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나립 박사(5)
서문윤의 위에 느릿한 숨을 내뱉는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휘장처럼 길디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로 사내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침음을 흘렸다. 치렁한 머리카락이 장막처럼 얼굴을 가려 서문윤이 볼 수 있는 것은 찌푸려진 미간과, 장밋빛으로 달아오른 사내의 얼굴이었다.
흐릿한 시야에 사내가 입술 끝을 딱딱히 굳히는 장면이 보였다. 서문윤은 아주 찰나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 그만, 흑!”
흔들렸던 사내의 눈에 섬광이 스친 순간이었다. 공황에 차 버둥거리던 서문윤의 시야가 새까매졌다. 눈을 덮은 것은 커다랗고 까슬까슬한 손이었다. 안 보이는 시야에 서문윤은 더욱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내장을 짓누르는 짙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통증이 하반신을 완전히 부서트리는 듯했으며, 무엇보다 충격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부목을 대지 않은 다리를 굽히며 서문윤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형, 의형?”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면서도 인정하기 힘들었다. 지금 자신은 다리를 벌린 채 사내의 양물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안에서 눌린 배 속의 고통과, 척추를 박살내는 듯한 아찔한 통증으로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서문윤은 도저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 몸을 버둥거렸다.
“흐, 윽. 하, 악!”
정말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서문윤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숨을 헐떡거렸다.
대체 왜 나는 그에게 안기고 있단 말인가?
밤중에 일어난 황망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에 서문윤은 그저 반항할 뿐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야가 더욱 그를 자극했다.
“싫, 싫, 흐윽!”
그의 귓가로 얕은 신음이 흘렀다. 신음에는 낭패한 마음이 담겨 있었으나 그를 알아채기엔 지금 서문윤이 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발, 제발. 그는 울음 섞인 비명을 내뱉으며 단단한 몸을 밀쳤으나 검설린은 한 치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배를 마주 닿은 상태 그대로 잠시 몸을 멈출 뿐이다.
그리 몸을 굳힌 채 검설린은 잠시간 음울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불쌍하게도 눈물로 얼굴을 물들인 어린 청년을.
시간이 흘러 서문윤이 몸을 잘게 떨었다. 정신을 되찾기는 아직 요원했으나 그는 그저 검설린에게 묻고 싶었다.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왜 이러십니까?”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서문윤은 입술에 닿는 뜨거운 숨결로, 검설린의 입술이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서문윤이 턱을 잘게 떨며 입술을 벌렸다. 평소에 정갈한 인상을 주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고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하염없이 울었다.
“놔, 놔주세요.”
다가가고 있다 생각했다.
“그만…… 제발…….”
의심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과를 들으며, 의형이 자책하고 있다 생각했다.
서문윤이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중 마른기침을 했다. 잔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희뿌연 시야는 서러운 울음 탓이었다. 소리도 나지 않건만 눈물이 계속 흘러나와 서문윤은 앞을 잘 보지 못했다. 아니, 그는 사실 환상을 보고 있었다.
“시험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두려웠을 뿐.”
“너를 반드시 고치리라.”
“미안하다.”
언젠가는 그가 마음을 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믿었던 의형이 왜 내 위에 있나?
서문윤은 간신히 그 한마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울먹거리며 내뱉은 애원이었다. 아무리 피가 식은 사람이란들 마음을 흔들 만치 처량한 목소리였다. 배신감에 흔들리는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져 동풍에 흩날리고 있다. 꿈이라 믿고 싶은 마음을 삼키며 서문윤은 일그러진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의 간절한 마음에도 허공에 고정된 검설린의 상은 불변하였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말해주듯이.
검설린은 한참을 그와 몸을 마주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서문윤의 위에서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다. 적나라한 욕지거리. 그 말을 들은 순간 서문윤이 몸을 파득 떨었다. 검설린의 말은 사납긴 해도 천박하지는 않았는데, 그가 처음으로 저열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이 점차 희게 물들었다.
제 위에 자리한 사내가 낯설었다. 갑작스럽게 찬물이 머리에 뿌려지는 기분이었다.
서문윤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의형에게 범해지고 있구나. 내 위에 자리한 이는 경애하는 마음으로 따랐던 사내가 아니구나.
언행이 거칠어도 고결한 사람이다. 그랬기에 그를 경애했고, 그를 지키기로 마음먹었건만. 겁을 덜컥 먹은 서문윤이 몸을 잘게 떨었다. 그의 눈을 가린 손이 축축이 젖어들고 있었다.
긴장이 고조된 자리. 사내 둘은 몸을 굳힌 채 침묵을 지켰다. 서문윤은 그저 침을 꿀꺽 삼키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제 몸 위에 무겁게 자리한 사내를 두려워하며 몸을 떨 뿐이었다.
찰나의 시간 청년의 눈물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뒤이어 사내의 눈에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
그리고.
“흐윽.”
서문윤이 울음을 내뱉으며 단단한 어깨를 밀쳤다. 굳은 채 말이 없던 검설린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배를 가득 채운 커다란 이물감이 짙어지고, 서문윤은 그의 몸을 밀며 버둥거렸으나 검설린은 그의 눈을 가린 손에 힘을 주었을 뿐이다.
단단한 손에 눌려 서문윤은 침상에 머리를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벅지는 다른 손에 잡혀 벌려진 채로, 가슴은 철벽처럼 단단한 몸에 짓눌린 채로. 아무리 몸을 버둥거려도 서문윤의 반항은 통하지 않았으며 그는 어느 순간 몸부림치던 몸을 늘어트리고야 말았다.
그때부터 서문윤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내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서럽게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청년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손바닥에 퍼져 나가는 뜨거운 물기에 사내는 결국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그러나 검설린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서문윤의 허벅지를 붙잡아 벌렸다. 몸을 기울이며, 검설린은 건조한 입술을 서문윤의 입에 겹치며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를 말캉한 혀가 파고들었다. 혀를 깨물까? 생각했으나 서문윤은 곧 포기하고 잘게 떨리는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어진 것은 그가 차마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농밀하고도 폭력적인 입맞춤.
