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안사준(長安四俊)(2)
“그렇게 일을 벌이면 어쩌자는 거야.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도 질풍노도 이팔청춘 짓인가? 이 반항아!”
허공을 째는 날카로운 목소리. 볼이 움푹한 초췌한 인상의 귀공자가 버럭 소리쳤다.
서문윤이 경악한 얼굴로 의형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폭급한 성정을 걱정한 탓이었다.
‘어쩌자고 저런 말로 의형을 도발하나?’
말하는 것을 보니 의형의 성격을 잘 알 터인데. 그러나 서문윤의 예상과 다르게 검설린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오히려 말을 내뱉는 자가 더 심기가 어지러운 듯 보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 태평한 말에 귀공자의 얼굴에 빠각 금이 생겼다.
“뭐? 강소성주에게 연락이 직통으로 가게 해놓곤 아무 짓도 하지 않아? 작정하고 일을 벌이면 아주 반정이라도 일으키겠군.”
서문윤이 헉 소리를 냈다. 장난으로도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어찌 저리 쉬이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귀공자는 실수로 말을 내뱉은 것이 아닌 듯, 강렬한 시선으로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을 본 순간 서문윤은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저자.’
한순간 어둡게 가라앉은 눈에 스친 섬광에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살기도 적의도 아니었으나 어쩐지 그의 경계심을 돋웠다. 그는 유심한 눈으로 두 사내의 대담을 좌시했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 앞에서, 검설린은 냉랭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의욕이 넘치는 자가 아니란 것을 잘 알지 않나?”
호리한 생김새의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태연한 검설린의 얼굴을 보며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래, 잘 알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서문윤이 그 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둘이 무슨 관계일까.’
서문윤은 그 둘의 대치를 관조할 뿐이었다. 이 상황이 꽤나 낯설었으니까.
* * *
경칠승이 가져간 목함은 혼란에 행방불명되었다.
국법을 어겨 소금 거래를 한 경칠승은 강소성주의 명으로 그날 바로 즉각 참수되었다. 아무리 대역죄를 지었더라도 몹시나 급작스럽게 진행된 일이다. 사람들은 수상쩍은 일처리에 뒷말을 수군거렸으나 관군이 떼거리로 몰려드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소금 거래의 죄는 몹시 엄하게 다루어졌으니까.
경칠승은 꽤나 인심이 넉넉한 유지였으나 반역죄에 얽힐 위험을 자처할 만큼 존경받지는 않았다.
“그게 사람의 정이다!”
검설린은 그 꼬락서니에 날카롭게 조소했다. 서문윤은 그 말에 항의하고 싶었으나, 그의 기세가 워낙 날카로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던 서문윤이 간신히 입을 뗐다.
“목함은 어찌합니까?”
그것은 몹시 중요한 귀물이다. 의형이 사람을 고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다. 그 중요한 물건을 소실했으니, 서문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의 진심이 담긴 말에 검설린은 여상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새로 채우러 가야지.”
그리 간단히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일이었나?
그 목함 때문에 경칠승과 그리 대립각을 세우고 사달이 났는데. 어안이 벙벙한 서문윤을 검설린은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강남동도를 벗어나 국경 근처 하서 지방으로 향했다. 일전에 몇 번 와본 도시였다. 서문윤은 그제야 이 도시가, 검설린이 몰래 목함 속 의기구를 구하던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기사 물건을 쓰고 버리는 경우가 많았지.’
몇 번이고 교체되었던 날카로운 바늘이 담긴 물건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그제야 그는 목함의 기구가 저도 모르게 교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스럽게 걱정했구나. 경칠승이 목함을 찬탈한 이후로 계속 마음을 졸였던 서문윤이, 사실을 깨닫고 억울함을 느낄 무렵이었다.
“기다리고 있겠-.”
“따라와라.”
항상 그랬듯 검설린이 저를 내버려두고 갈 줄 알았던 서문윤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할 말을 잃은 채 잠시 침묵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그가 제게 비밀로 하던 일이었다.
짧은 침묵. 그 끝에 서문윤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그리하여 찾아간 곳이었다.
‘기루?’
서문윤은 동서대란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지 안다. 그것은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 일이었으며, 동시에 역린이었다. 그러니 서파의 잔재를 주고받는 일은 은밀한 장소에서 행해야 할 것인데.
서문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너른 등을 보았다.
“여, 여기는.”
검설린이 향한 곳은 대로에 자리한 기루였다. 꺄르르, 여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서문윤이 머뭇거리며 검설린의 안색을 살폈다.
“어서 오셔요, 어서 오셔요!”
“두 분이세요? 알고 계시는 꽃이 있으셔요?”
가슴을 드러낸 기녀 둘이 검설린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서문윤은 몸을 움찔했으나 곧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이 여전히 냉랭했기에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 무심한 그의 의형은 곱게 치장한 여인에게도 여전히 싸늘했다. 서문윤은 그저 또다시 어리석은 생각을 품은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그는 쓰라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련한 것.
‘그나저나 의형은 정녕 여색을 기피하시는 건가.’
2년의 세월간 여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검설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였다.
“선표를 불러와!”
싸늘한 목소리가 기루를 울렸다. 돌연 내뱉은 말에 기녀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서문윤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던 여인은 더러운 것을 놓듯 후다닥 손을 물렸다. 검설린의 팔뚝에 매달렸던 여인 또한 황급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언제 교태를 부렸냐는 듯 물러선 여인들은 놀랍게도 공손하게 몸을 숙여 그들을 응대했다.
“따라오시지요.”
그리고 기녀의 말을 듣고 달려온 총관이 안내한 방이었다.
초저녁부터 문란한 기색을 보이는 도시의 밤. 꺄르르 여인의 웃음소리의 잔해가 귓가를 문질렀으나 어두컴컴한 방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방 한가운데는 미백색 비단을 입고, 옥관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귀공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귀공자는 볼이 움푹 파이고 눈 밑이 거뭇하여 초췌한 인상이나, 선이 섬세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청년이었다.
‘저자가 선표?’
검설린이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관으로 임관했던 서문윤이 받기 힘들어 떨었던 시선. 그러나 호리하고 연약한 인상의 귀공자는 그에 위축되기는커녕 뜻밖에도 몹시나 신경질적인 얼굴로 검설린을 노려볼 뿐이었다.
서문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볼 때 불호령이 내려졌다.
“네 이놈!”
귀공자가 벼락같이 내뱉은 뜻밖의 호통에 서문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상황이었다.
“고우군이 감시를 붙였단 말이다! 운가(雲家)가 아무리 은주왕조 이후로 백대에 걸쳐 내려온 고금 제일의 명문가란들, 이 일은 그를 박살낼 만한 것임을 모르느냐? 네놈이 아무리 10년 약조로-.”
검설린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입 닥쳐!”
사내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노기가 묻어 나오는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하게 울리고 서문윤이 경직되어 숨을 멈췄다. 그 말에는 몹시 흉흉한 살기가 담겨 있었으므로, 서문윤은 얼어붙은 채 검설린의 안색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복면 밖으로 드러나는 얼굴을 살벌하게 일그러트리며 귀공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귀공자의 입술이 굳게 다물린 때였다. 검설린의 목소리는 들끓는 분노를 담고 있었으나 공자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새까만 눈을 위로 뜨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침묵 끝에 귀공자가 문득 서문윤을 바라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서문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나?
귀공자는 마치 서문윤을 품평하는 것만 같은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 명백한 호기심이 담긴 시선에 서문윤이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였다.
귀공자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백년화를 찾았지.”
뜻 모를 말이다. 검설린이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더 지껄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래, 그래.”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을 하곤 귀공자가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변모한 분위기를 따라잡지 못해 서문윤은 눈을 멀뚱히 뜰 뿐이었다.
검설린은 미간을 좁힌 채 귀공자를 마주 보았다. 불편한 심기가 역력한 표정이었으나, 그는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검설린은 그저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고우군이 너를 사찰하나?”
무거운 목소리였다. 귀공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럴 만하지 않겠어? 의심하던 정체를 확인시켜줬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지, 내가 약조를 어겼을까 봐. 그 말에 입술 끝을 비틀어 웃으며 검설린이 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강서진이 확인시켜주었지.”
강서진. 익숙한 이름이다.
서문윤은 기억을 더듬어, 그 이름이 한때 유명한 기재였던 장안사준(長安四俊) 중 한 사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현재 강남동도의 절도사란 사실도.
강소성주 강서진.
‘잠깐?’
서문윤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뭔가 좀 이상…….’
산산조각 난 파편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서문윤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때 의미심장한 귀공자의 얼굴에 참지 못한 듯 검설린이 돌연 언성을 높여 역정을 흘렸다.
“그래서 주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귀공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실 검설린의 말은 몹시 배은망덕한 것이리라. 서문윤이 언뜻 본 상황은, 귀공자는 반역 혐의를 무릅쓰고 의기구를 마련해 주고 있었고, 검설린은 수혜를 받고 있었으니까.
명백히 귀공자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 맞을 텐데 그는 적반하장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귀공자는 입술 끝을 비틀며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 있다!”
챙캉!
품에서 열쇠가 달린 나무패를 꺼내 탁자에 던지며 그가 말을 이었다.
“감시 탓에 이리 옮기진 못했다! 양주(涼州) 지부의 위치를 네 알렷다? 창고에서 찾아가라. 이 못난 놈.”
그 말에 검설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귀공자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쳤다.
“그냥 가는 거냐? 이 매정한 놈아.”
“더 있어보았자 뭐 하게.”
“그래도 우리가 몇 년 친구인데.”
검설린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귀공자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너.”
귀공자는 한 마디 말을 내뱉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초췌한 얼굴을 검설린을 향해 들이밀었다. 검설린은 불편한 얼굴로 시선을 받을 뿐이었다.
귀공자는 한참을 차근히 검설린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기색을 살피는 듯, 무언가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듯.
그 기이한 행동에 서문윤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공자의 언행은 몹시 기이하구나.’
검설린의 얼굴에 희미한 분노가 일렁일 쯤에야 귀공자는 굳게 다물린 입술을 뗐다.
“너 생기가 도는구나.”
검설린의 얼굴은 여전히 냉막했다.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만 같았던 놈이. 금방에 피를 토하고 죽을 것만 같았던 네가.”
“…….”
“…사람답게 내 앞에 설 줄이야.”
“……선표.”
경고와도 같은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귀공자가 빙긋 웃었다.
“흐흐, 백년화를 찾는다고?”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순간이었다.
“그만.”
분노가 억눌린 목소리. 그러나 귀공자는 아랑곳 않고 혀를 놀릴 뿐이었다.
“저자를 위한 일이냐?”
“그만, 선표.”
“저 청년이 너를 그리 만들었어?”
“그만, 너…….”
“10년이 끝나가는 지금, 나는 네가 이리-.”
그 때 노성이 방을 쩌렁하게 울렸다.
“운표선!!”
살기마저 서린, 그야말로 대노한 목소리. 서문윤이 눈을 크게 뜬 채 의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는 서문윤이 일전에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의 격렬한 감정을 함유하고 있었다. 그를 존경했고 또 두려워했던 서문윤이었다.
넘실거리는 살기에 압도되어 그는 숨을 멈추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 두려움이 몸을 굳게 만들었다.
용광로와 같이 들끓는 눈은 아까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흉험한 살기를 내포했다. 검설린은 귀신과도 같은 눈으로 공자를 노려보았다. 그를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듯한 기세로.
그 때 귀공자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감돌았다.
타악.
가볍게 검지로 탁자를 때리고 귀공자는 선율을 내뱉듯 부드럽게 말을 내뱉었다.
“알겠다.”
그 장난스러운 태도. 검설린의 목에 핏줄이 곤두섰다. 스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놈.”
“그리 보지 않아도 돼. 네 말을, 잘 알겠다.”
네가 무얼 꺼리는지도.
분노한 사내의 시선을 받으며 귀공자는 그리 말을 중얼거리고는 방긋 웃었다. 서문윤은 순간 그가 저를 바라보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어쩐지 저 여유롭게 웃고 있는 귀공자의 시선이 오싹해, 서문윤은 입술을 깨물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여전히 흉포한 얼굴로 그를 보았으나, 귀공자는 오금이 저리는 기세를 모르는 듯 태연히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할 말은 그것뿐이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설린이 그를 노려보았다. 몸을 찌르는 살기에 귀공자가 피식 웃었다.
“청매소(靑霉素). 배양 성공했다.”
검설린의 얼굴이 얼어붙은 순간이었다. 경악이 서린 얼굴을 바라보며 귀공자는 고개를 꺾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복잡한 감정의 물결이었다.
살기가 스멀스멀 배어 나온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거짓을 말하면 너를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런 걸로 네게 거짓말하지 않다는 걸 알지 않나? 진실이다.”
“파나립과 함께 그것은 사라졌어.”
검설린의 얼굴은 몹시 흉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대화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을 수가 없다.
“8년 동안 소실되었던 것을 지금 와서 복원했다는 소릴 나보고 믿으라고?”
그 살기 어린 목소리에 귀공자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내가 8년을 소모했지.”
그 말을 내뱉고 귀공자는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은 보는 사람의 기분을 어쩐지 오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생의 허무함을 담은 듯한, 그런 씁쓸한 조소.
이윽고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 단 한 번의 성공. 우연에 불과하다.”
“……”
“완성품을 만들 때 연락을 주겠네.”
