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장안사준(長安四俊)(6) (13/31)

12. 장안사준(長安四俊)(6)

악바리가 되어 울고불고 난리쳤던 이청우는, 검설린의 결정에 화색을 보이며 등 굽힌 새우가 되었다. 얼굴을 볼 틈도 없이 연신 허리를 굽히는 이청우를 서문윤이 말리고 검설린이 짜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는 그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러나 검설린은 그의 감격 어린 반응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는 초원의 겨울바람 같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지. 생사람을 죽을 자리로 인도하는 물귀신이 되었는데, 그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시달려서 제정신을 찾을 수 없을 테지.”

“의형!”

지나친 말이다. 가차 없는 비난의 말에 서문윤이 미간을 좁히며 검설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저를 다시 의형이라 부르는 이를 무시하면서 검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왜, 틀린 말도 아닌걸.”

따라오지 말라는 검설린의 말에도 부득불 그의 곁을 따라온 운표선이 익살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받았다. 검설린은 그 말에 동의하는 듯 싸늘한 시선으로 이청우를 노려보았다.

그간 냉소적인 말에 익숙해져 있던 서문윤은 그러나 그 말만은 참을 수 없어 발끈하고야 말았다.

“장한성주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동기로서, 그리고 무인으로서 이청우에게 은근한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던 서문윤이다. 검설린의 무도하기까지 한 말을 참지 못해 그는 사내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항의의 말에 검설린은 코웃음을 치며 답할 뿐이었다.

“저자는 애민하고 보국하는 마음 때문에 일을 벌인 게 아니다. 만민을 진정으로 아꼈더라면 애꿎은 의원들을 납치하여 사지로 처박아 넣을 리가 없지.”

그의 말에는 조롱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업을 짊어진 자의 강박이다, 저건.”

사람을 앞에 두고는 그게 할 소리야?

그의 말이 맞는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공감이 안 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이청우는 관리로서 차악을 저해하며 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택한 것이다. 서문윤 또한 그의 지나친 행동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음마저 폄하하는 인신공격성 발언에는 참지 못했다.

“말이 심하십니다, 의형. 그는….”

“그분을 탓하지 말게.”

그러나 이청우는 서문윤이 화를 내며 하는 말을 씁쓸한 목소리로 끊을 뿐이었다. 서문윤이 놀란 얼굴로 이청우를 보았을 때, 그는 덤덤한 얼굴로 말의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사내의 그을린 얼굴에 쓰라린 미소가 감돌았다. 그들은 너른 초원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광활한 초원을 다그닥다그닥 말을 모는 이청우의 등 뒤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차라리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 보였다.

4년 만에 성숙한 사내가 된 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죄를 저질렀어.”

서문윤은 그의 말을 묵묵히 받을 뿐이었다. 검설린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태연히 말을 몰고 있었다.

이청우는 매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하여 악행을 저질렀지. 더 무슨 말을 하겠나.”

“하지만….”

동기의 말을 끊으며 이청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그대는 굳이 그대의 의형에게 화를 내지 않아도 돼.”

“…….”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지.”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저분의 화를 이해하네.”

초원에는 바람이 불었다. 서문윤은 뼈를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잠시간 입술을 깨물고 굳은 침묵을 지켰다. 이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이청우의 얼굴에는 방금 전 들떴던 사내의 것과 같지 않게 허무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사실 지금도 내 자신이 조금은 혐오스럽거든.”

그의 얼굴에는 보는 순간 사람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바람이 불고 있었다. 푸르륵, 말이 보채는 소리에 서문윤이 말의 굵은 목을 쓰다듬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답이 없는 동기를 향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이청우가 중얼거렸다.

“가면 알게 될 걸세.”

그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냉랭한 빛이 가득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역정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못마땅한 얼굴로 검설린은 그들을 쓰윽 한 번 훑어본 후 한숨을 내뱉었다.

운표선이 그의 옆에서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녘땅 초봄에 부채라니.’

그러나 서문윤은 차마 장안사중 사영귀를 말릴 자신이 없어 깊디깊은 한숨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말을 모는 손에 힘을 주며 그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장한성은 회흘, 토번, 대당, 세 나라의 국경이 마주한 요지라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성민조차 허가를 맡고 떠나야 했기에 그 인근에는 사람들이 자리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몇 개의 검문을 걸치고 관을 통과하여 유목민의 땅에 가까운 황량한 벌판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를 가로지르는 강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석양의 빛을 받으며 반짝거리는 거대한 강이었다. 끝이 어렴풋이 보이는 폭이 넓은 강. 서문윤은 그것이 바로 북부에서 성스러운 강이라 불리는 낙수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지류가 다섯 개에 다다르는 초원의 젖줄기.

그리고 강 너머에는 거대한 성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너른 들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뒤이어 강 너머의 성벽이 세모꼴의 모양인 것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의 의문점을 해결해주듯 이청우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장한성은 수맥이 둘로 나눠지는 삼각 지대에 위치하고 있네. 강 상류에 건전성을 비롯한 회흘과 인접한 국경 지대가 있고, 이곳은 강줄기가 크게 둘로 나눠지는 중류에 속하지. 장한성의 오른쪽에는 중원과 국경선을 이루는 낙수강이 흐르고,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왼쪽에서는 회흘과 토번과 마주한 낙수강의 지류, 백탄강이 흘러.”

마치 새총의 가운데에 자리한 모양새다. 그제야 어느 정도 지형을 파악한 서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청우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흐르는 강은 두 가지지만 그 뿌리는 같다.”

낙수강 위에 떠 있는 배다리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독특한 지형이군요.”

그 때 검설린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혜의 요새지.”

그 의미심장한 어감에 서문윤이 놀란 얼굴로 검설린을 보았다. 오는 동안 심기가 불편한 듯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간만에 내뱉은 말이었다.

“동시에 보급이 아주 중요한 곳이다. 너도 알겠지만, 이 지형은 완전히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야. 사람이 자급자족하기에 마땅하지 않아.”

이청우 또한 그를 흘깃 보고 있었다. 말을 잠시간 곰씹던 서문윤이 문득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의형께서는 군문에 몸을 담그셨군요.”

검설린은 그저 차디찬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서문윤 또한 굳이 그가 숨기고 있는 일을 추궁하기 싫어 그를 향했던 시선을 돌리며 말을 모는 데 열중했다.

어느새 가까워진 낙수의 물은 석양에 보석같이 찬란한 빛을 흘리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배다리에 이르러 검문에 응하기 위해 말에서 내리곤, 서문윤은 잠시간 그 강의 경치에 취하여 멀거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가 감탄성을 내뱉으며 의형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의형?”

서문윤은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은 검설린의 얼굴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배다리 근처의 풀밭에 쭈그려 앉아 땅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청우는 그 근처에서 군패를 내보이며 검문을 받는 중이었으며, 운표선은 낙수에서 애마의 물을 먹이는 중이었다. 사막길 근처 나라에서 나는 귀한 한혈마의 목을 애지중지 쓰다듬는 운표선의 얼굴을 문득 강렬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검설린이 이를 부득 갈았다.

“왜 그러십니까?”

어째서 더러운 흙을 만지고 있나?

그리고 어째서 갑자기 저리 화가 난 표정을 지을까?

검설린의 돌발 행동에 놀란 서문윤은 그가 있는 곳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발자국?’

그리고 그는 검설린이 만지고 있는 풀밭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발자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기로 보아서 성인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별다를 것 없는 발자국이.

“무슨…?”

