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망향(望鄕)(6)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때였으나 그 둘 중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의자 위에서 검설린은 서문윤의 옷을 벗기고 성기를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었고 그를 부드럽게 주무르곤 그의 목 곳곳에 얼룩을 남기는 일에 열중했다.
“이곳에서, 읏, 할 겁니까?”
목을 핥는 혓바닥과 입술에 자그마한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붉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지는 벗겨져 내려 허벅지에 걸쳐져 있고 그의 손은 어깨를 부여잡은 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서문윤이 더듬거리는 말을 연이어 내뱉었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사람들이 볼 수도 있는데.”
탁상과 의자는 천막 입구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혹여 바람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민망한 꼴을 보일 터였다. 그러나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을 완전히 잊고 정사에 완전히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서문윤의 다리를 더듬던 손이 문득 그의 오금 아래를 파고들어 그를 끌어안았던 것이다.
그렇게 서문윤을 끌어안고 검설린은 자리에서 가벼이 몸을 일으켰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침상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저를 침상에 내려놓는 검설린을 서문윤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올려다보며 문득 중얼거렸다.
“오늘 장군의 측근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장군께서 직접 벌을 하시는 것으로 해주세요. 매질을 당했다 변명을 하게 저를…윽!”
그는 제 입술을 뜯는 검설린에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고, 다리를 벌리는 손길에 더욱 이성을 차리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정사 후의 일.
달빛이 내려앉을 무렵에 두 사람은 부드러운 늑대털이 깔린 침상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푹신한 늑대털에 나신을 묻으며 서문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을 해보면 도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시골에선 사람을 부르기도 여의치 않으니 저택을 관리하기 아무래도 힘이 들지요. 적당히 사람이 붐비는 소도시에 거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멍한 눈을 깜빡거리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단한 팔에 감겨 몸을 축 늘어트린 서문윤이 돌연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시비는 들이지 마십시오. 그런 건 필요 없어요. 너무 커다란 저택도 필요 없고. 그냥 단둘이 살아요.”
그 뒤로 서문윤은 몇 번 더 검설린이 쓸데없다고 생각할 말을 재잘거렸으나 답변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쉴 틈도 없이 조잘거리던 서문윤은 문득 작은 침묵 끝에 나지막한 목소리를 입술 밖으로 흘렸다.
“의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때쯤 이상함을 느낀 서문윤은 뒤를 돌아보곤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저를 품에 안은 채 얌전히 눈을 감고 잠이 든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검설린은 어느 순간부터 깊은 수마에 빠져 규칙적인 숨을 내뱉은 것이었다.
평소의 음울함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도 없이 평온한 사내의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복잡한 심정에 휘말려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묵중한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의 팔에 단단히 휘감긴 몸을 꾸물거려 검설린과 마주 보는 자세를 취한 서문윤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잠든 검설린을 멍청히 바라보며 속으로 울적한 말을 중얼거렸다.
‘……돌겠네.’
따끔한 가슴 한가운데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고, 기분은 우울하여 도저히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왕의 암살도, 세작의 일도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그렇게 서문윤은 무거운 얼굴로 깊게 잠든 검설린을 빤히 바라보며 밤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 끝나기 하루 전날 밤의 일이었다.
* * *
“급보요!”
사실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다.
오왕 암살이 의미하는 바, 앞으로 일어날 파국을 말이다. 검설린의 보호를 받고 그의 막사에 그와 함께 누워 평온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이 폭풍 전야라는 것을 서문윤은 짐작하고 있었다.
“급보요! 급보!”
오왕의 죽음은 진정한 파란을 일으킬 것이다.
제 권력을 지극히 탐하는 황제는 유일한 동복동생의 죽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오왕은 정계에 입문할 수 없는 황실 종친이었으므로, 고우군과 다른 자였다.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하여 그 몸을 낮추고도 황제의 견제를 받던 고우군과 다르게 그의 온전한 신임을 받던 자 말이다. 아주 옛날에 황제가 황제이기 이전에 그의 즉위를 지지했던 우애 깊은 형제 말이다.
권력에 혈육이고 아니고가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가 죽은 상황이 몹시 좋지 않다.
그래, 고우군의 죽음까지는 어떻게 그의 능력으로 덮었다고 치자.
온화한 인상의 사내, 강서진을 떠올리며 서문윤은 느릿한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러나 뒤를 이은 거물의 죽음까지 황제가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고우군에 이어 오왕까지, 감히 황실의 혈통에 손을 댄 죄.’
아무리 정치에 문외한인 그일지라도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황제의 임계점을 벗어난 일이었다.
이미 황제는 자극을 당한 상태였다. 나라의 우환으로 인해 가까스로 의심병을 다스린 상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조정이 흔들릴 거다.
그를 알면서도 마음의 갈피를 정하지 못한 까닭은 저를 신뢰하는 사내의 눈에 죄책감을 느낀 까닭이었다.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항상 생각하고 있어.”
이제는 그에게선 처음 만났던 날의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모습을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힘이 들 때면 저를 폭 품에 끌어안고 위안을 받으려는 그가 새삼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리하여 그간 검설린을 보면 항상 죄책감을 느끼며 저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인가? 지금이라도 의형에게 사실을 고백하는 게.’
그러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고, 서문윤은 결국 상황의 급박함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 사실을 고백해보았자 그들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언제 의형을 반역자라 명하는 성지가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그래,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행할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서문윤은 확고한 다짐을 다시금 세우며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제 정말로 검설린의 미움을 받아야만 해,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야 해.
‘그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가 날 미워할 것을…….’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와중에 들려온 말이었다.
“너는 그간 팔기린과 함께 지내며 그의 신뢰를 쌓아왔다.”
마침내 이청은의 말에서 떨어진 말.
“그간 나는 팔기린의 동정을 살피라 말을 하며 네게 제대로 된 임무를 주지 않았지. 그것은 아직 강서진의 무리 중에서 너를 의심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지금은 꽤나 긴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어.”
예비했던 말을 듣고 서문윤은 침묵 끝에 느릿한 목소리로 그에게 답변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옛 주인의 눈에는 푸른 불꽃이 돌았고 서문윤은 그의 차분한 얼굴에서 어느 굳건한 다짐을 엿볼 수 있었다.
“너는 장계에 손을 댈 수가 있겠느냐?”
이윽고 들려온 말에 서문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듣곤 기나긴 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서문윤은 잠을 자지 못해 밤을 꼬박 새며 저를 괴롭히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끙끙 앓아야만 했다.
가끔 후회를 하곤 했다.
‘지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지 않을까?’
서문윤.
제 귓가에 속삭이는 낮고 부드러운, 애정이 희미하게 섞인 목소리가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서문윤은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사실을 고변하고 싶은 마음을 느꼈던 것이다. 그에게 저가 그저 ‘서문린의 아들’뿐이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무심한 얼굴에 희미하게 드러난 다정함이 사라지고 검설린이 그때의 싸늘함과 비관함으로 저를 다시 바라볼 생각에 서문윤은 목이 조여지는 기분에 휩싸여 안달이 났던 것이다.
‘아니, 이제는 틀렸어. 돌이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가 하면 자포자기하여 그는 종종 스스로를 위해 변명을 하곤 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의형이 조금만 더 나를 신뢰했더라면.’
가끔 서문윤의 귓가에 교차하며 울리는 말들이 있었다.
“너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다.”
“네가 고통받을 게 눈에 보이는구나.”
검설린과 이청은. 그 두 사람의 말들 말이다.
“지긋지긋하게 고리타분한 네가 비정해야만 살아남는 전장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리라 생각지 않아.”
“네가 네 의형을 배반하고도 멀쩡할 만큼 모진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를 향해 같은 평을 했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너를 오지 말라 한 거다. 이 전장에선 네가 상처받을 일만 있다. 그리고…… 지금 내겐 네가 필요 없지.”
“네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안다. 내가 요구하는 일이 너를 상처 입히리란 것도. 하지만 내게는 네가 필요하구나.”
그 차이였다. 서문윤이 검설린이 아닌 이청은의 손을 잡고, 미래를 대비하려 한 것은.
‘이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고 서문윤은 흔들리는 마음을 완전히 틀어쥘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가 저에게 신뢰를 보였는가?
검설린은 제게 확신을 주지 못했고 이청은은 그를 믿었다.
서문윤은 항상 그에게 저를 신뢰해달라, 모든 진실을 말해달라, 짐을 나눠달라 말을 했지만 검설린은 항상 그를 지켜줘야 할 어리고 나약한 것으로 여겼고 그리하여 서문윤은 그 사실에 항상 좌절해야만 했다.
그와 짐을 나누고 싶었건만, 검설린은 항상 저를 모든 풍파에서 배제하려 들 뿐이니 그리하여 서문윤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모든 일을 대비하고 있는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는지 제가 어찌 아는가?
그러니 서문윤은 검설린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또한 그들의 미래를 제멋대로 꾸리려 했으니 저 또한 그럴 권리가 있다.
그렇게 폭풍과도 같이 휘몰아치는 감정에 휩싸여 괴로워하며, 죄책감에 망설이고, 검설린의 온화함에 갈등하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급보(急報)!”
그것은 말에 올라타 진영을 다급히 가로지르는 파발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급보요!”
막사에서 잠을 청하던 서문윤이 벌떡 일어나 불안에 찬 얼굴로 천박의 문을 노려보았다. 그의 옆에서 고요히 잠을 자던 검설린의 눈이 열리고 유리처럼 맑은 눈이 허공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서문윤의 두 눈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건.’
불길함을 맡은 청년이 이를 악문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느릿한 말이 들려왔다.
“시작이지.”
바로 서문윤의 몸을 뻣뻣하게 굳게 만들고 심장을 멈추게 한 말이었다.
파발이 들고 온 것은 바로 검남 절도사를 설득하러 간 사신의 목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영을 들이닥친 또 다른 전령이 내뱉은 말.
“보국장군은 당장 예관을 갖추고 나와 성지를 받드시오!”
악천화의 해임을 알리는 황명이었다.
* * *
그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어느 날 밤에 있었던 일.
달이 높게 뜨고 어둠을 밝히던 때.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리던 날.
문득 서문윤이 잠을 자지 못해 뒤척거리다가 막사에서 나선 적이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늘이 진 얼굴로 진영을 거닐던 그는 어느 순간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몸에 긴장을 돋우고야 말았다.
인적이 드문 수풀 새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새벽이 넘은 시간이다.
엄격한 규율로 사람을 통제하는 병영에서 이 시간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라?
그리하여 서문윤은 자연 그를 경계하며 어둠 속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나 기척을 죽이며 그곳을 향해 살금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던 서문윤은 이내 몸을 멈칫하곤 놀란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선배?’
크나큰 아름드리나무. 병영의 한구석 뒷산과 가까운 부근에 자리한 그 음습한 곳에 나무 아래 선 채 말없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로 이중환의 것.
‘이 시간에 여긴 왜?’
심란한 마음에 한참을 넋을 잃고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장소는 간부의 막사와 가까운 곳이 아닌 으슥한 곳이었다. 무슨 꿍꿍이라도 꾸미고 있는 것인가? 그런 마음으로 경계에 찬 얼굴로 그를 지켜보던 서문윤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을 풀고 문득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타다닥, 불씨가 튀기고 있었다. 이중환의 손에 들린 종이가 불타고 있는 것이었다.
지전인가? 아니면 비밀스러운 서신인가?
잠시간 불그림자가 춤을 추는 이중환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몸을 뻣뻣이 굳히며 아, 낮은 음성을 흘리고야 말았다.
“……선배.”
그와 눈을 마주한 것이다. 마치 심연처럼 가라앉은 깊은 두 눈과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잠시간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한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중환의 얼굴은 고요했고, 서문윤은 그 고인 호수 같은 얼굴에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느릿하게 흐른 음성에, 서문윤은 그 순간 몸을 움찔하여 반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나는 경고했어.”
서문윤은 침묵 끝에 간신히 한마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게 뭡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를 판단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진실을 모른 채 어두운 벌판에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방황하고 있다.
그리하여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지 못한 사내의 잘게 떨리는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저 진실의 한 파편이라도 좋아. 그것을 길라잡이로 삼아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출구를 찾을 수가 있다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서문윤은 손끝에 재를 흘리며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향해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제발.”
