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망향(望鄕)(9)
‘떠날 자유를 줬다고?’
그리 말을 하며 제가 떠나길 방관하던 검설린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정사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식은 듯이 덤덤했는데. 지금 이 순간 서문윤은 깨달을 수 있었다. 검설린을 향한 마음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도리어 검설린의 그런 무심하고 소극적인 태도에 서문윤은 분노를 느꼈다.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인가?’
10년 가까이 정처 없이 지내던 와중에 유일하게 마음을 연 상대라며. 희망을 놓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와중에 삶을 꿈꾸게 했다며?
‘개소리!’
그러나 지금 검설린의 태도를 보고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제가 천막을 나가기까지 방조하던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돌고 돌아 결국에는 원점인 것만 같았고. 가장 화나는 건 이리도 너무 쉽게 위태로워진 관계였다. 서문윤이 포기한 순간 둘의 관계는 마치 사탕수수로 만든 다리처럼 무너져 내렸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얻고자 했는데….’
실망을 넘어서, 의심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검설린은 저를…… 연모하고 있을까?
서문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었다.
아니, 애초에 검설린은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 연모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서문윤에게 이끌려갈 뿐이었고. 몸을 섞는 것은 중독된 서문윤의 상태로 시작된 일이었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심지어 검설린은 서문윤이 연정을 품고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죽음을 이유로 그를 거부했다.
서문윤이 진실을 알고서도, 검설린을 향한 어려움과 두려움을 걷어내고 마음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때도 검설린은 한결같았다. 그는 마치 거대한 벽과 같았다. 말을 하지 않았고. 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한성에서 서문윤은 그에게 저와 함께 살아가겠노라고, 세상을 버린 마음을 바꾸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네가 소중해.’
그리 애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검설린은 막상 가장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래, 검설린은 지금껏 그를 향해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를 짐작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부터 서문윤은 그를 마음에 담아두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검설린이 스스로를 바꾸겠다는 말을 하고, 또 살아가겠다는 말을 하고, 저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마음을 검설린은 내보인 적이 없었다.
익애하는 너를 위해 살아가겠노라.
그 말을 사실 원했으나, 막상 서문윤은 검설린의 마음을 확인하기 두려워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나날의 결과였다. 서문윤이 느릿한 숨을 내뱉었다. 차가운 공기에 김이 서리고, 그 사이를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이 꿰뚫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나날들에는 한계가 있었지.
그리하여 현실의 벽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는 안 된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고 서문윤은 희미한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막연한 마음을 품은 채, 그리고 서문윤은 이청은의 막사에 이르렀다.
“응? 정보를 빼먹으려 왔어?”
천막을 여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서문윤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 말을 내뱉었다.
“잠시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당당한 말에 이청은은 한참을 얼이 나가 말을 내뱉지 못했다.
“왜…?”
침묵 끝에 흐른 먹먹한 말이었다. 근래에 이르러 최고로 당황하는 중이었다. 검설린 쪽에서 파발이 왔다길래 신경을 세우고 있었더니, 뜻밖에도 도착한 이가 눈에 익숙하다.
서문윤은 한때 이청은과 손을 잡았지만, 지금은 검설린의 막사에 머무른 채 이청은과 교류를 끊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향한 것과 다름없었다. 협곡에서 검남 절도사를 몰아내던 날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노리지 않으며 암묵적으로 검설린과 이청은은 휴전을 맺었다. 허나 그들이 완전히 한 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태자당은 정치 파벌이란 태생 때문에 배신에 민감했고, 그들은 서문윤을 성토하는 목소리를 올리곤 했다. 허니 제 앞에 당당히 선 서문윤을 마주하고선, 이청은은 그가 내뱉을 말의 목적을 궁금해했던 것이다.
“신세를 무기한적으로 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망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됩니까?”
아니, 너 저쪽 진영 사람이잖아?
“언제고 찾아오시라 하셔서….”
아무리 이청은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인재를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한들 이런 상황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농담인가, 서문윤의 얼굴을 살펴보았으나 그의 얼굴은 그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진지하게 얘기한 거라면 더 미친 이야기인데.
이청은이 침묵하던 그 순간에, 문득 그들의 옆에 서 있던 문천상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이 쏟아졌다.
“여기가 네가 오고 싶으면 오고 물러나고 싶으면 물러나는 장소로 보이느냐!”
서문윤이 이청은과 안면이 있어도 일단은 다른 진영에서 넘어온 파발이라 알렸기에, 문천상은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옛 상관이기도 한 그는 묵묵히 말을 듣던 와중에 결국 참지 못해 흉흉히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를 내지르고야 만 것이다.
“대주님.”
서문윤이 그를 돌아보며 당황한 표정을 했다. 문천상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그를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튀어나온 매서운 고함.
“너 이 새끼, 완전 사람이 맛이 가버렸어!”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갔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너 지금 이 나라의 태자 앞에 있어! 한 나라의 기둥 앞에 있다. 정명공이 득세를 한다고 네가 아예 옛 주군을 무시하겠다는 거냐?”
문천상의 말은 심히 옳았다.
“파발이라 말을 하고 야밤에 태자의 처소에 들이닥치더니, 이젠 네 전향을 변명도 하지 않고 파렴치하게 옛날의 약속을 말을 해? 양심도 없는 것아!”
“으음.”
어색한 얼굴로 뺨을 긁는 이청은이 흘끗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것을 정명공의 뜻이라 봐도 되느냐?”
그는 완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 위로 죄책감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이청은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그는 서문윤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젊은 동량을 눈여겨본 이유는, 일신의 뛰어난 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강직하고 올바른 성품을 높게 산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야밤에 무례를 무릅쓰고 파발을 가장하여 천막에 쳐들어와 대담한 일을 벌인다라.
“그만.”
그리고 그 순간 이청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리 와라.”
천막 안에 정적이 흘렀다. 어지간히 열이 받았던지, 무어라 더 말을 내뱉으려던 문천상이 입술을 꾹 다물고 뒤틀린 눈으로 서문윤을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느릿한 한숨을 내뱉고 서문윤이 이청은을 향해 다가갔다. 피로에 젖은 이의 팔을 손으로 가볍게 잡으며 이청은은 그를 향해 친근함이 서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술 냄새를 뭐 이리 풍겨?”
언제고 배신을 겪었냐는 듯한 다정다감한 태도에, 순간 서문윤은 허탈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빙긋 웃는 이청은을 향해 서문윤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좀 독합니까?”
“엉, 술통에 빠지기라도 한 거냐?”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청은은 서문윤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에 서문윤은 견디지 못했다. 얼굴에 걸린 가식 같은 미소가 사라진다. 가라앉은 눈으로 옛 주군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태자전하.”
“조금 너무하긴 했다, 네가.”
손에 쥔 서문윤의 팔을 놓곤 이청은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지 앞뒤 사정을 설명해줘야 내가 너를 이해하지.”
“…….”
“너는 역시 검설린을 택한 거냐?”
그날 사건이 벌어지고 서문윤은 지쳐 쓰러져 거의 며칠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꿈속을 헤맸다. 일어나니 이청은은 토벌군 본영과 분리하여 따로 군대를 이끌고, 검설린과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장안성으로 향했다. 이 폭풍과도 같은 나날 속에서 서문윤이 이청은과 연락할 시간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처음 마주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 의사를 궁금해하는 이청은에게, 서문윤은 힘없는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숨을 내뱉고 그가 중얼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지금 뭐 하자는…!”
또다시 간을 보겠다는 말인가? 박쥐 같은 짓거리에 화가 난 문천상이 울컥하여 언성을 높이려던 때였다.
“문 대주.”
침착한 목소리가 말을 끊는다. 문천상이 이를 악물며 이청은을 바라보았다.
“전하.”
“배반할 놈이었으면 이미 나는 목이 날아갔어.”
문천상의 얼굴에 불만의 기색이 일렁거렸으나, 이청은은 그저 담담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내가 지금은 엎어진 계획을 위해 은군의 정보망을 알려줬지. 그게 내 밑천의 다는 아니지만, 내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만한 것이었어. 허나 검설린은 그를 모르고 있다. 그건 너도 알잖아.”
“그리 믿으셨는데, 배반을 당한 게 아닙니까!”
항의하는 문천상의 말을 이청은은 단호한 목소리로 받았다.
“배반이 아니지. 엄연히 따지자면 서문윤은 그날 낙마를 하고 지금까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상황에 이끌려 왔으니까.”
“…….”
“나가봐라.”
이청은이 고요한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할 말이 있다.”
* * *
“나는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청은이 차를 내리고 있었다. 전시라 차의 질은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윽한 향은 불안정한 마음을 다스리기에 충분했다. 복잡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태자를 방문했으나, 제가 한 짓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는 서문윤도 체감하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는 서문윤의 얼굴을 눈치챈 이청은이 어색한 기류를 풀려는 듯,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 마음이 싱숭생숭해도 난 차를 마실 거야.”
그러나 서문윤은 슬프게도 그 말을 받아칠 정신이 없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놈이 왜 술을 그리 마셨어?”
이청은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서문윤이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제가 마신 게 아닙니다.”
“뭐?”
차를 내리던 이청은이 멈칫하고 서문윤을 바라보고, 그 순간 두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어?”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고 제 옷깃을 손가락으로 슬쩍 헤쳐 목을 드러낸 것이다. 붉은 울혈이 드러난 목을 바라보며 이청은이 얼이 나가 빨개진 얼굴로 말을 되뇌었다.
“어? 어?”
“전하와 문 대주님이 일전에 제게 누누이 말하셨지요. 의형이 선하고 고결한 사람이란 제 말이 기가 막히다고.”
줄줄줄, 흘러넘치는 다기의 찻물을 서문윤이 슬쩍 손짓으로 지적했다. 황급히 차를 내리는 손을 멈춘 이청은이 얼떨결에 말을 내뱉었다.
“나는, 나는 기가 막히다고 말한 적까지 없어.”
당황하여 말을 내뱉은 이청은은 바로 제가 꽤나 머저리 같은 소리를 했다 생각했다. 허둥지둥하는 이청은을 서문윤은 차분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청은이 그 말의 어감을 파악하고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칼로 물 베기야.”
“그런 게 아닙니다!”
진지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말에 서문윤이 순간 울컥하여 소리를 쳤다. 미간을 좁힌 서문윤이 이청은을 노려보고, 이청은이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거리던 서문윤이 결국 깊은 한숨을 내뱉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청차(淸茶)를 서문윤에게 내밀며 이청은이 담담히 말을 받았다.
“뭘 말이냐?”
“동궁사변에 관련된 일 말입니다.”
그 순간 이청은의 몸이 우뚝 굳었다. 서문윤의 깊게 가라앉은 눈이 이청은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것은 태자의 역린과도 같은 말이었다. 서문윤은 이청은이 동궁사변을 입에 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서문윤은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 끝에 말이 흘렀다.
“그때 나는 갓 스물이 된 철없는 것이었고, 정치판에 몸담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세력도 없었고…. 그저 철이 없었어.”
이청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허나 형님은 뿌리 깊은 나무였다.”
목소리는 끝이 갈라져 있었다.
서문윤은 그 말에서 이청은이 그동안 묵혀왔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청은은 거의 10년이 넘는 세월간 동궁사변의 가장 강력한 배후로 의심을 받았다. 동궁사변으로 태자가 된 그에게 가장 큰 수혜자라 말하며, 사람들은 그를 지나치게 운이 좋거나 혹은 음흉하다 말했다. 소문은 거세어 한때는 서문윤도 의혹을 지우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간 이청은이 받았을 비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리라.
“나는 형을 경애했어.”
그러나 엄연히 따지면 이청은 또한 동궁사변의 피해자였다.
“허나 형님을 구명할 수 없었다. 비겁하게 입을 닫고 회피할 수밖에 없었지.”
“……”
“내게 쏟아진 모든 날카로운 말들이 그곳에서부터 시작하기에, 나는 억울해하지 않았다.”
이청은은 웃음기가 완전히 빠진 담백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 순간 이청은의 얼굴은 서문윤이 낙마를 할 때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무섭게 굳어 있었다. 그때 이후로 처음 목격한 모습. 그에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고 귀비가 개입된 일을 아십니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고 그래, 짤막한 답변이 흘렀다. 이청은은 두 눈에 냉기를 흘리며 고소하고 있었다. 서문윤이 묵묵히 말을 기다렸다. 그답지 않게 빠르고 노기 어린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여자는 세상에 원한을 가질 만했지. 허나 과했어. 아무리 그녀의 억울함을 형님과 팔기린이 들어주지 않았다 한들, 그날에 흐른 피가 일만이 족히 된다!”
순간 이청은의 얼굴에 푸른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억울함으로 봐줄 수 있는 범위는 한참 지났지. 그 여자는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형님의 일을 제외해도, 내 원한을 제외해도 귀비가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녀를 용서하자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청은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의 일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서문윤은 무어라 더 분노 어린 말을 쏟아내려는 이청은에 앞서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저는….”
눈썹을 꺾는 이청은을 향해 서문윤이 숨을 들이켜고, 다시금 차분히 목소리를 가다듬곤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흘러나온 말에 이청은은 순간 몸을 멈칫하고 묘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인과관계를 제게 숨기고 제 곁에 모른 척 자리하려 한 그에게 화가 날 뿐입니다.”
“…….”
“동시에 제가 얻은 ‘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이청은의 얼굴은 흥분이 완전히 가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문윤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향에 중독되고 강서진이 백년화의 씨를 말렸다 들었습니다. 그것이 환희향을 해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라고 하셨지요.”
부드러운 다향을 맡으며 서문윤은 동요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제가 겪은 불행을 입에 담고도, 서문윤의 얼굴에는 분노나 다급함은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청은은 침묵을 깨고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건 사실이다. 그건 운남에서 찾아보기 쉬운 약재였지. 환희향과 그 해약에 모두 들어가는 주재료였고.”
힘들여 차를 내리고서도 이청은은 목을 축이지도 않은 채 갈라진 목소리로 이어나가고 있었다.
“고 귀비가 형님을 모해하기 위해 썼던 술수는 지나치게 더러웠다. 그리고 그건 모함이라 말하기도 모호했어. 사실……. 그건 고 귀비에게 지나치게 치명적인 방법이었다. 황제의 여인이 정조의 위기를 겪는 일이니 말이다. 귀비는 그때도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어. 그녀가 태자를 찍어 내리려면 그것 말고도 술수는 많았다.”
그 대목에 이르러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야 말았다.
“귀비는 그분을….”
그의 말을 끊은 것은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래, 마음에 품었다.”
답변을 들은 서문윤은 순간 몸을 굳히며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청은의 얼굴에는 순간 냉소가 흐르고 있었다. 서문윤의 숨결이 떨려온다. 검설린이 은근히 흘렸던 과거의 비사에 서문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게 모해가 아닐지도 모르지. 그녀가 황형을 연모하는 마음에 벌인 일일 수도 있어.”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렸던 동궁사변이 치정으로 일어난 일이라 말하고 있었다!
“허나 어찌 되었건 그 사건은 한 나라의 국본을 해치고 조정의 판세를 바꿨다. 부황께서는 귀비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황형이 환희향을 쓴 줄로만 알지.”
“…….”
“백년화는 폐기될 수밖에 없었어. 그게 민간에서 종종 쓰이는 약재라 암시장에서 유통되기도 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강서진은 충분한 양의 백년화를 손에 얻고, 나머지 분량을 폐기시켰다.”
그리고 그 말에 이르러 이청은의 눈에는 섬광이 스쳤다.
“검설린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고.”
“알고, 알고 있습니다.”
그 희망을 완전히 끊으려는 듯한 단호한 말에 서문윤은 더듬거리며 답할 뿐이었다. 멈칫한 이청은은 고개를 들어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리고 기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제게 말을 묻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서문윤의 얼굴에 절망의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서문윤은 오히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고, 그에게서 이청은은 무언가 특이점을 읽을 수 있었다.
묘한 기색이 어린 얼굴과 묘한 어감이 있는 말.
도대체 그는 무슨 마음으로 제게 이리 말을 끌고 있는 건가?
이청은이 서문윤의 의도를 의심하며 그를 차분히 바라볼 때였다.
“허면 귀비에게는 약재가 있지 않겠습니까?”
느릿하게 흘러나온 말에 순간 이청은은 풀렸던 얼굴을 다시금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아까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무섭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문윤을 노려보았다.
잠시간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이청은이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그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싸운 게 아니구나?”
서문윤은 그 말에 담담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 일로 화를 내는 게 아닙니다.”
“…….”
“근본적인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 겁니다. 그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사람이었던 것. 그리고 그를 제게 숨겼던 일까지….”
이청은은 그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방금 전까지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던 이의 얼굴에 동요가 일렁거렸다. 손바닥으로 찻잔을 덮으며 묵묵히 서문윤의 고요한 얼굴을 노려보던 이청은은, 언뜻 보기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침묵 끝에 한숨과 함께 말이 흘렀다.
“그는 악랄한 사람이 아니었다.”
