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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장안사준(長安四俊)(7) (14/31)

13. 장안사준(長安四俊)(7)

반나절의 강연 후에 검설린은 바로 환자를 돌봤다.

의당은 하나가 아니라 환자들이 격리된 장소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전염병자들이 모인 장소는 꽤나 넓어 검설린은 의당 이곳저곳을 바삐 오가야 했다.

의원들은 교대로 움직였으며, 일손을 돕는 자들은 허드렛일을 도우려 바삐 움직였다. 검설린은 하루 밤낮을 바삐 보내면서 사람들을 관리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만나길 원하던 사내와 마주할 수 있었다.

바로 백년화를 가져간 의원.

침상 아래로 손이 덜렁거렸다. 핏기가 싹 가신 사내의 얼굴은 운표선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초췌해 보였다. 아니, 그는 사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

한참 동안 침상을 말없이 바라보던 검설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지극히 흉흉한 목소리였다. 그를 살피던 노의원이 한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증상이 나타난 지는 일주일째입니다. 쓰러진 것은 사흘 전이고.”

“의식은?”

“말도 못 알아듣습니다. 특히 고열이 심해서.”

검설린의 얼굴에 살벌한 기운이 스친 순간이었다. 한순간 살기가 일렁거리는 사내의 얼굴을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지 못하는 듯 눈을 질끈 감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노의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당신께서도 납치를 당하신 겁니까?”

검설린이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노의원의 얼굴에 찬탄이 서린 순간이었다.

“역시 명성이 자자하신 신의시군요. 이곳에 제 발로 들어오시다니. 부끄럽지만 저는 의원이면서도 이 상황이 싫습니다.”

쓰디쓴 웃음을 흘리며 노의원이 말을 덧붙였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인데, 살고 싶군요.”

“자포자기한 얼굴이군.”

그 말에 돌아간 대답은 그답게 무심했고. 서문윤은 그 건방진 말이 나이 많은 의원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염려하며 노의원의 얼굴을 살폈다.

노의원의 얼굴에는 오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서문윤의 걱정하는 방향과는 달랐다.

소탈한 웃음이 흘렀다.

“허허, 자신 있으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북성. 그를 아셔야 합니다. 이곳은 의원으로서 겪어본 험지 중에서도 특별히 만만치 않는 곳일 겝니다.”

심호흡을 하며 노의원이 말을 이으려던 때였다.

“아니, 그냥 가망이 없어.”

“예?”

그게 무슨 말?

갑작스럽게 초를 치는 말에 노의원이 눈을 댕그랗게 뜨며 북성을 보았다. 그는 예의 그렇듯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냉막한 말이 이어졌다.

“아마 시체로 나갈 거다. 한 6할은 그리 예상하고 있지. 타클라마칸 쪽에서 넘어온 역병은 감염률이 낮지만 사망률은 꽤 높지. 게다가 외딴 사막 도시에서 발발했던 병이라 완치한 사례도 없어.”

“어, 어?”

“그런데 어떻게 희망을 가져? 다 죽은 목숨이다. 그냥 포기해.”

신랄한 말에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의원의 얼굴.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만 혀를 깨물었다.

가망이 없어도 죽음을 무릅쓰고 치료한다면 길이 열리리라. 빈말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아. 그게 아니더라도 둘러서 말을 할 수도 있으련만, 가끔 검설린은 작정하고 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서문윤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의원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검설린의 옷을 잡아당겼다. 돌아온 것은 코웃음뿐이었지만.

서문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신랄한 말은 이어졌다.

“최선을 다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아니,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거짓을 말하진 않았어. 사기를 꺾지 않기 위해 에둘러 말한 것일 뿐. 생각보다 사람의 의지라는 게 쉽게 무너지거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푸르죽죽하게 변한 의원의 낯이 심상치 않았다. 귀신을 보는 듯한 노의원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지 않아. 애초에 나는 외상치료를 중점으로 배웠어. 전염병은 내 분야가 아니야.”

“당, 당신은 불치의 병을 고치셨잖습니까.”

“불치라 알려졌던 병이지. 너도 이게 중원의 것과 다르다는 걸 알잖아.”

그 말에 노의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중원에 올 때 이곳에서 유행하는 병에 관련된 서적을 가져왔으니까.”

파나립의 이야기다.

희망이 생겼다가 무너지는 일은 얼마나 가혹한가. 반백의 의원의 얼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측은함이 서렸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해 들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터인데.

그러나 검설린은 독한 말로 와장창 희망을 무너트리고도 부족한지 냉정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만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이란 없어. 만병통치약 또한 없지. 만년 묵은 산삼이니 뭐니 해도 그저 풀뿌리뿐이니까.”

그리고 검설린은 잠시간 머뭇거리며 말을 망설였다.

“…비슷한 게 있기는 하지만.”

뜸 들여 내뱉은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것이 청매소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움찔하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는 웬만큼 확신하지 않으면 말을 내뱉지 않는 사내다. 그 중요성을 들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정도라니.’

일말의 가능성이나마 있다는 게 어딘지 놀라울 뿐이었다. 서문윤이 동요할 때였다.

“사람의 힘으로 노력할 뿐이다.”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침상을 바라보았다. 이불이 걷혀져 앙상하게 마른 몸이 보였다. 온몸에 수포가 가득하고 얼굴에 붉은 반점이 군데군데 보인다.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는 그는 생사가 요원해 보였다.

“목숨을 건 건 나도 마찬가지야.”

백년화를 가져간 의원.

검설린이 애타게 찾던 약초의 행방을 아는 자다. 그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절박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한순간 짧은 정적이 자리했다.

서문윤은 침을 삼키며 음울함이 자리한 의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 듯한 노의원의 얼굴. 그리고 귓가에 간간히 들려오는 으으 신음소리.

서문윤이 아는 의당과 달리 이곳에는 울음도 절규도 없었다. 어딘가 불편한 정적 속에서 그저 고통 어린 앓는 소리만이 간간히 울릴 뿐이었다. 가끔 흐느끼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조차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장한성의 의당에는 건전성의 것과 다르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침울함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목을 죄게 만들었으며 의지를 꺾게 만들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를 무뎌지게 만들었다.

‘계속 이런 분위기면 정말 사람이 미치는 건 시간문제겠구나.’

장한성에 들어올 때 보았던 깡마른 소녀의 눈이 잊히지 않았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던 서문윤이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 나섰다.

“의형.”

아까와 다르게 힘이 실린 말이었다.

