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망향(望鄕)(4) (23/31)

22. 망향(望鄕)(4)

천 년의 고도, 장안은 요즘 하루가 다르게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소식 들었어, 하동이 독립을 했다던데?”

“그게 뭔 개소리야? 거기는 지금 회흘이랑 전쟁 중이라지 않았어?”

“그건 승리로 끝났는데, 조정에서 전시 사령관에게 책임을 물으려다가 하동 전체가 뒤집어졌나 봐.”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민초의 반응은 터질 게 터졌다는 식이었다.

“내 언젠가 그럴 줄 알았지. 이 무능한 놈들.”

중앙 관청이 자리한 장안은 특히나 고관의 무능함이 두드러진 곳이었다. 사서에 나올 법한 유능한 재목이라던 나라의 재상도 차마 수습하지 못한 문란한 풍조를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하동은 지나치게 먼 곳이었으나 사람들은 변방의 난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또 안사의 난이 일어나려나?”

절도사들이 독립을 외치고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은 이제는 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므로.

“그나마 10년 전에 변방을 정벌해서 다행이군. 거기는 이제 다시 일어나려 해도 힘이 없잖아?”

“불행 중 다행이겠지. 그쪽이 침략해오면 이제 막을 장수라도 있어? 조정에서 다 처죽인 지 오랜데.”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논했고, 어떤 사람은 반란을 논했다. 사람들은 평상시라면 대역죄로 여겨질 발언조차 서슴지 않고 논하곤 했다. 이미 정부는 혼선에 이른 상태였고, 장안의 사람들은 관료에 믿음을 주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사람들의 입을 단속하려 들었으나 지방에서 횡행하는 반역의 조짐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찰 뿐이었다.

그렇게 혼란이 가중되던 와중에 들려온 말이었다.

“고우군이 도적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소문에 연연하지 않고 상황을 관조하던 소수의 식자층마저 충격에 빠트린 말이었다.

“정말 하늘이 당을 버리시는 건가!”

무얼 모르는 사람들은 조정의 문란을 방조한 고우군을 욕하지만, 사실 알 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정적을 대하는 그의 가혹함은 둘째 치고, 나라를 경영하는 그의 능력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치세에서 그는 명재상이라 충분히 불릴 수 있는 인재였고, 난세에도 그는 적어도 재상으로서의 몫을 똑똑히 해내고 있었다.

당은 그가 있어서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이 모양 이 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회에 불참하던 황제 대신에 기강을 바로잡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동궁사변 이후로 기세가 한풀 꺾였다지만 아직까지 위세가 높은 번진의 장수들을 견제하고 9년이 넘게 조정을 이끈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 그들은 고우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일어날 분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가 죽으면 도대체 이제 누가 그 억센 변방의 장수들을 억제한단 말이지?

식견이 있는 자들이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일이었다.

그리하여 위아래로 말이 나오던 그 어느 날 장안에 당도하여 화약고를 터뜨린 말이었다.

“악공이 귀환을 한다! 팔기린이 관직에 복귀한다!”

온 장안을 들썩이게 한 말이었다.

* * *

장안은 무수히 많은 인파로 거리가 미어터지고 함성과 환호로 가득 찼다.

“팔기린이 돌아왔다!”

마차가 저 멀리서 보일 때 번을 서던 경비병이 기쁨에 차 소리친 말이었다. 그들의 상관은 그런 경비병을 꾸짖기는커녕, 성문을 달리며 우렁차게 소리를 내지를 뿐이었다.

“팔기린이 돌아왔다! 악공이 돌아왔다!”

거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뛰쳐나오고 있었다.

마차는 수행하는 인원이 적고 초라했으나 곧 그렇지 않게 되었다.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었다. 시장에서 비단을 팔던 아낙은 천을 던지고 성문으로 향했고, 나라에서 세운 학당에서는 박사가 서책을 던지고 맨발로 땅을 밟았다.

“저희를 또다시 구원하러 오셨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내뱉었다. 하나같이 들뜬 표정을 지으며 그들은 마차 안에 자리한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외치는 중이었다. 대다수의 외침은 사내의 귀환을 축하하는 것이었고, 또 그들의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장안에 인파가 물결치고 그 한가운데 마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리를 치는 이들의 얼굴에 환한 빛이 가득하다. 언제 앞날을 걱정하고 시름했냐는 듯 밝은 얼굴로 귀환을 환영하는 이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사내는 어느 순간 제게 들려온 말에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네 명성이 대단하군.”

담담히 내려앉은 말에 고개를 돌리니 강서진이 차분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나직한 말이 이어졌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 말에 잠시간 침묵하던 검설린은 돌연 냉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혼이 날 생각.”

그러곤 그는 미간을 찡그리곤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울상을 짓는 얼굴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그 애가 알면 화를 내겠지.’

한순간 그들이 벌레 같다는 생각을 품었다.

제 스스로의 삶을 건사할 힘조차 없는 제게 인생을 구원해달라고 달려드는 이들이 역겹다. 제게 맡겨둔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제게 애원하는 이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이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야멸찬지도.

그러나 그런 생각을 품다가도 장한성의 일이 떠올라, 그리고 저를 곧은 눈으로 바라보던 청년이 떠올라 검설린은 제 생각을 바로 지우고야 말았다.

그 아이가 말했지, 세상에는 절망만큼 희망이 있다고.

그러나 검설린은 마차가 나아가지도 못할 만큼 거대한 인파를 바라보며 환멸을 느낄 뿐이었다. 그의 곁에서는 살아갈 희망도, 세상을 조금 더 너그럽게 볼 여력도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눈은 그저 감정 없이 무심할 뿐이었다.

예상과 다를 바 없이 그는 장안에 도착하곤 지리멸렬한 일들을 경험해야만 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이젠 영공을 원망하는 이도 아무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때 낙향을 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개나 소나 지인을 다 팔았는데 그깟 고변이 뭐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영공, 나를 기억하시오?”

입조를 하는 길에 수도 없이 들려온 말들.

알고 모르는 얼굴들이 내뱉는 말들에 대한 사내의 감상은 짤막할 뿐이다.

“병신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음울하게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떨궈내는 이의 등을 강서진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반색하는 사람들을 떨치고 도착한 정전에서 검설린은 그리고 또다시 한 번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대는 동궁사변에서 그대가 모셨던 주군의 죄를 고발했지.”

황제의 앞에 엎드려 복귀를 알렸을 때 떨어진 말이었다.

“짐은 그대의 공을 보아 역적을 모신 죄를 사하려 했으나, 그대는 짐이 내린 면책 조서와 치하의 뜻으로 내린 비단을 내려놓고 돌연 장안을 떠났다.”

부복하여 대청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검설린의 얼굴에 조소가 스치고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저 치는 변하지도 않았다.

“어째서 그리한 거지?”

답변은 침묵 끝에 무덤덤한 목소리로 흘렀다.

“신이 잘못했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흐른 말이었다.

“신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떠났나이다.”

황제에게서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고, 검설린은 그에 몸을 낮추며 제 오랜 원수를 향해 공손한 목소리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거흉을 알아보지 못한 눈을 뽑고 싶었으나, 그리하지 못해 천하를 헤맸습니다. 공덕을 쌓아 죄를 씻으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죄를 저질렀으니 청컨대 천화의 목숨을 거두길 원합니다.”

그가 내뱉었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장황한 말이었다. 평소에 그라면 결코 내뱉지 않을 말.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사내는 제 뒤통수 위로 떨어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뻣뻣했던 사내를 의심이라도 하는 듯한 매서운 시선. 검설린은 제 육신을 헤집고 마음을 꿰뚫어보려는 듯한 시선을 무시하고 묵묵히 말을 기다릴 뿐이었으며,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짐의 명령을 어기고 분란을 일으킨 그대를 처벌해야 하리라. 심지어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리고 침묵 끝에 들려온 말이었다.

“그대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지나치게 요란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짐에게 충심을 다했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만 같던 자들이 다 짐을 배신할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짐에게 복종했다.”

편전 안에 늙은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신의는 죽은 것이다. 영원히 그대는 정북대도호로 살거라! 나는 강소성주의 보증을 믿겠다. 짐은 그대의 여러 잘못을 용서했다. 악공은 부디 충심을 다하라. 역적을 따른 죄가 있으니 대장군의 자리는 바로 돌려주진 않겠다만, 공을 세운다면 마땅히 치하할 것이다.”

마지막 말에 검설린은 결국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짐은 그대가 하동의 변란을 진정시킬 때를 기다리고 있겠노라.”

안 본 사이에 더 병신이 되었는데?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말을 간신히 삼키며 그는 짤막하게 답할 뿐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왜 저렇게 된 거냐?”

정전에 나서자마자 바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그런 말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도대체가 제가 역적 집안으로 몰아 그 가족을 잡아 쳐죽인 사내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꼴이며, 강소성주의 보증을 들먹인다든가, 저가 휘말려 있는 하동의 변란을 직접 진정시키라 종용하는 말이니.

하나같이 정상인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다.

강서진은 도대체 왜 저리 신뢰를 하는 건가?

고우군이 강남동도에서 죽었으면 그곳의 안찰사를 의심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 게다가 본인이 병부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견제한 저를 등용하여 절도사를 막으라고? 아니, 애초에 저를 박대하고도 등용하곤 충성을 바치라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잖아.

강서진은 입궁 전 그의 말에 ‘원래 황제라는 족속은 그리 뻔뻔한 법이지.’란 말로 답을 했으나, 검설린은 상식적으로 그의 말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 잠시 웃던 강서진은 ‘애초에 너는 네 권세와 인기로 위기를 얻은 게 아니다. 네 뻣뻣함이 황제를 분노케 했으니, 몸을 굽힌다면 황제는 만족할 게다. 그런 오만한 족속이다, 그들은.’이라 말을 내뱉어 검설린의 실소를 자아냈다.

지금 장난해?

그간의 황제의 견제와 탄압이 권력욕도 아니고 고작 허영심에 의한 것이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예전에도 그리했지만, 검설린은 그들의 생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의문할 뿐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은 말. 그것은 뜻을 파악하면 바로 구족을 멸할 말이었으나 강서진은 그를 탓하지 않고 무심한 목소리로 받을 뿐이었다.

“고우군이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피를 토한다고 암암리에 말이 돌았었지.”

그의 말을 듣고 검설린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간신히 삼켜야만 했다.

‘원래도 병신 같던 작자가 거기에서 더 모자라질 수 있단 말이냐? 고우군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던 거냐? 저런 병신을 하늘의 자손이랍시고 모시면서 모지리들을 이끌고 나라를 운영했으니 그 작자도 고생이 꽤나 많았겠군. 한 나라의 재상을 개새끼 도살하듯 죽였다고 네 만행에 욕을 퍼부었는데, 이제 보니 호상이었어.’

그러고였다. 침묵하는 그의 귓가로 어느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은 것은.

“난 이걸 9년간 버텨왔어.”

냉소 어린 말에 고개를 돌린 검설린은 싸늘하게 굳어진 강서진의 얼굴을 마주하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병신과 모지리들 틈에서 9년간 버텨왔다고, 알아들었어? 팔기린. 난 이걸 9년간 버텨왔다. 그리고 더 참을 수 없지 ”

그의 말은 지나치게 적나라하여 천하의 독설가의 얼굴마저 굳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직 정전을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는 곳에서 적나라하게 흐른 말에 검설린은 그의 분노를 엿볼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 기척은 없었고, 그 또한 소리를 죽여 말한 것이었으나 궁궐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런 위험한 말을 퍼붓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고우군이 죽었으니 비어 있는 영보의 자리는 누군가 채워야겠군.”

침묵 끝에 검설린이 내뱉은 말은, 그래서 강서진의 이성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는 화제를 다루고 있었다.

“네가 앉는 건 아닐 테지. 누굴 꼭두각시로 삼았지?”

그의 시도가 무색하지 않은 듯, 온화하던 얼굴에 서느런 분노를 드러내던 강서진은 그제야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금세 마음을 가라앉힌 강서진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심완.”

답변은 검설린의 실소를 자아내기 충분한 것이었다.

“적당히 유능하고 바보 같은 인사군. 네 검은 속이 아주 잘 보여.”

뼈가 서린 말에 강서진은 그저 덤덤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래, 그럼 나는 심완처럼 네 꼭두각시가 되면 되는 건가?”

그의 말에 강서진은 침묵 끝에 나직한 웃음과 함께 답변을 했다.

“네가 할 일은, 그저 마음을 다잡는 것뿐이다.”

이어진 말에 검설린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너는 희망을 놓지 않았지? 익위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강서진은 고요한 눈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뚝 선 채 얼어붙은 사내의 등에 심상치 않은 기세가 엿보였다. 분노를 억누르는 듯, 혹은 모멸감을 느낀 듯한 모습. 뒷짐을 진 손 사이로 슬쩍 까딱거리는 검지를 흘끗 보며 강서진이 음울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불편해하는 듯한 검설린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강서진은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하지만 너는 고향을 잃었고, 이미 일은 벌어진 후다. 네가 더 무엇을 할 수 있다 생각하지? 너는 돌아갈 곳이 없어.”

침묵 끝에 돌아온 검설린의 답변이었다.

“……알고 있어.”

그 단순한 답변에 담긴 마음은 단순하지 않았다. 강서진은 그 갈라진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쓸쓸한 감정을 느끼고 그 순간 몸을 멈칫해야만 했다.

“알고 있다.”

중얼거리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며, 한순간 강서진은 무언가 말을 망설이는 듯 입술을 살짝 열었다가 멈추었으나 이어진 사건에 모든 고민을 잊고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부황을 알현하러 온 태자의 일행과 마주하고, 그의 익위와 마주한 것이었다. 태자의 호위 무관인 익위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고, 그에 두 고관은 충격과 공포에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앞서 서술한 상황의 전말이었다.

* * *

“네 신용이 고작 이 정도냐?”

서느런 말에 강서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당혹스러운 얼굴로 침묵할 뿐이었다. 도대체 저놈이 여기엔 왜 있어? 저로 인해 인생이 꼬인 그에게 다시 평범한 삶을 찾아주려 장안에 온 검설린이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익위 차림을 한 서문윤은 그야말로 검설린을 분노케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성을 잃고 감히 정전에서 언성을 높인 검설린은 제 소매를 잡아당긴 강서진에 의해 뒤늦게 내관의 시선을 눈치채곤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정명공.”

그리고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눈이 가느스름한, 귀티가 흐르는 인상의 사내, 현 태자 이청은은 느릿한 목소리로 여유로이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나 또한 정명공에게 할 말이 몹시 많지만, 알현을 청하러 온 자리이니 후일을 기약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명공. 시간은 많습니다.”

황제를 보필하는 공공이 때마침 뛰쳐나와, 이청은의 뜻대로 검설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나 가택에 돌아온 후에도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도대체 이곳에 있을 까닭이 무에 있단 말인가?

평소와 달리 푸른 익위의 옷을 입고 담담하게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를 이청은이 저를 흔들려 내세운 대역이라 생각하고 싶었으나 검설린은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서문윤이다. 검설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존재를 확언할 수 있었다.

어찌 저가 서문윤을 모르겠는가?

제 인생은 서문윤에 의해 한 번 구원을 받았고, 의욕 없이 죽어가던 검설린은 그로 인해 살아갈 의욕을 다시 품기까지 했다. 외롭게 세상을 떠돌던 중에 돌연 다가와 잊었던 감정을 다시 깨우치게 만든 이였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바로 서문윤이었다. 지키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 그의 정체를 대역과 혼동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검설린은 더욱 격분하여 강서진을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켜주겠다, 약속을 지키겠다 말을 해놓곤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저놈을 보게 만들어? 이게 네 능력이란 말이지?”

냉소가 흐른 순간, 사내의 입술 밖으로 독랄한 말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고작 이립도 되지 않은 애송이조차 통제하지 못하면서 대업은 무슨 대업이고 유지는 무슨 유지냐!”

그리고 기나긴 침묵 끝에 강서진이 내뱉은 말이었다.

“익위가 어려운 길을 걸으려 하는군.”

검정이 거세된 듯한 삭막한 눈으로 허공 어느 한곳을 노려보는 사내의 얼굴에 일순간 차가운 한기가 감돌다가 사라졌다.

* * *

“불이야!”

고함소리와 함께 찾아온 매캐한 연기. 서문윤의 얼굴에 화색을 돌게 한 것들이었다.

‘오늘인가.’

예상보다 몹시 빠른 시간이다. 서문윤은 침착한 얼굴로 침상을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곤 숨을 멈췄다. 새빨간 불길이 물결치고 있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몸을 움직여 빠르게 외투를 몸에 걸치고 앞으로 있을 일을 채비했다.

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검설린을 보내줄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를 하고 있던 서문윤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부수고 들어온 사내를 마주하고 희색 어린 얼굴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문 대주님.”

차분한 인상의 40대의 중년인. 복면을 쓴 사내의 정체를 서문윤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직접 오셨군요.”

그를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바로 서문윤의 옛 상관이었다. 그러나 희색이 만연한 서문윤의 말에, 대주라 불린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할 뿐이었다.

“시간이 없다.”

창백한 얼굴로 내뱉은 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네가 왜 여기에 갇혔어? 표식을 남겼길래 급하게 일을 저질러버렸다마는 이건 원래 저질러선 안 될 일이야!”

그 말에 서문윤은 씁쓸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늘진 서문윤의 얼굴에, 사내는 더 추궁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에게 검을 던진 사내가 작게 말했다.

“그래서 여기서 꼭 가져가야 하는 게 뭐라고? 시간이 없어. 빨리 말해라!”

