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의 여왕 1-1 ─L. (1/101)

1 ─L.

극악무도한 두통. 열흘 만에 다시 찾아든 병마.

나는 끈질기게 어둠을 응시했다. 새가 떠나 버린 둥지처럼 방은 춥고 쓸쓸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두려움만 차곡차곡 무게를 더해 갔다. 이런 날에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밤 11시. 나는 떠밀리듯 몸을 일으켰다.

코트를 걸치고 집을 뛰쳐나왔다. 얼음을 깨문 듯 시린 찬바람이 몰아쳤다. 왕국의 겨울은 혹독했다. 그것도 눈송이가 매섭게 쏟아지는 1월 1일이었다.

으슥한 시간에도 42번가 거리는 흥분으로 일렁거렸다. 코끝이 빨간 주정뱅이가 내 어깨를 툭 스치고 지나쳤다. 검은 우비를 걸친 경관 무리가 창녀들에게 농지거리를 던지며 걸어갔다. 멀찍이서 스트립 바의 네온사인 간판이 반짝거렸다. 낡고 어두운 거리에서 혼자 붉은 빛을 발하는 간판은 부둣가를 지키는 등대처럼 외로워 보였다.

높다랗게 쌓인 눈이 발목까지 푹푹 잠겼다. 눈송이가 짙어지다 못해 굵은 빗방울로 변했다. 삽시간에 온 거리가 잿빛으로 젖어들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42번가 광장이 나왔다. 신년 첫날밤에도 광장은 폭력이 범람하고 있었다. 광장 한복판, 메두사의 목을 높이 치켜든 페르세우스 청동상 주변이 아수라장이었다.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팸플릿을 살포했다. 진압대의 호루라기 음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사나운 고함과 묵직한 워커 소리가 비바람에 뒤섞여 휘몰아쳤다. 갈기갈기 찢긴 신문지 조각과 팸플릿이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경적을 울리는 버스가 빗물을 사방으로 튕기며 달려갔다. 그리고 시민들은 광장의 펍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시위대와 진압대의 난투극을 축구경기 관전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코트 후드를 푹 눌러쓰며 빠르게 걸어갔다. 광장을 벗어나자 다시 컴컴한 골목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에 도착했다. 비좁은 바 실내에서 객들은 자욱한 담배연기에 몸을 파묻은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무데나 앉던 나는 멈칫했다. 바 테이블에 누군가가 놔두고 간 신문이 널브러져 있었다. 울프삭의 얼굴이 신문 1면의 반을 채우고 있었다. 사진 아래 기사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울프삭 경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무능력으로 점철된 한심한 통치방식은 이제 끝났다고 말했으며…….》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으나 기사 논조는 찬양 일색이었다. 당연했다. 무신귀족의 거두 울프삭을 비판하는 기사를 새해 첫날부터 신문 1면에 실을 언론사는 이 왕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사를 반쯤 읽을 즈음 종업원이 다가왔다. 나는 신문에서 눈길을 거두고 칵테일을 주문했다. 오늘밤도 첫 마디를 던지는 사내와 곧장 동행할 예정이었다. 이런 것 말고는 병마를 떨칠 다른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종업원이 내 앞으로 칵테일글라스를 내려놓을 때였다. 테이블로 문득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왜 뜸했습니까.”

귀를 파고드는 정중한 음성.

고개를 돌리자 ‘그’가 서 있었다. 금발. 회색 눈동자. 옅은 미소가 서린 입매.

오늘로써 일곱 번째 마주치는 남자였다. 그는 내게 첫 번째 남자이기도 했다.

첫 번째라…….

이 명칭에는 어폐가 있다. 분명 첫 섹스이긴 했다. 그러나 그날의 상대는 남자만이 아니라 남자의 친구도 함께였다. 그래도 첫 삽입은 남자가 했으니 첫 번째라는 명칭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칵테일글라스를 만지작거렸다.

첫 번째든 백 번째든 무슨 상관인가. 섹스는 병마를 떨쳐 줄 것이다. 그러나 지친 몸이 두 명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남자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머리가 재차 욱신거렸다.

나는 칵테일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혼자인가요.”

남자가 쾌활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오늘도 친구와 함께.”

