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망향(望鄕)(3)
“아직도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어깨의 얹힌 짐을 경계하여 저는 윤아의 뜻을 이뤄줄 수 없었습니다.”
맑은 하늘에 서슬 퍼런 말이 울렸다. 서문린의 얼굴이 드물게 차갑게 질려 있었다.
드물게 서문세가 전체가 들썩인 날이었다.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던 세가의 장손이 사라지고, 혼란은 넓디넓은 무가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묵묵히 자리를 지킨 사내가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우두커니 자리한 그의 주위는 소란과 동떨어진 것만 같이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소란이 일어났는데, 그런 태평함이라니?
그 모습에 울컥한 서문린이 결국 참지 못해 분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하실 겁니까?!”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분노가 꾹꾹 억눌려 있었다.
그 원망의 말에 검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서문린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제 아들을 끼고 산다 오만히 말을 할 때는 언제고, 지켜준다 호언장담을 할 때는 언제고 저리 침묵을 치키고만 있는가?
그러나 무어라 더 말을 내뱉으려던 서문린은 문득 귓가에 들려온 희미한 신음을 듣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따위….”
그는 새까만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매섭게 그를 노려보던 서문린이 그제야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는 넋이 나간 사람마냥 망연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지?
그가 아는 검설린은 냉철한 사람이었고, 결코 헛된 행동을 하는 이가 아니었다.
“명, 아니 신의?”
자연스레 흘러나온 옛날의 호칭을 빠르게 수정하고 서문린이 조심스레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의 물음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갈라지고 찢겨진 말의 파편을 내뱉을 뿐이었다.
“나 따위가…. 큭, 무슨 그런 빌어먹을 생각을….”
자조 어린 말에 시퍼런 살기가 묻어 있었다. 그 순간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오르는 불안에 서문린이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지금, 지금 뭐라 하시는….”
“결국, 결국 이렇게 될 거였는데…, 고작…, 고작 그따위 말에 홀려서…….”
“신의?”
“그 개같은 희망을 놓지 못해서, 결국 이 사단을 일으켰지. 흐, 흐흐….”
등골에 소름이 타고 오른 서문린이 입술을 꾹 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지금?’
그 순간 오싹함을 느낀 서문린이 가라앉은 눈으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희게 웃는 사내의 얼굴에는 허탈함과 동시에 처절한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서문린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번져나간 순간이었다.
그의 모습이 몹시 이상하다.
허공을 헤매는 음습한 눈은 그가 견딜 수 없을 만치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서문린은 그에 당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횡새군사로서 검설린을 보좌한 적이 있었으나 일전에 그의 그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검설린은 오만한 면모는 있어도 중요한 일에서는 항상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그 순간 불안에 휩싸인 서문린이 그를 향해 작게 말을 내뱉었다.
“진정하십시오. 이럴수록 정신을 차리셔야…!”
그러나 그는 이윽고 들려온 커다란 웃음소리에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한 채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하하, 으하하하하!!”
그 순간 광소를 터트린 사내가 고개를 돌려 서문린을 향해 들끓는 시선을 보냈던 것이다. 그 눈빛은 이리처럼 번뜩이고 있었고, 서문린은 그 시선을 받으며 입술 밖으로 희미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몸을 움츠린 사내에게 떨어진 것은 통한함이 담긴 외침이었다.
“우습지 않으냐? 서문린. 내가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연명하다가 결국 이런 상황에 이르렀구나.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내가 누구를 탓하겠느냐?”
그리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실소는 뒤로 갈수록 완연한 웃음이 되었고, 그에 서문린은 오싹함을 느끼곤 몸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일순간 검설린의 눈에 빛이 번뜩 튀겼다.
“차라리 태어나기 전에 죽어버렸을 것을!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서문린! 이게 나야! 이게 사람들이 그리 의지하고 칭송하고 비난하던 나라고!”
말의 수위가 걷잡을 수 없이 세지고 있다. 아무리 자식의 일 때문에 그와 척을 졌지만, 그를 향한 존경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서문린이 그 순간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소리쳤다.
“명공!”
격정을 참지 못하는 검설린이 한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숨겼던 호칭을 저도 모르게 내뱉은 서문린이 다급히 검설린을 말리려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그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며, 검설린은 넋이 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릴 뿐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얼 위해….”
그 순간 얼굴을 무섭게 굳힌 서문린의 그의 팔을 부여잡으며 명공!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슬 퍼런 웃음을 이어나갈 뿐이었으니, 소란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떨며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명공, 명공 정신 차리십시오.”
이건, 이건 무언가가 위험하다.
한계까지 몰린 검설린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서문윤을 내심 지극히 아끼던 그의 모습 또한.
한순간 이지가 흐트러져 그에게 원망을 토해냈으나 서문린은 제가 내뱉은 말들을 후회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어찌 그 혼자만의 잘못인 건가?
세가 내에서 아들을 잃어버렸으니 경계를 느슨히 한 제 잘못이 큰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분기가 치밀어 올라 검설린을 비난했으나, 서문린은 막상 미친 듯이 웃는 검설린을 보며 그가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서문윤을 사랑하고 그의 실종을 걱정하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 그는….
이를 악물며 그가 중얼거렸다.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윤아는 무사할 겁니다. 그러니….”
그리고 상황을 해명하려는 서문린의 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산되고야 말았다. 실성한 것마냥 웃어대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처절한 웃음과 함께 표독한 목소리로 말을 내지른 것이었다.
“흐하하, 강서진, 강서진!!”
서문린은 그저 그를 망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두 눈에 살기를 죽죽 뿜으며 검설린이 으득 살벌하게 이가는 소리와 함께 분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
“네놈이 감히 나를, 나를!”
그가 진정한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기둥에 손을 대어 지탱하곤 검설린이 억눌린 한숨을 내뱉었다.
“명공….”
죽은 듯이 그를 살폈던 서문린이 어느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차분해진 검설린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분노에 날뛰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검설린은 평소의 고요함을 되찾고 느릿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제게 다가오는 서문린을 향해 검설린은 심호흡 끝에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비켜.”
무겁지만 감정이 정돈된 말이었다.
“비켜라.”
그 말을 들은 서문린은 잠시간 머뭇거림 끝에 말을 내뱉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보이나?”
그 말에 서문린은 아무 말도 없었다.
미친 사람마냥 핏줄이 불거진 눈부터 섬뜩하다.
차라리 분노가 느껴졌다면 모를까, 검설린의 얼굴은 창백하게 식어 있어 감정을 찾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 모습이 더 섬뜩하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침묵하는 서문린의 귓가에 싸늘한 음성이 이윽고 내려앉았다.
“강서진 그놈이 이 정도로 막가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이청융의 말을 칼처럼 따르던 놈이었는데…. 강산이 바뀔 세월이 너무 길었군. 결국 이 지경에 이르러? 그놈이 벗의 유언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내게 이런 일을 저질러?”
그리고 그 순간 숨을 멈추고 검설린은 날카로운 예기가 묻어 나오는 웃음을 터뜨리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감히 내게서 내 사람을 빼앗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 순간 그의 눈에서 칼처럼 매서운 빛이 섬뜩 빛나고 있었다.
“어디 네 뜻대로 되나 한번 해보자!”
독기가 그득그득 묻어 나오는 말은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뒤틀리고 음산한 것이었다. 검설린은 차라리 악랄함에 가까운 음험한 눈으로 강서진이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기겁한 서문린이 그의 눈치를 슬금 보며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명, 명공….”
“감히 네가 나를 적으로 두고 승승장구할지 똑똑히 두고 보지, 강서진! 네가 감히 나를 건들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
그 말이 끝이었다.
서문린이 저를 뒤로하곤 성큼 발걸음을 떼는 검설린을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어디, 어디 가십니까?”
“……돌려받으러.”
그 말을 끝으로 검설린은 싸늘하게 몸을 돌려 대문 밖으로 나섰다.
“아아.”
그가 떠난 자리.
하인들이 집안을 뒤지고, 자식과 아내가 달려오는 상황 속에서 서문린은 한참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선 채 넋을 잃어야만 했다. 한순간에 자식이 실종되고 검설린이 당장에라도 일을 저지를 듯 뛰쳐나간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에 서서히 복잡한 감정이 물들었다.
‘운명이라.’
이런 일을 막으려 했으나, 꼬여버린 상황을 어찌하겠나.
서문윤은 불운하게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을 뿐이고 검설린은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할 뿐이었다.
하, 한숨을 내뱉는 서문린을 향해 다급히 그를 향해 달려온 서문취가 물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오라버니가 사라지셨다고 들었는데, 아, 아니지요?”
유독 우애가 좋았던 남매지간이다. 오라비의 부재를 듣고 신마저 신지 않고 뛰어나온 딸을 한숨을 쉬며 바라보곤 서문린이 중얼거렸다.
“윤아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구나.”
그저 탄식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 아이가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황형, 다른 것은 필요 없으니…. 제발 윤아에게 운이 있기를.”
* * *
창고 안에는 유독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얼어붙은 공기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이윽고 공간을 울렸다.
“그분을 이용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의 말에 고우군은 오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게 적의를 품은 말에 화를 내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얘야, 나는 자존심을 꺾고 내 일생일대의 적에게 읍소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노라.”
제 말이 걸릴 게 무어 있겠는가?
검설린은 관직 생활 내내 고우군에게 견제당해 제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도와주겠다는 고우군의 말은 사실 기적과도 같은 말이었다. 고우군은 다른 것도 아닌 제 신념 때문에 검설린을 경계했고, 그가 하야한 이후에도 견제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복귀를 제안하는 말이 만일 새어 나간다면 사람들에게 불신을 살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서문윤은 그의 말에 기뻐하거나 납득하지 못했다.
“대인, 어째서 그분을 그리도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항의하는 청년의 눈이 서느렇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우군은 그의 말에 침착한 목소리로 답변하려 했다.
“나는 그에게 후대의 조정을 이끌 지위를 줄 수 있다. 부모를 신원하고 고향에 공덕비를 세울 수 있다. 권세를 줄 수 있고 잃었던 것들을 찾아줄 수….”
그리고 서문윤은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없으십니다, 대인!”
고우군의 얼굴에 희미한 동요가 스친 순간이었다.
“…없다?”
감히 제 말을 단칼에 끊은 동량의 배포에 놀라움을 느끼곤 그는 잠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빛이 번뜩이는 눈이 어두운 창고 속에서 빛났으나 서문윤은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화살 같은 시선으로 고우군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시선만치 강렬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대인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가족을 돌려줄 수 없습니다! 그가 잃은 평온한 유년 시절을 돌려줄 수 없습니다! 그의 고향도, 그의 가산도, 그의 행복도 돌려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인께서 그분에게 앗아 갔던 것이, 그 어느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우군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후배의 토로에 그는 차갑게 웃음을 흘리며 답할 뿐이었다.
“교활하게 굴더니 갑자기 왜 이리 어리석게 구느냐?”
그리고 서문윤의 답변은 망설임 없이 흘러나왔다.
“이 문제가 제게 있어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완강하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고우군은 잠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회한 정치가였으나 그렇기에 청년의 막무가내인 태도에 더욱 적응하지 못했다.
언제 이리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풋내기를 상대해봤지?
시간이 흘러 곰곰이 생각하던 고우군은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건방지군.”
헛웃음을 흐린 고우군이 서문윤을 잠시간 살폈다. 무슨 배짱인지 제게 설교하는 저 어린 동량이 우습고도 또 신기했다.
아무리 그를 뒷배로 삼은 상황이라 할지언정 거진 30년간 조정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저를 모르는 건가?
그리고 저를 조용히 살피는 고우군을 향해, 서문윤은 기나긴 침묵 끝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저를 죽이실 건가요?”
그 말에 대한 답변은, 뜻밖에도 몹시도 호쾌하여 서문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그 말을 내뱉고 고우군은 그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협! 내가 수많은 위협을 무릅쓰고 그대를 납치한 것은, 직접 손대기도 민망한 어린 동량을 죽이려는 쓸모없는 이유 때문이 아니네. 그런 안일한 각오로 한 게 아니야. 운표선이 소협을 보며 권세가일수록 다루기 힘든 인물이라 평하더니만,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겠구나.”
“운, 운 공자가요?”
그 순간 동요한 서문윤을 고우군이 기묘한 것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이 필요한 사내라. 하하. 중환아. 어디서 이 난세에 저런 희귀한 놈이 태어났는고?”
“초록동색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 팔기린도 그런 놈이었지.”
그 순간이었다. 고우군의 입가에 쓴웃음이 서린 것은.
“원래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야.”
그리 말을 중얼거린 고우군은 잠시간 침묵 끝에, 가라앉은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있어 조정이 혼란스럽다 한다.”
서문윤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고우군은 차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서문윤은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곤 몸을 움츠려야만 했다.
“내 세대에 일어난 두 번의 변란이 대당을 기울게 했고, 나는 말년에 향응에 빠진 황제를 막지 못해 조정의 부패를 방관했지. 그래, 그건 나의 잘못이다. 허나 너는 이 모든 상황을 내가 의도했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정말 대당의 상서령이 황제에게 여덟 차례에 걸쳐 올린 상소문을 보지 않았느냐?”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천인상소(千人上所)….’
고우군이 그와 그의 의형에게 있어서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서문윤은 그가 나라에 내로라한 명사 천 명과 함께 올린 상소를 보았다. 서문윤이 고우군과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때, 호소 어린 문장에 감탄하며 그를 충신이라 여긴 적이 있었다. 고우군은 그 외에도 세 번이나 정치 생명을 걸고 황제에게 충언을 올린 적이 있었다.
가식이나 연기라 할 수 없는 절절한 상소문을 서문윤은 차마 깎아내리지 못해 침묵할 뿐이었다. 그는 그저 고우군의 안색을 살피며 그의 심기를 읽으려 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한숨이 흘렀다.
‘세상이 선악으로만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래도 인정하기 힘들어.’
고우군의 말을 인정하는 게 힘들었다.
그가 검설린의 적이고, 많은 사람을 죽인 권신이고, 또 조정의 부패를 막지 못한 책임을 안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 아예 상종 못 할 그런 부패한 인간 말종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 일이었다.
적어도 그는 나라에 두 차례의 북란이 일어나기까지는 안사의 난 이후, 황폐화 된 조정을 수습한 명신이었다. 정치적인 고집을 부려 동서대란과 같은 피를 보는 사건을 종종 일으키기는 했으나, 그는 전대에 정권을 지었던 이들보다는 훨씬 유능한 인간이었다.
부패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게 청렴한 데다가, 거적때기 같은 조정을 수습하여 세수를 안산의 난전으로 환원시킨 명신. 그가 조정의 부패를 막지 못했다 말이 돌았지만, 어찌 보면 그가 있어 이 정도 모양새를 갖춘 것일 수도 있었다.
치세라면 아마 나름 명재상으로 추앙받을 사람이었다.
다만 위로 무능하고 욕심 많은 군주가, 밖으로 창궐하는 이민족이 그를 무능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그대는 서문세가의 사람이지. 나는 그대의 선조 같은 사람이 되길 원했다네. 서문표처럼 명신이 되기를 원했으나 뜻밖에도 세상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내 스스로도 그리 되지 못했지. 나는 실패하고야 말았네. 그러나 그럼에도 최악을 막으려 했어.”
침묵하는 서문윤의 귓가로 유려한 말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서문윤의 두 눈에 심연 아래 가라앉은 노인의 어둑한 얼굴이 보였다.
“모름지기 정치가란 최선을 택하지 못한다면 최악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뜸을 들인 순간, 서문윤은 연유 모를 불안을 느끼고 잠시간 떨고야 말았다.
침묵 끝에 고우군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느릿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가 원한다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할 수 있다. 목이라도 내어줄 수 있지. 최악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제야 서문윤은 억눌린 목소리로나마 간신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고우군은 그 말에 잠시 웃음을 흘리다가, 돌연 정색한 얼굴로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내게 일어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팔기린을 이용할 거다. 그를 얼마든지 상처 입히고 또 괴롭힐 거야.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오? 소협.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네의 목숨으로 팔기린을 협박할 생각이네. 그의 야망을 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자네와 같은 피라미의 목숨마저 거둘 수 있어!”
서문윤의 얼굴이 굳은 순간이었다.
“야망…?”
야망이라면 무슨 야망을 말하는 건가?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가 보아왔던 검설린은 야망은커녕 미래를 생각하는 것마저 힘들어하는 이였다. 이리 말하면 조금 그렇지만, 검설린은 그 옛날의 명성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쳐 닳아 있었다.
서문윤은 심지어 그가 저 없이 홀로 자립할 모습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검설린이 야망이라?
‘한 치 앞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 무슨 야망을….’
그가 오묘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너는 모르고 있구나.”
그리고 불현듯 서문윤의 귓가에 떨어진 말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미 그는 조정과 양립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단 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 그는 몰이꾼에 몰린 짐승과 같다. 특별한 점은 그가 노루나 토끼가 아닌 기린이라는 점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문윤의 얼굴에 핏기가 빠르게 가셨다. 영민한 청년은 빠르게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이 담은 날카로운 경고의 뜻마저도.
그것은 바로 검설린의 대죄를 의심하는 말이 아니던가?
납치당한 상황에서 노야, 노야 앙순하게 답을 하던 청년은, 고우군의 말을 깨달은 순간 싸늘해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것은 꽤나 불순한 행동이었으나, 그러나 이 철혈의 재상은, 새파란 후배의 건방진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띤 의미심장한 미소를 서문윤은 험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
헛소리라 웃어넘기고 싶은데, 어쩐지 마음속에 스며드는 불안감에 그리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침묵 끝에 마음을 다잡은 서문윤이 택한 것은, 바로 회피였다.
그의 항변의 말을 들은 고우군은 그 순간 얄팍한 미소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람은 변하지.”
그 짤막한 말을 남기고 그는 얼어붙은 서문윤을 창고에 남겨둔 채 홀홀 날듯 자리를 떠났다.
* * *
자세한 상황은 이해할 수 없으나 저와 의형이 분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잘 알겠다.
고우군이 나가고, 어둠이 내려앉고 정적이 감도는 창고에 홀로 앉아 머리를 굴린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황숙은 앞으로 내 인생이 달라질 거라 했지. 의형은 내게 네가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아느냐 소리쳤고. 그리고 아버지는 내게 책임질 수 없을 거란 말을 했다.’
