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망향(望鄕)(1)
강소성은 전통적으로 오라고 불리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강남동도이고, 지역에 강남동도 안찰사 강서진의 치소가 있어 그가 직접 관할했다.
춘추시대에 이르기까지 중화 개념에 편입되지 않았던 이 오랑캐 땅은, 회하가 가로질러 땅이 기름졌고 물산이 풍부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 이곳은 중화에 편입되었으며, 사람들에게 중히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 오랑캐의 땅이었냐는 듯이 번화하여 중원의 문화를 선도했다.
강소성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귀하였고, 농민들은 문화생활에 힘을 쏟을 여유가 있다. 사람들은 상업에 종사했으며,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장신구와 옷을 선호하여 장인이 우대받았다. 문화 또한 개방적이라 여인들은 얼굴을 내놓고 돌아다니길 거리끼지 않았으며, 남녀 간 교류가 자유로웠다.
그런가 하면, 이곳의 호족들은 그 옛날 흉험했던 선조를 닮은 것마냥 호전적이기도 했다. 당금의 기조는 문을 숭상하는 것이었으나 강소성에서는 문재(文才)보단 무재(武才)가 많이 났던 것이다.
음서(관료인 선조의 자손이 추천을 받아 관직에 출사하는 제도)가 등용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므로, 그리하여 이곳에 대대로 무관으로 출사했던 명문무가가 많았다. 문에 종사했던 중원 강북의 호족이나, 관롱 집단과는 다른 경우였다.
그리고 회하 하류 버드나무가 우거진 곳에 자리한 서문씨 일가는, 그런 명문세가 중에서도 손꼽힐 만치 역사가 깊은 무가였다.
주공단의 혁명에 동참한 서문창, 월왕 구천을 보필한 서문백, 개국공신이었던 서문중수 같은 사서에 이름이 남을 영웅에서부터 횡새군사의 위에 올라 북벌에 공을 크게 세웠던 현 서문가주 서문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잊을 만할 때쯤이면 이름난 무관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문린은, 그의 자식들을 당연하게 무관으로 키웠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를 몹시 후회했다.
음서가 아닌 과거에 급제하여 황궁 무관이 되곤, 차근차근 출셋길을 밟던 그의 자랑스러운 장남이 어느 날 다리가 부러져 낙향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서문린은 몹시 슬퍼했으나, 빠르게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저보다 더 절망할 아들을 다독이며 달래줘야만 했으니까. 서문린은 서문윤이 더 이상 출사할 수 없는 것을 탓하지 않았다. 비록 한 발을 못 쓰더라도 제 곁에 온전히 자리한다면 그로 만족한다. 그런 아비의 마음으로 서문린은 아내와 함께 서문윤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의 예상보다 더욱 절망했고, 그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윤아를 무관으로 키워 그 애가 마음이 크게 다쳤구나.”
그리 한탄하며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아들이 삶을 비관하여 안 좋은 선택을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2년 동안 강소성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서문린의 시름은 커져갔다.
어째서 연통조차 하지 않나 원망을 알음알음 키워나갈 때의 일이었다. 오래된 붕우에게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편지가 전해진 것은.
“윤아가 어찌 그곳에 갔단 말이야? 어찌하여.”
“아버님.”
그것을 읽은 후 서문린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윤아, 어째서 이런 편지를 보낸단 말이냐. 네가 어찌 아비보다 먼저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어.”
갑작스럽게 변란이 일어난 장한성에 자리하고 있단다. 갑작스럽게 신의의 제자가 되어 있단다. 그로 인해 다리를 고쳤단 것은 기뻐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으나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을 자식을 생각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황재천은 서문린에게 일부러 검설린의 얘기를 쓰지 않았고, 서문윤 또한 말을 뭉뚱그려 썼기에 서문린은 자세한 사정을 모른 채 그저 마음만을 애태울 뿐이었다.
“아버님, 고정하소서.”
“윤아, 윤아.”
“아버님. 형님은 꼭 살아 있을 겁니다.”
“오라버니는 꼭 돌아올 겁니다. 오라버니가 우리에게 얼굴 하나 보여주지 않고 만리타향에서 떠날 리 없잖습니까?”
자식들은 그런 서문린을 말렸으나, 서문세가에는 항상 그을음이 졌고 서문린의 얼굴에서는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자식 없다지만, 올바르게 큰 장남을 유독 자랑스러워했던 서문린이었다.
“아, 다 나의 잘못이다.”
그리고 그는 종국에 사변에 먼저 떠나보낸 동료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들을 구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기에 이르렀다. 자손마저 끊긴 그들 생각에 이르러, 서문윤의 화가 변란 속에서 그들을 구하지 못한 제 업보가 아닐까란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서문린은 누명을 쓴 이들을 두둔한 몇 안 되는 용기 있는 이였으나, 그럼에도 그리 불안해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두려움이 깊어져 병화에 이르기 직전의 일이었다.
“가주, 가주님!”
슬픔에 사로잡혀 어두운 얼굴로 서재에 틀여박혀 병서를 묵묵히 읽던 서문린은, 고개를 들어 소란을 일으킨 시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문을 박차고 제 방 안으로 뛰쳐 들어온 하인의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다.
가주의 서재는 본디 안사람마저 들어올 수 없는 중요한 공간이다.
다른 호족이라면 멍석말이를 시켰을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천성이 온화하고 자애로운 서문린은 그의 행동을 굳이 탓하지 않았다. 그는 병서를 닫고 잠긴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하인은 몇 번을 숨을 헐떡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대, 대공자가!”
서문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모한 순간이었다.
“윤아!”
비명을 지르며 그가 미친 듯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그는 실성한 사람마냥 서문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아들을 찾았다.
그리고 대문 근처에 자리한,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다갈색 머리칼의 청년을 눈에 담고 그는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아버님.”
그 말이었다, 서문린의 몸을 비틀거리게 만든 것은.
“윤아야, 이 무심한 것아.”
탄식을 내뱉곤 서문린은 한참을 서문윤의 몸을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연통도 없이 아비의 마음을 찢었던 아들 또한 해후의 기쁨에 사로잡혀 두 눈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울 뿐이었다. 한바탕의 소란에 조용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조용하던 서문세가가 웅성일 무렵이었다.
“윤아, 윤….”
이성을 잃고 아들의 뺨은 어루만지던 서문린은, 어느 순간 서문윤이 흘끔 눈치를 보는 인물의 존재를 깨닫고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그는 그제야 편지에 써져 있던 은인의 존재를 상기할 수 있었다.
‘다리를 고쳐주었다고?’
비록 귀한 아들을 사지로 끌고 간 존재였으나, 원망하기 이전에 그는 아들을 살린 이였다.
“귀인께서 빈한한 집안에 방문해주시… 헉?”
그리고 그는 대문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사내와 마주하고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서문윤이 그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서문린은 그러나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해후의 기쁨도 그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넋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명, 명공(明公)?”
한참 후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경악의 말이었다. 그리고 하인들 사이로 잠시간 놀라움의 물결이 술렁거렸다.
저 사내가 공위를 받았다고?
명공은 고관대작을 뜻하는 존칭이었다. 뜻밖의 말을 들은 하인들 사이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갈 때, 사내는 대문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곤 서문린을 향해 머뭇거리며 말했다.
“…서문린.”
그 사내를 서문린이 모를 리 없었다.
서문린은 얼어붙어 한참을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새하얀 옷으로 몸을 둘둘 싸매고 있었으나, 사내는 한때 저가 모셨던 이였다. 한때 그는 병부의 모든 이들이 믿고 따르던 이였고, 사람들의 희망으로 불리었다. 수많은 이들을 구하고 민중의 영웅이 된 자.
그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홀로 떠난 비운의 사내.
…그런데 어째서 그가 이 자리에?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더듬거리며 내뱉은 말에 사내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서문세가 대공자, 서문윤이 다리를 다치고 실종된 지 2년 만에 서문세가로 귀환한 날이었다.
* * *
대문에 사람이 많이 모여 그들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잊을 만큼의 충격을 받아 넋을 잃은 서문린을, 서문윤은 집 안으로 이끌어 그들에게 해후의 기회를 주었다. 부자지간의 해후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러기엔 조금 복잡한 것이 아닌가?
검설린과 조정의 관계는 묘했고, 서문윤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를 회피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배려로 둘만이 남은 자리.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로 시작한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검설린은 사견을 제외한 건조하기까지 한 말로 그간의 일들을 말했으나, 그간의 일들이 짤막하게 설명하기에 무리가 있던 탓이었다.
특히 서문윤을 만난 이후의 2년은 그가 없었던 7년의 세월보다 더 많은 말들을 필요로 했다.
묵묵히 말을 듣던 서문린은 한숨을 짤막하게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 살아오셨군요.”