잠깐 뒤, 나는 “좋습니다.” 하고서 일어섰다.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뒤통수를 갉아먹는 이 극악무도한 통증만 없애 준다면.

벌써 남자의 친구가 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자동차 뒷좌석에 들어가 앉았다. 남자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이쪽으로 말을 던졌다. “어이, 왜 그동안 뜸했던 겁니까?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요?” 등등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대꾸 없이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쌀쌀하고 막막한 밤이었다. 빗물로 흠뻑 젖은 거리에서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점멸해 갔다. 골목 어귀에서 갑자기 어느 젊은이가 확 뛰쳐나왔다. 남자가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저런.”

남자가 차창 밖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젊은이가 길목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그의 뒤로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가이거》였다. 젊은이는 얼마 못 가서 가이거들에게 포획되었다.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그에게로 발길질과 각목 세례가 쏟아졌다. 잿빛 보도로 핏물이 왈칵왈칵 흩어졌다. 나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흔한 광경이었다.

남자가 룸미러로 시선을 힐끗 던졌다.

“머리 부딪치진 않았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가볍게 어깻짓하며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불쌍한 자식들. 저것들은 휴가도 없나.”

남자의 혼잣말에 친구가 낄낄거리며 받아쳤다.

“42번가는 불온지역으로 유명하니까. 우린 운이 좋은 거지.”

지금 눈앞에서 떠드는 저 사내들도 가이거였다. 가이거는 울프삭이 사설병사 조직을 빙자해 만든 정치깡패 집단이다. 일개 귀족이 사병 조직을 거느리는 것부터가 반역이요 위법행위였으나, 울프삭에게는 법도 통하지 않았다. 거리를 몰려다니며 온갖 패악을 일삼는 가이거를 둘러싼 흉흉한 괴담은 셀 수도 없었다. “두 다리 건너면 가이거에게 맞은 시위대, 세 다리 건너면 가이거에게 죽은 시위대”라는 우스개가 떠돌 정도였다.

처음 관계를 맺은 밤, 호텔에서 사내들은 「저희가 사실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며 코트를 벗었다. 가이거 제복이 드러났다.

「혹시나 해서요. 예전 상대는 이 옷을 보자마자 화를 내며 돌아가더군요. 그쪽도 우리 직업에 거부감이 있다면 지금 돌아가는 편이 좋을 듯해서 미리 밝히는 겁니다. 어떤가요.」

나는 괜찮다고 했다. 저들과 나는 하룻밤 관계일 뿐이었다. 일몰 후에 빛이 스러지듯, 이런 밤에는 이름도 계급도 무의미했다.

“목 안 마릅니까? 음료수라도?”

남자의 질문에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됐습니다.”

사실 저들 같은 상대는 드물었다. 난교를 선호한다는 점만 뺀다면 예의바른 사내들이었다. 우습지만, 변태에도 급수가 있다고나 할까. 이제껏 내가 겪은 남자 대부분이 난폭하기 일쑤였다. 나를 묶어 놓고 두 시간이나 두들겨 팬 한 달 전의 그 변태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쳤다.

“다 왔다.”

차가 멈췄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17번가의 푸니카 호텔, 사내들이 애용하는 장소였다. 42번가에서 잠자리 상대를 물색하면서 방사는 정작 이 먼 곳에서 했다. 가이거 본부가 바로 앞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와인이라도 마시겠습니까?”

방으로 들어서자 남자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한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자 사내들은 보드카를 마시는 중이었다. 보통의 상대와 달리 저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일단 개시하면 시간을 길게 끌며 매우 방탕하게 노는 것도 저들의 특징이었다.

친구가 아래에서, 나는 위에서 식스나인 체위를 했다. 남자가 내 엉덩이를 높이 치켜세우고서는 곧바로 삽입해 왔다. 친구가 내 머리채를 꽉 눌러 성기를 깊숙이 빨게 했다. 엉덩이 골에 꺼칠한 음모와 묵직한 불알이 퍽, 퍽, 소리 내며 부딪쳤다.

