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M─ (2/101)

2 .M─

“레드폭스잖아.”

뒤에서 레오파드가 낄낄거리며 속삭였다. 나는 “음.” 하며 웃었다.

인파에 끼여 안절부절못하는 행색이 제법 볼만했다. 코트 후드 밖으로 아마빛 머리카락이 펄펄 나부꼈다. 그가 겁에 질린 눈초리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동공이 텅 비어 있었다. 휘청거리던 그가 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인파에 파묻혀 줄달음쳤다. 밤새 시달렸는데도 저리 뛰어가는 게 신기했다.

나는 채찍을 한 번 더 후려쳤다. 오늘따라 대열이 엉망이었다.

“이 시간까지 퍼 자고 있었나. 하긴, 간밤에 우리가 좀 화끈하게 다뤘어?”

레오파드가 훌쩍 사라지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주시하며 말했다. 저 멀리서 레드폭스가 멈춰서더니 코트 후드를 후다닥 눌러썼다.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흡사 구겨 넣다시피 했다. 그 꼴에 나는 자칫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퍽 재미난 친구란 말이야…….

어젯밤 섹스를 돌이키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졌다. 레오파드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스네이크. 대열정돈 대충 끝난 것 같은데.”

“음. 이만 가지.”

나는 오픈 트레일러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대원이 지프 차문을 열며 허리를 숙였다. 레오파드와 내가 뒷좌석에 들어가자 지프가 출발했다. 대원들을 실은 수십 대의 트럭과 트레일러가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뒤따라왔다. 칙칙한 잿빛 하늘에서 조금씩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에 점점이 휘날리는 눈송이는 고운 소금이 뿌려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왕궁 앞 광장이 점차 가까워졌다. 광장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먼데서도 또렷이 보였다. 시위대가 깃발과 플랜카드를 흔들며 가두행진하고 있었다. 플랜카드마다 울프삭 경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구호가 새빨간 스프레이로 쓰여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의 95퍼센트 이상은 자신들이 든 플랜카드에 쓰인 구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것이다.

저들은 울프삭 경의 정적이자 문신귀족의 거두 마넨에게 일일 수당을 받고 시위해 주는 부랑자들이었다.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노숙자, 도박꾼, 퇴물깡패, 불량청년들. 열에 아홉은 문맹이고, 구제할 방도가 없는 사회의 골칫거리들. 오늘의 시위대는 경찰 추산 1만2천 명, 본부장인 나까지 출동하는 것은 간만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론 길거리 청소라니까.”

레오파드가 광장을 점령한 시위대를 턱짓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세간의 견해에 부합했다. 그러나 내 눈에 저 부랑자들은 호사스런 성찬으로 보일 뿐이었다. 오늘 종일 시위대를 신나게 때려잡을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짜릿했다.

테렌스 7세는 치세 삼십 년간 개혁군주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른바 ‘황금전쟁’, 왕국의 부를 둘러싼 귀족들의 혈투가 이백 년째였다. 거기에 가세한 외척들이 위세를 떨친 지는 삼백 년을 넘었다. 귀족 대다수는 왕을 따르지 않았으며 되레 빈정거리기를 일삼았다.

말년의 왕은 사면초가였다. 결정적으로 못을 박은 것은 의문스럽게 떠나간 왕자들의 죽음이었다. 실의에 빠진 왕은 결국 갑작스런 최후를 맞았다. 왕자들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왕의 훙서 또한 세간의 의혹을 샀다(그러나 왕자들의 의문사에 깊숙이 관여한 내가 단언하건대, 왕의 죽음은 단순한 심장마비에 불과하다).

어쨌든 이 행운에 뛸 듯이 기뻐하며 울프삭 경과 마넨은 서둘러 꼭두각시 신임 왕을 옹립했다. 그런 다음 울프삭 경은 갈망하던 ‘재포니카(Japonica : 시민계급 대표의원 Orchis와 문신계급 대표의원 Lotus와 더불어 무신귀족 대표의원직)’에 올랐다. 마넨은 자신의 딸을 왕비에 봉하고 로터스Lotus가 되었다. 그리고 몇 번의 피바람 후 정쟁은 소강 형국으로 들어섰다.

