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7)

[miumiu] 나비의 전족

10살 여름

그 해 장마가 업어온 태풍으로 산에서 나무들이 꺾이고 넘어졌다. 이틀 동안 지축을 흔들 듯한 바람이 불어대더니, 전날 밤엔 기어이 몸을 밀어제치는 강풍을 버텨내지 못한 산 나무 한 그루가 아랫 나무로 쓰러져 기대고, 그 아랫 나무 역시 그 아래로 기대 쓰러져, 그렇게 위로부터 내려온 무게의 중력에 차례차례 도미노처럼 투두둑 무너져 내린 모양이었다. 촘촘히 퍼렇게 솟아 있던 산 일부가 나무들의 누운 자리로, 마치 잠자다 눌려버린 머리 자리마냥 납작하게 풀썩 내려앉아 있었다. 

태풍이 멎고 빗살이 가늘어진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들은 밖으로 나와 그렇게 쓰러진 산과 나무들을 보고 감탄을 내질렀다.

“나무가 왕창 꺾였다아!”

“우와. 후다다다 쓰러졌네.”

“또 무슨 난리가 났나 찾아보자.”

“그래, 강에도 가보자!”

우리들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강가로 달려갔다. 

나랑 선중이, 병식이, 무영이는 강물을 보고 다시 넋이 나갔다.

강은 이미 흙탕물로 범람하고 있었다. 그날처럼 물이 불은 날이 아니더라도 평소의 강은 깊고도 푸르렀지만 그날의 황색 강물은 여느 날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도적으로 넘치고 있었다. 차오르는 강수량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윗마을에서 댐의 수문을 열어 방수를 하는 바람에 두둑이 밀려 터져 나온 누리끼리한 물살 위로 수풀의 잔재들과 나무의 잔가지들 그리고 갖가지 쓰레기들이 하류로 흘러가고 있었다.

개중에 커다란 부목(浮木) 하나가 묵직하고 느긋이 떠내려 오는 모양이 우리의 눈에 들어찼다. 강가에 선 우리는 “저 통나무를 건질 수만 있다면 뗏목 놀이를 할 수 있을 텐데-”, “깃발 꽂아서 해적 놀이도 할 수 있을 텐데-” 하며 가당치 않은 상상으로 안타까운 맘에 발을 동동 굴렀다.

강변 나루터 바닥을 넘어선 수위가 배와 고무보트들을 슬렁슬렁 흔들어가며 하류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물살의 흔들림에 따라 나무배가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간간이 나루 바닥과 맞물렸다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무영이네 아버지가 강 건넛마을로 오갈 때 가끔씩 그 작은 나룻배에 우리들을 태워주기도 했지만, 그 정도론 우리들의 무한 어드벤처의 로망에 성이 차질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저 큰 나무라면 여름마다 곧잘 멱 감으러 가는 냇가로 옮겨다 띄워놓고 더 신나게 놀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깊어진 강물에 섣불리 다가섰다간 발이라도 휩쓸릴까 잔뜩 꺼리고 물러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 제일 무모하게 앞장서서 나대던 선중이도 범람하는 탁류의 용량에 압도된 듯 쳇, 쳇, 발길만 툭툭 내지르며 부목을 건져오지 못하는 아쉬움을 던져내고 있었다. 

“지금 강에 빠지면 못 나오겠지?”

“당연하지. 아무도 못 구해줘.”

내 말에 선중이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선중이의 말대로 그런 물에 누군가 빠진다면 보통 사람은 아무도 못 건져낼 것이다. 그 순간 설령 나나 친구들 중 누구 한 명이 빠진다 하더라도 아무도 친구를 위해 그 깊은 강에 뛰어들 엄두도 못 냈을 거다. 다들 자기 목숨이 소중하니까. 특히나, 어렸으니까 말이다.

나는 뗏목놀이도 좋지만 사실, 그 나무 자체만으로도 몹시 탐이 났다. 

어쩐지 그 큰 나무를 소유할 수 있으면 세상의 일부를 얻은 기분이 들것만 같았다. 아이들의 부러움도 한몸에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라는 존재가 달라 보일 것도 같았다. 산에서 흔히 보는 나무 한그루 일뿐인데, 제자리가 아닌 데로 흘러들어온 그것이 그때는 그것이 어찌 그리 대단히도 희귀해 보였던지…. 

그래도 감히 나무를 건지고 싶다는 생각은 못했다. 수영을 못하는 건 둘째 치고 강물에 발끝이라도 담갔다간 그대로 그 탁류의 물살 속으로 잠겨버릴 것만 같았기에, 작은 유혹에 못 견뎌낸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침잠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기에 말이다. 

“그만 가자.”

“그래, 무영이네 가서 놀자. 야, 무영이 너네 집에 어제 손님이 과자 잔뜩 사들고 왔다며?”

선중이가 재촉하는 말에 병식이 녀석이 동조를 하며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당사자인 무영이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제 멋대로 무영이네 집에 가자고 결정해버리는 병식이는 본디 뻔뻔함을 사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무영이는 그런 병식에게 쓸데없는 자랑을 늘어놓은걸 후회하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우리를 저희 집으로 데려갔다. 

가늘어진 빗속에서 우리들은 우산을 펼친 채, 또는 접어들고서 칼과 방패인양 칼싸움 흉내를 내며 강에서 돌아오다 삼거리 길목에 서 있는 미승이와 마주쳤다. 우리는 본 척도 안 하고 우리끼리 다시 더 크게 장난치고 떠들며 지나갔다. 장마 구름이 완전히 걷히지 않아 묽은 먹물 같던 그날의 습한 공기 속에서 검은색 우산을 쓰고 홀로 빙충맞게 서 있던 미승이의 모습은 유난히 창백하고 우중충해 보였다.

9살 봄 

한동네에서 자라온 또래였던 나와 선중이 병식이 무영이 넷은 어려서부터 붙어다녔고, 초등학교에도 나란히 입학해서 늘 함께 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등하교를 했다. 그리고 여전히 넷이 까불고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놀았다. 

선중이는 제법 체구가 다부지고 땅땅한 녀석이었는데, 특히나 겨울마다 굵은 마디 층을 잡아 박음질 선을 넣은 패딩 점퍼를 입고 나오면 꼭 미쉐린 타이어맨 같아 보였다. 우리들 중 성격이 제일 드세고, 목소리 크고, 달리기도 잘하는 녀석이어서 자연스럽게 우리 넷 사이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선중이는 우릴 제 휘하로 놓고 맘대로 부리곤 했지만, 그런 제멋대로인 녀석이 이따금씩 밉살스러울 때는 있어도 그와 놀면 재미가 있든 없든 ‘놀고 있다’는 감각이 확실하게 전해지는 활기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논다’하면 그것은 곧 선중이와 함께 논다는 뜻으로 통했다. 

쳐진 팔자 눈썹에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병식이는 원래는 우리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천식을 앓느라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 우리와 동급생이 되었다. 하지만, 체격도 별로 안 크고 허약한 녀석이 선중이를 제 아랫수로 부리려다가 선중이에게 한 대 얻어맞은 뒤로는 다시는 개기지 않고 저를 형이라 부르라 소리도 안 했다. 그 후 병식이는 선중이에겐 고분고분 맞춰주면서도 나나 제 놈의 사촌인 무영이는 자신의 하수로 보고 제 마음대로 부리려 들곤 했다. 

어수룩하고 주변머리 없는 무영이는 병식이의 사촌 동생이었고, 우리들 중 유일하게 병식이를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선중이나 병식이가 밀어붙이면 군소리 없이 순순히 따르는 아이였고 별 불만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런 점에서 나도 무영이와 다를 바 없는 미숙아였지만. 

우리들의 포식관계를 말하자면, 나랑 무영이랑 병식이는 선중이의 밥이었고, 나랑 무영이는 병식이의 밥이었다. 그렇게 쉽게 아이들의 상하 관계가 지어지고, 누구도 그것을 깨려 들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계층화에 불만을 가지기엔 우리들의 욕구란 것도 저마다 보잘것없이 작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2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무렵, 미승이네 가족이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다. 미승이는 우리와 같은 읍내의 미령초교로 전학을 와서 나와 병식이랑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러나 우린 미승이를 우리들 무리 안에 끼워주지 않고 모른척했다. 

그래서 그 애는 아침에 학교 갈 때 우리와 같은 버스를 기다렸다 탈 때 혼자였고,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들과 같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혼자였다. 미승이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와도 우리들은 절대로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팽 돌려버리는 유치한 따돌림 놀이를 했다. 그것은 비단 “너희들, 저 녀석이랑 절대 말하면 안 돼!”라던 선중이의 지시가 아니었더라도, 아마도 어른들의 편파적인 감정들을 은연중에 듣고 받은 영향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승이네가 이사 오기 전까지 명재골이라 불리는 산등성이 사이의 초입에 자리 잡은 그 집엔 미승이네 할아버지가 막내아들인 현구와 둘이서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큰 은행에 다니고 있었다는 장남인 미승이네 아버지가 그즈음 구조조정인가 뭔가로 은행을 그만두는 바람에 갑자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도심으로 나가려는 추세에 역행해서, 교육열이 드세게 끓고 있는 도시에서 굳이 강원도 산골로 한창 자랄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고 주변에선 말들이 많았다. 한편으론 그 집안이 예전보다 가세가 확 기울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넉넉한 땅이 있으니, 남의 눈치 안 보고 고향에서 맘 편히 살 터전을 찾으러 왔을 거라며 마땅히 이해한다는 말들도 있었다. 

한때 마을에서 수재 비슷한 소리도 듣고 살았다는―흔한 말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라는―미승이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의 인상 속에선 도시 물에 나가 사는 것이 더 어울리고 당연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도시에서 다시 자리 잡을 생각을 않고 고향으로 내려온 건 현명하지 않다는 뒷담들이 당시 마을의 대세였다. 

내가 봐도 미승이네 아버지는 우리 아빠나 동네 아저씨들과는 달라 보였다. 농사일로 볕에 그을려 굵은 주름이 잡힌 얼굴에 말투까지 퍽퍽했던 마을 사람들과 달리, 그는 비슷한 연배의 우리 아빠나 다른 아저씨들보다 살도 희고, 주름도 엷고, 항상 단정한 옷차림에 말씨도 점잖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시골에서 보기 드문 깔끔한 엘리트 타입의 아저씨였다. 그래서 그런 아빠를 가진 미승이가 약간 부럽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살겠다고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의 반기는 웃음 속엔 작은 실망과 궁금증들이 여러모로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이 어릴 땐 그렇게 공부도 잘했다면서요. 근데 도시 살던 사람이 어쩌다가 도로 시골로 내려오게 됐을까? 그 댁 할아버지도 당신 장남이 이담에 크게 성공할 거라고 그리도 장담했었다던데….”

