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7)

교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노랬다. 교목들이 짙은 신록을 뻗어가는데도 태양이 너무 가까워서 하늘은 맑다 못해 노랗게 보였다. 여름이 익어가는 만큼 방학도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신나하지 않았다. 나른하고 끈적이는 더위 속에서도 학교는 냉방비 절약을 위해 비싼 돈 들여 설치한 에어컨을 한가하게 놀리고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선풍기 바람만 이리저리 훈기를 몰고 다녔다. 점심시간 종이 울려도 환호성이 날아다니지 않았다. 숟가락 들기조차 귀찮아서 책상위에 엎어져 자는 애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재만이들만 팔팔하게 살아서 까불고 있었다. 

“근육하면 뭐니 뭐니 해도 괄약근이지.”

“괄약근? 그게 어디 붙은 근육이냐?”

“무식한 새끼, 괄약근 처음 들어 봤냐? 거시기에 붙어있는 근육 말이다. 거시기.”

처음엔 팔뚝과 허벅지를 걷어 부치고서 올망졸망한 근육들을 견주던 녀석들의 뽐내기는 어느새 후줄근한 농담을 펼치기로 가고 있었다. 주범은 역시 강재만이었다.

“정확히는 거시기랑 똥꼬에서 수축 운동하는 고리모양 근육이지.”

“태수 자식은 아는 것도 많아.”

“당근이지. 자고로 거기가 발달해야 사람이 살 맛 나는 거야.”

“변비에는 괄약근 운동이 최고라던데.”

“변비뿐이냐? 그 짓 할 때도 괄약근이 발달하면 더 좋대.”

듣는 애들 귀도 생각 안 하고 주책맞게 떠들어대는 재만이 패거리들의 소음은 들을수록 거북했다.

“근데 그게 믿을 만한 소리냐?”

“그렇다니까. 전에 육상부였던 여자애랑 해봤는데 아주 죽이는 맛이더라고.”

과연 재만이는 빠지지 않고 나섰다. 진짜로 육상부 여자애랑 해봤는지 아니면 들은 얘기를 제 경험인양 구라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이는 맛?”

“조임이 대단하다는 거지. 처녀인데다가, 육상 하느라 괄약근이 어찌나 발달했는지, 하다가 죽는 줄 알았다니까. 얼마나 꽉 쪼이는지 거시기가 끊어지는 줄 알았어.”

“우하하, 말 되네. 꼬추가 숨막혀서 죽거나, 끊어져서 죽거나 어쨌건 죽을 맛이 되는 건 맞다.”

“그러고 보니까 희승이도 중학교 때 육상 했었지?”

“뭐? 정희승도 육상 했었어?”

“모르냐? 작년에 체육대회 할 때 희승이가 우리 반 계주 4번 주자로 나갔었잖아. 그때 이자식이 마지막에 다른 반 녀석들 다 따라잡아서 우리 반이 1등 했었잖아.”

정규 시합에선 성적 못 내도 학교 내에서 기록 안 재고 뛰는 결과는 나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도 분위기에 따라서다. 대화의 흐름상 절대로 상큼한 이야기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우어, 제법이네―.”라는 감탄의 눈길을 받는 건 잠시 잠깐, 쌩뚱한 화제의 빌미가 된 건 짐작대로였다.

“오이, 그럼 정희승 너도 잘 알겠다, 그치?”

바보들. 알긴 뭘 알아!?

“쟤도 육상했으니까, 거기가 잘 발달했겠네. 괄약근인지 뭔지가.”

“얌마, 희승이는 왜 끌어들이냐? 쟨 남잔데.”

“그래, 빙신아, 여자도 아닌데 거기 발달해서 좋아할 게 있냐? 변비에나 좋을진 몰라도.”

듣기 싫은 소리들이 질기게, 괄약근보다 질기게 따라붙는 동안 난 똥씹은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차창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내 정수리를 데워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중엔 질끈 눈 감고 책상 위로얼굴을 파묻어버렸다. 교실로 들어온 미승이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는 것도 알았지만 거기까진 관심도 가지 않았다.

“왜? 남자들끼리도 하잖아. 뒤로다. 여자랑 하는 것도 앞보다 뒤로 하는 게 더 죽인다더라.”

“우아, 거기는 드럽잖아!”

“드럽긴 뭐가! 좋기만 하다던데.”

“푸핫! 그럼 희승이도… 끄악……!”

비명과 동시에 우장창, 시끄럽고 둔탁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 뿐 아니라 자다 깬 아이들까지 뒷자리를 돌아보았을 땐 재만이랑 모여 떠들던 한 녀석이 의자가 동시에 교실 바닥에 넘어져 뒹굴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승이가 재만이의 의자랑 책상까지 걷어차고 있었다. 미승이의 다리가 의자다리를 걷어찬 게 한순간이었는데, 그 장면을 목격할 때만 해도 길고 슬림한 다리에서 오는 충격이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씹! 류미승. 너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재만이가 벌떡 일어서서 류미승에게 맞장 뜰 듯이 덤비는데, 다른 아이들은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반면, 나는 눈앞이 노래졌다. 류미승, 어쩌자고 끼어든 거냐!

“니가 뭔……!”

재만이는 말도 잇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미승이가 열나게 패고 있었다. 재만이가 교실 바닥을 구르고 엉망이 되고 있었다. 

오오… 필승 류미승. 

내가 재만이 대신 까무러치고 싶었다.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비명 소리가 나왔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땐 미승이가 주먹질을 멈추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길게 느껴지는 한 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나를 알아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진 않았던 걸까. 아니면 벌레만한 소리를 낸 걸 미승이만 들었던 걸까. 교실에는 느닷없는 소동의 잔 흥분과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미승이는 그 길로 교실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말릴 틈도 없이 재만이를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재만아, 괜찮냐? 미승이 저 새끼 잡아올까?”

“미승이 새끼 미친 거 아냐? 지가 뭔데 재만이를 패?”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리고 재만이를 왜 팬 거래?”

“그러게. 근데 쫌 무섭긴 하더라.”

“다들 입 닥쳐! 씨발… 미승이 자식 그냥 두나 봐라.”

반격을 못 한 게 억울한지, 맞아서 힘든 건지, 씩씩거리는 재만이의 표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기운만 차리면 당장이라도 미승이를 찾아내서 아작 낼 기세였다. 

“가만두지 않으면. 네가 어쩔 건데?”

상관없는 반 애들까지 움츠러들 만큼 험악한 재만이 앞에 강짜를 놓는 건, 멀찍이서 사태를 관망하던 한지석이었다. 나서는 타이밍이 제법이었다.

“늬들 더위 먹었냐? 아무리 심심한 사내자식들끼리 모여 노닥거린다지만, 할 소리 못 할 소리가 있다. 교실에서 풍기문란 조장하지 마라.”

