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나립 박사(4)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다. 청명한, 구름 한 점 없는 높디높고 푸르디푸른 하늘.
그 아래 황금빛 풀로 뒤덮인 언덕을 뛰어놀아야 할 아이는 커다란 고통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벌레와 같다. 아이는 텅 빈 눈에 불타오르는 저택을 담고 생각했다.
내가 벌레와 다를 게 무어지?
푸욱!
아름다운 비단옷을 벗기고 어미의 부드러운 가슴에 칼을 꼽으며 병사는 크게 소리쳤다.
“반역의 무리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도살하라!”
아이는 몹시 영민했기에, 그리고 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잘 알기에, 그리고 가족들을 몹시 사랑했기에 일찍 좌절했다. 죽음을 바라보는 눈에는 희망이 없었다. 말없이, 말없이 제 터전을 짓밟는 이들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서늘한 웃음.
“아기씨, 어찌 도망가지 않습니까!”
몰래 전각의 틈 사이를 오가던 늙은 유모가 다급히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어찌하여 그리 있습니까?”
그 말에 어미의 죽음을 바라본 아이는 아이답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둥지가 깨졌는데 그 안의 알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예?”
덤덤한 목소리에 유모의 턱이 잘게 떨렸다. 소년은 마침내 희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을 겪고 제가 살라는 말입니까.”
그를 바라보는 유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지극한 고통과, 체념한 아이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었다.
“와아악!”
비명을 지르는 사병에게서 몸을 숨기면서도 아이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유모의 얼굴이 굳어갔다.
이 아이는 이리 스러질 꽃잎이 아니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를 바라보며 유모가 눈물을 지었다.
“그럼에도.”
울음에 목이 멘 목소리로 늙은 여인이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살아야 합니다.”
* * *
그것은 너무나도 오래전의 일이다.
눈을 뜬 사내의 얼굴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시절 불타오르는 터전을 보았던 아이의 얼굴처럼. 사내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질박한 평화였다.
잠시간 침묵 끝에 사내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후우.”
긴 한숨을 내뱉고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고요한 밤을 닮은 눈으로 그는 제 뒤를 따르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을 살짝 숙여 땅을 바라보며 청년이 절룩거리는 걸음을 걷고 있었다.
냉막한 얼굴에 퍼져 나가는 희미한 웃음,
‘10년의 끝이다.’
과거를 헤매는 사내의 얼굴에 희열이 스쳤다.
‘드디어.’
그것은 오랫동안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결말이었으며 이 고행의 길의 목적지였다. 잿더미만 남은 마음에 하나 남은 희망의 불씨.
‘마지막으로 그 일만 해결되면.’
그러나 어느 생각에 이르러 검설린이 얼굴을 굳혔다. 냉랭하던 눈가가 슬쩍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잠시간 사내는 상념에 잠겼다. 서느런 눈은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검설린은 어느 생각에 이르러 한숨을 삼켰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청년의 우울한 얼굴을 바라보며 사내는 답답한 마음을 느꼈다. 그 반응이 심상치 않다.
너무 정이 들면 안 되는데.
그러나 철썩같이 저를 맹종하는 청년의 새까만 두 눈을 떠올리며 사내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일이겠지. 어느새 저 청년이 자리한 일상이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그가 떠난 자리를 상상치 못할 만큼.
사내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전혀 사내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청년의 존재는 진실로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사내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 시퍼런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가.’
어릴 적 유모의 말에 고소하며 사내는 대답했다.
‘당신의 말이 나를 여태껏 괴롭혔다.’
바람에 타고 날아갈 마음이었다.
* * *
현과 현을 넘는 자리에는 비석이 세워져 그 경계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촌은 밖으로 사람이 잘 오가지 않기 때문에 관할지를 알리는 표식을 해두지 않으면 관원들도 헤매는 일이 잦았다.
마을의 경계선에 도달한 순간 서문윤은 신음을 흘렸다. 빠개진 마을의 비석을 보고 흘린 것이었다.
‘부질없는 마음 때문에 행로를 늦추었구나.’
후회를 삼키며 서문윤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항상 최악의 장소만 찾아다니는 검설린 탓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긴 했지만, 아직도 따스한 성품의 청년은 고통받는 민초를 보면 가슴 아팠다.
정확히는 오곡현이 아닌 그 인근 지역에 지진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곡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검설린을 향한 마음의 정리는 아직도 수습이 되지 않았으나, 헛물 켠 몽상가처럼 꿈에서 깨어나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서문윤은 얼추 평정심을 되찾은 후였다.
‘흐트러진 마음 탓에 의행에 걸림돌이 되면 안 되겠지.’
거기까지 추락할 생각은 없다. 욕망에 대의를 망칠 바엔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낫겠지. 서문윤은 그리하여 방황하는 외로운 청년을 뒤켠에 두고 오곡현의 비석 앞에 자리했다.
그리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할 말을 잃은 채 쪼개진 비석과 난장이 된 길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거운 마음에 짓눌려 그는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연심에 강아지풀마냥 흔들리던 마음이 쑥 들어갔다.
시름할 민초를 생각하며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피해가 얼마나 심하려나.’
그리고 반파된 가도를 보고도 말이 없던 검설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끝내 미간을 찌푸렸다. 서문윤 또한 검설린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야 말았다.
“미쳤군.”
서문윤이 턱을 잘게 떨린 순간이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지진이 난 산에서 흘러들어온 부산물로 흙탕물이 된 강이었다.
세찬 물줄기가 흘러야 할 강은 여러 갈레의 희미한 물줄기로 나뉘어져 졸졸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악몽을 예고하면서.
‘이 정도면 우물도 오염됐겠군.’
의형을 따라다니면서 식수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서문윤이다. 그는 탄식을 삼키며 무너진 오곡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부서진 가도의 끝을 말없이 좌시하는 의형을 보지 못한 채로.
“아이코야!”
가끔씩 서문윤은 북성신의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소책자를 퍼뜨릴 생각을 한다.
‘차라리 그런 게 의형에게도 좋고 세상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서문윤이 바닥을 구르는 통통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
세상 억울한 얼굴을 한 중년인이 먼지 범벅이 된 채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지진이 난 오곡현의 길을 밤새도록 지키며 그 ‘북성’을 맞을 준비를 하던 이였다.
“허허, 잘 선택하셨습니다. 신의.”
방금 전 길의 저 너머 점이었던 중년인이 가까워졌을 때 서문윤은 그의 입가에 띤 느글한 미소를 보고 불안한 마음을 느꼈다. 호감상도 아닌 것이 개기름이 낀 얼굴로 웃으니 자칫하다간 의형의 빈정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조르르 달려와 검설린의 소매를 덥석 잡으며 쫑알쫑알 말했다.
“오곡현이 산 좋고 물 좋은 고향이라 정을 붙인 게지, 원래 대인께서는 거상이십니다. 벽지라지만 신의께서 만족하실-.”
“닥쳐!”
참고로 검설린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는 그의 몸을 만지는 것이다.
서문윤은 우당탕 바닥을 구르는 중년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과거 의형의 소매를 붙잡았다가 땅바닥을 굴렀던 적이 있었지.
회상을 하던 서문윤의 귓가에 당황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지,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정신을 차린 중년인이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날뛰었다. 서문윤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그를 주의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 의형에게 소리를 치면 결과가 좋지 않을 텐데.
그러나 서문윤의 예상과 다르게 검설린은 거칠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경멸하는 눈으로 중년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 뿐이었다.
“뭔가 착각을 하나 본데.”
스산한 목소리에 중년인의 몸이 움찔했다.
“나는 경칠승인지 경팔승인지를 보러 온 게 아니야.”
궁중에 임관했던 서문윤도 기가 질리게 만드는 눈빛이다. 벽지의 사람이 쉬이 받을 리 없는 시선이 그를 압박했다. 중년인이 주눅 든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러면.”
시선을 내리깔아 피한 채였다. 물론 검설린에게 그 질문에 대답할 의리는 없었다. 사내는 성큼 오곡현의 내부를 향하는 길목을 밟을 뿐이었다.
“파나립 박사!”
그러나 검설린은 중년인이 바락 내지른 말에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뭐?”
떨리는 목소리에 서문윤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는 크게 놀란 눈으로 검설린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의형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경악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유의 싸늘한 얼굴로 상대를 내려다보는 검설린에게 이제 여유란 보이지 않았다. 복면으로 가려지지 않는 부분이 흉중의 놀라움을 드러내고 있다. 서문윤의 얼굴에도 동요가 일었다.
‘파나립 박사?’
들어본 적이 없는 괴상한 이름이다. 파나립 박사.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서문윤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의형을 바라보았다.
“파, 파나립 박사를 봐서…… 사정을 봐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검설린은 우두커니 선 채로 바닥에 벌레처럼 웅크린 중년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느새 검설린은 흉흉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살벌한 기세는 바닥에 있는 중년인을 죽일 듯이 억눌렀으며 칼처럼 날카로운 눈에는 불길한 빛이 일렁거렸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서문윤이 침을 삼킬 때였다. 높고 날카로운 고소가 공간을 울렸다. 서문윤이 몸을 움찔한 순간이었다. 웃음은 널리 허공에 울려 퍼져 협소한 길에 가득 찼다.