이슬같이 맑은 물방울이 눈매를 따라 흐르는 순간, 단단한 이가 부드러운 혓바닥을 긁고, 살덩어리가 얽혀 입안을 희롱하고 농탕쳤다. 서문윤은 막힌 입술 밖으로 괴로움에 찬 신음을 흘렸으나, 그것은 사실 애원하는 사람의 것마냥 달콤하게 들릴 뿐이었다.
귓가에 가득 찬 것은 끈적한 신음뿐. 서문윤은 그것이 자신이 흘린 것임을 깨닫고 절망 어린 얼굴을 하고야 말았다.
달콤한 탄식에 사내는 뜨겁게 억누른 신음을 섞으며 고개를 숙였다.
겹치는 입술.
부드럽게 혀가 얽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마저 쾌락의 자락으로 해석되는 순간, 바르작대던 청년은 정사의 끝에 결국 몸을 달구는 쾌락에 굴복하여 하악 단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사내의 무뚝뚝한 얼굴에 실금이 퍼져 나간 순간이었다.
침상에 널브러진 채 청년은 몸을 떨었다. 슬쩍 열린 창문 사이로 새하얀 달빛이 어스름하게 나신을 빛냈다.
하얀 빛이 노니는 새하얗고 매끄러운 살결. 그곳엔 군데군데 상흔이 있었다. 대부분 오래된 상처였으나 가끔 붉게 달아오른 상처가 보였다. 그것은 손톱만 한 크기의 붉고 푸른 멍이었다.
울혈은 나신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흔적을 낸 자는, 참았던 정욕을 터뜨린 듯 집요하게 그를 괴롭히고 범했다. 더 이상은 숨길 생각이 없다. 그리 말하는 것처럼.
등줄기를 따라 피멍이 군데군데 보였고, 가슴팍과 팔뚝에도 울혈은 여럿 보였다. 그리고 부목을 대지 않은 발의 복사뼈 아래, 무릎 위, 고간에 맞닿은 허벅지 안…….
마치 여러 개의 꽃이 피어난 것만 같다. 새하얀 몸을 그리 울혈로 장식하곤 청년은 벽을 바라본 채 말이 없었다.
방 안에는 그 말고 사내 하나가 더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청년의 몸을 색칠한 이였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흐트러진 침의를 정돈하고 허리띠를 고쳐 매고 있었다. 허리띠에 매듭을 진 사내가 힐끗 침상 아래를 보았다.
바닥에 새하얀 천이 떨어져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사내가 몸을 기울였다. 길디긴 새까만 머리카락이 사륵 침의에 스치고, 사내가 손을 뻗어 떨어진 천을 주워 들었다.
복면을 다시 얼굴에 두르고, 사내가 작은 한숨을 삼킨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침묵은 스산했다.
정교를 나눈 후였으나 방 안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몸을 섞을 때의 열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그저 청년은 침상에 누워 가는 숨을 내뱉을 뿐이었으며, 사내는 그를 모른 척 등을 보일 뿐이었다.
교교한 달빛이 청년과 사내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먼저 적막을 깬 사람은 서문윤이었다. 그는 팔뚝으로 부은 눈을 가린 채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설린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서문윤은 묵묵히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무언의 압력을 느끼고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짙은 숨소리에 서문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검설린이 눈을 감았다. 무언가 말을 고르는 듯 사내의 얼굴에 희미한 동요가 스친다. 시간이 흘러 검설린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은 이미 평소의 냉랭함을 되찾은 채였다. 차게 식은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너를 안고 싶어서.”
부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몹시나 뻔뻔한 말이 아닌가?
강간이나 다름없는 관계 후에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저열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휘감긴 채 서문윤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서문윤의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검설린은 그의 분노를 알았으나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문윤의 몸이 서서히 잘게 떨렸다. 어느 순간 떨림은 완연하게 몸 전체를 덮었다.
그리고 검설린은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에도 닿았기에. 검설린은 어두워진 얼굴로 침음을 삼키고야 말았다. 복면 사이로 짧은 한숨이 흘렀다. 검설린은 묵묵히 청년의 서러운 울음을 귓가에 흘렸다.
한동안 방 안에는 그 애달픈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차디찬 달빛이 검설린과 서문윤을 유리하듯 가로질렀으며 적막은 그들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엮고 있었다. 검설린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굳어갔다. 냉랭한 얼굴에 동요가 스치고, 그는 등 너머로 들려오는 억눌린 울음에 어느 순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것은 차라리 짐승의 울음과도 같았다.
살얼음이 서서히 깨지듯이, 얼음장 같았던 얼굴에 실금이 생긴 순간이었다.
청년은 믿고 따르던 의형에게 겁간당해 울고 있었다.
왜, 왜. 원망이 담긴 말을 중얼거리면서 청년은 몸을 웅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욱욱 서러운 울음에 검설린의 얼굴에 파문이 짙어졌다.
…그는 고작 스물넷의 청년이다.
숨이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냉랭하던 얼굴에 균형이 깊어져 갔다.
끼이익.
바람이 문을 흔들어 삐걱거리는 경첩소리를 흘리고, 잠자코 앉아 숨을 고르던 검설린이 문득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찰나간 고민이 얼굴에 스쳤다.
검설린은 마침내 침음을 흘리며 꺾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가라앉았던 두 눈에 빛이 스칠 무렵이었다. 검설린이 드디어 입술을 떼려던 때.
“의형에게 범해질 때.”
검설린은 말을 내뱉지 못했다.
“쾌, 쾌락을 느꼈습니다.”