그는 의자에 기댔던 몸을 굽히며 검설린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고요한 두 눈으로 사내를 담으면서 귀공자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파나립의 유산 중 그저 하나를 복원하려 이 내가 8년을 손을 썼다. 백방으로 전 세계에 사람을 파견하여 고작 약 하나의 실마리를 찾았구나. 파나립과 함께 수백만의 생명도 같이 떠난 것이겠지. 고우군이 지킨 유가의 가치가 그리 중한가?”
“…….”
“아니, 그가 지킨 것은 진정 동도(東道)가 맞나.”
“이제 와서 따져 무엇 하지.”
“…그래, 그렇겠지.”
검설린은 어느새 다시 싸늘한 얼굴로 변모한 채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귀공자는 잠시간 씁쓸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서문윤은 그들을 관조하며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운표선? 운…… 운표…… 운표선?!’
아니, 사실은 그는 놓쳤던 사실에 뒤늦게 경악하고 있었다. 충격에 얼어붙던 서문윤의 귓가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얘야?
서문윤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민한 인상의 귀공자는 놀랍게도 서문윤을 바라보며 온유하게 웃고 있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화를 돋우던 그의 방금 전 모습을 떠올리고 잠시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귀공자가 꽤나 급격한 행동변화를 보이고 있는지라, 서문윤은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귀공자가 웃었다.
“너는 이름이 무어냐?”
검설린은 맹렬한 눈으로 귀공자를 쏘아보는 중이었다. 서문윤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서문윤입니다.”
“서문윤? 명문가의 손이구나. 기특한지고.”
“예?”
아랫사람을 어르는 듯한 말에 서문윤은 당혹감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귀공자의 눈에는 그를 향한 호감이 스치고 있었다. 어째서 처음 보는 사내가 뜻 모를 호의를 내보이는지 모르겠다. 서문윤이 머뭇거릴 때 귀공자는 몹시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선표 공자라고 한다. 저 아이가 까칠하고 못되어먹어서 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그를 욕하지 마십시오.”
“오호?”
아무리 그에게 실망했어도 남에게서 욕을 듣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울컥한 서문윤이 내뱉은 말에 귀공자가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검설린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자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 미안하다. 하하. 설린이 내 오랜 벗이라 말이 험하게 나왔어. 내가 사과하마.”
“말씀에 주의하여주십시오. 허물이 있어도 그는 의인(義人)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까칠한 말에 귀공자는 몇 번을 사과를 하고 웃어넘겼다. 서문윤은 그제야 화를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초췌한 인상의 귀공자가 입가에 실바람 같은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입술을 열었다.
“그래. 서문 공자. 내가 잘못하였네.”
상황을 지켜보던 검설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애를 놀리지 마라.”
이어진 말에 서문윤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가자, 서문윤.”
자리를 일어서는 검설린을 따라 서문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귀공자의 입가에 그어지는 호선.
“그를 잘 부탁한다!”
방을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귀공자를 바라보았다.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던 사내는, 어느새 진중함이 자리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무거웠으며, 서문윤은 그 눈빛에 사로잡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딱한 사내다.”
그건 또 무슨 소리?
서문윤의 의아한 시선에도 귀공자의 시선은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엄숙함이 자리한 얼굴로 청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설린은 또다시 울컥한 표정을 지었으나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죽일 듯 살기가 어린 시선으로 귀공자의 얼굴을 노려볼 뿐이었다.
시선이 화살이라면 서문윤의 몸은 그에 관통당했으리라.
고요함이 자리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선표 공자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 선표가 애타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진실로 그를 잘 부탁한다. 거목의 꽃은 천 리를 그윽한 향으로 물들이건만, 꽃 피는 봄철은 찰나에 저물었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만, 나는 꽃이 영원토록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는 그만한 대가는 치렀지 않나. 한탄스럽구나. 나는 청융의 죽음이 한탄스럽다. 서문윤. 내가 네게 기대를 걸어도 되겠느냐?”
절절함이 담긴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나 간절한 시선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아, 맞다. 백년화!”
“뭐?”
“제일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군. 경작하는 밭을 찾았어! 량현이다. 가는 길에 들르면 될 거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알려주고도 욕을 먹네? 이 배은망덕한 놈이! 보은(報恩)이란 단어를 어디 잘못 알고 있는 게냐?”
“너 이 새끼!”
‘백년화.’
방금 전 대화를 생각하던 서문윤이 머리를 까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형이 격분할 정도의 일이면 그리 간단한 사안은 아닐 터인데.’
의뭉한 얼굴로 서문윤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내가 길을 걷는 중이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 쾌청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맑은 태양빛이 눈을 녹여 구불거리는 길 위엔 장애물이 없었다. 부목을 뗀 청년은 딴생각을 하면서도 뒤처지지 않았다. 검설린은 그보다 반보 앞을 걸었고, 서문윤은 그의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량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갑작스러운 선표 공자의 말에 행선지가 바뀐 것이다. 서문윤은 익숙한 단어, ‘백년화’라는 말을 듣고 변모한 의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의형은 그 약초로 추정되는 것을 몹시 찾아다녔다.
유지들을 볼 때마다, 어느 상인이나 권세가를 볼 때마다 검설린은 백년화를 물었다.
귀한 약초인가, 생각을 하면서도 의뭉스러운 마음을 품었는데. 서문윤의 눈이 가라앉았다.
‘의혹 수준이 아니라, 뭔가 있어.’
그가 깊은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할 때였다.
“넌 생각을 하지 마라.”
“예?”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냉막한 얼굴을 슬쩍 일그러트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일까. 서문윤이 그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검설린은 살살 눈치를 보는 서문윤의 행태에 짧게 혀를 찼다.
“넌 한번 생각을 하면 우물까지 파더군.”
“아, 그게.”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이야? 응?”
짜증이 섞인 말에 서문윤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청년이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물으면 답변해주시겠습니까?”
“뭐?”
“답변해주신다고 약속하면 묻겠습니다만. 아직도 당신께선 내게 많은 것을 숨기지 않습니까.”
검설린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굳어진 의형의 얼굴을 인지 못 한 채 서문윤이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내게 말 못 해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모른 척을 할 테니 그냥 넘어가주십시오.”
검설린은 그 말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짧은 침묵 끝에 검설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하라.”
그것은 돌려서 한 긍정의 말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기대를 품지 못한 채 속으로 헛웃을 뿐이었다. 이미 그가 자신에게 한 짓이 있었다.
‘의형은 알수록 더 모르겠구나.’
한숨을 삼키며 그가 입술을 열었다.
“백년화는 무엇입니까.”
검설린의 몸이 멈칫거린 순간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눈치채고 서문윤은 쓴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이 봐라. 또 그는 자신에게 거리를 내보인다.
청년의 얼굴에 체념이 스칠 때였다. 무거운 말이 내려앉았다.
“마약에 쓰이는 약이다.”
청년의 몸이 멈칫했다.
“마약?”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서문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경칠승의 방에서 맡았던 향. 거기에도 섞여 있었다. 당시에는 워낙 이것저것 섞여 몰랐지만…….”
말의 끝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검설린은 미간을 좁히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냉막한 얼굴에 노인을 향한 분노가 언뜻 떠올랐다. 무어라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사내는 짧게 혀를 차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서문윤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히 굳어 있었다. 선표 공자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의형은 백년화를 나를 위해 쓰려 했다.’
서문윤의 몸이 얼어붙었다. 설마 하는 마음을 품으며 청년이 경계에 가득 찬 눈으로 검설린을 힐끗거렸다.
그는 설마 그 물건을 삿된 일로 쓰려 하는 건가?
사내는 서문윤의 마음을 읽은 듯 덤덤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약재로도 쓰인다. 그리 경계치 않아도 돼. 네가 후유증을 앓지 않도록 쓸 거다.”
“저는, 다 나았지 않습니까?”
“다 안 나았다.”
퍽 믿음직스러운 말이었다. 서문윤이 픽 웃었다.
“그렇습니까?”
몇 번의 비슷한 거짓말을 들었다. 예전에는 그가 샘물이 바닷물이라 해도 믿었을 서문윤은, 그러나 지금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흘릴 뿐이었다.
불신의 얼굴에 검설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거짓을 말하는 거라 여기는군.”
“아무래도 당한 게 있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검설린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말에 뼈가 있구나, 서문윤. 네가 언제부터 내게 이리 불손하게 말했나.”
싸늘해진 목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움츠렸다. 화를 억누른 듯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서문윤은 그가 내뱉는 말이, 마음이 담긴 경고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서문윤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속에 산재되어 있던 억울함이, 그에게 또다시 미움이 치솟으려 했다.
‘이제 와서, 또 무슨 자존심을 내세우지?’
그러나 그는 쓴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이제 와서 또 무엇을 어찌하랴. 이미 자존심은 갈기갈기 찢겨진 후다.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덤덤한 어조였다. 동시에 텅 빈 마음이 담긴 것. 말에 담긴 씁쓸한 어조를 검설린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말을 듣고 한참을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검설린이 입을 연 것은, 소정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네게 한 말은 기만이 섞였으나.”
“…….”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문윤의 몸이 움찔거렸다. 검설린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땅을 방황하던 청년의 시선이 흔들렸다.
‘거짓이 아니라고?’
검설린은 쓰디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백년화는 마약이라 나라에서 금한다. 애초에 재배를 할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로워 희귀한 작물이었는데, 보이는 족족 관에서 태우기까지 하니 나로서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선표가 다행히 밭을 찾아주긴 했지만.”
“……그자가 당신의 생명을 보존케 했습니까?”
검설린의 몸이 멈칫했다. 서문윤이 올곧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느릿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서문윤은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서파의 잔재. 반역 가문의 후손. 그럼에도 천하를 찌르는 명성을 보존할 수 있는 까닭.
‘운표선.’
한때 천하에 이름이 쟁쟁했던 사내의 이름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오늘내일 할 것 같던 병약한 인상의 귀공자는, 사실 그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드높은 인사였다.
서문윤이 입매 끝을 딱딱히 굳혔다.
깨어진 파편이 하나씩 끼워지고 있었다. 맞춰진 조각은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만들고. 서문윤은 아직까지 그 조각을 다 맞추지 못했으나, 어렴풋이 그 크기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감히 단언하지 못할 만큼 거대하리라.
‘운표선의 이름은 강서진만큼 드높았다.’
그리고 그 둘과 면식이 있는 것만 같은, 의형의 정체는 무엇인가?
청년이 상념의 바다를 헤맬 때였다.
“언젠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서문윤이 고개를 들었다.
검설린은 허공을 좌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네가 모든 일을 다 깨우칠 때가 있을 거다.”
쓸쓸한 목소리였다.
“네가 알기 싫어도……. 언젠가 그날은 올 거다.”
그리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그것은 서문윤이 일전에 본 적이 없는 그의 평온한 웃음이었다. 사람을 저절로 위축되게 만드는 날카로운 눈매는 봄날의 훈풍과도 같은 미소를 머금었으며 복면 밖으로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아련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서문윤은 부드럽게 풀리는 그의 눈가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이 묵직하다. 연유는 모르지만, 갑작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청년은 얕은 신음을 흘린 채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아.”
앞서 나가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어서 서문윤이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량현.”
비석에 적힌 글자를 중얼거리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등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나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얼마만큼의 조각을 발견할까. 의형을 이루는 파편, 그의 정체를 끼워 맞추는 조각들을 나는 여기서 얼마만큼 획득할 수 있으려나.
그러나 서문윤은 량현에서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 * *
잿빛의 연기가 눈을 사로잡았다.
바람이 흩날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맑고 청아한 소리는 마음에 울리고, 또 귓가에 퍼져 나갔다. 서문윤은 마음속에 이는 파문을 느끼며, 몸을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끼며 입술을 벌려 얕게 침음했다.
“아.”
새까만 연기가 뭉게뭉게 타올랐으며, 구름을 대신하여 연기는 청명한 하늘에 엉켰다. 서문윤이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고 침묵했다.
타닥, 타닥.
거무죽죽하게 불씨가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텅 빈 공간. 검설린과 서문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한참을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서문윤이 침묵 끝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관, 관군일까요.”
검설린은 그 말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거칠고 쉰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관군이 아니라면 그럼 밭을 불태운 이는 누구냐. 서문윤은 그리 묻고 싶었으나 입술을 다물었다. 검설린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 없었다.
‘이건.’
불길함이 스멀스멀 몸을 잠식하여 서문윤은 얼굴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수소문한 량현의 백년화 밭.
마을 사람들 전체가 밀수에 힘을 쓴다 했던 곳.
검설린은 그저 차디찬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새까만 두 눈을 잿더미만 남은 백년화 밭에 고정한 채로.
은밀하게 백년화를 재배해왔다는 사람들은, 마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에 솟았나, 땅에 꺼졌나. 거짓말처럼 텅 빈 인가에 불길함을 품고 도달한 백년화의 밭은, 이미 잿더미가 된 후였으며, 검설린이 찾던 백년화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느런 침묵이 감돌 때였다.
바람이 빠진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멍한 얼굴로 의형을 보았다.
사내는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며 앞에 자리한 전경을 노려보았다.
짙어지는 웃음과 함께 서문윤의 얼굴에 자리한 그늘도 짙어져 갔다. 의형. 떨리는 목소리는 이어지는 앙천대소에 묻히고야 말았다.
그것은 뿌리 깊은 분노와 한이 담긴 광소(狂笑)였다. 서문윤이 말문을 닫게 한, 처절한 웃음.
