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망향(望鄕)(2)
서문윤의 말처럼 대체로 서문세가의 사람들은 검설린은 잘 받아들였다.
검설린이란 사람 자체의 외양이나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엄격한 무가의 가르침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위치가 감히 항의를 하지 못할 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서문린은 가족에게 검설린의 위치를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의 외모가 많이 잡아보았자 서른이 넘지 않아 보이니, 넉넉하게 쳐서 서른 중후반이라 한들 그 나이에 서문린의 상관이 된 사람이 어디 흔한가?
게다가 서문린은 악천화의 휘하에 있었으니 이 모든 사실이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한때는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병부의 수장이었고, 지금도 수많은 후배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있는 잠룡이다. 관직은 모두 잃었으나 그가 지니고 있던 공위는 아직도 박탈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두 차례에 걸쳐 나라를 구한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항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은혜를 갚으라고 형님을 달라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떨떠름하지만, 그가 그나마 공손하고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 다행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반응은 명쾌할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너그럽기로 유명한 가주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만두십시오.”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의 일이었다. 세간의 눈을 신경 쓰느라 처소를 달리 쓰던 두 사람이기에, 검설린은 매번 남몰래 서문윤의 처소에 잠입하곤 했다. 양상군자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냐 짜증을 부리면서도 그는 일단 서문윤의 말을 몹시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문윤의 처소를 밟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였다. 사부작 풀잎을 밟던 중 멈칫한 검설린이 고개를 돌려 말이 들려온 곳을 응시했다.
늦은 시각에도 침의가 아닌 제비 깃같이 새까만 비단옷을 입은 청수한 사내가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의 머리 위에 걸린 보름달을 흘끗 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의 안광이 스치는 눈을 마주 보곤 조소했다.
“매정하군. 아무리 귀한 집 자식을 건드렸다지만 내게 적의를 내보이다니.”
병부에서 손꼽히게 온화하였던 사내 아닌가. 그의 벗이었던 황재천은 일찍이 서문린의 순한 성정을 걱정하며 성을 내곤 했었다.
그러나 9년이라는 세월이 긴 것인지, 서문린은 지금 그의 앞에 얼음으로 만든 칼처럼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웃음을 띠었던 서문린은 입가에 미소를 싹 지운 채 검설린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만두십시오. 터무니없습니다.”
그 엄중한 말에 대한 검설린의 답변은 여유로웠다.
“내가 마음에 썩 안 드나 보지?”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하긴 집도 재산도 다 잃고 나이만 그저 먹은 사내가 바르게 키운 자식을 데려가겠다 껄떡대니 마음이 편하겠나.”
그리고 검설린은 그를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네 무례를 기꺼이 용서해주지. 서문린.”
서문린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문린은 잠시간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는 예전에 누구보다 검설린에게 우호적인 사람이었고 그를 몹시 존경하던 이였다. 검설린의 냉혹하기까지 한 성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많은 장병들에게 그의 엄격함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때때로는 원망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러니 그의 부관인 서문린이 검설린의 차분한 말에서 묻어 나오는 은근한 경고의 기색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감히 상관이었던 자에게 대들고 있으니 무례를 저지르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다.
“자꾸 이러실 겁니까? 나이가 저보다 많더라도, 빈털터리 거지일지언정 저는 당신이 상대라면 기꺼이 교제를 허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이리 멍청한 말을 하십니까?”
그러나 서문린은 검설린에게 항의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를 향해 결국 역성을 내고야 말았다.
“당신의 상황이 풍전등화인 것을 제가 굳이 말로 해야 합니까?!”
도대체 이 일을 어이하면 좋을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사내와 사내와의 결합은 중요하지 않다. 검설린의 말은 틀린 것이었다.
어찌 그의 현재 모습이 초라하다 박대하겠나? 그의 성품이라면 나이가 예순이 넘어도 거적때기 하나만을 걸친 거지일지언정 서문린은 반대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살짝 입술 끝이 일그러진 서문린의 얼굴에서 고통이 언뜻 스쳤다. 그는 몹시도 진중한 시선으로 검설린을 응시하다가 입술 끝을 잘근 깨물었다. 간절함이 스치는 눈은 흔들거렸으며 동시에 무언가의 구원을 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를 잠자코 바라보던 중 검설린이 내뱉은 말이었다.
“한때는 목숨만 붙어 있으면 모든 것이 물처럼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지. 고통스러운 기억이란 언젠가 잊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숨을 들이켜고, 검설린은 한층 더 또렷해진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막상 나란 사람은 그걸 하지 못해 스러져가는 꽃처럼 말라비틀어져 갔음에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고개를 든 검설린과 마주하곤 서문린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지켜줄 거다.”
다시금 몸이 떨려왔다.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동시에 사람을 이끄는 마력이 있었다. 새까만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또다시 그를 믿고 싶어지고야 만다.
아니, 이 문제는 이래서는 안 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서문린이 절절한 목소리로 토로했다.
“그런 말로 단언을 할 수 없는 상대인 걸 알잖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를 경애하고 또 존경했었다. 그런 사내에게 화를 내는 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답답함에, 또 이 상황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서문린이 그를 향해 언성을 서서히 높혀갈 때였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싸움을 거셨습니까? 도대체 어쩌자고 그의 분노를 사셨습니까?!”
그리고 검설린의 너무나도 간단한 대응이었다.
“이길 수 없다는 건 내가 단 한 가지의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그저 한 마디 말일 뿐이었다.
“설, 설마.”
그러나 서문린은 그의 말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무언가 짐작하는 것이 있는 사람마냥 그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벌벌 떨며 검설린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경악이 물든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돌연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내가 지켜줄 거다.”
그저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고자 했을 뿐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리 말하며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검설린의 얼굴에 흉악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그 옛날에는 제약이 많았지. 이청융은 너무 바보같이 정명정대했고, 얽힌 인연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 후였고 오로지 남은 것은 서문윤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서늘해진 얼굴이 담은 의미를 깨달은 서문린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그, 그건!!”
울부짖으며 그가 검설린의 옷깃을 부여잡아 당기려들 때였다.
“아버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검설린과 서문린 둘 다 고개를 빠르게 방 문을 향해 돌렸다.
소란에 잠에서 깬 듯 침의 차림을 한 서문윤이 경악하여 처소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잠에서 방금 깬 듯 헝클어진 머리조차 정돈하지 않은 서문윤은, 바로 제 눈 앞에 펼쳐진 아비와 의형의 기묘한 대치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멍하게 그들을 응시하고야 말았다.
“윤아.”
서문린의 입에서 침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의형.”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서문윤이 걱정과 불안을 담은 시선으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그는 냉혈한 얼굴을 돌려 서문윤의 간절한 시선을 피했고, 그저 싸늘한 표정으로 서문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시선을 받고 서문린은 다시금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들어가 있거라.”
그는 위험한 사람이다. 이 문제를 확실히 마무리 짓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품으며, 서문린이 유례없이 강직한 얼굴로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시선을 받는 검설린의 얼굴은 담담했으나 그 고요한 눈에서는 서문린 못지않은 고집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검설린의 입에서도 나직한 말이 흘렀다.
“들어가 있어라.”
서로가 시선을 교환한 자리.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성과 소란에 뛰쳐나온 서문윤은 그들의 대치를 입술을 깨물며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한 차례의 난리에 사람들이 깼는지 어느새 고요했던 서문세가에 불빛이 하나둘씩 올라가고 있었다. 숨을 멈추고, 입술을 질끈 깨문 서문윤이 몸을 돌리기 직전에 서문린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내뱉었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요.”
서문린의 얼굴이 허물어진 순간이었다.
“너.”
“아버지도, 저 사람도.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을 하고 서문윤은 조용히 몸을 돌려 처소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서문린은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새벽에 잠을 깼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상황에서 마주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아버지의 불화 현장이라면.
잠을 자려고 침상에 몸을 웅크렸으나,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쉽지 않으리라곤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고하실 줄은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설린에게 마음을 여는 타인과 다르게 그는 오히려 더욱 냉혈해졌고 또 단단해졌다. 거부는 철옹성과 달렸고 서문린은 어느 순간부터 심지어 가족들과도 어울리지 않은 채 별채에 틀어박혀 있었다.
평소에 의형을 안타까워하던 그가 저리 완고하게 일을 반대할 줄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인 것만 같아 서문윤은 어두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참 고뇌에 빠졌을 때, 그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했나?”
“의형.”
반색한 서문윤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사내 하나가 담담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몹시 걱정하던 서문윤이 그의 안색을 잠시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간단한 대답에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한숨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혹시 무슨 말을 했는지요?”
걱정 어린 얼굴로 하는 말에 검설린은 피식 웃으며 잠시간 바닥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내가 말했잖아 그에게 얻어맞지 않는 이상 나는 할 말 없다고.”
농기 어린 목소리로 한 말이었으나, 검설린은 말이 끝나고 낯색을 슬쩍 어둡게 하곤 잠시간 침묵했다. 그 끝에 내뱉은 말은 평소보다 한 층은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차라리 그가 날 원망하고 때리는 게 나은 것만 같아.”
의문이 스치는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조소를 흘리며 침묵했다.
그가 어찌 알랴?
황재천이 서주에서 잠적하여 지명수배당한 일과 하동지방에서 난 봉기가 하서의 요동지역으로 번져나간 일을. 병부가 술렁거리고 암암리에 저를 중심으로 뭉치려는 세력이 커져나가는 것을 서문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는 강소성.’
검설린의 얼굴에 순간 예기가 스쳤다.
‘……강서진이 담당하는 곳이다.’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 * *
썩 한가한 시간이 흘렀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 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행랑을 다녔던 서문윤은, 기름이 흐르는 식사에 길들여져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변화를 말없이 지켜보던 검설린은 여름 눈사람 같다는 무심한 감상을 내뱉었고, 서문윤은 그제야 살이 오동통 붙은 허벅지를 깨닫고 기염을 토했다.
“내 몸, 내 몸 어딨어.”
“네가 진수성찬과 팔아먹은 것을 어디서 찾느냐?”
한이 맺힌 귀신처럼 넋 나가 제 몸을 찾는 서문윤에게 검설린은 짜증을 부릴 뿐이었다. 그런 검설린의 괘씸한 행동을 서문윤은 귀찮아하는 그를 질질 끌고 나가는 것으로 답을 했다. 어린 연인의 집에 머물면서도 주야로 왕진을 나가던 검설린은, 눈 그늘이 짙게 진 얼굴로 말없이 서문윤을 노려보았으나, 서문윤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목동이 게으른 소를 억지로 이끄는 것처럼, 그는 오랜만에 쉬고 있던 검설린을 억지로 말에 태우고 함께 즐거운 나들이를 즐기러 나갈 뿐이었다.
“하하, 오랜만에 말을 타니 기분 좋지요? 이쪽 인근이 경치가 좋습니다.”
“…….”
“아버지랑 동생과 이곳에 많이 말을 타러 왔습니다. 이 인근은 사람도 별로 없어서.”
그리하여 서문윤과 검설린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푸른빛이 어질어진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곳은 서문윤의 말대로 사람이 없었고, 사방이 탁 트여 전경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전경은 검설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듯했다.
그는 기분을 숨기지 않고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재잘거리는 서문윤의 말을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재잘대던 서문윤은 제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오는 검설린을 흘끗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리 얼굴 표정에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니 그야말로 정계에는 있어서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 순간 불쑥 농기가 든 서문윤이 그를 향해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의형, 말을 잘 못 타시네요?”
전신이라 불리던 악공이 설마 말을 못 탈 리가? 세간에 그는 말과 거의 하나가 되어 달린다 했었고, 나라에서 손꼽히는 기창의 달인이었다. 서문윤도 그와 함께한 세월 속에서 그의 뛰어나다 못해 화려한 기마술을 경험했으나, 그의 그 미적거리는 행동에 장난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검설린의 음울한 얼굴에는 일순간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농담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간단했다.
“미친 거냐?”
“그게 아니면 왜 그리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십니까.”
그리고 다시금 이어진 장난스러운 말에 검설린은 역시나 간단한 답변을 돌려주었다.
“미친 거냐?”
그쯤에 돼서야 서문윤은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저 불퉁한 답변이 이제는 귀엽기까지 했다. 저를 어여삐 여기는 서문윤의 생각을 아는 듯이 검설린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심기가 불편한 듯 그는 쾌활하게 말을 모는 청년의 등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나는 왜 끌고 나왔어? 나는 할 일이 많고, 너는 가족이 있지. 내가 너를 호종할 이유가 무어냐.”
“호종이라니요. 연인끼리의 즐거운 시간 아닙니까?”