서문윤은 묵묵히 말을 들을 뿐이었다.
“조정에 몸을 담은 사람은 먼지를 묻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도 그랬을 뿐이었다.”
“…….”
“허나 너는……, 정말 그를 떠나려 드는 거냐?”
그 말에 서문윤은 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성품이 사악한 이가 아니다.”
깊은 침묵을 깬 말이었다. 고개를 든 서문윤은 이청은의 복잡한 얼굴을 마주하고, 또 이어진 말에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시적인 동맹관계를 맺었다 한들 그와 편한 관계는 아닐 터인데 이청은은 뜻밖에도 검설린을 옹호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 정도의 수법이 특출하게 악랄한 것도 아니고. 아니, 팔기린, 정명공은 고지식한 축에 끼는 편이지. 내가 그를 대단하게 여기는 이유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뭔 줄 알아?”
그러고 보니 이청은은 의형에게 악의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생각을 해보면 검설린의 기가 막힌 언행을 항상 용인해주었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서문윤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잇는 태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리 수세에 몰린 상황이라 한들 선인을 건들지 않았지.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았어. 악인이 아니고서는 죽이지 않았지.”
이 사람은 실로 대인, 군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백성에게 도량을 베푼 이청은의 품성을 잘 알고 있지만 황족으로 태어나 제 이름 석 자를 무도하게 들먹거리며 제 형을 배신했다 비난하는 사내마저 너그럽게 용서하다니?
실로 서문윤이 감탄하고 또 감동할 일이었다.
만약 오늘날의 일이 아니었다면 저는 분명 군주의 자질을 내보이는 태자에게 항복하여 충성을 또다시 맹세했으리라. 일전에 태자를 지키기 위해 낙마를 했던 것처럼 그를 위해 또다시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선인은 아니지만 악인도 아닌 자는 충분히 건드렸겠지요. 죄를 저지른 자에게 그 죄가 아닌 다른 죄를 뒤집어씌웠겠지요. 악인이 아닌 자를 굳이 죽이지 않고 장기말로 이용했겠지요.”
“…….”
만약 제가 지난 수년의 세월을 겪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만 생각했겠지….
그러나 서문윤은 그간에 보고 배운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할 말을 잃고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이청은을 향해 서문윤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외람되지만 묻겠습니다. 제게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의형과 저를 분리하기 싫어하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는 의형이 진 책임이 많아 통제를 할 수 있었다지만 지금 의형은 한 번 황실에 버림을 당하고 인생의 쓴맛을 지독하게 본 위험인물입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으니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말이 진행될수록 이청은의 얼굴은 푸른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새하얀 빛도 아닌 시체의 시퍼런 빛을 띠는 얼굴에 서문윤이 기이한 만족감을 느끼며 말을 맺었다.
“의형이 장안을 정복하고 병권을 손에 놓을 수도 있지만, 놓지 않을 경우도 생각을 하셔야겠지요. 제가 없으면 의형을 다루기에 버거우실 것 같습니까?”
“……너 누구냐!”
그러고였다. 이청은이 돌연 정색을 하고 제 소매를 걷고 팔을 서문윤에게 겨눈 것은.
“왜 이러십니까?”
청광이 눈앞을 스친 순간 서문윤이 조금은 당황하여 이청은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까 전 그를 자비로운 얼굴로 달랠 때와 사뭇 다른 냉정한 얼굴이 그의 앞이 있었다. 새벽에 차를 마시던 와중에 갑자기 목젖에 암기가 대어지게 되었다. 그가 일어서서 소매를 걷고 팔에 설치된 바늘 암기를 들이댈 때까지 서문윤은 이청은을 충분히 막을 수는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득하려 들 뿐이었다.
“제가 서문윤이지 누구입니까? 그래서 이 야밤에 저와 마주앉아 차를 마셨던 것 아닙니까?”
이청은이 답변했다.
“내가 아는 서문윤은 이런 냉소적이고 꿉꿉하고 음험한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바른 대로 말하라.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꾸몄지? 강서진? 황재천? 설마 또 정명공이냐!”
서문윤을 울컥하게 한 답변이었다.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앉으십시오. 그리고 또라니요?”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열이 올라 말을 하려던 서문윤은 뒤늦게 말의 이상한 어감을 깨닫고 두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또? 또라니?
진지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서문윤의 모습에서 그가 서문윤이란 확신을 얻은 듯 이청은이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다가 팔에 있는 암기를 거두었다. 서문윤은 뒤늦게 긴장을 풀고 막혔던 숨을 팍 토해내고야 말았다. 명색이 태자 익위였던 서문윤은 암기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이청은이 애써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여 웅얼거렸다.
“몰라도 되는 일이다.”
서문윤을 허탈하게 웃게 만든 말이었다.
“동맹 맺은 것 아니었습니까?”
나름 권력의 본질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다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이 살벌함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이없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의 시선을 흘려 넘기며 이청은은 대수롭지 않게 소매를 내리곤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암묵적 동맹은 토벌군이 꾸려지기 전부터 맺어졌어. 그래 보였냐?”
“…….”
“간도 크게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걸 보니 윤아가 맞나 보군. 하지만 정말 믿기지가 않아. 어떻게 ‘그’ 서문윤이 내 앞에서 이렇게 탁월한 정치인의 어휘를 사용하는 거야?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구나. 정말로 난세구나.”
이청은은 실로 탄식을 하는 듯했으므로 서문윤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도 오래 함께 있었더니 닮아가나 봅니다.”
“하기사, 그놈도 옛날 같지 않더라. 인간미가 없어서 구방(九方, 천하)을 노닐지 못한다며 팔기린이라 불리던 놈이 답지 않은 모습을 내게 보이고…….”
“팔기린이 원래 그런 뜻이었습니까?”
수습을 하려는 도중 흘러나온 말에 서문윤은 놀라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장안사준 팔기린은 사실 정명공이라는 작위나 악천화라는 이름 석 자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다만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명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 작자 소년 시절에 덕이 없는 놈이라고 황궁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강남사준은 원래 팔기린이 원조야.”
그게 이런 뜻이었다고?
서문윤은 황당하여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비꼬는 말이었습니까?”
“형님이 자기를 비응룡이라 칭한 뒤부터는 비꼬는 말은 못 됐지. 황태자가 스스로를 기린의 보좌를 받는 응룡이라 칭하는데 누가 팔기린이란 소릴 듣고 작은 물에서 논다며 우스워할 수가 있어? 다음 시대의 용이 하늘을 날아간다는 걸 부정할 놈이 누가 있겠냐?”
“황제께서 계시지요. 스스로를 용이라 칭하며 기린을 거느리려 한 것부터가 불화의 씨앗이었겠군요. 의형이 부채감을 가진 이유가 또 있었다니.”
그리고 이청은은 또다시 발끈하고야 말았다.
“제기랄! 눈 오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시골 강아지는 어디 가고 어디서 천년 먹은 능구렁이가 와?”
이청은은 실로 당황한 듯 서문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훌륭한 성품에 뛰어난 재능, 준수한 판단력으로 지나치게 곧은 작자라 도의적으로든 간에 손익을 따져서든 간에 써먹기는 곤란하다는 판단으로 낙향시켰다.
‘그런데 얘가 왜 이렇게 되어 있어?’
이건 세월이 무상한 정도가 아니지 않나. 거의 검설린을 대하는 기분에 이청은은 지금껏 느꼈던 위화감을 참지 못해 폭발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너 진짜 뭐야?”
황당하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이청은을 향해 서문윤이 그제야 제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언행을 깨닫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아차 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지금 지치고 암울한 심정이라 한들 이리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제가 요 근래 조정의 일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십니까?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았는데 그 정도 말장난을 모르고 역학 관계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변명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저는 원래부터 둔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이청은은 쉬이 수긍했다.
“그래, 내가 그래서 너를 눈독 들인 거지.”
그리고 덧붙인 말에 서문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고.
“형님이 팔기린을 눈독 들인 것처럼.”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서문윤은 완전히 차분해진 얼굴로 이청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도리어 그의 동요를 내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청은은 서문윤을 알았다. 서문윤이 긴장을 할 때 도리어 예의를 갖췄다. 제 심리를 간파당한 것을 서문윤 또한 알고 있었으나,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청은을 화살 같은 시선으로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서문윤이 태자와 나눌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문윤은 자의가 아니라 한들 이미 이청은을 한 번 배신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일전의 태자의 속하였고, 결정적으로 정계의 일에 낄 만큼의 권한이 없었다.
서문윤은 오직 검설린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문윤 또한 옛 주군이자 제가 마음의 빚을 진 이청은에게 무례를 무릅쓰고 진실을 꼬집은 것이었다. 나를 이용하지 말아달라는 뜻이었으나, 뜻밖에도 이청은은 제 역린이었던 이청융의 일마저 꺼내면서 은근슬쩍 서문윤을 압박하고 있었다.
황실의 비사까지 꺼내어 제게 이리 말을 하는 연유를 모르겠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순간 깨달은 서문윤이 어둑한 눈으로 이청은을 바라본다. 청차를 거머쥐며 이청은은 쓴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너 정말 옛날과는 달라졌구나.”
“…….”
“미안하다, 이쪽의 화법이 워낙 익숙해서.”
한숨을 내뱉으며 이청은이 청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어진 말이 본론이란 것은 서문윤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또한 이청은을 따라 차로 목을 축이며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어느새 입 안에 침이 말라 있었다.
어쩐지 목이 따끔거리다 했더니.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고 있던 제 상태를 깨달은 서문윤이 순간 입가에 번지는 씁쓸한 미소를 깨닫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두려워하고 있던 건가?’
이청은의 시선을 피해 동요한 모습을 숨기던 서문윤의 귓가로 이윽고 나지막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일단 나는 정말로 팔기린을 변호하고 싶었다. 이건 정치적인 사견이 없는 내 마음이야. 너같이 선량하고 올곧은 놈이 고작 3년이란 시간 안에 이리 변했다. 팔기린은 얼마나 더하겠느냐?”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씁쓸함에 물든 말이 이어져 나갔다.
“난세다. 윗사람이 구정물을 묻히길 피하는 건 고결한 일이 아니야.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에 불과하지. 하물며 태자당의 이인자에게, 황제의 견제를 받는 전쟁 영웅에게 고결함은 평화로운 시대와는 방식이 달라.”
반박을 하고 싶었으나 서문윤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서문윤 또한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으나 그들은 종묘가 파헤쳐지고 장안이 쑥대밭이 되는 전쟁을 겪었었다. 서문윤은 그 당시에 변방 외가에서 몸을 피해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나, 지금의 수십 배가 될 만큼 그때의 전쟁과 정쟁이 치열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자는 함부로 말을 얹을 수 없지.
“팔기린은 황궁에서 자랐고 나는 그를 오랜 시절부터 보고 자랐어. 그는 순수함으로는 눈과 같고 열정으로는 불과 같았다.”
그를 알기에, 또 이청은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검설린의 과거가 어쩐지 온몸의 힘을 쭉 빼내었기에 서문윤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너와 같이 올곧고 바른 소년이었다.”
어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마음이 떠났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자연스레 심장에 번져 나가는 통증에 서문윤이 무너지는 얼굴을 다잡으려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를 그저 현실과 타협한 비겁한 권력자라 칭하는 것은 정적이었던 나 또한 용납이 가지 않는구나……. 그래도 나는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거든. 네 말대로 그는 악인이 아닌 자를 이용하거나 죄를 저지른 자를, 그 죄가 아닌 다른 죄로 몰락시켰다. 허나 그날의 조정에서 잘못이 없는 자, 선량한 자를 건들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너는 모를 거야.”
회상에 잠긴 태자의 얼굴을 서문윤은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을 동정하는 마음을 그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청은의 말을 동의하지 못해도 의형을 아는 서문윤은 그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했다.
“그를 너무 미워하지 마라.”
더욱이 중얼거리는 말에는 여운이 있었으므로. 서문윤은 차마 그 어느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할 뿐이었다.
그 끝에 먼저 입술을 연 것은 이청은이었다.
“허나 너는 이런 말에 납득을 할 사람이 아니겠지. 그건 내가 너무나도 잘 알아. 우리는 경험한 것이 다르고, 너는 사실 이런 것에 동감을 해선 안 되는 사람이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서문윤이 애써 입술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검설린과 너를 닮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둘 다 대쪽 같은 성품이었고, 순수했지. 검설린은 의학, 너는 무술에 열정을 지녔고, 가장 중요한 건 너희 둘은 사람들이 비웃을 만큼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허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너와 검설린은 달랐어!”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운이 좋았다.”
“…….”
“너는 운이 좋아서 나와 운표선과 황재천과 팔기린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가 있었어……. 너를 둘러싼 상황이 좋아서, 운이 좋아서……. 부정하겠느냐?”
서문윤은 반박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이청은은 잠시간 입술을 꾹 다물며 서문윤을 노려보았다. 서문윤은 긴장을 완전히 흐트러트리고 평온한, 아니 힘이 없는, 아니 그것보다는 슬픔이 묻어 나오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제가 운이 좋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압니다. 허나 마음으로 용납이 가지 않습니다.”
“…….”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압니다. 허나 그 부당함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이청은은 서문윤을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게 후세의 일이다. 그리고 네가 할 일이고.”
그러고였다. 서문윤이 그 말의 이상한 어감을 느끼고 몸을 멈칫한 것은.
서문윤의 시선이 이청은을 향했다. 그는 찻잔을 손바닥으로 덮고 서문윤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허리를 뻣뻣이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청은의 그 모습에서 그간 서문윤이 겪어보지 못했던 기이한 위압감이 흐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공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낙향하지 말고 장안에 남아라.”
“……예?”
“나는 네가 이후의 조정을 책임졌으면 좋겠다. 재상중심제가 정착된 조정에서 말이야.”
침묵이 흐르고 서문윤이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혹시 최근에 말에서 떨어진 적 계십니까?”
“누구보고 미쳤다는 거야? 겁대가리를 상실했지!”
“제가 행정 업무에 대해서 단 한 차례의 경험도 일고의 지식도 없는 황궁 무관이었던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그 말에 이청은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넌 이미 정치가인걸?‘
“예?”
이건 또 무슨 소리? 라는 듯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을 이청은은 평온한 얼굴로 마주할 뿐이었다.
* * *
이청은의 막사를 빠져나올 쯤엔 이미 하늘이 남푸른색으로 변한 후였다.
‘총사령관이 밤을 깜빡 새도록 만들었군.’
안 그래도 막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 묵묵히 서 있던 문 대주는 서문윤을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은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살벌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서문윤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팔짱을 낀 채 기세를 죽이던 문 대주의 입술에서 결국 말이 흘러나왔다.
“태자전하는 널 아끼신다.”
서문윤은 짧은 침묵 끝에 가까스로 답변했다.
“압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 대주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따라와.”
문 대주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서문윤은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천막 안의 대화가 그를 당황케 해서, 또 아직까지 납득이 가지 않아서,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왜 내게 그런 말을.’
지금껏 이적 행위를 몇 번을 한 건지 모르겠다. 이청은의 뒤통수를 한 번 후려갈긴 서문윤으로서는 궁금할 뿐이었다. 어째서 이청은은 제게 이리 관대하나?
그리고 어째서 이리도 대범하나.
‘임관.’
서문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왜 제게 이리 대하십니까?”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든.”
물어본 말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두루뭉술했다.
향수, 향수라고?
서문윤은 그 모호한 말의 의미를 묻고 싶었으나, 말을 할 때 이청은의 얼굴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여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느낌상 그것이 동궁사변 당시 그가 얻은 상실과 관련되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침묵하는 서문윤의 마음을 알아챈 듯 이청은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장한성에서 네가 한 짓은 나나 고우군은 할 수 없는 바보 같은 짓이었지.”
바로 서문윤을 기함케 한 말들을.
“팔기린조차 처음에 거부하던 일로 알고 있다. 그 고집 센 사내를 설득한 것은 오롯이 네 몫이라고. 안 봐도 훤해. 네가 일고의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에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팔기린이 죽을 인상을 쓰며 끌려간 거겠지? 그리고 결국 장한성을 사수했고, 그 대가로 황재천은 제 기반을 다지고 운표선은 정치적 사망 위기에서 구명받았다. 더하여 너는 팔기린에게 부채감을 안기고 그를 완전한 네 편으로 만들었지.”
“뜻을 두고 꾸민 일이 아니었습니다.”
“뜻을 두지 않아서 더 대단한 거다. 너는 위정자들이 포기하고 외면한 일을 성사시켰거든.”
그 말을 듣고 서문윤은 새파래진 얼굴로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청은의 말은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칭찬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도 서문윤의 공은 크지 않았으니까.
“저는 그저 자리를 지켰을 뿐인데.”
장한성 사수는 허드렛일만 한 제 공이 아니었다. 목숨 걸고 성을 사수한 장한성주 이청우나 황제의 뜻의 반하여 청매소를 운반한 운표선이나 파나립의 진전을 물려받아 전염병에 대처가 가능했던 의형의 공이면 공이었지. 제가 감히 뺏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게 자질이란 거다. 그저 자리를 지키는 일. 허나 무수히 많은 위정자가 중심을 지키지 못해서 나라가 이 꼴이 났지.”
