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골을 지나는 호숫가는 어릴 적 걸었던 시간보다 15분가량을 단축해서 짧게 도착할 수 있었다. 자라면서 다리가 부쩍 길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예전 같지 않게 몸놀림이 잽싸졌다.
중학교 때는 육상 선수를 했었다. 시합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어도 팀 전체 성적에 해가 되지 않을 만큼은 뛰었다.
어릴 적 수시로 잘 넘어지고 꼴찌로만 달리던 느림보 정희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의외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을 만큼, 나도 스스로의 변화가 놀라웠다. 하지만, 고등학교 와서는 1학년 때만 육상부원을 했었고 올해 들어 관뒀다.
빨라진 다리만큼 뇌가 자라지 못하는 건 아쉽고 답답한 일이었다.
호숫가에 도착하자마자 녹색으로 변한 수면이 반갑지 않은 색을 뿜고 있었다. 물이 흐르지 않는 호수 안에는 언제부턴가 녹조현상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지저분한 이끼와 오물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도저히 몸을 담그고 수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호수가 전보다 지저분해 보이는 건, 호수가 전보다 작아 보이는 건, 내가 자란 탓만이 아니었다.
시간은 물을 가두고 영양분을 썩혔다. 영양염류는 빛을 받아 반짝이며 동시에 고름처럼 상해가고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의 텅 빈 구멍속이 여전한 걸 확인했다. 4년 전 이 안에 담겨 있던 여섯 개의 유리구슬을 모두 호숫물에 던져 넣은 후로 다시는 무엇도 채워 넣은 적이 없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채워 넣은 흔적도 없었다.
4년 만에 처음으로 와 보는 호숫가는 지나치게 변질되어 있었다. 깊은 땅 속에서 썩은 물에 닿은 버드나무의 뿌리도 썩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넌 어째 변한 게 없냐. 여전히 이기적이야.’
오늘 아침에 미승이가 지나가며 뱉어놓은 말이 생각났다. 복도에서 어깨뼈를 그야말로 일부러, 세게, 툭 치고 가는 녀석이 재빠르게 던지고 간 말이었다. 우연이라고 묵살해버리기엔 0.5초 정도의 짧은 찰나이나마 녀석은 분명히 나, 정희승을 보고 있었다. 한 순간 녀석의 시선이 내 눈을 쓸고 지나갈 때 등골을 타고 세 번의 전류가 찌릿 흘렀다.
녀석이 날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 번,
‘변한 게 없다’는 말에서 또 한 번,
‘이기적이야’라는 말에서 또 한 번.
4년 전 후로 처음이었다. 같은 고등학교 들어와서도 서로 아는 척 하지 않고 지냈다. 1년 하고도, 같은 반이 되어서 삼개월간 영락없이 무시하고 지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저런 식으로 아는 척을 해 온 게 되씹을수록 찜찜하게 얹혔다.
스치듯 두고 간 녀석의 말이, 귓등에서 맴맴 돌았다.
‘넌 어째 변한 게 없냐.’
난 정말 변한 게 없는 걸까? 내 스스로는 달라졌다고 자부하고 싶은데 녀석은 나더러 안 변했다고 단정 지었다.
‘여전히 이기적이야.’
여전히 이기적이라는 말은, 아직도 나를 책망할 감정이 남아있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무시하자. 녀석의 심술딱지가 변덕처럼 자라난 거라고 생각하자. 일시적인 거라고.
이젠 썩어가는 호수에 던질 유리구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풀숲에서 돌멩이를 몇 개 집어 들었다. 호숫물로 팡팡 던졌다. 세 번째 것은 본의 아니게 물수제비를 떠버렸다. 편편한 돌이 수면 위를 멀리뛰기 하듯 담방담방 네다섯 차례 튀기며 뛰어가다 가라앉았다. 재미는 없었지만 시간을 달래려 납작하고 둥근 돌을 몇 개 더 골랐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뜬 물수제비는 신통찮았다.
‘다시는 이곳에 오나 봐라.’
하며 호숫가를 멀리했다. 올 때는 운동화 끈을 새로 조여 묶고 달리기 시작했다. 100m를 11.02초까지 뛰어본 연습 때의 실력은 시합에선 한 번도 발휘 된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기분이다. 땀방울이 오르는 뺨을 식히며 지나가는 바람이 미지근하다. 시합에서 등위 안에 한 번도 못 든 것이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뜻하지 않게 생겨난 유일한 장기인 육상을 관두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처럼, 과거로부터 빠르게 내달릴 속력만 된다면 충분한 거다.
“안녕하십니까.”
달칵, 앞문을 열고 반 아이들 모두가 착석해 있는 정숙한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 꼭 닫고 들어와라.”
교탁 앞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자 담임은 얼른 들어가 앉으라는 고갯짓을 했다. 담임이 조례 사항을 알리는 동안 자리를 찾아가서 앉아 잡음 안 나게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짝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나도 마주 찔러주고 나서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도 익숙해져서 잠잠해졌지만, 처음 한동안은 이 시간마다 듣기 불편한 웅성임이 일었었다.
쟤는 오늘도 조례시간에 들어오네. 버스시간 때문이라잖아. 집이 시골이라서 시내에 도착하면 등교 시간이 늦을 수밖에 없대. 좋겠다. 우리 집도 시골로 이사 가자 그럴까? 얌마, 대신 막차도 일찍 끊긴다잖아. 못 봤냐. 쟤 토요일에도 늦게까지 못 놀고 일찍 집에 가는 거― 따위의.
시골에서 시내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려니 어쩔 수 없는 애로사항이었다. 마을에서 첫 차를 타도 시내 중심가에서 내려 학교에 도착하면 항상 8시가 넘었다. 늘 아이들이 아침 자습을 끝내고 담임이 조례를 시작할 때에서야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담임들이 내 사정을 이해해주었기 때문에 지각했다고 혼이 나지도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등교 시엔 “반드시 앞문으로 들어와라.”는 명령에 따르려니, 쪽팔리긴 했다. 뒷문이건 앞문이건 남들보다 늦게 와서 조용한 교실에 문소리 내고 들어가는 동안 아이들의 시선을 받는 건 마찬가지이고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 녀석의 주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껄끄러웠다. 비록 녀석이 날 쳐다보지 않더라도.
“오늘은 결석 없나? 그래도 출석 한 번 불러보자.”
아직까지도 반 아이들 이름을 못 외우는 담임은 출석부를 펼치고 출석체크를 시작했다. 학년 초에 담임이건 학과목 선생들이건 출석체크를 끝내고나면 ‘이 반엔 특이한 성씨들이 많네. 어째 기역부터 히읗까지 골고루 채워져 있냐.’라고 한 마디씩은 할 만큼, 진짜로 드물다 싶은 성씨들이 골고루 모여 있는 반이었다. 한국의 3대 성씨들인 김, 이, 박은 물론이고 당, 빙, 천, 태, 피 등의 희귀한 성씨들도 있었다. ㅋ만 빼고는 모든 자음의 성씨들이 출석부에 깔려있었다. 담임의 걸걸한 목소리로 강으로 시작되는 기역자 성이 주르륵 호명되고 나씨 성을 가진 아이 다음에 당씨 성을 가진 아이가 불렸다. 그리고 ㄹ 순에 유일하게 기재된 이름이 불릴 차례가 되었다.
“류미승.”
담임의 호명 즉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담임이 "류미승“을 한 번 더 부른 후에야 “네―.” 어딘지 딱 집어 말하기 곤란한 거만스러움이 배인 저음을 길게 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치를 찾아 교실 뒷자리를 돌아보니 그 이름의 당사자는 큰 키로 엉성하게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앞자리 아이의 의자 위로 걸친 다리를 쭉 뻗어놓고 발끝을 쳐다보면서.
어느새 내 이름이 불릴 차례가 되었다.
“정희승.”
“네.”
짤막한 대답을 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가 또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들었을 텐데… 여전히 나를 쳐다보진 않았다. 이번엔 앞자리에 앉은 아이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어이, 정희승. 이리 와.”
담임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뒷자리의 강재만이 손을 까딱까딱 하면서 불렀다. 감히 내가 도리도리 거부해선 안 되는 녀석이라서 순순히 부르는 자리로 갔다.
“오늘도 일찍 왔더라. 머리도 뻗쳤네. 밥은 먹고 다니냐?”
녀석은 종종 그러듯이 튼튼한 무릎 위로 날 끌어다 앉혀놓고 시답잖은 농담을 시작했다.
“못 먹고 다닐까봐 걱정 되냐? 아니면, 네가 밥 해주게?”
“밥은 너네 엄마한테 해 달라 그러고. 이 형님은 이따가 우유나 쏴줄게.”
“우유를 쏴줄 거야? 어디? 요기로?”
“이 자식, 볼수록 귀엽다니까.”
