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7)

깊은 김을 내쉴 때마다 조금씩 축축해진 배는 옷 틈으로 들어온 공기에 차가워졌다 다시 김에 뜨거워졌다 체온을 수시로 바꿨다. 그러나 배꼽 안의 정희승은 아직 생생한 10살 무렵의 일그러진 형상을 변함없이 담고 있다. 

돌아가고 싶어도… 너무 망가져서 돌아갈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미승이가 나를 좋아해 준다 해도, 내가 녀석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런 감정은 도리가 아니었다. 10살 이후 모든 진전의 발걸음을 멈추고, 상처와 비밀들을 막아내기에만 급급해온 내게는 돌이켜질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소경이 코끼리 만지듯, 모르는 척 또는 모르는 채로 미승에게서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고 감질 나는 교감만을 나누면서 내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만이 내겐 최선의 거리였다.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고, 지워버리지도 못하는 열네 살의 살인자라고……. 

울음을 참기 위해 배를 꾹 안으로 집어넣었다.

등바닥은 미지근하고 배 중심은 뜨끈했다. 긴 손바닥이 배꼽을 가리고 있어서 유독. 

저 손이 맨 살갗에 닿아 전신을 어루만져댄 지난 밤, 두려움보다는 슬픔이 더 길게 찾아들었다. 어릴 때처럼… 끔찍하지 않을까, 무섭지 않을까, 죽도록 후회스럽지 않을까… 걱정스럽게 속이 울컥거렸다. 

하지만, 참을 만 했다. 외려 내 몸을 훑어간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은 두렵고 증오스러운 과거에 약을 바르는 과정이었다. 까치야 까치야 불러가며 배를 살살 쓸어주던 예전 할머니의 약손과는 절대로 달랐지만―할머니라면 그렇게 옷을 들춰가며 내 몸을 구석구석 빨고 쓰다듬어대진 않았을 테니까―따끔거리는 소독약 뒤에 요오드팅크를 바르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긴 몸뚱이가 내 위에 닿아오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다듬이 방망이질을 당하는 것처럼 뛰었다. 어떻게든 내 다리를 벌려보려고 사타구니를 진지하게 주물러대는 노력의 손길은 찐득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저하고 있었다. 최선의 인내를 다하는 최소한의 갈구였을 것이다. 차마 무서워도 무섭다고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입도 꽉 다물고 손도 침대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무서워하지 마. 네가 싫어하면 아무 짓도 안 해.’

떨고 있던 나를 안심시키면서 그 다음엔 별 다른 행위 없이 안고 입 맞추는 데만 열심인 미승이었지만 난 다부지게 긴장했다. 

거북이처럼 지나가는 어두운 시간 속에서 축축하게 다가오는 입술에 익숙해져 갈 만큼 긴장이 느슨해질 즈음에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연거푸 머릿속을 두드렸다. 내가 싫어하는 짓―그 기준이 무척 애매했지만―은 안 하겠다지만, 발열하는 본능을 나 편하자고 무시하는 게 가히 편치가 않았다. 몸 위에 닿아있는 몸이, 주체하기 힘들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거세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배를 쿡쿡 찌르는데, 거기서 자꾸 미끈거리는 게 배에 묻어나오는 데 말이다. 

얄팍한 친절이랄까… 오지랖이랄까… 결국 녀석의 분신을 손으로 만져주어서 분출을 돕기로 결심했다. 허벅지에 닿아있는 다리 사이로 머뭇머뭇 손을 내려 트렁크 한 겹 밖에서 불거진 성기를 조심스럽게 움켜쥐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겁나게 흥분하는 미승이를 보니 덜컥 두렵기도 했지만, 녀석이 끝내 이성을 불사지르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 정도로 그쳐서 다행이라고.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하고 평온한 오전. 옷 한 겹 속을 훑고 다녔던 간밤의 입술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가슴위에 얹힌 것은 죄악감의 추가 아니라 덤덤함이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설풋한 애잔함이었다. 

그러나 머리맡에 뒹구는 티슈를 보는 순간 그 기분이 싹 가신다. 이불을 걷고 앉아 티슈를 집어 멀리 던지고 구겨진 옷을 폈다. 면티랑 반바지가 구깃구깃 말려 올라가 있는 것을 고쳐 입고 아직까지 널브러져 자고 있는 미승이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커튼을 열고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 밖으로 내다보니 해가 중천에 떴다. 

커튼을 쳐둔 채 돌아서자, 녀석이 얼굴로 쏟아지는 빛을 팔로 가리고 있다. 

“왜 벌써 깼어? 더 자자…….”

께느르한 얼굴을 보니 더 자게 내버려두고는 싶지만,

“12시야. 너나 일어나.”

벽에 붙은 시계를 가리켰다.

“벌써?”

