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장안사준(長安四俊)(11) (18/31)

17. 장안사준(長安四俊)(11)

건전성으로 돌아온 서문윤은 몸져누웠다. 아픈 몸으로 악을 쓰고 검설린과 한바탕 난리를 쳐 병환이 깊어진 것이었다. 건전성에 도착하자마자 핏덩어리를 다시 웩 토한 서문윤은 정신을 거의 잃은 와중에도 황양양을 찾았다.

“오라버니, 몸을 걱정하셔야지 어째서 저를 찾으십니까?”

울면서 내뱉는 말에 서문윤은 뜸을 들이다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너와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구나.”

그 말에 황양양은 눈물을 흘리는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노랑치마에 연꽃무늬 배자를 입고, 길고 아름다운 생머리를 붉은 머리끈으로 묶어 늘어트린 아름다운 소녀. 휘장 너머에 자리한 젖은 눈으로 저를 보는 황양양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과거에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던 어린아이를 생각하고는 웃었다.

“나의 길이 이미 한 사람에게 이어졌구나.”

그 말에 황양양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물기가 묻은 목소리는 서글픔에 물들어 있었으나 동요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체념한 얼굴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양양.”

“그를 원하십니까?”

“그래.”

그 말에 황양양은 울컥하여 말했다.

“사람들은 오라버니를 비웃을 거예요. 귀족들 사이로 단수(남색)가 유행하지만, 막상 사람들은 그를 음탕하게 여기지요.”

“알고 있다.”

“무관의 삶을 포기하신 건가요?”

“넌 그리 보이느냐?”

황양양은 입을 다물었다. 침대에 누운 채 서문윤은 흔들리는 휘장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에게 너는 좋은 누이이자 가까운 벗이었고, 숙부님은 내 길을 알려준 스승과 같았으며, 숙모님은 내게 있어서 어머니와 같으신 분이셨지.”

“……”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은 아쉽지만, 숙부모님과 너는 내 가족 같았어.”

황양양은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만약 황 숙부가 고민할 때가 있으면 한마디 말을 전해주지 않으련?”

서문윤은 웃으며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황양양은 그 말을 듣고 아리송해했으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라버니께서 무슨 선택을 하시든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가족이에요. 서문 가가.”

그녀가 자리를 떠나기 전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저는 오라버니를 존경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제가 잘 설득할게요.

그 말을 마치고 성큼거리며 방을 떠나는 양양을 서문윤은 잠시 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묵묵히 바라보던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알고 있다.”

창밖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다. 바스락 풀밭을 밟는 소리와 함께 신경질 적으로 미간을 좁힌 사내가 보였다. 그의 기척은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검설린은 애초에 인기척을 숨기고 싶지 않은 듯 대놓고 풀 밟는 소리를 흘렸으므로.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그걸로 재천이 움직일 거라 생각해?”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비슷할 거다.”

그 염세적인 말에 서문윤은 검설린을 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오만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게 패배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는 또다시 냉혈하고 고압적인 모습을 되찾은 후였다. 서문윤은 웃을 뿐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게 차라리 더 보기 좋았다.

문득 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 그녀가 질투나지 않으세요?”

실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의 얼굴에는 즐거움과 함께 묘한 기대가 서려 있었고, 그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의 기대 어린 시선에도 검설린은 그저 싸늘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내가 왜?”

그리고 검설린은 얼굴을 와락 구길 수밖에 없었다.

“연인의 약혼자 아닙니까?”

서문윤이 내뱉은 말에 그의 얼굴에 잠시간 황당함이 서렸던 것이다. 싱글 웃는 서문윤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침묵 끝에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언제 내 연인이 되었지?”

눈썹을 꺾으며 그는 서느런 시선으로 서문윤을 보았다. 서문윤은 그러나 그 말에 싱글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저희 이제 마음이 통한 것이 아닙니까?”

이제는 그를 다룰 방법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어이없는 말에 검설린은 더 답변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응할 뿐이었다.

서문윤의 미소가 어색히 변했다. 싸늘하다 못해 서리가 낀 검설린의 반응에 그는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며 말을 내뱉었다.

“의형은 빨리 북촌으로 가셔야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간 말에 검설린의 얼굴도 다시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덤덤한 목소리가 서문윤의 말을 받았다.

“알고 있다.”

“저도 몸이 어느 정도 추슬러지면 의형을 따르겠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잠시간 침묵 끝에 답했다.

“그러든가.”

서문윤의 얼굴에 묘한 빛이 서린 순간이었다.

“말리지 않으십니까?”

“네가 말린다고 들을 놈이냐?”

검설린의 얼굴에는 진절머리 난 기색이 역력했다. 서문윤은 그 말에 어색히 웃으며 답했다.

“아뇨.”

그 간단명료한 말에 검설린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 담긴 그의 마음을 읽고 서문윤은 가슴이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침묵 끝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쟁입니다.”

장한성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고요한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장한성을 지킬 의리는 없었으나, 이미 돌아가겠다 약속한 바가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검설린은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장한성으로 갈 거냐?”

서문윤의 답변은 하나였다.

“예.”

검설린은 더 이상 그를 말리거나 욕하지 않았다. 이미 마차를 타고 건전성에 돌아올 때부터 그들은 저가 걸어야 할 길을 예감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의 마음을 확인했을 뿐이고.

창틀에서 손을 떼며 그가 가볍게 말했다.

“죽지 마라.”

“의형도 죽지 마십시오.”

그 말에 몸을 멈칫한 검설린이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반듯한 눈으로 그를 받을 뿐이었다. 검설린은 침묵 끝에 문득 한마디의 말을 내뱉었다.

“살아남는다면.”

“예?”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놀란 표정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는다면 생각해보지.”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조소를 흘렸다.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얼어붙어 한참 동안 그 어느 말도 내뱉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 서문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두루뭉술합니다. 적어도 확언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라는 것도 많구나. 그리고 원래 그런 건 확언하는 거 아니다. 재수 없어진다.”

“의형, 나중에 강소성에 들르면 안 되겠습니까? 부모님께는 그래도 먼저 말하는 게….”

“그건 차도살인계냐? 아주 날 수치스러워 죽이려고 작정했군. 제길, 일단 살고서 말해!”

처음에 그가 쓰러졌을 때 검설린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죽을 사람 같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던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횡설수설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조리 다 토해내기까지 했으니까. 그때 그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았고, 소생의 여지마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검설린은 요즘 해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바로 마차 사건 이후 건전성에 돌아온 날부터였다. 그가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은. 그는 북촌에 나갔다 마차를 몰던 때 마음을 토로하던 때와 다르게 서문윤에게 싸늘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서문윤은 맹세할 수 있었다. 의형이 제게 마음을 터놓은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노란 것을. 아마 상황이 이렇게 암담하지 않았더라면, 생존의 가능성이 더 높았더라면 검설린은 영원토록 그리 행동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어찌 되었건, 엎질러진 물이다. 그가 아무리 후회한다 한들 검설린은 마음을 터놓았고, 서문윤은 그 안을 파고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검설린이 저를 무어라 생각하고 있는지 서문윤은 확신할 수 없으나 이제 단 한 가지는 자신할 수 있었다. 만약 제가 없다면 검설린은 더 이상 살 수 없으리라는 것.

그것이 육신이든 넋이든 이미 검설린은 제게 깊게 정을 주고 있었다. 사람에게 깊게 상처받아 앓는 자가, 심지어 세상이 싫고 증오스러워 죽음을 각오했던 이가 저 하나에게 마음을 주고 더욱이 살아갈 각오를 얻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서문윤은 그가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제가 외동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동생이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으니.”

그 말이 못마땅한 듯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서문윤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부모님을 뵙고 싶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드리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불효가 후회되는군요.”

검설린은 그리고 그 말에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 네가 강소성에 내려가서 평생 나랑 산다는 말을 내뱉으면 그게 최고의 불효일 거다. 서문린이 뒤집어질 게 눈에 뻔하군.”

“아버지는 의형이 존경스럽다고 하셨는걸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서문윤은 가끔 검설린을 회상하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유독 눈발이 거셀 때면 허허 웃으며 장한성에서의 겨울을 회상하곤 했었던 아버지는, 그 시절 저의 상관을 떠올리며 존경을 희미하게 드러내곤 했으니까.

그의 정체를 알고 이제야 그 사실이 기억났다.

회상에 잠긴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피로에 찬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마치 저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시선에 서문윤은 그저 웃었다. 검설린은 언뜻 무정한 듯했으나 서문윤은 그 모습마저 이제는 귀엽게 보였다.

치렁한 머리카락이 가린 이마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검설린이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양심이 있다면 네 아버지 앞에 서기 전에 고꾸라져 죽어야지.”

“하지만 의형은 약속을 하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더 이상 말문을 열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다정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행복하다.

침상에 몸을 기대 서문윤은 잠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의 얼굴은 실로 교묘하게 생겨, 눈매가 몹시 날카로우니 복면으로 가리면 무뚝뚝하고 사납게 보였으나 전체가 보일 때는 맑고 청정하게 보였다.

서문윤은 연꽃같이 수아한 외모의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를 마음에 품었는지는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노라고.

‘황하에서 그에게 구함을 받을 때인가?’

그가 내뱉은 위로가 마음을 울렸던 기억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쓸쓸한 목소리로 한 말이 귓가를 사로잡은 것도. 검설린이 내뱉은 말이 마음을 울렸던 것도.

그저 지금 서문윤은 생각할 뿐이었다.

그날에 황하에서 검설린을 만난 일은 진실로 천운이었노라.

서문윤의 입가에 서서히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와서 그가 없는 나날을 생각하지 못했다.

검설린은 사납고, 거칠며, 또 이기적이었으나 서문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불쌍하고, 또 사랑스러웠다.

“의형.”

그리고 그 마음은 두 눈에 비추어져 따스한 빛을 흘렸다. 검설린은 그 다정하고도 강렬한 시선에 침음을 흘렸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침상에 턱을 괸 채로 싱글 웃었다.

이내 핏기가 가시고 또 싸늘하게 변한 얼굴로 검설린이 그를 노려보았다. 서문윤은 그가 동요하는 줄 알아 그 날카로운 기세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과가 끝나고 침상 위였다.

검설린은 얄팍한 침의를 입은 채 서문윤의 옆에 누워 있었고, 서문윤은 그를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몸을 섞은 직후였다. 검설린에게서 미약에 관련된 설명을 들은 서문윤은 더 이상 그와의 잠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역병에 걸린 몸이라, 검설린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거부했을 서문윤은 순순히 눈을 감고, 그와의 정사를 받아들였다.

검설린은 서문윤이 괴질에 걸린 것을 신경 쓰지 않았고, 서문윤 또한 그에게 전염이 될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열기가 남은 몸을 침상에 뉜 채 서문윤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검설린의 수려한 얼굴을 살필 뿐이었다.

그의 외양은 가혹한 혓바닥과는 다르게 몹시 고결하게 보였다. 마치 연꽃을 닮아, 진흙탕 속에서도 순순히 빛을 발휘할 것만 같이 깨끗하고 또 순수해 보인다.

서문윤은 그의 외모가 좋았다. 그의 외양은 그의 성품을 닮아 있어, 그 미추와는 별개로 서문윤은 그의 외모를 좋아했다.

귓가에 비오는 소리가 시원하고 울리고, 달빛이 침상에 드리울 때. 서문윤은 목에 칼날이 들어온 작금의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평온함을 느꼈다.

죽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검설린은 침묵하던 중 입술을 열어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미소 지었다.

“제 눈을 뽑아버리고 싶습니까?”

검설린은 농담 같은 말에 가벼이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서문윤의 눈알이 도륵 굴러간 순간이었다. 장난으로 한 말에 검설린은 쉬이 응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가끔.”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버틸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어.”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 그는 순간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으음.’

농담으로 한 말에 돌아온 답변이 무게가 상당하다. 서문윤은 당황한 마음을 갈무리하려 애써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무엇이 힘이 드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갑작스럽게 빨라지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깊게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문윤은 제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지는 손길에 그 순간 얼어붙어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시선을 돌려 서문윤을 고아한 눈으로 응시했고, 차분한 두 눈에 담긴 순간 서문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귀 끝이 홧홧하다.

침은 바싹 말랐고.

검설린은 한동안 서문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지고 놀다가 내려놓았다. 그의 눈은 고요하고 또 진중했기에 서문윤은 시선에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해로운 외모.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서문윤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내일부터는 저도 의당을 나서겠습니다. 몸은 좋아졌으니.”

검설린의 얼굴이 굳은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제 자리가 그곳에 있겠습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잠시간 침묵했다.

서문윤의 말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피를 두 번이나 토하여 몸이 완전히 망가진 줄 알았으나, 그것은 사실 약이 독을 이겨낸 증좌였다. 실제로 지금 서문윤은 거동은 물론이요 범인마냥 가벼운 소일거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 의형이 자신의 안전에 몹시도 예민했기에, 서문윤은 그가 제 말에 반대할까 봐 긴장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비록 검설린이 마음을 꺾고 건전성으로 회귀했다 한들 서문윤은 검설린의 답변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긴장이 스칠 때였다. 간절한 빛이 감도는 서문윤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무리는 하지 마라. 네 몸은 아직 완전히 나은 게 아니니.”

서문윤의 얼굴에 희미한 기쁨의 빛이 스친 때였다.

검설린은 그의 발걸음을 막지 않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체념이 한순간 스친 것을 알았으나 서문윤은 굳이 지적을 하지 않고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예!”