자못 의젓하게 충고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지금 재만이에겐 곱게 들릴 리가 없는데.

“넌 뭐야, 지금 우리한테 선도하냐? 반장이라고 위세 떠냐?”

재만이의 친구 녀석이 대신 대들고 나섰는데도 한지석은 들은 척도 안하고 외면해버렸다. 보기에도 밉살맞은 태도로. 그리고는 내 자리쪽으로 오더니 냉한 눈초리로 나지막하게 말을 던졌다. 

“정희승, 너도 저딴 소리들 듣고 멍청하게 있을 게 아니라, 네가 알아서 처신해야 되는 거 아냐?”

마치, 이 모든 사태가 나 때문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언짢았다. 한지석은 미승이를 걱정하고 그 때문에 나한테 불쾌해서 한 말이겠지만, 나 역시 한지석의 말투가 기분 나빴다. 미승이가 과도하게 난리 친 걸로 왜 내가 핀잔을 들어야 하는지…….

어디론가 나가는 재만이를 따라 교실을 나갔다. 재만이는 화장실에 가자마자 세면대에서 물을 콸콸 틀어놓고 피 터진 얼굴을 씻었다. 심란했다. 바닥에 구르고 피가 군데군데 묻어 지저분해진 녀석의 교복이 눈에 들어와 나도 옆자리 수도를 틀고 손을 적셔 대충이라도 녀석의 옷을 닦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닿자마자 거칠게 내뿌리치는 팔에 턱만 맞았다. 

“뭐야!”

“나야. … 넘어진 데 괜찮아?”

“씨발. 내가 넘어진 걸로 보이냐? 아까 반애들 다 보는 데서 뒤지게 맞는 꼴 못 봤어?”

“…….”

“류미승 그 새끼, 너 때문에 날 팬 거냐?”

“…몰라. 아닐 거야.”

“그럼 한지석이 한 얘긴 뭐야?”

“알 게 뭐야.”

치졸한 발뺌이었다. 아니면 달리 무슨 설명을 하겠는가. 아무래도 미승이가 나 때문에 널 팬 것 같다고? 나조차도 인정하기 싫은 얘길 너한테 변명이랍시고 해야 되겠냐? 

“나중에 그 새끼 손 봐둬야겠어.”

“그러지 마.”

“정희승, 지금 그 새끼 편드는 거냐?”

“그게 아니라, 미승이 걔가 3학년 해진이 선배를 뒤에 업고 있잖는 거 너도 알 거 아냐. 그래서 이태수도 걜 못 건드린다며.”

“하! 그래서? 선배 빽 업고 있는 놈 겁나서 그 새끼 하나 해치우지 못할까봐? 아까 미승이 새끼가 날 패면서 뭐라고 씨부렁거렸는 줄 알아? 날 죽여 놓겠단다.”

“죽인다 소린 너도 아무 때나 하잖아.”

“농담이 아니라, 그 새끼 진짜 사람 죽일 것 같이 노려보던데.”

“그래 뵈도 미승이가 사람 해치진 않는 녀석이야. 아무튼 미안.”

“왜 니가 사과해!? 진짜 열받네!”

“…….”

“내가 그 자식보다 너랑 친하잖아. 그러니까 내 편 할 거지?”

또 나왔다. 지긋지긋한 편 나누기. 나, 박쥐 정희승은 누구 편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않을 거란 말이다 이 빠가야! 그만큼 지내보고도 모르겠냐? 정말이지… 너무 피곤했다. 내 인간관계는 온통 몹쓸 관계들이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인간이 없었다. 나 자신도.

“난… 누구 편도 아니야.”

“무슨 뜻이냐?”

재만이가 화를 내면 화를 받고, 때리면 맞을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너든 이태수든… 미승이든… 이제 다 싫어. 전부 귀찮아.”

뭔가 거친 행동력으로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던 재만이는 뜻밖에도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란 얼굴만 하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건강한 녀석이었다. 난 나른한 눈을 비비며 복도를 걸었다. 나는… 너무 덥고, 지치고, 우울했다. 더위가 나를 침체시킨 게 아니었다. 내 우울이 더위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찾아간 작은 교정의 음지에서 미승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여기로 올 줄 알았어.”

산갈나무 아래에 앉아 옆 자리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벤치는 굵은 나무둥치와 무성한 잎으로 진 그늘에 짙은 이끼 냄새가 풍길 듯한 음지의 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석고상처럼 우뚝이 서서 부연 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오도가도 하지 않았다. 미승이와 나의 시선은 목석처럼 굳은 채 멀리 닿아 현실감을 투과하는 시간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승이가 먼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녀석에게 걷어차이고 얻어맞던 재만이의 모습이 나로 대치되어갔다. 미승이가 아까 휘둘렀던 난폭한 행태로 보아선 나한테도 거칠게 앙심을 풀 거라고. 그리 생각했는데… 

“덥다. 그치?”

…전연 그렇지 않았다. 

“배고프다. 너도 배고프지? 밖에 나갈까?”

어이없게도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쌩뚱맞게 상냥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게 날 얼마나 우습게 하는지…….

“너 귀찮아.”

들릴 듯 말듯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가자.” 

“너 귀찮다고!”

“언제는 네가 날 안 귀찮아했냐?”

못들은 척 웃으면서 어깨를 두르는 미승의 팔을 뿌리쳤다. 녀석의 억지웃음은 간당간당 걸려있었다. 찌푸림을 간신히 참고서.

“알고는 있었냐? 너 귀찮은 놈인 거?”

“알아. 알았으니까 나가자.”

“근데 아까는 뭐야. 누가 너더러 끼어들래? 왜 쓸데없이 참견이야? 네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왜 상관없어?”

“넌 아무것도 아니니까! 친구도 뭣도 아니야!”

“그만해, 정희승.” 

순식간에 하복의 얇은 겹 안으로 어깨를 짖누르듯 손가락들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깊이 갈고리처럼 박혀든 것은 억지나마의 웃음조차 지우고 싸늘한 흥분을 비추는 눈이었다, 도무지 대서기도 외면하기도 힘든 저 눈―.

“네가 이런다고 우리가 상관이 없어질 것 같아?”

“이거 놔!”

“어떻게 그런 말이 쉽게 나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리가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그런데도 네 기분에 따라 단박에 끊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미 끝난 거야. 내가 끝냈으니까! 나한텐 그럴 권리가 있어!”

“권리 좋아하시네! 이래서 넌 이기적인거야, 정희승. 넌 항상 자기만 소중하지. 자기감정만 무겁지! 네가 나한테 양보한 적 있어? 날 위해서 참아본 적 있어? 내 기분 알면서도 아는 척도 안했잖아!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넌 아무것도 진심으로 노력하지 않아!”

