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망향(望鄕)(10) (29/31)

28. 망향(望鄕)(10)

강서진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무려 황제의 별궁이었다.

은근히 고지식한 서문윤이 떨떠름해하니 강서진이 전혀 신경을 쓸 필요 없다 그를 달랬다.

“어차피 궁은 귀비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말이 퍼져 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

서문윤은 그러나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떨떠름하게 있었다. 그가 그곳에 머물기를 꺼린 이유는 평판 때문이 아니었다. 대대로 충성심이 깊은 명문 무가의 자손으로서 껄끄러움을 느낀 것이지.

“으음, 그게 아니라.”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을 강서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서진이 문득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너 고지식하구나.”

검설린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되고 있었다. 서문윤은 난세에서 보기 드문 정직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나와 영합을 하겠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곤 강서진이 그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변했다.

“나에겐 이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곤 덧붙인 말이었다.

“의형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회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강서진은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각오가 그렇다면야.”

그러곤 그는 검설린과 서문윤이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요약을 하자면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지 않고 이청은을 비밀통로의 끝, 귀비가 모습을 보였던 공간으로 유인하란 말이었다. 그곳에서 폭약을 터뜨린 후 유인한 자들은 통로로 몸을 피한다는 설명이었다. 단순하기에 더욱 효과적인 계획이다. 큰 변수가 소용이 없는 계획 말이다.

묵묵히 말을 듣는 서문윤을 향해 강서진이 문득 정색을 하며 말을 내뱉었다.

“나를 배신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내게는 장안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한 양의 폭약이 있다는 걸 명심해라. 내가 비록 청융 때문에 세상을 용서하려 했지만… 자포자기할 수 있는 노릇 아니냐?”

“알겠습니다.”

검설린이 등 뒤에서 첨언했다.

“저놈을 믿지 마라.”

순간 발끈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뭘 그리 보느냐는 듯이 검설린은 코웃음을 치며 싸늘한 얼굴로 시선을 받아칠 뿐이었다.

“또, 또!”

강서진은 기가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너희 그렇게 사이가 좋아놓곤? 지금 와서 이 모양이냐.”

그 말에 대한 서문윤의 답변은 냉정했다.

“저희가 정말 사이가 좋았는지도 의문이군요.”

헛웃는 청년을 강서진은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문득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너무 그러지 말거라.”

옛 벗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알고 있다. 쓸쓸함이 스치는 강서진의 얼굴을 검설린은 애써 못 본 척하려 시선을 홱 돌렸다. 서문윤은 침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을 세우고 있었다.

‘이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 * *

“의형. 저랑 대작을 해요.”

그것은 강서진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문윤이 내뱉은 말이었다.

“뭐?”

창가에 앉아 멍하니 후원을 바라보던, 정신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검설린이 그 순간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서문윤이 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은 얼굴을 굳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서문윤은 시선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검설린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하여 마련된 술자리의 분위기는 마치 두 사람의 대작이 홍문연이 아닌지 의심케 할 만큼 살벌했다.

홍문연은 암살 의도를 품고 여는 연회를 의미한다. 즉 그들은 생사 대적하듯, 술잔에 독을 섞은 듯 서로를 심히 경계를 하고 있었단 의미다.

그러던 와중에 결국 검설린은 육중한 분위기를 참지 못해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술에 뭐라도 탄 건 아닌지 의심되는군.”

탁, 소리와 함께 술잔이 탁상 위에 내려앉았다. 차분한 눈으로 서문윤이 검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냐.”

서문윤이 담담히 물었다.

“우리가 꿍꿍이가 없이 술을 같이 마실 수 없는 사이입니까?”

“이제는 그렇지.”

“슬프군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서문윤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도 슬픕니까?”

검설린 또한 잠시간 할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다 자초한 일을 슬퍼한다 말을 해서 뭣 하지?”

그 말을 내뱉을 때 검설린은 마치 가시를 마구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남들이 볼 때는 어딜 봐서 그런 귀여운 종류냐 말을 할 법한 살벌한 모습이었으나 서문윤은 실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서문윤이 잠시간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겪었다.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이 길었고, 의형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았다. 그렇기에 서문윤은 이와 비슷한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서문윤이 인질이 되고, 검설린이 그에 저를 위한 독선적인 결정을 하는 상황. 결국 검설린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상황. 그 모든 일에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몇 번이고 머릿속에 상황을 그리며 궁리를 했었다.

서문윤은 장안에 입성하기 전에 어렴풋이 마음을 정리했었다.

이제 행동을 할 뿐이지.

검설린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그의 마음에 선 다짐을 모르는 검설린은 서문윤의 온화한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딱딱히 굳은 사내의 얼굴에 균열이 깊어져 간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 끝에 검설린은 깊게 갈라진 목소리로 침착히 말을 내뱉었다.

“이청융과 했던 10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9년차에 저버렸지.”

“저 때문이지요.”

검설린은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다시 맹약을 사수하러 갈 거다.”

탁상 위에 올려놓았던 술잔을 다시 거머쥐며 그는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북성신의로 돌아가야지. 니취로.”

서문윤이 조용히 물었다.

“또 홀로 방황하시게요?”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떠나실 겁니까?”

술잔을 쓰다듬으며 검설린이 작게 읊조렸다.

“네가 나랑 같이 가진 않을 것 아니냐.”

“의형이 선택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검설린이 멍한 얼굴로 읊조렸다.

“내게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목소리에는 희미한 떨림이 묻어 나왔다 .끝이 갈라져 있었다. 그것이 검설린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어.”

허탈한 얼굴로 검설린이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얼굴을 서문윤은 차분히 마주할 뿐이었다. 시선이 대치되는 상황이 흘렀다. 포기한 검설린이 눈을 감고야 만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겁이 많은 사내는 그저 회피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 그의 귓가로 담담한 말이 흘렀다.

“의형.”

검설린은 눈을 뜨지 않고 그의 말을 들었다.

“저는 당신을 지금껏 용서했습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조금의 침묵 끝에 답변이 흘렀다.

“알고 있어.”

서문윤은 쓸쓸한 가을바람 같은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제가 뿌리 내렸다고 생각했어요.”

그 대목에 이르러 검설린은 스륵 눈을 뜨고 서문윤을 지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절박함이 스치는 얼굴을 서문윤은 매정하기까지 한 평온한 얼굴로 마주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은 게 아니야.”

동요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흘렀다.

“허나.”

서문윤은 그리고 그 순간 말을 끊었다.

“정말 그 감정이 동료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천장에 높게 솟는 목소리였다.

“당신의 마음에 정녕 삿된 것이 없었나요? 정열이 없었습니까?”

검설린이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서문윤은 그를 지긋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흐르고, 검설린이 술잔을 거머쥔 손을 물리곤 제 목을 부여잡았다. 숨이 막히는 듯 목을 긁으며 그가 몸을 웅크렸다.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한마디 말을 되뇌었다.

“나는, 나는.”

괴로워하는 사내의 얼굴에 서문윤은 결국 억눌린 숨을 길게 토해내고야 말았다. 질끈 눈을 감은 청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검설린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네가….”

그러고였다.

“네가…?…?!”

검설린의 머리가 탁상 위로 풀썩 떨어진 것은.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진 때였다. 갑작스럽게 몸을 덮치는 강렬한 수마에 빠져 검설린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갇힌 것처럼 몸을 늘어트리고야 말았다. 경악한 검설린의 귓가로 그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저는 당신을 지금껏 많이 용서해왔어요.”

검설린을 경악하게 만든 목소리였다.

설마…?!

“그러니까 의형도 저를 용서해야 합니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으며 술잔의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가 쓰러진 검설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셨지요?”

“너… 헉, 너…!”

“저도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서문윤이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의형은 대화로 안 통하니까요.”

검설린의 눈에서 흉광이 터지게 한 말이었다.

“너 이 새끼…!”

흉광과 함께 복장도 터졌다. 그러나 검설린은 탁상에 박은 머리를 들지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서문윤이 품에서 자기병을 꺼내어 손에 굴리며 잠시간 상념에 빠졌다. 수면제가 든 자기병은 일전에 이청은이 서문윤에게 준 것이다. 검설린을 대가로 주겠다 말을 하며 회유를 하면서 제시했던 물건.

이청은은 그에게 이 물건으로 검설린을 잠재우고 제가 알려준 거점으로 떠나라 말을 했다. 그렇게 검설린과 함께 새외로 떠나 잘 살라고.

‘일주일은 혼수상태에 이른 듯이 잠에 취하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곰곰이 생각하던 서문윤이 미심쩍은 얼굴로 반문했다.

‘그게 독 아니야?’

잠시간 속으로 태자의 흉심을 의심하던 서문윤이 결국 포기하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찌 되었건 저질러버린 일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새외로 떠나 잘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잠재우는 건 성공했지.

‘이게 이렇게 쓰일지는 몰랐군.’

이청은은 제가 서문윤에게 준 약과 세력 전도가 이렇게 쓰일지 어디 예상을 했을까?

‘감사합니다, 전하.’

이청은이 알면 뜨악할 감사의 인사를 하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길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뭐라 말했을지는 궁금하긴 하네.’

잠에 취한 사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서문윤은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이마 위에 입을 맞추고 서문윤이 아련한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검설린의 이마가 일그러져 내천 자를 그리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주름이 생길 것을 걱정하며 서문윤이 그의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러곤 문밖을 빠져나가 궁인에게 말했다.