밝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당분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치열해질 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거친 싸움이 일어날 거고, 나는 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미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장한성에서 살아남아도 역적이 될 수 있다. 너는 그것을 감내할 수 있어?”

그 말에 생기 있는 목소리로 답하던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곤혹스러운 빛이 도는 서문윤의 얼굴을 검설린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생각까진 하지 못했나 보지 싶어 쓴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몸을 바로 세웠다.

서문윤은 그가 몸담으려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또 위험한 일인지 아직도 다 모르고 있었다. 검설린은 침상머리에 몸을 기댄 채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황제의 뜻은 장한성이 무너지는 거지. 우리는 황제를 거역하고 암중으로 그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다. 지금껏 나는 운표선과 강서진의 비호를 받아 그의 마음을 거스르는 일들을 일부 저지를 수 있었으나 이 일마저 넘어갈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 드넓은 땅의 주인. 구주천지를 다스리는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방법은 국경을 넘어 이민족의 나라로 도망치는 것뿐이다. 그것 외에는 생존할 방법이 없다. 검설린의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검설린은 서문윤이 현실을 바로 알기를 원했다.

나풀거리는 눈썹을 내리깔며 검설린이 문득 지긋한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했다. 긴장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검설린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나 서문윤의 반응은 검설린이 생각했던 것과는 꽤나 궤가 달랐다.

“그는 백성을 버리려 했습니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돌연 얼굴을 딱딱히 굳힌 서문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자는 하늘이 아닙니다.”

그의 두 눈을 보며 검설린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매사 저 눈은 동요하는 듯하면서도 깊은 부분은 흔들리지 않는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웃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또다시 밀려들어왔다. 검설린은 표정을 어찌 지을지 판단 못 하고 슬쩍 미간을 좁히다가, 결국 느릿한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서문린이 널 영웅으로 만들겠다고 즐거워했었는데. 이제 보니 서문세가에 작은 역적이 태어났군.”

그 말에 서문윤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얘기를 들먹이는 순간 서문윤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의 외견이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보여 평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가끔 과거 아버지와의 인연이 거론될 때마다 서문윤은 속으로 조금 괴로워하곤 했다.

의기소침해진 서문윤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역적이 되는 일은 없을 거다. 황제든 고우군이든 나를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을 테니. 하물며.”

그 말을 하곤 검설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물며?

서문윤은 그의 뒷말을 기다렸으나, 의아하게도 검설린은 제가 내뱉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서문윤은 의형이 저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심계를 읽기 힘든 면이 있었으나 그 순간 서문윤은 유독 검설린의 눈이 음울하게 빛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불안이 등허리에 소름을 치밀게 만들었다. 서문윤은 감이 좋은 편이었고, 오랜 시간 검설린과 함께하여 그에 관련된 일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서문윤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너는 내가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군.”

싸늘한 웃음과 함께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담담히 답할 뿐이었다.

“필사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의미다.”

그것은 가벼운 말이었으나 서문윤은 쉬이 넘길 수 없었다. 검설린의 눈은 우물의 깊은 물처럼 끝을 알 수 없이 깊었고, 서문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평소처럼 고요했으나 품고 있는 기세는 장중한 고목같이 묵직했다.

그는 결심이 선 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결심했을까?

무언가 불안했다.

서문윤이 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던 검설린이 몸을 침상머리에서 떼며 말을 내뱉었다.

“자거라. 일단 내일의 일을 생각하자.”

간단한 말에 서문윤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설린은 그를 보며 피식 작은 웃음을 흘렸다. 예전의 그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온유한 웃음이었다.

* * *

시간이 흘렀다.

건전성의 의원들이 괴질을 상대하는 방법에 능숙해지고, 자리에서 털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하며 장한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 했다. 길어도 일주일 후에는 그곳으로 출발해야 한다며. 따스해지는 기온에 서문윤은 전쟁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황재천은 군대를 지원해달라는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황 숙부로서는 양양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보전할 필요가 있지. 그분에게 보신이란 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닌 양양을 위한 것이니까.’

그는 한숨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순적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만들고야 마는구나.’

이 기묘한 상황에 탄식하고야 말았다. 사람은 선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사악한 행동을 하게 되고, 사람을 위하는 마음은 사람을 죽이고야 만다.

그 부조리함이 몹시도 슬펐으나 서문윤은 마음을 빠르게 수습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궁리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오로지 한 사내에게 증명하고 싶을 뿐이었다. 인세(人世)가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거동과 소일거리가 가능한 시점에 북촌에 나갔고 검설린을 보좌하기 시작했다. 검설린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기 위해서.

사람을 살피는 일은 검설린에게 맞지 않았고 서문윤은 그를 보좌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걱정을 품고 간 북촌에서 서문윤은 생각보다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 검설린을 발견하고 슬쩍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항상 가는 곳마다 거친 언행으로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은 의형이 아닌가?

그런 변모한 태도에 서문윤이 조금 당황하여 물은 적이 있었다.

“신의가 이곳 사람들에게 믿음을 사고 있습니까?”

검설린이 제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함이 들었다. 그리고 서문윤이 말을 붙인 오십 줄은 훌쩍 되어 보이는 노년의 의원은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답해 그를 놀라게 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은혜를 두 번이나 입었음에도 저희는 신의께 두 차례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게 무슨?”

의혹이 가득 찬 말에 의원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원들이 납치당한 동안 여력을 다해 병자를 돌봐주신 은혜를 입고도 그를 모르고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양양 아가씨를 살려주신 은혜를 입고도 쓰러진 공자를 걱정하는 신의를 겁박하려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서문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겁박이라니, 무슨 일이었습니까?”

의형의 급한 성질을 알기에, 그는 겁박이라는 거친 단어에 불안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동요한 목소리로 의원에게 물은 그는 이어진 말에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당신은 마차 위에 올라 기억하지를 못하시겠지요. 그날 성민들은 신의를 막으려 아우성치며 말고삐를 붙잡았습니다.”

서문윤은 그 순간 제가 쓰러졌던 날, 마차로 질주하며 분노의 말을 내뱉던 의형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잠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이성을 잃고 세상을 저주했다. 서문윤은 자연스럽게 성민들과 부딪혔을 검설린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사태가 심각했던 거지?

굳은 얼굴로 서문윤이 물었다.

“그,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혹여나 성민에게 지나친 말을 내뱉었으면 곤란하다.

서문윤은 장한성의 일을 위해선 건전성의 민심이 중요한 것을 알았다. 애당초 건전성에 지원을 온 까닭은 끊긴 물자를 다시 요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 말에 의원은 회상에 잠긴 얼굴로 잠시간 침묵하더니 서문윤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건전성의 사람들은 그분이 당신을 장중보옥처럼 아낀다는 것을 압니다.”

서문윤의 눈을 크게 뜨이게 한 말이었다.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그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동요가 스치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의원은 쓰게 웃음을 흘리곤 말을 이었다.

“삿된 소문이 있다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분에게 몹시나 귀중한 것 같더군요. 이성을 잃고 단말마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욕지거리를 퍼붓더이다. 말로 해서는 설명이 불가할 겁니다. 신의는 그야말로 미치고 분노하며 날뛰었으니까요.”

그 순간 붉어지는 얼굴을 참지 못해 서문윤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눈치가 빠른 의원은 그를 지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 절규를 듣고 저희는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서문윤은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에 의형은 완전히 폭발했구나.’

의원은 검설린이 서문윤이 쓰러지고 완전히 분노하여 성을 빠져나가면서 저를 말리는 황재천을 마차를 모는 채찍으로 때렸다 했다. 사람들에게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고 비난했다면서.

의원은 그날의 검설린의 분노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서문윤은 눈앞에 스치는 그의 모습에 입술 밖으로 얄팍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무리 의형이 망나니라도 관료를 때리거나 병졸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황재천에게 함부로 하대를 하지도 않았고.

그러나 그는 그날 사람들 앞에서 그야말로 미치광이처럼 날뛰었다. 절도사를 때리고 병졸을 향해 말을 몰았으니, 서문윤은 그날 사망자가 없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었군, 이라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

‘나 때문에 그렇게….’

의원은 한숨을 푹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은혜도 도리도 모르는 짐승 같은 것들이라는 말들을 들을 때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름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과오가 가득하더구려. 차라리 장한성이 무너지고 건전성이 말굽에 밟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때 언제부터 저분이 저리 구석에 내몰렸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소 독한 말을 내뱉어도 검설린은 심계가 깊어 일정 수위 이상의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차에서 검설린은 거의 이성을 잃고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했고, 마음속에 숨겨둔 깊은 말과 비밀을 언급했다. 그리고 서문윤은 이 순간 예상할 수 있었다. 건전성을 떠나는 순간에 검설린이 완전히 폭발한 것을.

그를 떠올리며 서문윤은 그저 말을 들을 뿐이었다.

“의로운 명사의 입에서 차라리 모두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지요. 저희가 마차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은인을 두 번이나 제치고 무슨 면목이 있겠습니까?”

검설린의 마음을 유추할 수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 시점부터 아예 의형은 미쳐버렸던 것이겠지.’

듣는 것만으로도 상상이 가는 그의 모습. 서문윤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로 인해 인한 것이다.

그를 눈앞에 두곤 의원은 탄식 어린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건전성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저 부끄러워할 뿐입니다.”

의원의 말이 끝나고도, 서문윤은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입술을 열어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의형은 사람 때문에 많은 고난을 얻었습니다.”

심란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었다. 의원은 그 말에 아무런 말도 묻지 않았다.

“오늘날 받은 비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이 많은 이는 험한 꼴을 많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절박함을 품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목숨을 보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이들 말입니다. 그것이 제 자신이든, 혹은 사랑하는 이든 그들은 살리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의원께서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는 부질없는 일일 뿐입니다.”

“…….”

“그저 바랄 뿐이었습니다. 의형이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세상과 화해할 수 있길.”

잠시간 침묵 끝에 의원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건전성이 바람을 저버렸군요.”

서문윤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아직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확고한 말에 의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를 앞에 둔 채 서문윤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장한성은 건전성 본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밟고자 하는 길은 명백히 하나였다. 고민을 하거나 망설인 적도 없었다. 서문윤의 얼굴은 결심이 선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으나 의원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서문윤의 말에 사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사지라는 것은 건전성의 주민 또한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의원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장한성에 복귀하신다는 말이 사실이었습니까? 하지만 그곳은 사지입니다.”

그리고 서문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지에서 도망치지 않는 이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건전성은 본진이 자리한 도시입니다.”

“허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 말하는 사내를 향해 서문윤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장한성을 떠날 때 약속했습니다. 그곳에 돌아간다고요.”

말문이 막힌 듯 의원은 입술을 다물 뿐이었다. 그를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며 서문윤이 말을 이었다.

“사람을 살린다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도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이렇게 고단한지도, 또 이리도 험난한지도. 그러나 이제는 끝을 바랄 뿐입니다.”

의원이 한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의형에게 들은 말이었다. 실제로도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나 다른 길은 생각지 않고 있었다.

정심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을 향해 의원이 침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사람을 모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서문윤은 그의 직함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의술에 문외한이었다지만 검설린을 2년간 따라다닌 경험이 있었다. 의원의 손길은 서툴렀으며, 그러나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의원을 존엄하게 여기는 기색이 보였다.

일부러 그에게 말을 건 까닭은 그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입술을 다문 의원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모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가 입술을 열었다.

“비참한 상황에서 비난할 상대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사실 알고 있었네.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그러나 10대의 소녀보다 못한 이들은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여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어.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을 버린 거지.”

“어째서 손수 사람들의 수발을 들고 계십니까?”

서문윤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도 알지 않는가. 나는 고가의 사람으로 대대로 건전성의 유지였으나 원로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했지! 그저 헤맬 뿐이네.”

그리고 그는 서문윤을 진중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 줄은 아네. 하지만 본진은 절도사의 오롯한 권한일 뿐이지. 이들이 설령 장한성을 도우고 싶다 한들 무슨 소용이지? 그리고 그대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

그리고 서문윤의 대답이었다.

“유자께서는 어찌 인이 아닌 이(利)를 말하십니까?”

그에게는 유자의 냄새가 흘렀다. 사람의 인정을 논하고 의로운 일을 부르짖는 고지식하고도 순수한 이들의 모습이 흘렀다. 그리고 겸손하게 내뱉은 서문윤의 말에 노년 사내의 입술은 잠시간 굳게 닫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문윤이 작게 말을 내뱉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사내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흐른 때였다. 서문윤은 지역의 존경받는 유지라면서 병자의 수발을 손수 드는 사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수오지심은 사람에게 분명 과오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기에 생겨나는 단어다.

“그대처럼.”

마음으로 호소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다.

유지의 입술에서는 한탄이 흘렀으나, 서문윤은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유지가 결국 고개를 무겁게 끄덕일 때 서문윤은 어린아이처럼 맑고 환한 미소를 지어 답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서문윤은 정면을 응시하며 또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품으면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작고 힘없는, 아무 짝에 쓸모도 없는 백민(白民) 하나일지라도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 * *

“어쩌다가 우리는 환난지세에 태어나버렸나!”

서문윤의 말을 허하며 유지가 내뱉은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수없이 긴 세월간 고통을 겪었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환난지세!

