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7)

염병. 그날 잠시나마 안타깝고 애처로운 기분이 들었던 난 뭔가. 

나를 포기해줄 것처럼 슬픈 눈을 하고 심각하게 숲을 나가더니, 전혀 딴 소릴 하는 류미승. 

내가 웃기는 게 아니라, 이 자식이 날 웃기는 놈으로 만들고 있었다. 

“병딱아, 네가 ‘그래. 포기해줘’ 했다고 내가 그대로 할 줄 알았냐? 흥, 누구 좋으라고?”

몸살기에 미승이의 조롱까지 얹혀서 매우 피곤했다. 말대꾸할 기력도 모자랐다. 

미승이가 교실에서 내 책가방을 챙겨 멋대로 챙겨 나올 때 꼬리처럼 뒤따라 온 형수가 챙알거리고 있었다.

“어디가? 미승아, 어디 가?” 

“희승이네 집. 데려다 주려고.” 

“나도 갈래! 지석아, 너도 갈래?”

“난 됐어.”

저들이 남의 집에 가는데 집주인의 허락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지퍼도 채 안 닫고 책이 쏟아질 것 같은 책가방을 부랴부랴 들고 따라 나온 당형수는 내 뒤에서 미승이랑 쫑알쫑알 거렸다. 내가 아프건 말건, 마을 가는 버스에 타서 오는 내내 떠들면서 내 몸살기만 악화시켰다. 

날 데려다 줬다는 핑계로 내 방에서 뒹굴다가 시내로 가는 막차가 끊겼다는 이유로 형이 쓰던 중간 방에서 자고 가는 저들을, 난 감기만 아니었다면 저지할 수 있었을까?

“아줌마가 나 되게 반가워 하시더라. 또 놀러 오래.”

“정말? 그럼 또 와야지!” 

“너 말고 나 말이야, 하긴, 아줌마가 너도 좋아하시는 것 같긴 하더라. 웃기게 생겼다고.”

“우하하. 난 어딜 가나 환영을 받는다니까. 점쟁이가 그러는 데 내가 사람이 꼬이는 팔자래. 그래서 연예계로 진출하면 성공할거랬다.”

미승이랑 떠드는 형수의 커다란 목소리가 등교 버스 안에 왕왕 돌았다. 

우리 엄마가 몇 년 만에 보는 미승이를 반가워한 것도 사실이고, 황당한 생김새에 서슴없는 주접을 떠는 형수를 보고 깔깔댄 것도 사실이지만, 난 저놈들이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 

비단 지난밤에 잠자기 전까지 내 좁은 방을 채우던 녀석들이 만들어낸 탁탁한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분명 형수랑 미승이가 형 방에 가서 자는 걸로 알았는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이불 속에 들어와서 자고 있던 미승이 놈 때문에 놀라서 경기했던 심장 때문만도 아니다. 

지금 떨떠름하게 창밖을 보는 척 하는 선중이나, 억지로 냉소를 짓고 있는 병식이를 보더라도 류미승과 그들의 어색한 대면까지 알고도 모른 척 하는 일도 은근히 진이 빠졌다. 

아픈 김에 결석이나 했으면 좋았으련만, 아빠가 지어온 감기약 하루치를 책가방에 챙겨 나와야 하는 아침 등굣길은 퍽이나 피곤했다. 

나 몰라라 잠이나 자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를 들고 버스에 올라 타 빈자리 없이 꽉 찬 버스를 둘러보더니 하필 내 앞에 와서 섰다. 

젠장, 나 아픈데… 하면서도 여느 때처럼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할머니한테 자리를 양보했다. 

“학상이 앉아서 가지?” 하면서도 허리를 잡고 끄응거리며 곧바로 자리에 앉는 할머니는 제법 양반이었다. 

시골 버스에서 마주치는 할머니랑 아줌마들은 아이들이 자리양보 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심하면 아이들의 자리는 곧 자기들의 자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방금 버스에 오르자마자 선중이랑 병식이가 앉은 자리로 와서 “이봐, 여기 자리 있어. 이리 와!” 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녀석들의 자리를 가리키며 자기 친구까지 부르는 아줌마처럼. 

“희승아.”

미승이가 팔을 내민다 싶더니, 금새 내 팔을 끌어다 저가 앉았던 자리에 앉혔다. 

이럴 거면 애당초 할머니한테나 자릴 양보하지 그랬냐. 예의 없는 놈.

버스가 시내의 경계 안으로 들어서면서 정류장마다 버스에 오르는 중학생들이 보였다. 

이 시간에 늦은 등교를 하는 고등학생들도 종종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방금 올라탄 모 여고 교복차림의 여자애는 이미 여러 차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저애는 상습 지각범이구나. 하고 내가 알만큼. 그런데 오늘은 제 친구까지 달고서 지각을 하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미승이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버스 고리를 잡고 옆에 선 친구랑 소곤닥거리고 있었다. 들리진 않아도 수줍음과 낮은 흥분이 교차되는 저 상기된 얼굴들이 어떤 얘길 주고받는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류미승 하면 이미 이 지역 바닥에서 파다하게 소문난 인물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난 인물로 소문난 얼굴.

“어멋……!”

낮은 비명과 함께 여자애의 주머니에서 툭 떨어지는 하늘색 생리대를, 난 봤다. 

여자애는 당황해서 얼른 생리대를 주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여자애였는지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고작 생리대 하나 갖고 뭐하냐? 얼른 줍기나 해라, 생각하는 짧은 사이였다. 

미승이가 한쪽 어깨를 슬쩍 내리는가 싶더니 어깨에 걸쳤던 가방이 생리대를 덮치며 바로 위로 떨어졌다. 그걸 보자 여자애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화끈거려보이는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애를 보니까 난 재밌었다. 그런데,

“미안한데, 내 가방 좀 집어줄래?”

저때만 해도 나도 여자애도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여자애가 “네에…….” 하고 미승이의 가방을 집으면서 동시에 그 밑에 깔린 생리대를 잽싸게 치마 주머니로 집어넣고 가방을 건네주면서 “고맙습니다.”하고 오히려 인사를 했을 땐 진짜 웃기지도 않았다. 

방금의 상황만 본다면 가방 집어준 여자애한테 류미승이 인사해야 마땅하지만, 실상은 여자애가 생리대를 살짝 갈무리할 수 있도록 미승이가 도와준 상황이라는 게 맞았다. 

“우아, 류미승! 너 그러기냐! 여자애들한테 인기 몰이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아주. 그러면 안 돼. 넌 더 이상 그러면 안 돼!”

여자애들이 저희끼리 울긋불긋 꽃 담화를 나누면서 버스에서 내리고, 우리들도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학교로 향하면서 형수가 과장된 호들갑을 떠는 것도 당연했다. 

얼굴 잘생기고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류미승에, 매너 좋은 류미승의 소문까지 시내 여학교의 말 많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번지는 데는 일주일도 안 걸릴 거다.

“시끄러워. 입 좀 다물어 당형수.”

미승이는 형수의 뒤통수를 때리고는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걸었다. 

대단히 싱글거리는 얼굴이어서 차마 팔 치우라 소리도 못하고 질질 걸었다. 