여기까지가 1년 전의 일이다.

울프삭 경이 다음 단계로 착수한 것은 ‘로터스’ 마넨의 숙청이었다. 테렌스 7세의 치세 동안에는 연인처럼 친근하던 두 거물이, 신임 왕 옹립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으르렁거리는 사이로 돌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울프삭 경은 무신귀족이고, 마넨은 문신귀족으로서 소위 ‘태생’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왕국의 주요 개국공신은 문신귀족이었다. 그 영향으로 왕국은 대대로 문文을 숭상했으며 당시 편찬한 법서에서부터 무신귀족과 문신귀족의 차별을 못 박아 놓은 터였다. 울프삭 경과 마넨의 야합은 “손님 대접이란 어제와 내일이 없는 오늘뿐”이라는 속담처럼, 일시적이었던 것이다.

두 달 전이었다.

「령Soul이라고 들어 보았나?」

울프삭 경이 나를 불러서 말했다.

또냐…….

나는 혀를 찼다.

「경께서 노랠 부르는 상대 아닙니까. 마넨이 총애하는 참모이자 주술사라고요.」

령Soul.

울프삭 경은 그들을 ‘령’이라고 불렀다. 옛날부터 도시를 떠도는 괴담과도 같은 존재.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을 다루는 자들. 특별히 선택받았다고만 알려진 그들의 정체는 철저한 비밀에 싸여 있었다.

울프삭 경이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도무지 안 되겠어. 마넨이 요즘 집에만 처박혀 있는 게 령의 귀띔 때문 같단 말이야. 얼마 전 제출한 안건만 해도 그래. 딱 이쪽에서 준비한 작전을 미리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귀신같이 피해나갔더군.」

「죄송합니다만 지겨운 질문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하게.」

「령이 존재하기는 합니까.」

울프삭 경이 미소를 흘렸다. 흡사 십 더하기 십은 이십이 맞는 계산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지했다.

단지 소문으로만 떠도는 존재. 아무도 보지 못했고, 누구도 마주치지 못했다. 유령선도 이렇게까지 정체가 흐릿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넨이 령을 참모로 부린다는 것도 울프삭 경의 단독주장이었다. 내가 던진 의문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울프삭 경이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있다고 믿는다. 십칠 년 전, ‘피의 26일’, 선왕이 정적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기 위해 마넨을 불러들인 적 있어. 그러나 마넨은 자기로 변장한 부하를 대신 보내 왕으로 하여금 부하를 죽이도록 유도했지. 그러곤 외려 그날의 기습을 기회로 바꾸었어. 그것도 령의 조언이었다고 후일 술김에 뻐겨 대더군.」

「마넨은 영리한 꾀주머니죠. 왕의 계책쯤은 익히 뚫어보지 않았을까요.」

「마넨이 직접 내게 말했다니까.」

「죄송합니다만, 제가 본부장으로 직하면서 마넨이 주술사와 접촉한다는 정보는 한 번도 접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또, 십오 년 전부터는 마넨이 령을 언급도 안 하더라고 경께서 말씀하셨다고 기억합니다만……?」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게야. 자네라면 보물지도를 철천지원수에게 함부로 자랑하겠나.」

「예, 알겠습니다. 있다고 쳐 보죠. 그렇지만 령이 죽었을 가능성은요?」

「그럴 리 없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직감일세. 직감이 말하고 있어, 내 직감이.」

울프삭 경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진지하게 톡톡 쳐 보였다.

크으…….

저놈의 지겨운 레퍼토리.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의 간언은 소용없었다. 울프삭 경은 령에 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날카롭게 굴었다.

울프삭 경이 창문 벨벳커튼을 손으로 훑어 내렸다.

「42번가를 한번 살펴 봐. 선왕의 견제가 극심할 무렵 마넨이 자주 들락거린 장소지. 그때는 나도 몸 보전하느라 바빠서 령의 거처까지는 알아낼 겨를이 없었지만 단서는 그것뿐이야. 꼭 알아내게. 저 눈엣가시 같은 마넨을 없애려면 그 이전에 령의 제거가 급선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할 수 없이 저녁마다 정찰을 돌았다. 42번가는 매춘남녀가 골목마다 손짓하는 매음굴이었다.

