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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나립 박사(1) (2/31)

1. 파나립 박사(1)

모든 것이 혼몽한 와중에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사내는 청년을 살렸고, 청년은 사내를 흠모한다는 사실이었다.

* * *

청년은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사내의 너른 등을 긁었다. 맞닿은 가슴에 눈물인지 체액인지 땀인지, 혹여 밀문에 처바른 기름인지 모를 액체가 번들거렸다. 살갗이 맞닿아 움직일 때마다 끈적한 소리가 흘렀다. 눈물이 눈꼬리에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으며 그는 몸이 흔들릴 때마다 따뜻한 숨을 내뱉었다. 단정한 얼굴을 눈물범벅으로 물들이며 그는 제 위를 점한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바르작댔다.

“형, 흐윽, 형, 학!”

어지러이 엉망진창이 된 아랫도리에 감각이 없었다. 단단한 가슴에 짓눌려 청년은 몽롱한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고개를 꺾었다.

거친 숨결이 살갗에 스치고 아래 깔린 청년은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몸부림에도 사내는 꼼짝을 하지 않고 행위를 이어갈 뿐이었다. 낮게 울리는 신음을 흘리며 사내는 살이 적당히 오른 허벅지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란한 소리.

살이 치대고 향유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고. 청년은 수치심에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이며 눈을 감았다.

눈물길을 따라 반짝이는 물이 흘렀다.

‘좋, 흑, 좋아.’

받아들이기 버거운 거대한 양물이 배 속을 농탕치는 것에 얕은 신음을 흘렸다. 청년은 사내의 손톱자국이 그득한, 피 흐르는 등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깊숙이 배 속을 파고드는 성기. 청년은 어느 순간 쾌락에 물든 얼굴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내는 헐떡거리는 청년의 눈가를 혀로 싹 핥았다. 뺨을 말캉한 혀로 쓸어 마침내 눈물길을 지우면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위에 울렸다.

몽롱한 시야로 청년이 습한 눈을 깜빡이며 달짝지근한 신음을 흘렸다.

“형, 흐윽, 형, 형님.”

그리고 청년이 사내의 등을 미친 듯이 긁으며 그를 부른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마지막으로 청년이 기억하는 것은 그를 찢어발길 듯 노려보는 두 눈이었다.

“허억!”

거친 숨을 들이켜며 서문윤이 감긴 눈을 번쩍 떴다. 새하얀 이마에 땀이 송골하게 맺혀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는 한참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 넋을 잃고야 말았다.

청년은 멍한 눈으로 나무 천장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서문윤이 문득 아래에 느껴지는 통증에 작은 신음을 흘렸다. 새하얀 얼굴에 언뜻 두려움이 스친다. 청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불 위에 올려놓은 손을 머뭇거렸다.

서문윤은 망설임 끝에 이불보를 걷었다.

그리고!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청년은 말없이 눈을 깜빡이며 이불 아래를 바라본다. 한참을 굳은 표정으로 이불 아래 드러난 몸을, 정확히 말하면 다리 사이를 노려보던 서문윤이 손을 뻗었다.

바지 사이에 손을 밀어 넣고 서문윤은 허벅지 사이를 더듬거렸다. 민망한 모양새였으나 그의 얼굴은 놀리기에는 몹시도 진지해 보였다. 굳어진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흐르고 있었으므로. 한참을 무언가 확인하듯 만지던 서문윤이 어느 순간 안도한 얼굴로 손을 빼냈다.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청년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문윤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어느 순간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눈에 스치는 건 안도의 마음과, 동시에 실망이었다.

서문윤은 또다시 깊디깊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꺾었다. 자괴감에 입술을 짓씹은 채 청년은 고뇌에 휩싸였다.

‘도대체 나는 이 꿈을 왜 놓지 못한단 말인가?’

사실은 그는 답을 알았으며, 그 질문은 단지 투정일 뿐이다. 서문윤이 고요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아니, 사실 허공을 노려다보는 게 아니다.

그는 2년 전 황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주 깊디깊은 시선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어둑한 눈으로. 서문윤은 과거의 서문윤을 마주했다.

마주한 것은 사건이 시작된 날의 서문윤이었다.

* * *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매 머뭇거리고.’

콸콸콸!

