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석의 윤신은 거울을 보며 풀어 헤쳐진 넥타이를 꼼꼼하게 고쳐 맸다. 혹시나 싶어 단추가 잘못된 자리에 채워지지 않았나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옷깃까지 정돈한 후 재킷을 정갈하게 걸쳐 입었다.
옆 창을 통해 보이는 가로수들은 이파리가 노랗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대지는 뜨거웠던 계절과 작별을 고하고, 요술처럼 선선해진 계절과의 새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똑바로 앉아 앞을 보니 멀리 전방에 도국의 사옥 빌딩이 풍경처럼 시야에 걸렸다. 무심코 운전석을 힐끗 살피자, 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냐는 양 완벽하리만치 멀끔한 인상착의를 한 강세헌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저 모습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전 헝클어진 상태 그 자체였던 제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억울했다.
자신은 아직도 유두가 쓰라리다 못해 아팠다. 아마 못해도 몇 시간은 그럴 법했다. 문제는 양쪽이 아니라 한쪽만 그렇다는 거였다. 셔츠에 살갗이 쓸릴 때마다 찌릿찌릿한 통증이 일어서 허리를 배배 꼬게 됐다. 최소한 반나절은 이래야 할 걸 알기에 결국 폭발한 윤신이 분노를 토로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 항변에도 세헌은 개의치 않았다.
아주 조금도 말이다.
“젖꼭지가 빨고 싶어서 출근길에 좀 빨았어. 무슨 불만이라도?”
일부러 귀를 더럽히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여과 없는 언어로 대꾸하는 그 덕분에 잠시 얼음이 되긴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투정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금세 녹아내렸다.
“……팀장님한테 한 번도 혼나 본 적 없단 말이에요.”
“풍부한 경험은 뇌 발달에 도움 돼.”
“제가 무슨 성장기 어린애예요? 자기 일 아니라고 진짜……. 이건 선배 책임이 99퍼센트예요. 팀장님이 혼내시면 구해 줘요. 시간 약속에 엄청 깐깐한 거 아시면서.”
“가사 팀 일은 가사 팀 안에서 해결해. 난 그런 편애는 안 해.”
“와, 오늘 왜 이렇게 못되게 굴어?”
“내가 못되게 구는 게 새삼스러워? 그럼 넌 기억력이 아주 별로니까 더 많은 경험을 해야 돼.”
“원인 제공자가 책임을 지란 소리죠.”
“글쎄. 눈에 띄는 그 주니어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해 보시지 그래. 사이좋은 거 같던데.”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윤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그거 때문일 줄 알았다. 서로 기분 좋자는 거였으면 한쪽이 아니라 양쪽 가슴팍을 모두 괴롭혔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울러 회의 시간에 관해서도 뭔가 조치를 취해 주었을 테지만 그 또한 해 주지 않았다. 제 옆의 남자는 지금 심술을 부리는 중이었다. 크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처럼 오묘한 미소를 띤 윤신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얼른 단속했다. 질투해 주어서 기쁘지만 그 방식이 저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라 난처한 것도 사실이다. 더는 누구의 지적도 받을 일 없는 세헌과 달리 자신에겐 아직 절 혼낼 사람이 차고 넘쳤다.
‘왜 늦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
다시 그를 힐끗 본 윤신은 기쁘면서 화가 나는 뒤숭숭한 감정을 느끼며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최근 들어 세헌과 제가 같은 차를 타고 출근하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줄었다. 대형 로펌의 대표가 누군가와 카풀을 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아서였다. 애초에 핑계가 없으니 무덤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여름 병원에서 약속한 뒤론, 아주 가끔 기회를 엿봐 세헌이 저 대신 운전대를 잡아 주곤 했다. 오늘이 그 얼마 안 되는 날 중 하나였다.
그가 기꺼이 출근 시간을 평상시보다 앞당겨 같은 시각에 나와 준 것까지는 좋았다. 평화로웠다. 발단은 차 안에서의 대화였다.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그가 유난히 꼬치꼬치 질문을 하기에 심도가 깊어졌다. 그러다 별 뜻 없이 새로 들어온 주니어 중 한 명이 무척 똘똘해서 관심이 간다는 말을 전했더니, 그대로 가던 길을 선회해 으슥한 장소를 기어이 찾아 주차하곤 재킷을 벗기는 거였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사이 드레스셔츠의 단추까지 착실하게 풀어낸 그는 장장 30분이 다 되어 가도록 정확히 심장이 있는 제 왼쪽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유두를 놔주질 않았다. 빨고, 깨물고, 치아로 잘근잘근 짓이겼다. 살결을 짓무르게 만들 기세였다. 처음에는 출근길에 그가 이성 잃고 제게 달려든 게 짜릿했는데, 어마어마한 얼얼함이 느껴지던 순간부터는 이게 뭔가 싶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빨아도 우유 안 나온다니까.”
차마 가슴팍을 만질 수도 없었다. 아직도 후끈거렸다. 셔츠에 젖꼭지가 닿지 않도록 천을 펄럭이며 툴툴대는 윤신의 말에 세헌이 어이없어했다.
“넌 그런 말 하면서 수치심도 안 들어?”
“아침부터 반 시간이나 남자 가슴 빠신 분 먼저 반성하세요.”
“내가 내 거 빨면서 반성까지 해야 돼? 난 수지 안 맞는 짓 안 해. 그냥 돈 내라고 하지 그래.”
“돈 말고 의견 달라고요. 선배 때문에 회의 늦게 생겼잖아요.”
다소 마음에 안 든다는 기미를 내비치긴 했지만 세헌은 부탁을 야멸치게 거절하진 않았다. 그 신호를 알아챈 윤신이 그에게 가슴을 혹사당하느라 잠시 뒤로 던져 두었던 태블릿을 다시 집어 와 회의 자료들을 열람했다. 오늘 오전 예정된 미팅은 주니어들에게 시험용으로 맡길 가사 사건을 고르는 시니어 회의였다. 제게 이미 내린 답이 있었으나 세헌과 같이 있는 김에 의견을 물어보고 싶어서 말이 이래저래 길어졌다.
아까 반 정도 읽었던 건 당연히 그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듯해 읽지 않은 부분부터 음성으로 새롭게 기억시켜 주었다.
