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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나립 박사(3) (4/31)

3. 파나립 박사(3)

“인의를 위해 죽는다 한들(聖人則以身殉天下) 이익을 위해 죽는 길(小人則以身殉利)과 무슨 다를 바가 있더냐. 너는 그 길이 특별히 고귀하지 않다는 말(其於傷性以身爲殉一也)을 몰랐다고 말할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다 말할 거냐.”

한이라면 끝도 없이 무궁하다.

사내는 그러나 비명과도 같은 말을 삼키며 입술 끝을 비틀었다.

어차피 원망할 상대도 없다. 한탄할 대상도 없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저 그는 10년의 끝을 기다리며 죽어갈 뿐이었다.

그런데….

내게 다가오지 마라.

침상 아래, 아침에 복면으로 쓰였던 새하얀 천이 떨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암갈색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비비며 사내가 말없이 잠에 취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속도 모르고 세상 편하게 잠을 자는 청년의 얼굴. 달아오른 분홍색 뺨. 깨끗한 숨을 내뱉는 옅은 색의 입술. 그는 사내의 배 위에 뺨을 댄 채 만족스러운 얼굴로 색색 소리를 내며 잠에 취해 있었다.

청년은 그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주범이었다.

사내는 피로에 사로잡힌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손에 휘감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길고 곧은 손가락이 청년의 뺨을 쓸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청춘. 손가락에 맞닿은 청년의 살갗은 몹시 매끄럽고 부드럽다.

살갗에 와 닿는 감촉을 느끼며 어느 순간 사내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 * *

같은 시각 청년은 또다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은 이불보를 뜯었다. 살짝 숙인 얼굴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달아오른 귀 끝이 얼굴을 짐작케 했다. 그는 몸을 꼬며 눈물을 뚜욱뚜욱 흘렸다.

부끄러움에 허벅지를 조이려던 서문윤이, 살갗에 닿는 단단하고 거친 손에 몸을 움찔거렸다. 훤히 드러난 살갗 사이에 들어간 손은 허벅지를 누르며 틈을 만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청년이 마주한 것은 그를 내려다보는 고요한 눈이었다.

눈을 마주하는 순간 전율하고야 만다.

가쁜 숨을 내뱉는 서문윤에게 몸을 기울이며 사내는 그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시야가 새까매질 때 입술에 닿는 부드럽고 뜨거운 살덩어리. 그는 제 입술을 훔치고 있는 것이다. 서문윤은 순순히 입술을 벌려 그 혀를 받았다.

접문(接吻)은 길고 집요했다. 입술 사이를 헤치는 두터운 혀에 희롱당하며 서문윤이 떨리는 숨을 흘렸다.

이것은 정녕 미몽(迷夢)인가?

단단한 목에 팔을 둘러 혀를 받으며 서문윤이 속으로 생각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서문윤은 홀린 얼굴로 입술을 더욱 크게 벌렸다. 더 크게, 더, 더, 크게.

혀가 섞이는 질척한 소리에 얼굴을 붉히고야 만다. 사내에게 매달리며 서문윤이 만족감에 이른 작은 신음을 흘렸다. 사내는 부드럽게 서문윤의 살갗을 쓸었고 농밀한 입맞춤으로 그를 홀렸다. 서문윤은 그의 허리를 다리로 조이며 달콤한 기분에 취해 웃었다. 접문에 취한 와중 서문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그러나 그것은 꿈이기에 끝이 있었다.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희미한 햇볕이 가루가 되어 침상을 가로질렀다. 땀에 흠뻑 젖은 침의는 살갗에 달라붙어 날렵한 선의 몸매를 드러냈다. 새하얀 이불을 손으로 그러쥔 사내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

희고 단정한 얼굴이 호감상인 청년, 바로 서문윤이었다.

잠에서 깬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손에 얼굴을 묻고 서문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척추가 도드라지게 굽은 등이 잘게 떨리고, 침묵 끝에 서문윤이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소문이 문제가 아니야.

‘소문의 의형보다 내가 더 추악하다.’

경애하는 이의 몸을 탐하는 꿈을 꾸니 이것은 사특한 마음이 불러일으킨 참사가 아닌가. 서문윤은 한참을 두터운 솜이불을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어리석은 꿈을 떨쳐내려 했으나 그것은 서문윤의 머릿속에서 쉽사리 떨쳐나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천박한 자신을 떠올리며 그는 침음을 흘렸다.

‘더러운 놈.’

욕망과 마주하고야 말았다. 서문윤이 굶주린 사내처럼 강인한 몸에 매달렸던 스스로를 떠올리고 조소했다. 휘어진 선의 허리를 다리로 얽고 강인한 턱을 매만지며 고양이 같은 울음을 흘렸던 서문윤. 울면서 입술을 간절히 원하며 그의 가슴을 더듬던 서문윤.

그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수치에 몸을 떨 뿐이었다.

그리고.

