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망향(望鄕)(5) (24/31)

23. 망향(望鄕)(5)

파나립 박사의 수제자였던 아버지.

동서분란에 검설린의 집안이 휩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나립의 최측근이었으므로. 서역에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동파의 가장 큰 적이었다.

타다닥.

그리하여 불로 타오른 검가(劍家)의 저택. 잿더미로 남은 곳에서 마지막 남은 검가의 후손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오지 말랬잖느냐.”

그 말을 내뱉은 이는 붉은 옷을 입은 건강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한숨 섞인 말에 백의를 입은 창백한 낯의 미소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두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제 유년 시절의 끝을.”

“어째서? 악취미라도 있는 거야?”

“그래야지 제 분수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애늙은이.’

속으로 생각하며 적의의 소년이 볼을 긁적였다. 유심한 눈으로 폐허를 바라보던 소년은 시간이 흘러 고개를 돌려 적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참변을 당한 이 같지 않게 유리알처럼 맑았다. 적의 소년은 그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태자인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부황의 병사는 그를 베었을 것이다. 서슬 퍼런 칼날에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린 소년이 저리 담담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 황궁의 비사를 생각하고 수긍했다.

‘어린아이는 고난을 버티기 힘들지.’

그 순간 가슴에 스쳐 지나가는 쓸쓸한 바람에 적의 소년은 씁쓸하게 웃고야 말았다.

‘둥지를 잃은 새는 성장을 해야만 하는 법.’

그의 본디 품성이 어른스러운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패가망신한 상황에서 저 백의 소년은 현명해질 필요가 있었으니까. 적의 소년은 그 순간 깨닫고 있었다. 백의 소년이 저와 같은 길을 걸어간 것을.

담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저는 태자의 것입니다.”

그 말에 적의 소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왜 나의 것이지?”

“병사에 쫓기던 몸을 살려주셨으니, 후은을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우스운 말이었다. 빙그레 웃음을 흘리며 그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맑았으나, 동시에 공허했다.

‘부황.’

그 순간 입안에 감도는 씁쓸함에 적의 소년이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입술을 열었다.

“나는 시체를 가지고 싶지 않아.”

백의 소년의 눈은 고요히 그를 담고 있었다.

“난 대당의 태자다. 난 용봉만을 거느릴 뿐이다. 네 말은 은혜를 갚으려는 목적이지만, 나는 그 말에 귀찮음만을 느낄 뿐이야.”

“…….”

“너는 쓸모가 없다.”

그 말은 썩 매정한 것이었다.

빙그레 웃음을 흘리며 적의 소년, 태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백의 소년은 그의 말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태자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다.

‘황궁에서도 저런 자는 드물었지.’

태자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이였다. 선천적으로 사람의 심기를 읽는 데 탁월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가 방벽을 저리 세울 수는 없으리라. 태자가 그 순간 한숨을 내뱉었다.

소년은 마음을 잃은 것이었다.

느릿한 말이 울렸다.

“유모는 제게 살라고 말을 했지만 저는 지금 삶에 미련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

“제가 어찌해야만 합니까?”

태자는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비가 너를 망치고 부모를 죽였다.”

소년의 얼굴은 투명했다.

“내가 미우냐?”

그 말에 대한 답변은 간결했다.

“전하를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태자의 얼굴에 희디흰 미소가 흐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역정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그만!”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태자가 예민하게 눈썹을 치켜떴다. 태자는 귀인이다. 그를 호위하는 어림군은 이 자리에도 사람의 눈을 피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손으로 어림군의 등판을 막지 않았다면 대역무도한 말을 내뱉은 소년은 당장에 곤죽이 되었겠지.

소년은 그저 맑은 눈으로 태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태자는 깨달을 수 있었다.

“호위를 알아챘구나.”

죽으려 한 거군.

천하의 어림군을 자살용으로 써?

허탈하게 웃으며 소년을 바라보던 태자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침묵 끝에 말이 흘렀다.

“거짓말.”

소년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태자의 입에서는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네 눈에 증오가 보이지 않는다. 너는 선량하군.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어른도 원수의 자식을 앞에 두고는 멀쩡하지 않아.”

“저는 선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위기에도 병사를 가로막은 연유가 뭐냐?”

소년의 입술이 막혔다. 태자는 그를 지그시 보며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핏물로 물든 수도.

부황의 일에 내심 반대하고 있었으나 그를 입 밖에 낼 만큼 태자는 어리석지 않았다. 속앓이를 하던 태자가 선택한 것은 바로 동산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곳은 산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조그마한 구릉만이 자리한 곳이었으나 부지가 낮은 수도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사건에 휩쓸렸다. 산 입구에서 소년의 몸을 뒤지던 병사들이 수색 도중에 반역자 가문의 호패를 발견하고 칼을 뽑은 것이었다.

평소라면 분개하였을 태자는 어린 소년을 죽이는 무도한 일에 나서지 않았다.

서학을 뿌리 뽑겠다는 부황의 뜻이 완강하여 그에 반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씁쓸하지만 그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모후는 오래전 세상을 떠나 뒷배가 약했으니까.

“난리에 네 호패를 주은 아이가 죽으면, 넌 추격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덤불에 숨어 있던 소년이 뛰어나오지만 않았더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소년을 바라보며 태자가 웃었다.

“재주가 많은 자는 흔하다. 선량한 자는 흔치 않고.”

소년은 그 아이가 환란 중에 제 은자 주머니를 훔쳤노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어느 각오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병사가 칼을 치켜 들 때까지 소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태자는 칼이 내리쳐지는 순간 멈추라는 말을 내뱉고 소년을 살렸다.

“재주가 많은데 선량한 자는 기린이지.”

선량한 자는 가치가 있다.

하물며 칼을 눈앞에 든 소년의 눈은 몹시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다른 것을 다 떠나서 태자는 소년이 가여웠다.

“난 너를 거둘 거다.”

이 사태에는 저의 책임도 있다. 마음속에 욱신대는 죄책감을 삼키며 태자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기에 여자아이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자칫하다간 위험할 뻔했군.’

신분도 없는 소년이 저런 미색으로 세상에 나가면 어찌될 지는 뻔한 일이다. 착잡한 마음을 삼키며 태자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내 옆에 서려면 너는 용봉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네 이름이 무어라고 했지?”

“검설린(劍泄麟).”

그 말에 태자는 웃었다.

“역시 기린(麒麟)이군.”

죽음을 각오할 때에 내려졌던 구원의 손길. 대당의 태자는 뜻밖에도 검설린을 놀이동무로 임명하여 보호했고, 그와 같은 교육을 받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근본도 없는 자를 태자의 놀이동무로 받아들이다니, 제정신인가?”

그런 말들이 있었으나 태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안 돼요, 안 돼요! 아버지한테 들키면 전 죽습니다!”

“참으로 무정하구나, 표선아. 네가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나는 이 소년을 버려야 할 터인데. 그걸 원하느냐? 이 조실부모한 어린 소년이 험악한 세상에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아, 안 되는데…”

울먹거리는 운표선의 등을 떠미는 태자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떠나고 검설린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황궁의 노비라 한들….”

“나는 용봉을 원한다고 했어, 검설린.”

검설린은 그 말에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려면 좋은 교육을 받아야지.”

태자는 그 말을 내뱉을 때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 얼굴을 했다. 씩 웃음을 흘리는 태자는 어린아이임에도 꽤나 믿음직스러워 보여, 그 당시에 얼음장 같았던 소년마저 조금은 흔들릴 정도였다.

‘부모와 가솔을 잃은 날에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훗날 검설린이 코웃음을 터뜨린 마음이었다.

개울물에서 용봉이 나와봤자 입구에 끼여 죽을 뿐이지!

그러나 그 당시의 검설린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모는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빼돌리려 했지. 나보고 살아가라 말을 하면서. 생애에 가치가 있다고 했다. 터전을 잃었어도 나는 살아났다.’

운씨세가의 운표선이 신분을 위조해주고, 태자와 그 친우들과 벗이 되었다. 검설린 생애에 제일 안온하던 삶이었다. 그간에 검설린은 서서히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억울하게 역적이 된 이들이 사적에 한둘도 아니다. 제 유년이 불우하여 부모의 죽음을 보았으나, 그것은 복수조차 하지 못하는 나라의 일이다.

태자에게 구원을 받고 또 기회를 얻었으니, 원한다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고 재상과의 거래로 군졸이 되어 사지를 굴렀을 때도, 어찌어찌 살아 돌아온 이후 관료의 몸으로 암계와 정략을 헤쳐 나갈 때도, 결국 저를 견제한 재상의 모략으로 버려진 땅 장한성에 성주로 부임이 했을 때도 검설린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적어도 검가가 멸망한 그날에 생각했던 것보다 암담하지 않았으니까.

그 당시에 검설린에게는, 적어도 목표가 있었다.

“왜 저희에게 용봉이 되라 말하십니까? 귀가 아주 닳겠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그는 태자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려면 인재가 필요해.”

유모의 말을 들어 살아가려고 했으나, 검설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그저 생존하는 것만으로 살아간다 말을 할 수 없다.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목표가 있어야 해.

소년 시절에 울타리와 터전이 무너진 검설린은 항상 둥지 없이 떠도는 외로운 기분을 느꼈고, 벗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공허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어느 순간 삶의 목표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태자의 곁에서 꾸게 된 꿈이었다.

‘나의 불행은 내가 자초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 소년의 세상이 무너졌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잘못이 아닌, 그저 정략에 휩쓸린 일이었다.

검설린은 아버지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죄가 아니었으며, 그 이후에 검설린의 삶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졌다.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는 세상이 오기를.’

그런 소박하고도 큰 꿈이었다.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

그리고 덤덤히 말하는 태자를 보며 검설린은 그 순간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이 뒤집어져, 이 모든 일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고 있다. 저는 힘이 없어서 그리할 수 없다.

그러나 이청융은, 태자는 할 수 있지. 검설린은 그에게 희망을 기대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만들 수 있다. 정략에 희생되어 허망하게 부모를 잃는 소년이 없는 그런 세상을, 그는 만들 수 있어.’

청융은 황제의 적자다.

또 그는 온화한 성품에 융통성이 있었고, 지혜로웠다.

그가 천하를 가진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여색을 밝히는 황제와, 융통성 없는 노회한 재상보다야 더욱더 나라를 잘 이끌겠지.

그리하여 검설린은 그에게 미래를 걸며 어느 순간부터 꿈을 꾸고 있었다.

더 나은 미래를 그가 이끌어주길.

더 많은 사람을 그가 구원해주길.

적어도 어린 소년이 허망하게 둥지를 잃고 방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검설린이 품은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평화를 갈망하면서 검설린은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갔고 종국엔 재상은 그를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두가 태자의 잘못입니다.”

그가 꿈꾸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한 줌의 모래로 허망하게 흩어진 것은.

* * *

一. 아비에게 불효하고 황제에게 불충한 죄.

二. 병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면서 안북대도호부 12만 사병을 나의 군대라 칭한 죄(本郡).

三. 민간의 여인을 사사로이 빼앗은 죄.

四. 수하의 군공을 빼앗아 제 것으로 돌린 죄.

五. ………

이청융이 살해된 날 모든 꿈은 무너졌다. 검설린은 고신을 받고 낙향했으며, 그의 유능한 부하와 전우 중 절반 이상이 개같은 죄목으로 아까운 목숨을 형장의 이슬로 바치고야 말았다.

마음에 한이 되어 검설린의 반생을 병에 앓게 한 사건이었다.

꿈이 무너지고, 미래도 무너지고, 제 모든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검설린은 제 수하를 보호하려 제 손으로 직접 터무니없는 개같은 죄목 스물네 가지를 열거해야 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틀렸으니 너라도 살 길을 찾아라.’

두 차례 북란에서 승기를 잡았어도 토번과 회흘을 완전히 정리하지 않았는데 북방에서 뼈가 굵은 장수를 다 잃어버릴 순 없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들의 목숨을 버릴 수는 없었다.

황제는 병부 전체를 태자의 도당으로 의심하고 있었으니 검설린이 뼈대만 남은 병부의 남은 장수들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유일하게 태자보다 명성이 높은 병부의 인물이다…….’

그리고 한 번도 고관에게 수그린 적이 없는 인물이지. 그리 명성이 높은 자가 태자를 고발한다면 황제에게도 정당성이 생기는 것이다. 병부의 반발도 줄어들 테고, 민심도 사로잡을 수 있겠지.

‘게다가 나 또한 견제가 가능하고.’

청백하고 대쪽 같은 성정으로 이름 높은 사내가 수많은 사족이 죽어나간 동궁사변에 황제 편을 들었으니, 이제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원망을 받을 터이니.

그러나 그를 알면서도 검설린은 묵묵히 고변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의기양양한 환관의 얼굴, 고우군의 음울한 시선, 장수들의 들끓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그저 최악만을 막기 위해, 이청융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 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어쩌자고 그리하셨습니까!”

혼군에게 복종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반란을 일으키자 울고 불며 청했던 황재천은 격노하여 그를 비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태도를 바꾸어 소극적으로 황제에게 영합하였고, 그를 중심으로 몇몇의 무장이 그렇게 항복을 했다.

“정명공이 태자를 두 번 죽였다! 그가 제 주군을 팔아 보신을 꾀했어!”

그 시발점은 검설린임이 명백하였으므로 그는 ‘상종조차 하지 못할 자’라는 평가를 얻으며 수많은 명사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았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이청융의 편을 들어 뻗댔다면 적어도 죽어나간 이들의 명예만큼은 지킬 수 있었을 테지.

그러나 검설린의 붓 아래 그들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충신에서 천하의 역도를 섬긴 반신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검설린은 그들의 모욕에 할 말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피를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다곤 하나, 이청융의 유지라 하나 저 또한 비루먹은 말 같다 여기는 일이었으므로. 아니, 사실은 거의 해탈하여 검설린은 저를 향한 모욕을 받아들였다. 아니, 사실은 거의 인생을 자포자기했었다.

