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안사준(長安四俊)(12)
“금상의 증조부이신 성종께서는 분명히 성인이셨지.”
그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마차에 오르기 전 서문윤은 황재천의 의미심장한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황재천은 서문윤의 추궁의 시선에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하느냐? 성종의 치세가 끝난 후 72년 사이에 얼마나 나라가 기울어져갔는지 너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끼지 않았더냐? 많은 사람이 하루살이처럼 맥없이 죽어가지 않던? 단순히 수치로 가늠해 보자면, 국고에 환수되는 은전의 양은 성종 때의 반에 불과하고, 가구의 수는 6할이 줄어들었다.”
말은 뒤로 갈수록 힘이 붙었으며, 단정해졌다. 서문윤의 얼굴은 그의 말이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묘한 빛으로 물들어갔다.
그것은 관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친황파의 인물이라는 사람이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말을 내뱉지 못하고 서문윤은 곤란한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마차 안에 먼저 올라선 검설린은 날카로운 예기가 서린 눈으로 그를 관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시선을 받으며 황재천은 입술 밖으로 담담한 목소리를 흘렸다.
“국력은 쇠했고 민초는 고통을 받고 관료의 기강은 무너져 내렸다. 지난 72년의 세월 동안 이민족이 일으킨 외란이 크게 다섯 번, 작게 열세 번.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은 합쳐서 서른여 번에 해당하지.”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말에서 드러나는 의미심장함이 서문윤의 얼굴을 묘하게 만들고 있었다.
검설린의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황재천은 말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환난지세에서 사람들은 쇠퇴하거나 부흥을 도모하거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 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울렸다.
“황재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괜스럽게 찔리고야 말았다. 말에 서린 기세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안쪽에 자리한 검설린이 살벌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재천은 부드럽고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으나 그는 그들이 한 말을 모조리 듣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으름장을 놓을 듯한 검설린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황재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난 금상의 치세 34년 동안 하향하던 인구의 수는 단 세 번 증가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고 재상의 부임 이후의 성세. 두 번째는 악천화가 북란을 진압하고 동궁태자가 섭정하던 당신의 일. 앞서 거론한 이 두 번의 경우는 위정자의 옳은 정치가 이루어낸 거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가구는 완만히 감소했지, 그러나 세 번째 경우는 다르다.”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이었다.
“8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가구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뭐라 생각하느냐?”
“의형이군요.”
엉겁결에 답한 서문윤이 저가 입 밖에 내뱉은 말에 놀라 몸을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멍한 얼굴로 말을 중얼거렸다.
“의형이 많은 사람을 살렸군요.”
많은 사람을 살렸다는 명성이 대륙을 울렸다. 고치고자 하면 못 고칠 이가 없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검설린을 따라다니면서 서문윤은 한 번도 제가 한 일을 객관적으로 직시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수치(數値)는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이 세상을 바꾸고 있노라고.
“네 의형은 그 세 번의 성세 중 두 번의 일에 기여하였다, 윤아. 나는 유능하던 고 재상이 스스로의 아집에 갇혀 강퍅해진 경우를 보았고, 동궁태자가 비명횡사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일전에 단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서문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서문윤, 들어와.”
귓가에 웅웅 울리는 의형의 화가 난 말.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을 듣기보단 침을 삼키면서 황재천을 바라보길 우선했다. 그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고, 그것은 하늘 위로 날아갈 듯 가벼웠으나 동시에 태산보다 더 무거운 기색을 품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권력자도 관료도 아는 신의가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바꿨지?”
“습, 습관으로 세태를 바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황재천의 답이었다.
“명답이구나.”
그의 입가에는 순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치기 어린 아이 같은 숙부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무어라 또다시 경고의 말을 내뱉었으나 서문윤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구불거리는 길이 보인 기분이었다. 황재천의 의도를 항시 의심하였던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에서 무언가의 실마리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숙부의 뜻이 무엇입니까?”
떨리는 소리로 내뱉은 말에 황재천이 빠르게 답했다. 검설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대담은 빠르게 진행되어야 했다.
“너는 내가 권력에 부합하는 보신주의자라 생각하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었다. 솔직한 서문윤의 반응에 황재천은 픽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맞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언가?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윗사람의 고해에 불편함을 느낀 서문윤이 에둘러 말을 돌렸다.
“그러나 내게도 꿈이 있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서문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으나 더 이상 황재천이 말을 이을 의사가 없어 보였기에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검설린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앉아 더 말할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서문윤을 향해, 아니 정확히는 마차의 뒤편을 향해 황재천은 공손히 손을 모아 읍을 하며 말을 내뱉었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그것은 명백히 검설린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그 말에 “잘도 보중하겠군!” 싸늘한 말을 퍼붓는 것으로 답했다. 황재천은 예의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차에 오른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은 시선을 내어주지 않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랴!”
마차는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 * *
사람들의 탄식을 뒤로하며 떠나고 있었다. 머릿속은 실타래가 엉킨 듯 어지러웠으나 서문윤은 그 엉킨 실의 끝을 잡은 기분을 느꼈다.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는 검설린은 그를 모른 척할 뿐이었다. 황재천의 말을 곱씹던 서문윤은 그를 향해 탄식 어린 말을 내뱉었다.
“습관으로 세태를 바꾼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군요.”
물은 끓인 다음 식혀 먹는다. 하루에 한 번 멱을 감는다. 전염병이 번지는 곳에는 흰 천을 복면처럼 쓰고 다닌다.
이제는 서문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이었다. 사람들에게도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들. 그러나 서문윤은 뒤늦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것이 당연하다 느끼기까지 저는 거부감을 느꼈다.
위생이란 관념은 익숙지 않은 것이었고, 서문윤은 명문의 사족이었기에 하루에 한 번 멱을 감는 일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부정물이 사람을 오염시킨다는 신의의 말은 그의 명성만 아니라면 사이비의 발언이라 의심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행동으로 그를 증명했다.
‘습관이 세태를 바꾼다라.’
황재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서문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그리하여 서문윤은 생각이 진행될수록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애써 그를 무시하던 검설린은 어느 순간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헛소리에 신경 기울이지 마라.”
묵직한 울림을 가진 말에 서문윤은 잠시간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노을빛을 받은 사내의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 없이 차분했다.
입 안의 말을 고르던 서문윤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리 무거운 무게였습니까.”
“…….”
“숙부는 설마, 웁?”
그러고였다. 검설린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 것은.
서문윤은 우악스럽게 제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말린 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하고 차가웠으나 서문윤은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서린 짜증을 읽을 수 있었다. 당황하여 있던 서문윤은 입안에 퍼져 나가는 당분 냄새에 놀라 순간 입술을 오물거리고야 말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혹시나 하여 황양양이 챙겨준 건량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문윤의 말이 듣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검설린이 말린 과일을 꺼내 그의 입에 쑥 집어넣은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잠자코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에게, 검설린은 한마디 말을 툭 내던져 입술을 막게 만들었다.
“시끄러워.”
아하, 시끄러워.
서문윤의 얼굴에 어색함이 물들었다. 검설린이 한계에 서려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짜증이 서린 검설린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큰 피로가 엿보였다.
“아어어어.”
“뭐라는 거냐.”
한심함이 서린 시선에 서문윤이 목울대를 움직이며 건량을 삼키곤 말을 내뱉었다. 새까만 눈이 짜증 서린 사내를 향했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입술을 다물었다. 서문윤은 그저 검설린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간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날카로운 시선이 평온한 그의 얼굴을 쓸고,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나는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서문윤은 그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정적이 다시 흘렀다.
습관이 세태를 바꾼다는 말.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
상념에 빠진 서문윤의 얼굴에 서서히 묘한 빛이 물들어갔다.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추증에 의한 것이었고, 황재천의 말을 장고한 후에 얻은 결론에 인한 것이었다.
검설린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황재천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영웅이 난세를 구원할 수 없다 생각하여 포기했으나, 지난 8년의 세월 동안 서서히 마음을 바꾸었노라고.
그리고 그 순간 귓가에 울리는 말이 있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위정자가 만약 만세에 이르는 출중한 제도를 만들어 후대의 사람이 소규조수하게 한다면 이 난세를 벗어날 수 있지 않는가?”
그 순간 두려움이 든 서문윤이 몸을 떨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판에 끼어든 걸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장안사준 중 네 명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난세의 영웅이라는 팔기린이 그의 의형이 되어 있었고, 20년을 아우르는 긴긴 조정의 흐름에 엮여 있었다.
전직 무관이었다지만 서문윤은 당상관도 되지 못한 채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귀동냥으로만 들어보던 인물들이 판치는 이 상황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동시에 기이한 열망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난세는 범인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난세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닮았다.
연꽃은 꽃봉오리가 잎사귀 위에 자리하고 있어, 진흙탕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고결한 자태를 보였다. 순백의 꽃잎은 무결한 혼을 상징했으며, 진하지 않지만 백 리를 가는 향기는 성인의 덕을 상징했다.
‘난세를 끝내는 것은 영웅이지.’
연꽃을 닮은 영웅.
청려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침음을 삼켰다.
황재천은 검설린이 정권을 잡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크게 갈등하고야 말았다. 고지식한 명문세가의 자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역감을 느꼈으나 장한성을 팔아넘기려던 조정의 행각이 서문윤을 역겹게 만들었고, 또 고난을 겪고서도 결벽증에 가깝게 정도를 걸어가는 검설린의 모습이 그를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서문윤은 고민 끝에 결론을 냈다.
‘어떤 길이든 의형만 행복하다면 돼.’
한참을 장고하던 서문윤은 결국 심력을 소비하여 모든 것을 잊고 마차에서 몸을 늘어트리고야 말았다. 황재천과 검설린과의 대담으로 전날에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그는 마차의 벽에 몸을 기댄 채 검설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곧 심취했고, 그에 짜증을 내는 검설린과 투닥거리다가 결국 잠이 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도착한 장한성에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우아아아아아!!”
마차에서 내리고, 서문윤은 귀를 찌르는 듯한 환호성을 들으며 멍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들은 의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검설린은 눈을 감은 채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빤한 시선을 주었다. 무언의 압박 끝에 검설린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유리알 같이 투명한 눈이 마차를 가로막은 인파를 담으며, 동시에 복잡한 빛을 드러냈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 묻어 나오는 심란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장한성은 그가 부임하여 갈고닦은 곳이었다. 고작 십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검설린이 이곳의 성민들을 모를 리 없었다. 모르는 척했지만 서문윤은 그간 검설린이 그들을 향해 진한 애증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의형은 북적의 침입을 주로 막아 강북에서 영향력이 크다 했다.’
그러나 동궁사변 때 구주(九州) 천지에서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이들을 향해 탄원을 하던 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당시에 태자가 패륜을 저질렀고 그의 신하들이 부정부패했다는 말에 휩쓸려 그를 모욕하였다. 서문윤은 검설린이 동궁사변에 연루된 일을 고백하던 날 이후 수도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하급 관료에게 넌지시 물은 적이 있었다.
군중심리(群衆心理)란 지극히 단순하여 세태에 쉽게 휩쓸렸다. 그리고 친족과 지인을 서로가 고발하고 구족이 멸족하는 광기 어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들이 존숭했던 이들을 버렸다.
이후 8년이 지나고 혹한 정치가 그들의 가세를 더욱 어렵게 하고서야, 그들은 과거의 일이 누명이었다 말을 할 뿐이었다.
그런 검설린에게 그들은 환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그를 희망이라 받드는 이들 앞에 서 있었다.
신음이 귓가에 흘렀다.
귀가 멀 듯한 함성을 들으며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곤 숨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서린 증오, 분노, 애정, 연민, 탄식, 기시감, 그리움.
그리고 슬픔.
운명이 그에게 지나치게 가혹하여 검설린은 증오에 먹히고야 말았다. 그를 어떻게 비난할 수가 있을까.
서문윤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와 함께한 2년간 각박한 난세의 추악함뿐만 아니라 사람의 정 또한 보았고, 동시에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보았다.
검설린 자신은 모르지만, 타인에게 그 또한 그런 인물이었다.
세상은 단편적으로 해석을 해선 안 되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저들은 한결같이 어리석구나.”
삶이라는 희망.
“내가 여기에 온다고 무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저들을 구원할 것이라 확신하고 환호성을 내뱉는구나.”
서문윤이 그 말에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삶이 각박할 때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법입니다.”
그리고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 끝에 말을 덧붙였다.
“제가 생명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봅니다.”
마차가 열리고 서문윤은 발을 내디뎠다. 중동에서 넘어온 불치의 병을 고칠 의술은 그에게 없었으나 사람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저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곤궁에 처한 사람들의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악물며 북받치는 마음을 참고 있었다.
환난지세의 곤궁한 환경이 세태를 각박하게 만들었으나, 그들이 완전히 악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은 사라갈 가치가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이 불꽃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보며 서문윤은 환난지세의 끝을 상상하고 있었다.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등 뒤로 울려 퍼졌다.
“넌 항상 생각이 없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서문윤은 피식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이들이 아직도 미우십니까?”
검설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귀가 멀 듯한 고함이 하늘을 찌르고 구름 같은 인파가 시야를 막을 때, 저 멀리서 뛰어오는 환한 웃음을 짓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이청우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어느 순간 눈을 감고 입술 밖으로 얄팍한 신음을 흘렸다.
하늘은 청명했고, 사람은 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옛날 어느 영광스럽던 때와 같은 날이었다.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바위가 되어 내려앉고 있었다.
* * *
홍정(紅定) 34년 2월.
낙수와 백탄강을 경계로 회흘과 인접한 장한성.
가한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던 장한성 전투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 서문윤은 이청우에게 황재천이 말해준 일들을 조심스럽게 언질해주었다. 어마어마한 돈이 오가는 밀무역 시장. 견마무역이 벌어다 주는 이득에 눈이 먼 황제가 장한성을 회흘에 내어주고 밀무역 시장을 재건하려 한다는 추악한 말에 이청우는 창백해진 얼굴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원군도 받지 않는 게 좋을걸세. 황 숙부는 그들이 위장한 회흘병일 테니 주의하라 하셨….”
“개잡놈들!”
그 순간 와장창 깨진 화병이 허공을 비산했다. 서문윤은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이청우를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의 뒤에 황제가 자리한 것을 이제 이청우도 안다. 그럼에도 거친 쌍욕을 내뱉었으니 이것은 엄연한 불충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항시 호방하던 이청우의 분노를 이해한 까닭이었다.
“신의는 어디에 계시나?”
분노가 해일처럼 스쳐 지나간 자리 이청우는 물먹은 걸레마냥 힘없고 지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역량이 부족함을 알고 있어. 모든 힘을 다한다 해도 나는 명장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지. 내 장수로서 자질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아버지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구나.”
서문윤은 그리고 그의 이어진 말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 장한성을 의탁하고 싶네.”
말을 내뱉는 이청우의 얼굴에는 마음을 다잡은 자의 고요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서문윤의 표정은 가히 심상치 않았다.
그가 정녕 미친 게인가? 부담감에 완전히 돌아버린 게 아닌가?
지금 검설린은 엄연히 민초에 불과한데 어째서 그는 하나의 성을 책임져달라는 말을 할 수 있나?
성주는 고위관직이라 정상적이라면 태부의 아들이 아닌 황제의 아들이 와도 그 나이에 부임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청우의 얼굴에서 결의를 보았고, 그에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등골에 소름이 타고 올랐다.
그는 짧은 침묵 후에 입술을 열었다.
“알고 있었나?”
“신의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었지. 그는 악 씨인가?”
서문윤의 숨이 멈췄다. 창백한 이마에 서린 땀방울을 본 순간 이청우는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정말 그로군.”
그 말을 듣고 서문윤은 이청우가 그를 떠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일은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몸을 돌리자 이청우가 등 뒤에서 간절한 말을 내뱉었다.
“그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지 여쭈어봐 다오!”
그 말은 서문윤이 참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람 앞 등불을 근 1년간 지켜온 사내.
굳건한 의지가 두 눈에 있고 강인함이 철벽처럼 얼굴 위를 두르고 있다. 유생일 적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인 어엿한 무관은, 그의 앞에서 한껏 지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나긴 투쟁이 그를 10년은 늙게 만든 듯했다.
서문윤은 그의 머리 군데군데 흰머리를 엿볼 수 있었고, 그를 보며 잠시간 입안에 담긴 말을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단함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그는 고작 20대의 어린 무장인데 어찌 나라 안팎의 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나.
서문윤은 착잡한 마음을 삼키며 입술을 열었다.
“그는 의원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청우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그는, 그는!”
그리고 이청우의 말에 앞서 서문윤은 또다시 입술을 열어 그의 말을 끊었다.
“성주는 또다시 관인으로서 해결해야 할 책무를 민초에게 넘길 겁니까?”
이청우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그를 보며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장수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고, 장병은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죽고, 성민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지만 서른여덟 명의 의원은 그의 짐이다.
“나는 모두를 위해서-.”
“긍지와 목숨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고.”
흔들리는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과거의 한 청년을 보고 있었다. 무관으로 만나자 했던 청년은 그의 약속을 지켜 훌륭한 장수가 되어 눈앞에 있었다. 세월은 고작 4년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서 특히 지난 2년은 서문윤에게 있어 특별한 나날이었다.
“그 끝에 깨달은 것은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사족만이 전자에 비중을 둔다는 생각을 품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지막한 말을 내뱉는 서문윤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청우는 그를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가.”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은 존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이청우의 입술 밖에 침음이 흐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를 향해 잠시간 고요한 시선을 보내다가 입술을 열었다.
“성주. 민초는 단순하지만 어리석지 않습니다.”
부드럽게 흘러나온 말에 이청우가 몸을 멈칫했다. 고작 말도 몇 번 섞지 않은 짧은 인연이지만 어쩐지 정이 든 동기를 향해 서문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보냈다.
“지금껏 생각해왔는데, 성주는 지금 잘못된 걸 지키고 계시는군요.”
“뭐…?”
“어째서 당신은 그들의 영혼과 뜻이 아닌 육신을 살리기 위해 오명을 자초하신 겁니까.”
“!”
서문윤의 반듯한 얼굴에 차분한 기색이 서렸다. 그는 한순간 당황을 드러내는 이청우를 바라보며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이청우만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명문세족의 일원이었던 청년은 2년간의 험난한 생활 끝에 성장했고, 많은 사람을 바라보며 희로애락을 겪었다.
그가 헤엄친 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전쟁이었다.
적어도 인간군상의 이해도는 이청우를 비롯한 그 또래보다 높았다. 민(民), 사람(人), 백성(百姓). 군집을 부르는 조금은 다르지만 엇비슷한 말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형용할 수 없는 그들의 무궁무진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하늘의 뜻이고, 누군가는 지켜줘야 할 대상이고, 누군가에게는 계도의 대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원망의 대상이다.
서문윤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근원이 그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너무나도 간단한 이치는, 그들은 절대다수이고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이다.
민심이 천명(天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세상은 민의 세상이고, 그들의 단순한 생각은 세상을 이루는 이치였다.
“장한성민이 생존을 위해서만 싸운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 사족이 민에게서 제 집단을 유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에 비해 특별히 현명하고 똑똑하다 말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세세한 학식은 떨어질지 몰라도, 그들은 세상을 이루는 도리와 대의명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다.
“인정을 위해 싸운다면 이들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심호흡을 하며 서문윤이 단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형은 대의명분을 위해 사람이 죽는 것이 쓸모없는 짓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서에 남는 한 줄의 이름 탓에 생명이 스러지는 것이 무슨 의미냐 했습니다만, 그 의미는 차고 넘칩니다.”
새까만 눈이 허공에 반짝이고 이청우는 그를 바라보면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단정한 청년의 얼굴은 저와 달리 4년 전과 엇비슷했으나, 그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서문윤 또한 성장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난을 겪지 않는 듯한 그를 부러워했는데.
동요를 삼키는 사내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역사에 남아 타의 모범이 되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지 않겠나?”
서문윤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소규조수나 온고지신이나 법고창신 따위의 수두룩한 말들. 사람들은 옛 사람의 일을 본받아 앞날을 밝히려 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후대의 사람을 위해서라도 누구보다 모범적이게 살 필요가 있지 않겠어?”
“후대의 일까지 걱정하다니, 너는 재상이 되었어야 할 재목이구나.”
그 핀잔에 서문윤이 피식 웃었다. 이청우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젊은 성주의 얼굴에는 전쟁으로 인한 불안이 가신 이후였다. 다시금 그의 얼굴에는 굳건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은 철벽처럼 단단해 무너질 염려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에 아련함이 언뜻 스쳤다. 어느 날을 회상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들을 위해 모든 짐을 지고 흙탕물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나를 믿고 따르던, 생사의 전장에서 등을 맡길 수 있던 전우들을, 우리를 믿어준 이들을, 불쌍한 그들을 위해서.”
그 말에는 깊은 정이 묻어 나왔다. 가슴이 아릿하다. 그러나 서문윤은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한 채 한숨을 가볍게 내뱉었다.
장한성이 아무런 보급도 없이 저 사나운 명장 열파답의 맹공을 겨우내 막아낸 것은 오로지 생존본능 때문인가?
그건 아닐 테다.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일은 사실 기적이 아닌 사람의 의지가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이청우는 그를 잊은 채 오직 연명을 위해 의원을 납치하고, 또 책임을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덤덤한 말이 이어졌다.
“그들의 눈에는 자부심이 엿보였지. 척박한 땅에 둥지를 틀어 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긍지와, 가정을 지인을 혹은 나라를 지킨다는 결의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외환을 막고자 하는 동심이. 성주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나. 단순한 목숨을 지키는 것은 사람을 수습하여 성을 빠져나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청우 자네가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나의 사명 때문이지.”
또렷한 말이 말을 끊고 서문윤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미소였다.
“민초는 민초의 할 일, 병사는 병사의 할 일, 성주는 성주의 할 일이 있습니다. 신의는 병자를 돌볼 사명이, 윤에게는 신의를 지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게 맞는 길입니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너는 힘든 길을 걷는구나.”
이리 말을 하긴 했어도, 이리 잘난 듯 말을 하긴 했어도 수만의 목숨을 책임지는 무게를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하물며 부친에게 버림받은 마음. 이 태부는 결국 황제의 뜻에 따라 이청우를 방관하였으니, 이청우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놓인 셈이었다.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나라와, 존경하던 명성 높은 가친과, 믿고 따르던 군부의 상관에게서 버림받았다.
그의 운명을 함께할 수는 없어도 동기의 정은 남아 있었다. 서문윤은 그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청우는 어깨에 닿은 손등을 꽉 잡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잘못 말했구나.”
손등을 잡은 이청우의 손은 벽돌처럼 우둘투둘했다.
고난의 흔적.
서문윤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을 때, 이청우는 다시금 성주의 모습으로 돌아와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다시 만날 때 완연한 무장의 모습을 보인다고 했는데, 한심한 말을 해버렸어.”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사실 그대들에게는 책임이 없어.”
“?”
말에는 힘이 있었고, 또한 부드러운 정이 있었다. 서문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째서 장한성으로 돌아온 거냐. 부끄러운 말이지만, 네 말대로 이곳은 우리의 소임하에 있는 곳이다. 생도 사도 그대들은 함께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청우의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청우는 신의와 서문윤과 처음 조우할 때 기뻐하면서도 착잡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었다. 성주로서 기뻐했으나 정리로서 안타까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또한 강직한 마음을 지닌 동기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 살아난다면 더욱 많은 일을 해낼 이다. 그의 말대로 저의 불민함 때문에 그가 제 책임을 나누어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한성은 그들의 사명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둘러서….”