이불을 말아 눕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11시 43분으로 가고 있는 분침을 확인한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하품을 한다.

“어제 늦게 잤잖아.”

실로 늦게 자긴 했다. 눈두덩이 만큼 부어있는 녀석의 입술만 보더라도 우리가 몇 시까지 부둥켜안고 뻘 짓을 했는지 헤아릴 필요도 없었다.

“난 거의 새벽에 잠들었는데, 넌 잘 잤어?”

하지만, 저런 몰골로 이쁜 척 미소 짓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가시처럼 돋은 날이 선 평소 모습은 간데온데없이 모래밭에 구른 털 뭉치 인형마냥 무작위로 흐트러진 저런 꼴은 너무 적응이 안 된단 말이다.

“너랑 비슷하게 잠들었을 거야.” 

“아닐걸. 내가 너 잠드는 거 보고나서 잤거든. 그래서 잠이 너무 부족해.”

아, 그래서 그렇게 눈이 부으셨어? 

“그래도, 일어나야지. 우리 밥 먹고 놀러가자.”

“더워서 나가기 싫어.”

올 들어 가장 더운 날이 될 거라고 기상청이 예고했다. 잠의 열이 가시지 않은 팔이 둘러오는 것조차도 이렇게 더운데 . 

“…목말라.”

“여기. 얼음은 거의 녹았다.”

“괜찮아. …아, 흘렸다. 수건 좀 집어줘.”

“자―.”

“발로 집어주냐? 이걸로 입 닦으라고?”

“바닥만 닦아. 입은 손으로 대충 훔치면 되잖아.”

“자. 수건.”

“아무데나 던져 놔.”

깨끗하다 못해 휑했던 거실은 잡다한 사물들로 어수선해져 있었다. 얼음 통, 물 컵, 수건, 카세트, CD랑 테이프들, TV랑 에어컨 리모컨에 점심 먹고 나서 치우기 귀찮아서 한쪽으로 밀어둔 쟁반이까지. 거기다 덮었다 젖혔다 헝클어진 여름 이불에 여기저기 팽개쳐둔 휴지 뭉치들까지 완벽하게 너저분했다. 어지르기만 하고 치울 줄 모르는 남자애들의 공간으로 완벽하게 변신해 있는 것이다. 

물이건 이불이건 리모컨이건 필요한 건 뭐든 미승이의 긴 팔이 집어다 줄 수 있는 반경 안에 있었기에 우리는 두 평 남짓한 바닥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뒹굴거렸다. 

사실은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게 맞겠다. 

수영장에 가자던 미승이의 제안을 어제도 오늘도 귀찮다고 거절했다. 내일도 확실히 거절할 거다. 물에서 수영하는 게 싫어진 탓도 있지만, 미승이가 다른 데로 놀러가자고 했더라도 어차피 집에 있겠다고 하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여름이면 밖에 나다니는 게 싫었다. 엄청나게 소심한 사춘기가 되어 집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것만 좋아하는 습성을 고칠 도리가 없었다. 

이 붙박이 습성이 이젠 미승이 팔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녀석도 덩달아 바닥에 눌러 붙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희승아, 이리 와. 추워.”

“싫어. 에어컨 끄면 되잖아. 붙어 있으면 더워.”

“이기적인 놈. 아깐 저가 춥다고 달라붙었으면서.”

“이따가 추우면 또 달라붙을 거야. 지금은 이거나 덮어.”

대놓고 나를 ‘이기적인 놈’으로 명명하는 녀석을 위해―아까 수건을 집어다줄 때 놈이 그랬던 것처럼―발가락으로 얇은 이불을 집어다 덮어주고 에어컨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등을 식혔다. 

미승이네 온 뒤로 땀띠가 도질 날이 없었다. 

에어컨도 풍풍 틀어주고 하루 두 번씩 샤워할 때마다 녀석이 파우더도 빠짐없이 뿌려주니, 폭염이니 열대야니 하는 것들이 먼 나라 얘기로 생각될 만큼 시원하고 보송보송한 날들의 향연이었다. 

게다가 무진장 게을러졌다. 잠도 거실에서 자고, 밥도 거실에서 먹고, 음악도 거실에서 듣고, 하여간 몸이 거실에 중독돼서 한 발작도 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이나 간신히 흐느적거리며 오가고 있었다. 미승이도 나 따라서 거실로 행동반경을 좁히고 공부도 팽개치고 지냈다. 

한지석이 자기 집에 가 있으니 망정이지, 그가 이 꼴을 보았더라면 날 몹시 괘씸하게 여겼을 거다. 집을 어수선한 꼴로 만드는 걸로도 모자라 미승이까지 게으름뱅이로 만들고 있다고.

“한지석은 언제 온대?”

“개학하면 오겠지.”

“걔 나 때문에 간 건 아니지?”

