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51/51)

도국의 대표는 1년 중 한 번 반드시 외유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말이 외유지 포상 휴가 개념이었다. 지난여름 미희가 일주일 이상 길게 휴가를 다녀올 때 세헌은 주말을 제외한 내내 꼬박 일했다.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는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런 건지 올해 연차가 꽤 많이 남아 있던 윤신은, 곧 연말인데 그때 가서 몰아 쓰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적절한 핑계를 대며 휴가를 한꺼번에 신청했다. 여행 날짜는 주말을 껴서 최소한도로 잡았다. 혹시나 직원들이 두 사람의 일정이 겹치는 걸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우려들까지 고려해 갤러리 ‘산사’의 특별 휴관일 및 이경의 휴일과 날짜를 맞췄다. 나머지 빈틈은 탁 비서가 채워 줄 터다.

비행기 안에서 구름 낀 밤하늘을 내다보는 윤신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옆자리에서 태블릿으로 자료를 읽고 있는 세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려다가, 영 제게 관심 없어 보이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뭐 봐요?”

“봐야 하는 거.”

꽤나 불친절한 대답이었다. 입을 슬쩍 내민 윤신은 괜히 그의 기분을 자극하고 싶어졌다. 이럴 때 특효약이 하나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 밤인지라 기내는 어둑어둑했다. 주변에 잠든 사람들이 꽤 있었다. 좌석 간에 거리가 제법 되었는데도 혹시 몰라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선배 이 비행기 기장님 송사해 주신 적 있다고 했죠?”

“응, 예전에.”

“어떤 분이에요? 탁 비서님 말씀이 되게 잘생겼다더라?”

활자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세헌이 느릿하게 옆의 윤신을 돌아봤다. 눈빛이 사나웠다.

윤신은 이제야 겨우 저를 봐 준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반응할 줄 알았다. 아직도 강세헌은 아주, 대단히, 상당히 다루기 어려운 남자지만 적어도 이런 부분에 한해서는 꽤 쉬워졌다. 일부러 질투를 기대하고 떠봤다는 건 이미 걸린 듯했다. 그가 알아채고, 저는 들키는데도 자꾸만 반복하게 되는 걸 보면 역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동물이 맞는 모양이다.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안 궁금해요.”

“그럼 나를 왜 긁는 건데. 한 기장을 죽이고 싶은 거야, 네가 죽고 싶은 거야.”

“둘 다 반대합니다.”

“그럼 한국 항공이 망하는 꼴이 보고 싶어?”

“아, 선밴 싫으면 망하게 하나 보다. 마치…… COP처럼?”

얼마 전. COP의 원 회장은 오너 리스크의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재벌들이 흔히 그러듯 앞에서만 물러나는 체하고 실질적으로는 계속 경영을 하는 눈속임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수 합병을 위한 실사에 들어갈 거라는 증권가발 소문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윤신도 몰랐다. 항설대로 정말 M&A가 성사되는 건지 여부도 알지 못했다. 단지 원 회장의 사퇴가 회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만 짐작됐다. 아마 세헌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대갚음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듯해서였다. 그가 진짜 엽총으로 난사라도 해 버리고 싶었던 건 COP가 아니라 원 회장이었을 테니까.

그는 이런 제 지레짐작들을 모두 읽기라도 한 듯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말려들어 가 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표현한 세헌이 반박했다.

“그건 나 아니라니까.”

“아닌 거 알겠으니까 관심 좀 달라고. 둘이 여행 가는데 한 사람이 일을 하면 난 어떡해요? 딴짓도 좀 하고 그래요.”

명제 자체에는 긍정하는 듯 가만히 시선을 던지던 세헌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의 냉담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은 윤신이 그를 향해 얼굴을 기울이며 너스레를 부렸다. 그러자 귀염 떠는 모습을 지켜봐 주다 결국 못 이기겠다는 양 입꼬리를 올리는 세헌의 모습이 근사했다.

세헌은 종종 그러는 것처럼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옆쪽의 사람들이 고요히 잠들고, 기내 승무원들도 지나다니지 않는 틈을 타 조용히 고개를 숙여서 입 맞추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러고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상체를 바르게 세워 다시 자료를 보는 데 집중했다.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일부러 쓱 내린 윤신이 창가로 다시 눈을 돌렸다.

비행기에서 관찰하는 하늘과 땅은 아름다웠다. 그런 동시에 어둡고, 광막했다. 새카만 허공, 흐릿한 지평선, 그리고 군데군데 반짝이는 불빛들만 한참이나 지속되니 눈이 황홀하긴 한데 왜인지 지루한 감을 지울 수 없었다. 제겐 옆의 세헌이 훨씬 흥미로운 그림이었다. 얼마 못 가 다시 그를 보는 윤신의 눈에 조금 전에는 잠시 뒤로 미뤄 두었던 얼마간의 미심스러움이 깃들었다.

약간, 아주 약간 예감이 안 좋았다.

그래도 설마, 비행기에서 내려서는 모든 시간을 온전히 제게 쓰겠지.

아무리 워커홀릭 강세헌이라도 말이다.

이건 시간이 금보다 비싼 그가 직접 제안해 준 특별한 여정이었다.

“도착해서도 바빠요?”

“가서 안 바쁘려고 지금 보는 거야. 듣고 있으니까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해도 돼.”

“그럼 다행이고.”

소리 죽여 콧노래를 부르던 윤신이 세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왼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게 느껴졌다. 살포시 눈을 감고, 여정에 오르면서 품었던 기대감을 부풀렸다.

도착하면 늦은 시간일 거라 진짜 일정은 내일부터였다. 긴 비행은 체력적인 부담도 초래했다. 오늘 밤은 체크인을 하고, 높은 확률로 호텔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었듯 내일 제일 처음 방문할 곳은 오르세 미술관으로 정했다. 관광지라서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최소한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한국에서보다는 훨씬 적을 터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찾아간 낭만적인 도시에선 둘의 행동도 보다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왼손의 반지를 오른쪽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윤신이 별안간 몸을 틀어 다시 세헌을 보았다.

“로트렉의 ‘침대’ 있잖아요. 기억나요?”

약속한 바대로 귀는 제 쪽에 열어 두고 있던 그는 별말을 다 듣겠다는 듯 곧바로 기막혀했다.

“요지가 뭐야. 너는 기억하고 나는 못 할까 봐? 그 반대여야 맞는 거 아닌가?”

“그 두 여자, 사창가에서 일하는 레즈비언들이었대요.”

“로펌에서 일하는 호모들이 곧 만나러 갈 거라고 전해 줘. 볼만하겠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은 윤신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언젠 자기 호모 아니라더니.

담담한 말로 대형 폭탄을 던져 놓고 동요라곤 하나 없는 저 미끈한 옆모습 때문에 더 즐거워졌다. 윤신은 가뜩이나 속삭이는 것처럼 조용조용히 뱉어 내던 목소리를 한껏 더 낮춰 덧붙였다.

“그때 그 두 사람. 잠들기 전에 뭐 했는지 알아요?”

“글쎄. 오늘은 어떤 체위로 할지 고민했겠지. 동? 서? 너는 어제 전방위로 했고.”

꼬박꼬박 대꾸는 하는데, 제대로 된 대답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는 입술을 깨무는 거로 해결이 안 될 것 같았던 윤신이 무릎을 손으로 꽉 꼬집어 웃음을 겨우 집어삼켰다. 호흡이 정리될 때까지 세헌을 지켜보다 보니, 일에 집중하느라 날림으로 대꾸하는 건 아닌 듯했다. 원래 세헌은 주의를 기울이고 싶어서, 혹은 능률을 최대한 높이고 싶어서 한 번에 한 가지씩 처리할 뿐,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거뜬히 해내는 데에도 능했다. 이쯤 되니 자신도 그의 반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도 조금 들뜬 걸까.

“……키스했을 거예요. 그 그림 연작이거든요. 다른 도록에서 키스하는 거 봤어요.”

키스라는 단어가 그의 귓전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니면 단지 한 번 더 쳐다보고 싶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옆의 윤신을 돌아본 세헌이 고개를 숙였다. 연인의 눈동자 속 폭풍이 분명히 바라는 게 있었고, 그는 그걸 모른 척하는 사람이 못 됐다. 그들은 다시금 남들 눈을 피해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수 분 전 했던 것보다 길게 살결을 맞댔다.

