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장안사준(長安四俊)(5) (12/31)

11. 장안사준(長安四俊)(5)

“해명하세요.”

“그래, 해명해. 왜 내 이름을 사칭했느냐? 겁 없는 어린 청년아, 장안사준의 이름을 사칭하였다면 후환도 각오를 한 게지?”

울컥한 서문윤이 붕대를 감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당신을 말하는 겁니다! 대체 무슨 꿍꿍이속입니까? 당신을 제일 못 믿겠어!”

쾅!

상처가 난 손이 바닥을 찍었다. 고통이 팔을 타고 흘렀다. 서문윤이 작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행동하고야 만 것이다. 그 순간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렀다.

“둘 다 입 닥쳐라, 미친놈들아!”

서문윤이 조개 닫듯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원망이 슬쩍 서린 눈으로 의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어찌 이성을 차릴 수 있을까?

배신에 배신.

‘확실하다. 황 숙부는 지금 다른 속내가 있어.’

매복을 하였다던 군관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서문윤이 안배해놓은 낭인 무리는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가면 사내를 추포하여 꼬리를 밟겠다던 운표선은 살기가 등등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도대체 무슨 속내인데!’

답답함에 서문윤이 억누른 숨을 내뱉었다.

그들은 환자가 된 채 의당 한켠 처소에 몸을 뉘고 있었다. 검설린이 빈 방에 요를 깔아 세 사람을 뉘고 상처를 돌본 후였다.

“적에게 칼을 들이댔으면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지, 치료는 무슨 치료냐!”

격분하여 소리친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검설린은 흉흉한 기색으로 걸레짝이 된 두 사내를 어깨에 짊어진 채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지금 검설린은 팔짱을 끼고 문에 몸을 삐딱하게 기댄 채 그들을 불량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이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몸을 눕히고 있었으며, 운표선이 가운데에서 태평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검설린은 그의 옆에 있는 운표선을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살기의 여파만으로 몸이 쭈뼛거리고 소름이 돋았다. 운표선은 슬쩍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가면 사내는 가장 안쪽에 위치에 있었다. 도주가 가장 힘든 곳.

그는 분명히 깨어났음에도 침을 삼키며 눈을 감은 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청년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참담한 심정.

어느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는 거북이 가면이 존재하지 않았다.

‘…젊잖아?’

서문윤은 가면을 벗긴 순간 드러난 그의 얼굴에 놀라움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아니, 젊은 정도가 아니라 그는 제 나이 또래인 듯한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을린 얼굴은 서문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순한 인상이었다. 이런 일에 휩쓸렸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젊은 사내.

사내는 꽤나 호감상의 젊은 청년이었다.

6척이 조금 넘는, 서문윤보다 반 뼘 정도 큰 키에 그보다 더 단단한 체격. 차돌 같은 근육은 그러나 날렵한 선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여러모로 의외인 정체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어디서 봤는데?’

그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서문윤이 그림자가 드리워진 심란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중요한 문제였다.

서문윤은 명문세가의 사람인지라 교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관료의 자제였다. 제 나이 또래인 사내, 거기다 낯이 익다라.

머릿속에 운무가 어스름하게 낀 듯했다. 서문윤이 끙끙댈 즈음이었다.

살벌한 눈으로 운표선을 노려보던 검설린이 입술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얌전히 입 닥치고 있어.”

“뭐, 내가 뭐 어쨌….”

“내 손으로 너를 해치고 싶지 않다.”

“…….”

고저 없는 목소리에 운표선이 부리를 닫듯 입술을 딱 닫았다. 검설린은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운표선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정말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무지를 고백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운표선이 짤막한 한숨을 흘렸다.

묘한 긴장이 조성된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태연했던 운표선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검설린은 여전히 굽힘 없는 냉랭한 얼굴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패를 가진 이는 분명 운표선이건만, 상황을 더 잘 아는 이는 저임이 뻔하건만,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보기에는 운표선이 약자고 수세에 몰린 것만 같다.

서문윤은 눈을 깜빡거리며 의형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중 어느 순간 헉 소리를 흘렸다.

“아! 설마!”

서로에게만 집중하던 두 사내가 고개를 돌려 의아한 얼굴로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싹 가셔 새하얗게 변모한 후였다.

서문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석에 몸을 웅크린, 검거된 사칭범을 향해 소리쳤다.

“이씨세가! 이청우!”

검설린의 두 눈이 크게 뜨여진 순간이었다. 그는 팔짱을 풀고 자세를 바로하곤 말을 내뱉었다.

“이씨세가? 삼재상가(三宰相家) 이가(李家)를 말하는 거냐?”

삼재상가.

그것은 세 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를 의미했다. 서문세가가 고위 무관을 많이 배출하는 가문으로 유명하다면, 이씨세가는 고위 문관을 많이 배출하는 가문으로 유명했다. 그것도 서문세가보다 훨씬 더 높은 관직에 오른 인재들을 배출하는 가문.

그 가문은 황가 바로 아래를 점한, 아니 어떻게 보면 그들보다 훨씬 뿌리가 깊은 운씨세가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서문세가를 비롯한 그저 그런 명문세가와는 확연한 격차를 보이는 명문 중 명문이었다. 당대의 재상은 고씨지만 아직도 조정에는 이씨 출신 고위 관료가 많았다.

운표선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제 옆에 자리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숨이 흘렀다.

뺨을 찌르는 시선에도 모른 척 침묵하던 가면 사내가 거칠고 깊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어둠이 자리한 깊은 눈이 천장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띤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둑한 사내의 얼굴을 서문윤이 경악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청우! 그가 맞습니다. 이씨세가의 삼남. 저와 같이 4년 전에 과거에 급제한 동기입니다. 이럴 수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리며 서문윤이 넋을 놓고 이청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와 같이 무과에 급제한 무관입니다. 군적에 이름을 올린 무관.”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순간이었다. 그는 운표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살벌한 목소리를 흘렸다.

“설명해라!”

운표선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물들인 것은 강렬한 수치였다. 진한 감정이 너울 치는 새하얀 얼굴.

으득.

그를 노려보던 검설린이 문득 정색했다. 두 눈에 불타올랐던 분노는 싹 사라져 있었다. 그는 희디흰 미소를 지으며 이내 허공을 찌르는 고소를 흘렸다.

그는 곧 벽을 콰앙! 주먹 쥔 손으로 내리치며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정녕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구나! 업이 나를 묶고 공은 파헤쳐지고 의지마저 꺾인 채 젖은 진흙마냥 길을 걸었노라. 선인의 옛말이 나를 배신하고, 하늘은 나를 끊어버렸건만 사람의 마음 하나를 믿고 나아갔다.”

운표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얼어붙어 광소를 흘리는 의형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쓰라린 미소를 지으며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오랜 벗마저 나를 속이는구나.”

검설린은 차라리 한에 치민 사람과도 같았다. 상처를 입은 사람마냥, 그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운표선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운표선이 눈에 불을 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널 배신하지 않았어!”

격분하여 하는 말.

검설린은 암울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운표선을 노려볼 뿐이었다.

“너를 배신하지 않았어! 나를 그놈들과 비교하지 마라!”

그는 진실로 그 말에 억울해하는 듯했다. 몸을 덮었던 이불을 걷어차며 운표선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를 흘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놈은 나를 그리 말해서는 안 되지, 다른 이는 나를 비난해도 너는 나를….”

“나는 네 아랫사람이 아니다.”

운표선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검설린은 차디찬 조소를 흘리며 열화 어린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네가 일방적으로 주는 은(恩)과 배려가 나는 달갑지 않다. 나는 너와 장사를 하는 게 아니야. 마음을 통하지도 않고 네 멋대로 나를 위한 일이 전혀 달갑지 않다.”

서문윤이 침을 삼킨 순간이었다.

“여기서 신뢰가 어딨지?”

싸늘한 목소리였다.

“나는 너의 무수히 많은 식객 중에 한 사람이 될 생각이 없어. 네가 내어준 술과 고기에 목숨을 버리는 그런 인간이 될 생각 없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표선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자세 그대로 몸을 웅크리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웅크려진 몸이 그답지 않게 초라해 보였다.

서문윤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리 보니 그의 체구를 실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운표선은 서문윤보다 신장도 체구도 작았으나 그의 기세가 그를 거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자세 그대로, 운표선은 웃으면서 말을 내뱉었다.

“이청우에게 물어봐라.”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장한성주에게 물어봐라. 그가 알려줄 수 있을 터이니.”

장한성주가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청우가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장한성주임을 알고도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그는 마치 귀신처럼 눈을 부릅뜨며 운표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내가 운표선의 옷자락을 잡아채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놀란 서문윤이 이청우의 팔을 부여잡았다. 검설린의 얼굴이 구겨진 순간이었다.

이청우는 운표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며 울었다.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대만이 장한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운표선이 참담함을 삼킨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영문을 모르겠다. 서문윤이 넋을 잃으며 운표선의 발치에 엉겨 붙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을린 피부, 건장한 체격의 무관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흘릴 뿐이었다.

이어진 이청우의 말에 서문윤은 경악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파나립의 유산을 내게 주시오, 제발!”

운표선의 눈이 번쩍 뜨인 순간이었다.

* * *

“자네가 나와 같은 장원이지?”

“아.”

“반갑네, 반가워. 하하! 이름을 듣고 바로 서문린 장군의 아들임을 알았지.”

서글서글하게 웃는 청년이었다. 그 당시에는 백옥같이 살결이 흰, 고귀한 혈통이 드러나는 우아한 외모의 사내. 그는 씨익 이가 드러나게 웃으며 제게 악수를 청했다. 제법 붙임성이 좋은 사내인 듯 그는 서문윤과 만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조잘대었다.

“궁내로 배정을 받았다지? 나는 아마 변방을 돌 거야.”

“자네는 합하의 자제가 아닌가?”

하물며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저가 궁내로 배정을 받았는데 태부의 자제가 험한 변방이라니?

그의 아버지는 천자의 스승이었다.

당황하는 서문윤의 앞에서 이청우는 호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자원했네!”

이어지는 말에 서문윤은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무관이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 정녕 무관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의 힘으로 날 변방에 보내겠다고 협박하시면서! 하하! 기왕 변방에 갈 거라면 내가 선택하는 길이 낫겠다 싶어 자원했지!”

그곳은 아직까지 교전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당황한 서문윤이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친자식을 장한성에?”

지금 생각해보면 무관답지 못한 말이었으며, 동시에 오만한 말이었다. 특권에 젖은 이가 할 수 있는 말. 그러나 서문윤의 말에 이청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고 관료가 있지 않은가. 나는 가서 증명하고 싶어. 사람들의 말처럼 내가 철없는 귀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다시 만난다면 진정한 무관 이청우로 만나지.”

그리 말하며 이청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 당당한 사내의 모습에 서문윤은 어쩐지 무언가 가슴이 울렁거려 그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청우와의 짧은 만남.

단 일각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다.

그리고 다시 재회한 그는 일전에 보았던 모습이 아닌,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사영귀께서 파나립의 유산을 보존하신 것을…!”

헉 소리와 함께 서문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검설린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죽을 사람마냥 창백하게 변모해 있었다.

“아버지께서, 혼잣말을 하시는 것을 들어서….”

횡설수설 말하는 이청우가 어느새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편익을 봐주셨다고 했습니다. 부친께서는 동궁태자의 죽음을 막았어야 했다며 후회하셨습니다. 그리 탄식하며, 속죄로 파나립의 유산을 보존하려 도움을 주었다고….”

그는 눈에 불꽃을 튀기며 말을 내뱉었다.

“장한성에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병입니다. 당신을 부르려, 당신을 부르려 일을 꾸몄습니다.”

서문윤이 숨을 멈추었다. 검설린의 두 눈에 서린 살기를 본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청우는 그의 살벌한 눈길을 무시하며 비명과도 같은 말을 내지를 뿐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제발…! 장한성은 회흘을 견제하는 요새입니다!”

운표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지, 서문윤은 도저히 짐작하지 못했다.

장한성의 성주가 여기에는 왜?

눈앞이 까마득해진 서문윤이 머리를 굴렸다.

사영귀로 분장하여 소동을 일으킨 것이 그라고?

장한성에 전염병이 돌아? 그런데 그를 해결하려 어찌 이런 터무니없는 방법을 써?

아니, 그것보다 서른이 안 된 자가 성주로 부임을 하다니?

‘아무리 태부의 자식이어도 그럴 수가?’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서문윤은 갈색으로 그을린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할 뿐이었다.