“네 번째 케이스는…… 유부남이 이혼남이라고 속이고 교제한 건인데요. 혼인 관계 증명서를 위조했어요. 이 유부남은 SNS에서 유명한 헤어 디자이너고, 진행하게 되면 우린 원고 대리합니다.”
“문서 위조에, 상대측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 거고, 손해 배상 청구하면 되겠네. 이길 거야.”
“네, 맞아요. 답안지가 있어요.”
“안 돼. 패스. 다음.”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다음…… 혼인 관계가 실질적으로 파탄에 이르렀는데,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가 이혼 청구를 했어요.”
“사건을 의뢰한 쪽은?”
“유책 배우자요. 이분은 스님이에요. 아아아주 유명한 스님.”
세헌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결국 제 귀가 무언가를 잘못 들었을 리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 건지 말로 물었다.
“중이 결혼을 했다고? 대처승을 인정해 주는 종파인가?”
“아니에요. 어떻게 안 들킨 건진 모르겠어요. 우리가 수임을 하게 되면 그것도 알게 되겠죠.”
“대법원 판례대로라면 혼인 관계가 실질적으로 파탄에 이르렀더라도, 파탄에 주된 책임 있는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네, 액면 그대로만 보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봐야 하고요. 이 사실이 공표되면 승려 자격이 박탈될 텐데, 우리 펌에 직접 의뢰를 한 걸 보면 어지간히 이혼하고 싶으신가 봐요. 여러모로 세간이 좀 시끄러워지겠네요.”
“도국에는 이기는 변호사만 있으면 돼.”
도국 사옥은 마천루가 가득한 도심에서도 랜드마크처럼 자리하고 있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어느 틈에 화려한 사옥 출입구에 당도한 차량은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이 진입했다. 능숙하게 운전하던 세헌이 대답과 동시에 그거로 결정하라는 의미로 윤신에게 쓱 눈길을 주었다.
시선을 받아 낸 윤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제야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도 이미 이 건으로 결정했어요. 힘 받고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가사 팀 시니어들은 이런 시끄러운 건들 주니어들 안 주고 본인들이 하고 싶어 하니까. 너하곤 다르지.”
“네, 잘 아시네요. 전투력 충전해야 하거든요. 안 그래도 이건 승인 나면 그 똘똘한 주니어한테 줘 볼까 싶어요. 어떻게 설계할지 궁금하기도 하…….”
끼이이익.
스키드마크가 찍히지는 않았을까 우려가 될 정도로 사나운 주차였다. 때와 장소에 걸맞지 않은 난폭한 급정지이기도 했다. 점점 서행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기동력을 높인다 싶었다. 덕분에 주행이 제법 안정적인 묵직한 세단임에도 자세를 고치던 윤신의 몸이 한쪽 방향으로 훅 쏠렸다.
“헉……!”
툭, 창틀에 팔꿈치가 부딪친 윤신이 얼떨떨해하며 세헌을 봤다. 대표의 지정석에 거칠게 차를 세운 그는 시선이 느껴졌을 텐데도 정면만 바라보았다. 동시에 부수기라도 할 기세로 핸들을 단단하게 움켜쥘 따름이었다. 자연히 손등에 푸른 힘줄이 또렷하게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반사적으로 흠칫한 윤신이 심호흡하곤 마저 입을 뗐다.
“하, 하고…….”
말줄임표가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고개를 보조석 쪽으로 돌린 그가 한껏 가라앉은 시선으로 윤신을 직시했다. 이어지는 그의 음산해진 음성이 이 순간을 현명하게 타개해야 할 거라고 친절히도 경보음을 울렸다.
“너 지금 이 차 안에서 같은 남자 얘기 두 번 했다. 세 번 하면 걔 오늘 죽어. 영리하게 굴어.”
“그냥 걔한테 배당을 할 거라는…….”
“죽는다니까.”
“……진짠데.”
아까와 달리 장소가 사옥 주차장이니 별일이야 없을 터다. 이 구석진 모퉁이 사각지대 자리는 대표의 전용이라 부르지 않는 한 근처에 누가 나타날 일이 없긴 했으나, 그럼에도 두 사람이 여기서 어떤 의미심장한 일을 저지른 적은 손에 꼽았다. 만에 하나를 위해서 평소에 꽤 조심하는 편이었다. 세헌이 여기에서 수상쩍은 일을 벌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뜻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던 윤신이, 그의 오해가 커질세라 조심스럽게 해명했다.
“저도 연차 쌓이면 언젠간 팀장 달 테고. 뭐…… 제 팀에 일 잘하는 팀원들 많이 있으면 좋고요. 궁극적으로는 선배가 대표로 있는 펌을 위해서 잘 키워 보겠다. 그런 의미였어요.”
“변명할 게 있을 때 말이 길어지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변명이라기보단 설득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언제부터 도국에 애정이 그렇게 충만하셨지?”
그런 지는 꽤 됐다.
시간은 정말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아주 오래전, 누나의 말을 듣고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자신은 언젠간 여길 떠나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여기서 긴 시간 일해도 마음은 놓아두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단순히 그리고 오로지 이곳에 강세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게 도국은 그 어떤 장소보다 특별해졌다.
윤신은 안전벨트를 풀면서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도국은 문제없이 잘 굴러가야죠. 제가 선배의 법률 대리인이거든요. 무슨 일 생기면 저까지 골치 아프잖아요. 아, 물론 선배도 제 대리인 돼 주셔야 해요. 무슨 일이 생기든지요.”
“내가 손해 아니야? 난 실익 없는 수임은 안 해.”
“저도 엄청 비싸거든요. 저 만나기도 힘든 변호사예요.”
세헌은 코웃음 쳤다.
“프로 보노 의뢰인들은 전화 한 통만 하면 너를 만날 수 있던데. 찾아가는 서비스.”
틀린 소린 안 하는 그 때문에 윤신의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이럴 때 그와 계속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자신이 반드시 무언가를 잃게 돼 있었다. 후퇴가 최선이라는 의미다.