그들을 괴롭게 한 원인은 검설린이나 황재천이나 다른 이에게 있지 않았다. 혼군이 사직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이민족이 기승하며, 의로운 이가 죄 없이 죽은 것은 오직 시대가 혼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몇 번이고 반복된 역사의 한 굴레였다.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서 고통을 겪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고, 고통을 겪으며 비정해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럼에도, 그럼에도 어떻게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도리를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의를 말하기에는 그는 경험한 것이 너무 없었으나, 그럼에도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사람을 모아서 어쩔 거지? 그들에게 호소를 할 생각이냐.”

소식을 들은 검설린은 조소 어린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서문윤은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어리석다 하실 겁니까?”

그리고 검설린은 그 말에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니.”

서문윤의 몸이 멈칫했다. 그것은 예상과 다른 말이었다.

서문윤은 잠시간 검설린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복면 위의 얼굴에는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었으며 서문윤은 그것에서 무언가의 회한을 읽을 수 있었다.

검설린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너를 어리석다 계속 말했지만, 사실 백치는 나였지.”

느릿한 말에 서문윤은 귀를 기울였다.

“넌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나는 오로지 비관할 뿐이었다. 나는 패배자였고, 네게 할 말이 없다.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한 자가 네게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서문윤을 바라보는 눈은 무심했고, 동시에 다정했다. 서문윤은 그를 알 수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에 담긴 염원은 간절했으며 또 허무한 웃음 뒤편에 서린 마음은 처절하다.

그에게 아직 불씨가 남아 있다 믿었다.

검설린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흐트러진 서문윤의 옷을 정리해주었다. 아직은 찬바람이 들어와, 옷을 꽁꽁 싸매야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서문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검설린은 그를 바라보며 평소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네 실패를 예감하면서 성공을 바라고 있다.”

서문윤은 제 앞섶을 그러쥔 그의 손을 잡으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검설린은 그 웃음에 허탈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간절히 기원하고, 기원하고, 또 기원하여 하늘에 사람의 마음이 닿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 말을 할 때 검설린의 얼굴에는 서문윤이 여태껏 본 적 없는 처절한 기운이 스치고 있었다. 서문윤의 입에서 신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 * *

살고 싶다.

속으로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

“강소성의 네 부모님은 생각하지 않느냐? 그저 자리를 피하고 몸을 보신하거라.”

그리하여 서문윤의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바로 세워져 있었다. 단단한 결심은 옛적부터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어, 황재천의 말에 서문윤은 한 치도 고민하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숙부님처럼 말입니까? 그저 지인과 가족의 목숨만 보전하면 됩니까? 조정이 버린 곳은 저 또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곳이라 무시하면 됩니까? 나라를 위해 싸워온 이들의 목숨이 스러지는 것을 모른 척해도 됩니까?”

“나를 원망하는 게냐?”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서문윤은 쓰라린 웃음을 입가에 띠며 황재천에게 답했다.

“환난지세에 그리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 누가 그들을 탓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숙부님은 아시잖습니까? 생존을 수치로 알아 지금껏 고통에 갇혀왔던 자를.”

황재천은 그저 조소할 뿐이었다.

“그 사람은 미련한 자다.”

그러나 차갑게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빛이 서려 있었고 서문윤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황 숙부를 잘 알고 있었다.

무사는 검을 잡을 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지키는 것에 뜻을 두어야 한다.

무인의 사명을 말할 때 황재천은 빛나고 견고해 보였다. 서문윤은 황 숙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한때는 결의를 다진 무인이었고, 순수함을 지녔던 자였다.

언제부터 그가 뜻을 말하지 않고 검을 잡지 않았지?

서문윤은 그 어느 순간부터 제 앞에서 말을 삼갔던 황재천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분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저는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을 보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는 황재천의 얼굴은 몹시 슬퍼 보였다.

“지금 저는 그의 마음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실 검설린을 보았던 순간부터 느꼈던 끈이었다.

“그를 지키고 싶습니다.”

* * *

황하에서 그에게 구함받았을 때, 다리를 고칠 길이 있다 말하는 그를 보며 생각했지.

아, 내 사명이 그에게 이어졌구나.

다리를 잃은 순간 나의 길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무인으로서 살아왔던 앞날이 불투명했다. 그런 그가 다리를 돌려받을 때, 다시 점화된 무인의 혼은 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잃었던 것을 되찾는 순간 결심했다. 보은이 아닌 마음으로 그를 따르겠노라고.

이 상황에 이르러 서문윤은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를 만나던 때, 고통에 찬 마음을 이해하는 말을 내뱉을 때, 저를 바라보며 물속에 잠긴 듯한 은은한 웃음을 처음 보였을 때.

서문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마음의 너무 많은 부분을 내어주고야 말았지.

그리고 그것은 그가 알려준 하나의 이름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검설린.”

서문윤은 검설린의 말을 듣는 순간 목구멍에 말을 삼키고야 말았다.

“의형, 당신은 어째서 저에게 진명을 말해주었습니까?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닌, 20년이 넘도록 폐기했던 잃어버린 이름을 말해주었습니까?”

그것은 전율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명인 줄 알았던 이름이 사실 어린 시절, 아주 소년 시절에나 썼었던 이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완전히 묻어두었던 이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서문윤은 어이없어 웃고야 말았다. 태자의 옆에서는 악천화로, 의원인 시절에는 북성으로 살아왔던 그는 첫 만남에 서문윤에게 자신의 진실 된 이름을 그리 쉽게 내뱉었다. 서문윤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검설린은 머뭇거리며 답했다.

“나도 모르겠다.”

황당할 뿐이지.

수십 년 동안 감추었던 과거의 이름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에게 내보였나?

그러나 어찌 되었건 검설린은 제게 그 소중한 이름을 내보였고, 마음을 내어주고야 말았다.

그러니 이 마음을 우연이라 할 수 있겠나?

황하에서 만나 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를 미워하기도 했고, 무서워하기도 했고, 답답해하기도 했으나 서문윤은 지금 그를 완전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한 그와 함께하는 꿈을 꾸며 위기를 직시하고 있었다.

이 일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장한성에 의형과 함께 들어간 일을 어리석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죽어가는 긴 삶이 아닌 한시라도 빛나는 짧은 삶을 누리게 해주고 싶단 마음을 철없다 생각할지도 모르리라. 그에게 영광을 찾아주고 싶다는 마음, 사람에 대한 믿음을 다시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정말로 검설린의 얘기처럼 철없는 어린애의 무지몽매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간혹 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 죽으면 된다.’

무엇이 두려우랴?

검설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문윤 또한 함께 죽는 자리를 원했다. 그렇다면 후회할 것 없이 같이 죽으면 된다. 적어도 한순간만큼은 검설린은 온전히 제 자신으로 자리할 테니.

한 치의 오점도 용납하지 못했던 고결한 자에게 그 자신을 찾아줄 수 있다면 죽음도 나쁘지 않다.

서문윤은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서 있었다.

“신의를 2년 동안 모시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검설린을 살리고, 또 저 자신을 살리고 싶었다.

“그 기간 동안 깨달은 것은 인명이란 그 어느 것에 비교할 바 없이 존엄하단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죽음 앞에서 추해지고 또 이기적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가 한 가지 굳건하게 믿는 사실은, 인명에는 지키고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물곁을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구하고자 함이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합니다. 상황이 그들을 극단적으로 몬다 하여도, 저는 위기에 처한 타인을 구원하고 은혜를 갚고자 함이 사람의 본성임을 압니다.”

단상에 무릎을 꿇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는 결코 비굴하지 않아 보였다. 수많은 시선이 꽂히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으나 서문윤은 신경 쓰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건전성의 박대를 저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위기에 몰린 사람이 이성을 잃고 저도 모르게 행한 것일 뿐 큰 의미가 없으므로. 그러니 저는 의형의 마차를 붙잡은 건전성민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행위가 어찌 잘못되었습니까?”

지극히 원하고, 또 원하고, 또 원하면 하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 하였다. 서문윤은 그러나 하늘에 마음이 닿기를 원치 않았다.

그저 사람에게 진심이 닿길 바랄 뿐이었다.

“다만 인정과 도리에 묻겠습니다. 이 세태에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세상이 삭막해서입니까? 아니면 상황이 나빠서입니까? 어째서 의형과 저는 가는 곳마다 분노와 비난을 들어야 합니까? 선의로 구해준 이에게 목숨을 위협받아야 합니까?”

목소리는 낮지만 그윽하여 사람들의 귓전을 때렸다. 그러나 그들은 답하지 않았다. 괴질이 돈 이후 번화했던 거리는 한적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골목마다 사람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사병들은 사람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서문윤은 그들의 앞에서 공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서문세가의 장자 윤이라 합니다. 황궁 좌순 번위였으나 지금은 낙향을 하고 신의를 섬기고 있습니다.”

신분을 드러내는 순간 웅성이는 소리가 번져 나갔다. 황궁 무관이라는 직위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평생에 한 번 관직을 얻고자 매달리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고난한 기색의 청년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내던지고 고난을 자처하는 자는 드물다.

특히나 지금 같은 환난지세라면.

“역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슬프지 않습니다. 아늑한 고향의 집에 몸을 뉘고 편히 여생을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할 생각도 없습니다. 오직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못한 것이 슬플 뿐입니다.”

그리고 힘주어 내뱉는 말이었다.

“건전성 본진의 군사는 13만으로 장한성의 2만의 군사와 진격하는 회흘 7만 군사를 합친 것보다 세가 강함에도 장한성을 버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동안 물자를 끊고 지원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뭡니까?”

목소리는 명료했고 말을 내뱉는 이의 얼굴은 고요했다.

“절도사께서는 조정에서 허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군대를 움직이면 조정의 명을 거역한 반역자가 된다고. 그러니 저는 슬플 뿐입니다. 장한성은 나라를 지켰으나 무의미하게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어찌 사람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슬플 뿐입니다.”

맑은 시선이 장안을 쓸었다. 서문윤은 잠시간 뜸을 들이다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가볍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의를 모시고 장한성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의와 서문 모는 그곳에서 운명을 같이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서문윤이 입을 다물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시내를 울려 퍼졌다. 혼란에 가득 찬 얼굴들이 보였다. 서문윤은 쬐는 태양빛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눈을 감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몹시 많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수로 사람을 호령하기를 바랐으나 서문윤은 하나의 민으로서 이 자리에 있었다.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닌 인정에 호소하며 자비를 기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 순간 결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장수가 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황하를 서성인 것도, 낙마를 한 것도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현실을 마주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웅성거리는 목소리 중에 누군가의 또렷한 목소리 하나가 울렸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서문윤은 그 말에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더 많은 사람에게 간청할 뿐입니다.”

* * *

수백, 수천 쌍의 시선이 한 청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 중 유독 검고 짙은 두 눈이 있었으니, 시선의 주인은 골목 한켠에 자리한 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렇다는구나.”

무덤덤한 말에 황재천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변설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는 있겠지요.”

“마음은 마음을 움직이지. 저 아이의 마음은 누구보다 귀하다.”

“그의 마음에 하늘이 감동하겠습니까?”

“인간은 하계의 미물인데 어찌 고결한 하늘에 그 마음이 닿겠느냐! 황재천, 나를 놀리는 건가?”

코웃음을 치며 하는 말에 황재천이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저 아이를 저 자리에 내버려두신 겁니까?”

“그러는 너는 왜 저 아이를 저 자리에 놔두었지?”

할 말을 잃은 황재천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만한 시선이 그를 쓸다가 싸늘한 조소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인망이 높은 유지의 호소에 번화가는 골목마다 사람들로 복작거렸으나 그들이 선 골목은 유독 한적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단지 핏자국만이 바짓단을 물들일 뿐이었다.

복면의 사내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고, 황재천은 말없이 서문윤을 훔쳐보고 있었다. 조카를 바라보며 숙부는 속으로 씁쓸히 웃고 있었다.

서문윤은 순수하다.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저 자리는 유지의 자리로 만들어졌으나 서문윤이 말할 수 있는 기회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황재천과 검설린은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 바로 그의 쇠심줄 같은 고집을 말릴 수 없다는 사실에.

골목을 물들인 피는 암살자의 것이었다. 황재천과 검설린은 기어코 조정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암중에 막아야 했다.

황재천이 푹 한숨을 내뱉었다.

‘윤아, 왜 네가 제 무덤을 파는지 모르겠구나.’

서문윤은 그가 몇 번을 사지를 넘나들었는지 모를 거다. 장한성에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암중에서 그들 일행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만약 서문윤이 황재천의 저택에 머무르지 않았더라면, 검설린이 그의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진즉 그의 목숨은 스러졌을 것이다.

무심한 말이 흘렀다.

“어쩔 거냐?”

황재천은 서문윤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내뱉었다.

“이게 끝이 아닐 겁니다.”

검설린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내가 모를 것 같아?”

“결국 서문윤을 뱀 아가리에 처넣으셨군요.”

“너와 나의 합작이다. 지옥에서 만나자꾸나, 황재천.”

“저희는 지옥에 사이좋게 손잡고 걸어갈 수 있다지만 윤아는 무슨 잘못입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몸을 멈칫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려히 말을 내뱉었던 사내의 얼굴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황재천은 실성한 사람마냥 실실 웃을 뿐이었다.

검설린은 묵묵히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동정과 존경, 죄책감과 후회가 담긴 것을 깨달았으나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없었다.

검설린이 기대하는 것은 오직 서문윤뿐이었다.

저 아이가 끝까지 본인의 순수한 마음을 지킬지,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를 때였다.