“야아, 하늘 좀 봐라. 날씨 좋네.”

하늘이 청명한 건 맞는데, 얼렁뚱땅 관자놀이를 쓸고 가는 녀석의 턱과 입술은 턱턱하게 열을 올렸다. 

똥 씹은 표정으로 그대로 질질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처럼 똥 씹은 표정의 이태수랑 복도에서 마주쳐야 했던 건, 그리고 1교시가 끝나고 이태수에게서 “너 점심 때 보자.”라는 알림을 들어야 했던 건 개운찮은 하루의 운수를 여는 시작이었지만. 

“요새 왜 이러냐? 정희승, 이틀 전에 이무영이 다구리 치려고 할 때도 재만이랑 나타나서 방해하더니, 오늘은 류미승이랑 사이좋게 어깨 끼고 등교하더라?”

태수 녀석은 담배를 빡빡 피워 물면서 내 얼굴에 뿜어댔다. 

약으로 잠재운 기침이 매운 연기 때문에 콜록콜록 목구멍에서 아프게 터져 나왔다. 

“너, 내가 우습게 보이냐? 나랑 강재만 사이에서 저울질 하다가 이젠 류미승한테 붙는 거냐? 하긴 그럴싸하지. 류미승 자식은 3학년 해진이 선배가 귀찮은 잔챙이들 다 막아주니까, 자기가 직접 주먹 안 쓰고 학교에서 우등생 역할만 하면 되는 놈이잖아. 그래서, 너도 그 새끼랑 어울리는 게 바람직한 것 같다는 계산 튕긴 거냐? 나랑 강재만이 같은 양아치들보다는 류미승이 빽도 있고 평판도 좋으니까 그쪽으로 붙겠다 이거냐?”

이태수는 혼자서 마구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럴싸했다. 

류미승이랑 나 사이에 과거만 없었다면 아마 이태수의 말대로 내가 가장 유리하고 안전하고 그럴싸한 류미승에게 붙으려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다. 처음부터 류미승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래 저래 붙거나 떨구거나 하는 따위조차 계산하지 않았을 거다. 

친구를 친구로 여기는 청순한 열 여덟 고등학생으로 자랐을 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런 거 아냐. 나 아파서 걔가 어제 집에 데려다 준거야.”

“왜 그 새끼가 널 데려다 줘?”

“걔가 우리 집 아니까. 어릴 때부터 친구였단 말야.”이태수한테 변명을 하다 보니 내 입에서도 기어코 미승이랑 ‘친구’였단 소리가 나왔다. 

덕분에 이태수도 몰랐던 사실을 알아서 의외였는지 “진짜? 너랑 걔가 친구였다고?”하고는 엉겁결에 바닥으로 떨어뜨린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그렇단 말이지. 근데 아픈 친구 데려오는 놈 치고는 얼굴도 밝더만. 류미승 그 새끼.”하고는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친구라는 말은 여러모로 편했다. 정말. 

“근데, 너 어디가 아프냐?”

“감기 걸렸어.”

“흐응… 감기? 뽀뽀나 하고 용서해줄까 했는데, 이를 어쩐다?”

이를 어쩐다? 어쩌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이태수. 잡생각 말고 얼른 보내주기나 해라. 

느물거리게 웃으면서 내 팔을 잡아당기는 놈을 보자 반사적으로 몸이 뒤로 빠졌다. 

“이거 놔,”

“뽀뽀 한 번 하자는데 뭘 그래? 너한테 엉덩이 까고 엎어지라는 것도 아니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빼냐?”

“엉덩이 까든 입술 까든 다 싫어.”

전에도 시시때때로, 잦은 빈도로 음흉한 웃음을 보내며 입술을 들이대는 이태수였지만 오늘은 내 기분이 특히나 끔찍했다. 

전에도 가끔 이런 장난으로 보챌 때마다 적당히 상대 해 주고 말았는데, 오늘은 정말 그러기가 싫단 말이다. 

불쾌하고 당황스럽더라도 되도록 그렇지 않은 척 해왔지만, 자칫 혐오스러워하거나 겁내는 기색을 드러내면 이런 놈을 도발하기 안성맞춤인 태도인 걸 아니까 많이 참았지만, 감기 기운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이런 저런 잔재주를 튕길 수도 없었다. 

“어쭈, 이게 반항을 해? 이러니까 더 땡기는데.”

이태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짓이기듯 밀어내자 이태수가 화났을 때 특유의 지으며 자꾸만 얼굴이 가까워졌다. 

팔을 붙잡는 손아귀의 힘이 거셌다. 장난이 아니다. 무진장 갈구하는 눈치다. 녀석의 눈에서 폭력이 발생하기 직전의 기가 흐르는 걸 감지했다. 

“자, 이걸로 됐지?”

녀석의 거친 입술에 순식간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이태수를 달궈놓은 빌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게 아니지, 정희승. 고작 이거 하자고 내가 너 붙들고 사정하겠냐?”

녀석이 기어이 강압적으로 내 머리통을 붙들고 제 얼굴을 갖다 붙였다. 마른 껍질이 일어난 거친 입술로 비벼대고 두꺼운 혀로 억지로 입술을 열려고 했다.

‘하지 마! 하지 마!’ 놈의 큰 입이 내 입술을 다 먹어버려서 소리도 못 나왔다. 

테크닉도 꽈당이고 생긴 것도 꽈당인 놈이 억세게 입속을 탐해댔다. 

구역질이 났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토악질을 눌러 넘기느라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당하니까 더 좋지, 정희승?”

녀석이 입술을 떼자마자 벌어진 입 속에서 침이 주르륵 입가로 흘러내렸다. 

녀석의 침을 삼키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모아두었더니 한 입 가득 찼다. 

남아있는 것을 땅바닥으로 뱉었다. 

“너 뭐하냐?”

당연히 태수의 얼굴은 험악해졌다.

“보면 모르냐? 침 뱉는다.”

침 뱉은 자리에 발로 차서 흙을 덮고 마구 비볐다. 

“십새끼, 그걸 내 앞에서 뱉냐? 씹, 또 해버릴까 보다. 침 전부 삼킬 때까지.”

“그랬단 죽인다.”

입가에 묻은걸 소매로 닦으며 녀석을 노려보자 화를 내던 놈이 갑자기 벙실거린다. 

‘그랬단 죽인다’는 내 말을 억수로 우습게 받아들이는 거다.

“푸핫! 니가 날 아주 잘도 죽여주겠다. 요 꼬꼬마 녀석이.”

도로 내 팔을 끌어다가 어깨를 껴안고 난리다.

“이거 치워. 이태수!”

“왜? 또 한 번 할까? 응? 우리 또 한 번 웁…….”

녀석은 끌어안고 나는 몸부림치고, 녀석은 입술을 디밀고 손으로 막아내고 꼴사나운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멈췄다.

“뭘 봐? 새꺄.”

태수가 내 어깨 너머를 본다 싶더니 한지석을 향해 욕을 하고 있었다. 

한지석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꼿꼿한 석상처럼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안 꺼져!?”

“이태수. 네가 상습 흡연 장소가 여기라지? 꽤 좋은 장소네, 여기. 내가 선생님들께 알려드릴까? 애들 흡연 단속 좀 제대로 하시라고.”