이런 곳에 령이 있다……?

어림없는 소리.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42번가에 들어선 지 한 시간 만에, 마넨이 이곳을 들락거린 이유라곤 오입밖에 없으리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정찰을 돌아봤자 얻을 만한 건수는 없었다. 아울러서 철저한 보안을 기한답시고 가이거의 본부장과 부장, 해서 달랑 두 명(나름대론 특급 요원이라 판단한 듯했다)을 투입한 울프삭 경의 조치에는 한숨만 나왔다. 다 떠나서 울프삭 경은 하등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마넨의 명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선왕 테렌스 치하에서 울프삭 경과 마넨에 맞서 경쟁하던 세 명의 거물이 있었다. 테렌스의 숙부 엑달 공. 울프삭 경과 비등한 세력을 자랑하던 무신귀족 수오미넨. 마넨과 대립하던 문신귀족 에델마. 셋 모두 황금전쟁에서 선두를 달렸으며 막강한 세력을 떨친 왕실 외척이었다. 물론 저것도 다 지나간 이야기였다. 세 거물은 2년 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년 전, 울프삭 경은 나를 본부장에 앉혔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일 년 안에 엑달과 수오미넨, 에델마를 없애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8개월 만에 약속을 지켰다. 엑달과 수오미넨과 에델마처럼, 나는 마넨도 역사의 뒤안길로 곧 보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시간문제였다.

함께 42번가 정찰임무를 떠맡은 부장 레오파드도 이쪽과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는 며칠 만에 정찰을 내팽개쳐 버렸다. 요즘 가이거 업무라고 해 봐야 문신귀족들의 하수인을 납치해 손봐 주고 시위대나 두들겨 잡는 일이 고작이었다. 시간은 넘쳐났다. 42번가는 들어서기만 하면 사방팔방에서 매춘남녀들이 옆구리를 잡아끄는 환락가였다. 한창 젊은 우리가 엽색행각에 열중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오늘도 이른 저녁부터 우리는 42번가의 단골 바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레오파드가 보드카를 잔에 들이부으며 말했다.

“령이란 게 정말 있기나 할까?”

나는 칼같이 대꾸했다.

“없다고 봐.”

“역시 그렇지?”

나는 담배를 뽑아 물며 불을 붙였다.

“울프삭 경이 하도 령, 령, 려어어엉, 타령해 대서 마넨이 처음 령을 언급했다던 십팔 년 전 기록까지 뒤져 봤지. 확실히 이곳을 들락날락한 시기가 있긴 하더군. 선왕과 사이가 나쁘던 팔 년간 말이야. 하지만 십 년 전부터는 발걸음을 딱 끊어 버렸어.”

“호오. 팔 년이나 여기를?”

레오파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뭐,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우리만 해도 위에서 쪼아 대는 바람에 오입 따위로 스트레스를 풀잖아. 어쨌든 놈이 여기에 발걸음을 끊은 지가 무려 십 년이야. 울프삭 경도 마넨이 십오 년 전부터는 령을 언급도 안 했다고 털어놓았단 말씀.”

“이사를 갔거나, 무덤으로 갔거나.”

“게다가 울프삭 경이 령을 잡겠답시고 미신 타파를 핑계로 주술사를 탄압한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지. 설사 령이 있다고 쳐도 잡혀간 주술사 무리에 섞였을 가능성이 커. 그런데도 42번가에서 단서를 찾으라니, 말이 된다고 보나.”

“결론은?”

“마음이 심란하고 몸이 괴로우면 여자를 찾는 것이 사내의 기본적인 습성. 마넨도 예외는 아닐 터. 고로, 령은 없다.”

“너와 나 같은 게이는 남자를 찾고 말이지.”

“그렇지.”

우리는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레오파드가 보드카 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내려놓았다.

“스네이크, 스네이크.”

“왜? 반반한 엉덩이라도 찾았냐?”

