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7)

얼레!? 내 주둥아리가 뭔 소릴 한겨!? 미승이 저놈은 왜 얼굴이 빨개지는데!? 막장으로 썰렁해진 분위기를 추스를 만큼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다. 바지나 바로 입으려고 움직이는데 글세… 설상가상으로 아랫배에 걸려 있던 단추가 툭 떨어져나갔다. 굴러가는 단추를 집으려고 몸을 돌리자 엉덩이 부근에 허전한 공기가 닿았다. 꼴사납게도 팬티랑 바지가 엉치까지 밀려가 있었던 것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엉덩이 골을 타고 내려가는 아찔한 느낌이라니―. 

“뭘 보냐?”

얼른 바로앉아서 바지허리를 올리고 지퍼도 다시 채우는 동안 미승이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분명히 봤을 것이다. 그나마도 엉덩이 골의 시작점에서 팬티가 걸려주어서 완전히 까 보이는 불상사는 면했지만. 

“바지 갈아입어. 단추 떨어졌잖아.”

“네가 단추 붙여놔. 너 때문이니까.”

미승이가 가져온 반바지를 그 앞에서 보란 듯이 갈아입고 교복바지를 훌렁 벗어 던졌더니, 녀석은 순순히 내 교복바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제 손으로 단추를 꿰매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큰 방 문을 열어보았더니, 녀석이 진짜로 바늘에 실을 끼우고 있었다.

“깜짝이야!”

뒤에서 어깨를 툭 치는 한지석은 미승이가 연신 바늘이랑 씨름하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더러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제 방으로 불러들였다. 

“받아.”

그러더니 건네는 것이 이번에도 열쇠다. 

“이거는 현관 열쇠고, 이것 들은 미승이 방이랑 내 방 열쇠야. 필요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주는 거니까.”

오호라. 너도 혹시나 해서 주는 거냐? 필요는 없겠지만? 

“내가 복사한 거니까 부담 없이 받아 둬. 나야 네가 오건 안 오건 상관 안 하니까.”

“…….”

이 같잖은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한지석, 네가 복사한 거라고 말해주면 내가 단숨에 홀딱 믿을 것 같아? 거짓말을 하려면 적어도 미키마우스 열쇠고리라도 빼던가 바꾸던가 했어야지! 두 자식들의 형편없는 쿠션치기가 열쇠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가볍게 마모시켜버리고, 결국 난 열쇠를 받았다.

한지석과 내가 작은 방에서 나오고 미승이도 결국 실 끼우기단계에서 포기한 바지랑 단추를 들고 방에서 나왔을 때, 마침내 현구도 깨어났다. 드르렁 그르렁 쿨쿨 아파트 내부를 진동시키기던 우렁찬 자기 코골이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은 것이다. “누구야!”하고 사방을 휘둘러보더니 그제야 자기 소린 줄 알고 겸연쩍어했다. 인간 류현구도 조금은 창피함을 아는 구나 싶었는데, 웬걸, 

“밥 먹자! 미승아! 지석아! 늬들 뭐 먹을래?”

느닷없이 밥 먹자고 외치면서 자기가 점심을 쏘겠다고 큰소리를 왕왕 울렸다. 부엌에서 중국집 스티커를 잘도 찾아다가 전화를 걸더니, 

“짜장면 곱빼기 네그릇이요.”

맛있는 거 사주겠다 해놓고는 고작 짜장면 곱빼기냐… 싶던 찰나에 미승이가 현구가 끊으려던 수화기를 빼앗아서는 곱빼기를 보통 짜장으로 바꾸고 요리 두 개를 추가시켰다.

“아이구. 오늘도 미승이가 사는 거야? 삼촌 잘 먹을게. 근데 만날 짜장 아니면 짬뽕만 시켜주더니 웬일로 요리를 쏘냐? 오늘은 삼촌 대접 제대로 해 주네?”

현구의 너스레에 콧방귀도 안 뀌는 미승이가 이해됐다. 조카랑 조카 친구의 면전에서도 하등 쪽팔림 없이 에어컨 쐬고 낮잠 자고 짜장면을 얻어먹고 가는 현구의 면피 팔리는 나날들이 환히 그려졌기에.

그리고 간만에 저들의 모습을 보니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예전에도 지금이나 여전히 삼촌과 조카의 지갑 무게가 부조리한 집안이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조카 삼촌지간의 빈부의 격차가 벌어져가는 듯 보였다. 어쩌면 현구의 말대로 미승이가 제 삼촌 복을 뺏어먹고 사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마저 멍청한 미신을 끌어들일 뻔 했다.

짜장 묻은 젓가락이 아까부터 투명한 소스가 뿌려진 요리 접시 속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검게 그슬린 돼지고기와 해삼이 질척한 소스 속에 범벅이 되어있는 해삼요리는 아까부터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미승이 이놈아, 희승이한테 열쇠라도 하나 복사 해 줘라. 여기서 같이 학교 다니면 좀 좋냐? 의리 없는 자식이네 거. 삼촌이 그렇게 가르쳤냐?”

특히 해삼을 골라 먹느라 소스 색깔을 갈색으로 바꾸어 놓는 현구의 젓가락질은 쉬지 않고 오가며 그의 입에도 질척한 소스를 번들거리게 묻히고 있었다. 

“그리고 하는 김에 삼촌 열쇠도 복사해. 방 열쇠 같은 건 필요 없어. 현관 열쇠만 하나 하면 돼.”

결국 저 말을 하고 싶은 거였다. 자기 열쇠가 필요해서 나를 팔다니. 미승이가 입 다물도 쌩 까는 심정도 능히 이해가 됐다. 짜장면 그릇에 얼굴 박고 낄낄거리는 한지석은 제쳐두고.

“삼촌 말 안 들리냐?”

