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안사준(長安四俊)(8)
“왜 몸을 빼지 않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이게 뭔가 이상한 건 알고 있잖아. 조정에서 무턱대고 장한성주 취임을 반대할 리가 없다는 걸. 조정을 장악한 노친네들이 아무리 정신 나갔다 한들 전장에 우두머리를 세우지 않는 개같은 짓거리를 할 정도는 아니야.”
“신의께서는 속세에 초연한 신선 같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상당히 다르군요. 저 멀리 장안 조정의 일을 다 아시고.”
“백성들을 끔찍이 아낀다던 장안성주도 죄 없는 의원을 납치하는데, 소문과 사실이 다른 건 그다지 놀랍지 않지.”
“제가 저지른 잘못을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할 일이 태산과 같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그때 목숨으로 사죄토록….”
“그래, 그게 가진 자들의 권리지. 자기들 멋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듯 사죄하고 죄책감을 더는 거. 그런 입 발린 말 따위 듣고 싶은 게 아니니까 제대로 답하기나 해.”
“…성주가 성을 버리고 어찌 도망을 가겠습니까.”
“너는 이게 정말 승산 있다고 생각하나?”
“…….”
“조정이 관련되어 있으면 네 적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아니, 역병까지 합하면 셋이겠군. 넌 이 상황에서 수성이 가능할 거라 생각해? 휴전이 끝나면 다 죽은 목숨이야. 현실적인 충고 하나 할까? 이 태부에게 연락해. 네 알량한 자존심 따위….”
“아버지는 제게 죽으라 하셨습니다.”
“…….”
“장부는 한번 벌인 일을 돌이킬 수 없다. 무관의 길을 걷겠다고 한 건 너이니, 책임지고 이곳에서 죽으라 하셨습니다.”
“…그래, 자식은 더 낳으면 되는 거지. 혈육의 정에 대해 너무 높게 평가했군. 나도 이제 물러졌어.”
“끝났다는 표정이십니다.”
“그래, 다 끝났으니까. 모두 다 죽을 거다. 너도 모르지 않지 않나?”
“장료는 합비에서 7천 군사로 10만을 무찔렀지 않습니까? 포기하지 않으면 살 길이 열리겠지요.”
“태평한 소리 하고 있구나. 여긴 합비가 아니라 장한성이다. 선대 가한돈(왕비)의 남동생이 이곳에서 죽었으면 장한성은 풀포기 하나도 남지 못할 거다. 왕족을 죽인 성은 불태우는 법. 다 죽은 목숨이지.”
“그렇습니까?”
“…이게 그따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청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성벽 밖을 바라보던 사내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청우는 복면 위의 차가운 눈을 바라보며 반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책망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제 멱살을 잡으실 때만 해도 당신이 저를 경원시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의원을 납치하고 가망 없어 보이는 일에 발악하는 저를.”
“…….”
“당신은 제게서 무엇을 보고 계신 겁니까?”
“…말 돌리지 마라.”
“서문 공자가 저번에 제게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사실 심약하신 분이라 했는데, 그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와그작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에 피식 웃으며 이청우가 고개를 숙였다. 볼에 홈이 파이게 웃는 그를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며 사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살 수 있었다. 성주 취임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순간에 너 하나는 몸을 뺄 수 있었어. 아니, 사실 네가 이 성을 책임질 필요는 없지. 말마따나 넌 성주가 아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렇지요.”
“사람들은 널 기억하지 않을 거다. 너는 사서에 가망 없는 일에 몰두하여 아까운 목숨을 버린 청년 무장으로 남을 거다. 너를 연민하는 사람도, 어리석다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게 네가 목숨을 버리고 얻을 명예의 전부다.”
“저는 명예 때문에 성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명예 때문이 아니라면 더 어리석군. 너는 이름 석 자 외에 남길 것이 없을 테니까.”
“왜 남길 것이 없습니까? 저는 사람을 지킵니다.”
멈칫한 검설린을 이청우가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세찬 바람에 오히려 더 세차게 불타오르는 횃불이 있었다. 검설린의 입술에 신음을 흘리게 한 것이었다.
“이들을 버리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맞습니까? 저는 제 사람을 지킬 뿐입니다.”
“…그건 더욱이 목숨 바쳐 지킬 만한 가치도 없다. 사람의 본성은 사악하며 언젠가는 타인을 반드시 배반하게 되어 있다. 타인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더벅머리 어린아이의 의기일 뿐이다.”
한숨을 내뱉으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어리석구나. 스스로의 목숨을 보존하기도 힘든 세상에 인의라는 허상을 지키려….”
“그것은 장군의 경험으로 인한 의견입니까?”
그 말은 사내를 바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숨을 멈춘 망부석이 된 사내를 향해 이청우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안타까우십니까?”
“…….”
“제가 다른 길을 걷기를 바라십니까?”
“…….”
“저는 후회하고 있습니다. 의원을 납치하고 그들을 겁박한 것은 사람답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의 명은 장한성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목숨을 바쳤고 저는 그를 외면하고 도망칠 수 없습니다. 저보고 아집을 부린다 하셨지요?”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흘렀다. 이윽고 이청우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설령 아집이라 한들 어떻습니까. 저는 이들과 명을 다할 것입니다. 사명에 임하는 건 장수의 일이고, 약속을 지키는 건 장부의 일입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사악하지 않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하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착잡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청우가 물었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전 장한성주가 죽었을 때 상황, 네가 옆에서 지켜봤다고 들었다.”
“무얼 원하십니까.”
“그날 일, 내게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 * *
“서문 공자는, 그는 건전성에 빼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성벽에서 내려오며 검설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동기 아니랄까 봐. 이청우는 서문윤과 비슷한 눈으로 검설린을 괴롭게 했다.
아니, 그건 사실 때 묻지 않은 올바른 청년의 눈이었다. 관직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의 눈.
‘사람의 선한 면을 믿고 있는….’
쓰게 웃으며 검설린은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그가 내뱉은 말이 연이어 스쳤다.
“그는 무고합니다. 저희와 다르게.”
저희라고.
한순간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 말을 할 때 이청우가 지었던 묘한 미소를 떠올리며 검설린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그의 뒤이은 말을 떠올렸다.
“전대 성주님께서는 한 사내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머릿속에 동시에 생각났다.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진 순간이었다.
그 말을 내뱉으며 이청우는 누군가를 회상하는 듯한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분의 영웅이셨다며….”
영웅 좋아하네.
짜증 섞인 말을 중얼거리며 검설린이 미간을 좁혔다. 기분이 좋지 않다. 답답함에 옛 버릇을 못 버리고 성벽을 올랐더니만, 오히려 불쾌함만이 가중되었을 뿐이다.
이제 와서 그의 탈선을 바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꿋꿋이 올바른 이청우의 태도가 마음에 짐을 얹었던 것이다.
쯧, 혀를 차곤 사내는 잡생각을 떨치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이 허공을, 아니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열파답이라….’
눈앞에 아른거리는 불꽃을 떠올리고 검설린이 차분히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청우는 회담 중에 전대 장한성주가 암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회담에 나선 회흘의 장수인 열파답이 배신을 하여 기름 먹인 천막에 불화살을 쏘았다고.
“아직도 눈에 아른거립니다. 그는 저희를 구릉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불화살을 쏜 사수들을 옆에 거느리며 아지랑이 속에서 늑대 같은 눈을 빛내면서….”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검설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아니야.’
화공을 쓴 것은 열파답이 아니다.
* * *
교착(膠着).
그것보다 지금 장한성의 현 상황에 더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물론 서문윤 일행이 처음 올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상황이었다. 원활해진 물자 수급에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으며, 장한성에는 한층 활기가 돌았다. 검설린의 예상과 다르게 수액의 효과가 좋아 사망하는 환자의 수 또한 확연하게 줄어들었고, 놀랍게도 병자들 중에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까지 생겼다. 술이 묻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게 한 것도 전염의 확산을 막는 것에 도움이 되어, 괴질의 확대는 어느 정도 잡힌 상태였다.
거동이 가능한 이들이 일손을 도우기 시작했다. 빈곤한 상황에 신음하던 이들도 기력을 되찾아 사람들을 간호하니 부족하던 인력도 충원되었다.
다만 아직까지 완치된 이들은 없었으며, 사망자는 줄어도 간간히 숨을 거두거나 중태에 빠지는 환자들은 있었다. 의원들은 그것만 해도 기적이라며 기뻐하곤 했으나, 전직 무관이었던 청년은 그에 그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병세가 잡힌 것도 아니니, 거의 밀폐되다시피 한 장한성에서 언제 또 확산될지 모르는 노릇.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가는 이청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서문윤은 폭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휴전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젠 전쟁인데.’