녀석이 드디어 헝클어진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 쌓인 감정을 몰아서 일시불로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도 감정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록 그 많고도 복잡한 기분들을 켜켜이 캐낼 순 없어도,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말은 알고 있었다. 

“그래. 나 너 위해서 양보한 적 없고, 참은 적 없어. 네 편 돼준 적도 없고, 네 기분 알면서도 모른 척만 했어. 그치만! 내가 왜 그걸 알아줘야 되는데? 내가 왜 양보해야 되는데? 나더러 어떡하라고! 나더러 어떻게 변하라고? 네 멋대로 덤벼들고 끼어드는 걸 모조리 참고 맨 정신으로 받아들이란 말이냐!? 내가 네 밥이야!?”

“그러면 어때서.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만 있으면 되잖아! 왜 자꾸 밀쳐낼 생각만 해? 왜 내가 널 쫓아가게만 만들어? 왜 내가 널 밀어붙이게 만들어!?”

녀석도 끝까지 지지 않고 대섰다. 분노보다는 기가 막혀서 막 힘이 솟았다.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을 단숨에 쳐내고 본격적으로 화를 냈다.

“그게 네 문제지 내 문제냐? 왜 나한테 따지는 건데! 그래. 어릴 땐 나도 네가 좋았어. 친구 해주길 바랐어. 내가 너한테 부족해서 미안했지만 그래도 친구하길 바랐었다고! 적어도 네가 그따위로 굴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난 처음으로 미승이에게 진심으로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내 탓이다 이거냐? 네가 원치 않는 감정을 내가 마구 뿌려서, 너한테 욕심 부려서 다 내 잘못이란 거냐? 넌 평범한 친구로 남고 싶었는데 내가 그렇게 안 해줘서?”

“그래! 네 탓이야!”

“후아, 미치겠네. 진짜.”

양손으로 머리를 박박 헝클이는 미승이는 보기에도 속 터져 미치기 일 보 직전인 놈으로 보였다. 적반하장도 이만한 게 없었다. 그게 악다구니를 더 들끓게 했다.

“혼자 괴로운 척 하지 마! 넌 네 감정 혼자서 감당 못해서 나 괴롭히는 거잖아. 전에 그랬지? 나한테 시간 줬다고. 헛소리 마! 류미승 넌 나한테 시간 주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야. 너는 박기수랑 똑같은 종자야! 알아? 그 새끼가 나한테 어땠는지 알지? 너나 그 새끼나 똑같애! 나한테서 넌, 그때 끝났어!”

박기수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미승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분노에 찬 흥분으로 차오르는 걸 보면서도 내 혀는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마냥 주체 못하고 파닥거렸다. 한계수위에 도달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폭력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을 감지했다. 그래, 너도 화나지? 못 참겠지? 드디어 날 쥐어 패겠구나. 맞으면 열라 아프겠구나. 맞는 건 두렵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라도. 

얼굴 앞으로 휙 날아오는 주먹을 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

툭, 둔하고 딱딱한 소리가 귀 옆으로 부딪혔다. 둔탁하고 딱딱한 아픔을 기다리던 뺨에선 아무런 진동도 울리지 않았다.

“눈 떠.”

찌그려 감았던 눈을 실풋이 떴다. 예상했던 둔통은 비껴간 대신 바로 옆에 수평으로 뻗어진 긴 팔이 보였다. 날아오던 주먹은 내 얼굴이 아닌, 바로 옆의 나무를 찧은 채 멈춰있었다.

“내가 널 때릴 수 있을 것 같아?”

“…….”

직전의 태도로 보아선 얼마든지 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얻어맞고 땅을 굴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미승이는 겁먹고 있던 떨어버린 인해 저가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넌 나를 아직 한참 몰라.”

뚝 끊어져 버린 긴장과 천천히 이어지는 이완의 미묘한 경계 사이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나를 안은 팔에는 어떤 강제도 깃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 심장의 반대편에 닿은 다른 심장의 박동은 무거운 진동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흥분을 고르는 녀석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마저 힘이 풀렸다. 

“…바보야,”

어릴 적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아니고, 평소의 거친 열여덟 남자아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내가 만약 미승이를 좋아하는 여자애였더라면, 저 바보야 소리에 메롱메롱 녹아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베이스처럼 낮은 허스키가 저토록 차분하고 다정하게 누군가를 부른다면… 내게 미련퉁이 같은 악감정만 없었다면……. 

“희승아. 지금처럼, 네 기분 참지 마.”

“…….”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그러니까 다른 녀석들한테도. 나한테도… 참지 마.”

예전에도… 미승인 가끔 날 울적하게 했다. 

“이만 나가자.”

미승이는 내 어깨를 감싸고 숲 밖으로 이끌었다. 우리의 걸음은 교실이 아니라 그대로 교문 밖으로 향했다. 미승이의 그늘이 가리마를 따라오는 따가운 뙤약볕을 간간히 가려주고 있었다. 은근슬쩍 뒷 허리를 감아오는 팔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잡을 것 없는 양손으로 자꾸 눈만 비볐다. 

우리는 오후 내내 시내를 걸어 다녔다. 일부러 나랑 눈을 마주치진 않았지만 미승이는 줄곧 웃고 있었다. 아까 교실에서의 일도, 방금 전까지의 실랑이도 까맣게 잊은 것처럼. 거친 나무둥치에 까진 손등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마저 잊어버려야 할 것 같은… 아니, 사실은 이것저것 신경 쓰기 귀찮아진 건지도 모른다. 못이기는 척이 아니라, 내가 이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한테 지는 놈들이 하나도 없었다. 피가 배어나온 미승이의 손도 난 모른 척 했다.  

무감각한 더위가 모든 걸 완전하게 연소시킨 건 아니었다. 밑바닥에 남은 앙금은 여전히 묽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다. 우리의 갈등은 어떤 결론도 짓지 못하고 부력에 밀려 붕 떠버렸다. 갈등하기를,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왜 미승이에 관해선 늘 결정적인 순간에 뿌리치지 못하고 잡혀버리는지, 날 지치게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명개 위로 어슷이 내밀어진 진실의 민둥머리를 내 안에서 수차례 보았지만…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웃고 있을까… 쳐다보다가 옆을 향하고 있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왔다. 내게서 무슨 말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배고파.”

실망, 이어서 기가 찬 헛웃음이 빠져나온다.

“하긴, 배가 고프시겠지―.” 

“먹으면서 자냐?”

닭 날개 조각을 씹다 말고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에 신경을 바짝 몰아 깜빡깜빡 치뜨다가 기어이 고개가 꾸벅 앞으로 떨어졌다. 무거운 눈을 떠보니 미승이가 혀를 차고 있다. 

