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상관없어. 내가 널 좋아하니까.”
나도 널 좋아해. 이 말을 하면 넌 어떤 얼굴을 할까? 하지만, 난 말하지 않겠지. 넌 끝까지 모르겠지―.
“오늘 나랑 같이 있을 거지?”
“…으응.”
“가자.”
미승이는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미승이와 나의 이야기는 길다. 녀석이 처음 우리 마을 명재골로 이사 오고 나와 친구로 지내던 시절부터 우리가 친구가 아니게 된 시절까지, 서로에게 상처와 악감정만 남긴 채 끝냈던 중학교 때까지, 우리에겐 지칠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모르는… 평생을 숨죽여 가져가야 할 나만의 비밀도 있었다. 아무리 웅크리고 웅크려도 모든 틈이 닫혀 지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녀석과 얘길 나누고 같이 걷는 것도, 일상을 흉내 내며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기적 같은 해프닝이었다. 나는 웃고 있다. 화내고 있다. 떠들고 있다. 미승이랑 걷고 있다. 미승이가 나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알지만… 받아들이진 않을 거다.
녀석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그 모든 것들을 통 털어 내 안에서 짙은 고름으로 끓어 올린 열기는 죽을 때까지 식히지 못할 거다. 누구를 통해서도, 무엇을 통해서도 식히려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지금 옆에서 잡아오는 미승이의 손이 아무리 따뜻하고 굳건해도, 녀석은 내게 있어 이미 친구도 무엇도 될 수 없는 먼 상처의 자투리로 남아 질질 끌려온 현재에 불과했다.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가 시끄럽게 거리를 채웠다. 밤은 정적이지만, 어둠에서 깨어나는 빛들은 소란스러웠다. 상점가의 쇼 윈도우를 걸어가면서 지나치는 창마다 비치는 내 흐릿한 특징들을 무의미하게 확인했다.
…저렇게 내 존재가 흐릿해질 수 있다면…….
어두운 도로에 밤의 불빛들이 부산한 소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움직이고 지나다니고 웃는 사람들이 있다. 그 속에서 난 존재를 감추며 숨죽이는 생명이다. 어른어른 흔들리는 빛들을 지치며 내 옆에서 당당히 걷고 있는 미승은 빛과 어둠을 모두 흡수해버린 성장체였다. 주검의 호흡에 묻혀져 간, 오직 나만이 밤의 미토콘드리아다.
“혼자서 고민하지 마. 마음이 풀리면 언제든지 얘기해 줘.”
비록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순 없어도…
“아까 한 말 진담이야. 또 다시 도망치고 싶어지면 같이 가는 거야. 혼자 뛰지 마. 다른 생각 하지 마. 나를 생각하면 돼. 내가 널 보고 있잖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계획적이고 서툴렀던 방랑이 가져다준 교훈은 없었지만, 끝끝내 나를 끌어온 인력의 중심은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이 녀석을 바라보고, 이 녀석과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을.
“친구라고 우겨도 좋아. 아니, 이름만 부를 수 있어도 좋아. 너랑 계속 볼 수 있으면 돼. 이렇게 손에 잡히면 돼.”
어떤 이름으로든, 어떤 존재로든 간에.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더러 널 놔달라고 하지 말고, 네가 네 자신을 놔. 그게 빨라.”
아무 말 못하고 있는 나를 떼어 놓고 “응?”하고 반복해서 물어오는 미승이의 눈을 보며 가만히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자, 녀석이 눈웃음을 가득 싣고 양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 끄덕 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껏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뗐다. 미승의 손이 떼어져 나가고 나서 난 다시 고개를 끄덕 끄덕 몇 번인지 모르게 목을 움직였다. 골이 흔들려 어지러울 때까지.
“이렇게 있어. 달리려고 하지 말고. 날 외면하지도 마. 네가 나한테 올 수 없다면 내가 너한테 갈게. 그러니까 부딪히는 대로 받아들여.”
미승이의 애정은 날 울리는 방파제였다. 그래서 돌아서서 웅크리고 눈을 가려야 했다. 이제는 눈을 가리지 않을 거다.
다만, 앞으로도 혼자 뻥 뚫린 물 위에서 부유하는 척 해야 할 거다. 미안했으니까. 그를 향했던 어긋난 복수심, 그에 대한 미움, 두려움, 질시, 내 모든 감정들이 밉고 안쓰럽고 불안해서, 그가 아직도 조금은 밉고 또 많이 미안해서… 슬펐다. 그리고 지금은 설렘과 두려움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고동 때문에.
미승이 팔이 길게 뻗어왔다. 내 어깨를 안고 내 안에 얽히고 꼬인 기억들을 풀어내려는 듯 등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있으면 되는 거야?”
“그래. 이대로.”
어설프고 비릿한 우정이었지만, 한 때는 최고의 친구로 갖고 싶었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승이의 입술을 받아들이면서 애증이 고약하게 뒤섞여 분리의 갈피조차 찾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소망 하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젠, 어린 날의 예쁜 미승이랑 다시 손잡고 봄 산에 오를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지긋한 몸짓, 그러나 억센 포옹.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고, 미승이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눈앞을 찌르던 앞 머리카락이 미승의 손길에 거두어져 이마 뒤로 넘어갔다. 눈이 자꾸만 시큰거렸다. 매트 위로 쓰러지는 순간, 미승이가 몸을 옆으로 틀어 먼저 떨어졌다. 나를 가슴에 얹고 머리를 끌어다 입술을 맞추는가 싶더니 스프링의 짧은 탄성 위에서 내 몸이 밑으로 돌아갔다. 흔들리는 매트의 여운이 남기도 전에 거친 키스와 몸부림에 삐그덕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살갗과 점막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가파른 숨소리가 끼어들었다.
눈을 감은 채 긴 속눈썹을 내리고 내 입술에 집중하고 있는 미승이는 차분하지만 강박적으로 보였다. 세상 누구보다 강렬하게 나를 원하는 저 녀석을 향해 나도 똑같은 고백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만 빼고는 오롯한 희열이 피어올랐다. 끔찍하지만 발 뺄 수 없는 쾌락 속으로 몰아부쳐지고 있었다.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몸 안에 심기 싫은 쾌락의 파도가 살갗 속으로 밀물로 들어와 뼈 마디 마디 전이되고 있었다. 미승이의 심장, 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은 불붙은 날개로 미친듯이 불춤을 추는 나방의 날개짓처럼 파닥거렸다. 메마를 틈도 없이 활활 타서 바스러질 희나리처럼 숨을 태웠다.
‘…해버렸네.’
다음날 눈 뜨자마자 ‘이제 어찌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한숨이 연달아 터졌다. 한 밤을 벗고 뒹군 녀석과 나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매트 위에 남았다. 쌉싸름한 침이 고이도록 대단히 몹쓸 기분. 아무래도 여우같은 미승이 놈의 재주에 홀랑 넘어가버린 것 같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저 놈을 받아들인 걸 생각하면 머리를 벽에 찧고 싶어졌다.