그 생각만 하면 마음 한편이 답답해지고 가슴이 무거울 뿐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빠르게 고민을 털고 수건을 빠는 일에 열중했다. 어떻게 타파할 방도가 없으니 그저 묵묵히 제 일을 다할 뿐이다. 그는 장수가 아니었으며, 말마따나 수성은 그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일손이 늘어도 할 일은 찾아보면 태산이다. 서문윤은 제가 필요한 자리에서 제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일손이 부족할 때에 비해서 더욱더 분주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의당에서 환자를 살피는 것도 그렇지만, 뜬금없이 광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평소에 자주 벌이던 기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상한 이끼나 곰팡이 같은 것을 키우는 것. 바로 운남에서 장이족의 분노를 샀던 일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왜 또 그런 일을? 휴식 할 때는 그냥 쉬십시오.”
보다 못한 서문윤의 말을 가볍게 흘리며 검설린은 묵묵히 광문을 닫았다. 그걸 지켜보던 운표선은,
“냅둬라, 지가 알아서 제 몸 축내겠다는데.”
라며 이죽거리는 말을 내뱉어 서문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검설린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그의 싸늘한 눈매가 무섭기도 하고, 또 그가 상황을 타개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만 같다는 짐작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쓰러졌다가 병 걸리면 나는 모른다.”
“당장 저거 치워, 서문윤!”
운표선만이 끝까지 검설린을 도발하여 분노한 그의 노성을 맞고 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타박에 궁시렁거리던 운표선은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밤낮으로 무언가를 꾸물꾸물거리던 검설린이 결국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서문윤이 대경한 사건이었다.
경황이 없는 상황에 검설린이 무리하는 것을 넘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제야 서문윤은 제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괜찮다는 말을 진짜 괜찮다고 알아들었으니 내가 바보지.’
제 몸 돌보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 사내에게 제 건강을 맡겼으니 당연히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서문윤은 검설린이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할 때가 되어서야 그가 크게 무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본래 무심한 얼굴이라 티가 안 났지만, 사실은 그도 일정에 많이 지친 것이다.
‘미련해도 이리 미련할 수가.’
비틀거리며 쓰러진 의형에 비명을 내질렀던 서문윤은, 침상에 누워 땀을 흘리는 검설린을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심상치 않다. 서문윤은 끙끙 앓은 의형의 얼굴에 그야말로 치를 떨며 말을 내뱉었다.
“지병이 있으면 쉬셔야지요. 일손도 늘었겠다, 휴식을 취할 시간도 충분히 있는데 왜 쉬지를 못하십니까.”
뜨끈한 이마를 닦아내며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검설린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쉬고 있잖아.”
때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이야. 서문윤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내뱉었다.
“의형, 이건 쓰러진 거예요. 누가 이걸 쉬었다고 합니까?”
“말꼬리 잡지 마라….”
싸늘한 말에는 이미 익숙했다.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서문윤이 초췌한 사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른 척 시선을 피하려던 검설린은, 그러나 짙어지는 시선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감았던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왜.”
“탕약은 제때 드시고 계십니까?”
장한성에서 온 이후로부터는 탕약을 만드는 일은 서문윤이 담당하지 않았다. 바쁜 일정과 불안한 수급 탓에 검설린이 제가 알아서 탕약을 달여 마시겠다며 서문윤에게서 일을 뺏어간 것이었다. 그 말에 일리가 있어 순순히 수궁했는데, 심상치 않은 병세에 서문윤은 그를 추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탕약을 제때 마시기는 한 건가? 각혈을 할 정도라면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데.
검설린은 그의 매서운 말에 뜸을 들이며 “응.” 작은 목소리로 답변할 뿐이었다. 사내의 내리깐 눈에 서문윤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지고야 말았다.
침상에서 몸을 웅크리며 사내는 그의 시선을 또다시 축 늘어진 기세로 피했다.
“자꾸 이러시면 안 됩니다.”
“탕약은 잘 먹고 있어. 단지 약재가 몇 개 부족해서….”
“의형.”
뭔가 이상하다.
짧은 대담이었지만 서문윤은 그가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빠르게 눈치채고 눈썹을 치켜떴다. 검설린은 궁지에 몰릴 때 독설을 하거나 비꼬는 어투를 했지 이토록 순순히 답하지 않았다.
침상에 누워 벽을 바라보는 사내의 등을 수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청년이 입술을 열었다.
“요즘 왜 이렇습니까?”
검설린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그냥.”
“…이상합니다.”
그 말에 대한 검설린의 반응은 꽤나 늦게 나왔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뜸들이며 내뱉은 말에 서문윤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어진 검설린의 말에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래도 네 나이 때 죽을 자리는 가리고 다녔다. 너처럼 무모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어.”
복잡한 심경이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검설린은 그 말을 내뱉고 쓴웃음을 지으며 벽을 바라보던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복잡한 생각에 빠져 침묵하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의 지병이 무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잠시간 머뭇거리며 답을 미뤘다. 잠시 우물거리던 그는 서문윤의 시선에 진한 한숨을 내뱉고 입술을 열었다.
“…여러 가지, 위는 원래 안 좋았고 폐질환도…. 심한 건 아닌데 가끔 과로하면… 속이 쓰라리고 그래….”
졸린 듯이 눈을 깜빡이며 내뱉는 말이었다. 의원이 탕제에 졸음이 오는 약초가 섞였다고 했다. 약기운에 꼬인 혀로 웅얼거리는 의형을 지그시 응시하며 서문윤이 물었다.
“의형이 고칠 수 없는 병입니까?”
그것은 평소에 서문윤이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병에 관련되어 사내가 원체 단호한 태도를 유지해서 내뱉지 못했던 말. 침상에 몸을 웅크리며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했다.
“…아니.”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무섭게 얼굴을 굳히며 사내의 등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평소에 예민했던 사내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약에 취해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서문윤은 잠시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을 노려보았으나 결국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한숨만을 쉬고야 말았다.
‘왜 이렇게 안쓰럽게 구세요.’
이마와 뺨에 달라붙은 매끄러운 머리칼을 정리하며 그는 그저 착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평소에 철벽처럼 단단한 그가 불만스러워 가끔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어 했으나, 막상 지병에 앓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핏기 없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몸을 웅크린 채 색색 숨을 내뱉는 검설린을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하늘 높이 오만한 게 낫다. 딱히 일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약한 모습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여 서문윤은 그의 쾌유를 바라고 있었다.
* * *
그가 쓰러진 이후로 서문윤의 일상은 한동안 슬쩍 바뀌었다.
검설린은 지금 장한성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므로. 생각지도 못한 검설린의 와병에 기겁한 사람들이 서문윤에게 그를 돌보라 권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의형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게 신경 쓰였던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 의당으로의 발을 끊고 그를 돌보았다.
검설린은 사흘 밤낮을 고열에 시달리며 꼬박 앓았다. 예전에도 과로로 쓰러지거나, 지병 때문에 아파한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는데. 피가 섞인 기침을 하고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하는 사내 옆에 앉아 땀 흘리는 이마를 닦고 희게 질린 손발을 주무르며, 서문윤은 속으로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끙끙 알아댔을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 아파왔으므로.
“제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되신 겁니다. 휴식을 취하라 몇 번을 말씀드렸잖습니까.”
결국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면박을 꿍얼거리고야 만 서문윤이었다. 그는 기침을 흘리는 검설린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새우처럼 등을 말고 고통스러운 듯 쿨럭대던 검설린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짜증을 부렸을 사내는 무어라 말을 내뱉지 않고 서문윤을 한 번 흘긋 노려볼 뿐 반항하지 않았다. 기침을 이어나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입술을 열 기력도 없는 모양이지.’
서문윤은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으나 연민을 이기는 분노에 휩싸여 으름장을 내뱉을 뿐이었다.
“또 움직이셨다간 정말 화낼 겁니다. 서 의원이 적어도 사흘, 아니 일주일은 요양하라 했습니다.”
“알았다.”
“식사랑 탕약은 제가 챙길 겁니다. 거르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
“알겠다 했잖아!”
역정을 듣고서야 서문윤은 잔소리를 늘어놓던 입을 다물었다. 검설린은 그를 향해 울컥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말을 내뱉지 않고 “하아.” 긴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 * *
그렇게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쓰러진 것에 당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문윤은 휴식을 취하는 검설린을 보며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언뜻 품고야 말았다. 항상 바삐 움직이던 검설린이 단정하게 쓰던 관을 풀고 침상에 기대어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서문윤에게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긴장을 풀고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조금 쉬어도 달라질 일은 없다만, 몸을 너무 혹사하시니.’
편히 쉬는 법을 모르는 듯한 사내의 이전 행각을 떠올릴 때마다 골이 지끈 울리고야 말았다. 고집불통인 사내의 행동을 되짚으며 한숨을 내뱉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돌연 눈을 빛내며 손을 주먹 쥐었다. 그 순간 그는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나도 더 물러가지 않을 거다.’