주인을 잃은 무사, 그가 짐작하지 못하는 비밀을 가진 사내. 이중환은 깊은 눈으로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타닥거리는 불씨는 사라지고 어둠만 남은 때였다.
“사람들은 주인이 융통성이 없고 비정하다며 욕을 했지만, 내게 있어서 그는 나라의 희망이었다.”
“…….”
“오왕이 북란 중 사치를 부리고 양민을 학대하였고, 참다못한 그들이 그를 북적 오랑캐들 손에 넘겨주었지. 그 당시에 나는 낙양을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규조성에서 사투를 벌이던 후배들을 도우러 가고 있었고, 조정은 그런 내게 낙양 전선을 포기하고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 내가 그에 어이 행동했는 줄 아느냐?”
서문윤은 조정에 기대하지 않기에 침묵했고, 그리하여 이중환은 조소를 흘리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개소리 말라 그래. 명령을 거부하고 규조성을 그렇게 지켜냈다. 그건 내 신념이었으니까! 난 오왕을 구하러 갈 생각이 없었어. 규조성이 넘어가면 낙양이 넘어가고 정명공이 간신히 구축한 대북 전선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내가 규조성이 아닌 오왕을 구하러 갈 수가 있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
“……그러나 그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던 시대였다.”
묵직한 저음이 흘렀다.
“내가 무얼 원하냐고?”
“…….”
“전쟁이 끝나고 난 처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오왕은 황제의 친동생. 그는 다행히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나는 황명을 거역하고 황친을 위기에 빠트린 죄를 짓게 된 거지……. 그리고 그런 나를 살려주신 분이 고 대인이시다.”
그 말을 할 때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엔 쓸쓸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런 그의 얼굴에서 서문윤은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분은 나와 내 후배들이 황명을 거역한 대역죄를 저지른 상황에서 위기를 무릅쓰고 날 변호해주셨지. 그분은 실제로 그 일로 탄핵을 받았고, 가지고 계셨던 작위마저 빼앗길 뻔했다.”
그리고 서문윤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내뱉는 말.
“너는 그 이유가 뭔지 아느냐? 주인께서 날 살려주신 이유가?”
“…….”
“고 대인께서 병부에서 이름 높던 나를 그분의 검이나 개로 삼기 위해 은혜를 베푸셨다 생각하느냐?”
서문윤은 그 말에 기나긴 시간 침묵했고 그 끝에 입술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결국엔 입술 밖으로 흐르는 자그마한 신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모든 난장판에서 가장 괴로운 사실은, 의형의 적이 사리사욕을 탐하여 남을 해치는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고우군도 열파답도, 이청은도 그들은 나름의 신념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를 추종하면서, 그를 위해 오명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설령 선배를 제 사람으로 삼기 위한 일일지라도, …그게 과연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고우군과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서문윤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우군은 매사 국정을 생각했고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수십 년간 조정의 최고 권력자였던 만인지상의 늙은 노인은 매사에 그늘진 얼굴로 나라의 명운을 걱정했고, 서문윤을 설득할 때도 사욕을 결단코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검설린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간 사내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해 어두운 얼굴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자리한 시기엔 사람들은 모두 빛을 바라보며 사는 거야.”
이윽고 느릿한 말이 내려앉았고 그에 서문윤은 잠시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해를 가리키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짧은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
“그분의 정신을 따르시려는 겁니까?”
이중환은 그에 답을 하지 않았고 그저 서문윤의 뇌리에 남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그가 떠난 후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선 채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그러곤 그는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왜 아니겠는가?
난세에는 사람의 목숨이 중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은 모두 하나의 가치를 품고 살아가고야 만다. 하물며 그 정도 되는 무인이 평범히 살아간다 생각하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리고 어느 생각에 이르러 문득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돌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청융도, 운표선도, 검설린도, 강서진도, 황재천도,
심지어 그 고우군마저도 어느 숭고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었다. 비록 그들 중 누군가는 그 중간에 좌절하였고, 누군가는 가치관이 충돌한 이들을 비정하게 학살하였을지라도, 그 피에는 모두 목적이 있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하늘을 지켜보는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벽의 어둠은 깊었고, 숨결은 몹시 차가워 폐부를 따끔하게 할 정도였다.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을 잠자코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서문윤이 문득 고개를 돌려 병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치 앞도 확인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병영 너머의 땅 끝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순간 흔들리고, 서문윤의 입술 사이로 느릿한 숨결이 흘러나오고야 만다.
‘저곳에서 언젠가 해가 뜨리라는 희망을 믿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안사의 난 이후로 나라의 국운이 다해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관료들의 기강은 해이해진 반면 수를 셀 수도 없는 많은 무고한 이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 어두운 밤을 밝히려 애를 쓰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사투는 난세를 끝내기 위함이었고, 지옥 같은 현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어느 생각에 이르러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문득 한 사람을 향한 애정에 휘말려 전전긍긍하는 저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차가운 공기. 그에 입김을 입술 밖으로 흘리며 그는 잠시간 입술을 깨물며 동요해야만 했다.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품고 살아가는 거라면, 그것이 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잠시간 갈등하던 서문윤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낼 수 있었다. 흔들리던 시선이 안정되고 확고한 빛이 그의 얼굴에 돌았다. 멈추었던 발걸음이 다시 떼어진 때였다.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서문윤은 제가 밟아온 길을 다시금 되돌아가며 속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아니, 그것 또한 가치가 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투하는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문윤은 저 스스로 뜻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처럼 분투를 하여 반드시 쟁취를 하고 싶은 삶의 목적이 있었다.
수백만을 살릴 수는 없어도 단 한 사람만큼은 살릴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만큼은 구할 수 있지.’
그리하여 세상 고요한 병영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서문윤은 다시 한 번 확고한 다짐을 다지고 있었다. 반드시 그와의 안온한 미래를 쟁취하리라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리라고.
그리고 혼란이 자리한 병영 한가운데 선 서문윤은 다시 한 번 그때의 다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전쟁 와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는 것은 병가의 법도라지만 이렇듯 사안이 실로 중대하고 사간의 탄핵을 외면할 수 없으니 악천화를 보국장군직에서 해임하고 부사령관의 병부를 박탈하여 장안으로 소환한다. 흠차(欽差)!”
경악에 찬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듯 차분한 얼굴로 성지를 받는 검설린을 잠자코 살피는 눈이 깊은 밤과 같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문득 누군가와 두 눈을 마주하고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를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내의 정체는 바로 이청은이었다.
* * *
병영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날이 뜨고 병영에 도착한 두 명의 전령으로 인한 것이었다.
검남 절도사의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파견된 사자는 목이 잘려 병영으로 돌아왔다. 물러설 곳 없이 전쟁을 알리는 행동.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사령부가 긴급히 소집되었을 때, 혼란을 가중시킨 그 말이 또 다른 전령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정명공은 당장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드시오!”
장안에서 당도한 전령은 바로 황제의 명을 받은 칙사였다. 그 순간 불길함을 예감한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황제는 항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명령을 내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칙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사람들을 경악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옛날 북란에서의 공이 동궁사변 때의 과를 덮어 짐은 그대를 중용하였다. 그러나 현재 실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만행의 배후로 사간이 그대를 지목하였으니 짐이 어찌 언론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조정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동궁사변 이후로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은 황제의 입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람들은 모순된 황제의 말에 얼굴을 딱딱히 굳힐 수밖에 없었다.
‘실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만행이라.’
성지는 그 만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묘사하지 않고 있었으나 서문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훔쳐본 장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오왕 암살.’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를 떠올리며 그는 자연스레 얼굴을 딱딱히 굳히곤 긴장에 가쁜 호흡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술렁거리는 진영과 다른 세계에 자리한 듯 검설린은 담담히 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채 자리할 뿐이었다.
칙사로서 병영에 온 어전 태감은 연이어 부드러운 질책을 섞은 황제의 말을 전달했고, 그것은 마침내 ‘더 이상 조정의 말을 막을 수 없다’는 한탄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비명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전쟁 와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는 것은 병가의 법도라지만 이렇듯 사안이 실로 중대하고 사간의 탄핵을 외면할 수 없으니 악천화를 보국장군직에서 해임하고 부사령관의 병부를 박탈하여 장안으로 소환한다. 흠차(欽差)!”
전쟁이 바로 코앞이다!
검남으로 갔던 사절이 목만이 남은 채 돌아왔으니, 이제 토벌의 명운을 가를 최후의 전쟁만이 남은 셈이다. 토벌이 지금껏 천운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곤 하나, 그것은 정말 하늘이 돕다시피 한 일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 사람들은 전쟁 이전에는 이렇게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늘의 뜻이 아직 대당에 있었던 걸까? 아니면 한 사내의 능력이 탁월한 탓인가?
그들은 자연스레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들의 총사령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상석에서 마치 귀신과 같은 얼굴로 잠자코 앉아 있던 이청은은, 바로 군략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정치가일 뿐이지 않나.
그가 총사령관이라 하나 실질적으로 군을 지휘했던 것은 그 휘하의 장수들과 그들의 수장이었던 악천화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암담함에 휩싸여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들 중 몇몇은 태자를 향해 의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정녕 이런 길을 원하고 계셨던 겁니까?’
바로 태자와 악천화의 대립을 그간 지켜보던 장수들의 시선이었다.
* * *
동궁사변이 일어난 이후 가장 큰 수혜자는 이청은이었다.
노기등등한 살벌한 황제의 기세를 두려워한 탓인지 아니면 제게 떨어질 고귀한 자리를 탐낸 탓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그는 어찌 되었건 친형이었던 폐태자 이청융의 죽음을 방관했고 그의 뒤를 이어 국본의 자리에 올랐다.
그 사건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심지어 그가 동궁사변의 배후라 일컫는 말 또한 암암리에 떠돌아다녔다.
이청은 개인의 성품은 청렴하며,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탁월하고 또 자비로웠지만, 사실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인 면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뿐인 친형의 죽음을 방관할 만큼 그는 황제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았고, 그의 뜻에 영합하였으므로. 소문은 기나긴 시간 동안 진화되긴커녕 더욱 구체적인 것으로 변모한 후였다.
비록 그가 황제의 심기를 누그러트려 흘리는 피를 줄이고자 하는 선한 취지로 모든 일을 행했다 한들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사람들 중에서는, 특히 동궁사변 때 피해를 입은 이들은 이청은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개중 가장 대표적인 이가 강서진, 운표선, 황재천, 악천화…….
사실상 그는 동궁사변에 얽힌 모든 인물과 척을 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청은은 병부에서 그다지 인기가 좋은 인물이 아니었으니, 토벌전에서 그가 본의 아니게 ‘악천화’를 견제하게 되면서 병부의 인물들이 그를 싫어하는 감정은 깊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동궁사변 때 주군을 고발한 악천화가 병부에서 평이 갈려도, 그는 뿌리가 깊은 병부의 사람이었고 이청은은 굴러들어온 돌이 아닌가?
게다가 병부에 적을 올린 이들은 정치보다야 전술전략에 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이청은이 사사건건 악천화와 대립각을 세우며 일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던 일은 그들의 마음 한켠에 앙금을 쌓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비록 이청은이 제 자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할지언정 직접 전장에 나서는 이들은 깊은 속사정을 이해할 겨를이 없던 것이다.
그리고 뜬금없이 병영에 찾아온 칙사의 말은 지금껏 꾹꾹 화를 참아 누르던 이들을 완전히 폭발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
적막이 흘렀다. 말을 마친 칙사가 오만한 눈으로 제 앞에 무릎 꿇어 앉은 나라의 영웅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열려 할 때였다.
“병부는 내어놓고 저를 따라 가시지…….”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병영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비명과도 같은 말 때문이었다. 칙사는 당황하여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타 누군가의 격한 목소리가 뒤를 이어 병영을 울렸다.
“전하, 전하라니? 그 입 조심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칙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은 때였다.
칙사는 황제의 명을 대행하는 자인데 어찌 중간에 말을 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성지를 전달한 후에 사람들의 굽신거리는 태도를 즐기며 뒷돈을 받곤 했던 칙사는 이 무뢰배들의 무엄하고 발칙한 행동에 더할 나위 없는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히!’
그러나 그는 그 오만한 태도를 길게 유지할 수 없었다.
