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승, 너도 갈래?”
방과 후 류미승이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틈에 멈춰 있었다. 책가방을 챙기던 걸 중단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였다. 저놈이 또 무슨 꿍꿍이야? 라는 생각부터 대번에 들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정희승은 왜? 너 쟤랑 친해?”
옆에서 당형수가 류미승의 턱밑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랑 류미승을 두리두리 번갈아보느라 바빴다.
“둘이 초등학교 중학교 때 친구래.”
한지석이 불쑥 대답하고 있었다. 당사자는 입을 다문 채.
“어, 진짜? 난 얘네들이 말 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둘이 별로 안 친했나 보지?”
당형수가 가차 없이 솔직하게 끼어들자, 이번에는 류미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거니까.”
“흐응. 초등학교 때 헤어졌다가 고등학교 와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거냐?”
정확히는 중학교 때였지. 하지만, 친구가 아니게 된 걸로 치자면 그보다 전이라고 할 수 있겠고. 막연히 오랜만에 다시 본 거다, 라고 하기엔 막연하지 않은 공백이 있었지. 당형수는 얼핏 중요치 않아 보일 저 질문에 한지석까지 셋을 번갈아보며 끈기있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럼 희승이도 같이 가자. 너 아직 미승이네 못 가 봤지? 가자, 가자.”
당형수가 촐랑거리며 뛰어와서 내 책가방을 닥치는 대로 싸대기 시작했다. 남의 결정은 듣지도 않고 행동력을 앞세우는 놈이었다. 내가 류미승의 옛날 친구라고 믿기 시작하자마자 대번에 날 제 친구까지 되는 양 허물없이 굴면서, 동시에 남의 집 놀러가는 데 제 집처럼 생색내기까지 했다. 오히려 처음 말을 꺼낸 류미승은 내가 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고, 옆에 묵묵히 서 있는 한지석도 마찬가지였다.
“나 버스 시간 늦어서 안 돼.”
“내일 노는 날이잖아.”
한지석이 내 핑계가 말이 안 된다는 듯 잘랐다. 어딘가 짜증스러워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계획에도 없던 일정에, 류미승의 주변에 꼽사리 끼어들기 싫어하는 내 기색을 눈치 채인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에 미승이는 먼저 교실을 나가버렸다.
“맞아, 내일 현충일이니까 상관없잖아. 우리도 미승이네서 놀다가 자고 갈 건데. 너도 같이 자고 가면 되지.”
가방 지퍼를 다물며 당형수는 내 가방까지 제 어깨로 겹쳐 매고 교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등을 밀었다. 류미승과 한지석이 앞에서 걷고 뒤에선 나랑 내 팔짱을 낀 당형수가 걸었다. 녀석은 말이 많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죄다 참견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어도 번잡했다.
학교부터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주공 아파트는 17평, 20평형의 소담한 구조라 신혼부부나 독신자, 아니면 노년부부들이 대부분의 주거세대를 이루는 단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현구 삼촌이 결혼하기 직전에 미승이네 아버지가 당시에 신축된 이 곳 아파트 한 채를 사줬다는 얘길 들었었다. 현구 삼촌 내외랑 초등학생 아이들 둘에, 미승이가 겹쳐 지내는 것만도 빡빡할 텐데, 조카 친구들까지 수시로 드나든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복작거렸다. 게다가 류현구가 어디 보통 성깔이던가.
‘현구 삼촌이 좁다고 짜증 낼 텐데. 이젠 그 성질 도 좀 죽었나?’
현구 삼촌이 결혼한지가 7년이 넘었으니, 결혼 당시에 제법 신혼부부가 살만한 아파트랑 가게―수렵 좋아하는 현구의 적성에 맞춰 총포사를 차려줬다고 들었다―까지 장만해 주었다는 정보랑 견주어 보았을 때, 아직도 낡은 주공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류현구의 무능함 탓이라고 볼 수밖엔 없었다. 게다가 제 삼촌이 장가들게 되어 혼자서 방 두 개를 걸쳐 쓴다고 좋아하던 예전의 류미승을 생각하면, 비좁은 집에서 어찌 참고 지내는지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녀석도 삼촌네 가족이랑 복닥거리면서 살기엔 성깔이 만만찮을 텐데.
일 층까지 4개, 다음부터 한 줄 당 여덟 개씩. 4층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층계가 모두 52개였다. 제대로 센 게 맞다면.
“여기야. 들어가.”
미승이 열쇠를 걸어둔 채 문을 붙잡고 우리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가자마자 든 생각은, 주공 아파트답게 15평형 면적을 실한 설계로 넉넉하게 짜놓은 곳이라서 라기 보다는… 말도 안 되게 휑해서 넓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가정집다운 살림이 없었다. 낯선데다 텅 빈 공간속에 들어와 맹하게 서있는 나를 관심에도 두지 않고 한지석과 당형수는 제 집인 양 익숙하게 여기 저기 가방을 내려놓고 각자 방과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미승이 부엌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물을 따라 마시는 동안 혼자 서 있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엔 TV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고,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벽에 못 자국 하나 없었다.
“현구 삼촌네는? 다들 밖에 나간 거야?”
“살림 보면 모르겠냐? 여기 안 살아.”
“현구 삼촌도 이 아파트에 살지 않았어?”
“그게 언제 적 얘긴데. 3년 전에 이사 갔어. 서서 그러지 말고 앉아. 쿠션이라도 갖다 줘?”
“됐어.”
작은 방으로 보이는 문에서 한지석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서 형수가 목에 걸고 나온 수건을 걷어 욕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희승이 넌 몰랐냐? 여기 미승이 혼자 살아.”
『혼자는 아니지. 나도 여기 사니까.』
욕실 안에서도 형수의 목소리가 다 들리는지 한지석이 소리쳤다.
“언제부터 둘이서 사는 거야?”
“미승이가 혼자 산 건 작년부터고, 지석이가 빌붙어 사는 건 올해부터야.”
빌붙어 산다는 말에 반박이 없는 건 욕실에서 거침없이 들려오는 물소리 탓이겠지. 늘상 한 옥타브 상기되어 있는 당형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혼자 살 거면 방 하나 얻어서 자취나 하숙해도 되잖아. 왜 굳이 아파트에서 지낸대?”
형수가 한지석이에게서 들었다는 대로 설명하길, 미승이가 중학교 때 시내로 전학 왔을 때만 해도 삼촌네와 같이 지내면서 학교를 다녔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촌과 뜻이 안 맞고 사촌 동생들(류현구의 자식들)도 자라면서 쿵쾅거리기 시작하자 ‘때는 바로 이때다’하고 미승이는 당장 집에다가 ‘도저히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따로 방을 얻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저씨는 전부터 큰 아파트로 옮겨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현구 삼촌에게 자금을 보태줘서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게 하고, 살던 아파트를 고대로 미승에게 주면서 “나중에 그거 팔아서 대학까지 다녀라.”라고 했단다. 미승이네 아버지가 의외로 엉뚱한 건지, 아니면 굉장히 현실적인 건지 의아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데다, 형수가 말을 하니까 더욱 분간이 안 될밖에.
“그리고 고등학교 들어와서 1학년 때 미승이랑 지석이랑 같은 반이라서 친해지고 나서, 지석이도 자기네 집보다 여기가 학교에서 가까워서 아예 제 짐들을 갖다 놓고 왔다 갔다 하는 거야. 나도 덩달아서 가끔 놀러오지만 지석이처럼 아무 때나 빌붙는 건 아냐.”
마지막으로 당형수는 자신이 보기엔 덤벙덤벙 눈치 없이 엉겨 붙고 살 것 같은 놈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상당히 강조하고 싶어 했다.
“흐응… 그렇구나.”
“그나저나 너, 초등학교랑 중학교도 같이 다니고 고향도 같다면서 미승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어릴 때 안 친했나 보다.”
“…….”
할 말이 없어 머리를 긁적이고 나니 어느새 거실엔 나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당형수는 어느새 작은방으로 바람처럼 사라지고, 아까부터 류미승은 큰 방에, 한지석은 욕실에서 각자 볼일을 보고 있었다. 처음 데려온 나를 내버려두고 제 할 일만 하는 녀석들. 뭐 하러 따라왔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상황이었다. 심심해서 벽에 기대 앉아 양말속의 발가락만 꿈지럭거려 보고 있었다.
