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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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L.

“부쩍 기미가 이상해. 요 며칠간 사고가 자꾸 터지지 뭔가. 어제는 오페라 관람 도중에 갑작스레 극장에 불까지 나더군. 자네가 한번 봐 줘야겠네.”

고객이 말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정신을 집중했다.

“또 그 사람이 이쪽을 노리고 있습니다. 파이프 같은 걸 연신 피워 대며 궁리에 여념이 없네요. 마치 연인을 그리워하듯 몰두하고 있군요.”

“또 그놈이!”

고객이 분통을 터뜨렸다.

“어차피 그자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 의심에 못을 박기 위한 절차일 뿐, 놈의 정체에 놀라진 않았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으킨 몇 건의 사고는 이쪽의 조심성을 슬쩍 시험해 본 거네요. 최근에 접촉하신 시기는 언제입니까?”

“일주일 전, 왕세자 즉위식에 참석했을 무렵에 만난 게 마지막일세.”

“그럼 일주일 전 기준이죠. 그때만 해도 아직 이르다고 유보한 거였네요. 그새 생각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만간 접촉을 시도하셔야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내가 말했다.

“두려워하고 계시는군요.”

“사실은 그러네. 집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워. 파티를 서성거리는 짓거리도 이제는 신물이 나네.”

“하지만 가셔야 합니다.”

또 적막. 두려움이 실린 침묵만 지나갔다.

긴 시간 끝에 고객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주일 전 놈이 꾸민 계책을 구체적으로 말해 다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릴 어떻게 할지 당분간은 두고 보겠다는 입장입니다만. 좀 더 자세히 볼까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아니네요. 두고 본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는 쪽에 더 가깝군요.”

“어련하겠나. 그 성미대로 확 잡아들여 죽이자니 내 지위가 너무 높고. 그렇다고 사고사로 위장하기엔 내가 굉장히 조심스럽고. 암, 갈팡질팡하고말고.”

“그리고 그는 지금 또 다른 일로 머리가 아픕니다.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데 잘 안 풀려서 골머리를 앓고 있군요.”

“머리 나쁜 무신이 머리를 굴리려니 아플 수밖에. 껄껄.”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있는 한 우리가 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죠.”

“고맙네. 든든히 위로가 되는구먼. 그나저나 요즘 들어서 목소리가 안 좋군. 어디 속병이라도 걸린 게야?”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허허, 야멸치기는. 그나저나 요즘 놈이 부쩍 주술 탄압에 열 올리더군. 자넬 어찌 해 보려 애쓰는 모양이다만…… 흥, 어림도 없지.”

“그렇지 않아도 그가 그 문제로 스트레스가 심한 듯했습니다.”

“잘하면 나보다도 놈이 더 먼저 죽겠구먼. 내가 자네를 알게 되어서 행운일세. 그럼 다음에 보세.”

고객을 상대한 후 탈진하여 쓰러졌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허공을 응시했다. 안개가 낀 양 머리가 탁했다. 남자들과의 하룻밤도 이제 약발이 떨어진 듯했다.

음식을 넘기면 토하는 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 버렸다. 식기도 플라스틱 용기로 갈아 치웠다. 창문까지 두꺼운 커튼으로 빈틈없이 가렸다. 얼굴이 비치는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치워냈다.

부쩍 잦아진 병마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요 십 년간 꽤 잘 견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도무지 자제가 되지 않았다. 평소에도 온몸을 꽁꽁 가리고 다녔지만 요즘에는 그조차 안심할 수 없었다. 혹여 사람이 쳐다볼까 두려워 집을 나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두서없는 생각만 머릿속을 장악했다. 사람들이 코트 후드로 가려진 내 얼굴을 투시하는 망상. 집에 틀어박혀 급기야 아사하는 내 모습. 혹은 미쳐 버려서 면도칼로 손목을 긋는다거나.

아니, 이미 나는 미쳐 버렸는지도.

몸을 간신히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며칠 내리 토했건만 또 배가 고파 왔다. 그러나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한심하다…….

어딘지 우스운 기분을 느끼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굶어죽는 상상, 손목을 그어 자살하는 상상 따위에 진지하게 골몰한 자신이 웃겼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살할 용기가 있었다면 예전에 끝냈을 것이다. 주린 배에서 나오는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웃길 만치 한심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다시 치료를 받아야 할까. 할리우드 미소를 짓는 간호사와 뻔한 소리만 늘어놓는 의사, 효험 없는 약을 억지로 삼키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벌써 지긋지긋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없었다.

커튼 사이로 일광이 스몄다.

황혼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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