“당신은 우리에게 길이 하나 더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문득 황재천이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그 순간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그를 분노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닥쳐!!”

황재천은 그러나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어째서 뜻을 바로 세우자는 강서진의 말을 거절하고 낙향을 선택했습니까. 대사를 그르쳤습니까.”

검설린의 얼굴에는 핏기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증오하는 눈으로, 혹은 분노하는 눈으로 황재천을 바라보았으나 신랄함이 가득 찬 그의 얼굴에 기세를 잃고 머뭇거리고야 말았다.

황재천이 진실로 책망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검설린은 지금 이 순간 바로 과거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엿보이는 것은, 바로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하는 마음이었다.

“당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태자의 오명을 백성들이 납득하기 위해선 당신의 이름이 필요했지요. 당신이 확정짓지 않았더라면 태자의 이름은 그렇게까지 땅에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그를 모해한 이유는 후일을 생각함이 아니었습니까?”

검설린은 그의 말에 결국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정의를 바로 세우자는 말을 듣지 않은 겁니까?”

한탄과도 같은 말에 검설린은 그저 쓴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길은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한 번을 회피하고 또 버려버린 길.

하늘의 뜻이 왜곡되고 인세에 인의가 사라질 때 정의를 바로 세우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오로지 하나뿐.

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역천(逆天)!

검설린은 머릿속에 감도는 단어를 빠르게 지우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버려버린 단어다. 그러나 단어를 지우고도 검설린의 얼굴에는 그 말의 잔상이 남은 듯 한참 동안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황재천의 얼굴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함이 서려 있었다.

* * *

비틀거리면서 마을을 빠져나오는 서문윤의 팔뚝을 누군가의 손이 움켜쥐었다.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천 위에 자리한 냉막한 얼굴.

“무리하지 말랬지 않나?”

서문윤은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보곤 웃으며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그래.”

검설린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간관을 하지 그랬나? 적성에 맞아 보이던데.”

“하하.”

그는 얼버무리려 웃을 뿐이었다. 검설린은 소탈한 건지 속이 편한 건지 모를 청년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소를 흘리며 팔뚝을 놓았다.

“하긴 네 혓바닥으로 간관을 했으면 진작 목이 잘렸겠지.”

서문윤이 흔들렸던 신형을 다잡으며 어영부영 말을 넘겼다. 그를 바라보면서 검설린은 미간을 슬쩍 좁히며 말을 내뱉었다.

“걸을 수 있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습니다.”

“몸을 잘 챙겨.”

그 말에 이르러서 서문윤은 몸을 멈칫하곤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검설린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곧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꼭 강소성으로 갈 겁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서문윤은 크나큰 야망을 말하는 것마냥 강소성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가자.”

황재천의 집으로 귀환하는 길에 서문윤과 검설린은 소담을 나누었다. 대부분은 평소와 똑같은 의미 없는 말들이었고, 특별할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검설린이 그 이름을 내뱉기 전까지는.

“이청연의 호위였군.”

그것은 태자의 이름이었다. 동궁사변 이후에 동궁을 차지한 사내이자, 서문윤이 다리를 희생해서 지킨 이의 이름. 서문윤의 몸이 멈칫했다. 검설린은 그의 동요를 알면서도 말을 잇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리도 그 때문이었나?”

달빛이 희끄무레하여 밤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둑한 길의 한 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사고였습니다.”

“궁에는 사고와 모략이 구분되지 않지.”

그 말에 서문윤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윽고 빠르게 얼굴을 수습했다. 그 일은 이제 서문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그가 더 신경 쓰는 것은-.

한순간 서문윤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제 옆에 자리한 사내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며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입술을 열었다.

“제가 원망스러우십니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얼음으로 만든 다리 위를 지나가는 사람이 경계심을 세우는 것같이 긴장이 서린 말. 검설린은 그 말에 담긴 초조한 마음을 읽고 흘끗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서문윤은 그를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한 말이 흘렸다.

“내가 왜 널 원망해야 하지?”

서문윤은 그 말에 우물거리며 말을 삼킬 뿐이었다.

‘그야 물론 소문이 안 좋게 났으니.’

사람들은 동궁사변에 이청융이 귀비를 겁간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일을 부당하다 여겼다. 그렇다고 귀비의 자작극이라 의심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는 그 당시에 자손이 없어 태자를 모함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귀비와 태자의 사이는 꽤나 평온했으니, 사람들은 사변 이후의 시혜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다.

이청융이 죽고 가장 시혜를 본 이는 이청연이었다. 태자는 목숨을 잃었고, 귀비는 명예를 훼손당했으니, 그가 태자 자리를 어부지리로 얻은 일은 사람들의 비난을 살 만했다.

황궁 번위로 입궁하여 서문윤은 이청연을 근위에서 모셨다. 이청연은 사람들의 말과 달리 소탈했고 꽤나 배려심이 깊은 사내였다. 단 한 번도 그의 결백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청융과 막역지우였던 검설린의 앞에서는, 서문윤은 저절로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의 염려가 무색하게, 검설린은 코웃음 치며 그의 걱정을 일축했다.

“나에겐 원망을 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 말에 서문윤은 말없이 어색한 웃음으로 답변할 뿐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새 봄이 왔군요.”

깜깜한 밤에 길거리를 걷는데도, 이 서느런 북녘 땅의 칼바람의 기세가 약했다. 서문윤은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푸른 싹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강소성은 꽃이 예쁜 곳입니다.”

고향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곤 서문윤은 강소성의 집에 귀환할 상상을 했다. 몹시도 행복한 상상이었다. 잠깐의 피로를 잊게 해주고 저절로 그를 웃게 만드는 상상. 밖을 돌아다니며 의형을 따랐으나 부모와 집을 향한 그리움은 있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청년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미약한 조소를 흘렸다. 그에게는 없는 것을 꿈꾸며 기쁨에 젖은 서문윤을 바라보고 복잡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지.

이제는 다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면서도 검설린은 이 순간 지독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모르겠으나 검설린은 그를 보며 자신이 상실한 것에 대한 생각을 종종 품었으니까.

집과 가정.

이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사람의 구성요소를 검설린은 손아귀에 쥔 모래처럼 흘려보내고야 말았다. 오랫동안 돌아갈 곳이 없었기에 검설린은 서문윤이 행복을 누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격차를 느끼곤 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를 바라보며 후회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그는 더 행복해질 수 있던 이였다.

검설린에게 남은 것은 후회뿐이었다. 골조만 남은 그를 구성한 것은 회한과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입술을 열지 않고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서문윤이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였다.

가슴이 욱신거렸으나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도중이었다.

서문윤은 문득 입을 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강소성에 돌아가면 말리화가 펼 텐데, 같이 구경을 하겠습니까?”

봄철에 연인과 같이 꽃을 구경하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농기가 짙은 말에 검설린은 팍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핀잔을 주는 것으로 답했다.

“자꾸 그런 말 하지 마라. 재수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짜증 섞인 검설린의 말에 서문윤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검설린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농기 어린 말 대신에 서문윤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병부에서 이런 일을 기피합니까?”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검설린의 반응이 예민했다. 잠시간 그를 흘긋 보던 검설린이 불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후일을 약속하는 일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

“미신이라도 원치 않아.”

서문윤은 창백하게 질린 검설린의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하고야 말았다.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꺾는 검설린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그제야 그의 긴장을 깨달은 서문윤이 입술 사이로 얄팍한 신음을 삼켰다.

그는 괜찮은 게 아니라 그런 척을 한 것이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검설린은 침묵으로 답했다.

“후일을 약속하는 것만 기피하는 겁니까?”

“유품을 동료에게 맡기거나, 말을 전달해달라 부탁하는 것도.”

“병부에는 기피하는 일이 많군요.”

“죽음이 많은 곳에는 미신이 많지.”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 웃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1년이 남았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멈칫했으며, 입술을 열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래. 나는 1년을 채우지 못하겠구나.”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울컥한 서문윤의 말에 검설린은 냉소를 짓다가 문득 얼굴에 표정을 지웠다. 발끈하던 서문윤의 얼굴에도 차분한 기색이 감돌았다. 검설린의 얼굴에 평온함이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힘든, 아주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거를 생각하는 듯한 사내의 입술 사이로 담담한 말이 흐를 때,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 그를 한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부드러운 말에 서문윤이 잠시간 당황하여 얼어붙었다.

“목숨이 아쉽군.”

검설린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왔고, 항상 인형같이 공허했던 사내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애정이 있었고, 미움이 있었고, 연민이 있었으며, 또 염원이 있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입술 밖으로 얄팍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생기.’

그래, 그곳에는 생기가 있었다.

삶을 직시하는 눈이 있었다.

건전성으로 돌아올 때 서문윤은 이곳에서 그가 한순간이라도 빛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차갑고 우울한, 죽음을 직시하는 우중충한 눈이 아닌 소문의 악천화의 밝고 영명한 눈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멀리 갈 필요 없이 이 순간 검설린의 눈이 저리 찬란했다.

서문윤의 눈에 그것은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하게 보였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 자리에 장대처럼 멀거니 선 채 기나긴 시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만약에….”

그것은 검설린의 말조차 잊은 채 내뱉은, 강렬한 충동으로 인해 내뱉은 말이었다.

“정말 만약에 기적이 일어나서 장한성이 수성에 성공하고, 운 공자께서 청매소를 조달하는 데 성공한다면-.”

검설린의 얼굴에는 냉랭한 기색이 감돌았으나 서문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발에는 저릿한 충격이 감돌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가 살아남는다면.”

“쓸데없는 가정이군.”

검설린은 차갑게 말을 끊었으나 서문윤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질문을 끝맺었다.

“그러면 의형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죽고 싶을 것 같다.”

한 치의 고민 없이 흘러나온 야멸찬 말!

검설린은 비소를 흘렸고, 그 냉랭한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그 순간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원을 담고 말을 내뱉었으나 검설린의 반응은 여전히 하나였다. 목구멍에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속은 기분이었다.

살고 싶다면서.

그 순간 서문윤이 슬프게 웃었다.

저로 인해 살고 싶다면서 다시 그는 죽음을 말하고 있다.

서문윤은 죽을 예정이었다라 말하는 검설린을 떠올리며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그의 얼굴에 슬픔이 감돈 순간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는 마음을 대변했고.

그리고 그의 확연한 감정변화를 읽은 사내의 얼굴에 일순간 당황이 스쳤다. 백짓장처럼 차가운 얼굴이 더욱 새하얘지고 있었다.

서문윤이 힘없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땅 밑을 기어들어가는 우울한 목소리였다. 검설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잠시간 얼어붙어 그를 바라보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얼굴을 무섭게 굳히곤 쏘아붙였다.

“네 아버지가 내 수하였는데 어떻게 널 평생 데리고 살겠다는 말을 맨 정신으로 하지?!”

생기 없이 음울하던 서문윤의 얼굴에 빛이 감돈 순간이었다.

“난 어떻게 되든 죽는 거다! 내가 서문린의 앞에서 자진할 마음을 느끼지 못할 것 같나?”

고개를 든 서문윤이 분노 어린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귀 끝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활짝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기왕이면 부끄러워서 죽어주세요.”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흘렀으나 서문윤은 싱글 웃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절 데리고 살고 싶다 말해주세요. 꼭, 아버지 앞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이 그의 얼굴은 밝기 그지없었다. 서문윤의 앞에서 검설린은 그저 한탄할 뿐이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서문린 앞에서 죽는 것일 줄이야!”

농담 같지만 전혀 농담이 아닌 말에 서문윤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 * *

어느덧 떠나야 할 때가 찾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호소를 했고, 황양양을 구했으며, 황재천에게 최대한의 설득을 했다. 역병이 번지는 것을 막고 의원을 교육시켜 그들이 낯선 의학에 숙달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건전성에서 할 일은 다한 셈이다.

이제 장한성의 일만이 남았다.

“같이 가기로 한 거냐?”

떠나기 전 하루 전날 밤 황재천이 그를 찾아와 한 말이었다. 행장을 꾸리던 중 불려 나온 서문윤이 그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저보다 살짝 큰 키에, 무관보다는 문관같이 온유하고 청수한 외모를 지닌 중년 사내. 항상 그에게 다정했던 숙부는 요즘 서문윤에게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막상 헤어질 시기가 되어서, 서문윤은 황재천의 얼굴을 오래간 살피고야 말았다.

미워도 고와도 숙부였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절도사의 직인과 영부를 빼앗기셨다 들었습니다.”

그저께 조정에서 내려온 칙사가 황재천의 절도사령부를 정지시킨 일은 이미 군영과 성내에 싹 퍼진 지 오래다. 두 눈을 끔뻑거리며 서문윤을 바라보던 황재천이 어느 순간 푹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망했다. 난 이제 좌천이다. 제기랄!”

흙먼지가 일게 땅을 퍽 차며 투덜거리는 황재천은 옛날의 숙부와 같았다. 서문윤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어떤 걸 희생해서… 얻은 자리인데, 이렇게!”

황재천은 몹시도 억울한 듯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퍽퍽 흙을 걷어차며 짜증을 내는 황재천에게는 권위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저 황 숙부와 같았다.

“제기랄!”

조금, 묘하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땅을 파던 황재천의 신발이 멈췄다. 그는 잠시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은 그저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황재천이 서서히 허리를 펴며 서문윤을 응시했다. 달빛을 닮은 은은한 눈이 서문윤을 바라보다가 문득 씁쓸한 빛을 띠었다.