때마침 사옥에 도착하기도 했고, 회의 시간에 정말로 아슬아슬하기도 한 상황이었다. 내친김에 얼른 짐들을 챙겨 가방 속에 대충 욱여넣고는 보조석의 문을 열어젖혔다. 붙잡힐세라 한쪽 다리부터 내뻗어 하차한 윤신은 허리를 기울여 안의 세헌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관찰해 보니 그도 내릴 기세여서 급한 대로 손을 척 뻗어 말렸다.
“어, 잠깐. 내리지 마요.”
세헌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아는 눈치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양새가 딱 그랬다. 그는 이쪽에 하면 된다는 듯 오른쪽 뺨을 살짝 내밀었다. 가볍게 웃은 윤신은 허리를 있는 대로 숙여서 그 위에 쪽, 입을 맞췄다. 임무를 완수하고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차 안의 그가 턱을 잡고 얼굴을 강제로 돌리더니 제 것이라고 도장 찍듯이 입술 위를 꾹 비벼 누르는 통에 안색이 벌게졌다.
눈을 뜬 채로 키스당한 윤신은 뒤늦게 슬쩍 내리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 틈에 세헌이 하차하기 위해 뒤의 서류 가방을 챙겼다. 그걸 목격한 윤신이 이번에도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이쯤 되니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눈치챈 그가 물었다.
“뭐 하자는 거지?”
“같이 올라가면 괜히 수상하니까. 선밴 10분 있다가 올라와요. 알겠죠?”
“10…….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말해 봐.”
“여기서 10분 낭비하시라고 말한 거 맞거든요.”
“너 내 1분이 얼만지는 알아? 게다가 탁이 내 차 들어온 거 확인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평소라면 제가 기다렸죠. 그런데 저한테 회의가 있는 걸 어떡해요. 그리고 진짜! 똘똘하다는 건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는 뜻이지 제 눈에 걔가 귀엽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제 마음 알죠? 사랑해요. 이따 봐요!”
타악.
일방적으로 다다다 쏟아 낸 윤신은 문을 닫고 한 걸음 물러섰다. 호기롭게 둘 사이의 장벽을 만들어 놓긴 했으나 막상 바로 돌아서진 못하겠는지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많이 서운해 보였다.
차 안의 세헌이 편안하게 자세를 고쳐 앉곤 퍽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제 손목시계를 손끝으로 툭툭 쳤다. 그걸 보곤 화들짝 놀란 윤신이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제야 몸을 틀어 최대 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남겨진 세헌은 아침부터 요란한 뒷모습을 보며 기가 찼다. 헛웃음이 절로 터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알긴 뭘 알아?”
혹시나 자신이 그 주니어의 이름이라도 알아내 무슨 짓을 저지를까 싶었는지, 기어이 마저 변명하고 간 부분이 그 무엇보다 괘씸하다는 걸 윤신이야말로 아는지 모르겠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렀다.
현재 시각을 확인한 세헌은 이쯤이면 많이 기다려 주었다고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듯 혼잣말했다.
“최대한 봐줬다.”
그러고는 10분 기다려 달라는 윤신의 요청과 달리 딱 3분 만에 하차했다.
대기 중인 전용 승강기에 올라탄 그는 사무실 층에 금세 당도했다. 차량이 주차장에 입차되었을 때부터 이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탁 비서 이하 네 명의 직원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를 마중했다.
“대표님, 오늘 평소보다 출근이 이르시네요. 책상 위에 기업법 연구소장 임명 건 결재 서류 올려 뒀습니다. 전자 결재로 안 된대서요. 자필 서명해 주셔야 합니다.”
“확인하지. 도윤신은. 회의실로 직행했어?”
“아뇨. 가사 팀장님이 사무실로 찾아오셨길래 거기로 먼저 가시라고 말씀 전했습니다.”
“그래? 그거 잘됐군.”
“뭐 전할 말씀 있으세요?”
“전할 말이라…… 도윤신한텐 없어. 가사 팀장한테 있지.”
탁 비서를 포함한 모두가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분위기로 그걸 충분히 읽어 낸 세헌은 자세히 알 필요 없다는 말을 행동으로 대신하듯 그들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의 뒤를 직원들이 따랐다. 가방을 받아 들고, 오늘의 일정에 대해 브리핑하는 모두가 매우 기민하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세헌은 익숙한 음성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입력하면서 집무실 방향으로 걸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사무장과 패러 리걸들도 일어나 그를 향해 정숙하게 아침 인사 했다. 그는 대충 손짓으로 답하며 윤신의 사무실로 경로를 이탈했다. 이미 언질을 들은 비서들 외에 다른 이들은 그의 행보에 의아함을 느끼는 듯했다. 사정거리에 있는 전원이 다들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윤신의 방 문 앞에 우뚝 섰다. 안에서 가사 팀장이 지각한 일로 언성을 높이고 있는 건지 주의를 주는 목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수 초간 그 소리에 집중하던 세헌은 노크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정 팀장.”
“예, 대표님!”
불시에 나타난 게 그이리라곤 예상 못 한 가사 팀장이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그 앞에 경직된 자세로 서서 혼나고 있던 윤신도 뒤를 돌아보았다. 사방의 모두가 그의 입에서 나올 뒷말을 기다렸다. 오직 윤신만이 ‘10분 후에 올라오기로 했잖아요?’라고 적힌 눈동자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세헌은 가뿐히 그 눈길을 무시하곤 가사 팀장을 향해 까딱, 손짓했다.
“도윤신 아침에 나하고 놀아 주느라 늦은 거니까 너무 쪼지 마세요.”
“아, 예……. 알겠습…….”
순순히 대꾸하던 가사 팀장은 불현듯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지 화들짝 놀랐다.
“예? 무슨 말, 말씀이신지.”
세헌은 평온하게 답했다.
“정 팀장이 다친 게 머리입니까, 귀입니까. 어느 부분을 다시 알려 줘야 하는 거지?”
“아닙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가사 팀장을 향해 할 거 하라는 듯 한 번 더 손짓했다. 그대로 돌아서며 제 할 말이 끝났다는 걸 행동으로 알렸다. 뒤통수에 눈앞이 아찔해진 윤신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저를 쏘아보는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 눈빛을 말로 표현하면 ‘저 사디스트가!’ 정도 될 터다. 명확히 감지했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그는 제 발언 때문에 덩달아 얼음이 되어 버린 비서실 직원들을 지나쳤다. 서로를 살피는 저마다의 안색 위에 ‘지금 저게 무슨 의미야?’ 정도의 질문들이 스몄다. 소리 없는 시선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사방에서 오갔다. 세헌은 그 모든 것들을 너끈히 무시하곤 집무실에 입성했다. 잽싸게 뒤따라 들어온 탁 비서가 안에서 문을 닫았다.