내가 녀석의 가슴을 쿡 찌르자 좋다고 킬킬댔다. 귀찮긴 하지만 강재만 녀석은 잘 응수해줘야 하는 상대였다. 고1 때도 남들보다 늦게 학교에 도착하고 남들보다 일찍 집에 가는 버스 시간이 일찍 끊기는 시골아이 티를 팍팍 내면서 다니다보니 날더러 촌놈이라고 놀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촌스러운 데다가 덩치까지 또래들보다 작아서 무시당하기에 너무 좋은 조건뿐이었다.
재만이 녀석도 처음엔 날 만만하게 보고 못살게 굴던 놈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딴죽을 걸 때마다 움츠리지 않고 적당히 상대를 해 주자,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언젠가부터 섣부른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들을 저가 막아주고 나섰다. 말하자면 정희승의 무사한 고등학교 생활을 위한 가드였다.
“그만 해. 머리 헝클어져.”
연거푸 머릴 헝크리는 재만이의 손을 치우며 실랑이를 하는데, 옆에서 딱딱한 어투가 들려왔다.
“강재만, 애 괴롭히지 말고 교무실에나 가봐.”
담임을 따라 교무실에 갔던 반장 한지석이 재만의 옆 분단인 제 자리로 앉으면서 참견을 했다.
“어이, 반장. 이게 괴롭히는 걸로 보이냐? 귀여워해 주는 거지. 그치, 정희승?”
“너, 아침부터 담배 냄새 풍기고 와서 담임한테 걸렸다면서? 반성문 가져오라고 하시더라. 반성문은 다 썼냐?
“남이사 반성문 쓰건 말건. 답답하면 네가 대신 써서 내 주지 그래, 반장?”
남의 조언을 콧구멍으로도 들어먹지 않는 재만이에게 말이 안 통하자, 반장은 변함없이 냉랭한 태도를 나한테로 돌렸다.
“네 자리로 돌아가. 곧 수업 시작이야.”
반장이라서, 반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성실한 고지식한 리더라서 저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재만 위에 앉아 있는 나를 쳐다보는 눈이나 입가엔 아무런 비웃음도 띄우지 않았지만, 그 무표정 속에 같잖다는 기색이 깔려 있는 것으로 비쳤다. 난 한지석을 대하는 게 껄끄럽고 어려웠다. 몇 개월 지내보진 않았지만, 한지석은 타인에게 무심하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놈이었다. 그리고 류미승과 각별히 친했다.
“나, 갈게. 이따가 우유나 쏴 줘.”
“킬킬, 알았다. 요기로 짜서 줄게.”
재만의 어깨를 툭 치고 일어났을 때, 옆 분단 건너의 류미승이랑 눈이 마주쳤다. 진짜로 본의 아니게 우발적으로.
하지만, 녀석은 본의로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지석의 것보다 날카롭고 무거운 시선이 내 눈에서 다리로 그리고 정재만 쪽으로 천천히, 냉막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찜찜한 벌레들이 등을 기어오르는 것처럼 시서느런 기운이 돌았다.
“얼른 안 가고 뭐해?”
한지석이 류미승을, 이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교과서를 꺼내 펴면서 내가 옆에 서 있는 것 때문에 그림자가 진다는 표시로 손짓을 하며 쌀쌀맞게 굴었다.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등과 손끝이 저리고 스멀거렸다.
하필… 류미승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묘한 악연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며칠 안 지나서, 복도를 지나가다 누군가 ‘류미승’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생소하지 않은 울림이 위태하고 아찔한 진동을 남겼었다. 그 이름이 불리는 위치를 찾아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은 이름의 주인을 금방 찾아내지 못했었다.
그럴 수밖에. 녀석은 달라져 있었으니까.
예전에는 가늘게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에 뽀얀 피부를 하고 있던 자그마한 녀석은 무섭도록 훌쩍 커서 길고 커다란 녀석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하얀 얼굴이었지만, 짙어진 머리색과 단단해진 머릿결로 인해 혈색마저 달라보였다.
부드럽고 아기자기했던 이목구비는 진하고 날카로운 선으로 변해 있었다. 검고도 창백하고, 길고도 무거운. 지나치게 성숙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얼핏 봐선 내가 알던 류미승과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지만, 분명 어릴 적 얼굴이 남아 있기는 했다.
가장 변하지 않은 건 입술이었다. 아니, 전보다도 붉어보였다.
그토록 변한 녀석을 나는 알아보았는데, 변한 게 없는 내 모습을 녀석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보다는 불안했었다. 언제 녀석이 날 알아채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녀석의 뒤통수나 시선을 뒤쫓던 혼자만의 답답한 올가미에 매여 있었다.
하지만, 우린 1년이 넘도록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말 한 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복도를 드나들 때라던가, 합동체육대회, 소풍, 전체 조회 시간에도 어깨 한 번 부딪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 존재가 알아 채일까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시선을 살피고 뒤쫓던 내 자신의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싶었다.
‘진짜로 날 기억 못하나? 머리 나쁜 놈.’하고 말이다.
정말로 녀석이 나를 잊었거나, 아니면 영원히 잊기로 완전히 작정을 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 나한테 갑자기 이기적인 놈 어쩌구… 뱉어놓고는 이후로는 뚜렷한 반응 없이 저런 식으로 나를 혼란시키고 있었다.
녀석은 1년 동안 기가 막힌 아웅으로 모른 척만 해 왔던 건가?
아무튼, 류미승이 어찌 했건 간에, 난 녀석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더라도 녀석에 관한 소문은 수시로 아이들의 입살을 통해 내 귀로 흘러들어왔을 것이다. 지난 1년간 듣고 보아온 바로는 류미승의 주변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 때 시내에서 학교생활을 하면서부터도 류미승은 다방면에서 주목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좋은 이유와 좋지 못한 이유로 지명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학교에선 공부 잘하는 똘똘한 학생이 들어왔다고 선생님들이 꽥꽥, 학교 밖에선 그럴듯하게 생긴 남학생이 나타났다고 여자애들이 꽥꽥, 학교 안팎에선 재수 없는 놈이 등장했다고 주먹 좀 쓴다는 놈들이 꽥꽥.
그리고 류미승은 그들 모두를 무시하지 않고 제각각에 맞는 기대에 부응하고 살았다고 한다. 선생님들 앞에선 예의범절 깍듯하고 영특한 학생인척, 여자애들 앞에선 인물 잘나고 성격도 좋은 소년인척, 저를 패 죽이겠다고 불러내는 녀석 앞에는 힘센 녀석들을 거느리고 등장해서 해치워버렸다고 들었다.
요즘도 그렇게 산다는 소문이 종종 조용하게 흘러들어왔다.
한 마디로 심심할 틈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같은 반이 된 후로 놀라웠던 건, 그런 녀석이 아이들과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본인이 곁에 친구들을 많이 두지 않아서 그렇지, 류미승을 좋아하는 녀석들은 많았다. 보고 있으면 내 속이 갑갑하다 못해 말라 허물어질 지경이었다.
다들 놈의 과거랑 실체를 모르니까 저러는 거야, 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씹었다.
어제 오늘의 작태를 보건데, 놈은 너무나 이중적이었다.
녀석이 보여주는 ‘척’ 하는 모습들을 걷어내고 나면, 대체 뭐가 남을까? 사악한 무리들을 더 큰 사악함으로 눌러버리는 것이 류미승의 본체라고 난 말하고 싶었다. 교활한 녀석은 절대로 직접 주먹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짐작대로라면 분명 모범 학생의 가면을 쓰고 지내면서, 한 편에선 구리고 험한 녀석들을 구슬러서 적당히 이용해 먹었을 것이다.
예전의 작태를 돌이켜 보건데, 지금의 성장도를 고려해 보건데, 그 정도는 해 주어야지 실망스럽지 않을 거다. 류미승. 안 그러냐?
“가자, 우유 사줄게.”
점심시간 중에 교무실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온 재만이는 나를 데리고 매점으로 갔다. 농담이 아니라, 재만은 툭하면 매점에 갔다 오면서 나한테 흰 우유를 사다주거나 데려가서 사 주거나 했다. 학교에서 흰 우유를 꼬박꼬박 빠트리지 않고 마시는 날 알게 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면서 내 우유 공급자라도 될 것처럼 굴었다.
어릴 적 좋아했던 초코 맛 우유는 입에도 대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키 크고 싶은 마음에 흰 우유를 부지런히 마시기 시작했다. 비록 맛없는 흰우유에서 성장의 효험은 못 봤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마셨다. 남들은 자라면서 늦게 키가 크기도 한다던데, 난 매우 꾸준히, 티도 안 나게 자랐다. 부디 남들이 뼈아프게 겪는다는 팔다리의 성장통이란 걸 나도 겪어보고 싶었다. 코를 쥐고 비린 맛을 참아가면서 먹는 흰 우유를 먹는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희승이 오늘도 흰 우유 먹냐?”