검설린의 입술이 다물린 순간이다. 서문윤이 흘낏 본 검설린의 얼굴에는 황당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제가 살이 찐 것은 다 의형 탓입니다. 의형이 너무 저를 쉽게 번쩍번쩍 드시니 제가 살이 안 찐 것처럼 느껴지잖습니까. 그러니 의형이 저를 책임지셔야지요.”
검설린은 그 예술적인 답변에 그만 할 말을 잃어, 그 순간 입술을 벌린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런 뻔뻔함이라니?
그는 한참을 서문윤을 그리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정신을 차리고는 서문윤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고였다. 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것은.
“너, 언제부터 그렇게 기어올랐지?”
그것은 사실 생각을 깊게 하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으나, 서문윤은 그 말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그는 잠시간 멈칫하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살짝 꺾어 검설린의 얼굴을 마주하며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내뱉었던 검설린은, 의외로 진지하게 제 말을 받는 서문윤의 모습에 당황하여 그 순간 그를 정도 이상으로 무뚝뚝한 얼굴로 바라보고야 말았다.
서문윤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의형이 제게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아서, 저도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고,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실 그는 이미 서문린과 검설린의 대담을 몇 번 듣고, 제가 정말 검설린에게 크나큰 호의를 받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인이 아닌 이들에게만 언행이 거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분명 죄책감을 느낀다 하셨지.’
회상하던 서문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을 느낀다던 사내는 가끔씩 무척 무뚝뚝한 얼굴로 고압적인 명령을 내뱉었고, 서문윤은 그를 당연하게 느끼는 서문린에 그것이 그들에게 일숙한 일상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운 공자님도 심심하면 목을 조르고.’
켁켁거리며 허공에 다리를 버둥거리던 운표선의 모습이 선하다. 구박을 받았던 운표선과, 고압적인 검설린의 언행에 순종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서문윤은 거의 처음부터 제게 너그럽게 대했던 검설린을 깨닫고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다리의 상태를 보고 화가 나 그를 꾸짖었지만, 그 외의 일에는 사실 서문윤을 많이 봐주는 편이었다. 그때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두려워만 했었는데. 사실 검설린은 서문윤의 말을 대부분 들어주었고, 그가 겁을 먹을 때 누그러진 어조로 말소리를 죽이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 대우는 처음부터 월등히 좋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순간 오묘한 기분이 든 서문윤이 빤한 시선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저를 어리고 가엾게 생각했던 것은 안다. 그럼 그는 그리 생각해서 제게 전지적인 그의 시점으로 다정하게 대한 걸까? 그래서 서문린보다 더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 걸까?
“뭘 그리 보는 거냐.”
정말 알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서문윤이 확신하는 것은, 봐주는 것을 넘어서 지금 그가 유일하게 끙끙 앓으며 대하는 이는 저가 유일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아니요.”
그러니 제가 그를 놀리는 일을 그만둘 수가 있나?
그는 잠시간 진한 웃음을 지으며 장난기를 드러냈고, 검설린은 고개를 홱 돌려 이유 모르게 기분 나쁜 미소를 피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경보 수준으로 말을 몰던 서문윤이 입술을 열어 문득 말을 내뱉었다.
“하여간 살은 다시 뺄 겁니다.”
그리 말하며 서문윤이 폭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무관이었던 몸인데 승마살이 도톰한 게 말이 되나? 며칠을 잘 먹었다고 허벅지에는 물렁살이 배겨, 승마를 하는 내내 허벅지 안쪽이 따갑게 쓸렸다. 유비가 식객 생활에 허벅지에 살이 붙는 것을 걱정한 적이 있다지만, 그때는 그의 나이가 이미 중년이었다!
무려 20대의 나이에 유비의 고사를 실감하게 된 서문윤은 굴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인에게 여름 눈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은 이상,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그러나 막상 검설린은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 서문윤을 힐끔 보다가 대수롭지 않은 말을 툭 내던져 그의 사기를 죽게 만들었다.
“빼지 않아도 돼.”
군사를 일으킬 때 사기가 가장 중요한 일이란 것을 그는 모르는 건가? 발끈한 서문윤이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여름 눈사람이라면서요?”
“너…… 예전이 너무 마른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표준체격이었습니다, 의형.”
너무 마르다니?
물론 검설린의 월등한 몸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그는 그래도 무관인 몸이었다. 결코 마른 거라는 말을 붙일 경우가 아니었다.
그러나 철이 들 때부터 병부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접하던 사람의 눈으로는, 서문윤은 기준에 미달해도 한참을 미달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소리. 넌 뼈다귀만 남아 있고, 그 위에 가죽을 덧씌운 것만 같았다.”
그리 짜증 어린 말로 면박을 주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완전히 넋을 잃어 잠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무슨 오랜만에 해후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할 법한 소리란 말인가?
서문윤은 그 말에 멍한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으나,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런 기분인가?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끼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검설린은 그저 앞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넌 지금이 딱 좋아, 예전에는 부러질 것만 같아서 내 인내심을….”
그리고 그 대목에 이르러 그는 갑작스럽게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서문윤의 입술에 탄식이 흐른 순간이었다.
“아.”
“음.”
민망한 말을 깨달은 두 사람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다. 서문윤은 검설린을 못 본 척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고, 검설린은 창백해진 얼굴로 묵묵히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잠시간 죽음에 이른 자가 지을 법한 표정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표정을 가다듬은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이 낫다.”
서문윤이 그 말에 푹 웃었으나, 이어진 말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말랑말랑하고 푹신해서 껴안기 좋….”
“놀리십니까?”
그 말에 돌아온 답변에 서문윤은 또다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팔기린이 농담하는 법 봤나?”
들은 적은, 당연히 없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신의 깊은 사내의 명성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검설린은 요즘 들어 드물게 연거푸 물을 먹은 그의 모습이 유쾌한지 피식 웃었고, 어느 순간 반짝거리는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의 배를 차며, 갑작스럽게 서문윤을 지나쳐 질주했다.
“이랴!”
“의형!”
말은 겅중대며 서문윤을 빠르게 지나쳤다.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간 검설린은, 말을 못 타노라 놀렸던 서문윤의 말을 비웃듯이 빠르게 말을 몰아 금세 점이 되어 사라져갔다. 나비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검설린의 뒤꽁무니를 서문윤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같이 가요, 조금만 천천… 아.”
그리고 황급히 말을 내뱉던 서문윤은 이윽고 귓가에 들려온 시원한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몸을 굳힌 채 멍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하하하하!”
‘언제 그가 저렇게 저리 크게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있었지?’
접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넋을 잃던 서문윤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이럇 소리를 내곤 말의 배를 찼다.
그는 요즘 들어 처음 만났을 때 비해 밝아진 모습을 종종 보여, 서문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의형, 같이 가요!”
연인과 보내는지, 운동에 열중하는지 모를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말을 타고 힘껏 달리던 서문윤은, 결국 검설린이 서서히 속력을 늦추어서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거의 반 시진을 미친 듯이 질주했던 서문윤은 푸르릉거리는 말의 갈기를 여유롭게 쓰다듬는 검설린을 불손한 눈으로 바라보아 그를 또다시 웃게 만들었다.
“내가 너를 책임졌다.”
확실히 운동이 되긴 했지.
웃는지 우는지 모를 괴상한 표정을 짓던 서문윤은, 결국 검설린의 능글맞은 미소에 피식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가 웃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 * *
“여긴 언제 떠날 예정이십니까?”
노을이 지평선에 걸린 시간. 붉은 주황색 빛을 등 뒤로 받으며 두 사람이 털레털레 말을 몰고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말에 잠시간 고민하던 검설린은 고개를 돌려 그를 고요한 눈으로 응시했고, 듣기에 썩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을 주었다.
“네가 마음을 다잡을 때.”
거의 한 달이 되도록 집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맹약을 알고 있었고, 그가 지난날 그 약속을 지키려 평생을 살았던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해왔었다. 그러나 그는 환자가 적은 풍요로운 강소성에 지금 머물며 잔업만을 처리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맹세를 지키기 위해 오지로 향하던 그는 서문윤을 채근하지 않고 그저 가족과 해후할 그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게, 새삼스럽게 또 감동이었다.
시큰한 콧잔등을 찡그리며 서문윤이 고개를 슬쩍 들렸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은 옛날처럼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정이 깊었다. 화려한 장시가 서는 번화한 마을을, 서문윤은 잠시간 아련한 눈으로 응시했다.
어둠이 시작되려는 때, 호박색 등이 하나둘 걸리고 왁자지껄한 웃음이 들렸다. 화려한 밤이 시작되기 직전, 강소성은 사람들의 활기가 넘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곤, 서문윤은 건전성과 장한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떠나야지.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1년이 남았군요.”
검설린은 그 말에 멈칫했다가,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그래.”
다시금 차분해진 목소리에 서문윤은 잠시간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너른 등은 동요하는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고, 검설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 뿐이었다.
서문윤이 숨을 들이켜고 말을 내뱉었다.
“우리, 여기서 살까요?”
그는 고삐를 잡는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푸르스름한 핏줄이 도는 손등을 말없이 응시하던 서문윤은,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두렵습니까?”
검설린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래, 두려워.”
순순히 감정을 시인하는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말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검설린의 뒤를 따르던 서문윤은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곤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응시했다.
침묵이 자리한 그의 얼굴이 또다시 싸늘했다.
“가까이 와주세요.”
그 말에 검설린은 고민을 하다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입술에 온기가 스친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입술을 빼앗긴 사내의 입에서 흐른 것은, 울컥한 듯한 목소리로 내뱉은 욕설이었다.
“제기랄.”
“욕은 왜 합니까?”
“네게 자꾸 휘둘리는 것 같은 기분은 내 착각이냐?”
“그래서 기분 나쁘세요?”
“…제기랄.”
결국 입술을 꾹 다문 검설린을 서문윤은 잠시 장난기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조금씩 사람다워지는 그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는 작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가득한 고향의 아름다운 야경이 눈을 멀게 할 듯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제 떠날 때도 됐지.’
그리웠던 고형의 정취를 눈으로 즐기며 서문윤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동생들과도 회포를 풀었고, 어머니의 마음도 안심시켰다. 비록 아버지와 일을 끝까지 풀지는 못했으나, 앞으로 시간은 많을 테니까.
이제는 저를 위해 기다려준 검설린을 제가 배려해줄 차례였다.
‘슬슬 작별 인사를 고하고 떠나자. 사흘이면 충분하겠지. 나 때문에 시간을 많이 소비했으니까. 의형이 맹약의 남은 1년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려면 아무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러나 서문윤의 바람과 다르게, 그들 일행은 강소성을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 * *
그 날은 유독 비가 치적이던 날이었다. 쾅쾅거리는 소리가 서문세가의 대문 밖에서 울려 퍼졌고, 늦은 시각에 일어난 소란에 하인들은 깜짝 놀라 달려 나오고야 말았다.
“여기 북성이 기거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당시 침상에 검설린과 함께 누워 하품을 하고 있던 서문윤은 무섭게 굳어지는 검설린의 얼굴에 깜짝 놀라 얼어붙고야 말았다. 요즘 들어 제법 순하던 검설린의 얼굴에 다시 냉혹한 조소가 스며들고 있었다.
차가운 웃음이 흘렀다.
“불청객이 왔군.”
“의형?”
제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 서문윤을 조심스레 품에서 내려놓고 검설린은 침상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당황하여 상체를 일으키는 서문윤에게 가만히 있어, 말로 내뱉은 검설린은 방으로 나가던 중 몸을 돌려 그를 빤한 눈으로 응시했다.
“의, 의형?”
수상한 기색에 움츠러든 서문윤을, 검설린은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잠시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여기 있어라.”
서문윤의 얼굴에 당황이 물들 때 검설린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작은 웃음을 짓고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장하여 속삭였다.
“밤이 늦었다. 먼저 자고 있어.”
서문윤은 망설이다가 예, 말을 내뱉었다. 검설린은 다시 몸을 돌려 침의 소매를 펄럭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검설린의 권유와 달리, 그가 나간 후 서문윤은 잠에 들지 않았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제 의형이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 얼굴.’
살기가 희미하게 스치는 얼굴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검설린의 분위기가 워낙 심각하여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으나, 서문윤은 그 파편만으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살의를 품은 얼굴에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의형은 파나립 박사나 동궁사변의 일을 말할 때나 그런 표정을 지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입술을 깨물고 비가 추적하게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하인들은 당황한 듯 웅성거리고 있었고, 저택의 등불은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직감한 서문윤이 갈등이 서린 눈으로 검설린이 박차고 나간 자리를 빤히 응시했다. 그를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욕망이, 또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또다시 그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또 서문윤은 마음속에 불거진 어느 불안한 의심 때문에 도저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랑 완전히 똑같은 얼굴.’
그것은 바로 검설린의 담담하고도 살벌한 얼굴이 말해주는 위험성 때문이었다.