그리고 이청우가 조심스레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병이 진압되기 전에 신의는 그것이 발발한 땅을 떠나지 않았어.”
서문윤은 그의 마음을 안다는 것처럼 웃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 훌륭한 무관이 되어 만난다고 했지.”
“…….”
“관료는 아니지만 나름의 길을 밟고 있습니다, 성주.”
이청우는 그리고 가볍게 웃는 서문윤의 앞에서 할 말을 잊고야 말았다.
“제 사명은 신의를 지키는 겁니다.”
서문윤은 완성된 무인처럼 보였다. 한 치의 의심도, 한 치의 미혹도 없이 그는 다정하고 온유하지만 동시에 강인한 눈으로 이청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에 침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한 사내의 얼굴을 생각했다.
진흙에서 피는 아름다운 연꽃.
그러나 향기가 퍼져 나가기엔 진흙탕은 너무 깊고도 넓어 알아봐주는 이 없이 홀로 썩어나갈 뿐이었지. 언제부터 홀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고고하고 외로운 이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서문윤이 고개를 숙이며 빙그레 웃었다.
이청우가 나라를 지키는 것처럼, 수만의 민초의 긍지를 등에 업고 나아가는 것처럼. 서문윤 또한 무인으로서 굳건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것은 한 명의 의원을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이었고, 그를 살리겠다는 의지였고, 그의 명예를 지키겠노라는 의지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겠다는 마음.
누구보다 선량하면서도 누구보다 불운한 인생을 보내야 했던 불쌍한 사내.
‘끝까지 함께할 수가 있다면.’
검설린이 다시 활짝 필 수가 있다면, 그 우아한 향취를 다시 낼 수 있다면, 훼손된 영혼을 수복하고 명예와 긍지를 찾을 수만 있다면 바라는 게 없다.
그런 마음으로 서문윤은 담담하게 이청우의 말을 거절했다.
“그가 한때 자리했던 이곳에서 다시 끝을 보고 싶어.”
그러나 서문윤의 바람과 달리 검설린은 전쟁이 시작한 후에도 냉소적인 모습을 유지했다.
* * *
홍정(紅定) 34년 4월 초순.
공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개 공성전의 끝은 성문이 열리는 것으로 끝이 나나 장한성의 성문은 검설린이 장담을 할 만큼 두껍고 또 견고했다. 장한성의 성문을 깨지 못하니 성벽을 오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 장한성의 해자는 깊고 넓었고, 성벽 근처에 지은 토산은 초기에 점령을 당해 사용도 하지 못한 채 포기해야만 했다.
공성전은 대개로 지구력 싸움이다. 회흘의 군대가 5만에 육박한단 소리를 듣고 서문윤은 어이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군대는 기마병이 대부분인 강군이다.
‘끝까지 가보자 마음을 먹었나 보군.’
길면 수년이 갈 싸움이다. 공성전은 민간의 피해가 심해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려오고, 민(民) 또한 뜨거운 물을 끓이고 투석기로 날라 오는 돌을 피하느라 피로가 심했다. 여러모로 전장은 있을 만한 곳이 못 된다.
그리고 전장에서의 검설린의 존재는 특히나 빛을 발했다. 사실은 검설린은 괴질을 치료하는 데 그 특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부분에 특화가 되어 있어 부상자들의 사망률이 크게 줄었던 것이다.
전염병을 완전히 잡지 못하는 검설린에 “훌륭하긴 하여도 소문만큼 신의는 아니군.” 말을 했던 이들은 팔을 꿰고 다리를 붙이는 신묘한 광경에 기겁하여 그를 선인이라 숭상했다. 검설린이 코웃음 치며 비웃은 광경이었다.
“신의께서 없으셨다면 사망자가 다섯 배는 더 되었을 겁니다.”
감탄 어린 군의의 말에 검설린은 말없이 바늘을 움직일 뿐이었다. 실로 사람의 몸을 재봉하는 것은 어디에서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의술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독특한 것에 군의는 눈을 반짝거리며 검설린을 바라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의가 사람은 안 고치고 희희낙락거리느냐는 검설린의 역정 어린 고함을 받고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바쁘고 고난스러운 때에 서문윤은 봄을 함께 맞이하고 싶다는 검설린과의 약조를 지켰다.
봄이라고 해보았자 벚꽃도 연꽃도 도화도 없다. 단지 야르구이라 불리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보라색 꽃이 피고, 민들레 따위가 초원에 무성하게 날 뿐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벚꽃을 보지는 않았지만 노란색 꽃가루가 날리는 마당 대청에 앉아 함께 휴식을 취했다. 초원의 봄은 화려하지도 멋스럽지도 않았으나 그 특유의 간지러운 느낌은 여전했다.
두 손에는 피가 묻었고 새하얀 의원복에는 더러운 이물질들이 가득했으나, 이것이 고작 일 각 남짓한 휴식 시간이었으나 두 사람은 선선한 바람을 받으며 졸린 눈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있었다.
서문윤은 작게 하품을 하고 마루에 털썩 대자로 누웠다. 검설린은 그를 한심한 눈으로 흘끗 바라보았으나 굳이 지친 그를 향해 타박을 늘어놓지 않고 작게 살랑거리는 들꽃을 구경할 뿐이었다.
서문윤은 그날 저녁 고열로 끙끙 앓는 검설린이 그제야 꽃가루에 심히 민감한 것을 알아채고 머쓱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 * *
홍정(紅定) 34년 4월 중순.
성벽을 오르지도 못하고, 공성포도 궤적이 맞지가 않고, 또 믿었던 위장한 원군도 장한성이 물리치니 열파답의 마음이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무조건, 무조건 여름이 가기 전에 성을 정복한다!”
총사령관이 고래고래 외친 말을 듣고 서문윤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여름입니까?”
검설린이 묵직한 말로 답했다.
“해자에 시체가 쌓이니까.”
“?”
“여름에 급속도로 퍼질 전염병을 두려워하는 거다. 게다가 장한성 내에서 퍼졌던 괴질이 슬슬 그쪽에서도 퍼졌을 터인데, 아마 공황상태일 거다.”
“아, 아아.”
그제야 괴질이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에게도 치명적인 사실임을 깨달은 서문윤이 탄식했다. 전장에서 전염병에 걸린 아군의 병사가 그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으니 아무래도 질병이 그들에게 퍼질 수밖에 없다. 이쪽에서도 일부러 전염병자의 물건을 그쪽에 던지곤 했으나 서문윤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공성전이라면…… 이기는 건 몰라도 버틸 수는 있을 것 같군.”
그 말에 서문윤은 새까만 눈을 반짝 빛내며 성벽에 선 새까맣게 그을린 젊은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멋있다.’
무인으로서 다른 길을 찾았지만, 아직도 과거에 품었던 장수에의 꿈을 잊지 못했다. 선망 어린 눈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 그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검설린은 문득 얕게 웃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이니, 그로서도 서문윤이 그 꿈을 이뤘으면 참 좋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장수를 보고선 고집 세게 내 곁이 제 길이라고 우겨?’
어이없어 웃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뒷짐을 지며 그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고 따라와라.”
“예?”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다.”
“……?”
그리고 검설린을 따라간 서문윤은, 그에게서 사람의 몸을 꿰매는 법을 배우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래도 사람이 죽지 않습니까?”
“사람 죽여봤지?”
툭 내던진 말에 서문윤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느질도 제법 잘하잖아.”
검설린의 뜯어진 옷을 꿰매는 것은 서문윤의 몫이었다. 본디 검설린이 하던 소일거리를 서문윤이 득달같이 빼앗아 이미 잔업에는 어느 정도 소양을 갖춘 서문윤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데 무슨 걱정이냐?”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시큰둥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를 향해 결국 서문윤은 울상을 지으며 손에든 바늘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바느질 잘하고 사람 죽여본 적 있는 거랑 봉합술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손 하나라도 귀중하다, 그냥 해! 살면 제 복이고 죽으면 제 명이지.”
엄하게 말한 검설린에 서문윤은 입술을 벙긋거리는 부상자를 향해 바늘을 들고 다가갔다. 꿀꺽 침을 삼키는 서문윤이 어색한 웃음을 짓자 부상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 아무래도 못 하겠어요.”
고개를 돌리니 검설린의 등만이 보였다. 망연히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은 결국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저, 저기 저는 그냥 두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대화를 들었는지 불안을 드러내는 사내를 향해 서문윤이 황급히 말했다.
“저 나름 바느질 잘합니다.”
서문윤의 첫 수술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봉합이 끝날 쯤 다가온 검설린은 상처 부위를 살피며 서문윤의 핀잔에 “네가 서당 개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말로 답했다. 서문윤은 지긋한 그의 시선을 받고 결국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어야만 했다.
그는 제가 뒤에서 돼지 껍데기로 바느질을 연습한 것을 알아챈 거다. 몰래 연습한다고 하였는데 들키고야 말았으니 부끄러워 서문윤은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향해 검설린은 작은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꾸욱 손으로 잡곤 말을 내뱉었다.
“잘했다.”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당황하다가 이윽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검설린은 툭 그의 어깨를 건드리고 자리를 가볍게 떠났으나 서문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서문윤은 의원의 일도 일부 분담할 수 있었다.
“미숙해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 게다가 네 실력이 그다지 미진하지 않아. 연습한 것만큼 하면 충분할 거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 말에 서문윤은 설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홍정(紅定) 34년 5월 초순.
한 차례의 전투가 끝나고 비교적 안전하던 후방에 자리하던 노인 한 명이 발견한 것이었다.
일찍이 아들 둘을 앞서 보내고 하나 남은 귀한 자손을 병으로 차출당한 이 노인은, 홀로 후방에 있는 것을 슬퍼하며 일손을 거들려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나이가 많아 성벽에 나가지 못했고, 괴질을 견디지 못할 만큼 몸이 허약해 의당으로도 가지 못했다. 부상자의 몸에 붕대를 감는 일도 잘하지 못했는데, 그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늙으면 일찍 죽는 게 답이구나. 폐물이 쓸모없이 귀한 쌀이나 축내니 더 살아서 뭣 할꼬?”
그리 한탄하던 노인은, 그러나 뜻밖에도 그 당월에 가장 큰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바로 혈공(穴公, 땅굴)을 발견한 것이었다.
공성전 와중에는 화시(火柴)에 대처하여 항아리에 물을 긷고 곳곳에 놓곤 했다. 일손을 거들게 없나 돌아다니던 노인이 항아리의 물에 진동이 퍼지는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초병에게 사실을 알린 것이었다.
노인은 힘이 없으나 경험은 있었고, 그 옛날 악천화 시기에 장한성에서 복무했던 퇴역병이었다.
“혈공입니다. 회흘놈들이 혈공을 파고 있습니다!”
노인의 보고를 받고 바로 수색에 들어간 초병이 지청(地聽, 땅굴 감지법)으로 검수한 후 한 말이었다. 당연히 장수들은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미친놈들이 해자가 있는데 혈공을 파?”
장한성의 해자가 얼마나 깊고 넓던가? 게다가 그곳은 시체들이 무더기로 자리하여 지반이 불안정한 곳이었다. 발견을 하지 못했더라면 장한성이 통째로 그들에게 넘어갈 판국이었으니 그 말을 듣고 등골에 소름이 돋지 않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리 혈공을 발견하였으니 대처는 쉬웠다.
이청우가 진동이 심한 곳에 맞굴을 파고 쇳물을 부어서 혈공의 일을 간단히 해결했다. 혈공은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감지만 한다면 의외로 대처하는 법은 쉽다.
쇳물이 들이부어진 혈공에 참담한 비명이 울리고 곧 정적이 찾아왔다. 이청우는 조금의 시간이 흘러 땅을 파 시체를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본디 성벽 안으로 잠입하는 임무는 정예병을 차출하여 맡긴다.
그러니 혈공의 별동대를 제거한 것은 회흘의 전력을 크게 빼앗은 일이었다. 충격이 큰 듯 회흘은 한동안 침공을 하지 않았고 장병들은 가시적인 승리에 기뻐하였으나 뜻밖에도 장한성의 수뇌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사실 장수들 사이에서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가한돈이 제대로 칼을 물었나 보군.”
회흘은 유목민족이라 공성전의 역사가 짧아 혈공을 파지 않았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이들이 혈공을 파고 정예병을 보냈으니 만약 노인이 없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이것은 회흘이 장한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전장에 등장한 새로운 모양의 투석기는 서역의 것과 엇비슷했고, 혈공을 파는 것은 공성전에 능숙한 나라에서 배운 것 같았다.
금년의 회흘은 여러모로 작년과는 많이 달랐다.
“이번에는 그들이 물러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유목민족에게 씨족이란 가족 이상의 의미를 지니니.”
굳은 얼굴로 이청우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가한돈의 유일한 남동생이 장한성에서 죽었고, 오늘날 회흘의 대권을 차지하고 있으니 아마 끝을 볼 생각인 것이 분명합니다. 올해의 전투는 작년의 것보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제장께서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덤덤하게 내뱉는 말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필사의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사실 이청우는 기반이 무너지지 않게 혈공을 파는 방식이 중원의 것과 비슷하여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조정이 그를 버렸다는 서문윤의 말이었으나 이청우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애써 말을 삼킬 뿐이었다.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싸우지 않으면 죽어갈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장한성민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말을 곱씹으면서도 이청우는 불쑥 뇌리에 스친 말 한마디에 답변하지 못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왜 종묘사직과 나라가 필요한 건가?’
그것은 반드시 가슴에만 묻어두어야 할 말이었다.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면 어찌하여 유자들은 애국충정을 외치는 건지,
조정은 어째서 세금을 걷고 군주는 왜 존재하는 건가.
어찌 국학(國學)에서는 군신의 도리를 가르치고, 전대의 아름다운 고사를 설파하여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하는 건가.
그 누구보다 공맹의 도리를 귀에 따갑게 설파하던 아버지는 장한성과 장병들을 버리라 하였다. 그 누구보다 나라에 충성하던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청우가 속으로 툭 튀어나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장한성이 축성된 지 거의 20년이 다 돼가는 시점. 이곳의 평화를 위해 죽어간 이들이 거의 10만이 가까이 됩니다. 아버지. 그러나 조정은 저희를 버렸고 목숨 바쳐 충성할 대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죽을 마음을 품을 뿐입니다.’
한숨을 내뱉으며 속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녕 옳은 일입니까?’
아버지가 말한 애국의 가치를 이청우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역심으로 느껴질 말을 꾹꾹 누른 채 이청우는 그저 제가 할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바로 장한성을 지키는 일을.
그리고 그쯤에 장한성에 전해진 소식이 하나 있었다. 건전성의 성주와 하동 절도사가 황재천에서 전 어림군 제일군사장군 곽사항으로 변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황재천은 오로지 하서 절도사로서의 관직만을 수행하기 위해 인수를 내려놓고 건전성을 떠났고, 하동에 전혀 연고가 없는 곽사항은 하동의 10만이 넘는 군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는 실로 까무러칠 일이었다.
절도사는 병권뿐만 아니라 행정 치안 또한 담당하여 지역에서 군주나 다름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에 그 지역에 연고가 있거나 인망이 높은 이를 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졸들이 복종하지 않았고, 특히나 국경의 절도사라면 특별히 검수받은 이를 임명하지 않던가?
그러나 곽사항은 인망이 높지도 지역에 연고가 있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수도에서만 부임했던, 권세를 누리는 일에 관심이 많은 군인이었다. 북란 당시 활약한 전적이 있던 황재천과는 다르게, 장수보다는 정치가에 가까운 인물.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검설린이 먼저 한 일은 약탕기를 깨부수는 것이었다.
“헉!”
놀라서 얼어붙은 서문윤의 귓가로 얼음송곳같이 차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장살해야 마땅할 놈이 명줄이 길어서 아직도 살아 있구나!”
검설린은 장한성에 방문한 이후 감정의 변화를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간 냉막했으나 덤덤했고, 어딘가 초탈한 듯한 태도를 보여 서문윤의 마음을 혼돈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분노하여 오랜만에 시퍼런 살기를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아시는 분입니까?”
조심스럽게 한 말에 검설린은 예민하게 웃었다.
“알다마다!”
분노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을 향해 그와 관련된 일을 더 묻고 싶었으나, 음습한 기운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서문윤이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곽사항이 바로 태자의 심복이었다가 가장 먼저 그를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서문윤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검설린 처소의 불을 보며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울화가 치밀어 병이 되었다는 말이 사실인 듯 검설린은 그날 심한 고열을 앓아 침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나뭇잎 같은 한이 쌓이고 쌓여 강을 막는 둑이 된 듯하다. 서문윤은 정신을 잃은 채 몸을 웅크리며 떠는 그를 내려다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병색이 짙은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죽인 신음이 간헐적으로 흐르는 입술에는 피비린내가 묻어 나왔다.
이 심병에는 탕약이 쓸모없었다.
불처럼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으며 서문윤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마음을 죽인 이들이 득세하는데 어떻게 의형이 멀쩡하겠어.’
그저 마음의 병은 깊어져갈 뿐이었다.
“난 그러려고 했던 게….”
“의형, 여기는 장한성입니다.”
저를 알아보지 못한 채 헐떡거리는 검설린을 토닥거리며 서문윤이 입술 밖으로 얄팍한 신음을 내뱉었다. 옷자락을 붙잡고 검설린은 무어라 변명을 시도했으며 갈라진 입술 사이로 더듬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고열로 흐려진 혼탁한 눈이 그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심장이 지끈거리는 고통은 바로 그를 연민한 까닭이었다.
“……하지 않았다.”
그의 눈가에 맺힌 투명한 눈물을 닦으며 서문윤은 결국 눈을 질끈 감기를 택했다. 마음이 몹시 아파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는 하지 않았……”
아스라이 흩어지는 간절한 말을 뒤로하며 서문윤은 묵묵히 그를 토닥거릴 뿐이었다.
* * *
홍정(紅定) 34년 5월 중순.
곽사항이 보급을 끊었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입니까?”
이쯤 되면 아무리 장수들이 암약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한들 눈치를 챌 법했다. 그저 조정의 탁상공론 때문에 이청우가 성주가 못 되고 보급을 제때 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제장들 중에서는 경험이 일천한 이청우가 아닌 다를 이를 성주를 세우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작금 상황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의심을 품을 뿐이었다.
군수품을 제때 보내주던 황재천이 교체당하고 그 후임인 곽사항이 보급을 끊으니 이것이 뜻한 바가 무언가?
“그들이 우리를 버리려나 봅니다.”
허탈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이청우는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조정에 기대하는 바가 아직도 있었습니까?”
답변이 걸작이었다.
“이 조 모가 그렇게까지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확신을 할 뿐입니다.”
“그 권력놀음에 미친 비루먹은 개새끼들이 우리를 살리려 들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을 바라보며 이청우는 허허로이 웃었다.
보급이 줄어드는 일은 전장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 특히나 공성전은 물량이 기 7할을 차지하는 전투. 황재천의 언질을 받아 이청우가 물자를 아끼긴 했지만, 또 여름에 그나마 작물이 나 먹을 것을 구할 수는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입을 풀칠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전장에서 보급의 우선순위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따져 매긴다. 먼저 병자들의 식량이 줄었고, 그 다음으로 노인, 아이, 여인과 같은 민인, 그 다음으로 의원의 배급이 줄었다.
‘어지러워.’
전쟁은 병사들만이 수행하는 게 아니다.
생사를 가르는 곳이 전장이라 한다면 엄연히 의당도 그리 부를 수 있겠지. 나날이 줄어가는 식량에 서문윤은 어지럼증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굶주림 앞에 장사가 없는 법이다.
‘이러다가 지쳐 죽겠군.’
“좀 쉬거라.”
그리고 잠시간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던 검설린이 서문윤을 향해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쉴 생각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하루가 고되고 고되지만 그와 함께 이 전장에 있는 것이 보람되고 뿌듯했다.
그와 함께 사투를 하는 것이, 또 검설린의 옆을 지키는 일이 모두 그의 바람이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은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으나, 검설린은 말을 듣기는커녕 그를 바라보며 흉흉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그럼 조금 쉴까요?”
어색하게 웃으며 한 말에 검설린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당장 숙소로 꺼져!”
욕설을 들었음에도 서문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까닭은, 검설린이 그의 중병을 걱정하고 기 때문이었다. 종종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며 서문윤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체질이 좋은 건지 괴질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오히려 서서히 좋아지고 있단 것이었다. 검설린은 그것에 꽤나 흥미를 느낀 듯, 아니 사실 서문윤의 몸을 살피고 눈을 번뜩이며 확연한 탐구의 의지를 드러냈으나 상황이 알맞지가 않아 그저 다행인 일로 넘어갈 뿐이었다.
서문윤은 가끔씩 운표선이 있는 서쪽을 묵묵히 바라보는 검설린을 떠올리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철없게도 그가 저를 걱정하며 초조해하는 것이 좋으니, 정말 답이 없는 일이었다.
검설린이 들으면 역정을 낼 말을 삼키며 서문윤이 침상에 몸을 웅크렸다.
귓가에는 멀리서 들어온 고함소리가 났으나 서문윤은 그에 신경 쓸 여를 없이 피로에 젖어 잠에 들었다.
* * *
홍정(紅定) 34년 6월 초순.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북방의 봄이 가시고 있었다.
북방인지라 벚꽃도 없고 도화도 피지 않은 봄은 따스하기보다는 건조했고 또 삭막했다. 그러나 장한성의 봄은 서문윤에게는 꼭 놓치고 싶지 않은 계절이었다.
북방에도 여름은 있다.
서서히 건조하던 바람은 부드러운 기운을 머금고 햇살은 따뜻해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서문윤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 충분했다.
여름은 결코 기쁜 징조는 아니었다.
볼품없는 듬성한 풀꽃이 자리한 길목. 쪼그려 앉은 청년 하나가 희고 붉은 옷을 입은 채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를 보고 있었다.
흰 것은 의복이요 붉은 것은 피였다. 새하얀 의복을 입고 방금 전까지 부상자들을 돌보던 서문윤은 잠깐의 휴식 시간에 길거리에 나와 흩날리는 꽃씨를 보고 있었다.
아우성거리는 비명소리는 사라지고 적막이 감돌았으나, 서문윤은 귓가에 울리는 이명을 지우지 못했다.
전쟁은 언제 어디서든,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가혹하다.
장수는 아니라지만, 창칼을 들고 싸우는 군관은 아니라지만 서문윤은 그 모든 치열한 투쟁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수성전은 회전과 달라 병과 민이 쉬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 민간의 피해가 심하고, 또 그들의 협조가 필요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이청우가 수성전을 선택한 이유는 그것 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장한성 내에는 민간인이 없었다. 모두가 성벽에 올라 돌을 던지거나, 무너진 갑옷을 고쳐 쓰고 전쟁에 나갔다.
변방의 사람들은 병민 할 것 없이 강인하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런 이들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에 나풀거리는 깃털 같은 홀씨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긴 여름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단정한 얼굴에는 근심이 스치고 있었다.