세차게 몰아치는 물살이 귀를 멍하게 했다. 청년은 누우런 강물을 바라보며 그곳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느 가을의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잎처럼 이 한 몸 가는 곳 모르는구나…….’

그 충동을 억누르고 억눌러야 했다. 크나큰 절망에 휩싸인 청년의 얼굴은 오히려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물 앞에 넋을 잃고 서 있는 허름한 회색 무복을 입은 채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20대 초반의 청년.

단정한 얼굴로 키는 6척에 아주 조금 미달한 중키.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간 웃는 인상이며 또렷한 이목구비가 유약한 느낌을 피했다.

그가 바로 서문윤이었다.

휘이잉!

그렇다면 어째서 서문윤은 그리 공허한 눈으로 황하를 바라보고 있을까?

거대한 황하에 작은 몸이 휩쓸리면 부서질 게 뻔하건만, 서문윤은 위태하게 강가에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문윤은 황하에 몸을 던지려던 중이었다.

‘죽으면 나라에 보은하겠다는 맹세를 깬 불충,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

서문윤은 누구보다 의로운 사내다.

충심이 깊은 무관이요, 부모에게 공손한 효자.

그는 서문세가의 영광을 짊어진 장손이었다.

그러나.

서문윤이 쓰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다 무슨 소용이지?’

다그닥 다그닥!

귓가에 그날의 말발굽 소리가 스쳐 갔다.

“주군, 주군!”

“안 돼! 서문윤!”

말발굽 소리에 이어진 찢어지는 비명.

경악, 충격, 혼란에 가득 찬 우짖는 소리가 귓가를 교란하고, 서문윤은 쓰라린 웃음을 흘렸다.

‘후회하지 않는다.’

한참을, 한참을 말없이 황하를 보며 서문윤은 자조를 삼켰다.

부르르 떨리는 등이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갑자기 튀어나온 토끼 새끼 한 마리가 일으킨 사고였다. 주군의 말이 놀라는 것을 본 순간 서문윤은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본능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다리의 통증이 뒤를 이었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종아리를 더듬거렸다.

“서문윤! 서문윤!”

정신을 차린 그의 주인은 우짖으며 서문윤을 껴안았다.

“당장, 당장 사람을 불러라! 당장!”

서문윤은 그의 품에 안겨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골반 아래를 울리고 있었다.

“아, 윽.”

옅은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은 고개를 숙였다. 바라본 다리는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그 순간 서문윤은 제 운명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후회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다잡듯 이를 악물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훗.”

서문윤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또 그리하겠지.’

그리고 또 이곳에 서서 좌절하리라. 주인을 구했으나 병신이 된 다리에 서문윤은 무관직을 내버리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절름발이가 된 서문윤을 본 그의 주군은 기염을 토하며 의원을 닦달했으나, 의원은 측은한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화타가 다시 살아도 이 다리를 고칠 수는 없으리오.”

차라리 벌을 달라 말하는 의원에게 주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허망한 얼굴로 저를 보는 주군을 향해 서문윤은 쓰게 웃어야만 했다.

그렇게 입신양명은 물이 건너갔으며 가문의 이름은 빛이 바랬다. 무가의 독자인 서문윤이 다리병신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서 무관은 집에 돈이 있으니 어디 무관이나 차려서 아이들이나 가르칠 수는 있겠소.”

그런 말에 서문윤은 ‘그리 살아보았자 무엇 하나?’ 울분 어린 비명을 속으로 내질렀다. 그러나 겉으로 그는 웃으며,

“낙향하고 길을 생각해보겠소.”

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본심이 아닌 말을 하고 삭인 속이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청년은 그렇게 이리 황하에 있었다.

콸콸콸!

아, 흐르는 황하여!

천하가 시작이 된 곳이다. 서문윤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청년의 몸이 기울어져 갔다. 아래로, 아래로, 또 아래로.

누우런 진흙이 뒤덮인 강물을 향해서…….

그러고였다.

“아악!”

비명소리에 위태하게 숙인 몸이 움찔거렸다.

“살려줘요! 아아, 살려줘!”

놀라 고개를 든 자리에 거센 황하의 물살에 휩쓸려가는 어린아이가 바동거리고 있었다. 물가에 발을 동동 구르는, 머리에 흰 두건을 쓴 젊은 처자.