병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흐르고, 살벌한 고함이 오가고야 말아 그는 저절로 무장들의 눈치를 보며 길게 빼었던 목을 쑥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게야!? 병영을 계속 지키신 전하께서 무얼 어찌하셨다고 전하를 들먹여!”
그것은 실로 흉흉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들이었다.
“전하가 아니면 무슨 미친 언간들이 전시에 우두머리를 바꾸자는 개소리를 씨불인답니까!”
“언간들이 백성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전하의 목소리를 전달해? 혐의가 있으니까 말이 나오는 게 아니야!”
“아니, 전시에 우두머리를 바꾸는 혐의가 도대체 무어입니까?!”
그 순간 태자를 변호하며 격렬히 말을 내뱉던 이의 입술이 거짓말처럼 꼭 다물렸다.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니, 방금 전 태자를 비난한 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실로 합당한 것이었던 탓이었다.
가장 중요한 최후의 격전을 앞두고 우두머리를 교체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황제는 그 혐의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실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만행’이라 돌려 말하였으니 사람들은 쉽사리 황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는 오왕 암살의 혐의를 성지에 박아두지 않았는데, 그것은 검설린의 명성이 몹시 커 황제가 그를 아예 대역죄인으로 낙인찍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탓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추후에 사건을 수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는 의도는 사람들에게 동궁사변과 같은 짓이 또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안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 무장들은 폭발하여 노기등등한 기세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동궁사변 이후로 계속되었던 황제의 핍박. 우두머리는 황제의 연줄하의 부패한 중신들로 교체가 되고, 북란을 막았던 명예로운 군대는 온데간데없이 악명만을 떨치고야 말았다. 그간 쌓였던 한은 병부의 전설과도 같던 인물이 받는 수모에 폭발하고야 말았으니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격렬함을 띠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체포를 해도 검남 전선이 마무리되고 해야지 전장에 장수를 바꾸는 말 따위를!”
“황명을 거절할 셈이오?”
“폐하께서는 이리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병부를 다시금 핍박하고야 마는 것인가!”
병영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어, 어어.”
대역죄에 이르는 무엄한 말들이 오가는 상황. 칙사는 살기를 내뿜는 그들을 두려워하며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병영의 분위기는 거의 폭동 직전이었다.
심지어 태자 휘하의 장수 또한 몇몇은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복잡한 얼굴로 침묵하였으니 사실 병영의 분위기는 한 방향으로 넘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전하께서 정명공을 견제하신다 하더라도 지금은 전시가 아닙니까? 최후의 결전이 코앞이 아닙니까? 정치 놀음도 작작하셔야지요!”
“그게 무슨 망발이야!”
“몰라서 물으십니까?”
날카로운 조소가 흐른다. 돗자리에 무릎 꿇고 앉은 사내의 담담한 눈이 느릿하게 감긴 순간이었다.
“토벌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것 같으니 보국장군의 공을 완전히 뺏으려는 게 아닙니까?! 검남에서의 일만 마무리가 된다면 승자는 정난공신이 되니 그 공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은 게 아닙니까? 일국의 태자가 강도와 다름없는 짓을 저질러! 창피한 줄 아십시오!”
그리고 그 과격한 말에 태자의 편을 들던 장수는 결국 참지 못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리춤에 맨 검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이, 이 대역죄인!”
그러나 기세 좋게 허리춤에 손을 대었던 그는 검집에서 검을 빼지 못한 채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어?”
갑작스럽게 그를 향한 수백 쌍의 시선. 싸늘한 살기가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철컥거리는 소리가 어디에서 울렸던 탓이다. 성지를 들고 있던 칙사가 몸을 잔뜩 움츠리며 버들강아지처럼 발발 떨고 있었다.
검설린의 휘하, 중립, 태자의 휘하 나눌 것도 없이 병영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적의 어린 시선으로 검을 꺼내려 한 장수를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장수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고, 무의식적으로 그는 고개를 돌려 태자의 안색을 살피고야 말았다.
“전, 전하.”
상석에는 굳은 표정을 한 태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는 제게 구원을 바라는 이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시간이 꽤나 흐르고 난 후에 입술을 열었다.
“모두들 경거망동하지 말게.”
“……전하.”
수많은 시선이 이청은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의혹과 불안, 의심과 분노, 그 모든 복잡한 감정이 한데 얽힌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태자는 침착한 얼굴로 장안을 쓸어보았고, 마침내 칙사에게 시선을 고정하곤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신하로서 황명을 받드는 게 당연한 일이나…… 지금은 군무가 급해 곧이곧대로 성지를 받들기 불가능할 것 같군.”
“허, 허나!”
“칙사는 잠시간 대기하시오. 말을 나눠보겠네.”
그 말을 끝으로 태자는 등을 내보이며 혼란이 가득한 자리를 빠르게 떠났고, 그의 뒤를 간부들이 하나둘씩 따랐다.
“이런, 이런 무, 무엄한…”
상상치도 못한 상황을 마주하고 공황에 빠진 듯한 칙사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를 묵묵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내가 돗자리에 무릎 꿇던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마침내 소란 한가운데에 당당히 두 발로 일어선 때였다.
서문윤은 짙은 시선으로 잠시간 그를 바라보았고,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지 않은 채 아랫입술만을 짓씹을 뿐이었다. 잠시간 그 자리에서 우뚝 서 있던 사내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어 자리를 빠져나가고, 마침내 남은 것은 분개에 치를 떠는 사람들뿐이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그리고 그들이 터뜨린 고함, 불경한 말들로 휩싸인 자리에서, 서문윤은 참담한 마음을 삼키지 못해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오왕 암살은.’
석연찮은 죄로 우두머리가 장안에 소환되는 상황. 사람들은 ‘악천화’의 결백을 믿으며 황제를 욕하고 태자를 의심했으나 서문윤은 이 사태의 내막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오왕이 기거하는 별장은 하동에 자리했고, 그곳은 현재 반쯤 독립한 것과 다름없는 황재천이 통치하는 곳이었다.
‘……그건 의형이 저지른 짓이 맞다.’
그리고 그는 의형의 조력자이지.
사정을 모른다면 암담함에 휩싸여 검설린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문윤은 일련의 사태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러트리곤 몸을 잘게 떨 수밖에 없었다.
‘이게 우연이라고?’
강서진이 장안에 있는데 검설린이 이리 쉬이 병권을 잃고 죄인이 다시 될 수 있다고? 황 숙부가 한 나라의 황족을 암살하면서 그렇게 조심성 없이 증거를 흩뿌리고 다녀 장안에 그 은밀한 배후와 관련된 소문이 퍼졌다고?
‘이건, 이건.…’
그리고 머릿속을 스치는 장수들의 격렬한 반응. 당장이라도 황실에 반기를 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그들의 무도한 말.
그 순간 서문윤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뱃속에 울리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키며 손을 주먹 쥐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잖아!’
손톱이 파고 든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서문윤은 그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불안한 어느 한 가정에 함몰되어 있었다.
태자와 정명공. 양측으로 나누어져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지고 태자는 오명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청은을, 정확히 말하면 태자의 뒤에 자리한 황제를 비난하고 있으니 이것은 황제의 자충수라 칭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너무도 공교로운 상황이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정치 놀음이라니! 이럴 거면 차라리 다 뒤집어엎고 말지.”
그 어느 하급 군관의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어두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반란.’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에 내려앉은 느낌에 휘말려 있었다. 칙사는 툭 치면 바로 쓰러질 것만 같은 참담한 얼굴로 이청은을 기다렸고, 서문윤 또한 초조함에 가득 차 발끝으로 지면을 툭툭 치며 간부들이 향한 막사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만 해.’
이청은과 병부의 사람들이 돌아온 것은 시간이 꽤나 흘러 해가 서쪽을 향할 때의 일이었다.
“전하.”
밤낮을 달려 장안에서 이 먼 검남까지 달려온 상황에서 몇 시진을 밖에 서 있던 칙사는, 이청은의 등장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기쁨에 물든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하게 굳어져 경악으로 물들고야 말았다.
“병부의 일이 급하여 황명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가 없다. 황상께 재고를 부탁드리는 장계를 올릴 테니 칙사는 대신 그것을 가져다주게.”
“전하!”
“오늘 아침 검남 절도사를 설득하러 파견된 파발이 수급이 되어 돌아왔다…….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인데 장수를 급히 바꿀 수가 있겠는가?”
담담히 말을 내뱉는 태자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창백했다. 망연한 시선으로 태자를 응시하던 칙사가 붕어처럼 입술을 버금거리다가 비명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허, 허나!”
“황상께서도 이런 상황을 예견하여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는 지친 듯하면서도 단호하기 그지없는 태자의 말에 다시금 입술을 앙다물 수밖에 없었다. 불만이 가득한 칙사는 제게 쏟아진 수많은 시선에 결국 굴복하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체념한 듯한 태감의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던 태자가 어느 순간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막사에서 쉬다 가거라. 황제께 올릴 장계를 쓰겠다.”
칙사는 그저 음울한 목소리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 * *
‘악천화’의 해임을 막아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병부의 불만은 봉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그런 태자의 굴복으로 끝날 만한 게 아니란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칙사는 태자가 내어준 막사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않은 채 불안에 떨고 있었고, 그 주변을 태자 휘하의 병사들이 삼엄한 기세로 지켰다. 사람들은 칙사가 머무는 막사를 마치 꼴같잖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그들 중에서는 불경하게도 그곳을 향해 침을 뱉거나 발길질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부산스러운 상황을 수습한 것은 바로 사건의 당사자인 검설린이었다.
“급한 건 검남의 일. 이미 해결된 일에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고 군무에 집중하라.”
그런 그의 말에 사람들은 까마득히 잊었던 수급이 되어 돌아온 파발의 일을 생각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다시금 군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군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위 장수들이 모이는 장소가 사령부가 아닌 검설린의 막사란 것이었다.
“안 돼, 안 돼. 이건 안 됩니다.”
막사 한구석,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두운 그늘에 어색하게 선 채 상황을 관망하는 한 청년이 있다.
“절대, 이건 절대 안 돼!”
막사 안은 이미 개판이었다. 병부의 오랜 실력자. 북란에서 활약했던 뼈 굵은 장수들이 하나같이 ‘정명공 악천화’의 막사에 모여 있었으니 서문윤은 불안에 찬 눈으로 그들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 일에 문외한일지언정 총사령관인 이청은의 눈치를 보아 이리 노골적으로 그를 배제한 일이 없었는데. 평소에 권력다툼에 싫증을 내면서 토벌에 집중을 하려던 이들은 하나같이 대로하여 검설린의 막사에서 저마다의 의견을 개전하는 상황이었으니.
‘이건, 이건 안 돼.’
상황을 관조하던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억눌린 한숨이 문득 새어 나왔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섬뜩한 빛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건 못 막는다.’
이를 악물어 비명을 삼키는 중이었다. 흥분에 가득 찬 사내들을 바라보는 얼굴에 암울함이 서려 있었으니, 그것은 서문윤이 상황의 심각성을 몹시도 잘 이해하고 있는 탓이었다.
‘황제가 직접 막사에 와도 이 기조는 못 막아.’
이미 병부는 황실에 몇 번이고 뒤통수를 맞은 상태지 않나!
북란에서 목숨 걸고 활약했으나 돌아온 것은 부귀영화도, 명예도 아닌 황제의 칼날과 매서운 질책뿐이었으니, 동궁사변 때 이들이 당했던 수모는 실로 지나친 것이었다.
애써 동료를 고변하여 사변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들의 남은 인생이 평탄한 것 또한 결코 아니었다.
황제는 경력이 풍부한 군재가 아닌 제게 영합하는 인사를 병부에 꽂아넣었고, 정상적이라면 승급을 해야 할 인사들은 하위직을 전전하고 저보다 능력이 모자란 이들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병부는 이름을 더럽혔고, 기강은 문란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 그들이 한때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나선 토벌전에서, 군사 일에 문외한인 태자가 총사령관이 되어 그들의 발목을 부여잡고 검설린은 번번이 황실의 견제를 받다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뜬금없이 병부를 빼앗기고 압송당하게 생겼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이유나 말을 해주면 이해라도 가지. 갑자기 언간의 의혹을 물리칠 수 없다니? 그 의혹이 대체 얼마나 중한 죄인데 전장의 장수를 죄인처럼 소환해! 검남에 있던 장군께서 무슨 대역죄라도 저질렀다고?”