그 끝에 검설린은 정색하며 소리쳤다.
“꺼져라!”
그 말을 내뱉는 사내의 얼굴에는 시퍼런 살기가 일렁거렸다. 이후 검설린은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청년의 두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아, 아니.”
중년인은 넋이 나가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서문윤은 그 모습에 쯧 혀를 차면서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오곡현의 상황이 심각해 서문윤의 속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록 서문윤이 의형이 욕먹는 것이 안타까워 ‘공자 왈’ 소리를 늘어트리곤 했지만, 그 또한 구빈의 일이 가장 심각하단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이런 일이.”
이럴 줄 몰랐다는 듯한 얼굴을 한 중년인을 힐끗 보며 서문윤이 냉정하게 말했다.
“의형은 원래 왕진을 갈 때 환자나 그 가족의 청만 받으시오.”
퍼뜩 정신을 차린 중년인이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니. 그런 것이 어디-.”
“만약 그대가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진료는 요원할 것이오. 그리고 순서를 기다려야 할 듯한데.”
“순서라니?”
“무얼 그리 놀라시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진찰을 받는 것이 순리 아닌가.”
중년인은 얼이 나간 채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다. 무정하기까지 한 단호한 어조로 서문윤이 말했다.
“그 댁 주인이 의형의 절차를 밟지 않았으니 다시 청을 드리고 기다려야 할 것이오.”
중년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미친놈!”
그 얼굴에서 아집을 읽은 서문윤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 반응에서 벗어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경칠승 대인이란 자가 이 마을의 유지인가?
무언가 분란이 생길 것 같다는 불길함을 느끼며 서문윤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구빈에 있어서 사람의 의지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상황이 맞아야 할 터인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충돌이 있게 생겼다.
서문윤은 그러나 곧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었다.
‘그렇다 한들 경칠승에게 의형이 머리를 조아릴 연유는 없지.’
더군다나 그는 남총이라 저를 모욕하고 존경하는 의형에게 오라 가라 명령한 작자였다. 그 속내가 뻔히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더 안타까운 사람도 많다.
등을 쑤시는 망연한 시선을 무시하며 서문윤이 검설린의 등을 따르려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던 중 발걸음을 멈추었다.
청년의 얼굴에 잠시간 묘한 빛이 서렸다.
그는 중년인을 슬쩍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근데 파나립 박사는 대체 무어요?”
그러나 중년인은 일곱 살 어린아이 같은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파나립 박사.
서문윤은 그 이국적인 이름, 분명 중원의 것이 아닌 이름이 의형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검설린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졌기에, 그와의 거리를 일 촌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에, 상념에 빠져 느적느적 길을 걸었다.
‘파나립 박사? 박사라면 유생일 터인데? 의형과 관련되었으면 의원일 확률이 높고.’
절뚝이며 걸음을 걷는 내내 서문윤은 그 이름에 대해서 고민했다.
사실 검설린의 과거는 서문윤이 항상 알고 싶어 하던 미지의 세계였다.
2년 동안 그와 동고동락하며 서문윤은 검설린을 많은 시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기에, 지루한 시간 속 검설린을 관찰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습관처럼 행했고, 의문점을 발견했다.
의원이면 귀한 혈통은 아닐 터인데, 그는 아무리 보아도 백정(평민)은 아닌 것 같았다.
의원의 일은 귀족이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문윤은 가끔씩 의문을 가지곤 했다. 검설린의 근골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허리는 꼿꼿했다. 눈은 수리처럼 매섭고, 피부는 눈처럼 희었으며, 그 기품은 복면과 답답한 의복에 온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또한 서문윤은 명문 귀족가 출신이요, 황궁의 무관이었음에도 의형의 앞에서 자주 기가 죽고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니 의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저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하고 천출이라고?
사실 이것 말고도 궁금한 것은 많다.
사람의 살갗을 찢는, 기상천외하고도 파격적인 의술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그의 부모는 누구고 고향은 어디인지.
어째서 매일 밤 그는 탕약을 복용하는 것인지.
가끔씩 그가 내보이는 쓸쓸한 얼굴은 어디서 연원한 것인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입가에 선혈을 흘리며 괴로움을 참던 의형의 모습.
어느 생각에 이르러 서문윤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상념에 사로잡힌 얼굴에 그림자가 깊었다. 서문윤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의형의 등을 노려보았다.
‘의형은 내게 대답을 해주지 않으리라.’
자신이 강요하듯 어거지로 맺은 의형제의 관계. 애초에 답변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곧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저 가끔, 아주 가끔 보이는 의형의 유한 얼굴에 만족할 뿐이다. 그래도 2년 전보다는 1년 전이, 1년 전보다는 지금의 의형이 더 다정했으니까.
언젠가 그가 내게 마음을 터놓을 날이 오려나?
그러나 지금은 아무래도 요원해 보이는 일이었다.
‘파나립, 파나립.’
서문윤은 길을 걷는 내내 파나립 박사와 의형의 과거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고, 간간히 객잔에서 의형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우울한 얼굴을 했다. 미적대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점이 된 검설린을 발견한 청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앗.”
아차 한 서문윤은 발걸음을 빠르게 해야만 했다. 지팡이를 사용한 지 오래되어 제법 경보에는 능숙해졌다만 절름발이로서는 한계가 있었으니.
종종 서문윤은 걷기를 버거워하여 뒤처지는 일이 잦았고, 검설린을 따라잡기 힘들어했다. 그러면 검설린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흉흉한 얼굴로 발걸음을 늦추곤 했다. 그것은 검설린이 서문윤에게 내보이는 몇 안 되는 배려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설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문윤이 그를 놓친 것을 깨닫고 멈추어 섰다.
서문윤이 걸음을 빨리하며 의형에게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여…….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뭐가.”
짤막한 말에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검설린의 얼굴은 몹시도 창백했다. 안 그래도 새하얗던 얼굴색은 핏기 하나 없었고, 어쩐지 복면 위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은 사람의 것처럼 실이 없어 보였다. 잠시간 그의 안색을 살피던 서문윤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편찮으신 얼굴입니다.”
“……괜찮다.”
서문윤은 그 말에 잠시 침묵한 후 말문을 열었다.
“전날 객잔에서 의형이 해준 말을 돌려드려도 될까요?”
검설린은 그 당돌한 말에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서문윤은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견디며 꿋꿋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짤막한 한숨이 흘렀다. 검설린이 피곤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신경 쓰지 마라. 정말 나는 괜찮으니까.”
서문윤을 납득시키기에는 조금 부족한 말이었다. 발끈한 서문윤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하지만 의형-.”
“언제부터 그리 말이 많았지?”
엄정한 말에 서문윤은 부리 닫듯 입술을 딱 닫고야 말았다. 이어서 냉엄한 시선이 그를 내리쬈다. 검설린이 같은 일로 서문윤을 잡은 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꽤나 불공평한 일이었으나 서문윤은 그에게 항의의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명백히 검설린은 그의 윗사람이었고, 그는 자신의 의형을 존경하면서도 조금은 무서워했기에.
서문윤은 그저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괜찮지 않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그 말에 검설린은 서문윤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미간을 좁히던 중 그는 한숨을 내뱉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간간히 보수된 흔적이 보였으나 길은 지진에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서문윤은 간간히 검설린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살폈다.
‘아무래도 수상하다.’
평소와 같은 냉랭한 얼굴로 여함 없이 싸늘하게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으나, 그와 오랜 기간 함께한 서문윤은 의형의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복면이 그의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검설린은 무심한 사내로, 분노나 짜증 외의 감정을 내보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것은 서문윤이 그간 본 적이 없었던 의형의 동요였다.
‘그냥 말할까?’
점점 더 병자처럼 창백해지는 그의 낯빛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의형의 면박에 입을 다물려 했으나, 가만히 지켜보기엔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서문윤이 조금 쉬었다 가자는 말을 내뱉으려던 때였다.
탁.
그 순간 검설린이 우두커니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고뇌하던 서문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형?”
부름에 답을 하지 않고 그는 그저 어느 한 곳만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얼굴에 스친 동요를 읽고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 몸을 돌렸다. 의형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진 서문윤은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신음이 흘렀다.
“저건…….”
인가(人家)였다. 그들이 생각한 것과 다른 상황에 처한 인가.
“줄을 서시오! 줄을! 예 쌀은 많으니 순서만 지키면 모두 주린 배는 면하리다!”
“어허! 욕심 부리지 말래도! 욕심 부리는 이는 쌀 한 줌을 뺄 테야. 새치기하지 말고 들어가시게. 거 아낙! 댁 말하는 거유!”
왁자지껄하게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에 빳빳한 핏대가 세워져 있다. 무리는 하나의 옷을 맞춰 입고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레를 줄지어 이끌고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옹기종기 사람들은 수레 앞에 모여 있었다. 서문윤은 수레에 놓인 포대기가 바로 쌀을 담은 것이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배급을 하고 있는 중이란 것을 깨닫고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지진의 무서움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식수가 끊기고 건물이 무너져 그 이후 민초의 삶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락이 되어간다. 아무리 민초가 풀뿌리처럼 다시 살아날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 한들 천재(天災)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빈이 중요한 것이다. 서문윤은 시선을 약간 들어 수레 위를 바라보았다. 청명한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으며 오직 푸른 깃발이 펄럭거렸다. 높은 깃대 위에 매달린, 경(經) 자가 써진 푸른 깃발. 서문윤이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경칠승.”