“미련하긴―. 졸리면 자.”

녀석이 투덜거리는 동안을 못 참고 도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이제 막 해가 떨어진 참인데 엄청나게 졸렸다. 재만이를 때리고 나랑 티격태격하느라 소모전을 치렀던 미승이를 앞에 두고 나 혼자 피곤을 걸머진 듯 푸시시하게 꾸벅거렸다. 그래도 한지석이 오늘은 자기 집에 가서 자겠다며 학교 끝나자마자 우리의 책가방을 가져다주고 간 거랑, 당형수가 쫓아와서 저녁 먹고 가겠다고 법석을 떨다가 쫓겨난 건 또릿하게 기억했다. 두 녀석 다 오늘 교실에서의 사태에 대해 왈가왈부 없이 평소와 다름 없었던 것도.

“방에 가서 자라. 씻고 자는 게 좋겠지만 졸리면 하는 수 없지.”

가물가물 가느다란 시야에서 미승이가 티슈로 내 입이랑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주는 게 보였다. 양 겨드랑이 사이로 끼어들어온 팔이 나를 들썩 일으켜 세울 땐 눈이 바짝 떠졌다.

“…됐어. 씻고 잘래.”

“잠이 깨냐? 그러면 대충이라도 씻고 자.”

잠기운이 덜어지고 나니 기름진 손과 입이 텁텁했다. 미승이가 욕실 쪽으로 떠미는 대로 움직였다. 비누거품을 내서 손과 얼굴을 씻는 동안 미승이도 따라 들어와 옆에서 칫솔질을 하고 있었다. 민트향 치약을 거품으로 만들어내며 치카치카 하는 녀석을 보니까 나도 칫솔질을 하고 싶어졌다.

“남는 칫솔 없니?”

“엄…은…데.(없는데)” 

입 안 가득 물었던 흰 거품을 세면대에 뱉고 나서 칫솔을 수돗물에 헹구어내더니 물기를 탁탁 튀겨내고 그대로 내게 내밀었다.

“이거 쓸래?”

“칫솔을 어떻게 같이 쓰냐?”

“칫솔 같이 쓰는 게 뭐 어때서?”

이상한 데서 위생관념이 없는 놈이었다. 하긴, 이런 놈인 줄 진즉에 알았지. 예전에도 한여름에 찐득하게 빨아먹던 하드를 바꿔 먹자고도 했던 놈이고, 고구마 먹던 입으로 남의 입에다가 침칠도 해댄 놈이고, 그보다 더 한 짓도 했다. 놈의 기괴한 실체를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지석이 거라면 쓰겠냐?”

저 따위 질문을 하는 의도는 뭐야? 

“됐어. 누구 거든 안 써.”

안됐지만 내게는 상식이 절실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한들, 입술을 마주 부비고 혀와 침이 오가는 연인끼리도 칫솔이란 따로 써야 하는 물건이다. 한 집에서 부부로 이십 년을 넘게 살아온 우리 엄마아빠도 칫솔을 공용으로 쓰는 건 본 일이 없다. 하물며 류미승인데, 놈에게 허점을 보여선 안 되겠다는 경계심이 바짝 자랐다. 아쉽지만 손가락에라도 치약을 묻혀 입을 닦으려고 했다.

“기다려. 찾아볼게.”

미승이가 세면대용 넓은 거울 끝으로 모서리에서 튀어나온 작은 거울 문을 열자 선반이 나타났다. 어쩐지 거울이 볼록 튀어나왔다 했지. 3단 선반에는 아랫단부터 마른 새 수건들, 화장지, 비뉴와 치약 등의 여벌분이 칸마다 차지하고 있었다. 맨 윗 칸의 치약 뒤편으로 미승이가 손을 넣더니 여행용 접이식 칫솔 하나를 찾아냈다. 포장을 뜯어낸 상태인 그것은 새 칫솔이라고 믿을만한 건 못되었다.

“전에 여행 갔을 때 한 번 썼던 거야. 이 정도는 그냥 써라.”

잠깐 갈등하다가 까짓 거, 몇 달 전에 남의 입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거라면 눈 감고 쓰자. 내 눈 앞에서 남의 입에 들락거린 칫솔이 아닌 게 어디냐 생각하고 받아들었다. 접힌 칫솔자루를 펴자 정말로 언제 썼는지 흔적도 나지 않은 새것과 마찬가지인 일직선의 칫솔모들이 눈부셨다. 미승이 세수를 하고 나갈 때까지 열심히 입 안 구석구석을 닦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지난번처럼 한지석의 방으로 가서 자려고 했더니, 손잡이가 달칵달칵 반도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은 내 방에서 자야 돼. 지석이가 방문을 걸어놓고 갔어.”

한지석, 부지런한 한지석. 가방 놔두고 그새 방문까지 걸어놓고 가다니.

“다른 열쇠 없냐?”

“전에 녀석이 열쇠 잃어버려서 내걸 줬거든. 복사를 안 해놨어.”

비상용 여벌 키를 복사도 해놓지 않고 들고 다닌다니, 치밀하고 꼼꼼해 보이는 한지석은 겉보기랑은 달랐다.

“그것도 갖고 다니다 잃어버리면 어떡해? 얼른 복사해야지. 걔도 허술한 데가 있네.”“의외로 많이 허술해. 남들 앞에서 빈틈없는 척 보이려고 가식을 떨어서 그렇지. 그 자식.”

너처럼? 하고 물어볼 뻔 했다. 미승이 입에서 누군가 ‘가식을 떤다’는 소리가 나오니 웃긴다. 녀석이야말로 내가 아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변화무쌍하고 가식적인 놈이었으니까. 오늘 일만 해도 그렇고.

문 열린 방안으로 등을 떠밀며 녀석은 침대에 쿠션을 하나 던져두었다. 베개가 하나뿐이라 대용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불은 따로 없어?”

“없어. 지석이 방에 있는 것 말고는.”

두 명이 자기에도 넉넉지는 않아 보이는 침대에서 자느니 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불 따로 덮기는 포기해야겠구나, 

“난 공부 하다 잘 거니까 너 먼저 자. 참 네가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 그래야 내가 나중에 눕기 편하니까.”

미승이는 스탠드를 켜고 형광등을 끈 후에 책상위에 앉아 교과서랑 참고서를 꺼내 펴고 있었다. 친구…라고 하기엔 서로 염치가 없지만, 어쨌거나 날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저는 공부하는 놈. 역시 친구가 아니다.

