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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안사준(長安四俊)(3) (10/31)

9. 장안사준(長安四俊)(3)

하동하서 절도사 양주도독 건전성주 황재천.

다섯 개 도를 아우르는 번진의 절도사였던 악천화 이후, 군권이 한 사람에게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정에서는 번진을 나누어 절도사를 임명했다. 그러니 황재천은 상당히 예외인 경우였다. 지방에 무소불위의 권위를 지니고 번진에 군림하는 절도사 중에서도 도합 14만의 병력을 거느린 그의 위치는 남달랐다.

올해 서른여덟밖에 안 되는 젊은 축의 무장이 승승장구한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는 청년일 때 악천화를 따라 북란(北亂)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번진에 익숙했다. 동궁사변이 일어나던 시기. 수많은 무장이 실각하고 갈려나갔을 때도 황재천은 토번을 견제하느라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북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무관들로부터 병권을 빼앗았던 황제는 시간이 흐르고 유능한 무장에 목말라 했다. 이민족이 설치는 시기였다. 경험 많은 무장이란 드물었으며, 더군다나 황재천은 악천화의 오른팔이었으나 그의 숙청에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말하자면 꽤나 눈치가 좋은 무관이었다.

처음 황재천에게 하동 절도사직을 제수하여 그를 시험했던 황제는, 빠르게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중임했다.

“유능한 무장도 얻기 힘들지만, 유능하고 눈치 빠른 장수는 더더욱 얻기 힘들지.”

우아한 손가락이 머리가 희끗한 사내의 입술에 포도를 밀어 넣었다. 여인의 치마폭에 누워 뒹굴거리던 황제가 입술을 내밀어 포도를 빨아 먹었다.

손에 뚝뚝 떨어지는 포도즙을 털며 고 귀비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은 선하고 악한 게 아니다.’

명령에 얼굴을 굳히던 무장을 떠올리며 고 귀비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당한 명령에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화를 내거나 거부의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강하거나 혹은 나약한 것이지.’

황재천은 나약한 사람이었다. 고 귀비는 황재천이 황제의 밀명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수행하리라 믿었다.

* * *

“폐하께서 무슨 말씀인들 품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물며 사직의 안위를 말하는데 신 황재천이 무슨 까닭으로 하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밀명을 행하겠습니다. 허나 무부(武夫)가 상관이 전사하고 간신히 전란을 수습했으니 그 사정이 딱합니다. 은혜를 베풀 방도가 없습니까?”

“그대는 지금껏 그의 품성을 익히 들어 안다. 일이 한 번 틀어지면 더 이상 수습하지 못할 것을 그대는 모르나?”

“하오나.”

“이것은 나의 죄다. 성군이 되지 못해 수중을 보살피고 심중의 마음을 알리지 못하니, 이것은 나의 실덕이다. 상황이 급박하고 그의 성품이 맹렬하여 나는 차마 일을 누설할 수 없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금상께서는 성군이십니다. 이는 제가 처리할 일입니다.”

궁궐을 빠져나오며 황재천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속으로 이죽거렸다.

‘개같은 놈들! 성품이 맹렬하긴 뭘 맹렬해. 변경의 무장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말을 해. 그냥 일찍 죽어줬으면 고마울 것을 뻗대는 모양새가 괘씸하다고 해! 이 답 없는 나라 하나 살려보겠다고 벌레처럼 바르작대는 이해 못 할 등신새끼, 당장에 짓밟아 죽여버리라 말을 하라고! 그럼 뜻대로 밟아 터뜨려줄 테니까.’

영원히 입 밖에 내뱉지 못할 말이었다. 황재천이 발바닥으로 슥슥 침 묻은 땅을 비볐다.

일그러진 얼굴은 어느새 온화하게 변모한 후였다. 무장답지 않은 청수한 얼굴은 흉중 욕지거리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평온했다.

그렇게 제 마음을 숨기며 황재천이 발걸음을 뗐다. 건전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쨌거나 명령을 수행하려면 치소로 돌아가 사건을 지켜봐야 할 테니까.

또다시 그는 더러운 일을 방관해야 한다. 황재천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딸아이의 얼굴이 몹시 그리웠다.

‘양양은 잘 지낼까?’

8년 전 사변 당시 아내와 헤어진 뒤 황재천은 딸 하나만을 그리고 살았다. 저보단 어미를 닮아 성격이 거센 황양양이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재롱이 많은 철부지에 불과했다.

‘착해빠진 것보단 드센 것이 나은 세상이다.’

순하기만 해서야 어디 동궁태자 꼴을 못 면하지. 황재천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숙였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구나.’

건전성으로 가는 길. 황재천은 귀여운 딸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면서도 황제의 밀명 생각에 우울함을 느꼈다. 한시라도 빨리 마음속에 남은 끈적한 죄책감을 활달한 황양양의 재롱으로 잊어야겠다.

“음?”

그러나 간절한 마음을 품고 건전성 자택에 도착한 황재천은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은 휑한 마당을 바라보며 황당함을 느껴야만 했다.

‘오전에 분명히 파발을 보냈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양양이 나를 보러 오지 않아?

아비의 마음으로 섭섭함을 느끼던 황재천은, 그러나 “꺄아악!” 높게 울린 여인의 비명에 정색하고야 말았다. 그 목소리는 황재천에게 몹시도 익숙한 것이었다. 눈을 흉흉하게 부릅뜨며 황재천이 소리쳤다.

“양양아!”

황재천이 미친 듯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뛰어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양양의 비명이 그의 이성을 앗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황재천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원으로 향했다. 양양은 그의 소중한 딸이다. 동료마저 버리고 추하게 부귀영화를 좇는 이유.

그녀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내원을 밟는 순간, 그리고 황재천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피비린내가 후욱 코끝을 찔렀다.

“아, 아아!”

탄식이 입술 밖으로 흘렀다. 황재천은 절규하는 사내마냥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양양아!”

그녀가 잘못된다면, 혹여 이상한 일이 생긴다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이들을 다 쳐 죽여버리리라!

그리 악을 품고 황재천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개구락지처럼 부릅뜨고야 말았다.

헉! 소리와 함께 황재천의 입에서 비명이 흘렀다.

* * *

그 일이 발생하기 하루 전의 일이다.

서문윤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황양양이 새침한 얼굴로 서문윤의 시선을 피했다. 정말 얘가? 화를 억누르며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왜요?”

“황양양!”

결국 서문윤은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처소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예법이 아니다!”

