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봄
읍내 근방에는 초등학교가 두 곳 밖에 없었고, 시골이라 아이들도 많지 않아서 우리 미령 초교도 학년마다 40여 명씩 두 개의 반밖에 없었다. 그러니 봄 방학 전에 새 학년의 반 배정에서 선중이와 미승이가 한 반이 되고, 나랑 무영이랑 병식이가 한 반이 된 것도 전혀 놀라운 확률이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6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병식이랑 내가 제일 친한 친구가 되지 않은 게 놀라울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병식이랑 나는 상성이 가깝지 않은 관계라고 그 해부터 어스레히 감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좀 더 나중의 이야기지만.
2학년 겨울 방학의 끄트머리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만 모른 채 태평한 시간이 흘러갔다. 난 너무나 어리버리해서 그 동안 아이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눈치 끝발도 못 잡고 맹하게 뒤섞여 놀기만 했을 뿐이다. 전부터 툭하면 병식이가 선중이를 붙잡고 뭐라 쑤근덕대는 것도, 선중이가 그런 병식이를 무시하고 자꾸 미승이만 따로 제 옆에 붙여두려는 것도, 미승이가 곤죽 같은 표정으로 선중이랑 마지못해 어울리는 것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마음 편히 쳐다보고 지냈다. 멀건 무영이조차도 눈치껏 병식이랑 선중이를 따라 붙었는데 나만이 멋모르고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깨소금 쏟듯 웃고 구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죽하면 겨울 방학 때 선중이가 제 아빠한테 꽤나 심하게 두들겨 맞았던 일에 대해서도 얘기만 전해 들었을 뿐, 녀석이 무슨 이유로 맞았는지,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도 몰랐다. 여느 때처럼 아저씨의 험한 술주정에 대빗자루로 몇 대 맞은 줄로만 알고 있었고, 그래서 녀석이 평소처럼 금세 털고 일어나 큰소리치며 까불짝거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겨울 방학이 끝난 후에도 선중이의 등과 종아리에 남아있는 멍을 보고서야 녀석이 결코 가벼운 매질을 당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도 약간 의아해졌다. 선중이는 전처럼 시끄럽게 잘난 척도 안했고 오히려 말수가 줄었다. 게다가 전에는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하고 수시로 끼고 돌지 못해서 안달하던 미승이까지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봄방학을 맞았다.
봄 방학을 지나는 동안 다행히 선중이는 서서히 씩씩해졌다. 그런데 우리들이 모여서 놀 때마다 미승이는 부르지 않았다. 어쩌다 동네 어귀에서 미승이랑 마주쳐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듯 지나쳤고 덩달아 병식이까지 미승이를 무시했다. 무영이는 미승이를 아는 척 했다가 옆에서 병식이의 눈 째림을 받고 입을 바로 다물었다. 나는 아이들의 변덕이 도진 거라 여기고 ‘또 저러다 말겠지-’ 하고 말았다.
그래서 옆에서 아이들이 나한테 투덜대건 말건 웃으면서 미승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승이도 나를 보고 조금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엇갈리는 시간들을 향해 조용히 뛰어가고 있었다.
2월 마지막 날에는 처음으로 명재골 깊숙이 지어진 하얀 새 집에 사람이 다녀갔다. 검고 기다란 승용차 한 대가 명재골 안으로 들어가 반나절 만에 나왔는데 그 승용차 안에 하얀 집의 주인 남자가 타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새카만 썬팅 유리창 안에 가려진 주인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만큼 어두운 의심들도 생겨났다. 마을에 기척도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다녀간 걸로 보아 그다지 유쾌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은 직업으로 돈을 번 졸부일지도 모르겠다고 작은 수근거림이 돌았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차를 몰고 와서 명재골에 하룻밤 만에 훌쩍 떠나갔다. 그날 나도 동네를 빙빙거리며 돌아다니다 마을로 들어오던 빨간색 승용차와, 마을 삼거리 가게 앞에 차를 세워두고 음료수를 사가는 그들의 모습을 멀찍이서 보았다.
엄마의 매니큐어보다 빨간 승용차가 하도 반짝거려서 걸음이 가겟집 가까이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 차가 ‘부웅-’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떠나는 걸 보고서야 과자를 사러 가겟집으로 들어갔다. 고르고 고르던 끝에 먼지 묻은 쵸코볼 통을 집어드는 동안 주인 할머니가 동네 아줌마를 붙잡고 방금 떠난 젊은 사람들이 하얀 집 주인의 자식과 애인인 것 같다며 떠벌리는 얘길 들었다. 세상에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부잣집 망나니들인 것처럼 그들에 대해 지어내는 말도 들었다. 아마 그들의 행실거지가 가겟집 할머니의 눈에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비춰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에 대해 정확한 사실 하나 알지도 못하면서도, 멋들어지게 지어진 하얀 집의 이야깃거리만큼 그 주인들에 대한 소문이 마을 안에 퍼졌다. 봄 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넌 배신자야.”
3학년 등교 첫 날 버스 정류장에 모두 모였을 때 선중이가 미승이를 보고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봄방학 때부터 따돌리기 시작했으면서 뭔 새삼스런 소리냐 싶겠지만, 앞으로는 미승이를 자신의 친구 무리 속에 끼워주지 않겠다는 전투적인 선언이었다. 미승이는 건너편 산만 바라보며 입술을 꼬옥 다물고 있었다. 위협적인 얼굴로 미승이를 노려보는 선중이를 보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미승이를 외톨이로 만들려나보다 하는 짐작이 들었다.
그리고 경종을 울리는 전초전이 벌써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를 학교까지 실어다 줄 버스가 마을 정류소 앞에서 섰을 때 선중이에게서 “잡아.”라는 말이 떨어지자 병식이랑 무영이가 미승이의 양 팔을 붙들고 버스에 못 오르게 방해하는 것이었다. 난 버스에 오르다말고 내려가서 병식이랑 무영이를 뜯어말렸다.
“야! 너희들 이러지 마!”
“넌 비켜!”
선중이가 나를 붙잡아서 옆으로 홱 밀쳐냈다. 그 바람에 눈이 녹아 질척해진 흙바닥에 넘어졌다.
“이 자식들아! 뭐 해!? 빨리 타지 않으면 당장 차 출발시킨다. 싸우려면 학교 가서 싸워!”
버스 기사 아저씨가 크게 호통을 치자 선중이들은 그제서야 먼저 후다닥 버스에 오르고 나랑 미승이도 뒤따라 올라탔다. 서너 개의 빈자리가 있었지만, 선중이들이 각각 따로 따로 떨어져 두 칸 좌석 버스에서 한 줄씩 차고 앉아 옆자리에 책가방을 놓고 우리들이 못 앉게 으르렁거렸다. 무영이마저도 “안 돼… 너네 서서 가야 돼…….”라고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이런 행태들을 보고 버스 기사 아저씨가 “저눔의 새끼들…” 어쩌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에게 참견해 오지는 않았다.
다음 정거장에서 아줌마 한 명이 내려서 맨 뒷자리 자리 한 칸이 비었을 때 미승이랑 난 서로 앉으라고 양보를 하다가 그냥 같이 서서 가기로 했다. 산 고개랑 언덕을 구불구불 지날 때마다 버스가 이리 저리 심하게 흔들리긴 했지만 학교까지 20분 동안 서서 가는 건 힘들지 않았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멈출 때마다 미승이는 손바닥으로 내 바지에 묻은 젖은 흙을 털어주느라 넘어질 때 땅을 짚었던 내 손바닥만큼 녀석의 손바닥도 흙으로 더러워졌다.