그리하여 오로지 이청융의 유지만을 따르기 원하며 낙향을 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검설린은 제게 무거운 부담을 떠안긴 이청융에게, 벗의 죽음을 방관한 운표선에게, 그를 고발한 저 자신에게, 저를 비난하는 옛 수하와 벗들에게, 그리고 황제에게 환멸이 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며 저 자신마저 용납을 하지 못한 채 이청융의 유지를 지키며 8년을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이청융의 뜻과는 정반대로 검설린은 인간관계에서 환멸을 깊게 느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추해지는 것은 권력자들뿐만이 아니다.

나라에서 이름 높은 명의를 붙잡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고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아 협박하는 것들, 약초에 불을 지르고 상천(上川)에 진흙탕을 만든 이들에 검설린은 그저 빨리 10년이 끝나 안식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을 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말이다.

가끔은 사람을 믿고 싶을 때가 있었다. 검설린이 그런 유혹을 느끼게 만든 것은 바로 환난 중에도 꿋꿋하게 올바른 길을 걷는 이들 때문이었다. 구명을 위해 친족과 벗을 고발하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의니 뭐니 하는 가치로 벗의 죽음을 방관한 이가 있는가 하면, 선한 의지를 지키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미련을 버리고 세상을 원망했으나 개중에서도 살아남은 몇 명, 저와 다르게 고결함을 지킨 이들에 대한 죄악감이 검설린에게는 남아 있던 것이었다.

현실과 타협하여 그들의 미래를 망친 죄.

후일을 포기하고 도망친 죄.

그들의 기대를 실망시킨 죄.

그런 부채감이 말이다.

그리고 개중 한 명이 바로 서문린이었다.

단 한 사람도 무고하지 않고, 단 한 사람도 해치지 않은 선량하고 올곧은 성품의 사내.

그리하여 검설린은 극심한 인간 불신에 시달려 사람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 원칙을 깨고 서문윤을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길 꺼려하며 마음이 갈 일을 원칙적으로 차단했던 그가, 사람을 혐오하곤 저 자신을 조롱하며 날을 세웠던 그가,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진료를 하지 않는 원칙을 깬 이유 말이다.

‘서문린의 자식.’

그는 검설린이 부채감을 가지고 있던, 사변 때 고변을 하지 않고 끝까지 태자를 옹호했던 서문린의 자식이었으므로.

사실은 그것은 초반에 검설린이 유독 서문윤에게 약한 이유였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래, 서문윤은 모르겠지만 그는 검설린에게 있어서 특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슬리는 짓을 해도,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과거의 일을 캐물어도 검설린은 서문윤을 협박하거나 선 이상의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못했으니까.

‘적어도 저놈의 다리만큼은 고쳐주는 게 도리다. 그게 내가 그자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선량하고 고지식했던 사내의 얼굴이 가끔 보여, 검설린은 그리 생각하며 서문윤의 개같은 말을 꾸역꾸역 참았던 것이다.

“제가 당신을 압니다. 신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게 뭔 미친 소리야?

속으로 어이없다 느끼면서도, 서문윤의 입을 찢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스스로를 갈무리했다.

초라한 행색으로 서문린이 낙향했을 때가 떠올라, 그때 격정을 참지 못해 그를 비웃던 때를 후회하면서 말이지. 그러면 안 됐었는데. 저와 다르게 끝까지 도리를 지킨 그에게 사죄는 못할망정 그리 비웃지는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 당시 검설린은 거의 한계에 몰려 있었고 서문린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검설린이 서문윤에게 가혹할 수가 있겠는가? 서문린의 자식을 홀대할 수 있겠는가?

곤궁한 상황에서 저만을 돌보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니 추궁과 위협을 당하면서도 검설린과 태자에게는 잘못이 없다, 자백을 하고 반강제로 낙향한 서문린은 검설린에게 있어서 꽤나 각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검설린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서문린과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싫어서가 아닌, 오히려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선량한 사내라 저의 일에 더 이상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슨 염치로 그 앞에 몸을 보일까.’

검설린은 반은 망자요 반은 환자인 제 상태를 잘 알았으므로 서문린의 앞에 몸을 드러내길 꺼렸던 것이다. 애초에 빈민을 주로 치료한 것도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고관을 꺼린 탓이었으니.

‘다리만 고치고 바로 내치자.’

그리하여 서문윤을 받아들일 때는 그럴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제게 다가오는 그를 짜증내면서. 이름을 말하며 강아지처럼 눈을 밝히는 서문윤을 귀찮아하면서.

“신의님!”

그러나 너무나도 오랫동안 홀로 지내온 탓인가, 외롭게 살아온 탓인가. 어느 순간부터 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종자부터 서문린이군.’

제 아비를 닮았는지 반듯한 서문윤을 보며 어느 순간 속이 뒤틀리고야 말았다. 마을의 창고에 감금되어 목숨을 위협당할 때도, 전염병이 창궐하는 험지에서 분노의 대상이 되어 욕설을 먹을 때도, 여인의 순결을 깼다며 음적으로 몰려 부당한 소송을 당할 때도 세상을 바르게 보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고 짜증났다.

무수히 많은 사건이 반복되어도 서문윤은 저처럼 사람에 환멸을 느끼거나 세상을 증오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일이 마무리된 이후에 웃으며 세상이 각박하여 사람도 힘듭니다, 검설린을 달래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제까짓 게 뭔데 그런 말을 해?

‘도대체가 서문세가에는 부처의 피라도 흐르는 모양인가? 그따위 취급을 받고도 그들을 동정해?’

아무래도 네가 험한 일을 덜 당한 모양이지, 라는 생각을 품었으나 서서히 검설린은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서문윤은 애초에 그 모양인 종자다. 서문린처럼 그는 조정에 나가면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고 절대로 영화를 받지 못하는, 오로지 말뿐인 영예만을 손에 움켜쥘 그런 호구종자 말이다.

차라리 낙마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품었는지 모르겠다.

검설린은 그리고 서서히 서문윤을 보기 거북해했다.

“당신은 화가 나지도 않습니까?”

전염병을 창궐하는 지역을 곳곳이 전전하던 그들이었다. 한 마을을 살리고도, 유지는 우물을 오염시킨 죄를 피하기 위해 역귀를 데려왔다며 검설린 일행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쫓아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지. 힘든 상황에서 타인을 비난하고 제가 살아남을 힘을 얻으니. 사람을 살리고도 욕을 먹는 억울한 상황에서 제게 화를 내며 말하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은 덤덤히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추악한 사람들의 본성이다. 너는 특별할 일 없는 일에 힘을 들이는군.”

그 말에 대한 서문윤의 답변이 아직도 기억났다.

“신의, 어찌 그리 말하십니까?”

그때 검설린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삼키며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말은 둘째 치고 저를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문윤의 두 눈이 싫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듯한 서글픈 모습이 싫었다.

‘내가 그들에게 기대를 가지지 않다는데 왜 제가 난리야?’

목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킬 뿐이었다. 사실 그렇게 격하게 반응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그저 뭘 모르는 어린것이 멋대로 내뱉는 말이다.

그러나 어쩐지 슬픔에 잠식된 그의 눈을 마주하며 검설린은 동요하고야 말았다.

“나는 의로운 이가 아니다.”

“신의께서 그리 말할 때마다 저는 크나큰 모욕감을 느낍니다.”

그래,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거북한 말을 주절대기 시작했다.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악인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위악일 뿐입니다.”

“당신이 걷는 길을 저 또한 밟고 싶습니다.”

점점 더 그와 함께 있는 일이 거북해졌다.

“나는 네게 귀가 닳도록 얘기했다. 사람의 악의와 그 무정함을.”

종국엔 실력 있는 의원을 감금코자 하는 이들의 계략에 휘말려 창고에 갇힌 처지가 되었을 때, 검설린은 크게 동요하는 서문윤을 향해 실컷 조롱했다.

“너는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들을 옹호하느냐?”

빈민이라고 다 선한 이는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약자이기에 더욱 이기적이고, 그러기에 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뿐이지.

“신의. 그들은 돈이 없어 가족이 죽어도 의원에게 가지 못했습니다.”

서문윤은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사람을 향한 미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순하고도 또 어리석은 놈이다. 검설린은 분노를 참지 못해 이죽거릴 뿐이었다.

“너는 아직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구나.”

“…….”

“구제 못 할 놈.”

“당신은 제가 한심하십니까?”

“내게 무슨 답변을 원하느냐?”

검설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래, 나는 네가 한심하다! 그리고 그들이 혐오스럽다! 그들을 바퀴나 쥐새끼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가 참지 못해 제 본성을 드러낸 날이었다.

“권세가는 곳간의 곡식을 갉아먹는 더러운 쥐새끼와 같다 여기고 있고, 선비는 권력에 영합하는 박쥐와 같다 여기고 있지. 부자는 교활한 승냥이고 평민은 못 배워먹고 도리도 모르는 바퀴벌레만도 못하다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기대를 하는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 서문윤의 착각은 지긋지긋하다. 온몸에 개미 떼가 앉는 기분에 검설린은 이를 악물며 말을 토해낼 뿐이었다.

“너는 내가 의로운 마음으로 그러는 줄 알았겠지. 아직도 너는 내가 의인이라 생각하느냐?”

두 눈이 경멸로 물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저를 맹종하는 저 새까만 두 눈이 무너져 내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나아. 더 이상 저런 눈은 보기 싫단 말이야.

꽁꽁 숨겨두었던 역겨운 제 마음을 토로하며 검설린은 그리고 그 순간 처연하게 웃고야 말았다.

“아니, 난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어.”

진심을 꺼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비참했으므로.

“나도, 너도, 우릴 가둔 모든 사람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제는 어린 청년에게 투정을 부리고 화풀이를 하고야 만다.

“나는 사람이 혐오스럽고, 그런 이들을 변호하는 널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 서문윤.”

홧김에 말을 토해내고 검설린은 무너지는 얼굴을 수습하려 부러 싸늘한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대답이 되었나?”

슬픔이 마음을 감돌던 순간 검설린은 서문윤의 희게 질린 얼굴과, 분노 어린 말을 예상하고 암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저를 외면해도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쓰게 웃으며, 긴장에 떨리는 손을 숨기곤 움츠리며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돌아온 서문윤의 대답은 검설린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것이었다.

“제가….”

걸작인 답변이었다. 아직도 검설린은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제가 당신을 의형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해 얼빠진 얼굴로 검설린은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흐트러진 머리가 새하얀 이마를 가려 가뜩이나 어린 청년의 얼굴이 소년처럼 보였다. 말조차 내뱉지 못해 멍한 얼굴로 검설린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무슨 개소릴….”

“무슨 사정인지 감히 여쭙지 않겠습니다.”

“…….”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감히 원컨대 청합니다.”

저는 서문윤의 밝음을 꺼려하고 있었구나.

‘……닮았어.’

그 아이의 눈을 보면 항상 역함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 눈은 흠결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품고 검설린을 바라보았으며, 그것은 그에게 한때 잊었던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미련도.

“그저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사실 그 눈을 보며 흔들리고 있었다. 저절로 희망을 가지게 되는 제 자신에, 또다시 사람에 속게 되는 마음에 당혹감을 느끼며… 상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은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서문윤의 올곧은 두 눈은, 아니 서문윤의 올곧음은 검설린에게 헛된 미혹을 안겨주었고, 다시금 삶을 살아가고 싶노라는 그런 마음을 품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의형, 당신은 선한 사람이에요.”

‘만약에 다시 새로운 삶은 산다면,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은 불현듯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장면 하나에 당혹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입바른 말을 흘려대는 청년을 옆에 두고 시골에서 안락하고도 평온한 삶을 보내는 것이었다.

“저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집도 가족도 없는 생활을 반복했지.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따위 미혹에 휩쓸리고야 만 것이?

‘난, 지금 무슨 생각을.’

그 순간 손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흠칫하면서 검설린이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두 손으로 저의 손을 꼭 부여잡은 서문윤이 몸을 웅크리며 잠긴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의형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손을 적시는 축축한 것에 검설린은 복면 아래 입술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는….’

그날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의형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검설린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서문윤은 그의 삶에 일부가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가 옆에서 재잘거리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져버렸다. 의형, 의형 거리는 것을 그저 자포자기하여 방관한 것인데 정말로 그가 가족과도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내 딸을 늙은 황제에게 바치고도 멀쩡할 것이라 생각했나?! 난 그대를 용서하지 않아. 그렇게 그 아이가 빌었건만……. 사람이 되어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어찌 내 앞에 뻔뻔히 나타날 수 있어?”

그리고 서문윤이 제 죄의 대가를 받게 되고, 그리 그와 가까워진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럼 차라리 나를 중독시켰어야지. 네 부족이 자랑하는 그 잘난 투향술로 아무것도 모르는 죄 없는 자를 희생시켜? 고위화가 그리하라더냐?”

“더러운 입에 내 딸의 이름을 올리지 마라!”

제가 무슨 짓을 당한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것은 새까만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의형 소리만 내뱉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까마득함을 느끼며, 그가 당한 일을 숨겼다.

‘어떻게 하지?’

해약을 찾아 나섰으나 귀비가 해약에 쓰이는 약초를 숨겨 암시장에서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낌새를 눈치챈 강서진마저 나서 백년화의 뿌리를 말리려 했으니, 그저 검설린은 암담함에 휩싸일 뿐이었다.

자기 직전에 수면제를 타 서문윤을 깊게 재웠으나, 그에도 한계가 있었다. 어느 순간 서문윤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몸 위를 타고 올랐고, 검설린은 제 뺨 위에 뚝뚝 떨어지는 액체에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형, 의형….”

풀린 혀로 그리 중얼거리는 서문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어 제게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무너트리는 서문윤의 위를 올라타곤 검설린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본디 제가 당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귀비가 원하는 일은 저의 몰락이 아니었던가? 황제에게 자신을 바친 이가 모욕을 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 제 아비에게 언질을 하였던 게 아닌가.