사람을 싫어하는 검설린의 성격을 아는 서문윤이었다. 차마 양양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어 쩔쩔매면서도 그는 그녀를 내쫒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황양양은 피식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약혼자의 처소에 드는 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리고 여긴 제 집인데.”

“그런 말이 어딨어. 신의는 민감한 사람이다. 남이 방에 드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황양양이 눈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윤 가가와는 처소를 같이 쓰지 않습니까.”

서문윤은 잠시간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그와 나는 오랜 시간 같이 있었으니.”

말을 얼버무린 채 서문윤은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황양양이 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시비가 다 고했습니다! 처소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고, 망측한 소리가 흐른다고! 절 속이실 작정입니까? 정녕?”

“뭐?”

“윤 가가가 연모하는 이가 바로 그 사내가 아닙니까? 당신과 몸을 섞는 그 북성신의라는 사람!”

철렁,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 서문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윽고 울화통이 터진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쩌렁하게 울렸다.

“절 속이려 들지 마세요! 윤 가가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다 알 것 같으니까! 절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윤 가가. 어찌 제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남색에 미쳐 저를 밀어낼 수가 있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약혼녀인 절 밀어내요?”

“황, 황양양.”

“왜 하필이면 사내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같은 성별인 사내를 어찌, 어찌….”

황양양은 울먹이며 말을 내뱉었다.

“망측해요.”

서문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청초한 인상의 소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문윤을 노려보았다.

서문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힘겹게 입을 열 뿐이었다.

“혹여라도 그에게 해를 끼치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윤가가!”

“그리고 황양양. 의원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백년화를 지니고 있다는 의원이 어찌 열흘이 넘어가도록 압송되었다는 소식이 없는지.

‘설마 이 아이가.’

서문윤이 가라앉은 눈으로 황양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황양양은 그 순간 눈매를 치켜뜨며 버럭 소리 질렀다.

“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알지 못하면 그 누가 알아!”

“방금 전까지는 의원의 소식을 알았었는데, 지금은 모르겠군요. 양양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서문윤이 울화를 참지 못해 언성을 높였다.

“정말 이리할 것이냐?”

황양양은 그저 답할 뿐이었다.

“그것은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도도도 달려 나가는 황양양을 서문윤은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점이 된 황양양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를 어쩌나.’

황양양이 이해가 되어 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임시 약혼이라지만, 약혼은 약혼. 저리 마음이 깊을 줄은 몰랐는데. 황양양이 저리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서문윤은 한동안 상념에 사로잡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끝에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양양을 달래는 수밖에 없구나.’

저 이팔청춘의 소녀를 달래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하동하서 절도사의 금지옥엽이고, 사건의 패를 쥔 여인이었다.

황양양이 마음을 잘못 먹어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들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 있다.

한숨을 삼키며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청년은 닫았던 눈을 열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양양을 찾아가자. 양가의 입장이 있으니 내게 가혹하게 대하진 못할 거다. 어찌 되었건, 양양은 정에 약한 애니까.’

그러나 다음 날 서문윤은 황양양을 만나지 못했다.

“여, 여긴 어쩐 일로?”

당황한 목소리로 시비가 고했다. 무언가 수상하다. 아녀자의 방을 함부로 보는 것이 무례한 짓이라지만, 무언가 이상한 낌새에 서문윤은 날카로운 눈으로 황양양의 처소를 흘깃 보았다.

조용한 방에는 아무도 자리하지 않았다.

처소를 지키는 시비 하나 남기고 황양양은 오전부터 어디를 갔나?

서문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비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이윽고 무거운 목소리가 앉았다.

“양양은 어디에 갔지?”

“아가씨는 잠시 외유를 나가셨습니다. 기다리시면 바로 오실 겁니다. 서문 공자.”

동요를 감추고 재빨리 태연한 기색으로 일변하여 말을 하는 시비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야 말았다. 그는 시비의 동근 이마에 맺힌 이슬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바른 대로 말해라! 황양양은 어디로 갔어?”

방을 쩌렁하게 울리는 노성이었다. 단숨에 시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게.”

당황한 듯 얼버무리려던 시비의 얼굴이 가면 갈수록 시퍼렇게 변했다. 그를 노려보는 시선이 맹수같이 번뜩였다. 무언가 이상하다. 서문윤은 황양양의 처소로 올 때 유독 쥐 죽은 듯이 조용했던 저택의 공기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황양양이 분노를 토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시비가 그 순간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소리쳤다.

“다 공자의 잘못입니다! 아가씨께서 얼마나 공자를 그리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뭐?”

“공자가 다리를 다쳤단 소식에 우시고,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혼절까지 하시며 당신을 생각하셨는데! 그런데 어찌 아가씨의 마음을 배신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서문윤의 얼굴이 살벌하게 변했다. 불안이 확실시 되는 순간이었다. 뿌득 이를 갈며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다. 그녀가 그저 시골 현령의 자제라면 이리 걱정스럽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윤은 지금 이 상황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고관대작의 딸이었다.

그것도 20만에 육박하는 군사들을 통솔하는 하동하서 절도사의 딸.

“당장 말해! 황양양 어딨어?!”

시비는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안채로, 전 마님께서 쓰시던 처소로 북성을 부르셨습니다.”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은 앞뒤를 따지지 않고 바로 안채를 향해 달렸다.

황양양.

황양양!

서문윤의 얼굴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초봄의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칼처럼 할퀴었으나 서문윤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서문윤이 목구멍에 걸린 신음을 삼켰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러?’

양양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강직하지만 오만했다. 홀로 딸을 키우며 황재천은 그녀를 섬기다시피 하면서 싸고돌곤 했다. 양양은 고집이 센 성격이라 그 탓에 사실 한 번 옳다고 믿는 일은 끝까지 뜻을 꺾지 않았다.

‘제발, 제발!’

황양양이 무례한 짓을, 아니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했다. 서문윤이 꺽꺽대며 안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서문윤은 안뜰을 밟는 순간 절망에 가까운 탄식을 흘렸다.

“아!”

바람을 타고 흐른 냄새.

아주 희미하게,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핏내를 맡은 탓이었다. 서문윤이 절규하며 소리쳤다.

“양양!”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서문윤은 미친 듯이 달리며 사람들이 복작하게 몰린 안채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장한 군사가 열댓 명 가까이 있었다. 그들은 안뜰에서 웅성거리고 있었으며,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열려진 창문에서 몹시 성내는 황양양이 보였다. 그녀는 무어라 크게 소리치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꺄아아악!”

갑작스럽게 기겁하여 우짖는 황양양. 후원에 있던 군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감돈 순간이었다.

타앙!

서문윤이 벌컥 문을 박차고 방 안에 들어섰다.