자괴감에 빠져 몸부림치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손등에 시선을 단단히 고정했다.

‘이건.’

서문윤이 바라본 것은 손등에 난 생채기였다. 분명 어제까지 없던 희미한 실금 같은 상처. 서문윤이 얼굴을 굳히며 꿈을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꿈속에서 의형의 등을 긁으며 신음을 내지르던 서문윤을 생각하며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상처…… 설마.’

사실은 소문을 들은 이후로 계속 의심을 하고 있었다.

1년 전부터 갑자기 치료가 더뎌진 다리.

1년 전부터 간간히 아침에 느꼈던 이질감.

1년 전부터 퍼져 나간 남총의 소문.

하나하나가 맞아떨어지면서 추악한 소문이 서문윤의 마음에 의심의 싹을 틔웠다.

‘설마 의형이 몰래 나를 밤마다 안는 건…….’

의형은 의술이 고절하시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 지금 무슨 생각이야.

그 순간 서문윤의 얼굴에 싸악 핏기가 가셨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이냐.’

서문윤은 빠르게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추악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내쫒았다.

분명 부질없는 감정을 끝내려 마음먹지 않았나?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고 서문윤은 이를 악물었다.

‘개소리다. 개소리.’

잠시간 그를 의심하긴 하였으나, 서문윤은 의형을 찰떡같이 믿고 있었으므로 바로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치려 했다. 그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서문윤이다. 그는 제 착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잘 알았다.

‘의형은 고결한 사람이다.’

손등의 상처는 자다가 뒤척여서 생긴 것이리라. 서문윤이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의심은 제 혼몽한 정신이 불러일으킨 착각일 뿐이라고. 그분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스스로 고행의 길을 자처하는 의로우신 분이다. 서문윤은 미련을 떨치고 행동하려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서문윤은 옷을 정돈하여 입고 소세를 했다. 본디 명문가 사람인 서문윤은 행랑 중에도 몸가짐을 번듯하게 하곤 했다. 즐겨 입는 적갈색 면옷을 차려입고 서문윤이 의형의 방 문 앞에 섰다.

잠시 흔들린 눈을 하던 서문윤이 심호흡을 했다. 가장을 하는 거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다시 평온한 얼굴을 되찾을 쯤에 서문윤이 문을 두드렸다.

“기침하셨습니까?”

짧은 침묵 후 “그래.” 나지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서문윤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 동요를 내보이지 않는 태연한 얼굴을 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몰라도, 티를 내지 않는 것은 천성에 잘 맞는 일이었다. 서문윤은 궁궐에 있을 때부터 그 침착한 태도로 상관에게 칭찬을 받았으니까.

끼익.

느릿하게 문이 열렸다. 서문윤은 여상한 얼굴로 의형을 맞이했다.

검설린은 항상 그렇듯 단정한 의관을 입은 채였다. 새하얀 의원복은 구김 하나 없이 빳빳했고 관으로 틀어 올린 머리는 삐져나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었다. 복면은 그의 얼굴을 가려 눈매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문윤은 가끔 그의 복면을 벗기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충동을 떨치며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일찍 출발하기로 하여 다 준비를 끝냈습니다.”

체구가 큰 몸이 서문윤의 몸을 그림자로 가렸다. 서문윤은 그의 엄중하고 정갈한 모습을 마주하며 평소와 다르게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가슴께를 바라봤다. 서문윤은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사내이지만 아침에 이지러진 심기에 차마 그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출발할까요?”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뜻밖에도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서문윤이 예상하지 못한 긴 침묵이었다. 검설린은 한참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문윤이 저를 향해 내리쬐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서문윤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칼처럼 날카로운 눈이 일그러져 있었다.

제법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다.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건가. 서문윤이 당황할 때였다. 검설린이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

서문윤은 영문 모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길고도 짧은 침묵. 그 끝에 허, 짧게 혀를 찬 검설린이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이른 조반을 들던 중의 일이었다.

타악!

수저 놓는 소리에 서문윤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평소에 예절이 바른 검설린이다. 일부러 소리 내어 식기를 내려놓는 의도가 명백했다. 서문윤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자.”

서문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오곡현에 지진이 나서 넘어가기로 한 것 아닙니까? 어째서.”

“지금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말하는 거냐.”

얼굴이라니?

서문윤의 얼굴이 흔들렸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가 뺨에 손을 더듬거렸다. 그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차디찬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복잡한 시선으로 서문윤을 바라보던 검설린이 문득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앞에서 서문윤은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하루 더 묵고 갈 거다. 밥 먹고 짐 풀어.”

“꿈자리가 사나울 뿐입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

“짐. 풀어.”

한 글자 한 글자 힘이 들어간 목소리. 서문윤은 그 말에 조개처럼 꾹 입술을 다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꼬리 만 강아지 같은 모습에 그를 노려보던 검설린이 미간을 좁혔다. 굵은 검미가 산처럼 꺾였다. 서문윤을 바라보는 눈이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침묵 끝에 검설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냐.”