“아, 그럼 뭐해. 공부 잘하는 거랑 사회생활 잘하는 게 어디 같은가!? 한창 일할 나이에 은행에서 자리 하나 못 지키고 벌써 잘린 걸 보면 안 봐도 뻔하지. 제 놈이 뭔 사고라도 쳐서 잘렸겠지.”

어릴 적 미승이네 아버지와 마을 형, 동생 사이였다는 아빠의 말투에 안타까움은 묻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중이네 아버지나 다른 아저씨들이 비슷한 말을 떠드는 것도 들었다. 

“아, 그리고 농사짓는 일이 어디 뚝딱뚝딱 절로 되는 일인가? 손에 흙 한번 안 묻히고 책상 앞에만 들러붙어 살던 놈이 무슨 재주로 농사를 짓는다고. 은행에서 돈 만지다 잘린 놈인데, 앞으론 우리들 농자금도 안심할 수 없게 됐어.”라는 말이 뒤따라 붙는 걸 들은 적도 있다. 듣고도 뭔 소리인지 이해는 못 할 나이였지만.

그런데 나중에 돈 소문에 의하면 사고를 친 건 미승이네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상사였다고 한다. 그제야 아빠와 아저씨들은 “거 참 안됐네.” 라며 입속에 안쓰러움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승이 아버지랑 삼거리 가게 앞에서 모이기만 하면 소주를 걸치며 모 심는 시기라던가, 제초제 사용법이라던가, 밭에 비닐 덮는 방법 같은 것을 친절하게 일러주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난 어째서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누군가가 대신 모가지를 당할 수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게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미승이네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이유가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 시샘하고 모략하고 동정하는 식의 태도 바꾸기를 훌렁 훌렁 잘하는 모습들은 살면서 이후에도 죽 볼 수 있었지만, 당시의 나에겐 요모조모 이해가 안 되는 말들 투성이었다. 

그리고 도지를 주고도 남아돌던 집안 땅에서 농사짓고 살겠다던 미승이네 아버지의 계획은 그 부친의 강력한 반대로 곧 허물어졌다. 한때 지역에선 한 가닥 하는 유지였다던 미승이네 할아버지는 시들어가는 마지막 연줄들을 동원해서 시내의 농협 한 곳에 그의 아들을 꽂아 넣을 자리를 억지로 만들어냈고, 미승이네 아버지도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직장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의 뒷말들은 안타까움과 공감에서 다시 은근한 질시와 비난으로 돌아섰다.

우리는 은연중에 그런 어른들의 감정을 입력받고 자랐다. 그들은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도 듣건 말건 험한 소리 들을 가리지 않았고 부모들의 감정적인 의견들이 어린 우리들의 마음 안에 확정처럼 찍혀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미승이를 당연히 따돌려야 할 아이로 찍어버렸다. 어른들이 미승이네 할아버지나 아버지 앞에서는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입에 발린 인사들을 담고 사는 줄도 모른 채, 어린 우리들의 결합의식은 무조건 타지 녀석을 따돌리는 일에 의미도 목적도 없는 방향키를 잡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봐야 어차피 어린애들의 가벼운 변덕이라 오래가지도 못했지만. 

미승이가 전학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미승이 아버지의 새 일터가 결정된 직후였다―미승이 어머니는 부모들을 통해서 마을의 또래 친구들을 그 집으로 초대했다. 물론 또래라 하면 우리 넷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껏 류미승이라는 녀석과 인사 한마디 나눠본 적 없고 무작정의 따돌림에 합류해왔던 내가 걔네 집에 가는 건 안될 일 같았다. 혹시나 미승이네 엄마한테 혼나는 거 아닐까? 푸대접 받고 오는 게 아닐까? 은근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엄마가 갈아입혀 준 옷을 입고도 방안에서 데굴거리며 좀처럼 집 밖으로 나설 생각이 안 들었다. 하지만 “희승아, 가자!” 하고 문밖에서 부르는 선중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뇌를 텅 비우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우리는 무리가 되어 당당하게 미승이네 집에 몰려갔다. 

미승이네 어머니는 우리에게 정말로 상냥하게 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승이가 외따로 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줌마가 우리들을 회유하려고 초대를 계획했을 것이다. 그 아줌마는 우리 이름을 한 명씩 묻고 웃으면서 미승이랑 친하게 지내달라고 공손한 부탁까지 했다. 그리고 맛난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려주고도 간식거리를 계속 내오며 우리들이 잘 놀고 있는지 확인했다. 물론 우리들은 혼이 빠지게 잘 놀았다. 난 가서 너무 까불지 말고 점잖게 놀다 오라는 엄마의 충고도 완전히 잊고서 선중이들과 박자를 맞춰 시끄럽게 방 안을 뛰어다녔다. 미승이는 우리가 와서 기쁜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녀석도 우리에게 친절했다. 

“너 신기한 장난감 같은 거 없냐?”

질리도록 퍼먹고 배가 부른 선중이는 장난감 구경 좀 해보자며 미승과 삼촌이 함께 지낸다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승이는 “내 장난감 저 방에 다 있어.”라며 우리를 작은 창고 방으로 데려갔다. 두 개의 나무 궤짝을 열어 보여줬을 때, 그 안엔 탐나는 장난감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선중이는 이것저것 끄집어내서 움직여보고 굴려보고 하더니 나중에 진녹색 포켓 헬기를 집어들고 입으로 투두두두 웅웅 소리를 내며 한참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 그 헬기가 대단히 맘에 들었는지, 대뜸 “이거 나 줘.”라고 염치도 없이 요구했다. 나 같으면 절대 안 주고 싶었을 텐데, 미승이는 싫은 기색도 없이 그러라고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은 우리 셋에게도 맘에 드는 장난감이 있으면 하나씩 골라 가지라고 했다. 

병식이는 로봇으로 변신 조립이 가능한 경찰차를 아까부터 눈여겨보았던 듯 금방 집어 들었고, 무영이는 기중기처럼 생긴 노란 차를 골랐다. 마지막까지 무얼 고를지 망설이던 내게 미승이는 빨간 소방차를 보여주었다. 난 전에도 소방차를 한번 가져봤었지만, 형이 망가뜨리고 나서 아예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비슷한 장난감을 다시 만난 반가움과 새로움이 없는 데 대한 시들함이 교차하며 난 시큰둥하게 소방차를 받아들었다.

“요 뒤에다 물 담아 놓고, 이걸 누르면 물도 나온다.”

미승은 저가 준 소방차의 특별한 시스템을 설명해주고 나서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겠다며 부엌에 가서 소방차 안에 물을 담아 왔다. 그리고 할아버지 방에서 유리 재떨이랑 성냥을 가져와서, 작은 종이 한 장에 불을 붙여놓았다. “앗, 불났다!”하며 장난감 소방차에 달린 고무 호수꼭지를 불붙은 종이를 향해 꾹 누르자 정말로 삐지직 물이 흘러나와 불이 사르륵 꺼졌다. “자. 다 껐습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고선 내 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진짜 소방차 같지?” 

진짜 소방차 같았다. 그때는. 

쏘면 물 나오는 장난감이 한두 개도 아니고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어쩐지 미승이가 노는 양이 재미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빨간 소방차는 사이렌 소리를 앵앵 울리며 굴러가는 성능도 갖추고 있었다. 선중이랑 병식이마저 별것 아닌 그 놀이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 저희가 고른 것과 내가 받은 소방차를 곁눈질로 비교하기도 했다. 무영이는 방구석에서 노란 기중기에 집중하느라 우리가 뭘 하는지 보고 듣지도 않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즈음엔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웃으면서 우리에게 자신의 장난감을 나눠주던 미승이가 갑자기 조금 좋아졌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니다. 

다음날 선중이는 우리 셋을 끌고 미승이네 집까지 가서 “미승아. 학교 가자.”하고 녀석을 불러내서 함께 버스정류 장으로 데리고 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마을의 외톨박이였던 미승이는 그렇게 우리들의 친구가 되었다. 

미승이는 하얀 얼굴에 입술이 붉고 헤실헤실 잘 웃는 아이였다. 얼추 웬만한 여자애들보다 더 여자애처럼 보일 만큼 곱상하고 호리호리했다. 뽀얀 피부색을 볼 때마다 “도시의 수돗물엔 소독약이 많이 들어서 사람이 하얘진다더라.” 하는 얘기들을 반 여자애들이 주고받을 만큼 미승이의 흰 피부는 또렷한 눈매랑 붉은 입술, 그리고 밝은 머리카락과 함께 여자아이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승이의 머리카락도 토종 한국인의 자연모발치고는 드물게 밝은 갈색이었다. 햇볕이 쨍한 날 바깥에 서면 덜 익은 옥수수수염빛깔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순박했던 난 처음에 전학 온 미승이를 보자마자 어린 게 벌써 물들이고 다닌다고 약간 놀랐을 정도였다. 나중에 우리들이 친해지고 나서 무영이가 “미승이 너, 머리 염색했냐?” 물어봤을 때 미승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날 때부터 그런 색이라고 했다. 

그래서 미승이는 마치 여자애 같기도 했고 백인 혼혈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서울 살 때도 그런 소릴 자주 들었다고 했다. 그만큼 미승이의 외양은 밝게 눈에 띄었고 더더군다나 우리들의 산골 마을에서는 특히나 그랬다. 오죽하면 그 애 삼촌인 현구조차도 가족들이 밥 먹던 자리에서 미승한테 “넌 류씨네 씨가 맞는가? 어찌 이리 사내새끼가 허여멀겋대.” 하고 주책없이 떠들다가 미승이네 할아버지한테 혼뜨검이 났다고 했다. “쟤가 그럼 류가 씨앗이지 언놈의 씨앗이야!? 그 나일 처먹고서 애한테 허튼 농이나 허고…, 싸갈머리 없는 자식! 그러니 여즉 그 모냥 그 꼴이지. 쯧!” 요렇게 말이다.