소매를 잡아당기는 손에 검설린이 몸을 돌려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긋한 눈에 그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떠났다. 그를 바라보는 노의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비명을 터뜨릴 사람의 것 같았다.

한숨을 삼키며 서문윤은 노의원을 향해 “속과 겉이 다르신 분입니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불쌍한 노의원을 달래고 싶었으나 멀어져가는 검설린을 따라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떠야만 했다.

빠르게 마음을 수습하고 검설린은 다시 환자의 몸을 살폈다. 선반에서 서둘러 맑은 술과 깨끗한 천을 꺼내 온 서문윤이 그의 일손을 거들었다.

시름시름 앓는 사내의 몸을 닦던 중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6할이나 됩니까?”

그 긴장 어린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7할로 시정하지.”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팔뚝을 끈으로 조이며 검설린이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더 몸상태가 좋지 않아. 돌팔이 아닌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의원들을 데려온 게 다행이었다. 비록 장한성주의 막 나가는 개짓거리는 머저리 같았지만, 이들에게는 호재군. 8할이 될 걸 막았어.”

바늘이 허공에서 반짝였다. 팔뚝에 관을 연결한 후 검설린이 고개를 들어 언성을 높였다.

“전염병을 치료했던 의원이 있었군. 누구지?”

“접니다. 2년 전 운탄에서 돌던 홍역을 치료하는 데 도왔습니다.”

몸을 돌린 건 30대로 보이는 온화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분변을 닦은 수건을 대야에 올린 채 바쁘게 걷던 중이었다.

“그때 너도 있었나?”

“예, 당신이 그때 인근의 의원을 불러모아 대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황망한 와중 검설린을 바라보며 화색이 돈 얼굴로 의원이 말을 이었다.

“양잿물에 살겨를 섞을 것, 인근 10리의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지 않을 것, 환자를 격리하는 곳은 반드시 물을 낄 것, 옷을 태울 것, 약탕기를 부술 것. 그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열하는 말에 검설린이 몸을 멈칫했다.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 스친 동요를 읽을 수 있었다.

“더 할 말이 없는지요? 가보겠습니다.”

총총총 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희망이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3할이라도 살아날 확률이 있다면, 그 확률을 차츰 키워나가면 되지요.”

한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습관은 시대를 바꾼다. 검설린이 강조했던 말이다.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구나.’

마음속에 다시 돌아오는 평온함. 검설린의 말에 가졌던 불안이 사라졌다.

서문윤은 그 1할을 높인 사내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8할이 될 걸 막았잖습니까.”

저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그는 그리 말해주는 듯했다.

검설린은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짤막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대책 없구나.”

서문윤은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까?”

“…수건 삶아 와.”

장한성은 일손이 부족했다. 서문윤이 그 말에 수건 무더기를 올린 대야를 빠르게 품에 안아 들었다.

하루에 두 시진마다 일각씩 교대로 쉬며 고된 일정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 이러다가는 과로사로 먼저 죽겠군.’

전쟁이고 병이고 둘째 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손을 돌보니 죽을 지경이었다. 장한성 자체가 워낙 열악한 환경인지라 무어라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휴전이 언제 끝날지 몰라, 병사들에게 병이 더 번지면 곤란합니다.”

애걸복걸하는 이청우의 얼굴을 보면서 서문윤은 더 이상 동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저 속으로 ‘그리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죽게 생겼어.’라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킬 뿐이었다. 고된 일정이 서문윤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전쟁이라고?’

승기를 예상할 수가 없다. 검설린의 회의적인 반응에 반감을 가졌던 서문윤은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마음을 바꾸고야 말았다.

보통 검설린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던 곳에는 죽음도 있었으나 삶도 있었다. 호전을 보이는 환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의원들이 수액을 꽂고 분변을 갈며 환자를 돌보았음에도 병자들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이 유예되고, 입가에 가린 천이 전염 확률을 낮추긴 했으나 그 정도였다.

“지금으로써는 그 정도가 다야.”

사내의 손에 꽂힌 바늘을 바꿔 끼우며 하는 말이었다.

“몸을 보전시켜 회복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 다행인 건 타클라마칸에서의 악명만큼 증세가 심각치 않아. 그쪽이 특별히 환경이 미미했던 건가? 그리고 사망한 환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홍역보다 월등하게 전염 확률도 낮고.”

대롱을 막던 장치를 풀자 수액이 뚝뚝 떨어졌다. 서문윤은 시름시름 앓는 사내의 몸을 닦던 물수건을 대야에 올려놓고 말을 내뱉었다.

“예상보다 심각치 않다니 다행이군요.”

그 말에 대한 검설린의 답변은 짧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음에 가깝지 않은 건 아니지.”

물수건을 새로 꺼내 들며 서문윤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서문윤을 향해 흘긋 시선을 주었으나 이내 빠르게 거두었다. 그들 모두 그저 묵묵히 손을 놀릴 뿐이었다.

검설린을 따라다니며 일손을 도왔던 서문윤은 종종 그와 헤어져 의당을 전전했다. 환자가 격리된 마을에는 다섯 개의 의당이 있었다. 병이 악화되면 환자들은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곳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원했으므로, 그들은 각각 분리되어 일손을 도왔던 것이다.

의기구에 손을 대지 못했던 서문윤은 장한성에서 거의 의원의 일을 하고 있었다.

허드렛일이라도 북성의 등 너머로 배운 것이 있다. 서문윤은 제법 한 사람의 의원 몫을 해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의원이라고 또 거창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치료법을 알지 못해 의원들도 간호만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잡일꾼은 구분되지 않았다.

의당에서 서문윤은 주로 환자를 간호하는 일을 했다. 괴질이 설사를 동반하여, 침상에 구멍을 뚫어놓고 분변을 따로 대야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은 이를 옮기고 환자의 뒤를 닦는 일을 했다. 혹여나 탈수가 올까 중간중간 환자를 살피고 수액을 꽂거나, 혹은 음용이 가능한 것을 먹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간호를 하던 서문윤은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하고야 말았다.

침상에 힘없이 늘어진 열 살 무렵의 어린 소녀였다.

“너 그날 나와 눈을 마주쳤지 않느냐?”

장한성에 입성한 날, 역병에 걸린 환자들이 격리된 곳의 문책을 잡고 있던 아이와 눈을 마주쳤었다. 한창 어린 나이에 죽은 눈을 한 게 충격이라 계속 생각이 났다.