검설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서문윤이 짧은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황금을 팔아 빈민을 도우면 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궁색한 말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받아서 팔든가.”
서문윤이 힐끗 본 그의 얼굴엔 복잡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서문윤이 한숨을 삼켰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한번 방문이라도 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역 유지라 체면치레상 구호는 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규모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구빈(救貧)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재물도 재물이지만 서문윤은 의형의 길을 따르며 마음을 얻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이방인을 두려워한다. 또한 곧 떠날 사람의 순간의 호의는 10년을 살아갈 삶의 안정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신의의 괴팍한 소문이 사람들의 두려움을 샀으니, 서문윤이 의행을 따라다니며 가장 어렵게 느꼈던 과제는 그들이 진실된 마음으로 검설린의 말을 따르게 만드는 일이었다.
한순간의 호의는 짧은 효과를 보일 뿐이다. 오래가는 것은 사람의 습관이었다.
검설린이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서 가장 먼저 행했으며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를 훈육시키는 것이었다. 청결한 물을 쓴다. 분변을 닦은 옷은 태운다. 병자가 자리한 문지방에 고수를 태운다.
하나의 의원이 만 명을 살릴 수 있는가?
신의라고 한들 한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가?
검설린의 신조(信條)는 이러하다. 의원은 사람뿐만이 아닌 기풍을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만인의 협조가 필요했다. 강제로 규약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진심으로 믿고 따르고 협력하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가 필요했다.
평소라면 딱 잘라 거절할 꽉 막힌 의원도 말없이 그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볼 뿐이다. 서문윤도, 검설린도 깨닫고 있었다. 경칠승이 생각보다 더 교활하단 사실을.
시간이 흐르고 검설린이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서문윤은 그 웃음에 담긴 뜻을 짐작하고 무거운 얼굴로 입을 꾸욱 다물었다.
“가자.”
마침내 내뱉은 말에 서문윤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가 걱정하여 언뜻 바라본 검설린의 얼굴에는 시리도록 푸른 귀화가 있었다. 희미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을 마주하고 서문윤은 몸을 떨었다. 불안이 마음에 얼핏 스치고 있었다.
‘왠지, 왠지 몹시 불안하구나.’
* * *
의형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동요한 것도 처음.
진료 수칙을 무시한 것도 처음.
사람에게 휘둘린 것도 처음.
‘수완이 대단하구나.’
이쯤 되면 뻔한 지역 유지라 허투루 넘길 수도 없다. 지진에도 작은 폭포가 쏟아지는 연못을 보고 서문윤이 으음 소리를 흘렸다.
경칠승의 저택이었다.
검설린이 융통성이 없어도 일의 순서를 모르는 이는 아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의형의 자존심을 아는 서문윤은 검설린의 마음을 걱정했으나 그는 말없이 경칠승의 저택을 찾았다. 마을 한가운데에서 구빈을 펼치던 이들은 검설린의 방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부처님 손아귀의 손오공인가?’
서문윤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의형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당도한 저택은 서문윤에게 말을 상기시켰다. 마을의 경계에서 마주한 중년인이 했던 말을.
촌구석 유지의 저택이라기 힘든 거대한 규모였다. 간간히 지진의 흔적이 보였으나 저택의 연못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건물은 보수한 흔적이 있었다. 지진이 난 것이 불과 보름도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빨리 수습을 했다는 것 자체가 주인의 수완을 증명케 했다. 서문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쉽지 않겠구나.
검설린은 냉랭한 얼굴로 회랑을 걸을 뿐이었다. 긴 회랑을 걷는 그의 기세가 등만 보아도 심상치 않다. 서문윤은 그 등 뒤를 묵묵히 따를 뿐이다. 검설린의 성격상, 오늘 무슨 일이 터질 것이 분명하다. 속으로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윤은 파나립 박사를 떠올렸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과거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속속들이 알고 싶은 자라,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기대가 얼핏 보였다. 사실 의형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경칠승의 저택에 어쩔 수 없이 들르게 된 이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역시나 말을 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서문윤은 그저 심기가 불편한 의형 뒤를 따를 뿐이었다.
회랑을 지나며 서문윤은 작은 감탄을 삼켰다. 회랑에 늘어진 매미 날개처럼 얇은 새하얀 천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부스러지는 햇빛을 발치에 깔리게 만들었다. 긴 회랑의 천장에는 연꽃에 앉은 부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자비로운 관자재보살이 사람을 구원하고 지장보살이 지옥에서 설법하는 내용의. 어찌나 저택이 넓던지 본관과 별관을 연결하는 회랑이 끝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촌구석이라고 보기 힘든 곳이다.
‘불자(佛者)였던가.’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지겨워질 즈음이었다. 서문윤은 힐끗 그림을 보던 중 묘한 얼굴을 했다. 부처의 얼굴이 새파랬다. 더군다나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색이 새까맣고 붉고 파랬으니 마치 면검을 하는 사람 같았던 것이다. 세속에서 명왕을 그릴 때 붉은 물감을 쓰긴 했으나 그림은 본 적도 없는 이름 모를 신의 적면(赤面)을 묘사하고 있었다.
탱화에서 자주 쓰이던 그림이 아닌 듯하다. 서문윤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탱화가 아닌가?’
검설린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이었다. 정신줄을 놓은 서문윤이 그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고 신음을 흘렸다.
“앗.”
비틀거리며 서문윤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넋을 놓고야 말았다. 당황한 서문윤이 검설린을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탱화가 신기하여……. 죄송합니다.”
궁색한 변명이다. 변명하려던 중 머쓱함을 느낀 서문윤이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눈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이 그렇게 한심한가. 조금은 섭섭함을 느꼈으나 호위가 넋을 잃은 것은 변명으로 통할 일이 아닌지라, 서문윤은 그저 중얼거릴 뿐이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려-.”
“인도교(印度教)의 것이다. 저건.”
“예?”
검설린은 서문윤의 반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서문윤을 바라보며 무언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서문윤은 그제야 그가 저를 탓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입술을 다물었다.
가라앉은 눈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만 같다. 새까만 눈은 저를 담았으나 저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서문윤의 입매가 느릿하게 굳어갔다.
의형은 또다시 제가 모르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
공허한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얼굴을 굳혔다. 저 눈에 담긴 것은 내가 아닌 그의 과거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다.
희미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 순간 서문윤이 불쑥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파나립과 관련된 일입니까?”
검설린의 몸이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꺾어 서문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과거를 헤매던 눈이 자신을 다시 담은 순간, 초점이 돌아오는 눈을 마주하고 서문윤은 안도의 마음을 품었다.
청년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고 심기가 어지러워지신 듯하여.”
“…….”
“추궁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의형이 신경 쓰시는 일이 이와 관련이 돼 있지 않나.”
검설린은 그저 그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은 느릿하게 말을 빼며 답을 했다.
“……걱정이 되어서.”
괜히 말하였나. 그가 제법 저에겐 많은 부분을 허하긴 했으나, 그래도 검설린은 몹시 배타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서문윤은 혹여 의형이 그어놓은 선을 밟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은 잠시간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의 얼굴에 긴장이 퍼져 나갈 때였다.
긴 회랑에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검설린은 평소 그답지 않게 주저하며 말을 내뱉었다.
“너는 왜 나를 따르고 있지?”
서문윤이 놀란 얼굴로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특히 의형이 내뱉으리라고는.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검설린은 그저 묵묵히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문윤은 잠시간 사내를 바라보며 안색을 살펴야 했다. 말의 저의가 몹시 의심되었기에.
서문윤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입술을 뗄 수 있었다.
“제가 당신을 따르는 이유는…….”
많은 생각이 머리에 스쳤으나, 그는 대부분을 추려 한 가지 말을 남겼다. 서문윤이 다시금 평정을 되찾고 굳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당신께선 아마 잘 모를 겁니다.”
그리고 몰라야만 한다. 목구멍에 치밀어 오른 것을 삼키며 서문윤이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떤 말로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러나 분명히 당신은 제게 은인 이상이십니다.”
검설린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굳어진 그의 얼굴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무관으로 살아왔고, 그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제게 당신은 무관의 욕망을 일깨운 두 번째 사람이십니다.”
숨을 짧게 고르곤 서문윤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목숨을 바치고 싶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
청년의 눈이 영준하게 빛났다.
“제가 의형을 따라다니는 연유는 망가진 다리를 고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말을 끝맺을 쯤에 서문윤의 얼굴엔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로는 부족한 마음이지만,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였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답변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검설린은 겨울밤과 같은 눈으로 서문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막을 깨고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오늘.”
서문윤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어쩐지 의형이 동요하고 있다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나는 오늘 네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니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나를 따르는 그 굳건한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이유는 모르지만, 서문윤은 한순간 그렇게 생각하고야 말았다. 그의 의형은 분명히 냉혈한 사람임이 분명하건만.
‘왜 한순간 의형이 절벽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을까?’