무거운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검설린은 그의 말에 탁자에 내려놓은 찻잔을 바라보며 작게 조소했다. 차를 즐겼던 검설린은 북성신의로 살던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내밀었던 술과 차를 거부했다.
오랜만에 찻물로 입술로 축이고, 그는 코끝을 찌르는 청아한 향에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9년 만에 입에 담은 귀품의 차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고, 마치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설린의 입으로 퍼져 나갔다.
너무나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옛 동료 앞에서, 너무나 오랜만에 비단 방석 위에 앉아, 너무나 오랜만에 차를 마시는 기분이란.
고아한 향을 맡으며 그가 눈을 내리깔 때, 서문린이 그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명공.”
찻잔을 덮는 그의 손이 멈칫했다. 검설린이 고개를 들어 올려 서문린을 바라볼 때 그는 진실로 검설린을 연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실로 그를 걱정하는 듯 그는 미움도, 분노도 없는 그런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서문린은 그의 얼굴에 찻잎이 물에 우려지듯 퍼져 나가는 복잡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 순간이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죄인이 어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죄지은 자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어째서 명공께서 죄인이십니까? 명공께선 저희의 영웅이었습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덤덤히 답했다.
“너희를 버리고 떠났다.”
그 말에 무어라 다급히 답변을 하려던 서문린은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꼭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쓸쓸한 가을바람이 불어 있었으므로, 그 진한 회한으로 물든 얼굴에 입술을 깨물고야 만 것이었다.
검설린은 그저 서문린의 과분한 말에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에 버리고 도망친 영화를 파편이나마 접하며, 검설린은 그것이 의복처럼 몸에 맞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가슴 한켠에 제가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몸에 퍼져 나가는 그윽한 향이 숨통을 조일 때, 검설린은 긴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원망하지 않느냐?”
그의 말에 서문린은 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 특유의 온화한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제 업이 현실을 조이기 때문이다.
검설린은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항상 그는 그날의 선택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비겁했던 제 행동을 수치로 여겼다. 검설린은 그때 목숨을 무릅쓰고 사람들의 구명을 외쳤던 서문린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그의 앞에 선 지금 검설린은 과거의 잘못의 무게를 느끼며 입가에 흐르는 억눌린 신음을 삼킬 뿐이었다.
“원망을 하는 이들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문린이 느릿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병권을 지니고 있었고, 세 차례의 북벌의 끝에 지나치게 많은 명성을 쌓았으므로, 황제의 숙청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를 중재할 태자가 세상을 떠난 후 군부의 수장인 당신은 무책임하게 병부를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
“당시 태자를 고변한 것은 수하들의 구명을 위함이었으나, 막상 입지를 되찾은 당신은 황제에게 환멸을 느끼고 낙향했습니다. 구심점이 사라진 우리가 쉬이 무너진 것은 당신이 없었던 탓이요, 황제와 고 승상이 눈치를 보지 않은 것도 당신의 탓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당신을 아예 원망치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날의 우리가 느꼈던 마음이란.
서문린은 그 암울했던 날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를 앞에 두곤 검설린은 그가 내뱉는 날카로운 말들을 그저 받았다.
그리고, 서문린이 숨을 삼켰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신을 존경하였기에, 당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렷하게 내뱉는 말.
그날에 비겁하지 않았던 자가 내뱉는 비수 같은 말이다. 검설린은 심장에 비수가 찔리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때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검설린의 눈이 뜨인 순간이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서문린을 향했다.
청수한 중년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아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흐른 고요한 말들.
“어찌 제가 당신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변경에 자리한 장수들이 난리에 휘말릴까 두려워 지우지기를 고변했습니다. 병부에서 당신의 성품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
“그간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습니까?”
검설린의 숨이 떨려왔다.
“그간 얼마나…… 스스로를 책망하며 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서문린의 눈에는 자애가 있었다. 탄식이 있었다. 연민이 있었고 사람의 정이 있었다. 검설린의 숨이 멈췄다.
“속죄를 원하며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의원의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다 들었습니다.”
“…나는 그런 숭고한 마음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오로지 행동만이 마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
“명공.”
“…….”
“감히 제가 수많은 당신의 옛 동료들을 대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럴 자격이 제게 있다면…….”
“…….”
“당신을 용서할 겁니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를 악문 사내의 턱이 떨렸다. 동요를 삼키는 사내의 얼굴에는 격정의 파편이 스치고 있었고 그를 마주하는 이의 얼굴은 훈풍이 불 뿐이었다.
격동을 품은 침묵이 이어졌다.
검설린은 한참을 말이 없었고, 그저 허망한 얼굴로 서문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서문린의 입가에 번져 나가는 불상을 닮은 자애로운 미소.
그의 온화한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익숙한 청년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탄식하는 듯 그의 입술 사이로 흐른 말이었다.
“……그 애는 역시 너를 닮은 거였구나.”
그 순간 검설린의 두 눈에 언뜻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서문린은 그러나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아!” 탄식을 흘릴 뿐이었다.
“아, 맞아. 그를 물어보는 것을 잊었습니다.”
검설린의 입에서 친근하게 거론된 아들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황재천과 서문윤의 편지는 모호했고 서문린은 그간 마음을 졸이며 애태우곤 했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검설린의 정체에 서문린은 무수히 많은 궁금증을 앓고 있었다.
“그 일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윤아와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어찌 그 아이가 명공의 곁에 있었습니까? 명공께서 그 아이를 돌봐주신 겁니까? 다리는 명공께서 고쳐주셨다 들었습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
“이제는 명공이 아니다.”
그리고 검설린은 빠르게 쏟아진 서문린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서문린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하오나.”
무어라 말을 하려는 서문린을 검설린은 한숨을 내뱉으며 막았다. 잠시간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텁텁한 말이 흘렀다.
“…나를 죄인이라 부르라.”
검설린은 그 말을 몹시도 힘겹게 말하고 있었다. 말을 내뱉는 그의 두 눈은 아래로 바싹 내려깔렸으며 음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차를 마시고도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동공은 내리깔린 시선에 서문린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아비는 그저 측은한 시선을 그에게 던지며 부드럽게 말을 던질 뿐이었다.
“명공께서는 죄인이 아니라.”
“아니, 맞다.”
그리고 검설린은 그 말을 쉰 목소리로 잘랐다.
“…?”
그쯤 이상한 점을 깨달은 서문린이 눈을 흔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고개를 슬쩍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냉랭한 얼굴에는 초조함이 스쳤고, 풍부한 속눈썹은 희미하게 파르르 떨렸다.
그는 제가 저지른 일을 회피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서문린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그의 안절부절못한 모습에 불안함을 느끼고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검설린은 시선을 서문린의 손등에 고정한 채로 힘겹게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죄인이, 맞다, 나는.”
그리고 그 때였다. 장지문 밖으로 격노한 여인의 날카롭고 예민한 목소리가 찢어지게 울린 것은.
“감히 그 늙은이가 염치도 없게 제 옛 수하의 자식을 단수(斷袖, 남색 상대로)로 해달라 청하러 왔단 말이지? 그 개자식의 목을 졸라버리겠어!”
서문린의 얼굴이 멍해진 순간이었다.
“아이고, 아씨 이리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어멈, 이거 놔! 어멈은 저 천인공노할 늙은이가 밉지도 않아?”
소란이 한참 동안 이어지다 잦아들었다. 일을 해명하려던 검설린은 제 뒤통수를 치는 것처럼 와다다 쏟아지는 매도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참담함을 삼키고 있었다. 얼어붙어 검설린의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서문린은 어느 순간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명공?”
태산 같던 사내는 눈에 띄게 움츠러들어 서문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서문린의 눈가에 경련이 파르르 일은 순간이었다.
설마?
“죄, 인이… 으음.”
……사실이구나.
순간 목구멍에 치솟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밀어 넣으며 서문린이 그를 흉험한 빛이 스치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 든 찻잔에 끼긱 금이 가고 있었다. 온화하게 옛 상관을 다독였던 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충격과 공포를 고스란히 담은 서문린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검설린은 착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꾹 입술을 다물던 검설린은, 서문린의 찻잔이 파삭 부서질 때 결국 한숨을 한 번 내뱉고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었다. 미안하구나. 네 아들을 내가 거둬야겠다.”
서문린을 결국 졸도에 이르게 한 말이었다.
* * *
서문세가의 도련님이 귀환한 기쁘고도 기쁜 날. 그러나 항상 웃음이 넘쳤던 이 버드나무 아래 가택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었다.
“저 늙은이를 죽여라! 당장 죽여버려!”
“아이고, 아가씨!”
하나는 대공자의 다리를 고친 귀인을 죽이겠다고 날뛰고.
“으아니, 주인어른! 어르신! 의원! 의원을 불러.”