운표선과 검설린 또한 여러 의미가 담긴 침묵을 지켰다.

“아버지와 얽혀 있는 일. 어디에 고변을 할 생각도 없고,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지금은 대가한의 취임식 탓에 휴전 중이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 죽습니다!”

이청우는 거의 발악하다시피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급박한 마음에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으나 몇 통의 서신에도 회신이 없어서…. 저로서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 난장을 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예를 더럽힌 일은 나중에 목숨으로라도 사죄할 터이니, 제발 나라를 위하여-.”

그 순간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게 나한테 해준 게 뭔데?”

싸늘한 말에 이청우가 얼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예?”

장안사준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그 무엄한 말. 서문윤이 놀라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 이 위대한 대당제국이 내게.”

귀공자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절절한 소청은 그에게 들리지 않은 것만 같았다.

운표선은 감정이 거세된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 그래. 충효. 그거 옛날에 내가 아주 맹신하면서 따랐던 때가 있었지. 응. 그때는 그게 그렇게 좋게 들렸거든. 그런데 그래서 결과가 어때? 너도 알 거 아니야? 지금 얼마나 개같은지.”

“잠, 잠시만, 공자.”

말의 수위에 경악한 서문윤이 그의 말을 끊으려 했으나, 운표선은 그저 차디찬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나라를 위해 살지 않는다, 나는.”

“그, 그게 무슨.”

“이 지리멸렬한 목숨을 보존하는 이유는 애국심 때문이 아니야.”

덤덤한 목소리가 어찌나 이리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지. 그리고 서문윤은 그 순간 검설린의 눈가에 서린 차가운 조소를 보았다. 그는 무언가 직감을 하며 신음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의형은, 아마 동궁사변 때….'

어렴풋이 마음속으로만 떠올렸던 추측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직 의리를 위해 살고 죽을 뿐.”

이청우의 얼굴에는 크나큰 혼동이 있었다. 사실 그 말은 맹자의 학맥을 이었다던 운가의 자손이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보국안민하겠다던 명사가 내뱉을 말도 아니었고.

“그것도 차라리 부질없는 명예를 위한 욕심에 가깝겠지.”

자조 어린 말에 이청우가 무언가 항의하려는 듯 와락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청년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운표선은 매정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미안하지만, 너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군. 미안하지만 그 물건은 완성품이 아니야. 어디까지 이야기를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닥 마음이 좋지는 않군.”

“그것이 정녕 사실입니까?”

“너는 그 물건이 물력만 있으면 완성되는 줄 아는구나.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닿는 간절한 원이 있어야 하며, 상제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태부는 그날 사변을 방관한 죄책감으로 날 도왔지만, 불운하게도 우리의 원은 그 정도까지가 아닌 듯하구나. 나는 실패했다.”

그 말은 교묘하게 사실과 다른 것이었다. 거의 완성품이 제조되기 직전이라던 말. 그리고 지금 원이 닿지 않아 실패했다는 말. 그 사실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운표선의 의도를 깨달은 서문윤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운표선의 말을 들은 순간 이청우의 얼굴에 크나큰 절망이 감돌았다.

“아, 안 돼!”

머리를 두 손으로 쥐어 감싸며 내뱉은 말이었다. 희망을 걸었던 물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에 사내는 몸을 콩벌레처럼 웅크리고 떨며 그가 받은 충격과 절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순간 서문윤은 이청우가 일전에 했던 말을, 다시 만났을 때는 어엿한 무관일 것이라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 밖으로 삐져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 그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서문윤이 연민에 헤엄치고 있을 때였다. 운표선이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몹시나 슬프게도 네가 사방팔방으로 난리 쳤던 일로 나는 감시대상이 되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 물건의 일은 고우군이 눈에 불을 켜고 막으려 하는 극비사항인데. 네가 또 난리법석을 쳐서 곤란한 실정이구나. 그 물건을 만드는 일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으니.”

“아, 아아.”

“좋은 의도였다마는, 아쉽게 되었구나. 나는 너를 도와주지 못하겠다.”

매정하게 내뱉은 말에 이청우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척추뼈가 도드라지게 몸을 만 채로 울부짖을 뿐이었다. 서문윤은 그의 마음속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직시하며 얕은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책임감을 껴안은 사내는, 저와 맞닿은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서문윤이 짙은 시선으로 방 안에 자리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겠다며 쾌활하게 내게 말하던 사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하라고 선포했던 이청우.

오랜만에 만난 동기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호인이었던 사내는 처절한 통곡을 흘리며 방 한켠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것이 서문윤의 마음 한편을 동요케 만들었다.

어느새 저 사내는 어엿한 무관이 되어 있구나.

어딘가 침통함을, 그리고 자괴감을 느끼며 서문윤은 입술을 깨물고야 말았다.

절규 속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은 너도 알고 있었겠지. 이 일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무모한 것임을. 네 아버지가 서신을 받고도 회신을 안 한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았어? 무어라도 하고 싶었나? 지푸라기를 쥐어 잡아 뜯을지라도?”

꺽꺽 우는 사내를 향해 매정한 눈길이 내려앉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국무에서 손을 뗀 지 오래. 그대를 도와줄 수 없네.”

부탁을 거절하는 매정한 말. 처절한 울음만이 한동안 방을 울렸다.

참담한 표정으로, 그러나 무언가에 크게 동요하며 서문윤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문가에 기대선 채 잠시간 상황을 관조하던 검설린이, 팔짱을 풀며 몸을 바로 섰다.

“운표선.”

낮은 목소리에 운표선이 폭 한숨을 내뱉었다.

“당장 나와라.”

그 말에 운표선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문윤을 응시했다. 그 또한 석상처럼 얼굴을 딱딱히 굳힌 채 침묵하고 있었다.

“다치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까 전 이청우에게 매정하게 말을 쏟아내던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어조로 말을 하며, 운표선은 방을 빠져나갔다.

탁.

어색한 동기와 같이 남은 자리. 서문윤이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걸 뭘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귓가에 울리는 끅끅 소리가 한스러웠다.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서문윤은 생각에 빠진 채 잠시간 침묵했다.

참으로 한스러운 울음이구나.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끊임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서서히 복잡한 빛이 물들었다.

‘분명히 나와 동기였는데.’

동기였으며 그때에 가장 주목받던 두 급제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서문윤은 이 순간 이청우와 저 사이에 유리감을 느꼈다.

그가 우는 이유는 보국안민을 위해서이다.

‘내가 포기한 길을 그는 착실하게 걸어가고 있었구나.’

서문윤은 한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자는 밝았던 마음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진 바 위치에 대한 책임감을, 그리고 지키는 자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울음이 서서히 거둬들여질 무렵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고 의원은 납치를 왜 하였어?”

타박하는 말이었다.

“건전성에도 환자는 많아. 이청우. 아니, 이리 불러도 될지 모르겠군. 이제 나는 민초고 그대는 장군이니.”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나를 기억하나?”

“…물론.”

“여기서 이리 재회할지는 몰랐는데. 당황하고야 말았지.”

이청우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중얼거리는 말에 서문윤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째서 네가 성주가 된 거지? 장군이라니. 10년 전이면 몰라도 그 나이에 그런 높은 직급에 오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다.”

진실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것은. 그 말에 잠시간 침묵하던 이청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악운이 좋았다. 나를 신임하는 훌륭한 상관을 얻었던 건 내 복이요, 그의 죽음을 수습한 것은 내 불운이지.”

상념에 사로잡힌 사내의 얼굴에 흰 웃음이 흘렀다. 이제는 고통도 무엇도 담기지 않은, 덤덤하기 그지없는 말.

“회담 와중에. 그러니까, 천막에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를 지키기 위해 천막에 뛰어들었으나, 성주님은 내게 직인을 맡기고 도망가라 윽박질렀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이었다.

“이제 내가 성주라며.”

그리 말하는 이청우의 얼굴에는 쓰라린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서문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자리야, 나는 한 번도 원하지 않았어.”

“…….”

“그때 우리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 미래를 생각하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었나?”

“…….”

“너는 그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어? 5만 8천 대군을 통솔하는 위치에 오르는 미래를?”

끝으로 갈수록 떨려오는 한이 가득한 목소리. 이청우는 자조하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책임져야 하지.”

서문윤은 정말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살아남은 사람의 의무니까.”

방 안에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서문윤은 단단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의 의형과 운표선이 나누는 말들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했다.

“의원은 어쩔 수 없었다. 건전성에도 급한 환자가 많았겠지만, 장한성은 십팔지옥이다. 환자들을 돌볼 의원을 공수해야 했다. 남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나는 그리해야 했어. 너는 모르겠지. 조정이 얼마나 썩어빠지고 무능한지.”

“그게 무슨 소리지?”

조정이 여기서 거론되는 이유는 무언가. 의아한 얼굴을 한 서문윤의 앞에서 이청우가 문득 정색했다. 감상에 젖었던 사내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서문윤의 귓가로 걸걸한 욕설이 흘렀다.

“병신 같은 놈들!”

말을 듣는 순간 서문윤은 놀란 얼굴로 이청우의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아무리 그가 낙향을 하고 지금은 일반 백성이 된 몸이라 한들, 한때는 군관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더군다나 명문 무가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조정을 향한 욕설에 더욱 적응을 하지 못해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청우는 보국안민의 선봉에 선 이가 아닌가?

그러나 이어진 처절한 외침에 서문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어야 했다.

“성주의 직인을 받은 것만으로도 장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게 변방에서 무슨 소용이지? 나는 전쟁 중이었고, 성주 대리가 되어야 했어! 하! 지금 조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알아? 나를 인정하느니 마느니, 내가 항명을 저질렀느니 마느니 그 소리를 하고 있어! 이런 병신 새끼들이, 그 절차에 목메면서 천금 같은 시간을 반년을 버렸단 말이다!”

쾅!

벽을 주먹으로 치며 이청우는 두 눈을 부릅떴다. 다친 다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는 한이 절절하게 밴 목소리로 소리칠 뿐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유능한 장군이라도 보내든가, 하! 진상을 조사한다며 감찰관을 보내는 게 말이 돼? 미친놈들이 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재상은 날 성주로 삼겠다 하고 중서성에서는 극렬히 반대하여 상소문을 올리고.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지금?”

“잠시만, 진정, 진정하게.”

분노에 폭발하여 새빨개진 얼굴이 심상치 않다. 그가 상처를 입은 환자라는 것을 떠올린 서문윤이 기겁하여 그를 말리려 들었으나, 이청우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장한성주라고? 미안하지만 조정에서는 나를 그렇게 인정 안 할걸. 하물며 하동하서 절도사 황재천마저 내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겠다며 난색을 표하곤 발을 빼는데, 내가 어디서 도움을 구해? 의원도, 물자도 황재천은 회흘의 다른 국경을 경비한다며 외면하고 있다.”

분노에 가득 찬 사내가 옷자락을 잡은 서문윤의 손을 뿌리치며 격정 어린 목소리를 터뜨렸다.

“5만 8천 대군이 보급이 끊겨 겨우내 끙끙 앓아 간신히 명맥을 이었어! 중간에 대가한의 취임으로 휴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린 다 죽었다. 이 판국에 내가 다른 사람을 어찌 생각해?”

그것은 쓰라린 말이었다.

“나의 눈에는 장한성밖에 없다, 서문윤.”

실로 쓰라린 말.

“나의 업은 장한성이야. 나는, 나는.”

몇 번을 더듬거려 말을 하던 이청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느덧 방 안에 침묵이 자리했다. 분노에 말을 쏟아내던 사내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없이 허공 한켠을 노려보았다. 서문윤은 한참 동안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는 상념에 사로잡힌 가라앉은 눈으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기의 발치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나도 저와 달라져버린, 어엿한 한 명의 관리로 자리 잡은 동기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청우의 얼굴에는 어느새 허탈함이 자리 잡았다.

침묵 끝에 서문윤이 문득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다시 만날 때에는 진정한 무관으로 거듭나 있겠다 말했지.”

덤덤한 목소리에 이청우의 몸이 움찔거렸다.

“너는 정말 무관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구나.”

그 말에는 희미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는데.”

그제야 서문윤이 일반 백성이 된 것을 깨달은 이청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별로 접점은 없었지만, 그래도 동기라며 기억에 남아 있던 청년이다. 어딘가 반듯하고 곧았던 청년을 떠올리며 그가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너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북성을 따라다닌다는 그, 그자가 너냐?”

