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장안사준(長安四俊)(9)
“너 설마 계속 이런 태도로 이 아이에게 소홀히 했던 거냐?”
“한 사람을 죽여 다른 열 사람의 생을 살린다면 어찌 할 것이냐? 나는 이미 선택을 했다.”
“미안해, 내가 미안.”
검을 쥔 손이 부들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장면에 서문윤은 차마 경악을 금치 못해 얼굴을 무섭게 굳히고야 말았다.
정말로 그가?
그가 정말 배신을?
“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라.”
밤에도 형형한 눈이 시퍼렇게 빛나는 사내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익은 것이다. 평소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어디 갔는지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냉엄한 목소리로 운표선은 말하고 있었다.
“감히 내게 그따위 말을 하려면 적어도 네 상관을 데려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수상쩍어 보이는 군사를 적대하지 않으며 그와 무어라 이야기를 늘어놓는 운표선의 모습.
그리고 서문윤에게 간간히 들려오는 말은 그의 마음속 의심에 쐐기를 박기 충분했다.
전쟁, 황제, 청매소.
그들이 말하는 단어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순간 확신이 든 서문윤은 앞뒤를 따지지 않고 바로 검을 들어 군사의 목을 베려 들었다.
‘그가 배신했어.’
청년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검집에서 검을 뽑아, 흙바닥이 파이도록 힘을 주어 도약하고, 흥분한 군사의 목덜미에 검을 꽂아 넣기까지 걸린 시간은 눈이 한 번 깜빡일 시간.
‘운표선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고수다. 한 호흡에 처치하지 않으면 안 돼.’
다대일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를 빠르게 승부의 변인 요소로 우선 제거하는 것.
서문윤의 칼날은 군사의 목에 머리카락 한 올 스칠 만할 거리에 이르고 있었다.
‘됐다!’
그리고 기습이 거의 성공에 이를 때였다.
“커흑!”
그는 제 가슴을 때리는 발길질에 허공을 날아 검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짧은 순간 저를 향해 형형한 눈빛을 빛내는 운표선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군사의 목에 검을 꽂으려 했으나 가슴에서 퍼져 나가는 충격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발길질은 몹시 거세어, 서문윤은 군사를 베기는커녕 검을 손에서 떨어트리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던 것이다.
청년은 바닥을 구르던 중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몸을 멈칫하고야 말았다.
파르르, 은빛 검신이 살갗에 닿은 채 떨리고 있었다. 서문윤은 제 목에 닿은 검에 으득 이를 갈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서곤, 분노가 죽죽 흘러나오는 눈으로 검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배신, 하셨군요.”
충격이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기습이 막혀 사내의 손에 제압당한 채 무릎 꿇린 상황. 서문윤은 그러나 목에 닿은 칼날이 두려워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몸을 덜덜 떨었다.
“배신하셨군요, 당신은 배, 배신하셨습니다 .저, 저희를….”
운표선은 그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의형을….”
그는 의형의 벗이요,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의형이 끝까지 신뢰하던 자였다. 그리고 지금 제 목에 칼을 들이밀고 살기를 뿜고 있고. 그 사실에 충격에 떨던 서문윤은 마침내 분노에 차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버럭 소리치고야 말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리고 청년을 바라보던 운표선은 돌연 입가에 봄날에 부는 훈풍 같은 미소를 지었다.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운표선이 돌연 몸을 움직였다. 서문윤은 이어진 그의 행동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살심을 품은 듯 진한 기세를 흘리며 허리춤에 손을 대는 군사의 품에, 그는 손을 불쑥 쑤셔놓고 다른 손으로는 서문윤의 목에 댄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물 흐르듯이 검집에서 검을 빼내려 하는 군사의 손을 누르곤,
다른 손으로 놀란 듯 몸을 경직시킨 그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커흑!”
피가 비산하며 허공에 흩뿌려지고, 붉은색 핏방울을 뒤집어쓴 사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서문윤을 얼어붙게 만든 웃음이었다. 아주 아련하고도, 그리고 또 다정한 웃음.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배반하려는 줄로만 알았던 사내가 갑자기 군사를 베는 것을 바라보고 서문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충격에 허우적거리던 청년이 쩍쩍 마른 입을 열어 갈라진 소리를 내뱉었다.
“무, 무슨?”
더운 피에 얼굴을 더럽힌 채, 운표선은 손에 든 검을 털어 핏방울을 허공에 흩뿌렸다. 잠시간 웃으며 피 묻은 검날을 바라보던 그는, 어느 순간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윤아.”
다정한 말의 울림에 놀란 서문윤이 몸을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상황에 맞지 않는 자상한 말을 내뱉곤, 사내는 유독 고요하고도 평온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두려움과 불안을 잊고야 말았다.
이윽고 그의 귓가로 담담한 말이 흘렀다.
“우리의 일은 사람의 손으로만 되지 않았고.”
그것은 차분하게 내뱉는 고해와 같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으로 태어나 노력해야만 했다.”
서문윤은 사내의 반짝이는 두 눈에 홀린 사람마냥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운율이 되어 청년의 귓가로 흘렀다.
“뜻을 이루기 위해 피와 살을 깎으며.”
청년은 운표선의 얼굴에 서서히 물드는 희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사람을 죽이며.”
그리고 운표선은 마침내 두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격정을 드러내며 일그러진 미소를 흘리고야 말았다.
“종국에는 내 뜻을 이루었다.”
그 말에 담긴 마음.
그 말에 담긴 무게.
운표선은 덜덜 떨리는 손을 허공에 주먹 쥐며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서문윤을 응시했다.
“너는 내 기분을 아느냐? 너는 지금 내 기분을 아느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그 순간 가까스로 입술을 열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그리고 서문윤은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경악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성공했다고 하는구나.”
말을 음미하듯 잠시 뜸을 들이고 우물거리던 사내는 이윽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청매소.”
서문윤의 귓가에 쿵! 낙석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그것은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였다. 하늘에는 날벼락이 치고 있었으며, 마음은 해일이 덮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청년이 경악 어린 얼굴로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청매소, 청매소라고?
운표선은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것은 희로애락이 담긴 얼굴이었으며, 그간의 고난이 묻어 나오는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은….”
충격에 허우적거리던 서문윤이 꺽꺽 말을 내뱉으려 할 때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데.”
서문윤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그 말을 내뱉은 사내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어.”
그 씁쓸한 목소리에 압도되어 서문윤은 그저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윤아,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어.”
그러니까,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어찌나 무거운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버렸다.”
사내는 노을 진 가을하늘 같은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입가에 아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의 눈에 그 얼굴은 몹시도 서글퍼 보였다.
이상한 일이지?
지금 상황은 운표선의 배신을 알리고 있으며, 청매소의 완성과 군사의 죽음은 그의 머릿속에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몹시도 수상한 운표선을 끝끝내 적대하지 못했다.
어쩐지, 어쩐지 그는 나를, 우리를 헤치지 않을 것만 같아.
시간이 흘러 마음을 추스린 청년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만족합니까?”
운표선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아니.”
그러곤 그는 손에 쥔 검을 땅에 꽂았다. 파르르 떨리는 검을 바라보며 사내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때 대로가 아니면 밟지 않으리라 맹세한 적이 있었지.”
꽤나 쓸쓸한 어감을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한때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추숭을 받았던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영귀는 느리지만 항시 옳은 방향을 나아가는 거북이다. 바로 운표선의 별호.
정명정대했던 사내의 과거.
“윤아.”
귓가에 명료한 말이 울렸다.
“나는 일을 돌이켜야겠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서문윤은 강렬한 감정에 취해 어느 순간부터 슬픔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운표선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서문윤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어둔 밤에 수상한 자와 만나 대담을 하고, 그의 목을 단숨에 자른 위험한 이다. 저를 한 번에 제압한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 그러나 서문윤은 그를 막을 생각을 품지 못했다. 운표선은 저를 형용할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청년 앞에 서서, 그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꾸부렸다.
그는 서문윤의 손에 군사가 건네주었던 자기병을 내려놓고, 품을 뒤져 서찰을 꺼내 올렸다.
“이건?”
떨리는 목소리에 대한 답변은 간결했다.
“청매소, 그리고 나의 답변.”
그 말에 서문윤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운표선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이게 불세출의 영약이라 불리는 물건, 서방 의학의 정수를 모았다는 영약이라고?
그 진귀한 물건을 건네주곤 사내는 몹시나 담담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서문윤의 얼굴에 혼란이 서린 순간이었다.
“저는, 저는.”
그리고 그의 귓가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읽어도 좋아.”
떨리던 손이 멈춘 순간이었다.
그 말을 남기고 사내는 몸을 돌리며 빠르게 그의 시야에 사라졌다. 멀어지는 운표선을 멀거니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소리 질렀다.
“어디, 어디 가십니까?”
그리고 돌아온 낭랑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옳은 길을 향해.”
표홀한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 사내를 도저히 잡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사내가 사라진 순간 청년은 손에 쥔 병과 서찰의 무게를 깨닫고 신음하고야 말았다.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서문윤은 서신을 바라보며 시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읽어도 좋아라고?’
그것은 바로 비밀의 열쇠였다. 모든 궁금증을 풀고 운표선이 숨겼던 사실을 파헤칠 물건. 그가 적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서신이다. 입안에 침이 마르고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듯하여, 서문윤은 한참을 얼어붙어 크나큰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미지였다. 그리고 두려움과 호기심에 헤매던 청년은 기나긴 고민 끝에 손을 움직였다.
비밀이 담긴 서신을 펼치며 그는 제일 오른쪽 모서리에 쓰인 글자를 읽어 내렸다. 서문윤의 선택이었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읽은 순간 청년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편지는 고해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었다. 몹시나 무겁고도, 또 씁쓸한 어감이 담긴 말.
서문윤의 창백한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져 내린 순간이었다.
“불이야!”
그리고 그 때 서신을 읽는 청년의 귓가로 이어질 고난을 알리는 타종이 울렸다. 그것은 혼란과 격정이 가득한 찢어지는 목소리였다.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사람들의 입가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장한성에 번져나가는 혼란.
그러나 서문윤은 그 혼란에 신경을 쓰지 못한 채 편지의 나머지 구절을 읽어 내릴 뿐이었다.
‘이, 이건.’
서신의 내용이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 * *
야밤에 소란이 일었다.
“불! 불이야!”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까만 밤하늘 위로 뭉게구름 같은 연기가 몽글거리며 흘렀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화재로 발생한 연기였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바구니를 품에 안고 이곳저곳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들려온 높고 예민한 비명이 그들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성주님이 활에 맞으셨다!”
“뭐, 뭣이?”
그것은 사람들의 얼굴을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성주? 장한성주가?
믿기 힘든 사실에 동요하던 이들의 귓가로 쐐기를 박는 말이 들려왔다.
“습격이다! 당장 군사를 풀어!”
장한성에 혼란이 퍼져 나간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뛰어나와 냇가로 달려가 물을 떴으며, 잠을 자던 장수들은 기겁하며 청사로 뛰어가 혼란을 파악하려 했다.
“이게 뭔 일이야?”
“화재가 아닌 방화요! 군량미를 보관하던 곳에 불이 났어.”
건조한 북쪽 지방이라 자연적으로 불이 나는 일이 많다. 특히나 겨울에 자주 발생하는 화재.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해 소리치고야 말았다.
“방화라니! 도대체 누가?”
“제길,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불 꺼!”
버럭 역정을 지르며 답을 하던 사내가 흉흉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불을 못 끄면 말짱 황이다!”
겨울의 번지는 불이, 그리고 식량이 없는 전쟁이 얼마나 혹독한지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달려 나가는 사내의 뒤를 따라 제기랄 욕을 내뱉으며 일련의 무리가 따랐다.
지성감천(至誠感天)이라,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며, 하늘의 자비를 바라며 움직이고 있었다. 건조한 땅에 일어난 화재란 하늘의 뜻이 없으면 붙잡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의 마음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강물을 떠서 불이 난 창고를 오가는 이들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의 재앙은 홀로 오지 않았다.
“파발이오!”
동이 트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이다. 갑작스러운 파발의 등장에 힘겹게 사투하던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파발? 이 시간에 무슨?”
화재 진압을 지휘하던 장수들이 군기를 휘날리며 말을 몰아 들어온 사내를 향해 굳은 시선을 보냈다. 그의 등장에서 무언가의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인의 불길함은 사실이 되었다.
파발은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고삐를 부여잡은 상태 그대로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건전성에 역병이 도졌습니다!”
혼란에 허둥지둥했던 장수들의 눈이 부릅떠진 순간이었다.
“뭐, 뭐라?”
“성주님의 말씀이십니다.”
큼큼 목을 가다듬던 파발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터뜨렸다.
“더 이상의 보급은 없다! 장한성에서 괴질이 퍼졌으니, 더 이상 교류도 없을 예정이다!”
예정이다, 예정이다, 예정이다!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 말이 사람들의 얼굴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밤하늘에는 연기가 뭉게뭉게 퍼져 나가고, 사람들은 불을 끄려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절규와 흐느낌이 사람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혼란에 가득 찬 장한성에 파발은 쐐기를 박는 말을 터뜨렸다.
“전시 상황에 성민이 지역을 오가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 장한성의 성민들은 성을 벗어나지 말라!”
그 말은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휴전이 끝나가는 때 바로 보급이 끊긴다는 말.
술렁이는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상황을 지켜보던 장수 하나가 윽박을 질러 항의했다.
“그런 법이 어디에 있소? 전쟁이 다가오는데 어찌 그런단 말이요. 그리고 건전성까지 어찌 역병이 번져?”
장한성의 성민들은 빈곤이, 굶주림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안다. 그리고 얼마나 그것이 전쟁에 중요한 요소인지도.
“물자 보급은 배다리에서 이루어지고 사람들끼리는 접촉을 하지 않아! 물자를 두고 사라지면 시간을 두고 우리가 회수하는데 어떻게 역병이 퍼진단 말이오!”
그리하여 장수는 거의 발악을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두 눈에 핏발과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면서. 그는 처절히 절규하는 것과도 같은 목소리를 폐부로부터 쏟아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건전성과 장한성 사이에는 강과 들판이 있어. 쥐새끼도 드나들지 못하는 상황에 괴질이 어찌 건전성에 퍼져….”
“성주의 외동딸이 몸져누웠습니다!”
그러나 장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단칼에 그의 얘기를 자른 파발의 말은, 그만큼의 사안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꽈드득, 소리가 나게 고삐를 잡아당기며 파발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괴질에 쓰러진 사람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성민이 두려움에 가득 차 물자 송출을 그만해달라 소청을 하는데, 그럼 어찌하란 말입니까?”
어두운 밤, 파발의 얼굴은 하늘 위 매처럼 푸른빛으로 빛났다. 장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희미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그는 연이어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말을 내뱉곤 시퍼런 눈매를 치켜떴다.
“백성의 목소리가 곧 하늘의 목소리. 성주님은 하늘의 명을 따르고 계십니다.”
장수는 그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게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절도사의 딸, 하늘의 목소리. 그의 말은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넋을 잃은 장수를 흘긋 바라보던 파발이 이럇 소리를 내며 말의 배를 때렸다. 말머리를 돌리면서 그는 툭 무심한 말을 내던지곤 그들의 앞에서 사라졌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타닥타닥, 저 멀리로 나아가는 파발을 잡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발에게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항의했던 장수마저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멍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 제기랄.”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렀다.
“망했어….”
순식간에 웅성거리며 퍼져 나가는 탄식과 울음소리. 화살을 맞고 쓰러진 성주에 장수들은 이성을 잃고 울부짖고, 끊긴 보급에 성민들은 탄식하여 절망을 토했다.
그리고 혼란의 한가운데 광인마냥 돌아다니는 사내 하나가 있었다.
* * *
“서문윤!”
버럭 소리치는 목소리에 애타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잠을 자던 중에 소란을 느끼고 뛰쳐나온 사내는, 있어야 할 이의 부재를 확인하고 눈이 뒤집혀 뛰쳐나왔다. 사내는, 그러니까 검설린은 제대로 관을 틀지도 못한 채 긴 머리를 허공에 늘어트리며 미친 듯이 한 사람의 이름만을 불러 젖히고 있었다.
“서문윤, 서문윤! 서문, 제기랄!”
그리고 그는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담장에 쿵! 주먹을 내리찍고야 말았다. 복면 아래로 헉헉 벅찬 숨을 토해내며 검설린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어디야.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어.
