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망향(望鄕)(8)
서문윤이 가장 화가 났던 건, 그가 항상 도움이 필요할 때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힘든 상황이 있어도 그는 속으로 삭이며 홀로 헤쳐 나갔고, 그 과정 속에서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모든 일의 결과를 홀로 감내하려 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았다.
그게 화가 나서,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왜 모르시나요.’
황하에 빠진 저를, 무수히 많은 사람을 구해냈으면서, 막상 스스로는 구원하지 못하는 그 사내가 가련하다.
그 감정은 서문윤의 안에서 쌓이고 쌓였고, 그래서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향한 손길마저 거부하고 거친 물살에 홀로 헤엄을 치는 그에게 화가 나, 그래서 그랬던 것이다. 몸담을 곳, 마음을 지탱할 곳 없이 홀로 사는 그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그의 방황을 억지로 끝내고 싶었다. 그처럼 독단적인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 * *
지독한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약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시야가 연기로 가득 찬 걸까? 아니면 눈에 문제가 생긴 걸까. 서문윤은 두 눈을 깜빡이던 중 문득 목구멍에 차오르는 쓰디쓴 액체를 깨닫고 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는 목에 자리한 혈을 누르는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입술을 열고 그 정체불명의 액체를 받아 마셔야만 했다.
꽤나 시간이 흐르고서야 서문윤은 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의형.”
“가만히.”
낮은 저음이 흐른다. 서문윤이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자리한 사내의 고요한 얼굴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았던 싸늘한 얼굴은 어디 갔는지 그는 순한 양과 같았고, 심지어 조금은 지쳐 보였다.
그 순간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그 밤새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괜찮으신 건가요?
그러나 서문윤은 가까스로 말을 삼켰고, 제가 해야만 하는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약을 뜬 수저를 서문윤의 입술에 대어주곤 검설린이 짤막하게 말을 내뱉는다.
“일은 순조로워.”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서문윤의 얼굴이 무너지고야 만다. 그 어르고 달래는 말은 검설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서문윤은 오히려 더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 전하는.”
지레짐작한 서문윤이 검설린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연다.
“토벌군은, 성도는.”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아랑곳 않고 검설린은 수저를 움직일 뿐이었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쓴 액체에 서문윤이 기침을 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검설린의 얼굴에 문득 허탈한 웃음이 감돈다.
“너는 정말 나를 믿지 않는구나.”
서문윤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진 때였다.
“당신은 내게 신뢰할 만한 행동을 했습니까?”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상황. 이미 서로 간의 견고했던 믿음은 금이 간 상황이었다. 검설린이 독단적으로 서문윤을 위해 천금같이 지켜오던 폐태자의 유언을 어긴 때부터, 그의 만류를 물리치고 홀로 정계에 복귀한 때부터 이미 그들의 관계는 금이 가 있었다.
검설린은 그저 스스로를 희생하며 홀로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고, 서문윤을 그저 보호하려고만 했다.
그때부터 서문윤은 분노해왔었다. 완전히 열린 줄로만 알았던 그의 마음이 실은 아직도 굳건히 닫힌 문임을 깨닫고 서문윤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검설린처럼 홀로 상황을 헤쳐 나가고자 했지.
서문윤의 시야가 한순간 돌아왔다. 그는 그제야 사내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서려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선과 시선이 서로 부딪치고,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느릿한 말이 흘러나온다.
“그렇군.”
고소 어린 목소리였다.
“네가 날 불신하는 게 당연하지.”
서문윤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검설린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고, 그 엄한 말에 서문윤은 결국 칭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약을 먹어.”
“…써요.”
제 입가에 들이미는 수저를 입술을 꾹 다물어 막고, 서문윤이 다시 점멸된 시야 속에서 손을 허우적거리며 뻗었다. 수저를 쥔 손의 팔뚝을 꽉 부여잡으며 서문윤이 식은땀을 흘린다.
‘도대체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정말 이런 어린아이 같은 투정은 하기 싫은데. 이 약은 정말 미칠 것만 같다.
‘의형이 정말 내가 의심스럽다고 처리하려 하나.’
차라리 독약을 먹는 게 나은 것만 같은 맛에 그가 몸을 부르르 떨 때였다.
“넌 그리 몸을 혹사해놓고 고작 쓴 약을 먹는 것에 불평하느냐?”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고 수저가 서문윤의 입술을 푹 쑤셨다. 악 소리를 내며 서문윤이 억지로 목구멍에 흘려 넣어진 약을 컥컥거리며 받아 마신다.
의형, 정말 죽겠다고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서문윤이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원망에 찬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검설린의 얼굴을 확인하고 더 이상 항의의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 미치광이야. 넌 네가 중독된 몸이란 걸 잊었느냐? 그게 춘약 종류라 한들 정말 그런 쪽으로만 몸에 작용한다고 생각해? 넌 무리를 하면 안 돼! 내가 널 밤에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막은 게 무슨 이유 때문인데.”
그의 얼굴이 심히 일그러져 고통과 불안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네가 건강하지 않았다면 벌써 일곱 번은 황천에 다녀오고도 남았어!”
화를 꾸역꾸역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 또한.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술을 꾹 다물며 서문윤이 물결치는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 침묵 끝에 침음성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약은 강서진이 준 겁니까?”
팔뚝을 부여 쥔 손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흐릿해진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며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을 살피려 노력했다. 허탈한 웃음이 흐르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오늘 시력을 완전히 잃을 뻔했다. 지금도 그 말이 나오느냐?”
그 정도로 심각했다고?
“하, 하하.”
아무리 오늘 내일 없이 산다 욕을 먹는 서문윤이라 할지라도, 그 소리엔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에 노기가 서린 까닭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그리고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검설린은 저의 안위를 분명히 걱정하고 초조해하는구나.
그동안 검설린의 마음을 알지 못해 불안해하던 서문윤은 그 순간 완전히 안도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멀어졌다 해도, 의형은 의형이다.
한없이 냉랭하게 보이면서도, 속정이 깊은 사람.
그 생각에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고야 말았고, 그것은 검설린의 얼굴을 순간 일그러트리기 충분했다.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무사태평하게 행동하는 그가 기가 막힌지 검설린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화를 억눌렀고, 그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결국 자그마한 웃음소리를 입술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살자, 윤아.”
서문윤이 또다시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 * *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의 곁에 검설린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백 년은 잠에 취했다가 일어난 것만 같은 가뿐함에 취해 서문윤이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밀린 잠을 몰아 잔 것만 같은 느낌에 휘말려 잠자리를 휘적거리던 서문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으음, 소리를 흘렸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몸이 바윗덩이에 짓눌리는 것만 같았으나 그래도 정신만은 가뿐했다. 서문윤은 손등을 눈 위에 얹고 몸을 웅크렸다. 새우처럼 몸을 말며 한동안 끙끙거리던 서문윤은 시간이 흘러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정신이 드십니까?”
그가 부스스한 눈을 깜빡거리며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와중에 들려온 말이었다. 귓전에 살포시 내려앉은 어린 목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얼이 나간 표정을 짓는다. 멍한 얼굴에 서서히 표정이 돌아오고, 서문윤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는?”
어젯밤. 아니 어젯밤인가?
다시 일어나서 시간 감각이 애매모호하여 잠시간 혼란에 빠졌던 서문윤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앳된 얼굴의 소년병을 향해 희색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있었구나.”
바로 운표선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알렸던 소년병이었다. 서문윤의 눈앞에 자리한 그는 안색이 창백하고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으나 처음 보았을 때처럼 오늘내일하는 중상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눈은 오히려 총명함으로 반짝거리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에게서 긍정적인 마음을 엿보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이다. 강서진이 운 공자를 처리하고, 홀로 역천에 성공하여 검설린과 태자 모두가 완전히 모서리에 몰리는 상황.
그것은 어찌 피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가 안도하고 있을 때였다.
“정명공께서 친히 돌봐주셨습니다. 서문 공자님과 그저께까지 나란히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어제 제가 먼저 일어났어요.”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흐른다.
“정명공이 서문 공자님을 돌보라 하셔서, 그래서 제가 낮에 간호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음, 그렇구나.”
천진난만하게 말을 내뱉는 소년병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할 말을 잃고 잠시간 입술을 달싹거릴 수밖에 없었다.
‘의형이 괴롭겠군.’
누워 있는 동안 번져 나갔을 소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나이대까지 혼인을 하지 않고 독신을 유지하는 게 말이 무척 나오긴 하지. 그게 막사를 함께 사용하는 하급 무관, 바로 제 소문과 결합되어 검설린이 남색가라는 소식은 확실시 되었고. 거기다가 어린 소년병을 근처에 들인다는 소문이 추가됐으니, 이제 의형의 명성은 땅에 떨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디 매파가 출입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 다행인 걸 수도. 사람들이 그를 피할 테니……. 아니, 생각해보면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잠시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소년병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병은 그 시선의 연원을 알지 못해 갈팡질팡 헤매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서문윤은 마침내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고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설명해주겠느냐.”
그리고 돌아온 말들에 서문윤은 서서히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일단 장안이 완전히 강서진의 손아귀에 넘어갔습니다.”
* * *
그간 수도에서 있었던 일.
운표선은 일찍이 검설린과 밀통하여 수도에서 강서진을 감시하고 있었다 한다. 그는 이미 황제의 눈에 찍혔던 상황이므로,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급박한 상황에도 그저 은둔할 뿐이었다.
다만 그는 청매소의 제조법을 알았으므로, 늙은 제 몸을 염려한 황제는 검설린과 운표선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하게 그를 압박하지 않았다. 그저 운신을 제약하고 압력을 줄 뿐이었지.
그러나 그것도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오왕 암살 이후 황제가 의심병을 이기지 못해 전장에 나간 장수를 해임하는 정치적인 악수를 둔 후, 그의 권위가 심하게 낮아졌던 것이다. 태자가 검설린을 비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병사들이 그의 압송을 심히 반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에는 그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황제는 한동안 조정에 출석하지도 못했다.
암암리에 황제가 노망이 났다는 말이 돌고, 나라의 우환을 이끌어나갈 섭정 대신을 뽑는 게 맞지 않느냐는 말이 돌았다.
그것은 평상시라면 역모에 준하는 발언이었으나, 장안성의 민심을 바로잡을 사람은 없었다. 조정의 우두머리인 재상은 사실상 강서진이 세운 꼭두각시였고, 본디 여론전에 능하던 태자마저 저기 저 먼 검남에 처박혀 황제를 비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저와 이익 관계로 얽혔던 운표선은 자신이 영향력을 축소한 상태. 그제야 황제는 제가 의심병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곁에서 쳐낸 것을 깨닫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시, 강서진은 이미 수도를 장악한 후였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위기감을 느낀 황제는 뒤늦게 운표선을 이용하여 강서진을 쳐내려 했으나, 사실상 조정을 장악한 강서진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운표선 또한 마찬가지라, 그는 저를 협박하고 회유하는 강서진에 거의 수족이 묶인 채 억눌려 있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황제의 도움을 받아 강서진을 암살하려 했다.
그것은 화를 참지 못해 벌인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당시 강서진은 거의 운표선의 목을 조르고 사지로 몰아넣은 상황이었으므로. 그것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선수를 치느냐는 수 싸움에 의해 결정된 일이었다.
비범한 검술 실력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운표선은 그 스스로가 협객 출신이었으므로 황제와 그의 친위대의 은근한 도움을 받아 조정 고관의 저택을 급습하는 초유의 사건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더 치밀하고 또 재빠르냐의 승부수는 강서진의 승리로 끝나고야 말았다. 강서진도 운표선도 서로의 세력에 세작을 심어놓았으나, 더욱 치밀했던 건 강서진 쪽이었으므로. 운표선에게 암살을 허했던 황제의 측근 중 하나가 강서진의 세작이었고, 그에 정보가 그쪽으로 새어 나가 거사일에 강서진이 제 저택에 사병을 매복시켰던 것이다.
그 덫에 걸려 운표선은 중상을 입고 간신히 몸만을 빼내고 패퇴하고야 말았다. 그 말은 장안이 완전히 강서진의 손아귀로 넘어갔다는 뜻이었고, 검설린이 장안에 남겨둔 세력이 전초제근되었다는 의미였다.
바로 그가 운표선에게 전달받던 정보가 강서진에 의해 교란이 되었다는 말.
중상을 입은 운표선이 은신처에 숨어 검설린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 한 게 검남 토벌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강서진의 포위망이 촘촘하여 수개월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소년병은 강서진의 추격을 뚫고 간신히 검설린에게 그 사실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들은 검설린은 빠르게 가찬성의 일을 손썼던 것이다.
애초에 그는 가찬성을 습격한 검남 절도사의 과격한 움직임에서 강서진의 그림자를 보았었다. 그러던 와중 사건의 앞뒤를 깨닫곤 그는 파격적이게 행동할 수 있었다.
강서진은 중앙에 있어 토번의 일을 잘 몰랐으므로, 본디 적송덕찬을 경계하던 그는 보병만이 남은 성도를 먼저 침략하고 협곡에 매복했다. 그건 사실 병가의 전술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병참기지인 가찬성을 잃고 성도를 차지하는 것은 호리병 모양의 검남 땅에 고립되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게다가 태자는 황제의 유일한 적통 자손이요, 검설린을 견제하는 파벌의 우두머리이니 그가 해를 입는다면 그 파급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장안이 이미 강서진의 손에 넘어갔단 소식을 듣고, 검설린은 복잡한 정계의 사정을 따지지 않고 파격적으로 행동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검남 절도사의 반란군의 자멸, 적송덕찬의 토번군의 도주라는 커다란 결실을 맺으며 끝이 났다.
협곡에서의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고 검설린은 군대를 나누어 가찬성 또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서, 검남전이 토벌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청은 또한 해를 입지 않았다.
산의 능선을 따라 성도로 향하던 이청은은 그런 기조를 눈치채고 속도를 올려 빠르게 협곡을 빠져나갔다. 검설린은 그런 그를 붙잡지 않았고, 이청은 또한 협곡에서 전투를 벌이는 검설린을 기습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기습할 수 있는 틈이 있음에도, 장안이 마비되고 서로 간에 명분이 각각 있어 전처럼 세간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시점이었음에도. 그들은 ‘검남 토벌’이라는 본래의 제 임무를 잊지 않고 행동했다.
그러니까, 모든 건 반듯하게 끝났다.
허탈한 음성이 흘렀다.
“……의형은 몰랐던 거구나.”
말을 잇던 소년병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친 때였다.
“예?”
되묻는 말에 서문윤은 답변하지 않고 침상 위에 우두커니 앉아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서문윤이 미간을 찌푸린다. 침묵 끝에 곤혹스러운 음성이 그의 입술 밖으로 흘렀다.
“아, 이런.”
검남 절도사가 가찬성을 친 일은 검설린이 의도한 게 아니다.
이중환과 저가 의심했던 바와 다르게 태자를 제거할 의도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강서진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의 손 위에서 놀아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서문윤은 잠시간 멍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해 우두커니 침상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럼 나는 지금 무얼 했던 거지?
그 순간 그가 떠올리는 것은 협곡에서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검설린의 얼굴이었다.
저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지. 그가 쓰러지는 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과, 격정에 일렁거리는 눈빛.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서문윤은 한참을 그렇게 침상 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늘게 몸을 떨어야 했다.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를 믿지 못했구나.’
그리고 그 끝에 흐른 말.
“의형은 지금 어디에 계시지?”
갈라진 목소리로 흐른 말이었다.
검설린이 있는 곳은 성도의 성벽 위였다.
“일어났느냐.”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자마자 흐른 말이었다. 그는 기척만으로 나를 알아본 건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제게 말을 거는 검설린에 서문윤이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곤 그는 잠시간 그 자리에서 우뚝 선 채 성벽 앞에 선 검설린의 등을 응시했다. 검남전은 끝났고, 그는 더 이상 갑옷을 입지 않았다. 새하얀 장포를 입은 채 그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강 너머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끝에는 화살비가 내리고 시체가 쌓였던 협곡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서문윤이 정신을 잃었던 장소 말이다.
의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뜻 드러난 창백한 얼굴 위에는 평소처럼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을이 드리운 얼굴은 조금 더 따스한 빛이 돌았고, 그가 감상에 빠진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상념에 빠진 듯한 등을 보니 어쩐지 장한성이 떠올라 서문윤은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가는 신음을 억지로 삼키려 애를 써야만 했다.
그때도 성벽 위에 종종 오르곤 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짧은 휴식 시간에, 바람을 쐬러 올라와 그들은 말없이 성벽 밖을 응시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그때는 그리고 그와 저의 마음이 하나였다.
상황이 더욱 고되고 더욱 암울했어도 어쩐지 희망이 있었지.
‘지금과 다르게 말이야.’