“됐거든. 삼촌도 가게 비워두고 자꾸만 여기 들락거리지 마. 에어컨이 그렇게 좋으면 사면되잖아. 능력 안 되면 돈 보태줘?”

“너 에어컨 장만했다고 유세 떠냐? 이 삼촌이 오는 게 그렇게 못마땅허냐?”

“그걸 말이라고 해? 삼촌 좋으라고 에어컨 놨는 줄 알아?”

“그럼 누구 좋으라고 놓은 건데?”

“…….”

“너 혼자 좋자고? 애새끼가 나이 먹을수록 이기적이냐.”

“아, 몰라! 아무튼 앞으론 다신 오지 마. 송별회 하는 뜻으로 비싼 요리 시켜 준 거니까.”

“호오라. 이거 먹고 꺼져라? 이 새끼, 조카만 아니면 콱―!”

“자꾸 젓가락으로 헤집지 마. 그렇게 침 묻은 젓가락으로 마구 건드리면 다른 사람이 못 먹잖아. … 희승아 이거 먹어. 삼촌 젓가락이 조금 건드리긴 했지만, 먹고 죽진 않을 거야.”

미승이랑 현구가 투닥대는 동안 한지석은 자기 페이스대로 짜장 그릇을 비우고 간식처럼 요리를 집어먹고 있었지만, 나는 짜장면조차 반도 삼키지 못해 퉁퉁 불려가고 있었다. 

“왜 안 먹어? 입에 안 맞아?” 

미승이가 내 그릇을 들여다보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몇 가닥 집어먹다 만 그릇속의 면발은 여전히 일인분의 부피를 채우고 있었고 미승이가 집어다 준 해삼이랑 전복 덩어리들도 그대로 남아있는 채였다. 

“야, 이놈아, 친구만 챙기지 말고 이 삼촌한테도 좀 물어봐라. 삼촌 뭐 드시고 싶으세요 하고―. 난 이런 류산슬이니 해삼주스니 다 별루다. 값만 비쌌지 먹어볼 게 없어. 그저 양 많은 탕수육이 최고야.”

“다른 걸 시킬 걸 그랬나―.”

현구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고, 내 그릇만 쳐다보는 류미승. 이런 것쯤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것도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다. 흐느적거리는 커다란 해삼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물컹한 해삼의 씹는 육질과 향채의 묘한 풍미가 입안을 채우면서 기억 속의 그것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똑같은 요리, 똑같은 냄새, 똑같은 질감, 똑같은 여름… 아무리 꾹꾹 내리 눌러도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치달아 오르는 철면피한 기억을 누르며 필사적으로 씹어 삼켰다. 

“억지로 먹지 마.”

미승이가 내 손을 잡아 젓가락질을 멈추게 했을 때, 한지석이랑 현구까지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았다. 

“정희승은 입에 안 맞나 보네. 삼촌 말대로 탕수육이나 시킬 걸 그랬다.”

“그치, 지석아? 희승아, 눈물까지 나냐? 너무 맛없어서? 아무리 그래도, 비싼 요리 맛없다고 울면 어떡하냐. 우리 미승이 돈이 울겠다.”

정말로 눈곱이랑 눈물까지 고이며 죽을 둥 말 둥 음식을 삼켰으니,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토사물이라도 먹인 줄 알거다. 아닌 게 아니라 토사물 같은 기억과 맞닿아 있긴 했지만.

“희승아 속 안 좋아? 이리 와.”

미승이는 신속하게 나를 욕실로 데려가서 양변기를 걷어 올리고는 칫솔을 건네주었다.

“싫은데 억지로 먹으면 어떡해. 차라리 토해. 목구멍까지 칫솔질 하면 넘어 올 거야.”

“…알았어. 나가…….”

“등 두들겨 줄게.”

“싫어… 나가.”

“알았어.”

미승이가 나가고 칫솔을 제자리로 꽂아놓았다. 속이 꾹 얹힌 느낌이었지만 토할 정도는 아니었다. 찬물을 세게 틀어 얼굴을 연겨푸 씻었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수돗물도 연겨푸 삼켰다. 뱃속에 호수 하나가 생길만큼 위가 출렁거리도록 부연 수돗물을 들이키고 나서야 수도꼭지를 잠그고 마지막엔 세면대를 잡고 헉헉거렸다. 

박기수가 사준 요리들을 먹고 전부 토해냈던 날, 박기수는 나를 완전히 꿰뚫고 망가뜨렸다. 그 날의 고통과 패배감, 침울한 눈물의 비린내 속에는 수 가지의 음식물 건더기가 숨 쉬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해삼주스의 기묘한 냄새와 질감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와 같은 감촉과 모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단 한 치의 수치심도 극복되지 않았다. 이토록 작은 기억의 꼬투리 하나 감당하지 못 하는 내가… 너무 병신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현구는 돌아간 후였다.

“꼭 열쇠 갖고 다녀. 그리고 지석이 너, 앞으로 우리 삼촌 와도 문 열어주지 말고 집에 아무도 없는 척 해.”

“그게 될까?”

반신반의, 의욕 없는 대답을 하는 한지석에게 절대로 현구가 오면 문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미승이는 나를 보더니 “괜찮아?” 하고 상태를 염려했다. 교복 바지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나오자 따라 나왔다. 

“갈 거야?”

“응.”

“바지 단추 못 달았는데.”

“네가 달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 집에 가서 달면 돼.”

“미안…….”

“뭐가?”

“뭔가…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전부 엉망인 것 같아서.”

“…….”

그건 네가 아니라 나지.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전부 엉망진창인 나, 정희승. 비틀려버린 성장기, 돌이킬 수 없는 마침표, 그리고 희망 없는 순환선. 

이 지독한 자괴감은 언제나 희미해질까. 

나는 언제쯤 미승이를……

“열쇠 받았으니까…….”