그러나 일은 잘못되어, 제 곁에 있는 선량한 이가 고통받게 되었다.

달아오른 입안, 새빨간 혀를 깨물며 검설린은 억눌린 한숨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순진무구한 새까만 눈을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곤 차라리 그날에 서문윤의 다리를 고치지 않을걸, 후회를 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검설린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날 이후로 서문윤이 모르게 그와의 밤을 함께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서문윤은 그저 저를 존경하며 따를 뿐이었다. 그게 부담스럽고 죄스러워 그를 피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친밀함을 느꼈고 다가갔다. 그리고 그 자신이 모르는 밤에, 서문윤은 열에 달뜬 입술을 벌리고 숨을 할딱거리곤 제 의형의 목에 팔을 두르곤 매달렸다.

그런 나날들이 지나고 있었다.

“……의형.”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몹시 신경 쓰이게 되었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서문윤의 뺨을 닦으며 열기에 할딱거리는 그를 달래곤 검설린은 무너지는 얼굴을 수습할 수 없었다. 밤은 익숙해져 가는데, 마음은 오히려 더욱 무너져가고 있었다. 약기운을 해소한 서문윤은 마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장수마냥 미소를 지었고, 그 얼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야 말았다.

‘그런 얼굴을 왜….’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절 괴롭게 한 이가 누군지 모르는 듯 저를 따르며 웃는 서문윤을 보면 항상 무거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서서히 시나브로 제 일상에 스며든 그 어린 청년을 거부하는 것도 이제 힘들었다.

‘……내게 왜.’

그리고 뒤늦게 검설린은 서문윤의 변한 시선을 깨달을 수 있었다. 존경의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은밀한 감정을 깨달았고, 애달픔을 담아 검설린의 가슴을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다.

어째서 너는 다 불타버린 잿더미 같은 내게 마음을 줘버린 거지?

해약을 찾지도 못해, 그와 몰래 몸을 섞는 밤을 보내며 그를 능멸하고 있다. 예쁜 말을 하지도 못해서 그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비관적인 생각으로 그를 화나게 만드는데도 서문윤은 질리지도 않는 듯이 제게 끈질기게 다가오고, 그런 시선을 보내고, 결국엔 마음을 내준 것이다.

‘네가 정말 미쳤어? 넌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에 들끓는 분노를 느꼈다. 앞날이 창창한 명문세가의 장손이 다리를 낫고도 더러운 약에 중독당해 제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속이 터지는 일인데 그가 저를 보는 시선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게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답답했다.

더욱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그에 서서히 흔들리는 저 자신이었다. 열기를 참지 못해 바르작거리는 서문윤이, 제 옷깃을 부여잡고 울먹거리며 제게 매달리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저 후학을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가 소중해지고, 사랑스러워졌지.

그리하여 그 이후의 일은 무어라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결국엔 환희향의 일을 들키고 제 과거를 서문윤에게 털어냈다. 그에게 미움을 받고 자포자기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 이제는 모든 게 끝이 난 거라며. 가시가 박힌 서문윤의 원망의 말에 안도를 하면서도, 가슴에 드는 공허한 바람에 쓸쓸해하곤 했었다. 이제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라줄 이는 없는 거겠지. 절 맹종했던 새까만 눈을 떠올리며 시린 느낌을 받고 조소를 흘리고야 말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나?

뜻밖에도 서문윤이 제 마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미련하게 굴 것을.

제가 억지로 몸을 취하였다는 말에 충격을 먹고도 그는 증오를 키우지 못해 제게 미련을 내보였다. 서서히 살아나는 불씨가 보이는 눈에 환장하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놈은 어떻게 된 게 저리 머리가 텅 비었어?’

그렇게 장한성에서 살아남고 어영부영 그의 연인이 되었다.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서문세가에서 뒹굴거리며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평온한 일상을 맛보았고, 재잘거리는 그의 입술을 맞추며 어느 순간 다짐했었다.

‘…이 애랑 살아야겠다.’

겁도 없이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사람을 도발하는 저 철없는 어린것을 홀로 둘 수가 없다. 정말 하등의 가치가 없는 사내에게 매달리는 꼴을 보아하니 평범하게 살아가기는 힘들 것 같아. 차라리 내가 거두어버려야지.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작은 입술에 입술을 맞추고야 말았다.

그를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을 다잡지 못해, 다짐하고야 말았다.

‘네가 내게 온 거야. 네가 먼저 내게 다가온 거야. 이제는 무르려야 무를 수도 없지. 난 너와 함께 살아갈 거다.’

그리고 그 다짐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검남만이 남았군.’

달빛이 흐르는 밤. 일찍 잠에서 깬 검설린이 조심스럽게 제 가슴에 얹힌 손을 거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뱀처럼 칭칭 몸에 얽힌 그를 어렵사리 떼어내곤 검설린은 의자에 앉아 그가 깨어있던 와중에 하지 못했던 일을 행했다.

바스락 소리가 나지 않게 서신을 펼치며 잠시간 그 위를 바라보던 검실린이 문득 차가운 조소를 흘리고야 말았다. 무언가의 상념에 잠긴 듯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던 사내가 어느 순간 시선을 돌려 침상에 팔자 좋게 늘어진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배를 훤히 드러내고 잠에 취한 서문윤을 잠시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본 그는 시간이 흘러 자리에서 일어나 결국 그를 향해 다가가고야 말았다.

‘네가 사랑스럽다고 했잖아.’

발간 뺨에 입술을 맞추며 자조의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결국 황하에서의 마음을 끊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애정은 깊어져 참기 힘들 지경이 되었고, 희망은 목을 죄고 있었다.

‘내가 다시 살겠다는 다짐이 얼마나 힘겹게 나온 건지 넌 모르지?’

새근거리며 자는 청년을 잠시간 그리 빤히 바라보던 검설린은, 시간이 흘러 통통한 뺨에 입술을 맞추곤 피식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젠 후회를 해보았자 상관이 없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그래보았자 뭐 해.’

보름달이 뜨던 밤, 서문윤의 얼굴을 응시하는 사내의 얼굴은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의 것마냥 몽혼하고 황홀할 뿐이었다.

그렇게 검설린은 서문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시간을 흘려 보내고야 말았다. 그의 새까만 눈을 생각하며, 저를 맹종하는 청년에 대한 사랑스러움을 억누르지 못한 채 고깃덩어리를 바라보는 굶주린 개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바로 서문윤이 모르는 순간의 일이었다.

* * *

어둠이 자리한 막사에 달뜬 숨소리가 흘렀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간간이 섞이고 느릿하고 긴 한숨이 그 사이로 작게 들려왔다.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나른한 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듯한 사내의 뺨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턱 선에 입술을 가져다 댄 서문윤이 홧홧한 살결에 문득 얼굴을 붉히고야 말았다.

어둠 속에 눈을 빛내며 잠시간 그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길고 치렁한 머리카락이 흐드러지게 몸을 숙이며 서문윤의 몸을 끌어안았다. 말없이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사내는 달아오른 뺨에 입술을 맞추며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허리가 유려하게 움직이고, 작은 신음이 막사 안에 퍼져 나갔다.

“말을, 이렇게, 읏….”

말을 넘기려는 수법을 뻔히 알면서도 서문윤은 저항하지 못하고 넘어가고야 말았다. 미간을 좁힌 서문윤이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감각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행위는 항상 느릿하고 또 집요했으니, 서문윤은 종종 정사 초반에 여유를 내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숨을 헐떡거리며 몸부림을 치곤 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눈물이 작게 매달려 있었다.

“의, 흑, 의형.”

마치 그를 달래듯 사내는 쿨쩍거리는 청년의 콧잔등에 입술을 맞출 뿐이다. 찡그린 이마를 유심히 바라보며 사내는 그의 온 얼굴에 느릿하게 입술 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허리짓은 끊기지 않았고, 사내는 제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청년을 교묘하게 품 안에 가두고 행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막사 안에 열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막이 작게 팔락거려 흰 달빛이 스며들고야 만다. 어둠이 가실 때마다 서문윤은 사내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는 문득 지극히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른침을 삼키며 그는 그 순간 얼굴을 붉히고야 말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희미하게 찌푸린 사내의 고요한 눈과 마주한 탓이었다. 그와 오래 몸을 마주한 서문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감정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욕망이, 무언가를 원하는 간절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그는 돌연 울컥 치솟는 격정을 참지 못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어째서 그는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가.

발갛게 달아오른 귀 끝이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숨결. 고조되는 열락에 서문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하곤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은 그의 생각대로 지극한 욕망을 담고 있었다.

끼익, 침상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그날 밤늦게까지 끊기지 않았다.

* * *

깍깍. 까마귀 소리가 울렸다. 침상에 웅크리고 잠을 자던 한 청년이 눈을 뜬 순간이었다.

‘아…….’

잠시간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환기를 하는 건지 반쯤 열린 천막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스며들었으나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 어버버 침상에 웅크린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서문윤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

뭐지, 이건?

새까만 눈에 서서히 의문이 물들고야 만다. 정신을 찾아가며 제 옆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의 부재를 깨달은 것이었다. 눈살을 찡그린 서문윤이 으음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돌려 침상 옆을 바라보았다. 탁자가 자리한 곳에는 바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장계를 정리하는 장발의 사내가 있었다.

벌써 의관을 정리한 모습이다.

소매를 끈으로 조인 눈처럼 흰 백의를 입은 사내를 보며 서문윤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갑옷을 입지 않았다지만 길고 치렁한 흑발을 빈틈 하나 없이 틀어 올린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방금 일어난 사내 같지는 않았다. 군중에서도 질릴 만치 꼿꼿한 사내의 모습에 오한마저 느끼며 서문윤이 온기가 식은 빈 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쳤다. 민감한 사내라, 분명 제가 일어난 것을 알았을 터인데 눈길조차 주지 않고 냉랭한 얼굴로 붓을 움직이는 검설린을 노려보며 서문윤이 불퉁한 목소리를 흘렸다.

“왜 안 깨웠어요?”

유려히 움직이던 붓이 우뚝 선 순간이었다.

‘도대체 말을 듣지도 않아.’

먼저 일어나시면 항상 저를 깨워달라 신신당부를 했던 서문윤은 홀로 기상하여 저리 선비처럼 고고하게 구는 사내에게 작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그를 무서워했냐는 듯 눈썹을 높게 치켜떠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서문윤이 그를 제법 강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가 아침에 혼자 일어나는 것을 몹시 싫어했는데, 그것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그가 제가 안 볼 순간에 헛구역질을 하던 검설린을 발견하고 기겁한 까닭이었다.

‘개가 꼭 그런다던데.’

개들은 꼭 아플 때 주인이 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 홀로 끙끙 앓는다지. 궁중에서 개를 키우는 내관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또 항상 제게 아픈 사실을 숨기는 검설린을 되새기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앓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은 강인하지만 그 속은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걸 항상 내게 숨기지.’

그는 개도 아닌데 그렇게 사람을 안달복달 나게 만든다.

다시금 못마땅함이 치밀어 오른 서문윤이 굳건한 사내의 등을 노려보며 칭얼거리는 듯, 혹은 타박을 하듯 말을 이었다.

“이제는 동생의 말이 우스운 겁니까? 너무하군요. 저는 항상 의형의 말을 하늘처럼 떠받고 따르려 하는데.”

그리하여 얌전히 있으라는 검설린의 말에 순순히 복종하고 있고,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지 않은가. 부총관의 은근한 눈초리, 열받은 듯한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설린의 명령을 사수하여 천막에 뿌리를 내린 서문윤은 그 말을 내뱉을 때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검설린에게 있어서 그것은 꽤나 열받는 말인 듯했다.

‘하늘처럼 떠받고 따른다’와 ‘서문윤’이라는 이름이 도대체 어울리는 것인가?

서문윤의 말에 기어코 이마에 핏대를 세운 검설린이 하늘에서 멈추어 선 붓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한참을 동결되어 있었다. 서문윤이 보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는 몹시나 우중충한 먹구름이 서려 있었다. 먹물을 뚝뚝 흘리며 허공에 우뚝 선 붓을 눈치챈 서문윤이 정색하며 말을 내뱉었다.

“장계가 젖잖습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문윤의 머리가 까치집처럼 부스스했다.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아프다. 비틀거리며 침상 아래로 발을 밟은 서문윤이 묵묵히 붓을 들고 있는 검설린의 손을 손수 움직여 벼루로 향하게 했다.

“힘겹게 장계를 정리해놓고 다시 써야 되잖습니까. 으아, 이걸 어떻게 해.”

글자 하나가 잘못되어도 처벌받을 수 있는 게 군중의 일인데, 완전히 종이가 젖었으니 이건 그냥 다시 써야 한다. 그것이 안타까워 서문윤은 검설린을 면박을 주었으나, 그는 그 말이 와 닿지가 않는 듯 허공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너.”

어쩐지 스산한 목소리였다. 학습된 듯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서문윤이 그제야 이상한 그의 낌새를 눈치채고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네가 널 스스로를 깨워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음울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가다듬어 검설린을 바라보니 등 뒤에 모락모락 음울한 기운을 내뿜는 사내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뒤늦게 사내의 날카로운 턱 선에 살짝 남은 불그스름한 기를 눈치채곤 서문윤은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 건가?’

분노한 사내를 향해 슬그머니 서문윤이 말을 물었다.

“제가 그런 건가요?”

“…….”

“그러고 보니 꿈에 의형이 나온 것 같군요.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잠 중에 쓰다듬다가 그만 실수를, 넵, 죄송합니다.”

농담으로 말을 넘기려던 서문윤이 빠각 붓을 쥔 손에서 흐르는 소리에 잡소리를 집어치우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빠르게 입술을 다문 서문윤이 그의 눈치를 보다가 순진무구한 듯한 얼굴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검설린의 입술에 우중충한 목소리가 흐른 순간이었다.

