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7)

“아? 에? 우구한데? (나? 왜? 누구한테?)”

검은 콩밥을 한 볼 가득 물고 한지석을 향해 순수한 질문을 날리는 당형수. 더욱이 내가 입에 댔던 포크수저로 거리낌 없이 깍두기랑 두부부침을 찍어대는 녀석을 보니 입맛도 없던 차에 이래저래 밥 남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누굴까?”

저 한지석이 밥 맛 떨어짐에 일조했다. 

지금 내가 가려는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녀석도 한 몫 대단했지만. 

교실 뒷문을 열려던 차에 느닷없이 팔이 잡혔다. 춘추복이라 엷은 셔츠 깃 안으로 잡힌 팔목의 살이랑 뼈가 아프게 비틀렸다. 

“어디 가?”

소매 깃을 접어올린 녀석의 팔목의 심줄이 퍼렇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저 목… 단추 하나를 풀어놓고 있는 셔츠 안으로 언뜻 보이는 쇄골 위의 불긋한 자국은, 아마도 내가 그런 것일 테지. 어젯밤에 후끈거리도록 나를 안고 귀랑 목까지 집어 삼킬듯이 빨아대던 녀석의 입술 아래서 몸부림을 치면서 나도 모르게 저 어깨를 깨물어버린 듯 만 듯… 기억은 희미하다.

“대놓고 그러기냐?”

“뭐가?”

“…….”

아까부터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내 자리를 지켜보던 녀석이 대화를 조금쯤 들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우걱우걱 콩밥 도시락을 비우고 있는 당형수를 대놓고 쏘아보는 것도 알았지만, ‘대놓고 그려기냐?’는 대체 무엇에 핀트를 맞춘 질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거 놔. 나갔다 와야 돼.”

“어디?”

“화장실.”

“화장실?”

“쉬 마려.”

이런 소리까지 하고 나서야 미승이의 굳었던 눈이 풀리고, 손목을 죄던 압박감도 느슨해졌다. 

쉬야가 마려운 척 미간을 구겨 보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살가운 미소를 받으면서 조금씩 출렁거리는 내 속이 진짜로 구겨질 것 같았다. 

이 녀석 앞에서의 내가 언제나 솔직하지 못하고 움츠려 있기만 해서. 너무 작아서…….

“쌀 것 같은 얼굴 하지 말고, 빨리 갔다 와.”

안 손목의 정맥을 쓰다듬는 손을 떼어놓고 교실 문을 나섰다.

소각장에는 이태수 혼자가 아니라 녀석의 똘마니들 세 명이 추가되어 저마다 불편한 자세로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수위 아저씨가 쓰레기를 태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종이탄내인지 담뱃잎 탄내인지 모를 매캐한 연기 냄새가 자욱하게 돌았다. 

흐린 시야에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가장 먼저 일어선 놈은 당연히 이태수였다.

“한참동안 기다렸다. 언제까지 안 오나 단단히 마음먹고 기다려봤지. 정희승이 이젠 날 기다리게도 하고, 많이 컸네?”

“쟤들은 왜 같이 있는 거야?”

“넌 왜 혼자 왔는데? 류미승이건 한지석이건 아니면, 꼴통 당형수건 와르르 몰고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용감하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냐? 너 힘 세?” 

오호라, 내가 다른 녀석들 대동하고 등장할까봐 너도 똘마니들을 방패막이로 데리고 나왔단 소리냐? 비열한 놈이 머리도 굴릴 줄 아네.

“나 혼자 나오라는 줄 알고 혼자 나왔지. 근데 네 계산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저 똘마니들까지 끌고 오고.”

“어헛, 이 자식 바라, 개기네? 내 배짱을 평가하는 거냐, 지금? 내가 우습다 이거지, 정희승?”

“그래, 우습다. 혼자서 미승이 상대 못해서 재만이까지 끌어들이고 나한테 같잖은 협박이나 하고, 안 우습게 생겼냐? 왜, 내가 많이 커서 놀랐냐? 팰 테면 패 봐!” 

“너 맞으러 나온 거냐, 정희승?”

역공의 효과가 먹힐지 아니면 더 꼴사나운 참사를 부를 지 예측은 불가. 패면 맞을 자신도 없었다. 저 철면피한 놈을 약 올리고 무작정 줄행랑을 치는 것이 내가 이 자리에 나온 첫 번째 목적이었다. 왕년의 달리기 실력을 간만에 좆 빠지게 실행해보는 거다. 

요행히 안 맞고 무사히 도망치면 열이 바짝 오른 녀석이 당분간 나한테 정신 파느라 미승이를 뒷전으로 미룰 거라는 계산 하나. 

반대로 불행히 곤죽이 되도록 터지게 된다면, 그래서 미승이가 알게 된다면, 물불 안가리는 미승이놈이 눈에 불을 켜고 이태수를 그 즉시 습격할 테니 일단은 이태수-강재만의 협동 작전을 무산시킬 수 있을 거라는 계산 둘. 

둘 중 하나라도 맞아떨어지길 바라고 얻어터질 각오와 달음질 칠 준비를 동시에 하고 나온 나였다. 

“햐. 이 새끼 바라. 얘들아, 이 새끼가 나한테 자길 패달란다. 내가 어째야겠냐?”

“패달라는 놈은 패주는 게 자비를 베푸는 거 아니냐?”

“네가 알아서 해라, 임마. 우리한테 저런 잔챙이까지 떠넘기지 마라. 손 봐줘도 쪽팔린다.”

“살살 해, 이태수. 저 놈 떨고 있다.”

멀찍이 떨어진 이태수 패거리들은 여전히 궁상맞게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호방하게 주둥이들을 놀리고 있었다.

“너 떨고 있냐?”

“지랄. 어서 볼 일이나 끝내시지!”

“에이, 떨고 있네. 쥐어터질 생각하니까 무섭지, 정희승? 응? 겁 나 죽겠지?”

“…….”

같잖은 농담을 하는 이태수는 웃어도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입술 각도를 간신히 사선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 조소도 못되는 불쾌감과 황당함이 내비치고 있었다. 넙죽 기어들어와 매달릴 줄 알았던 내가 예상 밖으로 깝죽거리고 있으니, 주먹을 덜덜 떨면서도 버팅기고 있으니 녀석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이만 가 봐라. 점심 시간 끝났어. 그치?”

확실히 안 좋은 징조였다. 

차라리 평소의 무식한 놈답게 패던지 갈구던지 했어야 되는데. 이렇게 순순히 물러가라고 명하면 내 계산들은 전부 흐지부지 되고 만다.

“얘들아, 가자, 수업 종 친다. 땡땡땡!”

꿈쩍 않고 녀석의 도발을 기다리다 맞던지 튀던지 할 준비를 하고 있던 나의 웅지는 저렇듯 시시하게 허물어져버렸다. 이태수가 똘마니들을 그러모아서 먼저 소각장을 떴다. 

수업종이 치려면 1분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던 하나의 건수는 기대의 배반에 허탈해할 여운도 사라지기 전에 새로운 반전으로 등장했다. 

