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 자식이 아름다워서 좋아.”
기막힌 답변을 들었다.
언젠가 나에게 미승이가 노력하는 녀석이라서 인정하네 좋아하네 따위의 고지식한 평가를 내뱉던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놀라웠다.
“껍데기가 화려할 뿐만 아니라, 알맹이도 껍데기에 기울지 않는 녀석이잖아, 류미승은. 그래서 좋아해. 하지만 네 앞에선 아니더라. 단단한 껍데기가 왕창 물렁해져. 끝도 없이 너그러워져. 그러면서도 집착적이지. 난 류미승이 네 앞에서 물컹해지는 건 싫지만, 그 집착 하나는 맘에 들더라. 그 녀석의 외모만큼이나. 바라보고 있으면 즐겁거든.”
류미승의 아름다운 껍데기와 끈질긴 집착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별 볼일 없는 정희승은 싫어한다―.
어쩌면 한지석은 이기적이고 무뚝뚝한 관음자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미승에게 끼어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서… 네 결론은?”
“결론? 결론은 말이지… 좋건 싫건, 난 류미승과 정희승이 어떻게 가게 될지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이 될 거야. 왜냐고? 즐거우니까.”
내가 가진 좋아함과는 다르겠지만 분명 한지석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미승을 좋아하는 거다. 그것은 흔한 우정의 이름으로 심심하게 녹아버리는 류의 좋아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오묘하고 이중적인 호의.
류미승에 대해 입으로는 방조를 하면서 몸으로는 극적인 참견을 했던 그의 이유를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넌 미승이를 좋아하는 거야.”
“응. 좋아하는 거지.”
그는 매우 쉽게 응수했다. 그것은 가벼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떳떳함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그에겐 감출 것이 없으니까.
“할 말 다 했으면 네 자리로 가.”
“그럴까?”
짝의 자리에서 가붓하게 일어난 한지석은 몸을 돌린 채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대화 잘 나눴어, 친구”라고 했다. 피식대는 웃음기가 보지 않아도 선했다.
“넌 내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내 대답이라…….
그럼… 끝까지 지켜봐, 한지석. 네가 바라는 즐거움이 오래가진 않을 테지만.
짝인 세정이가 돌아오고 나서 15분 쯤 지나니 마침 벨이 울렸다.
그리고 5분 후엔 복도를 지나가는 무영이를 열린 앞문으로 보았다.
얼마 전에도 무영이가 우리 반 앞까지 와서 복도 앞에서 입술만 달싹이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가버리는 걸 본 적이 있다. 때때로 나를 발견하면 머뭇거리는 것도 안다. 50미터 이상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랑 마주친 눈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고 미적지근한 갈등의 흔적을 남겼다.
그것뿐이었다.
무영이는 터트릴 용기가 없었고 감당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른 척 했다. 그대로 무영이의 비밀이 무거운 짐으로 영영 안겨가길 바랐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와서 새삼스런 폭로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무영이 혼자서 고뇌하다 잊어가게 내버려두고 싶었고 무영이에게 그만한 의지가 있기만을. 아무도 모르도록(미승이가 모르도록…) 무덤 같은 세월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아이들이 웅성댄다. 오늘도 다른 반 아이가 미승의 책상에 쪽지 한 장을 툭 던져 놓고 갔다. “초대장이야.”라며 히죽대고 가는 녀석의 재미없는 재치가 아니더라도 쪽지의 내용을 짐작 못하는 애들은 없었다.
일시. 장소. 유치하고 조악한 도전 메시지.
미승이는 쪽지를 구겨 이번에도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하루가 바쁘게 이태수가 보내는 초대장을 일관되게 무시했다. 류미승의 무시를 알면서도 이태수의 초대장은 하루 한 번씩 꾸준히 날아왔다. 들끓는 분을 축적해가며, 응징의 그날을 입맛 다시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웅성임 속엔 긴장과 실망들이 얽혀있었다. 저러다가 언젠가 거하게 싸움이 터질 거라는 예상들로 상기된 흥분. 한편에선 류미승이 이태수의 도전을 겁내는 거라는 핀잔과 다른 패를 끼지 않고 직접 싸울 자신이 없는 거라고 시들해하는 비아냥들이 골고루 산재했다. 정본인인 미승이는 어떤 소리가 들려와도 평온을 지켰다.
그 평온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미승은 시간을 정하려는 것이다. 한시 바삐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이태수나, 묵묵히 관망하는 강재만이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류미승 자신에게 맞는 시간을 지정하고 싶은 것이다.
맞기 위해서, 지기 위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자신을 내버리는 시간을 쌓아가고 있는 거겠지.
알고 있는 만큼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멀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눈치 없이 파고드는 당형수도 알면서 지켜보는 한지석도 우리의 거리를 눈치 챌 만큼 말 한마디, 인사 한 번 나누지 않았다. 그는 내게 더 이상 어떤 표정도 보여주지 않았고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그날 이후 미승이 기다리는 시간을 나 또한 기다리며 멀어지는 과정의 순간들을 촘촘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동시에 같은 느낌을 공유했던 적이 있을까?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가끔씩 돌아볼 때마다 우연찮게 마주치는 녀석의 눈길엔 속이 따끔거렸다.
일순, 처연하리만치 부드러워서.
그게 꼭 내 표정인 것 같아서…….
그래도 순식간에 돌아가는 무표정은 단단한 대리석 같은 차가움을 발했다.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거다. 이번에는 그도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있는 거다.
“어이, 태수가 너 좀 보잔다.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다.”
화장실에서 맞닥뜨린 이태수 패들은 얼마 전에 나를 가양로 골목으로 끌고 가서 묵사발을 만들었던 놈들이었다. 녀석들은 이번에는 나를 창고로 데려가겠노라고 으스댔다.
“내 볼일은 끝난 걸로 아는데. 볼 일 있으면 이태수더러 우리 반으로 찾아오라고 해. 너네들 시켜서 만날 유치한 쪽지만 보내지 말고.”
“핫, 이 자식 봐라? 그날 덜 맞았지? 몸 좀 더 쓰다듬어줄까?”
놈들이 나를 끌고 가려는 건 그날의 만행으로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요즘 계속되는 이태수와 류미승의 한쪽만 밀어붙이는 신경전을 보건데 이태수에겐 류미승을 도발시킬 화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화약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리석은 이태수. 놈은 수많은 아이들이 목격하는 가운데에서 벌건 대낮의 뻔뻔한 납치극마저 불사할 만큼 미승이를 향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강제로 날 끌고 가려는 패거리들과 낑낑거리며 화장실 문을 잡고 버티는 나와 그것을 구경하면서도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모두가 한심한 꼬라지. 그 또한 나를 버티게 하는 악다구니의 밑거름이었다.