윤신은 이 키스가 유독 가슴 떨렸다. 사방이 어둑어둑하고, 드문드문 주황 빛깔의 조명만 그 적막한 사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 은은한 어둠의 한쪽 구석에서 오직 서로에게만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한껏 주파수를 낮춰 은밀한 대화를 속삭이는 중이었다. 덕분에 괜히 집 근처 가로등 아래에서 부모님 몰래 키스하는 고등학생이 된 듯해 수줍어졌다.

이윽고 차분히 살결을 떼어 낸 그가 즐거운 상상을 하느라 방심한 윤신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윽.”

최대한 소리 죽여 신음한 윤신이 얼얼한 통증이 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세헌은 그 모습까지 섬세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수 초쯤 지난 듯했다. 결국 태블릿을 옆으로 치운 그가 몸을 창가 쪽을 향해 비스듬히 틀어 앉았다. 반대편에서 보면 윤신이 죄다 가려지는 절묘한 자세였다. 그의 어깨 너머를 슬쩍 건너본 윤신도 세헌이 앉은 방향으로 몸을 비스듬히 해 그를 마주 보곤, 시트에 좀 더 몸을 담그듯이 기댔다.

“선배 불어 할 줄 안다면서요. 제가 프랑스 안 가 봤다고 했더니 탁 비서님이 말해 주셨어요.”

윤신의 뺨을 어루만져 주던 그가 믿기지 않아 하며 반문했다.

“못 하는 사람도 있어?”

“……일단 저는 못 해요. 아니, 보통 못 하지 않나?”

“너 거기서 길 잃어버리면 큰일 나겠다. 나 잘 쫓아다녀.”

“잘하고 자시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프랑스어 유창하다는 말 한 적 없잖아요.”

“안 물어봤잖아. 그리고 그냥 조금, 일상 대화만 되는 정도야.”

강세헌의 영어가 모국어 수준이라는 건 거기서 자격증까지 초고속으로 땄으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도 적당한 수준의 회화를 할 줄 알았다. 넌지시 물으니 요새는 스트레스받으면 판례를 읽지만 변호사가 되기 전엔 외국어를 익히는 일도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당시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필요할지도 몰라서 그랬다는 얘길 전해 듣곤 너무 지독하리만치 칼 같아서 그답다 싶었다.

그는 성취에 대한 기준치가 유독 높은 편이었다. 스스로 ‘조금’이라고 표현했으니 다른 언어들처럼 현지인들과 일상적인 회화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한 수준일 게 뻔했다.

“탁 실장님이나 송 대표님은 아는데 저는 아직 모르는 거, 또 있어요?”

그는 의외로 이 물음에 묵중히 숙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이젠 확실히 네가 나에 대해 제일 많이 알긴 하는데, 둘 다 워낙 음흉한 인간들이라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장담은 못 하겠다.”

“그럼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빨리 더 생각해 봐요.”

“너야말로 궁금한 거 생기면 속에 담아 두지 말고 바로 물어봐. 넌 들을 자격 있어. 네가 들으면 다치는 얘기 말곤 최대한 비밀 안 만들 거야. 같이 살잔 얘긴, 앞으로는 물론이고 내 이전 삶까지 너하고 공유하겠다는 뜻이야.”

그는 이렇게 이따금 사람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데 능했다. 살짝 달아오른 뺨을 실룩거린 윤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면에 고스란히 다 드러내곤 온몸의 힘을 빼 버렸다. 잠시간 말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걸 지켜봐 주다 이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는 세헌 덕분에 일순 꿈결 속에 빠져 허우적대던 자신도 이내 현실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COP…….”

“거기까지만 해라. 나 아니야.”

“물어보라면서.”

“그래서 답해 주는 거야. 그럼 믿어야지? 게다가 최대한 말할 거라고 했지 전부라곤 안 했어.”

성가실 법한 질문에 일일이 장난스럽게 응수하는 그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긴가민가했는데 이쯤 되니 확실히 알겠다. 감정의 증폭이 크지 않은 저 남자도 이 여행이 적잖게 즐거운 것 같았다. 어쩐지 오늘은 그의 언어로 확인 도장을 받고 싶은 기분이라 일부러 물었다.

“선배 지금 기분 좋아 보여요.”

아니나 다를까.

그도 부정하지 않았다.

“좋아. 너랑 같이 있잖아.”

설렘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현재 두 사람이 엇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여행에 대한 소박한 기대였다.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 정도로 치환해도 맞을 터다.

몇 번이나 몰래 키스해 놓고 그들은 또 서로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으나 때마침 승무원이 칵핏 방면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내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놀란 윤신이 얼른 허리를 정자세로 세우고 가방에서 허겁지겁 도록을 꺼내는 사이, 세헌은 뻔뻔한 태도로 태블릿을 다시 손에 쥐었다.

숙면 중인 승객들이 깰까 싶었던지 승무원은 복도를 쭉 둘러보며 지나쳐 갔다. 각자 할 일을 하던 두 사람은 인기척이 이코노미석 방면으로 멀어지는 걸 확인하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아래로 숙여 쪽, 입 맞췄다. 그러고는 코끝을 맞대고 조금 웃었다.

* * *

이건 반드시 진지하게 숙고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별한 의미의 여행을 와서, 호텔 스위트룸의 침실 티 테이블에 앉아, 놀랍게도 첫날부터 업무를 보는 저 남자의 처분에 대해서 말이다. 온갖 서류들과 태블릿 PC를 펼쳐 놓고 통화 중인 세헌은 방금 전 씻고 나온 그대로여서 배스 가운만 가볍게 걸치고 있었다.

설마 했다.

인천발 비행기 안에서도 잠시 우려는 했지만 그가 부인해 주었기에 정말이지 설마 했다.

여행지 호텔에서도 업무에 전념하는 강세헌이라니.

너무 그다워서 뭐라 따져 말할 힘도 안 났다.

“그쪽이랑 접촉해 봤어? 하아, 송 변. 주가가 오르면 너무 싸게 팔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해. 이 건은 소송으로 번지면 절대 안 돼. 계약 종결은 예정대로 진행되게 만들어.”

더없이 골치 아파 보이는 세헌이 수화기 건너편의 미희를 책망했다.

“어떡하긴, 설득이 안 되면 협박을 해야지. 일단 TF 팀장한테…… 뭐? 지금 장난해? 일을 좆같이 해 놓고 아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대? 잘리기 싫으면 당장 튀어오라고 연락 넣어. 이딴 식이면 곤란해.”

그가 하는 말들로 미루어 올해 초 회사법 팀이 발족한 프로젝트 성 TF 팀에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했다. 너무 깊게 알고 싶진 않았던 윤신이 와인 잔에 검붉은 색 포도주를 4분의 1쯤 콸콸 채우고 그걸 훅, 단번에 마셨다. 씁쓸한 뒷맛이 입 안에 가득 맴돌았다. 매우 야속해하는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세헌의 뒤쪽에 있는 협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위에 엉덩이를 어설프게 걸치고 앉아 통화 중인 그의 뒤태를 주시했다. 위급한 상황이긴 한 모양인지 뒷모습마저 짜증 나 보였다.

앞에서 얼쩡거리던 인영이 뒤로 사라지자 안달이 좀 난 건지 세헌이 후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짧게 갈등하긴 했지만 윤신은 한번 봐주는 셈 치고 몸을 일으켰다. 수 분 전 미희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헌은 비행기 안에서 했던 말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으니, 아직은 수용 범위였다. 그의 옆으로 다가서자, 근접해진 순간 허리를 쑥 잡아당겨 허벅지 위에 모로 앉힌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팀장 선임 단계부터 누누이 이 인수전 아무한테나 맡기면 안 된다고 얘기했잖아. 그 회장 귀가 습자지 같은 사람이라 여기저기 휘둘릴 거 뻔한데, 이 건은 끝까지 긴장 놓치면 안 된다고. 하아, 알겠어. 일단 어디라고? 그쪽에서 선임한 펌. 아, 거기. 소송 전문 로펌이군.”

사각사각.

