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여름
푸른빛으로 넘실대던 강은 사시사철 저녁마다 시원한 산바람이 돌고, 건너편의 산그늘이 지면 한 겹의 녹음을 받아 더 진한 빛으로 흘렀다. 물도 맑아서 무릎 깊이까지의 수위에선 바닥에 깔린 밝은 모래와 돌들이 환히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깨끗한 수질로 입소문을 타서 근교의 여름철 피서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나 여름 한철에는 강변의 돌바닥에 색색의 텐트들이 가득 쳐지고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고적한 우리 산동네의 인구가 늘어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늘어나는 입 수 만큼 마을에 몇 개 안되는 가게들도 장사가 성황을 이뤘고 여름 한창 물에 수확한 옥수수나 과일들도 잘 팔려나갔다.
그래서였을까?
마을사람들이 쉬쉬하는 사실이 있었는데, 사실 그 강의 바닥은 모래로 덮여 있어 그만큼 위험한 장소였다. 간혹 거친 물살에 모래가 휩쓸려가 바닥이 푹 꺼지며 수위가 별안간 높아지는 곳이 군데군데 있어서 어른이라도 느닷없이 바닥 꺼진 물속에 잠기면 당황해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 형도 그 강에서 죽을 뻔 했던 적이 있었고, 내가 여덟 살 땐 동네 아이 하나가 꺼진 바닥에 잠겨 죽은 적도 있었다. 병식이도 놀다가 죽을 뻔 했던 것을 마침 타지 사람이 지나가다 구해준 적도 있었다. 그래서 피서철이 다가오면 깊지 않은 물마다 모래를 덮어 바닥을 고르게 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익사 주의’라는 푯말도 내걸곤 했지만, 타지인들 앞에서 그 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일부러 입에 올리는 이들은 없었다.
어린 우리들은 강가에서의 물놀이가 당연히 금지되고 있었다. 중학생이 되고나선 우리 재승이 형도 동네 형들이나 청년들과 어울려 강변에서 수영도 하고 밤낚시도 하고 놀았지만, 초등학생인 우리들은 강 근처에도 못가도록 누누이 주의를 들어왔다. 나나 선중이나 무영이 모두―병식이는 빼고. 녀석은 익사할 뻔 했던 충격 때문인지 지금도 깊은 물에는 가지 못한다―개헤엄 정도는 칠 수 있었지만, 강은 무섭도록 깊고 넓어서 어린애의 체력을 다한 개헤엄 정도로 배겨낼 수 있는 곳은 아니어서 강에서 노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강에서 헤엄쳐 보겠다고 나대다가 저마다 집에서 볼기짝 한 번씩은 얻어맞아 본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여름날이면 물가에서 팬티 한 장 걸치고 물장구 치고 물고기 잡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쩌다 시내에 있는 공설 체육관의 실내 풀장에 놀러 가기도 했지만, 버스를 타고 오가는 시간이 걸리는데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수영장 물은 미지근하고 지저분해서 자주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마을 안 얕은 물가에서 해결하는 피서가 우리들의 최선책이었다.
그리고 그해부터 강 주변 일대가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타지 사람들이 차차 몰려와 여름마다 성황을 이루는 곳이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강변 뱃나루 곁에 노란 칠이 된 나무판자에 ‘수상 스포츠’라고 파란 페인트로 쓰인 글자는 우리에게 생경해 보이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상 스포츠란 내가 아는 물놀이와는 사뭇 달랐으니까 말이다.
말로만 듣던 수상 스포츠란 걸 직접 보게 된 것은 그 해 7월의 초순이었다. 수상스포츠가 특화된 첫 해라 입소문도 크게 타기 전인데, 여름의 초입부터 빨간색, 은색, 초록색의 장난감처럼 화려한 색색의 크고 작은 차들을 몰고 마을을 찾아든 유난스런 손님들이 있었고, 그들은 도착하던 첫 날부터 일곱 명이서 강을 통째로 차지하고 놀았다.
하얗게 물살을 튀기며 달리는 고속정과, 그 뒤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타는 수상스키, 하얀 세일을 날개처럼 펼치고 푸른 물 위를 떠다니는 윈드서핑 등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펑 뚫릴 지경이었다.
누구보다도 깊은 강 한가운데서 시원한 물과 잔잔한 바람을 즐기던 그들은 나중엔 고무보트에 올라타고는 노를 저어서 가장 깊은 물 한가운데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주황색 구명조끼들을 입은 채 서로를 물속으로 떼밀고, 잡아당기고 일부러 자처해서 풍덩풍덩 빠지는 것이었다. 마치 주황색 공처럼 물 위에 둥둥 떠서 꺄악꺄악 소리 내지르며, 우리들과 다르게 물놀이를 즐기는 이방인들의 모습은, 그때까지 강을 두렵게만 바라보던 우리들에게서 부러움을 자아냈다. 친구들과 난 놀 생각도 아연히 잊은 채 강변에서 그들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의 눈길을 즐기는 듯 더 떠들썩하게 놀아댔다.
그렇게 낯선 타지인들이 푸르고 너른 강에서의 스릴 넘치게 즐기는 ‘스포츠’랑 우리는 동떨어진 세계에 속해있었다. 우리는 수상스키나 윈드서핑을 하는 그들처럼 깊은 강 한가운데서 신나고 시끄러운 웃음을 뿌리는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우리 마을 강인데, 우리들의 강인데, 그 맘쯤엔 타지에서 온 피서객들의 소란에 빼앗기는 강이었다.
“얘들아, 우리도 내일은 호수로 물장구치러 가자.”
선중이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다음날 점심을 먹자마자 우리는 약속대로 모여서 냇물보다 깊은 호수로 갔다. 호수도 물 한가운데는 제법 깊어서 가슴팍까지 물높이가 차는 곳에서만 헤엄을 치고, 바위 위에 올라가 다이빙도 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놀았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하얀 팬티 속에 물이 가득차서 주르륵 떨어지는 걸 보면서 아이들은 서로 팬티를 잡아당기고 웃었지만, 그 장난만큼은 진짜 내키지 않았다. 특히 미승이 팬티 속을 만져대려고 애쓰다가 제 아빠한테 맞은 선중이가 내 팬티를 끌어내리려 할 때는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 어쨌거나, 남이 노는 걸 구경하는 것 보다는 자기가 직접 놀아야 즐겁다는 걸 새삼 깨우치며 우리는 몇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등짝이 벌겋게 타도록 원 없이 놀았다.
다만 병식이는 원이 시원하게 풀리지 못했던 것 같다.
“어제 그 사람들 어디서 왔을까? 자동차도 대따 멋있던데.”
돌아오는 길에 녀석은 전날 강에서 놀던 사람들을 입에 올렸다.
“서울서 왔겠지.”
“어제 그 사람들 자동차들이 명재골 쪽으로 가는 거 봤잖아.”
“맞아. 명재골 쪽에 미승이네말고 하얀 집 밖에 또 있나? 하얀 집 주인이 서울사람이라니까, 그 사람들 서울서 온 거야. 틀림없어. 아마 하얀 집 자식들일거야.”
선중이랑 내 말에 이어 무영이는 답을 길게도 늘어놓았다. 녀석은 우리들 틈에 끼어 은근슬쩍 병식이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는데도 병식이는 상관을 않는 건지 눈치를 못 챈 건지 무영이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 돛 커다랗게 달린 게 윈드서핑이란 거 맞지? … 그 사람들 부잔가 보다.”
녀석은 여전히 그 사람들에 대한 동경과 미련이 떨쳐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껏 잘 놀고, 잊고 있던 부러움을 꺼내드는 녀석이 웃겨보였다. 선중이도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왜? 부럽냐?”
“아니 뭐… 그런 사람들도 있나 보다 하구…….”
병식이는 슬그머니 얼버무렸다. 선중이는 그런 병식이를 힐긋 흘겨보다가 입 속에 작은 날벌래가 들어갔다며 땅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삼거리 골목에서 아이들과 헤어져서 돌아오던 길에도 하늘은 여전히 밝고 해도 가물가물 떠 있었다. 6시가 넘었을 텐데도 낮같아서 좋았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호수에서 아이들이 정신없이 놀아대는 틈에 살그머니 내 비밀기지인 버드나무에 다가가 나무 구멍에 손을 넣어 유리구슬을 꺼내 보았었다. 구슬은 여전히 일곱 개였고, 그중에 ‘희’이라고 적힌 구슬 세 개랑‘미’이라고 적힌 유리구슬 세 개를 손 안에 담고 내려다보는 기분은 울적했다. 구슬을 구멍 속에 얼른 집어넣고 아이들에게 돌아갔지만 그 후의 물놀이는 썩 즐겁지가 않았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우리들의 이름 앞 자음이 희미하게 지워져가고 있던 유리구슬이 자꾸만 뇌리에 아른거렸다. 자꾸만 생각나는 게 싫어서 이리저리 고개를 휘둘러보며 걸을 때였다.
명재골쪽에서 차 한 대가 달려오다가 내 옆에 멈춰 섰다. 전날 강에서 물놀이하던 일행들의 차 중 한 대인 빨간 스포츠카였다.
“너 이 동네 사는 애지?”
빨간 차를 운전하는 화장 진한 여자가 반말로 던지는 말씨는 밝고 높았다. 그 차는 전에도 같은 삼거리에서 본 적이 있는 차였다. 엄마의 빨간 매니큐어처럼 너무 반짝이던 차.
“당근 이 동네 사는 애 맞겠지. 어제도 지네 친구들이랑 강에서 우리 쳐다보고 있었잖아.”
운전하는 여자가 얼굴은 예쁘지만 어쩐지 사람 별로라고 느끼던 참인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는 더 별로였다. 우리가 자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일일이 말하느냐 싶었다. 여자는 남자를 보고 툭 치더니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얘, 물어볼 게 있는데, 여기서 가까운 백화점은 어디에 있니?”
“백화점은 시내 가야 돼요.”
“시내? 여기서 얼마나 걸려?”
“한 시간쯤 걸려요.”
시내까지 한 시간은 버스를 탔을 때 걸리는 시간이었다. 즉 정류소마다 서서 손님들이 타고 내려야 하는 버스에 소요되는 시간이었지, 실상 승용차로는 2-30분 남짓 걸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어리벙벙한 내가 그런 시간차까지 감안해서 설명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헛, 한 시간이래. 여기 되게 오진가 보다.”
‘오진가 보다’라고 옆자리 남자의 말에, 오지가 뭔지는 몰라도 ‘꼬진’것과 비슷한 것이리라는 뜻으로 전달되었다. 아무리 아둔한 나라도 남자의 노골적인 실소에서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애 앞에서 그런 소릴 하고 그래? 유치하게-.”
저렇게 핀잔을 주는 여자도 남자랑 같이 웃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시내는 어디로 가면 돼? 얘! 꼬마야!”
팽 돌아서 걷는데 여자가 하도 불러대는 통에 손가락으로 남쪽 방향만 가리켜주었다. 그런데 집을 향해 걷다보니 생각할수록 그 사람들이 괘씸해서 ‘틀린 방향을 가르쳐줄 걸. 잘못했네-.’ 하는 후회도 생겼다.
조용한 마을에 시끌벅적한 색을 몰고 온 그들은 명재골의 하얀 집에서 나흘 간 머물며 그 집과 강과 시내를 뻔질나게 오갔다. 그러나 그들이 마을길을 걷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삼거리에 있는 가겟집도 전혀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집 안이나, 강변이나, 백화점 안에서 물건 살 때말고는 걸어 다닐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과 관련된 말은 그들의 차보다 빠르게 마을 안을 달렸다.
눈에 띄는 그들의 자동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을 국도를 달리며 자신들의 존재를 눈에 띄게 알렸는데, 꼭 자동차가 아니었더라도 그런 시골에선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올 만한 사람들이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와 여자들 무리인 그들은 한 눈에 봐도 여름의 푸릇한 풀내와 쇠똥 냄새가 열에 익어 짙게 들끓어 오르는 우리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냄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퀴퀴하지만 푸근하고 익숙했던 우리들의 몸 냄새와 달리 그들에게선 상큼하고 찬내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하얀 또는 곱게 그을린 색을 가진 그들의 피부나, 알록달록한 옷차림새나, 화려한 차들.
그러나 빵빵하게 터져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들을 흘리며 마을을 훑고 가는 그들의 자동차들을 보며 어른들은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대놓고는 뭐라 못하고 “역시나 젊은 것들이 예의가 없어.”라는 숙덕 뒷공론들을 했다. 특히 마을의 소문이 자주 모이는 삼거리 가겟집 할머니의 투정이 심했다. 아마 그들이 그 작은 가겟집에서 음료수 하나도 사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결국 어른들이 볼 때 그들은 우리 마을에 무례한 타지인들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떠들썩한 행랑들처럼 마을 안에 휘몰려 왔다 간 후 그들에 대한 마을 어른들의 호기심은 더 풍성해졌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람들의 기억은 잊고 하얀 집의 탐색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만 벗어놓고 모여서 명재골로 달려가 하얀 집까지 올라가는 일을 놀이의 하나로 삼았다.
산 중턱에 너르게 평지를 깎아 지어진 하얀 집은 깊은 산과 높은 하늘을 배경으로 외딴 정경일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의 어떤 집과도 닮아 있지 않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어쩐지 녹색 수풀 사이로 비치는 하얀 회벽이 밝은 빛을 받는 맑은 날이면 유독 눈이 부시곤 했다. 창도 많고, 아주 커다란 창도 있고, 베란다와 야외탁자 까지 있는 것이… 마치, 외국 영화에 나오는 집 같았다. 시내의 부유한 주택가에서 크고 높은 집들을 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밝은 집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집의 하얗고 낮은 울타리 가외만 뱅뱅 돌던 우리들은 점차 울타리 너머 마당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고 창을 통해 집안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못했던 건, 비단 창마다 쳐져있는 커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곱 명의 일행들이 다녀간 후, 그때부터 현구가 맡아서 그 집 관리인 노릇을 하게 된 탓이었다. 현구는 비워진 집을 돌보며 여기저기 주변에 자란 정원의 풀과 나무들을 전지하고 손보는 걸로 매일 소일거리를 삼았다. 그러니 그 집 탐험을 호시탐탐 노리는 우리들의 의욕을 본체만체 놔둘 리가 없었다.
현구는 원래도 퉁명하고 아이들을 성가셔하는 사람인데다, 우리들이 그 하얀 집의 속 알맹이가 어찌 생겼나 궁금해서 근처에라도 가볼라치면 버럭대는 호통과 욕설로 우리들을 쫒아내곤 했다. 그가 그럴수록 우리들의 호기심도 더 무럭무럭 자랐고, 몰래몰래 다가갔다 현구의 침 튀기는 욕짓거리와 싸리비로 때려대는 괄괄로부터 내달려 도망쳐오곤 했다. 나중엔 그 집보다 현구와의 술래잡기 놀이에 더 재미가 붙기도 했다. 그래봤자 호기심이 짧고 산만한 아이들이었기에, 장마가 시작되면서부터 점차 그 집에 대한 궁금증이나 우리들의 스릴도 점차 식어갔다.
한편, 미승이는 시들시들해져 갔다.
별장지기가 된 위세를 부리며 우리들의 탐구심을 훼방 놓는 현구의 성깔이 가뜩이나 마을 외톨이였던 미승이가 우리에게 더 미움 받는 이유는 못되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 애를 따돌리는 구실 하나는 되어주었다. 우리… 라고 했지만, 다른 아이들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난 그랬다. 미승이에 대한 변명거리가 새똥만큼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 즈음의 미승이는 키가 나랑 비슷하고 몸은 가늘고 목소리가 작아서 누가 봐도 만만해 보이는 아이였기에, 선중이가 미승이를 볼 때마다 “희멀건 계집애 새끼”라고 부르는 것도 과히 억지스런 심통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우리들과 멀어진 후로 똑 부러지던 성깔도 잃은 듯 녀석은 점점 우중충하게 빛을 잃어갔다. 오죽하면 우리 엄마도 지나가는 미승이를 보며 “어릴 때 예쁜 아이가 자라면서 덜 예뻐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데…….”라고 중얼거릴 만큼 녀석의 외모는 씁쓸하게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이 전학 오던 9살 때만 해도 무척 화사하고 예뻤는데……. 성장하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들이 그 애를 따돌리고 외롭게 해서 그랬는지… 잘은 몰라도 하여간에 녀석은 전처럼 날 두근거리게 하는 예쁜 천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음울하고 청승맞은 외톨이일 뿐이었다.
그런 미승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있었던 건 나뿐이었는지 어땠는지도 모르겠다. 속없는 무영이는 아무 내색도 없었고, 선중이는 미승이가 지나갈 때마다 슬쩍 흘겨보고 마는 정도였는데, 오히려 병식이 녀석이 한 술 더 떴다. 미승이가 지나가는 걸 볼 때마다 돌 던지는 병식이 자식은 “희멀건 계집애 새끼, 배신자, 바보, 쪼다, 븅신….”선중이가 지어낸 지칭에 별 창의성도 없는 욕들을 덧붙여 연신 반복했다.
사실 진짜 배신자에 쪼다는 병식이 지놈인데, 그때만 해도 왜 미승이가 배신자인지, 왜 선중이가 그를 그토록 내몰았는지 잘 이해도 못하면서 우리들은 미승이를 상처 입혔다. 그 애를 따돌릴 근거들이란 어린아이들의 무지한 치기와 질투, 무의미한 공동체 의식에 묶여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도 끝끝내 미승이가 우리에게 가까이오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치는데 일조했고, 병식이가 행패를 부릴 때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미승이를 막아주지도, 아이들을 말리지도 못하는 내 비겁함에 간혹 가슴이 따끔따끔 할 때가 있었지만, 녀석을 기피해야하는 이유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서 스스로를 다짐시켜두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미승이는 내게 많이 잘 해줬는데…….
우리들이 친구가 된 후부터 다섯이 함께 몰려다니고 노는 게 당연한데도, 처음부터 미승이는 나에게만 유독 상냥했다. 교실에선 나에게만 간식거리를 나눠주기도 하고, 아이들 몰래 자신의 장난감을 자주 주기도 했었다. “다른 애들은 안줘?” 라고 물어보면, 그때마다 “애들 다 나눠주기엔 모자라니까.”라는 그럴듯한 대답을 들었다. 내가 이리저리 변덕을 부려도 한결같이 기다렸다가 친구가 되어주는 아이였다.
그런데도 난 녀석의 친절들을 고맙게 받아들였던 적도, 제대로 인사 한번 한 적도 없었다.
좀 더 나중에 기억을 돌이키고서야 그애의 마음이 다른 아이들에 대한 우정보다 더 큰 감정으로 내게 향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았고 내 배신이 녀석을 변하게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의 시점에선 이미 반성도 소용없었다. 어떤 후회조차도…….
일찍 찾아든 태풍이 부목을 흘려보내던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찾아들면서 하늘은 다시 파랗게 개이고 구름도 뽀얗게 밝아졌다. 누런 탁류로 흐르던 강도 차츰 맑은 녹색 물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한창의 무더위 속에 열기들이 북덕북덕 할 때 현구가 커다란 전지가위와 전기톱을 가지고 그 하얀 집 마당의 풀과 나무들을 다듬는다 싶더니만 사흘 후 그 집에 다시 사람이 들었다는 소식이 지나가는 소리로 설풋 들려왔다.
내가 그 집에 올라가게 된 건 그 얘길 듣고도 잊고 있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기억을 담고 있는 무의식의 궁금증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필 그날 혼자서 그 집을 갈 생각을 했을까?
나른한 오수가 쏟아지던 오후, “희승아 한 숨 자자.” 하고 내 팔베개를 해주다 잠든 할머니 곁에서 잠에 들려다 말고 일어났다. 몰려오는 잠기운을 애써 떨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골목길엔 더운 볕이 뿌려져 가물가물 아지랑이처럼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개 한 마리조차 짖어대지 않았다. 온 동네가 깨나른한 잠에 빠져 든 듯 고요하고 한적했다.
꿈길 위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삐릭’ 어디선가 날아가는 울음소리와 푸드득 날갯짓 소리가 꿈결 같은 침묵을 깼다.
골 어귀까지 나가니 졸졸졸 산골물이 흘러내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걷고 또 걷다보니 잠기운도 천천히 도망가고 어느새 미승이네 집 앞을 지나고 매미소리가 들려오는 명재골 산등성이로 향하고 있었다. 새소리, 매미소리, 풀벌레 소리가 점점이 크게 귀를 열어오고 있었다.
명재골은 예전엔 상당수의 가구가 고을을 이루고 있었지만 수 년 전에 산의 침식과 홍수의 재해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죄다 이사 나오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골이 된 터였다. 그 명재골을 이루는 한쪽 산등성이에 새로 오르막길이 뚫린 게 내가 9살 여름이었고, 10살 봄 무렵에는 하얀 집이 지어졌다. 그 집은 마을에선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숲길을 따라 산을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명재골 초입에 자리 잡은 미승이네서도 그 집까지 가려면 산비탈을 따라 10분은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나는 차 한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산 포장길을 타박타박 걸어갔다.
하양, 노랑, 분홍, 보라색 꽃들이 자잘하게 피어 은근한 향내를 뿜어내는 길섶을 지나자 눈앞에 민틋한 지붕이 나타나고 있었다. 집은 여느 맑은 날처럼 빛을 한가득 받고 눈이 시릴 만큼 하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면서 가까이 걸어갔다. 하얀 펜스로 이어진 낮은 대문이 반쯤 어슷하게 열려있었다. 문이 열려 있다면 마땅히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현구는 그림자도 안 보이고, 전에 왔던 색상도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던 길쭉한 무리들이나 멋진 차들도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 하나 없이 여느 때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집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살금살금 집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현관문 쪽으로 와서 보니 작은 창 하나가 열려있었다. 산에서 상쾌한 솔바람이 불어와 창 안의 얇고 하얀 커튼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창문이 열린걸 보면 이 누군가 그 집 안에 들었다는 게 맞을 텐데 왜 이리 조용할까… 궁금해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하얀 손이 창틀을 넘어왔다. 창밖으로 걸쳐진 창백하고 깡마른 손을 보자마자 유령이라도 본 듯한 착각에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졌다.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흔들리는 인영이 커텐 안에서 움직였다.
‘하앗! 진짜 귀신인가보다!’
벌건 대낮에 귀신이라도 보게 되나 싶어, 겁에 질리다 못해 몸이 통째로 굳어져버렸다. 그러면서도 눈은 창에서 떼지도 못하고 있는데 스윽- 창밖으로 얼굴과 상체가 넘어왔다. 손처럼 하얗고 마른 남자였다. 그는 눈을 감고 공기를 들이키며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 왔던 희고 검은 피부의 무리들 중 가장 희던 여자보다 더 흰 사람이었다. 게다가 파리할 만큼 말랐다. 그가 눈을 뜨는 바람에 멀뚱히 서있던 내 눈과 마주쳤다.
그는 무표정하게 똑바로 날 주시하더니 이내 흐릿한 미소―당시 내 눈엔 병자의 찡그림과 다를 바 없는 어색한 근육운동으로 기억되던 표정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미소였다.―를 지으며 손을 살살 흔들어 보였지만,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한 나는 곧장 산을 내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엄마 아빠의 대화 속에서 그가 그 별장 주인의 아들이고, 몸아 아파서 요양 차 와 있다는 걸 알았다. 아직 마을에선 아무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는 듯, 어찌 생긴 사람인가 궁금해 하며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온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산 도로에서 내려온 하얀 승용차가 한 대 올라간 것만 목격 되었을 뿐, 아직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그 곳 관리를 도맡아오던 현구도 전지와 집 점검들을 마친 이후로는 한 번도 그곳에 가질 않았다고, 아니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서울서 내려오기 전에 전화로 ‘혼자서 조용히 지내고 싶으니 외부인의 출입이 없도록 단속해 달라’는 말만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리 깐깐허게 사람을 가린대요?”