“…예?”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아. 대체 요즘 왜 이러는 거지?”

그 말을 내뱉는 검설린의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역력했다. 강렬한 눈이 서문윤을 노려보았다. 매처럼 사나운 시선은 청년에게 진실을 말하라 종용하고 있었으나 서문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희미한 떨림이 자리한 손을 탁상 아래에서 주먹 쥐며 서문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넌 정말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러나 감정을 숨기려는 그의 시도는 빠르게 좌절되고야 말았다.

“턱도 없는 거짓말은 집어치워. 날 아무것도 모르는 치로 생각하지 마라. 대체 무슨 일이냐. 너를 그리 산송장처럼 우중충하게 만든 일이 뭔데.”

서늘하게 가라앉은 말에 서문윤은 결국 입술을 다물었다. 숨기려고 했던 심중의 동요가 떨리는 턱 선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문윤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열었다.

“모른 척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우울한 목소리에 검설린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언가의 상념에 잠긴 듯 서문윤의 단정한 얼굴을 짧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늘진 얼굴을 바라보며 검설린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하나 묻겠다.”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네 반응으로 짐작하건대.”

“…….”

“……나와 관련된 일이냐?”

청년이 부리 닫듯 입술을 딱 다물었다. 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 시선을 피하는 서문윤을 바라보는 검설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검설린이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입을 열 때.

짤랑!

“신의가 예 있소?”

객잔을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검설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텅 비었던 허름한 객잔 안에 어느덧 험악한 사내들이 가득 차 있었다. 허억, 점주가 숨을 들이켜며 몸을 웅크리고, 가래 낀 거친 목소리가 객잔을 쩌렁하게 울렸다.

“숨지 말고 나오시오! 헤치려는 것이 아니니.”

소리를 지른 이는 봉두난발로 머리를 풀어헤친 사내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서문윤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의형의 추궁에 몰려 있다가 어떻게 빠져나갈 구석이 보이니 이때다 싶어 빠르게 행동한 것이었다.

‘천만다행이구나.’

누가 봐도 무뢰배인 거친 행색의 사내들이 지금 이 순간은 얼마나 반가운지. 기쁨을 삼키는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문윤은 사내를 향해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나 비굴하지는 않은 자세. 서문윤이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신의를 찾으셨다면 옳게 왔소. 다만 지금은 신의께서 식사 중이시니 나중에 오시오.”

사실 이것은 북성과 같이 다니며 많이 경험해본 상황이었다. 그는 고절한 의술로 왕진 요구를 많이 받았는데, 가끔 폭력도 수반됐던 것이다. 다행히도 북성은 지역 유지나 세력가에게도 빚을 지우고 있어, 대부분의 경우는 허접한 불량배 무리일 뿐이었지만. 여하튼 이 상황 자체는 서문윤에게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왕진을 청하려면, 환자의 가족이 직접-.”

그러나 그날의 일은 서문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봉두난발의 험악한 인상의 불량배는 서문윤을 눈에 담은 순간 코웃음을 치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남총 따위가 낄 자리가 아니다!”

불량배의 말이 객잔을 쩌렁하게 울린 순간 서문윤은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네게 물은 것이 아니다! 어딜 감히 대인의 일을 얘기하는데. 다시 한 번 입을 열면 무서운 일을 겪을 줄 알아라. 신의를 모시는 몸이니 한 번은 봐주겠다.”

“……지금 뭐라?”

“신의께서는 경칠승 대인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대인께서는 오곡현 제일의 부자이시니.”

“…….”

“당연히 경 대인께서는 금은보화로 배상할…….”

사내는 계속해서 참람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서문윤이 숨을 멈췄다.

‘지금 뭐지?’

어깨를 잘게 떨며 청년이 멍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미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청년은 충격에 잠겨 있었다. 소문을 들었지만 면전에서 모욕당하는 일은 처음일뿐더러, 그 내용이 몹시 추악한 것이었으므로. 사내의 말은 그를 공황으로 몰고 가기 충분했다. 더군다나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의 정체가 바로 저의 의형이다.

서문윤이 아찔함에 숨을 멈췄다.

검설린이 지금 이 소문을 들었다. 바로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남의 입으로 들을 소문이 아니건만.

서문윤이 경악에 휩싸여 있는 순간에도 불량배는 떠벌거리며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족한 약재가 있다면 얼마든지 경 대인께서는…….”

그리고 짤막한 한숨이 흘렀다. 검설린은 어느새 감았던 눈을 뜬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뤄진 일행의 침묵.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검설린이 서문윤의 얼굴을 힐끗 보고 미간을 좁혔다.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검설린이었다.

“꺼져.”

“…예?”

사내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린 순간이었다.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꺼지라 했다.”

사내는 독설에 멍한 눈으로 신의를 바라볼 뿐이었다. 복면 위 얼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답을 원하는 시선을 무시하며 검설린은 사내가 아닌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야말로 깔끔한 무시.