돌이 날아다니고 불화살이 하늘을 덮어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성벽을 둘러싼 해자는 넓고 깊었고 투석기나 화살이 침범할 수 있는 범위는 군사지역으로 한정되었다. 회흘적병이 성문을 부수지 못했고, 토굴을 파지 못하였으니 수성전에서 고지를 점한 것은 아직까지 장한성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긴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흙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다리에 묻은 흙먼지는 털어도 근심과 걱정은 털어내지 못한 듯 그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북방에는 여름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서문윤의 머릿속에 예전 날 있었던 짧은 대담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다행입니다, 북방에는 여름이 없어서.’
덥고 습기가 많은 여름에는 온갖 병이 퍼지곤 했다. 사막의 도시 하나를 궤멸시켰던 괴질이 장한성에서 지지부진한 까닭은 첫째로 호수가 식수이던 사막 도시와 다르게 장한성이 흐르는 강을 끼고 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겨우내에 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원리는 잘 모르지만 서문윤은 고온다습한 환경에 병이 독하게 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가혹한 북방의 겨울은 괴질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안도하는 서문윤에게 검설린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던졌다.
“뭐? 그게 뭔 개소리야? 여기가 세상의 끝인 줄 아느냐? 여기 위를 한참 더 가서 초원길 달단이나 바이칼호 너머에 이른다면 모를까, 장한성에도 여름은 온다.”
그리고 지금 서서히 햇볕이 따스하니 중원의 봄과 같은 기후가 느껴지고 있었다. 북방의 봄은 중원의 것과 달리 시원했으나, 여름은 유월 초부터 따뜻한 기운을 내보였다.
중원처럼 후덥지근하지는 않겠지만, 전염병이 기승을 부릴 시기가 온다는 징조였다.
암담함이 눈앞을 가로막아 서문윤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야 말까.
그 옛날에는 그저 막연하게 장수가 되고 싶고 무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의원의 곁을 머물며 그의 전장을 지켜본 그로서는 생명의 무게에 대해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일이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잠시간 멀거니 서 있던 서문윤이 청명한 하늘을 잠시 보다가 몸을 돌려 의당으로 향했다. 몇 겹의 천을 젖히고 들어가니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귓가에는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말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에는 꽤나 차이가 있는 법이다.
‘인세지옥이 있다면 이런 거겠지.’
비명이 가득한 처참한 자리에, 고성을 내지르는 온통 새하얀 의복의 사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개같은 놈들이 회흘의 첩자냐? 매수를 당했느냐? 환부를 이 따위로 엉망으로 곯게 해놓고 지금 치료를 했다고 말을 해?”
또 무엇이 그리 화났는지 미친 듯이 노성을 내지르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피식 웃었다.
‘지옥이라 할지라도 내게 기꺼운 땅이다.’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팔팔 날뛰는 검설린을 잠시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서문윤이 자리를 옮겼다. 그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온 까닭이었다.
시간은 바삐 가고 있었다.
* * *
홍정(紅定) 34년 7월.
그리고 마침내 여름의 시작이었다.
서문윤은 항시 이 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원이 아니었고, 또한 서양의학을 이론으로 접한 적이 없어 자세한 법칙은 몰랐다. 그러나 중원 땅 또한 질병과의 오랜 사투를 경험했고, 그곳의 사람인 서문윤은 여름에 질병이 크게 창궐한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파나립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어떤 입자들이 사람의 몸에 침투하여 병을 옮긴다고 했지. 그가 죽기 전까지 연구한 과제는, 어쩌면 그 입자들이 모기나 날파리와 같이 살아 있는 존재일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서문윤이 알고 있는 보편적인 상식은, 모기와 날파리같이 체구가 작은 미물들은 겨울보다 여름에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쯤 해서 검설린은 여름을 앞두고 그늘진 얼굴로 끙끙 앓는 서문윤을 보다 못해 말을 내뱉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쪽에서 발병한 괴질과 장한성에서 발발한 괴질은 궤가 다르다.”
나름 위로를 하기 위해 한 말이었고, 또 지금까지의 관찰과 경험으로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된 가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두 개가 다른 병이란 겁니까?”
타클라마칸 사막 도시를 휩쓴 질병이라 가장하고 장한성의 괴질을 인간이 이겨낼 수 없다 평했던 검설린이다. 그 말에 일찍이 서문윤은 생사를 하늘에 맡기고 거의 죽음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드물게 제 말을 무르고 다른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꽤나 희소식이었으나, 서문윤은 순간 당혹스러워 제가 기뻐해야 할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연이어 내뱉은 말은 서문윤이 이해가 갈 법하면서도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본질은 똑같지만 약간 양상이 다르구나. 그쪽은 전염병 중에서도 특별히 사망률이 높은 반면에 장한성은 마마나 호열과 크게 다르지 않아. 게다가 사막 쪽 도시를 휩쓸었던 병은 완치자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를 비롯한 꽤나 많은 표본이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리고 있다.”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장한성 쪽은 타클라마칸과 감염경로가 다른 것 같구나. 그쪽은 오아시스를 끼고 있어서 물이 쉬이 오염되지. 비단길이 지나는 곳이라 여러 문명의 선진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상하수도 시설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들. 위생에는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만약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해가 됐을 수도 있다.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분리가 되지 않아 혹시나 오물이 식수에 유입이 되었다면, 짐승을 통해 옮겨진 병보다 더 병세가 심각한 것도 이해가 간다. 장한성은 적어도 식수의 걱정은 없으니까. 이쪽은 아마 밀거래 무역 와중에서 병을 옮기는 짐승이 유입되었을 확률이 크군. 위생을 충분히 신경 쓰고 방역을 높이니 전염률 또한 높지 않고. 너 또한 지금 병에 걸린 지 반년이 되어가지만 기력이 멀쩡하지 않느냐. 똑같이 완치가 힘든 건 마찬가지다만 잘만 신경 쓴다면 내가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암담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말을 듣는 서문윤의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인가?’
검설린이야 같은 입자라도 감입 경로에 따라 그 증상이 달라지고 병세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지만 눈대중으로 본 지식만이 있는 그로서는 잘 이해하지 않은 것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어색해졌고, 검설린은 우물쭈물하는 그를 보며 그저 조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냥 그런 거다.”
“그런 건가요?”
“그래.”
“…….”
대답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서문윤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새까만 서문윤의 눈. ‘의형의 말은 다 옳으니 순종하겠다.’라는 빛이 역력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의형.”
그리고 이어진 말에 검설린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장안에 의학당이 망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학문을 더 많은 사람이 접하고, 또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터인데 안타깝습니다.”
서문윤의 얼굴에는 진실로 안타까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검설린이 서문윤에게 진실로 감탄하는 것들 중 하나는, 그가 정말로 순수하게 애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기득권의 말이 아닌 사람을 많이 살리고자 하는 마음.
“아쉽습니다, 정말…….”
그것은 꼭 그 어느 누군가를 닮았다.
검설린은 잠자코 서문윤의 허여멀건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여 어린 기운이 서서히 가신 그의 얼굴은 성품답게 반듯하고 또 선량했다.
이 아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유심한 시선에 서문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릴 때, 검설린은 피식 웃곤 서문윤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힘껏 쓸어 올려주곤 자리를 옮겼다. 몸을 휘청거리던 서문윤이 저를 빠르게 지나치는 검설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황급히 말했다.
“의형!”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검설린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속으로 말할 뿐이었다.
‘아니, 장안의 의학당은 망해야만 했지.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한 손을 뒷짐을 지고 걷는 그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죽으면 이제 파나립의 의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유산은 사라져버려.’
파나립이 죽고, 장한성의 의학당에 불이 난 후, 심지어 의학이 중흥했던 중동에도 변이 나 도서관과 의술학교가 사라진 지금 이 시점에서 적어도 그 말을 이해할 자는 없었다. 검설린이 가지고 있는 지식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그들의 유산인 것이다.
그리고 검설린은 파나립의 유산을 후대에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검설린의 입가에 씁쓸한 조소가 서렸다.
그것이 불러일으킬 화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대와 20대를 군부에서 보냈지만 적어도 검설린에게는 부친이 몸을 바친 가업을 물려주겠다는 의지는 있었고, 의술에 몸을 바친 아버지의 정신도 잘 알고 있었다.
아비는 만인을 살리고 또 긍휼히 여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절 몇 번 얼굴을 보았던 파나립 박사는 ‘인간이 당연히 인간을 살린다’라는 말로 지식을 넘어선 하나의 정신을 드러냈다.
‘인당활인이라.’
듣기에 썩 좋은, 이해하기 쉬운 말이지만 심계가 깊은 검설린은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인간이 어째서 당연히 인간을 살리는가? 인명은 재천이라는 사상이 널리 퍼진 중원에서 한 사람의 사활이 하늘이 아닌 사람에게 달렸다는 말은 사상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아직도 중원의 사람들은 일식과 혜성이 하늘의 노여움일 뿐이라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중원에서 천명(天命)과 인도(人道)의 관계라는 나름의 학문으로 정착화 되었다는 사실.’
파나립 박사는 의학서만을 가지고 중원에 들어온 게 아니었고 검설린은 비단 양의학뿐만이 아닌 서양의 여러 이론을 접할 수 있었다. 반역 도당으로 가문이 멸망한 이후에도 검설린은 연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여러 지식들을 살피고자 했다. 유가와 춘추전국시대로부터 내려온 제자백가의 사상을 살피고 서양과 중동의 여러 서적을 읽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파나립의 노력이 쓸모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무정한 검설린이라도 그것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암담하기 그지없어, 그저 길고 깊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넓은 중원 땅 그 어디에도 유가가 해석한 자연관 이외의 이치는 설 자리가 없다.
인당활인.
그것은 하늘이 아닌 사람에게 사람이 기대야 한다는 말이었으며, 작게는 의술의 발전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고, 크게는 학문의 발전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아주 더 크게는 그런 학문을 오로지 인간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애민, 아니 애인정신을 의미하고.
길을 묵묵히 걷는 검설린의 등 뒤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푸른 풀을 짓밟으며 검설린은 인적이 없는 외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상념에 깊게 빠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씁쓸하고, 또 한스러운 상념에.
‘파나립은 큰 사람이다.’
그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저 네 글자로 인류의 길을 결정하고 그들을 더 나은 길로 이끌려 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의 세상을 신이 아닌 인간에게 선물하려 하고 있다. 검설린은 중동과 서양에서 종교가 유가와는 또 다른 의미로 강한 구속력을 지닌 것을 알았고, 의술을 토대로 인류를 자립시키고자하는 파나립의 뜻이 무엇인지도 짐작을 했다.
파나립 박사가 공부했던 중동의 학당에서는 대진국(로마)에서 흘러들어온 희랍(그리스)의 학문들이 있었으니, 그는 학술과 예술이 부흥하는 시기를 그리워하고 있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희랍의 현자들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인본의 가치를 세우려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모두 인류를 위함이었고 또 후세대를 위한 것들이었다.
고우군이 기함을 하여 파나립의 사상을 뿌리 뽑고자 함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나립은 대계를 그릴 줄 알았고 그러면서 제 뜻을 은닉할 줄 알았다. 단순한 의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품은 뜻이 많은 자였다. 그것은 그가 장안에 의학당을 세울 때 들여온 의학서가 아닌 여러 학술 서적으로 증빙이 가능한 사실이었고.
그리고 어느 순간 검설린의 칼 같은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다.’
검설린의 입가에 날카로운 조소가 스친 순간이었다.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풀잎을 짓이기고 검설린은 성벽을 올랐다.
바람이 불었다. 꽤나 쓸쓸한 바람이었고, 외로운 바람이었다.
‘실로 성인 같은 뜻이라지만, 사실상 그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고우군과 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의 뜻을 이해한 고우군은 기겁하여 그의 학문을 말살시키려 했으니 이는 그의 사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기 때문.’
서양의학의 정수라는, 적어도 의학의 수준을 천 년을 끌어왔다는 파나립의 서적을 습득하고 꼼꼼히 공부했으나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지식은, 그의 말은 시대와 몹시 맞지 않다.’
학문의 발전이 시대를 이끌까? 시대가 학문을 필요로 할까?
검설린은 후자에 생각을 두었다.
그는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는 말을 믿었다. 다만 여기서 검설린이 생각하는 천(天)은 시간과 공간이었고, 그것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힘으로 어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학문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만약 중원이 아닌 다른 나라에나, 아니면 천 년 뒤에 유학이 무너진 후에 중원에 의술이 들어왔다면 시대를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검설린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져 나갔다.
조금만 융통성이 있던 나라였다면, 정교한 의술이 빛을 발해 소아사망률이 떨어지고 노역을 할 수 있는 젊은 장정들의 수가 늘어날 수 있겠지. 잉여인력과 잉여재화가 생기고 또 다른 학문의 번영도 기대할 수 있을 거다. 의학의 발전에는 반드시 정교하고 섬세한 의료기구를 만들기 위한 제철기술의 발달이 필요했고, 유리가공 기술이 필요했다. 그런가 하면 표본을 수집하기 위한 통계학이, 병을 연구하기 위한 병리학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이 발발하는 격변의 시대고, 권력자들은 제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바로 잡기를 원했다.
탄식이 흐를 뿐이었다.
‘그가 희망한 아름다운 꿈은 모래성일 뿐이다. 잠시 그 유용한 기술에 혹해 그를 이용하려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기반이 없이는 무너지고야 만다. 기반을 구축한 전제 군주가 이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키거나, 혹은 격변기에 그 어떤 봉기 세력이 파나립의 뜻을 통치를 위한 사상으로 가공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야. 게다가 후자도 건국이 선공해야지 건국사상이지 아니면 그저 제자백가의 흔한 사상 중 하나가 되거나 역적 논리가 된다.’
민간인은 성벽에 오르지 못하나 검설린을 막는 이는 없었다.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가망이 없는 장한성에 헌신하는 그는 이미 장한성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므로 그는 쉬이 드높은 성벽에 올라 노을이 진 들판을 바라보며, 그곳에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리는 병영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차디찬 웃음이 흘렀다.
비참한 거다.
해자에는 수많은 시체가 고여 썩어가고 있었고, 들판에도 치우지 못한 사체들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것은 파나립이 원한 세상이 아니었고, 그의 아비가 원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원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비참한 거다.
‘너무나 일찍 태어난 거다. 그는 너무 일찍 태어난 거야.’
도대체 저의 가문은 왜 멸망했는가?
검설린은 파나립을 원망할 수 없었으나 가끔씩 기나긴 한과 서러움을 느꼈다. 그저 가족이 멸문한 것으로 낙담한 것이 아니다. 아비와 어미가 죽고 반역자의 가문이 된 것으로 절망한 게 아니다.
드높은 이상에 동감하면서도, 그들이 꾸는 꿈을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아름답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깨닫고 있다. 파나립의 뜻을 사람들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외딴 세상에 홀로 떨어진 이방인.
그런 기분이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서문윤마저 간단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 검설린은 답답함보다는 외로움을 느꼈다.
완전히 희망을 놓지 못해 습관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말로 사람을 바꾼다는 시도를 했으나, 청매소를 알려주고 의료기구를 전파했으나 검설린은 이것이 한 세대의 일임을 알고 있었다. 운표선과 고우군이 이것이 일으킬 파장을 염려하지만 그는 그저 그 지식들이 시대를 바꾸지 못하고 쓸려나갈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상은 후대에게도 위험한 것이니까.
권력자는 절대로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검설린은 파나립의 유산이 저와 함께 모조리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성벽 아래를 바라보던 검설린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여기서 살아남아도 문제다.”
어느새 그의 옆에 묵묵히 서 있던 이청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고 화살이 쏟아질지 모르는 자리. 검설린의 안위를 염려하여 이청우는 장병의 보고를 듣고 황급히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검설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팔아넘기려 한 도시를 네가 사수한다면 넌 반드시 죽는다. 이 태부도 너를 지켜주지 못한다.”
“각오가 부족하다 생각하십니까?”
검설린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우언이었다.
이청우는 얼굴은 피로했으나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났으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검설린이 쓰게 웃었다.
꼭 누구를 닮아가지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그를 먼저 깬 것은 이청우였다.
“고민이 많이 보이십니다.”
“아무래도 의원은 의원의 일을 걱정할 수밖에 없겠지. 여름에는 역병이 심히 번지니.”
해자에 놓인 사체를 힐끗 보며 검설린이 중얼거렸다.
“시체를 치워야 한다. 저리 두면 역병이 심히 번진다.”
이청우가 곤란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불가능하단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저도 회흘군도 해자로는 다가가지 못합니다.”
공성전에 빈틈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회흘군.
적은 병력을 소중히 여겨야만 하는 한군.
둘 중 어느 세력도 저 해자의 시체가 병을 들끓게 하는 원인임을 알면서도 치우질 못했다. 검설린은 이청우의 의미심장한 말에 덤덤히 답할 뿐이었다.
“의원이니 하는 말이지.”
여러모로 뜻이 많은 말이었다. 몸을 멈칫한 이청우가 조심스럽게 검설린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새파랬던 시절 수많은 군공을 세웠던 사내는 갑옷이 아닌 새하얀 의원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사실은 이청우는 아직도 망설여졌다.
서문윤의 말로 스스로 수성을 하겠다는 마음은 새겼으나 악천화의 이름은 군부에 드높다. 한때는 그를 비난하던 말도 있었으나 북방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지금에 있어서는 명성만 드높을 뿐이다.
고작 부관 출신으로 어영부영 성주가 된 저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지휘관일 거다.
검설린은 담담히 성벽 위에 서 있었으나, 이청우는 그 모습에서 크나큰 유혹을 느꼈다.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한 이청우가 입술을 열었다.
“장한성을 지휘해주실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말에 이청우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다시 한 번 말을 내뱉었다.
“난 없다.”
이청우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검설린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적어도 의원으로 죽어야지.”
가슴의 한을 묻고 검설린은 다시금 평정심을 되찾아 차갑게 얼굴 표정을 갈무리했다. 파나립의 유산을 남길 수는 없다. 아버지의 죽음은 허무한 것일 뿐이며, 검설린이 설렜던 이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꿈도 꾸지 못하고 용기도 희망도 품을 수 없는 폐물은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단기의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려보지.”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이청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담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방전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바로 회흘군과 한군 양측에 불어 닥친 역병의 바람 때문이었다.
서문윤에게 내뱉었던 말과 다르게 역병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었다.
* * *
홍정(紅定) 34년 8월.
“하늘이 있다면 이런 지옥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악천화는 역사서 한켠에 이름이 놓일 명장이라 했다. 그는 10대 후반의 젊다 못해 상당히 어린 나이부터 활약을 하여 서문윤이 출사를 하기 한참 직전에 명성을 날렸고, 나라를 구했다. 장수로서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전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쓴웃음을 흘렸다.
후대에 명성이 퍼져 나간 많은 명장이 있으나 서문윤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악천화의, 아니 그의 의형의 특이점을 뒤늦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의 가장 큰 전공은 황하와 장강 사이를 침범한 이민족을 막아낸 데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단 한 번도 침략전을 수행하지 않았던 장수였다.
전쟁을 먼저 시작하지 않은 장수.
결코 전쟁을 원하지 않은 자.
“교전이 끝나고 핏빛이 흐르는 노을이 시체가 널린 들판에 스며들 무렵에, 성벽을 오르며 수십 번도 넘게 생각했지.”
장수가 되고 싶었으나 서문윤은 뒤늦게 제 자신이 전장에 대해서 너무나도 쉽게 생각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설린을 따라 전장을 방문하며 품었던 생각이지만, 전장 중에서도 특히나 잔혹하기로 손꼽히는 수성전을 맞이하고, 또 그의 탄식을 들으며 서문윤은 속으로 마른 웃음을 흘렸다.
최고의 전공은 마땅히 그에 응당하는 핏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다.
최고의 전공은 응당 최고 다수에 달하는 생명을 요구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껏 죽어야만 했는가?
‘그는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았는가.’
“사람들은 내게 천명이 있다 말하지만, 이런 인외마경 한가운데서 난 어디 어느 곳에서 하늘의 뜻을 찾아야 하나?”
그리하여 서문윤은 침묵할 뿐이었다.
엄숙하지도 장엄하지도 않은 그저 공허한 목소리가 귓가를 쓰다듬었다. 서문윤은 피가 튀긴 검설린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미약한 신음을 삼켰다.
전란의 시대에 태어나, 수백 번의 전투를 경험했다는 것의 의미.
‘그 무게를 너무 쉽게 평가했다.’
자책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드물게 과거의 소회를 늘어놓는 사내를 바라보며 숨을 멈췄다.
장수의 검은 갑옷 대신 눈처럼 새하얀 백의가 그의 몸을 가두었으며, 투구가 아닌 단정한 관이 긴 머리를 틀어쥐고 있었다. 민간의 차림을 한 사내는 그러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군병보다 더욱 답답해 보였고, 또 비장해 보였다.
노을이 피처럼 옷소매를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서문윤을 향해 씁쓸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을 맺었다.
“성벽 너머로 펼쳐진 지옥을 바라보면서 곱씹고 생각하기를….”
“…….”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이 업을 짊어지리라.”
건조한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에 그 순간 서문윤이 울컥한 마음을 삼키지 못해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의형의 종교가 뭡니까?”
결국에는 충동을 이기지 못해 입술 밖을 비집고 나간 말이었다. 속이 답답하고 몹시 복잡했다.
“불교면 불교, 도교면 도교, 유교면 유교. 한 가지만 하시지요.”
천명을 거론하면서 윤회를 말하는 것은 또 무언가?
책임을 지고 싶은 마음은 알다지만, 검설린의 자학은 실로 지나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검설린은 잠시간 새까만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글쎄.”
그러곤 검설린은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그 어느 종교의 신이 우리를 구원할까?”
서문윤은 그 말에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평소라면 차갑게 답변을 할 사람이 저리도 맹숭맹숭하게 굴어, 의형답지 않은 모습에 서문윤은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말을 내뱉는 검설린에게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도 그다지 생기가 넘치는 모습은 아니었으나, 특히나 휴식이 필요한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신물을 삼켰다.
그들의 대담은 짧게 이뤄졌으나 서문윤은 검설린의 어깨에 놓인 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자학적인 사내인지도, 또 얼마나 터무니없는 바람을 꾸는지도.
서문윤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일그러져 있었다.
‘의형은 지나치게 선량하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사내는 서문윤이 지금껏 보아온 무수히 많은 자들 중 가장 고결한 이였다.
단 하나의 오점도 허용하지 않아 차라리 자신을 깎아먹는 이.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허용하지 않아 괴로워하는 자.
그는 너무나도 맑은 물에만 살 수 있는 사내라 구정물 같은 작금 난세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서문윤은 침잠한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깨져버린 수정구슬을 얼기설기 억지로 엮어 그 형태만 조악하게 모아놓은 것만 같았다.
손을 대면 깨질 것처럼, 입김을 불면 금이 드러날 것처럼.
그리도 망가진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를 학대하지 마세요, 의형.”
그리고 서문윤이 자그마하게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잠시간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짧게 웃었다. 뜸을 들이던 그는 어느 순간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그냥, 그냥 버티기 힘들구나.”