그날의 감상에 빠져 서문윤은 본래의 뜻대로 검설린을 추궁하지 못한 채 머뭇거려야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검설린이었다.
“방황은 끝났나?”
그리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그제야 성벽을 향했던 몸을 돌려 서문윤을 응시했다. 유리처럼 맑은 눈에 비친 저를 마주하며 서문윤이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선명한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요동치는 마음.
침묵이 있었고, 그 끝에 결국 서문윤은 입술을 열 수 있었다.
먼저 물은 것은 공적인 일이었다.
“토번군은, 안 쫓아도 되는 겁니까?”
토번군은 궤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협곡 안을 빠르게 달려 결국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으니까. 그들이 위험요소로 남은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은 고소를 흘리며 답할 뿐이었다.
“쫓을 여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군.”
조소가 섞인 말에 서문윤이 몸을 멈칫한다.
“미안하지만 정규군의 수준은 그 정도가 되지 못해. 이백영과 다른 멀쩡한 자들이 기를 쓰고 제 휘하 병영을 추슬렀다 하지만…… 이미 토번군의 수준은 우리보다 높아.”
당혹스러워하는 서문윤을 빤히 바라보며 검설린은 말을 잇고 있었다.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하물며 적송덕찬은 교활한 이리인 것을!”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성벽에 기댄 몸을 바로잡는다. 두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수하를 다루는 솜씨는 그저 그런 장수의 것을 넘어선 지 오래지. 내가 지난 성도 공성전에서 가장 신경을 쓴 건 검남군이 아니라 적송덕찬의 토번군이었다. 매복을 걸리지 않았다면 애초에 적송덕찬이 잘 훈련시킨 수하들을 막을 수 없었다……. 너는 우리의 수준을 높게 평가하는구나.”
평온한 목소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으므로. 서문윤은 그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려야만 했다. 그런 그를 차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검설린은 말을 잇고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제가 빼앗긴 자리를 되찾을 거다. 그럼 굳이 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 호전적인 성정이 걸리지만…… 이쪽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으니 그도 앞으론 신중해질 거다.”
“…….”
“이걸로 족하다.”
그러곤 짧은 침묵 끝에 흐른 말이었다.
“내가 여력을 숨기고 있다 생각했군.”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곡을 찔렸다.
무너지는 얼굴을 수습하며 서문윤이 숨결을 골랐다. 마음에 든 의심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서문윤은 잠시간 그의 의형을 또다시 의심하고 있었다.
소년병이 그가 토번군이 패주하는 것을 따라잡지 않았다고 했지. 쓰러지기 전 서문윤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은 분명 검설린에게 유리했던 상황이었는데. 그런 그가 적송덕찬을 살려 보내고 많은 수의 기마병을 보존케 한 까닭을 서문윤은 의심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검설린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무어라 변명을 하려 입술을 열려던 서문윤은 유리처럼 투명한 눈과 마주하고 다시 입술을 닫아야 했다. 침묵이 잠시 이어졌고, 그 끝에 그는 한숨을 길게 내뱉고야 말았다.
“제가 당신을 오해했습니다.”
결국엔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마음의 장벽이 무너지고 남은 것은 허탈함이었다.
그러니까 모두가 내 기우에 불과한 거였다고?
노을빛으로 물드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그 사이로 흘러나온 건 떨리는 음성이었다.
“당신은 또다시 멋대로 행동했고, 그래서 오해했습니다. 삶에 미련이 없던 당신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와의 약속을 완전히 놓아버린 줄 알았습니다.”
망설이며 서문윤이 덧붙였다.
“전하를 죽이고 싶어 할 만큼 증오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의 그는 제게 이청은에 대한 분노를 퍼부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그 말에 화를 내지 않고 덤덤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가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적어도 이청은이 어부지리로 권좌를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악의가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아니, 애초에 내가 그를 탓할 자격이 되던가? 그는 방관했을 뿐이지만 나는 만인의 희망을 내 손으로 고발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대목에 이르러 검설린이 조용히 숨을 내뱉고 잠시간 침묵을 지킨다. 그러곤 고요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잘못으로 따지면 내가 더 크지.”
그 얼굴에 스친 고소에 서문윤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고야 만다.
그가 쓸쓸한 석양에 어울리는 어조로 말을 흘렸다.
“그러나 내 본성은 글러먹어 그럼에도 이청은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내 스스로를 원망한 것처럼, 몸보신을 위해 그의 죽음을 방관한 모든 사람들을 원망했지. 막상 나 자신조차 그를 돕지 못했으면서…… 책임의 소재를 만인에게 돌리며 증오해왔던 거다.”
이어진 말에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지고야 만다.
“그러나 그건 마음뿐이야.”
목소리는 선명하게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두 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서문윤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석양처럼 들끓는 눈에 강인한 의지가 있었다. 침음을 삼키는 서문윤의 귓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져 내렸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떨리는 숨결이 흘러나온 때였다.
서문윤은 저를 노려보는 시선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뜨거운 눈빛에 담긴 분노를 피하지 않았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고, 그 끝에 서문윤은 결국 이 악문 목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그럼 그때 왜 내게 그런 말을 하셨던 겁니까?”
검설린의 말이 그의 죄책감을 자극했으나, 동시에 서문윤은 모순을 느끼고 있었다. 검설린은 분명 장안에서 저와 재회했을 때, 번을 서고 있던 제 입술을 막고 등장했을 때 이청은에 대한 커다란 증오를 터뜨렸다.
그때 검설린은 제게 ‘그럼에도 대의를 져버릴 짓은 하지 않겠다.’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제 본의를 말하지 않았다.
“왜 제게 이청은에 대한 증오를 말하고 권좌를…!”
그리하여 터져 나온 서문윤의 항의 어린 말. 그를 검설린은 싸늘한 얼굴로 단칼에 끊어낼 뿐이었다.
“너는 이성과 감성이 일치한다 보느냐?”
그 말에는 어쩐지 울렁거리는 감정의 물결이 있었으므로.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부리 닫듯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흔들며 그를 바라보았을 때, 서문윤이 마주한 것은 시린 미소였다.
“서문윤.”
석양을 등진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어째서 그 얼굴에서 그리 시선을 떼기 힘든지, 어째서 저 얼굴이 금이 가기 직전의 유리와 같이 아슬아슬해 보이는지….
“윤아.”
귓전에 울리는 다정한 말에 서문윤은 제대로 응대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 뿐이었다. 격정이 몸을 떨게 만들었고, 이어진 말이 마음을 흔들었으므로.
“이 내 마음과 별개로 그는 내 정적이 맞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네가 서 있었지.”
그 말을 내뱉을 때 검설린은 날카롭게 웃고 있었다. 상처받은 짐승과도 같은 눈이 안광을 튀기고, 이윽고 고소와 함께 흘러나온 낮은 음성.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너는 알아?”
서문윤은 차마 그 어떤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목소리는 허탈했고, 동시에 가시 박힌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주한 사내의 두 눈은 고요함 속에서 분노를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너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 줄 넌 정말 짐작했느냐? 넌 정말 내 생각을 해보았어?”
이건, 정말.
“너를 의심하라, 네가 내게 마음이 떠났다, 하루도 빠짐이 내게 앵알앵알댔지. 그들을 물리치는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
그 말에 이르러 검설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이를 까득 물며 살벌한 소리를 흘렸다. 목에 도드라진 핏줄, 분노에 타오르는 두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숨을 삼키고야 만다.
두 눈에 불꽃이 튀겼고, 날카로운 고소가 이어졌다.
“너는 내게 사람을 믿으라 말을 해놓고 내게 말과 행동을 숨기더구나!”
그러곤 사내는 순간 고개를 돌려 성벽 밖 들판을 응시했다. 노여움을 다스리는 듯 떨리는 몸을 서문윤은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흐른 들판 끝에 협곡이 보였다. 서문윤이 쓰러졌던 장소였다.
침묵 끝에 말은 차갑게 흐른다.
“견딜 수가 없었지. 난, 정말.”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서문윤은 가까스로 억눌린 숨결을 흘릴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거기서 화를 참지? 너는 네 진심을 전달할 의사를 보였나? 내게 네 마음을 보여주려 했어?”
우리는 정말 서로를 속이고야 말았구나.
“내게 사람을 믿어라 말을 했던 너는 나를 향해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장한성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느릿한 숨을 내뱉었다.
그때의 마음가짐을 잊었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려 해도 목이 막히고 눈시울이 붉어져 서문윤은 그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모든 분노를 터뜨린 검설린이 그를 차분한 눈으로 응시했다.
아니, 응시하는 것보다는 관조하는 것에 가까운 눈이지.
“의형도 그랬잖습니까.”
침묵 끝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애초에 의형이 제 마음을 신경을 썼다면 제게 아무런 말 없이 장안을 떠났겠습니까?”
그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이게 우리의 신뢰입니까?”
그래! 이것은 그가 제게 마음을 열지 않고 저가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저를 의심하고, 저가 그를 의심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입술을 깨문 서문윤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검설린이 문득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너보다 약해.”
그의 몸을 움찔거리게 한 말이었다.
“나는 너보다 약하다.”
서문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리며 성벽에 몸을 기댔고, 창백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따뜻한 석양은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누볐으나,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서 가시지 않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결국엔 얼굴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침묵 끝에 흘러나온 허탈한 음성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짧은 고소를 흘렸다. 검설린은 다시 평소의 반듯한 얼굴을 되찾고 있었다. 석양을 등진 사내의 고요한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씁쓸한 웃음을 흘린다.
“당신이 나를 배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그런 것은 나였군요.”
배신감에 사로잡혀 보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있었다.
“당신은 날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흔들리는 눈으로 성벽에 몸을 기댄 사내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숨을 삼킨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서문윤이 실로 부정하고 싶은 사실은, 그럼에도 검설린이 끝까지 제 선택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알면서도, 어찌 되었건 의형은 끝까지 저를 막지 않았다.
검설린은 결국 저를 향한 의심을 털어버렸으나, 저는 그러지 못했지.
“그럼에도 당신은 날 끝까지 믿었고, 나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에 잘게 몸을 떨며 서문윤은 말을 잇고 있었다.
“나의 잘못이군요.”
그 말을 내뱉곤 서문윤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간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분노를 터뜨렸던 모습을 어디 갔는지 그는 다시 평온함을 되찾은 후였다. 시선에는 온화함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게 못내 괴로워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약한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나는 또 그를 상처 입혔구나.’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검설린의 미간이 누그러진 순간이었다. 성벽에 기댄 몸을 일으키며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지 마, 제기랄.”
손을 뻗어 눈물을 흘리는 뺨을 감싸는 검설린에 결국 서문윤이 참지 못하고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죄송해요.”
그 말에 답변을 하지 않고 검설린은 그저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달랠 뿐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저 사람 하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달려왔지. 그의 마음이 모래성과 같다는 걸 알기에 더욱 강인해지려 했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 다짐을 잊고 불신의 굴레만이 이어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으며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멍하다.
그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묵묵히 제 몸을 쓰는 검설린의 손을 받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두려웠지.”
그러던 와중 문득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네가 잘못될까 봐.”
작게 중얼거리는 사내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져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담담한 목소리가 흐른다.
“그러니 이제 됐어.”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서린 희미한 균열.
그 틈새로 언뜻 엿보이는 흔들리는 영혼을 깨닫곤 서문윤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저를 구금하지 않았습니까?”
검설린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얼굴 위에 고통스러운 빛을 드러낼 만큼 불안에 떠는 사내를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가장 쉬운 길인 저를 구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
작은 의문을 품어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검설린은 문득 고소를 흘리며 짧은 침묵을 지켰다.
“네 그 열정을 사랑했는데 너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 끝에 돌아온 답변에 서문윤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큼은 하지 못하지. 나는 네게 한 번 원망을 들은 적이 있지 않느냐.”
그 말을 내뱉곤 검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문윤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서문윤은 입술 밖으로 작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의 손에 뺨이 부여 잡힌 채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석양이 드리운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순간 두 눈을 흔들고야 만다. 제게 닿는 시선은 침착했고 두 눈은 확고했다.
마음이 이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격정에 서문윤이 시선을 슬쩍 아래로 피하며 고개를 살짝 돌린다.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난 항상 홀로 서는 데 익숙했고, 허나 그것은 네가 원치 않는 일이었지. 웬만하면 네게 다 맞춰주고 싶었는데. 이 일만큼은 그러지 못했지.”
유려히 흐른 말에 서문윤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묻어두자.”
뺨을 감싼 검설린의 손이 떨어졌다. 그는 대신에 서문윤의 어깨를 감싸 쥐곤 그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모든 게 다 끝이 났어.”
아프지 않게 어깨를 부여 쥐는 손길. 그에 서문윤이 묘한 안정감을 느끼고 검설린을 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토라질 일은 없다, 이제.”
침묵 끝에 말은 흘렀다.
“장안에 가지.”
그 말을 내뱉곤 검설린은 완전히 서문윤의 몸에서 손을 떼고 발걸음을 옮겼다. 성벽 아래를 향하는 계단을 밟는 검설린의 등을 빤히 바라보며 서문윤이 물결치는 태양빛에 흔들리는 마음을 숨겼다.
“가서 이제 모든 일을 마무리하자.”
그는 등을 돌리지 않고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더 이상 네게 말을 숨기지 않겠어. 내 갈비뼈 안에 자리한 모든 것을 네게 보여주겠다. 네게 내 거취 하나하나를 보고하고, 바람결에 든 생각마저 들려주겠어.”
느릿한 발걸음이 멈추고, 잠시간 침묵이 이어진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끝이 갈라진 목소리로 흐른 말.
“그러니 다신 그러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검설린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이었다. 성벽 아래로 사라져가는 검설린의 등을 서문윤은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개를 돌려 성벽 밖을 바라본 서문윤이 붉은빛으로 물든 들판을 바라보며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트린다.
장한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의 다짐을, 그때의 이어진 마음을.
그리고 선명한 두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의 다짐.’
흔들리는 시선이 그때와 다른 붉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 *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서문윤을 당혹스럽게 할 만큼의 평화가 병영에 있었다. 평로의 반란은 일찍이 평정이 되었고 삭방의 일도 마무리가 되었다. 토벌전의 승패를 결정지을 검남전마저 토벌군이 성도와 가찬성 두 성을 점령하고 매복이 성공하여 승리로 끝난 상태였다.
말하자면 토벌은 성공적으로 종료된 것이다.
다만 검남 절도사가 협곡 안으로 도주하여 검설린은 예민하게 그를 수색했는데, 그것은 검남 절도사가 반란군의 가장 주요한 인사이고 강서진과 내통한 혐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살려서, 반드시 살려서 데려와야 한다!”
여러 세력이 궐기하기 직전인 작금 상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명분이니 증거를 수집하려는 목적이었다. 검설린은 강서진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고, 애초에 섭정 대신이라는 허울 좋은 방패를 낀 그를 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명분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살아 있는 절도사가 아닌 검남 절도사의 목만을 돌려받을 수가 있었다.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그리 말을 내뱉고 퉤! 침을 내뱉는 이를 ‘악천화’는 잠시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가벼운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원래 연나라 땅에서는 충신이 많이 난다 하던데. 그것도 옛말이었나?”
신선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남 절도사의 머리를 들고 온 것은 바로 그의 부관이었다. 검설린 또한 아는 이였다. 옛날에 토번을 정벌했을 때 그는 공을 세운 전적이 있었으니까. 치중(보급)을 맡을 때 뛰어난 능력을 보여 눈여겨 본 이였다. 후방을 안정시키는 일은 공이 두드러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꺼리지만, 막상 그것을 잘하는 인재는 드물다.
그런 인재가 검남 절도사에게 인생을 넘어간 걸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런 방식으로 제 살길을 찾았나 보다.
“허나 잘했다.”
쓴웃음을 지우며 검설린이 고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고 나발이고 네가 살길을 찾아야지.”
“기본만 했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제 탐욕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정신을 차리지 않았지요.”
허탈한 음성과 함께 흐른 말이었다.
“천자가 되겠다 그 난리를 쳐놓고 한다는 선택이 토번에 투신한다는 겁니다.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의 자격도,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놈을 제가 살려둬야 합니까?”
부관의 얼굴에 분노가 희미하게 일렁거린다.
악천화의 말은 심히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는 적어도 가찬성을 습격하기 전까지는 제 상관을 의리로 따르며 그의 터무니없는 행각에 복종했으니까. 그는 제게 은혜를 베푼 상관에게 충성하는 무장이었고, 이 전쟁에 책임을 지고 검남 절도사와 운명을 함께할 생각마저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못을 박은 검남 절도사의 만행은, 부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부관은 이미 부상병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검남 절도사의 행동에 울컥한 상태였다.