들려 있는 내 아랫도리 밑에 친구의 머리가 있었다. 친구가 삽입되는 아랫도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자극적인 걸…….” 하고 중얼거리며 성기가 헤집는 구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조임을 풀며 손가락을 몇 개 더 늘렸다. 삽입되는 성기와 손가락으로 아래가 한계까지 늘어났다.

“다치겠어. 벌써부터 심하게 하진 마.”

남자가 친구에게 재빨리 주의를 주었다. 그러고는 내 허리를 양손으로 꽉 조였다. 반사적으로 수축하는 내벽이 꿈틀거리는 성기를 질끈 물었다. 남자가 즐겨하는 짓이었다. 허리를 부러뜨릴 듯 조이면 내벽이 성기를 꽉꽉 물지만, 당하는 쪽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럴 중이라 호흡이 힘들던 참이었다.

남자가 허리에서 손을 놓더니 내 유두를 애무했다.

“이렇게 만져 주면 좋아요?”

관계를 맺은 첫날, 섹스를 시작하자마자 대뜸 저들은 내게 욕설을 했다. 당장 룸을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서 저들이 왜 그러냐고 묻기에, 나는 섹스든 뭐든 간에 욕설은 싫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섹스 땐 욕설을 하면 기분이 돋워지는데 이쪽이 싫다면 하지 않겠다고 바로 사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약속을 지켰다. 꼭 필요한 말이나 간단한 소감을 늘어놓는 정도가 전부였다.

남자가 사정했다. 내 몸속 깊이 정액을 싸 놓은 후 떨어졌다. 그동안 불알을 움켜쥐고 사정을 늦추던 친구가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정상 체위였다. 둘 모두 원체 힘이 넘쳤지만 오늘따라 유난했다. 벌써 아래가 얼얼했다. 잠깐 멈추고 있던 남자가 내 가슴팍에 허벅지를 벌리고서 걸쳐 앉았다.

“숨 막혀요?”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입 더 벌려 봐요.”

그러고는 성기를 내 입으로 삽입했다.

돌아가며 그들이 온갖 방법으로 내 아랫도리와 입을 탐했다. 상해만 입히지 않되, 무자비하리만치 난잡한 성교를 즐기는 사내들이었다. 콘돔을 싫어하는 것도 단점이었다. 결국 느슨해져 버린 아래에서 체액이 흘러나왔다. 정액은 반드시 삼켜 주기를 요구해서 그렇게 해 주었다. 안개가 낀 양 머릿속이 탁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섹스는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비로소 잠이 몰려왔다. 머리를 갉아 대는 고통도 점차 물러서고 있었다. 당분간은 편히 잘 수 있을 것이다.

친구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고, 남자는 옆에 누워 내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 좀 아픈 것 아닙니까?”

남자가 불쑥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열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아프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약간 피곤한 정도예요. 요즘 일 때문에 쉬질 못했더니.”

“예…….”

남자가 말꼬리를 끌었다. 잠시 이쪽을 살펴보던 그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무리가 안 간다면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금방 끝내겠습니다.”

의향을 물어오는 점잖은 입과 달리, 내 허벅지에 밀착된 그의 물건은 이미 딱딱했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해 버렸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남자가 내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각도를 맞추더니 곧바로 성기를 뿌리까지 삽입했다. 푸욱 소리가 났다. 아랫배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또 내 허리로 손을 가져오는 그에게 “아프니까 그건 관둬요.” 하자, 남자가 “아, 예.” 하며 얼른 손을 치웠다.

남자가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이며 내 귓불을 핥았다. 한참 삽입하다가 대뜸 말했다.

“어디까지 닿습니까?”

딴생각 중이던 나는 건성으로 “예?” 하고 되물었다.

“궁금해서요. 어디까지 닿느냐구요. 내 좆 말입니다.”

점잖은 어투에 섞인 상스러운 단어가 묘하게 장난스러웠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배꼽 아래를 더듬었다.

“여기까지 들어가긴 해요?”

그렇게 말하며 쐐기처럼 콱 박았다. 무의식중에 내 입술 밖으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남자가 재촉하듯 또 말했다.

“어디까지 들어가냐고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결합 부위에 손가락까지 넣어 전립선을 더듬었다. 기운 넘치는 두 남자를 받느라 조임이 풀려 있어서 아까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좋아요? 느낍니까?”