“네 아버지를 원망했다.”

서문윤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 순간이었다. 뜬금없는 말에 멍한 눈으로 황재천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연이은 그의 말에 다시금 침착함을 되찾고 진중히 말을 들었다.

“너는 나를 보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칭하고, 정명공은 그리 살아갈 수 없는 이라 말했지. 나에게도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오명의 굴레였다.”

그리고 흘러나온 것은 칼날같이 예민한 조소였다.

“운아! 나는 편히 살 길이 있는데도 어렵게 돌아가는 이들을 증오했다. 서문 형과 장군을 증오했다. 그들을 보노라면 오롯이 보신을 택한 내가 더욱 더럽게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고고한 척한다며 그들을 속으로 비웃었고 조롱했다!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미치고야 만 거다. 윤아, 너는 내 마음이 이해 가느냐? 내 몸을 휘감는 분노에 휩싸여 차라리 타인을 미워하고야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느냐?”

서문윤은 그 말에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황재천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시라도 그들을 증오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 지금 이 순간도, 그들을 미워하고 있다. 윤아.”

따끔한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서문윤은 고개를 숙인 채 쓰라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때 존경했던 사내의 말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묵묵히 말을 듣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말에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좋아하고 있어.”

서서히 고개를 든 서문윤은 울먹거리는 황재천을 바라보곤 그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좋아하고 있다, 제기랄! 아니, 그래서 존경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나는 그 꿈속에서 사는 것마냥 고결하게 살려 하는 그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고결함을 지닌 이들을 좋아하고 있다.”

황재천은 울면서 웃고 있었다.

“좋아하고 있다, 윤아.”

그리고 그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 어느 말도 내뱉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수 어린 말이, 기뻐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모르는 그 복잡한 얼굴이 심혈을 헝클어뜨리게 만들었다. 마음 한편이 묵직했다. 동시에 크나큰 슬픔이 찾아왔고.

‘황 숙부.’

시간이 흘러 그의 입술에서 떨리는 숨이 흐를 때였다.

황재천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네 아버지와 정명공. 두 명에게 빚을 진 내가 하는 말.”

한숨을 내뱉고 황재천은 잠시간 뜸을 들였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황재천은 문득 얼굴빛을 싸늘하게 바꾸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일주일 뒤 전쟁이 시작되면 건전성 본진에서는 장한성에 지원군을 보낼 거다. 그리고 장한성주는 그들을 받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윤아! 장한성에 당도할 군대는 아군으로 위장한 회흘족 정예병이다.”

* * *

“그건 완전히 매국입니다! 완전히, 완전히, 그건….”

“그래 완전히 매국이지! 하지만 어쩌겠니? 윤아. 장한성이 저렇게 잘 버티는데! 조정도 원래 이렇게까지 독하게 굴지는 않을 셈이었다. 역병까지 걸린 곳이 어찌 멸망을 막을 수 있으랴,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급만 끊을 생각이었는데….장한성이 끈질기게 수성하는데 뭐 별수가 있겠느냐? 그들의 인내심에 한계가 다다른 모양이구나.”

“하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뭐? 심해? 아하하, 윤아! 이 순진한 것아. 너는 아직도 심하다 아니냐를 말하는 거냐? 조정에 아직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고 생각해?”

“숙부님?”

“웃기는 소리!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

“악공 이후로 북방에 큰 환난은 없지만 이민족이 아닌 더 큰 재앙이 범람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를 모르고 있지. 크크. 눈에 보이지 않는 환부에 고름이 썩어들어가는데 악취도 맡지 못하는 꼴이란…. 윤아, 이 순진해빠진 놈아, 너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어느 왕조든 간에 천 년이 가지 못하며, 작금 나라에는 가망이 없다. 우리는 아마 스러지거나 혹은 영광을 되찾겠지….”

바람에 스러지는 꽃잎같이 아스라한 목소리였다.

황재천의 말을 서문윤은 멍하게 곰씹었다.

‘가망이 없다라.’

황재천은 심히 당황스러운 말을 했다. 그의 입술 끝이 움찔 떨렸다. 그 말이 함유한 것은 아무리 강심장인 사내라도 듣는 순간 몸을 떨게 만드는 것이다.

그건 사실상 역천의 말이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리 말한 거지?’

신랄하기까지 한 황재천의 말은 서문윤을 동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반역에 가까운 말을 내뱉는 황재천에 서문윤은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황제에게 충성하여 이 모든 분란에 협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건전성의 사건 이후 황재천을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하고 경계했던 서문윤은 그가 내뱉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넋을 뺄 뿐이었다.

단정한 얼굴에 고민이 스쳤다.

‘과거의 숙부라면 난 철석같이 그를 믿었겠지.’

존경스러웠던 무인인 옛날의 황 숙부라면 그를 믿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미 조정의 명을 무조건적으로 앙복하는 냉혹한 관료인 하동하서 절도사를 보았고, 그의 비정한 면을 안다.

그리고 서문윤은 또 다른 황재천의 모습을 보고 심란해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온화한 빛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고로 역천을 꾀한 이는 삼 대를 멸하는 것이 고금의 법칙이 아닌가? 서문윤은 보신에 목숨을 거는 황 숙부의 입에서 제 앞날을 풍전등화로 만드는 위험한 말이 나올 줄 몰랐다.

그러니 그는 그 의도에 대해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황 숙부는 아예 마음이 움직이신 걸까? 설마 함정인 건가? 날 떠보는 건?’

고민하고, 또 고민할 뿐이었다. 장고의 시간 끝에 그리고 서문윤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의심암귀(疑心暗鬼)!’

하늘이 무너져도 황 숙부만은 아버지의, 그리고 저의 편일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가족보다 더 친근했던 이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된 인연을 실망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의형의 심정도 이랬으려나.’

가족과도 같던 이의 실망스러운 행위. 심장이 쥐어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에 휘말려 서문윤은 탄식할 뿐이었다. 잠시간 어두운 얼굴로 생각하던 서문윤이 피식 웃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나는 그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다.

‘당연히 의형이 더 비참했겠지!’

적어도 황재천은 그를 완전히 배신한 것은 아니었으며, 가족의 정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서문윤은 더욱 검설린에게 마음을 쓸 수밖에 없었다.

믿었던 이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이리도 비참한 기분인지 겪어보기 전까지는 가늠하지도 못했다.

한숨을 내뱉고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숙부는 마음이 흔들린 것 같습니다.”

침묵 끝에 등 뒤에서 말이 들려왔다.

“이도 저도 아닌 박쥐 같은 무리가 있지.”

3월의 마지막을 달리던 시간. 선선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뺨에 내려앉았다. 볼에 닿는 바람은 따뜻하건만, 귓가에 들려오는 싸늘하다 못해 오한이 드는 목소리에 서문윤은 곤란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는 창턱에 걸터앉아 달을 보던 중이었다. 건전성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밤. 황재천에게 들은 말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황 숙부는 우리를 배려해주셨잖습니까.”

반박하는 서문윤의 귓가에 냉랭한 말이 이어졌다.

“너도 너군. 언제까지 미혹된 말에 속을 거냐. 완전히 돌아서지도 않을 거면서 죄책감을 덜기 위해 면책을 시도하는 것들을 한두 번 보았나? 황재천은 패를 내던진 거다.”

“그게 무슨?”

“……절도사의 인장을 빼앗았으니 이제 그가 군부를 움직이는 일은 공식적으로 할 수 없다. 그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덜려는 술수지. 나는 적어도 이만큼은 했으니, 잘못한 게 없다. 이런 것.”

그 말에 서문윤이 조금은 발끈하여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실제로 황 숙부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리 독하게만 말씀하십니까? 적어도 황 숙부는 저희 앞에서 지금까지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부담을 안으면서도 저희를 구해주시려고 했잖습니까?”

황재천을 의심하고 있지만 그때 그는 계책이 뒤에 숨겨졌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진실 되어 보였다. 그런 서문윤의 말을 듣고 검설린은 짧은 침묵을 지킨 뒤에, 낮게 울리는 웃음을 큭큭 터뜨렸다.

어이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웃음이었다. 동시에 허탈함마저 담긴 웃음.

서문윤의 얼굴에 불안이 스칠 때였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울린 것은.

“순진한 놈!”

“!”

“너 너무 단순히 생각, 하아, 이걸 정말.”

복잡한 마음이 담긴 말에 서문윤이 눈을 크게 떴다.

몸을 움직이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등 너머로 들렸다가 사라지고, 검설린의 싸늘한 말이 서문윤의 귓전을 때렸다.

“황재천같이 군부에 뿌리 깊은 무장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대가 없을 것 같나? 너는 장한성주가 인수 없이 1년이 넘게 버틴 것을 모르나 보군. 인수인계도 없이 덜렁 인장만 가진 관료를 장수들은 사령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황재천은 정권에 야합한 장수지만, 그러면서도 북방대란 때 두 개의 대전에 참전한 뼈 굵은 무장이다. 동궁사변 때 무장이 많이 죽어 이젠 병부에서 황재천 이상으로 노련한 무장이 없어. 그는 병부의 핵심인데 인수 따위로 병권을 빼앗길 것 같으냐?”

서문윤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푸드덕 나무에서 새가 날아가고, 후원에는 새 우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완전한 정적이 자리했다. 새까만 밤에 어스름한 달빛이 녹음이 가득한 정원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후원의 정취를 즐기지 못한 채 목 뒤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느끼며 몸을 떨 뿐이었다.

인수를 뺏겼다고 병권을 빼앗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장한성의 사례에서 입증된 일이었다. 작금에 절도사의 권한이 줄어들었다만 본디 그들은 군벌에 가까운 이들이었고, 조정과 독립된 권한을 보유하였다.

전장에는 실무자의 권한이 강한 법.

한낱 장한성주마저 인수 없이 사수를 하는데 황재천이 쉽게 권력을 빼앗길 리가?

서문윤은 그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다 말을 내뱉으며 진심으로 슬퍼하던 황재천을 떠올리며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숙부, 설마?

그리고 싸늘한 말이 이어졌다.

“그는 실권을 빼앗긴 게 아니다. 적어도 그만한 급의 장수가 오지 않는다면 번진의 장수들은 사령관을 인정하지 않아. 그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을 하며 대책이 없다 말하지. 아니, 그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간 거다. 그는 군대를 움직여 장한성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겠지. 조정과 완전히 척을 지는 일이니까.”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으며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갑작스럽게 봄바람이 몹시 차다.

씁쓸한 눈으로 후원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탄식을 삼켰다.

“어차피 계획을 알려줘도 장한성의 멸망은 기정된 사실. 황재천은 그저 자기 위안에 불과한 말을 한 거다. 이 순박한 것아.”

그리고 서문윤은 이를 악물고 반항했다.

“고작,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런 말을 내뱉으실 분이 아닙니다.”

서문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말을 돌렸다.

“고작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런 말을 내뱉지 않으실 겁니다.”

검설린은 깔끔히 수긍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실 자기 위안만이 아니지. 그는 널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예?”

“황재천은 계략을 꾸미고 있을 거다.”

서문윤의 등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연이어 그의 뒤로 싸늘한 목소리가 떨어지고 서문윤은 경직된 몸을 펴지 못해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너는 서문린의 아들이다! 너, 황재천의 수완을 너무 얕보지 마라. 그는 널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소중한 딸이 자리한 저택을 내어주고 널 보호하지 않겠지. 서문윤. 네가 건전성 성민들을 설득하고 다니는 동안 네게 붙은 자객의 수가 몇인지 너는 모르고 있다.”

“!”

“나는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혔기에 원한다면 큰 영향력을 생각할 수 있다. 빈민을 위주로 진찰했다지만 권세가나 관료가 없는 게 아니야. 네가 가패를 관리했으니 알지 않느냐? 그들은 모두 조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나에겐 사람이 따르지 않았지. 난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들은 나를 경원시했으니까. 은혜를 베풀고도 원을 사는 나를 누가 따르겠느냐. 그래서 권세가 있는 이들은 내가 명성을 쌓았음에도 그다지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

“서, 설마.”

“네가 건정성민 앞에서 변설하기 전까지는.”

“!”

그 순간 서문윤이 아, 탄식을 내뱉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나는 그럼 지금!’

말의 무게를 깨달은 서문윤은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저 뭐라도 하고 싶어서 움직였던 행위가 생각보다 더 복잡한 행위로 변질되었다.

‘나는, 의형이 사람을 모으는 일에 협조했다.’

그리고 그것은 황재천이 내놓은 불길한 말과 어울려 서문윤의 심장을 몹시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아니지, 아닐 거야.

황재천과 검설린의 관계는 파경이었다. 깨어진 거울 조각과 같아 더 이상 맞출 수가 없는.

그러나 서문윤은 황재천의 의미심한 표정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크게 동탕되어 잠시간 넋을 빼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때였다. 검설린의 냉소 어린 말이 들려온 것은.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보다는 너를 더 위험하게 여기는 게 맞다. 소문에 너는 나의…… 후, 총애받는 단수고, 유일한 측근이니까. 그런데 그런 놈이 성을 싸돌아다니며 선동을 한다니 얼마나 두려우랴.”

“…….”

“너는 작금 중원에서 나 이상의 이름값을 지닌 명사(名士)를 본 적이 있느냐?”

……없다.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에 서문윤이 숨을 멈추었다.

없다, 없었다.