청년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서문윤은 침묵 끝에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침상에 앉은 사내의 등에 동요가 보였다. 끼이익. 끼익. 경첩 우는 소리가 어찌 저리 슬프게 들릴까. 새하얀 달빛은 어느새 방 전체를 덮고 있었다. 서문윤은 달빛에 검설린의 모습을 완전히 볼 수 있었다. 붉어진 눈으로 거구의 사내를 노려보며 서문윤이 원망을 담은 말을 내뱉었다.
“그런 저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검설린은 그저 침묵으로 응대할 뿐이다. 청년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무심했다. 서문윤은 불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며 헐떡거렸다.
어째서 당신인가.
청년의 얼굴에 깊은 상처가 묻어 나왔다.
가까워졌노라 생각하면 그 거리만큼 밀려나고야 말지.
청년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다른 날이라 믿었는데.
의형이 내게 보인 나약한 모습이, 나를 믿었기에 허용한 것이라 믿었는데.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 내가 조금 더 특별해졌다고…….
문득 서문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십니까?”
자조의 마음이 서린 말이었다. 서문윤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있었습니다.”
서문윤은 마침내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그는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삼키며 입술 끝을 비틀었다.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고 서문윤은 끝내 괴로움을 참지 못해 몸을 모로 웅크렸다. 척추가 도드라지게 움츠러든 등에 떨림이 묻어 나왔다.
“의형을, 연모,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또다시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은 그때까지 평정심을 간신히 유지하던 검설린에게서 동요를 이끌어냈다.
그는 그 순간 몸에 냉수가 뿌려진 차디찬 전율을 느끼고 헉,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수축된 동공이 동요를 드러내고, 복면 밖 드러난 얼굴에 스친 것은, 놀랍게도 희미한 두려움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검설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망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의형은 항상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시지요.”
원망이 짙게 깔린 갈라진 목소리에 검설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간간히 들려오는 흐느낌에 침대에 걸터앉은 사내의 몸이 서서히 움츠러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초라하게 늘어진 어깨와 잘게 떨리는 등줄기가 처량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은 깊은 과거를 헤맸으며, 사내는 결국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그 어떤 생각에 이른 검설린이 어느 순간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나는, 나는.”
그리고 더듬거려 내뱉는 마음의 파편.
검설린은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
그는 그저 벌려진 두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을 느릿하게 내뱉을 뿐이었다.
또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검설린이 무거워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볼 때였다.
뿌드득.
살벌한 소리가 울리고, 연이어 쾅!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설린은 갑작스럽게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
우지끈, 낡은 침상이 부서졌다. 경악한 검설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상을 박차고 나가는 서문윤이었다.
사내의 눈에 경악이 자리한 순간이었다.
“잠, 잠깐!”
이게 무슨?
기겁한 사내의 목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검설린은 자리를 박차는 서문윤을 확인한 순간 손을 뻗었으나, 그저 그의 옷자락만을 그 끝에 스치고야 말았다.
서문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울혈로 얼룩진 몸,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뚜욱뚝 뜨거운 정을 흘리며 휘장 하나를 찢어 두른 나신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서문윤은 방을 빠져나갔다.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검설린은 그저 그를 쫒아 뛰쳐나갈 뿐이었다.
“제기랄!”
환장한 마음이 담긴 욕지거리를 마지막으로 방 안에 정적이 자리했다.
* * *
“서문윤!”
등 너머로 울리는 목소리가 격하게 갈라져 있었다. 쩌렁하게 울리는 말에는 분노가 녹아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나신의 청년이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얼굴은 검미가 곧으며 얼굴의 각 부분이 균형 잡힌 단정한 인상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에 충격이 드러나 있었다. 서문윤은 공황에 가득 찬 채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소문이.’
흙발이 피투성이였다. 벗겨졌던 침의는 팔에 걸려 흩날리고 얇은 붉은 휘장은 새하얀 달빛을 고스란히 투과시켰다. 그마저 지진에 찢겨진 천이라 서문윤은 나신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밤길을 달리는 중이었다. 허벅지가 서로 살갗에 스칠 때마다 새하얀 액체가 주룩 흘렀다.
어째서 이 젊은 청년은 이런 참담한 꼴로 밤길을 달리고 있나?
“서문윤, 제기랄!”
밤길을 쩌렁하게 울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답을 짐작케 했다.
“당장 멈춰라! 당장!”
격한 목소리였다. 흉흉한 기색이 가득한 말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길을 쩌렁하게 울렸다. 청년이 어려워하던 이의 분노다. 그는 사내가 이토록 격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정확히는 다른 이가 아닌 제게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을.
서문윤이 본능적으로 움츠리고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새하얀 목에 솜털이 서 있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새파란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의형이 나를 범, 범하고 있었어.”
그 1년 동안, 자신이 모르는 수많은 시간 동안 의형은 저를 범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배신감에 찢겨진 마음을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믿었다.
의형이 저를 살리고, 다리를 고치고, 또 제 마음을 고쳤으므로. 또한 그를 쫓아다녔던 2년의 시간이 그를 믿게 했다.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2년의 시간 동안 경험했던 그의 거친 언행. 빈정거리는 말투와 과격한 태도. 그러나 그는 분명 남들이 가지 못하는 길을 걷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했다. 그리하여 남들이 그를 욕하는 것은 그를 몰라서라고 생각했다. 진실은 그의 품성이 고아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사내라며.
그래서 스스로를 더럽다 여겼다. 서문윤은 입술을 막고 토악질을 삼켰다. 욱욱 헛구역질을 내뱉는 그의 입가에서 맑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시린 겨울바람에 새빨갛게 얼어붙은 나신. 그에게 엉키듯 둘러져 있던 얇디얇은 휘장이 너울대고.
서문윤은 바람에 스치는 겨울나무처럼 얕게 울었다. 어미 잃은 짐승마냥 서럽게 울었다.
그랬는데. 어째서.
“하악!”