10년 가까이 쌓이고 쌓였던 한이 터져 나와 마침내 물이 들끓고 있으니, 서문윤은 그들을 바라보며 암담함을 느낄 뿐이었다.
이미 그들은 흉흉한 얼굴로 소리를 치며 무도한 말을 내뱉고 있었고, 사실상 노골적인 말을 입에 담지 않은 것뿐이지 그들은 하나같이 결단한 사람마냥 독랄히 눈을 밝히고 있었다.
‘다 틀렸어.’
이들은 사실상 반란을 결의한 것과 마찬가지 없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였다.
“이유가 있을 터가 있습니까? 검남에서 완전히 승전을 겪으면 황상께서 곤란해지는 게 뻔하잖습니까.”
분기에 가득찬 목소리를 빈정거리는 말이 받고, 그리고 한바탕의 난리가 또다시 이어지고야 만다.
“전쟁 도중 장수를 바꾸는 것은 병가의 금기! 그런 일이 일어나면 백이면 백 모두 참패한 것을!”
“그럼 뭐 어찌합니까?”
“정명공은 부절(符節, 최고 병부)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짧고 날카로운 웃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부절을 가지고 있으니 군사를 움직일 수 있고, 군사를 움직일 수 있으니 황제의 개소리를 무시해도 되겠네? 검남 전선에서 승리하곤 우리 모두 백만 군사와 함께 장안으로 몰려가 소청을 드리지. 대가리를 박고 애원하면 황제께서도 우리의 간절함을 이해하여 명을 물려주시지 않겠나?”
부절이 있다 조심스레 말을 내뱉던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에 험악한 기세가 흐르고, 묵묵히 말을 듣던 검설린이 시선을 흘끗 돌려 그를 바라보고야 만다.
“그리 비꼬지 마십시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잖습니까.”
결국엔 튀어나온 진심에 그리고 막사 안에는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서문윤의 얼굴에 긴장이 물든 때였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이가 이곳에 있을 터가 있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애써 돌리고 돌려 말을 했을 뿐이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그와 대담을 하던 중년의 장수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오고야 만다.
“장안에는 우리들 가족이 있어.”
그리고 말을 받은 것은 예민한 인상의 사내였다. 바로 잠자코 상황을 관조하던 안서대도호(安西大都護) 안영진. 북란 이전부터 활약하던 노장이자, ‘악천화’를 제외하면 가장 품계가 높은 노장은 묵묵히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다가 문득 관자놀이를 누르며 핵심을 찌르는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유구한 관습에 따라 장안에는 장수들의 가족이 있었고, 그들은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개들 중에는 흥분한 이들은 있어도 직접 반란을 입에 담는 이들은 없었던 것이다.
정적이 감돈 막사 안, 그리고 침묵 끝에 누군가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나라가 없으면 가족 또한 없습니다.”
검설린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고, 안영진의 미간이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말을 내뱉은 이는 서른 중후반의 무장이었다.
“처자식은 소매와 같은 법. 아내는 다시 맞이해도 충분하고 자식은 몇 번이고 다시 낳아도 되지만, 잃은 나라는 되찾을 수 있습니까? 이번 토벌에서 패배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그다지 품계가 높지 않은 그의 말을, 장안에 자리한 이들은 건방지다 평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젊은 장수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리고, 그 사이로 작지만 커다란 파급력을 가진 말이 흘러나온 것은.
“안사의 난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사람들 사이로 파장을 불러일으킨 말이었다.
안사의 난!
절도사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난이 어떻게 대당을 파멸로 몰고 갔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은 지금의 혼란 또한 그때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대당의 율령체제는 그때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고, 이미 그날부로 민생은 지옥도와 다름이 없으니. 황제가 절대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악을 쓰고, 신하들과 대립을 하는 까닭은 그날 이후로 기울어진 국력과 깊은 관련이 있던 것이다.
사실상 지금의 난세는 이민족이 아닌 그때 번국의 반란이 불러일으킨 것과 다름없다. 심지어 안록산의 난은 제압이 되었음에도 대당을 이리도 약화시켰는데, 이 난에서 패배를 한다면 어떤 지옥도가 펼쳐질까?
‘적어도 안사의 난 때보다 심하겠지.’
사람이 굶어 죽고 도적이 들끓던 때. 조정의 힘이 도시에도 미치지 못해 사실상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그런 나날들.
그리고 사람들은 대당이 그런 지옥도를 두 번이나 견뎌낼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나마 조정의 모양새라도 갖출 수 있던 그때와 다르게, 아마 완전히 파멸하게 되겠지.
그것은 서문윤 또한 쉬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리하여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지 못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혼란은 사람들 사이를 물결쳤고, 그들은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며 한참을 아우성거렸다. 누구는 애국을 말하고, 누구는 명예를 말하고, 누구는 보신을 말하고 있다.
“장군.”
그리고 그 끝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한 사람을 향했고, 좌중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답을 종용하는 시선을 받은 이는 긴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몹시도 차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검설린은 제 얼굴을 치르는 날카로운 시선에도 한동안 말을 내뱉지 않았고, 그들이 초조함을 드러낼 쯤이 되어서야 입술을 열었다.
“그럴 때가 아니라…!”
“내가 난을 일으키면.”
그리고 긴 적막을 깨고 사내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담담한 말이었다. 물이 흘러나오듯 유려하고 매끄러운 목소리에 답을 재촉하려던 이의 몸이 멈칫하고야 만다.
그 순간 새까만 눈이 장안을 쓸고 있었다. 좌중에 자리한 사내들의 얼굴은 그 시선이 닿을 때 저마다의 복잡한 마음을 드러내며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검설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
“누구를 황위에 올리자고?”
그것은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로 물고 간 말이었다.
“난이라니.”
누군가가 두려움에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막사 안에 정적이 감돌고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울렸다.
흥분하여 날뛰던 이들의 머리 위로 찬물이 끼얹어진 것만 같은 듯한 상황이었다. 당금 황제의 치세에 반역으로 삼족이 몰살당한 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며 황제의 부당하고 무도한 결정을 성토하던 이들은 기나긴 침묵을 지키며 서로의 눈치를 볼 뿐 말을 삼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었으니 흥분하여 위험한 수위의 말을 내뱉었던 이들 또한 그 무게에 충격을 받아 입술을 꼭 다문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뜻밖에도, 막사 안에 자리한 적막을 깬 것은 뜻밖에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이씨 황가의 명운도 다한 듯하오.”
“대도호!”
병부에서 존경받는 노장의 그 순응하는 말에 누군가가 충격을 금치 못해 소리쳤으나, 더 이상 막사 안의 공기는 술렁이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듯 다시금 확고한 얼굴을 되찾은 장수들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결국 입술 밖으로 야트막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분열은 피할 수 없는가.’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뜻 모를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검설린의 새까만 두 눈과 마주하고 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의형.’
혀뿌리가 굳는 느낌에 휘말려 얼음이 된 청년에게서 시선이 떼어진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달이 중천이 뜨고, 회의는 흐지부지되어 사람들은 막사 밖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너!”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막사를 빠져나가던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문윤을 향해 험악한 얼굴로 손가락질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상념에 빠져 넋을 잃던 서문윤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응?’
저를 손가락질하는 사내를 어색하게 바라보던 서문윤은 이어진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이중환과 가까운 사이였지? 태자 무리랑 분명 어울렸던 놈 아니야.”
노기가 등등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사내는 마치 사달이라도 낼 것처럼 서문윤을 향해 성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자연 굳어지고, 그가 망설이며 손을 움찔거릴 때의 일이었다.
“내 수하다. 더 할 말이 있나?”
문득 등 뒤로 들려온 말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하고야 만다.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타인이 쉬이 거역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정, 정명공.”
그리하여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당황하여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으니 그에 서문윤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누군가의 중후한 목소리에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만의 일이 아니오.”
안서대도호 안영진.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차분한 시선으로 검설린을 바라보는 노장을 발견하고 그 순간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디 정계의 복잡한 일에 얽히지 않고 몸을 조심하는 순수한 군인이었다. 이청은과 검설린의 힘겨루기에도 얽히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던 이.
‘그런 이마저 반란에 호응할 상황이라면…….’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서문윤의 뒤로 덤덤한 말이 내려앉았다.
“내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 말에 노장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굳은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래, 알아서 하시겠지요.”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는 그리 중얼거리곤 막사를 빠져나갔고, 그렇게 다시금 천막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남은 자리였다.
“너는 나를 따르지?”
문득 귓전에 내려앉은 말에 서문윤이 놀라 몸을 움찔거리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차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는 검설린이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앉은 그의 얼굴에는 피로함이 자리하였으므로.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안타까움을 참지 못해 그를 향해 다가가 그의 찡그려진 미간을 향해 손을 뻗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거리고, 서문윤은 뒤늦게 상황에 맞지 않는 짓을 저지른 저 자신을 깨닫고 아차 하고야 말았다. 이제 와서 손을 물리는 것도 어색한 상황.
“이러다가 주름이 생깁니다.”
“뭐?”
“적은 나이도 아닌데, 관리를 하셔야지요.”
애써 뻔뻔한 표정을 가장하여 중얼거린 말에 검설린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가 문득 허탈한 미소를 입술 밖으로 흘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서문윤이 태연함을 가장하여 검설린의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을 때 그리고 돌연 그의 귓전에 내려앉은 담담한 말이었다.
“…가서 이청은에게 전해라.”
서문윤의 손이 멈칫하고, 얼굴을 굳게 한 말이었다. 피가 식어 내리는 기분에 서문윤이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검설린은 손을 가볍게 휘저어 제 이마를 문지르는 손을 조심스레 밀어내곤 그를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 인내심의 한계가 이제 온 것 같다고.”
“…….”
“강산이 세 번 바뀌던 시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그저 참아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허공에 뻗어진 손이 움츠려지고, 청년의 새하얀 얼굴에 복잡함이 물들고야 만 순간이었다. 정곡이 찔린 청년의 입술 밖으로 의형.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검설린은 돌연 깊은 한숨을 쉬고 서문윤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를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나를 말리려 드느냐?”
그리고 짧은 웃음과 함께 흐른 말에 서문윤은 차마 말을 이어나가지 못한 채 몸을 빳빳이 굳힐 수밖에 없었다.
“윤아.”
“……예.”
“날 다시 일으킨 사람은 너다.”
“…….”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너 때문이야.”
어찌 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나를 말리면 안 돼. 그러면…… 아니 되는 거지.”
고요한 눈에는 오직 저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의자걸이를 손에 쥔 채 비스듬히 등받이에 몸을 기댄 사내의 피로한 얼굴 위에는 절박함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 어느 목표를 추구하며 사는 이의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무기력함이란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간절함, 삶의 욕구를 엿본 서문윤은 그 순간 입술 밖으로 비집고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려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리고 침묵 끝에 서문윤이 간신히 내뱉는 말이었다.
“말해.”
검설린은 그를 짙은 시선으로 응시하며 짧은 말을 내뱉었고,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 끝에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흘릴 수 있었다.
“성지가 내려온 까닭이….”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긴장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침을 삼키는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왔으니, 바로 그 순간 그가 황재천의 비밀스러운 편지를 떠올린 까닭이었다.
‘의형은 완전히 결백한 게 아니다.’
지금 이곳에 자리한 이들은 검설린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서문윤은 이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사실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진실로 검설린이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었으며, 최소한 그에 개입을 했다는 정황이었다.
‘……황 숙부와 의형은 지금껏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어. 두 분은 실질적으로 동맹과 다름없는 거다. 아니, 황 숙부는 의형을 따르고 있다.’
장한성에서의 사건으로 실질적으로 하동하서 지방에서 독립을 한 것과 다름없는 황재천. 하동에 별장을 두고 유유자적 유람을 즐겼던 오왕의 죽음이 그와 연결되어 있고, 황재천은 그 사실을 검설린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장안에 퍼져 나갔고, 황제는 불안증이 도져 검설린을 또다시 견제하여 그를 소환하려 들었다.
음모의 냄새가 짙게 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항상 당하기만 하던 고결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의형에게서 서문윤은 짙은 음모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저 의형을 견제하기 위함입니까?”