세수를 하느라 물기가 묻은 머리칼을 털며 한지석이 욕실에서 나왔다. 도기 인형마냥 얼굴이 반질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빡빡 얼굴을 씻어봤자 토기 인형 같은 윤기만 도는 나랑은 다르게.
“교복, 불편하지 않아? 미승이한테 편한 옷 달라고 해.”
“네 옷 빌려줘도 되잖아?”
내 말에 녀석의 눈썹이 꿈쩍거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 그걸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저 차고 희멀건 얼굴을 이쑤시개로 콕콕 쑤셔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한지석의 애매하게 감추는 듯한 태도 때문이었다. 딱히 근거가 있는 짐작은 아니었다. 다만, 한지석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가까이 지내기도 싫고, 그렇다고 멀리 밀어내버릴 수도 없는 그런 류의 감정이라는 정도임을 어렴풋이 확인하고 있었다.
『야, 쟤 갈아입을 옷 갖다 줘.』
한지석은 큰방으로 들어가 문 밖으로 샐 만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 들으란 듯이. 자기 옷은 빌려주기 싫다는 간접 엄포인 듯. 서랍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반팔 면 티와 검은색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거실로 나온 미승이 내게 옷가지를 내밀며 큰 방 문을 가리켰다.
“저 방에서 갈아입어.”
추측대로 미승이 가리킨 방이 큰방이었다. 1인용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그리고 긴 거울. 학생 혼자 거주하는 방이란 걸 알 수 있는 짐들이 방 벽을 두르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받아온 옷을 펼쳐들고는 아연했다. 위아래 밝은 연두색 한 벌 트레이닝복. 어릴 적엔 형광 연두색에 아무 이유 없이 끌렸던 적도 있지만, 내 피부색에 대해 자각한 후로는 절대로 밝고 자극적인 색은 기피해왔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칙칙하게까지 보이게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데 바로 기피해왔던 최고 색상의 추리닝 세트를 들고 입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여하튼 투정부릴 상황이 아닌지라 주섬주섬 갈아입긴 했다. 피부색이 밝아 어떤 색이건 화려하게 소화해내는 류미승이에게는 잘 어울릴 색상이지만, 나에겐 영…….
“으아, 희승아, 너 그 옷 짱, 잘 어울린다! 미승이가 입었을 때랑 전혀 딴 판이네.”
형수가 호들갑을 떨며 놀릴 거라는 건 어느 정도 각오했던 바라 전혀 타격이 없었다. 오히려 빤히 쳐다보고 아무 평도 안하는 나머지 두 녀석의 시선이 날 쪽팔리게 했다. 다만 형수에게 고마운 건, 녀석이 갈아입고 나온 학교 마크가 새겨진 진 보라색 체육복 차림이 나랑 밝은 연두색의 조화만큼이나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내가 입은 건 쫄쫄이 밴드도 없고 천의 재질이 좋아서 착용감이라도 착착 감겼다.
“저녁 뭐 시켜 먹을까?”
“밥 시켜 먹자. 밥!”
미승이가 한지석한테 묻는 걸 형수가 손을 번쩍 치켜들고 선수를 쳤다. 자기는 밥을 꼭 먹어야겠으니 밥집에 전화를 걸라며 싱크대 서랍 안에서 온갖 종류의 메뉴판과 스티커들을 들고 와서 미승이를 재촉했다.
“희승이 넌?”
“난 됐는…….”
“됐다 소린 말고, 먹을 생각으로 골라.”
“으응.”
어중간한 거절을 칼처럼 자르고 미승이는 형수가 들고 온 메뉴판들을 빼앗아 내 앞으로 밀었다. 형수는 얼른 내 옆으로 와서 옆구리를 꼭 붙이고 앉아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여긴 뭐가 맛없고, 여긴 맛있고, 그러니까 이걸로 하자고 꼬드기기 시작했다. 귀에 대고 간지럽도록 소곤거리는 녀석의 장난기에 맞춰 “응, 응” 고개를 맞춰 웃었다.
“그럼, 나랑 형수는 오징어 덮…….”
메뉴판에서 고갤 들었을 때 미승이의 입매가 사나웠다. 냉기가 돈다 싶을 만큼 기온 떨어진 기색에 내가 뭘 실수했나? 눈치를 보기 시작해야 할 지경이었다.
“형수야, 이리와. 너 어차피 내 거 뺏어먹을 거잖아. 그러니까 내거나 같이 골라.”
한지석이 형수를 부르자 녀석은 나를 내팽개치고 메뉴들을 그러모아서 재빠르게 한지석의 옆으로 가서 옆구리를 붙이고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당형수는 먹을 것과 관련되면 사람에 대한 친밀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승이 넌?”
“나도 쟤들이랑 같은 걸로.”
“안 돼! 같은 거 시키면 안 돼! 다른 거 시켜서 나눠 먹어야지. 안 그러냐, 희승아?”
형수는 절실하게 외치며 나한테 동의를 구했다.
“어… 그치만, 같은 걸로 시키면 배달이 빨리 되잖아.”
“시끄럽다, 당형수. 미승아, 나랑 넌 국물 있는 걸로 하자 재들이 덮밥 골랐으니까.”
한지석이 내 말토막은 비워두고 형수한테 핀잔을 주고는 식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식당에 주문하는 동안 형수는 그 등 뒤에 달라붙어 있고 미승이는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졸린가? 싶어 쳐다보다가 눈꺼풀을 올린 녀석의 검은자위랑 갑작스레 만나버렸다.
“근데 희승이는 눈알이 참 크네.”
눈 돌릴 새를 맞춰 옆에 형수가 와서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알’ 하니까, 예전에 곧잘 들었던 눈깔 소리가 자연히 연상되었다.
“눈알이 큰 게 아니라. 검은자위가 큰 거야.”
미승이는 그 시절과 비슷한 해명을 했다. 형수가 계속 가깝게 얼굴을 들이밀고 안구 주변을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내 얼굴을 뜯어봐서 민망한 참인데 한지석이 형수의 어깨를 뒤로 잡아당겨 나한테서 떼어 놓았다.
“쟤 어릴 때 별명이 사팔뜨기랑 눈깔탱이였어.”
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유치찬란한 별명이 미승이의 입에서 나왔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형수는 크핫 웃으려다 한지석한테 꿀밤을 한 대 맞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때부터 서서히 정상기온을 찾아가는 미승이의 표정은 심술궂은 수수께끼 같았다. 제멋대로 꼬여서 풀을 테면 풀어보라는.
호루라기소리 같기도 하고 새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초인종이 울렸을 때 미승이가 현관으로 나가고 그동안 한지석은 네모진 상이랑 쿠션을 찾아 와서 거실 가운데에 놓고 형수는 TV를 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런 움직임들이 공간에, 서로 간에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걸 느끼는 순간, 오늘 얼떨결에 섞여 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나, 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감정이 한 구석에서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앉아.”
두 개밖에 없는 쿠션 중 한 개를 자신의 옆자리로 끌면서 미승은 제 몫으로 온 된장찌개를 나랑 저 가운데로 몰아 놓았다.
“넌 쟤들 거 넘볼 생각 말고 여기서 내 찌게나 얌전히 떠먹어.”
한지석은 형수를 옆으로 끌어다 앉히고, 건너편에선 밥 먹는 내내 투닥대는 소리만 들려왔다. 야, 밥풀 튄다. 찌개에 밥알 좀 담그지 마, 침칠한 젓가락으로 반찬 좀 뒤적거리지 마. 당형수를 향한 한지석의 잔소리 퍼레이드였다.
“안되겠어. 지석이 넌 날 너무 힘들게 해. 희승아!”
“너 절루 가.”
형수가 우리 자리로 뛰어와 내 밥그릇에 수저를 담그려 하자, 미승이의 숟가락이 와서 찰강 소리 나게 걷어냈다. 산만한 형수 덕분에 밥알이 어디로 넘어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형수는 10시쯤 되자 집으로 갔다. 먹을 것 먹고 실컷 놀았으니 이젠 볼 일 다 끝냈다는 듯 홀가분한 얼굴로 나가는 녀석을 한지석이 배웅해 주겠다며 따라 나갔다. 나도 녀석들을 따라 나갈 걸 그랬다. 휑한 거실에 미승이랑 단 둘이 남아 30분간 말없이 썰렁한 공기만 나눠 쉬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녀석의 눈초리를 피해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땐 노르스름한 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옅은 레몬색의 패턴이 흰 바탕위에 나열되어 있었다. 꽃무늬인지 추상무늬인지 모호한 벽지 문양을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있는데 뒤에서 퉁명한 말투가 넘어왔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아니.”