* * *

악천화가 장안성에 정명공부를 다시 연 지 일주일째 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장안을 충격으로 몰고 간 고우군의 사망 사건과, 연이은 악천화의 정계 복귀 이후의 일 말이다. 고우군이 저와 정권을 다투는 강소성주의 영역에 갈 일이 무에 있어? 게다가 변경도 아니고 평안한 강남에서 도적떼를 만나?

고우군의 뜬금없는 죽음을 당연히 의심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티를 내거나 굳이 그 말을 내뱉지 않았으니, 그것은 모두가 고우군의 긴 치세를 지긋지긋하게 여긴 탓이었다.

고우군은 정적에게 자비롭지 않았고, 사람들은 수십 년간 길게 권력을 독점한 고우군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늙고 꼬장꼬장한 노인네란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고, 그에 대한 대항마로 등장한 강서진은 상대적으로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품에 고결한 이름으로 명성이 높았다.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살 일이 있는가?

어차피 고우군은 늙었고, 세대교체는 필수적인 일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강서진이 대권을 잡을 일을 예상하고 있었으니 조금 더 그 순간이 빨리 찾아온다 할지언정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연이어 벌어진 두 차례의 큰 사건에도 겉으로 장안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복귀한 악공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또다시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리란 기대였다. 그가 무관이고, 조정을 관리하는 것은 재상인 영보의 영역이란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다만 그건 확실히 겉으로 보이는 일에 한정된 일이라, 그 내막은 호수 아래 백조의 다리처럼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그것은 요즘 들어 장안성의 가장 큰 화두인 두 사람, 새로 대권을 짊어진 젊은 권력자와 병부로 귀환한 전쟁 영웅에게 그러했는데,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의 충격적인 등장에 이성을 잃고 그간의 일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강서진은 뒤늦게 어느 불한당이 제 가택을 침범한 것을 알고 어이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한 도의 안찰사의 가택을 침범하곤 그 은밀한 곳에 갇힌 이를 꺼내 가다니, 그럴 만한 수완을 지닌 자는 천하에 별로 없다.

개중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은 더욱 소수였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천리 밖의 태자가 그 먼 강소성의 일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그러곤 그는 이성을 다시 부여잡고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서문윤이 내통한 거군.”

그럴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고우군이 강남으로 떠나고 태자의 사람이 그를 경계하여 강소성에 내려온 것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택의 경계는 엄중하다. 서문윤이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은 기밀이었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천 리 밖 태자가 서문윤이 감금된 사실을 알고 그의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네 동생, 설마 아직까지 이청은과의 연을 끊지 않은 모양인지?”

그 말에 검설린은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바라본 강서진은 음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그날 문천상이 지나치게 빨리 내 행적을 따라잡았다 했지. 그렇게 유능한 인사는 아닌데. 그때부터 표식을 알리고 있었나?”

고우군이 죽은 그날. 중환마저 추격하여 사살하려던 강서진은 뒤늦게 저를 급습하려는 문천상을 피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고 후환을 남겨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의아했던 점이 이해가 간다.

“자네 의제는 판을 크게 벌리는 데 재능이 몹시 크구나. 장한성의 일을 보고받고도 내가 그를 모르고 있었군. 하하!”

살벌하게 웃음소리를 들으며, 침묵하던 검설린은 결국 이를 부득 갈며 격분하여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자식은 무슨 생각이야!”

그 시간, 이 모든 소란의 주인공인 두 고관을 충격으로 빠트린 청년은 세상모르게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물이 졸졸졸 흐르는 맑은 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심심해.’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청년의 얼굴에 어느 누군가가 알았다면 속이 터질 여유가 덕지덕지 묻어 나왔다.

그는 살이 보기 좋게 오른 채 폭이 좁은 푸른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니, 그것은 몸에 달라붙는 운신이 편한 무복이란 점에서 그와 함께 다녔던 나날간 입은 평복과 다를 게 없으나 중요한 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바로 일반인이 입을 수 없는 관복이란 점이었다. 그것은 바로 동궁에 충성을 바치는 무관이 입는 옷이었다.

그러니까 청년, 서문윤은 태자의 호위, 익위사라는 종5품의 높은 관직에 복귀한 채 이 순간 동궁의 후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너무 없군.’

종5품이라면 무관 중에서도 딱히 낮지 않은 관직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태자가 동궁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내린 관직에 불과했다. 군신의 연은 끊어진 지 오래고, 귀환한 그는 태자가 경계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서문윤도 이해하는 바였다. 엄연히 따지면 저는 바로 태자의 은밀한 적과 깊은 연을 맺은, 잠재적인 적이었다.

사실은 위기를 무릅쓰고 그가 저를 구한 것도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리라.

아니, 사실은 서문윤 또한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의리로 저를 구원한 이에게 어찌 절 의심하냐 섭섭함을 표할 수 있겠어?

서문윤은 저를 향한 감시에 투정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요즘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후원을 산책하던 중 들려온 목소리였다.

“나는 네가 영원히 장안에 오질 않길 바랐어.”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아, 소리를 흘리며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소매가 넓은 푸른 용포를 입은 자가 담담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갸름한 얼굴과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이 인상적인, 어딘가 뱀과 같은 인상을 주는 서른의 사내였다.

어찌 보면 교활한 책사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고아한 귀공자같이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오만한 권세가 같기도 한 자.

그는 일국의 태자이자, 서문윤의 전 주인인 이청은이었다.

“전하.”

청은의 옆에는 차분한 인상의 중년인이 검을 든 채 주군을 호위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전 상관이자 그를 구출해낸 문천상은 그를 잠시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그 얼굴에서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읽은 서문윤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저는 이 옛 주군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태자는 한가롭게 동궁의 후원을 산책하며 예산을 축내는 겁 없는 익위를 추궁하지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람 된 자의 정리를 내보이지 않고 너를 내쳤다. 면사패를 내렸다만 그게 네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나는 널 마치 공사에 이용하는 목재마냥 가져다 쓰고 쓸모없는 나무토막처럼 내쳤다.”

호수에 다다른 태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숨을 내뱉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바로 한탄이 섞인 말이었다.

“그런데 네가 내게 도움을 청할 줄은 몰랐구나. 어찌 내 마음을 안 거냐?”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웃음을 지으며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래, 사실은 그를 오랫동안 원망했었다. 이청은은 그의 주군이었으나, 충성을 다한 신하를 돌보지 않았고 서문윤은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방식으로 낙향하였다. 주군에게 버림을 받고 군신간의 정리는 끊어진 지 오래. 마음속 깊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던 서문윤이 모순적이게도 그의 진정한 뜻을 깨달은 것은 바로 강서진의 말을 곱씹은 덕이 컸다.

강소성주가 내뱉은 말. ‘태자가 인재를 허투루 쓰고 버려버렸다’며 은근히 회유하려 했을 때, 서문윤은 그에 잠시간 흔들렸으나 잊혀두었던 날의 일을 떠올리곤 이상한 점을 깨닫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네가 날 떠나게 되었구나.’

그것은 바로 그가 낙향하던 날의 일이었다. 서문윤이 그의 옛 주군에게 상처를 입었던 날.

‘이 은혜는 잊지 않고 있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너 하나쯤은 돌봐줄 수 있을 테니 언제든지 수건을 흔들어 나를 부르거라.’

이청은은 그가 낙향하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 그리 말을 했던 것이다. 손수건을 살랑거리면서 떨어트리며 하는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암담한 얼굴로 침묵했다가 묵묵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 말이 조롱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인도 아니고 수건을 흔들어 구명을 바랄 일이 무에 있단 말인가?

누가 들어도 그것은 조롱에 불과했고, 서문윤조차 그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충격이 너무 커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생각을 해보면 아무리 한낱 도구에게 감흥이 없다 한들 충심을 다한 이를 그리 조롱하며 내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는 수하를 다루는 주인의 자세가 아니다. 적어도 한 나라의 태자에게는 체면이 필요했으니.

게다가 오랫동안 지켜본 주군은 그럴 성품이 아니었다.

강서진은 그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그 말을 내뱉었으나, 오히려 서문윤은 정신을 차리고 그때의 상황을 관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누누이 그가 궁궐에 있을 성품이 아니라 했다.

그가 차라리 다리가 부러져 낙향한 게 복이었다고. 그 말에 심증을 얻은 서문윤은 이청은이 평소에 제게 했던 말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허언을 내뱉지 않는 성품이었다. 장난기 많은 성품이긴 했으나, 그는 결코 태자로서 부적절한 일을 하지 않았고, 한번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켰다.

저를 도우겠다는 말은 사실에 가까운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 수건이 정말 저를 한 번 도울 수 있지 않겠는가?

긴가민가한 마음은 사실로 드러났다. 서문윤은 고우군에게 납치당하고 수건을 남몰래 떨어트렸다. 수건이 무에 큰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했으나 그는 강서진의 저택에서 익위대가 사용하던 작은 표식이 섞인 음식을 발견하고 그런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강서진이 떠난 이후 일을 도모해보겠다는 말을 서문윤은 믿었고, 문천상은 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그를 구했다.

지금에서야 서문윤은 그저 머쓱해할 뿐이었다.

“제가 너무 어려 전하의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한 나라의 태자라 한들 권신의 저택을 한낱 옛 수하를 구하려 침범할 수 있겠는가?

그는 정녕 저를 위하려 한 것이었다.

“아아, 넌 정말 강아지 같았지. 귀여웠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으며 말하는 이청은의 모습은 한 나라의 태자라기보단 그저 동네에 사람 좋은 형과 같아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도 격의가 없는 옛 주군의 모습에 서문윤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수건을 발견하신 겁니까?”

그 말에 잠시 웃던 이청은은 나긋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수건은 짓밟히면 향이 난다. 황실에서 기르는 개가 맡을 수 있다.”

그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알아. 사실 네가 잘 몰랐으면 했다.”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더는 네가 정계의 일에 얽히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구나. 결국 네가 수건을 사용했고, 내 앞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럴 줄을 알았으면 그냥 널 돌볼 것을 그랬다. 네가 상처받은 것을 깨닫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그리고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 끝에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전하께서는 제게 이리 잘해주십니까?”

“네가 나를 위해 다리를 내어주었잖아.”

그런 말로 설명이 가능한 게 아니다. 서문윤은 그를 향해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준 것만큼 돌려받는 게 아니지요. 특히나 군신관계라면.”

“무얼 그리 말해. 이제 너는 내 수하가 아니잖느냐?”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곤, 이윽고 느릿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를 의심하십니까?”

이청은은 느긋하게 반문할 뿐이었다.

“너는 나를 의심하느냐?”

서문윤은 그리 말하는 사내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이청은에게는 충성을 맹세했고, 그 결정을 아직도 후회하지 않았다.

잠시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원망할 때도 다리와 맞바꾸어 주인을 구한 결정을 돌이킬 생각은 없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어느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서문윤이 이청은을 처음 만날 때 일이었다. 동궁으로 배정받기 전에, 장안에 도착한 서문윤은 주막에서 초가을의 서린 비를 맞고 떠는 아이를 품에 안아 드는 공자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비단옷에 진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아이의 젖은 신을 벗기고 제 비단 허리끈을 벗어 그 발에 감아주던 사내를, 서문윤은 동궁에서 다시 만나곤 결심했다.

그에겐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다.

‘착하지, 아가.’

어린아이의 발을 부드럽게 감싸며 달래는 사내의 얼굴에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 묻어 나왔고, 그런 사내를 기억하는 서문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아니요.”

그것은 분명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제가 당신의 성품을 의심한다면 기꺼이 다리를 희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을 내뱉곤 서문윤은 고개를 들어 태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태자는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옛 주군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느릿한 목소리로 할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이청은이 동궁사변의 배후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위정자의 자질이 있었고, 적어도 제가 충성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다면 서문윤이 해야 할 일은 무에 있겠는가?

“당신이 악공의 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검설린과 그가 반목을 할 이유는 없었다. 검설린은 강서진이 하고자 하는 일을 원치 않았고, 서문윤은 그저 그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따를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청은은 적이 아니었고, 서문윤은 그런 그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순진해빠진 놈. 내가 그래서 너를 낙향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태자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 * *

‘그나저나, 너 정명공과는 무슨 사이냐?’

자리를 떠나기 전, 미간을 찌푸리며 이청은이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렇게 부황과 강소성주가 어르고 협박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던 위인이 너 때문에 다시 똥물에 발을 담갔다고? 운 상단주도 그를 설득하지 못했는데.’

그리 말을 내뱉은 사내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가 너를 그리 신뢰하더냐?’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는 절 마치 집을 나간 병사의 마음속에 자리한 고향처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제 의형입니다.’

그러나 그리 말을 내뱉지 못하고, 서문윤은 그저 짤막한 말로 애틋한 마음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다.’

검설린과 그리 조우한 지 거의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검설린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아 검설린과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을뿐더러, 여러 가지 혼잡스러운 상황이 그들의 몸을 사리게 한 것이다. 재상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때다. 게다가 그의 조심스러운 성품상, 약점인 저를 노출시킬까 행위를 쉽게 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그를 알면서도 서문윤은 저를 찾지 않는 검설린을 섭섭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의형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의형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걸까?

그러나 그리 투덜거리던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원하던 검설린과의 조후를 이룰 수 있었다.

“악!”

비록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이지만.

“너, 너 이 막나가는 놈아!”

뒤통수를 움켜쥔 서문윤은 귓가에 울려 퍼지는 울분에 찬 말에 일그러진 얼굴을 활짝 펴며 환히 웃고야 말았다.

“의형!”

“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검설린을 더욱 격분하게 만든 반응이었다.

* * *

그것은 궁중의 연회 도중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지나치게 눈에 띄는 것은 그닥 좋지 않다……. 네 직위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외번을 서주어야겠어.

태자는 외번을 서게 된 서문윤을 향해 미안한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었다. 본디 종5품의 관직이라면 연회를 즐기지 못해도 태자의 뒤를 서 그의 몸을 지킬 정도는 된다. 서문윤이 일전에 하던 일이었고, 그러나 지금은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으슥한 기슭을 지키는 외번은 익위가 할 법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신세를 지고 있는 서문윤이 무슨 항의를 할 수 있으랴? 게다가 그것은 불안한 상황을 염려함이니, 서문윤은 그저 그의 명령을 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가 번을 서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뭐지?’

문득 서문윤은 저를 노려보는 시선을 느끼고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외번을 서고 있는 입장이라 한들 서문윤은 제 옆에 같이 외번을 서는 자와 달리 무과에 장원한 명문무가의 후손이었다.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그저 찬바람이 부는 담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시선이 분명 있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옆에 자리한 시위의 말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다가 문득 망설였다.

“잠시….”

상황을 설명할까? 잠시간 머뭇거렸으나 그는 궁중에서 말이 도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러 말을 돌리고야 말았다.

“잠시 후원을 살피고 오겠다.”

그리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담벼락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렇게 긴장을 삼키고 담벼락을 돌았을 때, 그는 휑한 바람만이 부는 빈 공간을 마주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야 말았다.

들짐승이었나?

요즘에 지나치게 신경이 곤두섰던 일을 떠올리며, 그는 그렇게 의심을 빠르게 풀고 몸을 돌려 원래 번을 서던 자리로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제 허리를 감싼 팔과 제 입술을 틀어막는 두꺼운 손에 반항할 새 없이 결박을 당하곤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헉, 소리를 흘리며 서문윤이 몸을 비틀었다. 두 눈이 흔들거리고 얼굴이 긴장으로 빠르게 물든 순간, 그는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아득한 기분에 휘말려 있었다.

한시도 경계를 풀어서는 안 돼야 할 금궐에서, 내가 너무 방만하게 굴었구나!

궁궐은 복마전이었고, 서문윤은 저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굳이 태자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볍게 저를 제압한 이 사내의 등장은 서문윤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다시 저는 이리 무력하게 납치되고 이용당하나?

요즘 들어 제 무술 실력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던 서문윤은 그 순간 제 미약함을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위기에 몰린 상황을 해치우려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곤 몸을 움직여 저를 붙잡은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려 들었다.

‘아, 제길!’

그러곤 그의 팔꿈치가 사내의 손에 붙들린 그 순간이었다.

“누구… 의형?”

입술을 가렸던 손이 떼어지고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꿈에도 그리며 그리워하던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한 탓이었다. 달빛을 등진 사내의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그에게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밤중에 더욱 고고하게 빛나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 서문윤은 그 순간 환한 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의형, 여긴 어떻게!”

그리고 그는 의형의 얼굴이 마치 지옥도의 야차마냥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눈앞에 별이 튀기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보고 싶었, 악!”

이마를 철썩 때리는 매서운 손길에 서문윤이 기쁨에 찬 목소리를 내뱉다 말고 비명을 내지르고야 만다. 이게 무슨 횡액인가? 이마를 부여잡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서문윤에게 이어진 것은, 바로 울화통이 터진 듯 울분에 찬 목소리였다.

“너 이놈 새끼! 너, 너 너!”

연이어 뒤통수를 퍽퍽 후려갈기는 손길이 이어졌다.

“앗, 의형, 악!”

그 한이 서린 듯한 손길에 서문윤은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이를 부득 악물며 그야말로 분노에 차서 서문윤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에 그는 의형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손바닥은 그저 어린아이가 투닥거리는 듯한 힘으로 살을 찰싹거리고 있었다. 그 손길은 아프지 않았으나, 서문윤은 의형의 심상치 않은 얼굴에서 자연 그의 크나큰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많이 화나신 것 같지?

“여긴 어디라고 또 기어들어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문윤은 그가 울컥하여 소리친 말에 문득 억울함을 느끼고 미간을 찡그리고야 말았다. 그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불퉁한 말 때문이었다.