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릴 때 우리를 밀치고 먼저 내린 선중이가 버스 계단 밑에서 기다렸다가 발을 걸어 미승이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이번엔 미승이의 옷을 털어주느라 어차피 지저분한 내 손바닥도 더 지저분해졌다. 그렇게 선중이의 미승이 2차 따돌림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무시로 일관하던 것이 3학년의 시작과 동시에 본격적인 적대 행위로 나타난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미승이가 우리 반으로 와서 나랑 밥을 먹고 같이 운동장으로 나가 놀다가 들어왔을 때였다. 미승이네 반에 같이 들렀을 때 미승이의 자리에 아이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미승이랑 나도 우뚝 서서 아이들이 시시덕거리며 들여다보는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진 교과서들이 지저분하게 눈에 들어왔다. 교과서 표지마다 낙서가 되어 있었다. 국어 교과서 표지에 빨간 싸인펜으로 배신자, 병신, 쪼다, 뒈져라… 등등의 욕설에, 재주 없는 솜씨로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이 조악하게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 도덕 교과서에는 고추 두 개를 맞붙여 그려놓기까지 했다. 남세스럽고 어처구니없는 그림이었다. 화장실 문과 벽에 낙서된 것들보다 더 형편없었다.
“선중이랑 병식이가 그랬어.”
옆에서 연정이가 끼어들었다.
“미승이 네가 없는 동안 걔들이 이렇게 해놓고 갔어.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막 했어.”
미승이가 나랑 점심 먹고 노는 동안 선중이랑 병식이가 빈자리에서 교과서를 꺼내 잔뜩 낙서를 해놓고 갔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선중이가 제멋대로인 녀석이긴 해도 그동안 미승이를 좋아해서 잘 해주는 것 같더니 무슨 변덕으로 다시 미승이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건지 종 잡을 수가 없었다.
“선중이 자식이 또 왜 이러지?”
“…….”
“어떡하냐? 네 교과서…….”
“괜찮아. 책 싸서 다니면 돼.”
미승이는 뜻밖에도 차분했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태연히 책상 위를 정리했다.
그날 오후 하굣길에 미승이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노란 바탕에 하얀 고양이 무늬가 들어있는 포장지를 몇 개 사갖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미승이네 반으로 같이 들어가 녀석이 책가방을 푸는 걸 지켜봤을 때, 녀석은 진짜로 교과서를 포장지에 싸갖고 왔다. 전날 산 노란 포장지로 교과서를 전부 싸고 하얀 직사각형 견출지에 과목명을 쓰고 나서 겉에 아스테이지로 한 번 더 바싹 덮어 쌌다. 유치한 욕과 낙서 대신 귀여운 포장지로 새로 덮인 교과서가 보기 좋았다. 그리고 녀석이 혼자 했다고 보기엔 포장이 아주 깔끔하고 반듯했다. 아줌마가 싸주었을 거라 생각하니 언뜻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너네 엄마가 책 싸줬어? 그럼 낙서들도 다 봤겠네?”
“아니, 삼촌한테 싸달라고 했어.”
만약 아줌마가 교과서의 욕이랑 고추 그림들을 보았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역시 녀석도 엄마에게 교과서에 있는 조잡한 낙서들을 보이기 차마 창피해서 현구 삼촌에게 몰래 부탁했다는 것이다. 대신 제 용돈에서 삼촌에게 막걸리랑 담배랑 사다 주고 앞으로 삼촌 말도 잘 듣겠다는 각서까지 썼다고 했다. 어린 조카에게 각서를 쓰게 하고 인주로 지장까지 찍게 하면서 킬킬거렸다는 현구를 미승이는 최대한 한심하게 묘사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현구도 엄마 아빠에게 비밀로 해주기로 하고 자로 꾹꾹 선을 눌러가며 꼼꼼하게 교과서를 싸주었단다. 어쩌다가 미덥지 못한 제 삼촌에게 그런 부탁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현구도 나름 용한 구석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척 보기에도 미끄러운 비닐이라 웬만한 걸론 낙서도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실험삼아 플라스틱 꼭지를 돌려쓰는 색연필로 교과서 비닐 위에 데굴데굴 낙서를 해보자 눌린 자국만 남을 뿐 아무 색도 남지 않았다.
“히야. 진짜로 아무것도 안 그려지네. 이제 괜찮겠다, 그치?”
“그 색연필로 하면 당연히 안 써지지. 근데 저걸로 하면 된다.”
미승이가 깔깔 웃으며 앞자리 상주의 필통에서 종이 껍질을 돌돌 벗겨 쓰는 진한 색연필을 꺼내 와서 세모를 그리자 또렷하게 세모가 그려졌다. 같은 색연필인데도 어떤 건 낙서가 되고 어떤 건 안 되고 희한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진한 남색 색연필 자국도 지우개로 지워진다는 거였다.
나는 다른 필기구들도 골고루 써서 실험을 해 보았다. 싸인펜도 자국은 남지만 손으로 문지르면 사라졌다. 볼펜은 아무리 꾹꾹 눌러도 소용돌이 모양을 남기기가 힘들었다. 이런 저런 다양한 실험 끝에 나는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이젠 선중이 자식도 못난이 같은 낙서 못하겠네.”
“응. 만약 또 낙서하더라도 비닐만 바꿔 씌우면 돼.”
미승이도 자신있게 대답했다. 실은 지난밤에도 책을 싸고 나서 삼촌이랑 함께 비닐 겉에 낙서가 되는지 어떤지 온갖 필기용구를 갖다놓고 실험을 해보았다고 그제서야 말했다. “어제 오늘 교과서가 고생하네-” 하며 우리는 같이 웃었다. 지나가던 선중이가 “책이 그게 뭐냐? 니가 기집애냐?” 하고 흉 잡고 가는 것도 무시했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미승이의 교과서는 괴롭힘을 당했다. 이번엔 아침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나갔다 온 사이를 틈타서 만행이 저질러졌다. 싸인펜으로 표지에 낙서를 하려다 실패했는지 불그죽죽한 얼룩이 표면에 남아 있었고, 그보다 심각한 건 기어이 교과서 속에까지 볼펜으로 낙서를 한 것이다. 별 새로운 내용도 없이 전날의 욕설과 그림들만 복사하듯 옮겨놓았다.
그런데 군데군데 이상한 낙서도 있었다.
두 개의 동그라미로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눈코도 없이 입만, 오직 입만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입에서 지렁이 모양의 꼬불꼬불한 선이 나와 다른 동그라미의 입에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렁이 모양의 곡선은 혀를 그리려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그림은 한명이 다른 한명에게 혀로 뽀뽀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았다.
학교에서 온갖 지저분한 낙서를 보아왔고 뽀뽀쯤이야 애교처럼 보아줄 수 있는 거였지만, 유난스럽게 집착해서 그려놓은 그 낙서에선 왠지 모를 혐오감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 놈들이 한 짓 아냐? 김선중이랑 이병식!”
“그 못된 놈들! 야, 정희승! 네 친구들은 왜 그렇게 못됐냐? 만날 미승이만 괴롭히고… 진짜 바보 같은 놈들이야! 니가 좀 어떻게 해 봐! 넌 왜 바보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냐!?”
“희승이한테 그러지 마. 걔들이 나쁜 거지 희승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미승이 대신이라도 되듯 연미가 화를 내고 경미는 나한테까지 분풀이를 하자 미승이는 나를 두둔했다.