서문윤은 그 답을 알지 못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이윽고 짧은 웃음이 회랑을 울렸다. 사람을 할퀴는 날카로운 조소. 검설린은 몸을 돌려 다시 회랑을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몹시나 이질적이게 보여, 서문윤은 한참을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시선을 사내의 등에 고정시킨 채 미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서문윤은 짧은 한숨을 흘리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의 사정을 잘은 모르지만 자신은 의형을 따라야 했다.
부목을 찬 다리를 절뚝거리며 서문윤은 그저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것은 이제 그의 사명이었으므로.
저 멀리 걸어 나갔던 검설린이 어느 순간 발걸음을 늦추었다. 서문윤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도 금세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어느덧 회랑의 끝이 보였다. 서문윤은 심호흡을 내뱉곤 굳게 닫힌 붉은 문을 바라보았다.
귀면상(鬼面相)이 그려진 문.
불퉁한 눈을 크게 부릅뜬 새빨간 얼굴의 귀신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얼굴을 굳혔다. 기이한 불안감이 마음에 스쳤다.
‘이건?’
코끝에 스치는 향에 서문윤이 문을 열기 전 머뭇거렸다. 그러나 서문윤은 문을 짚은 손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검설린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은 채 눈을 빛내며 마침내 문을 열었다.
청년의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아, 기억났다.
청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파나립 박사.
서문윤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과거를 헤매는 중이었다. 그가 황궁 무관으로 부임할 당시에 낙양 성도를 떠들썩하게 울렸던 사신의 행렬.
새하얀 얼굴을 한 코가 커다란 외국인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대식국 사람이 비슷한 이름을 썼던가.’
드르륵!
문이 열리고 서문윤은 코끝을 후욱 찌르는 연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향?’
색유리로 장식된 향로에서는 어스름한 연기가 피어나와 방 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것이 주술에 의한 것임을 눈치채고 얕은 신음을 흘렸다. 강렬한 향은 사람의 이지를 찰나간이지만 몽혼하게 만들 만큼 진했다. 서문윤은 한순간 흐릿해지는 시야에 이를 악물었다.
작작 좀. 간신히 신형을 흐트러트리지 않은 서문윤은 이어서 진득한 향에 가려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비릿하고 독한 악취였다.
코끝을 스치는 망자의 향기.
향로에서 흐른 향기가 덮지 못한 것이다. 서문윤이 말없이 발걸음을 뗐다.
생애를 향한 집착이란, 사는 것이 고역인 민초보다 평안한 삶을 누리는 권세가에게 더욱 짙다. 하늘 아래 복된 삶을 약속받은 자들에게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지하의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 갈망은 집요하기까지 하다. 저절로 수축하는 근육은 긴장된 마음이 몸에 퍼진 결과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방 안을 바라보았다.
스륵. 손에 걸리는 얇디얇은 비단 천을 걷으며 서문윤이 눈을 빛냈다. 오방색의 천이다. 그는 오묘한 얼굴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회랑에 걸린 천 또한 미신이었던가.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일 게다. 서문윤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검설린의 옆에 자리했다.
“오셨소?”
방 한가운데 자리한 흰여우의 가죽이 덮인 자리, 얼굴에 죽음의 흔적이 꽃핀 노인 하나가 긴 상에 앉아 있었다. 서문윤이 얕은 신음을 삼켰다.
‘저것이 그 거상?’
뺨이 홀쭉한 노인의 얼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하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노인이었다. 푸른 옷을 입은 채 새하얗게 센 머리를 곱게 빗어 풀어헤친 이는, 품에 유리 향로를 낀 채 그들을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향로에서 기이한 연기가 피어올라 노인의 코끝을 스쳤다. 문득 노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으음, 소리를 흘렸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연기가 하늘거리는 방 안. 서문윤은 얼굴이 검은 여인이 사내의 가슴을 밟는 탱화 비슷한 그림을 바라보며 신음을 삼켰다. 미지의 공간에 온 것만 같았다. 낯설다는 말은 가끔 불길함과 비슷한 뜻을 함의하고 있었다. 서문윤은 긴장된 얼굴로 남몰래 허벅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이 자리한 곳이었다.
검설린의 등은 여지없이 굳건했다. 그 모습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어 보이는 강건한 기세가 서려 있었다. 의형의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에 서문윤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긴 의자에 자리한 채 노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북성신의. 허허허. 여기선 그리 부르던가.”
여기?
서문윤의 눈이 흔들린다. 노인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사실 도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묘한 미소가 서린 얼굴에 검설린이 어찌 나올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인은 검설린의 얼굴을 힐끗거리더니 곧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럴 자격이 충분하지. 이 좁은 중원에 그 사내의 의술을 이은 자가 있노라면, 충분히 그렇게 불리어도 된다.”
서문윤은 의형의 등만을 보고 있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의형의 얼굴을 보고 싶다.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파나립 박사의 제자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거뭇한 눈가와 움푹 팬 뺨과 앙상한 팔다리가 쇠진한 생명을 드려내고 있건만, 노인은 어째서 즐거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나?
서문윤이 만난 환자 중에서 이러한 이들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집 안 곳곳에 자리한 주술 용품만 보아도 노인이 여느 권세가처럼 목숨에 강한 집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건만.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란 없었다.
검설린은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끌끌끌. 노인은 낮고 불길한 웃음을 흘리며 흰자가 보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입술이 움직였다.
이어지는 말에 서문윤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 파격적인 의술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노라. 그대는 대역죄인 파나립 박사의 제자 아닌가!”
대역죄인.
말의 무게에 짓눌려 서문윤이 얼어붙었다.
‘천, 천역(天易)을…….’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것은 천역을 진 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국법에 따르면 수레바퀴 이상 크지 않은 소년은 살해해서는 안 되고 임부(妊婦)는 죽을죄를 지어도 사면한다. 한 갑자를 산 노인은 살인을 저질러도 재물로 배상케 한다. 법에는 도리가 있어야 함이 맞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진나라 이후부터 나라가 지켜나간 도리였다.
진나라가 패망할 때 사람들은 그 가혹함을 지적하며 한고조의 단 세 가지 법률, 약법삼장에 환호했다. 소하가 법을 세우고 조참이 이를 지켰으니 한고조는 스스로 멸망스킨 진나라의 통치체계를 계승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유학자 숙손통을 존중하여 나라의 이념을 다시 세웠다.
법가의 기세를 이용하나 국가의 통치에 인정(人情)을 담는다.
어린 소년을 죽이는 것은 참람한 일이니 관은 그를 엄벌로 다스리지 않고, 임부를 죽이는 것은 도덕에 어긋난 일이니 자비를 베푼다. 노인은 존중할 만한 기풍을 가지므로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
그것이 나라의 인의로운 법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소년의 목을 쳐 죽게 하고, 임부의 배에 창을 찌르고, 노인의 허리를 잘라 죽게 하는 죄목이 있다.
하늘을 거스른 천역!
천륜을 무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 건덕지는 없다. 아비를 살해한 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형을 베풀어 마땅하다. 어미를 겁간한 자는 금수이므로 반드시 패 죽여야 마땅하다.
그리고 존속살해, 강간보다 더욱 무도하게 여겨지는 천역(天易)이 있다.
바로 하늘의 아들인 군주를 시해하여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는 대역죄(大逆罪).
반드시 삼족을 멸하여 그 씨앗을 남게 하지 않는 천하의 극악무도한 죄의 이름.
서문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대역죄라 하였나, 그는 지금.
그 무거운 이름에 얽힌 이가 바로 그의 경애하는 의형이었다. 서문윤이 그 어마무시한 말의 무게에 압도당해 몸을 떨었다. 검설린에게선 여전히 말이 없었다.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노인이 말을 이었다.
“파나립 박사가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명왕(明王)의 자식이라 했었지. 명부의 모든 이름이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비단길에서 속특(粟特)의 상인이 가져온 문물 중 가장 귀중한 것이었기에 우리는 그를 비단길의 진주라 불렀다.”
무슨 소리야. 서문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군다사파의 의학교가 세워진 이후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인사! 파사와 대진과 대식의 천년 의학이 한군데 모여 만든 조개 속 알.”
말을 듣는 검설린의 얼굴에는 싸늘함만이 감돌았다.
“천년의 역사를 끌어모아 천년의 기술을 앞당겼으니. 이 땅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가 세워진 것은 파나립 박사의 공덕이나 다름없지 않나?!”
노인, 경칠승의 움푹 파인 눈에서는 짐승의 것과 같은 푸른 겁화가 불탔다. 색유리로 만든 향로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의 소문을 듣고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대는 그의 정통(正統)을 이은 유일한 의원이므로. 이 넓디넓은 중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신의의 자격을 지닌 자.”
흥분에 눈을 부릅뜬 노인의 얼굴에 스친 희열. 서문윤은 문득 불길함을 느끼고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진실로 삶을 갈망했다…. 이 부질없는 삶, 부질없는 삶, 욕을 하며 한탄해도 이승에 머물고 싶었지…. 나를 살릴 수 있는 그대의 등장에 환희하였소. 그게 사람의 마음이었네.”
경칠승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내가 추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대는?”
그 말을 끝으로 긴 침묵이 있었다. 검설린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서문윤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해 그저 어두워진 얼굴로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경칠승의 얼굴에 기대가 설렁거렸다.
마침내 검설린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래.”