“……내가 의원이다. 저리 비켜.”
하나는 뜬금없이 졸도하여 정신을 잃은 지 오래니.
침착하게 쓰러진 서문린을 살피던 검설린 또한, 방 문을 박차고 들어온 여인의 매도에는 참지 못했다.
“이 늙은이야, 다 들었다! 네가 감히 우리 오라비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네 얼굴이 추악하다고 내 아버지를 겁박하여 어린 것을 탐하려 드느냐? 외모뿐만 아니라 행실 또한 추악하구나! 네겐 정녕 법도도 뭐도 없단 말이냐?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 심장 위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거라!”
서문린의 안색을 살피던 검설린의 손이 굳어졌다. 그의 복면 밖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늙은이라니?
그 충격적인 말에 검설린은 창으로 배가 관통당한 충격을 얻어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심 욕설을 각오했긴 했어도 너무한 말이 아닌가? 그것은.
비록 풍파를 많이 겪고 보통 사람보다 많은 짐을 짊어지어 나이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오긴 했으나, 아직 서른 중반에 이르지 않았다.
쇄골 위 맥에 가져다 댄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검설린은 서문린을 향해 웅크린 자세 그대로 굳어져 기나긴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그런 검설린의 방관하에 서문윤의 누이는 한참을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그에 따라 검설린의 몸의 떨림도 깊어져가고 있었다. 어디서 감히 옛 수하의 자식을 건드리냐느니, 고금의 이런 추악한 법도도 없다느니.
사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정체를 숨기려 서문윤이 ‘아버지의 옛 상관’이라는 모호한 호칭을 사용한 탓이었으니, 그녀가 검설린의 나이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다. 서문린이 40대 중반이고, 그가 검설린에게 존대하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녀가 헷갈릴 여지가 많았다.
상관이라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니취의 소문은 대륙을 울렸고, 복면으로 가려진 얼굴은 험악한 눈매만을 보였으니.
서문린의 누이, 서문취의 머릿속에서 검설린은 못해도 50대에, 군부에 모래바람을 오래 맞은 험악한 얼굴의 소유자인, 사납기 그지없는 성격의 호색한이었다. 오랜 친구였던 황양양이 인편으로 보낸 편지에, 그 둘이 진심으로 서로를 경애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녀는 그를 믿지 않았다.
“오라버니, 편지는, 편지는 무슨 내용입니까? 예?”
“취아야. 형님에게 쉴 시간은 주거라.”
“그, 그게. 일단 진정하고 취아야.”
돌아온 서문윤을 추궁하여 그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다, 마음을 확인했다는 말을 받았으나 그녀는 경악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옛 상관, 그것도 사내와 통정이라니?
“오라버니? 미치셨습니까! 듣자하니 술취한 진흙처럼 생겨 여인에게 도태된 사내라는데 그런 놈을 마음에 품는다 하십니까? 진심은 개뿔! 옛 수하의 아들이라면 양심이 박힌 놈이라면 오라비가 심장을 꺼내어 준다 해도 석고대죄라도 하여 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듣자하니 그 사람이 대인이라 하던데 왜 이런 면은 어디 동네의 양심 없는 졸부와 같습니까?”
울화를 참지 못해, 편지의 내용을 해명하는 서문윤에게 따박따박 말을 퍼붓곤 당장에 이곳으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옛 수하의 자식이라니. 누가 보아도 위계가 명백한 그런 관계에 사랑이라니. 서문취가 그를 믿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저를 말리는 어멈 또한 뿌리친 채 그녀는 행실이 지나친 이 파렴치한에게 대노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여인에게 인기가 없으니 다정한 오라비를 건드는 것이요? 흥! 어림도 없지. 양심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술취한 진흙마냥 추악하게 생겨 성격도 괴팍해졌다는데 나이도 많고 용모도 추레한 자가 무슨 염치로 양가의 자제를 넘보는 게요? 옛 수하라면 옛날의 수하지 자식을 내줄 의리가 지금 어디 있다고 감히 우리 오라비를 연모니 뭐니 운운해. 군자인 척을 하는 파렴치한이구나! 정녕 댁이 사람이요? 사람이 되어서는 그런 염치없는 짓을 못 하지!”
그 순간 매도를 참지 못한 검설린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뿌득 이 가는 소리가 울리자 서문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디 한 번 칠 기셉니다. 병부에서 한 가닥 하시던 분이라는데 연약한 여인을 어디 한 번 때려죽이고 그 오라비를 약탈하시지요! 대인!”
그 말이 끝이었다. 검설린이 참을 수 있는 건.
“서문윤이 어린 여인에게 약하군.”
황양양도 그렇고, 그의 누이도 그렇고 어째서 그 주변의 여인들은 이리도 당돌하기 그지없는가?
분노에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울컥함을 참지 못한 검설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복면에 손가락을 걸었다.
“어디 한 번 그 잘난 위세를 내게 부려, 헉!”
서문취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 나간 순간이었다.
“어, 어?”
초장부터 이리 난항이니 과연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산전수전 다 겪은 검설린 또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리 된 걸 어찌하는가.
그녀의 매도는 심히 가납하기 어려운 말들이었으나, 사실 일정 부분은 옳은 바가 있었고 검설린은 논리로 그를 설파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 그 ‘성격도 괴팍한 것이 나이도 많고 사람에게 버림받아 양가의 자제를 넘본다’와 ‘옛 수하의 자식을 염치도 없이 탐하는 파렴치한’에 대해서는 차마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삼십육계 중 하나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 내 처지가.’
병법을 보면서도 내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지. 한숨을 내뱉은 검설린이 반쯤 흘러내린 복면을 완전히 턱에 걸으며 서문취를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그녀를 향해 검설린이 평소보다 조금은 풀린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소저는 너무 화내지 마시게. 내가 추악한 짓을 저지른 것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이인지도 알아. 그러나 소저의 오라비는 이미 내게 지극히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려, 마음을 버릴 수 없게 되었구나.”
그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서문취의 귓가를 달큰하게 감아, 그녀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그 순간 서문취가 쩍 얼어붙어 멍하니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인간을 초월한 듯 아름다웠던 그의 얼굴에 냉막함이 가시고 부드러운 빛이 감도니, 보는 이가 간장을 빼어 내줄 만큼 그 외모가 더욱 찬란하다.
오십 줄의 주름이 늘어진 괴팍한 늙은이를 생각하고 있던 서문취는 지극한 혼란함에 휩싸여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제 생각과 몹시 다른 청아한 외모의 사내를 눈앞에 두고, 서문취는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입만을 벙긋댈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그를 포기할 수 없다.”
삼십육계 미인계를 발하며 검설린은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속으로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언제 그가 어린 여인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고, 논리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검설린은 무인의 본능인지 뭔지 모를 슬픈 예감으로 가장 나은 대처방법을 깨닫고 있었다.
“욕을 하려면 언제든지 욕을 하거라.”
그리하여 그의 절박함이 담긴 선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외모는 매도를 하기에는 지극히 아름다웠고, 서문취는 그를 향해 더 이상 신랄한 말을 퍼부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 고결한 외모에 홀려 서 있을 뿐이었다.
“소저의 욕은 정당하오.”
그리고 그녀가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서서히 함몰될 때였다.
“취, 취아야!”
벌컥, 문이 열리고 헉헉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서문윤이 다급히 방 안으로 쳐들어왔다. 평소에 단정했던 그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으며, 한쪽 신이 벗겨져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을 살필 여력도 없이 그는 한켠에 넋을 빼고 앉은 서문취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무례를 저지르지 말거라!”
서문취의 폭력과 같이 아픈 말에 한참을 넋을 잃었던 서문윤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그녀를 찾은 것이었다.
평소에 온순하던 서문취의 폭주 성향도, 검설린의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
검설린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던 황양양과 나이 어린 소녀에게 끝끝내 조롱의 말을 퍼부었던 검설린 사이의 소란 또한 뇌리에서 가시지 않았으니, 서문윤으로서는 다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안을 안고 있던 서문윤의 앞에 펼쳐진 것은, 제 생각과는 몹시 다른 광경이었다.
“나의 마음을 이해하겠소?”
“예, 저는 다 이해해요.”
응?
서문윤의 동공이 흔들거렸다.
“어, 어?”
다정다감하다가도 한번 분노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서문취가 평소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으니, 서문윤은 그 순간 혼란이 가시지 않아 멍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고맙소, 소저.”
“무슨 그런 말씀을. 오라비를 잘 부탁드립니다.”
게다가 의형은 평소에 사자 같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제게도 잘 보여주지 않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서문윤은 그 순간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리고 그가 멍하니 그들의 행각을 지켜볼 때였다.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정신을 차린 서문취가 허둥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잖습니까!”