“알아. 놀러 올게.”

“진짜지?”

“응.”

“같이 지내면 더 좋을 텐데.”

“…….”

“너 말이야 땀띠 났더라. 어린애도 아니고 오돌도돌.”

내가 땀띠 생긴 건 어찌 알았대? 

“그러니까 자주 와. 우리 집 시원하니까.”

버스에 오르며 들었던 마지막 배웅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동안 몰랐었는데, 미승이는 후한 듯 보이지만 은근히 야박하고 인색한 놈이었다. 특히 현구에게는 에어컨 바람 한 조각 나눠주기도 아까워할 만큼.

지난 저녁 미승이네서 나와 집으로 가면서부터 나는 떠올리기 싫었던 골방의 비밀들을 조금씩 뜯어내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무디게 무디게 추슬러 왔던 기억들. 그러나 느슨해지고 있었다. 자꾸만 새나오고 있었다. 

미승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애가 자꾸 튿어지게 했다. 그 존재가 눈앞에 있는 한, 아무리 까맣게 눈을 가려도 아웅일 뿐이었다. 작은 손바닥으로 하늘은커녕, 내 눈조차 못 가렸다. 그리고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미승이의 성의를 무시하기 싫어서 씹어 넘긴 음식물, 그에 연이어 토사물처럼 꾸역꾸역 밀려들던 기억처럼. 욕지기나는 치욕. 절망… 

…그래도 괴롭다는 건 낫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병균을 이겨내기 위해 열이 들끓듯, 내게 필요한 열앓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도 조금씩 자라고 있지 않을까. 초속으로 빠르게 내달려도 절대로 멀어지지 않는 환영을 억지로 뒤로 하지 말고, 여기서부터 천천히 마주보고 걸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두툼한 가방을 추슬러 메고서 현관 앞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한 순간, 미승이의 얼굴은 화색 이상의 반가움으로 밝아졌다. 내가 찾아오면 녀석이 좋아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기쁨으로 반짝거리는 웃음을 눈으로 직접 보는 건 감흥의 수준이 달랐다. 

“며칠간 여기서 지내도 돼?”

“얼마든지.”

내 손엔 미키마우스가 매달린 열쇠고리가 쥐어져 있었지만, 전혀 필요치는 않았다. 미승의 손에 들린 열쇠가 자물쇠를 열고, 벌어진 현관은 나를 먼저 안으로 들였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뒤에서 넘어온 팔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저께 오고, 오늘도 온 건데…….”

“네 의지로 온 건 처음이잖아.”

그래. 똑같이 내 발로 이 집에 왔어도 분명 함축된 의미가 달랐다. 실재는 같아도 내재는 이렇게 큰 차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로 이 집에, 미승이에게로 왔다. ‘가야지’라는 각고를 옷가지 넣은 가방에 같이 꾹꾹 눌러 담았다. 

무언가가 변한 건 아니다. 나아진 것도 없었다. 다만, 나는 달리기를 포기했다. 류미승이라는 인력이 내게서 끊어지지 않는 한, 나의 멀리 달리기는 헛바퀴 도는 공전일 뿐, 거리는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왔어.”

자발로 찾아 온 나를 반기리라는 것을 알았다. 안아주리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닿는 체온의 느낌은, 거부감과 안도감이 미묘하게 교차되어 다리에 힘을 풀릴 것만 같았다. 아까부터 현관에 서서 거실로 올라서지도 못하고 미승이의 팔 안에 소중한 짐 보따리처럼 안겨있는 꼴은 역시 어색했다. 거기다 목도 더웠다. 후끈 거리고 축축해져 있었다. 

“…이러지 마. 더워.”

말이 떨어지자마자 등에 달라붙어 있던 체온이 떨어져나갔다. 

“찬물로 샤워하지 마. 안 좋으니까.”

저렇게 말한 녀석이 보일러를 얼마나 돌렸는지 아니면 이 집은 보일러 성능조차 월등히 뛰어난 건지, 샤워기를 틀자마자 뜨거운 물이 콸콸 떨어져 나왔다. 겨울도 아니고 한 여름에 온수욕을 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부러 보일러를 돌려준 성의를 생각해서 몸에서 열이 오르도록 뜨끈한 물을 부어댔다. 이열치열이라던가, 더위에 익은 몸에 뜨거운 물을 뿌려대니 외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서 하얀 입을 뽈뽈 올리면서 거실로 나왔을 땐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시원한 냉풍이 ‘어서와. 이리 와서 더위 식혀’하고 나를 반겼다. 한 여름의 찌는 더위, 뜨거운 샤워 끝에 맞는 에어컨 바람은 정말 좋았다. 현구가 자꾸 이 집에 드나들고 싶어 하는 기분이 이해가 됐다.

“개운해 보이네.”

“응.”

“머리 덜 말랐다. 마저 말려.”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어 말리는 동안 뒤에서 솜 덩어리 같은 게 목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하얀 분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파우더.”

흘긋 돌아보니… 젠장, 진짜로 베이비파우더 칠을 하고 있지 뭔가. 

“너 평소에 이런 거 바르냐?”

“아니. 한지석이 엉덩이에 바른다.”

“으엥…….”

“농담이야. 농담.”

자신이 이토록 유치한 농담의 소재가 되는 줄 알면 한지석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리고 두 번 강조 안 해도 진담 아닌 줄 안다. 금방 뜯어낸 비닐과 포장 곽이 옆에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는 걸.

“냄새 안 나니까 걱정 마. 애기 분 냄새 나는 건 싫어할 것 같아서 무향으로 골랐어.”

셔츠 목을 열고 어깨를 두드리는 퍼프 때문에 내가 머리를 좌우 어깨로 갸웃갸웃 기울이는 걸 냄새 맡는 걸로 생각했는지 녀석이 공연한 설명을 한다. 애기 분 냄새건 무향이건 열여덟 살이나 먹어갖고 몸에다 뽀사시한 분칠 하는 게 우스꽝스럽긴 매 한가지, 오십 보 백 보건만, 

그치만 뭐 어때. 난 어차피 앤데―. 