궁금증을 풀어줄 답변을 요구하는 듯한 끝이 흐려진 목소리. 검설린은 풀밭을 헤치던 손을 떼어내며 짤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군화다.”

그 말에 서문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군화요? 가죽신을 말하는 겁니까?”

서문윤은 무관으로 부임했던지라 군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군관이 된 자는 정해진 규격에 맞는 복식을 개인이 맞추어 제작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군관의 옷은 겉으로는 유사해 보였으나 자세한 부분에서는 각기 차이점이 드러났다.

서문윤은 뒤이어 내뱉어진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동궁사변 이전, 병부가 개편되기 이전에 따로 관청을 만들어 무기와 병사의 군복을 지급하곤 했다. 한 몇 년 동안은.”

서문윤은 그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수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검설린의 말에는 몹시 의뭉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서문윤이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검설린을 올려다볼 때였다.

“국경이 조금 변했군.”

그리 말을 하며 검설린은 굽혔던 몸을 펴고 자리에 일어섰다. 서문윤은 제 몸을 가리는 그림자에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반 발자국 물러서고야 말았다.

“기다리셨습니까?”

동시에 이청우가 황급히 그들에게 달려와 말을 걸었다.

“니들 뭐 하냐?”

운표선 또한 말의 고삐를 끈 채 그들에게 다가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아, 그게.”

사실은 저 또한 의형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운표선을 경계해야 한다는 마음에 본능적으로 그는 말을 얼버무리며 우물쭈물하고야 말았다. 게슴츠레해지는 운표선의 얼굴에 그가 당황할 무렵, 이청우가 멋쩍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휴전 상황이다 보니, 장한성 밖을 빠져나간 것은 비밀인지라 일이 늦어졌습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 말이 적절하게 상황을 환기시켰다. 검설린과 운표선의 시선이 이청우에게 향했다.

그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그럼 갈까요?”

배다리를 건너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실할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흔들림 없는 다리에 서문윤은 놀라움을 드러내며 흘끗 낙수의 물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물 위에 석양이 반짝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감탄에, 또 감탄이다.

서문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을 씻은 듯이 잊어버린 채, 호기심이 많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배다리와 낙수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와 다르게 운표선과 검설린은 꽤나 덤덤한 태도로 말을 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넌지시 이청우가 그를 향해 말을 던졌다.

“여기에 와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

운표선의 얼굴이 묘하게 변한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호위의 임무도 잠시 잊고 넋을 잃은 채 장관을 구경 중이었다. 낙수의 경치가 그리 아름다웠다.

“이 정도까지 황량하지는 않았어, 장한성 주변에 번화한 성이 몇 개 더 있었고 장벽도 있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검설린이 문득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 어디 가고 허허벌판에 보초들뿐이지?”

그 말에 장한성주는 쓴웃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있었던 성이 없어졌다면 그 이유는 뻔하지 않습니까.”

“…….”

“그나마 이 정도로 평화로운 건 대가한이 즉위했기 때문입니다. 잠시간 휴전을 맺어서.… 그것도 한정적인 평화일 뿐이지만.”

그 자조 어린 말에 검설린이 짤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군.”

검설린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 꽤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 청년은 씁쓸한 얼굴로 이제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버린 자신의 부임지를 보았으며, 한 사내는 사랑하는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청년은 몽롱한 눈으로 아름답고도 서정적인 낙수의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남은 한 사내는 그런 천진난만한 청년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는 중이었다.

배다리를 건너고 장한성의 성문으로 향했다. 어딘가 호인의 기질이 있었던 이청우의 얼굴에 준엄함이 서린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긴장 어린 눈으로 말의 고삐를 부여잡으며 늦추었던 경계심을 북돋았다.

그렇게 입성한 장한성은 인외마경(寅畏魔境)이었다.

* * *

죽음이 자리하는 곳에는 항상 곡성이 딸려온다. 망자를 위해 슬피 우는 사람이란 장례식의 기본. 사람들은 곡성이 죽은 이의 안식에 기여한다고 믿어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라도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검설린을 따라다닌 곳곳은 망자의 흔적과 울음이 함께했다. 귀를 멀게 할 만치 앵앵 울리는 목소리는 처음 의행을 따라나선 서문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곡소리가 소생의 징표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망자를 챙겨줄 기력이 있는 곳이라면, 그러니까 배곯는 상태에서도 죽은 이를 향해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며 기력을 낭비할 수 있는 곳이라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신체의 고난은 인정을 빼앗아버린다.

곡성이 없는 죽음이 있는 곳이 바로 인정 없는 지옥이다.

그리고 서문윤은 지옥을 보고 있었다.

‘이건….’

덜그덕 덜그덕 시체 무더기를 실은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에 삐져나온 다리가 앙상하다. 시체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차분한 표정으로 짐짝을 대하듯 시체의 손목을 질질 끌었으며, 마차를 끄는 사람은 멍한 얼굴로 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시신을 모독하는 행위에 고지식한 서문윤이 항의할 수 없던 까닭은, 그들의 팔다리가 앙상하고 몸이 후들거렸기 때문이었다.

시신을 배웅하는 이들 또한 움푹 파인 눈에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가족임이 뻔한 이를 배웅하면서 그들은 곡성을 흘리지 않았다. 심지어 슬픔의 그림자 또한 없었다.

그곳에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그닥 말을 타고 움직이는 이청우 일행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운표선은 부채로 무섭게 가라앉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검설린은 복면 위로 얼굴을 찌푸리면서 동요를 드러냈다.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서문윤은 얕은 신음을 입술 밖으로 흘렸다.

그들은 길을 빙 둘러 치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청우는 휴전 기간에 몰래 장한성을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으므로 정체를 숨겨야만 했던 것이다. 전시 중에 전장을 벗어나는 것은 목을 자를 중죄였으므로, 이청우는 변복을 하고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채 청사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서문윤은 암담한 장한성의 현실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논밭과 촌민.

장한성은 특이하게 민(民)보다 병사의 수가 월등히 많은 곳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세 사람 중 한 명꼴로 민이 보였고 또 병사들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와 노인, 여인들도 종종 보였다. 그러나 모두 또는 대다수가 병마로 인해서인지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눈에 그들은 꽤나 한계 직전에 이른 듯 보였다. 아니, 사실은 꽤나 가망이 없어 보였다. 다만 군병이 눈에 불을 켠 듯 형형한 빛을 드러내고, 손에는 풀칠을 한 것마냥 무기를 꽉 잡고 경계를 세우고 있다는 점이 그들의 의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힘든 상황임에도 기적같이 겨울에 수성을 성공했던가?

겨울은 이민족이 더욱 강해지는 날씨였다. 그들의 사투가 안 보아도 뻔했다.

‘대단한 의지군.’

그리 평가하며 서문윤은 마을 안을 바라보았다. 목책에 기댄 앙상하게 마른 여자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서문윤은 결국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소같이 커다란 눈에 서린 것은 삶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었다.

* * *

‘강가라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군.’

성벽의 위에 서서 서문윤이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곳이었다. 운표선은 짐을 정리하겠다 하며 빠르게 숙소 안으로 들어갔고, 이청우는 성내에 무슨 일이 생긴 듯 양해의 말을 구하며 치소로 향했다.

그리고 서문윤과 검설린은 이청우가 내어준 숙소에 짐을 풀고 성벽 위를 걷는 중이었다.

“중류이긴 해도 자급자족이 불가한 곳은 아닌 듯합니다만.”

