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장안사준(長安四俊)(4)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사람의 숨통을 얼게 만드는 온도를 띤 바람은 청년의 머리를 차게 식게 만들었다.
잠시간 서문윤은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의당에 딸린 처소에 있었다. 운 좋게 의원 몇 명이 번을 서주어 새벽에 잠을 잘 수 있었으나, 유사시에는 몸을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있을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검설린은 구석에 자리한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사병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관부에서 내어준 의당. 그 뒤뜰의 구석진 건물을 의원이 거주하는 처소로 개조하였다. 냇가와 가까이에 자리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허름한 건물. 그 인기척 없는 장소에 불현 듯 등장한 사내.
어둠을 등지고 선 사내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스르릉!
낙엽이 볼을 스칠 때 서문윤이 굳은 얼굴로 검을 뽑았다. 그 순간 청년의 마음에 든 한 줄기의 불안감. 서문윤은 그 순간 숨을 멈추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선표 공자, 운표선, 혹은 장안사준 사영귀, 이름을 알 수 없는 침입자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문윤이 이를 악물 때였다.
“그만.”
동시에 검설린이 말문을 열었다. 서문윤이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검설린은 팔짱을 풀고 기둥에 기댄 몸을 바로 섰다. 피로했던 얼굴은 어느새 다시 평소의 얼음장 같은 것으로 돌아온 후다. 그는 어둑한 눈으로 눈앞에 선 운표선을 노려보았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그것을 깬 것은 느릿한 목소리였다.
“나를 왜 그런 눈으로 노려보지?”
서문윤이 침음을 삼키며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는 긴장을 놓치지 않고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기색의 운표선을, 아니 실제로도 위험한 위치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가 짐작한 정체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저 사내는 멀리해야만 할 것만 같았다. 턱 선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무관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검설린의 입에서 거칠게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엔 왜 왔어.”
그 말에 운표선은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향기와 악취가 한데 얽히더라도 그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은 피어나는구나(芳與澤其雜糅兮 羌芳華自中出).”
“…운표선.”
“이 사람아, 왜 이렇게 운치가 없어졌나.”
경고를 하는 듯 승냥이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운표선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검설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운표선은 잠시간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문득 쓴웃음을 흘렸다.
“향기와 악취가 한데 얽히더라도 향기로운 꽃은 피어나는 법이지.”
“본론.”
“…향기와 악취가 얽히듯 나의 소문 또한 얽혀 이 건전성 변방을 울리는구나.”
그 말을 내뱉고 운표선은 싹 얼굴을 바꾸었다. 그는 정색한 얼굴로 감정이 억눌린 말을 이었다.
“나의 귀에 들려온 나의 오명.”
어둠 속에서 사내의 얼굴이 귀화처럼 빛났다. 그는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나를 사칭한 자를 찾으러 왔다!”
찾으러 왔다!
으러 왔다!
…왔다!
트인 공간을 쩌렁하게 울리는 음성.
검설린은 그를 매서운 눈으로 잠시간 노려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눈에 귀화가 있었다. 그는 잠시간 짙고 강렬한 시선으로 운표선을 응시할 뿐이었다.
운표서는 그저 귀신처럼 창백한 낯으로 그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문득 검설린이 입술을 열었다.
“청매소는?”
서문윤의 몸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운표선은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그 말을 내뱉고 운표선은 성큼성큼 방 안에 들어섰다. 마치 제 집인 것마냥 당당한 태도. 검설린도 서문윤도 그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서문윤이 잠깐, 말을 할 때였다. 문을 벌컥 열고 운표선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헛간도 아니고 이게 뭐냐? 누추하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
서문윤이 혼란에 찬 얼굴로 검자루를 손에 쥔 채 검설린의 안색을 살폈다. 어이할까요. 그리 물어보는 듯한 얼굴. 검설린이 얼굴을 흉흉하게 일그러트린 채 이를 으득 갈았다. 그러나 그는 말을 더 내뱉지 못했다.
폐부에서 쏟아붓는 듯한, 길고 일그러진 한숨이 마당을 울렸다.
* * *
그윽한 향기 짙게 멀리 퍼져 나가니(紛郁郁其遠蒸兮)
안을 가득 채워 밖에 새는구나(滿內而外揚).
질박한 마음, 충정을 보전할 수 있다면(情與質信可保兮)
숨어 살아도 그 명성 빛나리라(羌居蔽而聞章).
동궁사변에 단금지교의 벗을 잃고 사영귀는 시골로 내려갔다 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퍼진 소문, 크나큰 슬픔과 답답함에 사로잡혀 그가 심병을 앓는다는 말.
소문은 퍼지고 퍼져 양주 땅에서 변형되었다.
사영귀가 양주에서 요양하던 중 병세가 심각해져 의원을 모집하고 있다고.
그리고 소문을 입증하듯 뒷골목 구석구석 의원을 찾는 방이 붙었다. 방을 붙인 자도 알 수 없고, 의원을 구하는 자도 알 수 없는, 그저 만나는 장소만을 기입한 은밀한 ‘방.’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일어난 의원의 실종사태에 사람들은 그것이 사영귀의 짓이라 말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찍힌 입장에 내가 미쳤다고 그 사달을 일으키겠느냐? 소문을 듣고 나도 경악한 참이다!”
버럭 소리 지르며 운표선이 얼굴을 구겼다. 언뜻 보면 심약해 보이는 귀공자는 화를 낼 때 불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소문처럼 충신이 아니야.”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과로한 업무에 휩싸인 검설린의 얼굴이 창백했다.
허름한 처소는 원래 광으로 쓰이던 곳이라 방은 넓었으나 필요한 가재가 잘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식탁으로 쓰려 놓아둔 참나무 원탁에 빙 둘러앉은 참이었다. 허름하다 난리를 쳤으면서도 운표선은 의외로 순순히 착석하여 차를 끓였다. 이 밤에 무슨 차냐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하는 검설린에게 풍류를 모른다 부드럽게 면박을 주면서.
그리하여 지금 이 상황이었다.
검설린의 얼굴을 힐끔 살피며 서문윤이 문득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의형의 얼굴이 썩 좋지가 않다.
검설린은 특히 운표선의 등장 이후로 동요한 기색을 엿보였다. 그러나 그는 잠시간 몸을 쉬라는 서문윤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운표선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태자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죽은 사람을 부둥켜 안아보았자 무얼 하랴. 나는 그를 놓은 지 오래다. 황제 또한 몸을 웅크린 나를 안심시키려 운가 상단에 소금을 유통할 권리를 유일하게-.”
“그래서 소문이 퍼진 것에 여기엔 왜 왔어?”
서글프게 들리기까지 한 말을 매정하게 끊으며 검설린이 짜증을 부렸다.
“제기랄! 너 정말 친구가 맞는 게냐?”
운표선이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그저 높고 단단한 성벽과 같았다. 싸늘한 검설린의 얼굴에 운표선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곤란하다.”
소문이 퍼져 곤란하단 것은 모두가 다 안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고 운표선의 얼굴은 돌연 장승마냥 엄중하게 변모했다.
“몹시 곤란해.”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검설린이 무언가 눈치를 챈 듯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는 복면을 다급히 벗으며 말을 내뱉었다.
“청매소가 문제가 되었나?”
서문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저리 쉽게 얼굴을….’
서문윤에게 2년의 시간 동안 보이길 거부했던 얼굴을 검설린은 너무나도 쉽게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또다시 어둑해지는 마음을 고개를 돌려 떨치며 서문윤이 숨을 멈추었다.
사건의 흐름을 따라잡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 그가 의문 어린 눈을 했다.
그런데 청매소는 대체 뭐지?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알지 못하겠다. 내가 가까이 하기 힘들어. 제기랄. 강소성의 일로 안 그래도 날 탐탁찮게 여긴 고우군이 꼬투리를 잡고 압박해….”
으드득.
악물린 소리가 들렸다. 검설린의 흉흉하게 빛나는 눈빛을 보며 서문윤이 의아한 눈을 했다.
아까 전부터 그는 그 의미심장한 청매소란 물건을 찾았다. 알 수 없는 물건의 이름에 또다시 궁금증이 일어 서문윤이 미간을 좁혔다가 곧 체념한 얼굴을 했다.
무어라 말을 해도 어차피 답을 해주지 않을 터인데.
‘내가 강제로 맺은 의형제 관계.’
문득 씁쓸한 마음이 들어 서문윤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슬쩍 숙였다.
‘그는 나를 동생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겠지.’
그나마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믿었던 2년의 시간도 기만이었으니,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게 서문윤이 어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때였다.
“사람들의 견제가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이리로 내려오는데 갑작스레 소문이 퍼져서 놀라… 이런.”
문득 그림자가 진 청년의 얼굴을 바라본 운표선이 혀를 차며 말을 멈추었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이상한 기류를 느낀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눈 아래가 거뭇한 귀공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운표선이 무언가 실수하였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너를 배려하지 못했구나.”
‘응?’
서문윤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게 뭔 소리야?
빠르게 말을 내뱉던 운표선이 갑작스럽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해 못 할 소리를 했구나. 미안하다.”
“괜찮, 괜찮습니다.”
사실 호위에게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일. 그저 제 욕심에 의형의 과거를 알기를 원할 뿐이었다.
서문윤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지?’
사내는 그것이 잘못이라도 되는 양 그를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검설린이 미간을 좁힌 순간이었다. 그는 무언가 불편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하던 말이나 계속해라, 그래서 청매소는 어찌-.”
“너 설마 계속 이런 태도로 이 아이에게 소홀히 했던 거냐?”
빠르고 공격적인 목소리가 검설린의 말을 끊었다. 운표선은 그를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검설린은 흉흉한 눈으로 운표선을 마주 볼 뿐이었다. 대화는 없었으나 서문윤은 무언의 행동으로 그들의 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 귀공자는 분명히 믿어서는 안 될 타인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쩐지 제 편을 들고 있었다.
검설린이 제게 자꾸 말을 숨긴 게 걸렸던 서문윤이었다. 그럼에도 의형에게 똑 부러지게 말을 못 했던 청년은 내심 운표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서문윤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다가 멈칫했다.
그가 슬그머니 검설린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어쩐지 저 사내는 제게 호감을 가진 듯하다. 하는 행동은 기이하지만 검설린에게도 도움을 주고 있고.
‘…나를 어린아이 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명문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런 취급은 처음 받아보는데. 서문윤이 아리송한 마음을 품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내의 뜻이 궁금했다.
운표선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강소성에서 그 사달이 났으면 대충 파악한 거 아니야.”
“제발 입 닥쳐.”
“그러면 내가 나서지 않게 너 스스로 해결하면 되잖아. 그리고 왜 이 불쌍한 아이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느냐?”
검설린의 얼굴이 굳은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그 기색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조개처럼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잠시간 운표선을 노려보던 검설린이 여러 감정이 묻어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너는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운표선은 그저 하하 웃을 뿐이었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 그를 복잡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검설린이 묵직한 말을 내뱉었다.
“나를 동정하거나 혹여 내 삶에 간섭할 생각 따윌랑 품지 마라. 나는 이미 내 마음을 굳힌 지 오래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10년의 끝을 기다렸다.”
서느런 말에 운표선의 얼굴이 잠시간 굳었다. 검설린은 또다시 한숨을 내뱉으며 피로에 지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낡은 의자에서 삐끄덕, 소리가 들렸다.
서문윤은 저를 향한 시선에 몸을 움찔거리며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그를 잠시간 짙은 시선으로 살피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묵직한 저음이 이어졌다.
“파나립이 장안으로 건너올 때 여러 약재와 치료제, 의기구의 제조법을 아는 장인, 제조사, 의학자를 함께 데려왔다. 동서대란 때 다 죽었고.”