여진에 부서진 도로가 거칠었다. 튀어나온 돌에 걸려 바닥을 구른 서문윤이 신음을 삼켰다. 뒤에서는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살기가 넘실거리는 목소리다. 서문윤이 숨을 거칠게 내뱉곤 비틀거리며 자리에 일어섰다. 무릎에 피가 뚝뚝 흘러 떨어졌으나, 그는 다친 다리를 움직이며…….
서문윤의 눈이 홉떠졌다.
다리?
청년은 그제야 공황에 놓쳤던 사실을 깨닫고 얼어붙었다. 그 순간이었다.
부서진 가도를 달리던 중 서문윤이 아악 비명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다친 다리를 감쌌던 부목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던 것이다.
또다시 다리가 문제다. 서문윤이 자괴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릴 때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려움에 잠식당한 사람의 얼굴로 얼어붙고야 말았다.
타닥, 탁, 탁, 탁…….
흙길을 밟던 발의 보폭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발은 어느 순간 길인지 그냥 땅인지 알 수 없는 험난한 곳에 멈추어 섰다. 먼지와 흙과 돌로 얼룩진 곳에. 발을 더듬더듬 움직였으나 보폭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부목이 부서진 다리의 곡선을 따라 떨림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아, 아아.”
누군가의 겁에 질린 신음이 어둔 밤을 울릴 때.
“끝났나?”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서문윤의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신 순간이었다.
목소리는 그의 바로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아아, 듣기만 해도 불길한, 나무에 겨울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을 참을 수 없었다.
서문윤은 그저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릴 뿐이다. 점으로 변한 동공이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
차라리 적이었다면 나았으리라. 혹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나았으리라.
‘나는 어째서 달릴 수가 있지?’
마음속에 드는 생각.
부목이 떨어지고 저는 맨다리로 땅을 달리면서, 왜 통증을 느끼지 못한 건가.
“서, 설.”
그러나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불쾌하기까지 한 상쾌한 기분. 서문윤이 발작을 일으키며 인기척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가까이 오지 마!”
평소의 그답지 않은 발악 섞인 목소리였다. 청년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으며, 평소에 곧았던 두 눈은 미친 사람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울부짖는 목소리가 밤길을 울렸다. 어둑한 밤에 서문윤은 제 앞에 선 검설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제 앞에 굳건히 자리한 사내를 인식했다. 스산한 바람소리 사이, 거친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공포가 희게 번져 나갔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코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밤길을 뛰어온 사내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달빛이 들지 않는 밤길. 서문윤은 허억,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리고야 말았다.
팔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그가 있다, 지금.
저를 바라보는 의형의 강인한 몸은 철벽과 같았다. 그것은 평소에 서문윤이 믿음직스럽다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안도가 아닌 위협을 느꼈다.
청년이 방금 전까지 멀쩡하지 않았던, 그러나 지금은 멀쩡한 다리로 더듬더듬 뒷걸음을 치며 새파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 나는.”
내가 경애했던 이는 누구인가?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눈물을 뚜욱뚜욱 흘렸다.
“다리는.”
“네 다리는 반드시 고쳐주겠다.”
“반드시.”
거짓말이었어. 중얼거리는 서문윤의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뇌리에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나를 믿느냐?”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고요한 얼굴. 그것은 평소 그의 얼굴이었으나 서문윤은 그 말을 내뱉을 때 살짝 일그러졌던 그의 눈가를 기억했다. 그는 그리고 서문윤의 대답에 음울한 웃음을 흘렸다.
“의형이 제 목에 칼을 들이댄다 하더라도.”
아, 이 어리석은 놈아.
“저는 의형을 믿을 것입니다.”
서문윤은 공포에 질린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다리가 나았으니 떠날 것입니다.”
그가 저를 배신했다. 저를 속이고 제 몸을 취했다. 2년간 하늘이었던 사내의 배반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서문윤은 떨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질척한 액체가 주룩 흘러내릴 때 서문윤은 모멸감에 얼굴을 붉혔다.
“떠날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발악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경애하고 또한 두려워하던 사내에게 처음으로 내뱉은 반항의 말이었다. 울분을 터뜨리듯 말을 하고 서문윤은 몸을 고꾸라트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더 이상 무너지는 마음을, 몸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맘대로?”
서문윤의 얼굴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목소리는 짐승이 내뱉은 것같이 거칠었고, 흉흉한 기세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억눌린 감정이 말에서 묻어 나왔다. 평소의 서문윤이라면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을 강렬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무는 대신 이를 악물며 의형을 노려보았다.
“다리가 다 나았으니 떠날 겁니다.”
두려움을 이긴 분노였다. 정을 이긴 미움이었다. 그의 얼굴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곳을 향해 서문윤이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쳤다.
“문제가 있습니까? 제가 떠나겠다는데 막을 수 있으십니까?”
반항은 거세고 격렬했다. 청년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먹구름이 바람에 밀려 희미한 달빛이 어둠을 가로지를 때였다. 부서지는 달빛이 사내의 얼굴 일부를 밝히고, 서문윤은 그 순간 숨을 헉 멈추고야 말았다.
“너.”
구겨진 사내의 얼굴을 본 탓이었다.
“네가.”
정확히는 뜨거운 불꽃이 이글거리는 두 눈을 본 탓이다.
그 순간 강렬하게 몸을 찌르는 살기에 서문윤은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를 가까운 곳에서 내려다보는 눈은 몹시 흉험하여, 차라리 그를 목 졸라 죽여버리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것뿐인가?
복면으로 가려지지 않는 살갗. 달빛에 드러난 창백한 얼굴이 일순간 일렁거렸다. 서문윤을 내려다보는 들끓는 눈이 찰나간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사내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강렬한 시선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것만 같은 눈으로 서문윤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그러나 사실 검설린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의 어린 조수가 아니었다.
그는 심연을 헤매는 중이었다.