한참 동안 흐르는 백탄강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내뱉은 말이었다. 검설린은 무언가의 상념에 깊게 잠긴 사람처럼 거센 성벽의 바람을 맞으며 그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형을 향해 몸을 돌리고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변방이라 둔전 생각은 안 해봤을까요? 군사들이 직접 논밭을 간다면 양곡 수급이 원활하지 않겠습니까? 장기전이라면 고려할 만한 것일 텐데.”

그 말에 허공을, 아니 성벽 아래를 말없이 바라보던 검설린이 유리처럼 투명한 눈을 서문윤에게 향했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일이다.

무관이었던 시절의 향수에 젖은 청년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수성이 힘이 들더라도 농사를 포기하고 병력만 키운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황궁 무관으로 부임하긴 했지만, 사실 무관이 되려 하는 사내가 가장 열망하는 미래는 전시의 장군이리라. 서문윤 또한 그러한 부류 중 하나였다.

이민족의 침입을 받는 성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는 보국충정의 무장.

장한성의 힘든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새끼 무장의 눈이었다. 흘끗 서문윤을 바라본 검설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건 네가 장한성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거센 강풍이 부는 성벽 위, 검설린은 바람에 묻히는 목소리에 언성을 높여야만 했다.

“둔전은 시작할 때 품이 많이 들지. 더군다나 장한성은 군사요새의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기 때문에 농민의 수가 적다. 이 인근은 바위와 자갈이 많은 곳이라 수확량도 좋지 않고.”

“요새를 지을 때 그럼 둔전을 생각하지 않은 겁니까? 대체 왜 그런….”

“너는 둔전의 중요점만 알고 있구나.”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성벽을 짚은 굳은살이 박인 손에는 험난한 세월이 묻어났다.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빳빳이 굳히고야 말았다.

“이론만 배운 관료의 전형적인 잘못된 생각이지.”

손은 마디마디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그리고 관절 부분의 살이 닳은 것이었다.

검설린은 고요한 눈으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성과 몹시도 잘 어울렸다. 마치 오랜 시간 잃었던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다. 서문윤은 그 순간 떨림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의형께서는 무관이셨습니까?”

검설린은 냉소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알면서 왜 물어. 너도 짐작하고 있잖아.”

서문윤은 그저 긴장을 삼킨 채 검설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맞다.”

코웃음을 치며 내뱉은 말이었다. 서문윤의 입술 사이로 아, 작은 신음이 흘렀다.

그를 한 번 힐끔 바라본 검설린이 다시 몸을 돌려 백탄강을 응시했다. 청년의 귓가로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보단 경험 많을 거다.”

그 말에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양곡이 부족한 게 아닙니까? 군사들이 밭을 갈아 자급자족을 한다면….”

“둔전제는 전란의 시기에 유리하지 지금 시기에 유리한 게 아니야.”

그리 말하는 사내의 복면 위 얼굴이 몹시 서늘했다. 평상시보다 유독 더 무뚝뚝한 어조에 서문윤이 당황하여 말을 이었다.

“지금도 전란의 시기입니다. 불과 20년 전에 장안이 회흘의 말굽에 정복당했던….”

“아니, 단순히 이민족의 약탈에 시달리는 때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말을 몰아 사람을 죽이고 양곡을 앗아 가지만 영토는 빼앗지 않지. 그게 유목민족인 그들에게 더 이득이니까. 나는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다.”

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검설린이 싸늘하게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민(民)이 정착하지 못해 피난을 일삼고 터전을 버리는, 영토가 바뀌는 전면전일 때를 말하는 거다. 병사고 농부고 구분이 안 되는 시기. 너, 농사를 짓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느냐?”

서문윤은 그의 거친 목소리 앞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는 전쟁이나 다름없어. 너는 강소성 사람이라 수긍하기 힘들 테지. 농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얼마냐 힘들겠냐고. 강소성은 산도 없는 비옥한 지방이니까. 황하의 수혜를 받는 기름진 땅. 하지만 서문윤. 대부분의 땅은 그리 비옥하지 않아.”

그것은 전직 무관을 혼나는 어린아이로 만드는 매서운 기색이었다.

“기름지지 않은 땅을 가는 일은 돌덩어리에 곡괭이를 쑤시는 것만 같아. 태양빛은 화살과 같고, 일은 끝도 없이 몰아치지. 매일 밤 거름을 묻어야 하고 해충을 쫒아내야 한다. 게다가 농사가 실패하면? 너는 1년, 길면 수년을 공들인 농사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빠르게 말을 쏟아낸 검설린이 한 차례 심호흡 후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세차게 울렸다.

이윽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둔전제는 병사의 피로를 증가시키지. 전쟁은 병사가, 농사는 농부가 하는 게 맞는 거다. 둔전제가 거행되었던 시기가 예외인 거다. 그때는 농병이 구분이 되지 않아 둔전에 익숙해져야만 했으니까. 터전이 바뀌는 일이 잦아 개간을 같이 할 필요성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혹독한 꾸중.

“제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서문윤은 검설린의 지적을 순순히 시인할 뿐이었다. 혼이 난 것 치고 청년의 얼굴은 꽤나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청년이 본능적으로 검설린의 모습에서 무관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꼭 병부에 자리한 기분이다.’

그저 범부로 장한성 성벽에 올라 있으나, 꼭 저가 장수가 된 기분이다.

지금은 길을 벗어나긴 했지만, 그 옛날 서문윤에게는 군관이 되길 열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어쩐지 상관의 질책 같은 말에 그날의 향수가 문득 되살아난 것이다. 그런 저 자신을 발견하며 서문윤은 오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나는 무관이기를 갈망하고 있나?’

그가 상념에 빠진 사이 성벽에 기댄 사내의 얼굴에 흐릿한 먹구름이 껴가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던 검설린이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그리 말하며 검설린은 시선을 돌려 반짝거리는 강물을 잠시간 응시했다.

짧은 침묵 동안 서문윤은 그를 향해 치밀어 오르는 여러 개의 말들을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호기심에 젖어 서문윤이 말없이 그를 바라볼 때였다.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게다가 여기는 애초에 농사가 힘들어.”

한숨과 함께 검설린이 말을 내뱉었다.

“국경은 황무지일 수밖에 없다.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경계는 대체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조성되니까. 장한성은 황무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농사가 용이한 곳은 아니다.”

그 말을 뱉는 사내의 눈이 깊게, 아주 깊게 가라앉았다.

“둔전은 애초에 고려도 하지 않았어.”

그 눈은 백탄강 저 너머를 헤매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백탄강이 아닌 그 너머의….

어쩐지 시선을 떼기 힘든 얼굴이었다.

멍하게 검설린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의아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장한성은 아예 보급에만 의존을 하게 지어진 겁니까?”

단호한 말에 얼떨떨하게 받아들인 사실의 허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말에 검설린이 몸을 멈칫거렸다.

그답지 않은 태도다. 서문윤의 얼굴에 의문이 번져 나갈 때였다.

검설린이 망설이며 말을 내뱉었다.

“양곡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장한성 주변에 보급을 목적으로 만든 성이 있지. 하지만 수확량이 그렇게 마땅치 않아서….”

그리 말을 하고 검설린은 잠시 우물거렸다.

“…?”

어리둥절해하는 청년을 흘긋 바라보며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고 중얼거렸다.

“이젠 다 지난 일이다.”

이윽고 무심한 표정을 되찾은 사내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회흘이나 토번의 민족이 그들의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게 아님을 아느냐?”

“어느 정도는….”

“그들은 나라보다 민족이 중요하다.”

보급 이야기 중 갑자기 무슨 이민족 이야기?