“방학이니까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겠다고 간 거야. 나랑 살면서 사먹는 음식에 질렸대.”

“넌 안 질려? 매일 매일 사먹으면.”

“글쎄. 적응이 되니까 견딜만해. … 넌 질리는구나.”

“그냥 뭐…….”

엄마 곁을 떠나서 오래 지내본 적도 없고 지긋지긋하리만치 끼니마다 챙겨주는 식사를 거르지 못하고 살다보니, 여기 와서 미승이의 제멋대로 식생활이 신선하긴 했다.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골라서 사 먹고, 먹기 귀찮으면 거르고 사는 게 처음엔 편하고 자유로워서 좋기도 했지만, 나흘 만에 질렸다. 집 밖에 나와 있어 보니, 매일 똑같은 반찬에 지루한 끼니 챙기기라도 집에서 배인 오랜 식습관의 좋은 점이 여실히 느껴지는 거다. 

“엄마한테 밥 해달라고 해야겠다.”

녀석은 굼뜨게 몸을 일으켜 앉아 전화기 앞으로 기어가더니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응. 나야. … 오늘 저녁 밥 해다 줘. … 사 먹는 거 질려서. … 참, 희승이도 있어. … 아니, 방학 때만 와 있겠대. … 아냐, 됐어. 일부러 밥 해주고 갈 필요는 없고, 그냥 만들어서 가져 와.” 

미승이네 엄마는 복도 많다.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혼자 살겠다고 집 나와서 평소엔 방해된다고 자기 집에 엄마를 오지도 못하게 하다가, 친구 밥 해먹이려는 구실에 식순이로 불려오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자식 복인가 말이다. 

그렇지만, 나도 나다. 녀석이 지네 엄마한테 전화 거는 걸 말리지도 않고 빤히 듣고만 있었다. 

“… 정희승, 너 뭐 먹고 싶어? … 아무거나, 맛있으면 된대. … 먹을 것만 주고 가면 돼. 자고 갈 생각은 하지 마. 알았지?”

달칵, 경쾌하게 수화기 내리는 소리에 맞춰 ‘이래서 자식새끼들 키워 놔 봐야 말짱 소용없다니까!’라는 우리 엄마의 18번 가락이 귀를 훑고 지나갔다. 엄마가 바로 옆에서 외치는 것 같은 강렬한 환청이었다.

“엄마 여섯 시쯤 온대. 그때까지 잠이나 자자.”

열두 시가 되도록 자고 일어나서도 낮잠이란 게 쳐들어오는 건지, 아니면 잠이란 게 잘수록 느는 거라서 인지,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눈을 하고서 녀석은 낮잠까지 챙기려는 참이었다. 

팔에 닭살이 돋을 만큼 추워지고, 카세트에선 CD의 마지막 곡이 끝나면서 반복 재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곡 세 번째 듣는 거야. 다른 거 틀자.”

“응.”

긴 팔이 카세트로 뻗어 느릿느릿 CD를 갈아 끼우는 동안 나는 리모컨으로 에어컨 작동을 정지시키고 그대로 몸을 반 바퀴 굴려 앞에 뻗어진 미승이의 팔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한 팔이 내려와 등을 당겨 안는다. 미승이는 나만큼 열이 많지 않은 체질이다. 어릴 때부터 겨울나기보다 여름 더위가 쥐약인 나에 비해, 그는 더위도 추위도 잘 참는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뭐… 상관은 없는 얘기지만, 아무튼 실내온도가 지나치게 낮아졌다 싶을 때면 미승이한테 들러붙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 몸에 맞대고 웅크려 있는 동안 서늘함이 적당한 온기로 가라앉는다.

최근에서야 느낀 거지만, 미승이에겐 독특한 체취가 있었다. 지금도 얇은 민소매 티 안으로 드러난 성숙한 겨드랑에서 풍기는 것은 비누나 스킨 같은 인공적인 향이 배제된 자연스러운 몸 냄새다. 이맘 또래 사내 녀석들의 꼬릿꼬릿한 땀과 분비물의 냄새보다는 깔끔하고 진한, 여름 더위에 짓무른 풀 냄새 같다고 할까. 

그의 쇄골과 겨드랑이 사이에 닿을락말락하게 코가 머문 채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긴 쇄골이 내 숨결에 반응하듯 오르내린다. 

“류미승, 자냐?”

“…아니.”

무겁게 웅얼거리는 게 잠이 듬뿍 실렸는데.

“하나 물어봐도 돼?”

“열 개 물어봐도 돼.”

“너 진짜로, 날 세 번이나 때려죽이고 싶었냐?”

게슴츠레 눈을 뜬 미승이는 졸린 표정으로 뜬금없이 뭔 소린가 하고, 생각에 잠긴 듯 만 듯 하더니, 이내 질문의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장난으로 한 소리 같아?” 