의형을 쉬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서문윤은 그의 다짐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와병 중 검설린은 서문윤의 단단한 방어에 막혀 침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강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와병 중 검설린은 서문윤이 이제껏 본 것 가운데 가장 한가로운 때를 보내야만 했으며 서문윤은 그를 간병하며 시간을 함께했다.
와병 도중에는 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저게 뭐냐?”
닭과 꽃이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것들을 품에 안은 서문윤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청년이 그 말에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성민들이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뭐?”
와그작 구겨진 검설린의 얼굴에 서문윤이 그의 무릎 위에 얼른 꽃을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라는 듯한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고 서문윤이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자원하여 험지에 오신 은인이니 사람들이 고마워할 법하잖습니까. 꽃 보고 기뻐하시고 닭 먹고 몸을 추스르시랍니다.”
“뭔 소리야, 환자한테 꽃은….”
“그럼 이거 삶아 오겠습니다.”
“뭐, 서문윤!”
등 뒤로 들려오는 외침을 무시하며 서문윤은 냉큼 부엌으로 가 솥에 물을 올렸다.
불을 떼는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의형이 가끔 사람들의 배척을 받기는 하지만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를 볼 때면 서문윤은 저가 칭찬을 받는 것처럼 기뻐하곤 했다.
사람들을 배척하고 또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검설린이 사람과 가까워지는 게 좋았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매달리지 않는 그가 온기에 당황하는 모습이 좋았다. 처음에는 초연한 듯 보였던 모습이 상처받지 않기 위한 검설린의 방벽임을 깨닫곤, 서문윤은 그의 껍질을 무너트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사람과 더 친해졌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에서였다. 사람들이 걱정하여 내어준 닭을 고이 삶는 중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까닭은.
그리고 닭죽을 들고 문턱을 밟으려던 서문윤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 침상에 앉은 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청년은 문득 작게 웃고야 말았다.
검설린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꽃을 만지작거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침상 머리에 몸을 기댄 사내의 얼굴은 평소보다 초췌했으나 예민한 감은 덜해 보였다. 서문윤은 서사가 있는 듯한 깊은 얼굴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어, 멀거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검설린이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왔냐.”
“아, 아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몸을 움직였다. 탁상 위에 닭죽을 올리고 의자 옆에 앉은 청년이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숟가락으로 개면서 서문윤은 속으로 그가 아까 전에 지었던 표정을 생각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온순한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좋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문윤은 검설린의 짜증 어린 시선에 굴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 *
일주일은 쉬어야 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검설린은 사흘이 지나자 몸을 털고 일어섰다.
열이 뜨겁게 달아올라 기침을 해대고 복통을 호소하던 검설린의 혈색도 닭죽 때문인지 꽃 때문인지 사흘째 되던 날은 제법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기력을 찾자마자 바로 침상을 벗어나 광에 틀어박혀 꼼지락거렸다. 의당에 나가려던 운표선을 탄식하게 만든 일이었다.
“야, 이 새끼. 또 그러네. 옛날 버릇 못 버리고. 빨리 가서 안 누워? 어허?”
“당장 안 꺼져? 누가 여기 들어오랬지?”
“오랜 지우에 대한 대접이 박한걸.”
“서문윤!”
목소리를 듣고 후다닥 달려온 서문윤은, 얼굴을 와그락 일그러트린 사내를 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검설린을 향해 청년은 곤란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저도 더 쉬시는 걸 권합니다. 이제 ….”
“됐어, 푹 쉬었다.”
예상했던 답안. 싸늘한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나가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어색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쯧, 버릇을 잘못 들였지.”
운표선은 이죽거리면서도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쯧 혀를 찬 사내가 자리에서 떠나고, 서문윤은 시선을 돌려 광에 자리한 검설린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주섬주섬 광에서 챙기는 모습은 꽤 수상하게 보일 법한 것이다. 그동안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던 서문윤은 그 순간 궁금함을 참지 못해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게 뭡니까?”
검설린의 답변은 짧았다.
“청매소.”
“예?”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서문윤이 눈을 크게 떴다. 경악 어린 청년의 얼굴을 힐끗거린 검설린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것과 비슷한 거다.”
그리 말하고 검설린은 굳은 얼굴로 잠시간 그를 매만지며 살폈다. 곰팡이가 낀 종이를 바스락거리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서문윤은, 이윽고 그가 혀를 차며 그것을 내던지는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챙캉!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약병.
“실패야.”
그 말을 남기고 검설린은 무뚝뚝한 얼굴로 광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갔다. 서문윤은 그를 빤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 *
검설린은 다음 날 의당에 복귀하였고, 서문윤도 그를 따라 의당에 나갔다. 제 부재에 초조함을 드러냈던 검설린은, 문제없이 잘 굴러가는 의당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좋아만 해서는 안 될걸.”
그러나 이죽거리는 운표선의 말은 검설린의 얼굴을 구깃하게 만들었다. 의형을 도발하는 그의 모습에 곤란한 표정을 짓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없어도 의당이 잘 굴러간다는 소리는, 네가 선을 넘었다는 이야기인데.”
동파재상의 이야기를 하는 거다. 서역의 물건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동파의 수장을. 서문윤은 파나립의 유산을 기를 쓰고 말렸던 재상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의형의 고난과 관련된 일이었으므로.
운표선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나는 이제 뒷감당을 하지 못해, 설린아.”
그 말에 대한 대답은 꽤나 늦게 돌아왔다.
“그래.”
그리고 검설린은 다시금 싸늘한 얼굴을 되찾고 무뚝뚝하게 몸을 돌렸다. 운표선은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으며, 서문윤은 그를 차분하게 살필 뿐이었다. 그들의 애증 어린 관계에 대해 제 마음속에 무언가 깊이 생각하면서.
그렇게 모든 일은 다시 궤도에 오르는 듯했다.
검설린은 의당과 광을 오갔고, 운표선은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검설린을 도발하는 발언을 종종했다. 서문윤은 그들 사이를 오가면서 분노하는 검설린을 달래곤 했다. 낮에는 바삐 의당을 오가고 저녁에는 검설린과 함께 일과를 마무리했다. 가끔씩은 몸을 섞었고, 가끔씩은 한담을 나누었다.
의원의 일은 수성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원의 일에, 민초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전쟁이 다가오는 때 근심걱정을 짊어져 시름하는 이청우를 뒤로한 채로.
* * *
그렇게 그들이 각자 제자리에서 할 일을 다하던 어느 날이었다.
“뭐?”
“완, 완치자가.”
서문윤은 아직도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검설린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완치자가 생겼습니다!”
아니, 그 얼굴은 아마 평생 가도 잊지 못하겠지.
“완치자가 생겼습니다! 신의, 괴질이 치료가 가능하다고요!”
의원이 떠벌거리는 말에 검설린은 한동안 멍한 얼굴을 수습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서문윤 또한 울먹이는 듯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운표선의 입가에 허탈하고도 시원한 웃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힘인가, 하늘의 뜻인가.”
그것은 진실로 상쾌한 목소리였다. 회한과 즐거움이 동시에 묻어 나오는 것.
그리고 희로애락이 뒤섞인 얼굴을 한 채 사내는 웃음을 띤 말을 툭 내던졌다.
“사람이 힘을 다했으니 하늘이 힘을 쓰는 법이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검설린은 그저 환희에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식은 희망의 경종이었다.
사막에서 도시 하나를 궤멸시켰던 병은 완치된 사람이 없다 하여 의원들의 마음에 짐을 얹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無)에서 생겨난 가능성은 이들을 기쁨에 젖게 만들었고. 완치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극복이 가능한 병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사람들은, 서문윤은 움직이며 더 많은 이들을 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의 일이었다.
* * *
문득 윤아 생각이 났다.
‘윤아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아이는 씩씩하게 병마를 잘 견뎌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 고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형도 무언가를 하는 듯하고 사람의 손으로 치료할 수 있단 희망도 생겼으니 조금만 더 버틴다면 어떻게 길이 나지 않을까?
길가의 꽃을 보곤 아이를 떠올리며 서문윤은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봄이 오는 증거다. 잠시간 이름 모를 새하얀 꽃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머뭇거리며 그것을 꺾어 들었다.
윤아랑 함께 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는 의당에 들어선 순간 몸을 무섭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윤아의 자리에는 서글픈 기운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침울해하는 의원과 여인이 있었으며, 그리고 침상 위에는 싱글 웃고 있는 윤아가 아닌 흰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
죽음이다.
침상에 늘어진 손을 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덜컥 떨어져 내렸다. 초봄의 꽃을 보아 꺾어 왔다. 서문윤은 꽃을 든 손을 내리며 말없이 하얀 천이 덮인 침상을 바라보았다.
“앗, 서문 공자.”
혀를 차며 아이의 손을 침상에 올리던 중년의 여성이 문가에 선 서문윤을 깨닫고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아이와 서문윤의 관계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서문윤은 특별히 아이의 병세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종종 찾아와 소담을 나누었으니까.