그리하여 망설임 끝에 입술 밖으로 흘린 갈라진 목소리.
“아니면….”
“내가 그의 마음을 어찌 짐작하겠느냐…… 그저 내 살 길을 도모할 뿐인 것을.”
그러나 검설린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끊을 뿐이었다. 입술을 열다 말고 몸을 움찔거린 서문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검설린이 이리 와, 짧은 말을 내뱉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제게 다가온 서문윤의 너덜거리는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고, 이윽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이청은을 정말 결백하다 믿는다면, 그가 앞으로도 결백한 사람으로 남도록 노력하는 게 좋을 거다.”
서문윤의 얼굴을 긴장으로 물들게 한 말이었다. 의형. 불안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 서문윤은 이윽고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작게 벌렸으나 검설린의 얼굴을 마주하곤 결국 포기하여 몸을 축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평온하기에 더욱 살벌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에 각오가 서린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이젠 말로는 통하지 않는다.’
억눌린 한숨을 내뱉고 그가 눈을 감은 때, 서문윤의 얼굴 위를 훑는 짙은 시선이 있었다. 사내의 차분한 얼굴 위에 섬광이 스친 순간이었다.
* * *
그날 새벽, 무거운 적막이 가라앉은 병영 한구석에 우뚝 선 인형이 있었다. 어느 한때 검설린의 막사를 빠져나와 서문윤이 뼈를 시리게 만드는 맑은 공기에 입김을 내뿜고 있던 것이다.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사람들의 시선에 동떨어진 나무의 가지에 매달린 새하얀 천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태자가 비밀스러운 만남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쪽 두 번째 가지에 감긴 새하얀 천.
‘더 이상 태자와 병부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까?’
‘이씨 황가의 명운은 끝난 듯합니다.’
‘이건 나라가 먼저 당신을 버린 겁니다.’
그 어느 말들을 회고하며 망설이던 서문윤은 결국 무거운 얼굴로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병영의 서쪽이었다. 빈 수레를 모아둔 그 장소는 부총관이 관리하는 곳이었고 사람들이 한적한 곳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길이 꺾이던 지점에 들어섰을 때는 그곳에는 허름한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장소에 우두커니 서 잠시간 망설이던 서문윤은 이윽고 굳은 얼굴로 문을 밀어 창고 안으로 발을 디뎠다.
‘공기.’
창고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서문윤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발이 닿으면 바로 균열이 번져나갈 듯한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긴장이 곤두선 탓이었다. 서문윤은 느릿한 한숨을 내뱉었고, 그 순간 담담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형님이 폐위되어 감옥에 갇혔을 당시 나는 너와 비슷한 나이였지.”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린 그는 의자에 앉은 사내의 푸른 눈과 마주하며 눈을 흔들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옛 주군의 얼굴에 자리한 쓸쓸한 감정에 엮인 까닭이었다.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
“많은 나이도 아니었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당황한 듯한 서문윤의 귓전으로 이윽고 매끄러운 말이 연이어 내려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당시에, 살았으면 지금 국난을 당연히 헤쳐 나갈 수 있던 수많은 인재들이 허무히 목숨을 잃었지. 내가 지금 당하는 수모가 업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마치 도깨비불 같은 눈이 어둠 속에 반짝거리고, 달빛이 어스름하게 새어 들어오는 창고 안, 의자에 앉은 사내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 있다.
“그들은 거진 다 무고한 사람들이었고, 개중에는 병부의 사람이 많지 않았느냐.”
서문윤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고야 말았다.
“그런데 왜 그들을 구제하려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이청은의 옆에 묵묵히 자리하던 문 대주의 얼굴을 와락 구겨지게 한 말이었다. 옛 수하를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호위의 눈에 시퍼런 빛이 번뜩이고, 벽력같은 목소리가 이윽고 창고를 울렸다.
“서문윤, 너 이 새끼! 말조심해!”
금방이라도 사달을 낼 것만 같은 그의 험악한 분위기에 그러나 서문윤은 굴하지 않았다. 저는 이제 그들의 수하가 아니었으니 그는 꼿꼿이 이청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답을 종용할 뿐이었다.
“숨을 죽이고 살아가면.”
그리고 그렇게 침묵이 흐르고 난 후 돌아온 답변이었다.
“언젠가 내가 살아서 할 일이 있다 여겼으니까.”
한 나라의 태자는 제 얼굴을 무엄히 바라보는 서문윤에게 화내지 않았다. 불쾌함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둠 속에서 새파란 눈을 빛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으니.
“바로 지금처럼.”
서문윤의 얼굴에 물결이 일렁거린 순간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잘게 갈라진 목소리가 흐른다.
“정명공께서는 당신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 같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겠지. 우리는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가도를 밟았으니.”
담담히 말하는 이청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이를 악물 뿐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문득 울컥한 서문윤이 입술을 열어 거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분께서는….”
그러나 그는 입술을 열다 말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머리는 새하얗게 변모하고 숨결은 종잡을 수 없이 거칠어진 후였다. 떨리는 시선이 그와 정반대로 차분한 시선과 공중에 맞부딪치고 있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 시간이 흘렀다.
‘이걸 어떻게….’
서문윤의 얼굴에 아득함이 스치고 있었다. 그가 입술 밖으로 내뱉으려 한 것은 황재천과 오왕암살에 관한 일이었다.
오왕암살을 주도한 이가 황재천이며, 검설린이 그를 보고받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을 입술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제 말을 묵묵히 기다리는 이청은을 얼어붙어 바라보던 그는 결국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아, 아무래도 이건 아닌가 싶습니다.”
각고의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이상하단 걸 알지만.’
입술 사이로 억눌린 숨결이 흐르고, 선택의 무게가 서문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청년의 머릿속에는 실타래가 얽힌 듯한 복잡한 생각이 가득했으니 오늘 벌어진 사건의 무게를 그가 아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힘겨운 얼굴을 한 서문윤을 잠시간 바라보던 이청은이 문득 말을 내뱉었다.
“양심의 가책을 품고 있느냐?”
바로 서문윤의 얼굴을 무너트린 말이었다.
“그런,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목구멍에서 치솟는 비명을 삼키며 그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은, 그것은 새삼스러운 말이지 않나?
서문윤은 이청은의 손을 잡고 밀회를 이어나간 때부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미래를 말하는 검설린을 배반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서문윤이 새삼스럽게 망설이는 이유, 이청은의 손을 잡은 것을 후회한 이유는 말이다.
만약 그저 죄책감을 느낀다면 바로 오왕암살과 관련된 사건을 태자에게 고변했을 것이다.
허니 그가 박쥐처럼 구는 까닭은 실로 따로 있었다.
“그분, 그분은 이제…….”
창백하게 질린 얼굴. 잠시간 망설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굳은 얼굴로 이청은을 노려본다. 그러곤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창고 안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 대당의 최후의 보루나 다름이 없잖습니까.”
적막이 감돈 때였다.
서문윤은 암담하고도 우울한 얼굴로 이청은을 응시했고, 이청은은 그 무언의 압력을 주는 시선에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켜나갔다. 그의 옆에 선 호위 좌장의 얼굴이 심히 굳어져 있었으니 그것은 자리한 세 인물이 모두 그 말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검남 절도사가 최후의 혈전을 택했으니 이제 전쟁을 대비해야 할 때다.
허나 검설린이 아니면 누가 군대를 이끌 수 있단 말인가?
검설린은 적어도 토벌전이 마무리되기까지는 건드릴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정말 대역죄를 저질렀다할지언정 그 누구도 그것을 추궁할 수 없으리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지어질 때까지는 검설린과 대당은 사실상 한 몸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태자의 줄을 잡은 무장들 또한 오후에 그 난장에 굳은 얼굴로 입술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쟁을 떠나 토벌의 승패는 국운을 결정지을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부사령관의 손에서 병부를 빼앗자는 말을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의형이 실각한다면…… 지금 토벌은커녕 조정 또한 무사치 못하잖습니까?”
게다가 이미 황제는 신용을 잃은 상태였고, 민심은 흉흉했다.
그는 두 차례의 지옥 같은 난을 걸쳐 어지러워진 나라를 돌보지 않고 권세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 이미 나라에는 수차례의 혈풍이 불어 닥친 후였다.
동궁사변이 지난 후에 사람들 중에 황가의 불행을 비는 이들이 많다. 점심에 있었던 장수들의 불손한 말들은 뜬금없는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헌데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과연 대역죄의 혐의를 쓴 영웅의 실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치적인 감각이 없는 서문윤 또한 쉬이 그 파장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어. 황제도 하필 오늘 검남 절도사가 사신의 목을 벨 줄은 몰랐겠지. 칙사가 병영에 당도했을 때 그 소식이 알려질 줄은 말이야. 하지만 이미 상황이 글러먹었는걸. 차라리 오왕암살을 명시했다면 명분이라도 섰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억누른 한숨이 흘러나오고, 서문윤의 얼굴에 그늘이 스치고야 만 때였다.
‘조정에 명분이 없다.’
우연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잘 짜여진 판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실로 교묘할 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황제의 결정은 악수. 실제로 검남 절도사가 토번과 영합을 한 상태니…. 자칫하면 진나라가 멸망하고 난 후 이민족에 천하가 쪼개지던 때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것은 바로 중원이 흉노나 선비와 같은 이민족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반복되던 시기를 의미했다. 바로 한인(漢人)의 마음속에 깊은 각인을 남긴 난세 말이다.
‘사람들은 이민족에 나라가 넘어갈 위기에 황제의 손을 들어주려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기엔 황제의 인망은 너무나도 부족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이었다. 그러니 서문윤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그와 함께 평온히 살아가고자 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일 없이 은퇴하여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자 했어. 그러나 그것은 정녕 내 이기심에 불과하였는가? 도리어 내 선택이 천하를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 되어버렸잖아. 나는 그저 평화를 바라였는데도.’
서문윤은 검설린을 막기 위해, 혼란을 막기 위해 이청은과 손을 잡았으나 막상 돌아가는 상황이 그를 막는다면 나라가 무너질 상황에 이른 것이다.
지금 그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일인 걸까?’
차라리 일찍 그가 난을 일으키는 게 답인 걸까. 강서진과 황 숙부의 말처럼 그가 패권을 쥐는 것이 답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황실에는 명분도, 정리도, 정의도 없었다.
‘나는,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문윤은 망연한 얼굴로 이청은을 바라보았고, 침묵은 길게 흘렀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이청은이었다.
“그를 헤치려 함이 아니다.”
그것은 서문윤의 몸을 움찔하게 만든 말이었다.
실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곤 이청은은 다정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았고 손을 까딱이며 짤막한 말을 연이어 내뱉었다.
“이리 와.”
서문윤은 잠시간 망설였으나 순순히 이청은을 향해 다가가 그의 옆에 섰다.
이청은은 그가 제 옆에 오자마자 손을 뻗어 서문윤의 어깨를 감싸 쥐곤 몸을 기울여 그와의 간격을 좁혔으니, 스스럼없는 행동에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으나 곧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청은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고, 차분한 눈빛에서 서문윤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서문윤은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잘게 몸을 떨고야 말았다.
“널 내가 아낀 것은 알고 있을 거다. 이득을 따지지 않고 널 돌본 것도.”
그 담담한 말에 눈을 흔들던 서문윤이 곧 이를 악물며 답했다.
“……정말로 이득을 따지지 않은 게 아닙니까?”
“그건 네 판단이지.”
그 말에 서문윤은 아슬한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 판단이란 게 어려워 이리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다시 정적이 흘렀고 그 시간 동안 서문윤은 수없이 많이 갈등해야 했다. 반짝거리는 눈은 그를 차분히 바라보며 말을 기다렸고, 기나긴 침묵 끝에 서문윤은 갈라진 목소리로나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제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돌아온 것은 몹시도 가벼운 목소리였다.
“그것도 네 판단이지.”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 있어서 최악인 것임을 모르는 건가?
암울한 상황에 맞지 않게 태평한 듯한 이청은이 얄미워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억울한 듯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청은은 그에 바람 같은 미소를 지었으며 서문윤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내리고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동궁사변 때 결심했다. 형님이 비상하여 하늘로 날아가는 응룡이라면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린 와룡이 되어 언젠가 비상할 때를 기다리겠노라.”
“…….”
“네가 만약에 나를 믿는다면.”