딴 길로 샌 말에 서문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이민족이 세운 나라는 여러 민족이 연합한 형태가 많지. 대가한의 권위가 황제와 같지 않아. 민족이 왕보다 중요할 수도 있고.”

그는 드물게 돌려 말하고 있었다. 평소에 직설적이고 오만하던 사내의 익숙지 않은 화법이었다. 서문윤이 답답함을 참지 못해 빠르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곳은 격전지지만 강을 타고 내려가면 하류에는 제법 국경이 평온해. 팽팽한 대치가 조성된 평화라지만 사실은 조금 기류가 다르지. 토번과 회흘과 본국이 대치한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힘이 평화를 조성하고….”

서문윤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마침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이상한 검설린의 모습이 서문윤의 마음속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검설린은 문득 성벽을 향해 몸을 기대며 쓴웃음을 흘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의형이 어째서 저리 돌려 말할까?

불길함에 사로잡혀 서문윤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제일 중요한 건… 그 지방에는 시장이 있지.”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를 짐작한 서문윤이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설, 설마.”

강풍에 깃발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부산스러웠다. 창백한 얼굴로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지금 제가 생각한 일이 사실이 아니라 믿습니다.”

서문윤은 바보가 아니다. 검설린이 내뱉은 말을 조합한 그는 머릿속으로 실로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떠올리고는 마른침을 삼키고야 말았다.

설마?

청년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하며, 사내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맞을 거다. 쓸려나간 도시 중에서 회흘, 토번과 양곡을 거래하던 밀수시장이 형성된 곳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토번의 양곡을 회흘의 중간 상인이 중개한 형태의 무역….”

서문윤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 순간이었다.

“그, 그건… 그건 국법에 어긋난 일입니다! 아니, 그냥 크게 어긋난 일 아닙니까?”

“어긋난 일이지.”

“전시 중에 적국에게 군량미를 보급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덤덤한 말에 울컥한 서문윤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라 미친 일이 아닙니까? 적국의 상인에게 군량미를 보급받다니요! 상식적으로…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되지, 당연히.”

서문윤의 혼란에도 사내는 태평하게 답할 뿐이었다.

그 평온함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 서문윤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그런데 너도 많이 봤잖아? 이 세상에는 미친 일이 제법 많이 일어나는 걸.”

냉랭한 말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 말은 몹시도 서늘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었다.

신음을 삼키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을 마주했다.

고요한 눈이 샛보라색 하늘 저 너머를 헤매고 있었다. 마치 백탄강이 아닌 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는 한참을 성벽 너머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검지로 복면을 느릿하게 내리며 검설린이 몸을 돌렸다. 서문윤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새까만 눈과 마주하고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아니, 사실은 일상이라 생각했던 일보다 미친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

동요를 삼키려 해도 멈출 수가 없는 몸의 떨림. 비릿한 조소와 마주하고 서문윤은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사실 그게 정상일지도 모르겠군.”

그 눈을 본 순간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가 구분을 하겠나.”

대화를 주도하여 이어나가던 검설린은 그 말을 끝으로 우울함이 잠식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 또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한 채 머뭇거려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말을 내뱉을 때 그의 얼굴이 몹시도 쌀쌀맞아 보여, 오랜 시간 그와 함께한 서문윤조차 함부로 입술을 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신음할 뿐이었다.

펄럭거리는 깃발이 바람에 휘날려 귀신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서문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벌렁거리는 심장이 진정되고 나자 청년이 중얼거렸다.

검설린의 기세에 말을 잇지는 못했으나,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일이다. 불편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서문윤을 흘긋 보며 검설린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회흘에는 민족이 많아. 대가한을 싫어하는 부족장도 많지.”

대가한은 회흘의 군주를 의미했다. 족장들의 족장. 서문윤의 시선을 받으며 검설린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돈을 밝히는 사람은 더 많고.”

뒤이어 그가 머뭇거리며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대놓고 거래하던 건 아니었어.”

아니었어?

‘이거 어감이.’

서문윤의 얼굴에 스친 의심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듯, 검설린은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건전성과 인근 지역에서 보낸 양곡이 주였고 가끔 농사가 실패할 때 몰래 이용하던 수단이다.”

그 순간 서문윤이 백년화와 관련된 때의 일을 떠올리고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어, 설마 양양이 말했던 밀수시장이?”

그리고 그가 뒤이어 내뱉은 무심한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얼굴을 와그작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망했구나.”

그렇다.

과거는 둘째 치고 지금 장한성은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성들은 갈려나가고, 밀수시장은 보아하니 단속에 털렸고, 본진에서는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도 않… 그냥 끝이잖아?’

불쌍한 동기의 얼굴이 순간 아른거려, 서문윤은 앓는 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이청우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댔다.

이청우, 이 불쌍한 놈.

‘정말 사면초가였구나.’

서문윤은 용솟음치는 연민을 억누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음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희 어찌하면 좋습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퉁명스러운 대답에 당황한 서문윤이 자세를 바로 하며 입술을 열었다.

“건전성에서 물자를 보급한다니 급한 일은 해결되었지 않습니까. 소량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희망이 생긴다는 점에 의미를 두는 것이….”

“나는 네가 낙천적이어서 좋다고 말을 해야 할지, 꿈속에서 사느냐고 면박을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또다시 벙어리가 된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이 자그마한 한숨을 내뱉고 중얼거렸다.

“일단 가자.”

답답함에 내렸던 복면을 다시 위로 올리며 하는 말이었다. 하나하나 장인이 섬세하게 조각한 듯한 미목수려한 얼굴이 투박한 천에 가려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서문윤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렀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원의 일은 수성이 아니니.”

그리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몸을 돌려 성벽을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잠시간 그의 등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둠이 저무는 백탄강을 흘끗 바라보곤 뒤를 따랐다.

* * *

건전성과 장한성의 거리는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다.

좋은 말들로 며칠을 달려서야 도착한 곳이었다. 서문윤은 여독에 찌들어 몸을 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앓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의형을 재촉했다.

“빨리 짐을 풀고 진료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가 의원이냐? 이제 보니 내 일의 향방을 네가 결정하고 있군.”

“하지만….”

서문윤의 말을 단호한 목소리가 칼처럼 끊었다.

“다급한 건 알고 있지만 오늘은 쉬어라.”

본디 혹독한 일정을 먼저 이끄는 이는 검설린이었다. 심지어 그가 절름발이였을 때부터 검설린은 훈련을 받은 무관 출신이 학을 뗄 만큼 가혹한 일과를 밟아오게 했다.

휴식이 익숙지 않다.

피로에 찬 몸에도 안절부절 쉬지를 못하는 서문윤을 향해 검설린이 말을 내뱉었다.

“내가 온갖 개짓거리는 다 해쳐먹고 저리 신세 좋게 퍼질러 자는 저놈을 방관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서문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돌려 슬쩍 열린 방 문 사이로 겨울잠을 자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말 잘 자는군.’

상황은 둘째 치고 감탄스러울 만큼의 배짱이다.

그리고 감탄스러울 만큼의 뻔뻔함이다.

‘저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검설린이 일러준 바가 있었다.

운표선이 이청우의 힘줄을 끊어놓은 것은 그를 죽이려 한 게 아니라, 사실 살리려 함이었다고 말이다.

그 말은 서문윤의 운표선을 향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꾸어주는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

그럼에도 서문윤은 경계를 풀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전시에 장수의 다리를 베려 한 건 맞잖아?

오히려 조정과 얽혀 있는 여러 뒷사정들이 그의 마음을 더욱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서문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표선은 징하게 그들 일행을 따라붙었다.