무어라 마음을 달래야 하나, 머뭇거리는 여인의 고민이 무색하게 서문윤은 꽤나 담담한 얼굴로 침상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죽음은 꽤나 보아온 편이다. 3년의 시간은 그에게 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게 했으니까.
정이 들긴 했어도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의 시신을 덮은 새하얀 천 위에 꽃을 올려놓으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결국, 죽었군요.”
“…오래 견딘 게지요.”
한숨을 내뱉으며 여인이 말을 이었다.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래도 웃으면서 간 걸 보면 한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군요.”
“…….”
“사실 살아서 부모 없이 연명할 삶을 생각해보면, 더 고생 안 하고 간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습니까.”
잠긴 목소리로 답하는 서문윤을 흘끗 바라보며 여인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란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상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머뭇거리며 시신을 가린 천을 흘긋 내렸다.
저승에서는 부디 아프지 말기를.
그리 속으로 빌며 서문윤은 어두운 얼굴로 침상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그는 다시 제가 할 일을 하였으나 그날은 유독 실수가 잦아 검설린의 꾸지람을 듣고야 말았다. 수건을 대야에 싣고 나오던 중 서문윤은 잠시간 우두커니 선 채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해가 저물 때가 아닌데.
시간이 흘러 청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도 일찍 야위었구나.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서문윤은 깊디깊은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 * *
일상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밤이었다.
낮에는 검설린과 다른 임무를 수행할 때도 있었으나 저녁에만큼은 항상 그와 붙어 있어야만 했다. 서문윤은 검설린과 남은 업무를 마치고 귀가하여 일과를 정리했다.
의기구를 삶고 의복을 태우고, 목욕을 하여 몸을 정리하고 뭐 그런 것들.
중간에 잠에서 깬 운표선이 꿍얼거릴 때도 있었으나 서문윤은 “예예.” 하면서 익숙하게 그의 말을 흘려 넘기며 삶은 의기구를 바람에 말릴 뿐이었다.
목욕마저 끝마친 후에, 그러니까 잠에 드는 일만 남았을 때. 서문윤은 그러나 잠자리에 들지 못한 채 마루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
밤하늘의 반짝거리는 별을 바라보면서 서문윤은 한참을 넋을 잃은 채 바람을 쐬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이의 웃던 얼굴이 계속 떠오르기도 하고, 또 너무나도 이른 아이의 죽음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런데 생각보다 크게 슬프지가 않았다.
‘왜지?’
서문윤이 복잡한 상념에 잠겨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갑작스런 인기척에 몸을 움찔했다. 찔끔한 청년이 고개를 돌려 말을 내뱉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표정을 말입니까?”
검설린은 그의 옆에 주저앉으며 짤막하게 답했다.
“체념한 사형수 같은 얼굴.”
갑작스럽게 제 옆에 앉은 검설린에 놀라 서문윤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사람에게 다가오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서문윤은 그의 뜻밖의 행동에 당황한 마음을 수습해야만 했다. 그는 검설린의 얼굴을 잠시 살피며 그의 기색을 읽으려 했다. 병석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무슨 비유를 그렇게 살벌하게 하십니까.”
“살벌하게 살았던지라.”
무뚝뚝한 얼굴로 사내가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뭔 문제냐.”
단단한 얼굴에 복잡한 마음을 삼키며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아는 아이가 하나 죽었습니다.”
“…….”
“오래 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너무 어려서, 죽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
그 말에 검설린은 단답으로 답했다.
“죽기에 적당한 나이 따위는 없지.”
“…그렇지요.”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중얼거리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누가 들으면 핀잔을 할 법한 매정한 답변을 내놓고, 사내는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복면에 검지를 걸었다.
내려가는 복면과 함께 단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험한 말솜씨나 모난 성격과 다르게 그의 용모는 투명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치 청아했다. 그리고 그 반듯한 얼굴은 지금 복잡한 기색을 띠며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의형은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짧은 침묵 끝에 느릿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후회돼서.”
서문윤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청년은 그 말에 잠시 동요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흔들리는 두 눈에 마음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덤덤하게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내뱉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어진 답변에 서문윤은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그날 진즉 내 목에 칼을 쑤셔 넣지 않은 게.”
독한 말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어진 담담한 목소리에 심장의 떨림이 커져나갔다.
“그냥 죽어버릴 걸 그랬어. 더 미련 가지지 말고….”
서문윤은 그리고 마음속에 불쑥 든 충동을 참지 못해 돌연 몸을 움직이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말이 끊긴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입술에 입술을 겹치며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심장에 낙뢰가 치는 듯한 격통을 느끼며 서문윤은 눈을 내리깔고야 말았다. 뜨거운 온기가 말랑한 입술에 스칠 때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입술을 타고 전해지는 찌릿한 느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 순간에도 검설린은 눈을 감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접문을 끝마치고 서문윤이 입술을 떼며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그저 접문만으로도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흔들리고야 만다.
그리고 사내는 건조한 눈으로 동요하는 청년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뭐냐.”
그 냉랭한 말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하고 우물거렸다.
“죄, 죄송….”
그러나 그는 결국 사죄의 말을 내뱉지 못하고 파아, 한숨을 내짓고야 말았다. 웃기는 일임을 알지만 서문윤은 항상 그가 몹시 심려되었다. 덩치도 산만 한 사내가 계속 나약해 보여서.
“하지만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심경이 복잡합니다.”
“…….”
“차라리 다른 말을 해주세요.”
“무슨 말을.”
그 무뚝뚝한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몸을 멈칫하며 답변하기를 망설였다. 검설린은 보채지 않고 그의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서문윤은 머뭇거리면서 말을 내뱉었다.
“네가 걱정된다고….”
분명하지 않은 목소리로 내뱉는 말. 뒤로 갈수록 흐릿해지는, 웅얼거리는 말.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검설린은 한숨을 쉬는 것과도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걱정돼….”
그 고민 없이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몸을 빳빳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사내가 너무나도 쉽게 내뱉은 말은 서문윤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으며, 그의 머릿속을 정지하게 만들었다. 흐트러진 이지를 추스르지 못한 채 서문윤이 끼긱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제 앞에 자리한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몹시나 복잡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 희미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착잡한 심경.
서문윤의 눈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날 걱정한다고.’
이윽고 그의 귓가로 조용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싫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마음이 울컥했다. 서문윤은 또다시 충동을 참지 못해 그의 입술을 훔치고야 말았다. 아주 스치듯이 짧게 입술을 훔치고 서문윤은 슬그머니 입술을 뗀 다음,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무어라 변명하려고 할 때였다. 무감정한 눈으로 제 입술을 두 번이나 훔친 당돌한 청년을 바라보던 사내가 돌연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혀가 비좁은 입술을 비집고 입안에 들어왔다. 그것은 숨통을 틀어막을 듯 목구멍에 혀끝이 닿는 깊은 접문이었다.
그것은 서문윤이 했던 접문과 달리 꽤나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숨이 가빠 서문윤의 몸이 가늘게 떨려올 무렵이 되어서야 검설린은 입술을 느릿하게 떼어내고 그의 숨통을 열어주었다.
깊은 입맞춤 끝에 물려진 입술은 젖은 채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서문윤은 그 사이로 떨리는 숨결을 내뱉으며, 동탕된 마음을 참지 못해 침을 삼키고야 말았다. 입술을 훔친 사내의 차분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긴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하십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원하나?”
서문윤의 얼굴이 혼란스러워진 순간이었다.
“왜 제게 물으십니까?”
그는 이 일에 대해 서문윤에게 일전에 물은 적이 없었다. 또 의사를 존중하지도 않았고. 뜻밖의 답변에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이상합니다. 당신은….”
“나는 원하고 있어.”
그리고 덤덤한 말이 그의 입술을 닫게 했다. 서문윤이 당황한 눈으로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저는….”
넋이 나가 허둥지둥거리는 청년을 바라보는 눈에 고요한 빛이 서려 있었다.
“지금 너와 입을 맞추고 싶다.”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품에 안고 싶어.”
그 순간 얼음이 된 서문윤이 빳빳한 고개를 억지로 들어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담박한 얼굴은 항시 그렇듯 감정을 쉬이 알 수 없었으며 투명한 눈에는 고요한 빛이 감돌았다. 서문윤은 한참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용모에 홀린 것이 아니라, 검설린에게 묻어 나오는 고요한 느낌에 벅차는 마음을 느껴서. 서문윤은 그리하여 한참을 침묵한 채 그를 떨리는 시선으로 훑고야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무뚝뚝한 목소리가 얼 나간 서문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래서 네 대답은?”
퍼득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몸을 오소소 떨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저는, 저는….”
한참의 방황 끝에 서문윤은 갈라진 목소리를 억지로 낼 수 있었다.
“싫, 싫습니다.”
“그래.”
