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망향(望鄕)(7) (26/31)

25. 망향(望鄕)(7)

“이건 말과 다르잖아, 이건!”

그것은 처절한 절규였다. 스산한 기류가 감도는 방 안을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봉두난발이 된 채 핏발 선 눈으로 누군가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마흔 중반의 사내였다.

“나를 황제로 만들어준다며! 당군은 힘들이지 않고 무너트릴 수 있다며!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며, 그냥, 그냥 쓸어버릴 수 있다며…!”

말을 듣는 이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서른의 이민족 사내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중년인의 말을 흘려보내다, 이어진 말에 문득 입술 끝을 살짝 꿈틀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애초에 그 조건으로 이민족에 나라를 바쳤다는 말까지 들으면서 내가 당신과 손을 잡은 거 아니야! 장강 이남의 땅까지 준다고 내가 약속을 했잖아! 그런데 왜…!”

“그래, 그런 약속을 했었지. 그때는 너무 쉬운 장사처럼 보였으니까.”

젊은 사내는 토번군을 이끄는 장수였다. 지금은 바로 검남의 절도사와 영합했던 그네들이 군사를 물리려는 상황이었고.

“장, 장사라니!”

웅대한 포부를 펼치는 일을 그리 말하다니?

이민족 사내의 천박한 말에 검남 절도사의 얼굴이 새하얘지고 이윽고 분노의 불길이 그의 얼굴을 사로잡았다. 검남 절도사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에 앞선 이민족 사내의 웅변에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희 한족 나라가 무너져 내려가는 것을 우리들이 모를 것 같으냐? 국경을 지키는 정예병의 상태만 보아도 너희는 예전의 그 당군이 아니야. 썩은 지푸라기를 세워도 그것보다는 잘 싸우겠어. 다만 네 그 옛날 재상이 교활하여 왕께서 설득당한 것뿐. 그런데 그는 죽었잖아? 그러니 네 제안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있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 비옥한 땅을 얻을 수 있다니…….”

음울하게 이어진 말, 그 대목에 이르러 사내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거리고야 만다.

그리고 이어진 정색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들.

“너희 왕이 사실 한인이 아닌 돌궐의 출신이란 것은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사실이지! 우리 또한 황제가 되지 않을 연유가 무어지? 그래, 맞는 말이지! 네 제안을 듣고 우리 왕께서는 야심을 품었지!”

사내는 조롱을 했고, 이어진 말에 검남 절도사는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다.

“……허나 이건 쉬운 장사가 아니잖은가.”

그는 그저 입술을 깨물고 굳은 얼굴로 이민족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으니, 그것은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토번의 총사령관이 꼬았던 팔짱을 풀고 의자에 몸을 바로 세웠다. 태만하던 자세를 고치니 그에게서는 일군을 이끄는 이 특유의 기세가 흘러나왔고, 그것은 검남 절도사를 압박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엄중한 말.

“게다가 너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지!”

절도사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순간이었다.

“무, 무슨…….”

“개같은 변명 집어치워! 왜 내게 장안의 악마가 군을 이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가! 응? 왜 그 미친 괴물이 군을 이끈다고 하지 않았냔 말이다!”

벼락같은 말이 방을 쩌렁하게 울리고야 만다.

“10년 전에 그 개자식 때문에 전대 왕이 죽고 우리 땅이 쑥대밭이 되었다! 실각했던 그 악마가 다시 돌아온 것을 말하지 않다니! 이 개같은 놈아……. 그래서 토번의 귀중한 전사 3만 명이 가천성 들판의 거름이 된 거냐!”

그 말에 이르러 이민족 사내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주먹으로 탁자를 쾅!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위협적이고도 몹시 무례한 행위였으나, 검남 절도사는 그를 지적할 마음조차 품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민족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으니.

이미 두 차례의 회전이 있었고, 뜻밖에도 그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 가천성에서의 전투는 토번의 기마병이 화공(火攻)에 당하여 한 줌 잿더미가 되는 것으로 끝났고, 귀중한 병마와 기마병을 잃은 토번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애초에 당군에 승승장구하던 반란군을 보고 그에 붙은 이들이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전장은 애초에 10년 전 크게 벌어진 전쟁 이후로 그럭저럭 당과 원만하게 지내던 토번의 지휘부를 흔들고 있었다.

검남 절도사의 능력이 범상치 않아 그와 손을 잡았건만, 이런 병신이었다니.

그리하여 지금 토번 장수의 얼굴에는 냉소와 조롱이 가득했고, 그에 검남 절도사는 분개하여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이것은 실로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장안에 ‘믿을 만한 소식통’이 있었고, 그가 내어준 정보의 정확성은 토벌군이 오기 전 정규군과의 수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입증된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일이 흐르고야 만 걸까? 어째서 그가 내어준 정보가 갑자기 들어맞지 않는단 말인가!

‘……젠장! 왜 사람은 보내지도 않아.’

심지어 끊겨버린 돈줄, 소식에 그저 답답한 속내를 꾸역꾸역 삼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끔 아주 무서운 상상을 하기도 했다.

어쩐지 그 ‘장안의 소식통’에 제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 슬슬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이 그에게 온갖 불길한 상상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검남 절도사는 긴장을 숨기지 못해 침만을 꼴딱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매처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이민족 사내는 말을 이었다.

“더 할 말이 있나?”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사실은 저가 따로 믿고 있는 연줄이 있었는데, 그들이 저를 버린 것 같다고? 그들이 내어준 정보만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도 이제 믿을 수가 없다고?

이를 악문 검남 절도사의 턱이 잘게 떨렸다.

‘그렇게까지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안 그래도 병신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거기까지 추락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이민족 사내에게 모욕을 받고 있지만, 그는 황제를 꿈꾸던 이였고 어찌 되었건 토번 사령관의 군주와 동등한 입장에 서 있었다. 그렇게 절도사는 우물쭈물거렸고 시간이 꽤나 흘러서야 그는 더듬거리는 말로 변명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토벌군을 이끄는 것은 군사일을 모르는 어리숙한 태자다……. ‘그’는 태자가 악천화를 견제할 거라고.”

그리고 토번 사령관의 반응이었다.

“꺼져!”

코웃음을 친 이민족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가 앉은 의자를 발로 걷어찬다. 우당탕, 떨어지는 의자를 살피지도, 경악한 절도사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는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이봐!”

처절한 외침은 그저 텅 빈 방 안을 울릴 뿐이다.

그는 이후에도 몇 번을 토번 사령관을 부르짖으며 그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간청했으나,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검남 절도사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제기랄!”

이미 산발이 된 머리를 쥐어뜯으며 검남 절도사가 불안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토번 사령관이 걷어찼던 의자를 마침내 발로 차고 부수며 제 안에 품은 분노와 불안을 해소하려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항복을 할걸. 당군이 회유할 때 사신의 목을 베지 말고 몸을 수그릴걸.

반역자의 최후는 뼈가 갈리고 살점이 저며져 죽는 것이고, 가문은 대가 끊기고 멸절된다. 그에게 남은 상황은 암흑뿐이었으니. 그는 그리 후회에 후회를 반복하다가 거의 광인에 이르러갔다.

그가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을 때의 일이었다.

문득 문밖으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장군, 상인이 알현을 청합니다.”

“…뭐?”

멈칫한 그의 귓전에 그리고 그 말은 내려앉았다.

“명하신 대로 리산차(梨山車)를 구해 왔습니다. 장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검남 절도사의 얼굴을 한순간에 무너트린 말이었다.

‘이, 새끼!’

그 순간 으득 이를 악문 검남 절도사가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말이 흘러나온 문을 노려보는 눈에는 시퍼런 살기가 묻어 나왔고, 얼굴은 원독이 차 있었다.

“모르시는 분입니까? 돌려보낼까요?”

흘러나오지 않는 대답에 문 앞을 지키던 병사가 쭈뼛거리며 물었고, 그 말에 절도사는 수그렸던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들여, 들여보내!”

‘리산차를 구해 왔다’는 ‘장안의 소식통’이 그와 접선을 할 때 암호로 걸었던 말이었다. 바로 지금까지 검남 절도사의 거병 자금을 후원했던 상인이 접선할 때 쓴 말!

‘지금 와서 나를 찾는다고? 간곡히 찾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난 이제 구제할 수도 없이 추락했는데!’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온화한 인상의 장사치의 얼굴이 드러났다. 곳곳이 전장인 검남에선 이전의 제일 거부 또한 비단옷을 입지 못했는데, 방 안에 들어선 사내는 무늬가 있는 화려한 옷은 아니나 한눈에 보아도 상품의 비단을 걸치고 있었고, 전장을 경험한 자답지 않게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다!”

그 뻔뻔함에 자극된 검남 절도사가 분노하여 그를 손가락질하며 격분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내게 바람을 넣었지. 황재천이 거진 독립을 하고, 황제가 손을 쓰지 못했으니 나 또한 그럴 것이라고, 내가, 내가 웅심을 펼칠 자질이 있다고! 네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개꼴이 되었어! 너, 너…….”

상인은 그저 싱글 웃으며 그의 분노를 받을 뿐이었다. 그의 그런 여유로운 모습은 검남 절도사가 스스로의 우스운 꼴을 상기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는 그렇게 흥분을 서서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졌을 때 그는 과거의 일을 하나둘씩 떠올리고야 말았다.

바로 그의 얼굴에 핏기를 싹 가시게 한 말이었다.

“너 그러고 보니 내게 토번을 연결시켜주었지…….”

그리고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 떨리는 음성.

“검남에서는 군주와 같다지만 중앙 권력에는 연줄이 없던 내게 거금을 투자할 이유가 무어였지? ‘장안의 권력자’가 나를 필요로 할 이유가 없잖은가…….”

상인은 문득 검남에 나타나 검남 절도사에게 거금을 주며 다가왔었다. 그러곤 말을 하길 그가 후원하는 어느 장안의 권력자가 변방의 장수와 교류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내뱉었고, 아주 은밀하게 야심을 불어넣으며 거병을 조장했다.

그렇게 상인은 검남 절도사에게 물자를 보급했고, 장안의 권력자는 그에게 믿을 만한 소식을 전하며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마주한 현실.

“내 모든 것은 네 말에 휘둘린 거지. 난, 난 애초에 검남에서 왕처럼 살 생각이었지 그리 큰 꿈을 꾸지 않았다. 네가 날 세 치 혀로 흔든 거야……그러고 보니 강남의 땅을 분할하는 것도 네가 술자리에서 말을 흘린 거였지…….”

넋을 잃고 중얼거리던 검남 절도사가 돌연 이를 으득 물며 상인을 시퍼런 눈으로 노려본다. 그때까지 담담히 웃고 있던 상인은 그리고 이어진 말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침착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이성을 잃고 추하게 굴었던 검남 절도사는 다시금 냉정을 되찾은 듯 차가운 눈으로 상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껏 침묵을 지키는 상인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고, 그에 검남 절도사는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었다.

침묵 끝에 말이 흐른다.

“네가 후원한다는 장안의 권력자가….”

상인은 실로 수상했고 검남 절도사는 그에게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네 주인은 누구냐…….”

아니, 그에 더해 ‘장안의 권력자’가 제 원래 생각보다 더욱 거물이란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다.

한 나라의 기반을 흔들며 토번까지 끌어들여 내전을 벌인 작자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도대체 검남 절도사도 알지 못하는 그런 나라의 극비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란 말인가?

“그대의 능력이 모자란 것을 누굴 탓하겠소?”

그리고 침묵을 깨고 상인은 여유로이 말을 내뱉었다.

“조금 더 견딜 줄 알았는데 불운히 그대는 생각보다 모자라고, 더욱 어리석었지. 우리 주인께서 많이 탄식하셨소.”

검남 절도사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그의 입술 밖으로 탄식을 자아내게 한 말이었다.

“네가 나를 망쳤구나!”

헛된 미혹에 휘말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끝이 나고야 말았다!

반역자의 최후를 아는 사내는 암담함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있었고, 그런 그를 상인은 괄시하는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대만 망치면 다행이지. 그대는 가문과 가족을 생각 안 하는가?”

넋을 잃고 있던 검남 절도사의 몸을 움찔하게 만든 말이었다.

“……나, 나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리려 했다. 당면한 사태를 외면하고 현실을 도피하려 했다. 그러나 상인의 말은 검남 절도사의 잃었던 넋을 다시 부여잡아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고, 그에 그는 이를 악물며 격분 어린 목소리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무얼 어찌한다고? 누가 나를 구원할 수 있냔 말이야!”

그 순간 검남 절도사의 눈에 활화산 같은 불꽃이 휘몰아친다. 대가 끊기고 가문이 망할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를 깨달은 사내는 제 멸망을 초래한 원수를 향해 뒤늦게 살기를 불태우며 이를 악물었다.

“너…!”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저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자를 베고 가지 않으면 이 원한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검을 찬 허리춤에 충동적으로 손을 올리던 검남 절도사는 그러나 이어진 상인의 행동에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이봐, 이제 좀 진정하지!”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 듯한 검남 절도사의 기세가 무섭지도 않은 듯 상인은 호쾌히 말을 하며 그를 향해 서신을 던졌다. 상인의 품 안에서 빠져나온 한 장의 서신이 그의 가슴을 툭 치고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이건 또 무슨 개짓거리야?

더 이상은 속지 않는다. 험악한 얼굴로 상인을 노려보던 검남 절도사는 그러나 그의 능글맞은 얼굴에 잠시간 주춤거리다가 결국 서신을 받아 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서신을 봉인한 띠에 시선을 주고 그 순간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이, 이건!’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서신을 집어 들던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고야 만다. 그는 잠시간 얼어붙어 망연한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서신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상인을 노려보았다.

“설, 설마 이 모든 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다면 그대는 부여잡겠는가?”

말을 끊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검남 절도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가, 붉어졌다가, 새하얘졌다가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그는 이를 악물며 원독에 찬 눈으로 상인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대를 잇게 해주겠다. 자식 중 하나만큼은 반드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

실로 사악한 말이 아닌가?

그가 저를 망쳐놓고는 숨구멍을 열어주겠다 회유를 하다니.

“……내게 원하는 게 뭐요?”

그러나 검남 절도사는 이를 부득 갈면서도 그의 말에 순순히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서신을 봉인한 띠지에는 불타오르는 새의 문양이 있었고, 검남 절도사는 이 사건의 실제 배후를 그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로 서신의 주인이 그 사내라면 가문의 대는 끊기지 않을 수가 있다.

눈앞에 살랑거리는 기적 같은 동아줄에 사내의 얼굴이 무너지고야 만다.

“난, 난 따르겠어. 뭐든지…….”

긴박함, 또 절박함을 담은 그의 시선이 상인에게로 향하고, 그를 덤덤히 바라보던 상인은 짧은 침묵 끝에 입술을 열어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서신의 내용은 토벌군의 보급로와 군영의 위치가 적혀진 지도요.”

“……!”

바로 검남 절도사의 두 눈을 흔든 말이었다.

“이 지도로 태자를 제거하시오. 그리고 악천화에게 패배한 후 그에게 항복하여 온전한 군대를 넘기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도 가문은 대를 이을 수 있을 것이오. 혹여 그 서신을 이용하여 다른 꿍꿍이를 벌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장안은 이미 내가 장악한 지 오래고, 그대는 내 눈을 피할 수 없으니까…….”

* * *

토벌군 군영.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자리에 우뚝 선 청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드는 그것은 바로 피 냄새가 섞인 것이었다.

전장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러나 말없이 어느 한곳을 바라보던 청년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져 긴장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 상황에 있어서 무언가의 의문을 품고 동요한 탓이었다.

‘왜 이리 순조롭지……?’

전장에서 승리를 거듭하는 일. 사상자의 수가 줄어드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일 텐데. 그러나 서문윤은 한껏 물이 오른 병사들의 사기와 반대로 마음을 놓지 못했다.

‘……검남전이 시작한 지가 한 달밖에 안 되었지.’

그리고 서문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제가 자리한 진영 반대편에 있는 너른 강을, 그 너머의 성벽을 유심히 바라보곤 문득 복잡 오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버렸다.’

성도(成都). 바로 검남 절도사의 치소가 자리한 땅이 강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고 있으니 서문윤은 그나마 피가 적게 흐르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복잡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끝이 보이는 토벌전에 안도를 하면서도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복잡함을 느끼고 그 뒤의 음모를 슬슬 걱정한 것이다. 그는 꽤나 여러 번 뒤통수를 맞아보았기에 많은 인물들이 얽힌 판을 쉬이 생각할 수 없었다.

또한 그를 제외하고도 그가 동요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장의 끝.’

갑작스럽게 품이 무거워진다. 서문윤의 눈썹이 꺾이고 미간이 찡그려진 때였다. 심장이 빨리 뛰고, 갑작스럽게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니, 그것은 바로 품에 고이 간직해놓은 물건 하나가 주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바로 이청은이 제게 주었던 자기병.

‘평화라.’

거세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성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실로 여러 가지 감정이 얽혀 특별히 어느 것을 구분할 수 없었고, 그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묵묵히 선 채 상념에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서문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등 너머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서문윤의 몸을 움찔하게 만든 말이었다.

“의형.”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제 앞에 서 있는 차가운 인상의 사내를 마주하며 엉겁결에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는 검설린보다 몇 보 뒤에 모여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깨닫고 바로 제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검설린의 수행원들이었고, 서문윤과도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다.

바로 서문윤을 탐탁찮게 여기는 보국장군부 소속인 검설린의 직속 휘하이자 서문윤의 상관들.

그들의 눈치를 완전히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서문윤은 안 좋은 시선을 깨닫고 말을 정정해야만 했다.

“아니, 부사령관님.”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검설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왜 여기에 있지?”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에 바로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말을 내뱉은 사내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으니. 그런 그의 모습에 그 주위에 자리한 이들 몇몇이 발끈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앞으로 나서지는 않고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그 끝에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흘러나온 뜬금없는 말이었다.

“상처를 지혈할 때 인두로 피가 흐르는 부위를 지지는 게 상처 부위 근처를 묶는 것보다 낫습니까?”

검설린이 눈썹을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아니.”

틈을 두고 말은 이어졌다.

“…전장에서 얻는 상처는 대부분 중상이라 상처를 지지면 환자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지. 하물며 청매소나 여타 약재가 없다면 차라리 지혈을 하지 않느니만 못할 거다. 상처가 덧날 수도 있고, 발열이 일어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곤 검설린은 돌연 정색하며 서문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건 네가 알 게 아니지?”

차가운 말에 서문윤은 몸을 멈칫하다가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검설린을 응시했다. 말을 회피하려는 수작이 뻔한 모습에 검설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사람들이 네 말을 많이 한다. 내가 조용히 있으라 몇 번을 말해. 1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단 걸 알잖아. 네가 지금 부상병을 돌볼 때가 아니란 걸 왜 몰라?”

서문윤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검설린은 한층 누그러진 시선으로 서문윤을 응시했고, 어떻게 들으면 마치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너도 알잖아. 모든 사람들이 다 선행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검설린은 길고 느릿한 한숨을 흘렸다. 그러다 이윽고 다시 서문윤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힘주어 내뱉은 말에, 묵묵히 그의 말을 듣던 서문윤은 그제야 입술을 열어 답변의 말을 내뱉었다.

“의형이 하지 못하는 일을 제가 대신하고 있는걸요.”