한 손으로 몇 글자 적고 펜을 내던진 그가 윤신의 가운 안으로 손을 쑥 넣었다. 이쪽도 알몸에 나이트가운만 걸치고 있는 상태여서 그의 커다란 손이 금세 맨살에 닿았다. 세헌은 구태여 들여다보지 않고도 자신이 가장 잘 느끼는 자리를 거침없이 찾아냈다. 단단하고 곧은 검지 끝을 세워서, 긴장으로 바들거리는 몸 이곳저곳을 쭉 훑어 내렸다.

“흡.”

목부터 어깻죽지를 타고 내려온 손이 유두를 둥그렇게 굴렸다. 흠칫한 윤신이 입술을 꽉 깨물면서 교성을 간신히 억눌러 삼켰다. 세헌은 아는지 모르는지 뾰족해진 젖꼭지를 잠시 괴롭히나 싶더니 금세 흉통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하강하는 것처럼 내려간 그의 손끝은 복부에서 멈췄다. 배꼽 주변부를 간지럽히는 것처럼 더듬다가, 또 윤신이 겨우 적응하려는 찰나 가랑이 사이로 진입했다.

부드러운 음모를 손가락에 걸어 몇 번 들춰 대던 그가 마침내 아득한 장소에 다다랐다. 그 순간. 예열하는 일도 없이 바로 정중앙을 향해 진입한 그의 살결이 윤신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흐읏.”

끝내 윤신의 입에서 교성이 터졌다. 새된 소리가 먼 곳에 있는 미희에게까지 전달될까 봐 두 손으로 입을 턱, 틀어막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게 최선이었다. 윤신이 테이블 위에 상체를 기대다시피 하면서 신음을 참자, 세헌이 내친김에 손아귀에 있는 음경을 능숙하게 주물럭거리면서 발기되도록 종용했다.

애무하는 그의 손바닥도, 유린당하는 윤신의 성기도 마찰열이 일어 점점 달아올랐다. 만지다 보니 그도 서서히 흥분되는지 숨소리가 미세하게 가빠졌다.

“알겠어. 명함 나한테 보내 놔. 내가 직접 통화해 보지. 그래. 또 뭐. 아냐, 다시 걸지 말고 그냥 한꺼번에 해.”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던 그가 멈칫했다. 상대방이 대화를 이대로 종결하지 못할 만한 화두를 던진 듯했다. 심지어 윤신의 성기를 거침없이 조몰락대던 손의 움직임마저 잠시 멈췄을 정도였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펌 내부의 중요한 일임이 분명했다.

이런 날까지 ‘도국의 강세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그가 괘씸해진 윤신이 세헌의 가운 밑단을 걷었다. 연달아 자세를 고쳐 그의 딴딴한 허벅지 한쪽에 가랑이를 벌리고 철퍼덕 걸터앉았다. 그때까지도 세헌은 저를 다리 위에 얹은 그대로 통화 삼매경이었다.

“하아, 그래? 잘못 키운 자식은 대체로 발목을 잡지. 차라리 지금 터진 게 다행일지도. 그럼 차안으로 가야겠군. 아냐. 기업법 연구소 초대 소장이야. 신중하게 가는 게 나아. 응, 직전에 선관위 위원장이면 행보가 괜찮아. 그건 메일로 보내 둬. 일단 추가로 검토하고, 귀국하면 내가 직접 만나 보…… 읏.”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세헌이 몸을 튕기는 것처럼 요란하게 움찔했다. 동요가 적은 그에게서 보기 드문 반응이었다. 황망해하던 그는 제 왼쪽 다리를 하체로 감싸듯이 앉아 탄탄한 살결 위에 회음 부위를 문지르는 윤신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몸을 들썩거릴 때마다 근육 잡힌 쫀쫀한 살갗에 부드러운 회음의 피부 면적은 물론이고 음낭, 성기의 뿌리, 그리고 귀두까지 아슬아슬한 빈도로 비벼졌다.

윤신은 휴대폰 너머로 제 신음이 새어 나갈까 봐 여전히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였다. 이 상황을 미희에게 들킬까 우려하면서도 움직이는 걸 멈추진 않았다. 상반신을 테이블 위에 한껏 기울인 상태로 마치 세헌의 다리가 야한 장난감인 것처럼 하체를 치댔다.

쓰윽, 느릿하게 회음과 성기를 문대는 순간 ‘철썩’ 하고 저속한 효과음이 일었다. 곤두서 있던 성기가 그의 허벅지를 체벌하는 것처럼 내리친 것이다.

그걸 지켜보는 세헌의 깊은 눈동자에 기막혀하는 기색과 당장 날뛰고 싶어 하는 충동이 정확히 반반씩 섞였다. 휴대폰을 쥔 손에 미친 듯이 힘을 준 그가 미희의 말을 가까스로 마저 들었다. 대꾸하는 목소리는 한계치까지 푹 잠겨 턱없이 음습한 음성이었다.

“……그래. 내가 만나 볼게. 할 얘기 끝났지. 끊어.”

타악. 휴대폰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은 그가 제 다리 위에서 어설픈 자위의 여운으로 허벅지를 떨어 대는 윤신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안은 채로 얼마간 걷나 싶더니 가까운 침대 위로 마른 몸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털썩!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추락하면서 윤신의 가운이 양옆으로 확 벌어졌다. 세헌은 반쯤 풀린 매듭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과 동시에 수줍게 드러난 알몸 위에 올라탔다. 밝게 켜 둔 불빛이 그들을 선명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도윤신, 내가 네 장난감이야?”

머리를 뒤로 젖히는 것처럼 시트에 뒤통수를 문지른 윤신이 한껏 늘어져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게 누가 여행 와서 일하래요?”

“5분 정돈 기다려 줄 수도 있잖아. 저게 얼마짜리 M&A인지 알아?”

“선밴 외유 간 송 대표님한테 전화 안 했었잖아요. 선배도 받아 주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를 자위 도구로 써 놓고 반성하는 기미도 없다, 이건가?”

“사정에 성공해야 자위 도구죠. 선밴 그냥……. 선배죠.”

나름대로 여유 있게 들어 주다 돌연 싸늘한 표정이 된 그가 음산하게 되물었다.

“모욕적이군. 진심이야?”

“제 입으로 그걸 변호사 앞에서 인정할 만큼 법에 문외한은 아니라서요.”

“그 말 후회할 텐데.”

“글쎄요. 후회 잘 안 하는 편이거든요.”

대답 끝에 윤신이 꽤 통쾌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되바라지게 직시했다. 세헌은 그 대찬 얼굴을 정통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순간, 그의 또렷한 이목구비 위에 평소 자주 보기 어려운 짓궂은 표정이 스쳤다. 계속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윤신은 명확히 포착할 수 있었다.

“어…… 어, 선배 표정이 이상한데?”

“이상하긴 뭐가. 그렇게 나한테 비비고 싶었어?”

“어…… 점점 더 이상한데…….”

“알겠어. 비비게 해 줄게. 쌀 때까지 문질러. 이리 와.”

일순 윤신은 진심으로 공포감이 들었다.

‘지금 가면 나 죽을 거 같은데.’

일부러 도발해 놓고도 막상 그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완전히 겁에 질리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곤 뒤로 몸을 물렸다. 그 바람에 아래 깔려 있다시피 하던 얇은 가운이 흐트러졌다. 세헌은 거슬린다는 듯이 그걸 주워서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얼떨결에 완전한 의미의 나신이 된 윤신이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제 가운까지 나란히 탈의해 어딘가로 대충 날려 버린 세헌이 침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작심한 듯 도망자의 골반을 단단히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더는 달아나지 못하도록 강하게 붙든 상태로 제 탄탄한 허벅지 위에 자빠지게 만들었다.

거부할 틈 같은 건 없었다. 그대로 침대의 헤드 방향으로 풀썩 드러누운 그가 윤신의 몸을 팔 힘만으로 제 복부까지 끌어 올렸다.

“어? 잠깐, 읏.”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윤신이 두 팔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짚으려 했다. 그러나 세헌이 그것도 용인해 주지 않았다. 연이어 기승위로 삽입할 때의 자세가 되어 당황한 포로의 골반을 좀 더, 좀 더, 제 상박 쪽으로 끌어당겼다.

쓰윽. 쓱.