“순덕아아!”

서문윤은 바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것 또한 날뛰는 말 앞에 몸을 던졌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으윽.’

서문윤은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황하의 세찬 물살에 몸이 부서질 듯 아파온 탓이었다. 다행히 아이가 빠진 곳은 물살이 세차지 않는 테두리. 방금 전까지 황하에 뛰어들기를 망설이던 서문윤은 새하얘진 머리를 한 채 미친 듯이 몸을 놀렸다.

‘제기랄!’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아. 낙마의 충격에 아직도 휩싸인 몸은 관절이 뻣뻣하게 굳고 근육이 저릿하여 제대로 움직이기가 힘들다.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오른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서문윤이 아이를 향해 나아갔다.

“움직이지 말거라!”

“으아앙!”

마침내 물장구치는 어린아이의 통통한 팔을 붙잡고 서문윤이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그는 원래 어린아이에게 다정다감했으나 생사의 기로에서 아이의 버둥거리는 몸이 위협이 된 상황이다. 서문윤은 몇 번을 더 아이에게 소리치다 포기하고 아이를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사투가 이어졌다.

‘몸, 몸이.’

얼마 전까지 병석에 있던 몸. 얼마간 누워만 있어 굳어버린 몸의 상태는 끔찍했다. 옆구리에 낀 아이의 몸도 뻣뻣했으며 허벅지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순덕아! 순덕아아!”

아이 어미의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문윤은 이를 악물었다.

어미의 울음에 마음이 요동쳤다. 서문윤은 어느 순간부터 황하의 물살에 눈물을 흘려보냈다.

아, 어머니.

<네 다리가 정녕 낫지 않는단 말이냐? 아니다. 내가 사람을 불러 모색할 터이니, 너는 걱정 말고 강소성으로 돌아와라.>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는 주검으로 돌아온 외동아들의 시체에 저리 하늘이 무너지듯이 울겠지.

서문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나는. 나는.’

탄식을 삼키며 서문윤이 물살을 가로질렀다. 귓가에 스치는 처절한 울음소리. 품 안에 있는 어린것은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살려 발버둥을 쳤다.

나약한 사람의 심성이란!

서문윤은 그 순간 후회하고야 말았다.

‘살고 싶다.’

심중에 몰아치는 물살은 깊은 한을 머금고 있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을 보며 무어라 생각을 할까?

‘어리석은 서문윤.’

죽음으로 가는 길은 쉬웠으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허나 삶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움직여도 제멋대로 되지 않는구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서문윤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었다.

그리고.

“아, 안 돼!”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마에 흙이 묻은 아낙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몸이 성치 않은 서문윤의 몸이 늘어진 것이다.

“순, 순덕아아!”

처절한 비명이 황하를 쩌렁하게 울리고, 서문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물 아래로 서서히 침잠하는 몸. 서문윤은 눈을 부릅뜨고 목구멍에 차는 물에 꼬르륵댔다. 서문윤이 암전된 시야에 좌절할 때였다.

폐에 흙물이 가득 찬 순간.

첨벙!

허우적거리는 서문윤의 귓가로 누군가 물에 뛰어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악과 희망이 교차하는 어미의 비명. 서문윤은 까무러치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아이를 움켜쥔 서문윤이 허리를 감싸는 팔에 숨을 들이켰다.

단단한 팔이다.

서문윤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새하얀 시야 속 몸을 늘어트렸다.

‘살, 살았구나.’

안도에 찬 마음에 시야가 희미해져 갔다. 서문윤이 그 속에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 * *

정신을 잃은 서문윤이 눈을 떴을 때는 젊은 어미가 아이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흐어어엉, 순덕아! 순덕아아!”

코찔찔이 어린애가 숨을 가쁘게 할딱거렸다. 서문윤은 아이가 싯누런 황하의 물을 먹은 것을 깨닫고 경악하여 소리쳤다.

“아이는 괜찮소?”

“괜찮다.”

칼처럼 단호한 대답에 서문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기이한 기색의 사내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문윤은 그를 마주하는 순간 기묘한 압박감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이, 이자는.’

짧은 소매를 끈으로 묶은 사내.