비록 이청우가 지난날 이름을 사칭한 일에 대해 앙금을 풀기로 하였으나, 서로의 사이는 딱히 좋지 않았다. 아니, 사이가 좋은 게 이상하지. 안 그래도 몸이 귀한 전시 상황에 칼로 푹푹 제 다리를 쑤셨으니.

그러나 운표선은 은근한 이청우의 원망 어린 시선에 굴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제가 찌른 자가 담당하는 성으로 따라온 사내는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 뒹굴거리며 저리 여독을 풀고 있었다.

저것이 배짱인지 아니면 허수인지, 서문윤은 이제는 사실 잘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방 문 사이로 보이는, 침대에 늘어진 발을 보며 서문윤이 잠시 생각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도. 저 순간에도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장안사준. 그 이름이 서문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가 저 신비롭고도 무서운 사내에 대한 고찰에 빠져 있을 무렵이었다.

“내일이면 네가 나서지 않아도 개처럼 구를 테니까, 알아서 네 몸 관리하라고.”

상념을 깨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아.” 소리를 흘리곤 몸을 돌려 문가에 기대선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끼익.

그리고 그는 사내의 복잡한 빛이 띤 얼굴과 마주하고 멈칫거렸다.

“…오늘은 나도 어떻게 일을 수습해야 할지 머리를 좀 굴려봐야겠다.”

묵직하게 흘러나온 말. 검설린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치 아픈 듯 좁혀진 미간을 누르며 검설린이 기대선 몸을 바로 일으켰다.

어딘가 스산해 보이는 그 얼굴에 서문윤은 더 이상 진료를 하자 말을 옮길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침실로 향하는 검설린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바라볼 뿐이었다.

* * *

검설린의 말을 따라 그들은 하룻밤 편히 잠을 자 피로를 풀었다. 서문윤 또한 그간의 가혹한 일정, 건전성에서의 환자 대란에 시달렸던 차였다. 직접 손을 쓰는 검설린보다는 업무의 과중이 크지는 않다만, 그도 하루에 두 시진도 못 자고 생활한 지 꽤 되었다.

오랜만에 단잠을 자니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검설린이 처소 밖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도 저러신 것 같은데.’

설마 밤을 새운 것은 아니겠지?

잠시간 의심했던 서문윤이 빠르게 고갯짓을 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저에게는 몸 편히 푹 쉬어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라 해놓고선, 혼자 앓는다면 그게 미련한 행위지.

의형은 그리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늦잠을 잤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서문윤은 소세를 하고 나왔다. 다행히도 장한성은 강 인근에 자리했는지라 물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겨 천으로 질끈 묶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검설린의 앞에 섰다.

“저는 각오가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저는 목숨을 하늘에 맡길 것입니다!”

준비를 끝낸 서문윤이 눈을 반짝일 때였다.

“장한성주한테 좀 가자.”

“어, 예?”

서문윤의 예상과 다르게 검설린이 향한 곳은 환자촌이 아닌 치소였다.

그리고.

“네가 앞뒤 신경 쓰지 않고 다 같이 죽자는 심보로 납치해 온 그 불쌍한 의원들은 어디에 있느냐?”

“의형!”

병사의 안내를 받아 청사에 도착하자 검설린이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방 안의 장수들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를 깨달은 서문윤이 검설린의 옷깃을 황급히 잡아당겼다.

“그, 그렇게까지 말을 하지 않으셔도.”

“설린이 한 말에 틀린 구절이 있어?”

어느새 그들 옆에 찰떡같이 달라붙은 운표선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이 상황에 나서기는 무얼 나서?

서문윤의 매서운 시선에도 그는 뻔뻔하게 부채를 살랑거릴 뿐이었다.

“이 자식이 혀를 어디서 놀려?”

“감히 백민(白民) 주제에 성주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아니나 다를까 충격에서 벗어난 무장들이 쾅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한성주는 수성을 포기하지 않는 훌륭한 그들의 수장. 그 주위에 있던 무장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되었다! 북성이시네! 역병을 고치려 목숨을 아끼시지 않는 분. 그만두어.”

그러나 이청우의 말에 그들은 검을 뽑으려던 손을 순순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한성주의 명은 군명이기에 따라야만 했으니.

그러나 명령이 화가 난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법. 그들의 얼굴에 서린 분노는 더욱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군. 누구 때문에 천하의 이름 높은 명의가 이곳에 왔는데.”

운표선의 이죽거리는 말이 험악해진 분위기에 또 기여를 했고, 긴장이 팽팽한 공기에 서문윤은 당황하여 검설린의 안색을 살폈다.

의형의 성격이 폭급한 데다가 지금 상황이 아무래도 짜증날 수밖에 없는지라. 그로서는 의형의 혓바닥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운표선에 이어 그까지 까칠하면 꽤나 상황이 곤란해질 것 같으니.

그러나 뜻밖에도 검설린은 이청우가 아닌 제 옆에서 여유롭게 입을 놀리는 운표선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너는 내가 미리 말을 하는데,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때마침 우리 사이의 우정에 대해서 큰 회의감이 솟으려 하거든.”

그 말에 스멀거리는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운표선이 끙 소리를 내며 접선을 접었다.

“매정한 놈.”

그리 말을 하며 운표선은 제 입술 위에 접선을 올려놓았다. 검설린의 말을 따른다는 의미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검설린이 이청우를 바라보았다. 수북이 쌓인 종이와 책상에 펼쳐진 지도. 그리고 벽면에 또한 특정 지역을 세분화하여 묘사한 지도가 걸려 있었다.

이청우는 잠을 자지 못한 듯 퀭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의 바짓자락을 질질 잡아 끌어놓고 바쁘다며 얼굴조차 내보이지 않더니만, 바쁘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인군.”

“으, 으음.”

“하지만 조금 너무하지 않아? 사람만 불러다가 문제 되는 곳에 던져놓으면 만사 해결, 이런 생각을 한 거냐? 세상 쉽게 사는구나.”

“그게 아닙니다.”

손에 든 붓을 황급하게 내던지며 이청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조정에서 또 걸고넘어지는 일이 있어서….”

“뭔데.”

“저보고 양곡을 빼돌렸답니다, 하하. 아무래도 사정이 달라지다 보니… 양곡을 더 달라고 하였는데, 그게 또 눈에 거슬리나 봅니다.”

그 순간 검설린이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미묘한 기색은 아주 잠깐 흘러나온 것으로, 검설린은 빠르게 얼굴을 정돈하고 말을 내뱉었다.

“의원.”

납치한 의원을 내놓으란 말이었다. 이청우가 머뭇거린 순간이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 보니 병 걸린 놈들이 몇몇 있나 보지?”

눈치 빠른 검설린이 그를 모를 리가 없다. 이청우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저는 벼락을 맞아 죽을 겁니다.”

“그런 호상을 바란다니 아직 반성은 멀었구나.”

서문윤은 의형의 독한 말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해를 입은 자가 생겼구나.’

마음이 갑작스럽게 무거워졌다. 굳은 얼굴을 한 청년의 귓가로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옥에 갇힌 의원은 대체 왜 납치한 거지?”

“큰 뜻은 아니었습니다. 서역과의 밀수 혐의로 투옥될 만한 자라면 아마도 서방 의술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헛다리짚었군.”

“예, 뭐.”

목을 주무르며 쓴웃음을 짓는 이청우는, 납치한 의원의 일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제 잘못을 면피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서문윤의 눈에는 그것이 썩 무책임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놈은 어찌 되었다고?”

이청우는 그 말에 또한 침묵했다.