이렇게 대답하고 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뻘쭘해져서 아예 벽을 향해 책상다리를 하고 안정감 있게 돌아 앉아 벽에 대고 명상하는 사람처럼 벽지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 너머가 싸늘해지는 기분도 무시하고.
“지금 장난해?”
“…….”
“돌아 앉아!”
귓바퀴를 때리는 소리가 장난 아니게 매서웠다. 말 안 들었다간 후한이 남을 것 같아 책상다리를 한 채 엉덩이를 움직여 고분고분히 돌아앉았다. 매서운 목소리에 딱 걸맞은 눈초리로 녀석이 날 쏘아보고 있었다.
“자.”
돌아앉았으니 네가 할 얘기 있으면 해 보라는 눈초리로 미승이를 쏘아보았다.
“나한테 할 얘기나, 듣고 싶은 얘기 없어?”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 없었다. 우리의 과거를 끄집어낸다면 얘깃거리가 있겠지만, 하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없다. 새삼 번거롭게 과거나 들추어서 다른 고리를 이어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 서로에게서 이미 한 번 이상씩 학을 뗄만한 상처들을 주고받았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묵묵히 궁시렁대는 동안 미승의 눈썹이 꿈찔거렸다. ‘입 좀 떼시지?’라고 불평하는 것처럼.
“누가 입 꿰매놨냐?”
“미승이 넌,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녀석이 전에 내게 흠칫하게 던져두고 간 얘길 꺼냈다. 별로 궁금해서가 아니라 입을 떼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떠올린 화제 거리가 저것뿐이었다.
“넌 아니라고 생각하냐?”
되물으면 어떡하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반문을 던진 녀석이 눈가를 찌푸리며 입가에 건 조소가 거슬렸다.
“정희승. 넌 네가 이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 왜냐면 약하니까. 넌 강한 놈들만 이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단순한 새끼.”
거칠게 넘겨짚는 미승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내 정의는 단순했다. 강한 놈 = 센 놈이고, 센 놈 = 이기적인 놈이라고 믿고 살았으니까. 물리적으로 강한 녀석들은 마음대로 휘두르고 상대방을 배려해 주지 않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고 사는 놈들이니까 당연히 이기적이었다. 예전의 선중이나 병식이를 보고 자라면서 내 안의 믿음도 확고하게 자랐다. 어릴 적엔 김선중이라는 기준이 강함과 이기심으로 상통했고, 병식이가 일어섰을 땐 강하고 이기적인 놈은 병식이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선중이의 강함이 병식이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작은 새우마냥 이리저리 채이던 내 안에서 자리 잡힌 단순한 도식이었다. 강함 = 이기심이라는 단순한 도식.
그리고 박기수는 허약한 인간이었지만 나에게만 위압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고로, 내 기준에 나보다 약하고 나보다 덜 이기적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다못해 무영이 조차 나만큼 약해도 녀석은 공부라도 잘 했다.
그러니 내가 궁극으로 이기적이 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보다 훨씬 강하고 세고 이기적인 미승이한테 저런 소릴 들을 만큼은. 내 삶에서 한때 약하고 다정한 녀석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꾸준하게 강하고 이기적인 놈으로 버텨온 류미승은 지금은 내가 아는 한, 가장 강하고 이기적인 종자였다. 중학교 시절 이후 녀석과 떨어져 지낼 때, 녀석이 눈앞에 없을 때조차 류미승이란 그늘은 내 자신감의 머리꼭지를 내리눌렀으니까.
“넌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냐?”
그런데도, 미승이 쪽에서 저렇게 물어오면 응, 아니, 둘 다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너한테 이기적으로 구는 것 같아?”
재촉되는 질문에도 대답 못 했다. 녀석과 관련된 끔찍하게 싫은 기억도 많지만, 녀석이 내게 잘 해 주었던 아홉 살 무렵의 기억도 쉽게 지워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때는 내가 얼마나 제멋대로 이리저리 붙었다 떨어졌다 했는지, 그럼에도 녀석이 얼마나 날 참아주었는지를 생각하면…
“넌…….”
“말 해.”
“…넌 지금도 날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어?”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겠냐?”
“한지석한테 날 어릴 적부터 친구라고 했다며.”
“그럼, 너 같으면 뭐라고 했겠어?”
미승이는 진심으로 날 친구로 생각하는 걸까? 아니, 지금도 날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한 걸까?
“넌 날 친구라고 생각해?”
미승이는 외려 나한테 물었다. 듣자듣자 하니, 녀석은 아까부터 제 얘긴 안 하고, 나한테 질문을 던지기만 하고 있었다. 청문회에 끌려 나온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질문을 받아야 되나. 게다가 내가 물어보면 같은 질문을 부메랑처럼 되돌리기만 하고. 녀석의 생각을 듣기는 포기하기로 했다.
“내 생각엔…….”
“네 생각엔?”
“친구 하기엔…, 너나 나나 자격이 없지 않냐?”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린 서로 친구라는 순진한 말을 쓰기엔 지나치게 오염된 관계였다. 돌이킬 수 있는 건 없었다. 설령, 녀석이 원한다 한들, 내가 원한다 한들. 우린 너무 멀리 와버렸다. 미승이도 대답 없이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내 말을 새겨 곱씹는 듯 했다.
“내가 했던 말 신경 쓰지 마. 너 원래 이기적인 놈인 거 알고 있었으니까.”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미승이가 고개를 들고 한 말을 뜬금없었다. 방금 진지한 내적 성토 끝에 힘겹게 짧은 결론을 내려 줬더니.
그러나 뒤따른 말들은 미승이가 조금씩 열어주는 이해의 문이었다.
“우리가 친구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다. 전에 지석이가 나한테 너랑 아는 사이냐고 묻는데, 그때 ‘친구’라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더라. 그래서 옛날 친구라고 했어. 듣자하니 넌, 날 친구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 같은데… 그건 뭐, 상관없어. 그치만 친구 자격이란 게 뭔지 난 모르겠다.”
날 쳐다보며 미승이는 잠시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게 어색하게. 미승이랑 재회해서 처음으로 나에게 진심으로 웃어 보이는 게 저런 얼굴이라니.
“하지만, 친구란 게 별거냐? 같이 놀면 친구지. 지석이나 형수가 지금 나한테 친구인 것처럼… 예전에 선중이나 병식이나 무영이나… 그리고 너도 다 친구로 해버리면 편하잖아. 네가 싫지만 않다면 우리가 친구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난.”
또박또박 마디를 끊을 듯 잇는 미승이의 말들은 아까 내가 물었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몰아서 들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속엔 강요도 설득도 없었다. 어찌나 듣기에 편한지 머리가 혼미해졌나 싶을 만큼, 이상하도록, 평이했다.
“친구든 아니든, 너 편할 대로 날 상대해.”
그리고 끝까지 애매했다. 미승이는 내가 녀석을 쉽게 놓을 수 있는 답을 주지는 않았다.
한지석은 11시쯤에나 돌아왔다. 형수 바래다주겠다고 나간 게 10시였는데, 거의 한 시간 만에 돌아왔으니 설마 형수네 집까지 데려다주고 온 건가 싶었다. 게다가 녀석은 오자마자 곧장 “나 졸려.” 한마디로 작은 방으로 들어가려했다. 그 순간에야 뭐야, 나더러 미승이 방에서 둘이 자라는 거야? 속으로 펄쩍 뛰었는데,
“지석아, 잠깐만.”
“왜?”
“오늘은 네가 큰방에서 자. 희승이랑.”
마치…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미승이는 내 어깨를 떼밀었다. 한지석은 절대로 반기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자고 있는 한지석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이랑 가방을 거실로 들고 나왔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벗어둔 츄리닝을 거실 한 쪽에 두었을 때 미승이가 방에서 나왔다.
“벌써 가려고?”
“벌써 10시 넘었잖아. 지금 나가면 버스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서.”
“같이 나가자. 나도 나갔다 와야 되니까.”
열쇠를 찾아 온 미승이는 내가 우리 마을 버스가 지나가는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따라왔다.
“자는 데 불편하진 않았어?”
“응. 나보다 한지석이 불편했겠지.”
“지석이는 한 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몰라.”