“왜 세 번이야?”

“하나하나 가르쳐줘? 첫 번째는 열 살 때, 봄에 저수지 낚시터에서 네가 선중이편 들었을 때. 두 번째는 그 해 여름방학동안 네가 박기수 새끼한테 넘어가서 당했을 때. 세 번째는 고등학교 들어와서 네가 이태수랑 강재만 자식들하고 샐샐거리면서 지내는 걸 봤을 때. 됐냐?”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곧장 곧장 입으로 쏟아내는 선명한 사례들로 보아서, 심각한 진담이었다. 근데 웃겼다. 

“아아, 고등학교 들어와선 정말이지, 누구부터 죽여야 할지 순서가 뒤죽박죽 될 정도로 열 받았지.”

진심으로,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날 미워했다는 걸 이해한다. 그럴 만도 했겠다고. 

오히려, 그토록 지독한 미움이 들었던 순간에 내가 녀석을 찔렀던 그 날의 사건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의외일 따름이었다. 녀석은 그 일에 관해서 내게 아무런 죄책감도 씌우지 않았다. 언젠가 말했던 대로, 그 때의 일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순전하게 날 이해하기로 했기 때문일까.

“안 죽어서 다행이네, 나.”

미승이가 날 죽도록 패는 장면을 상상하면 기가 질리는 영상이 떠오르는데, 난 녀석의 쇄골에 이마를 숙이고 킥킥댔다. 미승이도 김빠지듯 피식거렸다.

“바보야, 내가 진짜로 널 죽였겠냐? 생각만 그랬다는 거지.”

“생각이 사람을 잡는 수도 있대. 나 죽을 뻔한 거 맞잖아.”

“뻘소리 한다. 나한테 염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다른 것도 가능하겠네. 근데 넌 왜 줄창 나한테 이 모양이냐?”

“그거야… 네가 변변찮은 친구니까!”

“친구―.”

떠드는 사이에 낮잠 기운이 달아났는지, 아까보다 또릿하게 뜬 눈을 기울여 내려다본다.

“정희승. 너 고민이나 해 보고서, 나한테 물어 본 거냐?”

“뭘.” 

“내가 널 죽일 만큼 패고 싶다고 느낀 이유를 뭐라고 생각해? 만약 한지석이 다른 녀석이랑 친하게 군다고, 나를 좀 배신했다고, 그런 걸로 그 녀석을 패죽이고 싶어 할 거 같아? 난 지석이가 누구랑 더 친하건, 뒤에서 호박씨를 까건 말건 관심도 안 가. 그치만 넌 달라. 네가 친구였다면, 애당초 그만큼 분노를 느끼지도 않았을 거야.”

“…….”

“이런데도 나랑 친구하자 그럴래?”

얼굴에 닿은 손바닥이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실내온도보다 약간 높고 달아오른 내 뺨보다 약간 낮은, 넓은 손바닥이 내 왼쪽 뺨과 귀를 덥고 있었다. 극세사 담요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중력으로 닿아 오는, 점점 더워지는 손바닥.

“난…….”

“말하지 마. 네가 입 열면 기운 빠지는 소리나 할 게 뻔하니까.”

그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입이랑 콧구멍까지 막아버리면 숨은 어떻게 쉬라고!? 

“너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잖아. 너 편할 대로 날 대하라고 말한 건 나니까. … 그렇지만, 그러니까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까지 방해하진 마.”

언행일치. 

이 말만큼 미승이에게 새겨주고 싶은 격언이 없다. 녀석의 말과 행동은 수시로 따로 논다. 나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나더러 편하게 대하라면서, 결국엔 저가 하고 싶은 대로 해왔다. 지금도 말이다, 입을 가렸던 손바닥이 떨어져나가자마자 바짝 다가오는 얼굴이 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얹힌 입술이 입술위로 천천히 맴돌면서 깊은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인중과 윗입술에 닿는다. 끈기와 조급함이 들쑥날쑥 하는 숨결과 달리, 꾸준하게 차분히 맴도는 입술은 저중력의 바람 속을 유영하는 홀씨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점점 젖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 받쳐진 머리카락 속이, 목과 턱의 경계가, 이마가 묽은 땀으로 젖어들고… 점점 깊이 들어오는 혀가 할짝거리는 입 속은 말 할 것도 없이 축축해졌다, 

숨이 턱턱 막혔다. 끈끈한 더위에 리모컨을 찾아 헤매던 손은 다른 손에 붙잡혀 머리 위로 올라갔다. 

남의 겨드랑이에 코 박고 핥는 짓은 내가 하는 것도, 남이 하는 것도 꺼림칙한 짓이다. 하지만, 대담한 소년 류미승에겐 마음만 내키면 만사가 꿀리고 꺼릴 게 없는 모양이다. 정말로, 이런 점이 싫었다. 