키는 6척 반보다 조금 더 큰 듯하고 꽤나 두꺼운 하얀 옷에 가려져 있음에도 체구는 넓고 단단하다. 복면으로 가려진 탓에 코 위 얼굴의 일부만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눈빛은 매섭고 차가웠다.

핏기 없는 얼굴을 보며 서문윤이 몸을 굳혔다.

서문윤은 입을 열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선이 주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서늘한 눈이 그를 내려다보는 것에, 서문윤은 서늘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낙엽같이 생긴 두 눈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턱을 잘게 떨었다. 두려움 이상으로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서문윤은 얼어붙었으면서도 그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공허한 눈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강렬한 인상에 압도당한 채로 서문윤은 한참을, 한참을 그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콜록!”

정적을 깬 것은 기침소리였다. 머뭇거리던 서문윤이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비볐다. 그제야 시선을 피하며 서문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감정의 잔여가 몸에 남아 그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손등에 묻어 나오는 흙물을 바라보곤 서문윤은 쓰게 웃고야 말았다.

정말 죽었다가 살아났군.

그리고 그 때였다.

“너는 딱히 살리려 하지 않았는데.”

몹시 낮고 그윽한 목소리다. 서문윤이 크게 눈을 뜨며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곳에서 사내가 저를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은인! 제 아들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멍한 얼굴을 한 서문윤의 시야에 흐릿한 눈을 깜빡이는 어린 순덕이 보였다.

모자와 조금 동떨어진 자리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복면 쓴 사내. 희뿌연 시야 속에서 칼처럼 날카로운 사내의 눈에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꼭 비웃는 것처럼 저를 오만하게 좌시하는 눈. 그를 앞에 두며 서문윤이 침을 삼켰다.

긴장에 얼어붙은 서문윤을 내려다보며 사내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살았군.”

“보셨, 습니까?”

“하늘이란 원래 그 모양이지.”

“으음.”

“죽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안 데려가고 앞길이 밝은 소년을 거두려 하다니. 참으로 영명 정대한 하늘 아니더냐?”

비꼬는 말에 서문윤이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꼭 저를 책망하는 것만 같다. 서문윤은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장면을 보았구나.’

황하에 서서 몸을 던지려 갈등하던 그 순간, 결국 생사의 기로에서 무기력하게 삶을 갈구하던 모습을 들키고야 말았다. 서문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치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다.

치부를 들킨 청년이 수치에 점철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서문윤을 바라보던 사내의 얼굴엔 비릿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

소정의 시간이 흐르고 조롱을 담은 사내의 얼굴이 돌연 싸늘해졌다.

“흥!”

코웃음을 치며 사내가 몸을 홱 돌렸다. 미련이 없는 듯 자리를 빠져나가는 사내.

“엄마, 엄마.”

그가 떠난 자리에 훌쩍이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순덕아. 너 다신 이러면 혼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순덕은 훌쩍 울었다. 자리를 떠나려던 여인이 서문윤을 바라보며 몇 번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답변하지 않았다. 마치 동상처럼 그는 넋을 잃은 채 점이 된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말을 묻던 여인이 눈치를 보며 순덕을 껴안고 떠났다.

마침내 적막만이 가득한 자리. 서문윤이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나는 어이해야 하나.’

이대로 강소성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서문윤으로서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강소성에 가다가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또 황하든 어디 이름 없는 강이든 강변에 넋을 잃고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세찬 물살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삼킨 채로.

‘그렇다면 뭘 어찌해야 되지? 나는?’

그러나 서문윤은 답을 몰라 헤맬 뿐이었다. 그저 오늘 처음 본 사내의 등만을 바라보며 서문윤은 긴 침묵을 지켰다.

한참의 망설임. 그 끝에 청년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명을 받았으면 반드시 빚을 갚는다. 그것은 서문윤의 철칙이었다.

‘일단 은혜를 갚는 것이 먼저겠지.’

서문윤이 절뚝거리며 황급히 사내를 쫒았다.

“잠, 잠시만!”

그는 다친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가까스로 사내의 소매를 붙잡아 매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은인, 제가 보은을 할 수 있게, 윽?”

서문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어?”

