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여름
방학을 하기 직전 일요일에 아빠를 따라 저수지 낚시터에 갔던 날은 초여름 볕이 유난히도 따갑고 쨍한 날이었다. 나는 아빠가 자리 한 곳을 잡아 접이식 낚시 의자를 펴고 낚싯대를 드리우는 동안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저수지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 위로 쏟아져 부서진 노란 볕이 뻐끔거리는 물고기들의 입질과 거품 속에 섞이고, 한편으론 더운 열기가 물을 미지근하게 덥히고 있었다. 물고기 밥과 수초와 이끼들로 지저분한 풀빛 저수지에선 물비린내가 심하게 진동했다.
30분쯤 지나자 미승이가 아저씨랑 낚시터 입구에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필 미승이네 아빠는 오자마자 우리 아빠를 발견하고는 같이 인사를 나누며 가깝게 떨어진 자리에 터를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리를 펴두고 뾰족한 미늘 끝에 깻묵 밥만 물려 물속으로 던져놓고는 배낭에서 소주병을 들고 아빠의 자리로 왔다.
두 사람은 입질의 기미가 없는 낚싯대를 간간히 살펴가며 형, 동생소리를 나누며 종이컵에 소주를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 아빤 멀거니 서있는 나랑 미승이를 보며 “둘이 놀고 있어. 이 근처에서 멀리가지 말고.” 쉽게도 말했고, 미승이네 아빠는 돈을 주며 “그래. 멀리 가지 말고 저기 가게에서 놀다 와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미승이랑 나는 마지못해 나란히 몇 걸음 떨어져 낚시터 매점으로 갔다. 우리는 냉장고 안에서 아이스 바를 한 개씩 골라 가게 앞 파라솔 밑에서 의자에 앉아 열심히 빨아먹었다. ‘아빠들 땜에 어쩔 수 없네…’ 하는 이유로 함께 있게 되었을 뿐이라 그 애랑 할 말도, 놀 맘도 없었다.
날씨는 무척이나 끈적하고 더웠다. 스크류된 모양의 빨간색 하드를 쪽쪽 빨아먹는 미승이의 입속이 새빨갛게 젖어가는 걸 보면서, 거무칙칙한 색과 빨간 색이 혼합된 하드를 먹는 내 입은 더 말이 아니겠다 싶었다. 천천히 하드를 할짝대는 동안 내 하드 바는 혀처럼 빨간 속을 드러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밑둥에서도 거무스름한 표면이 녹아 손등에까지 흘렀다. 하드를 다른 손에 옮겨 쥐고 얼룩덜룩하고 찐덕한 즙이 묻은 손가락을 핥아내고 있을 때였다.
“맛있니?”
미승이는 또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매우 황당한 말도.
“우리 하드 바꿔먹을래?”
미승이의 입술이 녹여놓은 자리에서 흐르는 빨간 색소의 국물을 보며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생긴 것 같지 않게 위생관념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제 아빠가 돈도 넉넉히 줬구만, 왜 굳이 먹던 걸 바꿔먹자고 하는지 아무리 머릴 굴려도 알 수가 없었다. 내 손에 쥔 게 먹고 싶으면 넉넉한 잔돈으로 새로 사먹어도 될 텐데. 저놈이 뜻밖에도 욕심 많은 놈인가 보다고도 생각했다.
“먹고 싶으면 새로 사먹으면 되잖아.”
퉁명스럽게 내뱉고 나서 내 남은 하드 바를 아작 아작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미승이도 이젠 입 다물고 먹기만 할 테지 싶었을 때, 녀석이 또 쓸모없는 소릴 꺼냈다.
“너랑 나랑 이름 비슷하지? 희승이, 미승이. 꼭 형제 같지 않냐?”
전 해에 우리 다섯이 함께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도 미승이는 같은 소릴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 이름 비슷하잖냐?” 하고. 그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응. 형제 같지?”라고 같이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러나 이제와선 머쓱하게 멀어진 미승이와 같아지고 싶은 마음도 녀석과의 공통점 찾기 놀이에도 관심이 없었다.