한지석의 반사는 즉효였다. 태수는 나를 옆으로 밀쳐놓고 한지석의 앞으로 뛰어가서 섰다.

“십새꺄, 너 지금 날 협박하냐?”

“협박이 아니라 충고다. 담배 피우다 걸리려면 혼자나 걸려. 애꿎은 애까지 데려와서 괴롭히지 말고.” 

“에이. 씹! 존나 재수 없어!”

이태수는 한지석을 향해 눈만 실컷 부라리고는 가버렸다. 

놈이 한지석이 멱살이라도 잡고 주먹이라도 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욕으로만 성질을 삭이고 가다니. 

아무래도 이태수에겐 남은 고교 생활에 흡연 장소의 안전 확보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지석이 놈도 의외였다. 힘으로 이길 수 없는 녀석을 상대로 고작 내민 협박이 선생님께 일러바치는 거라니. 웬만한 애들도 저런 치사한 소린 입에 담지 않는다. 샤프한 생김새랑 달리 유치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정희승.”

“왜?”

한지석의 눈초리가 방금 나랑 태수가 어떤 꼴로 엉켜 있다가 목격됐는지를 상기시켰다. 말도 못하게 무안했다.

“…너, 미승이 힘들게 하지 마라.”

힘들어? 류미승이?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린데, 미승이 원체 발랄하거든? 뭐든지 순풍순풍 털어버리고 잘 일어서거든? 오히려 내가 힘들거든? …하면서도 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오늘 미승이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 하지만,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겠지?”

“…….”

한지석이 일부러 말 하지 않은 ‘너 때문에’라는 말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 미승이는 저가 다가오는 것을 최선을 다해 밀쳐내지 않는 나에 대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그걸 알기에, 어지러운 가슴 한 구석에서 미승에 대한 안타까움이 일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방금 전의 이태수가 구역질나게 끔찍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한지석은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단지 미승이가 나를 친구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상대하는 거다. 외곽선으로만 겹치는 얄팍한 접선에서만 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진작부터 알았기에 나도 그만큼 녀석을 관심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방금 녀석의 발언은 확실하게 미승의 편에 서 있으며 미승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내게 한축 비뚤어지게 꺾인 시선을 보낸다는 것을 확실하게 표시한 것이다. 알면서도 난 한지석에게 되물었다. 

“무슨 뜻이냐?”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넌 뭘 아는데?”

“내가 아는 척 해봐야 공연히 꼬이지 않겠어? 미승이가 너에 대해 나한테 말한 건 없어. 고향친구라는 말밖엔. 나머지는 나 혼자 짐작한 거니까.”

뭘 짐작 했느냐고 물어선 안 된다. 헤집으면 안 된다.

“정말이냐?”

“못 믿을 거면 처음부터 묻질 마.”

“…….”

“하지만, 방금 내 충고는 흘려듣지 마라. 네가 미승이한테 거치적대기만 하는 놈인 것 같으면, 내가 나서서라도 너흴 떼어놓을 테니까.”

한지석의 건방진 발언에 속이 불끈 했다. 잠시 속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네가 떼놓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걔랑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정희승?”

한지석의 눈이 심술궂게 웃고 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오리발 잘도 내미네? 라고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웃음. 

내 말의 반절 이상이 진실이란 걸 녀석에게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가는 게 우리 관계의 정답이라고.

“집에 일찍 가네. 토요일인데.”

버스 고리 손잡이를 잡고 있는 선중이는 내 옆의 빈자리에 자기더러 앉으라고 권해주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모서리 비닐가죽이 뜯어진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으라고 하자마자 선중이의 엉덩이가 털썩 옆자리로 떨어졌다.

“친구들하고 안 놀아? 동네에 가 봐야 놀 애들도 없는데.”

“너야말로 벌써 집에 가?”

“시내 돌아다녀봤자, 재미도 없고, 날도 덥고.”

“말 하는 게 노인네 같아.”

“정희승 너야말로 엄마 보고 싶어서 일찍 집에 가는 초등학생 같다. 집에 가면 혼자 뭐 하고 노냐?”

“남이사.”

토요일 2시. 다른 애들은 시내를 한창 배회하며 놀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일찍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는 심심한 집으로 일찍 귀가하는 성실한 아이들이었다. 

해도 길어진 여름 토요일 낮에 말이다. 

누가 누구더러 일찍 집에 들어가네 마네 갈굴 처지가 아니었다.

미승이네 집에 놀러가자는 형수의 부추김을 떨치고 나온 건 한지석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한지석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지난 번 이태수와의 몹쓸 짓을 목전에서 걸리는 바람에 한지석을 대하기가 찜찜했고, 그 후로 유난히 나를 탐지하는 것 같은―과대망상일지도 모르지만―그가 더욱 껄끄러웠다. 한지석은 일부러 나를 떼밀지는 않아도 미승이의 시선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 카메라 역할을 하고 있는 것같았다. 미승이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속은 알 수 없었다.

요즘들어 미승이는 하루하루가 조금씩 다르게, 누가 보더라도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말을 걸고 점심시간에도 자꾸 끌고 나가서 재만이랑 어울리는 걸 방해했다. 수업 시간 중엔 여전히 뒷자리에서 발로 의자를 톡톡 차고 내 뒷머리랑 하복 깃을 샤프 끝으로 긁어댔다. 이동수업 시간 때도 과학실이나 음악실에서 내 뒷자리는 꼭꼭 차지하고 앉아 같은 짓거릴 꾸준하게 했다. 근질거리는 데다 짜증스러워서 뒤를 돌아볼 때마다, 능청스럽게 수업 필기에 열중하고 있는 녀석을 보노라면 관자놀이 심줄이 불끈 솟을 지경이었다.

그런 미승이를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눈에 띄는 개입은 하지 않는 한지석이었다. 미승에 대해 각별한 호의와 이해심을 보이는 한지석의 관심은 결국, 미승이와 관련된 나의 존재에 대한 관심 이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내가 류미승의 친구로서의 한지석에게 쓰는 관심의 분량, 딱 그만치일 뿐이었다. 

당형수는 이런 구도의 어느 꼭짓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모르는 건지 매사가 태평했다. 지금쯤 미승이네 가서 식당의 스티커들을 모아놓고 열심히 점심거리를 찾고 있을 게 환히 그려진다. 

어쨌건 그 애들은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 서로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등해 보였다. 위선적인 류미승도, 인간미 없는 한지석도, 푼수 떼기 같은 당형수도, 위화감이나 가식 없이 저마다 다른 인간적 형성들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담백한 관계였다. 

그 가운데 끼어들어가 있으면 나는 모두랑 일정한 거리가 졌다. 누구도 가깝게도 멀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큰 뭉치의 행성 주위를 겉돌다 공전 궤도를 이탈해가는 작은 위성이 되고 있었다. 

“날도 더운데 호수에 멱이나 감으러 갈까.”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어컨도 틀어주지 않는 낡은 버스 안에선 빛을 차단하지 못하는 창이 더위를 올리고 선중이는 혼잣말처럼 늘어지게 중얼거렸다. 