바로 검설린을 동요하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검설린은 잠시간 몸을 멈칫한 뒤, 숨을 멈추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서문윤은 빛이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고, 그렇게 잠시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흐른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 말을 끝으로 검설린은 돌연 정색하며 서문윤의 앞에서 몸을 돌려 사라졌고, 서문윤은 그를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그 자리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홀로 남은 자리.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사령관을 보필하는 장수 중 하나가 떠나기 전 내뱉은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흘려 넘겼고 그런 그를 말을 내뱉은 사내는 잠시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침내 고요함을 되찾은 장소에서 서문윤이 잠시간 검설린이 향한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금 강 너머, 그가 바라보던 검남 절도사의 치소를 응시했다. 잠시간 그를 응시하다가 서문윤은 시간이 흐르고 망부석처럼 굳은 몸을 움직여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바로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막사였다.

“……으윽.”

천막을 손으로 걷기도 전에 서문윤은 고통 어린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피비린내와 고름 냄새가 코를 찔렀고, 서문윤은 그에 잠시간 얼굴을 굳혔다가 멈추었던 발걸음을 놀렸다.

천막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광경에 서문윤은 오묘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이제는 옛날이 되어버린 기억을 잠시간 떠올리던 서문윤이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크흠.”

한구석에서 굳은 얼굴로 부상자의 어깨에 붕대를 감던 노의원이 고개를 흘끗 들어 올려 서문윤을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바로 수석 군의다.

노의원을 향해 말없이 다가간 서문윤이 상처를 지혈하는 손을 놀리는 그의 곁에서 잠시간 서 있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제가 할 일이 없겠습니까?”

그 묘한 어감이 있는 말에 노의원은 결국 답변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해!”

서문윤이 군의들과 함께 섞여 부상자를 돌본 지 꽤 되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서문윤은 웬만한 의원들만큼 처치를 할 수 있었으므로, 어느 순간부터 노의원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은 빙긋 웃고 다시 몸을 움직여, 신음을 흘리는 부상병 중 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검설린과 막사를 함께 썼으나 일반적인 군무에서는 배제되어 있었다. 애초에 칠품 녹수군사가 부사령관의 지근거리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 그가 본디 해야 하는 일은 군수물자의 수가 맞는지 점검하는 역할이었으나, 부사령관의 옆에 자리한 그를 쉬이 부릴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서문윤은 필연적으로 한가했고, 검설린은 바빠 요즈음 그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고 서문윤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전장에서 홀로 여유를 즐기는 저 자신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금 이 상황인 것이었다.

처음에 그를 불신하여 막사 출입을 꺼리던 수석 군의 또한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이 막사에 출입하는 것을 허용한 후였다. 그렇게 서문윤은 시간이 될 때마다 군의의 일을 보조하고 있었다.

“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으로 입을 가리고 손을 씻은 후였다. 숨을 헐떡거리는 병사에게 다가간 서문윤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리 말을 하며 서문윤은 능숙하게 부상자의 사지를 묶었고, 두려움에 동공을 흔드는 그를 잠시간 동정하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다가갔다.

‘아직 소년인데…….’

스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병사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착잡할 뿐이다. 그 순간 문득 무슨 일에 나서는 저를 향해 어린것이라 칭하며 질색하던 검설린과 운표선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서문윤은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그런 마음으로 저를 말렸을까?

“아아아악!”

환자의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자제를 해야 할 일이다. 검설린처럼 시종 냉랭한 표정을 짓는 게 차라리 환자를 안정시키기엔 좋았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소년의 살갗을 갈라 화살을 뽑으며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펴지 못해 느릿한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가 이런 소년마저 피를 흘려야 하는 시대라니.’

홍안의 소년이 비명을 지르는 게 안타까웠다. 어린아이는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보다 못한 의원 하나가 소년의 입에 죽통을 물려 비명을 삼키게 했으나, 결국 임시로 물린 재갈이 부서질 만큼 소년은 쉰 비명을 처절히 내질렀다. 서문윤은 그에 잘게 떨리는 손의 동요를 멈추려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소년의 몸 구석구석에는 뜻밖에도 심각한 상흔이 여러 개 있었다. 서문윤이 손을 대기까지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던 것이 이해갈 만큼, 그 상처는 깊고 중하여 부상병을 치료하는 데 이골이 난 서문윤마저 꽤나 시간을 들여 돌보아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화살촉을 뽑았을 때 소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쳤군.’

결국 서문윤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컥함을 참지 못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신의의 어깨 너머로 의술을 배웠다곤 하지만 그처럼 도드라진 의술을 보유하지 않은 서문윤이 굳이 부상병들의 막사를 찾는 이유는 바로 생명의 무게를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 의행을 하던 때의 각오를 가끔은 잊어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천하 곳곳을 돌아다니며 굶어 죽고, 칼에 맞아 죽고, 아파 병들어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생명의 무게를 느꼈었지.

그러나 요즘엔 검설린과 함께 안온한 천막 안에서 있을 때면 가끔 서문윤은 제가 변했다는 느낌을 받고 괴로워하곤 했다. 처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홀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다.

‘의형이 하지 못하는 일을 제가 대신하고 있는걸요.’

그리하여 검설린이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대신 지키며, 고통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서문윤은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제가 할 선택의 무게를 새기고 흐트러지는 마음가짐을 되잡으려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서문윤은 제가 목표했던 바를 이루고 굳은 얼굴로 피투성이가 된 소년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생명의 무게란 견딜 수 없을 만치 무거운 법이다.

침묵 끝에 그의 입술 밖으로 담담한 말이 흘렀다.

“어디 출신이지? 보아하니 강북 쪽 사람인 것 같은데.”

다정한 목소리였다.

서문윤은 대야에 피로 물든 손을 씻으며 소년에게 자상하게 말을 이어나갔고,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소년은 배에 얹어진 손을 희미하게 꿈틀거리며 앓는 신음을 흘렸다.

“응급 처치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운이 좋았어. 네가 잘 견뎌서 목숨은 위험하지 않을 거야.”

그것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소년의 상처는 중상이었고 서문윤은 중상자를 한눈에 보고 그 생사를 가늠할 만큼의 지식이 없었다.

그러니 그 모든 말은 기만이었다.

‘음, 의형이 알면 대로하시겠군.’

바로 검설린이 엄격히 금지하는 행위, 환자를 기만하는 말을 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지? 고향에 돌아갈 거야? 나는 강소성에 아버지가 계신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볼 때 그에게 걱정을 안겨드렸는데 계속 신경이 쓰이는구나.”

검설린은 환자를 위로하려 내뱉은 말들이 그들의 마음을 더욱 상처 입힐 수 있다 말을 했다. 제 몸의 주인인 그들이 제 몸 상태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마음을 정리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게 방관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리 말을 하면서 말이다.

서문윤은 평소에 검설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또 일정 부분 그 말에 공감하고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행동을 멈추지 못했다.

“곧 전쟁이 끝날 거야. 알고 있어? 이제 곧 부모님을 볼 수 있겠군.”

모든 이의 죽음은 끔찍하지만 특히나 앞날이 창창한 어린아이가 어른의 일에 희생당하는 것은 보기에 몹시 괴로운 것이었으므로. 서문윤은 그리하여 제가 할 일을 끝내고서도 침상 앞에서 바로 자리를 떠나지 못했고, 그의 마음을 살피려 말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견뎌보거라.”

그리 말을 하며 서문윤은 어두워진 눈으로 소년병을 바라보았고,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떨리는 숨결이 느릿하게 흘러나올 때, 그가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한 그때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쉬거라.”

환자는 많고, 이제 저가 할 일은 끝났다. 그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서문윤은 그러나 문득 제 손목을 덥석 부여잡은 손길을 느끼며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봐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그는 헉헉 거친 숨을 내뱉으며 병상에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소년을 바라보고는 몸을 뻣뻣이 굳혀야 했다.

“…령관을.”

그런 그의 귓전에 내려앉은 쉬고 거친 목소리로 내뱉은 말.

“사령관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소년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게 흐릿하고 혼탁한 것이었다. 서문윤이 손을 쓰기 전에 기절해 있던 소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또한 식은땀과 피로 물들어 있었다. 죽기 직전에 이른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정신을 차린 그는 이를 악물며 서문윤을 향해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사련, 사령관은…….”

흔들리는 시선이 서문윤을 찾는 듯 허공을 배회하고 있다. 얼어붙은 사내의 귓전에 연이어 말이 떨어졌다.

“……저, 저는 그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곤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손에 쥐었던 서문윤의 손목을 놓고 비틀거리며 병상에 쓰러져 내렸다. 그의 몸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려 할 때 서문윤은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무너지는 몸을 받아 들려 했다.

다행히 소년의 몸은 서문윤의 품에 안착했고, 서문윤은 그를 다시금 병상 위에 눕힐 수 있었다.

“사령관은…… 함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방금 전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한순간 소년의 흐릿한 눈에 불꽃이 번뜩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서문윤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곤 몸을 주춤거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뜬금없이 사병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소년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사령관이라는 말.

‘이건 뭐지?’

불길함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오르는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서문윤이 이를 악물면서 말을 내뱉었다.

“일단 몸을 회복하고 말을…….”

그리고 그의 말을 끊은 단호한 목소리였다.

“저는, 저는 장군을 만나야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애…….’

문서상으로 사령관인 이청은은 격이 더 높은 호칭인 전하로 불리지 장군으로 불리지 않는다.

‘…의형을 찾고 있다.’

사령관이라 하여 한순간 이청은을 찾는 줄 착각하였으나, 곧 소년이 말하는 이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엄연히 군의 사령관은 이청은이었으나 그를 인정하지 않고 검설린을 사령관이라 부르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군부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이들이거나, 아니면 황실에 충성하지만 능력이 부족한 장수들에게 요직에서 밀려난 이들이었다.

그리고 소년 또한 그런 말을 하고 있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무언가의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고 서문윤이 그를 향해 속삭였다.

“누, 누구….”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몽혼한 눈을 깜빡이며 소년이 말을 받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는 가쁜 숨을 색색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에 서문윤은 나직한 목소리로 답변을 했다.

“그의 의제(儀制)다.”

그리고 이어진 소년의 행동에 서문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애.’

소년은 뜻밖에도 서문윤의 말을 듣고 진실로 환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군의와 구분이 되지 않을 이가 갑작스럽게 부사령관의 의제라고 나서는 상황을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은 듯 그는 실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열었으니.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완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새가 거북이를 쪼아 먹었다니…….”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끝에 서문윤은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말을 흘릴 수 있었다.

“……너는 누구지?”

그러나 소년은 마지막 기력을 쏟은 듯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고 헉헉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발작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소년을 잠시간 노려보던 서문윤이 옆에 있던 군의 하나의 옷을 잡아당기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저 소년에게 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주십시오. 지혈은 했으니 죽지 않도록 잘 살펴주십시오.”

그러곤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군의의 어깨를 부여잡고 윽박지르듯이 소리 지르고야 말았다.

“저 소년병은 어디 소속입니까? 그는 어디 출신입니까!”

“으, 으응?”

서문윤의 얼굴은 병자와 다름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거북이니 새니 운운하는 뜬금없는 말을 그는 완전히 알아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사실은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은유였으니….

‘설마, 설마!’

……장안사준은 네 개의 영물로 비교되곤 했지.

“어디 출신이냔 말입니다, 이 소년은!”

그리하여 서문윤은 기절한 소년병의 신원을 다급히 캐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닦달을 당한 군의가 얼떨떨한 얼굴로 답하고,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다가 막사 앞을 지키는 병사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서문윤은 그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을 캐묻는 것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군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난처한 듯 뺨을 긁었고,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 대답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떨떨한 얼굴로 돌아온 군의가 내뱉은 말이었다.

“어젯밤 군영 밖에서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품에 군패가 있고 갑옷을 입어 낙오되었다가 귀환한 병사인 줄 알았는데……. 상처가 심해 신원을 알아보기 힘들어서……. 더 찾아보고 연락을 드리도록….”

“아니.”

그리고 서문윤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고개를 돌려 쓰러진 소년을 응시했다.

“아니 됐습니다.”

두 눈은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의 상념에 사로잡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애초에 더 찾아보았자 그의 신원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

그리 생각하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소년이 정신을 차리면 내게 연락을 주십시오……. 특별히 잘 보살펴주셨으면 합니다.”

어딘가 음울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군의는 그저 고개를 빠르게 끄덕여 답할 뿐이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입술 끝을 딱딱히 굳히며 허공 어느 한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장안에서 보았던 초췌한 인상의 사내였다.

‘……운표선.’

불안함에 몸을 떨며 삼킨 말이었다.

이 전쟁이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고 성도는 바로 눈앞이었다.

혹여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내가 쓸데없는 불안으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뜻하지 않게 들은 소년의 말로 인해 서문윤은 이제껏 제가 은밀히 품었던 염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소년, 날 알고 있었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병영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서문윤은 가빠오는 호흡을 정리하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의제라는 건 고위 장수들 사이에서나 알려진 일이었는데, 병졸로 보이는 소년이 내가 의제란 걸 알고 안심하고 긴장을 풀었지.’

그리고 소년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의 의미가 의미심장하지. 마음을 해일처럼 뒤덮는 불길함을 억지로 삼키며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복잡한 감정을 품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주작은 불타는 새, 사영귀는 느릿하게 걷는 거북이. 그것은 장안사준에 속하는 인물들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새가 거북이를 쪼아먹었다고?’

그 말은 어려운 암호가 아니었다.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중의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암시였다. 바로 강서진이 운표선을 쳤다는 전령의 말.

‘왜 강서진과 운표선이 내분을 일으킨 거지? 운표선은 장한성의 일로 황제와 적대하고 있고 의형과 돈독한 관계인데……. 그는 오래된 세족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 의심 많은 황제 또한 경계를 할지언정 대접을 박하게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 둘의 관계가 그 유명한 옛날의 우정으로 설명될 것이 아님을 알지만 하나의 큰 적을 공유하고 있는데 강서진이 운표선을 제거했다고? 그는 나라의 거부고, 황실의 어용상단을 보유하고 있고, 낙양 세족을 대표하는 명사(名士)인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숨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서문윤은 초조함을 삼키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검설린의 천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척을 내지 않고 천막을 열어젖히며 입술을 열어 “의형.” 하고 다급히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숨이 멈추고, 세상이 잠시간 정지하고야 만다. 천막 안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맡은 순간 서문윤은 생각을 길게 이어나가지 않고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빼내어 들어 휘두를 뿐이었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몸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검설린은 지도가 펼쳐진 탁상에 손을 댄 채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으려 하는 듯 보였다.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고 피비린내는 서문윤이 불길한 상상을 일순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침입자의 갈비뼈 아래를 빠르게 검으로 찔러 넣었고, 몸을 비틀곤 겨드랑이 사이로 검을 잡으려는 사내의 행동에 기민하게 행동하여 허벅지에 꽂아 넣은 중간 길이의 비수를 꺼내 들어 그의 허리를 망설이지 않고 공격했던 것이다.

모두가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검이 침입자의 허리에 스치기가 무섭게 서문윤은 제 목 뒤에 가해지는 충격을 느끼고 비틀거려야만 했다. 한순간 시야가 까마득하게 변하여 그는 큭 소리를 흘리곤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숨통이 잠시 끊겨 빠르게 정신을 잡으려 몸을 물리곤 서문윤이 뒷목을 부여잡는다.

비틀거리는 몸을 천막 천막의 기둥에 등을 대어 가까스로 중심을 부여잡은 그는 그 순간 고개를 들어 올렸고,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하곤 동공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

‘이건!’

혀뿌리가 단단히 얼어붙은 순간 그리고 묵중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내려앉았다.

“그 몸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킨 서문윤이 무섭게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귓가에 내려앉는 검설린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만.”

그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으니, 서문윤은 비수를 든 손에 힘을 주며 그를 노려보다가 결국 이를 악물며 대치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땅바닥을 향해 펼친 손바닥으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검설린이 탁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자세로 건조한 시선을 침입자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아니, 침입자는 사실 침입자도 외부의 적이 아닌 인물이었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막장 가도를 달리는 내가 정말 그대의 목을 벨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천막을 울리고 묵묵히 말을 듣던 검설린의 입가에 삭막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차가운 시선이 허공에 부딪치고 있었다. 서문윤은 순간 피부를 따끔하게 찌르는 살기에 숨통이 쪼여지는 느낌을 받고 숨을 죽인 채 둘의 안색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오왕이 내 아내와 내 어린 아들을 죽였을 때 내게 남은 것은…… 그분께서 내게 안긴 알량한 희망뿐이었지.”

비소가 흐른다. 대낮의 침입자, 아니 서문윤에 의해 허리를 찔려 피를 뚝뚝 흘리는 이중환이 제 청광이 감도는 검을 손에 쥔 채 검설린과 대치하고 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혼란에 가득 차 서문윤이 이를 악물며 그들을 노려보고야 만다. 살기에 조여지는 숨통에 압박감을 풀려 목을 주무르며 그는 경계의 태세를 다지고 있었다. 검설린이 그 옛날에 저를 거둔 태자와 동고동락하면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내에게 칼을 쓰고 박투를 하는 법을 배운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중환은 한때 대당 제일검이라 불린 사내였고, 그다지 높지 않은 관직에도 병부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순수한 무인이었다.

그런 그들이 갑작스럽게 피를 보며 대치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

서문윤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노려볼 때, 그리고 귓가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렸다. 퍼뜩 놀라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피를 떨어트리는 손을 주먹 쥔 채 이중환과 마주하는 의형을 마주하고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날 목숨을 끊지 않고 도망을 쳤지?”

경장 차림의 사내는 검 앞에서 전혀 긴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중환을 그저 고요한 흑안으로 바라보았고, 입술 끝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정작 그 알량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기까지 와놓고 뭔 헛소리야.”

그리고 흐른 나직한 음성.

서문윤은 오로지 이중환의 등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쉬이 예상하고 있었다. 묵직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너는 그 검으로 정말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보지?”

도발에 가까운 말을 들은 서문윤이 그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다급히 소리쳤다.

“그만두십시오!”

그리 말을 내뱉은 서문윤이 검설린의 앞을 빠르게 가로막고 긴장된 눈으로 이중환을 노려보았다. 숨을 헐떡거리는 서문윤의 얼굴에 긴장과 당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서문윤에게 검설린을 노리지 않겠다 맹세했던 사내가, 그것도 병부에서 한때 제일 무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가 무섭게 가라앉은 눈으로 검을 뽑고 의형과 대치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리하여 갈라진 목소리를 흘리며 서문윤이 이중환을 노려볼 때였다.

그것은 실로 뜻밖에도 서문윤의 귓전에 내려앉은 목소리였다.

“착한 후배.”

그 상황에 맞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에 서문윤이 몸을 퍼뜩거리고야 만다. 그런 그를 이중환은 뜻밖에도 사뭇 다정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고, 그 사이로 담담한 목소리를 흘려 서문윤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불운히도 너와 안 좋은 인연으로 맺어지게 됐지만, 그간 너와 말을 섞으며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아마 좋은 시대에 정말로 선후배 관계로 이어졌다면 정말로 마음이 맞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 말은 서문윤의 눈을 흔들게 한 것이다.

사실은 그런 생각을 그 또한 조금은 품은 적이 있었다. 위험한 변수인 그를 감시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서문윤은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의 이중환과 종종 대담을 나누면서 그와 교분을 쌓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로 그가 저의 선배와 같다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이미 피까지 흘린 급박한 상황이 아닌가? 이러한 때에 그런 말을 내뱉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당황에 머뭇거릴 때였다.

“하나만 기억해라.”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던 사내의 눈에 문득 청광이 스친다.

“모든 일은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고, 잘못은 공으로 덮을 수 없는 법이지.”

한 마디 한 마디 곱씹은 말을 내뱉은 이중환은 문득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검설린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러곤 그는 천막 밖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선배!”