“황양양, 지금 뭐 하는 짓이… 이게 무슨?”

서문윤은 고함을 끝까지 내지르지 못했다. 그의 몸이 얼음동상처럼 얼어붙었다.

“이, 이게.”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의 코끝에 스치는 비릿한 피비린내.

서문윤이 잘게 떨리는 눈으로 피를 뒤집어쓴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의원인 그는 자주 더운 피를 콧날에 걸곤 했으나 지금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검설린이 서문윤을 마주 보았다.

피가 뚜욱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검을 손에 늘어트린 채로.

까마득히 멀어지는 정신. 서문윤의 영혼을 꿰뚫는 듯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고요한 두 눈동자. 서문윤은 그를 눈앞에 두고 잠시간 전율에 몸을 벌벌 떨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황양양이 기겁하여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비명이 나오는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눈을 부릅떴다. 서문윤은 칼을 늘어트린 채 저를 바라보는 검설린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는 역시 무예를 알았구나.’

비범한 몸에 어렴풋이 예상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피를 흘린 채 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군사였다. 병부에서 정규 훈련을 받은 군사.

“의, 형.”

검설린이 쥐고 있는 검 또한 병부의 것이었다. 검설린은 싸늘한 얼굴을 하며 손에 쥔 검을 털었다.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이 허공에 튀고, 고즈넉한 멋을 풍기는 병풍을 적셨다.

황양양의 어머니가 아끼던 병풍이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며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그는 서문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황양양을 말없이 응시했다.

희게 질린 얼굴로 황양양이 소리쳤다.

“잡아, 당장, 당장 저놈을 붙잡아! 얼른!”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서문윤은 그 순간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고 몸을 떨어야만 했다. 검설린의 기색이 몹시 이상했다.

그는 서문윤이 일전에 볼 수 없었던 서느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향해 분노를 터뜨릴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마치.

‘…전장에 임한 군관과 같은.’

정제된 시퍼런 살기가 방 안에 깔리고 있었다. 황양양의 말에도 후원에 있는 병사들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막상 황양양이 두려움에 입을 막고 있었으니까.

검설린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았으나, 서문윤은 그의 눈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때 서느런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들은 무슨 죄로 피를 흘려야 하나.”

황양양이 몸을 움찔한 순간이었다. 그 말에는 숨겨진 분노가 있었다.

서문윤이 크게 눈을 뜨며 그를 보았다.

“장군의 딸이니 긴말 않겠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검설린이 말을 이었다.

“군부에 적을 살려두는 법은 없지. 이번에는 목을 베겠다.”

그 무덤덤한 말에 담긴 차가운 분노. 서문윤이 그를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일순간 검설린의 두 눈에 불길한 빛이 스쳤다. 뚜렷한 두 눈에 귀화가 서린 순간 서문윤은 그가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을 알아챘다.

두려움이 마음을 스쳤다. 서문윤은 가끔 검설린이 너무나도 먼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끔 내보이는 날카로운 비소가 이질적일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따끔거리는 살기. 본능이 알리고 있었다.

검설린은 검을 배웠고,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이.

“형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서문윤이 막혔던 숨을 내뱉었다. 땅에 늘어트린 칼끝을 말없이 바라보며 서문윤이 턱을 잘게 떨었다. 그것이 움직일까 두려웠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싫었다.

몸을 짙게 감싼 살기를 애써 무시하며 서문윤이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그를 향해 검설린이 다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서문윤이 그의 앞을 가리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형님, 제발, 제발.”

그리 말하며 청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설린의 손을 잡으려 했다. 검을 늘어트린 손은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아 투명했다.

무기를 든 채 살의를 드러내는 자의 손을 잡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 줄 안다. 무관이었던 서문윤은 제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그저 유리와도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감정이 없는 모습이 마음을 울렁이게 만들어 서문윤은 검설린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응시했다.

“형님.”

칼을 쥔 손 위에 손을 겹쳤다. 서문윤이 침을 삼키고 그의 검을 떨구려 할 때였다. 죽은 듯이 침묵이 이어졌다. 검설린은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으나 그를 밀치지도 않았다.

핏줄이 도드라진 단단한 손을 서문윤이 더듬었다. 그의 품에서 흐르는 익숙한 피 냄새에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검을 잡은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익숙지 않은 의형의 모습이 몹시 이상했다. 서문윤이 틈을 타서 그의 손을 붙잡고 검을 빼냈다. 굳게 검을 부여잡은 손이 단단했다. 서문윤이 울음을 삼키며 애써 손을 더듬었다.

쨍그랑!

검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떨어트렸다. 그는 순순히 서문윤에게 손을 내어주고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형님, 제가, 제가, 할 테니까.”

살기는 흩어졌으나 서문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애써 부여잡으며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황양양이 군사를 움직였으니 일이 크다. 그리고 의형은 그 군사를 베었고.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서문윤이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했다. 청년의 희게 질린 얼굴이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황양양도, 검설린도 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미 군문의 일이 되어버렸으니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병사를 움직인 기록이 남았을 터인데. 서문윤이 거의 울먹거리며 검설린의 손을 붙잡았다.

“당장 도망가야 합니다.”

병사를 해한 죄는 사형으로 처벌받는다. 서문윤은 그저 덜덜 떨며 그의 손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으나 서문윤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고변했다.

나지막한 한숨이 머리 위를 울렸다.

그리고 그 때 서문윤은 갑작스레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당장 그를 추포해!”

양양. 서문윤이 신음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여인은 칼을 떨어트린 검설린을 흉험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당에 있는 군병들은 빨리 마루를 밟아라! 나는 분명 안채에 들어오도록 허했다!”

병사들이 우물쭈물할 때였다.

방 문이 벌컥 열렸다. 기겁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으나, 그곳에 자리한 이는 군병이 아닌 적삼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격노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

공포와 경악, 충격과 분노, 증오와 그 외 여러 강렬한 감정이 서린 사내의 목소리. 서문윤은 방 안을 들어온 사내의 정체를 깨닫고 숨을 멈추었다.

“황 숙부.”

장군보다는 유학자와 같은 청수한 외모의 중년인. 그는 헐떡이며 숨을 내뱉고 눈알을 부라렸다. 피비린내가 흐르는 방 안. 중년인은 그 단정한 외모와 정반대로 사자와 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이 무슨 사지를 육시랄해서 죽여버릴 개잡놈이 감히 우리 양양을 해치려 들어?!”

검설린이 묵묵한 눈으로 그를 본 순간이었다.