하면서 상판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엄마가 툭 던졌다.
“젊은 사람을 이런 시골로 요양 보낼 정도면 병이 심한 모양이네요.”
“보질 못했으니 알 수가 있나. 아니면 부모 골치 썩이고 도망 와 있는 자식 아냐?”
“에구…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요. 아프니까 아프다 하겠죠. 젊은 남자가 그 정도로 골골하다는 것도 충분히 흉 잡 힐 일인데. … 그치만 이상하긴 하죠? 그 집 딸네미는 친구들이랑 강으로 왔다갔다 놀기라도 했지, 아들이란 사람은 뭘 하느라 집에만 콕 틀어박혀 있나 몰라.”
막상 보게 되면 신기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조금 마르고 하얄 뿐인데-. 어른들은 정체모를 서울 부자의 자식이라는 이질감, 병이 깊은 젊은이의 폐쇄성에 어두운 초점을 맞추고 그에 대해 추측했다.
“아무리 아프기로서니, 마을에 한 발자국도 디밀지 않으니……. 그 놈의 집구석 인간들은 시골 땅 못 밟고 사는 체질인가. 심심풀이로 다니는 별장이라지만, 여기 와서 한 번도 마을에 코빼기를 비친 적이 없어. 이 동네 집 짓고 살면서 인사 정도는 두루 해 두는 게 도리가 아니겠냐고.”
“그러게나요. 사람이 그렇게 살면 못 쓰는데……. 안면이라도 익히고 인사라도 두루 나눠 두면, 저들도 좋을 텐데 말예요. 우리가 저희 거 뺏어먹기라도 할까봐 그러나.”
그 사람들이 동네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대화도 하고 그러면 좋을 거라는 데는 나도 동의했다.
마을 어른들은 지나쳐가는 타지인들에겐 무심해도, 우리 마을에 적을 둔 사람에겐 상당히 호의적으로 반겨주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뒷소리들을 할망정 나름대로 ‘후한 시골 인심’이라는 것을 제대로 수더분하게 내놓기를 즐겨하기도 했다. 예로, 미승이네가 서울서 이사 온 후 사람들은 그 집안일에는 작은 도움이라도 서로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기 쟁탈전이라도 벌이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여하튼, 난 현구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 집에 한 번 더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 다시 그곳에 갔을 때 남자는 마당에 나와 있었다. 마르고 긴 손에 잡힌 파란 호스 끝에서 땡볕이 쏟아내는 무더위를 감질나게 축이는 물줄기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막은 호스 입구에서 뿌려지는 물방울들이 분수처럼 분사되며 작은 나무와 꽃과 풀들을 적셨다. 어차피 더위에 다 시들 텐데, 때 되면 비오고 알아서 자랄 텐데 뭐하러 물을 뿌려주는지 의아했다.
하얀 펜스 문 앞으로 다가가자 내 발걸음 소릴 들었는지 그가 휙 돌아봤다. 그 바람에 느닷없이 내 쪽을 향한 호스에서 물이 칙 뿌려져 나왔다.
“앗!”
깜짝 놀라며 양손으로 셔츠 앞을 가렸지만 이미 충분히 젖은 후였다. 남자도 “앗” 하며 수도로 걸어가 꼭지를 잠그고는 느슨해진 물줄기처럼 하하… 참도 매가리 없는 웃음을 뿌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미안. 젖었네.”
“…….”
난 젖은 티셔츠를 짜낼 생각도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남자는 전봇대처럼 마르고 길쭉했다.
“너 어제도 여기 왔었지?”
전날 왔다가 그를 보고 놀라서 도망쳐버린 잠깐 동안의 내 얼굴을 남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몇 살이야?”하고 친절하게 묻는 목소리에 얼떨결에 양손으로 손가락 열개를 다 펴들어 보였다.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와 다른, 시멘트벽이 발린 우리 집과는 다른 저 예쁜 하얀 집에 사는 피부가 하얀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그래도 친절해 보이는 웃음에 아까의 물벼락에 놀란 긴장감은 기화되듯 날아가고 난 어쩌면 그를 조금쯤 우러르는 눈길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름이 뭐니?”
“저, 정.희.승.”
내가 이름을 한자씩 또박또박 끊어 대답하자 그가 따라한다.
“정.희.승.?”
난 고개를 끄덕끄덕 몇 번이나 목을 움직였는지 모른다. 그가 젖어버린 내 셔츠 가슴위로 살짝 손을 얹었다.
“그나저나 옷이 젖었네. 어떡하지? 우선 집 안에 들어가 볼래? 자, 이리와.”
가만 서 있는 나를, 그가 하얀 집 안으로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의 손은 푸른 심줄이 툭툭 불어올라있는 손등과 두드러진 뼈마디들을 가지고 있었고 혈색 없어 보이는 모양새 만치 차가웠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 손은 싫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내 옷이라도 줄테니 갈아입고 있을래?”하길래 고개를 저었다. 해가 밝게 비쳐드는 집이라 젖은 옷도 금새 마를 것 같았고, 젖은 채라도 차라리 그게 더 시원할 것 같았다.
집 안은 밖에서만 바라보며 상상했던 것 보다 넓었다. 거실에도, 부엌에도, 방에도, 우리 집에서나 친구들 집에선 본 적 없는 가구들과 여러가지 장식들이 있었다. 오른쪽 벽은 훤하게 터놓고 유리창으로만 되어있었는데, 남향으로 화악 뚫린 유리창에선 작은 마당의 정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수풀과 꽃들, 불긋하게 오르는 적단풍 나무들이 말이다. 커다란 베란다창의 양쪽 끝에 주름 잡혀 묶인 브론즈색의 커튼과 짙은 초록 벨벳의 소파만이 실내에 무거운 빛을 깔아놓고 있었다. 그 밖에는 눈에 띄게 복잡하거나 번쩍대지도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질 만큼 정갈하고 밝은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난 너무 깨끗한 곳에선 침착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편이었는데, 평소에도 잘 안 씻고 밥도 잘 흘려먹는다고 엄마에게 하도 닥달을 당해온 탓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집에선 밝은 원목재질로 깔아놓은 바닥 때문인지, 뒤쪽 벽을 터서 통째로 끼워 넣은 유리를 투과해 비쳐들어 오는 노란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친절하고 나지막한 말소리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도 차분하게 그 공간 속에 어우러져 버렸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어버렸다.
“근데, 진짜로 아파서 온 거예요?”
지난밤에 엄마 아빠의 대화에서 들었던 것을 곧이곧대로 물었더니 그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젊은 사람이 아픈 것도 흉잡히는 일이라는 어른들의 생각처럼, 그도 흉잡히고 싶지 않은가보다 생각해서 나도 억지로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얘길 꺼냈다.
“그 사람들은요?”
“응?”
“얼마 전엔 누나랑 형들이 놀러 왔었는데. 빨간 차랑 녹색 차랑 타고서요.”
“아아, 걘 내 여동생이야. 걔가 친구들이랑 여기 와서 놀다갔다고 하더라. 근데 며칠 놀고 질렸나봐. 지금은 해외로 여행 갔어.”
벌써 우리 마을에 질렸다고? 너무 시골이라서? 시시해서? 심하게 빨갛던 차 색깔만큼이나 자극적인 걸 찾아 헤매는 아가씨였던 모양이다. 괜스레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여기 안에는 첨 들어와 봐요.”
“그래? 와 보고 싶었니?”
“네. 너무 궁금해서 애들이랑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애들?”
“네. 선중이랑, 무영이랑, 병식이도 여기 매일 매일 같이 왔었는데요, 현구가 못 들어오게 했어요. 우린 울타리 밖에만 왔었는데도, 현구가 우릴 막 때리고 내쫒았어요.”
“현구? 아. 여기 관리인 말이구나. 그 사람이 너희를 못 오게 때리고 그랬어?”
“네. ‘이 잡놈들아 썩 꺼져-!’ 그러면서 만날 싸리비로 때려요. 나도 도망치다가 딱 한 번 맞은 적 있어요. 참, 선중이는 달리기가 빨라서 한 번도 현구한테 맞은 적이 없어요.”
“그래? 넌 안 빠른가 보지?”
“빨리 못 달려요. 잘 넘어져서요.”
“그랬니?” 하고 빙긋거리며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모습에 난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애든 어른이든 존중받는다는 만족감은 참으로 흐믓한 것이다. 아무리 어린 애라도 자신을 차분히 들여다 봐주고,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에겐 더 기대하게 되는 법이니까. 나 역시 그에게 안심을 놓고 마음을 기울여가고 있었다.
“내가 있는 동안은 현구란 사람도 여기 안 올 거고, 아무도 방해 할 사람 없으니까 얼마든지 놀러 와도 돼.”
“그럼 내 친구들도 데려와도 돼요? 걔들도 여기 와보고 싶어 했는데.”
그렇게 물었을 때 그의 얼굴에서 대화가 시작된 후 두 번째로 웃음기가 가시고 시큰둥한 표정이 나타났다. 아까 그의 몸이 아프냐고 물었을 때처럼. 그래도 이번에는 대꾸를 했다.
“그건 싫은데. 시끄러운 게 싫어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시골이라서 조용하고 마을 집과도 떨어져 있으니까. 난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대번의 거절에 난 우물쭈물 손가락 끝만 맞물려 주무르며 속으로 혀끝을 찼다.
“그렇지만 희승이 넌 언제든지 와도 돼. 넌 내가 이집에 초대하는 유일한 손님이니까.”
아아. 초.대.받.은, 유.일.한, 손.님.-. 어린 내게 그 깍듯한 단어들이 주는 달콤한 예우는 설탕 같았다. 어른인 그가 아이인 나를 상대로 예의 바르게 인정해주는 대접에 속이 들뜨고 있었다. 그래도 겉으론 태연한 척 했다.
“아저씬 몇 살이에요?”
“나? 스물둘.”
“우와. 많네!”
무례함도 모르는 어린 내가 큰소리로 과장해서 내지르는 감탄에도 그는 웃을 뿐이었다.
“시원한 거 갖다 줄까?”
나를 거실의 초록색 소파의자에 앉혀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던 그가 큰 컵에 담아온 차가운 청량음료를 내밀었다. 의외로 가게에서 흔히 사먹는 사이다였다. 어쩐지 이런 집에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색다른 음료수를 가져다 줄 거라고 지레 짐작을 했던 내가 바보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음료수와 함께 접시 위에 담아온 케잌은 정말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난 단것들, 특히 케잌을 아주 좋아했는데 친구들 생일날 아니면 집에서는 좀처럼 먹을 기회가 안 생겼다.
8살 내 생일날 할머니가“얘 명승 에미야, 오늘이 저 희승이 생일이쟈? 아가 좋아하는 거 차려줘라.” 하며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건네줬는데도 엄마가 그걸 스리슬쩍 하려다가 나한테 들켰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엄마가 할머니 돈을 꿍쳤다고 일러바치고 나서야 엄마는 해마다 내 생일날엔 케잌을 사다주었다. 그리고 할머니 생신날에도 난 할머니를 졸라서 엄마가 꼬박꼬박 케잌을 사오게 했다.
“이딴 달고 느끼하기만 한 게 뭐가 이리 비싸-.”
그리 불평하면서도 기어이 케잌 두 접시 이상은 비워내는 엄마였다. 난 달아서 좋고 느끼해도 좋았다. 하여간 단 거라면 사족을 못 썼다.
하지만, 그가 가져다준 자그만 케잌을 접시 옆에 놓인 동그란 금색 수저로 떠먹었을 때 처음으로 느껴보는 신기한 감촉이 입 안에 닿았다. 젤리처럼 물렁물렁 그러나 쫀득하지도 않고 여느 케잌처럼 버터크림 맛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크림의 끈끈한 뒷맛이 입안에 남지도 않고, 여느 때 잘 안 팔리는 읍내 제과점의 케잌 스펀지처럼 부석거리지도 않았다. 차고 달고 물컹한 것이 아주 색달랐다.
“맛있니?”
맛있는지 어떤지 몰라 고개를 상하 좌우로 다 흔들어 버렸다. 그러면서 약간 눈썹을 구겼던 모양이다.
“맛 없나보네.”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처음 먹어봐서…….”
괜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내 딴엔 예의바르게 어물쩡 넘겼더니, “그거 무스 케잌이란 거야.”라고 그가 가르쳐줬다. 무스인지 뭔지 몰라도 신기하긴 한데, 낯설어서 난 두입만 더 떠 먹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넓은 베란다 창에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와 금색 스푼이 반짝반짝거렸다.
“넌 시골아이라서 그런지 참 순하다. 서울 애들은 너랑 같은 나이라도 영악한 데가 있는데.”
그의 말이 썩 기분 좋게는 안 들렸다. 약간 무시 같기도 했다. 시골 사는 거에 그다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막연히 도시와 도시 사람들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던 어린 내게 그의 말은 잘 이해가 안됐다. 다만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는 그의 미소가 마음을 좋게 해주었기 때문에 칭찬 쪽으로 돌려 듣기로 했다.
난 그가 물어볼 때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조잘거렸다. 주로 우리 집과 가족, 동네 사람 얘기들 같은 것들을 말이다. 어린 내가 가진 정보력과 전달력엔 무지하게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얘기도 해주었다. 아직 대학생인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몸이 아파서 1년간 학교를 쉬기로 하고 봄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러 왔다는 얘기도 그제서야 해주었다.
“이곳은 공기가 참 맑아서 좋아.”
“좋아요? 우리 마을?”
“그래. 좋아.”
“그럼 마을도 돌아다녀 봐요.”
엄마아빠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가 마을에 걸어 내려와 산책도 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다니면 좋겠다고 얘기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흙 밟고 다니는 게 싫은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여기 쉬러 온 거지. 사람들 만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래도 심심하잖아요. 혼자서 집에만 있으면 난 너무 심심하던데.”
“희승이 네가 놀러와 주면 되잖아. 그럼 형도 안 심심하고, 희승이도 안 심심하고-.”
그러면서 나더러 자기를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형이라고 부르기엔 나한텐 아저씨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나한테 해주는 것도 하나 없는 재승이 형보다는 가짜 형이라도 저 사람이 더 낫겠다 싶었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오자 그가 하얀 펜스 문 앞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들꽃들이 피어있는 길섶을 뛰어내려올 때 검은 나비 하나가 팔랑거리며 곁을 날아갔다.
밤이 되자 낮에 먹은, 한 두입 먹다 남기고 온 그 ‘무-’ 뭐시기란 것이 밤 내내 떠올랐다. 낯설고 이상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맛있었던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남겼을까? 왜 다 먹지 않았을까?’하는 미련을 떨며 이부자리에서 뒤치락거렸다. 그래도 그가 배웅해주며 “내일 또 놀러와.”라고 했으니 나중에 가면 또 먹을 수 있을 거다. 내가 놀러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또 가도 될 거다- 하면서 그가 다시 반겨 주리라는 믿음과, 그 케잌을 다시 먹을 수 있을 거란 제멋대로의 안심에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에 일어나서 아침을 겸 점심을 먹고 방학숙제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도로 치워 버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닭장에 가서 하릴 없이 닭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달 반 전에 알을 까고 나온 노란 병아리들이 약병아리 태가 날 만큼 자라서도 여전히 종종종종 제 어미, 남의 어미 가릴 것 없이 쫓아다니고 있었다. 골목을 둘레둘레 돌아다니다가 오후 2시쯤 되어 산중턱의 하얀 집으로 달려 올라갔다. 전 날 올라간 것과 비슷한 시간대였다.
새하얗고 조용한 친절로 나를 집 안으로 들여 주던 그가 또 놀러오라고 허락했었다. 내가 유일한 손님이라고 했다. 동네 아이들은 아직 아무도 와보지 못한 성역 같은 곳, 현구는 신성불가침 구역이라도 되는 양 다가가는 우리들의 호기심을 그토록 억지로 내몰던 곳. 선중이도, 무영이도, 병식이도, 심지어 현구의 조카인 미승이도 한 번 발을 들여놓지 못한 그 곳에 오직 나만이 손님으로 초대받는 것이었다. 얼씨구나. 했으면 했지,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하얀 집의 낮은 펜스문은 여전히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나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 밝은 갈색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 희승아.”
그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또 놀러 왔어요.”
“그래. 잘 왔어.”
내 손을 잡고 초록 벨벳 소파로 데려가서 앉혔고, 난 착한아이 시늉을 하며 다소곳이 앉았다.
“희승이가 오니까, 반갑네.”라는 말에 난 어깨를 살짝 좁히고 히죽 웃었다. 소심하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내 머리를 그의 손이 연거푸 쓰다듬었다.
“내가 오니까 반가워요?”
“응. 좋네. 형 심심하니까 매일 매일 와라.”
역시 난 환영받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매일 매일-.
“그래도 혼자 있는 게 좋다면서요?”
살짝 어깃장을 놓아보았다. 내가 얼마나 반겨지고 있는지 또 확인받고 싶어서-. 그에게서 빈말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붙었던가 보다.
“혼자 있는 것도 좋지만, 희승이라면 같이 있는 게 더 좋지.”
“헤헷-.”
“기다려. 형이 마실 거 가져올게. 덥지?”
아무리 봐도 형이기 보단 삼촌뻘 쯤 되는 나이 차인데도, 그는 꿋꿋하게 ‘형’이라 했고 나도 그러려니 들어 넘겼다.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계속 반듯이 앉아 있으려니 몸에서 안달이 났다. 그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찬장에서 꺼낸 핑크색 통을 열어 뭔가를 타고 있는 동안, 나는 소파 위에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앉았다가, 비스듬히 누워보기도 했다가, 다시 일어나 소파 등을 잡고 실내 풍경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산만하게 몸을 놀렸다.
“이거 마셔.”
바로 돌아앉았을 때 그가 내 앞 탁자 위에 유리컵을 내려놓고 있었다. 크고 기다란 유리컵엔 빨간 루비처럼 예쁜 색깔의 주스가 가득 담겨져 있고 얼음알 세 개가 동동 떠 있었다. 밝은 색 나무 바닥에 흘리지 않도록 양손으로 컵을 얌전히 들고 가서 붉은 색 쥬스를 한 모금 머금었다. 달고 시원한 체리 맛이 입 안을 가득 발랐다.
“마음에 드니?”
“응. 달아서 맛있어요. 난 단거 되게 좋아해요.”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리자 그는 흐믓한 웃음을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서 나온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그래? 잘됐다. 어제 일부러 시내까지 나갔다 온 보람이 있네.”
“시내에서 사온 거예요?”
“그래. 혹시나 희승이 놀러오면 주려고 어젯밤에 양키시장에서 사 온 거야. 밤이라서 백화점은 닫았더라고.”
오오. 나한테 주기 위해서, 밤에, 일부러, 시내까지 나갔다 오다니! 유일하게 환영받는 손님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는 나! 이 맛에 어른들은 대접받길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양키 시장에선 이런 주스가루도 판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끔 엄마 아빠를 따라 시내에 있는 중앙 시장에 갈 때마다 양키 시장 골목을 지나치곤 했는데, 간혹 그곳 가게에 들르더라도 아빠가 사는 건 군복 비스무레하게 생긴 겨울 작업복이나 장화도 군화도 아닌 작업용 신발 같은 것이었다. 질기고 튼튼해서 오래 입고 신기 그만이라고 했다. 그러나 작업용 옷이나 신발에 손끝만큼도 관심 없는 난 엄마 아빠가 물건을 고르고 값을 흥정하는 동안, 식품류들이 채워진 선반으로 눈이 멍하니 돌아가 있곤 했다. 침침하고 작은 가게 안, 작은 선반에 빽빽이 늘어선 낯설고 다양한 캔과 과자 상자들에 어린 마음이 사로잡히곤 했었다. 양도 많아 보이고, 엄청 달고 새로운 맛일 것 같은 젤리와 초콜릿들이 눈앞에서 희룽거렸고 내 궁금증은 커갔지만, 그래봤자 그림의 떡이었다.
“나 저거 사줘.”라고 졸라도 “미제는 몸에 나빠.”라는 구실을 대며 내 요구를 묵살해 버리는 엄마였고, 그 때마다 엄마를 흘긋 쳐다보는 주인아저씨가 있었다. 엄마는 외제 과자에 첨가된 과도한 지방과 염분과 방부제가 사랑하는 자식의 몸에 해악을 입힐까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안 사주었던 게 아니었다. 단지 비싸기 때문에 안 사주는 거란 건, 보채는 내 손 안에 매번 작은 롤리 팝 한 개씩만 사서 쥐어주는 속셈에서 간파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고 달고 색깔도 예쁜 주스 가루도 있었네.’
주스가 찰랑거리도록 흔들어 보면서, 역시 양키 시장은 미지의 과자 창고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주방에서 또 뭘 들고 오는 그를 보면서, 당연히―아무런 근거 없는 당연이었다―전날의 무스 케잌이 오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난 ‘이번엔 맛있을지도 몰라. 끝까지 다 먹어봐야지.’ 하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것은 무스 케잌이 담긴 접시가 아니라, 내 얼굴보다 커다란 원형 쇠통이었다. 내가 읽을 수 없는 꼬불꼬불한 글자들이 박힌 둥글고 큰 쇠뚜껑을 열자, 그 속에 쿠키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무스 케잌이 아닌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각기 다른 꽃 모양에, 색깔도 조금씩 다른 쿠키들은 아쉬움을 넘기고도 남음이 있었다.
버터맛과 초코 맛과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맛이 들어간 쿠키들을 하나씩 맛보았다.
“쿠키 맛있어요.”
“그래, 맛있니?”
그는 전날처럼 쓸데없이 많은 질문들을 걸어오진 않았지만 더욱 상냥했고, 내가 주스를 마시고 쿠키를 집어먹는 모습을 테이블 건너에서 흐믓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옆자리로 건너와 앉아 각기 다른 맛의 쿠키를 양손에 들고 먹고 있는 내 머리랑 어깨를 쓰다듬었다.
“왜 안 먹어요?”
한 손에 든 쿠키를 그에게 건네주자 그는 고개를 흔들며 사양했다.
“난 됐어. 희승이 많이 먹으라고-.”
그 말이 진짠 줄 알고 난 정말 열심히 먹…으려다 천천히 먹었다. 많이 남겨두면 나중에도 오래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거 남으면 집에 가져가서 먹어. 희승이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형이 또 사다 놓을게.”라는 말이 듣기만 해도 배가 불러서 결국 몇 개 안 먹고 뚜껑을 덮었다. ‘찰각’쇠뚜껑이 입구와 맞물려 닫히는 소리도 좋았고, 쿠키통을 들어 흔들어 보았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도 뿌듯했다.
“희승이는 형이 좋니?”
“응.”
“형도 희승이 좋아.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희승이는 내 동생 할까?”
“응. 형.”
그렇다. 우리는 안면 튼 지 하루 만에 양자 합의 하에 형, 아우 사이가 되었다. 게다가 좋아한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까무잡잡하고 작은 시골 아이에 불과한 내가 어디가 좋았는지 속으로 갸우뚱 하면서도 흡족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어감은 내가 더 어릴 적에 엄마가 “엄마는 희승이 좋아해”라고 했던 말이나, 할머니가 “우리 이쁜 희승이”라고 했던 것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미승이가 내가 좋다고 했던 말과는 조금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들렸다. 어쨌거나 기분은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가족에게서 받는 당연스럽고 무조건적인 사랑보다는 타인에게서 받는 타산적이고 얄팍한 감정에 더 휘둘리기 쉬운 감정 체질이었나 보다.