“으…응…….”
배 위에 올려진 팔을 살그머니 밀쳐놓고 이불을 빠져 나오자 긴 팔은 빠져나간 체온을 찾아 어중간하게 허우적댔다. 녀석은 아직 노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붉고 통통한 입술을 약간 벌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서 어릴 적의 앳된 기를 찾을 수 있었다. 엎드려있는 하얀 등은 여드름 자국이나 흉진 자리 하나 없이 깨끗했다. 미승이가 이내 이불을 뒤척이며 몸은 돌렸다. 하얀 배 옆으로 난 흉터가 둔중한 날이 억지로 쑤시고 들어갔던 기억을 되살렸다. 3센티 정도의 이제는 탁한 갈색으로 변색된 버들잎 모양의 흉터. 크기는 작아도 휘몰아치는 기억은 컸다.
미승은 눈이 뜨이자마자 침대 위의 빈자리를 훑고 거울 아래의 긴 궤짝에 앉아있던 내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내려간 이불을 허리로 감고 엎드린 채 양팔 사이로 머리를 돌려 괴고 나를 계속 바라본다. 나 역시 미승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우리들 사이에 어떠한 기분이 연결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미승이가 한 팔을 내밀었을 때 나는 일어나서 침대가로 가서 그 손을 잡았다. 그대로 팔이 끌려들어갔다.
덜 마른 머리카락은 그의 팔 아래서 헝클어지고 있었다.
“기분 어때?”
지난밤에 대해 소감을 묻는 거라면…
“모르겠어.”
작은 웃음에 흔들리는 가슴 위로 머리를 얹었다.
“벌써 씻은 거야? 머리카락 덜 말랐네.”
“응. 이불 젖으니까 일어나야지. 그만 놔.”
“잠시만 이대로 있자.”
등과 머리가 가득히 감싸인 미승의 가슴은 아직 잠의 열이 빠져나가지 않아 보송보송하고 뿌근했고, 이마 위로 내려앉는 숨결도 따뜻했다. 길지도 않은 귀밑머리를 연신 귀 뒤로 넘겨주는 손가락과, 보지 않아도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지는 눈길.
그가 내게 던졌던 상처들을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씻어 내릴 순 없는 거겠지만, 적어도 그가 참고 기다려온 시간들, 시계추처럼 잠시도 정지해있지 못하는 불안정한 나를 향해 매 시간 다른 속도로 다가왔던 시간들은 너무나도 확고한 무엇이었다. 집착, 집착, 집착, 지겹도록 되뇌어도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무엇. 길었던 시간 속에서 미승이가 나를 향해 왔던 길이 때론 비탈길이었고, 때론 외딴길이었지만, 궁극에는 이정표대로 왔다는 것. 그러니… 아무리 모른 척 하려 해도, 둘러대려 해도, 미승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나 또한 그를 좋아한다는 진실도.
“미승아, 난 너한테 고마워해야 되는 거니?”
“…아니.”
“그럼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뭘?”
“네 상처… 봤어. 아까.”
“봤구나.”
“…꼭 죽이려고 그랬던 건 아냐.”
“알아. 죽이고 싶을 만큼 혐오했던 것뿐이지.”
“…….”
“아팠어. 하지만, 찔린 자리보다 여기가 더 아팠어. 네가 그렇게까지 날 끔찍하게 여겼다는 사실 때문에.”
미승의 손은 심장을 가리키는데 내 눈은 그보다 아래쪽의 배꼽 옆의 상처로 자꾸만 가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난 정말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비뚤어진 악착만 가졌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고마워 할 것도 미안할 것도 없어. 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비뚤어진 길이 바로잡혔던 거니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고마워.”
“고맙다는 말 싫은데. 차라리 다른 말을 해주지 그래?”
“…….”
나도 정당한 애정을 그에게 줄 수 있다면, 그늘에 묻은 죄과와 모든 충동의 잡음들을 제거해버리고 진실만을 볼 수 있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애정을 어느 타인에게서 받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순하지 않은 감정을 일궜다. 기쁨과 절망이 섥힐 수밖에 없는… 아픈 투시.
“이따 같이 가. 또 수업 끝나자마자 버스 타러 내빼지 말고.”
“넌 독서실 안 가냐?”
“관두기로 했어.”
독서실을 관두다니. 그야, 자식이 내키는 대로 다니다가 빠지다가 제멋대로 드나드는 독서실인 걸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류미승이 지금까지 전교 톱 순위를 지켜온 공적 뒤엔 독서실에서의 학구열이 만만찮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을 텐데.
“네가 같이 있어주면 공부 잘 될 것 같은데.”
미승은 방금 떠오른 내 생각과 정 반대의 말을 덧붙인다. 같이 있으면 녀석은 공부도 게을리 하고―내가 평가할 주제는 아니지만―애먼 짓거리만 풀풀 해댈 게 빤하다. 녀석이 나한테 지분거리는데 허비하는 공부 시간이면 무영이가 등수 하나는 올릴 수 있으려나?
“그런 못생긴 표정 짓지 마. 집에 가서 공부만 할 거니까.”
또 내 생각을 알아맞히고 공부만 할 거라고 쓸모없는 다짐을 하는 저 녀석.
“거짓말 아니다.”
“어떻게 믿냐? 넌 머릿속에 이상한 것만 든 놈인데.”
“엇, 너야말로 이상한 생각 했구나? 쬐그만 게 발랑 까져가지고.”
“뭐라는 거야!?”
“너도 은근히 기대한 거겠지. 하긴, 내가 공부만 하면 섭섭하겠지?”
천만에! 제 놈은 하룻밤 나랑 오붓하게 뒹굴었다고 금세 그 관계가 적용될 줄 아는 모양인데, 나도 얼떨결에 넘어간 거라고!
“야, 야, 그렇게 고개 흔들지 마. 머리 돌아가겠다.”
세차디 세차게 가로 흔들어댄다고 머리가 돌아갈 리는 없지만, 골이 띵하긴 했다. 미승은 나지막한 내 머리통을 한 팔로 안고 볼을 꼬집었다.
“웃자고 한 소린데, 뭘 그리 정색을 하냐?”
“하나도 안 웃겨!”
“같이 우리 집 가자. 정말 공부할 거니까.”
“믿어도 될까?”
전에 녀석이 나한테 했던 말을 똑같이 빌자면, 녀석도 나한테는 신용을 잃은 놈이잖은가. 하지만, 막바로 따지고픈 마음을 내리누를 정도로 진지한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믿어. 난 널 쉽게 대하지 않아, 정희승.”
미승의 눈은 그 이상의 많은 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날 쉽게 대하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 이상으로 여러 의미를, 다정함과 엄중함을 그리고 따뜻함과 뜨거움 사이의 아슬아슬한 분계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금의 저 눈동자만큼이나 실제로 그가 나를 대해온 방식은 복잡다단했다. 쉽다 어렵다 정도의 표현으로 끊어버리기엔 그의 노력이 허무할 정도로.