“하지 마. 싫어.”

“여기만 싫은 거야?”

꼭 말로 해야 아냐? 키스할 때 가만 있었던 걸 보면 이해 할 거 아냐. 대답 기다리지 말고 눈치껏 넘어갔으면 좋겠다. 저렇게 사람 뻘쭘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다 싫어.”

이렇게 밀고 나갈 수밖에 없지 말이다. 그런다고 곧이곧대로 들을 녀석도 아니지만. 

“거짓말.”

겨드랑이에서 가슴을 타고 목덜미로 올라온 입술이 목과 어깨의 경계를 깨무는 순간 아차 싶은 신음소리가 나갔다. 그러자 더욱 촘촘한 입심으로 목을 빨아대며 거세게 추스르듯 몸을 끌어안는 팔 안에서 갑갑함을 느꼈다. 

“더워… 하지마…….”

쥐뿔도 안 먹힌다. 덥다. 무진장 덥다. 

“소리 못 들었어?”

띵동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미승인 놈은 못들은 건지 안 듣는 건지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난 다시금 누군가 현관 밖에 와 있는 소리를 확실하게 들었다. 

“아줌마 왔나봐. 나가 봐.”

띵동 띵동, 초인종으로 안 되자 『미승아, 미승아! 엄마다!』 아줌마가 현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그제야 미승이 자식은 내 목덜미에서 입을 떼고 무진장 꿈지럭거리면서 일어났다.

“아… 시팔, 되는 게 없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현관으로 걸어가는 녀석을 보며, 저토록 잘난 아들네미를 낳아 논 아줌마는 다시 한 번 생각건대, 정말 정말 복이 많은 여자였다.

“너 낮잠 잤니? 왜 금방 문 안 열어?”

현관 자물쇠가 열리자마자 아줌마가 잽싼 보폭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왜 벌써 왔어? 여섯 시에 오기로 했잖아!”

대뜸 짜증이나 부리는 류미승. 

“어머, 신경질을 내고 그래? 내가 다섯 시에 온다고 했지, 언제 여섯 시에 온다고 했니? 얘는 저가 잘못 들어놓고 나한테 막 화를 내네, 아우, 이 집안 꼴 좀 봐. 청소도 안 하고… 어머, 희승아.”

“안녕하세요.”

“그래. 너도 잘 지내지? 너희 엄마도 건강하시고?”

“네.”

“아줌마가 불고기 재워주려고 고기 사왔으니까, 이따가 우리 저녁 맛있게 지어 먹자.”

“네.”

“이게 뭐야! 만들어 오지 않고 재료를 사왔어? 밥은?”

“밥을 뭐 하러 해와? 다 식은 찬밥 달랑 던져두고 가라고? 밥이랑 반찬이랑 금방 따끈하게 지어서 먹는 게 좋지. 그치 희승아?”

“네.”

“그럼 지금 밥 안쳐놓고 가. 이따가 다 되면 우리가 알아서 챙겨먹을 거니까.”

“어머. 사람 오자마자 쫓아내는 거야? 내가 지은 밥 내 입에 한 술 뜨지도 못하고?”

“엄마, 여기서 저녁 먹고 갈 거야?”

“그럼 안 되니? 넌 무슨 애가 인정머리가 없니? 모처럼 왔는데 나도 아들이랑 밥이나 같이 먹고 가자. 아줌마랑 같이 밥 먹는 거 좋지, 그치, 희승아?”

“네.”

“야, 넌 대답 좀 하지 마!”

류미승은 아줌마의 질문마다 ‘네.’하고 동조한다는 이유로 나한테까지 짜증을 부렸다. 

나도 친구 복이 넘치는 팔잔지도 모르겠다.

고기에 양념을 재워 두는 동안 아줌마는 우리가 어질러 놓은 집안을 청소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고 혀를 끌끌거렸다. 갑자기 아까 던져둔 휴지뭉치가 생각나서 혼비백산을 하고 아줌마가 보기 전에 얼른 찾아다 화장실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아줌마를 따라다니면서 눈치껏 정리를 도왔는데, 뻔뻔한 미승이 놈은 손도 까딱 안하고 제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방 안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 페이지가 그 페이지, 그야말로 책 보는 척만.

“저 놈은 엄마가 오랜만에 왔는데… 내가 와서 공부하는 척 하는 거 아냐?”

맞아요. 아줌마. 쟤 요새 풍풍 놀기만 했답니다. 아줌마가 오기 직전까진… 아아, 생각을 말자.

청소랑 세탁을 마친 아줌마랑 내가 거실에 앉아 일일 연속극을 보는 동안, 녀석도 심심해졌는지 방에서 나와 내 옆에 앉았다. 꼴에 그럴듯하게 안경까지 끼고 있다.

“공부 안하냐?”

“할 만큼 했으니까 쉬어야지.”