“미승아, 선생님한테 일러. 아니면, 내가 대신 일러줄까?”
옆에서 연정이랑 경미가 선생님께 이르자고 거들었지만 녀석은 손을 저었다.
“됐어. 그러지 마.”
미승이는 교과서를 책상 서랍 안으로 넣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속상한 듯 파묻은 고개를 일으키지 않고 계속 엎어져있는 녀석을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몰라 난처했다. 화가 난 걸 참는 듯 숨만 색색거리는 녀석의 등을 보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병식이가 자리에서 선중이랑 같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낙서의 범인도 역시나 녀석들이었다. 병식이가 마침 주번이었고 선중이도 주번인 녀석을 위협해서 아침 조회시간에 교실에 남아, 둘이서 미승이가 없는 틈을 타서 그 짓을 했다고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나더러 바보같이 가만히 있기만 한다는 경미의 말이 떠올랐다. 오기도 생겼다. 아무래도 녀석들한테 가서 한 마디라도 해줘야겠다 싶어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 병식이의 자리로 갔다.
“야!”
큰소리로 녀석들을 부르자 선중이가 더 큰 소리로 “왜!?” 하며 주먹으로 책상을 쾅 쳤다. 그 바람에 움찔 놀라서 기가 확 죽었다.
“늬, 늬들… 미승이 교과서에 나, 낙서하지 마.”
내가 기어 죽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한소리 하자 병식이랑 선중이가 동시에 나를 쏘아봤다.
“웃기지 마! 네가 뭔데 참견이야?”
“정희승, 내가 분명히 말했지! 류미승이 배신자라고. 그런데 넌 내 말도 안 듣고 미승이랑 붙어서 놀고-. 너도 배신자 소리 듣고 싶냐? 앙!? 알아들었으면 참견하지 말고 꺼져!”
선중이가 또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날 협박하는 바람에 난 모처럼 용기 낸 훈계의 효과도 못 보고 슬금슬금 자리로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선중이한테는 대들 수가 없었다. 병식이도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난 그날 종일 심약한 내가 부끄러워서 수업 필기를 하나도 못했다. 경미가 나한테 화를 낸 것도 당연했다. 친구라면서 병식이랑 선중이한테 옳은 소리도 못하고, 미승이를 도와주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눈치나 보며 쩔쩔매는 내가 한심했다.
그렇지만 막무가내인 녀석들을 상대로 내 말이 먹힐 리도 없고 어차피 내 힘으론 이기지도 못할 녀석들이니 굳이 더 험한 상황을 만들지는 말자고 혼자서 열심히 타협했다.
그리고 그걸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미승이랑 놀아주면 되니까, 미승이 옆엔 나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이다. 난 선중이네랑 노는 것만큼 미승이랑 노는 것도 재밌었고, 미승이도 나랑 노는 걸 좋아하니까 그렇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도 일부러 미승이네 반까지 데리러 가서 같이 학교를 나오고 버스 안에서도 선중이들을 무시하고 미승이랑 앞자리에 앉아 소근거렸다.
“너 정말 선생님한테 안 이를 거야? 아니면 너네 엄마 아빠한테라도 일러. 쟤네들 혼내주라고 해.”
“아니… 이르는 건 안 할래. 그러면 지금보다 더 배신자가 되니까. 그러니까 희승이 너도 어른들한테는 말하지 마.”
“그래도-. 쟤들이 계속 못살게 굴면 어떡해.”
“계속 그러진 않을 거야. 저 놈들도 지겨워지면 안하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승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놈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나까지 속상했다.
“선중이 나쁜 놈. 병식이도 무영이도 다 나빠.”
내가 소심하게 화를 내자 미승이는 “맞아. 걔들 나쁘다.” 그러면서 조금 웃었다. 진심으로 그 애들을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걱정 마, 미승아. 그 자식들하고 안 놀아도 돼. 나랑 놀면 되잖아.”
난 의리와 정의감을 물씬 끌어올리며 힘줘서 말했다.
“응. 너랑 놀면 돼.”
미승이는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덜컹거리는 시골 버스 안에서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며 마을로 돌아왔다.
교과서 낙서 사건 이후로도 선중이의 만행은 계속됐다. 체육시간엔 미승이의 체육복을 대걸레 빤 물통 속에 집어넣고, 미술시간엔 스케치북을 찢어놓거나 물감을 전부 팔레트에 섞어서 짜버리고, 숙제 해 온 산수 노트에도 빨간 줄로 커다란 엑스를 그어놓는 둥의 괘씸한 짓들을 서슴지 않았다. 난 녀석들이 미승이를 자꾸만 못살게 구는 이유도 몰랐고 미승이가 담임에게 이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미승이는 어째선지 집에 가서도 말하지 않았다. 어른들에게 고자질 한다고 해서 깨끗하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지만, 만약 걔네 부모님이 아셨더라면 그래서 학교에 한번 쯤 찾아왔더라면 선생이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신경을 써줬을 텐데. 그랬더라면 제아무리 막무가내 선중이라도 선생님 호통에 그렇게까지 함부로 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아무리 괴롭힘 당해도 울지 않고 잘 참는 미승이가 강해보였다. 가끔 혼자서 구시렁거릴망정 딱히 선중이를 심하게 욕하지도 않는 미승이가 참 착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 착한 녀석을 위해 나라도 슬쩍 담임에게 대신 고자질을 해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선중이들의 악행이 심해지자 여자아이들이 먼저 미승이를 두둔하고 나서면서 선중이를 “저 나쁜 놈! 선생님한테 우리가 다 일러줄 거야!” 하고 협박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남자 애들 중에도 “넌 툭하면 남의 반에 와서 그딴 짓이나 하고 가냐!?” 라고 선중이의 대책 없는 행동들을 비난하는 녀석들이 생겨났다. 그 바람에 선중이들은 학교에선 미승이를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미승이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협박해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꽃샘추위가 닥쳐와 갓 피어난 떡잎들을 움츠리게 할 무렵이었다.
점심시간에 학급 주전자에 물을 받으러 수돗가로 가고 있는데 무영이 녀석이 뒤따라왔다.
“희승아, 선중이랑 병식이가 너 데려오래.”
“뭐 하러?”
“할 말 있대.”
“어디서?”
“쓰레기장에서.”
“나 주전자 들고 있는 거 안보이냐?”
“그래도… 너 데려 오랬단 말야.”
“그 녀석들더러 오라고 그래.”
내가 생각해도 야무지게 딱 잘라서 거절을 했다. 무영이는 나를 긴장시키지 않는 녀석이었으므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녀석은 주춤주춤 팔다리를 꼬고 고개를 이리저리 바닥으로 훑으며 “그치만… 너 데려 오랬는데…” 라고만 작게 중얼거렸고, 난 “흥!”소리로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갔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기위해 미승이랑 가방을 챙겨 들고 나오다가 정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다. 20분 동안 흔들리는 시골버스를 타고 거기다 5분 동안 집에 걸어갈 때까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미승이에게 가방을 맡기고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하고는 도로 학교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1층 3학년 1반 교실 끝에 있는 화장실 입구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는데 그 앞에 있는 우리 반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하필 선중이랑 병식이가 교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녀석들은 나를 보자마자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앞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 나 화장실 가야 돼!”
“얘기 좀 하자.”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녀석들은 한껏 위협적인 폼을 잡으며 나랑 대화를 하겠다고 들이댔다. 난 녀석들처럼 못되게 친구나 따돌리는 녀석들과 할 얘기가 없었거니와 우선은 화장실이 너무 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녀석들을 지나쳐서 고지를 눈앞에 둔 화장실문으로 다시 달려가려는데, 병식이랑 선중이가 양쪽에서 강제로 내 팔을 낚아챘다.