“뭐가 비슷하냐? 난 김씨고, 넌 류씬데.”
짜증을 실어 날리자 미승이는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 형아도 재승이니까, 너랑 형제 같겠네. 안 그래? 이름 비슷하잖아.”라고 내가 예전에 말했을 때, “흥! 재승이 형이랑은 그런 형제 하기 싫어.”라고 했던 미승이의 심통 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보다 침울했다.
“너… 지금도 나랑 놀기 싫으냐?”
“그래.”
“진짜 이유가 뭔데? 선중이네 말고-.”
나는 막 머리를 굴렸다. 솔직하게 다 까발리자니 내 입이 창피하고, 일단 놀기 싫다고 말을 뱉어놨으니, 땅을 파서라도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한참 궁리 끝에 찾아낸 답이 고작 선중이가 미승이를 부르던 명칭 하나뿐이었다.
“넌 배신자니까.”
“내가 왜 배신자인지 말해봐.”
“그건…….”
당연히 말문이 막혔다. 미승이가 어떤 배신자인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선중이는 우리한테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미승이를 따돌리기만 했으니까.
“거봐 말 못하지? 선중이가 그러니까 너희들도 따라하는 거잖아.”
미승이의 말대로 난 선중이의 행동과 말들을 생각 없이 복사하는 짓들을 꺼리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미승이가 날 생각 없는 놈 취급하는 건 밉살스러웠다.
“그럼 안 되냐? 선중이는 내 친군데.”
정말 생각 없는 놈은 나였는데 말이다.
“너, 선중이 그 놈이 왜 나한테 배신자라 그러는지 알아?”
아이들의 놀림에 한 번도 반박하지 않던 놈이 느닷없이 제 입으로 ‘배신자’ 소리를 꺼내는 통에 귀를 세웠다. 그 전까진 왜 배신자라 부르는 건지, 배신자라는 말이 꼭 필요한 건지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그 자식이 먼저 나한테 나쁜 짓 했단 말야.”
미승이는 남은 하드를 손에 쥔 채 탁자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무슨 나쁜 짓?”
난 손에 남은 빈 나무막대기를 땅에 버리지도 못하고 손에 쥔 채 미승이의 말을 기다렸다.
“작년에 선중이 그 자식이 여섯 번이나 내 바지를 벗기고 고추를 만졌어. 그래서 내가 걔네 아빠한테 일렀거든. 그래서 걔가 지네 아부지한테 엄청 얻어맞고서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근데 왜 내가 배신자냐? 그 새끼가 나쁜 놈이지.”
미승이의 말을 듣고 보니 선중이 놈이 이상하긴 했다. 그리고 그걸 한 번 한 번 세고 있다가 선중이네 아빠에게 바로 일렀다는 미승이도 만만치는 않은 놈이었다. 그래도 난 미승이의 말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분명 친구의 옷을 벗기고 한두 번도 아니고 여섯 번 씩이나 고추를 만졌다는 선중이 놈이 먼저 잘못했으면서 미승이를 따돌리기까지 했으니 선중이가 치사한 변태 놈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는데, 난 그 와중에도 이미 마음에서 떼어놓은 미승이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말도 안 되게 선중이의 편을 들었다.
“네가 걔네 부모님한테 일러서 걔가 혼난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배신자지.”
이렇게 말이다. 미승이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는데, 잠시 후 하얀 쇠 탁자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미승이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그 순간 마음이 몹시도 찔렸다. 그런데도 아집이란 본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기 위한 몰이해와 몰인정인 것이므로… 난 미승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달래주지도 않은 채 착찹한 마음만 안고 먼저 낚시터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내내 헛물만 켰던 아버지와 제법 월척 비스무레한 것을 건진 미승이네 아버지가 자리를 접고 일어설 때까지 미승이와 난 한마디도 않고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저수지 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10살 여름 무렵, 미승과 나의 이야기.
그 해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