“대표님, 방금 일부러 그러신 거죠? 도 변호사님 당황하게 만드시려고요. 심술이 느껴지던데요.”
자리에 앉아 책상 위의 서류철을 열어 보려던 세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서류 가방을 지정된 자리에 내려놓은 탁 비서가 그 눈길을 느끼며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고요한 시선으로 제 비서실장을 응시하며 관료적으로 응수했다.
“심술? 넌 언제부터 말버릇이 그렇게 없으셨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도 변호사님 구해 주신 적은 없었던지라…… 오히려 더 매몰차게 내버려 두셨죠. 혹시 두 분 아침부터 싸우셨습니까?”
만년필을 손에 쥐던 세헌은 멈칫했다. 좀 의외라는 기색이 담긴 얼굴이었다.
“넌 우리가 싸움이 된다고 생각해?”
“뭐 그거야, 당연히 대표님이 전승하시겠지만요.”
만년필의 캡을 열다 만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탁 비서가 뱉어 낸 음절들을 열심히 분해하고, 또 분석해 보는 기미였다. 얼마간 침묵을 고수하다가 무슨 생각인지 대답 대신 픽 웃었다. 일일이 말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건 일종의 대꾸였다. 부정인지 긍정인지는 그를 오래 모셔 온 탁 비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세헌은 헷갈려하는 상태를 숨기지 않고 있는 제 비서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마저 캡을 열었다. 결재 서류를 펼쳐 눈대중으로 읽어 내린 그가 종이 위에 서명했다.
사각.
섬유에 펜촉의 끄트머리가 쓸리는 재밌는 소리가 났다.
그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상관이 하는 양을 관찰하기만 하던 탁 비서가 다시 운을 뗐다.
“저기, 제가 가서 도 변호사님 좀 도와드릴까요?”
한데 돌아온 건 단호하고 즉각적인 거부였다.
“아니. 그냥 둬.”
“지금 비서실 뒤집어졌는데요. 오늘 도 변호사님, 대표님하고 새벽부터 뭐 하고 노셨는지 종일 그 질문 받으시느라 곤란해지실걸요.”
저 소리 없는 전쟁터를 직접 보시라는 듯 창밖을 가리킨 탁 비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곳에는 집무실에서 나온 윤신을 복합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는 하이에나들이 가득했다. 가사 팀장을 포함한 임직원들이었다. 세헌은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도 고개를 똑바로 가로저었다.
“잘됐군.”
“잘…… 예?”
“절대 도와주지 마. 난 쟤가 종일 내 발언에 대해 해명하느라 피곤해졌으면 좋겠어. 그래야 지쳐서 헛짓거리 못 하지.”
“일부러 그러신 거 맞네요.”
“내가 하는 일 중에 일부러 아닌 게 있던가? 대답 됐으면 이만 나가. 방해돼.”
탁 비서는 윤신이 내내 피로해질까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이 상황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책상 위의 서류철을 챙겨 들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이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갔다.
딸칵.
문이 닫혔다. 그리고 동시에 창문 너머에서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방금 나간 탁 비서의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이런 적나라한 관심이 비서실발일 리도 만무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그의 시선 끝에 회의실로 가다 말고 이쪽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윤신의 모습이 걸렸다. 세헌이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방금 무슨 짓을 한 줄 알고는 있냐는 항의의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였다. 세헌은 꼴좋다는 기색이 완연한 오만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네가 구해 달라며. 편애해 줬잖아. 뭐 문제 있어?”
당연히 소리까진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입 모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던지 윤신이 움찔했다. 세헌은 여봐란듯이 리모컨 버튼을 눌러 블라인드를 척, 쳐 버렸다. 황당해하는 도윤신의 커다란 눈이 빈틈으로 보이는 듯했다.
만년필을 대충 내던진 그는 등받이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댔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똘똘한 주니어한테 관심이 가?”
쯧, 짜증스럽게 혀를 찬 그가 기막혀했다.
* * *
나란히 걷는 세헌과 미희의 뒤를 탁 비서가 따랐다. 앞에 선 두 사람은 이제 막 간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몇 달 전 극단적인 선택으로 유명을 달리한 직원에 대한 여러 가지 사후 처리 안건들이 이번 특별 회의의 주요 화두였다. 펌 내부에서도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그 과정에서 윤신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상황은 결과적으로 잘 수습됐다.
곧 세헌의 외부 미팅이 있었다. 내친김에 주차장까지 그를 배웅하겠다며 미희가 따라나선 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그걸 눈치채고도 그가 물어봐 주지 않자, 비스듬한 뒤편의 탁 비서와 시선을 은밀히 교환하던 그녀가 크게 절제된 어조로 먼저 운을 뗐다.
“강 변, 이사 준비는 잘돼 가? 집 인테리어 거의 끝났다는 얘기가 들리더라? 많이 급했나봐. 뭐가 그렇게 일사천리야?”
그러면서 뒤로 손을 휘휘 내젓자, 탁 비서가 기계적으로 끼어들어 장단을 맞췄다.
“예, 참, 관련 서류 정리는 모두 준비 완료됐습니다. 신호만 주시면 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세헌은 이 두 사람이 윤신과 제 동거에 관해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 못 견디겠는 상태임을 직감했다. 어림도 없다는 듯 미희를 돌아본 그가 그녀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가.”
“에이, 세헌아. 그러지 말고. 있지, 니들 집들이 같은 거 해라. 응? 비싼 술 사 갈게. 나 너희들 이사 선물로 주려고 그림도 하나 봐 놨다?”
“매너 없이 대표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고. 직함으로 불러. 가.”
“너무하네, 정말. 안 할 거야, 집들이? 남들도 집 사면 다 하는 거야.”
“안 해. 그리고 회사에서 그딴 것 좀 묻지 마. 여기가 유원지야?”