느긋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고개를 숙이자 셔츠가 등으로 올라가고 등에도 마른 분가루가 두드려졌다. 찬바람에 식어가며 눅눅한 물기가 보송보송한 분가루에 묻어 말라가고 있었다. 등을 씌운 한 겹의 분, 그리고 그 위를 쓰다듬는 손길이 미온을 남기고 있었다.

앞 목이랑 가슴까지 분칠을 하고는 배꼽을 드러낸 채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냉기를 즐기고 있었다. 미승이는 내 옆에 따라 누웠다가 도로 일어나서 파우더 칠할 만한 곳을 찾더니 마땅히 건드릴 곳을 못 찾았는지 내 발바닥에다 퍼프질을 했다. 어지간히 심심하고 할 일 없는 놈 같아 보였다. 남은 분으로 제 목이랑 팔다리 몇 군데에 파우더를 두드리고서야 겨우 파우더 통을 치우고 다시 한 팔을 괴고 누워 멀거니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되게 심심해 보여.”

“심심하진 않아.”

“신나지도 않지?”

“…….”

대답을 않는 걸 보니 정곡을 찔렀군. 하지만, 심심하지 않다는 말도 진심일 것이다. 녀석이 연방 웃음을 흘리며 내 배꼽을 건드리는 걸 보면. 

“사실은 지금 너랑 있는 게 기분이 이상해.”

“뭐가 이상해?”

“왜 갑자기 날 찾아왔는지, 왜 오늘따라 가만히 있는 건지, 희승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뭐, 그런 생각들 때문에 좀 복잡하다고 할까. 나 혼자 들떠서 마냥 좋아하면 바보 같잖아.”

미승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내 머릿속에 딱히 생각 같은 게 들어있진 않았다. 해골복잡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여길 온 게 아니었으니까.

“너랑 이렇게 둘이 있어 보는 게 얼마만일까. 아니, 신경 곤두세우지 않고 널 편하게 대한 적이 언제였지?”

“나도 모르겠다. 너랑은 편했던 적이 거의 없어서.”

“맞아. 거의 없다.”

나는 가슴을 들썩이고 미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를 흘렸다. 하나도 기쁘지 않은, 장난이 될 수도 없는 기억들을 차마 쏟지도 담지도 못하고 우울한 농담을 넘기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땐 말이야…….”

소리 나지 않는 웃음들이 멈췄을 때 미승은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내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얹고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바라는 건 크지 않았을 거야. 기껏해야 어린애다운 욕심뿐이었어. 학교랑 집이랑 함께 붙어 다니고, 손잡고 걷고, 누가 봐도 제일 친한 친구들처럼 남들에게도 보여지는… 그 정도였겠지. 그리고 내가 널 특별히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날 특별하게 생각해주길 바라는 욕심이 컸어.”

아무렴. 그 정도였어야지. 아홉 살짜리가 처음부터 친구를 상대로 음란한 마음을 품었다면 정신병원에 갔어야 할 문제다. 물론 예전의 내 마음은 저 놈이 정신병원에 쳐 박히길 바라기도 했었지만. 

“그런데 너랑만 친하게 지내려고 내가 유난을 떨수록, 넌 질색을 하고, 날 무서워하면서 피하고. 그럴수록 난 널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안달을 치고…….”

“그 얘기, 안 하면 안 되?”

“듣기 불편해서?”

“조금.”

“그래도 들어.”

“…….”

“변명하려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잘못 했다고 생각해. 그런 식으로 널 괴롭히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너나 나한테 나았을 텐데. 내 지독한 아집이 우릴 다 망가뜨렸어. 진심으로 너한테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녀석이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저런 소릴 듣는 난 어찌해야 하지……? 

지금에 와서 내게 필요한 알약은 미승이의 사과가 아니었다. 미승에 대해선 과거에 대한 미움보다 크게 덩어리지는 또 다른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너랑 있으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만약 나한테 네가 특별하지 않은 친구, 그냥 보통 친구였더라면, 오늘 같은 밤에 우린 뭘 하고 놀고 있을까…….”

우리가 만약 특별하지 않은 친구, 그냥 보통 친구였더라면, 지금 우리는 무얼 하며 놀고 있을까. 어떤 수다랑 농담을 나누며 깔깔거리고 있을까. 만약 우리가 그랬더라면… 각자 이런 상상을 하며 궁상맞은 슬픔을 삼키고 있진 않겠지.

“…지금은 뭘 하고 싶은데?”

“말 하면 하게 해 줄 거야?”

“아니.”

“그러면서 왜 물어.”

“네가 싫어하는 짓 안 하니까, 겁먹지 마.”

“누가 겁먹었다고 그래?”

“넌 눈이 항상 겁먹은 소 같애.”

항상 이놈의 눈이 말썽이지. 누구라도 정희승을 만만하게 여겨주는 심벌이니 말이다.

“어릴 땐 이렇게까지 우울하게 생기진 않았는데. 나 때문이야?”

고개를 가로 저은 건, 눈시울을 일그러뜨린 건, 내 의지를 배신하고 얼떨결에 떨어져 나온 꼬투리였다. “그래. 어쩔래?” 하고 시선을 피해버린 것도 서투른 방어였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희승이 너… 또 뭐가 있는 거야?”

미승인 그 짧은 동요를 놓치지 않고 꼬투리를 붙잡았다. 

“…뭐가?” 

“내가 모르는 일 있는 거 아니야?”

“…없어. 그런 일.”

“믿을 수 없어.”

턱을 내 무릎 위에 괴이고 중얼거리는 녀석의 시선은 내 얼굴을 향해 뚫어지게 박혀있었다. 