“재만아, 너 매일같이 희승이 우유 먹여 키우니까, 네가 희승이 둘째 엄마 해도 되겠다.”
“안 그래도 조만간 직접 젖을 짜 먹일 생각이다. 요기로. 그지, 희승아?”
“푸하하, 미친 새끼. 눈물겨운 모정이야.”
“모정 좋아하시네. 그런다고 재만이 새끼가 엄마가 되냐? 젖소가 되는 거지.”
“이 십새들이, 진짜로 내 젖 나오는 꼴을 보고 싶나―.”
종이 곽에서 오르는 비린내를 참으며 빨대로 우유를 열심히 빨아 마시는 동안 매점 입구에 재만이랑 친한 녀석들이 몰려와서 거친 목소리로 떠들고들 있었다.
“어, 저기 이태수 새끼잖아.”
매점 문 안으로 들어오는 이태수의 모습이 보이자 매점 안에 어줍잖은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들어오자마자 1학년 중에서 누가 짱이 되느냐의 문제로 양쪽이 자웅을 겨루느라 어느 공터에서 붙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하지만, 이태수와 정재만의 싸움질에 시작에 관한 소문만 무성했지, 결과는 흐지부지했다. 누가 이겼노라 졌노라 가타부타가 엇갈렸다. 애들의 패거리조차 화끈하게 싸움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고, 이태수나 정재만 스스로도 자기가 1학년 짱입네 하고 우기고 다니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싸움의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결과는 미약하였다.
짐작컨대, ‘양쪽 다 왕창 깨졌다’에 내 일 년치 흰우유를 몽땅 걸 수도 있었다.
“저 새끼 요즘엔 잠잠하냐?”
“모르지. 언제 또 욱하고 뜰지 모르니까.”
이태수와 정재만의 무리들이 멀찍이 떨어져 서로에게 소리 없는 으름장을 넣으며 같잖은 긴장감을 연출하는 가운데, 난 손을 까딱 흔들어서 태수이한테 인사를 했다.
‘너 또 저 자식들이랑 있냐?’라는 뜻으로 찌푸리는 녀석에게 웃으면서 또 손을 흔들어 보이자 녀석도 마지못해 썩을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바람에 하필, 녀석이 보내는‘따라 와’의 사인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매점에서 이태수의 눈짓을 받고 정재만의 무리들에게는 핑계를 둘러대고 빠져나와 간 곳은 게으른 수위 아저씨가 하루에 두 번 이상은 드나들지 않는다는, 학교 자재창고 뒤에 있는 쓰레기 소각장이었다. 쓰레기 소각장은 나에게도 좋지 못한 기억만 연상시키는 장소였다. 그런데 이태수는 그곳으로 하루 수차례씩 담배를 태우러 들락거렸다. 쓰레기통 버리러 오는 주번 녀석들을 빼면 선생들은 그곳에 올 일이 없었다. 수위 아저씨는 이태수나 녀석의 패거리가 그곳에 와서 담배를 피는 걸 알면서도 못 본 척 했다.
마음 같아선 화장실에서 담배 태울 때마다 나한테 망을 보게 하는 강재만한테도 이 장소를 알려주고 싶었다. 들킬 염려 없이 마음껏 연기를 뿜을 수 있는 최상의 흡연 장소가 있노라고. 그렇지만 진짜로 그랬다간 이태수와 정재만가 붙을 결과까진 감당 못했을 거다.
“너 아까도 재만이 새끼들이랑 시시덕대고 있더라. 정희승, 넌 도대체 누구 편이냐?”
소각장에서 올라오는 불쾌한 냄새만큼이나 일그러져 있는 이태수는 날 당장에라도 쥐어 팰 수 있을 것 같은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편은 무슨 편이냐? 너랑은 친구잖아. 그리고 재만이 걘 나랑 1학년 때부터 같은 반 친구란 거 알면서.”
그냥 ‘친구’와 ‘반 친구’의 한끝발 차이가 녀석의 험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내 천 자(川)로 찡그려져 있던 미간이 두 줄 풀렸다. 나한테는 하나도 차이가 없는 것을. ‘진정한 친구, 신실한 우정’따위는 엿한테 주고 아무한테나 ‘친구’라고 막 갖다 붙이면 되는 거였는데.
“너 말이야, 만약 정재만이랑 내가 붙으면 누구 지원할 거냐?”
“싸움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무슨 지원이 되겠냐? 너네들 문제에 내가 끼어봐야 도움도 안 될 텐데. 솔직히 한쪽 편만 들기도 좀 그렇고, 난 그냥 너희가 안 싸우는 게 제일 좋다.”
저런 말로 잽싸게 넘어갔다. 딴 녀석들이 이태수 앞에서 이런 소릴 했다간 병신 같은 놈이 착한 척 한다고 욕만 먹고 변절 인자의 취급을 받겠지만, 나라서 넘어가졌다.
“그래도 네가 나랑 친구 하면서 그 새끼랑도 어울리면, 내 자존심이 뭐가 되냐? 그리고 애들이 널 뭐라고 부르는지 아냐? 너더러 박쥐라잖냐. 박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이태수는 굳이 확인시키려 들었다.
“이태수, 너도 날 박쥐라고 생각해?”
“…아니… 뭐, 난 네가 그런 소리 듣는 게 싫으니까 그렇지. 어쨌든 간에, 너도 한쪽 노선을 정하지 그러냐? 나든 강재만이든 한쪽만 택해.”
“나한테 그런 벅찬 요구 하지 마라. 그랬다간 너네들 싸울 때 난 정말 한 쪽 편만 들어야 되잖아. 늬들 둘 다 다치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새끼, 기가 약해―.”
“미안. 네가 이해해라.”
태수의 머리에서 검불을 떼어주는 척 하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자, 녀석의 미간이 민틋하게 펴졌다.
“가자. 아직 점심 못 먹었잖아. 내가 라면이나 살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쓸고는 어깨에 팔을 걸쳐왔다.
끝을 찾고 싶지 않은 실랑이 하나가 겨우 끝났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구린 상황을 넘겨야 할 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다보니 이태수까지 꼽사리 걸쳐서 저 어설픈 후까시 두 명을 동시에 ‘친구’라는 허탈한 명목으로 두게 된 복잡한 팔자가 되었다 보니.
학교에서의 내 가드는 강재만 하나가 아니었다.
강재만은 1학년부터 같은 반을 지내면서 반에서 날 괴롭히려드는 아이들을 녀석이 막아주었던 인연으로, 이태수는 1학년 말에 집에 가다 삥 뜯기는 나를 우연히 구해주었던 인연으로 연결된 녀석들이었다.
특히나 이태수는 내게 은인이나 된 척 굴었다. 맘에 안 들지만, 무시하기엔 녹녹치 않았다. 강재만보다 다혈질이고 욱하는 놈이라서 훨씬 다루기가 고약했다.
게다가 센 놈들끼리 한 데 뭉쳐 사이가 좋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제 놈들 각자가 여기저기 솟아난 쇠뿔처럼 잘난 탓에 녀석들과 골고루 친하게 지내려면 사방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녀석들 사이가 안 좋다 싶어지면, 난 되도록 두 놈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중립을 지키고 되도록 다른 평범한 놈들 사이에 엉겨서 사태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니 “저 새끼는 센 놈들 꼬랑지에 붙어서 알랑 방구나 까면서 까불고 다닌다.”라거나 “정희승은 강재만이랑 이태수 사이를 오가면서 박쥐처럼 엉겨 붙는다.”라는 쑤근거림이 따라붙는 것도 당연했다. 항상 못 들은 척 했다. 뒤에서는 그렇게 떠드는 애들도 저런 녀석들을 주변에 끼고 있는 내 앞에서까지 대놓고 욕하진 않았으니까.
조금 비참하지만, 그건 나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나는 약하기 때문에 두 놈을 다 적으로 만드느니 나한테 은근히 친절한 또는 불친절한 관심을 보이는 녀석들을 적당하고 고르게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강재만나 이태수 앞에서는 되도록 웃고 까불려고 노력했다. 흠칫댄다거나 삐질거리면 곤란했다. 그러면 녀석들에게 쉽게 눌릴 밥으로만 보일 테니, 되도록 평범하게 생각 없이 잘 웃고 장단 맞추는 아이로 보이는 것이 편했다. 그러면 정만이나 태수가 같은 녀석들은 날 애송이 취급하며 무시할 지언정, 괴롭히진 않았다.
저런 녀석들이 동네 꼬마 취급하며 내 어깨에 무거운 팔들을 걸칠 때, 자신들의 덩치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도, 내 헐렁한 언행들이 녀석들의 위신을 긁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한 우월감이 녀석들이 내게 느끼는 호의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둔했다. 희미하지만 야릇한 감정 섞인 친절들을 나한테 보이고 있었지만, 자신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척 하면 그만이었다.