의형도 제 의사를 묻지 않고 이곳에 온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머리를 때리는지?

잘한 짓이 없어 그저 몸을 웅크리고 있으나,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반항 어린 표정을 지은 서문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의의 말을 내뱉었다.

“별로 좋지 않은 머리를 왜 때리십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격분하여 소리칠 뿐이었다.

“좋지 않은 머리라 때리지, 좋은 머리면 때릴 필요가 무에 있어! 아껴도 모자랄 판국에.”

그 미친 논리에 서문윤은 잠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일리가 너무 없어서 오히려 일리가 있게 들리는 말에 묘하게 설득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항의할 틈을 놓친 서문윤이 검설린을 빤히 바라보며 눈알을 굴렸다. 그를 마주하곤 검설린은 또다시 격분한 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네가 드디어 미쳤어!”

여기서 수긍을 하면 어떡하누. 어째 더 머리가 백지가 되어가!

답답한 마음에 면박을 주던 검설린은 서문윤의 그 태연자약한 반응에 결국 울화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복마전에 들어오고야 말았는가? 그것도 나라에서 가장 음험하고 무서운 인물의 싸다구를 후려갈기며 당당히 입성을 해.

정계에 입문을 하겠다 알리는 방식이라면 지나치게 화통하고 과격하다.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는 강서진을 옆에서 지켜본 검설린은 그저 탄식할 뿐이었다. 우연히 궐에서 만난 운표선이 그의 소매를 부여잡고 ‘내가 그놈 싹수를 알아봤지!’ 같은 개소리를 지껄일 때, 검설린은 암담함을 삼켜야만 했다.

망했다, 망했어!

이미 서문윤은 그렇게 거나한 신고식을 정계에 치렀고, 검설린이 기피했던 복마전에 몸을 담고야 만 것이다. 이제 패를 물릴 수도 없다.

동궁에 몸을 담았으니 강서진은 그를 도저히 용서하지 않을 거고, 서문린과의 정리를 보아 은근히 그를 봐주었던 이전과 달리 저 햇병아리에게 가혹하게 대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듯 서문윤은 그리웠던 이와의 해후가 몹시 좋은 듯 꼬리를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는 개처럼 반가워할 뿐이었다.

“의형, 의형.”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네가 그런 얼굴로….”

맥이 빠져 한숨을 내뱉는 검설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서문윤은 그저 싱글 웃는 얼굴로 속삭일 뿐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비틀거리는 몸을 그에게 기울이며 검설린은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생각이 나지 않으셨는지요? 왜 저를 찾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몹시 보고 싶었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따박따박 귓전을 때리는 말에 검설린은 죽은 듯 침묵할 뿐이었다. 어지간히 신이 난 듯 서문윤은 오랜만에 보는 연인의 우수한 얼굴을 찰흙반죽을 주무르듯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마구잡이로 만져지며 검설린은, 또다시 흘러나오는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속으로 탄식했다.

어떻게 저 성정을 참고 있었나?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 처연한 얼굴로 검설린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서문윤의 모습이 다 가식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서문윤이 그리 쉬이 포기할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어리석은 것은 그가 아닌 저였나 보다.

“그래.”

그치지 않는 탄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검설린은 저를 장난감처럼 만지는 손을 치우며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일단 내게 설명을 해봐. 무슨 일인지 요강은 파악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저지른 일을 수습하려 할 뿐이었다.

그렇게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제 사정을 설명했고, 제가 저지른 일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무모한 짓을 저질렀군.”

설명을 들은 검설린이 냉랭히 내뱉은 말이었다. 도저히 울컥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듯 그는 결국에 또다시 언성을 높여 서문윤을 쏘아붙였고, 그에 청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넌 네가 어떤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아는 거냐. 너 지금….”

“모르고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검설린의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려 그를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려 했다.

그러던 그 순간이었다. 여유로운 얼굴로 의형을 달래려던 서문윤이 몸을 움찔하고야 만 것이.

“으, 으음.”

말을 빼앗긴 사내가 마치 그를 찢어 죽일 듯한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에 더 이상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야 말았다.

“모, 모르진 않았지요….”

평소에 이리 차분히 말을 하면 보통 그의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오늘은 그럴 상황이 아닌가 보다.

“알면서 그런 게 더 어리석지.”

싸늘한 말에 서문윤은 머쓱히 웃을 뿐이었다.

“초췌해지신 듯합니다.”

짧은 침묵 끝에 서문윤이 화제를 전환하며 말을 내뱉었다.

실은 그것은 그를 보는 순간부터 마음에 걸렸던 일이다. 옆에 태자전하가 없었다면 바로 그에게 달려가 초췌한 얼굴을 추궁했을 거다. 그리고 마침내 단둘이 남은 자리, 서문윤은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매끄러운 뺨을 손으로 더듬으며 근심 어린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마음 걱정이 심하셨는지요? 아직도 악몽을 꾸십니까?”

“그래.”

“몸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겨울이면 고생하지 않으셨습니까.”

검설린은 동궁사변 때 고문을 당한 이후 몸과 마음 양쪽으로 병을 앓았다. 후유증을 앓는 몸은 겨울이면 그 발작이 잦아져, 그는 더욱 고통스러워하곤 했으니. 날이 갈수록 추워지는 날씨. 게다가 강남보다 몹시 추운 북쪽 도시의 낮은 기온에 서문윤은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리 아파하는 건 모두 수도의 일과 얽힌 탓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걱정을, 검설린은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 듯한 목소리로 받았다.

“정계의 더러운 일에 얽혀 고난을 당했고,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했지. 너도 알지 않느냐. 내 몸이 병신인 것을.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내 마음을 모르고 여기에 있느냐?”

그 말에 서문윤은 돌연 정색하며,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검설린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말을 정정하러 왔습니다.”

그러곤 이어진 행동에 검설린은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으적 작은 소리가 흐르고, 뒤이어 윽,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적막이 잠시간 흘렀고, 그 시간 동안 검설린은 눈을 감지 않았으며 서문윤 또한 그런 그를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곤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입술을 물린 서문윤은 그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은 제 것인데 어딜 도망갑니까!”

피가 흐르는 아랫입술을 닦으며, 검설린은 그를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눈으로 볼 뿐이었다.

“저는 화가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까? 의형을 포기한다는 말은 울컥하여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의형께선 왜 그리 반응을 하세요.”

그 말에 대한 냉랭한 답변이었다.

“내가 모자라서.”

고개를 들어 검설린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미목수려한 얼굴에는 짙은 자괴감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네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자라서 널 답답하게 한 거겠지.”

그리 말하는 사내의 얼굴엔 냉소가 서렸고, 서문윤은 그런 그의 음울함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모자란 게 아니라 예민한 겁니다.”

그 말을 내뱉은 서문윤은 잠시간 망설이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연이어 말을 덧붙였다.

“저는 의형이 그리 예민한 게 좋습니다.”

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검설린에, 서문윤은 상황을 면피하는 듯한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닥 아름답지 못한 입과 달리 청정하기 그지없는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그 순간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간신히 삼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나치게 생긴 외모인데 성격이 그의 반의반만큼이라도 따라오면 곤란하지.’

자자한 명성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려한 외모에 서문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니취라 소문이 파다할 때도 그 소나무 같은 고결한 자태와 명성으로 청혼을 받았던 검설린은, 악천화가 되어서 그 뛰어난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복면을 썼을 때는 이런 아름다운 얼굴을 감추고 다니는 것은 죄다, 사람들이 이 보물 같은 용모를 다 알아야 한다 아쉬워하며 괜스럽게 칭얼거렸었는데. 막상 그가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고 나니 서문윤은 요즘 들어 동궁의 산해진미도 맛이 없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괜스럽게 그를 남에게 빼앗긴 기분에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성격이라도 나쁘니 다행이다.’

그나마 그게 위안이었다.

의형에게 들키면 또다시 그의 복장을 터뜨릴 생각을 하며 서문윤은 그저 안도에 찬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몸은 어떻지? 해약은 적어도 2년은 장복해야 해.”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검설린은, 어쩐지 마음속에 슬쩍 머리를 들어 올리는 떨떠름함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다시금 차분해진 순간이었다.

“나오기 전에 약방을 털었어요. 1년은 견딜 수 있을 듯합니다.”

강서진은 철두철미한 인물이라, 혹시 서문윤이 이처럼 제 손아귀에 빠져나갈까 봐 그 이상의 약은 조제하지 않다. 그 말에 음울한 표정을 짓는 검설린의 뺨을 부여잡고 서문윤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의형이 책임져주셔야지요.”

그것은 검설린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그의 진심이 담긴 것이었다. 검설린은 이런 상황에서 저를 버릴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으니.

“너는 네 몸을 원래대로 돌릴 기회를 영영 놓쳤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검설린은, 그리고 그 순간 울컥함을 참지 못해 서문윤의 손을 뿌리치고야 말았다.

도무지가 제정신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고도 제 몸을 되돌릴 수 있는 일을 그는 제 손으로 무너트렸다.

“너는, 너는 반드시 후회할 거다. 이 철없는 것아.”

모든 것을 그를 위해 감수하려 했는데 어찌 이리 어리석게 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못해, 그는 또다시 서문윤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검설린의 마음을 모르는 듯 서문윤은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을 담담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고, 결국 검설린은 더 그를 추궁하길 포기하고 허탈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서문윤의 반응이었다.

“그저 의형과 함께하길 바라고 있어요.”

그 말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검설린의 굳어진 얼굴은 서서히 풀려 결국 어느 순간부터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분해진 얼굴로 서문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막을 깬 것은 책망이 작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작정하고 일을 저질렀군. 만약 실패했으면 어쩌려 했어?”

“실패해도 본전 아니겠습니까? 사지가 묶여 창고에 처박혀도 목숨은 보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의형이 있는데.”

“…태자가 널 인질로 잡을 수 있다.”

서문윤은 단호히 답할 뿐이었다.

“그분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검설린은, 그 순간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간 서문윤을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의미한 바를 짐작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안의 무게 또한.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서문윤이 풀어졌던 자세를 가다듬고 차분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이 일은 검설린의 역린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니, 서문윤은 이 사안에 있어서 이전처럼 함부로 반응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나긴 침묵 끝에 검설린의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그 얼굴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서느런 바람이 불고 있었다.

“너는 태자의 도당에 들어갔느냐?”

적막을 깨고 흘러나온 묵직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도당이라 하니 어감이 이상하군요.”

그러나 그리 말하면서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순순히 그의 말을 긍정했다.

“예, 아마 그런 듯합니다.”

패거리란 말은 지나치게 과격하였으나, 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그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검설린의 마음을 염려하여 한때 그를 주군으로 모셨던 과거를 숨겼으나, 이미 상황은 그런 마음 따위를 생각지 못할 만큼 급박했고, 그들에겐 선택할 여지가 없지 않는가?

고우군이 죽은 상황에서 검설린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태자뿐이었다. 검설린과 이청은의 관계가 좋지 않아 그가 태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서문윤은 기꺼이 그의 다리가 될 생각이 있었다.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실 겁니다. 그분은 적어도 은혜는 잊지 않으시는 분이니… 의형, 저를 믿어주시겠어요?”

그리고 서문윤을 경악하게 한 검설린의 반응이었다.

“그럼 우린 적이다.”

그 냉랭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의형!”

그 순간 비명처럼 튀어나온 목소리였다.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질 무렵, 그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서느런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분은….”

“네가 내 분노를 감히 이해하려 드느냐?”

다급히 변명하는 말을 내뱉으려던 서문윤은 그 칼 같은 말에 입술을 다물고 망연자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청은을 의심하고 적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동궁사변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우군이 그 사건을 통해서 이득을 얻었다 말했으나, 사실 그는 인재들이 지나치게 죽어나간 사건 중간부터는 당황하여 일을 수습하려 들었다. 그의 도당에서도 피를 본 이들이 있었으니 오죽하랴?

그러나 단 한 사람,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그 사건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이득을 보게 되었다.

‘……그는 국본의 자리를 얻었지.’

바로 이청은이었다. 미심쩍은 일이 많은 동궁사변의 배후로 지목되는 유력한 인물 말이다.

서문윤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러니 그가 받은 상처를 아는 서문윤은 입술을 다물며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그에게 이청은의 결백을, 오해를 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강서진이 나를 이끌었지. 그렇게 강제로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고. 나도 알고 있다. 고우군이 죽은 이상 내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태자와 연합하는 것이란 걸! 그러나 넌 내가 그럴 거라 생각하느냐?”

검설린의 태도는 완고했고, 그 조롱 어린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이청은과 그 사이의 오해를 풀려 했으나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요원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가.”

검설린은 변명을 시도하는 그를 냉랭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복마전에 몸을 담기 싫어 그의 제안을 거부했으나, 차라리 강서진을 따르지. 이청은을 따를 리가. 내 주군의 자리가 능글맞은 뱀의 먹이가 되었다!”

“난 절대 태자의 도당이 되지 않아.”

서문윤의 골을 때리게 한 말이었다.

그럼 그렇게 계속 강소성주에게 끌려 다닐 예정이십니까…?!

속으로 비명을 내지른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그를 노려보는 검설린의 얼굴에 진한 고집이 엿보였다. 서문윤은 그런 얼굴을 할 때 검설린이 얼마나 답이 없는 사람인지 알았다. 장한성에서 그 생고생을 한 서문윤은 뒤통수에 징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 순간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이청은은 지금 상황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황제가 입조하지 않은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가는 상황 속에서 그 말고 강서진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어쩌다 보니 반역에 가담해버린 상황에서 그가 지난날 그토록 원했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이청은은 서문윤에게 빚이 있어,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이렇게 완강할 줄이야.’

혹시 제가 모르는 뒷사정이 또 있는 걸까?

서문윤이 아는 그는 예민하고 가시 돋은 사람이긴 했으나 그저 의혹만으로 사람을 증오할 만큼 편협한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그 사건은 검설린에게 있어서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긴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므로, 서문윤은 그저 어이할 바를 모른 채 방황할 뿐이었다.

“허면, 허면.”

검설린의 눈은 감정이 거세된 사람의 것 같았고, 서문윤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불현듯 그가 방금 전 내뱉은 말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바로 이젠 우리는 적이라고 했던 말.

서문윤의 심장을 무너지게 만든 말이었다.

“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저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미움이 더 진한 겁니까?”

그러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항의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굳은 얼굴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강소성에서.”

어찌 적이란 말을 내뱉을 수 있지? 서문윤은 당황을 삼키지 못해,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삼키지 못해 입술을 깨물며 그를 향해 말을 잇고 있었다.

이성이 통하지 않으니 감정적으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강소성 본가 근처에 적당히 조용한 터를 찾아 집을 짓고 살기로, 그렇게 같이 살기로, 그렇기로 했잖습니까.”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내뱉은 말은, 뜻밖에도 서문윤을 지극한 슬픔으로 몰고 가 어느 순간부터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의형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함께 찾기로 했잖습니까.”

진심으로 검설린을 말리고 싶었다.

“가족이 되기로 했잖습니까. 같이 평온한 삶을 살아요, 의형.”

서문윤은 마치 꿈을 꾸는 소년과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에 그 깊은 마음이 묻어 나온다. 그러나 그 간절한 말에 돌아온 검설린의 답변은, 실로 담담한 것이었으니….

“가족이 되기로 했지.”

그러곤 이어진 그의 말에 서문윤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내가 권세를 버려야 하지?”

뭐라고?

“……예?”

정적이 잠시간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얼이 나간 목소리에 검설린은 야멸찬 냉소를 흘리며 몸을 바로잡고 정색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숙였던 몸을 펴자 서문윤 한 사람을 그림자로 가릴 만치 건장한 체구가 그제야 도드라졌다. 거구는 앞에 자리한 이의 몸을 저절로 움츠러들게 하는 기세를 흘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사실 체구보단 그의 돌변한 분위기에 의한 것이었다.

서문윤이 넋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검설린의 얼굴은 달빛 아래에 유독 창백하게 질려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가워 보였다.

지금 이게 무슨?

갑작스럽게 일변한 기류에 서문윤이 당황할 무렵이었다. 검설린은 입술을 열어 묵직한 말을 내뱉었고, 그에 서문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멍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

서문윤의 입술에서 더듬거리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그게, 그게 무슨 의미십니까?”

그 말에 담긴 의미, 그 형체만을 가늠한 것만으로도 서문윤은 그 무게에 짓눌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여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검설린은 몹시도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했으나, 그 말에 담긴 은근한 뜻은 서문윤을 충격으로 몰고 가기 충분한 것이다.

왜 굳이 권세를 버리느냐니?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잃어버린 것들을 슬퍼하며 고통받았지 않던가?

서문윤은 그의 옆에서 그의 처참한 과거를 안타까워하며, 검설린을 위로하곤 그에게 약속을 받아냈었다. 같이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찾아내자고. 같이 행복하자고.

서문윤은 장한성에서 그를 얻는 데 성공했고, 그렇게 소소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약속을 들이밀어 설득하려던 서문윤은, 이어진 말에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해 입술을 작게 벌리고야 말았다.

“나는 부귀영화를 누리면 왜 안 되지? 왜 평탄한 삶을 살면 안 되지? 모두 다 욕망으로 살아가는데, 왜 나만 사람답고 사람답지 않고를 따지면서 불우하게 살아가야 하느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 나온 그 순간, 잔뜩 뒤틀린 마음이 묻어 나온 목소리가 날카로운 웃음과 함께 울렸다.

“아주 병신 같지! 호구처럼 당하기만 하고, 결국엔 또다시 여기에 이르렀으니. 네게 손해 보고 살지 말라 그리 말을 했는데, 사실은 내가 제일 모자란 거였어.”