“내가 이제 만만하구나?”

벼루 위에 금이 간 붓을 올려놓으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곤 검설린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제 눈치를 보는 똥강아지의 얼굴을 노려보며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서문윤을 움찔하게 만든 말이었다. 항상 이리 그를 빤히 보면 그의 마음이 약해지곤 했는데.

‘이제는 안 통하지?’

군중에서 써먹은 경우가 너무 많았다. 냉랭한 반응에 머쓱하게 웃은 서문윤이 뺨을 긁고 중얼거렸다.

“형이 편해요.”

검설린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서문윤은 작게 웃으며 그의 뻣뻣하게 굳어진 등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 위를 주물러주었다. 그의 마음을 풀려 아부를 하듯 어깨를 주무른 게 통한 모양이었다. 손길은 부드러웠고, 그에 노곤해진 듯 검설린은 서서히 직각이던 어깨를 풀고 어느 순간부터 의자에 몸을 편히 묻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검설린이 고요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꿈틀거리는 눈썹은 화난 기운이 아직 보이는데 손바닥 아래 몸은 부드럽게 풀려 있으니,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빤히 저를 바라보는 모습을 고양이 같다 생각하며, 서문윤은 고개를 숙여 검설린의 입술 위에 작게 입술 도장을 찍었다.

검설린은 입술을 피하지 않았고, 눈을 감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눈과 마주하며 심장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짧게 입술을 맞춘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떼곤 중얼거렸다.

“잘 주무셨어요.”

천막 사이로 스며든 햇볕이 백옥 같은 얼굴 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몹시도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을 장식하는 듯한 것이었다.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나른하게 풀린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매력적이라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것만 같아. 그리하여 경직된 자세로 뻣뻣이 사내를 내려다보던 서문윤의 귓전으로 느릿한 말이 떨어졌다.

“아니, 못 잤다.”

“얼굴이 편안해 보입니다. 오랜만에 푹 쉬어서 다행이에요.”

“네가 내 배를 대퇴로 누르지 않았다면 개운했을 터인데.”

“농담을 재밌게 하시는 걸 보니 잘 주무신 모양이군요.”

“아예 네가 날 깔아뭉개 죽이지 그랬어?”

“뺨이 매끄럽군요. 사신이 조금만 더 늦게 돌아오면 좋을 텐데.”

굵은 눈썹이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자꾸 네 말만 할 거야?”

그리 말을 한 검설린이 뒤로 젖혔던 몸을 일으키곤 의자머리에 팔을 걸치며 몸을 돌렸다. 사신이 오고 가는 와중이라 휴식이 길었다. 매번 밤을 새어 요즈음 예민했던 사내는 오랜만에 눈을 길게 붙이고 나름의 여유를 되찾은 모양이었다.

깊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내에 마른침을 삼키며 서문윤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간 그의 얼굴을 노려보던 검설린은 문득 입술을 열어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못마땅한 듯 말을 내뱉었다.

“왜 잘 때 자꾸 나를 더듬는 거지?”

서문윤의 얼굴을 오묘하게 만든 말이었다.

오랫동안 전투가 없어 평온한 시기다. 때를 놓치지 않고 서문윤은 슬그머니 검설린의 뺨 위에 입술을 맞추고 그를 어색하게 유혹하려 들었다. 항상 같이 잠자리에 들었던 사내는 그런 그의 행동을 방관하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서문윤의 입술에 입술을 맞추고 그를 깔아뭉갰다.

그 어떤 다른 요인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정사였다.

사랑하는 이와 마음을 섞고 싶을 때, 사람들은 대신 몸을 섞곤 한다. 그 행위로 연인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마음을 확신하곤 했다. 어젯밤 서문윤 또한 그러했다.

‘……왜 그런 얼굴로 날 봤던 거야.’

어젯밤 저를 바라보던 고요한 시선이 떠올라, 무언가를 지극히 갈구하는 듯한 얼굴이 생각나 서문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의 일은 할 말이 없었다. 정사 중 보았던 그의 애타는 얼굴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서문윤은 정사가 끝나고도 치밀어 오르는 애정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검설린의 몸을 넝쿨처럼 팔다리로 엮은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검설린의 몸 구석구석을 넋을 놓고 만지며 단단한 몸에 뺨을 비비곤 즐거워했다.

불편한 듯 몸을 뒤척거리다가 신음을 흘리던 검설린이 떠올라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려던 검설린을 무시하곤 강인한 몸을 만지작거렸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는 흥분하여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의 의형은 몸을 만지던 손에 크게 당황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갈라진 목소리를 큼큼 마른기침으로 푼 서문윤이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여 말을 내뱉었다.

“왜 몸마저 그렇게 아름다우시나요? 제 욕망을 부추기는 의형이 나쁜 겁니다.”

죄책감이 잠시 들었으나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말 싫었으면 저를 아예 밀어냈겠지. 그런 마음으로 뻔뻔하게 말을 하니 검설린의 입술이 비틀리며 음울한 웃음을 그리고야 만다.

“네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갔구나.”

짤막한 말을 내뱉은 검설린이 손을 뻗어 저를 도전하는 눈으로 노려보는 서문윤의 뺨을 움켜쥐었다.

“정 칠품 주제에!”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으나 그 손길은 과격하지 않았다. 얼굴을 흔들었다가 허공에 홱 내팽개치는 손장난에 서문윤이 여유를 되찾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서문윤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고작 이품 주제에 그리 말을 할 겁니까?”

“뭐라고?”

어이없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답했다. 검설린은 그 말에 입술 끝을 가늘게 떨다가 결국 오냐, 이품 주제에 내가 녹수군사에게 건방지게 굴었구나! 으름장을 놓으며 서문윤의 뺨을 다시금 잡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서문윤이 으악 소리를 흘리며 몸을 버둥거리고, 그렇게 한차례의 소란이 다시 일었다.

그리고 풍파가 가시고 난 후의 일이었다.

검설린이 다시금 벼루에 내팽개쳤던 붓을 주워 들었다. 까치집을 한 머리를 그제야 정돈한 서문윤이 침의를 갈아입고 옷차림을 정돈하곤 검설린을 힐끗거렸다.

평온함을 되찾은 검설린이 말없이 장계를 쓰고 있었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글자들을 그의 어깨 너머로 잠시간 살피던 서문윤이 폭이 좁은 소매를 끈으로 조이며 문득 입술을 느릿하게 열었다.

“사신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군요.”

묵직한 목소리에는 근심과 걱정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아니나 다를까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었다. 비록 검설린과 아웅다웅거리면서 사신이 늦게 왔으면 좋겠다느니 농을 했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는 검남 절도사가 부디 고집을 꺾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신은 항복을 권유하러 갔으나, 그 조건으로 검남 절도사의 목을 내걸었다. 역적의 가문은 멸족을 피할 수 없으니 한 사람의 목숨으로 나머지를 사면한다는 것은 굉장히 관대한 요청이었다. 심지어 이것은 검설린과 이청은이 황제에게 엎드려 사정사정하여 얻어낸 결과였다.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였으나 전쟁이 길어지면 안 된다는 면에서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비록 토벌군은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으나, 북란 당시 입은 피해로 어느 정도 이민족의 세가 잡힌 북방과 다르게 검남과 국경을 마주 댄 토번의 기세는 심상치가 않았다. 더 이상의 내란은 그닥 좋지 않았다.

게다가 조정은 국고가 빈약했으므로. 대군을 유지하는 비용에 나라가 휘청일 지경이었으니. 그들은 검남 절도사의 자진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자 입을 모았던 것이다.

대세는 기울어진 후이니 검남 절도사가 순순히 황명을 받아들이면 가장 좋을 일이다.

하지만 말이 너그러운 결정이지 듣는 절도사의 입장은 또 다르지 않는가?

절도사라면 그 지역에서 군주처럼 위세를 떨치는 인물인데 그리 쉬이 목을 내놓을 리가 없지.

“어찌 되었건…… 피는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할 때의 서문윤의 얼굴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으니, 그것은 지금껏 그가 보아온 전장의 참상을 떠올린 탓이었다.

장한성에서도, 또 의행 와중에서도 전쟁을 수차례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이 내린 결론은, 바로 전쟁은 일어나면 안 되는 참혹한 악행이란 것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적응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검남 절도사를 아십니까? 그가 사신의 말을 받아들일까요?”

서문윤은 조심스럽게 검설린에게 물었으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붓을 움직이며 장계를 써 내릴 뿐이었다.

그 평온한 얼굴에 불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느 이유 탓일까?

잠시간 어두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소매의 매듭을 짓곤 문득 말을 내뱉었다.

“나갔다 올게요.”

붓이 멈춘 순간이었다.

“어디를?”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천막을 빠져나가려던 서문윤이 발걸음을 멈칫하고 잠시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 끝에 머쓱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피를.”

검설린의 입가에 냉소가 서리고, 붓이 다시 움직인 순간이었다.

“다녀와.”

짤막한 말에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뱉은 서문윤이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떼고 조심스럽게 막사를 빠져나갔다. 장계를 적어 내리는 검설린의 얼굴에 묘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 * *

또다시 한 계절이 지나고 있었다.

토벌은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순조롭게 흘러나갔고 말했다시피 일은 거진 다 마무리된 후라 평로, 삭방, 검남의 절도사는 천명을 받았다 생각하며 독립을 알리고 황제에 반기를 들었으나 불운하게도 아직까지는 나라의 명운이 끊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쪽에서 일어난 평로의 반란은 토벌 초반 행군대총관 이백영이 사만의 군대를 이끌고 산둥반도로 내려가 두 차례의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으로 종식시켰다. 평로는 사실 그 자체로 군대의 세가 강한 것은 아니었으나, 위에 자리한 요동군과 합세할 위험을 경고하여 미리 싹을 자른 것이다. 요동군은 회흘, 돌궐 등 사실상 제국이라 불러도 될 만큼 강인한 나라와 세를 겨루어 군대가 드셌다. 게다가 그곳은 말만 충성을 맹세한다는 상태이지 거의 반쯤 독립한 하동하서 지방과 가까웠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전장이 커질 수 있는 위험이 자리한 곳이었다.

나라의 삼 면을 둘러싼 나라 중 강한 강대한 나라가 토번이니, 그와 인접한 검남에서 명운을 다투어야 할 터인데 동쪽에 신경을 써야 할 전장을 늘리는 것은 몹시 좋지 않다. 그러니 수뇌부는 전쟁 초반에 평로를 가장 먼저, 빠르게 해결하는 데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아니나 다를까 총사령관과 그의 부관, 그러니까 이청은과 검설린의 의견 차이가 조금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백영이 동궁사변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검설린이 다시 병부로 불러들인 그의 후배란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검설린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평로를 평정할 인물로 다툼이 잠시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명운을 결정짓는 주전장은 검남, 그리고 그와 인접한 삭방이 될 터이니 평로의 전선을 검설린이 주관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적당한 인재를 보내야 할 터인데, 평로 전선을 책임질 인물로 충관인 이백영과 부총관인 유왕인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다.

전자는 검설린의 사람이고 후자는 이청은의 사람이다.

모름지기 총관은 실무를 책임지는 이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유사시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총관의 수뇌를 그들은 동부 전선이란 먼 곳에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은 토벌 초반부터 의견 차이를 보이며 잠시간 대치를 하였으나, 결국 그 다툼은 검설린이 포기하여 이백영을 평로로 내보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유왕인은 물자를 나르는 보급에 뛰어난 인재지 전선을 담당할 그릇은 아니다. 대총관은 평로 출신이고 북란의 일도 능숙하지. 시간이 급하니 그를 보낼 수밖에 없지 않나.”

서문윤의 조심스러운 걱정의 말에 대한 검설린의 답변이었다. 그의 덤덤한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그때 불안에 찬 마음을 다스리고 안도하고 있었다.

‘적어도 의형은 대의를 따르는 사람이다.’

정말 그가 딴 마음을 품었다면 그리 쉬이 이백영을 그 먼 동부 전선으로 보냈겠는가? 유사시 회군을 하여 힘을 보탤 수도 없을 만치 먼 지방에 그를 보내는 것은 오른팔을 자르는 것과 똑같은 일일 텐데도, 총사령관과 대치하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그는 나라를 위하여 대범히 제 수족을 잘라낸 것이다.

검설린이 지난날에 한 말에 큰 불안을 가지고 있던 서문윤은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 그는 적어도 권력을 위해 나라를 팔 인물은 아니지.

“너는 언제까지 그리 순진하게 살 테냐.”

그런 그의 말을 들은 이청은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으나 서문윤은 그의 탄식 어린 시선을 못 본 척할 뿐이었다. 저자는 정명공의 수족인데 믿어도 되겠습니까. 암암리에 태자에게 그리 묻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서문윤은 나를 구한 은인이고 대쪽 같은 사내야.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순수하기에 오히려 더 믿을 만한 위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청은의 답변을 몰래 듣고 서문윤은 묘한 감정에 시달려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해야만 했다.

씁쓸할 뿐이었다.

‘전하 또한 나를 믿고, 의형 또한 나를 믿고.’

차분한 걸음으로 병영을 지나며 서문윤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제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어, 심지어 부관에게마저 수기는 장계마저 보여주는 검설린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또한 고관이라 제가 이청은과 접촉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터다. 그럼에도 저를 막사에 들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검설린에 서문윤은 가끔 깊은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둘 다 좋으신 분인데….’

오늘 아침에도 그는 저를 바로 등 뒤에 놓고 장계를 적어나갔다. 저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잡고 몸을 기울여도 검설린은 장계를 가릴 생각을 않곤 순순히 제 장난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택해야만 하지.’