“강소성주께 서문윤이 만나고 싶어 한다 연락을 드려다오.”

* * *

강서진은 서문윤이 자신을 불러냈다는 말에 의아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저를 위험분자로 알고 경계하는 그를 알았다. 이 상황의 책임을 저에게로 돌리며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건 사실 틀리지 않는 말이었기에 강서진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서문윤이 검설린을 움직일 좋은 패이긴 하지. 허나 그뿐이다.

그 애에겐 알음알음 퍼져 나간 협의의 명성은 있으나 그것을 사용할 능력도 담도 없다. 흉중모략을 펼칠 만한 위인도 아니고 야심도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에 비해 사고방식이 독특하여 사건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데 재능이 있을 뿐이다.

그런 서문윤의 능력에 몇 번 당했음에도, 그러나 강서진은 이번에는 다르리라 생각했다.

“정명공이 나를 불러?”

아무리 그래도 적진 한가운데 감금된 상황이니 무슨 손을 쓸 수 있을 리는 없겠지. 그러나 그리 생각하며 시비의 말을 정정했던 강서진은 이어진 말에 차를 따르던 손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정명공께서는 만취하여 곯아떨어지신 듯했습니다.”

두말을 하기 싫어하는 강서진은 그 순간만큼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뭐?”

드물게 얼이 나간 사내의 앞에서 시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강서진의 이상한 반응에 놀란 것이다. 그런 시비를 앞에 두곤 강서진이 미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가마.”

시비가 어찌 알랴?

검설린이 단 한 번도 남에게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사내란 것을.

‘게다가 이 시국에 술이나 퍼마시고 곯아떨어져 잔다고? 잠을 자지 않고 경계해도 모자랄 판국에?’

그리하여 강서진은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 짓을 저질렀군, 그 애.’

서문윤이 지독한 사고를 쳤단 사실을 깨닫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그들이 머무는 별궁으로 향했다. 강서진이 모르는 사실은 그가 걸음을 걸으면서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단 것이었다.

그 청년의 기상천외한 행각은 황당하면서도 너무나 재밌어 아무래도 기대가 됐다. 비록 그것 때문에 셀 수도 없이 엿을 먹었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내는 그저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별궁에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을 연 강서진은 제 마음을 배반하지 않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야 말았다.

“아!”

서문윤은 일국의 섭정답지 않게 경망스럽게 행동하는 사내를 쭈뼛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짝, 짜악, 짝.

느릿한 엇박자의 박수를 흘리며 강서진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며 방 안에 들어왔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탁자 위에는 빈 병이 옆으로 넘어져 구르고 있었다. 검설린의 술잔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창백한 얼굴로 탁자에 푹 엎어진 사내를 바라보며 강서진이 웃음을 삼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린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어야만 하는데….”

허나 검설린도 설마 그가 이러할 줄 어찌 알았을까?

“내, 네 그간의 행적과 심성과 결단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라는 사내를 너무 얕보았어.”

그 순간 서문윤이 쭈뼛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저는….”

그러나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하려던 말을 멈춘 채 경악하여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독살이라니.”

“예?!”

아니, 지금 뭐라는 거야?!

“아닙니다!”

서문윤이 공황에 빠져 말을 내뱉었다.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의형을 독살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러자 강서진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자신의 주변상황을 둘러본 서문윤은 그 순간 제 입술을 꾹 다물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누, 누가 봐도 독살이잖아….’

탁자 위에 축 손을 늘어트린 채 힘없이 엎어진 사내. 땅바닥을 구르는 술잔. 탁자 위에 엎어진 빈 약병.

누가 보면 이게 모함이 아니야?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노골적이고 작위적인 범죄 현장이었다.

그를 깨달은 서문윤의 얼굴이 구겨질 때였다.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강서진이 문득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독살을 하는 게 나을 텐데. 그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입술 밖으로 나지막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너, 이 애가 깨어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으, 으음.”

그의 얼굴에 그늘이 순간 드리운다. 어쩐지 몹시 불안해 보이는 청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강서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생각은 안 해봤어?”

서문윤은 침묵 끝에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말을 내뱉었다.

“의형은 저를 용서할 겁니다.”

생각을 안 했군.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내심 짐작한 강서진이 이어진 말에 순간 몸을 멈칫했다.

“제가 의형을 용서했던 것처럼.”

잠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 시간 동안 강서진은 서문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은 얼굴로 그를 받았다.

긴 시간이 흘러 강서진은 미묘한 어감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고 말을 내뱉었다.

“웃는구나.”

서문윤이 강서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악한 악당. 수도를 피로 물들인 권력자. 복수에 미쳐버려 인륜을 저버린 미치광이는 그 순간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못내 이상했다. 서문윤의 눈에 이상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강서진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너…….설린이를 믿는군.”

반짝거리는 강서진의 눈과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그 순간 홀린 듯 말을 내뱉었다.

“무얼 바라세요?”

강서진이 되물었다.

“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충동적으로 말을 해놓고서도 뒤를 이을 말을 생각해내지 못해 서문윤은 잠시간 입술을 다문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강서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마음을 정리한 서문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 당신은 복수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는 게 없으십니까?”

그에 대한 강서진의 반응은 냉혹할 뿐이었다.

“건방지구나.”

강서진은 확실히 검설린과는 다른 자였다.

“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위치라 생각하느냐?”

싸늘하게 말을 내뱉는 강서진에 서문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했다.

“성주를 모욕하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겁니다.”

그가 덧붙인 말에 강서진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성주께서 의형을 걱정하는 것처럼.”

“…내가?”

순간 얼이 나가 그는 저도 모르게 또다시 두 번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를?”

서문윤이 그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시선은 절대로 적대적이지 않았다. 제 몸이 중독된 사실을 이용한 자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저를 이용하여 상황을 휘두르려는 자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 눈에는 심지어 희미한 안타까움마저 서려 있었기에. 동정과도 같은 그 시선에 강서진이 미간을 좁히고야 만 때였다.

“운 공자님을 왜 살려주셨습니까?”

강서진의 몸이 멈칫했다. 서문윤이 그를 바라보며 잠시간 상념에 빠졌다. 강호에 잠시 몸을 담았던 운표선. 병약한 생김새 때문에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그는 고수였다. 그래서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던 상황에서 강서진의 저택에 혈혈단신으로 잠입한 것이고.

그러나 그는 매복에 걸려서 도망쳤다. 미리 덫을 치고 있던 강서진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패퇴해서 도망친 운표선은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검설린에게 장안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고, 검설린을 비롯한 이들이 거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서문윤이 침착한 시선으로 강서진을 보았다.

거의 1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몸을 웅크리곤 반역을 설계한 그가 그리 쉽게 운표선을 장안에서 내보내줬다고? 이런 건 차라리 덫을 놓으니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비록 운표선의 수하들은 많은 수가 제거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인 운표선은 남아 있었다.

‘그가 살려준 것이다.’

그것은 검설린과 이청은 또한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일에 무언가의 흉계가 있다 예상하며 경계를 했다. 운표선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그가 황제에게 협력을 하여 여러 일을 벌인 것은 사실이므로. 이청은을 비롯한 반정군은 그들의 반정에서 운씨 상단의 힘을 배제한 상태였다. 운표선의 결백을 아는 검설린은 아마 강서진이 그런 상황을 노린 것이라 예측했고.

하지만 서문윤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쩐지 그 일이 술수인 것만 같지 않았다.

강서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서문윤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고 귀비를 왜 보살펴주셨습니까?”

이 사건도 그러하지. 따지고 보면 고 귀비는 강서진의 지독한 원수였으며, 심지어 정적이었다. 어찌 되었건 고 귀비는 황제의 권력을 기반으로 득세를 하였으니. 그러나 강서진은 고 귀비를 쳐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황제의 약점과 마찬가지이므로. 이것저것 사악한 흉계를 낼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았다.

서문윤이 강서진의 눈을 직시했다. 강서진은 그의 물음들에 바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무수히 많다. 저 말에 답변할 수 있는 말은, 제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많다.

그러나 강서진은 그 많은 변명들을 결국 입술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확실히 내 행보는 내가 주창한 정치 역학과는 다르지.”

그는 그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곤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서문윤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을 위해서. 황위를 운운하신거지요? 의형이 죽을까 봐.”

강서진이 냉소를 지었다.

“나는 네 세 치 혀에 휘둘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딜 감히 나를 흔들려 해?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른 노련한 정치인이 코웃음을 치며 탁자 위에 팔자 좋게 늘어진 검설린의 이마를 툭 검지로 때렸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이놈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아.”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강서진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검설린.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정말로 독살을 당한 것마냥 탁자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이 이윽고 입술을 열었다.

“당신을 동정하지는 않습니다. 원망합니다.”

강서진은 묵묵히 그 말을 들을 뿐이었다.

서문윤은 실로 그럴 만하다.

“아니, 사실 혐오하고 있지요. 당신이 죽는 것도…… 저는 당연한 대가라 생각을 하고 있지요.”

강서진이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서문윤은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하지만 의형께서…. 너무 씁쓸해할 것 같네요.”

“뭐?”

그 말에는 천하의 강서진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이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은 할 일이 있잖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리고 이어진 말에 강서진은 몸이 얼어붙고야 말았다.

“아무도 그분의 유언은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까?”

서문윤은 쓴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의형으로 충분하잖아요. 유언을 깬 건.”

아….