망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타, 지금 여기 장안까지 왔지. 하지만 더 이상 끌려가지 않을 거다.”

그는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에 시간이 갈수록 얼굴 위로 경악의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곤 어느 순간 들려온 차가운 웃음과, 나직한 말.

“기왕 이렇게 된 것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 대목에 이르러 검설린은 높였던 언성을 죽이곤, 유리처럼 맑은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했고, 서문윤은 제 어깨에 닿는 손에 몸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아까 전 한을 토해내듯 분노에 휩싸여 말을 잇던 모습이 거짓말 같을 만치, 검설린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런 담담한 얼굴에 더욱 불안을 느끼고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는 행복해질 거다. 윤아. 너와 함께. 행복해질 거다.”

그의 평화로운 얼굴이 어째서 이리도 소름이 끼치는지.

“잃었던 고향을 찾을 거다.”

나직한 말이 귓가에 내려앉았고, 결국 서문윤은 참지 못해 애타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의형!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서문윤의 얼굴이 마치 귀신의 것을 본 것마냥 창백하다.

“말이, 말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건 마치….”

그 대목에 이르러 서문윤은 차마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마치, 마치’ 그 한 마디 말을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마치 당신이 그 길을 원하는 것마냥….’

그리고 그의 귓가로 돌연 내려앉은 말이었다.

“널 위한 마음이 그를 향한 미움보다 깊냐고?”

힘없는 미소가 흐르고, 짙은 속눈썹이 내리깔린다.

“그럴 리가 있겠어? 윤아. 나는 네가 살렸어. 네가 나를 아름답다고 했다.”

말은 묵직하게 내려앉았고, 서문윤의 숨결을 멎게 했다. 그 담담한 말을 들은 서문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 그는 제 뺨을 더듬는 손길을 느끼고 흠칫하고야 말았다. 커다란 손은 서문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고, 그렇게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쳤다.

“네가 내게 살 가치가 있다 했지.”

그리고 입술 밖으로 흐르는 얄팍한 신음.

서문윤은 그 순간 두 눈에 들어온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 그 다정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을 마주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냉랭하여 마음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던 검설린은 그 순간 제가 품은 애정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서문윤은 저를 마치 애정에 굶주린 아이마냥 애타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검설린에 그만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회상에 잠긴 눈에는 보는 이를 슬프게 만들 만치 진하고 아련한 감정이 엿보였으므로.

“네가 내 손을 부여잡고 종알종알 말을 해주었지. 나를 짓누르는 모든 업보에서 도망쳐온 나를 존경스럽다 말을 하고, 사악한 내게 선량하다 말을 해주었지. 네가 나를 위로했고, 그렇게 너는 나를 다시 살게 했다.”

그러곤 검설린은 중얼거렸다.

“내가 무얼 더 말해야 하느냐?”

서문윤은 도저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그 누구보다 내게 소중해.”

검설린은 그야말로 유리로 만든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서문윤의 뺨을 쓰다듬었고 그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몹시도 강렬하여 서문윤은 침이 마르는 감각을 느끼며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숙여 숨을 할딱거리던 순간, 그리고 그 말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러니 그때까지 부디 몸조심하거라.”

네가 잘못된다면 나는 이성을 되잡지 못할 테니.

서문윤은 제 이마에 조심스레 내려앉는 부드러운 입술에 몸을 퍼드덕 떨며 커다랗게 눈을 뜨고야 말았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리니 검설린이 차가운 손으로 그의 이마를 조심스레 쓸고 있었다. 애가 타는 듯, 혹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서문윤은 그 순간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너는 내게 남은 마지막 것이다.”

그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말에 담긴 마음이란.

멍한 표정을 짓는 서문윤을 뒤로한 채 검설린은 빠르게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고, 서문윤은 펄럭이는 옷자락이 담벼락 너머로 사라질 쯤이 돼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그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의, 의형!”

궁궐이라는 것을 잊고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잠깐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를 향한 지극한 애정을 엿보고 어쩔 줄 몰라 했었으나 정신을 차리곤 서문윤은 그 말에 담긴 뜻에 경악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의형! 의형, 제발!”

그러곤 발악하며 소리치던 서문윤의 입을 막은 목소리였다.

“익위!”

등 너머로 들려온 경악 어린 음성에 서문윤이 저도 모르게 흠칫하곤 몸을 돌린다. 아, 소리를 내뱉은 서문윤이 저를 향해 황급히 뛰어오는 사내를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같이 번을 서던 시위였다, 경악한 얼굴 위로 식은땀을 후두둑 떨어트린 채 그는 서문윤 앞에 당도하곤 바로 숨을 죽인 말을 내뱉었다.

“익위! 무얼 하시고 계셨던 겁니까?”

서문윤의 얼굴에 아차 한 기색이 스친 순간이었다.

“금궐에선 함부로 소란을 일으켜선 안 됩니다. 이곳이 외진 곳이긴 해도, 혹시라도 높으신 분들이 들으셨으면 어쩌려 했습니까?”

그 말에 서문윤은 그 어느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비록 그곳이 뒷산과 마주 닿은 으슥한 곳, 누군가가 잠입할 가능성도 낮고 말을 엿듣기에도 부적합한 곳이기는 했으나 궁궐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장형을 받을 중죄였으니.

그를 아는 서문윤은 그저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던 시위가 이윽고 입을 다물고,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연회는 끝났습니다. 전하께서 익위를 찾으십니다.”

서문윤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 때였다.

* * *

이마에는 화인이 남은 듯했다. 검설린이 처연한 얼굴로 고백을 하듯 제게 애정 어린 말을 쏟아냈던 일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서문윤은 뒷목이 뻣뻣하게 당기고 얼굴이 자꾸만 붉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의형,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곤 그렇게 이마를 꾹꾹 누르며 당도한 동궁에서 서문윤은 제 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토끼처럼 눈을 뜨고 놀라움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면 당번을 서는 관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퇴궁해야 할 시각이 아닌가?

그러나 서문윤은 동궁의 대문을 밟는 순간부터 들려오는 소란에 멍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이건?’

“미쳤어!”

누군가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둠이 내려앉아야 할 시각, 동궁의 밤은 여기저기 솟아오른 횃불로 인해 전혀 어둡지 않았다. 고성이 오가고, 사람들이 혼망한 얼굴로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자리. 그 순간 그들의 정체를 깨달은 서문윤이 아,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몇몇은 그가 낙향하기 직전에 알고 있던 위인들이었고, 몇몇은 동궁에 기거하고 있는 동안 얼굴을 익혀둔 이들이었다.

‘가신들이 이 시각에 여기엔 왜?’

바로 태자의 모사들과, 그의 최측근들이다. 바삐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은 서문윤이 얼굴을 굳히며 지나가는 이의 팔뚝을 부여잡고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벼락 같은 고함뿐이었다.

“지금 정신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으시게!”

그리 말을 내뱉은 사내는 바로 소매를 휘저어 제 팔을 부여잡은 손을 떼어내고 빠른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망연하게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정신을 차린 것은 불현듯 제 어깨를 부여잡은 손 때문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문천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주님.”

옛날의 호칭을 얼떨결에 내뱉은 서문윤이, 그 순간 무너지는 얼굴을 수습하고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리고 당황하는 그의 귓가로 내려앉은 묵직한 말이었다.

“너는 독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도 저도 아닌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발목을 잡을 생각이라면, 차라리 퇴궁을 해라.”

서문윤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렁거린 순간이었다.

“대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크게 놀라 옛 상관의 얼굴을 바라본 서문윤은, 그리고 문천상의 우묵한 두 눈에 서린 암울한 빛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몸을 뻣뻣이 굳히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살기가 희미하게 섞인 경계의 기색이었다.

“들어가라.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침묵 끝에 문천상은 짤막한 말을 내뱉었으나, 서문윤은 문천상이 짧은 시간 내보였던 그 서느런 시선에 충격을 먹고 한동안 석상처럼 굳어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다.”

침묵 끝에 등 너머로 들려온 말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움직이곤, 서문윤은 창백한 얼굴로 돌계단에 올라 홀린 듯 침전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순간, 서문윤은 방 안에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그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침전 한가운데는 연회 중간에 입었던 옷을 갈아 입지조차 않은 이청은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청은은,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서문윤을 향해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고 나직한 말을 내뱉었다.

“왔구나.”

서문윤은 그 순간 차갑게 내려앉은 방 안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제게 꽂히는 적의 어린 시선, 그리고 경계 어린 눈빛 또한.

아랫입술을 질끈 문 서문윤을 잠시간 바라보던 이청은이 어느 순간 입술을 열고 느릿한 말을 내뱉었다.

“이런 날이 오질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엔 일이 터져버렸다.”

침묵 끝에 새파란 입술에서 흘러나온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돌아온 답변에 서문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평로, 삭방, 검남의 절도사가 번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곤 조정에 전갈을 보냈지. 바로 방금 전, 귀비의 생신연에 말이야. 더 큰 문제는 뭔 줄 알아? 황상께서 나를 토벌사령관으로 삼고 부관으로 정명공을 임명하셨다…….”

그리고 흘러나온 허탈한 웃음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동궁의 소란도, 방 문을 들어설 때의 제게 꽂혔던 눈빛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어이없어 멍한 얼굴로 그가 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정계의 속사정을 깊게 모르는 서문윤이라도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견제야, 뭐야?’

의형이 토벌을 담당하면 담당하는 거지 부관은 웬 말이냐? 말이 상장군 겸 안북대도호지, 검설린은 이미 일전에 있던 관직 중 대장군과 절도사를 제외한 웬만한 요직은 다 회복한 상태였다. 대장군의 자리가 공석인 상태에서, 그는 이미 병부의 수장 아닌 수장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가 토벌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문제는, 병부에 아직도 영향력이 있는 그가 실제로 대군을 이끄는 일이 가능하냔 것이다. 막말로 토벌을 나간다고 병사를 이끌고 나갔다가, 변방이 아니라 회군하여 장안을 친다면 그건 막을 도리가 없었다.

‘유능한 장수들을 옛날 옛적에 다 처죽였으니 수도를 방비할 인력이 있을 리가….’

그렇다고 수도의 민심이 황제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예 그를 원수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말했지만, 고우군은 긴 시간 동안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정을 수습한 것만으로도 이미 그 대단한 정치력을 입증한 것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알겠다.

고우군이 죽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절도사들이 궐기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겠어.

하지만 이 이도저도 아닌 이 인사안은 도대체 무슨 의미지?

황당함에 휘말려 그가 멀거니 태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였다.

“당장 대전 앞에 나아가 돌계단에 머리를 깨트려 말리겠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도대체 이게 토벌을 한다는 겁니까? 아니면 아군에 엿을 먹인다는 겁니까?”

동궁의 신료들은 모두 우수한 인재였으나 이 순간만큼은 성현의 가르침이고 예법이고 다 잊고 흥분하여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명공이 사령관을 맡는 일보다 최악입니다, 이건. 차라리 전하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그를 후방으로 편제를 하든가. 단 한 번도 군대를 운용한 적이 없던 전하를 머리로 삼고 병부에 인망이 깊은 이를 부관으로 삼는 게 말이 됩니까?”

허리춤에 검을 찬 유생복의 사내가 분노하여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안 보여도 눈에 뻔합니다. 황상의 의도에 따라 정명공을 견제하란 말이겠지요! 그렇다고 견제를 한다면, 제대로 된 군 운용이 되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정명공과 휘하 장수들은 분노하여 전하와 맞설 테고!”

태자의 눈이 스륵 감긴 순간이었다.

“이건 그냥, 그냥 토벌군을 두 쪽으로 나누자는 것 아닙니까! 군사일에 정치적 사안이 개입되어선 안 된다는 그런 이상론이 아니라, 이건 그냥…!”

“망하자는 거지.”

그리고 흥분한 말을 끊는 차분한 음성.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은 때였다. 방 한 켠, 태자의 문객 중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있던 서문윤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을 때, 이청은의 얼굴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토벌군이 제대로 정돈된 것도 아니고. 수년째 제대로 된 보급도 받지 못해, 연습도 하지 않아, 기강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는데 이 상황에서 내가 그를 부관으로 삼고 서로 기싸움을 하자면 토벌이 되겠느냐? 팔기린이 제대로 군사를 운용하여 제 무재를 과시해도 힘들 판국에.”

그 한숨에 섞인 마음이란.

문객들의 얼굴에 조급한 빛이 스치고,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야 만다.

“다른 일은 몰라도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많은 명사들이 전하를 비난할 겁니다. 오명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는 사실상 이득이 아무것도 없고….”

“게다가 이것은 나라의 명운이 달린 일이 아닙니까?!”

“그냥 차라리 정명공을 총사령관을 삼는 게 어떻습니까?”

종국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다른 일이면 몰라도 이민족 출신 절도사의 반란입니다. 변방의 반란을 등한시하고 정권을 잡을 술책을 그가 벌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동북부 영토를 사실상 그들에게 할양하겠다는 말인데, 그만한 명사가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그러곤 입술을 다문 문객이 뒤이어 내뱉을 말을 그들 중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굳이 그리 오명을 쓰지 않아도 그는 젊고 황제는 나이가 많으니 앞으로 기회가 많습니다….’

바로 천자가 일관되게 충심을 보였던 악천화를 견제했던 가장 큰 이유 아니었던가?

“다른 걸 떠나서 전하께서는 수도를 떠나시면 안 됩니다! 누가 전하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습니까? 이건 말려야 합니다. 무조건 말려야 합니다.”

그리고 침묵 끝에 눈치를 보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일견 타당한 말이었으며, 사실 문객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수도는 이청은의 터전이요, 정치적 근거지다. 게다가 천자가 주둔하는 신성한 장소인 황궁은 최후의 보루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 터져도 이청은이 몸을 피할 가능성이 있는 안전한 터전 말이다.

허나 군부는 달랐다. 그들은 사변 이후로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으나, 마음속으로는 깊이 황실을 향한 원한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 이청은이 어찌 군부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장수들 중 황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충견 같은 자가 많다 한들, 그 입으로 관직을 얻은 무능한 이들이 군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극단적으로 말하여 전하의 목숨만 붙어 있다면, 저희는 재기할 기회가 있습니다. 허나, 태자께서 만약 위해를 입으신다면….”

“나보고 성지를 거부하라고?”

그러나 이청은은 그들의 말을 단호하게 끊을 뿐이었다.

“허나, 전하는 황상의 혈육이십니다.”

서문윤은 그 순간 눈치챌 수 있었다. 방 안에 자리한 가신 중 몇몇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참담함이 서린 것을. 그것은 체념의 빛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서문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짐승의 정치.’

천자의 명을 드디어 제대로 이해한 까닭이었다.

“너는 이게 아비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일로 보이더냐?”

“예?”

문득 태자가 내뱉은 말에, 항의하던 문객의 얼굴에 서리가 낀다. 잠시간 이해를 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물들었다.

“설, 설마.”

그것은 불신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나도 견제당하고 있었구나.”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자식을 한 번 죽인 황제가 또다시 다른 자식에게 마수를 뻗으려 한다는 것을.

“부황의 치세 초반에 관롱 귀족들이 지나치게 날뛰었지. 그에 부황은 그들이 후원하는 서학을 지원하는 척하다가 고우군을 이용하여 동서대란을 일으켰다. 그렇게 고우군을 비롯한 과거 출신 인재들이 득세를 하니, 부황은 형님과 정명공 같은 신흥 무관을 중용하셨다. 그러곤 동궁사변으로 형님이 죽고, 당시에 정권을 부여잡던 신흥 무관들이 갈려나갔지. 그 후에 고우군이 권력을 독점했고, 그와 나는 서로를 견제하며 아슬하게 정국을 유지했어.”

묵묵히 상황을 관조하던 서문윤은 그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이어진 황제의 정치관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 바로 검설린이 가족을 잃고, 영광을 얻고, 지우를 잃고, 명예를 잃고, 평화를 잃고, 또다시 꿈마저 잃어버린 인생을 설명하는 말.

바로 그것은 한 사람의 탐욕 때문이었다.

예복을 벗지도 않은 태자의 피로한 얼굴에 쓰디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심장에 무거운 종이 내려앉은 것만 같은 격통을 느끼곤 이를 꽉 악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했던 이유가.’

그 순간 마음에 스친 것은 바로 절망이었다.

‘고작, 고작 권력 때문에.’

말은 덤덤한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죽고 이제 내가 의심받는 수순이 아니겠느냐. 그와 내가 서로 견제를 해서, 황권을 강화시켜야 하지 않겠어?”

태자는 씁쓸히 웃었고, 방 안에는 잠시간 죽음과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정계의 중심에서 무수히 많은 모략을 도모한 태자의 도당에게 절망과도 같은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적을 죽고 죽이며 보신과 영광을 도모했으나, 그것은 모두 한 사람의 영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보아왔고, 그것은 그 비정한 정치가에게도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황상께서는 너무하십니다.”

그리하여 침묵 끝에 누군가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떨림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에 이청은은 허탈이 웃으며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있던 모든 정쟁을 겪으며 너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더냐? 남 일이 내 일이 된 거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리 말하고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부할 수는 없다. 천자께서는 나도 노리고 계신 거다. 피할 수 없어.”

허나! 높고 처절한 비명이 울리고, 이청은이 소매를 휘저어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이만 나가보거라! 이미 모든 일은 황상의 손바닥 안에 들어갔다. 성지를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 대비할 방책을 강구해야지.”

그 말은 준엄한 목소리로 내뱉은 것이었으므로. 그리하여 그들은 탄식을 하면서도 주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윤아, 너는 이곳에 잠시 남거라.”

그리고 서문윤이 조심스레 자리에 일어날 때, 이청은이 내뱉은 말이었다.