녀석들은 성장기를 거치면서 길고 날카로운 기를 뿜어내는 류미승과 다른 느낌의 우람한 녀석들이었고, 키 크고 말랐던 박기수의 연상에서는 가장 멀찍이 떨어진 타입들이었다. 간혹 커다란 손들이 내 어깨를 주무른다고 해서, 뺨이나 입술에 장난삼아 뽀뽀를 한다고 해서 기겁을 하고 놀랠 심장은 이미 없었다.
“얏, 하지 마! 새꺄!”
“새끼, 빼기는―. 라면 사줬는데.”
꼴랑 컵라면 하나 사고는, 아니, 평소에도 저런 식으로 집적거리려드는 태수 녀석도 저 정도로만 깜짝 놀란 척 하면서 밀치면 그만이었다.
“너, 자꾸 이러면 호모라고 소문낸다.”
피식거리는 내 농담에 녀석은 같이 웃어넘기고 있었다.
어릴 적엔 작고 어려보이고 머리도 덜 떨어져 보이는 순딩이여서 아이들 사이에서 기도 못 펴고 눌린 채 마냥 이리저리 채이기에 바빴지만, 일찌감치 몸과 마음이 고생을 겪고 나니 나쁜 머리도 학습이란 걸 하게 되었다. 약간의 처세술이 생긴 것이다. 여전히 어리고 맹해 보이는 외모의 취약성을 장점으로 활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슬프지만, 백치미의 승리라고나 할까…….
아방한 외모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릴 적 먹을 걸로 꼬임을 당해 협박으로 옭아매어지던 기수나 미승이 때와는 달랐다. 나도 제법 머리가 컸단 말이다. 이젠 미숙하나마 보호본능을 앞세워 행동할 줄도 알았고, 주체성이란 것도 자라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불편한 질척거림의 가장자리로 몰리기 전까지만 친교의 선을 유지할 줄 알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되도록 모두와 골고루 친하게 지냈다. 덤으로 백치미는 적당히 유지시켜 간다- 라는 확고한 인간관계의 목표 선을 세웠다. 눈치 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던 어린이 정희승이 이만큼의 인간 승리를 거두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야말로 순전히 과도한 경험의 성과였다.
가끔 한숨과 실소도 실풋 나왔지만, 뭐 어떠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지금도 생각한다.
난 너무 이른 나이에 어린 몸에 성애(性愛)를 느끼는 어른 남자랑 또래 남자아이를 만나버린 덕분에 지금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고.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저녁 먹으러 나온 아이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시내랑 내가 살던 지역이 시군 통합이 되었다지만, 변한 건 없었다. 시내까지 시외버스 요금을 내고 타던 버스가 시내버스로, 시내버스 요금으로 싸진 것이 조금 좋아졌을까. 시골은 여전히 시골이었고, 종점에서 첫차와 막차가 뜨는 시간은 똑같았고, 한 시간이나 두 시간마다 한 대씩 마을로 가는 버스는 여전히 기다려야 했다.
마침 시간이 되어 서미령으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류미승이 한지석이랑 다른 서너 명과 함께 웃으면서 지나가는 것을 봤다.
어쩐지… 서글펐다.
지나간 일들의 기억에 구속 받고 있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더는 자라고 싶지 않다고, 성장을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어린 시절의 나랑은 달리, 미승이는 쉽게 과거를 끊어내고 나보다 빠른 성장기로 들어섰던 게 틀림없었다.
“아직 안 쌌어? 재만아, 빨리 나와.”
『새꺄, 보채지 마라. 다 싸야 나가지. 너 땜에 볼일도 제대로 못 보겠다. 지퍼에 자지 찝히면 니가 책임질래?』
그러게 누가 담배 물고 볼일 보라고 했냐고!
재만이가 ‘화장실 같이 가자.’ 하며 끌고 갈 땐 꼬박 꼬박 니코틴을 흡입하기 위해서 화장실을 찾을 때였고, 당연히 화장실 안에서도 오래 걸렸다.
천장에서 20센티 쯤 공간을 두고 띄워진 칸막이 틈으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새나올 때마다 내 교복에까지 니코틴 냄새가 밸까봐 신경 쓰였다. 남의 흡연 장소에서 망 봐주다가 나까지 선생한테 걷어 들리긴 싫었다. 화장실 창문을 있는 대로 활짝 열어놓고 녀석이 들어간 칸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기다렸다.
씻은 손의 물기가 다 말라갈 때 겨우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달칵 열렸다.
“하아. 새끼. 네가 재촉해서 장초를 버렸잖냐. 아깝게.”
필터에서 1센티 이상 남으면 무조건 장초라고 우기는 강재만이었다.
필터 스펀지가 타도록 빡빡하게 피워야 겨우 담배 한 개비 피운 것 같다니 말 다했다.
“정희승, 이따 수업 끝나고 같이 가는 거 알지?”
“알아.”
“지난번처럼 약속 깜빡하고 막차 버스 잡아타고 집으로 튀었단 소린 하지 마라.”
“알았으니까 빨리 가자. 점심시간에 자리 바꾼다고 했잖아.”
“자리 바꾸기가 선착순이냐? 어차피 제비뽑기 하는 걸, 늦게 가나 일찍 가나. 그리고 난 어차피 고정석인걸. 말 난 김에, 희승아. 이번에 내 짝 해라. 내 옆 번호 잡은 놈이랑 네 거랑 바꿔줄 테니까.”
중지 마디만 올라오도록 쥔 주먹을 보여주면서 누구든 그걸로 협박해서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잘난 척 하는 정재만.
“안 돼. 맨 뒷자리에선 칠판이 안 보여서.”
“이궁. 쪼그만 새끼. 불쌍해.”
녀석의 짝을 해선 안 될 일이었다. 하루 종일 수업을 방해받고 피곤할 게 뻔했다.
게다가 덩치 큰 녀석 옆에 조그마한 내가 짝꿍 되어 맨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누가 보기 좋은 그림이 되겠나.
교실에 들어가자 아이들이 벌써 자리를 옮겨 다니느라 교실 안이 번잡하고 시끌시끌했다.
부반장이 우리한테 늦었으니까 남은 것 중에서 고르라며 조그맣게 접힌 쪽지들이 담긴 필통을 내밀었다.
시력이 나쁜 아이나 수업 받는데 지장이 생길 정도로 키 작은 아이들 몇 명만 앞자리로 고정석을 두고 그 외엔 한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라는 것이 담임의 방침이었다. 그런다고 안 친한 녀석들이 친해지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번거롭기만 한 방침이었다. 아마 한두 번 해보고 나면 아이들 마음대로 자리차지가 될 게 뻔했다.
둘째 줄 자리에 당첨된 재만이는 “어이, 내 자리 번호 뽑은 놈 누구야?” 하며 맨 뒤줄 창가 자리를 차지한 녀석을 찾아가 자신의 번호를 쥐어주었다. 수업 시간에 딴 짓하고 잠만 자는 강재만에게 뒷자리는 필히 사수해야 할 좌석이었고, 특히 창가는 녀석의 고정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재만 외에도 맨 뒷줄은 벌써 고정석으로 임자들이 나타나는 조짐이 보였다.
반장인 한지석과 류미승도 그러했다. 둘은 이번엔 나란히 앉아 있었다.
키 작은 아이라는 조건에 포함되는 게 싫었던 난 이번엔 뒤쪽에 가까운 자리가 된 게 마음에 들었다. 뒤에서 세 번째 자리가 배정되었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당형수의 머리통이 크긴 했지만 이리 저리 머리를 갸웃거리면 칠판 보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오후 수업 내내 “아아. 새끼, 거 되게 고개 까딱거리네.”라며 내 의자를 툭툭 치는 뒷자리 녀석의 불평도 들어줄 만 했다.
수업이 끝나고 야자랑 인연 없는 재만이네 패거리를 따라 간 곳은 시내에서 외곽으로 떨어진 변두리 초등학교의 뒷 공터. 인근 공고 녀석들과 붙게 되었다고 아침부터 알려오면서 이번에도 나를 구경꾼으로 참가시키는 강재만의 초청으로 이번에도 내키지 않는 걸음에 따라나섰다.
거추장스럽게도 강재만은 매번 내가 저의 주먹질하는 모습을 봐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딴 거 누가 보고 싶어 한다고.
언젠가 사람 패고 피 보는 거 싫다고 거절을 했을 때, 강재만은 제 입으로 “새끼야, 우리가 깡패냐? 피 볼 때까지 싸우게. 그냥 몸 풀이 하는 거야. 몸 풀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했었다.
몸 풀기를 할 거면 운동이나 하지 어째서 주먹질을 하느냐고!?