몸이 아닌 마음에 오한이 들고 있었다. 운표선과 서문윤의 부재는 한데 얽혀 검설린의 머릿속에서 온갖 불길한 상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운표선이 죽을지언정 서문윤을 헤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서문윤에게 터무니없는 기대를 걸고 있으므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서문윤을 살리려 할 것이라는 예상에 장한성에 굳이 운표선을 대동하였는데.
‘내 예상이 틀렸다고?’
그가 정말 나를 배신했어?
그 순간 밑도 끝도 없는 나락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늘함에 몸을 잘게 떨며 검설린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고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랬던 적이 한 번 있었지.
아주 옛날, 그러니까 정말 그렇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람이 등을 돌리는 일을 겪은 적이 있었어.
‘아니, 사실 특별한 일도 아니었잖아.’
오로지 저 혼자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너는….’
그리고 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림자에 잠식되어 있을 때였다.
“신의, 신의!”
담벼락에 손을 댄 채 몸을 구부리고 있던 검설린은, 그 애타는 부름에 살벌한 눈으로 저를 부른 사내를 바라보았다. 헉헉 거친 숨을 토해내던 이는 바로 예전에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말했던 의원이었다.
본디 성정이 차분하고 진중한 이인지라, 그 의원은 날카로운 시선에 흠칫하면서도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는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인 사내의 살기를 받으면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요인이십니다.”
요인? 무슨 요인?
검설린의 얼굴에 살기가 짙어졌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모두 다 끝났는데, 그는 배신했고 바보같이 저는 또 제 사람을 잃고….
밑도 끝도 없이 암울한 생각을 펼쳐나가던 검설린은, 그러나 의원의 이어진 말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서문 의원이 성벽에서 홀로 울고 있어서 큰일이 난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무리 행방을 물어도 답이 없어서… 항상 붙어 계시던데 어찌 이리 따로 계십니까? 성주님께서 신의를 찾으신… 신의?”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검설린은 성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신의! 신의, 이러면, 어어?!”
등 뒤로 울리는 메아리를 무시하며 사내는 이를 아득 물 뿐이었다. 성벽에서 울고 있었다던 그의 말이 마음속에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설마 운표선을 만난 거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무사해야 해. 너는, 너는 제발 무사해야 한다.’
* * *
혼란이 가득한 현장과 동떨어진 장소. 서문윤은 성벽에 몸을 기대어 앉은 채 말없이 울고 있었다. 사람과 유리된 곳에서 그는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 손에 유리병과 운표선의 서찰을 든 채 그는 소리 없이 울 뿐이었다.
구깃구깃한 서찰은 뜯어진 후였다.
애타게 청년을 찾았던 사내는, 그를 보는 순간 호통 칠 마음을 날려버린 채 침묵했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한참을 말없이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묵 끝에 검설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울고 있지?”
서문윤은 그의 물음에도 검설린을 돌아보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워서?”
답변은 긴 침묵 끝에야 흘러나왔다.
“슬픔이 사무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청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눈물에 젖은 얼굴을 사내에게 보여주었다. 얄팍한 신음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는 청년과 마주하고 검설린은 그 순간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의형.”
크나큰 슬픔에, 서러움에 젖어 청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사람을 위하는 길은 밝은 대낮의 큰길과 같아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을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서문윤은 결국 끅끅 소리를 흘리며 몸을 웅크리고야 말았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그건 울먹거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 한마디 말을 중얼거리며 서문윤은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사내는 훼손되지 않는 영혼이 흘리는 순수한 눈물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이슬처럼 맑은 눈물을 보며 검설린은 어느 순간 그 옛날 누군가가 흘렸던 눈물을, 그리고 저가 흘렸던 눈물을 떠올리면서 헛웃고야 말았다. 저는 과거를 잃었다.
쓸쓸한 돌풍에 휘말리고 있었다. 사내는 가을 하늘에 부는 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그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를 연민하나?”
손바닥으로 부은 눈을 비비면서 청년은 안쓰러운 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열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네.”
이어진 말에 검설린은 안도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그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훼손되지 않았다.
검설린은 그 사실에 얕은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의 눈을 바라보았다. 물기 어린 눈은 아직도 밝은 빛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김없이 검설린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훼손되지 않은 청년의 영혼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고 그를 마주한 순간 검설린은 얄팍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상처입지 않기를 바라고 있구나.’
언젠가부터 서문윤에 스스로를 투영하고 있는 저 자신을 깨닫고 있었다. 검설린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어느 순간 정적을 깨고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가 남긴 편지입니다.”
구깃구깃해진 서신을 내밀며 서문윤이 내뱉은 말이었다. 검설린은 그가 내민 서신을 바라보고 한동안 머뭇거렸다. 사내는 결국에는 그것을 받아 들었으나, 그럼에도 서신을 읽길 망설여했다.
이것을 읽는다 하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러나 검설린은 저를 바라보는 밝은 눈에 못 이겨 서신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편지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검설린은 눈썹을 꿈틀거리고야 말았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지리멸렬한 말.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친 그 옛날 사변의 기억에 검설린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절망했던 때.
그의 오랜 벗은 환멸 나는 현실에 절망했고, 검설린은 그를 내버려둔 채 도망쳤다.
‘너 이 새끼.’
두통이 또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머리의 통증은 그날 이후로 그가 고질병처럼 달고 다닌 것이었다. 찌릿한 눈 뒤의 통증을 이를 악물어 버티며, 사내는 다음 문단을 읽어 내려갔다.
<사변이 일어나고 너는 우리의 오랜 벗을 고변하여 살아남았지. 전쟁 와중에 장수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위해 그런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너는 죄악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나 사실 진정 비겁한 자는 나다.
나는 오로지 세가의 보신을 위하여 침묵을 택했고, 죽어가는 이들의 절규를 무시했지. 그때 나에겐 대의도, 정의도 없었으며. 난 그저 나의 혈족과 권세만을 돌보았을 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비명에 밤잠을 설쳐 불면은 나의 고질병이 되어버렸으며, 사람들의 시선이 나의 비겁함을 비난하는 듯해 나는 지금껏 대로변에 서지 못했다.
나는 오랜 불면을 고치기 위해 널 살리려 했어. 나보다 더 세상을 이롭게 만들, 비겁한 나와 다른 너를 살리려. 나는 너를 통해 과거의 나의 회복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내가 저지른 악행을 지금 설명하려 한다.>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황제는 공고한 권력을 위해 고우군을 신임하여 동파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노쇠하고 서방 의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지. 아니, 사실 그는 영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으며, 이 태부는 그의 심복이었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황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황제는 내게 청매소 제작과 관련된 의서를 하사하였지.
그래, 나는 거짓말을 한 거야.
나는 목숨을 바쳐 황실 서고에서 청매소 제작법을 빼돌리지 않았다. 이것은 거래일 뿐이었다.
황제는 내게 말했어. 청매소가 완성된다면 오직 저에게만 상납하라고. 그것을 불로불사의 영약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 귀물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그래, 설린아. 그건 권력자의 욕망이었어. 백만 명을 부유하게 할 수 있어도, 오로지 저 하나만이 특별해지고 싶은 독점욕.
그리고 나는 그 욕망에 빌붙어서 보호를 받았지. 그 대신 황제는 나에게 힘을 주었으니까. 너를 보호할 힘. 그리고 서역과 거래하여 투수기와 주사기를 비롯한 의기구를 마련할 수 있는 힘.>
그 순간 검설린은 목구멍에 치솟는 울화를 참지 못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그래, 짐작하고 있었어. 이 태부란 말에, 추궁하는 말에 지나치게 화를 내는 너를 보며 뭔가 타협하고 있으리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운표선을 용서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었다. 사내는 숨을 멈추고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청매소가 완성되기 직전 나는 충동적으로 말을 흘렸다. 황제와의 맹약에 따라 나는 네게 그 사실을 숨겼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것은 사실 죄책감 때문이었으며, 또한 이 모든 일을 바로잡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너는 그에 동요하여 건전성으로 향했다,
건전성, 그래… 건전성은 중요한 곳이지.
이 일에 건전성과, 그리고 장한성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너는 그날에 비겁하게 살아남은 이들, 현실과 타협한 이들의 추잡한 악행에 대하여 알아야만 해.>
이어진 문장에 검설린은 끝내 얄팍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네가 장한성에서 부임할 때 터놓았던 밀무역 시장은 서역의 문물을 들여오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헛된 망상이길 바랐던 예감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운씨세가에 허가된 서역과의 거래는 소수의 품목에 제한된 것. 감시가 심해 고우군의 눈을 피해서 나는 변방에 서역과의 접점을 텄어야만 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선대 하동 절도사가 나를 도왔으며, 나는 양주에 둔 제작소에서 청매소 배양을 위해 힘썼다. 황제는 청매소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해주었으나 청매소 배양은 7년이 다 되도록 성공 못 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이건 모두 하늘의 뜻일 거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사람이 일을 계획해도 하늘이 허가하지 않으면 무엇도 이룰 수 없지.
그 무엇도.>
다음 문장에 이르러 검설린은 서신을 읽는 행위를 중단하고야 말았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밀무역 시장이 지나치게 커져버렸다.>
밀무역 시장.
‘이게 또 이런 식으로.’
익숙한 이름의 등장에 탄식이 흘렀다. 그 옛날 밀수에 관여했던 사내는, 그 단어에 어두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신은 과거의 파편이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끼쳤는지 계속해서 설명해나갔다.
<다자 무역은 돈을 낳는 궤짝과도 같지. 황제의 비호를 받은 밀무역 시장이 지나치게 커져나가자 돈냄새를 맡은 이들이 끼어들었다. 토번과 회흘, 그리고 선대 하동 절도사까지. 그리고 여기서 선을 넘는 이들이 생겼고, 그 사실은 황제의 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설린아, 여기서 하나 웃긴 걸 알려줄까?
황제는 불법 밀수의 판을 키운 선대 하동 절도사를 해임하고 그의 재산을 압수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가산을 보고 충격을 먹게 되었어.
8년 전부터 관의 창고에는 흉년지세에 사람들을 먹여 살릴 양곡이 없었고, 전쟁에 대비할 세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절도사는 지방에 왕처럼 군림하여 알아서 세금을 걷고 알아서 자급자족했고, 황제는 8년의 사치 끝에 탕감한 국고를 회복하지 못했지.
그래, 지존은 돈이 필요했던 거다.
설린아, 장한성이 무너져야만 했던 이유다, 그게.>
마침내 드러난 추악한 진실이었다.
<황재천을 새로운 하동 절도사로 세우고, 황제는 오히려 밀무역 시장을 자금줄로 이용했다. 황재천은 그것을 도와 회흘과의 무역에 끼어들었고. 그리고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건 너무 판을 크게 벌인 일이었다.
먼저 사실을 알아챈 것은 회흘의 가한(왕)이었지. 그는 적국에게 군량미를 판 사실에 격노하며 일을 벌인 부족을 축출하려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었어.
장한성에서 중계무역을 주도한 부족은 가한돈(왕비)이 속한 무리였다. 가한은 눈물로 비는 가한돈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을 축출하는 대신 장한성의 함락을 요구했다.
만약에 1년 안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네 목을 베겠노라. 그리고 그들은 1년이 지나가도록 장한성을 함락치 못했어.
설린아, 그 상황에서 가한돈이 무슨 일을 택하려 했을까?>
다음 문장을 읽지 않아도 그는 이어질 일을 짐작하고 있었다.
<가한돈은 남편인 가한을 죽이고, 황제와 손을 잡았다.>
쐐기를 박는 말에 검설린이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이쯤에는 밀무역 시장은 폐기된 상태였어. 일련의 사건에 황제의 비리를 눈치챈 고우군이 강력히 항의하여 황재천은 밀무역 시장을 단속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전에 회흘의 가한이 군량미를 푼 일에 대노하여 내린 무역 금지령 탓에 세가 준 것도 있었고.
그러니까 이들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주머니 사정이 곤란해진 황제와 밀무역으로 부를 움켜쥔 부족의 가한돈.
장한성은 그들의 맹약 때문에 패해야만 했지.
가한돈은 장한성을 무너트리려고 했다.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한, 그녀 개인의 증오심을 제외하더라도 여러 이해관계가 맞았거든. 너도 알겠지만 장한성은 밀무역 시장이 자리한 강 하류와 바로 이어진 곳이다. 바로 토번과 중원과 마주 닿은 곳의 길목. 그녀는 다시 밀무역 시장을 개최하려 했고, 부족을 번창시키려 했어.
그리고 놀랍게도 황제는 가한돈의 말을 승낙했다. 고우군 때문에 황제는 밀무역 시장을 재개할 수 없었으니까. 중원의 영토 내라면 그의 감시를 피할 수 없지.
그래, 황제는 정전과 무역 재개를 비롯한 여러 대가를 받고 장한성을 내어주기로 한 거야.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 설린아. 우리가 피땀 흘려 수호했던 영토가 이리 쉬이 포기할 수 있는 곳이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아.>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그날에 뒤집어쓴 피의 향기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서신은 말하고 있었다. 그가 뒤집어쓴 피는 사실 가치가 없었노라고.
<그리고 나는 그 웃기지도 않은 일을 따라야만 했다.
나에게는 사명이 있었거든.>
사명, 그 웃기지도 않는 말.
<나는 그날 내가 죽음을 방관한 이들의 수만큼 많은 사람을 살리기로 결심했어.
설린아, 나는 황제가 청매소를 독점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문장에 이른 순간 검설린은 결국 높고 예민한 고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지리멸렬한 정계의 일!
<나는 후약을 기약하고 있었지. 이청은과 거래를 하면서.>
동궁사변 이후에 태자가 된 이황자의 이름이었다.
<황제 사후 청매소를 퍼트리는 일에 도움을 준다고 했어, 그는. 나는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보장을 받고 황제에게 협조하며 살았다. 이것이 수백만을 살릴 수가 있다면 나의 명예가 드높아질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속죄를 할 수 있으리.
그래서 동참한 거야. 선대 장한성주를 암살하고, 장한성을 무너트리려는 계획에….
그러던 중 내 은인이었던 이 태부가 아들인 장한성주를 빼돌려달라는 소청을 했고, 마침 들려온 사영귀의 소식에 나는 이곳에 오게 되었다.>
검설린은 이어진 문장에 이르러 잠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너와 저 아일 만났어.>
그것은 그답지 않게 뭉개진 필체로 쓴 문장이었다.
<이청우를, 장한성의 주민을, 내가 죽인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절절한 회한의 마음. 오랜 벗의 마음을 읽어낸 사내가 쓴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사람은 너무나도 어리석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하곤 하지. 그리고 서글픈 오랜 벗의 편지가 그의 마음을 동요케 하고 있었다.
너는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지?
아니, 너는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완전히 사람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거야.
진흙탕에 발을 디뎠으면 완전히 더러워질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거늘.
검설린은 그 순간 길고 고통스러운 한숨을 흘리고야 말았다.
역시나 운표선은 마음이 물렀다. 누가 오랜 벗이 아니랄까 봐. 이런 면에서는 저를 닮아 있었다.
<나의 미련함에 너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날 비웃겠지.>
검설린은 묵묵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사람은 어리석어 후회할 짓을 반복한다.>
그리고 시선이 오랫동안 머문 말이었다.
<그러나 범인과 현인을 가르는 건, 일을 저지르고 난 후의 행동이리라.>
사족(士族)의 글씨는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라 했다. 선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사족의 혈통은 반듯한 글씨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 문장은 흐리고 뭉툭한 다른 것들과 다르게 유독 칼같이 정갈했다. 검설린은 과감했던 사내를 떠올리며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그는 얄팍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돌이키리라.>
그의 선택이었다.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겠다는 말. 잠시간 침묵하던 사내가 날카로운 조소를 흘리며 속으로 뇌까렸다.
‘애초에 그따위 짓거리를 저지르지 않으면 되었던 것을 누구를 탓하지?’
더군다나 이미 한 번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었다. 숨긴 점을 말하라며 그를 추궁하고, 모른 척하는 놈의 멱살까지 잡았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운표선이다.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그의 죄였다.
그러나 검설린은 끝까지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어느새 춘풍이 분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검설린은 편지 아래에 써진 문단을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걸쳐서 얻은 청매소의 제조 비법이었다. 마지막에는 불순물 없이 정제된 청매소의 완성품을 남긴다는 말이 있었다. 검설린은 시선을 돌려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어쩔 거냐.”
성벽에 기대어 비 맞은 생쥐처럼 처량하게 앉은 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눈물자국이 난 뺨을 응시하며 검설린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눈물이 많지.
검설린의 눈이 낮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청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검설린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장한성주가 습격당했다.”