한지석의 표정을 빼고 잠드는 데 불편할 건 없었다. 혹시라도 한지석이 무뚝뚝한 기류를 흘리며 늦게까지 안 자고 버텼더라면 눈치가 보였겠지만, 녀석은 금방, 푹 잠에 들었다. 게다가 일찍 잠든 주제에 우리가 나올 때까지 깨지 않는 걸 보면 잠이 많은 체질인 것 같았다.
39번 번호가 식별될 만큼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오고 있을 때, 차도 가까이 한 발 옮기자 미승이가 책가방 꼬리를 당겼다.
“우리 집 위치 알았으니까, 자주 놀러와.”
고개를 끄덕했는지 어땠는지 구분하기 모호할 만큼 머리를 움직이고 버스에 올랐다. 내가 뒷자리에 앉는 걸 보자마자 돌아서 걸어가는 미승이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어젯밤 미승이와의 대화를 되새김질 했다.
내가 이기적인 건 맞았다. 어릴 적에 미승이가 아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나의 결정은 언제나 의리보다 안위에 우선해서 지어졌고, 선중이와 병식이의 관계가 전복될 때도 그들의 위계가 바뀌건 말건, 선중이가 피터지게 얻어맞건 말건 어느 쪽에도 끼어들지 않고 싸움의 결과만 확인했다. 하다못해 무영이는 제 사촌인 병식이의 노선은 꾸준히 따르는 일관성이라도 있었는데, 난 어느 쪽도 아니었다. 비록 우리들의 우정이란 게 처음부터 변덕스럽고 못미더운 것들이었다지만, 긴 시간 티격태격 붙어 다닌 추억들에 조금이라도 의리와 애착을 가졌더라면 그런 방관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어릴 때건 지금이건 내게 믿을만한 친구가 없는 건 내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친구라고 편의상의 명찰을 붙인 녀석들은 항상 있었지만, 우정을 위해 발 벗고 간섭해 줄 만큼의 의리가 쌓인 친구는 없는 것은 내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미승이를 친구로 가지지 못하게 된 것엔 내 탓도 없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겐 자괴감보다 피해의식이 컸다. 세상에서 나만큼 기가 약해서 휘둘리고 사는 놈이, 무영이 빼고, 또 있을까 싶었다. 세상에서 나만큼 상처 받고 또 받은 아이가 또 있을까 싶었다. 내 상처밖엔 볼 줄 몰랐다. 억울한 눈물이 가슴의 방둑을 넘치고 분통으로 가슴의 벽이 튿어지는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싶었다. 비록 어린 시절의 한 서린 투정이었을 망정, 지금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견디는 건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하는 몫이었다. 못 견딜 것도 없었다. 나는… 그래. …견뎠다. 지금은 자괴조차 허물어졌다. 대신 메마른 자기장이 지지직거린다. 간혹, 의식할 때와 의식 못 할 때, 간헐적이고 불규칙적으로, 비선형적으로 찾아드는 공백 아닌 공백.
“희승아, 너 집에서 다니기 많이 불편하냐?”
아침 밥상에서 아빠가 묻자마자 엄마가 옆에서 나 대신 입을 열었다.
“왜 안 불편하겠어요? 같은 시내라지만 말이 그렇지 여기서 한 시간 거린데. 요즘 고등학생들 너도 나도 더 시간 붙잡아서 공부하지 못해 안달들인데, 잰 오가는 시간이 너무 뺏기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곤란한 아빠의 표정과 새삼 갑자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영문 모를 내 표정사이로 엄마가 다시 끼어들었다.
“나쁜 얘긴 아니잖아요.”
“그래도 남의 집에 함부로 신세 지는 건 생각해 볼 문제야.”
“아유. 신세라고 해봤자 방 하나 같이 나눠 쓰는 거라는데, 대단치도 않지 뭘 그래요? 내가 애들 조금만 신경 써 주면 되는 거니까.”
아무리 봐도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만 빼놓고 엄마 아빠끼리만 왈가왈부 주고받는다. 결국 내가 끼어들 수밖에.
“무슨 말이에요?”
“어? 아, 너 지난주에 미승이네서 자고 왔지? 학교에서 가깝다며? 어제 미승이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희승이 너도 미승이랑 같이 그 아파트에서 학교 다니면 어떻겠냐고 하더라. 지금 미승이 친구 한명도 같이 지낸다는데, 좁지는 않다며. 미승이 방이 넓으니까 희승이 네가 같이 써도 될 거라고 하더라.”
“…….”
“너 미승이랑 같은 반 됐다는 말은 왜 안했니? 미승이 엄마도 며칠 전에야 알았다더라. 요즘 애들은 부모한테 말을 안 해. 아무튼, 미승이가 지 엄마한테 희승이 네가 집에서 다니느라 야자 못하고 학교 일찍 나온다는 얘길 했는가봐. 그런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희승이 널 미승이랑 같이 지내게 할 걸 그랬다고 하더라. 우리야 신경 써주니 고맙지 뭐.”
엄마는 미승이 엄마의 제안을 반기고 있었다. 넓은 방 한 귀퉁이에라도 낑겨 사는 걸로 통학시간과 방값을 줄일 수만 있다면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아줌마에게 고마워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도 아줌마의 마음이야 고맙지만…
“됐어요. 지금처럼 집에서 다닐래.”
“아니, 왜? 너 여기서 다니는 거 힘들잖아. 안 힘들어?”
엄마는 아깝다는 듯 다그치고 아빠도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생뚱하단 표정으로 쳐다본다.
“힘들면 엄마가 방 따로 구해 줄 거야?”
“그런 데 쓸 돈이 어딨냐? 우리 형편 좀 보고 애기해라.”
“그럼 됐어. 안 힘들어. 다닐만 해.”
엄마는 무척이나 아까워했지만 아빠의 기분은 나랑 엄마의 기분 반반이었는지 묵묵히 수저를 들고 국을 뜨기만 했다.
“너, 앞으로 내 앞에서 학교 멀리 다니기 힘들다 소리 하기만 해 봐. 하여간에 지 발로 복을 차요. 애가 얼마나 박복하면 저리도 주변머리가 없을까…….”
“희승이가 결정한 대로 해.”
엄마의 쫑알쫑알이 길어지자 아빠가 한 소리 했다. 묵직한 저 한마디의 위력에 엄마의 미련도 더는 고무줄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전화했다며?”
전화 했다며? 그게 아니지, 류미승. 네가 아줌마가 전화하게 만든 거잖아!?
녀석이 이제 와서 지 엄마에게 나랑 같은 반이 되었다는 얘길 꺼냈다면 꿍수를 부린 틀림없다. 다만 그 꿍수의 근거를 끄집어낼 데가 막연할 뿐이지만. 녀석이 아줌마한테 내가 야자도 못하고 다닌다는 소리도 했다니 녀석은 확신범이었다. 확실히 물릴 만한 빌미만 던져서 아줌마가 덥썩 물도록 만든 거다. 녀석의 간계를 꿰뚫어보는 예리함은 어느 날부터 내가 갑자기 똑똑해져서 그런 게 아니다. 오로지 류미승 이 자식에 한해서만 발휘되는 예리함이었다.
“아줌마한테 말씀은 고맙다고 전해드려 줘.”
“말씀은 고마운데, 나랑 같이 지내는 건 싫다?”
“싫고 말고 할 것 없어. 집에서 다니는 게 편해서 그래.”
“좋을 대로 해.”
녀석의 입가가 빈정거리듯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주변으로 몰려든 녀석들 때문에 쌉쌀한 기분의 교차는 순식간에 단절되어 버렸다.
미승은 모여든 녀석들과 떠드느라 여념이 없다. 아이들이랑 만화책을 펴놓고 깔깔대는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놈의 주변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착잡했다. 난 갈수록 찜찜해져 가는데 녀석은 아무 일 없는 듯 군다는 사실이. 난 여전히 찐득한 어둠에 잠겨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녀석은 평범하게 웃으면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오늘도 야자를 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난 학교를 일찍 빠져나왔다. 미령 읍내나 우리 마을을 통 털어도 고등학교는 없었고 더군다나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몇 안 되었다. 대부분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나처럼 야자 빼먹고 집에 오는 아이들은 없었기 때문에 중앙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교복은 나 혼자였다. 인문계를 다니는 아이들 대부분은 시내에 있는 친척집에서 다니거나 자취들을 했다. 무영이만 해도 그랬다.