서문윤은 그 말에 헛웃었다.

“소문?”

그 순간 마음을 읽힌 듯한 느낌이 들어, 이청우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꾹 다물고야 말았다. 흔들리는 눈에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소문은 아마 그 남총에 관련된 것이겠지.

서문윤은 잠시간 침묵 끝에 피식 웃으며 답을 했다.

“다리를 다쳤다. 영원히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해서 낙향하였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퍼져 나간 소문이다. 수치심을 느꼈으나, 그 이상으로 피로한 일이 많았다. 서문윤이 덤덤한 목소리로 그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분이 구해주셨어.”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네가 부럽구나. 나는 무관이 되지 못했는데.”

이청우는 한참의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지킬 것이 있나?”

서문윤은 그 말에 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따라 문에 눈길을 주며 이청우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위에게는 소명이 있는 법이지.”

그 순간 서문윤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그래, 그런 거야.”

이청우는 그 옛날처럼 곧고 우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의 소명과 너의 소명은 다르지 않다. 그리 폄하하지 마.”

서문윤은 그제야 저 풍파에 찌들어 허무한 표정을 지었던 사내가, 그 옛날에 반짝 빛이 났던 이청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청우는 서문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이청우의 그을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 또한 무인이 되어 있구나.”

그 말이 우습게도 위로가 되었다. 서문윤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단단해 보이는 이청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며 마음속에 물결치는 복잡한 감정을 다스렸다.

동기의 정이란 게 무언지.

딱히 그리 신경을 쓰던 사이는 아니었는데 막상 재회를 하고 나니 마음을 울리는 면이 있다. 서문윤이 그리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저게 네 최선이야? 이 새끼야! 정신 차려. 너야말로 과거 장한성에서의….”

밖에서 갑작스럽게 울리는 고함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굉음.

콰앙!

청년이 눈을 크게 뜨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이 우지끈 부서져 아직은 찬 바람이 방 안에 후욱 스며들었다.

서문윤은 방바닥을 구르는 운표선을 경악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너 그냥 죽어라.”

그리고 뒤이어 방을 울리는 싸늘한 목소리. 콜록거리는 운표선의 멱살을 잡는 검설린의 기세가 몹시 흉흉했다. 그 순간 불길함을 예감한 서문윤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형!”

또다시 부르지 말아야 할 호칭으로 부르며, 그는 운표선의 멱살을 잡아 올리는 검설린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의, 의형이라니?”

당혹 어린 이청우의 말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서문윤은 다급히 검설린의 팔뚝을 거머쥐며 소리쳤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일단 진정을 하시고 일을 해결하십시오.”

“아니, 그냥 죽일 건데?”

“의형, 제발….”

간절한 목소리를 흘리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성격이 폭급한 검설린을 달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릿속이 까마득해진 채 그저 검설린에게 매달려 간절히 되뇔 뿐이었다.

의형, 제발.

제발.

그 말을 되뇌며 서문윤은 검설린의 팔을 잡아당겼다.

귀공자의 가는 목을 쥐었던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 컥컥거리며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긁던 운표선이 몽롱한 눈에 초점을 다시 주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복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사내는, 그 눈가에 서느런 조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저놈이 너를 죽일 마음을 품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네 편인 줄 아느냐? 네가 그러고도 무인이냐?”

그것은 서문윤의 약점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 순간 숨을 들이켜며 청년이 그 자리에서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귓가에 날 서린 목소리가 뚝뚝 떨어졌다.

“네게 칼을 들이댄 놈을 변호하는 건 뭐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그리 말을 하면서도 검설린은 손에 준 힘을 풀고 운표선의 가슴팍을 팍 세게 밀쳤다.

“항상 말했지만 너는 사람에게 너무나 무르다.”

거칠게 쉰 목소리로 말한 운표선이 뒤이어 제 목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낙마가 복이었다니까.”

서문윤은 그 말에 아무런 답변조차 하지 못했다. 굳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당신, 당신은 병을 고칠 수 있습니까?”

세 쌍의 시선이 그을린 얼굴의 청년을 향해 꽂혔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후, 한 줄기의 빛을 본 얼굴로 검설린을 응시했다.

“북성신의. 그, 그래. 당신이 갑자기 등장했지. 나는, 나는 그때 완전히 포기를….”

더듬더듬 말을 내뱉던 이청우가 돌연 눈빛을 바꾸고 검설린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신의! 장한성으로 가주시오! 나는 그대를 위해 천금을 바칠 수 있소. 내 아버지는 운가 상단에 비견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로라하는 거부요. 그대가 원한다면 수도에 있는 전 재산을 주리라.”

돈으로 재능을 사고자 하는 말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말을 듣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아, 또 의형이 어려운 길을 걸으시겠구나. 한숨을 내뱉으며 그는 짐을 정리할 준비를 했다.

검설린은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방문을 하였으니까.

‘전염병이면, 그 자리가 내 죽을 곳이 될지도 모르겠군. 하기사, 나는 이미 저분을 따른다고 할 때부터 목숨을 내놓았지. 그저 그런 일로 죽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장렬하다.’

다만 가시밭길인 앞날을 예측하여 한숨지을 뿐이었다.

“짐을 준비하겠습니다.”

이청우의 얼굴에 장밋빛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 말에 돌아온 검설린의 답변은 서문윤을 경악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방 안에 싸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니, 난 안 갈 거다.”

예상치 못한 말에 서문윤이 경악하여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청우를 절망에 이르게 한 말이었다. 경악한 얼굴로 청년이 소리쳤다.

“어, 어째서!”

“다 때려치우고 떠나라. 성주가 성을 떠나고 군관이 전장을 떠나? 닥치고 네 부임지로 가라. 나는 장한성에 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당신은 빈민을 챙긴다며.”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는 경악할 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이청우의 손을 뿌리치고 검설린이 역정을 내질렀다.

“너 때문에 의원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건전성의 수많은 환자들은 어찌할 거지? 여기서 일을 다 끝낼 때까지 나는 떠나지 않는다.”

“의원 납치는 내가 꾸민 일이니 이제 다른 곳에서 의원을 차출해도 되지 않소!”

“그럼 네가 의원을 차출해달라고 건전성에 소청을 보내든가. 개같이 일을 벌여놓고 어디서 목소리 높이느냐?”

“이런 미친!”

그 말에 이청우는 결국 얼굴을 흉악스럽게 구기고야 말았다.

“그 새끼들이 소금 한 가마니라도 보내줄 것 같아?”

귓가를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당황하여 의형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정녕 왜 이러시는 건지.

물론 그로서는 검설린이 전염병이 닥친 위험한 자리에 가지 않겠다는 말이 좋았다. 아직까지 서문윤은 그에게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위험을 피하겠다는 말은 기꺼운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그러해도 서문윤은 막상 그의 말에 크게 당황하고야 말았다.

검설린이 언제 사지를 두려워한 적이 있었어? 그가 필요한 자리에 가지 않은 적이 있었나?

칼처럼 단호한 거절의 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청우는 그 생각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말에 분노를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는 바로 검설린의 멱살을 잡아 내려 끌며 눈을 부릅떴다. 서문윤이 당황하여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 검설린은 팔을 들어 그의 개입을 막았다.

순순히 그는 이청우의 손길에 끌려가 몸을 낮추었다. 마주치는 두 눈.

복면 위의 고요한 눈과 마주하며 이청우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겨우내 조정에 몇 번이나 편지를 처 보냈는데 답은커녕 질리도록 싸움박질 해대면서 쪼아대는 놈들이? 사비를 풀어서 내 스스로 물자를 조달했어. 개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황재천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이대로는 위험하다. 잔뜩 흥분한 이청우의 모습에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저 서문윤의 앞을 팔로 가로막을 뿐이었다.

“왜, 제기랄! 대체 왜 안 간다는 거야! 사지로 걸어 들어간다면서,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사람을 돌본다면서!”

돌아오는 것은 오로지 무덤덤한 말뿐이었다.

“안 갈 거다.”

이청우의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안 갈 거다.”

서문윤은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의형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칼처럼 단호하게, 또한 무심하게 이청우에게 답을 하는 검설린의 모습은 그가 여태껏 보아온 것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적어도 서문윤은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검설린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삶을 연명하지 않는다. 그는 신념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 운표선이 일전에 서문윤에게 그는 약조 때문에 의원의 길을 걷고 있다 이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는 민초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매정하게 사람을 버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서문윤은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운표선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방금 전 그와 검설린이 얘기를 나누었지.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깨닫고야 말았다.

“…어째서?”

운표선 또한 작금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파리한 얼굴로 검설린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서문윤의 얼굴이 그 순간 일그러졌다.

그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혼돈 속에 휘말리는 듯한 느낌을 받곤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서문윤이 혼란에 허우적거리고, 운표선이 충격에 빠져 무언가 의미 모를 말을 달싹거릴 때였다. 분기에 가득 차 검설린을 몰아붙이던 이청우가 별안간 검설린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큭!”

그러고였다. 검설린의 눈이 한순간 번뜩인 것은.

그는 벼락같이 이청우의 뺨을 움켜쥐며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멱살을 잡아당긴 손에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설린은 숨결이 섞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멈추곤 이청우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추앙받을 생각 단 한 톨도 없으니까 개같은 소리 그만해.”

낮게 깔리는 목소리였다. 동시에 진득한 살기가 묻어 나오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트는 이청우를 짙은 시선으로 노려보며 검설린은 말을 이어나갔다.

“장한성에서 퍼진 그 질병이 뭔지 잘 들었다.”

“이, 이것.”

“초반에는 오한이 들어 식은땀을 흘리며 이불을 찾다가도 종국에는 피가 끓는 작열감에 시달려 괴로워한다지. 물을 미친 듯이 마시다가 배가 터져 죽는 이가 있고. 사지에 경련이 일어나고 복통을 호소하는데 막상 죽기 직전에는 힘이 빠져 몸이 늘어진다.”

새파란 입술을 달싹이며 이청우가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검설린의 눈에는 이글거리는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죽어갈 때 피땀을 흘리고, 됫박의 피를 토하는 질병.”

그러나 그의 입술에서는 정반대로 듣는 이의 피를 식게 만드는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타클라마칸 인근에서 발발했던 괴질이다. 도시 하나를 괴멸시켰던 병!”

“회흘이 서역과 무역으로 국력을 유지하니 아마 거기서 옮아 온 거겠지. 전쟁 중이니 아마 그쪽에서 옮겼을 수도 있고.”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연이어 쏘아붙이는 말에 이청우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말은 가면 갈수록 더욱 혹독해져갔으며, 검설린의 눈에서는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건 운남에서 있었던 홍역이나 하북에 퍼졌던 풍진 따위가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조소와 함께 흘린 말에 이청우는 결국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같이 죽자고?”

이청우는 울먹거리며 울음을 삼키던 중 문득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검설린을 악이 빠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면,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

검설린은 짧게 답했다.

“혼자 죽어.”

그리 말을 하며 그는 쓰레기를 내버리듯 이청우의 몸을 바닥에 던졌다.

“아, 아아!”

동시에 방을 울리는 사내의 처절한 비명.

울음을 듣는 순간 검설린은 쓰라린 조소를 지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사내의 무너지는 몸을 바라보며 운표선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 울부짖는 짐승의 비명이 있었다.

‘저것은 업보를 짊어진 자의 절규다.’

세 사람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오직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울음을 들으며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설운 울음은 끅끅거리는 소리로 변모했다.

눈을 감고 침묵하던 서문윤이 문득 두 눈을 뜨고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야멸찬 말을 내뱉던 사내는 바닥에 엎드린 이를 차갑디차가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를 바라보던 검설린의 복면 위의 얼굴이 별안간 크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끄윽, 끄윽.”

짐승의 것과 같은 소리를 들으며 청년은 한참을 망망대해를 배회하는 기분에 휩싸여 침묵해야만 했다.

소리는 서서히 심상치 않게 변했다.

이청우의 상처는 결코 얕지 않았다.

서문윤의 손에 남은 상처는 오직 표면을 벤 것이라 그다지 중한 상처는 아니었으나 이청우는 다리를 관통당한 후 바닥에 메쳐져 충격이 컸다. 중한 상처를 입은 데다가 심적인 충격을 얻었으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닐 것이 뻔했다.

울다가 지친 사내는 결국 쓰러지듯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야 말았다.

묵묵히 그를 지켜보던 서문윤은 한숨을 내뱉으며 그를 챙기려 발걸음을 디뎠다.