게다가 내가 아는 한 피 한 방울 안 본 싸움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조금이나마 싸움판을 열심히 구경하는 이유가 있다면 상대편 공고 교복들 중에 아는 얼굴이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김선중이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공터에 양쪽 교복들이 모였을 때, 내가 녀석을 알아보고 다소 놀란 것만큼이나, 선중이도 나를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이런 싸움판에 끼기도 하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을까?
하지만, 공고 녀석들을 인솔해 온 녀석이 “3대 3으로 붙기로 하지 않았냐? 쟨 뭐냐?”라고 나를 가리켜 묻고 재만이가 “얜 신경 쓰지 마. 그냥 구경하러 따라온 거니까.”라며 나를 구경꾼으로 소개했을 땐, ‘니가 그럼 그렇지―.’라고 핀잔 섞인 찌푸림으로 바뀌었다.
싸움 중간 중간에도 선중이가 내 쪽을 힐끔거리다가 서너 대 맞는 것까진 세었다.
목적도 없고, 챙길 것도 없는 투닥질이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열다툼이란 건 어차피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짱이 누구건 간에 대세와 운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기 마련인데. 왜 저 짓거리를 하는가 싶은 마음으로 가방을 가슴팍에 안고 담벼락 아래 앉아 싸움을 구경했다.
누구 편을 들 것도 없이, 어서 어스름이 내리고 한쪽이 완전히 뻗어버리기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설령 재만이네가 공고 애들한테 왕창 깨져서 뻗어버리고 나까지 두들겨 맞더라도 빨리 끝내기나 했으면 좋겠다고.
싸움은 바랐던 대로 한편이 아작 나고 끝장나진 않았다.
강재만 한명 빼고는 떨거지에 불과한 우리 학교 애들에 비해 공고 애들 쪽은 기량이 비슷비슷해서 중반까지도 이렇다 할 승패는 보이지 않고 공고가 약간 우세한 정도의 판이었는데, 막판에 아이들이 지쳐갈 무렵 재만이가 발동이 제대로 걸려서, 제 조무래기들 몫까지 발작을 해대는 바람에 공고 교복들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지친 녀석들에 비해 재만이는 아직 팔팔한 기운이 남아 가장 우세한 놈부터 한 놈씩 잡아 넘어져서 쉽게 일어서지 못할 때까지 패고 있었다.
‘그래. 빨리빨리 끝내라. 얼른 집에 좀 가게.’
하품을 참아가며 끝까지 방관만 하고 있던 내가 일어서서 재만이 앞으로 끼어든 건,
재만이가 기운도 차리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선중이의 멱살을 잡고 있을 때였다.
“강재만, 이제 그만 하고 가자.”
“뭐야! 다 된 밥에 재 뿌리냐? 이 새끼만 넘어뜨리면 되는데!”
재만이는 한창 신들린 주먹질에 맛을 들여가던 참에 내가 찬물을 끼얹자 불만에 가득 찬 욕을 앙다문 잇새로 내뱉었다.
“넘어뜨리지 않아도 네가 이겼어.”
내가 가방을 메고 서 있는 걸 보더니 선중이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주먹날림에 이미 상한 관자놀이나 입가가 툭 터진 핏방울이 굳어가는 선중이의 눈은 쳐다보지 않았지만, 축 쳐져 있는 주먹이 부들부들 떠는 전율에서 강재만에게 터진 것 보다 정희승이 얄밉게 끼어든 사실에 분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재만이는 내가 끌어내린 손 그대로 잡혀서 끌려오려던 참이었다.
“이 새끼야, 끝장내고 가! 네가 날 이겼다고 생각하냐?”
어리석은 김선중. 저 소릴 듣자마자 홱 돌아선 재만이의 주먹에 나가 떨어졌다.
“너 뭐라 그랬냐? 이것 봐라, 정희승. 이래서 이딴 새끼들은 봐주면 안 돼. 끝까지 못 일어서게 밟아놔야 정신을 차리지.”
넘어진 선중이의 허리로 발길질을 하는 재만이를 말리려다 관뒀다.
흙바닥을 구르며 발길질 당하는 김선중을 전에도 본 적은 있지만, 두 번 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었다.
차라리 외면하는 게 나았다.
“그럼 마저 하던가. 난 집에 갈 거야.”
이렇게 하면 재만이가 나를 따라 올 거라는 자신감도 약간은…….
“어이, 같이 가.”
역시나, 돌아서 걷기 시작하자마자 재만이가 뛰어와서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다른 녀석들도 공터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어이, 다음번에 결판 짓자.”
재만이가 옆을 지나쳐 가는 공고 녀석들에게 말하자, 공고 녀석 두 명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중이는 나를 노려보다 재만이의 나직한 욕설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동기도 종결도, 밑도 끝도 없이 무모하고 한심한 싸움의 끝.
그나마 싸움에 광기를 띠고 들러붙는 녀석들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강재만이 내게 친절한 가드라 하더라도, 녀석이 사람 잡는 피 맛에 맛들인 녀석 같으면 절대로 녀석과 붙어 다니지 못했을 거다. 차라리 내가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지더라도 끊어내고 말지.
“저녁 먹고 우리 집 가서 자자니까. 새끼, 넌 외박도 안 하냐? 지금쯤은 너네 집 막차도 끊긴 시간 아냐?”
"아직 읍내까지 가는 버스는 남아 있어."
외박.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일부러 할 일은 없었다. 집으로 가는 막차는 끊겼지만, 읍내까지는 버스가 남아 있었다. 서면 읍에서 내려 서미령 마을 쪽으로 가는 트럭이나 차들을 히치하이크 하면 어떻게든 집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집에 꿀단지 숨겨놨냐? 바락바락 기어들어가게.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안 돼.”
“혹시, 집에서 귀동이셔요?”
“응.”
중심가로 돌아와 아이들을 보내고 버스를 기다리는 나를 옆에서 같이 기다려주기까지 하는 재만이는 친절하지만 역시 성가셨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아 버스가 도착해서 재만이한테 진심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줄 수 있었다.
버스야, 반갑다. 재만이 너도 잘 가라.
웃을 수 없는 분위기는 버스 안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회수권을 넣고서 빈 좌석을 찾아 들어갈 때 뒷좌석에 앉아 있는 선중이를 발견하고, 이번에는 모른 척 하지 않고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너도 이 버스 탔네.”
“…….”
나랑 달리 선중이는 공고 친구들과 시내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의외로 성실하게 꼬박꼬박 등하교를 하는 것도 의외로 이렇게 둘이서 같은 버스를 타게 된 것도 모처럼 만이라 말을 걸었다.
옆에서 씨근거리는 숨소리는 녀석이 결코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왔지만.
“우리 읍에서 내려서 같이 히치 하면 되겠다.”
“…너, 아직도 내가 우습냐?”
무겁게 입을 뗀 선중이의 말투는 낮지만 역시나 거칠었다.
“강재만이 새끼도 별 것 아니던데. 내가 그 자식 상대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끼어들었냐? 그러면 내가 고마워 할까봐? 싸움판 구경이나 하는 비겁한 새끼한테 도움 받았다고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 착각하지 마, 정희승. 난 너 같은 새끼가 제일 싫어. 너 같은 새끼한테 동정 받을 정도 아니거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암만 허세를 부려도 김선중이 강재만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싸움에 조예가 없는 내 눈으로 봐도 그건 빤했다.
게다가 벌써 언제 적 일을 여즉 마음에 담고, 나를 깔아뭉개가면서까지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김선중은 안되보였다.
“네 말대로. 그때는 그때고 오늘은 오늘이야. 연결 짓지 마.”
“…….”
9시가 넘어 어두워진 길을 달리는 버스는 시내 외곽을 벗어나면서부터 마음껏 과속을 했다.
선중이도 나도 그 후론 잠잠히 입을 다물고 왔다.
읍에서 내려 도로변에 서서 지나치는 차량들마다 손가락을 세워 보았다. 외지 차량을 얻어 타려는 시도는 생각보다도 어려웠다. 어릴 적엔 자그마한 애들이라고 곧잘 태워주는 어른들이 있었는데. 당연한 얘기겠지만, 시커먼 교복 차림의 고교생 둘이 서 있으니 선뜻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들은 없었다. 시골 행 차량이 많지도 않은데다가, 선중이랑 분위기가 껄쩍지근해서 5미터 가량 떨어져 서서 따로 히치를 시도하는 데도 이처럼 어려우니, 날밤이 닳도록 차를 잡게 될 지경이었다.
40분이 넘도록 차들은 모른 척 쌩쌩 지나쳐 갔다. 마냥 지나쳐갈 헤드라이트가 다가올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세워들기도 지쳤다. 아무래도 집에 전화해서 아빠에게 트럭으로 태우러 와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길 건너 가겟집에서 전화를 빌려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옆을 보니, 선중이는 여전히 손을 내리지 않고 지나치는 차들마다 잡아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얼굴에 주먹질한 흔적이 남은 선중이가 저희 아버지한테 전화를 할 수 없을게 뻔했다.