강서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설득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태자전하의 유언은 고 귀비를 보살펴달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죽으실 때 남겼던 유일한 한을 당신은 돌보았던 것이 아닙니까. 마음속에 샘솟는 증오를 억누르면서까지 말입니다.”

강서진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며 강렬한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 위로 드러나는 어둑한 감정들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녀를 살리겠다고?”

시간이 흘러 강서진은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정말 웃기기도 하지.

강서진은 진실로 즐거움을 느끼며 두 눈을 휘었다. 그 상태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제에게 마약을 먹이고,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지. 그의 악행을 부추겼다. 만약 황제가 본래의 그였다면 아무리 타락했어도 장한성의 일 같은, 국토를 팔아넘기는 미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살아남을 수 없는 죄인이야.”

그리고 서문윤의 답변이었다.

“아예 용서받을 수 없는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건 아니잖습니까?”

“뭐라고?”

강서진이 얼이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경악한 듯 보였으나 서문윤은 사실 이 문제에 대해 굉장히 긴 시간 고민했다. 고 귀비가 제 입장에서 사악한 자임은 맞다. 서문윤은 그녀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벌인 일이라 하지만 그녀가 동궁사변의 시발점은 그녀였다. 그때 흐른 피를 생각하면, 용서는 안 되는 일이다.

허나 동정을 아예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상 그날 이후로 그녀가 한 일은 황제를 중독시킨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구명을 패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서문윤이 고심하던 일이었다. 그는 이미 마음속에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듣기로는 그녀는 직접적인 잘못을 저지른 적은 거의 없다 들었습니다. 동궁사변을 제외하면…. 사람들을 죽이거나 매점매석을 한다든가 해악을 끼친 적은.”

그리고 그 순간 강서진은 박장대소를 흘렸다.

“하하!”

“성, 성주님?”

“네가 진짜 미치광이긴 하구나.”

허리를 뒤로 젖히며 미친 듯이 웃어대던 그가 문득 눈꼬리에서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황제를 미치광이로 만든 자를 그것 외엔 악행을 저지른 게 없다며 감싸주다니?!”

황제를 중독시켰는데 그 정도 일이라고 한다. 유가의 큰 맥을 이은 강가의 가주는 그 말에 기분이 유쾌해져 웃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황제는 솔직히 쓰레기였어요.”

이어진 그의 말은 더욱 마음에 들었고.

“그러니 그런 자 때문에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당신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나 뒤이은 말은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웃음기가 가득했던 강서진의 얼굴에 얼이 나갔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말을 고르던 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멍청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뭐라고?”

서문윤은 잠시간 그를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두 죄인이 저지른 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단 사실을 알아. 하지만 그들은 동정의 여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서문윤은 지금 이 상황에서 이청은이 죽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태자전하가 비밀리 키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제가 가지고 있는 패를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이 세상 곳곳에 거점을 마련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비밀스러운 일을 하기 적합합니다.”

“…너, 설마?”

“저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들에게 협조를 요구할 수 있는 패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청은은 서문윤에게 검설린을 빼돌려 남만으로 도피하라며 소식과 패를 제공한 적이 있었다. 비록 서문윤이 검설린과 화해를 해버려 쓸모가 없어져버렸으나, 이청은은 언제고 서문윤이 제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 패를 거두지 않았다. 그와의 연줄을 끊기 꺼렸던 것이다.

서문윤은 그것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귀비와 함께 남만으로 도망치십시오.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없잖습니까?”

서문윤이 내뱉은 말에 강서진은 기나긴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게 적의 손에 목숨을 맡기라는 건가.”

적막 끝에 강서진이 조소하여 내뱉은 말이었다. 침묵 끝에 나온 냉소적인 말에 그러나 서문윤은 절망하지 않았다.

“왜 그가 적이 되었습니까?”

“뭐?”

“저는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의형도 그렇고 지나치게 태자전하를 미워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들의 진정한 적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까? 의형의 집안을 멸족시킨 것도 그, 동궁사변을 일으킨 것도 그, 동궁태자를 비롯한 당신들이 그렸던 미래를 망친 것도 그. 그런데 어째서 그 모든 죄를 그의 자식이 물려받아야 하는 겁니까? 의형과 당신이 제게 설명을 했으나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그저 이리 생각할 뿐입니다.”

숨을 들이켜곤 서문윤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미워할 존재가 필요해서 그를 미워하는 것뿐입니다.”

강서진의 눈에 불을 밝힌 말이었다.

“너!”

“상황이 당신을 미움으로 몰아넣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어느새 숨도 쉬지 않은 채 서문윤은 빠르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당신은 미워하고 싶어서 그를 미워하는 게 아닙니까? 누군가를 향한 증오가 아니면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잘못이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태자전하를 계속해서 미워하는 것이겠지요.”

강서진의 눈에는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을 노려보며 서문윤은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은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스스로가 엇나가고 있던 것을.”

강서진의 눈은 서문윤을 마치 찢어 죽일 듯했다. 한 지역의 패자. 고우군과 함께 조정을 양반했던 암중의 권력자. 복수를 위해 10년간 칼을 갈고 모반을 준비했던 시대의 풍운아. 그런 사내의 눈빛은 일개 무인이 받기엔 힘든 것이리라.

그러나 일개 무인 서문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늙은 부모의 힘없는 잔소리를 무시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을 흘려 넘길 뿐이었다.

저런 것을 두려워하기엔 이미 서문윤이 검설린에게 너무나도 단련되어 있었다.

서문윤은 도리어 그의 험악한 반응에 하나의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방황하셨지요?”

궁지에 몰린 짐승은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다.

“죽은 전하의 명을 들어 귀비를 보살피고, 죽여야 할 이들을 살리고, 의형을 걱정하면서도 원한을 놓지 못해 이 자리에 있으신 것 아닙니까?”

강서진의 행적과 지금의 반응이 희망의 빛을 알리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강서진은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다.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다. 그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다. 다만 현실을 도피하는 것일 뿐.

“이제 마지막입니다.”

그렇다면 이청은을 폭사시키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 또한 물릴 수가 있으리라.

“지금이 아니면 이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대인”

서문윤은 그리하여 간곡히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태자전하가 죽으면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

“지금 성벽 밖에 있는 이들은 이후의 세상을 어떻게 꾸려나갈지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선명한 말이 방 안에 울렸다.

“모두가 태자를 중심으로 한 계획입니다.”

서문윤의 얼굴은 절박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그는 실제로 지금 절박한 마음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중환과 검설린과 이청은이 미래의 권력 배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말을 나누는 것을 들었다.

이중환은 고우군이 설계한 구상을 실현시키고자 했고, 그를 위해서 검설린과 이청은 사이를 저울질했다. 검설린은 황제의 권한을 제한하는 고우군의 재상 중심 체제에 미래가 있다 보고 이청은의 화해의 손을 암묵적으로 잡았다. 이청은은 황권의 폭주로 일어난 사태에 책임감을 느끼고 어찌 보면 제 살을 깎아먹을 수 있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더하여 황재천은 황제에 의해 엉망이 된 병부가 정상화되길 원했다. 황가보다 오래된 명가, 운씨세가의 후손 운표선은 다수의 신료가 권력을 황제와 양분한다는 체제를 선전해 저력을 숨긴 명가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귀족주의에 가까운 체제였으므로.

그러니까 그들은 저들 나름대로의 미래에 대한 구상을 꾸리고 있었다. 잘 나아가고 있었다. 동궁태자가 꿈꿨던 것처럼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스스로의 권력을 나누겠다는 이청은의 제 살을 깎아먹는 결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구상이었다.

“멈춰주십시오. 대인.”

그가 죽으면 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언제 또 그들과 타협을 할 수 있는 종친을 구해 황제로 내세우고 그에게 재상 중심 체제를 이해시킨단 말인가? 차라리 역성혁명을 하거나, 꼭두각시를 구하는 편이 낫지.

그건 또 다른 피를 불러올 일이었다.

이 구상에는 반드시 첫 시작으로 황제의 협조가 필요하다. 기꺼이 제 살을 깎으려 하면서도 조정과 황실의 균형을 맞추어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그가 필요합니다.”

완벽히 모든 것을 이해한 건 아니지만 그 정도쯤이야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진심을 담아 호소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가 죽는다면 세상이 더 혼란해집니다. 더는 세상에 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 강서진은 냉소를 지으며 서문윤의 말에 답변을 했다.

“지금이면 돌이킬 수 있단 말이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이었다.

“네.”

“…….”

“어차피 당신의 계획은 망가지지 않았습니까.”

강서진의 눈썹이 꿈틀한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탁자에 구르는 자기병을 손에 쥐며 중얼거렸다.

“이 수면제. 한 번 마시면 일주일간은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선은 탁자 위에 자는 듯 엎어진 검설린을 향해 있었다. 불면증에 시달려 깊게 잔 적이 없었는데 그는 마치 안식에 이른 사람처럼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잠시 띠던 서문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자께서 의형이 일어나 난리를 칠 것을 염려하셔서 독한 것으로 준비를 하셨지요.”

강서진이 그 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를 태자라 부르지 마라.”

서문윤은 그저 제가 할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저희가 사흘 내로 돌아가지 않으면 공습이 시작되게 말이 되어 있습니다.”

강서진은 그 말에 이르러 서문윤이 하는 말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입술을 딱 다물었다.

“너… 지금…!”