운남 장이족의 영역에서의 일!
검설린은 운남에서 장이족과 마주했을 때 그와 같이 억눌리고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유독 장이족에게 까칠하고 적대적으로 굴었고, 결국엔 화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 당시에는 단지 의형의 까칠하고 괴팍한 성격 탓에 화를 입었다 생각한 일이지만, 지금 서문윤은 검설린과 장이족이 과거에 은원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과거의 일을 떠올린 서문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당시는 단순히 의형의 발을 묶어놓으려는 책략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잖아. 의형은 장이족 촌장을 경멸했고, 촌장 또한 의형을 꺼리는 눈치였어. 둘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서로가 서로를 멸시할 수 있던가? 의형은 까칠하긴 해도 무도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촌장 또한 부족의 은인을 그리 냉대할 수 있을까? 이민족이라 해도 은원은 알 텐데. 게다가 그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사내를 원하게 되는 치욕스러운 음약을 쓸 이유가 없지.’
서문윤의 숨이 삼켜진 순간이었다.
‘마치 그들이 서로 원한 관계인 것만 같구나.’
그리고 서문윤은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이 아직도 그에게 감추어둔 일이 많으니 그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문 너머를 힐끗 보며 서문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과거의 인연인가.’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이라. 서문윤은 어렴풋이 지금 사건이 그저 단순한 나그네의 방문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검설린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믿고 싶은데, 그의 얼굴에 스친 뿌리 깊은 한과 살벌한 증오가 알려주고 있었다. 이것은 무언가 그의 과거와 단단히 얽힌 일이라고.
사실 이 상황은 서문윤이 어느 정도 예상하고 또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올 때부터 마음속에 걸리는 무언가를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서문윤의 얼굴에 답답함이 스쳤다.
‘아직도 그는 내게 감추고 있는 게 있다. 아직 중요한 것들이.’
그는 강소성에 오길 꺼려했던 검설린을 알고 있었다. 지난 3년간 천하의 험지를 꺼리지 않고 오가던 검설린은 단 세 곳에 발을 들이길 꺼려했는데, 첫째는 수도 장안이었고 둘째는 운남이었고 셋째는 강남동도, 특히 강소성이었다.
장안은 동궁사변과 관련이 있으니 그렇다 치고, 운남과 강남동도의 일은 아직 알지 못했다.
무슨 일로 그는 저의 고향으로 가길 꺼려한 걸까?
그리고 생각하던 서문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사실 짐작한 바는 있다.
서문윤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명주작(明朱雀) 강서진.’
그것은 장안사준의 일원이자 강남동도 안찰사의 이름이었다. 바로 경칠승과의 분쟁에서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도와주었던 인사. 그리고 그는 과거보다 현재에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출세가도를 걷는 유일한 장안사준의 일원이었다.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처소에 있으라는 검설린의 말은 이미 머릿속에 까마득히 사라진 후였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직 살의가 희미하게 엿보이는 의형의 얼굴뿐이었으므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서문윤은 검설린을 홀로 둘 생각이 없었다.
침의를 벗고 옷을 갈아입은 서문윤이 황급히 신을 고쳐 신고 처소를 빠르게 나섰다. 소란은 어느 순간부터 수군거리는 소리로 잦아들었고, 어느새 쥐 죽은 듯한 침묵이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또 불안하여 서문윤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처소를 나서 외당으로 향했다.
먹구름이 달빛마저 먹은 컴컴한 밤이었다. 어둠을 헤치고 묵묵히 걷던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내에 돌아다니는 하인 한 명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몸에 긴장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이건.’
밤중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건만, 엄연한 무가에 경계하는 이가 하나 없다니.
그리고 그가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서문윤.”
“아, 아버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에는 왜?”
그곳에는 서문린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은 짧은 시간 내에 서문린의 얼굴에서 상황의 다급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손님에게 예의를 지켰던 서문린은 중의(中衣)만을 걸치고 있었고, 평소에 온화하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문윤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아들에게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건.’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자리한, 불이 켜진 객당의 전각. 그 순간 서문윤은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야 말았다. 불빛이 일렁거리는 순간 움직이는 그림자 둘을 본 것이었다.
개중 하나는 그가 아는 이의 것이었다.
‘의형이 안에 있다.’
어찌 그가 모를 수 있겠는가?
서문윤은 검설린의 그림자가 아닌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3년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관찰한 이였다. 서문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의형의 그림자가 저가 있는 방향으로 힐끔 고개를 돌리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이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도.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을 일깨운 것은, 그의 귓가로 내려앉은 싸늘한 명령의 말이었다.
“너는 처소로 들어가거라.”
“예?”
당황한 서문윤이 서문린을 바라보았다. 항상 자애롭던 아비는 흉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방 안에 들어가지 못하겠느냐!”
그러고였다. 머뭇거리던 서문윤의 귓가로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가 떨어진 것은.
“거기 누구 있소?”
처소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리고 서문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존재가 바로 야밤의 불청객이며, 의형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란 사실을.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무섭게 굳어지는 아버지의 얼굴로,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어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의형의 그림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서문윤이 숨을 삼키며 불청객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에 대한 궁금함을 드러내는 듯 창문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서문린이 희미한 두려움과 긴장을 드러내며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당장 방 안에 들어가라. 방 문 걸쇠를 걸어 잠그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 나오지 마라.”
경직된 목소리는 조급함이 서린 것이었으나, 서문윤은 그 말에 쉬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어진 말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하하, 서문 군사. 왜 이리 박정하게 구시오? 우리는 비록 직속은 다르지만 같은 적을 두고 싸운 전우 아니오? 소문이 자자한 공자가 그곳에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사슴을 보고 말이라 칭할 셈인가?”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대인.”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서문린에 서문윤은 잠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인?’
아무리 그가 병부에서 은퇴를 했어도 횡새군사에 오른 이였고, 더 중요한 것은 북란의 2등공신이었다. 직책을 떠나 난리 중 군공을 세운 공신에게 함부로 대할 관료는 없다. 하물며 그의 동기가 절도사요 대장군이건만.
그렇다면 그가 대인이라 칭하며 극히 공손히 대하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서문윤은 귓가에 떨어진 말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거기에 전 태자친훈익위낭장(太子親勳翊衛郎將) 서문 공자가 계시오?”
태자친훈익위낭장.
바로 정오품에 해당하는 서문윤의 옛 관직명이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숨을 멈추곤 두려움과 긴장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얼굴로 검설린의 그림자를 살피고야 말았다. 태자친훈익위낭장은 태자를 호위하는 관직이었다.
‘의형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가 동궁태자의 뒤를 이은 현 태자의 호위였다는 말을 뜻했다. 바로 동궁사변의 흑막으로 의심되는 이의 수장이었다는.
서문윤의 얼굴이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감히 의형에게 언질하지 못했던 말이다. 말을 한다, 한다 다짐했으면서도 그의 마음을 걱정하여 서문윤은 감히 고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쉬이 말을 하겠나?
검설린과 수많은 사람을 몰락시킨 사변의 흑막으로 의심되는 자의 목숨을 구하고, 그를 한때 주군으로 모시고 따랐었다. 충심을 다해 태자를 섬겼고 또 그의 후의를 받은 입장에서 서문윤은 차마 검설린에게 제 본디 관직명을 말하지 못하고 속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리 그 사실이 폭로되다니?
“내 일전에 갓 스물 된 어린 장재(將材)가 관직에 오른 지 1년 만에 당상관에서 네 발걸음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지. 아무리 십수 년 전에 변란이 일어나 조정에 어린 나이에 출세한 고관이 많다 쳐도, 그대는 그 후세대가 아닌가? 스무 살에 정오품이면 변고가 없다면 서른이 되기 전에 당상관이 될 터인데 실로 대단한 일이라 우리 사이에 말이 나온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장재가 낙마의 위기에서 황태자를 구해 면사패(免死牌)까지 수여를 받았으니, 일전부터 나는 이 만고의 충신에게 관심을 가졌네.”
담담한 말은 몹시나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것이었으나, 서문윤의 얼굴은 그저 창백할 따름이었다.
서문린이 조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안찰사!”
그리고 거의 동시에 들려온 묵직한 말이었다.
“나오시게, 낭장.”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고, 촛불에 비춰지는 검설린의 그림자가 슬쩍 움직였다. 서문윤은 그가 저를 바라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그였구나.’
강남동도 안찰사 강서진.
운표선, 이청융과 같은 검설린의 옛 벗이자 그가 지극히 꺼려하는 사내.
그라면 서문린이 지극히 공손하게 대할 법도 했다. 그는 현재 고 승상에 버금가는 권력자였으며, 전란 중 제일공신이었고, 황제의 신임을 얻는 고관이었으니까. 게다가 안찰사는 절도사와 거의 동급의 지위였으며 관할 영역 내에서는 황제처럼 군림하곤 했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진 순간 서문윤은 무거운 시선으로 창문에 자리한 그의 그림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문린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와 창문을 번갈아 볼 때, 그들의 귓가에 다시금 부드러운 명령조의 말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대의 얼굴을 보아야겠네.”
이렇게 되면 피할 수 없다.
서문윤이 숨을 들이켜며 서문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작은 웃음을 지었다.
“괜찮을 겁니다.”
담담한 말에 서문린이 아득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를 향해 잠시간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던 서문윤은, 이윽고 고개를 돌려 객당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오랫동안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금 옮겼다.
* * *
문을 열고 서문윤은 입술 밖으로 작은 신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아.’
객당 안에는 그가 예상했던 대로 검설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불청객과 탁상을 사이에 두고 창가에 자리하고 있었고, 과거의 인연이라는 서문윤의 추측처럼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등 뒤로 늘어트린 검설린은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묵묵히 제 앞에 있는 이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서문윤의 등장에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근래의 풀어졌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싸늘함만이 자리한 검설린의 얼굴이 서문윤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혹여나 그가 과거를 숨긴 저를 책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를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서문윤이 입술 밖으로 침음을 흘렸다.
“의형.”
그러나 그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고도 검설린은 끝끝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에게 태자익위낭장의 일을 해명을 하고 싶었으나, 서문윤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더 이상 그 일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사람들이 널 하도 숨기기에 네가 마마라도 걸린 줄 알았다. 그냥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이구나.”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제게 말을 건 일을 잠시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찰사라는 높은 위치에 오른 고관이요, 의형과 아버지가 극도로 경계하는 자인지라 고압적인 인상의 사내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드럽고 다정한 인상의 미남을 마주하고 서문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자가 강서진?’
그의 얼굴에 잠시 불신이 스쳤다.
검설린과 나이가 비슷한 것은 알고 있었기에 젊은 외모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의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라에 비견할 이가 거의 없는 고관이 아니던가?
하물며 검설린과 운표선 또한 그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에 높은 지위에 오른 자 특유의 오만함과 위압감이 엿보였다. 그러나 은은한 옥색의 비단 옷을 입고 앉아 싱긋 웃음을 흘리고 있는 강서진의 모습에는 권위란 눈에 씻은 듯이 보이지 않았고, 그저 그가 글월을 외는 공자 같은 온유한 인상만을 줄 뿐이었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잔잔한 웃음은 위압감보다는 기품을 드러냈으며 서문윤은 그에게서 전혀 고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자가 의형과 아버지가 그리 경계한 인물이라고?’
그렇게 그가 경계의 빛을 놓은 채 의심에 빠져 있을 때였다. 서문윤은 문득 귓가에 들려온 살벌한 목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정말 나를 적으로 돌리고 싶은 거냐?”
검설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서슬 퍼런 엄포를 들으며 서문윤은 머리 위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느낌을 받고 몸을 움츠리고야 말았다. 저 멀리 흩어진 정신머리가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장안사준의 일원이다!’
다시금 정신을 찾은 서문윤이 숨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일전의 한량처럼 보였던 운표선이 어떤 심계를 숨기고 있었는지 서문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아버지와 의형이 경계하는 사람 앞에서 외견에 홀려 긴장을 놓치다니.’
스스로를 탓하던 서문윤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차분한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관조하던 강서진의 얼굴에 웃음이 스친 순간이었다.
이윽고 태연스러운 말이 흘렀다.
“팔기린, 어째서 나를 경계하지? 우리는 절친한 벗이 아닌가.”
그것은 거의 반사적으로 검설린을 웃게 만든 말이었다. 검설린의 입술에서 높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절친한 벗!”
천장에 높이 솟을 듯한 예민한 웃음을 들으며 서문윤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웃음에는 살벌한 기운이 묻어 있었고, 서문윤은 그 진득하고 억눌린 감정에 몸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느끼며 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 순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의형과 그는 사이가 틀어졌구나.’
검설린이 그에게 보이는 태도가 운표선에게 보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때 장안사준이라 불렸던 절친한 벗을 검설린은 적처럼 대하고 있었고, 강서진은 그의 태도를 몹시 당연한 듯이 받고 있었다.