그 모든 것이 사실 고우군이 한 말과 닿아 있었다.
지금은 생각지 못했는데, 그들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왜 몰랐을까? 황제에게 대놓고 개긴 것과 다름이 없는데…. 아무런 보복이 없을 거라 생각한 것도 순진한 거고, 눈에 보이는 일이 없다고 무사히 넘어갔다 생각한 것도 바보 같아.’
장한성 사건 이후로 큰일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으나, 과연 한 지역이 뒤집어지고 관리가 맞아죽을 뻔한 사건이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까?
게다가 의형은 다른 이도 아니고 옛날의 큰 명성을 입었던 이였다. 황제의 입장에서 경계할 만한 거리는 충분했다.
아니,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보아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고우군의 말만큼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다.’
서문윤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는… 오로지 평온한 일상을 원할 뿐이었어.’
그러나 서문윤은 확신하지 못했다.
그와 저가 그저 평범한 이들처럼 살아가길 원한다 해도, 사람들이 그리 놓아두지 않는다면 어쩔 건가?
이미 검설린은 제 평온한 삶을 한 번 그런 방식으로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저를 방어하려, 어쩔 수 없이 야망을 품는다면… 서문윤은 그 순간 생각을 끊고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지?’
망연한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어듬 속에서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식어 있었다.
고우군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그날 이후 서문윤은 상념에 사로잡힌 듯한 얼굴로 기나긴 침묵을 지켰다.
식사를 하러 하루 두 번 창고를 오가던 중환이 걱정이 되어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서문윤은 그때마다 괜찮다, 말을 하며 작게 웃었지만 그 얼굴 또한 몹시 초췌하여 중환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췌해져 가는 그의 얼굴에 고우군마저 혀를 찰 정도였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한 건가?”
“순진해 보이긴 했지요?”
“음.”
작게 침음을 낸 고우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애들이 평화에 젖기는 했지.”
마차를 보는 그의 눈이 수면 아래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어느 심각한 고민에 빠져 말을 잃은 듯했던 서문윤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바로 창고에서 몸을 옮길 때였다.
돌연 제 눈에 안대를 씌우고 번쩍 몸을 안아 든 중환에게 서문윤이 그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우리 이제 도망가야 해~”
여유로운 듯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서문윤은 그저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반항을 하지 않고 늘어진 몸을 마차에 올려놓곤 중환은 잠시간 그를 깊은 눈으로 응시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너는 무사할 테니까.”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 끝에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서문윤을 바라보던 중환은 서문윤의 안대를 벗겨주고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을 흘렸다. 마차 밖을 나가는 그를 서문윤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마차가 움직이고,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천막으로 가려진 어두운 마차 안에서 서문윤은 저가 동으로 가는 건지 서로 가는 건지, 북으로 가는 건지 남으로 가는 건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재상이니 그의 영향력이 남은 성도로 가려나?
그리 추측을 했으나 확신은 하지 못했다.
납치당한지 사흘 정도가 흘러 강남동도는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지.
홀로 어둠속에 자리한 채 인질로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 서문윤은 말벗이 없는 긴 여정을 결코 무료하게 보내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마음을 흔드는 한 가지 심각한 고민에 휘말려 끙끙 앓을 뿐이었다.
그것은 고우군이 흘린 말에 불거진 고민이었다.
‘혹시나. 아주 만약에… 정말로 의형이 반역이라도 일으키면 난 어떻게 하지?’
비록 조정의 명령에 불복한 적이 있으나, 서문윤은 한 치의 고민 없이 낙마 위기에 처한 황태자를 대신하여 말에서 떨어질 만큼 충정스러운 이였다. 애국충정을 기치로 삼고, 군사부일체를 머리에 박아 넣은 명문의 후예였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려나.’
또 가문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역적의 최후는 삼족을 멸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핼쑥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나날이 말라가는 서문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마차 밖 마부석에 앉은 노인이 실소를 지었다. 청수한 노인의 얼굴에 스치는 만족감을 읽고 중환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 * *
“밥이다.”
그날 서문윤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벽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중얼중얼거렸던 서문윤은, 그날 마차 밖을 나서려는 중환을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마차를 세워놓고 야영을 하려던 중이었다.
‘뭐야? 왜 이래?’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절로 흠칫한 중환의 귓가로 연이어 들려온 것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병부에 있으셨습니까?”
“응.”
그 말에 무심코 답변하고야만 중환은 이윽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야 말았다.
제 과거를 묻는 모습이 수상하다.
비록 저 청년은 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다시금 경계심을 갖춘 중환이 서문윤에게 되물었다.
“그건 왜?”
서문윤은 그의 말에 턱짓으로 중환의 허리춤을 가리키는 것으로 답했다.
그 시선 끝에 중환의 허리춤이 자리하고 있었다. 띠돈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검을 발견한 중환이 아아,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썰미가 좋군.”
민간에서 사용하지 않는 패용법이었다. 활과 검을 병용하는 군관이 활을 쏠 때 검이 거치적거리는 것을 방지하려 검을 뒤로 차는 방면, 민간에서는 활이 금지되어 검을 바로 뽑기 좋게 앞으로 차곤 했다.
“선배님이군요.”
그 말에 중환은 무어라 답을 하지 않고 우물거렸다. 이 상황에서 선배, 후배를 따지기에도 뭣하다.
게다가 서문윤은 궁내 무관이었고, 중환은 병부의 사람이었으니 엄연히 따지면 선배라는 말도 사실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저 머쓱한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물 뿐이었다.
“저도 나름 무재라 불렸는데, 요즘 들어 회의감이 듭니다. 한 번에 무과에 급제했다 하늘 모른 줄 모르고 뽐냈는데, 어쩐지 궁 밖이 궁내보다 더 험난한 것 같습니다.”
그런 중환에게 서문윤은 마치 동향을 만난 사람마냥 살갑게 말을 걸고 있었고.
도대체 무슨 속인지 모르겠다.
신변에 위협을 당하는 입장에서 저리 태평하게 말을 거니, 그가 무슨 꿍꿍이를 지닌 걸까 의심하면서도 어쩐지 저 순진한 얼굴을 보노라면 마음이 유해지고야 말아, 중환은 저도 모르게 답변을 꼬박꼬박 내뱉었다
“글쎄, 그것보다 네가 그 사람 주변에 있어서 휩쓸리는 게 아닐까? 너 나름 싹수 있어.”
의아함이 스치는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환이 쓰게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한 나라 만인지상의 호위가 쭉정이인 게 더 이상하지 않겠니? 내가 기습했는데 한 번을 쳐낸 게 용한 거야.”
“아.”
“훌륭해, 훌륭해.”
서문윤은 그 순간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제 어깨를 탁탁 치며 훌륭하다 칭하는 게 다른 사람이 했다면 조롱이라 생각할 법한데, 저 중환이란 사내의 얼굴에 서린 태평함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생각외로 유들유들한 성격의 사내였다.
서문윤이 신기함을 삼키고 빤한 눈으로 그를 볼 때였다.
“그러니까 그자에게선 이제 멀리 떨어지는 게 어때? 네가 많이 아까운데.”
덤덤한 목소리에 담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 순간 움찔한 서문윤이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 웃으며 답했다.
“선배께선 고 노야의 호위를 그만둘 수 있습니까? 그가 있어서 험난한 일에 많이 휘말리실 겁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중환은 황당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답을 했다.
“그게 무슨 비교가 돼? 노야는 내가 없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연약한 노인이고, 그자는 미친 인간 흉기인데. 너 이 얼 나간 놈아, 칼도 한 번 못 막고 바닥을 구른 놈이 무슨 배짱으로 그 괴물을 호위하겠다고 나서는 거냐?”
‘훌륭하다면서…’
속으로 웅얼거린 서문윤이 빠르게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고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을 아십니까?”
인간 흉기니 뭐니 하며 질색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깨달은 서문윤이다.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그러나 중환은 깜짝 놀라 그를 추궁할 뿐이었다.
“의형? 너 의형제까지 맺었냐? 미쳤군. 그자를 아냐고? 병부에 있었다고 했잖아.”
그리 말하고 얼버무리는 모습이 제법 수상했으나, 서문윤은 이어진 말에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못했다.
“중원인 중에선 그 작자를 꺾을 놈은 없을 거다. 이민족 중에서 엇비슷한 괴물 몇 명이 떠오르긴 한데, 하여간 네놈이 지킨다 나설 만한 사내는 아니지 않나?”
중환의 말을 들은 서문윤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침묵해야만 했다.
‘의형이 명장이었던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뛰어났다고?’
병법과 용병술이 탁월한 줄로만 알았다. 명장의 조건에는 만인지적의 무예는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의형의 무예가 뛰어난 줄로는 알았지만 드넓은 대륙에서 대적할 자가 없다니?
시간이 흘러, 입술을 연 서문윤이 탄식이 짙게 서린 말을 내뱉었다.
“정말 하늘이 내신 분입니다. 재능이 그리 많으시니.”
신의라 불리는 뛰어난 의술에, 시운을 읽는 뛰어난 머리, 게다가 만인지적에 가까운 무력이라니?
정말로 그는 하늘이 낸 영웅과도 같다.
반짝 눈을 빛내는 서문윤을 향해, 중환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무사태평한 답변은?”
그 식겁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를 마치 괴기한 것 보듯 바라보는 중환을 향해 서문윤이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입술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네요.”
중환의 얼굴이 다시금 평소처럼 차분해진 순간이었다. 그 순간 안타까움이 서린 중환의 눈을 응시하며 서문윤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 노야께서 선배가 없으면 목숨이 위태롭다 하셨습니까? 연약한 노인이라고요?”
“아, 뭐… 재상이 칼솜씨로 따먹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
웅얼 말을 내뱉는 모습에 상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문윤은 그 모습에 저절로 입가에 띠는 미소를 지우려 애를 써야만 했다.
납치할 순간에 그리 무서워보였던 사내는 의외로 정이 많은 듯했다.
‘…고 재상도 생각하던 것과 조금 달랐지.’
그 순간 딱딱하게 굳는 얼굴을 간신히 펴며 서문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도 그렇습니다.”
“?”
중환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린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못 본 척 담담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의형은 제가 없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연약한 사람이라, 그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를 지켜주지 않으면 불안해서요.”
그러고였다. 중환의 얼굴에 싹 핏기가 가신 게.
“괜히 말했군. 미친놈에게 설교라니.”
그리 말을 내뱉은 중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려 천막을 걷었다.
천막 사이로 흘끗 보이는 긴 산맥을 확인한 서문윤이 순간 몸을 움찔했다가 다시금 평온한 얼굴을 되찾았다.
‘아직 강남동도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속으로 제가 있는 장소를 가늠하며, 서문윤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사람들은 그가 강인하다 착각하고 있군요. 하지만 실상 그는 바로 앞날을 생각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미래를 꿈꾸기는커녕 그 당장 쓰러져서 죽기를 원했던 지친 사내입니다.”
중환은 그의 말을 침묵으로 받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야망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의형은 제가 없으면 죽을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나긴 침묵 끝에 중환은 단 한 마디 말을 내뱉고 다시금 몸을 돌려 마차 밖을 빠져나갔다.
“난 모른다.”
그의 몸이 완전히 마차를 빠져나가기 전에, 서문윤이 언성을 높였다.
“그가 꿈꾸었던 야망은 그가 가지지 못했던 평안한 삶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남들과 같은 일상을 원할 뿐이었습니다.”
사실은 아직도 그 또한 제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검설린은 만약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그를 괴롭히거나 이용하려는 이들이 없다면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낙향하여 평온한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는 것을 택하리라.
그에게는 야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순진한 놈.”
천막 틈 사이로 들려오는 웅얼거리는 말에 서문윤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순진하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듣는 거야?’
요즘 들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을 자주 받는 것만 같다. 그리 생각하며 서문윤은 푹 한숨을 내뱉고 수저를 들 뿐이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납치된 지 한 닷새 정도 되던 시점인가?
그날에 서문윤은 코끝에서 감도는 물비린내에 저가 강가를 지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강남동도를 지난 것이다.
그쯤 되어선, 서문윤도 제 거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 종종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곤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악명 높은 고 재상의 손아귀에 잡혀 있으니, 그것도 다른 이유도 아닌 나라에서 가장 엄중한 죄를 의심받고 구금당한 처지이니 아무리 중환이 안전을 약속했어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괜찮으려나?’
그리고 제가 없는 상황에 방황할 사내를 떠올리며 서문윤은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이 불안한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제가 알던 것보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저가 이리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검설린이 과연 무사하려나?
그를 걱정하며 서문윤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환의 말마따나 제 걱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밤에 함부로 나돌아 다니지 말라는 말.
지독한 음약에 중독되었다는 말.
제 곁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
검설린이 신신당부했으면서도, 막상 서문윤이 까마득하게 잊었던 말들을 그는 뒤늦게 상기할 수 있었다.
“흐윽….”
어두운 밤, 짙은 안개에 달빛이 가려진 무렵, 마차 밖으로 신음이 희미하게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아, 아… 윽.”
어두컴컴한 마차 안에 바닥을 긁는 손이 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청년이 입술을 틀어막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눈을 뜨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달빛이 가라앉는 야밤의 일이었다. 그날따라 잠을 자지 못해 뒤척거리던 서문윤은 서서히 으슬으슬해지는 몸에 중환이 던져준 모포를 휘감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감기에 걸렸나?
여정이 급박하다 보니 식사도 챙기지 못하고, 잠도 주기적으로 자지 못하는 때가 많다.
슬슬 계절이 바뀌는 시절이 아닌가?
오한이 드는 것을 보니 고뿔이라도 걸린 모양이지.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할 터인데 곤란한 일이군….
그렇게 생각했던 서문윤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을 타고 번지는 작열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것은 그가 일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고통이었다.
목구멍에 불덩어리가 튀어나오는 듯한, 마치 몸 안에 타오르는 뱀이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
그에 더해 몹시도 당혹스러운 충동이 그의 배 속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근질거리는, 또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각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서문윤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더워, 숨이 막혀.
한참을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단전에서 그리고 하체로 번져 나가는 기괴한 느낌에 시달리며 그는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비틀어야만 했다.
그리고 바닥을 긁는 손이 간절하게 떨리던 그 어느 순간이었다.
‘설마…!’
무언가를 생각해낸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새파란 입술이 잘게 떨린 순간이었다.
“너 음약에 중독되었다고! 사내를 갈구하게 되는 추잡한 약에 네가 중독되었다고! 서문윤! 이 무사태평한 놈아! 도대체 넌 언제쯤 정신을 차리겠느냐?”
의형의 말이 머릿속에 스치고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의 이가 악물리며 살벌한 소리를 흘렸다.
“이… 제기랄!”
왜 그 말을 잊고 있었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제야 제 몸이 이상한 이유를 눈치챈 서문윤이 고개를 숙이며 바닥에 묶인 손을 쿵 내리쳤다.
의형과의 정사는 서문윤에게 애정을 나누는 일 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맨 정신일 때 그는 약이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경험한 적 없었고, 그렇기에 제가 중독되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서문윤은 강렬한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죽을 거야. 죽어버릴 거야.’
달궈진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몸을 감싼 열기를 물리치려 주먹으로 바닥을 치고, 손톱으로 긁으며 고통을 호소했고, 입술 밖으로 죽인 신음을 흘리며 떨어야만 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던 중 어느 순간이었다.
손톱에 피가 날 만치 바닥과 벽을 긁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기진맥진해져 몸을 늘어트렸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서문윤은 마치 벌레마냥 몸을 웅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안 될 것만 같아.
몽혼해진 눈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마차 밖을 응시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천막 뒤편을 그는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 흐윽….”
그리고 그 때였다. 그 순간 마차 밖으로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무슨 일이냐?”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순간이었다.
‘안 돼!’
나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서문윤은 제 몸이 반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에 피가 순환하고, 또다시 불덩이가 솟구치는 느낌.
제 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마차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삼킬 뿐이었다.
긴 침묵에 이상함을 느낀 중환이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너?!”
마차 안에 들어선 순간, 그리고 그는 놀라움을 삼키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너 지금 뭔…?!”
바닥에 웅크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서문윤의 모습이 이상하다.
창백한 얼굴은 마치 시체와 같았고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와 새파란 입술은 환자의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불현듯 이상함을 눈치챈 중환이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몸을 숙였다.
“중독이냐?”
어깨를 붙잡으며 하는 말에, 서문윤은 자연 몸을 움츠리며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여주십시오.”
숨을 거칠게 내뱉고, 그는 다시금 말을 중얼거렸다.
“흑, 죽여주세요.”
창백하게 변모한 중환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애걸할 뿐이었다.
“제발…… 제발 제 명예를.”
정말로 이런 수치는 원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런 일은 원하지 않았다.
장마가 온 듯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서문윤의 눈앞에 한 사내의 냉랭한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형, 의형.
그가 보고 싶었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제 앞에 그 사내가 나타나기를 갈구하며 움츠린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부름에 대한 답은 당연하게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그렇게 한참을 서문윤이 바닥을 구르며 몸을 웅크릴 때였다. 찬바람에 몸을 식히려 비틀거리며 나온 서문윤은 중환의 만류에도 상관없이 자갈을 손으로 긁으며 피를 보고 있었다.
잠을 자던 노인마저 깨운 소란에 두 사람이 놀라 물었으나 서문윤은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이 아군이 아닌데 약점이 될 말을 어찌 하겠는가?
‘미쳤어, 미쳤어, 정말.’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예감을 하며 서문윤은 실실 웃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짓누를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 후배.”
서문윤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고 내뱉은 말이었다. 진중한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허탈히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죽여주십시오.”
굳어지는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중환은 지나치게 사람이 좋았다… 고우군의 사람답지 않게.
흐릿한 정신 속에서 서문윤이 그 순간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절망에 휩싸여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제발… 제발 죽여…….”
그깟 다리 하나에 질질 짜며 황하에 몸을 던진 네가 이 일을 알면 자결을 하지 않을 것 같았느냐?
의형이 그리 말을 했었지. 그리고 서문윤은 지금 그의 말에 지극히 공감을 하고 있었다.