둔부와 회음 부위, 성기까지 모조리 세헌의 근육 잡힌 가슴팍과 도드라진 쇄골에 노골적으로 문질러지자, 반쯤 발기해 있던 윤신의 음경이 더욱 단단해졌다. 어느 틈에 그의 어딘가를 잡기 애매한 위치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세헌의 머리 위로 양팔을 뻗었다. 떨리는 두 손을 이용해 침대 헤드를 잡으니 그가 칭찬하듯 양쪽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가득 움켜쥐는 거였다.

“하윽.”

“하아…….”

둘의 호흡 소리가 거칠어졌다.

어느 틈에 사냥감은 포획 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세헌의 턱에 꼿꼿하게 선 윤신의 선단이 닿았다. 그 순간 윤신은 제 걸 그가 빨아 주려는 목적은 아니었을까 희망적인 사고 회로를 돌려봤다. 물론 그 꿈은 삽시간에 산산조각 났다.

“더 와야지. 와서 앉아.”

“어, 어딜 가요.”

“올라와.”

“그러니까 어딜?”

“뭐 해, 올라타라는데.”

이보다 위는 그의 얼굴뿐이었다. 윤신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며 거부했다.

“그건 싫, 싫어요. 안 해요.”

“아, 전에 네가 섹스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 그거 지금 알려 줄게.”

“잠…… 하윽!”

안정적인 자세로 누운 그는 매끈한 얼굴 위에 윤신의 하반신을 강제로 끌어다 앉혔다. 그뿐만 아니라 붙들고 있는 골반을 꾸욱 아래로 짓눌러 민감해진 회음 부위에 제 안면 윤곽이 고스란히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아, 제발, 제…… 아!”

콧대의 뾰족한 촉감과 물컹한 입술의 감각 따위를 한꺼번에 느끼고 기겁한 윤신이 일어나려고 했으나, 세헌의 팔 힘이 원체 강력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움직이기가 곤란한데 하체가 뻣뻣하게 약이 올라 있어서 다리에 힘이 자꾸 풀리기까지 했다.

이건 그의 허벅지에 자의로 하반신을 비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몹시 곤혹스러워진 윤신은 일단 급한 대로 침대 헤드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반작용을 통해 최대한 하체를 허공으로 들어 올려 그의 얼굴에 제 회음이 닿지 않게 하려 했다. 다만, 분리되려는 기미를 알아챈 세헌이 더욱 집요하게 얼굴 위에 주저앉게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역효과였다.

그는 윤신의 골반을 앞뒤로 억지로 움직이게 하면서 부어오른 살결이 제 온 얼굴을 쓸도록 종용했다.

“아……. 아! 아…….”

보들보들한 회음의 살갗과 음낭의 표피들이 그의 속눈썹이 긴 눈두덩을 거쳐 오뚝하게 솟은 콧등, 그리고 은근슬쩍 새빨간 혀를 내미는 촉촉한 입술 틈새까지 모조리 마찰했다.

차라리 불이라도 소등했으면 나았을까. 숱하게 봐 온 서로의 알몸인데도 밝은 빛 아래에서 몇 배로 더 부끄러운 건 왜인지 모르겠다. 환한 불빛 아래 그에게 의도적으로 능욕당하고 있자니 이 저속하고 외설스러운 감각 때문에 윤신은 혼이 절로 나갈 지경이었다.

“흐으, 부, 불이라도 꺼 주면 안, 안 돼요?”

“후우, 안 되겠는데. 이 자세 좋네. 구멍이 잘 보여.”

“으응? 읏!”

“더 제대로 문질러. 비싼 장난감은 제대로 써먹어야지.”

정말 그냥 투정 섞인 도발만 아주 살짝 하려던 거였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곤 짐작 못 했다.

진심으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매일매일 보는 얼굴에 이런 짓을 하게 만들다니. 그의 잘생긴 얼굴은 관상용이다. 그리고 감상용이었다. 저 얼굴을 숨 막힐 정도로 좋아해서 평소 얼마나 자주 쳐다보는데…….

한동안은 마주칠 때마다 오늘 일이 떠오를 것이다.

게다가 그의 저질스러운 음담으로 귀까지 함께 더럽혀지고 있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선배, 읏, 으응, 흐으…….”

침대 헤드를 잡은 윤신의 두 팔이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부들부들 떨렸다. 아까부터 후들거리던 두 다리도 중심을 제대로 못 잡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차마 완전히 세헌에게 모든 하중을 의탁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창피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의 얼굴을 제 회음을 이용해 중력으로 내리누르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일이 거기까지 치닫는다면 창피해서 이 여행 내내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는 이쪽이 얼마만큼 수치스러워하는지 계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점점 더 직접적으로, 또 노골적으로 굴었다. 처음에는 얼굴의 피부와 이목구비의 골격만을 느끼게 하더니, 슬슬 콧잔등으로 음낭을 찌르거나, 구멍에 하관이 마찰했을 때 입을 열어 혀끝을 이용해 은근슬쩍 입구를 쑤셨다. 한겨울에 알몸으로 내쫓긴 아이처럼 오들오들 떨던 윤신이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이제 그, 그만하고 그냥 넣어요…….”

“내가 감히 중요한 날에 5분씩이나 너를 방치했잖아. 난 반성할 필요가 있어.”

물론, 그에게 반성하는 기미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읏, 제발, 제발,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냥 넣어…….”

그가 선사하는 야릇하고도 짜릿한 감각이 몇 곱절의 자극이 되어 한꺼번에 몰아쳤다. 덕분에 아직 세헌이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은 성기의 기둥마저 점점 한계치까지 내몰렸다.

“아니, 난 미안해서 안 되겠어.”

뭘 위한 사과인지 모르겠다. 영혼 없이 미안해한 그는 다시 처음처럼 윤신의 하체를 얼굴에 문질러 댔다. 언제 코끝으로 찌르고, 혀로 압박했냐는 듯 회음이 안면 이곳저곳에 닿을 수 있도록 차근히 비볐다. 이 행위는 저만 미쳐 돌게 만드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서서히 세헌 또한 달아올라 숨 가빠하는 게 느껴졌다. 보통은 입술이나 뺨, 귓전 같은 다른 무난한 곳에 그의 숨결이 닿는 편인데 지금은 오로지 사타구니 사이에서 그게 여실히 느껴져서 창피함이 최대치를 찍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윤신이 하는 수 없이 그를 걷어차는 극단적인 방법이라도 써야 하나 갈등하던 찰나였다. 또 한 번 그의 행위가 미묘하게 양상을 달리했다.

세헌은 흔들리는 양쪽 골반을 고쳐 쥐어 단단하게 지탱하고는, 그대로 방아를 찧는 것처럼 몇 번 얼굴 위에 윤신의 하체가 짓눌리게 내리쳤다.

‘악! 미쳤…….’

온 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벌게진 윤신은 속으로 비명 섞인 신음을 겨우 삼켰다.

그의 팔 힘을 통해 제 하체가 강제로 몇 번이고 떠 들렸다. 꾸욱, 꾸욱. 몸이 들썩거릴 때마다 섬약한 피부들에 그의 얼굴이 뭉개지며 나는 마찰음이 차라리 이대로 까무러쳐지고 싶을 정도로 상스러웠다.

기겁한 나머지 자지러지는 호흡을 몇 번이고 다시 목구멍에 욱여넣었다.

“읏, 흐읏, 읍!”

둔부가 그의 얼굴 이곳저곳에서 튕기면서 이미 빳빳해진 성기도 자연히 함께 들썩거렸다. 주인의 속도 모르고 예민해진 음경이 세헌의 얼굴과 맞부딪혔다. 그는 그때마다 온 살결을 뭉근하게 비비고, 또 비벼 애무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꾸욱. 흉포한 성기를 내부에 삽입했을 때처럼 완전히 윤신의 허리를 얼굴 위에 짓누른 세헌이 혀끝을 세웠다. 그는 긴 여정을 하듯 음낭에서 시작해 구멍의 초입까지, 걸신이라도 들린 양 요란하게 핥았다. 덕분에 척척한 살덩이가 보들보들한 맨살에 부대끼면서 끊임없이 천박한 소리가 일었다. 질펀한 애무로 상대의 정신을 나가게 만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 싫어, 선배, 나 이거 싫어!”