‘결국 역병에 걸렸구나.’

의당에서 아이를 마주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윤은 동요하는 기색을 숨기곤, 투수기를 꽂으며 말을 내뱉었다.

“양친께서는 어디 계시어?”

신경을 돌리려는 의도였다. 바늘이 꽂힐 때 고통을 줄이려는 뜻이었으나 이어진 행동에 서문윤은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답변하지 않으며 시선을 피했던 것이다.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서문윤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저는 살 수 있사옵니까?”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명가의 말투였다.

그제야 서문윤은 어린아이에게 귀를 뚫은 흔적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살 수 있을 게다, 아마.”

그 말은 저가 듣기에도 몹시나 무책임해 보였다. 그러나 서문윤의 그 미묘한 말에 아이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서문윤도 마주 웃으려 했으나,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괴상한 표정만이 지어질 뿐이었다.

아이와 재회한 이후, 서문윤은 일상 속에서 가끔씩 아이의 미소를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다. 그는 기이한 힘에 이끌려 아이의 침상을 종종 찾곤 했다.

‘더 불쌍한 아이도 많은데.’

더 불쌍한 사연을 가진 아이도 많고, 더 어린이들도 많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상하게도 소녀의 미소를 자주 생각하곤 했다. 검설린을 따라다니거나, 혹은 의당 밖에서 잡일을 하면서도 서문윤은 가끔씩 아이를 찾아갔다.

맑게 웃는 미소를 보면 마음이 진정된다.

“바쁘지 않습니까?”

“걱정 마라. 휴식을 하라 하셨으니.”

“휴식을 하시려면 편히 쉬셔야지요.”

“여기기 편해.”

환자에게 정이 들면 곤란한 것을 알잖아. 아이에게 죽지 않으리라 말을 하면서도, 사실 그는 소녀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병마를 버티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지만, 서문윤은 장한성으로 오기 전 검설린에게 충분히 병의 무서움을 언질받은 바가 있었다. 하물며 홍역도 무서운 판국인데 그보다 여섯 배는 독한 병이라니 그저 한숨이 나올 따름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아이를 애틋하게 여길 게 무언가.

그러나 서문윤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정이 가는 마음을 막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그 아이 하나가 신경 쓰일까?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아이.’

공허한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침음을 흘렸다.

‘살아날 희망을 가지지 않고 있어.’

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 아이의 미소는 힘이 없었으나, 그보다는 다른 면에서 서문윤의 마음을 찔렀다.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은 어른보다 태연했다. 그리고 그 태연함이 서문윤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저런 눈을 또 어디서 보았더라.

그 순간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았다.

앙상히 마른 팔에 침을 꽂는 사내의 웅크린 등을 바라보면서, 서문윤은 작디작은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살아갈 희망을 버린 눈.’

그래, 그 눈이 싫었다.

서문윤이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도 그러했지.

그는 황하에서 마주했을 당시 검설린의 눈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아무리 가망이 없다 하여도 그런 눈은 보기 싫어.

한 무더기의 수건을 운반하며 서문윤이 속으로 새긴 말이었다. 냇가로 가는 내내 서문윤은 황하에서 처음 보았던 검설린의 눈과 아이의 공허한 눈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청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둘의 눈은 무언가 비슷한 점이 있다.

‘살아간다기보단 그저 죽어간다는 것에 가까운.’

죽음을 바라지도, 생애를 바라지도 않은 그 무기력함이 짙게 묻어 나오는 눈은 그의 마음을 몹시 불안에 빠트렸다.

잠시간 곰곰이 생각하던 서문윤은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의형의 눈이 달라지게 되었지?’

지금 그의 눈은 전혀 공허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사지에 이른 사내는 황하 시절보다 더 생기 넘쳐 보였고, 또한 집념을 보이는 듯했다. 서문윤은 의원을 가르칠 때나 환자에게 역성을 내리칠 때 검설린의 빛나는 눈을 떠올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훨씬 나은 모습.

딴생각을 품으며 저벅 걸음을 걷던 서문윤이 멈칫했다. 당도한 냇가에 사내 하나가 자리하고 있던 까닭이다.

“죽어버리겠네.”

한숨을 내뱉으며 물을 뜨고 있는 운표선. 열악한 장한성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궂은일을 해야 했다. 특히 그는 수액을 만드는 일을 종종 담당하곤 했다. 운표선은 꽤나 섬세한 성격인 데다 서방 의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으므로 검설린이 그를 불러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물을 끓이는 사내의 얼굴에는 피로가 잔뜩 감돌고 있었다.

서문윤이 운표선을 잠시간 가느스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얼 그리 보느냐?”

당당하게 저를 마주 보는 사내를 향해 서문윤이 작게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임할 줄은 몰랐군요.”

운표선이 깡마르고, 또 어딘가 음산한 기색을 풍기기는 했으나 그는 외양만큼은 고귀하게 보였다. 언행은 투박해도 식사를 할 때의 모습, 걸음걸이, 접선을 흔들 때의 모습에서 그 누구도 출신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의 기품이 묻어 나왔다.

심지어 그는 검을 쓸 때조차 우아하게 보였으니까.

그런 그가 장한성에 온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말하면, 서문윤은 상전이 하나 붙었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건전성에서는 운표선은 숙소에만 처박혀 나오지를 않았으니까. 집안일에 한정된 범위에서만 일손을 거들었던 사내가 그 이상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험한 일이 어울리지 않았다.

분변을 가리는 일, 물을 떠 오는 일, 전염병자의 몸을 닦는 일.

서문윤은 그가 그런 일들을 해내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경험으로 그 일이 쉽지 않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장한성에서 운표선은 생각 외로 헌신적이었다.

아니, 운표선은 사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일손을 돕고 있었다.

고귀한 출생에 내로라하는 명성의 소유자.

차라리 뒷방에 앉아 명령을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그가 장한성에 죽음을 무릅쓰고 당도한 이유를 서문윤은 알지 못했다.

“어째서 당신은 안중에도 없었던 장한성에서 이리 헌신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습니다.”

그 말에 돌아온 것은 짤막한 대답이었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말을 돌리려는 목적이 명백한. 그리 말을 내뱉고 소금을 움켜쥐던 운표선은, 그러나 뺨을 찌르는 빤한 시선에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이해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리고 새까만 눈이 운표선을 향했다.

동시에 서문윤은 장한성으로 오기 전 의형과 나누었던 대담을 떠올렸다.

“그날 그는 이청우를 죽이려 한 게 아니었다.”