그날 저녁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앞에서 우리 마을 버스를 목전에서 놓친 채 나는 이태수의 똘마니들에게 강제로 붙들려 가양로 골목으로 끌려가야했다. 그날따라 점집이건 창녀촌이건 찾아드는 목격자도 하나 없었다. 날이 저물지도 않은 환한 가양로 골목 끝에서 세 명에게 둘러싸여 오래도록 얻어터졌다. 대강 한 시간여의 집요한 복수전이었다. 개김의 대가는 상당히 큼직하게 돌아왔다.

이태수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똘마니들의 처리 몫으로 이태수가 내어준 다구리 숙제였던 것이다. 

놈의 뇌가 진화하고 있었다. 세 녀석들의 주먹이 교복이 사수하는 몸뚱어리의 부위만을 직사게 패대기치고 때리는 동안 이태수 자식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명령을 이놈들에게 내렸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놈들은 깨진 병으로 살을 긋거나 방망이로 뼈를 아작내는 짓거린 하지 않았다. 얼굴이나 목처럼 옷 밖으로 드러나는 부위에도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 내 손등에도 멍자국 하나 남기지 않도록 한 놈이 내 양팔을 붙들고 두 놈이 번갈아 주먹으로 배에다 샌드백질을 해대는 교활하고 무자비한 보복을 수행하고 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아도 반죽음이 되도록 괴로웠다. 

처음에 파니아를 게워 올릴 때만 해도 조금은 감상을 느낄 여유가 있었다. 학교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에 미승이가 사준 따뜻한 은박지에 담긴 파니아를 만지작거리다가 오븐에서 막 데워낸 빵이 식는 게 아까워서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조금씩 먹어치우면서 느꼈던 기분들을, 

뒤이어 점심먹은 것까지 게워 올리고 교복 앞면이 토사물로 엉망이 되자 녀석들은 무릎을 꿇고 앞으로 고꾸라진 내 등과 허벅지를 때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쏟아낼 것이 없어진 다음부터는 감상이고 생각이고 굴릴 여유가 없었다. 계속되는 발길질에 누런 신물까지 주르륵 쏟아내면서 위장이 뒤틀리고 뇌도 뒤틀려갔다. 

헛구역질의 반응으로 떨어져 나오는 눈물이 눈마저 까맣게 멀게 하는 것 같았다.

한 시간 새에 까만 어둠이 졌다. 점집 계단 앞의 가로등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녀석들이 사라진 후에도 내 다리는 좀처럼 일어설 힘이 나지 않았다. 세 명의 운동화가 밟아댄 허벅지 어딘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 놈이 스파이크를 박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세모꼴 쇠붙이가 땅을 갈 정도로 날카롭지는 않다고 해도 힘껏 밟아대면 살을 찢고 피 흘리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개새끼… 스파이크는 트랙 달릴 때나 신는 거야……. 

얼굴이 끈끈할 만큼 눈물은 말랐다. 

토악질의 오물이 뭉개진 교복은 여전히 지저분한 냄새를 풍기고 다리는 끊어질 듯 아팠지만 일어설 수 없는 이유는 그보다도 묵중한 한숨 때문이었다. 

끝까지 이태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놈은 미승이에 대한 앙심은 별개로 나를 먼저 화끈하게 짓밟아 놓았다. 자기 손이 아니라, 제 무리들의 손발로 더럽히고 싶었던 것이다. 

넌 내 상대도 못 된다, 조무래기들이 조금만 손 봐줘도 세상에서 줄행랑을 칠 정도로 겁쟁이인 놈이다. 그런 네가 얄팍한 의리를 앞세워 친구 싸고도는 흉내 내기는 이정도 타작으로도 충분히 꺾어놓을 수 있는 거다. 

아마도 이태수는 이런 생각들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녀석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녀석의 위협을 우습게 본 나를, 최대한 하찮게 땅바닥에 꿇려놓았으니까. 

가로등이 켜졌다. 

수명이 다해가는 전구는 답답한 광채를 억지로 뿜어내느라 골목을 멀리까지 비추지 못했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인기척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태수 패들이 가버린 후로 계단 중간까지 기어와 혹여라도 누군가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어둠 속에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저쪽에서도 신경만 쓰면 날 알아챌 수 있을 만큼은. 

그들은 자신들의 볼 일에 집중하느라 계단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가양로 골목에서 나쁜 짓을 일삼는 애들은 이태수 패거리만이 아니었다. 

이태수의 무리들과 비슷한―오십 보 백 보의 행보를 일삼는―어리석은 객기들을 뿜는 십대 다섯의 뭉치는 얼핏 봐도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사복차림의 여자애들이었다. 그리고 현주여상 교복의 여자아이 하나. 

다섯 무리 중의 하나가 험악한 욕설을 내뱉으며 현주여상 여자애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벽으로 박아버리고 거친 벽면에 뺨을 짓이기고 있었다. 여자애가 뺨을 갈리면서 저항도 못하고 울먹이는 신음소리만 흘리고 있는데도, 차마 나설 용기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내가 방금까지 저 아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침침한 점집 계단 아래 선 이 낡은 전등 하나에 의지하는 밤이 아니더라도 낮의 볕도 제대로 들지 않아 밝아지지 않는 골목,

거기에 우연히 나타난 그 애를 난 어째서 알아보았을까. 나랑 닮은 비틀림으로 낯익은… 작아 보이는 그 애를. 

처음엔 단순한 느낌이었다. 으슥한 구석에 들어오자마자 처음에 여자애의 머리를 벽에 박은 장본이었던 그 앤 다른 네 명이 여자애를 돌려가며 패기 시작하자 무리에서 몇 걸음 안쪽으로 떨어져 나와 삐딱한 등을 벽에 기대고 주황색 야구점퍼 주머니에서 캔 음료수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잔혹한 십대의 반항과 삐딱한 나쁜 자세 속에서도 그 애는 전혀 강해보이지 않았다. 선머슴처럼 짧게 친 비죽비죽한 머리카락도 까무잡잡한 피부와 커다란 눈에 담은 아픔을 가려주진 않았다. 

어릴 적 마을의 예쁜 여자아이는 이제 아니었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까만 살결이, 진한 눈썹이 그 애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현미… 난 그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몰매질을 당하고 있는 가엾은 여자애는 이미 내 주의에서 흐릿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아팠던 다리의 경직이 풀어지고 나는 어느새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주황색 점퍼가 기대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현미다. 가까워질수록 느낌에 확답이 오고 있었다. 

소생된 기억. 내 안에서는 한 치도 나은 적 없는 지긋지긋한 상처. 

왜 난 저 애를 기억한 걸까. 내가 열 살 때 마을을 떠났고, 이후로는 이름도 얼굴도 잊었어야 할 저 애를. 

빠작, 손 안에서 구겨진 캔이 낡은 시멘트 골목 바닥을 굴렀다.

그 애가 내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어둠 아래에서 한 자취 벗어난 나를 까만 눈이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너도 날 알아보겠니? 

아니면 너의 무의식이 낯익다고 느끼는 거니? 

불편하구나. 이런 대면이. 