그러나 서문윤은 이청은의 단호한 말에 압도당해 차마 항변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입술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청은은 늪에 침잠된 듯한 어둑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알고 있느냐? 네가 양주의 성벽 앞에서 사람들에게 인의를 호소한 일이 명사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은 것을? 또 장한성과 양주 본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애를 쓴 게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는 걸? 네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다만 존재는 인식이 됐지. 장한성에서 너는 팔기린에 비해 결코 입지가 떨어지지 않는다. 전염병에 걸리면서까지 사람들과 함께했던 너를 새로운 세상의 빛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서문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무능력자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알량한 세 치 혀를 놀려 의형을 움직인 건 사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저를 높이 평가하십니까? 그런 거라면 그만둬주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사실 저는 의형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쓴웃음이 흘렀다.
“환희향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의형의 책임이니까요. 다만 저는 기민하지 못했습니다. 의형이 감춘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 상황에 이끌려 다니기만 했습니다. 나약했습니다. 기울어진 전세를 바꿀 능력은커녕 스스로의 몸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여정 와중 내내 의형의 인질이 되었고 결국은 그를 그가 도망쳤던 성도로 내몰았습니다. 내세울 장점이라곤 없습니다. 알량한 무예를 자랑으로 여겼으나 세상은 넓었습니다. 충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제가 옳은 길이라 믿고 행한 일들은 사실 사람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단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열지도 못했습니다. 지극히 원하던 단 하나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나를 그리 높게 평가하는가?
북받친 말은 사실 그간의 설움이었다.
“왜 다들 내게 그런 기대를 보이십니까.”
정말 저는 하찮은 사람이다.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한 줄기 눈물이 뺨을 가로질렀다.
그럼에도 제게 기대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검설린 ,운표선, 고우군, 황재천, 이청우, 그리고 눈앞의 지극히 존귀한 자.
“저는 장한성에서 단 한 명의 어린아이조차 살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침묵 끝에 짤막한 말이 흘렀다.
쓴웃음이 그 순간 흘렀다.
그것은 서문윤이 유독 잊지 못하는 죽음 중 하나였다. 어린아이는 장한성에서 맥없이 목숨이 스러졌다. 어쩌면 살았을 수도 있는 목숨.
만약에 황재천을 더욱 일찍 말릴 수 있었더라면.
만약에 운표선을 더욱 일찍 설득할 수 있었더라면.
‘모두 미련일 뿐이리라. 이미 엎질러진 물.’
한숨이 흘렀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는 걸 어떻게 해.’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술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그게 아니라….”
후회와 한이 쌓였다.
“그게 아니라 제가 조금 더 현명하고 과감했으면 죽어도 되지 않았을 이들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태자전하.”
서문윤은 그러곤 고개를 들어 태자를 바라보았다.
“제 부족함을 너무 많이 실감했어요.”
사실은 이건 독백이었다. 동시에 애원이기도 했다.
이제 제게 짐을 지우지 말아달라는 간원.
‘저도 너무 힘들어요.’
그러나 서문윤은 고개를 든 순간 투덜거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윤아.”
“…….”
“내가 널 얻으려고 했던 건 네 능력 때문이 아니다.”
서문윤이 느릿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전하는 그게 문제이십니다.”
“뭐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방법을 아시지요.”
이청은이 짧게 웃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너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서문윤을 황당하게 만든 답변이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고, 그러다 못해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이청은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제게 그런 위로밖에 할 말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청은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가 보군.”
참으로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네가 새 세상에 필요하단 의미야.”
그런데 어째서인지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장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거다. 장안에 남아라. 남아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네 의형은….”
“…….”
“난 사실 네 의형이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이르러서 서문윤은 감출 수 없는 동요를 내보이고야 말았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이미 자신은 그와의 인연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내가 원하는 건 너와 네 의형이 내 양익에 자리하는 거야.”
서문윤은 침묵 끝에 짤막한 말을 내던졌다.
“이 중랑장과 고우군의 잔여 세력을 견제하면서요?”
이청은은 웃을 뿐이었다.
“겸사겸사.”
태자의 말이 머릿속에서 가시지가 않았다.
문관으로의 임관이란 충격적인 말도 그러했으나 그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뇌리에 남는 말.
‘의형.’
문천상이 안내한 막사 안으로 들어서며 서문윤이 조용히 읊조렸다.
‘나 없이는 그 사람이 죽을까?’
무심코 그리 생각을 하였으나 서문윤은 평소와 다른 점을 깨닫고 몸을 흠칫하고야 말았다.
‘그 사람?’
내가 언제부터 의형을 그 사람이라 불렀지?
서문윤은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항상 그를 존경하고 경애하고 혹은 연민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친밀해졌고, 그 행동이 답답해졌고, 그에게 분이 났다.
잠시간 서문윤이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흘러 그는 허탈히 웃었다.
‘의형은 견디지 못할까?’
이청은이 무슨 말을 하는 줄 알았다. 검설린은 저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문윤은 아직도 그가 죽음을 말할 때의 충격을 기억했다.
막사 안 침상에 앉아 서문윤이 상념에 잠겼다. 깊은 수면 아래로 잠겨 들어간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의형이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그를 미워하는가?’
아니, 그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서문윤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에 이르렀다.
‘나는 의형을 정말 미워하는 건가?’
그의 이름을 말할 때 이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생각했다. 허나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스스로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나 사실 그냥….’
절박한 마음이 닿지 않았다고 생각한 순간 마음의 빛이 꺼진 느낌이었다.
‘그냥 암담한 건가.’
한숨을 내뱉었다.
의형은 너무나도 상처가 깊었다.
눈을 감고 서문윤은 한참을 미동하지 않았다. 그가 불쌍하다. 의형의 인생이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는 너무 지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제가 수치를 겪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또 그 일을 숨긴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또 고 귀비 사건에 연관된 검설린이 낯설었다.
그는 심지어 제게 저 자신마저 속이고 있었다.
돌고 돌아 제자리.
결국엔 검설린은 절 믿지 않은 거다. 그렇게 제가 진심을 부르짖었는데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침묵 끝에 깊게 가라앉은 눈이 허공에 드러났다.
‘임관.’
결국 돌고 돌아 태자의 제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술수로 생각하는 게 편한데.’
그런데 어째서 머릿속에 그의 말이 떠나지 않는다.
‘그 눈빛.’
그리고 이청은의 눈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천막 밖에 여명이 밝을 때까지 서문윤은 한참을 그 여운에 젖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 끝에 문득 중얼거렸다.
“새 세상이라.”
그곳에서 의형과 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서문윤은 의형과 제가 함께하는 모습을 떠올렸다가 문득 고개를 슬쩍 젓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선한 의지를 지닌 채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 그곳에서 의형과 제가 함께 미래를 꾸려 나간다라.
낙향도 좋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미래를 낙관하지 못했다.
‘그 전에 선행 과제가 해결되어야지.’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을 생각하며 서문윤이 쓰게 웃었다.
* * *
시간이 흘렀다.
“장안 함락이 멀지 않았습니다.”
공성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어져 나갔다. 강서진은 무의미한 항전을 지속했고 그것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강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군.”
그는 한때 기울어진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인재라 칭송받았었다. 고우군의 뒤를 이을 인재라 칭해지면서. 그러니 이 결과가 정해져 있는 무의미한 공성전을 이어나가는 행동이란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태자의 가신들 중에서는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사실 그건 중론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명주작이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이런 어리석은 싸움을 이어나갈 이유가 없었다.
혹시 장안에 비밀통로가 있지 않는가? 지금 이 전쟁으로 시간을 끌고 황족과 고위 관료를 빼돌려서 항전을 이어나가려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적인 생각이었고.
“그게 아니면 저렇게 무의미한 죽음을 향해 나아갈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 또한 어찌 되었건 나라를 위하려 했던 인재인데.”
그러나 사정을 아는 자들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복수심에 눈이 먼 건가?”
이청은은 강서진의 원한을 잘 알았다. 그는 이 나라 자체에 분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 마음을 억누르고 검설린을 황제로 만들어 나라를 쇄신하려 했다가 실패하였다. 거기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
유예시켜두었던 원한이 폭발할 수도 있으리라.
이 나라를 향한 깊고 깊은 원한이.
“사람은 가끔 감정에 치밀어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지요.”
문천상의 말에 이청은은 잠시간 침묵했다. 강서진은 이청융의 의지를 존중하고 마지막 이성을 다잡아 검설린을 황제로 만들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세상과 타협하였다. 그러나 모든 게 엇나간 시점에서 그가 지금 목표하는 바가 무엇일까.
“공멸.”
이청은이 한숨을 내뱉었다.
“파국.”
막사 한켠에 앉아 있던 서문윤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몸을 움찔거렸다.
“복수.”
침묵이 잠시간 흘렀다. 그 끝에 문천상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전하.”
피로에 찬 사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문천상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은 이청은의 얼굴이 심히 굳어져간다. 그리고 이어진 문천상의 말에 태자의 막사 안 사람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다른 괴물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뭐?”
“복수귀는 하나가 아닙니다.”
그 순간 이청은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고 귀비.”
사실 그녀야말로 진정 이 나라에 원한을 가진 이였다. 나라에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배반당한 여인의 한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이청은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지고야 만다.
“이상해.”
그 어느 생각에 이른 것이다.
“아주 이상해.”
막사 안에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이청은이 홀린 듯 말을 되뇌었다.
“어째서 고 귀비를 바로 죽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면.”
서문윤의 두 눈을 크게 뜨게 만든 말이었다.
‘맞아. 고 귀비가 왜 살았지?’
고 귀비는 동궁사변을 일으킨 주범. 강서진과 그녀는 원한관계로 얽혀 있었다. 공존을 할 수 없는 관계였다. 두 복수귀는 풍랑과 같은 사건 끝에 서로가 서로의 원수가 되었다.
의견과 목표를 합치할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어째서 고 귀비가 아직껏 생존해 있나?
“느낌이 좋지 않아.”
순간 얼굴을 빠르게 굳힌 이청은이 중얼거렸다.
“무엇보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깝구나.”
침음과도 같은 말에 문천상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포기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 불안이 스치고 있었다. 태자를 오래간 모신 신하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에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이청은은 가끔씩 터무니없는 말을 하곤 한다.
“그들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구나. 강서진과 고 귀비 둘이 따로.”
그러니까 저런 말 말이다.
“그들이 들어줄 리가 없잖습니까? 강서진이면 몰라도 고 귀비는 후금의 사람입니다. 밖으로 나올 일이 요원합니다.”
“그럼, 내가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예?!”
문천상을 경악하게 한 말이었다. 서문윤이 생각해도 미치광이 같은 말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한차례의 소란이 있었다. 막사가 뒤집어지고 병영이 폭발했다. 심지어 황재천, 검설린, 이중환의 진영도 술렁거렸다. 서문윤은 진영 사이로 파발들이 바쁘게 뛰어나가는 모습을 몹시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이청은을 보고 미쳤다 말을 했으나 서문윤은 그의 태도에 기묘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전하는 정말 사람을 위하는구나.’
해자에 쌓인 시체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슬픔과 희망을 같이 느꼈다. 검설린은 권력을 쥔 사람은 무조건 타락을 한다 말을 하지만 그래도 신념을 잃지 않는 자들은 분명히 있다.
이청은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한때 모셨던 사내의 어리석기까지 한 우직한 신념에 서문윤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기이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쩐지 전하는 죽지 않을 것만 같다.’
그는 어쩐지 정말 그가 원하는 미래를 이룩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서문윤은 동요하지 않았고, 담담히 상황을 방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문득 이청은의 막사로 찾아온 사내의 차분하고도 비이성적인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장안으로 들어가겠다.”
이번에는 서문윤을 경악하게 만든 말이었다.
아니, 분노케 한 말이었다.
“야, 검설린!”
정확히 말하면 이성을 잃게 만든 말이었지만.
솔직히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속이 후련했다. 정신을 차린 순간 제 손아귀에 잡힌 멱살의 주인을 마주하고 서문윤은 아차 하는 마음 이전에 희열을 느꼈다.
속내를 털어놓자면, 사실 서문윤은 전에도 종종 이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검설린이 얼마나 속이 터지는 사내던가. 자타공인 인정했던 인격자인 서문윤이, 태자 공인으로 성품 때문에 눈여겨본 인재라 했던 서문윤이 폭발하여 세작질을 할 만큼 껍질이 두터운 여러 마음의 사내였다.
그가 두른 껍질을 부수기 위해 인내에 인내를 더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서문윤은 언젠가부터 그 껍질을 부수기 위해 인내나 사랑이 아닌 뭔가 형체가 있는 도구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야! 검설린!”
그러니까 이건 그런 마음의 결정체이리라.
마치 둑이 터져 물이 쏟아지듯 서문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지로 숨어들어가겠다는 미치광이 말을 내뱉는 일군의 사령관 옷깃을 잡아당겼다.
“정말 미쳤습니까?!”
흥분하여 내뱉은 말이었다.
삭히고 삭혔던 마음을 털어놓고 서문윤은 그 순간 충만하게 차오르는 희열감에 몸을 부르르 떨고야 말았다.
아, 속 시원하다!
그러나 그는 제 기쁨을 토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행동을 후회하고야 말았다.
“헉?”
“아….”
누구 하나 죽은 것만 같은 살벌한 적막이 흘렀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마주한 것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만난 검설린의 형형한 얼굴이었다. 한 달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얼굴은 예전의 그 선인같이 미목수려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칼날을 품은 듯한 예리하고 음산한 기색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기세와는 정반대로 그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제 멱살을 잡은 무례를 책망을 하지 않고 서문윤을 그저 담담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에 순간 서문윤은 심각하게 부담을 느끼고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공허한 시선과 마주하자 입안이 메마른다. 심지어 이청은과 문천상을 비롯한 이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를 말리거나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마치 역치를 넘어선 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심지어 이 상황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
탄식을 들은 서문윤이 불안감에 두 눈을 흔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 차라리 놀라기라도 하지.’
충동적으로 행동을 하곤 일을 수습하지 못하겠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쭈뼛거릴 때였다.
“눈치를 볼 거면 놔라.”
담담한 말이 흘렀다.
서문윤이 소심히 멱살을 놓고 중얼거렸다.
“오랜만입니다.”
검설린은 침묵으로 답변했다. 심지어 그를 보지도 않았다. 서문윤은 그에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또다시 중얼거렸다.
“오랜만인데 제게 이런 소식으로 찾아오시다니요.”
허탈한 음성에는 쓸쓸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서문윤을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고 심지어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천막 안에는 수장끼리의 대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반대하십니까?”
“이때는 불허라는 말을 써야 하지 않느냐.”
이청은이 짧게 웃었다.
“이제는 아예 막나가는구나.”
엄연히 따지면 토벌군의 수장은 이청은으로 군 통솔권은 그의 손아귀에 있다. 그러니 검설린의 행동은 이청은이 통제하는 게 맞으리라. 악천화는 부사령관이었고 이청은은 사령관이었으니까.
그러나 문천상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도 유명무실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사령관의 자리로 술수를 부렸고, 그마저 천자의 생사가 불투명해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까.
“불허하십니까?”
그러나 검설린은 뜻밖에도 순순히 이청은의 시비를 탓하지 않고 몸을 낮추었다. 이청은이 잠시간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왜? 왜 불허하지?”
허탈한 웃음과 함께 흐른 말이었다.
“천자가 내게 내린 군대를 분열시켜 제 휘하에 두고 나를 허수아비로 만든 불손한 무장이 제 발로 사지로 걸어가겠다는데 왜? 게다가 그놈의 명성이 천하를 울리니 천지가 개벽해도 화해하지 못할 원수들의 손아귀에 그자의 목숨이 스러지면 내게도 이득이겠다. 아니 그러겠느냐?”
서문윤을 경악하게 만든 말이었다.
“태자전하, 그것은!”
“하지만 너는 굉장히 재수가 없어. 팔기린.”
그 순간 서문윤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는 뒤늦게 이청은이 드물게 빈정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서문윤 이상의 무골호인에 술수에 능수능란한 정치인인 그는 함부로 제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사람을 비꼬지 않았다.
“지금 그런 말을 해보았자, 이제 와서? 란 말밖에 나오지가 않는다고. 그런데 굉장히 때를 잘 맞추어서 나타나는군. 영웅이 만들어지기 딱 좋은 기회에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왜?
갑작스러운 이청은의 분노에 망연한 표정을 짓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대담들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검설린이 느릿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의도한 게 아닙니다.”
마치 빈 우물같이 깊고 공허한 두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겉으로 보기엔 텅 빈 것같이 보여도, 사실 깊은 물속과 같아 그 속에 복합한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이청은이 차게 웃었다.
“똑똑한 넌 알고 있지. 넌 그냥 무장이 아니라 황태자의 옆에서 정계 중심에서 키워져 눈칫밥을 먹고 살았으니까.”