운표선이 위험하다, 항의하던 제게 복잡한 표정으로 내뱉었던 믿기 힘든 말들.

“그는 이청우를 병신으로 만들려 한 거야.”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하, 아무리 실권 없는 명예직이라 한들 승상보다 높은 태부의 자식이 저 생고생을 하는 게 네 상식과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느냐?”

“이청우, 아니 장한성주와는 한 번 안면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제게 말했습니다. 이 태부가 무관의 길을 반대하고 있다고. 아마 태부는 이청우가 장한성주 인가를 받도록 힘을 싣지 않았을 겁-.”

“너, 뭐라는 거야?”

“예?”

“이 태부가 아무리 중립을 지켜도 이청우는 그의 자식인데 고작 성주 취임 따위를 이렇게까지 질질 끌 리가 없잖아? 서문윤. 이청우는 태부의 아들이고, 태부는 황제의 스승이야. 정상적이라면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관료들은 이렇게까지 결사반대하지 못해.”

“그, 그럼.”

“그는, 이 태부는 이청우의 장한성주 취임을 반대한 거다.”

사실 그것은 지금도 이해 못 할 말이다.

천하의 장안사준이 무고한 이의 다리를 망가트릴 이유가 뭐가 있을까?

“죽이려면 진즉 그는 이청우의 명줄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허벅지와 가까운 종아리, 고통이 적고 즉사할 위험이 적은 부위를 칼로 깊숙이 쑤시고, 비틀었지. 그건 이청우의 다리를 끊으려 한 거다. 내가 손쓸 수도 없게 힘줄이 뭉친 부위를 완전히 망가트리려고.”

“그, 러면.”

“수성은 지휘하는 이의 지구력을 괴물같이 잡아먹지. 정식으로 인가도 받지 못한 자가 중상을 입고 수성전을 지휘할 수 없는 노릇. 이청우를 장한성에서 빼내려는 목적이었을 거다. 성주가 아니어도 이청우는 인장과 전 성주의 인가를 받아 성주 대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니까. 뒷공작을 펼치려 한 거다.”

움찔거리며 제 눈치를 보는 사내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복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한때 저자를 비롯한 장안사준이 제 우상인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내뱉을 때 조소를 띠던 검설린의 얼굴, 낙마가 다행이라던 운표선의 말을 떠올리며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리고 지금 제 앞에 자리한, 눈치를 보는 초라한 운표선의 모습에 마음이 울렸다.

그 순간 서문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만족하십니까?”

“뭐?”

순간 굳어진 사내의 얼굴을 낮게 가라앉은 눈이 담았다.

운표선은 짧은 침묵 끝에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만족해.”

그리고 서문윤은 운표선의 말에 헛웃으며 속으로 답변했다. 아니, 당신은 만족하지 않고 있어.

“…그러나 검흔은 얕았다. 다리가 찔린 이청우가 말을 탈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먹었으면 돌이킬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하는데.”

이 순간 서문윤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말을 내뱉을 때 검설린이 흘렸던 허탈한 웃음이었다.

“무른 마음을 먹은 거다. 이청우의 다리를 망가트리려 할 때 운표선은, 한순간, 아니 수차례 망설였다. 상처는 얕았어, 서문윤. 상처는 몹시 얕았다.”

그리고 서문윤을 아직까지 크게 고뇌하게 만든 말이었다.

“검을 처음 잡은 소년이 휘두른 것마냥.”

그가 우릴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고 해서 위험한 작자가 아니란 말은 아니지, 하지만 의형께서 신뢰하는 분이라면 완벽히 적은 아닌 것 같다. 지난 시간 동안 보아온 모습을 보면 그저 권세를 탐하는 이도 아니고….

아니, 차라리 그는 명예에 붙들린 사람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보는 운표선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생각에 깊게 빠질 때가 아니지.

머리를 어지럽히는 고민을 뒤로 묻고 서문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악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선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요.”

그의 앞에는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트린 사내가 있었다. 그 말이 역린을 건드린 듯 서느런 살기를 내뿜는 운표선을 향해, 서문윤은 덤덤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당신은 제 소년 시절의 영웅이었습니다.”

“…….”

“그러니 저는 당신이 후회할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적인 목적, 그 어느 뒷이야기, 서문윤은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무고한 청년 하나가 다리를 영영 못 쓸 뻔한 광경을 보았을 뿐이다. 바로 장안사준의 손에 의하여.

“당신이 영원히 제 마음속에 선한 영웅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운표선의 얼굴은 차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의형의 벗으로.”

운표선의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트리게 만든 말이었다. 말이 끝나는 순간 서느런 예기를 품은 눈과 호수 같은 담아한 눈이 허공에 맞부딪쳤다.

한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 반면에 청년의 얼굴은 평온함을 되찾고 있었다.

살벌한 대치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끊은 것은 어느 순간 허공을 울린 “파아.” 하고 숨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미치겠군!”

놀란 청년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언제 싸늘한 얼굴을 했다는 양 그는 진절머리를 치며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당황한 서문윤의 귓가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뭔 놈의 눈이….”

“예?”

눈은 무슨 눈?

의아해하는 서문윤의 앞에서 운표선은 부르르 몸을 떨고 으으, 소리를 내며 질색할 뿐이었다. 벙 찐 청년 앞에 그는 피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많은 것을 희생하고도 지키려 한 것이,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그리고 그는 한숨을 폭 내뱉으며 웅얼거렸다.

“검설린. 그 개자식이 흔들어놓아서….”

혼잣말을 내뱉는 운표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를 눈치챈 서문윤의 눈이 한순간 일렁거렸다. 잠시간 말을 고르며 머뭇거리던 청년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아까 전에 하신 말씀은 조정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운표선이 쓴웃음을 흘린 순간이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군.”

“안 굴릴 수가 없잖습니까. 제가 호위인데.”

“그렇다면 뭐 어쩔래?”

“…당신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긴 했으나 생각해보니 저희를 해할 작정이면 목숨을 던져서 장한성에 오시지 않았겠지요.”

그 말에 운표선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그는 짧은 침묵 끝에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이제 날 믿는 거냐?”

서문윤의 답변은 명쾌했다.

“의형의 판단을 믿습니다.”

