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장안사준(長安四俊)(10)
눈.
그 눈이 고역이었다.
서문윤의 모든 것이 거슬리고 또 불만족스러웠으나 가장 짜증나는 건 그 강아지마냥 새까만, 저를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두 눈이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고, 검설린은 새까만 눈이 종종 저를 훑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강아지같이 맑은 눈으로 순수하게 저를 따르고 있어, 검설린은 그 두 눈을 볼 때마다 뽑아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종종 품었다. 가끔 옛날에 저를 믿어주었던 이들, 옛 수하와 붕우들의 것이 겹쳐, 보기에 몹시 고역스러웠던 것이다.
그들도 저를 맹종하며 저리 따랐지. 검설린은 그 순수한 눈에 저가 담길 때마다 과거의 일들이 떠올라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눈이 변해가던 과정을 떠올리며, 그는 싸늘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수한 믿음으로 가득 찬 눈은 결국 실망과 배신감에 물들었다. 그들과의 인연은 파국에 이르렀고.
‘결국 저 눈도 언젠가 변하겠지.’
그런 비관적인 마음뿐이었다. 적어도 그때의 검설린은.
그저 마음에 남은 것은 10년의 약조 끝에 찾아올 안온한 휴식뿐이었고, 서문윤과는 가까워질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을 영원히 외인으로 두려 해도, 어찌 된 모양인지 저 정신 나간 놈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의형께서 의로운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따위 말로 검설린의 어이를 앗아갔고, 욕설을 처먹어도 날이 갈수록 그를 향한 맹종의 눈빛을 더욱 빛내어 그의 속을 터지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문윤의 눈은 가끔 검설린을 한계에 치닫게 만들었고, 또 심사를 꼬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검설린의 거부감은 심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검설린이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나는 그런데 왜 서문윤에게 그만 보라 명령하지 않았을까?’
엄연히 윗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게다가 그는 서문윤에게 은혜를 준 입장. 원한다면 검설린은 그의 거북한 시선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는 서문윤에게 저를 보지 말라 명하지를 않았을까?
심심하면 멍한 눈으로 저를 관음하듯 훑는 건방진 저 청년의 행동을 검설린은 애써 무시할 뿐이었다. 목에 솜털이 서고 등에 소름이 돋고 근육이 긴장되는 감각을 느끼는데도, 그 매슥거리는 느낌을 받고서도 검설린은 그에게 말을 내뱉기는커녕 시선을 내리깔며 회피하곤 했다.
고역감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이 부조리한 일을 깨닫고 당황하던 검설린은 마침내 기나긴 상념 끝에 제가 애써 무시했던 것에 이르러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그는 막상 서문윤이 저를 보지 않을 때 묘한 아쉬움을 느끼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거둬지기를 바라면서도 서문윤이 고개를 홱 돌릴 때 섭섭한 눈으로 그의 등을 보는 저를 깨닫고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서문윤의 눈에 자신이 담길 때 불쾌함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노라고. 그러나 막상 거두어진 시선은 검설린에게 또 다른 불쾌감을 안겼던 것이다.
아니, 그건 불쾌감이라기보단….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봐, 날 보라고.
어느 날 마음속에 아우성치는 외침. 진실로 회피하고 묻어놓았으나 그것은 분명히 서문윤의 시선을 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를 깨달은 순간 검설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실 그 시선을 받는 게 싫지 않았다.
시선이 살갗을 쓸어내릴 때 긴장을 느끼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껄끄러움을 느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 눈에 담기며 아편에 중독된 것만 같은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지.
속이 미식거리는 기분에 휩싸여 검설린은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지? 언제부터 그의 시선을 즐기게 되었지?
‘이게 무슨… 나는 도대체.’
그리고 검설린은 고뇌 끝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나약한.’
사실은 그와 보내는 일상이 싫지 않았다는 것을.
‘왜, 도대체 왜?’
아니, 사실은 사람의 온기를 바라고 있었지.
홀로 떠돌아다니며 영원한 휴식을 바라보는 나날이 지긋지긋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 마음을 터놓을 벗은커녕 저를 아는 이조차 거의 없는 삶. 그 고독하고 힘든 삶에서 아무리 밀쳐내도 다가오는 청년 하나가 등장한 순간 삶에 활력이 돌았고, 검설린은 인간에 다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그 보잘것없는 온기 하나에 무너지고 있던 것이었다.
‘이, 이 나약한 놈이.’
사람을 믿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검설린은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그는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나는 서문윤의 그 겁 없는 말을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인가?
길을 걸을 때 저 어린 청년이 겁 없이 함부로 쫑알대는 게 같잖고도 또 귀여워 복면 아래로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웃던 때가 수없이 많았다.
복면을 쓴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았지?
“의형.”
그동안 가족이라곤 없었다.
“제가 감히 당신의 짐을 나눌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홀로 고민해야만 했고.
“당신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음 기댈 사람 없이 세상의 모든 이가 다 적과 같았을 뿐.
그리고 정에 굶주렸던 순간 다가온 티 없이 맑은 청년에게, 검설린은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정을 줄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러나 거부하지 못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검설린은 10년의 기한이 지나고 은거를 하는 생각을 종종 꿈꿨다. 수도와 적당히 멀어진 창경성에 집을 얻을 생각. 그리고 검설린의 상상 속에 서문윤은 그의 옆에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너무 올곧아서 출사하기에 미진한 감이 있었다. 권모술수는 몰라도 기본적인 처세술에 관련된 사안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꿈 같은 상상을 할 때면 검설린은 슬그머니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망상 속에서 서문윤은 아무리 가르쳐도 불안했고, 또 조정에 보내기 미욱했다.
‘같이 데리고 살면…….’
그리고 상상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곁에 있으면 편하긴 하지.’
가옥에 서문윤과 함께 살아가는 망상으로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비록 이성이 들면 바로 기가 막혀 웃고야 마는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제정신이 들면 검설린은 그 바보 같은 생각에 어이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명문세가의 자식이다. 게다가 다리까지 나았으니 조정에서 할 일이 많았고, 나이도 어려 앞날이 창창했다. 겁 없이 말하는 게 귀엽고, 또 잡일을 잘해 수발시키기에 편하다는 생각을 종종 품었지만, 그래도 서문윤은 제게 묶여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위인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조하며 그 알량한 생각을 비웃으면서도 검설린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10년 약조가 끝난 이후의 삶을 종종 꿈꾸게 되었다. 생존한 삶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약한 놈, 구제도 못 할 놈.’
또다시 사람의 정에 홀리고야 마는 저 스스로를 원망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으나, 검설린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수도와 먼 지역에, 가옥을 하나 얻고 은거한 채 살아가는 삶. 의원의 일을 해도 좋고, 아니면 운표선의 돈으로 먹고살아도 좋고. 가끔 서문린같이 끊어지지 않은 인연의 방문을 받고, 서문윤에게 군략과 정략을 가르치며 후생을 보내는 삶.
‘…꽤나 나쁘지 않을지도.’
그런 같잖은 생각을 한때는 한 적이 있었다.
“영공께서는 저희를 기억하십니까?”
“도대체 내가 너희에게 무슨 그런 지독한 잘못을 저질렀지? 그 아이는 도대체 무슨 잘못으로 그런 치욕을 겪어야만 하는 거냐?”
“당신께서 그것을 말하시니 참으로 웃깁니다.”
그것이 그저 산산조각으로 깨어질 유리 같은 망상임을 검설린은 또다시 일이 벌어진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 * *
그날에 검설린은 또다시 포기하고야 말았다.
운남에서 더러운 기억의 조각을 마주하고, 오명을 뒤집어쓴 벗처럼 서문윤 또한 그 역겨운 것에 당하고야 말았을 때 검설린은 모든 것을 놓았다.
그의 불행은 나의 잘못이다.
‘살아서 편안해지기에는 나는 업이 많지.’
제 과거의 파편에 서문윤이 휩쓸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그것에 망상을 아예 접고 그저 죽음만을 기다렸다. 그를 더 이상 괴롭히기 싫었다. 더 제 추잡한 과거에 얽혀 그를 고난스럽게 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때 서문윤은 이상한 기조를 보였고, 그의 눈은 그 올바르고 곧은 맹종에 더해 애틋한 기색을 품었다. 검설린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도피할 뿐이었으나 사실은 어느 정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안이 스멀스멀 몸을 타오르던 때 들은 말.
“의형을, 연모,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검설린은 그때 입안에 번지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 * *
비가 추적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검설린은 소식을 들은 후 약탕기를 깨고 미친 듯이 황양양의 저택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비명이 등 뒤를 울렸으나 그것을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저택에서 곡을 참는 듯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검설린은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고성이 이어졌다.
“당신, 당신 때문이야!”
가슴을 퍽퍽 때리는 황양양의 손을 막지 않은 채 검설린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없이 문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의 창백한 뺨에 빗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바로 황재천의 저택으로 뛰쳐나왔으나, 그는 차마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마당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렇게 일이 될 거라 정녕 예상하지 못했나요? 서문 가가의 목숨이 위중해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나요? 이것은 당신의 업인데, 무슨 까닭으로 무관인 서문 가가가 당신의 길을 밟습니까?”
말없이 우뚝 선 채 검설린은 과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황하에 서성이던 당시 공허하던 두 눈을.
서문린을 닮은 죽기 직전의 청년을 구하곤 검설린은 그를 윽박질러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어이없어 웃고야 말았다.
‘고작 다리? 다리 하나에 목숨을 잃으려 한다고?’
다리 하나가 목숨을 끊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검설린은 아주 어린 소년 시절부터 죽어야만 했다. 게다가 죽음을 원해도 죽지 못해 10년을 기다리는 신세인 그로서는 서문윤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속도 편하군. 이런 일에 황하에 몸을 던지려 들고.’
철없이 숨을 끊으려 했다는 서문윤의 말에 검설린이 느낀 것은 짜증과 분노였다. 말을 들을 때 정말 엿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마음은 서문윤의 새까만 눈을 마주하고 눈이 녹듯 사라지고야 말았다.
‘이건….’
검설린은 더 이상 서문윤의 고통을 한심하게 여기거나 그를 모욕하지 못했다. 그 공허한 눈을 본 순간 마음속에 드는 쓸쓸한 바람이 그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그것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천공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 눈을 바라보면서 검설린은 그 순간 울컥하고야 말았다.
저런 눈을 가져서는 안 되는 나이다.
그럼에도 세상을 다 산 듯한 서문린의 아들이 보이는 공허한 눈이, 생명을 부여잡을 의지를 잃은 듯한 그의 힘없는 미소에 불쑥 마음속에 울화가 치솟았다. 저런 눈을 가지기에는 이른 나이다. 저래서는 안 되는 나이다.
‘적어도 나와 다르지.’
그 순간 검설린은 제가 과거의 저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마음의 고통에 이유가 더 필요할까.”
좌절에 잠식된 눈이 몹시 거슬렸다.
어색하게 그를 달래려 한 말에 그 공허하던 눈에 물기가 번질 때 검설린은 그를 보며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릴 줄 안다면야 회생할 여지가 있다.
검설린은 역모에 휘말려 일족이 멸문한 이유로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운표선을 비롯한 그의 벗들은 동궁사변에 휩싸여 사람을 잃은 후에 곡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슬픔을 표할 줄 안다면야 상처는 회생될 여지가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서문윤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문득 쓰라린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짐 덩어리를 달게 되었군.’
귀찮게 됐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검설린은 그를 떼어놓을 생각을 품지 못했다. 본디 왕진을 가지 사람을 달고 다니지 않았음에도, 검설린은 그가 서문린의 아들이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그를 달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눈이 그렇게 꼴 보기가 싫었다.
그렇게 검설린은 충동적으로 그와 1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했고, 그 공허했던 눈은 결국 그의 원대로 맑고 고요한 것으로 변했다. 그 눈을 보며 검설린은 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안도했다. 이제야 제법 사람 같은 꼬락서니였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맹종의 기색을 보이는 것에 당황하고야 말았다.
뭐야? 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
그리고 그는 뒤늦게 자신이 지금껏 서문윤과 너무나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늦은 깨달음이었고, 끝내 그의 눈은 저를 향해 애틋한 기색을 보였다.
그 생각을 하면 입가에는 비소만이 흘렀다.
나는 또다시 어리석게도 사람에게 정을 주고야 말았고, 내 방만함에 그는 허황된 마음을 품었다.