그가 오후에 외출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나도 일찌감치 그 집을 나서기로 했다. 그가 내 팔에 들려준 커다란 쿠키 통과 핑크색 체리가루 통을 들고 신나서 언덕을 내려왔다. 기분이 방방 들뜨긴 했지만 혹시라도 까불대다 구를까봐 서두르지 않고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집에 가서 재승이 형한테도 조금 나눠 줘야지. 쿠키는 딱 다섯 개만.’ 하고 인색한 궁리를 하며 미승이네 대문을 지나칠 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뎌졌다.
미승이는 고모네 가 있다고 들었다. 녀석은 상심해서 방학 동안 줄기차게 서울서 지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저를 괴롭히고 따돌리는 시골에서 신물이 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서울엔 녀석의 방학숙제를 자진해서 도와주는 사촌 형과 누나들이 있다. 그리고…….
‘옛날 학교에서 사귀던 서울 친구들도 만나서 놀겠지. 거기선 미승이도 외롭지 않겠지.’
잠시 늦춰진 걸음을 다시 빨리 했다.
형한테 쿠키도 나눠주고 체리 주스를 타주면서 어떤 생색을 내 볼까, 나도 현구처럼 형한테 ‘앞으로 동생한테 잘 하겠습니다.’라는 각서라도 쓰게 할까. 궁리하며 히죽대며 걷고 있을 때였다. 눈앞에 선중이 녀석들이 등장했다.
“야, 정희승! 너 어디 갔었냐? 무영이네 아버지가 우리 고속정 태워줬는데.”
“맞아. 우리 아빠가 선착장에 데려가서 태워줬어. 지금 강에서 그거 타고 오는 길이다. 무진장 신났어. 그치?”
“그래, 무진장 재밌었는데. 부우웅. 하고 배가 달려서 강물이 막 튀기고, 배가 엄청 빨리 달렸다구. 넌 안됐다, 야. 그것도 못 타 보고.”
선중이랑, 무영이랑, 병식이가 순서대로 잘난 척을 했다. 갑자기 속이 팍 상했다. 나도 고속정 타 보고 싶었는데……. 그렇지만 아이들이 날 안 데려갔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내 나름대로 사교활동을 하느라 놓친 대가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너, 그건 뭘 들고 있는 거냐?”
무영이가 손가락으로 내가 양팔로 감싸고 있는 쿠키랑 주스가루 통을 가리키며 내놔보라고 했다.
“어? 이거 과자네? 누가 준 거야?”
엄마 아빠가 사준 거냐고 묻길래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가?”라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했다. 하얀 집의 형이 줬다고 하면 아이들이 쫓아서 그 집으로 따라 다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어서 왔다는 사람이고, 이미 아이들을 데려와도 좋으냐는 내 요구가 거절당했기 때문에 그건 곤란한 노릇이었다.
“몰라… 모르는 사람이 줬어.”
그렇게 어물쩡 넘겼다. 아이들은 넘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받아 먹으면 안 된다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 너네 엄마는 안 그러냐?” 하고 무영이가 잘난 소릴 해대는 사이 병식이가 쿠키 통을 빼앗아갔다.
“안돼! 내놔아!”
소리를 질러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병식이는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고, 선중이도 따라가고 무영이도 나에게 “네롱” 혀를 내밀고―녀석 치고는 잽싸게―도망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큰 맘 먹고 달리면 무영이 정도는 붙잡을 수 있었지만, 쫓아가기를 포기했다. 과자 욕심이 쉽게 저버려져서가 아니라, 너무 허탈해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아방했던 무영이마저 내 앞에서 기를 세우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하면… 아마도 내가 미승이랑 못 놀도록 압력을 받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던 것 같다. 미승이에게서 제일 마지막으로 떨어져 나온 내가 서열상 꼴찌였다고, 녀석이 인식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그 날 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고속정을 태워 준 덕분에 기가 부쩍 살았는지도…….
체리가루라도 안 뺏긴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도 엄마가 “뭘 들고 있는 거니?”와 “누가 준 거야?”라고 물었을 때 고개만 절래절래 저어 또 어물쩡 넘기자, 엄마도 넘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함부로 받지 말라고 엄마가 말했지! 요즘이 얼마나 험한 세상인데. 넌 어째 애가 말을 안 들어먹니! 아무한테서나 넙죽넙죽 받아들고, 그러다 낯선 사람 꾐에 빠져서 어디 잡혀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응!?”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엔 엄마가 목욕탕 가자는 걸 흔쾌히 따라갔다. 평소엔 엄마가 날 공중목욕탕에 데려가려 할 때마다 가기 싫다고 필사적으로 버티던 나였다. 그럴 때면 의례 할머니가 “아가 저리 싫어하는데, 그냥 내비둬라. 집에서 할매랑 씻음 되지. 그쟈, 희승아?” 라고 말려주는 덕에 대충 물 칠만 하고 끝낼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그런 할머니마저도 “으매. 이리 더러븐거. 어매랑 가서 빡빡 씻고 온나.” 그렇게 날 떠밀어 버리는 날이면, 엄마는 때 안밀겠다고 발광하는 내 팔을 붙잡고 등과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가며 때타월로 전신을 빨갛게 되도록 벅벅 밀어댔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순순히 목욕탕에 따라가겠다고 하자 엄마는,“오늘은 여느 때처럼 안 간다고 버티질 않네. 어쩐 일이래?” 하며 날 기특하게 여겼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그날따라 얌전히 앉아있는 내 등을 덜 아프게 밀어주었고 목욕을 다 마치고 나왔을 땐 차가운 베지밀도 사줬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난 얼굴과 목과 손을 열심히 씻었다. 내가 더 깨끗해지면, 그 하얀 집과 하얀 남자에게 더 잘 어울리는 방문객이 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젠 나를 하찮게 부리며 무시하는 선중이들을 나도 무시하자고 마음먹었다. 녀석들이 놀자고 우리 집으로 날 부르러오기 전에 한 발 먼저 집을 나섰다. 고속정이니 뭐니 하나도 필요 없었다. 친구를 친구라 여기지 않으며, 대장과 쫄따구로만 나누는 녀석들은 괘씸했다.
“희승아 니 또 어데 가나?”
그 할머니가 날 붙잡고 묻는 말의 끈도 놓고 그 손길도 뿌리친 채 난 산 중턱의 하얀 집으로 달려갔다.
하얀 집을 네댓 차례 들락거리는 동안, 어린 눈에도 그 집이 얼마나 고급스럽게 잘 꾸며져 있는지 알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실내가 어찌나 조용한지 덤벙대는 나도 침착한 아이로 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방이 방음처리가 된 것도 아닌데,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면 사방이 고요해지는 마술이라도 펼치는 듯, 내려앉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게다가 그는 어린애인 나랑 놀아주는 법은 서툴렀다. 대신 간식과 장난감으로 물량공세를 펴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보아야 옳았다.
그 날도 남자는 알록달록한 젤리가 들어간 쿠키를 예쁜 접시에 담아 유리판이 깔린 탁자 위에 놓아 주고, 그가 사다 준 아동용 퍼즐을 놓고 내가 맞추면서 쿠키를 먹고 있는 동안 건너편 자리에서 흐믓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이런 저런 말을 걸던 여느 날과 달리, 말도 거의 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서 쑥스럽게 했다.
“왜 자꾸 그렇게 쳐다봐요?”
“희승이가 귀여우니까.”
입만 떼면 내 수준에 맞춰 아동용 어조로 대꾸하는 그가 어색하기도, 또 부끄럽기도 해서 시선 둘 데를 몰라 헤맸다. 그러는 사이 그는 옆자리로 건너와 앉았다. 그리고 쿠키를 집어 직접 손으로 내게 먹여주기까지 했다. 보드라운 버터 맛이 물신 나는 노르스름한 쿠키와 퍼런 심줄이 툭 비치는 마른 손목을 가진 손의 조화가 부담스럽게 생경했지만 난 고분고분히 받아먹었다. 그치만 사실은 자꾸만 그 병든 것처럼 마른 손에 눈이 가면서, 온기 없는 손가락이 내 입술을 슬쩍 슬쩍 쓰다듬을 때마다 쿠키가 입 속에서 점점 맛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제 배불러서 그만 먹을래, 형.”
“그럴래?”
그가 내 몸을 소파 위에서 그의 무릎 위로 옮겨 앉혔다. 나를 품에 안는 것이 할머니가 종종 방바닥에서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둥기둥기를 해주던 품새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도 그 해엔 요통과 관절염이 심하게 도졌다 하시더니 나를 그리 안아주는 횟수가 거의 줄어들어 있었다. 근데 할머니 대신 서울 형이 날 안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선 시원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희승이는 눈이 까만 게 예쁘구나.”
형은 내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내 입술에 뽀뽀를 했다. 사실은 약간 놀랐지만 참았다. 어린 미승이가 했던 것은 이상하다 여겼지만, 그는 어른이니까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항상 해주던 뽀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맛있는 걸 주는 그에게 할머니에게 했던 것과 같은 뽀뽀를 나도 해줬다. 사실은 할머니가 뽀뽀하자고 할 때마다 노인네 냄새가 싫어서 짜증부리고 피해 다니던 난데, 이 서울 형에게선 입 냄새도 안 났다. 오히려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무엇보다도, 오롯이 더 큰 친철의 응답을 바라는 아양어린 몸짓으로 난 그따위 아첨을 했던 것이다.
그 행위의 결과로 난 할머니에게서도, 엄마 아빠에게서도, 미승이에게서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접촉을 경험했다. 그가 다시 입술을 맞춰 왔을 때 그의 입술은 얇고 온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기억으로 내가 남하고 뽀뽀해본 건 할머니랑 미승이 밖에 없었는데―본의 아니게 당한 경우였지만―머릿속에서 갖가지 감각들이 비교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쪼글쪼글한 할머니의 입술처럼 마르지도 않았고 통통한 미승이의 입술처럼 촉촉하지도 않았다. 할머니의 뽀뽀가 다 마르지 못한 낙엽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면 미승이의 뽀뽀는 갓 태어나 애벌레가 입술 위를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형의 뽀뽀는 둘 다 아니었다. 입술이 마른 느낌은 들었지만 분명 내 입술 위엔 습기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느닷없이 입속에 물컹하게 들어온 뜨겁고 축축한 것이 먹을 게 아니란 건 당장에 알았지만, 입안으로 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닌, 남의 몸의 일부가 들어왔다는 놀라운 충격에 혼이 떨어져나가 입만 벌린 채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입속에서 내 혀를 감고 움직이는 혀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못 하고 있었다.
“아. 달다-.”
내 입속을 축축하게 적셔놓고 나서 입을 뗀 그는 전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어서 방금 한 짓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믿음까지 얼핏 들게 했다.
“쿠키 정말 다네. 그래도 맛있는 걸.”
‘형은 쿠키를 조금만 맛보고 싶었던 걸까……?’
납득되지는 않으면서도 억지로 그런 이유를 찾아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도 내가 모르는 그들 세상의 친절 같은 건지도 모른다고… 바보 같은 생각도 했다. 그래도 어쨌건 간에 놀래긴 엄청 놀랬기에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서 버렸다. 그러자 그가 내 팔을 잡고 웃으며 “이건 인사야.” 라고 했다.
“외국에선 이렇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형은 나를 다시 옆에 앉히고서 자신이 외국에서 공부했던 얘기를 해주었다. 같은 방을 썼던 친구와, 또는 클럽이라는 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또는 그의 지도 교수의 얘기들을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들을 섞어가며―그래봤자 사람이름과 동네 이름 같은 거였겠지만 내겐 하나같이 생소해서 뭐가 사람이고 뭐가 동네인지 헷갈리기만 했던 영어다―그들과도 같은 인사들을 자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난 가슴을 놀래킨 그의 혀가 다른 사람들과도 주고받는 인사라고, 그러니 무서워하면 안 된다고 내 자신을 설득시켰다.
그 즈음엔 동네 어른들조차도 동성애를 먼 나라 얘긴 줄만 알았고, 특히나 그 무렵의 난 그 얘기 속에 얼만큼의 뻥과 사실이 섞여 있는지도 분별할 수 없는 마냥 어리고 무식한 아이였기에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릴 수 있었다. ‘아아. 외국식 인사를 한 거구나!’하고.
역시 그는 나와 다른 세상, 더 크고 넓고 부유한 세상의 사람이라 다를 수밖에 없는 거라고 억지스럽게 이해해버렸다. 억지로 억지로…….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이런 인사를 아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하거든.”
그렇게 덧붙인 말 때문에 그가 나에게 인사를 한 건지, 아주 아주 좋아한다는 건지 아리송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인사를 했다는 사실은 우리 끼리만의 비밀로 나눠 갖자길래 난 그와 손가락도 찍고 손바닥으로 복사까지 했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 인사니까.”
“비밀 인사?”
“우리는 형제같은 사이고, 동료니까. 아까의 인사는 동료끼리의 암호 같은 거야.”
“그치만 난 비밀 인사 또 하기 싫은데…….”
“그래. 희승이가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이 집은 비밀기지지만, 여기선 암호가 필요 없으니까.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비밀기지라면 사죽을 못 쓰고 좋아하는 난, 버드나무 몸통 속의 내 작은 비밀기지를 그 순간 잊었다. 대신 그 하얀 집을 비밀기지로 갖게 되었다는 작은 충족감이 일었다. 내가 모르던 하얗고 높아 보이는 세계, 우리들은 모르지만 그가 경험한 넓은 세계에 그를 통해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으로 그의 친절에 넋 놓고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멍청하고 가련했던 시절이었다.
‘매일 매일 와도 돼.’
‘내일은 더 일찍 올래?’
서울 형이 건넨 말들을 뱅글뱅글 돌리며 마루턱에 앉아 있었다. 처마 그늘 밖으로 비죽이 빠져나간 코만 노란 햇빛을 받아 따끔 따끔 반짝거리고 있었다. 눈동자를 가운데로 모아 높지도 않은 코끝의 하얀 솜털을 내려다보면서 코가 더 빨갛게 익어서 허물이 벗겨지면 딸기코가 되려나? 하고 생각하며 기왕이면 입술이나 빨개지면 좋겠다고 입술도 쭈욱 앞으로 내밀었다. 엄마가 봤더라면 또 바보짓 한다고 혼을 냈을 테지만, 다들 밖에 나가고 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부산하고 작은 걸음걸이들이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어―이―, 배신자!”
“배신자! 멍청아!”
“찐따야!"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명재골 산중턱까지 오르내리는 나와 며칠간 함께 놀지 못한 친구들은 이제 나까지도 미승이 못지않은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매일 매일 집 앞에 와서 저렇게 나를 한 번씩 부르며 지나가곤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속에서 한 장 접어버린 녀석들이었으니까. 녀석들과 놀지 않아도 여름동안 얼마든지 심심찮게 보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녀석들은 나처럼 하얀 새집의 손님이 될 일도 없을 테니 녀석들의 무시가 속상하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대문 앞에서 내키는 대로 잔돌멩이랑 욕을 퍼붓고 사라진 낌새가 보인 후에야 마루에서 일어났다. 대문도 열어둔 채 집 밖으로 나왔다.
하얀 펜스 문은 여전히 조금만 안으로 젖혀져 있었지만 집안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은 이제 그 시간이면 나를 위해 열려 있었다.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나 혼자 손잡이를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커다란 거실 창을 활짝 열어둔 채 소파에 앉아 사진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오늘 날씨가 예쁘지 않니?”
매일 매일이 똑같은 여름날인데 날씨가 어디가 예쁘다는 건지, 언뜻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도 여느 날보다 환하게 나를 맞아들이는 그를 보니 컨디션이 좋아서 날씨도 좋게 여겨지나 보다 했다. 그의 마른 손에 들린 검은 사진기는 크고 무거워보였다. 망원경처럼 커다란 렌즈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진 찍으려고요?”
“응. 희승이 찍어주려고.”
“나?”
“그래. 우리 사진찍자. 형이 예쁘게 찍어줄게.”
집 안으로 들어간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그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는 사진기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몇 번 셔터를 누르더니 나를 화단가에 세워두고 그의 키만큼 떨어진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우리 사진 찍자’ 하더니 찍는 건 그 혼자고 난 찍히기만 했다. 처음엔 적단풍 나무 아래 서서 차렷 자세를 하고 있는 나더러 “포즈 좀 잡아봐.” 라는데, 내가 사진기 앞에서 잡을 줄 아는 포즈라봐야 기껏 손가락 두 개 올려서 V자 만드는 것밖엔 없었다.
“하하… 그런 거 말고.”
그가 나무 옆으로 와서 내손을 내리게 하고는 양 팔을 허리 뒤로 받쳐서 나무에 슬쩍 기대는 자세로 고쳐주고는 좀 전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진기에서 사선으로 비껴진 자세라 고개를 옆으로 한껏 돌렸더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눈은 카메라 보지 않아도 돼. 그 자세에서 편한 위치를 쳐다 봐. 표정도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없다고 생각하고.”
옆에서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는데 의식하지 말라니, 너무 까다로운 요구였다. 그래도 렌즈를 향해 억지로 ‘김치-’나‘치즈-’를 하라는 것보단 나았다. 그런데 그도 낮은 패랭이꽃 화단에선 나를 주저앉혀 놓고 “희승아 ‘위스키-’해 봐.” 하고 시켰다. “왜 위스키에요?” 물었더니, 그게 더 예쁘게 웃는 입모양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별로 믿어지진 않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나도 아는 척 하고 싶어진 게 있었다.
“이게 무슨 꽃들인지 알아요?”
“무슨 꽃인데?”
“이건 각시 패랭이고요, 이건 구름패랭이예요.”
“희승이 똑똑하구나.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나도 아는 거 많아요.”
“그러네. 희승이 똑똑하구나. 형은 그게 둘 다 패랭이 꽃인 줄 처음 알았다.”
사실은 미승이가 지난여름 현구가 마당에 심어놓은 꽃이 궁금하다며 나를 저희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식물백과 사전을 찾게 했던 꽃이었다. 그렇지만 사전을 찾는 것보다 현구에게 묻는 편이 빠르겠다고 내가 말했더니 미승이도 나를 참 똑똑하다고 칭찬해 주었었다. 진보라의 키 낮은 각시패랭이랑 연보라의 부슬부슬 꽃잎이 가느다란 구름패랭이 옆에 서서 사진을 찍히면서, 저희 집 마당으로 모자라 이 집에까지 패랭이꽃을 심어놓은 걸 보니 현구가 어지간히도 저 소박한 꽃을 좋아하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 형은 패랭이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기껏 사진을 찍어 놓고는 “저 꽃들은 보기에도 지저분한데 뭣 하러 심어놨지? 나중에 다 뽑아버리라고 해야겠네.”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리는 걸 들었다. 진짜로 그 꽃들을 뽑으라고 시키면 현구가 되게 서운해 하겠네… 걱정도 해 보는 사이 그는 나를 뒤란으로도 데려갔다.
뒤란 화단은 보다 큼직하고 선명한 꽃들로 채워져 있었다. 먼저 하얀 부용에 내 얼굴을 디밀게 하고 가까이서 얼굴사진을 한 장 찍고는 옆에 있는 꽃을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희승아, 이 꽃 이름도 아니?”
내 이마보다 조금 낮은 키로 피어올라있는 그것은 해바라기보다는 높이가 짧지만 거의 해바라기만큼 큰 꽃대가리가 매달려 있었다. 꽃술은 감춰진 채 밝은 레몬색의 얇고 긴 꽃잎들이 더덕더덕 길고 부드럽게 쏟아져 나온 모양새였다. 꽃이 거의 내 얼굴만했다.
“이건 달리화예요.”
“달리화?”
그 꽃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미승이 때문이었다. 똑같은 모양의 자주색 꽃이 삼거리 가게 앞 화단에 피어있는 것을 보고 미승이가 나한테 물어봐서 또 모른다고 대답했고, 그 다음에 녀석이 이 책 저 책 찾아가며 꽃 이름을 알아내려 애썼지만 녀석의 백과사전도 그 꽃의 사진을 실어놓지는 않았다. 결국 미승이한테 가르쳐주고 싶어서 내가 가겟집 주인할머니의 딸인 경성 아줌마에게 물어서 알게 된 꽃 이름이었다.
“그렇구나. …이 꽃 은근히 색스럽네.”
색스럽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몰라서 갸우뚱하는 나를 노란 달리화 옆에 세워두고는 그가 다시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뭔가 성에 차지 않는듯 갸웃거리다가 수돗가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호스를 가져오더니 별안간 나랑 화단에 한꺼번에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앗! 나 젖잖아요.”
“미안! 꽃에 물기가 있으면 사진이 더 잘 나올 것 같아서 그랬는데, 희승이까지 적셔버렸네.”
약간 심술이 나서 호스를 빼앗아들고 그에게 치직 뿌려버렸다. 저도 미안한 건 아는지 등에다 뿌려대는 물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아주다가 나중엔 다시 호스를 빼앗아가더니 깔깔거리며 나한테 또 뿌렸다. 내가 호스를 빼앗으려 할 때마다 큰 기로 긴 팔을 높이 쳐들어서 키 작은 내 손이 닿지도 못하게 하면서 연신 물을 뿌려댔다. 어린애를 상대로 봐주지도 않는 치사한 인간이었다.
“그만! 그만요! 항복!”
“그럼 이제 그만할까?”
눈도 못 뜨게 얼굴로 집중공격을 해대는 통에 기어이 ‘항복’을 외치자 그제서야 그도 호스를 치우고 물을 끄러 갔다. 잠깐의 물장난―이라기엔 거의 일방적이었지만―에 옷이 흥건히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티를 벗어서 물을 주르륵 짜내고 젖은 얼굴을 대강 닦은 뒤 다시 물기를 꼭 쥐어 잤다. 그 사이 그는 옆에서 사진을 또 여러 장 찍고 있었다. 달리화는 그의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갈아입을 거 줄게.”
내 초록색 티를 바깥 빨래대에 널고 나서 그는 나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갈아입을 옷은 나중에 주겠다며 사진을 먼저 찍자고 하더니 베란다의 커다란 창을 닫고 창문 양끝으로 젖혀져 있던 브론즈색의 커튼을 펼치고 있었다. 무거운 커튼이 창을 가리자 환하게 비쳐들던 햇빛이 차단되고 거실 안에 그늘만 가득 들어찼다. 순식간에 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하면 빛을 더 잘 조절할 수 있거든.”
카키색 반바지만 걸친 나를 어두운 초록색 소파 위에 앉혀놓고 그는 건너편 의자 뒤로 가서는 “희승아, 팔 좀 내려봐. 팔걸이에 기대 봐.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볼래?” 갖가지 주문을 하면서 카메라의 플래시를 터트리며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편하게 팔 내리고. 자연스럽게 있어 봐.”
나 혼자서 상체를 훌렁 벗고 있는데 편하고 자연스러울게 다 뭐란 말인가. 빛이 차단되어 어두워진 실내도 그렇고, 카메라가 발가벗은 내 가슴을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몸이 으슬으슬했다. 몸을 가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단 말이다. 그래서 팔을 교차시켜 젖꼭지를 가리면서 계속 손으로 양팔을 문질러대고 있자니 그가 “팔은 내리는 편이 좋겠는데.” 하며 다가와서는 내 팔을 내려 소파를 짚게 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중간중간 손가락으로 가슴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난 슬며시 무릎을 끌어올려 젖꼭지를 가렸다.
“왜? 싫어?”
“이제 사진 그만 찍어요.”
“사진 찍는 게 싫으니?”
“응. 이제 많이 찍었잖아요. 그리고 추워.”
손을 도로 올려 가슴에서 교차시키고 있자, 그도 “그럴래?” 하고 카메라를 넣어두러 갔다. 그가 다시 방에서 나왔을 땐 가로 줄무늬가 들어간 면티 한 장이랑 반바지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나더러 그걸 입고 있으라며 바지까지 벗으라는데 난 불현듯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 옷 입고 갈래요. 지금 집에 갈 거니까요.”