그 덤덤한 말에 담긴 신뢰. 말을 들은 운표선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문윤의 안색을 살폈다. 마치 그의 마음을 읽고 싶은 것마냥 한참 동안 얼굴을 훑어보던 운표선은, 문득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도대체 무얼 하는 건지.”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 목적을 알 수 있습니까. 서문윤의 목에 찬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총총 제 앞을 사라져 본당으로 향하는 운표선에 말을 삼키고야 말았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은 물을 뜬 대야를 움켜쥐고 발걸음을 옮겼다. 운표선의 말을 생각할 시간은 없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기억을 통틀어 가장 바쁘고 험난한 나날이 흐르고 있었다.

피와 진물이 몸에 배 냄새가 가시지 않는 것 같다. 그릇을 삶던 중 서문윤은 혀를 차며 이마를 닦았다. 그는 장한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과 사람을 돌보는 의원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기를 벌써 일주일째.

보글보글 소리가 올라오는 가마솥에 불을 떼며 서문윤이 차분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나마 황 숙부가 마음을 고치신 게 다행이다.’

다행히 본진에서 물자 보급을 제시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조정의 눈치를 보는 듯했던 황 숙부가 마음을 고친 것에 기뻐하면서도 서문윤은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황 숙부를 좋아하였으나, 그가 훌륭한 군관인가에 대해서는 제법 회의감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어찌 되었건, 가장 중요한 것은 양곡이 수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장에 굶주린 배를 채우니 검설린의 예상과 달리 사망하는 환자의 수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수액 또한 생각보다 도움이 되어, 침상에 누운 채 병을 견디는 이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다른 말로 일손이 늘어났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검설린 일행 또한, 건전성의 배가 되는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힘들어.’

피로에 찌들어 그릇을 삶으며 서문윤이 하품을 했다.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청년의 얼굴이 퀭했다.

어느새 풀꽃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었다. 북쪽이라 봄이 느리게 찾아오는 듯했으나, 공기는 제법 따뜻하게 변하고 졸음이 자주 찾아왔다. 그릇을 삶고 정리하던 서문윤은 길가에 피어나는 풀꽃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간 머뭇거리며 고민하던 서문윤은 풀꽃을 꺾어 들었다. 허리춤에 풀물이 떨어지는 꽃을 꽂고 다시 손에 그릇을 들었다.

의당 내부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서문윤은 한켠에 자리한 선반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내려놓고, 후다닥 침상을 향해 달려갔다. 장한성에서 처음 눈을 마주친 소녀가 있는 곳이었다.

침상의 머리맡에 꽃을 내려놓으며 서문윤이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초췌한 뺨과 누렇게 뜬 안색.

검설린은 소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 일주일도 버티지 못한다 하였다. 그것이 자못 신경 쓰여 소녀를 살폈는데, 다행히도 죽기는커녕 의식조차 잃지 않고 있다.

‘불쌍하다.’

형제자매가 없어 딱히 아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신경이 쓰이는 아이. 서문윤은 한동안 측은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서문윤은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할 일이 많다. 그리고 그가 그릇을 선반에 올려놓으러 떠나려 할 때였다.

“서문 의원님.”

서문윤이 누군가의 부름에 몸을 멈칫했다. 발길을 멈춘 청년이 머뭇거리며 등을 돌렸다.

“감사하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힘겹게 눈을 뜬 아이가 있었다.

“윤영아.”

불린 이름에 윤영이 픽 웃음을 흘리며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눈을 감는 게 무서웠는데, 이제는 별로 무섭지 않사와요.”

그 말에 서문윤은 한참 동안 윤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풀내음 나는 들꽃을 쥐어 배꼽 위에 올려놓으며, 분명 명가의 자제였을 것임이 뻔한 아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그 모습이 아이답지 않아 보였다. 차라리 체념한 것에 가까워 보였지.

서문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 말에 윤영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를 바라보는 청년의 얼굴에도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어둠 속에도 빛은 있고, 밤에도 새벽은 있는 법.

침상을 떠나 선반에 그릇을 올리며 청년이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슬퍼하지만 않을 거야.’

윤영을 바라보면 슬픔이 들었다. 조실부모하고 고난을 겪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지끈거려 몹시 아팠다. 비단 윤영뿐만이 아니었다. 장남이 죽고 차남마저 병에 걸려 통곡하는 노모를 볼 때, 혼약을 맺은 지 반년 만에 참변을 겪은 부부를 볼 때, 자식이 죽어 넋을 잃은 부모를 볼 때 그는 아픔을 느꼈다. 수없이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사람을 고치시는 분이 의원이 아니면 무어랍니까….”

둥그렇게 눈을 뜨며 하는 말에 서문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환자의 분변을 닦으며 하루에 한 번 몸을 물수건으로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그것에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감사를 표했다.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저를 버린 줄 알았으나 사람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군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병자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것은 부처를 닮은 미소였다.

“설령 내일 당장 내자와 제가 죽는다 하여도, 저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어 보였던 곳에서 모두가 제자리에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노력을 모르지 않고 있었다.

‘의원은 몸만을 고치는 게 아니구나.’

‘의원은 마음만을 고치는 게 아니구나.’

그 순간 서문윤은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설령 여기서 모두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헛고생을 한 게 아니야.’

적어도 사람의 마음에 온정 하나를 남겼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겠지.

달그락, 그릇을 선반에 올리며 서문윤이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장한성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다시 평온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흘끗 곁눈질하던 사내의 눈이 한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상관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수하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쉬라는 말에 거절의 응답을 내뱉는 검설린에게 서문윤이 던진 말이었다.

“당신의 눈치를 보느라 의원들이 못 쉬고 있는 게 안 보입니까?”

사내는 수액을 섞던 손길을 멈추곤 서문윤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러나 청년의 얼굴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 일정, 모자란 일손에 교대로 일하는 것은 몹시 중요했다. 그러나 검설린이 막상 쉬지를 않으니 의원들은 눈치를 보며 의기와 건강을 동시에 불태우는 중이었다. 검설린은 그에 짜증을 부리며 쉬라 말을 내뱉었으나 어불성설인 일이었다.

윗사람이 쉬지 못하는데 아랫사람이 어떻게 편히 쉬겠는가?

검설린은 인정 안 하는 말이지만, 사실 그는 이들의 상관이나 다름없었다. 제발 북성 좀 쉬게 해달라는 의원들의 애원에 서문윤이 나선 것이었다.

태평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검설린이 결국 어이없다는 듯한 짧은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관료 티는 아직도 못 벗었구나.”

그 말에 서문윤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검설린은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폭 내뱉었다.