뺨 위에 묻어나는 입술이 보드랍다… 싶더니 볼을 잡은 엄지랑 검지가 살을 꽉 아프게 꼬집는다.
“앗, 아프잖아, 새꺄!”
“아. 방학동안 너 때문에 공부를 하나도 못 했더니 바보가 된 것 같아, 난 하루라도 공부를 안 하면 뇌에서 바늘이 돋는데… 넌 어떻게 사냐, 정희승?”
“밥 먹고 살거든!”
“네가 옆에 있어도 몸이 근질거리긴 마찬가지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집에서 공부해야 할 게 많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 너도 내 옆에서 같이 공부하던가, 놀고 싶으면 놀던가.”
얼굴이 후악 붉어지려다 식었다. 자발로 독서실 관두겠다면서 방학동안 나 때문에 공부 못했다고 말하는 저 사가지라니―. 또한, 저는 공부 계획이 착실하게 세워져 있으면서 나더러는 놀던가 공부하던가 맘대로 하라니, 이쯤에서 발끈 뚝심이라도 오르지 않는다면 나 정희승 남자도 아니다. 그런다고 새삼스럽게 공부가 발끈 땡기는 건 아니지만.
5교시 전에 지석과 교무실에 들렀다 가야 한다며 먼저 녀석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고 사라진 후, 나는 교정에 잠시 혼자 남아 진한 그늘 아래 앉아 더위를 식혔다. 가문 여름을 지냈는데도 진해지는 흙냄새에 비해 부서질 듯 푸르렀던 잎사귀들이 차차 안정된 초록으로 내려앉는, 계절이 가고 있었다.
학교의 겉과 속은 다르다. 마르지만 넘쳐나는 열기에 부스러질 듯한 우리들에게선 끊임없이 혼돈이 맴도는 반면, 냉정하게 눈과 귀와 입을 닫아버리는 선생들이 학생들을 다스린다. 어른들은 귀찮은 걸 외면한다. 중소도시의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인 우리 학교 건물 벽도 항상 그렇듯 잠잠하게 다스려지는 학생들을 내장처럼 수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어른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귀찮은 웅성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 들어서도 학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웅성웅성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서울행 가출을 감행하고 오느라 다른 애들보다 등교가 늦어진 나지만, 덕분에 학교의 이슈거리도 남들보다 여러 발짝 늦게 알게 되었지만, 이태수와 강재만이 손을 잡았다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았다. 어쩌다가 두 놈이 합심을 했는지는 몰라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그 녀석들의 패거리가 갑자기 사이좋게 섞여 학교를 활개치고 다니는 모습이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그들이 언젠가 날을 잡아서 류미승을 반쯤 죽여 놓기로 벼르고 있다는 작당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공공연하게 오가기도 했다. 언젠가, 그날이 도대체 언제냐!?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학교생활 속에서 아무 사건이라도 펑 하고 터져나와주길 기다리는 아이들의 불순한 기대심리가 상승해가는 분위기였으므로, 선중이가 ‘확실치 않은 얘기’라고 전해주었던 그 소문이 이제는 ‘확실해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얘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미승이는 모른 척 하고 있을 뿐 전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요즘 들어 재만이나 태수가 나를 본체만체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장소가 여기야? 냄새나는데.”
6교시 체육 시간을 몰래 빠지고 일부러 재만이를 소각장으로 불러내서 밀담을 시작하는 이유도 한 가지. 나만 보면 험상궂게 눈을 부라리는 이태수보다는 눈만 돌리고 무시로 일관하는 재만이 쪽이 상대하기 나았다. 다만, 지금의 강재만은 “씨발, 오늘 축구 뛰면서 몸 풀어야 되는데.”하며 나 때문에 체육시간을 빠져나와 축구를 못하게 됐다는 불만을 욕으로 풀고 있었다.
“빨리 말해. 나 축구 하러 가봐야 되니까.”
싸움질 빼고는 몸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는 녀석이 언제부터 축구에 애착을 가졌다고. 마지못해 나를 상대해주는 거란 기색이 역력했다. 방학 전에만 해도 나를 살갑게 대하던 강재만의 태도가 180도 쯤? 돌변한 것이다.
“재만아, 너 왜 요즘 나랑 안 노냐?”
“애냐? 안 논다고 말하게.”
“안 노는 거 맞잖아. 이번 학기 들어서 나랑 말도 안 하고 너, 나 무시하더라.”
“무시하는 거 알았으면 됐어. 나한테 아는 척 하지 말고 꺼져.”
“이유나 알고 꺼질게.”
재만이의 앞을 막아서고 고집스럽게 버티자 녀석도 처음처럼 험하고 냉랭한 태도가 약간, 아주 약간 누그러지고 미간만 찌푸렸다 폈다 하며 저 혼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냐? 혹시 류미승 때문에 그러냐? 소문 듣고 와서, 내가 안 놀아주니 어쩌니 맘에도 없는 소리로 수작 거는 거냐고.”
“그거 정말이야?”
“이태수랑 손 잡고 내가 미승이 조진다는 거? 그래. 일단은 사실이다.”
“일단은 이라니?”
“난 혼자서 류미승 치면 쳤지, 이태수랑 손잡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 자식이 미승이놈한테 얼마나 다부지게 깨졌는지는 몰라도 나한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라. 이태수가 믿을만한 놈이 아니라서 아직은 썩 내키진 않지만.”
과연 강재만. 일단 입을 여니까 술술 꺼낸다. 류미승을 상대하면 차라리 혼자 하겠다는 것도, 아직은 이태수랑 손잡을 생각이 없다는 것도 마음이 놓인다. 이태수의 비열함에 비한다면 강재만은 우직하긴 했다. 나한텐 그놈이 그놈이지만 미승이의 문제가 심상치 않게 번지는 지금, 재만이라도 붙잡고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태수에 대한 재만이의 찜찜함으로 봐서도 조그만 희망은 있어보였다.
“내 생각도 그래. 이태수는 믿을만한 놈이 아냐. 네가 이태수랑 편먹는 건 말이 안 돼. 그 자식은 너랑 질이 다르잖아. 넌 적어도 걔처럼 삥 뜯고 뒤통수치는 놈이 아닌데. 안 그러냐? 강재만답게 일대 일로 붙어라.”
“정희승, 너 웃긴다. 나랑 이태수가 질이 달라? 나답게 일대 일로 붙으라고? 속셈이 뭐냐?”
그러나 지나친 설득이 희망의 실마리를 놓쳐버렸다는 것을, 도로 일그러진 재만이의 얼굴을 보고 금방 깨닫게 되었다.
“속셈이 아냐. 재만아, 나는 말 그대로…….”