어우. 툴툴대는 그녀를 지나친 세헌이 앞서 걸었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탁 비서는 예상했던 대로라는 얼굴로 미희와 아쉬워하는 시선을 교환하고는 그를 따랐다. 붙잡아 놓고 있던 승강기에 바로 올라탄 두 사람은, 밀폐된 공간 안에 갇히자 이사에 관한 보다 내밀한 대화를 시도했다.
“얘기가 나와 말씀인데 두 분 다 워낙 조용히 지내시는 분들이라 사택 비우는 거 자체는 별문제 없을 걸로 보입니다. 당분간은 계속 사택에 거주하는 거로 제가 문서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짐 옮기는 게 문젠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슬슬 중요한 것들만 조금씩 옮길 거고, 가구같이 차 들어와야 하는 큰 짐은 그냥 둘 거야.”
미희와 탁 비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얼마 동안은 이사 소식을 비밀에 부쳐 두기로 결정했다. 서로 친밀한 사이인 두 변호사가 동시에 움직이면 눈에 띌 게 뻔해서였다. 이삿짐 차가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내놓고 보이는 건 그 어떤 실수보다도 치명적인 실책일 터다.
당분간은 둘 다 사택에 계속 거주하는 거로 말을 맞추고, 가끔 사택에도 들러 얼굴을 비친 다음, 반년에서 1년 정도의 사이를 두어 한 명씩 집을 비웠다는 말을 흘릴 셈이었다. 몹시 번거로운 일이 되겠지만 사생활 상의 안전을 위해선 필수 불가결했다.
“어, 그럼. 가구 같은 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내가 두고 가는 건 다 폐기 처분해. 벽지도 다 떼고.”
“그걸 다요? 대표님 댁에 있는 가구들은 감가상각 고려해도 애초에 엄청 비싼 것들인데 그 아까운 걸……. 차라리 로펌에 귀속하시면 어때요? 판매하고 남은 수익금을 기부…….”
“내 지문 묻은 물건들을 남한테 쓰게 할 순 없어. 싹 다 폐기 처분해. 도윤신 집도 마찬가지야.”
“예, 알겠습니다.”
탁 비서가 공손하게 대답하는 동안, 승강기의 문이 다시 열렸다.
주차장에 도착해 나란히 내린 그들은 그의 차가 주차된 차량으로 향했다. 몇 가지 사안에 대해 마저 논의하며 걷던 와중, 기둥 뒤에서 예고도 없이 누군가 훅 튀어나와 대화가 중단됐다.
“대표님!”
불청객은 다름 아닌 윤신이었다.
세헌이 황당해했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미팅 가신다면서요. 저한테 도움이 좀 필요한데…… 마침 두 분이 같이 나가신다고 해서요.”
품에 서류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업무상 조언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게 됐다. 바로 위의 상사인 가사 팀장이 아닌 그를 찾아온 이유까지도 말이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세헌이 꽤 매정하게 굴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튀어나와 놓고, 시간을 빼 달라?”
“……많이 바쁘세요? 나중에 할까요?”
윤신은 한발 물러서면서도 금세 서운해져 입을 앙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세헌이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표정을 풀면서 웃었다.
“안 듣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장난이란 걸 깨닫고 안심한 윤신의 안색도 덩달아 무너졌다.
“못되게 말하면 누가 상 줘요?”
“누가 나한테 상은 안 주고, 쥐어짜 내면 내가 너한테 10분 정돈 줄 수 있고.”
“될 거 같기도요.”
“타.”
침묵하며 둘 사이의 공기를 착실히 읽던 탁 비서는 앞서 차량으로 향했다. 뒷좌석의 문을 열고 탑승하시라는 듯 대기해서, 세헌이 먼저 올라탔다. 윤신은 고맙다는 인사를 눈짓으로 대체하곤 반대편 방향에서 탔다. 문을 닫은 탁 비서도 자리를 비켜 드리겠다는 말 대신 그들에게 꾸벅 인사하는 거로 응수했다. 이어서 일정 거리 이상으로 멀어졌다. 로비에서 기다리면서 혹여 사람이 지나다니는 걸 점검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완전히 탁 비서의 모습이 가시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좇던 윤신이 천천히 세헌을 돌아보았다. 옆의 그는 어느 틈에 태블릿 PC를 꺼내 화면을 살피고 있었다.
“제 얘기 들어 주는 거 아니었어요?”
“귀 열려 있어. 얘기해. 이거 보는 시간 포함해서 10분이었어.”
아.
그는 약속 시간에 절대로 미리 가서 기다리지 않는다. 딱 맞춰서 가야 할 땐 그렇게 했고, 그 외엔 대체로 상대를 기다리게 했다. 정말로 쥐어짜 낸 10분인 모양이다.
번뜩 정신을 차린 윤신이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펼쳐 세헌에게 보였다. 주요 쟁점들을 인덱스 스티커로 야무지게 붙여 놓은 정성스러운 자료였다. 그는 그걸 눈으로 쓱 확인하나 싶더니 금세 관심을 꺼 버렸다. 아무리 그가 기억력이 좋고, 인지 능력 또한 뛰어나다고 해도 겨우 2초 힐끗 본 거로 사건을 대략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일단 읽어야 외우는 것도 가능한 게 아닌가.
“읽어 보지도 않아요? 대충이라도.”
“사건번호 봤으면 됐어.”
“안 됐거든요?”
“형사 사건이잖아. 네가 검토하는 케이스들은 나도 보고받고 있어. 원심 파기된 사건 아닌가?”
섭섭해할 뻔했는데 그런 감정들이 피어나기도 전에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아직도 제 사건에 면밀히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덕분에 윤신은 얼떨떨했다.
처음 가사 팀으로 옮겼을 때는 얼마간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웬만한 거로는 이 남자를 귀찮게 괴롭히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서 잘 해결했다. 해서 아직까지도 그가 자신이 검토하는 사건들을 일일이 보고받고 있으리라곤 예상 못 했다.
심지어 이건 정식 수임한 건도 아니라, 정말로 자료만 전달받은 케이스였다. 아울러 가사 팀 사건도 아닌 프로 보노로 보고 받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티를 안 내는 건지 모르겠다.
“……그거 맞아요.”
“왜 목소리가 갑자기 다 죽어 가.”
“나는 언제쯤 선배 이길 수 있나 해서.”