“푸흐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은 실웃음을 흘렸다. 동요하던 서문윤은 어느새 마음을 가라앉힌 후였다. 그는 정순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귀기 어린 노인의 태도가 오히려 서문윤의 마음을 일깨운 것이었다.
“그래, 난 추하지. 백 년도 가지 못할 부질없는 목숨을 연명하려 발악을 하니. 허허.”
노인이 중얼거리는 말에 검설린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조롱 섞인 목소리였다. 경칠승이 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인의 얼굴이 싸악 굳은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둘의 모습을 말없이 관조했다. 그의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이미 서문윤의 옷은 축축이 젖은 후였다. 그들이 말하는 주제는 그가 쉬이 감내하기 힘든 것이었다. 서문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모라니.’
말의 무게가 무겁다. 동요를 내보이지 않으려 서문윤은 눈매를 매섭게 치켜뜨고 노인을 노려볼 뿐이었다.
짧은 침묵.
목내이처럼 말라붙은 노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요.”
거칠게 쉰 목소리였다. 요요한 향기가 노인의 얼굴을 어지럽혔다. 서문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검설린의 등뿐이었으나, 그는 의형의 얼굴을 짐작할 것만 같았다. 노인의 얼굴이 검설린의 얼굴이 어떤지 말해주고 있으니까. 노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두려움이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에 스쳤다.
서문윤이 떨리는 숨을 내뱉을 때였다.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약하고 벌레 같은 인간?”
짧은 비웃음이 방을 울렸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을 내가 모욕할 수 있나?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죽기는 쉽고 살기는 어렵다.”
서문윤은 그 때 몸을 움찔했다. 황하의 일을 떠올렸던 것이다. 죽기 위해서 황하를 서성거렸으나 모진 목숨을 끊지 못하고, 살기 위해 발악했으나 쉽지 않았던 기억. 그는 느린 숨을 내뱉었다. 살기는 쉽고 죽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의형이 한 말은 그가 품었던 생각과 정반대의 것이다.
“살아가려 애쓰는 이들의 발끝도 나는 따라가지 못한다. 불꽃을 태우려고 한들 정녕 심지는 스러진 지 오래. 그을린 불그림자만이 남은 자리에서 헤매며 마지막 타오르는 촛불(回光返照)을 부러워하였다. 하물며 너 따위에게 모욕당할 이들로 보이나? 경칠승.”
검설린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나는 동서대란(東西大亂)의 일을 말하는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문윤은 동요를 숨기지 못해 턱을 가늘게 떨고야 말았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쿵쿵! 심장소리가 요란했다. 서문윤이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동서대란이라면, 설마 의형은?’
그렇다면 이 상황은 가히 좋지 않다.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언뜻 파악한 서문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의형이 한 의미심장한 말은 이를 이르는 것이다.
서문윤이 검설린의 얼굴을 굳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덤덤한 눈으로 서문윤을 짧게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문윤은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찰나 검설린의 눈에 서린 기묘한 기색을 읽은 탓이었다. 그것은 저를 탐색하는 눈이었고, 마음을 꿰뚫려 하는 눈이었다.
‘의형.’
소름이 번져 목덜미 위로 올라와 있었다. 서문윤은 신음을 삼키고 가슴의 통증을 삼켰다. 이런 의미였나. 아까 전의 말은 내 신뢰를 시험하려는 의도였나. 섭섭함이 목구멍에 걸렸으나 서문윤은 말을 삼켰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다른 일이다. 그는 경계심이 짙은 얼굴로 호피(狐皮)에 몸을 뉘인 망자 같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잘하면 저 노인을 베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였다. 잔뜩 긴장을 하던 서문윤이 문득 숨을 멈춘 것은. 어지러움을 느낀 서문윤이 얕은 신음을 흘리고 눈을 꾹 감았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서문윤이 거친 숨을 내뱉을 때였다. 검설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상한 서문윤의 모습에 뒤를 돌아본 검설린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서문윤의 모습은 몹시 곤궁에 처한 듯했다. 새하얀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으며, 그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설린의 미간이 찌푸려진 순간이었다. 시선을 눈치챈 서문윤이 억지로 웃었다.
“괜, 괜찮습니다.”
서문윤이 더듬더듬 말하고 손에 쥔 검을 꾹 부여잡았으나 그의 모습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서문윤이 고조된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의형을 지켜야 한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서문윤은 경계를 세울 뿐이었다.
그를 보던 검설린의 복면 밖으로 드러난 얼굴에 살벌한 기운이 스쳤다. 싸늘한 얼굴로 정색하며 검설린이 비소를 흘렸다.
“역겨운 것을 썼군.”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 검설린은 빠르게 소매를 내저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향이 꺼졌다.
경칠승의 눈가가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느릿한 숨을 내뱉으며 침을 삼켰다.
‘정신 차려라! 서문윤.’
경계를 굳건히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고개를 빠르게 도리질 친 서문윤이 다시 매섭게 눈을 빛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독한 향에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그에 넋을 잃을 틈이 없었다.
긴장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노인은 흉측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말이 없었다. 서문윤의 귓가로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약에 절인 몸을 나보고 해결하라고.”
“……어쩔 수 없었소. 나의 고통은.”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않나? 경칠승.”
건조한 웃음 끝에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놈이 그 일을 들먹이는 게 역겨워.”
예민한 정적이 이어졌다.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것 같은 공기가 폐부에 내려앉는 듯하다. 서문윤은 숨을 쉬지 않고 예민한 감각을 돋웠다. 의형과 함께하는 길, 침묵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나 특별히 날카로운 분위기에 긴장했다. 서문윤이 심유한 눈으로 검설린의 어깨 너머를 주시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스치는 희미한 떨림. 서문윤은 망자에 가까운 노인에게서 비명을 읽고 검미를 꺾었다.
의기양양하던 노인이 경악을 삼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문윤이 느린 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노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어찌 되었건 과거의 일.”
경칠승은 갑작스러운 노화(老化)를 겪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에 형태가 있다면 저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으리라. 귀한 짐승의 털을 덮고 노인은 몸을 움츠렸다. 서문윤은 그제야 노인의 몸이 일반인보다 훨씬 더 조그맣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경칠승의 얼굴에 서린 것은 공포였다. 죽음에 의한 공포.
“사람을 살리는 것이 의원의 일 아닌가? 맞아. 나는 살릴 가치가 없겠지. 허나…….”
노인이 입을 우물거렸다. 말을 곱씹는 듯했다. 서문윤이 가라앉은 얼굴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침묵 끝에 경칠승이 중얼거렸다.
“살려주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가 찬 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검설린이 내뱉은 것이다. 누가 보아도 호의적이지 않은 반응. 그 스산하기까지 한 웃음에 경칠승이 몸을 웅크리며 고양이 앞에 쥐 같은 모습을 했다. 서문윤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
‘줏대 없는 사람이군.’
무에 있어 보여도 역시 상인 출신인가. 명문 무가 출신인지라 그 또한 상인에 대한 편견이 없지는 않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최상층에 해당하는 이의 눈으로 볼 때 주도권을 빼앗긴 후에 비굴해진 경칠승의 모습은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더군다나 천역을 운운하여 의형을 협박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난 후니 비굴해진 모습이 더더욱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입이 간질거린다. 서문윤이 몸을 움찔거리며 목구멍에 걸린 말을 간신히 삼켰다. 이 자리는 그가 껴서는 안 되는 자리다. 그는 느린 한숨을 내뱉으며 무겁게 가라앉은 눈을 빛냈다.
경칠승은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자네는 의원이 아닌가! 의로운 의원! 가진 바 재산을 모두 풀어 마을의 재건을 돕겠네, 이미 이 인근에서 실력 좋은 의원을 대거 차출했어. 그들이 대신 사상자를 돌볼 걸세!”
처절한 애원에 검설린은 그저 냉랭하게 말할 뿐이었다.
“가자, 서문윤.”
서문윤이 허리에 찬 검을 쥐며 답했다. 그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
경칠승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노인의 얼굴에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그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손을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내 병은 자네만 고칠 수 있어! 나라의 모든 실력 좋은 의원을 뽑아도 나를 살리지 못한다고 했네! 반위는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받아들이라고!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아니야! 제발, 제발!”
피가 끓는 음성이었다. 서문윤은 그 말에 담긴 진득한 집착에 몸을 잘게 떨었다. 노인의 생애를 향한 갈망은 연민보다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경칠승의 움푹 파인 눈에 도깨비불 같은 것이 번뜩였다.
“가지 마! 가지 마!”
마치 횃불 같은 귀화가 눈에 얼룩져 있었다. 흉흉하게 빛나는 푸른빛은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검설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서문윤은 그를 따라갈 뿐이었다.
“기, 기다리라고! 신의! 신의! 나를 살린다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네!”
딱 한 번 검설린이 멈추어 선 적이 있다. 문턱을 밟을 때였다. 발걸음을 멈춘 서문윤이 의아함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의형의 성격에 말을 물릴 리가 없는데. 갸웃거리던 서문윤의 귓가로 나지막한 말이 내려앉았다.
“백년화.”
의원은 고요히 가라앉은 눈을 허공에 고정한 채 말을 기다렸다.
“그, 그게 무슨.”
경칠승의 망연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그 말에 검설린은 차게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모르는군. 그 한마디를 내뱉고 검설린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역적의 죄로 정녕 가문이 끊기고 싶은가!”