퍽이나―. 고작 30분 지났다.

“무슨 드라마가 저래? 딴 거 보자.”

아줌마가 한창 빠져들어 있는데 채널을 돌리려는 무례한 녀석의 손에서 아줌마는 재빠르게 리모컨을 빼앗아들었다. 

“시끄러. 엄마가 보는데 중간에 딴 데 트는 놈이 어딨어. 희승이도 드라마 재밌게 보고 있는데. 그치, 희승아?”

“…네.”

“재밌긴 뭐가? 너 우리 엄마 기분 맞추지 말고 솔직히 말해.”

“…나름 재밌어.”

또 못마땅한 눈총을 받았다. 미승이 녀석은 드라마가 재미없다고 투덜대면서도 저 여자주인공이 생김새가 어떻네, 남자 주인공이 어떻네, 떠들긴 아줌마보다 더 떠들었다. 그래봐야 두 사람의 수다분이 우리 엄마 한사람분의 수다를 넘지 못하지만.

우리 엄만 연속극을 엄청나게 몰입해서 본다. 내가 어쩌다 중간 부분만 봐도 설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내용,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빤히 감이 잡히는데도 횟수만 늘려먹는 울궈 먹기 진행, 거기다 볼수록 성격 이상한 주인공들이 무척 많다. 

그럼에도 우리엄마는 매 회마다 충격 받고, 화내고, 눈물 쏟고,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 풍덩 빠져서 120%의 공감을 만끽한다. 

그럴 때의 엄마는 다분히 여자다.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부터 억척스런 아줌마로 돌아와 버리지만.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녁밥 해야겠다.”

드라마가 끝나자 아줌마도 방금까지 몰래 훌쩍이던 참새 눈물을 말리고 주부로 돌아왔다. 

기운차게 부엌으로 가서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밥을 짓는다. 

“희승이 너 여자 친구 있니?”

저녁상을 치우고 TV를 보면서 아줌마가 깎아주는 포도랑 참외를 먹는 동안 아줌마가 대뜸 물었다. 

“네? 아뇨.”

“에이. 뭘 감추고 그래?”

아줌마가 뭔가 눈치를 챘다는 표정인데… 미승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너 목에 멍들었어.”라고 속삭여주는 바람에 알아차렸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목에 불긋한 멍 자국이……! 

아줌마가 오기 전까지 미승이 자식이 잔뜩 깨물고 빨아댄 목덜미에 난 흔적이 암만 찬물로 헹구고 문질러봐야 쉽사리 가실 리가 없었다. 

망할 놈의 미승이 새끼! 

속으로 다섯 번을 부르짖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 흉측한 멍 자국의 범인인 류미승은 태연하게 안경 콧대를 잡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아줌마는 나를 보고 히죽대고. 

“어디서 부딪혔나 봐요. … 아, 목 아파.”

미승이 건너편 아줌마 옆에 앉아 포도를 따먹으면서 서툰 핑계를 댔다.

“그래?”

피식피식 웃는 아줌마. 젠장, 믿질 않는다. 미승이는 연신 시계를 보고, 아줌마는 참외 하나를 또 꺼내들고 깎기 시작했다. 

“엄마, 9시야.”

“그래서?”

“집에 안 가?”

“넌 왜 날 보내지 못해서 안달이니? 아까부터 계속 시계만 본다?”

“늦었잖아. 집에 가서 저녁 안 해? 아빠 굶길 거야?”

“별 걱정을 다 한다. 너네 아빠는 밥만 해두면 혼자 알아서 잘 챙겨먹는 사람이야. 너 같은 줄 아니?”

“그래서. 몇 시에 갈 건데?” 

“내가 몇 시에 가건 내 맘이지! 얘 웃기는 애네. 왜? 엄마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려고? 말해봐, 무슨 꿍꿍이 속인지. 희승아, 미승이 얘 왜 이러니? 넌 알지?”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다. 당신 아들이 엄마랑 같이 있기 싫어해서 저래요― 하면 내가 몹쓸 놈이고, 쟤가 몹쓸 짓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 같아요― 라고 하면 미승이가 죽일 놈이 되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포도껍질을 빨면서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아줌마는 꺄우뚱한 얼굴을 지우지 못하면서 마지막 참외를 썰었다.

“시간이 늦긴 늦었네.”

“그치?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엄마 보고 싶어서.”

“말은 잘 한다.”

아줌마가 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이자 냉큼 신문을 접고 반가워하는 류미승의 꼴이 눈에 거슬렸다.

“늦었으니까 아줌마도 오늘 여기서 자고 가세요. 오랜만에 오셨다면서요.”

“그럴까?”

미승이 자식이 기겁을 하고 안경까지 떨어뜨리는 꼴을 보니 기분이 좋다. 