윤신이 금세 엉망이 되어 온몸으로 헐떡거렸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 제가 느끼고 있는 게 너무 창피해서 머릿속이 찢어진 종이처럼 너덜거렸다. 거부하는데도 그는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도리어 더 고집스럽게 굴었다. 쪼개듯이 두 손으로 볼기를 벌린 그가 입구에 혀를 밀어 넣고 저질스레 쪽쪽 빨았다. 일부러 더 음란한 파장을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얼굴이 완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윤신이 저항의 ‘저’도 실행하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수치심이 한계치에 다다르면 무엇도 극복하기 어려워졌다.

그냥 놓아 버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끝내 윤신은 지은 죄 없이도 절실하게 사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 잘못했어, 잘못했어, 쌀 거 같……. 응? 이제 그만해……!”

개의치 않고 혀끝을 내벽에 넣어 넓히듯이 굴리던 그가 양쪽 볼기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윽. 먹히는 탄성을 내지른 윤신이 결국 온몸의 힘을 풀고 세헌에게 모든 걸 내맡겼다. 요의가 차올랐다. 절정에 임박했음이 하반신의 떨림으로 전이됐다.

더는 못 견디겠다.

“아……! 아흑.”

훅, 연신 힘을 싣고 있던 하체가 노곤하게 풀어지면서 쿠퍼액이 쏟아졌다. 연달아 희뿌연 정액이 헤드의 주변부에 흩어지듯 퍼졌다.

사정할 때의 신음과 흐느낌 소리를 포착한 그도 그제야 여린 내부에서 살덩이를 빼냈다. 쪽, 소리가 나도록 음낭에 키스하더니 손힘으로 윤신의 허벅지를 받쳐 드는 건 일종의 아량일지도 모른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세헌의 손이 안정적으로 지탱했다. 곧이어 가슴팍쯤으로 옮겨 앉혀 주는 손길이 퍽 상냥했다. 헤드를 잡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인 윤신은 차마 너무 창피해서 계속 쳐다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그의 얼굴을 뒤늦게 내려다봤다. 가쁜 숨을 내쉬며 다소 원망스러운 시선을 딸려 보내니 그가 천연덕스레 눈썹을 흘긋해 보였다.

“제품에는 만족했어?”

“사디스트.”

“사용 후기 써야지. 구멍 빨리면서 사정했잖아. 흡착과 진동 기능이 좋다고 써.”

“나쁜 새끼…….”

몹시 얄미워하며 내려다보자, 그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응수해 왔다.

“아직도 화가 났나 보네. 더 할까? 그래, 난 더 반성해야지.”

“아뇨! 취소. 취소할게요. 잘못했어요.”

득달같이 거부한 윤신이 설혹 그가 못 들은 체할까 봐 손도 마구 내저었다. 명백히 승기를 잡은 세헌이 우아한 어투로 물었다.

“그럼 화 다 풀린 건가?”

“화난 거 아니에요. 여기까지 와서 선배가 나 아닌 딴 사람하고 말 섞는 게 싫었던 거지.”

잘 알고 있다는 듯 눈짓한 세헌이 윤신의 몸을 제 복부쯤으로 더 끌어 내리곤 상체를 일으켰다. 연달아 자세를 고친 그는 제 위의 윤신을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그러고는 뼈가 도드라진 등에 제 몸을 한껏 기울여 귓전에 마저 속닥거렸다.

“나 너하고 할 말 많아.”

“…….”

“우리 대화는 일단 몸으로 시작할까. 어때.”

이미 절찬리에 그러는 중인 거 아닌가 싶었다.

고개를 돌려 뒤의 그를 힐끗 본 윤신이 입에 쪽, 입 맞추는 것으로 답했다.

삽입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세헌은 급하게 손가락을 세워 조금 전까지 혀끝으로 유린했던 밀부에 욱여넣었다. 부드러운 내부는 그를 집어삼킬 듯이 쫀쫀하게 감쌌다. 푹푹 찔러 박을 때마다 깊숙한 곳까지 순리대로 받아들였다.

익숙한 자리를 찾아 거침없이 당도한 그의 손가락이 오돌토돌한 전립선 위를 능란하게 찔러 댔다. 이미 흥분한 세헌으로선 당장 삽입해서 허리를 흔들어 대도 부족할 지경이었으나, 제 성기 직경을 고려하면 공간을 어느 정도 만들긴 해야 했다. 덕분에 둘 다 괴로웠다. 그나마 한 차례 사정한 윤신은 형편이 나았다. 대신 그가 용의주도하게 찔러 줄 때마다 다시금 반응했다. 신음이 절로 터지면서 정액으로 번들번들해진 성기가 도로 딱딱하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흐윽. 읏! 읏!”

꾸욱. 손끝으로 눌러서 내부의 공간을 만드는 세헌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계속 윤신을 괴롭히는 데 전념하고 있느라 미뤄 두었던 그의 흥분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아 곤란했다. 팽팽하게 강직된 성기가 꿈틀거릴 때마다 융기한 핏줄들이 함께 꾸부러졌다. 후우, 깊게 심호흡하면서 내벽을 넓힌 그가 예정보다 이르게 손가락을 쑥 빼내고 제 허리를 윤신의 둔부에 맞췄다.

그는 협탁 위의 윤활제를 끌어다가 맞닿은 둔부와 제 성기 위에 흠뻑 뿌렸다. 촉촉하면서 미끄덩한 그 액체가 골고루 펴 발리도록 기둥을 엉덩이 골 사이에 밀어 넣었다, 빼냈다 하면서 넓게 도포했다. 그 촉감만으로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여실히 짐작한 윤신이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짐승이 교미할 때처럼 윤신의 등에 바짝 달라붙었다.

꽈악. 각자의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포개는 건 신호라고 봐도 좋았다.

제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을 발견한 윤신의 귀가 빨개졌다.

이는 언제부턴가 생긴 세헌의 섹스 시 습관이었다.

“선배 요즘 이렇게 하는 거 좋아하더라.”

세헌은 그 달아오른 귓바퀴에 쪽, 하고 입 맞추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답했다.

“맞아, 나 너 좋아해.”

“……!”

느닷없는 고백에 놀란 윤신이 허리를 잘게 떨었다.

조금 전 본 얼굴을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같이 있는데도, 심지어 이렇게 최근접 거리에서 몸을 겹치고 있는데도 그가 그리웠다. 초조해진 나머지 고개를 도로 꺾어 뒤의 세헌을 마주 보려던 찰나였다. 그가 곧바로 귀두를 밀부에 푹 찔러 넣는 바람에 시도에 그쳤다.

삽입 전 충격을 완화해 주기 위해서인지, 관심을 다른 데 돌리려 달콤한 말로 정신을 팔리게 하는 작은 배려이자 심술도 익숙해졌다. 다만 알면서도 왜 번번이 또 당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흐으.

입술을 꽉 깨물어 신음을 참은 윤신이 고개를 떨어뜨리듯이 숙였다. 동시에 단박에 뚫고 들어오는 그의 것을 감당해 내며 사지에 힘을 실었다.

아무리 안을 풀어 주어도 그의 거대한 직경을 담기는 어차피 모자랐다. 바로 그 이유로 세헌은 웬만해선 한 번에 최대한 깊이 넣는 걸 선호했다. 이를 잘 기억하는 내밀한 자리의 점막들이 온 체중을 실어 진입하는 그의 성기를 물처럼 면밀히 감쌌다. 얼마나 사납게 짓이겨 댈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기꺼이 환영하면서 흥분해서 난리를 피웠다. 덕분에 제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았다. 윤신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끙끙거리기만 하자, 그가 이참에 마저 끝내 버릴 기세로 남은 반 정도를 마저 쑤셔 박았다.

퍼억!

마치 쫀득한 살결을 찢을 기세로, 약이 바짝 오른 음경이 투박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눈자위가 벌게지도록 첫 진입의 고통을 참던 윤신의 입에서도 결국 소리가 샜다.

“하윽! 너무 커……! 아파!”

구역질할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자, 세헌이 잘 참았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목덜미 이곳저곳에 정성을 다해 키스했다. 윤활제를 발라 미끄덩해진 성기가 내부에 무사히 안착했다. 그는 너무 놀라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앞뒤로 몇 번, 들락, 날락하면서 최대한 느긋하게 피스톤질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차진 살결에 제 살덩이를 뭉개려는 것처럼 서서히 힘을 싣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미 머리끝까지 흥분한 상태였던 윤신은 눈앞이 새까매지는 착시마저 일었다. 얼굴은 한참 전부터 벌겠다. 숨이 벅차서 헉헉거리는 과호흡 상태 또한 계속 이어졌다. 그의 것이 전립선 위에 꽂히듯 지나칠 때마다 혈관이 팽창하고, 세포들이 폭주하는 느낌이었다.