검설린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서문윤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놀라 몸을 움츠리는 청년의 허리에 손을 감아 그를 가볍게 들고, 검설린은 제 방에 발을 디뎌 침상으로 향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보셨습니까….”
침상에 조심스럽게 몸이 뉘어지며 서문윤은 어이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제 뜻대로 할 거면 왜 제 양해를 구하려 했나.
그의 손길은 평소보다 극히 부드러웠으나 행동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검설린은 그의 위에 올라가 옷고름을 풀며 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담담한 말에 서문윤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고야 말았다. 포기의 뜻이었다. 거부가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도 했고, 또 오늘 그의 행동은 이상하게도 거절하기 싫었다.
옷을 벗겨 내리는 손길은 차분했다. 나신이 된 서문윤이 몸을 불편하게 틀자 검설린이 몸을 멈칫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우물대던 서문윤이, 결국 한숨을 내뱉고 작게 중얼거렸다.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잠시 그를 바라보던 검설린이 작게 답했다.
“무리 안 해.”
그리 말하고 검설린은 고개를 숙여 서문윤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서문윤은 그가 제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는 항상 제가 지쳐도 저를 어르고 얼러 길고 느릿한 정사를 이어나갔으니까.
그러나 서문윤은 굳이 그 사실을 꼬집지 않고 눈을 감았다.
서문윤은 그와 입술을 맞출 때 꼭 댓잎을 입에 물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었다. 깨끗한 숨결이 입안을 어지럽히는 감촉이 느껴지고, 옷을 벗는 소리가 사륵 귓가에 들려온다. 서문윤은 긴장을 삼키지 못한 채 떨리는 숨을 내뱉고 감긴 눈을 움찔거렸다. 입맞춤 끝에 검설린은 서문윤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마땅한 향유는 없었다. 서문윤은 순순히 제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진 검지를 조심스레 혀로 굴리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아슬하게 걸쳐졌던 하의를 마저 벗곤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손은 서문윤의 입술에 대며, 그리고 한 손은 벗겨진 옷을 허공에 던지며 검설린은 이어진 정사를 준비했다.
침대 아래로 옷이 툭 떨어지는 순간, 서문윤은 드러나는 수풀에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귀 끝은 서서히 달아올라 발갛게 변한 후였다. 긴장이 자리했던 청년의 얼굴이 수치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옷 사이에 두툼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검설린의 물건을 마주하며 그는 마침내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에게 과한 시련을 안겨주었던 물건이 굵직한 허벅지 사이에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서히 크기를 키워나가며 청년의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 검설린의 한 손이 두 허벅지 사이를 벌리며 골에 이르렀다. 서문윤의 혀를 검지로 가지고 놀던 검설린은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을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는 젖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그것을 혀로 굴렸다.
숨결이 섞이는 가까운 거리. 감정변화 없는 청아한 얼굴로 손가락을 빠는 모습에 서문윤은 잠시간 얼굴을 붉히고야 말았다. 무심한 얼굴이라 더 선정적이다.
그리고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다 못해 불었을 쯤에 검설린은 입술 사이로 그것을 빼내고, 벌려진 서문윤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서문윤의 미간이 찌푸려진 순간이었다.
이물감에 눈을 감으며 청년이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질척하고 부드러운 손이 아래를 조심스럽게 비비는 감촉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은 타액으로 밀문을 적시며 비좁은 곳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아래서 움직이는 감촉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리라.
입술 밖으로 작은 신음을 흘리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눈을 뜨다가 놀라 숨을 삼키고야 말았다. 고요한 눈을 내리까는 사내의 얼굴이 몹시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은 상황에 맞지 않게 몹시나 청아하여 서문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유해한 얼굴이다, 저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는 심장에 이를 악물며 서문윤이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할 때였다.
“흑?”
“힘 빼.”
밀문에 닿는 딱딱하고 뜨거운 물건에 서문윤이 침을 꼴깍 삼키며 몸을 발발 떨었다. 아무리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이어질 것이다. 고통을 예감한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일 때였다.
“목에.”
나직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그리고 그는 가까이 자리한 얼굴을 바라보고 또다시 신음하고야 말았다.
‘얼굴, 얼굴….’
충격에 혼돈스러워하던 서문윤의 귓가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목에 팔을 감아….”
그리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오므려진 서문윤의 허벅지를 손에 잡고 몸을 기울였다. 입구를 문지르던 성기가 밀문을 벌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오므려지는 허벅지는 단단한 손에 강제로 벌려지고야 만다. 다친다. 그 무덤덤한 말에 서문윤은 결국 검설린의 목에 팔을 두르고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삽입은 느렸고, 그럼에도 버거웠다.
서서히, 서서히 둔덕을 가른 성기는 서문윤에게 그 일련의 과정을 충분히 느끼게 만들었다.
서문윤은 온전히 성기가 삽입될 때 신음을 흘리며 검설린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청년은 홧홧한 이마를 단단한 가슴에 대며 숨을 헐떡거렸다.
아무리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
눈을 질끈 감은 서문윤의 뺨이 축축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적응을 기다리는 듯 잠시간 몸을 멈췄던 검설린은, 서문윤의 뺨에 묻은 눈물을 닦으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어진 정사는 느긋하고 또 길었다.
사내는 느릿하게 뒤로 물건을 물리고, 깊고 세게 아래로 내리찍기를 반복하며 청년의 입술 사이로 신음을 자아냈다. 동근 엉덩이가 찌그러질 때마다 서문윤은 안타까운 소리를 흘리며 밀문을 꽉 조이며 몸을 떨었다.
“힘, 힘이 듭니다.”
더듬거리며 내뱉은 말에 대한 대답은 느리게 돌아왔다.
“괜찮아.”
그리 말하며 검설린은 울먹거리는 청년의 아랫입술을 우물거렸다.
괜찮다니, 어이없는 말에 서문윤은 우는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청년의 입에서 떼어내며 검설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힘들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는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고 허리를 움직였다.
“난 무리 안 해. 네가 하는 거지.”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남성의 움직임. 서문윤이 흐윽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동시에 눈꼬리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검설린은 말캉한 혀로 핥아먹었다.
고환과 두꺼운 허벅지로 얻어맞은 둔부는 까슬까슬한 수풀에 스칠 때마다 고통을 호소했다. 움직임은 느릿했으나 성기는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고, 서문윤은 그때마다 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허벅지는 사내의 굵은 몸통을 조였다.
‘이상해.’
신음은 혀를 섞을 때 흐르는 질척하고도 음란한 소리에 섞였다.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눈을 푼 채 헉헉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상, 이상….’
등을 뒤로 휘곤 눈을 꾸욱 감으며, 서문윤은 몸을 간헐적으로 퍼덕거렸다. 허벅지를 부여잡은 커다란 손이 그의 은밀한 부위를 몇 번 주무르다가, 허벅지 위 샅을 향했다.
미칠 것만 같다.
머리가 망가질 것만 같다.
몸을 짓누르는 거구에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서문윤은 결국 허무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좋아.’
그래, 제기랄. 안을 파고드는 물건에 몸을 퍼덕이며 서문윤은 속으로 소리쳤다. 그래, 좋다.
이건 좋다.
아주 오래전부터 서문윤은 이 일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인정한 순간 서문윤은 몸을 덮치는 강렬한 쾌락의 해일에 사로잡혀 전율하고야 말았다.
우는 소리인지, 쾌락에 찬 신음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서문윤의 시야는 그의 눈물로 흐릿했고, 얼굴은 그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두꺼운 팔에 대롱 매달린 몸은 거구에 가려져 보이지조차 않았다.
서문윤이 풀린 혀를 간신히 움직여 흐릿한 발음으로 말을 내뱉었다.
“왜, 저, 저를, 안으십니까?”
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는 뭉근한 목소리였다. 답변은 느릿하게 서문윤의 귓가에 흘렀다.
“이게 좋아서.”
그리고 서문윤의 귀를 부드럽게 핥는 혓바닥. 서문윤은 읏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고야 말았다. 동시에 성기가 깊게 삽입되고 있었다. 밀지를 자극하여 눈앞을 까마득하게 만들 만치 깊게. 하복부를 찌르르 울리는 자극에, 서문윤은 그만 단단한 가슴을 밀며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의, 형.”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문윤의 귓가를 울렸다.
“네가 좋다고는 안 했어.”
그 말에 서문윤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싫다고도 안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실로 우스운 말이다. 서문윤은 웃는 듯 콜록거리는 기침을 하며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검설린의 턱이 잘게 떨렸다.
사내는 서문윤의 입술을 삼키며 그의 숨결 또한 삼켰다. 숨은 서서히 가빠졌으며, 그는 이윽고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 덜덜 떨리는 서문윤의 어깨를 꽉 부여잡고 삽입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아, 읏.”
서문윤이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며 그의 몸을 힘을 주어 밀었으나, 검설린은 꿈쩍하지 않고 몸짓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헉….”
낮은 숨소리가 살결에 스칠 때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고야 말았다.