망연히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언성을 높여 소리쳤으나 이중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니, 정적만이 감도는 천막에 그는 멀거니 선 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정신을 돌아오게 만든 목소리였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고개를 들어 올린 서문윤이 피를 흘리는 손바닥을 주먹 쥔 검설린을 발견하고 아찔함에 이를 악물었다. 피비린내는 이제 익숙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흘러나온 대상이 검설린이란 사실은 무게가 실로 다른 법이다.

“의형!”

다급하게 검설린을 향해 다가간 서문윤이 피를 흘리는 손을 부여잡고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야 만다.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황급히 살피며 그는 공황에 빠진 채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근육을, 근육이 다치지 않았습니까? 손을 오므리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느냐?”

그러나 검설린은 그의 말을 덤덤한 목소리로 자르며 말을 대신 이어나갈 뿐이었으니.

“피륙만을 베었다. 깊지도 않아. 단지 손바닥이라 상처가 많이 난 거다.”

그러곤 이어진 말에 담긴 묘한 어감을 느끼고 서문윤은 그 순간 몸을 멈칫하며 당황한 얼굴로 검설린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차피 날 죽이지 못해. 그저 그는…… 내게 화가 났을 뿐이다.”

서문윤이 입술을 연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선배는 어디로 갔습니까?”

“가찬성. 태자가 있는 곳으로.”

태자는 앞선 황제의 경솔한 행동으로 병부를 완전히 검설린에게 맞긴 채 후방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가찬성은 물자를 모아놓은 검남전선 토벌군의 보급 기지였고, 태자가 자리한 곳이었다.

숨을 멈추고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왜 그가 가찬성으로 향했습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바로 답을 하지 않고 잠시간 고요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실은 뜬금없는 것이었으나 서문윤은 그의 말을 끊거나 막지 않았다.

“너는 나와 이중환과 이청은의 관계를 궁금해했지. 나는 그에 대해서 답변해주지 않았고.”

“……”

“허나 설명하기 싫어서 네게 하지 않은 게 아니야. 설명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여 말로 정돈할 수 없던 거다. 이중환은 사실 나와 접선하기 위해 병부에 잠입을 했지만 불운히도 너와의 사건으로 이청은의 눈에 들어갔고 태자당의 눈을 피하려 그와 손을 잡는 척을 했지.”

말이 진행될수록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간다. 그의 그런 얼굴을 보며 검설린은 탁상에 몸을 기댄 자세 그대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니, 잡는 척이 아닌가? 그는 나 또한 믿지 않았으니.”

그리고 마침내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가 의형의 세작이었습니까?”

떨리는 목소리에 검설린은 담담한 말로 답할 뿐이었다.

“완전한 나의 사람은 아니지. 그는 그저 고우군의 유지를 이으려 날 이용한 것뿐이었으니까.”

순순히 순응하는 검설린의 반응에 서문윤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 뒤로 갈수록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나가고 숨은 떨리고 있었다.

“고우군은 강소성으로 내려올 때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의 생각보다 강서진이 독하게 손을 쓰긴 했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암살에 대비하여 유지를 남겼고 이중환은 복수를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유지를 이으려는 목적으로 병부에 다시 돌아왔다.”

“……그 유지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잠시간 뜸을 들여 내뱉어진 말이었다.

“난세의 종식과 영원한 치세의 도래.”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천막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검설린의 손을 움켜쥔 손을 뻣뻣하게 굳히며 얼어붙어 검설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세한 표정 변화까지 모두 감지해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검설린은 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검설린의 얼굴에 서린 것은 피로함이었다.

“특별한 것은 아니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염원은 사실 그것이니까. 다만 그걸 끝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고.”

“…….”

“서문윤.”

“…….”

“고우군은 유학의 정수를 이은 보수주의자이지만 그래서 더욱 급진적일 수 있었지.”

그 순간 서문윤의 몸이 움찔하고야 만다. 그런 그를 고요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검설린은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얼이 나간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오랜 기록에서는 훌륭한 신하가 돌아가면서 국정을 총괄하던 이상적인 시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칭송하던 그런 전설상의 시기가.”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서문윤의 얼굴에 혼란이 스친다.

‘의형이 지금 이윤(伊尹)을 말하는 건가?’

전설상의 재상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를 말하는 검설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서문윤은 그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파격적인 말이었고, 그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으니.

그런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조소를 흘리면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고우군은 혼군에 의해 너무나도 쉬이 무너져 내리는 조국을 보았다. 그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나선 그는 변덕스러운 황제를 수십 년간 모시면서 제 이상이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아야만 했다.”

“무슨, 무슨 말을 하시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해를 하는 게 이상한 거다! 윤아. 그래서 고우군 또한 수십 년간을 비상한 계획의 골조를 짜려 심력을 다해야만 했던 거니까. 나는 그의 원대한 꿈에 그다지 함께할 생각도 의지도 없지만…… 그를 이용할 수는 있지.”

그리고 높고 날카로운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

“그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뿐이다! 이청은도, 나도, 이중환도……. 누가 적이고 아군일 것도 없어. 다만 믿고 있는 것은……”

눈에 섬광을 빛내며 중얼거린 검설린이 문득 고요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숨을 죽인다. 혼란에 빠져 눈을 흔들던 서문윤이 입술을 연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선표, 아니…….”

마른침을 삼키고 잠시간 말을 고르던 서문윤이 결심한 듯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영귀가 명주작의 공격을 받았다 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예기가 흐르는 검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사내는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동요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야 말았다.

“……뭐?”

검설린은 그 말을 내뱉고 무슨 말을 더 이어나가려 입술을 벌렸으나, 그는 더 질문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또한 서문윤은 이중환이 가찬성으로 간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막 안으로 다급히 달려온 전령이 내뱉은 말로 인한 파문 때문이었다.

“부상병 막사에 운 공자의 전령이…….”

“장군!”

가차 없이 말을 끊는 목소리에 몸을 움찔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예의를 지키지 않고 부사령관의 막사에 침입하는 창백한 얼굴의 사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가, 가찬성이!”

헐떡거리는 숨을 흘리며 천막 안에 들어온 이는 바로 검설린의 부관 중 하나였다. 익숙한 사내의 얼굴에 멈칫한 서문윤은 그리고 이어진 말에 숨을 멈추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가찬성이 포위되었습니다. 적이 길을 우회해서, 성도를, 성도를 벗어났다고…!”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내뱉던 부관이 결국 막힌 숨통에 잠시간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이윽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천막을 울렸다.

“검남의 반란군이 가찬성으로 진군했다 합니다! 태자전하가 위험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바로 이중환이 가찬성으로 떠날 것이란 검설린의 말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서문윤이 검설린을 황급히 돌아보았을 때였다.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귓전에 내려앉는 무거운 말에 서문윤이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입술을 열다가 이를 악물고, 망연한 시선으로 천막을 빠져나가는 사내의 등을 바라본다. 검설린은 빠르게 자리를 떠났고, 그렇게 천막에 홀로 남겨진 서문윤은 한참을 자리에서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가 몸을 움직여 자리를 박차 천막을 빠져나간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굳은 얼굴로 서문윤이 향한 곳은 바로 마구간이었다.

* * *

병영에는 혼란이 있었다.

마구간으로 달려간 서문윤은 역마로 쓰이는 말을 약탈하듯 병사에게서 빼어내곤 병영을 가로질렀다. 그것은 실로 군법을 어기는 일이었으나 서문윤을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말리던 마구간의 담당자가 상관의 명이라는 짤막한 말에 소문을 깨닫고 그를 보내주었고, 병영은 이미 혼란스러워 서문윤을 신경 쓰는 이들도 없었던 것이다.

붉은 안장을 매단 파발마를 타고, 밖으로 뛰쳐 나가는 서문윤을 병영과 관문의 병사들은 잡지 않았다. 서문윤은 지도를 떠올리며 목표지를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 헤맸다.

그가 그렇게 향하려는 곳은 가찬성이었다. 바로 태자가 자리하고 있는 병참기지. 그는 가만히 있으라 애걸하는 검설린의 말을 어기고 경솔하다 못해 마치 묏자리를 찾으려는 듯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랴!”

그러나 서문윤은 저가 하는 행동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단 본능에 따르고 있었다.

마치 장한성에서의 때와 같았다.

서문윤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가찬성에, 선배가 간다고 했다….’

검남 절도사가 후군을 치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중환은 가찬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문윤은 이중환이 노기가 등등하여 제 말을 어기고 검설린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고, 의형이 한 말의 의미심장한 뜻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찬성, 태자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도. 그의 목숨이 위중하단 것도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장한성 때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하고야만 것이다. 그는 때때로 직감이 이성보다 더욱 나은 결과물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경험한 결과물이기도 하고.

서문윤의 얼굴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군용 지도에 적혀 있는 가도는 가찬성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으나 중원에 있는 것처럼 잘 닦여 있지 않았다. 변방에 있는 길은 상대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워 낙후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서문윤은 제 얼굴을 쳐대는 나뭇가지에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외지라고 하지만 만 단위의 병사가 오고 가야 할 가도가 이렇게 관리되지 않고 낙후되었다니?

이곳은 산세가 심한 곳이 아니었다. 길을 닦을 수 없는 길도 아니고. 지난 몇 년 간의 병부의 문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한 길에 서문윤은 그저 침음을 삼킬 뿐이었다.

머리에 말이 스치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이라.

거친 길에 승마의 충격이 심해 몸이 지나치게 흔들렸다. 그러나 서문윤은 속도를 멈추지 않았고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한 밤이 찾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고삐를 쥔 손이 저릿하다. 온몸이 난도질을 당한 듯 아파오고 뒷목이 뻐근하며 시야가 흐려질 때였다. 쓰러질 것만 같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가 밭은 숨을 헐떡거리고 어두운 숲속을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중요한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거의 네 시진을 쉬지 않고 잘 닦이지 않은 가도를 달렸고, 흐트러지는 정신을 억지로 가다듬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서문윤의 노력은 뜻하지 않게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승마 실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서문윤이다. 그런 그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가장 빠른 지름길을 달리던 와중에, 그에 앞서 가찬성으로 향하던 사내는 이미 지쳐 병마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찬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달리던 두 사내가 마침내 만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말을 몰던 서문윤이 문득 익숙한 사내의 등을 발견하고 얼굴에 희색을 드러냈다.

이중환의 굳은 등을 응시하며 그는 곧장 “중환 선배!” 화색이 돈 목소리로 말을 걸었고, 그에 묵묵히 말을 몰던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홱 돌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중환은 어둠 속에서 저를 향해 다가오는 청년을 발견하고 잠시간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벌리고 넋을 잃다가 울컥하여 소리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너는 또 왜 따라와!”

“중환 선배!”

그러나 사내의 외침에 서문윤은 아랑곳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다는 듯이 그를 향해 다가올 뿐이었다.

“이, 이, 이!”

도대체 이게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얼굴 근육이 말할 수 있다면 그리 말했을 것만 같다. 무섭게 얼굴을 굳히고 있던 이중환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선연한 붉은빛을 띠며 붉으락푸르락하길 반복했다.

“이 철없는 놈아!”

마침내 쏟아져온 역정에 서문윤은 응답하지 않고 기어코 그와 말머리를 했고, 그에 이중환은 멍한 눈으로 제 옆에 자리한 청년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을 잃은 듯 저를 망연히 노려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서문윤은 빠르게 입술을 열었다. 그 사이로 내뱉은 것은 이중환의 얼굴을 실로 벙 찌게 만들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저희는 이제 같은 편입니다!”

“뭐?”

이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넋을 잃은 이중환의 귓전에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뚫고 말이 흘러들어왔다.

“의형에게 설명을 들었어요.”

이중환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을 때 서문윤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느릿한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대충 고 재상께서 황제와 반하는 뜻이 있었다 가닥은 잡았다지만, 아직까지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건 너무 어렵습니다.”

그것은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서문윤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검설린이 전해준 말은 익숙한 관습에 아주 어긋나는 파격적인 제도에 관련된 것이었으니.

“군주가 있는데 재상이 통치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권신에게 통치를 맡기는 게 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내뱉곤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며 말을 골랐다. 그 끝에 문득 담담한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허나 고 재상께서는 저보다 똑똑한 사람이니 더 깊은 뜻이 있었겠지요?”

“…….”

“그러니 제게 말해주십시오. 당신이 품고 있는 뜻이 뭔지.”

말을 달리는 이중환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만큼의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저 또한 더 나은 세상을 원합니다.”

그 말은 묵직하게 그 둘 사이를 내려앉아 잠시간의 정적을 자아냈다. 서문윤은 더 이상 말을 재촉하지 않고 나뭇잎이 달빛을 가로막은, 유독 어두컴컴한 숲길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그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이중환을 재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결국 서문윤은 원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 대인께서 황제를 견디지 못하셨다.”

잠긴 목소리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그분은 나라를 생각하시는 분이라 웬만하면 천자를 충심으로 받들었을 텐데, 그는 너무, 너무…….”

“……”

“……그는 너무했지.”

감정이 거세된 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서문윤은 손에 쥔 고삐를 더욱 세게 움켜쥐면서 느릿하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뛰어난 한 사람만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극악한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었다.”

“…….”

“……이렇게 말이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윤은 정면만을 보고 있었으나 그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7년 전 동궁사변을 기회로 몰락하던 고 대인이 다시 재기한 줄로만 알았겠지만, 그는 사실 절망하고 있었다. 태자와 그는 정적이었지만… 고 대인은 차기 황제가 그라는 사실만큼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어. 아니, 그를 제외하고 누가 후대를 맡을 수가 있지?”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을 스쳤고, 서문윤은 미끄러지는 고삐를 손에 감으며 묵묵히 말을 들었다.

“그는 희망이었고, 그게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거다.”

이중환의 그 말을 들을 때 서문윤의 등이 그 순간 움찔했다. 그는 순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는 모른다. 이청융이 그 당시 식자들에게 지녔던 의미를…….”

…고우군이 그때 득세하고 스스로를 기뻐한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고우군이 그의 축출을 원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서문윤은 복잡 미묘한 표정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고우군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황제는 제가 등용한 재상을 검으로 사용했고, 고우군은 적극적으로 병부와 태자의 사람들을 수청했다. 그러니 그는 의형의 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원수임이 틀림없었다.

“고 대인이 결심하긴 충분한 일이었지.”

그런데 막상 그는 태자의 죽음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8년 전부터 서서히 병부에 사람을 심고, 금위군 중 몇몇을 우리의 편으로 만들었지.”

그런 모순적인 말이 또 어딨겠는지.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문득 고우군이 했던 말이 무엇이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그래,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강서진과 다른 점은 강서진은 황제만을 바꾸길 원했지만 그분께서는 황제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체제까지 바꾸길 원했어. 그는 유능한 신하들이 모여서 나라를 다스리기를 바랐으니까!”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한 인물이 다수의 뜻을 저버리고 인세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불신과 불의가 판치고 인이 조롱받는 사회가 되었다.

“나는 이제 맹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장한성에서의 기억, 냉소하던 의형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스쳐 지나간다. 한때 드높은 꿈을 꾸고 달렸다는 사내는 세상에 희망이 없음을 말하고, 항상 죽음을 바라며 인생을 자포자기하곤 놔버렸다.

“서문 후배, 고 대인께서 젊었을 때 동서대란을 일으켜 이름을 알렸던 것을 아나?”

그게 한때는 선악의 대립으로 일어난 결과물인 줄 알았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이 현실이 그저 사악한 신하가 권세에 눈이 멀어 세상을 암흑으로 몰아넣어 생긴 결과가 아니란 것을. 많은 사람들은 말리고 싶어 했고, 세상을 밝히고 싶어 했고, 부조리를 되잡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지.

그러지 못한 많은 이유가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일을 주도한 자가 이 나라의 황제라는 사실이었다.

“의형이 그곳에 얽혔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다.”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서문윤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허공을 보는 밝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적을 물리치려면 적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한숨이 흐르고, 적막 뒤에 말이 이어진다.

“고 대인께서는 작금 대당에서 누구보다 서학을 잘 알고 이해하는 분이시지. 말은 안 했다지만 속으로 깊이 동감하는 제도도 몇 개 있었고. ……무슨 뜻이냐면, 그때부터 재상 중심 정치 체제를 고안하신 거다.”

“…….”

“서쪽에 융성한 오랑캐들이 고대에 고안했던 제도가 재상의 마음속에 와 닿았고 그분은 거기에서 유학과의 접점을 찾았다. 태평성대에 회의로 나라를 이끌어나간 이윤과 주공단의 고사 같은 것들…… 폭주하는 군주를 막을 제도의 기틀을 말이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은 피로도 잊은 채 그의 말에 완전히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서진은 역성혁명을 원했고, 고 대인은 황계의 방계혈족을 허수아비로 세우기를 바랐던 거다. 그래서 그 둘은 모두 황제를 축출하길 원하면서도 대립한 거다. 그 둘 사이에 화의는 없었다. 그 논쟁은 실로 격렬했어. 알아, 서문윤? 그 둘은 실제로 서로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밑으로 접촉한 때도 있었어.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지.”

“…….”

“그 둘이 목표한 바는 겉으로는 닮아 보여도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다른 거였으니까.”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그래서 강서진이 황제로 만들려 한 네 의형을 빼돌리려 했는데, 걸려버렸구나.”

이중환은 마치 마음속에 품었던 말을 완전히 쏟아내고 싶은 것처럼 들었다. 이어진 말에 묵묵히 말을 듣는 서문윤의 얼굴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그때 강서진이 조급해 보이지 않았던? 그때 벌써 그와 고 대인은 이판사판이었다. 누가 먼저 선수를 칠지 서로 눈치를 설설 보다가 고 대인은 때를 놓친 거지. 그러나 그때 강소성으로 가기 전에 유서를 남기셨어! 내게 후일을 대비하라고.”

연이어 날카로운 광소가 어두운 숲속을 울린다.

“서문윤, 서문윤! 지금이 춘추전국시대인 줄 알아? 뛰어난 무인, 협객 하나가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인 줄 알아?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정적의 수하, 그것도 고작 낭장에게 네 의형과 태자가 후한 대접을 해주는 이유는 그게 아니야……. 그들은 고 대인께서 남긴 유산을 두려워하는 거다. 그가 근 10년간 몰래 양성한 군대와 병부에 숨겨놓은 세작들…….”

침묵 끝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선배께서 물려받은 세력의 세가 반란을 획책할 만큼 많지는 않았군요. 그렇다면 선배께서 이리 계시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

“하지만 의형과 태자 둘 중 누구의 한편을 든다면 단번에 승기를 휘어잡을 수 있을 만한 수고요.”

“그래.”

“……이미 황제의 파멸은 예정되었군요.”

한숨을 내뱉고 서문윤이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이건 정말 전하와 의형의 싸움이었군요. 이미 대세는, 대세는 떠났습니다. 반정은 반드시 일어나고, 황제는 무조건 파멸합니다. 모두들 그걸 확신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황제가 몰락하고 난 후 그 일을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난 무얼 한 거지?

서문윤의 얼굴에 해탈한 빛이 감돌았다. 그의 생각으로 반란은 세상을 암흑으로 몰아넣는 일이었다. 그는 명가의 자제였고, 우국충정을 기치로 삼은 교육을 받아왔다. 명신이 혼군을 잘 보좌하는 것이 세상의 혼란을 걷어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반란은 안 그래도 어지럽던 세상을 더욱 나락으로 몰아트리는 것.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거친 한숨이 흘렀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심지어 태자마저 반정을 동의하며 판을 짜고 있던 것이다. 반란은 이 상황에서 혼란이 아닌 질서였고,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는 길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현명한 사람 몇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기는 이미 끝났다. 오로지 근원을 끝낼 뿐이지.