어쨌거나 쿠션을 머리맡에 놓고 최대한 벽 쪽으로 붙어서 미승이의 자리를 남겨두고 좁은 잠자리를 확보했다. 녀석이 공부를 마치고 침대에 들 때 내가 대자로 팔다리를 뻗어 침대 전체를 차지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데 아까는 먹다가도 꾸벅거릴 만큼 졸리더니 침대에 누우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벽에 코가 닿도록 모로 누워 있다 보니 갑갑해져서 몸을 돌렸다. 노랗고 좁은 스탠드 빛 쪽으로 고개를 내려 책을 들여다보는 미승이의 등이 보였다. 빛으로 물든 자리와 어둠에 그늘진 자리들, 애매한 경계를 녀석의 옆모습 선을 따라 머리에서 등허리로 찾아보고 있었다.

“빨리 자.”

내가 쳐다보는 걸 어떻게 알았지? 옆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시선은 책에서 조금도 비껴나지 않은 채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아까 나 때릴려고 했지?” 

“아니.”

“진짜?”

“믿어. 때려서 속이 풀릴 것 같았으면 넌 나한테 벌써 세 번은 맞아 죽었어.”

“…먼저 잘게.”

미승이 진지하게 대답했는데, 난 머릿속으로 세 번을 맞아죽으려면 얼마나 세게, 얼만큼 많이 맞아야 하는가? 따위의 멍청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미우면 때려죽이고 싶은 감정이 들었을까―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달이 깊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고개쯤이었을까. 

짙지 않은 어둠이 깔린 하늘이 방의 어둠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몇 시나 되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잠들기 전의 불편하고 얌전한 자세에서 한 치의 변동 없이 모로 누워 벽을 향하고 있었다. 

긴장을 해서 얌전하게 잤다기보다는 등 뒤에 있는 미승의 몸에 밀려 벽으로 딱 밀어붙여진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벽과 느슨한 여유를 둔 배에는 허리를 타 넘어온 미승이의 손이 있었다. 

뒤에서 귓등으로 숨소리가 끼쳐온다.

일찍 잠들었다고는 해도 너무 일찍 깨버렸다. 왼팔과 다리가 마비된 듯 저렸다. 허리에 올려진 손을 치우고 등이랑 엉덩이를 뒤로 조금씩 밀어보았다. 뒤에 있는 몸이 억지로 밀려나며 아까보다 여유 있게 벽으로부터 3-4센티 공간이 생겨났다. 그 틈을 빌어 억지로 몸을 비틀어보지만 바로 눕기엔 여의치 않았다. 몸을 일으켜 반대쪽으로 돌아눕고 보니 미승이랑 마주누운 상태가 되었다. 

입술 위로 닿는 녀석의 콧숨을 피해 몸을 아래로 약간 내렸다. 녀석의 어깨와 목 너머로 불투명한 유리창을 바라보니 건넌 동 어느 집의 등빛인 듯 작은 불이 어룽거렸다.

“…ㅣ승아…….”

이마를 간질이는 입 숨이 무더웠다.

“깼니?”

대답이 없다. 내가 뒤척거리는 동안 녀석이 잠에서 깬 줄 알았는데 잠꼬대였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녀석의 동공이 눈꺼풀 속에서 돌아다니며 깊은 수면을 알려주고 있었다. 

치워졌던 팔이 목으로 넘어왔다. 고장 난 기계 같은 손끝이 까닥 까닥 뒷목과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있었다.

“…승아 …내… … 수… 여…릴… 게…….” 

꿈에서 녀석은 어떤 얼굴로 저 말을 하고 있을까. 

꿈의 벽을 불완전하게 뚫고나온 불분명한 발음처럼 재현될 수 없을 현실. 입술위로 부어지는 뜨거운 숨결에 목구멍까지 더워졌다. 

“…니까… 울지…마…….”

웃기는 놈. 너도 날 못살게 굴긴 마찬가지였는데 누구 탓만 하는 거야? 

자꾸만 입술을 덥히는 숨결을 피해 몸을 올렸다. 미승이의 목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떨어져 귀와 쿠션을 적셨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이 게으름뱅이야!”

뺨을 찰싹찰싹 따갑게 때려대는 차고 딱딱한 재질이 뭔가 하고 눈을 떠보니 미승이 자식이 30cm 자의 넓은 면으로 내 뺨을 쳐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일러도 한참 이른데, 여기서 학교까지 몇 분이나 걸린다고 벌써부터 잠을 깨우고 설치다니. 

“…졸려.”

이불을 말아 뺨을 가리고 자를 피했다. 그런데 이번엔 자를 모로 세워 잡는 자세를 보니 세로 단면으로 두개골을 내리치려는 모양이었다. 두께가 5mm는 돼보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안 일어나? 일어날 때까지 괴롭힐 거다.”

“조금만 더…….”

발끝에서 잡아 당겨지는 이불을 더 뺏어가지 못하게 몸으로 둘둘 말았다. 그러자 기어이 자 모서리가 내 이마 뼈랑 무릎 근처를 잘도 찾아서 욱신거리게 때려댔다. 여름 이불이라서 너무 얇다. 감고 있는 이불솜의 두께는 플라스틱 자 모서리의 공격에 조금도 완충작용을 하지 못했다. 녀석이 하도 아픈 데만 잘 골라 때려서 뼈가 찌릿찌릿했다.

“아파, 아파!”

이불속에서 발버둥 치며 꿍얼대자 30cm 자는 더 이상 난공불락과도 같은 이불을 공격하지 않았다.

“안 일어나면, 간질인다.”

엄포의 실행이 너무 빨랐다. “잠깐!”하기도 전에 이미 이불 속으로 손을 디밀어 내 왼쪽 발목을 잡고는 발바닥을 간질어대기 시작했다. 

까르륵 깔깔 꺽꺽……. 열불이 나는 속과 달리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파블로프의 개 같은 웃음으로 숨이 넘어가도록 발바닥이 괴롭혀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 마! 알았어! 일어날게!”

욕 나오기 일촉즉발에서야 녀석이 간질이기를 멈췄다. 

풀썩, 침대가 진동을 하더니 옆에 묵직한 체온이 닿았다. 미승이가 손가락으로 이불을 열어 내 눈을 찾아내선 싱긋 웃고 있었다.

“그러게 일어나랄 때 일어났으면 좋았잖아.”

훈계를 하면서 내 눈꺼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놈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래. 상쾌하기도 하겠지. 잠꼬대를 하면서도 숙면을 취한 놈은 기운이 축적되었는지 몰라도, 이쪽은 네 잠꼬대랑 몸부림 때문에 엄청나게 불편했다고! 