그의 눈에 안광이 튀기고 있었다. 검설린을 향한 것이었다.
“네가 여기서 죽어도 문제지만 죽지 않는 게 더 문제란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은 뒤늦게 태자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검설린을 향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는 냉담한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해진 순간이었다.
서슬 퍼런 말이 이어진다.
“그럼 넌 죽으러 가는 게 아니냐? 아주 훌륭하구나!”
그 때 검설린이 냉소를 흘렸다.
“태자 또한 사지를 걸어 들어가겠다 하시면서 제게 박한 말씀을 하십니까?”
“너와 나는 다르지! 그들은 수세에 몰려 있고,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한 데다가, 내가 황족 신분이라 섭정이라는 명분을 쥔 강서진은 나를 절대로 못 건들 테니까. 하지만 넌 그냥 적장이다!”
검설린은 조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본 이청은은 그 순간 흉흉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냉소를 지었다.
“아, 그래?”
그러곤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명공, 나는 그대에게 손을 내밀었소. 그간의 원한을 잊고 함께하자는 말을 몇 번이고 했소. 미래는 우리가 이끌어가는 것이니 함께 세상을 바꾸어보자 말을 했소.”
드물게 그는 격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말은 모두 쓰레기더미 속에 틀어박혔구려!”
그리고 이청은은 군용 지도가 널리 펼쳐진 탁자 위의 필통을 잡아 던졌다. 깡!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는 필통이 필기구를 흩뿌리고 검설린의 발치에 구르고 있었다.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검설린은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불허하지 않는다 알고 나가겠습니다.”
그러곤 그는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검설린이 떠난 자리에서 이청은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한 비명을 미친 듯이 내질렀다.
“으아아악! 저 벽창호!!”
그 순간 서문윤은 이청은의 모든 말에 절절히 공감하고 있었다. 아니, 더하여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검설린은 정말 구제하지 못할 쓰레기다.
‘망할 의형!’
그런 그를 알면서도 결국 서문윤은 포기하지 못해 달려갈 뿐이었고.
‘어쩌면 우린 정말로 서로 잘 어울지도 몰라.’
이젠 서문윤은 기가 막혀 웃는 법을 터득했다.
“…나가보겠습니다. 전하.”
서문윤이 나가기 직전 문천상은 잠재적 정적에게 또다시 다가가는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혀를 찼을 뿐이었다.
* * *
천막 밖으로 뛰쳐나간 서문윤이 검설린을 따라갔다. 그는 표홀한 발걸음으로 저 멀리 가고 있었다.
“의형.”
정말 뜻밖인 사실은 서문윤의 마음이 그 순간 평온하다는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서문윤은 더 이상 화를 느끼지 않았다. 태자의 충복인 문천상마저 기가 질려 혀를 차는 상황인데도. 도리어 이청은보다 더 화를 내야 할 서문윤이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설린이 발걸음을 멈추고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순간 서문윤은 괜스럽게 그런 마음이 억울해져 그에게 언성을 높이려 했다.
“야, 이….”
“두 번은 안 봐준다.”
서슬 퍼런 목소리에 그만두게 된 시도였지만 말이다.
서문윤이 헛기침을 하고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서문윤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가게 한 행동이었다. 한바탕 난리가 일어난 후다. 검설린은 서문윤이 또다시 자신에게 격렬히 항의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얼굴은 고요할 뿐이니, 검설린은 순간 기이한 불길함을 느꼈다.
“할 말 있느냐?”
침묵 끝에 흐른 떨떠름한 말이었다. 서문윤이 그 순간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무 많아서 뭘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검설린이 그 순간 실소를 흘렸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하지.”
그는 서문윤을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매듭을 진 자가 매듭을 풀어야 하는 법이다.”
서문윤이 빤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말을 했듯이 저 성벽 안에는 내 과거의 은원이 있다. 나는 미진하고 책임감이 없는 겁쟁이라 수습을 해야 할 때 그렇지 못하고 도망치고야 말았다. 이 상황에 많은 술수가 있지만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가 벗어 던졌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그 말을 내뱉을 때 검설린의 목소리는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은원에 의해 시작되었지 않는가?”
꺾이지 않은 결심이 서린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서문윤이 짤막히 평했다.
“그렇군요.”
“…….”
“…….”
갑작스레 이어진 긴 침묵에 당황하던 검설린이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너.”
서문윤의 담담한 얼굴을 마주하곤 무언가를 짐작한 것이다. 철벽같은 얼굴을 와르르 무너트린 검설린이 목구멍 밖으로 거칠게 쉬어빠진 목소리를 다급히 흘렸다.
“안 돼.”
서문윤은 태평할 뿐이었다.
“됩니다.”
“안 돼.”
“된다고요.”
검설린은 결국 분노했다.
“너, 이! 서문윤 이 미친…!”
얼굴 근육이 뒤틀린 채 검설린이 그를 향해 성큼거리며 다가갔다. 서문윤이 순간 정색하며 언성을 높였다.
“저도 두 번은 안 봐줍니다. 당신의 독단. 그리고 미친 짓!”
억울함에 사무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저는 심지어 두 번도 아니었어요! 아십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반박했다.
“네게 은원이 있느냐? 네가 성벽 안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더냐? 나는 있어. 너는 없고.”
서문윤이 문득 편안한 얼굴을 했다. 속으로 미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의형의 살기를 맞으니 이것도 몹시 반갑다.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천막 안으로 꺼져! 탕약은 운표선 쪽으로든 이청은 쪽으르든 네게 수급이 될 테니까.”
“말 나온 김에 오늘 밤에 가시지요.”
검설린이 잠시간 서문윤을 보다가 그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끌었다.
“내가 잘못했지. 말로 해서는 어찌할 수 없는 놈이란 걸 일찍이 알았건만.”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가며 서문윤이 항의했다.
“그건 제가 할 말이지 않습니까? 의형은 실로 뻔뻔합니다.”
잠시간 실랑이가 있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손에 끌려가지 않으려 사지를 버둥거렸고, 검설린은 이를 갈면서 그를 이청은의 천막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서문윤이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가는 상황이었지만 검설린은 그의 입을 막지 못해 패착을 겪어야만 했다.
“원래 의형제는 태어난 날짜는 달라도 한날한시에 같이 죽는 겁니다.”
검설린은 그에 분노했다.
“삼국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도대체 이 작자가 왜 이러는 건가?
“또 왜 이러는 거지?”
답답함을 참지 못한 검설린이 눈썹을 꺾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넌 내게 배신감을 느꼈지 않았나, 서문윤.”
목덜미를 움켜쥐었던 손이 떨어져나간 후였다. 비틀거리는 신형을 바로잡은 서문윤이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당신을 용서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검설린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가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만 같다는 생각을 어쩐지 품고야 말았다. 아니,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미진함에 서문윤은 헛웃을 뿐이었다.
“또 당신은 굉장히 답답합니다. 한때 당신이 정의롭고, 또 외곬수인 줄로만 알았지만 실상은 칠순 노인보다 음흉하고 속내가 깊습니다. 안 좋은 방향으로요.”
서문윤은 제가 검설린의 속내를 이제 굉장히 잘 읽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순간 발끈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침묵 끝에 마음을 가다듬은 검설린이 냉랭히 말했다.
“그래, 나는 음흉한 작자다. 그런데 넌 왜 그래?”
서문윤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잇고 있었다. 실소가 흘렀다.
“네가 날 떠날 때 난 네가 제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그러나 너는 정말로 또다시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구나.”
서문윤이 순간 허탈히 웃고 있었다. 검설린이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아득 물었다.
“구제불능 같은 것.”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십니까….”
그리고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서문윤과 검설린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를 한 시간이었다.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허나 어찌 되었건 의형제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검설린의 얼굴이 허물어진 순간이었다.
“미친 것 아니냐? 너 아직도….”
“의형, 태자전하의 천막에 머물면서 그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뭐?”
서문윤은 검설린의 눈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제가 당신을 버릴 수는 있지만 당신이 저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요. 우리의 관계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검설린은 서문윤을 노려보면서 어떠한 말도 내뱉지 않았다. 서문윤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 마음이 어떤 건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당신을 잃을 생각이 추호도 없고요.”
“…….”
“우리가 서로를 구제불능이라고 하는군요.”
검설린의 얼굴이 구깃해지고 있었다.
“도망가시면 쫒아갈 겁니다.”
“이….”
“애초에 구제불능끼리 어울리는 거군요.”
서문윤이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곤 그의 눈을 직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천천히, 그러나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한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검설린이 흔들리지 않는 두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의형. 당신의 독단에 어울려주고, 또 제가 이리 고집을 피우는 건.”
느릿한 목소리의 끝에 이르러 검설린은 순간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더 이상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면 전 이제 제 마음을 결론지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있었다. 검설린은 창백해진 얼굴로 순간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서문윤을 들끓는 눈으로 노려보던 사내가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곤 그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걸이로 그의 앞에서 사라져갔다.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선 채 사라져가는 검설린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성문 안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하고 계십니까?”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았다.
“제게 더 숨기고 있는 게 있으십니까?”
그간 몇날며칠의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이청은은 손을 놨고 이중환과 황재천은 몇 번씩이나 파발을 보내어 서문윤을 이 일에서 빼내려 들었다. 검설린에게 드디어 미쳐버렸냐는 악랄한 비난을 퍼붓는 건 덤이었다. 사실 비난보다는 비판에 가까웠다. 그 말에는 논리가 있었으니까. 비겁한 악천화는 그들의 무수한 공격을 한마디 말로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내가 아니라 서문윤을 꺾어라.”
그럴 수 있을 리가?
그 둘이 내심 서문윤을 많이 아낀 모양이었다. 아니, 황재천은 아예 악천화의 막사로 찾아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추억팔이를 했다. 서문윤이 어렸을 때 돌잡이를 한 일까지 거론하면서 서문린이 받을 충격을 상기시켰다.
“양양이는 어쩔 것 같으냐?”
거기에 슬그머니 제 욕망을 끼워놓기도 했고. 묵묵히 말을 듣던 서문윤은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곤란한 듯 보이기도 하고 미안함이 언뜻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 애는 제 소임이 아닙니다.”
황재천은 울컥했다.
“정말로 완전히 마음을 결정한 거냐?”
태어날 때부터 혼담이 오가던 사이다. 황재천은 서문윤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다. 그가 훌륭한 사내로 자란 것을 알고 있었다. 사위로 생각하던 이가 상관을 따라 사지로 걸어간다 한다.
“제 삶이 앞으로 두 가지 길뿐이네요. 의형이 있거나, 혼자거나.”
그리 말을 하는 서문윤의 얼굴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황재천은 그 말을 듣고 앓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나는 역시 그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
서문윤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멈칫한 채 잠시간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서문윤은 검설린의 인생을 동정하지만 그들의 사연에는 끼어들 수 없었다. 황재천의 얼굴에는 비소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짙은 원망과 한탄이 서린 것이었다.
“그가 원했다면 난, 우리는 그날에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일찍 올바른 길로…….”
멍하니 읊조리는 황재천을 서문윤은 한동안 묵묵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그만하세요.”
황재천은 얼이 나가 답변했다.
“뭐?”
“당신의 후회를 왜 그에게 전가합니까.”
서문윤은 그 순간 모든 인연을 잊고 솔직한 진심만을 말하고 있었다. 황재천의 인연, 검설린의 인연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을 전달하자면…….
“그냥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황숙.”
황재천은 검설린과 비슷한 자였다.
“그날의 전우들을 배신한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형태가 다른 겁쟁이.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말없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황재천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동궁사변 때 죽어가는 전우를 외면하고 황제와 영합한 것을 후회했을까?
그건 아마 모를 일이다. 서문윤은 황재천을 사적으로만 평가를 하고 싶었으니까.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결정되고 신분을 숨기고 사절로 장안 수도의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성벽 안에 들어가니 당연히 검설린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당연히 소란이 일었고 검설린과 서문윤은 병사들에게 포위가 되었다. 서문윤은 긴장에 몸을 떨었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역사서에 이름이 오르겠군.’
사령관이 사절로 위장해서 적진을 염탐한다. 혹은 적장과 이야기를 나눈다라. 어디 춘추 전국시대에서나 나올 법한 고사가 아닌가?
비록 공성전에서 공을 맡은 측의 사령관이 군벌에 가까운 이 셋과 군재가 전무한 황태자 하나를 합한 네 명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미친 짓이기는 마찬가지다. 개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세력이 큰 이가 검설린이었으므로. 사실상 사람들은 이 전쟁의 주역을 그로 알았으니까.
그 말인즉슨 그런 만큼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이었다.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검설린은 역시나 명성처럼 당당하게 행동했지만 서문윤은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야 말았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눈앞이 아득했다. 장한성이랑은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는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고 서문윤은 일종의 흥분에 빠진 상태에 이르렀으니까.
‘생각보다 더 무섭군.’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서문윤 또한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무관인 서문윤은 대역죄를 저지른 이를 어찌 처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은 직접 보기도 했고.
‘아…… 나 굉장히 나약하구나.’
그리하여 서문윤은 긴장을 덜기 위해 검설린에게 지금껏 떠벌대고 있던 것이다.
“의형, 제가 어떻게 해야지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
그리고 그 때쯤 검설린이 툭 내던진 말이었다.
“나는 네가 싫다.”
“어….”
말을 들은 서문윤은 잠시간 어물댔다.
‘뭐지?’
몹시 당황한 까닭이었다. 검설린의 오랜 동료요 암묵적인 연인인 입장에서 저 말에 상처를 받는 것은 둘째 치고 굉장히 황당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말이 나올 건 아니지 않나?
의형을 따라서 죽을 자리를 찾아왔건만 어째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서문윤은 혼란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배은망덕한?
그리하여 바라본 검설린의 얼굴은 그저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날 고통스럽게 만든다.”
“으음.”
“말도 뒈지게 안 듣지.”
서문윤의 눈썹이 그 순간 꿈틀거렸다.
‘아니, 지금 누가 할 소리를?’
속에 울컥한 것이 치솟아 서문윤이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열 때였다. 검설린이 냉소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자꾸 내게 옛날 생각이 들게 만든단 말이다. 서문윤. 네가.”
꾸역꾸역 감정이 억눌린 목소리에 서문윤은 그 순간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검설린의 얼굴은 사실 냉막한 것이 아니라 화를 참아 경직되어 있었다.
동요하는 서문윤의 귓가로 말이 흘렀다.
“어떻게 하면 진심이 닿을 수 있냐고? 내 손에 있는 피를 지워달라. 내 과거를 바꿔줘. 제발.”
무어라 숙덕거리는 두 사람에 긴장된 듯 그들을 안내하는, 혹은 호송하는 경비병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도 네게 솔직하고 싶으니까.”
서문윤이 잠시간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의형. 혹시 죽을병이….”
“기어오르냐?”
검설린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그를 마주한 서문윤이 머쓱한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물었다. 으르렁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네가 원하던 진심을 말하잖아.”
서문윤은 그 말에 의외라는 듯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되게 가볍게 말하네요.”
그러곤 잠시간 침묵 끝에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숨기셨습니까?”
원망이 희미하게 서린 말이었다. 아니, 실제로 서문윤은 그를 탓하고 있었다. 책망 어린, 혹은 탄식이 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청년의 앞에서 검설린은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쉽게 말하는구나. 그건 너만 쉽게 여기는 거야.”
서문윤을 바라보는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겐 어렵지. 다른 사람에게도 어렵고.”
그리고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끝에 서문윤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태자전하가 저보고 개편된 조정에 몸을 담으라 하셨습니다.”
“미쳤군.”
검설린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변을 했다. 서문윤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의형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심 그럴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검설린은 길게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릴 때 검설린은 무거운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아니, 사실 그럴 줄 알았다.”
서문윤을 당혹케 한 말이었다.
“예?”
“장한성의 일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향력이 커. 황제는 내 명성에 신의의 명성이 더해지는 걸 꺼렸지.”
“어….”
“그렇다고 운표선에게 공을 돌리겠느냐 황재천에게 공을 돌리곘느냐.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그 말에 이르러 검설린은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서문윤의 두 눈은 그 때쯤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너는 내 곁에 있어서 네 명성을 모르고 있는 거야. 게다가 네 이름이 사람들에게 풀렸다.”
그 순간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되물었다.
“제 이름이요?”
“그래.”
서문윤이 멍한 얼굴을 하다가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저, 저는….”
“두려워하지 마라.”
서문세가를 일에 얽히게 할 수는 없다.
크나큰 공포에 휘말려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서문윤을 검설린은 그 순간 확고한 목소리로 말을 끊고 달래려 들었다.
“시골에서 은거하는 세가를 엮을 사람은 없어. 네가 우리 중에 나쁘게 얽힌 세력이 있느냐?”
우물쭈물하던 서문윤의 얼굴이 서서히 안정되었다. 그런 모습에 검설린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네 진정한 재능이구나. 패권을 다툴 이들은 모두 너와 우호관계니 향후 네 앞날은 밝겠군. 살아만 돌아간다면. 그게 어렵겠지만.”