말했다시피 부관은 치중에 능한 사람이었다! 병사를 위무하고 돌보는 일을 담당한단 말이었다. 그런 그가 매복에 당해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협곡 안으로 피신을 하고 말발굽에 짓밟힌 시신을 발견했을 때 마음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리라.
말을 빼앗기고 협곡 안에 갇힌 이들은 그 험한 돌길을 걸어 가다가 도망치는 토번 기마병에게 밟혀 죽은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검남 절도사의 책임이었다. 동시에 그의 책임이었다.
말이 있었더라면 그런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겠지! 적어도 그렇게 무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검남 절도사가 조금만 더 그들의 목숨을 생각했더라면….
그리고 할 말을 잃고 침묵하는 부관의 귓전에 떨어진 말.
“음, 이제 보니 적송덕찬의 토번군이 살아남았군……. 잠깐만, 잠깐만. 금준! 좋은 생각이 났다. 토번 가한이 그 조카를 견제하니 우리가 이 사건을 잘 포장하는 거야. 가한에 투신해서 때를 기다리는 거다. 그리고 나중에 상황이 맞으면 검남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러면 장군을 따르던 이들은 어찌합니까?”
“이미 사방에서 난리가 났는데 잔챙이들마저 솎아낼 여력이 있겠어? 여긴 국경이다. 토번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갈아엎지는 않을 거다.”
허나 반란에 가담했던 고위 무장들과 그 가족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
그것이 부관 금준의 인내심의 끝이었다.
금준은 더 이상의 피를 보기 싫었고, 부하들의 희생을 바라지 않았다. 장안의 천자가 인륜을 저버렸다는 대의? 솔직히 금준은 절도사가 황제보다 더 나은 인물 같지도 않았다. 무관의 습성에 따라 앞뒤를 따지지 않고 그에게 복종했으나, 눈에 허물이 걷힌 후 마주한 현실은 그저 더러울 뿐이다.
절도사는 반역자고, 금준은 그에 호응해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렸다.
‘애초에 이렇게 할 것을.’
그렇게 토번에 투신을 하고자 하는 상관의 목을 잘라 금준은 수하들을 그러모아 검설린에게 항복한 것이다. 절도사를 죽인 금준을 비난하거나, 말리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그런 것이었다.
“네가 몸을 투신할 위인이 아니었다.”
상념에 잠긴 금준의 정신을 깨운 말이었다. 고개를 든 금준의 눈에는 냉소를 흘리는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
목숨을 바칠 가치.
금준은 그 말에 고소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답변에 검설린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기에 그를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날카로운 반박이었다.
“한때 당신과 같은 사람을 존경한 적이 있습니다. 닮고 싶어 한 적도 있었고. 지금 이 순간 알겠군요. 나는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금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깟 대의란 말로 탐욕을 합리화하지요. 저 자신을 위해 남의 목숨을 이용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겁니다. 아닙니까?”
한을 쏟아내듯 차갑게 말을 하는 그를 검설린은 침묵으로 방관할 뿐이었다. 금준의 말은 무도한 것이었으나 검설린은 화를 내거나,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요한 눈으로 금준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 뿐이었으니.
“돈을 가져가라.”
침묵 끝에 흐른 말에 부관은 묵묵히 몸을 돌려 그의 막사를 빠져나갈 뿐이었다. 막사 밖에 선 채 대화를 엿듣던 서문윤이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검설린은 의자에 깊이 몸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듯하면서도 꽤나 지친 얼굴을 서문윤은 잠시간 바라보다가 짤막한 말을 한마디 던졌다.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검설린은 대답하지 않았고, 서문윤 또한 더 말을 내뱉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은 흘러갔다.
강서진과 반란군의 내통 혐의는 잡지 못했으나, 대세는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던 명분이 강서진이 장안을 장악하고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확보되었던 것이다. 토번과 손을 잡은 반란군의 명분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고, 이미 민심은 토벌군에게 있었으니까.
게다가 검설린은 그를 견제할 유일한 존재였던 이청은과도 암묵적으로 화해를 한 상태였다.
그것은 바로 양분화된 토벌군의 지휘체계가 검설린의 손에 온전히 넘어갔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협곡에서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시점에서 대의를 생각하여 군사를 물리고 상대의 존재를 인정했으므로, 서신이 오가거나 협의가 있지는 않아도 암묵적으로 그들은 예전의 대립각을 세우던 관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적도 아군도 아닌 미묘한 관계로 남아 있다.
본디라면 사령관이라 불려서는 안 되는 검설린이 사령관으로 불리고, 암묵적으로 토벌군 전체를 통솔하는 것을 이청은은 묵인했고, 검설린은 본디 있어야 할 자리를 제게 충성을 바친 병사들을 데리고 벗어난 이청은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나눠진 군대를 통솔하여 장안으로 올라가고 있을 뿐이었으니, 비록 조금은 아슬아슬하지만 서문윤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안정을 되찾은 대군은 그리고 지금 장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청은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별동대 비슷한 기마병이 앞서 움직이고 있었고, 토벌군 본영이 검설린의 지휘하에 장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쪽에서 일어난 평로의 반정을 일찍이 수습한 이백영 또한 잔군을 처리한다며 어영부영 그곳에서 머물다가 그들과 비슷한 속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바로 강서진이 정권을 차지한 장안을 향해서.
그 사실을 깨닫고 서문윤은 요즘 한참 동안 머리가 멍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
그러니까, 그가 고민했던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고 있었다. 이청은과 검설린은 손을 잡았다기에는 미묘하지만 적어도 가장 큰 적을 무너트리긴 전까지는 서로를 적대하지 않기로 묵언의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리고 검설린은 강서진을 무너트리고 바로 정계에서 몸을 빼기로 서문윤과 약속한 상태였고.
‘이렇게 일이 쉽게 흘러간다고?’
그 사실에 서문윤은 안도를 느끼면서도, 또 무언가의 복잡한 심경에 휘말려야만 했다. 분명히 좋은 일이긴 한데, 이건 그가 예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서문윤은 당황하여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강, 강소성주께서 이 일을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이렇게 일이 무난하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검남전이 끝나고 풍파가 있을 줄을 알았지, 이렇게 잔물결만이 있는 호수에 조각배를 둥둥 띄워놓는 듯한 평화가 지속될 줄은 몰랐다.
“예상은 했겠지, 그래서 여러 가지 견제를 했고.”
그리고 그에 대한 검설린의 답변은….
“애초에 검남, 삭방, 평로의 궐기가 그의 충동질 때문에 일어난 거다. 허나 황재천과 내가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고……. 운표선 그놈이 칩거를 한다 한들 상황을 손 놓고만 있던 것도 아니지.”
서문윤의 몸을 멈칫하게 한 말이었다.
“오왕 암살이 단순히 이중환의 해묵은 원한 때문에 이뤄진 건 아니지. 오왕은 황족이라 운 씨 상단이 독점하던 소금 매매권을 가지고 있고. 선박을 운영하는 데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강서진은 오왕을 제가 은밀히 키운 사병을 운반하기 위해 이용하려 했다. 그걸 막기 위해 하동 쪽에서 독립한 황재천이 간을 보다가 군사…… 으음.”
“…….”
“…네가 모르는 여러 일이 있었다.”
사실은 뭔 말인지 모르겠다.
서문윤의 혼란에 가득 찬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멈칫한 검설린이 대충 대화를 얼버무리곤 몸을 침상 위에 깊게 묻는다.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고, 입술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잔기침을 몇 번 한 검설린이 짤막한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는다. 죽이지 못한 신음이 귓가에 들려온 순간 서문윤이 한숨을 폭 내뱉고야 만다.
“의형은 정말 구제불능이시군요.”
검설린의 눈매를 매섭게 뜨게 만든 말이었다.
“너, 이 새끼…!”
순간 울컥한 검설린이 두 눈을 빛내며 서문윤을 죽일 듯 노려본다.
“뭘 잘했다고 네가 그런 말을…!”
“제가 항상 탕약을 잘 챙겨드시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의형은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으셨군요. 저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야, 이!”
검설린은 그 말에 눕혔던 상체를 들썩거리며 서문윤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으나, 가슴을 꾹 누르는 가벼운 손길에 제압당해 무기력하게 침상 위로 풀썩 쓰러지고야 말았다.
서문윤의 한숨을 자아낸 반응이었다.
검설린이 뜻밖에도 장안성에 가는 길에 앓아누웠던 것이다!
본디 고문 후유증과 화병을 앓고 있던 검설린은, 겉으로는 강인해 보여도 매일매일 탕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곤란한 몸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신적인 충격에 몹시 약해서. 서문윤은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안 보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제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은 거다. 제 앞에서는 멀쩡한 척,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했어도 탕약을 제조할 정신도 없이 저를 걱정하고 속앓이를 한 것이다.
그 사실을 검설린이 쓰러지고 난 후 지금껏 그를 간호하면서 서문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일 듯 저를 노려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검설린을 잠자코 바라보던 서문윤이 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제야 조금 제가 아는 의형 같군요.”
“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검설린을 빙글 웃으며 내려다보며 서문윤은 말을 아낀다. 그의 반응에 울컥한 듯 입술을 열던 검설린이 문득 멈칫하곤, 짧은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의 얼굴에 의아함을 스치게 만든 반응이었다.
또 무슨?
검설린은 그를 고요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고, 그 의미심장한 얼굴에 서문윤은 또다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검설린의 시선에는 묘한 감정이 묻어 나왔으므로.
그리고 그 끝에 흐른 말에 대한 서문윤의 반응은.
“서문윤. 너 그놈이 설치한 가장 큰 한 수가 뭔 줄 알아?”
“…?”
서문윤이 의문이 스치는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본다. 검설린의 얼굴을 미묘하게 만든 반응이었다.
“너잖아.”
“…??”
그리고 그의 대답은 서문윤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복잡함으로 일그러진다.
‘나? 나라고?’
이어진 검설린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서문윤은 그제야 잊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서문윤을 노려보면서 검설린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읊조린다. 어이없다는 듯한 어조로 흐른 말이었다.
“너……. 내가 정계에 복귀한 이유를 잊었군.”
“아.”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그제야 짤막한 탄식이 흐른다.
그제야 제가 강서진에게 인질로 잡혀 검설린이 굴복했던 일을 떠올렸던 것이다. 검설린이 중간에 정적과 손을 잡은 서문윤에게 ‘왜 저는 욕심을 내지 않느냐’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지만, 검설린이 미련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게 만들던 약속마저 내팽개치고 정계를 복귀한 원인은 바로 저에게 있었다.
‘아, 시작이 그랬지.’
순간 서문윤의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지고야 만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끄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저를 담는 유리처럼 맑은 눈과 마주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간 검설린이 적처럼 느껴지고 낯설었는데, 막상 그가 저를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서문윤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휘말려 있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지?”
“……어, 의형 곁에.”
“태자가 너를 빼돌렸을 때 이미 걔는 엿을 먹은 거라고.”
그 말을 내뱉을 때 검설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그제야 서문윤은 검설린의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웃음을 참으려는 의도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입술 끝을 뒤튼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끝이 갈라진 기묘한 목소리가 연이어 흘렀다.
“장안에서 네가 발견되고 나 또한 몹시 당황했지만 강서진은 거의 미칠 지경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네가 태자에게 투신한 후에 강서진은 너를 다시 되찾기 위해 온갖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 이청은이 토벌군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면, 그는 장안에 홀로 남은 너를 다시 손아귀에 넣었을 거다. 그리고 네가 토벌군에 숨어들어 나를 따라왔고.”
잘게 떨리는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기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널 두 번이나 그렇게 봤을 때는 나도 정말 열이 받았지만, 강서진 그 자식만 할까? 큭, 큭큭.”
결국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리는 검설린을 서문윤은 망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반응이 제가 생각했단 것과 몹시 다른 이유도 있었고. 또 웃음을 터뜨리는 검설린이 마치 족쇄에서 벗어난 것만 같이 가벼워 보여 당혹스러운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흐른 말이었다.
“너, 그런데 강서진이 왜 지금까지 그리 자신만만하게 나를 풀어준 줄 알아?”
웃음기가 가시고 난 후 차분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내뱉은 말.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열려 할 때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서문윤.”
동시에 서문윤의 손목을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서문윤의 몸이 흠칫한 순간 그의 귓전에 연이어 내려앉은 말은 서문윤의 눈을 크게 뜬 말이었다.
“백년화는 강서진의 손아귀에 있어.”
바로 그가 까마득하게 잊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
“내가 강서진을 대적하면 넌 영원히 네 몸을 고칠 수 없다고.”
그 순간 검설린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서문윤을 담고 있었다.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문윤이 부리 닫듯 입술을 딱 다물며 얼어붙은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본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검설린은 조소하고 있었다.
어딘가 씁쓸하기도, 어딘가 가뿐하기도 한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잠시간 할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순간 그의 시선이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몸을 고칠 수 없다고?’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모한 때였다. 과거의 한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 이후 이어진 짧은 대담.
“너는 지금 기분이 어떠하냐?”
검설린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창백한 얼굴에 비틀린 미소를 흘리며 그리 말했다.
“너는 나 같은 병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몸도 마음도 정상적이지 않은 내게 영원히 얽히는 거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검설린에게 서문윤은 짧은 침묵 끝에 짤막한 말을 내뱉어 답했다.
“저는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했어요.”
“서문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검설린의 답변.
“그건 네 자유로운 의지였어.”
들끓는 불꽃이 점거한 두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얄팍한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통증이 팔을 타오르고 있었다. 검설린의 손에 돌연 부여 잡힌 팔뚝에서 느껴진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손을 뻗어 서문윤의 팔뚝을 거세게 움켜잡은 뒤, 검설린이 비스듬히 눕혔던 몸을 일으키곤 입술을 열었다.
“강제가 아닌 네 자유의지였지.”
“…….”
“그리고 이건 네 선택권이 박탈된 일이다.”
조소와 함께 흐른 말.
“너는 그 둘의 차이를 모르는구나, 너는.”
서문윤은 묵묵히 그의 얼굴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그를 검설린은 잠시간 노려보며 침묵을 지켰다. 시간이 흘러 고소를 흘리며 그가 속삭이는 말에, 서문윤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으론 언젠간 넌 절망하게 될 텐데……. 너는 왜 그를 몰라.”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끝이 희미하게 갈라진 것이었다. 서문윤은 그 감정이 깊은 탄식이란 것을 깨닫고 도저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그 말을 끝으로 서문윤의 팔뚝을 잡은 손에 힘을 풀고 쓰러졌다. 손자국이 붉게 날 정도록 팔을 비틀었던 손아귀의 힘이 거짓말처럼 흐트러지고, 서문윤은 제 앞에 풀썩 스러지는 그를 향해 손을 뻗고 경악한 목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의형!”
그날 밤 검설린은 심하게 앓아누웠다.
서문윤을 겁을 먹게 만들만치 열병이었다.
아니, 그건 열병이라고 단순히 말하기 뭣한 것이었다. 검설린은 그날 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몸을 뒤틀고 간간히 피를 토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는 심지어 중간중간 서문윤조차 알아보지 못했고, 몇 번을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서문윤에게 그 어느 일에 대한 기시감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사실 서문윤이 과거에 익숙하게 보던 모습이었으므로.
‘또다시 발작.’
바로 그들이 서로 마음을 트기 전에 종종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옛날, 검설린은 안 그래도 상한 몸으로 심병을 앓았고 그에 종종 발작을 일으켰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울화에 몸을 내어주었던 것이다. 검설린은 그 당시 모든 것을 잃고, 영혼마저 훼손당한 울분을 참지 못해 심마를 앓고 있었으므로. 심지어 탕약을 먹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홀로 괴로워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서문윤은 항상 문 너머에 무릎을 꿇고 앉아 검설린이 죽인 신음을 흘리는 것을 들었다. 몸을 늘어트린 사내를 마주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눈이 잠시간 과거를 헤맨다.
그 때는 차마 손을 댈 생각을 못 했지.
문밖에서 죽은 신음을 들을 때 서문윤이 원하던 것은 검설린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황하에서 저를 구한 그를 구하고 싶었다.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를 보듬고 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아니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제 곁을 허하지 않았고, 그에 서문윤은 우울함을 느껴야만 했었다. 검설린은 고통을 홀로 감내했고 누구에게도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곁을 허용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서문윤은 그의 의지처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답답함과 슬픔을 느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서문윤은 그때처럼 제 앞에 늘어진 검설린을 마주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감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의형을 만질 수 있다.’
상황은 분명 달라졌다.
장한성에서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진심을 보여주었고, 제 곁을 내어주길 허했다.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은 검설린이 고통스러워할 때 방 안에 들어가 그를 간호할 수 있었고, 그때를 기점으로 검설린의 발작 또한 차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제 눈앞에 또다시 자리한 식은땀을 흘리는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때의 마음이었다.