“그게 끝이 아니잖아?”
뿌드득.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서문윤은 고요하던 검설린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폭발의 징조임을 청년은 잘 알았다. 그는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의형을 응시했다.
검설린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가 청매소다. 그를 만드는 장인이 죽고 제조서만이 딱 하나 황궁에 남았다. 만인의 죽음은 상관없지만 제 목숨은 아까웠는지, 황제는 그 자신의 서고에 그것을 비밀리에 보관했고…….”
검설린은 뜸을 들이며 답했다.
“…운표선이 빼돌렸다.”
“나로서도 목숨을 걸었던 일이었지.”
일순간 운표선의 얼굴에 뿌듯함이 묻어 나왔다. 서문윤이 순간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 말을 내뱉을 때 운표선이 부모에게 자랑하는 어린아이마냥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치기 어린 성격은 아니어 보였는데.
운표선은 훗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후대에 남긴 가장 큰 은덕이지.”
그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검설린이 입술을 열었다.
“자랑할 만하다.”
“네?”
서문윤이 의아한 얼굴로 검설린을 보았다. 냉랭한 목소리가 말을 되뇌었다.
“그는 이 일을 자랑해 마땅하다. 만인에게 추송받아 마땅하다.”
그답지 않은 칭찬. 당황에 찬 청년을 향해 검설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이 일만큼은 나는 그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잠시간 말을 고르던 검설린이 이윽고 쓰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정말 패망을 무릅쓰고 그 일을 해냈다. 무슨 다짐으로 그가 그 일을 행한다 했을까. 그것은 고우군이 명운을 걸고 막으려 한 일이었다. 나를 용인하는 일과는 수위가 달라. 나는 개인일 뿐이지만, 그것은 유산이었으니까. 난 후대를 남기지 않는 조건으로 살아남은 거다. 그러니 운표선 이자는 도박을 한 거다.”
“…….”
이어진 말에 운표선이 빙긋 웃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수만의 목숨을 걸고 수억을 살리는 짓거리를 그 말고 누가 할까.”
그 말에는 희미한 떨림이 잔재하고 있었다. 그날의 일을 상기하는 듯 검설린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 얽혀 있었다.
서문윤은 그저 그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회상의 끝,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로 만들어낼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운표선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나는 준비된 도박사지.”
그 말에 서문윤이 운표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는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평온해 보이는 미소를.
검설린이 무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그는 청매소를 복원하는 일을 8년째 이어나가고 있었다. 계속 일을 실패했는데, 최근에 희망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곡현에서 사건을 벌인 것 때문에 고우군이 나의 정체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조정을 움직여 운표선을 압박했으리라.”
“맞아, 맞아. 거기다가 소문까지 퍼지니 나로서도 곤란했지.”
“…너는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군.”
그 말에 운표선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수족이 다 잘렸다.”
“여기에 온 까닭은?”
“수족이 잘렸으니까.”
간결한 답에 검설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차게 웃으며 침묵을 지켰다. 운표선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 수족의 앞길은 막아도 감히 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천자를 제외하곤 불가능한 일이다.”
검설린은 그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곤 어느 순간 한숨을 내뱉었다. 운표선 또한 깊은 숨을 내뱉었다.
“대체 어떤 놈인지.”
그 말은 희미한 분노가 묻어 있는 것이었다. 서문윤은 빤한 시선으로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운표선이 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뭐냐?”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으음.”
검설린의 시선이 벗을 향해 시퍼렇게 내리쬈다. 운표선이 그를 슬쩍 피하며 중얼거렸다.
“말해봐라.”
“두 분은 어찌 친분이 있으십니까. 어째서 선표 공자께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을 도운 겁니까. 그리고 의형은 어째서 군문의 무술을 쓰십니까? 어째서 강소성주는 그때 의형을 도왔습니까?”
“잠깐, 잠깐, 잠깐!”
말하라곤 했어도 이렇게 봇물 터지듯 쏟아질 줄이야. 와다다 내뱉은 말에 운표선이 기겁하여 그를 말렸다.
서문윤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지금 아니면 실마리라도 잡을 기회가 없으리라.’
이제는 오기였다.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그의 입으로 듣기를 원했으나, 서문윤은 그것이 요원하단 것을 이제 체감하고 있었다.
검설린은 저자에게 은혜를 입어 유하게 반응했다.
‘그가 없다면 나는 청매소든 뭐든 이야기를 듣지 못했겠지.’
그의 의형은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제게 일말의 실마리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서문윤이 하나의 결심을 품고 단단한 얼굴로 운표선을 보았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운표선이 끙 소리를 흘리며 검설린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오랜 벗의 얼굴은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무섭게 굳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서문윤 네가 감히….”
“아아, 나는 답을 줄 수 없다.”
손을 휘저어 말을 끊으며 운표선이 피곤한 얼굴을 했다. 안 그래도 초췌한 얼굴이 더욱 연민을 살 만치 곤하게 보였다.
서문윤은 굳은 시선으로 운표선을 보았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별로 없을 터인데, 의형은 내게 말을 해주지 않을 터인데. 서문윤이 긴장에 떨리는 숨을 내뱉을 때였다.
뜸을 들이던 중 운표선이 문득 서문윤을 향해 덤덤한 말을 내뱉었다.
“너는 어째서 그것을 궁금해하는 거냐.”
그 말에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그는 잠시간 침묵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한때 모셨던 분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함이….”
“네 눈은 주군의 과거를 원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빠져나갈 틈 하나 없는 말에 서문윤이 새부리 닫듯 입술을 다물었다. 심장이 화살에 관통당한 듯했다.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운표선을 응시했다.
귀공자는 의미심장한, 그러나 호의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가에 띤 자애로운 미소는 어쩐지 불상의 것을 닮아 있었으나 서문윤은 그 미소에 불안감을 느낄 뿐이었다.
운표선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한때 모셨던 분이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겠지.”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겠다. 과거에 너희 둘이 어떤 비사를 숨기고 있는지 묻지 않겠다. 나는 오직 하나의 간절한 소망을 품을 뿐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것은 내가 말해줄 수 없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저 친구의 눈빛을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서문윤이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어째서입니까? 함부로 말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아가야.”
그는 눈썹을 꺾으며 온유한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맥이 빠져 서문윤이 힘없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아가라니요, 저는, 저는 스물넷입니다.”
“너는 정말 임관을 한 무인이 맞더냐?”
운표선은 검설린을 마주하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검설린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고갤 짤막하게 저을 뿐이었다.
서문윤은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멀거니 저를 바라보는 서문윤을 향해 운표선은 나지막한, 그러나 무언가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가 네게 먼저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말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깊은 상처와 연결되어 있는 일인지라, 나는 그 대신에 말을 할 수 없어. 더군다나 그가 너를 2년 동안 곁에 두고 방관했다면, 그리고 그의 지금 얼굴을 네가 만든 게 맞다면 난 더더욱 말을 할 수 없지.”
“운표선.”
“알았어, 알아서 얘기를 하잖아. 너는 여전하군.”
운표선이 짜증 섞인 얼굴로 손을 휘휘 젓곤 다시 서문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서문윤은 그의 부드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어쩐지 위압감을 느껴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러나 하나는 말해줄 수 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한때의 장안사준은 모두 이이에게 빚을 진 적이 있다. 이런, 더 말하다가는 저놈이 내 목을 비틀어 죽일 것만 같구나.”
입안이 바싹 말랐다.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황하에서 서성일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도 큰 판에 끼어든 것은 아닐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운표선의 얼굴은 몹시나도 다정했으나 어쩐지 시선에는 그를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서문윤이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빚 때문에 역모를 감수하고 서고에서 책을 훔친 것입니까?”
그 말에 운표선은 돌연 팔랑나비처럼 가볍고 경쾌한 웃음을 흘렸다. 뜬금없는 행동. 서문윤이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운표선을 보았다.
그는 문득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서문윤을 보았다.
“너는 어찌 손익으로 이 일을 이해하려 하느냐? 이 못난 사람을 장안사준이라며 높게 보며 따르는 사람이 많구나.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천만금을 주어도 불의(不義)한 짓을 하지 않겠노라 맹세를 했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책을 빼돌렸다. 내가 움직인 이유는 이 친구 때문이 아닌 사람 때문이다.”
그의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서문윤은 얕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청년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설린이 그 때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청매소는?”
“아.”
계속해서 물어본 말이다. 운표선이 아차 하여 면구한 표정을 지었다. 검설린이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말을 고르며 잠시간 머뭇거리던 운표선은, 이윽고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는 길에 몰래 접선했다. 짧으면 1개월, 길면 6개월 새에 완성이다.”
말이 끝나는 순간 검설린이 눈을 질끈 감고 아득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 신음에는 오래된 한이 묻어 나왔다. 서문윤은 무어라 말을 내뱉고 싶었으나 내뱉을 것을 고르지 못해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눈을 감은 채 검설린은 한참을 몸을 떨며 침묵을 지켰다. 짙은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아예 사악한 이였으면, 모든 게 위선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저 사람이 저토록 청매소의 일에 신경을 쓰는 까닭은,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까닭이겠지. 파렴치한에게 어떻게 애민의 마음이 있을까?
가끔 그의 선한 모습을 발견할 때 서문윤은 애통한 마음을 느꼈다. 그가 아예 사악한 이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미움마저 마음대로 되지 못하니 이는 나의 어리석음이겠지.’
씁쓸함을 삼키는 청년의 앞에서 운표선이 어두운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를 앞으로 수급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자칫하다간 공장마저 철폐될 위기야. 더군다나 내 이름을 누가 사칭하여 의원을 납치하고 일을 벌였으니, 어이하면 좋으냐. 나는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여야 한다.”
검설린이 눈을 감았다. 운표선이 소태를 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반드시.”
서문윤이 그 옆에 앉아 차분히 들은 말을 정리했다.
‘청매소는 파나립 박사가 죽은 뒤 유실되었던 치료제고 사영귀가 그것을 목숨을 걸고 복원한 거다.’
언뜻 들은 말로는 구멍이 많았으나 흐름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영귀에게서 들은 정보를 조합하여 서문윤이 머리를 굴렸다.
‘오곡현에서 사건을 벌인 일로 고우군이 사영귀를 의심하여 감시하는 중이고, 그는 수족이 잘려 직접 청매소를 만든 곳을 방문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는 소문을 듣고 건전성에 방문한 거구나.’
그렇다면 이 주위에 청매소를 만드는 곳이 있겠군.
결론에 이르러 서문윤이 숨을 멈추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일순간 어둑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정적을 깬 것은 쉬어빠진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온 거냐.”
운표선은 피식 웃으며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이 몸이 불쌍하게도 사악한 고관대작의 탄압을 받아 먹고 지낼 곳이 없다. 벗 좋은 게 무어냐. 우리가 같이 석 달을 보내던 용하에서의 나날이-.”
“용건!”
“당분간 신세 좀 지자.”
서문윤이 검설린의 이마에 빠각 돋는 핏줄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 새끼가!”
처소를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번을 서던 병사들이 놀라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 경비를 어떻게 선 것이냐며 발작을 일으키는 검설린의 면박만 받았을 뿐이었다. 운표선은 너구리같이 쏙 방 안으로 들어가 그 방을 점하고 침상에 몸을 웅크렸다. 그 태연한 모습에 서문윤이 황당함을 느끼고 입술을 떡 벌리고야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면피는 참 장안사준 같다.’
검설린은 서문윤이 일전에 듣지 못했던, 쌍욕은 아니지만 창의적인 방향으로 사람을 비하하는 무수히 많은 욕설을 퍼부으며 날뛰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검설린은 결국 운표선을 쫒아내지 못했다.