잠시간 웃음을 터뜨린 강서진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 말에 비웃는구나.”
그리고 서문윤은 그의 담담한 말에 슬픔보다는 위화감을 느끼곤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어째서인지, 강서진 저 사내의 차분한 모습이 마음속에 걸렸다.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너는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칼로 겨누어야 할 적이 아닌 것을.”
서문윤은 그의 의형이 그 말을 듣고 냉소를 지으며 싸늘하고 맹렬한 말을 내뱉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뜻밖에도 검설린은 그 말에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서문윤은 꼿꼿한 검설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저 침묵이 불안하노라고.
그리고 그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 때였다.
“이리 오너라.”
담담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몸을 흠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는 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강서진이 있었다. 마치 따스한 봄을 닮은 사내가 온유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으니 서문윤은 또다시 해이해지는 정신머리를 다잡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다른 의미로 위험한 작자군.’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그의 앞을 향해 다가가자, 그는 서문윤을 차분한 시선으로 훑으며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언질을 많이 들었네. 낭장. 낙마할 위기에 처한 태자를 대신 구하고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지? 태자는 국본이니 마땅히 나라의 큰 공을 세운 게 아닌가. 면사패로는 그 값이 충당되지 않아.”
서문윤의 숨을 턱 막히게 한 말이었다. 그것은 겉으로는 극찬으로 들렸으나 서문윤은 도무지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장안사준은 태자의 벗이었고, 흉수로 의심받는 현 태자 이청은은 그다지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는 입장이었다.
강서진이 동궁사변 때 황제에게 순응하여 그의 총애를 받았다지만 그 마음이 어떨지는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의형의 마음은….
그러나 서문윤의 초조한 마음을 모르는 듯 강서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태자께서는 동궁사변의 혼란을 수습하시고 어질러진 나라의 기풍을 바로 세웠으니 실로 영웅이시고 나라의 기둥이시네. 그런 분을 몸 바쳐 구한 자네가 이리 산천을 떠돈다는 걸 듣고 나는 분개했지. 마땅히 자네를 중랑장(中郎將)으로 삼는 게 마땅한 것을.”
그리고 잠시간 침묵 끝에, 강서진은 묘한 표정으로 서문윤의 다리를 흘끗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다리를 다쳤다고 이리 폐기시키나.”
서문윤의 몸을 뻣뻣하게 만든 말이었다. 그래, 그건 사실은 서문윤의 마음을 점거한 불만이었다.
‘면사패가 무슨 소용이야. 내 인생이 끝이 났는데.’
한 나라의 태자가 다리가 다친 무관을 측근으로 두고 쓸 만큼 한가한 이가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일이다.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태자를 구할 것이다, 라 생각을 하면서도 서문윤은 충성을 맹세했던 자가 저를 금은보화와 면사패를 대가로 놓아버린 것을 섭섭히 여겼다.
‘적어도 나를 무관이 아닌 측근으로서 사용하고 싶다 말은 할 수 있잖아.’
그리 쌓아둔 마음이 걸려 서문윤은 강서진의 날카로운 말에 바로 반박을 하지 않고 침묵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등만을 내보이던 검설린은 그 순간 고개를 슬쩍 돌려 서문윤의 어두운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시선을 알지 못했고, 그저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때였다. 서문윤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안찰사 대인.”
고개를 든 서문윤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으나, 강서진은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입신양명은 사내의 꿈. 자네는 자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돌려받기를 원하나?”
은근한 웃음이 마치 서문윤을 꾀어내는 듯했다.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멈칫하곤, 잠시간 입술을 잘끈 물며 말을 내뱉지 못했다. 검설린은 여전히 침묵했으며, 방에는 또다시 짧은 침묵이 돌았다.
서문윤이 잠시간 대답 없는 검설린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복잡함이 스치는 눈은 잠시간 흔들렸다가 평정을 되찾았고, 새하얗던 낯빛은 어느 순간 결심을 품어 차분해져 있었다.
침묵 끝에 서문윤이 고개를 들었다.
묘하게 웃는 사내를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며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저는 그저 관료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면사패 또한 제게는 지나친 물건입니다.”
그리고 강서진을 처음으로 동요케 만든 행동이었다.
“대인! 부디 그런 곤란한 말씀 거두어주십시오.”
급습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강서진이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고, 정색한 얼굴로 소매를 한 데로 모으며 강서진을 향해 극진한 예법으로 공수를 했다.
당황한 듯 멈칫한 강서진을 향해, 서문윤이 심히 절절한 말을 연이어 내뱉었다.
“저는 대인의 후의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윤은 이제 청운의 꿈을 꾸지 않습니다. 제가 관인으로서 할 일을 마땅히 다하고 은퇴를 했는데, 추잡스럽게 어찌 다시 떠난 자리로 돌아갈 마음을 품겠습니까?”
심호흡을 하고,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산천을 떠도는 것은 제가 원한 제 뜻입니다. 윤은 지금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고요한 눈으로 강서진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강서진은 이런, 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고 이윽고 방 안에는 잠시간 적막이 감돌았다.
긴장이 이면에 숨겨진 침묵이었다.
서문윤이 그 둘의 심기를 살폈을 때, 검설린은 그를 예의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강서진은 여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곤란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잠시간 동요가 스쳤다.
‘이런 무식한 방법이 통하려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강서진이 위험한 인물인 것은 잘 안다. 그의 언행이 과격한 것을 제쳐 두더라도 서문윤은 의형이 경계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휘둘릴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문윤이 선택한 회피법이었다. 일단 강서진은 까마득한 고관이었고, 서문윤을 괴롭힐 지위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단정한 용모와 언행을 볼 때 그는 의형과 다르게 체면을 챙기는 인물이었다.
천만다행이게도, 그의 방법은 꽤나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갑작스레 과례를 취한 서문윤을 바라보는 강서진의 얼굴에 곤란함이 스쳤다. 여유를 잃은 사내는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문윤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공자는 귀한 무릎을 꿇으시오? 사내는 부모와 스승과 임금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 법. 나는 안찰사지만 그대는 은퇴한 관인이니 과례를 치루지 않아도 충분하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말에 서문윤은 담담히 답할 뿐이었다.
“황세성에서 아버님이 군수품을 받지 못해 곤란해하실 때 대인께서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강서진의 얼굴이 또다시 빠르게 굳어갔다.
“아버님께서 항상 그 일을 고마워하시며 옛날의 동료들을 그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등왕각으로 나를 보냈건만, 누각의 주인은 어디 갔는가? 마룻대의 남포 구름 서산의 비만 남았구나’라 탄식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
“돌아가지 못하는 나날을 아버님께서는 몹시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대인께서는 아버님이 그리워하던 과거의 일부이시니 저 또한 공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대인께서는 의형과 정을 나누신 분이니 제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가 상대하기 힘든 위인이란 사실은 잘 안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도.
그러니 서문윤으로서는 정으로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가 검설린에게 고지식하고 눈치 없다고 구박을 받기는 했지만,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대인께서 아직도 과거의 정을 기억하신다면, 부디 저와 의형을 생각해주십시오.”
어떤 방면에서는 검설린보다 더욱 유연하기도 했고.
“윤은 관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사람과의 평온한 삶을 원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나름 위기를 타파할 방법을 궁구한 것이었다.
그렇게 공손히 말을 내뱉은 서문윤은 제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으로 강서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취아에게 ‘병법’을 사용하던 의형을 향해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
그는 검설린의 ‘병법’에 큰 인상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전에 그것을 써먹을 수 있었다. 비록 미인계는 아니지만은 상대의 호의를 사는 외양이란 점에서 얼추 비슷하니….
그리고 한참을 서문윤을 바라보던 강서진은, 어느 순간부터 어두워진 얼굴을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나를 곤란하게 하는구나.”
그 말에는 깊고 무거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웃음이 사라지고 진중함이 남은 강서진의 얼굴은 서문윤이 의아해하던 한량의 것이 아닌 의심 없는 고관의 것으로 변모해 있었다.
고요한 시선이 제 몸을 쓸어내릴 때, 서문윤은 연유 모를 오한을 느끼고 몸을 잠시간 떨어야만 했다.
시선 끝에 강서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강남동도 안찰사 강서진일세. 언제고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디 말을 하기를.”
그리 말을 하며 일어나는 강서진을, 서문윤은 차마 올려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조정에 충성하는 동료가 아닌가?”
그가 전각을 나설 때 슬쩍 검설린을 돌아보며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그저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묘한 웃음이 서린 강서진의 얼굴이 신경 쓰여 서문윤은 더 이상 그를 향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 * *
강서진이 빠져나간 전각에 잠시간 침묵이 돌았다. 촛불은 새벽의 짙은 어둠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했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으슬거릴 만치 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검설린은 굳게 닫힌 창문 옆에 앉아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자네는 듣던 바와 다르게 영민하군.”
그리고 서문윤은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 넋을 빼고 있었다. 멍한 얼굴이 그의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강서진이 나가기 전 웃으며 했던 말은 기묘한 어감이 있었고, 서문윤은 한참을 그렇게 그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날 알고 있었구나.’
제법 시간이 흘러 정신을 언뜻 수습한 서문윤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흐릿한 눈으로 검설린을 본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 스친 서늘한 기색에 문득 소름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지극히 차갑다.
그 순간 불안을 느낀 서문윤이 그를 향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
그리고 검설린에게서 돌아온 싸늘한 답변이었다.
“나가봐라.”
삭막한 말에 놀란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조소조차 흘리지 않은 검설린의 무표정한 낯과 마주한 서문윤은 그 순간 제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 바로 태자와 관련된 일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고야 말았다.
그의 얼굴에 피가 식은 순간이었다.
“의형.”
설마 그는 제게 화가 난 것일까?
두려움을 품고 조심스럽게 의형의 눈치를 보던 서문윤은, 그리고 이어진 검설린의 싸늘한 축객령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움츠리고야 말았다.
“나가봐, 나는.”
“제 말을….”
그리고 검설린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말이었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그 순간 적막이 짧게 흘렀다.
싸늘한 말은 방 안의 공기를 한층 더 차갑게 만들었으며, 무거운 침묵을 조성했다. 면박을 들은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고, 검설린은 침묵한 채 무언가의 상념에 빠져들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 때였다
‘정말로 그는 내게 화가 났구나.’
서문윤의 얼굴에 문득 복잡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요즘 들어 다정하고 섬세했던 검설린은 축객령을 끝으로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혹여나 과거의 일로 그가 제게 실망할까 두려워했던 서문윤은, 그의 그런 차가운 태도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설린의 반응은 몹시 야멸차기 그지없었다.
‘역시나 실망한 거겠지.’
동궁사변의 흑막으로 암암리에 거론되는 폐태자의 이복동생. 그를 모셨던 과거를 숨기고 검설린의 곁에서 전전긍긍했으나 이리 탄로 난 것이었다.
그리고 검설린의 모습은 아니나 다를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서문윤의 두 눈에 좌절이 언뜻 스쳤다. 검설린이 그에게 요즘 너그럽다고 하나, 서문윤은 그가 과거에 갇혀 있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저에 대한 애정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과거의 비사보다 더 비중이 더 큰지는 확신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 검설린의 행동으로 그는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의형은 그날의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분이다.’
서문윤의 얼굴에 참담함이 서렸다. 제가 그에게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검설린의 반응이 상처였다. 특히나 사이가 좋았던 최근의 일을 떠올라 그런 마음이 더 진했다.
그렇게 서글픔이 마음을 점거할 때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무언가의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검설린은, 방 안에 번지는 이상한 기류를 뒤늦게 눈치채고 몸을 흠칫하고야 말았다.
“뭐?”
서문윤의 얼굴에 자리한 어두운 그늘을 본 검설린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뭐냐?”
그리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가 내뱉은 눈치 없는 말은, 결국 서문윤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게 만들고야 말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며 검설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이야?
검설린은 강서진의 일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어 서문윤을 신경 쓰지 못했고, 제가 내뱉은 말의 가시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우울한 얼굴에 당황을 금치 못할 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서문윤이 공허하고 쓸쓸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그 순간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어진 공방이었다.
“의형. 제게 왜 이리 냉혹하십니까.”
“서문윤?”
몸은 싸늘하게 식고 있었으며, 마음 또한 서서히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울컥함을 참지 못한 서문윤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내뱉었다.
“제 과거 때문에 이제 제가 미우십니까?”
“뭐, 뭐라고?”
“변명도 듣기 싫어하시는군요.”
그리고 그 순간 말문을 잃은 듯 검설린이 작게 입을 벌리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런 반응은…?
일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건만 방 안에는 쓸쓸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창백하게 일변한 검설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제가 미워서 얼굴도 보기 싫으십니까?”