그 마음에 짓눌려 서문윤은 한동안 검설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처연한 웃음은, 연기가 하늘에서 흩어질 무렵에야 끊겼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하실 예정입니까?”
언제 웃음을 흘렸냐는 듯, 광기가 묻어 나오던 얼굴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설린은 한동안 말을 내뱉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의 말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건전성(健戰城)으로 가자.”
* * *
절도사란 무엇인가?
명 황제의 태평성대는 새벽의 이슬과도 같이 짧고 아련했다. 땅이 기름지고 사람이 배가 부른 치세는, 오히려 기승하는 북방 이민족에게 이득이었다. 과거 혼란의 시대에 중원을 침략하여 나라를 세웠던 이들은 그 옛날 찬란하던 과거, 선조의 찬탈 업적을 칭송하며 그들을 먹이로 삼고자 했다.
이민족들을 막으려 여러 군진을 묶어 큰 단위의 번진을 조성하였으니 그들의 수장을 절도사라 했다.
그렇다면 절도사는 그저 무관이 아닌가?
북방에 혼란이 많아 무관직의 대우가 나쁘지가 않으나, 정상적인 조정하에선 무관은 병권을 지닌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휘두를 수 없다. 그러나 절도사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아무리 장군이 휘하의 병사들을 관리해도 출병을 허가하는 것은 군주의 몫이다. 그러나 절도사는 기민한 군사대응을 위해 출병을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으며, 외적과도 교섭할 수 있었다. 또한 장성 외의 절도사는 출병이 잦았기에 지방행정 감찰권을 보유하는 경우가 빈번하였으니, 사실상 그들은 번진의 총수이자 번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나 하서는 토번과 돌궐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아직도 국경에서는 자잘한 전투와 토벌이 이뤄지고 있어 절도사의 권한이 강하다.
건전성은 하서 절도사의 치소가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선표 공자가 운영하는 운가 상단의 양주 지부가 자리한 곳이었다.
* * *
드높은 관리가 기거하는 곳이라, 건전성은 몹시나 활기찼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활기찬 거리를 조성했으며,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귓가를 간지럽혔다. 시끌벅적한 건전성의 길거리. 그 중 어느 한 번잡한 루주에 두 사내가 앉아 있었다.
하나는 얼굴을 천으로 가린 새하얀 사내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남색 경장을 입은 선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들의 옆에 커다란 목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둘은 대낮부터 말없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냉랭하고 또 착잡했다.
‘밭을 태운 건 누구인가.’
남색 경장의 청년, 서문윤이 상념에 잠긴 얼굴로 넋을 잃고 허공을 응시했다. 창문 밖 건전성의 밝은 거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늦겨울 스산한 바람이 살갗을 할퀴었으나 서문윤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정말 의형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그는 그때의 의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탄식을 삼켰다. 광소를 터뜨리던 때의 검설린의 얼굴. 충격에 일그러진 얼굴은 격정에 물들어 있었으며 찌푸린 눈매에는 분노가 있었다.
‘답답하군.’
복잡한 마음에 서문윤이 앓는 신음을 흘렸다. 마음에 수십 가지의 의문이 들었다.
그 약초는 정녕 나를 위한 건가?
아니, 그는 이미 다리 건으로 나를 수도 없이 속였다.
그를 신뢰할 수 없다.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에 대한 신뢰가 박살난 지금 궁금증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박혀 커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의형을 추궁하고 싶어도 서문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검설린은 서문윤에게 아주 작은 범위만을 허했고, 경계선 안에 진입하려 할 때마다 칼 같은 태도로 쳐냈으니. 냉소적인 태도가 두려워 서문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서문윤이 어느 순간 씁쓸한 조소를 흘렸다.
‘미워하는 것도 힘들구나.’
건전성에 오기 전날 밤, 바로 어젯밤에 서문윤은 또다시 그에게 안겼다. 새벽까지 이루어진 정사를 생각하고 그가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몸을 내어주기로 한 후에 이뤄졌던 첫 정사. 그때 서문윤은 강건한 몸에 매달리며 울었다. 분명 제 마음을 배신한 그를 원망하려 애를 썼지만, 대가로 이뤄지는 관계에서 그리 흐느끼니 면이 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제의 정사 전에는 단단히 다짐했었다. 절대로 그에게 매달리지 말자,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그리고 실패했다.
새벽 내내 고양이처럼 길게 울었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서문윤이 침음을 삼켰다. 청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눈물로 뺨을 적시고 검설린의 등을 긁었던 서문윤의 머릿속에 어제의 대화가 스치고 있었다.
“형, 의형.”
“조이지 마라…….”
“흐윽, 아. 아파, 아, 좋…….”
“서문윤… 제발…… 힘 풀… 윽.”
“흑, 형, 님, 아, 아흑.”
“……힘 풀어라, 윤아.”
부르지 않기로 맹세한 호칭을 달큰한 신음과 함께 부르며, 두려움에 그에게 입술을 달라 애원했던 서문윤.
두터운 양물이 속살을 짓누를 때 듣기 민망한 야릇한 소리를 흘리며 그에게 매달리던 서문윤. 검설린의 검지를 혀에 굴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던 서문윤.
완전히 미친 게지.
회상을 하던 서문윤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한숨을 삼키며 청년이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에 취해 죽고 싶군.’
차라리 그가 완전히 제 욕구만을 채웠다면, 그 정사에 고통만 남았다면, 몸은 고통스러워도 오히려 마음은 편했으리라. 그러나 검설린은 서문윤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주었고, 진득한 전희로 그가 몸을 열게 만들었다. 서문윤은 정사에서 쾌락을 느끼며, 그와 혀를 나누며, 서로 몸을 뒤엉켰다.
사실은 정사의 쾌락보다, 그 이후가 더 곤란했다. 서문윤이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그 기분을 어찌 설명을 할까.
파정 후에, 배가 끈적한 정으로 진득하게 채워지고 난 후면, 서문윤은 나른한 기분에 휩싸여 만족했다. 그 기분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여,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검설린을 몽실거리는 시선으로 쫓았으니까.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시선으로.
‘그게 어떻게 대가로 내어주는 관계냐.’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 새벽에도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녹진한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미련함을 어이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짙은 한숨을 내뱉곤 서문윤이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술병의 목을 잡고 묵묵히 잔을 채우는 사내의 모습은, 얼굴을 가렸음에도 우아한 태가 보였다. 고고한 모습에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와 달리 태연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벽의 일이 신기루인 것마냥 냉막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서문윤은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설린은 그저 술잔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서문윤의 얼굴이 곧 복잡해졌다.
‘니취의 소문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얼굴을 가렸으나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몹시 고아하다. 소문과 새벽의 그의 맨얼굴을 교차하여 떠올리며 서문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세간이 입방아를 찧기 좋아한다지만, 몹시나 동떨어진 소문이 아닌가, 그것은. 실제로 그의 외양은 그가 이 세상에서 본 귀물 중 가장 고아하고 아름다웠으니. 서문윤은 제가 무관이 아닌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으나, 그의 외모를 회상할 때는 가끔 글을 더 깊게 배울걸, 하는 생각을 품으며 아쉬워했다.
그가 아는 글로는 묘사가 부족할 만큼 검설린의 얼굴은 몹시 아름다웠다.
보타암의 비구니와의 소문은 와전된 게 분명하겠지. 서문윤의 눈이 상념에 사로잡혀 흐릿해져 갔다. 헛소문이 멸칭을 만들었으나, 의형이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으니 그것은 사실이 되었으리라.
서문윤은 문득 그 소문이 퍼진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명성이 높고, 또 고관과 인연을 맺은 자가 얼굴마저 아름답다면 나한테 기회는 완전히 없었겠지.’
아무리 그가 여색에 뜻이 없고, 사내의 몸을 취하길 원한다 해도 밀물처럼 쏟아지는 유혹을 거부할 수 있을까? 서문윤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흘렀다. 그가 외모를 가린 것이, 그리하여 추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 이렇게나마 그와 연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든-.
술잔을 따르던 서문윤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청년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 미친놈아.’
멸칭에 순간 기뻐했던 제 자신이 어이가 없어 서문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청년이 속으로 소리쳤다.
너를 강제로 범한 사내를 밸도 없이 못 놓느냐? 이 미련퉁이야!
내면의 서문윤이 답했다.
응, 못 놓는다.
‘답이 없구나.’
술만 퍼마실 따름이었다. 서문윤은 한숨을 내뱉으며 술잔을 손에 쥐었다. 2년만, 2년만 지나자. 그리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서문윤은 맑은 술이 담긴 술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씁쓸한 얼굴을 한 서문윤이 술잔 안에 있었다.
시간이 약이 될 수 있을까.
서문윤이 말없이 맑은 술 위에 띄워진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침묵. 그 끝에 서문윤은 술잔을 손에 쥐었다.
독한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술에 비친 미련한 서문윤마저 삼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몸을 내어준 선택은 다리를 고친 은혜를 갚기 위해서.’
꿀꺽, 목울대가 움직였다.
‘2년을 그와 몸을 섞는 것은 오직 그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독주를 목에 넘기며 서문윤은 비소를 흘렸다.
그저 자기 위안인 말을 하고 있구나, 나는.
답답한 마음에 서문윤이 어두워진 얼굴로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한 번은 그렇다 쳐도, 두 번째 가진 정사마저 이런 식이니 참담한 기분이었다. 영혼이 천 길 물 속 아래로 침잠하여, 그는 그저 술로 속을 달랠 뿐이었다.
서문윤이 땅굴을 팔 때였다.
“독한 놈들. 언제까지 전쟁을 지속할 셈이야.”
문득 들려온 말에 검설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방금 전까지 묵묵히 자작하던 사내는 고요한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군주가 바뀌었으면 장수가 군대를 물리는 것이 당연한 말이건만. 도리도 모르는 회흘족 놈들이.”
“엥? 소식을 못 들었어?”
“뭔 놈의 소식?”
“가한(회흘의 군주)의 친모가 맹세했어. 장한성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선대 가한의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미친 맹세를 왜?”
그들은 검설린 일행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객잔 속에서도 말은 제법 또렷하게 들렸다. 검설린은 어느새 술잔을 내려놓고 침묵을 지켰다.
꽤나 이상한 낌새였음에도, 서문윤은 정신이 몽롱하여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복잡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 그는 평소와 달리 과음한 상태였다.
“장한 공방전에서 전사했다는 회흘의 장수가 선대 가한돈(왕비)의 남동생이라고. 선대 가한이 암살당하고 가한돈이 지속되던 내란을 수습하여 사람들이 그 여자를 몹시 따르는 모양이야.”
“아니, 아무리 그렇다 쳐도……. 국사에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하냔 말이야? 허, 참.”
“장한성이 무너지고서야 물러날 기세야. 그곳 사람들도 끈질기지, 성주가 죽었는데도……. 심정으로는 차라리 그냥 성을 내어주는 게-.”
“이 사람아! 그게 할 말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밤톨 수염을 한 중년인의 성화에 키가 작은 중년인이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난리야, 난리. 도대체 몇 년째 이 모양인지 모르겠네, 나 원. 사영귀(號靈鬼)는 또 중병에 걸렸다고 의원을 모으지 않나.”
“아, 그거?”
“도대체 왜 이 먼 양주 땅에 그 양반이 나돌아 다니는 건데? 허 참.”
검설린의 손가락이 슬쩍 술잔의 가장자리를 비볐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사내의 두 눈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서문윤은 울적한 얼굴로 창문 밖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으며 객잔은 여전히 시끄러운 상태였다.
검설린은 침묵 끝에 다시 술병의 목을 잡았다. 빈 술잔을 채우려 술병을 기울일 때였다.
별안간 째지는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객잔을 울렸다.
“뭐가 어쩌고 저째?!”
객잔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군데로 모은 노성이었다. 검설린의 어깨가 멈칫한 순간이었다. 넋을 잃던 서문윤의 몸이 파득 떨렸다.
이게 뭔 고함?
서문윤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노성을 내지른 사람은 놀랍게도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소녀였다. 머리를 하나로 묶어 왼쪽 어깨에 늘어트린, 군청색 경장을 입은 10대의 소녀. 흐릿한 시야에 서문윤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여인을 노려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서문윤이 멍하게 여인을 바라볼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또다시 객잔의 천장을 찔렀다.
“사지 분절해 죽여버릴 역적 놈 같으니라고! 장한성에 대당국민 수만이 피를 흘리며 국경을 지키는데, 한낱 늙은이 따위가 성을 넘겨주자 말을 해?”
욕을 들어먹은 중년인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허리가 호리하고 팔다리가 가늘어 언뜻 보기에 청초한 인상이었으나, 눈에 불길을 품은 모습이 맹호처럼 보였다.
서문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취한 청년의 볼이 발그스레했다.
“아니, 소저. 이것은 취중의 말인데, 어찌.”
“내 저놈을 관부에 고발할 것이야! 유모! 저 역적의 말을 분명히 들었지? 군중의 심장이 자리하는 건전성에서 저따위 민심을 흐리는 말을 하다니! 죽일 놈이다.”
“아이고, 아가씨. 진정하셔요.”
노파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소녀가 삿대질을 하며 눈매를 치켜떴다. 난데없이 역적 운운을 하니 객잔이 발칵 뒤집어졌다. 소저의 성질이 드세구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퍼져 나갈 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 양반도 잘못 걸렸지. 하필이면 양주도독 하서 절도사의 따님 앞에서 군병(軍兵)의 일을 들먹이다니.”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헉! 양양(良良)?”