‘빨리 아빠한테 전화해야지. 선중이도 태워가야지.’
혼자서 잔 생각들을 곱씹은 끝에 길 건너 가겟집으로 가려 할 때였다.
“야, 정희승! 이리와.”
어느새 선중이가 화물 트럭 한 대를 잡아놓고 날 부르고 있었다. 통도 크게 20톤이 넘는 커다란 화물트럭이었다.
차량이 큰 만큼 발 디딤대가 높았다. 계단 오르듯이 양 손을 놓고 오르는 건 불가능해서 문손잡이를 붙들고 끙끙거리는데, 선중이의 손이 내 팔을 낚아채서 단번에 끌어 올렸다.
“여전히 작아서 고생이구나, 너도.”
저도 손잡이 붙들고 발돋움질로 튀어 올라갔으면서.
녀석은 나를 차에 올려준 걸로 조금 마음이 풀어진 듯 보였다.
“어이, 꼬맹아, 차 문 꼭 닫아.”
터프하게 생긴 화물트럭 기사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말했는데, 그는 들은 척도 안하고 뽕짝 테이프를 커다랗게 틀어놓고 무거운 차를 쌩쌩 몰았다. 버스보다 두 배는 빠르게 달렸다.
버들골과 갈라지는 근방에서 우리를 내려준 화물차가 떠나고, 선중이랑 나는 마을까지 조금 걸어야 했다.
“미승이는 잘 지내냐?”
혼자서 삐쳐있고, 혼자서 풀어지고, 혼자서 침묵을 곱씹던 선중이가 간만에 처음으로 안부다운 안부를 물어온 건 미승이에 대한 소식이었다.
“잘 지내겠지.”
“대답이 뭐 그러냐? 같은 학교면서.”
“나 걔랑 안 친해.”
“무영이랑도 안 친하지?”
“응.”
“하긴… 우리가 다 그렇지……”
선중이는 자조하며 뇌까렸다.
어릴 적엔 넷이서, 다섯이서 친구라고 몰려다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만한 감정의 고리는 한 절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완전히 잊기에 우리의 기억은 지나치게 가까웠고, 다시 잇기엔 기억에서 받은 상처가 컸다. 비록 어린 시절의 치기와 실수들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생채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열여덟만큼 머리만 자라고 마음은 자라지 못한 어린애들.
“그래도 너랑 미승이는 다를 줄 알았는데…….”
“…….”
“류미승이 널 모른 척 하는 건 상상이 안 되는걸.”
선중이의 낮은 목소리는 암시처럼 꽂혀들었다.
어쩌면… 내가 재만이와 선중이 사이에 끼어든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미승이가 내게 처음 말 한마디 걸었던 순간부터였을지도―.
수년간 멀어졌던 과거들이 조금씩 현재로 다가서고 있었다.
버스는 중앙 교차로를 꺾어져 상점가 입구 근처 정류장에 정차했다.
학교는 교차로의 중앙에서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 우체국 골목으로 들어가면 금방이었다.
신호등에 파란 불이 깜빡 거리는 게 보였지만 건너지 않았다.
그대로 상점가 옆구리로 뚫린 길목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대의 상점가를 좋아했다.
시내 중심의 상점가는 아침이면 한산했다. 10시만 넘어도 사람이 모여들고 가게들이 문을 여는데, 아이들이 등교하는 9시까지의 시간대엔 열린 상점도 없고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길 다니는 행인과 등굣길을 통과하는 아이들 정도. 한산한 거리, 휑한 공기, 부대끼지 않는 인적. 소음과 사람 대신 바람이 채워진 거리는 죽어있는 도시처럼 회색으로 비쳤다.
아침마다 이 거리를 걷다 학교에 가는 게 습관이 되었다.
첫 차가 시내 중심가에 도착하는 대로 곧장 학교를 향한다면 여덟시 이십분 정도엔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한참 아침 자율을 하고 있을 중간에. 하지만, 일부러 매일 10여 분간 거리를 헤매다가 아침 조례시간에 맞춰 학교로 가곤 했다.
상점가의 남쪽 방향으로 더 내려가면 중앙시장이란 곳과 연결되었다.
거기서 골목 하나를 꺾어 들어가면 어릴 때부터 엄마아빠를 따라 가끔씩 다니던 양키시장 골목이 나타났다.
양키시장 골목은 특히나 썰렁하고 어두웠다.
어릴 적 기억속에서도 밝은 명도를 찾을 수 없는 곳이지만, 이제 와선 사람들이 모여드는 한낮의 시간대에도 낡은 재래시장보다 못한 후미진 취급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 시장 끝 어귀부터 연결된 상가 전체가 낡은 골조의 기둥으로 이어진 천장으로 뒤덮여 음습한 그늘을 짓고 있었다.
낮이건 밤이건 불빛 없인 환해지지 않는 곳. 비좁고, 밀집되고, 영세적이고, 불량하고 칙칙한 냄새를 품은 곳. 이곳에 오면 검은 흙색과 검은 자주색을 떠올리게 된다. 빛이 들지 않아 칙칙한 바닥에서 고여 검어진 오수처럼, 색소가 잔뜩 들어간 어두운 자주색 츄파춥스처럼, 달달했던 공기와 미각을 어두운 통각으로 바꾸어 보게 된 곳.
우리 마을 만큼이나, 이곳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마을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아침마다 발길은 이곳까지 찾아들곤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강박 증세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죽은 박기수가, 여기에선 살아있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8시 55분. 양키상가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
서둘러도 늦겠다. 마음잡고 뛰기 시작했다.
교문 턱을 넘었을 때 아침 자율을 마치는 종소리가 운동장까지 퍼지고 있었다.
2학년 교실이 있는 별관 2층까지 부리나케 뛰어올라갔다.
쉬는 시간이라 아이들이 복작거리는 복도에서 가파른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대걸레 자루를 들고 달려오는 덩어리가 보였다.
“도룡검을 어디에 숨겼느냐아아아아!”
쿵 소리가 나도록 내 앞에 양발로 착지한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의 괴상한 생물체는 우리반 7번, 내 앞자리 당형수였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찌를 듯이 대걸레 자루 끝을 내 목울대로 디밀고 있었다.
“어서 도룡검을 내놓거라!”
다짜고짜 도룡검인지 뭔지를 내놓으라는데, 하는 수 없이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빈 주머니를 털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내 반응이 에러였는지, 녀석의 기세등등한 살기가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줄 게 없냐?”
“응.”
“…….”
“…….”
녀석은 심각하게 곤란한 얼굴을 짓고, 난 그런 녀석의 다음 반응을 기다려 보고 있었다.
당형수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는 게 재밌었는데, 마침 한지석이 와서는 당형수의 뒤통수를 거세게 때렸다.
“멍청한 짓 그만 하고 그거 제자리에 두고 와. 복도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놈 누구냐고 옆 반 담임이 화내더라.”
한지석이 훈계조로 말을 하자 형수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분고분 화장실로 대걸레를 두러 갔다.
“놀랐냐? 저 자식이 요새 무협지에 미쳐서 저런다. 나 먼저 들어간다.”
반장으로서 신경 써주는 건지, 아니면 제 친구를 변호해 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한지석은 평소보다 편한 말투를 쓰고 있었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당형수가 영웅문이나 의천도룡기 같은 오래된 무협지에 푹 빠져서 시도 때도 없이 대걸레나 빗자루 같은 것만 보면 휘두르고 주접을 떤다는 걸 모르는 반 애들은 없었다. 덕분에 의천검이니 도룡검이니 하는 단어들이 내 귀에도 저절로 익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이라면,
“어? 너 아직 안 들어갔냐? 수업 들어야지, 수업.”
돌아온 당형수가 그때까지 복도에 서 있던 내 어깨를 교실 안으로 떠밀고는, 마침 입구 옆에 서 있는 기다란 두 녀석에게로 거침없이 끼어들어 갔다는 사실.
류미승과 한지석은 분명 눈에 띄었다. 더욱이 나란히 서있으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이 두드러졌다. 짙은 곤색의 블레이저에 회색 바지가 최상품으로 보일 정도로 산뜻하게 잘 빠져서, 같은 사내 녀석들조차 저 둘만 세워놓고 사진을 찍으면 최상의 교복 광고 사진이 될 거라고 떠들어댈 정도로.
내가 봐도 같은 교복인데도 한껏 멋 내고 쫄 바지로 줄여 입는 녀석들과 차원이 다르게 생긴 대로 입어주는 교복이 그 자체로 ‘상품’이 되어 보이는 맵시가 있었다.
그리고 색깔은 다르지만 둘 다 벼린 날처럼 선뜻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사실 하나가 공통점일까.
다른 이유 다 차치하고, 나 같으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 사이에 기어드는 어정쩡한 그림이 되고 싶진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에 비해 형수는 나만큼이나 교복이 허술했다.