끝끝내 튀어나온 말에도 검설린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저열함에 발끈한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다.
“이-.”
소리치려는 서문윤을 검설린이 손을 들어 막았다. 울컥한 사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경칠승의 말에 시근덕거리던 서문윤은, 그러나 저를 막은 손에 무어라 말을 내뱉지 못해 한숨을 내쉬었다. 검설린의 태도가 굳건했다.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서문윤은 말없이 의형의 뒤에 섰다.
굳어 있는 얼굴로 서문윤이 손에 든 검을 꾹 붙잡았다. 유사시에는 손을 써야 하리라. 긴장을 돋우며 서문윤이 바닥에 엎어진 경칠승을 힐끗 보았다.
노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해 보였다.
“살려줘…….”
경멸스럽다. 조소를 삼키며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다. 살기 위해 애쓰는 자를 욕할 자격 없다 의형이 말했으나 서문윤은 그 말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아, 아아!”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귀곡성 같은 울음을 뒤로한 채 서문윤과 검설린은 방을 빠져나갔다.
* * *
회랑을 다시 밟아 돌아오는 발걸음이 표홀했다. 서문윤은 하인이 혹여라도 검설린을 구류하려 무력을 쓰지 않을까, 긴장을 품으며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에게서 항상 흘렀던 고아한 향도 경칠승 방의 향로에서 흘러나온 독한 냄새에 묻혀 희미했다. 서문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역모(逆謀).
그 이름에 짓눌린 탓이었다.
그의 과거가 비범하리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었다. 서문윤은 혹시나 모를 습격에 대비하여 경계의 태세를 갖추었지만 복잡한 마음이 쉬이 정돈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럴 만치 중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 서문윤이 숨을 들이켰다.
“의형.”
잠시간 침묵 끝에 그가 말을 내뱉었다.
“괜찮으십니까?”
짤막한 말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서문윤은 멈춰 선 검설린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복면 위로 드러난 얼굴은 감정을 알 수 없이 차분했다.
고저 없는 말이 긴 회랑을 울렸다.
“괜찮다.”
* * *
아무래도 이 마을에는 생각보다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았다. 생각보다 급한 환자도 없고, 경칠승의 대처도 훌륭했으니. 지진은 관청을 부쉈으나 인명 피해는 심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중환자는 조치를 취한 후였고, 칼로 살갗을 가를 일이 있긴 했으나 환자의 수는 많지 않았다.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자리에 앉은 검설린의 등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의원복이 그의 몸을 조이는 듯했다. 차라리 죄수복처럼 보일 만큼, 그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가리고 옭아맸다.
다를 것이 없는 일상이었다.
검설린은 진료를 하고 있었고 서문윤은 그 뒤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앉아 있었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짚으로 만든 벽 사이를 드나들었다. 그들은 얼기설기 엮은 수준의 민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날 당시 불운하게도 아이를 사산했다는 여인은, 열흘을 고열에 시달려 흰 눈자를 까뒤집은 상태였다. 산욕열이었다.
고열을 내리려면 머리의 양기를 죽여야 한다. 견정에 침을 꽂는 손길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칼 같았다. 여인의 남편은 신의가 명한 약초를 달여 탕으로 만들었다. 검설린은 비싼 약재를 쓰지 않았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민가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약초를 사용했다.
한 번의 호의는 찰나의 구명.
수십 명을 살리기 위해선 그 풍기를 고쳐야 한다. 습관의 정착이 그가 원한 것이었다. 검설린이 구해 오라 한 것은 녹곽두(鹿藿豆)와 황하호(黃花蒿)였다.
“둘을 같이 먹여서는 안 된다. 상태가 심하면 황화호(黃花蒿)를,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녹곽두를 먹이고, 약초를 달이기 전에는 그릇을 반드시 삶거라.”
황화호의 효과가 세니 장기 복용은 하지 말 것이다. 보양은 좋지만 인삼이나 부자같이 양기를 심히 북돋는 약초가 들어간 음식은 피하라. 자칫하다가는 몸의 장기가 망가질 위험이 있다. 음양의 위리(委理)이니 신장의 기능이니 농민들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농가의 사내가 알기 쉽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반드시, 반드시 아내가 나을 때까지 너는 매일같이 멱을 감아야 할 것이다.”
“예이?”
농가의 사람에게 몸에 물을 대는 것은 제사나 성묘 전에나 하는 특별한 일이다. 신의가 하는 말이라, 굽신거리며 잠자코 말을 듣던 농부가 망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런 말을 합니까? 말이 읽히는 얼굴이다. 검설린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으나 평소라면 내뱉을 독한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 죽이고 후처에게 남은 고아 기르게 할 생각이냐?”라거나 “아내 송장 치울 생각이면 네 맘대로 하든가.” 따위 말이 나올 법도 한데.
검설린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자는 호흡이 불안정하고 정신이 맑지 않다. 네가 흙먼지와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쓰고 환자의 방을 들어가면 이이의 정기가 흐트러져 좋지 못하다.”
이어진 말에 농민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네 정녕 아내를 보전하고 싶은 게냐?”
엄하게 꾸중하는 말에 농민은 예, 예, 그러겠노라 그저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달칵.
“그저 누구나 알 수 있는 민간요법에 불과하다.”
초가를 나서면서 내뱉은 말이다.
어느새 캄캄한 밤이었다. 동자가 한입 베어 먹은 듯한 샛노란 상현달이 하늘에 박혀 희미한 빛을 흘렸다. 각이 진 어깨에 교교한 달빛이 흘렀다.
쓸쓸한 목소리가 밤거리에 퍼졌다.
“나는 외체(外體)를 다루는 의원이다. 사람들의 말과 다르게 나는 전염병을 막을 근본적인 방법을 알지 못해. 약초를 처방하는 것보다, 수술이 쉽지. 다만.”
검설린이 조소를 흘렸다.
“아주 기본적인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그래, 그건 분명히 쓰디쓴 조소였다. 쓰다 못해 구역질이 날 만큼 고역인 조소. 서문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오곡현으로 오고 검설린은 꽤나 이상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서문윤은 그의 동요하는 모습이 제법 나쁘지 않다 생각하기에, 또한 검설린이 누군가에게 제 답답한 마음속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저 가만히 앉아 그의 한탄을 들었다.
그러나 검설린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하아. 낮은 한숨이 흘렀다.
둘은 묵묵히 밤길을 걸으며, 경칠승의 집을 빠져나와 구한 숙소로 향했다. 천재지변 탓에 운영하는 여관이 없었다. 현령마저 관사가 무너져 경칠승의 별채를 빌릴 정도라는 말을 듣고 서문윤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수완은 좋은 노인네다. 그리 생각하면서 서문윤은 마음속 꿈틀거리는 의문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너무 쉽게 저택에서 빠져나왔어.’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지닌 유지, 그렇게 강한 생애의 집착을 보이는 노인이 너무나도 쉽게 그들을 놓아주었던 것이다. 저택을 빠져나올 때까지 검설린의 옆에 철썩 붙어 경계를 늦추지 않던 서문윤은, 저택의 문턱을 밟고 의아한 얼굴로 갸웃거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이 니취니 기인이니 조롱받아도, 그는 원(怨)보다 은(恩)을 많이 뿌린 명사(名士)다. 서문윤은 검설린이 구해준 세도가와 사족들에게서 가문을 상징하는 명패를 무수히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을 모아 짐꾸러미에 넣어놓았는데, 이는 유사시에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명패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자고로 명사를 죽이는 것은 살해자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다. 검설린은 사람을 살릴 때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순번을 따지노라 선포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사람들은 북성의 가치를 그가 살린 수많은 백성보다 높게 평가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재 하나가 무지렁이 십만보다 더한 가치가 있노라, 그리 생각하였으므로. 차라리 수십만을 학살하는 것보다 더한 악명을 안겨주는 것이 명사 살해다.
위무제(魏武帝)는 서주의 30만이 넘는 민초를 학살한 것보다 사서에 업적이 남지 않는 당대 명사 변양을 죽인 것을 더 비난받았으며, 진목공(秦穆公)은 서융을 평정하고 동진에 성공하였으나 현명하기로 유명한 자거 씨의 세 아들을 순장시켜 춘추오패에 들어갈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물며 공자의 제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쓰며 그것은 인덕이 아니라 구구절절이 그를 비난하지 않았나?
경칠승의 입장상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잡아야 할 터이다. 그러나 검설린이 애원에 휘둘리지 않는 성품이란 것을 이미 그 수완 좋은 노인은 깨달았을 것이고,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칼로 협박하는 법.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반드시 몰래 행해야 하는 일이다. 명사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은 반항이 거셀 것이니 햇살 아래 당당히 겁박 행위를 할 수 없으리라.
하여 아무 일도 없이 저택을 빠져나온 것이 수상했다. 이것은 경칠승에게 자폭행위였을 터인데?
‘설마, 역모의 일을 거론하려고?’
동서대란. 그를 떠올린 서문윤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자신이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이었기에, 그는 확정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아니, 그것은 그 상인에게도 부담인 일일 텐데.’
역모가 괜히 역모가 아니다.