“입 다물어! 그따위 수작에 넘어갈 줄 알아? 내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만만하지, 정희승? 네가 그 동안 잔대가리 굴리면서 나랑 이태수 저울질 한 것도 모르는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은 류미승한테 기울었냐? 나 추켜 세워주는 척 하면서 미승이 새끼 싸고도는 거 아냐!?”
재만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위협적으로 사방을 부라리고 다니는 이태수보다, 평소에 실없이 허허대던 놈이 화를 내니 더욱 무서웠다. 이태수가 재만이한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는 말이 재만이의 허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 난 김에 다 까발려주지. 우리가 왜 손잡게 됐는지. 정희승, 너도 무관하지 않아! 아니, 네가 원인인거겠지. 이태수가 그러더라, 류미승이 자길 패면서 다시는 약한 애들 집적대지 말라고 협박했다고. 근데, 이태수가 약한 애들 집적거리건 말건, 자기밖에 모르는 류미승이 왜 그딴 소릴 했겠냐? 그래서 생각해봤지. 미승이 새끼가 나랑 이태수를 건드린 이유를. 그리고 단박에 알았어. 내가 그 자식한테 당했던 게, 너한테 농담했던 날이었다는 걸. 그러면 류미승이 나랑 이태수를 건드린 이유가 확실해지잖아? 그런데! 넌 지금 나한테 와서 이태수랑 손 풀고 미승이랑 일대 일로 하라고? 왜!? 일대 일로 붙으면 그 새끼한테 승산이 있어 보이니까? 날 뭘로 보고! 이 강재만이를 얼마나 좃 같이 봤으면 니가 그딴 잔대가리를 굴려!? 여우같은 새끼, 이래서 넌 믿을 수가 없어. 박쥐 정희승.”
설득도 협상도 실패. 그뿐만이 아니라, 강재만의 노기만 두 배로 부추겨놓은 악상황이 되었다. 이리 되고 나니 정말로 모든 원인은 나한테 있는 것만 같았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그동안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취해온 이기적인 접선들이 결국엔 이토록 나쁜 결실을 매달게 된 거라고.
“강재만, 너… 나 좋아했냐?”
“지금 그딴 소리가 왜 나와!?”
부정은 안하고 얼굴을 불그락 달구며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재만이는 나를 좋아한 게 맞을 거다. 느물거리고 실실대기는 해도 나한테 베풀어준 녀석 딴의 친절들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태수처럼 너절하진 않았다. 그걸 이제 와서 뚜렷이 알게 되었다 한들, 내 마음이 달라질 건 없어도.
“…아니지? 그러면 관둬. 네 말대로라면, 나 때문에 너희가 시시한 싸움에 말려든 거가 되잖아.”
“착각하지 마셔, 정희승. 네가 무슨 주제나 된다고 우릴 말려들게 하고 말고 하겠어.”
“네 말이 그렇잖아. 미승이한테 열 받은 건 알겠는데, 지금 작당대로 몰고 가면 진짜 우스워지는 거야. 미승이 쳐봤자 자랑거리도 못돼. 류미승이 나 때문에 너흴 때렸다면 그 놈이 웃기는 놈이지. 근데 너까지 우스워질래?”
미승이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막아내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진심으로 강재만이 우스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반의 필사적인 진심은 저토록 서툴게 이어지고 있었다.
휘익―!
그때였다. 뒤에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이태수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싱글거리고 있었다. 불시에 밀려오는 당혹감. 이태수는 언제부터 저곳에 서 있었을까?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재만이는 태수가 와 있는 걸 알고 있었을까? 심란하게 얽혀든 재만이의 표정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호오라―. 류미승이 정희승 때문에 주먹 휘두른 게 맞긴 맞구나! 전부터 긴가민가하더니, 역시 그랬어! 그럼, 아주 일이 쉬워지겠는걸. 이 골방쥐부터 잡아놓으면 그 새끼 발목 걸어 넘기는 건 시간문제라는 얘기네. 안 그래, 강재만?”
하필 이태수, 나쁜 쪽으로 머리 돌아가는 속도는 급경사 내리막길의 돌멩이처럼 빠른 이딴 자식이 다 듣고 있었다니.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우등생 가면만 쓰고 살던 새끼가 느닷없이 돌변한 게 정희승 때문이라. 재밌어. 이놈이 류미승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거잖아. 그치? 정희승 너, 앞으로 몸조심해야겠다.”
언제든지 나를 함정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얄팍한 수단을 캐내고 비열한 웃음소릴 날리는 이태수.
“얘긴 끝났어. 가 봐, 정희승.”
그리고 그 돌멩이를 유일하게 저지시킬 수 있었던 돌부리 강재만은 절박한 내 호소의 눈길을 외면했다. 둘 중 어느 놈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오뚝이처럼 흔들리며 좌우로 번갈아 기울던 내 술수도 여기서 바닥났다. 담배 필터를 씹어 뱉으며 일그러진 미소를 흘리는 이태수와 무표정하게 입을 다문 재만이에게서 떨어지는 발걸음은 조금 후들거리고 있었다.
“야! 어디가, 정희승!”
미승이의 고함소릴 뒤로하고 책가방을 둘러매지도 못한 채 뛰었다. 같이 가겠다고 약속해놓고 먼저 뛰어나와 버린 내 모습을 보고 미승이는 내가 집으로 튄 걸로 생각하겠지. 약속 어겼다고 성질이 뻗쳤겠지. 하지만, 오늘따라 수업 끝 종이 울리자마자 뛰어 나간 한지석을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한지석, 네가 도와줘.”
아쉬운 소리 하면서 손 내밀기 싫은 자식을 꼽으라면, 내겐 한지석이 첫 번째였다. 그래도 좋고 싫기를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 미승이를 도울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게 중요했고, 누군가 중에서도 강재만을 저지시키는 데 실패한 이상, 한지석이 가장 유용해보였다.
힘은 안 써도 머리는 쓸 줄 아는 놈이니까.
“내가 왜?”
그러나 미승이의 상황을 전하고 그의 도움을 요청했을 때, 녀석의 반응은 생각지도 못하게 차가운 것이었다.
내가 아니라 미승이를 도와달라는 건데도.
“왜냐니… 친구잖아. 너 미승이 친구 아니냐?”
“그래서?”
미승이를 좋아하는 친구라고, 그를 인정한다고 말했던 한지석인데.
그런데 지금 한 점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미승일 도우면, 넌 뭘 할 건데?”
질문을 이해하기도 대답하기도 어려웠다. 난 뭘 해야 하는 걸까.
“넌 미승일 위해서 뭘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정희승,”
“…….”
재차 대답을 강요하며 기다리는 차가운 눈앞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너 똑똑히 생각해 봐. 지금 류미승이 곤란해진 게 누구 때문인지. 어쩌다가 강재만이나 이태수의 타겟이 되버렸는지. 뭣 때문에 걔가 그런 폭탄들을 건드렸는지. 정희승, 네가 그 자식들 주변에서 설레발 치고 다니는 꼴을 못 참고 류미승이 멍청하게 터져버린 거잖아. 내가 아는 녀석은 그렇게 아둔한 놈이 아닌데 말야. 그것만 아니면 그 자식이 그렇게 어리석게 흥분하진 않았을 거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나한테 부탁하기 전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봤어야 하는 거 아냐? 미승이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흥분했는지. 그 누구가 책임져야 된다고 난 생각하는데.”