“거기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매달리고 끌어당기는 낭패스런 소란 속에서 구경만 하는 아이들을 제치고 나선 것은 마침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오던 강재만이었다. 그의 등장은 패거리들의 강제를 정지시켰다.
“이태수 똘마니들, 꺼져.”
“강재만. 이태수가 시킨 거야.”
“그 새끼가 너희한테 뭘 시키건 내가 알 게 뭐야. 학교에서 문제 일으키지 마. 꼴불견이야. 가서 그 자식한테도 말해. 이딴 식으로 추잡하게 나오면 나도 협조 안 한다고. 늬들도 다 꺼져. 무슨 구경났다고 모여서 보고만 있어!? 병신 같은 새끼들.”
강재만의 일갈에 아이들이 흩어지고 이태수의 패들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가버렸다. 화장실 앞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그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널 도운 게 아냐. 이건 내 자존심 문제니까.”
“응. 고마워.”
“고마워? 방금 말한 거 못 들었어!? 인사 받을 일 없어. 너를 채가서 손쉽게 류미승을 치려는 이태수랑 같은 놈이 되기 싫은 것뿐이야.”
“알아. 그래도… 고마워.”
“…내가 너한테 지켜줄 수 있는 의리는 이것뿐이야. 두 번은 기대하지 마. 네가 또 이태수한테 붙잡히면 그땐 나도 손쓰지 않을 거니까, 알아서 빠져 있어. 당분간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사는 게 좋을 거야. 뭣하면 이참에 학교 안 나오는 것도 괜찮겠지.”
재만이의 충고 속엔 친절과 위협이 나란히 들어있었지만, 어쨌거나 이태수가 나를 미끼로 끌어들이려는 계기를 막아준 건 사실이었다. 방금 일도 없었던 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등을 쫓아가서 울퉁불퉁한 팔을 잡은 것도 나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언제나 거짓된 웃음으로 쉽사리 매달렸던 그 팔을 힘들게 잡은 이 순간에는, 그에게 털어내야 할 진심 하나가 필요했다.
“강재만. 너 의리 있는 놈이야. …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어.”
“흥, 내가 그 말에 기뻐해야 되는 거냐? 이거 참, 춤이라도 추고 싶네.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난 네 편이 돼주지 않아. 알지?”
“알아. 너 기분 맞추려고 하는 말 아냐. 내 편들어달라고 이러는 것도 아냐. 잠깐, 가지 말고 이 얘기만 들어줘! 사실은… 나, 너 안 좋아했어. 널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난… 난 약하니까 강한 녀석이 주위에 필요했어. 강재만 널 병풍처럼 뒤에 세워두고 보호받으려고만 했었어. 비겁하게 널 이용하기만 했어. 알지? 내가 이런 놈인 거 넌 알고 있었잖아. 내가 괜히 박쥐 소리 듣고 산 게 아니야. 그렇지만 박쥐도… 너한테 고마울 때가 많았어. 고마워도 인정하기 싫을 때가 많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싫었었어. 떳떳하지 못해서… 미안해 강재만. 그동안… 진짜로 미안.”
한 순간도 솔직하게 살아오지 못했던 나로선 작은 하나라도 솔직해지고 싶은 게 있었다.
거짓투성이, 비겁투성이, 죄책투성이, 자괴투성이… 온통 부정적인 투성이들의 대란으로 혼란스런 내 안에서 숨막혀 죽겠다고, 문 좀 열어달라고 두들겨대는 진심은 너무 많았고, 내가 열수 있는 문은 고작 지금의 이것뿐이었다.
“고해성사 하냐? 말 되게 길다. 안됐지만 난 신부님이 아니거든.”
강재만의 비웃음을 고스란히 받아넘겼다.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할까. 진심에 숨통 좀 트겠다고 그에게 새삼스럽지도 않은 소리들을 구태여 까발려버리는 나의 잔인함에 얼마나 화가 날까.
안다. 알지만, 나 역시 그에게서 미움을 받고 공평해져야 했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의리 아닌 의리였다.
하지만, 그의 이죽임은 길지 않았다. 나직한 말소리와 함께 변색되어가는 표정은 순순한 허탈함을 담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진즉에 나한테 한 번이라도 이런 얘길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
“…난 네가 항상 궁금했었어.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네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나를 배짱 좋게 이용하면서도, 이태수랑 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도, 애들한테 박쥐 소리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네가… 어째서 불쌍해 보이는 건지. …그래서 한 번이라도 친구로서 네 생각을 듣고 싶었어. 진즉에 이랬더라면… 기분이 이렇게 좆같진 않았을 텐데…….”
“…….”
“늦었지만… 이제라도 얘기 해줘서 고맙다.”
내 어깨에 한 순간 얹혔다 떠난 묵직한 손은 그다지 홀가분하지만은 않은 안도와 새로운 미안함을 남겼다.
마지막에 보인 재만의 희미한 미소는 이미 늦은 것들에 대한 내 회한의 한 꺼풀을 닮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한 꺼풀을 벗은 거겠지. 나약한 거짓의 아주 얇은 한 꺼풀을.
토요일 12시. 4교시가 시작되기 직전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이태수의 멍청한 하수인이 미승이의 책상에 놓고 가는 걸 착각하고 잘못 놓은 걸까 싶었지만 딱지처럼 접힌 쪽지를 열어보고는 자리를 제대로 찾아 온 것임을 알았다.
「할 얘기가 있어.」
익숙한 글씨였다. 비뚤비뚤하고 못생긴 철자에다 모음 위에 강한 삐침을 넣는 습관은 아홉 살 일기장에서부터 열여덟 살 노트까지 숱하게 보아온 특징이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쪽지를 딱지 모양으로 도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한 시간 후 수업을 끝내고 청소까지 마친 후 하교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미승은 책가방을 메고 내 책상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책들과 필통을 느릿느릿 가방에 담는 것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보다 천천히 교실을 나왔다.
“저기서 얘기 할까?”
본관 입구에서 교정의 숲을 가리키는 눈짓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긴 시간 빼앗지 않아.”
“그래도. 가면서 얘기 해.”
석고 소녀상을 지나치는 동안 진한 흙냄새가 풍겼다. 좁은 습기를 품고 있는 숲의 흙냄새, 그림자의 냄새. 그곳에 들어가면 우리는 언제나 단 둘이 되었다. 어두운 흙과 수풀의 공기에 휩싸여 단 둘임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고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우리를 느끼게 되는 공간은 내키지 않았다. 세상의 텁텁한 먼지 속에서 타인들과 함께 각자가 흐릿하게 섞여야 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까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뚜벅뚜벅 말없이 걷기만 했다. 옆에서 뻗는 긴 다리랑 자꾸만 같아지려는 박자를 맞추지 않기 위해 일부러 걷는 속도를 빗겼다. 버스가 오려면 삼십 분 쯤 남아 있었다.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가는 교복들이 줄어들고 정류장엔 우리와 서너 사람밖엔 남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언제까지 이태수 쪽지 버릴 생각이야?”