경악에 찬 목소리에 검설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떠져 청년의 모습이 새끼 강아지 같았다. 서문윤은 놀란 얼굴로 양양이라 부른 소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의 몸을 녹진하게 만들었던 취기는 어느새 싹 가신 후였다.
“누가 이 황고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 윤 가가(呵呵)?”
버럭 소리를 내지르던 소녀가 서문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검설린의 검미가 높게 꺾였다.
“세상에.”
경탄성과 함께 경악이 자리한 소녀의 얼굴이 빠르게 환희로 물들었다. 아는 사이인가. 객잔 안이 술렁거렸다. 소녀는 검설린이 자리한 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 나갔다.
이윽고 낭랑한 목소리가 객잔을 울렸다.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정녕 윤 가가가 맞습니까?”
술잔을 내려놓으며 검설린이 작게 속삭였다.
“아는 사이냐.”
“어, 네.”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서문윤은 곤란한 마음을 삼키며 검설린의 시선을 피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서문윤이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왜 양양이 여기에 있어.’
생각지도 못한 일에 청년이 당황할 무렵이다. 말실수를 한 중년인을 맹호처럼 몰아붙이던 소녀는, 서문윤을 마주한 순간 놀랍게도 장밋빛으로 뺨을 붉히며 눈을 빛냈다.
“윤 가가! 어찌 이 먼 하서의 땅에 오셨습니까? 강소성,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곤.”
“양양. 네가 여기 왜 있어? 황 숙부는 하서가 아닌 하동 절도사잖아.”
“2년 전 하서 절도사직을 겸임하셨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윤 가가는 어찌 강소성이 아닌 이 먼 하서 땅에 계십니까?”
서문윤이 신음을 하며 답했다.
“사정이, 사정이 있었다.”
격렬한 성정을 드러내듯 여인은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낼 따름이었다.
“그 어느 사정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답니까! 불효는 역적질보다 더한 죄인데, 윤 가가는 부모 심장에 정을 박고 그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녀의 말은 실은 모두 옳은 것이다. 서문윤이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양양이 돌연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 이 양양에게는 어찌 그리 잔인하게 대하십니까.”
서문윤은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은 죄가 크구나.’
양양이 말을 잃은 청년을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가라는 가까운 호칭과 이상한 분위기.
그를 바라보던 검설린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그의 눈은 남녀를 상에 비춘 채 상념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들 사이로 기묘한 기류가 감돌 때였다.
그녀의 유모로 보이는 늙은 노파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여인의 소매에 매달렸다.
“아가씨, 아가씨. 이 유 노인을 살려주십시오. 나와서 또 소란을 일으킨 것을 알면 저는 황 도독께 죽습니다.”
“유모가 죽기는 왜 죽어?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 말을 하면서도 양양은 미간을 좁히며 객잔을 살폈다. 지방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하서 절도사의 딸. 여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이것이 철없는 소녀가 부린 소란으로 끝날 것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들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전쟁 중인 성을 내어주는 게 낫지 않냐, 말을 내뱉었던 중년인의 얼굴이 새파랬다. 민간의 일을 절도사가 총괄하니 그 딸인 여인에게는 남 일이 아니었다.
양양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여러분은 이 일의 사안을 알 테요! 저 참람한 말을 내뱉은 이를 관부로 압송해줄 위인이 있소?”
겁을 먹은 사람들이 나서지 않았다. 여인이 입술 끝을 비틀며 말을 이었다.
“내 배상을 하리라!”
그 말에 객잔에 작은 정적이 돌았다. 서로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던 이들 중에서, 하나둘 앞으로 나서는 이들이 생겼다. 주춤거리며 저를 둘러싼 사내들에 중년인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 이 사람이!”
“자네가 말을 함부로 한 것을 어찌하나.”
“말 섞지 마라! 괜히 얽힐라.”
그것은 어린 여인이 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대담한 일처리였다. 서문윤이 질질 끌려가는 남성을 보며 당황하여 말을 내뱉었다.
“양양! 정말 역적죄로 처벌할 건가.”
아무리 그래도 취중에 내뱉은 말에 그리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가혹하다. 서문윤의 걱정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양양이 빙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윤 가가. 소녀가 그리 박정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럼.”
“겁을 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연히 관부에 일러, 은혜롭게 처리해달라 언질할 생각이지요.”
서문윤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저 말은 진정 사실인가? 아니면 제 타박을 면피하려는 말인가.
그는 영악한 소녀를 잘 알았기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양양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저를 의심하시군요. 윤 가가의 너그러움은 여전하십니다. 알았어요. 황씨 세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딱히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흠, 그렇다 치지요.”
의뭉스레 말을 넘기고 황양양이 빙긋 웃었다. 청초한 미인의 웃음이 객잔 안에 탄식을 불러일으켰다.
“궁금한 것이 많지만, 여기는 이야기하기 썩 좋지 않군요. 윤 가가, 저희 집에 들르시겠습니까?”
“그-.”
“백년화.”
황양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어와, 그들의 말을 자르곤 검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양양을 보았다. 술잔을 손으로 덮어 탁자 위에 내려놓은 채였다,
당황하여 시선을 돌린 황양양은, 그의 눈과 마주하고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야 말았다.
“……누구?”
공허한 흑안은 마주하는 순간 사람의 힘을 앗아갔다. 창백한 얼굴의 여인을 훑는 눈에 섬뜩한 빛이 스친다. 검설린은 고요함 속에 묘한 기색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황양양을 지그시 응시했다.
고조된 날카로운 공기가 숨마저 막고, 서문윤을 만난 기쁨에 취해 있던 여인은 새하얀 일색의 의복으로 온몸을 가린 사내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얕은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말문을 열었다.
“가, 가서 설명을 하지.”
상황을 수습하려는 말은 무심한 목소리에 끊기고야 말았다.
“백년화.”
“형, 형님?”
서문윤의 떨리는 시선을 흘리며, 검설린은 문득 조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백년화, 알고 있나?”
그것은 제 지역에 기거해달라는 유지의 요청을 받을 때 그가 내뱉는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 말이 나온 이후의 대화의 흐름을 알았다.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대는 백년화가 무엇이냐고 말을 할 것이다. 그러면 의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리며 그 말을 흘리겠지.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축객령이 이어졌다.
뒤이어 있을 일을 예상하고 다급히 말문을 열었던 서문윤은, 그러나 이어진 황양양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 물건을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
싸늘하던 검설린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친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황양양을 바라보았다.
황양양이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알아요, 물론.”
* * *
“양양,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제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왜 해요? 아니 근데, 저 사람은 누구길래 그 물건을 물어요? 가가는 그 물건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아셔요?”
“양양! 네 집으로 가겠다.”
“제 말이 들리지 않으세요? 윤 가가! 백년화를 아시냐고요.”
한바탕 소란 끝에 고즈넉한 정자에 세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군청색 단출한 무복을 입은, 단정한 인상의 청년.
새하얀 백의로 온몸을 감싼,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그리고 소매가 넓은 푸른 경장을 입은 단아한 여인.
기묘한 조합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서문윤은 조심스럽게 검설린의 얼굴을 살피는 중이었다. 검설린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그 예의 무심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으며, 황양양은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을 들어 다도를 즐기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황양양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잠시간 착잡한 빛이 감돌았다.
‘이렇게 마주할 줄이야.’
정적을 깨고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에요. 윤 가가.”
“……그간 잘 지냈느냐.”
머뭇거리며 내뱉은 말에 황양양이 뼈가 담긴 목소리로 답을 했다.
“잘 지냈기도 하였고, 못 지냈기도 하였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잘 지내면 잘 지낸 거고, 못 지내면 못 지낸 거지.”
그것은 어리석기까지 한 말이었다. 여인은 새치름한 눈매를 치켜뜨며 바로 반박했다.
“윤 가가는 정녕 몰라서 물으십니까? 아버님이 하서 절도사직을 겸임하시게 되었으니, 이는 양양의 복입니다. 하지만 윤 가가께서 실종이 되어 서문 숙부와 진 숙모의 마음이 꺼지고, 또 그 속을 썩이시니 이는 양양의 불운이었습니다!”
그 말에 서문윤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부모의 일은 그에게 역린이었다. 의형을 따라다니면서도 가끔 하는 부모 생각에 서문윤은 남몰래 가슴을 앓았으니까.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말을 내뱉었다.
“…사정이 있었다.”
곧바로 그를 쏘아붙일 것처럼 굴던 황양양은, 그러나 서문윤의 말에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말을 잇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묘한 눈으로 그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의 입가에 쓴 미소가 번졌다.
객잔에서 저택으로 올 때, 황양양은 그를 부축하겠다 말을 했으나 서문윤은 단칼에 거절했다. 멀쩡하게 걷는 서문윤을 바라본 순간 황양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문윤의 다리는 누가 봐도 온전했으니까. 들려온 말과 다르게.
황양양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다리와 관련된 일입니까?”
서문윤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언의 답에 황양양이 다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완전히 나으신 겝니까? 정녕 아무 문제도 없습니까?”
“거의, 거의 나았다.”
검설린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서문윤이 답했다.
‘나 또한 그게 궁금하구나, 양양아.’
그의 냉막한 얼굴을 보며 서문윤은 속으로 말을 삼킬 따름이었다. 사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로에서 헤매고 있으니.
답을 원하는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답답함을 삼키며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완치하기 위해서는 백년화가 필요한데, 양양아. 네 정말 그 행방을 아느냐?”
황양양은 그 말에 무언가 눈치를 챈 듯 오묘한 얼굴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는 어떤 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침묵하더니, 곧 방긋 웃음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야 윤 가가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일이 그리된 것이군요.”
그 때까지 없는 사람처럼 검설린을 배제했던 황양양이 고개를 돌렸다. 검설린은 비스듬히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물건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시큰둥했다.
같잖다는 시선 앞에서, 황양양은 모른 척 인사를 이어나갔다.
공손히 공수를 한 채 몸을 숙이곤 여인이 말을 내뱉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신의. 하동하서 절도사 양주도독 황재천의 딸, 황양양(黃洋良)이라고 합니다. 그대는 천하에 이름을 알리는 북성신의임이 분명하겠지요.”
황양양(黃洋良). 서문윤이 불렀던 양양(良良)과는 다른 한자다. 검설린의 냉막하던 얼굴에 이채가 서린 순간이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서문윤의 귓가로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칭으로 부르는군.”
서문윤이 뜨끔한 마음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청년이 말을 늘이며 웅얼거렸다.
“네에.”
시선이 슬쩍 탁자로 향하는 모습이 몹시 수상했다. 검설린은 그를 힐끗 보았으나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시선이 빠르게 황양양을 향했다.
그의 성격상 이리 오래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몹시 예외적인 일이었다. 아마 백년화가 없었다면 진즉 노성이 터져나갔겠지. 그러나 백년화가 준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검설린이 그녀를 보는 눈빛에 슬슬 짜증이 서려갔다. 그를 알아챈 서문윤이 황급히 말문을 열었다.
“양양아. 네 어찌 백년화를 알아? 이 마약을.”
황양양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독과 약은 백지 한 장 차이라지요. 중원에서 백년화를 마구잡이로 태워버리니 약초가 부족하다더이다. 백년화는 기후가 맞지 않으면 재배하기 까다로워, 중원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만 키울 수 있어요. 원래 토번에서 백년화를 약초로 자주 썼는데, 당국에서 백년화를 태우니 물자가 부족한 모양입니다.”
“아 설마.”
“네, 토번에서 밀무역 시장이 열렸습니다.”
서문윤이 침음을 흘렸다.
“백년화를 천금을 주고 산다는 사람이 무더기입니다. 황금이 있는 자리에 사람이 꼬이지 않을 리가 없지요. 당국과 회흘이 사이가 나빠, 견마무역이 금제되었으니… 돈줄이 막힌 회흘족이 또 끼어든 모양입니다. 상황이 몹시 번잡해졌어요. 한바탕 그 일로 난리가 났는데…….”
흐려지는 말에 서문윤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황양양은 똑 부러진 여인이라 평소에 두루뭉술하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드물게 뒷말을 잇기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에 서문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시장이 불타고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격노하여 개입하셨지만 백년화는 다 타버리고…….”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년화가, 다?”
쉬고 갈라진 목소리에 마음이 묻어 나왔다. 떨리는 목소리와 그늘진 얼굴을 보는 순간 황양양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끝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 수소문하셨는데, 사건이 터지기 전에 백년화를 사 간 의원을 찾았다 하더이다. 지금 청사로 압송 중이랍니다.”
불행 중 다행인 말이었다. 다행히 어떻게 길이 트였다.
서문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구나. 아아, 고맙다. 양양아.”
“무얼요, 오라버니의 다리가 낫는 것은 양양의 바람이었습니다.”
태연스러운 말 뒤로 잠시간 정적이 있었다.
처음 조급하게 그를 몰아붙이던 황양양은, 정신을 차린 듯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서문윤은 그동안 침묵하며 상념에 잠겼다. 많은 생각이 들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당연히 하나였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고 탁상에 손을 걸쳤다. 죄인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입술 밖으로 흘렀다.
“부모님께서는, 많이 걱정하시더냐.”
“어리석은 질문에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어리석은 질문이겠지.”
하아. 낮은 한숨이 흘렀다. 서문윤은 어두운 얼굴을 탁상에 고정시킨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로구나. 중얼거리는 말은 입안에서 흩어질 따름이었다.