나 들으라는 속내가 빤히 들렸다. 나도 같이 가겠다고 얼른 끼어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인내심이 모자라는 녀석은 결국 내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그럼 강에 갈까?”

그건 더 싫다.

“안 되겠지? 거긴 위험하니까 절대로 수영하면 안 돼.”

혼자서 묻고 답하느라 수고한다, 김선중. 

어릴 땐 어른들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말 안 듣는 청개구리였던 김선중이, 어이없는 모험을 즐기던 김선중이 이제는 안전제일 원칙을 엄수하는 청소년이 되었다. 

선중이 만이 아니라, 동네 사람 중에 강에서 수영하는 이는 없었다. 그가 아는 것만 해도 벌써 다섯은 그 강에서 빠져 죽었다. 

내가 아는 것으론 거기에 한 명의 목숨을 더해야겠지만.

“진짜로, 집에 가면 뭐 할 거야?”

버스에서 내렸을 때, 우리의 발길이 갈라지는 골목에 이르기 전에 선중이는 다시 물었다. 

“할 거 없어.”

“그럼, 심심하면 이따 우리 집에 와.”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왔다.

흰 하복 상의의 등판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교복을 벗어두고 반바지만 달랑 입고서 마당으로 나갔다. 수도 아래 큰 다라를 놓고 물을 철철 틀었다. 

“웬 물을 그리 받아? 거기서 물장구 칠 거야?”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다. 어린 애도 아니고, 다 큰 청소년이 남사스럽게 다라 쪼그리고 앉아 물장구를 친단 말야!?

“더워서 등목 하려고. 엄마가 물 뿌려줄래?”

“좋지.”

엄마는 부엌에 들렀다 냉장고에 가더니 커다란 대접에 얼음을 가득 담아 왔다. 다라안의 찬 물 속에 대접을 쏟아 얼음을 동동 띄우고는 손으로 휘휘 젓다가 파란 바가지 안에 찬물 한 바가지를 푸고는 내 등을 앞으로 밀었다.

“됐다. 엎드려봐.”

설마, 갑자기 홱 붓는 건 아니겠지? 하는데,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는 듯 차가운 물이 등으로 대번에 쏟아졌다.

“윽!”

“어때, 시원하지?”

시원한 게 아니라 시렸다. 내가 젊어서 다행이지, 노인네 같았으면 심장마비나 쇼크로 쓰러졌을 거다. 엄마가 내 등짝을 찰박거리게 때려가며 차가운 얼음물을 가차없이 부어댔다. 찐득하고 화끈거리게 더웠던 등이 오들오들 떨리게 추워졌다. 

“놀러왔어.”

선중이네 오는 동안 뒷목에서 땀이 났다. 지하수에 얼음 섞은 물로 등목을 하고 동태처럼 몸이 굳었던 게 삼십 분도 안 됐는데.

“어서 들어와.”

선중이는 방문을 열어 나를 들이고자마자 선풍기를 강풍으로 돌렸다. 손부채질을 하는 동안 선중이가 음료수에 얼음을 띄워 가져왔다. 

놀러 오라고 한 녀석이나, 놀러 온 나나 노는 데 딱히 의욕이 없었다. 마을 이라 봐야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싸돌아다녔으니 돌아다닐 곳도 없고, 읍내라도 가서 놀자니 더위가 배기고. 집 안 그늘에서 선풍기 바람이나 쐬는 게 제일이었다. 

삼거리 가게에서 사온 과자를 집어먹으며 TV에서 나오는 주중에 나왔던 재방송 프로그램들만 채널을 바꿔가며 이것저것 보고 있었다. 

우리는 심심하고 무료한 청춘들이었다. 그래도 뭐, 사는 게 별 거 있나.

“TV 끌까?”

물어놓고, 대답도 안 듣고 꺼버린다. 더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었다. 녀석은 나랑 대화라는 걸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며칠 전에 무영이랑 만났다.”

“시내에서?”

“응. 무영이가 먼저 말을 걸더라. 그 꽁한 자식이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이야. 그래서 같이 저녁 먹고, 그러다가 걔 하숙집에도 가서 잤어.”

선중이랑 무영이랑 사이가 풀어졌단 소리? 아, 그래서 오늘 이 녀석이 나한테도 말을 걸고 놀자고 한 거구나. 선중이는 어릴 적의 친구들을 되찾고 싶은 기분이 든 걸까?

“그랬구나. 잘 놀았냐, 무영이랑?”

“놀기는. 그냥 뭐……. 네 얘기도 하고.”

나에 관해 무영이가 선중이에게 할 만한 이야기가 있긴 하지. 

어떻게 얘기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걔가 너네 학교 깡패 녀석한테 돈 뺏기고 얻어맞았다던데. 근데 그 녀석이 너랑 아는 애라며?”

“어…….”

“덕분에 무사했다고, 너한테 고마워하더라.”

나한테 고마워 해? 이무영이? 

그날 무영이가 남겨두고 간 표정은 혐오감에 가까웠는데, 선중이에게는 저런 소릴 했나보다. 

“인사 받을 일도 아니었어.”

“걔가 네 얘기를 많이 묻더라. 너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는지―. 꼭 엄마가 자식 소식 묻는 것 마냥 걱정하면서 묻더라니까. 무영이 놈은 너랑 같은 학교면서 왜 나한테 네 소식을 묻는 거냐? 하여간, 다들 웃기다니까.”

“네가 나랑 버스 같이 타고 다니니까.”

“그건 그렇지만. …여튼, 그 자식이 밍기적 거리면서 뭔가 말 할랑 말랑 하는 꼴을 보니까 답답하더라고. 애새끼가 소심해가지고는―, 아무튼, 나중에 너도 같이 가자. 걔가 가끔 자고 가도 된댔으니까.”

“하숙방이면 좁지 않냐?”

“셋이 자면 좁기야 하겠지만, 뭐 어때. 내가 ‘희승이도 데리고 올까?’ 했더니 그러라던데. 너랑 얘기 하고 싶은 게 있나봐. 그 자식, 네 얘기 하고 싶어서 나한테 말 걸었을지도 몰라.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으응…….”

뭐라고 반응 할게 딱히 없어서 우물거렸다. 그리고 침묵이 더위처럼 쏟아졌다. 뱅뱅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랑 바깥의 벌레들 소리가 끊어진 대화의 공란을 채웠다. 선중이는 방바닥에 누웠다 앉았다 뒤척거리다 얼음을 가져와 유리컵에 쏟아 붓고 이빨로 아작거리며 씹어 먹었다. 나도 따라서 얼음 하나를 입에 넣는데 선중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전에 미승이가 너네 집에 왔다 갔지? 너희들 이제 친해진 거냐?”

그걸 물어보고 싶었구나, 김선중. 평범하게 물어보면 될 걸 주춤대고 얼음 씹어 먹느라 애썼다.

“…별로.”

“여전히 미승이 혼자 너한테 열 올리는 거냐? … 야, 농담이니까 째려보지 마. 이런 건 좀 웃어 넘겨라, 정희승.”

“…….”

“실은 미승이를 보고서 좀 놀랐다. 자라면서 계속 변하긴 했었지만, 그날 아침에 버스에서 보고 저게 미승인가 싶더라. 너무 달라져서.”