그리고 그 말에 서문윤은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형의 얼굴을 바라보기 힘들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외면하곤 성벽 안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참혹한 전장을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은 그리고 어느 순간 마른 웃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두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던 서문윤의 어깨 위로 문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의 이를 악물게 한 것이었다.
역병에 비라.
그저 탄식할 뿐이다.
이윽고 후두둑 내리는 비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한참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 채 서 있었다. 땅을 적시는 비는 중원에서는 호재였으나 이 북방에서는 하늘의 낙뢰와 같은 천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깨를 누르는 빗방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은 결국 허탈하게 웃고야 말았다.
팔월은 여러모로 잔혹한 달이었다.
회흘에게도, 장한성민에게도.
그리고 북방에 있지 않는 이들에게도…….
* * *
검설린의 예언대로 북방에도 여름은 찾아왔으며, 더위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역병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름은 서문윤이 상상한 바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사람들의 신음 또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성벽 아래를 바라보면 시체가 가득했고, 성벽 안을 바라보면 신음하는 병자가 가득했다. 장한성은 망자의 마을과 같았다.
북성신의라는 명사(名士)가 신의를 지킨 일로 올랐던 사기는 다시 승승장구한 역병의 기세에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으며 근 1년간 장한성을 굳건히 사수했던 장수들은 마침내 혼란을 이겨내지 못해 붕괴하고 있었다.
여름은 더위와 비를 동반했고, 해자의 썩어가는 시체와 난잡한 전장의 상황이 그와 더불어 역병을 널리 퍼트렸던 것이다.
한 뼘의 천으로는 퍼져 나가는 병을 막을 수 없었고 위생을 챙기려 해도 챙길 수 없는 상황은 그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그 무렵에는 역병보다 악독한 것이 장한성을 강타하고 있었다.
성벽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저 까마귀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떼로 돌아다니던 무리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하물며 미물마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떠난 것이다.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보급이 끊기고 수개월이 지나 쌓아놓았던 식량마저 동이 난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깡말라 있었으며 그들의 눈에는 지치고 고된 기색이 가득했다.
굶주림.
그것은 타클라마칸에서 옮겨온 역병보다 더 잔혹한 병마였다.
입가에 터지는 비명을 삼키며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여름에 번지는 역병이야 재해와 같다지만 이것은 인재였다. 전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장병들을 위주로 먹이기 시작한 식량은 노인과 아이에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문윤 저 자신 또한 견디기 힘든 식량난은, 기가 막히게도 사람들을 아사로 몰아가고 있었다.
역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보노라면 슬픔이 든다. 그러나 서문윤은 굶어 죽어가는 이들의 시체를 볼 때 분노를 느꼈다.
그들은, 그들은 도대체 왜 죽어야 하지?
장한성은 건전성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언제든지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작년 가을 하동에는 풍년이 들었고 양주의 논밭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은 장한성이 무너지는 것이요, 새로 들어온 건전성주의 사명 또한 그와 같았으므로. 풍년이라는 하늘의 뜻과 다르게 장한성은 굶주려야만 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냇가에 갈비뼈가 다 보이게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죽었길래 놀라 확인해보니 목구멍에 물에 불린 가죽신이 있더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노인은 입에 넣을 것이 없어 가죽신을 불려 입에 넣다가 목이 막혀 죽은 것이다.
그날 서문윤은 나뭇가지 같은 노인을 끌어안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늘의 뜻이라 한들 납득하지 못할 판국에 이게 어떻게 같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어떻게 그들은 이렇게 비정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부조리하고 사악한 일이 많다지만은 서문윤은 이토록 사악한 일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중원을 돌아다니면서도 이토록 참담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서글피 울 뿐이었다.
검설린은 그의 등 뒤에 선 채로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사람의 탐욕이 만든 인재 앞에서 서문윤은 이성을 다잡지 못했다.
굶주림과 역병.
전장에서 가장 치명적인 두 칼날을 맞은 장한성은 자연스럽게 황폐해져갔으며, 그것은 서문윤이 처음 조우했던 장한성보다 훨씬 더 참혹한 모습을 보였다. 큰 소요가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만큼 사람들은 참담한 지경에 몰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한성에만 역병이 들이닥친 것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 전염병의 정체도 알지 못하는 회흘에서는 사상자가 더 큰 듯했다.
들판에는 어느 순간부터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한성 앞에 친 회흘의 진영은 상을 당한 듯 죽음을 닮은 침묵이 이어졌으며 서문윤은 그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은 양측에 공평하게 자리했던 것이었다.
그 사실에 서문윤은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몰라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해자의 시체부터 치우고 다시 전투를 시작하자는 말씀입니다. 성주의 사람이 해자의 시체를 치운다면 아군은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가한돈의 엄명을 받아 맹렬한 기세로 성을 공략하던 회흘군은,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해 일시적인 휴전을 뜻하는 전갈을 내보냈다. 그게 무슨 뻔뻔한 말이냐 의분을 터뜨리며 화를 낼 법도 하다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청우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회흘의 전갈은 그의 안 좋은 안색이 장한성의 궁한 사정을 의미하는 줄 알고 눈을 빛내며 돌아갔으나, 사실 속사정은 조금 달랐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안 좋았지.
“너는 내게 말하기를 들판은 너의 전장이요, 성벽 안은 우리의 전장이다, 그리 말했지 않았어?”
서문윤은 그 다정다감한 어조로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치솟아 오르는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는 어째서 지금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그리 소리치며 달려들고 싶은 마음은, 사실은 지나친 슬픔으로 인한 것이었다.
두 눈이 퀭한 이청우는 조우할 당시와 다르게 앙상히 말라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보면서, 서문윤은 검설린이 방금 전 내뱉었던 말을 떠올리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열흘. 말을 하는 검설린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서문윤은 그가 정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네 말처럼 그저 우리는 각자 우리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될 뿐이야.”
그리고 그런 검설린의 얼굴은 담담한 이청우의 말에 서서히 균열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서문윤은 금이 간 얼굴 사이로 보이는 슬픔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슬픔 이면에 물든 체념 또한.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이 일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끝까지 이청우는 의연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고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여러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째서 너는 이 순간에서 담담히 웃음을 흘리지?
조국에 버림받고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무참히 죽어가는 이 시점에서 어째서 그리 태연할 수 있지?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은 저를 향해 검설린이 품었던 마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이청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말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에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전시에 혼란을 일으키기 싫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에 서문윤은 그저 억눌린 신음을 삼킬 뿐이었다.
의형의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프다.’
성주의 처소를 빠르게 빠져나오며, 서문윤은 휘청거리는 몸을 담벼락에 손을 짚어 지탱하곤 몸을 웅크렸다. 시큼한 냄새가 목구멍을 울리고 있었다. 골이 울리고 다리가 떨려왔다.
‘미친 듯이 슬프다.’
식사 때 멀건 죽이 아닌 다른 것을 먹어본 적이 언제더라?
투명하고 노란 위액을 토해내며 서문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말을 타고 고작 며칠이면 당도할 거리에 있는 건전성 본진에는 항상 장시가 서고 뺨에 통통히 살이 오른 자들이 걸어 다닌다.
‘그냥, 그냥, 슬퍼서.’
풍작이 돌았다 했다. 작년 한 해만 장한성의 성민이 7년은 견딜 수 있는 군량을 비축했다고 했다. 건전성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본진의 사정이 그러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굶어 죽고, 또 괴로워할 수가 있어?
마땅히 본진의 지원을 받아야 할 장한성에서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이건… 이건 아니잖습니까.”
그것도 황제의 뒷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라는 쓰레기 같은 이유 때문에.
어느새 서문윤은 길가에 주저앉아 토악질을 내뱉고 있었다.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자상했으나 손의 주인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단정한 얼굴을 눈물로 흠뻑 적시며 서문윤은 울며 중얼거렸다.
“이건, 이건 아니잖습니까.”
단 한마디 말만을 중얼거리며, 서문윤은 그저 울부짖을 뿐이었다.
“이건 아니잖아요, 의형. 이거 아니잖아요.”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통을 나누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것만 보아오셨습니까? 이런 아픔을 지니고 살아오셨습니까?”
그런데 쉽지 않았다.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어떻게 미치지 않으셨습니까?”
육신의 고통이란 견딜 수 있지만 갈가리 찢기는 마음의 고통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죽지 않아도 될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허망하고 화가 났다. 이 전쟁이 고통받는 이들의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허물어지는 목숨이 안타까웠다.
그러면 안 되는데, 각자의 긍지를 위해 죽어간 이들을 모욕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이 허무한 죽음이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나는, 나는 잘못 생각한 걸까.’
검설린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내가 생각이 모자라서 너무 쉽게 긍지니 뭐니 하는 말로 그들의 죽음을 예쁘게 포장하고 추앙했던 걸까.’
그러나 그러면서도 서문윤은 한 가닥 마음을, 희망을 놓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청우의 담담한 얼굴을 떠올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정말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있을까?’
그 희미한 미소가 화인이 되어 가슴에 남은 듯했다. 뚝뚝 눈물을 흘리는 서문윤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려놓곤, 검설린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나는 견디지 못했다.”
그 담담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미치지 않을 수 없었고.”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은 관절의 마디가 드러나고 있었다. 손은 시간이 갈수록 힘이 들어가 서문윤의 어깨를 아프게 그러쥐었으나 서문윤은 그를 떨쳐내기보다 손으로 그러쥐기를 선택했다.
“슬픕니다.”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꼭 쥐며 서문윤이 서럽게 울며 말을 이었다.
“너무 슬픕니다.”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검설린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울지 마라.”
손을 꼭 그러쥔 손이 안타까웠다. 가슴이 지끈거리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서문윤은 눈물을 그치지 않았고 그것은 검설린의 마음속에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수몰이 될 것만 같다. 검설린은 눈을 감고 입술로 짓씹은 말을 힘겹게 내뱉었다.
“울지 마라.”
제발, 이라는 단어가 아스라이 귓가를 울리고, 서문윤은 그제야 숨을 헐떡거리며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고개를 든 서문윤을 향해 손을 뻗어 검설린이 묵묵히 그의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은 후 가자,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서문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 검설린의 등 뒤를 따랐다.
* * *
8월은 잔혹한 달이었다.
서문윤은 그간 종종 한 사내의 얼굴을 간절히 떠올렸다.
‘운 공자, 제발….’
잘못을 돌이킨다 말하고 서쪽으로 향한 사내. 의형의 친우 아니랄까 봐 냉소를 짓는 모습이 유독 잘 어울렸던 깡마른 귀공자를 떠올리며 서문윤은 한 줄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해 기원했다.
그가 돌아오길, 언젠가 돌아와 거짓말처럼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해주길.
그러나 서문윤의 바람과 다르게 운표선은 여름의 끝이 오도록 오지 않았다. 굶어 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역병이 성내를 한 바퀴 돌아 지옥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붕괴의 타종.
그를 울린 것은 바로 모두가 경애했던 헌신적인 성주의 죽음이었다.
* * *
오래전 대륙이 수많은 나라들로 나누어졌을 때부터 관롱의 귀족들은 세력을 키워왔다. 그 유서 깊은 관롱 귀족들은 한때 황제 부럽지 않은 권력을 누리고 살았으며, 현 왕조의 건국에도 한몫 거들었고, 지금도 만만찮은 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 황제의 가장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태부 이춘금은 대표적인 관롱 귀족이었다.
이 태부는 선조로부터 많은 특혜를 물려받은 관롱 귀족의 일원이요,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겸임하고 있으니 이런 그의 자식으로 태어난단 것은 사실상 왕족에 준하는 특권을 지닌 것과 같았다.
그런 이청우가 무과를 응시한다 했을 때 이 태부가 받은 충격은 컸다.
모름지기 문관이 득세하던 시기다.
비록 잦은 북란에 무관이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지역에서 군주처럼 군림한다곤 하지만, 대대로 중원은 문(文)을 무(武)의 앞줄에 놓았다. 심지어 음서(추천제도)를 받지 않고 과거를 나선다고 했으니 그 충격이 오죽하랴?
콧대 높은 관롱 귀족인 이 태부에게 이청우의 이 선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기를 쓰고 이청우를 말리려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청우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제 소신을 고집했고, 결국 장한성으로 흘러들어왔다.
이 태부가 평생을 후회한 일이었다.
“어째서 무관이 되고 싶어 했지? 그대에게는 더 나은 길이 있었을 터인데.”
그러나 이청우는 평생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차분한 인상의 중년인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이청우가 결코 잊지 못하는 전대 성주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이청우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한여름에 서리가 낀 듯 눈앞이 뿌옇다. 숨결은 뜨겁고 몸은 근육이 다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제 것 같지 않는 육신과 달리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음서를 택했더라면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는 과거의 일들을 하나하나씩 떠올리고 있었다. 주마등은 아니었다. 그는 일전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그 효율성을 지적받았던 신념을 다시 되짚고 있는 중이었다.
따뜻한 숨결을 내뱉으며 그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저는 정말 최선의 길을 걸어온 것인가?
영웅의 길을 걷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청우는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고 싶었다. 난세에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알았고, 또 죽지 않아도 될 목숨들이 억울하게 스러지는 것을 알았다.
사(士)족에게는 마땅히 사명이 있는 법이다.
어렸을 때부터 올곧았던 이청우는 기득권으로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이들을 많이 보았고, 심각한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권을 지니고서 의무를 지지 않는 것이 말이 되나? 성인이 될 때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청우가 내린 결론은,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 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었다.
일족이 지키지 못했던 책무를 다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청우는 스러지는 생명을 볼 때마다 가끔 고민에 빠졌다. 서문윤의 말을 듣고 장한성이 더러운 협잡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자주 고민하곤 했다. 그것은 바로 효율에 관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들려오는 아비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 어리석은 놈아!”
아들이 제 뜻을 어기고 무과를 보려 했을 때 이 태부가 분노하여 소리친 말이었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난세에 피를 흘리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네가 알량한 정의심으로 모든 것을 다 망치는구나! 일선에 있는 이들은 네가 옆에서 알짱대는 것보다 위에서 내린 고기와 쌀을 더 좋아할 게다. 전쟁에 휩쓸린 이들이 너와 같이 전장에서 죽기를 선호할 것 같으냐, 아니면 네가 뒤에서 성공해낸 외교의 성과로 평화를 얻는 것을 원할 것 같으냐? 이 생각 짧은 놈아! 너는 네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아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생각을 하지만, 넌 그저 작은 동정심에 휩쓸렸을 뿐이다.”
그 당시에는 인정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회피한 말이지만 지금에 있어서 그것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이청우가 곰곰이 생각했다.
문관이 되었다면 더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
음서로 관직을 얻었다고 한들 지금보다 더 높은 직위에 오를 수는 없을 거다. 전대 장한성 성주는 정3품의 관료였고, 이청우는 전시에 상관이 죽어 얼떨결에 장한성의 성주가 되었으니 사실 그의 지위는 나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그러니 아마 문관이 되었어도 지금보다 더 높은 직위에는 오를 수 없을 거다. 다만, 조정에서 내세울 수 있는 영향력은 더 컸을 테고 이가(家)의 힘이나 인맥을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테지.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테고, 어쩌면 지금 일어난 전쟁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묵묵히 생각하던 이청우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검설린이 기억하지 못하던 때의 일을 이청우가 담담히 떠올렸다. 이청우가 홍재영이나 다른 장수들은 깨닫지 못한 검설린의 정체를 쉬이 알아챈 까닭은 전대 성주의 언질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검설린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수도에 붙박이로 살았던 어렸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수도 외곽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고, 그 주변은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저녁이면 지나치게 어둑하여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소년은 수도에서 축제가 벌어진 날 연을 날리며 놀다가 그곳을 우연히 방문하고 숨죽여 우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잊지 못한 강렬한 기억이었다.
사람이 없는 한산한 장소였으나 그곳은 의외로 경치가 좋았다. 언덕 아래 일렬로 늘어진 화려한 등롱이 노랗고 붉은 빛을 빛내고 있었다. 수도의 야경은 화려했고 또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내는 말없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청우는 아름다운 경치보다 사내의 눈물에 더 시선을 뺏겨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수려한 외모가 아닌 다른 이유로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내는 소매가 넓은 단정한 백의를 입고 있었으나 소년이 알고 있는 귀족과는 전혀 달라 보았다. 기품 있는 자태나 고요한 기운은 그들과 비슷했으나 소년은 덤덤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희미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의 코끝에 스치는 씁쓸한 향기와 고요함 속에 품은 날카로운 기운은 사내의 몸에서 가시지 않는 전장의 냄새였으나 소년은 그 당시에는 그를 잘 알지 못해 그저 보이지 않는 특이점을 느낀 채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이한 이끌림을 느끼고 사내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왜 눈물을 흘려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돌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리처럼 공허한 눈을 바라보며 소년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잠시간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슬퍼서.”
덤덤히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은 고요했으나 그 뒤켠에는 단편을 엿본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크게 먹먹하게 만드는 비탄이 자리하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슬퍼서.”
그 말을 하고 사내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언덕 아래 늘어진 등롱을 바라보았다.
이청우는 뒤늦게 그가 수도를 축제에 휩싸이게 만든 존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은 악천화가 지리멸렬했던 전쟁을 종식시키고 마침내 승전보를 전송한 날이었다. 수도는 일주일 동안 축제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기뻐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사내는, 악천화라 불렸던 검설린은 홀로 한산한 장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칭송을 받아 마땅할 자. 누구보다 더 크게 기뻐해야 할 승전보의 주인공이 어째서 울고 있나?
이청우는 그날의 일을 잊지 못했다.
무성한 나뭇잎이 우거진 음산한 언덕 위에서 조용히 울고 있던 사내 하나와, 그 언덕 아래에 별천지처럼 화려하고 떠들썩했던 수도의 전경을.
콕 집어서 그날의 일 때문에 무관이 되고자 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승전한 장수의 조용한 눈물은 이청우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는 지극한 슬픔이 가득했던 사내의 무덤덤한 얼굴을 떠올리며 기쁨이 아닌 슬픔을 얻고자 했다.
그래, 슬픔을 사고 싶었다.
시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전공은 기쁜 일일 뿐이다. 그저 종이나 말로 알게 된 것들은 나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그저 별천지의 것들이다. 이청우는 수도에서 관료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다. 백성들이 고난에 빠지고, 신음한다며 읍소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무수히 많은 죽음이 그들을 무뎌지게 만들었으며 안위가 보장된 상황이 그들이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걸, 진정한 관료라 할 수 있을까?
성장기의 깊은 사유 끝에 이청우는 적어도 그것은 제 길이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리고 장한성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얻게 되었지.’
장한성에 도착하고, 수없이 눈물을 흘렸던 날들을 차분하게 떠올리며 이청우가 눈을 감았다. 전대 성주는 이청우가 생각했던 강직한 무인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온화하고, 유연했으며, 이청우에게 많은 귀감을 주었다. 이청우는 그를 보좌하면서 많은 슬픔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최선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목표한 바는 얻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후회하면 안 된다.’
그것은 이청우의 긍지였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척을 지고 험난한 길을 겪으면서도 지켜온 신념을 뿌듯하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이청우는 자신이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온 그 잔인한 역병에 걸린 것을 깨달았을 때 웃음을 흘렸다.
난세는 나와 같은 작디작은 사람이 구원할 수 없을 만큼 험난하고 잔혹하니….
‘그러니 적어도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하겠노라.’
그런 마음가짐을 품은 채 장한성에 와서 뜻을 이루었다.
슬퍼할 것이 무어 있겠는가?
이청우는 의원에게 몸을 내보이지 않고 반년간 괴질을 홀로 견뎠다.
그런 것이었다.
* * *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문을 박차고 들어온 홍재영의 말이었다. 40대 장년 사내는 이청우보다 더 일찍 전대 성주를 보좌했으나 출신이 낮아 성주로 내세울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이청우가 성주에 오른 직후 꼬박꼬박 존대를 했던 그는 격분하여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무례함을 지적을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이 이미 우리를 다 버렸거늘 너마저 우리를 버리려 하느냐!”
비통한 목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이 유리알같이 새까만 눈을 깜빡였다. 마치 지옥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돌아다니면 사방이 시체요, 코끝에는 피내음이, 귀에는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검설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왜? 도대체 왜?!”
짐승이 우는 듯한 처절한 울음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검설린은 마음을 울리는 비명을 뒤로하고 덤덤한 얼굴로 방 문을 나섰다. 사람들은 그를 잡지 않았으며, 검설린은 쉬이 청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200일….’
이청우가 일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황양양을 구하기 위해 건전성으로 향했던 그 시점에 검설린은 이청우의 병을 눈치채고 있었다. 안색에서 의심을 했고 의복을 숨기며 처소에 칩거한 채 사람을 만나지 않는 행위에 거의 확신했다. 병사와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소탈한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부관인 홍재영만을 간간이 만날 뿐 방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성주의 일에 힘겨워하고 있다고 여겼으나 검설린은 누렇게 뜬 얼굴을 보며 다른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200일이라.’
그리고 그가 봄날에 화로를 켜고 땀을 빼는 것을 발견했을 때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운도 지지리 없지.
그저 날카롭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200일을 거의 혼자서 병마를 견뎠다. 성주가 역병에 걸린 것을 알면 사기가 떨어진다. 그런 생각으로 이청우는 병을 숨겼던 것이다.
초반에 병을 진화하지 못한 게 타격이 컸다. 검설린은 장한성으로 돌아온 이후에 근근이 이청우의 몸을 몰래 살폈으나 이미 이청우는 너무 늦어 있었고 가망이 없었다.
“한 달을 버티지 못할 거다.”
이제는 손쓸 도리가 없다는 검설린의 말에 이청우는 자그마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그는 검설린의 예상과 달리 한 달이 아닌 다섯 달을 더 버텼다.
신발을 물든 노을이 하반신을 타고 올랐다. 황혼의 햇빛을 맞으며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고통스러웠겠지.
육신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플 때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또 비참한지 검설린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거운 책무를 짊어진 채 싸우는 중이었다. 이청우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침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부관 홍재영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노을은 성벽을 비추어 바닥의 돌 사이로 스며들었고, 검설린은 고개를 숙여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을 당시 이청우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평온해 보였다.
‘어리석은 사내.’
어느 순간부터 노을은 검설린의 어깨에 닿고 그의 얼굴의 일부를 감싸 안았다. 따스하고, 또 포근했다. 요즈음 들어 계속된 과로에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지쳤던 검설린은, 전시에 성주가 병마로 죽은 이 순간 모순적이게도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등 뒤로 뒷짐을 진 채 그가 덤덤히 성벽을 걸었다.
생각이 많아질 때, 혹은 감상에 휩싸일 때 성벽을 걷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아니, 사실 장한성의 성주는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검설린이 그러했고, 죽은 전대 성주가 그러했고, 이청우가 그러했다.
탁 트인 평야와 너른 강과 따스함이 물든 하늘을 보면 어깨에 올려진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곤 했으니까.
장한성은 건축이 될 때부터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일들에 휘말려서, 성주들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진정한 평화가 물든 이청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놈.’
이 태부의 자식…. 몸을 빼낼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안식을 가지려고 해. 그저 눈을 딱 감고 이 태부의 말을 들으면 될 거 아닌가? 죽어서 안식을 가지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귀한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이야?
검설린의 입가에 날카로운 웃음이 흘렀다.
타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에도.