황양양이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으며 달칵,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다리도 고치셨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피치 못한 사정으로 낙향하시게 되었으나, 황제 폐하께서는 황가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은 윤 가가를 치하하시며 금문과 비석을 세우셨습니다. 면사패(免死牌) 또한 하사되어 앞으로 역적죄를 제외한 일에 처벌받지 않게 되었으니 고향으로 가시면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명예요, 일족의 영광이었다. 서문윤은 그러나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그렇구나.”
말에 담긴 이상한 어조에 황양양의 시선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서문윤은 그저 묵묵히 탁상 귀퉁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양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윤 가가, 고향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서문윤이 답했다.
“나는 가지 않는다.”
여인의 안색이 돌변한 순간이었다.
“윤 가가!”
“다리를 다치고 많은 생각을 품었다. 절망에 어리석은 생각을 하던 나를 구해주신 분이 이분이시지. 양양아. 내가 얼마나 배부르고 나약한 사람이었는지 아느냐?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생각 안 하십니까.”
다급한 목소리에 서문윤은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청년이 어둑한 얼굴로 과거를 생각했다. 지난 2년, 그를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많은 것들. 많은 참상들.
‘나는 실로 우물 안 개구리였지.’
궁궐의 높은 벽, 세가의 담장 안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2년간 그를 따라다니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어.”
“오라버니!”
“2년. 다리를 고치는 데 2년의 세월이 걸렸으니 나는 2년간은 이분의 전장을 따라다니며 종군할 셈이다.”
황양양이 꽃 같은 입술을 앙 깨물었다. 그녀의 매서운 눈길에 서문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말을 잇는 황양양의 얼굴이 새파랬다. 여인은 어느새 귀신 같은 얼굴로 서문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외란이 일어났을 때 장수는 창칼을 들어 나라를 지키고, 농민은 쟁기로 밭을 갈아 나라를 지킵니다.”
“양양.”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각자의 천성을 부여받습니다. 이는 삼황오제 이후로 중원을 이루는 질서. 양양이 틀린 말을 하였습니까?”
“양양아, 나는-.”
“만민은 마땅히 스스로의 본분을 지키고 천성에 따라야 하거늘. 윤 가가는 어찌 그런 어리석은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말이 아니다. 내 말을 듣거라.”
답답함에 서문윤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흥분한 여인은 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독랄한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검설린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검지를 쭉 뻗었다.
“신의의 능력이 비상하다지만 고름을 짜고 뜸을 뜨는 일은 귀족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서문세가의 장손이 천민이나 할 저따위 하찮은 일을 한다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 때 정자 안에 벼락같은 노성이 쩌렁하게 울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황양양!”
황양양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든 순간이었다. 헛. 숨을 삼키는 소리.
끼익!
의자가 바닥을 굴렀다. 서문윤은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크게 노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청년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뒤이어 노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렸을 때 똑똑하고 당찼던 너를 황 숙부께서 혼내실 때 난 널 감쌌지. 그 때 일이 후회되는구나.”
“윤, 윤 가가.”
“너는 어찌 갈수록 건방져지는 게냐!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고 해서 네 말버릇이 용서될 것 같으냐!”
의형제와 다름없이 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부모 덕에, 황양양의 아버지가 하동 절도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그들은 자주 왕래하였다. 황양양의 기억 속에 서문윤은 한겨울 꽃을 꺾어 달라면 그림을 그려서라도 제 말을 들어주는 다정한 오라비였다.
실종 소식을 들은 순간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저따위의 일? 입을 함부로 놀리는군. 양양, 너는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그리 말하지. 너는 금은보화를 오른손에 쥐고 태어나, 스무 해 가까이 살아왔으면서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보존한 적이 있더냐.”
그리하여 처음 보는 그의 격분한 모습에 황양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 아. 신음을 내뱉는 그녀의 얼굴이 새하얬다. 서문윤이 들끓는 분노를 삭이며 형형히 빛나는 눈을 치켜떴다.
이내 심호흡을 하며 서문윤이 묵직한 말을 내뱉었다.
“이분은 내 은인이다. 또다시 네가 입을 놀려 의로운 일을 함부로 폄훼한다면 너를 보지 않을 거다. 양양.”
검설린은 그들을 냉랭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을 관조하던 사내의 얼굴에 어느 순간 씁쓸한 빛이 서렸다.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흥분에 말을 내뱉던 황양양은, 차디찬 시선을 눈앞에 두고 한참을 말을 내뱉지 못했다. 여인은 침묵 속 굳은 얼굴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적막을 깬 것은 떨리는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황양양이 내뱉은 말이었다. 서문윤이 숨을 들이켜고 그녀를 보았다. 황양양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
“죄송해요, 오라버니.”
황양양은 명문세가의 금지옥엽 외동딸인지라, 사과를 하는 법이 잘 없었다. 그녀의 하늘을 찌르는 드높은 자존심을 아는 서문윤이다. 그는 그 말에 마음이 풀린 듯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양양은 그 말에 끝내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의께도 사과드려요. 가가께서 사라지시고, 워낙 마음고생을 하여 말이 격하게 나왔군요.”
여인은 공수를 하며 검설린을 향해 다시 몸을 숙였다. 서문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 순간이었다.
얘가 왜 이래?
격하게 화를 내뱉기는 했으나, 황양양이 어디 꾸중에 성격을 누그러트릴 사람인가? 그녀를 오래간 지켜본 서문윤은 뜻밖의 일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린 나이에도 당돌한 황양양은 아름다운 눈을 반짝 빛내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감흥 없는 얼굴로 그를 마주할 뿐이었다. 황양양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나 윤 가가에게 의원의 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관은 붓으로 말을 하고 무관은 검으로 가치를 증명하는 법. 의원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명백한 도발의 말이었다.
하동하서 절도사, 지방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고관의 천금 같은 외동딸이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
서문윤의 숨이 멈췄다.
‘양양! 안 돼!’
의형의 성격이 어디 보통인가? 황양양도 오만하지만, 그가 아는 검설린은 그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독선적이었다. 서문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건방지구나.”
싸늘한 목소리가 그에 앞서 정자를 울렸기 때문이었다.
자신감 넘치던 황양양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한순간 정적이 있었다.
서문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새파란 얼굴로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설린의 얼굴은 북풍한설같이 싸늘했으며 황양양을 바라보는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울컥한 얼굴로 검설린의 얼굴을 쏘아보았으나, 그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말을 내뱉지 못하고 몸을 잘게 떨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눈을 본 순간 그녀는 저절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흑옥을 세공한 듯 붉은 기운 하나 없이 새까만 두 눈은 마주한 사람의 말을 앗는 힘이 있었다. 그녀를 보는 시선은 묵직했으며, 또한 진득했다.
마주하는 순간 심연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황양양은 그리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이 비소를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네게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서문윤과 나 사이의 일이다.”
사내의 두 눈에 위험한 빛이 일렁거렸다. 흉흉한 눈빛과 마주한 황양양이 어깨를 움츠렸다.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낮은 목소리가 정적이 자리한 고즈넉한 정자를 울리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여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서문윤의 얼굴은 급격하게 굳어진 후였다. 정자에 흐르는 바람소리만이 그들의 귓가를 울렸다.
황양양은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잃었던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뚜욱, 섬세한 턱 선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황양양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신의께서는 몹시나 어리석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 끼어들지 않을 수 있다 보십니까?”
“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하지.”
“아니요, 저는 똑똑히 들었-.”
“아니, 너는 못 들었어. 들었다면 내 앞에서 네가 그렇게 가당찮은 혓바닥을 놀리지 않았겠지. 황양양. 이미 나는 경고했다.”
한 마디, 한 마디, 감정이 억눌린 말.
“나서지 마라.”
말에 짓눌리는 기분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서문윤은 결국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황양양의 얼굴은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진 후였다. 불쌍한 황양양. 그 마음을 짐작하는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열었다.
“양양아, 그만하자.”
아끼는 동생을 위하는 마음을 모르는 걸까?
서문윤의 만류에도 황양양은 울컥하여 소리칠 뿐이었다.
“아니요! 저는 나설 겁니다. 윤 가가의 일이 제 일입니다!”
검설린의 얼굴에 고소가 스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황양양의 말에 두 사내는 각기 다른 이유로 동요를 내보이고야 말았다.
“태중 혼약으로 어미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맺어진 인연, 이 황양양이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윤 가가의 약혼녀로서 저는 이 일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서문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탕!
“황! 양양.”
비명을 내지르려던 중 높아지는 목소리를 간신히 낮추곤, 서문윤이 입가가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끄응.’
망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불안한 마음이 들더니만,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다. 초조함을 삼키며 서문윤이 빠르게 소리쳤다.
“여독에 피곤하구나! 별관에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느냐?”
“말해보세요! 윤 가가! 제가 자격이 없습니까?”
“아청이 아직도 네 시녀인가? 길을 물어보면 되겠지. 이만 가보겠다. 하하. 형님, 몸이 피곤합니다. 일찍 처소에 들지요.”
“윤 가가!”
서문윤이 후다닥 검설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평소라면 몸에 손을 대지 못했을 텐데, 서문윤은 그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손으로 당기며 별관으로 향했다.
“많이 피곤하시지요?”
순순히 그의 손에 끌려가는 검설린의 표정이 묘했다. 장신의 사내가 몸을 낮춘 채 서문윤의 손에 붙들려 보폭을 맞추었다. 서문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가서 푹 쉬지요! 새벽까지 무리하셨는데 고생 많으셨습니……”
허둥지둥 말을 돌리려던 서문윤의 얼굴이 웃는 채로 굳어졌다. 실수를 깨닫는 순간 그는 복도를 성큼 걷는 발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청년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미친!’
거기서 왜 그 말을 해!
새벽까지 검설린이 무리했던 일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홧홧하게 얼굴을 붉혔다. 생각 없이 지껄인 말이 함유한 의미가 몹시도 대담하니, 그는 저를 내려다보는 지긋한 시선을 느끼고서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윽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서문윤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무리는 하지 않았는데.”
그 순간 서문윤은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리를 한 게 아니라고?’
동이 틀 때까지, 쉰 목소리로 애원할 때까지 이어졌던 음탕한 짓거리를 떠올리며 서문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청년이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환장할 것만 같다. 서문윤이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무심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검설린과 마주하고, 숨을 멈추었다.
그는 너무도 멀쩡하여 순간 서문윤은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저만 허둥지둥거리는 것이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검설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손은 놓고 가지.”
서문윤은 그 말에 순순히 따랐다. 멍한 얼굴로 서문윤이 그의 팔을 쥔 손을 놓았다. 검설린은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우곤 흐트러진 복면을 다시 올렸다. 잠시간 침묵하며 그를 바라보던 검설린이 이윽고 말을 내뱉었다.
“가서 얘기하겠다는 말 아니었느냐?”
석상처럼 굳은 서문윤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네가 아는 곳이니 앞장서거라. 짐부터 풀자.”
서문윤은 그의 말에 머뭇거리며 “예.” 답했다.
* * *
서문윤의 아버지 서문린이 무과에 급제를 하고 가장 먼저 친해진 이가 황재천이었다. 둘 다 무과에 급제했고, 명문세가 출신이었다. 계급상 황재천이 윗사람이었으나 서문린의 나이가 더 많았으므로, 둘은 절친한 벗이 되어 교류하였다.
어찌나 친했냐면, 사람들이 둘이 항상 붙어 다니는 모습이 꼭 연리지 같다 말을 할 정도였다. 연리지는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로, 사람들이 그리 돌려 말할 정도로 그 둘의 사이가 좋았다.
시운도 맞아떨어져 그들은 임기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어 돈독한 사이를 다질 수 있었다.
서문린이 하동(河東)・하서(河西)・삭방(朔方)・범양(范陽)・평로(平爐), 총 5도의 절도사였던 악천화의 군사로 부임할 때는 황재천은 5도 절도사의 부장이었다.
8년 전 동궁사변 이후 암투에 신물을 느낀 서문린이 낙향하면서 양가 간 거리는 멀어졌으나 둘은 꾸준히 연락을 나누며 교분을 유지했다.
서문윤과 황양양도, 1년에 한 번씩은 만남을 가져 서로의 저택에서 묵었으니, 그것은 양가 부모의 의도였다.
서로 친한 가문끼리 혈연으로 맺어지면 보기에도 좋고, 정도 더욱 돈독해지지 않을까?
“아이가 여자애라면 윤아랑 짝지를 맺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거절할 터가 있나. 남아도 좋지만 린 동생과 가족으로 맺어진다면 여아도 좋구나.”
황양양이 어머니인 류군의 배 속에 있을 때 장난스럽게 맺어진 혼약은, 부모들의 마음에 점점 커져나갔다. 황양양은 똑똑하고 활달한 명문세가의 고명딸이었으며, 서문윤은 바르고 건실한 청년이었다. 양가의 부모가 서로의 자식을 마음에 들어 하니, 장난이었던 태중 혼약은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만약 서문윤이 낙향 도중 도주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어쩌면 혼례를 치렀을지도 몰랐다.
“저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양양은 저와 어렸을 적부터 보았고, 그저 제게 친누이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서문윤의 마음은 어떠냐고 한다면, 또 얘기가 달랐다.
방 안에 도착한 청년은 억울함이 묻어 나오는 얼굴로 검설린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열심히 항변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녀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습니다. 어릴 적에 양가의 사이가 가까워 내뱉은 약조일 뿐, 양친과 숙부숙모 내외께선 제게 연모하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을 물려주겠노라 하셨습니다.”