“형… 의형….”
그 말에 검설린은 사라질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린.”
서문윤의 얼굴에 이채가 서린 순간이었다. 동탕된 속에 거의 이성을 날린 상태였던 청년은 멍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마주했다.
“린아(麟兒).”
그것은 낮게 긁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이슬처럼 맑고 수려한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서문윤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린아.”
그 말에 검설린은 입술 끝을 비틀어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길디긴 정사의 끝은 파정이다.
‘아, 또 안에.’
검설린은 꼭 제 배 속에 씨를 퍼트리곤 했다. 이제는 화낼 힘도 없어, 서문윤은 기진맥진하게 늘어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검설린은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연결된 자세 그대로 검설린은 잠시간 서문윤의 위에 늘어져 몸을 겹친 채 침묵했고, 일 각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서문윤의 몸을 정리하고 힘없이 몸을 만 그에게 옷을 입혔다.
서문윤은 그의 시중을 받으며 허공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속으로 그는 정사 후만큼은 검설린이 처음부터 끝까지 상냥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서문윤의 몸을 추스른 후에야 검설린은 제 몸을 돌보고 침의를 갈아입었다. 말없이 검설린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그가 제 옆에 누울 때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의형.”
“왜.”
“…여기서 자고 가도 됩니까?”
그 말에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든가.”
또다시 순순한 말이다. 서문윤은 그 말에 몽롱한 눈을 허공의 한 지점에 고정시켰다. 운표선이 옆방에 있다. 검설린과 몸을 섞은 다음에 아침을 나란히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그와 함께 침상에 몸을 뉘이고 싶었다.
서문윤은 어쩐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으며 검설린을 등진 채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그는 그날 일찍 잠을 자지 못했다.
“의형.”
잠에 들지 못해 잠자리를 뒤척이던 도중 서문윤이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저를 위로해주려 한 겁니까?”
몸을 아예 눕히지는 않고, 침상 머리에 몸을 기대고 한쪽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손을 까딱거리며 침묵하던 검설린은 서문윤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이런 위로도 있나.”
서문윤은 그 말에 순순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싫다는데 입술을 맞추고 침상에 몸을 뉘게 한 게 위로라면 언어도단이지. 그러나 서문윤은 유독 달았던 정사가 계속 신경 쓰였다. 답지 않게 허락을 구하던 그의 모습도, 어쩐지 조심스러워 보였던 그의 손길도.
잠자코 누워 정사의 열기를 식히며, 서문윤은 정사 때 제 이마에 조심스레 입술을 맞추던 그를 떠올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게 위로라고 하면 정말 미친 소리 같은데, 정말로 그는 나를 달래주려던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던 서문윤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온 것.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
서문윤의 입에서 한숨을 짓게 만든 말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그날로 돌아간다면….”
“더 했다가는 귀가 닳을 것 같아요, 의형.”
그 말을 내뱉곤 청년은 몸을 돌려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냉막한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입을 열려는 사내에 앞서, 서문윤이 짜증 서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이라고 하지 말라는 말도 한 번만 더 하면 백 번째입니다. 이제는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았어요?”
그 말에 검설린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할 뿐이었다. 정곡이 찔린 듯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사내를 보며 서문윤은 웃음을 참으려 얼굴을 일그러트려야 했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아는데, 저 난폭한 사내가 조금은 귀여워 보인다.
서문윤은 무너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수습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무뚝뚝한 얼굴을 되찾은 사내가 짧게 반문했다.
“왜지?”
그리고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간 뜸을 들여야만 했다.
“아이… 죽음은 슬펐는데.”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창백한 얼굴에 띠었던 희미한 미소, 서문윤의 비통한 마음에서 우울함을 조금은 날려주었던 얼굴.
“그래도 죽을 때 웃고 있었어요.”
그를 따라다니는 3년간 죽음은 많이 경험했으나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보는 순간 서문윤은 비통한 마음을 조금은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는 전언을 듣고 서문윤은 마음속 절망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잠시 우물거리면서 말을 고르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마음의 짐은 덜어준 것 같아서…. 많이 슬프지는 않습니다.”
“…….”
“곧 괜찮아질 겁니다. 걱정 마세요.”
검설린은 그 말에 잠시간 침묵하며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저를 보는 사내의 눈이 마치 서역에서 들여온 유리 같다고 느꼈다. 그가 본 것 중에 가장 맑고 깨끗하여, 때가 묻지 않은 것만 같았던. 검설린은 그와 닮은 눈으로 서문윤을 탐색하듯이 바라보곤, 어느 순간 입술을 열었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머뭇거리며 내뱉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그 말을 한 다음,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구부렸던 무릎을 바로 폈다. 일으켰던 몸을 다시 뉘는 검설린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저도 의형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 * *
평소에 깊게 잠들지 못하던 검설린은 오랜만에 곤히 잠들었으나 서문윤은 유독 그날 잠들기를 버거워했다. 아이의 죽음이 슬퍼서도, 검설린과의 잠자리에 모욕감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기이할 만치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깊은 여운에 휘말려 눈을 붙이지 못한 채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얇은 침의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몸에는 깊은 상흔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험한 과거가 있구나, 넘어갔던 것이 사변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팔뚝에 남은 흉터를 바라보면서 서문윤은 복잡한 감정에 휘말려야만 했다.
서면윤은 결국 새벽이 넘어서 잠에 들고야 말았으며,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아.’
눈을 쿡쿡 쑤시는 따가운 햇살에 눈을 뜨고 그는 바보같이 멍하게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부스스한 정신이 돌아오자 그는 중천에 뜬 해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검설린이 누웠던 자리는 이미 온기가 식은 후였다. 그제야 서문윤은 제가 늦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고 옷을 빠르게 주워 입으려다가 몸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검설린의 방에 있었지….
옷가지를 챙겨 입으러 방 문을 나선 서문윤은, 그러나 문턱을 밟는 순간 얼어붙고야 말았다.
“이, 이건 그러니까.”
바로 뒤뜰에서 빠져나오던 사내와 마주친 것이었다. 초췌한 얼굴에 마른 체구의 귀공자. 허둥지둥하는 서문윤의 앞에서 운표선이 뚱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뭐야, 새삼스럽게.”
그의 손에는 반듯하게 개인 수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건을 운반하려던 참인가, 뒤뜰에서 빠져나오던 사내는 방을 나가려던 서문윤과 마주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며 핀잔을 주었다.
“숨기려면 같은 방을 쓰지나 말든가. 설린이가 우애 때문에 사람이랑 부둥켜안을 놈은 아니잖아. 그 사람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놈이.”
서문윤의 얼굴에 당황이 가신 순간이었다. 그의 말에서 어느 한 부분이 마음을 아프게 하여 서문윤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병적으로 싫어합니까.”
사람을 멀리하는 의형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운표선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옛날부터 심했는데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 또 안 좋아졌어.”
“어째서?”
“걔 인생에 환멸나는 일이 많았거든.”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가끔씩 파편으로만 듣는 의형의 과거가 얼마나 암담했는지는 그 또한 짐작하는 일이다. 대역죄인을 부모로 둔 자식의 삶, 강제 복역, 거둬준 은인을 고발해야만 했던 일, 그리고 믿었던 이들이 서로를 모함하는 광경.
‘환멸이 안 나는 게 이상한 거지.’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동요를 삼키며 서문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분의 병과도 관련 있는 겁니까?”
운표선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너는 항상 내게 설린의 일만을 물어보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그를 지나치게 추궁했다는 것을 깨달은 서문윤이 아차 하여 몸을 굳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에게는 꽤나 무례하게 추궁했던 일이 많았다. 아무리 의심 가는 위인이라도, 또 의형의 과거를 아는 자라도 신분 차이를 생각해서는 민망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말을 우물거리는 청년을 빤히 바라보며 운표선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사변 때 얽혀서 고문당했는데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해서 병이 생겼지. 워낙 튼튼한 애라 상처는 금방 회복되었는데, 마음이 아파서 후유증을 길게 앓고 있다.”
“고문….”
“압슬이나 단근을 제외하면 심한 강도는 아니었어. 그때는 사방이 미쳐 돌아서 대당률에 없는 온갖 개짓거리가 자행되었는데, 설린은 모욕적인 것은 받지 않았으니까. 단지 고초가 심했던 거지….”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심병이었구나.’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으며 어두운 얼굴로 허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고문이 아니더라도 심문 과정에서 고초가 심한 것은 황궁 무관이었던 그가 더 잘 알았다. 황궁의 감옥은 빛이 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자리했다. 돼지우리보다 못한 곳에서 병졸 따위에게 모욕을 들으며 겁박당하는 일은, 의형의 성격을 보아서 고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게다가 의형이 휩쓸렸던 동궁사변 때는 환장할 만한 일들도 많았으니.
씁쓸한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압슬과 단근도 충분히 잔인합니다.”