“왜 벌써? 형이 사진 찍으면서 희승이 귀찮게 했어?”
“아니요. 집에 가서 할머니랑 놀 거예요.”
“그래…….”
그는 표정만 서운하게 짓는 게 아니라 입으로도 “희승이가 벌써 간다니까 형이 서운하네.”라는 말까지 했다. 내가 그를 실망시킨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졌다. 미안해할 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또 놀러올게요. 내일도 올게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 빨래건조대에서 내 초록색 티를 걷어내서 도로 주워 입었다. 그도 따라 나와서는 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뒤란 창고로 갔다. 아니, 내가 창고로 알고 있었던 그곳이 사실은 차고였다는 걸, 그가 안에서 하얀 승용차를 끌고 나왔을 때 처음 알았다.
“오늘 현상 맡기면 내일 찾을 수 있겠다.”
하얀 승용차에 올라탔을 때 그가 필름통을 보여주면서 시내로 현상을 맡기러 갈 거라고 했다. 우리 집 근처에서 세워 내려주면서는 “내일은 사진 찾으러 시내 같이 가자.” 하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시내에 갈 수 없었다. 다음날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 서울 고모네 가게 되는 바람에 말이다.
서울 고모네는 내가 네 살 때도 할머니를 따라 가 본 적이 있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차역에 발을 내디딜 때부터 모든 게 처음 같고 신기하기만 한 서울이었다. 높게는 산과 수풀로 뒤덮이고 평지에는 논밭이 깔린 우리 마을과 달리, 우리 마을산보다 높은 빌딩으로 뒤덮여 있는 흐린 허공과, 널찍한 도로 위에 빽빽이 움직이는 차들과, 걸을때마다 어깨가 부딪히도록 붐비는 사람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엄마랑 할머니는 내가 손을 놓치지 않도록 번갈아가며 꼭 내 손을 쥐고 촘촘하고 뜨거운 사람들의 틈새로 걸었다.
그런데, 눈이 복잡하도록 사방이 빽빽한 서울 한복판을 걸으면서도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그 많은 차들과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하얀 집에서 놀다간 사람들이 타고 왔던 것만큼 빛이 나는 차들이나 그들 같은 화려한 분위기를 띈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까지 부자라는 개념이 뭔지, 얼만큼을 가져야 부자인지, 그들이 전체 인구비율에서 얼마나 소수를 차지하는 부류인지 모른채, 난 그저 서울 사람이란 다 부자려니― 하고 단순무지한 정의만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내 장난감이나 과자들을 많이씩 사다주던 고모도 서울사람이라서 당연히 내 머리 속에선 부자에 포함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하얀집의 사람들을, 그 창백한 형을 눈에 담게 된 나는 1년 만에 보게 된 고모의 얼굴과 첫 기억으로 담게 된 그녀의 평범한 셋집 살림을 보자마자 고모가 부자가 아니란 사실에 은근히 실망해버렸다.
“하이고, 우리 희승이 왔네.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 올케?”
“뭘요. 근데 얘가 하도 두리번대서 촌놈 티를 팍팍 내는 바람에 그게 더 정신없었지.”
‘촌놈 티’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서야, 왜 고모네까지 오는 동안 내가 길을 걸을 때마다 엄마가 “야, 그만 좀 두리번거려. 챙피하게―.” 하고 자꾸만 내 고개를 앞으로 돌려놨는지 알 것 같았다. 서울의 복잡한 풍경을 두리번두리번 하는 인간들은 ‘촌티’나는 ‘촌놈’이었던 것이었다.
그날 저녁은 집에서 고모가 고기를 구워주었는데, 고모가 종잇장처럼 얇게 구워진 쇠고기를 내 밥 위에 얹어줄 때마다 옆에서 나랑 같은 또래인 사촌 남매들이 내 고기를 집어다 먹다가 고모한테 혼났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의 고기를 집어다 사촌들에게 놓아주며 “희승이도 많이 묵어라.” 하고 나를 챙겨주지 못하는 마음을 대신 웃음으로 보냈다.
그 날 밤 고모가 내어 준 안방에서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끼어 자면서 ‘우리는 부자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서글픔에 어린 마음이 젖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전까지는 어른이나 아이나 남들이 떠드는 말 속에서 부자가 좋은 거란 건 알았지만 어째서, 어떻게 좋은 건지는 몰랐고 내가 부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밥술 굶을 일 없고, 매 끼마다 배부르게 퍼먹고, 좋아하는 간식은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은 졸라서 다른 가족들보다 많이 먹을 수 있는 막내인 나였기에 그동안 한 번도 결핍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가진 것이 남보다 많이 적다는 사실에 서글펐다.
우리 집이 가난한건 아니었지만, 가난하다고 느껴졌다. 내 마음도 가난하고 청승맞게 느껴졌다. 설령 우리가 정말 가난했다 하더라도,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혼자만의 가난은 그럴지 몰라도, 누군가와 비교되어 가난해지는 마음은 더 큰 박탈감과 결핍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감정들이 욕구를 자극하는 도화선이며 불행의 전초와도 같다는 것을 나는 더 많이 자라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대부터 마을 유지로 너른 땅들을 도지를 주고, 아버지는 시내에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미승이네가 내가 아는 중에서는 가장 넉넉한 살림집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땅의 재산가치도 모르고 그저 비슷한 집과 살림, 비슷한 생활, 다만 우리들 보다 조금 더 풍족해 보이는 미승이를 심하게 부러워한 적은 없었다. 미승이를 통해서 내가 빈곤하다 느꼈던 적도 없었다. 미승이 자신도 친구들이나 남 앞에서 우쭐하거나 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런 감정을 모르고 살았었는데…….
부의 규모가 다르고, 그것을 치장하는 정도가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눈으로 배우면서 난 조금 불행을 깨달았다. 살아온 냄새부터 확연히 다른 그 사람의 하얀 집,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그의 세상은 나에게 결핍과 목마름을 가르쳤다. 그들의 풍족함이 우리들의 결핍을 깨우치게 했던 것이다. 작은 욕망의 불씨도 띄웠다. 내게 마르지 않는 상냥함을 아낌없이 선사하는 그를 향해 가깝게 따라붙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울 고모네서 이틀 밤을 자고 노는 동안 고모는 너무나도 잘 해주었다. 나만 보면 ‘오빠 아들, 우리 조카, 귀여운 희승이…’ 해가며 사촌남매인 지영이 누나랑 지혁이보다 나를 먼저 챙기고, 관심을 듬뿍 가져주었다. 둘째날엔 나를 위해 커다란 놀이공원에도 데려가 주고 그때껏 먹어본 중에 제일 맛난 치킨도 사주었다.
“고모, 이게 우리 동네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네.”
이랬더니, “그럼 내일도 고모가 사줄게.”라는 대답으로 어린 마음을 또 한 번 흡족하게 해주었다.
그날 하루가 신났던 건 나만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처음에 날 촌놈이라고 은근히 무시하던 사촌들도 나중엔 내가 와서 기쁘다고 수다들을 떨었을까. 나를 가운데 자리에 앉히고 눈 돌아가게 어지러운 놀이기구를 타면서 지혁이는 “너도 손 놔 봐, 손 들어 올려봐!” 하면서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내 손을 억지로 안전벨트에서 떼어 들어 올리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으며, 놀이기구에서 내려서는 “넌 저게 뭐가 무섭다고 소릴 지르냐? 하나도 안 무서운데.” 하고 용감한 체를 했다. 그리고 길을 걸을 때도 양쪽에서 손을 잡고 걸으면서 지영이 누나는 나에게 별걸 다 가르쳐 주겠다고 보이는 것마다 쉴 새 없이 아는 척 하며 조잘거렸다.
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고모가 잘해주니까 저들도 덩달아 즐거워서 그러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고모는 내가 즐거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잘해주었지만, 내가 몇 년 만에 서울나들이를 온 조카였기에 각별했던 것이었지, 지들처럼 매일 옆에서 보고 산다면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주는 거랑 차이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 어떤가? 어쨌건 간에 신났다.
그리고 고모는 새 여름옷을 사주겠다며 고모가 자그마한 옷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대문 시장이란 곳에도 데려가 주었다.
“너는 어쩌면 애가 보는 눈도 촌스럽니? 니 얼굴에 그런 색은 안 어울려.”
아동복을 파는 작은 가게에서 내가 첫 눈에 고른 형광연두색 티를 보더니 엄마는 홱 잡아채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냥 무난한 걸로 골라, 무난한 걸로―.”라며 심심하기 짝이 없는 회색티를 골라서 강요했다.
“희승이가 입을 옷이니까 희승이한테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형광색 티에 미련을 못 버리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옆에서 지혁이가 똑똑한 말로 거들었다. 덕분에 좋은 말을 배웠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툭하면 내 선택의 권리를 무시하기 일수였다.
“나도, 나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지혁이의 말을 따라했더니 엄마는 나보고 시덥잖은 소리 하지 말라며 또 무시했고, 지영이 누나까지 “네가 그거 입으면 진짜 까매보일거야.”라고 물을 흐려놓았다. 피부 까만 것도 서러운데, 형광연두빛이 안 어울린다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들으니 기분이 참 안 좋았다. 회색 티는 입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며 토라져 있는데 고모가 흰 바탕에 남색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랑 남색 반바지를 골라 와서는 내 몸에 대주었다.
“고모가 보기엔 이게 잘 어울린다. 희승아.”
형광연두색 티가 아쉽긴 했지만 고모가 골라준 것도 마음에 들었다. 탈의실에서 새 티랑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오니 나도 약간은 세련되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기분이 좋았다. 흐드러지게 놀고 먹고 돌아다니며 쇼핑도 하고. 저녁 즈음엔 허벌나게 어지럽고 속 메슥거리던 놀이기구를 탈 때 쿵쾅 뛰어대던 기분까지 벌써 아쉽고, 빠른 시일 내로 서울에 또 놀러오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고모의 형편에서 무리를 했다는 걸 알고 나선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 자다 깨서 화장실을 가려고 방에서 나와 익숙지 않은 집안을 어둠속에서 더듬으며 불 켤 곳을 찾고 있는데 작은 방에서 고모부와 고모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니, 당신 오늘 과용한 거 아니야? 요즘 우리 형편도 시원찮은데…….”
“그래도… 모처럼 서울 올라온 거잖아요. 우린 해마다 오빠랑 올케언니가 농사지은 거 받아먹으면서 그동안 해준 것도 없고, 게다가 엄마도 요새 허리가 많이 안 좋아지셨다는데…….”
“그야 그렇지만… 다음달에 밀린 월부금 나갈 일도…….”
“그만해요. 자주 오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 대화를 듣고 그날 낮에 고모가 놀이공원에서 점심까지 먹고 돌아오면서 나랑 엄마한테까지 새 옷을 사주고 할머니의 약도 한 재 지어드린 것까지 차례대로 금방 금방 떠올렸다. 그리고 미안한 기색으로 머뭇머뭇 변명하는 고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나까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버렸다.
그때 갑자기 작은 방문이 열리며 방안의 낮은 스탠드 불빛이 거실로 새나왔다.
“어머, 희승아. 언제 나와 있었어? 잠이 안와서?”
“화장실 가려고…….”
고모는 나를 보자마자 당황한 목소리였지만, 거실 불을 찾아 켜주고 나선 금세 웃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럼 고모가 쉬 하는 거 도와줄까?”
됐다고 고개를 젓자 고모부도 무안한 기색으로 방에서 머리를 긁으면서 우물우물하고 나오더니 “나도 화장실 갈 거니까 같이 가자.”며 내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가서 볼일 보는 걸 도와주었다. 내가 아무리 키가 작아 보인다 한들, 양변기에도 혼자 못 앉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안방으로 돌아와서 엄마랑 할머니 사이의 자리로 들어가 누워서도 두 사람의 대화를 생각했다. 고모가 고모부에게 자신감 있게 대들지 못하던 걸 보면 고모부 말대로 이 집 형편이 어려운가보다 싶었다. 우리가 온 바람에 고모네 살림이 폴싹 망하는 건 아닌가도 걱정됐다. 그 때문에 즐거운 낮 시간이 남긴 희미한 웃음기마저 가라앉아 버렸다. 그런 생각들을 조금 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를 배웅해주러 기차역에까지 따라온 사촌들이 “니가 오니까 우리 엄마가 잘 해준다, 야! 너 서울에 자주 놀러 와라.”하고 내 팔을 붙들고 말했을 때 그 속에서 발견한 초라한 동심이 어쩐지 내 맘과 닮아 있어 창피함과 안타까움이 일었다. 아무래도 자주 오면 고모가 곤란할 것 같아서 고개를 슬며시 가로저었는데, 녀석들은 관심도 없는지 눈치도 못 챘다.
“또 와! 겨울 방학 때도 놀러 또 와!”이러면서 바쁘게 손을 흔드는 사촌들을 돌아보고 손만 살살 흔들며 고모가 집에 가서 형이랑 먹으라고 사준 치킨 봉지를 들고 엄마랑 할머니랑 기차에 올라탔다.
“엄마, 가을에 고모네다가 쌀이랑 콩이랑 많이 보내줘. 작년보다 많이.”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전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내가 한 말이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구, 니가 웬일로 남을 챙겨? 고모가 맛난 거 사주고 좋은데 데려가주니까 그리도 좋디? 아예 고모네서 눌러 살지?”하고 남의 속도 모르고 빈정거렸다. 그래도 할머니는 “우리 희승이가 벌써 철들라나부네. 아이고 이쁜 거.”하며 지나가는 아저씨에게서 초컬릿을 사주었다.
내 맘을 알아주는 건 할머니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왜 안 왔어? 어디 갔었니?”
나흘만에 만난 서울형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마냥 날 보자마자 손목을 아프게 잡고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눈에 보일만큼 짜증이 배어든 태도라 마주하기 불편해서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고모네 갔었어요.”
“고모네? 어딘데?”
“서울이요.”
“…….”
“근데 왜요?”
“같이 시내 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그런데 약속도 안 지키고 사람 기다리게 하면 어떡해? 난 기다리는 거 딱 질색이야.”
어차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어린애인 나를 상대로 약속이 어쩌구 따지고 드는 게 퍽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기다리는게 질색이라니, 내가 언제 저더러 기다리라고 했나? 자동차도 있겠다 사진이야 혼자 가서 찾아와도 될 텐데, 괜한 성질을 부리는 그가 형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매일 날 환영해주다가 느닷없이 신경질이라니, 나도 화가 났다.
“나 갈래요.”
“가지 마.”
다시 손목이 아프게 잡혔다.
“미안. 형이 몸이 아파서 희승이한테 신경질을 부렸어. 미안해. 형이 나빴어. 하지만 정말 많이 아프거든. 아프면 외롭잖아. 형은 여기 혼자니까.”
“많이 아팠어요?”
“응. 많이 아팠어. 외로워서 더 아팠어.”
내 키로 맞춰 앉아 손을 가슴에 얹으며 아프고 외로웠다는 말이 어린 심금을 울렸다. 나도 내가 그토록 동정심 많은 아이인 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럼 같이 있을게요. 근데 나 오늘은 숙제해야 돼요. 방학숙제 하나도 안하고 놀기만 했거든요. 여기서 할게요. 대신 나 숙제하는 거 방해하지 마요?”
“알았어. 방해하지 않을게. 희승이는 숙제 해라.”
옆구리에 끼고 왔던 공책이장이랑 필통을 내려놓고 마루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자 그도 옆에 바닥으로 털썩 앉았다. 완전 새거인 일기장을 펴고 가운데 선을 쫙 눌러 폈다.
방학일기는 가장 끔찍하게 하기 싫은 숙제였다. 원래 다른 숙제도 좋아서 하는 건 없었지만. 그렇지만, 지난해랑 같은 선생님이 담임이 되는 바람에 “희승이 너, 방학숙제 작년 여름이랑 겨울방학 때처럼 미승이랑 짜고 쓰지 말고 제대로 써 와. 그날 그날 날씨도 맞는지 틀리는지 선생님이 다 살펴볼거야.”라고 나만 특별히 지적해서 엄포를 놓는 바람에 섣불리 쓸 수 없는 일기였다. 그럼에도 난 방학이 된 후로 한 번도 일기를 쓰지 않고 배짱 좋게 놀았다.
그래도 이번엔 장마가 끝나고부턴 매일 매일 서울 형이랑 놀았다고 쓰면 될 것 같았고, 지나간 3일치는 고모네서 논걸 잔뜩 쓰면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고 떨어진 신용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짜랑 날씨는 제쳐두고 난 방학 첫날엔 무엇을 했었나 곱씹어보며 연필 꼭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일기 쓰게? 형이랑 이집에서 논 것도 쓸거니, 희승아?”
“응. 방학하고 여기 와서 형이랑 제일 많이 놀았으니까 당연히 제일 많이 써야죠.”
“내 얘기 쓰는 거, 난 싫은데.”
“형 얘기 쓰면 싫어요? 왜요?”
“일기에 쓰면 선생님도 보고 그럴텐데, 그러면 우리가 비밀이 아닌 게 되잖아.”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았다. 일기에 형과 그 집의 이야기를 쓰면 내 비밀기지를 까발리는 꼴이 되고, 형이랑 약속한 비밀도 못 지키게 되는 거다. 그치만 그것마저 쓰지 못하면 일기를 쓸 게 너무 없어서 곤란해질 지경이니…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가 일기장을 덮어버리며 나를 일으켜 앉혔다.
“희승아, 형이 사진 찾아왔는데 그건 안 궁금해?”
“전에 찍은 사진요? 찾아왔어요?”
“응. 지금 그거 보여줄게. 숙제는 나중에 하자.”
그가 방에 들어가더니 종이봉투를 들고 나와 소파에 앉으며 나도 그리로 오라고 불렀다. 난 일기장과 필통을 내팽개쳐둔 채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것 봐봐. 사진이 아주 잘 나왔어.”
“내가 사진발이 잘 받아서요?”
“음… 그렇기도 하지만, 형이 잘 찍기도 했어.”
웃으면서 내 어깨를 그에게 닿도록 끌어당긴 왼손이 계속해서 팔에 힘주어 머물러 있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탁자위에 놓은 사진 뭉치를 한 장 한 장 집어줄 때마다 난 양손으로 받아서 들여다보았다. 정원의 하얀 펜스문 옆에서나, 단풍나무 아래서, 자잘한 꽃들 사이에서 찍힌 사진들은 나인가 싶을 만큼 귀엽게 잘 나왔다. 아이답게 웃고 당연히 철없어보였다. 특히 부용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찍은 사진은 흰 꽃잎과 대조된 내 까무잡잡한 살결이 촌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깨끗하고 밝아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 웃자, 그도 웃으면서 다음 사진을 건네주었다.
노란 달리화 옆에서 찍은 사진들은 이전 것들만큼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봐줄만 했다. 그런데 흠뻑 젖은 상체를 하고 티셔츠를 벗어들고 있는 사진들에선 내가 귀엽지 않았다. 티를 막 벗어낸 머리칼이 젖고 헝클어져서 있었고 몸에 묻은 물기가 너무 선명했다. 사진은 점점 안 예쁘고 마음에 들지 않아졌다. 특히 집안으로 들어와서 찍힌 사진들이 싫었다.
“아주 맘에 드는 사진이 나왔어.”
“…….”
내게 가장 보기 싫은 사진이 그에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던가 보다.
어두운 실내 배경 속에서 진초록의 소파위에 웃통을 벗고 있는 내 모습은 이상해 보였다. 티만 벗고 있었는데, 바지는 그대로 입은채였는데 다 벌거벗은 느낌이 들어보였고, 내 얼굴은 아이이면서도 어딘가 아이 같지 않아보였다. 웃지 않고 경직된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눈은 유난히 겁먹은 아이마냥 크게 뜨여져 우울해 보이는 빛까지 담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에서 나오던 느낌의 차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기에.
지금의 표현력으로 설명하자면, 그것은 마치 포식자 앞에 놓인 먹이의 느낌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상체가 아주 예쁘게 나왔지?”
그가 사진속의 내 가슴을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만지고 있었다. 목이랑 어깨랑 배랑 허리를 오가며 손가락은 마지막에 젖꼭지를 가리고 멈추는가 싶더니 그 위치에서 다시 지문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었다. 사진을 빼앗으려 하자 손을 치워 사진을 던져버리더니 내 옷 속으로 차가운 손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근한 손길로 조심스럽게 위 아래로 쓸어내리다가 점차 유두로 몰려온 손끝이 그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 마요.”
“희승이 형 좋아하지 않니?”
“하지 마요.”
“형은 희승이 좋아하는데……. 희승이는 형이 싫어?”
그의 병기운 도는 듯한 손을 억지로 떼어내자 그 손이 내 손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뒤통수를 잡고서 내 얼굴로 입술을 붙여왔다. 혀가 또 들어왔다. 붙들린 손목이 너무 아프다는 생각만 하며 입 속으로 찾아든 그의 입술 인사를 얼떨떨함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손목을 풀어주고 다시 가슴과 등을 계속 쓰다듬어대는 병적일 만큼 찬 손에 온몸에 오돌오돌 닭살이 돋았다.
“추워… 집에 갈래.”
결국 창백하고 시린 손을 참아내기 싫고 갑자기 두려워져서 집에 가려고 그의 몸을 밀어내자 그가 무게로 밀어붙이며 내 몸을 소파 등으로 눌렀다.
“추워? 그럼 따뜻한 물에 목욕하자.”
“싫어, 갈래.”
“형도 추워. 같이 목욕하고 가.”
그래도 싫다고 고개를 휘젓자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욕실로 데려갔다. 발버둥을 치며 “집에 갈래! 집에 갈래!” 하고 소리를 지르자 당황해서는 나를 내려놓고 달래기 시작했다.
“쉿―!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형이잖아, 희승아. 내가 희승이 아프게 안 해. 알지? 내가 희승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흑…….”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나를 안아주고 다시 양 손으로 내 눈물을 보며 웃고 있었다.
“희승이 바보구나. 울긴 왜 울어. 형이 이따가 희승이네 집에 가서 방에까지 데려다 줄 텐데. 희승이네 부모님이랑도 만나서 내가 저 윗집에 사는 희승이 형입니다― 하고 인사도 할 거야. 그럼 희승이네 엄마랑 아빠도 아주 반가워하신다고.”
“…….”
“그리고 형 아픈데, 희승이가 이렇게 울고 떼쓰면 힘들지.”
내게로 은근한 책망까지 돌렸다. 그래도 날 엄마아빠한테 데려다 줄 거고, 그러면 엄마 아빠도 반길거라는 말이 어쩐지 믿고 싶은 기분이 들게 했다. 울음을 뚝 그치고 눈물을 마저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그렇다고 긴장이 다 풀어진 건 아니었다.
“코 빨개진거 봐. 우리 따뜻한 물 받아서 물놀이 하자. 거품놀이도 하면서 목욕하고 나면 기분 좋아질 거야.”
똑똑한 판단도 못 내리고 우뚝이 서 있기만 하는 사이 그가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몸이 굳어 서있는 나를 다시 감싸 안아왔다. 명랑해진 분위기로 입을 꾹 다문 채 경직되어 있는 내 볼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장난을 걸었다.
“이거 볼래?”
욕실 문을 잠그고 오면서 그가 주황색의 샴푸통 같은 걸 집어 들었다. 꼭지를 누르자 그 속에서 샴푸처럼 말간 액체가 물속으로 주르륵 떨어지며 녹아서 사라졌다. 그 액체를 물속에 듬뿍 뿌리고는 그가 나에게 손으로 물을 흔들어보라고 했다. 그가 해 보이는 대로 따라서 손바닥으로 찰박찰박 수면을 흔들자 조금씩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재밌지?” 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열심히 거품을 지어내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을 흔들어줄수록, 물을 때려줄수록 늘어나는 보글거리는 하얀 거품들의 감촉이 따끈하고 미끈거렸다.