오밤중에 깨어났다가 저 때문에 금방 다시 잠들지 못하고 새벽을 홀랑 세워버린 사정을 녀석이 알 리가 없다고는 해도… 그래도 너무하다. 잠도 모자라고 몸도 피곤한데. 반면 잠꼬대 해가면서 긴 팔다리로 내 몸을 누른 채 쿨쿨 잘 자고 일어난 녀석은 아침부터 쌩쌩한 걸 보니 기분이 얄궂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던 녀석이 내놓은 아침식사 메뉴는 고작 마트에서 사다 쟁여둔 햇반과 레토르트 식품이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밥과 해시라이스를 접시 위에 부어주는 걸 보면서, 음식 못 만드는 놈이 혼자 집 나와 살면 이렇게 먹고 살아야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먹고 살건 생각 없이 미승이 놈은 혼자서 히죽거리고 있었지만. 

그 이유가 더 황당했다.

“너 어제 날 막 껴안고 자더라.”

밥숟가락을 떨어뜨릴 뻔 했다.

“거짓말 마.”

“진짜야. 너 나보다 먼저 잠들었잖아. 새벽에 공부 끝내고 자려고 침대에 누웠더니, 양팔로 내 목을 꼬옥 껴안던데? 그 뿐인 줄 아냐? 내 가슴에다 미친 듯이 머리통을 묻어오더라. 아침까지 그렇게 하고 자는데, 너 깨우지 않으려고 참느라 내가 얼마나 불편 했는지 알아?”

“…….”

“그리고 잠꼬대로 내 이름도 부르더라.”

기가 목구멍까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누가 누굴 껴안고, 잠꼬대까지 했다는 거야! 제대로 알고나 떠들어라, 류미승! 

내가 중간에 깼던 줄도 모르고 지 맘대로 지어낸 헛나발인 줄은 알겠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저따위 쌩 거짓말을 하다니! 

…그런데 나도 100% 아니라고 박박 우기진 못하겠다. 아침나절에 내가 잠들고 녀석이 먼저 깨어났으니 그 사이를 빌어서 내가 몸부림을 쳤다고 우겨대면 할 말이 없다.

“내가 밥 했으니까, 네가 설거지 해.”

등교시간까지 삼십분이나 남았다며 나를 싱크대 앞으로 떼민 녀석은 며칠분인지 모르게 잔뜩 쌓여있는 그릇들을 씻으라고 시키고는 옆에서 감시자처럼 지키고 섰다. 

“넌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하냐?”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방해도 했다. 간간이 녀석이 혼자 고개를 돌려 나 모르게 실쭉거리는 걸 봤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웃음을 뚝 그치더니, 

“그렇게 대강 닦으면 찌꺼기가 남잖아. 야, 그렇다고 자꾸 느리게 할래? 늦어, 늦어. 넌 할 줄 아는 게 뭐냐? 쓸모가 없어, 쓸모가.”

또 잔소리였다. 느린 설거지 구경하느니 옆에서 수세미질 한 그릇들을 헹궈주기라도 하면 될 텐데, 밀린 설거지를 시키고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나더러 굼뜨다는 둥, 무용하다는 둥, 재주가 꽝이라는 둥, 누가 데리고 살지 걱정이라는 둥… 잔소리는 허벌나게 해댔다. 그렇지 않아도 더딘 내 손놀림을 더욱 산만하고 느리게 만들었다.

…내가 뭘 하는 거지? 

누가 보면 허물없는 친구사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도록 연출되는 이 자연스런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미승이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었다. 

분명히 어제의 난 류미승이 내 앞에서 사라져도 한 줌 아쉬움 없을 것처럼 자포자기의 바닥 끝으로 가라앉았었다. 현재의 모든 것을 다 내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힘겹고 괴로웠다. 그런데 녀석과 소릴 지르며 싸우고, 화해도 없이 시시하게 다툼을 끝내고, 같이 시내를 걷고, 이 집까지 와서 잠을 자고 아침 설거지까지 하고 있다. 

미승이의 의도에 따라 내 감정이 변덕을 타고 있었다.

지금의 가벼운 분위기가, 미승이의 장단을 수용하는 심정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 있다면 지난밤의 짧고도 강했던 단상, 미승이의 잠꼬대였다.

‘…희승아 내가 박기수 죽여 버릴게. …그러니까 울지 마.’ 

꿈을 넘어서 완성되지 못할… 조각도 날자국처럼 깊이 파인 저 말.

선중이가 우리 학교까지 찾아 온 이유는 날 데리고 민정여고까지 가기 위함이었다. 민정여고 전반 보충의 마지막 날이라서 내일부터 일주일간은 애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으므로 오늘이 아니면 그 여자애를 선보여 줄 기회를 잡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보충수업 같은 거랑 담 쌓고 사는 선중이는 방학을 하자마자 날이면 날마다 민정여고 앞에 와서 보충이 끝나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저가 좋아하는 여자애를 보고 갔다고 한다. 

그 학교 교문 앞에서 어슬렁대기를 거의 한 시간 째. 교복 치마 두른 여자애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때만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는 나랑 선중이는 평범하게 음흉한 남고생들 같았다.

“봐, 쟤야 쟤.”

드디어 서늘한 하얀색 블라우스랑 회색 주름 스커트들이 물결처럼 빠져나오는 교문 입구 속에서 선중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목적지를 단번에 맞출 수 있었다. 

그 여자애의 얼굴을 본 순간,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피부가 희고, 선이 곱고, 머리칼은 밝고, 이목구비는 또릿한 여자애였다. 9살 무렵의 미승이랑 닮은. 

“어때? 예쁘지?”

똑 닮은 얼굴은 아닌데도 당시의 미승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금방 ‘닮았네’라고 떠올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태였다. 다만 미승이보다 여리고 유순한 인상에 덜 예쁘긴 했지만, 여자애치고 그만하면 밝고 고운 아이 소리 들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저 애가 우리 쳐다본다. 선중아, 가서 말 걸어봐.”

“아냐. 안 돼.”

“왜?”

“…저 애가 나만 보면 자꾸 피해서…….” 

정말이었다. 여자애는 선중이랑 날 보더니 후다닥 제 친구의 팔짱을 끼고 종종걸음을 쳤다. 

으아… 안타까운 김선중. 녀석이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아이는 서로 사귀는 게 아니라, 녀석 혼자 좋아해서 줄줄 쫓아다니는 거였다. 

여자애가 친구들과 사라지고서 우리도 허탈하게 민정여고를 떴다. 

“미승이 보니까 어때?”

아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지나가던 미승이가 우리에게 오더니 ‘오랜만이네.’ 하고 선중이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고, ‘어… 안녕.’선중이는 서먹하게 뒤통수를 긁적였었다. 그리고 미승이가 나한테 뭔가 얘기 하려던 차에 마침 버스가 와서 우리는 지체할 여유 없이 차에 올라타고 손 흔드는 미승이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를 타고 마을로 가고 있었다. 

“글쎄다. …그 자식이 먼저 아는 척 해준 게 기분 나쁘진 않은데… 좀 거시기 하더라.” 