불길함을 느꼈는데 막상 일이 벌어지니 죽을 맛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설린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답답하여 어이할 바를 몰라, 서문윤은 그저 검설린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오, 오해 마십시오.”
끝내기로 마음먹은 관계에 또다시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서문윤은 지금 간절한 얼굴로 그의 의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로 겉옷을 벗었다. 소매에 찬 완갑을 침상에 내던지며 그는 잠시간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머쓱한 기분에 서문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 때 검설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 것 치고는 가까워 보이던데?”
서문윤이 황급히 말을 받았다.
“가깝기야, 당연히-.”
“양양이라.”
서문윤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성년의 여인을 부르기엔 지나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설린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으니까. 그는 그저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검설린이 검지를 복면에 걸었다. 지난 2년 동안 보기를 갈망했던 것을 단단히 가렸던 한 겹의 천은 너무나도 쉽게 아래로 내려갔다.
턱 아래에 복면을 걸친 채 검설린이 무심한 얼굴로 서문윤을 마주 보았다. 투명한 얼음을 조각한 듯한 비인간적인 외모.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숨을 멈추었다.
“서문윤.”
청년에게 고정된 새까만 두 눈이 어둠 저편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내게 그리 말하는 이유가 뭐지?”
귀에 달큰하게 감기는 목소리였다.
“깰 수 있는 약조라서, 뭐 어쩌라고?”
비록 내뱉은 말은 서문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싸늘했지만.
“약조를 깰 생각이라고?”
차가운 시선이 그를 내려쬐고 있었다. 서문윤의 심장이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형님.”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또다시 부르지 말아야 할 호칭을 부르고야 만다. 망연한 마음이 담긴 목소리로 검설린을 부르며, 서문윤이 몸을 잘게 떨었다.
의형은 저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분명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도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니 이 말의 의도는 명백한 것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반대로 그를 바라보는 검설린의 얼굴은 자정의 밤하늘마냥 고요할 뿐이었다.
부드러운 저음이 이어졌다.
“연모하는 사람이 생겼느냐?”
그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서문윤은 마치 버림받은 새끼 강아지 같은 눈으로 검설린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까만 눈이 지진이 난 것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의형을…….’
그 마음을 잊으려고 했는데.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내가 한 다짐과 맞닿아 있을 터인데.
그런데 어찌 이리 섭섭할까?
성벽처럼 단단한 의형의 모습과 마주하고 서문윤은 한참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공허했다.
시간이 꽤나 흐른 후에야 서문윤은 어렵게 입술을 뗄 수 있었다. 쓸쓸한 목소리로 청년이 중얼거렸다.
“어찌 그렇게 말하십니까?”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시잖습니까?”
청년의 상처받은 얼굴은 보는 이에게 저절로 탄식을 자아낼 만큼 처연한 것이었으나, 검설린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할 뿐이었다.
시린 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말을 읊조렸다.
“나에게 어떤 감정도 원하지 마라.”
감정 하나 없는 공허한 눈이 서문윤의 몸을 훑었다. 청년이 무정한 시선에 결국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짧은 침묵 끝에 검설린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네 몸만 탐할 뿐이다.”
공간에 울리는 무거운 목소리. 매정한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서문윤은 입술을 깨문 채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를 내려다보는 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힘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모든 뜻을 따랐습니다.”
부질없는 말이다. 서문윤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제 마음만은 어찌하려 하지 마십시오.”
검설린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 얼굴을 바라보기 싫어 우울한 얼굴을 살짝 숙여 시선을 피했다.
“그것은 하늘마저 못 하는 일입니다. 설령 저마저도.”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서문윤이 비참한 기분에 잘게 몸을 떨며 속으로 탄식했다. 어쩌자고 나는 저런 무정한 사내를 마음에 품게 되었을까. 서문윤은 그저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저 사람의 눈에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의형제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2년은 기만으로 얼룩졌던 일이라. 그리 선포를 해놓고 이리 구질하게 굴고 있다.
지금 저가 내뱉는 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서문윤이 힘없는 미소를 흘렸다.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자의 말로다.
‘의형이 비웃어도 나는 어쩔 수 없다.’
정적은 한 사람의 얼굴을 우울하게 바꾸어놓았으며, 또 한 사람의 얼굴을 서서히 일그러트렸다. 우울함에 사로잡혀 서문윤이 시선을 피할 때였다.
“…허.”
문득 들려온 소리에 서문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서문윤의 몸이 굳은 순간이었다.
뭐지?
그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검설린은 제 앞에 선 청년을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크게 불만스러운 사람처럼. 그리고 그 때, 불현듯 서문윤의 귓가로 텁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넌 정말 구제불능, 하아.”
뜬금없는 말에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서문윤이 당황할 때였다. 그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불현듯 방을 쩌렁하게 울렸다.
“정신 차려라, 이 철없는 것아!”
언성을 높여 말을 내뱉고 검설린이 순진한 청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문윤은 제 뺨을 감싸 쥐는 손길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손은 서문윤의 뺨을 단단히 쥐고 짧게 흔들곤 그를 홱 던지듯 놓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이 맥없이 끔뻑거렸다.
‘이건 뭐지?’
얼이 나간 목소리로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의, 의형?”
검설린이 거머쥐었던 뺨을 저도 모르게 부여잡으며 서문윤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아귀의 힘이 세지 않아 아프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으나 갑작스러운 손길이 당황스러웠다.
서문윤의 당황스러워하는 말에 검설린은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서문윤을 노려볼 뿐이었다.
“너 지금 나한테 그리 말하면 어쩌자는 거냐.”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서문윤은 그저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얼굴을 무너트린 채로 검설린이 그를 노려보았다.
‘뭐, 뭐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서문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면을 벗어 드러난 관옥같이 수려한 얼굴 위에 황당함이 서려 있었다. 서문윤은 그저 사내를 멍청하게 올려다볼 뿐이었다. 검설린은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복잡한 얼굴로 짧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상념을 떨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검설린은 몸을 돌렸다. 사내는 서문윤을 지나쳐 성큼 방을 빠져나갔다. 서문윤은 그와 어깨가 스칠 때 또다시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타아악!
적막이 남은 자리.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청년은 벙 찐 얼굴로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뭔데, 이건?’
황소같이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서문윤은 의형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서문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홀로 서 있어야만 했다. 흔들리는 마음속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면서.
* * *
압송당한 의원과 대면하려면 절도사의 딸인 황양양의 힘이 필요했다. 검설린과 서문윤은 일주일 내로 건전성에 당도할 의원을 기다리며 그녀의 집에 머물렀다. 응당 조카 된 도리로 황재천을 뵈려 했던 서문윤은, 그가 보름 전 입조하였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였다. 황재천은 그를 자식처럼 아껴준 좋은 숙부였으므로.
황양양은 2년 만에 돌아온 서문윤을 몹시 반기며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서문윤은 검설린이 신경 쓰여 요청을 거절하고 싶었으나, 양가의 정을 들먹이며 속상하다 말하는 그녀를 내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백년화를 찾는 데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므로.
가끔씩 서문윤은 황양양의 요청에 태양이 어스름하게 지는 일몰에 함께 후원을 걷곤 했다. 권세가 쟁쟁한 절도사의 저택이다. 겨울에도 후원에는 아름다운 매화가 피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윤 가가가 돌아오신 걸 알면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거예요.”
“…….”
“실종 소식에 충격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윤 가가, 당신이 얼마나 매정한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시는군요. 많은 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니 윤 가가는 죄인입니다.”
“…….”
“저 또한, 저 또한 가슴을 앓았습니다.”
황양양이 지난 2년의 나날을 생각하는 듯 처연한 얼굴을 했다. 청아한 외모의 소녀가 회상에 잠긴 모습이 몹시 가냘파 보였다.
“…그렇구나.”
그러나 서문윤은 그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는 그저 넋을 잃고 상념에 잠길 뿐이었다.
‘그는 왜 내게 화를 냈을까?’
그의 머릿속을 점거하는 것은 오직 검설린에 관련된 일이었다.
“이 철없는 것아!”
꾸중을 하며 미간을 좁혔던 검설린의 얼굴. 서문윤이 골똘히 상념에 잠길 무렵이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설중매(雪中每)라. 시련을 겪고 핀 꽃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매화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고한 꽃이 설중매랍니다. 윤 가가 또한 설중매이십니다.”
서문윤은 그저 푹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하아.”
종달새처럼 조잘대는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문윤은 서늘한 사내의 얼굴과, 그가 자신을 향해 보였던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만든 것은 황양양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속삭인 은밀한 말이었다.
“설령 다리를 영구히 못 쓰셨다 한들, 양양은 윤 가가와 파혼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이 굳었다.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에 서문윤이 황급히 몸을 돌려 황양양을 보았다.
“양양.”
“윤 가가는 양양의 마음을 정녕 모르십니다.”
호수 같은 눈에 둥둥 떠오른 마음. 그 마음을 서문윤이 어찌 모를까. 그는 지금도 애달픈 감정에 앓고 있었다. 황양양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머뭇머뭇 말을 내뱉었다.
“양양아. 나는 네가 동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저는 윤 가가를 오라버니 이상으로 여기는걸요?”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매정하게 그녀를 대하고 싶어도 연심이 거부당하는 마음을 아는 서문윤은 함부로 말을 내뱉지 못해 침묵할 뿐이었다. 청년이 미간을 좁히며 잠시 신음했다. 소녀의 눈은 어둠을 밝히는 밝은 초와 같았다.
서문윤이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너를 좋아하고 싶어도 이제 그러지 못한다.”
“무슨?”
“너는 너무 늦었다.”
그는 쓰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너무 늦었어.”
“오라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너는 생각만으로 애가 타고 마음이 쓰라린 느낌을 알 거다. 마음이 기울어져 몸마저 휘청거리는 느낌을 알 거다. 양양아, 미안하다. 나의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갔어.”
황양양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의 얼굴에 충격이 물들었다.
“어떻, 어떻게 제게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오라버니. 저는 당신의 약혼녀-.”
“사실 나는 그를 향하는 마음을 끊으려 한다. 나를 거부하고 상처 주는 사람에게 마음 한 가닥 주지 않으려 굳건히 마음을 다짐하면서.”
“……윤 가가.”
“그러나 양양아. 나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구나. 나는 미련한 사람이다. 그리고 넌 내 소중한 동생이지. 소중한 네 마음을 가지고 놀 수 없다.”
서문윤이 한숨을 내뱉으며 황양양을 바라보았다. 소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마음을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알아다오. 나 또한 너처럼 그 마음을 쉬이 버릴 수가 없구나.”
“가가!”
“이런 마음으로 어찌 네 마음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눈물은 하염없이 소녀의 뺨을 적셨다. 황양양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미친 소리를 하지 마세요! 저희는 혼약을 맺었습니다! 양가의 부모가 허락한 관계를 누가 어이할 수 있답니까!”
황양양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서문윤을 향해 소리쳤으나,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처소로 돌아왔다.
* * *
서문윤의 반응에 무언가를 눈치챈 걸까?
그날 이후 황양양은, 검설린을 경계하며 서문윤에게 접근하려 했다. 불타는 마음에 휩싸인 여인이 무어라 명령을 내렸는지, 집안의 가솔은 검설린이 집 안을 거닐 때마다 접근이 금지된 구역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서문윤은 저를 향해 노골적으로 마음을 드러내는 황양양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윤 가가, 서역에서 어여쁜 보검을 진상했는데 같이 보시겠어요.”
“양양아, 이러지 마라. 그는 또 왜 못살게 구느냐.”
검설린은 다행히도 아침나절로 사람을 진료하러 다녀 그녀와 부딪히지는 않았다. 권세가의 저택에 어쩔 수 없이 기거했지만 그는 제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조수 일을 했던 서문윤은, 황양양의 곁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의원의 일을 하신다 합니까! 안 됩니다! 저는 절대로 그리 내버려둘 수 없어요.”
“황, 황양양.”
떼를 쓰는 여인의 모습에 검설린이 혀를 차며 짤막한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냥 남아라!”
그리하여 서문윤은 지난 2년을 통틀어서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검설린과 아침나절로 떨어지고, 저녁에만 얼굴을 보는 일상. 그리고 그 시간에 서문윤은 자주 고민에 빠졌다.
‘왜 나는 그에게서 가끔 나를 향한 정을 느낄까.’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검설린과 부대꼈던 서문윤은, 그가 없는 시간 동안 놓쳤던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폭풍에 휩쓸려 어영부영 끌려갔으나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 상황은, 사실 몹시 수상했다.
‘그는 정말로 내게 정이 아예 없어서 냉혈하게 말하는 걸까?’
서문윤은 일상 중 종종 넋을 잃으며 검설린의 감정을 억누른 얼굴을 생각했다. 검설린이 자신을 보았던 시선. 어쩐지 할 말을,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그의 모습엔 석연찮은 기색이 있었다.
‘조금 많이 이상하다.’
전에도 가끔 무언가 껄끄러운 기분을 느꼈었는데, 확실히 황양양의 저택에서 그와 떨어지고 나니 그 점이 도드라졌다. 그날 갑작스럽게 울컥하여 제게 화를 낸 것도 이상했고, 가끔씩 저를 신경 쓰는 듯한 말을 내뱉을 때 기색도 이상했다.
하여간 의형의 태도는 몹시 수상했다.