의형의 반란을 막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며 달려왔던 서문윤으로서는 그를 깨달은 순간 여러모로 허탈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난 어떤 길을 밟아야 하나.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그는 잠시간 갈등하며 숨을 죽였고, 그 끝에 입술을 열었다.

“의형과 손을 잡은 까닭은, 그가 당신의 말에 동의를 했기 때문입니까?”

“……그래.”

서문윤이 침묵 끝에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강소성주는 의형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건 네 의형 또한 동의한 일인가?”

그러고였다,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것은.

지금은 몰라도 확실히 검설린은 옛날부터 강서진을 꺼려 했으며, 저 때문에 억지로 그와 손을 잡았다. 서문윤은 숨을 죽이고 잠시간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이……, 강서진과 다른 길을 가는 겁니까?”

아찔함에 흐트러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서문윤이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그는 스스로 반정에 찬성한다는 뜻을 내보였습니다.”

그 말을 내뱉을 때 서문윤의 머릿속에는 냉소를 짓는 사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수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설린과 조우했었지. 남몰래 서문윤의 입술을 틀어막고 모습을 드러낸 검설린은 서문윤과의 대담 끝에 왜 나만 당하며 살아야 하지, 그리 말을 하며 냉소를 지었었다. 서문윤은 그때 검설린의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을 보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이 순간 제가 놓쳤던 그 무언가를 깨닫고 절벽 아래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아찔함을 느끼며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반정에 찬성한다고 얘기했습니다.”

“…….”

“……허나 황제가 되겠다 말을 하지 않았군요.”

그래, 그는……. 내게 약속을 저버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

아찔한 마음에 휘말려 있었다. 마치 낙마를 할 것만 같이 정신은 어지럽고 숨은 가빠온다. 머리를 정으로 내려맞은 듯한 충격에 휘말려 서문윤은 긴 시간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을 벙긋거렸고, 그런 그의 말을 이중환은 아까 전의 서문윤처럼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그는, 그는……. 그는 애초에 내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를 믿으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우리가 함께할 그날을 그리워한다 그리 말을 했을 뿐이다.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희열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달빛마저 무성한 나뭇잎으로 가로막혀 어두컴컴한 밤일진대, 서문윤은 갑작스럽게 눈앞이 새하얗게 밝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말의 묘한 어감을 깨달은 이중환이 고개를 돌려 그를 흘끗 보다가 잠시간 머뭇거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알지 못한 채 서문윤은 환희에 젖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어! 그는 지존이 될 생각이 없었어……. 같이 낙향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무심하던 검설린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순간 서문윤은 피로가 모조리 풀리는 기분, 근육의 힘이 풀리는 느낌을 받고 겪은 낙마의 위기를 간신히 고삐를 움켜쥐어 넘길 수 있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에 그는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이를 악물어 애써 참아 넘겨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아왔으나 서문윤은 요즘 몹시 힘겨워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요즘 장한성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의형과 한 몸일 수가 있었지!’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느릿한 숨이 흘러나온다. 그때의 지옥도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분명 장한성에서 그는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겪었다. 외부의 상황이 그를 죽음의 문턱에 거의 몰아넣었고, 검설린은 틈만 나면 날카로운 독설을 내뱉었으니까.

그에 반해 요즈음의 상황은 겉으로는 그 지옥 같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한 것이리라, 검설린은 그때처럼 반항적이지도 않고 서문윤에게 은근히 다정하게 굴었으니. 서문윤은 그와 함께 막사를 쓰며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편안한 몸에 비하여 서문윤의 마음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회상을 하던 서문윤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번지고야 만다.

적어도 장한성에서는 확고한 목표를 지녔고 그의 곁에 검설린의 몸과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전쟁의 끝에서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국 함께하는 미래를 약속했지.

그러나 지금은 어떠하지?

‘그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서문윤의 얼굴에 격정이 번져나간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벗어 던진 사내의 얼굴에는 탄식과 기쁨이 함께 얽혀 있었다.

그동안 한 몸처럼 여겼던 사내의 침묵을 의심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종종 경계하고 있었다. 그 뜻을 알지 못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여 서문윤은 속앓이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렇게 속으로 검설린의 심계를 두려워하고, 그의 배신에 상처입고 서로가 마음의 벽을 내보이며 멀어졌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 둘은 서로 다른 길을 밟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의형이 완전히 약속을 저버릴 줄 알았어.’

그렇게 그를 원망하고, 또 의심했는데.

그런데 사실 그가 다른 미래를 도모하고 있고, 강서진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마음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저를 믿어주면 안 되냐 덤덤히 말하는 검설린이 스치고 있었다.

‘오왕 암살이 그래서 그런 거였어. 애초에 황재천과 의형과 이중환은 한편이었으니. 함께하겠다는 말도 뒤에 그런 맥락이었고.’

하나둘씩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서문윤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것으로 변모해갔고, 그에 이중환은 식겁하여 ‘너 왜 이래!’ 소리를 치고야 말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선배의 식겁한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희에 젖어 넋을 잃을 뿐이었다.

이중환을 한탄하게 한 행동이었다.

“너, 네가 그렇게 지금 생각 없이 기뻐할 일이야?”

칼바람 사이로 기쁨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 네!”

“아니, 이 자식이!”

참다못한 이중환이 소리를 지르고야 만 때였다.

생각이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그는 돌아온 대답에 발끈하여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서문윤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저놈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뻐하고 있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한 후배를 본 이중환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해?

결국 이중환은 눈에 불을 켜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돌아가! 너 여기가 어디라고 쫒아와!”

서문윤에게 돌아가는 사정을 설명한 게 어디 저리 기뻐하라는 뜻으로 내뱉은 말인가?

이중환은 그저 서문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사건이 폭풍가도에 오르게 된 것은 어찌 되었건 이중환이 서문윤을 납치한 일에서 시작이 되었으니까. 고우군이 손을 쓰지 않았더라도 장한성 사건으로 이미 그들에겐 평온한 앞날이란 없는 것에 가까웠으나, 그래도 이 혼란한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꿍꿍이가 있던 호칭인 선배란 말을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이 진심으로 부르고, 이중환은 그에게 조금씩 정을 느끼고 있었다.

‘악천화가 지랄을 떨 것도 감수하고 아가리를 놀렸는데 이 반응이라니….’

그러니 검설린이 신신당부하던 함구령을 어기고서 돌아가는 상황을 토설한 이중환은 울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이 종자!’

그리하여 이중환은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열어 설득하는 말을 내뱉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목소리에 더 이상 역정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태자전하께서 위험한 것이 맞습니까?”

바로 이중환의 몸을 뻣뻣하게 굳게 한 말이 그의 입술을 막았으므로.

적막이 흐른다.

날카로운 시선이 서문윤의 얼굴을 쓸었으나 서문윤은 그 매와 같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히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재촉을 하지 않고 답변을 기다렸고, 그 모습에는 다시금 침착함이 감돌아 있었다. 마음을 수습한 서문윤의 얼굴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으니 그것은 이중환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기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너.”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내뱉어진 말이었다.

“말이 맞지 않는군요.”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한층 선명해진 목소리를 입술 밖으로 흘리고.

“왜 그를 구하려는 겁니까. 말씀을 들어보면…… 선배에겐 차라리 전하께서 변을 당하시는 게 이롭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중환은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긴 시간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질 무렵 흔들리는 마음을 되잡은 듯 이중환이 담담한 얼굴로 입술을 연다.

“너는 내게 주는 것도 없으면서 많은 걸 얻어 가려 하지? 주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게 도리 아니냐.”

그 빈정거리는 말에 서문윤은 도리어 물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제게 얻어 갈 것이 있나요?”

그 말에 이중환은 잠시간 침묵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그래.”

바로 서문윤의 몸을 멈칫하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네가 모르는 일이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엔 정적이 다시 흘렀다. 서문윤은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중환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정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나뭇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의 인생이 이 앞길과 같다 생각하고 있었다.

목표 또한 알고, 제가 가는 길이 무언지 잘 알고 있으나 그 길에는 빛이 들지 않아 이중환은 아슬아슬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걷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살기 싫었어.’

그러니 이미 그는 폭풍의 눈 한가운데 있었고, 그것은 서문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중환이 느릿한 한숨을 내뱉었다.

서문윤이 어찌 알겠는가? 그는 이용가치가 높은 이였고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검설린은 그런 그를 제 옆에 끼며 보호했으나, 뜻밖에도 서문윤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중환의 얼굴이 굳은 순간이었다. 허공을 노려다보는 그의 눈에 섬광이 언뜻 스친다. 그 순간 이중환은 사건의 가장 중심의 있는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악천화.’

이청은은 저와 접촉하는 서문윤을 방관하는 검설린이 술책을 부릴 수 있다 경계했다. 이중환 또한 잠시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고. 그러나 그는 요즘 묘한 생각을 품곤 했다.

‘그냥……, 그냥 그는 아무런 뜻 없이 서문윤을 방관하는 게 아닌가.’

가끔 보았던 검설린의 평화로운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훈풍에 휘감긴 듯한 그 온화한 얼굴은 서문윤의 앞에서만 보이는 드문 모습이었다. 그가 하야를 하기 전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모습을 이중환은 알았다. 그러니 그때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얼굴을 볼 때마다 이중환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을 위해 지금 그 끔찍해하던 정계에 다시 몸을 담은 검설린이다.

‘그는 정말 진심으로 의제를 아끼고 있다.’

그래서 든 생각이었다. 검설린이 그저 서문윤을 진심으로 대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고.

이중환의 얼굴을 묘하게 만든 생각이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미 천하는 난장판이 되었고, 지우가 서로를 적대하고 원수끼리 손을 잡는 상황에서……. 술책을 벌이기 싫어해서 이 좋은 기회를 잡지 않는다고?’

잠시간 그 믿기 힘든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던 이중환이 문득 입술을 딱 다물고야 만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은 그런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침묵 끝에 모호한 기류를 깨고 칼바람 사이로 선명한 말이 흘러나온다.

“그는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서문윤의 몸을 멈칫하게 한 말이었다. 이청은에 대해 들은 말에 빠져 있던 그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묘한 얼굴로 이중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죽어서는 안 된다고?’

이청은의 편이 아니라 했으면서? 방계의 황족을 황위로 세우겠노라 당당히 선포했으면서 그리 말을 하나?

그가 말한 계획대로라면 이중환은 이청은의 죽음을 바라야 하는 게 맞다. 이청은은 황실의 유일한 적통 황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대적할 이가 없다. 그러니 이중환이 고우군의 유지를 잇는다면 반드시 그를 처치해야 하는 게 옳을 텐데…….

이중환을 응시하는 서문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그러나 이중환은 뜻밖에도 지금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어둠을 뚫고 이청은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모순적인 말을 내뱉었고,

그리하여 서문윤이 의문에 휩싸여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

“고 대인께서는 폐태자와 대립각을 세웠어도 이청은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청은은 그 형보다 더욱 대담하고, 또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니까…….”

그것은 서문윤의 얼굴에 잠시간 당황을 스치게 한 말이었다. 그것은 언뜻 듣기에 뜬금없어 보이는 말이었으나, 뒤이은 말에 서문윤은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돌연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청융은 비룡이었으나 이청은은 잠룡이었지.”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흐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중환의 얼굴에 냉소를 스친 순간이었다.

“내가 이청은에게 설득되었다는 의미지!”

“예?!”

그게 무슨 말이야?

깜짝 놀란 서문윤이 망연한 눈으로 이중환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중환은 그 다급한 시선을 무시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곤 소리칠 뿐이었다.

“이랴!”

서문윤은 당황하여 그를 더 추궁하려 입술을 열었으나 이중환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말의 배를 발로 세게 걷어차 서문윤과의 간격을 더욱 벌렸고, 그에 서문윤은 깜짝 놀라 말의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선배, 선배!”

앞으로 멀리멀리 나아가는 이중환을 향해 서문윤이 다급히 말을 내뱉는다. 그러나 이중환의 굳건한 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그 명백한 거부의 표현에 서문윤은 낙담하여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후였다.

‘설득, 설득이라고?’

그 순간 서문윤의 목구멍에 비명과도 같은 말이 걸려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전혀 상황을 짐작할 수 없다!

한순간에 이중환은 이중첩자에서 다시 이청은과 영합한 사람이 되었고, 서문윤은 도저히 갈피를 잡지를 못했으니. 이중환이 해준 설명에 오히려 더 머리가 깨져 그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써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환은 그와의 대답을 거부하며 등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그는 상황의 흐름을 파악하려 홀로 분투하며 끙끙대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머리 아파!’

결국 완전히 폭발한 서문윤이 분노가 어린 얼굴로 이중환의 등을 강렬히 노려본다.

언질을 해줄 거라면 차라리 다 말을 해주지!

그러나 이중환은 사건의 조각은 던져주었으면서 그를 조합시키지 않았고. 그에 서문윤은 더욱 큰 혼란에 휩싸여 헤매야만 했다. 그 순간 원망이 울컥 치밀어 오른 서문윤이 이중환을 설득하려 입술을 벌리다가, 문득 무언가를 생각하고 몸을 뻣뻣이 굳히고야 말았다.

‘이중첩자.’

그 순간 서문윤은 뒤늦게 제가 놓쳤던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선배.”

갈라진 음성이 흐른다.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창백하게 식은 서문윤이 고삐를 쥔 손을 희미하게 떨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그럼 제가 이청은과 내통한 걸 의형에게 말했습니까?”

그리고 묵묵히 침묵하던 이중환은 그 말에 반응하여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어.”

“……아.”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탄식이 흘러나오고, 조금은 안도하여 경직된 얼굴을 풀던 그는 그러나 이어진 이중환의 말에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넌 정말 그가 모를 거라 생각하나?”

그것은 실로 서문윤을 섬칫하게 만든 말이었으니.

머리에 차가운 물벼락이 뿌려진 기분에 서문윤이 그 자리에서 몸을 굳히고 침묵한다. 이중환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고, 그렇게 그들 사이로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깨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였다.

“도착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서문윤을 대신하여 이중환이 눈앞에 보이는 길의 끝을 확인하고 다급히 말을 내뱉는다. 그는 고삐를 당겨 속도를 줄였고, 서문윤 또한 그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 말의 속도를 줄였다.

어둠만이 자리했던 숲길에 어느 순간부터 빛이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달빛마저 가로막았던 무성한 수풀이 서서히 적어지고 빛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 가찬성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 이건.”

“이런 제기랄!”

그들의 입술 밖으로 당혹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한순간 서문윤의 숨이 멈춘다.

“이, 이게.”

완전히 어둠이 가시고 새하얀 달빛이 어둑한 밤을 비추고 있었다. 암흑에 순응된 눈이 갑자기 들어온 빛에 의해 충혈되어 눈물을 희미하게 흘렸다. 서문윤은 그러나 따가운 두 눈을 감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아, 이, 이…….”

파편이 된 말만을 한동안 웅얼거리던 서문윤의 두 눈에는 불길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까만 두 눈에 일렁거리고 있는 것은 바로 불꽃이었다.

‘이건, 이건!’

그러니까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불에 타오르고 있는 가찬성이었다.

“이게…!”

“말에서 내려!”

충격에 사로잡혀 비명을 내지르려던 서문윤의 팔을 거칠게 부여잡고 이중환이 그를 끌어 내린다. 서문윤의 옆에서 망연히 가찬성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고함을 내지르려는 서문윤에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이중환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서문윤을 강제로 하마시키고 수풀로 이끌고 갔다. 그들의 귓가에는 살벌한 고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서문윤을 몸을 눌러 강제로 엎드리게 한 뒤, 이중환은 거칠게 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애써 정신을 다잡았으나 그 또한 충격을 감추지 못해 흔들리는 눈으로 가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그의 아래에 짓눌려 가쁜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태자께서 위해를 입으신 겁니까?”

침착함을 가장하려는 듯한 목소리는 그러나 그 끝에 자리한 미세한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중환은 잠시간 숨을 삼켰고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너……, 아직 체력은 남아 있지?”

“……솔직히 죽을 것 같아요.”

“지금 말을 안 몰면 그냥 죽어…….”

그 말에 서문윤은 아득한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질끈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아찔함이 스치고 있었다.

“전하께서 정녕….”

잠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잠시간 말을 가다듬던 서문윤이 굳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녕 저곳에 계신 겁니까?”

그 말에 이중환은 차마 답변을 하지 못하고 아찔한 얼굴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그가 바라본 곳은 바로 가찬성의 성문이었다.

가장 높은 누각에 꽂혔던 토벌군의 군기가 꺾여 달랑거리고 있었다. 야밤의 하늘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거뭇한 연기가 구름 위로 치솟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치르고 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확히 말하면 이중환에게 불길함을 안긴 가장 큰 것은 그런 꺾인 군기나 불타오르는 성벽이 아니었다.

불타오르는 가찬성을 바라보는 이중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가 실로 섬뜩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찬성이 습격을 당한 자체가 아닌 그 침묵에 있었다.

이중환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시뻘건 혓바닥 같은 불길이 일렁거리는 가찬성을 수풀 사이에 엎드려 말없이 노려보던 이중환의 얼굴이 어느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 무슨…?”

당황하여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이중환에 고개를 든 서문윤이 멍한 표정을 짓고야 만다.

“왜, 왜……”

“…….”

“왜 쟤네가, 회군을 합니까?”

저 멀리서 가찬성의 성문을 와르르 빠져나오는 대군을 망연히 바라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가찬성은 검남 절도사의 치소인 성도로 가는 주요 길목에 자리한 곳이었다. 대개 이런 곳은 침략을 받기도 쉬워 양곡 기지를 구성하지 않으나, 가찬성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검남 절도사는 옛날 촉땅, 그러니까 사천 지방을 다스린다. 한고조와 소열제가 궐기를 도모한 이 사천 지방의 특징은, 중원으로 가는 골목의 지형이 매우 험악하나 막상 내부는 땅이 기름져 생산성이 좋다는 것이었다.

가찬성 또한 이런 특징을 지녔는데, 성벽이 견고하고 해자가 깊어 공성전에서 유리하고 근처의 산세가 험악하여 대군을 동원하기 몹시 힘든 구조였다. 그러나 이 가찬성을 뚫으면 그 후부터는 논밭이 이어졌고 사천의 요지로 가는 도로를 이용하기가 용이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토벌군이 승기를 장담하고 이청은과 검설린이 서로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일찌감치 이 가찬성을 꺾은 일이 한몫했다. 가천성에서 토번의 정예군 삼만이 목숨을 잃었고, 그것은 토번이 발을 빼는 데 큰 몫을 했으니까.

그러나 사실 이 사건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음습하고도 비밀스러운 모략이 말이다.

이 모략의 주인공이 바로 이청은이었다.

검남 절도사는 대국을 보는 안목은 떨어졌어도 몸집을 불려나가는 토번을 견제하던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다. 검남과 가찬성의 지형은 수성에 적합했고, 절도사는 뛰어난 장수이니 토벌전이 장기화될 것은 뻔하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쉬이 가천성에서 군사를 잃은 것은 사실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토벌군이 입은 피해는 거의 전무한 상황, 아무리 검남 절도사가 봉기 전 제가 손을 잡았던 절도사들의 몰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 쉽사리 무너질 수가 있을까?

이청은은 여기서 전쟁 중 크게 빛을 발할 업적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동궁사변 이후 태자가 되어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조용조용 살아왔으나, 그 말이 이청은이 무능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난세에 현상을 유지하는 것 또한 사실 능력이 필요하다. 황제는 고우군의 독주를 경계하여 이청은을 장기말로 썼고, 그는 고우군과 서로를 견제하며 정계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다.