지나친 외모에 넋을 잃었던 서문취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려 들었다. 정신이 돌아온 그녀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그가 추악한 늙은이가 아닐지라도, 제 생각과 달리 그가 연꽃을 닮은 우아한 미남이라 할지라도 같은 사내에 아버지의 옛 상관이라는 사실은 서문취에게 잊었던 상식을 되찾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관계는 부도덕하지 않나?
“이건, 이건 아닌데!”
그러나 전처럼 거센 매도를 하기에는, 검설린의 얼굴은 그 자체로 몹시 설득력이 있었다. 서문취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저런 얼굴을 지닌 이를 욕하기엔 그녀의 양심이 너무나 멀쩡했다. 처연한 빛이 서서히 감도는 그의 얼굴은 마치 절벽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그것은 순백이 어울리는 그의 수아한 외모와 어울러져 서문취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런 관계는 부도덕하긴 한데, 저런 미인이 슬퍼하는 일이 더 부도덕한 것 같아.
그리고 서문취가 동공을 흔들 때였다.
“소저가 지금 그러는 것은 내 나이가 많고 초라해서겠지.”
“나, 나이가 많다니요! 초라하다니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서문취가 화들짝 놀라 손을 허우적거렸다. 검설린의 말은 단순했으나 서문취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그 순간 대죄를 지은 사람처럼 망연한 표정을 지은 서문취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소저. 내 부족한 것을 알고 있으니 그저 최선을 다해 그를 아껴주려 할 뿐이오.”
“화,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제 성질을 참지 못해 함부로 말하여….”
서문윤이 얼이 나간 순간이었다.
하?
‘쟤가 왜 저래.’
황양양 못지않게 고집이 센 서문취가 눈물마저 글썽거리고 있으니 어이 말이 나오리오. 그저 망부석처럼 선 채 넋을 잃고 이 한 편의 촌극을 구경할 따름이었다.
“하, 하지만 그래도, 아, 앗 그런 의미가.”
서문취는 빠르게 이성을 잃고 빠르게 다시 되찾기를 반복했다. 멍하니 여동생의 고뇌를 보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느긋함이 담긴 검설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입가에 경련을 일었다.
“아,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의형, 이거 완전히?
서문윤의 얼굴에 기가 막히다는 빛이 들었다.
성격이 둥글지 못한 그가 가족과 핏대를 세울 것을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제 생각보다 의형은 더 고단수인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여우 같은 의형의 행각에 서문윤은 결국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꺾고야 말았다.
* * *
오랜만에 제 방에 발을 들이민 서문윤의 얼굴에 희미한 물결이 쳤다.
부모와 그간의 일을 해후하고 형제자매들 간의 우애를 다진 후였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방에 발을 디디는 것은 그리웠던 사람과 만나는 것과 다른 감회가 있었다. 잠시 문턱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던 서문윤은 그의 방 전체가 먼지 하나 쌓이지 않게 관리된 것을 깨닫고 입술 사이로 침음을 흘렸다.
‘내가 무정했구나.’
은사로 백호죽림도가 새겨진 진청색 이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계수나무로 만든 침상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열려진 창문 앞은 나뭇잎이나 풀 바스라기 하나 없이 말끔했다. 창문 앞에 놓인 긴 의자는 바랜 흔적 없이 잘 기름칠되어 있었으며, 탁상 위에는 싱싱한 국화가 꽂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기까지의 흔적이 남은 검들은 시간별로, 또 길이별로 정리되어 벽에 걸려 있었다.
여러모로 마음을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제 생각을 하면서 방을 돌보았을 부모 생각에, 서문윤은 한참을 넋을 잃은 채 방 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그가 멍하니 문가에 서 있을 무렵에, 그의 등 뒤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지 않고 뭐 해?”
“아.”
서문윤이 얼떨결에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의 사내가 뒤따라 들어오고 드르륵, 문이 닫혔다.
서문윤은 문이 닫히자마자 육중한 한숨을 내뱉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묘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의형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몹시 깊었다.
잘 대처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조금 피로한 모양이었다.
감동과 후회가 가시고 묘한 즐거움이 자리한 서문윤이 그를 향해 잠시 웃다가 말을 내뱉었다.
“훌륭한 미인계였습니다. 역시 병법의 달인이시군요.”
검설린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너….”
스산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킥킥 웃다가 긴 의자를 눈짓하고 건너편에 앉았다. 잠시간 그를 노려보던 검설린이 한숨을 다시 푹 내뱉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창문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문윤은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검설린의 안색을 살피다가 웃음을 참지 못해 다시 물었다.
“의형이 그렇게 깃털같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어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양양 때처럼 화낼 줄 알았는데.”
검설린은 그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잠시간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을 했던 서문윤은, 그 가볍지 않은 시선에 머쓱함을 느끼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침묵 끝에 검설린이 내뱉은 말은, 서문윤의 얼굴 표정을 묘하게 만든 것이었다.
“네 누이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이 없다.”
“예?”
“관리 중에서 서른 중반이면 그녀 말처럼 늙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손주를 볼 나이다. 너와의 나이 차이는 띠를 한 바퀴 돌고.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네 누이한테 어찌 함부로 대해.”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벙긋거렸다. 검설린은 무심한 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고, 서문윤은 우물쭈물한 채 침묵하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왜 웃지?”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듣기에 다정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의형은 제가 당신에게 과분하다 생각하고 계시군요.”
“…….”
“저는 제가 당신에게 모자랄까 봐 항상 두려운데.”
담담한 말에 검설린은 쓰라린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 말을 내뱉는 이의 얼굴에 서린 회한이란. 서문윤은 잠시간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유심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 서린 죄책감이 그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시선을 피하는 검설린의 모습이 낯설다.
‘언제부터 의형이 저리 나약한 모습을 보였지?’
자존심이 낮은 것도 알고 있었고, 자기혐오적인 모습이 강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서문윤이 본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여리고 처연하여 익숙하지 않았다.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침묵을 지키는 그를 바라보다가, 서문윤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없음에도 제 눈에 그 누구보다 빛났기에 존애했던 겁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한숨을 내뱉고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서문린이 많이 심란해하더구나.”
그의 말에 서문윤은 아, 작은 침음을 흘리며 얼굴을 슬쩍 굳혔다. 그의 말대로 서문린의 표정은 몹시 어두워 보였다. 그는 서문윤에게 검설린과의 일을 묻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서문윤은 그가 그 일을 신경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착잡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갑작스럽게 침묵하는 그를 향해 검설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은 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는 나를 빛나다 여기고 택했으나 언젠가 네 선택을 후회할지도 몰라. 단순히 열두 살의 나이 차이가 아닌, 우리에게는 세대의 차이가 있다. 내가 겪은 일들이 너무 많고 나는 노인처럼 지쳐버렸어. 기력이 없고, 의욕도 없으며 그저 비관적일 뿐이다. 이런 내 곁에서 활력이 넘치는 너는 고통받을 거다.”
“…….”
“나는 네 생각보다 더 나약하고, 더 두려움이 많고, 비겁하다. 난 언젠가 널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 우리가 엇나갔던 지난 2년의 기억처럼. 나는 널 속이고 또 내치려 할지도 모른다.”
검설린이 우울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이런 나를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고통스럽지만 널 보내줄 테니.”
서문윤이 숨을 들이마시고, 짤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죽을 생각입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으나, 끝끝내 그의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뻔한 생각이다.
서문윤이 눈썹이 낫 모양으로 꺾인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정말 화낼 겁니다.”
“이런 식이 뭔데?”
“그런 어리숙한 말 하지 마세요. 제가 무얼 말하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날 과대평가하는군. 나는 어리석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서문윤이 그 말에 헛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탁상에 머리를 괴어 몸을 기울인 흐트러진 자세 또한 그답지 않은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은 어깨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요한 눈이 서문윤을 담을 때, 그는 무언가의 이질감을 느끼고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그제야 서문윤은 검설린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단 걸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삐딱한 태도를 보이는 검설린을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농담하는 것 아닙니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지. 검설린은 진지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모습에는 일견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몹시 동요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에 진한 착잡함이 묻어 나왔다.
잠시간 침묵 끝에 검설린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저음이 흘렀다.
“나도 농담하는 게 아니다.”
서문윤이 침묵할 때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정말로 농담하는 게 아니다, 윤아.”
서문윤이 몸을 멈칫한 순간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응시한 채 한참을 침묵했다. 말을 내뱉는 검설린은 지극히 담담했기에 오히려 서문윤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와 다르게 힘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서문윤을 자극하고 있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의 태도가 그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침묵이 잠시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설린의 입술에 걸린 쓰라린 미소는 진해졌으며, 동시에 서문윤의 얼굴 또한 서서히 굳어져갔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검설린의 덤덤한 모습이 그를 흔든 탓이었다.
의형은 후회를 하고 있는 걸까?