그제야 서문윤은 고갤 들어 검설린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물기 어린 눈을 보며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군량미를 쌓아놓은 곳에 불이 붙었지. 건전성에는 전염병이 펴져가고.”
“…….”
“황재천은 눈이 돌았을 거다. 외동딸이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본진에서의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 전쟁은 시작되려 하지.”
“…….”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 있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늘어놓으니 생각 이상으로 비참하다. 묵묵히 말을 듣는 청년을 지그시 바라보고 검설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되뇌었다.
“어쩔 거냐.”
지금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서문윤의 의사를 알고 싶었다. 이 암담한 상황에서 그가 포기할지, 발악할지 알고 싶었다.
“네 뜻을 따르마.”
사실은 지금 그 또한 상황의 암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꽉 막힌 상황에서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낙향을 한 지는 6년이 되었으며 정계에 닿는 연줄은 없었다. 아니, 연줄이 있다 한들 수습할 수 없는 황실의 사안. 검설린은 그저 그의 답변을 기다릴 뿐이었다.
눈물이 부슬부슬하게 맺힌 눈을 멍하게 깜빡이면서 검설린을 마주하던 서문윤은, 기나긴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건전성으로.”
검설린의 두 눈이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뒷짐 진 손을 그 모르게 오므리며 사내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건전성으로 가겠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서문윤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 중에서 가장 사람을 덜 죽일 수 있는 것을 택했다. 검설린은 고개를 숙이며 잠시간 동요한 속을 다스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또 빠르게 뛰기도 하며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리고 검설린은 꽤나 시간이 흘러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가 하려는 모든 일들이 허무한 행위임을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사람은 어리석어 후회할 짓을 반복한다.’
운표선의 자조 어린 말이 귓가에 스치고 있었다. 동탕된 마음을 추스르며 검설린이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지금 당장 가야 하지.”
“…….”
“그리고 너는 선택해야 한다.”
서문윤의 눈에 흐릿한 빛이 스쳤다. 초점이 돌아오는 눈을 마주하며 검설린이 뒷짐 진 손을 풀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손에 들린 옥자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한결 명료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누구에게 쓰길 바라느냐.”
쉬어빠진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이 청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마른기침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아는 의형이라면, 지금 이 성벽을 내려가 가장 먼저 보이는 환자에게 그 병을 건네실 겁니다.”
아끼는 외동딸을 잃을 위기에 처해 분노한 황재천을 달래기 위해서는 황양양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 보급이든 뭐든 그를 설득하려면 무조건 황양양을 살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이 아는 검설린은 뒷일을 생각지 않고 눈에 먼저 보이는 사람을 치료하는 이였다. 그리고 서문윤은 이제 그 행동이 지위고하를 가르지 않고 민중을 돌보겠다는 의로운 동기만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의 융통성 없는 행동은 후일을 생각지 않은 자포자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설령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한들, 심지어 수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한들 그는 보이는 순서대로 사람을 구할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제게 묻고 있었다.
누구를 살리고 싶냐고.
검설린은 서문윤의 말에 침묵으로 수긍했다. 서문윤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는 후일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분 아닙니까. 내게 그를 묻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게 말이다.”
“양양을 구하자고 한다면 의형은 제 말을 들으실 겁니까.”
검설린은 긴 침묵 끝에 답했다.
“그래.”
서문윤이 웃었다.
“장한성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청우에게 가자.”
* * *
어쩌면 돌이킬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장한성이 무너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바라고 있었다. 옛날의 추억이 담긴 곳, 영광이 시작된 곳, 우리가 시작했던 곳이 무너져 내리면 이제 제 발을 족쇄처럼 부여잡던 이 껄끄러운 기억 또한 사라지겠지.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은 쓸모없었어. 다짐했던 모든 선한 가치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완전히 그 옛날의 과거를 매도하고, 비난하고, 조롱하여 마음속에 남은 망설임, 의심, 미련을 떨치고 싶었다.
헛된 마음으로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이들을 바라보노라면 또다시 그 옛날의 마음이 떠오르고야 말아. 그 애의 반듯한 말을 들으면 또다시 사람을 믿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게 껄끄러워 오지랖을 부렸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라 이청우를 설득하고, 서문윤에게 포기를 말하고. 그렇게 이들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것은 저가 바랐던 일이었으니까.
그래, 검설린은 이청우를 보며 과거의 저를 겹치고 있었다. 장한성에 부임했을 당시 그는 너무 어렸고, 또 순수했다. 나라의 영토를 수호하고 동료의 목숨을 무겁게 여기고 민중을 지키는 건 무관의 의무. 이청우처럼 그는 험난한 상황에서 회흘과 싸웠고, 보국안민의 가치를 숭앙하며 대의를 따랐다.
의롭게 살아간다면 반드시 세상이 저를 알아주리라. 반역자의 자식이었던 검설린은 제 명예의 회복을, 제 존재의 가치를 바라며 살아왔었다.
…그래서 결과는 뭐였지?
나라는 그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매정히 버렸고 검설린의 명예는 땅에 처박혔다. 전선에서 같이 싸우던 동료들은 서로를 고발해, 어리석은 민중은 고관들이 살기 위해 제멋대로 고변한 그 알량한 말에 휘둘려 태자를 욕했다.
아니, 목숨이 두려웠던 건가?
헛웃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장한성은 다르리라 생각했는데……. 전장의 장수를 살리기 위해, 검설린과 태자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서문린이 애걸하며 받으려던 탄원서를 작성해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까 돌아간다면, 그날로 돌아간다면 이 성 따위는 넘겨줄 거야.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을 갈 거다. 토번에 죽든 회흘에 죽든 제 알 바는 아니지. 그들도 그랬지 않나. 사변 때 많은 사람들이 보전을 꾀하며 그 옛날의 동료와 친족을 고발했다. 장한성도 다르지 않았지.
그날에 죽음을 불사하고 함께 싸웠던 전우는 서로를 고발하는 처처지.
목숨을 걸고 지켰던 이들은 탄원 하나 하지 않고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방관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도망치리라. 그 어느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쳐, 홀로 평화로이 살아가리라.
…그러나 이청우는 결국 포기하지 않았지.
검설린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청우는 포기하지 않았고, 서문윤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한성의 무관들도, 성민들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사실은 검설린도 알고 있었다.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장한성을 떠날까? 이따위 성, 이따위 나라, 이따위 사람들은 지킬 가치도 없으니 내 목숨 보전하려 도망치리라, 그리 판단할까?
그는 답할 수 있었다.
아니, 저는 도망가지는 못하리라. 발목을 잡는 족쇄에, 어깨를 짓누르는 추에 짓눌리면서도 도망가지 못하리라.
‘그래서 어리석은 거야.’
운표선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어리석어 후회할 짓을 저지른다.
‘그러나 범인과 현인을 가르는 건, 일을 저지르고 난 후의 행동이리라.’
말은 계속해서 귓가에 감돌았다. 검설린은 저를 현혹하는 목소리를 지우며 식은땀을 흘리는 성주의 배를 꿰매는 손을 빠르게 했다.
귓가에는 아수라장이 들려왔다.
“닥쳐!”
“가기는 어디를 가? 당신들이 어디를 간단 말이야!”
“그만! 그만, 흥분하지 말고….”
“흥분하지 말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흥분하지 말라고?!”
장수들의 고함소리였다, 그것은. 검설린은 창백한 얼굴로 신음하는 성주만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습격은 잠을 자지 못한 채 서문을 서성이는 성주에게 달려든 암살자로 시작했다. 그는 이청우의 옆구리에 날카로운 검을 꽂았고, 쓰러진 그를 성벽 아래 버려두고 거리를 뛰쳐나가 이청우가 동문에서 습격을 당했다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소란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는 이미 그가 혼란을 틈타 빠져나간 후였다. 군패도, 호패도 없는 이였으나, 군병으로 위장한 암객을 알아챌 만한 정신머리를 가질 이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일을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있지 않았다. 쓰러진 이청우를 발견한 무관들은 아우성거리며 검설린을 찾았고, 검설린은 이청우의 배의 자상을 꿰매는 중이었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이청우를 침상에 두고 사람들은 흥분에 고조되어 저마다 마음속에 품은 분노를 쏟아냈다.
“지금 흥분하지 않게 생겼어? 성주는 배에 칼침을 맞고 창고는 불타고 본진은 우릴 버린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게 생겼어?”
“하늘이 내린 성자라는 사람마저 도망간다는데 흥분하지 않게 생겼나?! 빈민을 사랑한다면서 제 목숨은 더 사랑하나 보지?”
“가지 마시오! 신의, 이곳은….”
“그만, 그만하라고!”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한 톨의 이성이 남아 있던 유일한 사내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 한가운데에 오로지 들리는 소리는 희미한 장한성주의 신음이었다. 검설린의 입술 끝이 비틀린 순간이었다. 그는 마지막 바늘 한 땀을 정성껏 마무리하며 상처를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미안하지만 장한성을 빠져나지 못하십니다.”
서문윤은 “건전성으로 가겠다, 윤허해달라.” 말을 하며 바닥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설린이 코웃음 친 미련함이었다.
“당신이 온 이후로 절망뿐이었던 장한성의 상황이 크게 나아졌습니다. 비단 일신의 안위와 질병과 빈곤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관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쳐서 살아갈 힘을 잃었고,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끝에서 죽음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밀알 한 톨, 도움의 손길 하나가 얼마나 큰 힘인지 아십니까? 포기하지 않고 사지로 걸어 들어온 명사(名士)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희망이겠지.”
그리고 검설린은 그 뒤로 갈수록 분노가 섞여가는 말을 덤덤한 말로 끊었다. 좌중의 시선이 돌려진 순간이었다. 수십의 눈을 받으면서 검설린은 싸늘하게 웃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희망, 희망입니다.”
“이 상황에도 너희들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구나.”
“…….”
대답을 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검설린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려 그들을 외면할 뿐이었다.
“돌아오겠습니다.”
그 때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는 곧은 의지가 묻어 나왔다. 청년의 두 눈에는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흔들리지 않는 정명한 눈은 검설린조차 마주하기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안기는 맑고 순수한, 유리구슬 같은 눈.
서문윤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건전성은 번화하여 드나드는 인구가 많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괴질이 번질 겁니다. 사람들에게 병을 상대하는 법이라도 알려야 합니다.”
“그건 다른 의원들도 할 수 있지.”
“그들이 성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괴질이 퍼질까 두려워하며 보급마저 끊은 이들이 다른 의원을 성벽 안으로 들여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너희 또한 마찬가지다! 신의라고 하여 성벽 안으로 들여보내줄 것 같나? 절도사의 딸마저 전염병에 감염된 상황에 신의나 그의 조수라고 다를 것 같아? 하물며ㅡ!”
“고칠 수 있다 하면!”
방을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격렬한 대담을 이어가던 사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서문윤이 이를 악물고 그를 향해 불꽃이 치솟는 시선을 던졌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에 흠칫한 사내의 눈이 비추어졌다.
“…뭐?”
검설린이 웃은 순간이었다. 저가 나설 필요도 없어. 아니, 사실 검설린은 알고 있었다. 저가 나선다면 설득은커녕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반감만을 얻으리라.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은 알면서 행하지 못했다.
진심과 열정.
“그 병을 고칠 수 있다 하면, 절도사의 하나뿐인 외동딸을 낫게 한다 하면…!”
“그게 무슨?”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였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을 내뱉었다.
“…어제 완성된 약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저희는 이것을 숨긴 것이 아닙니다. 괴질을 낫게 할 수 있는 약은, 어젯밤에 천운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을 만들 수 있는 공장은 현재는 폐장되어 운영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 하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약입니다.”
가면 갈수록 진해지고 또박또박해지는 목소리였다. 담담한 목소리에는 삿된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고, 올곧은 시선은 굳건한 마음을 흔들게 만든다.
“사람의 목숨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저는 의형을 따라다니며 빈민과 사족의 차이를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이상한 노릇이지요. 저는 분명히 사족 출신인데, 부친과 스승께서는 고귀한 자는 혈통이 아닌 대의가 있기에 더 가치가 있다 말하셨는데, 그 말을 평생 믿고 따라왔는데 제 눈에는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무슨 역천의 말을…?!”
진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었으니까.
“한 줌의 재산이 없는 부랑자에게도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수히 많은 귀족들이 생사의 경계에서 제 목숨을 살리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품은 칼날은 신분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상해하는 독심과 불의의 칼날은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년은 잠시간 말을 고르고 웃었다.
“그러니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쾅!
그리고 방 안에 자리한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검설린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얼어붙은 동시에, 복면 위의 두 눈에 흉흉한 빛이 번뜩였다.
서문윤이 그 자리에서 바닥에 머리를 박은 것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청년은 고통을 느끼지 않은 듯 웃음을 흘리고 있었으나, 막상 그 주변의 인물들은 경악을 감출 수 없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검설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에 그는 여유를 잃고 격분한 마음을 다스리려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고요함이 깨진 사내의 얼굴에 살기가 스쳤다.
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사내의 마음속에는 비명이 맴돌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을 모르는 듯 서문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저는 장한성에서 의원이라 불렸습니다. 제게 고마움을 표하며 의원이라 칭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안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의원이 아닌 무인이기에, 천성이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기에 의원이라 불릴 수 없으니까요.”
새하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이 그의 순수함을 증명하듯 탁한 기운 하나 없이 새빨갰다.
“빈민과 사족의 목숨에 경중이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극기에 이른 상황에서, 의원이 아닌 저로서는 그들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금 머리를 찍으려는 청년을 으악 소리를 내며 앞에 선 사내가 말렸다.
“그만, 그만!”
“이 약으로 장한성의 성민이 아닌 사족을 살리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만약, 만약, 절도사의 영애가 살아난다면… 그러니까 황양양을 되살린다면…!”
그 대목에 이르러 서문윤은 절박한 빛이 떠오른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저희는, 저희는…!”
그리고 그 때였다.
“가시오.”
두 눈에 잉걸불을 켜고 그들을 노려보던 검설린이 떨리는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청우가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행히 암살은 실패했다. 북녘의 차가운 날씨는 상처를 막기에 충분했으며, 암살자는 엎치락뒤치락하던 과정 속에서 제대로 배를 찌르지 못하고 옆구리만을 베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생명이 위독할 상처는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중상이었다. 방금 전에 수술을 마친 이청우는 몽혼한 눈으로 서문윤이 있을 법한 자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는 장한성을 떠나시오.”
“성주님, 장병들의 사기가…!”
항의는 이청우의 혀 풀린 목소리에 끊겼다.
“사람을 살리려 한다면 대의고 사람을 죽이려 한다면 아집입니다.”
뜨거운 숨소리가 울렸다. 검설린은 묵묵히 피 흘리는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청우는 쓰디쓴 웃음을 흘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습니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훅 찔렀다. 그것은 적군의 피도, 반역자의 피도 아닌 바로 청춘을 누리는 이들의 것이었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이들의 것. 검설린은 긴 침묵 끝에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청우.”
제 얼굴을 쬐는 시선을 무시하며 검설린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는 네 몸 상태를 알 거다.”
이청우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검설린은 그를 향해 흘끗 시선을 주고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눈짓의 뜻을 이청우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어색하게 웃던 그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응대하지 않았다. 미련한 자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니, 사실은 답답한 마음에 금방이라도 고성을 내지를 것만 같아서였다. 울분을 참지 못해 그에게 화를 낼 것만 같아, 검설린은 그저 입술을 다물 뿐이었다.
미련한 자를 싫어한다.
“…돌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주님.”
“영애를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주십시오. 이것은 성주가 의원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목숨을 내던지니까.
“의원에게는 목숨에 경중이 없지만 성주에게는 있는 법입니다. 저는 설령 제 몸을 고칠 수 있다 한들 치료를 거부하겠습니다. 성민 하나하나의 목숨도 귀하지만 전체의 목숨은 더 귀합니다. 비단 숫자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장한성을 지키는 건 그저 개개인의 목숨의 합을 살리는 일보다 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오래된 터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국경의 성은 보통 죄인으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은 죄수였으나, 지금은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삶을 일구었습니다. 장한성은 그들에게 기회를 준 땅이며 동시에 삶을 준 땅입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게 무어라고.
목숨보다 중요한 게 무어라고 그리 쉽게 포기할까.
“그러니까 이것은 남에게 주입된 의무감도, 모두가 따라야 할 사명도 아닌 생존의 일입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장한성주는 고마움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애를 살려주십시오.”
그리 말을 하고 장한성주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검설린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성주님!”