완전히 절 신뢰하는 모습에 가끔 마음 한 켠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가끔 그의 부드러운 얼굴에서 날카롭고 음울했던 초반의 모습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때 검설린은 모든 사람을 증오했으니 심지어 서문윤마저 그의 멸시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도 저도 아닌 박쥐 같은 행동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그랬던 그가 지금 완전히 변해 저를 아껴주고 있었다. 비관적인 자신마저 바꾸려 노력하면서, 그 옛날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다정함을 내보이고 있었다.

검설린이 절 위하는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가끔씩 새벽에 눈을 뜨면 저를 잠자코 바라보는 검설린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깊은 시선, 그 덤덤한 눈에 담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곤 서문윤은 전율하곤 했다. 그 마음이 연인의 사랑이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우나, 검설린은 실로 저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유리처럼 투명한 두 눈을 떠올리며, 그가 어느 날 문득 내뱉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게 가끔 화가 난다.’

그 쓸쓸한 목소리를 되새기며 서문윤은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곤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장한성에서부터 검설린은 그간 지켜왔던 제 원칙을 깨며 저를 구하려 애를 썼다. 사지로 들어가는 절 원망하며 화를 내곤 속을 앓으면서도 간간이 저를 향해 탄식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나는 악운을 몰고 다니지. 그런 내 곁에서 네가 고통받는 걸 두고 봐야겠느냐. 너는 정말 내게 그리 가혹하게 굴 셈이냐.’

그리 말을 하는 검설린의 얼굴은 희미하게 일그러져 고통의 빛을 담고 있었다. 무거운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어찌 그리 내 마음을 모를까. 네가 가끔 너무 원망스러워…….’

고통스럽게 말을 하는 사내는 제 얼굴을 보며 동시에 과거를 직시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과거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 사내를 안다. 그러면서도 저를 위해 용기를 내는 그를 안다.

그런 그를 배신해야만 하는 상황이 착잡할 뿐이었다.

‘나는 정말 옳은 길을 밟고 있는 걸까?’

저를 온전히 바라보는 새까만 두 눈이, 그 쓸쓸한 얼굴 위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애정의 깊이가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서문윤은 그리하여 종종 제 자신을 돌아보며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곤 했다.

정말로 이게 우리를 위한 일일까? 그와의 미래를 꿈꾸며 그를 배신하기로 하였으나, 이게 과연 그에게도 옳은 일일까?

아무리 포장을 해도 이것이 이기적인 일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검설린이 제게 자주 하곤 하는 독선적인 일이었다.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그저 제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을 강제로 행하는 것. 멋대로 미래를 판단하여 상대를 강제하는 것. 모두 서문윤이 진절머리 쳤던 검설린의 오래된 악습이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종종 죄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양심에 묻곤 했다.

‘지금이라도 나는 돌이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곤 했다. 지금 이 순간도 서문윤은 빠르게 마음을 정리하여 확고한 빛이 드러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념 끝에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이미 저는 선택을 했다.

‘검설린을 네게 주겠다.’

품에 있는 패를 만지작거리며 서문윤이 멍한 얼굴로 그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 그의 확고한 말이, 저를 바라보는 빛나는 두 눈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속삭이는 말이 서문윤의 마음속에 희망이라는 미혹을 불러일으켜 이미 그는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진 후였다.

‘그와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나는 보장할 수 있어.’

그게 서문윤과 검설린이 원하는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그런 미래를 꿈꾸지 못했고, 한 치 앞도 모르는 깜깜한 밤길을 헤매고 있었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그리하여 절망하던 서문윤의 앞에 떨어진 동아줄과도 같은 태자의 제안. 그러니 서문윤이 어이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를 가진다라.’

묵묵히 발걸음을 걷는 서문윤의 얼굴에 균열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갑갑함에 사로잡힌 청년의 얼굴에 고통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그리하여 정신은 아득한 저편으로 가라앉아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간부 막사 한가운데를 무의식적으로 당당하게 가로지르고 있었으나, 그는 그를 깨닫지 못한 채 고민에 휘말려 갑갑한 마음에 시달릴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항상 내 마음을 존중해달라 요구를 했지. 하지만 그는 항상 내 마음을 신경 쓰지 않았다. 장한성의 일도, 백년화의 일도, 강서진의 일도 내게 완전히 알려주지 않았어. 그는 나를 걱정한다면서 스스로의 의견만을 고집하곤… 내 마음을 신경 쓰지 않은 거야. 그런데 내가 왜 그의 마음을 신경 써야 하지. 나도 그처럼 제멋대로 하면 안 돼?’

대로 한가운데를 걷는 서문윤을 춤추는 곰을 보듯 힐끗 보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녹수 군사면 말단 관리 중에서도 말단 관리인데 장군이라도 몸을 수그려야 할 군율이 엄격한 병영 안에서 저리 당당하니 그네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나로 모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문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더러운 놈!”

그것은 서문윤의 귓전을 때리고 그의 정신을 별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끌어온 말이었다.

“주 별가님!”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야 만다. 그리곤 그는 저를 경멸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는 어느 서른의 사내와 그를 말리는 병사를 발견하고 아, 짧은 소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고, 그에 서문윤은 얼굴을 빠르게 침착한 표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사령관의 뒷배를 믿고 아주 당당하군. 장군도 신경 쓰지 않을 기세야.”

“주 별가님! 그만 하세요.”

“내가 틀린 말을 했어? 이거 놓아라!”

존경이든 실망이든 검설린은 병부에 몸을 담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작금의 난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던 두 차례의 변란. 이민족이 장안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하였던 북란을 종결시킨 검설린이 토벌군에 다시 몸을 담으니 사람들은 희망을 그에 걸 수밖에 없었다. 총사령관이 이청은이지만 그는 전공을 세운 적이 없으니 사실상 토벌군의 원수는 그의 의형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의 총애를 받고 막사를 함께 쓰는 서문윤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장안에서는 그를 멀리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한 검설린은, 오히려 전장에서는 그를 모든 것을 차치하고 막사 안에 집어넣어 끼고 돌았으니. 문란한 소문이 막사에 도는 것은 그닥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악천화는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서문윤은 종종 이렇게 시비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수치도 모르는 단수가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꼴을 내가 더 봐야 하느냐!”

그리고 그 모든 비난은 놀랍게도 서문윤에게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비난의 말에 서문윤은 그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짜증을 삼킬 뿐이었다.

‘뭐야, 이건?’

이것은 익숙한 일이니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게다가 사람들의 비난은 제 알 바가 아니었으니, 애초에 서문윤은 지금 거짓된 신분으로 검설린의 옆에 자리하고 입장이라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낙향을 꿈꾸는 이는 저를 욕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으니, 잠자코 말을 듣던 와중에 서문윤은 문득 짜증이 치밀어 올라 시큰둥한 얼굴로 그의 정강이를 퍽 소리가 나게 시원히 까는 것으로 답을 하고야 말았다. 평소라면 자중했을 터인데 답이 없는 심각한 고민을 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저를 비난하는 말을 들으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부총관께, 억!”

“별가종사 주제에.”

한쪽 다리를 잡고 펄쩍펄쩍 뛰는 사내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시큰둥하다. 주 별가라 불린 사내의 얼굴에 황당함이 물든 순간이었다.

“뭐, 뭐?”

그것은 7품의 녹수군사가 내뱉을 법한 것이 아닌 황당한 말이었으나, 서문윤은 진실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별가종사가 저보다 네 계단은 높은 품계라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까마득히 잊혀진 후다.

이미 저는 무수히 많은 고관과 얽혔고, 그네들은 심지어 이 나라의 황제, 황태자, 막후의 실력자이지 않은가? 심지어 출병식 당시 악연으로 시작하여 지금껏 쭉 저를 싫어하고 있는 유왕인 부총관도 3품이 되는 당상관이다.

익위 시절의 품계와 같은 별가종사의 비난 따위란 산전수전을 겪고 온갖 서러운 눈칫밥을 다 먹은 서문윤에겐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으니. 그는 그저 피로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그를 지나칠 뿐이었다.

“이, 이게!”

무어라 등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으나, 서문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할애하기엔 그가 가진 걱정거리가 깊었다. 그리하여 뒤에 자리한 소란을 무시하며 서문윤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이 자식이!”

등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고, 문득 이상함을 눈치챈 서문윤이 황급히 몸을 돌려 저를 노린 칼을 피했다. 비틀거리며 고꾸라지는 사내의 얼굴에 시퍼런 살기가 감돌아 있다.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져 노기가 스친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짓….”

“그만!”

그러고였다.

주 별가가 다시금 몸을 돌려 서문윤을 찌르려 하고, 서문윤이 화가 난 얼굴로 허리춤에 꽂은 칼에 손을 대려 할 때의 일.

병영에 일어난 소란에 사람들이 몰려들 때, 그들 사이로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사내가 있었다. 서문윤의 몸이 움찔거린 순간이었다.

강인한 인상의 30대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위축시키는 기세를 흘리는 이였다. 눈썹이 굵고 팔다리가 긴 사내는 고요한 눈으로 주 별가와 서문윤이 대치한 상황을 노려보며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손 내려놔.”

바로 이중환이었다. 고우군의 전 호위였던 사내.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칼을 치켜뜬 주 별가의 손이 서서히 내려가 힘없이 지면을 향해 늘어지고야 만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사람들 사이 막중한 존재감을 드러낸 중환이 다시금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그만 해라.”

“하, 하지만 이 낭장님!”

울컥한 주 별가가 무어라 항의의 말을 내뱉었으나 그것은 이어진 그의 말에 끊기고야 말았다.

“그만 하라 했다.”

서느런 말에 희미한 노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주 별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답답한 빛이 스쳤다. 화를 참지 못한 듯 서문윤의 얼굴을 노려보던 그는 그러나 사내의 말을 어기지 못해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를 떠나고야 말았다.

“따라와라.”

마치 부모에게 장난을 친 일을 걸린 아이마냥 몸을 움츠리던 서문윤이 그의 눈치를 슬금 살살 살피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중환의 얼굴을 몹시 굳어져 있었으니, 뒤늦게 제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달은 서문윤은 제 발을 저려 할 수 없었다.

눈치를 보며 중환의 등 뒤에 붙은 서문윤이 주눅 든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고야 만다. 적막은 길게 이어졌고 그것은 서문윤의 몸을 움츠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명백한 하극상이지.’

다른 건 몰라도 검에 손을 대려 한 죄는 참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죄였다. 아무리 이청은과 검설린이 그를 보호하고 있다 한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곤경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배의 등장이 천운이었다.’

그러니 그를 아는 서문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별가의 말이 틀리지 않은 걸 아나? 제대로 하극상을 저지르더군.”

“…….”

“네가 절대로 장군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란 걸 깨달았지.”

녹수군사로도 그리 위세를 부리니 장군이 되어선 어찌하겠느냐. 기가 막힌 듯 중얼거리는 중환의 말에 서문윤은 그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그의 뒤통수 위로 강렬한 시선이 잠시간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 문득 탄식과도 같은 말이 흐르고 서문윤은 그 순간 놀라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고야 말았다.

“대체 전하는 널 첩자로 어찌 써먹겠다 하시는 거야! 사람도 되지 못한 놈을.”

“여기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숨죽여 내뱉은 서문윤의 말에 증환은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제가 미진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세작의 기본 수칙을 모르십니까?”

발끈한 서문윤이 그를 향해 숨을 죽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제가 미진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한 차례의 소란이 지나고 이목이 쏠릴 터인데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니고 병영에서 대놓고 그리 말하나.

그리하여 서문윤의 얼굴이 심각히 굳어졌을 때였다. 그 순간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느릿하게 입술을 연 중환이 묵중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기본 수칙이 뭔데?”

“그야 저도 모르죠.”

“넌 네가 뭐라고 하는 건지 이해는 하고 말하는 거냐?”

“저는 대부분 모르지만 그래도 입조심이 기본이란 사실은 알고 있어요. 어째서 이리 경솔하십니까. 아예 세작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시지 그럽니까.”

“뭔가 몹시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청은의 세작이 아니라 그의 협업자다.”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려 말을 하는 사내는 일견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차가웠으나, 그러나 여전히 서문윤은 그에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청년을 중환이 오묘한 얼굴로 응시하고, 그렇게 잠시간 기이한 침묵이 이어졌다.

‘협업자라.’

그 순간 서문윤이 그 어느 생각에 이르러 묘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출병식 사건 이후 어디론가 끌려갔던 중환과 다시 재회를 했을 때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소란을 일으키곤 그는 나와 함께 부총관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던 중 누군가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었지.’

그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어쩌다 보니 중환을 제 실수로 부총관에게 찍히게 만들어, 어디론가 끌려가던 중환을 미안해하며 걱정하던 서문윤은, 놀랍게도 태자의 옆에 시립한 그를 훗날 발견하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고우군은 태자의 옛 정적이라 재상의 수하였던 중환 또한 그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을 텐데, 뜬금없게 태자에게 그가 구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문윤과 이중환, 이청은은 지금 한 배에 타고 있는 것이었다.

서문윤의 두 눈이 그 순간 흔들거리고, 이중환의 입술 끝이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던 그 어느 순간 이중환을 응시하는 서문윤의 눈이 돌연 깊게 가라앉고야 만다.

그 눈에는 의혹의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서진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그가 태자에게 몸을 투신한 줄 알았다.’

바로 어느 합리적인 추론에 의한 의심에 이른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그저 단순하게 독랄한 강서진의 추적에서 벗어나려 하는 줄 알았지.

‘확실히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태자뿐이니….’

강서진이 독랄한 인간인지는 나루터에서 암살당한 고우군을 두 눈으로 보며 서문윤도 똑똑히 체감한 후였다. 또한 그가 얼마나 유능한지도 한 나라의 재상이자 최고 권력자의 암살 사건을 수습하여 정권을 부여 쥐는 과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그의 추격을 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리하여 서문윤은 처음에 이중환이 태자의 보호를 받으려는 줄 알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생각을 수정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단순히 보호를 받는 것만은 아니어 보이지.’