무영이는 시내에서 하숙을 하는데, 처음에 전세방을 얻어주려던 개네 부모님은 공부하는 아이 밥 챙겨 먹여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굳이 학교 가까운 데 하숙을 시켰다. 뿐만 아니라 무영이는 일주일에 삼일씩 개인 과외를 받으러 다니는 곳도 있었다. 녀석의 소심한 성격상 자기 입으로 절대로 그런 소릴 하진 않았겠지만, 무영이랑 같이 개인과외를 받는다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니 괜한 뜬소문은 아니었다. 무영이네는 외아들인 무영이 하나를 위해 그쯤 못해줄 형편도 아니었다. 더욱이 고등학교 들어와서 서울의 상위권 대학을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을 성적표를 보내드리고 있으니 그 정도 투자는 해줘야겠다고 계네 집에서도 각오를 했을 것이다.
내 경우와는 달랐다. 우리 집은 시내에 친척도 없고 나를 따로 방을 얻어 내보낼 만큼 나에게 투자해줄 여유도 없었거니와, ‘인문계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줬으면 됐지, 뭘 더 바래?’라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그러니 시내까지 왕복 두 시간 거리를 버스 타고 다니기 귀찮고 힘들다고 투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오가는 시간에 빼앗기는 공부 시간에 학습 효율이 떨어진다는 핑계도 못 댔다. 성적이 부모님의 기대를 높여줄 만큼도 못 되었고, 새삼 성적 올려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만큼, 엄마는 미승이네 엄마의 제안을 아깝게 놓친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교문을 나와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를 매일 왕복 두 시간씩 타는 게 못 견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견디기 힘든 것은 우리 마을의 그늘이었다. 마을에 남아있는 누구도 모르는 내 유년의 비밀과, 그 비밀이 생산한 죄악을. 가끔 깊은 밤에 자다 말고 소스라치게 깨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내 몸은 뜨겁지 않았다. 땀을 이룬 상념들은 돌비늘처럼 남아 몸을 차게 식혔다.
…이상한 건, 그런데도 마을을 떠나고 싶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마을이 죽도록 싫어졌다가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에 발이 잡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언젠가 마을을 떠날 수 있게 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벗어나고 달아나고픈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된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멀리 뛰어갈 거라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분노와 악몽을 축적하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가족의 곁에 남아 있는 거라고…….
언젠가 두려움이 그리움으로 변성된다 한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강가로 향했다. 7시가 되어가는 데도 강변은 아직 환했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강변 나루의 샵에선 직원들이 수상스포츠 비품들의 대거 손질에 들어가고 있었다. 성수기가 되면 몰려들 활기와 돈벌이에 대한 기대가 벌써부터 물씬하게 풍기고 있었다.
수상 스포츠가 활성화되면서 피서객들로 한창 호황을 누리던 강은, 내가 열세 살 때 잇따른 두 명의 익사자를 냈었다. 처음엔 수영 못하는 어린 아이가 튜브를 끼고 물에서 놀다가 헐렁한 튜브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고, 두 번째 익사자는 수영을 할 줄 알았음에도 강변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서 방심하고 놀다가 깊게 패인 모래바닥의 골 아래로 떨어지면서 당황해서 제 때 올라오지 못했다. 그 후로 외부인과 마을사람 모두 강에서 수영이 금지되었다.
덕분에 한동안 안 좋은 소문과 더불어 호황의 붐이 주춤거리며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러나 경계와 우려는 잠시, 해가 바뀌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고 강변은 점점 외지인들로 분주함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는 텐트치고 강에서 헤엄치고 고기 구워먹는 사람들 보다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고 요트나 수상스키, 윈드서핑, 바나나보트, 카누, 등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잘 잊었다. 잊어선 안 될 것들도, 아무리 심각한 일들도 한차례 들썩이고 나면 망각제라도 치른 듯이 잊고,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편한 것만 보려고 했다. 싫은 기분들, 기억들, 그렇게 자연 삭제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러지 못한다. 칙칙한 양키시장 골목을 찾아들고 가끔은 이렇게 강으로 찾아드는 것처럼. 징그러운 기억들을 자꾸만 들추고 사는 난, 호숫가엔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순 있어도, 강에는 발길을 끊을 수 없었다.
이유는 모호하고 모순되고 단순했다.
류미승은 살아있고, 박기수는 죽었으니까.
…내가 죽였으니까. 이 강물에 밀어 넣어 버렸으니까. 아무도 안 보는 밤에…….
그래. 강속에 쳐 넣어서 내 삶에서 박기수의 존재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승이는 실패했다. 미승을 향해 겨눠졌던 앙심의 칼날은 둔탁해서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미승이가 죽기 바란 건 아니었다. 박기수의 죽음도 바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없어지기만을 바랐었다. 내 삶에서만 없어지기만을.
열 네 살… 열 네 살…
끈끈하고 충동적인 열풍이 불었던 그 여름. 끝나지 않은 그 여름의 난 어디에 서식하고 있는 걸까. 현재했던 형체들은 어디로 날아가고 어두운 감정의 기억들만 안에 꼭꼭 숨겨진 걸까.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자라고 있는 걸까, 움직이고 있는 걸까…
지금에 와선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다. 박기수가 가라앉은 강물처럼 깊고 무감각한 절망뿐이었다. 죄를 지니고 살긴 싫었는데… 순결하고 명랑하게 살고 싶었는데……. 결코 이렇게 구차한 절망을 업고 살고 싶진 않았는데…….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묻었다. 콧구멍에서 간당거리는 콧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무릎 틈새로 빼꼼히 비치는 강은 흐르는 물살을 멈추지 않고 고요하게 이동시키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강처럼 유유히 흐르는 구름. 붉어져가는 하늘의 강 속에서 그날의 낡아버린 나룻배가 끼걱끼걱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년의 강을 뛰어넘어 오는 환청. 그러나 모든 게 환영이 아닌, 기억의 무덤을 파고 나온 현실이라는 사실.
끼걱― 끼걱―
석양 속으로 몰려가는 양떼구름이 많이 멀어졌을 때, 풀에서 일어섰다. 강바람은 시원하게 등을 쓸고 지나갔지만 속에서 이는 열은 식혀지지 않았다.
나는 망각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다.
“과학 실험 다 끝났는데. 늬들은 교실 안 가냐?”
“누가 저 자식들 좀 말려라.”
“새끼들아, 좀 떨어져라. 눈 썩겠다!”
제발 쫌… 자식들, 새끼들, 한데 엮어서 부르지 말아 주지?
강재만이랑 자꾸 같이 묶이기 싫다고!
“늬들 질투하는 구나.”
“질투? 강재만, 너 희승이 엄마 아니었냐?”
“모정이 너무 과한 거 아냐?”
애들이 한마디씩 날리는 데도 재만이는 응큼스럽게 웃고 있었다.
안 그래도 텅 빈 과학실 기온이 단박에 5도쯤 내려가고 있었다. 애들이 시도 때도 없이 주고받는 ‘미친 새끼’ 소리도 나누지 못 할 만큼 황당한 꼬라지가 연출되고 있었으니… 날 무릎에 앉혀놓고 볼을 부비는 강재만 놈이나, 콧잔등을 찌그리고 고스란히 앉아 당하고 있는 나나―.
“아아. 내 모정이 한계를 넘어서 근친으로 가려나 봐.”
‘이놈아, 정신 차려라!’ 하고 실실거리는 녀석을 떼어놓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너희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그딴 거 알게 뭐냐.”
“이거 봐라. 친구란 새끼들이 의리라고는 좁쌀 씹어 먹을 만큼도 없어요. 우리 희승이는 아는데. 그치?”
알고 싶어서 아는 게 아니잖아?
아침부터 날 보자마자 강재만이 “오늘 내 생일인 거 기억하지?”라고 기억도 못하는 제 놈의 기념일을 굳.이. 가르쳐주는 바람에 알 게 된 것을.
작년에도 굳.이. 자기 생일을 알려주는 녀석한테 쫄아서 쫄면을 사줬었는데.
티를 내면서 대놓고 뭔가를 바라는 녀석에게 입 씻고 넘어가기도 뭣해서 방금 2교시 과학실험을 끝내고 “저녁때 돈가스 사줄까?” 했더니 좋다고 이 모양이었다.
“오늘 이 몸의 생신이거든? 그러니까 입 쓱 닦고 갈 생각 마라. 선물 고르기 어려우면 현찰도 오케이! 오케이?”