* * *
소란이 끝난 후의 일이다.
그는 우두커니 마루에 서 있었다. 무언가 폭풍이 몰아쳐, 서문윤은 어이할 바를 모르며 머리를 꾹꾹 누르는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의형을 바라보다가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부는 황량한 소리가 들렸다.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뒤이어 들려오는 나지막한 한숨소리.
“조금 쉬시지요.”
“때로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게 득이 될 때가 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놀란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보았다.
바람소리는 곧 스산해졌다.
밤을 등진 사내는 피와 온기를 지니지 않은 자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차마 입을 뗄 수 없는 압박감에 시달려 침음을 삼키고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검설린이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서문윤은 그 앞에서 말없이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휘말려 서문윤은 목구멍에 걸린 비명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구제불능으로 날뛰는 철없는 어린것.”
억누른 목소리로 내뱉는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그러나 분노보다 묘한 감상을 느꼈다. 이글거리는 두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그의 이전 행적을 떠올렸다. 서문윤이 그 순간 숨을 멈췄다.
어쩐지 확신이 드는 것만 같았다.
짤막한 침묵.
그 시간에 검설린은 서문윤을 불꽃같은 눈으로 노려보았으며, 서문윤은 그 시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은 어둑했다. 달빛은 의형을 덮었고….
어느 순간 청년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어가시지요.”
덤덤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흉흉하게 눈을 치켜떴다.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짙었다.
그러나 그는 서문윤을 향해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한 채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 * *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깡은 몹시 좋은 게 확실하지.”
“그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감히 절도사가 거주하는 성을 뒤집어놓았는데.”
“아니,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무모해. 이 정도 일을 벌일 사람이라면 대단한 재력가인데, 그만한 권세를 누리고도 나를 모를 리가 없다.”
“…….”
“운씨세가는 나라가 바뀌어도 존재하며 명맥을 이어온 가문이다. 하물며 당금 왕조 교체기 때 운씨세가가 고조에게 수여받은 권한을 생각한다면……. 그럼에도 나를 사칭한다는 이야기는 어불성설. 그자는 미친놈이다.”
“으음.”
“뭐냐.”
“아, 아닙니다.”
“……린. 이놈은 정말 어젯밤 간신히 걸음마를 뗀 어린애인데 나는 의문이구나. 어째서 네가….”
“입 닥쳐!”
“아니, 너는 친구 맞느냐? 어쩜 이리 사람을 안 받아… 아, 알았다. 이불 뺏지 마라. 잘못했다.”
운표선이 얼굴을 팍 일그러트리며 말을 내뱉었다.
“제기랄, 정보망만 제대로 보존되었다면……. 답답해 죽겠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청매소의 일을 들키지 않으려면 그의 앞에서 넙죽 엎드려야 한다는 것을. 숨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
이어진 말에는 서느런 살기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날 사칭한 놈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손을 이용하지 않아. 내 이 두 손으로 확실히 처리할 거다.”
투명할 만치 새하얀 손을 보여주며 하는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의 고요한 눈을 마주하고 침음을 삼켰다. 세간에서는 그를 거북이라고 칭하였으나 어쩐지 서문윤이 마주 본 운표선의 눈은 설표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운표선은 서문윤과 검설린이 거주하는 의당의 처소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거주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 일상에서 서문윤은 운표선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수상하다.’
아무리 제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또 의형과 연이 있다고 한들 서문윤은 운표선을 향한 경계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어쩐지 제게 호감을 가진 듯한 사내를 웃으며 대하면서도, 서문윤은 처소에 들어온 외부인에 칼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사실 서문윤은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지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에.
‘황실에 물건을 납품하고 소금을 유통하는 상단이 아무리 손발이 묶였어도 외부에서 부리는 사람이 없을까? 또 이것이 누명이래도 이 변방에 와서 무얼 어쩌겠단 거지? 그는 혈혈단신에 깡마른 백면서생에 불과한데.’
그러나 겉으로는 그는 운표선을 웃으며 대했다. 어쨌거나 검설린은 그를 곁에 두기를 허했다. 더군다나 운표선은 사소하지만 지금 그들에 있어서 몹시 필요한 일을 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진료로 바쁜 서문윤과 검설린의 수발을 들었다.
그것은 하찮은 일이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서문윤과 검설린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운표선은 제가 자랑하듯 말한 높은 신분임을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알뜰하게 그 둘의 뒷바라지를 맡았다. 그 덕에 서문윤은 호위의 일에 더욱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의당에는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비명으로 호소하는 환자와 우짖는 환자의 가족, 눈에 불을 켜고 번을 서는 병사들이 한데 모여 있는 자리.
사실 황재천은 검설린이 의당에 머무는 것을 몹시 반대했다.
“그들이 진실로 사영귀라는 생각은 안 하네. 그럴 리가 없지 않는가?”
처소에 그 사영귀를 숨겨둔 서문윤이 뜨끔하여 시선을 피했다. 그날 이후로 황재천과 황양양을 만날 시간도 없었다. 황재천은 사영귀 사건 이후 단 한 번만 그들을 찾았을 뿐이다. 아니, 사실 서문윤이 보기에 황재천과 검설린은 그닥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대도 물론 짐작하겠지. 그렇다면 그들이 사영귀라 말을 하여 시선을 모으려는 이유가 무언가?”
“그들이라 말을 하는군.”
그 순간 황재천의 몸이 움찔거렸다. 검설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황재천은 굳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소정의 시간이 흘러서야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단체가 아니면 감히 누가 홀로 그를 사칭하겠나?”
그것은 일전에 운표선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황재천의 말에는 이상한 어감이 있었다. 서문윤이 미간을 좁히며 황재천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어둑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사람의 이목을 끌어모으며 하는 행위가 의원을 모집하고 또 납치하는 일이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어겠나. 그들에게는 환자가 있네. 적어도 그것만큼은 확실해. 수십 명의 의원을 납치할 만큼 중병에 걸린 환자.”
그의 말은 언뜻 듣기에 타당했으며 사실은 서문윤 또한 어렴풋이 짐작한 것이었다. 황재천은 검설린을 어둑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필히 노려질 수밖에 없어.”
검설린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럼 내게 틀어박혀 있으라는 거냐?”
듣기에 몹시 불손한 말이었다. 하동하서 절도사에게 민간인이 내뱉은 말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러나 황재천은 얼굴을 구기면서도 함부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보다 못한 서문윤이 그에게 속삭였다.
“황 숙부님은 하동하서 절도사이십니다. 함부로 대하여 자칫 화를 사면….”
말을 듣곤 검설린은 잠시간 침묵했다. 서문윤은 말없는 그의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꼈으나, 그는 침묵 끝에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네 입장에서는 나에게 미끼가 되어달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내가 아는 너는 그래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자였으므로.”
“…….”
“다시 묻겠다.”
검설린이 고요한 눈을 빛내며 그를 강하게 응시했다. 황재천은 묵묵히 그의 시선을 받았다.
“너는 짐작하는 바가 있느냐.”
황재천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황재천은, 어느 순간 쓰라린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러면 나도 다시 한 번 말하겠소.”
황재천이 눈을 감았다.
“나는 관료요. 민간인에게 내어줄 말은 없네.”
그의 말은 명료한 것이었다. 서문윤은 그 말에 검설린이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검설린은 놀랍게도 그 간단한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는 짤막한 말로 답할 뿐이었다.
“그러면 그대는 그저 나를 민(民)으로 대하시오.”
달라진 말에 황재천이 침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검설린을 말릴 수 없었다.
* * *
“나는 그에게 은을 주었고 그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어찌 연이 이어졌냐는 말에 대한 답이었다. 그 말에 서문윤이 미간을 좁혔다.
“황 숙부가…?”
검설린이 자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너는 내게 왜 그에게 말을 높이지 않냐 말을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마음이 허하지 않는다.”
“…….”
“마음이 허하지 않는데 억지로 존대한들 무에 소용이 있느냐?”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는 예가 아니라 말을 하겠지.”
서문윤이 바로 부정했다.
“의리를 지키지 못한 자에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잘 믿기지가 않습니다. 황 숙부는 제게 무관의 소임을 말해준 자입니다.”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윤아, 너는 하나의 철칙을 마음에 새기고 검을 휘둘러야 한다.”
처음 검을 잡을 때 황재천이 한 말이었다.
“필연적으로 너는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허니 너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임관이 목표였던 적이 있었다.
“무인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한때 살아갈 길이라 생각했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다. 윤아.”
한때 서문윤을 죽이고 동시에 그를 살린 말이었다.
“의리를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말을 높일 이유는 없어.”
서문윤을 상념에서 퍼뜩 깨우는 목소리였다.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검설린을 바라본 서문윤은, 그의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바라보며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무던한 말이 이어졌다.
“말을 높여서 후일을 보존할 마음 따위 없다. 이미 나는 그런 일의 무상함을 보았다.”
검설린은 조소하였다.
뜻 모를 말이 이어졌으나, 서문윤은 그를 향해 묻지 않은 채 말문을 굳게 다물었다. 쓸쓸함이 자리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어느 순간 길디긴 숨을 내뱉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가자.”
침묵 끝에 들려온 말에 서문윤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번을 선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일은 검설린이 도맡아 했다. 그는 검설린의 등을 따르며 목에 걸린 말을 삼켰다.
* * *
하루하루가 나날이 힘들어져 갔다.
의당에는 항상 많은 수의 병사들이 모여 번을 섰다. 처음 사달이 났을 때에 비해서도 월등히 많은 수였다. 그간에 또다시 사건이 일어난 탓이었다.
황재천이 근처에 방을 내려 의원을 급히 건전성에 차출했으나 소문을 두려워하여 거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반발을 누르고 억지로 병사를 보냈는데, 또다시 의원이 납치되었다.
황재천을 노엽게 만든 사건이었다.
개중 납치당하지 않은 몇몇의 의원이 고변한 바는, 군사(軍使)의 서찰을 든 일련의 무리가 다가와 그들에게 특히나 의원이 시급하게 필요한 지역을 먼저 방문하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병사들이 방심한 틈을 타 음식에 약을 타고 의원을 빼돌렸다.
“감히 군을 사칭해?!”
어지간히 간 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아니, 그것은 둘째 치고 군에 쓰는 도장을 민간인이 어찌 위조할 수 있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서문윤은 불현듯 섬뜩함에 몸을 떨고야 말았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느낀 불안감이었다. 갑자기 마음에 시린 바람이 드는 것만 같은 기분.
‘……관료와 관계된 일이다.’
서문윤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어두운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사태의 심각성이 그의 입에서 말을 빼앗았으므로.
그는 가끔씩 일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하며 그들이 빠진 상황에 대해서 파악하려 노력했다.
서문윤의 고뇌가 깊어질수록 검설린이 맡은 일의 과중도 심해졌다.
“조금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쉬고 있잖아.”
하루에 한 시진 반 남짓 잠을 자는 일을 말하는 거다. 더욱 싸늘하고 예민한 기운을 내뿜는, 볼이 움푹 들어간 의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운표선은 마당에서 수건을 말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그를 흘끗 바라보며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는 당신이 습격을 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굴리지 못했다. 그러나 서문윤은 뒤늦게 놓쳤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운표선은 서문윤이 모르는 모종의 일로 검설린과 연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검설린에게 의기구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고 있었고. 그러나 고우군, 이 나라의 재상은 그를 의심하여 감시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경칠승과 대거리를 한 일이 무언가 틀어져 고우군을 자극했으며, 운표선은 지금 자숙하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청매소라는, 들키면 역적으로 몰리는 치료제를 은밀히 발명 중인 상황.