“흣! 아! 너무 깊게 넣, 넣지 마요……. 아파, 그리고…… 나 또 쌀 거 같아…….”

고통이 큰가? 아니면 쾌감이 더 큰가?

조금만 더 이성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면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런 모든 사고력이 스러졌다. 그저 두 가지 다 지금 자신이 오롯이 느끼고 있다는 것만 알 따름이었다.

세헌이 과격하게 박아 대는 대로 흔들리던 윤신이 한쪽 손을 후방으로 뻗었다. 그의 탄탄한 허리를 잡고 살살 들어와 달라는 의사를 전했다. 자꾸 강렬한 자극이 눈앞에서 불꽃 튀듯 이어져서 참아 보지도 못하고 맥 빠지게 사정해 버릴 것 같았다. 물론 강세헌이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보다 광포해지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낭창하게 흔들리는 허리를 보며 시각이 자극당한 그는 윤신이 뻗은 손의 접촉면을 통해 더해진 흥분을 억누르기가 힘겨워진 듯했다. 결국 윤신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저를 돌아보게 했다. 그러면서도 거친 허리 짓은 멈추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읏……!”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낸 세헌이 윤신의 혀를 집어삼키듯이 물곤 질척하게 빨았다. 적극적으로 응해 오는 윤신 덕에 서로의 혀뿌리를 옭아매는 듯한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이 침대 위의 뜨거운 열기가 쉬이 가시지 않을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절정이 코앞인 윤신이 체위를 유지하기 힘들어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성기를 빼내고, 손까지 놓아주며 자세를 고친 세헌이 윤신을 옆으로 누였다. 마치 두 다리를 쪼그리는 것처럼 오므리게 만들어 몸의 비껴 튼 옆면을 통째로 감싸듯 끌어안았다.

모로 누운 윤신의 사타구니 사이를 세헌의 성기가 들락날락했다. 색다른 자세로 꿰뚫리게 된 윤신이 죄 없는 시트를 있는 대로 그러쥐었다. 세헌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인의 밀부로 팽창한 음경을 다시 밀어 넣었다.

콰악!

“언제쯤 질릴까? 응? 매일매일 똑같은 자리에 쑤셔 박아도 씨발 질리지가 않아.”

퍼억!

그가 힘 있게 꽂아 넣은 성기가 안으로 깊이 틀어박혔다. 한데 어느 정도에서 멈추지 못하고 뿌리까지 죄다 박아 버린 통에 내벽의 가장 아득한 자리까지 선단이 파고들고 말았다. 구멍의 훅 좁아지는 틈새로 귀두를 욱여넣은 순간, 윤신이 앓는 것처럼 날뛰듯이 신음했다.

“아……!”

전신으로 몸부림쳐 봤지만 세헌은 관대하게 굴어 주지 않았다. 그가 성기를 빼주긴커녕 음낭까지 쑤셔 박을 기세로 더 안쪽을 공략하는 바람에 몸만 부르르 떨 따름이었다. 벌어진 입술의 틈새로 투명한 타액이 흘러나와 시트를 적셨다. 그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이 안까지 들어왔을 때의, 온몸이 다 타 버릴 것 같은 강렬한 감각을 자신이 너무 두려워해서 평소 여기까진 의식적으로 삽입하지 않는 편인데. 세헌도 지금 많이 흥분 상태인 것 같았다.

“하윽, 아……! 싫어, 빼! 뒤로……!”

“……나는 여기가 좋아. 윤신아, 너도 좋다고 말해.”

“아! 아, 선배, 아, 거기 싫…….”

“싫다고 해도 안 빼 줄 거야. 더 깊이 쑤셔 넣을 거야. 너만 힘들어. 그냥 좋다고 말해.”

“아, 좋, 좋……. 싫어, 이상해…….”

열락을 닮은 호흡이 두 사람의 입술 주위로, 어깨 너머로, 머리 위로 끈질기게 스쳤다.

그는 관용 없이 허리를 흉포하게 쳐올렸다. 날카로운 시선은 환희에 빠져 넋을 놓은 윤신에게 오롯이 닿아 있었다. 고통과 이물감, 그리고 쾌락이 한데 섞인 감각을 느끼는 윤신의 얼굴은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였다. 그걸 본 세헌의 단전이 빠듯해졌다.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사정감이 팽팽하게 차올랐다.

그때부터 그는 무아지경에 빠져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내벽에 성기를 박아 댔다. 거친 추삽질로 인해 땀이 차오른 두 개의 몸이 완전히 서로에게 교접했다.

몇 번이고 살갗이 맞물려서 찌걱거리는 마찰음이 빚어졌다. 내부 점막이 성기에 쓸리는 소리는 귀에 담아 두기엔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교미를 닮은 본능적 피스톤질은 거친 숨소리를 자아냈다. 튼튼한 침대가 고장 난 배처럼 삐걱거렸다. 온갖 외설스러운 소음이 서로를 탐닉하는 그들을 감싸 안았다.

귀두부터 뿌리까지. 그가 삽입 운동을 할 때마다 성기는 적나라한 형태로 내부의 모양을 만들어 갔다. 윤신의 신음에 낯 뜨거운 돌기가 바짝 설수록 흉포하게 추삽질하는 세헌의 이마 역시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그가 흥분한 만큼 윤신의 것도 정비례해 극대화됐다.

마침내 윤신이 사정할 때가 됐다는 걸 직감한 세헌이 제 아래 깔린 몸을 보다 바짝 끌어안고 요도구를 손끝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이대로 토정하고 싶었던 윤신은 반쯤 까무러쳤다.

“아흑! 놔줘, 아!”

“후우, 같이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본 윤신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세헌은 진득하게 입을 맞춰 주곤 시선도 마주해 주었다. 말이 아닌 표정만으로도 모든 걸 이해할 수도 있을 만큼,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아득한 연애의 깊이에 다다라 서로를 볼 때의 그 애정은 이루 말도 못 했다. 눈길을 겹친 두 사람은 이대로 절정에 다다르고 싶은 욕망을 함께 느꼈다.

그때부턴 별 대화가 없었다.

거대하고 두꺼운 남성이 헐어 가는 내부에 포악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성기를 거세게 쑤셔 넣어 내벽을 짓이길 때마다 자지러지던 윤신은 깊은 쾌락의 나락으로 온전히 빠지고 말았다.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 위해 세헌이 윤신의 두 다리를 위로 들게 해 겹쳐 모았다. 두 발목을 한쪽 손으로 잡고 여전히 사냥감을 모로 누여 깔아뭉갠 저질스러운 자세로 그대로 꿰뚫어 댔다.

요란하게 흔들리던 윤신이 고개를 틀어 곁눈으로 다시금 세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허리 짓 했다. 단 한 순간도 공유하고 있는 이 특별한 순간과, 상대방의 표정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교차한 시선의 온도가 절실했다.

집요한 눈길이 서로의 위를 할퀴듯이 오갔다.

이윽고 세헌이 윤신의 요도구를 막고 있던 손을 훅, 떼어 냈다.

해방감을 느끼면서 사정하는 윤신의 비음이 높아졌다.

“아흑! 아……!”

투욱, 툭.

윤신이 토한 정액은 시트 위에 반, 스스로의 몸에 반이 튀었다. 세헌 또한 사정 직전에 몰려 어느 한 지점에 귀두를 욱여넣었다. 전립선을 핏줄이 도드라진 기둥 한 부분으로 지그시 누르는 그 때문에 윤신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까무러치며 아찔한 쾌감을 고스란히 집어삼켰다. 그 경련하는 몸을 와락 끌어안은 세헌이 끝내 희뿌연 백탁액을 내부에 모조리 쏟아 냈다.

눈앞에 별이 쏟아지는 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감각을 느낀 윤신이 울먹거렸다. 동시에 세헌은 사정의 여운을 즐기면서 늘어진 몸 위에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털썩. 음경을 빼지 않은 채로 반 바퀴 몸을 굴린 그는 윤신을 마주 보았다. 모아서 겹친 양다리를 가슴팍쯤까지 끌어 올리게 해 더 바짝 끌어안았다. 얼굴은 벌게지고, 눈자위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선 숨만 쌕쌕거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숨이 막혔다.