“네가 챙겨.”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이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구석에 틀어박혀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던 운표선을 향해 흉흉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챙겨, 운표선.”

잠시간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던 운표선이, 어느 순간 돌연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면서 침묵했다. 그리고 그 끝에 운표선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서.”

갈라진 목소리.

“그래서, 설마….”

더듬거리면서 내뱉는 말의 파편. 그 끝에 운표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문윤을 향해 강렬한 시선을 주었다. 그것은 어둠 속을 헤매는 자가 빛을 발견한 모습과 닮아 있었다.

서문윤은 엉거주춤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운표선이 돌연 빙긋 웃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비켜봐라.”

“아, 저.”

“네 의형이 내가 하란다.”

그 말에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너무나도 익숙하게 되어버린 호칭. 아니 부르겠다 마음먹고서도 몇 번이고 내뱉는 호칭에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나는 왜 이제껏.’

이제는 거부하는 말을 내뱉는 게 민망할 정도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 말에 또다시 거부의 의사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의형이 아닙니다.”

음울한 목소리에 운표선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의형이 아니겠지.”

그리 말을 내뱉고 검설린을 향해 운표선은 입꼬리가 귀에 닿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검설린은 그 시선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뿐이었다.

귀공자의 미소는 티끌 한 점도 없이 맑고 환했다.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발견한 것처럼, 병자가 천고의 약을 마주한 것처럼 운표선은 그리 밝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혼동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의형에게 얻어맞고, 이청우의 울부짖음에 얼굴을 굳히던 사내가 갑작스럽게 저를 바라보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변덕이 강한 사내라 이해를 하려 해도 도저히 그의 태도는 이해되지 않았다.

“왜 저를 그리 보십니까.”

서문윤의 말에 운표선은 잠시 우물거리다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냥, 즐거워서.”

그를 바라보는 검설린의 눈매가 날카로워진 순간이었다.

“너 이 새끼-.”

그리고 또다시 욕설을 내뱉으려 하는 사내의 말을 날카로운 목소리가 끊었다.

“너어, 결심을 했으면 확실하게 하거라.”

그 말은 동시에 의미심장한 뜻을 유포한 것이었다.

방 안에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서문윤의 몸이 멈칫했다. 날카로운 시선에도 운표선은 빙긋 웃음을 흘리며 은근히 도발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완전히 눈이 돌아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게 정말 살기까지 흘리곤.”

검설린의 굵은 검미가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저놈의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구나.”

“운표선.”

그리고 그를 향한 묵직하게 가라앉은 사내의 목소리. 갈라지고 쉬어빠진 목소리에 경고의 뜻이 묻어 나왔으나 운표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네 지금 이성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걸 자각 못 하겠느냐?”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와 어둡게 가라앉은 눈.

“일전에 경고했을 텐데.”

그와 동시에 검설린의 얼굴에 살벌한 기색이 감돌았다.

방 안에 예기 서린 침묵이 감돌았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서문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당황할 뿐이었다. 그는 그저 검설린의 불타오르는 두 눈과, 운표선의 웃음이 감도는- 그러나 분명히 진지한 일면이 엿보이는 얼굴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과거에 비하면 손바닥에 손금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운표선, 너 지금.”

그리고 그 순간 운표선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나는 네 아래가 아니다! 검설린!”

건물을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저를 겁박하는 사내에게 노성을 내뱉으며 운표선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검설린은 그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 하는 듯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들의 대치에 서문윤은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귓가로 운표선의 갈라지고 예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문 공자.”

검설린은 그 순간 한 발자국 그를 향해 발을 디뎠다.

“닥쳐.”

“서문 공자. 내가 재밌는 걸 알려줄까?”

“닥치라 했다.”

흉흉한 목소리에 운표선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긴 소매를 휘두르며 오랜 벗에게 역정을 내지를 뿐이었다.

“내게 명령을 하지 말라 했어! 내가 입술을 움직이는 게 싫으면 내 목을 비틀어 꺾어버려. 하지만 너는 그럴 수 없겠지. 너는 정이 많은 사내니까. 외로움이 많은 사내니까. 내게 그럴 순 없을 거야. 너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사람이 내어준 잔정에 또 그 몹쓸 희망을 품는 호구 새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설린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불길이 치솟는 눈이 희번뜩 빛났다. 검설린의 입술 사이로는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렀다.

“네놈이 감히…!”

운표선은 그의 눈을 마주 노려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서문 공자!”

마치 스승에게 기합을 받는 듯이, 서문윤이 그 순간 주먹 쥔 손에 힘을 주며 뻣뻣한 얼굴로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흘끗 무서운 시선을 던졌다.

서문윤은 숨통이 조이는 듯한 느낌을 일순간 받았으나 이내 이어진 운표선의 말에 홀린 듯 집중하고야 말았다.

“궁궐에서 황제를 지키는 은밀한 호위를 뽑을 때 가장 먼저 따지는 조건이 뭔 줄 아나?”

죽일 듯이 사내를 노려보는 시선이 강렬했다. 그러나 운표선은 그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오로지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멱살이 잡혀 종이쪼가리처럼 흔들리는 상황에도 운표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문윤을 응시했다. 그는 잠시간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이윽고 아주 은밀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로 가족이야.”

그것은 실바람과 같이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서문윤이 얼어붙은 몸을 움찔거렸다.

뜻밖의 대답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가족이라고?

“신분을 따지냐고? 으하하! 그게 아니지. 고귀한 핏줄 따위 상관없어. 호위는 가족이 없는 이들만이 될 수 있다.”

서문윤은 운표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멍한 눈을 한 채 그는 운표선의 이야기에 홀려 그의 입술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미 상황이 막을 수 없이 흘러감을 깨닫고, 검설린은 살벌한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 악문 목소리가 흘렀다.

운표선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왜냐고?”

서문윤을 바라보는 눈이 반짝 빛났다.

“가정이 있는 자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 눈은 등불이었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몸을 아낄 수밖에 없으니까.”

“이, 새끼가!”

목을 조르는 손을 잡아당기며 운표선이 거칠게 소리쳤다.

“제가 받은 업만을 짊어지던 놈이 어느 순간 타인에 대해서 얘기를 하더군!”

서문윤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거론한 타인이 저 자신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내가?’

그는 그저 넋을 잃고 운표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문윤아, 너는 설린이 본디 시간을 두고 봐야 할 환자를 다룰 때 다른 의원을 교육시키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설린은 너를 데리고 다녔지. 서문린에게는 빚이 있었으니까.”

“너, 너!”

“그래서 너는 기적인 거다. 갑자기 설린이 네 얘기를 하면서 답답하다며 짜증을 부릴 때 나는 기겁하고야 말았어. 그가 감정을 보인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죽어가는 사내가 그리 반응을 하는 게, 이거 놔!”

검설린의 손을 뿌리치며 운표선이 광소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너는 고독이 얼마나 사람을 좀먹는지 모르겠지. 안락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랑을 받고 자란 너는 모르리라. 너를 받쳐줄 집이 있는 너는 모를 거다. 안식처가 없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 정을 주어도 주어도 돌아오지 않는 마음. 이것은 단순히 농부의 수확과는 다르다, 서문 공자. 네가 당연하게 가졌던 것들을 그는 천고의 노력 끝에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반이 없는 자는 무너지게 되어 있어. 애를 써서 붙잡은 사람은 떠나가고, 평생을 방랑하며 지낸 자의 끝은 수미상관이었다. 고독에 젖은 자에게 온기가 얼마나 독약인지, 커흑!”

서문윤은 멍한 눈으로 몸을 꺾으며 고꾸라지는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그의 배에 주먹을 쑤셔 넣고 검설린은 두 눈을 번뜩이며 흉흉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 나는.’

“커흑, 컥!”

몸을 무너트린 채 기침을 쿨럭쿨럭 해대는 운표선의 배에 주먹이 꽂혀 있었다. 쓰러지는 몸은 검설린의 손에 붙들려 허공에 대롱거렸다. 한 손으로 운표선의 뺨을 붙잡은 채 검설린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귓가에 달싹거리는 입술.

무어라 말을 들은 운표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때 검설린이 그의 어깨를 밀치곤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닥에 넘어진 채 몸을 웅크리며 운표선이 요란한 기침을 해댔다.

기침이 잦아들 무렵에 사내가 타액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입술을 쓸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아가야.”

서문윤은 그 자리에 넋을 잃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검설린이 뛰쳐나간 자리. 끼익끼익 울어대는 문과 그 사이로 흐르는 아직은 차가운 봄날의 바람.

그러나 서느런 바람은 추위 안에 희미한 온기를 띠었으며, 봄꽃의 달큰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아, 이제 곧.’

이제 곧 봄인가.

우습게도 서문윤은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그런 우스운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새하얘진 머릿속. 잔뜩 일그러진 검설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서문윤은 한순간 강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는.’

운표선의 말을 떠올리면서 서문윤은 그 어느 생각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가야.”

그리고 그 때 운표선의 말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따라, 따라 나가봐.”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훈풍이 도는 사내의 얼굴. 그는 기쁨을 참지 못하는 사람마냥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 하하.”

짧게 흐르는 웃음이 엮여 하나의 말이 되어 흘렀다.

“고맙다.”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리 말하며 운표선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은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서문윤은 그의 입가에 띤 미소를 보았다.

“나는….”

귓가에 어른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며 서문윤은 의형을 따라나섰다. 확인을 받고 싶은 것이 있었다. 동시에 두려워서 피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미친 듯이 달려 나가 서문윤은 검설린을 찾았다.

심장이 벅차게 뛰고 있었다. 서문윤은 무언가 예지에 가까운 예감을 하곤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어디에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신의께서는 어디 계시오?”

“여기 나오시지 않았는데?”

“신의께서 어디 가셨는지 아오?”

“그분께서 사라지셨단 말인가? 아니, 어찌 이런.”

그러나 검설린은 어디에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 의당에 간 것인가, 찾아간 자리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수가 부족한 의원들이 핼쑥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는 자리. 서문윤은 검설린의 부재에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다급히 물었다.

“신의께서 어디 가셨는지 혹시 아오?”

서문윤은 미친 듯이 검설린을 찾아다녔다.

“아니, 모르겠다. 그자가, 그자가 어디 갔나? 아니, 윤아!”

황재천의 심각한 말.

“제게 할 말이 그것뿐이신가요?”

황양양의 씁쓸해하는 말.

“대체 어디 가시는 겁니까? 위험하십니, 앗!”

병사의 외침을 무시하며 서문윤은 사막의 물을 찾는 방랑자가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어디에?’

머릿속에 사내의 서늘한 눈이 있었다. 그는 그저 홀린 사람이 되어 시장을, 의당을, 관청을, 황재천의 집을, 건전성의 구석구석을 찾아 헤맸다. 지금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직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람 성벽 근처에 있던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말하는 것 아니오? 북문 근처에 홀로 서 있더이다. 거의 한 시진을 홀로 서서, 어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서문윤은 북문을 향해 질주했다.

‘형, 의형.’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그저 망상이라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현실과 닿아 있을 수 있을까?

“가정이 있는 자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으니까.”

사실은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몸을 아낄 수밖에 없으니까.

그날이 있기 전에 그와 함께 보냈던 일상. 절름발이의 느릿한 발걸음에 말없이 보폭을 맞추어주던 그의 모습.

“너는 고독이 얼마나 사람을 좀먹는지 모르겠지.”

그의 무심한 눈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돌변한 그의 모습을 생각해냈다.

“네게 정 따위는 없다. 네가 나와 함께한 시간들은 허상이었다.”

그 말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서문윤은 문득 그것을 믿기 힘들어했다. 이것이 나의 집착이요,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문윤은 본능적으로 그 말의 허무한 본질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아놓고.’

그리고 마침내 서문윤은 생각해낼 수 있었다. 가끔씩 뒤쳐질 때에 멈추어 서서 등 뒤를 돌아보던 검설린의 눈. 그 노을을 등진 사내의 눈은 차분하게 저를 담았다.

바쁘고 고된 나날들 중에 그는 가끔씩 저를 고요한 호수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뜻을 짐작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진한 여운이 남는 시선으로.

검설린은 가끔씩 저를 서정적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정이 없다고?’

그 눈이 정이 없는 사내의 것이라고?

서문윤이 헐떡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머릿속에 찬물을 맞은 것만 같았다. 사실은 아직도 저가 미련에 사로잡혀 헛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아리송했다. 운표선, 그자의 말이 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암계에 휩쓸린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서문윤은 운표선을 몰아붙일 때의 검설린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무서운 얼굴로 그를 몰아붙이던 의형은, 저를 향해 시선을 던지곤 이윽고 수치심에 젖은 얼굴을 했다.