그럴 만큼 누가 보면 정말로 미승이네 가족 중 그 애와 닮은 사람이 없어 보였다. 실은 미승이의 눈은 할아버지를, 입술 모양은 엄마를 닮았다는 걸 알려면 그들 가족 구성원의 얼굴에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난 다른 사람들보다 미승이가 닮은 가족들을 빨리 알아낸 편이었다. 어린애 눈썰미라 봤자 개 발톱만큼도 믿을만한 것은 못되지만 난 유난히 미승이의 얼굴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말이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거지, 그때만 해도 내가 미승이를 친하게 생각했다는 건 아니다. 

미승이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오직 여자애들한테만. 

도시에서 살다 온 아이답게 우리들보다 보고 들은 게 많아서인지 똑똑한 것 같았고, 수다스럽진 않은 아이였지만 일단 입을 열면 확실하게 야무졌다. 그래서 전학 온 지 두어 달이 지나면서 반 아이들과 말문을 트기 시작한 미승이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 

미승이 옆에서 같이 수다 떨며 놀고 싶어하는 여자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개중에서도 경미와 연정이 같은 극성스런 무리들은 쉬는 시간마다 미승이를 독차지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수줍음에 밀려 미승이랑 친해질 순서를 놓쳐버리고, 경미네의 극성을 이길 자신도 없고 해서 걔들이 노는 양을 주변에서 흘끔 지켜보기만 하는 여자애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경미네 서너 패거리는 점심시간만 되면 미승이 짝을 밀어내고 옆 자리들을 차고앉아 미승이랑 반찬을 나눠 먹고, 밥을 다 먹고 나면 밖으로 끌고나가 데리고 놀았다. 미승이도 그런 계집애들과 싫은 기색 없이 잘도 놀았다. 경미네 서너 무리랑은 등하교 때마다 “안녕”, “잘 가” 등의 인사도 나누고, 쎄쎄쎄도 하고, 고무줄놀이에도 곧잘 끼어들어 놀곤 했다. 

간혹 선중이의 심술로 학교에서 우리들의 놀이에 끼워주지 않을 때마다, 미승이가 그렇게 연정이네랑 점심의 남은 시간을 때우곤 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저러다 저놈 고추 떨어질 거다!”하고 선중이가 툭 내뱉으면 옆에서 병식이가 “맞아.”라고 거들었다. 바로 근처에서 여자애들 무리 속에 섞여있는 미승이 들으란 듯이 목소리 높여 떠들어도 미승이는 화내거나 삐치지 않았다. 선중이들이 뭐라던 아랑곳하지 않고 고무줄을 잘도 넘나드는 미승이 녀석을 보면서 난 속으로 녀석의 배짱이 부럽기도 했다. 귀엽고 예쁘장한 외모지만 자기주장도 뚜렷하고 수줍음 타지 않는 미승이 녀석의 모습은 친구들 사이에서 눈치나 보며 끌려다니는 내 모습을 돌아보게 했고, 그런 미승이랑 날 비교하며 내심 주눅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난 스스로 위안했다. 

나에겐 나머지 세 명의 동료가 있다. 별 미더운 놈들은 아니지만 선중이나 병식이나 무영이는 어쨌거나 내 동료들이다. 미승이가 제 아무리 똘똘하다 한들 우리 지역에 대해선 모르는 것투성이다. 제 아무리 인기가 많다 한들 읍내 학교에서일 뿐이다. 마을로 돌아오면 결국 녀석은 우리들 말고는 놀 사람이 없다- 하고 말이다. 

그래도 학교가 파하면 오히려 우리 다섯은 다시 가까워졌다. 서로를 친구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우리들 무리는 넷에서 다섯이 되어 매일 매일 함께 등하교를 했고, 항상 어울려 돌아다녔다. 평일에는 방과 후에 읍내 지리를 알려준다는 핑계로 미승이를 데리고 길 안내 삼아 시장바닥과 완구점들을 돌며 시간을 보냈고, 일요일엔 마을에선 산과 들판을 헤집고 다니며 우리들의 놀이터들을 찾아 알려주곤 했다. 그럴 땐 의례 병식이가 제일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선중이는 미승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거들먹거리며 활보하길 좋아했다. 무영이란 나는 항상 뒤처졌다. 

하루는 미승의 어머니가 놀러 와 우리 엄마랑 참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아줌마는 날 보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미승이도 고향은 여기야.”라고 했다. 

“맞아, 여기서 미승이 낳았지?” 

엄마가 맞장구를 치며 아줌마가 미승이를 가졌을 때 남편만 서울에 두고 이곳 시댁에 와서 몸 풀고 한동안 갓난쟁이를 키우다가 서울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아줌마랑 주고받고 나서 기억거리들을 또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 돌 지나고 나서도 왔었지? 미승엄마가 몸이 아파서였었나? 애 데리고 와서 몇 달간 여기서 지내다 갔었잖아.”

“그랬지. 그때 우리 미승이랑 희승이 너랑 자주 놀았는데…. 넌 기억 안 나니, 희승아?”

“아유. 얘가 뭘 알겠어. 애들이 엉금엉금 길 때였는데, 기억날 리가 없지.” 

아줌마는 나랑 희승이랑 친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내 기억에도 없는 얘기들을 자꾸만 꺼냈다. 엄마 말대로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아기들이 무슨 기억능력 따위가 있겠는가? 당연히 하나도 기억 안 나지. 그리고 갓난 애기들이 놀아봐야 뭘 어쩌고 놀았겠는가. 오히려 꼬부라든 손으로 서로 힘껏 할퀴거나 쥐어뜯지만 않았다면 그나마도 다행이지 말이다.

“그래도 갓난쟁이끼리 잘 놀긴 했지. 논건지 어쩌는 건지 모르겠지만, 둘 다 포대기에 모아서 눕혀 놓으면 어느새 팍 헤집고 나와서는 둘이 옹알이하면서 토닥대곤 했으니까.”

“맞아. 그래도 우리 미승이가 희승이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미승이 걔가 희승이한테 기어가서 뽀뽀한 적도 있잖아. 기억나? 우리 그때 막 웃었잖아. 그 장면 사진이라도 찍어놓을 걸 그랬어. 지금 보면 재밌을 텐데.”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엄마랑 아줌마는 저들끼리만 아는 얘기로 맞아, 맞아를 연발하고 깔깔거리며 자꾸만 날 낯 뜨겁게 했다. 난 남아 있는 찬밥 한 숟가락을 억지로 입 안에 구겨 넣고 마루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방안에서도 아줌마들의 수다는 얇은 창호지문을 통해 다 들려왔다. 

“바로 어제일 같은데 벌써 애들이 저만큼 컸네.”

“그러게나 말이야. 역시 애들은 갓난 애기 때가 제일 예쁜 것 같아. 커갈수록 말도 더럽게 안 들어 먹고.”

“우리 미승이도 그래. 쪼그만 게 머리만 커갖고는 얼마나 따박 따박 말대꾸를 해대는데.”

“그래도 미승이는 예쁘기나 하지. 그리고 걘 애기 때도 엄청 예뻤잖아. 희승이 쟨 애가 갈수록 밉둥이야. 참, 근데 미승 엄마, 미승이 얼굴 지금은 괜찮아? 우리 희승이가 미승이 얼굴 할퀴는 바람에 피가 막 났던 적 있잖아. 흉이라도 졌으면 어째?”

“괜찮아. 눈썹 옆에 좀 희미하게 남긴 했는데, 햇볕에 나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티도 안 나. 그리고 까짓 거, 사내새낀데 흉터 좀 남으면 어때? 계집애라면 신경 쓰일 일이지만.”

“그래도 흉이 남긴 남았네…. 갓난이들 손힘도 장난 아니라니까.”

난 다음 날 학교에서 미승이의 얼굴을 열심히 관찰한 결과 오른쪽 눈썹과 관자놀이 사이에 희미하게 패인 상처가 있는 걸 알았다. 평소엔 잘 안 보이지만, 햇볕을 받으면 약간 반짝거리면서 드러나는 작은 흉터 자국을 다른 아이들은 거의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나에게만 발견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의 작은 흔적이었다. 

그래서 난 미승에게 나만의 비밀장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미승아 학교 끝나고 호수에 가자. 내 비밀기지 보여줄게.”

“비밀기지?”

방과 후에 기대와 호기심에 들뜬 미승이를 데리고 저수지를 지나고 성주골을 지나 버들 마을에 있는 호수까지 한참을 걸어갔다. 그 작은 호숫가에 늘어지듯 휘어져 자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몸통에 작은 구멍이 하나 안으로 뚫려 있었다. 나무구멍의 위치는 몸을 아슬아슬하게 물가로 내밀어야 내 짧은 손이 겨우 닿을 곳이라, 충분히 비밀로 삼을만한 두근두근한 위기감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선중이들과 물장난을 치고 노는 호숫가였지만, 그 구멍만큼은 그때껏 선중이네도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었고, 그래서 나만의 비밀로서 소심한 자랑을 삼고 있었다. 

“바로 여기야.”

내가 물가로 몸을 쭉 뻗어 손으로 더듬더듬 구멍 위치를 확인한 후에 미승이에게 가르쳐주자, 미승이도 내가 하는 대로 반대편에서 팔을 뻗었다. 

“작네. 난 또…, 비밀기지라고 해서 동굴 같은 덴 줄 알았어.”

미승이의 반응에 조그마한 나무구멍을 비밀기지라고 뻐기며 자랑한 내가 우스운 놈이 된 것 같았다. 그래도 뭐라 투덜거릴 수 없을 만큼, 사실 내 비밀장소란 조막손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의 작은 구멍일 뿐이었다. 너무 작은 구멍이라, 별로 담을 것도 없었다. 

“근데 이 안에 뭐가 있다. 뭐지? 어, 구슬이네?”

미승이는 구멍 속에서 찾아낸 유리구슬 하나를 꺼내 잡고는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전해에는 그 구멍 속에 엄마가 삶아준 메추리 알 두 개를 넣어두었던 적도 있는데, 그것이 한 달 동안 썩어서 무지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그 후로 구멍 안엔 유리구슬만 몇 개 넣어두고 다녔던 것이다. 

“응. 여기다가 구슬 조금만 넣고 다녀.”