그것은 찰나간 일어난 일이었다. 기울어지는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한 채 서문윤이 순식간에 땅바닥을 굴렀다. 기울어진 몸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바닥에 맥없이 떨어지고, 서문윤이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넋을 잃은 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넘어트리게 만든 건 사내의 매정한 손길이었다.

‘지금 내가?’

경악한 청년의 위로 사나운 말이 내리쳤다.

“비키라고 몇 번을 말해!”

서문윤은 그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일, 일반인에게?’

황궁 무관 출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에게 제압당해 흙바닥을 구른 순간이었다. 서문윤은 충격에 몸을 떠는 채 한참을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은 정말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아무리 다리를 잃었더라도 일반인의 손에 이리 쉽게 제압당할 수 있나?

그는 장시간 혼란에 빠져 넋을 잃곤 상황을 부정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팔을 돌려 소매를 뿌리치고 몸을 빠르게 밀치는 손길은 군더더기 없었으며, 지금 서문윤은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서문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였다. 칼처럼 날카로운 눈에 섬뜩한 섬광이 번뜩거렸다.

“너는 정녕 황하에서 죽기 싫어 내게 죽여달라 매달리는 것이냐.”

불현듯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에 서문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아니, 저, 저는.”

변명하려던 서문윤이 돌연 몸을 굳혔다. 사내의 들끓는 시선이 몸에 닿는 순간 두려움이 퍼뜩 들어 그는 스멀거리며 몸을 타오르는 불안감에 침을 삼키고야 말았다. 어쩐지 저 사내의 시선이 몹시 버거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은 그가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몸에 소름이 돋고 순식간에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 얼어붙어 사내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점차 싸늘한 미소가 감도는 그의 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 저는 윽!”

그러나 그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서문윤이 비명을 내뱉으며 오른다리를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이 병신 같은 다리가 또.’

또다시 다리가 문제였다. 낙마의 충격은 몹시 깊었으며 의원은 서문윤의 다리가 완전히 손상되어 평상시에도 통증에 시달릴 것이라 했다. 그리고 서문윤은 지금 뒤틀린 다리에서 퍼져 나가는 통증에 신음하고 있었다.

새삼 병신이 된 다리가 수치스럽다. 귀 끝을 붉게 물들인 채 서문윤이 사내의 시선에서 다리를 숨기려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뒤틀린 관절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통증에 윽, 소리를 흘려야만 했다.

문득 낮게 울리는 신음이 퍼졌다.

‘응?’

서문윤이 놀란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사내의 이상한 기색을 읽곤 숨을 멈추어야 했다.

사내의 복면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으며 호수처럼 고요하던 눈에는 파문이 일렁거렸다. 그저 냉소만이 감돌던 사내의 얼굴은 어쩐지 크게 동요한 듯 보였으며, 그는 서문윤의 다친 발목을 노려보면서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내의 동요에 서문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할 때였다.

“어느 병신이 다리를 이렇게 관리하나!”

분노 어린 고함에 서문윤이 눈을 크게 떴다.

서문윤이 놀라 사내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의 복면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흉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윽!”

변명하려던 서문윤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렀다. 발목을 덥석 붙잡는 손에 고통을 느끼며 서문윤은 경악 어린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무슨, 무슨 짓이야?’

살갗에 닿는 거친 손바닥이 발목을 더듬고 있었다. 사내는 서문윤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커다란 손으로 그의 바짓자락을 과감하게 걷어붙일 뿐이었다. 떨리는 다리는 한눈에 보아도 뒤틀려 있었으며 그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타앙!

부목을 거칠게 뜯어 바닥에 던지고 사내는 새빨갛게 부은 종아리에 손을 뻗었다. 서문윤이 통증에 몸을 움츠렸음에도, 아무 말 없이 커다란 손으로 살갗을 쓰다듬으며 다리를 살폈다.

종아리와 무릎을 더듬던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작정하고 망가트렸군.”

서문윤은 넋을 잃은 채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시선에 아랑곳 않고, 사내는 망설임 없이 손을 놀릴 뿐이었다. 서문윤의 다리를 돌려가며 이곳저곳을 살피는 손길이 과감했다. 손은 복사뼈를 쓸고, 무릎 위를 매만졌으며, 오금 아래를 더듬고, 또 그 위로 향했다.