그때 저는 검설린의 몸에 손조차 대지 못했다. 하물며 마음을 나누는 일은 요원했으며, 서문윤은 그에 좌절하며 간절한 소망을 하나 품었었다.
그때의 마음.
‘고통을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느릿한 한숨이 흐른 때였다.
‘그와 마음을 나눌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때의 마음을 잊어버렸다.
상념에서 깨어나고.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물수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에 닿은 축축한 물수건이 체온으로 따뜻하게 물들만치 그는 침묵을 지키며 한참을 묵묵히 검설린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분명히 상황은 달라졌는데, 이제 그를 만질 수 있었음에도, 서문윤은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저 그를 한참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 지금은 그를 만질 수 있을 텐데, 의형은 그를 꺼리지 않을 텐데. 서문윤은 그러지 못했다.
잠시간 시간이 흘렀다.
서문윤이 느릿한 숨결을 내뱉곤 검설린을 내려다보았다.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침상 위에 죽은 듯 엎어진 채 사내는 아직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신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간간히 어긋나는 숨소리가 그의 정신이 온전함을 알렸음에도,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무어라 말을 하지도 않은 채 시체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에 식은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의형.”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서문윤은 고요한 시선으로 검설린을 보았고, 침묵 끝에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쓰러진 이유는, 그저 탕약을 먹지 않은 게 아니겠지요.’
그를 서문윤은 알 수 있었다. 검설린은 고문 후유증으로 폐병을 알았지만, 그것은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심한 게 아니었다. 그가 무너져 내리는 건 마음의 병이 몸을 갉아먹었을 때였다.
그리하여 검설린은 장한성 이후로는 그리 심한 발작을 겪지 않았다. 서문윤의 옆에서 차차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제 앞에 쓰러져 있지.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 그의 마음을 짐작케 하는 징조였다.
적막을 깨고 나지막한 말이 흘렀다.
“나는 의형을 의심했고, 의형 또한 나를 의심했습니다.”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시체처럼 늘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내에게선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서문윤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의형은 나를 믿었고, 나는 그러지 못했군요.”
그 말을 내뱉곤 서문윤은 멈추었던 손을 놀리고 다시 검설린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몸에 손이 닿는다. 치렁한 흑발을 들어 올리니 저를 향한 고요한 눈이 엿보였다. 안개가 낀 눈과 마주하고 서문윤이 그의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허나 하나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며 움직였어요. 당신을 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는 태자께 당신을 얻기를 소망했습니다.”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로지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행동한 겁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서로 닿지 않았을 뿐.
후회가 서린 목소리가 검설린에게 닿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말이 서문윤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단 것이었다.
굳어있던 서문윤의 얼굴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은 후였다. 마음을 갈무리한 듯 침착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그는 끊겼던 말을 느릿하게 이어나갔다.
“그러니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깟 약초 따위가 유일한 해답이라 생각할 수도 없지요.”
백년화.
환희향에 중독된 몸을 해독시킬 유일한 약초라고?
제 인생에서 자유를 빼앗은 그 물건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잠시간 침묵했다. 그것은 확실히 저를 비참한 마음에 들게 하긴 했다. 고우군에게 납치되었을 때, 서문윤은 단 한 번 그 향에 몸이 휩쓸리는 경험을 했었다. 무가의 일원으로 태어나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지. 확실히 서문윤은 그때 강렬한 절망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잠시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검설린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었고, 또 삶의 목적이 있었다.
“제 해답은 의형입니다.”
그 순간 검설린은 몸을 잘게 떨었고, 그렇게 시간은 잠시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 흐른 나지막한 목소리.
“당신은 스스로를 나약하다 칭했으니, 저 또한 감히 칭하겠습니다.”
심호흡을 하며 내뱉으며, 서문윤이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빛내며 곧은 시선으로 검설린을 바라본다.
“저는 강해요.”
그것은 사실이 아닌 다짐을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나약한 사내가 눈에 밟혀, 그를 마음에 담아버려 서문윤은 그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이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그걸 잊어버리고야 말았지.
어느 한순간 닿았던 마음이 끊겼고, 서문윤은 그를 깨달은 순간 검설린의 몸에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마음이 약한 사내가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그의 마음에 닿고자했던 저는 그러지 못했다.
그 사실에 서문윤은 과거의 다짐을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의형의 곁에 남을 겁니다. 이런 일에 좌절하지도 않을 거고요.”
서문윤이 그 순간 잠자코 웃었다.
그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검설린과 처음 만났을 때 서문윤은 지나치게 순진했고, 세상 물정을 몰랐으나 지금은 말이 달랐다. 스물 중반에 이르기까지 서문윤은 검설린의 곁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문중에서, 또 궁내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배웠다.
검설린은 제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방랑하던 이였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은 겉보기엔 자유로웠음에도, 사실 그를 통제하는 것은 검설린 스스로가 아닌 죽은 자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염증을 일부나마 알고 있다. 부자유한 삶을 증오했던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검설린이 제 삶을 손에 얻은 것은 장한성 이후의 일이었다.
그때 이후로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희미한 희망이 젖은 목소리로 미래를 말했고, 또 가끔은 따스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때의 검설린은 생기가 있었다.
서문윤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제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
제 의지로 검설린을 따르는 것과,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남는 것은 차이가 크다. 후자는 언젠가는 회의감을 느끼기 마련이고, 또 구속감에 고통을 받으리라.
그러곤 언제고 파멸을 향해 걸어 나가겠지.
그것은 검설린이 경험했던 것이고, 또한 서문윤이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문윤은 검설린이 지금 무너진 이유를 확실히 이해하고,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저는 무너지지 않겠습니다. 저는 의형보다 강인하니, 절대로 삶을 비관하지 않겠습니다.”
어둠 속에 새파란 눈이 빛나고 있었다. 검설린이 흉흉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살기에 가까운 시선을 받으며 서문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의형처럼 되지 않겠습니다.”
완전히 검설린의 얼굴을 무너트린 말이었다.
침묵이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에서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를 깨달을 수 있었다. 흐릿한 동공.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치 심각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검설린은 제 말에 분명히 반응을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였고, 그 다음은 울화였고, 그 다음은 허탈함이었다.
어느 순간 처참히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치 여러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네가 너무 태평해서 짜증이 난다.”
그 말을 내뱉곤 검설린이 눈을 질끈 감으며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피력했다. 물론 서문윤은 그를 방관하지 않았다.
“의형, 삶에는 언젠가 희망이 있고,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검설린이 흉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내뱉는다.
“넌 개새끼야.”
욕설을 무시하며 서문윤은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언제고 이 일이 해결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니여도 상관이 없어요.”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
“제가 너무 의형을 잊고 있었군요. 장한성 이후로 너무 안도해서 그때의 다짐을 잊었습니다. 이리 고생을 했군요.”
“…….”
“강서진을 완전히 떼어내지 못한 게 백년화 때문인 겁니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서문윤은 답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가 풀리고야 만다.
“그리고 그 일을 제가 망쳤고요?”
그 말에도 끝끝내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에 서문윤은 아까 전보다 조금 더 긴 침묵을 지켰다.
이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검설린이 그동안 고우군의 세력을 흡수하고, 황재천과 내통하고, 운표선과 손을 잡으면서 오랜 시간 강서진의 세력을 도려낼 계략을 펼쳤다는 것을. 오왕 암살부터 지금의 삼군 회군까지 모든 일에 검설린의 의사가 개입되었고, 그것은 모두 강서진을 상대하기 위한 안배였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그간의 수 싸움이 길게 이어졌다는 것을 서문윤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 검설린이 우세를 점했다는 것도. 그런 상황에서 그가 막상 갈팡질팡하는 원인이 저란 것도 말이다.
그리고 검설린의 침묵에서 서문윤은 이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느릿한 한숨이 흘렀다.
피로에 사로잡힌 검설린의 흐릿한 눈이 서문윤을 마주하고 있었다.
“넌 정말 말을 안 들어.”
낮게 흐른 목소리에 돌아온 것은 바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고였다. 기침을 흘리는 검설린의 건조한 입술을 어루만지던 서문윤이 고개를 숙인 것은.
충동적인 일이 아니었다.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뜨거운 입술에 입술을 맞출 때 검설린은 몸을 경직시키며 숨조차 쉬지 않았다. 온기를 나눈 입맞춤에 서문윤은 마음에 쌓였던 짐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평온을 되찾고, 서문윤은 그 순간 결핍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내가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왔구나.
그리고 그와 함께 서문윤이 얻은 깨달음.
‘내 집은 강소성에 있지 않다.’
감았던 눈을 뜬 순간 심장이 아릿할 만치 아름다운 눈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잠시간 검설린의 그 눈과 마주하며 침묵을 지켰다가, 이윽고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내뱉은 담담한 결의.
“저는 당신을 떠날 생각이 아예 없고, 마음을 무너트릴 생각도 없습니다. 더 이상 이리 어리석게 굴지도 않을 겁니다.”
“…….”
“그러니 제 걱정을 하지 마시고 강서진을 치십시오.”
흐릿한 두 눈을 깜빡거리며 검설린이 멍하게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그걸 염려하신 것 아닙니까?”
그는 한참 동안 서문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고, 서문윤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끝에 검설린이 문득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서문윤의 몸을 움찔하게 만든 반응이었다.
“네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으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얼굴을 슬쩍 무너트리며 그가 검설린의 눈치를 살핀다. 초조함이 스치는 얼굴을 검설린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기가 막힌 듯한 웃음을 흘리며 무언가의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의 정신이 혼미하여, 서문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일부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하룻강아지가, 이럴 줄……. 변한 게….”
예상했던 단어들의 나열에 서문윤이 어색하게 웃을 때였다.
“……고향으로.”
아주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을 용케 듣곤, 서문윤은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꽤나 그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으므로. 서문윤은 당황에 사로잡혀 한참 동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제 손을 부여잡은 손을 바라보고만 있던 것이었다.
새하얀 손은 간절히 서문윤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핏줄이 도드라질 만치 제 손을 꽉 부여잡은 손을 보는 순간 서문윤은 그 말의 의미를 추궁할 생각을 포기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다.
서문윤의 얼굴에 다시금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다만 서문윤은, 확언을 받고 싶을 뿐이었다.
“의형의 고향이 어딘가요?”
“…….”
“그곳은 강소성입니까?”
하나둘씩 지역을 호명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고향이 어딘 줄 모른다. 그저 그가 어린 시절 아비를 따라 수도로 올라왔고, 멸문을 당하고 고초를 겪었다는 것만을 알았으니까.
“수도에 있습니까? 아니면…….”
검설린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한 것에 가까웠다.
고열이 들끓는 머리가 새빨갛다. 서문윤은 그의 풀린 동공에서 점차 그의 정신이 흐려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면…….”
그 대목에 이르러 서문윤은 말을 머뭇거렸고,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검설린이 또다시 정신을 잃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에도 제 손을 놓지 않고 간절히 부여 쥔 손을 말없이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고개를 숙여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 위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곤 서문윤이 시선을 들어 올려 고요한 눈으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나, 어쩐지 서문윤은 그것이 무언가 짐을 덜은 사람같이 평온해 보인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검설린은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 서문윤에게 말을 내뱉었다.
“준비해라.”
“예?”
병석에서 일어나서 그게 무슨 말인가?
당황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을 검설린은 고요한 눈으로 잠시간 바라보았다가 문득 조용히 말을 읊조렸다.
“고향을 찾을 준비를 해야지.”
서문윤의 얼굴을 멍하게 한 말이었다.
고향이라는 말에는 울림이 깊다.
대개 사람들에게 고향은 돌아갈 곳이었고, 뿌리의 끝이었고, 영혼의 움집이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그것을 아주 어렸을 때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 단어의 의미대로라면 검설린의 고향은 하동이다.
그러나 의원이던 그의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 위해 하동 본가를 떠났고, 검설린은 기억이 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에 수도로 몸을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 동서대란 때, 검설린은 파나립 박사의 일과 엮여 가문이 멸망한 이후 본가와의 연결고리가 끊겼다.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들려오는 소식에 뿔뿔이 흩어져 성을 갈아 숨어 산다고 하긴 했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사실 행적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하동은 고향의 의미를 상실한 지도 오래였으니까. 가묘가 부서지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 속의 저택 또한 전소된 지 오래. 뿔뿔이 흩어진 일족들이 모든 일의 화근이 된 제 아비를 증오하고 있을 것은 뻔했고. 검설린은 그들을 굳이 찾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의 고향은 하동보다는 수도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면 황성에서, 검설린은 이청융의 시종으로 그와 같이 자라면서 그곳에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꽤나 생생했다.
가장 안정적인 때였다. 가족이 없어도 소년 시절 이청융과 운표선, 조금 지나고 나서는 강서진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유대 관계를 형성했으니까. 가족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가까운 관계였다, 그들은. 이상을 공유하며 같이 나아가는 벗이 있고,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지켜주는 이가 있었으니.
장안사준이라 불리던 네 명의 청춘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고, 영혼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돌아올 곳이 있었단 것이었지.
이건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다.
검설린은 고우군에게 제가 역적의 후손이요, 아비에게서 서학을 배웠다는 사실을 들키고 궁을 나가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육체적인,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그건 사람의 곁을 의미했다. 영혼을 둘 사람이 있는 곳을 말이다.
말단 군의가 되어 종군을 하고, 북란 때 생사의 고비를 겪으면서 고향을 떠올렸다. 한계에 몰릴 때마다 제가 돌아갈 고향을 떠올리곤 했다. 언젠가 그곳에 돌아가 지친 영혼이 쉬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검설린에게 고향은 쉼터를 의미했다. 항상 수난을 겪었던 그가 마음을 놓고 휴식할 수 있는 자리. 스스로의 회복을 꾀할 수 있는 자리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고향을 다시 한 번 잃어버려야만 했다.
아직도 기억이 남는 그 끔찍한 날의 일이었다.
동궁사변이 벌어진 그날, 검설린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저를 지켜주던 울타리는 부서졌고, 검설린은 그를 지키기는커녕 제 손으로 고발을 해야만 했다. 같은 이상을 함께 공유하던 벗들은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각기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았던 지우와의 연결고리가 끊겼고, 검설린은 고향을 박탈당했다.
다시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아무도 말이다.
사람을 잃어버리고 영혼을 둘 곳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검설린은 두 번은 견디지 못했다. 그 외로움. 허공에 부유하는 듯한 망연함을 견디지 못했지. 세상에 오로지 혼자 남은 느낌. 타자와 격리된 공간에 따로 살아가는 느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아예 가지지 못했으면 몰랐을 그 박탈감을, 검설린은 두 번이나 얻고 상실하면 크게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세 번을 견딜 수 있을까 봐?
그래서 검설린은 결심했다. 더 이상 상실을 겪지 말자고. 이청융의 유언으로 억지로 10년을 살아가게 된 직후, 그는 더 이상 이 끔찍한 경험을 겪지 않겠다 다짐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과 멀어지고, 또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 순간 검설린의 입가에 조소가 흐르고야 만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있다.
그것은 군중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고야 마는, 사람과 교류하길 원하는 마음이었다. 태어나길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기를 원하고야 말지.
검설린 또한 그러했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돌던 그 시절 가끔 악몽을 꾼 적이 있다.
힘들지만 희망이 있던 과거를, 외롭지 않던 시절을, 지친 영혼이 쉴 곳이 있었던 때를 꿈으로 꾸었다.
그건 돌아갈 수 없는 때 악몽인 꿈이었다. 검설린은 몸이 무너질 때마다 그런 꿈을 꾸고, 깨어나서 한동안 저조한 기분에 시달리고야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욕망이 투영된 것이었다.
쓴웃음이 흘렀다. 검설린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단어의 울림은 사람마다 다르곤 하다.
가족, 집, 고향.
검설린에게 꽤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말은 그런 것들이었고.
또 한평생을 원했던 것들이었다.
검설린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침상에 앉아 팔의 완갑을 고쳐 매는 중이었다.
장안이, 그가 상실한 두 번째 고향이 눈앞에 있었다. 그에 검설린은 새삼스럽게 옛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곳이 제 고향이었던 적이 있었지.’
그것은 검설린이 사랑했던 두 번째 고향이었고, 그가 애착하는 장소였고, 그의 영혼을 묻은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는 그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새로운 고향을 얻기 위해 청산을 해야 하는, 그러니까 옛날의 그가 저지른 일의 결과물이 말이다.
검설린은 침상에 앉아 침착하게 완갑을 조이는 중이었다. 과거를 앞둔 그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옛날의 죄악이었다.
검설린은 죽음을 다짐하고 제가 벌인 일에 책임지지 않고 도피했다. 그러나 지금 생존을 마음먹고, 살아가길 택하고 검설린은 제가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문윤의 중독.