그의 두 눈은 점점 더 어둑한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예전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나날을 투쟁하며 싸웠던 것.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살리려 했던 것. 많은 이들과 동고동락을 하며 마음을 나누고 또 신뢰를 쌓았다.
빼앗겼던 집을 되찾았으며, 친우와 전우가 가족을 대체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로 누구보다 열렬히 살아갔으며 사람의 선한 마음을 믿고 살았다.
그 중심에 한 사내가 있었고, 그리고 그는 비명에 목숨을 잃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검설린은 제가 잊었던 세상의 진실 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위가 보장할 때의 우정과 신의는 저 자신이 곤궁할 때 보장되지 않았다. 검설린의 미소는 점점 더 날카롭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동궁사변 때의 일을 떠올리면 저절로 화가 끓고 분통이 터진다. 목에 핏줄이 서고 눈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숨이 막히고 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쳤던 폐에 피가래가 끓고 또 배 속이 녹는 듯 아파왔다.
믿었던 벗이 벗을 고발하고, 등을 맡겼던 수하가 전우를 등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런 더러운 세상이다.’
검설린은 결국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지킬 만한 곳이 아니야.’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비명을 가버린 이청우가 안타까웠다. 그런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바친 순수한 영혼이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검설린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갔다. 서문윤은 검설린에게 여러 가지 말을 하며 생각을 바꾸려 들었으나, 그는 그저 말을 안 할 뿐이지 사실 근본적인 마음은 아직 그대로였다. 대의를 위해 몸을 바치는 이들에 분노했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부추기는 유학이나 대의명분 따위에 증오를 느꼈다.
막상 스스로가 신의를 지키지 못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앓고 있음에도, 그리하여 생존을 포기하며 죽음을 원하고 있음에도, 검설린은 모순적이게도 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설린이 등을 돌린 허점이었고, 또 그가 외면하는 제 진실 된 마음이었다.
이청우의 평온한 얼굴을 떠올리며 검설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죽음인가.’
검설린의 입가에 조소가 감돌았다. 안식을 되찾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가슴에 들끓는 한을 느꼈다. 울음을 터뜨려야 할지 웃음을 흘려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하겠다.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예상한 범주를 빗겨나가지 않았다.
이 곳에서 모두가 다 죽을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토록 죽음을 바랐던 검설린은 막상 눈앞에 들이닥친 파멸에 미묘한 감정을 느꼈고 안도하지 못했다. 검설린은 기나긴 상념 끝에 그 이유를 떠올렸다.
강아지를 닮은 한 청년의 순수한 눈이었다.
새까맣고, 또 맹종적인 그 두 눈.
검설린은 문득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눈은 정말 강아지를 닮았다. 아주 어릴 적에, 그러니까 반역의 죄를 뒤집어쓰기 전에 키웠던 털이 새하얀 강아지를 떠올리며 검설린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눈은 정말이지 까마득히 잊었던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집, 가족, 온기, 명예, 순수함, 과거, 벗, 대화, 봄, 강아지, 그리고….
그리고 상념의 끝이었다.
그 어느 순간 느껴지는 인기척에 검설린이 고개를 들었다.
“…….”
따스한 바람이 살결을 간지럽혔다. 비명이 저 너머로 울려 퍼지는 한산한 성벽에서 검설린은 저 멀리 제 앞에 자리한 서문윤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것인지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꾹 쥐어진 주먹과 떨리는 몸을 발견하고 검설린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우리도 죽으러 가자.”
덤덤한 말이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의 말에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희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까?’ 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노을처럼 따스하고 또 정이 많은 다감한 눈에 한 줄기 맑은 눈물을 주룩 흘리며 그의 의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늘에 황혼이 물들고 있었다.
* * *
시신에는 파리가 들끓었고, 들판에는 악취가 풍겼다.
“이렇게 참혹한 광경을 본 적이 없소.”
이청우의 뒤를 이어 성주가 된 홍재영은 가끔 검설린을 찾아와 울면서 한탄했고, 사람에게 매정한 검설린은 그에게 날카로운 말을 내뱉지 않고 묵묵히 그의 투정을 들었다.
홍재영은 본디 냉정하고 과묵한 사내였으나 성주를 잃고 많은 수하를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크나큰 동요를 겪고 있었다.
아니, 성 내부에서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의형, 저희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네요.”
마침내 서문윤은 현실을 인정하고 힘겨운 웃음을 흘렸다.
강인한 체력으로 의행을 다녔던 검설린은 그쯤에는 완전히 지쳐서 눈에 보일 때마다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잠시 있는 휴식시간이 거의 반시체가 되어 늘어져 있는 때였다. 복면에 가려지지 않는 초췌한 안색에는 창백한 기색이 감돌고 있다.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간 서문윤도 기진맥진하여 바로 검설린의 몸 위에 털썩 엎어져 그를 뭉갰다.
‘힘들어.’
새끼원숭이가 어미에게 안기듯 검설린을 넝쿨 같은 팔로 끌어안은 서문윤이 코끝을 흰 목에 들이댔다. 살결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이제는 익숙한 냄새.
무거운 듯 몸을 움찔하는 검설린을 생각 않고 서문윤은 한숨을 폭 내뱉고 그의 커다란 몸을 끌어안았다.
“다 좋으니 저보단 먼저 죽지 마십시오.”
그 진심이 깊게 서린 말에 검설린은 대답을 하지 않고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서문윤은 품에 안은 그의 몸에 조금씩 안정을 찾으며 그렇게 한참을 그의 위에 누워 있었다.
시간은 흘렀다.
항시 어디를 가든 전쟁은 참혹하였으나, 유독 장한성의 전투는 입맛이 씁쓸하고 암울했다.
왜일까.
문득 생각에 잠겨 생각하던 서문윤은 호화로운 장안에 있을 드높으신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실소할 뿐이었다. 굳이 되물을 필요도 없지. 마음속에 불쑥 차오르는 비명을 삼키고 서문윤은 차디찬 눈으로 현실을 바라볼 뿐이었다.
점입가경(漸入佳境).
그 네 단어의 말이 어울리는 상황.
“그대도 이러한 일을 원하지 않고, 나도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
그리고 그러던 중 일어난 뜻밖의 사건이었다.
유독 하늘이 쨍한 날이었다.
시취는 너른 들판을 채웠고, 전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회흘의 본진은 초반의 맹렬한 기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회흘에 역병이 지독하게 돌고 있다 확신했다. 잠잠해진 회흘군을 건드려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장한성 또한 회전을 할 여력이 없어 그저 휴전 상태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장한성과 회흘군 사이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손을 대면 바로 부서질 것만 같은 얼음장 같은 침묵이.
그리고 어느 날 석양이 질 무렵에 너른 들판을 다그닥 가로지르는 말 한 마리가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들판을 가로질러 장한성으로 당도한 사내는 전중의 사신으로 일대의 파란을 일으켰다.
“미친!”
머리를 터번으로 가린 은회안의 사내가 손가락질하는 병사의 얼굴을 말없이 보았다. 그 모습에는 품위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에 감탄하는 사람은 없었다.
턱이 각지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강직한 사내. 그는 비명과 고성이 오가는 현장에서 오로지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관조할 뿐이었다.
“열, 열파답!”
그리고 그는 회흘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자 저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장한성이 발칵 뒤집어진 순간이었다.
“이게 완전 돌았나?”
회흘인이라 하면 창칼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장한성이었다. 사신이라 하길래 꾸역꾸역 살의를 밀어 넣던 장수들은, 개중 하나가 열파답의 이름을 외친 후 순식간에 분노의 열기에 불타올랐다.
“비겁한 오랑캐놈이 무슨 염치로 이곳에 들어와!”
“사지를 찢어 죽여버려! 배를 갈라 간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이 어딜 감히?”
“뭣들 하는 게야? 당장 저놈을 사로잡지 않고!”
혼란이 불거진 자리, 당장에라도 제 사지를 찢어 죽일 듯한 군중 안에서 열파답은 말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아수라장은 서서히 험악해져갔으며, 그들은 당장에 소요를 일으킬 듯이 굴었다.
“그만!”
그리고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홍재영은 문득 손을 들어 묵직한 목소리로 그들을 만류했다.
분노와 경악성이 뒤를 따랐다.
“배 장군을 비겁하게 죽인 놈입니다! 배 장군을 살해한 음습한 놈이라고요! 어째서 죽이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명령을 내리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홍재영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복잡한 눈으로 볼이 움푹 파인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
그는 형제와도 같은 전전대 성주를 주살하고 장한성을 전란으로 몰아넣은 자였다. 중원의 적이었으며, 회흘족의 명장이었고, 그리고….
홍재영은 어느 순간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사지를 찢어 죽여 마땅할 나를 죽이지 않는 까닭은 그대도 이 전쟁의 진정한 진창을 알고 있는 까닭이겠지.”
어눌하지 않은 뚜렷한 한어였다. 회흘의 동남부 경계를 20년간 총괄했던 장수는 이제 회화라면 한인 못지않게 할 수 있었다.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홍재영은 그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어진 말에 냉수 한 사발을 머리로 뒤집어쓴 충격에 휘말려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사다. 난 배 공을 죽이지 않았어.”
말고삐를 그러쥐며 내뱉은 확고한 말. 열파답의 눈은 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홍재연은 그 순간 몸을 부르르 떨며 충격에 휘말려 한동안 석상이 되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가?
배 공은 전전대 성주를 의미했고, 그는 회흘과의 회담 도중 비겁하게 살해당했다. 기름 먹인 천막에 날아온 불화살에 의하여, 화공의 불길 속에서 잿더미가 되어서.
모두가 그 흉수가 회담을 주최했던 회흘의 지휘관인 열파답이라 했다. 잔혹하고 비열한 회흘을 욕하며 전의를 불태우며 그들에게 보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홍재영과 몇몇 장수들은 사실 종종 의혹을 품곤 했다.
장한성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본진은 어느 순간부터 왜 지원을 끊고 그들을 배척하고야 만 걸까?
그랬던 본진이 장한성에 본디 저들이 가지고 있던 외교 전권을 위임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불화살이 쏟아질 때 회흘군이 지었던 당황한 표정과 그들이 내뱉었던 의미심장한 말들은?
그리고 그 의심은 열파답의 말로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두루뭉술한 언질을 들었고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지. 그러나 그토록 비열한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 못 했네. 회담 중에 천막에 불을 지르다니. 계획을 알았다면 당장 그 추잡한 일을 말렸을 거야.”
심호흡과 함께 홍재영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黃)이요, 적(赤)이요?”
황은 대당의 국색이고, 적은 회흘의 국색이다.
흉수를 묻는 은유적인 말에 열파답은 묵직하게 답했다.
“황(黃).”
“육시랄 놈들!”
더 견딜 수 없었다. 진중했던 장군은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손에 든 지휘봉을 바닥에 퍽 내던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성주께서 아군의 손에 돌아가셨구나!’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야?!
전사를 하였다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명예는 치켜지니까. 그러나 이건, 이건. 이를 아득 간 홍재영이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건 그냥 개죽음이잖아?
어지러움에 몸이 비틀거렸다. 목구멍에는 비명이 돌았으나, 홍재영은 어리둥절하게 저를 바라보는 장수들 앞에서 쌍욕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수뇌부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나간 의혹이란 함부로 입에 담을 것이 못 되었다.
그나마 한 줌 남은 명예와 의기로 힘을 내는 이들에게 나라가 그들을 버렸다 어이 말한단 말이야?
그러니 울화통을 삼키며 으윽, 죽어나간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성주님?”
그를 바라보며 열파답은 쓰게 웃고 있었다.
“자네도 고생이 많군.”
중년의 장수의 입가에는 착잡함이 감돌아 있었다.
“여기엔 왜 왔소?”
한참을 괴로워하던 홍재영이 고통스럽게 토로한 말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평화롭던 장한성을 전란에 휩싸이게 한 존재가 탐탁찮을 리가 없다.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살기가 묻어 나왔다.
열파답은 본디 맹렬한 용장이었다. 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는 이를 용서하지 않는….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중원에서도 이름난 용맹한 장수는 그저 묵묵히, 아니 초탈하기까지 한 평온한 눈으로 홍재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하다.
그리고 홍재영이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을 때, 뒤이어 열파답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한계야. 병사의 7할이 죽었어. 격리를 시켰는데도 수하들이 하루가 다르게 앓아 죽어나가지. 수도에서 지원병을 계속 보낸다지만 올 때마다 죽고 죽고 죽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홍재영의 숨을 턱 막히게 한 말이었다.
“사상자가 병력의 3할이 넘으면 그 병용은 궤멸된 걸로 치지. 그런데 지금 몇 명이 죽었어? 응? 모름지기 병사는 장수의 자식과 같은 법이야. 난 자식 같은 병사들을 별 같지도 않은 더러운 이유 때문에 떠나보냈다.”
열파답은 냉소를 지으며 입술 끝을 뒤틀었다. 숙장의 얼굴에는 고통이 흘렀다.
“내 죄가 얼마나 깊은지 상상도 할 수 없지.”
홍재영은 그 말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나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용건은 뭐지?”
성주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애써 이성을 다잡고 있었다. 그러나 홍재영은, 이어진 열파답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얻고 또다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항명(抗命).”
얼굴에 핏기가 가신 순간이었다.
열파답은 담담히 말을 내뱉었으나 홍재영은 그것에 회흘의 총공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핑 돌고야 만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홍재영은 그 순간 절망을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석양이 내려앉는 하늘은 피처럼 붉었으며, 홍재영은 코끝에 담기는 피비린내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억눌린 목소리였다.
“…이제 와서?”
“나는 내 수하들이 소중하니까.”
열파답은 그 한이 담긴 말에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가한돈이 내게 복수하려 들겠지.”
“지금.”
“나 하나의 목으로 이들을 살리면 충분하려나? 더 대가를 내놓아야 할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멸족을 감수하더라도 이런 개짓거리는 더 이상 못 해먹겠어.”
“지금,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더 이상 가한돈 그 미친 여자의 손에 휘둘려 그들을 잃기 싫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복수? 탐욕? 아집? 난 이곳을 떠날걸세. 그대들이 하나라도 더 살아남기를 빌어. 장한성은 경외받아 마땅할 곳이지. 장안성의 황제는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열파답!!”
결국 홍재영은 분노를 참지 못해 고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수하를 아껴서 군대를 물리겠다는 이는, 그들의 생사대적이었으며 원망의 상대였다. 그리고 홍재영은 그제야 볼이 움푹 파여 초췌하고, 고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또한 비통함을 지니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열파답은 힘없이 웃고 있었다.
‘아아!’
흉통에 비명이 울렸다.
‘아니 된다. 이러면 아니 된다.’
차라리 그들이 말을 몰아 장한성을 싸그리 몰아 죽였더라면 마음이라도 가뿐하련만.
냉정하던 사내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닭 쫒던 개가 된 꼴인지, 팽당한 사냥개가 된 꼴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배배 꼬이고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는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잘 지내게나.”
이제 명예마저 지킬 수도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군에게 존경하던 성주가 사살당했고 조국이 저희를 버렸다는 참혹한 사실이었다.
열파답은 말머리를 돌리며 나지막한 말을 남겼다.
“믿기 힘들겠지만…… 난 전쟁을 원하지 않았어.”
홀연히 나타나 가뿐하게 사라지는 열파답은, 죽음을 감내한 사람과 같아 보였다. 총사령관이 전쟁 중에, 그것도 공성전 와중에 적지를 방문하는 상황은 용기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얼굴에 서린 환멸을 홍재영이 읽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막지 못한 채 홍재영은 떠나는 사내의 등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하, 하하.”
시간이 흘러 죽음 같은 침묵을 깨고 문득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하하하, 하하하하!”
성주가 드디어 실성을 했나?
뜻 모를 성주의 웃음소리에 기겁한 그의 수하들이 고개를 돌려 홍재영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겁하여 소리 질렀다.
“성, 성주!”
거암처럼 묵직하던 사내의 얼굴에는 절망이 자리해 있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이의 두 눈에는 처절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홍재영이 울부짖으며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성주님!”
당황한 장병이 그를 부르짖으며 뒤를 따랐으나 홍재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길거리를 달릴 뿐이었다.
그것이 성주로서 결코 해서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는 그리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그저 그는 마음속에 들끓는 울화를 참지 못해 절규할 뿐이었다. 머리채를 움켜쥐어 뜯곤 그는 청명한 하늘을 토로하듯 우짖었다.
“너는 왜 죽은 거야? 너는 왜 죽은 거냐?!”
배 공을 향한 말일까? 아니면 이청우를 향한 말일까?
그도 아니면…….
“성주님!”
그를 짐작하려 노력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홍재영은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지르며 소리칠 뿐이었다.
“대답해!”
가슴에 울화가 쌓여서, 그게 둑이 되어 강 같은 눈물을 막고 있었다.
“너는 왜 죽었어!!”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둑이 터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입가에 흐르는 비명을 참지 못해 홍재영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너는 도대체 왜!!”
그리고 그의 처절한 고성을 끊은, 눈발처럼 서린 목소리였다.
“사람다워서.”
그 목소리란, 북방의 겨울바람만큼 서늘하고 또한 잔혹하여…. 홍재영은 더 이상 절규를 내뱉지 못하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숨소리가 떨려왔다.
부르르 떨리는 몸은 한참을 진정되지 못한 채 그 상태를 이어나갔으며, 홍재영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여름답지 않은 흉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훕, 숨을 들이켠 홍재영이 천천히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피를 뒤집어쓴 사내 하나가 손에 작은 소단도를 든 채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저 눈을 바라보며 거북함을 느꼈다. 북성신의라, 명성이 높은 의원이요 장한성의 성민을 구원하려 한 사람이니 마땅히 존경해야 함이라.
홍재영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어째서 그는 이렇게도 거북할까?
검설린의 눈을 바라보며 홍재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아마 저 눈 때문이겠지. 공허한 듯하면서, 사람을 깔보며, 은근한 조롱을 담으며…… 동시에 제 종말을 예지하는 듯 동정과 연민을 담고 있는 것. 홍재영은 항상 저 눈이 싫고 거북했다. 길거리에 선 사내를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이 되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뚝뚝 피를 떨어트린 채 사내는 그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이 되는 세상이구나.”
그 말에 홍재영은 날카로운 비소를 흘렸다.
“빌어먹을…….”
눈물을 흘리는 홍재영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눈물은 피와 섞여 홍재영의 그을린 얼굴을 더럽혔다.
“빌어먹을…….”
홍재영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리 내어 엉엉 우는 홍재영을 바라보던 검설린은 두 눈을 꾹 감아 고통을 가렸다.
홍정(紅定) 34년 8월 29일,
장한성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전쟁의 끝이었다.
* * *
모든 것이 끝났다.
들판을 가득 채웠던 회흘군은 철수를 했고, 들판에 버려진 시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장한성민은 그것이 기만으로 의심하며 한동안 장한성 밖으로 나가길 꺼렸으나, 일주일이 지나고서 진정으로 평화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허무하게 찾아온 전쟁의 끝에 기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들은 절망에 휘말려 침묵할 뿐이었다.
“이게 뭡니까?”
서문윤이 힘없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쭈그려 앉아 무르팍에 얼굴을 파묻는 그의 모습에는 짙은 허무함이 남아 있었다. 그의 옆에 선 채 검설린이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왜 기뻐하지 않지?”
“…….”
“회흘군은 물러났고, 장한성민은 어쨌거나 몰살은 피했다. 생존할 확률은 더 높아졌고.”
검설린의 말은 단순명료했다.
“우린 살아남은 거다.”
간단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 기쁘지 않을까요?”
서문윤의 얼굴에는 힘없는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내뱉지 못했다. 무릎에 얹어진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또한 터무니없이 이루어진 종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그를 어찌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생보다 더한 가치를 얻기를 바랐다. 그의 명예를 지키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직 깊은 고통만이 마음속에 박혀 있었다.
홍재영은 장한성을 사수했음에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장한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을 그치지 못했다.
터전은 지켰으나 남은 것은 역병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 게다가 알음알음 퍼져 나간 소문은, 조국이 그들을 버렸다는 말이었다. 죽음으로 터전으로 사수했다는 자부심은 열파답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로 흐지부지되었다. 수하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고 군대를 물린 열파답의 행동으로 빛을 바라고 말았다.
그들 또한 농락을 당했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거란 말이지?
그리하여 희망마저 꺾인 곳이었다.
서문윤은 그저 짙은 허무함에 휩싸여 울먹일 뿐이었다.
“이건, 이건 아니잖아요?”
그 누가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가늠할 수 있을까?
“이건, 이건 아니잖아요.”
어느새 목소리는 습기가 묻어 있었다. 울음이 많은 사내. 무르팍에 묻힌 얼굴이 안 봐도 뻔했다. 검설린은 잘게 떨리는 서문윤의 몸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문득 짤막히 말했다.
“그냥 웃어라.”
그러나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서문윤은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그를 무심한 눈으로 검설린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이 아니면 웃을 때도 없다.”
서문윤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그냥 위로라기엔 의미심장한 말.
“그게, 무슨?”
고개를 든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설린은 차게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은 비통하기도 하고, 조롱이 섞인 것 같긴 것 같기도 하고, 또 슬픈 것 같기도 하여 그 진의를 알기 힘들었다. 서문윤이 그 웃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장한성에 황제가 보낸 칙사가 당도했을 때의 일이었다.
“죄인 이청우는 당장 황명을 받으시오!”
죄목은 회흘과의 전투에서 부러 승리를 포기한 내통죄, 왕을 속인 기군망상죄, 본진의 원군을 거부한 항명죄.
웃음을 잃은 장한성의 사람들을 웃게 만든 말이었다.
“코에 붙이면 코걸이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더냐!”
홍재영이 가뿐히 웃음을 흘렸다. 교서를 받는 이들 중에 그를 납득하는 이는 없었다. 하물며 황제의 칙사로 온 얼굴이 창백한 환관 또한 애써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으니까.
교서를 읽는 고저 없는 목소리가 끝이 날 무렵에 그들은 그저 허탈한 얼굴로 각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장한성에 감돌았던 생존의 기쁨도 사라지고, 성민들 사이에 번진 것은 그저 허탈함이었다. 분노할 기력조차 남지 않아 그들은 몸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노성을 토해내는 한 청년이 있었다.
부득 이를 악물며 서문윤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서문윤.”
“말도 안 되잖습니까, 아무리 추악하다 해도, 이건, 이건.”
“서문윤, 진정해.”
검설린은 자리를 뛰쳐나가려던 서문윤의 허리를 붙잡아 제 품에 껴안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려야만 했다. 몸부림을 치는 청년의 얼굴에는 눈물이 있었고, 동시에 커다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의 귓가에 스치는 황재천의 경고의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것은 반드시 패배해야만 하는 싸움이다.’
그 말을 들을 때 그것이 조정에 화합하려는 숙부의 참담한 말인 줄로만 알았지…. 그러나 서문윤은 작금에 이르러 그것이 품은 진정한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천자의 분노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그는 바로 하늘의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었으므로 분노의 대상을 필요로 했다.
서문윤의 얼굴에 분노가 물들었다.
어째서 이청우가 죄인이란 말인가?!
청춘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가 영웅이 되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죄인이란 말이지?