그것은 이중환이 가끔 보이는 묘한 기색에서 일어난 의심이었다.

미간을 찡그린 중환을 훑어보며 서문윤이 표정을 굳혔다.

아니, 애초에 이것은 조금 의심스러운 관계다. 고우군과 태자는 본디 서로를 견제하는 정적이었지 않는가? 그러니 좋은 감정이 없을 옛 정적의 수하를 견제할 필요가 있을 텐데 태자는 어찌 그를 중용하는가.

심지어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일개 녹수군사와 같은 반열이었던 중환을 장군으로 삼고 옆에 두었다. 게다가 서문윤은 가끔 그에게서 의뭉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저 근거 없는 의심이 아니라, 제게 가끔 쓴웃음을 흘리고 누군가를 피하라 언질을 줄 때 이중환의 기색이 의미심장했던 것이다.

뒷배가 없는 그가 제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알고 걱정 어린 충고를 하니 서문윤은 그에 자연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태자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가?

그렇게 침묵이 길게 이어질 때의 일이었다. 문득 중환이 음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그 표정이 뭐야.”

서문윤이 몸을 움찔하며 그를 얼떨떨하게 바라본 때였다.

“할 말이 있으면 차라리 말을 해! 그따위 눈으로 보지 말고.”

“아니, 뭐.”

울컥한 듯한 사내의 말을 흘려 넘기며 서문윤이 말을 얼버무린다. 머쓱한 표정을 한 그를 이중환이 못마땅한 듯 입술 끝을 꺾은 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강렬한 시선에 서문윤이 민망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별가인지 뭔지 하는 놈이 떠들어 이목을 끈 상황이 아닌가. 머쓱하게 말을 했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서문윤이 문득 어둡게 얼굴을 가라앉히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저희는 한 배를 탄 입장이고, 이것은 사소한 사건 하나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모래성같이 아슬아슬한 일이 아닙니까? 어째서 그리 방만하십니까.”

그 진지한 말에는 진심이 희미하게 묻어나 있었고, 또한 지울 수 없는 근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중환은 더 그를 추궁하지 않고 무거운 얼굴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거든.”

그리고 그 끝에 문득 흐른 말이었다.

“예?”

그 의미심장한 말에 놀라 서문윤이 되물었으나 그에게서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내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슬쩍 돌릴 뿐이었으나, 그러나 서문윤은 그의 차가운 얼굴에서 그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내뱉었는지 그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 건조한 목소리에 서린 마음이, 그 공허한 두 눈을 마주하며 받은 감상이 말이다.

서문윤은 그 순간 처음 만났을 때 냉소적이었던 복면의 사내를 떠올리며 희미하게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눈으로 차갑게 웃었던 검설린을 알고 있었다. 더 살아갈 희망을 품지 못한 채 죽음을 구원으로 여기던 이를 말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서문윤이 ‘따라와.’ 짤막한 말을 내뱉곤 등을 돌린 사내의 뒷모습을 어둑한 눈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또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거겠지.’

이중환 또한 그러하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묵묵히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인적 드문 샛길을 밟으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어째서 떠났던 병부에 몸을 담게 되었는가. 이청은과 손을 잡고 꾸미는 일은 무엇인가.

완전한 이청은의 사람도, 검설린의 사람도 아닌 서문윤은 이중환과 이청은이 무슨 까닭으로 서로 같은 손을 잡았는지 캐묻지 못했기에 자세한 비사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하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당신은 죽고 싶은 겁니까?”

문득 서문윤의 입에서 죽이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중환의 발걸음이 멈추고 공기가 가라앉은 때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린 서문윤이 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중환의 굳은 등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무엇 때문에 억지로 살아가고 계신 겁니까?”

그리 말하는 서문윤의 얼굴에는 불안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건조한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잠시간 적막이 이어졌다. 느릿한 숨결을 내뱉으며 서문윤은 튀어나오는 말을 삼키고 있었다.

‘당신의 죽음을 유예시킨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검설린은 이청융의 유언을 지키려 안식과도 같은 죽음을 물리고 10년을 버티려 했다. 서문윤은 그에게 언뜻 언질을 들은 적이 있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한지. 목적을 잃고 길을 헤매는 삶을 견디지 못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무언가 확고한 목표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그렇다면 이중환을 지금 살리고 있는 사명은 무엇일까?

서문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빛나고 있었다.

검설린에게 이청융과 같았을 그의 주군을, 고우군을 눈앞에서 잃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의형은 너무나도 지쳐 복수를 포기했지.’

그 순간 숨이 멈추고 서문윤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불길한 가정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 또한 그럴까?’

신념으로 따르던 주인을 잃은 수하가 따르는 사명이 과연 복수 말고 또 무에 있을까? 그리하여 서문윤은 그가 언뜻 옛 주인에 대한 애정과 그의 죽음에 대한 허망함을 드러낼 때 기시감을 느끼곤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태자의 곁에 있는지, 떠났던 병부로 다시 돌아왔는지 그는 항상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어두운 눈으로 중환을 바라볼 때의 일이었다.

“그만 가라. 그가 기다릴 거다.”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흐르고 서문윤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중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묵묵히 두 사람은 사람의 이목이 드문 그늘 아래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서문윤을 마치 호위하듯 태자의 천막 근처까지 그와 함께한 중환이 발걸음을 멈추어 서고 서문윤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이 서문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발걸음을 뗐다.

천막 안으로 발걸음을 디디는 순간 덤덤한 목소리가 흘렀다.

“왔군.”

잠시간 망설이던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전하.”

고개를 든 서문윤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막사 한가운데에 자리한 사내였다. 고요한 눈을 반짝이는 사내를 마주하며 잠시간 머뭇거리던 서문윤이 발걸음을 뗐다. 은은한 어둠이 깔린 막사에 발을 디디는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이제 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때가 올 거다.’

검설린의 막사를 나갔을 때는 해가 저 동쪽에 있었는데 돌아오니 이미 해가 정수리 위에 쨍쨍하게 떠 있다. 그러나 서문윤은 조급하게 굴기보단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검남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그는 또다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될 테지. 동궁사변 때 어느 정도 상실한 병부에서의 인망도 회복될 테고.’

묵묵히 걸음을 걷는 사내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부황께서는 그를 밟으려 들 거다.’

담담히 말을 내뱉는 이청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걸 강서진과 검설린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아.’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리는 말이었다.

‘결국은 그들이 먼저 손을 쓰느냐, 부황과 내가 먼저 손을 쓰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에 대한 제 답변을 상기하고 문득 입술 끝을 딱딱히 굳히고야 말았다.

‘전하께서는 폐하와 완전히 한 배를 타신 겁니까?’

‘뭐?’

그는 태자이니 당연히 황제의 말을 따르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러니 서문윤의 말은 황당한 것임이 분명할 터였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을 할 때 이청은의 얼굴에 스쳤던 묘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전하를 이미 정적으로 인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의형이 만약에 제거된다면 전하를 견제할 만한 이가 없습니다.’

그 말에 이청은은 짧은 침묵 끝에 짤막하고 상투적인 답변을 남길 뿐이었다.

‘효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청은의 얼굴에 스친 긴장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감히 황제를 불신하는 말을 내뱉은 저를 꾸중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황제와 태자의 사이엔 균열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군공을 세운 적이 없는 그를 토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검설린과 서로 견제하게 한 것부터가 자식에게 할 결정은 아니었지.’

황제의 눈치를 보며 검설린을 견제하고, 지난날 병부의 욕받이가 되었던 이청은을 떠올리노라면 서문윤은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어찌 그의 온전한 뜻이겠는가? 가장 중요한 일이 반란군을 토벌하는 것임을 이청은이 어찌 모를 리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황제의 대변인이 되어 그렇게 검설린과 사사건건 대립해야만 했다. 서문윤은 언젠가 괴로움을 토로하며 술을 진창 마시던 이청은을 기억했다.

“일단 반란을 진압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부황께서는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내가 걸출한 인재라 팔기린을 견제하고 전쟁에서도 승리할 줄 알아, 제기랄!”

황제가 은밀히 내린 서찰을 받고 분개하던 그를 떠올린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다며 한숨을 짓는 이청은을 말이다.

‘비정하다.’

그러니 서문윤은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부자가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권력의 습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이리 답답함을 느끼고야 만다. 묵묵히 이청은의 일을 떠올리던 서문윤은 그리고 어느 생각에 이르러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청은의 말마따나 자식을 그리 견제할 만큼 권력욕이 강한 황제가 의형을 두고 볼 일이 있겠는가? 황제의 지난 행적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니 태자께서는 의형이 혹여 거병할까 봐 걱정을 하시는 거고.’

한 번 호되게 당한 검설린이 두 번 황제에게 당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그가 손을 쓴다면, 반쪽이나마 병부를 손에 쥔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만약 검남 토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의형의 명성도 하늘을 찌르겠지.

그러니 서문윤은 이청은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을 하고 있었다.

이제 곧, 정말로 서문윤이 검설린에게 비수를 꽂을 때가 온단 얘기였다.

정말로 그를 배반할 순간이.

‘생각하기 싫다.’

이미 결정지은 일이라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다가온 현실에 서문윤은 답답함에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장계를 숨기지 않았으나 서문윤과 그는 항상 붙어 있어 그를 훔쳐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이청은에게 보고한 내용은 그다지 진귀한 정보가 아니었으니, 정말로 그에게 타격이 되는 일은 없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 서문윤은 완전히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싫은 일. 검설린의 상처받은 얼굴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영혼을 잃은 듯한 얼굴로 천막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발을 천막 안으로 디디던 서문윤이 이마를 향해 날아온 물체에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엇!”

그리고 식겁한 청년이 다급히 손을 뻗어 간신히 그 물건을 잡았을 때였다. 그는 제 뺨을 촉촉이 적시는 액체 방울을 깨닫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야 말았다. 코끝에 스치는 진한 먹물 향기를 맡으며 서문윤이 붓을 손에 든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들곤 몸을 굳히고야 만다.

그곳에 흉흉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검설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매를 조인 흑의 면복을 입고 관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사내는 검남의 지형지세를 기록한 군사 지도가 펼쳐진 탁자에 앉아 있던 와중에 뜬금없이 서문윤에게 붓을 날리고 못마땅한 기세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순간 당황한 서문윤이 중얼거리고, 그의 귓전에 서느런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늦었어.”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희미하게 굳은 얼굴을 풀곤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뒷간을 파다가 온 거냐. 아니면 또 어디 사고를 치고 온 거냐.”

검설린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 발에 저려 긴장하던 서문윤이 뺨에 묻은 먹물 방울을 닦아내고, 붓을 던진 손을 거두며 짜증에 가득한 얼굴로 검설린이 버럭 화를 이어나갔다.

“제발 넌 가만히 있어. 또 누구와 시비 붙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난 널 팔아버릴 테니까.”

서문윤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린 순간이었다.

“절 어디다 팔아버리시게요?”

“뭐?”

“제가 없으면 의형도 살 수 없다면서요.”

“웃기는 소리. 난 널 토번에 팔아버릴 거다.”

농담을 하는 거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얼굴로 하는 말.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은 사내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 순간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농인지 진담인지도 잘 모르겠어.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벌릴 때였다.

“아니.”

그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농담 어린 말을 내뱉으려던 입술을 막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그 순간 얼굴을 희미하게 굳힐 수가 없었다.

“농담이다.”

그 덤덤한 말에 서문윤은 몸을 멈칫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너무하시군요. 저를 적국에 팔아버리시다니요. 절 멀리 팔아버린다고 의형이 발을 편히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아니. 나는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겠지.”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침묵 끝에 잠긴 목소리로 답변할 뿐이었다.

“농담인 건 알고 있어요.”

더 이상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죄책감에 따끔해진 가슴을 외면하기가 힘들어, 서문윤은 민망함에 얼굴을 작게 붉히며 그를 향해 면박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의형답지 않습니다.”

검설린은 짧은 침묵 끝에 그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이리 와.”

그 말에 잠시간 고민하던 서문윤이 문득 어두운 얼굴로 발걸음을 떼며 느릿하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서문윤이 가까이 다가갈 때 돌연 검설린이 그의 팔목을 부여잡곤 그를 잡아당기려 들었다. 서문윤의 몸이 비틀거리며 무너진 순간이었다.

아무리 해가 서쪽을 향해도 아직 낮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남우세스러운 짓을 하려나?

요즘 들어 제게 많이 손을 대는 그를 상기한 서문윤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으나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민망한 짓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 의형.”

서문윤은 제 비틀거리는 몸을 단숨에 들어 제 무릎 위로 앉힌 검설린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어야만 했다. 그러나 검설린은 제 이름을 다급히 부르는 서문윤의 말을 못 들은 척 그의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단단한 가슴에 폭 넘어지듯 안착한 서문윤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얼음이 되었다. 그 또한 작은 체구가 아니었으나 가끔 서문윤은 검설린의 손에 너무나도 쉽게 팔랑거리면서 마치 제가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다는 착각을 하곤 했다. 검설린은 그 단아한 외모와 다르게 타고난 몸이 무골이었고, 서문윤은 그의 품에 폭 안겨 옴짝달싹도 못 했으니까.

“왜 이러십니까?”

그리하여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또한 고작 허리에 팔을 두른 단순한 행동에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며 그의 품에 가두어져 있어야만 했다. 검설린은 그에게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고, 그저 서문윤의 정수리 위에 턱을 대곤 깊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죄책감을 느끼던 중 갑작스러운 접촉을 받은 서문윤이 제풀에 찔려 오소소 몸을 떨다가 몸을 멈칫한 때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저를 끌어안고 있는 검설린에게서 이상함을 느낀 탓이었다.

저를 끌어안고 한숨을 푹 내쉬는 그가 몹시 피로해 보였으므로. 서문윤은 그저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검설린의 뜻 모를 행동을 거부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강소성으로 내려가자.”