서문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손길이 허벅지 안쪽에 닿았을 때였다.

“자, 잠시만!”

부드러운 살갗에 거친 손이 닿은 순간 비로소 이성을 되찾은 서문윤이 화들짝 놀라 손 위에 손을 겹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그의 반항은 벌레 떨구듯 손을 내팽개치는 손길에 간단히 막힐 뿐이었다. 서문윤은 또다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내 다리인데?’

그런데 이 과격한 행동은 대체 뭐지?

서문윤이 멍한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제 손을 막은 손길에 짜증이 난 것인지 사내의 굵은 검미가 산처럼 꺾여 있었다. 짜증 어린 얼굴이 몹시 당당하여 서문윤은 말문을 잃고야 말았다.

이건 내 다리인데, 어째 사내의 태도는 그것이 제 다리인 것마냥 거침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망설임 없이 커다란 손이 허벅지 안쪽을 꾸욱 눌렀다.

‘읏.’

서문윤이 얼굴 전체를 홧홧하게 붉히며 신음을 흘렸다. 허벅지의 여린 살이 자극당하고 등골에 치솟는 짜릿하고 간지러운 감각. 아슬아슬한 신음을 흘리며 서문윤이 달아오른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그만하시오!”

이쯤 되면 은인이래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함부로 다리를 만지고 거기에다가 은밀한 부위를 짓누르니 사내의 행동은 도를 지나쳐도 몹시 지나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상한 자극에 신음을 흘렸으니, 서문윤은 수치심에 몸을 떨며 사내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리 은인이라고 한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 뼈가 여러 마디로 부서졌는데 왜 부목을 제대로 하지 않아?”

그러나 서문윤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 무슨?”

“환부가 다 보이는데 무슨 부목이냐. 보아하니 제대로 붙지도 않았는데 왜 몸을 움직이지?”

“…….”

“아예 뼈가 잘못 붙었구나.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다리를 아예 망가트릴 작정이냐?”

서문윤이 멍한 얼굴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 말에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것이었다. 사내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짤막한 한숨을 흘렸다.

묵직한 말이 이어졌다.

“이 다리 때문이냐?”

다리를 붙잡은 손에 힘이 빠졌으나 서문윤은 차마 사내의 손에서 다리를 빼내지 못했다. 또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다리 때문에 저 황하에 몸을 떨어트리려 한 거냐?”

서문윤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예.”

힘겨운 대답이었다. 그 말을 내뱉고 서문윤은 시선을 떨구었다. 사내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잠시간의 침묵. 사내는 적막을 깨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이런 일로 죽을 만큼 세상 힘들 수 있겠지.”

“…….”

“그깟 다리 하나가 목숨 버릴 이유가 될 수 있으리라.”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리 하나에 목숨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서문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굳이 남에 의해 확인사살 당할 필요는 없지 않나?’

사내의 말이 견디기 괴로웠다.

울컥한 서문윤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사내는 그 말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화가 난 청년을 바라보는 고요한 눈. 그는 서문윤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너를 비꼬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놀란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그 말이 거짓인지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의 얼굴에 서린 쓸쓸함을 발견하고 꺾이고야 말았다.

사내는 무척이나 고요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문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사내가 오직 진심만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쩐지 서문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진심이야.’

거대한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황하. 아무리 천하장사라 한들 사람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위대한 자연을 등에 진 사내는, 그러나 몹시 거대해 보였다. 연유 모를 위압감을 느끼고 서문윤은 몸을 움츠렸다. 그것은 공포나 두려움보다야 경외에 가까웠다.

사내의 기세는 더 이상 사납지 않았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고요했다. 그러나 서문윤은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짓누르는 존재감에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평온한 목소리가 흘렀다.

“마음의 고통에 이유가 더 필요할까.”

“저, 저는.”

“그저 힘들고 고통스러울 뿐인 것을 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

“너를 비꼬려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나의 일도 그러했다.

희미하게 흘린 뒷말을 듣지 못했으나 서문윤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요동치는 마음을 품에 안고 청년이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트렸다.

쿵! 쿵!

억눌린 숨이 느릿하게 흐른 순간 누군가 내뱉은 말이 서문윤의 귓가에 어른거렸다.