역치를 넘어선 분노에 군관들은 화를 내지도 못한 채 그저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제삼자로 멀뚱히 옆에서 지켜보았던 서문윤이 오히려 참지 못해 날뛰는 중이었다. 화기가 몸에 감돌아 이성을 참을 수 없었다. 목구멍에 비릿한 핏물이 감돌고, 지치고 고난한 몸을 담벼락에 기댄 채 허무함을 달래던 그는 단숨에 분노하여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서문윤!”
그리고 당장에 환관의 멱살을 잡을 듯한 서문윤을 검설린은 다급히 끌어당겨 품에 가두었다. 서문윤은 잠시 몸을 펄떡거리며 반항을 했으나, 검설린의 팔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풀리지 않고 견고하게 그의 몸을 옥죌 뿐이었다.
검설린은 그를 품에 가두고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반항을 끝낸 서문윤은 서럽게 울며 의형의 팔에 대롱 매달린 채 늘어지곤 중얼거렸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검설린의 얼굴에는 차가운 조소가 물들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담담한 말에 서문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의 끝은 정해져 있노라, 내가 말을 했지 않느냐.”
쓸쓸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도대체 왜 저들이 저리 고통받아야 합니까.”
고난을 겪고 많은 것을 잃었다. 그들의 성주, 형제와 자매, 저 자신마저. 그리고 승리한 전투 끝에 장한성민의 얼굴에는 공허함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분노조차 자리하고 있지 않은 긴 침묵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울고 있었다.
쓸쓸하고 추운 여름날, 눈물이 많은 청년을 내려다보며 사내는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싸늘함이 자리한 그의 얼굴에는 어느 순간부터 희미한 분노가 엿보였고, 그 불씨는 서서히 지펴져 새파랗게 빛났다.
‘그걸 몰라서 내가 차라리 죽고자 했는걸.’
두 눈을 뜨고 살자니 타협할 수 없는 불의한 일이 너무나 많았고, 검설린은 그를 견딜 수 없었다. 홀로 고고하게 산다는 비난에 꾸역꾸역 말을 삼켰다. 내가 홀로 고고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비정상적인 거겠지.
그러나 세상은 변할 수 없고, 저 스스로 또한 변할 수 없기에 차라리 눈을 감고 도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서슬 퍼런 눈이 허공을 노려보았다.
“죄인 이청우를 장안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이오! 죄인이 죄를 치르지 않고 무책임하게 사망했으니, 그 시체나마 거둬 가야겠네.”
선인이 고통받는 세상.
“그게 무슨 미친 말이오? 성주께서 얼마나 나랏일에 헌신하셨는데!”
책무를 다한 자가 비난받는 세상.
“그대는 감히 죄인을 두둔하는가!”
야멸찬 웃음이 흘렀다.
그런 제정신이 아닌 세상이… 후대에게 이어지는 꼴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심장이 뜯기는 듯 욱신거렸다.
검설린은 말없이 서문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품에 축 늘어진 서문윤의 몸이 마르고 야위었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으니 뜨거운 눈물이 손가락에 화인을 남기는 듯했다. 서문윤은, 오랜 시간 끝에 그에게 찾아온 다정하고 선량한 그 어린 청년은 섧게 울며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는 이리 울음을 많이 흘리는 이가 아니었다.
눈물보다 웃음을 많이 보이는 이였다.
“왜, 도대체 왜 이럴까요. 의형.”
그러나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검설린의 앞에서 웃음보다 눈물을 더욱 많이 보였다. 그만은 더러운 것을 보지 않기를 바랐으나, 결국에 그는 추잡한 것들을 보고, 더러운 일을 경험하고,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희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설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적어도 너만큼은 고통스럽지 않길 바랐다.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 감돌았다.
고통스러운 지난 생애를 떠올려보면, 딱히 남는 게 없었다. 업적은 거론할 것이 못 되고, 사람은 제 주변을 떠나갔으며, 지나간 자리는 잿더미만이 남았다. 결국 불신과 의심이 가득한 못돼먹은 성질머리만 남아, 이청융의 뜻과 다르게 어느새 저는 타인의 선의를 왜곡하고 믿지 않고 사악한 것만 보고 고통스럽게 세월을 지내고 있었다.
‘살아라, 너는 살아서…….’
이청융이 목숨으로 간청한 연명의 날들을 그저 그리 뜻 없이 보내고 있었다.
검설린의 입가에 비소가 흘렀다.
“결국 제가 잘못된 거였어요, 결국….”
그리고 그런 뜻 없고 고통스러운 나날들 속에 제가 잃어버렸던 것을 상기시키는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악의라고는 한 줌도 알지 못하는 순수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대가 없는 무한한 애정을 퍼붓는 어리석은 종자가.
어리석고도, 또 사랑스러운 어린 청년이 항상 곁에 있었다.
…그게 좋았다.
정처 없이 유랑하는 삶이 편할 리가 없다.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이 필요한데 그를 너무 모른 채 홀로 앓고 살았다.
모난 성격 탓에 상처만 주고, 일신의 부족함에 고난만을 안겨준 게 한이었다.
눈물로 축축한 손가락을 웅크리며 검설린이 몸을 숙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검설린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하여 소중하게 되어버린 서문윤이 지금 저와 같은 수순을 밟으며 절망하고 있다.
“아니.”
결국엔 그가 예언하던 대로 이청우의, 장한성의 모든 사투는 허튼 것이 되어버렸는데,
“네가 옳다.”
그들이 지키려했던 나라는 그들을 버리고 악인이 득세를 하는데-.
“내가 틀렸다, 윤아.”
……어쩐지 마음이 크게 절망스럽지 않았다.
“내가 틀렸어.”
아니 오히려, 오히려 식었던 가슴 한켠에 뜨끈한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걱정뿐이었다.
침착하던 얼굴은 어느새 서서히 흔들리고 그는 어느 순간부터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먹먹한 말을 삼키며 동요하고 있었다. 서문윤을 끌어안는 손이 잘게 떨렸다.
이 어린 청년은 죽어가는 저 하나를 살리겠다고 겪지 않아도 될 온갖 험난한 일을 겪으며 제 곁에 있었다. 제게 과분한 마음을 내보이며 한결같이 저를 따랐다.
장한성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허망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만큼은 결코 허망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서문윤 때문이었다.
“이 땅이 목숨을 걸고 지켜낼 가치가 있었구나.”
그 청년 하나의 올바른 눈을 바라본 순간 모든 것이 가치가 있었다. 희망을 꺾지 않고 나아가는 선한 청년 하나가 제 지난 생애를 다시 되짚게 만들어주었다.
그리하여 거슬러 올라간 기억의 바닷속에 검설린은 제가 외면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살필 수 있었다.
그간 무수히 많은 날들 중에 정말 순수히 감사를 표하는 이들이 없던 건 아니었다. 경멸할 만한 이들만이 남은 건 아니었고.
장한성에서, 과거의 일에 또다시 사로잡혀 각혈을 할 때 검설린은 마을 주민들이 안겨준 꽃다발을 보며 일순간 흔들렸었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지금 이순간 다시금 되찾은 생애의 의지.
검설린의 숨이 멈췄다.
서문윤이 저처럼 아집에 휩싸이는 것은 원치 않는다.
세상에 버려지고, 세상을 버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검설린은 지금 이 순간 평소처럼 냉소를 짓거나 유유 적적하게 세상을 비관하지 못했다. 크나큰 두려움에 휩싸여, 동시에 분노를 삭이며, 전율에 휩싸이며, 또 눈물을 삼키며 그는 서문윤을 침잠된 목소리로 달랠 뿐이었다.
서문윤을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완전히 져버렸어.”
그 말에 서문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믿기지 않은 말을 들은 듯 청년의 얼굴에 놀라움이 드러난 상태였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이 방황할 때, 그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일찍이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아집에 휘말려 있었지. 차라리 모든 것이 구제할 것도 없이 타락했다면 나는 변명이나마 할 수 있으니까.”
“…….”
“그런 마음으로 사람의 선의가 아닌 악의를 보고, 사의의 말보다 악담과 저주를 먼저 듣고, 기쁨에 앞서 체념을 먼저 느꼈다….”
담담히 내뱉는 말에 서문윤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런데, 윤아. 네가 날 바꿨다.”
믿기 힘든 말에 서문윤의 얼굴이 멍해져 있었다.
“너는 절망하지 마라.”
너는 그렇게 말하지 마.
다정히 속삭이며 검설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청우가 목숨을 걸고 지킨 것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고 그의 죽음은 그 자체로 황홀하게 빛나고 있지.”
서문윤이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어디서 그 빛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검설린은 그에 답하지 않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세상은 아직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고, 사람의 의지는 어둠을 꿰뚫는 등불이 되어 길을 비추고 있구나.”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내뱉은 덤덤한 말에 서문윤은 결국 또다시 눈물을 왈칵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에겐 네가 빛이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의 마음이 어떤지 모를 리가 없었다. 서문윤은 저를 걱정하는 검설린의 마음을 깨닫고 몸을 웅크리고 떨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상황에서, 그 어떤 누군가를 원망해야만 마음이 놓일 것만 같은 상황에서 서문윤은 갑작스럽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담담한 말에 몸을 떨고 격정을 드러냈다.
“윤아.”
그리고 연이어 들려온 다정한 목소리였다.
“네가 완전히 이겼다.”
그토록 듣기 원했던 말.
“이젠 살고 싶구나.”
서문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숨을 헐떡거릴 뿐이었다.
* * *
10년이라는 시간은 적지 않게 길었다. 강산도 바꿀 시간이다. 하물며 한시라도 죽음을 원하는 이에게는 10년은 천 년 같았다.
검설린은 알고 있었다.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한 자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지. 어린 시절 부모가 죽고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을, 그는 또다시 체감하게 되었다.
귀비를 겁탈하려 들었다는 추악한 죄목으로 사사당한 이청융.
장한성의 사투, 전선에서 흘린 피는 하등 쓸모없었다.
검설린은 그들의 목숨이 결실을 피우지 못한 채 쓰러져갔음을 깨닫고 허무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집안이 몰살당했을 때 느꼈던 마음보다 더욱더 고독한 것이었다.
살기 위해 오랜 벗과 주군을 고발한 사내를 사람들은 암암리에 경멸했다.
그 옛날에 검설린과 교류하던 이들은 발길을 끊고, 그는 혼자가 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검설린은 낙향을 홀로 쓸쓸이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엇이 중요하랴?
나라를 지키니 후일을 도모하니의 생각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깔끔히 사라져 있었다.
희망은 없었다.
검설린은 몹시 힘들었고, 지쳐 있었다. 세 차례에 걸친 고문을 동반한 추국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검설린은 토번과 싸우는 수하들을 지키려 일찍 태자를 고변하여 고문의 수위는 심하지 않았다.
육신이 아닌 영혼의 문제였다.
이 땅에 발을 디뎌 숨을 쉬는 것 자체가 환멸이 났다.
두 번이나 제게 소중하던 이들, 제 삶을 빼앗은 하늘 아래서 살기 싫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다 죽여버리고 싶은 한편, 제일 먼저 저 자신이 환멸났다.
그럼에도 죽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했다.
“너는 실수한 거다.”
본디 그는 청융이 죽고 나서 정계에 자리하여 청융의 수하들을 지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죽음 이후 검설린은 그러지 못하고 죽음을 바랐다.
“나에게 차라리 복수를 명했다면 난 다시 기쁘게 살아갔으리라. 그거라면 내 인생을 불태울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복수라면 차라리 잘할 자신이 있다. 검설린은 이청융이 죽기 전 제게 안긴 사명을 떠올리며 헛웃었다.
“뭐, 용서?”
참으로 지리멸렬하고도 잔인한 말이다. 그 말을 생각할 때마다 검설린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에 휩싸여 이를 악물었다.
“네 아버지의 가업. 네가 그동안 잊고 있던 일이지만, 아니 잊어야만 했지만 넌 분명히 의원이 되고 싶었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10년만 나를 위해 더 살아다오. 설린아. 의원이 되어 사람을 살려.”
“이청융, 너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여?”
“나는 네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지우고 싶지만, 지금 나로서는 그 방도가 없구나. 수많은 사람을 구한다면 네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까? 나는 네가 너 자신과 화해하기를 바란다.”
어찌 그는 저에게 화해를 말하는가?
아무래도 울화가 터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네가 정녕 나를 고변한 죗값을 씻고 싶다면 그리하거라.”
차라리 복수를 해달라, 널 모해한 이들의 목을 10년 안에 가져오겠다. 그에게 애걸했으나 간절한 청은 가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작된 10년의 의행이었다.
“청융의 유언이라면 나는 천제의 목을 따는 것이런들 받들 것이다. 나는 너를 돕겠다.”
서학이라면 눈에 불을 밝히는 고우군의 눈을 운표선의 도움을 얻어 피할 수 있었다. 운표선은 이청융의 유언을 듣고 “다행이구나. 그나마 속죄할 길을 찾을 수 있어서.”라 말을 했으나 검설린은 속으로 헛웃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 무슨 소용일까?
그런 것에 무언 가치가 있단 말인가?
이미 검설린은 너무나 지쳐버렸다. 이청융은 그 옛날 삶을 포기했던 소년에게 세상의 인의(仁義)를 말했으나 그건 이미 그가 목이 잘리고 허망한 말이 된 지 오래였다.
복수도 뭣도 포기한 채, 낙향한 상황이다. 심지어 오랜 벗을 고변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수하들은 구명을 위해 악랄한 말을 지어내어 태자의 명예를 깎아내리고 무고한 자들을 서로 죽였다.
인간의 악랄한 본성을 이미 보았는데 그가 어찌 이 세상을 위해 무언가 남길 생각을 품는단 말인가?
차라리 다 때려 부수고 싶을 뿐이지.
운표선은 명가의 자손이라 명예와 속죄에 강렬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가의 자제인 검설린은 그저 분노할 뿐이었다.
천지가 갑자기 개벽하여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고대의 일처럼 큰 물난리가 나서 모두가 공평하게 목숨을 잃었으면 좋겠노라 생각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두 차례의 고난을 겪고 사람을 몹시 기피했으며 그들과 살갗이 닿는 것만으로도 큰 혐오감을 느꼈다.
그런데 어찌 그가 사람을 살리며 세상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10년의 의행은 지옥 같았다.
오히려 검설린의 환멸은 심해졌다.
“사람의 목숨에는 차등이 있는 법이 아닌가? 태부의 자손인 내가 감히 저 하찮은 천민보다 중하다고?”
귀족의 오만함이란 그나마 봐줄 만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습니다. 흉한 상처를 지닌 이 몸. 순결이 깨어진 몸으로 어찌 저는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음탕한 사람입니다.”
죽어간 이를 살려놓았더니 욕설을 내뱉는 것은 인간적인 일로 여길 수 있으리라.
“지금 당장 말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그대의 목숨을 보장하지 않겠소. 이판사판이야! 내 아내가 죽어가고 있어!”
수몰된 마을을 향해 달려가는 말머리를 붙잡고 제 가족을 먼저 살려달라 말하는 이기심도, 봐줄 만하다 여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제 신의가 갈 마을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황금을 받고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본디 가기로 했던 빈민촌에 불이 질러졌을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검설린도 할 말을 잃고야 말았고,
“신의께선 그곳으로 못 가십니다. 한 사람을 살려도 그것이 하늘을 울리는 공덕이라 했습니다. 신의께서는 영원히 저희 마을에 머무시어 마을의 일원으로서 의술을 베풀며 ….”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 혹시나 병이 다시 일어날까 봐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감금당할 때는 기가 막혀 웃고야 말았다.
‘이청융, 너 이 새끼.’
왜 내게 그따위 업을 부과한 거지?
내게 왜 그따위 말을 한 거야?
날이 갈수록 검설린의 마음속 혐오감은 깊어졌다. 제게 짐을 껴안긴 이청융을 원망하며 지루하고도 환멸나는 삶을 이어갔다.
이청융의 기대와 달리 그는 사람을 살리며 평화를 얻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분노하고야 말았지.
‘더 이상 살기 싫다.’
검설린은 그저 10년이 지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청융이 부과한 업을 해결하고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이청융은 저를 더 살기를 바라며 10년의 유예기간을 부과했으나 검설린의 마음은 오히려 더 확고하게 굳어질 뿐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뿐이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필연적으로 사람과 부딪혀 살아야만 하는데, 검설린은 그게 역하고 고난스러울 뿐이었다.
‘너무 늦었지.’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넋은 이미 죽은 지 오래. 육신만이 떠다니고 있구나.’
10년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완전한 휴식이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는 쉬고 싶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그리고 거의 10년의 끝이 보이던 때였다.
바로 8년째 되던 해에 일어난 일.
“의, 의형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 * *
사실은 말이다.
가끔은 사람을 믿고 싶을 때가 있었다.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악인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위악일 뿐입니다.”
“당신이 걷는 길을 저 또한 밟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뱉은 말들.
“아니,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난 그들이 혐오스럽다! 그들이 바퀴나 쥐새끼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권세가는 곳간의 곡식을 갉아먹는 더러운 쥐새끼와 같다 여기고 있고, 선비는 권력에 영합하는 박쥐와 같다 여기고 있지. 부자는 교활한 승냥이고 평민은 못 배워먹고 도리도 모르는 바퀴벌레만도 못한다 생각하고 있다. 너는 내가 의로운 마음으로 그러는 줄 알았겠지만 너는 내가 의인이라 생각하느냐?”
두 눈이 경멸로 물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저를 맹종하는 저 새까만 두 눈이 무너져 내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나아. 더 이상 저런 눈은 보기 싫단 말이야.
꽁꽁 숨겨두었던 역겨운 제 마음을 토로하며 검설린은 그리고 그 순간 처연하게 웃고야 말았다.
“아니, 난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어.”
…진심을 꺼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나도, 너도, 우릴 가둔 모든 사람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제는 어린 청년에게 투정을 부리고 화풀이를 하고야 만다.
“나는 사람이 혐오스럽고, 그런 이들을 변호하는 널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 서문윤.”
그리고 기적같이 돌아온 말이었다.
“제가 당신을 의형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뭐?”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해 얼빠진 얼굴로 검설린은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흐트러진 머리가 새하얀 이마를 가려 가뜩이나 어린 청년의 얼굴이 지금 소년처럼 보이고 있었다. 말조차 내뱉지 못해 멍한 얼굴로 검설린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무슨 개소릴….”
“무슨 사정인지 감히 여쭙지 않겠습니다.”
“서문, 서문윤….”
“그러나 감히 원컨대 청합니다.”
그 눈은 흠결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품고 검설린을 바라보았으며, 그것은 그에게 한때 잊었던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미련도.
“그저 곁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서문윤.”
“당신이 하는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네가 지금 하는 말이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 아느냐?”
“그렇지만 의형, 당신은 선한 사람입니다.”
울먹거리며 내뱉는 말이었다.
“저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순간 손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흠칫하면서 검설린이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두 손으로 저의 손을 꼭 부여잡은 서문윤이 몸을 웅크리며 잠긴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의형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손을 적시는 축축한 것에 검설린은 복면 아래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야 말았다.
‘이 아이는….’
그 순간 무너지는 미래를 감지하고 검설린은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쌓아온 모든 방벽이 무너지는 순간에 검설린은 손끝에 닿는 온기 하나를 떨구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그래, 그런 것이다.
결국에는 결말이 예정되어 있던…… 그런 쓸모없는 망설임.
‘아니, 사실 황하에서 서성이는 그를 만난 순간부터…….’
황하에 서성이던 청년을 본 순간을, 그의 서글픈 얼굴을 떠올리며 검설린이 조소를 흘렸다.
삶이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끝날 때까지는 어찌될지 모르는 법이고.
* * *
“결국에는 네가 살기를 원했다고?”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사내의 음성에 잠에서 깬 서문윤이 눈을 깜빡였다.
“20년 지기가 무슨 쓸모람~ 어린 애인만 못하는데.”
“그 입 안 닥쳐!”
…뭐지?
희뿌연 시야 속에서 잡히지 않는 아스라한 형체에 잠시 공황에 빠졌던 서문윤은, 다시금 들려온 벽력같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쓸모없는 나귀 같은 놈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쩌려고 굼벵이처럼 기어서 들어와?! 청매소를 완성한 게 봄인데 늦여름이 되고서야 날 찾아와? 제정신이냐?!”
“그래서 난 나귀냐, 굼벵이냐?”
“너 이 새끼가!”
…운표선이다.
정신이 퍼뜩 든 서문윤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며 가쁘게 소리쳤다.
“운 공자! 청매소는?”
예민한 인상의 사내 하나가 마당에 뒷짐을 지고 자리한 채 웃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듯한 부드럽고, 또 따스한 미소가 답이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수고했다, 아가.”
아아.
철렁 내려앉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서문윤이 숨을 멈추고 눈물을 삼켰다.
“청매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디로 가셨던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던 겁니까?”
“병을 고칠 방도가 있습니까?”
그런 말 중에 하나가 나올 거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목이 막혔다.
서문윤은 그가 평소에 생각했던 무수히 많은 말들을 입에 담지 못한 채 침묵하고야 말았다.
헤어졌던 그 시점과 다르게 바람은 따스했고, 하늘은 맑았다.
문을 박차고 나온 순간부터 뒷짐을 진 채 담담히 웃는 사내가 보였다. 눈처럼 흰 도포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공자는 서문윤을 향해 안녕, 깨끗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그 여유로움이란.
“그동안 잘 지냈니?”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벙긋거렸으나, 단어가 입 밖에 나오기 전에 서문윤은 몸을 비틀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넘어지는 순간 등 뒤에 닿은 단단한 몸과 동시에 허리를 두른 팔을 느끼고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아.’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동시에 크게 불안했던 마음이 안심이 되고 마음이 안정됐다. 서문윤은 결국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 격정을 참아야만 했다.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이 턱 선에 맺힌 순간 서문윤은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말이었다. 사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두서없는 말. 그러나 운표선은 그를 책망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렇구나.”
지금 이 순간 서문윤은 등 뒤에 자리한 이의 존재를 진실로 다행히 여기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처럼 동요하는 몸을 그에 기대고 서문윤이 한참을 가쁘게 숨을 헐떡거렸다.
운표선은 한참을 그저 온화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서문윤의 눈가를 닦았다.
“이제는 대놓고 그 아이를 아끼는구나. 체통도 없이.”
그 말에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고 모른 척 서문윤의 얼굴을 정리할 뿐이었다.
은은한 미소를 띠곤 그들을 바라보던 운표선이 문득 느릿하게 열었다.
“잠시만 이 아이를 빌려주겠나? 그와 이야기를 해야겠어.”
검설린의 손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이윽고 정적이 잠시간 흘렀다. 서문윤은 등 뒤에 자리한 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검설린이 그를 꽉 틀어쥐고 있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침묵은 긴장과 예민함을 품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에 운표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예민한 기세 속에서 운표선은 그러나 느긋하게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오랜 친우의 적의에 화가 나지 않는 듯 사람 좋게 말할 뿐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가 또 무얼 하겠어? 이미 칠 만한 사고는 다 저질렀는데. 대화를 나눌 시간이 늦춰진다고 해서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잖아.”
“…….”
그리고 고요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이젠 너도 마음을 편히 먹을 때도 됐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서문윤은 머리 위에서, 그리고 귀 끝에 스치는 짤막한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의형.”