서느런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랑거렸다. 검설린과 황양양을 피해 서문윤은 앙상한 겨울나무가 가득 찬 후원을 서성이곤 했다. 서문윤이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나를 향해 가끔 내보이는 복잡한 시선.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 말을 하면서도 가끔씩 내보이는 삭막한 배려.
그런 생각을 품으며 검설린과 유리된 시간에 서문윤은 고민에 휩싸이곤 했다.
평소와 조금, 혹은 많이 다른 나날이었다.
검설린은 아침 일찍 진료를 나가고 서문윤이 황양양의 저택에서 그녀의 조잘거리는 말을 듣는 일상이 이어졌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의행을 따라다니고 싶었으나 백년화, 그 미지의 약초를 얻기 위해서 포기한 채 저택에 머무를 뿐이었다. 감정변화가 심한 황양양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으므로.
그는 황양양과 시간을 보냈고, 가끔 그녀와 있을 때 검설린과 마주쳤다. 그때마다 황양양은 과시하듯 서문윤의 팔을 붙잡았고 서문윤은 기겁하여 그녀를 밀어내야만 했다. 막상 검설린은 그런 황양양을 보며 코웃음을 칠 뿐이었지만.
그러던 와중이었다. 요즈음 끙끙 고민에 앓던 서문윤이 결국에 폭발하고야 만 것이.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뭐?”
미간을 좁힌 사내의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도저히 못 참겠다.’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한 채 서문윤이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내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검설린의 일그러진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검설린을 바라보는 서문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서문윤이 한참 황양양에게 시달릴 때의 일이었다.
* * *
그간 황양양의 저택에서 서문윤은 검설린과 한 번의 관계를 더 가졌다.
검설린은 항상 그렇듯 서문윤의 몸 구석구석을 핥고, 살갗에 입술을 맞췄다. 그저 욕구를 푸는 관계라 말을 하면서도 잠자리에서 그는 그 어떤 연인보다 다정하게 굴었다. 버거워 우는 서문윤을 달랠 때, 그는 제 욕망이 아닌 차라리 서문윤의 욕망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평소에 그는 서문윤이 황양양과 단둘이 저녁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역정을 냈다.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수군댈 정도였다. 안 그래도 세간에는 북성과 그의 남총의 이야기가 퍼져 있었으니까.
일이 이 정도 되니 서문윤도 동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그는 검설린의 수상한 태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으며, 그 와중 검설린이 기름에 불씨를 끼얹었다.
“웬만하면 저녁에 돌아다니지 말거라.”
“예?”
“밤이 되고, 처소를 벗어나지 마.”
영문을 몰라 하는 서문윤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특히 밤에는 다른 사람이랑 함께 있지 마라! 그저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골치 아프다는 얼굴을 마주하며 서문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혼망스러운 마음속을 울리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철없는 것아, 그리 말하며 탄식하듯 저를 바라보았던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순간 어쩐지 마음 한편이 울렸었지.
당혹감에 사로잡혀 서문윤은 한참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는 왜 저녁에 싸돌아다니지 말라 했을까?
‘마치 황양양과 같이 있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
그것은 몸만을 취한다고 하기에는 썩 이상한 태도였다. 황양양과 같이 후원을 걸을 때 검설린은 늦지 말라 단단히 말을 일렀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으면 화를 냈다. 검설린은 가끔씩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서문윤은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을 느끼고 몸을 떨어야만 했다.
가끔씩 자신을 바라보며 그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
무언가 말을 삼킨 듯한 두 눈을 애써 무시하려 했으나 서문윤은 종종 고뇌에 휘말려야만 했다.
그 눈의 이유는 무얼까?
먹이를 노려보는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는 섬뜩한 두 눈. 그를 생각하며 서문윤은 떨리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
그에 사로잡혀 서문윤은 결국 버리려 했던 의심을 되살리고야 말았다.
‘일전에도 그는 싸늘히 말을 하면서도 갑자기 내 뺨을 거머쥐며 철없는 것이라 말했지.’
‘마치 일부러 내게 독하게 말을 하는 사람처럼.’
‘내게 스스로를 더 돌보라 말을 하였고.’
말을 내뱉고 서문윤이 입술을 새부리처럼 굳게 다물었다. 새까만 눈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한창 고뇌에 휩싸이던 중의 일이었다. 황양양이 그늘진 서문윤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 가가, 무슨 일 있으세요?”
서문윤은 황양양과 다도를 즐기는 중이었다. 서문윤이 짤막한 한숨을 내뱉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만 들어가보겠다. 그리고 양양아, 나는 분명 말을 했다. 내 성격을 잘 알 것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경고의 뜻이 명백히 담겨 있었다.
“난 한 번 내뱉은 말을 돌이키지 않아.”
황양양은 모른 척 새침하게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가가,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서문윤은 푹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이 어린것을 어찌할까.
황양양은 그런 서문윤을 모른 척 말을 걸 따름이었다.
“윤 가가! 이런 청도 못 들어주세요? 저는 윤 가가를 위해 관을 움직이는데 너무하십니다.”
“아니, 양양. 하아.”
세게 말을 하려 해도 백년화를 찾는 데 그녀의 공이 지대한 건 사실이라, 서문윤은 치대는 황양양을 세게 밀어낼 수 없었다. 황양양은 그의 팔을 붙잡고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말을 걸었고 서문윤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결국 서문윤은 지쳐서 몸을 늘어트리고야 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하늘은 남색이었다.
‘헉!’
깜짝 놀란 서문윤이 서화를 자랑하는 황양양을 돌아보았다.
“이만 가봐야겠다. 미안하다.”
“윤 가가? 잠깐만!”
어느덧 저녁 어스름이었다. 검설린의 벼락같은 말을 떠올린 서문윤이 말리는 황양양을 떨구고 처소로 향했다. 그가 그리 내게 살벌하게 말을 했는데. 그의 사나운 성정을 아는 서문윤은 걱정을 머금고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문을 여는 순간 숨을 삼키고야 말았다.
“죄송합, 헉!”
저릿한 살기가 몸을 찌른 탓이었다. 동시에 그는 눈앞에 자리한 벽처럼 단단한 사내의 가슴팍에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의형.’
서문윤이 눈을 크게 뜨며 위를 바라보았다.
검설린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흉흉한 기색이 역력하다. 문을 열려던 팔은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서문윤은 침을 삼키며 검설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는 다급히 방 문을 나서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관은 어쩐지 흐트러져 머리카락이 뺨을 가리고 있었으며, 검설린은 추운 날씨에 장포도 걸치지 않고 피가 군데군데 묻은 홑겹옷만 입은 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의 창백한 이마에 고인 땀을 보고 침을 삼켰다.
검설린은 몹시 화가 난 듯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화가 들끓는 듯한 거칠고 쉰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내가.”
어깨를 꾹꾹 누르는 묵직한 저음.
“밤에 나돌아 다니지 말라 했을 텐데.”
말에 억눌린 노기에 서문윤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살벌했다. 생각보다 몹시 화가 난 듯한 그의 모습에 서문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황양양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져 신경을 쓰지 못했다.
서문윤이 더듬더듬 변명을 하려 입을 열 때였다.
“나돌아 다니지 말라면 하지 마!”
방을 쩌렁하게 울리는 역정에 서문윤은 항변하려던 입술을 더 이상 열지 못했다. 새하얗게 질린 뺨이 청년의 마음을 대변했다. 망했다. 말을 삼키며 청년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매서운 질책이 이어졌다.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네 신변을 구속하는 수밖에 없다!”
검설린은 억누른 말을 이어나갔다.
“어린 소녀의 말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냐?”
묵묵히 말을 듣던 서문윤의 얼굴이 어느 순간 묘하게 일그러졌다. 호통에 주눅 들었던 얼굴이 서서히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게 하지 마라, 제기랄. 내가 얼마나….”
검설린이 말을 얼버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런 의형의 모습을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다른 상념에 젖어 있었다. 청년의 얼굴이 어두웠다.
‘어린 소녀의 말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해?’
서문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울컥한 마음에 항의의 말이 목구멍 위로 치솟았다.
그는 분명 내 마음을 알고서도 그리 말하나.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남아, 파기된 관계임에도 그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어린 소녀 운운하는 말을 듣는 순간 서문윤은 도저히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거부한 관계였다.
지금 와서 이런 행동은 몹시 부당한 것이었다. 또한 서문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었고.
계약으로 이어진 관계라기엔 몹시나 이상한 의형의 언행. 그는 애매한 태도에 휘둘리고 있었고 평소에도 몇 번씩 끙끙 앓아야만 했다. 심중의 고통은 이제 충분했다.
변덕스러운 그의 언행이 참기 힘들었다.
서문윤은 결국 울컥한 마음을 입술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뭔 상관입니까?”
반항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귓가에 살벌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뭐?”
“저의 일은 의형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검설린의 아미가 산처럼 꺾인 순간이었다.
서늘한 얼굴 앞에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며 그를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이 일렁거렸다. 서문윤이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제게 명령하실 권한이 없으십니다.”
검설린은 그 말에 조소를 흘리며 답했다.
“네가 대가로 2년을 날 따른다 하지 않았나?”
“그 말에 제가 그저 종처럼 살겠다는 의미가 있었습니까?”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어진 말에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은혜를 갚겠다면서 내게 몸을 내어주면서 또 내 말을 듣는 건 자존심이 상하더냐?”
“의형!
지나친 말이다. 울컥한 서문윤의 목소리에 검설린이 냉혈한 목소리로 답했다.
“언성을 높이지 마라. 서문윤.”
듣는 이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서느런 목소리였다.
“너는 몸을 내어줄 각오를 하면서 내 입술에 입을 맞췄지. 황하에 몸을 던질 때 다리가 없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마음으로 행동한 게 아니었나? 네가 죽으려 한 이유인 다리를 고쳤으니 나는 너를 또다시 살린 게 아니냐? 내가 네 목숨을 두 번 구한 게 아니냐, 정말?”
“저는, 저는.”
“그리하여 너는 상처 입은 강아지 같은 몰골을 하면서도 나를 따르리라 말을 했잖아.”
새하얘진 얼굴 앞에 검설린이 조소를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네 구함 받은 남은 생 전부를 2년에 몰아 최선을 다해. 그저 대가를 치르기로 했으면 닥치고 나를 따르기로 한 2년에 집중을 하라고.”
지독한 말이 마음을 할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검설린은 작정을 한 사람처럼 독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서문윤의 약한 부분을 찌르는 말들을.
검설린은 비소와 함께 또다시 말을 이었다.
“말을 들으라는 요구가 힘든 게 아닐 텐데. 네가 허락한 다른 일에 비하면-.”
“그만!”
울컥한 목소리로 청년이 소리쳤다. 검설린의 눈에 이채가 서린 순간이었다. 사내는 문턱을 쥔 손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선 채 청년을 보았다.
마음이 동탕되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목구멍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쑤셔 넣고 서문윤이 숨을 헐떡거렸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는 그저 차게 웃을 뿐이었다. 피를 식게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강렬한 원망을 속으로 삼킨 채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몸을 판다고 마음을 판 게 아닙니다.”
돌아온 답변은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꺾었다. 그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건 이미 내게 준 것이 아니었나?”
서문윤이 숨을 헐떡거렸다.
“…거두어 갈 것입니다.”
그 말에 검설린은 냉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빨리 거둬 가.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마라.”
번거롭다라. 서문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검설린이 손가락에 복면을 걸며 한숨을 내뱉었다. 피로에 젖은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연꽃을 닮은 수아한 얼굴.
마치 진흙 속에서 피는 것만 같은, 관옥 같은 사내의 모습.
“너랑 대거리할 시간 없어.”
아, 나는 어째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서문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을 마주 보기 싫었다. 심장을 멈출 만치 시린 바람이 마음에 불어 피를 식히는 것만 같았다.
그 어느 감정에 휩싸여 서문윤은 한참을 그리 눈을 감은 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적막을 깨고 서문윤이 마른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떨리는 속눈썹을 열고 의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 슬픔과 분노, 원망, 그 외 여러 감정이 뒤섞여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열었다.
“그게 안 됩니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했다. 서문윤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말 비참하다. 서문윤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데 어쩝니까.”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서문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참을 말을 내뱉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가 내뱉은 말은, 희미한 원망이 숨겨진 것이었다.
“당신의 말이 저를 붙잡습니다.”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검설린을 보았다. 그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싸늘한 얼굴로 서문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윤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여지를 주는 듯 계속 헛된 생각을 꿈꾸게 만드는 검설린의 모습이 자꾸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없는 관계라면 제게 이러지 마십시오.”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당신의 말은, 황양양과 제가 밤에 있는 것을 꺼리는 듯이 들립니다.”
서문윤이 아슬아슬한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마치 질투를 하는 것처럼.”
그와 눈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사내의 눈에 담길 조소를 받기 힘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을 읊조렸다.
“의형, 다시 한 번 물어도 되겠습니까?”
검설린은 침묵 끝에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렸다.
“말해봐라.”
그의 눈이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문윤은 그것을 모른 채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저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내뱉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했다. 숨을 들이켜며,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그가 입술을 열었다.
“정녕 제게 아무런 마음도 없으십니까?”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 어리석은 말을 또다시 내뱉고야 말았다. 말을 내뱉고도 제 자신이 우스워 얼굴을 일그러트린 서문윤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한 줄기 끈을 놓지 못해 떨리는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확인사살을 당하는 게 낫다.