“마지막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왜 들어왔어!”
“이 자리에서 저랑 또 싸울 겁니까?”
그렇게 잠시간 투닥거리던 두 사람이 진정된 것은 경비병의 시선이 꽤나 불안해진 후였다. 이성을 차린 서문윤의 만류로 피로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문 검설린은 문득 입술을 열었다.
“네 이름은 깨끗하다.”
그러곤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움찔거리다가 반문을 하고야 말았다.
“사실대로라면 제 이름은 더럽혀진 게 아닙니까…?”
힘없는 말이었다.
사실 이름이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서문윤은 옛날에 퍼져 나간 비역 소문을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망했군.’
그는 이제 명성이란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비역질을 한다는 소문이 대륙에 퍼진 상황이다. 서문윤은 한때 검설린을 지극히 원망하고 망가진 제 명예에 우울함을 느꼈다. 상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되고서는 그건 이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서문윤이 씁쓸함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재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입안의 쓴맛을 느꼈던 것이다.
“그걸 믿는 사람이 많겠느냐. 가시적인 결과가 나온 일을 믿는 이들이 많겠느냐. 그리고 공작을 한 이는 금군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검설린은 서문윤의 생각을 깨부수고 있었다.
“원한다면 복직할 수 있어. 관직에 종사해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이청은의 말을 듣는다면 출세도 충분히 가능하지.”
“…….”
“그래서 넌 뭘 원해?”
서문윤은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모르겠어요.”
서문윤은 다시 물었다.
“의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그걸 왜 내게 묻지?”
검설린은 차갑게 답변할 뿐이었다.
“나를 떠나기로 했잖느냐.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해.”
“판단을 보류한 거지요. 왜 자꾸 확정으로 말을 하세요. 제가 떠나는 게 보고 싶어요?”
“아니.”
단칼에 내뱉은 말이 서문윤의 말문을 막았다.
“아니야.”
검설린이 침묵 끝에 다시 말을 내뱉었다.
“날 용서하지 못한다고?”
서문윤은 잠긴 목소리를 간신히 흘릴 수 있었다.
“아니요.”
그러곤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쓸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힘없는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생각해보니 당신이 그렇게까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어요. 다만….”
그 또한 많은 고통을 겪었으리라.
“당신의 그 성품에 질린 거지.”
그 생각을 하니 갑작스럽게 눈앞이 핑 돌았다. 코가 시큰거리고 목이 울컥했다. 그리하여 입술을 또다시 열지 않고 감정을 삭이는 서문윤의 귓가로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고치면 되겠느냐?”
그것은 서문윤의 눈이 크게 뜨이게 만든 말이었다.
“어?”
뭐라고?
“살아 돌아오면 네게 나를 주려 한다.”
서문윤이 멍하니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면을 바라본 채 무뚝뚝히 말을 잇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네가 내 악몽이었어. 10년 전 일을 대신하여 네가 내 머릿속을 괴롭혔다. 네 악몽은 정말 악랄했지. 내가 서문린의 자식을 망치는 게 아닐까. 내 잘못으로 인해 순수한 청년이 더럽혀졌다. 후학의 앞날을 망쳤구나. 난 역시 이런 놈이군.”
서문윤은 숨을 들이켜고 명료히 답변했다.
“정말 의형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정말 그다운 생각이다.
이제는 웃길 지경이라 미소를 짓는 서문윤에게 검설린의 냉막한 말이 돌아왔다.
“네가 나한테 불면증을 안겼어.”
“…지금 저랑 싸우자는?”
서문윤의 눈썹이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검설린이 그 순간 눈을 질끈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피로에 찬 얼굴로 그가 중얼거린다.
“아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 순간 경비병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황궁이었다.
검설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애증의 장소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그가 침묵 끝에 느릿한 목소리를 흘렸다.
“나는 네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해졌다고 말하는 거야.”
“……”
“저것의 기억보다.”
말에는 여운이 있었다.
서문윤은 수색을 받는 동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아니, 그 이상이야.”
검설린이 냉소를 짓는다. 회랑을 걷고 있었다.
“그때와 달라. 10년 전과는 다르지. 장안사준 때랑은 달라.”
“…….”
“네가 내게 향수를 느끼게 만들어. 행복했던 시절을 꿈꾸게 만들지.”
보보를 하는 것이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는 기분 같았다. 서문윤이 크게 뛰는 심장을 느끼곤 멍한 눈으로 황성을 바라보았다.
마굴!
사람들의 피를 먹고 살아가는 짐승들이 우글대는 곳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문윤은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절망도 근심도 잊고야 말았다. 숨을 들이켠 그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검설린은 그 순간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 끝에 그가 곱씹듯이 말을 중얼거렸다.
“난 대의를 꿈꾸지 않고 자그마한 행복을 빌게 됐다고.”
서문윤은 그 말에 이르러서 기나긴 침묵을 지켰다. 대화의 중간중간에 들어갔던 침묵과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묵직한 적막이 이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 서문윤은 입술을 열었다.
“의형.”
“…….”
“역시 죽을 생각이었군요.”
왜 모르겠는가?
사실 이청은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분노를 했던 것이다. 이중환과 황재천 또한 그런 연유 탓에 서문윤이 그를 따라 부나방이 되는 것을 말렸던 것이고.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확정받고 서문윤은 배신감을 차마 지우지 못했다.
일그러진 청년의 얼굴 앞에 검설린은 무던하게 말을 내뱉었다.
“넌 살릴 거다.”
서문윤은 그 순간 참지 못해 검설린의 발을 꽉 짓밟고야 말았다.
“너 이 새…!”
검설린의 두 눈에 불꽃이 튀긴 순간 서문윤이 짤막히 촌평했다.
“구제불능.”
이게 이제 기어오르네?
검설린이 순간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본다. 서문윤이 그 때 한숨을 폭 내뱉텄다.
“저도 감당할 수 없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그러곤 덧붙인 말이었다.
“더 이상 절망은 하기 싫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허탈히 웃었다.
“서문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네가 정말 건방져졌구나.”
그러나 그리 말을 하는 검설린의 얼굴은 꽤나 후련해 보였다.
그 때쯤 경비병의 발걸음이 멈췄다. 대전의 앞에 선 것이었다. 풀어졌던 검설린의 얼굴에 그 순간 음산한 미소가 감돌았다. 내심 안도를 하던 서문윤의 몸이 움츠려진 때였다.
비소가 흐르고 날카로운 말이 툭 내던져졌다.
“병신들이 안에 있군.”
황제와 강서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서문윤은 저절로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긴장을 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검설린과의 대담으로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한들, 이것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남이었다. 서문윤이 지긋한 시선으로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분함이 자리한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서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어?”
그는 잠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높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검설린이 흘린 것이었다.
“미쳤구나.”
용상에 온화한 인상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강서진이 말을 내뱉었다.
“안녕?”
검설린은 오래된 친구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진짜 대역죄인이 이곳에 있었군. 뭐 하는 짓이냐?”
냉소와 함께 내뱉는 말이었다.
“황제 놀음이라도 하고 싶은가? 내게 천자가 되라느니 쓸데없는 개소리를 지껄이더니 뒤늦게 욕심이 생긴 건가.”
용상 위에 자리한 사내가 빙긋 웃었다. 강서진을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궁궐을 지키는 환관도, 궁녀도, 심지어 금군마저 강서진의 무도한 행위를 방관하고 있었다. 검설린이 잠시간 그를 노려보다가 짓씹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무슨 꿍꿍이냐.”
강서진은 수세에 몰린 사람답지 않게 여유로웠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잠시간 옛친구를 바라보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우리 잠시 걸을까?”
그러곤 고개를 돌려 서문윤을 응시하며 말을 덧붙였다.
“너도 함께 따라오거라.”
서문윤은 어쩐지 미궁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고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이 그 순간 차갑게 식은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조를 듯 강서진을 노려보던 검설린이 발을 떼곤 그의 등 뒤를 따랐다.
* * *
세 사람이 궁궐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서문윤은 강서진이 용상에 앉을 수 있었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궁궐 곳곳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궐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인간미가 없었다. 그들은 창백한 얼굴을 숙이며 부품처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서문윤이 알던 광경과는 사뭇 달랐다.
궁궐에는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황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재한 황제의 행방을 궁금해하던 서문윤은 그러나 뻗어나가던 생각의 갈래를 멈추고야 말았다. 강서진이 발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우뚝 선 사내의 등을 자리에서 멈칫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의 등에서는 많은 것이 묻어 나왔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서문윤은 고개를 들어 올려 검설린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그러곤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아.’
침음을 삼키며 서문윤이 눈을 크게 떴다. 검설린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영문을 모를 사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묵 끝에 강서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이곳에서.”
그제야 서문윤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서문윤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곳이었다.
‘여기는?’
동궁의 한켠이었다. 그들이 걸음한 곳은.
정확히 말하면 동궁에 자리한 전각의 후원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긴 장소를 서문윤은 잘 알고 있었다. 익위들이 휴식 시간에 몰래 훈련장을 빠져나와 담소를 나누는 곳이었다. 어째서 이곳이 버려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오래전부터 이청은은 이 장소에 발을 디디지 않았고, 전각은 무성한 수풀들에 휩싸여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서문윤은 선배 익위들로부터 그 연유를 듣지 못했다. 어째서 멀쩡한 전각이 버려졌는지. 어째서 귀신이 나올 것같이 스산한 저 전각을 아무도 보수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서문윤은 지금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맹세했지.”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세상을 바꾸자고.”
강서진이 뒷짐을 진 채 전각의 후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가벼워 보이는 모습에 서문윤은 무언가 목구멍에서 울컥한 것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고 입술을 꾹 깨물어야만 했다. 침묵 끝에 그가 잘게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의형, 이곳은.”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검설린을 올려다보며 머뭇거렸다. 침묵 끝에 말이 흘렀다.
“내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아.”
서문윤은 짤막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얼굴에 안개가 끼어 있었다. 희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생각하고 있었다.
“내 집이었던… 장소.”
그가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도통 모르겠노라고.
그건 마치 여러 가지의 감정이 혼탁하게 섞인 듯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잠시간 수풀이 무성한 음산한 전각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신입 익위들은 선배 익위의 시선을 피해서 쉬곤 했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곳이라, 불길하게 여기면서도 그늘이 짙게 드리운 시원한 공간에 자주 찾았었다.
“원래는 태자의 놀이친구를 재우는 공간이었다. 애기 환관이나 공족의 자제들이 퇴궐할 시각을 놓칠 때 잠을 자는 공간.”
사부작, 무성한 수풀을 밟으며 강서진이 전각 안에 들어섰다.
“처음 저 전각을 애용하던 이는 운표선이었어.”
검설린은 우두커니 선 채 전각의 이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멸망한 검씨 세가의 후손이 악천화의 이름을 얻고 저곳에 거주했지. 원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리했지.”
심장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거세져 서문윤은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의 시선을 따라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셋이서 이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훗날 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고 태자전하의 문객이 되어 이 전각에 머물렀어.”
사령전(四靈殿).
“장안사준은 이곳에서 서로 모여 미래를 의논했다.”
용, 영귀, 주작, 기린. 네 마리의 상서로운 동물을 뜻하는 사령(四靈). 그건 장안사준이라 불리던 황태자와 그 세 명의 벗들을 칭하는 별호이기도 했다.
바로 이들이 대담을 나누었던 전각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침묵 끝에 검설린이 냉소를 흘렸다.
“감성팔이를 하러 온 거냐?”
서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강서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이곳이 줄곧 버려졌던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다.”
그 순간 검설린이 얼굴을 슬쩍 일그러트렸다. 서문윤은 그가 강서진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노라 추측했다. 사실 그건 서문윤 또한 공감하는 마음이었다.
서문윤이 마주했던 강서진은 온화한 얼굴 뒤에 억제할 수 없는 광기를 숨겨놓은 인물이었다. 복수에 불타오르던 사내는 나라를 홀로 지탱해오던 재상을 화살로 쏴 죽였다.
온 세상을 증오하는 듯이 굴었던 사내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모든 원한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진실로 초연한 듯 가벼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체념일까? 아니면….’
서문윤은 아리송했다. 그리고 그건 검설린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무슨 꿍꿍이지?”
“하하.”
강서진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우리가 이런 사이였던가? 응? 섭섭하군.”
검설린은 입술을 꽉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강서진은 전각의 문을 열며 검설린을 돌아보고 있었다. 잠시간 망설이던 검설린이 전각 안으로, 사령전 안으로 들어섰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등 뒤를 따랐다.
“북란이 일어나고 난 후에 악천화는 군의로 종군을 했다.”
강서진은 담담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장안사준이 사령전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간 시점이었다. 애초에 황자라 할지라도 성인이 되고 나면 더 이상 궁에 머무르지 못하는 법.”
전각 안에 들어서고 서문윤은 마치 제가 미로 속을 헤매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상이 험악해지고 이 궁에 자주 들르지 못했어.”
아무리 버려진 전각이어도 동궁의 일부이다. 익위들은 후원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더위를 피해 담소를 나눌 뿐이었지 전각 내부에 발을 디디진 못했다.
그리고 처음 마주한 사령전의 내부는 생각보다 너무, 너무 잘 관리되어 있었다.
‘버려진 게 아니었… 아니었구나.’
그 순간 서문윤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곳을 일부러 빈 전각으로 남겨두었다.”
이청은은 전각을 방치한 게 아니었다.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이 묻히지 않게 하려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 이곳을 찾지 않은 거지.
그 때 강서진이 어느 방 앞에 서서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순간 서문윤이 슬쩍 몸을 틀어 검설린의 몸 너머 방 안을 확인하려 들었다. 검설린이 우뚝 서 있어 방 안이 어떠한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검설린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다가 문득 허탈한 웃음을 흘려 서문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의형?”
그리고 그는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강서진이 중얼거렸다.
“읽어봐.”
검설린은 거부했다.
“싫다.”
그러곤 덧붙였다.
“내가 왜?”
서문윤이 의형,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곤 고개를 돌렸다. 구깃해진 얼굴을 한 검설린이 원수가 된 벗을 격렬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를 악문 사내 앞에 강서진이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네 의무다.”
검설린은 비소를 흘리며 짤막한 말로 답변했다.
“내 죄를 상기시키려는 거냐?”
강서진은 그러나 그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검설린은 분노한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니, 사실 서문윤은 그것이 분노가 아닌 슬픔과 닮아 있다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단 사실 회한과 닮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검설린은 결국 서문윤의 말을 들었고 방 안으로 말없이 들어섰다.
그곳은 서재였다.
딱히 특별할 점이 없는 방 안에 단 하나 눈길이 가는 곳이 있었다.
머뭇거리는 서문윤의 귓가로 담담한 말이 내려앉았다.
“너도 읽어도 된다.”
서문윤이 잠시간 망설이다가 강서진이 겨냥한 물건이 있는 장소를 향해 다가갔다.
편지가 쌓여진 탁상이었다.
수상쩍게 관리된 전각. 겉은 무성한 수풀로 뒤덮여 익위들의 쉼터로 전락했음에도 내부는 먼지 하나 보이지 않게 관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장안사준이 몸을 웅크리며 꿈을 키우던 장소였다.
그들이 실패하기 전 희망을 키워나가던 기억이 남은 장소였다.
서문윤이 잠자코 편지를 쥐어 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펼쳐 글자를 읽어나갔다.
뭔가 중요한 것이 감춰져 있으리라 추측은 했다.
그러니까 태자에게 의미가 깊은 공간을 이청은이 이토록 잘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어…?’
그리하여 편지를 손에 쥐어 들 때까지 긴장을 삭이지 못했던 서문윤은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해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원망스러운 당신. 오늘도 이 금궐에서 평안하신가요?>
그는 얼이 나간 얼굴로 강서진과 검설린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뭔…?”
강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흉흉히 일그러진 검설린의 얼굴을 마주하며 흠칫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때 강서진이 중얼거렸다.
“네가 미처 불태우지 못했던 것들이다.”
검설린은 편지를 와락 구겼다. 그러곤 그것을 찢어버리려는 듯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한 채 잘게 몸을 떨며 그 자세 그대로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천천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이 감옥 같은 곳에서 오직 당신과 그대만이 사람이군요.>
“아.”
그제야 서문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연서를.”
고 귀비와 이청융이 주고받았던 편지였던 것이다.
침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팔기린은 태자와 귀비의 밀회를 깨닫고 증거를 없애려 했지.”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은 편지 하나를 손에 쥐어흔들며 강서진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나 태자는 그걸 두고 보지 못했다.”
그러곤 덧붙인 말이었다.
“청융의 팔에는 어느 순간부터 화상이 남아 있었어.”
그 말로 서문윤은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검설린은 무표정 얼굴로 강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목적을 말하라는 듯한 차가운 시선에 강서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청융은 생전에 이곳을 많이 들렀지.”