“서문 가가는 무관의 길을 걷고 싶어 했어요! 서문 가가의 소망과 상황이 모두 그분을 하나의 길로 이끌었는데 왜 당신은 그를 억지로 붙잡아두었죠?”
제가 불운을 몰고 다니는 역귀인 줄도 모르고, 또다시 함부로 행동했지.
빗물에 젖어 흐릿한 눈으로 검설린이 말없이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두 어깨를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만 같이 몸이 무거웠다.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손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으나 검설린은 그 대신 갈비뼈 안에서 지나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황양양이 검설린의 가슴을 두드리며 분노와 슬픔이 섞인 비명을 내지를 때였다.
“양양!”
흙탕물을 철퍽철퍽 짓밟는 소리가 들렸다. 황재천의 것이다. 어떤 예감을 한 검설린의 얼굴에 그 순간 희미한 균열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직 몸도 안 좋은 애가 여기에 왜 나온 게야.”
“아빠, 아빠!”
소식을 듣고 빠르게 뛰어온 듯 황재천은 관복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 사랑하는 딸을 끌어안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윤이가 정말?”
망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은 기나긴 침묵 끝을 깨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는 안에 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황양양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검설린은 팔로 그녀를 옆으로 밀치며 성큼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장 선 문 앞에서 검설린은 문을 열지 못한 채 문고리만을 붙잡을 뿐이었다. 방 문을 바라본 채 그는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결국, 결국 나는.’
등 뒤에서 황양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지 않았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치료하지 않았어.”
그건 저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검설린의 얼굴이 그 순간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문윤을 뜯어 말리고서라도 당장 양주를 빠져나왔어.’
사람들이 죽건 말건 알 게 무언가? 그는 오로지 서문윤의 생존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니, 바라는 정도가 아니지. 검설린은 장한성으로 가며 제 행동이 초래한 불운한 결말을 두려워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를 했으니까.
심지어 썩 관계가 좋지 않았던 하늘에 의존할 만큼 검설린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장한성에서 생존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런 꼴이지.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약방에서 날 법한 냄새가 후욱 코끝을 찔렀다. 검설린은 잠시간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침상을 바라보았다.
침상에는 투명한 천이 쳐져 있었다.
그 순간 검설린은 참담한 심정에 휘말려 입술 끝을 비틀었다.
황하에서 보던 날 공허하던 어린것의 눈이 서서히 맑게 반짝이는 생기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저를 향한 맹종으로 바뀔 때 검설린은 부담과 함께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애틋한 마음을 담아 저를 바라본 순간, 검설린은 참을 수 없는 비탄을 느꼈다.
‘왜, 도대체 왜.’
너는 나같이 불운을 몰고 다니는 자를 원하느냐?
건전성 성벽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검설린이 속으로 헛웃었다. 역귀를 몰고 다니는 자라고?
‘역귀라면 차라리 다행이군.’
유년을 보냈던 일가는 몰살당하고, 소년이 몸을 의탁했던 태자는 오명을 껴안고 비참하게 사망했다. 저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죽거나 혹은 절 증오했다.
검설린은 속으로 처절히 절규하고 있었다.
‘나는 역병보다 더하다.’
정적 끝에 검설린의 귓가에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굳었던 발걸음을 뗐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침상의 앞에 이르러 그는 또다시 얼어붙고야 말았다.
살짝 열린 창문에 비바람이 불어 투명한 천이 하늘거리며 침상에 누운 이를 드러냈다. 검설린은 말없이 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에는 절망과 공포, 혹은 분노와 비탄이 스쳤다. 침묵 끝에 맑은 목소리가 흘렀다.
“아침에 속이 너무 어지럽고 계속 매슥거렸습니다. 체한 것인 줄 알고 구토를 했는데, 계속 몸이 안 좋았습니다.”
그것은 검설린 또한 아는 일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서문윤의 얼굴을 보고 검설린은 그에게 오늘 의당을 나가지 말고 쉬라 명을 했다.
검설린은 그것을 너무나 작은 일로만 생각했다.
너무 오랜 시간 서문윤이 멀쩡했기에. 또 요즈음 검설린이 알량한 마음으로 흐트러져 세상일을 낙관하고 있었기에 그는 얼빠진 사람마냥 방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사태가 이에 이르러 스스로 조소했다.
너는 정녕 네 인생에서 반복된 사건을 모르느냐?
“게워낸 후에도 계속 속이 안 좋더군요. 점심부터 계속 열이 올라서 식중독인가 싶었는데 같이 식사를 했던 황 숙부네 사람들이 멀쩡한 것을 보고 예감을 했습니다.”
하늘은 그에게 작은 행복을 베풀어 숨 쉴 틈을 주고, 또다시 그에게서 그것을 앗아갔다.
검설린의 눈이 붉어졌다.
“결국 오후에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그 순간 참지 못한 검설린이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너는, 너는.”
“의형.”
서문윤은 그의 말을 자를 뿐이었다. 투명한 천 사이로 침상 위에 몸을 기대 누운 청년이 보였다. 눈에 팔을 댄 채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암울하기만 할 뿐이다.
그는 지나친 고통에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하늘이 저를 싫어하는 건 알았다.
“지금 몹시 아픕니다. 속이 쓰리고 기력이 하나도 없어. 땀이 마구 흐르고 배가 쓰립니다. 귀는 잘 들리지가 않고, 먹은 것을 아래위로 배출해버립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잔혹해야 하는가?
“역병이겠지요.”
그 순간 검설린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이성을 잃고 고함을 치려던 것을 간신히 억누른 파편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답변을 할 수 있었다.
“그런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너는 의원도 아니면서 확답을 하는구나.”
듣기에 몹시 매정하게 들리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 상황에 무슨 자존심을 내세울 게 있다고 저가 이리 뻣뻣하게 굴 수 있지? 실로 사악하다. 속으로 저 자신을 비웃었으나 검설린의 입에서는 딱딱한 말이 흐를 뿐이었다.
“탈수를 유발하는 병은 여러 가지다. 구토와 고열을 유발하는 병은 실로 수백 가지가 넘는다. 네가 함부로 확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궁중 무관은 신중해야 하는 법인데, 넌 아무래도 그 자리엔 어울리지는 않는군.”
그래, 너는 궁중 무관에 어울리지 않아. 차라리 낙마가 복이었지. 그 생각을 하며 검설린은 그 순간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과거의 그가 종종 품었던 생각이었다. 더러운 물에 살기에는 너무나도 청백한 서문윤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복잡한 마음을 느끼곤 했다.
낙마가 복이었지, 너는 조정에서 상처를 입을 거야. 다리가 다 낫고 출사를 한다면 너는 언젠가 봉변을 당할 거다. 오물들이 너를 상처 입혀 너는 과거의 빛나던 모습을 되찾지 못하리라.
그러니 그런 것보다 차라리 나의 곁에서….
사내의 숨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한때 그의 머릿속을 뒤덮었던 망상에 결국 검설린은 참혹한 비소를 흘렸다.
‘낙마가 그의 복이라고?’
아니, 그건 네 구역질나는 망상을 합리화하기 위한 마음이겠지!
사람의 온정이 그리울 때 다가온 청년이 소중했다. 그가 가족같이 느껴지고, 또 그의 밝음이 사랑스러웠다. 심장이 찢어지는 통증에 검설린은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나 자신은 결국 그를 상처 입혔고, 낙마보다 더한 불운을 그에게 안겼다.
서문윤은 얼굴을 가린 팔을 내리지 않고 웃었다.
“친우 아니랄까 봐, 그분과 똑같은 말을 하시군요.”
낙마는 그의 복이 아니었다. 주변을 불행하게 만드는, 바로 역귀나 마찬가지인 저와 인연을 맺은 것은 차라리 황궁에서 변을 당하는 일보다 지독했다.
후자라면 차라리 명예는 지켰겠지.
서문윤의 웃음은 여전히 맑았으나 힘이 없었다. 검설린은 그것이 더욱 슬퍼 차마 뒷말을 못 이은 채 망연히 천 너머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의형을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귓가에 스치는 말이 있었다. 해일과도 같은 슬픔에 잠식된 그의 귓가로 담담한 말이 흘렀다.
“먼저 말하는데, 이거 의형 탓 아닙니다.”
“역병이 아니다.”
“예, 혹시 만약에 역병이라면, 그래도 의형 탓이 아닙니다.”
“역병이 아니라 했다.”
그를 달래주고 싶은데, 불안에 휩싸인 그를 안심시키고 싶은데 목소리는 거칠 뿐이었다. 다정하게 말을 하고 싶다. 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주고 싶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러지 못해 저가 생각해도 듣기 싫은 흉흉한 목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끝까지 말을 안 듣는군. 너는 의원이 아니다. 역병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야! 그건 나의 몫이다. 의원인 나의 몫이다, 서문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잠시 흘렀다.
서문윤은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의형은 역시 선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끝이었다. 검설린은 마침내 입술 밖으로 허망한 웃음소리가 흐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
“휘장을 걷어주십시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이 순간에 검설린은 제가 복면을 쓴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말에 휘장을 거칠게 잡아 북 찢어발겼다. 흉흉한 눈빛에 침상에 몸을 기댄 청년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슬그머니 팔을 내린 서문윤이 새빨개진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 뻔한 청년은 검설린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왜 울고 계십니까?”
검설린은 싸늘하게 답할 뿐이었다.
“나는 울지 않는다.”
“복면이 다 젖었습니다. 의형.”
“나는 울지 않는다.”
고집 부리며 답하는 검설린에게 서문윤은 기묘한 시선을 던지면서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 끝에 그가 말을 내뱉었다.
“가까이로.”
검설린이 한 발자국 다가가고, 그 순간 서문윤은 손을 뻗었다.
검설린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잡아당겨진 머리카락에 휘청거리며 침상에 몸을 숙인 그는, 입술 부근에 자리한 복면을 짓누르는 부드러운 감촉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그 순간 그의 뺨에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서문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었다.
이윽고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검설린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울려 그는 한없이 서글퍼지는 심경을 다스리지 못했다.
“누가 뭐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검설린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한 것도.”
“…….”
“당신을 의형이라 부른 것도.”
“…….”
“당신을 마음에 품은 것도.”
“…….”
“저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곤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 끝에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힘들어.”
서문윤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힘들다, 윤아.”
검설린의 입에는 힘없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서문윤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정말 힘들어.”
동요 어린 눈앞에 검설린은 그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사람에게 기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검설린은 이 순간 모든 것을 잊고 그에게 진심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기대는 마음을 부여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너무 힘들어.”
뺨이 젖는 것이 느껴졌다. 서문윤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는 사실 제가 복면을 눈물로 적시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난다, 서문윤.”
과거에 그는 저 말들을 막기 위해 서문윤을 상처 입히고, 또 하고 싶은 말을 참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에서 다른 일들을 생각하지 못했고, 무너지는 정신을 다잡지 못했다. 그는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고 그저 고통에 휘말려 눈물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침묵 끝에 말을 내뱉었다.
“절 사랑하고 계십니까?”
끝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말에 검설린은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네가 내 유일한 가족이었다.”
어찌 무얼 더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음마저 복면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서문윤은 숨을 멈출 뿐이었다.
“내가 지금 무얼 더 가지고 있지? 난 항상 네게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어. 내 곁을 떠나지 말라달라고. 너만큼은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서문윤은 끝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너는 내 남은 모든 것이었다.”
* * *
서문윤이 쓰러지기 전까지 모든 일이 용에 날개가 달린 듯이 순조로웠다. 황재천은 황양양이 살아난 후 태도를 돌변하여 그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하여 검설린을 도와주었다. 검설린은 황재천의 도움을 받아 운표선이 제조법을 알려주었던 임시 청매소를 만들었다. 그것은 능숙한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황양양이 먹은 것만큼 순도가 높지 않았으나, 그래도 불치의 병을 달래는 데 효과가 있었다.
황양양이 병석에서 몸을 일으키고 병자들의 증세가 호전된 후, 민심도 바뀌어 건전성에는 사람들의 광기가 서서히 걷히고 다시금 질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선 순간에, 그러나 검설린의 마음속에는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서문윤이 쓰러지고 검설린은 현장에서 물러나 오로지 황재천의 저택에 칩거하고 있었다. 그것은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의원을 교육했다곤 하지만, 그들은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을 지휘해야 할 검설린은 모든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서문윤 하나를 돌보고 있었으며 심지어 자문을 물으러 온 이들마저 피하고 있었다.
