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7)

9살 가을 

예전의 마을 어른들은 들로 산으로 여러 가지 나물과 열매들을 채집하곤 했다고 하는데, 특히 두릅이니 고사리니 쑥이니 하는 나물들부터 머루나 다래 같은 열매들까지 손수 따다가 이웃과 나누어 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아저씨들도 나이가 들어 할배가 되자 들로 멀리 다니지도, 산으로 높이 오르지도 않게 되었다. 

시절이 바뀌어 이제 마을의 젊은 청장년층들도 저마다 바쁘게 사느라 그런 소일거리엔 관심을 끊었고 그런 것들을 채집하러 다니는 이들도 사라지다 보니 이제는 산 속 깊이 다니는 사람조차 드물어졌다.

그런데 미승이네 삼촌 현구만은 달랐다. 

그는 봄과 가을엔 두릅, 고사리, 더덕 같은 산나물을 채취해서 가끔 장에 내다 팔아 용돈을 챙겨 쓰곤 했는데, 옛 어른들보다 산과 숲의 몫 좋은 채집 자리들에 빠삭해진 현구는 어느덧 동네에서 가장 산속 지리와 동물들의 서식처를 잘 아는 사람?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현구가 칼칼한 성격에 맞지 않게 자연을 사랑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겨울엔 엽총을 들고 덫을 놓고 다니면서, 작은 새나 귀여운 동물들을 잡아다 손수 가죽을 벗겨 화톳불에 구워먹는 놈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현구는 특히 산을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며 송이 채집을 위해 바빠졌다. 귀한 만큼 값도 비싸다 보니 자연산 송이는 그의 용돈 벌이에서도 가장 쏠쏠한 몫을 차지하는 품목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딴 건 몰라도 송이가 나는 터만큼은 궁금해했다. 

그렇지만 이제 자연 송이들이 나고 자라는 위치는 이젠 마을에서 현구 외엔 아는 사람이 없었고, 현구가 제 돈줄 되는 자리를 남에게 알려줄 리도 없었다. 몫이 좋은 자리 근방에 그 혼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겨놓고 다닌다고 들었고, 산에 오를 때도 남이 보거나 뒤따라올세라 조심스레 다니곤 했다. 

이렇듯 시대를 역행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구는 마을의 산야들만 휘휘 돌며 자급자족을 하고 살아가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많은 나물과 버섯을 캐다 팔아먹는다 하더라도, 푼돈만으로는 충분한 자급자족이 될 리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제 아버지 즉, 미승이네 할아버지에게서 용돈을 받으며 사는 백수였고,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 일 할 욕심도 가지지 않았다. 

농협에서 대출 담당 일을 맡게 된 미승이네 아버지나, 아직은 아슬아슬한 연줄이 남아있는 할아버지가 아는 사람의 인맥을 통해 현구에게 몇 번인가 직장을 소개시켜 준 적이 있다는데, 그는 기껏 얻어준 직장도 매번 몇 개월 못 다니다 그만두고 다시 두릅 채집이나 토끼와 꿩잡이에 나서곤 했던 것이다. 

시골의 자연을 벗어나서는 버티질 못하는 체질의 청년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말해 게으르고 이기적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집이야 땅도 제법 있겠다, 먹고살 걱정은 없으니까 저리 살 수 있는 게지.” 라며 수런수런 하고 넘어갔지만, 미승이네 아빠는 자기 동생을 무능한 녀석으로 취급하며 “언제까지 저러고 살려는지….”라며 혀차는 소리를 내곤 한다고 했다. 미승이네 할아버지의 욕설과 넋두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선중이가 모처럼 우리 세 명을 이끌고 미승이네 가서 놀자는 바람에 나도 미적미적 따라가 익숙한 미승이 방에서 놀았던 날이다. 

마침 현구는 집에 들렀다가 도로 마을 주막거리에 술을 마시러 나간 참이었다. 

그날도 미승이가 제 장난감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자 선중이들은 깨춤을 추며 받아들었다. 그러나 나는 미승이가 준 병아리 키우는 장난감을 슬그머니 상자 속에 도로 넣었다. 

“너, 이거 안 가져갈 거야?”

언제 봤는지 미승이가 다시 그 조그만 다마고치를 집어들고 내게 물었다.

“우리 집에도 닭이랑 병아리랑 다 있어.”

내가 손수 집의 병아리랑 닭을 키우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장난감 병아리 밥 주고 씻겨주는 놀이가 탐탁지도 않았다. 

그랬다. 난 미승이에 대한 경계심이 아니라, 단지 욕심 나지 않는 장난감이라 가져오기 귀찮았을 뿐이다. 

그런데 미승이는 그 노란색 장난감을 들고 나한테 “왜 안 가져가?”라고 따지듯이 물었다.

“희승이 너, 안 가질 거야? 그럼 그거 나 줘.”

옆에서 병식이가 한 손에 든 탱크로도 모자라는지 더 욕심을 부렸다. 

미승이는 대번에 병식이에게 그걸 줘버렸다. 

“나도 그거 갖고 싶었는데.” 

앰뷸런스 차를 든 무영이가 부러운 소릴 내자, 병식이는 그 다마고치와 무영이의 차를 바꾸자고 들었다. 

그리고 무영이는 넙죽 바꾸려다 마음을 바꿨다. 아무래도 앰뷸런스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미승이는 아이들이 노는 양을 무표정하게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미승이를 떼어놓으려고 기를 복복 쓰는 모습에 미승이가 나한테 화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나한테 은근히 심통을 부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에 난 괜한 서운함에 기운이 가라앉아버렸다. 

그런데 미승이가 다시 나한테 고개를 돌리면서 “그럼 다른 거 가지고 싶으면 골라봐”라고 말했을 때에서야 미승이가 나한테 얄궂은 맘을 품은 건 아니란 걸 알고 안심했지만, 선뜻 ‘이거 가질래!’ 하고 장난감 상자를 뒤적일 기분도 아니었다. 

난 고개만 도리도리 젖고 미승이랑 나란히 벽에 등을 세우고 앉아 서먹서먹하게 선중이네가 노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나 집에 밥 먹으러 가야 돼.”

얼마 후 무영이가 저녁밥 먹으러 가야 한다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제일 먼저 미승이네를 떠났을때, 시계는 6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무영이네는 저녁밥 시간이 빨랐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에 무영이가 가자마자 우리도 이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대문 칸에서 어정대며 미승이네를 떠나려고 할 때 미승이가 “좀 있다 가.”라며 내 소매를 잡아챘다. 그리고 선중이랑 병식이랑 무영이가 다 돌아갈 때까지 내 소매를 붙잡고 있다가 녀석은 마루 쪽으로 몸을 돌렸다. 툇마루 기둥 옆에는 송이가 한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있었는데, 낮에 현구가 캐다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미승이는 그 바구니 속에서 버섯을 잔뜩 집더니 내 손안에 담아주었다.

“집에 가서 먹어.”

난 뭐라 말도 못하고 양손의 부피를 넘치게 받아든 송이버섯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며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짧아진 가을 해의 끄트머리 빛 아래서 나는 버섯을 하나라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오면서도, 뭐 이런 걸 주면서 미승이 녀석이 저리 뿌듯한 표정을 짓나 의아해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주었을 때, 엄마는 미승보다 더 얼굴을 활짝 펴고 엄청나게 반겼다. 

내가 아닌 버섯을 말이다.

그날 저녁상엔 얇게 저며진 구운 송이가 바닥에 깔린 접시와, 다진 송이를 넣은 된장찌개가 올라왔다. 아빠가 할머니의 밥그릇에 얹어드린 구운 송이를 할머니는 도로 내 밥 수저 위로 올려주며 “우리 희승이 마이 묵고 마이 커야지.” 이러셨다. 

난 뭐가 좋은지도, 뭔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지만 엄마와 형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연산으로 이만한 크기가 나오기도 참 귀할 텐데요.”

“그쟈? 거 찾기도 쉽지 않았을 거인데.”

난 고작 버섯 몇 개 가지고 그 정도로 반응하는 엄마랑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가 “미승이네 가서, 아줌마한테 어제 송이 잘 먹었다고 인사드리고 와.”라면서 내 손에 쥐여준 거위알 한 바가지를 들고 미승이네 또 가야만 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는 바람에 엄마는 미승이네 엄마가 송이를 나눠 준거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미승이네 도착했을 때 난 당황스런 장면을 목격했다. 그 집 대문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마당에서 현구에게 쥐어 박히고 있는 미승이와 호통치는 현구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눔 자식아! 이 삼촌이 허벌나게 산 뒤지고 손에 흙 묻혀서 열심히 따온 걸 그렇게 퍽퍽 집어가? 그것도 젤 굵은 놈들로만 집어갔드만. 대체 네가 그걸로 뭘 한 건데? 혼자서 날로 삼켰냐? 그게 장에다 내다 팔면 얼마친 줄이나 알아?”

입을 꾹 다물고 쥐어 박힌 머리만 손으로 누르고 있던 미승이는 뻘쭘하게 보고 서있던 내 눈과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녀석이 목까지 빨개진 걸 보니 왠지 나까지 창피해질 것 같았다.

“희승이? 넌 또 뭔 일이냐?”

현구가 날 발견하고 뱁새눈을 풀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 엄마가….”

“니네 엄마가 뭐?”

현구가 산 뒤지고 흙 묻혀서 따온 그 굵은 송이들을 미승이가 나한테 줘서 우리 집 식구들이 어제 맛나게 먹은 대가로 거위 알을 가져왔다고… 차마 내 머리 속으론 정리도 안 되고 설명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다행이도 미승이네 엄마가 부엌에서 나왔다.

“희승이 왔네? 왜 그러고 서 있어?” 

난 아줌마한테 대답 대신 주황색 바가지를 내밀었다.

“어머나, 거위 알이잖아? 뭘 이런 걸 다….”

친절한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목구멍 잠긴 소리로 “엄마가… 송이….” 까지 간신히 중얼거릴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아주머니는 미승이를 한번 흘겨보더니 “그랬군.” 하며 헛웃음을 쳤다. 

“도련님, 이제 그만해요. 제 친구 먹이겠다고 줬다잖아.” 

아줌마는 똑똑하게도 한눈에 상황을 파악하고 현구에게 화를 풀라고 다독였다. 

그 바람에 현구도 더 화내지 못하고 나랑 미승이를 한 번씩 째려보다 툴툴대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주머니는 굵고 하얀 거위 알들을 대바구니에 옮겨 담고 나서 빈 바가지를 돌려주었다.

“엄마께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 

아줌마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현구는 아마 한동안은 나까지 못 마땅해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수지맞지 않는 장사에 대한 아쉬움이, 그것도 제 용돈벌이 몫을 조카 놈이 줄여버린데 대한 옹졸한 마음이 생길만도 하지 않았을까? 