감옥에 갇힌 의원은 의형이 그토록 찾던 백년화를 지닌 자다.

‘의형.’

말을 들은 순간 차갑게 굳어진 검설린의 얼굴에, 서문윤이 걱정을 삼키며 흘긋 그를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그 끝에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장한성주.”

그것은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대는 명심해야 할 것이오.”

사내의 얼굴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를 마주한 이청우의 몸은 겁박을 받은 것마냥 움츠러들었다.

“그대가 지키려고 하는 게 정녕 이 나라와 민초인지. 아니면 신념이란 탈을 쓴 아집인지.”

그리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얼굴에는 냉엄한 기색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엄한 말을 들은 사내는 잠시간 침묵 끝에 문득 조소를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제게 두 가지는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서문윤의 얼굴마저 굳게 만든 말이었다.

“장한성주의 일이 제 업이고 그것은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지옥에 떨어져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청우는 탄식하듯 말을 되뇌었다.

“지옥에 떨어져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에 괴로움이 희미하게 스쳤다.

그리고 그 때였다. 검설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와그작 일그러진 것은.

냉막했던 얼굴에 흉흉한 기세가 흘렀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듯 검설린은 벼락같은 노성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옥에는 당연히 떨어지는 것이고, 저들은 무슨 죄로 저리 고통받아야 하는 거냐!”

주위 사람들이 막을 틈도 없이 손은 빠르게 사내의 팔뚝을 잡아당기고 배를 때렸다.

“병신 새끼!”

“커흑!”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로 몸을 새우처럼 굽히며 고꾸라지는 이청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이청우는 바로 바닥에 구역질을 하며 쓰러졌다.

“오, 제대로 들어갔는데?”

“선표 공자.”

이죽거리는 운표선에 서문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흐흠, 하고 운표선이 접선을 손바닥에 툭툭 치며 빤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어디 있소!”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청사에 분노에 찬 장군들의 비명이 울리는 때, 소란의 한가운데에 이청우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달래지 않을 거야. 의형을 비난하지도 않아.”

네 발로 엎어져 기침을 하는 이청우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끈적한 타액이 줄줄 흐르는 입술을 슥 닦으며, 이청우가 혼미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떠난 자리였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이청우는 쉬어빠진 목소리로 북성을 해하지 말 것을 소청했고, 더불어 검설린의 요청대로 의원을 빠르게 불러들이라 말했다.

장수들은 이를 아득바득 갈며 자리를 떴다. 검설린마저 그를 말리는 서문윤에 의해 밖으로 나간 자리에 적막이 감돌았다.

혼란했던 상황은 수습이 되었다기보다는 차라리 폭풍이 휘몰아치고 남은 황무지와 같았다.

“가라고 했잖아.”

쉬디쉰 목소리로 내뱉고 이청우는 또다시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배에 꽂힌 주먹이 꽤나 타격이 세게 들어갔는지 그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실망했나?”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며 하는 말이었다. 서문윤을 바라보는 눈이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안 할 리가.”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칼처럼 단호했다. 서문윤이 차가운 눈빛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말을 물리지. 내가 너무 안일했어. 의형의 말이 옳았구나.”

그 눈빛은 차가운 분노를 억누른 것이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서문윤이 부득 이를 갈며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

그 말에 이청우는 기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잠시 내뱉었다. 그 끝에 그는 쓰라린, 그러니까 보는 사람의 입안을 저절로 떫게 만드는 쓰디쓴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뒷말 대신 흘러나온 것은 걸쭉한 웃음이었다.

“크흐흐.”

서문윤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청우를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그리 말하고 그는 벽을 더듬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나는,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회한이 짙게 묻어 나오는 말. 그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순간 불운한 의원이 겪은 참상은 둘째 치고 연민에 휩싸이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그는 누가 보아도 동정할 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건만 저 사내의 그을린 얼굴이 어찌 저리 처연해 보이는가.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어. 후회를 하기에도 나는 너무 늦었으니까.”

장한성주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지. 나는 전쟁을 준비해야 하니까… 안으로든… 밖으로든….”

그러나 서문윤은 그를 탓하거나 비난하지 못했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아갈 길은 멀구나(日暮途遠).”

너털거리며 사라져가는 이청우의 등을 서문윤은 말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 * *

정신이 하나도 없다.

‘대체 나는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

이청우가 빠져나간 자리. 한참 동안 멍하니 문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몸을 움직였다. 충격이 꽤나 큰 모양인지 그는 비틀거리면서 청사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저 황궁 무관이었는데. 나라를 지키고 영웅이 되는 꿈은 꾸었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고 싶지는 않았어.’

“하아.”

길게 한숨을 내뱉던 서문윤의 곁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옆을 돌아본 서문윤이 관청의 문기둥에 몸을 기댄 사내를 발견하고 몸을 흠칫했다.

“의형.”

팔짱을 풀며 검설린이 작게 말을 내뱉었다.

“가지.”

“이렇게 빨리 의원들이 모입니까?”

“그냥 운표선을 보냈어.”

그 말에 서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스스로의 가장 유능한 심복이라 주장할 만큼 제 능력에 자부심이 있는 자니, 알아서 사람을 모았겠지. 먼저 앞장서는 검설린의 반보 뒤를 서문윤이 따랐다.

“나 혼자 일을 처리하기 힘들어. 일단 그들을 찾아가서 대충 몇 가지를 이를 거다.”

“그들은 억지로 납치당해서 온 겁니다.”

덤덤하게 말을 내뱉는 검설린을 향해 서문윤이 작게 말했다.

“구류된 사람을 풀어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장한성주는 의형의 말은 들어줄 겁니다.”

이청우의 절규가 씁쓸하고 또 장한성의 주민들이 불쌍하긴 하여도 의원의 일은 다르다. 저야 스스로의 각오로 장한성에 온 것이다만, 그들은 다르다. 이 험지에 타의로 끌려와선 죽을 길만 바라볼 필요가 있는가.

서문윤이 연민을 키워나갈 때였다.

“서문윤.”

검설린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들은 여기서 죽거나 혹은 살아야 한다.”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말은 차분한 어조로 이어졌다.

“그건 당연한 일.”

“…그렇습니까.”

“여기서.”

검설린은 힘을 주어 오른발을 쾅! 구르며 말을 되뇌었다.

“장한성에서.”

강조된 말이 의지를 드러냈다.

“그들은 빠져나가지 못해. 나는 그들을 납치한 이청우를 비난했지만, 한번 환자들과 접촉한 자를 밖으로 풀어놓지 못한다.”

서문윤은 얼굴을 슬쩍 숙였다. 그에게 동요를 내보여주기 싫었다. 사실 서문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전염병이 도는 지역에 출입한 이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럼에도 마음에 불쑥 솟는 연민을 검설린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그건, 너무 바보 같잖아.

작게 중얼거리는 서문윤의 귓가로 냉랭한 말이 흘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너와 나는 여기서 죽거나 아니면 살 거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죽음이라.

서문윤은 그 순간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후회하고 있어?”

“아니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전혀 두렵지 않은 얼굴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어조는 몹시나 덤덤하였고.

그러나 그 말에 검설린은 “말과 얼굴이 다르구나.” 핀잔을 내뱉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 또한 오랜 시간 서문윤과 함께해왔다.

그는 평온한 얼굴을 한 저 청년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서문윤은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의지를 바로 세울 뿐이었다.

저 모습이 제일 싫다.

검설린은 그 고지식함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슬쩍 숙였다. 가끔 서문윤을 볼 때가 몹시 괴로울 때가 있었다.

하려던 말은 따로 있지.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암거래 때문이다.”