의형에게 겁간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일을 먼저 알아 실제로 제가 겪은 사건을 체감하지 못했던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차라리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을 강렬히 느끼고 있었다.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오른 서문윤이 몸을 움츠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의 어깨를 감싸며 중환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무슨 일이냐. 도울 일이 있으면 내가 알아서 너를 도울 거다.”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중환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네가 인질이라서 구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아까워서 그래.”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작열감에 몸부림치던 서문윤 또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순수한 마음이.
잠시간 침묵 끝에 서문윤이 부끄러움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숨을 헐떡거리는 입술에서 더듬더듬 단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는, 저는…… 음약에 중, 중독돼서… 그래서…….”
중환의 미간이 찌푸려진 순간이었다.
“뭐라고?”
“운, 운남에서.”
“…?!”
그러고였다. 그 순간 당혹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관조하던 고우군의 얼굴에 경악이 스친 것은.
“아, 설마!”
탄식이 흐른 순간, 서문윤은 몽혼히 흐릿해지는 정신을, 뜨거워지는 숨결을 느끼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몸을 움직였다. 비틀거리는 서문윤이 거의 무너지듯 중환을 향해 달려갔다.
“뭐 하는 거냐!”
자연스레 경계심을 높인 중환이 빠르게 검집을 들어 그의 몸을 막아 세웠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중환은 이어진 서문윤의 행동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땅에 떨어지는 서문윤의 팔을 붙잡으려던 중이었다. 서문윤이 사선으로 기울어져 슬쩍 날이 보이는 검에 손을 뻗어, 제 몸으로 잡아당긴 것은.
“큭!”
칼날에 피가 묻는 순간 중환이 빠르게 검을 빼고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잠깐, 후배! 지금 뭐 하는….”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서문윤과의 대작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서문윤을 바라보던, 당혹스러운 빛이 역력한 두 눈에 한순간 서느런 빛이 스쳤다. 고개를 빠르게 돌려 어느 한곳을 바라보던 중환이 빠르게 검집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서문윤은 돌연 귓가에 스치는 찢어지는 소리, 마치 공기가 찢기는 소리를 듣고 몸을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알 법한 소리였다, 그것은.
‘활?!’
바로 병부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무기!
경악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린 그 순간이었다.
“누구냐?!”
나루터 쪽에서, 정확히 말하면 어둠을 틈타 고요히 강 위에 떠 있던 배에서 무수히 많은 횃불이 켜졌다.
고우군의 얼굴이 창백해진 순간이었다.
* * *
얼떨결에 밖을 밟은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필 때, 그는 저가 아직 강을 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비린내가 코를 스치고, 물 흐르는 맑은 소리가 귓가에 스치니 그것은 모두 발작 때문에 그가 알아채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강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 저편에서 건너오는, 나루터에 거의 인접한 배에서 밤을 밝히는 횃불이 봉화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고우군이 뒷짐을 진 자세로 제게 다가오는 배를 지그시 응시했다.
배는 한 척이 아니었고, 무수히 많은 횃불이 시야를 교란하고 있었다.
빠르게 나루터에 멈춰 선 배는 당장 그들의 시야에 닿았고, 서문윤은 그 앞에 웃고 있는 사내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탄식이 흐른 순간이었다.
“나요, 이 중랑.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으러 왔소.”
부드럽고 또 중후한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다.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멍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문 공자.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인재를 아끼네. 그대를 구하러 왔어. 절대로 이들에게 너를 넘겨주지 않을 거다.”
학 깃같이 새하얀 옷을 입은 단정한 인상의 문사가 뱃머리에 선 채 그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그 선선한 웃음은 보는 이를 절로 안심시키는 마력을 품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풀고야 말았다.
강서진이다.
“조금만 참거라.”
아버지와 의형이 경계하는 위인이지만, 그래도 저를 함부로 납치한 이들보다는 낫지 않을까?
어쨌거나 그는 검설린의 친우였고, 서문윤은 고우군과 중환의 온유한 태도와 별개로 지금 당장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제발 나를 이곳에서, 사람들에게서 멀리해줘.
그러나 간절함에 강서진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이윽고 제 귓가로 떨어진 부드러운 목소리에 넋을 잃고야 말았다.
“해약은 내게 있다.”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은, 더 이상 강서진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무슨?’
서문윤의 얼굴이 멍했다.
강서진이 지금 무어라 말을 했지?
그의 말은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속에 품은 내용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를 눈치챈 서문윤의 얼굴이 그 순간 싸하게 변했다.
그는 지금 상처를 치료해준다 말한 게 아니라 해약이라 말을 했다.
저 먼 거리에서, 이 어둠 속에서 제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마냥.
“허허.”
그리고 서문윤이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어두운 눈으로 나루터 가까이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던 고우군이 몸을 움직인 것은.
“어르신.”
만류하는 중환을 손을 들어 막고 고우군이 덤덤히 말을 내뱉었다.
“나를 설마 해치겠느냐? 그가 아무리 막 나가도 지금은 때가 아닐 테다. 너는 서문윤을 챙겨.”
그러고는 헛웃음과 함께 흐른 말이었다.
“내가 고작 손자뻘의 하관에게 겁을 먹어야겠느냐?”
배에서 몸을 내린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줄지어 서 있었으나,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마냥 조곤조곤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절대로 저 애를 뺏겨서는 아니 된다. 너는 내게 이번 일에 있어서 내 목숨보다 대의를 중히 여길 거라 맹세했다. 필요하다면….”
중환은 그의 말에 답변을 망설였으나 고우군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루터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 순간 중환이 검을 꺼내어 서문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는 뒤에서 움직이지 말거라.”
묵직한 목소리는 아까 전의 다정하던 그를 생각하기에 어려운 것이었다.
서문윤은 살갗에 피가 나게 목을 긁으며 그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고, 중환은 그저 묵묵한 눈으로 강서진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루터에 노인의 덤덤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찰사는 어찌 이 몸을 보려 여까지 발걸음을 하였는고? 여기는 강남동도가 아닌데 어째서 고관은 함부로 근무지를 이탈하는가.”
그러고였다.
고요하던 나루터와 강 위를 울리는 높고 찢어지는 광소가 크게 터져 나온 것은.
“으하하하!”
고우군의 얼굴이 창백해진 순간이었다.
“개소리 그만 지껄이고 닥치고 목이나 내놔라! 고우군! 이 날을 9년이나 기다렸다!”
차분하던 명사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 순간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트린 강서진의 모습에 서문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뭔?
넋을 잃은 그의 귓가로 마치 발악을 하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감히 내 원한을 모르느냐? 혼란에 빠진 인세를 구하려 애를 쓰던 동포들을 개돼지마냥 도살한 너를 살려둘 것 같으냐? 명예조차 지키지 못하고 추잡하게 죽어간 내 주군과 벗을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하지 못하느냐? 고우군! 내 앞에서 당장 지껄여봐라! 내가 너를 살려둘 것 같으냐? 아니냐?”
절절한 한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중환도 서문윤도 그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상한 이름을 떨쳤던 그가 저리 통한에 찬 말을 내뱉을 수 있으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고우군 또한 그저 짤막한 말만을 내뱉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나 또한 나라를 위했을 뿐이네, 안찰사.”
그리고 그의 말에 돌아온 냉소 어린 답변이었다.
“개소리.”
강서진의 손이 허공 위에 높게 올라간 순간 중환의 몸이 움찔거렸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조정의 중신이란 자가 그리 막나가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이들의 생각을 깨부수듯 강서진은 연이어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쏴라!”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것은, 수십 년 동안 정계를 구른 노인조차 눈치채지 못한 충격적인 참사였다.
“노야!”
비명이 강물 위로 비산했다. 서문윤은 자신을 밀치고 노인에게 다가가는 중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가 놀라움을 드러내기도 전에 허공을 뒤덮은 화살은 고우군의 목에 박혔고, 그 순간 중환과 서문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미쳤다!’
서문윤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모한 순간이었다.
‘안찰사가 제대로 돌았다!’
그 누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인을 제거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암살자가 아닌 군병을 동원하여서!
“꺼억….”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노인은 나루터에 피를 뿌리고 쓰러져 내렸다. 중환의 얼굴에 살벌한 기색이 감돈 순간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그 짧은 시간에, 중환은 누구보다 이성적이게 행동했다.
“욱!”
고우군에게 뛰쳐 가던 중환은 바로 몸을 틀어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던 서문윤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문윤의 귓가로 이윽고 노성이 울렸다.
“당장 활을 거두고 노야의 상처를 치료해. 만약 그분께서 해를 입으신다면 이자를 베겠….”
“이중환 중랑장. 왜 내게 거짓말을 하시오?”
그러나 강서진은 그의 말을 웃음이 섞인 말로 끊을 뿐이었다.
“북란에 공을 세우고 승승장구하던 자네가 파직을 당한 이유는 포로로 사로잡힌 오왕야를 포기하고 병부의 유능한 인재들을 살리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할 말을 잃은 중환의 입에서는 받아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웃듯, 혹은 진실로 즐거운 듯 싱긋 웃으며 강서진이 선명한 목소리로 뒤이어 말을 이었다.
“그런 이 중랑이 어찌 후배라 부른 이를 죽이겠소? 이 중랑은 그의 목숨을 거둘 수 없는 사람이오. 그리고 사람을 겁박하는 데 있어서 자네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해.”
그러곤 돌연 정색하며 소리쳤다.
“베라!”
“…!”
강서진의 손이 들린 순간 서문윤은 입술 밖으로 쏟아지는 비명을 삼키지 못한 채 허윽! 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피가 허공을 비산하고 있었다.
유혈과 함께 시신의 것이었던 살덩이가 먼지가 가득한 땅바닥을 굴렀다.
병사가 내리친 검이 시신을 모욕하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는 경악과 충격이 스치고 있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경악한 서문윤의 귓가로 상처 입은 짐승이 흘리는 듯한 우짖는 소리가 울렸다.
“이 개자식이!”
그 목소리는 살기를 진득하게 품은 것이었으나, 격분한 중환의 모습에 두려움은커녕 강서진은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당장에 그를 놓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마땅히 주인의 시신이라도 보존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더 못난 짓을 저지를 거야? 응?”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스산해지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나? 이 중랑장. 자네는 나의 원한을 정말 몰라?”
그 말을 할 때의 강서진에게서 서문윤이 전에 보았던 온순한 명주작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중환은 그야말로 강서진을 찢어 죽일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강서진은 태연히 받고 있었다.
‘미쳤어. 저자는 완전히 미쳤어.’
열기에 휩싸여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도, 서문윤은 그들의 대치를 바라보며 크나큰 충격에 휩싸여 몸을 떨 뿐이었다.
눈앞에서 바로 이 나라의 재상이 죽었다!
초유의 사태에 서문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사태를 수습할 생각이 정말 있는 건가?
아무리 서문윤이 제 의형의 인생을 참혹하게 만든 그를 미워하더라도, 이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변방 장한성에서 난이 일어나 하동 지방을 비롯한 세 곳의 관할 구역이 이미 반쯤 독립한 상태다. 다른 지방도 8년간 조정에 출석도 않는 황제의 태업에 불만을 느끼며 조짐이 좋지 않고.
이 상황에서 조정을 운용하는 이는 고우군이었다.
황제를 대신하여 정권을 책임지고 있던 재상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상 조정이 완전히 와해가 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막말로 지금 국정을 관장하는 최고 권력자는 주색에 빠진 황제가 아닌 저 늙은 노인이었다.
도대체 강서진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 건가?
“조정과 척진 검설린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 아닌가?”
그 순간 고우군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서문윤은 더욱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안 돼, 그건!’
그리고 그 때 들려온 말이었다.
“완전히 미쳐버렸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강서진이 허탈하게 말을 내뱉는 중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10년은 늙은 듯한, 그러나 그 속에 독사와 같은 살기와 원한을 품은 얼굴로 강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하시겠소?”
덤덤한 말에 돌아온 것은 사실상 항복의 말이었다.
“그는 나라의 재상이네.”
한숨을 내뱉은 중환의 얼굴에 지극한 슬픔이 묻어 있다.
“시신만큼은 보존케 해다오.”
그는 부끄러움과 한으로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오만하기까지 한 태도를 유지하던 강서진은 그 순간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입니다, 안 중랑. 저는 그대를 존경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게 남아 있는 분노가 그대를 존중하는 마음보다 거세기에….”
갑작스럽게 겸손하게 변한 그를 바라보며 중환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서진은 차라리 미친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청수한 문사 같고, 어르신께 원망을 토해낼 때는 지독한 한에 찬 사람 같고, 지금은 또 풍모 있는 고관 같으니…. 조롱하듯 말을 했던 강서진이 태도를 바꾸어 덤덤하게 말을 내뱉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환은 그 순간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대를 살려주는 것은 제게 남은 마지막 인정입니다.”
저음이 연이어 흘렀다.
“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적을 학살한 그와 다르게, 괴물이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서진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중환을 보았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먼저 움직인 것은 중환이었다.
“시신을 넘겨라.”
무거운 말을 내뱉고 중환이 서문윤의 목에 댄 칼을 느슨히 뗐다.
강서진은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답했고, 그것을 신호로 시신 가까이에 있던 병사들은 세 보 물러나곤 중환을 살폈다.
“어르신께 혼이 나겠구나.”
한탄하듯 말을 내뱉은 중환이 조심스럽게 노인의 시체로 다가갔다.
시신에 가까이 접근한 중환은 서문윤을 품에 놓고 바로 몸을 돌렸다.
“어르신!”
폐부에서 흘러나오는 절절한 목소리였다.
중환의 품에서 빠져나온 청년이 그 순간 균형을 유지하지 못해 몸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중환의 손에서 풀려나곤, 잔뜩 품었던 긴장이 사라진 서문윤이 제 중독된 몸상태를 오히려 더 절절하게 체감한 것이었다.
“괜찮습니까?”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서문윤을 누군가가 팔을 잡아 부축하곤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손을 휘젓고 손길을 물리쳤다.
“하흑….”
이제 큰일이 가셨으니 다른 큰일에 괴로워할 차례였다.
서문윤이 죽인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한계다. 얼굴에 손을 묻은 채 서문윤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스러운 일에 연루되었고, 해결법은 없으니 암담한 마음뿐이었다.
‘의형.’
한 사내의 얼굴을 간곡히 그렸으나 그는 결국 제 곁에 오지 않았다.
한 나라의 재상이 벌인 일이라 저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문윤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원망을 죽이지 못한 채 검설린을 탓하고야 말았다.
‘어디 계신 겁니까? 저는, 저는.’
침묵하며 몸을 떨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허탈하게 웃었다.
여기서 죽어야만 하는 건가?
수치를 당하느니 자결할 것이다.
마음이 선 서문윤이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찰사님. 저를, 저를, 그냥…….”
신음을 내뱉거나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서문윤은 그 말을 끝으로 손으로 입술을 덮곤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고개를 돌려 그런 서문윤을 잠시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강서진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설린은 왜 백년화를 구하려 들지 않을까?”
바로 서문윤의 얼굴을 경악하게 만든 말이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정수리를 내리쬐는 벼락과도 같은 말. 그 순간 고개를 퍼뜩 든 서문윤은 제 앞에서 덤덤히 웃는 사내를 마주하고 얼어붙었다.
강서진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를 마주하며 아득함을 느껴야만 했다.
설마, 설마 그가?
“그가 원한다면 천 뿌리든 만 뿌리든 내어줄 수 있는데. 내 사소한 부탁 하나만 들어준다면….”
유려한 말에 담긴 뜻은 명백하다.
미소를 지으며 휘어지는 강서진의 눈은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가울 뿐이었다.
“당신…… 설마……!”
그리고 서문윤이 기겁하여 무어라 말을 하려던 때, 강서진은 흉내나마 내던 미소의 흔적마저 지운 채 서느렇게 식은 얼굴로 소리쳤다.
“쏴라!”
“…!”
서문윤의 얼굴에 경악이 스친 순간이었다.
“안…… 허윽…!”
허공에 화살이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을 수습하던 중환이 활에 맞고 바닥에 구르고, 비명소리가 울렸다. 비틀거리는 중환이 시신을 바로 내팽개치고 나뭇잎이 무성한 숲을 향해 달렸으나 화살은 그의 등을 매섭게 노리며 추적했다.
“쫓아라.”
무덤덤한 말이 이어지고, 나루터에 자리하던 병사들 중 일부가 몸을 움직여 중환을 쫓았다.
모두가 사라지고 난 후 서문윤은 유혈이 낭자한 마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홀로 남은 노인의 처참한 시체를, 중환이 흘린 피를 말이다.
‘완전히 미쳤어!’
마음 한편에 드는 서늘한 바람은 고우군 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서문윤이 강서진의 태연한 얼굴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분명 그를 살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시신과 저를 교환을 하자고!
저를 납치한 이들이었음에도, 서문윤은 그의 비열함을 납득하지 못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경악에 휩싸인 서문윤이 부르짖듯 말을 내뱉었다.
“약, 약속했잖습니까?!”
뒷짐을 진 채 태연히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강서진이 그 순간 빙긋 웃으며 서문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윤아, 너는 왜 그렇게 순진한 거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내뱉는 말이었다.
그렇게 태평하게 할 말인가?
울컥하여 무어라 소리를 지르려던 서문윤은 그러나 제 몸을 해일처럼 덮치는 열기에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힉힉, 짧게 숨을 몰아쉬며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죽을 거다. 죽어버릴 거다.’
수치심과 작열감에 괴로워하는 서문윤을 향해 손을 뻗으며 강서진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네 순진함이 좋다.”
코끝에 스치는 매캐한 냄새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서문윤은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이토록 설린과 닮았으니…….”
그가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아련한 말이었다.
* * *
눈을 떠보니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
그 순간 서문윤은 얼이 나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밤하늘마냥 고요한 눈이 그를 담고 있었고, 그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손에 쥔 이불을 꾹 쥐어짜며 한참을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 그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건조한 말이었다.
“왜 안 왔습니까? 왜….”
잔뜩 쉰 목소리로 내뱉은 말.
음약에 취해 들뜬 몸이 어째서 멀쩡한지, 강서진은 어디에 가고 검설린이 제 눈앞에 있는지, 맑은 솔냄새가 풍기는 이 고풍스러운 방은 어딘지.