호전되던 와중에 환자가 피가 섞인 토사물을 토했는데 어찌해야 합니까?
환자의 손발이 붓습니다. 수액의 농도가 짙은 듯한데 소금을 적게 타면 아니 됩니까?
그 모든 말들을 무시한 채 검설린은 서문윤의 온몸을 물수건으로 닦고, 그의 입에 소금물을 먹이며, 수액을 투여하고, 그의 수발을 들며 그를 보살폈던 것이다. 그것은 애틋하기보다 차라리 광적인 기세를 풍겨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차마 충고를 하거나 현장에 복귀하라 빌지 못했다.
안 그래도 서늘했던 그의 얼굴에는 요즘 한풍만이 불고 있었으며 음산함마저 감돌았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서문윤의 처소로 발걸음하는 이들을 막았다. 심지어 황양양이나 황재천의 출입도 지금껏 금한 채 홀로 서문윤을 보고 있었다.
마치 미친 사람만 같다.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가 쓰러진 이후로 사흘이 지났으나, 서문윤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다.
‘영공은 아니라곤 했지만 거의 확실한 것이겠지.’
황재천은 문 앞을 서성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사흘 동안 토사곽란. 체하였다고 보기도 어렵고 역병 증세와 징후가 완전히 겹친다고 하였으니…… 역병일 거다, 아마도.’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마음이 몹시 무거워 황재천은 그늘진 얼굴로 방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은 황양양과의 인연 이전에 그에게 소중한 조카였고, 또 지키고 싶은 이였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나는 그저 양양과 오순도순하게 살고 싶었어. 부귀영화는 바라지도 않았다고. 그저 나는….’
그러나 황재천은 푸념을 길게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것이 진실로 쓸모없는 말임을 깨달은 것이다. 헛웃음을 흘리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다 변명이지.’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곤 황재천이 문을 열었다. 서문윤의 처소의 문이었다. 검설린이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어 서문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황양양의 소청은 둘째 치고 황재천은 조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요즈음 그는 무거운 짐이 가슴에 얹힌 기분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회의감이 들어 황재천은 가끔씩 복잡한 생각에 휘말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 황재천은 서문린을 떠올렸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지켜야 할 도리는 있는 법입니다, 황형.’
위란한 상황에도 굳건히 의지를 세웠던 그 당당한 무인을,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황재천은 지금 서문린의 아들을 찾는 중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등불 같던 눈이 보고 싶다.
그리고 발을 디딘 황재천은 어두운 처소 안에서 음산한 기운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꺼져.”
그것은 진실로 살기 어린 목소리였다. 황재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문틀을 부여 쥐며 한숨을 내뱉었다. 방 안에 진한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잠시간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네가 무슨 염치로 이곳에 왔지?”
“저는 그 아이의 숙부입니다. 당신이 뭔데 제 발걸음을 막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역귀를 몰고 다니는 놈이라고 했나? 그래, 결국 이 아이가 쓰러졌군. 그들의 말이 진정 옳았다.”
“아침에 저택을 방문한 이들을 말도 없이 내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지역 유지입니다.”
“그래, 나는 또다시 소중한 것을 잃고야 말았구나!”
서로 제가 할 말만 하고 있다.
“양양도 정신을 차린 지 오랩니다. 제게 윤아의 상태를 간곡히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실 겁니까? 의당에 나가시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아예 일선에서 손을 놓으실 겁니까? 계속 사람을 만나지도 않으실 겁니까? 북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신의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데 답변을 계속 거절당한다고.”
“내가 신경을 써야 하나?”
“영공!”
“나는 영공이 아니다. 황재천. 그리고 언성을 높이지 마. 이 아이가 깬다면 나는 이성을 붙잡지 못한다.”
싸늘한 목소리에 황재천의 몸이 주춤했다. 휘장이 따뜻한 바람에 휘날려 침상에 누운 이의 얼굴을 슬쩍 드러냈다.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침상 옆 의자에 앉은 사내는 마치 잘못 손을 대면 깨질 것만 같은 유리보옥을 만지듯이 침상에 누운 이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올려주었다.
퍽 다정한 손길이었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서느런 목소리로 검설린은 말을 이었다.
“그들은 환난을 당할 때 도움을 준 이에게 욕설을 퍼붓더니. 염치도 모르게 또다시 내게 손길을 내던지는군. 너희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느냐? 아니면 원래 사람이 그런 것이냐? 나는 이제 다 상관이 없다.”
“신의!”
“너의 양양이 나의 윤아였지.”
황재천의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그 말은 그가 함부로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나의 양양이라. 그는 그 순간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침상 곁에 앉은 옛 상관의 얼굴을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건 실로 비통한 목소리였다.
황재천은 그가 선량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거친 언행과는 별개로 그의 성품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그의 불행했던 지난 인생과 과거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이 아무것도 없던 그의 삶에 의지처가 되었음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검설린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러나 황재천은 그와 별개로 서문윤이 소중했다.
“어째서 그 아이를, 아니 그러신다면서 어째서 그 아이를 그리 대하십니까.”
가시밭길 같은 그의 인생에 서문윤을 얽히게 하기 싫었다. 사실 말하자면, 황재천은 검설린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는 불운한 사람이었고 사실 역귀같이 환난을 불러일으켰으므로.
황재천의 말에 담긴 원망을 검설린이 모를 리가 없으리라. 그는 그 말에 조소하며 답할 뿐이었다.
“그래, 난 죄인이지!”
그리고 검설린은 염세적인 웃음을 흘리며 황재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재천.”
서문윤이 잠을 자는 탓에 방 안에는 촛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늦저녁의 어둠 속에서 검설린은 시퍼렇게 빛나는 눈으로 황재천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게 이제 무슨 소용이 있지?”
그 처절한 웃음을 마주하며 황재천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쓰러졌고, 나는 이제 돌이키지 못한다.”
저는 끝까지 이기적인 생각만 하였구나.
“이 아이의 인생에 개입한 것을 후회해도 나는 돌이키질 못하지.”
비통한 마음이 꾸역꾸역 억눌려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속으로 원망을 드러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죄책감에 짓눌려 누군가를 원망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황재천은 검설린의 말을 들은 후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제정신을 차린 뒤에 그는 착잡한 마음에 휘말리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염치로 그를 탓할 수가 있는가?
장한성과 건전성의 악재는 모두 그의 책임이었다. 검설린은 그저 휘말린 것이며, 그는 제가 원하여 악운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서문윤이 아닌 타인을 살릴 수 있다 보느냐?”
항시 그를 동정해왔으나,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 그를 비난하고야 만다. 비탄 어린 말을 듣곤 황재천은 씁쓸히 웃었다.
그래,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하지만.’
짐승이 상처 입어 발톱을 세운 채 몸을 웅크린 것만 같다. 침상에 한 손을 올린 상태로 묵묵히 서문윤을 바라보는 검설린을, 황재천은 복잡한 눈으로 보았다.
전장에서야 드러낼 법한 흉흉한 기세를 흘리는 그를 보며 황재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검설린은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제 조카 같은 아이를 상실한 고통에 의한 것이었고.
‘사람 마음이란 게 쉽게 되지 않지.’
기나긴 침묵 끝에 황재천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당신을 조금은 원망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말씀한 것처럼 환난을 겪은 자가 고통을 덜기 위한 어리석은 마음일 뿐입니다.”
“…….”
“이 모든 사태는, 사실은 제 책임이 제일 클 테지요. 장한성과 건전성의 일은 제가 조정에 협력한 탓이니.”
그걸 알면서도 물어? 검설린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흘렀다. 가려진 복면에 황재천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그 스산한 웃음소리에 그 얼굴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재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저는 가족을 살리려 무고한 열두 명을 고변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풀려난 날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그 순간 검설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재천에게서 쓰라린 조소가 흘렀다.
“결국 끝내 그러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언가? 검설린은 그의 말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목숨을 끊으려 했다고? 후회를 하고 있다고?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결국에 무산된 일이다. 엎질러진 물일 뿐이다.
바뀐 것은 없다.
그러나 무어가 그리 잘난지 황재천은 그저 덤덤히 말을 잇고 있었다.
“죄를 짊어진 것은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검설린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말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건전성민들은 당신을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께 미안해하고 있지.”
차가운 목소리가 말을 막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지?”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추악해지긴 하지만 그렇게 사악한 것만은 아닙니다.”
빠르게 내뱉는 말은 강렬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제야 검설린은 고개를 돌려 황재천의 얼굴을 진중한 시선으로 살폈다. 굳건함이 자리한 사내의 얼굴. 그 옛날에 비해서 더욱 노련해진 무장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소가 흘렀다.
“이제는 상관없어.”
그가 후회하고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이제는 상관없다.”
이미 서문윤은 사지를 넘나들 위기에 처했는데.
창백한 얼굴에 슬픔이 스쳤다. 검설린은 땀에 젖은 서문윤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그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깨어 있을 때 편안한 척을 하던 서문윤은 결국 지쳐 잠이 들었다. 의원인 검설린이 그의 고통을 모르겠는가?
서문윤은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너무나도 착한 아이.’
슬픔이 몸을 무너트릴 지경이었다. 검설린은 이청융의 유언도, 10년의 약조도 이제는 상관이 없었다. 서문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물린 것은 사람을 보는 순간 살심이 치밀어 오른 까닭이었다. 분노와 슬픔이 구분가지 않았다. 검설린은 정신이 혼미하여 아군과 적군을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고, 황재천의 잘못이고, 황양양의 잘못이고, 또 하늘의 잘못 같았다. 온 세상이 다 밉고 다 징글징글했다.
저가 보아온 것 중에 가장 선량하고도 강직한 이가 서문윤이었다.
수만 명이 죽어도 그 하나만큼의 가치는 없으리라.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문윤의 목숨이 간당했다. 하늘이 이리 부조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검설린은 폐인이 되어 하루 종일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힘이 없는, 아직 앳된 기운이 남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죽으면 황재천이든 뭐든 다 목 졸라 죽여버리고 대들보에 목을 매달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지금 청융의 맹약이 중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아이를 주웠어. 그리고 다시 살렸지.’
그리고 다시 맥없이 죽어가고 있다.
검설린은 지금 절망하여 귓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황재천이 탄식하듯 말했다.
“영공.”
검설린의 입에선 싸늘한 말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따위 말로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사실 그는 황재천이 제일 꼴 보기 싫었다. 그만 아니었다면 장한성의 상황이 이리 어지럽지는 않았으리라. 서문윤과 그가 이렇게 고난에 휩싸일 이유도 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흉악한 기색이 가득했다. 황재천은 씁쓸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당신은 본인이 영공이 아니라 하지만, 제게는 영원히 영공입니다. 당신에게는 아직 정명공의 작위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더러운 고변으로 보전한 작위라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아직도 당신은 영공입니다.”
검설린의 검미가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조정에서 파발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아마 제 하동 절도사직을 박탈하려는 의도겠지요. 장한성을 지원하지 말라는 조정의 말에 반항했으니.”
그 순간 검설린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황재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어도 이제는 장한성에 원군을 못 보냅니다. 다음 주면 휴전이 끝이 나고, 회흘의 군대가 올 겁니다.”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다.”
“윤아에게도 상관없는 일일까요?”
그 말에 검설린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황재천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여전히 어리석으시군요.”
“너…….”
울컥하여 무어라 내뱉으려던 검설린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가 흉흉한 기세로 말했다.
“내게 무얼 원하지?”
“글쎄요.”
황재천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중한지도, 어느 게 옳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양양만 있으면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한 일에 엮여 결국 양양이 쓰러지고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딸아이는 내게 그리 살아가지 말라 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황재천의 말은 감동적이었으나 검설린에겐 쓸모없었다. 검설린은 묵묵부답으로 서문윤의 이마에 손을 댄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쳐 쓰러진 서문윤의 창백한 얼굴에는 땀이 범벅이었다. 검설린은 그가 땀을 내고 토사곽란을 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투수기로 수액을 넣고 약을 입에 넣어주니 서문윤은 탈수는 일으켜도 금방 기력을 되찾는 편이었다.
대답 없는 검설린에 황재천은 쓴웃음을 짓고 방을 나섰다.