하아. 하아. 호흡을 고르는 두 사람의 숨결이 공중에서 만나 하나가 되어 도로 흩어졌다.

“……선배.”

먼저 입을 연 건 가빠진 심장 박동을 진정하려 애쓰던 윤신이었다. 하도 신음해서 다 갈라진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미 뼈에 사무칠 만큼 잘 알고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제대로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해 두고 싶어졌다.

“저 얼마큼 사랑해요?”

“몰라서 묻는 거야, 알지만 듣고 싶은 거야?”

“그냥…….”

후우, 길게 호흡한 세헌이 윤신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친절한 대꾸를 완성했다.

“그냥 모르는 채로 있어. 네가 알기엔 너무 무거워.”

“……얼마나 무거운데?”

“말하면 네가 도망갈 것 같아.”

이미 잘 알고 있는데도, 언제나 그가 제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 순간은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윤신은 얼굴이 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듯 그의 견갑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세헌이 상체를 뒤로 물려 젖은 이마에 입을 맞춰 주는 것으로 호응했다.

여전히 세헌의 성기는 제 안에 있었다. 그게 꿈틀하는 게 안에서 느껴졌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또렷하게 마주 봤다. 윤신은 일단 한 수 접기로 했다.

“바로 다시 하게? 나 힘들어.”

“안됐네. 난 안 힘들어.”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나 오늘 이 구멍 헐 때까지 박을 거야. 네가 울면 우는 너한테 박고, 잠들면 잠든 너한테 박고, 기절하면 기절한 너한테 박고 싸대서 네 아랫도리에서 내 정액 냄새 밸 때까지.”

“하아…….”

그가 고집스럽게 굴기 시작하면 제 쪽에선 방법이 없었다. 지친 듯, 체념한 듯 허무한 한숨을 내쉰 윤신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를 눈으로 표현했다. 체력적으로 지친 거지 감정적으로 꺼려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정 제 한 몸 가누기 어려워지면 세헌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란 안일한 생각도 일부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내벽을 귀두로 쿡 찌른 그가 윤신을 품에 가득 안았다.

그는 허리를 과감히 쳐올려 깊은 자리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미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라 매우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었다. 푹푹 음경을 박아 대던 그가 윤신의 한껏 웅크린 몸을 부서뜨릴 듯이 격정적으로 껴안았다. 곧 마른 어깨 너머로 제 고개를 파묻더니, 차마 얼굴을 보고 하지 못한 말들을 입 밖으로 신중하게 꺼냈다.

사랑해. 좋아해.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 같이 있는 게 기뻐. 너로 인해 이 순간이 행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 한 수만 개쯤 됐던 것 같은데.

정작 음성화되어 출력된 건 고작 단 한 마디였다.

“도윤신.”

“읏, 응?”

“도윤신.”

“하윽, 응.”

“도윤신…….”

허리를 한 번 쳐올릴 때마다 한 마디씩. 그는 오직 제 이름만 불러 댔다. 한데도 윤신은 어째 그가 하지 못한 수만 개의 말들을 들은 기분이었다. 이럴 때의 강세헌은 어울리지 않게도 서툴러서, 서툰 만큼 알아채기가 쉬웠다.

저도 사랑하고 있다고 조용히 속으로 뇌까린 윤신이 두 팔을 뻗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러자 이 신호를 너무나도 잘 이해한 그가 다시 하반신을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미끄덩한 점액질을 덧바르는 것처럼 성기로 내부를 망가뜨려 갔다. 제 안에서 완전히 다시 커지는 그의 것을 느낀 윤신이 기대와 불안을 함께 삼키며 자신을 점령한 오만한 남자의 목을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뜨겁게 키스했다.

여행지에서의 첫날밤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오늘 밤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이다.

입술을 떼어 낸 세헌이 윤신의 눈을 또렷하게 응시한 채 난폭하게 피스톤질했다.

끼익. 끼익.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던 튼튼하고 커다란 침대 위가 다시 가열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 * *

객실의 커튼 사이로 아침햇살이 스며드는 것처럼 들이닥쳤다. 일출 시간인 듯했다.

시차 적응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 시각으로 동이 트기 전 윤신을 겨우 놓아준 세헌의 눈이 아침부터 번쩍 떠졌다. 여태까지의 루틴이 몸에 밴 건지 여행지에 와서도 늦잠을 잘 수가 없다는 건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잘 자는 윤신을 보는 그의 입가에 가을볕을 닮은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아마 윤신이 이 순간의 그를 직접 봤다면 느닷없이 너무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녹다운된 윤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려 팔을 움직였다. 그때, ‘지잉’ 하는 소리를 내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혹여 잠든 이가 깰까 봐 얼른 무음으로 바꾸고 화면을 확인했다. 이곳 시간의 아침부터 연락한 것으로 미루어 탁 비서나 미희가 아닐까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여행 올 거라고 말을 안 했나?’

‘그날’ 이후 윤신이 제 누나에게 데면데면하게 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남매간의 일인 듯해 모른 척했다. 보다 솔직해지자면, 원래도 이 남매의 친밀함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터라 이 반목이 제가 누릴 부가 이득으로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품 안의 윤신을 떼어 낸 세헌은 몸을 일으켰다. 전라 상태였던 그는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대충 매듭을 맸다. 안아 주던 가슴팍이 사라진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윤신이 잠결에 끄응, 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귀여웠다. 윤신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춰 준 그는 휴대폰을 든 채 스위트룸의 거실로 나갔다.

이쪽도 햇볕이 잘 들어오긴 마찬가지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아침 정경을 주시하며 좌우로 고개를 꺾은 그가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강세헌입니다.”

- 도이경이에요. 통화 괜찮아요? 거기 아침이죠?

힐끗, 윤신이 있을 침실을 돌아본 그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행을 갈 거란 얘기 자체는 전한 모양이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윤신이한테 걸려고 했던 거라면…….”

- 강 대표님한테 용건이 있어서 건 거예요.

“음, 얘기해요.”

전화를 건 쪽은 그녀였으나, 막상 이쪽에서 자리를 깔아 주니 잠시 말이 없었다. 숨을 고르는 기척만이 희미하게 그의 귓가에 전달됐다. 빨리 용건을 털어놓으라고 보챌까도 싶었다. 다만 이곳은 여행지고, 통화 상대는 도이경이며, 오늘 그는 도윤신과 아주 즐거운 하루를 보낼 계획이어서 초장부터 기분을 망치는 대신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이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윤신이 누나로서,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어요. 저희 집에서 제가 손수 만든 음식으로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가 피곤해하며 대꾸했다.

“난 회유가 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아, 오해 마세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서로 피곤한데 중언부언할 거 없이 그냥 핵심만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 좋아요, 간략하게 할게요. 그냥, 가족끼리 밥 한 끼 먹자고요. 간단하죠?

멈칫한 그의 굳은 얼굴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걸리는 단어가 한 가지 있어 목구멍이 급작스럽게 껄끄러웠다. 그는 습관적으로 목을 더듬었다. 넥타이라도 헝클고 싶은 심경이었으나, 지금 자신은 나이트가운 차림이었다.

침묵하는 세헌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보탰다.

- 버릇이에요. 다 큰 윤신일 아직 어린 남동생 취급하는 거요. 엄마의 대신이 돼 주고 싶었거든요. 사춘기 이후론 그 애가 엄말 못 봐서요. 그 애가 진작 어렵고 또 어렵게 강 대표님을 골랐을 텐데…… 만약 후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윤신이의 몫이죠. 전 그냥 돕는 사람이고요.

“…….”

- 제가 무례했던 부분이 있었겠지만, 우리 사이에 한번은 겪어야 했던 진통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대표님도 딱 그런 표정으로 ‘산사’에 당해 주러 오셨고……. 그러니 제 사과 받아들이고, 저하고 화해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래 줄 수 있다면, 초대에 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긴장한 목을 천천히 쓸어내린 그가 한숨을 토했다.

고요한 숨소리가 오갔다. 그녀 또한 정적을 지켰다. 하지만 세헌은 두 사람이 그 어떤 순간보다 서로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알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뗐다.