검설린의 얼굴이 끝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그 때였다. 방 문 밖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안찰사를 배웅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두 사람이 하나같이 입을 다문 순간이었다.
검설린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으며 서문윤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무런 답변이 없는 방 안이 이상한 듯 짧은 침묵 끝에 서문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됐다.”
그제서야 검설린은 말을 내뱉었으나, 이미 서문린은 전각의 문을 연 후였다.
걱정이 희미하게 물든 얼굴로 방 안을 바라본 서문린은 두 사람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고 그 순간 몸을 멈칫했다.
“아버지.”
침음을 흘리는 서문윤을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린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방 안의 분위기가 한층 스산해지기 시작한 때 서문린이 숨을 들이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감정이 잔뜩 묻어 나오는 목소리다.
‘뭐?’라고 검설린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무슨 오해를 한 듯 서문린은 이를 악물고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쏟아부었다.
“윤아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울어야 합니까? 왜 이 아이가 과거의 일을 책임을 져야 합니까?”
그 말을 들은 검설린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얼이 나가고야 말아, 그는 한참을 입술을 다문 채 속으로 당황한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저 서문윤에게 방을 나가라 했을 뿐이다. 화가 나서 거칠게 말을 하긴 했지만, 예전에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이것보다 심하게 말을 한 적이 많았다.
그 순간 울컥 치밀어오른 울화를 간신히 억누른 검설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난 책임을 지라 한 적 없다.”
그리고 옛날의 공손했던 서문린은 옛 상관을 향해 불손한 눈빛을 보내며 화를 꾹꾹 억누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왜 윤아가 눈물을 흘립니까?”
“뭐?”
검설린을 동요케 한 말이었다. 그 순간 황급히 고개를 홱 돌린 검설린은 서문윤의 뺨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의 눈물을 발견하고 몸을 뻣뻣이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너.”
그는 한참을 얼어붙어 멍하니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제게 돌연 꽂힌 두 개의 시선에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서글픔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서문윤이 손가락으로 조용히 눈가를 쓸었다.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쓰게 웃음을 지었다.
‘이 무슨 추태야?’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의 앞에서 매번 눈물을 보이고야 만다. 시답지 않게 의형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눈물은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었다.
검설린의 싸늘한 말은 서문윤에게 그 옛날의 살벌한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므로, 서문윤은 그에 덜컥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때의 검설린 또한 타인보다 저에게 유하긴 했다만, 그래도 그 날카로움이란 말로 설명하지 못할 만큼이었고 서문윤은 그때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살벌한 눈길과 매서운 말을 떠올리면 저절로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아, 서문윤은 마음을 추스르려 잠시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침묵 끝에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서문윤이 쓰게 웃었다.
검설린이 그에게 잘못한 것이 있던가? 그저 서문윤 저 스스로가 일을 자초한 것뿐이었다. 차라리 제 입으로 말을 하면 될 것을 이리 일을 질질 끌다가 타인의 입에서 사실이 폭로되고야 말았으니.
“의형이 아니라 제가 잘못한 겁니다.”
“서문윤.”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떨리는 숨결을 내뱉고, 다시금 말을 내뱉었다.
“허나 제게 그러지 마십시오. 제게 화를 내지….”
울컥한 말을 삼키며 그가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아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삼키곤, 서문윤은 끝이 갈라지고 또 흐릿해진 목소리로 간절히 말을 내뱉었다.
“…제게 옛날처럼 굴지 마세요, 명공.”
그리 속삭이듯 내뱉은 말을 듣고 서문린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에 걸린 말을 삼키며 그가 동요한 얼굴로 검설린을 홱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와 제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희미한 두려움이 스치는 아들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한 서문린은 그만 화를 참지 못해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명공, 도대체 무슨 일을….”
“나가라.”
그러나 서문린의 말은 살벌한 방 안에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차가운 목소리에 빠르게 끊길 뿐이었다. 냉엄한 말을 들은 순간 서문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멍하니 검설린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예?”
어설픈 말에 돌아온 것은 서릿발 같은 목소리였다.
“나가, 서문린.”
“명, 명공.”
“내 말 안 들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서문윤의 안색이 돌변한 순간이었다.
“그놈 여기에 놓고 당장 방에서 꺼져. 내 쥐꼬리만 한 참을성이 바닥나기 전에 이 자리에서 나가라. 지금 당장!”
그 말은 끝으로 갈수록 서슬 퍼런 기색을 닮은 것이라, 서문린도 서문윤도 그 말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하고 검설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복면을 벗은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수려했지만 찌푸려진 미간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서 냉엄한 기색이 엿보였다. 검설린은 감정이 꾹꾹 억눌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심히 사나워 보여 더 이상 서문린은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며 서문린이 방을 나서고,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침음을 흘리며 검설린을 바라보는 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상상이 스치고 있었다. 심기가 과히 불편해 보이는 검설린의 음울한 시선이 몸에 닿는 순간, 서문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아슬한 한숨을 내뱉고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서문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이 섭섭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명공은 이제 제가 미우십니까? 제가 명공의 원수인 태자전하를 살린 것이 화가 나십니까?”
검설린의 얼굴이 희미하게 구겨진 순간이었다.
“왜 나를 명공이라 부르지?”
그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답변을 재촉했고, 주제를 벗어난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할 말을 잃고 침묵하고야 말았다.
‘왜 그를 명공이냐 부르냐니. 그야….’
생각하던 서문윤이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야 제 변명도 듣지 않으려는 의형이 원망스러워서, 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유치하고 철이 없는 말이었으므로.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곤 서문윤이 그를 향해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는 왜 명공은 절 피하려 했습니까?”
그리고 검설린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나는.”
낮게 흐르는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흐르고, 서문윤은 진중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답변을 기다렸다. 검설린은 그 짙은 시선에 잠시간 머뭇거리며 말을 미적거렸고, 조금의 시간이 흘러서야 침착한 목소리로 답변을 내뱉었다.
“생각할 게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불신이 스친 순간이었다.
“제게 화가 난 거잖습니까.”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아까 전에 화를 냈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검설린의 기세는 몹시 수그러들어 있었다. 제 안색을 살피면서도 끝까지 의심하는 서문윤의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검설린이 돌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정말 화가 났다면 네 울음에 이렇게 당황을 하지도 않았어. 넋을 빼놓은 사람처럼 허둥지둥하지도 않았겠지. 오히려 나는….”
“?”
중간에 말을 멈춘 검설린이 말을 잇기를 머뭇거렸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이 서려 있었고, 서문윤은 그에 검설린이 제게 또 무슨 일을 숨기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화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맥 빠진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정말 화나지 않았어.”
반복해서 말하는 검설린의 얼굴에 피로함이 있었다. 그는 서문윤을 침착하고도 온유한 눈으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고, 서문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 들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단 말이지? 그저 내 성격이 더러워 말을 함부로 한 거다. 너는 나를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원체 못돼먹고 악랄한 인간인 걸.”
그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닌 듯 서문윤의 얼굴에 자리한 불안한 기색은 서서히 흩어져가고 있었다. 잠시간 뜸을 들인 검설린이 그 순간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만 응어리를 풀어라. 내가 말이 험했다.”
서문윤이 침을 삼킨 순간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으며, 그 시간 동안 검설린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문윤의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적막을 깨고 서문윤이 내뱉은 말이었다.
“앞으로 제 아버지에게 함부로 말씀하지 말아주십시오.”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제야 제가 서문윤의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한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아무리 옛 수하와 상관인 관계라 할지라도 저보다 나이가 많은 그를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윽박지르는 게 옳은 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서문윤의 아비이니.
검설린의 얼굴에 수긍의 빛이 희미하게 돌 때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순간 서문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자를 모셨던 일을. 그분을 구한 일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두려워서 말을 못 했습니다. 혹여 의형께서 제게 정이 떨어질까 봐 숨기고야 말았습니다.”
그리 말을 내뱉곤 서문윤은 씁쓸히 웃으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은 감정을 알 수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의형이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걱정했습니다. 의형은 당신의 과거를 현재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 새까만 유리알 같은 눈은 서문윤의 말이 끝날 쯤에 그 표면을 일렁거리며 동요의 빛을 드러냈다. 절절한 말은 검설린의 입술을 꾹 다물게 만들었으며, 그는 잠시간 할 말을 잃은 채 서문윤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그리고 갑작스럽게 조성된 침묵에 서문윤의 얼굴에 서서히 의문이 서렸다. 오해를 풀고 검설린에게 사과의 말을 하니, 갑작스럽게 그의 낯이 어둡게 가라앉고 있다. 이상하게 변한 기류에 서문윤이 머뭇거릴 때였다.
“너 내가 정말 그 일을 몰랐다고 생각하는 거냐.”
‘응?’
침묵을 깨고 검설린이 툭 던진 말에 서문윤은 그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든 서문윤이 바라본 검설린의 얼굴은 어이없다는 빛이 가득했다. 이윽고 검설린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절절하기 그지없는 탄식이었다.
“서문린은 제 장남을 얼마나 바보로 키운 거냐.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리고 이어진 통렬한 말들이었다.
“당장에 황재천이 내 후배고 서문린이 내 부관이었는데 내가 아끼던 수하의 아들이 어떤 직위에 올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내가 아무리 무심해도 널 거두고 나서 사정을 알아보지 않을 리도 없지 않느냐. 수도에 부임하던 작자가 다리를 다치고 낙향하는데 내가 뒷일을 조사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곳에 얼마나 음모가 횡행하는데. 게다가 운표선이 어용상인에 황실의 고문인데 그런 일 하나를 모를 줄 알아? 조금은 생각을 하고 살아라. 무관이라고 생각하는 법은 아예 모르는 건가? 강서진 앞에서 바로 무릎 꿇던 잔머리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말은 가면 갈수록 한탄으로 변했고 서문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서문윤이 어물거렸다.
“어, 그러면….”
“네가 먼저 언급하지 않아 말하지 않은 것뿐이다. 네가 이청은의 측근이든 아니든 나랑 뭔 상관이야. 어차피 이청융은 9년 전에 죽었고, 이제 남은 황자는 그뿐이다.”
깊은 한숨을 내뱉는 검설린의 얼굴에 피로한 빛이 역력했다.
그가 제 과거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서문윤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2년간 그에게 제 과거를 말하지 않았으니, 그가 당연히 제 일을 모르리라 생각했다. 항상 검설린의 곁에 있었으나 그는 한 번도 누군가와 연락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또 당연한 일이었다.
운표선과 황재천이 당장에 승상도 무시 못 할 권력을 지닌 위인인데 설마 별로 비밀도 아닌 사실을 그가 모를까?
당장에 검설린이 그에게 추궁한 바가 없어 그가 그저 일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니.’
넋을 잃던 그의 귓가로 쐐기를 박는 말이 내려앉았다.
“유감은 없어, 그러니 청승 떨지 마라. 제발.”
음울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서문윤은 결국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너를 싫어한 적이 없다.”
면피하는 의도가 역력한 그의 웃음을 검설린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과거의 일이 나를 짓누르지만, 서문윤. 내게 중요한 건 현재야. 내가 너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어. 과거의 일로 죽고자 한 내가 너와 현재를 보내고 싶다고.”
그리고 한숨을 내뱉고 하는 말이었다.
“그 말로는 충분하지 않았나?”
그 말에 서문윤은 답을 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답변에 고개를 들어 올린 검설린은, 그리고 싱글 웃는 서문윤을 마주하고 또다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또. 너 이 단순한 놈아.”
어째서 저놈은 또 저리 기쁨이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갑작스럽게 우울해지고 갑작스럽게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보다 단순하게 느껴져 검설린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내심 속으로 전전긍긍하던 찰나에 말 한 마디에 서문윤의 마음이 풀리니 검설린은 그저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저 바보는 정말 말을 해서는 듣지를 않구나.’
그리고 서문윤은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향해 작게 말을 내뱉었다.
“저는 아둔하여 표현을 해줘야 말을 알아듣습니다.”
다른 말은 몰라도 현재가 과거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서문윤의 마음속에 크게 와 닿는 면이 있었다. 그의 과거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서문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저와 함께하는 현재가 더 중요하다 말을 하는 게 기쁠 따름이었다. 과거로 죽으려한 그를 현재를 함께하는 제가 살렸다는 말이 마음을 울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주 표현해주세요.”
그리하여 서문윤은 감동을 삼키며 제 앞에 있는 사내를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의형. 하지만 저는 당신의 외면을 받는 게 두려워요. 차라리….”
“그만.”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아까 전보다 더욱 가벼운 표정을 지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서문윤을 향해 부드러운 말이 이어졌다.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날 혼자 두게 해주겠어? 저놈이 날 심란하게 만드는구나.”