시끄러운 의당에 앉아 쉰다는 검설린에게 잔소리를 하며 서문윤은 기어코 그를 후원으로 끌고 갔다. 당번을 서는 의원의 숙소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적한 공간, 마루에 서문윤은 대자로 뻗어 천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은 후원에 뒷짐을 진 채 서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지러워.’

선선한 바람이 식은땀을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녹진한 피로가 잠시나마 풀려 서문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힘들면 안에 가서 누워라.”

피로에 젖은 얼굴을 숨기며 서문윤이 바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이 있는데 제가 어찌 잠을 먼저 잡니까.”

고생을 한 건 검설린이다. 뼈 빠져라 사투를 벌인 것은.

조수로서 서문윤은 그리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환자의 몸을 닦고 분변을 정리한 일이 대수란 말인가?

어깨에 짐을 짊어진 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 생각할 무렵에 서문윤의 귓가로 덤덤한 말이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쓰러지면 나는 어쩌라고.”

“의형이 고쳐주셔야지요.”

그 말에 검설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못마땅해하는 눈과 마주하며 서문윤은 피식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에 식은땀을 식히며 그 둘은 잠시간 넋을 잃고 사람 없는 후원에 앉아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문득 입술을 열었다.

“의형의 이름은 황궁 무관이었던 제 귀에도 알음알음 들려왔었습니다. 저는 그쪽에는 관심이 없었는데도. 그만큼 당신이 당신의 분야에서 절대적인 존재라는 의미겠지요.”

목소리는 느릿했으며 또 부드러웠다. 그 말을 들으면서 검설린은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황재천의 저택의 있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날카롭게 말을 했다. 저를 원망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가시를 세웠던 청년. 상처받은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미움과 애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했었지.

‘…그랬는데.’

한순간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요즈음 그는 위기에 오히려 마음을 다잡은 듯해 보였다. 검설린이 문득 서문윤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면, 그는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은은한 미소를 띠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고된 일정이 힘들지 않는다는 듯이, 죽음이 두렵지 않는다는 듯이 서문윤은 그리 태평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 검설린을 따르던 어린 청년으로 되돌아온 듯했다.

‘저 멍청이가.’

그리고 그 평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복장이 터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의원 중에서 당신이 이른 말을 새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의형의 말이 결국 많은 이들을 살렸던 겁니다.”

청년은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제가 죽을 자리를 잘 찾은 것 같군요.”

사실은 죽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 말하며 픽 웃는 서문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검설린은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속을 분탕 치고도 뇌수를 들끓게 하는 화가 몸에 번져나갔다. 울컥한 마음을 참지 못해 사내가 예민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 정말 바보냐? 내가 밉지도 않아?”

그러나 서문윤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밉습니다. 그런데 미운데 어찌합니까.”

그것은 검설린의 복장을 뒤엎는 평온함이었다.

“그렇다고 미워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 인생이 당신에게 저당 잡혔는데. 그러니까 앞으로 2년간은 당신의 곁에 있을 건데, 그렇게 미워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난 네가 그리 존경의 시선으로 볼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 말에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뜻 없이 사는 자는 죽어가는 것일 뿐이라 했지. 나 또한 마찬가지다.”

고해와도 같은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한숨을 내뱉었다.

“난 대단한 사람이 되기 싫어. 될 수도 없고.”

“…….”

“나는 그저 살아남은 졸렬하고 비겁한 사람일 뿐이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말이 한계였다. 사내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목소리가 후원을 쩌렁하게 울렸다. 청년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격분을 토해내는 사내를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청년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분노한 사내의 얼굴에는 살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마! 나는….”

격분하여 무어라 쏟아내려던 말이 끊어졌다. 흥분하던 중 마음을 가라앉힌 듯 사내는 말을 내뱉지 않은 채 그저 이를 악물 뿐이었다.

서문윤은 저를 노려보는 눈을 마주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후원에는 바람이 불었다. 노을이 저물어가는 시간. 본당에서의 사투가 등 뒤를 울렸다. 깊은 침묵이 마음을 바람처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이곳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힘없는 말이 후원에 울려 퍼졌다.

“내일 죽을지 내일모레 죽을지 모르지요.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저는 기쁩니다.”

그는 쓰라린 미소를 지으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몸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그러니 의형은 저를 모욕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당신이 옳다 생각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숨을 들이켜고, 서문윤은 새까만 눈을 빛내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제 앞에서 당당하게 굴어주세요.”

그것은 단지 시선일 뿐이었으나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외침이 되어 검설린의 가슴에 꽂히고 있었다. 마음을 도려내는 비수와 같은 것.

그는 검설린의 마음을 비수로 찍었다. 입술 밖으로 얄팍한 신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나긴 침묵 끝에 검설린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 눈이 싫다.”

묵직하게 후원에 내려앉은 말이었다. 뜬금없는 말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거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린 서문윤은 의형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당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네 눈이 나를 슬프게 만들어. 내 마음에 닿고야 말아.”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에 스친 고통과 마주하고야만 것이었다. 마치 고해를 하는 듯 괴롭게 내뱉는 말들이 서문윤의 가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쉬어빠진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보는 눈이 내가 무책임하게 던져버렸던 일들을 상기시킨다.”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서문윤이 당황에 젖어 있을 때였다. 검설린은 원망이 서린 강렬한 눈으로 서문윤을 노려보며 원망이 꾹꾹 묻어나는 목소리를 쏟아부었다.

“내가 외면했던 모든 선하고 바른 일들이 네 눈 안에 있구나.”

그리고 그 말이 끝이었다.

서문윤은 와장창 무너져버린 벽을 보았다. 그것은 서문윤과 검설린을 나눈 것이었다. 그가 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두른 성벽이었다. 그리고 무너지는 벽을 보는 순간 서문윤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서서히, 서서히 그의 민낯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느낀 건….

“의형은 제가 싫은 게 아니지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 검설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널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것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입술 밖으로 쏟아낸 말이었다. 거르지 않은 진심이 담긴 말.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속내를 드러낸 사내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서문윤의 얼굴에 우는 듯한 미소가 감돈 순간이었다.

“역시 저는 의형이 좋습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검설린의 심장을 쿵 떨어지게 만들었다.

“아니야.”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말을 잘못하였다. 검설린이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서문윤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서문윤의 어깨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그를 이루지 못했다. 허공을 움켜쥔 손이 부들 떨렸다.

결국 사내는 분기를 참지 못해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도대체 날 왜 마음에 품게 된 거야, 미련하게 너는…!”