경악한 이들의 목소리가 방 안을 혼란하게 만들었으나 그들은 결국에 이청우를 말리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지에서 굳건한 의지 하나만을 품고 죽을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그들처럼 각오를 한 사내를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상관의 명을 따르는 것.
* * *
“너는 미련한 놈이다.”
방을 나가자마자 검설린이 피를 흘리는 서문윤의 이마의 상처를 지혈했다. 방 안에서는 덤덤하게, 아니 차가우리만큼 서문윤의 상처에 아무런 신경도 안 썼던 사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사라진 때 그의 이마를 세게 누르고 비상으로 상비해오던 붕대를 묶어주었다.
“머리를 깰 필요는 없었어.”
삭막하게 갈라진 목소리에 서문윤은 어색하게 웃고야 말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건 미련한 행위였으니까. 노여움을 참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모른 척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머리를 땅에 박아 피 흘리며 하는 맹세는 사실은 이 상황에서는 과한 일이었다. 그것은 살벌한 일이 많은 궁궐에서도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 그런 거지? 또 네 마음속 미련한 성인의 자질이 꿈틀거린 거냐?”
그러니 사실 이것은 과하고도 또 미련한 일이다. 어지러운 정신을 부여잡으며 서문윤이 힘없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덤덤히 말을 내뱉었다.
“마음을 다잡고 싶었습니다.”
이마를 짓누르는 손이 뜨거웠다. 딱 한 번 내리친 건데 피가 얼굴을 적신 채 멈추지를 않았다. 서문윤은 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검설린의 부축을 받으면서 걸음을 걷고 있었다. 방향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지혈을 하는 손길이 무겁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기댄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려온다는 사실도. 서문윤은 그를 향한 미안함을 삼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는 저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다.
서문윤은 새록새록 머릿속에 스치는 그간의 일들을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내게 마음을 열었지.’
사람을 향한 그의 분노와 혐오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이젠 잘 알았다. 어렴풋이 그 형체만을 짐작했던 서문윤은 그 과거를 알고 난 뒤 그 연유에 확신했다. 게다가 그는 제게 정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 배신을 두려워하고 또 저를 아끼는 마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싸늘하게 대하며 말로 모욕을 준 이유는 아마 그 탓이겠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으나, 또한 그간의 행적을 보면 그는 자기방어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저를 막 대하고 상처 입혔으나, 중요한 것은 서문윤이 그가 그동안 숨겼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검설린 또한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은 서로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다는 신호였으며 그의 마음에 굳건하게 쌓였던 불신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꾹 이마를 누르는 손이 뜨거웠다. 등에 닿는 그의 몸에서 빠른 심장소리가 전해져 왔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문윤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
심기가 상한 듯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문윤은 불규칙한 그의 숨소리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살고 싶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장한성에서는 몇 번이고 죽음을 고뇌하고 부모님 생각에 슬퍼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험한 길을 떠나야 하는데, 막중한 임무를 짊어졌는데도 두렵거나 암울하지 않았다. 일전에 운표선의 편지를 읽고 얻었던 슬픔에 잠시 이성을 잃고야 말았으나, 지금은 마음이 평온했다.
살아갈 희망을 얻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의형과 조금 더 깊은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듣기에 미련이 뚝뚝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그것이 조금 민망하여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제가 거부한 관계인데, 또 이리 붙잡는 말을 하고야 마니. 이것이 제가 미련하다는 방증이리라.
그러나 서문윤은 죽음을 각오한 상황에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아쉽네요.”
아스라이 흘러나온 말이었다. 피가 흘러내려 정신이 몽혼했다. 서문윤은 이마를 짓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짤막한 침묵 끝에 불편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 너는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나.”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우리는 죽지 않아.”
그 말이 담고 있는 크나큰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고, 또 그 ‘우리’라는 말이 제법 그를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우리, 우리라.
2년을 함께했어도 별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는데. 서문윤은 우는 듯한 웃음을 한순간 흘렸으나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서문윤은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입술을 다물고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괴질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모른다.’
시장이 서는 번화한 본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방비하게 괴질에 노출되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고, 언제 전쟁이 다시 시작할지도 모른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중요한 시기였으니.
깨진 이마를 치료할 시간은 없었다.
그들은 마구간을 향해 바쁘게 발을 놀렸다.
“신의께서 건전성으로 떠나신다!”
“뭐? 왜?”
“절도사 영애의 병을 고치신다고….”
“본진에 병이 발발했으니 치료하러 가시는 게 아닌가.”
가는 길에 서문윤은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귓가에 웅웅대는 고함이 커질수록, 소문도 몹시 빠르게 번졌다. 서문윤이 불안에 미간을 좁히며 검설린을 흘끗 보았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길 때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설린의 몸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의원님, 의원님 머리에 피가.”
“괜찮으십니까?”
“부탁드립니다, 신의!”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당황 어린 얼굴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신의님.”
“본진도 버린 사지에 와서 고생하셨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 명사(名士)께서 오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를 겁니다….”
그것은 비난이 아니었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서문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폭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발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집단이 공황에 사로잡힐 때 극단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곳에서도 신의는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그 어떤 견고한 마음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공황도 그 무엇도 아닌. 방금 전까지 성주의 죽음과 방화에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마음을 수습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마음을 수습한 게 아니다.
서문윤은 그들의 담담한 얼굴에서 체념과 굳은 의지를 보았다. 아, 작은 신음이 흘렀다.
‘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그 때였다. 묵묵히 그들을 안내하던 군관이 입술을 연 것은.
“장한성의 성민은.”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군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감겨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각오를 한 몸입니다.”
“…….”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항변하는 말이었다.
“성을 지키는 것은 아집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를 위함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군관은 다시 굳건히 입을 다물었다. 서문윤은 그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복면 위에 드러난 얼굴 부분이 너무 적어,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에서 심기를 파악하지 못했다.
“의형.”
작게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서문윤이, 이윽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
“사람은….”
숨을 들이켠 서문윤이 검설린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검설린은 그저 묵묵히 허공만을 바라본 채 걸음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도착한 마구간에서 서문윤은 성주가 준 군패를 내밀어 군영에서 건강한 군마 두 필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다시 오시오.”
군마를 담당하는 장수가 한 말이었다. 이청우의 방에서부터 그들을 안내한 사내가 한 말. 출발하기 전에 고삐를 부여잡고 서문윤은 차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오시오. 반드시, 반드시….”
떠듬떠듬 말을 하는 이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엿보였다.
“내가 이기적이고, 또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잘 알지만… 그렇지만….”
“…….”
“희망…은….”
그의 말은 푸르릉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가자. 귓가에 들려온 묵직한 말에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 말에 몸을 잠시 잘게 떨던 사내는 돌연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내뱉었다.
“…감사했습니다. 부디 두 분 다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 * *
“어째서 다들 죽음을 예비하는 것만 같습니다.”
말의 허리를 채찍으로 때려대며 서문윤이 말했다. 검설린 또한 말을 최대 속력으로 몰고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서 서문윤은 그가 승마에 익숙하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가 제 속도에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도.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비슷한 일이니까.”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아 그는 오묘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설린은 서문윤보다 조금 앞에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죽음이 다가오는 자리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지….”
바람이 세차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서문윤은 그의 말을 들으려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이청우….”
그리고 그가 흘린 뜻밖의 이름에 서문윤은 잠시간 공황에 빠져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목소리에는 꽤나 이상한 어감이 있었다. 어쩐지 신음을 흘리는 것 같은, 또 여운이 짙게 남는 그런 어감이. 이청우는 습격을 당했지만 목숨이 위중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했다. 당황한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몸이 크게 잘못되었습니까?”
혹여 사기를 염려하여 상처의 심각성을 말하지 않은 것인가. 괜찮은 줄로만 알았던 장한성주가 크게 몸이 상한 것인가. 서문윤이 걱정의 가지를 뻗어나갈 무렵에 검설린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생명을 불태우는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말에 서문윤은 짤막한 침묵 끝에 답했다.
“아니, 당신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서문윤이 대답 않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거가 생각나십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차디찬 조소를 흘렸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윤은 귓가에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몸을 경직시켰다.
“이청우는!”
말발굽 소리에 묻힐까 저어하는 듯 목소리는 전과 다르게 크고 격렬했다.
“요 근래 지나친 과로에 토사곽란을 자주 일으킨다 했다! 밥을 잘 넘기지 못하고, 괴질 치료에 관심이 많아 수액을 다루는 곳에 자주 출입을 한다고도! 투수기를 얻어 가고 수액을 만드는 방법까지 들었다고 했다!”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피가 잘 멈추지 않고, 유독 몸에 땀이 많았지. 손발이 노랗고 혈색이 창백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옆구리의 상처를 꿰맬 때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아랫배에 손이 스칠 때 비명을 내지른 일!”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서문윤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가 내뱉은 말에 무언가를 짐작하고야 만 것이다. 으스러지듯 이를 악물고 서문윤이 소리쳤다.
“의형, 설마?!”
“그는 괴질에 걸렸어!”
그리고 서문윤은 탄성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 그 짧게 울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광소가 퍼졌다. 연이어 격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는 괴질에 걸리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단 하나의 약병을 눈앞에 두고서 우리를 보내줬지. 크흐흐! 그는 성주다! 만고의 영약을 가질 명분 따위 충분해. 제가 없으면 성이 무너지니까, 전쟁을 지휘할 자가 없으면 아니 되니. 책임을 질 이가 필요하므로. 그따위 말로 충분히 그걸 취득할 수 있단 말이다!”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삐를 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쓸쓸한 말이 울렸다.
“그런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을까….”
서문윤은 차마 그 말에 답변할 수 없었다. 위로도, 사리에 맞는 답변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검설린이 그것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그저 탄식을 하고 있었다.
“윤아.”
침묵이 있었다. 씁쓸한 목소리가 뒤이어 흘렀다.
“내가 진정 괴로운 것은… 이 모든 것이 내가 수없이 많이 보았던 장면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바람에 눈이 따갑다. 서문윤은 고개를 슬쩍 아래로 숙이며 바람에 얼굴을 피했다. 씁쓸한 말이 이어졌다.
“……슬픔을 참을 수가 없어.”
무어라 더 말을 할 수 있을까? 짧은 침묵 끝에 서문윤이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는 아직 결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문윤의 말에 검설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서문윤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의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
“반복이 아닙니다. 의형.”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되뇌었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사실 확신은 하지 못하겠다. 서문윤은 항상 강인했던 의형이 무너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다. 흔들리는 눈은 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으며 바로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지금 이 순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껏 제가 불안할 때 의지가 되었던 철옹성 같은 의형이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저가 의지할 만한 이가 되어야겠지….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러니까 검설린을 지탱하고 싶었다.
“이청우가 의형의 전철을 밟을까 두렵습니까?”
덤덤한 목소리였다.
“…사람에게 믿음이 가지 않으십니까?”
“…….”
“장한성을, 민(民)을 지키는 일이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그 일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목숨 바쳐 살릴 만한 가치가 없다 생각하십니까? 이제 그들을 믿지 않으십니까?”
대답 없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도발하듯 말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또다시 이청우를 배신할 것 같습니까? 그걸 보는 게 두렵습니까? 과거의 일이 겹쳐져서?”
그 말에 검설린은 짧은 침묵 끝에 텁텁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는 어리다.”
“스물넷입니다. 그리고 이제 스물다섯이 되지요. 의형. 저는 어리지 않습니다.”
바람소리가 거칠게 나서 잘 듣지는 못했으나, 서문윤은 왠지 그가 한숨을 내뱉고 있다는 생각을 품었다. 바람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궁금하다.
검설린은 피로한 듯 웅얼거리는, 그러나 분명히 칼이 담긴 말로 서문윤에게 답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그러니 모가지를 지키려 가족을 팔고 지인을 팔지…. 그건 본능이므로. ……서문윤. 나는 정론을 말하는 거다.”
서문윤은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에 무에 가치가 있겠느냐. 100년, 아니 10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모든 것을 잃을 거다.”
고삐를 든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남는 건 없다, 서문윤.”
“.……”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은 허상이니까.”
결국 서문윤이 참지 못해 빠르게 말을 쏘아붙였다.
“의형, 왜 거짓말을 하십니까!”
그것은 차라리 꾸중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검설린의 입이 딱 다물린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분노를 참지 못해 고성을 이어나갔다.
“당신께서는 그들을 지키고 싶어 하잖습니까! 왜 그리 말하십니까! 당신은 사실 이청우가 포기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하잖습니까!”
“무슨 개소….”
“왜 자꾸 스스로를 부정합니까!”
합니까!
니까!
까!
들판에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소리. 우두두, 말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허공에 울리는 목소리에 검설린의 말이 잠시간 막혔다. 서문윤은 사내의 등이 그 순간 딱딱하게 굳는 것을 바라보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너.”
“저는 당신을 압니다.”
그가 내뱉으려 하는 말을 막으며 서문윤이 버럭 소리쳤다.
“위악은 그만 부리십시오.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을 떠나, 당신은 그게 마음이 편해서 선택한 겁니다.”
“서문….”
“당신은 사람을 지키길 좋아합니다! 당신은 의로운 성품을 지녔으니까!”
처음으로 서문윤이 이성을 잃고 내지른 고함이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당신이 부정해도 당신의 업적은, 그 순간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선택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듣기 싫습니다!”
핏대를 세우며 서문윤이 들판에 메아리치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제가 왜 쓸데없는 말을 계속 들어야 합니까!”
진실로 분노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저 화가 난 것뿐이잖습니까, 의형!”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이 치솟는 눈으로 서문윤이 검설린의 등을 노려보았다. 답답함이 치밀어 올라 그는 한동안 검설린의 굳은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긴 침묵 끝에 서문윤이 거칠게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장한성에서 내내 당신은 화가 나 있었잖습니까.”
“…….”
“……안타깝고 답답해서.”
상처받은 이리처럼 서성였던 사내를 떠올리며 서문윤이 헛웃었다. 서문윤의 말을 잠자코 듣던 검설린은 그의 말에 숨이 넘어가는 듯한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만.”
그러나 서문윤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뭐?”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검설린의 말이 한순간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되찾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사내의 등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고함은 아니지만 강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당신의 최후의 보루가 되겠습니다. 운 공자님과 같은 짓은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멋대로 판단하여 당신을 상심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숨을 멈추고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로지 당신의 아군이 되겠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당신의 곁에 있을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다. 서문윤은 그런 마음을 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 주세요.”
고요한 눈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그대의 온전한 편이라 생각하며, 한을 풀어주십시오.’
검설린은 그의 간절한 마음을 모르는 척 답변하지 않았다. 서문윤 또한 그의 답변을 원한 게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답변에 괘념치 않으며 말을 몰 뿐이었다.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우두두, 말발굽 소리만이 세차게 벌판을 울릴 뿐이었다.
우두두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이 이를 악물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저놈은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그냥 미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를 겁간하고 모욕한 사내를 저리 맹목적으로 따를 리가 없겠지.
하물며 의지할 곳이 웃전밖에 없는 황궁의 충성스러운 내관들도 주인이 모욕을 주면 앙심을 품는데. 검설린이 탄식을 삼켰다.
‘어째서 저 애는 저리 한결같이……. 바보 같아.’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은 인정했다. 나이가 먹으면 변하리라, 너 또한 세상을 알아가리라, 그리 생각했던 제 생각을 정정하고 검설린은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문윤은 이립이 되어도, 제 나이가 되어도 변하지 않으리라.
아니, 불혹의 나이에도, 지천명이 되어도 변하지 않으리라.
서문윤은 그저 한결같은 놈이었다. 저와 같은 이가 아니야. 검설린은 그에게서 저 자신을 투영한 터무니없던 과거를 반성했다. 미친놈에게서 저를 찾았으니… 그야말로 망령된 행각이지.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은 허무함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홀가분한 기분에 사로잡혀 넋을 놓았다.
‘날 지탱한다고?’
고작 낙향한 무관 따위가 함부로 말을 한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 말에 흔들리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흐흐 웃었다.
‘미쳤군.’
그러나 검설린은 곧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고야 말았다. 허허벌판을 노려보는 눈에 안광이 스쳤다.
‘…정말 미쳤어.’
한순간 사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기대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검설린은 차마 망연함을 거둘 수 없어 한참 동안 넋을 잃어야만 했다.
고작, 고작 저 허황된 말에 내가 흔들린다고?
그리고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뿌득 이를 갈았다. 살벌한 기색이 얼굴에 스치고 있었다.
‘…미친놈.’
또다시 서문윤을 향한 탄식으로 회귀했다. 검설린은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며, 서문윤을 향해 내뱉고 싶은 말들을 속으로 삼키면서 동탕된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마음은 차라리 말을 멈추고 서문윤을 강제로 말에서 끌어 내려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검설린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웃을 뿐이었다.