저도 모르게 웅얼거린 서문윤은, 그리고 그의 위로 흐르는 담아한 목소리가 얼어붙어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할 말이 있다.”
평소처럼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으나 일전보다 더욱 깨끗하고 청담한 것에, 서문윤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듣고 침을 삼켜야만 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채 그가 사내를 작게 불렀다.
“의, 형?”
목소리는 부드러울 뿐이었다.
“네게 할 말이 있어.”
그가 등 뒤에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에, 서문윤은 그의 표정을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서문윤이 그의 팔에 거의 매달려 숨을 작게 골랐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제 뒤에 있는 사내의 담아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뺨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서문윤이 우물쭈물할 때였다. 그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는 것은.
“다녀와.”
지극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서문윤은 그 순간 숨을 멈추고 몸을 경직시키고야 말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떨리는 심장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같이 컸다.
항상 그를 경애하고 있었으나, 서문윤은 그 귓가에 울리는 담아한 목소리에 새삼스럽게 또 동요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문윤은 얼굴을 붉힌 채 그저 얼어붙을 뿐이었다. 그의 뻣뻣하게 굳은 등을 사내의 손이 부드럽게 쓸었다.
“일단 내 차례.”
그리고 그를 보며 쿡쿡 웃던 운표선이 다가와 서문윤의 손을 부여잡아 이끌었다. 서문윤은 엉겁결에 그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자, 가자.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그러나 연이어 운표선이 내뱉은 담아한 말에 서문윤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를 따를 뿐이었다.
“너는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 * *
운표선이 대의라는 명목하에 장한성의 멸망을 묵인하였으나, 직접 그 땅을 찾고 양심을 일깨워 진실을 알렸다. 서문윤은 그에 이르기까지 운표선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이해하는 것과 원망하지 않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법이다.
서문윤은 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장한성을 사지로 몰아넣는 데 동조하고, 뜬금없이 서신 한 장을 보내어 서문윤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인물. 사태를 해결하겠다며 사라져놓곤 연락 하나 없어 서문윤을 희망으로 고문하고 또 걱정하게 만들었던 자.
만난다면 그를 향해 원망의 말을 퍼붓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한탄을 하고 싶었다.
검설린과 다른 방향으로 믿음직스러운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어딘지 정이 가는 그에게 고민을 덜고 싶었다.
제가 북녘에서 본 많은 일들을 알리고 찢어지는 마음을 그를 향해 토해내고 싶었다.
이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그리 말을 하면서….
그러니까, 이래서는 안 되는데.
비장한 각오와 서러운 한이 풀어지고 마음은 태평할 뿐이었으니, 운표선에게 화를 내고 투정을 부리려던 서문윤은 당황하여 그 손에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청명한 바람이 불었다. 운표선은 느릿하게 걸었고, 서문윤은 찌뿌드드한 몸을 애써 움직이며 그를 따랐다. 얼마나 잠을 잔 건지 근육이 당기고 그저 산보에도 서문윤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 장한성에서 묵었던 검설린의 의당이 아닌 치소에 머물고 있었던 모양인지, 자리를 빠져나오니 관복을 입은 귀인(貴人)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서문윤을 발견하고 눈짓을 하거나 고개를 살짝 숙여 호감을 드러내어 그를 놀라게 했다.
안 그래도 느린 걸음이 구불거리는 복도를 한참을 밟게 만들었고, 그는 서문윤의 인내심을 닳게 하기 충분했다.
결국 서문윤은 걸음을 걷던 와중 참지 못해 운표선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고야 말았다.
“어찌 되었습니까?”
누웠다 방금 일어난 병자의 손길에 운표선이 휘청거릴 리가 없는데, 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서문윤을 향해 몸을 기울이곤 작게 중얼거렸다.
“무얼 묻는 거지?”
분명 무얼 묻는지 알면서도 저리 능청스럽게 말을 한다. 운표선의 담담한 말에 서문윤이 더듬더듬하게 말을 내뱉었다.
“청, 청매소는.”
말은 완전한 문장이 아닌 더듬거리는 단어의 형태가 되어 입 밖에 부서지고 있었다. 운표선은 그에 빙글 웃을 뿐이었고, 서문윤은 그 웃음에 더욱 동요하여 그를 향해 말을 재촉하고야 말았다.
“장한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고는 다급하게 제가 걱정하던 이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청우의 시신은 무사합니까? 홍 성주는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까? 황 숙부님은 무탈하시지요?”
그 외에 몇 사람의 거취를 더 물어보던 서문윤이 문득 참았던 눈물을 다시 흘리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사람들은… 사람들은…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투명한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운표선은 폭포수 같은 눈물로 얼굴을 또다시 더럽히는 서문윤을 힐끗 바라보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눈이 우묵한 그의 초췌한 얼굴은 이전과 같았으나 지금 그는 어딘가 소담한 기색이 엿보였다. 얼굴에 진 그림자는 사라져 있었고, 양어깨에 진 짐을 던 듯 운표선은 쾌활해 보이기도, 또 호협해 보이기도 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청융이 죽고 우리들은 모두 나태함과 무기력함에 빠졌지.”
시야가 흐려질 만치 눈물을 흘리던 서문윤이 몸을 움찔했다. 태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운표선에 놀란 것이었다. 엄연한 대역죄였으나 서문윤은 그 무례함보다는 그 이름에 담긴 친밀함, 애정, 존경, 슬픔, 분노, 그리움에 더 초점을 맞췄다.
그 말에는 정이 담겨 있었고, 또 진한 향수가 느껴졌으므로.
“그놈은 이빨을 잘 털었거든, 꽤. 저 잘난 맛으로 사는 부유하고 똑똑한 놈들이 뭘 원했겠냐? 현실을 바꾸고 싶었지. 청융이 그 욕망을 일깨웠고.”
“…….”
“청융은 제 가족과는 많이 달랐어. 글월은 좀 외웠나? 백성이 우선이요, 사직이 그 다음이요, 군왕이 제일 마지막이다. 이 말 기억나? 맹자의 말이지. 천 년이 넘게 이어온 유학의 정신. 지금에 와서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는 국교의 기본정신 말이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놈은 그걸 말한 거야. 인을 지켜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고, 예를 지켜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의를 지켜 천하의 큰길을 거닐기를 원하노라! 이리 말이다. 이 얼마나 바보 같고…… 우직한 말인가. 그러나 그런 그는 이 나라의 황태자였고, 그렇기에 우리의 구심점이었다. 그는 말만 번지르르한 유자가 아닌 행동하는 위정자였고, 이 나라를 세울 반석이었다.”
그리고 그가 흘린 구름 같은 웃음이었다.
“그런 그를 너무도 쉽게 잃고 절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우리는 미래를 잃었다. 꿈을 잃고 암울하게, 나태하게, 한심하게 살았지.”
“…….”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서문윤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한 명이 의형입니까?”
그 말에 운표선은 몸을 멈칫하다가 답했다.
“아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들의 주군이자 붕우였던 폐태자의 이야기였다. 운표선의 얼굴에 진 그늘에 자세한 사연을 묻고 싶었으나 서문윤은 아무래도 민감한 주제인지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서문윤의 기색을 먼저 읽고 운표선이 피식 웃으며 나섰다.
“아아, 그건 지금 내가 할 이야기랑은 동떨어진 주제야. 일단 계속 들어봐.”
어차피 그가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될 주제였다.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곤 다시 조용히 운표선의 말을 경청했다.
말은 담담하고도 매끄럽게 이어졌다.
“초점은 우리가 정말 쓰레기처럼 살았다는 거야. 과거에 장안사준이라 불리었던 놈들이 하나는 세력을 지키러 정부의 개가 되고 하나는 제 수하 동료를 버리고 낙향했어. 공통점은 두 놈 다 미래를 버렸다는 거고, 개똥같은 세상에 희망이 없었다는 거지. 너도 봤지?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게 살았는지.”
순순히 운표선의 말을 듣던 서문윤이 그 문단에 이르러 작게 항의했다.
“한심하지 않습니다.”
말은 작았으나 서문윤의 눈에는 부정의 불길이 일렁거렸다. 의형과 함께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사람에게 헌신하며 살았는지, 그의 업을 청산하려 발악했는지 서문윤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을 그저 한심하다고 칭한다면 대체 어떤 사람이 한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적어도 장안에 자리한 관료들은 모두 입에 칼을 물고 고꾸라져야만 했다.
이들의 이상은 지나치게 높기에 더욱 말이 가혹했다.
“의형과 당신은 한심하지 않습니다.”
서문윤은 그 말을 내뱉곤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운표선을 곧은 눈으로 응시했다.
검설린이 불편해하고 피하고자 했던 시선이었다.
동시에 운표선이 피식 웃었다.
‘그놈 말이 이제 이해가는군.’
운표선은 그 흔들림 없이 꼿꼿한 시선을 받으며 잠시간 고개를 숙이며 말을 골랐다. 마음에 자리한 고요한 호수에는 파문이 있었고, 운표선은 그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관조하고 있었다. 침묵하던 운표선이 어느 순간 문득 툭, 발에 닿는 돌덩이를 차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아등바등하던 와중에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
“이렇게 살다간 안 될 것만 같아. 죽어간 그놈들에게 미안해 죽겠어.”
말에 짙게 묻어 나온 죄책감.
“그래서 살려고 발버둥친 거야. 숨을 쉬며 죽어가는 이 감각이 소름 끼쳐서. 죽어간 이들에게 미안해서. 그 옛날의 과거에 집착해서. 더러워진 영혼을 업적으로 씻고, 소생하려 하고, 이름을 빛내려 하고. 그런 부질없는 사족의 습성을 발휘하여…… 난 내 오랜 친구가 지켰던 곳을 팔아먹는 죄악을 저질렀다.”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사실을 말하신 겁니까?”
어찌 그를 비난할 수가 있겠는가?
원망은 할 수 있어도 서문윤은 단편적으로만 들은 운표선의 일생에서 그의 고통을 찾을 수 있었다. 운표선과 검설린은 본질적으로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어 고결한 뜻과 다른 일을 괴로워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나마 낙향하여 진흙탕을 피한 검설린과 다르게, 운표선은 장안에 남아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그를 뒷바라지했다. 사특한 학문이라 비난받던 서학을 익힌 검설린이 지난 9년간 북성신의로 활동할 수 있던 까닭은 운표선이 정치적으로 검설린을 방어하고 그를 위하여 구정물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서문윤은 알고 있다. 운표선이 없었다면 북성신의의 드높은 명성 또한 없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세상의 더욱 많은 이들이 의원의 손길을 받지 못해 억울하게 죽어갔을 것이요, 습관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감히 꿈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운표선은 사실상 신의의 가장 큰 공로자였다.
그리고 그는 이를 위해 손을 더럽히고 고통받았으리라.
서문윤은 운표선의 일전 청담한 명성을 알고 있었고, 그가 겉보기와 다르게 고결한 영혼을 지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운표선을 원망하면서도 동정하고 있었다. 그저 탄식할 뿐이었다.
의심하기도 했고, 또 원망하기도 있던 사내를 서문윤이 청명한 눈으로 담았다. 저벅 발걸음을 걷는 사내의 도포가 바람에 휘날리니, 서문윤은 운표선을 바라보며 그 옛날 그의 명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내려온 고귀한 혈통의 귀족.
그러나 그는 소탈하고 의로우며 호협하여 백성들이 친숙하게 여기고 사랑했다. 심지어 그것은 동궁사변에서 운표선을 보호하는 데 일조하기까지 했다. 황제는 자식인 동궁태자를 파면하고 부정적인 여론을 운표선을 이용해 수마했으므로.
누구보다 백성과 가깝고 친밀했던 사영귀.
그가 마침내 당도한 복도의 끝에서, 청명한 하늘 아래 선 채 부드러운 시선으로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렀다.
“후회하십니까?”
운표선의 시선은 지긋했고, 서문윤의 눈은 올곧았다.
어느덧 접어든 가을의 바람이 새하얀 도포를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꿋꿋한 자세로 선 채, 서문윤을 뜻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입술 끝을 휘었다.
서문윤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흐른 것은 청아한 목소리였다.
“살아가고 싶어.”
귓가에 북처럼 뛰는 심장소리.
“살아가고 싶었다.”
두려움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서문윤은 몸을 잘게 떨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싶었다.”
사족을 이념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라 한다. 그들은 기득권자기에 학문을 갈고닦기를 권해지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군자가 되어야만 했다.
“후회하기에 너무 늦었는지 모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하여 공자가 성인이 된 이후 그들의 덕목은 세상을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덕을 지켜야 했으며, 위국안민을 꿈꿔야만 했고, 학문을 끊임없이 습득해야 했으며, 생각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피비린내가 났던 야만의 시대, 선진시대가 끝이 나고 권력을 부여잡은 사족들은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의무를 졌다.
“그렇다고 나아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게 아니냐?”
무위도식하는 선비는 선비가 아니다.
공자가 하였던 말이다.
딱히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아도 특권을 가진 자가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악이다. 사족은 이념으로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꿈을 꾸지 않거나, 의지로 살아가지 않거나 한다면 그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고, 사족답지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사족은 태어날 때부터 더 선한 길로 향해 나아가는 사명을 받았다.
“나는 나로서 살고 싶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그러한 뜻을 세운 사족이 몇이나 되던가?
그들은 토지를 겸병하고 가난을 참지 못한 이들을 소작농으로 삼아 부리니, 사람들은 사족을 이익집단이라 평할 뿐이었다. 사족은 그 옛날 성인의 말은 유치하고 이루기 힘든 이상일 뿐이라 조롱했으며 꿈도 의지도 없이 헛되이 시간을 버리고 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구나.”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런 불명예를 벗으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한 장의 도포를 걸친 자태는 대범하고 은은한 웃음은 다정함을 담고 있다.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운표선을 응시하며 서문윤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찌 두 분께서는 울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이 사람들은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담담하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익숙했다. 그들에게 괴로운 일이었던 동궁사변을 말할 때 검설린은 그리 고요한 눈으로 저를 보았고, 운표선은 두 눈에 그리움을 띄운 채 고통을 웃음에 묻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서문윤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제 마음이 아픕니다.”
눈물이 마르고 말라, 결국에는 소리 내어 통곡하는 일에조차 지쳐버린 이들.
“거창한 건 모릅니다. 저는 경험이 일천하고 가진 바 재능도 없어서…. 그저 무부(武夫)라 그냥, 그냥….”
우는 것이 쓸모없는 행위란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 시간에 차라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서문윤 개인으로서는, 한 사내의 의제로서는 그들의 체념한 듯 고통에 익숙한 듯한 평온한 얼굴이 서글플 뿐이다.
그들의 무던함이 안타까웠다.
“그냥 슬퍼서.”
사람이 죽었을 때 곡을 하는 이유는 산 사람의 기력을 내빼려 함이 아니다. 돈을 들여 후히 장례를 치루는 이유는 재산을 뽐내려 함이 아니다.
사람이란, 섬세하면서도 의외로 지극히 소소한 일에 위무를 받아… 감정을 표해내는 것으로 상처를 회복시키고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어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을 알린다.
그러니 서문윤은 서글픈 일에 눈물을 흘리지 않고, 억울한 일에 분노하지 않고, 상처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그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날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의 고단함을 생각하며 서문윤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운표선은 그런 서문윤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다.
그리 말을 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우는 청년을 달래고. 그러던 중 운표선은 문득 하하 웃음을 흘리며 흘러가는 바람 같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이리하여 설린이가 헤어 나오질 못한 거지…….”
눈물을 쏟아내던 서문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운표선은 긴 소매로 그의 눈가를 닦아주던 손을 멈칫하곤 그를 향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간 침묵 끝에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네 다정함은 마치 독과 같구나.”
복잡한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운표선은 속으로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낯설군.’
일전에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어떤 이가 그를 동정할 수 있겠는가?
검설린은 만세의 영웅이었고, 운표선은 재상이 부럽지 않은 권세를 누렸었다. 그런 그를 불쌍하다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 운표선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그저 오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저이는 저가 예전에 잊어버린, 아니 잊어야만 했던 ‘감정을 표하는 방법’을 들먹이며 탄식하고 있구나.
서문윤이 가소로우면서도 마음 한켠이 찌르르 울리니 그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짧은 시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지독하다 칭해질 만큼 권모술수에 능했던 저이건만. 장안에서 모두의 견제를 받았고,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을 받았건만. 저 아이는 그런 자의 무던함마저 슬퍼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러니 저 눈물이 얼마나 귀한가?
잠자코 말을 곱씹던 운표선이 어느 순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런 시대에 너같이 순수한 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군.”
자신과 같은 이마저 연민할 수 있는 품성이란, 더 말할 것이 없다.
마치 자식을 지키는 어미 짐승마냥 그를 싸고돌았던 검설린이 그 순간 이해되어, 운표선은 너털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쯤 되어서 운표선은 확신할 수 있었다. 검설린이 철없는 어린아이라 여겼던 서문윤은 사실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지극히 선량하고 선량할 뿐이었다.
‘하늘이 정녕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은 건가.’
희망을 주었다 뺏는 것은 하늘의 특기와 같은 농간이었으나, 운표선은 어쩔 수 없이 그에 목을 매고야 말았다. 그는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남은 서문윤의 눈물을 닦아 내렸다.
손에 닿는 뺨은 건조한 바람을 맞아 일전보다 거칠었고, 피부는 그을렸으나 앳된 기는 남아 있다.
그들에게 지극히 절실했던 희망을 주었던 청년.
과분할 만큼의 상냥함으로 그들을 대하고, 희망을 안겨준 청년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그리고 쭈뼛거리는 그를 향해 운표선이 빙긋 웃어주었다.
“그래서 그를 살리려 했느냐?”
두 눈은 심유히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속에는 자세히 보면 엿볼 수 있는 빛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가려진 별빛 같은 것이었다.
어쩐지 서문윤은 그 시선을 받으며, 등선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끼고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쭈뼛거리고야 말았다.
운표선은 일전에 본 적이 없던 다정함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일전에도 소탈하여 서문윤을 잘 대해주었으나, 지금은 거의 장형이 막냇동생을 아끼듯이 행동하고 있으니, 서문윤이 그에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 눈빛이 담은 애정이 버겁고 또 당혹스러워 서문윤은 잠시간 망설이다가 답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의형이 세상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가 증오를 내려놓았으면 해서.”
그 말을 하곤 서문윤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멈추었다. 사내는 재촉하지 않고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담은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안일했나 봅니다.”
그리고 서문윤의 입술 밖으로 힘없는 웃음과 함께 흐른 말이었다. 제 잘못을 인정하는 말은 내뱉기 고통스러웠기에 서문윤은 버벅거리고 있었다.
“그래?”
“저는 의형이 겪은 일을 몰라서. 귀로만 들었지 감히 그 십분지 일도 경험하지 못해서… 너무 의형의 말을 쉽게 생각하고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목이 막혀 더듬더듬 내뱉는 말이 지극한 한을 담고 고통을 담았다. 운표선은 서문윤의 호소에 그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계속해봐.”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의 눈물이 후드득 모래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운 공자.”
결국 그는 자인하는 말을 내뱉고 운표선의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청년은 잠시간 서럽게 울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서문윤의 시야를 가리고, 운표선은 오랜 벗과 저 앞에서 감히 패기 넘쳤던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문득 웃고야 말았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씁쓸하기도, 또 감격스럽기도, 또 슬프기도 한 것.
“장한성은 나라에 버림받았고, 그들은 황폐한 영토를 사수했으나 성주를 불운하게 잃고 긍지를 잃었습니다. 적과 내통했다는 명예에 휘말리고야 말았습니다.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을 위해 그들이 싸우고 있다, 의형에게 말을 했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운 공자, 저는 저들에게 남은 것이 절망밖에 없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어요.”
“그래서?”
“의형이 살아가고 싶다 한 말은 저를 위로하려 내뱉은 것일 뿐이지 더한 의미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결말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웠고 누구를 원망해야 합니까? 무얼 지켰고 무얼 지키지 못했습니까? 제가 본 것은 죽음과 절망뿐이었습니다. 의형은 한순간도 변하지 않았고, 그는 또다시 불의를 보고 더러운 현실을 보고 추악함을 보았습니다.”
그 말에 이르러 목이 잠겼다.
서문윤은 잠시간 근 1년 사이의 일을 회상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는 시간 동안, 그는 이 북녘의 땅에 기거한 동안 많은 것을 경험했고 또 생각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담한 현실 속에서 궁리하고 또 궁리하면서 세상을 알고자 했고, 그를 바꿀 수 있는 길이 정녕 없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고통을 겪고 또 함께하며 지난한 현실을 깨달았고, 세상이 변함없이 추악할 것이란 믿음을 얻게 된 후 우울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렇기에 서문윤의 말은 처음 운표선을 마주할 때보다 비관적이었고, 또 절절했다.
“지리멸렬한 세상.”
그리고 운표선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인(仁)이 죽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울컥하여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운표선은 저 멀리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의 눈물을 못 본 척했고 그의 등 뒤로 숨죽여 우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뒤로 흐른 것은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이제는 저도 목이 막힙니다.”
“…….”
“숨을 쉬기 힘들어요.”
“…….”
“저도 고통스러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더듬거리면서 토해내는 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말이 끝나고 서문윤은 몸을 숙여 잠시간 헐떡거렸다.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내며 서문윤은 일전의 제가 했던 무책임한 말들 또한 토해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는 얼마나 지독히 무감각했던가?
세상에 버림받는, 선의가 악의로 보답받는, 인생의 가치를 남에게 부정당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부당하게 고통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아팠다.
그리하여 그가 한참을 울고 난 후였다.
서문윤은 그의 등 뒤로 흐른 나직한 말을 듣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지금 예전의 설린이가 했던 말을 공감하고 있어?”
은근한 말은 역린을 찌른다.
“세상은 목숨을 내던지고 살 만큼의 가치가 없다.”
“사람은 지리멸렬하고 세상에는 오직 부당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 말을 했던 사내의 얼굴에 스친 비소.
서문윤이 실소했다.
“예.”
결국에 인정한 마음.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꿀 수도 없었고.”
의형의 말이 맞았구나 생각하며 말을 잇고 있었다.
“저는 번지르르한 어리석은 말로 의형을 현혹시킨 죄인이었을 뿐….”
저는 틀렸다.
“의형을 달래던 그 모든 말이 제 안일함이었습니다! 제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때때로 사람은 고통을 이길 수 없으며 세상은 희망만으로 살 수 없는 곳이다.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세상은 의인이 목숨을 던져 지킬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말은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욱신거리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그가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잠자코 말을 듣던 운표선의 반응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문득 들려온 의미심장한 말에 서문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서 운표선은 빙글 미소를 지으며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들어봐라. 아가야.”
“…….”
“우리는 항상 더 나아가기 위한 길을 모색했고 특권을 가진 위정자로서 사람을 위무할 책무를 느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절실히 구세를 원했지.”
“…….”
“그리고 그 근간에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
“…….”
“결국엔 이 모든 게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함이었으므로.”
횡량한 초가을의 바람이 불었다. 북녘의 9월은 햇볕이 있을 때는 은근히 덥고 그늘이 질 때는 서리 낀 겨울만치 추웠다.
장한성에서 겨울을 견디고 또다시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햇볕이 들지 않는 긴 회랑을 걸으며 운표선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한데로 묶었던 이가 죽고 그때의 마음가짐을 잃고야 말았어.”