얼음 하나를 가져다 입 속에 넣었다. 

“겉보기만 그래. 걔도 그닥 안 변했어.”

찬 얼음이 입 안을 냉기로 얼얼하게 마비시킨다. 선중이는 미승이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미승과 관련된 기억은 선중이에게 모두가 싫은 일일까, 아니면…

“그래도―. 그 자식 옛날엔 여리여리하고 예뻤는데.”

그랬지. 하지만, 선중이가 황홀경에 차서 바라보던 류미승은 이제 없다. 

자라면서 알 게 된 건, 어릴 적 선중이는 동성이니 뭐니 그런 것을 의식할 여지도 없이 미승에게 반해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 때 선중이도 호모인가? 하고 염려했던 적도 있지만, 녀석이 미승이 외의 남자아이에게 눈 돌리고 엉뚱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미승이에게 보였던 관심과 질투와 노골적인 애정의 폭격탄들은 마치, 홀딱 반한 여자아이를 가까이 두고 싶어하고, 뜻대로 안되면 심술부리는 그런 류의 어린 감정이었다. 

즉, 선중이는 미승이를 여자아이로 혼동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 이야기를 선중이는 처음으로 고백하듯 말했다. 

미승이가 저처럼 같은 남자아인 줄 알면서도 계집아이처럼 곱상한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이 애가 여자였으면…….” 하는 바람과 호기심이 있었다고.

“그래서 걔 고추도 집적거린 거냐? 여자앤지 남자앤지 의심이 가서?

“…처음엔 그랬지. 근데, 나중엔 만져볼수록 자꾸 좋아지더라.”

헉……! 미승이 고추가?

“애들 고추는 귀엽잖냐. 특히 미승이는 살도 희고 곱상한 게, 고추도 하얗고 귀엽더라고.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하기도 싫지만.”

“…….”

할 말을 잃었다.

선중이가 산책도 할 겸 배웅해 주겠다고 따라 나섰다. 마르고 거친 노면에 네 짝의 고무 실내화 바닥이 끌리는 소리. 우리는 저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직은 파릇한 논길을 따라 걸었다. 

“희승이 넌 좋아하는 애 없냐?”

“없어. 넌 있냐?”

“응. 되게 예쁘다. 민정여고 다니는 앤데, 나중에 보여줄게.” 

얼굴까지 발그레 붉히는 것이 진짜로 좋아하는 앤가 보다. 그런데 “나중에 수업 일찍 끝나는 날 걔네 학교 근처에 가서 살짝 보고 오자.”라는 꼴을 보니, 선중이 혼자서만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스리.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하고 있었다. 병식이 혼자 내리고 있었다. 녀석은 나랑 선중이를 보더니 잠깐 쓴 웃음을 짓고 가버렸다. 

“너도 병식이랑은 아직 말 안 하지?”

“알게 뭐야. 저 새끼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볼 때마다 히죽대고 지나가긴 하는데, 저 면상을 보면 진짜 한 대 패주고 싶어. 저 자식은 자기한테 불리한 건 다 잊고 사니까.”

내 생각도 그랬다. 이병식은 그런 놈이었다. 선중이를 배신하고 나를 이용하고 미승이도 약점잡아 눌러보려다 실패하고 꽁무니를 뺐던 이병식. 어쩐지 병식이만큼은 돌려질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가 내게 큰 잘못을 한 건 없는데도. 어쩌면 병식이 스스로가 이미 우리들을 떼어놓았다는 직감이 들었다. 녀석에게 아쉬운 건 없는 거다.

우리들 중 오직 병식이만 과거에 앙금을 남기지 않고 척척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에겐 진보가 없었다. 진보도 퇴보도 없는, 제자리걸음도 아닌 행보로 우리들로부터 재미없게 멀어지고 있었다.

버려야 할 것과, 되찾지 않아도 될 것.

미승이가 전자라면 병식이는 후자였다. 

‘나는 미승이를… 진짜로 버릴 수 있을까……?’

플라타너스의 잎사귀 두 장의 떨어진 거리 사이로 거미가 집을 짓고 있었다. 

내일도 하늘이 땡볕을 쏟아 붓겠지. 

상승기운을 타는 무더위처럼 이태수의 짜증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변덕도 죽 끓듯 해서 언제 어디서 밟힐지 모르는 지뢰였다. 밖에서 싸움질 할 건수를 못 찾아서 그런지, 아니면 요새 삥 뜯는 액수가 시원찮아서 그런지 학교에서도 사나운 성질을 감추지 않고 돌아다녔다. 이태수의 주변 무리들도 녀석의 눈치를 보느라 절절매고, 나는 녀석이랑 안 마주치려고 피하느라 잘잘대고. 그런데도 재수 없게 자꾸만 걸렸다. 내가 혼자 집에 돌아가는 하교 길마다 녀석은 나를 붙잡아 들여 으름장을 놓았다. 용건다운 용건도 없었다. 저 혼자 죽이지 못하는 성질의 이유를 재만이라던가 한지석이라던가 등등 끌어들이고는 툭하면 저희 패거리들을 모아다가 나를 다구리 치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끝에 가선 “농담이야, 쫄지 마라.”라는 실없는 소리로 끝났지만. 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어이, 정희승. 오늘도 집에 일찍 가야 되냐? 애새끼, 집에도 잘 들어가고 효자야.”

오늘도 패거리 녀석을 통해 날 단독으로 소각장으로 불러들여선 저런 서두로 갈굴 거리를 찾고 있었다. 자식은 매우 몹쓸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너, 나 피해 다닐 핑계가 많지? 낮에는 재만이 핑계, 밤에는 버스시간 핑계.”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잖아. 화 내지 마라. 너 화내면 나 쫄잖아.”

“쫀다는 놈이 날 갖고 노냐? 이러다 나중엔 미승이 놈도 네 핑계거리가 되는 거 아냐? 그 새끼 요새 네 뒤꽁무니에 곧잘 붙어 다니던데. 재만이는 가만있냐?”

“걔 얘긴 하지도 마. 태수 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우리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나도 오늘은 집에 좀 늦게 가면 되니까.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골칫거리들을 죄다 돌려두기 위해 고작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먹을 걸로 태수의 신경질을 잠재우는 거라니. 내 꼬라지가 한심 또 한심.

“너 먹을 걸로 날 어째보려는 수작인 모양인데.”

“아냐, 나도 지금 배고파서 그래.”

이태수 저 미련한 놈이 내 속을 알아맞히는 걸 얼른 부인하고 녀석의 팔을 끌어 일으켰다. 그러자 녀석도 무거운 걸음으로 따라왔다. 마지못해 하면서도 녀석의 기분이 반쯤은 풀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쥐방울 같은 새끼. 약았어.” 

저러면서 내 목덜미로 팔을 힘주어 두르면서 기분을 내는 걸 보면.

녀석의 기분 내기가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이태수는 중앙로의 술집 골목으로 가서는 고깃집으로 냉큼 들어갔다. 그러더니 제 무리들까지 불러내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삼겹살을 육인분 주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갑 속에 든 만오천 원과 덩치 네 녀석이 해치우는 고기 분량을 가늠하며 까마득해졌다. 이럴 때 현금대신 맡길만한 비상용 금반지 하나 마련해 주지 않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모자라는 돈 대신 교복을 벗어도 책가방을 맡겨도 주인 아저씨가 날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자, 먹어 정희승. 네가 배고프다고 해 놓고 왜 안 먹냐?”