후욱 깊은 숨을 내뱉으며 검설린이 입술을 깨문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였나, 흔들리는 마음이 새까만 눈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살기에 억눌려 막힌 숨통을 꺽꺽댔으나 검설린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침묵했다. 냉막하던 얼굴에 복잡함이 스쳤다. 사내는 머뭇거리며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스산한 밤보다 차가운 얼굴에 탄식이 어리고…….
서문윤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하악, 가쁜 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한밤중 벌어진 두 사내의 대치였다.
사내 하나의 얼굴에 고민이 서렸다.
사내 하나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쳤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머뭇거리던 사내의 얼굴이 일순간 차가워졌다. 또다시 빙설(氷雪)이 서린 냉막한 얼굴을 되찾고 검설린은 아까 전의 동요를 씻은 듯이 없앴다. 검설린은 그저 비틀린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큭, 명백한 비웃음에 청년이 몸을 움찔 떨었다.
닫혔던 입술이 슬쩍 벌려졌다. 몽글한 입김이 그 사이로 하아 흘러나오고, 방금 전까지 자신을 배신한 의형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던 청년은, 짐승 앞의 온순한 양이 되어 몸을 잘게 떨었다.
서느런 공기에 몸이 식어가고 있다. 얇디얇은 붉은 휘장만을 몸에 두른 채, 서문윤은 말없이 그를 눈물 고인 눈으로 응시했다.
분노에 이글거렸던 얼굴이 새파래져 가고, 검설린 그를 짙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으득. 어느 순간 살벌한 이 가는 소리가 밤을 울렸다. 서문윤은 그 순간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눈물이 서린 눈을 깜빡거렸다.
검설린이 뜨거운 숨을 길게 내뱉곤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떠날 수 없다.”
힘을 주어 내뱉은 말이었다. 서문윤이 눈을 크게 떴다.
먹구름을 가로지른 어스름한 달빛이 드리운 얼굴. 복면에 가려진 얼굴은 싸늘하다 못해 닿으면 얼어붙을 것만 같이 차가웠다. 그러나 그 눈, 서문윤을 노려보는 눈은 꺼지지 않을 불꽃처럼 뜨거웠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서문윤이 가빠진 호흡에 숨을 헐떡거렸다.
“의형.”
그는 그저 절망에 중얼거릴 뿐이었다.
“제게, 제게 어떻게.”
눈물이 뺨을 가로지르는 순간.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처절한 목소리로 참담한 마음을 내뱉을 때였다.
그 순간,
“하, 하하!”
먹구름이 가득한, 희미한 달빛마저 흩어져 산란된 어둑한 밤에 광소가 울렸다.
누구도 오지 않을 촌구석 밤길에 울려 퍼지는 스산한 웃음.
서문윤의 몸이 잘게 떨린 순간이다. 아아. 그는 많은 의미가 담긴 탄식을 입술로 내뱉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본다.
“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어재끼는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웃음을 타고 번지는 전율에 서문윤은 몸을 휘청거리고야 만다. 단정한 얼굴은 넋을 잃어 혼몽했다. 이지를 잃은 청년이 멍한 얼굴로 눈앞에 자리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웃음은 한참을 이어졌다.
외딴 밤길을 크게 울리는 사내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것이 줄어든 순간 허공에 새하얀 천이 나풀거렸다. 서문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흐윽!”
청년은 그물에 걸린 새처럼 몸을 잘게 떨었다. 새하얀 목에 감긴 차가운 손 때문이었다. 커다란 손이 희고 곧은 목을 틀어쥐었다. 서문윤은 제 목을 죄는 손길에 몸을 파득 떨었다. 그것은 볼록 나온 목젖을 누르고 서문윤의 숨통을 좁혔다. 목이 졸려 살해당하리라, 생각하고 그는 컥컥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손은 서문윤의 숨통을 희미하게 남겨두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입술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물체에 몸을 파득 떨고야 말았다.
그것은 입술이었다.
아주 달콤한 입술.
청년은 눈을 크게 뜨고 석상처럼 굳었다.
‘이것은.’
생각을 끝마치기 전에 부드러운 입술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는, 몹시나 부드럽고 말캉한 살덩어리. 서문윤은 잘게 몸을 떨며 좁혀진 숨통 사이로 가는 숨을 몰아쉬었다.
혀는 입술을 헤집고 또 다른 혀를 농밀하게 얽었다.
‘나, 나는.’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에 서문윤이 비틀거렸다. 무너지려는 신형을 검설린이 붙들어 맸다. 그의 손에 쥐여진 목이 졸려 서문윤은 또다시 하악 숨을 내뱉으며 몸을 버둥거렸다. 감겨진 눈꼬리에 이슬방울을 흘리고.
혀는 송곳니를 핥고, 입술은 입술을 물고, 뜨거운 숨이 얽혀, 타액이 섞였다.
“흐, 윽.”
희미한 신음이 질척한 타액이 섞이는 소리 사이로 흐르는 순간 서문윤은 모이를 먹는 새처럼 입을 벌린 채 혀를 받았다. 능란한 살덩어리는 그의 혀를 휘감고, 혀 아래 침샘을 뭉근하게 누르고, 볼 안의 여린 살을 쓸며 입안 구석구석을 희롱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서문윤은 오직 숨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서문윤은 서서히 발꿈치를 지면에서 들어 올렸다. 막힌 숨통을 트이기 위해, 입술을 더 편안하게 열어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그리고 그는 어느 순간 몽롱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서 눈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만지면 베일 듯한, 칼처럼 날카로운 눈. 새하얀 달을 반으로 잘라 깎은 듯한, 고요하게 빛나는 눈이다. 그것은 서문윤을 온전히 바라보며 불을 태우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 순간 몸을 희미하게 떨며 하악 숨을 내뱉었다.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농염한 접문(接吻)이 한참을 이어졌다. 그리고 접문의 끝.
입안을 한참을 농탕치고 희롱했던 혀가 멈추고, 입술은 느릿하게 서문윤의 입술에서 떼어졌다. 서문윤이 몸을 덜덜 떨고 있을 때 입술은 숨결이 섞일 만한 위치에서 멈추었다.
