11 ─L.
나는 혀를 찼다. 조간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법관 에밀렌의 추문이 실려 있었다.
한 방 먹었구나.
대중에게 마가렛 아리키아넨은 시답잖은 가십이나 제공하는 말괄량이 귀족 영양에 불과했다. 그러나 법관 에밀렌은 ‘사법 살인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외척의 오랜 하수인으로 국민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아온 거물인사였다. 임질 걸린 여자를 왕세자비로 내세우려 했던 무신귀족들은 잠깐 비웃음이나 사고 끝나겠지만, 법관 에밀렌의 추문은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얻을 터였다. 에밀렌의 살인교사 혐의가 무혐의로 밝혀지더라도 법관으로 복직하기란 불가능했다. 문신귀족들에게 큰 흠집을 남기고 만 것이다.
임질 카드를 왕세자비 간택이 임박한 때에 꺼냈다면 더 좋았을까.
잠옷 바람으로 잡혀가는 에밀렌 사진을 재차 살펴보았다. 울프삭이 이쪽에게 꽤 효과적으로 한 방 먹였다.
이번은 내 패배일까.
아니야.
나는 금방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저쪽이 손해지. 외척의 핵심은 왕가와의 혼인 아니던가.
마넨 경에게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에밀렌이 체포된 때가 새벽 다섯 시였으니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뒷수습에 머리털이 빠질 것이다. 정말 다급하면 주저 없이 이쪽으로 전화를 걸어오던 터였다. 그러나 아직 연락이 없으니 마넨 경에게도 여유가 있는 셈이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울프삭의 뒤에 도사린 검은 기운이 자꾸만 걸렸다. 당분간은 마넨 경이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상담노트에 에밀렌 건을 체크한 후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오후의 눈바람이 매몰찼다. 며칠 잠잠하던 하늘에 다시금 눈의 여왕이 휘몰아쳤다. 신문 기사에는 앞으로 일주일은 내리 폭설이 몰아칠 예정이라고 했다.
하늘이 울프삭을 돕고 있었다. 악천후일수록 사람들은 쿡 처박혀 떠들기를 즐긴다. 그래 봤자 얼마 못 가서 사그라질 것이다. 의원선출 대회가 열릴 즈음이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에밀렌의 추문은 말끔히 지워질 터였다.
가게 앞에 내놓은 화분들을 옮겼다. 며칠간 햇볕을 쬐더니 화초가 싱싱했다. 아무리 인공광선을 듬뿍 쬐여 줘도 태양빛만큼은 못함을 실감했다. 요즘 나는 식물 키우기에 푹 빠져 있었다. 하루가 갈수록 화분도 늘어갔다.
내일 죽어도 나는 나무 한 그루를 심을 테니 운운하고 비슷하네.
쓰게 웃으며 화분을 옮기는데 돌연 뒤통수를 퍼억 맞았다. 하마터면 유리문에 얼굴을 박을 뻔했다. 순간 놓쳐 버린 화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났다. 누군가가 뒤에서 억센 힘으로 내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이년아, 나를 경찰서로 보내니까 살맛나던? 엉, 이 잡년아! 경관 새끼에게 엉덩이 흔들고 호위 부탁하니 맛 좋아? 그러고 세상 살면 꼴리냐구, 이 암캐 년아! 어때, 오늘은 네 기둥서방도 없는데? 누구한테 엉덩이 흔들고 호위 부탁해 볼래?”
험악한 목소리에 바로 알아차렸다. 우연히 헌책방 앞을 지나가다가 나를 알아보고 행패를 부려 경관에게 잡혀갔던 그 변태였다. 그러나 오늘은 폭설 때문에 경관은커녕 행인마저 뜸했다. 변태가 소나기처럼 발길질을 퍼부었다.
“내 어디가 모자라서 거절해, 어? 걸레! 갈보! 쌍년!”
변태가 내 머리채를 쥐고서 질질 끌고 갔다. 가까이서 그의 트럭이 보였다. 나는 공포에 질려 발버둥 쳤다.
“낄낄, 귀엽게 굴긴. 여기서 한번 꽁꽁 묶여서 맞아 볼래, 엉? 거긴 뭘 봐! 이년은 도망친 내 마누라야! 내 돈 떼먹고 도망간 빚쟁이라구!”
웅성거리는 행인들에게 고함치며 변태가 차 문을 열었다. 이대로 자신의 집으로 나를 끌고 갈 작정이었다. 나는 차 문을 붙잡고 버텼다. 변태가 팔꿈치로 내 뒤통수를 연거푸 갈겼다.
“얌전히 들어가지 못해! 이 갈보…… 어엇!”
외마디 비명과 함께 변태가 확 떨어졌다. 곧바로 뒤에서 퍼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연달아서 퍽 소리가 터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니 변태가 장신의 남자에게 사정없이 얻어맞는 중이었다. 검은 전신코트를 입은 사내였다.
누군지 금방 알아보았다. 그였다.
주먹질 몇 번 만에 변태의 다리가 풀렸다. 남자가 변태의 멱살을 붙잡고 수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한 번씩 퍽 강타할 때마다 퉁퉁한 아랫배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출렁거렸다. 급기야 변태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길목을 뒤덮은 하얀 눈으로 벌건 핏물이 질펀하게 흩어졌다. 변태의 눈이 완전히 돌아갔는데도 남자는 주먹질을 그치지 않았다.
남자가 오싹한 무표정으로 변태를 내팽개쳤다. 워커를 높이 치켜든 그가 주저 없이 변태의 샅을 내려찍었다. 변태의 입에서 비명이 치솟았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남자가 변태의 사타구니를 계속 내려찍었다. 삽시간에 아랫도리가 벌겋게 젖어들었다. 결국 찢겨 버린 바지 앞섶 사이로 덜렁거리는 하초가 드러났다.