마음에 파문이 일어 그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진 그의 얼굴에 그늘이 더 드리우고 있었다. 검설린을 노려보며 그는 속으로 쓰게 웃고 있었다.
지극히 바보 같게도, 이전 병부의 수장은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저와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제가 과분하다며,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곤 저를 끝까지 밀어내려 했었다.
장한성의 일이 아니었다면 그가 과연 여기까지 찾아올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에 휩싸여 서문윤은 어두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바보 같아도 이리 바보 같을 수가 있나?
그 순간 마음속에 든 야속한 마음에, 서문윤은 그를 향한 강한 원망을 느끼며 화가 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저리도 제 마음을 모른단 말인가?
그러고였다, 서문윤이 불쑥 충동을 이기지 못해 손을 뻗은 것은.
“?!”
검설린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서문윤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저놈의 고질병.’
손가락에 휘감긴 매끄러운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서문윤이 울화를 삼키고 있었다. 의형의 그 병과도 같은 삽질 증세를 깨달은 서문윤은 머리카락을 마구 잡아당기고 싶은 마음을 꽉 억누르며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머리카락이 저리도 풍성하니 몇 번은 쥐어뜯어도 멀쩡할 것 같은데. 그가 속으로 앞으로 ‘의형에게 화가 날 일이 있어도 참지 않아도 되겠다’ 그런 잡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입술 사이로 깊고 낮은 침음이 흘렀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서문윤의 몸을 움찔하게 만든 소리였다. 그 소리에 놀라 가느스름하게 눈을 떠보니 살짝 굳은 미려한 얼굴이 보였고, 그의 뒤틀린 입술이 보였다. 서문윤은 새삼스럽게 입술에 닿는 건조하고 따뜻한 감촉이 마음에 들어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나른한 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자꾸 이런 식으로 할 겁니까?”
그리고 서문윤은 입술을 떼고 경고 어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장한성에서, 분명 당신은 생존한다면 제 것이 되겠다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왜 자꾸 제게서 벗어나려 해요.”
검설린은 탁자에 무너지는 몸을 팔뚝으로 지탱한 채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그는 그 끝에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건조한 목소리를 흘렸다.
“……내가 언제 네 것이 된다고 했지?”
그 말에 서문윤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의 눈이 복잡한 빛을 띠고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적은 없지. 연인이 되겠다는 말은 했어도.
두루뭉술한 말로 사기를 치다 검거당한 서문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맞다고 해주면 안 되나? 비슷한 말인 것을. 그러나 검설린은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서문윤은 상황을 수습하려 재빨리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말이 아닌가요? 제 연인이 되기로 했지 않습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리며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착잡함이 스쳤다. 잠시간 어두운 눈으로 의형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우울함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싫으신가요?”
검설린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뭐?”
그의 얼굴에 당황이 스치고 있었으나 생각에 사로잡힌 서문윤은 그를 구분할 여력이 없었다. 그의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의형이 모가 난 사람이라도 어찌 이리 한결같이 저를 밀어냅니까? 이제는 제가 서운하려 해요. 제가 그저 싫어서 그러시는 거라면 말로 해주십시오. 이제는 속상합니다.”
섭섭함이 담긴 말이었다. 그 말에 얼어붙어 잠시간 서문윤을 응시하던 검설린은, 어느 순간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트렸다.
서서히 그의 얼굴에 새겨지는 균열을 서문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검설린은 짧은 침묵을 끝내고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싫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어. 네가 소중해 미칠 것만 같으니 더 문제야.”
평소라면 그 말에 만족했을 거다. 검설린은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몹시나 방어적인 사람이었으니. 그러나 서문윤은 그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만족하지 못하고 작게 속삭이며 덧붙였다.
“소중하다는 말로 이젠 부족합니다.”
검설린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을 바라보곤 하는 말이었다. 침음이 흐르고, 혼란한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더 어떻게 표현하지?”
그리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얼굴에는 혼란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검지에 휘감은 그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느릿하게 말했다.
“깊게 애정하노라.”
사르륵 허공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꿈결에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깊게 애정하노라.”
그리 다시 한 번 중얼거린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어느덧 평소처럼 평온한 얼굴을 되찾아 있었다. 일견 냉혹해 보이기도, 무심해 보이기도 한 그 정적인 얼굴을 서문윤은 사랑했다.
답변이 나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너를 깊게 애정한다.”
서문윤의 지긋한 시선을 받으며, 검설린은 교차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애틋함도, 절실함도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으나 서문윤은 그에 진한 행복감을 느끼며 작게 웃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얼굴이 차가워진 순간이었다.
“이제 되었나?”
무심한 말에 서문윤이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귀 끝이 빨개지셨어요.”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제게 향하는 서문윤의 손을 잡아 내린 검설린이 “놀리지 마라.” 작은 항의의 말을 내뱉었다. 서문윤은 감정표현에 익숙지 않은 그를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빙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검설린 또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서서히 풀릴 무렵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란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문득 서문윤이 그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이 흐르는 듯한 유려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검설린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게 다른 말을 해주실 겁니까?”
그곳에는 담담한 웃음을 띠고 있는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한동안 그 소박하게 웃는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으며, 그 미소에는 상대를 향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다정함을 숨긴 미소에 검설린은 목이 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깊은 침묵 끝에 흐른 것은 깊은 한숨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알지 못하겠어.”
그리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힘겹게 웃었다.
“그냥 두려워.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치렁한 흑발을 쓸어 올리며 그는 잠시간 몸을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서문윤은 그를 그저 담담히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짧은 시간이 흘러 검설린이 웅크렸던 몸을 꼿꼿이 세웠다. 다시금 서문윤을 바라본 그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을 기다리던 서문윤은, 그의 귓가로 드디어 들려오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고야 말았다.
“하지만 네가 내 곁에 온 순간부터 너는 내 마음속에 항상 차 있었고, 나는 너와 함께하는 한순간 한순간을 사랑스럽게 여겼다.”
단정하듯 말하는 목소리. 다르게 해석할 만한 일고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확신에 가득 찬 말. 담담하게 말했기에 더욱 기쁜 것이었고,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했기에 더욱 설레는 것이었다.
가장 단순한 말이 수많은 수사를 물리치고 가장 빛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기 힘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게 사랑이에요.”
더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하는 말은 지극한 마음을 담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에게서 일고의 거짓도 엿보지 못했다. 담백한 말에는 애정이 엿보였고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확신하기는.
서문윤은 그저 환희에 휩싸여 웃을 뿐이었다. 검설린은 그 미소를 마주하며 잠시간 멈칫하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지나가는 바람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 말이었다.
그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서문윤은 기쁨이 작게 드러나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작게 되뇌었다.
“네, 그래요.”
그에 대한 검설린의 반응은 몹시 단순했다.
“네 말이 맞는 거겠지. 너는 항상 옳으니까.”
순순히 시인하는 그의 말에 서문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해 검설린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곤 그를 끌어당기고야 말았다. 입술이 마주치는 순간 검설린은 조용히 눈을 감고 순순히 서문윤의 뜻에 따랐다.
* * *
짙은 남색 하늘 중간에 새파란 빛을 띠며 달이 떠오르고 있었고, 희끄무레한 구름이 그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달이 정수리 위에 채 오지도 않는 이른 시각이었다.
그러나 ‘밤이 채 오기도 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은 문란한 행위다’라 세가에서 바른 교육을 받았던 서문윤은 그 훈화가 무색하게도 충동에 이끌려 행동하고 있었다.
항상 행위를 주도했던 검설린은 박력에 휘말려서인지 서문윤에게 완전히 휘말리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탁상 위에 저를 바로 눕히는 서문윤을 잠깐, 다급히 말을 하며 달래 침상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도착한 침상에서, 서문윤은 검설린의 어깨를 잡아 누르곤 그의 위를 올라타고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에서 미묘한 빛이 서린 순간이었다. 얼굴에 조심스럽게 입술이 닿았을 때, 서문윤의 손이 제 옷고름을 조심스럽게 풀어 내렸을 때, 검설린은 서문윤을 방관했으나 속으로는 당황을 삼키고 있었다.
그는 저를 나신으로 만드는 서문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그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몸을 섞지 않아도 발작하지 않을 텐데.”
서문윤의 반응은 짧았다.
“제 것 한다면서요.”
그 말에 검설린은 또다시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내가 언제?”
자꾸만 저를 속이려드는 발칙한 후배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나른한 숨결을 내뱉었다. 살갗이 드러난 배를 더듬는 손 탓이었다. 서문윤이 착실하게 검설린의 옷을 벗겨 그의 상체를 헐벗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몰라, 모릅니다.”