“니 생신이었냐? 그런데, 생신이랑 지금 이 꼴이랑 무슨 상관이냐? 희승이가 너 효도관광이라도 보내 준대?”
“그게 아니겠지. 희승이는 현찰 대신 몸으로 때우는 거 아냐?”
“푸핫, 그럼 지금 재롱잔치 하는 거네?”
…재롱잔치. 진짜 지금 모양새가 어른 무릎에 앉아 둥기둥기, 부비부비 당하는 어린애 짝이었다. 제일로 싫어하는.
순간적인 힘으로 재만이를 뿌리치고 발딱 일어나서 발끈 했다. 하지만, 주먹만 발끈 했지 목청껏 화내지도 못했다.
“…재만아, 이따 저녁때 같이 나가자.”라고 매가리 없이 웅얼거리고 돌아서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나가려던 찰나에 하필 류미승이 창 밖 복도에서 과학실을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찜찜해하네… 하며 과학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녀석의 몸은 자연히 창에서 내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나한테 할 말 있는 얼굴이다 싶더니
“얘기 좀 하자.”
과연,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소리.
3교시 시작종이 울려 퍼지는 중에 우리는 본관을 지나 교정의 작은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양달의 무더운 햇볕이 숲의 응달의 경계 안까지 침투하지 못하고, 소녀상의 왼쪽 뺨에 노란 빛의 원만 남기고 지워져 있었다. 가지가 엉키도록 가까이 붙어 자란 여러 그루의 산갈 나무 가지들은 푸른 잎사귀들을 키워 원 형의 숲 안에 진한 그늘을 만들었다.
“여기 교장실에서 잘 보이는데.”
운 나쁘면 땡땡이 친 거 들킬 수도 있다고, 소심한 나는 그 걱정부터 들었다.
“교장이 할 일 없어서 여기나 내려다보고 있겠냐? 그리고 안쪽은 잘 보여도 이쪽은 안 보여. 나무에 가려서.”
말대로, 미승이가 지난 번 누워있던 벤치 뒤엔 숲의 외벽을 이루는 산갈 나무가 크게 자라 있어 잘 가려지는 음지였다. 교내에서 누구보다 자주 여길 드나들었으면서도 이런 요충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니, 내 눈은 해태 눈이었다.
“이 자리가 제일 명당이구나…….”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했을 텐데.”
내가 이곳에 처음 와보는 놈 마냥 산만하게 두리번거리자 미승이 짜증을 냈다. 발등으로 침침한 흙바닥을 툭툭 차면서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앉아서 얘기 해.”
앉으라는 말도 무시하고 계속 선 채로 내려다보는 눈초리가 약간 심상치 않았다. 바로 앞에 훌쩍하게 선 꺽다리는 묵직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너, 그 자식들 다 끊어내.”
“누굴 말하는 거냐?”
“몰라서 물어? 이태수랑 강재만.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자식들이랑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두고 보기도 지겨워.”
과연, 류미승. 내가 안 보는 데서도 넌 다 보고 있었구나. 그 말 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두고 보기도 지겨울 때까지―.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네가 그런 말 할 권리가 있냐?”
설마 이 자리에서 ‘친구’를 권리로 들먹이진 않겠지? 며칠 전에 저가 맘대로 친구 운을 띄워놨다고 곧장 그 빌미로 밀어붙이기라도 한다면 널 비웃을 거다, 류미승!
하지만, 비웃을 기회는 와주지 않았다.
“나한테 권리 같은 거 없어. 그렇지만…….”
미승은 볼 살이 물리도록 아랫입술을 다물고 숨을 조절하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달라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강재만, 이태수보다 중요한 본론은 따로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희승아? 말해 봐. 어떻게 해야 네가 이러지 않을 건지. 언제까지 널 참고 기다려야 되는 건지.”
부드럽다 못해 애처롭다 싶게 누그러진―사실은 성깔을 자제하느라 그랬겠지만―태도로 나직한 하소연을 읊는 류미승은 이제껏 보아온 중에 제일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나마저 누그러지는 게 아닌걸.
“뭘 참았는데?”
“…….”
“말 해 봐. 네가 뭘 참았는지. 나한테서 뭘 기다리는 건지.”
“…네가 이렇게 된 거, 내 탓이라고 생각해.”
처음으로, 미승이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기억의 물고를 트자마자 결과부터 설명하고 있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이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어. 내 집착이 희승이 너한테 어떤 상처 될지, 어떤 독이 될지 생각 안 하고 내 마음대로 했던 거, 인정해. … 하지만 호수에서 네가 찔렀던 날, 네가 우는 걸 보면서 알았어. 그만큼 네가 괴로워했다는 거. 내가 모른 척 하고 이기심으로 눈감아버린 시간들이 너를 괴롭게 했다는 거. …그래서 기다렸어. 그런데 넌, 어째서 하나도 낫질 않은 거냐?”
참고서의 핵심정리를 읽는 기분이었다.
미승은 지난 긴 시간들을 저토록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심경에 대해 수차례 곱씹어왔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정확했다.
그러나 저것은 어디까지나 류미승의 판단과 정리였다. 내 시간들과 내 몫의 갈등들은 그 속에 녹아들지 않은.
“류미승, 지금 네가 이러는 것도 집착이고, 독이 된다는 사실은 생각 안 하냐? 내가 아물지 않는 걸 네 시간을 기준으로 따지면 어떡해? 미승이 넌, 다시 시작하는 게 그렇게 쉽냐?”
“그래서. 넌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겠다는 거야?”
“시작할 게 뭐가 있어? 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적 있어? 내 용서가 필요했던 적 있어? 아니잖아. 지금도 이해한 척 하면서, 내가 낫지 않았다고 내 탓하는 거잖아. 네 기분대로 안 되니까, 나더러 이기적이라고 하는 거잖아!”
작은 잎 순 하나 놀래키지 못할 낮은 목소리임에도, 파르르 떨리는 울림만큼은 눅눅한 숲의 공기를 뚫고 흔들었다. 난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내 탓도 있었지만, 나한테 화내야 할 것도 많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미승이한테 화냈다.
“너야말로, 내가 어떡하길 바라는 거야? 응? 바라는 게 뭔데? 예전처럼 너한테 휘둘려줄까? 질질 짜고 기어줄까? 아무 때나 네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정희승이면 만족하겠어? 그런 거냐?”
스스로도 지나치다는 건 알았다. 과거의 행위보다 현재의 말이 잔인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러나 변명이나 철회는 필요 없을 분통의 심지. 내 심지만큼이나 단단하게 미승도 차가운 왁스처럼 굳어 있었다.
“그렇다면?”
“뭐!?”
순식간에 앞으로 쓰러지는 그늘을 피할 새도 없이 벤치 뒤로 목이 꺾여 넘어갔다. 온통 씹어버릴 것처럼 물어대는 이빨들 틈에 물린 입 안의 살들, 그악스럽게 쥐어 잡힌 뒤통수의 뻐근한 아픔은 과거를 닮은 굴욕이었다.
달아오르던 분노가 한껏 상승세를 탔다. 입 속을 들쑤시는 무례한 혀가 가속을 입혔다. 내 혀는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척척한 혀에 휘감겼다. 눈이 뒤집히게 화가 치솟았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주먹으로 등이랑 뒤통수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걸로도 모자랐다. 나는 더 화내야 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화내야 했다. 이 무뢰한의 혀가 잘리도록 꽉 깨물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물컹거려야 했을 살덩어리가 집히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을 교묘하게 감지했는지, 아니면 끝내려던 타이밍이라 그랬는지, 일방적으로 내 입을 농락하던 혀는 순식간에 입 밖으로 쏙 빠져나갔던 것이다. 앙다문 잇새에선 극심한 진동만 퍼졌다. 턱뼈까지 아팠다.
“너, 내 혀 깨물려고 했지?”
침 범벅이 된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어이없어하는 저 태도가 죽이게 얄미웠다. 난 질척이는 입을 닦을 생각도 못했다. 깨물린 입술이 부어올라 무감각해진데다 이빨들은 얼얼해서 씩씩거리기만 했다.
미승은 주저앉듯 벤치에 털썩 떨어졌다. 그러더니 등을 숙인 채 땅이 꺼져라 깊은 숨을 내쉬었다. 뻔뻔한 자식. 지금 한 숨 쉴 사람이 누군데! 방금 저가 뭘 했는지 아는 거야? 뭘 믿고 저 혼자 세상 고뇌를 다 집어삼킨 흉내를 내는 거야.