얼굴을 쬐는 시선에 검설린의 기색이 점점 살벌해지고 있었다.

넋을 놓았던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지금 무언가 착각을 하신 모양인데. 경 대인께서는 그저 그런 상인이 아니십니다.”

“꺼져.”

그러나 사내에게 돌아온 것은 똑같은 대답이었다.

“신의께서도 떠돌이 생활로….”

“꺼지라고. 말 안 들려?”

“……그리 거절만 하신다면 저희도 험한 방도를….”

검설린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당장 꺼져!”

객잔을 쩌렁하게 울리는 노성에 불량배가 눈을 크게 떴다. 노성을 내지른 검설린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지고, 결국 분노가 폭발한 그가 사내를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말 안 들려?! 꺼지라고! 당장 내 눈앞에서 더러운 흉물 같은 얼굴 치우라고! 이 조잡한 새끼야!”

맹렬한 독설에 사내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아, 아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불량배를 불꽃이 번뜩 튀기는 눈으로 노려보며 검설린이 소리쳤다.

“건방진 혓바닥을 잘라 보내기 전에 당장 꺼져서 경칠승에게 말을 전해! 왕진을 청하려면 직접 찾아와서 무릎 꿇고 빌라고!”

“뭐, 뭐라?”

“어디서 촌구석 졸부가 내게 오라 마라냐! 이 건방진 새끼가!”

그 말이 기폭제였다. 사내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뭐, 이 새끼가?”

검설린의 욕설은 인내심 짧은 한량을 도발하기 충분했다. 그래도 귀인이라, 말을 꼬박꼬박 높여주었는데 돌아온 답이 이따위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꾸역꾸역 화를 참던 불량배의 험악한 얼굴이 더욱 흉흉해지고, 폭발한 사내는 검설린을 향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네 발로 못 가겠다면 내가 끌고 가마!”

검설린의 두 눈에 살기가 튄 순간이었다. 그 때까지 넋을 잃고 있던 서문윤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허리에 찬 검을 꺼내 들었다.

“억!”

소란은 몹시 빠르게 종결되었다.

“대인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거다!”

“신의고 나발이고 감히 대형을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아?”

“아예 얼굴을 갈아버리겠다! 이 개잡놈이 어디서 혀를 놀려? 여승한테 차인 이 니취 새끼가…….”

시골 불량배가 황궁 무관 출신인 호위를 이길 리가?

기세 좋게 소리 지르며 달려들던 무리들이 검집에 얻어맞아 쓰러지고 작은 객잔은 순식간에 곡소리로 가득 찼다. 바닥을 구르며 사내들은 저마다 얻어맞은 부위를 부여잡고 끙끙댈 뿐이었다.

곡성이 흘러넘치는 자리, 객잔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 서문윤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철컥.

검집을 손에 쥔 채 그는 심호흡을 했다. 바닥의 불량배를 바라보는 시선에 한순간 원망이 서렸다.

‘하필 왜 의형 앞에서.’

서문윤의 귓가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저 소문이냐?”

묵직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문윤은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망했다.’

머릿속에 교차하는 수많은 생각. 몸을 부르르 떨며 서문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서문윤이 감았던 눈을 뜨곤 짤막하게 숨을 들이켰다. 까만 눈동자에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며 그가 머뭇머뭇 몸을 돌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검설린의 얼굴은 와그작 일그러져 있었다.

무언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 서문윤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얼굴에 두려움을 언뜻 내보이며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한숨이 흘렀다.

“……정말 이거냐?”

서문윤은 차마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채 서문윤은 그저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단정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리는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숨과 함께 거두어졌으나 서문윤은 검설린을 여전히 바라볼 수 없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변명해야 하나?”

서문윤은 그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떨림이 완연한 청년의 움츠려진 어깨를 바라보며 검설린은 또다시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쓸모없는 생각 그만하고 올라가서 나갈 준비나 해라. 객잔 밖에 사람이 몰린 걸 보니 알아보는 이들이 생긴 것 같은데.”

서문윤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여함 없이 일상은 이어졌다.

소란이 사람들을 몰려들게 만들었다. 지루하던 일상에 외지인이 일으킨 난동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몇몇이 검설린을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 사람 누구를 닮았는데.”

검설린의 체구가 크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외양이 눈에 띄니 그의 정체를 알아챈 자들이 생긴 것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저거 북성 아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간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서로 눈치를 보던 사람들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내, 내 아비를 살려주시오!”

그리고 지금 상황이었다.

환자의 집은 궁색한 살림이 드러나는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환자가 이불을 걷은 채 기울어가는 낡은 침상에 누워 있었고, 아낙네가 문가를 서성이며 걱정 어린 얼굴로 방 안을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침상 가장 가까이에 검설린이, 그 옆에 서문윤이, 그 앞에 진료를 요청한 중년 사내가 있었다.