너 같으면 고기가 넘어가겠냐고―. 난 지금 가게를 나설 때 정정당당하게 외상 장부를 그어야 할지, 열나게 튀어야 할지 고민중인데.

“밥 값 걱정하냐?”

“…어.”

“헛, 이 자식이 뭘 모르네. 인마, 이 녀석들까지 부를 땐 내가 쏠 계산이니까 그런 거지. 설마 너한테 덤터기 씌우겠냐? 차라리 벼룩이 간을 내 먹지,”

말하는 것 봐라. 저걸 들으면 이태수가 남에게 부담 안 주고 사리에 밝은 놈인 줄 알겠다. 언젠가 태수가 나더러 피자를 사라고 해서 “응.” 했다가 녀석이 제 친구랑 후배들을 다섯명이나 불러와서 나한테 덤터기를 씌운 일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녀석은 쏠랑 망각한 모양이었다. 그날 녀석들이 피자 네 판을 해치우고 이쑤시며 가버린 후에, 난 지갑을 탈탈 털고도 이만오천 원이 모자라서 울먹이며 재만이한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재만이가 와서 모자란 값을 치러주고 집에 갈 차비까지 줬었다. 그런데 다음날 곧장 갚으려고 했더니, 한사코 받지 않았던 강재만. 아무래도 재만이한테 물려 다니는 지금까지의 인연에 저 때의 사연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었다. 두 번 반복할 짓은 아니었다.

“안 먹고 뭐 하냐? 내 말을 못 믿냐?” 걱정 말고 먹으라며 다른 녀석들의 젓가락에 들린 고깃점들까지 뺏어다 내 밥그릇 위에 수북이 얹어 놓고 이태수는 내 앞에 지갑까지 던져 보이는 호기를 부렸다. 제 아무리 멋 부려봤자 녀석이 지불할 고기값은 얌전한 애들한테서 뜯어 모은 치사한 돈일 뿐이다. 무엇보다, 녀석을 누그러뜨리려는 계획으로 밥을 사겠다고 한 마당에 내가 되려 얻어먹게 생겼으니 뒷감당을 어찌하나, 이래도 저래도 낭패였다.

“자, 먹어.”

이태수가 상냥한 척 굴면서 고기로 밥을 싸서는 내 입에다 넣어주는걸 받아 먹고 꾸역꾸역 씹었다.

“술도 한 잔 해라.”

“나 술 못 마시는 거 알잖아.”

“새끼, 고기 먹는데 술 안 먹으면 무슨 맛이냐?”

나야말로 고기 먹는 데 술 먹는 게 무슨 맛이냐고 묻고 싶었다. 태수가 따라준 소주잔을 눈을 꼭 감고 꿀떡 비웠다. 너무 써서 “캬―” 소리가 절로 났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캬― 하는 놈은 첨 봤네. 좋다는 거냐, 싫다는 거냐?”

“술 고만 따라. 써서 못 마시겠어.”

“아이구, 술이 맛없으셔? 그럼 고만 먹어야지. 자, 요거 한 잔만 더 하고.”

태수는 막무가내로 잔이 찰찰 넘치게 소주를 따랐다. 요거 한 잔, 또 한 잔, 하면서 거부하려고만 하면 눈을 부라리는 녀석의 기분을 맞추느라 세 잔 까지 마셨다. 막잔을 내려놓자마자 전신에서 열이 후끈후끈 오르고 어지러워서 죽을 맛이었다. 더 죽을 지경인 건,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고기 샀으니까, 2차로 네가 노래방이나 쏴라.”라는 태수의 말에 뒷풀이랍시고 노래방까지 가야했다. 애들이 노래방 책을 건넬 때마다 노래 못한다고 거절하고 태수가 쥐어준 매주 반 캔을 무리해서 마셔야 했다. 아이들이 탬버린 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와중에 숙취에 빠져 소파에 누워 눈을 붙였다. 그것도 잠깐일 뿐이었다. 속이 메슥거려서 기어이 화장실에 가서 감당되지 않은 술이랑 저녁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입을 헹구면서 집에나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책가방을 가지러 들어갔을 때 방 안엔 태수 혼자만 남아있었다.

“다들 어디 갔어?”

“보냈지.”

“우리도 나가자.”

“예약 시간 남았거든.”

태수가 예약을 추가한 건지 아니면 내 생각보다 시간이 짧게 흐른 건지, 정말로 30분이 남아 있었다. 30분씩이나―.

“시간 저만큼이나 남았는데 애들은 왜 보냈어?”

“너랑 둘이서 놀려고. 자, 이제부터 네가 분위기 좀 띄워 봐라.”

난 노래 못하는데, 어떡하지? 태수랑 단 둘이서 뭘로 분위기를 살리며 놀지? 안 돌아가는 머리를 막 굴려서 좋은 생각을 냈다.

“태수 네가 노래하면 내가 탬버린 칠게.”

“븅신, 퍽이나 신나겠다!”

곧장 묵살당했다.

“그… 그럼 나도 노래할까?”

“좋지. 너 노래하는 거 들어본 적 없으니까.”

“나 되게 음친데… 그래도 네가 참고 들어. 알았지?”

비닐 책을 이리저리 넘기며 노래를 고르기 시작했다. 취기가 도는 와중에도 태수의 눈초리가 석연찮은 기미를 풍기는 건 느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노래도 몇 개 없거니와, 노래를 알면 제목을 모르고, 가수를 알면 제목을 모르고, 이런 마당이니 노래 한 곡 찾는 것도 부산스럽게 고달팠다. 무난하게 애국가라도 부를까? 하지만, 그랬다간 태수가 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멋진 곡을 고르더라도 맞을 확률이 높다. 

태수는 내가 노래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 정희승이 얼마나 음치인지 짐작도 못 할 거다. 원래도 노래를 못 했지만, 변성기를 지나면서 진짜 끝내주는 가창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음악시간에 가창 시험이 있을 때마다 반 애들을 본의 아니게 웃겨주는 나였다. 여느 때라면 몹시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것만큼 특효약이 없을 것 같았다. 이태수 저놈이 아무리 근질거리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내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확 깰 거다.

과연, 노래도 시작되기 전에 이태수는 웃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벙긋하기 시작하자 놈은 탁자를 치고 소파를 굴렀다. 내 노래 솜씨는 건장했다. 게다가 노래도 잘 골랐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장장 4절에 이르는 저 노래면 4분 정도는 가뿐하게 때울 수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의 위인을 집어넣어 만든 건지 헷갈렸지만. 