지금도 기분 나쁘진 않은 얼굴이었다. 두 마디의 짧은 인사, 그리고 풀어진 작은 웃음이 그들의 묵은 찌꺼기를 한 켜쯤 정화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희승아. 미승이는 어릴 때가 더 예쁘지 않았냐?”

물론 미승이는 어릴 때 여릿하고 예쁘긴 했지만, 지금이야말로 여자들이 껌뻑 넘어갈만한 미모를 풀풀 날리고 다니는데. 오로지 김선중만이 류미승 어린이의 미모를 떨치지 못하고 미련을 떨고 있었다. 저걸 듣고서 또 깨달아야 했다. 

‘선중이는 그런 얼굴에 약하구나―.’

아까 여자애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선중이는 미승이에게 동성애적인 감정을 품었던 게 아니라, 단지 미승이 같은 얼굴이 취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웃기지도 못할 김선중의 첫사랑 류미승과의 1라운드 완패에 이어, 2라운드로 불붙은 소녀를 향한 연심도 성공률이 무지하게 낮아보였다. 선중이는 죽어라 여자애를 쫓아 붙고, 여자애는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 그런 관계인데 어디서 아슴아슴 풋풋한 로맨스가 싹 틀수 있겠는가. 

게다가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스토커 김선중의 상세한 설명을 들어보니, 아무리 친구입장이라도 나마저 비관적인 예상도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도시물 먹고 자라 반듯하고 깔끔한 여자애는 아버지가 법조계에 몸담고 있다는 짱짱한 집안에, 학교 성적도 우수하고, 두루두루 흠 잡힐 데 없는 조건을 가진 유리 온실 속의 난초였다. 

그에 비해 시골에서 쇠똥냄새 맡으며 논밭을 제 세상 삼아 자라나서 지금은 전형적으로 우락부락한 공고생이 된 김선중은 비닐하우스 바닥에서 뒹구는 호박덩쿨이라고나 할까. 

선중이한테는 미안한 비교지만, 그토록 김선중과 소녀 양자 간에 눈이 맞을 확률은 희박했다.

그리고 사흘 후, 예상대로 김선중의 짝사랑은 끝내 보답 받지 못하는 2차 도전기로 끝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툭하면 우리 집에 와서 내 방에서 실연의 한숨을 내뿜다 가는 녀석을 위해, 난 무영이가 적어준 격언을 선중이한테 줬다.

「포기하지 마라. 저 모퉁이만 돌면 희망이란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까 미승이가 아파트 열쇠를 내밀면서 했던 말. 

‘어차피 필요 없겠지만―.’

현관 열쇠, 자기 방 열쇠, 지석이가 쓰는 방 열쇠 세 개를 미키마우스 열쇠고리에 걸어서 건네던 녀석의 주장인즉슨, 보충수업 받는 동안 자기랑 같이 아파트에서 등하교 하면 편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꿀 같은 여름방학에 보충 받으러 매일 시골버스로 왕복 두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깝지 않느냐고. ‘어차피 필요 없겠지만―’이라는 의미를 되새김질시키며 내가 거절 하더라도 자기가 붙들어서 데리고 다니면 된다는 무언의 암시를 눈 속에서 빛내고 있었다. 

또 다시 거부감의 약발이 올랐다. 이 정희승이 네 놈의 모략대로 끌려 다니기만 할까 보냐! 나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실망하는 녀석의 기색도 안중에서 싹 지우고 열쇠를 내던지다시피 떨어뜨리고 후다닥 학교를 뛰쳐나왔다. 내일도 모래도 글피도 집에서 학교를 꿋꿋하게 오가는 보충수업의 나날을 때우자고 씩씩하게 다짐하며 버스를 타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서 사방 건물과 간판들을 휘둘러보며 유유히 오는 인간이 눈에 익다 싶더니…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나이, 류현구가 아닌가! 헐렁한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껄렁한 폼으로 구두수선방도 들여다보고, 복권 판매소도 기웃거리느라 여념이 없어보였다.

“어엇, 너, 희승이 아니냐!?” 

그 와중에도 나를 알아보자마자 설렁설렁한 팔자걸음으로 뛰는 둥 마는 둥 가까이 오는 것이었다.

“이야. 오랜만이다! 같은 지역 살면서도 어째 얼굴 보기가 힘드냐. 하긴 같은 지역이래도 그 동네는 아직 동이 아니라, 리(理)지, 리! 넌 여전히 촌놈이네, 촌놈. 으하하.” 

방정맞게 반가운 체를 하며 껄껄거리는 걸 보니 주접맞은 성격은 여전히 건장했다.

“안녕하세요. 삼촌.”

“나야 늘 안녕하지. 보다시피.”

어련하시겠어. 한창 가게보고 있어야 할 시간에 느긋한 부랑아 폼으로 거리를 싸돌아다니는 걸 보다시피, 한가할 틈 밖에 없는 사람이다.

“어디 가세요?”

“나? 지금 미승이한테 가는 길인데 너도 가자.”

“됐어요. 우린 학교에서도 매일 보는데요. 아까도 교실에서…….”

“됐긴 뭐가 됐냐. 어른이 가자면 네― 하고 순순히 따라와야지. 가자. 가서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남의 얘긴 귀담아 듣지도 않고 억세게 팔을 잡아끌기까지…….

“삼촌 가게 한다면서요? 가게 안 봐요?”

“날 더우니까 손님도 없어. 한가할 땐 쉬어야지.”

“쉬는데 왜 미승이넬 가요? 차라리 집에 가서 쉬지.”

보고만 있어도 덩달아 마음이 가벼워지는 이 사람, 현구 삼촌이랑 있으니 나도 별 걸 다 묻게 되었다.

“가봤자 우리 집은 더우니까. 선풍기 바람 갖고 이 허벌난 더위를 식히겠냐? 미승이넨 에어컨 설치했잖아. 그것도 녀석이 지 돈 반을 보태서 장만했단다. 그래서 걔 아파트는 냉기가 쌩쌩 돌아. … 하여간, 조카 새끼가 삼촌보다 호강하고 살아요. 옛날부터 난, 미승이놈 은행 잔고랑 지갑이 털털 빈 걸 못 봤어. 그 놈이 이 삼촌 복을 다 뺏어먹고 사는 것 같어. 그치, 희승아?”

듣다듣다 별 소릴 다 듣는다. 미승이가 꾸준하게 풍족한 금전 운을 누리고 사는 건 사실이지만, 현구의 복을 뺏어가는 게 아니라, 현구가 제 복을 못 챙기고 사는 것이 정답인데. 장가들 때 제 형님이 아파트 사줘, 가게 장만해줘, 듣기론 위치 좋은 땅마지기도 제법 얹어줬다던데. 남보다 못 받고 산 처지도 아닌데 에어컨쯤은 자기 능력으로 사면 될 거 아닌가. 날이 더워서 가게 문 닫고 조카네 집에 쳐들어간다는 건 어디까지나 핑계로 보였다. 일 하기는 싫고 집에 가면 마누라한테 쿠사리 먹을까봐―. 