“정희승, 너 화난 거 알아. 그렇다고 아까 같은 소릴 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냐?”
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앞을 바라보았다. 관자놀이에 볕처럼 따끔하게 다가오는 시선을 알았지만, 담벼락을 가리기 위해 자란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날 봐.”
세 개밖에 안 되는 손가락에 잡혀 고개가 억지로 옆으로 돌아갔다.
“그래. 그러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고 싶어. 마음대로 너 만지고 싶어. 그런데, 그게 널 내 멋대로 휘두르고 주무르는 게 되는 거냐? 나 혼자 일방적으로 너 괴롭히는 게 되는 거냐? 정말로… 내가 그런 걸 바란다고 생각해?”
“이 손 놔.”
“너, 한 번도 날 받아준 적 없잖아. 넌 왜 내 기분에 다가오려고 안 하고, 화만 내지? 네가 날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은 있어? 언제까지 피해자인 척만 하고 있을 건데?”
“…넌, 한참 잘못 됐어.”
압정처럼 턱을 누르던 손가락들이 떨어졌다. 내 대답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미승은 난데없이 무릎을 벤치로 올려 양팔로 감싸고는 그 사이로 고개를 푸욱 담갔다.
참으로 종잡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화내고, 어르고, 기습하고, 한숨 쉬고, 조르고, 이젠 청승까지―. 아까부터 쫓아갈 새도 없이 성급한 감정의 파노라마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젠 겹쳐진 팔 위로 이마만 빼꼼이 들어 애처로운 척 올려 뜬 눈망울은 정말이지…
…류미승도 한 번쯤 정신감정이 필요해 보였다.
“너 말이야… 진짜로 내가 싫어서 이러는 거냐? 아니면 싫어하는 척 하는 거냐?”
“진짜, 싫어.”
“내가 그 말 믿어야 돼?”
“그래.”
가타부타 다 지우고, 바로 저것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대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본론이자 결론에 다다르고 있다고. 긴장이 스륵 풀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감지한 때문인지 아까의 분노도 흐물흐물 식어가고 있었다. 개운함 없는 끝맺음이지만, 나는 해야 할 말을 했다.
“어째서 어긋나기만 하는 거냐, 우리는.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추는데, 우린 이게 뭐냐. 난 계속 널 쫓아가고 널 기다렸는데, 왜 한 번도 만나지질 않았을까. … 네 말대로 내가 잘못된 걸까?”
미승의 목소리는 더 가라앉을 데도 없는 저공으로 흘러갔다.
고장난 시계도, 조금 빠르거나 느려서 안 맞는 시계도, 우리는 아니었다. 진실은 그보다도 못했다.
우리가 만약 시계바늘이라면, 느릿느릿 가는 내가 짧은 시침이고, 지나치게 빠른 미승이는 긴 초침이었다. 항상, 너무 빠르게 쫓아오고 너무 빠르게 앞서가서, 시침이 미처 따돌릴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는 초침. 하루 천 사백 사십 번의 찰나를 겹치지만, 만난 걸 느낄 새 없이 다시 엇갈려 버리는…….
내가 때때로 미승을 바라보고 그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더라도, 그것을 지속시킬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오류를 수리하지 못하고 고장난 추억들을 내달려온 우리는, 고장 난 시계만도 못하게 가슴만 벅적거렸다.
“내가 널 포기하길 바라니?”
힘겹게 열린 질문. 어딘가 툭 떨어지는 가슴.
섣부름 없는 운을 띄운 저 질문은 내게 어떤 의미가 될까?
어느 때부턴가 감정을 알기 힘든 벽만 담아왔던 저 눈이, 오늘따라 안타깝게 달아올라 보이는 건, 녹녹해진 내 마음 탓인지 아니면 녀석의 약해진 마음 탓인지…….
“…그래 줄래?”
그래… 제발 그래 줘라. 포기해줘라. 썩은 가지는 떼어내지 않으면 뿌리까지 썩혀버릴 거야. 그러니까… 다시 이어 붙이기엔 난 너무 약하니까…….
“네 고집은 못 말리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블처럼 복잡하게 섥혀들던 미승의 얼굴은 이내 담담해졌다. 그는 조용히 웃으면서 내 정수리를 짓궂게 흩트리고는 일어섰다.
"수업 곧 끝나겠다. 가자.”
숲 밖으로 걸어 나가는 등을 보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야했다. …울음이 날 것 같아서.
어제 재만이랑 식당가에서 저녁을 먹고 중앙로 뒷거리에 있는 빠칭코 장에서 놀다 오면서였다. ‘데이트야, 데이트’당치않은 입방정에 팔짱까지 끼고 좀스런 애살을 떠는 재만이의 활기에 이끌려 곁골목을 돌다가 가양로의 좁은 길목 끝에 있는 이태수 패거리를 발견했다.
대면만 했다하면 으르렁거리고 기 싸움을 빼놓을 수 없는 이태수와 강재만이기에, 빠칭코의 여운에 홀려 이태수를 알아보지 못한 강재만을 끌고 얼른 피해가려 했다.
무영이가 이태수 패거리에게 삥을 뜯기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괜히 아는 척 했다가 나중에 성가셔지느니 눈감고 지나쳐버리자 판단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몇 걸음 못가서 양심이 콕 쑤셨다. 참견하기엔 상황이 안 좋고 그냥 지나치기엔 장소가 안 좋았다. 낡은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양로로 이어지는 계단 길 입구는 다니는 사람들도 드물었지만, 그곳에서 타인의 악행을 목격하더라도 끼어들 행인은 없었다. 낡은 사창가와 오래된 점집들로 이루어진 부락이라 그 좁고 음침한 골목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용무건 마음가짐이건 은밀하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태수가 순한 애들 끌고 가서 겁주고 삥 뜯을 때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이태수는 정말 질이 나빴다. 순순히 지갑 털려주는 아이들에게도 반드시 험한 매질을 가해서 입막음용 마무리를 하는 놈이었으니까. 그런 걸 알면서 무영이가 당하는 걸 고스란히 지나쳤다간 집에 가서 후회할 것 같았다.
‘어라, 방금 내 친구 녀석을 본 것 같애.’라는 능청으로 재만이를 끌고 가양로 골목으로 데려갔다. 조금 무섭더라도 나 혼자 가서 이태수를 설득해보는 게 나았을 테지만. 내가 끌고 가지 않더라도 어차피 강재만이 쫓아 들어왔을 테니까.
어쨌거나 그렇게 어색한 사자대면이 이루어졌다. 나랑 이무영. 이태수와 강재만. 그 단순하지 않은 혼선이 삥 뜯기 사업보다 경쟁심을 부추겼던 건지 막 시작되고 있던 이태수의 주먹질이 멈췄다. 이태수 무리 안에서 팔로 머리를 막고 있던 무영이는 잔뜩 움츠려 있었다. 난 태수의 무리들 사이로 들어가 무영이의 손을 잡고 끌어냈다.
‘태수야, 얘 내 친구야.’
친하다는 걸 가식적으로라도 증명해보이기 위해서 무영이의 손을 놓지 않고 주저앉아 떨어진 교과서랑 참고서들을 책가방에 담았다. 무영이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릴 적에 본, 둥지에서 떨어져 파들파들 떨던 메추라기 새끼의 날개처럼.
‘미안하지만 지금 데려 갈게. 얘들아 다음에 보자.’
강재만도 이태수도 나 몰라라 하고 무영이를 끌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프게 잡힌 손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잡았지만, 나중엔 무영이가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지한다거나 반가움에서가 아니라는 걸, 거칠게 뿌리치고 가는 무영이의 등을 보면서 알았다.
녀석의 헤쳐진 자존심이 남긴 손바닥의 빨간 손톱자국.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싶었지만, 무영이가 절룩거리는 꼴이 나는 것 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조금 속상했다. 마지막에 흘기고 가던 무영이의 눈길이 마치 ‘넌 저딴 양아치 자식들이랑 친구냐?’라는 비난 같았다.