궁금하고 의뭉스러운 점들은 한둘이 아니었으나, 서문윤은 몹시도 그리워했던 사내를 마주한 순간 그 말을 먼저 내뱉고야 말았다.
“기다렸습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설움이 터져, 서문윤은 결국 손을 뻗어 검설린의 팔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묵묵히 그의 손길에 팔을 내어주었고, 이어진 그의 말을 들었다.
서문윤의 입에서 원망을 토로하는 말이 쏟아졌다.
“안찰사도 왔는데 왜 의형이 늦으셨습니까? 왜 그분보다 의형이 늦으셨습니까? 당신이 저를 먼저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겪을 수치스러운 상황을 알면서도 절 이렇게 두셨습니까?”
검설린이 몸을 조심하고 저와 붙어다니라 말을 했어도, 음약의 일을 말했어도 크게 실감나지 않던 서문윤은, 막상 고초를 당하고 나서 차라리 죽음을 원할 만큼의 수치를 느껴야만 했다.
사내가 사내를 원하기를 바라는 약이라니, 서문윤은 그 끔찍한 경험 속에서 몇 번이고 제 숨통을 끊고 싶은 충동을 느껴야만 했다.
중환이 말려, 강서진이 이상한 연기로 저를 기절시켜 그리하지 못했으나, 정신이 만약 남아 있었다면 한계에 치밀어 오른 서문윤은 분명 자결을 택했을 것이다.
검설린의 생각은 옳았다.
서문윤은 제가 저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리하여 서문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에 휘말려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소중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없으면 차라리 죽을 것만 같다고, 그런데 왜, 왜…….”
무어라 더듬더듬 말을 하려던 검설린은 서문윤의 울컥거리는 말을 듣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어느 순간부터 울먹거리는 목소리에는 비참함이 서려 있었고, 그를 듣는 검설린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
긴 침묵 끝에 검설린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그만 울어라.”
검설린은 그리 말했으나, 서문윤이 어찌 지금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있을까?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 쓸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의형에게 서문윤은 더 이상 원망을 토로할 수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돌연 헤어 나올 수 없는 크나큰 두려움에 휘말린 서문윤이 몸을 떨며 작게 물었다.
“제 몸을 고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부리를 닫듯 입술을 꽉 다물며 답을 주지 않았다.
“해약을 구할 방도가 있습니까?”
희망을 놓지 못해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서문윤의 시선을 검설린은 눈을 내리깔아 피할 뿐이었다.
잠시간 그를 노려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확신을 얻고 아찔한 한숨을 내뱉었다.
허무하다.
검설린의 침묵이 말하는 바가 명백했다. 서문윤은 제 운명을 깨닫고, 그리고 그가 전에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고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백년화를 그리 찾아다니던 검설린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치고 있었다. 2년의 시간을 들여 저의 다리를 고쳤으니 그만큼 제 곁에 남아 보답을 하란 말도. 그리고 서문윤이 죽음을 선택할까 봐 두려워 부러 거짓을 말했다는 검설린의 조소 어린 얼굴도.
‘그게 그런 뜻이었어.’
그제야 깊게 생각지 못했던 그의 말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서문윤이 어지러움을 느끼고 검설린의 어깨에 이마를 대며 몸을 기댔다. 손에 쥔 팔을 세게 끌어안은 자세로 서문윤은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런 서문윤의 등 위에 머뭇거리며 손을 얹었고, 그렇게 그들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의형이 절 책임져야 해요.”
그리고 긴 침묵 끝에 서문윤이 정적을 깨고 내뱉은 말이었다.
고개를 든 서문윤이 무섭게 굳은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을 주어 말을 내뱉었다.
“의형을 따라다니다가 제가 이리 되었으니 당신께서 제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만약 영원히 제가….”
“너는 네 원래의 몸을 되찾을 거다.”
그의 말을 끊으며 검설린이 단언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멈칫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검설린의 철벽같은 얼굴을 보았다. 본래 무심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던 사내의 얼굴에 어딘가 서늘한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의형?”
조심스럽게 묻는 서문윤의 머리를 검설린은 돌연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나?
움찔한 서문윤이 그의 눈치를 볼 때 검설린은 다시 입을 열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리 말할 것 없이,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과오를 다잡을 거다.”
“…….”
“널 책임질 거야.”
그리고 서문윤은 검설린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며 잠시간 침묵 끝에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제가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겪을 뻔한 것을 아십니까?”
믿음직스러운 말과 달리 강서진보다 늦은 사실을 은근히 탓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 말하는 서문윤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고, 그것은 분노가 아닌 투덜거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검설린의 진중한 확언이 마음을 안심시킨 지 오래라, 서문윤은 그에게 그저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검설린의 답변은, 서문윤과 다르게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늦지 않아.”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에 서늘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 차가운 조소에 서린 마음이란!
그 순간 서문윤이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하며 되물었다.
“예?”
가볍게 한 말인데, 돌아온 말에 서린 어감이나 기세가 심상치 않잖나?
슬며시 불안을 느낀 서문윤이 검설린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저가 검설린을 향한 설움 탓에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의형이 입고 있는 옷이…?’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항상 깨끗한 백의를 입고 짧은 소매를 줄로 조이던 검설린이 몹시도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차분하게 자리에 정좌한 사내는 평소처럼 흰 면으로 만든 것이 아닌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고 있었다. 얼이 나간 얼굴로 서문윤이 검설린의 옷차림을 살폈다. 허리춤에 느슨하게 찬 옥색 대, 일반인보다 반폭은 더 넓은 소매, 품이 넉넉한 모양새, 둥글게 마감이 된 목 부위의 깃.
눈을 씻고 봐도 영락없는 관복이었다.
그를 깨달은 순간 서문윤은 경악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저 옷을 입고 있어?
“의형, 이게 무슨 일이…?!”
그러고였다.
“음, 익위가 일어났나?”
서문윤의 말을 끊는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온 것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문윤은 순식간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얼어붙어야만 했다.
‘저자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가 얼마나 악독하고 위험한 자인지도, 그 부드러운 미소에 어떤 한을 숨겼는지도 말이다.
한때는 그의 온화한 겉모습에 의아한 마음을 품었으나, 지금 그는 이미 검설린과 서문린이 경계했던 강서진의 독한 면모를 엿본 후였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검설린의 옷깃을 잡아당긴 서문윤이 비틀거리는 그의 앞을 막았다.
잠시 당황한 검설린이 순순히 그 손에 이끌려 서문윤의 등 뒤에 자리한 때, 서문윤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강서진은 그런 어린 후배의 표독스러운 눈길을 웃으며 흘릴 뿐이었다.
“왜 익위는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가?”
“의형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경고의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서문윤의 눈에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서문윤은 그가 검설린을 겁박한 것이 분명하다 추정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것은 당연한 추측이었다.
무기력한 삶 끝에 그저 소박한 꿈 하나를 품던 검설린을 잘 알지 않는가?
서문윤은 속세를 끔찍이 증오하던 검설린을 알기에, 그가 관복을 입고 있는 현실에 충격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 강서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그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난다면 알 만한 추측이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몸을 비틀어 강서진의 시선을 차단하고 검설린을 가리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강서진에게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끊어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익위가 아닙니다. 다리를 바쳐 전하를 구한 것으로 이미 저는 옛 주인에 대한 도리를 다했습니다. 저는 이제 한낱 백민일 뿐입니다!”
그리고 강서진은 그런 서문윤의 모습에 하하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답을 했다.
“호랑이 지키는 병아리도 아니고, 그게 뭐 하는 짓이냐.”
사실 검설린의 체구가 크고, 서문윤의 몸이 그에 비해 늘씬한 체형이니 그를 지키겠다 앞을 가린 행위가 자못 우스꽝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북방의 영웅을 다리를 다쳐 낙향한 고작 전 태자 익위 따위가?
강서진은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웃음을 멈추지 못했으나, 서문윤은 그 태평한 모습에 울컥하여 화를 내고야 말았다.
“의형이 왜 관복을 입고 있습니까!”
그리고 강서진의 단조로운 답변이었다.
“조서를 받아야 하니 아무래도 저 옷을 입을 수밖에 없잖나?”
서문윤의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지금, 뭐라?”
웃음을 멈춘 강서진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팔기린이 조서를 받았다고 했어.”
얼어붙은 서문윤의 앞에서 강서진이 눈물을 훔치고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뻐해도 좋다, 익위. 황제께서 내 조서를 받아들여 팔기린을 사면하고 영하중윤과 진북대도호를 비롯한 5개의 관직에 복직시키라는 명을 내리셨다. 이제 그는 다시 조정에 복귀할 거다.”
그리고 이어진 강서진의 말에 서문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좋은 결말이니, 너는 마땅히 웃어야 하지 않겠느냐?”
강서진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서문윤을 자애롭게 바라보았으나, 서문윤은 그의 미소에 오히려 암담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의 옆에서 묵묵히 말을 듣던 검설린의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싸늘하게 굳은 공기 속에서 오로지 강서진만이 초봄의 훈풍마냥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강남동도 안찰사 가택.
강서진의 평판은 몹시 좋다.
그는 황제가 총애하는 이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청렴한 인물이었고, 유능한 관리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하며 선정을 베푸는 이를 백성들은 칭송하였고 관료들은 존경하였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치소에서 일을 몰두함은 물론이요 가택으로 돌아와서도 새벽까지 일에 몰두하며 국정에 헌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서진의 처소는 항상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시비들은 종종 불그림자 너머로 그들의 주인이 문서를 살피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좀 사정이 달렸다.
“하하.”
온화한 인상의 사내의 입에서 맑은 웃음이 흘렀다. 주인님.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황당한 일은 제법 겪긴 했는데… 이런 종류는 또 처음인걸.”
짤막하게 말을 내뱉은 강남동도 안찰사, 강서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제 목을 틀어쥔 이를 바라보았다. 살벌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옛 붕우. 그는 단단한 손으로 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의 고요한 얼굴에 스치는 살기에, 또 목을 조이는 묵직한 손에 진심을 읽은 강서진이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검설린이 밤을 틈타 안찰사의 가택에 침입하여 그를 겁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돌연 나타난 검설린은 강서진이 숨겨놓은 호위를 제압하고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던 강서진의 목을 졸라 말을 막았고,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벽에 등을 들이박게 했다.
그에게 목을 붙잡힌 상황에서, 강서진은 그저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도대체 이이가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았나?’
그는 20년 지기 친구를 단호하게 내치고 거의 강산이 한 번 바뀔 시간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던 무정한 사람이다. 그가 헛말을 하지 않는 사내란 걸 알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강서진은 그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가 결국 나를 적대하는구나. 좋다. 끝까지 가고자 한다면 끝까지 가지. 네가 나를 벼랑 끝에 몰아 네 뜻을 이루길 바란다면 결코 쉽지 않을 거다. 나는 이제 아쉬울 게 없다.”
그리고 그가 돌연 음울한 웃음을 흘리며 내뱉은 말에 강서진은 황당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얘가 뭔 말을 하는 거야?’
도무지 무슨 말인지 내막을 알 수 없어 천하의 강서진마저 그 순간에는 입을 닥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검설린의 말에 전후 사정을 파악한 후에야 그는 헛웃음이나마 흘릴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그것은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아니, 그럴 마음이 조금은 있었지만 흥미를 가지고 들렀던 서문세가의 저택에서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 강서진이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이청융에게 맹세코 나는 그를 납치하지 않았다.”
검설린을 얼어붙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은 하늘과 조상에게 한 맹세보다 더욱더 강한 구속력을 띠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아니, 애초에 나는 그 아이가 눈치 빠르게 내 앞에서 서문린과 과거의 연을 들먹일 때 다짐했었어. 적어도 나는 그 난세에 의리를 지킨 서문린과 그 자식을 존중하겠다고. 나에게도 자존심은 남아 있다. 그를 이용해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단언하여 말을 하는 강서진이 돌연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우군이 장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왜 이리 순진하게 굴어. 나긋하게 말한 후 강서진은 그 순간 무섭게 굳은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적이 하나가 아니란 것을 잘 알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검설린은 한참의 침묵 끝에 강서진의 목을 틀어쥔 손을 힘없이 내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지. 나름 도리는 지키고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사방에는 적뿐이고 저를 물어뜯는 승냥이 떼뿐이다.
또다시 저의 업보였다.
참담한 마음에 검설린이 침묵할 때였다.
“내 도움이 필요하나?”
들려온 말에 고개를 슬쩍 돌려 의뭉스러운 웃음을 짓는 사내를 바라보곤, 검설린은 그 순간 자조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야 말았다. 다른 사안이면 몰라도 한 나라의 재상을 건드는 일은 그의 도움 없이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그는 고우군의 지독함과 교활함을 이미 질리도록 경험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흘러 체념한 검설린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서진, 네가 드디어 뜻을 이뤘구나.”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다문 검설린은 짧은 침묵 끝에 돌연 강서진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입술 밖으로 짓씹은 말을 내뱉었다.
“네가 원하는 게 모두 이루어졌으니, 이제 속이 시원한가?”
강서진은 그 말에 시원한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서문윤이 그의 의형과 재회하기 바로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 * *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택은 주인의 취향에 맞게 꾸며졌다. 고즈넉한 정원 위 정자에 앉아 두 사내가 차를 마시며 전원을 감상하고 있었다. 백의를 입은 서느런 인상의 사내가 묵묵히 물결이 번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러나 그리 읊조리는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마음이 물결처럼 번지고 있었다. 푸른 용이 양각된 찻잔을 잠시간 어루만지던 그가 어느 순간 한 청년의 얼굴을 떠올리고 입술 끝을 딱딱히 굳혔다.
무언가의 상념에 사로잡힌 사내를 잠시간 바라보던 적의의 사내, 저택의 주인이 적막을 깨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그 애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
검설린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태연히 찻물로 입술을 축이고 강서진이 말을 이었다.
“마음이 그리 약해서 고관직은 틀렸군. 인평도 보아하니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 소문이 자자하던데, 정직하고 선한 건 좋지만 그리 마음이 물러서야 어디 쓰겠나? 하기사, 이청은도 그러니 그를 낙향시킨 거겠지.”
검설린은 제 얼굴을 마주하길 거부한 채 처소에 우울한 얼굴로 틀어박힌 서문윤을 생각하며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를 설득하려 들다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느 순간 화를 내다가, 결국 실망하여 물먹은 종잇장처럼 축 늘어져 지금 방 안에 처박혀 있었다.
아무리 달래보려 애원을 해도, 내가 잘못했다 사과를 해도 그는 검설린에게 답변을 주지 않으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검설린은 이전에 없던 저자세를 띠며 서문윤에게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으나, 지금까지 그의 마음을 달래는 데 실패한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그가 편한 얼굴을 내보일 수가 있겠는가?
제 자신을 감추는 게 관리의 기본이라 한들, 검설린은 그럴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림자가 드리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고 강서진은 지극히 온화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적어도 그는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던 좋은 도구를 그리 버릴 만큼 멍청한 자는 아니지 않나? 우리의 적은 교활한 여우지.”
그 말에 검설린은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말은 똑바로 하지. 태자는 우리의 적이 아니라 너의 적이지. 그리고 그는 약한 게 아니라 선량한 거다, 강서진. 제발 주제를 파악해.”
20년 지기 친구에게 보이는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싸늘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었다.
“우리와 달리 제정신이 틀어박혀 있는 걸 너는 왜 혓바닥을 자유분방하게 놀리지?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검설린은 한때 그 누구보다 고아하고 정직했던 사내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결하여 그 타락이 믿기지 않았던 사내를 말이다. 그는 그가 함께 어울렸던 무리 중 가장 순수했던 이였고, 무리가 머리로 따르던 이와 같이 비참한 상황에서도 정도를 밟았던 이였다.
그렇기에 더 현실은 참혹한 법이다.
검설린이 서늘한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았다. 그 적의 가득한 시선에 강서진은 이런, 소리를 흘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 민감하게 굴지 마라. 어째서 그렇게 골이 난 게야?”
아무리 우리 관계가 이리되었다지만 그런 반응은 너무한 거 아니야?
긴장된 공기를 풀려는 듯 강서진은 투덜거리는 말을 내뱉으며 나름 농을 걸었으나 검설린의 얼굴은 과거의 향수를 건드는 말에도 냉랭할 뿐이었다. 항상 뻣뻣하기 그지없는 친우의 반응에 강서진은 그저 헛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하긴, 그런 강직한 놈이라 희망도 걸 수 있던 거지.
강서진이 입을 열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익위가 너를 피하는 게 그리도 신경 쓰이나?”
검설린은 그 말에 바로 답변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끝이 흘렀다.
“나를 원망하고 있더군.”
조소와 함께 내뱉어진 말을 끝으로 탁, 소리가 들려왔다. 탁자 위에 찻잔이 내려앉는 소리였다. 자고로 예법에 어긋나지 않은 사내가 그를 어길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강서진은 무너져 내리는 검설린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놈이 완전히 그 애송이에 빠진 모양이군.’
이어진 것은 덤덤하기에 오히려 더 비통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 그 애에게 했던 모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자는 약속도, 그 아무것도 지키지를 못했어…. 도대체 이 어디에 너와 청융이 기대를 걸던 기린이 있다는 거지?”
조소를 흘리는 검설린의 두 눈은 암울한 과거를 헤치고 있었다. 남들이 감히 승패를 장담하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전장에서 그는 줄곧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작 다른 면에서는 그는 단 한 번도 원한 바를 이룬 적이 없었다. 사소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그는 패배자가 되었고, 오랜 벗과의 관계는 소홀해졌다. 꿈을 이뤄줄 주군을 지키지 못했고, 그가 마땅히 돌봐야만 하는 수하마저 지쳤다는 핑계로 내치고야 말아 검설린은 결국 무능하고 볼품없는 인간이 되었다.
“고작 그 어린 청년 하나를 지켜주지 못했어. 나는 그를 볼 면목이 더 이상 없다.”
탄식하듯 말을 내뱉곤, 검설린은 쓰라린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검설린을 앞에 두고 묵묵히 차를 마시던 강서진은, 돌연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글쎄. 내 눈에는 그 아이가 너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책망하는 듯한데.”
그 의미심장한 말에 검설린은 굳이 답변하지 않았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각오는 되었겠지. 나는 너처럼 무르지 않아.”