욕조에 물이 반 이상 채워졌을 때 나를 그가 일으켜 세워 바지랑 팬티를 한꺼번에 훌렁 벗겨서 그 안에 집어넣었다. 내가 얌전히 앉아 거품들을 계속 늘리며 만지작거리는 동안 그도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 또 기분이 경직되어버렸다.
그의 벗은 몸은 역시나 전신이 하얗고 말랐는데, 다만 다리 사이의 물건만큼은 색이 달랐다. 형이나 아빠의 것 말고는 유심히 본 적 없는 다 자란 남자의 성기는 이질적이었다. 특히나 하얀 피부 가운데 다리 사이에 매달린 검붉은 살덩어리는 마치 다른 살을 떼어다 붙여놓은 것 같아 징그러워 보였다. 아빠나 형의 것을 보고는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따뜻한 물이 내 심장을 너머 차오를 때쯤 그가 물을 끄고 욕조 얀으로 들어와 내 뒤로 앉자 물이 철퍽 넘치며 수면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가 다리 사이로 내 몸을 당겨서 앉히고 그의 등에 기대앉게 했다. 내 어깨위로 물을 담아 끼얹고 매만질 때, 그 물의 온기로 인해 그의 손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손을 넣어 양손으로 내 가슴과 배와 다리와 엉덩이를 쓰다듬는 사이 온수 표면은 한가득의 거품들로 가득 차올라있었다. 그의 손은 따끈하고 미끈했다.
“이제 안 차갑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몸을 더 바짝 당겨 안고 양손으로 내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어오는데, 그 손의 움직임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은연중에 짐작할 수 있었다. 성(性)이란 반드시 배우지 않아도 자연체득이 가능한 감각기능 이란 걸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역시나 그의 손이 내 작은 고추를 쥐고 문질러왔다. 마냥 간지럽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할머니나 아빠가 가끔 내 고추를 만지고 장난을 치긴 했지만, 그들의 툭툭 혹은 꼬집듯이 만지는 간지럽고 따끔한 손끝과는 전혀 달랐다. 딱히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조차 모를 만큼, 난 쾌감이란 걸 알기엔 너무 어린 몸이었고 불쾌감을 확신하기엔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예측 못했던 것은 또 다른 한 손의 행방이었다. 내 엉덩이 틈으로 들어온 가늘고 딱딱한 것이 좁은 구멍 주위를 돌고 매만지는 동안 그것이 손가락이라는 걸 짐작했을 때 그 손마디 끝이 이미 구멍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내가 움찔하자 내 허리를 더 바짝 당기며 손가락을 더 깊게 넣어왔다.
“아악, 아파!”
그의 손목을 할퀴자, 그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손가락을 빼냈다. 대신 자신의 몸 위에 내 엉덩이를 눌러 앉혔다. 엉덩이 아래에서 뭔가 물컹하면서도 단단한 것을 깔고 앉았는데, 그는 그대로 내 엉덩이를 잡고 그 위에서 원을 그리며 돌렸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가만히 앉아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흔들 허리 아래가 좌우상하로 시계방향과 그 반대방향으로 내 엉덩이가 오가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허억, 허억’ 하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혀… 형…….”
눈을 뒤로 돌리자 뭔가 정신 빠진 사람처럼 초점을 잃은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 입을 벌린채 눈을 까뒤집고 천장을 향하고 있을 땐 진짜로 미친 사람 같고 귀신같았다.
“하지 마. 하지 마 혀……!”
그가 내 얼굴을 당겨 입 속에 혀를 넣고 침을 잔뜩 흘리며 돌려댔을 때 이젠 더 이상 그것이 인사라고 속을 수도, 그 변명으로 내 자신을 속일 수도 없었다. 내가 울어대기 시작하자 그가 거세게 따귀를 때렸다.
엉덩이 밑에 깔고 있던 가운데 커다란 살덩어리가 다시 물렁하게 작아지고 나서야 빠르게 샤워기로 헹구고 그가 다시 거실로 안아들고 나왔을 땐, 난 울다 지쳐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볼에서도 화끈한 열이 오르며 부어오르고 있었다.
“…지… 집에… 가…….”
그가 소파 위에 던지듯이 엎어놓은 내 몸은 기운을 잃은 채 공포와 좌절감으로 희미하게 떨고만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가늘고 딱딱한 몸이 내 전신을 눌러왔다.
가느다란 허벅지 사이에서 굵고 단단한 살이 움직이던…, 그 첫 느낌을 난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느끼곤 한다. 그것이 아까 욕실에서 내 엉덩이가 누르고 비비던 그것이란 걸, 지금은 내 엉덩이를 누르고 비비고 있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것이 갑작스럽게 커지는 그의 쇳소리 섞인 신음과 함께 점점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함께 비벼지는 굵은 털 때문에 엉덩이가 아주 따가웠다. 어느새 그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뭔가 물보다 미끈한… 뭔가 따끈한 것이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내 붕알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로 흘러내린 물기 같은 것을 묻힌 그의 손가락이 툭하고 다시 내 구멍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아프다고 싫다고 소리치는 내 외침을 무시한 채 구멍 속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의 희고 차가운, 파란 심줄이 비치는 뼈마디가 툭 불거진… 내가 싫어하는 손가락이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대로 내 몸을 앞으로 돌린 채, 위로 올라오더니 아악 소리치는 내 입안으로 그의 검붉은 살덩어리를 넣고 뒤로 뻗은 손가락을 계속 내 구멍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길 한참 만에 그가 살덩어리를 빼내서는 다시 아까 같은 액체를 내 엉덩이 사이로 쏟아냈다.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너무 아프고, 너무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서… 눈물만 계속 주르륵 주르륵 흘러서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만큼 길고 추잡한 행위를 마치고서야 그는 욕실에서 나를 씻겨주고 다시 거실 탁자 위로 차가운 초코우유와 케잌을 가져다 놓았다.
“울지 마.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랬어. 형이 희승이 좋아하는 거 알지?”
“…근데… 왜 때렸…끅…어……. …왜… 이상한… 짓… 흐흑…….”
그는 아직 다 그치지 못한 울음을 끄윽 끄윽 넘기고 있는 내 입 안으로 억지로 케잌을 떠 먹였다. 어깨를 안고 귀 속에 다정하게 속삭이며 볼 옆에 묻은 크림을 핥아가며.
“미안해. 형이 잘못했어. 아까는 내가 정신이 나갔어. 희승이가 너무 좋아서, 그런데 희승이는 형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미안해. 형이 다신 안 그럴 거야. 그래, 이렇게 하자. 희승이도 형 때려라. 응? 나쁜 형은 맞아도 싸지.”
내 손을 들어올려 자기 볼을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도 그 정도의 매로는 그의 볼이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한 대의 따귀만으로도 반항심을 잃어버린 내 볼의 아픔에 비해, 열대를 스무대를 맞아도 절대로 부어오르지 않을 매질의 흉내를 내며 날 위로하려 들었다.
“희승이는, 형을 안아프게 때리네. 난 이렇게 희승이를 울려놓고. 정말 형이 나쁘다.”
마지막엔 두 손으로 내손을 꼬옥 잡고 기도하는 사람처럼 이마를 숙였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땐 거짓부렁이 아니라 진짜로 미안해하는 것 같아 보여서 내 공포심도 약간은 사그러들었다. 뚜렷하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죄책감 소름들을 덜기 위해서라도 난 그의 자책감과 부드러운 웃음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고 두려워졌다.
“형이 희승이를 이만큼 좋아하는 건 우리끼리의 비밀이야. 사람들은 너무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질투하거든. 그래서 우리 사이를 나쁘게 말하고 훼방 놓을지도 몰라. 남들이 알게 되면 우리 둘 다 부끄러워지는 거야. 죽을 만큼 부끄러워지는 거야. 그러니까, 비밀이야. 알지?”
좋든 싫든 비밀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빨리 그 집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우리는 공범이야.”
“공…범?”
“그래, 공범. 같은 일을 한 사람. 동지라고도 하지.”
“동지?”
“그래 동지. 우리의 비밀은 우리끼리만 알아야 되고, 우리끼리만 나눠가져야 돼. 서로 좋아하고 믿는 동지끼리만.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우릴 나쁘게 볼 거거든.”
그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쁜 짓을 한 거란 것 쯤은 나도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은 비밀이야. 비밀.”
“…비…밀…….”
기운없이 내려진 내 손을 끌어올려 그는 멋대로 새끼 손가락으로 약속을 걸고 내 옷을 하나씩 입혀주었다.
하지만, 그는 약속대로 날 집으로 데려다주지도, 우리 엄마 아빠를 만나지도 않았다. 옷만 달랑 입혀주고는 “잘가, 또와”라며 문간에서 손만 흔들어서 나를 보냈다. 다시는 저 집에 가지 않으리라고, 다시는 그를 믿지도, 얼굴도 맞대지도 않으리라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며 힘이 풀린 다리로 명재골 산등성이를 내려오는 동안 다섯 번이나 굴러 넘어졌다. 하지만, 그런 결심 같은 건 하나도 필요 없었다.
달콤하고 비겁한 거짓말들이 떠돌던 하얀 집은 다음날 텅 비어있었다.
“곰처럼 뒤굴거릴거면 숙제나 해. 책이라도 읽던가!”
마당 안을 빙빙 돌다가 마루청에 앉았다 일어섰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왔다가 다시 마루에 누워 구르며 일 없이 몸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나를 보고 엄마가 잔소리를 하며 오이 바구니를 들고 지나갔다. 집 밖으로 나가기는 겁나고, 이래저래 고민이 되어 어지러운 내 심사를 몰라주는 엄마의 잔소리를 흘려들었다. 한쪽 볼이 찌그러지도록 마루에 고개를 얹어놓고 한숨을 내쉬는데 형이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형이 엄마가 있는 부엌으로 가는 걸 보고 나도 일 없이 느릿느릿 따라갔다.
“엄마, 목말라. 물 좀 줘.”
“니가 떠 먹어.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이놈의 자식들은 지 손은 안 쓰고 사람을 부리려 들어. 지 애비 닮아서들…….”
“앗, 오이 금방 따 온 거지? 이거 먹을게.”
형이 오이 하나를 씻어서 와삭 깨물어 먹고는 내게도 한 입 베어 먹으라고 내미는 걸 고개만 절래절래 저었다.
“저 명재골 위엣 집 있잖아. 거기 있던 남자 어제 떠났대.”
형은 입안 가득 오이를 담고서 엄마에게 우물우물 떠들었다.
“가던지 말던지.”
“그치만 그 인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기 두주나 머물면서 끝끝내 코빼기도 안 보이고 가버린거잖아.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신경 꺼.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들이니까.”
부엌 문간에 기대 있는 날 툭 치고 엄마가 다시 밭으로 나가고 형도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또 따라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형의 방문 간에 기대 서있기만 하자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너 뭐냐?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사람 뒤만 따라 다니고.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나가려면 나가라. 날도 더워 죽겠는데.”
“형, 그 사람 갔대? …저 윗집 사람 말이야.”
“응. 아까 현구형 만났을 때 그러더라. 엊저녁에 명재골에서 하얀 차가 내려오더니 쌩 하고 엄청 빨리 가더라는데.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내가 그 집에서 내려오고 나서 몇 시간도 안 되어 마을을 뜬 것이었다. 나한테 또 오라고 해놓고 훌쩍 가버리다니… 다시는 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 인간이 먼저 내뺐다는 소식을 듣자 도무지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와서 당분간 그 집에 올 사람 없으니까 집 다 잠그고 단속 해달랬다더라. 그래서 이따 현구 형이 별장에 올라갈 거래.”
“언제?”
“몰라, 낮잠 자고 나서 간댔으니까 좀 있다 가겠지. 나도 잘 거니까, 넌 나가.”
그 길로 집을 나서서 명재골 미승이네 집까지 갔다.
미승이네 돌담 뒤랑 근방의 숲에서 우물쭈물 몸을 숨겼다 드러냈다 하며 현구가 나타날 때만 하릴없이 기다렸다. 해가 정오에서 서쪽으로 한창 기울어갈 즈음에서야 현구가 눈곱을 떼며 대문을 열고 나섰다. 그 길로 별장으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는 걸 보고 나도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뒤쫓아 갔다. 다행히도 현구는 콧소리로 트롯트를 흥얼대느라 멀찍이서 뒤쫓아 가는 내 기색과 발걸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하얀 집에 다다른 현구가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가 집 주위랑 마당을 둘러보고 전지가위로 두 주 새 자란 잡풀들을 싹둑싹둑 자르는 동안 난 근처의 숲에서 오래 자라 커다란 나무 둥치 뒤에 숨어서 힐끔힐끔 살펴보고 있었다. 나답지 않게 용감한 행동이었다. 다시는 절대로 다가가선 안 되는 기피의 대상이 된 하얀 집이었는데도, 무사태평한 현구의 그늘에라도 숨어 조심히 따라가서 눈으로 보고 무엇이든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당했던 끔찍한 일들이 꿈은 아니었을까, 악몽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버리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 형아가 아직도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잠식시키고 싶었다.
현구가 하얀 집 주변을 돌아본 후 낮은 펜스문을 잠그고 나서 다시 산을 내려간 후에서야 나도 숲에서 나와 낮은 펜스의 아랫단을 디디고 넘어가서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칠칠맞은 현구가 미처 내려두고 가지 못한 창고의 셔터문 안에서 사라져버린 흰 승용차의 빈자리와, 문이랑 창마다 굳게 잠긴 자리들과, 이미 햇볕에 바짝 말라버린 수돗가의 개수구를 보고서야 그가 정말로 떠났다는 걸 알았다. 그가 다시는 날 괴롭히지 못하리라는 희미한 안도감에 이어 극심한 서운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나를 그리 해놓고… 인사 한 마디 없이 가다니… 배신하고 도망쳐 버리다니…….
죽도록 괘씸했다.
먹장구름이 낀 내 맘과 다르게 여전히 색색으로 피어있는 꽃들 눈과 마음을 찔러왔다. 그가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던 시간들이 생각나자 화가 났다. 꽃들을 망가뜨리기로 했다.
나는 화단 안으로 들어가 키가 낮은 꽃들을 쾅쾅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게 밟았다. 운동화 밑바닥으로 눌린 꽃들이 찢어지고 꽃물이 나오도록 밟아 흙과 섞어 짓이겨 밟고 뭉개버렸다. 꽃나무는 발로 차서 부러뜨리려 했지만 다리 힘이 약해서 잘 부러지지 않아서 포기하고, 키 큰 줄기 꽃들로 눈을 돌렸다. 시들시들 말라가는 노란 달리화를 째려보다가 굵은 줄기를 잡고 양팔에 힘을 줘서 쑥쑥 뽑아버렸다. 그러나 가장 굵게 자란 달리화 한 줄기는 뿌리가 뽑히지 않고 중간이 찢어지기만 했다. 화단 흙 위에 널브러진 꽃들을 발로 밟고 차고 짓뭉개고, 또 밟고 차고 짓뭉갰다.
‘늬들도 나처럼 괴로워야 돼.’
꽃들이 괴로울 게 불쌍타 여기면서도 ‘내가 더 불쌍해’라는 주체할 수 없는 억하심정으로 이미 스러진 꽃잎사귀들 위에서 수차례 힘껏 들뛰어댔다.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허탈하고 울먹울먹한 기분으로 펜스를 넘어 그 집을 나와 잡꽃들이 피어난 길 곁을 걷는데 한 쌍의 흰 나비가 팔랑팔랑 내 주위를 날았다. 지들끼리 날개를 부대끼다 떨어졌다 하면서 살랑살랑 노니는 꼴이 날 놀리는 것만 같았다.
‘넌 이제 끝장이야, 바보야.’하고.
손으로 홱 나비를 잡아채려 했지만 놈들은 아둔하고 굼뜬 손아귀를 우습지도 않게 지나쳐서 날아갔다. 손바닥이 시큰하게 아려와서 펼쳐보니 핏금 간 자리들이 있었다. 거친 꽃줄기를 잡고 뽑을 때 생긴 상처였을 것이다. 나오지도 않는 피를 짜듯 손을 꼭 쥐었다.
명재골 산등성이 끝자락으로 내려오면서 길가를 벗어난 풀숲 한가운데 자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하얀 물체가 또 보였다. 이번에는 나비가 아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하얀 물체가 나만한 크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도카니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미승이의 뒷모습이었다. 내 걸음 소리도 안 들리는지,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릎을 감싸 안고 굳은 바위처럼 앉아만 있었다.
‘제발 돌아보지 마라… 날 보지 못해라… 제발 계속 돌아보지 마라…….’
숨소리를 죽이며 잰 걸음으로 남은 내리막길을 서둘러 지나쳐왔다. 울먹한 숨이 가슴에서 흐덕흐덕 울렸지만 넘어지지 말자고, 울지 말자고, 양 손을 힘껏 움켜쥐고 서서히 명재골을 뒤로 멀리했다.
내가 서울 고모네 다녀온 동안 미승이가 돌아왔다는 얘기는 나중에서야 들었다. 선중이 녀석들이 알려줄 리는 없었고, 마침 형을 따라 오전에 읍내에 갔을 때 반 친구 두 명을 만나 미승이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미승이는 방학 중에 서울에 갔다가 서울 문방구에서 파는 탐구생활 답안지를 사 와서 이틀만에 숙제를 다 끝냈다고 했다. 처음엔 사실인지 아닌지 몰랐지만, 같은 컴퓨터 학원에 다니는 아이에게 그 답안지를 빌려줬다는 것이었다.
미승이에 관한 얘기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미승이가 서울에 있는 동안 올스타전을 보러 야구장에도 갔다고 했고, 빙그레 어린이 회원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한다. 어린이 회원용 야구티랑 모자랑 야구놀이 세트까지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나가는 유명투수에게서 싸인볼도 받고 같이 사진도 찍어 왔다는 것이었다. 비록 시골마을에선 왕따일망정, 서울에서는 누구보다 알차고 멋진 방학을 보내고 온 게 틀림없었다.
‘그 녀석에 비해 난 뭔가…….’
한숨이 폭폭 나왔다. 좋다고 뛰어다니던 하얀 집에서 망측한 일이나 당하고,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이나 생겨버리고, 게다가 숙제는 하나도 못해놓고, 마음만 엉망진창이었다.
“희승아, 너 미승이랑 같은 마을 사니까, 니가 미승이한테 말해봐.”
“뭘?”
“우리도 이틀 만에 숙제를 끝내자. 미승이한테 답안지 있잖아.”
“그래. 니가 미승이한테 탐구생활 답안지 좀 꿔달라고 해 봐라.”
아이들은 기가 막힌 소릴 졸라댔다.
“답안지를 꿔주면 어떻게 갚을 거냐?”
난 녀석들에게 쏘아버렸다. 복사하면 돼잖냐는 말에도 대꾸 안하고 돌아서버렸다. 나랑 미승이 사이가 예전같지 않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개학이 다가오고 불이 발등 앞에 떨어지니 실속 없이 친한 척 하는 녀석들이 얄미워 보였다.
내 심사도 삐딱해져 있었다.
“미승이는 좋겠네. 너 지금 걔 엄청 부럽지?”
옆에서 약 올리는 형의 등을 주먹으로 때리자, 형은 내 머리를 두 대나 쥐어박고 달아났다. 게다가 마을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중엔 정류장을 지나치던 담임선생님까지 만나버렸다.
“이번에 선생님이 네 숙제를 제일 샅샅이 훓어볼 테니까, 잘 해와, 정희승!”
형이랑 주변 버스 기다리는 아줌마랑 아저씨들까지 다 들리게 내게 엄포를 놓고 가는 바람에 너무 쪽팔렸다. 선생님까지 내 기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탐구생활 답안지가 탐이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한 장도 써 두지 않은 방학일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사방이 캄캄절벽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달력에 표시해 둔 개학날을 쳐다보고 있자니 대책이 하나도 안 섰다. 개학을 나흘 밖에 안 남겨두고 대책없이 미뤄둔 방학숙제 때문에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혼만 빠졌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것처럼 한 장 펼쳐보지 않은 탐구생활도 그렇고 비밀 얘기를 써서는 안 되는 일기장을 펴놓고도 깊은 한숨만 들이켰다 내쉬고 있었다. 이전 해처럼 숙제를 도와줄 미승이도 없었다.
‘전 같았으면 녀석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숙제도 베끼게 해주고, 같이 베껴주고 했을 텐데…….’
미승이가 숙제 도와주던 시절이 그리웠지만, 녀석의 원조를 기대할 수도 없고 내 쪽에서 도와달라고 대뜸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혼자서는 어찌해 볼 도리도 없었다. 다가오는 개학날을 헤아리며 어찌 학교에 가나 고민만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도 나 혼자 어쩔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서, 자꾸만 생각할수록 서러워서… 끝내는 울음이 터져버렸다.
“희승아, 니 와 우나? 와 울어, 와?”
‘흐아앙!’ 하는 통곡소리를 듣자마자 할머니가 놀라서 달려와서는 내 앞에 앉아 끊임없이 흘려대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뒤따라 쫓아온 엄마랑 아빠랑 형까지 문간에서 고개들을 디밀며 뭣 때문에 우냐고 마구잡이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저거 숙제 못해서 우는 모양이네. 아까 읍내 정류장에서 쟤네 담임선생님 만났거든. 희승이 숙제를 제일 쫀쫀하게 검사할거라고 그랬어.”
텅 빈 일기장을 가리키며 킬킬거리는 형이랑,
“이놈아, 그러게 진작 진작 해야지 이제 와서 울면 어떡해!? 오죽하면 선생님이 그러셨겠냐!”
선생님 소리에 껌뻑 가서 막무가내로 다그치는 아빠랑,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으니까, 너 혼자 알아서 해! 학교 가서 선생님한테 실컷 매나 맞고 와. 엄마가 전화 걸어서 아주 다부지게 때려달라고 해야겠다.”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이 야박한 소리를 해대는 엄마랑,
“울지마라, 희승아. 할미가 도와줄게.”
별로 의지가 안 되는 할머니의 위로 때문에“흐아앙. 으앙. ” 울음소리만 더 억울하게 커져갔다.
“어머니, 냅둬요. 저 놈 버릇 나빠져요.”
“맞아요, 어머님. 안 그래도 애가 게을러 터져서 혼 좀 잔뜩 나 봐야 돼요.”
“희승이 쟤, 할머니가 자꾸 싸고도니까 저렇게 울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모른 척 해요, 할머니. 쟨 좀 맞아야 돼요.”
“야야, 아가 우는데 그런 소리 하믄 어쩌노!? 늬들도 아 숙제 좀 도와 줘라. 희승이 학교 가서 맴매 맞으면 안 된다. 야가 누구 손인데 함부로 넘이 때리노!? 걱정 말그라 희승아. 엄마랑, 아빠랑, 할매랑, 느이 형아가 다들 숙제 도와 줄기다. 울지 마라. 뚝!”
당신 손자가 학교 가서 맞는 꼴 못 본다며 가족들에게 호통―연약하고 기운 없는 할머니 치고는 참으로 호통이었다―을 내리자 가족들도 더 이상 나더러 학교 가서 맞고 오라느니 하는 따위의 소린 못했다. 그렇게 내가 안달복달을 쳐대고 징징댄 결과로 할머니의 채근에 못 이겨 온 가족이 내 방학 숙제를 거들어야 했다. 모두 신통한 도움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의 가족들은 내게 작은 구세군이었다. 싫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팔을 걷어붙이고들 나서니 하는 수 없이 나도 울음을 그치고 죽으나 사나 숙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아빠가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한 달간의 날씨를 일일이 물어보는 동안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일기장 날씨 칸에다 옆에서 아빠가 불러주는 대로 해랑 구름이랑 우산을 바쁘게 그려나갔다.