“집안에 돈이 많으니 재기할 수 있겠군.”

다리 다친 그를 위로하는 말들.

“장부가 이만한 일로 마음이 꺾일 성이냐?”

혹은,

“괜찮다.”

혹은,

“할 수 있다.”

그따위 말들…….

그리고 그를 부순 말.

청년의 입가에 일그러진 웃음이 흘렀다.

‘그렇게 살아 무엇 하라고.’

대충 돈으로 무관을 개업하고, 아니면 글을 배워 말단 관료가 되거나 상인이 되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스물두 해 동안 나는 그리 살지 않았다.’

그들의 위로하는 말이 자신을 모독했다. 망가져버린 다리와 함께 망가져버린 꿈. 그러나 누구도 탓할 수 없어 입을 조개처럼 다물 뿐이었지.

어느 순간 서문윤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아픕니다.”

서문윤이 울며 중얼거렸다.

“마음이 아픕니다.”

독살한 말을 내뱉은 사내 또한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비꼬지 않았으며, 책망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 뿐이었다.

“죽고 싶으냐?”

서문윤이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짧은 침묵.

서문윤은 그저 투명한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으며, 사내는 그를 말없이 좌시할 뿐이었다. 황하가 흐르는 세찬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바람은 그들 사이를 가르며 거친 소리를 흘렸다.

정적을 깨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 다리를 고칠 수 있다.”

서문윤이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였다. 벌려진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을 헐떡이며 서문윤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사내는 침묵 끝에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오로지 나에게 달렸다. 나는 북성(北星)이다.”

그 순간 서문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이름은 황궁의 안에서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허나 그 다리는 하루 이틀 내가 살펴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서문윤의 눈에 희망이 일렁거렸다. 사내는 짤막하게 말을 내뱉었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청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따라가도 됩니까?”

그 말에는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사내는 그러나 간청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날 뿐이었다.

서문윤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내는 천천히 서문윤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사내가 어느덧 점이 된 때였다. 넋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던 서문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절뚝이는 다리로 미친 듯이 달음박질을 쳤다. 절뚝거리는 다리로는 빠른 속력을 낼 수 없었으나 서문윤은 휘청거리는 몸을 하고서도 다리를 놀렸다. 중심을 잃은 몸이 넘어질 때도 있었으나 서문윤은 흙범벅이 된 채 자리에 일어나 또다시 달리고, 또 달렸다.

그의 눈이 야밤의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렸다.

일그러진 서문윤의 얼굴에 감정이 교차한 순간.

“저, 저는! 허억, 헉!”

발걸음이 빠른 사내가 우두커니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내를 따라잡은 서문윤이 뜨거운 숨소리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서문, 서문윤입니다.”

멈칫한 사내의 몸.

서문윤이 몸을 고꾸라트리며 숨을 헐떡였다. 멈추어 선 사내의 등은 움직이지 않았다.

“허억, 허억.”

맑은 타액을 함께 흘리며 서문윤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과 다리에 고통이 번졌으나 서문윤은 그 순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공허한 절망만이 가득 찬 마음에 새롭게 차오르는 빛이 있었다. 그것은 희망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내는 고개를 돌리며 서문윤을 흘긋 바라보았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고요한 눈. 그 순간 서문윤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마치 어둠 속 희미하게 타오르는 촛불을 보는 것처럼, 깜깜한 밤길에 등불을 간절히 바라보는 아이처럼 서문윤은 그를 바라보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매료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 순간 잘 알 것만 같다. 그는 무심한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소름이 오소소 등골을 타고 올랐다. 잠시간 숨 고르기 끝에 서문윤이 격정을 억누르며 새파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은인의 이름은?”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사내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검설린.”

입술 사이로 한 마디 한 마디 나뉜 이름. 말의 울림이 몸을 전율시키고, 서문윤은 탄식을 삼키며 몸을 떨고야 말았다.

북성은 다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뗐다.

당황하던 서문윤은 그의 등을 따라 다시 절뚝이는 다리를 움직였다.

서문윤이 그를 부를 호칭을 찾은 것은 석 달 후의 일이었다.

의로운 길에 함께하고 싶다, 절박하게 매달리며 내뱉은 간청에 검설린이 혀를 차면서 방관한 호칭은 의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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