“으악, 안 돼-! 놔 줘-!”
그 길로 난 학교 건물 뒤란의 소각장까지 질질 끌려갔다.
“할 말이 뭔데? 나 빨리 화장실 가야 돼. 빨리 말해!”
퀴퀴한 쓰레기와 재 냄새가 도는 시멘트 소각장 앞에서 다리를 꼬며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안절부절 하는 나랑 달리 녀석들은 느긋하게 히죽거리고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건 병식이였다.
“정희승 너, 내 말 잘 들어. 앞으로 미승이랑 놀지 마.”
“흥, 내가 니 쫄병이냐? 내가 왜 니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냐?”
“까불래? 이게 어디서 감히!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너까지 괴롭힐 줄 알아. 그러니까 대답해. 너 미승이랑 놀 거야, 안 놀 거야!?”
선중이까지 윽박을 지르고 나섰다. 요기를 참느라 짜증이 부쩍 오른 난 큰 소리로 대들었다.
“싫다! 미승이랑 놀 거야. 따돌림 하려면 너네나 해!”
“이게!”
선중이가 내 머리를 한 대 주먹으로 때렸다. 꽤나 아팠다. 옆에서 병식이도 발로 내 종아리를 때려서 또 아팠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당장이라도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쌀 것 같이 배가 팽팽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난 속으로 계속 ‘쉬야, 쉬야, 참아라. 조금만 참아라…….’ 해가며 다리를 잔뜩 오므리고 배안에 잔뜩 고인 소변이 흐를까 몸에 긴장을 듬뿍 주었다.
“너 빨리 시키는 대로 한다고 대답해. 안 그러면 집에 못갈 줄 알아.”
“나 화장실 가야 돼!”
“대답하기 전엔 못 가.”
방광이 점점 더 시큰거려 오고 소변을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에서 힘을 풀면 주르륵 새나올 것만 같아 몸을 한껏 비비 꼬며 오그리고 있었다. 난 아마도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얼른 약속 해!”
“싫어, 싫어! 나 쌀 것 같단 말야!”
내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선중이 녀석에게 마구 소리치고 저항을 하자 “너 진짜 대답 안 해!?” 이러면서 선중이가 주먹으로 내 배를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바람에 내 입에서 “안돼애!”라는 한마디 외침과 함께 팽팽하게 긴장시켰던 오줌보가 훅 느슨해졌다. 다리 사이로 따끈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이 왔다.
“어…어? 이 새끼 봐라!? 병식아, 얘 바지 좀 봐.”
“뭐야. 오줌 싸는 거야? 야, 정희승! 너 오줌 싸냐?”
“네가 갓난 애기냐? 학교에서 오줌이나 싸고. 으하하 저 모자란 놈! 저거 바보 아냐?”
선중이랑 병식이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에서 점차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바뀌며 깔깔거리는 동안 난 눈물이 막 났다.
“흐흑… 너네 때문이잖아. 흑… 내가 아까부터… 흑… 화장실 가야 된다고 그랬는데… 끅… 나쁜 새끼들… 끄흑…….”
난 흑흑거리며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었다. 창피하고 화가 나서 울음소리가 작아지질 않았다. 그토록 심하고 서럽게 우는데도 녀석들은 나한테 미안해하기는커녕, 되려 협박을 해오기 시작했다.
“쟤 저거 소문나면 창피하겠지? 안 그러냐, 선중아?”
“그렇겠지. 열라 창피해서 학교도 못 다닐걸.”
“들었지, 정희승? 나 같애도 쪽팔려서 내일부터 학교 못 나올 거다. 너 이제 어떡할래?”
멋대로 한술씩 뜨기 시작하는 병식이 놈이 밉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말로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면 개망신을 떨겠구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망신을 안당하려면 학교에 나오지 말아야 된다, 계속 학교에 못나온다, 그러면 나는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열등생이 되고 만다… 하는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눈앞을 까맣게 가리고 있었다.
“걱정 마. 소문 안 낼 테니까. 우리 친구잖냐?”
“맞아. 우린 친구지. 그러니까 앞으로 미승이 상대하지 마. 미승이는 우리 배신자니까. 안 그러면 내일 동네랑 전교에다가 너 오줌싸개라고 소문 다 내버릴 거다. 정희승이 소각장에서 바지에 오줌 쌌다고 다 떠들어버려야지.”
“나쁜 새끼들!”
“그러니까 우리 말 들으면 되잖아. 비밀 지켜줄 테니까.”
“미승이도 네가 오줌 싼 거 알면 어차피 너랑 안 놀 텐데 뭐.”
녀석들이 멋대로 떠드는 동안 몸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한편으론 머릿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대중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동네에 소문나는 것보다 학교에 소문나는 게 더 싫었고, 학교에 소문나는 것보다 미승이가 알게 되는 게 더 싫었다. 학교에서 바지를 적신 사실이 알려져선 안 되고, 미승이 앞에서 안 되고 우스운 놈이 되기도 싫었다. 그래서 녀석들의 어거지에 약속을 해 버렸다.
“어떡할래?”
“알았어…….”
“앞으로 미승이랑 말도 하지 마. 걔 쳐다도 보지 마. 내가 너네 반 찾아가서 확인할거야.”
“나도 같은 반이니까, 내가 다 감시 할 거야.”
선중이보다 병식이 놈이 더 미웠다. 내가 오줌 싼 거랑 미승이랑 안노는 거는 상관이 없는 데도 어쩌다 이지경으로 왔는지 알 수가 없엇다. 목적을 달성한 녀석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간 후에도 난 소각로 터를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눈물만 닦았다.
‘미승이가 계속 내 책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도 그제야 떠올랐지만 여전히 다리가 안 움직였다. 푸욱 젖은 바지 속을 파고 들어온 찬바람이 젖은 바지를 싸늘하게 식혀가고 있었다.
‘나 기다리다가 버스 놓쳤으면 안 되는데…….’
추울 날씨에 미승이가 날 하염없이 기다릴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미승이가 보게 되면 젖은 바지를 볼 것이고, 어쩌면 냄새도 날지 모른다. 그래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찬바람이 계속해서 젖은 바지를 휭휭 쓸고 가도록 소각장 앞에 버티고 서서 울다보니 젖은 살갗이 식어가며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우리 반 교실로 찾아들어갔다. 지나가던 선생이나 수위 아저씨에게 들킬까 불도 못 켜고 어두워질 때까지 텅 빈 교실 뒤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반 아이들의 모습도 시끄러운 수다 소리도 담임선생님도 없는 텅 빈 교실의 적막은 너무도 춥고 외로웠다. 외로워서 무서웠다. 아주 오랫동안 고개를 묻고 울었다.
그날 난 어두운 7시 막차를 타고 마을로 돌아왔다. 집에 가면 왜 이렇게 늦었냐고 엄마에게 혼날 일이 걱정되었다. 바지 속으로 슬며시 손을 넣어 만져본 허벅지는 깜짝 할 만큼 차가웠다. 봄인데도, 마치 겨울처럼 시린 바람이 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미승이가 놓고 간 가방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고 역시나 어둑해져서야 집에 돌아온 날 보자마자 엄마는 다그치기 바빴다. 그런데 훈훈한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내 바지에서 나는 지린 냄새에 엄마는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너 바지 지렸어? 이것 때문에 늦게 온 거야?”