이청융의 죽음.
장안의 혼란.
그리고 한 여인의 불행.
모든 것이 얽혀 결국 검설린은 대가를 받고 있었다.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숨결이 흘렀다.
‘망향(望鄕).’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방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 방랑하고 있는 것은 검설린뿐만이 아니었다.
잠시간 무언가를 생각하던 검설린의 얼굴에 문득 고요한 빛이 스쳤다. 실로 온화한 빛은,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마냥 차분한 것이었다.
적어도 검설린은 이 사건에서 저 말고도 방랑하고 있는 이를 두 명을 더 알았다. 고향을, 사람을, 그러니까 제 영혼을 둘 곳을 잃고 크나큰 허무감과 분노에 휩싸여 행동하는 이를 말이다.
장안에 도착한 그날 밤, 검설린은 바로 그런 방랑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운명에 휩쓸려 세상에 버려진,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세 명의 방랑자를.
검설린, 강서진, 그리고 고 귀비.
검설린의 입가에 비소가 번진 때였다.
깊은 밤만큼 어둑한 사내의 눈이 암울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두 눈에 비춰진 것은 바로 십여 년 전 불타오르던 이민족의 땅이었다.
* * *
“나는 반드시 복수할 겁니다.”
원독에 찬 여인의 웃음을 검설린은 애써 흘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검설린은 계단 아래 수치스럽게 결박당한 채 그 웃음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황제의 뒤에서 나긋이 웃는 여인을 마주하고 검설린이 깨달은 것은 세상의 이치였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구나.’
스스로 뿌린 씨앗을 거둔 것을 그 누구를 탓하겠는가?
* * *
검남전이 승리로 끝난 그 날로부터 한 달 후.
토벌군은 장안성을 포위했다.
아니, 그걸 토벌군이라 할 수 있을까?
반란을 진압하러 조직된 토벌군은 이제 조정의 명을 듣지 않았다.
‘악천화’는 훌륭히 반란군을 토벌했으나 그는 더 이상 황제의 말을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청은도, 황재천도, 이백영도. 장안을 포위하고 있는 모든 군대의 수장이 ‘군대를 성밖에 주둔하고 혈혈단신으로 황제를 배알하라’는 성지에 복종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성지를 쓰고 황명을 가장한 이’에게 항명하는 중이었다. 토벌군은 장안을 손에 넣은 섭정 대신 강서진에게 항거하고 있던 것이다.
토벌군의 주장은 이러했다.
“황제는 성지를 내려 불충한 무리의 반란을 진압하라 명했다. 토벌군은 삭번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으나, 임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성지는 불충한 무리를 제거하라 했고, 장안에는 불충한 이들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강서진이 황제를 핍박하고 찬탈을 노린다는 말이었다.
사실은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강서진이 황제를 유폐시키고 옥새를 빼앗은 것은 사실인 일이었으니까.
흔히 재상이라 불리는 조정의 우두머리, 상서좌복야는 강서진의 꼭두각시였고 중앙군 또한 강서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황제는 이청은과 검설린이 장안 밖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홀몸으로 저를 알현하라 성지를 내렸으나, 그것은 사실 도발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다.
강서진은 장안 권력을 장악했고, 성지를 명분으로 한 토벌군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끝까지 가야만 했다. 서로가 ‘불충한 반역자’임을 힘으로 입증해야 했다.
그러니까 성벽에 빼곡히 늘어선 흉흉한 군사들이 증명하는 것은, 장안 조정이 토벌군을 적으로 받아들인단 사실이었다. 토벌군 또한 성지를 내리는 환관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냉담한 태도를 보이며 조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고.
“소문에 강소성주가 황제를 유폐하고 조정 대신을 협박했다 한다! 일국의 태자이자 토벌군 사령관으로서 나는 이 소문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니, 부황께 성벽 위에 서서 소문의 참과 거짓을 가려달라는 말을 전하도록.”
그것은 이청은이 제 군영을 찾은 사신에게 전한 말이었다.
평소에 대범했던 태자는 성지를 받을 때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태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너는 원래 어전 태감이 아니군? 본래 성지를 전달하는 태감은 어전 태감일 터인데? 너는 어디 소속이지.”
“그, 그건.”
말을 더듬는 중년의 환관에게 이청은은 차갑게 웃을 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성지를 들고 온 태감이 태자가 본 적이 없던 인물이란 소문이 장안을 둘러싼 군대에 곧 퍼져 나갔다. 그것은 강소성주가 황제를 유폐시키고 권력을 찬탈했다는 소문에 힘을 실어주는 말이었다.
토벌군은 ‘감히’ 황제를 해하고 불충불의한 짓을 저지른 ‘반역자’ 강서진에 대한 분노를 불태웠고, 우국충정을 부르짖었다.
불편한 진실은, 그들 중에 사실 진정으로 충심을 지닌 이들은 없단 것이었다. 이미 토벌군은 검남에서 황제의 성지에 반발하여 태감을 위협한 전적이 있었다! 태자와 황제를 향한 적나라한 불만을 드러낸 적도 있었고. 심지어 그들 중에선 쓸모없고 무능한 황실을 뒤엎자 적나라한 주장을 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애국충정’을 운운하며 황제의 이름을 부르짖으니, 그를 지켜보던 서문윤은 당연지사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 가망이 없다면서요…?”
거의 광기에 이른 듯 황제의 이름을 부르짖는 장수들이 낯설다. 떨떠름한 얼굴을 한 서문윤에게 검설린은 차게 웃으며 답했다.
“황실에 충성이고 나발이고, 역적으로 몰지 않으면 몰릴 판국인데 어련하겠어?”
검설린의 조롱 섞인 짧은 촌평을 서문윤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또한 어느 정도 실감하고 있던 것이다.
<저놈들이 역적이 아니면 내가 역적이 된다!>
그러니까 이제 둘 중 하나가 역적이 되어야 하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장안의 조정과 토벌군, 둘 중 하나가 승자가 되고 모든 것을 차지함을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청은의 병영에 다시 내려온 성지는, 그러한 전운을 더욱 거세지게 했다.
“불충하고 불효한 태자를 폐한다!”
많은 이들을 당황케 한 성지였다.
“강서진은 무슨 연유로 이리 막나갑니까?”
성지의 내용을 듣고 서문윤은 그야말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중병에 걸려 성벽에 나서지 못한다는 변명은 그렇다 쳐도, 황실에 하나 남은 황자를 폐한다는 말은 너무 나갔다.
누가 보아도, 성지는 장안 권력이 찔리는 게 많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원래 이리 경솔하고 과격한 사내였던가?’
그리하여 서문윤은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강소성주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른 분이군요.”
“네가 생각했던 강서진은 어떤데?”
“더 현명하고 신중한….”
그리고 그 말에 검설린은 냉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놈이 정말 현명하다면 과거에 얽매어서 이리 자기 파괴적인 길을 걷지 않겠지.”
서문윤은 그 말에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강서진이 그린 그림에는 미래가 없다. 수단에는 인정이 없지. 그는 죽여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죽였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는 선이라는 게 없었어.”
옛 친구를 평론하는 말의 수위는 높았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말에서 조롱을 엿볼 수 있었고, 차게 식은 그의 눈에서 증오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게 위정자의 모습인가? 아니, 그는 복수귀다. 강서진 그놈은 백성이 고통받는다, 이청융의 유지를 지켜야 한다 변명을 하지만 사실상 복수를 하고 싶은 거야.”
침묵 끝에 서문윤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답했다.
“안타까워하십니까?”
“뭐?”
서늘한 목소리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서문윤은 그를 덤덤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분께 스스로의 그림자를 투영하십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비수로 약한 부분을 찔린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서문윤을 노려볼 따름이었으니까.
“그분과 당신은 다릅니다, 의형. 당신이 책임을 내려놓은 일과, 그가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악행을 저지른 일은 결코 같은 수위의 일탈이 아닙니다.”
검설린은 결벽증을 앓고 있기에, 서문윤은 그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동궁사변의 후유증을 두 분이 앓지만, 그 말이 두 분이 같은 책임을 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검설린의 반응은 서문윤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만약 내 책임이 더 크다면?”
담담한 목소리로 흐른 말이었다.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칠흑같이 어두운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했다. 서문윤은 당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다. 극히 부정적인 검설린의 성격과 냉소적인 화법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당신은 옳은 방법으로 책임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시선을 피하지 않고, 검설린을 차분한 눈으로 응시하며 서문윤은 말을 이으려 들었다.
“그게 차이입니다.”
평소와 같은 말이었다. 원론적인 위로 같은 것.
그러나 뜻밖에도 검설린은 그 말에 평소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서문윤.”
침묵 끝에 흐른 갈라진 음성에 서문윤이 몸을 멈칫하고야 만다. 말에는 묘한 어조가 있었고. 손에 쥔 술잔을 탁상 위에 내려놓고 서문윤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검설린을 응시한다.
이청은이 성지를 가져온 전령의 목을 자른 날,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검설린은 이청은의 병영에 전갈을 보내어 장안을 칠 날짜를 조율을 했다. 두 세력은 손을 잡았으나 완전히 뜻을 함께하지는 못하고 군대를 나눈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해진 날짜.
‘사흘 후라.’
생각보다 빠른 날짜에 서문윤은 어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실 다른 이들도 공유하는 현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병영에는 기이한 긴장이 감돌았다.
역적이 되고 마느냐, 천하의 주인이 바뀌느냐 마느냐가 내일 결정이 된다.
사람들은 이미 죽음을 다짐을 한 상태였으나 천하의 향방이 결정되는 날을 앞두고 어쩔 수 없이 무게감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건 전쟁을 앞두고 느끼는 감정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리고 서문윤은, 안 그래도 과중한 피로감을 느낄 검설린을 더 부담스럽게 하기 싫어 그런 부담감을 숨기고 있다가 걸리고야 말았다. 천막 뒤에서 토악질하던 모습을 보이는 최악의 방식으로 말이다.
검설린은 어색하게 웃는 서문윤을 데리고 천막으로 들어와 뜻밖에도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것은 서문윤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검설린은 전쟁 중 술을 마시는 이가 아니었다. 부담감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음주를 택하는 이도 아니었고.
그러니 지금 그와 밤중에 얼굴을 마주하고 대작을 하는 상황이 서문윤은 낯설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문득 촛불 그림자가 사내의 수려한 얼굴 위에 흔들렸다. 고요한 정적이 자리한 얼굴에서 서문윤은 그 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용모 때문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그 얼굴에 홀린 것이 아니었다.
서문윤은 단지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깊은 감정을 느끼고 시선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네가 내 진심을 원했고, 나는 네게 위로를 받길 원했다.”
언뜻 보면 짐을 완전히 덜어버린 듯 초탈하고, 언뜻 보면 절벽 위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사내마냥 위태롭다. 담담한 목소리로 이어나가는 검설린의 얼굴은 평온하기에 서문윤은 더욱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이 큰일을 벌이기 직전에, 다짐을 할 때 저런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를 잘 알기에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 연이어 흐른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얘기를 반드시 해야겠지.”
또 그것은 서문윤을 홀리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나는 네게 동궁사변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말을 할 때 검설린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이 물결치고 있었다.
바로 서문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감정이었다.
* * *
“영공(令公), 저를 제 아버지 곁으로 보내주십시오.”
동궁사변으로 검설린이 깨달은 것은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 제가 얼마나 오만한 생각으로 살고 있었는지. 또 사실 제가 그 옛날의 다짐을 변절하고 있었단 사실도.
“제발, 제발 저를 보내주십시오. 정명공. 이건 부당한 일입니다. 저는, 몽국 왕의 딸이 아니에요. 저는 강제로 끌려와 허울 좋은 공주가 된 겁니다.”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바꾸자 했다.
그것이 동서대란으로 역적이 된 부모의 죽음을 겪고, 그때 흘린 무수히 많은 피를 보고 결심한 것이었다. 정계의 논리에 휩쓸려 부당하게 죽어나간 그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했던 무고한 이들이었다.
“다시는 그런 이들이 없게 만들자.”
그리하여 과거의 이청융이 손을 뻗을 때부터 검설린은 하나의 각오로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거다.”
세상에 헛되이 사그라드는 목숨이 없게 하겠노라고.
그리고 검설린은 그로부터 십수 년 후에 원독을 품은 여인을 마주하게 되었다.
“제가 바란 것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제가 부당하게 공물이 된 과정을 황제에게 알리고, 절 아비에게 돌려달란 부탁이었습니다. 허나 당신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제 불행을 방관했습니다.”
정의(正義)라는 명분으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하물며 동서대란을 일으킨 고우군 또한 나름의 정의가 있었다. 정계에 선악의 구분이 무용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검설린과 이청융을 비롯한 이들의 목표는 고우군을 척결하는 것이 아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대의명분과 정계의 논리라는 미명하에 함부로 죽어나는 이들이 없도록.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저는 대의명분하에 헛되이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남벌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었다.
회흘이 장안을 침략한 북란을 겪고, 검설린이 얻은 결론은 소극적인 방어로는 더 이상 국경을 안정화할 수 없단 것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당의 군사력은 약해져갔고, 이민족의 세는 거세져갔다. 그리하여 검설린은 남벌을 강렬히 주창했던 것이다.
토번의 세는 거세져가고, 서방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서역과 당을 잇는 차마고도가 끊기고, 토번이 서방무역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서방의 소국들과 이민족들은 당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토번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토번과의 군사충돌이 몇 번 있었고, 검설린은 그를 가볍게 보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서남지방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운남은 이민족의 땅이라 사실상 중앙의 힘이 미치지 않고, 검남은 불과 3년 전 절도사가 토번과의 전투로 전사할 만큼 위태롭습니다. 토번의 호전적인 군주가 1년에 마흔 번이 넘는 전투를 국경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대당에 이익을 안겨주었던 서방무역은 차마고도가 끊기고 무력화된 실정입니다. 지난 북란을 통해 관병이 실전 경험을 쌓았고, 승리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기가 높으니 나라의 큰 우환을 방비하려면, 반드시 남벌을 자행해야 합니다. 이미 많은 서방의 소국들이 아국(我國)이 아닌 토번을 맹우로 택하고, 토번은 국경에서 군사 도발을 심심치 않게 행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남벌을 미뤄서는 안 됩니다. 만약 오늘날 남방을 평정하지 않는다면 장차 북란과도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겁니다.”
그것은 황제와 고우군이 반대하는 일이었다. 사실은 장안사준, 그의 동료마저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한 일이었고.
“이미 너는 너무나도 많은 승리를 거두어 황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남벌을 성공으로 거두면 이건 황제에게 지나친 부담이야. 어째서 그를 몰라?”
“설린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만 이미 사람들은 피로감을 짙게 느끼고 있다. 여기서 장병들을 더욱 고생시키는 건 인정이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왔어.”
“너는 남벌에서 승리하고 은퇴할 생각이구나.”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운표선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놀란 강서진이 검설린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차분한 얼굴로 이청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뜻을 깨달은 이청융이 침음을 흘렸다.
“고우군 때문에 종군을 하게 됐지만, 나는 원래 널 보좌할 생각이었다.”
그쯤에 검설린은 병부를 은퇴할 뜻을 품고 있었다. 나라를 구했다는 지나친 명성이 황제에게 부담을 주고 있음을 알기에. 또 그는 본디 문관으로서 이청융을 보좌할 생각을 품었던지라 병부에서 몸을 뺄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이곳이 내가 끝까지 몸담을 곳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사실 강서진이 격렬히 반대했던 일이었다.
“황제의 견제 때문이면 차라리 소하처럼 부정부패를 저질러 눈을 피하거라. 병권을 내려놓는 건 네 모든 것을 내준다는 의미인 걸 모르느냐……”
아무리 황제의 의심을 피하고자 함이라 한들 군사력이라는 커다란 패를 내놓는 건 지나치게 위험 부담이 크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그러나 막상 담담히 말을 내뱉는 이청융에 강서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제 말을 승낙한 것이 놀라운 듯, 검설린은 창백한 얼굴 위에 조금은 놀랍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는 선량하니까…….”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리고 이청융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방 안은 정적이 돌았고, 검설린은 순간 얼굴을 구기고야 말았다.
“날 놀리는 거냐?”
이청융이 이런 일에 장난을 칠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설린은 그 말이 당황스러워 화를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선량이라니, 정치에 뜻이 있는 장수에게는 필요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남벌에 검설린은 그런 그의 생각에 못을 박을 수 있었다.
선량하다니, 그런 개가 웃을 말을…….
모든 전쟁이 끝나고 검설린은 그 말에 날카로운 조소를 흘리고야 말았으니까.