“…….”
“다른 사람 손을 빌릴 생각 말고, 네가 직접 막아 봐.”
한지석의 말 속에서, 나라는 인간이 갑자기 보잘것 없어져버렸다. 그는 냉정하지만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반박하지 못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고 억울했다.
“너, 우냐?”
“안 울어!”
사실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주먹으로 눈을 마구 비볐더니, 빨개진 눈을 보고 한지석은 내가 울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짧은 날숨을 훅 뱉었다.
“너, 미승이가 싸우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교실에서 재만이를 팬 거 외엔 미승이가 주먹 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저런 소문은 왕성해도 그 속에서 미승이가 주먹으로 직접 싸웠다는 소릴 들은 적도 없었다.
“그 자식은 힘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머리랑 기로 싸우는 놈이야. 하지만, 이번처럼 주먹 쓰는 놈들이 떼거지로 작정을 하고 벼르면 도리가 없어. 그 놈들은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미승이를 패죽일 수 있을 거야. 쉽게 덫에 걸려들 테니까. 그리고 정희승, 네가 그 애 발목을 잡는 덫으로 놓일 테니까.”
“…….”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래서 네가 싫었어. 지금도 싫고.”
무거운 발길이 멈춘 아파트 복도는 서늘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안에는 주인이 있을 거다.
여름 방학 중에도 이렇게 혼자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이 앞에서 나를 보자마자 놀라움으로 반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기뻐서 웃음이 난다. 그때 녀석이 얼마나 환하게 웃었던지…
미승이가 철부지처럼 웃는 게 좋다. 오랜 시간 거만하고 냉랭한 표면으로 닫혀있던 그가 언젠가부터 내 앞에서 밝고 어린 웃음을 자주 지어보이는 것이, 견디고 싶을 만큼 아프고… 좋다.
그리고 그날 순식간에 뜨겁게 끌어안던 미승을 생각하면 내 가슴 한 복판이 뜨거워진다.
그때 우연히라도 미승이가 내 뒤를 이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난 한참동안 손 안에 뜨끈하게 잡혀있던 열쇠로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초인종이라도 누를 수 있었을까.
지금 난 혼자서 벨을 누르고, 방에서 나와 현관문을 열어줄 녀석의 얼굴을 쉽게 그려낼 수 있다. 이렇게.
“너!”
벨소리가 한번 끊기기도 전에 무섭게 현관문이 젖혀졌다.
“아까 어디 갔었어! 책가방 들고 뛰쳐 나가길래 그대로 집에 갔는 줄 알았잖아!”
대면하자마자 닦달을 하는 녀석의 차림새는 의외성 있고 가관이었다. 얼룩진 티셔츠에 헐렁하게 늘어진 추리닝. 거기다 하얀―그것도 제법 두꺼운 플라스틱의―헤어밴드로 앞머리를 올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샤프펜슬을 보니 공부를 하고 있었겠다고는 짐작하나, 초인종 한 방에 곧장 뛰쳐나온 걸 보니 별로 열중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왔으니까 용서해줄게.”
뭘 용서해준다는 거야.
“너, 집에서 공부할 때 항상 그러고 있냐?”
항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멀끔하기만 하던 녀석에게서 이런 모양새를 보게 되리라고는 나도 상상 못했고, 녀석도 보이게 되리라 생각하진 못한 듯했다.
혹시 내가 안 보이는 집안에서 공부할 땐 저렇게 꺼주한 고시생으로 변신해 있었던 걸까? 마법의 지팡이를 이용해 말짱하고 귀티 나는 평상시 모습에서 후줄근한 공부 모드로 변신하는 요술공주 류미승이었던 걸까?
“너 안 오는 줄 알고 공부하고 있었잖아. 머리 감기도 귀찮고.”
요술공주는 정체를 들켜버린 게 달갑지 않은 듯 변명을 하며 머리띠를 빼낸다.
“그대로 하고 있어라.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뭔들 안 어울리겠냐.”
어련하시겠어. 잘난 류미승 공주님이신데 말이지.
그런데 헤어밴드는 애교로 봐준다 치고, 연두 빛 추리닝 바지는 자꾸만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너무 너덜해서.
“그 바지, 너무 헐렁하게 늘어난 거 아냐? 허리 안 크냐?”
농담이랍시고 불쑥 내뱉은 것은 어떤 연상의 단편이었다. 어릴 적에 우리 형이 밤마다 추리닝 허리 고무줄을 늘려놓았던 사춘기의 열렬한 손장난을 기억하는.
미승은 고개를 젓다가 잠시 뚱한 얼굴로 머리를 긁더니 이내 날 째려보며 소릴 쳤다.
“무르팍만 늘어났지, 허리는 안 늘어났거든!”
“과연?”
“못 믿냐? 난 건전한 청소년이거든!”
퍽이나.
그러고 보니 연두색 추리닝 바지는 내가 처음 왔을 때 녀석이 입으라고 내준 거였다. 그리고 이 집에 올 때마다 입고, 밤에도 잠옷 대용으로 구기고 자던 그 추리닝. 그래서 아예 내 전용 추리닝이 되었거니 생각했었는데, 녀석도 틈틈이 입어주면서 쉴 새 없이 무르팍을 늘려주었던 모양이었다.
“저녁 안 먹고 왔지? 너 안 오는 줄 알고 먼저 간단히 먹었는데. 뭐 시켜줄까?”
덕분에 상상조차 못 해본 녀석의 허름한 면모를 보게 되었다. 아무리 잘나도 녀석 역시 평범한 열여덟 사내아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됐어. 내가 라면 끓여 먹을게.”
“그럴래? 라면 저기 있는 거 알지? 옷은 아무거나 꺼내 입고, 혹시 나랑 같이 씻을래?”
“됐어. 비좁아서 안 돼.”
“욕실은 넓게 지어야겠네.”어쩌고 군소릴 곁들이며 욕실로 녀석이 들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어처구니없도록 태평했다. 나도 방에 들어가 편한 옷을 꺼내 입고 주방으로 가서 라면을 끓였다.
삶은 라면이 담긴 작은 냄비를 쟁반에 받쳐다 TV를 보면서 먹는 동안 샤워를 마친 미승이도 방에서 다른―아까보다 말짱한―옷으로 갈아입고 책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서 공부하게? TV소리 때문에 집중이 되겠냐?”
“옆에 있는 게 좋으니까.”
“…….”
불어가는 라면을 여러 가락 집어 후루룩 급하게 씹어 삼키다 사레가 들렸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공부는 방에 들어가서 해. 나 이거 다 먹으면 같이 들어가자.”