그는 섬세하게 갈라진 몸을 만지며 조금은 이성을 잃은 듯 행동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제 말에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그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침상의 머리맡으로 몸을 기댔다. 서문윤의 정신이 돌아온 것은 단단한 아랫배를 만질 때였다. 고랑처럼 깊게 파인 그곳을 더듬던 그는, 제게 내리쬐는 시선을 눈치채고 흠칫 놀라 얼어붙었다.
“아.”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너무나도 덤덤한 듯한 의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욕망에 휘말리던 제 모습과 대비되는 듯하여 서문윤은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껴 몸을 훑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귀까지 빨개진 서문윤이 손을 황급히 거두고 말을 중얼거렸다.
“싫으면 그만두겠….”
“싫어.”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
놀란 서문윤이 고개를 홱 들어 검설린을 응시했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검설린이 그 예의 순백이 어울리는 새하얀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답지 않은 외모의 사내는 상체를 거의 드러내어 헐벗은 순간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마냥 같았다. 그 고요한 눈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상처를 입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였다. 서문윤의 얼굴을 마주한 검설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은 것은.
“그만두는 게 싫다는 거다. 시작도 끝도 네가 하는 건 너무 욕심 많은 일이잖나?”
그리고 제 아랫배에 놓인 서문윤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검설린은 몸을 움직여 서문윤의 입술에 입술을 맞췄고 몸을 기울여 그를 무너트렸다.
이어진 것은 서문윤의 옷을 벗기는 손길이었다.
나를 나신으로 만들었으니 너도 옷을 벗어라. 그리 말을 하는 것마냥 검설린은 서문윤의 옷고름을 잡아 풀고 움찔거리는 서문윤의 뺨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췄다. 음란하기보단 경건하게 느껴지는 그 행위에 서문윤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드러나는 몸의 부위 하나하나를 쓰다듬던 서문윤과 다르게 검설린은 빠르게 서문윤을 옷을 벗겨 내렸고, 시간이 흘러 그를 완전히 나신으로 만들었다.
“잠깐, 잠깐만.”
그리고 검설린이 그의 몸에 손을 대려 할 때였다.
“오늘은 이렇게.”
서문윤은 검설린의 팔뚝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검설린은 그 순간 오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순순히 그의 손길에 따라 다시금 서문윤에게 위를 내어주었다.
오늘은 그를 양껏 사랑해주고 싶다.
죄책감을 느끼는 검설린을, 스스로를 사랑해주지 못하는 검설린을 마음껏 아껴주고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에 서문윤은 검설린의 몸을 다시 타고 올라 그의 뺨에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고, 손을 놀려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의 마음이 묻어 나오는 듯 그 손길에는 욕망보다 애정이 엿보였다.
“상처가 많습니다.”
옆구리에 남은 상흔을 더듬으며 하는 말이었다. 검설린은 오래된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으나 그를 막지는 않았다. 서문윤은 잘 짜인 몸 구석구석에 자리한 상흔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고 생각에 함몰되는 듯 서서히 대담하게 행동했다.
“왜 이렇게 상처가 많습니까?”
속상한 마음이 깊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는, 가슴 위에 자리한 시흔(矢痕)에 입술을 맞추며 한 말이었다. 그 애정이 담뿍 담긴 말을 듣는 순간 검설린은 동요하여 작게 얼굴을 굳히고 그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저를 향하는 그의 손을 보지 못한 양 한숨을 폭 내뱉고 다시 고개를 숙였고, 살갗 위에 입술을 미끄러트려 상처 이곳저곳에 입 맞췄다.
의식과도 같은 행위였다, 그것은.
어째서인지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서문윤을 잠시간 바라보던 검설린은 그를 말리지 않고 허공에 뻗은 손을 조심스럽게 서문윤의 머리 위에 얹었다. 정신없이 그의 상체 전체를 입술로 누비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아슬한 탄식을 내뱉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설린의 입술에 자조 어린 미소가 걸린 순간이었다.
“흉측하느냐.”
장수에게 상흔이란 흠결이 아니었으나, 그의 몸은 창에 찢기고 유시에 맞은 흔적이 가득하여 그의 말마따나 흉측하게 보였다. 살갗에는 멀쩡한 부분보다는 멀쩡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으니, 그것은 세 차례의 커다란 난을 겪은 자가 얻어야만 했던 상흔이었다.
아랫배와 옆구리를 가로지르는 검상을 더듬던 서문윤이 그때 몸을 멈칫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설린은 조금은 화가 난 듯한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로 항의를 하는 듯한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무슨 소립니까? 저는 의형의 몸이 사랑스럽습니다.”
검설린의 얼굴이 오묘해진 순간이었다.
무어라 그가 대답하기 전에 서문윤은 혀를 내밀어 검상 위를 고양이처럼 핥았고, 검설린은 그에 몸을 움찔하며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그렇게 매끄러운 배 위를 한참 동안 혀로 핥았고 입술을 맞췄다. 그렇게 애정을 드러내는 서문윤을 검설린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의형은 제정신이 아니군요. 어떻게 이런 몸을 흉측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 말을 하는 서문윤의 얼굴이 감탄에 물들어 있었다. 침상에 팔꿈치를 댄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검설린의 얼굴에 희미하게 금이 간 순간이었다.
그의 동요한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문윤은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그를 바라보는 검설린의 얼굴의 균열이 깊어져가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는지는 알겠는데.
그 순간 검설린이 눈을 슬쩍 찌푸려졌다.
매끄러운 배 위를 몽혼한 눈으로 쓰다듬는 서문윤을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의형, 아, 의형.”
서문윤이 정말 저를 아끼고 경애하는 것은 알겠다.
상처를 입은 것에 안타까워하고, 제 마음이 상할까 봐 상처 입은 몸 곳곳에 입술을 맞추는 것도.
그러나 평소에 서문윤의 살내음을 맡으며 평온함을 느꼈던 검설린은 지금 이 순간 오히려 몸에 긴장을 더하고 있었고, 뜨거운 입술이 살갗에 닿는 순간 숨을 멈추며 어이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경직한 그의 얼굴에 오묘한 기색이 서렸다.
서문윤의 입술이 치골에 닿았을 때였다.
“…잠시만.”
이건, 이건 뭔가 이상하다.
무언가 크게 두려워져 검설린은 제 몸 위를 타고 올라간 서문윤의 팔을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오늘따라 적극적인 서문윤이 익숙지가 않았다. 약이 발작할 주기도 아닌데 제 몸 곳곳을 만지는 서문윤의 황홀한 얼굴이 뭔가 검설린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초반에 색향이 중독된 서문윤이 밤에 몽유병자처럼 정신을 잃고 제 위를 타고 오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그가 이성을 잃을 때의 일이었다.
발작 날이 아닐 때 잠자리는 항상 검설린이 주도했다. 서문윤이 서서히 정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도 전희 와중에도 희미한 두려움을 내보였고 정사 중간에 끙끙 앓으며 검설린에게 기대곤 했다. 그러나 오늘 서문윤은 날을 잡았다는 듯이 검설린을 타고 올라 그의 옷을 마구잡이로 벗기고 몸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얘가 왜 이래?’
“의형?”
전지적 검설린의 기준으로 순진무구하고 순수하던 서문윤이었다.
서문윤이 제 상처를 물고 핥고 빨며 적극적으로 나오니 검설린은 그가 귀엽다가도, 그의 풀린 눈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건, 이건 뭔가 아닌데.’
복잡한 심경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을 타락시킨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저를 예뻐해주고 싶다는 말이 감동적이기도 하고, 그 깊은 애정이 느껴져 사랑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앞으로 있을 일이 무섭기도 하다. 하여간 검설린은 다시금 체위를 바꾸려 서문윤을 지그시 바라보았으나 서문윤은 그 무언의 압박에 차분한 시선으로 응대할 뿐이었다.
검설린이 작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네게 잘 못했나?”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 말에 서문윤이 놀라 고개를 작게 저었다. 검설린이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혹시 제가 서툴게 대하여 그가 만족하지 못했나, 불안감을 품던 검설린은 일말의 짐을 덜고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단한 배에 뺨을 대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뭇 사랑스러워 검설린은 저도 모르게 그의 뒤통수를 헝클어트리며 토로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머리가 눌려진 서문윤이 눈살을 찡그렸다. 검설린이 그를 향해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널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서문윤.”
그 진심이 우러나오는 말에 묘한 감동을 느낀 서문윤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검설린의 얼굴을 무표정했으나 시선에서는 정이 느껴졌고, 뒤통수를 가볍게 문지르는 손길에는 그를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런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은 제가 의형을 아껴주고 싶어서.”
괜스럽게 화끈해지는 얼굴에 서문윤이 시선을 회피하며 느릿하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의형. 그냥 가만히 있으면 충분해요.”
참으로 믿음직한 말이었다.