서문윤은 평상시처럼 조수로서 검설린을 따르고 있었으나, 그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그는 지금 물이 줄줄줄 흐르는 수건을 손에 쥔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청년이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소문이 꽤나 멀리 퍼진 건가?’

대야에 물을 뜨면서도 서문윤은 객잔에서 있던 일에 동요할 뿐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그의 안색을 힐끗거리는 환자의 며느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검설린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료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토사곽란을 반복하며 계속 앓고 있다는 환자. 검설린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읊었다.

“오른쪽 배 그 부근에 위치한 창자의 말단이 막혀 염증이 생긴 거다. 아비가 토사곽란을 계속하는 것은 차라리 나은 편이다. 저 상태에서 더 나아가면 혈류가 원활하지 않아 상처가 터질 수도 있어. 독성을 띤 분비물이 복막으로 퍼지면 그때는 벽촌에서는 손쓸 수 없으니 지금 배를 갈라야-.”

“어, 어찌하여 사람의 생살을 찢는단 말이요!”

“…그래, 개소리로 들릴 줄 알았지.”

검설린이 한숨을 내뱉고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냉막한 얼굴에 조소가 스쳤다.

“그럼 난 손쓸 방도가 없다. 네 아비는 너 때문에 죽는군.”

“그, 그런 말이 어디에 있소?”

“송장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면 지금 당장 비키는 게 좋을 텐데. 환자를 본 이상 네 말은 가납하지 않아, 나는.”

사내는 마침내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쳤다.

“이 얼굴 갈린 더러운 쌍놈이! 내 아비가 죽으면 너도 죽여버리겠다!”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그 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청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개소리요!”

청년이 대야에 젖은 수건을 던지며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서문윤은 그리고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타앙!

“입 닥쳐!”

흥분한 중년인이 대야를 던진 탓이었다. 순식간에 저를 향해 쏟아진 물벼락에 서문윤은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물벼락이 청년의 몸을 덮고, 그는 망연한 얼굴로 중년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분노보다는 당황한 마음이 먼저 들어,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서문윤은 뚝뚝 물방울을 떨어트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냉정하게 중년인을 몰아세우던 검설린의 눈썹이 꿈틀거린 순간이었다.

손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컥!”

목이 잡힌 중년인의 신음이 울리고, “까아악!” 자리에 앉았던 여인의 비명이 이어졌다. 서문윤은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의, 의형?”

검설린이 사내의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턱 아래 목 윗부분을 부여잡은 채 차가운 눈으로 중년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문윤이 검설린의 돌발행동에 기겁하여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의형, 그만하십시오!”

검설린의 몸을 황급히 끌어안으며 서문윤이 기겁한 얼굴을 했다. 얼굴에 뿌려진 차가운 물 때문에 옷이 축축했다. 가해진 모욕에 기분이 상했으나 일단은 이성을 잃은 의형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문윤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간절히 그를 말렸다.

“참으세요, 의형. 뭘 모르고 한 짓이 아닙니까?”

서문윤이 한바탕 팔에 매달려 애걸했으나, 검설린의 손은 물려날 기색이 없이 강건했다. 중년인의 목을 부여잡은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제 몸에 매달린 서문윤을 돌아보지 않은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 어쩐지 몹시 무섭다. 덜컥 겁이 든 서문윤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빌었다.

“제발, 제발…….”

울먹거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간절한 목소리에 검설린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서문윤은 이윽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중년인의 목을 졸랐던 손이 거두어진 것이었다.

검설린은 중년인의 목을 쓰레기 던지듯 손에서 떨구곤 짧게 혀를 찼다.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희미한 경멸이 묻어 나왔다.

목이 졸렸던 중년인이 오들오들 몸을 떨며 바닥에 웅크리고, 이윽고 적막이 이어졌다.

뚝뚝 바닥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눈을 감고 신음을 삼켰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청년이 쓴웃음을 흘렸다. 중년인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난데없이 물벼락이라니. 아무리 온화한 서문윤이라도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서문윤이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정돈했다.

잠시 후 마음을 정리한 서문윤이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평온함이 다시 자리하고 있었다. 검설린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서문윤이 말문을 열었다.

“형님.”

검설린이 고개를 돌려 서문윤을 바라보았다. 북풍이 부는 듯 냉막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문윤이 목을 가다듬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진료는…….”

검설린의 검미가 꺾인 순간이었다. 서문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해주시는 게…….”

그런데 어쩐지 검설린은 화가 난 듯 보였다.

강렬한 시선이 얼굴을 쪼자 서문윤은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꾹 입을 다문 청년의 얼굴을 검설린은 한참을 지긋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검설린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져, 금방이라도 역정을 쏟아낼 사람의 것처럼 변모하고 있었다.

서문윤이 주춤거릴 때 날카로운 조소가 흘렀다. 짤막한 냉소를 흘리고 검설린은 서문윤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모욕을 당한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으음.”

“지금 화를 내야 할 것은 너야, 서문윤. 대체 왜 네가 나한테 비는 거냐.”