남벌은 북란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침략을 받아 시작된 전쟁인 북란과 다르게, 남벌은 당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국경에 인접한 소국을, 당이 아닌 토번과 친해지길 택한 나라를 공격하며 검설린은 어쩔 수 없는 찝찝함을 느껴야만 했다.
“저희는 어쩔 수 없이 토번에게 의탁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한 말을 검설린은 훗날에 종종 떠올렸다. 그것은 불타오르는 제 고향을 마주하고 좌절한 어느 이민족 사내가 내뱉은 절규였다.
“땅에는 마땅한 작물이 나지 않고, 저희는 서방과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헌데 어찌 저희보고 삼천 리 멀리 떨어진 당황제를 믿고 토번과의 관계를 끊으라 하십니까……”.
“너희가 어쩔 수 없는 건 안다.”
그 때 검설린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허나 그걸 우리가 왜 이해해야 하지?”
“그, 그건!”
“애초에 너희에게 면세 특권을 주고, 아국이 지은 역참을 사용하게 배려한 건 그런 너희의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너희가 토번과 손을 잡지 않게 우리가 제시한 대가였다. 헌데 너희는 받을 것을 다 받아먹고 아국을 버렸지 않나?”
“그런 어쩔 수 없는…….”
“우리도 어쩔 수 없다.”
그리 말을 하며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는 이들의 마을을 검설린은 망설이지 않고 불태웠던 것이다.
“토번은 아국의 국경을 번번이 침략하는 적국이고, 너희는 그와 손을 잡았지. 아국이 너희를 공격하는 데 불의한 구석은 없다.”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말은 사실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둑한 그림자를 떼어내기 위함이었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멍한 눈으로 불타오르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타닥거리는 불타는 소리 사이로 들려온 허망한 목소리에 검설린은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당신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입니까?”
이는 쓸모없는 변명일 뿐이다!
이민족 사내의 허탈한 웃음이 알려준 것. 그를 검설린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채 찜찜한 마음을 억누르며 대의를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남벌은 진행되었다. 토번을 물리치기 직전에 검설린은 23개의 소국을 침략하여 개중 18개의 나라의 전향을 받아내었다. 끝까지 저항했던 나머지 다섯 곳 중 세 곳은 왕이 바뀌었고, 두 곳은 나라가 불탔다.
“약탈은 삼가라. 묘를 파내지 마라. 여인을 건들지 마라. 죄를 저지른 이들은 군령으로 심판할 것이다.”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 명령을 내리면서 검설린은 속으로 이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위안이 될 결정인지 조소를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노예가 될 것이고, 그들의 고향을 잃을 것이다.
‘고향을.’
묘한 어감을 지닌 단어를 중얼거리면서 검설린은 문득 무언가를 마주하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사내의 시선이 닿은 것은 바로 공허한 눈으로 불길을 담고 있는 아이였다. 과거의 어느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심장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끼며 그 모든 것을 잃은 아이를 바라보던 검설린은, 그리고 어느 순간 들려온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는 이청융은 되지 못했다.
목표가 있었고, 그를 쟁취하기 위해선 하루가 부족할 만큼 노력해야만 했으니까.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가여운 어린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바쁘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타오르는 마을을 뒤로하고, 잿더미를 밟고 나아갔다. 토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남벌을 성공으로 이끌어 검설린은 목표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이었다. 저 자신을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쁘게 나아가던 검설린이 그 대가를 돌려받기 시작한 것은.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겠다.
더는 저처럼 어린 나이에 큰 슬픔을 겪는 이가 없게 하겠다.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겠다.
이 처음의 다짐을 잊고 대의를 위해 사람을 희생하는 구태와 다름없는 흔한 권력자가 된 대가를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느 한 불쌍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남벌이 끝나가던 와중에 몽국의 왕이 제 딸을 당황제를 향한 제 충성의 증거로 바쳤다. 여인의 미모는 대단했고, 사람들은 몽국 왕이 대단한 충심을 가졌다 평했다. 그러나 검설린은 몽국 왕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제 딸을 팔아 이득을 얻으려는 아비의 비정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는 몽국 왕의 딸이 아닙니다.”
몽국을 떠나기가 무섭게, 여인이 검설린을 향해 흐느끼며 그리 말했던 것이다.
“저희 아버지는 운남 남서 호운성에 사는 장이족의 족장입니다. 비록 이민족이지만 당의 국적을 가진 대당인입니다. 몽국은 당을 침략하고 당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 공물로 바친 겁니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손을 쓰기 복잡한 일이었고.
그때 병사들 사이엔 이민족의 왕이 바친 아름다운 공주의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이미 검설린은 황제에게 몽국의 왕이 그의 공주를 공물로 바쳤다는 장계를 올린 후였고, 황제는 이미 검설린의 높은 명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몽국 왕은 장계를 올렸다. 장안으로 가는 건 피할 수 없어. 일단 도착해서 얘기하자.”
책을 잡힐 구석을 철저히 피하려던 검설린은, 애원에 찬 여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리 말했던 것이다.
황제에게 바쳐진 공물, 여인에게 손을 대는 것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진 세력가라 할지라도 후궁의 일에는 조심스레 접근하곤 했다. 그것은 황제의 자존심이 달린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검설린은 지나친 명성 탓에 황제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몽국이 바친 공물이 사실 이민족의 공주가 아니라 아국의 사람이니 여인을 풀어달라’는 말을 하는 건, 지독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검설린은 장안에서 이 사안을 강서진에게 넘기려 했던 것이다. 그는 온유한 성품으로 적을 만들지 않았고, 정치관에서 이청융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태자파로 분류되긴 했으나, 두루두루 사람과 어울리는 그를 황제는 어느 정도 신임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강서진은 유가(儒家)의 커다란 맥을 이었으므로. 황제는 유학자들을 대표하는 그를 존중하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강서진은 검설린의 말을 거절했다.
“너는 장안의 상황이 어떤지를 모르는구나. 황제는 자존심이 드센 사람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공물로 바쳐진 여인을 풀어달라 소청을 할 셈이냐. 여인 하나를 살리겠다고 쌓아온 기반을 다 무너트릴 수야 없지 않아. 사정은 딱하지만, 더 딱한 사람은 많다. 설린아.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 네 불안한 위치를 바로잡는 일이야.”
실로 타당한 말이었다. 또 비정한 일이었고.
묵묵히 말을 듣던 검설린은 불타는 고향을 바라보던 공허한 눈을, 그 눈의 주인인 어린아이를 떠올리고 결국 냉소를 흘리고야 말았다.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고도 이 무슨 깨끗한 척이야….
“더 중요한 대의가 있다.”
“……그렇지.”
그렇게 검설린은 사건을 방관했던 것이다.
아니, 방관이 아니었지.
그 당시 온화한 성품의 이청융이 여인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녀를 구명하려 했었고, 장안사준은 모두 그를 말렸었다. 결국 황제에게 진실을 말하고 열화와 같은 역정을 들은 이청융에 그들은 위기감을 느꼈으니까.
“시국이 시국이고, 상황이 상황이다. 너는 어찌 그리 미련하게 구느냐!”
선하다 못해 이리도 미련하게 구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인 운표선의 말에 그리고 이청융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답변이었다.
“이게 미련함이 되는 세상이구나.”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찌 그들이 모를까?
“……네 정의로움이 미련함이라 칭해지지 않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나아가고 있는 거다.”
그러나 그때 검설린은 그런 말로 답변을 했었다.
“그런 세상을 위해 네게 목숨을 걸고 있어.”
그런 궤변으로 비겁함을 정당화하려 했지.
그날은 비가 추적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날카로운 웃음이 검설린의 귓전을 때린 날이었다.
“미안하오. 내 미안하오.”
이청융은 실로 부끄러워하며 여인에게 몸을 굽혀 사죄를 했다. 일국의 태자답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운표선과 강서진은 말리지 않았고, 검설린은 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의 사죄를 받던 여인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답변을 주었다.
“전하께는 유감이 없습니다.”
어딘가 초연함이 묻어 나오기까지 한 목소리에 검설린은 하루 전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울고 비통히 소리쳐도 다른 사람들은 저를 이민족의 요사스러운 계집이라 여기며 무시했었지요. 오로지 전하만이 제 목소리를 들어주고 절 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도 모르고 전하를 원망하겠습니까?”
이청융은 여인을 빼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를 알린 것은 바로 상단을 운영하여 뒷세계의 일에 민감한 운표선이었다. 묵묵히 말을 듣던 검설린이 택한 것은, 바로 도주를 준비하던 여인의 마음을 꺾는 것이었다.
정명공부를 폐쇄한 검설린은 우짖는 여인에게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청융이 그녀의 부모와 고향을 약속했다 하지만, 수천 리 밖에 있는 일을 다 돌볼 수는 없는 법이다.
그 말은 적나라한 협박이었다.
‘당신은 비열하군요.’
원독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여인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렇게 여인이 이청융에게 입궐을 할 의사를 알리고, 마침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원하지도 않게 황제의 여인이 된 이는 입궁하기 직전 감정이 거세된 듯한 담담한 얼굴로 검설린을 응시하며 말을 내뱉었다.
“정명공!”
그것은 그가 들었던 것 중 가장 지독한 각오를 품은 것이었다.
“마차를 타고 장안에 오는 내내 나는 영공(令公)에게 목이 쉬어라 빌었습니다. 저를 놓아달라고. 제 아버지에겐 어미도 다른 자식도 없고 오직 저밖에 남지 않았으니 제발 저를 운남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검설린은 투명한 유리알처럼 맑고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했고, 그렇게 말은 이어졌다.
“악천화, 그대를 저주하리라!”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 중얼거리는 검설린의 두 눈에 몸을 돌려 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는 여인이 비춰져 있었다. 마차가 떠날 때 차가운 얼굴에 순간 균열이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애써 무너지는 표정을 다잡곤 입안에 번져나가는 씁쓸함을 삼킬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 말을, 그러나 검설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번복하게 되었다.
그는 절절히 후회하고야 말았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검설린은 이청융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청융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으니까. 이청융과 가장 먼저 교류한 이는 운표선이였으나, 검설린은 그의 손에 구해져 궐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에 가까웠으므로 누구보다 먼저 이청융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항상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이청융을 알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가 괴로워하거나, 수심에 차 앓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수도가 적에게 점령되어 나라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던 북란 때도 한 치의 그을음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갈 뿐이었으니까.
이청융은 강인한 자였고 위기를 맞이한들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태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눈 아래에 그늘을 매달았고, 무언가 사색에 젖어 넋을 놓는 일이 많았다. 그것은 이청융이 소년일 때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항상 여유를 보이던 이청융은 어딘가 쫒기는 사람처럼 조급한 얼굴로 업무에 과도하게 몰두했고, 또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검설린은 장안사준 중 제일 먼저 그에게 지적했었다.
“네가 세력의 구심점인 걸 잊지 마라.”
“응?”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리 천연덕스럽게 말을 덧붙이는 이청융의 얼굴은 뺨이 움푹 패여 초췌해져 있었다.
저 말을 변명이라 하는지?
검설린은 이청융의 답변에 흔들리지 않고 그를 깊은 눈으로 응시했고, 그에 이청융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네가 흔들리면 다른 이들도 흔들리지.”
침묵 끝에 느릿한 목소리로 흐른 말에, 이청융은 쓴웃음을 흘리며 수염이 없는 제 밋밋한 턱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가 당황할 때 하는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청융은 실용주의를 받아들인 이후로 거추장스럽게 제 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그것은 가끔 태자의 스승인 태자태보의 불만을 샀다. 그 일로 스승에게 혼이 날 때마다 이청융은 머쓱하게 웃으며 턱을 만졌는데, 그것이 버릇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버릇은 이청융이 성년이 된 이후, 그가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는 데 성공한 이후로 사라졌었고.
“네 사생활은 사적인 영역이 결코 아니야.”
그런 그를 알기에 검설린은 더욱 확고한 목소리로 추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널 흔들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모두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일이니까.”
이청융은 긴 침묵 끝에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지.”
그러곤 어딘가 공허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길.
“나의 일은 더 이상 사생활이 아니지.”
그에 이르러 검설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노려보고야 말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청융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그에 검설린의 불안은 커졌던 것이다. 이청융은 추궁을 당하는 순간에 이리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는 자가 아니었다, 검설린이 아는 그의 주군은.
“무슨 일입니까.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그리하여 검설린은 낮고 확고한 목소리로 경고성의 말을 내던지며 그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말을 놓는 오래된 벗에게 존대를 하며 검설린은 침착한 얼굴로 말을 기다렸고, 그에 이청융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답변할 수 있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침묵 끝에 이청융이 턱에서 손을 떼곤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고요한 얼굴로 검설린을 마주했으나, 검설린은 그 말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말로는 부족하다. 검설린은 확고한 답변을 원하며 이청융을 노려보았으나, 뜻밖에도 이청융은 고개를 설레 저으며 말을 일축할 뿐이었다.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아.”
그것은 사실 이청융답지 않은 태도였다.
태자당이라 불리는 이들이 정치판에 몸을 담고 답지 않게 서로가 끈끈한 유대감을 가진 이유는 그들이 하나의 이상으로 뭉친 이념집단이기 때문이다. 태자는 장안사준과 사석에서 말을 놓으며 속내를 감추지 않았고, 특히 검설린에게는 제 모든 것을 내보이며 신뢰를 드러냈으니까.
그러니 이청융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수상한 것이었다.
검설린은 말을 돌리는 태자의 모습에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 하나의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검설린이 우연히 목격한 일로 인해 커져나갔고.
“부황의 여인과 더 이상 왕래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청융이 흔들리고, 장안사준을 비롯한 그의 일파가 슬슬 그의 이상한 상태를 눈치채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운표선은 이청융의 동요가 황제의 견제 탓이라 생각했다. 북란이 끝나고 황제는 지나치게 세가 커진 이청융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더 나아가 강서진은 그로 인해 이청융이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다 생각했다. 그는 이청융의 선량한 성품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위기감을 느꼈으므로. 주군이 제 아비와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일을 염려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검설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무언가 더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청융의 동요를 황제와의 불화로 예측했으나, 검설린은 다른 무언가를 더 느끼고 있었다.
황제와의 권쟁으로 피로를 느낀다고?
아니, 이청융은 애초에 북란 때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팔다리가 다 잘린 황제의 눈치 주기에 위기감을 느낄 리가 없지 않나.
부친과의 갈등으로 윤리적인 갈등을 느낀다고?
그 말에 검설린은 망설임 없이 조소할 수 있었다.
강서진은 이청융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이청융의 뜻은 구태를 혁파하는 것에 있었다. 아비의 유산을 남기지 않는 것에 말이다. 그에 전제된 조건은 아비와 반하는 것이었고, 이청융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각오하고 있었다. 이청융은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칼을 겨누는 패륜아는 아니지만, 정치적으로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윤리적으로 어긋난 일도 아닌, 고작 황제와 정쟁을 벌이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겠는가?
그러니 검설린은 짐작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사적인 이유가 말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를 지켜보기 시작한 검설린의 눈에 보이는 것들.
이청융은 어느 순간부터 황궁 밖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실 황제의 격노를 불러일으킨 행위였다. 북란을 극복한 영웅이 명사(名士)들과 어울리며 제 세력을 키우니 황제는 자식이 다른 뜻이 있다 생각하며 경계를 더욱 키운 것이다.
“너는 왜 자중해야 할 때에 세력을 키우느냐?”
그 일에 국영상단을 운영하여 황제와 조정 대신과 왕래가 잦은 운표선 또한 항의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네가 세를 모은다 동요를 한다. 너는 아무 목적이 없다 한들, 지금 이 상황에서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임을 알지 않느냐?”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쳐도, 군부의 사람과 접촉을 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지 않는가. 남벌 이후 검설린이 병권의 일부를 내려놓고 어느 정도 사라진 황제의 불안이 요즘 들어 다시금 하늘 위로 치솟은 후였다.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아도 충분해. 황제에게는 어차피 대안이 없으니, 아들인 네게 지나치게 대응하지는 않을 테니까. 허나 그게 자중할 필요가 없단 말은 아니다!”
그리하여 참다못해 항의하는 운표선을 묵묵히 바라보던 강서진이 덧붙인 말이었다.
“황제에게 대안이 왜 없지? 이청은이 있잖아.”
“그는……”
순간 운표선의 얼굴에 당황이 감돌고, 강서진이 고개를 돌려 말없이 웃고 있는 이청융을 응시한다.
“태자께서 인자하신 성품임을 압니다. 그러나 권쟁에는 혈육의 정은 무용하지 않습니까. 미리 얘기를 하자면, 저는 태자께서 당신의 동생을 살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는 답변하지 않았고, 강서진의 말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져 나갔다.