“…….”
“그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있느냐.”
서문윤의 얼굴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시선이 청년의 얼굴을 쬐고 긴장이 가득한 시간이 지났다.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서문윤은 떨리는 입술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
“전하의 계획을.”
“……”
“일단 설명해주십시오.”
이청은의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때였다.
“물론.”
“…….”
“허나 너도 알고 있겠지? 여기서부턴 너도 이제 발을 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서문윤은 눈을 감았고, 이청은은 그에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밤중에 소란이 일었다.
무거운 얼굴로 병영을 걷던 서문윤이 흠칫한 때였다.
‘뭐지?’
그러곤 그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산을 등진 병영의 밤은 몹시 어둑했으나 지금 이 순간 밤은 낮처럼 환했으니 그것은 병영 곳곳에 켜진 횃불이 어둠을 밝힌 탓이었다.
‘이게 무슨…?’
서문윤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 때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병영은 왈칵 뒤집힌 듯했고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를 예감한 서문윤이 그 자리에서 망연히 서 있던 중 문득 두 눈을 빛내며 자리를 박차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한 곳은 바로 검설린의 막사였다.
“의형.”
“칙사가 도망쳤어.”
서문윤이 막사에 발을 디딘 순간 내려앉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것은 서문윤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으며, 그를 잠시간 공황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고개를 든 서문윤이 새하얀 내의 위에 경갑옷을 갈아입고 있던 검설린을 마주하고 숨을 멈췄다
칙사.
칙사라니?
아침에 있었던 분란의 주인공. 군영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자의 뜬금없는 소식에 서문윤은 이성을 다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수족이 도망칠 이유가 무에 있으며, 그럴 수가 있는 일이냔 말이다?
그런 서문윤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갑옷을 잇는 가죽 끈을 고쳐 매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내가 분란을 일으킬 줄 알았나 보군. 두려움에 차서 꼬랑지를 말고 병영을 몰래 빠져나가고야 말았어. 방금 전에 병사들이 발견해서 추격하라 명했다. 하지만 잡기는 어려울 것 같군. 서문 망루에서 이미 그가 관문을 벗어났다는 깃발을 보았다 전했어.”
“…….”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담이 작은 사내야.”
말이 끝날 때까지도 서문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넋을 잃고 있는 그를 검설린은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문득 서문윤에게 성큼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뺨을 손으로 꽉 쥐었다.
커다란 손은 서문윤의 몸을 위로 올렸다가 내려놓곤 뺨을 가볍게 툭 건드리고 나서 물러났다. 그것은 서문윤의 긴장을 풀려는 듯 장난기가 서린 것이었으나 그에 휘둘리는 서문윤의 얼굴은 얼어붙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게, 그게.’
아니, 그는 오히려 검설린의 그 행동에 등골에 오르는 소름을 느낄 뿐이었으니 그 순간 입술을 벙긋거리던 서문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목구멍에 감도는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그게 말이 돼?’
검설린은 실로 간단하게 말을 했으나 그 짧은 말에서도 모순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실로 할 말이 너무 많아 입이 막힐 지경이었으니 그리하여 서문윤은 입술을 벌린 채 짧은 시간 침묵을 지켰고, 제 앞에서 눈에 띄게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는 서문윤을, 검설린은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에 병영을 몰래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결국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한 목소리는 끝이 잘게 떨리는 것이었다.
검설린은 그 말에 몸을 멈칫하곤 잠시간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으니 저를 그림자로 덮은 사내의 얼굴을 희미하게 굳어진 얼굴로 바라보던 서문윤은 문득 귓전에 내려앉은 말에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그래, 말이 안 되지. 군령이 서지 않아.”
그리 말을 하며 검설린은 묘한 표정을 지었고, 이윽고 담담한 말을 내뱉어 서문윤의 몸을 움찔거리게 했다.
“유왕인을 벌해야겠다. 그가 군무를 총괄했는데 이렇게 방만하게 굴 수가 있어? 10년 전이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방비를 하지 못해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꼬리를 자를 것도 없이 그가 책임져야지. 안 그래도 못마땅했는데, 잘됐어.”
“…….”
“이청은도 이번 일에선 날 말리지 못할 거다.”
유왕인은 부총관의 이름이었고, 출병식 날부터 소란을 일으킨 서문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자였으며, 또한 태자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서문윤은 자연 검설린을 응시하는 두 눈을 흔들며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태자전하의 한 팔이 잘리게 된다고? 그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고? 칙사가 도망을 치면, 그래서 의형이 또다시 황제의 질책을 받는다면 도리어 태자께서 곤란해지신다. 이렇게 그만 불리하게 상황이 돌아간다니?’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검남전을 앞둔 군영에서 어떻게 칙사가 도망칠 수가 있어? 위협을 당한 그가 이렇게 수도로 가면 무슨 말을 할지 뻔하잖아. 황제에게 과장해서 말을 전해다 바칠 게 뻔한데. 수족 같은 어전 태감이 수모를 겪은 것을 알고 그가 이성을 차릴 수가 있을까.’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게다가 지금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그런데 그건 뭡니까?”
문득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검설린은 그 말에 서문윤을 응시했고, 이윽고 입술을 열어 느릿한 말을 내뱉었다.
“뭐가?”
서문윤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간 머뭇거렸고 검설린의 안색을 잠시간 살폈다. 그는 서문윤의 반응이 실로 의아한 듯 굵은 검미를 꿈틀거리고 있었으니 침묵은 길게 이어져 나갔고, 그리고 그 끝에 서문윤이 마침내 결심한 듯 딱딱히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왜 의형에게서 피비린내가 납니까?”
장막 안에 적막이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내게서 피비린내 나는 게 뭐가 문제야.”
침묵을 깨고 그의 입술 밖으로 느릿하게 흐른 말이었다. 그 말에 서문윤은 희미하게 얼굴을 굳혔고, 검설린은 의아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항상 그것을 달고 다녔지 않는가? 난 죄인의 자식이었고, 장수였고, 의원이었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는다는 듯 검설린은 몸을 움직였고 서문윤의 옆을 지나가려 했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
그러나 천막 밖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의형의 얼굴에서 살기가 묻어 나옵니다.”
잠긴 목소리에 천막을 걷어 올리던 손이 멈칫한다.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창백한 얼굴로 검설린의 굳은 등을 바라보았고,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절 속이지 마십시오.”
그가 저리 부드럽게 말을 흘리는 게 더욱 이상했다. 서문윤은 오히려 그의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태도에서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의형의 개같은 성질머리에 역정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
얼굴을 와락 구기며 제게 헛소리 말라 지껄이는 말이 나왔다면 차라리 헛짚은 게로구나 생각할 텐데, 이 보통 사람 같은 화술은 검설린에게서 나올 수 없는 실로 수상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분명 뭔가 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사태의 심각성을 확신하고 심히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굳은 얼굴로 검설린을 노려보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 들었다.
“전 의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정말?”
그러고였다. 짧고 높은 냉소가 천막을 울리고 돌연 검설린이 무섭게 가라앉은 얼굴로 몸을 돌려 서문윤을 향해 성큼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온 것은.
‘어, 어?’
서문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빠져나가고야 만다. 그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몸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고, 제 앞에 순식간에 선 사내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확인한 후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원래 검설린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던 이였고, 그를 경외하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 서문윤은 장한성 이후로 처음 검설린을 향해 두려움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너.”
검설린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서문윤의 앞에 섰을 뿐이며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곤 침착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이청은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지?”
그러나 서문윤은 그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고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얼음이 되어 검설린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고, 평온한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의 오싹함을 받고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뭔가.’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희미한 살기가 제 얼굴을 따끔하게 찌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설린은 심유히 가라앉은 눈으로 서문윤의 안색을 살피는 중이었고 서문윤은 그 기운의 출처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
침음을 삼키며 서문윤이 침묵 끝에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말, 말 못 합니다.”
“…왜?”
그 말에 서문윤은 입술을 다물고 답변하지 않았다. 냉소가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서문윤, 서문윤.”
검설린의 입술에서 아득한 한숨이 튀어나온다. 서문윤은 제 어깨에 돌연 내려앉은 손길에 흠칫 놀라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굳은 얼굴로 검설린을 보니, 그는 슬쩍 미간을 좁히며 서문윤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널 처벌하라는 사람들의 말을 얼마나 막고 다니는지 알기나 해?”
그 말은 서문윤을 은근히 돌려 책망하는 말이었고, 언뜻 다정함이 서린 것이었으나 서문윤은 긴장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의형은…….’
무언가를 깨닫고 있었다.
‘날 의심하고 있구나.’
서문윤은 검설린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침착하게 저를 바라보는 저 눈에 서린 차가운 냉기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타인이라면 눈치를 채지 않을 그 가식적인 가면을 알 수 있었다.
서문윤이 알던 검설린은 지금의 그가 아니었으므로.
마른침을 삼키고, 서문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변할 뿐이었다.
“저를 믿으시잖습니까.”
검설린의 몸을 멈칫하게 한 말이었다.
“제가 당신을 믿는 것처럼…….”
“…….”
“…절 믿어서 곁에 두고 있는 거라면.”
“…….”
“제가 의리를 지킬 수 있게, 절 끝까지 믿어주십시오.”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이제 그것은 양심을 벗어난 영역의 일이었다. 서문윤은 지금 그의 선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죽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옳은 선택을 할지의 문제.’
그러니 서문윤은 태연스럽게 거짓을 말하며 그를 기만할 뿐이었다.
“아니면 저를 이 자리에서 내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래, 널 믿지.”
그러곤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담담한 말. 고요한 눈으로 서문윤을 말없이 응시했던 검설린이 정적을 깨고, 서문윤은 자꾸만 허리춤으로 나가려 하는 손을 억지로 주먹 쥐며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의형은 적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해 서문윤은 무거운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정말 그럴까?’
아니, 사실은 마음속에는 미혹이 들고 있었다.
“널 믿어야만…….”
그런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여운이 남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고, 잠시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 끝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와 왕래하지 마라.”
서문윤의 귀가 움찔거리고, 그의 시선이 잠시 흔들거리고야 만다. 검설린은 조소를 흘리며 서문윤을 차갑게 바라보았고,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허리를 빳빳이 세우곤 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 또한 이청은의 품성을 알고 있어. 그가 결백하단 것도, 동궁사변은 오로지 그저 황제의 뜻이라는 것도.”
서문윤의 얼굴에 물결이 친 순간이었다.
결백을 알고 있다고?
그동안 이청은과 검설린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했던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호쾌한 인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서문윤의 귓전에 이윽고 조소와 함께 말이 떨어지고야 만다.
“하지만 알면서도 나는 그를 증오하게 되지. 황제에게는 아들이 둘밖에 없었으니, 이청은은 사람들의 구명을 할지언정 목숨을 결코 잃지 못했다. 단지 황제의 신임을 잃을 뿐…….”
“…….”
“그런데 그는 무얼 했지?”
서문윤은 그에 바로 답변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스친 것은 바로 훗날을 대비했다던 이청은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서문윤은 사실 그 말을 들을 때 동감을 하기보다는 검설린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전하는 아무리 불이익을 당해도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어. 그는 이청융을 대신할 유일한 황실의 적자였으니까.’
아무리 포장을 잘해보아도 이청은이 그때 유독 소심하고 비겁한 면모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네가 이청은과 날 화해시키려 한 것을 잘 안다. 허나.”
“…….”
“……이제 일은 그렇게 무마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서문윤이 진정 원망스러운 것은 검설린의 말에 부정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심정적으로, 이성적으로 기울어지고야 마는 마음이었다. 작은 침묵 끝에 담담한 말이 흐른다.
“날 믿는다 했지?”
서문윤은 그 말에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서문윤을 검설린은 뜻을 알 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짧은 침묵 끝에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날 끝까지 믿는 게 좋을 거야.”
그러곤 그는 서문윤의 어깨에 쥔 손을 떼고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천막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오왕암살!”
그것은 서문윤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악을 쓰는 듯한 고함이었다.
천막을 나서려던 발걸음이 우뚝 서고, 서문윤이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서신을… 궁금해서 봤는….”
그러고였다. 천막을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이 흘러나온 것은.