서문윤은 그저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건 환자 아닙니까.”

짧은 침묵이 있었다. 서문윤은 그의 안색을 살살 살피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적막을 깨고 황당한 마음이 묻어 나온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의인인지 모르겠군.”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검설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무뚝뚝한 말이 이어졌다.

“네가 말하지 않았어도 수술할 예정이었다. 저놈의 사지를 붙잡아서라도 할 예정이었지. 서문윤. 말 나온 김에 준비해라.”

그의 말대로 검설린은 다시 진료를 이어나갔다.

서문윤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그의 옆에서 조수의 일을 이행했다. 그는 피 묻은 천을 갈고 대야에 물을 받아 수술을 도왔으며, 긴 시간 동안 중년인을 감시하는 역을 했다. 혹여라도 아비의 일에 중년인이 흥분하는 일이 없도록. 서문윤은 긴 시간 경계심을 세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중년인의 새파란 입술은 치료 내내 덜덜 떨렸다.

결과적으로, 노인은 살아남았다.

복통을 호소하며 앓았던 노인은 한결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망연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중년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굽혔다. 결국 그의 아비는 걱정과 달리 목숨을 구명하였으므로.

“죄송합니다.”

무례를 깨우친 중년인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을 굽힐 뿐이었다. 피 묻은 수건이 바닥에 널리 깔린 자리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중년인은 미안함에 새우처럼 등을 굽혀 연신 사과했으나 검설린의 냉막한 얼굴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본디 이런 일이 많았던지라, 서문윤은 그저 젖은 머리카락에 곤란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빨리 가서 목욕을 하고 싶다. 서문윤의 심기를 어지럽게 만든 것은 검설린의 불편한 심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의형의 안색을 살폈다. 검설린은 여전히 싸늘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한숨이 흘렀다.

‘의형.’

* * *

진료는 길게 이어졌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사람들은 번잡하게 신의가 왕진을 온 초가집 주위를 서성였다. 북성의 성격을 알고 그에게 다가가길 꺼렸던 이들은 한번 그가 진료를 시작하자 떼거리로 몰려와 그들을 에워쌌다.

세간의 말과 달리 북성은 사람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단지 그는 심기가 상하지 않을 때 온 순서대로 사람을 진료했으나 웬일이지 번현에서는 상태가 제법 중한 환자만 받았다.

온 사람들을 전부 진료하고 난 시간이, 해가 저물 쯤이었다. 보통 새벽까지 이어지던 왕진을 생각하면 늦은 시각은 아니리라. 그날 검설린은 서문윤을 데리고 일찍 객잔에 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한사코 말리는 서문윤의 말을 “시끄럽다.” 짤막한 말로 끊고 검설린이 매정하게 몸을 돌렸다. 복면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검설린은 서문윤을 내버려둔 채 망설임 없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서문윤은 그 자리에 한참을 멀거니 서 있어야만 했다. 그가 있었던 자리를 망연한 얼굴로 바라본 채 청년은 장시간 침묵을 지켰다.

* * *

그를 따라다니면서 서문윤은 청결이 몹시 중요하단 말을 수차례 언질받은 적이 있었다. 일과의 끝은 항상 목욕이었으나, 오늘 서문윤은 순서를 바꾸어 욕탕에 먼저 들었다. 여벌옷이 있어 갈아입었으나 수건을 짠 물을 뒤집어쓴 바람에 몸이 찝찝했다.

지금 서문윤은 욕탕 안에 있는 중이었다. 모락모락한 연기가 가득 찬 욕탕 안.

목간에 젖은 머리가 달라붙은 이마를 대며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의형은 그런 마음이 아예 아니라니까?’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걸고야 마니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끙 소리를 흘리며 서문윤이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따뜻한 물에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피곤하구나.’

뜨뜻한 물에 몸을 뉘며 서문윤이 멍한 눈을 깜빡였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체력 하나는 남들과 비견할 바 없이 뛰어난 서문윤이었다. 그동안 검설린의 험난한 일정을 빨빨빨 따라다니면서도 힘들지 않았는데, 오늘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서문윤이 문득 허탈하게 웃었다.

‘피곤할 만도 하군.’

생각해보니까 꽤나 많은 사건이 있었다.

악몽을 꾸고, 불량배가 난입하였고, 소문을 들키고, 또 물벼락을 맞았나?

헛소문임을 알지만 근래에 그를 괴롭혔던 소문을 확인사살당한 날이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묘하게 섭섭한 마음에 서문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 끝에 하아 한숨이 흘렀다. 잘박한 소리가 연이어 흘렀다. 서문윤이 목간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젖은 머리가 헝클어져 이마를 가렸다. 서문윤의 시무룩한 얼굴 또한 그 아래 숨겼다.

서문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는 씁쓸함을 느끼며 고개를 작게 숙였다.

‘…나는 도대체 왜 지금 섭섭한 걸까?’