강서진이 적막을 깨고 나지막한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고개를 든 검설린은 옛벗의 불타는 눈을 마주하며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날 이후, 지독한 부조리를 겪고 난 뒤 장안사준이라 불렸던 이들은 그들이 품은 지극한 한과 분노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소했다. 검설린은 자포자기했고, 운표선은 제 비겁함을 덮을 공을 세우려 날뛰었고, 강서진은 유일하게 제가 품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강서진의 방식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증오에 의해 피를 머금었다는 것이다.
침묵하는 검설린의 귓가로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은 말이 떨어졌다.
“끝까지 갈 거다. 무능한 황제, 교활한 태자, 돌아버린 귀비, 조정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무능한 대신, 쓸데없이 세금만 받아 처먹는 무능한 친왕들. 그들을 불태우든가, 아니면 잿더미가 되어 날아가든가. 둘 중 하나야.”
쾅!
좌식 탁상을 내리친 손은 핏줄이 시퍼렇게 도드라져 있었다. 힐끗 금이 간 나무 탁상을 바라보던 검설린이 다시 눈을 돌려 강서진의 시퍼렇게 빛나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귀화가 스치는 눈.
“재가 될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거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더 원하는 걸까?
검설린은 그저 조소할 뿐이었다.
‘이제 피비린내라면 지긋지긋하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너무 많은 지인의 죽음을 보아왔고
실로 많은 사람이 죽는 난세를 살아가며, 검설린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염증이 날만치 충분히 목격했다. 그에게 복수를 포기하게 할 만큼의 회의감을 안겨준 일이었다.
그것은 의행을 다니며 맡은 피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닌가? 더욱더 지독하고, 또 악취 나는 것.
강서진이 고우군을 처 죽이든 황제를 처 죽이든 검설린은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을 품었으나, 직접 그 피바람 한가운데 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 내 운명이구나.
침묵 끝에 검설린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가 어두운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며 내뱉은 말은, 항상 여유롭던 그를 발끈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네가 청융을 죽어서도 슬프게 하는구나.”
강서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노성이 울렸다.
“청융은 죽고 이제 없다!”
버럭 소리치는 강서진이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박찼다. 흉흉한 기세로 발걸음을 옮기는 강서진의 모습엔 평소의 온화함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쿵쾅쿵쾅 귓가에 울리는 커다란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강서진을 검설린은 한없이 어두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제가 밟는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그저 지친 마음으로 죽음만을 갈망하며 그 넓은 대륙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밝은 마음을 지닌 청년 하나가 정을 다시 알게 했으니, 검설린은 그에 홀릴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든 간에, 옛 동료와 붕우가 적이 되든 간에 알 바인가?
‘그 애만 멀쩡하면 충분하다.’
제가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누가 나선 이가 있었는가?
사람들이 죽고 죽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며 그리 제 안위를 도모했다. 검설린은 그날의 사건 이후 배운 바가 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하다.
* * *
그 옛날을 생각하며 검설린이 조심스럽게 서문윤이 칩거하고 있는 처소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의 귓가로 돌연 선명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보기 싫습니다.”
야멸차기까지 한 냉랭한 목소리에 검설린은 문턱을 밟던 중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침상 위에 이불뭉치가 꾸물꾸물거리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그 사이로 속상한 목소리를 흘렸다.
“나가주십시오. 저는, 저는…….”
서문윤이라 추정되는 이불 덩어리가 침상 위에 있었다. 어찌나 원이 강한지 그는 그동안 검설린에게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저리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기괴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는 그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떠나기 전 그의 얼굴만은 한 번 보고 싶은데.
“지금은 의형을 보기 싫습니….”
그리고 검설린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사흘 뒤에 수도로 올라갈 거다.”
꿈틀거리는 이불이 그 순간 경직된 채 얼어붙었다.
잠시간 정적 끝에 비명이 방을 울렸다.
“정말 미치셨습니까?!”
이불이 허공을 날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문윤이 산발에 충혈된 눈을 한 채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항시 방에 처박혀 있어 봉두난발 괴인 꼴을 못 면한 서문윤과 다르게 검설린은 빳빳하게 깃이 다려진 백삼을 입고 있었다. 재회할 때처럼 관복 차림은 아니었으나, 평소에 입었던 소매가 좁은 평복은 아니다.
누가 보아도 귀인이 입을 법한 옷에 서문윤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신다는 겁니까?! 그 수모를 당하고 염증을 느끼고 빠져나온 곳 아닙니까?”
그리고 묵묵히 말을 듣던 검설린은 기어코 서문윤의 이성을 끊게 하는 말을 내뱉었다.
“너는 여기 남거라.”
짤막이 내던 말에 서문윤은 한순간 눈이 돌고야 말았다.
“다 네 혼자 멋대로 해!!”
퍽!
목침이 날아와 벽에 부딪혀 땅에 굴러떨어진다. 처음으로 서문윤이 내뱉은 불손하기 이를 데 없는 반말에 검설린은 두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곧 입술 밖으로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평소라면 험악한 말을 내뱉을 검설린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야말로 이성을 잃은 서문윤이 마치 광인마냥 고래고래 악을 쓰며 말을 이었다.
“혼자만 알고, 혼자만 고민하고, 혼자만 감내하려 하고 그렇게 멋대로 결정하고 의형은 속이 편하십니까!!”
고막이 째지는 비명과도 같은 말을 들으며 검설린은 눈을 감았다. 서문윤은 그 후로도 한참을 더 검설린을 향해 원망을 토로했다. 별채를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이 흐느낌으로 바뀔 때, 검설린은 몸을 움찔하며 마른 침을 삼켜야 했다.
느릿하게 감았던 눈을 떤 검설린이 힘든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서문윤을 마주하고 숨을 멈췄다. 지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의형제고 연인입니까. 변한 줄 알았더니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습니까.”
쓸쓸한 목소리로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의형은 정말 구제불능입니다.”
시린 웃음을 흘리며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이제는 의형을 포기하고 싶어요.”
그 서늘한 말을 들으며 검설린은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살얼음 같은 정적이 잠시간 흘렀다.
기나긴 침묵 끝에, 검설린은 문득 자조하는 웃음을 흘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그게 지금 무슨 뜻이지? 경직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은 느릿하지만 또렷한 말을 이었다.
“나는 너와 어울리지 않지.”
서문윤을 당황하게 만든 말이었다.
“저는…….”
“이렇게 태어나고야 말았구나. 나는 천성이 글러먹은 작자다. 너와 어울리려 해도, 결국 이 모양이야.”
구제불능이라 했던 말은 화가 나서 그냥 내뱉은 말이다. 이제는 포기하고 싶다는 말도 그냥 내뱉은 거고.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에 돌아온 담담한 답변에 서문윤은 충격을 금치 못해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검설린은 그저 쓸쓸히 말할 뿐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저는.”
“쉬거라.”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은 뒤늦게 “의형!” 다급히 소리 질렀으나 끝끝내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착잡한 마음에 검설린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수도로 떠나가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이별하는 날이 말이었다.
* * *
그가 떠나기 전,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그가 다시 입조를 한다 했을 때 서문윤은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청융과 약조한 기한이 1년이 남았다.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벗이자 주군의 유조임을 생각할 때, 검설린이 그 약조를 깨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서문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안위로 협박을 당한 것이다.’
그 생각에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 그리 쉬이 사람에게 붙잡혀 의형을 사지로 내몬 저에게 화가 나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예를 거스르고 지나친 말을 하고야 말았다. 한심한 일이 아닌가? 수도에 있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던 사람이 그 인외마경으로 귀환한단다, 그것도 저 때문에. 그를 볼 낯이 없어, 또 그를 잡으려는 마음에 서문윤은 그리하여 방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검설린이 그날 수도로 올라가겠다 선언한 이후, 사흘 뒤 그의 시위는 무기력하게 끝나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그의 확고함을 깨달은 후 칩거했던 나날과 달리 검설린을 만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번에는 검설린이 서문윤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를 만나 드러눕든 소매를 잡고 매달리든 그를 어떻게든 말리려 했던 서문윤은 엄정한 감시에 처소 밖을 나가지조차 못한 채 무력히 시간을 보낼 뿐이었으며, 그에 시간이 갈수록 더 조급해하고 있었다.
의형이 저를 보지 않겠다는 까닭을 짐작하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툭 건들면 몸을 오그라트리는 미모사 같은 그 여린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정에 약한 의형은 아예 마음을 내줄 여지를 차단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서문윤이 결코 모를 리 없는 지난 3년간 지극히 겪은 일이었다.
‘그리 말을 하지 말걸.’
그러니 그는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찾지 않는 검설린에 서문윤은 제가 내뱉은 생각 없는 말을 지극히 후회하며 떨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제게 더 이상 약한 말을 하지 않기로 했고, 제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런 그가 또다시 저를 피하고 또 자책하는 말을 내뱉은 것은… 사실 제가 내뱉은 비난의 말 때문이었다. 그날 서문윤은 담담한 검설린의 얼굴 아래 그의 깊은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저의 말을 화가 치밀어 한 말이 아닌 온당한 진심이라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의 자존심이 낮은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이라니?
장한성의 큰 사건이 있고 나서야 검설린은 제게 믿음을 주었고, 다시금 살 생각을 품었다. 그 전에 검설린은 서문윤을 밀어내고, 상처 주고, 또 멀리했다. 그 나날을 기억하는 서문윤은 화를 참지 못해 함부로 혓바닥을 놀렸던 제 목을 조르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었다.
안 그래도 톡 건들면 쏙 껍데기로 들어가는 소라고둥같이 겁 많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 너 정말 미쳤구나?
산만 한 덩치와 다른 그 세심한 성격을 아는 그는 그저 탄식할 뿐이었다. 검설린이 상처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를 만나길 거부하는 검설린의 행동에 그 불안감은 가중되어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을 해일처럼 덮치고 있었다.
‘내일, 내일이면 의형이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가까이 다가온 그가 떠나는 날, 바로 하루 전날 밤 서문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여 깊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 멍하니 넋을 잃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왜 탕약을 먹지 않아?”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서문윤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웃음을 띤 사내를 마주하고 그는 얼굴을 자연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초췌해져선 내가 설린이의 얼굴을 볼 낯이 없잖아. 안 그래, 응? 의원의 말을 따라야지.”
“…대인.”
강서진이었다, 저를 감금하고 또 의형을 겁박한 인물.
“탕약은 먹어라.”
이 모든 사태는 사실 저 사내가 등장한 이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서문윤과 검설린은 나름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희망을 다잡고 있었고, 서문윤 또한 제 몸에 대해 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한성의 일은 몹시 큰일이었으나, 적어도 가시적으로 그를 위협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고 저는 갑자기 이 나라 만인지상에게 납치를 당했고, 역모니 뭐니 하는 이상한 일에 휘말리고야 말았다. 의형은 갑자기 다시 출사를 하게 되고, 저는 이리 감금당해 그를 강제로 송별할 상황에 처했다.
이 모든 것이 비록 강서진 하나만이 벌인 일이 아니라 한들 그는 의형이 경계하고 부친이 위험하다 평하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그는 지금 의형을 중원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로 보내려 하지 않는가? 성도는 장한성보다 더욱 살벌하고 잔인한 곳이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에 시달린 서문윤의 시선이 자연 고울 리 없다. 그 원망이 듬뿍 담긴 시선을 받으며 강서진은 휘적거리며 방 안에 들어와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서문윤은 그를 향해 입술을 깨물곤 잠시간 말을 망설였다.
그 때 들려온 느릿한 말이었다.
“네 몸이 좋지 않으니, 그건 먹는 게 좋을 거다. 윤아. 네 의형을 걱정시키지는 말아야지.”
서문윤의 몸을 움찔하게 만든 말이다.
탕약은 강서진의 저택에 머문 이후 계속 복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설린이 그야말로 그를 기함시킨 충격적인 수도 귀환 선언을 하고, 서문윤은 식사 끝에 항상 시비가 들이는 탕약을 거부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퍼뜩 깨달은 껄끄러운 추측 때문이었다.
‘…의형이 나를 떠난다고? 나를 혼자 이곳에 두고 떠나?’
저가 약에 중독된 몸임을 그가 더 잘 아리라. 그런 저를 수도에 데려가지 않겠다 망설임 없이 말하는 검설린의 모습은 자연 의심이 갈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탐구 끝에 그 탕약에서 짚이는 구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설린의 언행과 강서진이 여유로운 모습을 조합하곤 그는 어느 정도 그 둘 사이에 있는 비사를 추측하곤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그가 모든 일을…?’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저는 이렇게 계속 감금당하는 겁니까?”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착잡한 얼굴로 창가에 앉은 강서진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한숨을 쉬고 침대에 내려왔다. 비틀거리며 그의 앞 의자에 털썩 걸터앉은 그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묵 끝에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대인께서는 무슨 일을 도모하고 계신 겁니까?”
도모라는 어휘에 서문윤의 생각이 이미 묻어 나오고 있었다. 돌려 말할 줄을 모르는 어수룩하고 진솔한 후배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서진은 그 질문에 은은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의형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그런 그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서문윤은 발끈하여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 초조한 모양이다. 그의 말에 담긴 긴박함을 읽은 강서진이 태연한 얼굴로 작게 물었다.
“팔기린을 지금껏 피하지 않았어, 너는?”
그리고 서문윤은 그 말에 입술을 새부리 닫듯 딱 닫을 수밖에 없었다. 강서진은 몹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으나, 서문윤은 그 추궁 아닌 추궁 말에 정곡을 찔려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침묵을 지키는 청년을 향해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그가 너를 애타게 찾았는데 너는 그를 피했지. 이제 와서 네가 그를 보고 싶다고 해도, 네 의형을 원망할 수 없지 않느냐?”
서문윤은 침묵 끝에 그저 한 마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의형이 보고 싶습니다.”
그 떨리는 목소리가 흐를 때 강서진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의하는 말이 이어졌다.
“왜 그분을 괴롭히려 하십니까? 대인께서 짊어진 짐은 의형의 것이 아닙니다. 제발, 그를 놓아주세요.”
“글쎄. 그런 것을 논하기에는 너는 팔기린에 대한 일을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서문윤은 또다시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은 도발이 아닌 일고의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다. 검설린은 평소에는 앞뒤를 따지지 않고 일을 벌이는 난폭한 자였으나 이런 면에서는 지나치게 신중했고, 서문윤은 그가 지금 무슨 일에 얽히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의형, 당신은 정말….’
사뭇 섭섭함이 들어 잘근 입술을 깨무는 서문윤을 바라보며, 강서진은 묘한 얼굴로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나는 왜 보자고 한 거지? 너는 나를 이미 의심하고 증오하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서야 서문윤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시비를 통해 강서진에게 제발 한 번만 와달라 간곡히 말을 청한 것은, 그에게 원망을 토해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서문윤은 그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습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날 대인을 처음 보았을 때, 대인께서는 제게 일말의 정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그에 호소하면 아니 되겠습니까?”
간곡한 목소리였다.
“제발, 대인!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으니 의형과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 말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의자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또다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번이 두 번째. 언제까지 이런 어린아이 같은 떼쓰기가 통할지 모르겠으나, 서문윤은 이전 날에 동요했던 강서진을 기억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라 한들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분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 신경이 쓰입니다. 한시라도 떨어지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도는 그가 이미 고역을 치룬 곳이 아닙니까? 어차피 제 본가는 강소성이 아닙니까. 대인께서는 제 목숨을 틀어쥔 것과 다름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도 현실을 아는데 어찌 전 익위 따위가 성주에게 반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 말을 내뱉은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발, 대인. 저는 대인을 방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강서진은 짧은 침묵 끝에 침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으음, 너도 알지 않느냐.”
곤란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었다.
“네가 여기 남는 것은 인질 따위의 이유가 아니야. 설린이는 널 지키길 원하고, 나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지. 나는….”
그리 말하는 강서진의 얼굴에 난색이 스치고 있었다. 그의 태도에서 진심을 읽은 서문윤은 그 순간 할 말을 잃고 더듬더듬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저는 의형이 없으면 안 됩니다.”
강서진은 그 말에 담담한 얼굴로 답할 뿐이었다.
“그것은 네 마음 때문이냐, 아니면 몸 때문이냐?”
서문윤을 바로 얼어붙게 만든 말이었다. 그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운남의 일은 설마 대인이 저지른 일입니까?”
지금 그가 무어라 했지?
짐작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탕약을 거부할 때의 불길한 징조가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 서문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청년의 새까만 눈에 분노가 희미하게 스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짐작한 참담한 가설이었다.
서문윤은 그간 검설린이 간절히 백년화를 찾는 꼴을 보아왔다. 1년간 그가 간절히 찾던 그 약재는 가는 족족 누군가에 의해 밭이 훼손되거나 모두 팔려 있었고, 서문윤은 그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백년화가 나라에서 금한 작물이란 것은 알지만, 그것이 관군이 행한 일이 아니란 것은 은밀히 열리는 암시장까지 미치는 영향력으로 잘 알 수 있었다.
대륙 곳곳에 자리한 암시장에 손을 쓸 만치 조정이 그리 유능하다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그것은 관군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벌인 일이다.
그리고 서문윤은 불타는 밭 앞에서 검설린이 조소하며 소리친 이름을 기억했다.
“강서진, 이 개자식이!”
서느렇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그는 강서진을 추궁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그가 의형을 손에 넣고 흔들려 이 모든 일을 사주하였나? 제 몸의 변고 또한 그와 관련된 일인가?
이미 서문윤은 고우군의 죽음에서 강서진의 독기를 보았으므로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운남에서 그가 당한 음약은 본디 검설린을 향해 뿌려진 것이었다. 그같이 독란한 사람이라면 그 옛날의 벗을 해치려 했다고 한들 놀랍지 않다.
“아니.”
그리고 강서진은, 그 의심의 시선을 받으며 일고의 망설임 없이 말을 내뱉었다.
“내가 그 더럽고 추잡한 물건으로 설린이를 협박했냐고?”
이윽고 흐른 것은 혐오와 멸시가 섞인 날카로운 고소였다.
“아니, 익위!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익위. …너는 정말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 한 마디 말을 연신 되뇌며 강서진은 희디흰 미소를 흘렸다. 의심에 휩싸여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은 비통함이 희미하게 서린 그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응은…?