군략에는 재능이 없었으나 일찌감치 그는 정략에 재능을 보이고 경험을 쌓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청은은 황제의 헛짓거리로 줄어든 입지를 세우기 위해 제 재능을 사용했으니, 그는 그렇게 토번 왕에게 몰래 밀사를 보내어 그를 설득하려 들었던 것이다.

바로 가찬성 전투에 승리를 못 박고 이청은이 줄어들었던 발언권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일이었다.

“그가 북란 때 활약하던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때 조정은 지금보다 더욱 열악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천고의 기재이고, 지금 사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 재상이 근 10년간 정비한 국고의 물자는 차고 넘칩니다. 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토번 왕과 독대한 밀사가 내뱉은 말이었다.

사십만 대군은 실로 과장이었고, 풍요로운 국고 또한 허황되기 짝이 없는 소리였으나 사신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고 토번의 왕도 그것이 허풍임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것은 토번 왕이 교섭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였으므로, 밀사 또한 자신감을 얻고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본래 군사를 일으키길 꺼리던 팔기린이 북란 때 장안이 침략받은 이후 벌였던 일을 아시잖습니까. 그는 사방을 토벌하여 10년간 토번과 회흘이 기승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진중한 사내라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세를 확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당금 천자국이 일찌감치 많은 전란에 휘말려 내정을 다스리는 데 열중해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는 만약 전쟁이 필요하다면 피하지 않고 만인을 제치고 먼저 나설 겁니다.”

“…….”

“북란 후 벌어진 대대적인 토벌전으로 사위의 국경이 안정된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한때 고원에서 세력을 떨치던 토번은 북란 이후 그가 벌였던 토벌 작전에 수도가 쓸리고 선왕이 전사하는 수모를 겪고 10년간 외부에 세력을 확장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사건으로 왕위에 올랐던 토번의 왕은 그 말에 침묵을 할 뿐이었으니,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사신은 입술을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흘러나온 마음속에 못을 박은 말.

“또 왕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이 전쟁에 토번군 총사령관인 적송덕찬이 승리한다면, 왕은 그를 감당할 수 있으십니까?”

그때까지 침묵을 하던 토번 왕을 움찔하게 만든 말이었다.

“뭐?”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 왕의 앞에 밀사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흘린다.

“비밀스러운 자리이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합시다.”

그러곤 그는 돌연 정색하며 말을 내뱉었다.

“이제부턴 번왕의 본심을 보여주십시오!”

토번 왕의 얼굴에 묘한 빛이 스치게 한 말이었다.

눈빛을 날카롭게 바꾼 밀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잇는다.

“적송덕찬은 왕의 조카이고 사람들은 젊은 영웅을 따릅니다! 왕께서는 황폐화된 나라를 되살리기 헌신했으나, 사람들은 그런 당신의 노력을 모르고 복수를 호창하는 적송덕찬을 높게 삽니다. 당신의 수칙은 대당과의 교역을 이어나가자는 것이지만, 적송덕찬은 번번이 전쟁을 주창하여 평화를 깨트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은 선왕이 전사할 때 그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여 어린 손자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토번 왕은 그 말에 이르러 눈썹을 꿈틀거리며 밀사를 노려보았고, 밀사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격렬히 말을 이어나갔다.

“적송덕찬이 패배하는 것도 문제지만, 왕께서는 승리를 하는 경우를 더 걱정하시는 게 아닙니까?”

토번 왕의 입술 밖으로 날카로운 웃음이 흘러나온 때였다.

“감히 나라의 영웅을 모함하다니, 목숨이 여러 개인 모양이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토번 왕이 사신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지른다.

“내가 네 사지를 찢어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너희 군대가 선왕인 내 형을 죽이고, 영토를 짓밟았다. 우리에게는 깊은 원한이 있고 나는 그를 잊지 않았어!”

그것은 실로 노기등등한 말이었으나, 사신은 정말로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양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변할 뿐이었다.

“그러는 선왕께서도 북란 때 아국의 국경을 치고 검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 원한을 갚은 건데 마치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군요.”

“…….”

“아국과 토번의 역사가 누가 선량하고 누가 악하다 말할 수 없게 복잡한 걸 아시면서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는 고래로 서로가 서로를 침략하고 손을 잡곤 했습니다.”

그러곤 목소리에 힘을 주어 내뱉은 말이었다.

“제가 솔직해지겠다 말을 하였습니다.”

밀사는 숨을 들이켜곤 잠시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침묵을 지켰고, 그 끝에 선명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저는 태자의 사람입니다!”

토번 왕의 두 눈이 흔들린 때였다. 그는 절대로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토번과 당과의 관계가 끊어져, 팔기린의 복직 사실조차 모를 만큼 정보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북란 때 내정과 외정을 각각 이끈 이청융과 팔기린이 황제의 견제로 몰락하고 지금의 태자가 세워진 것이었다.

“우리 토벌군의 사령관께서는 북란 이후 지나친 인기를 얻어 천자께서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팔기린의 성세가 워낙 거세 병권을 회수하지 못했고, 한동안 천자께서는 꼭두각시처럼 살았습니다. 황제께서 다시 권위를 되찾을 수 있던 건 폐태자 사건 때 그의 수족과 지인이 연루되어 그가 압박감을 느껴서 자진 사퇴를 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방관하에 사신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실각된 악 장군을 다시 불러오고 천자의 권위는 지금 땅바닥 아래 떨어진 채입니다. 사람들은 팔기린을 황제보다 낫게 여기고, 심지어 그가 천자였으면 좋겠다 말을 합니다.”

“…….”

“하물며 팔기린은 집안이 영세하지만 적송덕찬은 번왕의 조카이자 황족이지요. 누구의 승리가 당신에게 더 위협적이겠습니까?”

숨조차 내뱉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내던 밀사는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다물었고 숨을 헐떡거리며 왕의 말을 기다렸다.

이제 솔직해지시지?

그런 말을 하는 듯한 강렬한 밀사의 시선을 받으며 토번 왕은 침묵 끝에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시인했다.

“너희는 뻔한 술책을 벌이지만 그게 정론이군!”

밀사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게 한 말이었다.

“나는 혈육이 죽은 원한을 잊지 않았다! 내 아들이 유시에 맞아 죽고 형님이 불타는 왕성과 명을 함께한 일을 잊지 않아.”

말은 봇물이 터지듯 흘러나왔다.

“허나 그것과 왕의 일은 별개야! 나는 흔들리는 토번을 반석에 오르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최근에 가까스로 우리는 예전의 성세를 되찾았고,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헌데 적송덕찬 이놈은……”

그 말에 이르러 토번 왕은 음울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고, 번뜩거리는 두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침묵 끝에 부득 이를 간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는 뛰어난 장수이지만 차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지금 당과 세력을 겨루며 힘을 뺄 때가 아니란 걸 모르고 복수만을 주창하지. 그는 위험한 자야.”

말은 뒤로 들어갈수록 격렬해지고.

“난 권력을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큰 인물이라면 나는 내 손자 대신에 그를 후계로 삼았을 거야, 허나 그는 군재만 있을 뿐 아무런 생각이 없지! 나는 그에게 내 나라를 맡길 수 없다.”

묵묵히 그의 분노 어린 말을 듣던 밀사는 그 순간 속으로 ‘정말 권력이 관심이 없었을까?’란 생각을 품었지만 그를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토번 왕은 더 이상 설득이 필요 없을 만큼 그들이 원하는 길을 밟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 전쟁을 반대했어. 하지만 그놈은 그런 나를 설득하여 전쟁에 참여했지. 나는 적송덕찬이 그 휘하의 사병을 이끌고 출정하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그러곤 숨을 들이켜곤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군사를 동원하면 반드시 수확을 얻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밀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그제야 토번 왕이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것이었다. 밀사는 그저 토번군을 회군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나섰으나, 토번 왕은 그보다 더욱 독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는, 저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밀사가 비명을 지르듯 말을 내뱉는다.

“저희는 그저 회군을.”

“삼만 명은 많은 숫자지만 회복할 수 있는 수치다.”

그러나 토번 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고,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으니-.

“적송덕찬이 정권을 잡는 걸 막기 위한 대가라면 충분해.”

“……으음.”

“이번 기회에 나는 그의 싹을 뽑을 거다. 너희는 어찌하겠느냐? 너의 주인인 태자와 황제는 팔기린보다 거대한 공을 세우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

“내가 도와주겠다.”

그리하여 성사된 거래의 결말이었다.

토번 왕은 군사기밀을 이청은에게 넘겼고, 그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적송덕찬의 수하 삼만을 무찌를 수 있었다. 옛날 토번의 수도가 불탄 일로 기마병 중에서는 불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토번 왕이 적송덕찬을 소환하니 그는 어쩔 수 없이 토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렇게 이청은은 땅바닥 아래로 떨어지는 그의 입지를 가까스로 부여잡고 끌어올릴 수 있었고, 병참기지인 가찬성에서 제 세력을 점검할 수 있었다. 토번 왕 또한 유능하지만 호전적인 왕족을 토사구팽할 실마리를 얻었으니 모두가 그들의 예상대로 원활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계속 진행이 되었다면 적송덕찬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토번 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적송덕찬을 추궁할 수 있을 테니, 사병조차 잃은 적송덕찬은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몰락했겠지.

그러나 뜻밖에도 토번으로 돌아가던 와중 적송덕찬은 뜻밖의 사건을 경험하고 토번 왕의 흉계를 알게 되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숙부께서 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바로 왕의 명을 받아 물주머니에 기름을 먹였던 적송덕찬 휘하의 장수가 욕심을 내어 왕에게 적송덕찬을 먼저 치자는 전서구를 날리다가 걸린 것이다.

“이, 이, 역적 놈들이!”

모든 사건이 드러나고 분노한 적송덕찬은 그를 처형하고 길길이 나뛸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는 제 처지를 깨닫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저가 크나큰 패배를 겪어 토번 왕의 권한이 몹시 세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이, 이게 뭐야!’

제 세를 뒷받침하던 기마병의 대부분을 잃었고, 왕의 흉계를 증언할 장수는 홧김에 죽여버렸다. 토번으로 가면 처형을 당하고 그렇다고 검남에 남을 수도 없는 상황. 검남 절도사에게 모욕을 주고 회군을 했던 적송덕찬은 갈 곳을 잃은 채 살아남은 기마병들과 함께 검남을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던 찰나에 목격한 일은, 병략에는 출중한 적송덕찬의 머리를 밝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게 뭐지?”

다행히 사천은 산이 많았으므로 적송덕찬은 그때까지 신분을 숨기고 은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유리걸식하던 와중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군도가 닦이고 성문이 닫히니, 적송덕찬은 그들이 무언가를 꾸미는 것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일을 살폈다.

“검남 절도사가 군사를 이끌고 성도를 빠져나왔답니다.”

“뭐?”

그리고 들려온 소식이 알린 말.

‘어, 이것 봐라?’

적송덕찬의 눈이 빙글 돌아간 순간이었다.

이제 그들은 토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번국과 다름없는 검남에서 차라리 세력을 키워 재기를 노리는 게 낫다. 그러나 적은 수의 사병, 부재한 기반으로 고민하던 그에게 있어서 검남 절도사가 전군을 이끌고 가찬성에 쳐들어갔다는 소식은 실로 광희를 할 만한 소식이었으니.

“지금 당장 말에 올라라. 성도로 가자!”

“예?”

“검남을, 검남을 우리가 먹는 거다!”

그리하여 일어난 사태였던 것이다.

* * *

“적, 적송덕찬!”

영문을 모른 채 비밀리에 군대를 쫒던 두 사람 중 하나의 입술 밖으로 비명과도 같은 말이 흐른다. 그것은 바로 추격 와중, 서문윤의 눈이 보이지 않는 저 멀리의 먼지 폭풍을 발견하곤 불현듯 내뱉은 말이었다.

“적송덕찬이다! 그가 토번을 떠나지 않았어. 그가, 그가…….”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이중환이 혼란에 빠져 더듬더듬 말을 내뱉다가 얼굴을 와락 무너트린다.

“아, 이건 이제 모략의 범위를 벗어났다!”

서문윤의 시선을 빼앗은 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리던 와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라, 어째서 검남 절도사는 요지인 가찬성을 포기하고 회군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작정 그들을 쫓는 와중이었다.

“제기랄!”

그러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온 이중환의 경악성에 서문윤은 체력의 한계를 느껴 숨을 몰아쉬면서도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지금 무슨 일이?”

그리고 서문윤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든 말이었다.

“성도가! 성도가!”

이중환의 얼굴에 핏기가 빠르게 가시고, 뒷목에 퍼런 핏줄이 세워진다. 이어진 그의 말에 서문윤은 그 순간 사건의 실마리를 잡고 얼굴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사천의 가장 중심부가 비었다고! 지금 팔기린이 토벌군을 이끌고 가찬성으로 내려오고 있잖아!”

숨을 헐떡거리는 이중환이 이를 아득 악물며 중얼거린다.

“그럼 누가 지금 성도에 있지?”

서문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순간이었다.

“어, 어어!”

성도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었다!

“이런, 망할!”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은 서문윤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비명을 삼키며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준다. 이중환은 악귀마냥 완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고, 지진이 난 듯 두 눈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고우군의 죽음 이후로 완전히 처음 보는 이중환의 모습이었으므로. 서문윤은 자연 몸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으며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건 속도전이야!”

그리고 터져 나온 이중환의 말에 서문윤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익주에, 성도에 먼저 진입해야 해. 이런 미친!”

그 말을 끝으로 이중환은 말의 배를 걷어 찼고, 서문윤 또한 공황에서 벗어나 말의 속도를 올렸으니. 말을 달리는 서문윤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져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그 순간 깨달은 것이었다.

‘이게, 이게 뭐야!’

지금 가찬성으로 진격하는 검설린, 성도를 비운 검남 절도사, 갑자기 나타난 토번의 장수. 모두의 운명이 비어버린 성도에 있다는 사실을!

“당장, 당장 속도 높여 서문윤!”

윽박지르는 말에 서문윤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 * *

그날 새벽, 옛 촉땅. 검남의 군도에는 죽도록 말을 달리는 다섯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 가찬성을 빠져나온 검남 절도사의 군대.

“이게 무슨 일이야!”

대경실색한 검남 절도사가 시퍼런 얼굴로 소리친다. 그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또 음모, 음모인 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데!’

실로 이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어째서 가찬성에 사람이 비어 있는 거지? 강서진이 내어준 기밀정보로 기습을 걱정하지 않고 토벌군의 눈을 피해 미친 듯이 말을 몰아 가찬성을 습격했다. 아무리 기밀을 알고 있다고 한들, 그곳은 천혜의 요지라 무너트리는 데 최소한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찬성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무너져 내렸으니, 당황하여 가찬성 안으로 뛰쳐 들어간 검남 절도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태자가 자리하지 않았다!

아니, 태자뿐만 아니라 장수의 수도, 병사의 수도 몹시 부족했다. 가찬성에는 수비를 방비할 최소한의 병력도 없었던 것이다. 크게 불안해진 검남 절도사는 기습을 염려하여 성을 불태우고 수색을 샅샅이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찬성이, 버려진 패라고?’

태자는 도망을 간 것이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쭉정이였다. 강서진은 그에게 가능하면 태자의 목숨을 취하라는 말을 했다. 그도 아니라면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라고. 그런데 어째서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가, 가찬성은 심지어 검남의 요지인데.

그 사실에 얼이 나가 잠시간 망연한 표정을 지었던 검남 절도사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잊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아악!!”

“장, 장군?”

갑작스럽게 절규를 내지르며 얼굴을 쥐어뜯는 절도사를 부관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바라본다. 정치 감각은 없어도 그 대범함과 군재로 수하 군관들의 존경을 받았던 검남 절도사는 그 순간 거의 미치광이처럼 날뛰고 있었다.

“당했다! 당했, 아악!”

“무슨 일이십니까?”

당황하여 말을 묻던 부관은 그리고 돌아온 우짖는 목소리에 상황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도!”

성벽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성도, 성도로 가야 한다!”

그 순간 절도사의 얼굴은 귀신처럼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치소로 돌아갈 거면 여기에는 왜 오신 겁니까? 어째서 태자는 이곳에 없고요?”

부관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애초에 성도를 비우고 가찬성에 돌격한다는 파격적인 전략은 나라의 유일한 적통 황손이자 국본인 이청은을 잡아 협상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가찬성이 요지라도 모든 면에서 검남의 배꼽이라 할 수 있는 성도를 버리고 가천성으로 돌격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태자는 요지인 가찬성에 자리하지 않고, 절도사는 저리 절망하고 있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눈알이 핑글핑글 돌아갈 만치 혼란스러워하는 부관을 뒤로하고, 검남 절도사는 흉흉히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다급히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갈 뿐이었으니.

‘하라는 대로 다 따랐잖아!’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퍼져 나갔던 소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내 뒤통수를 쳤어!’

강서진은 두 얼굴을 지닌 간사한 사내다! 그가 유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다지만, 사실 그는 고우군보다 더 교활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다!

“태자! 태자를 잡아야 한다. 아니, 아니…… 성도를!”

그리하여 검남 절도사는 위기상황에서 제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 믿었던 것의 실체를 의심하였던 것이다.

‘태자가, 태자가 가찬성을 버려? 여긴 천혜의 요지인데? 태자가 여기 있다기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온 건데! 아니, 이게 모두 음모라고? 음모를 이렇게 대범하게 부릴 수가 있어? 태자를 미끼로 하고 대역을 논하면서? 그는, 그는 태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건, 이건….’

혹여 태자를 치라는 제안은 음모가 아니었나? 강서진은 토벌군의 패배를 줄이기 위해 저를 속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

“뭘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당혹감에 중얼거리는 부관을 향해 검남 절도사는 말의 고삐를 부여잡으며 울화 섞인 목소리로 소리칠 뿐이었다.

“나도, 나도 모른다고!”

그걸 지금 반란을 일으킨 주체가 하는 말인가?

기가 막혀 웃는 부관을 뒤로하며 검남 절도사가 빠르게 말을 몰아 달린다. 그런 그의 등을 부관이 잠시간 그늘진 얼굴로 노려보다가, 문득 느릿한 한숨을 내뱉으며 두 눈을 빛냈다.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이랴! 소리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찬성 성벽 밖에 먼지바람이 휘몰아쳤다. 모래 폭풍을 만든 것은 바로 질풍처럼 가찬성을 뼈져나가는 검남군 기병 정예였다.

* * *

둘째, 미친 듯이 숲속 가도를 달리는 이청은과 그의 군대.

“강서진은 다 좋은데 단점이 하나 있지.”

어둠 속에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문천상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과 정예병들이 말을 타고 주군을 따르고 있었다.

“술수에는 능하면서 변수는 너무 무시하고 있어. 사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 입술을 무는 것을 모르고!”

그 대목에 이르러 차가운 얼굴로 말을 몰던 이청은의 호위, 문천상의 얼굴이 심히 일그러진다. 가찬성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이청은의 말에 반신반의했던 그는, 실제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들끓는 분노에 휩싸여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제 손아귀에 놀아날 것 같으냐! 과거에 벗어나지 못해 시궁창을 구르는 망령이 미래를 맡을 자격은 없다!”

황제가 제게 아첨하는 이들로 군부를 채웠을 때, 강서진이 그 사이에 제 사람을 심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강서진이 황제의 신임을 얻어 바로 벌레들을 속아내지 못한 것일 뿐. 이청은은 그들이 제게 충성을 한다 생각지 않고 있었다. 또 유사시에 그들이 제 숨통을 조일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예의주시하며 그들을 살피고 있었지.