난세는 영웅을 내놓고, 수많은 기인인사들이 많았지만 8년의 의행을 한 검설린을 이길 이는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검설린의 말은 서문윤의 허를 찌르기에 충분했다.

“넌 내 이름값을 등에 업고 사람들에게 봉기하자고 선동한 거야.”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그리고 황재천은 그런 너를 보호했다. 황궁의 간세가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불범의 성인 제 저택에 너를 기거하게 하면서. 네가 그와 친분이 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는 것을 방관하면서.”

“…….”

“그건 어쩌면 장한성에 군대를 보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다.”

“……”

“그는 너를 전장에 빼내고 싶은 거다. 그 중요하던 보신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

“그는 널 포기하지 않았어.”

“……”

“그리고 그는 네 생존을 위해 그 나름대로 기교와 정략을 펼치고 있을 거다.”

음산한 웃음이 흘렀다.

“네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 서문윤은 한참을 얼어붙어 전율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큭큭, 등 너머로 흐르는 웃음이 뼈에 스며들어 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팔랑거리는 나뭇잎이 허공을 맴돌았다. 떨리는 숨소리에 북풍에 묻어져 들리지 않았다. 거친 호흡을 훅훅 내뱉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입술 끝을 비틀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황 숙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청수한 사내의 웃음이었다. 다정하고 온유한, 누구보다 명예로웠던 무관이었던 사내. 서문윤의 얼굴이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황 숙부는 나를 살리고 싶어 한다.

내 마음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나의 죽음을 막으려 뒷면에서 그 어떠한 일을 펼치고 있었다. 숨을 멈추며 서문윤이 고개를 숙였다. 장한성의 일만큼 저를 구원하는 일이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제가 저지른 일이 일이 이리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후회는 없었으나,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파동에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간 침묵 끝에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그럼 그는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요?”

검설린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몰라.”

“예?”

“모른다고.”

서문윤의 입이 벌어졌다.

기껏 겁을 줘놓고 내뱉는 말이 저리도 간단하니, 그 순간 말문이 막혀 서문윤은 넋을 잃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귓가로, 감정이라곤 한 톨도 담기지 않은 말이 이어졌다.

“이제 나는 군부를 떠나서 그쪽 생리를 잘 알지 못해. 8년이면 강산은 몰라도 기풍은 충분히 바뀌는 시간이다.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죄책감 때문에 가증스럽게 연기하는 거라고 했지만, 황재천이 정확히 무얼 하려는지 난 파악을 못 해. 아니, 사실 그의 의도를 확신하지도 못한다.”

그 말에 울컥한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그럼 제게 왜 이 말을….”

짤막한 한숨이 흐른 순간이었다.

어쩐지 골치 아픈 듯한 기색에 서문윤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어쩐지 바로 말을 내뱉지 않고 뜸을 들이다가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의 말을 맹신하지 말라는 거다. 서문윤. 너는 너무 순진하게 굴어. 우리는 진정 전장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데 너는 어째서 그리 방만하게 구느냐?”

“!”

한숨이 섞인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으며, 그동안 서문윤은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해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이다.

서문윤의 얼굴에 착잡함이 물들고 있었다. 무거워진 공기. 그는 얼어붙어 창밖을 바라보며 입술 밖으로 흐르는 얄팍한 신음을 삼켰다. 두 눈은 후원이 아닌 더욱 어둡고 깊은 곳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을 느끼며 고뇌하던 서문윤은 결국 어느 순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옳다.

제 잘못을 인정하는 서문윤의 얼굴에 참담함이 물들었다.

저는 너무 방만했고, 또 순수하게 사람을 보고 있었다.

‘사람을 믿는 것과 백치 같은 것과는 다른데.’

머리는 옳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이 타당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서문윤은 기이한 기색이 돌았던 황 숙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마음이 납득 가지 않아.

그가 내뱉은 역천의 말이 마음에 걸렸으나 서문윤은 고민 끝에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는 그저 침묵 끝에 억지로 웃으며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의형, 완전히 마음이 비뚤어지셨네요.”

그저 갑갑해진 공기를 풀려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잠시간 침묵 끝에 들려온 검설린의 말에 서문윤은 당황하며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나가라.”

묵중한 말에 서문윤이 그 순간 몸을 멈칫했다. 단정한 얼굴에 일순간 당황이 스치고 있었다.

‘이건?’

몹시나 냉정한 말에 그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제가 말이 심했습니다, 말을 할 뻔한 서문윤은 그러나 검설린의 말이 남긴 기묘한 여운을 깨닫고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그제야 깨달은 사실은, 그의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짙은 피로가 묻어 나왔다는 것이다. 요즈음 과로에 시달려 그는 자주 피로를 드러내곤 했으나, 지금의 것은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 짜증이 섞인 예민한 목소리가 흐물흐물하니 매가리가 없었다.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장중히 울려 퍼졌던 의형의 것 치고는 피로가 심히 묻어나는 목소리에 서문윤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닫고 얕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창문을 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린 서문윤이 눈을 부릅떴다. 목구멍에 비명이 감돌고 있었다.

‘의형!’

비명이 얼굴에 감돌았다.

서문윤은 흔들리는 눈으로 탁상 위에 엎드린 사내를 바라보았다.

……일과의 마무리는 항상 서문윤이 탕약을 달여 올리고, 그가 탕약을 마시는 것이다. 복면 아래의 비밀을 안 후에도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습관이 들어, 창문 밖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검설린은 물에 젖은 종이인형마냥 기진맥진하여 탁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검은 폭포수 같은 흑발은 새하얀 침의와 나무탁상 위에 흐트러져 있었으며 그의 손은 시체처럼 힘없이 허공에 늘어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병자의 기색!

그 순간 서문윤의 동공이 흔들렸다.

또다시 발작인가?

철벽같이 강인해 보이는 의형은 평소에 괜찮다가도 서문윤이 생각지 못할 때 고통스러운 병세를 보이곤 했다. 그리고 지금 잘게 떨리는 검설린의 몸은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떨어져 내린 서문윤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괜, 괜찮으십니까?”

갈라진 목소리의 끝이 희미하게 떨려 있다. 성큼거리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 서문윤은 그의 등에 손을 대려다가 멈추었다.

마치 죽어가는 사슴의 것마냥 고통스럽고, 또 희미한 신음이 흐른 탓이었다. 잘게 떨리는 어깨를 보며 서문윤은 아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더 쉬었다 가도 됩니다. 아무래도 의형, 지금 몸이 버티지 못하는-”

“죽음에 더 가까운 사람은 너인데 쓸데없이 나를 걱정하는군.”

말이 끊긴 순간 서문윤은 울상을 짓고야 말았다. 목소리는 병자의 것 같지 않게 한 치의 틈을 보이지 않았으며,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제 뜻을 역력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탁상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속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병은 언제 나을까?

“심병이다."

귓가에 울리는 운표선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도대체 얼마나 한이 깊기에 그는 8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서린 화로 몸을 헤치는 걸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소연도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깊은 침묵 속에 입술을 다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어느 압박보다 더 강하게 검설린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느 순간 검설린은 한숨을 내뱉고 탁상에 엎드렸던 몸을 바로 세우고 정면을 바로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이 가셔 있었으나 서문윤은 그곳에서 병마의 잔재를 볼 수 있었다. 주춤거리는 그의 귓가로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괜찮다.”

“거짓말하시는 것 다 압니다.”

“괜찮다 했는데, 두 번 말해야 하나?”

그 말에 서문윤은 울컥하여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의형은 정말 말을 듣지 않으시는군요.”

그리고 그 순간 울컥한 검설린은 ‘누가 누구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 말해?’라는 뜻이 역력한 강렬한 시선으로 서문윤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을 바라보던 검설린은 그의 힘없는 얼굴을 마주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의 얼굴은 검설린이 몹시 싫어하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2년간 검설린은 어떤 고문이나 겁박보다 그의 저런 표정을 두려워했고, 또 기피하고 있었다. 부득 이를 갈던 그의 얼굴에 순간 복잡한 기색이 흘렀다.

그리고 서문윤은 귓가에 들려온 나직한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정말로 몸에는 큰 문제 없으니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말아주겠어?”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같이 다정한 말에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검설린의 목소리는 흔히 들을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정말 크게 아픈 건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을 마주하며 검설린은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마음 놓고 아플 수도 없게 만드는구나, 너는.”

그 힘없는 말에 서문윤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들끓는 기혈을 다스리며 검설린이 잠시간 서문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울상을 짓는 얼굴은 황재천의 일을 완전히 잊은 듯 그를 향한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툭 치면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이 보였다. 슬픔과 분노를 드러내는 얼굴을 말없이 살피다가 검설린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문득 입술을 열었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해주십시오.”

검설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때였다. 서문윤은 자그마한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하도 마음을 숨겨서, 가끔 지나치게 불안합니다.”

속삭이듯 내뱉은 말은 다정했으나, 서문윤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달리 조금은 편안한 기색이 보였다. 그 체념한 얼굴을 마주하고 검설린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때, 차가운 손이 그의 뺨을 덮었다.

검설린의 몸이 얼어붙은 순간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린 것은.

“운 공자는 심병이라 하셨습니다.”

그늘이 짙게 드리우는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검설린은 당황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이 제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기에.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지?’

서문윤은 쓸쓸함이,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검설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런 시선에 제일 약했기에, 온기를 담은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곤 했기에 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정이 담긴 눈.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흔들렸으나 서문윤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차분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감정이 거세된 듯했던 냉막한 얼굴에 서서히 균열이 서리고 있었다.

잠시간 서문윤은 깨지기 쉬운 공예품을 다루는 것처럼 검설린의 뺨을 더듬었고, 검설린은 열로 들끓는 뺨에 닿는 차가운 손길에 저도 모르게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고야 말았다.

항상 저 눈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야 만다.

서문윤은 그가 본 이 중에서 손꼽히게 정이 많은 이였고, 그것은 검설린을 항상 고역스럽게 하곤 했다. 나풀거리는 속눈썹이 서서히 내리깔려 짙은 부담감을 드러냈다. 따스한 눈은 익숙지 않았고, 차라리 검설린은 고문이나 욕설을 바라고 있었다.

뺨에 닿은 손은 몹시 차가운데, 검설린은 문득 그것이 칼로 도려내고 싶은 것처럼 뜨거운 것만 같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품고 시선을 피하던 검설린은 침묵 끝에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놈의 입이 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진즉 상기했어야 하는데.”

말에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원망의 기색은 입이 싼 사내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 말에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아직도 의형은 병을 못 고칠 것 같습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잠시간 뜸을 들였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뺨에 닿은 그의 손이 물려지고 검설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몸은 멀쩡하다.

압슬을 당한 다리도 멀쩡하고 낙형을 당한 몸도 크게 문제는 없다. 심문을 당할 때 밀폐된 감옥에서 연탄 가루를 들이마신 게 조금 문제 될 뿐이다. 폐에 염증이 생기고 약해졌지만 일생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그때 신경을 많이 써서 위장이 주기적으로 아프지만 그것도 심각한 병은 아니다.

목구멍에 말이 웅웅대고 있었다. 마치 부모에게 칭얼거리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한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입 싼 놈.

그저 운표선을 욕할 뿐이었다. 그러나 욕을 해도 엎질러진 물을 어찌할 수는 없었고, 검설린은 기나긴 말을 줄이며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사실을 고해하기를 택했다.

“꿈에서 그날의 일이 자꾸 떠올라.”

서문윤은 새까만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차분한 시선 속에서 검설린은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달아오른 뺨을 식혀주던 손은 화인이 되어 남은 듯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부드러운 눈에 목이 막혔다. 울컥거리는 감정이 목에 걸리고, 검설린은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써 차가운 음성을 입술 밖으로 흘렸다.

“고치지 않으려고 고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는 투명한 눈으로 저를 보는 서문윤을 마주하며, 그에게 칭얼거리고 싶은 마음을 삼켜야만 했다.

“잘 때마다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지. 울화가 치밀 때마다 속이 뒤틀리고 기혈이 들끓고. 나는 목이 잘리는 수하들과 피를 토하는 오래된 벗들을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손을 늘어트리고 있다.”

그리고 감정이 억눌린 말은 동요를 온전히 삼킬 수 없어 끝이 갈라진 채였다.

“모를 거다. 그 기분이 얼마나 개같은지.”

이를 드러내며 짓는, 마치 이리 같은 흉험한 웃음에 서문윤이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희디흰 미소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으며 그것의 이면에는 희미한 고통 또한 묻어 나왔다.

“잠을 잘 때마다 그래. 정말로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게……. 그 꿈은 나를 괴롭혀.”

피로한 눈으로 검설린이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강아지마냥 순종적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어린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어딘가 어수룩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 청년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문득 제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생각이 들어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에게 위로받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을 깨닫고 경악하고 있었다.

‘나약해졌어.’

그리고 검설린은 유독 답답한 가슴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문윤은 평소와 같은데, 어쩐지 그가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묵묵히 검설린은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희끄무레한 달빛을 등진 그의 온화한 얼굴에 검설린은 속으로 침음을 삼키고 있었다.

서문윤은 기나긴 침묵 끝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언젠가 나을 수 있을 겁니다.”

검설린은 그를 바라보며 갈라진 목소리를 애써 봉합하여 말을 내뱉었다.

“그래.”

고목나무 껍질처럼 갈라진 목소리였다. 검설린은 나풀거리는 두 눈썹을 내리깔아 서문윤의 시선을 피했다.