“그는 지금 그의 스승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강서진은 본디 정치인보단 학자나 사상가에 가까웠으므로, 신중한 성격에도 이청융에게 충고를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그는 이청융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안은 그렇게 커진 후였고, 그에 그들은 불안을 느꼈으므로.
“청은은 권력에 관심이 없다.”
“전하!”
그리고 이청융은 한마디 말로 그들의 불안을 일축했고, 검설린은 그를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훗날 서문윤이 알지 못한 사실은, 그 당시 장안사준에서 가장 절박하고, 또 열정적인 사내가 바로 검설린이었단 것이었다.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문윤의 반발을 샀던 검설린은 그때 목표를 위해 제 영혼을 불살랐었다.
검설린은 잃은 게 너무 많았고, 가진 것도 없었으니까.
황가(皇家)보다 오래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운표선과, 유학의 대맥(大脈)을 이은 강서진과 다른 입장이었다, 그는.
그러니 검설린이 절박하게 이상에 매달린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말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청융의 흔들리는 모습에 위기감을 느끼고 바로 사람을 붙인 검설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청융은 황궁의 출입을 어느 순간부터 자제 못 하고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그것은 검설린이 이청융에게 ‘사생활’을 지적한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앞뒤 상황을 고려하면, 이청융이 타격을 입은 건 사생활 탓이다.’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 거목 같은 사내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일이 몇이나 있을까. 대부분 이런 일은….
‘여자 문제지.’
그리고 태자의 뒤를 캐던 검설린은 문득 어느 불길한 가정을 품고 섬뜩한 마음을 품고야 말았다.
‘설마?’
요즈음 수도에서 가장 시끄러운 소문은 바로 황제의 총애를 얻은 여인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민족의 공주로 공물로 바쳐진 여인은 고씨 성을 하사받고 입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얻고 득세했으며, 후궁 중 가장 높은 귀비가 되었다. 이청융과 이청은의 생모인 황후가 오래전 사망하고 그 자리가 정치적인 이유로 공석이 된 걸 고려하면, 귀비는 내명부를 통치하고 있는 여군(女君)과 다름없었다. 고작 소국의 공주, 이민족 출신 공물이 나라의 반을 움켜쥔 것이다.
그리고 이청융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녀가 득세를 하기 시작했지.
이청융은 그녀를 동정을 하여 입궁 초기에 많이 챙겨주었고, 그는 검설린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이청융이 정치적인 이유로 황제를 설득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부채감을 이해하여 검설린은 그가 후궁에 손을 대는 위험천만한 일을 방관했다.
이청융이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내임을 알기에 그에게 일을 온전히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불길한 상상을 하고서, 검설린은 도저히 일을 방관할 수 없었다.
후궁의 일을 뒤에서 캐며, 서서히 드러난 실체.
이청융이 고 귀비와 남몰래 연락을 주고받은 것, 그녀가 이청융을 눈에 띄게 견제하는 황제를 말리며 사이를 조정한 것. 그녀가 고 귀비로 승진한 날 유독 심란해했던 이청융의 과거 모습.
그리고 그 의혹에 못을 박은 것은 우연히 마주한 만남이었다.
“더 이상 왕래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어느 날 밤 검설린이 이청융에게 비밀리에 말을 전하기 위해 동궁을 찾았을 때 목격한 밀담이었으니….
“애초에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고, 단지 저는 귀비마마의 일에 책임을 느꼈던 겁니다…….”
“그게 당신의 변명입니까?”
그 순간 검설린은 얼굴을 딱딱히 굳힐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각에 황제의 여인이 동궁을 방문할 이유가 무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단번에 이청융의 태자 위를 날려버릴 수 있는 큰 사안이었다. 어둠 속에서 밀담을 나누는 비슷한 연령대의 남녀. 귀비와 태자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있었고, 그에 검설린은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저는 당신께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닙니다.”
그녀였다.
“그저 당신과 가끔 이야기를 나누며 위안을 얻길 바랐을 뿐입니다.”
“…….”
“내 삶이 낙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청융은 그때 검설린이 본 적이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마저 위험부담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까?”
그 시간 검설린은 절벽 아래로 거꾸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고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느낌을 말이다.
안 된다.
그 길을 가면 안 된다.
목구멍에서 튀어나가려는 말을 삼키며 검설린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이청융을 보았을 때였다.
“행복하세요, 모비.”
침묵 끝에 흐른 말에, 검설린은 간신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귀비의 대답은 이러했다.
“당신들은 정말로 잔인하군요.”
당신이라는 말의 범주에 누가 들어갈까?
검설린은 그 순간 문득 잿더미 속에서 공허한 눈을 한 어린아이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허무하게 부모와 가정을 잃고 살아갈 희망을 저버린 아이를.
어쩐지 너울 속 그녀의 얼굴이 짐작이 간다.
입안에 번지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검설린은 고 귀비가 사라진 후 태자의 앞에 몸을 드러내어 말했던 것이다.
“네가.”
“…….”
“조금 더 이성적이길 바란다.”
가끔 검설린은 후회하곤 했다.
“그리고 감성적이길 바라지.”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동궁사변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우리를 생각해다오, 청융.”
이청융은 그 말에 힘겹게 웃으며 답변했다.
“그리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는 검설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청융은 그 후로 고 귀비와의 관계를 깔끔히 끊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비를 맞이했다. 중매를 선 것은 고우군이었고, 태자비로 간택된 이는 황제의 수족의 자제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 바로 동궁사변이었다.
모범적인 품성으로 명성이 높았던 태자가 미약을 사용하여 귀비를 범하려 한 상식 밖의 사건. 사람들은 이 일을 믿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사건이 북벌 이후로 세력이 축소된 고우군이 벌인 일이라 여겼다. 또 일부는 황제의 자작극이라 여겼고.
가장 대세인 의견은 이것이 태자 위를 탐낸 이청은이 꾸민 모략이란 것이었다.
당시 귀비는 또 태자와 정치적으로 가까운 관계였고, 태자는 혼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이 서로 그런 사건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이 사건의 뒤에 서린 비화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그 말을 내뱉을 때 검설린의 얼굴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 *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검설린이 말을 마치고도 서문윤은 한참을 말문을 열지 못했다.
“이게 내가 숨긴 마지막 사안이다.”
술잔의 술은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손바닥으로 술잔을 덮은 채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던 서문윤의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가셔 창백히 질려 있었다.
“내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원죄고, 세상에 저지른 잘못이지.”
평소라면 검설린에게 항의했을 서문윤은 긴 시간 말을 내뱉지 않았다.
“제가 중독된 이유는 인과였군요.”
그리고 침묵 끝에 흐른 말.
“제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당신이 이 일을 제게 끝까지 숨겼다는 겁니다.”
노기가 희미하게 섞여 나온 말. 그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원래는 평생을 숨길 생각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분노가 일렁거린 순간이었다. 차마 그 어떤 말조차 내뱉지 못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는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냉소를 지으면서 술잔에 입술을 댔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겁이 많다고.”
격정을 참지 못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문윤이 순간 울컥하여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입술을 연다. 고함을 내지르려는 듯한 서문윤을 검설린은 차분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격렬한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으나, 서문윤은 끝끝내 고함을 내지르지 못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여 복잡하게 얽히고야 만다. 목에는 핏대가 세워졌고, 이는 악물렸으며,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그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서문윤은 결국 도저히 참지 못해 천막을 뛰쳐나가고야 말았다.
부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은 묵묵히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어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불행을 겪은 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의형에게 있단 사실에 화를 내야 할까?
‘확실히 그건 충격이었지…….’
고 귀비가 장이족 족장의 딸인 건 강서진에게 들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제가 음약에 중독되어 몸을 버리게 된 배경이 검설린과 얽혀 있음도 알았다. 허나 이리 노골적인 인과를 생각한 게 아니다. 서문윤은 단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비가 검설린을 제 장기말로 삼기 위해 노림수를 쓴 것이라 예상했을 뿐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다.
그건 검설린의 잘못이라 칭하기엔 뭣한 일이었다. 그들이 검설린을 이용하고자 마수를 뻗은 것인데, 서문윤이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검설린을 탓하겠는가?
허나 밝혀진 것은, 이 사건은 너무나도 명백히 검설린의 책임이 크단 사실이었다. 검설린은 잘못을 저질렀고, 서문윤은 그 인과를 받은 것이기에.
그럼 의형이 저지른 악행을 비난해야 할까?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져간다.
이건 너무, 너무 명백한 검설린의 잘못이었다.
‘……그렇게까지 했을 줄이야.’
검설린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옛날에 서문윤은 스스로를 경멸하는 검설린을 한결같이 지지해왔다.
동궁사변 때 주군을 배반한 것?
검설린이 사리사욕으로 자백서를 쓴 것이 아닌데 누굴 탓하겠는가?
그때는 심지어 이청은마저 제 형을 버리고 잠적했었다. 국영 상단을 운영하는 운표선은 그에 더해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청융과의 연결고리를 필사적으로 끊었다. 괜히 훗날에 운표선이 세상에 속죄하려 발악하고 청매소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 강서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예 후일을 다짐하며 열렬히 이청융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황재천은 말할 것도 없이 아예 자백서에 이름을 얹었고.
미쳐 돌아가던 때에 그 한 사람만이 유독 잘못을 저질렀다 할 수 있겠는가?
서문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염원을 뿌리치고 와해된 태자당을 버리고 도망친 일?
그들의 원망의 말을 이해한다. 그때 완전히 산산조각 난 조정의 혼란을 서문윤은 아비에게 언뜻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관료였던 자로서 검설린의 선택을 비판하면서도, 서문윤은 그를 옹호했다. 그것이 과연 검설린의 책임인가? 하면 의문이 남는다는 뜻이었다.
태자의 죽음 이후 태자당의 이인자가 된 검설린이, 고우군의 손에 갈기갈기 해체되는 제 도당을 버리고 짙은 피로감에 정계를 떠난 건 누구의 원망을 받을 만하다. 허나 그건 그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때 의형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고.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애초에 검설린에게는 책임이 없었다. 검설린과 영혼이 이어진 동반자로서 그를 옹호하는 게 아니었다. 설령 남이었을지라도 서문윤은 검설린을 비난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서문윤은 검설린의 모든 자아비판을 무시해왔다.
당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이해한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제 어깨 위에 있는 짐의 무게를 실감하는 건 미덕이지만, 너무 그렇게 책임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던 시대고, 당신은 지나치게 고결하게 구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조금 무게가 다르다.
고 귀비 사건은 조금 말이 달랐다.
‘한 여인의 인생을 망가트리고….’
서문윤의 얼굴에 서서히 균열이 번져 나갔다.
공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여인.
이민족이라지만 엄연한 대당의 백성이었던 고 귀비는, 타국에 납치당해 협박을 당했다. 그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검설린은 대의를 위해 그걸 무시했고, 도당의 이익을 위해 그녀의 인생을 희생하려 들었다….
심지어 그녀의 가족으로 협박을 하고, 희망을 완전히 부숴버리면서 말이지.
그리고 그건 서문윤이 반발했던 방식이었고, 검설린이 증오했던 것이었다.
대의를 위해 사람을 희생하는 것!
고 귀비가 검설린에게 보복을 한 것은 당연하다. 동궁사변을 일으킨 일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지만,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에 버림받고 벼랑 끝에 몰려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라의 관료와 태자는 그 말을 거절했다. 심지어 인간적인 정을 바라며 교류만을 이어가고자 하는 그녀를 완전히 몰아붙였지.
동궁사변은 검설린과 그들 일파가 벌인 일의 대가였던 것이다.
그것은 고우군의 공작도, 황제의 암계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저 죄악에 돌려받은 업보였지.
그리고 그것을 안 순간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 귀비의 아비가 검설린을 중독시키려 했던 것은 정치적인 보복이 아니다. 그는 딸을 위해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착잡함에 서문윤이 두 눈을 깜빡였다. 검설린과의 대담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 또한 똑같은 사람이다. 네가 고우군을 비정하다 욕하고, 황제를 탐욕스럽다 말을 했지.”
“…….”
“나도 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내가 만든 칼이 나를 겨누기 이전까지는 말이야.”
검설린은 차갑게 웃었고, 서문윤은 그런 그를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죄가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이상을 위해 몸을 바쳤던 고결한 사내에 대한 상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일방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당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 더욱 뒤통수가 얼얼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숨기고 저를 기만하려 했던 검설린이었다.
왜 이런 일을 진즉 제게 말을 하지 않았지?
“세상에는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은 게 있다. 그래서 난 네게 그날의 일을 말하지 않으려 했어. 하지만 너는 굳이 진실을 원했지……. 그러니 나는 답했다.”
“……비겁합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검설린은 냉소 지을 뿐이었다.
“네 지금 얼굴로 나는 입을 닥치고 있던 내 선택이 옳았다 생각하고 있다, 서문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따져야 할지 모르겠다.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서문윤이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찬 공기에 뿌연 연기가 서리고야 만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검설린과 거의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졌다. 그것이 은근 부담인지라 위장에 독주를 퍼부었던 서문윤은 발개진 얼굴로 제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정신마저 흐릿하단 소리는 아니었다.
‘산 넘어 산….’
사실 정말 뜻밖인 것은, 서문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은……. 서문윤이 사실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서문윤의 얼굴에 허무함이 스쳤다.
‘어째서 이리 평온하지?’
놀랍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예 분노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막사 안에서 검설린의 말을 듣고서 서문윤은 순간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켜야만 했고 결국 폭발하여 자리를 뛰쳐나오고야 말았으니까.
그러나 곰곰이 검설린의 말을 곱씹고 사실을 회고하면서,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제 안의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사실 분노보다 더욱 극적인 상태였다.
차분한 눈으로 서문윤이 장안의 높은 성벽을 바라봤다. 고요한 얼굴은 성벽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어둠을 밝히는 불꽃. 그것이 늘어선 성벽 위를 빤히 응시하며 그가 문득 입술을 달싹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안을 칠 것이다. 그리고 저 성벽은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승기가 기울어졌음을 알았다. 검설린이 이끄는 토벌군, 이청은이 이끄는 친황군, 이중환이 물려받은 고우군의 유산까지. 모두의 목표는 하나였다.
그들은 장안이 무너지길 원했고, 군대는 성벽이 막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후를 생각하던 서문윤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럼 성벽이 넘어가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검설린은 이중환과 합의를 했다. 재상 중심의 관료체제로 조정을 개편하는 데. 뜻밖에 이청은도 재상중심 체제로의 개편에 동의했고, 세 사람의 목적이 통일되었다. 이청은이 이중환에게 변혁을 약속하고 검설린이 공증하면서 일은 잘 마무리되고 있었다.
서문윤이 원했던 검설린의 은퇴는 순조로웠다.
장안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그를 수습하는 일은 이청은이 맡게 될 것이다. 황재천이 병부를 물려받고, 이중환이 재상중심의 체제 개편을 위해 고우군이 마련된 유산을 풀어놓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검설린은 이제 뒤로 빠지기만 하면 됐다. 남은 일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모든 근심을 잊고…… 촌부처럼 편히 살아가자.’
그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
그것이 지금까지의 목표였다.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그가 빠져나왔던 천막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그를 잡지 않았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사실을 고백하는 검설린을 떠올리며 서문윤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얼굴엔 비난의 기색도, 그 어느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허상과 같았다.
모든 것들이 이뤄지기 직전인데, 어째서인지 서문윤은 그 모든 게 신기루 같았다. 손아귀에 들어오려는 행복, 그들의 귀향, 미래가 예전처럼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마음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서문윤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검설린과 함께 살아가는 미래에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무언가를 깨닫고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나…….’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결론이 나왔다.
‘질린 건가?’
운남에서 벌어진 일. 제가 겪은 불행이 순전히 검설린의 죄의 대가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제 잘못을 숨기고 기만하려 했단 것을 알게 되었다. 본래라면 화가 나야 할 사안이겠지. 허나 서문윤의 마음은 평온할 뿐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낯설어 방황하던 서문윤은 어느 생각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게 정이 떨어졌다는 건가?
검설린의 천막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서문윤은 잠시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서문윤이 멈추었던 발걸음을 뗐다. 성큼거리는 발걸음으로 그가 향한 곳은 바로 그가 빠져나왔던 천막이었다.
* * *
“의형.”
두꺼운 장막을 손으로 걷어내며 서문윤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서문윤이 침착한 얼굴로 방 안을 응시했다. 엉망이 된 술자리. 생각을 해보면 거의 처음으로 검설린과 대작을 한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의 술자리는 엉망이 되었고, 검설린은 서문윤이 떠난 빈자리를 마주하고 묵묵히 자작하고 있었다.
서문윤이 가라앉은 눈으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단정히 머리를 묶고 소매를 끈으로 조인 흐트러짐 없는 모습. 그의 얼굴은 흐트러짐 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천막 안은 서문윤의 코끝을 훅 찌를 정도로 술 냄새로 차 있었다.