마이크를 꼭 잡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난 생각이 많았다. 왜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대표해서 들어가 있는지. 태정태세문단세가 모두 위인이라 할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라지만 중간에 매국노 한 놈의 이름도 끼워 넣은 작사자의 의도가 아리송했고, 이수일과 심순애는 왜 들어가 있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이와 같이, 매우 진지한 고찰 속에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태수는 배를 잡고 자지러지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태수가 웃다가 숨넘어가서 죽을까봐 걱정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음정은 들쭉날쭉 발음은 어리버리, 그런 솜씨로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는 거창한 가사를 불러 제끼는 데 안 웃길 리가 없다. 신경질적이기로 유명한 음악선생을 웃긴 학생도 나밖에 없었다. 실력은 빵점이지만 당신을 웃게 한 ‘귀여운 노래솜씨’라면서 시험이 끝난 후 나를 다시 불러내서 앵콜 공연까지 치르게 했던 선생이었다. 덕분에 난 20점 만점인 가창시험에서 18점이나 건질 수 있었다.

“우아~ 존나 잘 불러! 너네 반에서 장기자랑 할 때마다 너 부르겠다. 맞지? 너더러 개그 하라고!”

이 순간만큼 내 노래솜씨가 자랑스러울 날이 또 있을까.

“야, 내친 김에 한 곡 더 해라, 정희승.”

“됐어. 이번엔 네가 불러.”

“하라면 해라. 난 네 노래가 엄청 마음에 드니까.”

어쩐다……. 재만이를 더 웃겨줄만한 노래는 없는데. 선방을 강하게 쳐 놨으니 이젠 뭘 불러도 시시하게 들릴 거다. 동요란을 뒤적거리다 미승이가 어릴 때 가르쳐 준 노래 제목이 눈에 들어왔지만 외면하고 앞장으로 넘겼다. 이번엔 ‘예쁜 맘 예쁜 꿈’이라는 노래를 골랐다. 하도 얌전하고 맑은 노래라서 서툴기 짝이 없는 내 음정으로 부르면 이태수가 꽤나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노래방 화면에 제목이 뜨자마자 “그 노랜 뭐냐? 유치하게.” 하고 피식거리던 이태수의 핀잔도 무시하고 하얗게 바뀌는 가사를 따라 열심히 불렀다. 

마음이 예쁘면 꿈도 예쁘죠 / 예쁜 꿈꾸면 나비같이 날아

마음이 고우면 고운 꿈꾸죠 / 고운 꿈꾸며 구름처럼 날아

흰 나비 무꽃에 어울리다가 / 흰구름 따라서 날아가네요

마음이 예쁘면 꿈도 예쁘죠…

계속 엇나가는 음정, 한 박자도 제대로 맞지 않는 리듬, 내가 들어도 가관이었는데, 태수의 웃음소리는 잠잠해졌다. 곤란하네… 하며 2절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화면에서 가사를 뚫어지게 보며 노래하는 내 옆에 어느새 태수가 와서 어깨를 안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곤란해졌다. 하나 남은 마이크를 집을 생각을 안 하고 내 손에 들린 마이크에 얼굴을 들이대는 건 뭔가 싶더니 뺨에다 입술을 부벼대는 게 아닌가. 그 짓이 뻔뻔하고 대담하게 계속되었다.

“하지 마. 치워!”

삐익- 마이크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화면의 가사는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빵빠레가 울리고 나서도 음이 끊어지는 법은 없었다. 이태수가 눌러둔 예약번호의 차례대로 반주들이 계속 울렸다.

노래방을 나온 건 10시가 넘어서였다. 예약 시간이 끝나고 주인 아줌마가 벌컥 들어와 “이봐, 학생들! 방 비워줘야지! 손님들이 기다리잖…….” 기겁한 눈으로 숨을 들이킬 때까지… 나는 이태수의 거뭇한 성기를 손에 잡고 있어야 했다. 놈이 나한테 주둥이를 못 대게, 나를 못 만지게 하기 위한 차선의 방책이었다. 노래방 아줌마 덕분에 녀석을 배출시키는 사태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지저분했다.

태수 자식이 요즘 들어 유독 윽박지르고 신경질 낸 이유가, 이렇게 날 제 맘대로 해보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늦게 깨우친 게 제일 화가 났다. 이태수의 강압에 눌려 녀석의 맘대로 휘둘리는 나. 그나마 그쯤에서 그친 걸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자꾸만 속에서 불이 났다. 그간 끌어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태수를 진즉에 정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장에 곤란한 건 집으로 갈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읍까지 가는 버스도 끊기고, 택시비도 없었다. 잘 데도 없고, 집도 못 가고, 길에서 날밤을 샐 생각을 하니 깝깝하고……. 학교에 가서 밤을 보낼까? 마침 야자가 끝나가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나올 때 슬며시 학교로 돌아가 수위 아저씨랑 숙직 담당 선생님의 순찰만 피하면 하루밤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교문에서는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교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도 선뜻 발이 빨라지지 않았다. 텅 빈 학교에서 혼자 밤을 지새는 게 겁이 안 날 리가 없었었으니까. 

만에 하나… 만의 만의 하나라도… 화장실 귀신이 나오면 어떡하지? … 음악실에서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들리면 어떡하지? … 교목에 매달린 애기 귀신이 내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어떡하지? … 발목 없는 귀신이 교실로 들어와 나한테 인사하면 어떡하지?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귀신 이야기들과 각종 학교괴담들이 뒤범벅되어 왕창 겁나는 상상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이래서 과연 학교에서 잘 수 있을까? 머뭇머뭇 교문 근처로 가고 있을 때였다. 거의 끝물로 나오는 드문드문한 아이들 사이에 무영이가 보였다.

“여기서 뭐해?”

“…집에 못 갔어.” 

“버스 놓쳐서?” 

“…….”

“내 방에 가서 잘래?”

무영이는 보기에도 무거운 책가방을 어깨에 다시 고쳐 매고 걸어갔다. 가다가 돌아서서 느릿하게 걷는 나한테 빨리 따라오라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소심하게 따라갔다.

처음엔 말 없이 걸었지만 무영이가 조금씩 말을 꺼냈다.

“원래 학원 가야 되지만, 오늘은 빼먹는 거야.”

“미안.”

“너 때문이 아니… 아니, 너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런 거 아냐.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우물쭈물대는 건 녀석도 여전했다.

무영이의 하숙방은 작았지만 지저분하진 않았다. 책상과 책들이 작은 방을 빼곡이 채우고 있어서 녀석이 제대로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것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저녁 먹었어?”

“응.”

“다행이네. 하숙집 아줌마도 아침이랑 점심만 해주거든. 저녁은 학교에서 먹으니까.” 

방을 둘러보다 재미난 걸 발견했다. 

「오늘의 침 한 방울은 내일의 눈물 한 방울이다」

무영이의 책상 앞에 붙어있는 표어였다. 도대체 몇 시까지 공부하다 자는진 몰라도 어지간한 각오가 엿보였다. 

“웃지 마,”

“안 웃었어.”

무영이가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내가 푸힛― 하고 조금 웃었다. 

“미안. 그치만 너 공부 잘 하는 거 아는데, 이런 것까지 붙여 놓는건 몰랐다.”

“흥, 난 소심해서 그런다. 미승이 같은 놈은 저런 것 안 써놓고, 나보다 많이 놀면서도 성적도 잘나오지만…….”

뾰루퉁한 무영이를 보면서 미승이의 성적을 질투 하느구나, 느꼈다.