천천히 태블릿 화면에서 눈을 뗀 그가 그제야 슬며시 고개를 틀어 옆을 주시했다. 저를 보는 표정에는 뭐라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색이 깃들어 있었다. 제 말에 동의하는 듯도, 아닌 듯도 했다. 그의 시선이 제게 닿은 순간, 윤신은 서류를 옆으로 치우면서 마저 말했다.
“말씀대로예요. 이 사건, 피고인은 항소심에서 원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어요.”
해당 사건은 아내가 협의 이혼을 진행하던 중 남편이 탄 차를 들이받았고, 그 사고로 인해 남편의 가족들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검사 측은 원심이 형의 너무 낮다는 취지로 항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아내는 모든 혐의를 인정해 항소심에서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어떤 자기 변론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가사 팀 주니어가 뭔가 이상하다며 함께 검토해 달라고 윤신에게 상담을 요청했던 거였다.
“그래서. 이미 법정 구속까지 된 건을 왜 들고 있는 건데. 정식 의뢰 들어온 사건도 아니잖아. 게다가 피해자가 치료받은 병원에서 보낸 사실 조회 회보서는 나도 읽어 봤어. 범행으로 인해 동승했던 피해자 가족이 사망했다고 봐야 해. 고의적이었어. 합리적인 양형이야.”
“네, 아무래도 작정하고 쳤던 거 같아요. 전부 다 죽일 작정이었을 텐데, 남편만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산 거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해요. 협의 이혼이 무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 가족이 탄 차를 죽어라고 들이받다뇨. 양상이 평범하지가 않아요.”
“네가 의심하는 건 뭔데?”
“눈에 보이는 거론 남편은 외도도 하지 않았고, 결혼 생활 내내 의무를 다했어요. 다만 이혼을 원했을 뿐이죠. 아내 쪽의 이런 급발진은 비정상적이에요. 남편한테 눈으론 못 찾는 원인이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뭐. 가스라이팅 같은?”
윤신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아내가 사이비 종교에 매몰됐을 수도 있고, 그의 말마따나 결혼 생활 내내 남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갖은 분노가 쌓였을 수도, 아니면 시부모와의 고부 갈등이 극단적으로 심했을 수도 있었다.
성별이 반전되었다면 모를까, 여자가 남자를, 그것도 배우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경우엔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남편이 원인을 제공했다면 감형 사유였다. 그걸 포기한다는 게 일반적이지 못했다. 법의 명령으로 몸과 행동반경을 구속받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변호사를 들들 볶는 쪽이 보다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자신 또한 여태까지 그런 의뢰인들만 접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재판 기록을 읽는데 제 눈엔 피고인이 감옥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것도 최대 형량으로요. 이런 경우 보신 적 있으세요?”
흐음. 짧은 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세헌은 담백하게 답변했다.
“죗값을 필요 이상으로 치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지만 그렇다고 없진 않아.”
“전 뭔가 더 있다는 감이 와요.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확인한다면 남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죠. 그럼 판 뒤집힐 거라고요. 처벌 자체는 피할 수 없겠지만 범행 경위에 여러 가지가 참작돼서 형량을…….”
“낮춰 주는 게 정말 그 사람을 위한 일일까, 그 점이 궁금한 거지?”
정답이다. 그리고 정곡이었다.
윤신은 차마 말로 답하지 못하고 옆으로 치워 둔 서류를 손으로 그러쥐었다. 단순히 일에 관한 거라면 바쁜 세헌을 찾아와 귀찮게 하지 않았을 터다. 어떤 가치관이나 신념, 혹은 한 인간의 존엄 같은 초월적 범주의 일이기에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게으르게 해답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내린 판단이 옳은 건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강세헌은 나쁜 짓을 종종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옳고 그른 게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헌 또한 그걸 잘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이 그걸 증명했다.
“도윤신 변호사, 한 사람은 중상이고 두 사람이 죽었어. 이건 살인 사건이야.”
“……알아요.”
“죄책감까지 변호사가 책임질 순 없어. 유감이야.”
“만약에 제가 이분 뜻을 어기고 돕는다면…….”
“일단 너한테 협조적이지 않을 거고, 내 경험상 최악의 경우 자살할 수도 있어. 살리고 싶으면 교도소에 수형인으로 있게 둬.”
물끄러미 종이를 내려다본 윤신이 그걸 다시 손에 쥐었다. 힘주어 움키는 모양새는 이게 제가 맡을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사리 받아들이고 있는 중임을 드러냈다. 마음이 조금 편해진 걸로 미루어 어쩌면 세헌의 조언을 통해 포기가 최선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다 파쇄해야겠네요.”
“정 궁금하다면 여자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정도는 알아봐 줄 수 있는데.”
“그냥 모르는 채로 있을래요. 알면 뭐라도 하고 싶어질 거예요.”
“도윤신 오늘 꿈자리 사납겠네.”
“그러게요. 고마워요. 저 내려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풀이 잔뜩 죽은 윤신이 인사와 함께 문에 손을 뻗었다. 그 착잡해하는 목덜미를 힐끗 본 세헌은 태블릿을 옆으로 대강 치워 두곤 그대로 팔을 내밀었다. 기운 없어 하는 어깨를 훅 잡아당기고는 뒤에서 힘껏 끌어안아 주면서 목덜미 이곳저곳에 비 내리듯이 쪽쪽, 입을 맞췄다.
볼이 발그레해진 윤신이 돌아보려고 하자, 그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팔에 힘을 주었다. 그거로는 모자랐던지 경고 차원으로 길쭉한 목선의 정중앙쯤에 콱, 치아를 박아 넣었다.
“윽. 주차장에서 막 이러셔도 돼요? 몇 미터 거리에 탁 비서님도 계시잖아요.”
“당연히 직장에서 이런 추잡한 짓은 하면 안 되지.”
입으론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세헌은 어째선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했다. 앞으로 내민 손으로 윤신의 하관을 단단히 붙잡더니 턱 선과 귀, 뺨에까지 골고루 키스했다. 싫진 않은 윤신은 일단 그가 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다만 곁눈질을 통해 누가 가까이 오진 않는지를 면밀히 탐색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창 여린 살결을 탐닉하는 데 몰두해 있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목덜미 근방에서 느껴지던 그의 숨결이 서서히 멀어지는 걸 느낀 윤신이 돌아보았다.