검설린은 제법 센 술을 좋아했고, 그들의 술자리에는 독주가 나왔다. 그리고 서문윤이 떠난 자리엔 술병 여러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서문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린다.
“술은 그만 마셔요.”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술을 털어 넣고 있었다. 침착한 얼굴. 감정이 거세된 듯한 무표정한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다.
그를 마주하고 서문윤은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천막을 뛰쳐나갔을 때, 서문윤은 검설린의 그 무심한 태도, 그 차갑고 매정한 말에 울화를 느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잖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이 사람, 두려워하고 있구나.
차가운 말이 돌아오고 침묵이 흐른다. 본래라면 검설린을 달랠 서문윤은 묵묵히 입술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검설린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고, 그러다가 문득 고소를 흘리며 술잔을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차가운 시선이 서문윤을 쓸었다.
“내가 네게 빌 줄 아느냐?”
검설린은 형형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후회를 할 줄 알아?”
서문윤은 말없이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사죄의 말을 듣고 싶어?”
말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검설린이 말을 그치고 침묵했다. 수려하면서도 칼날같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검설린은 서문윤을 음습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가 죽어 움츠릴 만한 시선에, 그러나 서문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지.
느릿한 숨결이 흐른 순간 검설린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진다. 서문윤은 그가 당황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술잔을 부여잡은 검설린의 손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
“내게 뭘 원하는 거….”
“제게 무슨 답변을 원하십니까?”
그런 그의 마음을 짐작하기에, 서문윤은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짜증이 납니다.”
이제 지친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피로에 지친 얼굴로 서문윤이 천막 안에 들어섰다.
“왜 당신은 제게 이렇게 굴지요?”
“…….”
“이게 당신의 진심입니까?”
검설린의 주변에 가, 탁상 위에 걸터앉았다. 건방진 행동을 검설린은 탓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지켰고, 서문윤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독설을 내뱉길 바랍니까? 제가 당신을 포기하길?”
서문윤의 두 눈이 건조하게 가라앉아 검설린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검설린이 본 적이 없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시간이 흘렀으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저만 당신을 부여잡는 것 같습니다.”
검설린이 몸을 뒤로 젖힌다. 서문윤의 얼굴을 더욱 잘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침착한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서문윤은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의형은 정말 답이 없군요.”
무어라 답변을 할 법도 한데, 검설린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거리며 서문윤을 응시할 뿐이다. 서문윤은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여러 말을 삼키고 있었다.
“당신이 절 믿지 않고 독선적으로 행동한 이유를 알겠군요. 애초에 당신은 제게 진실을 보여줄 생각도, 마음을 터놓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적절한 선에서 스스로를 숨기고……, 절 기만할 생각이었지.”
고요한 목소리가 울렸다.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검설린이 침묵 끝에 중얼거렸다.
“그것과 비슷한 일들.”
서문윤의 눈썹이 꺾였다. 답변을 원하는 짙은 시선에 결국 검설린은 굴복하고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했지. 그때의 나는 장안성에서 벌어진 일들을 조정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차분한 시선이 서문윤을 쓸었다.
“태자당의 이인자였고, 책임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
“내가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 아랫사람의 손이 더럽혀지지.”
“바꿀 생각은 없었습니까?”
굴레를 벗어던지길 우리는 바라지 않았나.
“세상을 바꾸자 했습니까.”
간절함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목소리에 검설린이 조소를 흘렸다.
“난 네가 순진하다고 누누이 말했지.”
서문윤이 그 순간 검설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 그게 제게 할 말입니까?”
멱살을 잡혀 끌려간 검설린이 무심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서문윤이 떨리는 숨결을 다스렸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빛나고 있었다.
“제게 할 말이, 그것뿐입니까?”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어서 말하는 서문윤의 얼굴이 살벌하다. 멱살을 잡힌 사내의 얼굴은 편안했다. 그는 오히려 서문윤의 분노를 반기는 듯했다.
안도가 희미하게 퍼져 나가는 검설린을 잠시간 이를 악물며 노려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에 이르러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손을 차분히 바라보며 검설린이 중얼거렸다.
“때릴 테면 때려라. 그럴 자격은 있으니까.”
그의 그런 말에 서문윤은 묵묵히 검설린을 향해 손을 뻗는 것으로 답했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고 검설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몸이 끌려가 서문윤을 향해 얼굴을 내어준 검설린은 눈을 감지 않고 제 입술을 훔친 이를 담담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잠시간 시간이 흘렀고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뜨거운 입술에는 독주의 향이 묻어 있었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눈을 곧장 바라보았다.
“오늘은 주기가 아닐 텐데.”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에 서문윤이 고개를 살짝 젓고 검설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에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검설린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며 서문윤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확인을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마음을 알고 싶었고.
검설린은 순순히 입술을 내주었다.
서문윤은 그런 그의 입술을 취하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검설린은 차라리 체념을 한 사람처럼 보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서문윤이 눈썹을 꺾는다. 술을 얼마나 들이부었길래 입술을 맞댄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게 주기가 들이친다.
서문윤이 입술을 떼자 검설린은 투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수한 얼굴에 서문윤이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느릿하게 속삭였다.
“침상으로 가요.”
두 눈을 감지도 않고, 고요히 검설린을 바라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평온한 얼굴에는 정사를 말하는 사람답지 않게 부끄러움도 열의도 묻어 나오지 않는다. 그런 그를 두 눈을 내리깔며 잠시간 지켜보던 검설린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은 어색했다.
검설린의 품에 안기면서 서문윤은 미묘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 그의 몸에 들러붙었던 때로부터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다. 헌데 어쩐지 등을 조심스럽게 감싼 손길이 낯설었다. 침상에서 몸이 눕혀질 때까지 서문윤은 미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누르고, 검설린은 서문윤의 몸 위를 올라탔다.
“술은, 이제 마시지 말지요.”
코끝을 훅 찌르는 취기에 서문윤은 결국 참다못해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입술을 입술로 틀어막았고.
야밤에 계획 없이 시작된 정사였다.
검설린은 부드럽고, 또 집요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본디 입버릇과 다르게 정사에선 대부분 서문윤을 배려했고, 그들의 정사는 검설린의 성정만큼 거칠지 않았다. 허나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여운이 남는 입맞춤을 깊게 했던 것이다.
서문윤이 시작한 밤이다. 그러나 검설린은 서문윤의 입술을 유독 길고 짙게 핥고 빨았다. 목구멍의 숨을 빨아들이는 검설린에 서문윤은 거부감을 느껴야만 했다. 검설린은 눈을 감지 않았다. 입을 맞추며 서문윤의 옷을 벗겨내는 동안에 그는 검은 유리와 같은 눈으로 그의 의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숨이 뜨거워졌다. 부드러운 혓바닥이 서문윤의 입천장을 쓸고, 서문윤은 고요하게 불타는 눈에 함몰되어 두 눈을 깜빡거리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곧 과정을 잊고야 말았다.
두 눈에 홀려 기억이 수면 아래로 침잠된 것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몽혼해진다. 길고 매끄러운 머리를 휘장처럼 드리우며 검설린은 헐벗은 서문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뺨을 핥는 혓바닥에 서문윤이 작게 웃다가 검설린의 몸을 손으로 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옷을 왜 안 벗으십니까?”
검설린이 그 말에 몸을 멈칫하다가 서문윤의 뺨에 누른 입술을 뗀다. 서문윤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괜히 제가 말을 내뱉다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연인이 몸을 섞는 정사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 네가 내 옷을 벗긴 적이 있었나….”
무덤덤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고야 만 것이다. 어쩐지 이상한 분위기가 되고야 말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나만 네 옷을 벗기는 건 부당하다 했지.”
왜 그런 말을 하지?
고저 없이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눈이 차가울 만치 차분했다. 그날은 서문윤도 기억하고 있었다. 검설린이 몰래 저와 몸을 섞었다는 걸 알고 난 후 의식적으로 몸을 섞은 첫 정사였다. 그때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환희향에 관련된 모든 사실을 숨겼고, 서문윤은 그리하여 그가 저를 삿된 욕망으로 탐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 의형에게 실망을 하고, 또 미움을 드러냈지.
‘허나….’
서문윤이 느릿한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그는 검설린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고, 고개를 기울여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생각에서 도주하려는 의도였다. 눈썹을 꺾고 두 눈을 감으며 서문윤은 그의 눈에서 도피하려 들었다.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시선에 도피하고 정사의 열의에 젖으려 했다.
그날. 부정할 수 없이 검설린에게 분노했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에 이 입맞춤이 더 뜨거웠던 것 같은 느낌이다. 불편한 사실을 애써 숨기며 서문윤은 제 허벅자리를 파고드는 손에 허리를 들어주었다. 향유가 하체를 적실 때 무의식적으로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서문윤은 그리고 입술 밖으로 야트막한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서문윤을 노려다보는 눈이 있었다.
“으음.”
정사 내내 서문윤은 의식적으로 제 눈을 감으려 들었다.
“아, 읏.”
성기가 파고들 때 서문윤은 제 위를 점거한 몸을 단단히 붙들며 신음을 삼켰다. 미간을 찌푸리던 서문윤은 홧홧한 시선이 닿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슬쩍 돌릴 수밖에 없었다. 메마른 입안을 마른침을 삼켜 축이며 서문윤이 힘겨운 미소를 짓는다. 흐릿해진 눈을 깜빡거리며 그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은 정사 동안 검설린의 시선을 피하려 들었다. 얼굴을 숨기려는 듯이, 그는 정사에 적응이 되지 않을 순간에도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뺨을 가리게 고개를 슬쩍 돌렸다. 느릿하게 삽입되는 성기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서문윤은 검설린의 팔뚝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서문윤을, 검설린은 지극히 정적인 새파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성기가 삽입되어질 때, 서문윤은 결국 참지 못해 고개를 뒤로 꺾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아, 제기랄….”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은 몸을 움직였다.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이윽고 작아진다. 그는 제가 적응하기도 전에 몸을 움직이는 검설린을 밀어내려 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삼키는 서문윤을 검설린이 순간 감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검설린은 고개를 숙여 서문윤의 잘게 떨리는 턱을 핥았고, 그 순간 허리를 움직였다.
“아…!”
서문윤의 미간이 완전히 찡그려지던 때, 그의 입술을 입술이 느릿하게 덮었다.
신음은 입술에 빨아들여진다.
이어진 정사에 서문윤은 고역감을 느껴야만 했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얼굴 지근거리에서 눈을 감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을 좋아했던 서문윤은 집요한 행동에 부담감을 느끼고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의형, 잠시만, 흣!”
검설린은 부드럽게, 그러나 결코 옅지 않는 몸짓으로 서문윤의 몸을 열고 있었다. 서문윤이 시작된 정사에서 적극적으로 군 것은 검설린이었다. 서문윤은 평소답지 않게 조급히 구는 검설린에 당혹감을 느껴야만 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문윤이 고개를 슬쩍 돌려 가쁜 숨을 흘렸다. 단정히 묶었던 머리가 흐트러져 내려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잠시, 잠시만.”
깊게, 더욱 깊게 제 안에 들어오려는 듯한 검설린. 코끝을 스치는 주향에 서문윤이 어지러움을 느끼며 숨을 헐떡거렸다.
“……왜 이리, 조급히 구십니까?”
강인한 손이 서문윤의 어깨를 잡아 누르고 있었다. 추삽질은 불규칙적이었고, 몸짓을 애달팠다. 입술 밖으로 야트막한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는다. 저를 집요히 노려보는 눈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윽, 읏.”
뜨거운 숨결이 살결을 스쳤다. 정사 중간중간 서문윤은 발개진 얼굴을 도리질 치며 제 마음을 드러냈다. 그런 서문윤의 입술을 꾹 누르고, 혀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곤 검설린은 그를 차가운 불꽃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뭐라 설명을 해야 하지?
그 눈은 마치 서문윤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했다.
“그, 그만.”
그리하여 결국 서문윤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며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만 보세요.”
돌을 박은 듯 단단한 어깨에 손톱을 꽂아 넣으며 서문윤이 마른기침을 했다. 검설린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성기를 빼지도 않고, 그저 제 안에 들어오는 일에 열중하는 듯 검설린은 서문윤을 침상에 꾹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해 머리를 징하게 울리는 쾌락에 허우적거리던 서문윤은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몸을 뻣뻣이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
그곳에는 희미한 간절함을 품고 일그러진 검설린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 * *
정사 내내 검설린은 집요하게 굴었다. 서문윤이 시작된 정사임에도 검설린은 오히려 그에게 매달리는 듯했던 것이다. 서문윤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릴 때 검설린은 그를 놓치지 않고 추격했다. 벌려진 입술을 머금을 때 그는 차갑게 불타는 눈으로 서문윤의 얼굴을 노려보고, 눈을 마주하려 들었다.
서문윤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설린은 감정 교환을 원하고 있었다.
영혼을 꿰뚫는 듯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곤 마음을 읽으려 들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지….’
그 마음을 알면서도 서문윤은 마른침을 삼키고, 두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얼굴 위로 흩뿌려지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러지 마세요….’
그것이 무얼 원하는지 알기에 서문윤은 초조함을 느끼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정사 후에 검설린은 서문윤의 몸을 정리하고 그의 허리를 팔로 껴안고 침대 위에 누웠다. 아니, 사실 껴안다기보단 허리에 손을 얹는 것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검설린은 그를 구속하지 않았고, 그를 몰아붙이던 정사 때와는 다르게 아주 조심스럽고 미묘하게 굴었다. 몸을 웅크린 채 서문윤이 잘게 몸을 떨었다.
머릿속에서 해와 달 같은 눈이 뜬 채 지워지지 않았다. 형형한 눈은 정사 내내 서문윤을 노려보고, 또 답변을 간절히 원했다.
네 마음은 어떠하느냐고?
그리고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아주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아.’
그 순간 그의 등에 검설린의 느릿한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는다.
‘아, 안 되겠다.’
모순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와 몸을 섞는 동안, 제 마음을 찾는 듯한 집요한 시선에 마음이 흔들거리면서도…. 근본적인 거부감을 서문윤은 완전히 떨구지 못했던 것이다.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손바닥의 단단한 부분으로 머리를 짓눌렀다. 술을 얼마나 들이부었던 것인지. 입술을 물고 빨고 하는 동안에 머리가 계속 울렸다. 도대체 몸도 안 좋은 양반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서문윤이 마른기침을 하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설린은 순순히 그의 허리에 걸친 손을 거두었다.
침상에 걸터앉아 서문윤이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잠시간 시간을 흘려보냈다. 시선이 등에 닿는 게 느껴졌으나 서문윤은 몸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느릿하게 옷을 걸쳐 입었고, 그런 그를 검설린은 묵묵히 방조했다.
신발을 신으려던 무렵에 서문윤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 관계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만 같다.
이제는 검설린만을 탓하기도 뭣하다. 서문윤은 그간 많은 애를 썼고, 그리고 그동안 검설린은 지독히 그의 속을 썩여왔다. 용서를 한두 번한 게 아니다. 서문윤은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아니, 그는 실제로 검설린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여러 번 바치려 들었다.
헌데 이제 회의감이 들었다.
우리는 정말 맞지 않는 게 아닐까?
검설린에게 맞추려 노력을 하고, 또 노력을 했다. 일방적인 관계였다. 서문윤은 오로지 일방적으로 검설린에게 매달리며 그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비관적인 그의 마음을 바꾸길 원했고, 그와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를 바꾸려 들었다.
헌데 바뀌지가 않잖아?
아니, 이제는 피로했다. 지치고, 회의적이었다.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구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곤 서문윤이 몸을 일으킬 무렵에,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렀다.
“서문윤.”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고. 그 끝에 서문윤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
그 말에 서문윤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검설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았다. 검설린이 그토록 원하던 시선을 서문윤은 주었다. 담담한 눈에는 분노가 없었다. 검설린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시선이 제 얼굴에 닿는 게 느껴진다. 서문윤이 허무한 웃음을 흘리고, 또 빠르게 얼굴에 표정을 지웠다.
“잠시간….”
원하는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전하의 막사에 있고자 합니다.”
몹시 피로하다.
서문윤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허가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나는 네게 아주 예전부터 나를 떠날 자유를 줬다.”
그 말에 천막 밖을 빠져나가려던 서문윤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 순간 몸을 뻣뻣이 굳히고 있었다. 서문윤을 향해 말이 이어지기까지는 작은 공백이 있었다.
“네가 날 떠나도 나는 막지 않아.”
그 끝에 흐른 말에 서문윤은 얼굴을 희미하게 굳혔다가 문득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천막을 빠져나갔고, 검설린은 그를 끝까지 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