‘왜 그런 모습으로 나를 보십니까.’

검설린을 보고 싶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정녕 그간의 시간이 허상이었습니까?

당신의 마음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습니까?

그저 남보다 조금 나은 존재라 저를 여기십니까?

‘웃기지 마십시오.’

그 순간 서문윤이 고소를 흘렸다.

‘아마 당신은….’

북문에는 사람이 잘 오가지 않았다.

고래로 불길함을 상징하던 방위인 북쪽. 시신과 병자, 분변 같은 부정한 것들이 오가는 골목은 한산했다. 북문에 비틀거리며 멈추어 선 서문윤이 허리를 고꾸라트리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한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려 한 사내를 간절히 찾았다. 서문윤은 귀기 어린 바람이 부는 북문에 이르러 확신했다.

그다.

그가 이 근처에 있다.

그것은 서늘한 기운이 드는 북문을 보는 순간 기이하게 든 확신이었다.

예감과 함께 서문윤은 홀린 듯 발걸음을 뗐다. 우둘투둘한 성벽을 따라 걸으며 서문윤은 빈자의 촌을 지났다. 도시의 빈촌은 시골과 다르게 처참한 몰골은 아니었다. 그들의 빈곤은 단지 침묵으로 드러날 뿐이었다. 귀신에 넋을 뺀 사람같이 걸어 나가는 서문윤을 흘깃 바라보는 시선은 있었다.

그러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문윤의 귓가에는 기이한 정적만이 감돌았을 뿐이었다.

그 죽음과도 같은 침묵.

그 불길한 정적.

‘마치 그를 닮은.’

서문윤은 마침내 인적이 끊긴 장소를 찾았다. 버려진 우물과, 갈색 풀들이 드문드문 난 풀밭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앙상한 겨울나무 아래에 선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거친 나무껍데기에 등을 댄 채 말없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오만한 자세. 검설린은 묵묵히 그를 향해 다가오는 서문윤을 마주했다. 분명 초라한 빈민촌 근처 버려진 벌판이요, 고목은 봄을 맞지 않아 앙상할 뿐이건만 그는 마치 옥좌에 앉은 군주와도 같아 보였다.

사내를 향해 다가가며 서문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귓가에 휘파람이 불고 있었다.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

검설린의 앞에 선 채 서문윤이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말을 고르는 청년의 얼굴을 사내가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와 수년의 시간을 보냈던 서문윤이다.

그는 지금 검설린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표 공자의 말이 그를 동요하게 하였다.’

묘한 설렘을 품에 안고 서문윤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왜 여기 계십니까?”

그러나 말에 돌아온 답변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꺼져.”

서문윤은 그 단호한 말에 몸을 멈칫거렸다. 청년을 바라보는 눈이 흉흉했다.

사내의 얼굴은 그가 기댄 고목과, 그리고 싸늘한 겨울날씨만큼 건조하고 무뎌 보였다. 차라리 살기에 가까운 흉광이 두 눈에 스쳤다.

그를 깨달은 서문윤이 긴장에 마른침을 삼켰다.

검설린은 생각보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어이해야 할까.

‘이대로 회피해도 된다.’

그렇게 하면 2년간 관계는 유지할 수 있겠지. 외줄타기 하는 듯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불신과 고민을 반복하면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잠시간 망설이던 서문윤이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여기에 홀로 계십니까?”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검설린이 서문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꺼지라고.”

서문윤은 그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혼자 있는 건 안 좋습니다. 들어가서 얘기를….”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서문윤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서문윤은 멱살을 잡아채는 손에 끌려가 나무에 몸을 부딪치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오른손으로 서문윤의 멱살을 잡아 올린 채 그를 향해 살벌한 기색이 묻어 나오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검지로 복면을 걸어 내리며 검설린이 음울한 목소리를 흘렸다.

“닥치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서문윤. 미안하지만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아. 당장 네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거다, 당장.”

서문윤은 들리는 험악한 말과 다르게 연꽃같이 수아한 사내의 얼굴을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꺼끌꺼끌한 나무껍데기에 쓸린 등에 통증이 있었다. 서문윤은 쇄골을 짓누르는 손길에 신음을 삼키며 그를 응시했다.

묵직한 저음이 이어졌다.

“당장 꺼져.”

그는 당장에 손을 움직여 서문윤의 목을 꺾어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귓가로 풀밭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서문윤은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밤하늘에 박힌 무수히 많은 별을 보았다.

‘아, 어쩌지.’

서문윤이 문득 우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망상이라도 상관없는 것 같아.’

오히려 꿈에 잠기고 싶어. 서문윤이 충동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싫습니다.”

“뭐?”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 당신의 의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사실은 예전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서서히 굳어가는 검설린의 얼굴을 응시하며 서문윤은 지난날에 품었던 의심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이상한 태도를, 고요한 눈을 머릿속에 담았다.

“…너 정말.”

그 끝에 서문윤은 단 하나의 가정을 확신으로 옮겼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정이 들었다.’

쓸쓸함이 자리한 얼굴은 오직 나에게만 보여주던 것이다. 과거의 파편이라 할지라도 허무함에 잠겨 시름하던 모습은 오직 나에게만 보여주던 것이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이제 당신도 말 한마디로 저를 좌지우지할 생각은 버리시길 바랍니다. 저는 당신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숨결이 흘렀다.

“그리고 믿지 않습니다.”

새까만 눈 안, 사내 하나가 폭풍우에 휩싸인 앙상한 나뭇가지 위 낙엽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당신이 나에게 숨긴 사실이 뭔지 미칠 듯이 궁금합니다.”

말을 내뱉으면서도 서문윤은 사실 헤매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뭔 상관이야. 그가 제게 정을 느꼈다 하더라도, 무어가 달라지는데.

저의 마음은 정을 넘어선 짙은 것이다.

연인의 정과 그가 지난 세월에 느낀 감정은 괴리감이 있겠지.

“그러나 당신이 그 일들을 말하길 꺼린다면 묻지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서문윤은 분명 기쁨을 느끼는 스스로를 깨달았다.

“다만 하나 명심하십시오.”

부드러운 목소리에 검설린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당신이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내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아, 이것은.

그 순간 마음에서 폭발하는 무언가의 감정을 느끼고 서문윤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답답함이, 막혔던 돌덩어리가 사라져 둑이 뚫리고 있다.

푸른 귀화가 이글거리는 사내의 얼굴.

저를 목 졸라 죽일 듯이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검설린의 앞.

서문윤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어. 이제야 확신을 하게 되었는데.”

아, 나는 드디어.

“형님,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청년은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검설린이 서문윤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진 순간이었다.

“입 닥치라고 했어!”

그리고 퍽! 소리와 함께 서문윤의 몸이 나무기둥에 눌렸다. 아프다. 몸이 굵은 나무에 부딪혀 서문윤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깜빡였다.

아프다, 아파.

지난 시간 검설린과 함께한 세월을 더듬어 서문윤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검설린은 군문에 투신했던 자다. 8년 전에 의행을 시작했다 하였던가.

‘그는 동궁사변 때 얽혀서 낙향했겠지.’

나처럼 무관의 직을 버리고 민초가 된 거다.

서문윤의 몸을 누르는 손이, 숨통을 조이는 살기가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을 저절로 압도하는 기세가 그를 짓누르고 쇄골을 부러트릴 듯 누르는 손이 육신에 고통을 자아냈다. 서문윤은 그러나 울먹거리면서도, 입가에 떨리는 미소를 자아내며 말을 내뱉었다.

“내가 소중합니까?”

검설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은 순간이었다.

“건전성으로 가지 않는 까닭은 나 때문입니까?”

서문윤은 딱딱하게 굳은 팔에서 힘이 풀린 것을 깨닫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떨리는 숨결. 떨리는 마음.

결국 이에 이르렀다.

한 가지 확신을 품고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위험할까 봐, 그 역병이 무척이나 위험해서.”

운표선이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가족이 있는 자는 몸을 사리는 법이지.

“당신은, 당신은 몸을 돌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 검설린은 몸을 사리지 않는 이였다. 지독한 역병과 화마에 굴하지 않고 움직이는 이였다.

이해할 수 없는 그간의 행동.

그에 의심을 품을 때마다 검설린의 매정한 말이 그것을 막아 고민을 깊게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운표선의 말이 확신을 주었다.

“그러니까 제가 아는 의형은.”

서문윤은 거의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검설린은 새하얀 뺨에 눈물이 반짝이자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얼어붙었다.

“타인의 일에 덤덤한 만큼 본인에게도 무던한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그 말을 끝으로 서문윤이 작게 열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가쁘게 내뱉었다.

하아.

시선이 마주했다.

서문윤이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몽혼한 눈을 검설린의 굳은 얼굴에 고정했다.

눈과 눈이 마주하는 순간 영혼이 마주하고야 만다.

서문윤은 그 순간 겁에 질려 떠는 어린아이를 보았다. 숨을 멈추며 영혼을 직시하는 순간, 그의 귓가로 묵직한 저음이 내려앉았다.

“네가 나에 대해서 무얼 알지?”

그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서문윤이 힘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의형께서 제게 보여준 만큼 압니다.”

이런 결말을 맞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리 우리의 관계가 변화할 줄 1년 전 저가 어이 짐작할 수 있었을까?

분노가 허무함으로, 미움이 한탄으로 변했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게 아니었군요.”

그와 나의 삐거덕거리는 관계는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어서였던 걸까.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서문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기묘하게 뒤틀린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의형은 나를 아무렇게 여기는 게 아니었습니다.”

검설린은 이제 반박도 하지 못했다. 수려한 사내의 얼굴은 창백하게 식어 있었다. 서문윤의 목을 잡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의형에게는 제가 소중합니다.”

저를 부정하고 있었다.

“업으로 삼았던 일을 외면할 만큼.”

그러나 분명히 제게 정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의형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던 서문윤은, 그러나 갑작스럽게 제 입술을 덮는 커다란 손에 눈을 크게 뜬 채 침묵하고야 말았다.

목을 졸랐던 손은 어느새 거두어져 있었다. 그의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검설린은 서문윤의 머리를 겨울나무에 기대게 한 채 몸을 숙였다. 서문윤은 제 앞에 자리한 사내의 얼굴에 크게 눈을 뜨고야 말았다.

“그만해.”

서문윤의 입을 막은 손등 위에 입을 맞춘 채 검설린이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그만해, 이제.”

지독한 목소리였다.

“네가 이겼으니까.”

검설린은 그 말을 끝으로 힘없이 몸을 무너트렸다. 눈을 감고 고목에 이마를 댄 채 그는 잠시간 침묵했다. 봄녘의 바람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바람 어디에 생기가 있을까?

봄바람을 맞이하며 검설린은 기나긴 침묵을 지켰다.

강철 같던 사내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의 품에 가려진 채로, 서문윤 또한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장시간 침묵했다.

허무하다.

그것은 그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서문윤이 쓰라린 웃음을 흘렸다.

“왜 제게 그리 구셨습니까?”

그가 저를 아프게 했다.

그가 저를 지독하게 상처 입혔다.

눈물을 흘리면서 서문윤은 검설린을 향해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검설린이 그 때 눈을 감은 그대로 중얼거렸다.

“고독이 나를 품었고, 그것이 내 오랜 동반자였다.”

뼈가 시리는 목소리.

귓가에 흩어지는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심장이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불운하게도 너에게 정이 들었지.”

조소와 함께 검설린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야.”

다른 선택지는 없지. 그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무너졌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서문윤은 전율에 몸을 떨며 코앞에 자리한 사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느새 검설린의 얼굴은 고요함을 되찾은 후였다.

“원하지 마라.”

나직한 말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거렸다.

“네가 간절히 원하는 소망을 나는 이뤄줄 수 없다.”

새파랗게 물들어가는 얼굴을 바라보고 검설린이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 어리석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서문윤이 말문을 열었다.

“제게 일부러 못되게 구셨습니까?”

그 말에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변화가 두려우십니까? 사람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답을 바라는 청년의 일그러진 얼굴. 그를 마주하며 검설린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네 생각대로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마라.”

그것은 폐부에서 쏟아져 나온 목소리였다.

“나는 내가 상처받느니 차라리 너를 해하고 싶었다.”

뼈저린 말이 서문윤의 숨결을 멈추게 했다.