아마도 이것은 구린 과거를 안고 있는 동류의 껄끄러움일까……. 

넌 역시 행복하지 않았나 보다. 

만일 오래전에 깊은 잠을 잤던 네가 그때의 아픔 속에서 건강하게 깨어났더라면… 훌훌 떨치고 마을을 떠났더라면… 넌 지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텐데. 우리는 이보다 밝은 골목에서 만났을 텐데. 서로가 어느 한쪽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어야 했는데. 완전히 잊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고 남은 채 버려졌던 초등학생 적 스케치북의 마지막 한 장처럼 말이야. 

…그런데 너도 날 알아보는 거구나. 

그래… 나도 행복하지 않아. 너만큼 불행하고 화가 나. 

…내 눈은 널 닮았니? 

“…….”

“…….”

“너…….”

“……!”

“뭘 꼬라 봐, 씹새꺄!”

주황색 점퍼 소매가 위협적으로 번쩍 치켜 올라가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버린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느닷없는 욕설과 함께 침을 퉤 소리 내서 뱉는 현미의 모습에 감상적인 해프닝 하나가 깨졌다. 

“눈깔 안 깔아? 이 좆만한 새끼가.”

오늘 하루 두 번이나 씹새끼 소리를 듣고 좆만한 새끼도 되었다. 유난히 우울한 날이었다. 

“윽, 이 냄새 뭐야! 너 저기서 똥 싸고 있었냐? 썩은 내! 냄새나, 꺼져, 더러운 새끼!”

코를 움켜쥐고 큰 소리로 나의 오물 냄새를 흉잡는 현미 덕분에 여자애 하나 잡느라 열중하던 계집애 무리들이 다구리질을 멈추고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그애는 전혀 눈곱만큼도 날 알아본 게 아니었다. 그저 여고생들의 다구리를 구경하는 비실비실한 남학생에 날리는 가벼운 위협과 모욕적인 일갈 뿐. 아프고 저린 다리를 재촉해서 가양로 골목을 허둥지둥 빠져나온 내 꼴은 어이없는 코미디였다. 

골목의 초입에서 바깥의 거리로 나왔을 때 여자애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욕설과 매를 받고 있는 여자애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애를 구해준다거나 돕는다는 결심은 가당찮았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피해의식에 가로막힌 우리 안에 갇혀있는 것이 걸맞다. 누군가를 위해 의리있는 투지를 불사르는건 패잔병 정희승의 몫은 아니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까부터 쌩쌩 달리는 차들이 내뿜는 빛들이 아슴아슴 어지럽다. 다리는 어느 곳으로라도 날아갈 수 있을 듯 힘이 없었다. 현미를 만난 기분이 나쁜 충격이 잔벌레들처럼 서서히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전신이 무너질 듯 아프다. 허벅지에서 흐르던 미지근한 핏줄기는 굳어가고 있었지만 기분은 한없이 나약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겨워… 모든 게 귀찮아… 이대로 저 도로로 뛰어들어버릴까… 그러면… 그러면… 힘들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차도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어깨가 뒤로 휘청 밀렸다. 

정확히는 밀린 게 아니라 어떤 강제에 의해 짤막하게 당겨진 것이었다. 

“여긴 차도가 아냐.”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가누는데 누군가의 운동화 발이 옆에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흐릿하게 시력을 잃어가던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난 내가 아니었던 것처럼, 흐믈거리는 망상에서 친숙한 현실로 돌아왔다. 

바로 이 녀석 때문에.

“만날 버스 시간 핑계로 늦게 오고 일찍 가는 네가 어째서 아직까지 여기서 서성대냐?”

“…….”

유난히 우울한 오늘따라 이 자식이 앞에서 자주 알짱거린다. 한지석이 나를 쫓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날 막은 것도 아니겠지만 보는 족족 시비 거는 놈 같아서 이런 순간에조차 반갑지 않았다. 섣불리 길을 비켜달라고 하지도 못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하냐?”

“… 그렇게 됐어. 근데 넌 왜 여깄어?”

“그게 질문이냐?”

점집 골목에서 얻어터지고, 주저앉아 쉬고, 여고생들의 불량행위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야자가 끝나는 시간이 넘어 있었다.

“나야 집에 가는 길…….”

대답하다 말고 한지석이 코를 움켜쥐었다. 너무 오래 맡아 내 콧구멍엔 익숙해진 토사물 냄새가 녀석의 코를 생소하게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녀석의 저런 표정을 보니 창피하지만 고소했다. 

만약 ‘무슨 냄새야?’물으면 ‘똥 싸고 왔다!’고 쏘아줘야지― 하고 결심했는데,

“가자.”

녀석은 대뜸 돌아서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건성으로 했다.

“어디?”

“어디긴. 몰라서 묻냐?”

“미승이네?”

“아니면. 갈 데 있어?”

“…….”

“미승이는 오늘 부모님 집에 간댔어.”

한지석은 내 걱정을 앞서 읽고 있었다. 미승이는 오늘 아파트에 없을 거라고 굳이 알려주는 걸 보면. 

어차피 집에 갈 방법이 막막했던 난 퉁명스럽긴 해도 사정을 꿰차고 앞서가는 한지석을 따르기로 했다. 시큼하고 역한 냄새 때문인지 녀석은 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져서 앞서갔다. 

이 꼴을 하고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들어와.”

오는 내내 나랑 모르는 사이인 척 하다가 현관문을 열면서 처음으로 고개를 돌린 한지석은 현관의 센서 등불에 비춰진 얼룩덜룩한 내 교복을 보더니 못 볼 걸 봤다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온 표정을 다해 역력히 드러낼 거면 차라리 냄새 난다고 해 버리지, 

말은 않고 티를 내는 게 더욱 불편했다. 

녀석은 허리를 굽혀 내가 벗어놓은 운동화를 들고 신발장 문을 열고 있었다.

아침에 도로 신고 나갈 걸 일부러 신발장에 넣어 둘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같은데.”

녀석은 새 것인 운동화 한 켤레를 꺼내들고 내 낡은 운동화랑 비교하고 있었다. 녀석이 같다는 것이 신발 사이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다른 신발들―류미승이나 한지석의 것들―과 눈에 띄는 크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바탕에 옆선으로 빨간 줄 두 개가 들어가고 흰 실과 빨간 실이 점점이 섞인 끈으로 맵시 있게 교차되어 묶여 있는 운동화는 내 발치수랑 맞는 크기였다. 최근에 미승이가 신고 다니는 것과 크기만 다른 똑같은 디자인. 

방학 때 내가 미처 사지 못했던 운동화. 미승이 녀석에게서 받기를 거절했던. 점심시간 한지석의 퉁명한 입을 지나갔던.

“흥.” 

한지석은 특유의 코웃음을 치며 새 운동화를 제 자리로 넣어두고 내 것은 바닥에다 던지듯 내려놨다.

“그 꼴로 방에 들어가지 말고 우선 욕실부터 들어가서 씻어. 갈아입을 옷은 내가 가져다 줄 테니까.”

유감스런 감정으로만 가득한 녀석이 저런 신경까지 써줄 만큼 옷 꼴이 진창이었다. 