상황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서문윤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양곡을 암거래한 일 때문일 거다. 이청우가 뒤집어썼다는 비리 혐의. 난리 났던 사건.”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정이 달라졌다고 했지.”

“…….”

“그때는 암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너도 기억하겠지. 북쪽에서 난리가 있었던 때를. 장한성 말고도 국경 근처가 다 난리라, 본진에서 양곡을 보낼 수가 없었어. 양곡이 있는데도 뻐기는 오늘과 다르게 그때는 양쪽 다 난리였으니까.”

덤덤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암거래 시장이 무너지고 부족한 물량을 채울 수단이 없으니 나머지 양마저 조정에 요구한 거다. 이전 성주가 필요로 했던 양곡보다 턱없이 많은 수를 요구하니, 조정에서 의심하고 있을 게다.”

그리고 그 때 서문윤이 되물었다.

“의형께선 그간 제게 많은 말을 숨기셨습니다.”

말을 내뱉던 검설린이 몸을 멈칫했다. 서문윤은 차분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분명히 많은 것을 듣고 싶어 함을 알면서도 의형께서는 외면하셨습니다. 헌데 지금 제게 이리 자세히 일을 설명하시는 연유가 무업니까?”

그는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 저를 하수인 취급하듯, 운표선의 말마따나 배려하지 않았던 검설린이다.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묻지도 않은 일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물음에, 검설린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네가 궁금하다며.”

서문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엔 부족한 말이었다. 입술을 열려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검설린의 말에 조개처럼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내게 다시 의형이라 부르는구나.”

그 말은 서문윤을 동요케 하기 충분했다.

서문윤이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을 읽기 어려웠던 얼굴이 어느 순간 한숨과 함께 허물어졌다.

“그러지 마라.”

그리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눈을 감았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듯 내뱉은 그 말은 서문윤의 마음을 할퀴기에는 충분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검설린은 감았던 눈을 떴다. 감정을 드러냈던 얼굴에 또다시 냉막함이 서렸다. 서문윤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이어진 말을 묵묵히 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심장의 고통.

서문윤이 흔들리는 마음을 어느 정도 수습할 때였다. 검설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비리와 밀수는 둘 다 대역죄지.”

그것은 국법이었다.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꼬인 상황이군요.”

“의원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서문윤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검설린 또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는 고요함이 자리한 청년의 얼굴과 마주하고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경험상 서문윤이 저런 표정을 지었을 때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다.

“의형.”

검설린이 가장 그를 대하기 힘들어할 때였다.

서문윤은 아니나 다를까 검설린을 몰아붙이는 말을 내뱉었다.

“의형은 제게 의원의 일은 수성이 아니라 반복해서 말씀하시지만, 제 귀에는 그 말이 스스로에게 내뱉는 다짐 같습니다.”

침착한 목소리로 내뱉는 것에 검설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는 거의 말을 잃은 상태였으므로.

서문윤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러니까 검설린이 가장 싫어하는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신경이 쓰이십니까?”

검설린은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시끄러워.”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저를 향해 대답을 종용하는 듯한, 빤히 쳐다보는 눈을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들어가자.”

어느새 당도한 의당을 밟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 * *

의당에는 의원 수십 명이 바글거리며 자리하고 있었다.

‘어수선하군.’

상황을 둘러보던 서문윤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납치당한 이의 행색이 좋을 리는 없다지만, 물자 보급이 여의치 않은 곳이라더니. 다들 몰골이 추레하다.

움푹 파인 볼이 고난을 증명케 했다.

북성의 행색은 독특하다. 온몸을 둘러싼 새하얀 의복에 등 뒤에 맨 커다란 나무함, 얼굴의 반을 가린 복면.

등장과 동시에 시선을 부여잡을 만했다. 그리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들 중 하나가 더듬대며 말을 내뱉었다.

“북, 북성, 진정 북성이 맞습니까? 저는, 저는.”

미리 상황을 정리하고 있겠다며. 그리 말을 하는 듯한 매서운 눈으로 검설린이 구석에 자리한 운표선을 노려보았다. 추궁하는 시선에 운표선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말해줬어. 그저 혼란을 다잡지 못한 것일 뿐이지.”

그는 잘 보이지도 않는 방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벽에 몸을 기댄 모습이 상황을 관조하는 듯했다.

‘따라와서 고난의 길을 걷겠다며. 그래서 제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서문윤은 그게 못내 얄미웠으나 대거리할 겨를이 없어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당신이 여기까지 와서 진료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정말로 북성이십니까?”

더듬더듬 나온 넋 나간 자의 말. 검설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았다.

“잔말을 할 시간이 없다. 너희들도 의원이니 상황을 잘 알겠지. 일촉즉발의 상황이니.”

서문윤은 의형의 성격을 알았다. 각진 성격의 사내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몰랐으며, 또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니다.

“성주에게 전해 듣긴 했지만 의원의 눈으로 본 것은 또 다르겠지. 그간 겪었던….”

“나, 나는 납치당했소. 이곳에 온 것은 내 의지가 아니야.”

그리고 이들 또한 닥치고 말을 들을 상황은 아니었다.

“나가고 싶습니다. 저를 내보내주십시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하나하나 말이 나왔다. 서문윤의 얼굴이 새파래진 순간이었다.

‘아, 이들은.’

의원의 의무는 환자를 돌보는 것. 그러나 목숨까지 던져서 그들을 구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강제로 끌려와 목숨을 바치게 된 상황을 누가 납득할까. 아무리 헌신적인 의원이라 할지라도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저는 나가고 싶습니다. 부모께서….”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장한성주 그 개자식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북성은 아니다.

운표선의 얼굴에 조소가 스친 순간이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이들은 순수한 희생자일 뿐이다. 웅성거림 사이에서 서문윤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그가 숨을 삼킬 때 검설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가지 못해. 우리는.”

그것은 방 안의 소란을 잠재우는 말이었다. 정적이 감돌았으나 서문윤은 그 속에 서린 불만과 원한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왜 우리가 죽어야 해. 그런 눈으로 그들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설린이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당신의 명성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요. 당신이 활약하고 다닌 6년간 역병이 고칠 수 없는 천역이라는 관념도 서서히 변했고.”

정적을 깨고 누군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을 내뱉은 이는 마흔의 중년인이었다.

“의원은 사람을 살리는 직업. 염제 신농씨 이후로 잊었던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어. 당신께 감사한 마음이 크오. 무인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당신이 병을 이겨낼 때 나는 내가 의원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움을 느꼈다오.”

그것은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검설린과 눈을 마주하며 뒤이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개죽음을 당하긴 싫어.”

서문윤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말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누구를 살리기 위해 너의 목숨을 바쳐라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가망이 없는 일에 힘을 쓰라 할 수 있을까? 서문윤은 그 말을 속으로 떠올리며 침중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살 수 있소? 신의는 불치의 병을 고치셨다지. 그렇다면 이 독한 병 또한 이길 수 있겠소?”

중년인의 말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어조였다. 두 눈에 서린 이글거리는 불꽃. 사내는 정중하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 말에 담긴 의미는 확고했다.

“우리 중에 감염된 자가 네 명이요. 그 전에 확신을 받고 싶네.”

그러나 그 강렬한 의지가 담긴 말에 대한 검설린의 답변은 간단했다.

“노력하겠다.”

“그런 말로는 납득할 수 없어. 우리는…!”

“나는 노력하겠다고 했어.”

방 안에 울려 퍼진 엄정한 말. 중년인의 입술이 부리 닫듯 딱 다물렸다.