그 말은 평소의 서문윤이 하던 위로와 비슷했으나 검설린은 그 말에 속으로 작게 절망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사랑을 받는 법은 익숙하지 않았고, 이런 방식은 더더욱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그냥 원래대로….”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한 검설린이 서문윤의 어깨를 붙잡아 힘을 주었다. 면피하려는 행동이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시도로 끝났을 뿐이었다.
“왜 제게는 의형을 아낄 기회를 주지 않으시나요?”
서문윤을 어찌 이길 수 있을까?
항의하는 말을 내뱉곤 저를 빤히 보는 서문윤에 굴복하여 검설린은 결국 항복하곤 어깨를 틀어쥔 손에 힘을 풀어야만 했다.
‘제기랄.’
팔을 눈가에 올린 검설린이 아래로 향하는 애무에 이를 질끈 악물며 거칠어지는 숨을 골랐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열 살 넘게 어린 것에게 휘둘려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그러나 검설린은 저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 서문윤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저를 아껴주겠노라는 그의 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장애물을 물리친 서문윤의 애무는 서서히 깊어져 장골 아래에 닿았다. 수풀 위에서 멈칫한 서문윤이 아주 잠시간 망설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피가 몰려 있던 성기에 입을 맞췄다.
검설린의 눈이 크게 뜨인 순간이었다.
서서히 긴장을 풀고 느릿하게 숨을 내뱉고 있던 검설린이 다시금 호흡을 거칠게 내뱉으며 누워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서문윤이 다리 사이에서 구음을 시도하는 것을 본 검설린의 얼굴에는 공황이 번지고 있었다.
“너….”
입에 담기지 않는 것을 억지로 욱여넣는 서문윤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설린이 거의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서문윤은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들어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 모습에 욕심이 그득하게 보였다. 검설린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뒤로 꺾고 탄식하고야 말았다. 자극에 몸은 서서히 달궈지고 있었으나 마음은 달궈지는 정도가 아니라 모닥불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이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나 검설린의 그 애타는 마음을 모르는 듯 서문윤은 열심히 입에 밀어 넣은 것을 물고 핥고 빠는데 열중할 뿐이었다. 그의 턱선에 뚝뚝 떨어져 내리는 맑은 타액을 검설린이 닦으며 아슬한 숨을 내뱉었다.
이불보를 움켜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제 그만.”
거친 숨과 함께 들려온 갈라진 목소리에 서문윤이 숨을 헐떡거리며 입술 밖으로 성기를 뱉었다. 그의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미숙한 경험과 작은 입술은 성기의 3할만을 간신히 담았을 뿐이다.
“이제 됐다.”
그러니 쾌락보다야 괴로움이 몸을 퍼져 검설린은 당장에 서문윤의 어깨를 부여잡아 넘어트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그런 마음을 삼키며 검설린이 어둑해진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맑은 액체를 묻힌 서문윤이 손등으로 턱을 슥 닦으며 말했다.
“제가 잘했습니까?”
검설린은 이를 악무는 것으로 그 말에 답했다. 서문윤은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대한 검설린의 선택은 빠른 포기였다.
체념한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몸에 힘을 늘어트린 검설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 뜻대로 하거라.”
그리 말을 하는 검설린을 보는 것은 서문윤에게 꽤나 묘한 감상을 일으키는지라, 그는 애써 표정을 정돈하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청아한 인상의 검설린이다. 고개를 살짝 돌린 검설린의 옆모습은, 짙은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려 처연함이 묻어 나왔고 순백이 어울리는 듯한 고아한 외모는 그에 더해 서문윤의 마음속 이상한 파문을 일게 했다.
‘이거, 뭔가 내가 몹쓸 짓을 하는 것만 같은데.’
생각보다 더욱 민감한 검설린의 반응도 서문윤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띠게 만들었다.
의형의 저런 얼굴을 바라보니 조금 위험한 상상이 들고야 말아. 서문윤은 잠시간 넋을 잃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설레 저었다.
‘무슨 미친 생각이야.’
흔들렸던 정신을 확고하게 다잡은 서문윤이 고개를 설레 저으며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일으켰다.
침상 위 널브러진 옷가지 속의 소매주머니를 뒤진 서문윤이 작은 향유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진득한 장미유를 손에 떨어트린 서문윤이 긴장이 스치는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검설린이 고개를 돌려 차분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은근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서문윤은 기름을 떨어트린 손을 둔부 사이로 가져다 대곤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윽.”
“괜찮나?”
조심스러운 물음에 서문윤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답할 뿐이었다.
‘그냥 물어보지 말아주실래요?’
검설린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서문윤으로서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서문윤은 얼굴을 슬쩍 붉히며 검설린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그 상태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자세다보니 아래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게 문제다. 특히나 속세와 연이 닿지 않은 얼굴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더 부끄러웠다.
그리하여 당장이라도 검설린의 눈을 가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곤 서문윤은 소름이 끼치는 이물감을 참으며 손을 놀릴 뿐이었다. 검설린의 어깨를 잡은 손은 이미 잘게 떨리고 있었고, 검설린의 얼굴에는 진중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문윤의 입술에는 죽이지 못한 신음이 잘게 나왔다, 버거움이 산재한 그의 얼굴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열심히 손가락을 놀리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놀란 검설린의 그의 허리에 손을 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될 것 같으면, 언제든 내게….”
“끝났어요, 의형.”
그리고 서문윤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술을 겹쳐 막았다. 움찔하는 검설린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곤 서문윤은 잠시간 그의 입술을 탐했다. 말 그대로 얼어붙어 석상이 된 검설린의 입안을 여유롭게 쓸곤 서문윤이 입술을 떼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급해요.”
“뭐?”
“의형은 음탕하군요.”
“뭐, 뭐?”
검설린의 낯이 한 층 더 창백해졌다.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등을 다시 침상 위에 닿게 하곤, 서문윤이 밀문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하체가 질척해진 감촉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구분할 수 없이 오묘했으나, 이어질 일에 비하면 작은 비중일 뿐이었다.
묘한 긴장을 삼키고 서문윤이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검설린이 걱정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물들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끄러운 둔부 사이가 성이 난 물건 끝에 닿았을 때 검설린은 입술 사이로 얕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근육의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체에 손을 대며 서문윤은 고개를 꺾었다.
삽입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흐, 윽!”
살갗에 까끌한 음모가 닿는 순간 서문윤은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검설린은 숨을 헐떡거리는 서문윤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주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익숙해지려 몸을 웅크린 채 떨던 서문윤이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 검설린의 얼굴을 보았다.
걱정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참지 못하고 검설린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야 말았다.
그러고 이어진 느리고 정확한 정사였다.
“아, 음.”
서문윤은 검설린의 입술에 달콤한 샘이 숨겨진 것마냥 그의 혀를 깨물고 입술을 빨고 핥았다. 어느 순간 숨결은 거칠어져 있었고, 서문윤은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그의 허벅지에 둔부를 비비고 있었다. 성기는 빠져나가지 않고 서문윤의 안에 물려 있었고, 그 안에서 자극을 받고 있었다.
검설린의 미간이 좁혀지고, 서문윤의 입술이 슬쩍 벌어져 숨결을 내뱉었다.
“으음.”
작은 침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고개를 살짝 꺾었다. 강렬하지 않은 자극이 그를 애태우고 있었으나, 서문윤의 고집이 완고하여 그를 침상 아래로 눕힐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검설린의 얼굴은 서서히 찡그려지고 있었다. 반대로 서문윤의 얼굴은 몽혼히 변해가고 있었는데, 그는 버거운 듯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검설린의 턱을 깨물고 뺨을 물었고, 손으로 단단한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아껴주었다.
“…예뻐요. 정말 예뻐요.”
뺨을 소중히 더듬으며 하는 말에 검설린은 결국 거칠고 긴 숨을 내뱉으며 와락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난, 사내다.”
검설린이 참지 못해 말을 내뱉었다. 이마에 손등을 짚은 채 그는 뜨거운 숨을 헐떡거리며 서문윤을 원망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주도권을 쥔다면 확실하게 할 것이지, 이도 저도 아니게 해서 애를 태우게 하나?
뜨겁게 달아오르다가도 끓기 직전에서 꺾이는 자극이 몸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 제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는 서문윤이 사랑스러웠다, 그 자극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제 얼굴에 입술을 곳곳이 맞추는 그를 침상에 눕히고 당장에 허리를 양껏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분노어린 시선에 킥킥 웃을 따름이었고, 고개를 숙여 콧잔등 위에 입술을 맞추는 것으로 모든 것을 때우려 했다.
“예쁜 걸 어떻게 합니까.”
그 방만한 행동에 검설린이 들끓는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서문윤을 제가 어떻게 이기나?
“아, 읏.”
그저 검설린은 서문윤의 곡선이 도드라지는 허리를 부드럽게 다잡을 뿐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것에 도움을 주면서.