현구가 그리 속 좁은 놈은 아니었지만, 만약 현구가 날 미워했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저녁의 밥상머리에서 들은 말로는 송이는 귀하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우리 집 거위는 알을 몇 번이고 낳고 새끼도 칠 수 있지만, 송이버섯은 거위만큼 자주 알을 낳고 새끼를 치지 못하니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평상 옆에 자란 마른 나무에서 감이 푹 익어가고 있었다. 떫은맛이 있어서 단단할 때 먹으면 입안이 온통 아리고 뻣뻣해지는 감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그 감을 따두었다가 시일을 묵혀 물렁해진 후에야 먹곤 했다. 나는 감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우리 할머니가 좋아했다. 난 언제가 미승이가 과일은 전부 다 좋아한다던 말이 생각나서 엄마가 할머니 드시라고 쟁여놓은 홍시 바구니에서 터질듯 익어 주홍색 도는 감 세 개를 집어들고 미승이네로 갔다. 

그런데 마침 그 집에 혼자 계시던 할아버지가 마당 흙을 밟는 내 기척을 듣고 문을 홱 열어 제꼈다. 

“희승이 왔냐? 미승이 없는데. 컴퓨터 학원인가 뭔가 다니느라, 여즉 안 왔다.”

“알아요.”

그 무렵 미승이는 방과 후에 컴퓨터 학원을 다니느라 우리들보다 늦은 버스를 타고 돌아오곤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 후에도 내가 양손을 옷단 안에 넣고 쭈뼛거리며 서 있자 할아버지는 “아직 오려면 멀었으니까. 이따 다시 와.” 라며 도로 방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졌다. 

옷 안에 들고 온 홍시 세 개를 툇마루 기둥 옆에 내려놓고 돌아왔다. 

다음날 학교에서 3교시 미술시간이 끝난 다음에 화장실로 그림물통을 비우러 갔을 때였다. 

미승이가 먼저 와서 팔레트에 남은 물감을 붓으로 박박 밀어가며 닦고 있었다. 녀석의 하얀 플라스틱 팔레트는 얼룩덜룩한 채로 매번 굳혀버리는 내 지저분한 팔레트랑 비교도 안 되게 깨끗해져가고 있었다. 

난 하도 여러 색이 섞여 흙탕물색 같아진 튜브수통의 물을 세면대 안으로 붓고 수통에 물을 받아 한번 헹구는 걸로 그쳤다. 손도 설렁설렁 씻고 손톱 사이에 끼인 물감도 다 못 지운 채 수통을 들고 미승이보다 먼저 화장실을 나왔다. 

조금 걷다보니 미승이가 뒤따라 나와 나란히 옆으로 걸었다. 

내가 걸음을 척 척 척 빨리 걷자 녀석도 따라서 빨리 걸었다. 

“어제 희승이 네가 홍시 가져왔지?”

내 걸음이 다시 늦춰지자 미승이가 아는 척을 해왔다. 

난 대답은 안하고 고개를 팽 돌려 창밖의 구름만 보는 척 했다. 

“할아버지가 네가 왔다갔다고 했어. 너 밖에 없는걸.”

“…….”

“우리 할아버지도 감 좋아해서 하나 먹었어. 하나는 엄마가 먹고, 내가 하나 먹었어. 맛있었어.”

짧은 생각에 감 세 개면 미승이 혼자서 떡을 치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가족들 입 생각은 못하고 모자란 개수를 가져갔던 내가 어리석었다. 

하지만, 우리 집엔 여전히 큰 바구니 하나를 가득 채우는 홍시가 남아있었다. 

“…이따 우리 집에 와. 아직 감 많아.”

소심한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자 미승이는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근데 우리 학교 끝나고 둘이서 놀다가 가자. 나도 오늘 컴퓨터 학원 빠질 테니까.”

이러면서 어깨동무를 해왔다. 녀석이 모처럼 밝게 웃었다.

그 날 방과 후에 학교 정문을 빠져나온 나랑 미승이가 차로 변으로 나와 걸을 때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모여 서있는 선중이네들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들도 우리를 봤다. 

“야, 늬들 어디가!?”

큰 소리로 외치는 병식이네를 무시하고 우리는 냅다 읍내 시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 쟤들 따라올지 모르니까, 더 빨리 뛰어!”

재촉하는 미승이를 따라서 달리기도 느린 내가 최선을 다해 등짝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미승이가 내 느린 발에 맞춰 뛰느라 그다지 빠르게 멀리 뛰진 못했지만 다행히 선중이들이 따라 오지는 않았다. 아마 녀석들도 그 시간대에 도착할 버스를 놓쳐가며 우리를 쫒아오는 건 미련하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히야. 힘들다. 그치?”

미승이는 말짱한데 나 혼자 숨을 헥헥 몰아쉬며 걷는 게 살짝 무안해서 말하자, 녀석은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으면서도 “응. 너무 빨리 달려서 힘들어.” 이렇게 저도 힘든 체를 하면서 내 손을 잡아왔다. 

“근데, 미승이 넌 선중이네가 싫어?”

“…….”

녀석은 대답을 안 하고 딴청을 부리며 시장을 두리번거리다가 “야! 저거 봐!” 이러면서 내 손을 끌고 시장 한복판으로 잰 걸음을 옮겼다. 

미처 몰랐지만, 그 날은 마침 지역행사와 겸해 장이 서던 날이라 여러 행상들이 몰려와 있었다. 

미승이가 먼저 호기심을 달고 간 곳은 각설이 분장을 하고 엿판을 들고 있는 엿장수 아저씨 앞이었다. 

그는 누덕누덕 기운 옷에 낡은 벙거지를 쓰고 중간이 툭 잘려져 나간 커다란 가위를 시끄럽게 챙강챙강 울리며 소란스러운 수다를 떨고 노래를 불렀다. 

구경꾼들 틈에 섞여 멀거니 올려다보던 우리랑 엿장수의 눈이 마주치자, 

“하이고. 아가들 이쁘네! 아저씨가 엿 줄 테니까, 먹어보고 맛있으면 많이씩들 사가라. 알겄지?” 

이러면서 미승이랑 내 입 속에 작은 호박엿을 한쪽씩 넣어주는 걸 받아먹고 우린 냉큼 그 자리를 떴다. 

“돈 없으면 엄마라도 데리고 와서 사달라고 졸라라, 아가들아!”

엿장수 아저씨의 호통치는 시늉하는 목소리랑 엿을 사가던 어른들의 잔웃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잡화를 파는 아저씨도 구경했다. 

구경꾼도 별로 없는 자리에서 그는 이것저것 꺼내서 시범을 보이며 그것들이 죄다 “아이디어 상품!”이라고 강조했다. “획기적인 가격!”이라고도 강조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다. 뭐든지 새것처럼 광택을 낸다는 왁스였다. 

특히 아저씨가 낡고 희뿌연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왁스칠을 하고 마른헝겊으로 한두 번 문지르고 났더니 동전 표면이 눈부시게 반짝거리며 새 동전이 되는 건 마음에 쏙 들도록 신기했다. 

저 마법의 왁스로 세상의 모든 돈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바지주머니 속을 뒤져 아저씨에게 100원 짜리 하나를 내밀며 “아저씨, 이것도 닦아보세요.” 했더니, 아저씨는 “뭐냐!? 안 살 거면 장난치지 말고 얼른 가. 애들은 가!” 이러면서 짜증을 부렸다. 

그러자 미승이가 “쳇!” 하고 내 손을 잡아끌며 “저거 다 속임수 일거야. 아저씨가 새 동전이랑 낡은 동전이랑 바꿔치기 했을걸!”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자 “뭐야!? 저 자식들이!” 하면서 아저씨가 화를 내길래 우리는 또 뛰어야 했다. 

넓지도 않은 시장바닥을 잔뜩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기웃대며 한참씩 구경하고 다니느라 어느새 배가 출출해졌다. 

아까부터 달고 기름진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먹거리 장터를 쳐다보고 있는데, 미승이도 배가 고팠던지 “우리 뭐 먹고 가자.”이러면서 포장 식당가를 가리켰다. 

난 가진 돈이 없어서 고개를 슬며시 저었는데, 미승이가 “넌 배 하나도 안고파?”이렇게 묻는 말에도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우리 저거 먹자. 나 용돈 아직 많이 있으니까 우리 둘이 먹을 수 있을 거야.” 

이러면서 메밀총떡과 족발을 파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낮부터 어른들 너덧 명이 족발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미승이는 도마 위에서 족발을 썰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오천 원짜리를 내밀며 다른 손으로 족발이랑 총떡을 짚었다.

“이거랑, 이거랑 주세요.”

“아가, 1인분씩 하려면 그 돈으로 모자라. 차라리 한 가지만 시켜. 그러면 아줌마가 양은 푸짐하게 줄게.”

“그럼 조금씩만 해서 두 가지 주시면 되잖아요. 우린 어려서 많이씩도 못 먹잖아요.”

미승이가 야무진 말투로 또박 또박 말하자 아주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옆자리에서 술 마시던 아저씨들도 얼굴이 벌개가지곤 “그래. 조막탱이들이 왔으니 조금씩 골고루 섞어주면 되겠구만.” 하고 껄껄대며 옆에서 흥정을 거들었다. 

아주머니가 알았다며 도마 위에 썰어진 족발을 접시에 담는 동안, 우리는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수저통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내 껍질을 벗겼다. 잠시 후에 아주머니가 뼈를 빼고 살코기가 많은 부위만 담은 접시에 새우젓과 함께 내주며 이것 먼저 먹고 있으라고 했다. 

난 미승이의 흥정실력에 속으로 감탄하며 한편으론 어린애 주제에 이런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미승이가 이상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시장에서 500원씩 모아 떡볶이나 튀김을 사먹는게 고작이었던 나로서는 미승이의 입맛이나 돈 씀씀이가 낯설었다. 아마 서울서 살다 와서 처음 보는 시골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미승이 말에 의하면 족발은 전에도 먹어봤고 자신은 고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이었는지 내가 족발에서 껍질부분을 떼어내고 살코기만 떼어 먹으면 미승이는 내가 떼어놓은 껍질 부분도 집어다 새우젓을 콕 찍어서 먹었다. 보기보다 편식도 안하고 식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게다가 아주머니한테 ‘어려서 많이씩도 못 먹는다’라고 했던 놈 치고는 먹성이 제법이었다. 

아주머니도 “거 참, 어린 게 잘도 먹네.” 이러면서 철판 위에서 금방 지글지글 데워낸 따뜻한 메밀총떡 한 접시도 넉넉하게 담아주었다. 

우리 집에선 엄마가 집에서 곧잘 얼큰한 무채 속을 넣은 메밀전병을 만들어주곤 했지만, 그것과 다르게 순한 만두속 맛을 닮은 소를 넣은 작은 총떡은 내 입에도 맛있었다. 