“그렇게 나와 줘야 귀엽지.”
책을 덮고 볼을 꼬집어 흔드는 녀석은 내 볼 꼬집기에 취미를 붙였나 보다.
냄비를 비우고 쟁반을 치우고 욕실에서 양치를 하고 나올 때까지 미승이는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제야 책들을 챙겨 따라 들어왔다.
미승이가 책상에 앉아 곧은 허리를 숙이고 교과서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한지석의 방에서―아마 당형수의 소유로 짐작되는―만화책들을 가져다 읽었다.
최고의 해적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 꼬마의 모험담을 흥미롭게 읽어가는 틈틈이 미승이의 옆모습으로 눈길이 가기도 했다.
낡은 티를 걸쳐도, 추리닝 무르팍이 늘어나도, 대수롭지 않았다. 계속 씻지 않고 몇 날 몇 일을 꼬질꼬질하게 버티더라도 류미승은 값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 같은 진지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지금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내가 뿌듯했다. 그리고 약간은 가슴이 아릿거렸다.
지금 녀석이 평범해 보여서… 평범하고 좋은 열여덟 살 같아서.
저것이 원대 제대로 자랐어야 할 류미승의 전신일 수도 있었을 텐데.
의자를 돌려 앉아 샤프심을 누르는 미승을 하냥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너, 태수랑 재만이 얘기 알고 있니?
네가 언제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거―.
“만화책이 재미없냐? 짠돌이 당형수가 제 돈 주고 사서 읽을 정도면 꽤 읽을 만할 텐데.”
걔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래.
혼자서도 아니고, 걔들이 패를 지어서 너한테 덤빌 거래.
그런데 한지석도 널 도와주지 않을 거래.
이제 어쩔 거냐, 류미승. 너, 경각심은 갖고 있니?
“…아니. 재밌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슬픈 내용이라도 있어? 주인공이 불쌍하냐?”
나라도 돕고 싶지만…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몰라.
네 발목을 잡을지도 몰라.
그래서 난 겁난다.
“아니.”
선뜻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고민들.
드물게 평범한 학생이 된 오늘의 녀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녀석에게 고민거릴 만들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내가… 한지석의 말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야지. 방법이 아주 없진 않겠지.
“왜 계속 그렇게 쳐다봐? 내가 너무 황홀하게 생겨서?”
내 기분은 모르고 장난스레 샤프 꼭지만 째각째각 눌러대는 녀석이 차라리 좋다.
날 알려고 들지 말고, 깊이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지금처럼 녀석이 늘 눈치가 없었으면.
그러면 나도 녀석을 한결 친구답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아까 널 보자마자 생각한 건데… 현구 삼촌이 젊었을 땐 꼭 지금의 너 같지 않았을까?”
“너 죽을래!”
농담치고는 나도 진지했지만, 녀석의 열띤 반응에 보람을 느꼈다.
얼마나 세게 책상을 쳤는지 샤프가 주먹에서 튀어나와 책상 밑으로 굴렀다.
솔직히―류미승에게 조금 미안한 비교이긴 하지만―아까 늘어진 티셔츠랑 추리닝 차림의 미승이를 보던 순간 행동거지는 칠레칠레 할망정 소싯적 인물은 잘났었다는 역사를 자랑삼는 류현구가 떠오른 건 사실이었다. 그도 조금만 인생을 변변하게 살았더라면 조카 녀석에게서 멀리 뒤채이지 않는 어른 노릇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떨어진 샤프를 주워 다시 공부태세로 돌아간 미승이를 보면서, 녀석을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만화책으로 돌린 눈꺼풀은 5분도 못 참고 일어나서 녀석의 뒷태를 훑었다.
“미승이 너―, 진짜 열심히 공부하는구나.”
저 말뜻은 깐깐하고 인정머리 없는 한지석이 인정하고 좋아할 정도의 성실함이 있구나―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성큼 나온 것은,
“당연하지. 이 담에 너 먹여 살리려면 능력을 키워야지.”
“뭐!?”
막말로 기찬 대답이었다.
“넌 공부 안 하고 만화책이나 읽어도 돼. … 어차피 머리도 나쁘잖아. … 내가 대신 열심히 살 테니까. … 넌 펑펑 놀아. … 내가 책임지고 데리고 살 거니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열심히 노트에 샤프를 끄적대가며 덤덤하게 내뱉는 폼이 가히 일품이었다.
저놈이 날 얼마나 물로 봤으면 저딴 소릴 하는가. 지가 뭔데 날 책임지겠다는 거야. 날 평생 데리고 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야, 나도 내 인생이란 게 있거든!
녀석의 의자가 반쯤 침대 쪽으로 돌아왔다.
“어때. 나 믿음직스럽지 않냐? 친구 생계를 평생 책임져 주기 위해 피땀을 흘려가며 공부하는 데. 아주 친한 친구를 위해서 말이야.”
찡긋, 윙크를 날리고 돌아앉아 교과서에 몰두하는 류미승.
저 모습을 본다면 무영이는 아마도 숨이 꼴깍 넘어가도록 밤샘 공부를 해대겠지.
“적당히 해라. 나 안 먹여 살려도 되니까, 공부에 열 올리지 마. 무영이를 봐서라도.”
“무영이? … 그 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어서 기분 나빠.”
이번에도 미승의 등을 타고 나오는 소리는 짧고 냉정했다.
무영이 대신 내가 조금 서운했다.
그래도 어릴 적엔 조금 친했는데…….
만화책을 여섯 권 쯤 읽었을까.
독서에 소질이 없는 난 만화책조차 빨리 읽지 못했다. 그나마도 미승의 말마따나 형수가 돈 주고 사볼 만큼은 재밌는 이야기여서 여섯 권이나 진도를 나가고 7권 째 초장부에 코를 파묻고 잠들어버렸을 때, 꿈 속에도 해적들이 나타나서 장난 같은 칼싸움을 해댔다.
챙강, 챙강, 챙강.
꿈속의 나는 칼싸움을 구경하며 얄팍하게 휘어지는 장난감 칼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입으로 소리 냈다. 해적의 두건을 쓰고 가짜 수염을 달고 있는 내 모습은 뱃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챙강, 챙강, 챙강. 물결에 흔들리는 뱃머리의 움직임을 따라 점점 빠른 리듬을 타고 있었다.
찬바람이 바다의 풍랑을 키우고 있었다. 두 마리 해적의 칼다툼도 크고 격해지고 있었다. 빨간 두건을 두른 해적의 칼이 그의 손을 떠나 뱃머리를 향해 휘익 날아왔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뱃머리가 휘청휘청, 몸을 숙일 데가 없었다.
내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칼은 어느새 단단하고 선뜩한 빛을 품고 있었다. 기다란 검이 아닌, 짧은 날로 변한 그것은 질리도록 낯익고 무서운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내 칼이야. 내 칼이 날아오고 있어. 이번엔 날 찌르는 거야.