넥타이도 비뚤비뚤, 아예 풀어놓고 다니는 시간이 많고 교복은 구김 투성이. 그나마도 요샌 칼싸움 흉내에 미쳐서 시도 때도 없이 쫄쫄이 밴드로 손목과 발목을 감싸주는 진 보라색 체육복을 입고 지냈다. 그것도 모자라 이소룡 헤어스타일이랍시고 바가지머리를 창피해하지 않고 꾸준히 유지하고 다녔다.
그러니 같은 교복, 같은 체육복을 입더라도 상급수와 오염수의 급수 차이가 난다고 할 만큼, 한지석과 류미승 사이에서 어울리는 당형수는 외모부터 그들과 대비되게 구렸다.
성격도 독특했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건 없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산만하고 정신없는 녀석은 희한하게 붙임성도 좋아서 아무나랑 잘 어울리고, 류미승과 한지석 사이에서도 후진 비주얼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어울렸다.
한마디로 남다른 인두겁을 쓰고 사는 놈 같았다.
그들이 자리로 돌아간 후에야 나도 교실로 들어갔다. 1교시 담당 선생과 동시에.
2교시가 끝날 무렵에야 알았다.
퉁, 퉁, 퉁, 퉁, 수업 두 시간 내내 의자를 툭툭 치는 뒷자리 녀석의 발장난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앞의 칠판 글씨를 읽느라 이리 저리 고개를 움직이는 데 대한 불평의 심술 치고는 매우 끈질기다는 것을.
엉덩이까지 진동이 울리도록 의자 밭침 밑을 차올리는 발끝에 깃든 심사는 은근하고 명확한 신호 같아 기분이 나빴다. 계속 신경이 쓰였지만 참았다.
‘안되겠네. 수업 끝나고 한마디 해야겠다.’
자리 배치가 바뀌자마자 뒷자리에서 불평을 시작하던 녀석의 성격으로 봐선 대화로 풀어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거지만. 말로 해서 안 되면 내가 자리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수업 끝 종이 울리고 물리 선생이 나가자마자 뒷자리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내가 기억하던 뒷자리 녀석이 아니었다.
“안녕.”
류미승이 양팔을 꼰 채 의자 등에 기대고 있는 걸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학, 소리까지 떼고 얼른 제자리로 몸을 돌렸다. 녀석은 분명 한지석 옆자리였던 걸로 아는데, 언제 뒷자리로 와서 그것도 수업 내내 의자 밑을 툭툭 차댔는지―.
“자리도 가까워 졌는데, 인사나 해 볼까?”
귓등으로 거친 허스키가 울렸다. 눈만 뱅글 돌리자 왼쪽 귀 앞으로 몸을 기울인 녀석의 하얀 코끝이 보였다. 귀밑머리로 감지될 듯 말 듯한 타인의 숨이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난 류미승이라고 해. 넌?”
“…지금 뭐하자는 거냐?”
“넌 정희승이지? 알아. 꽤 전부터 알고 있었지.”
이죽거림을 담았을 내용인데, 녀석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전연 없었다.
“…왜 거기 앉아 있냐?”
“내 마음대로. 여기서 자리 바꾼다거나 할 생각은 관둬.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끝내 강재만 짝이 되고 싶진 않겠지?”
속이 발칵 뒤집혔다. 당장 자리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꿍수와, 강재만의 짝이 되고프지 않은 속내까지 읽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앞으로 인사는 하고 지내자. 앞자리 친구.”
돌아보지 않고 꼿꼿이 앉아있는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이 독하게 파고들어 아팠다.
그 순간에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과거만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과거로 다가가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 못하는 사이에 찾아들어가는 기억의 골목은 아직 내가 헤쳐 나오지 못한 집착이었음을.
어두운 양키 시장의 골목을 찾아 들어가는 기분처럼, 얻어맞는 선중이를 내버려두지 못했던 애틋함처럼, 끝내 류미승을 무시하지 못하는 신경줄처럼―.
“전前 형수, 후後 미승. 자리 좋네. 아주 쌔끈한 배치야.”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면서 왜 안 웃냐? 아주 죽을상인데, 그러게 내 짝 했으면 좋았잖아.”
됐거든.
“하긴. 울고도 싶겠지. 당형수 새끼는 머리통이 커서 칠판 보는 거 방해하고, 미승이 새끼는 다리가 길어서 의자를 툭툭 쳐갖고 수업에 집중하는 거 방해하고. 우리 머리 나쁜 희승이가 공부하겠다는 데 앞뒤에서 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네.”
너야말로 머리 나쁘잖아!
강재만은 류미승이 수업 시간마다 내 의자를 치는 게 잘 보이는 가시거리에 있었지만, 그것을 단순히 류미승이 다리가 길어서 버릇처럼 하는 짓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주는 게 편했지만 이런 놀림은 들어도, 들어도 편치 않았다.
그야말로 앞에는 당형수, 뒤에는 류미승. 아주 멋들어진 배치였다.
금주부터 하복착용이 허락되어 얇은 반소매를 입고 다녀도 앞뒤가 꽉꽉 막힌 듯 답답했다. 내 자리 한 칸을 건너서 수시로 대화를 나누기위해 쉬는 시간마다 돌아앉아 떠드는 당형수의 커다란 얼굴을 봐야하는 일이나, 귓등을 오가는 쓰잘 데 없는 수다들의 입김이 후끈거리는 바람에.
설상가상으로 둘이 모이니 한 명이 더 꼬였다. 류미승, 당형수 저들 둘이 모여 있으니 한지석까지 쉬는 시간마다 와서, 당형수의 책상 위에 걸터앉아 셋이 모여 보란 듯이 반상회를 여는데, 그럴 땐 대화 소재들이 더욱 같잖아졌다. 일부러 모여 담소할만한 것도 못 되는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화제들은 그렇다 치자. 어째서 학급 일들까지 부반장과 각 부장들 놔두고 당형수 같은 꼴통까지 끼워서 상의를 하느냐고!?
생김생김에 걸맞지 않게 시시껄렁하고 당치 않은 대화들이 줄기차게 오가는 걸 듣다 듣다 지치다보니, 이젠 쉬는 시간만 되면 엉덩이가 절로 자리에서 떨어졌다. 화장실 갈 일이 없으면, 재만이 자리에서 노닥대는 게 수였다.
특히나 류미승의 목소리가 건너다닐 때마다 묘하게 근질거리는 뒤통수가 은근히 고문당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인사는 하고 지내자, 앞자리 친구.’
저 소리에 암시처럼 걸려든 건지는 몰라도 아침마다 미승을 보게 되면 아는 척을 하게 돼버렸다. ‘안녕’이라는 말이라든가 손짓으로 까딱거리는 정겨운 인사가 아니라, 눈 만날 때마다 이맛살을 찌푸려 보이는 걸로 대신하는 싸인. 그러면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라기엔 험상한 인상―가 돌아오곤 했다. 거기에 수업시간마다 톡톡 치는 발길질은 계속되고…
자리 바꾼 지 삼일 밖에 안됐는데 삼 개월을 자리 텃세에 시달린 듯 피곤했다.
“어이, 어디 가는 거야, 정희승. 매점 안 가?”
매점 같이 가기로 해놓고는 점심 챙겨먹기 귀찮아져서 매점 입구에서 딴 길로 돌아서자 재만이는 내 상의가 늘어나도록 붙잡아 당겼다.
“아침 먹은 게 얹혀서 아직도 안 가라앉았어.”
“그럼 내 거라도 사갖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그러지 마. 넌 애들하고 안에서 먹어. 난 됐으니까.”
“혹시, 소각장에 가려는 거냐? 이태수가 또 널 불러낸 거 아냐?”
미련퉁이처럼 보이는 강재만도 아둔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태수가 툭하면 날 불러내는 걸 몰랐던 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해줬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정확히 틀렸지만.
“아닌데. 지금은 바람이나 쐬고 싶어서.”
“정말이냐?”
“정말.”
고집은 있어가지고 의혹도 쉽게 풀지 않는 눈초리였다.
“희승이 너 말이야… 태수 자식이 엿 같지 않냐? 내가 보기엔 네가 그 자식 싫어하면서 마지못해 어울리는 것 같던데.”
너도 썩 좋아하진 않아.
“나는 네가 왜 그딴 놈이랑 어울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성격도 우라지게 나쁜 놈인데. 작년에 너 한 번 도와준 거 갖고 두고두고 우려먹는 거 아니냐? 치사한 새끼가.”
이태수가 우라지게 성격 나쁜 것도 맞고, 치사한 것도 맞았다. 그렇다면 강재만은 어떤가? 이태수만큼 강압적이진 않아도 이 녀석도 좋은 놈이라 하기엔 만만찮은 욱심이 있는 놈이잖은가.