그러나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비춰 본 얼굴은 누가 봐도 멀쩡하다고 할 만큼 멀쩡해서 구타의 흔적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오직 우울해보였을 뿐이다. 

욱지근한 둔통을 참아가며 옷을 벗어내고 남은 몸뚱이엔 가슴팍 아래부터 팔다리 전체에 걸쳐 수도 없는 멍들이 솟아올라 있었다. 불긋하고 푸릇하고 팅팅하게 핏줄을 올린 멍들이 흉측했다. 스파이크에 짓밟혔던 교복바지는 거친 보풀과 찢긴 자리가 남겨졌고 허벅지엔 찔리고 찢긴 상처들이 솜솜한 핏방울 자국을 굳혀가고 있었다. 끔찍한 형상이었다. …언젠가는 낫겠지.

세면대에 교복을 담가 물을 틀고 비누를 잡다가 떨어트렸다. 비누칠을 생략하고 뜨거운 물만 잔뜩 틀어 멍과 타박상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풀리길 바랐다.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는 물줄기의 쓰라림이 지독해서 이를 앙다물어야 했다. 비누 하나 집는 데도 손을 떨 만큼 기운이 바닥이었지만 까탈스러운 한지석 앞에서 지저분한 꼴 때문에 눈치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자존심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몸에 물칠을 했다. 교복을 빠는 건 포기했다. 

욕실 문 앞에는 흰색 옆줄이 들어간 회색 트레이닝 바지랑 흰색과 하늘색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 위에 연고랑 반창고가 올려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교복은 작은 방 앞으로 가자 한지석은 방의 매트에 한 팔을 괴고 누워 문간에 서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옷도 편하게 잘 입네.”

은근한 시비였다. 

이죽거리는 말투와 그 보다 가볍지 않은 눈이 자꾸만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 아까 내가 잡지 않았으면 차도에 뛰어들려고 그랬지? 왜? 죽으려고? 세상 살기가 귀찮냐, 정희승?”

“…아냐. 그런 거. 네 멋대로 꾸며대지 마.”

“아냐? 아님 말고.”

세상 살기가 귀찮냐는 말을 저리 쉽게 하는 놈, 

아님 말고라는 말을 저리 가볍게 하는 놈. 

“그런데 꼬라지를 보니까 어디서 얻어터진 것 같던데.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영리하게 팼나 보다? 보이는 덴 멀쩡해 보이지만 다리 풀린 걸 보니 교복 바지가 엉망이던 걸. 바늘로 허벅지를 쿡쿡 쑤셔놓은 것 같던데. 누가 그랬냐?”

“누구도 아냐.”

“그럼 누가 너더러 정절 지키라고 굵은 바늘 하나 건네주던? 너 혼자 푹푹 찌른 거야? 열녀문 받으려고?” 

피식 비웃는 놈의 면상을 밟아주고 싶었다. 

그럴 기운만 있었다면.

“말장난 그만해라. 나 피곤해”

“아. 피곤해서 그런 꼴을 하고 있어? 넌 말이지, 정희승, 항상 피곤해 보여.”

서서히 몸을 일으켜 앉은 한지석은 점점 분명하게 나를 향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피곤하겠지. 피곤해, 피곤해, 사는 게 피곤해, 항상 얼굴에 달고 사니 안 피곤 할 리가 있겠어? 그뿐만이 아니야. 널 지켜보는 사람은 안 피곤한 줄 아나보지?”

일어서서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더니 느닷없이 내 멱살을 잡고 매트로 끌어가 내동댕이쳤다. 

철컹, 무르지 않은 매트에 부딪힌 충격에 전신의 곳곳에서 그악스런 통증들이 울렸다. 

“으…윽……! …너 왜 갑자기 이래?”

갈비뼈 사이를 누르고 들어온 스프링의 탄력에 전신이 울듯이 떨었다. 

그리고 일어날 틈도 없이 위에서 덮쳐온 또 하나의 충격에 억한 신음이 삼켜졌다.

“내가 미승이한테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데, 하필 너 같은 놈한테 얽매여서 피곤하게 산다는 사실이지. 넌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해. 나까지도 말이야, 미승이 때문에 따라서 지켜보기 시작한 네가 나한테도 피곤증을 만들어주고 있어. 아주 아주 지겨워. 정희승.” 

한지석의 딱딱한 몸뚱어리를 밀어내려 바동대고 암만해도 바닥까지 떨어진 기력으로 밀어내기엔 녀석의 기운은 대단히 멀쩡했다. 

“그걸로 모자라서 오늘은 길거리에서 차도에 뛰어들 인간의 눈을 하고 있었지. 그래, 그러면 편하겠냐? 편하겠지. 피곤하게 사느니 죽어서 피곤을 떨치는 것도 방법의 하나야. 하지만,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마. 죽으려면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혼자서 죽어. 들키지 말고.”

잔인한 말 속에서 찌익 찢어지는 심장처럼 티셔츠가 찢겨져 나갔다. 내 뒤통수를 그러잡고 목덜미로 우악스럽게 입술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한지석의 어깨가 어깨뼈를 뻐근하게 눌렀다. 

낯선 입술이, 낯선 혀가, 낯선 이빨들이 목에다 절대로 가슴의 상처가 되지 않을, 히스테리와 짜증으로 뒤범벅된 냉정을 남기고 있었다. 

“왜이래! 하지 마! 이거 놔! 안 놔? 놓으라고! 십새꺄! 놔! 놔! 개같은 새끼야!”

욕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저항은 그렇지 않았다. 몸은 어떤 비명도 저항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욕을 해대는 내 입은 얼마든 비명을 지르도록 열어둔 채 찢겨져 나간 옷 안으로 입을 넣고 있었다. 되는대로 쥐어뜯고 깨물리는 아픔이 목으로 어깨로 가슴으로 이어졌다.

욕을 퍼붓고 눌리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정리되는 생각은 있었다. 

한지석이 나를 싫어하며 내게 무관심할 수도 없다는 것. 

그 이유는 바로…

“한지석, 누구 왔……!?”

바로… 열린 방문 앞에 서 있는 저 녀석 때문이다. 

놀람을 넘어서 아연한 모습으로 창백하게 굳어있는 류미승.

왜 네가 있는 거야?

“…뭐야?”

류미승, 네가 왜 거기 있는 거야. 

“…뭐야……?”

쟨 왜 여기 있는 거야?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오늘 밤은 없는 거 아녔어? 야, 한지석! 네가 그렇게 말했잖았어!

“부모님 집에 간다고 했지, 안 돌아온다고는 안 했어.”

서느렇게 깔리는 미승이의 뭐야는 무시하고 나의 허물어질 것 같은 뭐야에 한지석은 짓궂게 싱긋거렸다. 순간적으로 이 상황의 난감함을 잊을 만큼 녀석의 뻔뻔함에 피가 거꾸로 솟기 시작할 때, 재차 상황을 상기시키는 진동.

“뭐하는 거냐니까!?”

미승의 고함이 공기를 산산이 뒤흔들었다. 

“네가 봤다시피. 어때?”