조금만 넣고 다닌다는 건 뻥이었고, 구멍 안의 대여섯 개의 구슬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작은 새 구멍만 한 공간조차 채울 수 없을 만큼 내 다마치기 실력은 엉망이었고 허구한 날 병식이랑 선중이에게 따먹히기 일쑤였으니까. 그래서 난 나랑 실력이 비슷한 무영이하고만 붙들고 구슬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승이는 구슬을 굴려보고 다시 구멍 속에 손을 넣어보며 무척 즐거워했고, “이거 되게 재밌네.”라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게 또 기분이 으쓱해져서 미승에게 네 구슬도 세 개쯤 여기 담아도 된다고 허락을 해줬다. 다음번 호수에 올 땐 각자 자기 구슬에 표시를 해서 구멍 속에 넣어두자고 약속하며 우리는 다시 성주골을 지나 우리 골로 돌아왔다.

봄 산이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잎들이 향연으로 한껏 밝아지고 있었다. 완두콩처럼 밝은 연잎사귀들이 자라나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움을 틔우기 시작하고 희끄무레한 꽃가루가 부슬부슬 날아다닌다.

일요일에 나랑 미승이는 손을 잡고 산에 올라갔다. 

“진달래 먹어도 되는 거지?” 

미승이가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분홍색 꽃송이를 따먹으려는 것을 보고 녀석의 손을 탁 쳐서 못 먹게 말렸다. 진달래를 먹어도 된다는 소리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미승이가 집어든 것은 아직 제대로 크지도 않은 철쭉 봉오리였다. 

“그거 철쭉이야. 철쭉은 먹으면 안 돼.”

그러자 진달래랑 철쭉을 어떻게 가르냐고 느닷없이 묻길래 “진달래는 꽃만 피고, 철쭉은 잎도 피고 꽃도 피어.”라고 대답해주자 “흐응… 그러니까, 진달래는 꽃만 먼저 피는 거고, 철쭉은 잎이랑 꽃이 같이 핀다는 거지?”하고 알아서 이해한다. 먼저 알아도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나에 비해 늦게 알아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녀석이 보면 볼수록 똘똘한 것 같다. 

미승이는 “와아” 혼자서 신을 내며 산등성이를 뛰어올라갔다. 미승이의 밝은 머리카락이 햇볕 쨍쨍 내리쬐는 개나리 덤불 곁을 지날 때 더 밝고 화사해 보였다. 미승이의 뽀얀 우유빛 살결과 햇살처럼 밝고 가벼운 노랑 머리칼이 부러운 나였다. 내 곱슬머리와 거무스름한 피부는 미승이 옆에 서면 더 도드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승이가 자랑스럽기도, 종종 샘이 나기도 했다. 두껍고 까칠한 내 검은 머리랑은 다르게, 윤기나게 가늘고 찰랑거리는 뒤통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 

우리는 풀밭 위에서 뒹굴고 놀았다. 몸을 옆으로 뉘인 후 나지막한 경사를 따라 아래로 마구 뒹굴어 내려가며 꺄아 소리를 지르고, 또다시 경사 위로 올라가서 경사 아래로 몸을 굴려 내리며 꺄아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어지러운 놀이를 하는 동안 전신에 풀 포기가 잔뜩 묻었다. 서로의 머리와 옷에 달라붙은 흙과 풀을 서로 떼어주다가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가 옆에 있는 평평한 지대로 갔다. 

그곳엔 들꽃이 많이 피어나곤 했다. 우리는 그 자잘한 풀꽃들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쓰잘 데 없는 얘기도 하고 실없는 웃음도 날려 보냈다. 흰 홀씨들도 봄바람에 날아다녔다. 미승이는 하얗고 보송거리는 민들레 씨를 따서 입으로 후우 불었다. 동그랗게 모인 솜털 같은 홀씨들이 파라락 흩어지며 팔랑 팔랑 짧은 거리를 날아갔다. 미승이는 그 모양이 재미있는지 몇 개를 따서 계속 후우- 후우- 불어 날리더니 나중엔 숨을 헥헥거렸다. 노란 민들레가 여기저기 피어있었는데 미승이가 그 노란 꽃을 따서 내 한쪽 귀 옆에 꽂는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는데, 

“예쁘다. 희승아.”

그러면서 내 뺨에 입을 쪽 맞추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더니 쑥스러운지 저 혼자 몸을 뒹굴 거리며 히힛거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저도 한 포기를 뽑아 제 귓가에 꽂고 “나도 예쁘냐?” 묻는다. 그런 미승이 때문에 난 얼굴이 빨갛게 더워졌다가 다시 선선한 바람에 식어가며 같이 웃어버렸다. 봄꽃처럼 환한 그 웃음에 마음이 누그러져 뽑아버리려던 꽃을 그대로 두고 그 하얀 얼굴만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민들레보다 해사한 미승이는 두근거릴 만큼 예뻤다. 아니, 그때까지 내가 본 누구보다 예뻐 보였던 것 같다. 

“미승아, 노래 불러봐.”

“무슨 노래?”

“네가 전학 온 날 불렀던 노래 있잖아.”

미승이가 전학 오던 날 노래나 한 곡 하고 자리로 들어가라던 담임의 말에 주뼛거림 하나 없이 시원하게 부르고 들어갔던 노래가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나는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멜로디가 따뜻하면서 가사가 약간 슬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미승이는 기억도 못 하는 모양이다.

“으응… 할아버지 시계였나? 아무튼, 그거.”

“아. 그 노래?”

미승은 이번에도 주저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고 커다란 마루 위의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90년 전에 할아버지 태어나던 날 아침에 받은 시계란다?”

미승이는 말투도 또랑또랑하고 감수성 풍부한 얼굴에 걸맞게 노래도 잘 불렀다. 목소리도 고왔다. 노래의 다음 소절부터는 나도 드문드문 뒤따라 불렀다. 물론 알 리가 없는 가사 대신 흥 흥 콧소리를 내며 쫓아갔다. 미승이도 나를 마주 보고 귀 옆에 꽃을 꽂은 채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거리며 붉고 예쁜 입술로 벙긋벙긋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 영락없는 계집아이 같았다. 하지만,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았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난 후 미승은 한 소절 한 소절씩 또박또박 끊어가며 내게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내 음정이 틀릴 때마다 “그게 아니야, 이렇게 똑 딱 똑 딱, 다시 해 봐.” 손에 쥔 작은 나뭇가지로 탁탁 땅을 치며 박자를 맞춰주는 폼이 여간 선생 같은 게 아니었다. 미승의 붉은 입술을 보면서 꼬박꼬박 따라 부르다보니 나도 금세 가사를 외울 수 있게 되었다. 미승은 지겨워하지 않고 내가 음과 가사를 다 익히고 나자 한 번 더 나와 함께 그 노래를 불렀다. 어설프지만 대충 이중창이 되었다. 

즐거웠다. 선중이네랑 뛰어다니며 동네 개나 닭을 쫓아다니고, 말도 안 되는 모험놀이를 하는 것도 재밌었지만, 이처럼 몸 안을 간질이며 달리는 즐거움도 웃음이 흠뻑 쏟아지게 했다. 한 번도 이런 기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사내 녀석들이 할 만한 놀이가 아닌데도, 미승이랑은 그런 분위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나도 미승과 그 시간 속에 포함된 듯이 뿌듯했다. 그런 얌전한 시간 속에서 즐거움과 편안한 두근거림이 다가오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어쩌면 저 자식이랑은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해도 재밌어지는 게 아닐까… 조금 아찔한 생각이 들 만큼.

미승이가 하도 예뻐서 난 눈앞이 아슴아슴 노란 빛으로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작고 노란 민들레를 달고 있는 미승의 초롱초롱한 눈웃음과 붉은 입에서 번져나오는 팔랑팔랑한 음색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의 풍경화 같았다. 너무 부드러워서 녹아버릴 것 같은.

그날의 미승이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사의 이미지로 찰싹 머릿속에 달라붙었다. 태어나서 미승이만큼 예쁜 아일 본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이나 잡지의 광고 속에 나오는 아이들도 미승이에 비하면 평범하고 심심해 보일 만큼. 내 주관적인 미적 기준만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승이는 환상처럼―그러나 손에 닿는 현실의 환상으로―곱디 고왔다. 밝은 머리칼 사이 뒤로 꽂혀 들어간 노란 민들레도 미승을 위해서 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난 노래와 햇빛에 흠뻑 취한 기분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귀에 꽂은 시들시들해져 가는 민들레가 혹여라도 땅에 떨어질까 조심조심 손으로 확인하며 강을 따라 멀리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강물의 초록 수면 위로 번져나가는 물 주름이 노랫가락을 닮아 잘랑잘랑 흔들려가고 있었다. 아까 미승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불러주던 노랫가락이, 가사가, 음표와 자음 모음으로 쪼개져서 부서져 내린 노란 햇살이 되어 물결 사이 사이에서 흔들리며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빛이 내 가슴 안에서도 흐르고 흘렀다. 

그렇지만 산에서 집으로 내려오면서는 미승과 놀던 해맑은 공간과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 모양새를 본 엄마에게서 미친놈 소리부터 들었다. 머리에 꽃을 꽂는 건 미친년이나 하는 짓인데 넌 사내새끼가 정신이 어찌 돌았길래 꽃을 꼽고 온 마을을 싸돌아다녔느냐고 . 미승이와 함께 있던 아까까지의 아슴하고 예쁘장하던 분위기에 취해있던 꿈같은 기분이 홀랑 깨지는 순간이었다. 

“흐메… 희승아! 니 그러다 고추 떨어진데이.”

할머니까지 내 머리에 묻은 잔풀들을 골라내고 엉덩이를 토닥토닥 쳐주며 날 놀렸다. 

난 우리 가족들은 도통 미적 감각과는 거리가 먼,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승이라면, 멋을 아는 멋쟁이인 미승이가 자란 그의 가족들이라면 적어도 꽃 한 송이 정도로 미친놈 소리를 하진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그의 가족에 비해 우리 가족이 후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미승이의 말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전 날 현구가 산에서 꽃을 꼽고 온 미승이를 보자마자 미친놈이라고 신경질을 내며 막 쥐어박았단다. 

역시 현구도 어쩔 수 없는 놈이었다.

그 날 이후로 미승이가 점점 더 좋아졌다. 그럼에도 나의 호감을 내비치고 더 적극적으로 미승이와 어울리기엔 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는 안 그랬지만, 유독 미승이에겐 내 흠을 보이는 게 싫었고 그 애 앞에서 부끄러워지는 게 싫었다. 하지만 미승은 언제나 머뭇거리는 법 없이 내게로 한발 먼저 다가와 주었다. 다소곳이 그의 호의를 받고, 우정과 친절을 얌체처럼 받아들이기만 하는 난 소극적인 욕심쟁이였다.