군문에 이른 이들이 다툼을 벌여 피를 흘렸다. 더군다나 아무리 장군가의 딸이라도 규중의 처녀다. 사람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적 없는 황양양은 살기에 질려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마냥 떨고 있었다.

황재천이 분노에 이르러 눈을 까뒤집었다. 쇳소리가 울렸다.

“네놈의 껍데기를 벗겨 죽여 까마귀밥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발가락부터 네 머리꼭대기까지 하나하나 회를 쳐서 산 채로 씹어 먹을…… 허, 허억?”

“황 숙부, 안 돼… 응?”

황재천의 눈물 나는 딸 사랑을 알고 있던 서문윤이 그를 급하게 말리려던 중 눈을 둥글게 떴다. 이성을 잃은 채 검을 빼어 들고 검설린에게 달려들던 황재천이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켠 것이다.

“억, 어억.”

황재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무언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경악 어린 눈으로 눈앞에 자리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게 뭐지?

서문윤이 눈을 흔들며 벙 찐 황재천의 얼굴을 보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 듯이 그는 꺽꺽 숨을 내뱉으며 검설린을 허옇게 뜬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창!

그의 손에 든 검이 떨어져 내렸다. 황제가 하사한 하동하서 절도사의 검이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입술을 열었다.

“더 해봐라.”

공간에 내려앉는 서느런 목소리.

그 말에 그를 눈앞에서 본 황재천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서문윤은 오랜 시간 보았던 숙부의 얼굴에 서린 감정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희미한 두려움이었다.

황재천은 꿀꺽 침을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살기는 거두어졌으나 어느새 고조된 공기가 사람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방 안에 자리한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황재천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 명백했다.

예상과는 다른 아비의 반응에 황양양이 겁에 질려 문주를 손에 쥔 채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

서문윤이 침음을 삼켰다.

‘무슨?’

끄으윽. 바닥에 웅크린 군병이 피 흘리며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서문윤이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발끝에 서린 피를 잠시 바라보며 검설린이 눈을 깜빡였다. 새하얀 의원복에 산수유 열매 같은 핏방울이 알알이 튀여 있었다. 바닥에 꿈틀거리는 부상자를 바라보며 검설린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있었다.

“더 해봐라. 황재천.”

서문윤은 어쩐지 검설린이 몹시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황재천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당, 당신이 여긴 어떻게?”

검설린의 눈에 시퍼런 섬광이 스친 순간이었다.

* * *

황재천은 멀거니 선 채 한참 검설린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멍청하기까지 한 얼굴로 덤덤한 얼굴을 노려보듯 응시하던 황재천은 어느 순간 으악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얼굴에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경악과 공포가 서려 있어, 서문윤은 그저 멀뚱한 눈으로 그를 볼 뿐이었다.

“황 숙부, 오랜만입니다. 이건 제가 다 해명….”

“으, 으으?”

이성을 되찾은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멍청한 소리를 내는 황재천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아미를 꿈틀거렸다. 서문윤이 그들의 눈치를 슬슬 보았다.

대체 뭐지?

낌새가 몹시 수상했다. 황재천은 그의 의형을 아는 눈치였다. 아니, 알다 못해 그는 사랑하는 딸인 황양양도 내팽개친 채 노골적인 동요를 드러냈다.

그리고 분명 좋은 관계는 아닌 듯하다.

서문윤이 긴장을 드러냈다. 검설린은 황재천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으로 나와라.”

황재천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이 코웃음을 치며 안채를 빠져나갔다. 멀거니 그를 보던 황재천이 축 어깨를 늘어트리고 그의 뒤를 너털거리며 떠났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는 황양양과 서문윤, 다친 군병들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당황한 황양양이 무어라 말을 했다. 서문윤이 묵묵히 바닥을 기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숙여 피를 흘리는 이들의 상처를 살폈다. 훈련을 받았을 군병이 바닥을 기는 꼴이 심상치 않다.

굳은 얼굴로 상처를 확인한 서문윤이 이윽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모두 급소는 비켜 나갔어.’

한 명이 가슴에 피를 흘려 기겁했는데, 지금 살펴보니 갈비뼈를 비켜 칼을 찌른 것이다.

‘이러면 수습이 가능하다.’

그 때 그의 귓가에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쩜 좋아.”

사고를 저지른 황양양이 목소리를 떨었다. 서문윤이 그 순간 눈을 날카롭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양양!”

벼락같은 목소리. 황양양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은 그 전의 온화한 인상을 저버리고 귀신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

이 사태를 어이할 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군문을 움직인단 말인가.

절도사의 딸이라도 엄연히 황양양은 민간인. 군병을 움직이는 일은 엄연한 위법이다. 수도였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변방에 군주처럼 군림하는 절도사의 딸이기에 행할 수 있던 일.

‘철이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분노하여 황양양을 잠시간 노려보던 서문윤이 들끓는 화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은 죄를 아는 황양양이 겁에 질려 다람쥐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서문윤은 이윽고 그녀가 내뱉은 말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윤 가가는 말씀을 안 해주셨지만… 뭔가 이상해서… 그 사람… 가가는 그 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었잖아요….”

황양양이 울먹거리며 내뱉은 말에 서문윤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추락감에 휩싸여 한참을 침묵했다.

“그게 어떻게 연심이 오가는 관계예요? 두려워, 두려워하면서… 그리고 저 사람 가가를 보는 눈이….”

“그만.”

서문윤이 눈을 감고 읊조렸다. 분노가 거세된 덤덤한 말이었다.

거짓말같이 평정심을 되찾은, 아니 사실 평정심을 되찾았다기보단 다른 감정이 분노를 덮은 것이겠지.

서문윤은 한참을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저 아이가 알아볼 만큼 그와 나는…….’

착잡한 마음뿐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어느 순간 서문윤이 눈을 떴다.

드르륵!

의형과 황 숙부가 들어오고 있었다. 서문윤은 핼쑥한 얼굴로 돌아오는 황재천을 바라보았다. 짧은 수염, 단정하게 묶은 새까만 머리카락.

젊고도 유능한 병부의 권력자가 파르댕댕한 얼굴로 어기적어기적 문을 밟았다.

“황 숙부.”

조심스레 서문윤이 말을 걸자 황재천이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어, 그래. 윤아.”

영혼이 들어 있지 않는 목소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다는 얼굴을 한 서문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검설린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내뱉었다.

“군문의 풍기가 어디까지 어지러워진 거지? 민간인이 군병을 통솔해?”

“…딸자식을 잘못 키웠소.”

황재천이 크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황양양을 보았다. 황양양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사태에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렸다.

“형님.”