엄마는 기겁을 하고 내 두툼한 면바지를 마구잡이로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 욕실로 데려가 온수로 덥혀지지도 않은 찬물로 서둘러서 아랫도리를 박박 씻겼다. 그러니 감기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희승아, 니 열 나나?”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놀리는 형이나 한심하게 쳐다보는 아빠랑 달리, 할머니는 내 얼굴을 쓸어 만져 주면서 괜찮다고 그깟 거 어떠냐고 말해주다가 뜨거운 볼과 이마를 다시 급하게 만지고 확인했다. 학교에서 빠져나와 막차를 타기 위해 바깥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서성거리던 시간부터 이미 열은 나고 있었다. 게다가 하도 울고 우울해서 진도 다 빠져버린 상태였다. 할머니가 깔아준 이불 위에 가서 푹 넘어졌다. 한밤중에 불 꺼진 방 안에서 나처럼 잠들지 못하는 할머니의 손바닥이 이마에 와서 몇 번이나 열을 재가며 “아이고 우리 가여븐 새끼” 하고 애틋해 하는 동안에도 내가 느끼는 건 오직 겁나고 슬프다는 것뿐이었다. 선중이들이 나를 놀림감으로 만들까 겁났고, 미승이랑 안 놀겠다고 약속해버렸다는 사실이 슬펐다.
다음날엔 할머니는 나더러 열이 나니까 학교를 쉬라고 했다. 엄마도 내 다리가 휘청거리는 걸 보더니 어깨에서 가방을 벗기고 방에 도로 이부자리를 펴주었다. 두툼한 요와 이불 사이에 들어가 천정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미승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희승아, 학교 가자.”
“미승이구나. 희승이 오늘 아파서 학교 못 간다.”
“희승이 아파요?”
“감기 때문에 열이 심해. 그러니까 네가 가서 담임선생님한테 희승이 오늘 결석이라고 대신 말해줄래?”
“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와 미승이의 대화가 끝난 후에도 미승이가 금방 가는 기색은 없었다.
“미승이 넌 빨리 학교 가야지. 조금 있으면 버스 올 시간이다. 너 버스 놓치겠다, 얘. 얼른 가!”
재촉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미승이의 발소리가 대문을 넘어 사라졌다. 미승이는 버스 정류장에 내가 보이질 않아서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언젠가 약속했던 대로 녀석은 잊지 않고 나를 데리러 와 준 것이었다. 엎어져서 베개 속에 고개를 푹 파묻자 열에 들떠서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미승이는 방과 후에도 우리 집에 들렀다.
“아직도 많이 아퍼?”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미승이는 책가방을 벗어두고 내 이마에 얹혀진 물수건을 만져보고 내 이마를 만졌다.
“하나도 안 차갑네. 미지근해졌다.”
이러고는 물수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수돗가에서 물 트는 소리, 철벅대는 수건과 물의 마찰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에 다시 물수건을 들고 돌아온 미승이가 내 이마에 손을 얹었을 때, 그 작은 손이 빨갛게 차가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 새로 적셔온 물수건을 얹자 머리카락과 귓가로 찬물이 주르륵 몇 줄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어린애의 손힘이라 헐겁게 비틀어 짠 물수건에 물기가 너무 흥건했다.
“선생님이 문제 풀어오라고 프린트 숙제 내줬는데, 내가 가져다 너 주려고 했어. 그런데 병식이가 지가 가져다주겠다면서 선생님한테 가서 먼저 챙겼어.”
“…….”
“참, 어제 너 왜 금방 안 왔어? 어디 갔었어? 너 한참 기다렸는데. 나 5시 버스 타고 왔단 말이야. 혹시 너 먼저 집에 와 있나 해서 와봤는데, 넌 집에 안 왔대고…….”
녀석은 내가 타고 온 막차 직전의 버스를 탈 때까지 밖에서 계속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하도 기다려도 안 오길래 교실이랑 화장실도 찾아다녔다고 했다. 내가 소각장에 가 있던 동안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어제도 아파서 그랬어?”
걱정 실린 미승이의 목소리 때문인지, 난 눈시울에 뜨거운 열이 올랐다. 기분이 울먹하고 아팠다.
“울지 마. 다 나으면 안 아플 거야.”
다정하게 위로를 하며 미승이는 내 옆에서 종알종알 계속 떠들었다. 열 때문에 정신이 뱅뱅 돌아 녀석이 무슨 얘길 했는지 다 기억을 못한다. 내가 흐릿한 정신에 “병식이랑 선중이랑… 그래도… 몰래 놀면 돼…….” 라고 말 했던 것 같다. “응. 우리끼리 몰래 놀자.”라는 말과 함께 빨리 나으라며 녀석이 내 얼굴에다 뽀뽀를 했던 건 기억이 난다. 내가 “너도 감기 걸려…….” 라고 했더니, “난 건강해서 감기 안 걸려.” 라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미승이랑 몰래 몰래 어울리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새털처럼 가벼운 고만큼의 의리조차 손쉽게 쪼개져 버린 건 그로부터 몇 시간도 안 되서였다.
미승이가 돌아가고 난 후 다시 한잠에 들었다 깨었을 때 어둑한 시간에 병식이가 혼자서 나를 찾아왔다.
“너가 학교 빠져서 내가 가져다 준거야.”
녀석은 프린트물 한 장 가져온 것으로 생색을 내고 있었다.
“아까 미승이 왔다 갔다며? 너 걔랑 안 놀겠다고 약속했잖아.”
“근데 왜 미승이랑 놀면 안 되는데? 걔가 잘못 한 것도 없잖아.”
“나한테 잘못한 건 없지만…, 그치만 선중이가 미승이 때문에 아빠한테 맞았잖아.”
“미승이땜에? 왜?”
“나도 그것까진 몰라. 아무튼 난 미승이 놈 싫어. 그 자식 여자애들한테 인기 좀 있다고 잘난 척이나 하고, 장난감 나눠 주면서 부자인 척이나 하고. 계속 재수 없었어.”
병식이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미승이가 여자애들한테 인기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속으로만 조금씩 질투했었던 일이지만, 그게 녀석이 미워질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미승이가 장난감을 나눠줄 때마다 선중이 못지않게 욕심껏 챙겨들던 병식이 녀석이 어째서 이제 와서 미승이가 부자인척 했다는 둥 비꼬는 건지 이해가 안됐다. 이래저래 헷갈려 하면서도 생각 짧고 주체성이 모자랐던 나는 ‘어쩌면 그럴 수도…’라고 억지로 이해하려고 했다. 납득이 쉽지는 않았다. 그 순간 병식이의 말 속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던,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감정이 콤플렉스라는 것은 한참 나중에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난 미승이 싫지 않은데…….”
“흥, 그럼 뭐하냐? 또라이 같은 놈인데.”
“미승이가 어디가 또라이냐? 병식이 너보다 공부도 잘 하는데.”
병식이는 ‘공부’ 소리가 나오자 인상을 쓰더니 다시 슬그머니 음흉한 웃음을 띠우고 날 놀리듯이 쳐다봤다.
“이건… 나만 아는 비밀이지만 말야. 아마 이 말 들으면 니가 나보다 더 걜 싫어하게 될 걸.”
“……?”
“힛. 가르쳐 줄까? 걔가 왜 또라이인지…….”
궁금증만 북돋워놓고 뜸을 들이던 녀석은 다시 히죽거리며 요 아래 발을 끼워넣고 앉았다. 그리고는 “너 미승이 교과서에 낙서 봤지? 기억나?” 하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두 개랑 꼬불꼬불 선을 그렸다. 어떤 낙서를 말하는지 단박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왠지 모를… 끈끈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낙서였기 때문에.