“개울에 올갱이 잡으러 가자!” 

선중이가 우리 집으로 찾아 와 소리쳤을 때 녀석의 주변에는 이미 미승이와 병식이 무영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나를 먼저 데리고 미승이네 찾아갔어야 하는데, 늦봄을 지나가면서 선중이는 우리 중에서 미승이를 가장 먼저 챙기기 시작했다. 다음이 병식이였고, 그다음은 자연히 병식이네 옆집 사는 사촌 무영이었고, 어느새 내가 제일 마지막 순서가 되어 있었다. 

선중이가 나더러 빈 그릇도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제 녀석들은 빈손으로 가면서 나만 그릇을 들고 가라는 것이었다. 싫다 소리도 못하고 바닥이 찌그러진 양은냄비 하나를 부엌에서 찾아들고 나와 아이들의 맨 뒷줄에서 달랑거리며 따라갔다. 선중이의 팔을 마지못해 어깨에 걸친 채로 앞서 걷는 미승이가 종종 나를 뒤돌아보았지만 그때마다 난 딴 데 보는 척을 했다.

우리들은 돌다리를 건너가 얕은 개울 수면 속에 발을 담갔다. 허리를 숙인 채 종아리 중간쯤 차오르는 수면 가까이 머리를 박고 물과 바위 주변을 시선으로 훑었다. 

“이거야 이거. 이게 올갱이야.”

병식이가 손가락으로 이끼 낀 돌과 바위틈 위로 기어오른 다슬기를 가리켰다. 작은 걸 보니 수놈인 것 같았다. 

“아. 다슬기를 여기선 올갱이라고 하는구나.”

미승이는 병식이가 떼어서 건네 준 조그맣고 단단한 갈색 딱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까 자기 집에 와서 애들이 올갱이 잡으러 가자 했을 때, 무영이에게 올갱이가 뭐냐고 물었더니 달팽이라고 대답을 했단다. 그래서 달팽이가 왜 물속에 살지?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그런 것도 있는가 보다 하고 말았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병식이는 무영이에게 꿀밤을 먹이며 “달팽이랑 이것도 구분 못하냐?”하고 타박을 주었다. 병식이 자식도 올갱이를 달팽이라 부르는 걸 내가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너도 달팽이라고 불렀으면서 왜 무영이를 때리냐?”라고 대들었더니 병식이는 나를 재수 없게 째려봤다.

“정희승, 그릇이나 내놔 봐.”

내 손에서 양은냄비를 낚아채가는 선중이의 다른 손엔 그새 올갱이가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우리들이 아옹다옹하건 말건 올갱이 잡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미승이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저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아, 벌써 6마리나 잡았잖아!?”

미승이의 감탄에 병식이 자식도 서둘러서 올갱이 탐색에 나서기 시작했다. 나랑 무영이도 물속을 손으로 휘저어가며 돌 틈을 살폈다. 발이 쭈글쭈글 불도록 오랫동안 물과 바위 사이를 헤매다녔지만, 씨가 한정되어 있으니 수확이 썩 많지는 않았다. 

우리는 돌다리에 하나씩 걸터앉아 수면을 발로 달랑달랑 차올리며 자기가 잡은 마릿수를 각자 소리 내서 불렀다. 선중이가 21마리, 병식이가 13마리, 미승이가 9마리, 내가 9마리, 무영이가 3마리를 잡았다. 

시력이 좋고 동작이 잽싼 선중이와 그에 버금가는 병식이가 많이 잡은 건 항상 그래왔던 일이다. 그런데 난 선중이가 제가 잡은 것 중에 몇 개를 미승이에게 슬그머니 건네주는 걸 봤고, 무영이가 올갱이를 발견하고는 “아, 찾았다!”하고 소리를 내지를 대마다 옆에서 병식이가 잽싸게 먼저 잡아드는 것도 봤다. 

하여간에, 병식이에게 늘상 빼앗기고 당하면서도 무영이는 발전하지 않는 놈이었다. 끝까지 “아, 찾았다!”를 연발하는 바람에 고작 세 마리를 손에 쥐고 선중이와 병식이의 갖은 핀잔을 다 들어먹어야 했다.

“아야! 이거 뭐야!”

갑자기 미승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미승이의 흰 종아리 뒤편에 거머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들은 이미 한 번씩 겪어본 일이라 “거머리네” 하고 느긋하게 중얼거렸지만 미승이는 징그럽다고, 얼른 떼어달라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사내자식이 엄살은… 이까짓 거 팍 떼버리면 그만이야.”

선중이가 손으로 미승이의 종아리에서 거머리를 잡아떼어내서 돌 머리 위에 놓고 슬리퍼 신은 발로 탁 밟았다. 하얗게 말라있던 돌머리에 거무스름한 살덩어리와 붉은 피가 물기에 섞여 번졌다. 미승이는 거머리가 붙었다 떨어진 종아리를 돌려 피 빨린 빨간 자리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피 조금 빨린 거니까 괜찮아. 안 죽어.”

그러면서 선중이는 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미승이의 종아리에다 바르는 것이었다. 

병식이랑 나랑 무영이는 조금씩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고 미승이는 잔뜩 더 찌그러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마을에 커다란 장비 차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전 해에 서울 사는 사람이 명재골 옆 산 안쪽의 땅을 샀다더니, 거기에 집을 짓기 위해 집터를 다지고 산을 깎아 길을 내는 공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처음 며칠간 전기톱으로 나무를 무수히 베어내는 소리가 명재골 근처를 울리더니 산등성이 중간이 헐벗겨진 흙색을 드러냈고, 그 후 산에서 베어낸 나무들을 실어 어딘가로 가져가는 커다란 트럭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이 비워진 자리의 흙을 다지고 퍼 나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침 그 공사가 진행되는 길목이 미승이네 집에서 너무 가까워서 미승이네 할아버지의 짜증이 오르기 시작했단다. 굴착기의 덜컹거리는 소리에, 커다란 트럭과 화물차들이 오가면서 집 근처에서 날마다 먼지와 시끄러운 차바퀴 소리 때문에 숨도 마음 놓고 못 쉬고 낮잠도 제대로 못 자겠다고 공사 담당자를 찾아가서 버럭버럭 화를 냈다고 했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며, 부디 어르신께서 양해해 주십사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막걸리 대접까지 하는 바람에 더 따지지도 못하셨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부들이 마실 식수도 미승이네서 퍼 날라다 쓰기로 허락까지 하셨다고 했다. 막걸리의 힘潔珦?것이다. 

난 그 후에도 미승이네 할아버지가 툇마루에 앉아 못마땅한 눈으로 대문 밖에서 이는 뿌연 먼지를 보며 “크응….” 하고 치미는 짜증을 삭히는 모습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어쨌건 간에 공사는 꿋꿋하게 진행되었다. 

깎아낸 돌과 흙을 실어 나르는 차들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포장 상태가 안 좋은 길 위에 먼지와 흙가루를 풀풀 날리고 다녔다. 

그해 여름의 시작은 그렇게 부스스한 먼지 길 위에서 맞이했다.

6월이 되어 산들의 초록이 우수수 짙어져 갈 무렵, 산중에는 유독 희끗희끗해지는 나무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일렬로 나란히 논틀밭틀을 종종거리고 거의 다 지날 때 미승이가 논 건너편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나무들은 뭐야? 저기만 색이 달라.”

선중이가 “저건 밤나무야.”라고 대답하자, 병식이는 우리가 당연하게 아는 것을 미승이가 모른다는 사실에 신났는지 “바보. 그것도 모르냐?”라며 당치도 않은 잘난 척을 했다. 

그 사이 선중이가 논두렁 끄트머리에서 좁은 도랑 하나를 건너뛰어 찻길로 올라섰다. 우리도 차례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저게 밤나무야? 근데 왜 저기만 색이 저래? 꼭 나무에 흰머리 난 것 같다.”

미승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선중이는 산 쪽으로 방향을 잡고 “밤나무 꽃이 피어서 그래. 가서 볼래?”하고는 먼저 앞으로 뛰어갔다. 모두들 따라서 뛰기 시작했다. 무영이는 뛰기 시작하자마자 돌부리에 걸려 땅바닥에 뒹굴었다. 난 녀석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같이 달리는 바람에 아이들보다 뒤떨어졌다. 

원래도 무영이랑 난 달리기를 못했지만. 

우리들은 수풀을 헤치고 산중으로 들어가 밤나무들이 무더기로 심어진 자리까지 갔다. 

우리의 키에서 한참 높은 가지 끝에 여러 가닥으로 피어오른 밝은 미색의 밤꽃들이 벌써 흙 위에 떨어져 말라가는 것들도 있었다. 미승이는 땅바닥에서 갈색으로 말라 보슬거리는 기다란 밤느정이 하나를 주워들고 내 눈앞으로 디밀었다. 

“이게 저 나무에서 떨어진 거야?”

“그래. 그게 밤꽃이야.”

병식이가 대답을 가로채고, 미승이는 “꼭 벌레같이 생겼다.”라고 중얼거렸다. 10여 센티가 조금 넘게 가늘고 기다란 축의 사방으로 보실보실 가느다란 꽃술 같은 것이 지네 다리처럼 잔뜩 솟아있는 모양의 밤느정이는 멀리서 보면 긴 송충이 비스무레 해 보이긴 했다. 

“징그러워.”

미승이가 갈색으로 마른 꽃을 툭 내버리고 나자, 선중이가 히죽 웃으며 우리들의 주의를 모았다. 

“늬들 그거 아냐? 우리 형이 그러는데, 밤꽃 냄새랑 정액 냄새랑 똑같대.”

그러자 미승이는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지 얼마 안 된 밝은 색으로 하나를 다시 집어 들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정액? 그게 뭐야?”

무영이가 어수룩하게 묻자, 병식이가 무영이의 뒤통수를 때리며 “그것도 모르냐, 바보야?” 또 이랬다. 사실은 나도 전혀 몰랐다. 나보다 무영이가 먼저 묻고, 맞고, 바보 소리 먼저 들어서 참말 다행이었다. 

“정액이란 건 말이지-.” 

으스대듯 양손을 허리에 얹고 어깨를 폈다가 다시 수그리며 비밀담화를 모으듯 깔아대는 선중이의 목소리에 나도 귀를 유심히 기울였다. 선중이는 제 형에게서 들은 정액이란 것이 나오는 사람의 몸의 부위와 어떻게 하면 정액이란 것이 몸에서 흘러나오는지를 한참동안 꼼꼼하고 상스럽게 설명해줬다. 