그리 말을 내뱉고 제 어깨를 부드럽게 잡는 검설린을, 서문윤은 잠시간 맑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묘하게 기운이 빠진 듯한 검설린이 마음에 걸렸다. 강서진의 방문이 그의 마음속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서문윤은 그가 걱정될 뿐이었다.
“너무 염려 마세요.”
그런 마음으로, 서문윤은 그리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의 부드러운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검설린은 그의 말에 답변하지 않았으나 서문윤은 희미하게 부드러운 빛이 감도는 그의 얼굴에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나직히 흘러나온 말을 위안으로 삼고 서문윤은 검설린의 바람대로 전각을 말없이 빠져나왔다. 문을 여는 서문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감돌아 있었으나, 그는 묵묵히 의형이 자리한 곳을 떠날 뿐이었다.
“그는 선한 사람이다.”
그리고 방 문 앞에 기척 없이 서 있던 서문린이 내뱉은 말이었다.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달빛을 등진 서문린을 잠시 응시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서문린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고, 동시에 서문윤을 향한 걱정의 빛이 서려 있었다.
잠시간 망설이던 서문린이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박복한 사람이지.”
서문윤은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한탄에 가까운 말이 이어졌다.
“나도 잘 알 수가 없구나.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서문윤은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황숙도 그런 말을 하셨지요.”
그리 말을 내뱉는 서문윤의 얼굴은 몹시도 침착하고 어른스러워 서문린은 차마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가 서문린의 입을 막는 다정한 시선을 보내던 중이었다.
“숙부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문득 조용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서문린이 창백한 얼굴을 슬쩍 돌리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서문윤은 서문린의 말을 꿋꿋이 기다렸으나, 침묵만이 길게 이어질 뿐이었다.
* * *
서문윤이 나간 전각 안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검설린은 정좌한 채 말없이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장 같은 긴 머리칼을 늘어트린 채 그는 묵묵히 상념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촛불이 아닌 과거의 기억이었다.
‘강서진….’
그 인연의 시작이 어디서부턴가.
과거가 현재보다 중요하다 말을 하는 서문윤을 떠올리며 검설린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검설린은 과거에 함몰된 사내였으며 최근까지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음을 꾀했었다.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 옆에 서려면 너는 용봉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네 이름이 무어라고 했지?”
“검설린(劍泄麟)”
“역시 기린(麒麟)이군.”
머릿속에 스치는 말들. 그리 말을 내뱉은 소년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너를 위했지.’
그의 얼굴에 쓸쓸한 바람이 분 순간이었다.
이청융이란 사람은 그들에게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했기에, 사실 그들의 모임은 그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청융의 사후 장안사준은 모두가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회상을 하는 검설린의 얼굴에 그리움이 스쳤다.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 그리 말하는 이청융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덤덤히 말하는 태자를 바라보며 그 순간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었지.
세상이 뒤집어져, 이 모든 일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저는 힘이 없어서 그리할 수 없다. 그러나 이청융은, 태자는 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을 품고 검설린은,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희망을 기대고 있었다.
청융은 황제의 적자이고 자애로운 성품이었으며 지혜로웠다.
그가 천하를 가진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여색을 밝히는 황제와, 융퉁성 없는 노회한 재상보다야 더욱더 나라를 잘 이끌겠지.
그리하여 그들은 그에게 미래를 걸며 어느 순간부터 꿈을 꾸고 있었다.
더 나은 미래를 그가 이끌어주길. 더 많은 사람을 그가 구원해주길.
적어도 더 이상 저같이 허망하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없었으면 했다.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나가지 않았으면 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검설린이 품은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평화를 갈망하면서 그들은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갔고 종국엔 재상을 비롯한 그 누구도 당시의 태자와 그들의 일파를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두가 태자의 잘못입니다.”
그가 꿈꾸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한 줌의 모래로 허망하게 흩어진 것은.
검설린의 입가에 조소가 흘렀다.
그 이후였다.
이청융이 사사를 당하고 제 삶의 목표를 잃은 이들이 서로 뿔뿔이 흩어져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은.
운표선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황제와 타협했으며, 검설린은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자포자기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장안사준 중 유독 사상가적인 면모가 강했던 사내는 그들이 모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길로 나아가려 했다.
“우리는 한때 꿈을 꾸었지. 나는 우리가 그렸던 미래를 위해 죽을 각오마저 품고 있었어.”
강서진은 검설린이 낙향하기 전날 밤 그를 찾아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내 뜻을 이뤄줄 주군은 이미 죽고 사라졌지. 그리고 선비는 두 명의 주인을 섬기지 않는 법이라네(不事二君).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겠나?”
“왜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난 이제 정계에서 손을 뗄 거다.”
“설린. 나는 그렇다면 이제 복수를 해야겠어.”
그리 말하고 쓸쓸히 웃는 강서진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침묵할 뿐이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누군가는 산 사람을 위해 살고, 누군가는 유지를 위해 산다면, 그를 위해 복수를 할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지 그가 구천에서 조금은 편안하지 않겠어?”
“너, 설마.”
“그래야지 내 이 한이 조금은 풀리지 않겠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내뱉은 말을, 검설린은 9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잊지 못한 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나는 우리를 무너트린 모두가 무너지길 원한다네, 친구.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꿈을 이루길 원하지. 나는 전자를 위해 살 테니, 너는 후자를 위해 살아가.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하지 않겠나?”
그 말을 내뱉을 때 강서진의 얼굴에는 시퍼런 살기가 있었다.
평소에 온화하지만 수가 틀리면 그 어떤 맹수보다 살벌하고 집요하게 변하는 강서진의 성격을 잘 아는 검설린은, 그런 그의 모습을 마주하곤 속으로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검설린은 훗날에 강서진이 황제와 영합하여 권세를 누린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저가 아는 강서진은 헛말을 하는 위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은 그 검설린마저 오한이 들게 할 만큼 몹시나 살벌한 것이었으므로, 검설린은 그가 언젠가 큰 혈겁을 일으키리라 짐작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내가 왜 그들을 돌봐야 하지?”
그들은 제 지인과 친우를 박살낸 무리들이다. 말마따나 강서진의 복수는 틀린 게 아니었고, 검설린은 앙심을 잊고 원수를 돌볼 만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뒤집든 천자의 목을 따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던 검설린은 그의 진심을 알게 되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에 이르러 골이 아파온 검설린이 한숨을 푹 내뱉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고개를 슬쩍 숙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는 우리를 무너트린 모두가 무너지길 원한다네, 친구.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꿈을 이루길 원하지. 나는 전자를 위해 살 테니, 너는 후자를 위해 살아가.”
검설린의 두 눈에 빛이 언뜻 스쳤다.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의 꿈을 이룬다.”
그 말이 역천을 뜻하는 줄 누가 알았겠나? 그가 저를 천하를 책임질 재목으로 점지한 것을 그가 어찌 알았겠냔 말이다.
검설린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강서진이 피로 물들인 천하를 책임질 역천자로 낙점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고의 권좌라, 이 얼마나 달콤한 미끼인가!
모두가 그 지고의 자리를 마음속 깊이 탐하고 있다. 천하를 손에 움켜쥐고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을 원한다.
하물며 이청융이 죽은 일 또한 그 자리에 관련된 이권 다툼과 밀접하게 관련 있지 않던가?
그러나 검설린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욕망과 웅심을 느끼긴커녕 그저 실소할 뿐이었다.
‘강서진이 제대로 미쳤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미 의지와 마음은 너덜너덜 엉망이 된 후다. 그는 강서진이 이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려 하든 제게 만인지상의 권좌를 안겨주려 하든 그 일에 관계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검설린은 서문윤을 만나기 이전 죽음만을 생각하던 무기력한 자였다.
하루하루 숨만 쉬고 살아가는 것도 버거웠다. 그런 그에게 만인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리라니.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렇게 검설린은 강서진의 개짓거리를 알면서도 방관했고, 그가 저에게 은근히 권유하는 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어영부영 8년이 흘렸고, 검설린은 서문윤과 장한성에서 사건을 크게 터뜨리게 되었다.
‘눈에 안 봐도 뻔하다.’
강서진이 그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검설린의 두 눈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침잠했다.
외유내강이라 했다. 온유하게 보이는 강서진은 사실 그들 중에서도 유독 끈질기고 독한 면모를 보이곤 했다. 이루고 싶은 바는 반드시 이루었고, 그 과정에서 없애야 할 장애물은 반드시 없앴으니. 그 집요한 성격은 광적일 만치 이상적인 그의 사상과 엮어져 가끔은 이청융마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폭주하곤 했다.
그런 그가 강남동도 안찰사라는 자리에 올라, 고우군에게서 야금야금 권력의 지분을 갉아먹으며 대비하는 일이 바로 역천이었다…. 7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고, 검설린이 아는 강서진은 그 시간 내에 충분히 모든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이였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걸리는 것은 검설린의 무력함일 뿐이었으리라.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과격한 사상범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새 시대의 주인으로 점지된 자의 의지뿐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검설린이 장한성에서 제대로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것도 민심을 하나로 모아 조정의 일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그날 이후 하동과 하서에는 조정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고, 절도사들이 난을 선언하던 예전의 혼란한 시기로 회귀한 듯 변방의 몇몇 지역은 아예 독립을 선언했다. 아예 결심을 한 듯 황재천은 수뇌부가 무너지다시피 한 하동과 하서에 군벌로 군림하고 있었고, 심상찮은 움직임을 내보였다.
제국이 분열되고 있었다. 그 중심이 된 사건에 저가 있었고.
‘제기랄, 일이 복잡하게 됐어.’
욕지기를 삼키며 그가 이를 부득 갈았다.
아니, 복잡하게 된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막장을 달려가고 있지!
차라리 장한성이 무너졌더라면 이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고, 검설린은 조정에 적나라하게 정체를 드러냈다. 그것도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방향으로, 옛날에 민간에서 존경받았던 영웅은 또다시 그들의 ‘만세’ 소리를 받았다.
등불의 빛이 드리운 검설린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상념은 깊어져갈수록 심각해져갔고, 검설린은 좀처럼 불편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소성으로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찾은 강서진이, 그가 싱글 웃는 얼굴로 제게 내뱉은 은근한 말이 그의 기분을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었다.
침묵 끝에 검설린은 강서진이 속삭이듯 내뱉은 말을 떠올리며 눈을 스륵 감았다.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
복수불반불. 이미 일은 엎질러졌으니 나와 손을 잡는 게 낫지 않겠나?
그리 말하는 듯한 강서진의 담담한 얼굴이 몹시 거슬렸다.
그러나 검설린은 강서진의 말이 사실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를 예전처럼 물리치지 못했다. 이미 조정에 찍힐 대로 찍혀 언제든 제거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그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나 ‘선수필승’이라는 말을 생각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저 강서진의 말을 못 들은 척 침묵을 지키며, 속으로 갈등할 뿐이었다.
바로 갑작스럽게 서문윤이 별채에 오기 전까지 일이었다.
‘웃기는군.’
시간이 흘러 검설린의 입술 사이로 조소가 흘렀다.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임을 그가 왜 모를까? 그러나 그는 일전에 그저 염증 탓에 병부를 버리고 낙향을 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검설린은 책임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저 자신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관직을 맡기에도 적절치 못한 인간이 대업이라….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불안한 상황을 막을 신뢰를 주기엔 강서진은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해법은 그에게만 있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지독한 선택을 할 만치 궁지에 몰려 있지 않다. 검설린의 눈이 순간 무섭게 빛났다.
원하는 것은 더러운 진흙탕에 더 이상 몸을 담구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소담한 욕망을 이루고자 할 뿐이었다. 터전을 잃고 홀로 떠돌아다니는 걸인 같은 삶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끝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
검설린 저 자신이 아닌 서문윤의 의지로 그의 끝은 이미 내정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서문린이나 강서진뿐만 아니라 검설린 그 스스로조차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확고히 마음을 다잡은 검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전각의 문을 열고 자리를 벗어나 자연스럽게 서문윤의 처소로 향했다.
조심스레 문을 여니 침상 위에 널브러진 서문윤이 있었다. 잠을 자지 않으려 노력한 듯 창문은 활짝 열어져 있고, 잠버릇이 없던 이가 침상 밖에 덜렁 손을 내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지은 검설린이 겉옷을 옷걸이에 걸고 침상으로 향했다.
아까 전에 저를 걱정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세상모르게 잠을 자는 서문윤을 바라보니 지금까지의 고민이 모두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검설린이 묵묵히 서문윤을 바라볼 때였다.
“으음.”
인기척을 느낀 듯 서문윤이 눈을 깜빡이다가 침대 곁에 선 검설린을 발견하고 아, 소리를 흘렸다.
“이러고도 네가 무인이냐?”