“그거 그냥 가짜 낙서가 아냐. 진짜로 미승이가 했던 거야.”
“미승이가 그렇게 뽀뽀했다고?”
“그래.”
“그게 뭐……?”
전에 몇 번이나 미승이의 뽀뽀를 받아봤고 처음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한동안 녀석을 께름칙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결국엔 원래 녀석이 뽀뽀를 좋아하는가보다 하고 맘 편하게 생각을 돌려버린 나였다. 그런데 눈앞의 병식이 표정이나 아른거리는 낙서가 또 다시 찜찜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겨울 방학 때 썰매타고 놀다가 미승이네 갔던 날 알지? 우리 다 같이 있었잖아. 다 같이 걔 방에서 잤었고.”
“응… 기억나.”
“그때 애들은 다 잤지만 난 안 잤어. 미승이도 안자고 있었어. 그 자식은 내가 자는 줄 알았겠지만…….”
목소리는 차츰차츰 은밀하게 이어졌다. 병식이는 그날 오후 목이 아파서 잠들지 못하고, 어둑한 방 안에서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만 뜬 채 가만히 누워있었다고 했다. 내가 ‘쫑아야…’어쩌고 흥얼흥얼 잠꼬대 하며 우는 소리도 들렸다고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미승이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앉더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란다. 병식이는 전부터 미승이를 수상쩍게 보아왔던 터라 녀석을 곁눈질로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미승이가 내 위로 고개를 내리더니 잠시 후에 희미하게 할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란다. ‘저 놈이 무얼 하나’ 하고 들여다보기 위해 소리 안 나게 일어나 앉았더니 … 아 글쎄, 미승이가 내 얼굴을 핥고 있더란다. 한순간 제 눈을 의심했지만 진짜로 그냥 입술만 대는 뽀뽀가 아니라, 혀를 내밀어 내 입술이랑 뺨을 핥고 있더란다. 그 바람에 ‘헉’ 하는 소릴 내자 놀란 미승이가 고개를 돌리다 병식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고 했다. 둘 다 놀라서 아무소리도 못 내고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고 했다. 그날 후로 병식이는 미승이에게 한 마디도 안 걸고 그 얘기도 꺼내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이다.
“놀랐냐?”
“…….”
놀라울 뿐만 아니라 부끄럽게 하기에 한 톨의 부족함도 없는 이야기였다. 끔찍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날 나른한 오수 속에서 꾸었던 축축한 꿈과, 교과서의 낙서에서 배어나오던 조악한 꿈틀거림과, 병식이의 끈적거리는 목소리에서 그려지는 광경의 질감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날 부들부들 떨게 했다. 감기가 더 심하게 도질 것만 같았다.
“자, 이제 내가 그 새끼를 또라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지? 뻥 아냐. 전부 다 사실이야. 내가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거니까.”
“…그, 그거, 너 말고… 또 누가 알아? …선중이랑 무영이도 알아?”
“아직은 몰라. 나 혼자만 알고 있었으니까. 암튼, 내가 너 생각해서 얘기해 주는 거니까 미승이랑 놀지 마. 이젠 너도 미승이랑 놀기 싫어졌지? 그치?”
“…….”
그 순간의 기분으론 미승이랑 놀기 싫어지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 때문에 녀석이랑 절교까지 해야 하는지는 약간 아리송했다. 병식이는 그런 내 망설임에 못을 박는 한 마디를 더 열었다.
“그리고 어차피 전학 갈 녀석인데, 친해지면 뭐하냐. 지금 끊어지나, 나중에 끊어지나-.”
“미승이가 전학 가? 언제?”
미승이의 전학 얘기가 금시초문이라 눈을 바짝 뜨고 묻자, 병식이는 애매하게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줄줄이 말을 쏟아냈다.
“언젠진 몰라. 하여간 가긴 갈 거야.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어. 다른 아줌마랑 아저씨들도 그러더라. 원래 미승이네는 서울서 살다 왔잖아. 그놈이 거기서도 공부 잘했기 때문에 나중에도 좋은 대학 가려면 걔네 부모가 서울로 데리고 갈 거랬어. 그런데 지금은 할아버지 재산 물려받으려고 시골 와 사는 척 하는 거래. 그러니까 걔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땅이랑 돈이랑 다 받으면 그거 갖고 서울로 도로 이사 갈 거랬어. 그러니까 그 자식 가고 나면 우리 동네나, 우리들 같은 거 금방 까먹어버릴걸. 저 같은 희멀건 놈들이랑 새로 친구하고 놀겠지. 근데 뭣 하러 그딴 놈이랑 친하게 지내냐?”
떠들거 다 떠들고 나서야 천식기가 오르는지 녀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잔기침을 해대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병식이의 이야기는 날 이중 삼중으로 낙담시켰다. 무엇 하나 허튼소리 같지 않다는 게 더 문제였다. 다음날 학교를 쉰 나를 미승이가 또 병문안이랍시고 왔을 땐 잠든 척 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요새 미승이네 할아버지가 꽤 편찮으시다던데. 쉽게 일어나실 것 같지 않은가 봐요.”
“하기사… 그 양반도 연세 꽤나 드셨으니 언제 가셔도 이상할 거야 없지. 아무래도 환절기 날 때 노인들이 기가 많이 약해지니까.”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땅도 대부분 장남인 미승이네가 물려받을 거잖아요. 그거면 사는 데 평생 지장 없을 텐데.”
“아, 지장 없는 정도겠어!? 그 집 서평리 땅만 팔아도 서울서 살만한 아파트 한 채는 너끈히 장만할 수 있다는데. 전부터 그 집 땅 좀 팔아달라고 부동산 업자들이 발이 닳도록 왔다 갔다 했잖어. 근데도 그 노친네, 알짜배기 땅 꼭꼭 묶어두고서 어찌나 아끼고 살았는지-.”
“그럼… 그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미승이네가 땅 물려받게 되면… 그 집, 도로 서울로 가서 살려나?”
“글쎄. 미승 애비가 여기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 당장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 하지만 서울서 자리가 생긴다면야 서울로 가는 게 당연하겠지.”
“그렇겠죠.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그만한 땅 이랑 돈 생겨도 서울 살이 못하겠지만…….”
“못하긴 왜 못해? 돈이 사람을 만드는데, 돈만 있으면 어디 가서든 못 살까.”
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다 안방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엄마 아빠의 대화를 들었을 때 병식이의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라고 실감하게 되었다. 미승이가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한 것도 문제였지만, 미승이가 떠나게 된다고 생각하자 녀석이랑 쌓아온 시간과 감정들이 모두 허전하고 부질없이 생각되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녀석이랑 계속 친구를 했더라면 나중에 녀석이 떠난 후에 나만 혼자 녀석을 계속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 혼자만 녀석을 기억하게 되는 건 싫었다. 차라리 병식이를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게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난 밉든 곱든 예전처럼 선중이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하룻밤 더 잔열이 끓고 나서 사흘 만에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유산이나 들먹거리던 사람들의 입초사 탓이었을까, 아니면 꽃샘바람이 홀로 지나가기 외로워서였을까? 꽃샘이 지나가던 막바지에 미승이네 할아버지는 정말로 돌아가셨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시기 며칠 전에 상당한 임야와 논마지기에 예금과 보험금들을 대부분 장남인 미승의 아버지에게 상속하고 타 지역에 나가 사는 딸과 막내아들 현구에게는 팔면 작은 장사밑천 정도만 나올법한 땅을 주고 갔단다.