그것은 선중이의 내리깐 목소리보다 더 은밀하고, 숨죽이고 듣는 우리들의 숨기운보다 후끈거리는 이야기였다. 

선중이는 마지막으로 정액의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가 바로 그 정액으로 만들어진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얘기까지 덧붙였다.

“형한테 그 얘기 듣고 나서, 며칠 동안 밤에 잠 안 자고 안방에서 애기 만드는 소리가 언제 들리나 기다렸던 적도 있다. 그랬더니 정말로 엄마 아빠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어. 근데 아직까지 동생은 생기지 않았지만.” 

선중이는 어깨를 으쓱 세웠다 내리며 말을 맺었다. 

나는 다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간에 조금 많이 놀랐다. 병식이도 알듯 말 듯한 표정이었고 무영이는 입만 멍하니 벌린 모양새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미승이만은 다 이해한 것 같으면서도―어쩌면 녀석은 전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아는 척하지 않고 계속 밤느정이를 바꿔 들고 냄새 맡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근데, 꽃냄새랑 똑같으면 정액도 좋은 냄새가 나는 거겠네? 오줌이랑은 전혀 다른가 보다.”

무영이는 이 소릴 하고서 병식이한테 꿀밤을 한 대 맞았다. 

“띨한 소리 그만하고 네가 직접 냄새 맡아봐. 병딱아!”

병식이는 하여간에 자기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영이만 무시하고 닦달하는 데 질긴 습관이 붙은 놈이었다. 선중이가 꽃술 하나를 집어들자 병식이랑 무영이도 흰 꽃술 하나씩 잡아들고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결국, 저놈들도 잘난 척만 했지 정액의 냄새는 한 번도 못 맡아본 게 틀림없었다. 나도 정액이라는 것과 닮았다는 꽃냄새를 맡기 위해 아직 촉촉하게 보슬거리는 밝은 꽃줄기를 집어들었다. 다른 꽃들처럼 상큼하고 단 냄새와는 달리, 짓무른 풀 향기에 물비린내를 닮은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근데 왜 우린 정액이 안 나오는 거야?”

산에서 내려오면서 내가 묻자, 선중이는 잠깐 무시하는 기색으로 쳐다보았지만 대답은 제대로 해줬다. 

“그건 우리가 더 커서 어른이 되어야 나오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애를 만들기 위해서 나오는 거라고. 그래서 어린애들은 안 나와.”

여기에 무영이가 “왜? 왜 어린애들은 안 되는 건데?”라고 물었다가 병식이한테 “선중이가 말할 때 뭘 들었냐?”며 또 한 대 쥐어박혔다. 그건 내가 들어도 정말 쥐어박힐 만한 질문이었다. 

“멍청아, 너처럼 어린애가 벌써 정액이 나와서 막 애를 만들면 어떡할 거냐? 네가 애기 키울 수나 있냐? 못 하겠지? 그래서 그런 거야. 하나님이 어른들만 애기 낳고 키울 수 있도록 사람 몸을 만들어 놓은 거야.”

주말 성경 학교도 안 나가는 병식이놈의 입에서 하나님 타령이 나온 게 신기했다. 그러나 더 신비로운 인체의 비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날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의 비밀스러운 몸의 교접에 대해 알게 되고, 정액과 우리의 상관관계를 알고, 정액의 냄새까지 알게 되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많은 걸 한꺼번에 배운 날이었다. 역시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보다는 친구들이 가르쳐 주는 것들이 더 머릿속에 쏙쏙 잘 들어온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엄마 아빠 방에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자겠다고 우겼다. 엄마 아빠는 “네가 이방 와서 자면, 할머니가 심심해 하시잖어. 얼른 할머니 방에 가서 자.”라며 나를 말렸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랑 자겠다는 내 고집에 꺾여 기어이 나를 가운데 놓고 재웠다.

난 대단한 탐색전에 몰입한 스파이처럼 두근두근 신경을 곤두세우며 밤늦도록 잠을 안 자고 버텨봤지만, 엄마 아빠 사이에서 선중이가 말해준 것과 같은 일이나 이상한 소리는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서 선중이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일까? 하는 의심도 품으면서도 난 아주 많은 걸 상상했다. 

괜스레 화끈거리고 기묘한 느낌이 드는 무척이나 뿌옇고 희미한 살색의 장면들을 막연하게 그려보며 콩닥콩닥 심장 뛰는 소리를 듣다가 새벽녘 닭들이 홰치는 듣고 나서야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 지각을 했다. 지난밤에 쓸데없는 데 신경 쓰느라 늦게 잠든 바람에 여느 때보다 늦잠을 자버렸다.

항상 모이던 아침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을 땐 당연히 버스는 떠난 지 한참 후였고, 나는 한 시간 뒤에나 오는 다음 버스를 혼자 타고 학교에 가야 했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 왜 늦었느냐고 묻는 담임선생님께 늦잠 자느라 늦었다고 대답하고 자로 손바닥 세 대를 맞았다. 내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히죽대고 있는 병식이의 얼굴을 마주치자 갑자기 울컥해서 눈을 비비며 자리에 앉아 책가방을 풀었다. 

억지인건 알지만,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저희끼리 먼저 가버린 선중이 녀석들에 대한 서운함이 밀려왔고, 무엇보다 선중이의 얘기를 듣고 혹해서 전날 밤잠도 못들만큼 어리석게 몰입해 버린 녀석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한심스러웠다. 얼얼한 손바닥보다 그게 더 마음을 허전하게 했다. 

“버스 놓치면 우리까지 지각한다고 선중이가 먼저 가자고 그랬어.”

쉬는 시간에 우리 반으로 찾아와 토라져 있는 나를 달래준다는 무영이의 변명이 더 기분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점심때 미승이가 같이 밥 먹자고 내 옆자리로 와서는 제 반찬을 나눠주며 “다음엔 네가 늦으면 꼭 데리러 갈게. 같이 지각하더라도 같이 학교 오자.”라고 말했을 때에서야 조금 기분이 풀어졌다. 

그러나 선중이랑 병식이에 대한 괘씸함은 그날 하굣길에서도 금방 풀어지지 않았다. 

무영이나 미승이랑 달리, 선중이와 병식이는 내가 삐쳐있든 말든 발가락의 때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고 저희 기분 내키는 대로 희희낙락거렸다. 

오랫동안 삐쳐있어 봐야 나만 손해였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그리 생김새가 나쁜 어린이는 아니었다. 

미승이만큼 예쁨을 받지는 못했어도 간혹 가다 귀여워해주는 어른들은 있었다. 아줌마나 아저씨들은 내가 키도 작지만 얼굴이 작아서 무척 어려보인다고, 게다가 무척이나 순진해 보인다고들 말했다. 그럴 때면 우리 엄마는 “순진해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애가 진짜로 얼빵해서 큰일이야.”라고 대꾸하곤 했다. 

그러면 상대방은 “애가 애다운 게 좋지 뭘 그래?”라며 웃어넘기는 것도 자주 보고 들었다. 

그 말이 놀림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당시 어른들의 말이나 이후의 먹구름 같던 시절들을 종합해 보건데, 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꽤나 백치미를 지녔던 모양이다. 그 시절의 내 사진들을 들여다보면―굳이 옛날 사진을 들춰보지 않아도 지금도 그렇지만―참으로 어벙해 보였다. 

특히 눈이 그랬다. 

둥그런 눈 머리에서 좁아지는 눈 꼬리의 붕어 형 눈 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눈 안을 채우는 검은 동자를 거울 속에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검은자가 앞의 눈머리에 더 많이 차지하고 있어 약간 몰린 듯한 느낌이 들어 보였다. 

그래서 선중이나 병식이가 나더러 가끔씩“사팔뜨기”라고 놀려댈 때마다 난 주눅이 들곤 했다. 내가 봐도 조금은 사팔뜨기처럼 보였기 때문에 차마 “아니야!”라고 대들지도 못하고 참아 넘겨야만 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잠잠하던 그 별명이 또다시 움을 틔웠다. 

언젠가부터 선중이가 은근히 나를 밀어내고 무시한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그날도 학교에서 선중이랑 병식이에게 사팔뜨기 소리를 듣고 나서 어쩐지 기분이 침통해져 있었다. 난 정말 엄마 말대로 얼빵한 게 얼굴에 티가 나는 건가? 사팔뜨기면 남보다 순진해 보이는 걸까? 그래서 애들이 날 무시하는 걸까? 그런 걱정들을 곱씹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길래, 아무 말도 안하냐?”

버스 옆자리에 앉아있던 미승이가 나를 툭 쳤다. 여느 때는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가리지 않고 조잘대던 내가 조용해서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네가 봐도 나 사팔뜨기 같으냐, 미승아?”

미승이는 내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누가 너더러 사팔뜨기래?”

“선중이랑 병식이가….”

내 말을 듣고 미승이는 뒷좌석에 앉아 떠드는 아이들을 힐끔 뒤돌아보고 나서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아니, 너 사팔뜨기 아냐. 눈동자가 까맣고 커서 귀여워. 절대 사팔뜨기 아냐, 너.”

미승이는 절대 아니라고 강조하며 선중이네 말에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역시 미승이였다.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도 했다. 다른 남자애들처럼 유치하게 굴지도 않고, 선중이들처럼 말도 안 되게 사람을 놀려먹지도 않았다. 게다가 의협심까지 있었다.

그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선중이가 또 날더러 “어이, 사팔뜨기!” 하고 불렀을 때, 미승이는 선중이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희승이가 왜 사팔뜨기냐? 그냥 눈깔이 큰 건데!”

저렇게 큰 소리로 대들고 나섰다. 그러자 선중이는 미승이에게 반박도 못 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누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항상 제 말이 옳다고 윽박질러 누르던 김선중이가 말이다. 

그게 놀랍기도 하고 쌤통이기도 했다. 

하지만, 눈.깔.이 크다 소리엔 조금 상처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엔 사팔뜨기 보다 유치한, ‘눈깔탱이’라는 별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미승이도 끝까지 막아내지 못했다.

7월이 되자 산 벌레 우는소리가 사방에서 시끄러웠다. 이쪽이 울면 저쪽이 답하고, 저쪽이 답하면 또 이쪽이 울고, 저마다 도뜨려고 기를 세워 찌르르르 찌르르르 사방에서 가스러지게 울어댔다. 