어쩌면 미승이처럼 잘 먹는 녀석과 같이 먹어서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입가에 기름기를 묻힌 채 배가 불러 흐믓한 표정을 하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그리고 두둑해진 배도 꺼트릴 겸 오락실에 가서 두더지 잡기랑 테트리스를 열심히 하다가 6시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왔다. 

가을 해가 많이 짧아져서 집에 도착했을 땐 어둑한 기운이 돌았다.

“형, 엄마는?”

“앗, 뭐야! 새꺄! 놀랐잖아!” 

형의 방 문을 당겨 열자 형이 후다닥 이불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왜?”

“왜긴 뭐가 왜야! 남의 방에 들어오려면….”

형이 소리치다 말고 말을 멈췄다. 나랑 내 뒤에 서 있는 미승이까지 보더니 얼굴이 빨개져서는 “…방, 방문 열 때 노크라도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라고 했다. 난 창호지문에 노크를 하라는 형의 말이 하도 우스워서 “어떻게 노크를 하냐?”이러고서 웃었다. 

“근데 엄마랑 할머니는? 왜 집에 형 밖에 없어?”

내가 또 다시 물었다.

“오늘 장 선다고 아까 읍내에 갔어. 이제 곧 올 때 됐는데… 아빠랑 갔으니까 아마 술이라도 마시고 오나보지.”

그렇게 대답하고 형은 우리더러 얼른 방문 닫고 나가라고 했다. 

미승이랑 내가 그렇게 장터를 돌아다녔는데도 엄마 아빠나 할머니랑 마주치지 않은게 신기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무튼 난 광에 가서 백열전구를 켜고 홍시 바구니를 찾았다. 

미승이에게 이번에는 감을 다섯 개 들려주자, “이렇게 많이 줘도 돼?”라고 묻길래 “한 사람당 한 개 씩.”이라고 대답했다. 미승이가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것처럼 넉넉하게 한 가득이라 생각했던 홍시 바구니는 어느새 제법 비어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리고 난 별로 탐탁지 않은 인간이라도 현구의 입까지도 홍시의 계산에 넣었다.

미승이를 대문 앞에서 전송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벽옷걸이에 걸어놓은 추리닝 바지를 보며 아까 이상하다 싶었던 일을 다시 생각해냈다.

전에도 가끔 형 방에 문을 발칵 열고 들어갈 때면 잡지책 같은 것을 후다닥 치우면서 “야! 너 남의 방에 들어오려면 먼저 문이라도 두드려!”라고 형이 괜히 화를 내곤 했었다. 

그런 형의 추리닝 바지는 나중에 무릎뿐만 아니라, 희한하게 허리 고무줄까지 헐렁헐렁 늘어나 버려서 팬티가 하얗게 보일만큼 엉치뼈 근처까지 내려와 버리곤 했다. 그래서 나중에 형은 새 추리닝을 사겠다고 엄마한테 용돈을 받아가고 늘어난 추리닝 바지를 버렸다. 

그런데 할머니가 버려둔 추리닝을 발견하고는 “하아따… 저 몹쓸 놈의 자식, 이 멀쩡한 옷을 왜 버리남? 희승아, 넌 그러지 말거라. 사람이 아끼면서 살아야제.”이러면서 주워다 다시 고무줄을 끼워 입으셨다. 

“응. 할머니.”

난 씩씩하게 대답했고, 할머니가 새로 고무줄 끼운 바지를 나도 한번 입어보았었다. 바지 기장이 넘쳐서 내가 입으면 온 방바닥을 훔치고 다닐 정도였고 할머니가 새로 고무줄을 끼운 후에도 내게는 조금 큰 허리였다. 그것이 바로 벽걸이에 걸린 추리닝 바지였다. 

나는 어째서 형이 자꾸만 방문 고리를 걸어 잠그고 식구들이 못 들어오게 하는지, 왜 누가 들어가기만 하면 후다닥 놀래는지, 방 귀신마냥 혼자 방에 틀어박혀 뭘 하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언젠가는 기필코 캐내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형이 방에서 몰래 혼자서 후다닥 하는 일에 대한 궁금증은 의외로 쉽게 빨리 풀렸다. 이번에도 선중이 녀석을 통해서였다. 

우리가 선중이네 방에 모여서 놀고 있을 때였다. 

이불 속에 저마다 다리를 넣고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애들은 오락이랑 만화책 얘기에 이어 자기반 여자애들 흉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들이 떠들건 말건 미승이랑 나는 이불 속에서 서로 발을 꼬물거리며 장난을 치고 놀았다. 양말 신은 발로 서로 톡톡 건드리기도 하고, 발가락으로 발바닥을 간질이고 서로 발목을 꼬아 섥히며 우리끼리 히죽거렸다. 미승이 발이 내 양말을 벗기려고 하길래 내가 “캬,꺄-”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고 피하다가 선중이 녀석의 발을 툭 건드리는 바람에 우리끼리 희희낙락한 게 들켜버렸다. 

선중이가 “야! 늬들끼리 뭐해!?”라고 화를 내서 계속 그러고 놀 수는 없었다. 

“저 새끼들은 툭하면 지네끼리 놀아. 계집애들 같이-.”

병식이도 한 소리 했다.

잠시 어색하고 싸한 공기가 방안을 도는 데, “선중이 넌 형이랑 같이 방 쓴댔지? 안 귀찮니?”라는 말로 미승이가 분위기를 전환시키면서 아이들의 이야기는 자신과 방을 나눠 쓰는 가족에 대한 화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미승이가 먼저 자기는 삼촌이랑 같이 방을 쓰는데 현구가 잘 씻지도 않고 방을 너무 어질러서 싫다고 말하자, 선중이는 제 형이 자기보다 더 제멋대로고 힘도 세서 툭하면 쥐어 박혀서 못살겠다고 했고, 누나랑 같은 방을 쓰는 병식이는 여자랑 같은 방을 쓴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창피해하고 있었다. 

우리들 중 유일하게 방을 혼자 쓰는 무영이는 불평할 거리가 없었는지, 골몰히 생각하다 한참 만에 “난 혼자 자서 심심해.”라고 했다가 오히려 아이들의 원성을 샀다. 

할머니랑 같은 방을 쓰는 나야말로 투정거리가 없었다. 

할머니가 내게 잘해주어서 불편은 거녕,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밤마다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젖을 주물거리면서 안락하게 잠든다거나, 할머니가 나를 안고 무릎에 앉혀 놓고 둥기둥기를 자주 해 준다거나, 옛날 얘기를 많이 들려줘서 좋다는 자랑은 감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병식이들한테서 미숙아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걸 부러워할 녀석은 무영이 밖엔 없어보였고, 무영이의 부러움을 받아봤자 으쓱해질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고작 꺼낸 얘기가“할머니 입 냄새가 나.”였다. 

그러자 곧장 “너네 할머니 입 냄새 지독해? 옆에서도 냄새 맡을 수 있을 만큼 심해?”라고 무영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고, “에이, 그게 아니겠지. 할머니가 너한테 자꾸 뽀뽀하는구나? 그래서 입 냄새 난다는 거지? 우리 할머니도 그랬어.”라며 병식이가 짜증나게 아는 척을 했고, “그래도 우리 삼촌 보다는 나을 걸. 그 인간은 하루 종일 장화 신고 돌아다니는 주제에, 발도 안 씻고 잔 적도 있어. 냄새가 풀풀 나서 코가 마비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엄마 아빠 방에 가서 자버렸어.”라고 미승이가 또 현구를 흉봤다. 

선중이도 질세라 지 형의 흉을 이래저래 마구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 얘기 중에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있었다.

“…게다가 형이 툭하면 방을 혼자 차지하려고 한다니까. 요새 날 자꾸만 밖으로 내보내고 지 혼자 방에서 뭘 하더라고. 그래서 저번엔 내가 방에서 TV 보다가 형 방에 갑자기 들어갔더니, 형이 깜짝 놀라면서 나한테 화를 냈다. 공부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나? 킥… 근데 난 봤어! 형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옷 속에다 손 넣고 이상한 책 보고 있었다고. 진짜라니까!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선중이는 증거물도 찾아서 보여주겠다며 벌떡 일어났다. 

녀석이 형의 옷장서랍을 뒤적거리는 동안 나는 아마도 선중이네 형이랑 우리 형이랑 같은 일을 했을 거라는 짐작을 했다. 

“아, 여깄네. 후힛! 아무리 꼭꼭 숨겨봐야 난 다 찾을 수 있지롱!”

선중이가 신이 나서 우리의 이부자리 한가운데 놓고 보여주는 조그만 책의 이름은 ‘건강 다이제스트’였다. 

작은 표지에는 가슴이 커다란 외국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고, 옆에는 '뇌경색 체크, 헬스와 식이요법, 조루를 치료하자!’ 등등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들이 잔뜩 써 있었다. 책 속에도 작은 글씨들이 너무 많이 쓰여 있어서 내 국어실력으론 읽기도 힘들고 전혀 재밌는 책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중이가 책 속을 휘리릭 넘겨서 칼라 사진이 있는 곳을 펼치자, 선중이가 왜 시시덕댔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 나타났다. 

커다란 서양여자들이 거대한 가슴에 아슬아슬한 수영복을 걸치고서 웃고 있었단 말이다. 어찌나 가슴이 크고, 수영복은 또 얼마나 작은지 내가 몸을 비척거리며 긴장할 정도였다. 

‘이런 수영복을 입고 수영해도 문제없을까?’

난 고작 그게 궁금했다. 

얇게 묶어놓은 실 같은 끈이 스르륵 풀려서 물 위로 브래지어가 동동 떠내려가면 어쩌나, 엉덩이 사이로 팬티가 끼어 들어가면 어쩌나, 아니면 저 아찔하게 빵빵한 가슴 때문에 수영복이 터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들로 그 여자들이 몹시도 염려되었다. 

“우와, 이 젖통 좀 봐! 우리 엄마 꺼 백배는 되겠다! 이게 사람이냐?”

“그치? 젖이 수박만하지!? 엉덩이에도 쫌만 힘주면 수영복 툭 찢어질 걸.”

“수영복 벗겨지면 어떡해!? 홀랑 빨개벗겨지는 거 아냐?”

표현이 좀 다를 뿐, 병식이랑 선중이랑 무영이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래도 친구였다. 미승이만은 영 시큰둥한 반응으로 우리들처럼 사진에 눈을 박고 들여다보지도 않고 슬쩍 떨어져서 보고만 있었다. 

“우리 형이 이 책을 그냥 보는 게 아니더라니까.”

“그럼 어떻게 보는데?”

“바지 속에 손 넣고 거길 만지면서 보더라고.”

“고추를? 왜?”

“그러면 기분이 좋대.”

“형이 말해줬어?”