그는 얼어붙어 검설린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씁쓸한 조소가 서린 그의 얼굴을, 서문윤은 한참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리고 그 끝에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아직도 의형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호칭에 검설린은 결국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의형, 이 아니잖아.”

아아. 탄식이 흐르고 서문윤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얼굴을 위로 쓸어 올리며 검설린이 구겨진 종잇장 같은 얼굴로 서문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미칠 것만 같다, 환장할 것만 같다 토로를 하는 듯한 검설린의 얼굴에 서문윤은 희미한 미소로 답을 했다.

“너는 지금 누구를 의형이라 부르는 거야, 대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했는데.”

서문윤은 의형의 마음을 백번 이해했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리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명가의 가르침을 받고 살아왔다. 무인으로 살기 위해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이 흔들리고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아니, 사실은.’

검설린은 거의 호소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어떻게 내게?”

분노인지 울분인지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에 사내는 몸을 떨었다. 서문윤은 힘이 빠진 손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며 지면에 바로 섰다.

검설린 또한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서문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의형.”

서문윤이 속에 담은 말을 골랐다.

‘사실은, 나는 내 삶의 이유를.’

아주 짧은 침묵 끝에, 마음을 정돈한 청년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왜 제게 그리 대하셨습니까.”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제 마음이 후련한지, 쓰라린지 구분을 하지 못하겠다. 바라본 의형의 얼굴은 구겨져 있었으며 서문윤은 그의 눈에 서린 희미한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나는 정말.

추락을 느끼며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리멸렬한 저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도 그는 그런 말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한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

서문윤이 우는 듯 웃는 듯 울먹거리는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의형은 저를 구하지 말아야 하셨습니다.”

스물두 해간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견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리고 무너진 저의 길.

그리고 저를 건진 사내.

원망과 탄식을 담아 서문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알겠다.

‘나는 나의 길을 그에게 맡긴 것이었구나.’

이제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문윤은 그제야 그가 구원한 게 자신의 육신뿐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짙은 시선을 바라보며 내리깐 속눈썹을 떨었다. 서문윤은 침묵하는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듯 쏘아보았다. 평소 두 사람의 구도와는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달싹이는 색이 옅은 입술.

서문윤이 침을 삼키며 붉은 입술 사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을 말을 기다리며, 서문윤은 인내의 한계에 이른 자의 얼굴을 했다.

결국 검설린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나를 그렇게 따르는 거지?”

그를 부여잡았던 손을 거두며 검설린이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가 그런 눈으로 볼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을 하는 사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칼로 배를 찔러 죽음을 맞이할 사람처럼 보였다. 말에서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수치와 경멸이 서문윤에게 전해졌다.

“나는 선한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검설린의 얼굴은 어느새 무덤덤한 표정을 되찾은 후였다. 마음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강렬한 아쉬움에 휩싸인 서문윤이 아, 작은 신음을 흘렸다.

다시 평온을 되찾은 사내의 얼굴은 철벽과도 같았다. 그는 서문윤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여 차분히 말을 내뱉었다.

“이제 피로하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이제 너무 피곤해.”

한마디 말만을 되뇌는 사내의 얼굴에 자리한 쓸쓸함.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차마 그 어떤 말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겨울나무에 몸을 기댄 채, 서문윤은 목구멍에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검설린을 흔들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검설린은 그를 바라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눈을 볼 때마다 그것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일전에 들었던 말과는 다른 어감을 지니고 있었다.

실로도 서글픈 어감을.

긴 침묵이 있었다. 서문윤은 이를 악물며 목구멍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려 노력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면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았다.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았다.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여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서문윤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검설린을 노려보려 애를 썼다. 그 허무함이 가득 찬 두 눈과 마주하려 애를 썼다.

쓸쓸한 바람이 귓가에 스쳤다.

그리고 서문윤은 정적을 깨며 입술을 열었다.

“저희는 장한성에 갈 겁니다.”

허공에 또렷하게 울리는 말. 검설린은 서문윤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백 마디 외침이 있으나, 서문윤은 그 모든 것을 억누르며 단 한 마디 말을 내뱉었다. 비명을 참으며, 탄식을 억누르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장한성에 갈 겁니다. 그게 당신의 길입니다.”

그 옛날 칼을 잡을 때 다짐했던 결의가 있었다.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지 않기로.

‘나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겠노라.’

칼날에 묻는 피를 헛되이 하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여 무인으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서문윤의 눈이 어스름한 불빛처럼 빛났다. 고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의 길이고, 당신을 따르는 건 제 길입니다.”

되뇌는 목소리에 희미한 여운이 감돌았다.

“제가 선택한 길.”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회상을 하는 청년의 얼굴이 흐릿하게 흐려져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검설린은 어느 순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도전적인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서문윤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을 내뱉었다.

“저를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를 책망하는 말이었다.

“제 가치는 당신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리 말을 내뱉고 청년은 잠시간 입술을 다물며 침묵했다. 아니, 그는 덤덤한 사내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두려움을 모른 채 도전적으로 의형을 쏘아붙였으나, 평정을 되찾은 그의 싸늘한 얼굴에 서문윤의 죽었던 두려움이 슬며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무례하기까지 한, 평소라면 한 소리를 들었을 법한 강한 책망의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그의 반응을 본능적으로 꺼리며 몸을 움츠렸다.

거구의 사내에게 호령하듯 말을 쏘아붙였던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무른 모습을 보이는 새파란 청년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어느 순간 비소를 흘렸다. 그는 서문윤의 달아오른 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천생 무인이구나.”

그리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몸을 돌렸다. 매정하기까지 단호한 태도였다.

“어디로, 어디로 가십니까?”

당황이 가득한 얼굴로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말에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설린은 그저 성큼 발을 내딛을 뿐이었다. 불길하다 꺼려지는 북문 근처는 황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겨울의 기색이 가시지 않아, 그곳은 더욱 초라했으며 그리고 쓸쓸했다. 그곳을 걷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면서 서문윤이 아,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를 따라가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서문윤은 그저 앙상한 겨울나무 아래에 멀거니 선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그를 따라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떨리는 숨결. 서문윤이 방황하는 시선을 그의 등에 고정하며 숨을 멈췄다.

“의, 의형.”

더듬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서문윤이 당혹감에 휩싸여 망설일 때였다.

“짐을 싸러 가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서문윤의 눈이 크게 뜨여진 순간이었다.

“이게 나의 길이라는구나.”

뒤이어 들려온 덤덤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몸을 굳히며 어느새 저 앞에 자리한 검설린의 등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작게 떨리는 몸. 잠시간 침묵으로 그를 마주했던 서문윤은, 문득 달음박질을 하여 그를 향해 달려 나갔다.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검설린이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 * *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드리운 그림자다.

본디 가진 것이 없었던 자에게 고독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고독을 지녔던 자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아 가는 것만큼 능멸적인 행위가 있을까? 오래된 벗이 준 추억마저 문드러진 순간,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포기밖에 없었다.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은 다르다.

한 줌 흙에서 나온 몸뚱이의 가치를 가르는 것은 무언가?

‘무상하구나.’

창밖에서 스며드는 한 줄기의 달빛이 발치를 가로질렀다. 창살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유리처럼 투명한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침묵했다. 심문하던 관리가 감탄하리만치 신음 하나 내뱉지 않고 의연했던 사내는,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 심야에 나약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의연한 게 아니다.

‘피로하구나.’

살아가길 포기하고 있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오던 모든 것들이 허상이란 사실을 깨닫고 사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세상에 눈을 감으려 했던 때였다.

“살아라.”

피에 젖은 얼굴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벗이 내뱉은 말이었다.

“아니, 너는 죽을 수 없어. 너에게는 남은 일이 있다.”

그 말을 들으며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직 네게는 남은 업이 있다.”

도대체 나보고 뭐 어쩌라는 말이냐?

처절한 절규와도 같은 말은 그러나 흐트러지고야 말았다. 힘겹게 웃는 오랜 벗을 향해 그는 일그러진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10년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 이러지 마라.’

문득 깨달은 일이었다. 어느 날 고난한 길을 걷던 중, 서문윤과 검설린이 근처 민가에 하루를 묵기로 한 때 그는 “힘들지 않느냐.” 문득 그리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때 서문윤이 그를 향해 웃으며 답했다.

“의형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때 거짓말처럼 깨닫고야 만 저의 실수.

“그래도 저는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새까만 눈을 보는 순간 검설린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의형의 옆에 있을 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그리 말하는 선량한 청년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비참함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그날 밤, 회한에 사로잡혀 그는 얼굴을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관리이던 시절에 만났던 선량한 사내 하나가 있었다. 예전에 서로를 공격하지 않으면 목이 잘려나가는 풍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벗을, 스승을, 제자를, 동기를 팔며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유월에 꿋꿋이 저 자신을 지키던 이들도 있었다.

환멸을 느끼며 고향으로 내려간 서문린은 예전의 그의 동료였다. 고지식하다고 평할 수 있을 만큼 제 맡은 일에 성실했던 사내.

황하에 서성이던 청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서문린의 자식인 것을.

길게 두고 지켜보아야 하는 환자라 한들 처방전을 써주거나 주기적으로 왕진을 오가는 것으로 해결했던 검설린은, 그를 깨달은 순간 지닌 바 철칙을 깨고 서문윤의 다리를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후회하고야 말았다.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던 그간의 6년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서문윤의 존재는 몹시 낯설었다. 그는 제 앞에 앉아 같이 밥을 먹었고, 가끔은 같은 방에서 숙식을 행하곤 했다. 대화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았으나, 타인의 존재를 주지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저를 올려다보는 강아지처럼 새까만 눈동자. 존경을 담은 눈은 그 옛날의 기억을 상기시켰으며, 그리고 야멸쳤던 생애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게 이러지 마라, 제발.’

천천히 스며든 사람의 정. 그제야 검설린은 제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문윤을 데리고 다니지 말았어야 했다.

그를 서문세가에 돌려놓은 뒤에, 그저 검진으로 고쳤어야만 했다. 시간은 느릴지라도, 그래도 다리는 고칠 수 있었을 터인데.

후회하고 후회하는 일이었다.

홀로 남는 것에도 각오가 필요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온기에 무너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함께한 시간이 그에게 사람의 온기를 전했다. 그저 동행이라고만 생각했던 관계에 서서히 신뢰가 쌓여만 가고, 검설린은 저를 의형이라 칭하는 청년을 말리지 못해 방관했다. 저를 향해 반짝이는 신뢰의 눈이 나쁘지 않았다.

의형이라고 말하는 그 어린 청년이 귀여워 보였다.

두 번이나 안락한 삶을 떠나보냈음에도, 미련하게 저는 사람을 품을 생각을 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날 검설린은 마음먹었다.

‘떠나보내야 한다.’

이미 마음을 먹은 일이었다. 검설린은 또다시 사람에게 정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하며 다짐했다.

최대한 빨리 그의 다리를 고치리라.

그를 한시라도 빨리 제 곁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부질없는 희망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검설린의 아슬하지만 나름대로 잘 진행되던 계획을 망가트린 사건이 벌어진 것은.

그 개자식들을 다 죽여버려야 했지.

잠에서 깨어나고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몸을 웅크렸다. 한동안 잠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을 꾸몄던 장한성주가 붙잡혔으니 납치의 위험으로 멈추었던 의원 차출도 다시 진행할 수 있었다. 서문윤이 황재천에게 일이 해결되었으니 걱정 말고 공문을 돌리라 주지해서, 급했던 건전성의 상황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였다.

검설린은 오랜만에 세 시진이 넘도록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과거의 악몽을 꾸었다.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곤, 검설린은 길디긴 숨을 내뱉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릇푸릇한 기색이 가득한 새벽에 희미하게 뜬 달. 겨우내 앙상하게 변한 나뭇가지에 푸른 새순이 돋고 있었다.

9년째의 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짧고 높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간 그는 침상 위에 앉아 침묵을 지킨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 끝에 검설린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그 새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럴 수도 없었고.

* * *

하나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 때때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사람의 주관은 변하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타인의 보편적인 기준과 차이가 클 수도 있겠지.

검설린과 운표선에게는, 그리고 그들에게는 벗이라는 말이 그랬다.

이미 그날에 산산조각이 난 파편이 되어버린 관계다.

그날 이후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벗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였다.

“살아라, 살아서 너는.”

생존의 고통을 외면한 채 소중한 목숨을 붙들려 한다든가.