거기에 매미 소리가 맴맴맴맴 질세라 얹혀질 무렵, 괜스레 가슴 부푸는 여름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집엔 나만큼이나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던 형이 하나 있다. 

당시에 중학생이었던 형은 나와 같이 놀아주기는커녕, 동생 취급도 안 해주면서 잘난 척만 옴팡 해댔다. 게다가 공부는 안 하고 날이면 날마다 선중이네 형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엄마 아빠 몰래 술 먹고 담배 피고 어른 흉내 내기나 좋아하는 나쁜 본보기의 형이었다. 그런 형 덕분에 늦둥이인 나는 공부를 못해도 혼이 덜 났다. 

비록 “네 형이 저러니까, 희승이 너라도 잘해야지.”라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말이다. 

그런 형이 방학하자마자 친구들과 강릉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고 한창 들떠있었다. 방학을 하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미리부터 여행 준비해야 한다며 용건 없이 바쁜 형을 보며, 난 형의 방이 비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미승이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자고 놀다 가면 어떨까 하고 엄마에게 물어서 허락을 받아놓았다. 

미승이에게 그 얘기를 했을 때, 미승이도 활짝 웃으며 신나하길래, “근데 우리 엄마가 너희 엄마한테서도 허락받고 와야 된댔어.”라고 했더니, “당연히 허락해 줄 거야.”라며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 소릴 옆에서 듣고 있던 선중이 녀석도 미승이랑 같이 하룻밤 자고 놀아보겠다고 “그럼 미승이 너, 우리 집에도 와라.” 이랬는데, 미승이는 “안 돼.”라고 딱 부러지게 거절을 했다. 

“왜? 희승이는 되고 난 안 되냐?”

선중이는 당연하게 따졌다. 

“그게 아니라….” 

미승이는 방학 하면 서울 이모네랑 여기저기 친척들 집으로 놀러다니기로 여름 방학 계획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와서 노는 이삼일을 빼고는 시간이 없다고 조목조목 길게 설명을 했다. 

그 후 선중이는 나에게 유독 노골적으로 투박하게 굴기 시작했지만 방학이 얼마 안 남았으니 상관없었다. 

나도 방학 중엔 바쁜 몸이라 선중이네랑 어울릴 틈이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미승이가 우리 집에서 이틀 밤 자고 가기로 한 계획은 하룻밤은 우리 집에서, 또 하룻밤은 미승이네서 놀기로 변경됐다. 미승이 삼촌 현구가 마을 청년회 모임을 주동해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이틀간 온천 관광을 다녀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미승이도 사흘간 혼자서 방을 쓰게 되었다고 방방 떴지만, 미승이네 할아버지는 “허구한 날 노닥대는 백수 놈이 뭘 더 잘 놀아보겠다고 푹푹 찌는 찜통더위에 온천을 가는 게야!? 아, 이 더위가 모자라서 가서 몸을 삶아오려는 게야? 정신머리 없는 놈!” 하면서 관광 떠나는 현구 삼촌의 등에다 악담을 퍼부으며 담배를 뻑뻑 피워 물었다고 했다. 

미승이 할아버지가 짜증을 부리건 말건, 백수인 현구 삼촌이 한여름에 온천에 가건 말건, 지진아인 우리 재승이 형아가 바닷가에 가건 말건, 미승이랑 나의 흥겨움엔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현구 삼촌이나 우리 형아처럼 평소에 남들에게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이 그때만큼은 우리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들뜬 계획은 하루를 망쳐버렸다. 

미승이가 와서 놀던 첫날, 하필 선중이가 아이들을 몰아서 우리 집에 데려오는 바람에 우리는 온종일 다섯이서 붙어 놀아야 했다. 물론 선중이들이랑 같이 노는 건 재미있었다. 그래도 마음 두근거리며 기대했던 계획이랑 다르게―계획이라 할 만한 것도 하나 없었지만―어긋나 버린 놀이가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밤늦은 시각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하더니, 선중이 녀석이 느닷없이 “야, 우리도 희승이네서 다 같이 자고 가자!”라고 우겨대는 바람에 엄마는 할머니 방과 형 방에 이불을 한 채씩 깔아야 했다. 

왜 한 채씩이었느냐고? 

병식이가 미승이랑 자겠다고 우겨서 둘이서 형 방에서 자고, 나랑 무영이는 할머니 방으로 가서 자야 했기 때문이다. 정작 다들 한꺼번에 자고 가자고 선동했던 선중이 녀석은 늦은 밤에 녀석을 데리러 온 제 형에게 귀를 잡혀 끌려갔다. 내일 할머니 제사 지내러 가려면 아침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왜 남의 집에서 자빠져 자려고 하느냐는 호통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다음날 다 같이 아침을 먹은 후에 병식이와 무영이를 돌려보내고 나서, 미승이랑 나는 오붓하게 미승이네로 옮겨갈 짐을 꾸렸다. 챙길 거라고는 탐구생활 한 권이랑 엄마가 사준 간식거리밖에 없었지만 마음만은 희희낙락으로 한 가득이었다. 

무엇보다 신나는 건, 선중이 녀석이 화천에 있는 큰 집에 가느라 마을에서 사라져 주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승이의 장난감을 모아둔 작은 창고 방에 가서 장난감 상자를 통째로 옮겨다 미승이 방―정확히는 미승이랑 현구의 방―에다 마음껏 어질러놓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날 저녁에는 미승이네 아빠가 퇴근해서 오자마자 우리를 데리고 시내로 나가 피자를 사주었다. 그리고 백화점 식품매장에 들렀을 때 내가 처음 보는 과자들을 미승이가 잔뜩 골라서 한 아름 싸 짊어지고 왔다. 

그 많은 걸 다 먹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집으로 오자마자 미승이가 과자 몇 개를 내 가방에 넣어주며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나중에 집에 가서도 먹어봐.”라고 했을 때에서야 녀석이 똑같은 과자를 2개씩 고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승이는 제 과자를 뜯어서 그날 밤에 나랑 나누어 먹었다. 

다음날 오후에 미승이는 정말로 친척집 돌기 일정에 나서기 위해 마을을 떠났고, 그 다음 날 선중이는 돌아왔다. 녀석은 오자마자 미승이네 달려가 보고는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녀석은 미승이가 나랑 놀다 서울로 바로 가버린 걸 알고는 험상궂은 태도로 날 노려보았다. 

난 선중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형 방에 데려다 놓고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형이 돌아오면 뺏길까 할머니의 농장 안에 숨겨서 두고두고 아껴먹으려던 과자를 꺼내 와서 선중이 앞에 풀어놓았다. 

“이거 미승이가 준건데, 먹고 싶은 걸 안 먹고 참은 거야. 같이 먹자.” 

돌아온 선중이가 그 날 계속 나에게 툴툴거리며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나는 아까움을 무릎 쓰고 고육책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며칠 후 서울 고모네 놀러가기로 한 계획이 무산되는 바람에, 당분간 선중이를 편하게 보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흠… 미승이가? 그 자식은 왜 너한테만 잘해주냐?”

이러면서 선중이는 나를 조금 질투했지만, 제 녀석도 처음 보는 과자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는 나한테 불편하게 굴지 않았다. 

익어가는 더위의 푹푹한 단내 속에서 우리의 방학이 한 주 두 주 지나가고 있었다. 

긴 여름 동안 우리는 그렇게 저마다 친척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가족들과 바닷가나 계곡으로 떠나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닐 땐 우리끼리 모여 호수랑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더위를 식혔다. 

그리고 개학을 앞두고 우리들이 밀린 방학숙제를 몰아서 하느라 허겁지겁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미승이가 돌아왔다.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미승이는 다음날 저희 집으로 숙제할 거 챙겨갖고 놀러 오라고 했다. 

그리고 선중이네 한테는 자신이 더 늦게 온다고 말해두었으니 아이들에겐 비밀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명재골로 놀러다니는 일도 드물었고, 선중이들도 한창 숙제 때문에 몸살을 앓는 중일 터라 비밀은 지켜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미승이네 갔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얼굴도 반가웠지만, 더 놀라운 건 녀석이 신통하게도 숙제를 벌써 다 했다는 사실이었다. 사촌형과 누나들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주는 바람에 금방 끝냈다고 했다. 아마 녀석은 친척들 사이에서도 장난 아니게 예쁨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 방학일기도 다 써 놨다.”

부지런하게 방학과제를 끝낸 것만으로도 모자라, 녀석은 심지어 앞으로 남아있는 일 주일 분의 일기까지도 다 끝내놨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부럽다 못해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대단하다. 대단하네.” 하고 연방 감탄을 내뱉자, 미승이는 제 숙제를 모두 베껴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 

나는 그날 열심히 미승이의 숙제를 베끼고, 옆에서 미승이도 나랑 같이 탐구생활에 붙일 쪽지를 베껴 적어 붙여주었다. 제 딴에는 내 글씨를 흉내 내서 쓴다고 쓴 것이 참말로 괴발개발이었다. 나보다 더 글씨 못쓰는 놈이 할 짓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선중이 녀석이 들이닥쳐 “야! 이 배신자들아!” 하고 소리치고는 도로 자기 집으로 가더니 순식간에 숙제거리를 가지고 되돌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선중이도 열심히 숙제를 베껴서 돌아간 후에 미승이는 마지막으로 일기장을 꺼냈다. 

남은 일주일치 일기까지 제 것을 베껴 쓰라며 내 눈앞에 일기장을 펼쳐주었을 때, 이놈이 인심이 후하다 못해 좀 모자라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아쉽기로서니 어떻게 남의 일기까지 베끼냔 말이다. 그런데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 미승이가 자신만만하게 베끼라고 한 이유를 금방 알게 되었다. 

미승이의 남은 일주일간은 온통 ‘희승이랑 놀았다.’ 버전 일색이었다. 

나는 주어만 바꿔 쓰면 되는 거였다. 

나중에 담임선생님한테 나랑 미승이는 같이 혼났지만 말이다.

“우와, 이거 무슨 벌레야, 희승아?”

미승이가 가리킨 풀숲에 벌레 한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주황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알록달록하게 들어간, 지렁이정도 크기로 좁고 기다란 매끈매끈한 벌레였다. 

“나도 몰라.”

나도 처음 보는 벌레의 화려하고 징그러운 벌레에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미승이는 계속 쭈그리고 앉아 벌레가 기어가는 녹색 수풀 사이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뱀 새끼 아닐까?”

“뱀 새끼 치고는 작은데.”