그리고 긴 침묵 끝에 흐른 말이었다.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의아해하면서도 서문윤은 의형의 말을 순순히 받았다.

“강소성은… 번화한 도시인데요.”

머뭇거리며 흐른 서문윤의 반문에 이어진 답변이었다.

“너는 시골에 오두막을 짓는 것을 원하지만 나도 이제 이립보다 불혹에 가까운 나이잖느냐. 시골은 손 들일 곳이 많아.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편히 지내고 싶어.”

“아직 서른 중반인데 무슨 헛소리십니까? 육갑을 맞은 노인같이 말을 하시군요.”

“네가 지천명을 앞둘 때 난 이순(60살)이겠지.”

서문윤의 미간이 좁혀진 순간이었다.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만.’

자꾸만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는 것 보니 오늘도 그의 고질병이 도졌나 보다. 이제는 익숙해진 검설린의 땅굴파기에 서문윤이 제 배꼽 위에 얹어진 손을 긁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의형은 제가 돌볼 겁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검설린은 성격이 모나나 몹시 아름다우니 돌보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서문윤은 피를 토하는 그의 등을 쓸고 간호를 하는 것을 역겨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내어주기를 꺼려할 뿐이었다.

아파하는 그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를 꼭 껴안아주고 싶은 기이한 마음이 들고야 마니.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외모를 지닌 검설린을 서문윤은 다른 사람에게 시중들게 싶어 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그가 성격이 나쁜 것을 다행으로 여길 만큼 불안해하던 서문윤이 그 말에 어디 기쁨을 느끼겠는가?

그러나 그런 서문윤의 마음을 모르는 듯, 검설린은 언짢은 기색이 드러난 목소리로 그를 타박할 뿐이었다.

“돈이 있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난 널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을 거다.”

“으음.”

“시골은 벌레도 많고 먼지도 많아.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미비하다. 게다가 사람들의 텃세도 심하지. 너도 경험했지 않았느냐? 촌이라고 사람이 딱히 더 순수한 것은 아니란 걸. 그네들은 오히려 저들을 억제할 사람이 없을 때 더 이기적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본디 사악하므로 강제하는 힘이 없을 시….”

“또 순자 놀음!”

장한성 이후로 나아졌다고 생각했더니만 또 그놈의 성악설이다. 발끈한 서문윤이 배에 얹어진 검설린의 손을 탁 때리고 고개를 돌려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럼 전쟁에 나와서 맹자를 논하라고?”

성선설이나 왕도정치, 인의를 논하기엔 이미 겪은 것이 많지 않나. 그리 허무히 중얼거리는 검설린은 그러나 서문윤의 짙은 시선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곤 침묵 끝에 다시금 흐른 말이었다.

“……불량배들도 관아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럼 난 또 개같은 성정에 사고를 칠 거야.”

“참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으시는군요.”

어이가 없어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짤막히 답할 뿐이었다.

“난 나를 잘 알지. 되지도 않는 말은 하지 않아.”

“…….”

“하여간 강소성으로 가자. 서문린이 사는 곳 주변도 나쁘지 않지. 거긴 도시지만 그렇게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 아니니까.”

그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워 서문윤의 마음을 자못 녹이는 것이었다.

“외곽에 저택을 얻고 입이 무거운 시비를 몇몇 들이는 거다. 그래서 여름이면 고생하지 않고 네가 편히 낮잠을 자고, 겨울이면 네가 날 근심하며 지켜보는 일이 없게 따뜻한 탕을 매번 지으라 하겠다. 끼니마다 구주의 진미를 올리고, 새하얀 여우의 털로 푹신하게 침상을 잠식해주겠다. 자단목이 튼튼하지만 향이 없는 게 흠이지. 네가 원하는 나무로 저택을 짓고, 거기서 함께 살자.”

“…….”

“내가 잘하겠다.”

서문윤이 그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으니 검설린은 그것이 무언의 수긍인 줄 알고 한층 더 누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으려 했다.

“널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을 거야. 더 이상 마음고생도, 몸 고생도 하지 않게…, 윽!”

꿈만 같은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덤덤한 목소리는 희망에 잠겨 행복을 향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제 욕망이 드러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손등을 타고 오르는 고통에 신음을 목구멍에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너 이 새끼……!”

눈에 불을 켠 검설린이 서문윤을 노려보았을 때 그는 검설린의 손이 사라진 틈을 타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반항기가 서린 눈이 심상치 않다. 그 빤한 시선에 울컥하고야 만 검설린이 서문윤에게 꼬집힌 손을 거두곤 그를 흉흉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뭔 개짓거리야.”

그 말은 역시나 살벌한 것이었으나 요즘 들어 간이 부은 서문윤은 그에 기가 죽지 않고 따박따박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무슨 꿍꿍이십니까.”

2년 전 검설린을 두려워하고 존경했던 서문윤이라면 결코 상상치도 못 하는 일이었다. 서문윤은 마치 탐색하는 짐승마냥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검설린을 노려보았고, 그에 검설린은 순간 당황하여 몸을 멈칫하곤 한동안 아무런 반응을 내뱉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어야만 했다.

그가 언제 어디서 그런 대접을 받아보았단 말인가?

“꿍꿍이,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순간 울컥한 검설린이 서문윤의 허리를 잡아 그의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손을 놓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무슨 꿍꿍이로 그런 짓을 저지르고 다녀! 어디 가서 시비나 걸어놓고 어쩌면 그리 당당해?”

서문윤의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한 말이었다.

“아셨군, 악!”

“네가 버릇이 덜 들었어. 내가 아주 만만하지?”

몸을 돌려 그와 얼굴을 마주 본 상황, 제 머리를 퍽 때린 매정한 손길에 악 소리를 흘린 서문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상관을 패고 다니면 어떡해, 이 모자란 것아! 네가 황제의 총애를 믿고 패악을 부리는 귀비더냐? 네가 남자 양옥환*(양귀비)이라 병영의 소문이 쫙 퍼졌어!”

아무래도 그는 병영의 총책임자이니 그 한바탕의 소란이 보고되지 않았을 리가 없긴 하지.

‘그래서 선배님 입단속을 시키려 했던 건데.’

혹여 다른 말을 듣지 않았으려나 순간 긴장하여 허리를 꼿꼿이 세운 서문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설린은 그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다더니, 언행불일치도 어느 정도껏이… 너 이 새끼!”

그리고 서문윤은 문득 중압감을 참지 못해 제 어깨에 얹힌 검설린의 손을 떼어내곤 그를 깨물고야 말았다.

“그냥 죽어라.”

“악!”

그에 검설린은 당연지사 분노하여 망아지같이 구는 서문윤의 턱을 부여잡곤 뺨을 깨물며 그를 응징하려 들었다. 서문윤이 식겁하여 허우적거리는 손으로 검설린의 가슴을 밀어대고, 그렇게 잠시간 아웅다웅하는 시간이 흘렀다.

“좀, 좀….”

이제 몸이 버겁다면서. 혈기왕성한 스무 살이라면 사람 죽겠군.

결국 얼굴을 내어주어 무기력하게 깨물리고야 만 서문윤이 시뻘게진 얼굴로 뺨을 닦으며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좀 늙으십시오…!”

검설린의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은 실로 무도한 것이었으나 서문윤의 온 얼굴을 깨물어 그의 방만함을 응징한 검설린은 조금은 기분이 풀려 그를 탓하지 않았다.

“내가 머리 검은 짐승을 키웠군.”

그는 그저 빨개진 뺨을 만지작거리는 서문윤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른하게 말을 내뱉을 뿐이다.

“도대체 요즘 왜 이래? 왜 이리 엉덩이에 불 붙은 어린아이같이 굴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뭐?”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검설린이 당황할 때였다. 잇자국이 난 뺨을 문지르던 손을 떼며 서문윤이 그를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의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러곤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진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야 말았다.

“저택은 개뿔!”

검설린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을 드러내게 만든 말이었다.

“아주 막나가?”

호형호제를 하자더니 이제는 아예 서열을 바꾸고자 함인가.

어느 정도 현실감이 있어야 화가 날 텐데, 아예 정신을 아득한 저편으로 날려 보내는 말에 검설린은 또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해 얼이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고 나선, 그는 꽤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산산조각이 난 넋을 간신히 수습하여 얼굴을 미묘히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막나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의형이 제게 그런 말을 했는데.”

서문윤은 농담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제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강서진은 의형을 높은 자리에 앉히려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을 했고요.”

“…….”

“제가 비록 미진하다만 권력의 습성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그리 태평하게 말을 하십니까……. 만약 강서진의 뜻대로 지존을, 지존을 해하고 그 자리에 오른다면.”

차마 서문윤은 말을 내뱉지 못했다.

희미한 절망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짙게 떨리고 있다. 새빨갛게 변한 서문윤의 얼굴은 이윽고 희게 질렸다가 새파래지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체념의 빛이 물들고 평온해지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에 힘이 빠진 순간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리고 적막 끝에 흐른 말에, 서문윤을 잠자코 바라보던 검설린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곤,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어 그를 또다시 흔드는 데 성공했다.

“난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좌를 노린다 말했지 황제가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실로 사람의 얼을 뺏는 말이었다.

“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당황한 서문윤이 멍한 눈으로 검설린을 올려보았을 때 냉랭한 사내는 잠자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딘가 여운이 짙은 미소에 서문윤이 몸을 부르르 떨고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황가에는 방계 황족이 많지.”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화등잔 만하게 뜨는 서문윤을 마주하며, 그는 음울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적당히 꼭두각시를 세우고 난 빠질 거다.”

“그, 그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누구를 세우실 겁니까? 꼭두각시를 세운다면 방계 황족을 고르실 터인데 그럼 섭정을 세울 이를 누구로 생각하시고 계십니까? 권력의 균형을 어이 잡을 생각인가요? 아니, 다 차치하고 강서진과 합의된 일….”

“몰라.”

그리고 검설린은 서문윤의 간절한 물음에 담담하고도 짤막한 말을 내뱉어 그의 속을 뒤집는 데 또다시 성공할 수 있었다.

“예?”

“나라 따위 내 알 게 뭐야.”

지, 지금 뭐라고?

“내가 말했잖아 적당히 꼭두각시를 세우고, 난 빠질 거라고.”

얼이 나간 서문윤을 앞에 두고 담담한 말이 이어진다.

“권력이란 질색이야.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을 뭐? 위국안민? 그런 건 이미 옛적에 열 사람의 몫을 해치웠어. 그냥 살면 안 되나?”

“…….”

“내가 개인사를 희생해서 나라와 민초에 헌신했으면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이미 내 반생은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난 다 싫어. 귀찮아. 힘들어. 난 하야하고, 너랑 같이 살 거다.”

“…….”

“…우리 그냥 세외로 튈까?”

말이 진행될수록 서서히 일그러지던 서문윤의 얼굴은 마지막 질문에 이르러 결국 흉흉한 기색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주 막 나가시네요!”

누가 누구보고 막 나간다 하는 거야?

혼군이라지만 엄연한 군주를 교체하고자 하는 말을 내뱉으면서 나라 따위 내 알 게 뭐냔다. 세외로 튀잔다! 애국충정, 위국안민을 기치로 삼는 명문 무가의 후손은 그 심히 무도하고 무책임한 결국 더 참지 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검설린을 노려보며 쏘아붙이듯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게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란 것은 누구보다 의형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넌 요즘 왜 이래?”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거짓말과 같은 정적이 자리했다.

유리처럼 투명한 눈이 서문윤을 고스란히 담았고, 그 시선에 압도당해 청년은 기나긴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서문윤이 기나긴 침묵 끝에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

“……전 모르겠습니다.”

긴장이 숨통을 조이고 있다. 머리는 어지럽고 후각은 예민해진 후였다. 아찔한 시야를 가까스로 수습한 서문윤이 이윽고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중얼 말을 내뱉었다.

“전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서문윤의 얼굴에 불안이 스며들고 검설린이 고소를 흘린 순간이었다. 그는 무어라 할 말이 많은 듯 날카로운 눈으로 서문윤의 눈을 쓸었으나 끝끝내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래.”

그는 그저 무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리고 잠시간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전쟁이 끝나면 그래서 저와 함께 살 건가요?”

그 끝에 서문윤이 갈라진 목소리로 적막을 깨고 검설린에게 말을 내뱉는다. 고요한 시선을 받은 사내의 얼굴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런 태평하기 그지없는 검설린의 모습에 서문윤은 더욱 초조함을 느끼며 그를 추궁하려 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미간을 찡그린 서문윤이 검설린의 옷깃을 잡아당기려 손을 뻗고, 조급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을 내뱉으려 입술을 벌렸다.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러나 서문윤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것만 같이 애정 어린 눈으로 서문윤을 유심히 바라보던 검설린이 문득 묘한 미소를 띠며 책상 한켠에 말려 있던 서신을 검지로 쥐곤 그에게 내어주었던 것이다.

허공에 나풀거리는 종이에 시선이 닿았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리하는지 몰라 그가 어쩌지도 못한 채 제 앞에 팔랑거리는 서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안색을 굳혔다.

그것은 바로 시선이 닿은 먹물의 글자를 읽은 탓이었다.

‘…이건!’

그 순간 희디흰 채후지(종이의 일종) 위에 쓰여진 네 개의 글자를 읽은 서문윤이 몸을 부르르 떨고야 만다. 그야말로 정수리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아, 서문윤은 긴 시간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못한 채 그저 얼음이 되어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경악이 그의 얼굴 위로 물결치고 있었다.

“필체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

그리고 그 순간 귓가로 떨어진 담담한 말에 서문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홱 고개를 들어 올려 검설린의 얼굴을 창백한 얼굴로 바라본다. 손에 쥔 서신을 바스락 구기며 서문윤이 이 악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고작 네 글자에 동요당한 서문윤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치고 있었다. 검설린은 말 그대로 오묘하게 웃었고, 그렇게 잠시간 그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손에 쥔 서신을 거두어갔다.