“나는 술에 취한 진흙처럼 하계를 흐느적거리며 10년의 끝을 기다리겠다.”

벗을 향한 원망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끝끝내 업을 던지지 못한다든가.

“병신 같은 세상, 나도 병신같이 살다 뒈지련다.”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든가.

“두견새 소리 반가운 마음에 뒤돌아보니 아련한 새벽달만이. 그리운 이름은 이른 새벽에 이슬마냥 한순간 사라져버렸구나. 밤비단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손수 수의를 짜겠노라.”

혹은 죽은 벗을 위해 복수를 꿈꾼다든가.

자포자기하여 관직을 내팽개치고 낙향한 후, 검설린은 운표선에 한정하여 얄팍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벗이라는 관계마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던 때였다. 아니, 애초에 제게 업을 부과한 사내가 바로 그 벗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마음에는 잔여한 그 옛날의 정이 있었다.

적어도 저 사내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그리 믿는 마음이.

그러나 검설린은 제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 데이고도 아직도 멍청하게 행동하지, 너는.”

스스로를 향해 야멸찬 말을 터뜨리며 그는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다. 떨어져 있던 6년의 시간은 강산은 아니지만 사람 하나 정도는 충분히 바꿀 만한 시간이었다.

이청우가 자신이 사영귀를 자칭한 이유를 고백하고, 검설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예감을 신뢰했다. 생사를 헤맨 자의 예감이라 하면, 사실은 그저 감이 아닌 학습된 지표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더군다나 운표선은 꽤나 위험한 인간이다.

운표선을 이끌고 방에서 뛰쳐나온 검설린이 그를 향해 추궁했다. 운표선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였으나 이어지는 윽박에 못 이겨 상황을 설명했다. 숨길 것은 숨기고, 알릴 것은 알리면서.

말을 들은 검설린은 한참을 침묵했다. 상념에 빠진 검설린의 얼굴을 보며 운표선은 잠시간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태연한 모습을 되찾았다.

이윽고 이어진 것은 불편한 심기가 아래에 깔린 낮은 목소리였다.

“너는 교활하니 여러 개의 굴을 파놓았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인데?”

“농담 집어치우고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걸. 지금 상당히 화가 난 상태거든.”

가당찮은 말에 검설린은 미간에 눈썹을 꿈틀대며 운표선을 격렬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귀공자의 얼굴에 태연한 빛이 흘렀다. 그는 익숙한 듯 그 살기 어린 시선을 넘기며 검설린의 말을 기다렸다.

거칠게 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네가 잡은 연줄이 이 태부냐?”

빙긋 웃음을 흘리며 운표선이 입술을 달싹였다.

“확신하고 있으면서 되묻는 것도 웃기지 않느냐.”

아까 전부터 그의 태도는 몹시 의뭉하여 검설린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회피하고 있었다. 능글맞은 사내의 말에 화가 폭발한 검설린이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이를 악물었다.

“너!”

소리를 지르려다가, 안에 자리한 이를 생각하여 목소리를 낮추곤 검설린은 흉흉한 기운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바른대로 말해.”

운표선이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피했다. 그를 바라보는 얼굴이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장한성주의 종아리를 관통시킨 이유는 뭐냐?”

쉬어빠진 목소리의 끝이 갈라져 있었다. 그 말에 운표선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을 들이대는 사내를 봐줄 만큼 성격 좋은 호인은 아니다, 나는.”

그리 말하고 그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린 다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만한 시선을 검설린에게로 돌렸다.

“너와 다르게.”

그 말은 차디찬 냉소가 서린 것이었다.

그 말에 위축되지 않은 채 검설린은 자신을 비웃는 오래된 벗을 향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사지의 힘줄을 다 잘라놓으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덤덤한 목소리에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너 저놈을 죽이려 한 게 아니었잖아.”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운표선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오래된 벗은 그를 향해 짙고 강렬한 눈을 고정하며 들끓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앞길이 창창한 저 청년의 무인으로서의 생명을 끊어놓으려 하는 이유가 뭐냐.”

딱딱하게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 운표선은 답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 모습에 결국 검설린은 화를 참지 못하고 운표선을 향해 분노를 내뱉었다.

“너 이 새끼, 건전성으로 온 이유가 뭐야?”

운표선은, 그러니까 그의 옛 벗은 함부로 일을 처리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검설린이 더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는 머리까지 치솟는 열기에 돌아버릴 것만 같은 심정으로 그를 향해 집요한 시선을 내보였다.

그 누구도 아닌 운표선이 자신을 향해 뜻 모를 일을 꾸몄다는 것이 그의 화를 걷잡을 수 없게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내를 바라보며 운표선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군.”

사내는 말을 되뇌며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너라면 알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뒤늦게 말을 내뱉는 운표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침묵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시선이 뺨을 찔렀다.

그 모습에 운표선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너를 배신한 것이 아니다.”

그리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을 알지만 나는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지, 그리 말을 하며 운표선은 고개를 숙이면서 빙긋 웃음을 흘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에 자리한 노여움은 서서히 풀려, 어느새 그는 이성을 되잡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표선을 바라보는 시선이 짙었다.

운표선은 문득 검설린을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하나 명심해. 네가 자포자기하곤 낙향의 길을 떠난 것만이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의 눈은 드높고도 청명한 가을 하늘과 같았다.

“이미 다른 사람들도 선택을 마친 후지.”

시리도록 맑은, 그리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쓸쓸한 하늘.

“린아.”

그 말은 차라리 다정하기까지 한 어감이었다. 검설린은 그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운표선을 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옛 벗을 향해 속삭였다.

“너도 알겠지만 어떤 사람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

듣기 싫은 이야기다.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사내를 향해 운표선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불운하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부질없는 이름 석 자를 타인의 머릿속에 박기 위해 애를 쓰지.”

검설린의 얼굴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설린아, 너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선택은 도피였으나, 나의 선택은 다르다.”

운표선은 그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탁, 손에 든 접선을 접어 손바닥에 올리며 운표선은 묵직한 저음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공을 세워 나의 과를 덮기로 했다.”

그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속죄의 길.

그는 그리 말을 내뱉으며 싸늘한 웃음을 흘리면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냉소가 가득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분노를 터뜨리거나 그를 향해 책망의 말을 쏟아내지 않았다. 무엇을 더 어떻게 말을 하랴.

그 또한 운표선의 마음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더 나은 길을 가려 발버둥치는 불쌍한 사내. 검설린은 눈을 감으며 짧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운표선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정녕 옳고 바른 길을 걷고 있노라 확신할 수 있느냐.”

그 말을 들은 순간 운표선은 돌연 정색을 하며 얼굴을 딱딱히 굳히곤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씁쓸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있었다. 검설린은 감았던 눈을 뜨고, 유리처럼 투명한 눈으로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너는 저 청년의 간절한 말 위에 네 신념을 두었구나.”

여유로웠던, 아니 여유를 가장했던 운표선의 얼굴이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준한 무인 하나를 꺾어가며 너는 네 뜻을 이루려 했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하게 그들이 보아왔던 것이었다.

“이래서 신념이란 지리멸렬하다.”

너무나 익숙하게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것.

검설린이 허무한 눈으로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한때의 그들이 질색을 하며 거부했던 것.

“장안사준은 8년 전 사라진 것과 다름없겠지.”

그 말에 운표선은 창백한 얼굴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검설린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가 새파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운표선은 항의하려는 듯, 아니 무언가 속에 억눌린 말이 있는 듯 검설린을 향해 격한 시선을 보냈으나 한동안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끝에, 죽였던 화가 폭발한 듯 갑작스럽게 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 거칠게 쉬어빠진 목소리. 운표선은 검설린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서문윤,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네가 뭔 짓을 했어? 네가 현실과 맞닥뜨리기 싫어 도피한 것 때문에 저 아이가 무슨 상처를 입었나? 저게 네 최선이야? 이 새끼야! 정신 차려. 너야말로 과거 장한성에서의….”

그 순간 검설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 새끼가!”

그리 말을 내뱉으며 검설린은 운표선의 멱살을 잡아 그를 문을 향해 내던졌다.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삐걱 소리를 내던 오래된 문은 결국 와그작 무너지고야 말았다.

바닥을 구르는 운표선을 죽일 듯이 내려다보며 검설린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끅끅 웃음을 흘리며 운표선은 검설린을 향해 도발적인 시선을 내던졌다.

그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겠다는 시선을 품으며 검설린은 이를 악물었다.

저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서문윤을 억지로 외면하며 검설린은 느릿한 한숨을 내뱉었다.

* * *

지리멸렬한 이야기다.

이기적인 마음이었으며, 굳이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 개인의 서사였다.

검설린은 마음속 자리한 수많은 욕망을 억누르며 싸늘한 얼굴로 황재천을 바라보았다.

서문윤에게 장한성으로 가라, 그 말을 듣고 검설린은 바로 치소로 나섰다. 인간적인 면에서 황재천은 딱히 신뢰를 할 수 있는 자라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검설린은 그의 유능함만큼은 인정했다. 황재천은 건전성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며 정무를 보는 중이었다.

그는 검설린의 등장에 올 것이 왔다는 사람마냥 손에 든 붓을 내려놓고 침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 말에 검설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장한성으로 가겠다.”

그 말에 황재천은 한동안 답변을 하지 않았다. 검설린은 무심한 눈으로 황재천을 바라보며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원하는 게 무언가.”

침묵 끝에 황재천은 갈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그 말에 검설린은 몸을 멈칫했다.

“이제는.”

“…….”

“우리의 관계는 그런 말만이 오가는 것이 되었구나.”

황제천의 얼굴이 새파래진 순간이었다. 그는 무언가의 약점을 찔린 듯 이를 악물며 검설린을 향해 들끓는 시선을 보냈다.

나는, 쉰 목소리로 황재천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그러니까.”

검설린은 그의 말을 매정하게 잘랐다.

“네게 빚을 얘기하지 않겠다. 어차피 먼저 도망친 것도 나였으니. 과거를 파는 것도 구차하겠지.”

그 말을 하는 사내의 얼굴은 감정변화 없이 차분했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황재천이 숨을 죽였다.

아, 이것은 옛날의 영화를 불가피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다. 황재천은 어느 순간 그 청수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설린을 향해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그것은 과거의 은원이 담긴 시선이었다.

이제 와서 제게 죄책감을 안겨주려 하는 사내를 향해, 황재천은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반항의 뜻을 드러냈다.

이제 와서 사과를 하라고?

이제 와서 그런 말로 내 마음의 여린 부분을 건드리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

황재천은 검설린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목구멍에 치솟는 말을 삼켰다.

이제 너무 늦었어, 당신은.

사죄를 구하는 것도 때가 있다.

그리고 조소를 하는 사내의 귓가로 덤덤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이제 와서 그 옛날의 정을 얘기하는 것도 네게는 신물 날 테고.”

그 말에 황재천은 짧은 침묵을 지켰다.

시퍼런 달빛이 사내의 옷을 스치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는 가면 위에 서느런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재천은 홀로 남은 청사에 우두커니 선 검설린을 향해 쓰라린 미소를 흘렸다.

언젠가 저 사내를 바라보며 이리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 사내가 갑옷을 입지 않는 때를 생각할 수 없다는.

황재천은 문득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거 아시오?”

검설린이 침묵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황재천은 의자 등받이에 끼익 소리가 나게 몸을 기울이며 검설린을 향해 음울한 시선을 보냈다.

“…당신의 그런 태도가 사람들을 부추긴 것을.”

그 말을 하는 사내의 얼굴에 비소가 흘렀다.

“당신의 오만함이 사람을 자극하지.”

검설린을 비난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사내는 회상에 짙게 잠긴 얼굴을 했다.

“그대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자야.”

그 말에는 차마 가늠할 수 없이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봄녘의 바람처럼 흘러가는 작은 목소리로 황재천이 중얼거렸다.

“적을 사서 만드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검설린의 눈은 여전히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은 스스로 당신의 몰락에 기여하였소.”

그 말을 내뱉고 황재천은 짧고 높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래, 이제 그리 말해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이지.

검설린은 잠시간 황재천의 동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을 지켰다. 덤덤한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관료였던 시절과 달라진 바 없이 그는 황재천의 앞에 서 있었다.

쓰라린 웃음을 흘리는 사내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떨리는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검설린은 아주 짧은 침묵 끝에 몸을 움직였다.

그는 두 손을 허공에 하나로 모으고 몸을 숙이며, 황재천을 향해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것은 민초 검설린이 관리 황재천에게 부탁하는 말이오. 국경을 수비하고 사람을 지키는 일은 관리의 의무.”