버스 한 대가 나머지 사람들을 태우고 한 사람은 택시를 타고 사라졌을 때 한쪽 귀퉁이로 휘어진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들은 두 사람의 자리 외엔 비었다.
“자꾸 시간 끌면 곤란하잖아. 애들도 네가 질까봐 자신 없어서 미루는 거라고 믿고 있어. 네가 시간 질질 끌면서 뒤에서 따로 패거리 모으는 거라는 소문도 있고… 대체 어쩔 셈이야? 나한테 한 약속은 헛뻥이었냐?”
“그런 거 아냐.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기다려? 네가 기다리는 게 뭔데?”
“내가 자꾸 무시해서 이태수 자식이 최고조로 열 받았을 때.”
미승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걱정 마. 약속했잖아. 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 이태수가 함정을 치면 걸려줄 거고, 덜미를 잡으면 잡혀줄 생각이야. 그래야 되는 거잖아. 그치?”
“그래.”
내가 그러라고 했지. 너를 밀어붙였지. ‘그래도… 많이 다치진 마…….’라고 올라오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서툰 진심으로 여기까지 온 진도를 망칠 순 없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뭐가?”
“오늘 이태수한테 답장 보냈다. 그 자식이 매일매일 공개 러브레터를 보내오는데 나라고 딱지만 놓을 순 없잖아. 나랑 뒹굴고 싶어서 몸이 달았는지, 내용이 갈수록 열렬해지더라. 그 자식 피가 뜨거운가봐.”
“그래? 언젠데?”
“안 가르쳐 줘.”
“…….”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 하지 마.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내가 그러기로 결정한 거니까.”
“걱정 안 해. 나 때문도 아니고. 그게 사실이잖아.”
서툴기 짝이 없는 정희승의 연기는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계속될 테니까―.
“…그게 약속이었잖아.”
“그래. 그러고 나면 다… 정리되는 거지. 네가 바라는 대로 끝낼 테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마. 이건 거래도 협상도 아니야. 너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거야. 어릴 때처럼 널 협박해서 내 맘대로 하지도 않을 거고, 그럴 마음도 안 들어.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정희승.”
미승의 환한 미소는 체념이었다.
아아… 난 드디어… 이기고 있었다. 울렁거릴 만큼.
그래. 류미승, 힘들다는 걸 인정해. 널 여러 번 실망시키고 힘들게 한 나야. 내가 널 웃게 해준 적이 있었니? 난 너 때문에 기뻤던 날들이 많았는데 네가 나 때문에 기뻤던 날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래주면 다행이고.”
정류장엔 어느새 각각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중심가 교차로에서 커브해오는 녹색 버스는 시간상으로 나를 태우고 갈 39번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이 얘길 해주고 싶었…….”
“버스 올 때 됐다. 너도 이만 가봐.”
의자에서 일어서 차도 쪽으로 두세 걸음 가던 중에, 갑작스럽게 어깨가 돌려세워졌다.
저편에선 건넌 산이 강수면 위에 짙은 녹음을 내리고 이편에선 햇볕이 투과되는 해초의 물빛이 일렁거린다. 여름 끝물의 흔적마저 보내버린 가을의 진한 공기 속에 나무벌레들의 날갯짓 소리가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강은 여전히 아름다운 초록이었다.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지지지난해에도, 강 쪽으론 한 번도 걸음을 돌리지 않았었다. 이 강을 다시 찾아오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현실에서 가장 멀리 두고 싶은 강이었다. 매일 매일 마음속에서 삭제시킨 강이었다.
그런데도 삼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발이 달렸다. 찾아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답답함이 두려움을 눌렀다.
정확하게 4년의 강이 흘렀다. 48개월 또는 365일의 4회전, 헤아리기 어려운 긴 부유의 흐름이 박기수의 주검을 쓸고 갔을 것이다. 시체도 물살을 따라 얼마간 흘러갔을 것이다. 그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저 강 속에서 썩어져 물고기들의 밥이 되고 수초들의 양분이 되었겠지.
그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죄책감이라면 누군가를 죽인 나 자신을 향한 후회의 일말. 그리고 두려움.
세상에 완전하게 감춰지는 비밀은 없다고 했다. 죄악은 어느 때건 실체를 드러내고 말리라. 지금까지 숨죽이고 버텨왔을 뿐, 언젠가는 물 위로 떠오를 것이다. 박기수의 시체가 물고기 밥이 되어 사라졌다 해도 내 죄의 목격자는 남아있었다. 물 위로 떠오르지 않는 죄를 평생 숨기고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현미와의 재회를 생각했다.
나보다 세 살쯤인가 위였던, 나보다 한 철 앞선 험한 사건의 희생자였던 우리 마을의 현미. 마을을 떠난 지 여덟 해가 지났어도 그 애는 내겐 여전히 우리 마을 속에 담긴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잊었어도 나만은 잊지 못했다. 그녀가 끌고 살아가는 어둠은 내 것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내 것이 더 깊었으니까.
지저분한 뒷골목의 어둠 속에 기대 있던 현미가 나보다 착한 건지도 모른다. 독한 복수심으로 사람을 해치고 언제나 약한 위선자의 가면을 쓰고 사는 내가 더 더러웠다.
만약 그날 만난 현미의 모습이 밝았더라면, 커보였다면, 나는 조금쯤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다음에는 반듯하고 밝게 고쳐지리란 희망을?
모르겠다. 지금까지 예쁘게 고쳐지지 않은 현미처럼, 나 또한 오래도록 망가져있을지도 모른다.
미래…가 없어.
그러니 미승을 버리려는 이 선택을 평생 괴롭도록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후회하진 않을 거다.
‘사랑해.’
이 말은 바로 몇 시간 전에 들은 고백이지만 말이다.
강둑에서 일어나서 마른 흙을 털었다. 밝은 햇살에 반사되는 강 수면은 집으로 향하는 걸음 뒤에도 반짝이는 고요함으로 따라붙었다. 허약한 죄인의 한숨은 영 무시한 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망가진 대문의 철 고리를 풀고 소음 없는 집안으로 들어와 그림자처럼 마당을 지나 마루를 오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아무데나 던져놓고 작은 창문을 닫았다. 교복을 벗고 옷장서랍 이에 놓인 요랑 이불을 꺼내 바닥에 폈다.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조심히 접어서 얇은 이불 안으로 들어가 고치처럼 웅크리고 이불을 말았다. 피곤이 몰아치듯 파고들었다.