“너는 떠나지 못한다.”
낮게 긁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새하얀 달빛이 먹구름을 투과하고 사내의 매끄러운 뺨을 적셨다. 그리고 서문윤은 떨리는 숨을 벌려진 입술 사이로 길게 내뱉었다.
청년의 몸이 얼어붙었다.
반짝이는 달빛은 사내의 얼굴에 부서져 내렸다. 강 표면에 노니는 것처럼 달빛은 옥 같은 얼굴을 쓸며 그 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야 만다. 곧은 콧대와 끝이 살짝 올라간 입매. 고요하게 내리깐 숱 많은 속눈썹. 정으로 깎은 듯한 시원한 턱 선. 말캉한 입술은 선홍색이었으며 살짝 벌려져 있었다. 따뜻한 숨이 그 사이로 흘러나오고, 우수에 찬 눈과 어우러지는 창백한 뺨을 달빛이 누비며 빛을 흘렸다.
그것은 더러운 부산물이 질척하게 얽혀 어우러진 진흙탕이 아닌, 그 진탕된 곳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꽃이었다.
그는 연꽃을 닮은 고아한 외모의 사내였다.
어쩐지 수아(秀雅)한 향기가 날 것만 같은 사내.
점이 된 동공이 흔들렸다. 서문윤의 얼굴에 충격이 희게 번질 때 맨얼굴을 드러낸 검설린이 입술 끝을 비틀어 시원하게 웃었다.
사내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곁을 벗어나지 못한다, 너는.”
서문윤은 얕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사내는 서문윤의 목을 졸랐던 손을 놓았다. 비틀거리며 지면에 떼었던 발꿈치를 내려놓은 서문윤은, 한참을 말문을 열지 못한 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싸늘한 조소가 그 둘을 스쳤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코앞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반응을 보일까, 무슨 말을 할까. 검설린은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입술 끝을 비틀며 말없이 그를 관조하는 중이었다.
서문윤은, 몰이꾼에 몰린 사슴 같았다.
시선에 몸을 벌벌 떨며 서문윤이 겁에 질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 앞에 있는 자가, 진정, 의형이 맞습니까?”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서문윤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병자와 같은 얼굴로 망연하게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숨이 멎을 정도로 수려한 미남이 웃으며 답했다.
“내가 나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이냐?”
서문윤이 의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복면으로 항상 얼굴을 가렸으나, 서문윤은 그의 발걸음 보폭, 옷에서 밴 체취, 그윽한 목소리의 높낮이로 그를 알 수 있었다. 와락 눈물을 터뜨리며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했다.
“뻔, 뻔뻔하게. 어떻게, 제게 이러십니까.”
서러움을 참지 못해 서문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찢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러움으로 몸이 타오르는 듯했다. 검설린은 그를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눈에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배신감에 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제 어깨에 닿은 천자락에 몸을 흠칫했다. 서문윤이 꺾었던 고개를 들어 비참한 마음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몸에서 흘러내린 붉은 휘장을 그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네 몸을 취했다.”
숨이 멎는 것만 같다.
그 명료한 말에 서문윤은 심장이 무너지는 충격을 느끼곤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동탕된 마음이 사뭇 컸으나 그는 이번에 치솟는 절망을 입 밖으로 토해내지 않았다. 그를 밀치고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끅, 끅.”
작은 울음소리가 대신 울렸을 뿐이었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새하얀 뺨을 눈물로 물들이며 서문윤이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교교한 달빛만이 그 둘 사이를 가로지를 뿐이다. 비참함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서문윤을 바라보던 검설린은 어느 순간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
저 손이 반항하는 제 몸을 눌렀다. 서문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두려운 기색을 얼굴에 내보였다. 그러나 검설린은 그저 서문윤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칠 뿐이었다.
그 언뜻 보기에 다정다감한 행동에 서문윤은 마침내 서러움을 토하고야 말았다.
“이러지 마세요!”
울부짖는 목소리에 검설린이 손을 멈칫했다.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폐부로부터 올라오는, 들끓는 절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왜 지금 제게 다정하게 행동하십니까? 제가 당신에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를 원할 때는 외면하셨으면서, 마음의 파편 하나 바랄 때는 그토록 냉혈하셨으면서. 왜, 왜 제게 지금 다정한 겁니까? 왜 제 눈물을 닦습니까?”
검설린은 답하지 않았다. 서문윤이 떨리는 말을 내뱉었다.
“제게 왜 이러셨습니까.”
“…….”
“의, 의형을 증오합니다.”
눈물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검설린이 그의 눈물을 닦았으나 서문윤은 흐릿한 시야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저 그는 서럽게 울 뿐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의형이 밉습니다. 의형이.”
당신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데.
검설린은 짙은 시선으로 배신감에 허우적거리는 서문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미목수려한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검설린이 일그러진 얼굴로 엉엉 우는 서문윤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찰나간 일그러졌으며 그리고, 빠르게 냉랭함을 되찾았다.
이윽고 서문윤의 머리 위로 싸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왜 눈물을 흘리지?”
서문윤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참을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 말이 믿기지 않은 듯 멍한 얼굴로 의형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검설린의 얼굴은 차게 식어 있었다.
“나를 마음에 품었다 하지 않았어?”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마냥, 우아한 사내의 얼굴은 비현실적이었다.
“네가 연모하던 나와 몸을 섞었지 않았느냐, 왜 그리 화를 내고 우느냐.”
서문윤은 망연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정말 미치셨습니까?”
그것이 지금 어찌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금수가 아니고서야 이 순간 어찌 그런 파렴치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욱신거리건만. 그러나 검설린은 잘못을 모르는 듯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문제가 있나?”
“이!”