떨리는 목소리. 이마에 고인 땀방울. 분노에 일그러진 사내의 창백한 얼굴과 마주하며 서문윤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저는 당신에게 호응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눈은 침착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서진이 눈에 불을 켜며 이를 아득 물었다. 서문윤은 작게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태자전하께서는 저와 의형의 얼굴을 보지 않고선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의형은 쓰러져 있군요. 저는 협조할 생각이 아예 없고요.”

검설린이 사절로 장안성에 들어간 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장안성 조정이 화친이나 항복의 의사를 드러내며 성안으로 이청은을 불러들인다?

동궁사변이라는 큰일을 겪고 난 후 이청은은 제 안위에 대해 촉각을 세웠다. 누가 봐도 수상하고 위험한 상황에 그는 쉬이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계획. 끝났어요.”

이청은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은 믿지 않을 것이다.

서문윤이 침착한 얼굴로 강서진을 바라보았다.

“저는 죽어도 협조를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복수는 끝났다. 그런 말을 하는 듯한 서문윤의 깊은 눈에 강서진이 맑은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곤 그는 문득 얼굴에 감정을 지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탁상 아래 허벅지 위에 단정히 올려진 서문윤의 손이 움찔한 때였다.

강서진이 차갑게 웃었다.

“이놈이 죽어도?”

그의 소매에서 튀어나온 비수가 검설린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강서진의 한 손에는 비수가, 한 손에는 사내의 긴 머리카락이 감겨 있었다. 잠에 취한 듯 평안히 잠을 자는 사내의 목에 날카로운 비수를 겨누며 강서진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협조해라.”

“이제 끝났습니다.”

“협조해.”

“당신의 복수는 끝이 났어요.”

어째서인가?

그의 눈에는 의형의 목에 대어진 비수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서문윤은 그저 그 한마디 말만을 반복하며 강서진을 좌시할 뿐이었다. 까득 이 악문 소리가 흘렀다. 음산한 말이 흘렀다.

“내가 못 할 줄 아느냐?”

검설린의 목에 실금이 그어지는 순간 힘주어 하는 말이 돌아왔다.

“예, 저는 당신이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 해도 제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강서진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 순간이었다.

“아, 그래? 정말 대단하군! 네 그 천하를 위한 인의가 설린이를 향한 마음보다 더욱 거세다는 거냐?”

서문윤은 그 말에 이를 악문 목소리로 소리쳤다.

“의형을 사랑합니다!”

처절한 말이었다. 강서진의 입술을 꽉 다물게 할 만큼.

흔들리는 시선이 서문윤에게 닿았고 이후 울먹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그와 함께 사선을 헤쳐 오며 많은 것을 겪었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진정 상대를 위한다면 그의 안위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를 위하는 길은 고작 목숨만을 보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서문윤은 그가 목숨만을 보전했던 상태를 보았다.

인생의 가치를 잃고 방황했던 시절을 목격했다. 숨을 들이켜곤, 서문윤이 형형한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았다.

강서진은 조소하며 물었다.

“그러면?”

서문윤은 망설임 없이 답변했다.

“더 나은 길로 상대를 나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곤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은 운 공자와 달라요. 무술을 모르지요. 저는 지금이라도 당신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허나 그러지 않을 겁니다.”

“…….”

“당신을 설득할 겁니다.”

강서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왜?”

서문윤은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은 이미 선을 지독히 넘어버렸어요.”

“그래, 살아남을 수 없지. 그래서 죽는다잖아! 죽기 전에 너희의 세상을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그딴 것 필요 없습니다!”

그 순간의 일이었다.

“이미 당신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요!”

서문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서진을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이를 악물며 그는 사나운 기세로 말을 이어나갔다.

“동궁사변 때 훙서하신 태자께서 원하셨던 세상과 정반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 때문에!”

강서진의 얼굴은 이미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결이 흐른다. 구겨진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분노에 찬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억울하게 사람을 죽이고, 충신을 죽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며 세상에 빛이 들지 않게 하잖습니까.”

지금 누가 세상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가?

누가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복수입니까, 태평한 세상의 도래입니까?”

저를 노려보는 강렬한 눈빛에 강서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이청은은 교활한 모사꾼이다.”

비수를 든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검설린의 목에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곤히 자고 있는 사내의 속눈썹은 떨림조차 없이 가지런했다.

“아비를 닮은 놈이다. 세상을 혼란에 몰고 갈 자야.”

강서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금 두려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황제도 젊었을 때는 그와 비슷했지. 나름의 대의를 가지고 쇄신을 하고자 했다…. 헌데 지금 결과가 어떻지?”

강서진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은 말을 내뱉었다.

“모략에 능한 자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다.”

서문윤은 그 순간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 또한 황제처럼 타락할 거야.”

강서진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였다.

“들어보십시오.”

세상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전하께서는 이미 제 권력을 나누고자 하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강서진에게 설명해주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세하게 고우군이 구상했던 체제부터 그것이 타결되기까지의 과정을 침착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또한 무인인지라 세세한 부분까지 아는 바는 없었으나 천하의 기재였던 강서진은 서문윤의 서툰 설명에도 그가 말을 하는 바를 얼추 깨달은 듯했다.

설명이 끝났을 때 강서진의 얼굴은 멍한 빛으로 흐릿해져 있었다.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안도의 안숨이 흐르게 한 빛이었다.

그가 충격을 받았다.

그럼 이제 설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조금 그를 신뢰할 수 있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대한 답변은 꽤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돌아왔다. 강서진은 메마른 입술을 열어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그를 어찌 믿겠느냐?”

그 말에 서문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믿겠습니까?”

강서진은 답변을 하지 못했다. 서문윤은 그의 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희망, 열의, 증오, 원한, 생애의 의지….

“그래….”

“…….”

“그렇다고?”

힘없이 말을 내뱉은 강서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도망칠 생각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혹시나 죽음으로 사죄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럴 단계가 아니다.

심호흡을 하고, 서문윤이 침착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을 내뱉었다.

“수습하세요.”

명료한 목소리에 강서진이 스륵 눈을 떴다. 멍한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침착히 말을 내뱉었다.

“지금은 수습을 할 수 있습니다. 최악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

“병권을 내려놓고, 몰래 도망가십시오. 폭사의 위기를 면했다 한다면, 장안을 날려버릴 만큼의 폭약을 가지고도 항복을 택했다 한다면 태자께서는 그것을 감안하여 더 이상 추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침을 삼켜 마른 입안을 축이곤,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동궁태자의 유언을 사수하십시오.”

강서진은 한참을 말을 내뱉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강서진이 노인의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나는.”

“…….”

“나는 모르겠….”

촛불처럼 스스로의 영혼을 태우던 사내가 힘없이 축 늘어져 있다. 증오를 잃은 사내는 30대의 나이에도 칠순의 노파인 것처럼 보였다. 서문윤이 측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악인이지만 참작할 여지가 있었다.

아니,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더듬거리며 제가 할 말을 찾지 못하던 강서진이 제 추태를 깨닫고 입술을 다물었다. 시간이 흘러 그가 문득 서문윤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럼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그 말에는 서문윤 또한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늘이 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강서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놈도 방황을 하는 모양이군. 그리 생각하는 것이 역력한 기묘한 웃음에 서문윤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모르겠습니다.”

그래,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남 이야기를 할 게 아니지. 강서진의 일은 어떻게 설득을 할 방법이라도 생겼다. 해결을 할 방법이라도 생겼다지만 의형의 일은 정말 모르겠구나. 서문윤이 우울한 얼굴로 강서진의 손아귀에 들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애정인지 미움인지 묻은 집요한 시선이 수려한 얼굴을 때렸다.

강서진은 뒤늦게 제가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사내의 목에 댄 비수를 바닥에 챙캉 떨어트리곤 검설린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았다.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해약을 주실 생각입니까?”

강서진은 그 무렵에 외관상으로나마 여유를 되찾은 후였다. 강서진이 느릿하게 답변을 했다.

“해약은 귀비에게 있다.”

그는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귀비에게 해약을 받으면 떠날 셈이냐?”

서문윤은 혼란스러워했다.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 입술을 꾹 다문 채 굳어 있었다. 떠난다고 해야 하건만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해약을 핑계를 댈까? 검설린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니 해약을 받지 못한다면 저를 거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문윤이 원치 않았다.

서문윤이 원하는 건 진심뿐이었다.

그렇다면 환희향의 해약을 받아야겠지. 그것을 얻고 의형을 떠나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이리라.

그러나 서문윤은 어쩐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의형에게 실망했다. 노력은 빛을 발하지 않았고, 의형은 진심을 말하지 않았거나 혹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서문윤은 더 노력할 자신이 없었다.

허나 이별을 말하기는… 그렇기는 힘들어.

갈팡질팡하는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강서진이 문득 입술을 열었다.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할 시간을 다오.”

“…….”

“네게도 그럴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

서문윤은 차마 무어라 할 답변을 생각해내지 못하곤 깊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강서진이 떠난 자리.

서문윤이 검설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깨어 있을 때 이 사건을 들으면 노발대발할 사내는 지금 죽은 듯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앞에 앉은 채 서문윤은 한참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니 마음이 그저 온화해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흘러 서문윤이 문득 장난기가 들어 그의 코에 손을 들이댔다.

콕 콧대를 짓누르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이래도 잘생겼네.”

복잡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였다. 서문윤의 눈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단정한 얼굴 위에 온갖 감정이 버무려져 있었다. 잠시간 검설린의 얼굴을 찰흙 주무르듯이 문질문질한 서문윤이 이윽고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뗐다.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 이런.’