“못 믿으면 어쩔 건데. … 사람이 어떻게 남의 일을 다 알려고 하냐. 모르는 것도 있는 거지.”

“난 그런 거 싫어.”

그런 거 싫으면 어쩔 건데? 네가 애냐?

“너에 대해 다 알아야 돼. 알고 싶은 게 아니더라도 알아야 돼.”

진지했다. 녀석은. 너무 너무 진지했다. 나의 박기수 울렁증을 가라앉힐 만큼.

“너 혼자 나 모르는 고민거리 갖고 있지 마. 그런 게 있으면 나도 같이 고민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난 다 알아야 돼. 너에 관해선 전부―.”

“그게 네가 생각하는 우정이냐?”

“좋을 대로 생각해.”

몸을 웅크리고 팔에 오돌오돌 솟아난 닭살을 문질렀다. 열대야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실내 온도가 체온까지 싸늘하게 식혔다. 

“이제 에어컨 꺼도 되겠다.”

“춥냐?”

“응.”

추우니까 에어컨 끄랬지 누가 안아 달래냐!? 나보다 조금 넓고 많이 긴 체격이 덮치듯이 푹 감싸 안고 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제대로 가로막히긴 했다.

“에어컨 끄라구.”

“조금 이따 끌게.”

식었던 체온이 빠르게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의 과거가 빠르게 회복될 길도 있을까? 아니, 그런 건 없겠지. 

실상, 우리만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이 가장 참담한 진실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한 알의 치유제가 아니다. 내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큰 용서. 그것만큼 구하기 힘든 건 없었다. 하지만, 어떠한 약발도 듣지 않을 구제불능의 침체로 치닫는 내 본 모습을 미승인 모르겠지. 

그래도… 나는…….

‘넌 이쁘지도 않은데, 왠지…….’

언젠가 미승이가 저런 소릴 하다 만 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인 걸로 기억된다. 내가 녀석을 몹시 싫어하던 무렵, 내 기분은 아랑곳없이 녀석이 날 몹시도 괴롭히던 시절에 말이다. 그때 녀석이 하다 말던 뒷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내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누가 보더라도 난 예쁘지 않았다. 고추 달고 난 남자애로써 ‘예쁘다’ 소리 들어봐야 시다울 건덕지도 없었다. 그래도 ‘왠지…’뒤에 따라 붙을만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 건 내 얼굴의 장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아니라, 몹쓸 과거들을 돌이켜보며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날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에 말했듯, 난 그야말로 백치미를 타고 난 아이였다. 그만큼 심신이 고생을 했는데도, 약은 기색이 따라 붙기는커녕, 아방함만 불거진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큰 변화 없이 예나 지금이나 꺼벙하고 숭늉 같은 외양이라고 혼자서 생각하곤 하는데, 어째 갈수록 같은 사내 녀석들에게서 어줍잖은 보호본능이 아니면, 갈굼의 본능을 뽑아내는 체질이 된 거다. 그러니 미승이가 걱정스럽게 생겼다고 할만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새로 사귀고 가까이 지낸 대부분의 녀석들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나도 안다. 알고는 있는데―.

“그 얼굴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왜 또.”

“눈에 힘 주고 다녀. 맹하게 힘 풀린 표정 하지 말고. 그러고 다니니까 개나 소나 너한테 개기는 거 아냐.” 

새 운동화를 사려고 시내에 나왔다가 길을 걸을 때마다 미승이만 주시하고 한 번씩은 더 돌아보는 여자애들,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눈길을 줬다간 풋 하고 웃어버리는―여자애들 때문에 기분도 유쾌하지 못한 참이다. 조금 전에는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신호등도 바뀌기 전에 급하게 달려오던 녀석이 어깨를 부딪혀 놓고는 적반하장으로 나한테 눈을 흘기며 “씨ㅂ…” 하고 내뱉으려다 “야! 뭐라 그랬냐!?” 하고 댑따 위협적으로 일갈한 미승이 자식 때문에 냉큼 기세를 죽이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것 때문인지 또 내 얼굴이 맹하다는 둥, 아무나 개긴다는 둥 귀찮은 참견을 하는 류미승이었다. 그렇잖아도 남들이 맹물로 봐서 나도 속상한 얼굴인데 말이다. 

“왜 자꾸 남의 얼굴 갖고 시비야. 넌 얼굴에 자신 있다 이거냐!?”

“엉뚱한 소릴 하고 그래.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내가 있을 땐 괜찮지만, 너 나 없으면 어떡할래? 너한테 집적거리는 자식들 앞에서 만날 그렇게 약해 보이는 얼굴만 하고 있을 거야?”

“별 걱정을 다 하네. 나한테 집적거리는 건 네 놈밖에 없거든.”

“웃기지 마. 그럼 이태수나 장재만 자식들은 뭔데? 그 자식들이 너한테 집적거리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냐?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 넌 신용을 잃었어.”

별걸로 다 신용 타령을 한다. 물론, 내가 아주 결백하다고 우길 자신은 없어서 한숨이 폭 나오지만. 그리고 진짜로 화난 얼굴을 한 미승이 때문에 할 말도 잃었지만.

“너한테 화내는 거 아냐. 그렇지만 다른 녀석들 앞에서 그런 얼굴 하지 마, 내가 매일 너 쫓아다니면서 감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원체 이리 생겨먹은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놈은 어떻게 생겨먹은 뇌를 가지고 있길래 이딴 걸로 사람을 볶아대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네가 뭔데 그딴 참견을 하냐?”

“뭐긴. 너의 베스트 프렌드지. 네가 잠꼬대로 불러대고 막 껴안아대는 베스트 프렌드.” 