밀어내려고 했는데.
“이 무른 놈아. 그렇게 허술하게 해서 언제 정을 떼어낼래.”
귓가에 웅웅거리는 운표선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검설린이 또다시 탄식을 내뱉었다.
“…그냥 인정해라.”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네가 생애에 미련이 생긴 것을.”
검설린은 그 말에 흔들리는 마음을 눈을 감으며 잠시간 다스렸다. 목구멍에 악에 받쳐 차오른 것은 비명이었다.
정말 서문윤을, 서문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 * *
“멈추시오! 멈추시오!”
건전성의 문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말의 속도를 줄였다. 성문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문윤이 크게 소리 질렀다.
“파발이오. 하동하서 절도사께 전달할 말이 있으니 문을 여시오!”
“닥쳐라!”
그리고 돌아오는 고함에 서문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이어지는 말은 그를 동요케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쪽에서 온 파발은 받지 않는다! 문을 열지 않아!”
성벽을 움켜쥐고 우렁차게 소리치는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장한성에서 왔지?!”
그 순간 꼬여가는 상황을 깨달은 서문윤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초조함을 삼켰다. 검설린은 서느런 얼굴로 성벽에 자리한 군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정이 이어졌다.
“군영의 파발을 거절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오!”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서문윤이 소리쳤다.
“절도사의 명이다!”
다급한 상황이라지만 파발마저 막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역병이 돌아 혼란한 상태라 한들, 건전성은 엄연히 본진이 자리한 곳이다.
군영의 파발마저 막다니?
그러나 군관은 고성을 내지르며 그의 말을 막을 뿐이었다.
“건전성 성민의 의향도 모두 같다!”
노성이 이어졌다.
“사람 잡아먹는 마굴에서 온 파발 따위! 네놈들 때문에 건전성에 역귀가 붙었어! 지금까지 몇 명이 죽었는지 아나?”
그 말을 내뱉는 군관, 성벽을 지키는 이의 목에는 핏대가 죽 서져 있었다. 멀리서도 그의 분노한 모습이 잘 보였다. 서문윤은 그의 이어진 말을 들으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순리에 따라야 했어! 역병은 하늘이 낸 것인데, 네놈들을 도우려다 건전성도 천벌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뻔뻔한 놈들이 어딜 기어들어와!”
단순한 절도사의 명령이 아니다.
단순한 개인의 의사가 아니다.
“당장 꺼져, 꺼져!”
삿대질을 하며 노성을 처절히 토해내는 군관에게는 울화가 있었다. 서문윤은 의형과 함께 다니며 이런 일을 많이 보아왔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재난을 만날 때 집단이 일으키는 증세였다. 두려움이 공황과 합쳐져 타인을 향해 비난으로 책임을 돌리는 일은.
서문윤이 잇새에 눌린 말을 내뱉었다.
“이분은 북성신의요!”
그리고 서문윤은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공격성을 보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설린의 앞에 서며 서문윤이 폐부에서 토해내는 말을 뱉어냈다.
“성민을 구하러 왔습니다! 괴질을 완전히 잡을 방도는 없지만, 퍼져 나가는 괴질을 잡을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아, 성문을 넘는 것조차 이리 힘들 줄이야.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서문윤은 간절한 목소리로 토로할 뿐이었다.
“원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뿐입니다! 이분은 그리 살아왔습니다. 다들 아시잖습니까? 얼마 전에 이곳에서 북성신의가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그의 옆에서 검설린이 냉랭한 눈으로 성벽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에 뛰어나온 모양인지 성벽에는 사람들이 어느새 우글거리고 있었다. 성벽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은 간간히 보이는 안타까움을 담은 것을 제외하곤 적의가 가득했다. 검설린은 냉소를 지었다.
쉰 목소리로 서문윤은 말을 이어나갔다.
“성문을 열어주십시오.”
“…….”
“그대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러나 서문윤의 간절한 말에도 한동안 성벽 위에서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말에 표정을 굳힌 성벽 위의 군관이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다.
“…의형.”
불안한 마음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흔들리는 시선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쓸모없을 거다.”
그의 말을 입증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군관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냉랭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장한성에는 왜 아직까지 역병이 잡히지 않았지?”
“그것은….”
“긴말하지 않겠다. 돌아가시오!”
그리고 서문윤은 암담함에 아, 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돌아가시오!”
무수한 고함이 이어졌다.
“돌아가시오! 우리는 그대가 필요 없어.”
“역귀를 데리고 떠나라!”
그것은 군관이 내지른 것이 아닌, 성벽 위에 사람들이 내뱉은 것이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서서히 커져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 서문윤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었다.
‘아, 결국.’
암담함이 자리한 창백한 얼굴로 서문윤은 그저 성벽 위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병에 걸렸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남을 도우려다! 캬악, 퉤!”
“북성이라고 다 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더군! 떠나시오! 우리는 더 이상 천노를 사고 싶지 않아.”
“꺼져라!”
비아냥과 조롱이 섞인 말들은 사실 저희를 향한 것이 아닌, 불안과 분노를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겠지. 그러나 서문윤은 이 상황에서 야속함이 드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공황에 휩싸인 집단과 대면한 상황에서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검설린의 눈치를 보고야 말았다.
인간에 환멸을 느끼는 사내의 지금 심정이 걱정된다.
“…아.”
그리고 서문윤은 고요한 검설린의 얼굴을 마주하고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머릿속에 찬물이 뿌려지는 기분에 그가 멍한 눈을 할 때였다.
“병은 병원체가 사람과 닿으면 발생하는 거다.”
검설린이 입을 열었다.
“수원이나 땅이 병원체에 오염될 때, 쥐 따위에 묻어서 퍼져 나갈 때, 병자와 정상인이 접촉할 때 역병이 퍼지고 사람이 죽는다.”
그것은 고함도, 비명도, 고성도 아니었으나 힘이 있어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성벽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우는 목소리.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검설린의 군관이었던 과거를 실감하고 있었다.
“시체를 태우고 강 상류에서 물을 깃는 것은 병원체에 땅이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흰 천을 두르는 것은 병자 간의 접촉에, 병원체가 달라붙기 쉬운 구강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문윤은 그가 내뱉는 말의 뜻을 깨닫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역병은 단지 병원체가 옮겨 가는 것뿐. 하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가 있다.”
“의형, 이것은….”
서문윤이 황급히 검설린을 바라보며 말을 막으려 들었다. 지금 이 자리는 성벽 앞 성민들을 마주하는 자리. 서문윤은 이제 검설린이 서학의 씨를 남기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검설린이 내뱉는 말은, 단순히 습관을 알리는 걸 넘어서 서학의 정신을 얘기하고 있었다.
도를 넘어선 순간이었다.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장한성에 역병이 돈다는 얘기는 그저 망상이지. 그 말을 정녕 절도사의 본진에 소속된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건가?”
그러나 검설린은 멈추지 않고, 듣는 이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드는 서늘한 말을 내뱉었다. 성벽 위에 자리한 군관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범상찮은 기백에 당황하여 머뭇거리던 그는, 그러나 빠르게 마음을 수습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대가 이전의 북성신의였다면 그 말을 믿었겠지만, 현재로써는 장한성에서 병을 잡지 못한 의원에 불과하니 그대의 말을 믿을 수가 없구려!”
결국엔 회귀였다. 서문윤의 얼굴이 창백해진 순간이었다.
“나가시오!”
“우리는 이제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오.”
그리고 서문윤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절도사에게!”
성벽을 쩌렁하게 울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절도사에게 말을 전해주십시오.”
군관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거의 울먹거리면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헐떡거리며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 몽혼한 눈으로 성벽 위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간절히 더 나은 길을 바라면서 말을 이었다.
“장한성의 성민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지에 사람을 구하러 온 북성신의를 희망이라 생각하며 받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의는 건전성의 피해를 막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무슨 궤변….”
“아시잖습니까! 이분이 사람을 살리려 헌신한 것을.”
당황한 군관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에 간절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장한성주는, 그리고 장한성의 성민은 그럼에도 신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원을 받기 위한 마음으로만 저희를 보내준 게 아닙니다!”
성벽을 쩌렁하게 울리는 말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그곳에서 싸우고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를 송별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저희를 보내준 겁니다.”
서러움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당신들은 그런 그들을 죽어도 되는 이들이라 생각하십니까. 어찌 그들을 천역을 받은 이들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어느 순간부터 서문윤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목이 매여 잠시간 말을 더듬는 서문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적의가 아닌 당황이 물들었다. 검설린은 힐끔 시선을 돌려 서문윤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포기하고 침묵했다.
서문윤의 말에는 진심이 있었고, 간절함이 있었다. 하늘은 몰라도 성벽 위에 자리한 이들을 동요케 할 만큼. 성벽 위의 웅성거림은 바로 그의 말에 담긴 간절함에 흔들렸다는 증거였다.
‘…고래로 선동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을 이용한 이유가 따로 없지.’
진심은 세 치 혀보다 통하는 법이다. 쓴웃음을 짓는 검설린을 뒤로하고 서문윤은 가까스로 벅찬 마음을 갈무리하면서 입술을 열었다.
“절도사의 딸 또한 죽어간다 들었습니다. 시기가 늦어 그녀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절도사의 분노를 감당하실 수 있습….”
“기다리시오!”
그리고 그 때였다. 잠자코 말을 듣던 군관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온 게.
서문윤은 다급히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군관을 바라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단호한 성벽 같았던 자가 황양양과 절도사를 들먹이는 순간 움직인 탓이었다. 절도사의 분노가 그리도 무서웠던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내뱉은 말에 군관은 빠르게 정색하곤 행동했다.
군관이 사라진 자리와, 무언가 우중충한 기운이 감도는 성벽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공황에 빠져 말을 머뭇거렸다.
“이게 무슨….”
“그분을 걱정하지 않는 성민들은 없소.”
그리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서문윤의 몸이 멈칫했다. 성벽에 있는 누군가가 그를 향해 냉소 어린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그분은 역병이 퍼져 나갈 때 가장 먼저 솔선수범하셨으니까. 당시에 그분은 신의와 함께했던 의원을 찾아 조언을 얻고, 의당을 다시 꾸리는 일에 힘을 쓰셨지. 물자를 끊으라는 말에 반발하면서 그대들을 옹호했고, 역병환자를 쫒아내라는 말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신의의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셨네.”
아, 양양. 탄식이 흘렀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서문윤의 옆에서 검설린 또한 미간을 좁히며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병에 걸리셨다.”
병사의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연민이었고, 자랑스러움이었고, 슬픔이었고, 분노였다. 그리고 서문윤은 헤어질 때에 그를 울면서 말렸던 양양의 얼굴을 떠올리며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오라버니는 사지를 가시려 합니까? 의원에게는 의원의 일이 있고, 군관에게는 군관의 일이 있습니다. 그곳은 오라버니의 길이 아닙니다.”
그 순간 서문윤이 탄식을 삼켰다.
양양이 저를 걱정한다고 생각했었다.
“만일 오라버니가 그곳에 부임한 무관이었다면 저는 오라버니를 말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곳은 당신의 길이 아닙니다….”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황양양은 진실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길을 걸었구나.’
그의 옆에 자리한 사내의 덤덤한 얼굴에 희미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절도사의 분노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웅성거림이 커져나가고 있었다. 사내의 거칠게 쉰 목소리를 들으며 서문윤은 망연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그녀를 생각할 뿐이었다.
“우리는, 그분이 살 수 있다면 무엇이….”
그리고 성벽 위에서 고함이 울려 퍼졌다.
“문을 열어라!”
그그극, 두꺼운 나무문이 열리는 장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 * *
성문이 열리고 대로에는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대로에 서 있는 사내의 정체를 깨닫고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면서 검설린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재천.”
건조한 목소리였다. 원망도, 그 무엇도 거세된 가볍고도 담아한 목소리.
호명당한 사내, 하동하서 절도사의 위치에 있는 드높은 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오랜만입니다.”
존대를? 그 순간 당황한 서문윤이 몸을 뻣뻣이 굳혔다. 서문윤은 검설린이 군관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고관이란 것은 대충 짐작은 했어도, 서문윤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동궁사변 당시에도 황재천은 당상관이었다.
“일이 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재천은 지금 검설린을 향해 말을 올리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부관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으나,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다 천벌….”
“나는 하늘을 싫어한다.”
아니. 그의 말을 끊는 단호한 말이 아니었으면 분명 그리했겠지.
그러나 허심탄회하게 마음속 소감을 내뱉던 황재천은 칼날 같은 검설린의 말에 입술을 닫고야 말았다.
“그 소리는 내게 하지 마라. 앞장을 서.”
그는 고개를 들어 말 위에 탄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등진 사내의 복면 위 얼굴은 냉막했으나 동시에 굳건했다.
“반말을…?”
“됐다.”
부관의 말을 자르며 황재천이 손을 휘저었다. 언뜻 문인과 닮은 청수한 중년인은, 그들이 없던 시간에 더욱 초췌하게 변해 검었던 머리에는 흰색 흔적이 드문하게 보였다. 그는 세월이 묻어 나오는 용모만큼 사연이 깊어 보이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
“그저 내가 불민한 탓입니다….”
그는 외동딸의 병환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운표선이 남긴 편지를 읽은 후였기에, 서문윤은 이제 황 백부가 조정과 공모했으며 장한성을 버리려 한 악행을 저지르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 병자에 가까운 얼굴에 미움과 분노를 차마 터뜨리지 못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진실로 추잡하고 염치없다는 것을 알지만…….”
쓸쓸한 말을 흘리며 황재천은 머뭇거렸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공손히 숙이며 말을 내뱉었다.
“살려주십시오, 장군.”
장군.
그 말은 쉽지 않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무관 중에서도 오로지 소수만 오를 수 있는 자리.
“그, 그게 무슨.”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비사를 알고 있는 서문윤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자리한 부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북성에게 존대하는 상관의 모습, 그리고 그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검설린의 모습.
아연실색한 이의 시선을 무시한 채 검설린은 한동안 황재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비소를 흘리며 그래, 짧은 답변을 내렸다. 그 냉랭한 말에 황재천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쁨을 드러냈다. 장한성을 버리려 했던 비정한 사내가 딸의 죽음에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절망하고 있다. 서문윤은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황양양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황재천이 장한성을 지원할 것을.
부모자식의 정이란 그리 이기적이고, 또 맹목적인 것이다.
그를 바라보며 그 순간 강소성에 자리한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서문윤은 한순간 어두운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황재천은 길을 안내하는 하인마냥 검설린과 서문윤의 앞에 선 채 저택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들 일행을 불안과 기대, 적의와 간절함이 함께 서린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성안은 쥐 죽은 듯 침묵이 감돌았고, 서문윤은 대로로 향하여 병자촌을 보지 못했으나 사람들의 얼굴에 언뜻 보이는 공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장한성보다는 훨씬 낫다.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은 형편.
서문윤은 그들을 지나며 묘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시간 동안 장한성이 지켜준 땅에서 이들은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그들을 증오하고 있고.
‘…조금은 의형이 이해되는지도.’
타인의 상황에서는 둔하지만 제 상황에서는 몹시 극한으로 행동하는 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가 간다지만, 환멸나는 것도 사실이다. 복잡한 마음을 느끼던 서문윤은 그러나 황재천의 저택에 발을 디딘 순간 그 생각을 말끔히 지우고야 말았다.
‘이건.’
저택의 기운이 몹시 좋지 않았던 것이다.
황양양의 가솔들은 꽤나 안면이 있는 이들이다. 떠나기 전에 활발한 생기가 돌았던 곳이 우중충하니, 서문윤은 낯이 익은 자들의 애수 어린 표정에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제 일에 더 예민한 법이다.
저택의 있는 노비들은 상이라도 치른 것마냥 하나같이 어두운 기색을 하고 있었으며, 소리 내어 우는 이는 없었으나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럴 만했다. 서문윤은 조금은 건방졌으나, 나름 제 기준을 지키며 살아왔던 활달한 소녀를 떠올리고 무거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황양양은 사랑받던 아이였다.
“흑, 흑… 아가씨.”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황양양의 방에서, 서문윤은 결국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 양양.’
신음이 귓가에 흘렀다.
“아, 아….”
“아, 양양!”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상에 몸을 웅크린 소녀를 바라보며 황재천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신음을 흘렸다. 검설린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침상 옆에 앉아 황양양을 간호하던 유모를 제치고 그녀의 몸을 살폈다.