강서진은 다시 발걸음을 뗐다. 검설린은 그를 마치 짓씹을 듯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뗐다. 강서진이 향한 곳은 서재의 한켠이었다. 한가로이 서장에서 책을 빼내는 그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던 검설린이 이윽고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드드륵.
“청융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이리했을 거다.”
검설린이 그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서문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고 있었다.
‘어, 이건?’
강서진의 말이 이어져 나갔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야.”
분명히 이청융은 고 귀비를 사랑했다.
그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황궁에 비밀통로를 만들 만큼 말이다.
“뭐 해?”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떨며 검설린이 말없이 눈앞에 자리한 비밀통로를 응시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고 귀비를 빼어내기 위한 장소였다, 이곳은.
“들어와.”
야명주를 손에 든 채 읊조리고 있었다. 강서진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검설린이 이윽고 발걸음을 뗐다.
“어째서 고 귀비를 죽이지 않은 거지?”
비밀통로를 밟으며 검설린이 내뱉은 말이었다. 쉰 목소리에는 지독한 마음이 짙게 묻어 나와 있었다. 강서진이 그 순간 냉소했다.
“죽여?”
야명주를 든 채 어두컴컴한 비밀통로를 걷고 있었다. 하하, 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문득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녀를 죽일 자격이 있나.”
검설린은 비웃었다.
“네가 그걸 알 만한 이성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서문윤은 그들의 말에 끼어들지 못한 채 반보 뒤를 걷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의 대담을 지켜보는 와중이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강서진의 뜻 모를 말이 아리송하고, 또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의 낯선 모습에 아리송해하던 서문윤의 귓가에 이윽고 강서진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유언이 있었어.”
“뭐?”
강서진은 침묵 끝에 중얼거렸다.
“그녀를 막아달라고.”
검설린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둠 속에서 야명주의 빛을 받은 강서진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검설린은 그 순간 참지 못해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
낮게 울리는 경고성의 목소리에 강서진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대의를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려 했고, 이청융은 한 사람의 인생을 대의라 여겼지.”
눈을 뜬 강서진의 얼굴에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비밀통로의 끝에 이른 것이다. 그를 깨달은 검설린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 너머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허탈한 목소리가 검설린의 귓가에 문득 내려앉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결과적으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건 청융이었어.”
비밀통로의 끝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바위 위에 앉은 여인의 자태는 얼굴을 가리는 멱리로도 가려지지 않게 우아했다.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코의 점막을 찌르는 부드럽고 매혹적인 향 내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이었다.
멱리 속의 두 눈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여인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였으나, 그는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강서진과 검설린의 대화가 알려주는 바가 있다. 서문윤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검설린의 등을 바라보며 잘게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때 낭랑한 목소리가 비밀통로 안을 울렸다.
“장안성 내부 곳곳에 폭탄을 숨겨놓았습니다.”
뭐?
서문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고야 만다. 강서진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인이 바위에 앉은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멱리를 걷자 화용월태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세간의 소문처럼 요사스러운 용모는 절대 아니었다. 서문윤이 생각했던 것처럼 냉혹한 복수자의 얼굴도 결코 아니었다.
그녀의 용모는 몹시 가냘팠다.
마치 은을 얇게 녹여 세공을 한 것만 같이 섬세하면서도 또 위태로웠다. 창백한 얼굴은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원수라고 할 수 있음에도, 서문윤은 그녀를 마주한 순간 분노를 토해내지도 못한 채 얼이 나가고야 말았다.
여인은 너무나도 병약해 보였다. 그 얼굴에는 독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항복을 한 다음 터뜨릴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그녀의 혓바닥은 용모와 달리 서문윤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게 잔혹하긴 했다.
“그러지 않기로 했지만.”
담담한 말을 끝으로 비밀통로 안에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검설린이 무거운 눈으로 실패한 복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폭탄?’
서문윤이 순간 얼어붙었다.
‘화약이 있었다고?’
폭탄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것이 전략 병기로 사용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아니, 지금도 사실 그것의 운용은 쉽지 않았다. 지나친 파괴력이 그것을 군사기밀로 취급하게 만들었다. 국가에서 통제하는 염철에 비할 바 없이 화약의 거래는 엄격히 통제가 된다.
타인은 그 사용방법조차 잘 알지 못하는 병기를 서문윤이 잘 아는 까닭은 바로 그가 황실의 세력가였던 태자의 익위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태자와 그의 호위인 문천상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화탄, 폭약을 실험하는 장면을 몇 번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 위험성을 그리하여 잘 알았다.
그런 서문윤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귀비가 그런 기물을 손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귀비의 말대로라면 반란군은 궤멸할 뻔했다. 항복을 자처하여 군대를 장안성 안에 들어오게 한 후 폭탄을 한꺼번에 터뜨리면 다 끝나는 일이니까.
매복을 결정할 일도 없었다. 귀비가 장안성 성민들과 군병의 목숨을 걱정할 일이 없지 않은가? 그녀는 아마 백성들을 물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장안성의 병사들을 무장 해제시킨다면 의심하려야 의심할 건더기는 없었다.
그렇게 천년의 고도 장안은 폭탄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는 눈먼 화약에 의해서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참, 참사가 일어날 뻔했어.’
그를 생각하며 몸을 떨던 서문윤이 이윽고 몸을 멈칫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지?’
뒤늦게 이 사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귀비의 입에서 폭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 섬뜩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하물며 서문윤은 그녀의 원한을 알았다. 그녀가 세상에 가지고 있을 증오와 분노를 알고 있었다.
헌데 그녀는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제가 세운 참혹한 계획을 폭로하면서.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어디까지 공모한 거냐.”
감정이 들끓는 말에 답변한 것은 고 귀비가 아닌 강서진이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꼬박꼬박 화약을 모아왔다.”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폭죽놀이를 즐기겠다는 핑계로 그렇게 폭약을 빼돌려 장안성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화약을 모았더구나.”
그러곤 태연스레 덧붙인 말이었다.
“난 방관했을 뿐이야.”
검설린은 자연 분노했다. 폭발하는 살기와 함께 손이 뻗어져 나갔다.
“너 이 새끼…!”
장안사준이란 자들이 꾸었던 꿈이 있다. 아무리 몰락한 처지라 한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아니, 도리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기에 사수해야 하는 가치가 있지.
“그게 지금 내게 할 말이냐.”
“의형!”
비명이 울렸다.
서문윤이 다급한 얼굴로 검설린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억센 손에 멱살이 붙들린 채 강서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난 그녀를 증오하는 이상으로 그네들을 원망해.”
“뭐?”
“무고한 사람은 없지. 적어도 이 장안에서는.”
검설린의 입술이 다물렸다. 잘게 턱을 떠는 사내의 얼굴에는 무언의 긍정이 있었다. 음울함이 자리한 사내의 얼굴에 서문윤이 순간 다급하게 입술을 열었다.
“의형!”
그러나 강서진은 서문윤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에 앞서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내가 이 사실을 네게 말한 거지, 설린아.”
그것은 검설린의 입술을 다물게 한 말이었다. 설린아, 라고 말을 하는 강서진의 얼굴은 차분했다. 분노를 억누르던 검설린이 냉정을 찾게 한 것이었다. 다시금 차가워진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며 강서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복수를 포기했다는 사실 말이야.”
검설린은 아주 긴 시간 침묵했다. 그러곤 그 끝에 말을 내뱉었다.
“내게 왜 이러는 거지?”
억눌린 목소리였다.
“내게 뭘 원하는 거냐.”
강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 행동의 뜻이 무엇인지 서문윤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단지 추측하기를 이 상황에서 주역은 그가 아니란 사실을 알리는 것만 같다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명공.”
그래.
“오랜만입니다.”
주역은 따로 있었다.
서문윤이 숨을 들이켰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서문윤은 제가 마주하고 있는 자의 정체를 뒤늦게 실감할 수 있었다. 검설린의 등이 굳어져 있었다. 서문윤은 지금 이 자리가 아주 고역이었다.
사실은 여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제 인생을 망치기 직전까지 몰아놓은 귀비를 원망을 해야 할 터인데.
‘복잡해.’
그런데 더한 분노를 품었을 사내가 옆에 있으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겠다. 꼬이고 꼬인 관계 속에서 서문윤은 강서진이 한 행동을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 거다.
이 상황의 주역은 바로 그 둘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대치했다. 검설린은 통로의 어둠 속에서, 귀비는 야외의 빛 속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명암이 대비가 되고 있었다. 동시에 둘의 얼굴 또한 대비가 되고 있었다.
검설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귀비는 평온한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다.
기나긴 침묵이 흐르고 그 끝에 잠긴 목소리가 흘렀다.
“내게.”
처절한 목소리였다. 슬픔이 사무치는 목소리였다. 원망보다는 고통이 짙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순간 눈을 감았다.
“내게 보복했어야지.”
저 둘은 서로의 인생을 망가트렸다.
그녀가 이민족의 공주가 아닌 자국의 무고한 백성인 줄 알면서도 검설린은 부당함을 외면했다. 도망을 꾀하는 여인을 부족의 이름을 들먹여 막고 제 아비보다 나이가 많은 황제에게 던져주었다.
천하를 위해서.
대의 이름을 걸고 말이다.
“넌 내게 보복했어야지.”
그리하여 고 귀비는 다음 시대의 희망을 제 손으로 끝을 냈다. 인재들과 어울리며 험난한 세상을 구원하는 꿈을 꿨던 태자는 오명을 쓰고 젊은 나이에 스러졌다. 그와 함께 당의 미래는 끝이 난 것이다. 무수히 많은 무고한 인재가 처형대에서 스러졌다. 피비린내 나는 손으로 귀비는 제 인생을 망가트린 세상의 목을 졸랐다.
내 고통에 대가를 모두가 책임지라면서.
“넌 내게 보복했어야만 했어.”
누구의 잘못이 더 클까?
아니, 과연 여기서 누가 잘못을 하긴 한 걸까. 아니지, 잘못을 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그저 너무 많은 죄가 세상에 흘러넘쳐서 그 일이 작아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검설린 또한 그러했다. 너무 많은 죄악을 눈으로 보아서 고 귀비의 일이 너무 작아 보였다. 그렇게 무심코 저지른 죄의 대가를 처절히 지고 있었던 것이다.
“넌 내게.”
검설린이 하염없이 그 말만을 중얼거렸다.
“내게… 내게…….”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서문윤은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귓가에 들리는 흐느낌을 흘려 넘기려 들었다.
그 때 들려온 목소리였다.
“아니.”
낭랑한 목소리가 복도 안을 울렸다.
“나는 진정한 원수에게 보복을 했어야 했습니다.”
서문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귀비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건 미소였으나 처절함이 언뜻 묻어 나왔다. 검설린의 얼굴에 걸린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걸 몰라서 평생의 후회를 남겼지만.”
짓씹는 말을 내뱉던 귀비가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번에는 검설린이 무표정했고, 그녀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궁으로 돌아가지요.”
바위에서 일어선 귀비를 향해 그 때 말이 떨어졌다.
“널 위해서….”
말을 머뭇거리는 검설린에게 귀비는 순순히 긍정했다.
“예.”
귀비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태자가 한 사람을 위하여 하늘의 아들과 대적할 생각을 하였노라고. 대의도 천하도 물려놓고 오로지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위험을 질 생각을 했었노라고.
“날 위해서 그가 비밀통로를 만들었어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구하려고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덤덤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나는 거사를 일으켰지요.”
귀비가 일으킨 거사.
동궁사변.
그녀는 한 줄기 눈물을 뺨에 흘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참을 걸.”
흐느끼는 여인을 앞에 두고 검설린은 참혹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증오를 하는 듯, 혹은 연민을 하는 듯, 아니면 후회를 하는 듯 복잡한 눈으로 여인을 잠시간 내려다보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고 귀비는 한참을 흐느끼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 * *
동궁사변의 배후는 서문윤이 예상했던 대로 고 귀비였다. 아니, 사실 그건 검설린을 비롯한 고관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목숨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황제마저 그 사실을 짐작하면서 입술을 다물었다.
어째서냐고?
왜 자식의 결백을 알면서도 황제는 이청융에게 뒤집어씌워진 더러운 누명을 벗기지 않았냐고?
제 황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지.
같은 맥락으로 그는 동궁사변 때 태자당을 숙청하고 황권을 견고히 했다. 그러니까 동궁사변은 사실 귀비의 손을 빌린 황제의 작업이었다. 숙청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북란을 막은 공신이었고, 후세대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이었다.
나라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인재들.
그러나 기득권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 자들 말이다.
그때의 참상에 기가 질려 낙향한 서문린에게서 서문윤은 당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성도를 자욱하게 채웠다고 했다. 걸음을 계속 걷는데도 주변에 자리한 피로 물든 담벼락이 사라지지가 않았다고.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어.”
서문린이 후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라에는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는데.”
이건 황재천의 탄식.
“이 나라는 그때 이미 끝난 거다.”
이건 검설린의 냉소에 가득 찬 중얼거림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들의 불행과 고통의 시작에는 황제가 있었다. 탐욕스럽게 권좌를 지키려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나라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를 뒤늦게 깨닫고 서문윤이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천자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피를 묻히고도 끝이 좋을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스스로의 권좌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암약을 썼다. 허나 그는 대신하여 원한을 샀다. 당장에 서문윤 그 자신이 황제를 증오했다. 검설린은 말할 것도 없었고. 운표선이나 강서진, 고 귀비 같은 이들 또한 거론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심지어 황제의 총아였던 고우군마저 말년에는 참다못해 황제를 거스르고 반역을 도모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현재 천하의 인재였고 또 기득권이었다.
황제가 제 기반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결국엔 이렇게 반란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지.
“어, 어으으에.”
그러나 그가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서문윤이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귀비의 안내를 받아 천자가 있는 곳으로 향한 참이었다. 황제는 제 침전에 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건 짐작이 쉬이 가능한 것이었다. 천자는 언젠가부터 총애하는 귀비의 침전을 벗어나지 않았다. 권력에 집착이 많은 자라 조회는 꼬박꼬박 참석했던 황제는 어느 순간부터 유희에 몰두하여 조회를 빼먹었다. 은밀한 일은 운표선에게 맡기고 조정의 일은 고우군에게 맡겼다.
제 권력 기반을 다지는 일에 열정적이었던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향략에 빠져 게을러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동궁사변으로 역사상 유래할 바가 없이 견고하게 다져진 황권은 나뉘게 된 것이다.
고우군이 다른 마음을 품고, 운표선이 황제에게 대항할 뜻을 밝히고, 강서진이 고우군을 과감하게 살해한 배경에는 상실된 황제의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황제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는 요사스러운 귀비의 악명.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에, 에에.”
그녀는 정말 황제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었으니까.
황제는 금치산자가 되었다.
귀비의 궁전에 들어갔을 때 황제는 발가벗은 채 우리에 들어가 있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검설린과 서문윤 앞에 황제는 제 머리에서 이를 잡아 먹으며 연이은 충격을 주었다.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미치광이.
그건 바로 이 나라의 지엄한 지존이었다.
멀거니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귀비를 바라보았다. 말할 것도 없이 사건의 전후사정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건 확실한 귀비의 복수였다.
망연한 얼굴을 한 서문윤을 뒤로한 채 검설린이 문득 중얼거렸다.
“향을 썼나?”
귀비는 달콤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에 검설린은 잠시간 눈을 감았다가 이내 눈을 뜨곤 중얼거렸다.
“그래서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었군.”
그의 복수는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원수는 또 다른 원수의 손에 의해 처지가 당하고, 분노는 정처 없이 떠도는 부랑자처럼이 되어버렸다. 그를 알고 있기에 서문윤은 침묵을 택할 뿐이었다. 그는 검설린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조차 하지도 못했다.
“아니, 그는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지.”
담담한 강서진의 말에 검설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적막이 잠시간 이어졌다.
그 끝에 검설린이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할 작정인데.”
혼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를 끝으로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서문윤이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관계로 얽히고 얽힌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서문윤이 그 순간 눈치를 채고 눈을 감았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검설린이 세 명이었다.
먼저 적막을 깬 자는 귀비였다.
“이청은은 내게 편지와 통로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숨겼습니다.”
온화한 목소리였다.
“아마 내게 그 사실을 들켰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꺼린 거지요. 내 복수심이 어디로 튈지 염려했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절망한 내가 이번에야말로 정말 세상을 무너트리겠다 설치면 어찌할지. 죄책감에 시달려 혹여 속죄를 하겠다고 이 나라를 망하게 만들겠다 다짐을 하면 어찌할까.”
한숨을 내뱉으며 귀비는 덧붙였다.
“내 상태를 알기에 그는 이성적으로 행동한 겁니다.”
그리고 그 때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지.”
그건 살기 어린 목소리였다. 돌연 정색한 귀비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검설린의 얼굴이 굳어진 때였다.
창백한 얼굴로 귀비가 웃었다.