“응. 내가 다 봤다고, 뭐 했냐고 물어보니까, 다 가르쳐주더라.”

무영이랑 내가 번갈아 질문하고 선중이 녀석이 대답해주었다.

미승이 녀석도 그제서야 눈을 초롱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너네 형은 이거 보면서 자위 하는 거야?”

“자위? 그게 뭔데?”

“만지면 기분 좋아지는 거.”

처음 듣는 ‘자위’란 단어에 나랑 무영이가 선중이쪽으로 눈을 돌리자 녀석은 아주 애매한 답을 해줬고, 옆에서 미승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기분이 좋아져서, 거기서 정액도 나오는 거야.”

기억력이 나빠서 금세 까먹어버리는 내 머리는 ‘정액? 정액? 그게 뭐였지?’ 하면서 마구 눈알을 굴렸다. 도무지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거 밤꽃 냄새랑 정말 비슷해? 맡아 봤어?”라고 무영이가 묻는 바람에 겨우 생각이 났다. 무영이는 선중이한테 약한 핀잔을 들었지만. 

“칫, 우리 형이 냄새 맡게 해줬을 것 같으냐? 그때 방에서 뭔가 냄새가 나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 밤꽃 냄새가 기억이 안 나서.” 라고 선중이 녀석이 답지 않게 솔직하게 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희승이 너도 너네 형 방에 불쑥 들어가 봐. 우리 형이 그러던데, 재승이 형도 자위 한다더라.” 

그 바람에 난 며칠 전 형 방에 들어섰다가 형이 빨개졌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자위 하면 바지 고무줄 늘어나?”

내 말에 선중이가 뭔 소리냐고 되묻길래, 난 할머니의 잠옷 바지가 된 형의 추리닝에 대해 이야기해버렸다. 그러자 아이들이―심지어 미승이마저도―깔깔거리며 방에서 뒹굴었다. 

“바지 고무줄이 늘어날 정도면, 니네 형, 무진장 자위 많이 했나보다.”라면서 말이다. 괜히 얘기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형 때문에 나까지 우스워져 버린 것 같아서 바보같은 형한테 짜증이 났다. 

잠시 후 선중이네 아빠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낮술에 취해서 큰 소리를 내며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서 선중이네 집을 잽싸게 빠져나왔다. 선중이네 아빠는 술을 마시면 좀 시끄럽고 무서워졌다. 선중이랑 형을 가끔 때리기도 했다.

“선중이 괜찮을까?” 

대문을 나서고 한참 만에 무영이가 걱정을 했지만 병식이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나도 은근히 선중이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런 생각은 곧 날아가 버렸다. 

“그때 너네 형 방에 갔을 때도, 아마 자위하고 있었던 걸 거야.” 

미승이가 내 귀에 소곤거린 말 때문에 수치심이 한 돌 더 박혔다. 

난 집에 도착하자마자 형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냅다 소리를 쳤다.

“형! 자위 좀 작작해! 형 때문에 나만 망신당했잖아!”

“저 새끼가 돌았나! 느닷없이 뭔 미친 소리래!?”

보기 드물게 책을 펴들고 숙제를 하던 형은 내 뜬금없는 내 신경질에 당황해서 욕을 퍼부었다. 내 말소리가 온 집안에 다 들렸는지 엄마 아빠가 안방 문을 열고 날 이상하게 쳐다보았고, 그날 저녁 밥상머리 에서 형은 줄기차게 날 째려봤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현구 삼촌은 부지런히 사냥을 다니기 시작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현구는 올무와 창애 같은 불법엽구들을 산 속 곳곳에 놓아두었고, 뿐만 아니라 엽총도 들고 돌아다녔다. 그 해 가을에도 장총을 쏴서 꿩 한 마리를 잡고는 집에 와서 도리탕을 만들어 가족들의 저녁상에 올려놓고 생색을 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질긴 야생의 고기를 씹기엔 치아가 성치 않았던 미승이네 할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릴 순 없었던 모양이다.

“저눔의 자식이 내 이가 몽창 뽑혀 나가라고 이런 질긴 고기를 밥상에 올려놨구만.” 하는 핀잔만 들었단다. 

현구는 뭘 하던지 간에 제 아버지에게 곱게 보이질 않는 자식이었다. 

그에 비해 장남인 미승이네 아버지에 대한 신뢰는 늘상 무뎌지지 않고 勞틜痴痔?생전에 꾸준히 이어졌다. 더불어 미승이는 그의 유일한 친손주이자, 근거 없이 미쁨직한 아이로 할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렇다고 미승이네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살갑고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역 유지의 텃세와 허울로 한평생 괴팍하게 살아온 양반이었지만, 미승이에게 만큼은 표 나게 애정을 주었을 뿐이다. 

비록 그 애정의 표현 방식이 썩 그럴듯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한 예로, 미승이가 했던 말을 곰씹어볼 필요가 있다. 

“현구 삼촌이 날 싫어하는 건, 할아버지가 삼촌보다 나한테 더 용돈을 많이 주기 때문이래.”

이 정도면 알만하지 않은가!? 

미승이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늘 지갑이 두둑하고 씀씀이가 좋던 이유도 그제야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승이가 어른 용돈을 호가하도록 거하게 받아쓰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현구가 제 아버지에게서 받는 용돈이 조카랑 견줄 만큼, 그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다는 얘기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현구가 미승이를 은근히 타박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는 제 조카를 진심으로 미워한 건 아니었지만 남들 눈에 비추어진 저와 조카의 입지 차이에 질투하지 않고 허허 웃기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승이는 용돈이 남아돌아서 제 명의로 저금통장까지 따로 가지고 있다는데, 날마다 담배 사피고 술 퍼 마시느라 돈이 늘상 모자라는 현구는 어땠을까? 

난 아홉 살짜리랑 비슷한 용돈을 받고 사는 현구가 조금 불쌍해지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류현구는 류현구다!’라고 속으로 괘씸함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기억이 더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모처럼 아이들과 산에 올라갔던 날이다. 

숲 속에서 뭔가 파다닥 거리리고 있길래, 소리 나는 곳으로 가서 발밑을 내려다보니 참새 한 마리가 밧줄에 발목이 걸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수풀 사이에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히 고리를 만들어 넣으면 어쩌다 거기에 발이 걸려 잡히는 작은 짐승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실제로 해 본적도 없고, 눈앞에서 잡힌 동물을 보는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거 참새잖아?” 

“올무에 걸렸네.”

“아마 현구 삼촌이 놔둔 건가 보다.”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동안 미승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빠져나가보려고 바둥거리는 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쌍해….”라고 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미승이는 수풀에 쪼그리고 앉아 참새 발목에 걸린 줄을 풀어주려고 했다. 

그 때 바스락 소리가 나며 현구가 나타났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해? 어라, 고작 참새가 걸렸잖아? 야, 미승이 너 손 치우고 물러서.”

미승이는 현구 말을 무시한 채 참새 발목에 얽힌 밧줄을 풀어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미승이가 새 풀어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짐짓 미승이를 대변해서 설명하자 현구는 미승이를 툭 밀어서 넘어트리고는 저가 끈을 풀고 참새를 손 안에 잡아들었다.

“빨리 날려줘야죠. 왜 계속 잡고 있어요?”

“왜 풀어줘!? 내가 잡은 건데!”

내가 항변하고 나서자 현구는 버럭 화를 냈다.

“참새니까 풀어줘야죠!”

“참새라고 풀어줄 이유가 뭐야!? 요놈도 다 먹거린데.”

“그 쪼그만 새를 어떻게 먹으려고요?”

“참새구이 해먹으면 되지.”

현구의 태연한 대답에 난 어처구니가 없었다. 

옆에서 선중이랑 병식이는 “참새구이 맛있어요?”라고 태평하게 묻고 있었다. 

미승이가 삼촌의 팔을 꽉 깨물어 그가 새를 놓치는 바람에 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새를 얼른 내 손으로 옮겨 숲 쪽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에 참새가 날개를 파닥 파닥 쳐보더니 이내 하늘로 느리게 날아가는 것까지 보고 돌아왔을 때 현구가 미승이 머리를 때리는 걸 봤다.

“이 자식이 날 호구로 아나. 이게 어디서 삼촌 하는 일에 해살을 놓고 지랄이야!”

“왜 미승이 때려요! 내가 날려주고 왔는데!”

이랬다가 나까지 머리 한 대를 맞았다. 

옆에서 병식이들이 피식거리는 내내 나랑 미승이는 현구는 작은 생명을 존중할 줄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고 주절거리면서 산을 내려왔다. 

9살 겨울

겨울을 몰고 오는 찬바람이 일던 무렵이었다. 

그날 아침에 집에서 학교 가는 버스를 놓칠까 달랑 서둘러 뛰어나오는 바람에 두터운 셔츠 한 장 차림만으로 학교에 가서 종일 한기에 떨었다. 날씨는 흐리고 무겁고 스산했다. 

오후가 되어서도 방과 후 버스 정류장 앞에서 아직 오려면 20분이나 남은 버스를 기다리며 더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양 팔을 잡고 부들부들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미승이 주번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같이 나올 걸….’

버스도 한참 기다려야 되는데 괜히 먼저 일찍 나왔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옆에서 병식이들이 나더러 춥겠다고, 쟤 떠는 것 좀 보라고 놀려댔다. 날도 우울하게 흐린데 내 기분도 걔들 때문에 더 흐려졌다. 안 떠는 척 꼿꼿하게 서 있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움츠러들고 등 굽힌 자세로 팔다리를 비비꼬며 떨었다. 

녀석들은 새로 나온 만화 얘기를 하다가 그 캐릭터 딱지가 문구점에 나온 걸 봤다는 무영이의 말에, 당장 그걸 사겠다며 나만 내버려두고 학교 앞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딱지고 뭐고, 하도 추워서 내 것도 사다달란 소리도 못하고 시큰거리는 눈으로 혼자 정류장에 남아 차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휭하니 부는 바람이 노변에 마른 잎사귀랑 작은 돌을 굴려 보내고 있었다.

“추워?”

어느새 주번 일을 다 마치고 온 미승이가 내 옆에 와서 섰다. 

‘당연한 걸 묻네.’ 하면서도 입에선 다른 소리가 나왔다. 

“괜찮아. 하나도 안 추워.”

미승이가 입은 도톰한 귤색 점퍼를 힐끔 보고 나서 팔을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안 추운 척 허세를 부리려니 힘들었다. 

그런데 녀석이 어깨에 메고 있던 책가방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점퍼 앞지퍼를 열더니, 뜬금없이 제 점퍼를 벗어서 자기 어깨랑 내 어깨로 펼쳐서 반씩 나눠서 걸쳤다. 그리고 내 바깥쪽 팔을 잡고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바 벗으면 너도 춥잖아.”