“주, 주인님….”
어디 양가의 여인에게 외간 남자의 손이 닿을 일이 있겠는가? 당황한 유모를 손짓하며 황재천이 말렸다. 본디 절도사 정도의 고위 고관은 소문을 기피하여 추문이 일어날 일을 말렸으나, 황재천같이 딸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검설린을 신뢰하는 것도 있었고.
검설린은 그녀의 몸을 점검하다 몸을 일으켜 짧게 말을 내뱉었다.
“심하진 않군.”
“그게 무슨!”
발끈한 황재천이 무어라 말하기에 앞서 검설린이 냉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심하지 않다, 황재천. 본디 이기적인 줄 알았지만 이 일에 책임 있는 네가 그리 말하니 웃기는군. 네가 장한성의 수많은 병자들의 몰골을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니, 너는 방관하려나?”
그리고 검설린은 유모에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술이 젖었군. 옷도 흐트러졌고 열도 높지 않아. 네가 손쓴 거냐?”
“…양양 아가씨께서는 의당에서 일러주신 말씀을 지켰습니다…….”
흰 천을 입술에 두른 여인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많이 버텼다.”
그리고 검설린은 침음을 흘리는 황재천을 향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하나다.”
그게 무슨?
멍한 표정을 짓는 황재천의 앞에서 검설린은 품에 있는 자기병을 꺼내며 냉소를 흘렸다. 그 웃음과 마주하여, 황재천은 감히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잠시 손에 든 자기병을 굴리다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것은 제법 살벌한 미소였다.
황재천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황재천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그거, 그게, 설마….”
그는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이 일의 공모자다.
“성, 성공했…?”
그리고 검설린은 서느런 말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간 나는 귀인을 살려 수만 명을 살리는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귀인의 목숨이 그들보다 중하다는 사실을 나는 조롱했다. 그날이 지나고 대의를 증오하였으므로,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눈에 들어온 자를 먼저 치료할 뿐이었다.”
숨을 멈추고 검설린이 차가운 눈으로 황재천을 보았다. 보고 있던 서문윤의 심장이 다 내려앉는 눈이었다.
“황재천.”
엄정한 말에 호명당한 이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는지 알겠지.”
“…….”
“……이건 네 딸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다.”
황재천은 숨을 멈추고 두 눈을 질끈 감아 동요를 드러냈다. 눈을 감았어도 차디찬 말은 멈추지 않고 그의 귓속에 틀어박혔다.
“네가 저지른 악행의 대가.”
침상 위에 늘어진 황양양의 몸을 살피며 서문윤이 속으로 그녀의 증상을 가늠했다. 버석한 입술에서 드러나는 탈수 증세, 땀을 흘리는 고열, 가끔씩 웅크리는 자세에서 드러나는 복통 증세.
“네 딸에게 쓸 거야.”
검설린은 그리고 음울한 미소를 지었다.
“지나친 저 수많은 백성들이 아닌 귀인인 네 딸에게 쓸 거다.”
그 말을 들으며 황재천은 몸을 움츠렸다. 서문윤은 그 말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황재천에게 죄책감을 씌어주는 것이었다. 차가운 말은 황재천의 마음속에 짐을 얹었다. 창백해진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나는 후일을 도모하고 있다.”
“저, 저는….”
“그러니 너는 이 치료제의 대가를 지불해야 해.”
그리고 검설린은 스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네 목숨으….”
“안 받겠습니다.”
그 때였다. 그의 말을 끊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양양아?”
“양양.”
황재천과 서문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병석에서 몸을 일으키는 홀겹 옷을 입은 소녀가 있었다.
“안 받겠습… 쿨럭, 컥!”
“아씨!”
몸을 고꾸라트리며 기침을 해대는 양양에게 기겁한 유모가 달려갔다.
“양, 양양아.”
“아, 아가씨, 말을 그만하셔요.”
“안 받겠습니다. 안 받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만류에도 황양양은 손을 휘저으며 말리는 손길을 거부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고집이 서려 있었다. 황양양은 망연해하는 아비의 얼굴을 무시하며 검설린을 향해 말을 이었다.
“절, 절도사의 딸이라고…… 그들을 대신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양양아!”
애타는 아비의 역정이 잇따르기 전에 검설린이 그 순간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고집부리지 마라, 너는 네 목숨의 가치가 어떤지 알고서 입을 놀리는 거냐?”
“의형.”
병석에서 방금 일어난 여인이다. 가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문윤의 만류에도 검설린은 냉소를 지을 뿐 입술을 닫지 않았다.
“네가 죽으면 황재천이 좋다고 장한성을 돌보겠군. 개소리 지껄이지 마.”
창백하게 질린 여인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이제 네 목숨은 네 본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황양양은 그 말에 진정하지 않았다.
“아버지!”
병자의 것 같지 않은 찢어질 듯한 목소리에 황재천이 몸을 흠칫했다. 격분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장 맹세하세요!”
“양, 양양.”
“당장 맹세하세요! 장한성에 물자를 보급하겠다고!”
황양양은 차라리 전쟁에 임한 장수와 같아 보였다. 악에 바쳐 소리치는 여인의 눈에 불꽃이 흘렀다. 당황한 황재천을 향해 기어코 손을 뻗은 황양양이 그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병자의 손길에 무기력하게 비틀거리며 황재천은 침상에 손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분노 어린 말이 이어졌다.
“왜 물자를 끊으신 겁니까! 왜 제가 말렸는데 그런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양, 양양아.”
“저는 장군의 딸입니다. 군문에서 영토를 지키지 않, 않으면… 하흑…!”
그리고 미친 듯이 황재천의 소매를 흔들던 황양양이 어느 순간 몸을 고꾸라트려 침상에 엎어졌다.
“아가씨!”
“양, 양양아!”
“양양!”
기겁한 사람들의 아우성을 떨치고 크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검설린이 침상으로 성큼 향했다.
“비켜!”
황양양을 돌보려는 건가?
의원이 쓰러지는 환자에게 다가갔으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어진 검설린의 행동에 기겁하여 그의 소매를 붙잡아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의, 의형!”
“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꺄아악!”
검설린이 황양양의 뺨을 붙잡아 거칠게 흔든 탓이다. 아픈 소녀의 몸이 그의 손짓에 따라 흔들렸다. 눈이 뒤집어진 황재천이 그의 팔을 붙잡아들었으나 그는 검설린의 팔꿈치에 명치를 얻어맞고 바닥에 던져져 끙끙 앓아야만 했다.
“네가!”
그리고 놀라 몸을 부르르 떠는 황양양에게 검설린은 두 눈을 번뜩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네가 대의를 안다면….”
씹어 먹을 듯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 말할 수 없다.”
“하악, 하….”
아픈 소녀의 입에서 가쁜 숨이 흘렀다. 검설린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을 왜 살렸지? 왜 네가 솔선수범하여 병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추방을 막은 거지?”
“그, 그게 무슨….”
“내 규범으로 괴질을 막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행동한 거겠지. 그리고 이미 네 신념은 사람들에게 존중받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 너는 모르는구나.”
그리고 검설린은 차갑고 예민한 냉소를 흘렸다.
“너는 명사(名士)가 된 거다! 황양양! 너는 네 헌신으로 이들의 믿음을 산 거다!”
그 말에 황양양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높고 날카로운 조소를 흘리곤 검설린은 비웃듯, 혹은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네 죽음이 그저 한 사람의 죽음이라 생각하지 마라. 무너지는 건 저 어리석은 놈뿐만이 아니니까.”
“저, 저는… 저는….”
“너는 살아야 한다.”
냉혹한 말이었다.
“미안함으로 막기에는 네 가치가 커졌어. 네가 불러일으킨 일이야. 죄책감을 덜고 싶어 그냥 평범하게 죽으려면 아무 일도 하지 말았어야지. 그래야 황재천, 네 아비가 죽어가는 백성의 눈치를 보아 너를 살리지 못하지. 황양양. 그러나 너는 일을 저질렀고, 이미 네 의로운 일은 너를 가치 있게 만들었다.”
황양양은 몸을 벌벌 떨며 충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씨, 아씨. 울음을 터뜨린 유모가 검설린의 팔을 붙잡았다. 서문윤은 그가 연약한 여인을 때릴까 두려워하며 그를 살폈으나, 검설린은 뜻밖에도 엉엉 우는 유모를 밀치지 않고 황양양을 조심스럽게 풀어줬다.
“…흑.”
그리고 황양양은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서문윤은 울먹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짠한 마음을 느껴야만 했다. 황양양은 눈물을 참으려 노력했으나, 그것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잠시 어깨를 들썩이던 황양양은 결국 서러운 울음을 흘렸다.
“흐아아앙!”
어른스러운 소녀, 장군의 딸,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었던 명사라.
서문윤은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황양양은 오직 당돌하고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였다. 잠시간 멀거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고야 말았다.
“양양아.”
울음을 터뜨리는 황양양의 어깨를 껴안고 그가 속삭였다.
“양양아, 잘해줬어.”
“서문, 서문 가가.”
황양양은 엉엉 눈물을 흘리며 서문윤에게 말을 내뱉었다.
“양양아, 잘했다. 아주 잘했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서문윤은 한참 동안 그녀를 달랬다.
“돌아가신 숙모님도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네가 유언을 잘 지켰다고.”
황양양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서문윤은 알았다. 황재천이 열렬히 사랑했던 그녀는 신분은 낮았지만 몹시나 굳건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의롭게 살아가라. 그것이 그녀의 유언이었다.
“저는, 저는 잘하고 있나요?”
울먹거리며 하는 말에 서문윤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 너는….”
팔짱을 끼고 검설린이 그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서문윤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는 말을 내뱉었다.
“의롭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리고 의를 말한 순간 검설린은 그 말을 내뱉은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황양양은 울음 끝에 치료를 받아들였다.
“다행이군. 더 거부한다면 사지를 묶어서라도 치료를 하려고 했는데.”
“의형.”
굳이 그리 핀잔을 줄 필요는 없지 않나? 서문윤이 화를 참지 못해 무거운 시선을 보냈다. 그를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짓던 검설린이 이윽고 정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청매소는 만능약이 아니다. 환자가 병을 버티게 해주는 물건이지. 시간이 지나면 무용지물. 너희는 당장 이곳에서 나가라. 몸을 자세히 확인해야겠다.”
그 말에 주춤하는 이들을 향해 검설린이 역정을 내뱉었다.
“당장 나가!”
먼지에 젖은 몸을 씻은 후다. 검설린의 옆에서 그를 시중들려던 서문윤은 저마저 쫒아내는 의형의 행각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의형, 저는 왜?”
“나가라면 나가라.”
짜증을 부리며 소매를 걷는 검설린의 앞에서 망설이던 서문윤은, 그러나 소매를 당기는 황재천에 의해 어어, 소리를 내며 처소를 빠져나왔다.
“알아서 하실 거다.”
처소를 빠져나가면서 황재천이 서문윤에게 소곤댔다.
“네가 양양의 알몸을 보면 혼인해야 하는데 괜찮으냐? 넌 양양을 거부하고 있잖느냐.”
“예?”
“연동이니 뭐니 소문이 퍼졌다지만, 내가 네 성격을 모를 리가 없지.”
소문. 허를 찔린 듯하여 얼어붙은 서문윤을 앞에 두고 황재천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면 너는 모욕을 감수하고 그를 따라다니지 않았겠지. 황양양이 암시해줬다. 그를 좋아하느냐?”
“…….”
당근처럼 붉어진 얼굴로 침묵하는 서문윤을 향해 황재천이 피로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힘들 거다.”
“…압니다.”
“말리고 싶구나.”
“쓸모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그 말에 황재천이 힘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누구보다 더 잘 알지. 넌 양양보다 고집이 세니까.”
“…….”
대답 없는 서문윤에 황재천이 한탄하듯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런 험한 길을 걷게 되었느냐? 그는, 그는… 그러니까 네 마음의 상대로 적절치 않아.”
글쎄다.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를 왜 마음에 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대답이 나올 수가 있었다. 서문윤은 오만했던 사내의 시선을 떠올리며, 그가 이죽이는 말을 떠올리고, 그리고 어느 날에 지나칠 수 없이 쓸쓸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서문윤이 잠시간 넋을 잃었다.
달빛에 드리운 얼굴. 그는 제 뺨을 잡아 얼굴을 들이대곤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조롱의 말을 내뱉었다. 마치 저를 상처 입히려 작정하듯이 싸늘한 말을. 묵묵히 그날의 달밤에 벌어졌던, 그 충격적인 일들을 떠올리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입술을 열었다.
“잘생겼잖습니까.”
“어, 그렇긴 하지.”
황재천은 빠르게 수긍했다. 서문윤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잘생겼잖습니까.”
황재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은 정말 잘났긴 하다.”
서문윤은 그 말에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복면을 벗기 전에도 잘생겨 보였습니다. 그냥, 그냥… 평소에 행동거지가 위엄 있으셔서 지휘를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무관의 생애를 동경했던지라 그분을 동경했는데.”
사람을 위축시키는 그의 기세를 황재천은 잘 알았다. 수긍하며 얘기를 듣던 황재천은 이어진 말에 놀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어쩐지 가끔은 그런 의형이 몹시 나약해 보여서 신경이 쓰였습니다.”
“…나약이라.”
“어울리지 않지요? 근데 그랬습니다.”
황재천이 잠시간 침묵 끝에 답했다.
“너는 감히 그 사람을 동정하지 마라.”
그 말에 서문윤이 멈칫하고 황재천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는 꽤나 스산한 기운이 산재했던 것이다. 서문윤이 돌아본 황재천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살벌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네가 감히 동정을 해서는 안 될 분이다.”
“저는….”
“그 사람의 과거가 동정받을 만하다는 것은 둘째 치고 한낱 낙향무관 따위가 동정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서문윤. 너는 동궁사변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를 몹시나 가볍게 취급하는구나.”
무어라 말을 하려던 서문윤은 이어진 단호한 말에 입술을 다물고야 말았다.
“그 사람은!”
힘주어 내뱉은 말에 서문윤의 몸이 흠칫했다. 황재천은 그야말로 서문윤을 향해 귀신마냥 이글거리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잇새에 짓이긴 음산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알던 것 이상으로 지독한 과거를 지닌 사람이다. 네가 어디까지 그의 과거를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네가 가까이해서는 안 될 자다. 지금은 비록 야인이 되어 진흙을 구부정하게 기어 다니지만, 그럼에도 그를 주목하는 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야. 너는 그게 서학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악공(樂公).”
그 순간 황재천의 숨이 멎었다. 단 한마디 말로 그의 입술을 막은 서문윤이 투명하게 맑은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느렇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눈을 부릅뜬 황재천이 경악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
“저를 너무 허술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장한성, 장안사준, 동궁사변. 하나의 인물로 귀결되는 일 아닙니까?”
사실은 운표선과 동궁사변, 이청융의 일로 어느 정도 짐작한 상태다. 서문윤은 황재천을 향해 추궁의 시선을 던졌다. 얄팍한 신음을 흘리며 황재천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에게 존대를 하는 황재천을 마주하고 확신했다.
서문윤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가 맞습니까?”
“…….”
“그분이 악공입니까?”
“…….”
“제가 아는 그분이 맞습니까? 동궁태자의 벗이요, 장안사준 운표선의 붕우요, 장한성에 당시 부임했던, 아니 성주였던 사내가?”
알고 있던 나이와 이름이 달라 몹시 헤매고야 말았다. 답변하지 않는 황재천의 겁에 질린 얼굴에서 답을 읽은 서문윤이 탄식했다.
“맞군요.”
그에 대해서는 여러 아는 바가 있었다. 아니, 모르는 이가 없다고 보면 되겠지. 8년 전 그가 은퇴를 하고 사람들은 지속되는 외란에 그를 그리워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불운했던 인생을 동정했고.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서문윤은 잠시간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황재천이 잠시간 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이어진 무거운 말에 서문윤이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러니, 네 숙부로서 나는 네가 그자와 멀어지기를 바란다.”
황재천의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차마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는 분명 사람의 시선을 모으는 자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몹시도 짙은 불안과 걱정이 서려 있었으므로.
“나는 네 인생이 그자처럼 험난하지를 않기를 바란다.”