“…….”
“백성은 구도의 대상이나 어리석어 아무리 그들을 위하려 해도 세 치 혀로 흔들리고, 의리는 땅에 떨어져 지킬 것이 못 된다. 사람은 제 상황이 안 좋아지면 배신을 서슴지 않고, 세상은 그런 금수 같은 이들 천지이니 아무리 애를 써도 노력은 보답받지 못한다.”
비람에 휘날리는 낙엽이 그들 앞을 지났다. 눈앞에 스치는 잎사귀에 잠자코 웃으며 운표선이 작게 속삭였다
“그래. 우리는 계도의 대상인 이들의 아둔함을, 사악함을 한탄하며 원망만을 키워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고요한 말이 흘렀다.
“그들을 함께 가는 이로 애초에 생각했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애초에 품지 않았을 거다. 그들을 이해했다면 그러지 못했을 거다. 애초에 우리는 그들을 계도 대상으로 생각하고 우리와는 다른 부류로 여겼다.”
침을 한 모금 삼킨 후 운표선은 시원히 웃으며 말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 자체에서 그들과 우리를 유리시킨 거였어. 윤아. 작금에 이르러 내가 깨달은 것이 뭔지 아느냐? 우리는 지독히 오만하고 멍청했단 사실이었다. 이 북쪽 땅에서, 장한성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진작에 그들과 융화되지 못했음을 한탄했다.”
“…….”
후회가 절절히 묻어 나오는 말.
“그들은 너무 거대하기에 행동이 굼뜬 것일 뿐이었는데.”
그리고 그 때 묵묵히 말을 듣던 서문윤이 문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 깨달음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답지 않은 야멸찬 조롱이었다. 그 순간 놀란 운표선이 회랑을 딛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곤 고개를 돌려 서문윤의 얼굴을 응시했다. 절절한 얼굴은 일그러져 마음의 고통을 드러냈으며 그는 금방이라도 엎어져 피를 토할 사람처럼 보였다.
운표선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감돌 때였다. 분노 어린 말이 이어졌다.
“이청우는 시신이 모욕당할 운명이고, 목숨을 바쳐 싸운 장수들은 고난을 당할 운명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비난을 받을 상황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덧없이 죽어가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건데….”
“…….”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거의 이성을 잃고 흐느끼며 원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것의 화살은 운표선을 향했으며 동시에 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기 어린 말을 듣는 운표선의 얼굴은 부드럽기만 했다.
그리고 서문윤을 놀라게 만든 말이 이어졌다.
“과연 그럴까?”
서문윤의 얼굴이 흔들렸다.
“예?”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네가 쓰러지고 시간이 얼마나 흐른 줄 알아?”
운표선이 멈추었던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멍청한 시선을 보내고야 말았다.
어쩐지, 이유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몹시 뛰었다.
귓가에 이명이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충격적인 말.
“일주일.”
“예?!”
경악한 서문윤이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일주일이라니?
피곤에 찌들어 나풀거리는 나뭇가지같이 약했던 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하여 단잠이 약인 줄로만 알았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 누워 있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일주일 동안 잠에 들었단 말인가?
아니, 이걸 잠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얼어붙은 서문윤을 웃으며 바라보며, 운표선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일주일간 쓰러져 있었어. 괴질은 완전히 물러간 게 아니야. 네가 제정신으로 버티고 반년간 그리 몸을 혹사한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겠다. 너는 내가 오기 전까지 사경을 헤맸어.”
그리고 씩 웃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지금은 완쾌했지만.”
말에 담은 함의를 서문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서러워 울던 서문윤이 눈물을 그치고 크게 소리쳤다.
“청매소 제조에 성공하신 겁니까?!”
“그래, 제조에 성공했다. 내가 가져왔지.”
“아!”
짧게 흐른 탄식성에 운표선이 빙글 웃곤 고개를 숙였다. 회랑의 끝이었다. 운표선은 마른 풀을 밟으며,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나마 다행….”
눈물을 흘리는 서문윤을 측은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실제로 저 어린 청년의 분투를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능글맞고 또 겉과 속이 다른 위인으로 보여도 운표선은 의로운 이였다.
안타까운 시선이 그를 향하고,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서문윤은 귓가에 흐른 담담한 말에 멈칫하여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피식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로 앉았다.
“너는 네가 설린이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야 된다, 윤아.”
말을 우물거리던 운표선이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잘박, 성벽을 오르는 계단을 밟는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네가 울다 지쳐 쓰러지고, 많은 일이 있었다.”
“…….”
“첫째로 홍재영이 이청우의 시신을 내어주지 않으려 황제의 칙사를 두들겨 패고 강제로 내쫒았다. 목숨을 포기하고 행동한 모양이야. 아니면 금방이라도 칙사의 목을 딸 것 같은 수하들을 지키려 했던지. 칙사는 대역죄 운운하며 장한성을 나섰고 장한성민들은 이청우의 시신을 화장하곤 낙수강에 뿌렸다.”
귓가에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렸으나 서문윤은 그를 듣지 못한 채 어지럼증만을 느꼈을 뿐이다.
성벽을 오르는 발걸음은 쾌활했고, 그는 방긋 웃음을 흘리며 굳은 얼굴을 한 서문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둘째로 나는 장한성을 떠난 후 황명을 어기고 청매소를 완성했다. 그를 안 황제는 비밀리에 금군을 보냈고, 나는 그들의 추적을 받으며 장한성으로 귀환했어. 그리고 나를 추적하던 금군의 장수가 설린이에게 황제의 밀명을 전했다. 그대의 죄가 하늘을 찌르노라. 더 이상 날뛴다면 살려두지 않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운표선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설린이가 무슨 선택을 했게?”
서문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의형이 화를 냈군요.”
그 말에 운표선이 파하하 시원히 웃었다.
“야, 그놈 진짜 어리석어. 그 콧대 높고 오만한 놈 앞에서 그리 도발을 해대다니. 겁에 질려서 네발로 기어나갔다.”
그를 바라보는 서문윤의 얼굴에는 울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서 그는 이리 방만하게 말하는 건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거의 그는 반역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운표선은 그저 싱글 웃으며 서문윤의 복장을 터뜨릴 뿐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조급함이 서렸다.
역천이 얼마나 무거운 죄목인지 그는 모른단 말인가?
서문윤은 남의 일마냥 태연히 구는 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그리 태평하십니까? 모든 게 다 끝이 났는데 공자께서는 어찌 남의 일을 보는 것마냥 태평하십니까.”
“끝나?”
“예?”
서문윤은 제게 되돌아온 묘한 기색을 담은 말에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끝나?”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 서문윤은 숨을 멈추며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울리는 명성을 지닌 이의 얼굴이 의미심장했다. 재밌는 것을 보는 듯한 그 얼굴에는 봄 녘의 평온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지?
서문윤이 침을 삼키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운표선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옛날의 과거요, 영광이요, 오욕이요,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힘든 세상이라면, 그저 세상을 바꿀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리고 한 사람.
운표선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시절의 꿈은 푸른 구름 위를 오르는 것보다 높았지 않은가?
한때 그들은 맑은 이슬만큼 단꿈을 먹고 살아갔으며, 이상향이 자리한 산꼭대기는 멀었지만 분명히 눈에 보여 고난을 겪었음에도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다시 귓가에 아른거리는 그리운 이의 목소리.
“아무래도 사람이 바뀔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때의 이청융이 하는 말을 단순히 위정자로서의 다짐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운표선은 지금에 이르러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장안사준이라 묶여 있던 네 명 중에서 애민(愛民)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던 것은 그뿐이리라. 구세를 말한 이 중에서 백성을 계도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고 어울리고자 한 이는 그가 유일했다.
어쩌면 그는 제 미래를 예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운표선은 지금에 이르렀다.
청사에서 벗어나 그들은 땅을 밟았다.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며 운표선은 상쾌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단어의 한 음절 한 음절을 곱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첫째가 백성이요.”
서문윤은 귓속에 웅웅 울리는 모기소리를 듣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어쩐지 심장이 쿵쿵대어 참을 수가 없다.
“둘째가 사직이요.”
운표선의 하늘거리는 소맷자락이 허공에 휘날렸다.
서문윤은 성벽을 올라서며 제 정수리에 내려앉는 쨍한 햇볕을 느낄 수 있었다. 살갗을 찌르는 강렬한 햇볕을 타고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계단을 오르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서서히 일깨워지는 정신 속, 귓가를 울리는 함성을 들었다.
그것은 어째서 깨닫지 못했는지 모를 만큼 강렬한 고함이 되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성벽 위의 맑고 높은 하늘.
“마지막이 제왕이다.”
발걸음이 마지막 계단에 닿았다.
담박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내려앉고 서문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성벽 위에 올라선 채 그는 얼어붙어 드높은 하늘과 그에 이어진 벌판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너무 그 말을 잊고 살았구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연이어 귓가를 울린 순간 서문윤이 생각하고 있던 말.
‘이것은 꿈인가?’
가을 하늘은 청명하고 맑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운표선은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굳은 서문윤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말했다.
“작은 습관이 세상을 바꾸는 것처럼, 사소한 것이 때때로는 답일 수 있는 법이다.”
“……사소한 것.”
“그래, 사소한 진심. 쌓고 쌓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약하지만 어쩌면 유일한 해답일 수 있는 것.”
귓전에 크게 울려 퍼지는 말이 고함에 뒤섞여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 주먹을 말아 쥘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
함성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동시에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이어 말이 울렸다.
“신의는 무사하십니까? 성주는 안녕하십니까? 공의 시신은 평안합니까?”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무수히 많은 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은 파도처럼 물결이 되었고 들판은 파도가 모인 바다가 되어 초록색 땅이 보이지 않았다. 병사가 아닌 허름한 면옷을 입은 군중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한데 모여 격정 어린 말을 외치고 있었다.
“누가 그들을 해칠 수 있단 말이오! 흉년에 곡식을 수탈하고 풍년에 사람을 징용하는 그네들이 아닌 어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역적이라 한단 말이오?”
진심이라.
입안에 감도는 말을 중얼거리며 서문윤이 성벽의 난간을 더듬거리는 손으로 부여잡았다.
“이 공은 나라를 지켰고 신의는 우리를 돌봤소!”
“그들을 누가 처벌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들이 역적이라 하는가?”
“우리를 돌본 건 나라가 아니라 그들입니다!”
그저 작은 일이라 생각했건만.
“아.”
짤막한 탄성이 마음을 대변했다. 서문윤은 멍한 표정으로 난간을 움켜쥔 채 몸을 기울였고, 한참을 그들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구명을 외치고 있었다. 장한성의 장수들을, 전 성주 이청우를, 그들을 돌본 신의를 살리려 구명을 외쳤다.
사람들은 성을 내며 행동하고 있었다.
검설린의 말처럼 방관하거나, 겁을 내거나, 혹은 체념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움직이는 이들은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역천을 저지르면서도 저들을 위한 자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인(仁)과 저들을 위해 죽은 자의 불명예에 싸우고자 하는 의(義)를 드러내고 있었다.
잘못된 것을 꺼리고 옳고자 행하는 마음.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세 번째.”
귓가로 내려앉은 말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했다.
“제 목숨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저 어리석고 못난 나의 붕우가, 이 사태를 나름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길은. 네가 정말이지 증오할 만한 것이었단다. 서문윤아. 건전성 본진에서 군사가 들이닥치고 황명을 거부한 죄로 홍재영과 장한성의 장수들, 설린이를 압송하려 했을 때 저놈은 제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끝나려 했어. ‘단 한순간이라도 의형이 불처럼 타오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말을 마음에 품고 있다 전해다오.’ 그리 말을 하곤, 내가 본 적이 없는 가벼운 얼굴로 너를 내게 맡기고 떠났지. 그러나 그를 압송하는 마차를 따라오는 이들이 많았다. 건전성에 이르러 하나둘씩 모여오는 이들이 하나가 되어 군중을 이루고 당황한 병사들이 그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바다처럼 많은 이들은 파도로 변해 그들을 덮쳤다.”
석상처럼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다. 얼어붙은 청년의 두 눈은 혼란으로 흔들거렸고 그는 충격이 가시지 않는 멍한 눈으로 운표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운표선의 말은 멈추지 않고 담담하게 이어졌다.
“이청우의 시신은 무사하다. 장한성민은 무덤을 결사적으로 지켰고, 건전성민은 분노하여 죄인의 마차를 부수고 전염병에 몸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을 돌보던 신의를 구출했다. 그들은 가난과 기근에 휘말린 장한성을 위해 곡식을 기꺼이 나눴고, 장한성 청사의 곳간에는 아직도 곡식이 쌓이는 중이다. 이 모든 일련의 사태 속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중앙관리를 거부하며 명사들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분노하여 거리를 나서며 소리쳤지. ‘정의를 원한다(願立正義)’ 그 한마디 말이었다. 건전성은 본진이 자리한 곳이라 물자가 풍요롭고 어렵지 않았어.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어려움에 앞서 불의를 미워했고 불인에 반감을 느끼며 나섰다. 제 일이 아닌 일에 들고 나서며 그들은 지금껏 있었던 일에 대한 분노를 표했어. 결국 죄인의 마차는 부서졌고, 새로 온 하동 절도사는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고 장안으로 떠나야만 했다. 지금도 봉기의 물결은 잦아들지 않고 건전성을 중심으로 하동으로 번져 나가고 있다.”
서문윤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이건, 이건.”
“반란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끊으며, 운표선은 하늘에 날 듯한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낭랑히 소리를 높였다.
“맹자를 성현이라 받들면서도 그가 내뱉은 이 말을 제왕은 불편하게 여기고 없애려 했지. 백성이 곧 천하이니, 사람이 곧 천하이니라. 동시에 나 또한 그 말을 알면서도 너무 많은 시간 동안 잊고 있었다.”
이걸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맹자가 양혜왕에게 말하기를, 흉년기세에 곡식창고를 열지 아니하고 사람이 죽는 것을 방관하며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시대가 그리 만들었느니라.’ 말을 하는 것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고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닌 칼의 잘못이라 말한다는 것과 똑같다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위정자로서 업을 짊어졌음을 느끼고 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점차 맹자의 말이 틀렸다 비난하였고, 그가 이상만을 부르짖었노라 여겼다. 그가 사람을 위무한다면 천하의 백성이 귀의한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세상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던가? 민은 어리석게도 그들을 위하려던 수많은 이들을 모욕하지 않았던가? 사변 때 우리를 도와주는 이가 없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욕을 하였다.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한탄하면서. 허나 지금 나는 과거의 우리를 돌아보며 의문할 수밖에 없다.”
숨을 멈추고, 잠시 말을 고르던 운표선이 이윽고 별처럼 빛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과연 절실했는가?”
“절실….”
천둥처럼 내려앉은 말을 곱씹으며 서문윤이 아스라한 운무 속에 땅을 보았다. 그가 찾고자 했던 해답이 묻힌 곳이었다. 서문윤의 눈에 서서히 습기가 물들었다. 동시에 그의 눈에 죽었던 별빛이 다시 반짝였다.
말은 서서히 엄중해졌다.
“우리는 스스로 절실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절실했는가? 정말로 치열했는가? 백성이라는 물을 들끓게 만들 만큼 우리의 열의는 뜨거웠나? 백성은 남. 계도해야 할 대상. 긍휼히 여기고 오직 도움을 줘야만 하는 무리라 여기며, 그들을 우리와 유리시키며 멋대로 재지 않았던가?”
그리고 운표선은 서문윤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쥐며, 다정하나 심지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우리는 마침내 파도가 된 이들 앞에 서서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울리는 함성에 서문윤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윤아. 너는 틀리지 않았다.”
결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리석지 않아. 다만 덩치가 너무 커서 느릴 뿐이지.”
운표선은 잠시간 말을 곱씹던 중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무얼 그리 어렵게 생각하고 또 무서워했던지 모르겠구나.”
고개를 흔들며 내뱉는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말이 이어졌다.
“신의는 무사하십니까? 성주는 안녕하십니까? 공의 시신은 평안합니까?”
어질거리는 정신을 부여잡던 서문윤은 그 말이 한곳으로 향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누대에 서 있는 사내 하나가 있었다.
홍재영.
이청우의 최측근이자, 그의 뒤를 이어 성주가 된 자. 쓰러지기까지만 해도 얼굴에 절망을 띠었던 사내의 얼굴에는 기쁨인지 감동인지 모를 격한 감정의 물결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뺨이 움푹하고 피딱지가 군데군데 보이는 처참한 모습이었으나 홍재영의 안색은 밝았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이를 악문 채 들판 너머로 이어진 이들을 바라보던 홍재영이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신의는 무사하다.”
잠긴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나는 안녕하다.”
들판에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공의 시신은…… 평안하다!”
힘주어 내뱉는 말은 그가 전력을 다해 내뱉는 것만 같았다. 서문윤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이어지는 함성을 듣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홍재영은 환한 미소를 지었고, 세상을 다 가진 사람마냥 울면서 웃음을 흘렸다.
귓가에 맑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이게, 이게 이렇게.’
그리고 그 순간 귓가에 내려앉은 자그마한 말.
“서문윤.”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제 이름을 부른 이를 바라보았다.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의형.”
성벽 끝에서 익숙한 외모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눈처럼 새하얀 옷으로 몸을 가둔 듯한 사내.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어 올리곤 새하얀 천으로 눈 아래를 가린 사내는 성벽의 저 끝에서 함성을 뒤로한 채 서문윤을 고요함이 자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함성이 심장소리를 뛰게 하고, 또 눈물을 뚝 흘리게 만들었다.
“의, 의형.”
어느새 다시 눈물로 더러워진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천지를 울리는 고함소리 속에서 검설린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화가 자리한 두 눈은 고요한 호수같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이었다.
“너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뱉는 말은 간절히 원했던 것이기에 더욱 서글펐다.
“너와 강소성으로 가고 싶다.”
천지간에 울려 퍼진 고함을 꿰뚫고 그 말은 서문윤의 가슴속 깊게 내려앉았다.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구나.”
그 말을 내뱉고, 잠시 머뭇거리던 검설린은 간절하고도 또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감히, 내가 너와 함께…….”
그리고 서문윤은 결국 참지 못해 그를 향해 뛰어가고야 말았다.
우두커니 선 사내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서문윤이 그의 목을 팔로 휘감아 당겼다. 순순히 저를 향해 쓰러지는 사내를 꽉 껴안으며 서문윤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는.’
그 어떤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전율에 휩싸여 울었다.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내의 얼굴에 희미한 격정이 물들어 퍼졌다. 잠시간 머뭇거리며 서문윤을 껴안기 망설이던 검설린이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다가 이윽고 그를 와락 껴안았다.
“와아아아아아아!!”
등 뒤로 파도가 된 사람들이 물결치고 귓가로는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를 배경으로, 서문윤은 검설린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들지 못했다.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그의 의형이 세상과 화해한 날이었으며, 동시에 평화를 되찾은 날이었다.
울음을 터뜨리는 청년의 등을 쓸며 검설린은 숨을 멈추고 성벽 너머로 펼쳐진 구원과도 같은 광경을 바라보았다. 운표선이 그를 보며 씨익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제 뜻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사람의 본성이 저열하다고.
그리 믿으며 10년이 넘는 세월간 비뚤게 살아왔다.
제게 세상이 살아갈 만하다, 증명을 하고 싶다는 서문윤의 말은 믿고 싶지만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으며, 검설린은 암울한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벽 밖에 물결치는 사람들의 목소리.
“원립정의(願立正義)!”
원컨대, 오직 정의만을 원한다.
사람이란 어리석고 두려움이 많고 욕심이 많아 제 일에만 혈안이고 남의 일에는 길가에 돌덩이를 보듯이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백성은 근시안적이라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하면 그저 그걸로 족하는 개돼지와 다름이 없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건만.
제 세상을 모조리 깨부수는 함성소리에 떨리는 몸을 느끼며 성벽의 돌을 부여 쥘 수밖에 없었다. 제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인파에 휩싸여 격정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의 추억이 묻힌 장한성을 부여잡으며 검설린은 저절로 무너지는 신형을 되잡고 숨을 멈췄다.
죽음을 각오했으나, 죄인을 호송하는 마차에서 강제로 끌어내진 이후로 검설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상황을 관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상황의 끝에 들판을 채운 사람들의 함성.
‘나는.’
고개를 돌려 성벽 위에 찬란한 햇볕을 받으며 선 청년을 보는 순간 심장으로부터 퍼져 나가는 고둥소리를 들었다.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을 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이 그를 향해 뛰쳐 달려왔다.
검설린은 그의 눈물을 소중히 닦아주며 머리 위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품 안에 헐떡거리며 우는 그가 쓰러질 때까지 그를 달래고 또 달랠 뿐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구나.’
결국 기절한 그를 껴안고 검설린은 한참을 성벽에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의 세상은 깨졌으며, 마음에 남은 것은 거친 물결이었다.
이청융은 틀리지 않았다. 또한 저의 과거는 틀리지 않았다.
서문윤은 결국 그를 살린 것이다.
처소로 돌아와, 지쳐 쓰러진 서문윤을 침상에 내려놓고 검설린은 그를 한참 동안 잠자코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린 채 잠이 든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감돌아 있었고, 검설린은 그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은 마음을 품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손조차 대지 못한 채 그저 뚫어져라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어느 순간 담담한 말이 흘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불은 켜고 얼굴은 보지 그래. 호롱불을 켜며 운표선이 칭얼거리듯 말했다. 돌아오는 내내 검설린을 놀리고 익살을 피웠던 운표선의 얼굴에도 지울 수 없는 환희가 물들어 있었다.
잠시간 침묵하던 검설린이 문득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일단은 강소성으로.”
운표선의 눈썹이 꺾인 순간이었다.
“오호?”
“일단 고향으로는 가야겠지. 서문린이 날 죽이겠군.”
“죽어도 싸지 않아?”
“오체분시를 해도 마땅하지.”
그리 말을 내뱉고 검설린이 쓰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부정을 하려 해도 못 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제 안에 다가와, 이제는 저 녀석이 너무 소중해 잃을 것을 두려워할 지경이 되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도 덜컥 두려움이 들어, 혹여나 서문윤 저 녀석마저 잃을까 봐 겁에 질릴 지경이 되었으니. 그저 검설린은 서문린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품을 뿐이었다.
손을 뻗어 희고 둥근 그의 이마를 쓸어 올린 검설린이 풀어헤친 서문윤의 머리카락을 문득 집고 고개를 숙였다.
잠을 자는 이의 머리카락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는 친우를 바라보며 운표선은 입가에 지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나는 웃음을 띠곤 잠시간 침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강소성에는 강서진이 있다.”
그 말에 검설린은 잠시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려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떻게 할 거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에는 답을 종용하는 빛이 서려 있었으나 검설린은 그저 침묵하며 새곤 잠을 자는 서문윤을 응시할 뿐이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에는 어두운 빛이 서려 있었다.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나는 살아남은 자로서 길을 걸으리라.”
너무나도 어두운 길을 걷는 옛 친구를 떠올리는 순간 검설린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살기가 스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운표선은 씁쓸한 한숨을 푹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는 봉합할 수는 없는 관계.
“에휴.”
한숨을 내뱉으며 운표선이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나비 같은 나뭇잎이 팔랑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