일촉즉발인 상황에 사영귀와 관련된 소문이 퍼져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니, 운표선은 심한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문을 해결하러 건전성으로 왔다고 했다.
허나 수족이 잘린 입장에 혈혈단신으로 이 변방에 와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서문윤은 빠르게 답을 찾았다.
“당신을 미끼로 쓸 예정입니다. 습격을 당하는 때를 노려 실마리를 찾으려고. 당신은 북성이니까.”
걱정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말에 검설린이 침대 기둥에 머리를 대며 눈을 감았다.
서문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긋거렸다. 그의 상태는 몹시 좋지 않아 보였다. 전염병이 도는 것도 아닌지라 기민하게 대처할 필요는 없었으나 단순한 진료를 볼 의원이 없어 목숨이 넘나드는 이가 많았다. 해산에 가까운 여인, 노환에 걸린 노인, 급체한 아이. 자잘하면서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명이 위험할 수 있는 환자가 수없이 많이 의당에 모였다.
이러다가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만 같다.
일손을 돕던 의원 중에서도, 엊그제 하나가 과로로 쓰러져 다급히 휴식을 취하게 한 참이었다.
말이 한 시진 반이지 검설린은 요즘 자다가도 몇 번을 불려 나가 의당에 죽치고 앉았다.
요즘에는 매번 있었던 관계도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문기둥에 몸을 기대어 있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스륵 눈을 뜨며 유리처럼 투명한 눈을 서문윤에 고정했다. 청년의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아.’
청년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흘렀다.
서문윤이 홀린 사람마냥 넋을 잃고 그를 마주했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 평하자면, 서문윤은 복잡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황하에서 빠져 죽으려는 저를 살리고 다리를 고쳐준 자.
그러나 신의를 배반하고 추악한 짓을 저지른 이.
의미심장한 말로 그의 온전한 뜻이 아니었다는 사정을 어느 정도 깨닫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로운 행동으로 사람을 살리는 자.
동시에 장안사준과 연관되어 있으며, 무수히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사내.
하늘을 찌르는 오만함으로 사람을 화나게 만들며, 후일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말을 하는 자.
2년을 함께했음에도 그를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서문윤이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저 자신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검설린이 그 순간 입술을 열었다.
“너는 또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느냐?”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흠칫했다. 그는 숨을 멈추고 검설린의 얼굴을 응시했다.
사내의 얼굴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달빛이 사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문윤은 한참을 그를 바라본 채 얼어붙어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의 말은 사실 자신조차 그 대답을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묵묵히 그 시선을 받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복면에 손가락을 걸었다. 눈 아래를 완전히 가린 복면은 검지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가려진 얼굴을 드려냈다. 서문윤의 입에서 신음이 나온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얼굴은 진흙 속에서 스스로 빛나는 연꽃처럼 고아했다. 형광을 발하는 부드러운 뺨은 흠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서문윤이 그를 노려보던 중 눈을 질끈 감았다.
검설린이 어느 순간 쓴웃음을 흘렸다.
“부질없는 마음.”
서문윤이 몸을 움찔했다. 그 말은 냉정했으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너는 정말 말을 안 들어.”
그 말에 서문윤이 수치심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검설린은 그저 그를 유리처럼 투명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 감정의 원인이 저임을 모르는 것처럼. 서문윤이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제가 어찌하길 원하십니까?”
“뭐가.”
퉁명스러운 말에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상합니다.”
답답함이 웅그려 뭉쳐진, 어쩐지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서문윤이 눈을 흔들며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그저 그가 등진 밤하늘처럼 고요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형광을 발하는 듯한 얼굴. 어둠도 우미(優美)를 죽이지 못해 그는 차라리 하늘 아래로 내려온 천인과도 같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신음과 함께 검설린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서문윤의 시선을 피하며 무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저 네가 그날 내게 입술을 맞출 때 내뱉었던 말처럼 행하면 된다. 나는 네 존경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네 의형도 뭣도 아니야. 네가 느낀 수치와 분노가 거짓이었나?”
그는 투명한 연못 같은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럴 때마다 네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어.”
할 말을 찾지 못해 서문윤은 침묵할 뿐이었다.
“설린아, 수건 다 널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검설린은 스륵 눈을 감았다. 운표선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 상단에 일이 생겨서.”
어둑한 방 안에 침묵이 깔렸다. 참담함을 삼키며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황하 근처를 서성이는 기분이었다. 청년이 마음에 드는 희미한 절망에 떨리는 숨을 내뱉을 때였다.
검설린이 눈을 감은 채로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네 말이 맞다.”
서문윤의 얼굴에 놀라움이 물든 순간이었다.
“예?”
고개를 들어본 검설린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반문에 검설린은 바로 답하지 않으며 뜸을 들였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서문윤이 그를 굳은 얼굴로 바라볼 때였다.
검설린이 중얼거렸다.
“표선이 감시에 숨구멍이 완전히 틀어막혔다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기에 곁에 허한 것일 뿐. 너는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거라.”
“…….”
“낌새가 이상하군.”
서문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설린은 어느 순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지난날의 정을 믿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겠지.”
그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얼굴은 몹시 지쳐 있었다. 서문윤은 그 말에 울컥하여 무어라 말을 내뱉고 싶었으나, 몹시나 피로해 보이는 검설린의 상태에 그저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를 바라보는 무심한 눈이 있었다.
* * *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황양양은 충격을 받은 듯 서문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황재천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 이어졌다. 검설린이 중간에 과로로 코피를 쏟아 서문윤이 기겁하여 휴식을 취하라 말을 내뱉었으나, 그는 손을 내저어 말을 물릴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살인적인 일정을 따라오느라 눈가가 거뭇해진 서문윤에게 휴식을 할 것을 명했다.
“잠시만, 저는.”
쉬려면 저보단 그가 쉬는 게 맞는 게지. 당황한 서문윤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검설린은 짤막한 말로 서문윤을 떼어놓을 뿐이었다.
“너는 할 일이 따로 있지 않느냐.”
검설린은 복면 위의 고요한 눈을 청년에게 고정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를 감시하라.”
서문윤은 사람을 압박하는 그 눈에 억눌려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는 의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가고 있었다. 예민한 심기는 둘째 치고 건강이 염려된다. 서문윤은 휴식을 취하러 처소로 돌아간 후에도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걱정했다.
“저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탄식을 내뱉는 서문윤에 운표선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버려둬라. 저 녀석 고집이 원체 질기잖나. 쓰러져서 의당에 몸을 뉘이면 실컷 놀려줘야지.”
그는 진즉 처소에 자리하고 있었다. 의기구를 삶고 정리를 마친 운표선은 자리에 앉아 어디서 구한지도 모르는 초봄의 배를 아삭아삭 먹고 있었다.
태평스러운 말에 서문윤이 운표선을 노려보았다. 운표선이 묘한 웃음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다.
“그놈 참 생기 넘친다. 청춘이다, 청춘이야.”
그 능글맞은 말에 서문윤은 결국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서문윤의 눈이 어둑한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바빠서 제대로 그를 감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나름 운표선을 주의 깊게 살피던 서문윤이다. 검설린의 확언을 받고 짬짬이 그의 행적을 살피던 서문윤은, 그러나 너무나도 무사태평한 운표선의 모습에 아리송한 마음을 품어야만 했다.
그는 차라리 제가 내뱉은 헛말처럼 오래된 벗과 노닥거리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닌 것이 뻔하건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그러했다.
서문윤이 입술을 감쳐물 때였다. 운표선이 볼을 긁적이며 잠시 그를 지긋한 눈빛으로 보았다.
“너.”
서문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피로한 인상의 귀공자가 잠시 뜸을 들이며 서문윤을 응시했다. 느긋한 듯한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서문윤은 문득 서늘한 예기를 느끼고 몸을 움찔거렸다.
“목에.”
“응?”
운표선이 손을 뻗어 서문윤의 목을 가리켰다. 얼떨결에 목을 매만지던 서문윤은 이어진 말에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붉은 멍울이 보이는구나.”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의형, 제발.”
옷고름을 푸는 손을 잡으며 애원했던 때.
“사람도 있는데 이러셔야겠습니까? 옆방에 들리기라도 하면.”
그것은 거의 울먹거리며 내뱉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일이 과중한데 왜 이러십니까. 쓰러지십니다. 다른 날에 제가 더 노력해서, 읍.”
입을 가린 손이 그의 답을 말해주었다. 그 뒤의 일은 딱히 생각하기 싫었다. 서문윤이 참담함을 느끼며 눈을 닫았다.
입술에 아직도 온기가 감도는 듯했다. 정사가 싫지만은 않았기에 더 비참했다.
추레한 마음을 늘어놓자면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없으리라.
운표선의 시선 앞에 서문윤은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잊었던 미움이 다시 솟아오르고 있었다. 잊으려 했던 수치가 다시 스멀스멀 몸을 잠식했다.
그저 없던 시간이라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는데.
서문윤이 몸을 잘게 떨었다. 운표선의 말이 그에게 다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젯밤 제 위에서 헐떡였던 검설린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개를 들면 마주할 수 있는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 그는 서문윤을 찢어발길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문득 고개를 숙였다.
회상에 빠져 있던 서문윤이 흠칫 놀라 몸을 퍼드덕거렸다. 접문을 떠올리는 순간 입술에 무언가가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희미하게 떨리는 아랫입술을 손으로 더듬었다. 홀씨를 발견하고 서문윤이 아, 소리를 흘렸다.
벌써 봄이었던가.
멍한 눈으로 서문윤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넋을 뺀 채 침묵을 지켰다.
시간이 흘러 마음을 가다듬은 서문윤이 눈을 열어 운표선의 얼굴을 응시했다.
“피로한 모양입니다.”
“음, 그래.”
“가끔씩 상태가 안 좋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납니다.”
서문윤은 눈을 내리깔며 말을 내뱉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목을 손으로 더듬는 서문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운표선이 입술을 열었다.
“그래.”
느릿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잠시간 서문윤을 예의 그렇듯 나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게으른 분위기에 날카로운 예기를 숨기곤 했다. 서문윤은 목 뒷덜미에 쭈뼛 솜털이 솟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그를 미워하느냐?”
“…예?”
뜬금없는 말이었다. 서문윤이 놀라 운표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삭풍이 부는 초봄의 밤을 등지며 서문윤을 설표와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덤덤한 얼굴은 더 이상의 말을 내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문윤은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신음을 흘리며 답했다.
“……미워합니다.”
사실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겠지. 그는 운표선을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어쩐지 지금 이 순간 그리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자존심이 스스로를 할퀴고 있었다. 비참함을 참으며 서문윤이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운표선은 그를 말없이 노려보던 중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정적 끝에 무심한 말이 이어졌다.
“나는 네가 그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에 서문윤은 ‘나는 그를 미워했으면 좋겠다.’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술을 열지 않았다. 굳이 내뱉지 않아도 될 지리멸렬한 말이었다.
운표선은 한참을 서문윤을 그리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았다.
기나긴 정적 끝에 운표선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 네 낙마를 복으로 여겨야 한다.”
“……?”
“궁에서는 살아남기 힘든 성품이로다.”
그리 말을 하며 운표선은 몸을 일으켰다. 서문윤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어진 말에 그는 몸을 움찔거리고야 말았다.
“네가 나를 감시하는 걸 알고 있다. 꼬리 세운 새끼고양이마냥 경계하는 것도. 그런데 너 아예 숨길 생각은 안 하는 게야? 호위직이었다고 했나? 나 원. 그래도 그렇게 티 나게 날 견제할 건 뭐냐.”
“…….”
