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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 (10/101)

10 .M─

바닥을 치는 기분으로 울프삭 경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곧장 구깃구깃한 신문지가 내 안면으로 날아왔다.

“빌어먹을 마넨!”

지금이야 재포니카랍시고 점잔을 빼지만, 젊은 시절 울프삭 경은 온 거리를 쏘다니며 시정잡배들과 노닌 악동이었다. 집무실이 폐허를 방불케 했다.

울프삭 경이 나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명령한 후 온갖 집기를 던졌다. 커피 잔, 만년필, 손수건, 서류뭉치, 휴지통. 경이 십 년만 젊었다면 주저 없이 2미터짜리 아레스 대리석 조각상을 들어 던져 버렸을 것이다. 나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천사 도자기 인형에 내 관자놀이가 찢어지고 나서야 울프삭 경이 잠잠해졌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관자놀이를 닦았다.

“앉게.”

울프삭 경이 손바람을 부치며 말했다.

나는 경의 건너편에 앉으며 한 마디 던졌다.

“이제 좀 기분 풀리셨습니까.”

“그럴 리 있나!”

울프삭 경이 벌컥 화냈다.

“왕세자비 간택이 물 건너갔단 말이다! 외척이 외척 관계를 맺지 못하면 어찌 세력을 펼칠 수 있겠어! 왕의 아들이라곤 왕세자 한 명뿐인데!”

“왕녀의 나이도 찼다고 압니다만.”

“부마 따위 맺어 봤자 무슨 득이 있으려고!”

“진정하십시오. 리네아 태후께서 아직 정정하시잖습니까.”

리네아 태후는 선왕의 아내이자 울프삭 경의 누이였다. 울프삭 경의 세도는 리네아 태후의 치마폭에서 나온 셈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차례대로 의문사한 왕자들의 죽음에 가장 큰 의혹이 쏟아진 자가 울프삭 경이기도 했다. 오빠를 두려워하던 리네아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네아 태후가 언급되자 비로소 울프삭 경이 얌전해졌다. 조카들의 죽음을 사주한 그에게 리네아 태후는 계륵과도 같았다.

오늘 아침, 변함없이 조간을 펼친 나는 마시던 블랙커피를 내뿜을 뻔했다.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마가렛 아리키아넨의 추문이 헤드라인으로 박혀 있었다.

「특종! 유력한 왕세자비 후보 마가렛 아리키아넨, 사촌오빠 헤드릭을 비롯한 무려 일곱 남자들과 연인 사이! 그룹섹스를 즐기는 고귀한 귀족 영양과 관계를 맺으면 임질에 걸린다고! 충격사실 본지독점취재!」

크게 강조해 넣은 ‘Gonorrhea’ 색깔이 시뻘겋게 빛났다.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 병원을 나서는 마가렛의 사진이 1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점취재’한 신문은 마넨 소유의 언론사였다.

집무실을 뱅뱅 돌아다니던 울프삭 경이 내뱉었다.

“령이야.”

또 저 소리.

“침착하십시오. 누구나 필케 가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아리키아넨 가문을 꼽았을 겁니다. 마넨이 미리 준비했겠지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공교로워! 공교롭다구! 이게 다 령 때문이야!”

한숨이 나왔다. 울프삭 경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신귀족을 든든히 받쳐줄 왕세자비 후보가 아니라 정신과 치료였다. 마넨은 주술사 따위에게 좌지우지될 위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마넨을 운 좋은 파티광 정도로 치부했으나 내 판단에 그는 백년 묵은 능구렁이였다. 울프삭 경은 마넨의 영민한 처신이 어디까지나 배후의 뒷받침 덕분이라고 깎아내렸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마넨의 진짜 얼굴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말을 꺼낼 때가 아니었다. 울프삭 경은 흥분하면 뭐든지 제 직성대로 해야 풀렸다. 저 다혈질에 지금 필요한 것은 아첨이라는 사실을, 본부장질 3년째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최대한 령 체포에 힘쓰겠습니다.”

“그래, 실마리는 잡았나?”

빈말 한마디에 울프삭 경이 당장 반색했다.