사실상 외부인의 위치. 문턱 가까이에 앉아 문객이 하는 말을 그저 관청하고 있던 청년은 그 말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자리엔,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는 이청은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 * *

이미 알고 있었다.

이청은이 제게 크나큰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저를 위해 다리를 다친 무관에게 내보이는 호의를 넘어서, 이청은은 일정부분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에게 후의를 보이고 있었다.

“저는.”

그러니 의형과 그가 대립하는 지금 이 순간 서문윤은 크나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저는, 저는….”

그 둘의 관계의 골을 메꾸려 했다. 노력하여, 옛 주군에게도 검설린에게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검설린의 적의 어린 말을 듣고, 그리고 이청은과 그 사이의 생각보다 복잡한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엿보고 서문윤은 그 순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었군요.”

너무 일을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큰일이 일어난 순간, 서문윤은 차마 이청은의 앞에서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청은이 제게 할 말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확실한 마음을 물으려 하겠지. 발을 걸치지 말고, 제게 완전히 몸을 담으라는 권유를.

그러나 서문윤이 어찌 검설린과 완전히 대립하겠는가?

애초에 이 모든 일은 검설린과의 미래를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다.

“내가 네게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더냐?”

그리고 어두워진 표정을 한 서문윤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침묵하던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묘한 표정을 짓는 이청은을 바라보고 담담히 말했다.

“그럴 거라면 제가 낙마하는 전하를 감싸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의형에게 반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제가 지위 때문에 전하께 복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곤 뒤이어 선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는 선량하고 바른 분이십니다. 저는 태자께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믿고 있어요.”

그 말에 이청은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를 복잡한 마음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렇게 방 안에는 오랫동안 작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날.”

그러곤 짧은 침묵 끝에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서문윤의 어깨가 움찔하고, 이청은은 덤덤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다리를 잃은 날. 말이 흥분했을 때.”

그는 잠시간 무언가의 상념에 빠진 듯 흐릿해진 눈을 허공에 고정하다가, 돌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건 고의가 아니었다.”

서문윤의 눈이 크게 뜨인 순간이었다.

‘뭐?’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경악을 모르는 듯 이청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 다음 날에 동궁사변 때 휩쓸린 이들의 신원 회복을 논하는 상소가 올라왔지. 나는 그걸 미리 알았고, 그리고 그날 말에 오르기 전 바늘을 소매에 숨기고 올라탔다.”

그 대목에 이르러 터져 나온 서느런 웃음에, 서문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이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입조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신원을 주장하면 부황의 분노를 사고, 아니라면 사람들의 증오를 사겠지. 그리하여 난 보신을 위해 스스로 애마의 목을 찌른 거다.”

지금 무슨 말을.

“젊고 유망한 무관의 미래와, 제게 헌신했던 짐승의 목을 대가로 받고 말이지.”

그 말을 내뱉곤 이청은은 자조어린 웃음을 흘렸다.

“보신을 위해서 난 이리 독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내 몸마저 스스로 내던지고자 했다. 그런 내가 사악한 짓을 저지를 수 없다고 네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나조차 나 자신을 모르는데. 하물며 20년 가까이 대로를 걸어왔던 팔기린이 지인을 잃고 명예를 잃은 분노에 휘말려 극단적인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네가 어찌 장담을 하느냐.”

할 말을 잃은 서문윤의 앞에서 이청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윤아! 네가 나를 택하든 그를 택하든 나는 널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네가 네 목숨 하나를 지키길 원할 뿐이다.”

한숨을 내뱉는 이청은의 앞에서, 서문윤은 어쩔 줄을 몰라 한 채 넋을 잃고 있었다.

“너는 너무 순진하구나. 너무 순진해.”

한때 그에게 자결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일이, 그러나 결코 후회하지 않았던 자랑스러운 그 행동이 사실은 쓸모없는 행동이었다고?

“하지만 너도 이제는 알겠지. 네가 선택해야 할 때가 된 것을.”

이청은은 그리 말을 내뱉으며 차분히 눈을 내리깔아,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서늘할 때 뱀을 닮은 사내의 입술에서 느릿한 말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도 이제 네게 선량한 가면을 던지고 교활한 범처럼 굴 때가 되었구나.”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해진 순간이었다.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를 원망하느냐?”

이청은의 물음에 서문윤은 짧은 침묵 끝에 답변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 말을 내뱉으며 그는 숨을 삼키고 다시금 정돈된 얼굴을 들어 올려 이청은을 바라보았다. 그것에는 복잡한 심경이 스치고 있었으나, 분노나 항의의 감정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었고, 태자를 탓하기엔 서문윤이 이미 받은 것이 많았다. 그를 탓할 수 없는 상황도 상황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리 탓에 의형과 만난 것이 아닌가?

조금은 마음이 불편하긴 했으나 그 뿐이었다.

“저는 제 할 일을 한 것뿐이고 전하께서는 악의가 없으셨으니.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청은은 잠시간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를 향해 던졌다.

서문윤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 순간이었다.

“이건?”

제 앞에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철로 만든 패를 잠시간 멀거니 바라보던 서문윤이, 그 정체를 깨닫고 얼굴에 희미한 경악성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병부의 출입패였다. 바로 군사장군의 패.

황급히 고개를 든 서문윤이 이청은의 얼굴을 바라볼 때였다.

“네가 강소성주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약이 무슨 종류인지 알고 있다. 팔기린과의 관계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지. 너는 그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중원을 유랑하지 않았잖느냐. 사내를 구할 틈이 어디 있을까.”

얼어붙은 서문윤의 귓가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네 성품을 난 잘 알고 있다. 그 대쪽 같은 성품을. 넌 분명 그에게 마음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약을 구하기도 전에 바로 자결을 했을 테지.”

“…….”

“그는 아름다운 사내지.”

“…….”

“사내도 충분히 탐을 낼 만한 이고.”

숨을 멈춘 서문윤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을 때, 이청은은 그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네게 주겠다.”

서문윤의 두 눈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전, 전하!”

“네가 그를 위해서 나에게 가담하는 것을 꺼려한다면. 난 그를 네게 주겠다. 그에게 털 끝 하나라도 해를 입히지 않겠다. 내 명운을 걸고 맹세하마. 필요하다면 서문을 남길 수도 있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에게, 이청은은 힘을 주어 말을 내뱉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파멸만 있는 것을 네가 아직도 모르는 게냐? 팔기린의 굳세다 못해 고집 센 성격을 몰라? 너는 생각해야지. 그와 나 중 누가 이기는 것이 네게 이득이 될지. 네가 아무리 선량한 자라도 네 행복이 걸린 상황에서는 이득을 따져봐야지 않겠느냐?”

“저는, 저는.”

“그가 승리한다면, 넌 그의 곁에 있지 못한다. 그는 정략혼을 해야 되고, 권세가의 딸과 이어지게 될 거야. 그리고 또다시 무수히 많은 피를 봐야 하고 평생을 불운하게 살아야겠지.”

이청은의 눈에는 섬광이 스치고 있었고, 그에 서문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몸을 떨며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승리한다면 그는 너의 것이다. 내 포로가 된 그를 네게 하사하겠다.”

얼어붙은 서문윤의 귓가로, 그리고 이청은은 한 마디 한 마디 짓씹은 말을 마침내 내뱉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세작이 되거라. 팔기린의 곁으로 돌아가 나를 위해 일해. 그렇다면 나는 네게, 팔기린으로 보상을 하겠다.”

서문윤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가신 순간이었다.

* * *

“내 얼굴이.”

꾸역꾸역 감정이 억눌린 목소리였다.

“찹쌀떡이냐.”

그 말에 서문윤은 헤실헤실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뺨을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다. 짙은 눈썹이 산처럼 꿈틀대고, 검설린이 실로 음울한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한 때였다. 그러나 검설린은 발칙하게 제 몸 위를 올라타 제 얼굴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대는 그를 차마 강제로 떼어내지 못했다.

서문윤의 기분이 몹시 고조된 상태였으므로. 검설린은 그 상태의 서문윤이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차마 더 말을 내뱉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웃는 모습은 몹시나 기분이 좋았다.

어린아이처럼 헤실헤실 웃는 서문윤을 보며 그가 최근 1년간 눈물짓는 일이 잦았던 것을 떠올린 검설린은 그저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손에 얼굴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그리도 좋았나.’

포기하여 한숨을 내뱉은 검설린이 몸을 늘어트리고, 서문윤은 그의 반듯한 얼굴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며 제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옥으로 깎은 듯한 수려한 얼굴을 더듬던 서문윤이 문득 그의 입술 끝에 손을 대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키득 웃음을 흘렸다. 검설린은 미간을 좁히며 서문윤을 노려보았으나, 그럼에도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순둥하게 구는 제 사랑스러운 의형을 애정이 담긴 눈으로 빤히 바라보며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보시겠습니까?”

검설린의 눈썹이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싫어.”

“다시, 다시.”

“난 싫다 했어.”

검설린은 정말 그 말을 하기 싫었다.

그것은 정말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지 않는가?

정사 도중 정신을 차리지 못해 끙끙거리던 서문윤이 문득 어여뻐 보여 저도 모르게 내뱉은 정신 나간 말.

서문윤이 그 말에 고통스러워하던 얼굴을 돌변하여 지금껏 헤실헤실 웃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의 사정을 돌보려 하지 않았다.

“왜 이리 부끄러움을 타십니까. 얼른, 얼른 해주세요.”

항의하듯 내뱉은 말에 검설린이 다시금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말을 내뱉지 않으면 결코 물러나지 않을 듯한 서문윤의 고집 센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쳤지.

속으로 음울하게 중얼거린 검설린이 눈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널 아프게 했나?”

서문윤은 그 말에 검설린의 뺨을 꾸욱 손으로 누르며 항의했다.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결국엔 검설린은 해탈하여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내가 이리 수모를 당하다니!

실로 개탄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언제 또 그가 얼굴을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마구잡이로 만져지며 수치스러운 말을 강요당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을까?

심문을 당할 때도 이리 곤란했던 적이 없던 검설린은 그저 곤궁에 빠져 수치를 겪는 현실에 탄식할 뿐이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결국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침묵 끝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설린이 악독하게 애제(愛弟)를 아프게 했나?”

그 말을 내뱉을 때 검설린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 하는 사람같이 보였다. 검설린은 장탄식을 하며 차마 서문윤을 바라보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저 허공 어드메, 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파하면서도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 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서문윤이 어여뻐 내뱉은 말이었다. 평소라면 입에 담지 못할 애정이 깊게 묻어 나오는 말.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미쳤지.’

충동적으로 내뱉은 그 말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욕망과 결합되어 뒷말로 이어졌고, 그에 검설린은 말을 내뱉은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끝을 맺어야지요.”

작게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짧은 침묵 끝에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애제가 앞으로 계속 날 괴롭히며 응징해다오.”

그리 말을 내뱉은 검설린은 참담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부정할 수 없는 고백의 말에 그는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건 미쳤어.

평생을 함께하자는 말을 이리 말을 하고야 말았다. 제가 생각해도 이건 뜻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혼인을 앞둔 정인에게 할 법한 말.

혀를 깨물 것만 같은 심정에 검설린은 음울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마치 뜻하지 않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잘했어요, 잘했어.”

그리 말을 하곤 서문윤은 고개를 숙여 검설린의 입술 끝에 쪽 입을 맞추곤 입술 끝을 올려 빙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그는 다시금 의형의 수려한 얼굴에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주물럭거렸다.

검설린은 제 입술과 뺨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주물러지며 그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돌이킬 수는 없나.

장한성에서 그와 함께하길 약속했었지. 그리고 지금 저는 그에게 고백 같은 말을 내뱉었고. 현실을 부정하려 했으나 이젠 검설린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사실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그와 함께 평온하게 살아갈 미래를 꿈꾸고야 말았다.

“언젠가 네가 원한다면.”

문득 그가 내뱉는 말에 그의 얼굴을 가지고 놀던 서문윤이 손을 멈칫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그 순간 입술에 걸린 미소를 지우곤 몸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널 놓아줄 거다.”

또다시 그런 말을 하다니.

‘그는 아직도 내게 마음을 열지 않았구나.’

씁쓸함을 느낀 서문윤이 우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아 그의 시선을 피했다. 검설린은 그 말이 저를 위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만, 서문윤은 사실 그 말이 끔찍이 싫었다.

왜 자꾸 저를 놓아주겠다는 말을 하는가? 저는 그를 떠날 생각이 없다.

‘나만 매달리는 것만 같아.’

그가 절 소중하게 여기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의 마음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 서문윤이 땅굴을 파고들어갈 때였다.

“하지만 그 날을 상상하기 싫구나.”

문득 들려온 말에 서문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평온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항상 관으로 고정했던 머리를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트린 그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평소의 모습과 달리 한결 유하고 다정하게 보였다.

“애제는 내 곁에 있어주겠어?”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내뱉는 담담한 말.

그 순간 서문윤은 고조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의 어깨를 잡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그를 바라보며 잠시간 말을 머뭇거렸고, 짧은 침묵 끝에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네 마음이 허한다면, 음.”

그러곤 서문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장한성의 일이 마무리되고 서문세가로 향하던 중, 그 어느 평온한 날의 일이었다.

* * *

“헉, 허억.”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청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달콤하기에 더욱 벗어나기 힘든 꿈의 여운에서 잠시간 그리 잠식되어 있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몸을 잘게 떨며 고개를 들어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아니, 보고 있는 것은 허공이 아닌 꿈을 품던 과거의 일이다.

별로 먼 옛날도 아닌데, 어째서 그날이 이리도 오래전의 일처럼 보이는지.

‘의형.’

한숨을 내뱉은 서문윤이 얼굴을 가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피로에 찬 얼굴로 한숨을 내뱉으며 그는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제가 뭘 어찌해야 합니까.’

원하는 것은 그저 사소한 일상 하나뿐인데, 그것조차 얻기가 이토록 힘이 든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에 서문윤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한참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부터 그에게 욕망하고 있었다.

마음을 깨달은 이후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었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선 지금, 그가 원했던 미래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서문윤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의형.’

고된 상념 끝에 서문윤은 결국 아스라한 한숨을 내뱉고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희미한 미소가 감도는 사내의 얼굴에 좌절하며 그는 손에 쥔 이불을 더욱 세게 부여잡을 뿐이었다.

‘만약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날 용서하지 않겠지.’

그럼에도 평온한 미래를 바라는 마음에 어이할 바를 모른 채 서문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 그를 배신해야만 하는 모순에 참담한 심정에 휘말려, 선택을 종용하는 이청은의 말에 흔들리면서, 미래를 논했던 날 검설린의 평온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결정의 날, 서문윤의 선택이었다.

“제가 수여받을 관직이 무엇입니까?”

“안북대도호부 참군녹사(參軍綠事). 시선을 피하기에 어쩔 수 없이 품계는 강등해야 해. 괜찮으냐?”

“그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약속은 꼭 지켜주시는 겁니다.”

“남아일언중천금!”

탁상을 내리치며 내뱉은 호기 넘치는 말에 서문윤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제 앞에 자리한 옥패를 받아 들고 그는 결국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제가 맞는 길을 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형을 위하려 애를 썼건만 어떻게 제가 지금 그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벌써부터 후회하면 어떡하느냐?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어. 너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

한탄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제 결정에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다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 * *

대장군(大將軍)은 역대 왕조에서 대대로 군대의 수장을 일컬었던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관직을 군사에 문외한인 대신들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그 관직이 전국의 병권을 통솔하는 직급이라 실권이 몹시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후한 이후부터 그 권한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당금 왕조에서는 군권을 통솔하는 관직을 표기대장군으로 명명하고 병부의 가장 윗줄로 삼았는데, 이는 평소에 공석이었다가 반란이 일어날 때만 사람을 채웠다.

그 아랫줄의 진국대장군이니 보국대장군이니 같은 이들은, 대장군이 아닌 그저 고릿적 사방장군의 이름이 바뀐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까 민간에서 대장군이니 상장군이니 부르는 관직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표기대장군인 것이다.

이 관직은 명예와 실권을 함께 쥔 관직이라. 황제로서도 사실 견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이 악천화로 관직에 부임했을 때 그가 안북대도호의 작위를 내린 것도 사실 이와 관련 있었다. 대도호는 고관직이었으나 외방의 관직. 절도사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 안북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병사가 없었다.

그러니까 대도호는 사실상 명예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 그의 복귀 이후 병부의 서열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도호의 위는 표기대장군과 보국대장군뿐인데, 표기대장군은 공석이요 보국대장군은 병부와 상관없는 원로대신이 겸임하고 있는 관직이라 검설린 위로는 딱히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군통솔권을 쥐고 있지 않은 검설린이 병부의 수장이라 말하기는 뭣하였으니, 번국이 독립하고 황제가 토벌을 선언한 이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럼 반란이 터졌으니 이제 표기대장군직을 세우겠네?

그렇다면 그가 다시 병권을 잡는 건가?

그리고 그리 생각하던 이들의 뒤통수를 친 일이었다.

“금번에 일어난 삼번의 난은 태자가 책임지고 직접 토벌한다! 토벌군의 총사령관으로 동궁을 임명하고 표기대장군에 제수하라! 대도호에게 보국장군직을 제수하고 부관으로 임명하여 동궁을 보좌케 하리라.”

미친 게 아닌가?

좌중을 경악시킨 그 명령은 그러나 조정의 반대에도 물려지지 않았고, 그렇게 토벌군은 꾸려지게 되었으며 사령부 또한 조직되었다.

그렇게 급박하게 이루어진 출병 그 하루 전날의 일이었다.

“장군.”