서문윤이 쓴웃음을 흘렸다.

‘괜찮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대형 사고를 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천하의 판도를 갈음하는 일에 휩쓸려 있다. 어쩌다 보니 한낱 낙향 무사가 사기를 바꾸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다. 천하의 재사들은 뭐 하고 다니는 건지. 정략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던 자가 천하를 위해 방방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런데 문제는 서문윤의 능력이었다.

서문윤은 너무 어중간히 상황을 알고 있었고, 어중간히 교활했고,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강서진의 계획이 실행돼서는 안 되는 걸 깨달았기에 빠르게 움직였으나 계획은 완벽하지 못하다. 강서진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계획의 큰 줄기이니 더 말을 해서 무엇 할까? 변수를 생각할 깜냥도 되지 못했다.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성공을 했으나 그 이후가 불안정한 것이다.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느낌에 서문윤이 푹 한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아예 바보였으면 좋겠는데 보고 배운 것이 많은 서문윤이 저와 의형의 좋지 않은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탈이었다.

서문윤이 손을 뻗어 검설린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길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은 비단실과 같았다. 물에 닿으면 녹을 것만 같이 사르르 손에서 흘러내렸다. 가지고 놀면 기분이 좋다. 서문윤은 그리하여 잠에 취한 사내의 머리카락을 괜스럽게 가지고 놀며 마음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생각이 들어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의형이 달래줬으면… 아.’

한숨을 내뱉으면서 서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달래기는 무슨, 그는 깨어나면 당장에 분노하여 서문윤을 꽁꽁 결박하곤 성벽 위에 매달을 거다. 이번 사건은 정말 그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몰래 병영에 따라가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후폭풍이 뒤따르는.

서문윤이 자그마니 입술을 열었다.

“의형, 깨어나서 제게 화를 낼 겁니까?”

당연히 검설린은 답변이 없다. 새근새근 잠에 취한 사내는 깨어 있을 때에 비해서 훨씬 더 온화하고, 더욱 편안해 보였다. 갑자기 마음이 짠해져 서문윤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미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이렇게 있으니 낫네요.”

손을 뻗어 섬세한 선의 얼굴을 더듬으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의형은 깨어 있을 때보다 지금이 예뻐요.”

백옥을 조각한 듯한 매끄러운 살갗에 손이 누볐다. 광대를 문지르고, 콧방울을 비비고, 곧게 뻗은 입술을 지분거렸다. 한참을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서문윤은 감히 검설린이 깨어 있을 때 제가 풀지 못했던 욕망을 풀었다.

그러다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의형은 예뻐요.”

서문윤 스스로를 퍼뜩 정신을 차리게 한 말이었다. 어, 소리를 흘린 서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꿈을 꾸는 듯한 사내를 가는 눈으로 노려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아냐, 못생겼어.”

속을 계속 썩이는 의형에게 예쁘다는 말은 과하지. 그리 중얼거리며 서문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순간 검설린의 코가 위의 눌리고 있었다. 잠시간 키득거리며 웃던 서문윤이 문득 등골에 소름이 돋는 감각에 은근슬쩍 손을 뗐다. 검설린은 푹 잠이 들어 있을 터. 그러니 지금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를 테다.

그런데 어째서 검설린이 말을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잠시간 고민하던 서문윤이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내심 의형을 속이는 걸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나 보군.’

괜히 제 발을 저려 하고 있다.

‘그래도 잠든 의형을 더 괴롭힐 필요는 없겠지.’

서문윤이 손을 떼고 검설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분위기를 보니 잘 한다면 해약을 받을 수 있겠네요.”

검설린은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그 말을 내뱉곤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본 채였다. 그것은 답변을 갈구하는 말이 아니다. 서문윤은 오로지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것이다. 이윽고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저는 최선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의형이랑 제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결말을 찾고 있어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 세상이 더 평화로워지는 길, 또 의형이 괴로움의 더는 길을 찾고 있어요.”

조금의 침묵이 흘렀다. 서문윤은 망설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런데 이걸 제가 홀로 해야 하나요?”

마음이 불안하다. 결국 서문윤은 또다시 검설린의 뺨을 주물거리기를 택했다.

“저희 그래도 머리를 마주대고 고민을 할 사이는 되잖아요. 이런 중요한 일을 왜 나 혼자 고민해야만 하는 거야. 불안하게.”

“…….”

“네가 약을 타서 이 사달을 일으켰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설마 그러진 않겠지. 의형, 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예요.”

괜스럽게 찔려 서문윤이 다시 말했다.

“저는 분명히 말을 했어요.”

적막이 또다시 흘렀다. 창백한 뺨이 발긋하게까지 조물조물거리던 서문윤이 꽤나 시간이 흘러서 뺨에서 손을 떼고, 검설린의 팔을 잡았다.

그러곤 그의 몸을 부축해서 침상으로 이끌었다. 언제까지 탁자 위에 널브러지게 놔둘 수는 없잖아. 이제 그는 침상 위를 당분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서문윤이 침착한 얼굴로 속으로 생각했다.

‘의형을 잘 지켜야지.’

그는 이제 제 약점이 될 것이다. 강서진에게는 배짱을 부리긴 했어도, 서문윤은 다른 누군가가 검설린의 목숨을 위협하며 협박한다면 솔직히 수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만약 상황이 완벽히 강서진의 손아귀 안에 있으면 그래도 이런 걱정을 하지 않을 텐데… 지금 황성은 귀비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 않는가?

둘은 오월동주의 아슬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다.

강서진은 동궁태자의 유언에 의해 귀비를 돌보고, 귀비는 동궁태자를 향한 마음의 빚에 강서진을 향한 원한을 접어두었다.

물론 그 외에도 다른 이유는 있을 거다. 황제를 병신으로 만든 귀비는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강서진과 손을 잡아야 했고. 황제를 등에 업어 권력을 휘두르는 강서진 또한 섭정직을 유지하기 위해 귀비랑 협력을 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혈맹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상황과 감정이 그 둘을 어영부영 한데로 묶었으나 근본적으로 그 둘은 감정의 골이 깊다. 동궁사변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은 이들이었다.

서문윤은 강서진이 동궁태자의 유언보다 귀비에 대한 미움과 세상을 향한 증오심을 우선순위로 놓는 일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귀비의 판단을 걱정했다.

귀비는 분명히 이 방에서 이루어진 대담을 들었을 것이다. 궁궐에는 비어 있는 장소라 알려진 곳도 눈과 귀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면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서문윤은 그녀가 살 길을 찾은 기쁨을 표해낼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 증오로 살아온 여인이 그리 하겠는가?

‘아, 머리 아파.’

이 계획에는 너무 허술한 점이 많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한참을 머리를 감싸 쥐곤 끙끙 앓았던 것이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였다. 새근새근 자는 검설린을 흘긋 보곤 얄미워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난 이런 거 체질이 아니라고.’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우울한 얼굴로 잠시간 곱씹다가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의형. 저는 지금 어찌할까 고민 중입니다.”

불평불만을 토해내는 목소리였다.

“의형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이게 도대체 뭔데요.”

귀비가 언제쯤 제게 연락을 줄까?

속으로 생각을 하며 그가 웅얼웅얼 말을 이어나갔다.

“이 일로도 마음이 복잡한데 이 일이 해결이 되고 난 후도 걱정이 된단 말이에요. 조금은 제 마음을 편히 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거짓말도 못 하곤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곤….”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밀고 가슴이 따끔거리는 말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의형에게 원했던 답변은 ‘널 사랑한다’였습니다.”

혹은 이 마음을 모르겠다라거나.

씁쓸한 얼굴로 서문윤이 손을 뻗었다. 검설린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절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감정에 당황해하는 걸까요.”

“…….”

“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죠.”

서문윤은 잠시간 어물거리며 말을 잇지 않았다. 꽤나 시간이 흘러서 그는 침착한 목소리를 흘릴 수 있었다.

“의형은 제게 말했어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 그게 중요한 거다.

중요한 건 검설린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의지였다.

서문윤이 짙은 시선으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검설린이 제게 간절함을 품고 있는 것을 안다. 그는 경칠승 사건부터 지금 이 순간 장안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저만을 생각하며 뒤에서 일을 꾸며왔다. 문제는 그 방식이 정말로 제가 원하지 않은 방향의 것이란 거지. 검설린은 분명히 저를 위했다.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결국 죽음의 의지를 꺾었다.

그게 그냥 소중한 동생을 생각하는 거라고?

“아니요, 당신은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침묵 끝에 그는 스륵 눈을 뜨고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당신은 제 앞에서 선택을 했어요. 사랑을 하지 않는 길을 택했습니다.”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든 사내의 얼굴 위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렸다.

“저는 강서진이 여러 번 선택을 종용할 때 의형이 ‘환희향은 필요 없다. 내가 저 아이와 평생을 함께할 테니.’라 말을 하는 것을 바랐습니다.”

“…….”

“물 건너간 바람이지만.”

곱씹듯 말을 내뱉던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던 입술의 온기를 찾았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서문윤은 제가 주물러 발긋하게 변한 사내의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문득 힘없이 중얼거렸다.

“의형.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제가 원하는 건 의형의 진심이 아니라 의형의 사랑이었는데….”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로 의형은 저를 실망만 시켜요.”

* * *

시간이 흘렀다.