이 주 전에 생긴 타박상들로 한동안 심한 몸살을 겪었고 아직도 군데군데 움직일 때마다 아픈 자리들이 남아 있지만 몸을 좁게 말아 누워 있으려니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아픔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심하게 아팠고 심하게 앓기도 했지만 멍은 때가되면 흐려진다는 걸 안다. 어느 날인가는 나아질 것이다.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만 같은 것도 있었다.
이제 겨우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성한 풀림 하나를 위해서 한쪽이 꼬여야 한다면 나 한쪽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도 류미승이 망쳐버렸다.
‘이 얘길 해주고 싶었……어.’
교차로를 돌아오는 39번 버스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어지는 미승의 말을 끊고 일어서버렸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해 어깨가 붙잡혔다. 나를 돌려 세운 미승은 돌연 키스를 했다. 정류장에 새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목격과 놀라움의 웅성임과 이어지는 언짢은 주시들은 그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짧지만 깊고 강하게 맞물린 입술 속에서 난 당황스러움조차 잊었다.
‘사랑해.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마지막 고통이 되겠지.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그가 내게 건네려던 본론은 짧은 키스의 여운이 사라지기기도 전에 귓속을 후벼팠다. 그리고 내 속을 꿰뚫고 들어올 듯한 확인의 눈빛.
‘내가 너 사랑한 거, 알지?’
‘…….’
미승이 그렇게 말해왔을 때 입 속이 말랐다. 기뻐서도 슬퍼서도 아니었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화가 치솟았다.
사랑. 우리들의 관계에 그런 이름을 지어 부를 순 없었다. 절대로 그런 이름을 가지고 가선 안 되는 관계였다.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미승이 나와 함께 아파해선 안 되는 거다. 나 또한 그로 인해서 계속 힘들어지기 싫다. 더 아파지지 않으려면 기대갖지 말고, 관계의 잔여감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 우리들의 어울림이 애정으로 확인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오직 잔인하고 이기적인 책임의 분담만이 남아있어야 했다.
나는 우리의 몸을 섞은 관계들조차 섹스라고도 불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섹스가 사랑이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의 포옹이 아무리 따뜻했다 한들, 그의 키스가 아무리 달콤했다 한들, 그의 애무가 아무리 안락했다 한들, 무책임하고 무감동한 놀이여야만 했다. 그것이 나의 양심을 덮고 언제 마를지 모르는 괴로운 자책감을 최대한 밀어낼 수 있는 방어막이었다.
그래서 미승의 사랑한다는 말에 나는 등 돌리고 말았다. 놓칠세라 버스에 급하게 올라타고 나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흔들리던 녀석의 눈동자를 뒤로 하면서 버스가 멀어지도록 발걸음을 떨어뜨리지 않았을 그를 생각하면서 더, 고통스러웠다.
강물도 흘려보내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슬픈 건… 미승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겐 미승이를 좋아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무심해질 수조차 없었다. 오래전부터 미승은 차라리 증오로 끌어안을지언정 외면으로 내칠 수 없는 가슴 안의 혹이었다. 가장 밝은 추억들과 가장 염오스러운 기억 속의 주연이었다. 곱고도 밉고, 가증스러우면서도 미안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복잡하고 끈끈한 감정 속으로 달라붙어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우리는 ‘친구’일 수 없었다. 녀석은 내게, 나는 녀석에게, 그런 핑계는 더 이상 아무런 마음도 가려주지 못했다.
물 위에 유성물감이 겉도는 마블처럼 고르지 못한 내 마음은 앞으로도 놓아두면 된다. 나 혼자만 닫아 두고 안에서 물과 기름이 겉들은 묵혀지든 내버려 두면 된다.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으면 된다.
그래도 미승이는 나보다 빨리 희석되길 바랐다. 다잡을 수 없는 내 마음에 자꾸만 다가오려 하지 말고,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당당히 서서 웃을 수 있기를. 더 이상 흐트러지지 않기를.
그것만이 지금 내가 악을 쓰며 바라는 유일한 이유였다.
사랑?
사랑은커녕, 난 미승에게 아무 말도 해줄 게 없었다.
네가 뭘 알아……. 산 사람의 살을 찌르는 기분을 알아? 사람을 죽으라고 밀어뜨리는 기분을 알아?
널 찌르고 싶어서 찌른 게 아니었어. 박기수를 밀고 싶어서 민 게 아니었어.
그러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으니까… 죽을 것 같았으니까… 죽을 만큼 괴로워질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고통들을 네가 상상할 수 있어?
날 이해한다고 하지 마!
이해하려고도 하지 마!
사랑한다고 하지 마!
아프게 바라보지 마!
나도 널 좋아해. …그치만… 할 수 없잖아!
화가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고통에 사랑까지 보태면 견딜 수가 없다.
어느 날 다물린 꽃봉오리가 툭 터지듯, 세상엔 예감하지 못했으면서도 놀랍지도 않은 전조와 결과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희망일수도 불안일 수도 있으며, 기쁨일 수도 분노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건 맺히지 않고 터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작은 불안은 풀림의 전조이기도 했다. 터지기 직전의 고름이 아슬아슬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지끈거리는 통증을 낳지 않고는 풀어지지 않을 멍울.
드디어 무영이가 나를 불러 세운 날, 나는 그런 작은 불안을 느꼈다.
“희승아, 할 얘기가 있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그 날은 미승이가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진 날이었다. 목요일 6교시 수업이 끝난 후 한지석의 옆자리의 주인과 책가방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강재만을 포함한 무리들도 한꺼번에 학교에서 자취를 감췄다. 당형수가 한지석에게 “미승이 어디 갔냐?” 하고 묻는 소릴 듣고 내가 한지석을 주시했을 때 그는 나를 쳐다보고 당형수를 보며 “나도 몰라.”고개를 저었다. 쉬는 시간에 이태수네 반에 가서 그와 무리들도 학교를 일찍 나갔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미승은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싸움이 시작되기엔 아직 밝고 이른 시간이었다. 복도에는 기울어가는 가을볕이 날리는 먼지들을 반짝이게 비추고 있었다.
붉고도 노란 빛으로. 곧 서늘한 저녁 속으로 지워질.
“나랑… 얘기 좀 할래?”
부산한 먼지를 뚫고 투명한 걸음으로 어느새 내 앞에선 무영이는 심상치 않은 전조를 틔우고 있었고, 나는 앞으로 맞이할 충격에 대해 이미 절반쯤 준비되어 있었다.
무영이를 데리고 소각장으로 갔다. 이태수의 전용 흡연구역으로 알려질 만큼 알려져서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 엄두를 못내는 소각장이지만 오늘만큼은 배타적인 정적이 보장되는 장소였다. 내게는 어려서부터 안 좋은 행패들의 기억으로만 가득한 곳. 오늘은 어떤 추억이 소각장에 추가되게 될까.