서문윤은 입술을 조개처럼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태연한 척하려 애써 노력했으나 청년의 얼굴은 눈에 띄게 흔들었다. 애초에 황족의 호위였던 서문윤은 사람을 감시하는 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운표선은 그를 갸륵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잠시 수치심에 서문윤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느끼고 침묵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리고 서문윤이 먼저 한 일은 허리춤에 찬 검을 부여잡는 일이었다. 마음이 들킨 후다. 서문윤은 경계를 세우는 짐승과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운표선은 그런 서문윤 앞에서 잠시간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를 해하려는 게 아니야. 애초에 나를 믿지 못한다면 설린이 날 내쳤겠지.”
“…우연이라 생각하기엔 너무 이상한 일입니다. 하필이면 청매소를 만드는 장소가 건전성 주변에 있고, 소문을 듣고 수족을 부릴 생각 없이 이곳에 오셨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부리던 이들이 감시를 받는다 한들 선표 공자가 움직이는 건 이목을 몹시 끄는 일입니다. 적어도 공자께서 말하신 ‘사영귀의 소문’을 처리하려는 의도가 청매소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는 뜻이 맞다면.”
“똑똑하군.”
이어진 말에 서문윤은 눈은 흔들고야 말았다.
“그래, 맞아. 다른 의도가 있다.”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맹세하지. 이 일은 절대로 설린과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야. 장안사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만약에 내가 너희에게 해를 끼칠 의도로 일을 벌인다면 입에 칼을 물고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려 고꾸라지마.”
그리 말하는 운표선의 얼굴은 성벽처럼 견고했다.
“그리고 정말 그건 우연이 맞아, 제기랄. 청매소 연구는 장안과 최대한 먼 변방에서 진행되어야 할 일이란 말이다. 그리고 제작에 필요한 기술서를 밀수하려면 서역과 길이 트인 토번 쪽에 공장을 지어야 해. 다른 곳은 워낙에 어수선하니 나로서는 별달리 선택지가 없었어.”
“…….”
“내가 왜 이 변방에 직접 왔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주마.”
투덜거리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심중에 어린 뜻을 살피려 잠시간 그의 얼굴을 노려보던 서문윤은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감찰이다.”
쓰라린 말이었다.
“한 달 전 본단이 압수수색 당했지. 서역에서 의서를 밀거래했던 일이 꼬리가 잡혔다.”
운가 상단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상단이었다. 운씨세가에서 운영하는, 소금을 매매할 수 있으며 제한적이나마 서역과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상단.
서문윤이 숨을 멈추며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청매소 공장을 방문할 때도 그저 방문한 게 아니야. 보고도 사람을 몇 다리 걸쳐서 받았지. 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압력을 받는다면 내가 끝까지 비밀을 숨길 수 있을까? 반드시, 기필코 이 일을 해결해야 할 거야. 그에게 꼬투리를 넘겨주지 않아.”
서느런 목소리였다.
“나의 제일가는 수족은 나다, 서문 공자. 가신과 재물이 억류당한 상황에서 가장 믿을 사람은 나뿐이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으며 운표선이 눈을 반짝거렸다.
“너는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명사에게 명예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있어.”
전장에 임한 무관과도 같은 단호한 얼굴로 그는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건 내 자존심 문제다. 장안사준이 뿔뿔이 헤어진 그날 이후 내 찢겨진 자존심을 그나마 더 많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 사람을 돕는 일로 명예를 되살릴 수 있었다. 서문윤. 사족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름을 진창에 떨어트리지 않는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 앞에서 차마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말의 무게에 짓눌려 그는 그저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떨리는 시선으로 그가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이어 내뱉는 말에는 서느런 살기가 묻어 있었다.
“너는 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달빛을 등진 사내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서문윤은 그를 마주하며 목구멍에 치솟는 신음을 욱여넣으려 했다. 동요를 내보이지 않으려 그는 노력해야만 했다.
그리고 운표선은 문득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서문윤, 네가 나를 도와줘야겠다.”
뜬금없는 말. 얼떨떨한 목소리로 서문윤이 답했다.
“예?”
마른 팔에 핏줄이 도드라지게 주먹을 불끈 쥐곤 운표선이 활활 타오르는 눈을 빛내며 말을 내뱉었다.
“이제 못 기다려!”
서문윤은 그저 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나를 사칭한 배후를 밝히고 싶고, 너는 저놈을 호위하는 입장. 네 마음이 어떤지 묻고 싶지 않다. 저놈을 증오하는지 어떠한지 묻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네 성품상 너는 저놈을 지키는 데 목숨을 바칠 테지?”
“…….”
“고지식한 놈! 변명도 안 하는구나.”
서문윤이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를 향해 씨익 시원하게 웃음을 흘리며 운표선이 입술을 열었다.
“기다리는 것도 지쳤다.”
“형님을 미끼로 쓴 것을 인정하실….”
“인정은 무슨 인정! 그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여겨 입 밖에 내지 않은 거지. 혀 아프게 굳이 왜 말하나? 너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구나.”
“의심은 호위의 기본입니다. 무관의 생리에 대해 그리 잘 아시는 분이 기본도 모르십니까?”
“끙, 고집 센 놈.”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겁니까? 할 말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저는 의당에 돌아가봐야겠습니다. 감시도 이미 글렀으….”
“내가 미끼가 되어주마.”
“…예?”
서문윤이 멈칫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우물처럼 볼이 움푹 파인 초췌한 인상의 사내가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의 눈은 검설린처럼 서느렇거나 대놓고 사람을 억누르는 위세는 없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가끔씩 그 부드러운 눈웃음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말을 하기 힘들지만 마음에 걸리는 그런 껄끄러운 느낌을.
운표선이 그를 바라보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서문윤이 그를 노려보던 중 침음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그를 대신하여 북성인 척하겠다는 겁니까?”
“영명하구나. 맞다.”
“…위험합니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사칭을 하였는지 알고.”
“네가 나를 지켜주면 될 것이 아니냐?”
“저는 의형, 아니 그를 지켜야 합니다.”
“서문 공자. 잘 생각해보려무나. 선공이 가장 큰 방어라 하였다. 너 만약에 설린이가 지쳐서 쓰러진다면, 네가 방심하고 있을 때 일이 벌어진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협조를 해라. 내가 친히 위협을 무릅쓴다지 않느냐.”
서문윤이 어둑한 눈으로 운표선을 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그를 마주했다.
그 미소에는 어쩐지 무시하기 힘든 힘이 있었다. 사람을 저절로 굴복하게 만드는 위압감. 부드럽게 몸을 짓누르는 기운은 제왕의 기세를 닮았다.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도 아니나, 사람을 위계로 짓눌러 뜻을 성사시키는 힘.
‘…마치 의형처럼.’
서문윤은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중 신음을 흘렸다. 운표선은 그가 제 제안을 수용하리라 확신하는 듯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서문윤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허락 맡고 오겠습니다.”
“응?”
바로 산산조각으로 깨진 여유이긴 했지만. 생각 못 한 말인 듯 운표선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서문윤이 어느 순간부터 긴장을 떨치며 허리에 힘을 주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 잠깐.”
위세에 눌리는 느낌은 지난 2년간 수도 없이 많이 겪은 일이다. 서문윤은 의형의 온갖 종류의 짜증과 신경질을 겪어보았다. 검설린의 분노에 찬 얼굴도 마주 보았고.
‘이젠 익숙하지.’
서문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아니, 잠깐만? 얘야!”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서문윤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린아이 취급을 하더니 완전 나를 다룰 수 있나 생각을 했나 보지.’
서문윤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당황한 모습을 본 게 은근히 기분 좋긴 한데, 어쩐지 마음이 껄끄러웠다.
‘북성 행세. 미끼라.’
사실은 그만 허한다면 좋은 계획이다. 검설린은 한계에 이르렀고, 그를 지켜보는 서문윤 또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황을 타파하려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맞다.
서문윤이 아리송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이리 껄끄럽지…….’
우물쭈물 물어본 말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도, 사실 억울할 정도로 간단했다.
“해.”
“네?”
“하라고.”
“?”
벙 찐 표정으로 서문윤이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의당.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서문윤이 머뭇거릴 때였다. 검설린이 복면 위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어어으아으애.”
그는 개구기로 입을 벌린 사내의 혀뿌리를 기다란 중지로 꽉꽉 누르고 있었다. 침이 뚝뚝 떨어지며 환자가 두려움에 벌벌 몸을 떨었다. 지난 시간 동안 피로에 젖었는지 검설린이 평소보다 더 예민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할 말은 그것뿐이냐.”
“네? 아, 네.”
“그럼 비켜.”
그 말에 서문윤이 뜸을 들이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정말 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수상한….”
그 순간 검설린이 그를 용암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버럭 소리쳤다.
“하라고 몇 번을 말해! 일손 도울 것 아니면 바쁘니까 당장 기어나가!”
검설린은 그러나 황급히 대야의 수건을 부여잡는 서문윤에 또다시 눈을 부라렸다.
“일손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잖아! 가서 쉬라니까 왜 기어들어오는 거야?”
“그, 그럼 가서 감시를 하겠….”
그 말에 검설린이 와그작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목구멍 안에 푹 손가락을 쑤시며 소리쳤다.
“의당의 수용인원이 쉰 명인데 네 덕분에 적어도 쉰 명은 감시를 하란 말을 잘 들었겠군! 아주 잘했다! 이제 그놈 본명도 치소 누각 위에 서서 소리치면 충분해! 아주 믿음직스럽구나!”
분개해서 내뱉는 말에 서문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을 내뱉고도 아차 한 서문윤이다.
“애초에 네게 맡길 생각도 없었다! 그냥 감시고 뭐고 집어치우고 네 할 일 해. 귀찮게 하지 말고.”
“그럼 왜 그를 예의 주시하라 하셨습니까?”
울컥하여 내뱉은 말에 검설린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목구멍에 손가락이 삽입된 환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검설린이 분통이 터지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젠장, 네가!”
그는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잠시간 서문윤을 짙은 눈으로 바라보던 검설린은 어느 순간 돌연 얼굴을 차분하게 바꾸었다. 서문윤은 폭풍 전 하늘 같은 고요한 눈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검설린은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열었다.
“나가라 했다.”
목소리의 어조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서문윤은 그 말속에 숨겨진 짜증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몸을 움찔했다. 의형은 이제 한계다.
“아어으아으어.”
타액을 턱 선에 뚝뚝 떨어트린 채 환자가 울먹이며 말을 계속했다. 검설린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환자에 다시 집중했다. 서문윤은 제게서 신경을 끊는 검설린에게 차마 더 말을 걸지 못해, 의당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인하지 않기는 했지만, 친구는 맞는가 보지.’
감시대상이라면서, 너무나도 쉽게 승낙하는 모습에 운표선을 향한 은근한 신뢰가 드러났다. 서문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운표선을 의심한 적도 없는 듯 보였다. 바쁜 와중에 검설린이 내보인 태도는 가다듬지 않아 진솔되어 보였다.
‘그런데 왜 감시를 하라는 거야?’
서문윤이 아리송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분명히 그가 먼저 명령한 일이다. 서문윤은 그간 검설린을 호위하는 일도 소홀히 하며 종종 처소에 죽치고 앉아 빨래하고 청소하는 운표선을 예의 주시했다.
그것은 검설린의 운표선을 감시하라는 말에 따른 일이었다. 서문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간의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가!”
그러나 그의 상념은 가당치도 않은 호칭을 부른 운표선에 의해 깨졌다.
아가라니?
스물넷의 지나치게 커다란 아가가 기겁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리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그래. 준비는 다 되었느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운표선의 태연한 모습은 얄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를 잠시간 원망의 시선으로 노려보던 서문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병사를 차출해야 하니 황 숙부께는 사실을 알렸습니다마는 조금은 껄끄럽군요.”