서문윤은 검설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의 옆에서 조잘대면서 시간을 보냈다. 혹여라도 귀비의 사람이 손을 쓸까 봐. 귀비가 아니더라도 강서진이 다른 마음을 품거나 그들이 아닌 다른 조정의 인물이 손을 쓸까 봐 두려워 서문윤은 검설린을 최대한 보호하려 들었다.

아무래도 장안 조정이 구석에 몰린 상황이다.

예로부터 반역자를 처리하는 방식을 떠올리면 그들이 충분히 돌발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한날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의형, 귀비가 오늘 선물을 보내왔어요.”

대부분은 소소한 잡담으로 시작해서 서문윤의 우울한 한탄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 있을까요? 비단 금(錦) 자를 파자라도 해야 하나요? 무슨 상징이라도 있습니까.”

귀비가 보낸 화려한 비단이 지닌 함의를 생각했다. 태자 익위 시절에 높으신 분들이 선물을 보냄으로써 제 의사를 밝히는 것을 몇 번 보아온 서문윤이 그것을 떠올리며 끙끙 앓았던 것이다.

지금 성이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인데 비단을 그냥 선물이랍시고 보낼 리가 없잖아?

분명히 무언가 다른 뜻이 있겠지.

파자를 해보았는데 의미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슬쩍 촛농을 떨어트려 보았는데 지나가던 궁녀가 경악을 하며 하사품을 손상시킨다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제대로 비단을 탐구하지도 못했다.

‘찢는 건 생각도 할 수가 없고.’

궁녀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러다간 정말로 황실의 사람을 모욕했다면서 들고 일어날 것 같았다.

‘뭐야, 도대체 무슨 뜻으로 비단을 보낸 거야.’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으며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푸념식으로 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그녀가 원하는 게 뭐냐. 그냥 밀서로 전하지 궁중의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게 산다. 한탄을 내뱉던 서문윤은 말을 하던 도중에 문득 입술을 꾹 다물고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의형 때문이에요.”

항상 서문윤의 푸념은 이렇게 검설린을 향한 은근한 투정과 원망으로 끝났다. 서문윤이 핼쑥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강서진은 연락도 없고….”

그러니까 서문윤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서문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늘부로 이틀째 오후. 사흘이 지나면 성을 공격하라 하였으니 오늘이 바로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이었다. 헌데 생각을 하겠다는 강서진은 연락이 없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강서진을 보고 싶다 연락도 하지 못하겠는 게, 조급해하는 게 들켰다가 그가 저를 불신하면 모든 게 망가지는 상황인 것이다.

별궁에 처박혀 의형의 옆에서 묵묵히 그들의 결정을 기다리는 상황.

서문윤은 그것이 불안하고 또 불길했다.

평화는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의형.”

떨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조금 무섭네요.”

저 혼자의 안위는 그렇다 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서문윤은 검설린의 손을 꽉 부여잡은 채 불안을 드러냈던 것이다. 묵묵히 손을 잡고 있던 서문윤이 문득 힘없이 웃었다. 어떤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검설린 또한 이런 중압감을 품에 안고 천하의 운명을 결정지을 선택을 내렸던가?

서문윤이 검설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제가 가장 어이없는 게 뭔지 아세요? 의형이 제 안위를 걱정하여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것에 화를 냈는데, 저를 위한답시고 독선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에 답답해했는데.”

서문윤이 잠시간 뜸을 들이며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어요.”

그리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서문윤이 미묘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저희가 닮아가고 있나 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서문윤이 잠시간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들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던 그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문득 들려온 궁녀의 목소리였다.

“귀비마마께서 서 공자를 뵙고자 하십니다.”

서문윤이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긴장이 스치고 있었다.

드디어 결론이 났나?

서문윤은 이 상황에서 가장 움직이기 힘든 사람이 고 귀비라는 걸 알았다. 옛날의 정을 통해 강서진을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귀비는 과연 어떨까? 그녀가 과연 제 목숨에 집착을 할까? 황제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은 그녀가 원한을 떨구고 다시 삶을 시작하자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사실 서문윤 또한 회의적이게 생각했다.

그러나 고 귀비는 궁을 장악한 여인이었다.

황제가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서문윤의 허술한 계획에는 반드시 고 귀비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찾아온 귀비의 궁인에게 그리하여 서문윤은 협상의 기본을 잊어버리고 초조함을 드러냈던 것이다.

“귀비마마께 직접 오실 수 있냐 여쭤볼 수 있습니까?”

“무엄하오!”

검설린이 푹 잠을 자고 있으니 그를 데리고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를 놔둔 채 움직이는 건 불안하다. 그런 마음으로 서문윤은 최고 관직이 고작 익위인 주제에 황제를 손아귀에 움켜쥔 귀비를 오라 가라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당연히 궁인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상황이 불안하여 검설린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몸을 떼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의형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문윤의 그런 다짐은 이윽고 당도한 귀비의 궁인이 전한 말에 깨지게 되었다.

“귀비마마께서 말씀을 전하라십니다.”

서문윤은 입술을 꼭 다물고 궁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 죽고 싶으냐?”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대들어.

정말로 그리할 여인임을 알기에, 서문윤은 죽을상을 하면서 몸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귀비의 궁에서 서문윤은 잠시간 발걸음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이건.’

그가 시선을 빼앗긴 곳에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고개를 숙인 채 일렬로 서 있었다. 몇몇은 열 살이 갓 넘은 듯 어렸고, 몇몇은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 있었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집단의 특이한 점은 군데군데 장애를 입은 자들이 보였다는 것이었다.

무언가의 서늘한 느낌을 받고 서문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여인들은….”

그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서문윤을 움찔하게 만든 것이었다.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어느새 제 옆에 다가온 여인을 차분히 응시했다.

“황제에게 미래를 빼앗겼다.”

여인은 소문처럼 교태를 부리지 않았다. 사내를 홀리는 눈짓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낭랑하긴 했으나 사람의 혼을 쏙 빼놓기엔 부족했다. 절색의 용모는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여인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심지어 위엄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가 짓밟은 여인들이지.”

그리하여 무언의 압박을 받은 채 입술을 다문 서문윤의 귓가로 말이 내려앉았다. 그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서문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귓가로 느릿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무슨 말인 줄 알겠느냐?”

서문윤은 침묵 끝에 느릿한 한숨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귀비마마와 같은 경우입니까?”

“그래. 내가 거뒀다.”

귀비가 고개를 돌려 여인들을 응시했다. 표정이 없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했다.

“유용했지.”

그리 말하는 여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녀가 말하는 유용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숨이 흐른 때였다.

귀비는 역시 너무나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나보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 했다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보고 그걸로 만족하라는 거냐.”

작게 웃는 여인의 얼굴에는 희끄무레한 살기가 번져 있었다. 여인이 몸을 돌려 궐 안으로 들어섰다. 머뭇거리며 서문윤은 고 귀비의 뒤를 따랐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을 갈무리했다.

침묵 끝에 서문윤은 입술을 열었다.

“보아하니 귀비마마의 마음도 정해져 있는 듯합니다.”

귀비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으나, 서문윤은 침묵에서 무언의 긍정을 읽을 수 있었다.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저들을 모아둔 이유는…….”

“그래.”

귀비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저 애들도 함께 구해다오.”

서문윤의 입술을 다물리게 한 말이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귀비의 등을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여인들의 탈출을 부탁하면서 저 자신의 안위는 말하지 않는다.

설마 그녀는?

“그럼 귀비마마께서는 어찌….”

다급히 입술을 열었으나 그는 또다시 제가 내뱉고자 한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귀비가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있었으므로. 서문윤은 그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조급하게 굴지 말거라.”

어째서일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하려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귀비의 평온한 얼굴에 서문윤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 예.” 답변할 뿐이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귀비가 안내한 곳은 황제가 자리한 곳이었다. 우리에 갇혀진 벌거벗은 황제가 백치가 되어 죽을 손으로 퍼 먹고 있었다. 궁인들은 지고의 존재를 나뭇가지로 찌르며 낄낄대고 있었다.

‘아니, 이건…?’

서문윤은 잠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황제가 사악하다 한들 한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말살한 처사가 두려웠던 것이다.

‘지고의 천자가 저렇게까지 떨어지다니.’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복수심이 강한 여인이 황가를 향한 복수를 포기하고 새 삶을 살아가란 말을 들어줄지 의문이다. 그런 생각에 암담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서문윤은 제 앞을 갑작스럽게 덮친 물체에 순간 놀라 비명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헉!”

“깨지면 곤란한 건 너다. 조심해서 다뤄.”

이게 뭐야?

암기인 줄 알고 반사적으로 물체를 쳐내려다가 정신을 차리곤 저를 향해 날아온 도자기 병을 손에 쥐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손에 쥔 자기 병을 살피던 서문윤이 순간 어떤 생각에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귀, 귀비마마!”

이건 설마?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린 서문윤이 담담한 얼굴을 한 귀비를 바라보았다.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가져라.”

“어, 어….”

“해약이다.”

서문윤은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고 있었다. 잠시간 멍하니 귀비를 바라보다가 손에 쥔 자기 병에 시선을 옮겼다.

‘해약.’

그토록 원하고 갈망했던, 검설린과 그의 목줄을 죄었던 환희향의 해약을 마주하고 있었다. 서문윤이 자그마한 자기병의 무게에 짓눌려 머뭇거릴 때였다.

“미안하구나.”

자그마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서문윤은 그 말에 망설이다가,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제가 아니라 세상에 미안해야 합니다.”

귀비는 담담히 답할 뿐이었다.