그렇게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기듯 입술 도장을 찍고, 허리를 뭉근하게 움직이던 와중이었다.
느릿하던 서문윤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격해지고, 옆으로 슬쩍 비비듯 움직이던 몸이 아래위를 오갔다. 서문윤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고, 어깨를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 하흑!”
어느 순간부터 검설린의 손이 허리를 세게 부여잡고 있었다. 격렬한 움직임이 이어지던 그 어느 순간, 서문윤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검설린의 가슴팍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검설린이 숨을 멈춘 그 순간에 그는 웅크린 몸을 잘게 떨며 검설린의 배 위에 토정하고 있었다.
“흐, 흑.”
검설린은 제 아랫배가 젖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의 안에 있는 남근이 아픔을 호소하는 것도. 서문윤의 식은땀이 뚝뚝 흐르는 얼굴이 창백했다. 검설린은 땀에 젖은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숨을 헐떡이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와락 얼굴을 구기고 서문윤을 침상 아래로 향하게 했다.
이제 충분하지 않던가.
그렇게 서문윤의 위를 점한 검설린이 간절히 원했던 일을 성취했다. 퍽, 소리와 함께 골반이 벌어지는 순간 서문윤이 허리를 휘며 숨을 들이삼켰다. 평소라면 달래줄 검설린은 서문윤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핥으며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의 안에서 괴롭힘을 당한 고통이 그를 향한 연민보다 훨씬 컸다.
헐떡거리는 숨결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본능에 따라 허리를 놀릴 뿐이었다. 죽어가는 자의 신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 * *
“내 잘못이 아니다.”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음울한 표정을 짓는 서문윤에게 떨어진 말이었다. 기가 막힌 말에 서문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불손한 눈으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그럼 제 잘못인가요?”
항의하는 말에 돌아온 지극히 뻔뻔한 답변이었다.
“그래, 네 잘못이다.”
할 말을 잃은 서문윤이 한숨을 폭 내뱉고 몸을 다시금 축 늘어트렸다. 소매가 길고 얇은 침의를 걸친 검설린은, 사뭇 우아해 보였으나 서문윤은 그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서문윤이 파정을 한 후, 검설린은 괴로움을 참지 못해 서문윤을 아래에 눕히고 평소보다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초반에 검설린을 향해 웃어주는 듯 여유를 보였던 서문윤은 보복하듯 제 얼굴을 핥고 허리를 움직이는 그의 행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울고불고 사정을 해도 검설린은 못 들은 척 허리를 움직였고, 결국 결말은 이러했다.
“…아파요.”
우울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검설린도 그제야 조금 찔렸던지 몸을 움찔하곤 중얼거렸다.
“미안.”
그리 말하며 검설린이 슬그머니 침상에 앉아 서문윤의 허리를 쓰다듬고 조심스럽게 눌렀다. 악, 소리를 내며 서문윤이 몸을 부르르 떨고 침상에 얼굴을 묻었다. 검설린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친 순간이었다.
“의원이라고 이렇게 막 나갈 겁니까?”
도대체가 허리가 삐끗할 때까지 몰아붙이니 이거야 원 사람이 맞는 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의 허리를 꾹꾹 누르며 검설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정말 네 잘못이었어.”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쌓였던 화를 풀고 저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왜 내 앞에서 사랑스럽게 굴었느냐.”
언제 저렇게 말을 잘하게 되었는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이 속내는 뻔해도 마음은 풀렸다. 서문윤은 조금 붉어진 얼굴을 침상에 묻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 앞이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어린아이 같은 말에 검설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청융 생전 그에게 나무토막으로 만들어졌다 구박을 받았던 사내는, 죽은 사람이 관짝에서 튀어나올 만치 무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기분이 유쾌해진 검설린이 서문윤의 뺨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떼곤 작게 말했다.
“네가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그 장난기 어린 말과 입가에 서린 부드러운 미소는 서문윤의 얼굴을 붉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 웃지 마십시오.”
질겁하며 그가 검설린의 가슴을 밀었다. 순순히 그 손길에 밀려난 검설린이 그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유해한 미모다.
1년간 고난을 겪은 후 수척해진 모습마저 눈길이 갈 만치 처연히 아름다우니 그의 곁에서 꽤나 고생할 일이 많겠다. 그리 생각하며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검설린은 침상에 팔꿈치를 대어 서문윤의 옆에서 느슨하게 누운 채 자리하고 있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자태였다. 옥으로 깎은 듯한 아름다운 사내가 그리 방만한 자세로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니 서문윤은 그 자태에 취해 잠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피식 웃고야 말았다.
“이런 식으로 위기를 빠져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내심 놀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검설린은 차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가족들이 당신을 다 좋아해서.”
“좋아해? 나 같은 악당을?”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 웃다가 답을 했다.
“그냥 감사합니다.”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오묘한 표정을 짓는 검설린을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서문윤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많이 자세를 낮췄지.’
걱정을 많이 했었다. 성정이 좋지 않은 그가 혹여 가족과 분란을 일으킬까 봐. 아무리 서문윤이 그를 사랑하고 아낀다 하더라도, 가족간의 문제는 복잡하여 많은 고민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순순히 말을 잘 들을지 누가 알았어?’
그러나 걱정했던 검설린은 서문윤의 신신당부를 잘 새긴 듯, 아니 그 이상으로 차분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했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심지어 미인계를 사용하여 위기를 난파하는 면모까지 보이니, 서문윤으로서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존심이 센 사람인 걸 안다. 그런 사람이 순순히 자세를 낮추니 그 마음을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할까?
“가장 걱정했던 누이도 이미 의형께 넘어갔고, 어머니도 말솜씨와 아리따운 외모로 홀리셨으니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작아도 성정이 온화하고 너그러워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담담하게 한 말을 듣던 검설린은 그 순간 서문윤의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낮게 웃었다. 차갑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웃음이었다.
“서문린은.”
묵직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했다. 그제야 제가 무의식적으로 한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것을 깨닫고 그는 끙 소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작자 앞에서 대놓고 티를 냈으니, 마음이 읽힐 수밖에.
그리고 제 안색을 슬슬 살피는 서문윤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검설린은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날 반기지 않는 눈치더구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족 중 저를 가장 이해해주는 분이셨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른 가족들이 검설린의 일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그의 생환에 감격을 먼저 드러내는 상황에도 서문린은 어두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서문윤의 생각과 달리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의 옛 상관이라는 검설린의 높은 지위, 그럼에도 예의 바른 성정, 서문윤의 다리를 고친 은혜, 아름다운 외모에 우려 이상의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서문린만은 날카로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서문윤은 아버지가 그런 침묵을 지킬 때 그를 건드는 것이 위험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마따나 서문린의 완고함이란 자식인 그가 더 잘 아는 것이었으니.
“아버지도.”
그리고 생각을 빠르게 끝마친 서문윤은 그가 더 말을 내뱉을 틈을 주지 않고 황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아버지도 언젠간 받아들이실 거예요. 그분은 저를 사랑하시니까. 그리고 의형도 많이 생각하셨고.”
그 말에 검설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슬쩍 꺾었다. 어깨 능선을 따라 떨어지는 청묵 빛 머리카락에 흘끗 시선을 주던 서문윤이 이어진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나 나름의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씩은 있는 법이지.”
뭐라고 해야 되지?
“대개는 자식 문제가 그렇고.”
담담히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얼굴에 차분한 기색이 가득했다. 서문윤은 그를 위로할까, 혹은 농담을 할까, 혹은 진지하게 앞으로의 일을 여쭤볼까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아무 말을 내뱉지 못했다.
먼저 말을 내뱉은 것은 검설린이었다.
“됐어. 그가 나를 패 죽이지 않으니 그걸로 됐다.”
그리 담담하게 말을 한 검설린이 서문윤을 안심시키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검설린의 행동에서 그의 배려를 읽고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눈은 고요했으며 흑옥을 가공한 듯 아름다웠다.
왜 자꾸 그가 갈수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
서문윤은 한참을 멍한 눈으로 제 앞에 자리한 아름다운 사내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손을 움직여 그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잡아다 당겼다. 검설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 입술에 입술을 맞추는 겁 없는 어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높게 눈썹을 꺾던 검설린은 서문윤이 입술을 뗀 순간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흘리며 경고했다.
“허리가 아예 망가지고 싶다고? 제발 이러지 마. 내가 네 무식한 도발에 언제까지 인내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서문윤의 답변은 간단했다.
“방금 전까지.”
그리 말하며 홀린 듯 제 뺨을 잡는 서문윤을, 검설린은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했다.
“이런 제기랄.”
욕설을 내뱉고 제 몸을 껴안아 뒤집는 검설린의 행동에 서문윤은 작은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 7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