황재천 또한 그날의 일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 후의 반응은 석연찮았다. 그를 믿을 수 없다. 부친의 친구라고 하지만 서문윤은 오랜만에 만난 황 숙부가 예전과 다른 것만 같다는 생각을 종종 품었다.
그럼에도 서문윤은 황재천에게 협조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태는 황재천 또한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으며, 그에게도 크나큰 부담을 안기는 일이었다.
서문윤은 이 일의 배후가 황재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종의 연관은 있을지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겠지. 서문윤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번뜩이며 손에 쥔 검을 세게 부여잡았다. 황재천은 서문윤에게 일에 협조하겠다는 답변은 내놓았다.
운표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그래.”
“…일이 잘못되면 저희가 책임져야 합니다.”
서문윤이 머뭇거리는 얼굴로 운표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답을 했다.
“나는 책임지지 못할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말. 서문윤의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은 잡아주는 것이었다. 그는 길디긴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저지른 일이다.
‘……군부의 도장과 군패를 위조한 것을 보아 상대에게는 군적을 둔 방수(조력자)가 있다.’
군사기밀이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가 되는지 무관이었던 서문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궁내에 복무하는 호위직이었으나 군부의 생리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일은 생각보다 크게 벌어지고 있다.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북성이 외곽에 사람의 눈을 피해 오늘 밤 왕진을 다녀오겠노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수레를 구했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그는 뇌까렸다.
“의형은 처소에서 휴식을 가지실 겁니다. 수레에는 선표 공자께서 대신 들어가주십시오.”
“음, 너무 허술한 작전인데.”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의당에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이목은 둘째 치고 본진과 너무 가깝습니다.”
운표선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겠지. 염두해 두었다.”
그 말에 서문윤이 덤덤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당신께서 위험에 처하는 것입니다.”
운표선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장안사준이 목숨을 두려워할까? 이런 귀여운 놈!”
듣기에 썩 나쁘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오냐, 네가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면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너는 일을 제대로 처리할 생각이나 하거라.”
“…해를 입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
손에 든 검을 부여잡으며 서문윤이 가라앉은 눈을 빛냈다. 그를 운표선이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그리하여 진행된 일이었다. 까마득한 밤에 이루어진 허술한 계획.
서문윤은 바쁘게 황재천의 협조를 구하고 부단하게 필요한 곳을 돌아다녀 사람들의 협력을 얻었다. 어쩔 수 없이 군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서문윤은 황재천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형의 말에 일정 부분 동의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빈틈이 많은 허술한 계획.’
달그락거리며 마차가 나아가고 있었다. 운표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는 그가 나타날 것이라 확신한다.”
서문윤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들이 기본적인 병법을 모르겠습니까?”
“다른 일이면 몰라도 의원이 필요한 거면 시급을 다루는 일. 함정임을 알면서도 달려들 거다.”
“독기가 만만치 않게 올랐을 겁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말에 서문윤이 불안에 가득 찬 한숨을 내뱉었다.
“이미 벌어진 일. 제 마음속에 후회가 자라고 있지만 모든 일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언제까지 그가 모든 일을 도맡을 수도 없고.”
“걱정은 놓아라!”
호쾌한 말에 마음속 의심을 떨치며 서문윤이 검을 세게 부여잡았다. 청년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맑게 빛났다.
‘이미 그는 한계에 다다랐다.’
한 성에 거주하는 의원이 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다. 다른 성에 거주하는 의원을 차출하면 납치를 당하는 실정. 황재천은 의당에 병사들을 파견하여 위험을 막을 뿐이었다.
여러 소문만이 무성하게 퍼져 나갔다.
언젠가 일이 터지겠지, 언젠가 일이 터지리라. 그리 기다리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서문윤은 방금 전 있던 실랑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왕진을 간다 하지 않았나.”
“어딜 나간다 하십니까? 왕진은 아니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위급한 환자가 생겼다는 전갈이 왔다. 외곽에 있어 도심에 오기도 힘들어.”
“소문을 못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왕진은 절도사께서 위험하다며 웬만하면 금하라 말씀하셨던….”
“의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어란 말이야? 성주께서는 북성을 지키라 하였는가? 아니면 구류하라 하였는가?”
“허나.”
“사건이 벌어지고 며칠이 지났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이미 끝난 일일세. 아무리 사영귀라도 절도사의 치소가 존재하는 성에서 어찌 두 번을 함부로 행동할까. 염려 말고 비키게나.”
“…의당에서 빼어낼 병력이 부족합니다. 본진에서 따로 병력을 증원받겠….”
“자네야말로 소문을 못 들었나? 환자가 죽어 나가서 안 그래도 괴팍하신 분이 화를 내시면 어쩌게? 건전성을 떠나시겠다고 하면 그때야말로 구류할 예정인가.”
“.……”
“별일이 없다지 않았나. 그분께서는 단단히 마음을 먹으셨네! 백성 하나를 돌보지 못한다면 제 의술이 무어 쓸모 있냐고. 치소 주변은 부자가 많고 외곽은 빈자가 많으니 이는 불공평한 일이다. 그분은 빈촌에 왕진이 불허되면 건전성을 떠나겠다 하셨어.”
“그, 그런.”
“비켜라! 네가 일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
평소보다 더욱 언성을 높여 한 말이었다. 의당을 지키던 이들 사이로 웅성임이 퍼져 나가고, 몇몇 병사들은 울상을 지었다. 그들 앞에서 서문윤이 병사를 짙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서문윤과 말을 나누던 병사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호위를 차출하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달그락 달그락.
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소란을 일으킬수록 좋다.
‘그때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겠지.’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어딘가 어둠을 틈타 저를 감시하고 있을 이들에게 보여주는 시위. 이리 우리의 곁을 따라오라 말하는 행동. 승강이는 합의된 일이었다.
“고 녀석, 참 혓바닥도 매끄럽구나. 그것 하나는 황궁 무관 출신다워.”
“대체 선표 공자께서 생각하는 황궁 무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적어도 너보다는 더러운 놈들이지.”
타악.
초봄 바람에 살랑거리던 부채를 접으며 운표선이 날카로운 눈으로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는 인원은 열둘.
적지도 많지도 않은 인원이다.
창문에 가까이 서 있던 호위병 하나가 서문윤을 향해 눈짓했다. 방금 전 서문윤과 소란을 조성했던 병사였다.
호위병 중에서 유일하게 내막을 아는 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황재천이 심어놓은 심복.
“믿을까요?”
“안 믿겠지.”
운표선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온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함정은 사실은 서문윤의 평과 달리 꽤나 정교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급하게 환자가 있다며 인적이 드문 새벽에 소란을 일으키고 병사에게 알린다. 마차를 준비하고 의당에 비해 적은 수의 병사를 차출해 호위하게 한다. 그 대신 민가에 병력을 미리 포진하여 잠복하게 해 급습에 대비한다.
이 과정이 꾸며졌다는 것을 아는 병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황재천이 믿음직스러워하는 소수의 인원.
그러나 서문윤은 쉬이 안심치 못했다.
서문윤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황 숙부는 나를 해하지 못해.’
그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곳에서 마주한 황 숙부의 모습은 그가 알던 것과 상당히 달랐으나, 서문윤은 딸을 위해 헌신했던 황재천을 알았다. 그리고 황양양이 어머니를 잃고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자신이란 것도.
적어도 황 숙부는 자신을 해하지 못했다.
‘…대비하여 사람을 심어놓기는 했지만.’
서문윤도 그저 그냥 손을 놓고 황재천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북성의 이름은 드높았다. 그가 구한 이들 중에서는 상단의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그들에게 원하는 대로 돈을 써달라, 은을 갚게 해달라 애걸했고, 검설린과 서문윤은 그에 평소 자금에 허덕이지 않을 수 있었다. 오후에 서문윤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가패로 자금을 융통하여 사람을 부렸다.
혹시라도 병사들이 다른 속이 있다면 이 차로 포진해놓은 낭인이 들이닥칠 것이다. 이들을 다 이기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서문윤은 호위 일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
‘혼전을 틈타서 도망가는 일은 자신 있다.’
낭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북성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바친 가패는 서문윤이 관리하고 있었다. 암암리에 그들을 따라붙었던 미행인은 서문윤 일행이 낭패를 당하면 즉시 검설린의 은을 받았던 고관대작에게 편지를 전할 것이다. 서문윤이 미리 써둔 편지에는 도움을 요청 바란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수레 안에 앉은 채 서문윤이 숨을 고르게 내뱉었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운표선은 긴장도 안 되는지 수레의 상석에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서문윤은 긴장을 죽이지 않고 검집을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며 경계를 돋웠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서문윤의 뒷목에 털이 뻣뻣하게 설 때였다.
“성벽이 보이는군.”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서문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을 바라본 서문윤이 외곽의 빈촌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 돌연 정색했다.
‘눈치를 챘나?’
운표선이 초조해하는 서문윤을 힐끔 바라보며 말을 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기회가 지금만 있는 게 아니니까.”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빈촌에 도착하고 나서는 일이 들통날 수 있습니다. 저희에게는 북성이 없습니다.”
결국 습격은 없으려나. 서문윤이 새파란 눈으로 창문 밖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초봄의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이를 악물었다.
그 때였다.
“설린을 좋아하나?”
불현듯 귓가에 내려앉은 말에 서문윤의 숨이 멈췄다. 청년은 말을 듣는 순간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뭐라?’
그는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딱딱한 얼굴을 들어 말을 내뱉은 귀공자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톡톡.
손바닥을 부채로 치며 귀공자가 방긋 웃었다. 서문윤이 지독히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목나무 껍질처럼 갈라진 목소리. 귀공자가, 운표선이 빙그레 웃으며 저를 향해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을 받았다.
“말했잖아. 설린을 좋아하냐고.”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왜 못 들은 걸로 하지?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고 싶어.”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싶다 말하였습니다.”
운표선이 돌연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고 싶다 말하였다.”
그 말에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청년의 눈에는 푸른 겁화가 있었다. 검을 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한참의 침묵 끝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무얼 말하고 계신 겁니까.”
운표선이 손에 쥔 접선의 끝을 서문윤에게 향했다. 서문윤은 그가 제 목덜미에 자리한 울혈을 가리킴을 깨닫고 침묵했다. 그는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네가 보는 눈이 마음을 말하고 있다.”
서문윤이 부리를 닫듯 입술을 딱 다물었다.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운표선이 그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버릴 마음입니다.”
“그래?”
“관심을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런가.”
“…왜 이러십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가 담겨 있었다. 서문윤을 잠시간 얼음같이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던 운표선이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설린은 나의 입을 막으려 하지.”
“…?”
운표선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새파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문윤이 묘한 압박감에 짓눌려 숨을 멈추었다.
귀공자는 마치 서문윤의 육신을 해체하여 마음을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잠시간 그를 노려보았다. 짤막한 시간이 흐르고 운표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의 의지를 존중하여 대부분의 말을 숨겼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음에도, 나는 그를 존중하여 그 말을 삼켰어. 제기랄! 서문윤. 그래, 사실 나는 그를 어길 길이 없다. 나는 이미 죄를 저지른 비겁자이니까.”
운표선이 비죽 웃음을 흘렸다. 쓰라린 조소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서문윤은 그가 흉중에 숨겼던 진심을 터놓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짙은 시선으로 운표선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서문윤이 굳게 닫혔던 입술을 열었다.
“그대는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너는….”
“저는 몰라도 된다는 말은 가납하지 않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끊으며 서문윤이 언성을 높였다.