이번엔 날 …날!
푸르도록 벼린 날이 눈가를 지나 관자놀이를 긋는 찰나…
뺨에 닿은 건 따뜻한 온풍이었다. 찬바람도 풍랑도 흔들림도 없는, 따뜻한 손이 깨워낸 꿈. 눈을 떴을 때 미승의 손이 꿈의 방패가 되어 따뜻하게 뺨을 감싸고 있었다.
방 안은 책상 위의 노란 스탠드 불빛 하나로 잠잠한 빛의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배게 대신 목 뒤를 받쳐주고 있는 건 미승의 남은 한 손이었다.
“…재밌는 꿈 꿨니? 이상한 소릴 내면서 웃더라.”
“…….”
“그런데 방금 몸을 심하게 떨길래 추운가 싶어서.”
“그래서 팔 배게 한 거야?”
“아니. 이건 아까부터.”
우리는 아주 가까이 있었다. 밤의 희미한 그늘 속에서 서슬한 뚜렷함을 잃은 눈동자들이 금방이라도 서로 맞닿아 비벼질 듯이.
“입 맞춰도 돼?”
“…응.”
눈꺼풀을 내리깔자 반쯤 내리깐 그의 눈꺼풀이 더욱 가까이 왔다.
‘난 널 쉽게 대하지 않아.’
오늘 낮에 들었던 미승의 말은 이런 뜻이었나 보다.
내게 조심하겠다는 뜻. 이젠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뜻.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강제로 따라붙지 않고, 내가 다가가는 만큼 기다리겠다는 뜻.
어쨌거나 나도 조금씩은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가 원하는 거리만큼 가까이 가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를 슬프게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가늘게 내리깐 미승의 눈은 밝지 않은 빛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이 났다.
입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린 아기의 입술을 만지듯 가볍게 천천히 숨을 참고 늘러오는 입술이 나조차 잦은 숨을 참게 했다. 고인 숨을 뜨겁게 했다. 입술을 벌리지 않아도, 혀를 내밀지 않아도 뜨거운 운김만으로도 입술이 젖어가고 있었다.
“…하아…….”
숨이 늑골로 차올라 올 때 입술을 열고 긴 숨을 뱉었다. 동시에 내 것이 아닌 날숨이 입속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깊숙이 채웠다.
검은 머리칼 아래 가려진 그늘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빨갛게 떠오르지 않는 미승의 입술을, 색을 잃은 오직 뜨거운 호흡덩어리로 삼키고 있었다. 심장처럼 팔딱이는 혀는 체온 대신 몸부림 치고 있었다.
숨결과 혀의 애무가 입속을 가득 채운다. 내 양손은 시트를 뭉쳐 잡았다.
안 그러면, 미승을 만지고 싶어질 것 같아서.
내가 그를 끌어안아버릴 것 같아서.
베이지색 시트에 내 의지가 매달리듯 미승의 양손은 내 뺨들을 감싸잡고 의지를 버티고 있었다.
내 몸 위에 겹쳐진 몸은 강제하지 않는 무게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눌러오고 있었다. 가슴에서 허리에서 허벅지에서 숨찬 압박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무릎 사이를 눌러오는 사인을 알아채고 다리를 조금 벌렸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긴 다리들이 내 다리 사이에 안겼다. 다리를 가르는 사타구니와 치골로 묵직한 양감이 내려앉았다.
계속되는 입맞춤… 입맞춤…
우리가 맞추는 것은 입술만이 아니었다. 입속에서 오가는 고요한 요동처럼 가슴이, 허리가, 사타구니가, 깊은 수면속에서 유영하는 해초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미승은 내 몸의 곳곳으로 침잠하듯 부유했다. 침착하고 유연하게 체온을 지피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 희승아… 네가 싫어하면 안 해. … 참을 수 있어. … 이만큼만 받아줘도 …좋아. 난.”
입술을 핥으며 잠깐씩 떨어져 나오는 숨 속에서 미승은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다고.
맨살 속을 하염없이 더듬었던 밤보다, 얼룩진 내 가랑이 속까지 밤보다 두 겹의 옷장 사이를 두고 맞닿아 있는 지금의 체온이 더 끈적하고 힘들었다. 어쩐지 황홀하도록 숨이 차서…….
자꾸만 이러면… 난 어떡해야 하지…
난 이미 타버린 숲인데, 산소를 품을 수 없는, 태울 수 없는 연기로만 가득한 숲인데. 끊임없이 산소를 밀어 넣는 아까운 짓을 미승이는 하고 있었다.
난 녀석에게 줄 게 없었다. 너무 바보 같아져서.
안 돼… 더 이상은 안 돼…
난 어리석었다. 전혀 논리적인 데가 없었다. 이만큼, 그를 받아들이면서, 더 깊은―지난번과 같은 감각―을 체험하고픈 숨을 할딱이면서, 동시에 거부해야 한다는 의지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건 상관없었다. 논리적이지 않아도, 어리석어도 괜찮다.
난 고집을 피워야 했다.
‘류미승을 내버려뒀음 좋겠냐? 그러면 조건이 있어. 우선 네가 그 녀석한테서 떨어져. 그리고 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잘 해봐. 그러면 당분간은 보류해두지. 얼마나 잘 하는지 두고 볼 테니까. 대신 내가 수틀리면 국물도 없어. 알아들어?’
한지석과 헤어지자마자 이번에도 어디선가 엿듣다가 튀어나온 이태수. 그는 류미승의 약점과 취약점까지 모두 움켜쥔 셈이 되었다. 언제라도 전략적으로 류미승을 넘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붙은 놈의 입에서 나온, 최악의 협박 조건이었다.
“네가… 이만큼 와서… 멈춰준 것만으로도 좋아.”
그래. 나머지는 네가 올 테니까.
얼만큼의 시간이 걸리든, 넌 오겠지. 내 심장을 움켜쥘 수 있는 거리까지.
그만큼 난 기쁘고… 괴로워질 테지.
“여! 점심시간에 보자.”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다 복도에서 이태수랑 마주쳤을 때 한쪽 어깨를 빼는 제스추어로 ‘거기 알지?’라는 뒤 뜻을 덧붙이는 녀석의 눈앞에서 쌩 돌아섰다.
“저 씹새끼, 계집애처럼 씹고 가네? 어이, 정희승! 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기시지!”
뒷골을 세차게 야리는 녀석의 시선과 목소리가 나의 잰 걸음을 놓치지 않고 달라붙어왔다.
그나마 녀석을 견제해주던 재만이가 나한테서 떨어지고 나니 더 난리를 지폈다. 날 볼 때마다 으르렁대는 만큼에 비례해서 나를 고깝게 여기는 심층이 쌓이고 있는 게 눈에 비칠 정도로 분위기가 험상궂었다.