“너는 정말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안찰사?”
조심스레 제게 묻는 서문윤을 향해 그 순간 강서진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일어나라!”
그 위엄 있는 목소리에 서문윤은 엉겁결에 굽혔던 무릎을 펴고 엉거주춤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강서진의 눈치를 본 그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휘말려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그의 앞에 다시 착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정을 사기 위해 무릎을 꿇었으나, 처음 만날 때와 다르게 강서진은 휘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일전에 보인 적이 없던 오만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고작 서른이 안 되는 나이에 정2품 관직을 하사받은 이의 시선이다. 서문윤은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자연 얼어붙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제 앞에서 어미 잃은 강아지마냥 끙끙대는 이 어린 후배를 향해, 강서진은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며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잘되었군. 그래. 사실 그 얘기부터 하는 게 맞지. 너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익위.”
머리 위로 나지막하게 내려앉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대를 설득하러 왔네. 그대가 그리 원하는 진실이라는 무기를 써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러 왔지….”
이것은 그가 예상한 상황이 아니다.
마른침을 삼킨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저는 의형을 팔지….”
“아니! 네가 현명하다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알게 될 거다. 네 의형이 가야 할 길이 어느 것인지.”
허공에 높게 울려 퍼지는 강서진의 말에, 서문윤은 그 순간 당황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의자에 앉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야 말았다. 강남동도 안찰사, 후세대 만인지상의 재목이라는 유가의 거목의 눈에 불꽃이 치솟고 있었다.
“설린이는 네게 네가 중독된 그 약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 당연한 일이다, 익위. 그가 어찌 네게 그 이름을 말하겠느냐! 그것은 동궁사변을 일으킨 참담한 물건인데 너를 어찌 그 일과 엮으려 하겠느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서문윤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뭐라는 말하는 거지?
얼어붙은 청년을 바라보는 강서진의 두 눈이 어두운 과거의 일을 헤치고 있었다.
* * *
파멸은 겨울날 난데없이 봄날의 달콤한 꽃향기를 이끌며 성도에 도착한 마차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가 돌아오는군.”
10년 전 성도 장안성.
강서진은 아직도 그날의 일을 기억한다. 그는 운표선과 함께 주루 누각 위에 앉아 성도의 대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그와 함께할 이청융은 국사로 바빠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고, 검설린은 바로 오늘 성도에 귀환할 예정이었다.
온화한 얼굴에 잠시간 걱정의 빛이 스쳤다.
“굳이 그가 운남까지 갈 필요가 있었나? 상장(上將)이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몽국 토벌을 자원하는 장군은 많았어. 게다가 전쟁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는데… 몽국은 그저 제 몸값을 높이려 술수를 벌인 것뿐이야.”
당시에 운남 지방에 몽(蒙)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왕국이 있었다. 본디 천자국에 조공을 하는 곳이었으나, 두 차례의 북란이 일어나고 조정이 빈약해지자 자만심이 들었는지 그 변방의 왕국은 국경선을 침범하고 군수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걸로 모자라 몽국은 무려 군신이 아닌 형제의 관계를 요구한다는 조서를 보냈는데, 그게 씨앗이 되어 대몽 토벌의 문제가 반년 전에 조정에서 점화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북벌의 일을 어느 정도 수습한 병부의 수장은 ‘남쪽까지 변란이 터지면 조정이 끝장난다.’는 판단으로 남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강서진은 그런 벗의 말에 떨떠름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몽의 행동이 그저 외교적인 술수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이권을 얻으려 행동하였을 뿐이다.
“굳이 없는 살림에 군사를 일으킬 필요가 있나? 지금은 백성을 다독일 시점이야.”
무관의 시점과 문관의 시점은 다르다. 당시 예산을 담당하는 호조에 속하던 강서진은 자연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친우의 한탄 어린 말에 운표선은 별로 감흥이 들지 않는 듯 보였다. 시큰둥한 얼굴로 술을 기울이며 그는 그저 무심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자기가 가겠다고 하는걸 뭐 어떻게 막아? 북벌을 미리 하지 못해 두 차례 큰 변란이 있다 구국의 영웅이 말을 하는데 대장군의 남정을 막을 사람이 있겠나?”
“하지만….”
“오고 있군.”
그리고 말을 끊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강서진이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행렬을 바라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이 일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 한들 대당의 국민으로서 승전보는 기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저 녀석 완전 울상인데?”
“북정을 갔다가 바로 운남으로 내려간 거니 몸이 남아나겠나? 제가 자초한 일을 뭐 어쩌겠어?”
지친 얼굴로 말을 모는 사내의 얼굴을 악우들은 키득 웃음을 흘리며 술안주로 삼고 있었다. 행렬은 길게 이어졌고, 사람들의 환호성 또한 갈수록 높아졌다.
좋은 게 좋은 일이지.
어찌 되었건 친구가 군공을 세웠으니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복잡한 마음을 푼 강서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청은이 환영연을 준비하느라 바쁠 테니 아마 내일쯤 저녁에 세 명을 초대하면 되겠다. 반년 만에 오랜만에 같이 모이게 되었으니 밤을 새서 말을 나누지 않으면 섭했다.
그렇게 그가 곰곰이 오랜만에 재회한 친우를 축하해줄 계획을 세울 때의 일이었다.
“음, 저건?”
의아함이 서린 운표선의 말에 시선을 돌린 강서진은 때마침 창문 밖을 지나쳐 가는 뜻밖의 물체를 발견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누가 보아도 여인의 것임이 확실한 붉은 휘장을 두른 마차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불러일으키며 대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승전보를 알리고 돌아온 장군과 그가 가마로 소중히 모시고 온 고귀한 혈통으로 보이는 여인.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기에는 딱 좋은 주제였다.
그리고 그 무성한 소문을 불러일으킨 그 미지의 여인은 검설린의 자택, 바로 정명공부에 도착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 목석같은 사내가 제 처소 한 켠을 내어주고 여인을 받아들이다니? 소식을 듣자마자 운표선이 눈이 뒤집어져 정명공부로 찾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이야기 같은 승리를 거두다가, 변경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이 이민족의 공주의 청혼을 받는다는 민담 설화마저 증명하다니?”
제 뻣뻣한 친우를 놀릴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대문을 밟던 운표선에게 돌아온 말은, 그러나 뜻밖에도 격분한 마음이 드러나는 흉흉한 말이었다.
“입 닥쳐!”
“엥?”
웬 난데없이 욕설이람?
신이 나 들어오다가 뜻밖에도 욕을 먹은 운표선이 멍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입궁하여 승전보를 고하고 바로 정명공부로 귀환한 검설린은 아직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전장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니, 얼굴에는 시퍼런 살기가 감돌았으며 노기 또한 희미하게 엿보이고 있었다. 운표선이 놀라 입술을 우물거린 순간이었다.
검설린은 평소에 까칠하긴 했어도 이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던 사내였다. 그러나 장난스러운 말에 돌아온 뜻밖의 노성과 분노 어린 시선에, 운표선은 당황하여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서느런 시선이 운표선을 쓸고, 검설린은 이윽고 매몰차게 몸을 돌리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새끼 왜 저래?”
빠른 걸음으로 내당으로 들어서는 검설린의 뒷모습에 성난 기색이 역력하다. 멀거니 그를 바라보던 운표선은 문득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 그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길길이 날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랜만에 돌아와서 왜 저 지랄이야? 운남에서 뭐 잘못 먹었어?!”
출정에서 오랜만에 돌아온다고 벗들이 모였는데, 저놈 저 새끼 반응이 왜 저래?
선의에 돌아온 매정한 답변에 분노하던 그가 진정을 한 것은, 등 뒤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소저는 어찌 우시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운표선이 고개를 돌려 마주한 것은, 바로 안뜰에 살포시 내려앉은 여인의 가마였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운표선은 얼굴을 딱딱히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검설린이 무심한 사내라도 가마로 고이 모시고 온 여인을 이리 함부로 마당에 방치하고 떠나? 게다가 여인은 가마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운표선이 차분하게 가마 앞에 쭈그려 앉은 이청융을 바라보았다. 운표선이 희희낙락하며 정명공부로 가던 중 우연찮게 만났던 그는, 운표선과 검설린의 언쟁에 잊혀 있다가 가마를 발견하고 여인에게 말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뒤늦게 정명공부에 도착한 강서진이 이청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말을 내뱉었다.
“전하께서 지금 오셨어? 내일이나 되어서야 시간을 내실 수 있다 하지 않았나.”
“오는 중에 만났지. 그럼 그 목석이 여인을 끼고 왔다는데 안 놀라겠어? 나라도 버선발로 뛰쳐 온다.”
그 말에 강서진은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으음.”
“……그런데 상황이 묘하군.”
짤막한 말을 내뱉은 운표선이 어둑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난처한 얼굴로 마차 안 여인을 달래는 이청융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국지색.’
휘장 사이 언뜻 드러난 마차 안 여인의 외모는 사람들의 말처럼 몹시 아름다웠다. 스쳐 지나가듯 본 외모만으로 잠시간 넋을 잃게 만든 여인. 마차 밖으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흐느낌을 들으며 운표선은 복잡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불안이 스멀스멀 몸을 타 오르고 있었다.
“저는 몽왕의 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청융의 달램을 받으며, 여인은 서글픈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몽국왕 납찰득은 화친의 증거로 공주를 바친다며 저를 장안으로 보냈지만 저는 그의 딸이 아닙니다. 그가 딸을 위해 저를 아버지에게서 약탈하고 마차에 태웠습니다. 대당의 황제는 호색하니 저의 딸 대신에 네가 황제를 꾀어내라. 그리 말하면서 저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 말을 내뱉은 여인은 돌연 이청융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황한 이청융이 곤란한 얼굴로 주춤거릴 때였다.
“저를 보내주세요.”
이청융은 그 슬픔이 절절한 말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천하의 장안사준이니 존귀한 태자니 하는 것들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사연에 그는 그저 당황하여 말을 머뭇거릴 뿐이었다.
“소저, 일단 울음을 그치시오.”
그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위로할 수 있었다.
“내가 어찌 해결을 해보리라. 일단 울음을 그치시고 기운을 내시오.”
그리 말을 하며 여인을 달래는 이청융을 강서진과 운표선은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대담에서 사정을 깨달았으나, 그들은 차마 대화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할 뿐이었다. 아무리 태자라곤 하지만 황제에게 바쳐진 조공품, 그것도 여인의 문제에 손을 댈 수가 있을까? 여인의 사정이 딱해도 이 일은 신하가 개입할 수 없는 일이다. 황실의 일이라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해 그들은 그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표정이 안 좋았군.’
불같이 화를 내던 검설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운표선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더럽고 역겨운 일을 맡았으니 속이 뒤집어질 만했다. 도망치듯 내당으로 들어섰던 그를 떠올리며 운표선이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청융의 청아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던 때였다.
“그러면 소저는 중원 사람이시오?”
“아니요.”
도리질을 친 여인이 슬픈 얼굴로 이청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처연함이 드리운 미녀의 얼굴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듯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머뭇거리는 이청융의 귓가로 연이어 내려앉은 것은, 바로 탄식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은 서글픈 호소의 말이었다.
“저는 운남 남서 호운성에 사는 장이족 족장의 딸입니다. 저를 운남으로 돌려보내주세요….”
그 말에 이청융은 잠시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으나, 여인의 수심 가득한 얼굴에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고야 말았다.
“알겠소. 내 부황에게 한번 말해보리라.”
* * *
“설마, 그 여인이….”
그 대목에 이르러 서문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강서진이 차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여자가 고 귀비다. 동궁사변을 일으킨 시발점!”
차디찬 말을 듣는 순간 서문윤은 혼란에 빠져 멍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장이족, 동궁사변. 고 귀비.
그 순간 동떨어진 그 단어들이 서로 연결점을 찾아 빙빙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렴풋이 결합하여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낼 쯤, 서문윤은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강서진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이 중독이 된 장소는 바로 운남 장이족의 영역에서였다. 고 귀비는 동궁사변 당시 태자의 죄목, 황제의 여인을 겁탈하려 했다는 혐의에 얽힌 인물이었고.
그리고 그녀가 장이족의 족장의 딸이라 한다.
‘설마, 설마…?’
경악에 휩싸인 서문윤의 귓가로 이윽고 씁쓸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성공하여 오만했고,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게 우리의 패인이었고 또 몰락의 원인이었지…….”
* * *
여인에게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입궁을 무산시키려는 이청융의 시도는 빛이 바래고야 말았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소저.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입궁 날, 이청융은 마치 죄인이 된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말만을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태자가 한낱 이민족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닐 터인데. 그는 망설임 없이 그리 사죄를 청할 뿐이었다.
이청융의 얼굴에 착잡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 어찌 예상했으랴? 항상 제 자식의 말을 들어주었던 자상한 아비가 그의 소청에 뜻밖에도 불같이 화를 내리라고는. 당황하면서도 아비를 설득하려 소청을 이어나가려던 이청융은 그 순간 제 소매를 부여잡고 다급히 만류하는 측근들에 결국 여인의 구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는 전하를 총애하시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여인의 문제는 항상 화근의 씨앗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폐하께서 화를 내시는 이유를 정녕 모르십니까?”
그 말에 이청융은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태자라지만, 아니 오히려 그런 위치이기에 황제의 여인과 관련된 일을 함부로 거론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고금에 여자 문제로 파국에 이른 부자 관계가 몇이나 되던가? 한 무더기의 사례를 떠올리며 이청융은 소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가온 입궁 날에, 이청융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친히 궐 밖을 나가 여인에게 사죄를 청하고 있었다.
“미안하오. 내 미안하오.”
단 한 번도 이리 무력함을 느낀 적이 없다. 다정다감한 성정의 태자는 여인의 딱한 사정을 알기에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말만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묵묵히 태자의 사죄를 받던 여인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답변을 주었다.
“전하께는 유감이 없습니다.”
어딘가 초연함이 묻어 나오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울고 비통히 소리쳐도 다른 사람들은 저를 이민족의 요사스러운 계집이라 여기며 무시했었지요. 오로지 전하만이 제 목소리를 들어주고 절 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도 모르고 전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그것은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만, 충분히 이청융을 원망할 수 있는 입장인 여인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너그러운 것이었다. 고개를 든 이청융이 마주한 것은 처연한 웃음을 짓는 여인의 서글픈 얼굴이었다.
그 미소를 보고 마음이 심히 복잡해진 이청융이 어두워진 표정을 지으며 말을 머뭇거렸다. 그의 옆에서 상황을 묵묵히 관조하던 강서진은, 그것이 제 주군의 오지랖임을 깨닫고 그를 만류하려 들었으나 불현듯 들려온 싸늘한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정명공!”
그것은 갑작스럽게 여인의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온 얼음장 같은 목소리, 바로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마차를 타고 장안에 오는 내내 나는 영공(令公)에게 목이 쉬어라 빌었습니다. 저를 놓아달라고. 제 아버지에겐 어미도 다른 자식도 없고 오직 저밖에 남지 않았으니 제발 저를 운남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그 대목에 이르러 여인은 푸른 귀화가 스치는 눈으로 검설린을 올려다보았다. 팔짱을 끼고 문설주에 몸을 기댄 채 상황을 관조하던 검설린이 묵묵히 그 시선을 흘려보냈다. 그를 바라보며 여인은 차디찬 웃음을 지었고, 이윽고 뼛속까지 오한이 들게 만드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악천화, 그대를 저주하리라!”
절절한 한이 서린 말이었다, 그것은.
장안에 침묵이 잠시간 깔렸다. 운표선은 굳은 얼굴로 차디찬 미소를 짓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고, 강서진은 놀라 검설린의 낯을 살피고 있었다. 이청융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때,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검설린은 감정이 거세된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여인의 한 서린 말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냉랭한 얼굴을 바라보며 강서진은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괴로워하고 있구나.
오랜 세월 동안 사내와 함께했던 지기는 그의 연약한 성정을 알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을 느낄 때 더욱 태연해지고 차가워지는 그 성정을 알기에 강서진은 검설린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입궁 시간에 가까워지던 때 마차가 정명공부를 떠나고, 이청융과 운표선이 착잡한 얼굴로 내당에 들어선 때 검설린은 한참을 대문을 떠나지 않고 마차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청융과 운표선이 부러 그를 혼자 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강서진은 그 무심한 표정에 결국 그를 지나치지 못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아니나 다를까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답할 뿐이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이게 내 책임이 아니면 누구 잘못이지?”
그 서느런 말에 강서진은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강서진을 노려보는 검설린의 두 눈에 시퍼런 귀화가 솟구치고 있었다.
“나는 편히 죽지는 못할 거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고.”
냉소와 함께 흐른 말에 강서진은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저지른 업보만큼은 짊어져야 하지 않겠나?”
그의 말이 현실이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사람의 마음을 홀릴 만한 아름다운 이민족 여인은 아니나 다를까 입궁을 하고 나서 대단한 소문을 몰고 다녔다. 사저에서 강서진은 여인이 저를 모함하는 궁중 귀인들을 누르고 승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지.
나라에서 영웅이라 받드는 이에게 냉소를 터뜨리던 여인을 기억한다. 그 한이 묻은 여인의 얼굴에 서린 독기 또한. 입궁을 죽음처럼 거부하던 여인은, 대장군을 비웃은 그 배짱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리 독하게 살아가는 게 낫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이라 말을 섞지 못했지만, 내심 그녀를 측은히 여기던 강서진은 그 소식을 듣고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강서진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여인은 하루가 다르게 출세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녀가 귀인이 되고, 빈이 되고, 비가 되고, 마침내 황후 바로 아래의 귀비가 되었을 때, 강서진은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여인이 입궁한 이후로 이청융의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한두 번이라면 그저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청융은 눈에 띄게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근심이 스치는 얼굴로 멍하게 상념에 빠져 넋을 잃고, 가끔은 불안에 찬 듯 한숨을 깊게 내뱉으니. 아무리 걱정을 하지 않으려도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전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얼굴이 편치 않으십니다.”