미승이 가슴에서 남색 체크무늬 셔츠가 파다닥 파다닥 바람에 들썩이는 걸 보며 나 때문에 녀석까지 추워질 것 같아 미안해졌다.

“괜찮아.” 

당당한 척 하면서도 목소리가 나처럼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등 시림은 약간 막아졌지만 앞이 휑하니 벌어진 점퍼로는 얼굴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서야 누구도 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너 추운데….”

“한 사람만 추운 것 보단 낫잖아.”

미승이의 팔이 나를 더 당기고 나도 미승이 몸 옆에 붙어서 짧은 팔로 녀석의 허리를 꼭 붙들어 안았다. 바람은 휘잉휘잉 한기를 몰고 계속 치고 들어 왔지만, 미승이랑 맞닿아있는 옆구리랑 그 작은 손에 잡힌 왼쪽 팔꿈치 위만큼은 춥지 않았다. 

“너네 왜 그러고 있냐?” 

한손에 딱지 두세 장씩을 들고 정류장으로 되돌아온 선중이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춥다고 옷 나눠 입고 있냐? 저러고 있으면 더 추운데, 바보들.” 

병식이가 놀렸다. 선중이는 기분이 나빠 보였다. 

바람이 몰아오는 낙엽 부스러기랑 먼지가 눈앞으로 날아들어 우리는 눈도 실풋 찌그려 뜨고 고개를 숙인 채 같이 오들거리며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마을로 가는 버스가 도착해서 우리들이 올라탔을 때, 선중이네는 한 단 높은 맨 뒷좌석에 몰려가 앉았고 나랑 미승이는 걔들보다 한 줄 앞에 앉았다. 

중간에 잠깐 뒤돌아 봤을 때, 병식이랑 무영이는 동그란 딱지를 뜯어내느라 바빴고 선중이는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관하지 마.”

옆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미승이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을 정류장에 내려서도 우리 집까지 미승이랑 나는 점퍼를 반씩 나눠 쓰고 서로 옆구리를 꼭 끼고 걸어왔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선 후에야 미승이는 제 점퍼를 제대로 양팔에 끼워 입고 자기 집으로 갔다. 

밤에도 깊은 산골 바람이 휘잉 마당을 쓸고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 첫 눈이 내렸다. 

그해 겨울의 첫눈은 함박눈으로 찾아왔다. 

거짓말 아주 약간 보태서 애기 주먹만한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풍풍 떨어져 내려, 눈 내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이 입 벌리고 창밖만 하염없이 쳐다보자 선생님도 수업을 중단하고 한 시간 동안 나가서 눈 놀이를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옆 반 담임과 애들도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청정 눈도 아닌 것을 저마다 입을 벌려 받아먹고 손바닥에도 받았다. 큼직한 눈이 손바닥 안에서 금세 물방울로 녹았다. 아이들은 운동장을 하얗게 메우다 못해 운동화 창까지 폭 폭 쌓인 눈을 신나게 손으로 쓸어 모아 눈덩이를 만들었다. 

나도 손에 벙어리 장갑을 끼고서 열심히 무기를 쌓아 선생님한테도 던지고, 반 친구들한테도 던지고, 철봉 밑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무영이 등속에도 집어넣었다. 

차갑다고 경기를 떨며 울상 짓는 녀석 앞에서 깔깔거리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 내 옷 안으로 눈덩이를 집어넣었다. 등을 타고 내리는 찬기에 시껍을 하고 돌아보니 병식이 녀석이 서 있었다. 내가 제 녀석의 사촌을 괴롭혔다고 복수하는 건가 싶었지만, 병식이는 곧장 무영이에게도 작은 눈덩이 하나를 던졌다. 

그 길로 무영이가 만들던 눈사람을 반으로 나눠 병식이랑 내 얼굴로 퍽퍽 던졌다. 눈덩이가 제법 커서 코가 아팠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더 나쁜 건 연이어서 뒤통수로 날아오는 눈덩이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넘어져버린 것이었다. 선중이가 가까운 거리에서 한 팔에 잔뜩 눈덩이를 담고서 나만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는 내 호소도 먹히지 않고, 선중이 녀석이 쉬지 않고 던지는 눈덩이에 머리를 얻어맞으면서 처음엔 웃다가 나중엔 욕하다가 끝내는 눈물이 나버렸다. 

“나쁜 놈아, 하지 말라니까!” 

큰 소리로 외치자 눈덩이 공격이 뚝 그쳤다. 

내 외침에 선중이가 겁을 먹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저만치 뒤에서 미승이가 선중이 녀석에게 눈덩이를 던지고 있던 것이었다. 

“야, 너 왜 희승이만 공격하냐!?” 라고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면서 말이다. 

가만히 서서 희승이가 던지는 눈덩이를 몇 대 맞아주던 선중이는 머리에 남은 눈을 털지도 않고 못지않게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럼 넌 왜 미승이하고만 친하게 지내는데!?”

미승이의 공격이 멈췄다. 

병식이랑 무영이까지, 주변에 있던 아이들 몇 명까지 한순간에 시끌벅적하던 소란이 뚝 멈춰진 그 공간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우린 친구도 아니냐? 전부터 그랬어. 넌 꼭 희승이만 챙기고, 희승이랑만 놀려고 하고…. 나랑 병식이랑 무영이는 뭐냐? 우린 밥이냐? 너 친구 차별하냐?”

넘어진 채 여전히 엉덩이로 차가운 눈을 깔고 앉아 있는 나나, 손에 쥔 눈덩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병식이나, 맨손으로 멍하니 서 있는 무영이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승이는 벌개진 얼굴로 할 말을 못 찾고 벌어진 입에서 흰 입김만 색색 내뿜고 있었다.

낮에 눈싸움 하느라 다 젖고, 돌아오는 길에 눈 장난 하느라 또 젖어버린 벙어리 털실 장갑을 계속 끼고 있었더니 손이 더 시렸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장갑을 벗어내니 역시나 손이 빨갛게 얼어있었다. 차갑게 곱아서 잘 구부러지지도 않았다. 

젖은 털실장갑을 점퍼 주머니 양쪽에 한 짝씩 나눠넣고 나니 미승이가 끼고 있던 장갑 한 짝을 벗어 내게 내밀었다. 

“손 빨갛다.” 

두툼하고 젖지 않는 천으로 만들어진 장갑을 받아 왼손에 끼우자 안쪽의 보송한 천의 촉감이 손을 감싸왔다. 방금 전까지 끼워져 있던 미승이 손의 온도를 더해 손 시림이 누그러졌다. 

미승이의 왼쪽 맨손이 내 오른쪽 맨손을 잡고 제 점퍼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따뜻하지?”

살짝 눈웃음을 보내는 미승이를 보면서 내가 해야 할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작게 입을 열었다.

“미승아, 선중이랑… 친하게 지내. 병식이랑 무영이랑도…. 우리 다 친구잖아.” 

미승이는 점점이 웃음을 지우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우리 다 친구잖아.’는 겨우 겨우 소리 낼 수 있을 만큼 녀석이 나를 긴장시켰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아니면 이상한 소릴 한 건가?’ 걱정까지 하며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까 미승이랑 선중이가 다투는 분위기를 눈치 채고 양쪽 반 담임이 와서 ‘다들 친군데, 친구끼리 왜 싸우니?’하고 타이르며, 아이들을 몰아 도로 교실로 데려갈 때 했던 말을 따라 해본 것이니 아무래도 틀린 소릴 한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까 선중이랑 화해해.”

“희승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싫으냐?”

내 말에 엉뚱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녀석이 날 빤히 보고 있었다.

“응? 뭐?”

나도 녀석을 빤히 쳐다보며 녀석이 무슨 소릴 하나 기다렸다. 

“난 네가 친구들 중에서 제일 좋아. 그리고 특히 현구 삼촌보다도 훨씬 좋아.”

하필 현구랑 비교당해서 우위를 선점해봐야 기쁠 건덕지가 없었다. 난 다만, 미승이가 날 좋아한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 녀석이 심각하게 얘기하는지가 더 의아했다. 

“그런데 희승이 넌, 내가 싫으냐?”

“아니, 안 싫어. 나도 좋아.”

고개까지 가로 흔들어가며 대답했다.

“그치만, 선중이네도 다 같은 친구잖아. 그러니까 너도 선중이랑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 다 똑같이 친하고 좋아하면 안 싸워도 되잖아.”

이방하고 단순했던 내 얘길 듣고만 있던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여전히 녀석의 주머니 속에 손이 잡힌 채 나도 잦은걸음으로 따라갔다. 

“응? 내 말 듣기 싫어?”

한 번 더 반응을 재촉하자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알았어.”

다음날 미승이는 내 손을 잡고 선중이네 반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선중이를 복도로 불러내서 “미안해. 앞으로 골고루 친하게 지내자.”라며 사과를 했고, 선중이 녀석은 “좋아.” 하고 선뜻 대답해서 아이들의 작은 실랑이는 기분 좋은 화해로 끝을 맺었다. 

그 후로 우리 다섯은 공평하게 친해졌다. 

아니, 그건 틀린 말이다. 모두에게 공평해진건 미승이 하나뿐이었고, 예전에 미승이가 나랑 친하게 지낸 시간이 많았다면, 그때부터는 우리들을 상대로 똑같이 시간을 쪼개어 놀고 얘기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과를 흥겹게 받아들인 선중이는 또 미승이만 흠뻑 챙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병식이가 “저 오줄없고 쫀심도 없는 자식.” 이라고 선중이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히 궁시렁 댔고, 뭣 모르는 무영이는 “잘됐다.” 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들보다 몇 걸음 앞서 걷는 선중이랑 미승이를 뒤따라 걸으면서 나는 알듯 모를 듯 희미한 허전함이 가슴에 스몄지만, 그래도 무영이 말처럼 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방학식이 있던 날, 학교에 가기 전에 엄마는 나를 불러 세웠다.

“희승아, 이리 와서 이거 입어 봐.”

그리고는 부실부실 따가운 스웨터가 머리에서 목으로 푹 뒤집어 씌워졌다. 

겨울이 되면 엄마는 털실로 내 옷을 떠서 입히곤 했는데 난 피부에 닿으면 따끔거리고 몸이 가려워지는 털실 옷이 싫었다. 그래서 엄마가 방금 입혀놓은 스웨터랑 바지도 싫다고 벗으려 들자, “늬 형은 어렸을 때 군소리 없이 곧잘 입고 다녔는데, 넌 꼭 유난을 떨어!” 하며 군소리 말고 입으라고 다그쳤다. 

그해에 엄마는 무척이나 한가했는지 회색 스웨터랑 초록색 바지에, 자주색 목도리랑 벙어리장갑, 그리고 회색 모자까지 떠놓고는 차례로 내 몸에다 씌웠다. 이제는 덩치가 커버린 형 옷을 짜기엔 털실 값이 많이 들고 손이 아프다는 이유로 형의 옷은 하나도 뜨지 않으면서 엄마는 내 작은 체구를 만만하게 보고 내 옷만 자꾸 떠 댔다. 