사라지는 인기척을 느끼며 검설린은 진한 탈력감에 휩싸여 힘없이 침상 위를 응시했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서문윤이 쓰러지고 계속 검설린의 귓가를 맴도는 말이었다. 그를 족쇄처럼 부여잡고 괴롭게 만드는 말이 또다시 귓가에 울리자 검설린은 연이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 가당치 않은 말을 듣고 그는 서문윤이 받을 상처를 생각했다. 그리고 정을 떼려 독선적으로 서문윤에게 냉혹하게 대했으며, 그의 마음을 상처 입혔다. 후회가 막심했다.
‘네게 솔직해야 했을까?’
병자처럼 늘어진 서문윤을 바라보면서 지끈거리는 가슴의 고통을 자각했다.
서문윤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애저녁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이 그리 애틋한데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러나 검설린은 서문윤이 연심을 확언하는 말에는 절망에 이르러 혀를 깨물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검설린은 목구멍에 치솟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서문윤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충동을 꾸역꾸역 누르며 비릿한 피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속으로 분노 섞인 비명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저 새끼가 완전히 돌아버렸군.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저는 곧 죽을 이다. 그리고 불운을 몰고 다니는 역귀 같은 사람이다.
한때는 낙향하여 서문윤을 잠시 가르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운남에서 서문윤이 중독당한 이후로 포기한 망상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게?
‘내가 너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데, 그리고 어떻게 네 인생을 망가트리고 있는데 어찌 내게 그런 말을 하느냐.’
자리를 박차고 복도를 달리고 싶은 충격을 느꼈으나 검설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숨을 멈추고 그저 그의 호흡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검설린이 서문윤의 이마에 올린 손을 뒤집어 따뜻한 손바닥 대신 차가운 손등을 살갗 위에 올렸다. 고열은 그치지 않고 있다. 검설린이 속으로 생각했다.
‘초기에 고열이 오르고 탈수가 이어지는 시기를 잘 버티면 사망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비록 완치는 어렵다고 한들 살 수는 있어,’
사실은 검설린도 이것이 역병의 증세가 확실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면 확실한 일이 될까 봐 말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모든 상황과 징표가 단 한 가지 일을 말하였으니, 검설린은 불안 속에서도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서문윤은 본디 몸이 튼튼한 탓인지, 사제 청매소를 먹은 덕인지, 제법 잘 버티고 있었다. 그 사실에 검설린은 안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야 말았다.
‘하지만 후유증은?’
역병에 걸린 이들은 가끔 고열 탓에 정신이 이상해지거나 몸이 불편해지곤 했다. 그 생각에 이르러 검설린의 얼굴에 초조함이 물들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병에 걸린 이는 격리되어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명문세가의 자손이라 한들 그럴 수밖에… 제기랄!’
입술을 짓씹고 그가 어두운 눈으로 서문윤의 얼굴을 살폈다.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네게 그리 대하면 안 되었다 생각하느냐? 내 모든 행동이 독선이라 여겼느냐?’
서문윤은 명문세가의 자제, 앞날이 창창한 스물셋의 청년이다. 양도 절도사라는 세력가와 태중 혼약을 치르고, 약혼녀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준수한 용모에 단아한 성품,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고, 누구에게나 믿음을 받는 이. 그러면서도 마음은 단단하고, 또 선하기 그지없지.
검설린은 그런 놈이 좋아할 만한 이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짝으로는 동년배의 아리땁고, 또 선량한 아가씨가 어울릴 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네 마음을 받지 못해.’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불운을 불러일으킬 거니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불행해지지.’
그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흘렸다.
‘바로 너처럼.’
땀에 젖은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을 쓸며 검설린이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이마 위에 한 겹의 복면을 사이에 둔 입맞춤을 하며 검설린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사랑스러웠다.’
굳게 닫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서문윤.’
입술을 떼지 않고 검설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잠을 자지 않는 것 다 안다.”
서문윤의 몸이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냉랭하지만 어딘가 기운이 없게 들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잠시간 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열었다.
검설린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미 그가 내뱉은 절절한 말들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검설린의 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싸우고 계셨던 겁니까?”
요즘 그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철없게도, 분명 죽음을 앞둔 힘들고 고난한 와중에도 검설린이 저를 몹시 애틋하게 여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서문윤의 목소리에는 환자의 것이라 보기에는 지나친 명랑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에 울컥한 검설린이 그를 노려보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아니.”
“거짓말.”
그 말에 검설린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생글 웃은 서문윤이 손을 뻗어 이마에 닿은 그의 커다란 손을 더듬었다. 그 순간 몸을 움찔한 검설린이 슬그머니 손을 빼내고 싸늘하게 말했다.
“다시 자거라. 피곤할 텐데.”
그는 애써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서문윤이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네가 아프니까.”
“제가 그리 소중합니까?”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답했다.
“그래.”
그 말에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검설린을 놀리려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대답에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얼음장 같은 얼굴 속에서는 희미한 고통이 엿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마치 서문윤이 아닌 그가 병자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간 검설린이 저를 아끼지 않는 줄 알고 화를 냈던 서문윤은 그 순간 물밀려오듯 쏟아지는 감동에 휩싸여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제가 병에 결리고 저보다 더한 고통에 휘말려 있었다. 운표선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했으나 서문윤은 이 순간 의형이 저를 지극히 애정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흘이 지났는데도 토사곽란이 멈추질 않습니다.”
“몸이 피로해서 그래.”
“그렇습니까?”
검설린은 그 은근한 말에 답하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이 스치는 그의 얼굴을 말없이 보며 서문윤 또한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내일 북촌에 나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이 그들 사이의 적막을 깼다. 침묵의 시간 동안 처연했던 검설린의 눈에 매서운 기색이 서린 순간이었다. 답변은 단호했다.
“싫다.”
그러나 서문윤은 담담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건전성의 민심을 다잡아야만 합니다.”
“나는 그들을 진료하기 싫어.”
“장한성의 수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건전성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황 숙부가 하동 절도사직을 박탈당해도 바로 건전성주가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의형께서는 탄원이 명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검설린의 이성이 끊어진 순간이었다. 울컥한 사내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서문윤의 말은 지극히 옳았으나 검설린은 그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이윽고 분노 섞인 고함이 울렸다.
“그들이 다 죽어도 뭔 상관이냐! 네가!”
그러나 검설린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서문윤이 은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 탓이었다. 검설린은 ‘네가 죽으면 이제 다 끝인 것을.’이란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입술 밖으로 억눌린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다거나 의로운 말이 아니어서 그 말을 삼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서문윤의 죽음을 말하기 두려워 입을 다문 것 뿐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서문윤은 검설린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검설린의 험악한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가라앉아 다시금 그 특유의 싸늘한 기색을 되찾았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몸을 멈칫했다.
그의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이 지나치게 고요했던 것이다.
서문윤이 이질감을 느낄 때였다. 그의 귓가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네가 산다면 그들 모두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서문윤은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2년의 시간 동안 그의 곁에 착 달라붙어 시간을 보냈던 서문윤은, 무의식적으로 검설린의 특이점을 눈치채고 행동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말을 듣곤 검설린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형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문윤은 다시금 말을 내뱉었다.
“뭔지 몰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검설린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검설린의 반듯한 얼굴 위에는 운무처럼 아스라하고 스산한 기색이 엿보였다. 서문윤은 그가 고민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검설린에게 있어서 크나큰 다짐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그리고 서문윤은 검설린이 저를 위해 큰 대가를 내놓기를 원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으나, 지금 검설린은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것만 같았다.
걱정 어린 눈빛이 검설린의 살갗에 닿았다. 시간이 흘러 그는 적막을 깨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죽을 수도 있다.”
서문윤이 순간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진실을 말하시는군요.”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는 원망스럽지 않느냐?”
참다못해 토로한 말이었다. 탄식을 하는 듯한 말은 물에 잠긴 듯 습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문윤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모든 게 다.”
환자는 검설린 같았고, 멀쩡한 이는 서문윤 같았다. 잠시간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희미하게 웃었다.
원망이라.
‘살고는 싶다.’
그는 비탄이 서린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간 생각했다. 그의 다정함을 맛보고 서문윤은 살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강소성에 계신 부모를 생각하면서는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검설린에게 더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럽고, 또 속이 쓰라리고, 온몸의 근육이 파열되는 것만 같이 아파서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괴질의 아픔은 낙마 당시의 충격보다 심하지 않았으며, 심중의 고통은 검설린에게 외면당했을 때보다 크지 않았다. 그는 검설린이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바라보고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느낀 지 오래였다.
서문윤은 문득 검설린의 복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잡을 때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희무스레한 달빛을 받은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 담아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저는 제가 옳은 바를 지켰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의 뜻이 아니다.”
그리곤 검설린은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황양양의 말이 옳았지. 너는 내게 어울리지 않아. 너를 당장에 떠나보냈어야 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널 고쳐야만 했었어. 나는 너무 어리석고 또 태만했다.”
서문윤이 그를 바라보는 눈은 꿈결에 젖은 사람마냥 행복하였으나, 검설린은 그 반대로 몹시 고되었다.
“네가 이리 어리석은 줄 모르고.”
검설린은 자조 어린 웃음을 보았다. 그 비참함이 서린 미소를 마주하곤 서문윤이 문득 말을 내뱉었다.
“항상 궁금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당신이 제게 갑자기 싸늘해진 것. 그저 사람에 상처받아 방벽을 세운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검설린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방벽을 세울 것처럼 고요하고도 싸늘한 표정을 지었으나, 서문윤은 그에 억눌릴 생각이 이제는 없었다.
그는 그저 말을 이을 뿐이었다.
“당신은 선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했다.”
“아니, 당신은 선합니다. 선하고 고결합니다. 당신이 부정할 수 없는 당신의 본질은 몹시 연약합니다. 저는 당신이 고작 그런 마음 때문에 저를 몰래 취했다 보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검설린이 이를 악물었다.
“너는, 너는 내가 얼마나 추악한지 모른다.”
서문윤은 그저 덤덤히 말할 뿐이었다.
“당신께서 숨기고 계신 게 무슨 일인지 말해주시면 아니 됩니까?”
“서문윤.”
마치 애원하는 듯한 간절한 말을 서문윤은 듣지 않았다.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검설린이 이를 악물었다.
“서문윤, 그만.”
“다만 당신의 마음을 끝까지 알지 못한 채 외인으로 떠나는 게 슬플 뿐입니다.”
“제발, 윤아!”
탄식과도 같은 말이 흘러서야 서문윤은 입술을 멈췄다. 검설린의 얼굴에는 공황이 서려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웃으면서 말했다.
“의형, 저는 당신을 정말 좋아합니다.”
두려움으로 물들어가는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답변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의 진정한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가 절 괴롭혔던 이유. 저를 이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애틋하게 생각했음에도 함부로 행동했던 이유.
고요한 눈이 그를 담았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답변을 진실로 원하고 있었다.
“내겐.”
그리고 검설린의 답변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흘러나왔다.
“너는 그런 말조차 할 수 없는.”
더듬거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칼날이 담긴 듯 검설린은 그것을 목구멍 밖에 토해내길 고역으로 여겼다. 무심코 손으로 입술을 더듬으며 검설린이 고통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 것이었다.”
서문윤은 희열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답변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뤄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영혼은 이 순간 하늘 위로, 구름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병자의 얼굴에 홍조가 감돌고. 서문윤은 달싹거리는 검설린의 입술을 설렘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
그 순간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왜 하필 이때.’
목구멍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것들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나는 네가… 서문윤?”
검설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을 잇던 검설린은 돌연 침상 밖으로 몸을 고꾸라트리는 서문윤의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 서문윤!”
그리고 더듬더듬 말을 내뱉던 검설린은 코끝을 스치는 시큼하고도 비릿한 냄새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때는 이미 서문윤이 의식을 잃어 침대에 몸을 늘어트린 상태였다.
연이어 처절한 비명이 황재천의 저택을 울렸다.
“서문윤!!”
* * *
“네 가업. 네가 그동안 잊고 있던 일이지만, 아니 잊어야만 했지만 넌 분명히 의원이 되고 싶었지?”
이청융은 천하의 개자식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만 하면 검설린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10년만 나를 위해 더 살아다오. 설린아. 의원이 되어 사람을 살려. 나는 네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지우고 싶지만, 지금 나로서는 그 방도가 없구나. 수많은 사람을 구한다면 네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까? 나는 네가 너 자신과 화해하기를 바란다.”