“삼촌이 가게 열심히 해서 돈 벌어갖고 에어컨 사면되잖아요. 삼촌 그만큼 돈 못 벌어요?”

어수룩한 척 빈정거려 보자, 현구는 못 들은 척 컥- 콧구멍 깊숙한 데서 가래를 끓어 올려선 보도블록 바닥에다 퇘 뱉었다. 나란히 걷기도 남부끄러웠다. 게다가 딴 얘기로 돌리는 게 하필,

“근데 넌 키가 하나도 안 컸냐? 여전히 난쟁이 똥자루네. 우리 미승인 아주 훤칠하게 컸는데. 걔가 싸가지는 없어도 인물 하난 이 삼촌 닮아서 아주 반질반질하지. 여자들이 줄줄 줄을 설 거야. 이 삼촌 닮아서.”

남의 키를 비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자화자찬에 엮어가며 ‘이 삼촌 닮아서’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다니. 어쩜 이 사람은 이다지도 변함이 없을까. 나잇살도 먹을 만큼 먹고 초등학생 애 아버지가 되었어도 여전히 나사가 풀려 있는 어른이었다. 배려심도 전무하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체면이란 것도 모르고, 결정적으로 객관적인 자기 성찰이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살면서 류현구 같은 인간을 두 번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어… 오셨어요? 미승이 금방 올 거예요. 오늘도 더워서 오셨죠?”

나랑 현구를 현관 안으로 들이는 한지석의 반응을 보아하니 현구가 여기에 에어컨 쐬러 하루 이틀 드나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신발을 휘 팽개치듯 벗어던지고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작동시키는 폼새를 보더라도. 

“허이. 이제 살 것 같네.” 

전에는 비워졌던 거실 TV 옆 벽에 반짝거리게 빛나는 하얀 에어컨이 듬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거기서 냉각기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싸아한 인공바람을 만들어내자마자 현구는 거실에 대자로 벌렁 드러누웠다.

“시원하니 여기서 낮잠이나 한 숨 자고 가야겠다. 난 잘 테니까,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일 봐.”

남의 집 거실 차지하고서 누구더러 일 보라는 거야!? 아마 미승이가 있었더라도 저런 핀잔을 주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지석은,

“그럼 주무세요.”

저러고는 지 혼자서 달랑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현구 삼촌이랑 둘만 남아서, 그것도 자고 있는 사람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생뚱맞았다. 저가 끌고 와서는 혼자서 잠이나 퍼 자면 난 어쩌란 말인가. 현구의 배를 흔들어 깨웠다. 

“삼촌, 자면 어떡해요. 맛있는 거 사준다면서요.”

“졸려… 삼촌이 자고 일어나서 사줄게.”

“난 지금 배고픈데.”

“이놈아. 너도 내 적군이냐? 삼촌이 잠이 무더기로 쏟아지는데 니 밥부터 사줘야겠냐? 요새 애들은 어른 공경할 줄을 몰라."

나도 따라서 옆에 누워 버렸다. 

“삼촌은 무늬만 어른이잖아요.”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도 현구는 잠귀도 밝은지, 

“…하긴. 내가 아직 젊지?”

실눈을 뜨고 멍청하게 웃는다. 말뜻을 전연 못 알아듣는 걸 보니 무진장 졸린 모양이었다. 

“삼촌이 팔 배게 해줄까?”

이러면서 큰 인심 쓰듯 굵직한 팔을 내밀었다. 우뚝하게 알배긴 팔이 편한 배게는 결코 아니었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그냥 베고 있었다. 오히려 10초도 안 되서 잠에 떨어진 현구가 “…더워…….”잠꼬대를 하며 몸을 굴려서 내 머리통을 미끄러뜨리고는 세상모르고 쿨쿨 코골이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속편하게 사는 인간이라면 세상 모든 근심이 별 것 아니지 않을까. 킬킬 새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고 현구 옆에 바짝 몸을 밀었다. 

어쩐지 이 인간이 무척이나 편했다. 나도 철딱서니 없는 현구를 닮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을지… 큰 근심도 자그맣게 떨치고, 자기만의 편한 집을 지어서 그 안에서 세상의 눈살과 편견을 모두 떨치고 배짱 좋게 살아갈 수 있을지……. 희박하디 희박한 바람을 그려보며 등으로 시원하게 전해지는 바의 한기에 열이 식으며 서서히 잠기운에 딸려 들어가고 있었다.

턱이 자꾸만 근질거렸다. 고개를 흔들어보고 안면근육을 찌푸려도 끈질긴 날파리처럼 따라붙는 근질거림은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웬 손 하나가 턱밑으로 들어와 간질거리게 쓰다듬고 있었다. 

“잤어?”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미승이가 드르렁거리며 잠들어 있는 삼촌의 이마빡을 흘기듯 내려다보다가 나를 보고 생긋―이것도 좀 어이없지만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생긋이었다-했다. 턱에 묻은 손가락을 내치고 일어나 앉아서 눈곱을 떼는데, 다시 와서 똑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손.

“하지 마.”

“싫어? 강아지들은 여기 간질여주면 좋아하는데.”

“내가 개냐?”

“아니. 넌 개는 못되겠다. 코가 둔해서. 이 인간한테서 냄새 안 나냐?”

코를 킁킁거려보니 현구에게서 꼬리꼬리한 땀 냄새가 나긴 했다. 그렇지만 옆에서 같이 못 잘 정도는 아닌데.

“삼촌이 얼마나 안 씻고 사는 인간인지 내가 옛날부터 누누이 말해줬건만. 아무리 졸려도 그렇지, 어떻게 이 인간 겨드랑이 밑에 머리 박고 잘 생각을 하냐? 너 비위도 좋다.”

저 놈은 어떻게 저다지도 사람을 깎아내릴까. 비록 변변치 못하기로 공인된 인간 류현구라 하더라도, 일단은 지 삼촌이 아니냐고. 그리고 방금까지 생긋거리던 녀석이 왜 삼촌 얘기 하면서 열을 올리냐고! 치졸한 류미승이 냄새 타령에 “떨어져, 떨어져” 하며 내 팔을 당기는 바람에 찬 바닥에 엉덩이가 질질 끌리고 헐렁한 바지가 골반으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놔. 바닥에 막 쓸리잖아!”

“인간한테서 떨어져. 옆에 오래 있으면 냄새 밴다고.”

“흥! 삼촌한테까지 질투하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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