“내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가 나를 버렸다 생각해서 그리하였소. 허나 그는 실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는구려. 날 구원하려 했다고…. 그걸 안 내 마음이 어떨지 아시오?”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걸 모른 채 나는 근 10년을 고통받으며 살았어! 그가 세운 모든 것들을 무너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귀비가 헐떡거렸다.
“이청은은 어째서 그런 거지?”
서문윤이 그 순간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마마, 잠시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고통에 시달려 그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멈췄을 거야. 아니, 나는 모든 걸 돌이키려 노력했을 거야.”
그녀는 분루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늦었어.”
서문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돌아가기에 너무 늦어버린 겁니다. 명공.”
미치광이가 된 황제가 우리 속에서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평생을 살아온 여인이 흐느끼며 하염없이 말을 되뇌었다.
“시기를 놓쳐버렸어….”
3년.
단 3년 만이라도 일찍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여인을 세 사내는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귀비가 진정이 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그녀는 문득 차디찬 고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장안성 곳곳에 묻힌 폭탄은 터뜨리지 않겠어.”
눈물을 닦으며 귀비는 냉혹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는 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지.”
서문윤의 눈이 크게 뜨인 순간이었다. 검설린이 얼굴을 굳히고, 그 순간 담담히 말을 듣고 있던 강서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청은은 죽어야지.”
그게 그들의 합의점이었던 것이다.
이청은과 이들의 감정의 골은 손을 쓸 수 없이 깊어졌다. 귀비는 이청융을 죽였고 강서진은 이청은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강서진은 장안을 전복했고 귀비는 그와 손을 잡아 궁궐 안의 권력을 손안에 움켜쥐어 그를 보조했다.
그리고 결국 황제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어찌 되었건 이청은의 아버지를 말이지.
동서대란으로 유학이 실생활에 퍼진 시점이었다. 효는 충보다 중요한 가치. 이청은은 그래서 아버지에게 칼날을 들이댈 때 조정의 간신배를 들먹거리고 강서진이 그를 인질로 삼았다는 사실을 지금껏 누누이 강조해왔다. 그 말인즉슨 이청은은 강서진을 결코 사면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강서진과 이청은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귀비는 말할 것도 없이 거열형 감이고.
“자고로 군주의 허물을 여인과 간신배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이 땅의 전통이었지.”
냉소를 짓는 검설린과 달리 귀비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의 눈에 그녀는 이미 자포자기한 듯 보였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그냥 죽음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강서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의 발언은 이러했다.
“살아갈 생각은 품지 않는다. 복수는 완성하고 갈 거야.”
요컨대 혼자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새 시대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필요 없지. 그리고 황제나 고우군, 이청은 같은 사람도….”
구태를 처리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서진은 검설린을 황제로 만들기를 포기했다. 검설린을 비롯한 장안사준이 저지른 악행. 그것의 결과물이 동궁사변이란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분노는 누그러진 후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이 보였던 추악한 모습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강서진은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미래는 이제 검설린을 비롯한 새 사람들의 몫, 선택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를 위해 강서진은 새 시대를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그게 과거를 반성하고 제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속죄라면서.
“자격이 없는 자는 죽어야지.”
그 말이 끝나고 서문윤이 잠자코 귀비와 강서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제 눈으로는…… 이렇게 가지 않아도 될 사안으로 보였습니다.”
힘겨운 목소리였다. 강서진이 피식 웃었다. 귀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문윤이 무거운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보기엔 두 분이 살 방도가 있는데도 목숨을 포기하신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요란하게 일처리를 했으니 그들은 이제 강서진과 사생결단의 관계였다. 타협이란 없는 것이다. 비록 사령당의 일이 그들의 광기를 어느 정도 다스려주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그들을 폭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귀비는 마굴이라는 황성에서 정점으로 군림하던 여인이다. 강서진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력으로 고우군을 견제하던 위인이었고. 그런 그들이 이런 방식이 아니라 한들 복수를 못 할 리가 없었다. 더욱 세련된 방법이 있을 터였다. 스스로의 목숨을 구명하면서도 복수를 완수해낼 수 있는 정치적인 술수를 그들은 갖추고 있었다.
헌데 그러지 않았구나. 서문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속마음이 절로 읽히는 기분이었다.
“오명을 짊어지고 사라질 생각이……셨군요.”
힘겨운 목소리에 답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서문윤이 작은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구겼다.
“왜 이렇게 어리석게 구셨습니까?”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때까지 침묵하던 검설린이 입술을 열어 답했다.
“복수에는 원래 눈이 없지.”
냉소적인 말에 동의하듯 귀비는 맑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녀에게 분노조차 생기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제 원수였음에도.
‘이런 상황에서 동정심이 드는 내가 미친 건가?’
그 순간 서문윤이 눈을 스륵 감았다. 그는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두 눈을 뜨고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여기 의형이 세 명이나 앉아 있군요.”
검설린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검설린은 제안을 거부했다. 그 제안이 합당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의 드높은 자존심이 그들과 영합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아무리 제 인생이 막나가는 작자라 하지만 복수심에 미친 악귀들 두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생각은 없다 했다. 피가 묻은 더러운 손을 잡을 생각도.
그리고 그에 대한 강서진의 깔끔한 답변이었다.
“그래? 그럼 죽어야겠네.”
“헉?”
서문윤은 기함했으나 곧 그것이 강서진의 살벌한 농담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병사를 불러 서문윤과 검설린을 감옥에 가두라 명했던 것이다.
“거기 갇혀서 좀 더 생각해봐.”
싱긋 웃는 말을 끝으로 서문윤은 그렇게 검설린과 함께 병사들의 손에 질질 이끌려 방을 빠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 * *
똑,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이 감옥 한가운데에 있었다. 황궁에 빈 방도 많은데, 강서진은 고생을 하라면서 무려 금군에서 죄인을 고신할 때 쓰는 지하감옥을 내어주었다. 당연히 실사용한 흔적이 많은 방이었다. 섬뜩한 도구들이 아직 핏자국을 묻힌 채 널려 있는데, 서문윤은 살벌함보다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벽에 기대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아…… 오랜만이네요.”
파나립 박사 사건 때, 지역 유지와의 문제로 감옥에 갇히고 난 이후 처음이다. 신기해하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이 눈을 감은 자세 그대로 중얼거렸다.
“태평하구나.”
“경칠승인가 경팔승인가 하는 노인 때 이후로 처음이지요?”
검설린이 눈을 뜨고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짐승의 것 같은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놀러 왔느냐.”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내심 찔려 중얼거렸다.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니 좀 봐주세요.”
그러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검설린의 매정한 타박에 입이 다물린 서문윤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검설린 또한 말이 많은 사내는 아닌지라 둘은 묵상 아닌 묵상의 시간을 길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문윤이었다.
“태자께…… 제가 모르는 허물이 있었습니까?”
그의 옆에서 벽에 기대앉아 있던 검설린이 눈을 뜨고 서문윤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는 상념에 빠져 시선을 느끼지도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순간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렀다.
허무함이 스치는 얼굴로 검설린이 입술을 열었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해?”
서문윤이 그제야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려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어째서인지 검설린의 얼굴이 온유하게 변해 있던 탓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서문윤이 얼버무린다.
“어….”
창살 사이로 스며든 푸른 달빛.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사내의 얼굴과 마주하고 그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야 말았던 것이다.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서문윤이 정신을 차리고 푸르르 몸을 떨었다.
그 때에 이르러서 검설린의 얼굴은 다시 냉랭한 것으로 변모한 후였다. 조금의 아쉬움을 삼키며 서문윤이 머뭇머뭇 말을 내뱉었다.
“동궁사변 때 당시 태자전하를 버리거나 외면한 이들이 한둘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냉정히 말을 하자면…그건 의형도 마찬가지였는데.”
서문윤이 그 대목에 이르러 숨을 들이 삼키고 검설린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무료한 표정을 지을 뿐 분노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안도한 서문윤이 다시금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헌데 개중에서 지금의 태자전하를 유독 증오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존재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왜 다들 전하를 저리도 싫어한단 말입니까.”
검설린은 그에 짤막히 답했다.
“황제를 가장 많이 닮았거든.”
“아.”
“황제가 젊었을 때를 우리는 언뜻 본 적이 있지. 소년 시절부터 정계의 중심에 있었으니까.”
검설린의 말은 서문윤의 입술을 다물게 만들기 충분했다.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스쳤다.
“아, 닮아서…….”
그럼 어쩔 수가 없는 건데…… 조금 너무하다.
흐릿한 그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은 듯 검설린은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청융과 이청은이 닮았다면 그들이 이렇게까지 사생결단을 내자고 달려들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불운하게도 둘은 제 부모 한쪽의 피를 각각 너무나도 진하게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의미가 아니지.”
“무슨….”
“핏줄로 이어지는 죄업을 상기시킨단 말이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원수는 가문을 끊는 법이다. 불행히도 그 원수가 옛 친구의 가족이라 망설이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복수의 종지부는 멸문이야.”
살벌한 말에 서문윤이 숨을 멈추고야 만다.
“하물며 악업을 쌓은 가문이 하늘의 자손으로 칭송받으며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 따위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으냐?”
“…….”
“그래서 역모를 저지른 것이 아니야? 황제와 그 자손이 꼴도 보기 싫어서.”
검설린의 얼굴에는 조소가 감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닭과 달걀의 문제지. 상황이 먼저이냐. 감정이 문제이냐. 어떤 상황 때문에 감정이 생긴 것인가. 어떤 감정 때문에 상황이 생긴 것인가. 어차피 그네 두 무리는 태자와 반역 도당이라는 입장에서 서로를 적대할 수밖에 없었어. 타협은 없다.”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조금은 슬퍼진 얼굴로 그가 침묵 끝에 말을 내뱉었다.
“협상은 안 되는….”
“하하!”
미련이 남은 말에 돌아온 것은 의형의 광소였다. 서문윤이 입술을 다물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검설린이 비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협상 같은 개소리를.”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 상황은 타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자전하를 비롯한 구태들을 모조리 폭사시키겠다는데…….”
그리고 그 대목에 이르러서 서문윤은 뒤늦게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저희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환담을 나눌 때가 아니지 않는가?
서문윤은 당황하여 검설린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답변은 심드렁할 뿐이었다.
“어떻게?”
“어, 음…?”
그런 답변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서문윤이 더듬거리며 말을 흘렸다.
“무, 무예로?”
검설린은 몹시 냉랭했다.
“응원하겠다.”
서문윤을 울컥하게 만든 말이었다.
“조금 도와주시지요? 이건 남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러곤 발끈한 서문윤은 검설린의 팔뚝을 잡아당겨 항의의 말을 내뱉었다. 지금 감옥에 잡힌 게 저 혼자뿐인가? 똑같이 위기를 맞이한 걸 그는 모른단 말인가. 무언가의 부당함을 느낀 서문윤이 언성을 높여 항의를 하고야 만다.
“지금 이렇게 있다가는 당의 미래가……. 설마?”
그러다가 서문윤은 문득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두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검설린이 미묘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제 팔뚝을 잡아 흔드는 자세 그대로 굳은 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검설린은 이어질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설마 의형. 손을 빌려서 원한을 풀 생각은…?”
역시나였다.
검설린이 침착한 목소리로 생각해놓은 말을 흘렸다.
“고맙구나.”
서문윤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예?”
예상치 못한 말에 그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이어졌다.
“나를 맨몸으로 어림군 7천의 군사들을 뚫고 황궁 심처를 탈출할 수 있는 만부부당의 무재로 생각해주어서.”
서문윤이 눈치 빠른 멍청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음울한 사내의 시선 아래 서문윤은 침묵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못 하십니까?”
검설린의 눈이 감겼다.
“못 하면 안 되는 거였나?”
못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서문윤은 검설린의 건조한 목소리에서 무언가의 체념을 느낄 수 있었다. 제 말에 골머리를 앓는 듯 눈을 감아 시선마저 피한 검설린은, 정말로 상황을 타파해 나갈 방도를 모르는 듯했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복잡 미묘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소정의 시간이 흘러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두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읊조렸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서문윤을 반문케 한 말이었다.
“예?”
검설린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족제비 새끼를 치울 수 있으면 가장 좋은 길이긴 하지.”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검설린은 그의 복잡한 심경이 묻어 나오는 눈과 마주하고 냉랭히 말을 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웬만하면 네 말을 따르려 하니. 내가 원한이나 나 자신의 신념보다 너를 우선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냐.”
그것은 서문윤을 놀라게 한 말이었다.
“아…….”
조금 감동했다.
그리고 당황했고.
검설린은 서문윤의 흔들리는 시선 앞에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평온한 호수와 같은 얼굴. 그 얼굴을 몰래 훔쳐보던 서문윤은 그리고 그 순간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검설린이 강서진과 귀비와 재회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
검설린은 평소에도 다혈질이었으나 유독 강서진과 귀비와 관련된 일에 민감했다. 그 둘을 사실상 원수로 생각하고 적대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검설린은, 귀비와 재회할 때 잠깐을 빼놓고 지금까지 기이하리 만치 침착한 태도로 침묵하고 있었다.
“의형, 또 뭔가 꾸미세요…?”
서문윤이 문득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말을 내뱉고도 바로 후회한 일이었다. 검설린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정을 예상했던 서문윤은 기이한 검설린의 시선에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어, 진짜 뭐 꾸미는 거 아니야…?
미심쩍어 하는 시선 앞에 검설린이 허탈히 웃었다.
“넌 정말 잊고 있었구나.”
그리고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설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제가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 있었다.
요컨대 검설린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좋은 패는 서문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패를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강서진은 그들이 갇힌 지 하루가 지난 시점에 감옥을 찾아왔다.
“어때, 좀 고생하고 반성했어?”
“…….”
“내게 협력할 생각이 이제 좀 드나.”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뱉는 말에 서문윤이 떨떠름히 답변했다.
“고생을 겪기에는 주어진 하루의 시간이 짧지 않나요?”
“그럼 고문이라도 할까?”
서문윤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스스로의 혓바닥의 방종맞음을 자책하며 그는 강서진의 시선을 피하려 들었다. 강서진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어쩌겠어? 지금이 전쟁 중인데. 게다가 일군 총사령관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인데 일각이 아깝지 않겠는가?”
예전의 강서진은 웃어도 독란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 표리부동한 사람이었는데 어쩐지 장안성에서 재회한 이후로는 마치 다른 사람과 같았다.
친근한 태도로 말을 잇는 강서진에 서문윤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야 만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검설린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흰소리 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라!”
그건 정말 서문윤이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든 말이었다.
뒷짐을 진 사내는 잠시간 창살 안의 사내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선명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내 일을 도우면 백련초를 주겠다.”
검설린은 비웃었다.
“그냥 비열하게 나가는구나.”
강서진은 그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변했다.
“칭찬 고맙군.”
오로지 서문윤만이 뒤늦게 놓쳤던 사실을 깨닫고 창살을 손에 거머쥔 채 경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 어어.”
강서진이 고개를 돌려 새파랗게 질린 청년 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설린 또한 시선을 돌려 잘게 몸을 떠는 서문윤을 응시했다.
서문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침묵 끝에 검설린은 입술을 열었다.
“약속 지켜라.”
서문윤이 두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의형!!”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강서진이 사라지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가 또다시 이뤄졌던 것이다. 서문윤은 제 몸보다 다른 것을 생각하는 자였고, 검설린은 그런 서문윤을 배제한 채 일을 제멋대로 결정하는 자였다. 서문윤은 그런 검설린의 모습을 질색했고.
그리하여 또다시 서문윤이 한바탕 분노 섞인 항의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의 반응을 미리 예상했던 검설린은 무심한 얼굴로 그의 말을 흘려 넘기다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서문윤을 멍하게 만든 답변이었다.
“예?”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냐.”
뭐 어쩌자니? 할 말을 잃은 서문윤이 입술을 닫고 침묵을 택한다. 검설린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년화가 없으면 환희향 해약도 없다.”
“…….”
“없이 살 거야?”
무심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 몸으로?”
서문윤은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주먹 쥔 그의 손이 축 늘어지고야 만다. 그가 입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말에는 해답이 없었으니까. 아니, 사실은 해답이 있긴 했다.
이 상황에서 도저히 입술 밖으로 못 내놓는 해답이.
서문윤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호흡을 고르려는 행위였으나 어쩔 수 없이 숨은 흐트러지고야 말았다. 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해약 없이 산다면….’
단 하나밖에 방도가 없지.
서문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깊은 우물 같은 눈이 수면 위에 서문윤의 형상을 담고 있었다. 흡입력이 있는 눈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 서문윤이 잘게 몸을 떨 무렵 그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니면 죽을 거냐?”
서문윤은 망설이며 입술을 열었으나 결국 또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이를 악물며 그가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냉소가 흘렀다. 검설린은 감옥 벽에 기대어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치 끝에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죽을 거라면 방관할 수 없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는 말이었다.
“너와 달리 나는 천하보다 네놈의 안위가 소중하니까. 결정권을 쥔 게 나이니 내 맘대로 할 거다.”
서문윤은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검설린의 부담스러운 눈과 마주하며 그의 마음을 읽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 순간 그의 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침음을 흘렸던 것이다.