그것은 황재천이 처음으로 보는 검설린의 낮은 자세였다. 처음으로 보는 그의 고개 숙인 모습.

이어진 말에 황재천은 입술 사이로 탄식을 삼키고야 말았다.

“장한성으로 최소한의 지원을 부탁드리오.”

아, 나는 정말.

‘…무엇을.’

황재천은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결국 그곳에 가는 건가?”

새벽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황재천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를 바라보며 그 아래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는 그 얼굴, 그의 모습.

황재천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대가 그곳에 가지 않기를 바라였네.”

그것은 진실된 마음이었다. 암계나 술수가 없는 진실된 마음.

이제 와서 믿어달라 바라기에 민망한 말이지만.

“사영귀의 정체를 알고 이 상황을 짐작하며 두려워하였어.”

쓸쓸한 얼굴로 황재천은 검설린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침묵은 짧고도 길었다. 마주치는 두 눈이 마음을 알게 해주었다.

정적을 깨고 황재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시오.”

그리 말하며 황재천은 어느새 되찾은 관리의 얼굴로 제 앞에 선 백의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관리 황재천은 민초 검설린의 소청을 받아들이리다.”

* * *

조정의 인가를 받지 않은 성주의 말은 따르지 않겠노라. 그리 매정하게 말을 하며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던 하동하서 절도사가 뜻밖에도 물자와 약재를 지급하겠다는 공문을 장한성에 보냈다. 장한성주 이청우는 그에 의아함을 느꼈으나, 운표선이 어떤 힘을 쓴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는 납득을 했다.

“저의 무례를 알고도 이리 도와주시다니, 저는 실로 감읍드린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운표선은 감격에 젖어 고개를 조아리는 사내를 그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옆에서 검설린은 장한성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운표선의 보증으로 의원이 납치되지 않을 것을 확인받은 황재천은 의원을 차출하려 인근에 자리한 여덟 개의 성에 공문을 돌린 후였다. 넓게 트인 군로로 하나둘씩 빠르게 의원이 모이고, 검설린과 서문윤은 장한성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중원에서 이름 난 북성의 방문. 이질을 고치리라 장담할 수 없다 한들 이청우가 구름 위로 날아갈 것처럼 신이 나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정말 진흙으로 얼룩진 난잡한 진창 속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악착같이 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떠나가기 직전의 밤이었다.

“오, 오늘도?”

방에 들려던 서문윤은 제 방에 따라 들어오는 검설린에 놀라 비틀거리며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는 문턱에 몸을 기대선 채 묵묵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볍고 긴 침의를 걸친 채 자리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달빛이 드리운 그의 수려한 얼굴을 잠시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더 본다면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지금도 흐트러져버린 모래성이다, 그것은.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질 것만 같은 착각이 이번에는 강하게 들었다.

매일 밤 바빠도 짬을 내어 목욕을 하는 의원의 조수의 늘어진 머리칼이 살짝 젖어 있었다. 검설린은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잠시간 바라보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서문윤이 손에 쥔 수건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이어진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그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터는 손길에 침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의형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지레 짐작했던 서문윤은, 그의 생각 외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 동요를 내보이고야 말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일을 감내하려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서문윤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검설린은 다정한 사내가 아니었다. 남의 시중을 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만한 사내였으며, 잠자리 상대를 챙겨줄 만큼 섬세하거나 배려심 강한 이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 관계에서 꽤나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제 등 뒤에 앉아 머리를 말리는 사내의 존재가 자꾸만 신경 쓰여, 서문윤은 나무토막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서문윤이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경직시킬 때였다.

“미지의 병이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서문윤은 몸을 멈칫했다.

“타클라마칸 사막 인근의 도시 몇 개를 괴멸시킨 병. 증상은 알지만 완치에 이르는 치료법을 알지는 못한다. 아마 유목민인 회흘이 서역과 무역 중 옮겨 온 병이겠지. 중원의 병과 달라 중원인들에게 어찌 작용할지도 몰라.”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운남에서 있었던 남만의 전염병과도 달라.”

서문윤은 그 순간 사내의 다정함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저를 말리려 함을 알 수 있었다. 고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따르겠느냐?”

그러나 서문윤은 검설린의 마음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의형이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문윤은 그를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예, 따를 겁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하며 서문윤이 고요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뜻을 밀고 나아가겠다는 청년의 말에 검설린은 짧은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은 수건 너머의 손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깨닫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귓가에 이어졌다.

“죽는다면 네 유골은 부모의 품에 돌아가지 않아.”

무언가를 예감하며 서문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나는 네 죽음에 곡을 할 시간이 없을 거다. 장례도 치루지 못한 채 네 시체는 다른 환자들과 섞여 태워질 것이다. 한 줌의 재로 남은 유골은 땅에 묻혀 비석조차 세울 수 없으리라. 네 죽음은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고, 네 헌신은 아무도 높게 사주는 이가 없을 것이다.”

단단한 손이 머리에서 거두어졌다. 수건을 손에 꾹 쥐며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 끝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따르겠느냐?”

서문윤은 덤덤한 목소리로, 또다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을 했다.

“따를 겁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한동안 그 어떤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청년은 그 침묵 속에서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더 이상 등 뒤에 있는 사내가 두렵거나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감은 분명 전해졌으나 서문윤은 어느새 마음을 넘어 몸까지 잠식했던 긴장을 푼 뒤였다.

더 이상 검설린이, 아니 그가 내뱉을 싸늘한 말이 무섭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 끝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이가 어리다.”

이 마음을 무어라 해야 할까. 봄날의 훈풍과도 같은 목소리가 마음을 드나들었다. 서문윤은 우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네 나이가 어리다. 스물넷이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척 어려.”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서문윤만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은밀하게 숨겨진 간절한 마음이었다. 검설린은 그가 장한성으로 가질 않기를 원하고 있다.

사지를 앞두면서도 서문윤은 두려움이나 긴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묘하게 들뜬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의형과 그다지 크게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 말에 자그마한 한숨이 흘렀다. 서문윤은 그의 표정을 짐작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는 얼굴을 구기며 환장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뒤통수를 쿡쿡 찌르는 시선이 느껴져 서문윤은 간신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뒤이어 철이 없는 어린애를 꾸중하는 듯한 목소리가 서문윤에게로 떨어졌다.

“그 나이대의 12년은 노인의 30년보다 더 귀중하고도 큰 것이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 말에서 나온 숫자에 놀란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12년?

‘12년이라고?’

겉으로 보기에는 대여섯 살밖에 차이가 안 나 내심 검설린의 묵직한 말에 반항심을 작게 가지던 서문윤은 그의 나이를 듣고 놀란 기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12년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나이 차이에 서문윤은 그제야 그가 제게 종종 보냈던 철이 없다는 듯한 시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문윤이 잠시간 당황해 머뭇거릴 때였다.

“고향에 가족이 있지 않느냐?”

검설린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은 짙은 과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잠시간 무언가의 상념에 잠겨 머뭇거리다가, 손에 쥔 수건을 바닥 위에 내려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를 사랑하는, 너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집이 있잖아.”

평소에 단호하던 그의 말버릇과는 꽤나 괴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그리고 서문윤은 헤매는 사람의 말을 칼처럼 단호하게 끊으며 읊조렸다.

“사람은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 것으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말이 이어졌다.

“가겠습니다.”

그것은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처럼 올곧았으며, 뿌리 깊은 백송(白松)처럼 흔들림 없었다. 등 뒤에 사내의 시선이 느껴졌다. 서문윤은 그의 손에 물기가 어느 정도 제거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잠시간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끝에 그는 몸을 돌려 그의 의형의 얼굴을 마주했다.

사내는 몹시도 복잡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믿음을 배신하고 다시 바로 세운 영혼을 꺾어버렸던 사내. 병을 주고 약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저를 살리고 또 마음을 죽이려 든 이.

서문윤은 어둠 속에서도 우아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내의 얼굴에 취해 잠시간 시선을 그에 고정했다. 검설린은 묵묵히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문윤은 손을 들어 검설린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평소에 칼처럼 냉랭하고도 또 타인에게 험악했던 사내는, 그의 손길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얼굴을 내어주었다. 사람에게, 그리고 무인에게 가장 꺼려지는 부위. 부드러운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서문윤은 문득 굳은 얼굴로 그의 뺨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심한 눈이 그를 향했다.

서문윤은 건조한 바람이 부는 눈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아직도 밉습니다.”

차라리 마음이 아예 없었더라면 배신감이 이리 크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그 일은 애틋한 마음이 제게 스며들었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2년의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연심이 하룻밤 새에 허상이 되어버리고 서문윤은 진창에 처박혀 허우적거렸다.

아무리 그에게 다른 속사정이 있다 한들, 그가 사람의 정에 거부감을 느껴 방황하여 일을 저지른 것이라 한들, 서문윤은 그 일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과거가 아무리 비참하다 한들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그는 쓴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정을 느끼는 제가 더 밉습니다.”

그럼에도 서문윤은 그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고요한 바다 같은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알 수가 없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수많은 타박, 도대체 제정신인 거냐는 말을 들으며 속으로 그에 동의했었다.

제정신이 아닌 게지. 제정신일 리가 없다.

사실은 아직도 그의 과거를 알고 싶다. 검설린이란 사내를 더 깊게 파헤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상념에 사로잡힌 청년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서문윤은 손목을 붙잡는 손에 흠칫 놀라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 얼굴을 더듬던 손을 붙잡아 내리며 검설린은 서문윤의 강아지처럼 새까만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나는 네가 부럽다.”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서문윤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서문윤은 입술을 덮는 뜨거운 입술에 몸을 흠칫했으나 이윽고 눈을 꾹 감았다.

육중한 몸이 몸을 짓누르자 서문윤은 잠시 머뭇거리며 엉거주춤 손을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등 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뜨겁고 말캉한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고 서문윤은 그의 날개뼈를 긁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입속에서 퍼져 나간 쾌락이 짙어 숨이 가쁘게 흘렀다.

기나긴 입맞춤 동안 서문윤은 얇은 침의 한 장에 가려진 그의 몸을 부여잡으며 긴장을 드러냈다.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서문윤은 좁아진 숨통에 으응 소리를 흘리며 어느 순간 검설린을 향해 슬쩍 시선을 보냈다.

사실은 아직도 그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제가 모르는 부분이 더 숨겨져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감춘 부분이 옛날의 자신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막중한 일과 얽혀 있다는 것을 서문윤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았다.

‘아, 나는.’

고요한 밤과 같은 눈과 마주하며 서문윤이 신음을 삼켰다.

그럼에도 저 사내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문득 제 위에 자리한 사내의 얼굴에 자리한 아주 희미한 균열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균열 사이로는 동요하는 영혼이 보였다.

일그러진 얼굴에는 그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밉습니다.”

그리 말하며 그는 손을 뻗어 사내의 부드러운 뺨을 더듬었다. 다리를 더듬던 손이 아주 잠시간 멈칫했으나 검설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의 몸을 열던 손길을 이어나갔다.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손길은 서문윤의 몸을 따뜻하게 달궜다. 느린 숨이 살결을 스칠 때 서문윤은 침음을 흘리며 몸을 잘게 떨었다.

묵직한 물건이 둔덕을 가를 때 서문윤은 길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검설린에게 매달려야만 했다.

그날의 정사는 평소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었다.

대화 없이 이루어진 관계. 간간히 신음만이 고요한 밤을 울리는 그런 소통 없는 결착. 그러나 서문윤은 그날은 더 이상 배척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 전과 다르게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고통은 한순간이었으며, 쾌락은 몸을 뜨겁게 달구고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눈을 마주한 순간 빗장을 풀며 해금되는 마음을 읽었다.

끙끙대는 서문윤의 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곤 검설린은 뜨거운 입술을 마주하며 그 위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가 속삭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곤 그를 노려보았다.

숨결이 섞이는 지근거리에 자리한 채 사내는 청년을 향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몸을 섞는 게 아니다.

청년의 눈가에 주룩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사내가 능숙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윽 소리와 함께 떨리는 몸을 짓누르곤 검설린이 그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깨물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배 속.

부서질 것만 같은 몸의 고통.

그리고 마음에 와 닿는 사내의 고요한 눈.

서문윤은 마침내 눈을 감으며 그 집요하고도 아름다운 사내의 눈을 외면했다.

귓가로 음란한 소리와 함께 달큰한 신음이 섞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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