한지석이 돌아보며 “어때?" 하자마자 미승이 덤빌 듯이 방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한지석의 멱살을 움켜쥐고 강제로 뒤흔들자 한지석의 목에서 컥 하고 사래 걸린 신음이 나왔다. 

“…지 마.”

미승의 팔을 잡았다. 하지 말라고. 이 이상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말라고. 네가 화를 내야 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언제나 나였다고. 

“…….”

원망으로 흔들리는 초점이 나에게 향한 건 잠시. 한지석은 거칠게 목덜미를 잡힌 채 방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거실에서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둔탁한 난타가 집 안을 울렸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미승의 부르짖음과 한지석의 무거운 신음이 짜증나게 뒤섞였다.

찢어진 티셔츠를 벗고 한지석의 서랍을 열었다. 아무 옷이나 꺼내 입는 동안 거실의 소란은 계속됐다. 형광 오렌지색의 상의는 어깨선이 축 처질 정도로 컸지만 도톰한 질량으로 빈약한 신체 사이즈를 커버해주었다. 폴리에스테르의 미끄러운 감촉에다 손에 배인 진땀을 문질렀다. 가슴에서 목으로 올라오는 짧은 지퍼까지 꼴꼴하게 채운 후 허리 앞쪽에 작은 주머니에 양 손을 끼워 넣고 방을 나섰다. 

짐작했던 대로 베란다의 두꺼운 유리창이 깨져있었다. 녀석들은 서로에게 해명의 요구도 변명도 없이 거친 숨소리만 내쉬고 있었다. 다시 미승의 손이 올라갔다. 한지석은 입가에 피가 터진 채로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미승의 주먹을 받기 시작했다. 둘이 엇비슷한 체격이라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방어쯤은 가능할 텐데도 한지석은 전연 몸을 피할 생각을 않고 태연히 얻어맞고 있었다. 오히려 주체하지 못하는 분규로 패악을 부리는 류미승이 피해자 같아보였다.

‘류미승… 넌 나도 패야 돼. 아니, 날 팼어야지. 네가 화내는 건 항상 나 때문이잖아. 녀석들 때문이 아냐. 넌 나한테 화가 나는 거야. 지금도 그래… 날 패고 싶을 텐데 어째서 한지석만 몰아서 패냐.’

그 순간까지 미승이가 차마 내게 가하지 못하는 폭력, 오로지 녀석들을 향해서만 일방으로 뻗는 무분별하고 절제 없는 난폭함을 슬프게 비웃으며 조용히 현관을 향해 걸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미승보다 맞은편에 쓰러져 있던 한지석이 방에서 나온 나를 알아보았지만 그대로 현관으로 걸었다. 유유히 나갈 수 있었다. 한지석이 묵인하고 저대로 계속 맞아만 준다면.

“정희승! 이걸 보고도 그대로 가고 싶냐?”

그런데 녀석이 내지른 심술에 미승이까지 알아버렸다. 운동화 속에 발가락을 넣고 있던 나를 미승이 돌아봤을 때, 굳게 다물린 주먹은 퍼런 심줄을 불뚝이고 녀석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이 복잡했다. 들끓다 못해 차갑게 굳어가는 분노와 우울. 이건 지금 녀석의 기분일까, 나의 기분일까……. 

“류미승, 쟤 저대로 보낼 거야?”

양쪽 운동화를 모두 꺾어 신고 현관을 돌리던 내 손이 멈춘 건 이번에도 한지석 때문이었다. 진짜 끝까지 미운털 박히는 한지석이었다. 송진처럼 굳어가던 류미승에게 불심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었다. 

“나가.”

미승이 나지막하고 단호히 뇌까렸다. 내게서 시선을 놓지 않고 덧말 없이 이어진 짧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한지석은 안간힘을 써서 쓰러진 몸을 일으켜 현관까지 걸어왔다. 베란다 유리를 깬 것도 그의 이마였는지 입가는 물론 왼쪽 이마에 가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흐르는 피도 닦지 않고 보란 듯 내 어깨를 밀쳐내고 먼저 밖으로 나갔고 녀석을 뒤따라 나서려던 걸음은 그새 등 뒤에 와 있던 미승에게 붙잡혔다. 드디어 내가 끌려갈 차례가 온 것이다.

형광등도 켜지 않았다. 잡혀 들어온 방에서 나를 밀쳐놓은 벽은 거무칙칙한 어둠으로 발라져있었고 열린 방문 틈으로 들어온 거실 등빛이 마주선 미승의 모습을 반쯤의 명암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불안한 침묵.

“…….”

“…….”

“불 켜지 마.”

벽에 등을 기댄 채 스위치를 찾으려 더듬거리던 팔을 녀석의 명령에 따라 도로 내렸다. 절반의 명도를 피해 어두운 구석 내가 있는 벽 가까이로 오는 녀석 때문에 벽에 바짝 붙었다. 정작 분노를 풀 대상은 나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녀석의 행패를 받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긴 팔이 허공으로 올라오는 걸 봤을 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어두운 방에서 이대로 어떤 폭력을 당할지……. 어릴 적 박기수에게서 얻어맞았던 뺨의 쓰라린 열기를 무의식중에 회전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너덜거리게 몰매를 맞은 몸이 한 대만 더 충격을 받으면 이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고. 

쾅, 방문을 닫히는 소리. 

“눈 떠. 어차피 안 보일 테니까.”

가까운 저공에 흐르는 허스키. 눈을 떠보자 정말로 거실의 빛까지 차단된 방안의 사물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내 옷깃에 닿을 듯 말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검은 석상처럼 서 있다는 것은 무거운 숨소리가 알려줄 뿐이었다. 

“내가 때릴 줄 알았어? 전에 말했지. 난 너 안 때려. 아니 못 때려. 설령 네가 한지석을 꼬여서 내 눈 앞에서 방금 같은 짓을 했다하더라도.”

익숙한 말이었다. 언젠가도 들었던.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드러움이 희미하게 섞였던 그날에 비해 지금은 오금이 오그라들만큼 냉기어린 목소리만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그런 거 아냐.”

“그래서 한지석을 팼잖아.”

“…….”

다시 침묵. 

“한지석이라서 그만큼 봐 준 거냐?”

내 목소리는 엉망으로 갈라져 나왔다. 

“그 자식이 왜 그랬는지 아니까.”

그는 한지석의 어떤 생각을 안다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서운함이 침잠했다. 아니까. 친구라서 속마음까지 이해하니까. 그러면, 난 네 친구가 아닌 거냐. 나랑 너도 한지석과의 관계처럼 말없이 이해하고 싸우고 풀어지는 친구면 안 되는 거냐. 

“그치만, 이젠…….”

가려진 말끝엔 저조한 체념의 숨이 실려 있었다. 뭘 말하려다 만 걸까. 

“이젠… 뭐?”

“…….”

이젠 뭐? 내가 지겹니? 피곤하게 사는 내가 싫증나니? 한지석처럼 너도 지긋지긋하니? 나 때문에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니? 

그렇다면 네가 할 말은 하나 밖에 없겠네. 내가 대신 말해볼까?