딱히 기척을 줄이지도 않았건만 지금에서야 눈을 뜬다. 조소를 흘린 검설린이 비몽사몽한 서문윤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아무래도 정계에서는 있어선 안 될 이였다. 제 눈에도 칼솜씨는 그럭저럭 쓸 만하게 보이는데, 그런 것치곤 허술한 부분이 이리 많이 보이니.
‘암살자라도 들이닥치면 목이 바로 따였겠지.’
무심한 얼굴로 그가 서문윤을 빤히 바라볼 때였다.
“괜찮으십니까?”
졸린 눈으로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한 말을 듣고 검설린은 그 순간 입가에 자연스레 서리는 미소를 지우며 부러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변화는 아직 익숙지 않았고, 그는 아직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자주 감정을 숨기곤 했었다.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던 검설린이 고민 끝에 손을 뻗었다. 서문윤의 이마에 아주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올리며 그는 서문윤의 살갗에 닿고 싶은 마음을 충족시킨 것이었다. 스치듯 그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그가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일 여기를 떠나자.”
손바닥을 타고 오르는 온기가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는 것만 같아, 그는 어느 순간부터 긴장을 풀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서문윤이 데굴데굴 눈을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이제 충분해. 강소성에는 내가 필요한 사람도 없다.”
단언하며 하는 말에 의미심장한 기색이 있었다.
그는 환자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서문윤은 잠시간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미소가 자리한 그의 얼굴에는 지우지 못한 짙은 과거의 흔적이 있었다. 고민하던 서문윤은 이윽고 손을 뻗어 이마에 닿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곤 차갑게 식은 손을 주물거렸다.
평온한 목소리가 흘렀다.
“의형 뜻대로 하십시오.”
검설린의 얼굴이 녹는 듯이 풀린 순간이었다.
“……이곳에 다시 오자.”
그리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이 서문윤의 손아귀에 있는 제 손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언제 나를 놔줄 거냐 묻는 듯한 빤한 시선에 서문윤은 작게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같이 자요.”
“오늘은?”
검설린의 눈썹을 꺾게 한 말이었다. 서문윤의 본가에 들어온 이후 그들은 다른 처소를 배정받았으나, 단 하루도 침상을 따로 쓴 적이 없었다.
말없이 웃는 서문윤을 눈앞에 두고 검설린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 * *
날이 밝았다.
검설린은 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미리 꾸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상에 팔자 좋게 늘어진 서문윤이 깨지 않게 조용히 행낭을 꾸리던 그는 채비를 갖춘 후에 조심스럽게 처소를 나갔다.
할 일이 많았다.
“정말로 이렇게 하시려는 건가요.”
먼저 찾아간 것은 서문린의 처소였다.
“제가 언제 명공께 이리 간절히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 청탁을 한 적이 있습니까?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당신과 함께하기엔 윤아는, 윤아는….”
굳은 얼굴로 말을 하던 서문린이 어느 순간 힘없이 중얼거렸다.
“명공, 윤아는 제 장남입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내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이지. 제멋대로 나를 살리고 저와 함께 살아가자 당돌하게 말하던.”
서문린의 입술이 다물린 순간이었다.
세가에 그가 도착한 후, 하루도 빠짐없이 검설린을 찾아가 애걸했던 서문린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위험하단 것을 잘 알기에, 검설린이 폭풍의 눈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아비는 아들을 위해 그들의 의지를 거스르려 했다.
그리고 검설린은 그런 서문린을 그 옛날처럼 차갑고 고압적인 모습으로 물리칠 뿐이었다.
잠시간 서문린이 옛 상관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고 존경하지 않았던 적이 없던 그는 항상 감정을 숨기고 다녀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윤아가 그러더이다. 명공께서 제게 몹시 미안해하고 계시다고.”
그리고 그런 그가 제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문린은 놀라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항상 싸늘함만이 가득한 그가 제게 미안함을 느껴?
그리고 이어진 서문윤의 말에 서문린은 잠시간 할 말을 잃은 채 침묵에 잠기고야 말았다.
“그는 아버지의 생각보다 나약한 사람입니다.”
번뇌를 짊어지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나약한 사람.
“그래서 제가 지켜줘야만 해요, 아버지.”
그런 말을 내뱉었다, 서문윤은.
회상하는 서문린의 얼굴에 어느 순간부터 힘없는 미소가 흘렀다. 그 미소를 눈앞에서 응시하는 검설린의 얼굴에 드물게 동요의 빛이 스쳤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네게는 할 말이 없다.”
침묵 끝에 검설린이 잠긴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미안한 마음마저 내보이기 싫어 부러 싸늘하게 사람을 대했다. 그리고 지금, 숨겨왔던 마음을 들키곤 검설린은 드물게 죄책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서문린은 그 말에 담긴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든 서문린이 투명한 검은 눈을 내리깐 검설린을 바라보며 잠시간 침묵했다.
“이전의 일은 미안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단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어느 순간 서문린의 얼굴이 마음을 다잡은 이 특유의 담담한 것으로 변모해 있었다. 인정한 것인가? 아니면 체념한 것인가. 어찌 되었건 서문린은 더 이상 검설린을 설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윤아를 지키겠노라고.”
그 말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내가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내야 하나? 그래,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건방진 놈을 지킬 거야.”
실소하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린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거면 족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검설린은 매정하게 몸을 돌려 문밖을 나섰다.
* * *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남은 1년 동안은 이청융의 말을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검설린은 운씨세가 상단 강소성 지부에 방문하여 운표선이 제공해준 의기구를 챙기고, 청매소를 받아 왔던 것이다.
<1년 후에 너는 어떻게 할 거지?>
“…….”
그리고 그 과정에 전달받은 오랜 벗이 보낸 서신은, 1년 후의 검설린의 거취를 묻고 있었다. 그 말은 검설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거리를 걷는 와중에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야멸차게 답했다.
‘1년 후의 일을 왜 지금 나보고 묻지?’
강서진이고 운표선이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어.
검설린은 그저 평온한 삶을 원할 뿐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정녕 그의 소중한 일상을, 그가 바라는 미래를 앗아가려 든다면 그때야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 아닌가?
그저 남은 1년은 지난날과 다름없이 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지?’
그는 일상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세외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부귀영화나 권력, 복수보다는 그저 남들과 같은 평온한 삶을 바랄 뿐이다.
그리 생각하며 검설린은 묵묵히 거리를 걸어, 서문세가로 귀환했다.
* * *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장한성에 있을 때보다 더 피로한 듯했다. 요즘 들어 고민이 많아져 검설린은 초췌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던 와중에 받은 편지에 마음이 동요하여, 검설린은 또다시 피곤한 얼굴로 문턱을 밟고 있었다.
강소성은 역시 재수가 더러운 곳이다.
‘빨리 이곳을 떠나야지.’
그런 마음으로 검설린이 문율 열며 중얼거렸다.
“서문윤.”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설린이 고개를 들어 방 안을 살폈다. 침상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검설린이 싸놓은 목함이 탁상 위에 있었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행낭이 싸다 만 상태로 침상 위에 널브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서문윤?”
목소리에 불길함이 서려 있었다.
강소성은 강서진, 그 독 오른 늑대가 군주처럼 군림하는 곳이다.
그 순간 불안함이 치밀어 오른 검설린이 굳은 얼굴로 당장 처소를 박차고 나가 서문윤을 찾았다.
“서문윤!”
복도를 가로지르며 검설린이 서문윤의 처소 이곳저곳을 뒤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작 한 시진이었다. 그가 밖으로 나간 시간은.
그러나 검설린은 도저히 안정을 찾지 못했고, 넘어갈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며 미친 사람마냥 서문세가 곳곳을 쏘다니고야 말았다.
“서문윤! 서문… 이런 제기랄!”
그리고 그의 불안은, 아무리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는 서문윤에 더욱 증폭되어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야 말았다. 별채에도, 정원에도, 검설린의 처소에도, 심지어 안채에도 서문윤은 보이지 않았으며 하인에게 물어도 그의 행적을 아는 이가 없었다.
서문세가 전체가 뒤집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명,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소식을 듣고 뛰쳐 온 서문린이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떠는 검설린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 넓은 서문세가를 아무리 뒤져도 서문윤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은 그를 크나큰 두려움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는 말없이 서문윤이 사라진 침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사태를 깨달은 서문린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우짖는 목소리로 그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비난을 듣는 검설린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지켜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를 지켜준다 한 게 바로 한 시진 전의 일입니다!”
미친 듯이 소리 지르던 서문린이 어느 순간 아아 소리를 흘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비틀거리며 쓰려지려는 아비를 뒤늦게 달려온 두 남매가 비명을 지르며 부축했다. 하인들은 저마다 허둥지둥 세가 안을 돌아다니며 사라진 대공자를 찾고 있었고, 그 아수라장이 된 공간 속에서 검설린은 서문윤이 방금 전까지 자리했던 침상을 노려보며 자리하고 있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부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저택을 쩌렁하게 울리는 흉험한 목소리였다.
“……강서진, 이 개자식이!”
격노한 사내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지고, 화를 참지 못한 검설린이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자리하지 않은 어느 한 방향의 허공을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았다.
강남동도 안찰사의 치소가 자리한 곳이었다.
* * *
뚝, 뚝.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흘렀다. 뒤로 손이 결박당한 채 몸을 웅크린 청년이 살갗에 닿는 차가운 물방울에 몸을 움찔하다가, 이윽고 숨을 멈추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귀에 들려온 탓이었다. 딱히 인기척을 감출 생각이 아닌 듯 그 숨소리는 서문윤의 귓가에 고스란히 와 닿고 있었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제 귓가에 닿는 목소리에 몸을 흠칫하고야 말았다.
“일어난 거 다 알고 있느니라.”
중후한 목소리.
그 순간 몸을 움찔한 서문윤이 결박된 손을 오므리며 눈을 위로 치켜떴다. 어둠 속에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곳에는 사람의 형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누, 누구?”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눈치를 보는 서문윤의 귓가로 작은 실소가 귓가에 들리고, 연이어 덤덤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듣던 대로 호기심이 많군.”
그 순간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목소리는 그가 서문윤을 알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어제 그 소란이 일었는데도 무방비하게 나를 따라올 정신이 있어? 정말 어이가 없구나. 더군다나 이런 시국에서.”
납치를 해놓고선 사람을 꾸짖어?
묘한 표정을 지은 서문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구십니까.”
어둠 속에서 의자에 앉은 인형(人形)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의 가장 큰 적이니라.”
* * *
본래 뿌리 깊은 무가인지라 서문세가에는 무술이 뛰어난 문하생들이 보초를 서곤 했다. 경계가 삼엄한 서문세가에 외부인이 들락거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검설린 또한 그에 안심하곤 밖을 오갔던 것이다.
한 지역의 뿌리가 깊은 명가란 쉽게 손을 댈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럴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평가받는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검설린을 방관하고 있었다.
‘누구?’
그리고 그렇게 안심하던 검설린의 뒤통수를 치고 짐을 싸고 있던 서문윤이 돌연 서문세가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바로 누군가의 꾐에 의해서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창문 밖에 자리한 인기척을 느끼고 서문윤이 경계를 돋우며 말을 내뱉었다. 하인인 줄 알았는데 안을 살피는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 인기척이 문 앞에서 멈추어 선 것을 깨닫고 굳은 얼굴로 탁자에 올려놓은 검을 쥐어야만 했다.
‘대낮에 습격이라?’
그의 의형이 적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장에 검을 움직일 준비를 하던 서문윤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동궁사변의 내막을 알고 싶으면 오거라.”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강소성주가 팔기린에게 꾸미는 음모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나를 따라와.”
그 말에 소름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끼며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침묵 끝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누구십니까?”
답은 없었다.
서문윤은 연기가 흩어지듯 사라져가는 인기척을 느끼며, 얼어붙은 자세 그대로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동요가 얼굴에 스치고, 초조함이 침을 마르게 할 때였다.
망설이던 서문윤이 입술을 질끈 물고 문을 열어 재꼈다. 문을 열고 고개를 둘러보던 서문윤은 저 멀리 보이는 옷자락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보일락 말락, 닿을락 말락 한 사내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바로 인기척이 드문 서문세가의 후미진 뒤뜰이었다.
“전 태자친훈익위낭장 서문세가의 서문윤.”
그리고 서문윤은 면사가 붙은 흑립을 푹 눌러쓴 사내와 마주하고 몸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그는 살기도 투지도 뿌리지 않은 채, 그저 곧은 자세 그대로 덤덤하게 서문윤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경고한 것마냥 몸에 긴장을 세우며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팔랑거리는 면사 사이 고요한 눈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고수.’
침묵 끝에 서문윤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그리고 침묵을 깨고 사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거지?”
그 순간 서문윤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은은한 바람이 부는 때였다.
당황한 서문윤이 긴장을 흐트러트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말없이 서 있던 사내의 몸이 돌연 움직였다.