언제부턴가 목수 일을 겸하는 수위 아저씨가 직접 나무를 짜서 소각장 한 켠에 투박한 나무벤치를 하나 만들어 두었고 그 아래 커다란 분유통까지 놓아두었다. 날마다 그곳을 들락거리며 아무데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가는 못된 아이들을 향한 마지못한 배려였을 것이다. 무영이는 분유통의 용도가 의아한 듯 반투명의 플라스틱 뚜껑 안을 들여다보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거 재떨이야.”하자, 겨우 의문이 풀렸는지 허리를 들었다.
“날 왜 보자고 한 거야?”
“너한테 말해 줄 게 있어서.”
무영이는 정면을 향한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미 그의 수첩 속에서 읽었으니까. 열 네 살의 이무영에게 충격을 주었을,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을 옭아매고 있을 그의, 그리고 나의 기억을.
“…내가 오랫동안 아무한테도 하지 못했던… 비밀 얘기.”
드디어 묵은 고름 하나가 터지려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결국은 피해갈 수 없었다. 아니, 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이 순간의 초조함을.
“중학교 1학년 때. 여름 방학이 끝나갈 때였지. 일요일이었을 거야. 날이 너무 덥고 습했던 게 기억나. 아빠를 따라 강엘 가서 오후 늦게까지 나룻배에서 놀다가 잠이 들어 버렸어. 그런데 아빠가 날 깨우지 않고 혼자 집으로 가버렸나 봐. 눈을 뜨니까 배 안에 나 혼자 남아 있었어. …밤이었어. 별이 많이 뜨고 새까맸던 밤. 완전히 까맣지만은 않은 밤이었거든. 물 위에 별이 많이 떠 있어서 예뻤어. 강바람이 날아와서 더위도 식혀주고, 배도 출렁거리고…….”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그 끝 무렵의 어느 일요일. 나루터에서 조금 떨어진 강변 낚시터. 별이 많았던 밤. 무영이는 그 날을 내 머릿속만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계속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지금도 가끔씩 녀석을 괴롭힌다는 끼걱 끼걱 나룻배의 고백을 흘려보내려면 누군가는 들어주어야 할 테니까. 그 누군가가 나인 것이 가장 정당한 필연일 테니까.
“배가 물 위에서 흔들리는 게 기분이 좋아서 그대로 배 위에서 아침까지 자고 갈까 했지. 배는 나루에 튼튼하게 묶여 있었으니까. 아니면 조금만 더 있다가 집에 갈까 하고 뱃전에 얼굴을 얹고 강물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어. 사방에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사람 발소리가 들리는 거야. 조금 무섭기도 하고, 이 밤중에 누굴까 하고 배 아래로 몸을 숙이고 쳐다봤는데… 명재골 하얀 집 남자였어. 작은 플래시를 들고 나루에서 약간 떨어진 강가로 오고 있었어. …알지? 낚시터 바위 쪽 말이야.”
여기서 무영이는 말을 멈췄다. 그 다음은 설명하지 않았다. ‘넌 당연히 알겠지. 더 말하지 않아도―.’라는 얼굴을 하고 확실한 목격의 증언을 남겨둔 채.
“조금 후에 너도 거기로 왔었으니까”
각오했는데… 날이 더운 것도 아닌데… 머리가 멍해지고 있었다. 이어지는 무영이의 느릿한 이야기를 나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애써야했다.
“그리고 난 봤어. … 네가 그 남자를 강에 밀어 넣는 걸.”
놀라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다만 들어야 했다. 녀석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언젠가는 이렇게 되어야 했다. 내 비밀의 죄는 폭로되어야 했다. 그것이 무영이여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안타깝지만… 안심이었다.
“난 알고 있었어. 오랫동안 숨겨왔지만 잊어본 적이 없어. 거짓말 아니야. 그날 확실하게 널 봤어. 넌 울면서 웃으면서 넘어지면서 집에 갔어. 그치?”
“그래…….”
“놀라지 않는구나.”
이미 네 수첩에서 봤으니까. 그치만 그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네 고백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너도 이제 와서 이 얘길 하는 이유가 있겠지?
무영이가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고 한 번도 입 밖으로 아는 척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느닷없이 밝히는 이유가 공연히 궁금하기는 했다.
“…왜 이제 와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차라리… 그때 터트리지, 그냥…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그랬어…….”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내 죄를 폭로했더라면, 좀 더 일찍이 무거운 죄의 대가를 받았더라면,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면 진즉에 괴로움을 치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왜……?
“그때 난…….”
무영이는 고개를 숙여 깍지를 낀 채 접었다 폈다 하는 양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전조도 징후도 없이 찾아온 폭로는 덤덤한 말투 속에서 일상처럼 조곤조곤 이어지고 있었다.
미처 다 끝내지 않은 고백과 함께.
“그때 난, 네가 좋았었어.”
고개를 들면서 “넌 몰랐지?” 하고 웃는 무영이의 흰자위가 붉어보였다. 눈도 목소리도 젖어있진 않았는데도 운 것처럼 붉어 보였다.
“널 좋아했었어.”
무영이는 두 번의 과거형으로 나를 좋아했다 말하고 있었다. 열네 살의 이무영이 열네 살의 정희승을 좋아했었다는 이전의 고백. 거기에 현재와 미래는 없는.
“그게… 그날 일과 상관이 있는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그랬던 것 같애. 그날 내가 목격한 게 무서웠던 기분보다 네가 좋았던 마음이 조금 더 컸는지도 몰라.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 안하고 숨겨온 걸 보면.”
“…병식이도 모르냐?”
“병식이는 절대로 비밀 얘길 해선 안 되는 놈이잖아. 그 자식 입이 가볍진 않지만, 남의 비밀을 쥐면 반드시 한 번은 이용해 먹는 놈이니까.”
난 언제나 무영이가 판단과 줏대 없이 병식이를 따라 붙는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본 건 언제나 무영이의 희미한 겉모습뿐이었다.
녀석은 약한 만큼 속으로 많이 생각하고 살았을 텐데.
“정말로… 내가 좋아서 아는 척 안 하고 비밀로 감춰줬던 거야?”
“그런 것 같다고 했잖아.”
“앞으론 어떡할 셈이야?”
4년간 감춰온 일을 털어놓는 이유. 그것은 비밀을 더 이상 비밀이 아니도록 만든다는 의미. 그렇다면 무영이의 다음 선택은 뭘까, 난 복잡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고 어지러운 고민만 맴돌았다.
“근데 아직 너한테 말 안 해준 것도 있어.”
여기서 무영이가 눈을 활짝 휘었다. 어딘가 교활해 보여서 가슴에 찜찜함이 얹혔다.