그렇다고 엄마가 아기자기한 걸 좋아한다거나 대바느질 솜씨가 퍽이나 뛰어났던 건 아니다. 꼬임무늬, 방울무늬 같은 것은 넣을 줄도 몰라서 오직 한 가지 색으로 밋밋하게만 떴다. 그리고 심심하다 싶으면 서툰 장난을 부리곤 했다.

그 날 입은 스웨터랑 바지엔 갈색 가죽비닐을 곰 모양이랍시고 오려서 가슴팍이랑 무릎팍 위치에 엉성한 아플리케를 쳐 놓았다. 그러고선 “아유, 이쁘네. 역시 애들은 요렇게 입혀야 귀엽지.”라면서 혼자서 뿌듯해했다. 

내가 보기엔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선명하고 깨끗한 새 실도 아닌, 몇 년 전 형이 어렸을 때 떠 입혔던 스웨터를 풀어 색도 바래고 조직도 구불구불 헐거워진 실을 새로 감아 짠 스웨터는 아무리 봐도 낡고 촌스러웠다. 게다가 눈코입도 없이 귀 두개만 덜렁 달아서 곰이랍시고 덧댄 비닐가죽도 박음새가 우글거리고 엉망이었다. 

하필 방학식인데, 학교 마지막 가는 날인데, 온 몸을 게실로 두른 위에 노란 점퍼 하나 걸치고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서 나보다 심하게 털실 옷으로 무장한 녀석을 만났다. 바로 무영이였다. 

점퍼나 코트도 따로 없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털실 옷으로만 감고 나온 녀석을 보자마자 안도의 숨부터 나왔다. 그러나 그 다행감은 이내 의기소침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무영이네 엄마가 떠준 옷이라면 괜찮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녀석의 옷이 남달랐다. 

무영이네 엄마는 우리엄마보다 훨씬 더 훌륭해서 흰 바탕에 남색 사슴 무늬를 넣은 스웨터를, 그것도 앞을 지퍼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그 안에는 흰 실과 검은 실로 바둑판무늬 조끼까지 떠서 입힌데다가, 녀석의 손에 낀 장갑은 내 것처럼 엉성하고 헐렁한 벙어리가 아닌 손에 딱 맞는 다섯손가락 장갑이었다. 

그것도 전부 새 실로 짜 주었단 말이다. 

민숭민숭한 옷 판만 줄기차게 떠서 굵은 이불실로 이음새만 꿰매놓는 우리엄마 재주로는 언감생심인 솜씨와 정성이었다. 

미승이도 무영이 옷을 보고는 “우와, 너네 엄마 대단하다!” 하고 감탄해서 무영이 녀석을 으쓱거리게 만들었다. 털실 옷에 관심도 없던 선중이랑 병식이 녀석이 돌아보게 할 만큼.

‘그래도 오늘부턴 방학이다!’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교탁 앞에서 선생님이 떠드는 내용이 귀로 들어오는지 코로 들어오는지 모르게 연방 마음만 들떠서 방학식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마지막 교실 대청소에서 맡은 유리창 세 개도 후다닥 닦아버리고 선생님이 언제 와서 방학식을 해 주려나 안달복달 했다. 그래서 바닥을 닦느라 뒤로 몰아놓았던 책상과 의자들을 옮기는 아이들을 자진해서 도와주기까지 했다. 원위치 시켜놓은 내 책상이 반듯하게 선생님을 쳐다볼 수 있도록 움직여두고 나니 한 뭉치의 프린트물을 들고 드디어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방학 과제와 주의 사항이 쓰인 프린트물을 한 장씩 앞에서 뒤에까지 돌리고 나서 이것저것 설명을 한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겨울에 옷 따뜻하게 입고 돌아다니고, 감기 걸리지 말고, 특히 얇은 얼음이 언 호수나 강에서 함부로 놀다가 빠져 죽는 일 없도록 하라고 주의시키며 마지막으로 방학 잘 보내라는 인사와 함께 내년에 보자고 했다.

“와아아!” 하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함성과 동시에 벌써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리고 아이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후다닥 가방을 집어서 교실을 뛰어나갔다. 교실과 학교 문턱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방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상으로 이동되기라도 하는 양 마냥 설레고 흥분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삼일 간은 할 일 없이 집에서 밥 먹고 아랫목 구들에서 몸을 뒹굴뒹굴 굴린 게 전부였다. 방학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방학이 되었다고 딱히 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새삼스런 놀 거리가 나더러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학기 중의 일상과 달리 늦잠을 많이 잘 수 있고 마음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방학은 아주아주 좋은 것이었다. 너무 좋아하다 보니 엄마가 나무를 듬뿍 넣고 활활 땐 군불이 오른 아랫목에서 눌러 붙어 자다가 엉덩이를 데기까지 했다. 

“앗 뜨거!” 하면서 잠이 깬 나는 거울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어디가 데었는지 확인했다. 병식이네 진돗개 눈알 만하게 빨갛게 익은 자리가 보였다.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내 엉덩이를 탁탁 때려가며 바셀린을 발라주었다. 

쓰리고 화끈거리는 엉덩이가 빨리 식으라고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쐬며 마당을 돌다가 그 길로 미승이네로 갔다. 

“어제도 너네 집에 놀러왔었는데, 너 없더라.”

미승이네 대문 밖에 서서 대문 안에 서 있는 녀석에게 삐친 투로 말을 건네자 녀석이 “언제 왔었어?”라고 물어서 “저녁때”라고 대답했다. 

“교회 갔었어.”

“교회? 너도 교회 다녀?”

“현미한테 끌려갔었어.”

현미는 선중이네 뒷집 사는 우리보다 세 살 위의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였는데,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였다. 지나치게 활달하면서도 새침해서 종잡기 어려운 변덕스런 성격이었는데도, 교회만큼은 질리지도 않고 열심히 다녔다. 

우리 마을에도 있는 작은 교회는 돌아보지도 않고 읍내에 있는 더 큰 교회까지 일부러 다니는 걸 보면 현미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열심히 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현미는 제 입으로도 교회가면 동네 친구들과 오빠들과 만나는 게 재밌어서 다니는 거라고 앙큼한 사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런 현미한테 붙잡혀서 미승이는 며칠째 억지로 교회까지 끌려 다니고 있다고 했다. 

“교회 가서 뭐 하는데?”

“연극 연습.”

또 뜻밖이었다. 그런데 사정을 듣고 보니 이상할 건 없었다. 

“얘, 너 예쁘다. 연극하면 잘 어울리겠다. 나랑 같이 교회 가서 연극하지 않을래?” 하고 현미가 미승이를 꼬셨단다. 

해마다 교회의 크리스마스이브 예배에는 다른 날보다 재미있는 행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로 초등부가 연극을 맡으면 중고등부에서 재미난 콩트 같은 걸 하기도 하고, 청년부의 멋들어진 합창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초등부의 연극은성처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으면 동방박사가 나타나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를 축복해준다는 해마다 지루하게 똑같은 내용이었다. 

현미가 미승이를 끌고 연극에 데려간 건 다른 이유 없이 미승이의 외모 하나 때문이었고, 실제로 연극 연습을 시작하려는 아이들 틈에 미승이가 나타났을 때 대학생인 지도부 교사가 농담 삼아 “네가 마리아 역을 하면 되겠구나.”라고 해서 옆에서 듣는 아이들을 모두 꺄르르 웃겼단다. 아이들이 신나서 미승이더러 마리아를 하라고 농담들을 하는 통에 당장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그때 마침 목사사모님이 오셔서 미승이를 보더니 “천사처럼 예쁘네.”라고 해서 미승이가 천사 역을 맡게 되었단다. 

녀석은 목사사모님의 친절함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엔 아무래도 칭찬에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녀석은 자기를 예쁘다고 해주는 말에 마음이 약해지는 녀석이었다.

“너도 연극 보러 그날 교회 꼭 와.”

미승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왔을 때 우리들도 미승이를 보러 교회에 갔다. 

미승이를 보겠다는 이유만으로 갔을 리는 없다. 실은 우리도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 예배 때만큼은 잊지 않고 교회에 놀러가곤 했다. 연극도 보고 노래도 듣고, 행사가 다 끝난 후에 교회 선생님들이 나눠주는 귤과 과자를 받는 재미에 1년에 단 하루 새빠지게 다니는 교회를 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마을 교회 놔두고 읍내까지 일부러 다닌다고 현미를 흉보긴 했지만, 나랑 친구들도 읍내 교회로 일부러 다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곳 교회에서 주는 과자가 한 개 더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과자 한 봉지에 목숨 걸고 동네 교회를 외면하는 우리들도 속없는 놈들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저녁 버스를 타고서 읍내에 가고, 예배행사가 교회 안에서 끝나면 그 다음에 야밤 기도행렬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들을 실으러 온 트럭을 타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랬다. 과자 한 봉 욕심에 홀린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아이들의 아빠는 해마다 돌아가며 읍내까지 트럭 운전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여느 해보다 수태고지 연극을 더 재밌게 봤다. 

마리아 역할을 맡은 현미가 제일 먼저 무대에 등장했다. 명상 중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이를 잉태했다고 알려주는 장면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삼 년째 보고 있는 똑같은 연극이라서 다음 내용도 다 알았다. 오직 천사 가브리엘… 미승이가 어떤 모습으로 단상에 나타날 지만이 궁금했다.

가브리엘 천사로 분한 미승이가 나타났을 때 나는 주먹을 꼭 쥐고 긴장했다. 

미승이가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까봐 무척 걱정됐다. 우선 천사 옷으로 걸친 하얀 잠옷이 바닥에 질질 끌리도록 길었기 때문에 녀석이 단상에서 밟고 자빠지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리고 저놈이 혹시 대사를 까먹어서 바보짓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들이었다. 

하얀 옷에 하얀 가짜 날개를 달고 머리에 금종이로 만든 별모양의 장식 머리띠까지 단 미승이는 정말로 천사였다. 값싼 재료로 만든 분장용 의상이나 장식 소품들이 하나도 유치해 보이지 않을 만큼, 미승이의 반짝이는 미모가 아동용 무대를 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연기도 당당했다. 카랑카랑 높은 목소리로 마리아 현미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이를 가졌으니 잘 나아서 잘 키우라는 명령조의 대사를 당당하게 뿌리고 무대 뒤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승이의 등장은 그 한 장면뿐이었다. 

이어서 어리숙한 동방박사 세 아이들이 나타나 단상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금박지로 오린 별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이가 나셨다고, 선물 드리러 가자고 대사를 치는데, 녀석들의 형편없는 연기가 내 국어책 읽는 솜씨와 다를 바가 없었다. 