그 바람에 장례식 와중에 현구가 술에 떡이 되서 소란을 피운 소문이 동네에 자자하게 흘렀다. 내가 할머니랑 엄마 아빠를 따라 미승이네 집 장례식에 갔던 날에도 현구가 웃옷을 풀어헤치고 한 손으로 병나발을 불어가며 아우성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하이고 아부지 꽃 피는 춘삼월도 못보고 가신 우리 아부지이! 흐어엉 아부지……. 흐흑… 근데… 아부지는 왜 나만 미워하셨나-. 형이 뭐 잘한 게 있다고- 형만 이뻐하셨나. 끄흑, 내가, 내가 우리 아부지 모시고 이 시골 땅서 농사짓고 살았는데, 끅, 내 청춘 다 바치고 살았는데… 우리 아부지는 어쩌자고 날 빈털터리로 만들고 가셨냐고요? 왜 형만 다 주고 갔냐고요? 네? 아저씨! 아저씨가 말 좀 해보세요. 우리 아부지는 어째 날 주워온 자식마냥 미워하셨지? 하이고 아부지 불쌍한 우리 아부지 어쩌자고 벌써 돌아가셨어요…….”
때는 바야흐로 춘삼월을 이미 훌쩍 지나고 꽃도 피었는데, 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픈 건지 아니면 땅을 조금밖에 남겨주지 않아서 슬픈 건지 오락가락하는 현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하소연을 해댔다.
그러면 마을 어른들은 “아무렴, 아무렴, 자네가 아버지 모시고 산 효자인 거 우리가 다 아는데-. 너무 슬퍼 말어. 자네 아버지도 저기 하늘에서 다 보고 계실게야.”라며 별로 맘에 담기지 않은 말들로 현구를 토닥이고 달랬다.
나도 마당에 깔아놓은 돗자리에 앉아 육개장과 부침개를 먹으면서 현구의 넋두리랑 술주정을 구경했다. 재미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불쌍하기도 했다. 내가 들어도 미승이네 할아버지가 현구에게 박정한 것 같았다. 오죽하면 현구가 나한테까지 와서 양팔을 붙들고 “희승아, 니가 봐도 우리 아버지가 날 미워하시지 않았냐? 미승이 할아버지가 저 미승이놈만 이뻐하고, 날 미승이보다 못한 놈 취급하지 않았냐고!?” 할 때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엄마한테 허벅지를 꽉 꼬집히고 아빠한테도 세게 쥐어박혔다. 아저씨들도 당황해서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엉뚱한 하소연인가? 자, 저리 가서 우리랑 한 잔 하자고-.”라며 부랴부랴 현구를 나한테서 떼어 데려갔다.
엄마가 저녁밥 짓기 귀찮아해서 장례식 밥 먹으러 억지로 끌려왔던 나는 밥을 먹자마자 집으로 가려고 했다. 미승이 할아버지의 장례식인데, 그런 날 녀석이랑 마주치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방안에 들어가 할아버지 상을 지키고 있는 녀석이 나오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떠야겠다고 서둘렀다.
그런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신발을 더듬더듬 신고 있을 때 하필 녀석이 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당에 사방 전등을 켜놓아서인지, 녀석의 작은 몸에 헐거워 보이는 누런 베 상복차림 때문인지, 미승이는 여느 날보다 창백하게 탈색된 듯 보였다.
마당 자리엔 나 말고도 무영이랑 병식이도 와 있었는데, 미승이는 걔들 쪽은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나한테로 걸어왔다. 속으로 ‘낑…’ 소리가 날만큼 난처했다.
“밥 먹었어?”
하얗게 지친 얼굴이 울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인데 녀석은 차분한 목소리로 나한테 예의부터 갖췄다. 자기네 장례식 밥 잘 먹었느냐고-. 모로 보나 미승이가 현구보다 훨씬 상주다웠다. ‘너도 밥은 먹었니?’라고 물어줄 정도의 주변머리는 내게 없었다. 고작 대답이라고 한 것이“집에 갈 거야.”였다.
“조금 있다가.”
“지금 갈 거야.”
“내가 저기까지 바래다줄게. 밖에 지금 어두워.”
“싫어 안 그래도 돼.”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은 채 부랴부랴 대문턱을 나서는데 미승이가 쫓아 나오면서 팔소매를 잡았다. 나랑 미승이를 문턱 밖으로 뱉어놓은 무거운 나무 대문이 ‘끼익’ 울음소리를 내며 닫히다 말고 좁은 틈을 벌려 집안 풍경을 내보였다. 대문가에 달린 붉고 노란 종이 등불이 집과 마당 안에서 웅성이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조문객들의 소리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음울한 빛을 쏟아 넣었다. 종이등 밑에 선 미승이의 마른 눈시울도 조그만 불처럼 붉었다.
“너 요새 또 나 무시하더라. 말 걸어도 자꾸 피하고-.”
“…….”
“선중이네 때문에 그러냐? … 걔들이 나랑 놀지 말래? 걔네가 너까지 못살게 굴까봐 나랑 안 노는 거야?”
혼자서 생각도 많이 했는지 미승이는 내가 저를 피하는 이유를 한 가지는 맞췄다. 나는 맞았네 틀렸네 말도 안하고 ‘이유는 그거 말고도 또 있어.’라고 속으로만 되새겼다.
“…그래도 약속했잖아. 나랑 몰래 놀 거라고 그랬잖아. 네 입으로 말 해놓고 약속 안 지킬 거야?”“…….”
“그럼 난 뭔데? 내가 너한텐 마음대로 붙였다 떼었다 하는 친구냐? 내가 스티커냐?”
차마 눈을 피하지는 못하고 눈꺼풀만 끔뻑끔뻑 되도록 녀석의 눈을 조금만 보려고 노력하는 내 태도가 답답했는지 미승이의 목소리가 점점 앙칼져졌다. 미승이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간이 작게 오그라들어 도근도근 겁에 질린 난 입속에 묻히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미안…….”
“나쁜 놈.”
미승이는 ‘콰광’소리 나게 대문을 완전히 다물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이 끝내 나한테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하게 되다니… 은근히 충격이었다. 대문의 검은 쇠고리가 철컥거리며 흔들리는 모양이,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미승의 마음 같아 씁쓸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한동안 현구는 울적한 모양새로 마을을 배회했다. 그런 현구를 보면 마구 위로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미승이네 부모에게 친절하고 간곡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속으론 미승이네 아빠보다 어수룩한 현구를 더 좋아했다. ‘제 형과 닮지 않은 동생’이라고 현구의 미숙함을 흉보면서도, 불쌍하고 미숙한 현구에게 한결 친근감을 가지던 어른들의 이중성은 어린 내 눈에도 여과 없이 드러났다.
미승이도 현구보다는 조용하게 침울했다. 원래도 나대지 않고 조용한 편이었던 미승이는 그 후 점점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성격만 침체된 게 아니라, 녀석의 외모까지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녀석의 화사하고 밝은 외모를 부러워했던 시절이 의아할 만큼 평범해 보였고 게다가 따돌림 당하는 아이답게 시들시들 가라앉아 청승맞아 보였다.