“또? …뭔데……?”
“아직 모르겠어? 내가 이만큼 힌트 줬는데도?”
뭘 모른다는 걸까. 대체 무슨 힌트를 줬다는 걸까.
아까부터 내 머리는 아리송한 공회전만 하고 있었다.
“그 남자, 살아 있어.”
“아……!”
나도 모르게 한탄이 터져 나오던 입을 양손바닥으로 막았다. 숨을 탁 멈춰야 할 것 같은 경악감.
“너 가고 나서, 내가 그 남자 구해줬거든.”
박기수가… 살아 있다. 이무영이 구해줬다…….
어떤 기분을 가져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살인자가 되지 않았다는 다행?
어린 시절의 종양이 여전히 생존하고 있다는 절망?
무엇과 함께 해야 할까.
“희승이 네 얼굴, 지금 무지 웃겨.”
그렇겠지. 웃기겠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로 쉽게 형용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니까. 만의 하나라도 박기수가 살아있다면… 하는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만의 하나는 언제나 어두운 좌절 속으로 소멸되었다. 그는 내 눈앞에서 물속으로 잠겨간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존재였고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정말로 살아 있었다니…….
“나, 그때 순식간에 많은 생각을 했어. 그 해는 강물이 홍수로 바닥에 모래가 떠내려간 해였으니까. 그럴 때 갑자기 물에 빠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 지 우린 알고 있잖아. 그런 강물에 네가 박기수를 빠트린 건, 절대로 실수가 아니었겠지. 그렇다면 왜? 너한테 그 남자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이유가 뭘까? 너무 궁금했어. 아마 남한테 말 못할 이유가 있었겠지. 위험한 강으로 밤에 몰래 불러내서 빠트리고 싶었던 이유가……. 겁먹지 마. 너한테 그 이유까지 묻진 않을게. 결과적으론 그 남자가 죽은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난 그 남자를 건졌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방관하면 안 되니까? 응.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 그치만 그때 난… 네가 사라지자마자 물속에 뛰어들면서 희승이 네가 살인자가 되게 해선 안 된다고 절박한 심정이었던 게 기억나. 어떤 이유이건 간에 희승이 네가 사람을 죽이게 하면 안 된다고…….”
내 얼굴은 풀어져가고 있었을 거다. 무영이가 차근히 하나하나의 비밀들을 풀어내는 과정은 내가 오래도록 묵혀 온 불안의 독들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도, 이무영이 나를 열네 살의 여름에서 건져내고 있었다.
“그 남자, 운이 좋았는지 내가 있던 배 쪽에 가까운 데로 흘러와 있더라. 덕분에 늦기 전에 건져낼 수 있었어. 훗… 내가 말이야, 응급처치랍시고 마우스 투 마우스까지 해서 살려줬네. 물이랑 음식찌꺼기이랑 막 게워낸 지저분한 입에다 대고 말이야. 대단하지 않냐? 근데 그 인간은 고맙단 인사도 안 하고 다음날 사라져버렸더라.”
그건 정말 박기수다운 행동이었다. 뒤 켕기는 짓을 해놓고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 인간에 대한 배신감을 나 역시 절절히 겪었으니까.
“사정은 몰라도 그 인간, 물에 빠져도 싸단 생각이 들더라고. 하도 괘씸해서.”
당시의 괘씸함을 상기하는 듯 무영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화난 투로 말했고, 나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조금 웃었다. 당장이라도 강으로 달려가 엉엉 눈물을 쏟아내고 싶었다.
“왜, 아무 말 안 해? 너무 놀라서? 넌 그 사람이 살아있는 거 진짜로 몰랐구나. 난 네가 반신반의 하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고맙다고 말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고맙단 생각은 하지 마. 사실은 내가 오랫동안 이걸 너한테도 말 안했던 이유… 비열한 이유가 있었어.”
“비열한 이유? …뭐였는데?”
“말했잖아. 그때 내가 널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래서 처음에 네 비밀을 이용할 생각도 했었어. 널 협박해서 내 뜻대로 해볼까 하고……. 웃기지? 누가 병식이 사촌 아니랄까봐.”
“근데 왜 이용 안 했어?”
“나한테 그럴 배짱이 있어 보이냐? 어려서부터 날 봐서 알잖아. 그래서 결국 써먹지도 못하고 끙끙대다가 이렇게 털어놓게 됐네. …그러니까 희승이 너도 그때의 널 잊어버려.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얘기들을 하는 이유는… 열네 살 때의 나를 버리고 싶어서야. 그때 난 널 좋아한다는 게 힘들었어. 아무한테도 말 못하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담아왔는데… 이젠 다 버리고 싶어. …미승이가 있으니까.”
“미승이?”
“그 자식은 어지간해선 아무도 막을 수 없잖아. 미승이가 널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어릴 때도 그랬잖아. 난 그녀석이 처음부터 싫었고, 너한테 집착하는 것도 무서웠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여전히 걔는…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
무영이는 열네 살 여름의 나를 건져냈다. 그리고 동시에 열여덟의 나를 미승이라는 강 속으로 떠밀고 있었다. 내가 미승에게 녹아들 방법을 찾지도 못하고 있는 마당에 무영이의 설득은 종잡을 수 없는 곤혹감을 주었다.
아니다. 어쩌면 이젠 알고 있지 않을까…?
“미승이 지금 이태수 떼거지들한테 불려갔지? 류미승 혼자서 걔들 상대하러 간다고 들었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이태수나 강재만이랑 어울렸던 거랑 무관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미승인 어릴 때도 그랬잖아. 너랑 관련된 일이면 사소한 거에 목숨 거는 게 걔 특징이니까.”
“쪽팔리지만… 그래…….”
“맞아. 쪽팔린 것도 모르는 녀석이야. 그게 내가 지금 너한테 얘기하는 이유겠지. 미승이는 상대가 누구건 간에 널 악착같이 뺏을 테니까. 그치만 난 그럴 용기도 집착도 없었어. 지금은 옛날의 감정도 많이 사라졌고. 그러니까 이젠 완전히 포기해야지.”
무영이는 모든 과제를 끝내고 홀가분한 아이처럼 깍지 손을 낀 양 팔을 앞으로 기지개하듯 뻗었다. 몇 분 전에 ‘좋아했다’고 고백하고 이제는 완전히 잊어가는 사람처럼 가붓하게.
“무영이 너, 이젠 나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응. 그러려고.”
흐릿한 미소를 띤 무영이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열여덟 살의 무영이와, 열네 살의 무영이와, 열 살의 무영이와 여덟 살의 무영이를 보고 있었다. 내가 똑바로 눈 돌리지 못했던 시간들의 틈바구니에서 무영이는 자라고 있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내 비밀의 탯줄도 안고 자랐다.