“이젠 관두자고?”

멍든 등이 벽으로 쓸려 올라갔다. 멱살 째 잡혀 들렸다. 바닥에서 디딜 자리를 잃고 얕은 허공으로 올라간 발이 난리를 쳐도 앞뒤에서 밀어붙이는 벽과 가슴 때문에 바동바동 허우적댈 공간도 없었다. 정면에서 밀어붙이는 입술이 이고 잇몸이고 할 것 없이 아프게 눌렀다. 하지만 그보다 아픈 건 타박상을 입은 자리들이 반복해서 받는 압박이었다. 그대로 허공에 발 디디지 못하고 들쳐 업혀 갈 때 눌리는 위장의 격통과 오늘 두 번째로 매트위로 내동댕이쳐지는 옆구리의 진동. 바로 전신을 압박해오는 무게. 멱살이 쥐어졌던 옷감은 이제 찢어내려는 손길에 의해 투두둑 실 땀 뜯어지는 소릴 냈다. 하지만, 도톰하고 미끄러운 옷감이다. 질기고 탄력 좋은 폴리에스테르라서 한지석이 버려놓은 줄무늬 티처럼 쉽사리 찢어질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우악스럽게 걷혀 올라가 티는 결국 내 머리통과 팔을 빠져나와서야 질긴 고문에서 독립되었다. 

가슴을 깨물어오는 이빨이 지독하게 아팠다. 예전의 미승은 끔찍했지만, 날 아프게 한 적은 없었다. 지금의 미승은 날 아프게 하지만 끔찍하진 않았다. 고통은 저항을 희석시켰다. 정확하지 않은 시간을 헤아리고 헤매게 하고 있었다. 한지석이 짓누를 때처럼 저항을 하다 말다 비명도 지르다말다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미승의 몸부림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극단의 좌절처럼 몰려왔다. 이럴 때의 난, 녀석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기억의 유전자를 존속시키고 있었다. 결코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서, 좌절이 더욱 깊어졌다. 

일방적으로 틀어박으려는 거친 몸 아래서의 극간의 저항을 했다. 다리를 꼬고 세차게 몸부림을 틀었다. 다리를 억지로 벌리려는 손과 억지로 다물려는 허벅지의 전투는 몹시도 치열했다. 그럴수록 녀석의 숨소리는 흉폭해졌다. 풀어지지 않는 분기의 숨이 귀 밑으로 후욱 내려왔다. 

“하윽……!”

허벅지가 그악하게 끌려 올라갔다. 머리 위에서 발바닥이 천장을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허벅지의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 후끈한 통증과 함께 주르륵 흐르는 핏물을 느꼈다. 엉덩이를 밀고 들어온 엄지손가락 길이의 귀두보다 생생하게. 그 다음에 생생하게 느껴진 건, 살덩이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짧은 마디 안으로 바람이 드는 것 같았다.

후들렁한 다리를 천천히 내렸다. 위에서 누르던 체중도 숨 막히는 호흡도 사라졌다. 방 안이 환해져 있었다. 스위치에서 손을 떼고 돌아오는 미승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대체…….”

미승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나를 엎치던 한지석을 목격할 때와 지금 내 몸의 타박상들을 목격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기가 막힐까. 

누구야! 누가 그랬어!…라고 녀석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를 줄 알았다. 내 목이라도 잡고 흔들어댈 줄 알았다. 그러나 녀석에겐 뜻밖에도 이성이란 게 남아 있었다. 의외일정도로 차분하게 앉아 내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신의 멍은 아까보다 심하게 오르고 있었다.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베이지색 시트 위에는 미승의 주먹에 배인 한지석의 피와, 깨진 유리에 갈려나간 미승의 팔에서 배어나오는 피와, 내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우울한 날이다. 모두가, 모두가 피를 흘렸다.

“…난 뭐냐, 정희승. 너한테 난 뭐길래… 이렇게 바보로 만들어.”

내 허벅지로 오려던 떨리는 손끝이 도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 자식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너 때문에 손 안 쓰고 있었어. 네가 뭐라고 한 마디만 했으면, 난… 네가 하라는 대로 했을 거야. 나한테 그 자식들 이기라고 했으면 이겼을 거고, 지라고 했으면 졌을 거야. 패는 거든 맞는 거든, 대수 아냐. 너 때문에 내가 발작하고 흐트려놓은 거 아니까, 내가 책임질 일인 거 아니까. 그러니까 네가 해달라는 대로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야. 그런데 넌! 넌 날 안 믿고 혼자서 처리하려고 해. 왜 날 의지하지 않는 거야, 이 바보야!”

알아. 네가 얼마나 나한테 실망했는지. 얼마나 화를 내고 싶은지, 지금 눈물이 나올 만큼……. 너 아니? 네가 내 앞에서 눈물 보이는 게 두 번째야. 어릴 적에 난 널 배신해서 울렸고, 이번에도 널 실망시켜서 울리고 있어. 왜 네가 나 때문에 우는 거야. 

눈동자를 적시고도 남아 긴 아랫눈썹 아래 걸려 있는 물기는 뜨겁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바보 같은 날, 녀석은 얼마나 힘겹게 담고 있는 걸까.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다 죽여 버리고 싶다니……. 일순의 분기로 인한 허세로 치부하기엔 평온하면서 섬뜩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도 나처럼 일순에만 치닫는 욕지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지는 감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건… 아니다. 그가 나만큼 지독해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럼 져.”

미승의 눈이 깜빡이자, 속눈썹에 걸려 있던 물기가 짧게 흘렀다.

“져 주라고. 네가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어서 저지른 일이잖아. 그 자식들은 너한테 잘못한 거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맞은 거잖아, 난 걔들 이해해. 화내는 게 당연해. 그러니까 네가 해결해. 가서, 그 자식들 속 풀릴 때까지 얻어터지고 와.”

“…그게 이유야? 내가 상관없는 일에 끼어든 책임이라서? 하다 못해 그 자식들이 네 친구라는 핑계도 아니고?”

“잘 이해했어. 너는 나한테 상관할 필요가 없었어.”

“…….”

이대로는 미승이도 망가진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병신 같은 날 지켜보느라 녀석마저 멈추고 비틀거리게 해선 안 된다. 평생의 사슬이 될 죄책감과 두려움을 씻지 못하는 난, 녀석을 기쁘게 해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고해하지 않을 거다. 미승에게는.

“난 네가 싫어. 괜찮아진 척 했지만, 끔직했어. 네 손이 닿는 것도 싫고 네가 웃는 꼴도 보기 싫어. 몸서리 쳐져. 네가 나랑 있는 게 좋다고 할 때마다 난 열 받아. 무진장.”

“…거짓말 하지 마라.”

“거짓말 아냐. 그거 모르지? 나, 지금도 어떤 땐 널 찌르는 상상을 해. 네가 가증스러워서, 네 이기심에 치가 떨려서, 자기감정만 우기는 너한테 질려서. 너 때문에 내가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아서, 널 죽이는 상상을 해. 이게 괜찮은 거 같냐?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이건 비정상이야. 난 너 때문에 자꾸 끔찍한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평범하게 살고 싶어.” 