“뱀? 아, 참 그러고 보니까 나 어제 뒷마당에서 뱀 봤어.”

미승이는 뱀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여름이 되면 산 속에서 몸이 차가와진 뱀들이 몸을 덥히기 위해 도로나 인가 주변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여름에 차도를 걷다보면 멀리서 마치 짖이겨진 알록달록한 끈같은 게 보여 가까이 다가가면 차에 치어죽은 뱀을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주변에서도 뱀을 여러 차례 본 터라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승이로서는 눈으로 실제로 뱀을 본 게 처음이었는지, 신기한 듯 내내 그 얘기만 했다.

“꽤 길었어. 이만큼, 내 팔 길이보다는 조금 짧은데, 빨간 색이었어. 거기에 검은 무늬도 있고. 그건 무슨 뱀이야? 그거 독사야?”

“나도 몰라.”

미승이의 잇단 질문에 등을 돌리고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여간에 녀석은 질문이 너무 많았다. 미승이는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마을의 풀과 짐승이름들을 몽땅 다 아는 줄 아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한 동안은 녀석이랑 길을 걸으면 틈틈이 보이는 것마다 저게 무슨 꽃이냐, 무슨 벌레냐, 독버섯이냐, 아니냐고 묻는 통에 진짜로 피곤했던 적도 있었다. 나조차도 처음 보는 벌레나 풀들을 곧잘 찾아내는 미승이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엔 난 너무 무식했던 것이다. 

오히려 나야말로 미승이 덕분에 처음으로 마을의 구석구석 눈여겨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생물들이 생겨날 정도였으니까. 

내가 잘 아는 거라면 뿌듯하게 설명도 잘 해줄 수 있으련만, 내가 모르는 것만 쏙쏙 골라 물어보는 녀석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그래서 미승이의 궁금증과 호기심들이 부담스럽고, 내 무지를 속속들이 드러내는 게 귀찮아져서 한동안 은근슬쩍 미승이를 피하기도 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미승이는 언젠가부터 내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고, 대신 저희 집에 데려가서 녀석의 아빠가 새로 사 준 자연백과 사전을 펼쳐들고 자신이 이 마을에 와서 처음 보게 된 들꽃과 새와 벌레들을 찾아가며 내게 보여주었다. 나도 그 사진과 그림이 잔뜩 실린 두꺼운 10권의 백과사전을 통해 신기한 생명들을 배워갔다. 

그날도 하굣길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 시간 후에 우리 집 앞에 미승이가 동물백과 한권 들고 찾아와 서 있는 것이었다. 

“아까 내가 말한 뱀, 찾았어. 여기 봐라.”

미승이는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손가락을 끼워 넣었던 페이지를 펼쳤다. 

위쪽 모서리가 세모꼴로 접혔던 자국 아래로 녀석의 손가락이 옮겨간 자리엔 불그죽죽한 바탕에 검은 무늬가 선명하게 들어간 뱀 사진이 있었다. 나도 본 적이 있는 뱀이었다.

“이거 능사잖아!”

나는 사진속의 뱀과 닮은 것을 우리 집 담 주변에서 서너 번 본 적이 있는데, 아빠는 그것을 ‘능사’라고 불렀다. 아마 미승이네도 산에서 능사가 내려와서 몸 덥힐 둥우리를 틀었던 모양이었다.

“능사? 구렁이라고 쓰여 있는데? 아, 근데 구렁이 중에서 이렇게 붉은 건 능구렁이라고 부른대. 능구렁이를 줄여서 능사라고도 부르나보다.”

미승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으쓱해져서 아는 걸 죄다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응. 우리 아빠가 그렇게 불러. 능사라고. 그리고 독도 없대. 그리고 또 뱀을 잡아먹기도 해서 좋은 뱀이래. 그래서 우리 아빠는 이 뱀 죽이지 않고 놔뒀어.”

“앗, 그래? 참, 여기도 써 있었지. ‘쥐, 새, 물고기, 뱀 등을 잡아 먹는다.’ 그럼 독사 같은 것도 잡아먹겠다. 그치?”

“아마 그럴걸.”

“그럼 진짜로 좋은 뱀이잖아!? 근데 왜 우리 삼촌은 그 뱀 잡아 죽였지? 멍청하게… 착한 뱀은 죽이지 않고 놔두면 더 좋을걸.”

미승이는 아주 안타까운 표정으로 제 삼촌을 씹었다. 

미승이의 설명에 따르면, 며칠 전 능사를 발견하자마자 현구가 그 뱀을 잡아 술을 담갔다고 한다. 능사주가 신경통에 효험 있다는 소릴 어디선가 주워듣고 미승이 할아버지의 신경통에 좋은 약주가 될 거라며 능사를 보자마자 쇠꼬챙이로 신나게 때려잡았더란다. 

일 안하고 핀들대는 자신을 구박하는 제 아버지에게 아부도 할 겸, 옳다구나 하고 제가 좋아하는 술을 담갔다는 소리다. 

“너희 삼촌은 참….”

“못 말리는 인간이야.”

동물백과를 접으며 미승이는 다음에 또 능사가 나타나면 그때는 현구가 잡아먹지 못하도록 꼭 말려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름의 막바지에 현구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성남에 있는 친척 할아버지 집에 다녀오는 동안, 미승이가 또 혼자서 방을 쓰게 되었다고 즐거워했다. 내가 미승이랑 같이 자고 놀 기회가 하루 더 생긴 셈이었다. 

명재골 근방에 새로 시멘트 도로가 깔리고, 그 위쪽의 터에 짓고 있던 서울 사람의 하얀 집이 거의 완공되어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밤에 새가 울었다.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면 꽤나 시끄러운 소리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휘파람소리 같기도, 딸꾹질 소리 같기도 한 울음을 내며 어디선가 짧은 메아리를 울리고 있었다. 

미승이랑 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종아리를 달랑 달랑 흔들며 참외랑 수박을 나눠먹고 있었다. 가물었던 여름을 지난 끝물의 과일은 시들하면서도 달기는 무척 달았다. 수박에선 붉은 단물이 뚝뚝 흐르고 우리의 입가도 그 즙으로 흠뻑 젖었다.

“저건 무슨 새가 우는 거야?”

“…….”

미승이의 질문을 못 들은 척 수박에다 입을 박고 먹는 데 열중한 척 했다. 

미승이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새 이름보다는 엉뚱한데 관심이 쏠렸던 모양이다. 

“쪽,쪽,쪽,쪽, 꼭 뽀뽀하는 소리 닮았다. 그치?”

혓소리와 닮아있는 촉촉한 새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미승이는 방긋 웃었다. 

“응. 쪼금 닮았네.”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승이가 내 볼에다 대고 쪽 쪽 쪽 쪽 방금 그 새소리를 냈다. 미승이의 입에서 묻어난 과일즙 때문에 뺨이 축축해졌다. 그리고 손으로 얼른 닦아내고 바지에 문질렀다. 즙이 묻었던 자리는 금세 밤공기에 마르긴 했지만, 당분이 남은 오른뺨의 살갗이 끈끈해졌다. 

“이불 펴 놨으니까, 이만 들어가서들 자. 너무 늦었잖아.”

그때 아줌마가 나오셔서 자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난 미처 세수도 못하고 미승이랑 같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줌마가 펴놓은 널따란 이불 한 채에 나란히 몸을 나눠 뉘인 후에도 미승이는 “잘 자.” 이러면서 내 목을 안고 뺨에 또 뽀뽀를 해왔다. 미승이의 입술은 더 이상 젖어있거나 끈적거리지는 않았지만, 뺨의 마른 자리는 여전히 뻣뻣한 기분으로 남아있었다. 

“잘 자.”

내가 조그맣게 대답한 후에도 미승이는 내 목과 가슴사이에 두른 팔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은 잠시 후에 그대로 색색 잠이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를 대하는 미승이의 감정이 묘하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그만큼 난 둔감한 어린애였다. 그리고 여전히 경계심도 무뎠다. 

난 미승이가 좋기는 했지만, 가끔 당혹스러웠다. 

너무 잘해주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게 나한테만 너무 잘해주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그때까지 어떤 친구에게서도 그토록 독점적인 우정을 받아보지 못한 비 인기인이었던 나로선 적응하기 힘든 부담공세였다고 해야 하나? 난 과분한 미승이의 친철과 애정에 자연스럽게 대처할 만큼 여유 있는 아이가 아니었고, 되도록 미승이가 나한테 베풀어주는 모든 관심을 아무 뜻 없는 거라고만 받아들였다. 그냥, 미승이가 워낙 예쁘고 인기있는 아이라서,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받아서, 나한테도 그렇게 나누어주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도 그날만큼은 나 혼자 생각을 많이 했다.

녀석이 예쁘고 나한테 잘해주는 건 좋지만, 녀석은 약간 이상하다. 

차라리 내게 불친절하게 틱틱거리고 투닥대면서 어울리는 선중이네랑의 관계가 더 편하고 자연스럽다. 아무래도 미승이랑 조금씩 거리를 둬야겠다. 

내 어린 마음은 그런 식으로 미승이의 애정을 마음에서 한 걸음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부터 표나게 미승이에게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학교에 오갈 때는 버스에서 무영이나 병식이 옆에 앉으려고 기를 쓰고 서둘러 자리를 잡았고, 학교에서도 점심시간이 되면 내가 병식이 자리로 찾아가서 친하지도 않은 병식이 녀석의 패거리들 틈에 끼어 구박받으면서 밥을 먹었다. 미승이의 맛있는 도시락 반찬이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미승이는 몇 번인가 나한테 “왜?”냐고 물었지만, 난 심통맞게 “그냥.”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래서 미승이는 점심시간이면 다시 예전처럼 경미네들 속에 섞여야 했고, 버스에선 선중이 옆자리에 앉아 다니게 되었다. 읍내를 돌아다닐 때도,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닐 때도, 선중이는 미승이를 옆에 끼고 신이 나서 다녔지만 미승이는 하나도 즐겁지 못한 표정이었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선중이는 나보다 더 미승이를 잘 챙겨주는 녀석이었다. 

선중이는 학교에서 노는 친구들이 따로 있었는데, 병식이를 빼고는 나나 무영이는 무리에 끼워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선중이가 미승이는 제 친구들 무리에 미승이를 끼워주고 어울리게 해주었다. 그 바람에 병식이가 화를 냈다. 

그 친구들 사이에서 선중이가 병식이를 밀어내고 미승이를 챙겨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병식이는 미승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영이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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