얼마 만에 진심으로, 명료하게 보고 있는가. 나는.
“대신, 마지막인데… 키스해줄래?”
낮고 빠르게 말을 맺으며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무영이의 입술을 쳐다봤다. 여러 주검을 삼켰던 강에서 같이 썩어갔어야 할 박기수를 건져 올리고 내가 밀어버린 더러운 오욕을 살려낸 무영이.
그의 존재는 썩은 동아줄만 바라보며 울상 짓던 나에게 내려온 마지막 금 동아줄이었다.
나의 애처로운 구원이었다.
“눈 감아…….”
무영이의 뺨과 귀를 양손으로 감쌌다. 잠에 드는 것처럼 눈꺼풀을 감고 입술을 벌린 얼굴위에 내 얼굴을 가져가 도톰한 위아래 입술을 차례로 입속에 머금었다. 무영이의 팔이 내 등을 끌어안을 때 입술 속으로 혀를 넣었다. 무영이도 입술과 혀를 움직여 내 혀와 만나 오물거렸다.
우리의 입맞춤은 거세지 않고 질척이지 않았다. 수줍게 서로를 만지는 혀들은 조용히 손잡은 아이들처럼 얌전했고, 서로를 바르는 침들은 한 잔의 물을 나눠 마시는 것처럼 끈적임없이 자연스러웠다.
무영에게 입을 맞춘다는 것, 그것은 이상하고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어려서부터 담겨진 모습들 때문인지 나보다 어린 아이에게 입을 맞추는 기분이 들었다. 열여덟의 정희승이 열네 살의 이무영에게… 그리고 천천히 보다 과거의 시간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교환되는 것은 작은 탈피의 동화감. 열정도, 욕정도, 아쉬움도 없이 성장의 한 고개를 끝맺는 아주 덤덤한 이별식.
무영이와의 입맞춤은 순결했다. 아픔과 비밀로 얼룩진 오욕에 순결한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입맞춤이 끝났을 때 무영이의 눈이 아까보다 붉어지긴 했지만 운 것 같지는 않았다. 나 역시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고마워.”
“나도 고마워, 무영아.”
“응.”
우리는 말로 담을 수 없는 표정과 감정을 나누고 있었지만 아주 조금, 우리는 해방을 찾았다. 나는 구렁으로 엎어졌던 열네 살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무영이도 자신의 속박 하나를 방금 던졌다. 가장 생각 없어 보이던 시절의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평범해도 되는 거였다.
인구 밀집도가 낮은 농가 동네가 신도시 구역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근방 이백 여명의 학생들만 수용하던 송영초고는 몇 년 후의 신도시 인구 이전에 맞춰 새로운 확장 계획이 세워진 곳이었다. 작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고 몇 달 전에는 전교생들을 시내 각지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보냈으며 지난달부터 폐교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하고 많은 음지 중에, 폐교된 초등학교를 전투장으로 삼았다는 것이 참으로 이태수다웠다.
‘한 가지 알려줄 게 또 있어.’
무영이의 마지막 이야기는 앞선 고백들보다 간단한 것이었으면서도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결론이었다. 내가 달려가게 될 향방을 알려주는.
‘이 얘길 해도 나 미워하지 마.’
‘미워하지 않아.’
‘사실은 나, 이태수가 미승이 어디로 불러냈는지 알아. 며칠 전부터 이태수가 친구 시켜서 미승이한테 쪽지 보냈었지? 그 녀석이 복도에서 흘렸다 줍는 걸 얼핏 본 적이 있거든.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면 거기가 맞을 거야. 네가 끼어들면 다칠까 봐 가르쳐주기 싫었지만…….’
‘어딘데? 가르쳐 줘.’
‘그 전에 한 가지만 대답해줄래?’
‘물어봐. 뭐든지 대답할게.’
‘너, 미승이 좋아해?’
무영이가 묻는 의미를 알 것 같았고, 난 최대한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골이 흔들릴 만큼.
‘송영초교에 모여 있을 거야. 빨리 가!’
골이 흔들리는 진동이 멈추기 전에 무영이 먼저 나를 재촉했다. ‘지금쯤 벌써 시작했을 거야. 빨리 가야돼!’
나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달리기 시작했다. 가야 할 곳은 분명해졌다. 처음으로 제대로 뛰고 있었다. 가느다란 흰 줄이 가물거려도 어딘지 모를 결승점을 향해 잠재워지지 않는 갈등의 충동질을 삭혀야 했던 무분별한 달리기는 끝난 지 오래다. 지금 내 앞엔 뚜렷한 목적지가 내게 준비되어 있었다.
미승이를 향해서. 나를 위해서. 지금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앞뒤 경황없이 뛰어 나오느라 무영이한테 택시비를 빌리지 못한 걸 죽어라 후회하면서 이십 여분을 뛰어 송영 초교의 걸린 철문 앞에 섰을 땐 날도 어둑해져 있고 교복 셔츠가 온통 젖어 등에 들러붙을 만큼 땀이 흐르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대문을 타 넘기 위해 아랫단에 발을 디디고 몸을 끌어 올렸다. 꼭대기에 뾰족하게 세워진 가는 철침들을 타넘기 위해 숙인 배가 몇 차례 찔려가며 아슬아슬한 묘기로 철문의 경계를 넘어 초등학교의 운동장 안으로 착지했다.
건물은 작지만 운동장은 넓은 학교였다. 그리고 그 운동장의 저쪽 끝에서 움직이는 어두운 인영들의 소란은 내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그들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쪽엔 분주하게 얽혀있는 여러 명의 무리들이 있고 이태수와 강재만은 그들로부터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서 지켜보고 있었다. 강재만은 팔짱을 끼고 서 있고 이태수는 나무 의자 위에 쭈그려 앉아 담배연기를 뿜고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 하나에 몰려든 개미떼들처럼 별 볼일 없는 무리들의 바지락거리는 움직임 속에서 미승이를 발견했다.
그는 이태수와 강재만의 응징이 이미 한차례 거치고 그들이 먹고 남은 고기 뼈다귀를 개에게 던져주듯 똘마니들 사이로 굴려 넣은 존재였다. 이태수와 강재만은 언제든지 내키면 개들에게서 뼈다귀를 가로채서 폼 나는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자세였다. 그들은 시작과 끝을 절정으로 상정하고 그런 구상을 했겠지. 지금 재미없는 진행부는 똘마니들에게 맡겨놓고, 막판에 주인공으로 재등장 하려는 연출일 테지.
그래도 미승은 잘 버티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공정한 데 없는, 싸움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패악의 한 가운데서 상처 입은 몸을 지탱해가며 끈질기게 막아내고 버티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악착같은 독기를 지탱해가고 있었다.