그날 정명공부에서는 소란이 일었다. 그것은 주인의 출병 때문이 아닌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상관께 인사드리러 왔을 뿐인데.”

야밤에 이뤄진 소란에 그날 정명공부의 하인들은 가택의 엄격한 기풍을 잊고 웅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출병 전날은 본디 재수 없는 일을 기피하여 처벌할 일이 있어도 너그럽게 넘어가는 게 관례인데, 뜬금없이 기둥에 젊은 청년 하나가 꽁꽁 묶여 있으니 주인의 명을 받아 그를 감시하면서도 하인들은 얼떨떨해할 수밖에 없었다.

“미관말직은 고관의 집에 들락거리면 안 된단 겁니까?”

항의하는 청년의 말이 정명공부를 쩌렁하게 울려 침전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바로 긴 머리를 허리 아래로 풀어헤친 사내가 냉막한 얼굴로 탁자 위에 앉은 장소였다.

“저, 주인님.”

무슨 일인지 알 도리가 없다.

서릿발이 부는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주인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정명공부의 집사가 말을 망설였다.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정숙해야 마땅할 출병 전날에 이런 사달이 벌어지나.

하씨 성의 집사는 강서진이 골라 보낸 사람이었으나 서문윤의 정체는 알지 못했다. 그저 뜬금없이 대도호부 휘하로 들어온 수상쩍은 자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동궁이나 황제의 입김이 닿지 않았을까 추정이 되는 이.

그리하여 집사는 출병 직전에 일어난 소란이 혹여 사람들의 눈초리를 사지 않을까, 거사에 악재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주인을 말리려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가 의심스럽다 해도 출병 직전에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별로….”

“내가 관상을 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을, 검설린은 읽고 있던 병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칼 같은 말로 끊어낼 뿐이었다.

“예?”

집사의 얼굴에 당황이 번진 때였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미신 따위를 믿지 않는 냉혹한 그의 성품을 아는 집사는 얼이 나간 목소리로 되묻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물음에 되돌아온 답변에 그는 완전히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저놈은 딱 반위의 상이다! 상관을 배반할 불길한 상이야!”

그게 무슨 설화 속에 나오는 고사인가?

갑자기 신기가 생긴 것도 아니고 부하의 배반을 예언하는 제갈공명 같은 말을 내뱉는 주인을 앞에 두고 집사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막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눈썹을 팔자로 치켜뜨며 역정을 내뱉는 사내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집사는 그저 할 말을 잃은 채 침묵하길 택한 것이다.

“딱 봐도 재수가 없어! 재수가! 저 불길한 놈을 종군하게 놔둘 것 같으냐? 절대로 풀어주지 마! 기둥에서 내리지 마라!”

분통이 터져 말을 내뱉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던 집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출병 때까지 저리 둘 예정입니까?”

그 대목에 이르러 검설린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탁상 위에 올려놓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잠자코 주인의 말을 기다리던 집사는, 이윽고 이어진 그의 명령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안 그래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정명공부에서 그것도 출병 전날 소란이 이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만약 정말로 세작이라면, 이는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일일 테다. 그것은 아무런 이득도 없이 적을 자극하는 어리석은 일이니.

“그럼 적당히 혼을 내주고 자정쯤에 그를 내리겠….”

“내가 직접 가겠다.”

그리하여 적절한 선에서 일을 수습하려던 집사는, 제 말에 앞선 그의 단호한 말에 놀란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냉막한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져 복잡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영문을 몰라 하는 집사를 뒤로한 채 검설린은 한숨을 내뱉고 침전 밖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날이 풀리지 않아 몹시 서늘한 달이었다.

초봄의 한기는 두툼한 솜옷으로 막기 힘들었고, 장한성보다는 아니지만 밤바람은 특히 몹시 거셌다.

‘너 이 똥강아지가!’

분노에 휩싸여 그를 묶은 기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던 검설린은, 서문윤의 얼굴이 분간될 위치에 이르러 돌연 정색하고야 말았다.

“서문윤!”

경악에 이른 목소리가 흐른 순간이었다.

“이런, 제기랄!”

창백해진 얼굴로 그가 빠르게 기둥을 향해 달려가 서문윤의 몸을 묶은 밧줄을 빠르게 풀어냈다. 서문윤이 의식을 잃은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던 것이었다.

“서문윤, 서문윤! 정신을 차려봐라!”

다급히 서문윤의 몸을 묶은 줄을 풀어내 그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곤, 검설린은 눈을 뜨지 않는 그의 몸을 흔들며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윤아, 제발!”

그러곤 마침내 터져 나온 이름에 때맞추어, 감겼던 서문윤의 눈이 뜨여졌다.

“윤아.”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말이 흐른 순간이었다.

“정신이 드느냐?”

그와 눈을 마주하고도 검설린은 한동안 당황을 감추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로 말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닌데, 몸이 어디 안 좋은 거냐. 동궁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냐? 너 그 약은 제대로 챙겨먹….”

그러나 경황없이 말을 잇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을 다물곤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제 품에 안겨 있던 서문윤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자답지 않는 그 모습에 상황을 파악한 검설린은 그 순간 와그작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비명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 이 자식!”

부득 이를 가는 의형의 살벌한 얼굴을 서문윤은 장난기 어린 미소가 띤 얼굴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농기 어린 웃음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꿈틀거리고 그의 두 눈에 섬광이 스치는 순간 그가 한계에 이르고야 말았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아, 이건 좀 위험.’

오랜 경험으로 그 순간 제가 해야할 일을 깨달은 서문윤이 거짓말처럼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고 순아한 얼굴로 의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목대에 뻣뻣이 선 푸른 핏줄이 꿈틀거리고, 그를 목격한 서문윤은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곤 검설린의 팔뚝을 잡으며 황급히 수습하듯 내뱉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근육이 긴장된 팔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비명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악!”

잠시간 음울한 눈으로 그를 보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뿌득 이를 악물며 손을 든 것이다.

드디어 그가 제 몸에 손을 대는구나!

뺨을 거세게 움켜쥐거나 멱살을 잡은 적은 있어도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던 검설린이, 드디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제 몸에 손을 대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들 몸을 떨던 서문윤은 그러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리곤 그는 위를 올려다보고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너.”

외투를 벗던 검설린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당혹이 스치는 얼굴과 마주하고 서문윤은 그 순간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옷을 벗어 주려 한 거구나.’

검설린의 얼굴 위로 또다시 격정의 불꽃이 일렁거리다가 사라지고, 결국 체념의 빛이 스치고야 만 때였다.

“내가 널 데리고 무얼 하겠느냐. 이 모자란 것아!”

결국 탄식하듯 그리 말을 내뱉곤 검설린은 감정이 꾸역꾸역 억눌린 얼굴로 그의 어깨 위로 외투를 얹어주고 몸을 싸맸다.

몸을 늘어트린 것은 연극이었으나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으므로. 늑대 가죽이 덧대진 두툼한 외투에 몸을 파묻으며, 서문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더 있다가는 정말 얼어 죽을 뻔했습니다.”

검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새파란 달빛을 등진 채 그를 한참 동안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과 마주하며 서문윤은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네가.”

침묵 끝에 흘러나온 갈라진 목소리였다.

“언젠가 날 죽일 거다.”

그 말에 응? 소리를 흘린 서문윤은 이어진 말에 할 말을 잃은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내 복장을 터뜨려서.”

그것은 타인이 듣기에 농으로 들리는 말이었으나, 서문윤은 왠지 모르게 그 말에 진심이 느껴져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리 말을 내뱉곤 사내는 서문윤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고, 그렇게 대청에는 또다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 위험한 곳에는 왜 따라온다는 거지? 또 무슨 개짓거리야.”

시간이 흘러 적막을 깨고 대청에 내려앉은 말에 서문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의형과 적이 되기 싫어서 나왔습니다.”

“뭐?”

“제가 태자의 도당이라면서요. 그럼 의형의 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당황이 스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서문윤이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몸 때문에 저는 의형을 따라가야 해요. 안찰사의 집에서는 반년 치의 약밖에 없었습니다.”

그리 말을 내뱉은 서문윤이 문득 든 울컥한 마음에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그 수치스러운 문제에 생각이 이르곤 원망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의형은 정말 너무하시군요! 제가 다른 사내에게 몸을 여는 것을 꼭 보셔야겠습니까?”

아무래도 너무한 일이다. 강서진에게서 조금의 언질은 받았을 것이 아닌가?

해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제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런데 무정하게 그리 저를 내버리고 간단 말인가? 이성적으로는 그가 저를 이리 두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도, 그 순간 울컥한 마음에 서문윤은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반년이 지나면 제게 그리 잔혹….”

“내가 널 그리 둘 거라 생각하느냐. 넌 정말?”

그리고 그런 그의 항의를 검설린은 칼날같이 단호한 말로 끊을 뿐이었다.

“내가 널 생각하지 않은 적이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고개를 들은 서문윤은 저를 내려다보는 검설린의 고요한 얼굴을 마주하고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경험상 저런 얼굴을 할 때 그를 대하기가 힘들곤 했다.

희미하게 찌푸려진 얼굴에 진심이 스치고 있었으니, 그에 이어진 말은 서문윤을 동요케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반년 안에 끝낼 수 있었어. 설사 그 기간을 넘어선대도 강서진이 널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네가 날 다스리는 유일한 패인데 어찌 널 방관하겠어?”

…반년?

그 순간 얼어붙은 서문윤을 모르는 듯 검설린은 감정의 변화가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끝맺을 뿐이었다.

“몸 때문에 나를 따라온 거라면 그냥 돌아가.”

그리곤 검설린은 서문윤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서문윤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떨리는 목소리나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반년 안에 무얼 끝내겠다는 말입니까?”

그리 묻는 서문윤의 얼굴은 슬쩍 굳어져 있었다. 경직된 얼굴 위로 드러난 희미한 불안을 읽은 듯 검설린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네가 알 일이 아니다.”

덤덤히 흐른 말에 서문윤은 굳은 얼굴로 답변할 뿐이었다.

“제가 할 말이 무엇인지는 아시겠지요?”

“그래, 그럼 내가 할 말이 뭔지도 알겠지?”

그 말에 서문윤은 결국 참지 못해 검설린의 얼굴에 확 손을 뻗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그 손에 쓴웃음을 흘리며 그 순간 몸에 힘을 풀었다.

피하려면 왜 못 피하겠는가?

그러나 그가 뺨을 때리려면 맞을 생각이었다. 주먹을 꽂아도 맞아줄 생각이었고.

그런 마음으로 덤덤한 얼굴로 그 손을 방관하던 검설린은, 그러나 뜻밖에도 제 얼굴을 밀가루 반죽처럼 주욱 당기는 손길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분노에 찬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너 이 새끼!”

제 얼굴을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리는 손에 그 순간 또다시 도발당하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그의 들끓는 시선에 아랑곳 않고 서문윤은 고집 센 얼굴로 그를 마주 노려보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지금 뭐 하는….”

“똥강아지!”

바로 검설린의 눈에 불길을 태우게 한 말이었다.

“지금, 지금 누가 할 소리를…!”

검설린은 실로 울분할 수밖에 없었다.

똥강아지는 누가 똥강아지란 말인가? 하루가 다르게 사고를 치는 저 사고뭉치가 똥강아지이지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그렇게 격분한 사내에서 울분에 찬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였다.

때마침 뺨을 죽 당기는 손길에 검설린의 얼굴이 기어코 극치에 오른 분노로 물들 때였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그를 향해 항의의 말이 이어지고야 만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리 또 나홀로 짐을 짊어지실 겁니까?”

검설린은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곤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경험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짐작을 하고 있잖아. 내게서 확언을 받고 싶나?”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에 서문윤이 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힘없이 손을 휘저어 제 얼굴을 주물럭거리는 손을 떼어내고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장한성에서 그 난리를 친 이후부터 우리는 네가 논했던 그 꿈을 이룰 수 없었어.”

서문윤의 몸이 멈칫할 때, 그리고 검설린은 음울한 눈에 문득 희미한 빛을 번뜩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평범한 길로는 말이지.”

그리곤 그는 고개를 돌려 서문윤을 향해 허탈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와의 약속을 포기했다고 생각해? 응?”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할 말을 잃고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말이 아닌 어느 순간부터 제게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달빛이 흐르는 깨끗한 얼굴은 발간 손자국이 언뜻 보였고, 서문윤을 내려다보는 눈은 깊게 내려앉아 쓸쓸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불현듯 심장이 따끔거려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새하얘진 얼굴로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는, 저는.”

그리고 그 때 검설린은 한 마디 말을 내뱉고 고개를 숙였다.

“나름 노력하고 있어.”

서문윤은 제 입술을 덮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느릿하게 한숨을 내뱉고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겹쳤던 것들이 떼어진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의 일이다.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술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슬쩍 얼굴이 달아올라 서문윤은 더는 그를 마주 보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마음에 고개를 작게 숙이고야 말았다.

오늘따라 의형이 왜 이리 아름다워 보일까.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가 그의 얼굴이 더욱 애처로워 보인다.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건지.’

마음고생이 심해 보이는 초췌한 얼굴에 서문윤은 그를 향한 분노도 잊고 동정의 마음을 슬그머니 품고야 만 것이다. 아직 20대의 반도 되지 않는 혈기 왕성한 나이라, 저도 제 몸을 그닥 돌보지 않는 편인데 열두 살이나 더 많은 검설린은 어째 저보다 훨씬 제 자신에게 박한 것만 같았다.

“당신과 떨어지기 싫습니다.”

웅얼거리는 말에 검설린의 몸이 멈칫했다. 제 뺨을 찌르는 시선을 애써 못 본 체 정면만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더는 못 참겠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태자의 제안을 승낙한 것은 그의 말이 합리적이라 생각한 까닭이었으나, 검설린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도 한몫을 좌우했다. 이미 그와는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 약이 아니더라도 서문윤은 검설린의 곁에서 웬만하면 떨어지기 싫었다. 제 몸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와 함께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말이다.

“가서는 내 곁에서 벗어나지 마.”

“네.”

“무모한 짓은 벌이지 말고.”

그 말에 서문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실로 정직한 의제의 모습에 울컥한 듯 검설린의 관자놀이 위에 또다시 핏줄이 뻣뻣하게 세워졌으나, 그는 결국엔 모든 것을 포기하여 한숨을 깊게 내뱉고야 말았다.

“사는 게 왜 이리 힘들까.”

침묵 끝에 내뱉은 탄식에 서문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그러게요.”

“네 지분이 조금 큰 것 같아.”

“…….”

서문윤은 그의 한탄에 굳이 답변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들은 한참을 그리 대청에 나란히 앉아 멍한 눈으로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며 출정 전야를 흘려보냈다.

* * *

달이 기울고 아침 해가 뜰 때였다.

햇살이 눈꺼풀 위를 간지럽힐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문윤이 기겁하여 속으로 소리쳤다.

“검설린!”

실로 무도하게 의형의 이름을 막 불어재낀 그는 황급히 침상 아래로 내려가 없어진 사내를 찾으려 들었다. 같이 침상에 엉켜 잠이 든 사내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온기가 남지 않은 식은 옆자리에 그는 식겁하여 빠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 그가 제 말을 어기고 절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강서진에게 넘긴다면? 전장에는 죽어도 보낼 수 없다 그리 확고히 마음을 품고 절 저택에 가둔다면?

검설린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서문윤은 그의 지극히 예민한 성품을 믿지 못하였으므로. 어젯밤 잠에 들지 않으려 찬바람이 드는 대청에 굳이 앉아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수마와 맞서 싸우던 청년은 결국 그가 곁을 허락했다는 기쁨에 안도하여 긴장을 놓치고 꾸벅꾸벅 잠에 들고야 말았다.

언뜻언뜻 남은 기억에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와 한숨을 쉬고 절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그의 목을 고집 세게 끌어안고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것도 기억난다.

결국엔 그에게 떨어지지 않는 데 성공하고 침상을 같이 썼던 것만 같은데…?

‘또, 또 도망쳤어!’

식은 자리에 새하얘진 머리로 그가 그리 방문 밖을 뛰쳐나가려 할 때였다.

“정 칠 품이.”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밖으로 뛰쳐나오다 말고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우두커니 멈춰서야 했다.

“정 이 품 고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재껴?”

흠칫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검설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떠난 게 아니었구나.’

날카로운 시선에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따라와.”

“네?”

“넌 내 보좌다.”

그의 기습적인 선언에 서문윤은 잠시간 얼이 나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무슨 보좌라고?

“……전 정 칠 품인데요?”

침묵 끝에 간신히 내뱉은 말이었다.

부관은 무슨 부관?

대도호부 녹수군사면 정 칠 품, 당상관이 아니라 참상관도 되지 못하는 미관말직 중의 미관 말직이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끄트머리 관직인 것을, 그런 제가 어찌 병부의 실질적인 수좌를 보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싫다고?”

“아니요, 갑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에 냉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떨어지는 것보다 낫지.’

지나치게 눈에 띄는 행동인 것을 안다만은, 그의 곁에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으면 제게 더 좋은 일이다. 설사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싸더라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던 서문윤이 아니었던가?

전우의 미움을 사는 것은 그닥 마음이 좋지 않을 일이겠지만, 그것은 애초에 일이 마무리되고 병부를 떠나 낙향할 생각이었던 서문윤에게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행여나 검설린이 말을 바꿀세라 서문윤은 그의 등 뒤를 따를 뿐이었다.

급하게 이루어진 출병임에도 출병식은 화려했다.

“위로.”

그 순간만큼은 검설린의 곁에 있을 수가 없는 ‘고작 정 칠 품 녹수군사 서문윤’은 갑옷을 입고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선 채 용상 아래로 높게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는 이청은과 계단 아래에 자리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명공이 군대를 이끄는 게 아니야?”