“이 자식아! 그걸 일일이 그리고 앉아 있으면 어떡해!? 그냥 글자로 써, 글자로! 이 안내 아가씨도 바쁘잖아!”
“끅… 그치만 나… 끅, …글씨도 늦게 쓰는걸.”
울음 뒤의 딸꾹질을 삼켜가며 연필을 꾹꾹 눌러서 계속 해랑 구름을 그리고 있던 나는 아빠의 복장을 터지게 했다. 게다가 바보같이 날짜가 하루씩 밀리는 바람에 지우개질을 해대다가 “야! 나중에 고쳐 나중에! 기상청 아가씨가 짜증내잖아!”하는 아빠의 짜증에 이어 “바보야, 그걸 지우개질 하지 말고 날짜를 맞춰서 쓰면 되지.”라고 형이 참견을 해서 계속해서 하루씩 밀려서 날씨를 그려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일기장 첫 장은 백지로 비워졌다.
아빠랑 내가 일기장 날짜랑 날씨 칸을 채우는 동안 엄마는 옆에서 내가 방학동안 한 일이 뭔지를 곰실곰실 날짜랑 기억을 더듬어가며 일기에 쓸 내용들을 열 개 정도 찾아주었고, 나머지 빈 날들은 할머니가 마구 거짓부렁으로 지어내서 할머니의 돌아가신 친구분들 댁으로 여기 저기 놀러 다닌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엄마의 기억 몇 개와 할머니가 지어준 이야기로 이틀 밤낮에 걸쳐 일기장을 채웠다.
그리고 방학 마지막 날엔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공부 못하는 형이 탐구생활을 도와주었다. 나대신 식물들을 채집해서 가져와 주었고 이것저것 실험도 해가며 마구잡이로 때려 맞춰서 답을 알려주었다. 할머니는 옆에서 답을 적을 종이를 오려주고, 내가 답을 다 적고 나면 풀칠을 해주었다. 덕분에 탐구생활도 채웠다.
그렇게 온 가족을 들볶아서 욕도 왕창 얻어먹어가면서 간신히 숙제를 끝냈다.
방학 마지막 날 일기장 겉장을 쓸어내리며 한껏 감상해 취해버렸다. 그해 여름의 일기장은 거짓 상상으로 거의가 채워진 한 권의 그림 이야기책과 마찬가지였고, 난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이게 내 진짜 여름방학이었더라면-’ 하고 울적하게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울적한 보람이 허탈해지는 결과가 여보란 듯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개학식이 끝나고 아이들을 귀가시킨 후 담임은 정말로 나만 따로 교무실로 불러서 숙제검사를 한 것이다.
담임 책상 옆에 날 세워두고는 내 일기장만 꺼내들어 꼼꼼하게 들여다보더니 의심하는 눈초리로 찔러왔다.
“일기를 보니 희승이 방학 즐겁게 보냈나 보다. 그치?”
“…네…에…….”
“희승이네 할머니는 정정하신가보네. 친구분들이 이렇게 많이 살아계신걸 보니.”
“…….”
“그런데 희승이는 어떻게 방학동안 할머니 친구분 댁으로만 놀러 다녔니? 친구들하고 논 얘기가 하나도 없어.”
“…….”
기어이 할머니의 거짓부렁이 들켜버렸나 싶어서 바짝 긴장을 했다. 담임은 성실하게 숙제를 잘 해오는 반장의 일기장을 펼쳐서 비교해보며 “날짜는 맞는 것 같은데…….” 하고 그 이상 내용에 대해 추궁하지는 않고 일기장을 덮었다. 하지만, 탐구생활을 펼쳐서 빠르게 여러 장을 넘기더니 입을 쩍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답들이 왜 이래!?”
알고 보니 탐구생활의 답이 다 틀렸다. 문제랑 전혀 상관도 없는 답이 적혀있는 것들도 있었다. 형은 도와주는 시늉만 하고 엉터리로 탐구생활을 채워서 내가 선생님께 얻어맞고 오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너, 이거 며칠 동안 했어?”
“…하루요.”
솔직하게 대답했다가 결국은 손바닥을 열 대나 맞으면서 잔소리를 들었다. “앞으로도 이럴거야? 어쩔거야? 응? ” 하고 한 대 때릴 때마다 물었다.
‘왜 나만…….’
나 말고도 숙제를 엉터리로 해 온 녀석들은 많을 텐데 왜 담임은 나만 갖고 닦달을 하는지… 억울했다. 재수가 없다 해도 너무 없었다.
“…앞으로… 숙제 잘 해올게요.”
따끔하고 매운 통증을 넘어서 얼얼해진 손바닥을 마주 비비고, 등 허리로 돌려 비비다가 눈물을 닦았다.
“그래, 희승아. 선생님은 네 답이 틀려서 때린 게 아냐. 정답이 아니더라도, 희승이 네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랬어. 선생님이 희승이가 미워서 때린 게 아니라는 거 알지? 희승이를 예뻐하기 때문에 이 담에 좋은 사람이 되라고 혼낸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잘하자, 희승아.”
담임은 입을 내밀고 울먹울먹 하는 날 토닥이며 다정해진 목소리로 안아주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을로 올 때까지 얼얼한 건 손바닥보다 마음이었는데도, 손바닥만 쥐었다 폈다 했다. 냇가에서 현구를 보고 지나칠 때, “희승이 너 숙제땜에 선생님한테 불려갔다며?” 하고 킬킬거렸다. 병식이 자식이 헤벌쭉거리며 다 불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집으로 돌아온 직후에 현구가 물고기 잡겠다고 냇물 속에 맨발로 들어가 물속에 전기를 지지고 설치다가 감전이 돼서 기절한 사건으로 그 해 여름방학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미승이는 소식 빠른 아이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방학중에 답안지를 빌려준 녀석들이 미승이의 새로운 친구들이 되었고, 개학 후엔 소문난 싸인볼 좀 만져보게 해 달라고, 새 야구놀이 세트로 같이 야구시합 하자고 따라붙는 녀석들이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하얀 집에서 내려올때 보았던 미승이의 뒷모습에서 청승스러움을 느낀 내 심정을 비웃듯, 녀석은 피 알만한 아이들의 변덕으로 새로운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미모 덕분에 여자아이들에게서 얻은 선망이었다면, 이번엔 오줄없는 남자아이들의 호기심과 아쉬움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었다.
선중이들도 미승이를 부러워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체면은 있었는지 차마 다가가지는 못하고 전처럼 미승이를 욕하거나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냥저냥 지들끼리 열심히 뭉쳐서 노는데 주력을 다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지 못하는 나만 외로웠다.
…그리고 내게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또 다른 사건이 그 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개학하고 얼마 후, 현미가 피서객 두 명에게 강간을 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현미는 우리보다 세 살 위의 여자애였는데 아홉 살 겨울에 미승이를 읍내의 교회 연극에 참가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교회에서 성처녀 마리아역을 맡았던 현미의 모습은 진짜 그럴듯했었다. “분장 안 해도 아프리카 사람처럼 보이겠다.”고 애들이 웃고 놀릴 만큼 원래도 까무잡잡하고 예쁘게 생긴 계집애였다. 우리 동네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나 읍내에서도 현미를 보는 어른들마다 예쁘다고 자자히 칭찬했다.
그렇지만 “저 가스나 좀만 크면 아주 사내 좀 잡겠네.”라는 동네 아저씨의 농담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난 사내 잡는 게 어떤 뜻인지는 몰라도 그 말이 꼭 칭찬만은 아닌 걸로 들렸다. 실제로도 현미는 새초롬하니 자신이 남들 눈에도 예뻐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아양도 잘 떨던 아이였다. 우리 같은 어린 또래들은 무시하고 저를 더 예뻐해주고, 예쁨의 대가로 더 잘해주는 어른들의 비위를 잘 맞춰서 때론 밉살스럽다는 소리도 듣곤 했다.
가끔 강가에 놀러온 형들을 곧잘 쫒아다니던 현미를 보며 “저러다 혼 쫌 나봐야지, 저 놈들이 뭐가 좋아서 오빠 오빠 따라댕기고 난리야, 지지배.”라고 선중이가 욕할 때만 해도 우린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했었다.
그런데 ‘쫌’이 아니라 ‘지나치게 혼이 나 버린’ 현미의 사건은 길 좁은 산골 마을을 헤벌떡 놀라 뒤집히게 만들었다. 거기에 한 몫 한 것이 사건 현장을 발견한 우리 재승이 형이랑 선중이네 기중이 형이었다.
그날도 재승이 형이랑 기중이 형은 여느때처럼 인적이 사라진 어둑한 강에서 만나 어른들 모르게 어른 흉내를 내며 놀아보려 하고 있었다. 담배를 한 개피씩 꺼내 물고 맛난 듯이 피워대다가 막 소주를 까고 있는데, ‘스스락’수풀을 지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어 지나쳤는데 또 다시 “흐으으… 흐으…ㅇ……." 하는 가느다란 소리가 수풀 쪽에서 들려와 흠칫 놀랐다고 했다. 혹시 귀신인가? 하고 형들은 몸까지 경직되어 숨을 죽이고 귀를 세우고 있다가 한참 만에 다시 소리가 나는 선착장 뒤란의 수풀로 다가가보기로 했다. 그때는 이미 신음이 완전히 멎어 고요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발견한 것은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쓰러져 있는 현미였다.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현미에게서 나던 이상한 피비린내를 맡고 형들은 기겁을 했다. 제아무리 어른 눈을 피해 어른 짓을 따라하려 해도, 결국은 조심성도 없고 수습능력도 없는 고1, 중3 짜리 애들일 뿐이었다. 갑작스레 끔찍한 발견을 하고 당황한 그들은 어른들을 부르러 마을까지 뛰어와 “큰일 났어요오! 큰일 났어요오!” 하고 뜀박질이 닿는 길목마다 소리치고 다닌 덕분에 온 동네 어른들이 다들 불을 켜고 나와 버렸다.
“강에, 현미가! 현미가!”
“쓰러져 있어요! 죽었을지도 몰라요!”
“아래가 다 벗겨져 있었어요!”
“피도 흘린 것 같애요!”
현미가 집 안에서 자고 있을 줄만 알았던 현미네 부모를 비롯해서 모두들 아닌 밤중의 홍두깨같은 소리에 랜턴 하나씩을 들고 강가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넌 집에 있어!”라는 아빠의 만류로 난 따라가 보지 못했지만, 그 날 마을 어른들 중에선 아랫도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실신해 있는 현미의 모습을 못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들 몰려가서 구경하고 걱정했다.
그리고 자정이 넘어 빨간 등을 켜고 사이렌 소리를 울리는 앰뷸런스가 마을길로 들어와 현미를 실어 갔다.
다행히 현미가 죽지는 않았다. 다만 피를 많이 흘리고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회복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어린애를 건드린 천하의 죽일 놈들이라며 당장에라도 범인을 잡아서 족쳐야한다고 입에 개거품들을 물었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응급처치 중에 실신에서 깨어난 현미의 증언을 전해들은 바로는 상대는 모르는 아저씨들이었다고 했다. 사건이 나기 이틀 전부터 강가에 놀러온 늦물의 피서객들 중에 현미가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대학생이 있었는데, 그날 밤도 그 대학생이랑 그의 친구들과 함께 늦게까지 어울려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술에 잔뜩 취해 있던 건달같은 아저씨 두 명을 만나 그런 봉변을 당했다고 했다. 어두워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현미네 부모가 대체 누구냐고 누구냐고 다그쳐 물어도 ‘몰라’ 라고만 대답하며 자꾸만 울었다고 했다.
결국, 형식적인 경찰 조사는 용의자 검거가 어렵다는 손쉬운 결론만 내리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현미네 부모가 아무리 지서를 들락거려도 경장 아저씨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목격자나 또 다른 증인이 없는데 아이의 짧은 증언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으며, 정액채취를 한다 해도 상대가 전범이 아닌 이상은 범인을 걸러내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딸아이 단속 잘 하라는 충고를 끝으로 현미네 부모님을 지서 밖으로 내보냈단다.
며칠 후 현미는 퇴원을 하고 마을로 돌아왔지만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현미는 며칠간 방 안에서 깊은 잠만 잤다고 했다. 현미가 깨어나지 않고 계속 잠을 자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현미처럼 한동안 잠들어 있고 싶었다.
현미네 부모님도 마을 밖으로 모습을 자주 내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덮고 싶어도 쉬쉬하고 넘어갈래야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 되어버렸고 이미 소문은 마을을 타고 몇 바퀴나 돌았다.
현미가 독사과를 먹은 백설공주처럼 잠들어 있는 동안, 사건에 대한 한차례 충격이 가신 어른들 사이에선 고약한 말들이 나돌았다. 현미가 전부터 은근히 동네 남자들의 손을 탔다는 것이었다. 좀 예쁘다 싶으면 애나 어른이나 꼴릴 수 있는 거라고, 더우기 뭘 모르는 어린애라서 남자들이 수월하게 집적대기 마련이라고 아줌마들이 떠들었다. 겉으론 현미를 아이답게 예뻐하고 귀여워해주는 것 같지만 개중엔 눈길과 손길에 음흉한 기운을 달고 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는 말들이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악의였건 아니었건 간에, 현미는 이미 ‘그런 일을 당할만한 아이’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 놀러온 기중이 형이랑 우리 형도 책상이랑 의자에 걸터앉아 재미삼아 그 날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재승이 너도 처음 발견했을 땐 현미가 죽은 줄 알았지?”
“으아… 진짜 끔찍했어. 그 어린애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처음엔 그게 피인 줄도 몰랐다니까! 피 냄새 치고도 이상했잖아.”
“맞아. 게다가 한 밤중에 시체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있으니까, 나도 심장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고! 살인사건을 목격한 줄 알고.”
그러면서 선재형과 우리 형은 마을 여자아이가 당한 불행한 사고에 은근한 성적 상상까지 밀어 넣기 시작했다.
“현미가 이제 열세 살 아닌가?”
“맞아. 아직 초등학생인데… 얼마나 아팠을까?”
“잡놈의 새끼들. 열세 살 짜리가 구멍이 생겼으면 얼마나 생겼다고 거기에 그 짓을 하냐?”
“게다가 그 인간들 아저씨였다며? 그것도 두 명!”
“작은 구멍에 큰 놈들 걸 두 번 씩이나 쑤셔 넣다니…….”
“으아… 진짜 아팠겠지? 근데 그놈들은 좋았을려나?”
“흐힛, 그럴 지도 모르지.”
형들의 대화를 더 들어줄 수가 없어서 방을 나와 버렸다.
현미가 아픈데도, 잘못한 인간들은 따로 있는데도, 사람들은 뒤에서 갖은 이야기 살들을 덧붙여가며 그 애의 등을 할퀴고 있었다.
“애가 그렇게 가살을 떨더니만… 눈꼬리에 샐샐 웃음 달고 여기저기 엉겨 붙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 어린 게 그런 처참한 일을 당한 게 불쌍하지.”
“아, 누가 안불쌍하대요? 그치만, 타지서 여기 놀러오는 놈들 중에 어떤 놈팽이가 끼었는지도 모르는데, 애가 요기조기 졸졸대고 따라다니는 걸 사람들도 여러 번 봤대잖아요.”
“부모가 애 단속 잘못한 탓이지, 뭐.”
“에구… 저러고 어찌 산대. 나 같음 애 데리고 멀리 딴 동네로 떠나버리겠구만. 그 험한 소문 다 난 동네에서 계속 살면 누가 이담에 걜 데려가기나 하겠어요?”
저녁 먹는 자리에서 들은 엄마 아빠의 저 대화가 당시 마을 어른들의 거의 공통된 감상이었다는 걸 아이들이 저들끼리 모일 때마다 두런대는 이야기를 엿듣고 알 수 있었다.
현미가 자처해서 당한 일은 아닌데도, 단지 현미의 끼 있는 웃음과 지나친 교태 정신과, 어린애의 치기와 경솔함의 결과로 얻은 인과율의 당연한 벌처럼 여겨지고 있었고, 어른들은 자신들도 갖지 못한 무결한 순백과 도덕성들을 들먹여가며 당사자가 못 듣는 데서만 교훈들을 날리고 있었다. 온 동네가 쏘곤닥쏘곤닥-!
결국, 현미가 얻은 그 커다란 상처는 현미 자신의 잘못이 되고 그녀의 부모의 잘못이 되어있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두 놈의 가해자에 대해서도 물론 씹어죽일 놈들, 육실헐 놈들, 벼락 맞아 뒈질 놈들 등등의 자못 큰 욕설들이 오갔지만, 결국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고 이방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욕설은 벼락에 맞아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벼락을 원망하는 것 만치 뚜렷한 죄과의 대상이 없는 허무한 비난이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말을 돌린다 한들, 현미 가족의 불행을 속상해 해준다한들, 그 속에 언뜻 내비치는 어른들의 남일 취급은 사건과 관계없이 불필요한 교훈들을 주렁주렁 덧붙여 그렇게 현미의 가족에게 더 큰 상처를 그어가고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능욕을 당한 일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남 보기 부끄러운 수치심을 앞세우는 공공연한 말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로부터 한 달 후 현미네는 딴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나중에 듣기론 우리 마을에서 멀지 않은 그곳에서도 이내 소문이 돌았단다. 현미는 중학교에 올라가고 몇 달 안 돼서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을 해버렸다는 뒷얘기를 1년 후 듣게 되었다.
이렇듯 소문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비밀을 가진 난 더 무서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소문이었다. 같은 해 여름, 다른 시기에 겪었던 나의 일은 현미의 사건과 그 파장을 통해 더욱 무서운 비밀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homo sexual: 동성애(同性愛)’, 내가 그 말을 완전히 배우기까지는 아직 1년을 기다려야 했고, ‘pedophillia : 유아성애증(兒童性愛症)’를 알게 되기까지는 아직 5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 만큼 어렸다. 그래서 마음도 오락가락했다.
그 일을 당한 직후론 하얀 집의 남자를 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시는 그렇게 부를 일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난 한동안은 그 시절 하얀 집의 남자의 욕정을 애정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내 안에 보호막을 치려고 했다. 그가 내게 주던 사탕과자들처럼 달짝지근한 친절과 끈적한 온기로 나를 감아 안았던 그의 욕망을, 어린 내 몸을 벗겨놓고 그 위에서 헐떡이던 그의 거칠고 괴이했던 성벽을, 나에 대한 좋은 관심 그리고 애정으로 믿어버리려고 했다. 우리들은 공범이고 동지였다는 말을 고스란히 싶었고 그렇게라도 그의 낯설기만 했던 행위들을 죄라는 이름으로 무겁게 얹어놓지 않고 애정의 이름으로 위장시켜 내려놓고 싶었다. 거칠게 커지던 그의 숨소리라던가, 세게 껴안아오던 단단한 뼈에 눌리던 아픔이라던가, 그리고 변보는 구멍 속을 드나들던 아픈 손가락을 기억할때마다, 그것이 죽을 만큼 나쁜 짓은 아닌 거라고 생각을 구겨 넣었다. 내게 단것을 먹이고, 내게서 단침을 빼앗아갔던 그의 행위를 되도록 상냥한 거래처럼 이해하려 했다.
그래야 끔찍했던 기억들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에 빗장을 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얇고 허술한 10살짜리의 자물쇠는 자꾸만 녹아버리고 광폭하게 기억이 치밀려 들어오곤 했다. 그 밝은 집 안에서 그가 무거운 색의 커텐을 쳐서 바깥의 빛을 차단하고 집 안을 어두운 그늘로 채웠을 때, 내게로 다가와서 가슴을 만지고 입술을 댔을 때, 욕조 안에서 몸에 비비고 만지는 동안 눈에 평소와 다른 열과 광기가 흐르는 그의 눈빛을 봤을 때, 진녹색 소파 위에서 어린 손으로 다 잡히지 않는 그의 커다란 물건을 손안에서 힘겹게 꼬물꼬물 어설프게 움직였을 때, 그가 내 몸 위에서 비벼대고 손가락을 집어넣었을 때, 허벅지 깊이 그의 미적지근한 물이 흘러내려 왔을 때… 그와 같은 은밀하고 추한 유희들이 밝은 시간에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정말 모르지는 않았는데도, 모르고 당해버렸다는 사실… 그것이 날 바보같고 비참하게 했다. 그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다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도 선중이네들은 나를 ‘배신자’라 부르며 따돌렸고, 그래서 함께 놀 친구도 사라져 버렸다.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난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학교 운동장에서 선중이가 병식이들과 학교 친구들을 모아놓고 시끌벅적하게 깔깔거리며 말뚝박기를 하는 걸 보고 외롭다고 느꼈다. 그래서 같이 놀자고, 끼워달라고 다가갔더니 선중이의 주도로 아이들이 작은 돌멩이들을 던졌다. 그 중 병식이가 던진 돌 하나가 가슴팍에 맞았을 때 제법 아팠다. 그런데도 그 통증이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내 가슴 안에는 이미 큰 어둠이 들어있었다. 그것이 죄의식이란 이름의 벌이었다.
하얀 집의 남자가 내게 했던 행위들, 내가 받아들였던 행위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 일이 나와 친구들간의 경계를 깊게 갈라놓았다는 것만큼은 확연하게 깨우치고 있었다. 선중이나 병식이나 무영이는 아마 내가 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녀석들이 냇가에서 발가벗고 놀면서 가끔씩 서로의 고추를 잡아당기고 까불어대기는 했지만, 적어도 성인 남자의 그것을 직접 만지며 유희나 장난거리로 삼아본 적은 없었을 테니까. 비록 선중이가 미승이의 고추를 여섯 번이나 만지작거렸다고 한들, 미승이 녀석의 것은 그의 것보다 작았을 테니까. 누구도 어른의 것을 나만큼 확실히 만져본 녀석도, 어른의 것이 나만큼 몸에 닿아 문질러지던 녀석도 없었을 테니까.
난 아이들이 모르는 몸의 세계를 경험해버린 것이었다. 우리들의 화창하고 평화로운 일상 속에 끼어들 수 없는 금기가, 설마하고 아무도 짐작 못할 그런 일이 비밀로 간직되어 버렸던 것이다. 난 친구들과 나의 물리적인 차이를 만든 그에게, 그와 나 사이의 은밀한 비밀을 만든 그에게, 두려움과 미움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되고 나서야 말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혼자 놀아야 했다. 어차피 재승이 형은 중학생이 큰 벼슬이라도 되는 양 초등학생인 나를 상대거리로도 취급 안했는데, 날 못살게 군다거나 구박하진 않았지만 내게 자상하지도 않았다. 나를 챙기라고 잔소리하는 부모님이나 할머니 말씀은 듣지도 않고 집 밖으로 나가 저보다 두 살 위인 선중이네 형하고만 어울려 다녔다.
하루는 형이 기중이 형이랑 같이 놀러가는 걸 따라붙어 가고 싶어서 “나도 갈래. 나도 갈래.” 하며 줄기차게 졸라댔지만, 끝까지 형은 날 벽으로 밀쳐서 넘어뜨리고 후다닥 뛰어나가 버렸다.
“저놈, 저거-,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인데…….”
할머니가 혀를 차며 털썩 주저앉아 있는 내 곁으로 와서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나와 더 이상 놀아주지 않는 친구들, 그리고 집에서 외로움을 삭히는 날 뿌리쳐두고 나간 형이 야속해서 또 엉엉대고 울었다.
“희승이 또 우나? 하아… 참, 야가 요새 와 이리 눈물이 많아졌노? 희승아, 니 심심해서 우나?”
심심해서 울 리가 없었다. 친구들이나 형이랑 놀지 못해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되어버린, 나만이 알고 있는 무거운 이유가 두려움과 외로움을 재촉해서 기어이 눈물을 뿌리게 했다. 그때의 외로움은 친구 없는 외로움이 아니라, 나 혼자 가져가야하는 비밀을 짊어진 외로움이었다.