마치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처럼 저를 바라보는 황재천을 응시하며 서문윤은 가슴에서 울컥 치솟는 말을 삼켰다. 저를 걱정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가 유년 시절에 어린 저를 아껴준 것도 알고 있어. 그러나 서문윤은 아버지의 둘도 없는 벗의 걱정에도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제게 그런 말을 하실 자격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황재천이 몸을 멈칫했다. 서문윤은 그를 강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저를 걱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미 황재천은 황양양의 일로 서문윤을 한 번 버릴 생각을 했다. 그 어떤 사정이 있었던 간에 그건 사실이다. 황재천은 장한성을 망하게 할 생각을 품고도 조카 같았던 서문윤을 그리로 떠나보냈고,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검설린이 제게 무슨 고난을 안겼는가?
고난을 안긴 이는 오직 황재천과 그리고…. 서문윤이 숨을 들이켰다.
‘조정이지.’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구나.”
“예.”
“실망했느냐?”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황재천은 짧은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미안하다.”
서문윤이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아시면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
“의형과 관련된 일은 저를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
“저를 고난에 빠트린 것은 황 숙부입니다.”
창백해진 황재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설령 제가 고난에 빠진다 한들, 그건 제 선택입니다.”
황재천은 그 말에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강소성 형님 내외께는 가보지 않을 생각이냐?”
서문윤은 그 말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부모와 관련된 일은 그의 역린이었다. 다리가 망가진 이후로 절망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었다. 마음을 추스른 후에는 검설린과의 여정에 푹 빠져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을 못 했고.
‘…부모님은.’
황양양이 말했었지, 부모님이 저를 기다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신다고. 편지를 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황양양의 저택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장한성에 가기 전에 황재천에게 혹여나 하는 마음에 편지를 남겼으나 아무래도 불효를 덮기에 모자란 행동이겠지.
다른 건 다 몰라도 부모님의 일은 마음에 걸린다.
마음에 걸리는 죄책감을 무시하곤 그는 그저 묵묵히 처소를 바라보며 검설린을 기다릴 뿐이었다. 별관을 내어줄 테니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황재천의 말을 무시하면서.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수술은 길게는 반나절이 걸리는 험난한 일임을 잘 알았음에도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이 들지 않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황재천 또한 그의 옆에 시립한 채 간절한 눈으로 처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길어질 것만 같았던 기다림은, 생각 외로 몹시나 짧게 끝났다. 반 시진도 안 되는, 아니 이 다경에서 삼 다경이 흐른 시간. 벌컥 문을 열고 처소 밖으로 나오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놀라 물었다.
“벌, 벌써 끝났습니까?”
적어도 반 시진은 걸리는 정교한 작업이 아니었던가?
“수술은 어찌?”
그러나 검설린은 퉁명스럽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수술은 없다.”
그리 말하며 검설린은 피도, 그 어느 것도 묻지 않는 복면을 손가락으로 걸어 내렸다. 피로에 물든 담아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던 서문윤을 뒤로하고 황재천이 다급히 나섰다.
“양양은 괜찮습니까?”
“그건 모르지.”
일그러진 황재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검설린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7할은 병이 나을 거다.”
황재천의 입에서 탄식이 흐른 순간이었다.
“아아, 양양아!”
아비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비틀비틀 딸의 처소로 향했다. 그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밤 속의 우물같이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소리를 내며 주춤한 서문윤이 머뭇거리면서 입술을 열었다.
“시비에게 물어보니 북촌 근처에 병이 걸린 사람 수십 명이 생겼답니다. 많지는 않은 수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숫자이지요?”
“잘 아는군.”
“움, 움직일까요?”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고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의아해하는 서문윤의 얼굴을 소정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응시한 후 검설린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였다.
“윤아.”
“예?”
연이어 내뱉은 말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했다.
“만약에 장한성이든 건전성이든 완벽하게 살릴 방도가 있다면 어찌하겠느냐?”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서문윤은 잠시간 넋을 잃고 있어야만 했다. 농을 하지 않는 듯 차분한 검설린의 얼굴에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그, 그게 무슨.”
“대신에 의롭지 못한 일일 거다.”
검설린의 눈이 순간 어두워졌다. 서문윤이 흔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는 그러니까 사변 당시에 고위 무관이었던….’
정확히는 모르지만은 서문윤은 추측할 수 있었다. 환멸을 느끼고 낙향했던 검설린이 현실과의 타협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아마 조정과 거래를 할 생각을 하고 있겠지. 깊은 침묵이 서문윤을 불안하게 했다. 묵묵히 상념에 잠겨 있던 검설린이 입을 열려 할 때 서문윤이 그 순간 손을 들어 검설린의 입술을 막았다. 뒷짐을 지고 있던 사내의 눈이 크게 뜨인 순간이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굳은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서문윤이 숨을 가쁘게 내뱉으며, 그의 입술을 막은 손을 움츠렸다. 손바닥이 닿은 부위가 뜨겁다.
“…없는 경우라 생각하세요.”
눈을 내리깔아 그의 시선을 피했다. 서문윤은 망설이며 말을 내뱉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게 아니지. 방도가 있는데 하지 않는다면.”
“의롭지 않는 길에 최선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넌 참 욕심이 많구나.”
그 말에 서문윤이 검설린을 향해 놀란 듯한 시선을 던졌다. 검설린은 어이없다는 것처럼 웃음을 흘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찔한 청년의 귓가로 담담한 말이 떨어졌다.
“네 생존을 바라고 있다.”
그 뜻밖의 말에 서문윤이 얼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예?”
검설린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가자. 할 일이 많다.”
자신을 지나치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잠시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성큼하고 걸어 나가는 사내의 등이 점이 될 때까지, 그는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수아한 얼굴을 떠올리며 얼이 나가 있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처음 보는 희미한 미소에 홀려 그는 넋을 잃고 있었다.
‘…의형의 용모는 진실로 사랑스럽구나.’
시간이 흘러 그가 점이 될 때 서문윤이 주춤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속으로 작금의 상황만이 아니었다면 진실로 무도한 짓을 저질러버렸으리라, 생각을 품으며 그는 홧홧한 얼굴을 푹 숙이고 성큼 발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 * *
황재천이 판을 깔아주기로 했다.
장한성에서 있던 일의 반복이리라. 다만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보다 본진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전성에서의 하루가 더욱 여유롭고 편안할 것이란 예상이었다. 황재천은 의원을 모으라 전갈을 보냈고, 검설린은 황재천의 저택에서 기거하기로 하며 짐을 풀었다. 북촌과는 먼 거리였지만, 홀몸이었으면 몰라도 지금은 서문윤과 같이 있는 상황.
검설린은 혹여 모르는 조정의 개입을 경계하여 안전을 챙겼다. 이곳은 장한성이 아니라 조정과의 거리가 밀접한 곳이다. 아니, 사실 검설린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다.’
서문윤은 장한성으로 돌아가겠다 말을 했으나, 사실 그럴 의리는 없다. 검설린과 서문윤은 그들에게 그저 그런 은혜 이상을 베풀었으며, 성주는 그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말하였다. 이 상황에서 죽을 사지로 들어가는 일이 무슨 소용일까?
그러나 검설린은 착잡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안 통하겠지.’
서문윤의 고집 센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딜 가십니까?”
그의 부름에도 검설린은 말없이 별당 밖을 나섰다. 의원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물쭈물거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그가 일어서는 인기척이 들릴 때 검설린은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양양.”
아, 소리가 들리더니 서문윤이 작게 답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양양에게 가는 것이 아니었다. 검설린은 황재천의 처소, 본관으로 발걸음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의원의 일도 의원의 일이지만, 그 전에 끝내야 할 담판이 있지.
운표선이 알려준 비사는 아주 사악한 일을 말하고 있었고, 검설린은 그것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추궁이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간절히 탐색해온 일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황재천이 의뭉스러운 인간이지만 검설린은 그에 대해서 잘 알았다. 적어도 그는 정에 무른 인간이었다. 이런 선택을 한 것도 다 그 사랑에 휘둘린 탓이었고.
적어도 황양양이 완쾌하기 전까지는 황재천은 그를 배신할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검설린은 9할인 가능성을 일부러 7할로 떨어트려 말했다. 십 중 구와 십 중 칠은 어감이 몹시 다르지. 적어도 황재천은 그들을 해할 수 없을 것이다. 황양양이 투병을 할 때까지는.
그리고 본당에 들어선 순간 검설린은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의(義).”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저와 안 어울리는 말이지요. 압니다.”
힘없는 미소를 지은 청수한 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 처마 밑에 서 있었다. 그는 바로 검설린이 별당의 밖을 나서서 찾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황재천은 검설린의 방문을 기다렸는지 처소 밖 처마 아래 선 채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은 잠시간 황재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가 내뱉은 말은 검설린이 황양양에게 유독 날카롭게 굴도록 만들었던 원인이다. 바로 황양양이 말한 그녀의 어미의 유언.
‘의롭게 살라고.’
저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그것도 황재천의 딸이 의를 말하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지. 허가 찔린 기분이었다.
검설린의 시선을 받으며 황재천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회상에 잠긴 황재천의 얼굴이 황홀함으로 물들었다.
“저 같은 것에 비할 바 못 되는….”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는 황재천을 바라보고 검설린은 그 옛날 딸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던 청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웃으며 했던 말을.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죽는다 한들 저는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 칭하겠지요, 양양은 의인의 딸이 되고.”
…너무나도 순진했던 시절의 말이다.
그리고 황재천은 현실을 알고 장한성을 무너트리는 데 협조했다. 검설린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재천은 작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장한성에 물자를 지원해줄 수는 있습니다.”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에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저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입니다.”
“…….”
“하지만…, 이후에 벌어질 일은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황재천의 얼굴에는 쓰디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검설린이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냉소를 흘리며 황재천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너는 또 방관하겠지.”
“…막을 수가 없습니다.”
황재천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어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제 목을 쳐주십시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다. 검설린은 무덤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제와 공모했다는 사실은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원을 막은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 사실 황양양이 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황재천은 눈치를 보고 물자 보급을 막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저 하나의 보신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황제의 진노가, 양양, 양양에게 어찌 미칠지… 아시잖습니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고통, 분노, 자괴감이 섞인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황재천은 토로하고 있었다.
“관료의 잘못은 가족에까지 치죄하는 것을.”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검설린은 황재천의 간절한 말에도 피를 흘리지 않는 냉혈한 마냥 감정의 변화를 내보이지 못했다. 황재천의 얼굴이 씁쓸함으로 물들어갈 무렵이었다.
“배다리로 들어가기 직전, 검문을 하는 곳 근처에서 옛날 군화의 흔적을 발견했다.”
검설린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우리가 부임했던 때의 일이니까.”
황재천은 침묵했다. 지금은 민간에서 군화를 맞추지만 그들이 장한성에 있던 때는 군에서 나누어준 군화를 착용했었다. 나라에서 배부하는 똑같은 모양의 군화. 검설린은 그를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잊을 리가 없을 거다. 그 당시 군수창고가 회흘에 의해 대량으로 약탈당했던 사건.”
그것은 한창 회흘과 전쟁을 벌일 때의 일이었다. 황재천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검설린이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시 군화의 밑창 모양은 보고도 모방하기 힘들어. 그것에는 회흘이 감히 따라 하기 힘들 만큼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군병으로 위장한 간자를 잡아내는 데 유리했지. 강 하류 쪽에 시장이 있어 전쟁 중에도 교류는 끊이지 않았으니 우리에게도 큰 이득이었고. 너도 기억할 거다.”
“…….”
“그리고 그때 우리는 간자를 걸러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었다. 특별히 장색에게 명하여 군화 밑창에 새겨진 문자 중 획 하나를 정으로 꺾었었지. 검문 도중에 우리는 군화를 조사하여 흔적을 걸러내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네가 담당했던 기억이 나는군.”
동궁사변 이후에 군에서 군화를 지급하는 일이 사라지고 개인이 군화를 준비했으나, 그때 나라에서 나누어주는 군화를 재사용하는 군은 많았다. 하지만 다른 국경과 다르게 장한성 인근은 통상적인 군화란 존재치 않았다. 그 약탈 사건 이후로 회흘을 제외하곤 다 획이 꺾인 군화뿐이었지.
그리고 검설린이 배다리 근처에서 발견한 것은 회흘의 손에 넘어갔던 그 ‘통상적인 군화’의 발자국이었다.
그것이 말해주는 의미.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발자국은 장한성에서 건전성으로 가는 방향에도 찍혀져 있었지. 그것도 꽤나 활발하게 드나든 흔적이 보이더군.”
“…….”
“방금 전 성문 앞에서도 나는 발견했다.”
검설린은 수많은 말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 약탈 사건 이후로 국경에서는 검문을 할 때 군화의 모양을 살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지금은 병사들은 군화의 바닥을 검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 사건을 더 잘 알 황재천이 다스리는 건전성에서도 마찬가지였고.
‘통상적인 군화’를 신었을 회흘의 사람이 그렇게 건전성에 제 집인 듯이 출입하였던 배경에는 황재천의 묵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두 갈래로 갈라진 강에 끼어 있는 장한성에 침입한 회흘인이 회흘의 땅에 돌아가기 위해서 굳이 건전성을 거칠 필요는 없다. 본진은 장한성보다 병력이 막강하였으니까. 그것은 어렵게 돌아가는 일일 텐데 어째서 회흘인은 굳이 건전성을 거치려 하였을까?
그것이 말해주는 바는 명백했다.
검설린이 차갑게 웃었다.
“배다리 근처에서 국군화의 밑창을 발견하고 내가 어떤 생각이 들었는 줄 아나?”
회흘과 건전성의 공모. 황재천은 긴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냉소 어린 목소리로 검설린은 답변했다.
“그냥 그때 장한성에서 패배하고 죽어버렸을 것을. 그 생각을 했다.”
“…….”
“수많은 피를 흘려 지킨 것을 제 손으로 망칠 걸 알았으면 차라리 다 그때 끝내는 게 나았겠지. 난 널 비난하는 게 아니다, 황재천.”
묵묵히 들으며 황재천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애초에 내가 무슨 비난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진실로 쓰라린 미소였다.
“오랜 벗을 고발한 배반자가 그따위 ….”
검설린은 복면을 내리며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교철을 죽인 것도 너겠지. 열파답은 명장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화공을 쓰지 않아.”
교철은 장한성의 전 성주의 이름이었다. 회담 중 회흘의 기습으로 사망했다던, 이청우가 모시던 성주의 이름. 그리고 그는 검설린이 장한성에 있을 때 함께 그곳에 부임했었다. 검설린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회흘의 신앙은 화공을 기피하지. 게다가 열파답은 장한성에서 화공을 썼던 부친과 숙부가 역풍이 불어 오히려 타 죽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화공을 쓰지 않는다. 친족의 죽음을 하늘의 천역이라 생각하였으니까. 마음의 상처를 깊게 입어 불이 나는 곳에는 발을 들이밀지도 못했다, 그는.”
그 순간 검설린의 차분하던 눈에 불꽃이 번뜩였다.
“그리고 열파답은 회담장에서 기습할 사내가 아니야!”
그것은 격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회흘에서 바른 성품과 용맹으로 존경받는 명장. 한 번도 전쟁에 임할 때 비열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토번과 중원에서도 그의 성품을 높게 사는 이가 많았지.”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사내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있었다. 흉흉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황재천은 눈을 감았다.
“그런 그가 회담장에서 화공을 벌였다는 말을 내가 믿어야 하나?”
그는 스산한 목소리에 눈을 감은 채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초췌해진 황재천의 얼굴에 쓸쓸한 웃음이 일었다. 검설린은 황재천이 말을 내뱉기까지 그의 얼굴을 불꽃이 치솟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침묵 끝에 황재천은 눈을 뜨고 헛웃음을 흘렸다.
“성주에게 꼬리가 밟혔습니다.”
“…….”
“교철은 똑똑했고 또 고지식한 위인이었습니다. 사변 때 고변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의 시인에 검설린의 얼굴이 다시 차분해졌다. 황재천은 언뜻 경쾌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사실은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제의 명을 따라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조정에서 화공을 지시한 겁니다.”
“그들이 이청우를 암살하고자 한 것에 너도 동참한 거냐? 꽤나 조급하게 일을 벌였더군. 대놓고 그를 죽이면 꼬리가 밟힐 수 있을 텐데.”
“이청우 암살에 저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황재천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는 그때 양양을 돌보느라 미쳐 있었으니까요.”
건전성에 퍼진 괴질의 일과 이청우의 암살 시도 사건. 검설린은 그때 경악했었다. 중원 땅과 강을 사이에 둔 장한성과 다르게 건전성 본진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개방적인 곳이다. 중원에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는 일.
사고라 생각하면서도 공교롭게 겹친 시기에 검설린은 속으로 의심했다.
그날 이후로 조정이 맛이 간 것은 알았지만, 설마 전염병을 직접 퍼트린 건가?