차라리 복수를 원한다면 생애의 마지막을 불태웠으리라. 하지만 하등 쓸모없는 평화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검설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한 자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사는지. 어린 시절 부모가 죽고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을, 그는 또다시 체감하게 되었다.
귀비를 겁탈하려 들었다는 추악한 죄목으로 사사당한 이청융. 장한성의 사투, 전선에서 흘린 피는 하등 쓸모없었다. 검설린은 그들의 목숨이 결실을 피우지 못한 채 쓰러져갔음을 깨닫고 허무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집안이 몰살당했을 때 느꼈던 마음보다 더욱더 고독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무엇이 중요하랴?
나라를 지키니 후일을 도모하니 같은 생각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깔끔히 사라져 있었다.
희망은 없었다.
검설린은 몹시 힘들었고, 지쳐 있었다. 세 차례에 걸친 고문을 동반한 추국 때문이 아니었다. 검설린은 토번과 싸우는 수하들을 지키려 일찍 태자를 고변하여 고문의 수위는 심하지 않았다. 육신이 아닌 영혼의 문제였다.
두 번이나 제게 소중하던 이들, 제 삶을 빼앗은 하늘 아래서 살기 싫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다 죽여버리고 싶은 한편, 제일 먼저 저 자신에게 환멸났다.
그럼에도 죽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했다.
반강제적으로 의행을 베푼 10년은 지옥 같았고, 검설린은 이청융의 말처럼 세상을 용서하지 못했다.
사람은 이기적이고 사악할 뿐이었다.
‘이것 봐. 이청융. 여기 어디에 내가 평화를 되찾을 거리가 있지?’
귀족의 오만함이란 그나마 봐줄 만했다. 죽어간 이를 살려놓았더니 욕설을 내뱉는 것은 차라리 인간적인 일로 여길 수 있으리라. 수몰된 마을을 향해 달려가는 말머리를 붙잡고 제 가족을 먼저 살려달라 말하는 이기심도, 봐줄 만하다 여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 자신도 용서 못 하는데 하물며 이런 것들을 나에게 품으라는 말을 하는 거냐?’
그러나 본디 가기로 했던 빈민촌에 불이 질러졌을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검설린도 할 말을 잃고야 말았고, 전염병이 창궐했던 지역에서 혹시나 병이 다시 일어날까 봐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감금당할 때는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청융, 너 이새끼!’
왜 내게 그따위 업을 부과한 거지?
날이 갈수록 검설린의 마음속 혐오감은 깊어졌다. 제게 짐을 껴안긴 이청융을 원망하며 지루하고도 환멸나는 삶을 이어갔다. 어딜 가나 사람뿐이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필연적으로 사람과 부딪혀 살아야만 하는데, 검설린은 그게 역하고 고난스러울 뿐이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거의 10년의 끝이 보이던 때였다.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악인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위악일 뿐입니다.”
“당신이 걷는 길을 저 또한 밟고 싶습니다.”
검설린의 계획을 바꾼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람을 믿지 않기로 한 그를 흔든 일. 황하에 서성이던 서문린의 아들을 거두고, 검설린은 크나큰 당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몽상병자는?’
“나는 의로운 이가 아니다.”
“신의께서 그리 말할 때마다 저는 크나큰 모욕감을 느낍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또 달랐다. 그가 가소롭다 생각하면서도 기울어지는 마음을 부여잡지 못했다.
“제가 당신을 의형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눈앞에서 피를 울컥 토하며 쓰러지는 서문윤을 본 순간, 검설린은 오로지 하나의 말을 생각할 뿐이었다.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말 그대로 필사(必死)의 마음으로 품은 염원.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검설린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 * *
그 누가 삶을 원하지 않으랴?
사실 서문윤은 생존을 바라고 있었다.
‘살고 싶어.’
이미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던 그가 제 죽음을 보고 슬퍼할 게 싫었다. 그래서 서문윤은 아쉬움을 감추고 두려움을 삼켰다. 반듯한 말에 아픔과 고통을 삼키며, 서문윤은 검설린을 오히려 위로할 뿐이었다. 저의 죽음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운표선이 두루뭉술하게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암시를 흘렸지만 그런 보증 없는 망상에 마음을 홀릴 만치 어리석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원한다는 말이 아니다.
서문윤은 정말 절실하게 살고 싶었다.
모진 줄로만 알았던 의형이 뚝뚝 눈물 흘리는 꼴을 보고 서문윤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진짜로 죽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다.
여한이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쉬움은 있었고 그는 아직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아.’
아직 강소성의 부모님 일과 장한성의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검설린에게 그가 숨긴 진실도 듣지 못했고. 제 손을 부여잡으며 뚝뚝 처연히 눈물을 흘리던 의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몸을 움찔했다. 그 때 서문윤은 의형의 뺨을 더듬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야만 했다. 그는 육 척이 훨씬 넘는 장신인데 서문윤은 그거 마치 궁궐 후원에 자리할 법한 가련한 미인같이 느껴졌다. 폭군이 미인의 웃음을 보려 비단을 찢은 고사를 조금은 이해할 것만 같기도 하고.
누가 들으면 피식 웃을 생각이지만, 서문윤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분명 그런 바람을 깊게 품고 있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다고! 제기랄!’
그의 비참한 과거를 엿보았음에, 서문윤은 그를 달래줄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상처받아 너덜거리는 마음을 봉합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었다.
검설린은 불안한 사내.
집도 고향도 없이 그저 정처 없이 길을 헤매는 사내. 그를 처음에는 그저 의롭다고만 생각했으나, 그게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는 뿌리가 없는 나무다.
‘죽기 싫어!’
강풍이 불면 저 멀리 날아가버릴. 겉은 강인하지만 안은 유리조각 같은 사내. 열정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그저 잿더미만 속에 자리한 불안한 이.
‘죽기 싫다고!’
그리고 서문윤은 그런 그의 뿌리가 되고 싶었다.
언제부터일까?
서문윤은 눈을 뜨지 못했으나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이지? 왜 하필 의형이 나에게 진심을 고백할 때지? 내가 그의 마음을 알아갈 때지? 살아가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나는 그의 옆에 있고 싶어!’
치밀어 오르는 원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뺨을 적시고 있었다.
‘선량하다고? 아니요, 의형! 도망가고 싶었던 것은 접니다. 하지만 당신이 옆에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서문윤은 눈앞에 자리한 단 한 명의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아직은 죽을 수가 없다. 아직은,
‘아직은 당신을 세상과 화해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것은 검설린의 절규를 듣고 서문윤이 품었던 그의 사명이었다.
‘당신의 마음속 응어리를 풀지 못했습니다.’
건전성으로 가는 길에서, 벌판을 달리며 광소를 흘리던 검설린을 바라보며 품었던 그의 다짐. 손가락이 달싹였다.
‘당신의 마음을 달래지 못했습니다, 저는.’
서문윤의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 * *
두구두구두구!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앓는 신음이 서문윤의 입술 사이로 얄팍하게 흘렀다. 서문윤은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는 입안에 침을 삼키며 기침을 콜록거렸다.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만 같이 쑤시고 아팠다. 특히나 배는 마치 간장이 찢어지듯이 아팠고.
소리를 치지 않는 까닭은 기력이 없어서였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조상님을 뵈러 갔다 온 것 같군.’
정말 죽을 뻔했다. 가까스로 살아난 몸. 서문윤은 잠시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그 순간 얼어붙고야 말았다. 두구두구두구, 지면을 거칠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서문윤은 잠시 넋을 놓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전신과 눈앞을 가리는 천막. 그는 제가 마차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고 빠르게 암막을 걷고 뛰쳐나갔다.
도대체 제가 왜 마차 위에 있단 말인가?
그는 마부석에 앉아 미친 듯이 채찍을 놀리는 검설린을 발견하고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쳤어!’
그리고 소정의 시간이 흘러 서문윤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구겼다. 검설린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짐작한 탓이었다.
“미쳤습니까!”
경악한 서문윤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검설린은 세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릴 만치 검설린은 말을 빠르게 재촉하고 있었다.
짜악!
채찍의 끝이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기자 말은 히이잉 소리를 내며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망연한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허허벌판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기겁하여 검설린의 팔을 부여잡고야 말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마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허허벌판 울리고. 당황한 서문윤이 검설린의 팔을 당기려 했으나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영문 모를 질주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이윽고 싸늘한 목소리가 벌판을 울렸다.
“놔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손 당장 놓으라 했다!”
“미치셨습니까? 여긴 어딥니까? 왜 벌판입니까?”
“안 미쳤다. 건전성 밖이다. 왜 벌판이냐고? 우린 떠날 테니까!”
“예?”
기겁한 서문윤의 말에 검설린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다 놓고 떠날 거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한 탓이었다.
결국 그는 장한성을 버리고 그들이 보신할 수 있는 장소로 향하는 것이다!
서문윤은 저희가 향하는 장소를 확신하지 못하였으나, 검설린이 지금 그 ‘사악하지만 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방편’을 따르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건, 그건 안 된다!
“의형, 제가!”
그리고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다급히 그를 말리려 할 때였다.
“이젠 못 참아!! 이, 이, 이! 이! 호구 같은 놈아!!”
그 순간 벌판에 울리는 울분에 찬 고함에 서문윤의 입술이 닫혔다. 말문을 틀어막기에 충분한 그 악에 받친 목소리는 서문윤의 얼굴에 순식간에 얼빠진 표정이 덧씌워지게 만들었다.
‘호, 호구?’
말들은 그 순간에도 지면을 빠르게 두드리며 질주를 이어나갔다. 서문윤이 멍한 눈으로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복면 위로 보이는 검설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젠 못 참는다고!”
저가 쓰러지고 검설린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왜 난 항상 잃어야 하지?! 왜 난 항상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냔 말이다!”
어떤 반응을 보이고 또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도.
“이젠, 이젠 안 돼!”
그는 진실로 절망했구나.
처참한 비명이 벌판을 울리고 있었다.
“너처럼 호구 같은 놈에게는 결정권을 안 넘겨줄 거다!”
그리고 돌연 서문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황 숙부랑 양양은 괜찮으려나?’
그는 불운한 생각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타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나 이 순간 서문윤은 그들의 안전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에 가장 책임이 있는 이는 황 숙부였고, 약으로 병을 치료한 이는 양양이다. 의형은 평소에 자포자기하여 황재천에게 심하게 죄를 묻지 않았지만, 제가 쓰러지고 폭발한 뒤라면 서문윤은 장담하지 못했다. 그것은 서문윤이 지금 가장 염려하는 일이었다.
검설린은 지금 지나치게 흥분했고, 서문윤은 혹여 궁지에 몰린 그가 험한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았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어야 된다! 그래야 장한성에 지원을 받을 길이 그나마 생겨!’
서문윤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스쳤다. 서느런 말이 서문윤의 상념을 또다시 끊었다.
“도망칠 거다!”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에 서문윤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울부짖는 말에 비정하게 채찍을 내려치며 검설린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서문윤은 복면 위에 자리한 칼 같은 눈에 서린 섬광에 입술을 다물고야 말았다.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다 놓고 떠날 거다! 난 중원에 갈 거고, 장한성과 건전성은 북성신의가 전염병을 다스리지 못한 사례로 거론될 거다! 사람들은 내가 신이 아니라 사람임을 알게 되고! 난 비웃는 말도 듣겠지!”
짜악!
“그래도 생존할 거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차린 서문윤이 얼빠진 표정을 수습하고 다급히 말했다.
“의형, 안 됩니다! 아직 건전성은 정비가 되지 않았고 장한성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희는 사기를 위해서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넌 정말 바보냐?! 그건 네 일이 아니다!”
“의형의 일이 제 일입니다!”
“내 일도 아니야!”
“의형!”
안 돼, 이래서는 안 돼.
검설린은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있었다. 미친 듯이 말을 모는 그의 팔뚝에 매달린 채 서문윤이 애걸복걸했다.
“장한성에서 나올 때 약속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꼭 돌아가겠다고! 명사가 한 번 한 약속을 어찌 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상관없다!”
“의형!”
“명예 따위 시궁창에 처박은 지 오래야! 두 번 처박힌다고 두려워할 것 같으냐?”
코웃음을 흘리는 검설린의 얼굴이 냉랭했다. 서문윤이 기겁하여 다시 말을 내뱉었다.
“장한성에 돌아가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다만 건전성에서 황 숙부를 더 설득하고 지원을!”
순간 검설린의 얼굴에 열기가 돌았다.