그런 내 속도 모르는 할머니는 “자, 자 할매가 같이 놀아 줄께, 울지 마라 희승아. 자. 뚝!” 그러면서 나를 다리에 앉혀 품에 안고 둥기둥기 몸을 흔들어 주었다. 그것이 하얀 집의 남자가 나를 안고 흔들어주던 마음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걸 다시 느꼈다. 애당초 같을 수가 없는 거였다. 할머니의 품과 익숙한 흔들림 안에서 난 계속 울었다. “할매가 젖 줄까?” 라며 원치 않는 늘어진 젖가슴을 훌렁 까보일 때까지 말이다.
“가 맛있는 거 사 묵고 온나.”
겨우 지친 울음을 뚝 그친 나를 내려놓고 할머니는 치마춤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오는지 “끄응, 에구야-”하시며 결국 자리를 펴고 누웠다.
난 할머니가 준 돈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남은 눈물을 닦으며 삼거리로 나갔다.
삼거리에 있는 작은 가게는 소비자가 정가 판매만을 원칙으로 고수하는, 이름 없는 공장에서 포장되어 나온 빵과 먼지를 덮고 있는 몇 종류 안되는 라면과 과자포장들이 나뒹구는 곳이었다. 게다가 주인 할머니는 평소 손님이 가도 계산을 할 때가 아니면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방으로 연결된 미닫이 문을 열고는 먼지 뿌연 빵과 과자들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나한테 “퍼뜩, 골라라!”며 채근을 했다. 마지못해 빵 봉지 하나를 집어서 돈을 내밀고 나왔다. 후에 떠올려보면 그날은 거스름돈도 받지 않은 채 가게를 나와 버렸고, 주인 할머니도 나중에까지 잔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늘 사먹던 대단치도 않은 청량음료나 빵과 초컬릿들이 그리도 맛나고 좋았었는데, 그날 난 크림 빵 하나를 사서 먹고 걸어오다 길 위에서 ‘꾸엑’하고 토했다.
더 이상 단 걸 좋아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열 살 여름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묻기로 했다. 어쩌면 아이들과 다시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말을 걸어 올 때면 괜히라도 마음이 녹녹해져 내 비밀을 털어놓게 될까봐 잔뜩 마음을 웅크렸다. 하얀 집의 남자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잘못된 것이란 걸 깨달았던 시간부터 난 점점 더 소심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현미의 일이 생각날 때마다, 마을을 돌던 나쁜 말꼬리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리고 가끔 비밀이 너무 어둡고 무거워서 어딘가에 터뜨리고 싶어지면 호숫가로 달려갔다. 한동안 버려두었던 내 작은 비밀기지, 냇가 버드나무의 휘어진 몸통 속의 좁은 구멍을 찾아 몸을 뻗어 그 안에 입술을 대고 소근 소근 고백을 했다.
“단걸 너무 좋아하면 이빨이 썩는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난 이빨이 썩는 대신 다른 벌을 받았어. 더 큰 벌을 받았어.”
고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근데 억울해…….”라는 것이 언제나 내 울음의 끝마침이었다.
단걸 좋아했고, 그의 하얀 집을 좋아했고, 그의 다정한 목소리와 친절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하얀집과, 단 것과, 친절들을 좋아하고 의지했던 결과는 비참했다.
점점 단걸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얀 집이 있는 명재골로도 산 중턱으로도 다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햇볕을 받아 부시게 빛나던 하얀 회벽 대신 브론즈색의 두꺼운 커텐과 진초록의 벨벳 소파로, 그의 다정하고 친절했던 목소리 대신 파란 심줄 돋은 손목으로 남자와 관련된 기억들을 흉물스럽게 덧씌웠다. 마지막으로 그 집에 갔던 날 화단을 짓밟고 시들어가던 달리화를 부러뜨려 놓고 나온 것으로 내 기억도 뿌리 뽑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내 귀에 그 하얀 집과 그 집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경우는 없었다. 다시 그 집에 사람이 드는 일은 없었고, 집의 벽 색깔처럼 하얗게 텅 비어버린 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부예졌다.
그런데 현구가 지나가다 던진 말 때문에 가슴이 철렁해진 적이 있었다.
“기수씨한테 전화 왔었는데, 희승이 너 잘 지내냐고 묻더라.”
그때 그의 이름이 ‘박기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현구도 그 전화를 받으면서 처음 알았다고 했다. 현구가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남자가 현구에게 우리의 일을 얘기하지는 않았을까. 현구가 알고 있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진 않았을까… 정말 우리의 일을 아무도 모르는 걸까…….
우리끼리의 비밀이라고 했고 동지라고 했으니, 그러니 그가 말할 리가 없을 텐데도, 비밀동지를 맺은 기수란 인간이 괘씸하고 미웠던 것 이상으로 걱정이 몰려왔다. 비밀의 무게만큼 의심과 불안이 깊어진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아무 일 없는 조용한 일상이 흘러가면서 역시 동지의 비밀은 지켜지는 거구나 하고 조금은 안심했다.
‘그러니까 나만 그 일을 까먹어버리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마을을 한동안 달구었던 현미의 사건은 잠잠해져 갔고 내 비밀은 깊어져 갔다. 선중이들이 나랑 안 놀아준다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난 혼자 놀 수 있었다.
처음엔 쥐무덤을 만들었다. 아빠가 뒤란에 놓아둔 쥐덫에 걸려든 생쥐가 발버둥을 치는 걸 보면서 죽기를 기다렸다가 덫 안에서 쥐를 꺼내다가 숲에 데려가서 묻었다. 손가락으로 흙을 깊게 파고 쥐를 넣고 녀석의 몸뚱아리만한 봉분을 만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자리가 쓸려 내려가고 벌레들이 썩어가는 쥐의 몸둥아리를 파먹는 걸 보았다. 그 다음부턴 벌레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시때때로 길가는 개미나 쇠똥구리나 말벌등을 닥치는대로 밟아 죽여서 작은 무덤을 만들며 놀았다.
재미있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다. 내가 받은 상처를 상처로 돌려주는 행위로 삼았고, 미처 완전히 뽑아내지 못한 달리화의 뿌리처럼, 비밀을 묻어두는 의식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걸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안심시키고 밑도 끝도 없이 위안을 쏟아부었다. 내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깨진 항아리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비밀의 무덤은 너무나 작았고 쉬이 흐트러져갔다.
그리고 가을의 한창 무렵… 내 추한 비밀을 알고 있는 제 3자의 등장이 또 다시 심장을 헤벌떡 뒤집어지게 했다.
초여름엔 태풍이 비를 많이 몰고 오고, 늦여름엔 가물었다가, 가을에 맞춤비가 내려주어서 과일도 곡물도 그럭저럭 잘 자랐다. 올벼를 심었던 자리만 먼저 베어져나가고 여전히 고른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논은 물결처럼 출렁이고, 밭에선 고추랑 깨가 주렁주렁 열렸던 자리엔 열매를 위해 영양을 내어주고 남은 흙과 풀의 잔재들만 남았다. 집집마다 여름수확을 일부 출하하기 위해 상품으로 쓸 만한 가을 작물들을 모으고, 박스에 담아 커다란 트럭에 실어 보내는 일까지 끝내고 나서야 어른들의 이마에서 땀도 식고 일손도 한가해졌다.
그리고 9월 말의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만 해도 추석이 가까워오면 일 없이 마음이 분주해지곤 했다. 친절하게 따뜻한 기운을 내려 보내는 파란 하늘이랑 분홍 코스모스가 피어나는 계절이 올 때면 ‘노는 날이 오네’ 하는 뿌듯함이 한가득 차곤 했다. 연이은 명절 휴일동안 무얼 하고 노나, 어찌하면 잘 놀아볼 수 있을까, 마땅치도 않은 궁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해의 어린 마음은 ‘노는 날’이 안겨주는 특별한 기운에 방방 떠서 천진난만한 궁리를 할 수 없었다. 삼일간의 연휴 중 이틀씩이나 토요일과 일요일에 겹쳐져 있다는 사실이 아주 충격적으로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학교에 가는 거나 집에서 노는 거나 비슷비슷한 일상이었으니까. 그래도… 역시 노는 날은 많은 편이 좋았고, 명절은 길게 놀아야 맛이었다.
명절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인 금요일 오후부터 햇빛도 안 가신 오후부터 마루에선 가스레인지 두 대랑, 그 파란 불꽃 위에 놓인 두 개의 커다란 프라이팬에서 고소한 기름 익는 냄새가 지글지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엄마 쪽에선 밀가루 옷을 입고 다시 계란을 두른 작은 고기반죽들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할머니 쪽에선 얇고 널찍한 메밀전이 홀랑홀랑 앞뒤로 뒤집혀지고 있었다.
나도 마루 위에 앉아 맹한 얼굴을 무릎 위에 고이고선 옆에서 엄마랑 할머니랑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랑 할머니가 일하는 걸 방해도 안 하고 할머니가 간간이 기름 묻은 손으로 집어주는 고기전이랑 부침개를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기어이 잔소리를 했다.
“희승이, 너 매가리 없이 앉아 있지 말고 차라리 나가 놀아. 명절 음식 만드는데 옆에서 넋 빠진 얼굴로 초 치지 말고.”
“나가놀 데 없어.”
“왜 나가 놀 데가 없어? 흐이그, 저 주변머리 하고는―.”
엄마는 나한테 항시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쾌활하게 굴면 시끄럽고 방정맞다고 투덜대고, 조용히 굴어도 초 친다고 투덜대고, 하여간 칭찬은 인색하고 불평은 푸짐했다. 어쩌면 할머니가 나를 감싸주고 아껴주기 때문에 일부러 자상한 마음씨를 덜어놓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안 나가 놀믄 어떠노? 요로코롬 얌전하니 있으믄 할매가 맛난 것도 줄낀데. 그쟈, 희승아?”
엄마의 핀잔을 날리고 내 엉덩이를 툭툭 치며 그대로 당신 가까이 끌어 앉혀 금방 부쳐낸 따끈한 전병 한쪽을 가위로 잘라 입속에 넣어 주는 할머니의 독점적인 애정에 양보하느라 말이다. 당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병아리새끼처럼 붙어 있어도 하나 거추장스러워 않고 마냥 흐믓해 하는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것은 울적함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하고 작은 둔덕이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전부치기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송편 빚기에, 나도 기운 차리고 참여하기로 했다. 거기서 또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었지만.
할머니가 손가락을 맞물려 꾹 눌러 만든 손자국 모양의 콩 송편이나, 엄마가 반달 모양을 내고 있는 밤 송편이나, 어느 것도 나로선 흉내내기 수월찮은 모양들이었다. 그래도 ‘그까짓 거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만만하게 생각했다. 하얀 쌀가루 반죽을 떼어내어 가운데 홈을 파고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깨설탕을 듬뿍 넣은 후에 입구를 오므려주었다. 그리고 송편 모양을 내기위해 할머니를 따라 반죽을 꾹 눌렀을 때, 기어이 저지레를 쳤다. 약한 반죽을 너무 세게 누른 탓에 참깨랑 흑설탕으로 뒤섞인 고물이 터져 나와 방바닥에 흥건히 쏟아져 버린 것이었다.
“야! 장난 그만 쳐! 거기 흘린 거 니가 다 치워.”
바빠 죽겠는데 일거리 늘여놓는다고 투덜대는 엄마에게 걸레를 가져다가 내밀어 주었다. 그러자,
“니가 치우라니까, 어쩌라고 나한테 내밀어? 걸레 만진 손으로 다시 떡 빚으라고?”
하는 수 없이 서툰 걸레질로 바닥에 흘린 걸 닦는 동안 엄마는 나더러 하는 김에 걸레도 빨아오라고 시켰다.
“희승이가 엄마랑 할매 도와주느라 욕 본다.”
시키는 대로 순순히 지저분해진 걸레를 빨아다 방 한 켠에 놓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할머니는 칭찬을 하면서 내 입 속으로 깨설탕 한 스푼을 털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엄마는 날 째려보며 다시는 쌀 반죽에 손도 못 대게 했다. 만들려다 망친 반죽을 도로 집어들어고 심심함을 달래며 놀아야 했다. 설탕이 녹아들고 깨가 알알이 박힌 녹진녹진한 반죽을 주물거리며 비행접시 모양으로 만드는 동안 손이 온통 끈적끈적해졌다.
꼭 내 마음처럼…….
추석날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엄마가 아침 설거지를 마쳤을 때 친척 어른들이 모여 들었다. 아빠가 날 만들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형제들의 내외 묘가 함께 자리한 종중산(宗中山)이 우리 마을에 있다 보니, 왕래가 잦지 않은 먼 친척들이 추석이랑 설에는 우리 집으로 모이곤 했다. 그래서 명절마다 넓지도 않은 집이 벅적거렸다.
그날도 엄마가 싸준 음식들을 챙겨들고 산에 가서 할아버지들의 산소를 찾아 벌초랑 성묘를 하고 어른들이 술 몇 잔씩 걸친 후에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아빠랑 친척어른들의 떠들썩한 술자리가 저녁 늦도록 이어졌다. 그동안 엄마는 계속 음식 차리고 설거지하고 음식 차리고 설거지하느라 하루 종일 바빴다. 농번기 때보다 바빴다.
그래서였는지, 엄마는 추석이 되면 제일 신경이 곤두섰고 궁시렁도 많아졌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난 엄마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잘 행동했다. 어른들의 술자리에 얌전히 끼어서 용돈도 몇 푼 받고 안주도 집어먹고 목이 마르면 물도 혼자서 떠먹었다. 오히려 나보다도 아빠가 이것 가져와라, 저것 가져와라 하면서 엄마를 훨씬 많이 귀찮게 했다.
“희승아, 술 떨어졌다. 엄마한테 술 가져오라 그래.”
명절음식만으로 느끼다하는 아빠의 불평에 엄마가 술안주용 전골을 갖다 바친 지 5초도 안되서 불콰하게 취한 아빠는 빈 소주병을 들어 보이며 나한테 지시를 했다. 그런데 내가 일어서기도 전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어이, 술 떨어졌어. 술 가져와!” 하고 부엌을 향해서 소리를 쳤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서 부엌까지 들렸을 텐데 엄마가 술 가져올 기미는 없어보였다. 부엌에 가 보라는 아빠의 채근에 나는 미적미적 일어나서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 술.”
하자마자 엄마의 손에서 벅벅 쇠수세미질을 당하고 있던 무쇠 솥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굴렀다. 일부러 던진 것처럼 ‘철커덩’ 내팽개쳐지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높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움츠러들어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가 실수로 떨어뜨린 거야. 여기 술 가져가.”
너 때문에 화난 거 아니라는 듯 변명하며 소주병 두 개를 건네주는 엄마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보였다.
“그만 먹고들 얼른 가버리지, 대체 언제까지들 있을 거야?”
안방으로 돌아오는 등 뒤로 나직이 투덜거리는 엄마의 거친 한숨이 들려왔다.
엄마가 그토록 얼른 가주길 바라던 친척 어른들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예전엔 집에서 좁은 방에 꼭꼭 낑겨서 자고 다음날 점심까지 먹고 간 적도 있었지만, 오촌 아저씨뻘 쯤의 어른들이 차를 몰고 온 후부턴 자고 가는 날은 없어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형님 좋네, 아우 좋네.’ 해가며 가는 떠나는 걸음들이 늦춰지고, 어른들을 읍내 터미널까지 배웅해야겠다며 트럭을 몰려는 아빠를 간신히 말리느라 한탕 소동을 벌이느라 정말로 친척손님들의 흔적이 비워지기까지 30분이 넘게 걸렸다.
겨우 모두가 떠나 후엔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술기운을 견디지 못해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잠이 들었고 집안에 할머니랑 엄마가 남은 설거지를 하는 소리만 달그락 달그락 울렸다. 설거지 소리까지 잠잠해진 건 자정이 훌쩍 넘어서였다.
한 일도 없으면서 피곤하다고 형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불이 꺼지고, 술에 곯아떨어진 아빠를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면서도 이부자리를 펴서 반드시 누이던 엄마마저 잠이 들어 안방에서 두 사람이 울리는 신나는 코골이 소리가 울리는 밤이었다.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는 건 마루에 나란히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는 나랑 할머니밖에 없었다.
“할머니, 달이 밝아.”
“요맘때는 달 기운이 밝제? 그려서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는 거제.”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그 만큼 좋은 날이란 뜻이제. 오늘처럼 말이다. 안 그나?”
“응.”
“허지만, 며느리들은 젤로 꼴보기 싫은 날이 설이랑 한가위여. 내도 그랬제.”
당신이 처음 이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와 살 적만 해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친척 남정네들까지 모여들었다고 했다. 사나흘간 수십 인분의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주안상 차리고 치우고 그렇게 셀 수도 없이 꾸역꾸역 일을 하느라 손이 퉁퉁 불을 정도였으니 명절만 다가오면 끔찍해서 지레 몸살이 나더라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보다 힘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월매나 신물나게 끔찍혔는지, 지금 생각허면 내가 뭔 힘으로 그 일을 다 했나. 싶기도 허네.”
할머니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엄마가 힘든 기분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 며느리들이란 그런 거라고, 여자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
친척 어른들과 함께 지나간 나날의 담소와 술잔을 나누면서도 틈틈이 부엌으로 가서 엄마를 들여다보고 음식 접시를 옮기던 할머니는, 엄마의 불평과 고생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며느리 적에 고생 했으니 당신 며느리도 고생하는 게 당연타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이 여기고도 있었다.
검푸르스름한 하늘에 덩두렷하게 뜬 달을 보며 할머니의 어깨에 머릴 기댔다. 엄마의 피로가 달빛에 위안 받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숲 속에 만들어 놓은 수십 개의 무덤들도 생각했다.
한없이 작고 만만해 보이는 벌레들을 발로 밟아 뭉개고 땅을 파서 묻어버린 자리들, 고약한 응분의 죄가 묻힌 자리들……. 그 어둠이 우거진 깊은 숲에도 저 달이 노란 손을 내밀까? 휘영청한 빛으로 벌레들의 슬픔들을 어루만져 주고 있을까?
변명 없는 죽음들을 내 대신 달래주는 달빛이었으면…….
하지만, 내 비밀의 무덤은 너무나도 얕고 허술해서 금새라도 헤쳐질 것만 같았다. 무고한 생명들을 멋대로 밟아 죽여서 파묻은 데 대한 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동정도 용서도 없는 내게로만 향하는 못된 인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추석 연휴가 끝나가는 월요일 저녁, 엄마가 할머니랑 명절의 마지막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평상에 앉아 남은 과일들을 깎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산의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땅 위로 툭, 투둑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달이 떠오르기 직전에 집을 나와 논두렁 산책길에 나섰다. 떠들썩했던 명절의 흥취와 소란들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시골 길에 어스름이 짙어져가고 있을 즈음, 마침 반장 아저씨가 마을 길목을 지나가며 가로등을 켜고 있었다. 뽄때 없이 키만 높은 가로등에 퍼런 불빛이 들어오고 반장이 멀어지고 나니, 나 말고 또 한 하나의 인영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가로등을 중간에 둔 거리가 좁아들수록 무표정하게 걷는 미승이의 얼굴이 잘 보이게 되었다. 한 손에 가느다란 줄기 같은 것을 손에 쥐고 흔들며 점점 느린 걸음으로 가까워져오는 녀석의 모습은 늦저녁의 어둠과 고요에 묵중한 질감을 싣고 있었다.
방학 때 서울서 돌아온 후로도 2학기가 되고서도 녀석이 아는 척을 해온 적은 없었다. 새로 생긴 친구들과 어울려 평범하게 노는 녀석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혹는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돌아볼 때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만큼 녀석의 눈과 마주치곤 했었다. 그때마다 미승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움직이다 말았고 끝내는 먼저 눈을 돌리고 제 친구들과 가버리곤 했었다. 나도 할 말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내가 녀석에게 한 짓을 알기 때문에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서운해 해야 했다.
그러니 처음으로 단 둘이 마주보는 거리도 어색하게 침묵으로 지나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간지럽고 따가운 것이 뺨을 건드리고 갔다. 돌아서 있는 미승이의 어깨위에서 갯강아지풀이 보였다. 긴 줄기 끝에 매달린 부슬부슬 시든 꽃이삭이 녀석의 어깨 위에서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냥 건드려졌나보다…….’
가로등이 가장 환하게 비추는 바닥으로 발을 내딛는데 뒤에서 빠른 걸음소리가 오더니 갑자기 강아지풀이 열굴 옆으로 쑥 꼬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탁탁탁 얼굴을 노골적으로 때려 왔다.
“뭐냐?”
간지러움과 불쾌함으로 고개만 팩 돌려서 노려봤을 때, 미승이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때껏 만난 적 없는 낯선 아이 같은 웃음.
“나, 너 무슨 짓 했는지 알아.”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는 ‘짓’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덜컹했다. 입을 다문 후에도 탈을 쓴 것처럼 심술궂고 기이한 웃음이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뭘 안다는 건데?”
“네가 별장 남자랑 무슨 짓 했는지 안다고.”
“……!”
머릿속이 멍해져서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녀석의 말뜻을 알아채보려고 간신히 머리를 굴리다가 입을 열었을 땐 그득 찼던 숨이 한꺼번에 몰아서 나왔다.
“니가 어떻게… 아는데?”
“봤어. 산에 올라갔을 때”
바로 그날……. 내가 서울 고모네서 왔던 다음날이 미승이는 서울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녀석이 마당 뒤란의 평상에 엎드려서 숙제를 하고 있는데 내가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산 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부정할 수 없는 건, 미승이네 뒤란은 명재골 산등성이가 환히 잘 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필, 그 자리에서 숙제를 하고 있던 녀석이 하필, 그날 하얀 집으로 올라가던 내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현구 삼촌이 그랬어. 네가 그 집에 자주 들락거린다고. 동네 사람 아무도 안 다니는 그 집에, 너만. 그래서 네가 거기서 뭘 하는지 너무 궁금하댔거든. 나도 궁금했고.”
그리고 마침 현구가 열매 따러 간다는 소릴 듣고 따라 나서선, 현구가 명재골이 아닌 다른 산으로 채집을 하러 간다는 걸 알고 중간에 갈라져서 저 혼자 명재골 산을 따라 올라갔다고 했다. 좁게 열려져있는 펜스문 안으로 들어와 하얀 집 주위를 돌다가 베란다 뒷창으로 갔을 때 커다란 창이 어두운 커튼으로 온통 가려져 있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집 안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창에 귀를 가까이 대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을때, 허술하게 다물어진 커튼 틈이 나타나서, 그 틈을 통해 어두운 실내를 들여다보았다고 했다. 녀석은 거기서 우리들의 행각을 엿보았던 것이다.
“난 다 알아. 그게 어떤 짓인지.”
정말로 봤을까? 대체 무엇까지 봤을까? 다른 사람에게도 말했을까……?
“…뭘 봤는데……?”
미승이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둘 다 홀랑 다 벗고 이상한 짓 했지? 너랑 그 자식이랑 이상한 소리 내면서.”
그러면서 그가 냈던 소리들을 ‘하악…하악…하악…하학!“ 흉내내고 있었다.
브론즈색의 커튼… 햇빛이 쏟아지던 커다란 창을 가리던 무거운 장막……. 그가 날 데리고 집안에 들어가서 내 몸을 벗기려 할 때마다 꼭꼭 비밀을 감추듯 다물어 놓았던 그 무거운 커튼은 우리들 모르게 살짝 입을 벌리고 비밀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비밀을 염탐해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듯이.