결국엔 강서진은 그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도중에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당시 장안사준은 틈만 나면 사저에서 어울리고 다녔고, 가족보다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초조함이 스치는 이청융의 얼굴을 보다 못한 강서진이 결국 그에게 말을 내뱉은 것이다. 이청융이 평소에 아니라며 말을 둘러대어 지금껏 말을 하지 않았으나, 강서진은 지금 이 순간 그를 추궁하겠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어.”
아니나 다를까 어색하게 웃으며 이청융이 말을 내뱉었다. 그 의뭉한 말에 강서진이 심호흡을 하며 다시금 말을 내뱉으려 입술을 열 때였다. 문득 문가에서 들려온 앙칼진 목소리가 강서진에 앞서 그들의 귓전을 때리며 이청융의 말을 공격했다.
“완전히 죽을상을 하고 그게 뭔 소리야? 뻔한 소리 집어치워!”
그것은 사실 강서진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고개를 든 강서진이 소매를 휘날리며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병약한 인상의 사내를 마주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장안사준이라 불리는 네 명의 지기 중에서, 강서진과 이청융은 온화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 하는 편이었고 운표선과 검설린은 불같은 성격이라 그런 그들의 말에 바로 면박을 주는 편이었다.
“내가 직접 알아봐야 하나? 응? 친구? 왜 그래, 섭섭하게 말을 피하려 들어.”
평소에 운표선의 직설적이고 과격한 화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강서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말을 시원스레 여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이 생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선, 무에 아니라고 답변을 해?
부드러운 시선으로 표출되는 강서진의 무언의 재촉과 운표선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기가 눌린 이청융은 머뭇거리며 결국 입술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녀, 아니…… 고 귀비 말이야.”
그리고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강서진과 운표선, 그리고 방 한 켠에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던 검설린은 그 순간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야 말았다.
“음.”
한이 서린 말을 내뱉었던 여인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은 사실 평소라면 그들의 영향력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검설린과 이청융 두 사람을 제쳐놓아도 강서진은 유종의 학맥을 이었고, 운표선은 천 년이 넘게 이어진 명가의 자손이었으니, 사정을 한다면 여인을 구명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정치적인 상황에 관련된 일이었다. 두 차례 북란 때 공을 세운 이들은 지나치게 사람들의 인망을 사 적이 많은 상태였으니, 정계의 중심인 수도에서 지금껏 살아온 그들은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몸을 사렸던 것이다. 지나치게 인기를 얻은 자식을, 그리고 그의 신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황제 앞에서 ‘고작 여인’과 관련된 일로 언성을 높이지 못해 그들은 그저 침묵을 택했던 것이다.
“왜? 잘 적응하고 있다더니만.”
무거운 죄책감. 그에 휩싸여 침묵하던 운표선이 어느 순간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이청융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귀비가 초야에 부황을 암살하려다가 시위에게 붙들렸다는 소문이 있다…….”
“풉!”
술을 뿜은 운표선이 입술을 벌리고 이청융을 보았다. 침통한 표정으로 넋을 잃은 사내의 얼굴에는 진솔함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한참을 그 말을 믿지 못해 불신해야만 했다.
암살? 누구를?
이 나라의 지존을?
심지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듣던 검설린의 두 눈에도 불신이 스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그럴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네가 입에 담을 정도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겠군. 그 여자의 한이 그렇게 깊었다는 건가?”
탄식하는 강서진의 뒤를 이어 운표선이 중얼거렸다.
“대가 센 여인이군.”
“대단한 여인이지.”
그 말을 정정하는 이청융의 입가에 쓴웃음을 흐르고 있었다. 복잡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그는 무언가에 상념에 잠긴 듯 잠시간 넋을 잃고 말을 내뱉지 않았다. 항상 대화를 주도했던 이의 그러한 모습은 네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를 불어넣고 적막을 불러일으켰다.
잠시간 침묵 끝에 선명한 목소리가 흘렀다.
“피바람이 불겠군.”
적막을 깨고 강서진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엥? 얘는 왜 딴소리야.”
그 맥이 다른 말에 운표선은 딴지를 걸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담담한 목소리일 뿐이었다.
“일국의 황제를 암살하려 한 자가 살아남아 성총을 독차지하고 귀비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그 여자는 대당에 지극한 원한을 가진 이민족 여인이지! 그 독심만으로도 허투루 보아선 안 될 위험한 여자가 권력을 가졌는데 걱정하지 않는다니, 무사태평하군!”
그리고 말을 듣는 순간 운표선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마냥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언제까지 포사가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고리타분한 유가의 개소리를 할 건가?”
이죽거리는 말을 내뱉는 운표선의 얼굴에 냉소가 자리하고 있다.
“걸주가 나라를 망친 거지 여인이 국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나? 신료가 걱정해야 할 것은 고작 연약한 여인이 아닌 스스로를 주체 못 할 황제 아니야?”
벗의 말은 듣기에 타당한 것이었으나, 강서진은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했다. 고작 황제의 권력에 기대 살 수밖에 없는 여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이 몹시 추악하단 사실을 알았다. 그게 천자를 직접 공격할 수 없는 사상가들의 눈 가리고 아웅인 말뿐이란 것도.
그러나 한 명의 사상가 아닌 정치가로서 강서진은 그 말에 공감 가는 면이 없잖았다.
“삭초제근.”
침묵 끝에 강서진의 입 밖에 흐른 짤막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운표선이 그 순간 혀를 차며 어이구, 소리를 흘렸다.
“대단하시군 그래. 비정하기 그지없어.”
그 말은 빈정거리는 어조였으나, 사실 그 정도의 비꼼은 냉소적인 성격의 그가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말이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유들하게 그를 받아넘겼을 강서진은 그 순간 운표선의 말에 응대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물고 상념에 잠겨들고야 말았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찻잔을 바라보는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서진은 잠시간 맑은 백호은침의 붉은 찻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제 양옆에 자리한 자들의 안색을 살폈다.
이청융의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고, 검설린은 그를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같이 어울려 다니는 장안사준 네 명 중에서도 가장 오랜 기간 서로를 안 이들이었다. 무언가의 기류가 스치는 둘 사이를 바라보며 강서진은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금궐에 일이 벌어지는 중이구나.
그리고 그의 그 불길한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어온 혈겁으로 사실로 드러나고야 말았다.
* * *
“귀비가 복수를 한 겁니까?”
귓가에 들려온 말을 흘린 채 강서진은 탁상에 손을 댄 채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사내의 두 눈에 과거의 파편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는 서문윤의 의아한 시선을 신경 쓰지 못한 채 묵상할 뿐이었다. 본디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사건을 언질하고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었던 한이 사무치고야 말아 강서진은 또다시 그날의 향수에 젖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날. 몇 번이고 꿈을 꾸었던 그날의 기억.
그 일이 벌어진 때는 바로 비오는 날의 새벽이었다.
‘강제(姜弟)! 강제!! 제기랄, 강서진! 문 열어!’
대문을 무섭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강서진은 그 순간 불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장안사준 중 이청융과 검설린이 동갑이었고, 운표선이 그들보다 한 살이 적고, 강서진이 운표선보다 두 살이 적었다. 그러나 호방하고 규율을 따지지 않는 성격의 운표선은 검설린에게 존형이라 칭하지 않았고, 강서진에게 동생이라 칭하지 않았다.
본디 깍듯이 예의를 챙겼을 강서진 또한 그들의 자유로운 기풍에 어울려 운표선을 형이라 칭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운표선은 격정 어린 목소리로 강서진을 강제라 불렀고, 그에 그는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운표선은 취하거나 감정이 격한 일이 있을 때 강서진을 동생이라 부르며 챙겨주곤 했으므로.
‘이게 무슨 일이야?’
다급히 문을 빠져나온 강서진이 발견한 것은 비에 잔뜩 젖은 추레한 몰골을 한 운표선이었다. 천자보다 부유하다는 세가의 주인이 우산이 하나 없는지 그는 새하얀 장포에 물을 뚝뚝 떨어트린 채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황궁에서 사람들이 올 거다.’
그리고 연이어 그가 내뱉은 말에 강서진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이청융이 실권했어, 아니….’
그런 그의 앞에서 운표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마치 광인처럼 횡설수설 말을 이을 뿐이었다.
‘너는 절대 청융을 구명하려 들지 마라!’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 말에 이르러 강서진은 경악하여 운표선의 어깨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운표선은 지치고 공허한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았고, 그에 강서진은 절벽에서 낙상을 당한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끼고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청융을 구명하려 들지 말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강제, 그는 우리에게 훗날을 부탁했다.’
그러곤 운표선은 그 말 한마디만을 허망히 반복하여 말할 뿐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훗날을 부탁했다. 그는 우리에게 훗날을 부탁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인 말이었다.
훗날? 훗날은 무슨 훗날?
“…인.”
강서진은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창문 밖의 어둠이 드리운 내원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강서진은 저 밤보다 더한 어둠을 보았다. 동기들이 서로를 고발하는 자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지인이 구족이 멸해진 자리. 개중에서 가장 강서진을 절망케 한 것은 바로 그가 미래를 걸었던 주군의 죽음이었다.
운표선이 언질했던 말대로, 그날 강서진의 가택에는 황제의 사람이 찾아왔다. 금위에게 끌려가던 중 강서진은 전후의 아픔을 딛고 사람들이 재건한 거리에, 희망에 찬 웃음이 가득 찼던 그곳에 우중충한 죽음의 기운이 서린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문을 닫고 소란에도 밖을 나오지 않았고, 그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죄인이 압송되는 마차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훗날? 거기에서 또 무슨 훗날?
황궁에 입궐을 하고 강서진이 처음으로 추궁받은 것은 바로 ‘황제의 후비’를 겁간하고 ‘반역’을 저지른 태자의 일이었다.
‘너는 그의 죄를 아느냐?’
그리 묻는 황제의 눈에는 귀기가 서려 있었다. 그 순간 강서진은 천자의 얼굴에 서린 살의를 읽고 다짐하고 있었다.
‘폐하, 동궁과 신은 몽국 정벌 관련 사안으로 사소한 다툼을 벌였나이다. 그 후 사이가 벌어져 네 명이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닌 이상 홀로 동궁과 독대한 적이 없습니다.’
일단은 네 말을 따르겠다. 일단은 저 노기가 등등한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 너를 구명하든 네 말대로 훗날을 대비하든 하리라.
“…대인.”
그러나 막상 일이 끝나고 나서 강서진은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우리에게 훗날이 어디 있던가?
“…인, 제발 답을…….”
손을 쓸 틈도 없이 이청융은 죽었고, 미래를 책임질 수많은 인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저 지인이라서 안타까워한 게 아니다. 그저 벗이라서 슬퍼한 게 아니다. 그날에 죽은 것은 강서진의 벗과 지인이 아닌 이 나라의 미래였다.
수없이 많은 동량들이, 인재들이 추잡한 일에 휩쓸려 무참히 사라진 그날. 그날에 강서진의 꿈은 끝이 났던 것이다. 난세를 종결짓고 세상을 구원하겠단 그의 꿈은.
그러니 강서진은 이청융의 유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운표선은 이청융이 그들에게 훗날을 대비하란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했으나, 강서진은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죽은 이 세상에 미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청융은 희망이었고, 답 없는 세상을 구제할 빛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에 강서진은 한동안 폐인이 되어 너덜거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답이 안 보이는 미래에 좌절하여, 그래서 그는 유언이 담은 진정한 의미를 뒤늦게 깨달을 때까지 삶을 낭비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강서진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때였다.
“안찰사 대인!”
귓가에 울려 퍼지는 고함소리에 그제야 강서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고개를 돌린 그가 멍한 눈으로 그 옛날 마음속으로 사무치는 고마움을 느꼈던 이를 닮은 청년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잠시 생각할 일이 있어서.”
한참을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강서진이 돌연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녀는 저를 도와준 이청융을 사지로 몰았고, 그에게 추잡한 누명을 씌웠지. 향을 다루는 이민족의 딸이다. 그런 여자가 다른 것도 아니라 색향에 중독되리라 생각해? 웃기는 일이지. 그러나 사람들은 그 턱도 없는 개소리를 믿더구나.”
그 대목에 이르러 강서진이 서늘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과거를 바라보는 사내의 온화하던 얼굴에 조롱하는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기가 딱 좋기는 했지. 우리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명하기 위해 애를 썼고 전후에 마침내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태자당(太子黨)이라 불리는 도당이 되었지. 왜 몰랐을까? 사냥에 성공한 개는 잡아먹히기 마련이란 것을. 게다가 황제에게는 유능하고 교활한 또 다른 아들이 있었는데 말이지. 이청융을 대체할 황자가.”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 당시엔 제법 몸을 사리고 있다 생각했는데, 황제의 말에 순응하는 정도로는 부족했던 거다. 병권을 움켜쥐고, 유자들을 움직이고, 나라의 가장 큰 돈줄을 거머쥔 이들이 정통성을 지닌 태자의 곁에 우글대는데 그 어느 권력자가 눈을 뜨고 잠을 잘 수 있을까?
제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금만 더 우리가 현명했더라면 전쟁이 끝나자마자 저는 재물을 축적해서 명성을 더럽히고, 검설린은 병권을 내려놓고, 운표선은 황제에게 재산의 반을 바쳐 살길을 도모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시절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몰락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 대목에 이르러 강서진은 냉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나 그것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중얼거리면서, 강서진은 어딘가 보는 이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운표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나간 일은 고작 지나간 일일 뿐이 아닌가?
그러니 산 사람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마땅히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법이다. 후일을 도모하는 법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는 연이어 말을 내뱉었다.
“중요한 건 적어도 팔기린에게는 책임이 있다는 거다, 익위. 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모든 불행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단 게 중요한 거지.”
생각에 사로잡힌 강서진의 눈이 어둠 속에서 음울하게 빛나고 있다.
“네가 장이족의 촌락에서 환희향에 당한 이유는 바로 검설린과 귀비의 뿌리 깊은 은원 때문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견제를 받는다지만 그의 친아들이었던 이청융이 실각에 그치지 않고 사사당한 이유는 바로 그가 뿌린 씨앗 때문이었지.”
숨을 들이켜곤, 잠시간 뜸을 들이던 강서진이 이윽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그가 이 일에 빠지도록 놔둘 것 같으냐? 내가 그를 놔둘 것 같으냐?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저 홀로 힘이 들다 낙향해버린 그를 용서하지 못하겠어! 적어도 그는 책임을 져야지 않겠느냐! 그래, 난 그가 모든 일을 책임지기를 원한다. 모든 것을 책임지기를 원한다.”
그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는 말. 격분하는 사람마냥 흥분에 젖은 말을 내뱉곤, 강서진은 돌연 차디찬 미소를 짓곤 뜸을 들였다.
“그래. 네가 한 말 중에서 일부는 맞는 말이지. 적어도 그 백년화로, 네가 중독당한 그 향의 해약으로 내가 그를 협박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백년화를 찾는 그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어.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그건 귀비를 중독시켰던 환희향을 만드는 재료이기에 나라에서 금한 약재다. 동시에 그 해약의 원재이기도 하지. 그래서 내가 그 밭을 사들이고 약재를 태우며 그를 협박했지. 그리고 지금 나는 너의 목숨과 해약을 두고 협박에 성공하여 그를 내 손에 두었고.”
“…….”
“이런 내가 밉느냐? 허나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단 말이지? 이미 설린은 조정과 척을 졌고,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 내가 아니더라도 그가 멀쩡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모든 일의 원흉이 그였고, 그는 업보를 돌려받는 거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를 언젠가는 폭풍의 한가운데로 끌고 왔을 거다.”
“…….”
“너는 아직도 나를 악당이라 생각하고 그가 잘못 하나 없는 순백한 사람이라 여기느냐?”
그리고 방 안에 적막이 깔렸다.
서문윤의 손이 떨려온 순간이었다.
‘아, 이건.’
그 말에 어찌 답을 할 수 있으랴?
앞서 강서진의 말로 인해 그의 얼굴은 이미 혈색이 완전히 사라져, 새파란 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그는, 그는….”
한참을 더듬거려 말을 내뱉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이를 악물었다.
평소에 검설린에게 의형은 잘못이 없다, 말을 내뱉던 그는 지금 이 순간 확신을 할 수 없어 망설일 뿐이었다.
동궁사변에 휩쓸린 것은 검설린뿐만이 아니었다. 서문린은 그 사건에 휘말려 낙향을 했고, 서문윤은 삭막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 그의 아버지가 그날에 잃었던 동기의 이름을 술에 취해 읊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상처를 받고 아직까지 후유증을 앓고 있었고, 그건 제 앞에 자리한 저 사내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검설린 또한 마찬가지였지.
서문윤은 그러나 도저히 그가 순백한 사람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래서 그리 심하게 죄책감을 느꼈구나……. 아…. 이걸 어떻게…….’
지인들이 죽는 상황 속, 어쩔 수 없이 붕우였던 태자를 고발한 그에게 당신은 어쩔 수 없었다 말할 수는 있었으나, 상황에 휩쓸린 그를 동정할 수는 있었으나……. 이건 도대체 무어라 말해야 할까?
그는 사건의 여파에 휩쓸려 고통을 받았으나, 동시에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었다. 그 사실에 암담함을 느끼며 서문윤은 앓는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그는 충분히 가련한 여인 한 명을 빼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사람들의 견제를 당하는 상황에 부담을 느껴 일을 회피한 것뿐….
침묵 끝에 서문윤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건 그가 의도한 것이….”
“네가 만약 그의 잘못이 아니라 말을 해도 이 모든 비극의 원인엔 팔기린이 있지. 그는 수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제게 앞서 단호히 말하는 강서진을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미래를 책임지라 요구하는 게 잘못된 일인 거냐? 익위, 그대는 정말 내가 잘못했다고 보는가? 응?”
서문윤은 또다시 답을 주지 않았고, 강서진 또한 기대를 하지 않은 듯 그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냉소가 흐르고, 이윽고 나지막한 말이 그의 입술 밖으로 흘렀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리 말을 내뱉곤 강서진은 몽혼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과거의 어느 한 다짐을 상기시키곤, 그는 그때의 지독한 마음에 휩싸여 있었다.
“적어도…… 이청융의 유언을 잊지 않고 있지.”
절망 속에 살아가던 나날 중, 강서진은 뒤늦게 제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청융의 유언의 뜻을 깨닫고 다시 설 수 있었다.