어느새 검설린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합쳐도 내 지난 8년에 미치지 못할 거다. 이런 내가 노력을 한다 했어. 이 외에 또 무슨 답이 필요하지?”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하며 방 안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서문윤은 그의 눈에 스친 복잡한 기색을 볼 수 있었다.

작은 한숨이 흘렀다. 작은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그리고 이제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나.”

뒤이어 자조의 말이 흘렀다.

“그대들에게 미안하네. 장한성주는 개자식이다.”

복면 위 얼굴에는 어느새 씁쓸함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잖아.”

잠시간 정적이 있었다. 서문윤은 순식간에 가라앉은 공기에 한숨을 삼키고야 말았다.

‘왜 그리도 독한 짓을.’

이청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청년은 끝끝내 무거운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입술을 깨물고야 말았다.

폭발하여 말을 쏟아내던 이들의 얼굴에 체념이 서렸다.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전염병이 창궐한 곳에 왔으니 이제 사태가 정리되기 전까지는 빠져나가지 못할 테다. 그들은 이곳에 남는 수밖에 없었다. 장한성주의 외압이든, 아니든.

중년인이 기나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이제 와서 무얼 어찌하랴. 북성은 어쨌거나 의원이다, 저를 가둔 장한성주가 아니라. 원망의 말을 퍼부을 때도 아닐뿐더러.

상황을 파악한 중년인의 얼굴에 포기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겠지요.”

쓴웃음을 흘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원하시는 게 상황 설명입니까? 저는 협조토록 하겠습니다.”

“…환자의 증세, 사망에 이르기까지 특이점, 지금 대처상황, 그 외 관련된 모든 것들.”

체념한 사내의 얼굴에 그늘이 서려 있었다. 씁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답했다.

“의원의 눈으로 보고 싶구나. 부탁하겠다.”

그간에 있었던 설움이 몰려와 한탄을 쏟아부었던 의원은, 현실을 직시하고 빠르게 그의 말을 수용했다. 그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는 일임을 깨달았으므로.

“병사의 1할, 병사가 아닌 성민의 반에게 전염됐습니다. 병 자체가 퍼지는 속도는 홍역이나 천연두보다 느리다지만, 장한성이 폐쇄적인 곳이다 보니 병세를 꺾을 수 없습니다.”

“잠복기는 짧으면 세 시진, 길면 일주일이 넘습니다. 상체를 중심으로 습진이 일어나고, 온몸에서 물이 빠져나갑니다. 고열로 죽는 사람도 꽤 되는데, 문제는 혼수상태에 이르기까지 의원이 손쓸 틈이 보이지 않다는 겁니다. 가장 심각한 건 병의 증세입니다. 호전세를 보이는 환자가 없습니다. 이 병이 치료가 가능하긴 한 건지 의문입니다.”

“저는 이곳에 초창기부터 있었던 의원입니다. 지금까지 3할 이상이 죽었습니다.”

말을 잠자코 듣던 검설린이 그 순간 중얼거렸다.

“3할?”

이채가 서린 얼굴로 하는 말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군.”

그 말을 들은 서문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3할이라.

‘홍역이 1할이었나.’

생각에 빠진 서문윤의 귓가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거다. 호전세를 보이는 환자가 없다면 3할이 5할로도 올라갈 수 있고.”

“저, 저희는 어찌합니까.”

“버텨야지.”

짤막한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목함을 열었다. 서문윤의 몸이 움찔거린 순간이었다.

‘아, 저건.’

운표선이 장한성으로 들고 올 때 말안장에 묶은 주머니가 있었다. 특히나 두툼한 주머니에 의아함을 느꼈던 서문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유리관, 유연한 대롱, 그리고 날카로운 바늘.

‘저게 뭐야?’ 라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의원들 앞에서 검설린은 그것을 조립하며 말을 내뱉었다.

“말려도 소용없어. 난 네게 입 닥치라고 할 거니까.”

운표선을 노려보며 하는 말이었다. 마른 인상의 사내가 진절머리를 치며 입을 열었다.

“네네, 예예.”

언뜻 듣기에는 비꼬는 듯한 말이었으나 서문윤은 그의 얼굴에 서린 복잡한 감정을 얼핏 엿볼 수 있었다. 명성에 걸맞은 오만한 어투로 말을 하던 사내는, 꽤나 착잡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 말릴 테니, 네 할 일이나 하쇼.”

그리 말을 내뱉곤 운표선은 입술을 다문 채 벽에 몸을 기댔다. 사내는 내뱉은 말대로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북성은 그것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환자들의 기를 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탈수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음용에 한계가 있는 이유도. 그들은 현장에 있던 의원이라 검설린은 짤막한 설명으로 말을 넘기고 물건을 쓰는 방법을 알렸다.

검설린은 바늘과 그에 이어진 대롱으로 직접 시범을 보였다. 유리관에 물을 넣는 법, 동그란 바퀴를 돌려 물을 내리는 법, 사람의 살을 대신하여 수건에 바늘을 꽂는 법까지 시연하고 검설린은 주의할 점을 알렸다.

그리고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서문윤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미간을 좁히고야 말았다.

‘저건….’

그가 깨달은 것은 그동안 검설린이 그 물건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과거 과로에 시달리는 검설린에 의원 몇몇이 도와주겠다며 물건을 다루는 지식을 나누어 달라 하였으나 그는 단칼에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분명히 아니 된다 말하였는데.’

그때의 상황도 다급하긴 다름없었다. 지금보단 물론 나았지만, 어쨌든 죽어가는 사람이 무수히 많았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는 전장이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지금 상세히 물건을 다루는 방법을 알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수액을 넣을 투수기(投水器).”

사용법을 알린 검설린이 뒤이어 덤덤한 목소리로 환자에게 수액을 놓는 법을 알렸다.

“다들 상태로 보아서 팔뚝에 줄 힘이 없을 거다. 팔뚝을 단단히 끈으로 묶어야 하겠지. 푸른 혈관을 찾으면….”

의원들의 얼굴은 마치 부모의 말을 듣는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들어 묻는 이들이 있었다.

“안에 들어간 액체는 무엇입니까?”

“정수에 소금 타서 이것저것 섞은 거.”

답변에 경악으로 방 안이 일렁거렸다.

“그게 뭡니까?”

“더 상태 나빠지는 거 아냐?”

“물을 왜 몸에 넣습니까?”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서문윤의 얼굴에서도 동요가 스쳤다.

소금물?

‘그런 걸 몸에 넣어도 되는 거야?’

그러나 검설린은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오직 다른 일을 설명하기에도 바쁘다는 듯, 사내는 그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며 운표선을 가리켰다.

“이건 저자가 담당할 거다.”

웅성거림이 있었으나 분위기는 곧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신선에게 의술을 전달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역병을 고치셨다니 따를 수밖에.”

그의 명성은 의원들이 상식을 벗어난 말을 받아들일 만큼 높았다. 의뭉스러운 얼굴은 여전했으나 소란은 차차 잦아들어 다시 차분한 공기가 감돌았다.

검설린은 재차 입을 열어 빠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투수기의 숫자가 부족하면 음용보다는 항문에 관을 꽂아 수액을 삽입해. 정 안 될 것 같으면 소금과 꿀, 쌀가루를 정수랑 섞여 한 수저씩 마시게 하도록. 그리고 옷차림은 고쳐라. 반드시 하루에 한 번 옷을 갈고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다니는 게 좋다. 의원이 아니더라도 성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면을 반드시 쓸 것을 주지시키고. 일단 위생부터 바로잡지.”

< 4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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