운표선이 짤막하게 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서문윤은 잠시간 곰곰이 의형의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는 운표선이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서문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푹 파인 사내의 두 눈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평소에는 경박한 사내라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 눈은 쓸쓸한 기운을 가끔씩 풍겼다.
그 눈과 마주한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지요?”
운표선은 잠시간 침묵 끝에 입을 열어 답했다.
“설린이 잘 챙겨주거라.”
“…….”
“…딱 지금처럼만.”
어쩐지 묘한 어감인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서문윤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 말에는 대답하기 싫었다.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운표선은 입가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너무나 반듯한 아이지.’
진해진 미소를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이며 운표선은 말없이 오래된 붕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의 얼굴과 추억을 회상하며 잠시간 아련한 감상에 젖었던 사내는, 이윽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며 한마디 말을 남겼다.
“그 아이를 살려줘.”
바람에 타고 흩어지는 아련한 말에 서문윤은 머뭇거리며 운표선의 등을 바라보았다. 흐느적한 걸음걸이로 떠나가는 사내를 잠시간 바라보던 서문윤은 이윽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멈추었던 발걸음을 뗐다. 늦잠을 자고야 말았으니 몸을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미련을 떨친 청년의 얼굴은 그러나 운표선의 말을 생각하는 듯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 * *
운표선은 참 복잡한 자였다. 서문윤이 보기에 그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자였으나, 어쩐지 마음이 가는 면모가 있었다. 의형의 거의 유일한 벗인 것부터 신경 쓰이는 일이다. 게다가 운표선이 가끔씩 내보이는 사연 많은 얼굴과 의형을 생각하는 듯한 말은 서문윤에게 꽤나 그에 대한 호감이 가중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신뢰를 할 만한 상대냐면 그건 아니다. 운표선은 동시에 고위 관료와 연관이 많은 운씨세가의 가주였으며 꿍꿍이가 많은 자였고, 서문윤은 아직도 그를 믿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검설린이 곁에 두기를 허용한 자였고. 그의 오랜 벗이었으므로 서문윤은 운표선이 그들의 일상에 침투하는 것을 허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와 일상을 보내며 서문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운표선과 검설린의 관계가 그의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바닥을 구르는 운표선을 본 순간 서문윤은 반사적으로 험악한 기세를 내뿜는 검설린의 몸에 매달렸다.
“의형, 의형!”
또다시 치켜드는 주먹에 서문윤은 거의 이성을 잃고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진, 진정하십시오!”
도대체 또 무슨 일이란 말이야. 문을 들어서는 순간에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운표선이 벌건 목을 부여잡고 있다. 그리고 서문윤은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트린 검설린을 본 순간 앞뒤 상황을 바로 알아채고 행동했다.
평소에도 으르렁댄 사이였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은 일전에 볼 수 없던 험악한 것이다. 심상치 않은 의형의 얼굴에 대경한 서문윤이 그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말로, 일단 말로 하세요.”
그 말에 검설린은 더 이상 손을 올리지 않았으나, 살벌한 기세만큼은 어찌하지 못했다. 운표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이 짙었다. 목을 잡고 컥컥대는 운표선을 향해, 그리고 그는 싸늘하다 못해 흉흉한 살기가 죽죽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목을 잡은 사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항적인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감히 네가?’라고 말하는 듯한 오만한 얼굴은 차라리 도발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문윤의 숨이 멎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역정이 가득한 소리가 허공을 쩌렁하게 울렸다.
“꺼지란 말 안 들려?!”
운표선의 눈에 불이 화르륵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검설린, 이 개자식아! 너만 고고한 척하지 마.”
쩌렁하게 허공을 울리는 목소리에 당황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퉤! 피 섞인 침을 흙바닥에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선 사내는, 이윽고 비죽 웃음을 터뜨리며 살벌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 너만 사변에서 사람을 잃었나? 너만 배신당했어? 부모형제 죽은 사람이 너 하나뿐이야?”
이거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 무어라 말리려 운표선에게 다가가려던 서문윤은 이어진 고함에 몸을 멈칫거리고야 말았다.
“너 하나만 슬픈 척 살아가지 마! 그때 오랜 벗을 잃은 건 나도 마찬가지.”
그리고 서문윤은 그 말에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뭐? 슬픈 척?
청년의 얼굴에 불길이 타오른 순간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겁니까!”
쩌렁한 목소리에 운표선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성을 잃은 청년이 빠르게 말을 퍼부었다.
“그래서 고통이 덜합니까? 타인 또한 아프다 해서 본인 고통이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잖습니까.”
웃기는 일이지, 나의 고통으로 남의 고통을 재단하려 하는 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의형의 하나밖에 없는 붕우가 내뱉은 말이란 게 서문윤의 이지를 흐트러트리게 만들었다.
어째서 그리 함부로 말을 하나?
당황한 듯 굳어지는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며 서문윤이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견딜 수 있다고 해서 남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마십시오. 사람에게는 각자의 삶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사실 검설린에게 내뱉고 싶은 말이었다. 뒤에 있는 사내를 생각하며 서문윤은 숨을 들이켜곤, 이내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은 당신에게 돌봐달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운표선은 얼굴을 형편없이 와락 구기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기랄!”
흙먼지가 그 순간 서문윤의 앞을 가렸다. 운표선이 흙바닥을 신발로 걷어찬 탓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청년을 노려보던 운표선은 이윽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서문윤이 몸을 돌려 검설린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았다. 그를 추궁하려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검설린의 말에 더 이상 말을 내뱉을 수 없어 입술을 다물고야 말았다.
“혼자 있고 싶구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의 얼굴은 몹시도 피로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늙은 듯한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 끝에 답을 했다.
“…예.”
기력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힘없는 얼굴을 뒤로하며 서문윤은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머릿속에서 쉽사리 잊히지 않았으며, 한동안 청년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누가 절친한 붕우 아니랄까 봐 티격태격대면서도 빠르게 앙금을 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얘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서문윤은 서로 말조차 섞지 않는 둘 사이에서 곤란함을 느껴야만 했다. 둘이 대화를 하지 않으니 같이 동거하는 입장에서 서문윤은 꽤나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긴장된 상황이 이어지던 중 서문윤이 언제 한 번 운표선의 눈치를 보아 그날의 일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서문윤에게 비밀을 터놓던 이는 그 말에는 답을 주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듯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운표선은 그저 씁쓸한 말을 한마디 내뱉을 뿐이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생각도 많이 바뀌었구나.”
서로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리 중얼거리는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있었다.
서문윤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사실은 운표선의 저 쓰라린 얼굴을 볼 때마다 서문윤은 무수히 쏟아지는 질문을 뱃속에 품곤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셨습니까?
음울한 얼굴에 드리운 서글픈 그림자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런 말들을 내뱉고 싶었다.
당신은 정녕 의형을 아끼십니까?
그리고 그런 시선을 운표선은 모른 척 외면할 뿐이었다.
불편한 관계에도 일상은 이어졌다. 운표선은 의식적으로 검설린과 마주치는 일을 피했으며 검설린 또한 그와 마주치면 없는 사람처럼 그를 대했다.
그들의 싸늘한 관계는 가시적으로 드러나 사람들이 염려를 표할 지경이었다.
“저렇게 사이가 안 좋다면 차라리 방을 따로 쓰시는 건 어떤가? 지내기도 불편할 터인데.”
그러나 험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운표선은 그 제안을 거부했고, 검설린 또한 그에게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문윤은 꼭 그 모습이 싸움을 하고 난 후 화해를 머뭇거리는 일곱 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서로를 분명 증오하는 것만은 아닌데, 아예 관계를 끝내는 것은 꺼려하면서 화해는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아슬한 시간이 흐르던 와중의 일이었다.
“설린아.”
서문윤은 그 말에 우두커니 멈춰 서고야 말았다.
“내가 미안해.”
서문윤과 검설린이 함께 집에 들어설 때 일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지? 믿기지 않는 말에 멍한 눈으로 서문윤이 마루에 앉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느런 바람이 불 때 운표선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지친 와중에도 피로가 싹 달아나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을 황급히 바라보면서 그의 안색을 살피고야 말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탓이었다.
“내가 미안하다.”
검설린은 아무 말도 없이 운표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없는 말에 그는 답변하지 않고 말없이 문 안에 들어섰다.
운표선은 그를 여운이 남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은 운표선의 옆에서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서둘러 검설린을 따라 들어갔다.
“화해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짤막한 말로 답했다.
“응.”
“왜요?”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던 그는 꽤나 시간이 흘러서 답변을 내뱉었다.
“용서할 수 없거든.”
그 말을 듣고 서문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말에 담긴 의미가 서문윤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수건 위에 단도를 늘어놓는 검설린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움직였다.
* * *
그날 밤 서문윤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들의 관계는 어딘가 모나고 특별한 데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폄하하고, 믿으면서 불신하고, 비웃으면서도 가련하게 여긴다.