다시 웃고 있는 이 뻥쟁이는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내가 잠결에 제 놈의 이름을 부르며 마구 껴안고 몸부림을 쳤다고 우기고 있었다. 100% 자신할 순 없지만, 거의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희승이 너, 나 좋아하지?”

녀석의 엉뚱한 자신감을 무시하고 땅만 보고 걸었다. 옆에서 킥킥대는 게 신경 쓰였지만 고개는 땅만 헤치듯이 내려갔다.

“하여간… 여전해.”

“뭐가?”

“아니다.”

잠시 녀석을 올려다보느라 이번에도 미처 앞에서 사람이 오는 걸 보지 못했다. 어깨를 부딪친 것도 아니고, 몇 걸음 앞에서 “어머” 하고 가로막힌 진로에 당황함을 외치는 여자애를 보기도 전이었다. 

“미안.”

미승이가 내 어깨를 당기면서 여자애한테 가볍게 사과를 했다.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하고 가는 여자애를 돌아보니, 그 애도 가다 말고 미승이 뒤통수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랑 눈이 마주치니까 고개를 팽 돌리고 가버린다. 

“넌 어째 여자애들만 보면 사람 좋은 척을 하냐?”

괜스리 심통스럽게 내뱉었다. 어째서 여자애들은 날 우습게 보는 걸까. 미승이 놈은 얼굴밖엔 봐 줄게 없는데… 라고 하기엔 내겐 딱히 내세울 만한 장점이 없다는 게 유감이었다.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닐 때나 버스에 탈 때마다 다양한 치마교복들이 죄다 한 번씩은 그를 힐끔거리고 저들끼리 실실대고 조잘거리는 걸 숱하게도 봐왔지만, 오늘은 어쩐지 심술이 났다. 

“난 저런 여자애들이 이해가 안 돼. 네 본성을 알면 다들 정 떨어질 텐데.”

“훗, 그런가?”

훗, 그런가아!? 뭐야, 그 자신만만한 웃음은? 

“사람 얼굴만 보고 사는 애들은 멍청해.”

“여자들은 착한 남자보다 나쁜 남자한테 끌린다잖아.”

“그게 뭐야? 여자들은 성격 좋은 남자를 좋아한댔어.”

“얘가 몰라도 한참 모르네. 그건 나이 든 여자들이 데리고 살 남자 고를 때나 하는 얘기야. 우리 또래 애들 모아놓고 물어봐라. 성격 좋은 놈이랑 겉만 번지르르 한 놈이랑 누굴 택할지. 하긴, 네가 여자애를 상대해봤어야 알지. 남자만 상대하니까…….”

자신 있게 떠들던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내 눈을 피해 돌아간 녀석의 고개를 보았을 때, 하다 만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거다. 학교에서의 내가 녀석의 사각 지대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박기수를 혐오하고, 류미승을 증오했던 내가, 어떤 상태로 다른 녀석들과 지냈는지. 왜 여자애를 사귀지 못하는 건지.

“팔 내려.”

미승의 팔이 여전히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내리란다고 내릴 놈이 아닐 줄은 알았지만, 난 조금 화가 났다.

“너, 이태수랑 강재만 일 캐묻고 싶지 않아?”

“됐어. 걔들이랑은 별 일 없었을 테니까.”

“정말 그렇게 믿는 거야?”

“뭔가 더 있더라도… 알았다간 견디기 힘들 것 같아. 지금은 너랑 분위기 흐리기 싫어.”

숙여진 미승이의 아래 눈두덩이 찌푸려지는 걸 보면서, 이 녀석이 잘 생기긴 겁나게 잘 생겼구나―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도 고작 이딴 생각이나 들다니……. 

나는 아까부터 중학교 때부터 미승이가 사귀었던 여자애들이 문득 생각나고 있었다. 한 번은 그 여자애를 마을까지 데려와서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자기 친구라고 소개하고 여자애 앞에서 나를 하찮게 대한 적도 있었다. 그 여자애는 얼굴은 예쁘지만 성격이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미승이랑 덩달아서 나를 제 남자친구의 꼬봉이 취급했다. 게다가 여자애가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싶다고 아양방정을 떨어대서 류미승이 나한테 갖은 잔심부름을 다 시켰었다. 모로 보나 얄미운 류미승의 여자 친구를 위해서, 나는 백반을 사다가 꽃방아를 찧고 엄마의 바느질 바구니에서 실을 꺼내가서 여자애 손가락을 죄다 실로 묶어주는 작업까지 해야 했었다. 그때는 허탈하고 한심한 기분만 들었던 일이, 이제 와서 새삼 발끈 화가 날 줄은 몰랐다. 

“별 일 있었다면 어쩔 건데?”

“뭐가?”

“태수나 재만이가 나한테 꽤 잘 해 주거든. 주먹질 밖에 모르는 녀석들이 네 말마따나 맹하고 만만한 나한테 잘 해주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지금 나한테 화났냐?” 

내 말을 어떻게 곱씹었는지, 미승인 잠시 침묵하다가 억지로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없는 얘기 지어내는 거 같애?”

그러나 이내 창백하게 지워진 웃음의 자리에 찾아온 침묵. 

결국 운동화는 사지 못했다. 그 후로 서먹하게 빙빙 걷다가 눈앞에 보이는 아무 매장으로 들어가 신발을 골라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 행동 같으면 성가시리만치 끼어들어서 옆에서 운동화를 골라주었을 녀석이 묵묵히 뒤따라오기만 했지 가게 안에선 참견하지도 않고 멀찍이 떨어져 남처럼 쌩뚱맞게 구니까, 그건 그거대로 참기 힘들었다. 내가 눈치꾸러기가 되어 버렸다. 두 번째 세 번째 가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게 점원이 와서 무얼 찾느냐고, 요즘 이런 게 잘 나간다고 자꾸만 운동화를 꺼내 주며 신어보라고 권하는 동안 난 입구에만 묵묵히 돌아서 있는 미승이 녀석이 신경 쓰여서 한 켤레도 신어보지 못하고 시간만 끌다가 나와 버렸다. 