“저희 거실에서 자거든요. 아줌마도 여기서 주무세요.”

한 술 더 떠서 난 아줌마에게도 에어컨 있는 거실이 무척 시원하다고, 우리랑 나란히 주무시면 좋겠다고 권했다.

아줌마는 기꺼이 그러마했고, 미승이는 열 받아서 “알아서 자. 난 방에서 잘 거야.”라며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굴었나. … 일찍 집에 갈걸 그랬어.”

“아니에요. 여기도 자주 안 오신다면서요.” 

“그렇다니까. 평소에 안부 전화도 안 하는 녀석이 전화한 게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아서… 아들이 엄마가 만든 밥 먹고 싶다는데, 어느 엄마가 싫다 하겠냐고. 그래서 기껏 맛있는 거 해먹이겠다고 바리바리 싸왔더니… 이래서 엄마들은 미련한 거야. 저 녀석은 오자마자 날 귀찮은 사람 취급이나 하는데……. 그래도 괘씸해! 저 놈 미워서 내가 오기로라도 자고 가야지.”

지석이 방에서 들고 나온 얇은 이부자리를 깔면서 아줌마도 할 말은 다 했다.

‘이래서 엄마들은 미련한 거야’라는 말에 내가 공감을 한다면 우습지만, 아줌마의 속상한 마음은 전해졌다.

“저 녀석이 사춘기라서 그래요.”

“사춘기가 무슨 벼슬이냐? 희승이 넌 작아도 미승이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얘. 저 자식은 키만 커갖고, 속은 애야, 애.”

아줌마도 내 약점을 쿡 찔렀다. 그래요! 나 키 작아요! 

“하여간, 아무리 그래도 엄마 앞에서 팽 돌아서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건 또 뭐냐. 애새끼가 삐치기는―.”

“삐친 게 아니라, 공부하고 있을 걸요. 미승이 공부 열심히 해요.”

누가 봐도 영락없이 각자 삐쳐있는 모자지간을 위해 내가 이딴 변명이나 해줘야 하다니… 실로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아줌마가 자리에 눕고 내가 거실 등을 끄려고 일어났을 때, 이번에도 끈기 없는 미승이 녀석이 방에서 나왔다.

“…공부 하고 자려고 했는데 그냥 왔어. 내 자리는?”

그럼 그렇지. 지가 삐쳐 봤자지. 들고 온 베개를 어디다 두어야 할지 서성이고 있다. 

“네 자리 없어! 아무데나 디비 자.”

이러면서 옆으로 슬금슬금 비껴 눕는 아줌마는 가운데 자리를 만들고 미승이도 미적거리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정말 유쾌하기 짝이 없는 모자지간이다. 우리엄마랑 내 실랑이도 남이 보면 이렇게 우스울까?

“안녕히 주무세요.”

처음으로 제 엄마에게 처음으로 공손히 인사를 하는 미승이. 목소리가 개미 같다. 

“웃지 마.”

어깨가 툭 밀려도 참아지지 않는 킥킥 소리를 한 손으로 막았다.

아들과의 실갱이가 피로했는지, 아줌마의 나직한 코골이가 조용한 거실안에 울려 퍼진 건 우리들이 누운 지 십분도 안 되서였다. 

“우리 엄마 코 고네.”

“우리 엄마도 코 골아. 피곤하면 나도 곤대.”

“뭐가 피곤하다고…….”

퉁명스레 굴어도 녀석이 조금은 미안해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줌마 자주 오시라고 해. 전화도 자주 해드리고. 네가 전화해서 밥해 달래서 기쁘셨다더라.”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닌데. 엄마랑 수다 떠는 게 너 같으면 재밌겠냐?”

나도 우리 엄마 수다를 받아주는 건 재미없다.

“잘 자.”

“새끼, 말 돌리긴.”

이러면서도 “너도 잘 자.” 하고는 내 손을 잡는 녀석의 마음이 서툴지만 따뜻하게 전해져서 잠시 그 손을 나도 맞잡고 있었다. 

“나쁜 놈의 새끼.”

아줌마가 이빨을 갈면서 잠꼬대를 하기 전까지만. 

모자가 잠꼬대 잘 하는 버릇이 닮았다.

일어나자마자 아줌마는 어제 한 걸로 부족했는지 또 집안 청소를 하고 식사 준비를 했다. 

어젯밤 단단히 마음이 상했는지 아침밥만 해놓고 가방을 챙겨드는 것을, 미승이가 아줌마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같이 밥 먹고 가.”

아줌마가 뿌리치기만 하면 얼마든지 스륵 빠져나갈 만큼 헐렁하게, 두 개의 손가락 끝으로만.

“됐어. 너네 점심까지 먹을 만큼만 해 놨으니까, 부족해.”

그럼에도 옷소매가 빠져나가진 않는다.

“밥 더 해주고 가면 되잖아.”