‘그러나 이렇게 과감하게 굴 줄은 몰랐다. 그 미친놈이! 아니, 고우군을 추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굳은 얼굴로 이청은이 어두운 숲속, 정면을 노려다보는 눈을 매섭게 빛낸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고 있었다.

만약 그가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일전부터 강서진을 경계하여 그들의 사람을 추려내고 탐색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럼 저 가찬성 안에서 함께 불타고야 말았겠지. 바로 한 줌의 잿더미가 되어서 말이야.

그러나 이청은은 미리 방비를 했고, 그들이 도피를 준비하는 작은 움직임만으로 상황을 짐작하고 기민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백척간두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내의 얼굴은 이 순간 심히 굳어져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들려오는 흔들리는 목소리.

“허나, 허나 가찬성을 버려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사실 지금 이청은이 동요하는 가장 큰 이유였으니-.

“저곳은, 저곳은…… 검남 쟁탈전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요지였습니다.”

문천상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고삐를 쥔 이청은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야 만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둠으로도 숨길 수 없는 위기감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말은 확실히 예리한 것이었다! 가찬성을 빠져나오기 직전까지 문천상이 이청은의 결정을 반대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는 이 일의 후폭풍이 불러올 사태를 예상했고, 심지어 차라리 가찬성에서 패배해는 게 낫다는 말까지 내뱉었던 것이다.

“전하께서는 정말 이 사태를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청은은 검남 절도사가 강서진과 내통하여 저에게 쳐들어올 가능성을 예상하며 가찬성을 버리자 했으나, 그 말을 들은 태자의 측근은 그 즉시 경련을 일으키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안 돼요! 미쳤습니까! 가찬성을 버리면 태자께서는 정치 생명이 끝나십니다!”

황제가 병부의 일을 모르는 이청은을 꾸역꾸역 군부에 밀어 넣은 이유가 애초에 무언가? 황실의 이름은 땅바닥 아래를 구르고 있었고, 이청은은 반드시 이 전쟁에서 군공을 세워야 했다. 그것이 황제의 뜻이었고, 동시에 황실이 살 길이었으므로.

허나 이청은은 이 전쟁에서 그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했다. 심지어 중간에 황제는 검설린을 해임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어 군영을 개판으로 들쑤셨고, 이청은은 제 아비와 완전 한 패거리로 취급받고 적폐 취급을 받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토번 왕을 설득하여 가찬성을 손쉽게 얻어낼 수는 있었다만, 그걸 이리 포기한다고? 검남 정벌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을?

“사람들은, 태자전하의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수하의 한탄을 이청은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그래, 애초에 강서진이 검남 절도사와 내통했다는 증거는 없다. 세간의 눈에 이것은 군을 이끈 경험이 없는 태자가 습격을 받고 겁에 질려 내뺀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 그래도 말이 많은 황실의 관짝에 못을 박을 사건일 테고.

“그러니까 성도를 얻어야 하지.”

그리하여 이청은이 내린 결론이었다.

‘성도를 얻었다고 해서 완전히 승리했다 할 수 없지. 가찬성을 함락하지 못하면, 성도는 완전히 검남에 갇힌 꼴이니까. 하지만…… 검남 절도사의 치소라는 상징성을 누가 무시하랴!’

아니, 적어도 습격을 받아 도망친 게 아닌 공을 세우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이라도 들어야 했다.

숨을 들이켠 이청은이 이윽고 숲을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반드시 그곳을 얻어야 해! 성도를 얻고 말고에 우리의 정치적인 명운이 달려 있다! 그러니까 닥치고 달려!”

말허리를 세차게 내리치며 내뱉은 말이었다.

“빈 성도를 탈환한다! 서둘러라!”

* * *

셋째, 검남 땅에서 재기를 노리는 토사구팽 당한 토번의 적송덕찬.

“토번의 왕이 토번 사람을 버렸다! 그는 이제 내 숙부가 아니며, 우리의 왕 또한 아니다.”

우두두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산의 능선을 따라 달리던 기백의 기마병 선두에 자리한 젊은 장수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정통성은 모두 나에게 있다! 나는 가한이 될 것이다. 검남 땅의 중심! 성도를 차지해서, 웅크린 용이 되어 힘을 기르리라! 숙부에게 응당의 대가를 돌려줄 것이다!”

돌아온 것은 산을 쩌렁하게 울리는 세찬 함성이었다.

“토번 가한! 가한이시여!”

* * *

넷째, 토벌군.

앞선 무리들과 규모가 다른 대군으로 구성되었음에도, 토벌군은 기이하리만치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맑은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건널까요?”

침묵을 깨고 귓전에 닿은 말에 사내는 느릿한 목소리로 답변할 뿐이었다.

“아니.”

먹이를 노리기 전 맹수처럼 갈무리된 눈이 강 너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아직.”

* * *

그리고 마지막 무리는…….

“아!”

숲속을 달리는 두 사람 중 하나의 입술에서 신음이 터져 나온다. 어둠 속에서도 그 상태가 확인이 가능할 만큼 시퍼렇게 질린 얼굴. 서문윤은 이마 위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동공을 푼 채 고삐에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거의 본능으로 달리는 수준이다.

“이젠, 이젠 한계예요!”

파발도 이렇게 달리지 않을 것이다!

거의 하룻밤을 미친 듯이 달려 성도 근처에서 가찬성까지 왕복한 서문윤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손발은 벌벌 떨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야가 순간순간 까맣게 꺼져, 낙마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악천화!”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들려온 심각한 목소리.

“넌 그에게 가!”

“예?”

당황한 서문윤의 말에 이중환은 이 악문 목소리로 답변할 뿐이었다.

“당장 악천화에게 가서 회군하라 언질해! 성도가 뺏길 위기에 처했다고. 나는, 나는 태자를 찾아야겠다.”

그 말에 서문윤이 숨을 헐떡거리던 와중 얼굴을 무너트리고야 만다.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짙어지는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그리고 짧은 시간 침묵을 지키던 청년의 입술 밖으로 흐른 혼란에 찬 목소리.

“그는, 결국에 당신이 적대해야 할 자가 아닙니까?”

바로 서문윤이 지금껏 이청은에게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무슨 연유로 그를 살리려 하신 겁니까? 제도를 바꾸자 하시면서, 애초에 전하의 편이 아니라시면서 왜 그를 도우려는 겁니까?”

“…….”

“무얼 원하시는 겁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서문윤이 제게서 앞서가는 사내의 등을 노려본다. 이중환의 성격이 원체 격의 없는지라 그간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처음 만날 때의 그를 생각지 못했는데. 지금 제 앞에서 말을 달리는 그는 서문윤이 따를 바가 못 되게 기민하고, 또 강인했다.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강인한 체력과 요새가 불탄 충격에도 빠르게 제삼의 세력의 존재를 눈치챈 판단력.

그런 강인한 사내가 지금 목표하는 바가 뭔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그런 마음으로 내뱉은 말에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서문윤은 어지러운 머리를, 끊어지려 하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려 이를 악무는 중이었다. 이중환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입술을 열었고, 그 말에 서문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원한다.”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그는 또다시 회피를 하려는 건가? 그리하여 서문윤이 굳은 얼굴로 다시 말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사람이 그만 죽었으면 하지. 인재든, 그냥 평범한 사람이든 간에 후대에는 이런 일을 없길 바라.”

“…….”

“모두가 원하는 일이 아니냐, 그건.”

담담히 흐른 말에 서문윤이 짧은 침묵 끝에 느릿하게 입술을 연다.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지. 피를 더 흘리지 않길 바라고. 그러나 그런 걸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 천하의 패권을 잡았고 그리하여 많은 시간 그 소원은 외면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흐른 낮게 울리는 목소리.

“처음에는 이청은이 제 이익만을 생각한다 여겼지. 그는 지금껏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며 꼭두각시처럼 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고 대인조차 마찬가지였지. 그리고 고 대인은 속으로 절망을 삼키며 세상을 구할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어, 또 정신이 희미해져 서문윤은 그 말을 한 자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이 더 중요한 법이란 걸 나는 잊고 있었구나.”

조금의 뜸을 들이며 흐른 말이었다.

“이청은 또한 그리했어.”

“예?”

바로 서문윤의 얼굴에 균열을 서리게 한 말.

여러 방향을 해석될 수 있는, 어느 면에서는 충격적인 뜻을 내포한 말에 서문윤이 두 눈을 흔들며 충격을 삼킨다. 그런 그의 귓가로 담담한 목소리가 이윽고 내려앉았다.

“그자. 10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바로 못을 박는 말이.

“그 나름의 세상을 바꿀 방법을.”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퍼뜩 스친 것은 바로 태자익위 시절 이청은의 모습이었다. 그저 말단 무관에게도 온화한 사내는 인재를 아끼고 사람을 보듬곤 했다.

‘……내게 유독 호의적이었지.’

그리고 사람이 좋은 태자의 동궁에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스치고, 그런 그의 귓가로 날카로운 말이 떨어져 내린다.

“태자와 고 대인의 의견이 합치하는 부분이 있다. 이건 내 자의적인 해석이야. 어찌 되었건 태자는 죽으면 안 되고, 난 누구의 편도 아니니. 너는 당장 악천화에게 가!”

역정과 구분할 수 없는 거센 노호였다.

“제길! 일단 토번은 막아야 할 것 아니야! 오랑캐 손에 땅이 분할될 수는 없잖아! 당장 가서 막으라고!”

바로 서문윤의 몸을 움찔케 한 말.

“지금은 국란이라고, 국란! 이해 못 해?!”

그리하여 서문윤은 기백에 질려 더듬더듬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서둘러 대답을 했으나, 사실 서문윤 또한 그 말에 동감을 하고 있었다. 강서진, 이청은, 검설린의 일은 일단 내부의 분열이다. 그러나 토번의 내로라하는 명장이 낀 사안이라면 말이 달랐다.

북란이 아니어도 이민족이 한족의 땅을 점령하고 학살을 자행한 일은 무수히 많다. 지금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내란이 아닌 외란이었고, 그것은 무게감이 다른 심각한 문제였으므로. 이것저것 사안을 따지던 이중환의 얼굴을 새하얗게 질리게 만들 만큼 충격적인 사태를 이해하고 서문윤은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려 한 것이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고삐를 부여잡은 서문윤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친다. 바닥이 잘 정비된 길이 아닌 풀숲, 그 샛길로 빠져나가는 이중환의 모습이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하다. 실로 뛰어난 기마술에 감탄하던 서문윤의 귓가로 우렁찬 목소리가 이어지고.

“적송덕찬!”

그 말을 끝으로 이중환은 빠르게 서문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문윤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 소리 사이로 까드득 살벌한 소리가 흘러나온 때였다. 가빠지는 숨을 고른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이랴!” 말을 재촉하는 소리가 가도에 울려 퍼지고 모래 먼지가 휘몰아쳤다.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 종일 혹사된 몸이 늘어져 서문윤은 거의 아랫입술이 걸레가 될 만치 그것을 깨물며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전하는 무사하실까?’

이청은이 심계가 깊은 사람이란 건 잘 알고 있었으나 전장에는 변수가 많았고 그에 서문윤은 그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중환이 헤어질 때 이리 쉬이 가찬성이 함락당한 것을 보며 이청은이 미리 병력을 빼낸 것 같다 말을 했음에도 서문윤은 그가 죽고 난 후 벌어질 복잡할 상황을 염려하여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곤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속으로 품은 의문이었다.

‘적송덕찬에게는 왜 간다는 거지?’

그것은 바로 이중환의 생각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아리송한 빛이 스친다. 이청은을 찾겠다면서, 이중환은 헤어질 때 뜻밖에도 토번군 장수인 적송덕찬에게 향한다 말을 내뱉었다. 그때는 당황하여 자세한 사정을 묻지 못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서문윤은 갸웃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중환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

미친 듯이 말을 몰던 와중이었다.

문득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에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그리고 그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야 말았다.

‘적송덕찬!’

저 너머에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 그리고 귓가에 들려온 이민족의 언어로 그곳에 있는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곤 서문윤은 경악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바로 적송덕찬이 이끄는 토벌군이다.

“왜, 왜 쟤들이 여기에 있어?!”

그리곤 그는 망연한 목소리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민족들의 기마술이란 실로 유명한 것이지 않나! 밥을 먹고 말만 타고 달렸다 평해지는 북쪽의 기마술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사실 서흉(西凶)이라 불리는 토번의 사람들 또한 말을 다루는 솜씨로는 그들에 뒤지지 않았다.

추격전을 벌이는 와중 서문윤은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그 사실을 실로 체감하고 있었으니, 뜻밖에도 목격한 토번군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토번 기마병을 따라잡았는데…?’

그리고 그의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릴 수 있었다.

“악!”

속도를 올려 마침내 토번군이 자리한 길 옆에 가도를 지나치던 서문윤은 순간 들려온 비명소리에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악!”

고개를 돌리니 목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토번 기마병이 하나 있었고, 열이 받아 시뻘건 얼굴로 무어라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사에 그 순간 서문윤은 모든 상황을 깨닫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 미쳤어!”

그러곤 그저 망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으악!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적송덕찬으로 추정되는 젊은 장수가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화살이 쏘여오는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습격을 무시하고 말을 빨리 달리려 했으나, 제 투구에 정확히 박히는 화살에 결국 분노하여 말을 멈추고야 말았다.

“이 개자식이!”

분명 욕설일 것이 뻔한 토번어를 들으며 서문윤은 탄식하고 있었다.

‘그가 사냥을 하고 있던 거구나.’

저 너머의 수풀 사이로 맹수의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거린다. 새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사내의 정체를 서문윤은 알고 있었다.

바로 이중환이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떨리는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끌려고 한 거다.’

이중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서문윤을 경악하게 했던 신기 어린 기마술로 앞서 나아간 이중환은 토번의 발걸음을 막으려 지구전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단기필마로 수백의 토번 기마대와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 시간은 잡을 수 있을 테지.

그래도 그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고, 범인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서문윤은 그에 전율하며 몸을 잘게 떨고야 말았던 것이다.

단신으로 기마병을 막는다는 게 한때 병부 제일인이라 불렀던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

그에 실로 감탄하던 서문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금 말을 달리는 데 집중을 했다. 이중환이 저런 짓을 저질렀는데, 제가 그보다 미진하다 하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제 임무를 다하려 미친 듯이 말을 몰았던 것이다.

‘기마병이 앞서서 지나갔어!’

말을 달리던 와중에, 그리고 서문윤은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가도를 달리던 와중 기마병의 흔적을 발견하고 이청은의 존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전하구나! 전하가 살아 계시구나!’

그가 떠날 때는 분명히 토벌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토번군은 저곳에 이중환에게 곤란함을 겪는 중이었으며, 반란군은 이미 지나친 상태였다.

그러니 서문윤은 저를 추월하고 먼저 앞서 나아간 기마병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던 것이다.

‘선배의 말이 맞았다.’

이중환이 언질했던 바가 현실로 드러나고, 서문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난 후의 일.

서문윤은 눈앞에 익숙한 지형을 확인하고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속도를 늦추었다. 입구가 좁은 협곡과 마주한 것이었다.

바로 성도로 향하는 관문 중 가장 마지막에 자리한 천혜의 관문이었다. 높고 뺴곡한 산은 가운데가 협곡으로 뚫려 있었고, 그곳을 지나면 성도가 보였다. 검설린과 토벌군이 자리한 평야와 이어진 장소였다.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의 얼굴에 잠시간 복잡한 빛이 스친다.

‘산세가 험해 등성이에 깔린 군사도로는 구불구불하다. 협곡 안으로 바로 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걸릴 테고….’

속으로 이것저것 궁리를 하고 있었다. 단기필마로 달려야 하는 서문윤은 당연히 산속에 이어진 군사도로를 밟아야 한다. 허니 그가 지금 추측하는 것은 바로 그의 뒤에 자리한 두 군대의 행방이었다.

‘검남 절도사가 토번과 싸워서 애써 진을 빼려 하진 않겠지. 협곡은 너무 좁아서 필연적으로 두 무리가 부딪치고야 만다. 그러면 좋을 테지만…… 상식이 있다면 그러진 않을 거잖아.’

토번군이 이미 시간을 지체되었으니 그냥 산을 타고 달려도 무리가 아닌 것을, 그들이 충돌을 감수하고 비좁은 협곡에 들어갈 리가 없다.

그러고였다.

잠시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짧게 고민을 했던 서문윤이 그 순간 머릿속에 불쑥 든 생각에 퍼뜩 몸을 떤 것은.

“…협곡?”

서문윤의 두 눈이 흔들리고, 얼굴에 파도가 일렁거리고야 만다.

“아, 이거?”

고개를 돌린 서문윤의 눈에 푸르고 푸른 산이 담겨 있었다. 서문윤의 두 눈에 섬광이 스친 순간이었다.

‘이거,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도…?’

* * *

우두두, 세찬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리는 군대 앞에 서 있는 사내가 있다. 희색이 도는 얼굴로 그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어부지리!’

적송덕찬의 토번군을 발견하고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던 검남 절도사가 그 순간 승리를 예감하고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번 기마병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던 검남 절도사다. 특히 속도전에 이른 지금 이 순간 절도사는 그들의 기동력을 떠올리고 시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근심을 잊고 안도하였으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토번군의 속도가 지지부진해졌던 것이었다.

정찰을 하러 나갔던 기마병이 돌아와 누군가의 습격을 받는 것 같다 보고를 한 후 검남 절도사는 그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미지수인지라, 그는 수하들을 재촉하며 말의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빨리, 더 빨리! 더, 더 속도를 높이라고! 더!”

그리고 마침내 협곡에 다다를 때의 일이었다.

검남 절도사의 얼굴에 희색이 번지고야 만다.

‘이제 협곡만 넘으면 이제 곧 성도다!’

성도로 가는 관문이자 가장 위험한 장소. 그곳에서 검남 절도사는 당연지사 산속에 숨겨진 군사도로를 밟으려 했다. 협곡은 두세 사람이 꾸역꾸역 지날 수 있는 좁은 장소인지라, 혹여 뒤에서 토번 기마병의 추격을 받으면 곤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게, 이게 뭐야!”

그것은 바로 눈앞에서 활활 불타오르는 산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협곡의 입구가 아닌 산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검남 절도사는 조금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기마병이 저희를 추월했단 말이야?

그러나 진실은 그것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더욱 뜻밖인 것이었다.

검남 절도사의 두 눈이 크게 떠지고 입술이 벌어져 있었다. 억, 억 소리를 내는 그의 귓가로 떨리는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장, 장군.”

부관의 망연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절도사는 믿기 힘든 눈앞에 광경에 혼이 나가 있었으므로.

“미, 미친 새끼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욕설이었다.

“가도를 태워! 아니, 산을 태워!”

분노에 눈이 물들어 절도사가 길길이 날뛴다.

“완전히 미친 자식이야! 아니, 아니!”

군사도로를 이용하지 못하게 산불을 지르다니?

누가 한 건지는 몰라도 실로 막나가는 행위에 피 같은 돈을 들여 도로를 정비하고 가꿨던 검남 절도사는 그 순간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에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데! 세금을 얼마나 썼는데! 이 개자식들이 지들 돈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순간 부관이 핼쑥한 얼굴로 말을 끊는다.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절도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부득 이를 악물며 불타오르는 산을, 군사도로를 노려보던 절도사가 빠르게 몸을 돌리며 협곡에 들어섰다.

“토벌군이 쫒아오면 다 좆 되는 거다! 니들이 살고 싶으면 서둘러!”