황재천의 일로 단순히 생각하던 서문윤을 꾸중하고 몰아세우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그는 어느 순간부터 당황을 삼키지 못한 채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감정을 숨기려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 기세를 매섭게 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더 그의 감정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문득 손을 뻗어 검설린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검설린은 또다시 욱신거리는 뺨의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크나큰 번뇌 끝에 검설린은 무뚝뚝한 얼굴로 서문윤을 올려다봤다.

서문윤의 얼굴은 부드러운 빛이 가득했고, 그것은 검설린의 마음 한편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선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같이 잘까요?”

검설린은 그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서문윤은 침묵하는 검설린을 향해 방긋 웃음을 흘리며 그의 뺨을 다시 두 손으로 덮어주곤 고개를 숙였다. 땀에 젖은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검설린은 눈을 감아 감정을 숨기려 했으나, 결국 그는 목구멍 밖으로 짐승의 것같이 울리는 목소리를 흘려 동요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 * *

애정의 덫.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으나, 문득 몹시 무서웠다. 검설린은 이불 밖으로 쏙 나온 숱 많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의 일을 생각했다.

“의형이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요?"

서문윤이 병에 걸린 후 처음으로 입술을 맞추려 할 때 서문윤은 검설린의 어깨를 밀어 막았다. 그리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했다.

그 걱정의 말에 검설린은 단 한 치의 고민 없이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 입술을 내어주지 않을 거냐?"

“거부한다면 억지로 하실 겁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아.

이미 일을 들킨 사내는 짙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서문윤은 그를 보곤 살풋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잡아당겨 입술을 훔쳤다. 그의 얼굴에는 명백한 기쁨이 있었고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검설린은 그의 입술에 혀를 밀어 넣으며 의문을 품고 있었다.

서문윤은 왜 지금 기뻐하는 걸까?

저를 존경하는 것이라면 사지로 들어가기 직전 이 순간을 슬퍼해야 한다. 병을 옮을 수 있는 행위를 꺼리며 사모하는 이를 위하는 마음을 품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서문윤의 눈에 서린 것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검설린은 부드러운 살결에 얼굴을 묻으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진실로 타인과 다른 사내노라고. 규칙적인 심장소리를 듣고 검설린은 안정을 찾으면서도 동요하고 있었다.

저라면 서문윤을 살리려 들 거다.

한 치의 고민 없이 꽁꽁 묶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목에 칼을 들이밀든 어떻게 하든 그의 곁에서 떠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끼는 후학을, 어쩌다 보니 의제가 된 이를 살리기 위해 그리할 것이었다.

그러니 검설린은 고민하고 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정함을 품은 눈을 바라보면 심장이 지끈 아팠다. 꼭 저를 끌어안고 혀를 섞는 서문윤이 이해가지 않으면서도, 또 눈길이 갔다.

그러면서도 미소가 감도는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도 서문윤은 한 치의 두려움 없이 검설린을 끌어안고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검설린은 밤늦게 잠을 자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를 보면 희망의 늪에 또다시 빠지고야 만다.

‘10년의 끝이라.’

말랑한 뺨을 쓰다듬다가, 귓불을 어루만지다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다가를 반복하다가 검설린은 결국 서문윤의 정수리 위에 턱을 대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가슴에 닿는 살결에는 온기가 있었고, 심장소리가 온몸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서문윤에게는 생기가 남아 있었다. 그 나이대의 검설린이 가지지 못한, 그가 경험하지 못한 활달함이 있었다.

그게 보기만 해도 안타까웠다.

그저 죽어갈 뿐인 저에게 옭매여 이리 푸릇푸릇한 청춘을 소모하는 것을 보면.

그가 저와 함께 죽겠다는 말이 몹시 화가 나고 어리석게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물리지도 못한다.

동요를 참지 못한 채 검설린은 어둑한 눈으로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색으로 물드는 하늘처럼 입가에는 조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씁쓸한 기색을 담았고, 또 어느 순간 호수 위로 번지는 물결처럼 연민과 고통을 담았다.

‘10년의 끝에 네가 함께 있다면,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그시, 무언가를 염원하듯이 잠에 취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검설린은 이윽고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나는 비록 죽음을 바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귀공자다운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검설린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입술에는 따뜻한 온기가 스쳤고, 검설린은 그것에 전율을 삼키고 있었다.

‘네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생존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순간에 네가 내 진심을 받아가고야 만 걸까.’

심장에서 고통이 번지고 있었다.

애정의 덫과 희망의 늪.

검설린의 인생을 나락에 몰아넣은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고, 그럼에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람을 증오하고, 세상을 미워했다.

그리고 품에 안긴 것을 소중히 껴안으며 검설린이 몸을 웅크렸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서문윤의 뺨을 덮고,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장막처럼 숨기는 동안이었다. 검설린은 서문윤이 오랜만에 곤히 잠들어 색색거리던 때, 그의 말랑한 뺨과 동근 코와 보송한 볼과 뜨뜻한 입술에 작고 부드러운 입맞춤을 곳곳에 남기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솜털이 남은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검설린이 그의 뺨을 살살 검지로 쓸었다.

‘네 말대로 나는 어린아이마냥 나약하지.’

턱을 입술로 물며 검설린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날 떠나지 마라.’

턱 선을 따라 부드러운 입맞춤을 이어나가는 그의 얼굴에 간절함이 설핏 서려 있었다.

‘제발 날 아프게 하지 마.’

그리고 하루가 시작되지 않길 바라는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사지로 향하는 날이었다.

* * *

아침 해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황재천의 저택 주변에는 사람들의 음성이 가득했다. 마차에 올라서기 직전, 서문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걱정 섞인 목소리를 받으며 뿌듯이 웃었다.

“건강하십시오.”

“부디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대인, 대인.”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런가 하노라면, 격렬하게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고, 그곳이 어디인데 가신다는 겁니까?”

“민이 할 일은 이미 끝났네. 도대체 무슨 뜻을 펼치고 싶어서 사지로 향한단 말인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게지, 허허.”

글쎄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서문윤은 오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침나절부터 몹시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검설린은 음울한 기운을 무럭무럭 쏟아내며 마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민심이 천심이란 말이 있더구나.”

황재천의 말에 서문윤은 하하 웃을 뿐이었다. 검설린은 옆에서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공감의 뜻을 드러냈으나,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살아 돌아오거라.”

복잡한 표정으로 내뱉는 황재천의 말에 서문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살아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황재천은 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를 잠시간 은근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서문윤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한마디 말만 전하면 되나요?”

황양양이었다.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물기 어린 소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얕게 웃었다. 눈가가 발간 것을 보아 운 것이 확실한데 티를 내지 않고 옹골지게 얘기를 하고 있다.

‘다 컸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서문윤을 향해 황양양은 기세 좋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가가를 도울 수 있나요?”

서문윤은 잠시간 고민 끝에 말을 내뱉었다.

“글쎄다.”

황재천이 흔들릴 때 황양양에게 한마디 말을 전해달라 부탁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며, 서문윤은 황 숙부의 그 어디까지가 진실된 그의 모습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활활 불이 타오르는 소녀의 눈을 보노라면, 서문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물며 저 또한 흔들릴 때가 있는데, 황양양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제가 옳다고 믿은 것을 밀고 나간다. 때때로 그것은 몹시도 폭급하고 극단적이라 사달을 불러일으킨 하지만, 서문윤은 그녀가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적어도 옳다고 믿는 것에 한해서 황양양은 무릎을 꿇지 않는다.

“더 나를 도울 수가 있다면, 도와줘.”

황재천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양양뿐이리라. 그런 믿음을 품으며, 마차에 오르기 전 서문윤은 황양양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고맙다. 양양아.”

그 말에 서러움이 터진 듯 황양양은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주먹을 질끈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소녀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저 어색하게 하하 웃을 뿐이다. 귀하디귀한 딸을 울린 서문윤을 바라보는 살벌한 시선에는 착잡함과 분노, 살의가 함께 뒤엉켜 있었다.

‘으음, 이거.’

분노에 찬 황재천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서문윤이 땀을 삐질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황양양은 한참 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쓴웃음을 짓는 서문윤의 시선은 다정했으나, 그 이면에는 덤덤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오라, 오라버니는 무정하신 분입니다.”

“미안하다.”

황양양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눈물을 그치고, 긴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슥 닦았다. 꽤나 호방한 행동에 농담을 하려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던 황양양이, 팔짱을 끼고 마차에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검설린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간 것이었다. 그는 제 몸의 반절이 될 법한 병아리 같은 소녀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소매를 걷어붙인 황양양은, 시원하게 팔꿈치를 당겨 검설린을 향해 주먹을 내질러 황재천과 서문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개자식!”

퍽!

그리고 두 사람의 입에서 비명이 흘렀다.

“헉!”

“흐억! 양, 양양…!”

세상에!

서문윤은 이를 악물 뿐이었다.

문무 모두에서 극의를 찍었다던 명사는 무참하게 어린 소녀의 주먹에 얼굴을 내어주고 조소를 흘렸다. 그 눈빛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답지 않게 어린아이를 우짖게 만들 만치 냉랭했으나,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에는 분명 구타의 흔적이 있었다.

두 사내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의 성정이 어떤가?

또 그의 과거의 위치는?

황양양의 돌발행동에 경악한 서문윤이 바로 움직였다.

“참으셔야 합니다!”

서문윤은 거의 본능적으로 검설린에게 달려가 그의 소매에 매달렸다. 그가 황양양의 목을 조를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황재천 또한 식겁하여 사랑하는 딸의 허리를 붙잡아들며, 거의 통곡에 가까운 소리로 울먹거렸다.

“양, 흐으, 양양아.”

그러나 무려 정권을 얼굴에 얻어맞은 검설린의 반응은 그들의 걱정과 달리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그저 멍이 든 얼굴로 그 맹랑한 도발에 코웃음 치면서 반응할 뿐이었다.

“한 대는 맞아주지. 내게도 어른의 아량은 있으니.”

“익!”

그 말에 더 도발을 당한 듯 황양양은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앙칼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장군의 딸이라 그 기세는 제법 살벌했으나, 검설린은 마차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돌멩이를 보는 듯한 시선에 황양양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룩 섰다.

‘아아, 양양아!’

서문윤은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냉소 어린 목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더 할 거냐?”

그 말에 황양양은 울컥한 듯 소리를 내질렀다.

“서문 가가가 죽으면 당신도 죽어야 하는 거예요!”

“네 알 바는 아니지 않나? 그는 너와 남인 관계일 텐데. 네 가족도 연인도 아닌데 네가 무슨 상관이지?”

“그렇게 따지면 당신과도 남이지 않나요?”

그에 대한 답은 간결할 뿐이었다.

“남?”

그리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황양양을 바라보았다. 복면에 얼굴이 가려져 있지만, 눈가에 서린 조소만으로 황양양은 충분히 그가 지은 표정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황양양의 얼굴에 분통함이 번졌다.

“이 개자식!”

“아이고, 양양아!”

“할 말은 그게 끝이냐? 이게 네 오라비와 마지막이 될 수 있는데 더 말을 푸는 게 낫지 않겠나?”

“뭐야? 지금 당신 뭐라고 했어?”

그리고 난장이었다. 황재천은 미친 듯이 날뛰는 황양양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려야만 했으며, 서문윤은 그녀 앞을 가로막고 오만한 눈으로 그들을 좌시하는 검설린을 가려야만 했다.

“내 어디가 저 사람보다 못한데! 가가! 다시 생각해봐요!”

통한의 목소리에 검설린의 눈에 비웃는 기색이 스쳤다. 서문윤의 입술에서 저절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하하, 형님…….”

좋게 말해도 될 것을 매번 어째서 이리 개판 꼴을 만드는지. 이 상황도 이제 정이 들 지경이었다.

황재천은 한참 동안 딸을 막으려 애썼고,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황양양은 마치 물 밖에 놓아둔 장어만치 억세게 날뛰었다. 청수한 무장의 얼굴은 이미 울상이 된 지 오래였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목소리로 황재천이 서글프게 말을 내뱉었다.

“양, 양양아. 집에 가자꾸나!”

그러거나 말거나 황양양은 길길이 날뛸 뿐이었다.

“당신도 반드시 살아서 와야 해! 가가도 꼭 살려서…!”

“양양아!”

비웃음을 흘리면서 마차에 오르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은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 *

소란을 뒤로하고 달그락, 마차가 움직였다.

‘최선을 다한다라.’

올 때는 말을 타고 왔으나, 갈 때는 마차에 올라야만 했다. 급하게 건전성을 빠져나올 때와 다르게 마부 하나가 붙었으며, 그가 모는 마차에 올라 장한성을 향하고 있었다.

악악거리는 양양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거칠게 움직이는 마차에 균형을 잡으면서 서문윤이 말없이 앞에 자리한 검설린의 얼굴을 응시했다.

‘최선을 다하면 무언가 달라질까?’

그는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팔짱을 낀 채 마차의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졸음이 서린 그의 얼굴에 고단함이 엿보였다. 얼굴을 가렸던 복면도 거추장스러운지 마차 위에 올라서는 벗은 지 오래다. 그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피로에 찬 듯 벽에 몸을 기댄 채 단잠에 빠져들었다.

서문윤은 그 외모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 중이었다.

‘결과는 몰라도 적어도 하나는 바꾸고 싶어.’

서문윤의 얼굴에는 고요함이 서려 있었다.

‘의형의 마음.’