삼족을 멸한다는 의미는 무고한 사람들마저 연좌할 만큼 그 죄가 중하다는 의미이다.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에 형부는 눈을 밝히며 일을 처리했으므로, 잘못 얽혔다가는 나가리가 되는 역모를 함부로 들먹일 만큼 상인인 경칠승이 어리석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병으로 죽는 게 차라리 거열이나 요참보다는 낫지 않는가?
더군다나.
서문윤이 고요한 숨을 내뱉었다.
‘의형이 역모에 연루되면, 본인도 살 방도가 없을 터인데.’
경칠승이 역모자의 제자 운운하며 검설린을 겁박했으나, 그것은 자폭행위일 뿐. 역모죄에 검설린이 죽으면 누가 그를 치료하겠나?
더군다나 나라의 모든 저명한 의원이 치료하기 힘들어한다는 병을 누가 고치냔 말이다. 그가 아니면.
설핏 불안한 마음이 든 서문윤이 묵묵히 땅을 응시했다.
그렇지만 확신을 할 수 없는 것은 죽기 전 사람의 발악이 얼마나 지독할지 차마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답답하구나. 어느 순간 서문윤은 탄식을 삼켰다. 동서대란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비단길을 통해 대진국의 문물이 전래가 되고 난 후 벌어진 혈사(血事)였다. 본디 개방적인 나라의 기풍에 많은 신문물이 장안에 유행하였으나 단 세 개만큼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종교, 암염, 의술.
삼금(三禁)을 이름이다.
몇몇 종교는 풍속을 헤쳐 금하고, 암염은 전통적으로 국가에서 통제했던 소금시장에 영향을 미쳐 금하고, 도래된 의술은 인륜을 거슬러 금했다. 오늘날 동파재상(東坡宰相)으로 불리는 고우군(高佑君)이 바로 서양문물을 척결함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서파의 잔재란 역모자의 이름과 같았다.
물론 고우군도 꽉 막힌 사내는 아닌지라 상행을 온전히 금하지는 않았으나 풍기를 거스르는 기술의 경우에는 몹시 예민하게 굴어 반드시 척결했다.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 일에 의형이 엮일 줄은 그가 어떻게 짐작했겠나?
남총의 소문도, 다리의 장애도 마음을 어지럽혔으나 아무래도 역모의 소식이 가장 마음이 무거웠다. 서문윤은 그저 암담한 마음에 헤맬 뿐이다. 의형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꼭 살려야 한다.
‘미리 알았더라면.’
문득 입술을 짓씹으며 서문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회랑에서 검설린과 나누었던 대담을 다시 한 번 복기하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생각할 여유가 있었더라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여러 가지 말로 섭섭함을 달래려 했으나 그래도 의형의 방식은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독선적인 것이라.
믿음이라.
순간 서문윤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스친다.
그는 방관하는 것만 같았다. 제가 당연히 그를 고발하지 않겠노라 생각하여 과거를 연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초연히 죽음을 각오한 것만 같았다.
‘별 시답잖은 생각을.’
서문윤은 그러나 곧 피식 웃으며 우중충한 마음을 떨쳤다. 지금은 상념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다. 그에게 아쉬움을 느끼며 정을 바랄 때가 아니다.
그저 그는 묵묵히 길을 걸을 뿐이다. 너털거리면서 돌아가는 발걸음. 흙길에 깔린 달빛을 밟고 있었다. 서문윤은 한참을 상념에 사로잡혀 헤맸으나 곧 “으음.”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살짝 꺾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의형을 지키리라.’
결론은 어차피 하나다. 서문윤은 끝에 정순함이 자리한 눈으로 달빛이 드리운 의형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때였다.
“사람들이 기본만 알았어도, 수백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문득 귓가에 닿은 말에 서문윤이 몸을 멈칫했다. 말은 공허하게 갈라져 있었다.
서문윤은 검설린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느런 공기가 몸을 차게 식혔으나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 * *
숙소가 허름한 것은 상관이 없었으나 기본적으로 의원은 위생을 갖추어야 했으므로, 욕탕(浴湯)이 갖춘 곳을 찾으려니 몹시 힘들었다. 대저 빈민들은 멱을 감지 않는 편이라, 구색이나마 욕탕이 따로 갖추어진 건물은 여관 아니면 부민의 저택이었던 것이다. 여관은 이미 지진의 여파로 운영되지 않으니 부민의 저택을 찾아야 하는데, 촌구석인지라 그것이 쉽지 않았다.
어떻게 간신히 구한 숙소는 빈촌 근처에 자리한 보수 중인 집이라 몹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관은 아니었으며, 북성이 왔다는 소식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부민 하나가 처가댁으로 방을 옮기며 급하게 방을 마련해준 것이다.
촌에서 보기 힘든 거상인 듯한 경칠승이, 생필품을 마련하고 마을의 대대적인 보수를 자행했으나 지진의 여파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가장 큰 타격은 건물이 무너진 것이었다. 물과 식량은 경칠승이 보급해준다 쳐도, 하필이면 겨울에 건물이 무너질 것은 뭔가. 겨울 중이라 보수가 쉽지 않으니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고, 있다고 해도 다들 추위에 덜덜 떨었다.
그렇다고 현령처럼 경칠승의 저택에서 기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숙소에 들어서고 서문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겉은 그나마 멀쩡해 보였던 건물의 안이 몹시 협소한 탓이었다. 지진 전에는 제법 커다랬을 저택은 여기저기 무너져 방 두 개만 남았는데, 두 방 모두 별빛이 들고 풍한이 치는 방이었다.
검설린이 등에 멘 목함을 벗어 방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느린 숨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법 지친 얼굴이었다. 먼 길을 걸어 오곡현에 도착하여, 경칠승과 기 빨리는 대담을 하고, 또 환자 대여섯 명을 돌보았으니 피곤함을 느낄 만하다. 행장을 푼 검설린이 마지막으로 챙겨 온 다 쓴 붕대와 피 묻은 옷 따위를 창문 밖으로 던졌다.
청년은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움직여 마당으로 나갔다. 검설린이 창밖으로 내던진 옷가지를 주워 태우고, 그가 주었던 첩지를 펴서 약재를 털었다.
물을 부어 탕약을 끓이고 서문윤은 작은 의자를 가져와 자글자글 소리를 내는 탕약기 앞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흔들리는 연기를 바라보며 한참을 말없이 있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리면서 복잡한 얼굴을 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군.’
오곡현 주민들의 상태를 이름이었다. 분명 건물은 무너지고 식수가 끊겼으나 의형과 다니며 더한 것을 많이 본 서문윤의 눈에 오곡현의 상태는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것이 다 경칠승의 도움 때문이겠지.
마을 주민은 제 손에 맡기고 자신이나 돌보라, 말을 한 노인의 망령된 얼굴이 머릿속에 흘깃 스쳤다. 분명 그것은 발악이었으나 일리 있는 말이기도 했다. 어찌하여 검설린이 그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지는 모르나, 분명 그는 한 번 한 말을 끝까지 지키리라.
‘고집이 센 분이시니.’
아지랑이에 뿌연 시야 사이로 서문윤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그는 보글거리는 탕약을 눈앞에 두고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는 아침의 일을 상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의형을 따른다 한들 반역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문까지 연루되는 일이었기에.
그리고 그것은 서문윤이 그토록 알기를 갈망했던 의형의 숨겨진 과거다. 새까만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말한 이는 경칠승이었다.
서느런 공기가 뺨을 차게 식혔다.
뿌연 입김이 일렁이는 연기를 어지럽혔다. 그것을 바라보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등 뒤로 기척이 들렸다.
그가 욕탕에서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뿌연 연기를 자아내는 탕약기를 바라보며 서문윤이 저벅거리는 발걸음을 귀로 쫒았다. 바스락 흙을 밟는 소리가 정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그릇을 바라보던 눈에 이채가 서린 순간이었다.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서문윤이 탁탁 소리를 내는 탕약기에 상념을 끊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뜨겁게 달구어진 그릇의 뚜껑을 새하얀 천으로 집어 올렸다.
따뜻한 연기가 얼굴을 후욱 뒤덮었다.
탕약기에 달여진 약을 깨끗한 천을 비틀어 거르고, 시꺼먼 탕약을 흰 그릇에 담았다. 매일 하던 일이라 이제는 능숙한 솜씨로 탕약을 달일 줄 알게 되었다. 서문윤은 그것을 소반에 올린 채 검설린의 방으로 향했다.
타악.
문이 열리고 서문윤은 고개를 숙인 채 문턱을 밟았다. 탁상에 소반을 올려놓고, 예의 그렇듯 밖으로 나가려던 중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나는 대역죄인이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지자, 서문윤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청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네가 알고 싶어 하던 사실이다. 서문윤, 네 눈앞에 있는 나는 잘못 얽히면 삼대가 멸할 수 있는 역적이지. 하늘에 거역한 천역을 짊어진 자.”
서문윤의 발목을 잡은 말이었다.
“나의 과거는 반역에 얽혀 있다. 마땅히 관가에 고발해야 하는 게 옳지.”
사내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어찌할 거냐?”
서문윤은 답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문턱에 멈추어 선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네 가문의 존폐가 달린 일. 관가에 고발해도 너를 말리지 않겠다. 어차피 나는 혈혈단신인 몸이다. 생사는 중요하지 않아.”