“내가!!”
완전히 폭발한 검설린이 채찍을 허공에 집어 던졌다. 휘리릭 날아가는 채찍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손에 움켜쥔 그의 팔뚝으로 힘줄이 도드라져 그가 몸에 힘을 주고 있음을 알려왔다.
검설린은 이 순간 진실로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절규와도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내가!! 너를 가족으로 여긴다!”
처절한 목소리였다. 서문윤이 얼어붙어 몸을 딱딱히 굳혔다.
“네가 소중하다고! 서문윤!”
뭐라고?
“내게 남은 건 이제 서문윤 너밖에 없다고!”
그는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눈앞이 캄캄하고, 또 귀가 멍멍하여 그저 망연하게 검설린의 분노에 젖은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운표선에게 그의 마음을 언질 들은 적은 있지만, 검설린이 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알고 있으나 서문윤은, 이토록 격렬한 말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검설린의 처절한 비명은 서문윤이 생각했던 것을 훨씬 넘어서는 절규였다.
이 정도로 그가 나를 아낀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내게 정이라곤 하나 없는 것같이 굴었잖습니까.’
기쁨인지 무엇인지 모를 격한 감정이 쏟아졌다. 서문윤의 얼굴에는 어느새 격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사람마냥 말을 잇고 있었다.
“널 살리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해?! 내가 널 살리고 싶다고 몇 번을 말했느냐?!”
칼바람이 뺨을 스치고 있었다. 검설린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격노한 목소리로 쩌렁하게 말을 내뱉었다.
“중원에 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제발 남쪽으로 나랑 떠나!”
그리고 서문윤은 그 순간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파리한 얼굴에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왜 이리 늦게 말하셨습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 그에 검설린의 안광에 서느런 기색이 감돌았다.
“뭐?”
“왜 이리 늦게 제게 본심을 말합니까.”
서문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분노하여 말을 내뱉던 검설린은 그 순간 이상한 징조를 눈치채고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한 손으로는 검설린의 팔뚝을 잡고, 한 손으로는 마차를 부여잡고 지탱하며 서문윤은 그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눈빛. 검설린의 얼굴이 굳는 순간 쉬어빠진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 말을 원했습니다. 그 말을 진실로 원했습니다.”
어느새 서문윤은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다 잊고 흥분하여 행동하고 있었다. 분노인지 희열인지 모를 거대한 감정에 휘말려 서문윤은 그저 소리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격양된 마음. 흥분하여 차마 바로 말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던 서문윤이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왜 하필이면 이때 그 말을 합니까? 제가 당신의 옆에 서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 줄 아십니까?”
칼바람이 매섭게 눈을 찔러 그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당신을 알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믿음을 사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그리 저를 어린아이처럼 대하십니까? 보호해주어야 할 환자로만 대하십니까? 다리는 나은 지 오래요, 마음도 나은 지 오래입니다! 저는, 저는…!”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흉흉한 말이 쏟아진 순간이었다.
“그 입 닥쳐!”
“저는 당신이 평생을 함께할 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서문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 저는 걸림돌이 되어서야 당신의 마음을 들었습니다! 명예를 잃고 방황해온 당신이 또다시 장한성 사람들과의 약속을 잊고 명예를 잃어버리게 만들게 하셔야겠습니까!”
“그 입 닥치라고 했다!”
검설린의 기세는 흉악했으나, 서문윤이 그를 무서워하던 때에 비해서 훨씬 더 사나웠으나 서문윤은 멈추지 않았다.
“왜 이렇게 독선적이십니까! 왜 이렇게 제멋대로이십니까!”
그의 팔을 거칠게 부여잡으며 서문윤은 악에 받쳐 소리치고 있었다.
“당신은 정녕 제 마음을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까?!”
“입 닥쳐!”
그리고 검설린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뭐가 문제냐! 뭐가 문제야! 명예가 뭐가 중요해?”
“의형!”
“웃기지 마! 그 입 닥치지 않으면 당장 찢어버리겠다!”
거칠게 팔을 비틀어 서문윤의 손을 떨어내곤 내뱉은 말이었다. 무너지는 중심. 그를 되잡으려 몸을 웅크린 서문윤은 개선장군 같은 기세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대화의 주도권은 검설린에게 다시 넘어갔다.
“비석에 새겨질 무궁한 명예라 할지언정 죽으면 관짝에 한 줌도 그것을 가져가지 못한다. 이름 따위가 넋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물며 내가 원하지 않았던 명예가 내게 그리 중요할 것 같아?”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중요한 건 너다, 서문윤!”
그리 말을 하며 검설린은 부드득 소리 내어 이를 갈곤 홱 고개를 돌려 마부석에 엎어진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제기랄! 왜 이해를 못 해?!”
관자놀이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로 검설린은 서문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흉흉한 기세에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분노에 찬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똑바로 말해, 서문윤. 너는 명예를 위해 돌아가겠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숨을 멈추고, 그리고 검설린은 차게 웃으며 내뱉었다.
“진심을 말해! 서문윤! 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다고!”
서문윤은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명예 따위 중요한 게 아니라고! 너는 그냥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기 힘들어하는 호구 등신이라고! 내가 정녕 네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마음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에 서문윤은 그것을 부인하고 싶었다. 검설린의 얼굴에 띤 비웃음. 저를 조롱하는 듯한 눈길. 서문윤은 입술을 질겅 물다가 시선을 회피했다. 검설린의 입에서 하! 높고 짧은 조소가 흘렀다.
“그, 그들을 살리고 싶습니다.”
검설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소를 흘리며 답했다.
“그럴 줄 알았지, 넌 그런 천치니까.”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말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서문윤은 말을 내뱉기 거북해했다.
“왜?”
그것은 검설린의 험악한 목소리 때문도, 보기 드물게 살벌한 기세 때문도 아니었다.
“왜지?”
서느런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목에 감도는 비릿한 냄새를 서문윤은 목울대를 움직여서 침과 함께 삼킬 뿐이었다. 평소라면 서문윤의 이상한 점을 눈치챌 검설린은 흥분에 고조되어, 말을 모는 일에 집중하여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그걸 물으십니까.”
지금 이 순간 서문윤은, 말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마치 어깨 위에 무거운 추가 놓인 듯하다. 어렸을 때 황 숙부와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게 인의를 말했던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은 그 말을 쉬이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으로 알 수 있었다. 검설린은 그 말을 발작 수준으로 싫어했고, 그것은 서문윤의 말과 반대되는 심정을 불러일으킨, 참혹한 사건을 그가 겪은 탓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럼에도 그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어찌 말합니까, 의형.”
지금 이 말을 내뱉지 않으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저 한마디뿐인데, 저마저 부정한다면 검설린의 세상이 완전히 잿더미가 될 것만 같아 서문윤은 그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뺨이 눈물로 축축이 젖고 있었다. 그 눈물이 칼바람을 맞은 탓인지 마음속에 벅차오르는 무언가의 격한 감정에 의한 것인지 서문윤은 알지 못했다.
“개소리!”
다만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 싶은 게 본능이라고? 사람의 본성이 그리 선하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저마저 그 말을 부정한다면, 검설린은 영원토록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그리고 검설린은 울고 있는 서문윤을 향해 광소를 터트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서문윤! 너는 생각해보았나? 너는 상처입지 않은 옥석이고 선택받은 인간이다! 인간이 언제 민낯을 드러내는 줄 아나? 태어날 때부터 시궁창에 처박혀 진흙을 기어 다니는 자와 손에 옥과 패옥을 쥔 자의 차이를 너는 진정 몰라? 넌 후자고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지!”
사람의 말이 저리 비정할 수가 있던가?
“서문윤, 서문윤! 너는 왜 귀중한 목숨을 아끼지 않지? 사람은 마땅히 본능적으로 위기에 몸을 수그려 야합을 한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부득불 우기는 거냐? 목숨을 무릅쓰고 그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그저 너란 한 사람의 고결함에 불과한 걸 모르는 거냐? 너 혼자 고결해봤자 뭐가 바뀌지? 그들은 네가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고 너 혼자 천하의 백치가 될 뿐이다. 너는 내게 유일한 버팀목이 된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냐!”
서문윤은 검설린을 울며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죽으면!”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그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으며, 또 그를 연민하고 있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의형은 정말 벼랑 끝에 몰려 있었구나.
참담함을 느끼는 서문윤의 귓가로 처절한 절규가 이어졌다.
“난 너만 무사하면 돼! 그런데 왜, 왜, 왜! 말을 안 들어!”
말은 깊은 원망으로 흐르고 있었다.
“왜 사람에 굶주린 짐승에게 정을 줬지? 왜 그저 혼자 홀로 죽겠다던 내게 다가와서 의형이라 불렀지? 왜 내가 모욕을 받는데 화를 내고, 왜 내가 사람을 증오하는 걸 슬퍼했지?”
칼바람이 뺨을 스치고 서문윤은 목구멍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핏덩어리를 삼켰다.
“왜 내게 다가와 쫑알쫑알 말을 해댔어! 왜 내게 다가와 의형이라 불렀냐고? 왜 내가 사람에 기대게 만들어? 왜 내게 살아갈 희망을 품게 만들어?”
검설린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벌판을 쩌렁하게 울리는, 짐승의 포효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왜 내게 연모한다 말했어!! 왜 내가 가족을 다시 가지고 싶게 만들어!!”
서문윤이 어찌 더 말을 하겠는가? 그가 이 상황에서 어찌 더 말을 하겠는가?
입술 밖으로 나오는 것은 죽어가는 짐승이 흘릴 법한 신음이었다. 그저 그는 검설린의 말을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나는 내 터전과 기반을 두 번이나 빼앗겼다! 그리고 너마저 빼앗겨야 한다고? 아니, 난 그렇게 못 해. 왜 나는 정을 준 사람들을 계속 놓아 보내야만 하지? 서문윤? 나는 왜 계속 수탈당하고야 말지? 내가 선량하다고 얘기하진 않겠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고통받을 만큼 잘못했나? 정말 이렇게 세상에 무자비하게 버림받을 만큼? 운표선이랑 황재천은 긍지를 버리고 식솔을 살렸지. 이청융과 그때 죽어간 이들은 긍지를 살리고 목숨을 바쳤고.”
헐떡거리며 검설린이 웃었다.
“그런데 난 아무것도 없어.”
“…….”
“나는 긍지도 잃고 가족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말은 차츰 가라앉아 쓸쓸한 빛을 띠어갔다.
“서문윤, 서문윤! 오직 나에게 남은 것은 빈껍데기뿐인 과거의 영광과 죽은 이들의 원한에 찬 목소리와 멸시에 찬 눈뿐이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 순간 숨을 들이켰다.
“서문윤.”
언뜻 드러난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난 너밖에 없었어.”
그는 눈물보다 참혹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으며 서문윤은 마음속에 번지는 서글픈 말 한마디를 간신히 욱여넣었다.
“날 선량하다 말하는 사람이….”
저것은 비정한 삶이다.
“너밖에 없었어….”
딱딱하게 굳은 검설린의 등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저 신음을 삼킬 뿐이었다. 운표선의 말로 사람에게 정을 주기를 두려워하는 그를 알 수 있었다. 외로움을 타는 그가 저를 소중히 여기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말을 실감하지 못했고,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알겠다.
‘의형은 내가 없으면 죽겠구나.’
그런 생각은 한 번도 못 했다. 검설린은 냉혹하고 강인한 사람이라 서문윤은 그의 두려움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문윤의 생각보다 더 여린 자였고, 상처 입은 자였다.
그가 불쌍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절 소중하다 하시면서 왜 절 상처 입히셨습니까.”
서문윤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절 소중하다 생각하면서 왜 제게 다가오려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의형.”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탓하는 게 아니라. 그저 안타까워서.
“왜 제게 마음을 터놓지 않고 싸늘히 대하셨습니까? 왜 용기를 내지 않으셨습니까?”
너무나도 늦게 마음을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그저 그 사실이 안타까워 말을 내뱉고 있었다.
“왜 행복을 손에 쥐려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검설린의 반응은 냉혹했다.
하, 하하!
조롱이 담긴 웃음이 흘렀다. 잠시 피식피식 터지던 웃음은 곧 들판을 울리는 광소로 변해 서문윤의 마음을 짓눌렀다.
으하하하하!