독기 어린 그의 말은 바로 예언이 되었으니, 그가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약이 오를 대로 바짝 오른 토번군이 흉흉한 기세로 협곡에 들어선 것이다.

“내가 오늘 성도에 깃발을 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더러운 중원인들!”

우짖는 짐승처럼 살벌이 말을 내뱉은 적송덕찬이 협곡에 들어서고 있었다.

* * *

그리고 이 모든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킨 이의 상황은….

“음, 이거.”

빠르게 말을 모는 청년의 입술 밖으로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청년은 산등성이의 가도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의 중간부에 자리한 훼손되지 않은 가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에 다급히 일을 저질렀으나, 서문윤은 그 순간 방금 전 저지른 제 행동에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핼쑥한 얼굴에 갈등이 잠시간 스친다.

“내가 미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군사도로를 불태우는 큰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으니, 아무래도 슬쩍 부담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부지라 주변에 민가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긴 했다. 그러나 제 생각보다 너무나 활활 잘 타올라 군사도로 너머 산까지 번져 나가는 불꽃에 서문윤은 심란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 지금 국가 예산 1년 치 정도는 까먹은 건가…….’

군사도로를 한 번 까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데, 저는 방금 전 검남의 천연 요새까지 태워버리는 불씨를 놓았다. 그야말로 화끈하게 일을 벌인 서문윤이 머뭇머뭇 등 뒤를 흘끔거리며 속으로 항변했다.

‘아니, 근데 이제 돌이킬 수도 없잖아! 어쩔 거야! 토번에게 성도를 뺏기면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더 있었어.’

부담감에 울상을 짓고 있던 서문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그 엉성한 차도살인계가 다행히도 성공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검남 절도사와 토번이 서로 붙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는데.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결과가 잘 나왔다.

협곡 입구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서문윤의 뒷켠에서는 난잡한 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욕설과 고함, 날붙이 소리, 말이 울부짖는 소리, 비명, 불이 타오르는 소리, 신음이 얽힌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미친 듯이 올렸던 말의 속도를 조금 줄일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말은 게거품을 입에 새하얗게 물고 있었고, 서문윤 또한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므로. 검설린이 선물해준 명마를 타지 않았다면 이미 서문윤은 말과 함께 뻗어 산등성이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 숨을 돌리던 서문윤이 문득 얼굴을 희미하게 굳히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역시 전쟁은 싫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생각한 것이었다. 등 너머로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오고 서문윤은 그 순간 착잡함을 느끼고야 말았으니. 갑자기 우울함이 마음을 짓눌러 그는 심적 부담감마저 완전히 잊은 채 그늘진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 전쟁이 없던 세대가 드물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잔인한 건 잔인한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지.

검설린과 의행을 다녔을 때도 전쟁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나마 평화로운 중원과 달리 변경에서는 약탈과 토벌이 번번이 일어났고 검설린은 그런 곳을 골라 순행했으니까. 그때 많은 것을 보고 서문윤은 어릴 때의 치기 어린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을 말이다.

‘그딴 건 원하지도 않아!’

그저 평화로운 시대의 초민이 되길 원할 뿐이었다.

말발굽에 짓밟혀 신음하는 일개 병사를 보고, 또 검설린의 옆에서 수싸움을 하는 고관, 명장을 보았다. 그리고 장한성에서 복잡한 정계에 사정에 골머리를 앓는 회흘의 장수를 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천하의 모든 전쟁이 탐욕에서 비롯된 실로 쓸모없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천하의 악한이라 알고 있던 이민족도 사실 한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저 북쪽이나 여 남쪽이나 병사들은 높으신 분들의 복잡한 사정에 의해 잃어도 되지 않을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부조리한 것이었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서문윤은 마음속에 분수처럼 치솟는 감정을 느꼈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탄식을 삼키며 서문윤이 고삐를 꽉 부여잡는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지금 상황은 점입가경에 이르렀고, 나는 난세를 살아가야 한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서문윤이 숨을 멈춘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고, 이 위기를 효과적으로 헤쳐 나가야 했다.

‘죽으면 죽는 거지!’

그리하여 빠르게 마음을 다잡고 서문윤은 세뇌하듯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가도를 태운 것이 무어 대수랴?

‘의형이 알아서 해주겠지, 뭐. 아니면 강소성주가 처리하거나! 생각해보면 내가 저지른 일이 둘이 한 일보단 심각한 건 아니잖아?’

그들은 아예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걸. 이 나라 재상의 목에 화살을 날렸던 강서진을 떠올리며 서문윤은 그리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은 그게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일단 둘을 떨궈났으니 잘한 거다, 나는. 걱정하지 말자.’

성도를 먼저 점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속도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토번군과 반란군을 떨궈났으니, 시급한 일은 해결한 셈이다. 남은 건 검설린과 이청은의 일이었고. 그것은 서문윤이 지금껏 고민하던 양강 체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그나마 한시름 덜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긴장을 세울 수밖에 없었으니….

“……?”

바로 그가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서문윤이 문득 저 멀리서 들려온 경악 어린 고함성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능숙한 한어로 보아하니 반란군이 소리치고 있음이 뻔했다. 협곡의 입구와 멀리 떨어져 자세한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서문윤은 돌연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 싸한 기분에 휩싸여 문득 고개를 흘끗 돌리고야 말았다.

“헉!”

그리고 산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서문윤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 자식들!”

실로 그럴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저게, 저게 왜 가능한데?!”

무성한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산 아래에, 뜻밖에도 토번의 기마병이 하나둘 보였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실로 당황할 일이었으나 가장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들이 협곡 사이 길이 아닌 산과 이어지는 절벽의 바위를 밟고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해…?’

기예와도 같은 기마술로 평지가 아닌 절벽을 달리고 있다. 잠시간 망연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하나둘씩 몰려드는 기마병에 그제야 그들이 싸움을 포기하고 협곡을 뚫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망할!”

그쯤 되어서는 평소 단정한 말만을 내뱉었던 서문윤도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밥만 먹고 기마술만 연마했나?

아무리 한숨을 돌리려 제가 속도를 늦췄다고 하지만, 절벽을 달려 저를 따라잡은 이들이 기가 막혀, 식겁한 서문윤은 늦추었던 말의 속도를 다시 올렸던 것이다.

산의 가도는 구불거려 협곡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토번군이 성도를 점령하는 것은 피해야 했고.

그리하여 그는 젖 먹던 힘을 다시 내어 또다시 미친 듯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거의 가사상태에 이를 지경이었으나 그는 초인적인 힘을 내어 비몽사몽 꿈속을 달리는 중이었다.

장한성에서 역병이 걸린 일은 양반이었어.

“아니, 헉……미쳤어…….”

속으로 아, 그냥 죽고 싶다 한탄을 하며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달이 완전히 뜨기 전부터 새벽별이 뜬 지금 이 순간까지 쉬지도 않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있다지만 체력을 소모치 않는 것도 아니라, 서문윤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내어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는 중이었다.

‘늦으면 나가리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나가리다!’

그 한마디 말을 이 악물어 연신 되뇌면서 말이지.

사실 서문윤이 이 상황에서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상황은 비어 있는 성도, 검남의 중심을 먼저 점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속도전이었으므로. 같은 시각 성도로 향하는 모든 인원이 미친 듯이 질주를 하고 있던 것이다.

절벽을 타고 달려오는 토번군도, 뒤늦게 협곡 사이를 주구장창 달리는 검남의 반란군도, 앞서 나아가는 태자의 호위군 또한 말이 게거품을 물 만치 전력질주를 하여 일찍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개중 먼저 한계에 달한 것은 반란군이었다.

“아, 아!”

성도에서 가찬성, 가찬성에서 성도로 왕복을 한 데다가 협곡에서 한 차례의 전투까지 벌인 후다. 검남의 말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고 그리하여 속도를 줄이는 말들이 하나둘 생겨났던 것이다.

“말, 말이.”

“이런, 제기랄!”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부관의 앞에 검남 절도사가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욕설을 내뱉는다. 군대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토번군과의 격차가 커져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밤중에 내내 고생한 기마병의 얼굴 또한 썩 좋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금방 픽 쓰러질 것만 같이 거품을 물고 있었다.

“어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대로는 도저히 무리다.

아무리 검남군이 토번과 무수히 많은 전쟁을 벌였고, 개중에서도 정예병만을 뽑아 기마병을 구성했다 한들 앞서 나간 토번군과 어디에 있는지 모를 토벌군 또한 만만치 않다. 체력을 소모한 채 그들과 부딪쳤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수밖에 없다.

부관의 얼굴에 그늘이 스친 순간이었다.

상황이 여유롭다면 멀쩡한 자와 더 달릴 수 없는 자 두 패로 나눌 텐데 말이지. 그러나 반란군이라는 처지에 위험을 마주한 상황에서 함부로 병사를 나누기 뭣했다. 버려진 이들이 혹여 토벌군과 만나면 그들에게는 죽음 이상의 미래가 없었다.

‘……여까지 따라왔으면 이들이 절도사의 정예병이란 사실은 적에게도 다 알려진 거지. 반란에 가담해도 사병까지는 참형을 면한다곤 하지만, 절도사를 호종할 만큼의 측근이라면 참형을 피할 수 없다. 반란군의 미래는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러곤 입술을 잘근 깨물며 생각한 말.

‘그렇다고 토번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일은 없지. 아니, 오히려 토벌군보다 더 잔혹하게 다루려나? 그간 국경을 맞대고 무수히 많은 원한을 쌓은 것을……. 아! 이들을 어찌하면 좋으려나.’

그러니 애가 타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수하들에 부관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충격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이 비참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지도자는 선택을 해야만 했으니까.

“낙오병을 어찌합니까?”

착잡한 목소리로 부관이 절도사에게 말을 묻는다. 아니, 사실 그것은 질문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것이었다.

“낙오병들을 챙길 시간이 있어? 당장 버려야지!”

그 말에 부관은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을 뿐, 반박하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는 실로 잔인한 선택이었으나 부관 또한 그보다 나은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한시가 급한 속도전에 아무리 귀한 기마병이라 한들 그들을 하나하나 돌보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못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그 비정함을 알면서도 부관은 굳은 목소리로 그리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부관은 속으로 ‘절도사의 미친 말을 따르는 게 아니었어. 그가 허망한 꿈을 꾸었을 때 목숨을 걸고 말렸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품었으나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이를 악물 뿐이었다.

더 무엇을 말하리오?

모든 것은 엎어진 물이요, 이미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그리하여 부관이 군말 않고 낙오병과 군대를 나누라는 말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너, 부싯돌 있나?”

문득 절도사가 내뱉은 말에 입술을 열려던 중 멈칫한 부관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을 내뱉는다.

“예?”

얼이 나간 목소리에 절도사는 잠시간 뜸을 들이다가, 문득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협곡 후반부 직전에 절벽의 경사가 급해지지. 통로는 더 좁아지고.”

“…….”

“내가 좋은 생각이 났다.”

이어진 말을 듣고 부관은 결국 얼굴을 와그작 무너트리며 울렁거리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개자식!’

그가 내놓은 것은 실로 기발하고도 또 사악한 말이었으므로. 부관은 그에 분노하면서도 결국 군령에 복종하여 말을 따를 뿐이었다. 제 기지에 스스로 감탄하는 절도사를 속으로 비난하며 말이다.

“부상병,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는 당장 말에서 내려라. 그리고 말을 이리 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협곡 안에서는….

“이랴!”

절벽을 타고 달리는 신묘한 기마술로 토번군은 결국 절도사의 반란군을 제쳐나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협곡 중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뒤에 아무런 사람도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은 굳이 곡예를 펼치지 않고 통로로 내려와 말을 달렸다.

안 그래도 완만했던 절벽의 경사가 서서히 급해져 거의 직각에 이르던 참이었다.

절벽에서도 빠르게 달리던 이들이 평지를 달리니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겠는가. 통로가 좁다한들 그것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고, 그들은 마치 질풍처럼 빠르게 성도를 향하는 중이었다. 젊다 못해 어린 토번의 장수의 눈이 매처럼 치켜떠지고, 그에 시퍼런 안광이 일렁거린 순간이었다.

놓치지 않는다! 재기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 말을 하는 듯 독기를 품은 눈이 새벽의 어둠을 밝히는 중이었다.

‘난 이렇게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들려온 일이었다.

토번 기마병이 달리는 속도는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전력을 다하길 작정하고 말을 몰고 있으니, 그들은 거의 고막이 팽팽해지고 날카로운 굉음을 들으며 말을 다루는 데 온전히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듣지 못하고 또 알아채지 못하던 토번 기마병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개중 예민한 이들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장군, 누가 오는 것 같습니다.”

“……?”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거리는 수하를 향해 적송덕찬이 굳은 얼굴을 조금 풀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 말을 듣고서야 칼바람 소리 사이,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섞여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지?’

그리고 그의 정체를 확인하려, 신기와 같은 기마술로 몸을 마상에서 거꾸로 돌린 적송덕찬은…… 그 순간 눈을 부릅뜨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주군의 비명을 들은 토번군이 뒤늦게 고개를 돌리고, 경악을 이어나간다. 그 순간 그들의 눈에 비춰진 것은 바로 저희를 향해 무지막지한 기세로 달려오는 기백의 기마병, 아니 기마병이 아니라….

“마, 말!”

바로 꽁무니에 불이 붙여진 채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말 떼였다.

“아니, 이런 미친?”

“어, 어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말 위에서 곡예를 할 수 있는 그들이었으나 무지막지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흉흉한 말 떼와 마주하고는 실로 넋을 뺄 수밖에 없었다. 불이 붙여진 말 떼가 히이잉 소리를 흘리며 분노에 찬 말발굽질을 이어나간다. 협곡은 어느 순간부터 말의 뒤꽁무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말발굽에 이어진 먼지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희뿌연 시야 사이로 보이는 말의 눈빛은 평소의 온순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짐승의 것이었다.

“중원인들은 다들 미쳤구나! 이 무슨 개같은 짓을…!”

퍽퍽, 말발굽이 떨어질 때마다 바위가 부서지고 땅이 으깨진다. 핼쑥한 얼굴로 적송덕찬이 빠르게 말의 속도를 줄인다. 당황하여 고개를 돌아본 적송덕찬이 갈수록 좁아지는 호리병 같은 길에 이를 악물고, 다시 몸을 돌려 흉흉한 기세의 말을 마주하고 버럭 소리쳤다.

“다시 절벽 위로 올라! 아니, 말에서 내려서 절벽에 붙어!”

말을 들은 토번 기마병이 너 나 할 것 없이 하마를 하여 절벽에 철썩 붙거나 혹은 말 위에서 짐승의 목을 세게 부여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 떼가 기마병을 덮친 순간, 적송덕찬은 또다시 분노에 찬 긴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야, 이 광인들이!”

* * *

좁은 협곡 안에서 시시각각 토벌군과 토번군이 서로 피터지게 부딪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협곡 안이 혼란에 차오를 때마다, 태자의 군대 또한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화마에 휩쓸리지 않은 산의 가도를 제법 평화롭게 지나고 있었음에도, 태자의 군대는 실로 예상치 못한 사건에 일일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병법이라 할 수도 없을 만치 틀을 깨는 괴상망측한 행위에 태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은 산불이었다.

“헉, 전하! 저길 보십시오!”

“음, 무슨…… 어, 어?”

바로 그들의 등 너머, 푸르른 산이 화마에 휩쓸렸을 때였다. 다급한 문 대주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태자는 그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 이건….

“저, 저게 뭐야?”

그리고 그의 목구멍에 걸린 비명이었다.

‘완전히 뒤가 없이 사는구만!’

화르르 불타오르는 산림을 마주하곤 태자는 할 말을 잃어 입술을 벌릴 뿐이었다. 가도를 태우다니? 산채로 도로를 불태우다니?

아무리 그들의 상황이 몹시 복잡하다지만 이렇게 불을 질러서 완전히 퇴로를 끊어놓는단 말인가? 혹여 퇴각을 하거나, 가찬성으로 돌아가 훗날을 대비할 생각은 하지 않는가?

속으로 무수히 많은 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불은 누가 질렀지? 군사도로를 까는 데 드는 세금이 얼만데 저걸 저렇게 망가트려? 저거 완전 미친 새끼들 아니야? 아니,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저러면 우리도 돌아가지 못하잖아!’

그리고 그 끝에 흘러나온 한 마디의 말.

“망했네.”

그 허탈한 말을 듣고서야 문 대주는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곤 격한 목소리로 소리치기를.

“더, 더 속도를 높여!”

갈수록 상황은 꼬여버린 실패처럼 복잡해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산불은 이 상황이 그런 파격적인 행위를 저질러야 할 만큼 혼란하단 것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 채 산을 태운 것은,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묘수이기도 했으나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저 술책을 버린 사람의 사고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완전히 미래가 없이 사는구나!

산불이 태자에게 안겨준 것은, 바로 이 속도전이 승자가 빼고 모두 독박을 쓰는 아주 가혹한 전장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하여 태자와 문 대주는 말의 속도를 올리며 더욱 빠르게 구불거리는 길을 돌파하려 한 것이다. 어디에 도달했는지 모르는 수많은 경쟁자들보다 빠르게 성도를 차지하려, 공을 세우려고.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으니….

“태, 태자전하!”

갑작스럽게 들려온 문 대주의 당황에 찬 목소리. 그에 이청은은 또다시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일이야?

이청은은 방금 전 실로 충격적인 일을 겪었고, 문 대주의 당혹성이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하여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아본 이청은은 그 순간 몸을 우뚝 세우며 잠시간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낙마를 하려는 몸을 간신히 고삐를 잡아 지탱하곤, 정신을 차린 이청은이 불현듯 비명을 내지른다.

“저, 저건 뭐야!”

무슨 말 새끼가 우두두 달려오고 있어?!

빼곡한 나무 사이, 그러니까 산 아래 언뜻 보이는 협곡에 미치광이 말 떼들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던 것이다. 경악한 이청은의 시야에 언뜻언뜻 말들의 몸에 흩뿌려진 피가 엿보였다. 그리고 꽁무니에 타오르는 불꽃을 마주하곤 이청은은 입술 밖으로 야트막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화우지계(火牛之計)를 변형한 듯하군요.”

그것은 이청은 또한 알고 있는, 그 옛날 제나라의 전단이 연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쓴 계책이었다. 소꼬리에 불을 붙여 상대 진영에 돌격시켜 병력의 수세를 모면하는 방책.

그것은 분명 기발한 계책이기는 하지만, 아니 분명 묘수이기는 하지만……. 순간 이청은의 얼굴이 복잡미묘해진다.

“이, 이 상황에서 말을?”

잠시간 우물쭈물하던 그는, 결국 얼굴을 구기며 당혹스러운 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화우지계, 아니 화마지계는 분명 협곡에 자리한 어떤 무리에게 큰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말 한 필이 실로 귀한 때가 아닌가?

숙련된 군마 한 필은 노련한 병사 하나보다 훨씬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마병이 주도하는 전장에서 말들을 저렇게 희생시키다니?

망연함이 자리한 태자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문 대주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낙오병을 희생한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이청은의 얼굴을 어두워지게 한 말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독기를 품었구나.’

사방 천지에 적이요, 적군의 기마병이 어디에 자하는지도 모르는 상황. 이때 말을 잃은 낙오병의 최후란 그다지 머리를 쓰지 않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로 독한 각오. 이청은은 그들의 판단에 탄식을 하면서도 그들은 온전히 비난하지 못해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몸의 고통으로 정신이 흐트러진 때도 있었으나, 지금 이청은은 흔들리는 마음을 충격을 느끼고 가다듬었던 것이다.