“왜 안 사?”

미승이가 입을 연 게 백년 만인 것 같았다. 고작 삼십 분도 안되었는데 난 그의 침묵이 이만큼이나 길고 무거울 줄 몰랐다. 내가 이만큼 녀석을 주의에 담고 있게 된 것도.

“…아까 한 말 농담이야.”

“뭐가?”

내 말 뜻 알아들으면서 저렇게 묻다니. 의심을 지우지 못한 눈은 유심히 캐묻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기색이 얄밉도록 능청스러웠다.

“이태수랑 강재만 얘기 말이야. 난 힘이 약해서 그냥 걔들 꼬붕 하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지만 내 말을 믿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신용을 잃었다잖는가. 아무튼 녀석은 겨우 웃음을 보였다.

“내가 신발 사러 자주 가는 가게 있는데, 거기 가 볼래? 너도 보면 마음에 들 거야. 지석이도 거기 게 발이 제일 편하다고 좋아하더라.”

미승이랑 한지석이 신고 다니는 운동화는 나도 육상 하던 시절에 딱 한번 사 신어본 적 있는 메이커였다. 모양도 멋지고 발도 가볍고 편한, 좋은 운동화인 줄 알지만 나처럼 서민적인 학생이 사 신기에는 너무 비싼 게 흠이었다. 멋 낼 구석이 없는 나조차도 좋은 운동화에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만, 집착은 없어서 못 가지는 아쉬움에 안달 부릴 일은 없었다. 좋은 운동화를 신는다고 내 발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이렇게 편한 점도 있었다. 

“운동화는 다음에. 점심이나 먹고 들어가자.”

미승이 기분도 더 달래줄 겸―실은 엄한 소리 해 놓은 게 괜스레 미안해서―운동화 값을 쪼개서 점심을 사기로 했다. 

매장에서 사 온 포도 주스가 큰 유리잔 안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부어져 있었다. 내가 물을 마실 때 잘 흘린다는 이유로 빨대까지 꽂아 온 미승이 자식의 핑계는 그럴 듯 한데, 어째서 자기 것까지 빨대를 꽂아 왔는지는 영문을 모를 일이다. 어쨌건, 빛깔 좋게 부어진 음료수의 탄산 알갱이가 얼음 위로 뽀로록 올라가는 모양이 그럴싸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예전에 엄마랑 시내에 나왔다가 날이 덥고 목이 말라서 엄마가 큰 맘 먹고 카페에 데려가서 사 줬던 주스랑 똑같은 맛이라는 걸 알았다. 그날 한 잔의 음료수를 나랑 엄마랑 반씩 나눠 마시고 나오면서, 엄마가 “무슨 음료수 한 잔에 오천 원 씩이나 한 대니? 가겟집에서 천원이면 사이다 커다란 거 한 병으로 떡을 치는데.”라는 현실적인 계산을 날리며 다시는 비싼 카페에 갈 일 없다고 다짐을 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네 가게에선 팔지도 않는, 이름도 모르던 음료수 맛을 난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고 유리컵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뭘?”

“이태수랑, 강재만. 네 입으로 걔들 얘기 꺼낸 거 처음이잖아. 너 아까 일부러 그 자식들 얘기 한 거지?”

“일부러? 내가 왜?”

“질투한 거 아냐? 나한테. 그래서 내가 너 질투하게 하려고 그 소리 한 거지?”

집요한 놈은 여태껏 그 생각을 곰곰이 씹고 있었나 보다. 내가 왜 그런 소릴 했는지 이유를 캐내려고 되씹고 되씹은 끝에 결국 찾아낸 답이 내가 저를 질투해서, 저도 날 질투하게 하려고―였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흥, 웃기시네.”

“질투했구나.”

“아냐.”

“근데 왜 성질을 내고 그래? 진짠가보지?”

“아니라니까아―!”

좋다고 까르륵 거리는 녀석이 꼴보기 싫어서 발바닥으로 등을 퍽퍽 때렸더니 “알았어. 알았으니까, 발작 좀 하지 마. 주스 쏟아져!” 하며 내 발을 잡아챘다. 발 옆에 아슬아슬한 위치에 주스 컵이 놓인 걸 알고 발을 내렸더니 미승이 자식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이러면서 또 내 속을 긁는 것이다. 진짜로 사람 피곤하게 하는 녀석이었다. 

“너 말이야, 예전 여자 친구들은 다 어쨌냐? 그리고 요샌 아무도 안 사귀냐?”

내친김에 나도 녀석을 갈궈 보기로 했다.

“여자 친구라니?”

“예전에 너 여자애들이랑 많이 사귀었잖아. 6학년 때부터 연상이랑 사귀고 중학교때도 여자애들이 끊이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사귀긴 뭘 사귀어. 여자 친구 둔 적이 없는 걸.”

세상 영문 모르겠다는 저 표정. 진짜 대단하다. 시치미를 떼려면 저 정도는 되야지, 암―.

“사귄 거 아니면!? 놀다 버린 거냐?”

“놀다 버린 적도 없는데. 넌 도대체 날 어떤 놈으로 보는 거냐.”

“예전에 너 우리 동네에 여자 친구 데려와서 걔 봉숭아 물 들인다고 나 꼬붕이 노릇 시킨 적도 있었잖아. 기억 안 나냐?”

“기억 안 나는데.”

우아, 기막힌 놈!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고!?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내 눈을 피해서 주스를 마시는 꼴을 보니 확실히 놈도 기억하고 있다.

“너한테 누굴 보였건 간에 내가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애는 없었을 텐데. 그냥 친구라고만 하지 않았겠냐? 여자 친구라고만.”