미승의 주먹이 푸르르 떤다. 베어진 팔뚝에서 핏물이 뚝 배어나올 정도로. 도대체 오늘은 얼마나 피를 봐야 하는 걸까. 다물렸던 주먹이 펴지고 긴 손가락 끝으로 가늘어진 피가 내려가고 있었다. 그동안에 피는 충분히 식었을 것이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너랑 상관없이, 마무리 지을 게. 그 자식들한테 맞고 올게. 그러면 되는 거냐?”

“…그래.”

“그렇게 한 다음엔. 난 어떻게 해야 되지?”

“…….”

예상 못한 질문이 나왔다. 그 다음엔 어떻게? 당연히 알아서 질려서 떨어져 나가야지. 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아? 류미승, 넌 어째서 그토록 미련한 거냐.

“거래하자는 거야? 내가 원하는 대로 맞아주고 오면 나는 너한테 뭘 해줘야 되느냐고? 글쎄… 뭘 해줘야 될까? 이건 어때? 네가 그 자식들 문제 정리하고 나선, 네 마음대로 해. 어릴 때처럼 날 부려먹든지 굴려먹든지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다 받아 줄 테니까.”

내가 일그러지게 웃으며 주절주절 독한 소릴 담는 동안 미승의 눈이 이글거렸다. 물기 가신 눈에선 여전히 핏발이 섰지만 좀전 같은 붉은 핏줄이 아닌 푸른 핏줄이 비치는 듯 했다. 조금씩 내 뜻대로 돼가고 있었다. 

“…개새끼.”

저래야 된다. 질려야 된다. 정 떨어지도록 분노해야 된다. 

“너 그렇게 막 나가는 놈인 줄 몰랐다, 정희승. 내가 널 조금도 몰랐던 거냐?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그래. 넌 날 몰랐어. 모르는 게 한참 많아.”

푸훗, 미승이 웃기 시작했다. 히스테릭하게 갈라지는 웃음소릴 높이며 한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신음 같은 소리가 되어 귀를 아프게 했다. 

“좋아.”

나를 등지고 벽을 쳐다보며 미승이 말했다.

“어디, 네 뜻대로 가 보자. 마지막까지.”

이로써 우리의 마지막 관계가 성립되고 있었다.

“나, 갈게…….”

“잘 가라.”

이제 남은 건 끝. 서서히 멀어지는 이별. 그걸 준비해가는 과정은 내게 지독한 연극이겠지. 널 놓아주기 위해서 널 괴롭히게 되겠지. 그래도 괜찮아. 미안하고… 고마워, 류미승.

“어제는 뭐 하다가 그렇게 늦게 온 거니?”

뜨끈한 밥알이 닿은 혀끝이 쓰라리다. 어딘가 찢어진 듯 조그만 자극에도 아프고 어제와 같은 피 맛이 나는 기분도 들었다.

“…친구들하고 놀다가.”

“자알한다! 친구들하고 놀다가 늦어서 새벽에 자는 사람 깨워서 택시비나 들고 나가게 한 거냐!? 새벽 두 시였다. 두 시! 택시 기사는 차비 이만오천 원이나 부르고. 그 정도면 차라리 친구네서 자고 오지, 넌 어째 그렇게도 주변머리가 없냐. 같이 놀 친구들은 있어도 재워줄 친구는 하나도 없던? 쯧쯧…….”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미승이의 아파트에서 나와 막막하게 길에 서서 무영이네도 잠깐 떠올리긴 했지만 그뿐이었고, 빈 주머니에 택시를 잡아타고 집 앞까지 와서 자고 있는 엄마를 깨우는 방법밖엔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구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밤을 지내고 싶었다. 

“어이, 그만 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얘가 자주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집에 잘 들어왔으면 됐지 뭘 그래. 아침부터 학교 갈 애 붙들고 잔소리 하지 말라고.” 

“이 양반이―! 희승이 빗대서 당신한테도 아침 잔소리 하는 게 듣기 싫다, 이거죠? 잔소리가 그냥 잔소린 줄 알아요? 다 나올만 하니까 나오는 소리예요. 얘 얼굴 좀 봐요. 너! 밤늦게까지 잘 놀았다는 놈이 뭐가 부족해서 아침 밥상머리에서 얼굴이 그 모양이야? 잘 때도 끙끙 앓는 소리 내던데. 너 설마, 밖에서 싸움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잠드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아침 밥상 앞에 앉는 것도, 밥숟가락을 드는 것도 욱신거리는 아픔이 동반됐다. 아무리 단순한 행동들도 쉽지 않았다. 

“나한테 싸울 힘이 있어 보여?”

가장 어려운 건 몸 안팎의 두들겨진 자리들을 감추고 보통인 척 하는 거였다.

“하긴…맞고 다니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맞고 다니지는 마라. 맞지 말고 차라리 먼저 패! 싸움은 선제공격이 중요한 거야. 이 아빠가 어렸을 땐 말이다, 너만큼 체격이 작았지만, 싸움에서 져 본적은 한 번도 없었어. 상대가 덩치 크고 싸움 잘하는 놈 같으면 먼저, 녀석 몰래 손에 흙을 한 줌 쥐고 있다가, 놈이 방심할 때 흙을 눈에다 홱 뿌려서…….”

“그만 좀 해요! 가르칠 게 없어서 싸움을 가르쳐요? 그것도 정정당당히 싸운 것도 아니고 뭐가 자랑스럽다고.”

“맞는 것보다는 비겁하게라도 이기는 게 낫다는 거지. 그게 사나이들의 세계야.”

“사나이들의 세계 좋아하시네.”

엄마 아빠의 승강이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묵묵히 밥 한 그릇을 비웠다. 수저를 내려놓자 국을 푸던 엄마의 손이 와서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네. 희승아,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앓는 소리도 심상치 않던데. 감기 몸살인가?”

“그런가 봐.”

“그러게 작작 좀 놀아라. 미련퉁아. 밥 다 먹었으면 빨리 교복 입고 학교 가.”

엄마는 콧잔등을 찡그린 채 빈 밥그릇을 모았다.

방구석에 박아놓은 교복이 한심하다. 새벽에 젖은 채로 들고 온 교복은 아침까지 흙물을 먹은 채 구겨져 있었다. 사방에 고민거리가 산재해 있는 이 와중에 나는 학교에 입고 갈 교복까지 걱정해야 했다. 

교복 와이셔츠는 두 벌을 사두어서 여벌이 있었지만 토사물 묻은 재킷은 대안이 없었다. 대신 교복 베스트와 색깔이 비슷한 남색 니트 조끼가 있었다. 감도 다르고 V넥 라인에 흰 줄무늬가 있어서 엄연히 교복과는 구별이 되지만 어차피 남들보다 늦게 등교하니까 교문에서 걸릴 일도 없을 거다. 교복바지랑 헷갈리지 않을 만큼만 비슷한 두툼한 회색 바지도 골라 입었다. 지저분해진 교복들은 세탁기 앞에 던져놓은 후 욕실에서 얼른 빤 넥타이를 젖은 채로 바지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이 차림으로 눈에 띄지 않게 하루만 잘 버티면 된다.