“물론이다마다. 저기 또 나의 레드폭스께서 들어오셨어.”

“또 그 닉네임이냐.”

나는 레오파드를 향해 담배연기를 훅 불며 혀를 찼다. 아무한테나 닉네임을 붙이는 레오파드가 한심했지만, 저것도 딴에는 슬픈(?) 사연이 있어서 마냥 나무랄 수는 없었다.

가이거는 울프삭 경의 정적들에게 심한 견제를 받았다. 12년 전 엑달 공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이 가이거 부장들의 단체모임 장소를 습격해 깡그리 도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생일파티 모임이라 가이거 부장들의 가족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날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열 살 이하 아동이 일곱 명이나 있었다.

이후 울프삭 경은 가이거 부장들의 인적사항을 기밀로 다루도록 조치했다. 부장들끼리도 서로 인적사항을 물어보지 못하게끔 업무수칙으로 정해 버렸다. 그뿐인가. 업무 중에는 언제나 가면을 착용하라 지시했다. 이웃에게도 직장을 밝히지 말라고 엄포 놓았다. 그 눈물 나는 배려 덕분에 4년째 옆집에 사는 크룩 씨는 나를 젊은 사업가로 알고 있었다. 직속부하들도 부장들의 얼굴을 몰랐다. 부장들끼리는 그나마 서로 얼굴은 알았지만, 몇 년째 이름 대신 닉네임으로만 호칭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레오파드는 아무한테나 닉네임을 붙여 부르는 고약한 습관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레드폭스는 레오파드가 이곳 게이바, ‘스노우 화이트’에서 홀딱 반한 상대에게 멋대로 붙인 닉네임이었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아. 저게 어딜 봐서 레드폭스냐.”

“내가 레오파드니까 저쪽은 레드폭스여야 옳지. 어울리는 한 쌍 아니냐?”

“귀찮으니까 설교는 관두지.”

“아무튼! 얼른 데려와, 얼른. 다른 놈이 낚아챌라. 난 나가서 기다릴게.”

레드폭스는 우리가 엽색행각에 열중하면서부터 자주 들르게 된 바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났다. 처음 그를 대면한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죽이게 웃겼다.

42번가 정찰을 내팽개치고 며칠 뒤의 일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스노우 화이트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님들, 잠깐 이분과 합석하시겠습니까? 지금 여기에 자리가 안 나서요.」

주뼛주뼛 다가온 종업원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의 시선이 종업원 옆으로 쏠렸다. 웬 시커먼 게 하나 서 있었다. 발끝까지 퀴퀴한 코트를 걸친 놈이 푹 눌러쓴 커다란 후드 아래로 턱만 드러내고 있었다. 뭉크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일순 우리가 머릿속으로 동시에 떠올린 생각은, ‘정말 끔찍하네.’였다.

할 수 없이 합석을 허락하긴 했지만, 한 시간 내내 우리는 그에게 말 한 마디 던지지 않았다. 그도 칵테일글라스 한 잔만 시켜 놓고서 침묵을 지켰다. 그 분위기가 어찌나 음침한지, 우리는 나중에 그날을 회고하며 “마녀 앞에서 침을 삼키며 카드점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이었어.”라고 떠들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첫인상은 음산하고 황폐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암울한 먹구름이 테이블 주변을 감싸 버린 듯, 이쪽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우리는 바에 들어서기만 하면 시선이 빗발치는 탑이었다. 한마디로 인기남들이었다. 이런 날은 또 처음이었다.

급기야 기분이 나빠진 우리가 시선을 교환할 즈음이었다. 레드폭스가 더웠는지 후드를 젖혔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일순간이었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낙하했다. 쏟아지는 폭설처럼 지독스레 길었다. 흡사 마술 같았다. 저놈의 머리카락이 어디까지 내려올까 아연해진 나는 무의식중에도 보드카 잔을 내려놓았다.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풀썩 떨어졌다. 그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건성건성 쓸어 넘기며, 레드폭스는 다시 칵테일글라스로 무심한 시선을 고정했다.