검설린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서문윤이 눈치를 보며 입술을 열었다. 그를 흘깃 바라보며 검설린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네 딸이 만들어놓은 난장판 당장 네가 수습해! 더 이상 내게서 다른 말이 나오게 하지 마라, 황재천.”

노성에 황재천의 몸이 움츠려졌다. 그는 짤막하게 숨을 내뱉고 떨리는 눈으로 검설린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혼란이 드러나 있었다.

검설린의 눈치를 보던 황재천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충격을 받은 듯한 황재천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순간 날카롭게 눈을 떴다. 황재천이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패전지장 같은 몰골로 그가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겠네.”

* * *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걸음을 걷는 서문윤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서문윤과 검설린, 황양양과 황재천은 청사를 걷는 중이었다.

서문윤이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의형은 도대체가.’

그의 비밀을 꽤나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다시 생겨난 의혹을 생각하면 서문윤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희뿌연 물안개가 의형과 저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검설린과 황재천은 분명 안면이 있었다.

그것도 몹시나 특별한 방향으로.

황재천은 검설린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을 본 것처럼 그는 기겁하며 몸을 떨고 검설린의 앞에서 몸을 수그렸다.

호의적인 기색은 아니다.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나 딸을 아끼던 황숙부가 딸을 벼락같이 혼내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황양양이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져도, 황재천은 몇 번이나 그녀를 붙잡아 일으키면서 경기를 하듯 화냈다. 그 모습은 몹시나 이질적이었다.

황양양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데.

그리고 오곡현에서, 석방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던 이상한 일들.

소금 거래 혐의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 뒤가 구린 경칠승의 처형과 강소성주의 움직임.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이 암담한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끝도 없이, 헤어 나올 수 없이 깊은 구덩이에.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로 의형의 등을 보았다. 그는 황재천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대담을 생각하며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연유를 물어도 말해주지 않으시겠지요?”

“…….”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답답함에 토로했었다.

“내가 아는 의형이 의형이 맞습니까?”

검설린은 그저 냉랭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무어라 말을 더 내뱉으려던 서문윤은 울컥하여 말을 삼키고 쓰라린 미소를 흘렸다. 그를 빤하게 보는 시선을 알면서도 검설린은 모른 척 침묵을 지켰다. 창백하게 질린 살갗. 서문윤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말을 삼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청사의 감옥으로 가는 중이었다.

황양양은 황재천이 없던 사이에 친하게 지내는 아버지의 부하에게 떼를 썼다. 황재천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던 황양양의 드센 압력은 협박에 가까웠다. 일개 열여섯 소녀의 말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재천의 휘하 장수들은, 이전에 황양양의 월권을 봐주었던 상관을 떠올리며 군병을 내주었다.

고작 군병 서른 명이 이리도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몰랐겠지.

그들은 천하에 의로운 일로 명성을 드높인 검설린을 공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양양의 명령에 그들은 창을 쥐어야만 했다. 서문윤이 마당에서 보았던 열댓 명의 대기조가 그럼에도 명을 거부한 이들이었다.

군부에 소속되지 않는 자가 어찌 군병을 부려?

더군다나 의인이라 이름 높은 명사를 해치려는 이유가 옆에서 들어보니 치정문제다.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몹시 분노한 이들은 안채 안에서 흐르는 비명소리에 경악하여 안절부절못하다가, 상황이 종료되고 황재천에게 모든 것을 고변했다. 황양양이 혹여 명령을 어긴 죄를 물을까,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재천이 고변받은 것은 황양양이 그가 없을 때 저질렀던 무수히 많은 월권이었다. 딸이라 오냐오냐 예뻐하던 황재천의 얼굴을 퍼렇게 질리게 한 일들이었다.

“이 망아지 같은 게! 대체 무슨 일들을 저지른 거야!”

그건 분통이 터져 내뱉는 말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황재천은 군병을 물리고, 치소에 파발을 보내 황양양에게 월권을 허한 그의 부관을 구금하란 명령을 내렸다. 그동안 검설린은 부상자를 살폈다. 서문윤은 그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그의 일을 거들었다.

대충 일이 마무리될 때였다.

서문윤은 검설린을 도와 부상자의 상처를 돌보며 단면이 깔끔한 것을 확인했다. 상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를 살짝 벗겨나간 부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혈만 제때 하면 별문제 없는, 그러나 바로 몸을 회복하기는 무리인 상처.

손에 힘을 빼지 않고, 망설임 없이 단 한 번에 그은 일격(一擊).

서문윤은 묵묵히 상처를 지혈하며 속에 담긴 말을 삼켰다. 확실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의형의 무예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이.

그것은 서문윤이 일전에 보아온 적이 없는 검술이었다.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수위의 것.

검격에서는 익숙함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의형은 절도사인 황재천과 안면이 있다.

서문윤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입술을 깨물었다.

황재천이 황양양을 쥐 잡듯이 잡을 때였다. 검설린이 갑작스럽게 정색하며 말을 내뱉었다.

“네가 전에 다잡지 못한 가풍에 어린아이를 추궁할 때가 아니다. 너는 백년화를 가진 의원이 어딨는 줄 분명히 알겠지.”

“그, 그것을 어떻게?”

죽은 사람의 것마냥 푸르죽죽 시퍼렇게 변한 황재천의 얼굴을 용암이 들끓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검설린이 말을 내뱉었다.

‘잡아뗄 생각은 하지 마라, 황재천! 당장 의원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때 황재천은 익, 소리를 흘리며 황양양을 푸른 불꽃이 튀기는 눈으로 보았다. 그 전까지 황양양을 혼낸 것과는 전혀 다른 기색이 얼굴에 엿보였다.

그러나 황재천은 입술을 꾹 깨물며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체념하듯 한숨을 내뱉은 황재천이 앞장서고, 그리고 지금 상황이었다.

황양양이 두려움에 덜덜 떨며 서문윤의 옷깃을 붙잡았다. 서문윤은 그를 떨굴까 생각을 했으나 양양이 너무 두려움에 질려 있어 그저 모른 체하며 걸어갈 뿐이었다.

어쩐지 의뭉스러운 황 숙부의 태도도 그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서느렇게 굳은 의형의 얼굴도 몹시나 수상했고.

“…제가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옆에서 들려온 겁에 질린 소녀의 말에 서문윤은 그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는 묵묵히 어둑한 통로를 걸었다.

타악, 탁.

네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감옥을 웅웅 울렸다. 황재천이 손에 든 붉은 횃불이 어둠을 밝혔다. 벌써 어둑해진 시점이었다. 창살을 통해 남색 하늘을 밝히는 햇빛이 흘렀으나 감옥을 다 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황양양이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된 마음을 드러냈다.