사실 진료하는 내내 동요하고 있었다. 의형이 딱 잘라서 소문을 개소리라 칭한 게 섭섭하여. 서문윤은 그를 신경 쓰며 한참을 넋을 빼고야 말았다.

생각해보면 의형의 태도가 맞는 건데. 어째서 이리 마음이 싱숭생숭한지 모르겠다.

‘설마 그의 남총 취급을 받길 원했나? 나는?’

그건 정말 최악이다. 서문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디까지 추락할 작정인지, 나 원.

상념을 마치자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문윤은 그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새 그는 중년인의 목을 졸랐던 검설린의 서슬 퍼런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대를 하면 실망할 것이 분명한데, 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고야 마니……. 나는 그냥 글러먹었다, 중얼거리면서 서문윤이 눈을 감았다. 목선에 물이 잘박이게 잠기도록 서문윤이 몸을 웅크렸다. 어느새 청년의 뺨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무릎을 손으로 감싸며 서문윤이 멍한 얼굴로 넋을 잃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희뿌연 안개 속 의형의 옆모습만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높은 콧대에 걸린 복면. 날카로운 눈매가 치켜떠진 모습.

안개 속에서도 선연하게 드러나는 복면을 쓴 사내의 형상.

서문윤이 홀린 듯 그 얼굴에 빠져들었다.

‘니취라.’

고요한 두 눈, 끝이 길게 빼내어진 유려한 눈매에 어찌 그 소문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시큰거리는 가슴은 삿된 마음 탓이었다.

‘……사실 그게 진실이라도 상관없는데.’

얼굴이 대패로 갈렸다고 한들 그 뺨에 입을 맞출 수 있는데. 추하게 얽은 얼굴이라 한들,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눈꺼풀 위에 입술을 맞출 수 있건만.

그러나 서문윤은 회상의 끝에서 한숨을 흘리고야 말았다. 현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마음 깊이 욕망하여도 나는 그리할 수 없겠지.’

손등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돌린 서문윤은 물에 잠긴 손을, 그리고 그 손등에 그어진 붉은 상처를 한참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바뀐 일과의 마지막이었다.

서문윤은 욕탕에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침의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이 젖지 않게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묶고 서문윤은 으레 그렇듯 마당에서 탕약을 달였다. 객잔은 한가하여 사람이 없어, 홀로 행동하기 용이했다. 서문윤은 타닥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잠시간 홀린 표정을 지었다.

넋을 잃던 서문윤을 깨운 것은 코끝에 스치는 청아한 향기였다.

약탕기의 뚜껑이 탁탁거렸다. 정신을 차린 서문윤이 탕약을 체에 걸러 그릇에 내곤 검설린의 방을 찾았다.

‘들어가서 그냥 바로 놓고 와야겠다.’

문 앞에서 품은 다짐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서문윤이 문을 열었다.

끼이익.

사내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서문윤은 쭈뼛거리며 문 안에 들어서, 목함을 정리하는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문윤이 탕약을 내려놓자 검설린은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탕약 내왔습니다.”

“…….”

눈치껏 서문윤이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탕약을 마시는 소리가 호기심을 부채질했으나 서문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뿐이었다.

적막 속 꿀꺽거리는 소리가 선연하게 들렸다.

달칵.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 서문윤은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더는 사정을 봐줄 수 없어.”

서문윤이 고개를 돌렸다.

“내일 아침에는 그냥 출발할 거다. 몸 관리 잘해라.”

그리 말하는 검설린의 복면 위 얼굴이 무뚝뚝했다. 서문윤이 주눅이 들어 말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제 다리 때문에.”

“사과는 그만하라지 않았나? 제기랄.”

짜증을 부리는 검설린에 서문윤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청년의 얼굴을 마주하고 검설린은 한숨을 푹 내뱉을 뿐이었다.

문득 서문윤이 입술을 열었다.

“저를 걱정하셨습니까?”

검설린은 그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눈썹을 꿈틀거리며 복잡한 표정을 짓는 서문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설린은 짤막한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네가 답답하다.”

뜻 모를 말이었다. 그 말을 내뱉고 검설린이 손에 든 천을 선반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미간을 좁히며 그는 한탄하듯 말을 내뱉었다.

“가끔 네가 너무 답답해.”

서문윤은 그저 그를 빤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검설린의 얼굴은 복면으로 가려져 평상시에 감정을 읽기 힘들었으나, 그는 지금 의형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검설린은 그야말로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으니까.

찡그려진 눈가를 바라보며 서문윤은 간질거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 목구멍에 치밀어 올랐다.

살갗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만 같은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오늘 계속 실수를 하더구나.”

“어, 그냥 조금 몸이 안 좋았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소문 탓이냐?”

할 말이 없었다.

부리 닫듯 입술을 꽉 다문 서문윤을 바라보며 검설린이 순간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서문윤은 그 맹렬한 시선을 못 본 척 눈을 피할 뿐이었다.

침묵 끝에 묵직한 말이 이어졌다.