그런데도 난 의리를 지키긴 커녕 위로 한마디도 해 주지 못하고 미승이랑 거리를 두었다. 선중이랑 병식이 앞에서 오줌을 싸버렸을 때, 병식이에게서 미승이의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앞으로 미승과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줌싸개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학교에 다녀야했고, 학교에서 집까지 매일 매일 오가는 길목에 선중이들과 마주치지 않을 방법도 없었고, 마을에 들어서면 선중이는 우리들의 ‘기준’이었으니까. 그리고 미승이가 나한테 가까워지는 것도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러니… 미승이가 끝끝내 전학을 가지 않은 건 내 심사를 곤죽으로 만들 노릇이었다. 그나마 반이 갈라진 덕분에 수업 중에 미승이랑 어울릴 일이 없었기에 마음을 놓고 지냈다. 우린 등하굣길에 전처럼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일도 드물었다. 미승이는 아침에 저희 아빠가 출근하는 길에 같이 그 차를 타고 학교에 일찍 등교했고, 방과 후엔 컴퓨터 학원을 다니느라 우리보다 늦은 시간대 버스를 타고 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얼마 후 옆 반과 합동 체육 수업을 하게 되어 미승이네랑 우리 반 아이들이 뒤섞여 여자아이들의 피구 시합이 끝나고 나서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했다. 병식이가 축구공을 몰고 골 지점을 향해 뛰어가고 나도 곁다리로 쫒아가던 중에 미승이가 병식이 옆으로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나 전학 간다는 소문 돌았었다며?”
내 달음질 보다 한두 폭 앞선 미승이의 나직하고 빠른 말소리가 들려왔을 때 병식이는 흠칫 놀라며 공을 놓쳐 버렸고 나도 미처 공을 간수하지 못했다. 미승이네 반 아이가 공을 빼앗아 반대편 골로 몰고 가는 동안에도 멍청히 그 자리에 서버렸다.
“어떡하냐? 나 전학 안 가는데. 너 앞으로 나 보기 껄끄럽겠다.”
병식이를 쏘아보고 가면서도 미승이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병식이가 잔뜩 일그러진 입 속으로 뭔가 중얼거리며 마지못한 뜀박질로 공을 쫒아가는 동안 나 역시 미승이의 말이 맴돌아 기분이 묘하게 안 좋았다.
그리고 그날 방과 후에 미승이는 우리랑 같이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컴퓨터 학원을 빼먹은 건지, 어떤지 우리 옆에 꼿꼿이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도착해서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들이 우르르 올라탔을 때 병식이가 자리를 차지하러 앞서 달려간다 싶더니, 갑자기 도로 앞문으로 되돌아가 마침 버스에 오르려는 미승의 가슴을 발로 밀어 찼다. 그 바람에 미승이가 도로바닥으로 발랑 나자빠졌다.
“이 녀석들아, 무슨 위험한 짓이야!?”
버스기사 아저씨가 소리를 치는데도 아랑곳 않고 병식이는 미승이가 다시 버스에 오르려는 걸 방해했다.
“넌 다음 차 타고와.”
낮에 체육시간 일에 대한 심술인지 미승이에게 적극적으로 못되게 구는 병식이를 보면서 선중이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려버렸을 뿐이고 무영이는 나처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난 병식이를 욕하지도 못하고, 선중이랑 무영이에게 미승이도 같이 버스 타게 하자고 차마 말도 못했다. 고작 문을 닫으려는 기사 아저씨에게 “아저씨 잠깐만요” 외치고 버스에서 내려버린 게 고작이었다.
“어, 야! 정희승. 넌 왜 내려!?”
버스 창을 열고 소리치는 선중이를 무시하고 돌아서버리자, 기사 아저씨가 뭐라고 툴툴대며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미승이가 넘어진 자리들을 살펴보며 옷을 탈탈 털고 있는 것을 보며 뻘줌히 서 있다가 고개를 든 녀석이랑 눈이 마주쳤다.
“넌 왜 안 갔어?”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가 나도 내가 왜 내렸는지 모르겠으니까. 꼭 녀석이 걱정돼서만도 아니고, 그 와중에 녀석을 내버려두고 가기엔 꺼림칙하고 불편했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체육시간에 미승이가 병식이에게 한 말을 듣고 살짝 쫄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버스 올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릴 생각을 하니 곧 후회가 됐다. 마을까지 가는 다음 버스를 타려면 족히 시간 반은 넘게 기다려야 하는데……. 미승이와의 사이에 두어 사람 앉을 자리를 띄어 두고 정류장 의자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오락실 갈래?”
기다리던 중에 미승이가 내 팔 옷깃을 툭 잡아 당겼다. 버스가 오려면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했고, 속 없는 나는 오락실이란 말에 내 귀가 쫑긋했다.
잠시 후 우리는 찻길 건너편 만화방 옆에 있는 오락실에 들어가 둘이서 보글보글 기계 한 대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지내자, 희승아.”
화면에서 눈을 못 떼고 스틱과 버튼 위에 올린 양 손으로 쉴 새 없이 누르고 흔들며 방울, 점프, 방울, 점프를 해대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나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제대로 새겨듣지도 않고 “어.” 해버렸다.
“그럼 계속 친구지? 그럼, 너 선중이네보다 나랑 친하게 지내.”
“뭐가?”
미승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을 땐 화면 위에서 떨어지던 주황색 사탕 한 개를 놓친 후였다.
“방금 전에 나랑 친하게 지내자고 하니까 ‘어’ 했잖아.” 하고 녀석이 눈썹을 찡그릴 때에서야 내가 건성으로 대답했던 직전의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근데… 난 선중이랑 더 친하단 말야. 어떻게 걔네보다 너랑 더 친하게 지내냐? 걔네가 더 오래된 친군데.”
내 나름대로 열심히 변명거릴 찾았다. 그러나 미승인 하나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오래됐으면 무조건 젤 친한 거냐? 선중이 녀석은 제멋대로 굴잖아. 되게 못됐고, 너한테 잘해주지도 않잖아.”
“그래도…….”
내 변명이 놈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어쨌건 난 미승이의 접근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럼 걔네랑 안놀 땐 나랑 놀아.”
양보하는 척 타협안을 내놓는 녀석이 더 부담스러워졌다.
“그건 안 돼.”
난 고개를 돌려 다시 사탕을 잡아먹기에 힘썼고, 덕분에 스틱에서 손 놓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던 미승이를 가뿐하게 이겨버렸다.
버스에서 녀석이 앉은 자리에서 일부러 건너편 자리에 앉아버렸는데, 버스가 동네 어귀로 들어설 즈음에 미승이가 얼른 내 뒷자리로 옮겨 앉아 어깨 너머로 말을 걸어왔다.
“내일… 내 생일인데 우리 집에 올래? 우리 엄마가 맛있는 거 해 줄 거야. 와서 같이 먹자.”
“선중이랑 무영이도 와?”
“아니. 걔들은 안 불렀어. 너만 초대하는 거야.”
“그럼 나 혼자 가야돼? 딴 애들도 없는데?”
“다른 애들은 부르기 싫어.”
내가 유일한 초대객이라고, 다른 애들은 아무도 안 부른다고 또렷하게 말하는 녀석에게 기분이 언짢아졌다. 게다가 내가 알기론 녀석의 생일은 여름인데―나보다 세달 후에 태어났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어째서 빤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싫어. 걔네들 없으면 나도 안 갈래.”
“넌 선중이네가 있어야만 놀 수 있냐? 걔네 없으면 넌 놀지도 못하겠네?”
녀석이 날 빈정거리는 통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상관 마. 찐따 같은 네놈 생일 따위엔 안 간다.”
난 미승에게 하고 화를 내고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한마디도 더 하지 않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