“세상도 내게 미안해야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서문윤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만 할지, 또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잠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당신의 복수가 밖의 저 여인들 같은 이를 수만 명이나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불쌍하지만,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어버렸다.

곧은 서문윤의 시선이 마치 질책을 하듯 여인을 찔렀다. 그러나 귀비는 그 시선에 찔리지 않는 듯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곤 귀비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중얼거렸다.

“이런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뻔뻔한 귀비의 말에 항의하려 했던 서문윤은 그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더 악해지는 건 막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를 설득하는 일이다. 서문윤이 침착함을 되찾고 그녀를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복수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택하십시오. 그것이….”

“청융도 원하는 길이겠지.”

그러나 서문윤은 오늘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정말로 내뱉지 못했다.

어쩐지 그녀에게 휩쓸리는 기분이다. 그런 생각으로 귀비를 바라보던 서문윤은, 그리고 평온한 호수와 같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문윤의 말을 매정히 끊고 여인은 우리 속의 벌거벗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결정을 했구나.’

고 귀비는 서문윤과 대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결정을 통보하러 온 것이지.

고 귀비는 우리를 바라보며 잠시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의 빛이 물결치고 있었다. 서문윤을 흔들리게 만든 것이었다. 고 귀비가 문득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러 눈을 뜬 고 귀비는 문득 제 머리에 꽂은 비녀를 빼어 들었다. 머리카락이 하늘에 물결치고, 치맛자락이 움직였다.

이어진 그의 행동에 서문윤은 그 순간 생각이 정지되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으악!”

외마디 비명이 흘렀다.

피비린내가 물씬 흐른 때였다.

서문윤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멍하니 늙은 노인의 몸을 난도질하는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귀비는 황제의 목에 비녀를 꼽고 있었다.

귀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한 순간 여인이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가자.”

지고의 황제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 서문윤은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청년을 바라보며 귀비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도망치게 해준다면서.”

“…….”

“새 삶을 살아야겠다.”

귀비의 말을 들으며, 결국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고민하던 서문윤은 우는 듯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결국에 그녀의 복수를 마무리했다.

* * *

귀비가 황제의 피로 제 크나큰 복수심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운남으로,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 삶을 살아가라는 서문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대신하여 내세운 것은 그녀가 거두어 장기말로 부렸던 황제의 옛 여인들의 안위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요구조건이었다.

“그건 내가 처리하지.”

서문윤에게 귀비의 의사를 전해 들은 강서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귀비가 그를 부르고 난 직후였다. 강서진과 귀비는 한편임에도 사이가 그다지 돈독하지 않아, 서문윤이 말을 전달한 것이었다.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망설일 때 강서진은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곳에 남겠다.”

“예?!”

서문윤을 경악케 한 말이었다.

담담한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그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강서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서문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죽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어진 말에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귀비와 나 둘 다 빠져나갈 수는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할 사람이 필요하다.”

강서진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을 잇고 있었다.

“네 허술한 계획은 약점이 많았고, 나는 보안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지.”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 무슨 계획이 그렇게 허술하느냐.”

비난조의 말에 서문윤이 변명을 하듯이 웅얼거렸다.

“저는 무관이었는데요?”

아니, 이렇게까지 한 것도 정말 발전한 거라고.

“설린이도 무관이었지.”

“…….”

항의가 완전히 묵살당하고 서문윤이 우울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강서진은 싱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다.”

그 말에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었다.

‘아, 그걸 잊었….’

서문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둘은 조정의 수반과 황궁을 손아귀에 넣은 실세였다. 말 그대로 장안 정부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란 소리였다. 바로 내일 검설린이 말을 하고 떠났던 사흘의 유예기간이 지난다.

그 이후에는 공격이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항복이든 공성이든 상황을 결정할 머리가.

그 순간 서문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제가 어떻게든….”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청융의 유언은 따르지.”

강서진은 대수롭지 않는 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벌인 일도 수습할 거다, 서문윤. 네가 할 일은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강서진은 그 대목에 이르러 고개를 돌렸다. 귀비궁을 잠시간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 여인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도와줘. 충분히.”

서문윤은 그 순간 잠시 갈등했다.

이곳에 책임자로 남는다면 강서진이 죽을 것은 당연지사인 일이었다. 황조가 바뀌지 않으니 이청은은 부황의 잘못을 제대로 꼬집지 못했다. 그러나 반정이 일어난 상황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죄를 짊어져야 했다.

서문윤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꼭 그러셔야만 하겠습니까?”

서문윤은 알고 있었다.

강서진이 그 죄를 짊어질 것을.

강서진이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형벌을 피하기 힘든 장안 조정의 수반. 황제의 섭정. 귀비와 결탁한 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곤 상황을 수습하겠다 말을 하고 있었다. 복잡한 빛이 스치는 서문윤의 눈과 마주하며 강서진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내가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느냐?”

서문윤이 침묵 끝에 답변했다.

“말씀해주십시오.”

그는 사악한 자였으나 한때는 천하를, 사람들을 걱정하여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거인이었다. 결국에는 복수심을 포기하고 죄를 짊어지기로 택한 자였고. 그리하여 서문윤은 아마 마지막이 될 그와의 대담에서 공손함을 지켰던 것이다.

서문윤이 자세를 되잡고 강서진의 앞에 바로 섰다.

강서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설린이.”

그것은 서문윤의 숨을 멈추게 한 말이었다.

얼굴을 굳힌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강서진이 이윽고 묘한 얼굴빛을 띠며 중얼거렸다.

“그 애, 정신 차리면 때리거라.”

서문윤을 발끈하게 한 말이었다.

“제가 그와 함께하리라 여기십니까?”

“그래.”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가 결국 온연한 빛을 되찾았다. 한숨이 흘렀다.

“잘 모르겠습니다.”

강서진은 그 말에 빙긋 웃으며 답변을 했다.

“너는 그렇게 할걸?”

싱글 웃는 강서진은 예전의 그 음흉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이 익살스러워 보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10대 소년의 얼굴을 한 그의 앞에서 서문윤은 울상을 지으며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올 뿐이었다.

“부탁한다.”

떠나는 그의 등 뒤로 강서진이 내뱉은 말이었다.

서문윤은 못 들은 척 검설린이 새근새근 잠을 자는 그의 처소로 황급히 돌아왔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검설린은 무사히, 아니 너무나 얄밉게도 평안히 잠을 잘 뿐이었다.

‘얼마나 센 약을 준 거야?’

호랑이나 곰도 마취를 시킬 수 있다는 약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서문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의형.”

검설린은 답변이 없었으나 서문윤은 아랑곳 않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잘하고 있는 것 맞죠?”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귀비의 도주를 꾀하는 때였다.

* * *

“의형.”

약속된 시간이 다가올 때였다. 서문윤은 신음을 흘리며 결국 말을 내뱉었다.

“두렵습니다.”

손을 떨고 있었다.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으려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문윤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수많은 사건들을 거쳐 정신을 단련했다고 믿었는데, 사실 저는 태연한 게 아니었나 보았다.

“두렵군요.”

불안은 누적되고 있었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너무 두려워요.”

마굴과 다를 바 없는 황성에서 천하의 안녕을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서문윤은 울먹거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건가.

‘나는 그냥 무관이었는데.’

마치 죽은 듯 잠을 자는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창문에서 똑똑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윤이 황급히 검설린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시원한 이마에 입을 맞추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디 무사히 있어주세요.’

강서진과 귀비가 보낸 금군이 검설린이 누운 별궁을 삼엄하게 지키기로 했다.

그러나 서문윤은 마음에 드는 한 줄기 불안은 어찌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아니면 검설린이 혹시….

‘아, 아니야.’

휘휘 고개를 내젓고 서문윤은 시선을 창문 밖으로 두었다. 등불을 든 궁인이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서문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려 답을 했다.

궁인은 뒷길을 통해 동궁으로 향했다. 이제는 비어 있는 태자의 처소였다. 이청은과 이청융이 쓰던 궁. 그 한켠에 스러져 가는 전각으로 궁인은 서문윤을 인도했다. 사령전으로 향하며 서문윤은 간절히 기원했다.

‘태자 전하.’

그가 부르는 태자는 죽은 동궁이었다. 인자하기로 유명했던 사내.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탱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사내를 떠올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만약 이곳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부디 도와주세요.’

간절한 소망을 품으며 그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더 이상 세상에 피가 흐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지금껏 세상에는 많은 피가 흘렀다. 그러나 흐른 피만큼 희망도 싹이 텄다. 이청은을 비롯한 이들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죄 지은 자의 아들이 핏줄로 물려받은 혈족의 죄를 책임진다 했다.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었다.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은 깊어져 나갔다.

‘장군이 되고 싶었어. 무패의 명장이. 아니면 사서에 길이 남는 충신이 되고 싶었지.’

무가에서 태어나 입신양명을 꿈꾸었다. 장검을 허리에 차고 천하를 호령하는 장수가 되고 싶었다. 불후의 명성을 남기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그도 아니면 천하제일 무인… 아, 이건 너무 유치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서문윤이 고개를 숙였다.

‘명성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러한 대단한 명성에는 책임이 따른다. 서문윤은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간접적으로 체험하여 알고 있었다. 검설린이 본인의 이름의 무게를 짊어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깨달았다. 나는 저렇게 못 한다.

‘명성은 내게는 버거운 거야. 그냥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든 걸.’

하루하루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세상이다.