미승이의 자연스럽고 또랑또랑한 대사 솜씨와 비교됐다. 

확실히 미승이 녀석은 무대체질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중간 중간 기도와 찬송을 올릴 때는 지루해서 병식이랑 무영이랑 떠들다가 옆에 앉은 아줌마에게 “쉬잇-!” 하고 경고를 받기도 했다. 

교회 예배 행사가 다 끝나고 목사 사모님과 누나들이 상자를 들고 나와서 유아부와 초등부 아이들만 따로 모이라고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우리들이 얌전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면 사모님과 누나들이 한 사람씩 간식을 나누어주었다. 그 해에는 귤 두 개와 소보로 빵 한 개와 초콜릿 칩 쿠키 한 통을 받았다. 지난해보다 과자봉지 한 개는 줄었지만 대신 더 맛난 걸 받아서 기뻤다. 

그런데 쿠키가 여러 통 남았을 때 한 누나가 연극에 참가했던 저학년 아이들에게 한 통씩 더 나눠주었다. 미승이의 손에 들린 두통의 쿠키를 보고 부러워하는데 다행히도 녀석이 한 통을 열어서 우리들과 나누어먹었다. 

그런데 문득, 친구들에게 친절을 베푼 녀석이 산타 할아버지에게서 나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경쟁심이 불쑥 솟았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덮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그날 아침 내 머리맡에는 하얀 종이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세 번째로 나를 찾아 왔다는 사실에 기뻐서 바로 꾸러미를 풀었다. 그런데 속이 열리자마자 난 잔뜩 실망했다. 

구운 옥수수 두개랑 ‘착한 아이가 되자!’라는 제목의 그림책 한권을 보면서 이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어렴풋한 깨달음이 들었다.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서 하얀 김을 올리고 있는 옥수수를 손에 잡아보니 뜨끈했고, 안방으로 건너갔을 때 온 가족이 옥수수 하나씩을 입에 물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우리 식구 다 먹으라고 산타 할아버지가 갖다 준거야.”라는 천연덕스런 엄마의 말에 옆에서 형이 킥킥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무영이네 모였을 때 무영이네 엄마가 냉장고에 보관해두었던 여름 옥수수를 쪄서 내오며 “희승이네도 어제 보냈는데, 잘 드셨나 모르겠네.”라고 해서 나의 의혹은 한층 깊어졌다. 

“와아. 새하얗다아!”

잠에서 깨자마자 눈을 비비며 나와 본 아침은 사방이 하얗게 눈으로 덮혀 있었다. 

먼 산과 가까운 나무들, 우리 집 담벼락과 지붕과 장독대 항아리 뚜껑들마다 빙수처럼 푸짐한 눈이 올라와 있었다. 대충 내 손 한 뼘 만큼은 쌓였을 법한 눈들을 눈으로 가늠해보았지만, 눈대중만으론 성이 안 차 댓돌에 놓여있는 아빠의 장화로 높이를 재보기로 했다. 무거운 고무장화 속에 헐렁하게 담근 양발을 한 발짝씩 옮겨가며 댓돌에서 마당으로 내려서자 발목까지 하얀 눈이 푹푹 잠겼다. 하도 만족스러워서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커다란 고무장화를 신은 채 절벅절벅 뛰어가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는 엄마에게 호들갑을 피웠다.

“엄마! 엄마! 눈 왔어.”

“어쩐 일로 혼자 알아서 일찍 깼니?”

“엄마. 푸대자루 어딨어? 그거 갖고 나가야 돼.”

“이그… 니가 그럼 그렇지. 놀 생각 하니까 눈이 번쩍 떠지냐? 눈곱 떼고 세수부터 해. 이따 찾아줄 테니까, 밥이나 먹고 나가 놀아.”

수저로 국을 한술 떠서 간을 맞춰보는 엄마의 손목은 내 맘과 달리 느긋하게 움직였다. 

나는 손 시린 줄도 모르고 찬물을 잔뜩 틀어 참방참방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옷을 후다닥 갈아입고서 빨리빨리 아침 밥 달라고 엄마에게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그런 조바심이랑 상관없이 30분 후에나 밥상이 안방으로 들어왔을 때에도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여기저기 밥알을 흘려가며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웠다. 여전히 굼뜨게 밥숟가락을 뜨고 있는 가족들을 보자 엉덩이에서 안달이 났다. 식구들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간 세상 눈이 죄다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나 밥 다 먹었으니까 푸대자루 찾아줘. 나가 놀게.” 

또 엄마를 졸라대자 할머니가 옆에서 “야야, 희승아, 밖에 눈도 많이 오고 추븐데, 니 감기 걸린다. 할미랑 집에서 놀자.” 이러면서 내 손을 잡는 걸 얼른 뺐다. 그리고 밥 먹기 전부터 챙겨놓았던 점퍼랑 장갑을 서둘러서 손에 끼우자, 그걸 보던 엄마가 “쯧, 저 놈은 눈뜨자마자 아침부터 놀 생각밖에 안 하네. 이놈아, 공부 좀 그렇게 열심히 해 봐라!” 핀잔을 주며 “여보, 당신이 광에 가서 얘 자루 좀 찾아줘요. 애들하고 눈썰매 타러 갈 모양이니.” 하며 아빠에게 미뤘다. 엄마가 빈 그릇들을 모아 겹치며 내가 흘린 밥 알갱이들을 주워 담는 동안 아빠가 마지못해하며 일어서서 마당으로 나갔다. 난 광으로 향하는 아빠 뒤를 줄래줄래 쫒아갔다. 농약이 담겨있던 비닐 부대를 하나 꺼내며 “이건 너무 큰가?” 하길래, 난 절대로 안 크다고 그거면 딱 좋다고 우겼다. 아빠는 엉덩이 아프지 말라고 부대 안에 크기가 맞는 골판지 상자까지 접어 넣어서 두툼하게 썰매용 자루를 만들어주었다. 

“옷 젖지 않게, 잘 놀다 와.” 

내 등을 툭 쳐주는 아빠에게 헤헤 웃어 보이고 커다란 자루를 질질 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산이고 들이고 지붕들이고 온통 하얗게 덮힌 동네를 둘러보니 딴 마을 같았다. 

지난밤에 눈이 많이 와서인지,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아침부터 나다니는 사람들도 없었다. 

‘누구네 집부터 데리러 갈까?’ 하고 동네 갈림길에서 어정대다가 나처럼 농약 비닐 자루를 끌고 나오는 무영이를 제일 처음 발견했다. 우리는 무영이네서 바로 옆에 붙은 병식이네부터 들렀다.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부터 서둘렀던 탓에 병식이네서도, 선중이네서도, 우리는 그 애들이 가족들과 아침밥을 먹는 걸 방구석에 앉아서 기다려야했다. 선중이는 제 아빠에게 자루 챙겨달란 소리도 못하고 저 혼자 싸일로에서 얇은 비닐과 얇은 쌀가마니를 챙겨 들고 나왔다. 

그리고 넷이서 미승이네로 가서 대문 밖에서 “미승아, 눈썰매 타러 가자!” 하고 소리를 질렀을 때, 마당으로 나온 녀석의 첫 마디가 “여기 눈썰매장 있어?”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저마다 들고 있는 비닐 자루들을 보더니 그건 왜 들고 있냐며 이상하다는 듯 갸웃거렸다. 

때마침 말이 통하는 현구가 나타났기에 “우리 산에 갈 거니까, 삼촌이 미승이도 이거 찾아줘요.”라고 내 자루를 흔들어 보이자 “저 맹랑한 놈이 날 막 부려먹으려고 드네.” 이렇게 툴툴거리면서도 현구는 내가 들고 있는 미련스럽게 커다랗고 무거운 부대자루를 힐끔 보며 광에서 비닐 자루를 골랐다.

“희승이 니네 아빠가 고렇게 아담하게 만들어줬냐? 니 엉덩이 다치지 말라고?” 

“응. 종이 상자 넣으면 엉덩이가 덜 아파요.”

현구가 나를 비웃는 줄도 모르고 똑 부러지게 대답하자 현구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내 것보다 작고 튼튼한 비닐 부대를 골라서는 안에 넣을 종이 상자를 이것저것 골라보다 죄다 크기가 안 맞자, “에잇, 몰라. 대충 타.” 이러면서 커다란 골판지 상자를 대충 칼로 찢어 넣어서 미승이에게도 비닐 자루를 쥐어 주었다. 

우리 다섯은 각자 비닐 자루 하나씩을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겨울마다 눈이 쌓이면 우리들이 눈썰매를 타고 노는 자연 눈썰매 터가 있었는데, 바로 지난봄에 미승이랑 나랑 둘이 와서 몸을 굴리며 놀았던 무덤가 옆의 작은 둔덕이었다. 미승이 녀석이 생각한 것 같은 인공설이 넓게 뿌려진 긴 경사면에 빨갛고 노란 플라스틱 눈썰매 판을 타고 주르륵 길게 미끄러져 내리는 눈썰매장은 아니었지만, 녀석의 기대보다 보잘것없이 작고 짧은 썰매 터였지만, 우리들에겐 해마다 눈 내리면 아무 때나 와서 공짜로 실컷 놀 수 있었고 우리의 아빠들과 삼촌들도 그렇게 놀며 자라왔던 자리였다. 

게다가 보기보다 언덕의 경사각이 제법인데다 맨 아랫자리에 굵직한 홈이 패어있어 마지막에 미끄러짐과 동시에 퉁 튀어 오르는 알싸한 재미가 있었다. 

먼저 병식이랑 선중이가 수북한 눈 위에 비닐을 깔았다. 그 위에 엉덩이를 올려 앉고 힘찬 발돋움질로 몸을 경사 아래로 조금씩 묵직하게 미끄러뜨렸다. 평평한 비닐과 보송보송한 눈 사이에 아이들의 엉덩이 압력과 마찰에 힘입어 매끄러운 행로가 만들어졌다. 두 세 차례 그렇게 눈길을 다듬고 나서 우리는 언덕 위에 둘씩, 셋씩 열을 지어 본격적으로 눈썰매를 타기 시작했다. 반질반질하고 매끄럽게 다져진 눈 위에서 몸이 좌르륵 미끄러져 갈 때마다 가슴 철렁한 속도감에 꺄아- 꺄아- 최대한 신나는 척 해가며 5초 만에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부대자루를 끌고 30초에 걸쳐 힘들게 언덕 위를 올라갔다. 그리고 또 꺄아- 하고 내려왔다 헥헥 대고 올라가는 미련한 짓을 우리는 한 시간이 넘도록 했다. 