“소문을 신경 쓴 이유가 뭐지?”

서문윤은 그 말에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침묵. 그 끝에 청년은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저, 그저 제가 어리석어서…….”

날카로운 시선이 단정한 얼굴을 겨냥했다. 갈라진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것뿐이냐.”

청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는 그 말에 바로 답변할 수 없었다. 검설린의 시선은 서문윤의 혼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서문윤은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좀 많이 아팠나 봅니다.”

검설린은 그저 냉랭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집요한 시선 앞에 서문윤이 문득 쓴웃음을 흘렸다.

‘그저 아팠던 것이다.’

그리 중얼거리며 청년은 검설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나를 의형으로 모신다 했었지.”

검설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관계에 의심이 필요한가?”

서문윤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검설린이 짧은 고소를 흘렸다.

“알고 있군.”

서문윤의 얼굴이 굳은 순간이었다.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허튼 생각 품지 말거라.”

명백한 경고의 뜻을 포함한 말이었다. 말의 어조는 몹시 흉흉했다.

침을 삼키며 서문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검설린의 얼굴. 서문윤은 고요한 눈에 비친 상(像)에, 결국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검설린의 눈 안에서 그는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그러진 미소와 같은.

그 얼굴이 몹시 추악하다. 서문윤은 그리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 *

깍깍깍.

맑은 아침.

눈을 번쩍 뜨고 서문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잠시간 멍한 눈으로 침상에 앉은 채 침묵을 지켰다. 어느 순간 서문윤이 정신을 차리고 손등을 힐끔 바라보았다. 딱지가 조금 앉은 손등의 생채기. 서문윤이 그것을 잠시간 응시했다.

오늘은 꿈을 꾸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잠깐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고개를 내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로에 나서야 했다. 서문윤은 옷을 빠르게 갈아입고 길을 나서기 위한 행장을 바삐 챙겼다. 조수라기보다는 뒤치다꺼리를 하는 입장이라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았다. 깨끗한 수건과 물주머니, 비상식량 따위와 팔토시, 혹시 몰라 지방 유지를 진찰할 때 받아 온 가패를 정리하고 청년은 행장을 등에 멨다.

이후 숨을 삼키며 서문윤은 다짐했다.

‘의형의 말이 옳다.’

쓰라린 한숨. 진작에 이래야 했던 것이다. 서문윤이 후회를 삼키며 속으로 뇌까렸다.

‘허튼 생각 품지 말자.’

끼이익.

서문윤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출발하지.”

검설린은 그의 얼굴을 보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서문윤은 그 시선을 모른 척 얼굴을 숙일 뿐이었다. 얼굴 구석구석 날카로운 시선이 누볐으나 서문윤은 조개처럼 닫힌 입술을 열지 않았다. 침묵 끝에 검설린이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몸을 회복하라 했더니 병자가 돼서 왔느냐. 그런 핀잔이 담긴 얼굴로 검설린은 혀를 찰 뿐이었다.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고,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일정보다 하루가 늦었으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검설린은 말없이 행장을 들었고 서문윤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아니 그것보다는 넋을 잃은 얼굴로 그를 따를 뿐이었다. 서문윤은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입으로 내뱉는 말보다 핏기가 싸악 가신 행려병자와 같은 얼굴이 많은 것을 말했다.

어느 순간 검설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언가 복잡한 얼굴로 서문윤을 노려보며 검설린이 심기가 불편한 듯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잠시간 그를 맹렬하게 바라보던 검설린은, 그저 모른 체하는 서문윤의 반응에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일행은 길을 밟을 뿐이었다. 서문윤은 고개를 숙이고 그저 말문을 닫은 채 발을 움직였으며, 검설린은 그의 앞에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청년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에게 일상이었던 여로가 또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서문윤의 앞에는 새하얀 의복으로 가려지지 않는 너르고 단단한 등이 있었으며, 그는 그 등을 바라보는 순간 목구멍에 치솟은 말을 삼켜야만 했다.

입술을 열어 욕망을 말하면 의형은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고뇌하던 서문윤이 문득 피식 웃었다.

‘헛소리.’

의형의 마음을 이미 들었건만 왜 나는 또 이럴까. 의형의 눈에 비쳤던 추악한 모습을 떠올리며 서문윤이 한숨을 삼켰다.

‘그만하자, 제발.’

그러나 서문윤은 연신 되뇌면서도 쉽사리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제 뜻대로 될까. 꾸역꾸역 말을 삼키며 서문윤은 점이 된 검설린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어두운 얼굴로 서문윤이 검설린의 뒤를 따랐다. 절뚝거리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하며, 서문윤은 그저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두 사내의 등 뒤로 희미한 적갈색 노을이 드리우고.

사내 하나의 얼굴에는 계속 우울함이 감돌았다.

그 순간 다른 하나의 얼굴에는 쓰디쓴 회한이 자리했다.

더불어, 쓸쓸한 조소와 탄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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