그 때였다.

콰앙!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들린 것은. 황재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밖을 보았다. 창살 밖으로 갑작스럽게 빛이 번쩍거렸다. 황재천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어, 어어어!”

그 순간 쩌렁한 목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화약!”

황재천의 얼굴이 시뻘게진 순간이었다. 그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려 황재천이 돌아온 길을 되돌아갔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황양양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문윤은 그 말에 답변을 해주지 못했다.

‘화약이라니? 화약이라니?’

심상치 않은 사태에 그는 검설린의 앞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는 본능적으로 검설린을 지키려 허리춤에 놓인 검을 붙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울컥한 검설린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 포기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형님, 비키, 으악?”

짤막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검설린이 그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단단한 팔에 휘감겨 서문윤이 눈을 크게 떴다. 널찍한 품에 몸이 안기고 서문윤은 잠시간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에 얌전히 있어.”

“형, 형님?”

서문윤은 망연한 얼굴로 검설린이 감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윤, 윤 가가.”

소매를 당기며 황양양이 울먹거렸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녀를 달래줄 틈도 없이 그저 의형의 창백한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릴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혼란스러운 상황에 서문윤이 눈을 흔들며 침음을 삼켰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서문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서문윤은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두려워하는 황양양을 몇 마디 말로 달래고 그는 굳은 얼굴로 검설린과 황재천을 기다렸다.

“야야야!”

“저게 뭔데? 뭐…!”

“당장 병력 돌려! 지금 뭐야? 왜 경비대가 여기에 왜 있어?”

창살 밖으로 비명이 난무했다. 보지 않아도 아수라장이 된 바깥이 눈에 훤했다. 시간이 꽤나 흘러 서문윤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질 쯤에야 황재천과 검설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감옥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일사(一四 )호, 감옥 끝에!”

황재천은 다급히 말을 내뱉으며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서문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설마?”

황재천의 입술에서 당혹스러운 음성이 흘렀다. 감옥의 끝이었다. 벽이 보이는 한적한 구석진 방.

“여, 여기라 했는데?”

빈 방 앞에서 하는 말이었다. 손에 열쇠를 쥔 채 황재천이 당황한 얼굴로 검설린을 보았다. 섬광이 사내의 눈에 번뜩였다.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검설린이 황재천의 손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말릴 새도 없이 거칠게 감옥의 자물쇠를 연 검설린이 문을 박차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서문윤이 탄식을 흘린 순간이었다.

황재천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감옥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죄수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허름한 감옥에는 시린 초봄의 바람만이 살랑살랑 불 뿐이었다.

“이 방이 맞는, 맞는….”

황재천이 황급히 감옥 문을 살피고 또 벽에 써진 숫자를 보았다.

“일사(一四)호, 여기가 맞단 말이다!”

망연한 마음이 담긴 말이 삼방이 막힌 감옥을 휘휘 울렸다.

“어, 어어.”

황재천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렀다.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문득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어벙한 분이 아니셨는데.’

어쩐지 오늘 황재천은 몹시나 허술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서문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상황을 관조했다.

감옥에는 침입의 흔적이 없었다. 벽에는 구멍이 없었으며 창살은 패인 부분 없이 탄탄했다. 텅 빈 감옥을 노려보던 검설린의 얼굴에 살벌한 기색이 흘렀다. 일사호 감옥방을 멍하게 바라보는 황재천의 얼굴 또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모두가 충격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문득 그들의 귓가로 비명이 울렸다.

“침입자다! 침입자!”

황재천이 크게 놀란 얼굴로 창살 밖을 바라보았다.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저자는?”

창살 밖으로 보인 한 사내의 모습.

청사의 높은 담장 위, 대담하게 백의(白衣)를 입고 고고하게 모습을 드러낸 사내 하나가 있었다.

거북이 가면을 쓰고 어깨 위에 애필을 입은 죄수를 얹은 사내.

검설린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소란이 퍼져 나가 침입자를 부르짖는 소리가 감옥 안까지 들렸다.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채 담장에 선 사내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담 위에서 감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말을 내뱉지 못하는 자리에서 황재천이 흔들리는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린 저녁. 풍성한 구름을 병풍처럼 뒤에 깔고 그는 입꼬리를 광대에 닿게 비틀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자식!”

누가 봐도 도발의 뜻에 분노한 황재천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창살로 다가가려던 황재천이 몸을 비틀거렸다.

“무슨? 헉!”

검설린이 갑작스레 그의 팔을 붙잡아 당긴 것이었다. 팔을 잡은 힘이 거셌다. 그를 향해 몸을 무너트린 황재천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중 경악에 휩싸여 딱딱하게 굳었다.

서문윤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위험!”

타아앙!

창살 사이로 날아온 화살이 벽에 박혀 부르르 살을 떨었다.

“헉, 허억.”

숨소리가 들렸다. 양양의 비명소리도 같이 들렸다.

‘겁도 없이 절도사의 치소를 습격해? 게다가 사람을 어깨에 얹고 이 거리에서 활을 쏘다니?’

혼란이 가득한 자리. 서문윤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벽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잔떨림이 남은 화살을 살피던 서문윤은 그 끝에 매달린 편지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불길함이 마음을 잠식하고 있다.

빠르게 편지를 펼친 서문윤이 신음을 흘렸다.

“뭐라고 써 있느냐?!”

다급한 황재천의 목소리에 서문윤이 창백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서문윤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장안사준(長安四俊) 사영귀(號靈鬼)가 의원을 데려간다. 불치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나는 천금을 내놓으리라.”

그 순간 검설린과 황재천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 * *

장안사준(長安四俊).

그것은 8년 전에 와해된 무리를 뜻하는 말이었으며 현재까지 드높은 명성을 누리며 회자되는 이름이었다.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인재.

“문무를 겸전한 빼어난 네 영걸이 있으니 당국의 앞날이 훤하다.”

수도 장안에 기거하는 네 사람이라 장안사준이라 이름을 받게 된 이들은, 한때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명성을 누리며 승승장구했다.

사람들은 그들과 교류하길 원했으며, 장안사준의 이름은 명사들 중 가장 높게 빛났다. 황제는 그들을 칭찬하며 궁에 불러 자식처럼 아꼈다.

“너희가 있으니 나는 사직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명성이 높아도 그들이 평범한 신분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람들은 황제의 지나친 총애를 탓하지 않았다.

“이렇듯 뛰어난 인재가 황태자를 돌본다면 내가 무슨 걱정을 하랴?”