“여. 희승아, 너도 타라.”

“안녕하세요, 버스 곧 올 텐데요.”

정류장에 버스가 오기 전에 선중이네 아버지의 트럭이 먼저 멈춰선 것은 여느 때라면 괜찮은 하루의 출발로 여겼겠지만, 이 날만은 그렇지 않았다. 

“버스보다 트럭으로 가는 게 빠르지. 지각도 안 하고. 우리 아빠 운전 엄청 빨라. 성격 닮아서 거칠어서 그렇지.”

“너, 친구 앞에서 이 애비 들으라고 흉잡는 거냐?”

시내에 일이 있는 김에 선중이를 등교시켜주던 길이라는 아저씨는 나에게 얼른 타라고 채근했다. 

선중이의 말대로 아저씨는 성격답게 운전이 거칠고 빨랐다.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하필 이런 날. 남들 등교하는 시각에, 

학교 정문 앞에 정차한 트럭은 나를 내려주고 선중이네 공고가 있는 매화동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교문을 두고 떡하니 도착했으니 교문 앞에서 이루어지는 선도부와 담당 선생의 검열에 걸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선도부 중엔 한지석이 끼어 있었다. 

교복이 교복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련 선생에게 다그침을 받는 동안 한지석은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난 알았다. 그 얄팍한 입술에 얄궂은 비웃음을 얹고 있는 것을. 

“생각보다 멀쩡하네.”

그리고 선도부실에서 반성문을 쓰고 자습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교실로 돌아왔을 때 옆자리 앉아 놀리는 이죽임이 연장선에 있는 시비라는 것을. 

“멀쩡하지 않으면, 너처럼 얼굴에 멍 달고 있길 바랐냐?”

“어쩌면.”

한지석은 간밤에 얻어터진 자국들이 남은 얼굴에 반창고 한 장도 안 붙이고 보란 듯이 들고 있었다. 선도부 주제에 저런 얼굴을 어떻게 변명하고 아침 검열에 나섰는지 모르겠다.

“네 자리로 가라.”

“세정아, 나 한 시간만 이 자리 빌리자. 넌 내 자리 가서 앉아.”

“엉? 그럴래? 뒷자리니까 나야 좋지.” 

자습시작 종이 쳤을 때 녀석은 제멋대로 내 짝인 세정이를 자기 자리로 보내버리고 세정이의 책상서랍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쳐들었다.

“나올 때 분위기로 봐선 너도 멀쩡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류미승한테 실망인 걸. 아무래도 그 자식은…….” 

말하다 말고 녀석의 입술이 더 크게 휘어졌다. 

“교복, 특이하게 입고 왔네.”

조끼를 지목하던 손이 V넥을 따라 올라가며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찬 손가락이 목 아래 살에 닿았을 때 서늘한 간지러움에 움찔했다. 

“이거.”라며 그의 나온 손에 잡혀 나온 것은 뻣뻣하고 짧은 머리카락이었다. 

한지석은 여유롭게 핸드폰 폴더를 열어 문자를 찍었다.

“미승이는 오후에 온단다.”

아직 비어있는 미승의 자리를 가리키고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책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자식이랑 또 틀어진 모양이지? 어제 나 나온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돼?” .”

“…….”

“아니, 됐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 자식한테 어떻게 할 건지나 말해 봐. 너랑 미승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어제 왜 그랬냐고 물어봐도 돼?”

나도 참고서를 보는 척 하면서 물었다. 

“나한테 묻기 전에 스스로 생각은 해봤냐?”

“…….”

“조금만 혼자서 생각해 봐. 그래도 모른다면 바보지.”

“몰라. 난 바보라서.”

“훗, 맞아.”

국어 참고서 한 페이지를 넘기자 옆에서도 수학 교과서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미승이는 나도 알고 너도 알지.”

“그래.”

“아니, 넌 몰라. 그자식이 널 안다는 뜻을.”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해?”

“미승이는 너에 대해 일일이 보지 않아도 알아. 나는 너를 봐서 아는 거지만 걔는 보지 못한 것들도 느끼는 것 같아. 가령 전부터 네가 미승이 모르게 이태수나 강재만 사이에서 제법 약은 척 하면서 노닐었던 거라든지, 내 눈에는 역겨운 장면들이 몇 번 눈에 띄었지만 말이야. 공교롭게도.”

한지석의 말 속엔 소각장에서 이태수랑 입술 부비는 실랑이를 하던 순간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얘기를 미승한테 한 적은 없다는 뜻도. 

한지석의 퍼지지 않는 낮은 말소리는 사방에서 들리는 책장 넘기는 소리, 볼펜심 움직이는 소리, 군데군데 소곤대는 아이들의 수다 소리에 묻히지 않고 이어졌다.

“난 너한테 별로 좋은 감정이 안 들어. 애당초 너 같은 녀석은 안중에도 안 들어오는 게 정상이지. 보통보다 약고 조그맣다는 것 빼고는 평범하고 별 것 없어 보이니까. 단지, 류미승이 널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걔가 너한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자연히 내 눈에도 네가 띈 것뿐이야. … 재밌었어. 덕분에 너희들 관계 눈치 챌 수 있었고. 이건 내가 미승이한테 가진 관심의 결과야. 그래, 관심. 관심을 가지고 보면 언제나 많은 것이 보여. 옆에서 조금만 예민하게 관찰하면 알 수 있어. 그리고 경악할만하지. 그 자식이 널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러니까 네 관심이 미승이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이해하게 했듯 미승이의 관심이 나를 이해하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쯤은 나도 알아. 대수롭지 않아. 네가 함부로 아는 척 끼어들 만큼 만만한 얘기가 아냐, 한지석.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 행동이 그런 말로 변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변명? 훗, 변명은 상대방의 이해를 구할 때나 하는 거야. 내가 네 이해 따위를 필요로 할 것 같아?”

“…….”

“정희승 앞에서 한없이 약해빠진 류미승, 정희승 눈치 보기 바쁜 류미승, 정희승을 붙잡아두지 못해 안달하면서도 놓아둘 수밖에 없는 류미승. 헛, 진짜 웃기지도 않는 순애보야. 그 자식이 그렇게 꼴불견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네 덕분에 그런 꼴들을 봤지.”

“그게 내 질문이랑 무슨 상관있어.”

“어제 일 말야? 대수로운 건 아냐. 그 자식이 네 앞에서 바보처럼 굴고 얌전떠는 버릇이 고쳐질 수 있을까 궁금해서 시도해봤지. 확실한 반응을 보여주더군. 설마 나까지 패겠어? 싶었는데, 패더군. 그렇게까지 맞으리라고는 예상 못했지만… 실망스럽진 않았어.”

한지석은 미승에게 얻어맞은 게 전연 억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던진 호기심의 미끼를 덥석 물어준 류미승에 대해 뿌듯함마저 느끼는 듯 웃고 있었다.

“미승이 좋아하지?”

“나? 물론. 그렇지만 네가 그 자식을 좋아하는 거랑은 다르지.”

“어떻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