정확히 같은 시각,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시공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당도했다.

“귀국하면 연락드리죠.”

- ……고마워요. 안심이 되네요. 즐거운 여행 하세요. 그럼. 귀국하시면 봬요.

그리 길지 않았던 통화는 이쯤에서 갈무리됐다. 전화가 끊긴 휴대폰의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멀거니 창밖을 응시했다.

‘가족이라.’

그런 게 있었던 기억은 너무나도 까마득해서 정확히 어떤 감각이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매우 복잡한 심경인데 그걸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가 찬찬히 창 너머 풍경을 관찰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먼 곳에서 뜬금없이 인기척이 들렸다. 침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일어나자마자 세헌을 보고 싶었는데 옆자리가 텅 빈 게 무척 서운했던지 혼자서 열심히 칭얼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변태같이 또 일을 하러 간 거냐, 아니면 괴물 체력 자랑하려고 운동이라도 하러 간 거냐, 혼잣말로 자근자근 힐난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히 황당해하던 그가 침실로 되돌아갔다.

세헌이 금세 모습을 드러내자 침대 위에서 툴툴대던 윤신이 누운 채로 화들짝 놀랐다. 새벽 내내 해 대면서 번번이 울어 대느라 잔뜩 부은 눈은 원래 크기만큼 떠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버거운 눈꺼풀을 게슴츠레하게 들어 올리는 모습이 꽤 힘겨워 보였다.

“뭐예요? 계셨어요?”

“그러게. 계시네. 남자 친구 험담 잘 들었어. 엄청 개새낀가 봐?”

“엄청은 아니고 약간?”

“걷어차고 나한테 와.”

이 제안에 윤신이 매우 진지하게 갈등했다. 그러다 한쪽을 고르는 게 도저히 불가능했던지 뒤늦게 답했다.

“어…… 양다리도 돼요? 폴리아모리.”

세헌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진짜 고민을 해?”

“그러게 자리 왜 비워요. 옆에 계속 있어 줘야죠.”

그가 휴대폰을 흔들어 보여 주곤 콘솔에 대강 던져 두자, 몸을 일으켜 헤드에 기대앉은 윤신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또 일? 그럴 줄 알았어. 휴대폰 세느강에 던져 버릴까 보다.”

“다행이네. 나를 던진다고는 하지 않아서.”

농담처럼 말하는 그 때문에 반쯤 장난이던 윤신도 금세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선밴 안 던지죠. 이게 자그마치 얼마짜린데…….”

“그거참 고맙군. 감격스러워서 세느강에 뛰어들고 싶다.”

“……기왕이면 제 품으로 뛰어드세요. 선배가 훨씬 무겁지만 사랑으로 감내할게요.”

“깔아뭉개 달라? 음, 흥미롭네. 간밤에 부족했어?”

“어…… 더는 못 해요. 절대 못 해. 아무 데도 가지 말란 뜻이에요.”

지금부터 제 옆을 비우는 것만은 절대 안 된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급히 그의 팔목을 움켜쥐며 짤짤 흔들어 댔더니 세헌이 기꺼이 팔을 함께 움직여 주며 대꾸했다.

“좀 더 자지 그랬어. 안 피곤해?”

“그러게요. 찌뿌드드해요. 몇 시예요?”

“8시.”

“으……. 딱 한 시간 반 잤네. 여행을 와서도 늦잠을 못 잔다니. 둘 다 생체 리듬이 미쳤다니까.”

픽 웃음을 터트린 그가 윤신의 얼굴을 비슷한 눈높이에서 볼 수 있도록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아침이라 조금 뻗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을 정돈해 주면서, 조용조용하게 대꾸했다.

“오늘 뭐 하고 싶어? 네가 오르세 가는 거 말곤 아무것도 정하지 말재서 그냥 왔잖아.”

계획하지 않고 온 프랑스에서, 그들은 여태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일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획 단계에서 세헌에게 이것저것 말했다면 그가 미리 갖가지 서비스들을 예약해 두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윤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여행이니만큼 내키는 대로 즉흥적으로 해 보고 싶었다.

일단 예측 불허의 상황이 닥치면 즐거울 것 같았고, 예측되지 않는 상황을 싫어하지만 순발력은 좋은 강세헌이 어떻게 대처할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설레 하는 표정이 된 윤신이 머릿속으로 몇 가지를 떠올리나 싶더니 눈을 반짝거렸다.

“여기 실내 수영장 되게 좋아 보이던데 이따 밤에 나가서 수영해요. 그리고 오늘 낮에는…… 아, 햇빛 받으면서 길거리 걷고 싶어요. 햇빛 받으면서 선배랑 산책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

낮에 마음 편히 산책을 못 한 건 꽤 오래된 일이다. 가끔 멀리 드라이브를 가거나 한적한 공원 등에선 나란히 걷기도 했으나 횟수로 치면 많진 않았다.

그걸 상쇄하기 위해 그들은 가끔 밤늦은 시간 사람들 눈을 피해 사택 주변을 산책하곤 했는데, 윤신이 언론 인터뷰를 한 이후로는 그마저도 자제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 몰라 한동안 조심하려던 거였다. 그게 욕구불만으로 남았는지 눈동자에 벌써부터 생기가 돌았다.

“그래. 또?”

“점심은 뭐 먹지…… 우리 걷다가, 딱 낮 12시에 멈춰서 거기에서 제일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어요. 어때요? 그리고 나머진 나가서 정해요.”

“맛은 어떻게 장담하고? 그러게 내가 예약하겠다고 했지. 여행지 식사 맛없는 건 최악이야.”

“맛없으면 없는 대로 먹는 거죠. 그건 최악이 아니라 추억이에요.”

“넌 원래 여행을 이런 식으로 해? 아예 사다리타기를 하지 그래?”

“아. 그럴까? 그것도 재밌겠다. 앱으로 할까요?”

일순 아득해하는 얼굴이 된 세헌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충격이군. 최소한 대략적인 동선 정도는 짜고.”

“계획하면 무슨 재미예요?”

“계획하면서 기대한 만큼의 재미가 있겠지?”

“그냥 놀자니까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저만 믿어요.”

“안 됐지만 너를 못 믿겠어서 하는 말인데?”

쓱, 그를 흘긴 윤신이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버텨 보던 세헌은 하는 수 없이 체념의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처음부터 윤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 줄 생각으로 온 거였다.

“그런데 선배, 누구랑 통화했어요?”

짧게 고민해 본 그는 조금 전 도이경과의 통화 내용을 전할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하지 않기로 정했다.

가족.

대답 대신 그 단어를 다시 곱씹던 세헌은 윤신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동안의 그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미처 몰랐다. 어쩌면 알지만 모른 척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이제는 모른 척할 수가 없게 됐는데, 곁에 도윤신이 있다 없어지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가늠도 안 됐다.

진득한 시선 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걸 느낀 윤신이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했다.

“왜 그렇게 봐요? 또 송 대표님이었어요? 빨리 돌아오래요?”

“윤신아.”

“응.”

“나는 이제 외로운 게 뭔지 아니까, 가끔 내가 밉더라도…… 혼자 내버려 두진 마.”

이젠 너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는 얘기로 들렸다.

착각이 아니다.

“……선배. 무슨 일 있었어?”

그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눈에 띄게 걱정스러워하는 안색이 된 윤신이 어떻게든 세헌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제 손을 뻗었다. 약속하겠다는 의미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가 장단을 맞춰 주며 마주 손가락을 걸었다. 그 단단하지만 보드라운 촉감을 잠깐 느끼고 있던 윤신은 지난밤 섹스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기어이 튕기듯이 움직여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 강세헌. 내가 평생 옆에 있어 줄 거야.”

“…….”

“약속 꼭 지킬게요.”

겉은 담백하지만 속은 뜨거운 고백과 대답에 그는 만족한 듯했다.

삶이 때로 그를 고단하게 만들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 아침을, 윤신과의 이 순간을 떠올리면 버틸 수 있으리라.

고개를 슬쩍 튼 세헌이 윤신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저를 안은 품 안의 연인을 마주 껴안았다.

애틋하게 몸을 맞댄 그들의 위로 파리의 밝은 햇살이 은은하게 스며들어 비쳤다.

서로를 모른 척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하루가, 이렇게 또 시작됐다.

그해 11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Not The End〉 마침1684761544495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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