영광스러운 황제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으며 그들 중 한 사내가 방긋 웃었다. 그는 밝게 빛나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명료한 목소리를 흘렸다.

“부황.”

장안사준의 구심점은 그 당시 황태자였으므로.

사람들은 굳건한 후계자, 국본이었던 태자와 그의 벗들을 탓할 수 없었고, 그렇게 장안사준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드높아졌다. 그들은 각각 황가 이전부터 중원에 뿌리박은 명가의 자손이었으며,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고, 군주의 자손이었으며, 유가의 적통이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상과 신분.

사람들의 존경을 사는 무리.

그러나 그 이름은 8년 전 동궁사변 이후로 공석에서 금기시되었다.

황태자가 황귀비를 범하려 한 혐의로 추포당하고, 분노한 황제는 그를 사사하였다.

비응룡(飛應龍).

당시 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날개가 달린 용은 하늘을 널리 날아 비바람을 일으킨다. 용은 천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비응룡이란 말에는 태평성대를 이룩할 현군의 씨앗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비응룡은 무슨 비응룡이냐! 감히 짐 앞에서 그따위 이야기를 지껄이는 놈들은 혀를 뽑아 단죄하리다!”

그러나 용은 날개가 부러진 채 추락하고야 말았다.

역적 죄인을 품은 장안사준의 이름은 막상 장안에서 불리지 못했으며, 그를 기록한 문서는 파기되었다.

태자를 제외한 이들은 그와의 친분에도 살아남았다. 현인을 살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까 봐,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에 반발을 우려한 황제는 그들에게 적당히 경고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하여 장안사준은 사장된 이름이었으나, 아직까지도 민간에는 말이 오가곤 했다.

사영귀(號靈鬼)는 장안사준 중의 일원이었던 사내를 뜻했다. 지금껏 중화에 있었던 수많은 황가와 혈연을 섞고, 황제가 태산에 봉선하는 일을 보좌했던 명문세가의 거북이처럼 느릿하고도 또 진중한 사내.

그리고 건전성에는 그 사영귀가 난데없이 중병에 걸려 의원을 납치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하동하서 절도사의 치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었다.

“여기 북성이 있다는 소식이 들었소! 내 아내가 지금 위중해…!”

“비켜, 비켜!”

“부부 간의 의리보다 부모자식 간의 의리가 깊은 법! 앞 못 보는 노모가 침상에 떨어졌소, 제발….”

“이거 놓지 못해? 고관대작을 돌보지 않고 빈민을 돌본다는 사람이 절도사의 치소에는 왜 있어? 못 본 새에 군중에 소속되었나 보지? 허 참!”

“저, 저 사람 말본새하고는! 입 닥치지 못해? 도와주려 해도 마음이 달아나겠다.”

하룻밤 사이에 건전성의 의원이 하나같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던 중 다른 소문이 퍼졌다.

장안사준의 일원인 사영귀가 중병에 걸려 의원을 납치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납치 사건 이전에 퍼진 소문과 관련된 말이었다.

태자가 죽고 권세에 염증을 느낀 명문세가의 자손이 결국 심병을 앓아 양주 땅에 물러났다는 말이었다. 그간 요양했던 사영귀의 병이 깊어져, 그가 의원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의원이 실종되었다.

게다가 의원이 사라진 자리에, 사영귀가 그를 데려간다는 쪽지가 남겨졌으니 사람들은 이것을 사영귀의 짓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사실 이는 사람들의 흥미를 북돋기에 좋은 소문이었다.

“사영귀라고? 사영귀 그 양반이 여기 왜 나와?”

8년 전 일어난 사건이 장안사준의 이름을 공석에서 언급되지 못하게 만들었으나, 사실 민(民) 중에서는 동궁사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민족 출신 귀비.

사실 민초란 어떤 의미로는 관료들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들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국사에 손대는 귀비를 싫어했다. 더군다나 인자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태자가 뜬금없이 궁에서 시체로 나가고 귀비를 겁간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니, 8년 전 동궁사변 이후로 오고 가는 뒷말이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은 귀비가 꾸민 일이요, 태자는 무고하다.

8년의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장안사준의 일원이자 북란을 해결한 대장군이 은퇴하고 국경에 회흘과 토번이 또다시 기승을 부렸다. 고우군을 비롯한 유가의 세력과 본디 지배계층이었던 명문귀족들이 다투던 시점. 그를 조율할 수 있었던 장안사준이 황제의 견제에 정계에 손을 떼고 혼란이 가중화되었다.

사람들은 장안사준의 이름을 그리워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있던 시절의 향수를.

그러나 태자가 죽고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장안사준의 행적은 묘연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변방 건전성에서 나타난 사영귀였다.

하루아침에 의원이 깡그리 사라진 건전성.

혼란은 절도사와 그의 손님에게도 이어졌다.

‘사영귀라고? 사영귀라고? 그 가면을 쓴 사내가 사영귀라고?’

서문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대 아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알음알음 퍼져 나간 소문이 북성의 존재를 알리고 사람들은 하나 남은 의원을 찾는 중이었다.

서문윤이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어제 저택에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의형도 해를 입었겠군요.”

굳어진 얼굴로 서문윤이 북성을 내놓으라 소리치는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황재천의 저택에도 사람이 침입했다. 의원을 납치하러 온 사람이 북성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황급히 달려온 하인이 벌벌 떨면서 고한 이야기는, 복면을 쓴 사내들이 들이닥쳐 저택을 뒤집어놓았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청사로 이동하는 도중에 있던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마 해를 당했으리라.

서문윤이 심각한 얼굴로 상념에 빠질 와중이었다.

‘응?’

문득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서문윤이 등을 돌아보았다. 그는 곧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황재천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지 우는지 가늠할 수 없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그를 보고 있었다.

저 얼굴은 대체 뭐지?

서문윤이 그를 멍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아차 한 황재천이 무너진 얼굴 표정을 수습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윤아. 그간 2년간 어찌 서문 형의 속을 썩였느냐?”

“황 숙부, 그게.”

“네 할 말이 많겠지만, 나도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그러나 일이 바빠 회포는 나중에 풀어야겠다.”

검설린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껏 음울한 기색을 내보이는 중이었다.

황재천이 한숨을 내뱉었다.

“혹시나 양양이 일을 벌인 게 아닐까 추궁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더군. 그리고 이건… 나도 도저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한 달 동안 떠난 사이에 대체 건전성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리 말하는 황재천의 얼굴이 병자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잠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시선을 검설린에게로 옮겼다.