우리가 검남 절도사보다 일찍 선수를 쳤으니 아마 선두에 서지 않았을까? 이만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잠시간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빨리 달리자.”

……괜찮긴 개뿔!

지금 이 순간 완전히 깨닫고 있었다.

‘죽는 사람이 나가리라고! 나가리! 왜 정신을 못 차려, 이청은!’

승자는 모든 것을 독식하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를 다시금 마음에 되새기며 그렇게 이청은은 이를 악물며 말의 속도를 또다시 높였던 것이다.

‘10년간 잠룡으로 살았던 세월이 결실을 맺느냐 마느냐가 이곳에 있다. 닥치고, 닥치고 말을 달려!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그렇게 구불거리는 산길을 질주하고, 또 질주하여 마침내 협곡의 끝에 다다를 때의 일이었다.

“태자!”

문득 호위군 등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태자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청은은 순간 두 눈을 흔들며 얼굴 위에 동요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중랑장.”

그 순간 이청은의 얼굴에 희색이 감돈다. 고개를 슬쩍 돌린 태자의 시야로 훌훌 나는 듯한 신묘한 기마술로 빠르게 호위군에 접근하는 사내가 있었다.

두 눈에 정광을 빛내는 올곧은 인상의 사내, 이중환이었다.

이중환이 태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려던 순간이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 누굴 믿을 수가 있나?

그 옛날 고우군의 충견이었던 이중환을 완전히 믿지 못하던 문 대주가 문득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치며 태자의 옆을 가로막는다.

“괜찮다.”

그러나 이청은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의 걱정을 물리칠 뿐이었으니, 제 앞에서 소매를 휘젓는 그에 문 대주는 매섭게 눈을 빛내며 이를 악물면서도 결국 말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곁으로 다가온 이중환을 향해 태자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다.

“산불, 이 중랑장이 낸 건가?”

그 말에 이중환은 몸을 멈칫하며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러곤 묘하게 경련이 이는 얼굴로 떨떠름히 중얼거린 말이었다.

“제가 아니라, 그 미친놈이…….”

“그 미친놈이?”

바로 옆에 시립하던 문 대주 또한 놀라게 한 말이었다.

‘그 미친놈’이 누군지는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정명공이 불쌍하다면서 흑흑 눈물을 흘리고 그가 실로 연약하다, 그를 지켜줘야만 한다 막말을 하고 다니는 미친놈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그럴 줄 알았지.”

한숨을 푹 내뱉으며 이청은이 중얼거린다.

“내가 뭐랬어, 문 대주. 그 애 결코 간이 작은 놈이 아니랬잖아.”

그러게 그때 아예 우리 편으로 확실히 못 박아두는 편이 낫다 그랬잖아.

“……이렇게 내일 없이 사는 놈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청은의 탄식 어린 목소리에 문 대주는 착잡한 얼굴로 그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누가 알았겠는가? 너무나도 고지식하고, 올바른 성정의 서문윤이 이리 막나갈 줄을.

그의 심정이 대나무처럼 그저 곧아 부러지기 쉽다는 이유로 중용을 반대하던 문 대주는 그저 제 좋지 못한 눈을 한탄할 뿐이었다.

‘나약? 대나무처럼 꺾여? 고지식? 산채로 검남의 심맥을 불태워 보이는 미친놈한테 내가 함부로 입을 놀렸지!’

그렇게 문 대주가 충격에 휘말려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를 완전히 믿는 건가?”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로 흐른 말에 이중환이 순간 몸을 멈칫하고야 만다. 그러곤 그는 고개를 돌려 말을 내뱉은 선두의 사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담담한 얼굴로 정면을 곧게 응시하는 이청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중환의 얼굴에 실소가 번진 순간이었다.

“아니오.”

한 치의 고민 없이 흘러나온 답변이었다.

“그럼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응? 너 설마 세작질을 하려는….”

농기 서린 말에 이중환이 질주하던 와중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안 그래도 찌푸렸던 얼굴을 더욱 무섭게 일그러트리며 응대한다.

“왜 자꾸 나를 시험하려 하는 겁니까. 이런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황도 바쁜데 농담하지 마십시오.”

매섭게 쏘아붙이는 말이 태자를 향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방지지 않나. 그러나 이청은은 유들한 미소를 지을 뿐 그를 책망하지 않았고, 그에 이중환은 한숨을 짧게 흘리며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입술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한평생 사람을 보는 눈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흘러나온 무거운 목소리였다.

“고 대인은 강소성으로 떠나기 전 제게 말했습니다. 유사시에는 오로지 두 사람. 정명공과 당신 중에 마음이 가는 이를 이용하라고.”

“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리는 이청은을 향해 이중환이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선 모르는 일이지만 사실 저는….”

“네가 완전히 내게 의탁한 게 아니란 건 문 대주도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 너는 대놓고 나랑 거리를 벌리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 않아? 애초에 네가 간을 보고 있던 걸 숨길 생각도 없었던 것 아니냐?”

그 순간 이중환은 입술을 딱 다물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숨길 생각이었습니다만…….’

나름 서문윤과는 비교할 바 없이 완벽히 일을 처리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태어날 때부터 정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자리했던 사내의 눈에는 부족함이 많은 모양이었다.

조금 우울함을 느끼던 사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고 입술을 연다.

“예, 뭐, 그렇지요.”

그 묘하게 씁쓸한 어조에 이청은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으나, 이어진 그의 말에 다시금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간은 다 보았습니다, 이제.”

이청은은 더 이상 말을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본론을 꺼냈다.

차분한 목소리가 날카로운 공기 사이를 뚫고 울린다.

“그럼 내게 마음이 기울었나? 네가 내게 귀순하려는 거냐?”

이중환 또한 답변을 질질 끌거나 돌리지 않았다. 그럴 성정도 아니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까. 이중환이 냉소를 지으며 머리를 내저었다.

“당신은 영명하지만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은 부족하지요. 나는 정명공에게 마음이 갑니다.”

칼날같이 부정하는 말에 이청은이 몸을 멈칫한다. 칼날 같은 부정의 말에 조금 당혹스러워하던 그는 그러나 이어진 이중환의 말에 저도 모르게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미래를 맡기고 싶은 건 당신입니다.”

그 순간 이중환의 두 눈에는 귀화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저는 아예 선택권이 없는 게 아니었습니까? 당신도 정명공이 조정에 뜻이 없는 걸 알 텐데요. 그는 대쪽 같은 사내라 한번 마음이 떠난 일에 미련을 가지지 않습니다. 다만 의무감에 짐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던 것뿐이지. 그는 언제고 장안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에 이중환 또한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잇는 중이었다.

“그리고 사실 선택이라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청은은 그 물음에도 답변하지 않았다. 이중환이 흘끗 옆을 보았을 때 그는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정면을 묵묵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청은은 재촉하지 않았고, 그렇게 잠시간 침묵은 이어졌다.

새벽이 밝아와 어느새 하늘은 새파란 빛이 가득했다. 어두컴컴했던 가도가 시야에 드러나고, 횃불을 쥐고 있던 몇몇 이들이 그것을 꺼트리고 탄 나뭇가지를 등 너머로 버렸다. 달리는 데 열중을 하려는 것이다.

길고 느릿한 호흡이 열 번 정도 지나갈 쯤에 이청은은 굳건히 닫혔던 말문을 열었다.

“분명히 한 번은 막을 수 있는 때가 있었어.”

느릿한 목소리.

“아니, 사실은 서넛 번은, 아니, 생각해보면 훨씬 더 많은 기회가…….”

흐릿해진 사내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한데 엉켜 있었다. 갖가지 감정 중 가장 도드라진 감정은 회한이었다.

씁쓸함이 그의 입가에 서리고, 짧은 침묵 끝에 이청은은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와서 그걸 논해보았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중환은 그에 씁쓸한 조소를 흘릴 뿐이었으나, 괴로움이 언뜻 스치는 이청은의 얼굴을 눈치채고 묵묵히 정면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름지기 천자란 천하의 권력을 틀어쥐고 천하 만민의 안위를 돌보아야 한다지. 그러나 대부분은 그 두 개를 같이 할 능력이 못 된다. 그래서 전자나 후자 중 하나만을 틀어쥐곤 했어. 부황께서는 말할 것도 없이 전자의 비중이 높았다.”

“…….”

“이 모든 게 천자의 잘못이다. 아버지의 잘못을 넘어선 천자의 잘못.”

그는 꽤나 작정을 하여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중환이 흘끗 소란이 이는 곳을 향해 곁눈질을 한다. 문천상이 그들의 옆에 사람들을 물리고 있었다. 하기사 이건 그냥 역모가 아닌, 몹시 위험한 수위의 발언이다.

그러나 그의 말의 수위는 낮아지긴커녕 오히려 진해지고 있었다.

“이게 당금 왕조에 한두 번이 아니었지. 아니, 따지고 보면 천 년이 넘는 동안 우리는 이런 일을 반복해왔어. 그렇다면 이건 제도가 사람을 막지 못한 것이다. 폭군 한 사람을 막을 수 없는 제도의 잘못!”

그리고 그 순간 이중환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했던 말과 흡사한 이야기였으므로.

‘……고 대인.’

깡마른 인상의 노인을 떠올리며 그가 느릿한 한숨을 내뱉는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 권력을 독점하고 혈사를 방관한 그를 지탄하지만, 사실 고우군은 사람들의 말처럼 권력만을 탐하는 추잡한 노인네도, 천하의 안위보다 스스로의 영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비굴한 자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중환이 지금껏 살아가는 이유는 죽은 거인(巨人)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었다.

고 대인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으니까. 그게 적어도 폐인이 되어 살아갈 이를 구해준 은인에게, 한 평생 나라에 헌신했던 사내에게 보답할 일이었으므로.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말은 이어졌다.

“서학의 어느 나라에서는 군주와 귀족과 백성이 함께 국정을 이끌어 나간다 하지. 어느 나라는 군주가 없고 나이 많은 현명한 원로들이 모여 나라의 중요한 일을 논한다 하고. 또 어느 나라에서는 요순처럼 군주가 현명한 후계자를 양성하여 그에게 양위를 한다하더군.”

“그거 금서 아닙니까?”

“나는 태자잖나.”

그 말에 이중환은 또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치는 사내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이청은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고우군도 참고한 서적일 텐데?”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중환의 허점을 찌른 것이었다.

“그거 봐. 그 양반은 죽어도 싸다니까! 사람 살리는 학문이든 뭐든 군자의 법도에 반한다면서 핍박해. 죄 없는 학자들을 가문까지 씨를 말려 죽인 양반이 자기 멋대로 이건 천하에 이로울 일이라 원칙을 어기고 서학을 공부했지.”

그 말이 나오면, 솔직히 이중환은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이중환은 신음을 흘렸고, 이청은은 이를 드러내며 웃곤 그에게 소리쳤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어? 이 중랑장.”

“……이성적으로 반박은 못 하겠는데 그래도 제 앞에서 말씀은 삼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옛 주인이십니다.”

그저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더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고우군은 그의 주군이었으나, 동서대란은 동궁사변과 비교될 만큼 그 살육의 규모가 크고 상당했다. 죄가 없는 자들이 엮어나간 것 또한 비슷했고. 그 주제가 나오면 그는 그저 주군의 죄를 모른 척 죽은 듯 침묵을 지켜야 할 뿐이었으니.

씁쓸해하는 이중환의 반응에 이청은은 더 이상 망자를 비난하는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어차피 고우군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남은 게 있다면 아쉬움뿐이지.

짧은 침묵 끝에 이청은이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원한이 남은 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뿐이니까.”

그 순간 속으로 무수히 많은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고우군, 나의 형, 회흘과 싸웠던 두 명의 장한성주와, 그들과 같이 신념을 사수하려 목숨을 바친 이들의 이름들.

강서진, 검설린, 이중환, 위와 같은 이유로 죽음을 불사하는 이들을 말이다.

목표는 같은데 그를 가리키는 도구가 너무 다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그들 간 불화를 안겼고, 그에 휩쓸려 고통받게 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침묵 끝에 이청은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우군의 뜻을 모두 들어줄 수는 없다”

그래,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금 왕조가 세워진 이후로 무역이 활발해지고 개방적인 풍조로 변했다지만, 아무리 고사를 들먹여도 그건 너무 급진적이야.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작금에 그건 오히려 천하를 불안정하게 만들 거다.”

그저 앞날을 위해 나아갈 뿐이지.

이청은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밝은 빛으로 빛났다. 그는 강서진과 검설린과 다른 이였다. 과거에 사로잡힌 이도, 완전히 자포자기하여 세상과 싸워나갈 힘을 잃은 이도 아니었다.

“약속하겠다. 과거제에 음서를 폐지하고 신분 제한을 철폐하겠다.”

그리하여 이어진 말들이었다.

“설령 하찮은 빈농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배려를 하겠다. 또한 재상이 천자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릴 거다. 그리고….”

이청은은 덤덤한 목소리로 제가 바꿔나갈 것들을 담담히 나열했고, 그 말을 이중환은 정면을 바라보며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중환은 나열하는 말끝에 이르러 비로소 굳은 얼굴을 풀며 그 위에 만족을 드러냈다.

“천자는 하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될 거다.”

그것이 바로 원하는 것이었다.

무겁게 닫혔던 이중환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린다.

“그걸로 됐습니다.”

그제야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안도와, 조금의 해방감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의 대화는 끊겼고,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사로잡혀 차분한 얼굴로 묵묵히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문득 이청은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드는군. 강서진의 방식이 이런 개판을 만드는 거였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

상념에 빠져 있던 이중환이 이청은이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미간이 좁혀진 얼굴에 은근한 불안이 서려 있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는.”

갸웃거리는 사내의 모습에 결국 이중환이 참지 못해 말을 떼고야 만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때마침 들려온 말이었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당혹감에 찬 문 대주의 목소리에 이청은이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이중환의 얼굴 또한 경악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저, 저게 뭡니까?”

이청은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칠 뿐이었다.

“당장, 당장 말을 멈춰!”

* * *

“이랴!”

푸른빛이 드리우는 새벽, 아직은 어둠이 남아 있는 산길에 홀로 말을 모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안장에 끈으로 몸을 묶어 고정시킨 그의 얼굴이 심히 굳어져 있었다.

바로 서문윤이었다.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추위가 진해진 시점이었고, 서문윤이 거의 한계에 이른 때였다.

파발이라 할지언정 야밤 내내 전력으로 질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문윤은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검남의 중심이라 칭해지는 성도와 가찬성을 왕복해서 오가는 중이었다. 토벌군의 군마는 혈통이 좋은 데다가 잘 관리가 되어 지구력이 좋았으나, 그 또한 이미 한계를 맞은 듯 속도가 느려지고 침을 질질 흘렸다. 그에 서문윤은 불안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버텨라, 제발 버텨라.’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서문윤이 간절한 목소리로 되뇐다. 그것은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제 성도가 코앞이었다. 가도의 끝이 보였고, 그 말은 그가 진정한 전장에 진입을 앞두었다는 뜻이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마지막 한 톨마저 박박 긁어모은 서문윤은, 그러나 결국 참지 못해 어느 순간 입술 밖으로 얄팍한 신음을 흘리고 말의 속도를 줄이고야 말았다.

굳은 얼굴로 고삐를 잡아당긴 서문윤이, 비틀거리며 말에서 내려 나무에 손을 짚고 몸을 웅크린다.

“우웩!”

그리고 그는 토악질을 하며 맑은 위액을 줄줄 쏟아냈고,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헉헉거리는 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시야가 흐릿하다.

‘아, 이런.’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문윤이 멍하게 해가 밝아온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 거의 코앞인데. 그러나 그는 정말 죽을 것 같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얻은 말 또한 그의 옆에서 간절한 눈으로 서문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간 망설이던 서문윤은, 그러나 결국 말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배반하고 그의 등 위에 오르고야 말았다.

말의 얼굴에 언뜻 절망이 스친 듯했으나, 서문윤 또한 무너지려는 중심을 간신히 수습하곤 다시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숨 가쁜 시간이 다시 흐른다.

서문윤이 풀린 눈을 깜빡거리며 이성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을 때였다. 그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야 말았다.

길의 끝이었다.

‘의형은, 의형은 어디에?’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제가 완전히 잊었던 사실을 깨닫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 토벌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지?’

서문윤의 얼굴이 순간 굳어진 때였다. 당겨진 고삐에 말이 멈추어 서고야 만다. 울음을 터뜨리는 말을 다루는 서문윤의 얼굴이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생각을 해보니 산길에서는 토벌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토벌군은 십만 단위라, 인파가 움직이는 규모라 반드시 눈에 띌 터인데. 서문윤은 이청은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소수의 기마병의 흔적만을 발견했을 뿐 대규모 인파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성도 인근에 자리한 토벌군 진영에서 가찬성으로 가려면 반드시 협곡이나 그 주위 산에 이어진 가도를 건너야 했다. 토벌군이 가찬성을 향했든, 혹은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하여 회군을 했든 반드시 협곡이나 산길에 흔적을 내보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문윤은 호리병 모양으로 좁아드는 협곡의 입구에서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서문윤의 두 눈이 크게 흔들리고야 만다.

‘설마 내가 태워 죽인 건 아니겠지…?’

심지어 그런 황당한 생각마저 하며 공황에 차 허둥지둥대고 있었다. 협곡에 올 때까지 그가 보이지 않았으니 이중환과 제 예상대로라면, 산에서 그와 재회를 했어야 하는데 이제 성도의 끝이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전력질주를 하는 동안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 떠오르고 멍하니 길의 끝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이랴, 자그마한 소리를 흘리며 다시 말을 움직였다.

토벌군의 흔적이 없고, 비명도 들리지 않았는데 산불에 그가 희생될 리가 있겠는가? 한순간 공황에 빠져 심장이 철렁했으나. 사람이 타는 냄새를 잘 아는 서문윤은 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토벌군의 행방은 실로 기이했고, 그에 그는 혼란에서 벗어나오지 못해 계속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적송덕찬의 토번군이 성도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데. 그리고 반란군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말을 해야 하는데.’

그는 말의 속도를 높이지 않았고,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드러나는 정면을 바라보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길의 끝에서, 서문윤은 완전히 얼이 나가 그 자리에서 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사실은, 사실은 말이다.

서문윤은 토벌군이 지금껏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부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강서진이 손을 쓴 것 같다는 이중환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암략의 범위는 정말 이중환이 생각한 대로 검남 절도사에게 손을 쓴 것까지인 걸까?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려한 사내의 얼굴.

그 평온한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서문윤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고 있었다.

‘…의형.’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고함이 저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협곡 안에 자리한 기마병이 빠져나오려는 소리다. 서문윤은 그러나 그에 신경을 쓰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광경에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때맞추어 담담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쏴라.”

목청을 써서 내뱉은 것 같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는 그러나 사방 구석구석에 퍼졌고, 서문윤 또한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득한 한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화살비가 하늘을 빼곡히 수놓아, 협곡에서 빠져나오던 토번 기마병을 내리꽂고 있었다.

웅웅 귓가에 아우성거리는 비명.

서문윤이 그 순간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꾹 감고야 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스륵 눈을 뜬 그는 협곡의 입구를 포위한 빼곡한 군대, 그 가장 앞에 자리한 사내와 눈을 마주하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처럼 맑은 눈과 마주하는 순간 서문윤은 결국 완전히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귓가에 퍼지는 처절한 비명과 고함소리, 부딪치는 병기 소리를 들으면서. 긴장이 풀린 몸은 그렇게 땅바닥 아래를 힘없이 구르고야 말았다.

< 10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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