“말씀을 해주신 이상 저는 당신의 말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질 겁니다. 제게 진정 숨기시려면 말을 내뱉지 마셨어야 합니다. 당신이 제게 황궁 무관에 맞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말씀하셨지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 정계에 많은 가견이 있으신 분이라면 화술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겁니다.”
“으음.”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제게 무얼 원하는 겁니까.”
답답함에 말은 격렬하게 나갔다. 본디 그에게 이리 거칠게 말하면 안 되는 신분이다. 그의 본래 명호를 생각해도, 검설린과의 관계를 생각해도. 그러나 서문윤은 답답함이 화로 치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알면 알수록 깊어지는 그의 비밀.
‘나는 정녕 그에게 닿을 수 없나?’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기이할 정도로 그의 과거에 대해서 신경 쓰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도 닿아 있었다.
턱이 부서질 듯 이를 악물며 서문윤이 운표선을 노려보았다.
“왜 저를 도발하십니까.”
사실은 그가 제가 모르는 검설린의 과거를 안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것은 시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서문윤의 두 눈이 흔들릴 때였다.
문득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순수한 아이.”
탄식과도 같은 말이었다. 운표선은 그리 말을 내뱉고 손에 쥔 접선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갈라진 목소리에 운표선이 훗 소리를 흘렸다. 그는 고개를 아래로 꺾으며 잠시간 침묵했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
어느 순간 운표선은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쾌활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나를 알려주마. 설린은 모종의 이유로 10년간 의원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의 입가에는 훈풍이 불었으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어둠 저편을 걷고 있었다.
“그 전에 설린은 선친의 유지를 잇기 위해 알고 있던 의술 지식을 정리하고 의서를 편찬하려 했으나, 의원은 되지 못했어. 그럴 여력도 아니었고, 선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으니까.”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서문윤이 침을 삼키고 그를 바라보았다. 운표선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2년이 남았다. 그 시간은.”
2년.
무언가 불안함이 들어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표선이 말을 이었다.
“약조했던 10년의 시간이 끝나고 설린은….”
설린은?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서문윤이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시원시원하게 말을 내놓던 운표선은 말을 잇지 않았다. 입술을 살짝 연 채로 더 이상 달싹이지 않으면서. 잔뜩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다급히 물었다.
“설린은? 무엇입니까?”
운표선의 얼굴이 돌연 차가워진 순간이었다.
“왔다.”
“예?”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운표선이 갑작스럽게 손을 뻗어 서문윤이 쥐고 있던 검을 뽑았다. 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던 서문윤은, 운표선의 말에 집중하여 어느새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검자루가 운표선을 향한 자세였다.
스릉.
검집에서 꺼내어지는 검. 맑게 울리는 소리에 아차 한 서문윤이 얼굴을 굳혔다. 방심을 하고 있었다.
‘설마 내 경계를 늦추려고?’
그제야 서문윤은 이어진 소란에 아연실색하고야 말았다. 마차가 갑작스럽게 덜컥이며 멈추었다. 헉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서문윤이 마차를 가린 천을 조금 열어 밖을 확인했다. 그는 상황을 확인하고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마차 주위에 널브러진 병사들. 그들은 죽은 듯이 그 자리에 쓰러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들의 목에 달빛에 반짝이는 가는 바늘 같은 것이 꽂혀 있는 것을 깨달았다. 파르르 떨리는 침을 보며 서문윤이 얼굴을 굳혔다.
독침.
그리고 그는 마차를 향해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가면을 쓴 사내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꿈처럼 몽혼한 광경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돌연히 병사들을 제압한 후에 모습을 드러낸 가면의 사내.
‘그날 보았던 그자다!’
서문윤이 다급하게 운표선을 향해 말했다.
“검을 주십시오. 위험합, 이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문윤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운표선이 마차를 가린 천을 걷고 자리를 뛰쳐나간 까닭이었다. 그의 얼굴을 가린 복면이 팔랑거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서문윤이 눈을 부릅뜨며 그를 뒤따랐다. 한 대 치면 염라대왕을 영접할 것만 같은 비리비리한 사내가 무슨 깡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그러나 운표선은 서문윤이 붙잡을 수 없을 만치 빠르게 행동했다.
콰앙!
수레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어지는 행동에 서문윤이 기겁하여 눈을 크게 떴다. 운표선은 땅에 엎어질 듯 몸을 기울이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비틀거렸으나 지면에 몸을 대지 않았다.
운표선은 서문윤이 그저 잔상만을 확인할 수 있는 빠른 속도로 가면의 사내에게 달려 나갔다.
그는 그저 멍하게 가면을 쓴 사내가 다급히 검을 꺼내 제 복부를 향한 빠른 검격을 막는 장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챙!
간신히 튕겨나간 운표선의 검은, 그러나 가면을 쓴 사내의 검을 부서지게 만들었다. 가면을 쓴 사내의 얼굴이 당황에 굳어진 순간이었다.
운표선의 눈에 귀화가 빛났다. 그 순간 불길함을 예감한 서문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
운표선에게서는 일전에 볼 수 없었던 끈적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제게 온화하고 능글맞았던 사내는 하나의 날카로운 칼 같은 예기를 풍기며 저 사내를 베려 하고 있었다.
살기는 진심이었다.
“크흑!”
가면의 사내가 검을 던지고 바닥을 뒹굴었다. 운표선의 검이 종아리를 벤 까닭이었다. 복부를 향한 검의 궤도가 비껴나간 까닭은 서문윤이 그의 허리를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운표선의 허리를 움켜쥔 채 서문윤이 거칠게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돌아온 것은 덤덤한 목소리였다.
“전장에서 무기를 쥔 자를 향해 맨몸으로 뛰어든 건,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생각해도 되겠지?”
“공자!”
“너는 역시 군관이 되었으면 안 되었다. 비켜.”
품에 안긴 운표선의 몸은 서문윤의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다. 매달린 청년을 뿌리치려 운표선이 몸을 비틀었다. 서문윤은 다급히 그의 허리춤에 자리한 검을 손으로 잡아챘다.
“싫습니다.”
뭐가 뭐인지 알 수 없는 번잡하고 혼돈스러운 상황. 운표선은 농축된 살기를 뚝뚝 흘리며 가면의 사내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신음을 삼켰다. 급하게 움켜쥔 검의 부위가 칼날인 모양이었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운표선은 피냄새를 맡은 순간부터 서문윤의 품에 안겨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은 그 모습에서 언제든지 자신을 떨구어낼 수 있다는 여유를 느꼈다.
“피가 나잖느냐.”
한숨을 쉬며 운표선이 중얼거렸다.
“이 어린아이야.”
그 순간 서문윤은 운표선의 말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의 가장 쓸모 있는 수하는 나다.”
그 말대로 운표선은 저 자신의 몹시나 유능한 수족이었다. 그저 가만히 제 품에 안겨 있는 사내가 두렵게 느껴져 서문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청년은 필사적으로 운표선을 말리기 위해 그의 허리를 거세게 틀어쥐었다. 어찌나 강하게 허리를 죄었는지 운표선이 그 순간 작은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작열감. 서문윤이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생포를 하여 꼬리를 잡으려 했던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의 숨통을 끊으려 하십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않아?”
“배신이십니까?”
“그 또한 지금 물어볼 필요가 없는 말이다. 너는 어리석구나.”
“…당신께서는 무얼 원하십니까.”
운표선은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비켜라.”
“…선표 공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운표선은 그 순간 듣는 이의 영혼을 얼게 만드는 서느런 목소리를 흘렸다.
“비켜라. 어린것아. 나는 네게 설명할 여유 따위 없다. 인(仁)이 존재하기엔 너무나도 독한 세상이다.”
“무슨, 무슨 소리입니까?”
“한 사람을 죽여 다른 열 사람의 생을 살릴 수 있다면 어찌할 것이냐? 나는 이미 선택을 했다.”
날카로운 고소가 흘렀다.
“감히 내가 선택을 했는데 누가 말린단 말이냐!”
그는 그 말을 내뱉고 허공을 울리는 엄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비켜!”
그리 말을 하면서도 운표선은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문윤의 손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란으로 손바닥에 베인 상처가 깊었다. 서문윤이 아찔함을 느끼며 버럭 소리쳤다.
“공자! 어찌 함부로 이리 행동하십니까! 그리고 한 사람을 죽여 열 사람의 생을 살릴 수 있다 누가 단정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산수로 잴 수 있습니까!”
“뭐?”
“그것이 관료의 잣대라면 저는 그날 말에서 떨어진 것을 천운이라 여기겠습니다.”
그것은 절규와도 같은 처절한 목소리였다. 서문윤이 소원하는 사람처럼 애타는 목소리를 흘렸다.
“검을 놓으십시오! 제발.”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그 끝에 운표선은 허탈한 목소리를 흘렸다.
“너는, 정말 멍청하다.”
그 말을 내뱉고 운표선은 탄식을 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멍청해.”
씁쓸함이 서린 말이었다. 서문윤이 그의 허리를 껴안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손에서 떨어지는 피가 그의 발을 적셨다.
서문윤이 운표선을 껴안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가에 매복한 군사가 있다.’
‘그들 말고도 가패로 부린 사람이 있어.’
‘소란이 두려워서라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거다.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선표 공자는 지금 감찰을 받는 입장, 아.’
생각이 흐르던 와중이었다. 무언가를 눈치챈 서문윤이 피가 식어 새파란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굽혀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랐다.
‘설마?’
잠시간 숨을 헐떡이던 서문윤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매복한 사람들은 어찌 안 옵니까.”
가면의 사내가 바닥에서 피 흘리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잘려나간 검을 부여 쥐며 바닥을 더듬었다. 어느 순간 고통에 헐떡이던 가면의 사내가 손에 쥔 검을 불현듯 포박당한 운표선의 발을 향해 찔렀다.
콰득!
“끄윽!”
기다렸다는 듯이 손등을 빠르게 짓밟는 발. 운표선이 손등을 누른 발에 힘을 주며, 무심한 목소리를 흘렸다.
“생각하는 대로.”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이중으로 그물을 치고 습격을 대비하였다.
‘그럼에도 부족하였단 말인가?’
그러나 운표선은 그저 고소를 흘리며 답할 뿐이었다.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이 불안이 되어, 서문윤의 몸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는 팔로 껴안은 운표선의 몸을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마냥 거세게 부여잡았다. 서문윤이 거칠게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네가 그를 믿었던 것처럼?”
뭐?
그 말이 머릿속에 냉수를 뿌린 것만 같았다. 서문윤이 일순간 이지가 흐트러져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운표선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욱!”
팔꿈치로 저를 묶은 청년의 명치를 내리치고 운표선은 빠르게 검을 들었다.
달빛이 늘씬한 검의 표면 위를 노닐었다. 반짝이는 가루가 하늘 위에 치켜떠진 검을 내보였다. 그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두 명의 사내.
가면의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운표선은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허공을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급소를 가격당해 서문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의 귓가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이 악무는 소리도.
“…미안하다.”
그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 운표선은 이를 악물며 높이 치켜든 검을 내리쳤다.
아니, 내리치려 했다.
“내려, 운표선.”
갑작스럽게 들려온 동풍같이 서느런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검은 가면을 쓴 사내의 목을 베었겠지.
운표선이 그 순간 몸을 굳힌 채 침묵했다.
“허억, 헉.”
사내의 목젖에 닿은 칼이 새파란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뿌옇게 변했던 시야가 어느 정도 돌아온 서문윤이 바닥을 기며 숨을 헐떡거렸다.
흙투성이 바닥을 손으로 더듬으며 서문윤이 고꾸라진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의형이 왜 여길?’
새하얗게 변모한 얼굴로 서문윤이 기침을 터뜨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이를 악물었다.