“선배 오늘 저희 집으로 와요. 우리 거기서 자요.”
“아니, 오늘은 너희 집 말고 다른 데서 보자.”
“선배 집?”
“너하고 내가 살 집. 한번 가 봐야지.”
필연적으로 굳어 버린 윤신이 별말 못 했다.
그가 정식으로 같이 살자고 말해 준 이후로 두 사람은 윤신이 끌린다고 했던 지역의 전망 좋은 고급 빌라 한 채를 정식으로 매매했다. 혹여 사생활 관련 스캔들이 생길 때를 대비해 듀플렉스형으로 된 건물을 일부러 수소문하던 중 딱 적당한 매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집끼리 거리가 멀어 인근 주민들 사이에 왕래하는 일이 전혀 없고, 사생활 보호가 치밀하게 잘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어 빠르게 결정했다.
두 개의 주거 공간으로 나누어진 내부를 트고, 승강기도 재설치해야 했던 바람에 인테리어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기다림 끝에 슬슬 마무리될 때가 됐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사는 어차피 서로 간격을 두고 해야 할 거 같아 천천히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가 봐도 돼요? 공사 끝났대요?”
“공사는 끝났고. 가구들이 전부 들어온 건 아니고. 그런데 거길 가 보는 건 오늘이 딱 적기일 거 같네. 비밀번호는…….”
“제 생일?”
“우리 첫 키스한 날.”
“회식 날이어야 할 거예요. 인정할 때도 됐잖아요.”
세헌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어림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글쎄다. 너야말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면 집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겠지.”
곁눈으로 그를 슬쩍 살핀 윤신이 혹시 몰라 주변을 한 번 더 살피곤 그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이 남자의 위로는 무척 훌륭했다. 그리고 완벽했다.
찜찜하고 속상하던 기분이 그가 선사해 준 행복한 기분으로 포개어져 뒤덮였다. 자신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즐거운지 세헌의 눈에도 소소한 기쁨들이 새겨졌다. 윤신이 완전히 몸을 틀어 그의 뺨에 손을 얹으려던 때였다. 살갗을 문지르고, 어루만지기도 전에 그가 품에서 자신을 놓아주더니 야박한 축객령을 내렸다.
“자, 이제 상담 끝. 10분 다 됐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마주 본 윤신은 기막혀했다.
“와, 진짜 인정사정없네.”
“나머진 집에서 하자. 퇴근하고 거기서 봐.”
“우리 신혼집……요?”
어딜 말하는 건지 그도 알고, 저도 아는데 굳이 말끝을 흐리면서 세헌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똑같은 표현으로 듣고 싶은 기색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어설픈 도발에 쉽게 넘어와 주지 않은 그가 또박또박 답했다.
“어, 너하고 내가 살 집.”
“더 상징적인 표현이 떡하니 있는데 굳이 그렇게 길게 표현하는 이윤 뭔데요. 절차의 간소화가 생명인 현대 사회에서요.”
“우리가 아직 정식으로 결혼을 안 했으니까. 사실 관계에 입각한 거지.”
“언젠간 할 거잖아요? 그냥 동거를 먼저 하는 거뿐이죠. 실용적으로.”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고 지그시 윤신을 보던 세헌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영 안 내켜 보였다.
“너 내가 그 소리 안 하면 안 나갈 거지.”
“버텨 보시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 마침 제가 꽤 한가하네요. 미팅 어디서 해요? 따라가죠 뭐. 탁 비서님만 데리고 가시는 거 보면 엄청 은밀한 회동인 거 같은데…….”
뻔뻔하게 미소 짓는 연인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눈으로 훑던 그는 언젠가 도윤신의 잠정적 아군이 제게 했던 확신에 찬 말을 떠올렸다.
<뭐 그거야. 당연히 대표님이 전승하시겠지만요.>
도윤신의 아킬레스건이 그를 겨냥해 했던 비난도 덩달아 생각났다.
<대표님은 질 줄 모르는 분이잖아요?>
방금 전 도윤신 본인이 제게 했던 이 말도 함께 귓전에 돌림노래처럼 되살아났다.
<나는 언제쯤 선배 이길 수 있나 해서.>
누가 알까.
몇 년째 스스로조차 믿기지 않지만.
세헌은 윤신에게 단 한 번을 이기지 못하고 번번이 지는 중이었다.
눈앞의 당사자는 본인이 까마득한 상관이자 선배를 상대로 백전무패의 연승 행진 중이라는 걸 아는 듯도, 모르는 듯도 했다. 복잡한 심사를 지우려 혀를 찬 그가 몸을 훅 기울였다. 그러고는 윤신이 앉은 자리 문을 직접 열어 주며 답했다.
“……그래, 신혼집.”
“…….”
“내려.”
너무 행복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미처 억누르지 못한 윤신이 씨익 웃었다. 그의 뺨을 붙잡고 미친 듯이 뽀뽀해 주고 싶지만, 그가 문을 열어 둔 이상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아쉬운 대로 제 검지와 중지에 입술을 문지르곤 그걸 세헌의 입에 맞대는 것으로 타협했다.
차에서 얌전히 내린 윤신의 뺨이 홍조가 진하게 올라 선명한 핑크색을 띠었다. 여느 때처럼 차마 그에게 저 가는 뒷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어쩌면 단 1초라도 세헌의 얼굴을 더 보고 싶어서 돌아서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이따 봐요.”
손 인사를 하던 윤신이 이윽고 기둥을 돌아 탁 비서가 대기하고 있을 로비로 향했다.
“그래, 이따 봐.”
완전하게 가시거리에서 사라진 연인의 흔적을 되새기면 세헌의 입가에도, 마치 잔뜩 행복해진 윤신의 미소가 전염된 것처럼 부드러운 웃음기가 걸렸다.
* * *
심각하게 현관 도어 록을 들여다보던 윤신이 손가락 뼈마디를 꺾어 가볍게 마사지했다.
비밀번호는 여섯 자리 혹은 여덟 자리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이곳까지 들어올 때 거친 꼼꼼한 보안 절차를 고려하면 그리 안전도가 높지 않은 네 자리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후우, 깊이 심호흡하고는 매우 신중하게, 버튼을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삑, 삑, 삑, 삑.