“아이고 고마우셔라. 기특해 죽겠네. 이 엄마가 식순이냐? 네 집에서 밥 한 끼 얻어먹자고 몇 끼를 해대야 되는 거니?”

내가 들어도 아줌마의 항변이 일리가 있었다. 

류미승의 화해 방안은 엄청 몰염치했다. 나 같으면 괘씸해서라도 절대 저 딴 말에 넘어가지 않을 텐데…

“흥, 그러지 뭐.”

못이기는 척 아들에게 져 주는 아줌마는 천상 엄마였다. 

이래서 엄마들은 미련한 거다.

어제의 일을 미승이도 반성했는지, 아줌마가 아침 설거지를 하고 새 밥을 짓는 동안 별로 도움 되는 것 없이 옆에서 깔짝거려주니까, 아줌마는 연신 미승이한테 네 아빠는―, 네 아빠는―, 하고 아저씨 흉을 보면서 흥겹게 밑반찬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희승아, 엄마 가는 길에 우리도 따라 나가서 슈퍼에서 라면 사 오자.”라며 찬장에 빤히 남아있는 라면을 핑계로 아줌마를 배웅할 구실을 찾았으니, 덕분에 아저씨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때의 아줌마는 훨씬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이고, 이 양반은 겨우 하루 못 봤다고, 내가 보고 싶나 봐. 문자를 몇 번이나 보낸 거야! 미승이 너, 이거 봐라. 너네 아빠가 나더러 빨리 집에 오라고 야단이다. 그 양반은 그 나이 들어서도 나 밖에 몰라.”

아줌마가 자랑삼아 핸드폰 액정을 흔들어 보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아줌마라도 참 귀엽다. 

“네 아빠 나이가 되면 너도 엄마 귀한 줄 알게 될 거다. …아니지, 이 양반은 마누라 귀한 줄 아는 거라고 해야 되겠지?”

“그건 나도 알아.”

아줌마는 3분 간격으로 핸드폰을 삑삑 울리는 아저씨의 문자를 읽고 또 읽고 기다리는 재미에 미승이가 한 말을 못 들었다. 

그런 아줌마 몰래 내 귓가에다 속닥대는 미승이 말로는, 요새 아저씨가 핸드폰 문자 메시지 보내는 법을 배워 문자 송신에 재미를 붙여서는 직장 동료들한테도, 아저씨 친구들한테도, 미승이한테도 수시로 짧은 문자를 쳐서 보낸다고 했다. 그런데 간혹 내용이랑 안 맞는 이모티콘을 보내는 경우가 있어 황당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밥은 잘 먹고 다니냐 ㅠㅠ 」

「공부 열심히 해라, 류미승 화이팅 ;;;」 

이런 식이란다. 아까 내가 얼핏 본 액정 속의 문자도 과히 내용과 이모티콘이 어울리진 않았다.

「배고파. 빨리 와서 밥 해. ^^」

“전화 자주 할게.”라는 미승이의 말에, “흥, 두고 봐야 알지!” 라며 튕기는 아줌마였지만, 일부러 슈퍼에 들러 우리의 간식거리를 사 주면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라면서 가뿐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흥, 전화하면 또 와서 방해하려고!”

아줌마가 멀어지자마자 사가지를 내던지는, 무척 잘난 류미승!

우리 엄마는 말했다. 

“이 담에 꼭 너 같은 자식만 낳아서 고생해봐라!”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저주가 바로 저 말이 아닐까, 미승이를 보면서 난 새삼 깨우쳤고, 저 말을 속으로 미승이한테 던졌다.

나온 김에 바깥 공기나 묻히고 가자고, 아줌마가 사준 음료수랑 과자 담은 비닐 봉투를 달랑거리면서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아파트 내의 놀이터를 찾아내서 난 정글짐에 걸터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힘이 넘치는 미승이는 놀이기구들을 돌아다니며 땀을 흘렸다. 

미승이가 턱걸이를 열한 개까지 하다가 손이 땀으로 미끄러져 모래바닥에 주저앉는 걸 보고 박수를 쳐주었다가 욕도 얻어먹었다. 

눈꺼풀까지 뜨거울 만큼 무더운 날씨였다. 가만히 태양빛만 쬐어도 땀이 눈썹에 방울졌다.

딩동, 딩동, 

아줌마가 가다가 되돌아왔을 리는 없고, 우리가 놀이터에서 오자마자 초인종을 누르는 인물은 또 누굴까? 하며 인터폰을 켜 보니, 당형수가 렌즈에 대고 이마빡을 한 가득 디밀었다 뺐다 하고 있었다. 

“미승아, 형수야.”

“그 자식은 또 왜 왔대!”

“가서 문이나 열어줘.”

『미승아. 미승아..』

“너 입 안 다물면 문 안 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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