“미승이도 공부 디게 열심히 해. 학교에선 애들이랑 노는 것 같아도 집에선 늦게까지 공부하는 걸.” 

“그래?”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전에 미승이네 갔을 때 한지석이 그렇게 말했었다. 미승이가 헐렁하게 사는 것 같아도 뭐든 열심히 노력하는 녀석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미승이를 인정한다고. 

어쨌거나, 무영이는 조금은 위안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희미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넌 걔네 집에 자주 가봤나 보네.”

“딱 한 번 가봤어.”

“그래도… 걘 너더러 자주 놀러 오래지?”

무영이의 말은 어쩐지 이상했다. 미승이한테 하고 싶은 말인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지 아니면, 혼자서 확인하고 싶은 말인지 모르게 어중간한 맥락을 떠돌고 있었다. 원래도 녀석이 자기 속을 화끈하게 털어보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불현듯 내가 무영이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적부터 친구들 중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척을 지지 않으며 그나마 무난하게 보낸 것이 무영이였다. 병식이의 노선을 따라 꾸준히 움직이는 것은 변덕도 아닌 선택일 뿐이었다. 그러니 일관성 하나는 인정받을 만 했다. 누군가를 먼저 배신하거나 배신당한 적도 없었다. 이만큼은 알지만, 정작 무영이 자신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몰려든 건, 나를 쳐다보는 무영이의 얼굴이 오묘하게도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끝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분의 좁은 자리를 펴고 잠이 들었다.

시계는 오전 여섯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첫 버스를 타기 위해 집에서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이 방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라면, 너무 일찍 깨어난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영이는 벌써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난밤의 무리한 술기운이 남아 골이 띵하고 속이 메슥거렸다. 목이 말랐지만 무영이를 방해하기 싫어서 그냥 누워 있었다. 삼십분 쯤 지나 무영이가 책을 덮고 교복을 갈아입을 때에서야 나도 기척을 내며 일어나 앉았다. 

“화장실 저쪽이니까 가서 씻고 교복 입어. 주인아줌마한테 가서 아침밥 한 사람 거 더 준비해달라고 말하고 올게.”

“응.”

무영이가 나가고 벽걸이에 걸린 교복을 내리다가 바지가 책상 모서리를 스치면서 뭔가가 같이 떨어졌다. 학생수첩이었다. 학년 초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건데 대부분은 받자마자 버리거나 어딘가 내팽개쳐 버린다. 그러나 아무도 안 가지고 다니는 이런 것조차 무영이는 꼼꼼하게 챙겨 쓰는 녀석이었다. 그 수첩안의 빼곡한 표어들처럼.

「- 개같이 공부해서 정승같이 놀자. 

- 10분 더 공부하면 신부 얼굴이 바뀐다.

- 공부를 하려고 하지 말고 공부를 이겨버려라.

- 승리는 가장 끈기있는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 최선은 나를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

- 노력의 대가는 이유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

기타 등등. 학생수첩의 중간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무영이의 못생긴 글씨들을 보면서 처음엔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지만 점점 웃음이 접혀졌다. 무영이가 공부에 임하는 절실한 태도를 비웃을 자격 같은 건 나한테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막 추가된 듯한 굵기가 다른 볼펜의 글씨는 웃겨도 웃어선 안 되는 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류미승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어제 내가 미승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 말이 무영이의 경쟁심을 더욱 부추겨 놓은 것이다. 무영이가 얼마나 미승이를 라이벌로 여기는지 알겠다. 이렇게 열렬히 노력하고 견주는 녀석인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무영이, 포기하지 않는 무영이, 질투를 에너지삼아 노력하는 무영이가 미승이를 이기는 날이 꼭 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길 지경이었다. 진심으로, 두 녀석들에 대한 모든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무영이의 노력의 대가가 이유 없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는 미승이랑 50위권 안에서만 맴도는 무영이의 성적이 뒤집히기엔 무리수가 넘쳤지만, 미승이 녀석이 한번이라도 성적이 떨어져 주기를― 하고 묵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 또 ……!”

발칵 열린 문 밖에서 무영이가 빨개진 얼굴로 서 있었다. 제 수첩을 들여다본 나에게 이번에도 화를 낼 것 같았다.

“미안, 일부러 본 게 아니라. 이게 떨어져서…….”

어제부터 자꾸만 무영이한테 사과 할 일이 생겨났다. 게다가 핑계까지. 수첩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본 게 아닌 건 아닌데.

“그거 보고… 또 웃었지?”

“어… 조금. …그치만 계속 웃지 않았어. 뭔가… 되게 의미 있는 말들 같아서…….”

모면을 위한 변명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공부와 관련되어 나열된 원색적인 표어들 뒷면에 써 있던 격언들은 씁쓸하게 곱씹어지는 문구들이었다. 

「- 꿈이 없는 십대는 틀린 문장의 마침표와 같다.

- 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를 갖추어 나간다

- 나는 천천히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뒤로 가지는 않는다.

- 내가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해도 그건 미끄럼길일 뿐이지 낭떠러지는 아니다.

- 고생 없이 얻을 수 있는 진실로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다.

- 세상이 날 버렸다고 생각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 신은 잊어라, 그는 영원히 방관자일 뿐이다.」

특히 마지막 말의 의미가 가슴 속에 아프게 쑤셔들었다. 

「신은 잊어라. 그는 영원히 방관자일 뿐이다」

무영이가 썼을 때의 의미는 운을 믿지 말고 자신만을 믿으라는 것이겠지만, 내게는 보여지는 대로의, 가장 어두운 뜻으로만 전도되었다. 나 자신을 못 믿는 나에게 신은 이미 어린 시절에 잊혀진 대상이었다. 그는 방관자였고, 나는 방관자의 구경거리였다. 구원받지 못한 어린이 정희승은, 지금 꿈 없는 십대, 틀린 문장의 마침표였다.

새삼 무엇을 원망해도 소용없지만…….

옆에서 나랑 같이 수첩을 내려다보던 무영이가 조용히 입을 뗐다. 

“남한테 보여주기는 창피하지만, 이걸 가끔씩 읽으면 나한테는 힘이 돼. …너도 하나 써 줄까?”

필요 없어, 하려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영이가 꽤나 진지하게 물어보는 성의를 뿌리치기가 미안해서 녀석이 심이 굵은 볼펜이랑 포스트잍을 꺼내서 이번에도 못생긴 글씨로 격언을 두 줄 적고, 그것을 내 공책에다 붙여 책가방에 넣어주는 걸 얌전히 지켜봤다. 

“아줌마가 밥 차려놨으니까, 아침 먹고 학교 가자.”

볼펜 뚜껑을 닫으면서 책가방을 챙기는 무영이를 따라 나도 서둘러 교복을 마저 입고 방을 나섰다. 

「포기하지 마라. 저 모퉁이만 돌면 희망이란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트 안에 붙여진 노란 포스트 잍에 적힌 문구를 나는 2교시 영어 시간에서야 읽게 되었다. 별로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더욱이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도 아니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불확실한 가설은 기운을 북돋워주기는커녕 나던 힘도 빠지게 했다.

그래도 어쩌면… 

나도 언젠가 모퉁이에서 기다리는 희망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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