크으. 이렇다니까.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위를 맞춰 줘야 할 때였다.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직은 확실한 실마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보통, 여자들이 주술을 즐기니 매춘부들이 많은 42번가에 령이 거주할 확률이 높긴 합니다. 마넨이 42번가를 들락거렸다면 오입 아니면 령을 만나기 위해서일 뿐인데 아시다시피 마넨은 애처가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죠. 전자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역시 후자 쪽입니다. 경의 추측이 맞는 듯합니다. 현재 그곳에서 거주하는 주술사란 주술사는 모조리 쓸고 있는 중입니다. 령도 사람이니 이웃과 친분 관계가 없진 않았겠죠. 교분을 나눈 주술사 친구도 있을 테고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찰 중입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암, 암. 내 직감이 틀릴 리 없지.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울프삭 경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의 기분이 풀어진 것을 확신한 나는 본론을 꺼냈다.

“그럼 다음 이야깁니다. 얼마 전 입수한 정보로는 곧 다가올 의원선출 대회에 마넨이 공격적으로 나선답니다. 경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왕국 내 대학 대부분이 문신귀족들과 한통속 아닙니까. 대학 총회와 벌써 이야기를 끝낸 모양입니다. 투표에 관심 없는 시민들에게 더는 빨아먹을 표가 없으니 젊은 놈들 구미를 좀 맞추려나 봅니다. 한데, 문제는 젊은 문신귀족들을 극좌파 학생들에게 침투시켜 공작활동까지 진행 중이라고 하더군요. 의원선출 대회에 맞춰서 무신귀족들을 비롯해 울프삭 경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게끔 사주하려고요. 극좌파는 기본적으로 왕조를 반대하죠. 이걸 잘 기획해 보면 마넨을 크게 엮을 수 있겠습니다. 내란죄 등등으로 말입니다.”

“문신들이란!”

울프삭 경이 코웃음 쳤다. 잠깐 자리를 빙빙 돌던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네. 이 일은 4부장에게 맡기지. 자네는 령의 체포에만 전력하게.”

“예?”

무심결에도 목청이 올라갔다. 이번 건은 내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그걸 훌러덩 부하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내가 근래 엽색행각에 심취하고 있었다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 의원선출 대회와 왕세자비 간택은 일곱 달이나 남았어. 시간은 많아. 그보다는 령의 체포가 급선무라고 생각하네.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음, 그리고…….”

울프삭 경이 대뜸 웃음을 흘렸다.

“우리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마넨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스캔들을 한 건 때려 보자고. 뭐 좋은 기획 없나?”

진정 유치했다.

나는 실룩이는 표정을 간신히 관리하며 말했다.

“최고법관 에밀렌이 남자 정부를 두고 있습니다. 여풍(女風)을 여풍으로 한번 때려 보는 건 어떨까요.”

“여풍을 여풍으로라…… 호오, 괜찮은 맞바람 작전인걸! 이거 오늘밤 트럼프 모임이 기대되는데. 당장 진행하게.”

울프삭 경이 내 말을 음미하듯 곱씹으며 흐흐흐흐, 웃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잔뜩 상해 버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가이거의 최고 본부장이고 울프삭 경은 나를 등용한 은인이었다. 그를 존중해야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나이 오십을 넘은 과부 에밀렌이 정부 한 명 두는 일은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은가. 그 점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울프삭 경에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냥 해 본 소리에 저리 좋아하다니 되레 내가 뜨악해 버렸다. 이 건을 스캔들로 일으키면 맞바람은커녕 우리 쪽만 비웃음을 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생각에 잠겨 본부 업무실로 돌아갔다. 보드카를 한 잔 마신 후 직속부하를 불렀다.

“에밀렌의 남자 정부를 오늘밤 안에 급살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도록 반드시 화려하게 죽여야 해.”

단순히 남자 정부의 존재만으로는 관심을 끌기 힘들 것이다. 남자 정부는 에밀렌보다 스무 살이나 연하였다. 에밀렌은 젊고 잘생긴 정부가 바람을 피울까 봐 평소 노심초사했고, 여자 문제로 말다툼도 잦았다. 남자 정부의 의문사는 질투에 휩싸인 에밀렌의 짓이라는 의혹을 받게 된다…….

이것이 내가 짠 즉흥 시나리오였다. 경찰은 울프삭 경이 장악하고 있으니 문제될 일은 없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점친 후, 나는 조금 풀린 기분으로 보드카를 한 잔 더 마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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