서문윤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무심한 눈과 마주했다. 일렁거리는 검은 눈과 마주한 순간 짙은 수치가 마음을 감쌌다. 검설린은 그저 침묵한 채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정적이 있었다.
그 끝에 검설린은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마음 없다.”
잠긴 목소리였다.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사내가 되뇌었다.
“…마음 없다.”
사내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그는 어쩐지 당혹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검설린은 또다시 짧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 끝에 그는 음산하게 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쉬어빠진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다. 서문윤은 그저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몸을 움직였던 울화가 가시고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공허한 마음뿐이다. 자포자기한 청년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렇습니까?”
고목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답을 했다.
“그래.”
서문윤은 그 거친 목소리가 마음을 찢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었다. 한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예, 죄송합니다. 다 제 착각이었습니다.”
검설린은 냉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창백한 얼굴은 비인간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가 어쩐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품었다. 차라리 시체와 같았다.
그는 스스로를 자조하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대가일 뿐입니다. 다시는 착각 않겠습니다.”
서문윤의 눈은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 만치 투명하고 시렸다.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2년의 시간, 당신이 베푼 은혜를 갚기 위해 종처럼 살겠습니다.”
자조 어린 말이었다.
“밖에는 나돌아 다니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숨을 들이켜며 서문윤이 그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의형제가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정은 없고, 단지 서로의 이익을 교환하는 계약만이 있을 뿐입니다.”
굳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작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 관계라 믿게 해주십시오.”
검설린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보는 이의 마음을 저절로 동요시킬 만치 무서운 얼굴로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강렬한 시선 앞에서 서문윤은 한참을 침묵을 지켰다.
* * *
그날 이후 서문윤과 검설린의 관계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서문윤은 조금 더 검설린을 어렵게 대했으며, 검설린은 서문윤을 피하는 듯했다.
둘의 사이는 이전보다 조금 더 소원해졌다. 겉으로 보기에 검설린은 예전과 똑같이 냉랭할 뿐이었지만 서문윤은 사건 이후 그와의 사이가 어딘가 어색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저녁마다 검설린은 서문윤과 마주하고도 눈을 피했으며, 그의 말에 침묵으로 응대했다. 평소에도 말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사내는 그날 이후로 확연하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서문윤은 가끔 그늘진 얼굴로 검설린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의 얼굴은 그저 냉막하기만 했다. 청년은 곧 그날 말을 내뱉었던 것을 후회하고야 말았다. 괜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정말 그의 생각을 알 길이 없구나.’
그를 잠시 원망하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쓴웃음을 흘렸다.
‘사실 내 생각조차 알 수 없지.’
그의 말대로 검설린은 따를 뿐인데. 정이 담긴 언행을 보이지 않을 뿐인데. 그런데 그저 싸늘한 그의 태도가 불편하니. 이건 할 말이 없었다.
서문윤은 그저 잔여한 마음에 자조할 뿐이었다. 나는 정말 철없는 사람이다. 말을 읊조리며 청년이 고개를 슬쩍 숙였다. 그런 대접을 받고도 이런 길을 밟고야 만다.
마음에 불쑥 드는 마음이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그는 이런 나를 알아 한심하게 여긴 것인가.’
같은 사내에게 정신 팔려, 수치도 모르고 몸마저 내어주는 내 행동이 철이 없는 어린아이의 짓거리 같아서. 모욕에도 푼수처럼 그저 마음을 내어주는 내가 답답해 보여서.
그리하여 오직 몸을 탐하려 날 품에 안고도 안쓰러워 충고를 한 건가.
서문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저 헛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마음이 답답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마음이 묵직했다. 서문윤은 그저 묵묵히 목에 걸린 말을 삼킬 뿐이었다. 처소에 드는 의형의 냉랭한 얼굴에 가끔 흔들리는 시선을 내보내면서.
겨울바람 소리가 거셌다. 서문윤이 창문을 닫고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한참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청년은 문가에 걸어놓은 두꺼운 피풍의를 걸치고 방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의 냉대가 부질없는 마음을 없앨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의 짐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함이 가슴에 남아 병이 된 듯했다. 서문윤은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에 남은 우울함을 누구에게 토로할 수도 없는 상황. 어릴 적 예뻐했던 동생마저 짐이 된 상황에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청년은 그저 속으로 앓을 뿐이었다.
소원대로 된 상황인데, 마음이 이리 어지러운 것을 보면 그저 저만의 잘못이었나 보다. 가끔 답답함을 참지 못할 때 서문윤은 처소의 앞을 서성였다. 멀리 나가면 의형의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몰랐으니까.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그의 말에 반항하긴 했으나, 여전히 서문윤에겐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서문윤이 별관의 뒤뜰을 사부작 밟고 있을 때였다.
“왜 여기에 있지?”
저음이 공간을 갈랐다. 서문윤이 몸을 돌려 후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새까만 밤이었다. 황량한 나뭇가지 위에 새하얀 달빛이 걸린 때. 고목을 병풍마냥 뒤에 두고 사내 하나가 후원의 입구에 서 있었다. 새하얀 일색의 의복. 눈으로 몸을 뒤덮은 듯한 사내. 복면으로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가리고, 슬쩍 드러나는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그는 후원에 선 서문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의형.”
서문윤이 작게 말을 내뱉었다. 무심코 예전의 호칭을 내뱉고 서문윤은 몸을 흠칫하고야 말았다. 그는 곧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직도 의형이냐.
밤을 등에 진 검설린은 수묵화와 같았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달빛을 받아 새하얬다. 그를 바라보는 눈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답답함에 후원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밤에 사람과 만나지 말라는 의형의 말을 지키면서. 서문윤은 말을 머뭇거렸다. 침묵 끝에 청년이 입술을 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검설린은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간 서문윤을 바라보며 말을 망설였다. 짧은 침묵 끝에 검설린이 발걸음을 뗐다. 할 말은 많았으나 서문윤은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검설린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설린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소로 향할 뿐이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등을 졸졸 따라 처소로 돌아갔다. 냉랭한 검설린의 얼굴에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너른 등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피하는 그의 모습이 섭섭하다.
남은 2년의 시간 동안 이리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서문윤은 그저 그의 안색을 살필 뿐이었다. 그의 말이 몹시 두려웠다. 검설린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문 앞에 들어서는 순간 검설린이 우뚝 자리에서 멈춰 섰다.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파 보이는군.”
서문윤은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무심한 말이 이어졌다.
“내가 네 몸을 살피면 너는 또 헤매고야 말 거냐.”
“진료는 왜 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그저 종인데.”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원망이 희미하게 담겨 있었다. 제가 말하고도 비꼬듯이 들려 흠칫 놀란 서문윤이 몸을 움츠렸다.
그의 성격상 자존심은 있어서 비꼬느냐, 조롱의 말이 나오겠지.
그러나 서문윤의 생각과 다르게 검설린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차분한 눈으로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귓가에 바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깊어 어둠이 그득하게 내려앉은 때였다.
고요한 눈과 마주한 순간 서문윤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내부에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은 듯 텅 비어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냥 양양에게 시달려서 그런 겁니다. 애가 착한데 조금 활달합니다.”
서문윤은 애써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답했다. 또 저는 당신의 호의에 헤매고야 말 겁니다. 말을 삼키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무심하게 답했다.
“너를 보면 항상 네 과거를 의심하게 된다.”
“…?”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순해빠져서 궁내 무관으로 부임했다고?”
문득 검설린이 어이없다는 듯이 짧고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낙마는 복이었던가.”
그 모습이 마치 탄식을 하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서문윤은 그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닫혔던 말문을 간신히 열 수 있었다.
“저를 그냥 무시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검설린의 몸이 굳은 순간이었다.
그는 고요한 눈으로 청년의, 서문윤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힘없이 웃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청년의 얼굴은 환자마냥 희고 맥이 없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검설린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서문윤은 고개를 숙이며 잠시간 묵묵히 침묵했다. 그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의형을 더 힘들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를 원해 마음을 앓는 일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서문윤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검설린이 저를 피하는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의형의 마음을 잘 알았으니 물러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 끝에 서문윤은 허탈한 마음을 삼켜야 했다. 어쩐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양양의 말이 옳은지도 모르지.’
그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게 맞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지금 저는 그의 옆에 있다.
사실은 은혜를 갚고자 하여 그의 옆에 자리한 게 아니었다.
그가 없는 사이에 깨달았다. 어리석은 마음이 저를 미혹시키고 있다. 서문윤은 묵묵히 미혹의 대상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관자놀이와 뺨의 일부에 흘렀다. 서문윤은 복면을 당겨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입술을 열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새하얀 천에 가려진 사내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저입니까?”
복면 위로 드러난, 붓으로 그린 듯 유려한 눈매에 싸늘함만이 감돌았다. 초봄이 다가오는 무렵인데, 의형의 얼굴은 여전히 한겨울이었다.
검설린이 짤막하게 말을 내뱉었다.
“네가 나를 보는 눈이 싫다.”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서문윤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말을 끝으로 검설린은 또다시 말문을 닫았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공허한 눈.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복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새하얀 천이 허공에 나풀거렸다. 서문윤은 드러난 싸늘하고도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오늘도 저를 취하실 예정입니까?”
검설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서문윤은 흔들리는 두 눈을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침묵 끝에 느리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 말에 서문윤은 허탈한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당신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검설린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그의 입술 위에 입술을 겹쳤다. 검설린은 눈을 감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허리를 감싸는 두꺼운 팔이 있었다.
서문윤은 입술 사이를 헤집는 말캉한 살덩어리에 결국 눈을 감고야 말았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을 삼키며 서문윤은 접문에 신음을 흘렸다. 그의 싸늘한 말과는 반대로 여전히 그의 입술은 달큼했으며,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서문윤은 그날 밤 정사 내내 어두워진 얼굴 표정을 풀지 못했다. 몇 번 있던 정사에 그는 익숙지 않아 하면서도 신음을 흘리며 검설린을 껴안았으나, 그날 밤 서문윤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검설린은 그런 서문윤을 못 본 척 외면하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묵직한 성기를 안에 묻었다. 가쁜 숨소리가 방을 울렸으나 서문윤은 평소와 다르게 달짝지근한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몸을 방관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청년을 내려다보면서 검설린은 정사 도중 미간을 좁혔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서문윤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곧 포기하고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그저 몸을 기울여, 청년의 입술에 위로를 하듯 부드러운 접문을 시도했을 뿐이다. 서문윤은 혀를 섞는 것을 몹시 좋아했으므로.
우울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서문윤은 입술에 닿는 입술에 고개를 들어주었다. 으응, 입술 사이로 흐르는 신음에 서문윤은 수치를 느낀 듯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잘게 떨었다.
검설린은 청년의 부드럽고 깨끗한 숨결을 입안에 머금으며 그의 입술을 빨았다. 서문윤은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으며, 검설린은 그의 입술을 따라 몸을 숙였다. 허벅지를 잡은 손을 슬쩍 누르며 검설린은 그에게 몸을 기댔다.
서문윤은 윽윽 신음을 흘리며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몸을 수그렸다.
검설린은 그저 신음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서문윤의 몸을 탐할 뿐이었다. 보드라운 둔덕에 분신을 밀어 넣으며 검설린은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답답함이 산재한 얼굴은 한숨이 흐르고 체념한 얼굴로 변했다
서문윤의 입술을 빨고 그와 몸을 엉키며, 검설린은 암울하게 가라앉은 눈을 꾹 감았다.
서문윤은 침상에 몸을 웅크리고 우울한 얼굴로 벽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그 처량한 모습에 또다시 한숨을 삼켰다.
뒤처리까지 마친 후였다. 물수건을 넣은 대야가 탁자 위에 있었고, 청년은 기진맥진하여 침상에 늘어져 있었다. 달아올랐던 방 안의 공기가 아직도 식지 않아 색열이 감도는 몸을 스쳤다. 정사 후 나른한 몸을 누이고 싶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쉽사리 그러지 못한 채 말없이 자리에 누운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어느 순간 검설린은 굳은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청년을 바라보는 눈이 복잡한 감정에 휘말렸다. 한마디 말을 떠올린 채 검설린은 침묵을 지켰다.
그날 검설린은 서문윤의 방에도, 저의 방에도 들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마루에 앉아 밤을 새웠다.
서문윤 또한 피로한 몸에도 그날 잠을 자지 못했다.
* * *
어느덧 한 달의 시간이 흐른 날의 일이었다.
초봄의 서늘했던 날씨는 어느새 풀꽃이 싹을 틀 만치 풀렸으나,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냉랭했다.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져도, 어찌 되었건 일상은 여전히 진행됐으며 그들의 관계 또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검설린은 여전히 서문윤의 시선을 피했고, 서문윤 또한 언제부터 그런 그를 익숙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긴장이 유지될 때였다.
개울의 한 겹 살얼음같이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상황을 환기시킨 것은, 바로 외마디 비명소리였다.
“꺄아아악!”
타앙! 서문윤이 벌컥 문을 박차고 방 안에 들어섰다.
“황양양, 지금 뭐 하는 짓이… 이게 무슨?”
서문윤은 고함을 끝까지 내지르지 못했다. 그의 몸이 얼음동상처럼 얼어붙었다.
“이, 이게.”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의 코끝에 스치는 비릿한 피비린내.
서문윤이 잘게 떨리는 눈으로 피를 뒤집어쓴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의원인 그는 자주 더운 피를 콧날에 걸곤 했으나 지금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검설린이 서문윤을 마주 보았다.
피가 뚜욱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검을 손에 늘어트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