그가 짓궂게 계속 물어왔다. 아랫배 바깥까지 타격음이 새어나올 만치 강하게 꽂아 넣으며 한손으로 내 유두를 애무했다.

“여기 만져 주는 거 좋아하죠? 기분 어때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몸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대충, 거기까지 닿는 것 같긴 하네요.”

“예…….”

남자의 허릿짓이 빨라졌다. 귀두를 구멍 끝까지 걸치다가 한 번에 푹 쑤셔 넣길 여러 번, 절정 무렵에 성기를 확 뽑았다.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서 재빠르게 일어났다. 내 입으로 페니스가 꽂혔다. 깊숙이 들어온 그것이 끈적끈적한 정액을 분출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달아 왈칵왈칵 쏟아졌다. 나는 남김없이 정액을 삼켰다.

남자가 흥분이 완연한 눈초리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찰나 남자가 내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확 고정시켰다.

“왜 자꾸 얼굴을 돌리는 겁니까.”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쪽을 쳐다보는 게 싫어서 그럽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냥 습관이에요. 어쨌든…… 또 하려구요?”

미동 없이 쏘아보던 남자가 나에게 시트를 덮어 주었다.

“아뇨. 이만 쉬는 게 좋겠군요.”

정오 무렵에 잠이 깼다.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거울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는 나체가 서 있었다.

가만히 거울을 노려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씻고 나서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후 두 시를 넘겨서야 가까스로 호텔을 나섰다.

호텔 건너편 가이거 본부 앞이 떠들썩했다. 시위 현장으로 출동하는 듯 수십 대의 트레일러와 트럭, 지프를 비롯해, 건장한 남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도로를 아예 점령하고 있었다. 인도에 진치고 앉은 가이거 대원들이 행인들을 겁주며 으스댔다.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 광경을 보자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버스를 타려면 가이거 본부를 지나쳐 한참 걸어야 하건만 이 난장판을 헤쳐 나갈 엄두가 안 났다.

뒤에서 어느 행인이 “아우, 비켜요.” 하며 나를 밀었다. 떠밀리다시피 엉겁결에 앞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행인들에 섞여 가니 좀 나았다.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도로 한복판이었다. 행인들도 더는 앞을 뚫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깡패 새끼들.”

누군가가 짜증 가득한 어조로 내뱉을 때였다. 돌연 폭발적인 환호성이 허공을 흔들었다. 가이거 본부 정문에서 한 무리가 걸어 나왔다. 가이거 부장들이었다. 하나같이 사신 가면을 쓰고 검붉은 제복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다들 굉장한 장신이었다. 선두에 채찍을 든 사내가 있었다.

부장들의 등장에 대원들이 길을 좍 트며 물러섰다. 가이거 부장들이 오픈 트레일러로 올라서서 대열을 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가이거 대원들이 우르르 이동했다. 그 탓에 행인들이 밀려 넘어지며 우왕좌왕했다. 나도 연거푸 휘청거렸다. 일순간 내 코트 후드가 확 젖혀졌다.

“우, 우왓. 뭐야, 저거.”

가이거 대원들이 황당해하는 시선을 던졌다. 급히 코트 후드를 쓰려고 했으나 자세를 바로잡는 것도 힘겨웠다. 삽시간에 이쪽으로 쏟아지는 눈길들이 소름끼쳤다. 한 가이거 대원이 나를 거칠게 밀쳤다.

“금발! 멍청히 있지 말고 저쪽으로 가! 밟히고 싶냐?”

하마터면 중심을 놓치고 쓰러질 뻔했다. 바로 그때 짜악, 채찍 소리가 났다. 날카롭고 단호한 소리였다. 가이거 대원이 움찔했다. 나도 무심결에 채찍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어느 틈에 오픈 트레일러 앞까지 떠밀렸는지 바로 위에 가이거 부장들이 우뚝 서 있었다. 첫눈에도 무시무시했다.

채찍을 든 부장이 오른쪽으로 팔을 확 젖혔다. 가이거 대원들이 오른쪽 방향으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비로소 길이 트였다. 도망치듯 달려가는 행인들에게 섞여 나도 허겁지겁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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