“오왕은 북란 당시 피난 온 백성들에게 가축을 징발했다가 격분한 그들의 손에 걸려 회흘에 팔아넘겨졌다! 그 일을 수습하려 수많은 병부의 인재들이 죽었고, 그들 중에는 나 또한 아는 자가 있었지……. 네가 선배라 꼬박꼬박 부르는 이중환 그자 또한 그 책임을 지고 병부에서 물러났고! 그 당시 대당 제일검이라 불리던 인물이 말이다!”
검설린은 몸을 돌려 서윤을 흉험한 눈으로 노려보았고, 광소를 흘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보니 네 마음에 작은 미혹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해결해주어야지.”
그러곤 그는 탁상 향해 나아가 그 한켠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장부 중 어느 한 뭉텅이를 잡아 서문윤을 향해 던졌다. 제 가슴을 툭 치고 떨어지는 책을 받아 든 서문윤이 당황하여 머뭇거리다가 침을 삼키고 그것을 펼쳤다. 긴장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은, 그리고 그 서두를 읽는 순간 당황으로 물들고야 말았다.
‘북영상단 하북지부 장부?’
여기서 갑자기 상단이 왜 나와?
생각지도 못한 문장에 얼이 나가 있던 서문윤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설린이 장부를 던진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장부들이 알려주는 말의 의미 또한.
“이, 이건.”
서문윤의 얼굴이 차츰 굳어진다. 앞장을 넘긴 손이 굳은 채로, 얼어붙어 장계를 살피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다음 장을 놀려댔다. 종이가 팔랑거리는 소리가 천막을 울리고, 검설린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마지막 종이를 넘겼을 때 서문윤은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인 채 검설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냉혹한 눈으로 바라보며, 검설린은 그 순간 느릿하게 입술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
“하동에서 그는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지.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니 강남에서 쌀을 사들여 북방에서 미곡을 팔았다. 장한성 사건으로 거진 독립한 하동에는 대상들이 오가지 않아, 같잖은 돈놀이에 민생이 좌지우지되지. 그런데 오왕의 상인이 하동의 쌀값을 세 배를 올렸다는군!”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냉소를 다시 한 번 흘리곤 서문윤을 향해 성큼거리며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을 커다란 손이 덮고, 검설린은 그 순간 아득한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서문윤의 입술에 건조한 입술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잠시간 시간이 흘렀고, 서문윤은 눈을 내리깔고 떨리는 숨결을 내뱉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삼켜야만 했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입술이 떼어지고 흐른 부드러운 목소리. 서문윤의 목소리는 침묵 끝에 잘게 떨리는 것으로 돌아왔다.
“……황 숙부는 당연한 일을 했군요.”
그 말을 내뱉을 때 서문윤의 얼굴은 마치 횡액을 당한 자의 것마냥 창백했다. 실로 혼란스러운 일이었으나, 눈앞이 깜깜해질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서문윤은 이 순간 오왕암살이 옳은 일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흘과 하동이 극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다지만 수년 동안 전쟁을 해왔고 아직도 분위기가 험악한데…… 게다가 지금은 내전 중이잖아.’
보급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사실 보급의 절대적인 열악함은 명장 서넛 명이 달려와도 막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병가의 당연한 이치였고 당장에 서문윤은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의 전장이 얼마나 열악하고 끔찍한지 경험해보았다.
‘전시에 미곡의 가격을 올리는 일은 참수로 처벌한다, 허나….’
서문윤은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당장에 황실에 마땅한 성인 사내가 없는데 황제가 그를 내버려두겠어!
그의 귓전에 이윽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내 결백을 믿느냐?”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은 아스라한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황 숙부는,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그 말을 내뱉곤 서문윤은 눈을 감았고, 숱이 많은 속눈썹을 잘게 떨며 잠시간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곤 그 끝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의형이 옳습니다.”
“…….”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짙은 속눈썹이 열리고 암담함이 자리한 눈이 허공에 드러났다.
잠시간 검설린과 서문윤은 고요한 눈을 마주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천막 밖에서는 혼란에 가득 찬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왔으나, 한순간 그들은 그것을 듣지 못했고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무얼 하고 있을까요?”
침묵 끝에 흘러나온 묵직한 말에 검설린은 잠시간 망설임 끝에 답변할 뿐이었다.
“넌 항상 답답하고 바른 길을 가지.”
그 말을 내뱉곤 검설린은 서문윤의 어깨를 한 번 꽉 쥐었다가 풀어주었고, “그런 네가 부러웠다.” 짤막한 말을 흘려 서문윤이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그의 부드러운 말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거릴 때였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몸을 가늘게 쬐었던 살기를 풀고 평소와 같이 무심한 표정을 지었고, 몸을 돌려 천막 밖으로 나가려 들었다.
이번에는 서문윤은 그를 잡지 못했고, 검설린은 천막을 빠져나가기 전 단 한마디 말을 내뱉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해서 말하지.”
바로 서문윤의 눈을 흔든 말이었다.
“이중환은 오왕암살을 알고 있었다.”
“예?”
그 순간 화들짝 놀란 서문윤이 멍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고야 만다. 천막을 손으로 걷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묘했다. 그는 잠시간 서문윤의 얼어붙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조소를 흘렸고, 한마디 말을 끝으로 망설이지 않고 천막을 빠져나갔다.
“아니, 그걸 우리에게 조건으로 삼았지.”
펄럭거리는 천막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망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뿌려진 충격에 휩싸여 그는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끝에 경악에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뭐…… 지금 뭐라고?’
그 순간 서문윤의 뇌리에 스친 것은 바로 나무 아래 종이를 태우고 있던 이중환이었다. 쓸쓸하고도 어딘가 섬뜩하기까지 한 고요한 얼굴로 재를 날려 보내던 그 모습.
…그게 설마 지전이 아니라면?
마음 한켠에 바로 드는 서늘함에 서문윤은 몸을 부르르 떨며 그 자리에 기나긴 시간 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칙사는 결국 수도로 도망쳤고, 그 초유의 사태에 병영은 뒤집어졌다.
“억울합니다, 저는, 저는!”
관문의 방비를 책임지던 부총관은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그를 감싸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위해 말을 할 겁니까?”
검설린의 물음에 이청은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으니 그것은 그가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많은 것이 뒤바뀌었다.
부총관은 손이 묶여 감옥에 갇혔고, 이청은은 제 미진함을 깨닫고 검설린에게 병권을 완전히 넘겼다. 사람들 중에서는 검설린을 아예 사령관이라 부르는 이들이 많았고, 이청은에게 보고를 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모두가 군령을 어긴 행위였으나 그에 신경 쓰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친황파, 이청은에게 복종했던 사람들마저 입술을 다물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앞에 들이닥친 검남전을 걱정한 탓이었다.
“일단은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
이청은이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의 옆에 항상 자리하는 문 대주 또한 착잡한 표정을 지을 뿐 그 말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
“어쩌겠어, 우리는 이미 적폐인데.”
그 말에 문 대주는 발끈한 듯 이를 악물었으나 결국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이제는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잠자코 침묵하던 서문윤이 내뱉은 말이었다.
“너무 경계가 삼엄해졌습니다. 그리고 의형도…… 의심을 하더군요.”
“……그가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
한숨을 내뱉으며 이청은은 머리에 두 손을 대곤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고, 서문윤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고요한 시선을 서문윤은 그저 담담한 얼굴로 흘려 넘길 뿐이었다. 잠시간 시간이 흘렀고, 그 끝에 이청은은 몸을 바로 잡으며 서문윤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검남전은 승리로 끝날 거다.”
담담한 목소리로 흐른 말이었다.
“검남 절도사는 야망은 크지만 겁이 많은 인물이지. 그가 토번의 사람을 끌어들이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도박을 벌이는 건, 누군가의 입김이 분명히 들어갔기 때문이야.”
“…….”
“이건 검설린의 수법은 아니지만…… 강서진은 이런 암약에 능하지.”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검남전은 병부를 내 손에서 빼앗기 위한 미끼였다. 아마 강서진은 검남 절도사에게 항복해도 그의 일족이 사면되지 않을 거란 헛소문을 퍼뜨리며 겁을 주었겠지. 허나 전면전에는 승산이 없어. 아무리 검남이 변방이어도 그네들은 토번보다 한족의 정체성이 더 강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장안사준은 지는 싸움은 하지 않지.”
짤막한 숨이 흐르고, 이청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남전이 승리로 끝나고, 이 나라를 떠나라.”
그러곤 그는 서문윤을 향해 작은 도자기 병과 서신을 들이밀었다. 서문윤은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고 그 두 물건을 손에 쥔 채 이청은을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확고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심력이 강한 사내라도 사흘은 쓰러질 약이다. 서신에는 네가 추격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지. 나를 믿느냐?”
서문윤은 잠시간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문 대주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든 반응이었다.
“너, 이!”
흥분한 듯한 그의 말을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가 끊고 적막을 자아냈다.
“허나 제게는 방도가 보이지 않군요.”
그리 말을 하곤 서문윤은 쓰게 웃었고 이청은은 그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고달픈 삶이지.”
그리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손에 쥔 도자기병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숨을 느리게 내뱉고 천막을 걷어 밖을 나오니 햇살이 따사로웠다. 잠시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어느 순간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길 한가운데서 선 채 잠자코 서문윤을 바라보는 이중환이 있었다. 굳어진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고 서문윤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문득 입술을 열고 말을 묻고야 말았다.
“왜 그리 보십니까?”
그리고 침묵 끝에 흘러나온 그의 답변이었다.
“네 의형이 널 정말 골치 아파하겠구나.”
깊은 한숨이 연이어 흘러나왔고, 그에 서문윤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이중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중환의 피로한 얼굴을 바라보며 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가장 껄끄러운 자이지.’
음울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이중환과 마주하며 서문윤은 알쏭달쏭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이청은과 검설린은 수단만이 가려져 있을 뿐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하기라도 하지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청은과 대립을 하면서도, 검설린과 악연으로 얽힌 자의 수하. 그러면서도 한때 대당 제일검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무력을 지닌 사내.
서문윤은 그와 검을 마주 댄 적이 있었고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하며 그가 얼마나 뛰어난 무인인지 깨달았었다. 그는 자신과 격차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검사이다. 심지어 서문윤은 검설린이 그의 기습을 받는다면 무사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검설린과 운표선은 명성이 높은 장안사준이고, 서문윤이 아는 이들 중에서 대적할 자를 꼽을 수 없을 만큼 특출난 이들이었음에도, 심지어 익위대장인 문 대주조차 비교할 수 없는 자들이었음에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히 위험한 자일 텐데….
검설린이 내뱉었던 의심스러운 말들, 그가 이곳에 잠입한 이상한 정황들을 묵묵히 회고하던 서문윤의 얼굴에 어느 순간 묘한 빛이 서리고야 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적으로 생각되지 않지.’
착잡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바라보는 눈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 분명히 경계해야 할 대상임에도, 서문윤은 그의 앞에 설 때 종종 긴장을 풀고 친근하게 그를 대하고 있었다.
고우군에게 잡혔을 때는, 그저 상황을 제게 유리하게 만들려 선배라 칭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과 그는 정말 선후배 사이인 것마냥 친근하게 서로를 대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서문윤은 이중환이 검설린을 적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했던 말을 근거하는 신뢰했고, 그가 저를 걱정하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묘한 느낌을 받곤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어. 허나 만약 몸을 뺄 거라면….”
“선배는 누구의 편입니까?”
허면 저 정이 많은 사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얼까?
“……”
저의 말을 끊은 서문윤을 이중환은 음울한 얼굴로 바라볼 뿐 답변을 내뱉지 않았다. 덤덤한 말이 이어졌다.
“의형은 선배에게 조건을 걸었다 했습니다. 또 선배가 그 사실을….”
“오왕 암살은 이청은도 알고 있지.”
제 말을 끊은 것을 보복하듯 칼처럼 서문윤의 말을 자르며 이중환이 서문윤을 음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바람에 낙엽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윤은 이중환의 날카로운 시선을 흘려보내지 않고 당당히 마주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이중환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곤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를 너무 무시하지 마라.”
그러곤 침묵 끝에 몸을 돌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고, 길에는 태양빛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그가 누구입니까?”
이중환의 말에 아리송함을 느끼곤 서문윤이 그의 등을 바라보며 소리친다. 그러나 이중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서문윤은 그에 한참을 주홍빛 노을이 가득한 길에 망연히 서 있어야만 했다.