그리고 서문윤은 오늘 대담에서 그 비틀린 관계를 체감할 수 있었다.
냉전을 깨고 사죄를 했을 때 운표선의 평온한, 아니 해탈한 것에 가까운 얼굴. 그리고 그 말을 살벌한 얼굴로 무시하며 검설린이 내뱉은 답변.
“용서할 수 없거든.”
무얼 용서할 수 없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사내는 그 둘의 생각에 밤잠을 설치며 탐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침상에 누운 지 한 시진이 넘도록 청년은 눈을 말똥하게 뜨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결국 파하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끼익, 끼익.
‘망했군….’
내일 일어나기도 글러버렸어.
차라리 밤을 새우는 게 나을 것만 같다.
서문윤은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대며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평소 검설린과의 관계에 대해서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차라리 그와 밤을 보내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서문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위로, 그래 위로.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기도 힘들 그 기이한 형태의 위로는, 사실 서문윤의 마음속 불안을 크게 잠재웠었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강제로 몸을 섞는 것에 익숙해지다 못해 위로를 얻다니.
‘미쳤군.’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마음에 복잡한 생각이 또 하나 얹혀졌다. 잠을 자기 포기한 서문윤은 잠시 멍하게 삐걱이는 문을 바라보다가, 문득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 들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방 안에만 앉아 있기 고됐다. 그리고 끼익,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나선 서문윤은 밤바람을 맞고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춥다….’
북방의 땅에는 초봄의 날씨에도 서느런 바람이 분다. 몸을 부르르 떨며 서문윤은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에 미리 떠놓은 물을 바가지로 떠먹은 서문윤은 잠시간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유난히 밝은 날이었다.
‘무엇 때문에 의형은 그를 그리도 증오하고 있을까?’
운표선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길래. 그 둘이 본격적으로 화를 냈을 때의 일을 궁금해하며, 서문윤은 멀쩡한 정신으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달을 구경했다. 넋을 놓던 서문윤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정신을 차리고 마당으로 향했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서글피 들리는 밤, 쓸쓸함을 품으며 청년은 마루에 걸터앉아 뜨는 해를 맞이하려 마음을 먹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 때였다.
‘저, 건?’
무심코 운표선의 방에 눈길을 준 서문윤이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서문윤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한참 동안 운표선의 방 문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얼음이 되었던 청년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째서 신이?’
그의 방 앞에 마땅히 있어야 할 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실에 서문윤은 심히 동요하고야 말았다.
이상하게 해탈한 듯했던 아침의 운표선의 모습.
의미심장한 말들.
그리고 의형이 말했던 그 ‘용서할 수 없다’의 발언.
그 순간 불길함을 느낀 서문윤이 침을 삼키며 운표선의 방을 향해 살금살금 걸었다.
‘이 시각에 어디를?’
부엌에는 운표선이 없었고 밖에서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을 죽이고 그의 방을 향해 걸어간 서문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방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청년은 어느 순간 돌연 두 눈을 빛내며 문고리에 손을 댔다.
끼익!
침음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없어….’
예상대로였다.
불길한 마음이 사실로 드러난 순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서문윤이 어둑한 눈으로 빈 방을 둘러보았다. 운표선은 방에 자리하지 않았다. 그 순간 머리가 쭈뼛 선 청년이 그 자리에서 몸을 떨었다. 본능적으로 서문윤은 깨닫고 있었다. 이것이 무어떤 사건의 시작이란 사실을.
그리고 숨을 멈춘 사내는 고개를 돌려 닫힌 검설린의 방 문을 바라보았다.
곤히 닫힌 문을 보며 청년은 순간 갈등했다.
깨워야 하나?
‘아니, 아무 일도 아니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잠을 못 주무시고 피로하신데 괜스럽게 깨웠다간….’
머릿속에 여러 말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전에 일을 저지른 적이 있던 운표선의 부재가 몹시도 수상함을 알면서도 서문윤은 그 문을 열지 못한 채 방황할 뿐이었다.
사실은 서문윤은 헤매고 있었다.
‘정말로 운표선이, 하나 남은 의형의 벗이 그를 배신한 거라면?’
아래가 무너지는 기분에 잠시간 우두커니 서 있던 서문윤은, 어느 순간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몸을 홱 돌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느끼면서 그는 숨을 죽이며 문밖을 나섰다.
* * *
이 넓은 장한성을 다 수색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근처를 둘러보고, 문 앞을 지켜 운표선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니, 사실 서문윤은 이청우의 일처럼 숨겨진 내막이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들을 배신하려는 것이 아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숨겨야 되는 내막이 있으리라고.
‘애초에 의형은 그의 수상함을 알면서도 신뢰하였다.’
의형의 판단은 이제껏 틀리지 않았어. 청년은 청사와 성벽, 냇가 등 중요하거나 한적한 장소를 뒤지며 불길함을 다스리려 했다.
조금이라도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샅샅이 살피며, 그는 사라진 사내의 흔적을 추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물가를 지날 즈음이었다. 사람의 인적이 없고, 또 마을과 동떨어진 곳.
‘이건?’
이게 쓸데없는 짓은 아닌지. 청년은 고뇌하고 있던 찰나에 무언가의 흔적을 발견하고 얼어붙고야 말았다.
‘진흙이 마르지 않았어.’
그것은 질척한 진흙에 새겨진 신발 자국이었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
그리고 그 발자국이 새겨진 진흙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무언가의 기시감에 사로잡혀 한참을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만 같다. 왠지 지나쳐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뭐지, 어디서 봤지?’
한참을 끙끙 앓던 서문윤은 문득 발자국의 정체를 기억해내고 두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아, 이건!’
검설린이 배다리 근처에서 보았던 발자국이다, 그것은.
그리고 그 순간 청년은 예감과도 같은 불길함을 느끼며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리춤에 맨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으며 서문윤이 경계를 곤두세웠다. 청년의 얼굴에 긴장이 확연히 드러났다.
‘옛날에 사용되었던 군화가 어찌 이곳에? 그리고 운표선은 왜 방에 부재하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혼돈을 드러낼 때였다.
서문윤은 어느 순간 들려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황급히 몸을 나무에 밀착시키고 숨을 죽여야만 했다. 청년의 얼굴에 긴장이 물들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장소, 이 시간에 그곳을 서성이는 이라면 의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군병?’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나운 인상의 중년인. 병사의 복식을 하고 허리춤에 검을, 손에는 창대를 들고 척척 걸어 나가는 모습은 어김없는 군병이었으나, 서문윤은 이윽고 이상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군화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말없이 진흙탕에 새겨진 발자국을 바라보고, 또 고개를 돌려 사내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울리는 하나의 말이 있었다.
저 사내를 따라가라.
서문윤은 숨을 죽이고 사내를 미행하였다.
불안감이 심장을 쿵쿵 빠르게 뛰게 만들고 있었다. 사라진 운표선과 10년도 더 지난 군화를 신은 군사. 모두가 수상한 상황. 서문윤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사건과 이어져 있으며, 그는 지금 중요한 순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의형을 깨울 것을.’
탄식을 삼키며 서문윤은 검을 쥔 손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힘을 주었다. 무과에 급제한 몸이라지만, 나라의 중요한 사안이다 보니 그가 상대하는 이들은 급이 다른 고수들이었다. 운표선부터가 마른 체격과 다르게 검공의 고수였고.
의형이 운표선을 가뿐히 제압하는 것을 보아 아마 충분히 상황을 헤쳐 나갈 법도 했는데, 안일함에 일을 심각하게 만들어버리고야 말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청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어진 패배가 그의 자신감을 흔들어놓아, 서문윤은 한순간 위축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는 곧 빠르게 마음을 수습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해야만 하는 거지. 뭔 소리야.’
가망이 없다고 미리 재단하는 것부터가 글러먹었다. 한다면 하는 것이지.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마음속에 남은 걱정을 털어버리고 서문윤은 다시금 눈을 빛내며 사내의 등을 노려보았다.
사내는 인가로 다시 들어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헤쳤다. 서문윤은 벽과 담에 몸을 숨긴 채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가 어느 자리에 이르러 멈춰 섰을 때였다.
‘들켰나?’
사내가 갑작스레 멈추어 선 장소는 원래도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다. 의당과 먼 곳에 자리한. 성벽에서 가까운 위치의 포목점 옆 골목. 포목점은 주인이 괴질에 걸려 폐점을 한 지 오래인 곳이었다.
긴장을 삼키며 서문윤은 벽에 철썩 달라붙어 칼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수상하다. 여차하면 손을 쓸 각오를 하던 청년은,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얼리는 차디찬 목소리였다.
“감히 나를 불러?”
얼굴에 새하얀 천을 두른 사내가 골목의 반대편에서 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검설린 같은 복면을 하고 있었으나 서문윤은 훤한 달빛에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운, 운표선.’
바로 의형의 거의 유일한 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