황재천 또한 검설린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사실 서문윤 또한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참이었다. 의원이 납치되었다니, 심각한 일인데 이건 서문윤이나 검설린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치소 앞에 모여들어서 북성이 필요하다 우짖는데 한 사람이 성 전체의 환자를 돌볼 수 없는 노릇도 아닌가?

험지에도 의원은 있었다. 변방을 돌 때도 북성 한 사람만이 환자를 감당한 게 아니었다. 지역에 거주하는 의원을 가르쳐 일을 보조하게 만들어, 상대적으로 상태가 심하지 않은 환자는 그들이 돌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의원이 없는 상태였다.

너무나도 혼잡스러운 상황에 일단 대피를 하였으나 눈앞이 까마득했다.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검설린이 문득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떼고 황재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흉흉한 기색이 묻어 나오게 구겨져 있었다.

황재천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서문윤의 눈에 이채가 서린 순간이었다.

“황재천.”

낮게 깔린 저음이었다. 검설린이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뭔가 숨기는 거 없나?”

황재천이 그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서문윤이 잠시간 가라앉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의 새까만 눈에 어느 순간 섬뜩한 빛이 스쳤다.

황재천은 짧은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은 숙부의 떨리는 손을 보았으며 새하얗게 질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그러나 황재천은 어느 순간 희미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갑작스럽게 단단한 성벽처럼 변모해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이채가 서린 순간이었다. 그는 당황을 드러냈던 방금 전 모습과 달리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없소.”

이어서 내뱉은 말에 검설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이까.”

그것은 평소에 서문윤이 보았던 황재천의 모습이었다. 항상 여유롭고 강인했던 황 숙부의 모습. 사람의 마음을 꿰뚫듯 서느런 시선으로 검설린이 황재천을 노려보았다. 그는 짧은 침묵 끝에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황재천. 네가 내게 할 말은 없지.”

이어진 말에 황재천은 입술 끝을 딱딱히 굳히고야 말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너무 뻔뻔한 말이 아닌가? 황재천? 당위를 얘기하지 않겠다. 너는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

“그것은 사자에 대한 예의다.”

그 말에 황재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 *

황재천은 서문윤에게 그간 있던 일을 추궁했다. 서문윤은 그가 제 다리를 고쳐주었다며, 그 대가로 2년을 더 그를 따라다니기로 했다 말했다.

“네 부모님이 얼마나 너를 걱정하셨는지 아느냐? 이 몹쓸 것. 그래도 말은 남겼어야지.”

불효를 꾸중하는 말을 들으며 서문윤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묵묵히 말을 듣던 서문윤이 황재천에게 검설린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황재천은 서문윤에게 옛날에 큰 은혜를 입었다 말을 얼버무렸으나 서문윤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분이 군병을 베었을 때 검술이 심상치 않습니다. 상처가 군문의 검술에 당한 것과 닮아 있는데, 혹여 관련 있습니까?”

그 말에 황재천은 모른다 발뺌할 뿐이었다.

그렇게 짧은 회포를 풀고 서문윤은 검설린을 따라나서야만 했다.

“할 일을 해야지.”

“그게 무슨?”

“의원이 할 일이 뭐가 있지? 서문윤 짐 챙겨.”

“예.”

“아니, 잠깐, 바깥은….”

그는 황재천의 만류에도 사람들을 돌보겠다 나섰다. 황재천이 어쩔 수 없이 병사를 부려 사람들을 통제하고 광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내어주었다.

급하게 의당을 만들어 환자를 받으니, 서문윤도 요기를 할 시간 없이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전쟁과도 같은 하루였다.

전염병이 돌던 지역, 지진이나 산사태가 난 마을과 같은 급박함은 없었으나 환자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으니 체력이 좋은 서문윤도 탈진할 정도였다.

다행히 오후에 변을 당하지 않은 의원을 몇 명 발견하여 새벽에 번을 세우게 할 수 있었다. 검설린처럼 급하게 일이 있어, 혹은 왕진을 나와 집을 비워 변고를 피한 이들이었다. 하루 종일 시달려 파죽이 된 서문윤이 비틀거리며 문주를 틀어쥐었다. 검설린 또한 지친 얼굴로 문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검설린이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를 잠시간 바라보며 서문윤이 어느 순간 문득 눈을 빛냈다.

무언가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서문윤이 문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군사기밀 중에서도 기밀인 화약이 있는 곳을 알아채, 개중 소량을 빼내 한적한 관사의 뒤뜰에 폭발을 일으킨다. 굉음에 놀란 성벽을 지키는 경비를 위조된 군패로 부려 불을 끄게 만들곤 유유히 성을 빠져나간다라.”

“…….”

“소란에 휩싸인 부상자를 제외하곤 사상자도 없다 합니다. 의원을 납치한 이들의 수가 많지 않으나 무예가 고절하여 감히 건들지 못한다고.”

“…….”

“…이게 말이 됩니까?”

마침내 서문윤이 일그러진 얼굴로 기둥에 몸을 기댄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고요한 얼굴을 노려보며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일반인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적어도 규모가 있는 단체가 저지른 일입니다.”

“…….”

“당신께서는 이름을 알리신 명사입니다. 당신이 해를 입는다면 관에서도 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검서린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답을 주지 않는 의형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정녕 사영귀가 저지른 일입니까? 그는, 그는… 특혜를 받은 가문의 일원입니다.”

그는 그저 지친 얼굴로 답할 뿐이었다.

“내가 어찌 알지?”

청년의 얼굴에 답답함이 스친 순간이었다.

“당신이 모르시면 누가 어찌 압니까?”

울컥한 서문윤이 언성을 높였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영귀는 운표선이 아닙니까? 우리가 오는 길에 보았던 그 선표 공자!”

만년설같이 서느런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그래, 맞다.”

서문윤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목소리는?’

팔짱을 낀 채 문틀에 몸을 기대던 검설린이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정의 밤하늘처럼 티끌 한 점 없는 새까만 눈으로 고요히 사내를 바라보았다.

서문윤이 몸을 돌려 경악 어린 얼굴로 말을 내뱉은 이를 보았다.

퀭한 얼굴의 사내. 옥색 천으로 머리를 묶고 푸른 소주 비단옷을 입은 이. 소매가 넓은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움푹 들어간 볼과 거뭇한 그림자가 진 눈이 어둠과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뿜었다. 그것은 서문윤이 처음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어쩐지 사내는 뒤켠에 너른 공백과 어두운 밤을 두고 음산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맞다, 내가 장안사준 사영귀 운표선이다.”

귓가를 진득하게 울리는 음습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사내의 눈이 어둠 속에서 굶주린 승냥이 것마냥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 3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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