“동궁께서 사령관을 맡으신다나 봐.”

“그분이 군사를 이끈 적이 있어?”

참하관이 자리한 곳은 사실상 말석인지라, 긴장이 풀어져 여러 말들이 오갔다. 시작부터 동요하는 사람들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얼굴에 긴장을 스치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황명을 받고 올라간 태자가 무릎을 꿇고 명을 받드는 것을 바라보며, 뒤늦게 실감을 하고 있던 것이다.

‘정말 전쟁이구나.’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갑옷의 무게가 알리고 있다. 이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만 하는 것을.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검설린과 그가 무수히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하는 것을.

그리고 서문윤은 단상 위에서 빛나는 총사령관에게서 시선을 돌려, 계단 아래 수석에 자리한 사내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간 숨을 죽였다.

‘반년이라.’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설린의 시선은 이청은이 아닌 황제를 향하고 있었다. 무어라 지껄이는 황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그는 오직 의형이 숨기고 있는 일을 궁금해하며 사내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슴에 품고 있는 옥패의 무게에 무거움을 느끼며, 그는 그렇게 입술을 짓씹으며 앞으로 일어질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쟁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검설린의 언행으로 서문윤은 그가 번국의 반란을 그닥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예전에 세웠던 군공도, 그가 어떻게 북란을 이겨냈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서문윤은, 번국의 반란에 의심하고 있는 바가 있었다.

‘……설마 반란 자체도 강서진의 계략은 아니겠지.’

검설린이 강서진의 도당 후보로 의심하며 열거했던 절도사의 이름 중 지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것이 섞여 있었다. 번국의 반란으로 검설린이 황제의 견제에서 벗어나 시기 좋게 군사를 운용할 권한을 회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서문윤으로서는 아무래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거의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는 태자와 제 일에도 조용한 강서진도 불안하고, 수도에 있다면서 얼굴을 보이지도 않는 운표선도 수상하다.

하여간 서문윤은 전쟁 그 자체보단 그 뒤에 숨겨진 일을 경계하며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검설린의 냉랭한 얼굴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저와 비슷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참하관과 참상관 사이에 질린 장신의 사내였다. 심유히 가라앉은 눈으로 단상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익숙함이 느껴진다.

‘저 자는?’

그리고 차마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사내의 정체를 깨닫고야 만 순간 그는 경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시선을 눈치챈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서문윤을 발견한 순간 눈을 크게 부릅뜨고야 만다.

“…너?”

두 사람의 얼굴에 핏기가 가신 순간이었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석상이 된 서문윤의 얼굴에 빠르고 급격한 변화가 이어졌다.

새하얘졌다가, 새파래졌다가, 붉어졌다가를 반복한 얼굴이 마침내 완전히 일그러져 흉흉한 빛이 띠고야 말았으니, 그것은 사실 그와 마주한 사내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가신 순간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바로 비명과도 같은 고성이었다.

“여, 여기에 왜 있으십니까!”

“그럼 넌 여기에 왜 있는데!”

이중환, 바로 강서진에게 암살당한 고우군의 호위가 뜬금없이 출병식 날 참하관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심란함에 사로잡혀 무거운 얼굴로 시름하던 서문윤의 얼굴을 완전히 색다른 방식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출병식 내내 서문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중환을 향해 입술을 뻐금거렸으니까.

“낭장, 낭장이셨다 들었는데 왜 여기에 있습니까?”

이중환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가 자리한 곳은 서문윤보다 조금은 높은 장소였으므로, 사열된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그는 애타는 얼굴로 서문윤을 향해 ‘제발 그 입 다물어.’라는 듯 강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차라리 매달리는 것에 가까운 간절한 눈빛. 그러나 서문윤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금이 분란을 일으켰다가는 딱 목이 잘리기 좋은 토벌군 출병식 와중이란 사실도 완전히 잊은 채 더듬더듬 말을 이을 뿐이었다.

“복수를 하시려는 겁니까? 의형을 죽, 죽이려.”

“그 말의 무게는 알고 있느냐? 그리고 제발 입 좀 다물어! 개미 떼처럼 따닥따닥 사람들이 붙어 있는데 어이 입을 함부로 놀려?”

무언가 억눌린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중환은, 서문윤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충격적인 말에 결국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제 뒤에 사열한 이들과 자리를 바꿨다. 도대체 이 애는 제 정신이란 말인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 서문윤의 입술을 결국 두꺼운 손으로 덮고 윽박지른 이중환은 그 순간 제 이마 앞통수를 강렬히 찌르는 눈빛을 눈치채고 허망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아, 제기랄.’

고개를 들어보니 날카롭게 눈빛을 빛낸 중년인이 일을 벌인 두 사내를 불쾌함이 스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정체를 깨달은 이중환의 입에서 끅, 신음이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삭번대토벌군 부총관이다. 거리적으로는 그들과 꽤나 가까운 위치에 있었지만 직위상으로는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고관 말이다.

다행히도 낯을 보니 안면이 있는 상대는 아니지만, 부총관이면 실무를 담당하는 영향력 높은 위인인데 출병식부터 찍힐 이유가 무에 있단 말인가?

“제발…… 가만히 있어.”

그러니 이중환은 서문윤을 향해 애걸복걸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 잠입한 거 아니냐……. 그런데 시작부터 왜 이래…. 우린 이미 토벌군 부총관이나 되는 고관의 눈에 찍혔다고.”

서문윤의 얼굴을 애써 돌려 정면을 보게 한 후 숨을 죽여 흘리는 말이었다.

“내가 병부 출신인 걸 알면서…… 설마 너 날 일부러 엿 먹이려는 거냐….”

그러나 이중환의 노력을 모르는 듯 서문윤은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제발, 의형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그분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아슬한 탄식을 내뱉은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충분히 모을 만치 우렁찬 목소리에 그 순간 이중환은 아득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이 새끼…… 잠입한 게 아니야?’

태자친훈익위였다 들었는데 궁내에 부임했던 무관, 그것도 낮은 직위가 아니었던 장원 급제자가 갑작스럽게 병부 미관말직들이 모인 자리에 떡하니 있으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서문윤은 저리 당당히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건가. 뜻하지 않은 그와의 만남에 당연히 그가 꿍꿍이가 있다 생각했던 이중환은 마치 꺼릴 것이 없다는 듯 당당히 행동하는 서문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 끝에 이중환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대계를 그리고 있는 건지 잘 판단이 가지 않는다.”

그러곤 그는 문득 서문윤의 얼굴을 확인하고 몸을 멈칫하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또 왜 그런 표정이야?”

서문윤의 얼굴이 마치 귀신을 본 사람마냥 새하얗게 질려 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절망에 가득 찬 그 얼굴을 이중환은 일전에 한 번 본 적 있었다. 바로 그의 주인이 그에게 검설린이 처한 혼란한 상황을 주지시켰을 때였다.

그때 완전히 세상이 무너진 사람같이 충격에 빠졌던 서문윤과 지금의 그는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이중환은 당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그리고 침묵 끝에 서문윤이 내뱉은 말에, 이중환은 그제야 서문윤이 받은 충격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당신은 제일 위협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새하얀 얼굴에는 두려움이 얼핏 스치고 있었으니, 그것은 이중환에게 제압당했던 일을 떠올린 탓이었다.

서문윤은 아직도 기억한다. 이중환에게 저항할 새도 없이 몸이 무너지고 정신을 잃은 순간을. 서문윤은 엄연한 무과의 장원 급제자였다. 검설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동기 중에서는 대적할 이를 찾지 못했고, 태자의 호위를 책임지는 이이자 황궁에서 손꼽히는 검수인 문천상에게서도 호평을 받은 무인 말이다.

불운하게 검설린과 함께한 이후로 수많은 고수에게 치여 슬픈 신세가 되어버렸으나, 사실 이렇게 쉬이 제압당한 전적은 없었다.

검설린은 제 의형이니 감히 제대로 손을 쓰기 뭣하다. 운표선은 그 비실한 외모 탓에 방심한 마음으로 대응을 늦게 하였고. 그러나 이중환은 무장을 하고, 경계를 돋운 후에도 무력하게 짓밟혀 제압당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중환은 서문윤이 검을 마주 댄 인물 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이였다. 검설린을 만나기 전까지 그가 아는 가장 강자였던 문천상보다 예리하고, 검설린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순수한 무력에선 더 강할지도 모르는 이.

“저는 당신이, 당신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가 두렵습니다.”

아무리 강서진과 고우군이 심계가 깊고 무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인인 서문윤의 눈에는 실감나지 않는다. 하물며 오랫동안 조정을 주물럭거렸던 정계의 실력자 또한 나루터에서 쏟아진 화살에 맞아 수명을 다했지 않던가?

그러니 서문윤은 제가 체험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치에 오한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서문윤의 심정을 뒤늦게 깨달은 이중환은, 그리고 어두워진 얼굴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희게 질린 후배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팔기린을 해하지 않는다.”

서문윤을 흠칫하게 한 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게 이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어. 너는 내가 그를 해하지 않을 거라 말을 하면 그대로 믿을 수 있나? 우리의 상황이 이토록 혼잡스러운데도? 아니, 너라면 그리 믿을 수도 있겠군. 지금껏 보아온 넌 터무니없는 작자니까. 그래, 확언해달라 하면 그리하겠다. 적어도 지금 그자의 목을 노릴 생각은 없어. 원한도 없고. 내 원수는 오로지 강서진일 뿐이다. 그건 확실히 하고 있지.”

그 대목에 이르러 한숨을 내뱉은 이중환의 입에서 연이어 묵직한 말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제발 이제 네 앞을 보고 입 좀 다물어봐. 그 새하얗게 질린 얼굴 좀 수습하고. 지금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아? 일단 네 목적이 뭔진 몰라도. 우린 둘 다 시원하게 망한 것 같구나.”

* * *

이중환의 걱정이 무색하지 않게, 그들은 부총관의 크나큰 관심을 받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반란을 제압하려는 토벌군 출병식에 소란이 일어났는데 무사히 넘어갈 리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를 태우며 꾸역꾸역 화를 참던 부총관은 성도를 떠나자마자 제 직속 병사를 운용하여 이 여러모로 수상한 두 미관말직을 비밀로 추포하고 그들의 연원을 캐물으려 했다. 물론 병부의 심문은 고신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야밤 숙영지에서 이 두 사내를 추포하곤 그들을 비밀리에 고신을 하려던 부총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 동궁 출신이라고? 동궁 익위 출신인데 면사패를 받아? 전하를 구했다고? 그런데 절도로 좌천되어서 병부 녹수군사로…? 이거 뭐 하는 놈이야? 이게 뭔데?”

세작으로 의심하던 사내 중 하나의 연원이 뜻밖에도 몹시 수상치 않았던 것이다. 휘하의 보고를 듣는 부총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며 복잡한 빛을 띤다. 보고를 통해 서문윤의 소속이 동궁인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이다. 누가 보아도 그가 모종의 이유로 일부러 좌천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상황에 부총관은 순간 얼이 나가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동궁 출신이 왜 출병식에서 그따위 소란을 일으켜?”

또다시 뜻하지 않은 사고를 친 서문윤은 그의 시선에 그저 혀를 콱 깨물어 죽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이중환의 명을 어기고 소란을 일으킨 일을 지극히 후회하면서 말이다.

“이걸 건드려야 해 말아야 해? 아니, 일을 왜 이런 식으로 하신….”

이 일을 분명 태자전하와 의형도 보고받을 테다. 얼마나 그 두 사람이 황당해할까?

출병식에서부터 제 곁에 있으면 황실에 눈이 띄니 숙영지에 머무를 때 제 막사에 합류하라던 검설린의 신신당부를 떠올리며 서문윤은 그저 서글퍼할 뿐이었다.

그런 서문윤을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본 부총관이 이윽고 목표를 바꾸어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던 이중환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저놈은 아예 출신 연원도 불분명하군. 그리고 이 명부 확실해? 왜 종이가 누렇지 않고 새하얀데?”

아무래도 태자의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빠르게 판단한 부총관이 서문윤보다 배는 수상해 보이는 이중환을 잡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거 명단 바꿔치기한 게 확실하잖아! 누가 봐도 손을 댄 건데. 도대체 누가 이랬어?”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건 관행이라.”

“아, 이런 제기랄!”

그리고 돌아온 답변에 부총관은 눈을 감고 아득한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조정보다는 확실히 때를 덜 탔다곤 하지만 이미 개판이 된 중앙군에서 뇌물을 받고 관리 명부를 조작하는 일이 관행이 되었다는 것을.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잠시간 눈을 감고 몸을 떨던 부총관이 정신을 차리곤 검집으로 그를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 질렀다.

“네놈은 어디 세작이냐!”

“……출병식에 그렇게 소란을 일으키는 세작이 어디 있어.”

마치 말할 기력도 없다는 듯, 이중환이 힘없이 내뱉은 말에 부총관은 저도 모르게 깊이 공감하여 잠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사실 의문하고 있었다.

‘세작이 다른 때도 아니고 출병식에?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소란을 일으켜? 게다가 한 명은 누가 봐도 동궁의 사람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들을 고신을 해야 할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에 침묵하던 부총관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막사로 황급히 달려온 누군가의 말에 안색을 바꾸곤 그는 이중환과 서문윤을 각각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거나하게 망했구나.’

도대체 누구의 막사로 끌려가는지 모르겠다. 이청은이든 검설린이든 어느 쪽이든 민망한 상황인지라 서문윤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며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

그리하여 꽁꽁 묶인 채 막사에 던져진 서문윤은, 귓가에 들려오는 노기등등한 목소리에 애벌레처럼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세작이 아닌 건 확실히 알겠다! 얌전히 내 곁에만 붙어 있으랬더니 하루 만에 고위직 인사들 사이에서 네 이름을 널리 알려? 대단하구나! 감히 출병식 날에 소란을 일으키고 부총관에게 찍히다니. 작정을 하고 덤벼도 그리하기 힘들 터인데 네 재능이 아주 다재다능하군.”

다행인지 막사는 검설린의 것이었다.

장계를 손에 들고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짓는 검설린의 시선을 차마 뻔뻔히 넘기지 못해 서문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할 뿐이었다. 귀를 발갛게 붉힌 서문윤이 이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려 선택한 것은, 바로 몸을 결박한 밧줄을 풀려 손을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일이었다. 발목과 손목을 연결한 밧줄이 풀어졌으니, 느슨하게 포박한 손목의 매듭을 푸는 일은 쉬워 보였다.

그러나 서문윤은 밧줄을 쉬이 풀지 못한 채 한참을 끙끙대고야 말았다. 뜻밖에도 매듭을 풀면 풀수록 오히려 결박이 몸을 죄었던 것이었다.

그런 그를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던 검설린이 손에 쥔 장계를 말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포박술은 궁내와 민간과 달라. 이리 와라.”

그 말에 서문윤은 손목을 풀던 손을 풀고 조금은 서러운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어쩐지 제가 몹시 모자란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마치 해탈한 듯한 의형의 눈치를 잠시 보던 서문윤이 쭈뼛거리며 그에게 달려가 풀 죽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마치 풀 죽은 강아지 같은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여, 검설린은 그의 얼굴을 흘긋 보며 화를 조금 풀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저것에 화를 내서 뭣 하나.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날뛰던 서문윤의 기행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 고우군과 ‘그’ 강서진마저 경악하게 만든 서문윤의 돌발행동에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곤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문윤의 어설픈 몸부림 탓에 제대로 꼬여버린 매듭을 풀어주며 그는 결국 목구멍에서 치솟는 한탄 어린 말을 참지 못하고 입술 밖으로 쏟아내고야 말았다.

“넌 왜 거기가 있었어? 도대체 출병식 날 그 소란은 왜 일으킨 거야. 너는 그냥,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느냐? 그게 그리 몸을 좀먹는 일이야? 응?”

도대체 이게 첫날부터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감당이 안 되는 제 대단한 의제의 행동에 검설린은 화를 내는 것조차 포기하곤 그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그런 그를 놀릴 서문윤은, 그러나 그날만큼은 장난스러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의형이 그를 빼낸 게 아니구나.’

이중환의 일을 떠올리고, 문득 서늘한 마음에 사로잡혀 몸을 뻣뻣이 굳혔던 것이다.

무려 고우군의 호위였던 자의 존재를 그는 모르고 있었다. 토벌군에 몰래 잠입한 자의 정체를 말이지.

‘그렇다면 그는 누가 빼돌린 거지? 아니, 그는 여기에 어떤 연유로 잠입한 거야?’

지겨울 새도 없이 하루하루 사고를 치는 서문윤에 심란함을 느끼던 검설린 또한, 그의 이상한 기색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손목과 몸을 결박한 밧줄이 내려앉고, 서문윤을 문득 응시한 검설린의 몸이 멈칫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서문윤의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묵직한 말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냐.”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 서문윤이 굳은 얼굴의 검설린을 마주하곤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혹시, 이중환이라고 아십니까? 북란 당시 중랑장이었다 들었는데.”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설린은 몸을 움직였다. 돌연 막사를 빠져나가는 검설린에 서문윤은 “의형!”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가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빠져나가고 텅 빈 막사 안에 서문윤은 홀로 남아 굳은 얼굴로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의 귓가에 웅웅 울리고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있었다.

‘너는 그의 의제이니 그와 뜻을 함께하고 있겠지? 여기에 있는 것 또한 그의 뜻일 테고. 그러면 그에게 말을 전하거라. 내 길이 그와 합치하지는 않다만, 가끔은 같은 방향을 볼 수도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고우군을 추살한 강서진.