시원스레 웃는 검설린을 서문윤은 허망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마차는 덜커덕거리며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저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에게 돌아온 말은, 그가 실로 예상 못 했던 참혹한 것이었다.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서문윤의 얼굴에 푸르스름한 빛이 돌았다.
뭐?
검설린은 흐흐, 웃음을 흘리며 음산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는 항상 정교하게 행동하고 또 정도 이상의 일을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들었고, 제 껍데기 안에 뒤끓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리하여 검설린의 말은 그가 기피하려 들었던 화제에 이르렀다.
“그래, 아예 사실대로 말해주랴?”
갱도의 끝, 막장에 이르러서 검설린은 가릴 게 없었다.
무저갱을 파고드는 암담한 눈이 과거의 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가운 웃음이 흐를 때 서문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사실을?
“진실을 알려달라 했지. 내가 왜 네게 냉랭히 대했냐고? 네게 왜 모든 사실을 안 말했냐고?”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네가 장이족의 천막에서 맞은 향이 뭔 줄 알아?”
그게 지금 왜 여기서 나와?
서문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문윤이 그의 몸 앞을 가로막아 향을 대신 맞은 일이었다. 순조롭게 나아가던 서문윤의 다리를 또다시 절게 만든 사건.
동요하는 서문윤을 향해 잠시간 시선을 주던 검설린이 웃었다. 그는 여전히 순진하고, 또 여전히 착해빠지고, 또 바보 같다. 그가 기억을 지니지 못한 새 수도 없이 보냈던 밤. 그것은 둘만의 밤이었으나 동시에 오로지 검설린만의 것이었다. 정신을 놓은 채 울먹거리는 서문윤의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으며 검설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덮는 따뜻한 온기에 순종하여, 검설린은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그는 폐부에서 들끓어 오르는 말을 터뜨리며 웃었다.
“미약이다!”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경악에 사로잡힌 청년의 얼굴을 무시하며 검설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하다!
진실로 시원하다!
지금껏 종기처럼 마음에 고였던 사실을 터뜨리며 검설린은 후일을 생각지 않고 그저 시원스레 웃었다. 그는 차라리 정신이 나간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한동안 그 어느 말도 내뱉지 못했다.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
싸늘하게 식은 몸. 창백한 뺨. 칼바람에 지독히 따끔거리던 얼굴에 감각이 사라졌다. 그는 아래로 밑도 끝도 없이 잠수하는 느낌을 받은 채 망연한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어붙은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이 코웃음을 쳤다.
서문윤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몇 번이고 다시 말해주지! 미약이다! 미약!”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두려움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문윤이 들어본 적만 있는, 흉측하고도 추잡스러운 물건의 이름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청년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검설린은 거기에 쐐기를 박으면서 소리쳤다.
“음적! 색마가 여인을 꾈 때 쓰는 사특한 미약이다! 서문윤! 네 몸을 서리처럼 차게 만든 것!”
미약, 미약.
서문윤의 입술 사이로 고통어린 신음이 흘렀다. 실제로 그는 쓰러지려는 신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검설린의 말에 하나둘씩 조각이 맞추어지고, 동시에 서문윤은 시야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널 범한 게 아니야. 네가 매일 밤 내 방에 들어와 내 위에 올라탄 거다! 네가 나를 탐했고, 사내와 교접하길 바라며 내 몸을 더듬었지. 백년화가 뭐에 쓰는 약이냐고? 널 고치는 데 쓰일 재료다! 하하하하!”
광소가 들판을 울렸다. 그 순간 서문윤의 두 눈은 아득한 저편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사리를 따지고 있었다.
‘의형은 색을 밝히지 않는 성품. 그의 드높은 자존심에 몰래 약을 먹이고 몸을 취한다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몸만을 취한다면서 정이 들었다 말하는 것도 아귀가 안 맞는다. 그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라 생각한들 검설린의 태도는 몹시 싸늘했으며, 성욕이 들 만한 상황에서 저를 피로에 가득 찬 얼굴로 안았던 일도 수상했다.
“그, 그걸 왜?”
그럼에도 서문윤은 그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왜 그걸 지금 말하십니까?”
정말?
정말 내가 미약에 중독이 되었어?
지금껏 의형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고?
그가 지금 상황에서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의 말에 아귀가 안 맞던 일들이 꿰어 맞추어지고 있는 것을 알았음에도 서문윤은 쉬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무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이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사내를 받고자 하는 향에 중독이 되었다 인정을 쉬이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고, 암담한 현실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서서히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내 사실을 인정한 그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와 동요가 어우러져 일그러져갔다.
어째서 의형은 그것을 내게 숨겼단 말이지?!
그리고 그의 귓가에 시원한 웃음이 흘렀다.
“하하, 왜 내가 안 말했냐고?”
검설린의 눈에 불길이 치솟은 순간이었다.
“제기랄! 고작 다리 하나 부러졌다고 슬피 울면서 황하에 뛰어들려는 놈에게 내가 어떻게 이제 사내 없이 못사는 몸이 되었다 말해! 이 철 없는 놈아, 네가 그런 뜨거운 눈으로 맨날 나를 훑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너한테 말해! 내가 너한테 말하면 넌 자결하지 않으면 나와 계속 몸을 섞을 텐데! 네 마음이 내게 올 텐데!”
서문윤은 그 말에 이 악물며 소리쳤다.
“그게, 그게 뭐가 어때서요!”
그리고 검설린은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 미쳤어?!”
미치긴 뭐가 미쳐? 그러나 서문윤은 이어진 그의 역정에 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 뿐이었다.
“내가 무슨 염치로 네게 그리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집도 재산도 뭣도 남지 않은 부랑자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고질병을 안고 사는 데다가 조정 고관에 배신자라 낙인찍혀 없는 자리에서 욕을 먹고 조롱당하는 놈이! 심지어 나이도 너보다 열 살 넘게 많은 폐인 새끼가!”
핏발이 선 눈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만약 채찍이 있었더라면 말의 엉덩이를 피가 나도록 내려쳤으리라. 그러나 진즉 던져버린 채찍에 말을 닦달하지 못하고 검설린은 그저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울분을 토해낼 뿐이었다.
“그따위 놈이 널 어떻게 거둬! 네 연정을 어떻게 받느냐! 불운만 안고 다니는 내가 어떻게! 어떻게!”
서문윤은 그저 멍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그 눈처럼 순수한 마음을 받아!”
목소리는 피를 토하는 발악으로 이어졌다.
“서문유우우운!!”
들판을 울리는 이름에 서문윤의 눈가가 떨렸다. 검설린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 무책임한 놈아!”
처절하기 짝이 없는 사내의 비명. 고막을 갈기갈기 찢을 듯이 그는 발작을 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내게 살아갈 희망을 품게 했으면 네가 날 책임져야지! 네가 날 책임져야지! 네가 날 거둬야지! 네가 내 인생을 수습해야 하는 거잖아! 네가 감히 어딜 떠난다는 거지?!”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테니까.”
“뭐?”
“책임질 테니까! 당장, 이 마차 멈추십시오!”
고삐를 부여잡은 검설린의 팔을 잡아당기며 내뱉은 말이었다.
두 눈에 불길을 켜며 서문윤은 악에 바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차 멈추라고, 악천화!!”
검설린의 얼굴에 동요가 스친 순간이었다.
“너, 알았…?”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검설린은, 그러나 중심을 찾지 못해 순간 휘청거리는 서문윤을 발견하고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다. 마차 아래로 추락하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이 빠르게 몸을 내던졌다.
바닥에 몸을 구르며 서문윤은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의형은 내가 거둬야겠구나.’
무사태평한 생각을 하곤 또 강소성에 있을 부모의 생각을 하며 그는 헛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장안사준(長安四俊)!
그것은 한 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네 명을 엮는 말이었다.
바로 동궁태자요 성군의 자질로 기대받던 비응룡 이청융, 명가의 후손이자 의기로 명성이 높았던 사영귀 운표선, 공맹의 학맥을 계승한 유자이자 목민관으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던 명주작 강서진, 정명공이자 북적의 침입을 물리쳤던 영웅 팔기린 악천화를 의미하는 말.
그리고 서문윤은 마지막 이름에 방점을 맞추었다.
악천화.
그래, 악천화!
그것은 바로 혜성처럼 나타난 한때 영웅의 이름이었다. 회흘의 군대가 수도 근처에 이르고 토번이 국경에서 약탈을 자행할 때 장한성주였던 악천화는 좌병마사 삭방 절도사로 승진하여 하북 지방을 수복했다. 장평, 수천, 어선에서 이뤄진 세 번의 큰 전투 끝에 강북을 완전히 지킨 그는 정1품 공의 작위를 내려받아 정명공이 되었고, 이후 있던 두 차례 북방의 다툼과 한 차례 큰 반란을 정리하여 8도 절도사로 부임했다.
한때 그 누구에 비할 바 없이 빛나고, 사람들에게 청렴함과 고아한 성품으로 찬미받았으나, 악천화는 동궁사변 때 하야하고 낙향한 이후 소식이 없었다.
서문윤은 이제야 그의 일을 검설린과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있었다.
동궁태자와 운표선과의 관계.
오곡현에서 일어난 일에서 엿보았던 현 강소성주인 강서진과의 그 어떤 인연.
태자의 신임을 받았으나 그를 고발한 악명까지!
모두가 다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왜 몰랐을까? 의형은, 의형은 악천화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서문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명백히 그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귀결되었다. 서문윤은 뒤늦게 검설린이 제게 거의 작정하고 제 정체를 알렸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그 쉬운 사실을 왜 몰랐지?
그러나 과거의 서문윤은 정말 그와 검설린을 전혀 연관 짓지 못했다. 검설린은 장안사준 중 가장 명성이 높았고, 백성들에게 추앙받았으며, 또 많은 권력을 가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황태자나 황제보다 더한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백만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린 자. 또 기울었던 나라를 구원한 자.
서문윤이 어찌 그 드높은 이를 검설린과 연관 지을 수 있겠는가?
검설린도 물론 드높은 이었으나, 그의 염세적이고 비틀린 면을 아는 서문윤은 그 두 사람을 동일인이라 쉬이 생각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아름다운 흑발, 커다란 키. 악천화의 용모를 가리키는 말은 서문윤이 아는 검설린의 일면이었으나, 그럼에도 서문윤은 그 말을 귀로 넘기고야 말았다.
‘그래서 상투를 단정히 틀고 얼굴을 가리셨구나.’
그러나 이제야 알겠다!
검설린은 장안사준이자 팔기린이자 정명공이자 장한성주이자 북방의 대장군이었던 악천화였다.
‘니취의 소문은 아마 뒷공작이겠지. 쉬이 정체를 판단하지 못하도록 명망 높은 보타암의 이름을 빌린. 어떻게 불교의 성지와 인연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동행한 나 또한 속을 만큼 대단한 효과였다.’
불자는 거짓말을 못 하고 보타암은 위엄 있는 곳이니 사람들은 니취의 소문이 거짓이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검설린은 빈민을 찾아다녔고, 8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렇게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서문윤은 그의 정체를 확신하고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 알았…?”
그 말은 확언의 말이었다. 놀라움이 스치는 얼굴 또한 예상에 확증을 더했고.
그는 바로 전설로 남은 영웅 악천화였다.
‘완전히 호랑이 앞에서 햇병아리가 짹짹짹거렸군, 그의 눈에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기가 막혀 웃을 따름이었다. 까마득한 정신 속에서 서문윤은 마차 밖으로 떨어지는 몸을 껴안는 손길을 느끼며 숨을 멈췄다. 허리를 껴안고 저를 고요하게 바라보는 눈은 진흙이 자리한 연못과 같았다. 그 속에 피어나는 연꽃을 보고 있었다.
정심한 눈.
서문윤은 저를 감싸 안는 손길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소문다운 무위.’
질주하는 마차에서 떨어지는 몸에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싼 검설린은, 떨어지기 직전 몸을 틀어 서문윤의 부드럽게 받았다. 풀이 무성한 벌판에 등을 대고 구른 검설린에게서 서문윤은 경미한 수준 이상의 충격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몇 번을 구른 뒤에야 검설린이 바닥에 등을 댄 자세로 정지했다.
질주하는 마차에서 떨어졌으나 서문윤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푸르릉! 말이 멈추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서문윤은 기침을 콜록거리다가 까마득한 시야 속에서 저의 아래에 자리한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고 몸을 굳혔다. 검설린이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았지?”
그리고 서문윤은 악에 바쳐 소리쳤다.