“은애하고 있습니다.”

검설린의 입술이 딱 다물린 순간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검설린이 말을 내뱉은 이를 노려보았다.

순박한 강아지 같은 눈은 어느새 진중하게 변모한 후였다. 청년은 흔들림 없는 고요한 호수 같은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

“그냥 갑자기 의형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습니다. 그냥 쓰러질 것만 같이 어지러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픈 줄 알고 자리에 누웠는데 자꾸 머릿속에 의형의 말이 떠올라서…. 코끝에 스치던 당신의 향기가 자꾸 스며들고, 귓가에는 당신이 부른 내 이름이 울렸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의형의 복면 아래 얼굴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서문윤.”

힘겹게 내뱉은 말에 서문윤이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서문윤은 마음에 퍼진 물결을 정리하며 심호흡을 했다. 검설린은 새하얘진 얼굴로, 그러니까 그가 본 적이 없던 얼굴로 서문윤을 말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이 마음을 드러냈다.

마치 귀신을 본 듯한 사내의 백짓장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어느 순간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마주하고 검설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열렸다. 그 사이로 흐른 건 쩍쩍 갈라진 목소리였다.

“울지 마라.”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문윤은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서문윤은 그제야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 뺨을 더듬었다. 축축이 젖은 광대에 그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엄연히 관직에까지 올랐던 사내인데 감정이 격해지면 울고야 만다. 민망함에 서문윤이 머쓱하게 웃을 때였다.

“의형, 저는 괜찮….”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리고 그의 말을 끊는 억눌리고 떨리는 목소리.

괜찮다, 그저 지나치게 감성에 젖은 것일 뿐이다, 그리 말하려 했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말에 입술을 조개처럼 다물고야 말았다.

“제발… 제발 좀.”

간절한 말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강인한 손이 서문윤의 어깨를 돌연 잡아당겼다. 흠칫한 청년의 어깨를 부여잡고 그는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서문윤은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백짓장처럼 하얀 얼굴에 스치는 고통을 마주한 순간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음으로 스며드는 고통은 검설린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저릿한 가슴의 고통을 느끼며 서문윤은 우는 듯한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난 평생 동안 이 마음을 놓을 수 없으리라.’

울음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영원히 그를 향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니.”

그를 예감했나 보다, 저는.

그리고 그를 깨달은 서문윤은 검설린의 품에서 하염없이 설운 울음을 흘렸다.

그 순간에도 귓가에 속삭여지는 간절한 말이 있었다.

“제발 너는….”

검설린은 한참을 우는 서문윤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보듬었다.

“제게 과거의 파편을 말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눈물이 그친 뒤에 서문윤이 내뱉은 말이었다.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검설린은 그의 눈물을 닦아준 후 처마 밑에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다.

멍한 눈으로 서문윤은 노을에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의형의 마음을 가린 벽, 그가 저를 밀어내는 이유, 어쩌면 제 마음을 배반한 이유까지. 서문윤은 그것이 그의 과거에 닿아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를 더 알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갓난아이 때부터 지금에 이를 때까지 모든 그의 일생을 하나하나 다 알아내고 싶었다. 비밀스러운 그의 민낯을 보고 싶은 마음. 그것은 니취의 민낯을 몰랐을 때 복면을 걷고 싶게 만들던 충동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답을 주지 않으리라. 반복되는 일에 서문윤은 거의 체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답변을 기대하지 않았던 말에 뜻밖에도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의(軍醫)로 일했다.”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문주에 몸을 기댄 검설린의 얼굴 구석구석 따뜻한 적색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역적이 되어 도망치던 나를 숨겨주었던 어린아이가 있었어. 내 나이 또래인지라, 그와 함께 소꿉친구로 자랐지. 내 은인이다.”

“…….”

“그는 성년이 되어 군을 이끌었다. 나는 직책 없이 그를 따라다니며 조언을 하던 그의 심복이었고. 그냥 그저 가볍게 조언만 해주는 관계였어. 난 그의 오래된 벗이었으니까.”

“선표 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가 아니다.”

검설린이 피로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중간에 군에 전염병이 돈 일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주워들은 의술을 써먹으려 했지만, 일이 너무 커져 관직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어. 어쩔 수 없이 그는 내게 작은 관직을 제수했고, 나는 군의로 한동안 일했다.”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고우군이 눈치채기 전까지는.”

고우군이 그를 살려둘 리가 없었다. 파나립 박사와, 그리고 고우군과 관련된 비사를 떠올리며 서문윤은 신음을 삼켰다. 그는 검설린에게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서파를 증오하는 동파의 재상이 발견한 파나립의 흔적.

“만약 정치적인 목적만이라면 나를 죽이려던 뜻을 꺾을 수도 있었겠지. 그는 나를 제거하려는 고우군과 바로 대치하며 기싸움을 벌였으니까. 신념이란 게 그래서 무서운 거야. 고우군은 나를 죽이려고 그가 제시한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악을 썼으니까.”

“…….”

“그리고 최후의 타협안이 입대였다”

“입대요?”

묵묵히 말을 듣던 서문윤이 뜨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입대라니?

상상치도 못한 말의 흐름에 서문윤의 두 눈이 흔들렸다. 죄인들로 죄수 부대를 구성한 유래가 없는 건 아니다만, 지금 와서는 옛날 일에 불과하다. 검설린은 냉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웃기냐? 나도 웃겼다. 너만 웃은 게 아니야. 다 웃었어. 그런데 고우군만 안 웃었지. 그 작자는 진심이었거든.”

“죄, 죄수 부대입니까?”

“죄수 부대는 병졸로 구성되잖나. 북란 당시 군사가 모자랐긴 했지만 병으로 간 건 아니다, 난 군의였을 때 관직을 제수받아서 그렇게는 못 하지.”

“허면?”

“그 당시 제일 험했던 격전지에 부임됐다. 그것도 군의가 아닌 전투에 임하는 말단 장수로. 죽으라는 말이었어. 결국 죽지 않았지만.”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웃어야 할 사안이 아닌 것은 알았지만 너무나도 기가 막힌 말.

군의를 군관이라고 장수로 부임시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 넋을 잃고 있던 서문윤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혹시 장한성에 부임하셨습니까?”

그 말에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했다. 말을 하기 싫어하는 듯한 얼굴.

그러나 서문윤은 그의 반응으로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입술 밖으로 신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했다. 군공을 세우고 관직에 올랐지.”

사내는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환멸 나는 시간들.”