몰골은 엉망진창이지만 엉망진창으로 구르고 있진 않았다. 코피를 흘릴지언정 구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나 없는 데서 너무 심하게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녀석이 생각보다 초라해 보이지 않아서 안심이 됐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자위다. 나와의 약속대로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는 미승이, 공격을 할 수 없는 약속의 속박은 그를 애처롭게 옭아매고 있었다.
속박의 줄 끝을 내가 잡고 있었다. 그것을 얼른 놓아주어야 했다.
“류미승! 나랑 한 약속 지키지 마! 지면 정말로 너랑 끝이야!”
미승이를 향해 뛰다가 풀린 운동화 끈을 밟는 바람에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어이, 비련의 주인공이 또 하나 등장하셨네!”
나의 도착을 알아챈 순간 지루한 표정로 싸움판을 바라보던 이태수의 얼굴이 웃음으로 바뀌었다. 미동 없이 서 있지만 나의 등장에 조금은 놀란 게 분명한 강재만을 떠나 미승에게로 내 눈이 갔다.
미승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래. 그만하면 됐어, 그 자식들한테 지지 마. 약해지지 마. 지금처럼 휘청거려도 네가 부끄럽지 않아, 네가 그딴 녀석들한테 지더라도 부끄럽지 않아. 네 자존심만 잃지 마. 절대로 무릎 꿇지 마!
“슬슬 재밌는 걸 보여줄까? 특별 게스트도 등장했고 말이야. 야, 거기 늬들 중지!”
이로서 막판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재미없는 중반부가 멈추고 이태수가 교활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까지 나무 의자 뒤에 감춰져있던 그것을 난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
미승에게 다가가는 이태수가 불쑥 들어올리는 왼팔에는 길고 단단한 쇠파이프가 잡혀 있었다. 상대가 좁혀드는 거리를 허용하지 않고 반대로 자신은 얼마든지 거리를 두고서 맨손의 상대에게 일방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치졸한 무기. 원통도 아니고 네모진 각이 날 서게 잡힌 치명적인 무기. 지금의 미승을 가장 초라하게 고꾸라뜨릴 수 있는 악랄한 간섭기재였다. 더군다나 이태수와 강재만에 이어 여섯 명의 똘마니를 상대로 맞아주기만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버린 지금의 미승이에겐 죽었다 깨나도 이길 도리가 없는.
“안 돼! 하지 마, 이태수! 이 나쁜 새끼야!”
내 비명소리에도 죽지 않고 뼈와 쇠가 부딪치는 강렬한 타격음이 귀청에 아프게 꽂혔다. 내리쳐진 파이프를 팔로 막아낸 미승이 한 팔을 잡고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그를 향해 뛰어가려던 내 몸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저 자식 끼어들지 못하게 잡고 있어!”
이태수의 똘마니들이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아아… 저 새낀 끝까지 겁쟁이야. 이태수, 넌 끝까지 겁쟁이야. 미승이한테 한 번 당했다고 이딴 보복전을 준비하고. 알량한 체면 세우려고 그랬다면 넌 크게 잘못 생각했어. 이따위 짓으로 체면이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냐? 넌 창피한 줄도 몰라. 네가 이 싸움에서 미승이를 무릎 꿇린다 한들 넌 절대로 아무것도 회복시키지 못할 거야.
그렇다 해도 당장은 손 쓸 것이 없었다. 진심으로 강하게, 더욱 절박하게 몸부림친다면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있는 악력들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의지의 힘은 고작 이것 밖에 안 되는 걸까.
작고 약하다는 변명으론 모자랐다. 그것으론 마음의 옥쇄가 풀어지지 않았다. 나의 발버둥은 자꾸만 한심스런 자책의 물고를 열었다. 한시라도 빨리 끼어들어서 막아내지 못하는 괴로움에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다.
그 사이 몇 차례 휘둘러진 이태수의 쇠 파이프에 미승이 어떻게 피했는지 맞았는지도 가늠할 겨를이 없었다. 미승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그의 힘겨움을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 상처밖에 모르던 이기심이 그의 상처를 알게 되고, 그가 내게 중요한 의미라는 걸 깨우치게 되고, 그가 다치는 것이 곧 내 아픔이 되리라는 예감을 가졌다. 그것은 분명히 두려움이었다.
다치면 안 돼… 미승아… 넌 강해야 돼. 나보다 커야 돼. 고작 이런 일 따위로 다치거나 비참해지지 말아야 돼.
이 모든 바람은 따지고 보면 나의 이기적인 간절함이었다. 녀석이 내 앞에서 작아지는 것도, 다치는 것도, 약해지는 것도, 초라해지는 것도 싫었다. 내 안의 미승은 부딪히는 모습들이 때마다 달라졌어도 늘 하나의 존재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손잡아 주고 웃어주고 한 없이 베풀어주던 천사의 씨앗이었다. 그런 그가 내게 혐오스럽고 끈적한 기억의 싹으로 자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독소를 품은 꽃처럼 혹은 강철처럼 나타났다 해도 내게 그는 여전히 봄날의 햇살을 받는 꽃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미안해지는 게 너무 많았다.
“강재만! 재만아!”
재만이를 부른 건 내 대신 이태수를 막아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비참한 내 의지를 구해달라고,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강재만의 마지막 정에 호소하는 다급하고 나약한 외침이었다.
“강재만, 저 자식이 징징대는 소리에 넘어가지 마. 이건 우리랑 류미승의 문제야. 안 그래?”
강재만의 표정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태수가 돌아보며 일침을 놓았다. 그 바람에 멀거니 떨어져있던 강재만의 아이들마저 내 주위를 포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태수, 개새끼!”
안간힘으로 욕을 내지르고 한쪽 다리를 들어 뒤에서 내 오른 팔을 잡고 있던 녀석의 다리를 내찼다. 운 좋게도 좁다란 조인트에 명중한 모양인지 녀석이 악 소리를 내며 내 팔을 놓았다. 그 사이에 다른 한 녀석의 팔을 풀고 곧장 튀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사위를 좁혀오는 네 녀석의 포위망 사이를 빠져나가려던 계획은 금방 묶여버렸다. 미승에게로 달려가려는 몸부림은 다시금 붙잡혀 자꾸 헛된 기운만 쓰게 했다.
그래도… 헛되도 괜찮다. 달려가고 싶어…….
“너도 기운 빠지지? 포기 해, 정희승.”
강재만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어느새 다른 녀석들을 물리고 내 양팔을 붙들고 잇는 것은 녀석의 커다란 손이었다.
“저놈 말이 맞아. 이건 우리 문제야. 네가 끼어드는 건 맞지 않아. 아무리 이런 식의 싸움이 나한테 치욕적이라 해도 말이야. 이태수가 무슨 짓을 하건, 나랑은 별개의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