“…?!”
서문윤은 갑작스럽게 저를 노리는 검을 눈치채곤 황급히 몸을 움직였으나, 세 수를 견디지 못해 검을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크게 뜬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그가 경악에 휩싸였다.
‘무슨, 무슨 속도가?!’
분명 그는 손도 늘어트리고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몇 장은 떨어진 거리에서 단숨에 제 앞을 점하고 있다. 가공할 만한 속도는 체중에 더해 서문윤의 검을 육중하게 짓누르고 있었으며, 서문윤을 위협하고 있었다.
묵직한 검을 견디지 못한 서문윤은 결국 비틀거리며 몸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몸이 닿는 순간 그가 헛웃음을 흘리곤 속으로 생각했다.
‘난 분명 무과에서 급제를 했는데.’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황궁을 벗어나고부터 매번 고수만을 만나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제기랄, 어디 가서 검 좀 쓴다 자랑도 못 하지.’
그러곤 그는 목덜미에 이어진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후에 이어진 것이,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 * *
그러니까, 저자가 뭐라는 건지.
“너의 가장 큰 적이니라.”
그 말을 듣고 서문윤은 미처 바로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아?”
거두절미하고 ‘제게 가장 큰 적’이라 칭하는 노인에게 그가 무어라 말을 할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해 기절하고 일어나, 강서진에게 납치를 당한 줄 알았다. 코끝에는 퀴퀴한 냄새가 있어 창고나 지하감옥인 줄 알았고, 인기척이 많지 않아 저가 비밀리에 신변을 구속당한 것을 알 수 있었으니.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가 사람들 몰래 서문윤을 가두었음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뜬 서문윤의 앞에 보인 것은, 뜻밖에도 먹물냄새가 짙게 묻어 나오는 청수한 인상의 중노년 문인과 단정한 인상의 사내였다.
서문윤이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허, 중환! 저 얼빠진 표정 보게나.”
노인이 웃으며 옆에 자리한 호위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을 내뱉었다.
“팔기린을 움직이게 만든 놈이라 하더니만, 완전히 햇병아리구나! 어제 걸음마를 뗀 것이냐? 어수룩하기도 저리 어수룩할 수 있나. 정신 좀 차려라, 이놈아! 호랑이가 물고 가겠다, 쯧.”
“예?”
“나름 위험을 감수하고 왔는데, 맥이 다 빠지는군.”
노인의 말에 서문윤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손주를 대하는 할아비처럼 평온한 목소리라니?
납치를 하고선 내뱉는 말 치고는 친근하기까지 한 말이다. 게다가 제 목 뒤를 친 사내는 긴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태평할 뿐이었으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얼이 빠져 침묵하던 서문윤은 뒤늦게야 노인이 내뱉은 단어의 파편 속에서 나름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위험을 감수한다면… 강서진과는 관련이 없는 자다.’
안찰사가 병권과 군행수권을 지닌 절도사에 비해 영향력은 떨어지지만, 강남동도에서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강남은 자고로 대당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곳이었고. 그곳의 부유한 호족은 대가 세어 관료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당금의 안찰사, 강서진은 그런 그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강남동도에서 군주처럼 군림하고 있는 이였다.
그런 그가 저가 지배하고 있는 강남동도에서 서문윤을 빼내기란 사실 식은 죽을 먹을 만치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상대하시는 분들보단 순수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들은 누구지?
머리를 굴리던 서문윤이 이어진 노인의 말에 몸을 흠칫했다.
“조정에 있는 놈들과 비교할 텐가? 그들에 비하면 안록산도 순백한 놈이야.”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까.”
질겁하며 하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서문윤의 등골에 소름을 돋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고작 말을 듣는 정도로 나를 어찌할 사람이면 그따위 말이 아닌 더 좋은 명분으로 나를 옭아맸겠지.”
그 담담한 말은 오만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따위 말이라니!’
안록산은 전대의 반역자였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라 나라를 반으로 갈라놓은 위인. 지금의 난세를 만든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언급만 해도 사람들이 치를 떨고 조정이 그자의 뼈를 발라먹으려 하는 역적이었다.
그런 자를 조정 관리와 비교하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모한 순간이었다.
그따위 말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노인의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있었다.
침묵 끝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노야께서는 누구십니까?”
그 말에 서린 것은 삼킬 수 없는 긴장이었다.
호위를 바라보며 쓸데없는 말을 하던 노인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려 바닥에 널브러진 청년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노인은 서문윤을 심유히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호위는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저보다 머리 한 통 반은 작은 듯한 조그마한 노인이었음에도, 서문윤은 그의 시선이 버겁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분명 살기는 없는데.’
창백해진 서문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살기는 섞여 있지 않는, 글을 읽는 자 특유의 차분하고 덤덤한 시선일 뿐이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망망대해 같은 차분하고 고요한 눈이 부담스러웠다. 새까만 눈은 어쩐지 영혼을 꿰뚫는 듯했으며, 눈앞에 선 사람을 항복시키는 듯한 자연스러운 권위를 품고 있었으므로.
부담감 속에서 서문윤이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9년 전, 사람들은 그 참변의 뒤에서 내가 웃고 있으리라 말을 했다.”
침묵하던 노인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 순간 스치는 무거운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덤덤했던 노인의 목소리가 진중해지고, 웅크렸던 허리가 펴지는 순간 서문윤은 제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노인의 눈은 허공을, 혹은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호위의 얼굴이 희미하게 구겨진 순간이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 참변에 내가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결코 그 피바람을 의도하지 않았어. 사람이 죽고 죽이고 부자와 형제가 서로를 고변하는 상황 속에서 내가 웃을 것 같으냐? 내가 원한 것은 천하가 웃는 광경이었다. 인의도 뭣도 남지 않은 그 상황 속에서 내가 피 묻은 주춧돌을 밟으며 홀로 웃었을 것 같으냐.”
말은 끝으로 갈수록 허무함을 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 문단에 이르러 어느 정도 노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강서진이 아니라면, 저가 아는 의형의 적은 단 하나다.
서문윤의 얼굴이 그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말은 느릿하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내가 권세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아니야, 나는 지금껏 조정에 입사할 때의 다짐을 잊지 않고 있어.”
침묵 끝에 울리는 말에 서문윤은 결국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날을 후회하고 있지. 비록 아무도 나를 믿지 못하겠지만.”
회상을 하는 노인의 얼굴에 아련함이 번지고 있다. 과거를 후회한다는 제 말처럼 쓸쓸함이 짙게 묻은 얼굴에는 후회와 고통이 희미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인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했다.
‘저자는….’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데 어찌 저 노인을 동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런 자비로운 마음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럴 깜냥도 되지 못했다.
“노야의 성은 혹시 고 씨입니까?”
말을 내뱉는 서문윤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요를 지운 청년의 덤덤한 얼굴을 바라보며 노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너는 내가 잘못했다고 보느냐?”
“저는….”
“그만, 답을 원하고 물은 게 아니다.”
노인의 얼굴에 그 순간 냉소가 스쳤다.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하겠느냐. 너희에게는 나는 악당이고, 나라를 혼란하게 만든 주범이겠지. 틀린 말도 아니야.”
노인은 담담한 웃음을 흘리며 서문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의 가장 큰 적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말이야. 그놈에게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아니라 말하기도 면한 일 아닌가?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지.”
“…….”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야.”
그의 말을 묵묵히 듣던 중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합니까?”
답변은 고민 없이 바로 흘렀다.
“내가 너를 강제로 이 창고에 데려와, 너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나?”
노인의 눈이 기묘하게 반짝거렸다.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숨을 멈추다가, 그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예, 노야.”
창고에 울려 퍼지는 선명한 목소리에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호위가 흘끗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중 희미한 동요의 빛을 드러냈다.
“중요한 게 더 있다고?”
“노야께서 하신 말씀이 제겐 가장 중요합니다.”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노야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게 동궁사변의 비사를… 신의, 아니 팔기린을 향한 음모를 말씀해주신다면서요.”
그 말에 노인은 한동안 입술을 다물고 말을 내뱉지 못했다.
침묵이 잠시간 흘렀다.
서문윤은 그 시간 동안 노인의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서문윤을 관조하는, 혹은 해체하는 눈으로 살폈으며 무언가 깊은 사유에 빠진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이 나라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뜻이라면 자연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가 제 의형의 오랜 적이요, 저를 납치한 입장이라면.
그리하여 서문윤의 얼굴에 긴장이 스며들 때였다.
“왜 그랬나?”
창고를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하고 고개를 들었다. 준엄한 노인의 눈이 서문윤을 차분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중환을 따라왔느냔 말이다.”
노인의 말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뻔한 함정이다. 태자의 휘하에 있었으면서 그를 모른단 말이냐. 왜 넌 중환을 따라왔지? 왜 위험을 감수하고 그리 행동했지? 그가 너보다 강한 이임을 몰랐던 거냐? 서문세가가 네 그 수많은 적들에게서 너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거냐? 너는 정녕 어리석은 게냐? 아니면 오만에 차 있던 건가.”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게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화제란 말인가?
그러나 서문윤은 저를 꿰뚫는 듯한 눈빛에 굴복하여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모두가 아닙니다. 제게는 목숨보다 그가 제게 한 말이 중했습니다, 노야. 제게 그에 대해서 알려주겠노라는 말이 제게 두려움과 의심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그는 확연한 의지가 자리한 눈으로 노인, 아니 고우군을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노야,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실 건가요?”
대당재상 상서령 고우군!
수십 년 전 동서대란을 일으켜 서학을 몰아낸 자. 유서 깊은 관롱집단을 몰아낸 유자들의 정신적인 기둥. 30년이 넘도록 대당을 지탱한 기둥이며, 동시에 조정을 혼탁하게 만든 자.
검설린의 가문을 박살냈으며, 또 그를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몰아넣은 자.
그리고 동궁사변의 유력한 배후 중 하나로 의심받는 이.
바로 제 앞에 자리하고 있는 청수한 노인의 정체였으며, 저를 납치한 이의 정체였다.
저와 의형에게 적의를 드러낼 이는 많겠지만, 강서진의 눈을 피해 저를 납치할 만한 이는 생각해보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의형의 원수.’
시선은 차분했으나 서문윤은 결코 그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검설린의 인생을 파멸시킨 장본이었으므로. 게다가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검설린의 가장 큰 적이었다.
서문윤의 시선을 묵묵히 받던 고우군이 어느 순간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서문윤은 손이 묶인 상황에서도 바른 자세를 유지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느릿한 말이 흘렀다.
“네가 죽으면 팔기린이 멈출까?”
서문윤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너란 사람 하나 때문에 틀어진 일이 몹시 많지. 조정을 이끄는 중신으로서 나는 너를 싫어할 수밖에 없단다, 얘야.”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신이 저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창백해진 서문윤을 바라보며, 노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어쩌면 좋겠느냐?”
그리고 서문윤은 기나긴 침묵 끝에 입술을 열어 노인의 말에 답했다.
“노야, 그러지 마세요.”
놀라울 만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우군은 그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청수한 얼굴에 의문이 스친 순간이었다.
“그러지 마라?”
“이미 그분께서는 많은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더 이상 그를 비통하게 하지 마세요.”
유자들에게 익숙한 것은 읍소나 탄원이 아닌 언쟁이었다. 제게 돌아온 부드러운 말에 순간 당황한 고우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노야, 저는 가진 게 없습니다. 노야의 손에 스스로를 지킬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저 노야의 마음에 제 마음이 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손자뻘이 될 만한 청년의 간절한, 그러나 비굴하지 않은 읍소에 고우군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내게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읍소하려는 것이냐.”
말은 물 흐르듯이 흘렀다.
“제가 더 어쩌겠습니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진심이라 믿을 뿐입니다.”
그 순간에 고우군이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더 그를 몰아세우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아예 그를 해치려는 상황이면 모를까, 고우군은 미래의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래서 운표선 그놈이 내게 그리 말했던가.’
대하기 지극히 쉽고 또 지극히 어려울 거라,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했던 사내를 떠올리며 그가 쓰게 웃었다. 서문윤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묵 끝에 고우군이 느릿하게 입술을 떼며 말을 내뱉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하려면 너부터 네 몸을 챙기는 것이 좋을 거다. 이리 경계심이 없으니 강서진이 그대로 보쌈해 가도 모르겠군.”
쓴웃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그리고 팔기린을 적대하지도 않을 거다. 너를 어리석다 탓을 하려면, 먼저 내 스스로의 뺨을 쳐야겠지. 그래, 서문 공자! 나의 진심을 말하지. 이 늙은이야말로 그대와 팔기린에게 읍소하러 왔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팔기린이 조정에 복귀해줘야겠어.”
덤덤한 말이 우중충한 창고 안을 묵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