옥으로 만든 가지 같은 우아한 손가락이 편지를 쥐었을 때 잠시간 망설이던 서문윤은 결국 입술을 깨물고 그 서신을 검설린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오왕암살(吳王暗殺)>

그 누구도 결코 알아서는 안 될 충격적인 말은, 서문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자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바로 황재천의 것.

“이게 무슨 말이냐 물었습니다.”

충격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을 짙게 노려보며 대답을 바란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에 답을 하지 않곤 도리어 질문을 내뱉어 그를 당황시켰다.

“나를 믿어.”

서문윤의 허리가 빳빳이 세워질 때 검설린의 눈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더 철저한 사람이니까.”

마치 밤과 같은 눈이다. 그 속에 선도, 악도 품었으나 결국 모든 것을 어둠으로 뒤덮어버리는 은밀한 장막 같은 것. 평소에는 그런 그의 눈을 좋아했으나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어쩐지 오한이 서리는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조금만 더 날 믿어주면 안 되겠느냐?”

그리하여 겁에 질려 핏기가 가신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온화하고도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함께할 먼 훗날의 미래를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리고 서문윤은 검설린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그를 껄끄럽게 여기고야 말았다.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떠는 서문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왕 이환은 황제의 친동생이었고, 황제, 태자를 제외한 유일한 황후의 자식, 직계 황손이다. 바로 하동에 별장을 세우고 인근의 양민을 착취한 죄로 고발을 당했던 이.

‘대, 대역죄!’

그리고 경악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서문윤의 귓가로 뒤이어 내려앉은 말이었다.

“이청은이 네게 무어라 말을 했느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서문윤은 완전히 시체처럼 변한 얼굴로 기나긴 침묵을 지키다가 문득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제가 그간 전하와 접촉한 것을 아십니까.”

“넌 내가 정말 모르리라 생각했나?”

“으음, 예.”

검설린의 할 말을 잃게 만든 말이었다.

“감쪽같이 속였다 생각했는데.”

사내의 입가에 어이없다는 웃음이 스치고, 기가 막히다는 빛이 새하얀 얼굴 위에 스치고야 만다.

“그래서 네가 멍청하다는 거다.”

그리 말을 내뱉은 사내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 잠시간 무덤덤한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했다. 건조하기까지 한 그 시선을 잠자코 마주하던 서문윤이 문득 눈을 지그시 감고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검설린의 검미가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눈은 왜 감아?”

얘가 왜 이래? 라는 얼굴로 미간을 찡그린 검설린이 서문윤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훑었다. 경험상 서문윤이 저리 이상한 반응을 보일 때보다 항상 그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펼쳐졌으므로. 지금 이 순간 또한 검설린은 그 꿍꿍이를 두려워하며 불안에 시달리고야 만 것이다.

못마땅한 시선이 서문윤을 쓸고, 그러나 청년은 눈을 뗄 기미를 보이지 않고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답변에 완전히 얼이 나가 얼굴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죽이려면 죽이세요.”

그 순간 검설린의 몸이 뻣뻣히 굳어져 내렸다.

짧은 적막이 흐른 때였다.

……이게 도대체 뭔 말이야?

그가 변명을 하긴커녕 절 죽이라 말을 내뱉고 목을 길게 뻗으니 검설린은 그런 그를 자연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청년의 얼굴은 온화했고, 그리하여 그를 노려보는 검설린의 얼굴은 갈수록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네가 농담할 기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문득 헛웃음과 함께 불안에 잠긴 말을 터뜨린 검설린이 불현듯 서문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빠르게 뻗어나간 손은 서문윤의 어깨에 안착했고, 이윽고 그의 목덜미부터 상완까지를 부드럽게 쓸어주어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었다.

몸의 급소를 더듬는 손길에 오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서문윤은 그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긴장된 근육을 풀던 손은 마침내 목에 이르러 승모근을 가볍게 쓸고 주물렀고, 그 우악스럽지도 옅지도 않은 적당한 세기의 안마에 서문윤은 결국 얄팍한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시간이 흘렀다.

희미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서문윤이 문득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검설린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한 말이었다.

“뭐?”

근육이 뭉친 서문윤의 어깨와 목을 주무르던 손을 멈칫하고, 사내의 가라앉은 시선이 그의 얼굴을 쓸고야 만다. 담담한 말이 이윽고 내려앉았다.

“화를 낼 때 화를 내야지 지금 말고 다른 때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검설린은 서문윤이 내뱉은 말의 의미를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에 안착했던 손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검설린이 기가 막힌 듯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왜 저리 미묘하게 구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넘어가려는 뜻이었나?

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천방지축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는지 몰라 자연 긴장하던 검설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이런 뻔뻔함은 차라리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이니 도리어 마음이 편하다.

“너는 대체 뭘 믿고 내게 갑질을 하는 거지?”

그러나 검설린은 서문윤을 향한 핀잔을 이어나가지 못했고,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전 의형의 마음을 믿고 그리합니다.”

갑작스럽게 훅 마음에 들어온 말에 당황을 하고야 만 것이다.

“뭐?”

검설린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일렁거리고, 누군가의 한숨이 느릿하게 흐르고야 만다.

“의형.”

그리 아스라이 말을 내뱉은 서문윤은 돌연 고개를 숙여 검설린의 이마 위에 이마를 겹쳤고, 그에 검설린은 잠시간 숨을 죽이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을 만지길 좋아하긴 했어도 어리광을 쉬이 보이진 않았으니. 그런 그의 마치 칭얼대는 듯한 말에 검설린은 당혹스러워하며 바로 반응을 내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윽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정말 절 안 죽이실 겁니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서문윤의 반응이 꽤나 진지하다.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나온 담담한 말에 검설린은 그 순간 무언가 미묘한 구석을 깨닫고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고 담담했으나, 검설린은 그 얼굴 아래 태동하는 불안을 느껴 슬쩍 찌푸려진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야 말았다.

짧은 침묵 끝에 느릿한 말이 내려앉았다.

“왜 그곳에 간 거냐.”

고개를 든 서문윤이 저를 고요히 바라보는 눈에 검설린에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농담을 하거나, 거짓을 말했던 게 아니었다.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그를 기만하고 싶지 않아 서문윤은 진심을 입에 담고 있었다.

“……막고 싶어서.”

그리하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흐른 답변엔 거짓이라곤 티끌만 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냥 무어 하나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진실이 숨겨져 왜곡되어 있을 뿐이었다.

침묵이 흘렀고, 그 시간 동안 서문윤의 얼굴을 누비는 시선이 짙어져갔다. 그리고 그 끝에 흐르는 냉소에 긴장으로 몸을 뻣뻣이 굳히던 서문윤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네 힘으로는 미진한 일조차 하지 못해. 이건 장한성과는 다른 일이다.”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어 의형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니 검설린은 제 무릎 위에 앉힌 청년을 지독히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연인을 보는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서슬 퍼런 시선. 그 무정한 눈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야 말았던 서문윤은 그러나 빠르게 마음을 추스른 듯 다시금 평온한 얼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검설린의 이마의 홈이 더욱 깊어지고, 사내는 한층 더 서느런 시선으로 서문윤을 응시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곤 그 사이로 묵중한 말을 내뱉어 서문윤을 몰아붙이려 들었다.

“이곳에는 왜 온 거냐.”

그 냉막한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그저 짤막한 말로 답변할 뿐이었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검설린이 무어라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그러곤 청년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사내의 눈은 어둑한 저편으로 가라앉고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내렸다. 서문윤은 저를 짙게 노려보는 시선에 굴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의형은 아무래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내뱉을 때 서문윤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선이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져 어느 순간부터는 서문윤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렬해진 탓이었다. 그것은 검설린의 시선을 받는 일에 익숙하던 서문윤마저 고역스러워한 것이었으나, 그는 끝끝내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서문윤은 제 의형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를 향해 답변을 재촉할 뿐이었으니……. 그리하여 그 긴 대치 끝에 먼저 패배한 사람은 검설린이었다.

“수자(豎子)!”

끼익 소리가 흘렀다. 사내의 몸의 중심이 뒤로 기울여진 순간이었다.

다 큰 청년을 더벅머리 어린아이라 칭하며 사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고, 이윽고 그의 입술 사이로는 느릿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잔뜩 피로한 얼굴, 지친 표정에는 서문윤을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그제야 조금은 긴장이 풀린 얼굴로 편안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저를 의심하십니까?”

담대하게 말을 이어나갔지만 사실은 긴장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도리어 서문윤은 갑작스럽게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경계를 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제게 배반감을 느껴 저를 내칠까 봐 두려워했다.

아니, 그런 것보다 검설린의 마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를 신뢰하는 눈이 빛을 잃고 또다시 그가 삶의 의욕을 잃을까 봐, 모든 것을 포기할까 봐 두려워졌다.

‘다행이다.’

그러나 검설린은 완전한 내막을 아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저 이청은과 접촉을 하는 것을 꼬집을 뿐이었으니. 서문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문득 흘러나오는 말을 막지 못했다.

“절 곁에 두신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사실 서문윤이 쭉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저는 당신이 경계하는 태자와 영합하여……. 전장에 몰래 왔습니다.”

이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사내는 정말 저의 다른 속내를 눈치채지 않고 있는 걸까? 서문윤은 태자의 연줄로 군부에 들어왔고, 그것은 누가 보아도 의심할 법한 수상한 행위였다.

그런데 어째서 검설린은 무어라 추궁조차 하지 않은 채 절 쉬이 받아들였을까?

“제게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껏 가슴 한켠에 묻어놓았던 질문을 흐름을 탄 서문윤은 멈추지 않고 내뱉었으니,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꽤나 긴 침묵 끝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쭉 홀로 살아왔다.”

느릿한 말에 고개를 든 서문윤은 그리고 그 순간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고요한 눈으로 서문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 서문윤은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던 것이다.

“이청융이 나를 구제하고 잠시 내가 몸을 담을 곳이 생겼다고 여겼지만, 모든 게 허상이었지.”

지극히 온화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고, 그리고 이어진 검설린의 말에 서문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그렇게 쭉 혼자였고.”

그것은 감정변화가 존재하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너를 만난 거다.”

실로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말. 그러나 그의 과거를 아는 서문윤은 그 담담함에 더욱 동요할 수밖에 없다. 얄팍한 신음이 입술 밖으로 흐르고 서문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고야 만다.

그는 알고 있었다. 검설린은 과거의 일에 초탈한 게 아니라 그저 무뎌진 것뿐이었으니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은 모두 과거의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던 것이리라.

그러니 서문윤은 그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 홀로 외로운 세상을 헤쳐 나가고 발견한 게 저 자신이란 말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미 그에게 한 차례 잘못을 저지른 서문윤은 떳떳이 그를 바라볼 수도, 그를 위로하는 다정한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기만이 아닌가?

“서문윤.”

그리고 침묵하는 그의 귓전에 고요한 목소리가 연이어 내려앉았다.

“너만은 나의 편이겠지?”

서문윤의 얼굴을 완전히 무너트린 말이었다.

그는 기나긴 시간 동안 오로지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검설린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고, 서문윤은 제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움찔거리다가 뺨을 쓰는 손길을 깨닫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느릿한 한숨을 내뱉은 서문윤이 일그러진 얼굴로 검설린을 노려본다.

말의 무게가 상당한 것을 알기에 서문윤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문득 얼굴을 작게 휘저어 제 뺨을 쓰는 손가락을 떨어트리곤 그러곤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잔잔한 말을 내뱉었다.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서 멀어지라 말을 했지만 두 번이나 사지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검설린의 눈이 깊게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흐르고, 연이어 잠긴 목소리가 이어지고야 만다.

“제가 당신을 위하지 않으면 누가 당신을 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간곡히 호소하는 말이었다.

검설린에게, 또 그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

“제가 당신 곁에 있지 않으면 누가 당신 옆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검설린은 잠자코 서문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들반들한 흑석 같은 눈이 차분히 가라앉아 청년의 얼굴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었다.

그 눈에 새겨진 청년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내뱉은 말은 끝으로 갈수록 갈라지고 떨렸고, 그에 검설린은 자그마한 쓴웃음을 입술에 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널 별종이라 그래.”

“…….”

“하지만 그래서 내가 구원받았지.”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이 다시금 온화하게 풀리는 걸 목표하고 아슬한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러나 위기를 넘기고도 서문윤은 답답한 마음, 마음 한켠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안과 슬픔을 참지 못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허벅지를 부여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문윤의 얼굴에 문득 허탈한 웃음이 스친 때였다.

“당신의 옆자리는 제 몫입니다.”

제게 믿음을 주는 사람을 배신하는 무게를 깨닫고 있었다. 그를 위한다고 하면서 그를 상처 주는 행위를 예비하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의 진심을 듣고도 예전처럼 진심으로 호응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 답답하여, 또 제가 선택한 길이 또다시 후회되고야 말아 그리하여 울적한 얼굴로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서문윤은 문득 입술을 느릿하게 입술을 열고 그 사이로 불안에 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 당신은 항상 제 곁에 있어야 해요.”

그리 중얼거리곤 서문윤은 고개를 들어 간절한 시선으로 검설린을 올려다보았다. 그 새까만 눈에는 평소와 다른 초조함이 엿보였으니 희미하게 일렁거리는 불꽃은 애정에 의한 것이었고, 또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그 감출 수 없는 강렬한 욕망.

그를 잠자코 바라보던 검설린은 문득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곤 고개를 숙였다.

“네가 내 집이 된 것을…….”

그렇게 그는 고요한 밤 같은 눈을 감고 서문윤을 향해 몸을 기울였고, 제 부드러운 입술을 그의 것 위에 올려놓고 입맞춤을 시도했다. 서문윤은 제 입술을 덮는 부드러운 것에 자연 눈을 감고 입맞춤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손은 자연스럽게 서문윤의 허리춤으로 향하고, 옷깃 사이를 파고들었다.

< 9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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