그렇게 서문윤은 입신양명을 포기했고 목전에 들이닥친 일을 하나하나씩 해결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웃기는 일이다. 서문윤이 잠시 웃음을 흘리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럼 책임을 져야지.’

그 때 서문윤은 사령전의 입구에 들어섰다.

궁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문윤은 아직 오지 않은 귀비를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던 와중에 문득 궁인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죄가 많고.”

머뭇거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불쌍하신 분이십니다.”

그녀는 귀비의 사람이다. 잠시간 불안에 찬 여인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이내 조용히 답변을 했다.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궁인의 입술을 다물리게 한 말이었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처럼 죄가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어라 더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바스락 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이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수수한 옷차림을 한 귀비가 사령전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살짝 열린 멱리의 하늘하늘한 천 사이로 담담한 눈과 마주하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마마.”

멱리가 흔들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담담히 말을 내뱉는 그녀와 잠시간 대치하다가 서문윤은 입술을 열었다.

“모시겠습니다.”

귀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사령전 안에 들어섰다. 잘 관리된 복도를 걸으며 서문윤은 물밀려오듯 쏟아지는 불안과 중압감을 애써 잊으려 했다. 가빠오는 호흡을 간신히 진정하고 그가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의형, 괜찮겠지?’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스며드는 불안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며 서문윤이 어느 방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귀비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귀비가 말없이 방 안에 들어섰다. 스스로가 비참하게 주살했던 연인의 방에. 사랑하고도 원망했던 자의 방에 들어서곤 고개를 들었다.

비밀통로가 있는 방은 편지로 가득 찬 방이었다.

한때 검설린이 머물던 전각. 또 한때는 장안사준이 모여 나라의 미래를 거론하던 전각은 이청융의 마음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의 추억이 묻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청융은 귀비를 향한 그리움을 털어냈다.

귀비가 말없이 편지를 쥐었다.

부스럭 소리가 뒤에서 들리고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처음 와보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귀비는 침묵 끝에 답변했다.

“그래.”

서문윤이 비밀통로의 입구를 열었다. 덤덤한 말이 이어졌다.

“오래 있지는 못했지.”

침묵 끝에 말이 이어졌다.

“가슴이 아파서.”

서문윤은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말에 서린 쓸쓸함이 고통스럽다. 그는 묵묵히 귀비를 안내할 뿐이었다. 횃불을 든 서문윤이 비밀통로 안에 들어섰다. 귀비가 뒤이어 그를 따랐다.

걸음을 걷던 와중 서문윤이 침착하게 말했다.

“강 대인을 믿으십니까?”

귀비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그녀들.” 짤막히 말을 내뱉었다. 그제야 서문윤이 강서진에게 맡긴 그녀의 수하들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 귀비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런 걸로 거짓을 말할 이는 아니다.”

중얼거려 말을 내뱉은 귀비는 그러나 이내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또 모르겠군. 사람은 변하는 법이니.”

그러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횃불을 들었으나 비밀통로가 몹시 어두워 서문윤은 긴장을 돋우어야만 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기를 신중히 해야 했다. 혹시나 변수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혹시 이 모든 일을 망치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며 서문윤은 내심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삼키고 있었다.

그 때 들려온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잘 지내고 계시더냐?”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

서문윤은 당황했으나 짧은 침묵 끝에 조용히 답변을 했다.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문득 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꼴이 이상한데?’

그녀의 아버지, 장이족의 족장이 서문윤을 중독시켰다. 의형이 없었다면 당장에 자살을 계획했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을 겪게 되었다. 향에 중독된 몸으로 약점이 잡혀 검설린과 서문윤은 모든 풍파 속에 휩쓸려 다녔다.

이 모든 상황의 배경에 귀비와 그녀의 아비가 있었다.

그런데 저가 장이족 족장의 안부를 묻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그리 속으로 생각할 무렵에 귀비가 맑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구나.”

그 웃음에 서문윤은 마음속에 든 모든 의문들을 지워버리고야 말았다. 진실로 기뻐하는 듯한, 낭랑한 웃음에 미움도 증오도 모두 버리고야 말았다.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 끝에 귀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지키고자 하셨지. 멸족을 감수하며 싸우고자 하셨어.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말렸다.”

서문윤은 내뱉을 말을 고르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나 스스로 희생을 하고자 가마에 올랐어. 팔자에도 없는 공주가 되어 황제의 공물로 바쳐졌다. 가마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

“그런데 막상 가마에 오르니 마음이 바뀌었어.”

귀비가 조용히 읊조렸다.

“세상이 미웠다.”

서문윤은 그 부분에 이르러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흘렀다.

“이해합니다.”

그러곤 조용히 덧붙였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저는 당신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이토록 미워한 건 처음이라 생각을 할 만큼 당신이 몹시 싫습니다.”

귀비는 그 말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덤덤한 목소리는 차라리 남 일을 말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에 있지?”

앞서 걷는 사내를 흘끗 바라보던 귀비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함정인가?”

서문윤은 그 말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답변은 없었다. 침묵 끝에 서문윤은 끊겼던 말을 이을 뿐이었다.

“허나 당신의 미움은 이해합니다.”

멱리 안 귀비의 얼굴에 이채가 서린 순간이었다.

“이해?”

횃불의 불빛이 서문윤의 얼굴에 스며들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의 선이 부드럽게 보였다. 이목구비가 흔들리는 불빛에 왜곡되어 곡선으로 보였다. 서문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모든 우리의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한 사람 때문일까요?”

귀비는 그 말에 뜸을 들여 말했다.

“아니지.”

덤덤한 목소리를 들으며 서문윤이 걸음을 옮겼다.

“네 의형과 강서진과 운표선이 내 말을 들어주었다면 일이 조금은 달라졌겠지.”

“…….”

“청융이 조금만 더 빨리 마음을 먹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겠지.”

서문윤이 그 때 입술을 열었다.

“변명이신 걸 알지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문윤은 등 뒤의 귀비의 얼굴을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침묵 끝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그래. 사실 내 잘못이 제일 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강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태자를 견제하는 황제의 마음을 읽고 동궁사변을 일으키자 제안을 했다. 그로 인해 끔찍한 일이 벌어졌지. 환희향을 넣은 차를 내 스스로 마시고 그걸 청융에게 뒤집어씌웠어. 그리고 그는 죽으면서 강서진에게 나를 부탁했지. 그렇게 천하 만민을 걱정하던 사람이 대의를 걱정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만 말했어.”

이어진 건 습기에 젖은 목소리였다.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악인이란 없고 선인이란 없어. 인간이란 다 혼탁하지. 그런 단순한 개념으로 사람을 나눌 수는 없는 거다.”

“…….”

“사람은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들어선다.”

서문윤이 귀를 기울였다.

“그때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와 아닌 자가 나뉠 뿐이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그 끝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저는 선해지길 바랐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

“다만 최선을 다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현명하구나.”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서문윤은 다시금 경계를 세우며 걷는 데 집중했고, 그런 서문윤을 그녀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묵묵히 걸음을 걷던 서문윤이 문득 보폭을 좁혔다. 횃불의 어스름한 불길에 통로의 끝이 보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귀비는 잠시간 우뚝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시가 급한, 촉박한 상황인데도 서문윤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너울 치는 멱리 사이로 겁에 질린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통로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수하고 싶어.”

서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귀비는 흐느끼며 말했다.

“그자의 대를 끊어놓고 싶어.”

고개를 돌려 서문윤이 귀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녀의 멱리에 손을 뻗었다.

멱리의 천이 너울거렸다. 놀란 귀비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서문윤이 손을 들어 올렸다. 짜악! 매서운 소리가 울렸다.

귀비의 입술 밖으로 비명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그 순간 분노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 아집을 부리세요!”

귀비의 뺨을 친 서문윤이 굳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은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한 사내의 동생입니다.”

“감히 청융을 네 입에 담지 마라!!”

서문윤이 악착같이 소리를 지르는 귀비의 팔뚝을 부여잡아 당겼다. 비틀거리는 여인의 어깨를 부여잡아 흔들곤 서문윤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이글거리는 눈에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전하의 이름에 구정물을 남길 겁니까!”

귀비의 몸이 우뚝 선 순간이었다. 얼이 나간 여인을 향해 서문윤이 이를 악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당신은….”

숨을 헐떡거리다가, 말을 쏟아냈다.

“태자의 모든 것을 망쳤어요.”

귀비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끝이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동궁태자의 업적과 명성과 꿈이 모두 당신의 손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암울한 상황 속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저 밖에 있습니다.”

“…….”

“사서에 동궁태자가 남기실 내용은 동궁사변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선한 자는 없습니다.”

“…….”

“최선을 다하는 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귀비의 눈에 습기가 물들어가고 있었다. 서문윤이 조용히 속삭였다.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마십시오.”

“……”

“더 이상 후회할 짓을 만들지 마세요.”

귀비가 숨을 헐떡거렸다. 서문윤이 읊조렸다.

“당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풀지 마세요.”

귀비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어깨를 놓았다. 조용한 말이 내려앉았다.

“사실은 스스로를 증오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인은 흐느꼈다.

“나가기가 두렵다.”

그러나 서문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비는 통로의 끝에서 겁에 질린 채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서문윤은 끈질기게 기다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통로 안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가자.”

귀비가 땅에 떨어진 멱리를 다시 쓰곤 읊조린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통로의 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져 내린 순간이었다. 검을 움켜쥔 상태로 서문윤이 귀비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