병식이랑 무영이랑 내가 둘씩 번갈아 ―선중이가 미승이 뒤에만 붙어서 타는 바람에―타다가, 나중엔 내 비닐 부대가 제일 크다는 이유로 다섯이 한꺼번에 뭉쳐서 타고 내리다가 병식이랑 미승이가 눈 밖으로 굴러나가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 

언덕을 셀 수 없이 걸어 올라간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눈에 젖은 엉덩이도 차갑고,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목구멍도 아팠다. 지치고 배고파진 우리는 그만 놀고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올 때는 제일 크다고 좋아했는데, 지친 몸에 끌고 가는 자루는 너무 무거웠다. 

얇은 비닐과 쌀자루를 접어서 가볍게 들고 내려오는 선중이 녀석이 부러웠다. 

미승이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줌마가 우리의 젖은 꼬락서니를 보더니 옷을 말려야겠다며 젖은 바지랑 양말까지 벗으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벗어 놓은 옷과 양말들을 모아가지고 나가면서 방에 이불을 깔아 주었다. 

나랑 무영이랑 병식이는 속내의 차림으로, 미승이랑 선중이는 팬티 바람으로 이불속에 들어가 젖은 엉덩이와 다리를 붙이고 앉았다. 따끈한 방바닥 속에서 시리다 못해 얼얼했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찌릿찌릿하게 녹기 시작했다. 

젖어있던 팬티랑 속내의가 말라갈 때 쯤 아줌마가 찐 고구마랑 어묵국을 들여 왔다.

“미승이 친구들하고 재밌게 놀았어? 눈썰매장에서 말고 그렇게 썰매 타 보는 건 처음이지?” 

“응, 재밌었어.”

아침엔 보자마자 눈썰매장을 떠올리던 녀석이 우리가 노는 눈썰매 언덕을 시시하게 여기지 않을까 지레 걱정했던 것과 달리, 미승이는 우리만큼 신나게 놀았고 아줌마한테도 눈을 빛내며 생각보다 재밌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아줌마가 꼬치어묵 한줄 씩을 작은 공기에 담아 주고 나가자, 우리는 어묵국으로 속을 따뜻하게 데우고 함지에서 하얀 김을 올리는 찐 고구마를 한 개씩 집어들었다.

“고구마 껍질도 먹어야 돼. 그게 좋은 거래.” 

“질겅거려서 씹기 싫어.”

고구마 껍질을 벗겨내는 미승이를 보며 무영이가 참견을 해도 미승이는 꼼꼼하게 껍질을 다 벗겨낸 후에야 파근파근한 밤고구마의 노란 속살을 베어 물었다. 우리도 다들 껍질을 까서 먹었다. 저마다 자기 집에 고구마 한두 상자씩은 쟁여놓았는데도, 집에서 쪄 줄땐 잘 먹지도 않는 고구마를 우리는 두 개씩이나 먹었다. 확실히 남의 집에서 먹는 게 더 맛났다. 

“그런데, 너네들 나무썰매는 안 타? 겨울에 얼음판 위에서 노는 나무 썰매 같은 건 안 타?” 

“예전엔 탔는데, 지금은 잘 안 타. 아빠가 그거 만들어주기 귀찮아해서.”

“그 대신 스케이트장 가서 스케이트 빌려서 타.”

“스케이트장 이 근처에도 있어?”

“아니. 버스타고 시내까지 한 시간 동안 가야 돼.”

아이들이 옆에서 떠드는 동안 나는 고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놀아서 노곤한데다, 배도 부르고 방바닥도 따뜻하니 노골노골 졸음이 쏟아지려고 했다. 차라리 누워서 한 숨 자고 가자고 등을 기울이는데 옆에서 미승이가 “아얏!”했다. 제법 귀 따가운 소리에 게슴츠레하게 눈을 떠보니 미승이가 선중이를 노려보고 선중이 녀석은 능글맞게 히죽대고 있었다. 

“아파. 발가락으로 꼬집지 마.”

“넌 전에 희승이랑도 발가락 가지고 장난쳤으면서, 왜 안 되냐?”

미승이가 제일 난감해 하는 소리를 하며 선중이가 바로 치고 들어갔다. 미승이는 할 말이 없는지 다리를 오무려 책상다리로 접어 앉고 묵묵히 고구마 껍질만 벗겼다. 

“아야-” 

이번에는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종아리에 따끔하게 찝힌 자리를 주무르며 돌아보니 엉뚱하게도 무영이 녀석이 엄지와 검지 발가락을 집게처럼 벌리고선 “피힛” 웃고 있었다. 무영이가 혼자 실실대면서 병식이랑 선중이, 미승이 다리까지 돌아가며―걔들한테 욕도 얻어먹어가며―어설프게 꼬집고 집적대는 걸 보니 저도 어지간히 따라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감고 누워 저마다 잠이 들었다. 

옆자리 무영이의 낮은 코골이 소리와 미승이의 달짝지근한 숨소리가 귓가에 따라 들어왔다. 얕은 잠결에 현구가 방에 들어왔다가 왜 자기 방에 애새끼들이 뒹굴어 자느냐고 투덜대는 목소리도, 아줌마가 애들 자게 내버려두라며 이불 한 채를 더 끌어내려 우리에게 나누어 덮어주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입술 위에 찐 고구마처럼 따뜻한 게 올라오는 느낌도 났다. 입술을 축축하게 핥는 느낌도 났다. 

그 바람에 난 쫑아의 꿈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쫑아는 일곱 살 때 우리 집 마당에서 키우던 네 살 난 발바리였다. 주인이고 도둑이고 안 가리고 마구잡이로 반기는 잡종견이었지만, 몸집이 작고 어렸던 나를 유독 만만하게 넘보는 개였다. 개 집 근처만 가면 나랑 몸집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 개가 앞발로 턱하니 내 어깨랑 가슴팍을 누르고 달려들면서 푸르죽죽한 혀로다가 내 얼굴이랑 목을 마구 핥아댔다. 그 바람에 내가 겁이 나서 엉엉 울면, 우는 아이 입 속에다 혀를 넣고 할짝거리는 정신머리 없는 개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수는 없었다. 

내가 여덟 살이 되고 당당히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복수를 시작했다. 

쫑아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보고 반갑다고 꼬리칠 때마다 녀석의 허리로 손에 쥔 돌맹이 하나씩을 힘차게 던졌다. ‘깨갱’ 하고 놀란 비명을 지르며 아파서 몸을 웅크리던 쫑아는 그러고도 좋다고 다시 꼬리를 흔들고 고개를 낮추며 내게 다가오곤 했다. 그러면 나뭇가지로 녀석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개들이 싫어하는 콧잔등을 회초리로 탁탁 때리면 쫑아도 괴롭다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막 피했지만, 난 열심히 녀석의 코를 찾아내서 집요하게 때렸다. 녀석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걸 볼 때마다 속이 시원했다. 내 돌맹이와 나뭇가지에 날마다 한 차례씩 얻어맞고 ‘끄응’ 하면서도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쫑아 녀석이 불쌍하지만 미웠다. 그래서 자꾸 자꾸 괴롭혔다. 

“희승이 네가 쫑아를 싫어하니까 어쩌냐. 잡아먹어버려야지.” 

쫑아에게 된장을 바르던 날 이렇게 아빠는 내게 저런 핑계를 댔었다. 

말복 여름의 정오를 지난 시각에 자신을 보며 군침을 삼키는 남자들을 볼 때부터 눈치를 깠는지 필사적으로 목줄을 풀고 바둥거리고 도망가려던 쫑아는 끝내 자루 속에 담겨 개울가로 옮겨졌다. 개울가 나뭇가지에 쫑아를 잡아넣은 자루가 대롱대롱 매달렸고 동네 청년들이 자루를 향해 둔탁한 몽둥이질을 시작했다. 자루 속에서 꿈틀거리는 몸둥이를 향해 퍽퍽 날아드는 몽둥이 소리와 깨갱깽 깨갱깽 뒤틀린 비명을 내지르는 쫑아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개울가에 주저앉아 울었다. 쫑아를 때리지 말라고, 잡아먹지 말라고 애원도 못하고 그냥 앉아서 울기만 했다. 

자루속의 저항도 비명도 사라지자 사람들은 피묻은 자루에서 몽둥이찜질에 늘어진 개 몸뚱아리를 꺼내 껍질의 털을 제거했다. 화염기로 화르륵 개 껍질을 태울 때 마지막으로 ‘깨앵…’ 힘없이 죽어가던 소리와 지독한 노랑내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쫑아가 사람들의 뱃속에 들어간 줄로만 믿으면서 일 년 동안 쫑아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사실 녀석이 여름 천렵거리로 사라진 이유가 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와 상관없이도 어차피 난 쫑아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았던 다섯 살 난 개, 부스스한 털을 날리며 더벅머리로 달려와 나를 반기던 발바리, 나 좋다고 핥아대는 걸 귀찮다고 마구 괴롭히고 때려주었던 원수 같은 녀석.

‘미안해… 때려서 미안해. 괴롭혀서 미안해….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오랜만에 꿈속에서 만난 쫑아에게 울면서 사과를 했다. 

무더웠던 말복 여름날의 개울가가 아닌, 겨울눈이 내리는 명재골 초입에서 시원하게 뛰어다니던 쫑아가 내게로 발발거리고 달려와서 꼬리를 치며 내 입술을 핥았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내 눈물도 낼름낼름 핥았다. 

꿈에서 깨어 한참 만에 눈을 떴을 때, 눈부신 전등 불과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들 얼굴이 뿌옇게 눈 안으로 들어왔다. 선중이랑 무영이가 나보고 자다가 울었다고 놀려댈 정도로 울어서 부은 눈과 입술이 무겁고 축축했다. 

아줌마가 보송하게 말린 옷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늦은 김에 저녁들도 먹고 가라며 한 상에 밥을 차려 먹인 후에야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둑해진 저녁 길을 돌아오면서 기분이 아주 묘하게 슬프고 불쾌했다. 

겨울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에 미승이는 서울에 갔다. 

그 사이에 선중이는 제 아빠에게 심하게 얻어맞았고, 무영이는 눈썰매를 타다가 발목이 접질렸고, 병식이는 천식이 재발했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선중이, 제 집에만 앉아 뒹구는 무영이, 방에 누워 끙끙 앓는 병식이를 차례로 한 번씩은 찾아다녔지만 모두 시들했다. 나 혼자 탈 없이 무사했지만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개학 전날 돌아온 미승이도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개학날 오후 하굣길에 혼자 개울로 내려가 얼음 언 개울 위를 걷다가 빠직 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첨벙 물속으로 빠졌다. 겨울동안 수위가 얕아진 개울이라 깊이 잠기지도 않았고, 얼음 날에 얼굴이 긁혔지만 피는 나지 않았고, 추위에 떨며 돌아왔지만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끝끝내 탈 없이 겨울방학을 마쳤다. 그리고 2월 말의 눈이 한 차례 더 내렸다 사라질 무렵, 단단한 겨울 흙의 결빙점이 녹아내리고 새로운 봄이 움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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