그 뻔뻔함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서문윤이 이를 악물며 손을 휘둘렀다. 사내의 얼굴에 내리치려던 주먹은, 그러나 가볍게 막히고야 말았다. 검설린은 서문윤의 손목을 억세게 붙잡고 손을 들어 올렸다.
“윽!”
장신인 검설린이 손을 들으니 손목이 발뒤꿈치를 들어야만 올릴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갔다. 서문윤은 고통에 몇 번 몸을 버둥거렸으나 억센 손은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항 끝에 서문윤은 결국 포기의 뜻을 담은 눈물을 주룩 흘리고 몸을 늘어트리고야 말았다.
서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의형을 노려보며 서문윤이 미움에 몸을 떨었다.
습한 눈이 현실 같지 않은 사내의 냉랭한 얼굴을 담았다.
‘이것이 2년간 함께한 세월의 결과인가?’
그리고 괴로웠던 마음의 결과.
금방이라도 몸이 무너질 것만 같아, 마음을 따라 몸이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아 서문윤은 질끈 눈을 감고 검설린을 보지 않으려 했다.
닫힌 시야에도 시선은 느껴졌다.
집요한 시선에 서문윤은 가쁜 숨을 내뱉었다. 결국 그는 떨리는 눈썹을 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달빛 아래 새하얀 빛을 받은 사내가 음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미백색 옥으로 조각한 듯한, 몹시나도 우아한 외모의 사내. 시원한 선의 이목구비는 대칭이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비견할 데 없이 아름다운 사내가 그의 의형이었다.
그 순간 심장이 지끈거렸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미혹에 흔들리는 마음에 서문윤이 입술을 짓씹어 피를 냈다. 입안에 번지는 피비린내에 정신을 차리며 서문윤이 이를 악물었다.
“놓아, 주세요.”
검설린은 순순히 손목을 놓았다. 서문윤이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한 순간이었다.
“가자.”
덤덤한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충격에 몸을 떨던 서문윤을 정색하게 만든 말이었다. 그의 얼굴이 순간 노여움이 가득한 얼굴로 일변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청년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어딜 갑니까? 저는 떠날 겁니다!”
“네가? 어떻게?”
“어떻게라니요, 저는 고향으로, 으윽!”
말을 끊은 것은 기가 찬 듯한 웃음이었다. 그는 뺨을 거칠게 부여잡는 손에 동공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검설린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손을 불쑥 내밀어, 그의 뺨을 확 잡아챈 것이었다. 검설린을 향해 끌려가는 몸에 서문윤이 헉, 소리를 흘렸다.
낮은 웃음이 흘렀다.
검설린이 그의 뺨을 한 손으로 부여 쥐고 몸을 기울였다. 시원한 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이 서문윤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서문윤.”
또렷하게 귓가에 박히는 말이었다.
“네 다리를 고쳐놨는데, 도망간다고?”
“의, 의형.”
“이젠 네가 내게 대가를 지불할 차례다.”
음습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서문윤을 노려보는 두 눈에는 무언가 짙은 감정이 꿈틀거렸다. 청년은 숨을 쉬기 힘들어 헐떡거릴 뿐이었다.
망연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던 서문윤은 두려움을 참지 못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검설린의 어깨를 밀쳤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 사내는 저가 아는 검설린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의형의 변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마치 다른 사람마냥 자신을 겁박하는 의형의 모습에 두려움에 참지 못한 서문윤이 충격에 휩싸여 미친 듯이 소리쳤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울분을 터뜨리며 절규하는 사내를 바라보면서, 검설린은 그저 입술 끝을 비틀어 조소를 흘릴 따름이었다.
“당신이, 왜 하필이면 의형, 의, 의형이 내게 이럴 수 있습니까.”
씁쓸하고도, 공허한 웃음을.
서문윤은 마침내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설명하랴? 서문윤은 그저 애원할 뿐이었다.
“놔주세요, 의형. 의형…….”
검설린은 한참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문윤의 뺨을 잡은 손은 여전히 물러날 기미 없이 강고했다. 그는 그저 말없이 우는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부서진 사람마냥 초점 없는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리는 그를.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더듬더듬 서러운 말을 내뱉는 그의 의제를. 견고하던 얼굴에 서서히 실금이 퍼져 나간 순간이었다.
그리고 서문윤이 몽롱한 눈으로 숨을 헐떡거릴 때였다.
“울지 마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묵직한 저음이 서문윤의 귓가를 울렸다. 숨을 헐떡거리며 서문윤이 고개를 들었다. 청년은 딱딱히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검설린과 마주하고 서문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힘겨워 보이는 얼굴과 마주한 순간, 그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검설린의 눈에선 불길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는 부드러운 선의 입술을 열거나, 노여움 섞인 싸늘한 비소를 흘리지 않았다. 서문윤을 말없이 노려보며 사내는 입술을 잘근 깨물 뿐이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말문을 잃고야 말았다. 그는 분노를 토하지 못했다.
……검설린은 금방이라도 비명을 토해낼 사람 같았다.
어째서 저 얼굴에서 짙은 후회가 읽히는가?
동요하는 얼굴을 마주하고, 서문윤은 그저 몸을 떨 뿐이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정적의 끝에 검설린은 무겁게 닫혔던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검설린이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을 때.
“불이야!”
상황을 박살내는 말이 인가에서 먼 숲길로 들려왔다.
불이라니?
고개를 들어 올린 검설린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간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어깨를 밀쳐 품에서 벗어났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서문윤은 상황을 마주하고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이, 이건?”
그들이 바라본 곳은 희뿌연 연기가 허공을 덮은 오곡현이었다. 맑은 하늘에는 구름을 대신하여 뭉게뭉게 짙은 회색 연기가 피어나고 있다. 흰색 달빛이 그 위에 조각이 되어 떠 있었다.
검설린이, 그리고 서문윤이 그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아, 아!”