이태수랑 담판을 벌이진 않았는지 금방 뒤따라온 재만이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헤어졌다. 심드렁한 기분으로 읍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갔다. 서미령 세탁소 아줌마가 밖으로 끼얹은 대얏물을 느닷없이 맞아버리는 바람에 교복이 푹 젖었다. 당연히 히치하이크를 해도 태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친절한 노부부가 봉고차를 몰고 가다 마침내 나를 태워준 건 세 시간이나 길에서 서성이며 옷도 많이 말라갈 때였다,
그리고 어제 밤부터 난 여름 감기에 걸렸다.
표피만이라도 평화를 위장했던 일상이 강물의 살얼음 갈라지듯 뭉실거리는 건 나의 소심한 노파심만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에 소각장으로 나오라는 이태수의 전갈을 받고서 열 나는 머리통만 박박 긁었다. 이태수가 뭘로 시비를 걸어올지도 뻔하고, 재만이 문제에 참견할 것도 뻔하고, 난 그걸 어떻게 무마하게 될지도 뻔하고, 뻔하고 귀찮은 것 투성이라 가기는 싫은데 안 가자니 후한이 찜찜하고―. 몸살 난 데 골치까지 아파 죽겠다.
쉬는 시간마다 내 책상에 걸터앉아 당형수랑 킬킬거리는 미승의 웃음도 쇠를 긁는 소리마냥 거슬렸다.
수업 끝 종이 반갑지 않은 점심시간을 알려준다. 밍기적거리면서 일어나자 몸이 휘청거렸다. 태수가 날 마구 닦달할 것 같으면 요렇게 휘청 하면서 아프다고 엄살을 떨어야겠다고 쫀쫀한 계산 하나를 튕기며 태수를 만나러 갔다.
내 계획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연기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진짜로 이태수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를 만큼 청력이 가물가물했다. 소각장에서 내 얼굴에다 담뱃김을 홱홱 뿜어대며 욕설을 하던 이태수는 내가 휘청거리는 꼴을 보더니 재수 없다고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나중에 보자는 엄포도 빼놓지 않았다.
날 푹푹 찌는 여름에 몸살감기라니. 이건 아무래도 인간관계에 시달리는 마음고생 때문이라는 게 나의 자가진단이었다. 그리고 몸마저 고생시키는 다음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육 시간에 축구시합을 시키는 몰지각한 체육선생의 신경질가득한 호루라기소리와 “거기! 빨리 빨리 움직여! 사내 녀석들이 체력이 그게 뭐야?”라는 호령에 맞춰 흐느적흐느적 꼭두각시 춤추듯이 운동장을 기운 없이 뛰어다니다가 넘어져버렸다.
누군가 나를 들춰 업고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었다. 쿵쿵 등에서 가슴으로 울리는 진동과 이마에서 흐르는 진땀을 느끼며 누군가의 목 너머로 팔을 늘어뜨렸다.
하늘색 천으로 된 파티션을 젖히고 양호선생님이 내 이마를 짚어보고 있었다. 한가하고 심심하면 가끔 이렇게 아픈 애들한테 신경도 써 주는 양호선생님이었다. 내가 한 시간 반 전에 업혀 와서 몸살 약 먹고 잠들었다고 했다. 체육선생이 날 업어와 줬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류미승 알지? 걔가 업고 왔어. 너 여기 눕혀놓고 자기 손으로 약까지 먹이더라. 땀 닦아주다가 잠드는 것까지 보고 가던데. 너희들 친하니?”
“…네에.”
굳이 성실한 대답을 해줄 필요도 없어서 얼버무렸다.
전교적으로 유명한 류미승과 초라한 무명의 정희승이라는 매치가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양호선생은, 정말 솔직한 어른이었다.
“선생님, 저 조금만 더 자다 갈게요.”
“그래라.”
양호선생은 파티션을 벽 가까이 움직여놓고 밖으로 나갔다. 잠이 오진 않았다. 몸은 노곤하고 무거운데 정신은 비교적 평안했다. 심하게 폭신거리는 새털 베게가 젖은 뒤통수를 받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마를 짚어보니 손바닥이나 이마나 뜨거운 편이라 열나는 정도는 알 수 없었다. 코막힘도 오는 게 감기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교실로 가야겠다 싶었을 땐, 유감스럽게도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여선생 담화실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양호실엔 수업 없는 여선생들이 모여 수다를 떨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아줌마들이 모여서 온갖 험담을 주고받는 음해의 원상지라는 소문이었는데, 지금 내 귀는 그 온상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고 있다.
파티션 밖에서 쨍쨍거리는 여선생들의 목소리는 아침 운동장 조회 때마다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교장의 대머리에 관해, 공부를 되게 못해서 뒷구멍으로 대학 집어넣었다는 교감의 아들에 관해, 모 수학 선생과 모 독어 선생의 불륜에 관해 적나라한 평가와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수위아저씨의 공부 잘하는 자식조차, 제 아비 닮아서 곰보더라는 흠이 잡혔고, 집안 짱짱한 1학년 아이의 부모가 주요과목 선생들에게 돌린 촌지에 대한 평은 질시일지언정 비난은 아니었다. 진짜 황당했던 건, 같이 떠들던 화학선생이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양호실을 나가자마자 남은 사람들이 『저 여잔, 어쩜 저렇게 남의 흉을 잘 봐?』 이러면서 방금 나간 여선생을 흉잡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게 어이없어서 몸살 나는 와중에도 웃어버렸다. 입을 가리긴 했는데, ‘큿’ 소리가 조그맣게 새나갔다.
『저 안에 누구 있어?』
『어머, 어떡해! 저 학생이 우리가 떠든 거 다 듣지 않았을까?』
『걱정 마세요. 열이 심해서 잠든 애예요.』
급하게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는 여선생들을 안심시키면서도 양호선생은 파티션 안으로 들어와서 날 들여다보았다. 난 최대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자는 척을 했다.
양호선생님은 소파로 돌아가면서 내가 양호실로 오게 된 경위를 여선생님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내 감기증세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미승이가 어찌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춰서. 아까 나한테도 그러더니, 미승이에 대해 떠들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던 게 틀림없었다.
『미승이가 친구한테는 잘하나 봐.』
『그러게. 걔가 인물 잘나고 공부 잘하는 걸로야 군말할 데 없으니 다들 입을 모으지만, 난 뭐랄까… 걔 성격이 좀 냉랭해 보이더라고. 애가 깍듯하긴 한데, 왠지 전혀 선생대우 받았다는 뒤끝이 전혀 안 든다고나 할까?』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저도요. 그런데 아까 저 애한테 하는 거 보니까, 전혀 다르더라고요. 얼마나 자상해 보이는지 내 얼굴이 괜히 화끈거리더라고요. 우리도 애들 아프면 눕혀주고 이마 만져주고, 다 하는 건데―,』
『그래? 흐응… 보기보단 속정이 많은가보네.』
빨리 여선생들이 나가 줘야 나도 교실로 갈 수 있을 텐데 싶던 차에, 여선생들도 수다 떨면서 집어먹던 과자가 떨어지자 저녁 시간이 됐으니 밥 먹어야겠다며 양호실에서 나갔다.
나도 집에 갈 시간이라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어머, 미승이 또 왔네?』하는 양호선생의 말에 침대로 도로 누워버렸다.
등을 돌려 눈을 감고 있었더니 손가락 하나가 와서 볼을 쿡쿡 찔러댔다.
“깼지? 티 나니까 자는 척 하지 말고 일어나. 집에 가야지.”
이런 데서 시간낭비 하느라 막차를 놓칠 순 없지. 비척거리고 앉아서 실내화 한 짝을 신고 나머지 한 짝을 찾았다. 미승이가 침대 다리 밑에서 찾아다 신겨주었다.
파티션을 나오자 양호선생이 불편한 눈으로 흘끔거리고 있었다. 여선생들과의 대화를 내가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때문이란 건 이때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열은 좀 내렸냐? 아프면 체육수업 빠져야지, 미련하게―. 아직도 기운 없어? 똑바로 못 걷네. 교실까지 업어다줄까?”
“…너 뭐하자는 거냐?”
“뭐가?”
제 스스로 날 포기하겠다고 한 지 하루 지나기가 득달같게 친한 척을 하고 있으면서, 애들 보는데서 날 업고 뛰고, 양호 선생 눈에 띌 정도로 자상하게 굴고… 그러면서 뭐가?라니.
“왜 자꾸 참견해? 난 너 싫다고 했잖아. 너도 포기하겠다고 했잖아. 네 입으로 말하고도 기억 안 나냐?”
“웃기고 있네. 그 말을 믿었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