“…재만이 너도 내가 태수랑 말 트고 지내는 거 싫어서 그래? 내가 너랑 태수 사이에서 오락가락 붙어 다닌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아, 아니… 어, 거시기…….”
기냐. 아니냐. 한쪽만 해라, 강재만.
“싫은 건 맞는데… 근데 그런 소리 하려던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태수 그자식이 힘만 앞세워서 자꾸 너한테 협박하고 엉겨 붙는 거면 내가 처리해줄게. 그 자식이 다시는 귀찮게 못 굴게.”
말은 제법 고맙지만 굳이 부탁하고 싶진 않다. 확실히 이태수보다 강재만 쪽이 나은 건 사실이지만, 한 쪽의 힘을 업어 한쪽을 치우고 나면 무너진 균형의 한쪽으로 나도 같이 가라앉아버려야 하니까. 그런 뒤처리까지 끌어안기엔 강재만도 위험부담이 전연 없는 놈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태수를 꺼뜨림으로서 강재만이 내 앞에서 훨씬 기세등등해질 게 눈에 환하다는 말씀.
“신경 써 줘서 고마운데, 신경 쓰지 마.”
“진짜 점심 안 먹을 거냐?”
“응. 배고플 텐데 너나 빨리 가서 먹어. 난 밖에서 바람 좀 쐬다 들어갈게. 이따 보자.”
본관과 정문을 잇는 교정의 돌바닥을 따라 학교 창립자의 청동 흉상을 지나면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숲이 있었다. 교내의 한 구석에 인공으로 조림한 숲이라 작기는 해도 나무는 빽빽이 많았다. 그 앞엔 넓은 챙 모자를 쓰고 독서하고 있는 하얀 소녀상이 서 있었는데, 창립자의 의도에 따라 책 읽고 심신정화 시키라고 만들어 놓은 숲임을 알리기 위한 조각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책 읽으러 그곳을 드나드는 학생은 전무했다. 하도 그늘이 심하게 져서 책을 읽기에 적합한 채광도 아니었고, 아이들 말로는 코를 찌르는 이끼 냄새에 심신수양은커녕 정신부터 썩을 것 같다는 곳이었다. 본관 2층의 교장실에서 곧장 내려다보이는 위치가 위치인 만큼. 하다못해 담배피기나 삥 뜯기나 못된 짓 궁리하기에도 부적합한 장소라서 드나드는 아이들이 없었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와 겹쳤다.
그곳을 뭐라 불러야 할지는 몰랐다. 혹시나 소녀상을 받치는 육면체 기둥에 장소명이 조각되어 있지 않을까 찾아본 적도 있지만, 그런 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 이름을 짓지 않은 곳이라는 게 정답일 것 같았다.
굵은 플라타너스와 소담한 석고소녀상이 사이를 벌려둔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음지의 습한 흙과 이끼 냄새가 풍겼다. 수십 년 나뭇잎들의 거름이 썩어 검어진 흙은 시원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한쪽에 모아놓은 바윗덩이들은 분명 원가 의미가 있다거나 해서 둘러놓은 것이겠지만 외관상 보기 좋진 않았다.
산갈나무 아래 나무벤치에 드러누워 있는 녀석을 보자마자 나가려고 등을 돌리자, 등 뒤에서 짧고 날카로운 휘파람이 날아왔다.
“그냥 가려고?”
주춤하다 걸음을 돌려 벤치 앞으로 갔다. 벤치에 길게 누워 팔베개를 한 채 날 올려다보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왜 여기 있어?”
“오면 안 돼? 가끔 네가 혼자서 여기 오는 줄 알고서 왔다면 더 싫겠지?”
“…….”
“그래서, 나 때문에 도로 나가려고 한 거니?”
“그런 거 아냐.”
거짓말. 이럴 땐 아니야가 정답이지. 너 발견하자마자 가려고 했던 거 맞아, 라고 실토는 못 하겠으니.
짙어질 시기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참을성 없이 가지 끝에서 떨어져 나온 산갈 나무 잎사귀가 한 장 머리 위로 앉았다. 미승이가 몸을 일으키면서 내 머리로 손을 뻗어 잎사귀를 집어가며 벤치 등에 기대앉았다.
“내가 그동안 모른 척 해주니까 편했지?”
엄지와 검지로 잎사귀 꼭지를 쥐고 빙글빙글, 팔랑개비처럼 돌리며 입가에 걸로 있는 냉소는 음지에서 젖어든 잎사귀처럼 푸르기도, 시리기도 했다.
“…인사나 하고 지내자며.”
“그래서, 인사는 한 적 있어?”
껄끄러운 관계의 모서리들을 콕콕 찌르는 말들을 피해서 에두르는 나의 비겁한 화법은 역시나, 미승의 찌푸림을 불렀다.
“다음엔 인사나 하지 뭐. 네 말대로.”
“기분 나쁘네. 내 말대로 하는 중이라니, 그것 뿐? 네 생각은 없는 거냐?”
“내 생각이 필요하냐?”
“흥, 여전히 무책임해.”
그리고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어때?”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직선으로 올려다보는 미승의 눈은 뚜렷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난 그걸 금방 받지는 못했다.
“예전 일이라면… 난 잊었는데. 넌 그러지 못했나? 4년이면 웬만한 앙금은 가라앉을 만큼 긴 시간이라고 보는데.”
“잊으라고 시간 준거였냐?”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나?”
“…충분치 않아.”
“후아― 징해. 너.”
미승은 답답한 듯 숨을 뿜으며 도로 벌렁 누웠다. 그의 답답함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이제는 다 흘려보내도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하지만, 난 아니다. 누군가는 흘려보내도 누군가에겐 남는 앙금이 있다. 사람마다 같은 속도로 세류가 움직일 수 없고, 깊이가 다르기 때문에. 미승이 어떠했던 간에, 난 그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싶지도 않았다.
“나 간다.”
간다 해 놓고도 금방 걸음을 떼지는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잎사귀를 입에 물고 잘근 잘근 씹는 입술을 내려다 봤다. 아무리 씹어도, 짓이겨져도 이파리가 입술 사이에서 핏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붉은 입술의 실핏줄만 도드라지게 살아 꼬물거리고 있었다. 교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모레는 빨간 날이네.”
뜬금없는 소리가 나른하게 흘러나왔다. 짓이겨진 잎을 땅바닥으로 툭 뱉어버리는 소리도.
이틀 후면 6월 6일. 빨간 날이 맞았지만, 국경일이라는 사실 외에 상기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보자 미승도 상체를 돌려 벤치 등에 팔을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교실에서 보자.”
인사랍시고 건넨 말에, 뒤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훈기가 돌았다. 하복차림엔 서늘했던 숲의 음지에 비해 바깥의 기온은 높고 눅눅했다. 이내 더워질 만큼.
교사 1층 입구에서 노트 뭉치를 들고 교무실로 가던 무영이를 보았다. 반이 떨어진 만큼 층도 달라서 우리가 마주치는 일은 자주 없었다. 내가 먼저 손을 들어 보이자 무영이는 고개만 조금 끄떡하고 지나갔다. 나랑 무영이는 서로 이렇다 할 사건도 없이, 다른 아이들이 멀어지는 여파에 따라서 멀어졌다.
5년 전에 우리들 다섯이 읍내에 있는 미령 중학교로 진학을 했을 때도 결코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무영이랑 나는 말 정도는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무영이가 먼저 나를 피했던 걸로 기억한다. 중학교 1학년 여름을 지나고, 미승이가 시내의 중학교로 전학을 간 이후부터였으니까, 잊을 리가 없다.
미승이만 빼고 나랑 다른 아이들은 읍내의 미령 중학교를 계속 다니고 졸업했지만, 그때 이미 우리들은 각자의 벽을 치고 멀어졌었다. 나로선 바람처럼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중학교 3년의 시간은 끔찍하도록 느릿하게 끝났고, 면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했다.
병식이랑 선중이는 각각 농고와 공고로 진학했지만, 무영이랑 나는 인문계로 진학했고 그것도 류미승과 같이 셋이 한 학교에 모였다.
같은 시골학교 출신의 동창이랑 같은 학교 붙었다고 반가워할 만도 하지만, 우린 중학교 때부터도 뜨악하게 멀리 지낸 사이였으니, 오히려 방금처럼 서로 아는 척 해 준 게 별 일이다.
‘4년… 충분한 시간 아니었나?’
미승의 말대로 4년은 앙금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중학교 시절의 그날 이후로 연락을 뚝 끊고 전학 갔던 미승이와는 서로 연락을 끊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그 동안 미승이랑 얼굴 한 번 부딪히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그러나 전부가 악감정뿐인 연장선상에서 굳이 돌이키고 싶은 기억은 없었다.
우리는 차라리 서로에게서 투명하게 기화되어버리는 편이 좋았을 존재였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