그가 훗날을 대비하란 뜻은, 참고 견뎌 더 나은 세상을 만들라는 의미리라.
이청융에게 검설린은 가장 깊게 마음을 나눈 벗이었고, 운표선은 가장 격의가 없는 벗이었고, 강서진은 가장 뜻이 잘 맞는 벗이었다. 그런 강서진이기에 이청융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나의 주군이, 아니 만인의 주인이, 존엄한 천자가 되길 원한다네.”
너는 네가 없는 천하가 평안하기를 바란 것이겠지.
“너는 어느 길이 진정 그를 위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팔기린은 외면하고 있지만, 그는 이 모든 사태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 그리고 그게 그의 최선의 길이지. 너 또한 익히 들어 알지 않느냐. 힘이 없는 자가 맞이한 최후를 말이다.”
그리 말하는 강서진의 얼굴은 담담했으나 그 일면에는 시퍼런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지긋한 시선이 서문윤을 향하고, 청년은 그 순간 입술 끝을 딱딱히 굳히며 망부석마냥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강남동도 안찰사의 가택에서는 새벽부터 소란이 일었다.
시위들은 그들의 상관의 처소에서 오고 가는 고성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고, 가노들은 방 안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못 본 척 제 할 일을 했다.
“네가 완전히 나와 척을 지고 싶어 하는구나!”
분노에 들끓는 고함을 내지른 사내가 탁자를 엎어트리곤 무서운 눈으로 강서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값비싼 화병이 바닥을 굴렀으나 화병의 주인도, 그를 깨트린 이도 그것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늘 너는 성도로 떠나야 하지.”
태연하게 소란을 일으키는 이를 관조하던 강서진이 긴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이었다.
“채비를 미리 하는 게 좋을 텐데. 내게 신경 쓸 정신이 있나?”
그리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그저 부드러울 뿐이었다. 저를 향한 여유로운 시선에 일순간 분노하던 검설린은 돌연 몸을 굳히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향해 잠시간 들끓는 시선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그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디찬 웃음을 흘리며 소매를 뿌리치곤 엉망이 되어버린 방 밖을 빠르게 벗어날 뿐이었다.
“나는 약속은 지켜.”
등 뒤로 넘어온 말에 검설린은 조소할 뿐이었다.
“그러니 너 또한 약속을 지켜야지.”
더러운 것을 떨치듯 빠르게 빠져나간 검설린이 향한 곳은 바로 그가 지금껏 기피하던 서문윤의 처소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감금당한 장소였지만.
그를 향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죽음은 익숙한 것이었던지라, 단 한 번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였음에도 그 애의 앞에서는 겁을 너무나도 많이 먹었다. 심란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던 검설린이 별채를 발견하고 몸을 멈추어 서곤 잠시간 망설였다.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다음으로 앞날에 대한 걱정이 망설임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이기는 그리움, 혹은 욕망에 휘말려 결국엔 발걸음을 떼고야 말았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니 그의 냄새가 흘렀다. 검설린은 일순간 모든 생각을 멈춘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다. 감각은 기억을 일깨운다. 그 순간 눈앞에 스친 것은 지난날의 추억이었다.
‘의형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도대체 너처럼 선한 자가 어떻게 궁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니 개울 위 아스라이 펼쳐진 운무처럼 환상이 스쳐 지나간다. 그가 제게 이름을 물어보던 순간, 의인이라 찬탄하던 순간, 신뢰의 빛을 드러내는 눈을 반짝인 순간, 의형이라 부르던 순간, 외롭지 않았냐 조심스레 그간 행랑의 고통을 묻던 순간. 과거를 말하는 제 앞에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아팠냐 말을 하던 순간.
그 모든 순간 서문윤은 지나치게 제게 다정했고, 또 몹시나 사랑스러웠다.
그 순간 울컥한 검설린이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맞물린 볼이 살짝 튀어나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죽은 양친과 유모의 일도 이리 감정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는데 어쩐지 서러워져 통곡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문턱을 잡아 유지하며 검설린이 숨을 멈추고 잠시간 멍하니 그리 서 있었다.
그는 제게 과분할 만치 커다란 것을 베풀었다. 전혀 가치 없는 사람에게 그는 제 선량한 마음을 내어주고 또 호의를 내보였다.
그런 그를 또다시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검설린은 제가 도대체 얼마나 해악스러운 인간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긴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다.
무수히 많은 상념의 가지를 쳐내고, 마침내 검설린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침상이 있었고, 그것은 휘장으로 반쯤 가리어져 있었다. 반투명한 휘장 너머로는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댄 채 앉은 청년 하나가 있었다.
휘장 너머로 일렁거리는 신형을 바라보며 그가 마침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떠날 거다.”
메마른 목소리였다. 제가 내뱉고도 그 건조함이 신경 쓰여 검설린은 미간을 찌푸리곤 다시금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곧 떠날 거야.”
“…….”
“그와 함께 떠날 거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다. 저택의 집사가 네게 일주일에 한 번씩 해약을 줄 거다.”
대답 않는 그를 향해 검설린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빠르면 1년, 늦으면 3년이면 향이 몸에서 빠질 거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얌전히 안찰사부 안에서 쉬고 있어.”
사실은 이런 말이 아닌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그에게 얼굴을 한 번 보여달라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휘장 너머 침상 위 앉아 있는 서문윤을 저도 모르게 주인을 쫒는 개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는 막상 그 한마디 말을 내뱉지 못해 망설이고야 말았다.
“미안하구나.”
답이 없는 그를 향해 검설린은 짧은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네가 날 미워해도 할 말이 없지. 나는….”
잠시간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열던 검설린이 결국 포기하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무엇을 원하고, 바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네가 모든 것을 잊기를 원한다.”
결국엔 이리될 것을.
“그렇게 네가 나를 잊길 바란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고, 그 끝에 장막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할 말은 그걸로 끝입니까?”
검설린은 휘장 너머의 인영이 저를 바라보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떠나는데, 이게 정말 오랜 이별의 시작일지도 모르는데.”
분노가 희미하게 서린 목소리가 또렷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말 제게 남길 말이 그것밖에 없습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긴 침묵 끝에 간신히 입술을 열 수 있었다.
“네가….”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나를 잊고.”
“…….”
“더 나은 사람을.”
“…….”
“더 좋은 집안의, 사내가 아닌 여인을, 사랑을 받고 자란 그런 양갓집 규수를 처로 두길 원해.”
말을 내뱉는 동안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혔던 숨통이 트인 듯 기나긴 숨을 내뱉은 검설린이 바람처럼 흩날리는 듯한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네가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간절한 진심이 담긴, 또한 염원이 담긴 말이었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걸 네가 모두 다 가지길 바랄 뿐이야.”
그 말을 내뱉곤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휘장 너머의 인영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침상을 응시하는 검설린이 그 순간 떠올린 것은 바로 영혼을 꿰뚫는 듯 곧은 두 눈이었다. 마주하는 순간 제 부정한 것이 파헤쳐질 것만 같은, 그리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만 같은 눈을 검설린은 항상 두려워하고, 또 기피했다.
‘네 눈을 뽑아버리고 싶어.’
사실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는 제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항상 더러운 말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제 뺨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바보 같은 말만 해대는지, 도무지 제 한심함을 이루 말할 수 없어 검설린은 그저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 끝에 휘장 너머로 들려온 말에, 검설린은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의형은 아직 저를 모르시는군요?”
그 말이 끝나고 또다시 적막이 내려앉았으나, 검설린은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멍한 눈으로 침상을 바라보고 나서야 몸을 돌리고 방 안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인 줄로만 알았던 시간이었다.
* * *
사내는 붉은 옷을 입었다.
그 길한 색의 옷은 단 두 부류의 사내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혼례를 앞둔 신랑과 존귀한 신분의 고관 혹은 황족만이.
그리고 그는 후자에 속하는 이였다.
냉랭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오랜 친우를 마주하며, 안찰사는 온화한 웃음을 흘리며 부드럽게 말을 내뱉었다.
“가세.”
그의 그 고귀한 차림은 안찰사가 오래전부터 염원했던 것인지라, 그때 흐른 목소리는 제법 기분 좋은 티가 서려 있었다.
다그닥. 말발굽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연이어 이랴, 마부가 말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채찍이 바람을 때리는 매서운 소리 또한 들려왔다.
그것은 호화로운 마차였다.
지난 9년간 나귀가 끄는 수레를, 혹은 맨발을 이용하여 천하를 돌아다녔던 사내는 부귀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그 마차에 앉아 멀어지는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내 남은 희망마저 박살냈다.”
문득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이윽고 검설린은 고개를 돌려 그 누구보다 온화한 표정을 짓는 강소성주를 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두워진 눈에는 음울한 기색이 서려 있었고, 뒤이어 흐른 말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분노가 억눌려 있었다.
“네가 내게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빼앗았어.”
그리 말을 내뱉던 검설린은, 숨을 들이켜곤, 잠시간 침묵 끝에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를 소중히 여겼던 두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새롭게 나의 삶을 살라는 그 사소한 약속을 들어주지 못했어.”
그러곤 숨을 들이켜고, 형형히 눈을 빛내며 하는 말이다.
“그러니….”
“네게 정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지켜주지.”
그리고 그런 그의 말을 강서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끊었다.
“기필코. 내 명운을 걸고 지켜주리라.”
“…….”
“그러니 당장 병부에 자리한 이청은의 모든 세력을 제거하고 네가 용상을 차지해. 내가 그 천박한 향을 해독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한숨을 내뱉고 강서진이 그의 앞에서 나른하게 손을 휘저었다.
“모든 것은 이미 내가 다 준비해놓았으니, 너는 구심점만 되면 된다. 설린아. 넌 그저 내가 차려준 밥상을 먹으면 돼. 더 무엇을 바라겠나? 난 널 괴롭히려는 심산이 아니야.”
그러곤 그는 침묵 끝에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저 모든 것을 바로 세우길 바랄 뿐이지.”
그 말에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지리멸렬한 얘기에 신랄하기까지 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1년.”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날 사안. 그러나 오늘 강서진은 이쯤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차가운 눈으로 검설린이 시선을 돌리니 놀랄 만치 서느런 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1년 남았어.”
오랜 벗을 바라보는 시선은 서늘하고, 또 무감각할 뿐이다.
마치 감정이 거세된 듯한 사내 앞에서 강서진은 끝이 희미하게 갈라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우리의 주군이 죽은 지 10년째 되는 날이 1년이 남았다고. 그 전까지는 그래도 뭔가 결실은 맺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이어지는 원독에 찬 말들.
“너는 억울하지도 않아? 응? 너는 네가 뺏긴 그 모든 걸 다시 되찾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 모든 것을 내가 찾아주겠다고.”
평소에 온화하고 다정했던 사내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그저 화를 풀어내고 있을 뿐이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한이 사무쳤고, 그것은 듣는 이의 소름을 돋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네가 시대에 빼앗긴 그 모든 것을 다시 찾아주겠다는데 왜 그리 날 미워하는 거지?”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짤막한 침묵 끝에 말을 내뱉었다.
“넌 내가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라 충고를 했을 때, 스스로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라 했지.”
그것은 멸시하는 듯 조소를 흘리며 내뱉는 말이었다.
“개소리 하지 마라, 강서진. 나는 너만큼 증오에 차오른 자를 보지 못했어.”
이죽거리는 말에 강서진은 그저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넌 그냥 다 죽여버리고 싶은 거잖아?”
그는 역시나 저의 오랜 벗이다. 이토록 저를 잘 알고 있으니….
저를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한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벗을 지긋한 시선으로 마주 바라보던 강서진은, 불현듯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하지?”
그 말에 검설린은 코웃음을 치곤 다시금 서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 이후론 완전한 적막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고 그 냉랭한 침묵은 말발굽 소리를 희미하게 품으며 길게 이어졌다.
‘……머리야.’
그러곤 검설린은 어느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눈 뒤의 통증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여우의 털을 댄 마차에 깊게 몸을 묻곤 그는 아찔한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그의 앞날을, 복잡한 정계의 일을 계산했다.
‘황재천은 말은 황제께 충성 소리를 해도 독립을 한 상태고 하동하서가 떨어져 나간 후로 회흘뿐만 아니라 토번의 국경 또한 반응이 심상치 않다지…. 강서진의 영향하에 있는 놈들이 얼마나 되지? 일단 유호찬은 재상의 후은을 받았으니 호응하지 않을 테다. 평로나 검남 쪽은 잘 모르겠고, 하씨 형제 그놈들 생각이 궁금하군…. 야망이 많은 놈이 강서진에게 순순히 호응하려나.’
한숨을 내뱉고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짓눌렀다.
중앙의 병권은 크게 문제가 안 된다. 고우군은 지금껏 번진의 분란을 경계하여 저 스스로 영하중윤, 상장군의 작위를 차지하곤 병부를 손에 쥐었다. 그런 그가 있어서 사실 중앙 군부가 번진을 견제할 수 있던 것과 다름없다. 그의 수완은 번진의 거친 무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 당근과 채찍, 기만과 이간을 반복하여 번진의 절도사들이 서로 손을 잡을 수 없도록 갈라놓았다.
그런 그가 죽었으니 천자의 걱정이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토사구팽할 대상이었던, 그야말로 눈엣가시인 제가 바로 그의 구원자가 된 순간이었고.
그리하여 번진을 견제할 황제의 패로, 그 황제의 모가지를 날릴 강서진의 패로 이용당해 장안으로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기가 막히군.’
잠자코 제 상황을 복기하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꼴을 보지 않으려 수하들을 내버려두고 낙향을 했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장기말이 되어 장안으로 가는 실정이다.
업보를 받는다 해야 하나?
음울한 눈이 허공을 헤매고, 깊은 과거를 헤엄치고 있었다.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흐르는 마차에는 아직도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고 그 불편한 자리 속에서 검설린은 문득 어느 한 말을 떠올리곤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의형은 아직 저를 모르시는군요.’
그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말.
‘……너를 더 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찌 그 말을 잊을 수가 있을까?
비록 그것이 두 시진 전에 내뱉은 말이 아니라 20년 전 내뱉은 말이더라도, 검설린은 그것을 잊을 수 없으리라. 그 말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씁쓸함이 잠식한 눈이 어둠을 헤매고, 그는 한참의 침묵 끝에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서문윤의 얼굴을 다시금 머릿속에 새겼다.
검설린이 그 말, 의형은 저를 모른다는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장안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너, 너, 너! 네가 여기에 어떻게 있어?!”
그리고 그를 깨닫는 순간 검설린은 정전을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을 입술 밖으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 * *
대당 수도 장안성에서 벌어진 일.
그것은 바로 정전에서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장안사준이 한물간 이름이라지만 아직까지 그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전란에는 사람들은 영웅을 바라는 법이었고, 그들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를 만족시켰기에 불후의 명성을 알렸다.
본디 난세에는 젊은 영웅이 나는 법.
두 차례 커다란 난이 지나고, 전공을 세운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고위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수도와 정계의 생리에 대해서 배워갔다.
아니, 그 당시에는 무관, 문관, 언관, 청요직을 가리지 않고 처세술을 습득했어야만 했는데, 그 당시에 천자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정쟁이 심히 난무했던 까닭이었다.
그때의 정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관롱 지방에 노회한 귀족들이 기득권을 잡고 있는 한편, 변방에서는 황제처럼 군림하는 절도사를 비롯한 무장들이 지나친 권력을 휘둘렀고, 과거제로 정계로 진출한 신진 세력들이 고우군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던 때였다.
당시 가장 큰 화두는 새로운 세력의 거두로 나선 재상이 유서 깊은 관롱 귀족을 꺾을 수 있느냐였고, 그때에 벌어진 정쟁은 지금의 재상 독재 체제하에 벌어지는 암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독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험난한 세태에 ‘영웅’이라는 위태로운 자리에 오른 이들에게 감정을 숨기는 일은 사실 익숙하다 못해 필수불가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썩 좋은 일이 아니란 사실은, 신하를 질투한 무수히 많은 군주들의 예를 들어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드높은 명성에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으며 처세술이 몸에 익은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수칙- 바로 감정을 숨기는 법조차 하지 못해 경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담담히 흐른 단 한마디의 말로 일어난 파동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공, 안찰사 대인.”
혈관에 피 대신 차가운 물이 흐르고 있다 평해지는 이는 그 순간 입술을 살짝 벌리고 그 사이로 넋을 빼고야 말았고, 유가의 군자다운 종주라 불리는 이는 온화한 얼굴을 무너트리고야 말았다.
영하중윤 겸 정북대도호는 그 순간 혀를 짓씹으며 눈앞에 자리한 이를 바라보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아득해지는 시야는 곧 노란빛으로 변해갔고, 노랗게 변한 시야는 어느 순간 까마득한 의식의 저편 뒤로 넘어갔다.
지금 내가 뭘 보는 거지?
넋을 잃던 사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이……!”
목덜미에 핏대가 선 순간, 까드득 이가 맞물리는 살벌한 소리가 흘렀다.
“강….”
분노가 꾸역꾸역 억눌린 말의 운이 떼어지고, 그의 옆에 허망한 얼굴로 자리한 사내의 눈이 그 순간 스륵 감겼다. 체념의 뜻이었다.
“……서진!!”
일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한 거냐? 네 다짐이 뭐 어쩌고 어째?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차려놓은 밥상만 처먹으면 된다 해놓고선 지금 이게 무슨 사태라고?!
할 말은 많았으나, 도리어 너무 방대한 양에 그는 속에 담은 말을 단 한 마디 내뱉지 못하고 목에 핏대를 세울 뿐이었다. 눈을 감고 참담한 마음을 삼키는 듯한 강서진이 어느 순간 스륵 눈을 뜨고 복잡한 눈으로 제 앞에 자리한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청을 울린 처절한 목소리였다.
“네가, 네가 왜 여기 있어?!”
마치 짐승처럼 우짖는 사내 앞에 태자 익위의 차림을 한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황금색 용이 새겨진 적포를 입은 고귀한 생김새의 사내를 등진 채, 서문윤은 제 앞에 자리한 두 고관을 향해 몹시도 예의 바른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태자친훈익위낭장(太子親勳翊衛郎將) 서문가 윤아 인사드립니다. 영공, 죄송하지만 전하께선 지금 폐하를 배알해야 하기에,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8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