대체 의형이 왜 여길 온 거야?
그리고 서문윤은 어느 순간 불현듯 머릿속에 어떤 말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저녁에 나돌아 다니지 마라.”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경거망동하지 마라. 너는 내 곁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를 구속하던 의형은 그러나 너무나도 흔쾌히 저를 떼어놓았다. 제 시야에 꽉 잡아놓으려던 일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운표선의 뒤를 밟았구나.’
그 순간 깨달은 서문윤이 탄식을 삼켰다. 의형은 애초에 운표선이 무언가 일을 벌일 거라고 눈치를 채고 있었다. 청년은 곧 입술을 깨물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의형은 너무 무모하다.
‘운표선은 고수다.’
금궐에서 금군대장과 지도대련을 할 기회가 있었다. 황제를 지키는 가장 뛰어난 무관인 금군대장은 마치 어린아이를 놀리는 어른처럼 서문윤의 검을 받았다. 그리고 마차를 뛰쳐나갈 때 운표선의 모습은 그와 비견될 만한 것 같았다.
운무가 가득한 밤하늘. 어둑한 밤을 밝힐 달은 먹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검설린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자박자박 소리가 들려왔다. 복면 위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무기 없는 맨손을 늘어트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모하다, 위험한 일이다.
다급함에 사로잡혀 서문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지켜야 한다. 그를 보호해야 한다.
운표선의 돌변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온 서문윤이 입가에 타액을 뚝뚝 떨어트리며 쿨럭 숨을 내뱉었다.
“오시면, 오시면 아니 됩니다.”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서문윤이 바람이 새는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도망가십….”
“나는 내리라고 이미 말했다.”
사람의 피를 식게 만드는 스산한 목소리.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서문윤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살벌한 시선으로 운표선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운표선은 가면을 쓴 사내의 목에 댄 칼을 쥔 채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희미한 살기가 흐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 내려?”
한참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운표선은, 어느 순간 짧고 높은 고소를 흘리며 검을 거뒀다. 타원형으로 허공을 빙글 돌며 검날이 땅에 박혔다.
“교활한 놈!”
헛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검설린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운표선을 향해 빠르게 다가갈 뿐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의 장안사준 사영귀가 아니야. 이미 나는 더러운 꼴을 보았지. 대의(大儀)라는 허망한 꿈에 목숨을 내던지는… 지금 뭐 하는 거냐!”
저를 향해 뻗는 손길에 운표선이 다급하게 땅에 박힌 검을 들었다. 검설린은 바로 발로 검날의 끝을 쾅! 소리가 나게 밟고, 운표선의 멱살을 잡아챘다. 옷자락이 세게 조여져, 운표선은 막힌 숨통에 끅 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이 몸을 돌렸다. 손등에 핏줄이 드러나게 힘을 주면서.
운표선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미친….”
말이 끝나기 전에 운표선은 허공에 들어 올려지고야 말았다. 서문윤이 하늘을 나는 사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유 만만했던 사내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져 있었다.
쿠웅!
“야, 이 개새, 크흑!”
땅바닥에 매정하게 꽂혀져 운표선이 비명을 흘렸다. 검설린은 바닥에 그를 메치고도 멱살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운표선이 그대로 질질 끌려가 검설린의 손아귀에 목을 내어주었다.
핏줄이 곤두선 커다란 손이 운표선의 목을 졸랐다.
“커흑, 뭐 하는…!”
“진즉 개짓거리하는 줄 알았지.”
무심한 목소리가 울렸다. 검설린의 손은 운표선을 제압하고 그의 숨통을 조여 운표선의 얼굴을 사과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운표선은 검설린에게 끌려갔다. 순식간에 흙먼지로 몸이 뒤덮인 사내가 그의 손등을 미친 듯이 긁으며 컥컥 소리를 흘렸다. 서문윤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그의 목을 조르는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뭐야.’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가. 서문윤이 잠시간 공황에 빠져 헤맬 때였다. 바닥에서 바르작대던 가면의 사내가 틈을 타 도주를 시도했다.
피를 흘리는 종아리를 부여잡고 사내가 자리를 박찼다.
그를 지켜보던 서문윤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커흑!”
서문윤이 도주하는 가면 사내를 향해 다리를 재빠르게 걸었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땅에 엎어졌으나 이윽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종아리는 피로 범벅이 된 후였다. 인적이 드문 길. 사람이 오지 않는 으슥한 곳에 네 사람이 대거리를 하고 있었다. 가면 사내가 까득 이를 물며 서문윤을 향해 불현듯 달려들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야, 이 새끼, 컥, 이거 놓고….”
“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냐. 내가 네놈 새끼가 뒤에서 꼼수 부리는 걸 모를 줄 알아?”
“야, 이 새꺄… 저놈, 큭.”
으득, 살벌한 소리가 흘렀다. 서문윤이 가면 사내의 팔목을 움켜쥐곤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옛날의 정으로 모른 척 넘어가주려 해도 정도를 모르는군. 운표선. 바른대로 말해. 무슨 일을 꾸미고 자빠졌어.”
검설린의 손은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마치 운표선의 목을 졸라 죽일 듯한 기세로 그는 흉흉하게 옛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그죽죽하게 변모한 얼굴로 운표선이 컥컥거리며 쉰 소리를 흘렸다.
“저 아이, 지금 켁, 공격받, 공격받고 있잖아, 이 새끼…!”
살벌한 기세로 운표선을 노려보던 검설린이 그 말에 미간을 구겼다. 그는 그제야 서문윤이 손바닥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가면의 사내와 대치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운표선이 목줄기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 소리쳤다.
“네 귀염둥이 다 죽는다!”
검설린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진 순간이었다.
“미친놈!”
쉰 목소리로 말을 내뱉곤 검설린이 운표선의 복부에 발을 매정하게 꽂았다. 동시에 목을 부여잡은 손이 거두어졌다. 비틀거리면서 바닥을 구르며 떨어진 운표선이 콩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컥컥 숨을 내뱉었다.
그는 바닥을 뒹구는 운표선을 죽일 듯한 시선으로 잠시간 내려다보곤 사내와 대치하고 있는 서문윤을 향해 성큼 발을 디뎠다.
서문윤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손바닥과 종아리 중 더 급소에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
종아리라 답을 할 사람이 많겠지만, 의외로 난전 중 둘의 중요도는 비등했다. 다리를 유지하는 근육이 있는 곳이 종아리니 그곳을 가격당한 이상 몸의 중심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통이 강한 곳은 손바닥이었다. 더군다나 박투(격투)를 하는 이상 손을 움직일 때마다 충격이 타고 흘러들었다. 서문윤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나… 약한 거 아닐까?’
무슨 고수가 발에 차이도록 많아. 고간을 내리찍는 팔꿈치를 피하곤 서문윤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운표선이 마차에서 도약하여 단숨에 가면 사내를 제압했지. 그리고 운표선을 기습이나마 단숨에 메쳐 제압한 게 의형이고.
그리고 의형을 지키는 게 저다.
따지고 보면 가뿐히 그를 제압해야 하는데.
‘급제를 어떻게 했더라, 내가?’
수천 명의 응시생 중에서도 우수한 인재라 뽑혔는데. 아니, 어디 황궁 무관의 직함이 도박으로 딸 수 있는 것인가?
급제 후에 외직이 아닌 내직에 임명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서문윤은 능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것은 출신 성분이나 권세만으로 임명받을 수 없는 자리였다. 황족을 측근에서 지키는 자리는.
그런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지금.
주먹이 바람을 날카롭게 갈랐다. 뺨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매섭다. 서문윤이 와그작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숙이고 사내의 팔뚝을 잡아채려 했다.
그는 움켜쥔 사내의 몸이 차돌처럼 단단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문윤이 그의 팔뚝을 잡아당기려 할 때였다.
“헉?”
그는 불시에 오금을 내려찍는 발바닥에 몸을 엉거주춤 굽히고야 말았다. 종아리를 다친 발이었다. 가면 사내가 오금을 걷어찬 발은.
그리고 서문윤이 빈틈을 보일 때 사내는 잡힌 팔을 돌려 서문윤의 피 흘리는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몸을 강타하는 충격에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고통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서문윤이 비명을 악물며 참을 때였다.
“으억!”
가면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제 옆구리를 똥개 차듯 매정하게 걷어찬 발에 가면 사내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서문윤이 숨을 헐떡거리며 두 손을 벌벌 떨었다. 그는 피 흐르는 오른손을 부여 쥐며 이를 악물었다.
정신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달뜬 숨을 하악 내뱉으며 서문윤이 저를 가린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운무가 가린 달빛이 희미하게 사내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폭포같이 치렁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정히 묶고, 새하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답답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
검설린이 서문윤의 앞에 서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토록 원망했던 상대인데, 지금 이 순간 서문윤은 안도를 느꼈다.
어떤 일이든 의형이 알아서 해줄 것만 같아.
서문윤이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잘게 떨었다.
“의형.”
그를 내려다보는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문윤은 한참 후에서야 그의 시선 끝이 제 피 흐르는 손을 향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릎 위에 똑똑 흐르는 피. 아, 소리를 흘리며 서문윤이 피 흐르는 손을 주먹 쥐었다.
“움직이지 마라!”
그 순간 검설린이 버럭 소리 질렀다. 깜짝 놀란 서문윤이 엉거주춤 손을 만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검설린은 무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커다란 손이 상처가 난 손을 덮었다.
그제야 서문윤은 상처가 난 부위를 움직이는 일이 몹시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몸을 웅크렸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검설린이 복면 아래 얼굴을 구겼다. 구부려진 손을 노려보면서 그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상처, 상처를.”
“예, 예?”
“상처 보이라고!”
어벙한 목소리에 돌아온 고함. 서문윤이 황급히 손을 펼쳐 보여주었다. 검설린이 손목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제 검에 제가 베인다는 말이 있어도, 그게 제 얘기일 줄이야.
서문윤이 얼떨떨한 얼굴로 제 앞에 몸을 웅크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제 환부를 살피고 있었다. 손목을 잡고 오므린 손을 살피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눈을 꾹 감았다.
화를 내기 직전의 얼굴이다. 서문윤이 긴장에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는 듯한데 그는 화가 치민 얼굴을 하고 있다.
검설린이 눈을 뜨고 팔을 조인 완갑을 풀었다. 속옷의 소매를 부욱 찢은 그는 서문윤의 손목과 환부에 천을 동여맸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서문윤이 넋을 잃을 때였다. 침착한 얼굴로 청년의 환부를 살피는 검설린의 뒤로 비틀거리며 가면 사내가 나아갔다.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다.
‘잡아야 한다.’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서문윤은 눈을 날카로이 뜨며 그를 향해 달려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손목을 꽈악 조르는 천에 윽 비명을 내지르며 멈칫거릴 뿐이었다.
복면 위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검설린은 마치 쌍욕을 퍼붓고 싶어 하는 듯했다.
“지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닥쳐!”
결국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서문윤이 당황하여 머뭇거릴 때였다.
바닥을 구르던 운표선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가면 사내를 향해 달려갔다.
“죽인다면 너도 죽는다.”
그리고 그 순간 검설린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흉흉한 목소리. 누군가의 부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아! 개자식아!”
운표선은 가면 사내의 목을 부여잡고 그를 엎어뜨렸다. 서문윤은 허공을 훨훨 나는 가면 사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바람에 사라지고 남색 하늘 위 달에 걸린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느릿하게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불꽃이 들끓는 눈을 한 운표선이 가면 사내의 멱살을 잡아 쥔 채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콰앙!
“…!”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가면 사내는 바닥에 내꽂히는 순간 몸을 축 늘어트렸다.
죽음보다 짙은 정적이 감돈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