저걸 핑계라고―! 여자친구랑 여자 친구랑 다르다? 그래서 첫사랑 성취를 기원하는 의미로 보란듯이 제 녀석 앞에서 봉숭아 꽃물을 들이던 여자애를 여자 친구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이거냐! 게다가 녀석에게 뜨거운 눈길로 따라붙는 여자애를 걔 말고도 몇 명 더 데리고 다녔던 걸로 아는데. 류미승과 사귄다던 여자애들 소문은 다 뭐였냐고!

“그 여자들도 너랑 똑같이 생각할까? 그래서 너랑 사귀었단 여자애들 입소문이 그렇게 파다하게 도냐?”

“멋대로들 생각하라지. 난 사귄다고 생각한 적 없으니까. 내가 언제 지들한데 사귀자고 했나? 내가 건드린 것도 아니고, 지들이 해 달라고 달라붙어서 키스해 달래서 해 주고, 손 잡아 달래서 손 잡아준 것 뿐인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게 어딨냐!?”

녀석이 손가락으로 제 가슴 쪽을 가리키며 “여기―.” 하고 유들거리는데 악다구니가 나왔다. ‘야, 이 파렴치한 놈아!’ 하고 소리칠 뻔 했다. 여자애들이랑 사귀는 척 해 놓고, 그 애들한테 사귄다는 기대감도 심어 줘 놓고, 저 혼자 아니라고 발뺌하면 그만인가?

“너, 존나 뻔뻔하다.”

기어이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신체 접촉에 대해 자연스럽고 게다가 집착도 가지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어릴 때도 그러더니만 여자애들한테도 그렇게 지조 없이 굴었냐."

“뭐가? 사귄 것도 아니고 별로 한 짓도 없어. 그런데 왜 지조니 뭐니 사람을 타박하는데? 넌 꼭 내가 걔들이랑 뭔 짓을 했길 바라는 거 같다?”

“무책임하구나.”

“무책임? 괜히 엉뚱한 사람 잡고 책임 씌우지 마. 걔들이 보는 진심과 내가 보는 진심이 다른 것뿐이니까.”

정색을 하고 덤비는 말이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모양이다.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기껏 한다는 농담이,

“아, 그래도 너라면 사귀어 줄 수 있는데. 어때?”

“웃기고 자빠졌네!”

힘만 된다면 주먹으로 녀석을 때렸을 거다. 진심이라는 단어까지 들먹이며 독선적인 망발을 앞세우는 미승이는 어지간히도 대단해보였다. 한편으론, 녀석이 저대로 크다 보면 나중에 혼인 빙자 간음 내지는 사기죄로 걸려드는 꼴을 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류미승.”

“응?”

“너 이담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나? 네 신랑.”

녀석은 얄밉도록 주스를 쪼로록 빨아먹으며 빙글 웃었다. 

“미친놈!”

“얏, 농담이니까 때리지 마.”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녀석의 머리통을 두들기자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엄살떠는 시늉을 하며 “항복! 항복!” 하면서 하지만 입이랑 다르게 신나게 깔깔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웃음을 멈춘 녀석이 양팔로 내 허리를 감고 갑자기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미승의 얼굴이 배 앞에, 웃옷이 살짝 걷혀 올라간 맨 살에 닿아 배꼽에 미지근한 입김이 묻어나고 있었다. 

“류미승, 빨리 나와. 내 배에다 숨쉬기 그만하고.”

“…….”

“머저리 같은 놈. 빨리 안 나와?”

움직이는 입술이 배꼽에 닿아 적나라한 입김을 불어넣더니 숨쉬기 대신 티를 물고 위로 올리는 것을 저지하고 녀석의 머리를 떼내려 하자 외려 내 어깨가 뒤로 밀렸다. 하지만 어느새 등 뒤에 온 손에 받혀져 뒤로 넘어지는 불상사는 면하고 대신 어중간한 각도로 등을 기울인 채, 앉지도 눕지도 못한 자세가 되었다. 

순식간에 티를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온 머리통이 배꼽에 숨을 내뿜으며 자꾸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입술이 배를 훑어가고 뜨거운 혀가 가슴으로 올라와 심장을 덮은 살갗을 훑어댔다. 이 기묘한 행위들 속에서 찾아지는 건 미승의 그악스런 집착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음에도, 난 저항은 고사하고 외려 녀석의 다음 말고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 미승을 이토록 변덕스럽게 하는지, 조급하게 하는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류미승을 참아내게 하는지―. 

“…난 말이지… 질투가 아니었어. 질투 같은 아기자기한 감정 따위 개나 주라지. 그 따위 여유 없어 난……. 사실은 아까 화가 치밀어서 다 죽여 버리고 싶었어. 돌아버릴 것 같아서…….”

배아래서 중얼거리는 말이 울릴 때마다 뜨거운 고동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치만… 네가 아무 일 없었다고 하니까, 그냥 믿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널 믿게 해줘.”

“…….” 

느낄 수 있었다. 미승이 무엇으로 인해 화내는 건지. 그것은 재만이나 태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일그러진 추억의 와전이었다. 내 증오가 뒤틀렸듯, 미승에게도 뒤틀린 증오가 있었다. 하지만, 손 쓸 수 없이 흘러가버린 기억들이기에 우리는 각자가 다른 이유를 안고 먹먹했다. 숨죽이듯 가만히 엎어져 숨만 뿜어내는 녀석을 나도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1초 1초가 지날수록 자꾸만 가슴이 답답해져서 1분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잠시 후 고개를 치켜든 미승이의 눈이 젖어있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뜨뜻한 입김에 젖어든 배꼽의 눅눅함이, 입술의 축축함이 가슴으로 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아마도 그래서 녀석이 그리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엎어져서 내 허리를 감고 머리통을 묻은 녀석을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희승아. 날 좋아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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