황제가 그 정도까지 미쳤을까?
황재천이 설마 여기까지 타락을 했을까?
의심에 휩싸였던 검설린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회흘의 병사가… 후후, 장한성을 오가면서 괴질을 퍼트린 겁니다.”
그리고 황재천은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하늘을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만 저는 천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고?”
검설린은 그에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회개해서 장한성을 살리려 들겠다고?”
본인이 저지른 일. 이제 와서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웃기지 않나? 계속해서 하늘의 벌을 운운하는 황재천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비웃는 시선에 황재천이 살풋 웃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저는 이중곤을 적대할 수 없으니까.”
“아예 막나가는군. 이중곤은 황제 이름이잖아?”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중죄인데, 아예 황재천은 집에 있는 개새끼 부르듯 호명하고 있다. 애초에 그가 황실에 충성심이 없다 것은 알았지만. 그제야 검설린은 눈앞에 있던 자가 장한성에 있을 당시부터 황제에 대해 그다지 존경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떠올리고 헛웃었다. 황재천은 그때도 실리를 챙겼지 명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검설린을 향해 황재천이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당신을 조금 닮아보기로 했습니다.”
“허?”
“소인의 삶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황재천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빙그레 웃는 중년인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검설린이 이윽고 서느런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백년화는 어디다 처박았지?”
황재천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그가 어색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암시장이 황제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검설린은 무언가의 추측을 한 후였다.
동궁사변을 일으킨 물건, 백년화는 황제에게 있어서 역린임이 틀림없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황재천이 암시장에 개입했다면 아마 백년화를 판 상인을 추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저 백년화를 가진 의원을 잡아들일 뿐만이 아니라, 암시장을 뒤집어서 백년화의 씨를 멸하려 들었을 것이다.
날카롭게 벼린 칼 같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거짓말할 생각하지 말고 당장 내게 말해라. 황재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상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남아 있는 백년화는 아예 없는 건가?”
“…도대체 그건 왜 찾으시려는 겁니까?”
황재천이 숨을 들이켜며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요사스러운 물건을?”
검설린은 그의 말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담담했던 중년인의 얼굴에는 시퍼런 귀화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잠시간 검설린이 생각에 잠겼다.
백년화의 밭을 모조리 태우고 종자를 없애려 함은, 사건을 은폐하려는 귀비의 의도였으나 사람들은 그를 몹시도 반겼다.
향을 증오하는 이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검설린이 짧게 말했다.
“필요하다.”
그 말을 끝으로 검설린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다. 잠시간 검설린을 바라보던 황재천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귀비에게 모조리 갔습니다. 고우군에게 걸린 이후에는 암시장도 망하여 이제 수급이 불가합니다. 백년화를 대준 토번의 지주도 암시장에서 손을 떼어….”
“…….”
황재천이 그 순간 정색하며 말을 내뱉었다.
“설마 제가 생각한 일이 맞습니까? 서문윤 그 아이도 태자 전하와 같은….”
“네 태자는 이청융이 아니라 이청은 아닌가?”
그 말에 황재천은 입술을 다물었다. 검설린의 말은 옳았다. 동궁태자 이청융이 사사되고 황재천은 그를 감히 전하라 입을 올려서는 아니 됐다. 그것은 황제를 ‘이중곤’이라 칭한 것과는 다른 의미. 검설린은 황재천도, 저 자신도 감히 용서하지 못했다. 이청융을 전하라 칭할 자격도 없다 하면서.
쓴웃음을 흘리며 황재천이 말했다.
“옳은 말이십니다. 감히 제가 그 호칭을 입에 담아서는 아니 되겠지요.”
“…….”
“하실 말씀은 그게 끝입니까?”
검설린은 침묵 끝에 말을 내뱉었다.
“…동료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겠지.”
“무슨 소리십니까?”
“서문린의 아들은 책임지고 네가 보호해라.”
침잠된 목소리였다. 말을 내뱉는 사내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그는 황재천의 대답을 종용하며 상대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황재천은 투명한 눈으로 검설린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영공.”
그것은 그가 옛날에 불렸던 존칭이었다. 그 순간 무섭게 눈빛을 바꾼 검설린이 황재천을 노려보았다.
황재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 채 검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어진 말에 검설린은 얼굴빛을 싹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영공께서 설마 그러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
“…윤아와 미래를 약속할….”
“네가 내게 감히 미래를 말해?!”
그러고였다. 검설린의 손이 황재천의 뺨을 덥석 움켜쥔 것은.
“입 닥쳐!”
말을 내뱉던 황재천이 입술을 딱 다물고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뺨을 아프게 움켜쥐는 손길. 숨통을 꽉 막히게 만드는 살기에 버거움을 느끼면서도 황재천은 얼굴에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속해주십시오.”
그는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사내를 향해 간절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염치없다는 것은 알지만…… 아시잖습니까. 윤아는 착한 애입니다.”
“…….”
“당연히 윤아는, 제가 돌볼 겁니다…. 허나, 장군…. 저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의 쇠심줄같이 질긴 고집을 알기에.”
탄식이 흘렀다.
“당신이 그 아이의 마음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 아이를 망하게 만들 겁니다. 사내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말리지 않습니다만, 당신과 함께한다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
“그러니 약속해주십시오. 저는 확약받고 싶습니다.”
“…….”
“…윤아의 마음을 거부하십시오.”
간절함이 담긴 말에 사내의 두 눈이 잠시간 흔들렸다. 아끼는 조카를 사지에 보냈던 사내가 무어 할 말이 있다고 뻔뻔하게 이리 내게 말해. 그러나 검설린은 그를 향해 더 이상 독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어느 겁박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황재천은 검설린을 향해 은근한 비난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 그 아이를 고난스럽게 할 생각입니까?”
검설린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생각 없다.”
그러나 그리 말하면서도 검설린은 황재천의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어린것을 내가 어찌 품을 생각을 한단 말이냐. 다 망해서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같은 사내가 양가의 자제와 미래를 꾸릴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 황재천에게 이죽거리지 못했다.
‘왜, 왜 나는 그러면 안 되지?’
기울어지는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먼저 다가온 건 그 철없는 애인데. 거부해도 달라붙는 건 그 애인데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하지?’
맑은 눈을 떠올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미래를 꿈꾸는 저 자신을 깨닫고 있었다. 다가오는 온기를 막고 싶지 않아 하는 저를 깨닫고 있었다.
검설린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에 휩싸여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거칠게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완전히 미쳤군.”
그리고 황재천을 내팽개쳤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찾은 황재천이 아픈 뺨을 주무르면서 잠시간 묵묵히 땅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이 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0년이다.”
“……?”
복잡한 빛이 스쳤던 황재천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무슨 소리? 고개를 들어 올린 황재천은 용암이 들끓는 듯한 눈으로 잠자코 허공을 바라보는 사내와 마주하곤 숨을 멈춰야 했다. 어둠이 자리한 시간. 새하얀 달을 등지며 그 사내는 민초가 된 후에도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오만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분명 고관은 저이고, 그는 이제 낙향한 양인에 불과하였음에도 황재천은 그가 등진 달빛이, 머리 주변의 구름이 그의 옥좌와 같다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차라리 그가 황손이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쓸데없는, 그러나 수많은 이들이 품었던 생각을 하며 황재천이 헛웃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복잡한 시선을 받으면서 잇새에 짓씹은 말을 내뱉었다.
“청융은 내게 10년간 의원의 길을 걸으라 말했지. 제게 저지른 죄를 그리 갚으라 하였다. 10년은 자신의 명을 따라 사람을 도우며 살라면서 내게 사명을 내렸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검설린은 숨을 멈추고 싸늘히 웃었다.
“자유의 몸이 된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는가? 황재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내 혼마저.”
잠시간 넋을 잃고 검설린을 바라보던 황재천이 그 순간 어떤 사실을 깨닫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설, 설마?!”
“…육신은 혼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거겠지.”
분리된 그것들이 제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검설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황재천은 그 순간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며 기나긴 침묵을 지켰다. 걸어 다니는 시체 같은 혈기 없는 안색에 서린 차가운 조소. 검설린은 잠시간 황재천을 짙은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야멸차게 몸을 돌렸다.
황재천은 빠른 걸음걸이로 사라지는 검설린을 향해 끝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10년의 끝이 다다르고 있었다.
검설린은 차분히 처소로 귀환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집 없이 정처 없이 맴돌았던 혼은 한때 타인과 하나라는 이름으로 묶였으나 지금은 이미 땅 아래 묻힌 지 오래였다. 사변 이후에 미래를 꿈꿀 생각을 전혀 품지 못했다. 사부작 풀잎을 밟으며 검설린이 처소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셨습니까? 자리를 비우신 동안 사람이 왔습니다. 의당으로 지금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검설린은 문턱에 멈춰 서서 잠시간 단정한 용모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채비를 갖춘 서문윤이 맑은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은 잠시간 답을 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의형?”
의아함을 느낀 서문윤이 반문했을 때 검설린은 몸을 움직였다.
어쩐지 이상한 기색이다. 주춤하는 서문윤을 지나쳐 검설린은 목함으로 향했다. 놀랐는지 움찔하는 서문윤의 귀 끝을 흘끗 보며 검설린은 제가 복면을 쓴 사실에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맨얼굴을 보였다면 큰일날 뻔했군.’
목함 한구석에 자리한, 운표선이 내어준 편지를 펼치며 검설린은 잠자코 상념에 잠겼다. 그는 지난 2년간의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황하에서 몸을 떨어트리길 망설이던 그 어린 청년의 울먹거리는 얼굴을, 절망에 어린 얼굴을.
그리고 2년간 서문윤은 서서히 생기를 찾았다.
“신의께서 괜찮으시다면 의형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결코 당신께 형으로서의 의무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런 부담을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가 존경하여….”
“의형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을 당연하게 여기십니까? 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도 된다 생각하십니까?”
“결국 해냈습니다, 의형! 의형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스락거리는 편지를 접으며 검설린이 쓴웃음을 흘렸다.
열두 살이면, 특히나 그의 나이대의 열두 살이면 절대로 무시 못 할 나이 차이지.
황재천은 옳았다. 검설린이 잊어가던 마음가짐을 그에게 알려주었으니. 그는 참으로 시의 적절하게 그 말을 내뱉은 것이다.
‘…그러나.’
검설린이 문득 숨을 멈췄다.
그는 황재천에게 바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10년이 지나면 죽으리라. 서문윤과 미래를 꿈꾸지 않겠다.
그 말을 검설린은 바로 내뱉지 못하고 긴 시간이 흘러서 간신히 내뱉었다. 황재천의 의심은 가당찮다. 그러나 사실 검설린은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문윤에게 기울어지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금 살고 싶은 마음을.
이상한 의형의 기색에 불안해하던 서문윤이 이어진 말에 고개를 들었다.
“서문윤.”
“예?”
“……너는 북촌에 가지 마라.”
서문윤이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또다시 저를 일에서 배제하나, 하는 걱정이 묻어 나온 얼굴이다. 그러나 검설린은 무심한 얼굴로 운표선의 편지를 서문윤의 품에 던지며 말을 내뱉었다.
“이곳에 남아 청매소를 제작하라.”
그 순간 작은 침묵이 있었다. 서문윤이 새파래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 그걸 제가 어떻게 만듭니까?”
검설린은 놀라움이 산재한 그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운표선이 내어준 것은 정제된 청매소라 강력하지만, 임시로 만들 수도 있다. 사금이 섞인 모래와 정제된 금의 차이라지만 효능은 비슷하다.”
서문윤은 그제야 운표선이 편지 아래에 일러준 내용이 청매소를 제작하는 방법인 줄 깨닫고 탄식했다. 창고에서 이끼 같은 것을 기르던 검설린의 행동이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편지를 꼼꼼히 읽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이 말을 이었다.
“운표선은 부러 내게 청매소를 기르는 방법 중 몇 개를 변주하여 알려주었지…. 난 의원이지 장인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방법은 알지 못했어….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귀중한 가르침이다.”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파나립의 정수.”
그제야 서문윤은 그 대단하다던 청매소의 제작법이 몹시나 간단한 것을 깨닫고 놀라움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편지의 설명은 몹시 간단했다. 그리고 망설이는 서문윤의 귓가로 나직한 말이 내려앉았다.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파나립의 정수라면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 서문윤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며 잠시간 얼어붙어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가 듣기를 원했던 말이었고, 동시에 그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말이었다. 방황하는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서문윤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싫습니다.”
검설린의 얼굴이 굳은 순간이었다.
“…뭐?”
서문윤은 그의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황 숙부께 맡겨도 되는 일입니다. 제조법을 보니 이것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군요.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저 보안만을 철저히 하면 되는 일. 그러면 제가 굳이 할 일은 아니지요.”
바스락 편지를 접어 서문윤이 검설린을 향해 다가갔다. 목함이 자리한 탁자 위에 편지를 올리며 그가 작게 말했다.
“다시 드리겠습니다.”
“너….”
침음을 흘리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은 웃으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아시잖습니까. 황 숙부에게는 양양이 전부입니다. 이번 일에 의형을 배반치는 않을 겁니다.”
검설린이 의외로 불안한 사람이란 사실을 서문윤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믿는다는 말은 달콤했지만, 굳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형을 따라다니겠습니다.”
저를 떼어놓는다는 말이 불안했다.
‘그는 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목숨에 집착이 없어 사지를 피하지 않던 의원이 장한성으로 가길 망설일 만큼.’
짐작이 갔다. 검설린이 저를 건전성에 온 이 기회에 떼어내고자 함을. 어렴풋이 이제 서문윤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다.
검설린은 서문윤을 어두운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을 받으며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함께하겠습니다.”
그 말에 한동안 그를 빤히 응시하던 검설린은 곧 포기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라.”
그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는 일련의 사건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서문윤의 고집은 검설린마저 막을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세져 있었다. 쇠심줄같이 질긴 그 고집은, 아마 오곡현 이후부터 더욱 굳세졌지. 해탈한 듯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고 서문윤은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맹세해주십시오.”
검설린이 그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앞으로 저를 떼어놓지 않겠노라고.”
“…….”
“저는 당신의 곁에서 끝까지 함께할 겁니다.”
바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문윤은 답변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덤덤한 얼굴로 검설린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평온한 눈을 보면서 검설린은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황재천의 말은 모두 수긍이 가능하다.
검설린은 이 순간 그 말을 따르지 못할 저 자신과 마주하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지.’
장한성에서 있던 일련의 사건. 그리고 검설린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저가 서문윤을 밀어내기에는 너무나도 늦었다는 것을. 정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에게 너무 많은 부분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그토록 묻어두었던 이청융의, 동궁태자와 관련된 위험한 비사를 내뱉을 때 검설린은 사실 서문윤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웃기는 일이지.
그토록 밀어내려 하였는데도.
‘2년 전에 그가 의형이라 부를 때부터 거부해야 했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검설린이 고개를 숙였다. 복면을 검지로 걸어 내린 순간 슬쩍 올라간 입술 끝이 드러났다.
검설린은 바람에 날아갈 듯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수아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
붓으로 한 획으로 그은 듯한 단정한 입술, 자그마한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검설린이 눈을 감았다. 얼어붙은 청년의 몸이 느껴졌다. 입술을 타고 번지는 따스한 온기.
그래, 온기.
갑작스러운 접문(接吻)은 길게 이어졌다.
입술을 타고 뜨거운 숨결과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검설린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의형이라 부르던 말이 기분 좋았노라.
그는 오래전부터 이 온기를 바라고 있던 것이다.
그저 입술만 마주 댄 접문 끝에 검설린은 입술을 물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완전히 얼어붙어 멈칫대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약속하지.”
머릿속이 몽혼했다.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일이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검설린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충동에 잠식되어 행동했다. 그간 이래서는 안 된다고 그리 저 자신을 말렸는데.
그러나 모두가 떠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체 같은 제 곁에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서문윤을 앞에 두고 검설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버린 나를 거두어주겠다는데 내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한참을 붉은 얼굴로 어버버거리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슬쩍 검설린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고개를 슬쩍 숙이는 사내를 향해 서문윤이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한, 한 번 더….”
그 말에 검설린은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서문윤은 끙끙거리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뒤로 꺾어 입술을 더 깊게 받으려 노력했다. 꾹 입술을 누를 때 발뒤꿈치를 드는 서문윤을 깨닫고 검설린은 결국 입술 끝을 비틀어 시원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다 망했다.’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검설린은 이 행위를 멈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서문윤의 허리에 결국 팔을 감고야 말았다.
입술을 댄 접문은 어느 순간부터 혀를 섞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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