그것은 그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발을 종용하는 말에 가까운 것이지.
청년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문턱을 밟았던 발을 다시 방바닥 위로 옮기고 서문윤이 몸을 돌렸다.
검설린은 그를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냉막한 얼굴을 그에게 고정한 채로.
청년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저를 믿지 않으시군요.”
“아니, 난 너를 믿고 있어.”
“의형은 거짓말을 하고 계십니다.”
검설린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니, 나는 너를 분명 믿고 있어. 믿지 않았다면 네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얼굴은 말의 내용과 달리 싸늘할 뿐이었다. 청년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모순입니다.”
울컥한 마음을 삼키며 서문윤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 저를 떠보고 계십니다. 어찌 지금 신뢰를 말씀하십니까?”
원망 어린 말에 검설린은 차게 웃을 뿐이었다.
“사람은 마음과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지. 신념을 배반하고 행동해야 할 때도 있다.”
사내의 감정을 알아볼 수 없이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이 하물며 더 많은 사람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서문윤, 이것이 대의가 아니라 말할 수 있나?”
“…….”
“정(情)으로 판단하지 마라.”
“…….”
“내게 얽혀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흘릴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네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굳어진 서문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다시 생각해라. 지금 네게 떠오르는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고, 그리고 나를 생각해. 경중(京中)을 다시 따져서 선택해라.”
“…….”
“그리고 내게 다시 말하라.”
서문윤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무렵에야 청년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해야 할 말을 고르고, 청년은 고개를 들어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답변을 바라는 무정한 사내 앞에서 서문윤이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의형은 어찌 의(義)가 아닌 이(利)를 말하십니까?”
사내의 얼굴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씁쓸한 얼굴로 의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대답이 되셨습니까?”
말을 하는 청년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실망. 서문윤은 백 마디 말을 참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쓸쓸한 시선을 받으며 검설린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꽤 시간이 흐르고서야 검설린은 굳게 닫았던 입을 열고 무겁게 말을 내뱉었다.
“화가 났군.”
서문윤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2년을 기다렸는데도 모자라구나.’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나가보겠습니다.”
더 있다가는 실망에 몸을 망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청년이 복잡한 마음을 참지 못해 자리를 나서려던 때였다.
딱딱한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시험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쇳덩어리를 삼킨 듯한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는 문턱을 밟은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흘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고 짤막한 말이 이어 흘렀다.
“……그저.”
사내는 뜸을 들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저 조금 두려웠을 뿐이다.”
그것은 평소 사내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서문윤은 단단히 다물린 입술을 한동안 열지 않았다.
씁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믿지 못하는군.”
그 공허한 말.
울렁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서문윤이 쉬어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검설린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잠시간 응시했다. 서문윤은 그 시선의 의미를 몰라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단정한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잠시 후 검설린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조차 모를 일이다. 그건.”
어째서 내가 그리했을까. 복면 밖으로 드러난 얼굴에 조소가 스쳤다. 서문윤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착잡함, 혹은 후회인가.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얼굴로 검설린은 중얼거릴 뿐이다.
어째서 그리 두려웠을까.
어느 순간 검설린의 얼굴에 다시 차분함이 자리했다.
“서문윤.”
작게 읊조린 말이 귓가에 선연하게 들렸다.
“너를 반드시 고치리라.”
서문윤은 한참을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정적 속 서문윤은 저를 쪼는 시선을 눈치챌 수 있었다. 차디찬 바람이 화로가 달군 방 안의 공기를 식게 만들었으며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며 검설린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검설린의 몸이 멈칫거렸다. 서문윤이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망가진 다리를 고치기보다, 당신의 얼굴을 보길 원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서문윤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다. 검설린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얬다. 그의 얼굴에 퍼지는 균열을 바라보며 청년이 숨을 멈추고 힘없는 조소를 흘렸다.
‘무엇을 바라나.’
서문윤은 그저 쓸쓸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주무세요. 의형.”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몸을 돌려 방 문을 나섰다.
“…미안하다.”
그 아주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람이 부는 소리에 묻힐 만큼 작게 스며든 목소리.
그를 무시하며 서문윤은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뗐다.
타악!
차가운 바람이 몸을 쓸자 서문윤은 어지러움을 느끼고 몸을 비틀거렸다. 청년은 간신히 기둥을 손으로 더듬어 무너지는 신형을 되잡을 수 있었다. 한숨을 푹 내뱉곤 서문윤이 중얼거렸다.
‘괜한 말을 해버렸다.’
쓴웃음을 지었으나 서문윤은 사실 그다지 후회하지 않았다. 감추었던 말을 내뱉으니 오히려 속 시원한 기분이다.
서문윤이 잘게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발을 떼지 못해, 한참을 말의 여운에 취해 그는 복잡한 마음을 삼키며 처마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청년이 빠져나간 자리.
무거운 적막이 감도는 서늘한 방 안. 동풍이 누비는 차가운 공간에 타닥거리는 화로를 바라보는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내는 침상에 걸터앉아 장시간 침묵을 지켰다. 화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공허한 어둠이 자리했으며, 그것은 화려한 춤을 추는 불길을 투영했으나 그뿐이었다. 생기가 없는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그림자가 너울대고 있었다.
화로를 바라보던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서서히 감정이 물들어나가는 얼굴은 끝에 가서는 완전히 일그러져 완연한 분노를 드러냈다. 그리고 적막이 감도는 방 안에 어느 순간 들끓는 신음이 흘렀다.
마치 죽어가는 짐승이 흘리는 것만 같은 신음.
사내는 한참을 타오르는 화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 * *
방을 나선 서문윤은 상념을 끊고 일과를 마무리했다. 삶았던 의기구를 찬바람에 말리고 재가 된 옷가지를 땅에 묻었다. 목욕을 마치고 그는 마침내 허름한 방 안에 들었다. 사부작 발에 밟히는 건물의 잔재는 지진의 흔적이었다.
일과의 마지막으로 방 안에서 서문윤은 묵묵히 짐을 정리하며 내일의 일을 준비했다. 의기구를 넣는 목함은 검설린의 것이라 손을 대지 못했으나, 깨끗한 수건과 여분의 단도 등을 챙기는 것은 서문윤의 몫이었다.
잠을 청하는 시각.
서문윤은 모든 일과를 마무리했음에도 침상에 앉기 머뭇거렸다. 그는 잠시간 그 허름한 침상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또다시 나는.’
시간이 흐르고 서문윤은 눈을 감았다.
또다시 나는 꿈을 꿀까?
아무도 답을 모르는 일이었다. 심지어 서문윤 스스로조차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요가 깔린 거친 침상에 침의를 입은 채 몸을 뉘며 서문윤이 떨리는 눈썹을 꾹 닫았다.
시간은 흘렀으나 서문윤은 잠에 젖지 못했다. 거센 동풍이 몰아치는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올 뿐이었다. 어느 순간 그는 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의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느 순간 서문윤이 감았던 눈을 스륵 열었다. 결국 참았던 숨이 길게 흘렀다.
추위는 짙지 않았다. 타닥거리는 화로가 방 안의 공기를 달구고 있었기에. 서문윤은 고개를 돌려 화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 속에 스멀거리는 따뜻한 기운 또한 과연 저 화로 때문일까?
피로감이 몸에 쏟아졌다. 서문윤이 수마에 취해 느릿한 숨을 내뱉었다. 의형의 과거를 알게 된 날이었다. 그것이 반란에 얽힌 것이란 사실도.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서 현실 같지 않았다. 의형의 태도가 너무 익숙지 않았다. 신뢰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였으나 동시에 갑자기 그어놓은 선의 경계를 서성거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미안하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청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간절히 품은 마음이었다.
소망대로 서문윤은 그날 꿈을 꾸지 않았다.
* * *
잠을 자던 중 서문윤은 문득 수면에서 깨어나고야 말았다. 으응, 작은 신음을 내뱉고 청년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거렸다. 바람이 휘잉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혼미한 정신 속 서문윤이 생각했다. 창문이 열렸나. 그가 졸음에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힉?”
갑작스레 몸 전체가 부서지는 감각에 서문윤이 몸을 펄떡거렸다. 그것은 하복부에서 정수리를 관통하는 빠르고 강렬한 감각이었다. 청년이 파드득 몸을 떨며 손을 휘적거렸다. 서문윤이 뻗은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은 길고, 또 매끄러웠다.
갑작스럽게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찌릿한 고통에 서문윤이 입술을 열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어느새 아롱 매달려 있었다.
‘아, 아파.’
그러나 서문윤은 고통에 이어서 몸에 퍼지는 부드러운 소양감에 몽혼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하복부부터 몸을 타고 오르는 간질거리는 열기. 그 순간 청년은 저도 모르게 달콤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두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은 누군가의 숨과 섞여들었다.
그리고 탁하게 울리는 사내의 묵직한 신음.
서문윤의 몸이 파득 떨렸다.
지금 가까운 곳에,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다.
그 때 서문윤의 흐릿하던 시야가 돌아왔다. 단정한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순간이었다.
“당, 신은…?”
청년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넋을 잃을 뿐이었다. 벙어리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경악이 자리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의, 의형…?!”
서문윤이 두려움에 물든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청년을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내려다보는 사내는 바로 그의 경애하는 의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