그리고 그는 냉막한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들판에는 붉고 노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서문윤은 펄럭거리는 마차의 천막 사이로 들어오는 따스한 색이 검설린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구석구석을 물들이는 모양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예기가 흐르는 차가운 용모를 지녔으나, 가면을 벗기면 순백한 느낌이 없잖아 있어 서문윤은 가끔 다각의 매력을 느꼈다. 따뜻한 햇빛을 받은 그의 미목수려한 얼굴은 서문윤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다.

다그닥다그닥 빠르게 들판을 가로지르는 마차 안에서 서문윤은 입술 밖으로 흐르는 탄식을 삼키며 속으로 말했다.

‘영요추국(榮耀秋菊) 화무춘송(華茂春松)이라.’

영화롭고 아리따운 가을날의 국화와 무성하고 화려한 봄날의 소나무. 미인을 노래하는 낙신부의 구절을 문득 떠올린 서문윤이 몸을 움찔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장한성의 일은 저물어가는 해질녘과 같고, 전염병에 걸린 몸은 풍전등화와 같다. 임시로 만든 청매소에 몸이 호전되고 있으나 서문윤은 역병이 얼마나 악질적인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병을 경시하는 것은 무사가 끝나지 않은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 착각하는 것과 같다.

행방이 묘연한 운표선이 제 목숨을 구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그가 무언가를 시도하려, 일을 돌이키려 어디론가 향했다고 하나 그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상황은 암담할 지경인데.

‘이리 한가롭게 미인을 찬양하는 말을 떠올리고 있으니.’

서문윤이 쓴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러겠다, 아니 그러겠, 속으로 몇 번이고 맹세하면서도 그는 검설린의 얼굴을 보고 종종 넋을 잃고 그를 관음하고야 만다. 지금도 서문윤의 얼굴은 몽롱해져가며, 그를 향한 시선도 짙어져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곧 반문했다.

한심한 건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시선이 사로잡히고야 마는데 어찌하나?

붉은 노을에 물드는 단아하고 청아한 얼굴은 머리에 금잠보요를 끼고 비단옷을 입고 걷는 경국지색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몸을 짓누르는 피로도, 복잡한 고민도, 불안도 싹 사라지고 그저 심장만이 뛸 뿐이었다.

화려하지도, 여인 같지도 않은데. 아니, 오히려 마치 불도에 입적한 승(承)처럼 청빈하고 깔끔한 외모인데 그것은 그 누구보다 사람의 눈길을 훅 잡아챘다. 부담스럽지 않은, 어찌 보면 수수하기까지 한 청아한 외모는 보는 순간 마음을 찌르르 울리고 사람을 그윽하게 만들었다.

미로에 갇힌 것처럼, 보는 순간 시선을 도저히 떼기 힘들어 서문윤은 덫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감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서문윤의 얼굴은 서서히 묘연한 색으로 물들었다. 요괴에 홀린 듯이, 그러니까 정신을 잃고 사내의 얼굴을 탐닉하던 서문윤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마음속에 미묘한 마음이 불쑥 든 탓이었다.

그것은 짙은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저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얼굴에 손을 댈 수 있는 이는 나뿐이다.’

생각에 잠식된 서문윤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그는 의형의 얼굴을 어루만졌던 지난날의 밤들을 떠올리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만이 의형을 만질 수 있어. 나만이 그를 탐할 수 있다.’

서문윤의 시선은 갈수록 짙어졌다. 검설린의 얼굴에서 떼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실로 죽어도 좋다, 그런 생각을 서문윤은 속으로 하고 있었다.

‘조금 더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어.’

그리고 서문윤이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곱게 내리깔렸던 검설린의 눈썹이 어느 순간 파르르 떨렸다.

놀란 서문윤이 숨을 멈출 때, 짙은 속눈썹이 열리고 그는 공허한 새까만 두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 어느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텅 빈 흑안에 서서히 감정이 물들고 있었다. 그것은 서문윤의 심장 어느 한 부분을 찌르르하게 만들어, 그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벌린 채 침묵했던 것이다.

정수리에 번개가 쳐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때 서문윤의 귓가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렀다.

“너는 왜 나를 자꾸 보지?”

흑색 유리 같은 눈이 깜빡였다.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아닙니다.”

순수한 두 눈을 바라보니 제 탐심이 새삼 더럽게 느껴진다. 괜스럽게 찔려 서문윤은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검설린이 창틀에 기댄 머리를 슬쩍 떼고 느릿하게 눈썹을 깜빡였다. 음영이 진 눈에 그림자가 나비처럼 팔랑이고 있었다.

침묵 끝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그 아이. 심성은 나쁘지 않은데 지나치게 어리광을 부리는 게 흠이군. 황재천 저놈이 얼마나 싸고돌았는지 눈에 선하구나.”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멈칫하고야 말았다.

“그리 보지 않아도 10대 소녀에게 악감정 가질 생각이 없으니 신경 꺼라. 악의가 없는 건 잘 알고 있으니. 어린 여자아이와 대거리할 만큼 경우 없지는 않다.”

“…….”

검설린의 아미가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자꾸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짜증 어린 말에 서문윤이 정신을 차리고 음, 소리를 흘렸다. 미간이 구겨진 검설린의 얼굴이 날카롭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아니.”

“의형은 정말.”

“아니라 말했다.”

“의형은 정말 죽음을 각오하셔서….”

“내 의사를 반영하지 않을 거면 왜 물어봤나?”

서문윤은 못 들은 척 뻔뻔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의형은 정말 죽음을 각오하셔서 내일이 없는 듯 말을 하시는 건가요?”

“……언제부터 그리 혀가 길어진 거냐?”

어이없다는 듯한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검설린은 그리고 그 순간 묘한 얼굴로 말을 뇌까렸다.

“너는 황재천이 나한테 어떻게 말하는지 못 봤나 보군.”

그 말에 서문윤은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 당황이 스치고 있었다.

잊었던 것을 깨달은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의형에게 지나치게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의 말대로 황재천의 언행을 떠올리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의 정체가 알려지기 전에 황재천은 그를 향해 반존대를 했으나 행동은 극히 조심스러웠다. 서문윤이 검설린의 정체를 안 후에는 그를 존칭을 쓰며 높였고. 비록 경계하는 기색이나 은근한 위협이 느껴지긴 했으나, 황재천은 근본적으로 검설린을 하대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재천은 현 군부에서 극히 드문 검설린의 직속 하관이었던 자다. 그가 관서성에 치소를 둘 때 삼군사 장군으로 복무하였던.

그리고 그런 자를 향해 저는 어느 순간부터 몹시 건방지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헛웃음을 흘리는 검설린을 보며 서문윤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의형이 몹시 두렵고 존경스러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하나하나가 친근하기 그지없었으니 당돌한 일이었고. 건방진 후학을 보는 검설린은 화를 낼 여력도 없는지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침묵 끝에 날카로운 검미를 꺾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제 네 숙부랑 맞먹으려는 건가?”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에 쉬이 기죽지 않았다.

위계를 따지는 검설린의 말은 타당했으나, 서문윤은 그 말에 응수할 한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걸 따지기엔 근본적으로 항렬이 엄청 꼬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검설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한 수가 몹시도 잘 먹혀들어간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이 저에게도 살짝 타격을 입힌 것을.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좋아, 순식간에 얼어붙은 검설린의 얼굴을 본 서문윤의 표정이 꽤 떨떠름했다.

마차 안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관이었던 검설린. 그런 그와 의형제 관계를 맺은 저. 자신이 무관이 되기 전까지 아버지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명공이었다. 가끔씩 반주에 취하여 쓸쓸히 그 이름을 부르실 때가 떠올랐다.

‘아버지랑 친분이 꽤 돈독하셨던 듯하니. 듣자하니 내 얘기도 아버지한테 종종 언질받은 것 같은데……. 아니, 제길. 열두 살이면 그다지 많은 차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아 보이는 거야?’

사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검설린은 또래에 비해 열 살, 스무 살은 더 연륜이 있어 보였다. 그가 장한성주가 되었을 때가 저와 엇비슷한 나이라고 했나? 그런데 그는 마치 아버지의 또래와 같아 보였다.

상황이 그를 조숙하게 만든 걸까?

고민하던 서문윤의 얼굴이 어느 순간 떨떠름한 빛으로 물들었다.

제게도 그다지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검설린의 얼굴은 시간이 흘러도 평안치 않았고, 핏기가 싸악 가셔 귀신 같은 낯을 보며 서문윤은 그의 눈치를 주춤거리며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짧고도 긴 침묵 끝에 탄식하면서 말을 내뱉었다.

“그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건드렸으니 내가 다 받아야 할 대가지. 누굴 탓하겠느냐.”

서문윤은 머쓱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내 상황을 수습하려 그가 검설린의 눈치를 보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검설린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서린 탓이었다. 그 흔치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마차의 창 사이로 흘러나온 빛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따스한 색의 노을빛은 좁은 마차 안을 아리땁게 물들였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온유한 빛을 되찾은 검설린의 얼굴은 재차 서문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부드러운 분위기를 띤 검설린은, 어느 순간 서문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자거라.”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은 서서히 파고드는 수마에 잠겨,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답을 하고야 말았다.

“……잠을 자기 싫어요, 의형.”

바람이 빠지는 듯한 부드러운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서문윤은 결국 수마에 사로 잡혀 잠에 들고야 말았다.

* * *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건량을 질겅거리며 이청우가 흐릿한 눈으로 들판 너머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눈이 지평선의 어느 곳을 바라보는 순간 반짝거렸다. 안력이 좋은 이들만 발견할 수 있는 흩날리는 깃발은 대기하고 있는 회흘의 병진에 세워진 것이었다.

성벽에 기대어 선 채 이청우가 과거를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천한 길을 걷겠다는 거냐? 너는 문재(文才)이지 무재가 아니야.”

항상 다른 사람에게 진면을 보이지 않던 노련한 정치가이던 아버지는, 그러나 결국 저의 일에 분통이 터져 화를 내고야 말았다. 이청우는 제가 했던 대답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버지, 환란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남겠지요. 그들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명령을 내뱉으면서도, 제 안위를 보장받고 끝까지 영위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겠지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분노한 그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살아!”

진영을 바라보는 새까만 눈이 반짝거렸다. 그때 이청우는 이 태부를 향해 그리 말했다.

“저는 그리 살고 싶지 않습니다.”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무슨 연유로 돌아오겠습니까? 이곳은 사지이고 신의가 이곳에 온 것은 의원을 인질로 붙잡은 겁박에 의한 것이었는데.”

부관 홍재영. 그는 군병 출신으로 상급 교위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고, 엄연히 따지면 이청우의 선배였다. 신분이 낮아 성주 대리로는 이청우가 나서야 했지만 장한성에 머문 기간은 그가 훨씬 더 많았다.

이청우가 인정하는 충직한 군관은, 아직도 신의를 떠나보낸 것을 안타까워하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가 있다면 사기가 더 높았을 겁니다. 성민들이 더 살았을 수도… 아니, 잘하면 지원군을 받을 수도.”

“그는 겁박으로 남은 게 아니다.”

“예?”

담담히 들려온 목소리에 홍재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청우가 건량을 씹으면서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겁박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 말은 홍재영을 울컥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성주의 마음이 온화하고 다정함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홍재영의 평은, 장부라면 조금의 독기가 필요하고 특히나 전시의 장수에게는 범부와는 다른 잔인한 면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이 진행된 과정에 대해서 소상이 모르는 홍재영으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던 그는, 귓가에 들려오는 느릿한 말에 입술을 다물고 잠시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분을 납치하려는 계획이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진짜 사영귀가 자리했고, 그들이 원했다면 나는 전시에 탈영한 혐의로 죽을 수도 있었어. 그분은 정말 의로운 마음으로 사지로 들어온 거다.”

이청우는 이 모든 결정이 사실상 서문윤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이 왜곡된 그의 말은 홍재영을 감동케 하기 충분했고, 그의 입을 막기에도 적절했다. 크게 일렁거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청우는 고개를 돌려 씨익 웃음을 흘렸다.

“운명은 하늘이 내리고 인간이 가꾸는 것이지.”

시원한 웃음이었다.

“같이 죽읍시다. 홍 선배.”

홍재영은 그 말에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죽기는 누가 죽는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살기를 바라기는 무리지 않아?”

“그래도 핏값이 아까워서 어쩝니까? 살아야지요.”

그리고 그들은 마주 보던 도중 피식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청우는 성벽에 기댄 채 저물어가는 태양을 말없이 바라보았고, 홍재영 또한 그 옆에서 멍하니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니, 사실은 폭풍전야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그 불안함에 대해서 지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이 시간을 즐길 뿐이다.

그리하여 이청우의 얼굴은 담담했으며 노을을 바라보는 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서느런 저녁 바람에 몸이 식을 때의 일이었다.

‘응?’

이청우는 목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펄럭 군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잘 불지 않는 계절이다. 그럼에도 세차게 휘날리는 군기를 멍하게 바라보고 이청우는 무언가의 예감에 젖어 두 눈을 흔들고야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이청우는 등 뒤로 들려오는 어마어마한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우,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홍재영과 이청우의 눈이 동시에 크게 떠졌다. 놀란 이청우가 고개를 돌릴 때 그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기쁨에 찬 목소리였다.

“신의가 오셨습니다! 돌아오셨습니다!”

이청우의 눈에 물든 것은 경악이었다.

‘정말로 돌아왔다고?’

< 6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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