* * *
서문윤은 그 전날 밤에 꿈을 꾸었다.
바로 서문세가에서 검설린과 같이 한 이불을 덮고 얘기를 나누던 순간의 일들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작은 개를 키우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약 때문이 아닌 그저 애정으로 몸을 섞었고, 서문윤은 검설린의 팔에 턱을 대고 누워 눈을 깜빡거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둥근 창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어 검설린의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것은 사내의 온화하게 변모한 얼굴을 어둠 속에서 드러냈다. 욕을 달고 다니던 사내는 언제부터인가 그를 미간을 찌푸리거나 찡그려진 얼굴로 바라보지 않았고, 가끔은 평화가 자리한 부드러운 얼굴로 서문윤을 설레게 만들었다.
“개를 키우고 싶었어요. 음, 무과에 급제하고…… 수도로 올라가기 전에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애가 떠돌이 개에 물려 죽었다고 서신을 보내셔서 울어버렸어요. 대주님에게 혼이 났는데……”
그 고요한 눈에 감춰진 따뜻함에 마음이 들떠 그렇게 서문윤은 한참을 검설린에게 신이 나게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고했던 것이다.
“그래.”
그리고 그 끝에 검설린은 손을 뻗어 서문윤의 머리를 쓸어 넘기곤 작게 속삭였다.
“그래 네 뜻대로 해.”
그리 말하는 사내의 두 눈에는 차가운 얼굴로도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 나와 있었으니 그 순간 서문윤은 잠시간 세상이 멈춘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었고,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한참을 얼어붙어 있어야만 했다.
숨결이 섞이는 가까운 거리가 갑자기 몹시 부담스럽게 어색했다.
냉소적이었을 때도 수려했던 검설린의 얼굴은 가까이에서 온화한 빛이 흐르고 애정이 묻어 나와 더욱 아름답게 보였고, 이마를 쓸어주는 손길은 첫 만남 때의 그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했다.
아직은 그의 그런 모습에 익숙하지 않았다.
“개, 개는 안 싫어하세요?”
그리하여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고, 검설린은 유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내가 왜 싫어할 거라 생각하지?”
서문윤의 얼굴을 어색하게 만든 말이었다.
“그냥, 그럴 것만 같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시선을 슬쩍 피하려다가 다시금 침을 삼키고 그 고요한 호수와 같은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이 웅얼거렸다.
“말이나 매는 좋아하실 것 같은데, 개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뭔가 작고 순한 것들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뜻밖에도 피식 잔웃음을 흘리며 답변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싫어하면 너와 이리 있진 않겠지.”
바로 서문윤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잠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던 서문윤은 검설린의 담담한 얼굴과 마주하고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확 붉힐 수밖에 없었다.
‘작고…… 순한 것들…… 나랑 이렇게 있지 않겠지…!’
갑자기 훅 들어온 말에 당황하던 서문윤의 귓가로 이윽고 말이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좋아하게 되었구나.”
그리 말을 하며 검설린은 제 팔에 머리를 뉘인 서문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서문윤은 제 뺨을 부드럽게 덮는 입술에 문득 몸을 굳혔다가 저도 모르게 웃고야 말았다.
“의형.”
그러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검설린과 눈을 마주했다. 유리처럼 투명한 눈이 서문윤을 담고 있었고, 그에 그는 한참을 사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간 시간이 흘렀고, 그 끝에 서문윤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저희, 장한성에서 살아남았어요.”
바로 검설린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숨이 멈추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서문윤은 얼굴을 희미하게 굳힌 검설린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의형은 신념을 지켰고요.”
“…….”
“…하지만 저 또한 의형께 제 신념을 인정받았습니다.”
서문윤은 마주 닿은 검설린의 몸이 굳어지고야 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또한.
답변은 잠시간 침묵 끝에 나직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래.”
말을 들은 서문윤이 조용히 웃으며 검설린의 이마에 이마를 대곤 속삭였다.
“사람은 선하게도 살아갈 수 있어요.”
“……그래.”
“세상은 살아갈 만하고요.”
“…….”
“그분은 아마 의형께 그 말을 전달하고 싶어서…… 유언을 남기신 걸 겁니다.”
검설린은 끝끝내 답변하지 않았고 그러나 서문윤은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의형에겐 앞으로 남은 삶이 있어요.”
서문윤은 검설린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검설린을 바라보니 그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열린 입술 사이로 흐른 말들.
“그리고 의형이 갖지 못했던 행복이 아직 남은 삶에 있을 겁니다.”
“…….”
“제가 약속할게요.”
“……”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떠는 사내의 이마에 이마를 마주 대곤 서문윤은 그렇게 한마디 말을 계속해서 되뇌곤 문득 시선을 내리깔곤 검설린의 눈과 눈을 마주했다.
그곳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정을 담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희, 정말 행복하게 살아요.”
잠에서 깨어난 서문윤이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일장춘몽이었다.
* * *
그게 바로 1년이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그때는 정말 행복한 미래만이 남은 줄 알았는데.’
허탈히 웃을 뿐이었다. 장한성과 같은 인세지옥을 벗어나 앞으로 순탄한 일만 남은 줄 알았다. 1년간 유언을 지키기 위한 의행을 벌이면서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의형의 원수에게 납치를 당하고, 일국의 재상이 살해당하는 꼴을 보고 역모니 뭐니 하는 일에 얽힐 줄은 몰랐지.
그리고 저는 지금 폭풍의 한가운데 같은 미래를 꿈꾸었던 의형과 얼굴을 마주하여 함께 서 있었다.
쓴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모든 게 아리송하지……. 또 어느 게 옳은지도 모르고.’
그저 아는 것은 검설린이 무언가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서 저는 배제되었고.
많은 생각을 했고, 또 많은 갈등을 겪었다.
‘허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움직여야 해.’
그리고 그 끝에 서문윤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저 손을 놓고 넋을 잃고 방관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강서진은 마치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부나방 같았고, 검설린은 그에 동조하는 듯했다. 혼란한 상황에서 방관만 해서는 그를 막을 수 없다. 또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쟁취할 수 없다.
그들이 서문세가에서 같은 침상에 누워 도란도란하게 얘기를 나누며 그렸던 평온한 나날을 현실로 만들려면 그런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지금은 그저 손을 놓고만 있고선 평화를 바랄 수 없는 시대였으니까. 선하게 사는 사람이 일찍 죽고, 악랄한 이가 칭송을 받는 난세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세상에서 저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더욱 열심히, 격렬하게 저를 둘러싼 상황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새겨야 할 점.
서문윤은 묵묵히 병영을 걸어 나갔다. 평소에 사람들은 서문윤을 바라보며 뒷말을 하곤 했으나, 지금 그들은 평온한 얼굴로 길을 가로지르는 서문윤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검남이 마지막 전장이 된다고? 그 얘기를 내가 몇 번을 들었는데.”
“아, 뭐 팔기린께서 계시니 어찌 되겠지. 지금까지 다 이겨온 것을…….”
“그런데 칙사가 쫓겨났잖아.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데?”
“……어쨌든 더 전쟁은 싫어.”
귓가에 들려온 얘기를 들으며 서문윤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제가 원하는 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서문윤과 검설린이 원했던 평온한 미래는 바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는 때. 그저 안락한 집으로 귀환하여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 평안한 일상 안에서 가정을 일구고 생존이 아닌 다른 미래를 꿈꾸고 싶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람의 욕구였고,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쟁취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의형만을 살리려 했지. 그저 우리의 미래만을 꿈꾸면서…….’
검설린의 막사 앞에서 서문윤은 잠시간 들어가기를 망설이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나 한 사람만을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미래가 그에게 달려 있구나…….’
어떤 게 올바른 길일까.
어떤 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숨이 멈추고, 서문윤의 손이 천막을 그 순간 느릿하게 열어젖혔다.
‘……어떤 길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저 같은 사람이 뭐라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남이 들으면 우스운 일이었으나, 서문윤은 그 순간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제 선택이 천하의 안녕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걸 알고 난 서문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타인과 나의 행복을 동시에 쟁취할 수 있는지.
이 난세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느릿한 말이 흘렀다.
“의형.”
천막 안의 기온은 계절에 맞지 않게 서늘했다. 서문윤은 고개를 들어 올려 담담한 눈으로 그 안에 자리한 사내를 응시했고, 이윽고 입술을 열어 명료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저도 이번에 의형을 따라.”
“내가 전장에서 널 완벽하게 지키리라 장담하지 못해. 난 최선을 다하겠지만, 전장에서 유시(柳市)는 한둘이 아니지.”
그리고 서문윤의 말을 끊은 칼 같은 목소리였다.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지고, 잠시간 그가 불안에 찬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전장에 데려가지 않겠다는 소리인가?
‘안 돼, 그건!’
심장 소리가 빠르게 뛰고 긴장이 고조된 그 순간, 서문윤은 참지 못해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으려 했으나 곧 입술을 다물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야 말았다.
“허니 너는 반드시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살아남아라.”
서문윤이 천막 안에 들어올 때 검설린은 그를 살피지 않고 가죽으로 만든 지도가 깔린 탁상에 손을 걸친 채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살피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고개를 들었고, 마치 하강하는 매와 같은 빛나는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하였다.
서문윤의 몸이 굳은 순간이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내려앉은 것은.
“거기에 내 운명이 걸렸으니까.”
서문윤은 그 말에 한참을 얼이 나가 답변을 하지 못했고,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어리숙한 답변이나마 내뱉을 수 있었다.
“아, 네, 네!”
“당장 갑옷을 입어. 녹수 군사! 전장에서는 나도 네 태만을 비호할 수 없으니까.”
“넵, 알겠습니다!”
“가서는 제발 미진하게 굴지 마라……. 사고도 좀 치지 말고!”
“넵!”
검남전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오후의 일이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간 성도 장안에서 벌어진 일.
그것은 바로 고즈넉한 정원이 인상적인 저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백색 유삼의 사내가 창문 앞 긴 의자에 좌정한 채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던 와중의 일.
“언젠가.”
돌연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고 무거운 목소리에 좌정을 하던 온화한 인상의 사내의 몸이 굳었다.
이어지는 말에 담담히 가라앉은 눈이 허공에 드러나고 그의 귓가로 굳은 목소리가 연이어 떨어져 내렸다.
“이 땅에 피비린내가 그칠 때를 보겠노라 맹세했었지.”
서늘한 말에 좌정을 한 사내, 강서진의 입술에 자그마한 미소가 띠어지고야 만다. 운표선의 눈은 그 순간 날카롭게 빛나고, 시간이 흘러 그의 입술 밖으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너는 지금 피를 불러일으키고 있구나.”
그 말을 끝으로 운표선은 강서진을 잠시간 노려보았고, 긴장이 조성된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의 우리들은 너무 순수했지.”
그리고 그 끝에 강서진의 입술에서 흐른 담담한 말.
운표선의 입술 끝이 비틀리고 눈이 한층 서늘하게 가라앉고야 만다. 강서진은 의자에 앉아 아주 희미한 웃음을 띤 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정원의 수풀 사이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는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한참을 응시했다.
“너는 어디까지 갈 거지?”
그러곤 그의 입술 밖으로 흐른 말에, 강서진은 마침내 높은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내가 어디까지 가냐고?”
그것은 바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흐른 호쾌한 말이었다.
“당연히 끝까지! 너는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선표야! 그날 이후 내게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날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숨을 붙이고 살아갈 자격이 없어.”
그 말을 내뱉곤 그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넓은 창의 틀을 잡았고, 몸을 기대어 운표선을 노려보았다.
음습한 살기로 점철된 얼굴.
“그건 설린이도, 너도 마찬가지다.”
그를 마주하며 운표선은 한참을 어둑한 얼굴로 말을 내뱉지 않았고, 강서진은 시간이 흘러 흥분이 사라진 고요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날 죽일 테냐?”
침묵 끝에 흐른 말에 운표선은 손에 쥔 검을 잡아 비틀며 답할 뿐이었다.
“……그래.”
그러곤 운표선은 강서진을 향해 빠르게 도약했고, 강서진의 입술 밖으로 그 순간 벽력과 같은 말이 떨어졌다.
“쏴라!”
화살이 하늘을 빼곡히 덮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