나는 남자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그만해요! 죽겠어요!”
“놓으십시오. 이 정도론 안 죽습니다.”
섬뜩할 만큼 냉정한 어투였다. 남자가 연속으로 변태의 아랫도리를 내려찍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짓이겨 놓고서야 비로소 발길질을 그쳤다.
“기껏해야 내출혈에 고자 신세로 살아갈 정도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남자가 변태의 오른팔을 들었다. 뼈가 빠각거리며 부러지는 소리가 내 귓전을 긁었다. 나는 가까스로 구토를 참았다. 남자가 변태의 덜렁거리는 팔을 쓰레기 버리듯 툭 놓았다. 뒤이어서 왼팔까지 꺾어 버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양 다리마저 차례대로 부러뜨렸다.
비로소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장갑에 묻은 피를 닦았다.
“보험으로 팔다리는 못 쓰게 하는 편이 좋겠죠.”
태연하게 말하고는 이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잠깐 나를 살펴보듯 응시하던 그가 갑자기 픽 웃었다.
“언제까지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셈입니까? 얼어 죽겠어요.”
나는 손끝도 움직이지 못했다. 남자가 나를 휙 잡아 일으켜 헌책방으로 향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사람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저 정도면 몇 달 병원신세 지고 끝납니다. 팔다리야 어쩔 수 없겠지만요.”
“그런가요…….”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헌책방으로 들어선 남자가 코피로 범벅된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정황상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쪽을 뚫어지게 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참다못하고 “내가 닦을 테니 손수건 주세요.” 하자, 남자가 멈칫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로 짜증이 서렸다. 이내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럼 직접 닦아요.”
다음 순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손이 가느다란 경련만 일으킬 뿐 손수건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한동안 이런 꼴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다시 손수건으로 내 낯을 닦아 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그나저나 사람이 그쪽을 쳐다보는 걸 정말로 싫어하나 봐요. 좋은 습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혹시 저한테만 국한된 버릇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좋은 습관은 아닌 것 같다? 별 참견을 다 하네…….
나는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런데 정말입니까?”
남자가 불쑥 물었다.
“예? 뭐가요?”
“아까 놈이 그랬잖아요. 그쪽이 자기 마누라고 돈 떼먹고 도망갔다고.”
“나도 모르는 남편이 있었군요.”
내 심통한 대꾸에 남자가 하하, 웃었다.
“그나저나 많이 놀랐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그쪽은 모르나 본데 아까부터 계속 어깨를 움찔움찔 떨고 있어요. 갑자기 큰 충격을 받으면 나오는 전형적인 증상이죠.”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남자가 말한 대로였다.
“좀 있으면 괜찮아집니다. 애쓴다고 바로 가라앉진 않아요. 마음 편안히 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이 손수건으론 안 되겠군요. 타월 없습니까?”
내가 카운터를 가리키자 남자가 타월을 가져왔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어차피 한 시간 정도는 그쪽은 어깨 떨기 외에는 아무것도 못할 테고, 이쪽은 시간이 넘쳐나니까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이었다. 남자가 내 머리를 훑어보았다.
“상처가 가볍긴 해도 여차하면 흉터가 지겠군요. 병원에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까 보니까 그놈이 온몸을 두들겨 패던데, 제대로 진료 받아야죠.”
“기껏해야 멍이나 들었을 텐데요, 뭐. 그쪽이야말로 병원이 더 급해 보입니다만?”
나는 남자의 관자놀이로 시선을 던졌다. 어딘가에 부딪혀 다친 모양으로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남자가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하하, 웃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 사이좋게 같이 병원에 가죠.”
“혼자서나 가시지요.”
짤막히 말하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멀찍이 떨어진 길바닥에 널브러진 변태는 쏟아지는 폭설에 뒤덮이고 있었다. 지우개로 하얗게 지워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자가 타월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런 밤에는 동사자들이 속출하고 경찰은 바빠서 엔간한 시체에는 신경도 안 쓰죠. 게다가 여긴 42번가니까요. 저놈이 죽는 편이 더 좋지 않나요, 그쪽은?”
나는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가 가이거 대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죽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어깨를 으쓱한 남자가 실내를 천천히 거닐었다.
한 바퀴 돈 남자가 카운터 앞에서 멈춰 서더니 픽 웃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내 코트였다.
“그 옷이 어지간히 싫은가 보죠.”
약간 기분이 나빠져서 한마디 던졌다.
“예, 마음에 안 듭니다. 그쪽에게 정말 안 어울리거든요.”
“그쪽 마음에 안 들어도 할 수 없지요. 나는 가난뱅이고 옷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쪽이 마음에 들어 했던 옷은…….”
하다가, 말을 멈췄다. 그가 칭찬한 트위드 코트는 며칠 전의 일로 세탁소로 갔다. 남자가 눈치 빠르게 웃음을 흘렸다.
“예. 제가 강요할 권리 따윈 없지요.”
말은 저러나 어투에서는 장난기가 넘쳤다.
남자가 코트를 가져와 내 어깨에 덮어 주었다. 뒤이어 코트째로 나를 훌쩍 안아들었다. 내가 버둥거릴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걸어가 책방 구석 바닥에 내려눕혔다. 어이가 없었다.
“무슨 짓이에요?”
“심하게 떨어서요. 잠깐 누워서 쉬는 편이 좋겠습니다.”
내 옆에 남자도 벌러덩 드러누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짓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화가 나서 말하자 남자가 쾌활하게 웃었다.
“마음 놓아요. 어깨를 떨어 대는 사람하고 그 짓 할 생각은 나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