이태수의 얕은 수작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뭐 공양미 삼백석이랑 맞바꿔서 인당수에 몸을 풍덩 던지는 심청이도 아니고, 술주정뱅이 폭력 남편의 매질로부터 자식을 온몸으로 감싸는 모성 깊은 엄마도 아니다. 그런데 잘난 류미승의 어디가 안타깝다고 이태수 같은 새끼의 지저분한 협박에 굴해야 하느냔 말이다. 미승이 새끼가 어디가 이쁘다고―. 어젯밤에도 하도 문대고 비벼대다가 내 목덜미에 창피스런 멍 자국을 남겨놓은 놈인데. 게다가 내 손바닥에다 질펀하게 정액을 쏟아낸 놈인데 말이다. 녀석이 시킨 것도 아니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미안스러워서 얼떨결에 뻗친 손이 녀석의 끓는 혈기를 받아낸 거지만 말이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미승이를 도와주면 좋겠지. 내가 미승이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강지석도 한지석도 마다한 일, 나보다 능력되는 녀석들조차 마다해버린 일을 내가 곁들일 수 있는 보탬은 없어보였다.
그보다 마음이 갑갑한 건 내게는 이럴 때 내세울 만한 힘도, 친구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태수가 제시한 구린 제안 외엔 현재로선 그 놈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제 기분이 풀릴 때까지 잘해야 한다라…….
말짱 구라다!
놈에게 잘한다는 의미는 시도 때도 없이 녀석의 되먹지 못한 명령을 따라줘야 하고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준다고 한들 이태수놈은 평생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고 우길 놈이다.
재만이가 균형을 잡아줄 때였으면 이태수 같은 놈도 참을 만 했는데, 재만이도 내 곁에서 훌쩍 자리를 옮겨 앉은 지금, 이태수는 내가 전적으로 감당하거나 외면하거나 택일 할 수밖에 없는 역겨운 부담이 되었다.
진짜 싫다. 이태수가 역하게 짜증난다. 미승이를 보고 녀석을 보면, 그 말도 안 되는 비교 속에서 역한 기분이 더욱 심해지는, 중증이다.
점심시간에는 당형수랑 한지석이 앞자리에 앉아 나랑 마주보며 매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빵이나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남의 도시락 반찬을 주저 없이 집어삼키는 형수 놈은 강적이었다. 반찬이 모자라 날마다 서너 숟갈씩은 맨밥을 퍼먹어야 하는 내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가책 없는 놈이었다.
그렇지만 난 한 번도 녀석에게 불평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내 앞자리에 배치되어 수업시간마다 푸짐한 머리통으로 칠판을 가리고 점심시간마다 낼름 돌아앉기만 하면 밑반찬이 공급되는 당형수는 행운아였다.
“너, 어제 미승이랑 같이 학교 왔지?”
하지만, 나를 싫어하면서도 굳이 당형수와 같이 밥을 먹겠다는 핑계로 내 앞자리를 찾은 한지석, 얜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앗, 정말? 얘들 오늘도 같이 왔어?”
“드디어, 너도 거기서 살기로 한 거냐?”
속을 비칠 듯 말듯 하면서 저 혼자 뭐든 파악한다는 듯한 희미하게 거만한 웃음이 거슬렀다.
“희승이 너, 미승이네서 같이 사는 거야? 한지석 쫓아내고 네가 대신 그 집 작은 방 차지한 거냐, 정희승?”
“야! 말이 이상하다. 내가 정희승 대신 쫓겨날 군번으로 보이냐? 어젠 그냥 집에 가서 잔……”
“희승아, 정말이야? 너 거기 사는 거면 나도 꼽사리 끼면 안 될까? 지석이가 있을 땐 이 자식이 너무 깐깐시러워서 내가 맘 편히 지내지 못했지만, 희승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너랑 나랑은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나도 끼워 줘. 우리 미승이네 작은 방에서 오순도순 서식하자, 응?”
“이 자식이, 사람 말을 어디로 먹는 거야? 당형수! 나 아직 거기 살거든. 누구 맘대로 사람을 막 내보내? 그리고, 내가 깐깐해서 네가 못 견뎌? 웃기지 마, 오히려 너 때문에 내 피가 마를 걸.”
“희승아, 우리 진지하게 동거를 고려해보자.”
한지석의 쿠사리를 백퍼센트 귀막음으로 무시하고 나를 향해 열렬한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내 손목을 잡고 흔드는 당형수,
이처럼 속 편한 녀석이 차라리 부러웠다. 미승이네 아파트의 작은 방에다 새살림을 펴겠다고 야무진 꿈을 날리는 녀석의 기대에 호응해 주지 못하는 게 아까울 정도로.
“나도 너랑 동거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고 싶긴 한데, 거기 아직 지석이 방이야. 그리고 난 앞으로도 미승이네서 지낼 생각 없어.”
팔을 끈덕지게 붙잡고 칭얼대던 당형수도, 당형수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려던 한지석도 눈을 반짝 뜨고 날 쳐다보았다.
방금 내 대답이 녀석들에겐 잠깐의 말 막힘을 연출할 정도로 놀랄 건 아닐 텐데.
“희승이 너, 미승이랑 같이 안 살 거야? 미승인 너랑 같이 지낼 걸로 생각하던데.”
“…….”
눈을 동그랗게 뜬 당형수랑 가늘게 뜬 한지석의 표정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안 그러냐, 지석아? 네가 그랬잖아. 방학 때 미승이 자식이 에어컨 들여놓고 비누랑 파우더 같은 거 막 사고 그럴 때, 네가 그랬잖아. 미승이 새끼가 손님맞이에 유난 떤다고 궁시렁댔잖아. 그 때 네가 말한 게 희승이 아니었어? 내가 잘못 알았나? 방학 중에 놀러갔을 때도 너 대신 희승이가 있길래 그런 줄 알았다. 드디어 류미승이 조강지처 한지석한테 질려서 내쫓고 정희승한테 작은 방 내준 거라고… 아얏……!”
허공에 멈춰 있던 한지석의 주먹이 드디어 당형수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무표정한 녀석에게서 시야를 비껴나 난 형수에게만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네가 잘못 안 거지.한지석이야 원래 친한 친구니까 둘이서 같이 지냈지만… 내가 끼어들 자리면 당형수 네가 먼저 차지해야지. 우리 집 놔두고 왜 남의 집에서 사냐?”
“운동화는 아직 신지도 않은 새 거던데.”
한지석의 말을 외면했다. 얼추 알아들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저자식의 속마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이거야 원. 너무 비싸게 구네. 첫날 밤 치른 새색시도 저렇겐 안 튕겨. 안 그러냐, 당형수?”
“누구? 희승이?”
저 놈이 날 뭐에다 비교하는 거야!?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네. 나 나갔다 와야 돼.”
도시락 주머니를 꺼내서 담으려는 찰나, “남은 밥 내가 먹을래!” 손을 번쩍 들고 외치는 당형수에게 절반 이상 남은 도시락과 반찬통을 밀어주었다.
“당형수, 너 그러다 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