전신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저릿한 충격 당장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미승의 빨갛게 벌어진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과, 그로부터 다시 재탕되는 기억들은 아찔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혼자서만 담아왔던 비밀이 더 이상 나만의 비밀이 아니게 되었음에, 그것도 다름 아닌 내가 못되게 굴어왔던 미승이었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휘몰려왔다. 녀석은 섬찟할 만큼 묘하게 웃고 있었다. 넌 나에게 꼬리를 잡혔다고 협박이라도 하는 듯한 입술을 보며 예전의 하드를 먹고 있던 새빨간 입을 떠올렸다. 그때는 내가 미승이를 울렸었는데, 이젠 내가 통곡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거, 다른 사람한테… 말 했어?”
“비밀 지켜줄까?”
내가 고개를 빠르게 여러 번 끄덕이자 미승이는 한껏 입을 벌려 웃었다.
“그럼 앞으로 내가 시키는대로 해.”
‘응’ 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녀석이 무얼 원하는 건지 알아내는 것보다 내 자신이 더는 상처입고 싶지 않은 심정이 급했다. 어떻게 하면 녀석의 머릿속에 있는 흉측한 기억을 지워 버릴 수 있을까? 할 수 만 있다면 녀석의 머리도 숲 속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난 다 아는데. 하악… 하악… 하악.”
차라리 경기를 일으키고 싶을 만큼 흉측한 소리들이 미승이의 입에서 또 흘러나왔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웅크린 채 길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대답 안 할 거냐?”
그래도 위에서 나를 쪼는 소리는 들려왔다.
“미승아…….”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미승이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고 싶었다. 망가진 펌프처럼 눈물샘은 물을 멋대로 솟아올렸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의지에 기대어 흘러 나왔다. 녀석이 나를 용서하게 하고, 불쌍하게 여겨서 아무 조건 없이 비밀을 지켜주길 바랐다. 그래서 한껏 불쌍한 소리를 짜냈다. 예전에 너무나도 잘 해주던 녀석을 떠올려보면서, 아마도 날 위해서라면 무조건 비밀을 지켜주지 않을까, 내게 해로운 일은 절대로 안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 마……. 나 겁주지 마, 미승아…….”
하지만, 나만의 착각이었다. 녀석은 주저 없이 강아지풀로 내 머리 위를 탁탁 내리치며 “어떡할 거야?”라고 재차 물었다. 힘없이 까끌거리기만 하는 이삭 털이 머리카락에 부딪혀 사삭 거릴 뿐이었지만, 머리는 쪼개질 듯이 아팠다.
“내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해.”
미승이는 강아지풀로 조롱을 내리치면서, 울고 있는 나에게서 “알았어.”라는 대답을 기어코 받아내고야 말았다. 녀석이 만족스런 얼굴로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가고 난 후, 나는 힘이 풀린 다리로 달음질을 치려다 논두렁으로 굴러 넘어졌다. 엉망이 된 옷 꼴보다도 앞길이 막막했다. 어쩌면 앞으로 학교 다닐 때마다 녀석의 책가방을 나르고, 녀석 대신 주번 일을 해줘야 하는 평생의 노예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엄청 두려운 상상에 빠져 걸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미승이가 나를 상대로 노예 놀이를 하거나 심부름꾼 역할을 시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음날 우리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온 녀석을 따라 학교에 간 게 전부였다. 다음날부터는 녀석이 “나 컴퓨터 학원 관뒀어.” 라면서 정해준 시간대로 마을과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정확히는 내가 녀석을 기다렸다가― 같은 버스를 타고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녀석과 내가 이전 같은 친구 사이가 된 건 아니었다. 학교에선 함께 어울리는 법이 없었고, 특히나 녀석은 친구들과 놀고 있는 중에 나를 보면 아는 척도 안하고 무시했다. 오로지 집에서 학교로 오가는 버스 안에서만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 등하교용 짝꿍도 뭣도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서 다닌다 뿐이지, 우리는 한 마디 대화도 없었다. 내가 말을 걸어도 녀석은 무시했다. 고로, 난 녀석이 필요할 때만 명령어 내리는 대로 따라붙는 단지 등하교용 ‘소지품’이었다고 하면 적합한 표현이겠다.
딱 한 번, 내가 산수 시험을 엉망으로 치른 덕분에 너댓명의 반 아이들과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던 날만 미승이는 묵묵히 숙제를 하며 나머지 공부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소지품을 데리고 같이 귀가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둔한 선중이들이 녀석과 내가 같이 등하교하는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을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미승이가 학교에서도 우리 반에 찾아오기도 하고 나를 저희 반으로 호출해서 간단한 말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그래봤자, “오늘 집에 가기 전에 문방구에서 새 공책 사야 돼. 내가 잊어버리지 않게 너도 기억해 둬.”라던가 “선생님이 나더러 애들 숙제 나눠주고 심부름도 하고 가랬어. 그러니까 학교 끝나고 기다려.”하는 등의 이기적인 용건들뿐이었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제 문구용품을 사오게 한다던가 선생님의 심부름을 대신 미룬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하루 한 가지씩 시키는 대로 기억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건 일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녀석이 나를 노예처럼 마구 부려먹지 않는 것만도 참말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친하게 굴어주지도 않는 녀석과 함께 매일 매일 등하교를 함께해야 하는 것은 솔찮은 참을성을 요구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미승이가 다른 여자애들이나 남자애들과 떠들고 노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은근히 힘들었다. 나랑은 놀아주지도 않는 녀석이 다른 애들과는 신명나게 노는 풍경을 바라보기만 하는 심사는 처량맞기 짝이 없었다. 딱히 미승이가 “넌 내가 노는 걸 지켜봐.”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서 난 녀석이 노는 모습을 멀찍이서 쳐다보며 한숨을 짓곤 했다. 오기인지 청승인지…….
여름방학을 지나고부터 학교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낸 미승이는 나나 선중이네들이 아니더라도 심심하고 외로울 틈이 없어 보였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때마다 가장 떠들썩한 공간의 중심에는 미승이가 있었고, 녀석의 주위는 언제 보더라도 활기찬 놀이의 시간을 이루고 있었다. 누구 한 명과 더 가깝고 덜 가까워 보이는 일 없이, 놀이 테두리 안에 들어온 녀석들에게 고른 관심과 친절을 나눠주고 있었다.
“앗, 민애야, 무릎 까졌다! 괜찮아? 피는 안 나니까 울지 마.”
여자애가 넘어지면 얼른 가서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
“너, 그렇게 세게 밀면 어떡하냐? 넌 딴 애들보다 키도 크고 무거우니까, 좀만 살살 놀아.”
덩치 큰 녀석이 힘없는 애들을 힘으로 몰아 부치면 막아주고,
“너넨 또 왜 그러는데? 뭐? 쟤가 금 밟았다고? 운동화 자국을 보니까 금 밟은 것 같긴 한데, 금을 넘어간 건지 안 넘어 간 건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선을 너무 굵은 돌로 그려놨나 보다. 그러니까 이건 무효로 치고, 우리 선을 조금 가늘게 다시 그리자.”
사내 녀석들끼리 투닥대면 넉살좋게 중재해서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화해시키느라, 오징어 놀이 한 번을 하면서도 얼마나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는지 모른다. 덕분에 누구도 울상으로 끝나는 법 없이 모두를 만족시켜주며 놀이 시간이 끝나곤 했다. 그 과정을 본 사람이라면 류미승이 4학년이 되면서부터 줄반장을 맡고 급기야 6학년 때는 학생회장에 당선된 일도 하등 신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십이란 개념도 모르던 나로선 그저, ‘짜식, 귀찮지도 않나봐.’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이것 봐라, 어제 엄마랑 장에 갔다가 미승이 만났거든. 근데 걔가 이 머리 방울 사줬어.”
“머리 방울이 뭐 대단하냐? 기집애들은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이야. 난 미승이랑 족발 먹었다. 어쩔래?”
복도에서 저런 유치한 투닥거림을 나누며 지나가는 녀석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나도 한때는 미승이가―머리 방울은 아니어도― 장난감도 사 주고, 같이 족발도 먹었던 사이였단 말이다. 이젠 아무것도 안 해주었지만.
‘미승이가 너희한테 해 주는 거, 나한테도 다 해 줬던 거야!’
속으로 잘난 척을 했지만,
‘…지금은 놀아주지도 않지만…….’
전혀 위안이 되진 않았다.
여름 이후로 난 미승이의 친구라는 이름을 내밀 수 없는 처지였고, 그저 죄악의 꼬리를 밟힌 새앙쥐에 불과했으니. 그리고… 관심 밖으로 밀려나 갖고 놀지 않게 된 장난감처럼 골방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버려진 우정이었으니.
생각해보면 녀석은 꽤나 대단하고 좋은 녀석이었는데, 난 그걸 제대로 느낄 틈도 없이 때늦은 등을 바라보며 서운함만 생겨나고 있었다. 한때 내게만 집중적으로 모아주던 녀석의 웃음과 관심과 친절이, 이제는 나만―선중이 놈들은 그렇다 치고― 빼 놓고 모두에게 방사형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어찌나 못마땅하던지…….
그런데도 매일 마을과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치고 함께 버스를 타고 다녀야만 하는 선중이네들은 나랑 미승이가 도로 친해진 거라고 오해를 했다. 녀석들과 마주칠 때마다 완전히 미승이와 내가 한 묶음으로 ‘배신자들’이라며 뒤에서 숭숭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녀야 했으니, 참으로 눈치가 없는 녀석들이었다. 조금만 더 눈치발을 가졌더라면 미승이가 날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녀석들의 질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승이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학교에서 당당하게 자리 잡은 녀석을 괴롭히지는 못하겠고, 이리저리 채일 데도 없는 나만 우습게 보인 건 당연했을 것이다. 병식이랑 무영이가 빼돌려서 끌고 간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도 학교 건물 뒤 쓰레기장으로.
“너 요새 미승이랑 다니더라.”
팔짱을 끼고 새끼 보스처럼 기다리고 있던 선중이는 병식이랑 무영이가 내 팔을 놓자마자 으름장을 놓듯 내 정강이를 발로 찼다.
“희승이 너, 미승이랑 다시 친하게 지내는 거야?”
“…….”
“벙어리가 됐냐!?”
무영이 말에도 입을 꾹 다물고 아릿거리는 정강이만 내려다보자 병식이가 옆에서 뒤통수를 때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골이 윙윙 울렸다.
“미승이랑 안 놀기로 하지 않았어? 약속도 안 지키는 이 배신자야!”
“그게 뭐? 너네가 먼저 나 배신자라고 따돌렸잖아!”
나도 병식이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따졌다. 미승이랑 논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지만, 그보다는 녀석들이 배신자니 뭐니 하며 밀어세우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나까지 따돌린 녀석들이 누구더러 남이랑 놀아라 마라 따지느냐고! 내 허약한 기세에도 놀랐는지 병식이 자식이 움찔하자, 이번에는 다시 선중이가 나섰다. 그리고는…
“미승이가 니 얼굴에다 침칠했다며. 그거 알고도 그딴 새끼랑 같이 다니고 싶냐, 정희승?”
예상도 못한 소릴 내뱉었다.
“맞아. 걔 이상한 놈인데, 너도 변태냐?”
옆에서 맞장구치는 무영이를 보면서도 계속 뒤통수를 얻어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멍한 기분 속에서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병식이 새끼, 비밀이라고 해놓고…….’
참말로 믿지 못할 놈이었다.
“병식이, 이 나쁜 놈아! 너 혼자만 아는 비밀이라며. 얘네들한테 얘기 안 했다며!?”
난 잠시 멈췄던 숨을 병식이쪽을 향해 냅다 뿜었다.
“그때는 안 했지. 얼마 전에 얘기한 거야. 넌 이제 배신자니까.”
친구들이 나서주자 도로 뻔뻔하고 태연해진 녀석은 입가에 이죽이죽 웃음까지 흘리고 있었다.
“미승이 새끼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변탠가 보지?”
“맞아. 너도 미승이가 그러는 게 좋은 거지? 너한테 침이나 바르고, 찝적거리는 게 좋아 죽겠지?”
“너도 그런 게 좋냐, 정희승?”
선중이에 이어 병식이랑 무영이까지 힘껏 입술을 이죽여가며 쉴 새 없이 내 속을 박박 긁어놓고 있었다.
“우리 그것도 다 학교에 소문 퍼트려 버릴까? 미승이 새끼 까불지 못하게.”
“그럴까? 미승이도 이제 잘난 척 못하게. 소문이나 확 내 버리자.”
“그럼 희승이랑 미승이는 짝으로 변태 소리 듣고 다니겠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녀석들에게 이미 배신자다. 녀석들도 나한텐 배신자다. 게다가 변태 소리까지 듣는 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이왕에 배신자 돼버린 거, 끝까지 배신자로 밀고 나가자, 나도 배신자의 비밀을 확 까발려 버리자고 작은 비밀주머니 하나를 팩 튿어 버렸다.
“야, 김선중! 너도 미승이 고추 만졌다면서? 그것도 여섯 번이나! 그래서 니네 아부지한테 두들겨 맞았다면서? 미승이한테 다 들었어. 그럼 네 놈도 변태겠다? 왕변태! 미승이가 변태면, 니놈은 변태 대마왕이다!”
사실… 변태 대마왕은 류미승이었다. 우리 또래 중에서 놈의 성애(性愛)에 대한 관심과 집착도는 따를 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건 좀 있다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은 알 게 뭐랴. 날 모욕하는 선중이에게 나도 두 배 세 배의 모욕감을 돌려주고 싶었다. 녀석이 멋대로 굴고 잘난 척 하는 기세를 나도 한 번쯤 꺾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힘껏 높여 선중이를 공격했던 것이다.
“십새끼…….”
선중이는 잇새로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어서 내게 하는 욕인지 미승이에게 하는 욕인지는 분명치가 않았다. 내게 비밀을 까발린 미승이보다는 다른 녀석들 앞에서 까발린 내가 훨씬 미울 게 틀림없었겠지만, 놈도 창피해서인지 화가 나도 덤비지 못했다. 실컷 소리치며 녀석의 비밀 주머니를 벌려놓고 나니 내 속의 들뜬 열이 식어가는 반면, 선중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놈의 찌그러진 얼굴을 보니 막혔던 속이 훅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난 이제 가 볼래.”
처음으로 선중이 앞에서 당당하게 등을 돌려봤다.
하지만, 그 폭로로 인해 속을 시원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풀죽어가는 선중이 옆에서 경악하는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선중이를 쳐다보던 무영이는 제쳐두고, 선중이의 일그러진 옆얼굴을 보며 어쩔 줄 모르게 좋아서 입까지 헤 벌리고 있던 병식이의 얼굴이 불쾌감을 불러왔다. 마치 잔혹한 방관자 같던 병식이의 얼굴을 보며,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막연하게 스며들었다. 병식이 놈도 변태라고 몰아부쳐 줄 만한 흠 거리를 못 찾은 게 못내 아쉬웠다.
“어디 갔다 이제 오냐?”
“쓰레기장.”
“얼른 가방 갖고 나와.”
복도 앞에서 미승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중이네한테 끌려갔다가 30분이나 걸려서 되돌아온 바람에 버스 한 대를 놓쳐버린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미승이 놈은 소지품 챙기듯 날 기다리고 있었고, 선중이네들도 쓰레기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책가방을 챙겨서 복도로 나온 후에도 미승이는 쓰레기장에 뭣 하러 갔었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팩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앞서갈 뿐이었다.
‘어차피 30분이나 기다려야 되는데, 뭣 하러 빨리 걸어?’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정류장에서 기다릴 시간도 넉넉하구만- 하며, 물어봐야 대꾸도 안 할 녀석이란 걸 알기에 속으로만 궁시렁대며 걸었다. 선중이들은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도 정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해도 짧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린 우리들의 등하교 시간이 해가 뜬 낮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덴 변함이 없었고, 조금만 열기를 받아도 뽀얀 김이 백지처럼 스미는 버스 유리창이 안팎의 온도차를 알려주는 게 고작이었다. 덕분에 집까지 가는 동안 시간 때울 거리를 찾았다. 옆에서 입 다문 채 앉아만 있는 미승이는 날 계속 무시하도록 내버려두고 버스 창문이랑 놀기로 했다.
유리 위에‘하아’ 하고 입김을 불어서 뽀얀 김을 채워 그 위에 손가락으로 내 이름을 썼다가 소매로 쓰삭 지우고, 또 입김을 불어 우리 집 전화번호를 썼다가 소매로 지우고, 그리고 아이들이 화장실에 곧잘 그려놓는 하트랑 똥 모양도 그려보며 혼자서 심심찮게 놀고 있을 때였다.
“야!”
“응?”
깜짝 놀라 돌아보니 미승이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나 혼자 창에 입김 불어 노는 짓도 하지 말라고 명령을 하려는 건가? 겁을 집어먹고 있을 때였다.
“못 들었어? 오늘은 같이 숙제 하자고.”
늘 대화가 뜸하다 보니 설마 녀석이 말을 걸으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창문에 얼굴을 들이박고 노는 사이 그런 소릴 했던가 보다.
“숙제? 알았어.”
어느덧 마을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미승이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었고, 저희 집과 우리집의 갈림길에서도 방향으로 곧장 걸어갔다.
“우리 집에 가서 가방 두고, 숙제 할 것만 가져가면 안 돼?”
물어도 돌아보지도 않으니, 책가방의 어깨끈을 붙잡고 눈치껏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명재골이었지만, 만사가 뜻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미승이 왔니? 어머, 희승이도 왔구나.”
끼익 소리 나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고동색의 블라우스에 달린 리본을 매면서 방과 부엌을 들락거리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라우스 위에 치마랑 같은 베이지색의 자켓을 걸치고 나오면서 갈색 구두를 신는 아줌마는 세련되어 보였다. 우리 엄마에게도 위 아래가 같은 색으로 된 치마 정장이 있긴 했지만, 어깨에 뽕도 들어간 유행 지난 정장을 “한때는 고급 양장이었다.”는 이유로 시시때때로 걸치는 품새가 썩 보기 좋진 않았다. 더군다나 배가 불뚝 나와 버린 게 형이랑 날 낳고서 체형이 변한 거라고 우리들 탓만 하며, 자신의 넓은 밥그릇 탓은 죽어도 안 하는 엄마였다. 그에 비해 미승이네 엄마는 배가 조금 나오긴 했어도 예쁜 정장을 입으니 한결 날씬해 보였다.
“아줌마 어디 가요?”
“나? 오늘 시내에서 약속이 있어서. 희승아, 아줌마 괜찮아 보이니?”
“예뻐요. 우리 엄마보다 날씬하고.”
고작 저 정도 말주변밖에 안 되는 어린애의 칭찬에도 기분이 좋았는지, 아줌마는 외출의 내용을 내게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일전에 미승이 아빠의 직장 동료 소개로 현구 삼촌이 맞선을 보았는데, 상대 아가씨와 이야기가 잘 풀려서 혼담이 오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양가 상견례까지 하게 되어,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신으로 형님 내외인 미승이네 부모님이 현구의 보호자가 되어 상견례 약속 장소에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줌마가 예쁘게 차려 입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두고 보기에도 번거롭고 군살처럼 불편하게 여기던 시동생 현구가 드디어 노총각 딱지를 뗄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의 빛이 찬란하게 다가오고 있어서였는지, 아줌마의 화색이 몹시도 밝아보였다.
“근데 왜 아줌마 혼자 가요?”
“현구 도련님이랑 미승이 아빠는 읍내에서 만나서, 미승 아빠 차로 같이 가기로 했어. 그래서 읍내까진 나 혼자 버스로 가야돼. 버스 오려면 시간 아직 남았지?”
“네. 지금 가면 버스 기다려야 돼요. 좀 있다 가요.”
미승이랑 달리, 나한테 말도 잘 걸어주고 설명도 잘 해주는 아줌마가 갈수록 예뻐 보였다. 그래서 아줌마랑 대화나 계속해볼까 하는데, 미승이 녀석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엄마, 난 희승이랑 숙제하고 공부할거니까 집에 있어도 돼지?”
“그래. 어차피 애들 낄 자리는 아니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저녁 먹고 오려면 늦어질 텐데…….”
어른들이 죄다 시내 호텔에 있는 상견례 장소에 갔다가 돌아오려면, 어린 미승이 혼자서 밤이 어둑해지도록 외딴 집에 혼자 있어야 된다는 것 때문에 걱정하던 아줌마는 내 쪽을 돌아보자마자 손뼉을 쳤다.
“아, 그래서 희승이 데려 온 거구나? 그래. 미승이 혼자 있는 것 보다 낫겠다. 희승아, 너 오늘 늦게까지 있다 가도 되지? 아예 놀다가 자고 가라. 너희 집엔 아줌마가 전화 해줄게.”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아줌마는 후다닥 힐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빠르게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응. 그래서 희승이 재우고 여기서 내일 아침에 미승이랑 같이 학교 보낼 테니까 … 그래. 내일 토요일이잖아 … 아유, 폐는 무슨―. 희승이가 얼마나 얌전한데. 둘이서 사이좋게 잘 놀 거야. … 그러면 책가방은 내일 아침에 가서 싸도 되니까, 애들은 아침 일찍 깨워서 보낼게. 오늘은 둘이서 실컷 놀게 하고. … 응, 그럼 끊어.”
상견례 약속에 대한 엄마의 질문과 아줌마의 답변이 오가던 통화 끝에, 나는 미승이네서 사이좋게 놀다가 자고 가는 걸로 낙찰 지어져 버렸다. 아줌마는 우리가 먹을 저녁 찬도 미리 챙겨놓았다며 간식거리를 놓아둔 찬장까지 알려주고 난 후에야 핸드백을 집어 들고 버스 놓칠세라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줌마가 나간 뒤로는 마당 안이 조용해졌고, 우리가 마루에 놓인 저녁상 앞에서 일찌감치 밥을 먹는 동안에도 집안은 조용했다. “다 먹었으니까 치우자.” 하면서 내가 빈 밥그릇만 집어서 부엌으로 가져가려고 하자 미승이가 맞은 편 상을 붙잡으며 나더러 같이 상을 옮기라는 눈치를 주어 같이 상 째로 들어서 낑낑거리며 부엌으로 옮겨 놓았다. 맛있는 반찬이 많이 놓인 상을 받을 땐 좋았는데, 그릇이 비워지고도 무거운 밥상을 옮기는 건 힘들었다.
어느새 바깥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현구랑 미승이가 함께 쓰는 방으로 들어가 둘이서 나란히 방바닥에 엎드려서 숙제를 하는 동안 두 개짜리 형광등 중 하나가 수명이 다 되어 가는지 불이 깜빡 깜빡거리다 이내 흐리게 꺼져갔다.
“앗, 불이 하나 꺼졌네.”
천장을 바라보고 혼자 떠드는 내 소리도 공허하게 지워졌다.
‘이럴 거면 날 데려오지나 말지…….’
한쪽 불만 깜빡거리는 조명 속에서, 어두운 저녁 같은 회색 명도가 방 안을 채웠다. 먼저 숙제를 끝낸 미승이는 여전히 엎드린 채로 양손위에 턱을 받치고 방문 쪽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놈이 무슨 생각을 하느라 저리 말도 없이 조용하냔 말이다. 학교에선 잘만 떠들고 놀면서. 정녕, 혼자서 집 지키기 무서워서 마지못해 날 데려온 놈 같았다.
“희승아.”
침침한 등 아래서 얼굴 그림자를 피해 미승이의 공책을 곁눈질 해가며 숙제를 끝마쳐갈 무렵이었다. 미승이가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야’, ‘너’ 로만 날 불러대던 녀석이 모처럼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니 생소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왜?”
“…….”
불러 놓고는 괜스레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내게도 아줌마처럼 작은 희망의 빛이 다가오는가 싶었다. 이젠 드디어 녀석이 나를 졸병 노릇에서 해방시켜주고 친구로 대우해 주려나보다― 하는 기대를 걸어볼 만큼.
“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