쓰라린 말에 복잡한 마음이 묻어 나왔다.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관직에서 물러나셨습니까? 선친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까?”

“…….”

“아니면 백성을 긍휼-.”

“따위의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만해.”

청년이 몸을 멈칫했다. 역린을 건드린 듯 검설린의 얼굴이 심히 굳은 까닭이었다. 잠시간 침묵 끝에 검설린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둥궁사변에 휩쓸렸다. 서로가 고변하던 시기에, 나 또한 밀고당했고.”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밀고했지.”

밀고?

그는 바로 검설린의 안색을 살피려 들었다. 담담한 사내의 얼굴 구석구석에 노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은 제가 내뱉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하는 것처럼 차분했으나 서문윤은 쉽사리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의형이 밀고를요?”

경악 어린 청년의 말이 마음을 대변했다.

밀고라니?

‘그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서문윤이 아는 검설린이 그럴 리가 없다. 2년간 같이 중원을 떠돌아다니며 대쪽 같던 그의 성정을 파악한 서문윤이다.

검설린이 조금 험악하고, 또 오만하긴 하지만 목숨 보전을 위하여 동료를 팔 이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충격에 허우적거리던 서문윤은 그 순간 어떤 생각에 이르러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말 그리 확신할 수 있나?’

입술에 스치는 온기를 생각하며 그는 딱딱하게 얼어붙고야 말았다. 청년의 얼굴에 그 순간 그림자가 드리었다.

그때도 그리 믿었었지.

‘의형이 그럴 리가 없다고….’

어두운 생각에 허우적대던 청년의 귓가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밀고했어. 당시는 북란이 끝나지 않았고, 교전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국경을 수비하던 장수 대부분은 그의 파벌이었다.”

“…….”

“고우군이 들이민 열두 가지 죄를 나누어 가지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난 후자를 선택한 거야. 최소한의 자비를 구걸하면서! 그가 모든 잘못을 저질렀으니 우리는 잘못이 없다 자백했지.”

그 예민한 말에 서문윤이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르곤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나는 경칠승 같은 짓을 저지른 거다. 서문윤.”

사내의 눈에는 짐승과도 같은 불길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한참을 침묵했다.

노을빛이 스며드는 의당 후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다시 냉혈한 얼굴을 되찾은 검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많이 지났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할 일은 많고 날은 저물어가고 있다.

‘그 멍청이가 조금 이해가 되는군.’

장한성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앞뒤를 따지지 않고 일을 벌였으나 사실 쥐구멍에 몰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것뿐이다.

다른 점은 성주와 의원이라는 직책뿐이었다

‘의원은 의원의 일을 해야지.’

한숨을 내뱉으며 검설린이 서문윤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가자.”

그리고 그 때 서문윤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의형은 후일을 도모한 것일 뿐입니다.”

멈칫한 검설린의 몸.

본당에 돌아가려던 사내를 향해 말이 이어졌다.

“후일을 도모하여… 권세나 목숨을 위함이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여 그런 것뿐입니다.”

목소리의 끝이 떨리고 있었다. 서문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후원의 한편에 검설린이 노을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제가 아는 형님은 그런 사람입니다.”

또.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키며 검설린이 숨을 멈췄다. 곧은 눈이 또다시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을 울리는 말.

“형님은 그런 사람입니다.”

검설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침묵을 지켰다.

긴 시간이 흘러 그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너는 나에 대해서 모르고 있어.”

힘겹게, 아주 힘겹게 내뱉은 말.

“그리고 난 네가 나에 대해서 알지 않았으면 한다. 윤아. 네가 진정한 나를 알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 경멸로 변하는 게 무서우니까.”

그 말에 서문윤은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제가 모르는 부분 하나 없이,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습니다.”

심호흡을 삼키며 서문윤이 웅얼거렸다.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를 빤한 시선으로 재촉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검설린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난 네가 싫어.”

그 또한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다. 이제는 그 말에 담긴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서문윤은 두 눈에 힘을 주며 검설린을 마주할 뿐이었다.

그 강인한 모습에 검설린은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나는 후일을 도모하지 못했다. 그렇게 혐의를 벗은 관료들이 서로를 고변하기 시작하고, 결국 완전히 질려버려서 낙향을 결정했으니까.”

시야는 깜깜해졌으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선명할 뿐이었다. 울고 있는 청년의 얼굴. 심장이 지끈거렸다.

일은 이리 꼬였다. 씁쓸함을 품으며 검설린이 말을 이었다.

“그는 내가 후일을 도모할 줄 알고 날 용서했는데, 난 그 앞에서 못 하겠다 힘이 든다 말했어. 이미 일은 끝났으며, 더 이상 기울어진 해를 붙잡지 못하겠다며.”

과거를 고해하는 목소리는 지극히 공허했다.

“네 모든 것은 틀린 것이며 끝이 났다, 죽기 직전의 그의 앞에서 그리 말을 쏟아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퍼부었지. 네 모든 것은 헛된 일이었다며.”

아, 그 순간 서문윤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검설린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미친 자의 미친 말.”

땅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눈을 떴다. 서문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그 일은 아직도 검설린에게 악몽을 안겨주었다. 세 차례 심문으로 얻은 병. 마음에 드리운 한은 그에게서 평온한 잠자리를 앗아갔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나날이었다. 불청객이 오기 전까지는.

검설린이 고개를 들어 올려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마루에 걸터앉은 청년의, 석양이 스며드는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저 나이대였지.’

순수함을 간직한 청년의 얼굴이 과거를 회상케 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내가 한참 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청년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내뱉었다.

“그자가 혹시 의형과 약조한 자입니까?”

“운표선이 말해줬군.”

애초에 그놈의 입을 믿지 말았어야 했지. 덤덤한 목소리로 검설린이 답을 했다.

“이제 일어나자, 가자.”

“그자가 맞습니까?”

“그래, 맞아.”

몹시 피로하다. 빈말이 아니라 너무 피곤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피로가 견디기 힘들어 검설린은 지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그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그러니 이제 가자, 할 일이 많지 않느냐.”

서문윤은 그러나 검설린의 간절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서문윤은 검설린이 그토록 싫어하는, 2년간 몹시도 괴로워하게 했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의형을 숨겨준 그자가 누구입니까?”

그 말에 잠시간 그의 얼굴을 노려보던 검설린은, 한마디 말을 내뱉고 본당으로 향했다.

“…이청융.”

8년 전 사사당한 동궁태자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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