레오파드는 후일 “그 바 이름이 왜 스노우 화이트인지 그날에서야 깨달았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정작 내가 떠올린 것은 가슴앓이 병으로 얼굴을 자주 찡그렸다던 중국의 어느 미녀였다. 베일처럼 서린 희미한 병색이 그만큼 묘했다.

어쨌든 우리는 잠깐 멍해 있었다. 뭉크가 삽시간에 클림트로 변신했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크흠. 저기요.」

레오파드가 헛기침하며 레드폭스에게 수작을 걸었다. 레드폭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리깐 눈으로 칵테일글라스만 응시했다. 미인은 콧대가 높다더니…… 하며 나는 혀를 찼다.

레오파드가 어색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합석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나가지 않겠습니까. 흠흠, 그러니까 우리 둘하고 하룻밤을 즐기는 게 어떨지? 셋이서 하는 건 취미 없나요? 참, 그리고 우리는 좀…… 하드섹스를 즐기는데요.」

나는 보드카 잔을 들며 끌끌 웃었다. 레오파드의 서투른 낚시질이 한심했다. 저 냉랭한 낯빛을 봐. 꽝이다, 꽝. 백구십 센티가 넘는 근육질을, 그것도 두 명이나, 게다가 하드섹스까지 허락할 만한 타입으로는 안 보였다. 절대 꽝이었다.

내 직감은 틀린 적 없지…… 픽픽 웃으며 보드카를 들이킬 때였다. 레드폭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동자였다.

「좋아요.」

나는 하마터면 보드카를 내뿜을 뻔했다.

「그럼 갈까요?」

레오파드가 뛸 듯이 기뻐하며 일어섰다. 즉각 가이거 본부 앞 호텔로 향했다. 난교는 쉽게 수락했던 레드폭스는 정작 엉뚱한 쪽에서 까다롭게 굴었지만, 그런 점만 제외하면 이런저런 요구에 순순히 응했고 우리는 흠뻑 만족하여 호텔을 나설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바에서 레드폭스와 종종 마주쳤다.

레드폭스는 첫 마디를 걸어오는 상대와 으레 나가 버렸다. 시쳇말로 먼저 찜하는 놈이 임자였다. 미인은 미인이로되 콧대가 낮은 미인이었다. 간발의 차로 다른 놈에게 뺏겨 버리고 입맛을 다시기 일쑤였다. 레오파드는 아메리칸 풋볼보다 스릴 넘친다며 툴툴거렸다.

그러나 우리의 짐작대로라면 레드폭스는 그날이 남자를 경험한 첫날이었다. 일단 맨 처음 넣어 본 내가 느낀 바가 그랬다. 프랑스식 섹스― 펠라치오를 즐기는 레오파드도 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다 떠나서 오일을 발라 줄 때 레드폭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였다. 이런 면에서도 제법 기념할 만했다.

레드폭스는 괜찮은 상대였다. 피부는 하얗고 아랫도리는 뜨거웠다. 눈을 내리깔며 신음하는 표정이 일품이었다. 고개를 뒤로 꺾으며 입술을 벌릴 때는 죽여줬다. 또한 뒤끝도 없었다. 여러 차례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이름 한번 묻지 않았다. 귀찮게 매달릴 타입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엽색행각을 조용히 저질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가이거의 본부장과 부장이라는 작자들이, 힘겹게 거리를 뛰어다니는 부하들을 나 몰라라 하고 게이바나 들락거린다는 사실이 울프삭 경의 귀에 들어가는 날…… 따위야 물론 없겠지만, 어떤 연유로든 시끄러운 일은 질색이었다.

오늘도 레드폭스는 케케묵은 코트 차림으로 칵테일글라스를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며칠 전, 본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행색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짐 꾸러미인 양 코트 후드로 머리카락을 후다닥 쑤셔 넣던 꼴도 폭소감이었다. 여러모로 특이한 미인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그에게로 다가섰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레드폭스의 입술을 잠깐 감상했다. 선이 가늘고 작은 입술이었다. 저곳을 정액으로 범벅해 줄 것을 상상하니 벌써 짜릿했다.

나는 유쾌하게 말했다.

“사흘 만이네요. 오늘 같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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