“악천화, 이 개자식아!!”
검설린의 얼굴에 빠각 균열이 서린 순간이었다. 음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아예 막나가자는 거냐?”
아무리 서문윤이 요즘 그에게 대든다지만, 검설린은 그의 윗사람이었고 서문윤은 그를 무서워했다. 흠칫한 서문윤이 꼬리를 내리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의, 의형을 부른 게 아닙니다. 악천화를, 악천화를 부른 겁니다.”
그러나 변명을 듣는 검설린의 얼굴은 빙판처럼 싸늘할 뿐이었다.
“아니, 말 잘했군. 이제 내 부랑하는 개새끼 같은 본성을 알아챘나?”
“그게 당신의 멍에였습니까? 족쇄였습니까?”
“그래, 내 멍에였고 족쇄였다.”
검설린의 얼굴에 찬바람이 돌았다. 바닥에 누운 상태였으나 그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교룡처럼 사나웠다. 그는 북방의 대장군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무장들을 거느렸던.
그의 옛 명성을 떠올린 서문윤의 얼굴에 순간 겁이 스쳤다. 검설린은 그의 목을 비틀어 죽일 사람처럼 노려보았으므로 그는 겁을 먹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빠르게 마음을 수습했다.
“나를 기만하고 그리 홀로 죽을 작정이었습니까?”
지금은 두려움보다 울화가 강렬했다.
“당신의 과거가 힘들고 불안해서? 너무 힘이 들어서 나를 속이고 죽을 생각이었습니까? 내게서 정을 떼고 홀로 몰래 죽을 생각이었습니까?!”
미약의 일은 둘째 치고 서문윤은 그것이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의형이 저를 속이고 홀로 죽음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비참하고 싫었다.
그는 저에게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거절한 준비를 하며 나 자신을 기만했다.검설린의 행동은 진실로 사악했다. 그는 정녕 한 톨의 믿음도 주지 않았다.
배신감에 휩싸인 서문윤이 그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분노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디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절 기만했다고!”
그가 일말의 양심을 가졌다면 저의 말에 부끄러운 낯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의형은 서문윤의 예상을 와장창 깨고 그의 뜻대로 했다.
검설린의 얼굴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그래! 너! 너! 너! 너만 없었다면!”
검설린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서문윤의 몸을 바닥에 눌렀다. 서문윤은 어깨를 쾅! 짓누르는 손에 얄팍한 신음을 삼키고야 말았다.
복면 위에 자리한 두 눈에는 서슬 퍼런 안광이 스치고 있었다.
마치 짐승의 것 같은 눈이었다.
“너만 없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원히 쉴 수 있었겠지!! 모든 게 완벽한 계획이었어, 너만 없었다면!!”
완벽하긴 뭐가 완벽해?!
죽겠다는 말을 그리 묘사하고 있는 검설린에게, 울컥한 서문윤이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분노에 찬 노성은 그의 입을 빠르게 막고야 말았다.
“너만 없었다면 난 기다리고 기다렸던 안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네가 다 망쳤다, 네가!!”
검설린의 손은 거의 서문윤의 어깨를 비틀고 있었다. 거의 발악에 가까운 증오어린 목소리가 울렀다.
“네가 날 망쳤다고!! 서문유우우운!!”
그리고 서문윤은 고통을 이기는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제가 뭘 망쳤습니까?!”
그의 관자놀이에는 시퍼런 핏줄이 올라 있었다.
“살고 싶다면 살면 되지 왜 제가 의형을 망쳤습니까? 죽어가는 의형을 살고 싶게 만들었으면 제가 당신을 구한 거지 왜 망친 거라 합니까?”
“그러려면 죽지나 말든가, 왜 고집을 부려서 날 또다시 고통스럽게 만들지?”
빈정거리는 말에 서문윤이 울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같이 죽으면 될 것 아니야!”
검설린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 순간이었다.
“뭐?”
서문윤의 어깨를 그러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욱씬거리는 어깨의 고통을 삼키며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삼키곤 그가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1년, 1년 버티면 됩니까?”
“뭔 개소리냐.”
“10년 약조는 이제 거의 1년밖에 남지 않았다 하잖았습니까?”
솔직히 서문윤 스스로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1년 버티겠습니다. 약조 끝나는 날까지는 반드시 살겠습니다. 의형이 자결할 수 있는 날까지 살겠습니다. 차라리 같이 죽든가 하겠습니다.”
검설린은 얼이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돌아가서 같이 죽든가 살든가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악에 바친 얼굴로 하는 말에는 거짓 하나 엿보이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 말을 내뱉고 떨리는 눈으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검설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혹시 방금 전에 머리가 땅에 떨어진 거냐?”
농담기 하나 없는, 진중한 얼굴로 묻는 말에 서문윤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
그의 어깨를 퍽 강하게 밀치며 서문윤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보고 미쳤다는 겁니까?! 머리는 멀쩡합니다!”
검설린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냉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 답이 없군. 도대체 서문린은 너를 어떻게 가르쳤던 거지? 왜 하루가 다르게 미친 소리를 갱신하는 거냐?”
“제가 죽어서 남게 되는 게 고통스럽다면 같이 죽으면 될 것 아닙니까? 건전성이든 장한성이든 돌아가서 그곳에서 같이 생애를 마감하면 충분할 것 아닙니까?”
검설린은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막히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평소에 윗사람을 두려워하던 서문윤은 그를 향해 빠르게 말을 쏘아붙일 뿐이었다.
“하지만 의형은 그러기를 죽도록 싫어할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말했지만, 그저 제가 소중해서 살리고 싶어 한 거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침음을 흘렸다.
“너.”
그 말에는 울컥한 기색이 보였으나 검설린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안색을 살피며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검설린의 얼굴이 완전히 차가워졌을 때 서문윤은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가 소중해서 사지를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반대로 저는 당신이 소중해서 사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잿더미 같은 당신을 다시 살리려 저는 돌아갈 겁니다.”
서문윤은 그리고 일그러진 웃음을 흘렸다. 검설린의 두 눈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너는 완전히 미쳤다.”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은 말. 그러나 서문윤은 검설린의 말을 듣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이런 제 마음을 당신은 아십니까? 사지로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제 마음을 아십니까?”
검설린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생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잖습니까, 의형.”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검설린의 복면에 검지를 걸었다. 숨결이 섞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천천히 수아한 얼굴이 드러나고, 검설린의 입에서는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문윤은 그 아리따운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입꼬리를 저절로 올리고야 말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서문윤은 항상 웃음만이 나왔다.
그리고 굳은 입매를 억지로 끌어 올린 채, 억지로 웃음을 흘리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입술을 떼고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설린의 숨을 멈추게 한 말이었다.
“함께해주십시오, 의형.”
그 말이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검설린은 서문윤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반듯한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창백한 얼굴에 분노와 탄식이 섞였다. 연이어 울분에 찬 듯 경악에 찬 듯 고성과도 같은 목소리가 높게 허공을 울렸다.
“미친놈!”
서문윤은 꿋꿋이 말을 이을 뿐이었다.
“제가 가족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사내다, 이 얼 나간 어린애야.”
“중요합니까?”
“네 아버지가 내 수하였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입술을 다물었다. 잠시간 짙은 시선이 서문윤을 쓸었다. 그는 그저 묘한 미소가 감돈 얼굴로 시선을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침묵 끝에 검설린은 문득 입술을 열어 느릿한 말을 내뱉었다.
“난 불행을 불러일으켜.”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감정을 수습하곤, 심호흡 끝에 입술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저를 떠나보낼 겁니까?”
검설린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풀밭에 몸을 뉘인 채로 서문윤은 그를 차분한 눈으로 응시했다.
검설린은 동공을 떨며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서문윤은 고요하고도 집요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의 압력이었다. 검설린의 얼굴에는 서서히 분노가 사라져갔으며 그곳에는 어느새 체념만이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는 사형당하기 직전의 죄수 같은 빛이 보였다.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문득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형. 저 없이 살 수 있어요?”
그 말은 질문보다 확신에 가깝다. 검설린은 서문윤을 지긋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아니.”
잠긴 목소리였다. 서문윤은 웃었고 검설린은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마음을 내뱉은 것도 그였고, 진심을 내뱉은 것도 그였으니. 아무라 낯가죽이 뜨거워도 이젠 말도 잇지 못하겠다. 그리하여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얼굴에는 참담함이 자리해 있었다. 패자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승리를 깨닫고 웃었다.
“저도.”
결국 그에게 이기고야 만 것이다. 오만하고 고집 센 독불장군의 뜻을 꺾고 양보를 받아냈다. 그 순간 서문윤은 기쁨을 참지 못해 병자답지 않은 생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저도 그렇습니다.”
검설린은 더 이상 힘이 없는 것처럼 그의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10년은 늙은 듯 그는 허무한 눈으로 서문윤을 응시할 뿐이었다. 서문윤의 어깨를 쥔 손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는 매가리 없는 인형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켜주시겠습니까?”
서문윤은 대답 않는 검설린을 가볍게 밀치고 지면에 발을 대었다. 잠시 몸을 비틀거렸으나 서문윤은 희열에 사로잡혀 가벼운 어지럼증을 신경 쓰지 않았다. 흙먼지를 털어내는 서문윤을 바라보면서 검설린은 깊은 침묵 끝에 탄식을 흘리고야 말았다.
“미쳤구나.”
서문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제 혼을 당신 안에 두고야 말았습니다.”
“완전히 제대로 미쳤어.”
“왜 제가 미쳤다고 하십니까? 저는 정상입니다.”
“서문린이랑 황재천에게 물어봐라. 그 둘은 날 죽이려 들 거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검설린이 헛웃은 순간이었다.
“미친놈.”
그는 더 이상 서문윤을 설득하려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후회할 거다.”
“제가 책임질 일입니다.”
서문윤을 노려보며 검설린이 복면에 다시 손을 댔다. 벗긴 복면을 다시 쓰려는 검설린을 서문윤이 아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둘이 있을 때는 얼굴을 드러내시면 안 됩니까?”
묵묵히 복면을 고쳐 쓰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무언의 기색으로 짜증을 내는 검설린의 행동을 지그시 응시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서문윤의 눈이 어느 순간 깊게 가라앉았다.
‘후회할지도 모르지.’
차분한 얼굴로 의복을 정리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흘린 핏물로 새하얀 의복은 더러워져 있었다. 급하게 뛰쳐나온 듯 의관은 봉두난발이었으며 검설린의 얼굴은 그간 고생 끝에 초췌하게 변해있었다. 그를 애틋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서문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만족한다.’
벌판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드넓은 장소에는 오로지 단둘만 있었고 서문윤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을 나누기에 좋은 장소이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가 벌판의 끝에 걸리고 석양이 들판의 푸르고 노란 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건전성의 높은 성벽이 저 멀리에 보였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저곳으로 돌아가야지.
그는 생존을 바라고 있었으나, 동시에 생존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숨을 연명하는 삶이 얼마나 잔혹한지는 알았다. 그리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의형의 마음도.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면서도 서문윤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명을 받은 것만 같았다. 마치 하늘의 부름을 받은 것만 같았다. 명사의 명예를 위함도, 의무를 지려 함도 아니다. 양양의 말마따나 그의 길은 의원이 아니었고, 무관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저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많은 일들이 있던 곳. 그의 과거를 마주한 곳에서 서문윤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만일 장한성이 무너져 잿더미가 된다면 그것도 만족한다.
‘타지에서 죽는 것이 좀 걸리지만.’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바라보니 그는 어느 순간부터 한탄에 젖은 얼굴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착잡함에 젖은 두 눈.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의형의 옆이라면 괜찮다.’
태산처럼 강인해 보였던 사내가 이제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을 뿐이었다. 그를 떠나보내기 싫었다. 그를 홀로 보내기 싫었다. 할 말을 잃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향해 서문윤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사람에게 모두 죽을 자리가 있다 하셨습니까?”
“…….”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한 자가 불행하다고 하셨습니까?”
“…….”
“그럼 저곳이 의형의 죽을 자리라면 어떻습니까?”
답을 하지 않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의형과 함께하겠습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결국 날카로운 조소를 흘렸다. 태평한 말을 내뱉는 청년을 향해 예민한 말이 떨어지고, 서문윤은 빙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더벅머리 어린아이(豎子)가 감히!”
그러나 그리 비웃으면서도 검설린은 그의 말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