이 먼 산길에서도 보이는 시뻘건 혓바닥 같은 커다란 불길. 탄내가 코끝을 스치고, 퍼뜩 정신이 든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순간 그가 생각해낸 것은, 오곡현에 자리한 숙소의 짐이었다. 그가 황급히 검설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형, 형님.”
검설린은 항상 등에 목함을 지고 다녔다. 2년의 세월을 같이 보낸 제게도 허락하지 않은 목함에는, 괴이한 생김새의 의기구가 가득했다. 황궁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신이지물.
방금 전 겁박을 당한 상황도 잊은 채 서문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목함이, 저기에, 목함을 놔두고.”
“으득.”
살벌한 소리가 서문윤의 말을 끊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태산에 자리한 바위마냥 굳어 있었으며, 그는 수려한 눈매를 치켜뜬 채 말없이 불길이 자리한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밤처럼 새까만 눈에 비친 상(相). 그것은 혓바닥 같은 불길이 서로 엉겨 붙어 질척하게 하늘을 달구는 무저갱이었다.
검설린은 굳건히 자리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짐승처럼 눈에 분노를 드러냈으나,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하여 그는 이리 굳건하게 서 있는가?
“가야 됩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서문윤이 버럭 소리 질렀다. 검설린의 시선이 그를 향한 순간이었다.
“가, 가야 하잖습니까. 무얼, 무얼 하시고.”
망설이는 검설린의 모습이 낯설었다. 지금 상황이 이리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잖나. 그 의함은 수많은 사람을 살릴 물건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서문윤은 두려움에 벌벌 몸을 떨면서도 검설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가야 합니다. 의, 의형.”
그 때 검설린이 입술을 벌리고 얕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미간을 찌푸린 채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마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영문을 몰라 하던 서문윤은 문득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달빛에 희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부득 이를 갈았다.
“저 때문에, 망설이시는 겁니까?”
거친 숨이 흘렀다.
“제가 도망갈까 봐?”
검설린은 묵묵히 그를 좌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찡그린 얼굴에서 답을 눈치챌 수 있었다.서문윤이 그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가 분노에 찬 눈으로 검설린을 노려보았다. 실망에 얼룩진 얼굴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자처한 자. 그의 고결함을 믿고 경애했다. 서문윤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런데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저 사람이 목함을 구하길 망설인다고?
서문윤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마치 천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고결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의형은. 그리고 그 존재는 오늘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배신감이 깊게 든 서문윤이 그의 어깨를 밀쳤다. 굳건한 바위 같던 검설린은 너무나도 쉽게 그 손길에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서문윤이 눈물 서린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그리 두렵다면, 나는 돌아올 테니.”
그 때 검설린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돌아와라.”
그것은 공허한 목소리였다.
“…돌아와야만 한다.”
서문윤은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담긴 뜻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원망을 삼키며 자리를 박차고 나아갈 뿐이었다.
“불이야! 불, 불이야!”
서문윤이 떠난 자리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귓가에 울리는 경악성을 들으며 검설린은 달려 나가는 서문윤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언가 짙은 감정에 사로잡힌 눈으로 그는 그저 청년의 등을 쫓았을 뿐이다. 그 순간 사내의 머릿속에 스친 말이 있었다.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사내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하!
싸늘한 조소가 공간을 울리고 사내의 얼굴에 비틀린 웃음이 퍼져 나갔다. 검설린은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서문윤이 향한 곳으로, 허무한 굴레에 자신을 엮는 지긋지긋한 물건이 있는 곳으로, 고통에 자신을 엮는 족쇄가 있는 곳으로, 검설린은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를 무시하곤 그저 달릴 뿐이었다.
* * *
헉헉, 빠르게 숨을 내뱉고 달려간 자리. 사람들이 모여서 허둥대고 있었다.
“물! 물동이를 더 가져와.”
“물이 있기는 여기 무에 있어? 물값이 금값인데.”
“경 어르신께서 도움을 주신다 하네.”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안 돼!’
불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하늘에 날름거리는 혓바닥을 내보였다.
화드득!
불길이 후욱 치솟자 더운 공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서문윤은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에 소매로 코를 막았다. 서문윤이 뒤이어 숨을 크게 들이켜고, 눈을 빛냈다.
“들어가면, 안 되…? 자네 옷차림이 그게 뭔가.”
서문윤을 막으려 든 중년인이 천 하나를 두른 헐벗은 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문윤은 그의 어깨를 바로 밀치며 소리쳤다.
“아, 아니?”
“비키시오!”
그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서문윤은 그저 불길을 향해 달려 나갈 뿐이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
경악 어린 외침에도 서문윤은 불길이 가득한 뜨거운 방 안으로 향했다. 시야가 불길로 흐릿했다. 청년이 이를 악물었다.
‘목함, 목함!’
수만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귀물이다. 2년간 그의 옆에 있어왔다. 서문윤이 빠르게 죄이는 숨통에 소매로 코를 눌렀다. 잿더미와 불길로 가득한 시야. 귓가에 무언가 우지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서문윤은 아랑곳없이 방 안을 뒤졌다.
오로지 머리에는 목함 생각뿐이었다.
의형의 일을 차치하고서라도, 목함은 구해야 한다.
그러고였다.
“왜, 왜?!”
서문윤이 수색 끝에 당혹감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분명히 탁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던 목함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궤짝으로 된 목함이다.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는데. 청년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그 때 서문윤은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경칠승!’
자연스럽게 하나의 인물로 귀결되는 상황. 서문윤은 그제야 의형이 움직이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하고 숨을 멈추었다.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졌다. 서문윤은 숨을 헐떡거리며,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형님, 형님.’
간절히 그를 속으로 불렀다.
불길은 그의 몸을 집어삼키려 하였으며, 서문윤은 더 이상 정신을 유지할 힘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느린 숨을 내뱉었을 때, 그의 몸을 부여잡는 손이 있었다.
“서문윤!”
귓가를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몹시 익숙했다. 서문윤은 몽롱한 시야 속으로 보이는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기억을 잃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