그는 진심이다.
그는 정녕 저를 위해서 천하의 안위를 등한시하고 황태자를 폭사하는 미친 계획에 찬동할 생각이었다. 강서진과 영합할 생각이었다.
천하보다 나를 중요시 여긴다.
그 말이 감동이어야만 하는데, 어쩐지 서문윤의 마음은 복잡할 뿐이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눈과 마주하던 서문윤이 이윽고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의형, 하나 물어볼 것 있어요.”
검설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며 서문윤이 조용히 속삭였다.
“저랑 뭘 하고 싶은 거죠?”
그건 감옥 안을 울리는 말이었다. 검설린의 눈썹이 산처럼 꺾였다. 서문윤의 얼굴은 어느새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분한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검설린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음울한 목소리였다.
“너는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지?”
서문윤은 망설임 없이 답변했다.
“저는 의형이랑 사랑을 하고 싶어요. 평생 동안요.”
감옥 안에 정적을 자아낸 답변이었다. 어둠 속에 불빛 같은 눈이 흔들렸다. 서문윤은 안력이 높지 않아 어둠 속에서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는 알 것 같았다.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말이다.
서문윤이 잠자코 상념에 빠졌다.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기억의 바구니에서 그것을 하나둘 끄집어내곤 조각을 끼워 맞췄다. 어느 순간 옅은 미소가 입에 걸렸다.
침묵 끝에 조용한 목소리가 흘렀다.
“의형을 연모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은 아시잖아요.”
“그래.”
회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사내가 덧붙였다.
“화가 났지.”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검설린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서문윤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기셨는데요?”
재미없는 사내 검설린은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
“넌 내 니취의 별명만을 알 때부터 날 그리 보았다. 내가 추하다고 생각할 때부터.”
농담에 미간을 찌푸리며 정색하는 검설린을 서문윤이 지그시 응시했다. 한 단어가 신경이 쓰인다. 그가 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
서문윤이 그러했듯 검설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검설린이 침묵 끝에 중얼거렸다.
“날 원하는 얼굴로.”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끔찍했지.”
사람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서문윤이 투덜거렸다.
“너무하군요.”
검설린은 무뚝뚝한 얼굴로 설명했다.
“네가 끔찍한 게 아니라 내가 끔찍한 거다. 너도 알 텐데? 난 그때 지금보다 더 망가져 있었던 걸.”
“네. 그래서 의형은 본인으로 인해 인생이 망할 제가 불쌍해서 절 끔찍이도 고생시켰죠. 지금도 시키고 있고요.”
“실제로 어느 정도 비슷하게 흘러갔지 않나? 네 몸을 생각해.”
“계속 그 일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나요?”
이어진 말에 검설린이 멈칫했다.
“부채감이 우리 관계를 설명하는 전부인가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서문윤이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의형은 복면 써도 잘생겼어요.”
검설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니취란 별명이 붙었는지 모를 만큼. 아니, 알고 있으니까 설명은 하지 않아도 돼요. 선표 공, 아니 운 공자님이 퍼트린 소문이 아닙니까?”
“그래, 너도 철썩같이 믿고 있던 소문이었지? 그런데 도대체 왜 그따위 눈으로 날 보았던 거냐.”
“의형은 복면 써도 충분히 멋있었다니까요.”
그 순간 서문윤이 조용히 웃었다.
“부채감만으로 사람을 살린 게 아니잖습니까. 태자전하의 유언을 따라서 산 게 아니잖아요.”
“…….”
“사람을 살리던 것에 열중하고 계셨어요.”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과거를 떠올리며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때 당신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고 구제불능이라 말을 하지만, 그건 우리의 관계에 한정되어서 그런 거고 의형은 객관적으로 선인이었어요. 당신이 몇 사람의 생명을 살린 줄 아십니까?”
“몰라.”
“셀 수도 없이 많이 살렸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꿨어요.”
검설린은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서문윤이 이윽고 덧붙였다.
“당신의 선한 마음에 이끌렸습니다. 불타오르는 열정에 이끌렸어요. 뒤늦게 당신이 목적의식을 잃은 채 방랑하고 있단 사실을 알았지만……제 눈엔 당신이 별과 같았어요. 의형.”
그래, 그때는 정말 인간 같지 않았다. 북성신의라는 말을 별호가 아닌 진실로 해석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검설린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경애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사람이 된 후 그런 마음을 잊고 있었으나 한때 서문윤은 그를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깜빡 잊었던 사실인데 저는 당신을 동경하고 있었어요. 닮고 싶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래, 동경하고 있었다.
제법 감동스러운 그의 고백은 그러나 검설린을 질색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네가 미쳤다는 거다.”
헛웃음을 흘리며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덧붙여 말했다.
“이제는 동경은 안 해요. 당신을 우러러보지 않습니다.”
고개를 돌려 검설린의 눈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일그러져 불편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에 불안을 언뜻 느끼는 듯했다.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다만 동등하게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말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생각하고 있고요.”
그에게 지금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뭘 원하냐고?
서문윤이 조용히 웃었다. 그런 그에 검설린은 조소로 화답했다.
“그래? 유감이군.”
서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한숨을 내뱉으며 그는 그의 고통스러운 연애기를 회고했다. 정말로 힘든 과정이었어.
서문윤이 긴 시간 침묵을 지켰다. 황하에서 처음 그를 마주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말로 힘들고 유난했다. 서문윤은 노력하고, 또 노력했고. 그 노력은 결실을 맺기도 했고 가끔은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노력의 결과를 마주하려 한다.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끈질긴 내 사랑 고백에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을 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문윤은 이제 검설린에게 화를 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설득할 시간은 이미 지났단 걸 깨달았다. 그건 장한성에서 해야 할 일이었지. 성문에 들어오기 전에. 서로가 서로의 밑바닥을 샅샅이 들여다보기 전에 해야 할 일이었지.
“뭐?”
이제 남은 건 결과뿐이었던 것이다.
“의형.”
숨을 들이켜며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저를 사랑하세요?”
선명한 말이 감옥에 울렸다.
정적이 잠시간 이어졌다.
침묵 끝에 서문윤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장한성에서 연인이 되어주겠다는 확언을 듣고도 나는 그 말을 들은 적이 없군요.”
쓸쓸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었다.
“의형은 저를 그냥 동생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았어요. 비단 무뚝뚝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연인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하군요.”
검설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건.”
서문윤은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차분한 말이 이어졌다.
“저는 의형을 사랑하고 있어요. 알잖습니까?”
“…….”
“그래서 지금껏 당신을 따라온 겁니다. 당신을 계속 믿고 신뢰를 주었습니다. 내게는 당신과 함께할 미래가 있기에.”
서문윤이 검설린의 눈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두 눈은 마음의 창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서문윤의 얼굴 위에 스친다.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생각을 해보면 우리 관계는 당신이 회피하고 내가 다가가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문을 열려는 내 끈질긴 노력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는 충분히 한 것 같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한 말이 감옥을 울렸다.
“이제는 저는 당신을 설득하지 않을 겁니다.”
검설린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는 눈은 심유히 가라앉아 있었다.
“다만 묻겠습니다.”
“…….”
“이 상황에서 저랑 뭘 하고 싶은 건가요?”
“…….”
“절 위해 희생을 하고 싶은 건가요? 아님 책임을 지고 싶은 건가요?”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았다.
“저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몸을 섞는 동생으로 대하고 있나요? 미안함이 많은 친인으로 생각을 하나요? 아니면 후배의 아들….”
“내가 널 어찌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냐.”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득 서문윤의 말을 끊었다. 말을 잇던 서문윤의 입술이 꾹 닫힌 순간이었다. 유리알 같은 눈이 검설린을 빤히 담았다. 검설린의 얼굴은 흉흉히 일그러져 그 위에 격정의 기색을 담고 있었다.
서문윤을 지그시 노려보던 사내가 어느 순간 돌연 눈을 감고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널 서문린의 아들로만 생각했으면, 미안함이 많은 친인으로만 생각했으면….”
서문윤의 두 눈을 흔들리게 한 말이었다.
“…그따위 꿈은 꾸지 않았어.”
심장이 뛰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을 받으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했다. 고통이 묻어 나오는 얼굴을 손으로 쥐어짜며 사내는 신음을 흘렸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네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힘겨운 말이었다.
“네가 나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
“네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검설린은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정착해서.”
서문윤은 그 말의 무게를 잘 알았다. 고향을 잃고 방랑한 사내에게 정착이란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서문윤의 목울대가 꿈틀거리고, 눈이 감겼다. 잠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골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도 좋겠지. 공명을 버리고 한순간의 행복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도 좋아.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큰 의미가 있는 거다. 아니면 이청은의 말을 들어서 출세를 꿈꾸는 것도 좋지. 너 또한 그것을 원하지 않았더냐?”
서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전 잘 모르겠어요.”
대수롭지 않은 척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야 말았다. 코끝이 시큰해지고야 만다.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길고 험한 시간의 끝이다. 노력을 확인받는 순간이 떨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은 두려웠다. 결국 검설린이 지금껏 있었던 무수히 많은 나날처럼 마음의 문을 닫을까 두려웠다. 또다시 회피를 할까 봐 두려웠다.
검설린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잇고 있었다.
“난 네가, 네가, 내가 없더라도. 아니….”
잠시간 방황하던 말이 갈래를 찾았다. 침묵 끝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네가 어찌 되었건 네 운명을 선택했으면 좋겠어.”
서문윤은 결국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야 말았다.
“의형.”
“그런 마음이다.”
“의형, 저는….”
“그게 날 지배하는 단 한 가지 생각이야.”
서문윤이 스륵 눈을 감았다. 물기가 흐르는 뺨에 이윽고 딱딱한 감촉이 닿았다. 눈물을 닦는 손을 느끼며 그가 숨을 헐떡거렸다.
“알겠어요. 의형의 마음을 알겠어요.”
아집의 이유를 이해한다. 하지만 서문윤은 더 이상 이해만으로 끝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돌려받고 싶어요. 저랑 의형이 함께했던 무수한 나날들의 결과를 마주하고 싶어요.”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를 애써 선명하게 만들려 노력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을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검설린의 손이 그의 눈을 덮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안정을 느끼며 서문윤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을 내뱉는다.
“대신 믿어보려 해요.”
검설린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그저 서문윤의 눈을 가린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제 믿음을 돌려주세요, 의형. 그 때처럼 저를 배신하지 말아줘요.”
가늘게 몸을 떨며 서문윤이 덧붙였다.
“절 기만했던 수많은 나날처럼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
“벗어나려 노력해주십시오.”
“……”
“제게 완전히 다가와주세요.”
서문윤이 눈을 가린 손을 부여잡았다. 검설린의 손은 순순히 그의 손길을 따랐다. 시야가 돌아오고 푸른 달빛 사이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설린. 불쌍한 사내. 경애하는 의형. 연모하는 자.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이 이윽고 입술을 열었다.
“의형. 이제 당신의 마음을 말해주세요.”
“…….”
“저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검설린이 눈을 감았다. 그는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 다시 눈을 떴다.
그러곤 입술을 열어 내뱉은 말은.
“널 사랑하지 않는다.”
서문윤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푹 숙이는 서문윤을 검설린은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다 틀렸네.
‘나 뭐 한 거지.’
서문윤은 우울해했다. 딱 보아도 검은 기운을 뿜는 그에게 검설린은 차마 말을 걸지 못한 채 감옥 한켠에 콕 처박혀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 또한 지금 제정신을 찾지 못하는 상태였다. 넋을 잃고 벽을 바라보는 검설린의 얼굴은 실로 음울했다. 어찌 보면 서문윤보다 훨씬 더.
단지 그 상태가 달랐을 뿐이었다. 서문윤이 누가 봐도 ‘아, 얘 상태 장난 아니네?’라고 느껴질 만큼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뿜어낸다면 검설린은 정반대로 속이 텅 빈 것 같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것이었다.
불편한 시간이 흘렀다.
그를 끝낸 것은 바로 지하감옥에 느긋하게 들어오던 강서진이었다.
“그럼 합의는 됐…… 왜 이래?”
두 사람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려 강서진을 바라보았다.
텅 빈 껍질 같은 두 눈과 마주하고 천하의 강서진은 흠칫 놀라 몸을 떨어야만 했다. 항상 여유로웠던 사내는 시체와 같은 얼굴들과 마주하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결론은 어떤데?”
뜻밖에도 입술을 연 것은 서문윤이었다.
“저희가 협조해서 태자를 함정으로 유인하면 그를 폭사시킬 겁니까?”
강서진은 조금은 당황하여 말을 망설이고야 말았다. 뜻하지 않게 서문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내심 당황한 것이다. 침묵 끝에 강서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해를 줄이려면 협조하는 편이 좋을 거다.”
“그러고 나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서문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결국 토사구팽 신세가 아닙니까. 의형이 무명이어도 문제가 되는 판국에 하물며 그의 위치는 높습니다.”
정명공 악천화는 토벌군의 부사령관이지만 사실상 토벌군을 이끄는 위치이다. 게다가 이 반정이 일어난 과정에서 악천화의 역할이 지나치게 컸다. 그가 억울하게 소환명령을 받는 것에 민심이 폭발하지 않았던가?
사실상 그가 명분이요, 그가 구심점이요, 그가 실세이니, 결코 이 일의 파장이 적지는 않으리라.
“명성을 망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강서진은 그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 명성을 망치는 것만 문제야.”
서문윤의 미간을 찌푸린 말이었다.
“무슨…?”
강서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청은이 죽으면 이씨 황가는 끝이 나지. 그럼 세력이 가장 큰 일파는 누구의 것이지?”
서문윤은 그 순간 입술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창백한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흘러 잠긴 목소리가 그의 입술 밖으로 흘렀다.
“의형은 황제가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더 주목받겠지. 네 의형이 선택하는 자가 황위에 오를 수가 있으니.”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야 말았다.
“아, 이럴 수가!”
그제야 강서진이 말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한 것이다. 아찔함을 삼킨 채 서문윤이 넋을 잃고 강서진을 응시했다.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모략가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옥 안에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지금 그에겐 오히려 오명이 도움이 될 거다.”
황가가 민심을 잃었기에 검설린이 그들의 맥을 끊어도 백성들의 지지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유자들은 신하가 군주를 죽이고, 심지어 대를 이을 자손마저 끊은 것을 비난할 것이 뻔했다. 군주에게는 덕이 필요하다. 검설린이 폐주를 죽인다면 중원의 명사(名士)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 뻔했다.
다만 인덕보다야 의리를 중시하는 무장들은 경우가 다르지. 그들은 황재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일파가 악천화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검설린은 황제를 죽임으로써 이인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황위에 도전은 하지 못하면서, 무력을 지니고 있다.
그를 회유하려는 야심가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검설린의 명성은 어찌 되는가?
창백한 얼굴로 서문윤이 소리쳤다.
“허나!”
그리고 그 때 침묵하던 검설린이 입술을 떼고 고저 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오명을 지고 살아가는 건 익숙하다.”
냉소와 함께 흐른 말이었다.
“네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
입술을 열려던 서문윤이 그 순간 몸을 멈칫하고야 만다. 어둑한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드물게 냉랭한 미소에 강서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군요.”
그러곤 서문윤은 빠르게 몸을 돌려 강서진을 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협력하겠습니다.”
검설린의 얼굴을 순간 일그러트린 말이었다.
“뭐?”
“마지막으로 의형께 협력하지요. 어차피 제 일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빚을 지기 싫습니다.”
검설린이 그를 흉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서문윤은 침착한 얼굴로 날카로운 시선을 무시할 뿐이었다. 언제 검설린을 두려워했냐는 듯이 그야말로 억울한 상황에 처한 충신 같은 기세를 내뿜는 서문윤에 검설린이 헛웃음을 흘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본 이는 강서진이었다.
갑작스러운 서문윤의 태도 변화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강서진이 시선을 받고 “으응?” 소리를 흘렸다. 그 때 들려온 말이었다.
“속지 마라, 강서진. 저놈은 분명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다. 저럴 때의 서문윤은 항상 사고를 치지.”
서문윤을 발끈하게 만든 말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음험한 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음험?”
“깊은 심계를 감추고 항상 저를 엿 먹인 당신을….”
“엿?”
검설린이 짧게 웃었다.
“이제 막나가겠다는 거냐?”
날카로운 공기 속에서 강서진이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니네 싸웠니?”
두 사람이 한꺼번에 고개를 홱 돌려 강서진을 흉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기세에 강서진은 할 말을 잃은 채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음. 으음.”
어쩐지 분위기가 살벌하더라…. 여유로운 기세를 잃어버린 강서진이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곤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오랜 벗과는 그래도 같이 보아온 세월이 있다. 그가 지금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충격에 빠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더 자극을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검설린의 상태에 강서진은 그리하여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던 것이었다.
“일단 장소를 옮기지.”
침착한 시선이 서문윤을 쓸었다 .
꿍꿍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 뒤에 가서 판단할 일이다.
< 11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