그런 그에게 겁박을 당하고 결국엔 마음을 바꾸어 손을 잡은 검설린.

그런 검설린에게 원한을 산 데다가 황제의 뜻에 따라 그를 견제해야 하는 이청은.

세 사람이 머릿속에 얽혀 서문윤은 도저히 갈피를 찾지 못해 방황해야만 했다. 이중환은 도대체 이곳에 왜 잠입을 한 건가? 그가 목표하는 바는 무어지? 그가 애초에 병부에 잠입하도록 도와준 세력이 누군가? 아니, 애초에 그가 세력이 있었나? 이미 고우군은 죽은 후잖아.

정계의 복잡한 일은 그의 분야가 아니다.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던 서문윤은 결국 심신이 모두 지쳐 어느 순간 넋을 잃고야 말았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 서문윤이 저도 모르게 방금 전까지 검설린이 앉았던 의자 위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살려줘!’

이런 일은 까라면 까는 일이 다였던 무관에게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정말로 정계의 복잡한 사정에는 문외한이었으니까. 그렇게 굴려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던 서문윤은 결국엔 임계점을 넘고 넋을 잃어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열기를 식히며 침묵하던 서문윤은, 문득 고개를 돌리곤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바로 방금 전까지 검설린이 읽던 장계와 마주한 것이었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장계는 서문윤이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그 위에 쓰여진 글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장계를 무심코 바라본 서문윤은 그리고 그 순간 정수리로 벼락이 내려치는 충격에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황 숙부 서체.’

장계는 바로 황재천의 글씨로 써진 것이었다.

서문윤이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 없는 그의 의숙의 글씨. 그리고 서문윤은 그 익숙한 글씨로 쓰여진 단어를 읽곤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회군(回軍), 숙청(肅淸)!’

서문윤의 얼굴에 핏기가 빠르게 빠져나간 순간이었다. 그 순간 서문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있었다.

‘이제 그는 조정과 양립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난 네가 바보 같은 것인지 대계를 그리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한 쪽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이미 그는 달리는 마차 위에 올라탔지. 그 위에서 뛰어내리던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거나, 아니면 마차의 주인이 되거나.

그리고 쉬이 넘길 수 없는 그 날의 검설린의 이상한 말들.

‘호랑이 등에 올라타, 지금 여기 장안까지 왔지. 하지만 더 이상 끌려가지 않을 거다.’

애써 아니라 부정하였으나 마침내 진실로 드러나는 말에 서문윤은 암담함을 느끼며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의형, 설마 정말로?

아니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그리 애써 자위하려 서문윤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잘게 떨리는 손을 서신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그는 아리송했던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해줄 그 서신을 차마 부여잡지 못한 채 허공 위에 손을 대며 얼어붙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을 막은 묵직한 목소리.

“서문윤.”

황급히 손을 거둔 서문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밤에 취침을 앞두고 갑옷을 벗고 머리를 늘어트렸던 사내는 이중환의 소식을 알고 막사에 소문이 돌 것을 생각지 않은 채 침의 차림으로 뛰쳐나가 오는 길이었다. 사민 시절에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도 않던 사내의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 있었다.

그는 도대체 누구에게 가서 무슨 일을 하고 온 걸까.

장계에 써진 두 개의 단어가 그의 가슴을 짓눌러 서문윤은 제게 희열을 주었던 그의 흐트러진 차림에도 신경 쓰지 못한 채 어두운 표정을 지어야 했다.

“녹수 군사가 장군 자리에 함부로 앉아? 중앙군 기강이 어지러워도 한참은 어지럽군.”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검설린은 그저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내뱉곤 그를 향해 다가올 뿐이다. 그의 말에 서문윤은 애써 웃음을 흘리려 했으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입술 끝을 잘게 떨며 기이한 표정을 짓는 서문윤을 뒤늦게 깨달은 검설린이 잠시간 그를 어둑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서문윤.”

그리고 서문윤은 돌연 제 목을 향한 커다란 손에 흠칫 놀라 몸을 웅크리고야 말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사내의 눈에 섬광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흑!”

들켰구나. 속으로 탄식을 흘리며 서문윤은 차마 저를 급습하는 손을 막지도 못한 채 눈을 질끈 감고 이어질 일에 대비할 뿐이었다. 무얼 더 변명하겠는가? 세작이 되는 일을 받아들였다만, 아직까지 서문윤은 마음을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

‘의형!’

그는 서문윤이 존경하고 따른 위인이었다. 하늘처럼 생각하며 따른 은인. 그렇게 서문윤이 제 뿔에 찔려 몸을 잘게 떨면서도 그의 역정을 받아내려 예비할 무렵이었다.

“……도대체 네가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 거지?”

문득 귓가에 내려앉는 묵직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한껏 몸을 움츠리고 파리 날개마냥 몸을 파르르 떨다가 움찔하고야 만다.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린 서문윤의 시야에 엉거주춤 그의 뺨에 손을 대려다가 마는 듯한 검설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검설린이 내뱉은 말이었다.

“난 네게 손을 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잖나?”

실로 참담한 심정이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허탈한 얼굴로 검설린은 다시금 손을 뻗어 서문윤의 생채기 난 뺨을 가린 산발된 머리를 쓸어 올려주곤 입술을 열었다.

“그와 무슨 말을 했지?”

서문윤은 제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몸을 뒤로 젖혀야만 했다. 평소라면 그저 좋았을 손길이 죄책감을 짙게 만들고야 만 것이다. 마른 기침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인 서문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 잘못 없다고….”

“…뭐?”

“의형은, 아무 잘못 없다고.”

자꾸만 말이 목구멍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마른 침을 삼키며 서문윤은 다시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려 했다.

“복수하지 말라 빌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흘러나온 선명한 말에,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문득 흘러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너무 순진해서 가끔 화가 난다.”

허탈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다. 그제야 서문윤은 잃었던 평정심을 되찾고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안색을 살필 수 있었다. 피로함이 짙게 묻어 나오는 사내의 얼굴에는 묘한 기색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서문윤은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흑옥같이 새까만 두 눈이 문득 제 마음을 읽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은 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중환이 누구인지 아시는군요.”

그 말을 내뱉을 때는 서문윤의 얼굴에도 복잡한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들은 서로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탐색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실을 두 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침묵 끝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렀다.

“중랑장 이중환. 당시 병부에서는 검술로 이름을 날리는 이였고, 다만 병법에 눈이 밝지는 못하여 지휘관에는 오르지 못했다. 북란 때 활약했지만 황제의 눈에 벗어나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고우군 휘하로 들어갔지. 그리고 수년간 그의 충복으로 살았고.”

“위험한 자입니다.”

“네 곁에 있는 사람 중 위험하지 않은 자가 있었나? 고우군이나 강서진이 그에 비해 수백 배는 더 위험할 텐데. 네 기준은 이상하군.”

그 말에 서문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항의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이치에 맞음을 알았지만, 고우군이 막상 암살로 어이없게 퇴장당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를 아는 서문윤으로서는 답답함에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런 그의 짙은 시선에 검설린은 결국 짤막한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

“그래, 맞아. 그는 위험한 자야. 하지만 네가 신경써야 할 일은 없을 거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까?”

답답함에 서문윤이 손을 들어 검설린의 어깨를 퍽 내리쳤다. 1년 전이었다면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감히 저지를 수도 없는 행위였다. 검설린의 눈썹이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꿈틀거렸으나, 예전이라면 무서워할 그 슬슬 열이 받는 듯한 얼굴에도 서문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의형에게 충분히 원한을 가질 법도 한데, 어찌 이리 방만하십니까. 그가 그때 제게 의형과 그의 길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합치할 수 있다 말했습니다. 허나 저는 그가 무섭습니다.”

“내 호위가 나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겁쟁이처럼 두려워하니 나는 어떡하나.”

그 평온한 얼굴로 내뱉은 속 편한 말에 서문윤은 결국 울컥하여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의형을 가져다가 팔아버리고 싶습니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제게 숨기는 겁니까?”

한탄하듯 말을 내뱉는 서문윤에 검설린의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의형은 항상….”

“내 멋대로 행동하지.”

그리곤 그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말을 끊고 중얼거렸다.

“네가 네 멋대로인 것처럼.”

서문윤의 몸이 멈칫하고 얼굴에 억울함이 서린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검설린의 입가에는 음울하고 냉랭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마치 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운 그 미소는 일종의 여유로움까지 묻어 나와, 서문윤은 문득 치밀어 오르는 얄미움을 이기지 못했다.

그를 배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를 향한 죄책감과 미래를 향한 불안에 몸을 떨고 있었고. 그런데 또 멋대로 홀로 생각하면서 제게 저리 의뭉스러운 얼굴로 조소를 흘려? 그 순간 울컥함을 참지 못한 서문윤은 결국 그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행동하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팔뚝을 단단히 틀어쥔 서문윤이 발뒤꿈치를 들고야 만다. 검설린은 그의 뜻밖의 행동에 몸을 움찔거렸으나 제 몸을 향해 기울어지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서문윤은 장한성 이후로 시시때때로 약속을 들먹였고 그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의 몸을 만져대곤 했으니까. 서문윤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검설린은 그의 숱한 희롱에 익숙해져 이미 체념한 후였다.

그리하여 무표정한 얼굴로 제 얼굴을 향해 얼굴을 들이대는 서문윤을 바라보던 검설린은, 그러나 이윽고 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에 불을 켜곤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너 이 새끼…!”

버럭 소리를 내지른 검설린이 서문윤의 뒷목을 잡아 그를 떼어내곤 불꽃이 튀기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해 검설린의 턱을 깨문 서문윤이 하늘 위로 올라가는 그의 손에 기겁하여 소리쳤다.

“드, 드디어 제게 손을 대는 겁니까?”

“오냐!”

또다시 몸을 움츠리는 서문윤에 울컥하고야만 그는 결국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고야 말았다.

“어떻게 된 게 하루라도 제정신이 아닌 날이 없느냐, 너는?!”

그렇게 억울함에 치밀어오른 말을 내뱉곤, 검설린은 서문윤을 향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그를 마치 나풀거리는 종잇장마냥 탈탈 흔들어 털었다. 분개에 찬 얼굴에 식겁하여 힉, 소리를 내던 서문윤이 버둥거리며 그의 손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막사 한 켠에 자리한 늑대 가죽이 깔린 침대에 몸을 무너트려야 했으니, 결국엔 검설린의 몸 아래 깔려 그의 분노에 찬 손길을 받아야 했다.

“저 같은 어린 것을 때리다니요!”

“관례를 치른 지 10년이 다 되가는 게 무슨 소리를 해!”

“저보고 어리고 예쁘고 소중하다 할 때는 언제고 손을 대려 하십니까! 악!”

그 진실을 기묘하게 왜곡한 말에 냉랭한 표정을 지은 검설린은 서문윤의 두 손을 부여잡아 결박하곤 고개를 숙여 그의 코를 무자비하게 깨물었다. 서문윤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지금 내 코를 물었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은 비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손은 안 댄다.”

그리곤 그는 다시금 입술을 벌리곤 서문윤의 뺨과 턱을 깨물었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밀며 검설린의 입질에서 얼굴을 빼내려 노력했으나, 우악스러운 손길에서 벗어내지 못한 채 그렇게 얼굴을 무자비하게 깨물리고야 말았다.

그의 과격한 장난에 바둥거리면서 아웅다웅하던 서문윤은 결국 입술 밖으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웃음기 어린 말을 하는 서문윤의 얼굴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어있었다. 검설린이 지금 말을 돌리려 부러 행동한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침상에 얼굴을 묻고 큭큭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얼굴에 드문드문한 걱정의 그림자를 내보였고, 검설린은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깊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상황이 수습되고 서문윤은 그날 밤 검설린과 같은 침상에 누울 수 있었다.

그동안 불안한 밤을 보내곤 했다. 아무리 강서진에게서 해약을 구해왔다 하더라도 또다시 색향이 몸을 지배하면 어떡하나, 그 약이 듣지 않으면 어떡하나, 제 옆에 없는 검설린을 걱정하며 불안해하던 서문윤은 그날만큼은 안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침수에 들 수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적군 아군을 가리지 않고 창칼이 서슬 퍼렇게 저를 겨누고 있는 곳에서 서문윤은 평온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머리를 식힌 서문윤은 검설린의 몸 위에 풀썩 올라타 몸을 기대고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같이 제게 달라붙는 서문윤을 검설린은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단단한 가슴에 뺨을 댄 서문윤이 귓전에 들려오는 고둥 같은 심장소리를 듣던 중 문득 입술을 열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뭐가?”

짤막한 말에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새까만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작 7품 녹수군사가 2품 보국장군의 막사에서 숙식을 함께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럼 나가.”

냉랭한 말에 서문윤은 어색히 웃을 뿐이었다.

“죄, 죄송….”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억울함을 느낀 듯한 얼굴로 상반신을 일으키곤 얼음으로 조각한 듯 차가운 검설린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저는 농담도 못 합니까? 정말 달라진 게 없군요.”

그리 말하며 서문윤은 검설린의 뺨을 한참을 주무르며 가지고 놀았다. 검설린은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바로 역정이 떨어질 일일 텐데. 새삼 변화한 관계를 깨달은 서문윤이 치밀어오르는 애정을 참지 못한 채 아름다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약은 챙겨 드십니까?”

“…….”

“얼굴이 예전보다 더욱 창백해졌어요. 손도 차갑고.”

검설린은 제 손을 쓰다듬는 그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전장에 귀한 약재를 매일매일 챙겨 먹을 수는 없지. 그렇다면 검설린은 앞으로 또 건강을 해칠 테고, 더욱 괴로워할 것이다. 안타까운 얼굴로 잠시간 거친 손을 쓰다듬던 서문윤이 문득 쓴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의형은 정말 제가 없이는 안 되는군요. 제가 평생 당신의 곁에 있어야겠습니다.”

달빛이 흐르는 얼굴에 기묘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던 검설린이 문득 입술을 열어 덤덤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 난 너 없이는 안 돼.”

그리 말하며 검설린은 고개를 숙여 저를 순진무구한 얼굴을 가장하여 바라보는 악랄한 똥강아지의 입술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문윤은 몸을 멈칫하다가 입술을 벌렸고, 그의 협조하에 검설린은 제 목표를 쉬이 쟁취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 흘러 촉촉이 젖은 입술을 떼낸 검설린이 입술 사이로 건조하게 갈라진 음성을 흘리며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정말이야.”

감정을 알 수 없이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굳힐 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삭막해 보이는 저 얼굴에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까닭은 무얼까. 그를 알지 못한 채 서문윤은 그저 침묵하길 택할 뿐이었다.

* * *

그렇게 어영부영 검설린의 막사로 합류하곤,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중환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안북대도호부, 즉 검설린의 직속으로 배정이 되어 있던 것이다. 이중환은 검설린의 곁에 선 서문윤을 바라보자 쓴웃음을 흘렸고, 서문윤은 그에 놀라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를 추궁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아낄 뿐이었으니 그런 모습에 또 속이 터져 서문윤은 남몰래 그의 손을 슬쩍 잡아 깨물어 보복하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분개에 찬 시선을 무시하며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문득 한 사내와 시선을 마주하고 몸을 움찔하고야 만다.

그곳에는 길을 걸어가던 중 넋을 잃고 멍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청은이 있었다.

머쓱하여 우물쭈물거리는 서문윤이 손을 내려놓고, 의아하여 뒤를 돌아본 검설린이 익숙한 사내를 발견하고 냉소를 짓곤 매정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불쾌함이 짙게 물든 그 행동에 서문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릴 무렵이었다.

“그의 신임을 다시 얻는데……으음 성공했구나.”

조용히 그의 곁을 다가온 이청은이 곤란한 얼굴로 말을 물었다. 그 말에 서문윤은 답변을 하지 못한 채 잠시간 침묵해야만 했다.

이것을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고 해야 하나?

발뺌하기도 어렵게 애정 행각을 들키고야 말았으니, 서문윤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곤 그런 그의 앞에서 잠시간 곤란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던 이청은이 문득 입술을 열고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건(巾)을 나무 위에 걸어놓으면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사람을 보낼 것이다.”

고개를 든 서문윤은 다시금 진지함에 휩싸인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느긋하고 넉살이 좋았던 이청은은 요즘 들어 그에게 진중한 모습을 많이 드러냈고, 그것은 서문윤의 마음을 조금은 씁쓸하게 만들었다.

“부탁한다, 윤아. 나는 네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거다.”

그리곤 그는 제 어깨를 부여잡는 손길에 흠칫하며 문득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제국의 명운이 네게 달렸어. 나는 너를 믿고 있다.”

그런 감당하지 못할 소리를 들으며 그는 차마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느릿한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최선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해 멀거니 사라지는 이청은의 뒤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제 시작이지.

이것은 그가 원한 게 아니었다. 제국의 명운이 제 어깨에 달린 것도, 황태자의 신임을 사는 것도, 이 나라의 영웅의 막사에 숨어들어 세작 노릇을 하게 된 것도.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상황은 그가 그저 그런 시골 무관의 주인이 되어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방관하지 않았다.

원한 것은 그저 평범한 삶이었는데.

한숨을 내뱉은 서문윤이 다시금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고 사라진 의형을 따라갔다. 한적한 막사의 뒤편을 넘어서 병영 한가운데를 지나니 토벌군 부사령관이자 실질적인 병부의 수장의 부름을 받는 ‘고작 7품 녹수군사’를 향한 시선이 따갑게 뺨을 찔렀다.

이전의 그라면 당황에 빠졌을 그 날카로운 시선을 그러나 서문윤은 피하지 않고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며 발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오월이었다.

바로 꽃향기가 아닌 피비린내가 흐르는 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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