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L.
병마가 동원한 환각이 연일 이어졌다. 멍청히 그것을 쳐다보다가 음식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식사한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고객을 상대한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괴롭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병마에 피폐해져도 내 배는 굶주림을 호소했다. 이대로 죽기는 싫은 것이다. 그러니 먹자. 먹어야 한다. 일단은 눈앞의 고통부터 면하고 보자.
식사는 맛있었다. 끔찍할 만큼.
배를 채우자 조금이나마 용기가 생겼다. 머리도 맑아졌다.
결국 마음의 문제였나…….
나는 쓰게 웃었다.
오랜만에 대낮 나들이를 했다. 42번가는 변함없었다. 오물이 썩어 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을 흠뻑 뒤집어쓴 거리에서 사람들이 바삐 걸어갔다. 사내들이 붉은 눈초리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난잡한 화장을 한 매춘부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어귀에서 한 노파가 “달콤한 잇몸으로 빨아 줄게요.” 하며 웃었다. 나는 코트 후드를 꽉 여미고 걸음을 재촉했다.
긴 시간 동안 닫아 놓았던 헌책방을 열었다. 실내는 낡은 종이 냄새로 넘실거렸다. 난방 스위치를 올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운영하는 헌책방이 위치한 골목을 끼고 이십여 분만 걸어가면 ‘스노우 화이트’가 나왔다. 앞으로는 아무리 괴로워도 그곳에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이름 모르는 남자들과 뒹굴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약발도 닳아 버렸다.
스노우 화이트.
전신에 한기가 돌았다. 왜 하필 그런 이름이었을까. 어느 밤,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거리를 걷다가 눈에 띄는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간판까지 볼 여유가 그때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들어간 순간, 그곳이 게이바였음을 깨닫고 품었던 당혹감만 설핏 남아 있었다.
그날 아무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건너편의 사내들과 호텔로 향했다. 몽롱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평소에는 이웃과 대화마저 꺼리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날, 남자들과 관계를 맺은 후 며칠간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간만의 달콤한 수면이었다.
그때부터 병마가 찾아오면 으레 스노우 화이트로 달려갔다. 섹스와 치료제를 동일시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조차도 깨져 버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병마는 섹스 따위로 고칠 수 없었다. 섹스가 선사한 안식은 우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다. 나는 가게 곳곳을 공들여 청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그때까진 되는 대로 가 보는 거야.”
무명(無名).
어릴 적부터 앓아 온 이 기이한 병마에 나는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이름 없음, 무명.
나는 무명을 ‘병마’에 즐겨 비유했다. 사실은 병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선사하는 고통이나 증세는 어느 중병 못지않았다. 따라서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도 비슷하다. 치료제는커녕 공식적인 명칭도 없는 이상한 증세. 학자들도 도전하길 꺼려하는 기괴한 병증.
이 병의 가장 특이한 점은 유전이나 감염 등과 관계없이도 ‘세균’을 보유한 채 태어난다는 것이다. 흡사 샴쌍둥이처럼.
나 혼자만 무명을 앓지는 않았다. 무명을 앓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극심한 고통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균의 형질은 제각각이었다. 병자들의 증세도 다양했다. 자의식을 잃거나 반미치광이로 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평화롭게 지냈다. 간혹 자신의 병세를 즐기는 자도 있었다. 이른바 공존이랄까. 균이 날뛰든 말든 개의치 않고 별개의 삶을 유지했다.
그러나 내가 보유한 균의 형질은 최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 왔다. 병마를 확연히 깨달은 때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제일 심각한 시기는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였다. 그 무렵 나는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병마는 내 정신을 좀먹고 내 육체도 좀먹었다. 누가 말했던가. 꿈을 꾸지 않는 자는 죽은 자와 같다……라고.
병마는 내게서 꿈을 박탈하고 삶까지 망가뜨렸다. 심장이 마비되던 순간을 되살리면 끔찍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떨쳐 보고자 병마에 대해 백방으로 알아보기도 했다. 결론은 절망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몸속 세균이 급속도로 노화하는 중임을 깨닫고 있었다. 세균과 나는 빠르게 일직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 종착역의 이름은 죽음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