곧이어 ‘삐릭’ 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 록의 잠금이 해제됐다.
“그럴 줄 알았어.”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채 숨기지 못한 웃음을 터트린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서 희미하게 인기척이 느껴졌으나 윤신은 놀라지 않았다. 세헌으로부터 운 좋게 미팅 시간이 훨씬 단축돼 먼저 도착했다는 연락을 이미 받았다. 아마 그일 것이다.
자택 내부는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 가구들까지 얼추 들어섰다. 완성된 형태는 아니었으나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몹시 그럴싸했다. 세헌과 같은 집에서 잠들고 깨는 게 낯선 일인 것도 아닌데 정식으로 한 지붕 아래 함께 살 거라는 상상을 하자 이상하리만치 들떴다.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고, 긴 복도를 지나 소리를 따라 걸었다.
자잘한 소음이 있는 곳은 문이 열려 있는 서재였다. 처음 세헌은 빈방이 많으니 서재를 각자 구현해 쓰자고 제안했다. 윤신은 단칼에 거절했다. 집에 머무를 때의 그는 서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그럴 때 방해하는 사람이 되는 기분을 느끼기가 싫었다. 제 의사를 진중하게 고려해 보던 그는 동의했던지 서재를 공동 공간으로 만드는 걸 수락했다.
자신이 이곳의 소리를 들었으니 그도 밖에서 누군가 들어와 가까워지는 기척을 들었을 것이다. 쓱, 고개를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밀어 넣은 윤신은 세헌의 자취를 눈으로 찾았다.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던 그가 가까이 오라는 양 손가락을 까딱했다. 연이어 거의 비어 있는 책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위층 할래, 아래층 할래?”
“책 놓을 공간 말하는 거, 맞죠?”
“그럼 체위 말하는 걸까 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질문이 노골적이라 조금 당황한 나머지 숙고하지 못하고 대충 고르게 됐다.
“아뇨? 별로. 그…… 아래층요. 제가 아래.”
“여전히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네. 맞아, 넌 아래층이야.”
체위 말한 게 맞는 거 같은데?
눈빛으로 그런 말을 대신 했더니, 세헌이 귀신같이 읽어 내고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참고로 체위는 위아래 고를 필요 없어. 동서남북으로 다 할 수 있거든.”
“……진짜요?”
“왜 되물어. 기억을 잘 돌이켜 봐.”
그와 관계했던 기억들을 찬찬히 곱씹던 윤신이 얼굴이 벌게져서 웃음을 터트렸다. 곧 세헌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널찍한 등을 끌어안았다. 그가 복부쯤에서 엑스 자로 겹쳐진 제 손을 가볍게 주물러 주면서 마저 말했다.
“당분간은 꼭 필요한 물건들을 조금씩 옮기도록 해. 나는 네가 완전히 짐을 옮긴 뒤에 사택을 비울 거야. 우리가 정식으로 같이 사는 것도 내 이사까지 마친 뒤겠지? 저번에도 얘기했다시피 당분간은 차 한 대를 사택에 반드시 두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돈 얼굴 비쳐.”
친절한 설명에도 윤신은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세헌은 상대의 반응이 제 예상도에서 벗어나자 퍽 의아해했다. 능숙하게 자세를 고쳐 같은 방향을 보던 서로의 몸을 마주하게 하고는, 너른 품으로 자꾸 숨으려 하는 윤신의 턱을 슬며시 들었다. 손끝으로 밀어 올려 눈을 마주치게 만드니, 마지못해 눈높이를 얼추 맞추는 모양새가 평상시와 사뭇 달랐다.
한참 동안 깊은 눈동자를 마주 보던 그는 윤신이 왜 이러는지 깨닫고 넌지시 물었다. 사람들이 그의 것이라 선뜻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아주 다정한 어투였다.
“겁나?”
윤신은 순순히 인정하며 슬쩍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순히 그런 단어 한 가지로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모두 설명할 순 없었다. 하지만 산발적으로 드는 모든 기분들 중 단 한 가지를 골라야 한다면 세헌이 말한 그것이 맞았다.
여태까지 자신이 내키는 대로 적극적일 수 있었던 건 상대방이 심사숙고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작게는 사소한 스킨십부터, 크게는 동거나, 결혼 같은……. 연인 사이에 하고 싶은 이상적인 것들을 떠들어 대면 그는 어떻게든 현실로 만들어 준다. 그 과정에서 최선인 입장을 취하고. 가능한 한 서로가 다치지 않을 방법을 강구했다.
덕분에 제 쪽은 어떤 막무가내 부탁을 하고도, 심지어 그걸 세헌이 자의든 타의든 들어주게 만들고도 단 한 번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누나와의 일로 배운 게 있었다. 제가 타격받지 않는다고 해서, 세헌 또한 타격받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윤신은 종종 그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순진하게 굴 때가 있지만 무디거나 둔하진 못했다. 자신이 부린 욕심이 세헌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워졌다.
“사택이 우리 사이의 보호막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도망칠 구석이 없어지니까, 무서워졌다는 소리네. 무르고 싶어?”
“그런 건 아니지만…….”
“난 오래 고민했고, 결정했으니 이제 절대로 안 물러 줄 거야. 너 나한테 물렸어.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젠 진짜 돌아갈 데가 없는데, 만약 우리 관계가 누군가의 손에 쓸 만한 카드로 쥐어지면요? 선배가 또 나 때문에 안 들어도 될 말을 들으면요.”
들어오는데 대문이 딱 하나였다. 주차장은 오직 둘만 이용하는 공동 공간이었고, 이제부터 현관도 같은 비밀번호를 공유하게 될 터다. 서재는 반씩 나누어 사용하고, 침실에선 매일 밤 함께 잠들 예정이었다. 전부 알고 있던 일인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건 색다른 감상을 몰고 왔다.
모두가 이 관계를 환영해 주는 건 아니다.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사이를 아는 미희와 탁 비서는 조용히 응원만 해 주었고, 또 누나에 관해서는 당연히 환영해 줄 거라고 긍정적인 결말만 생각했기에 그런 상황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저를 뒤에 숨겨 준 덕에 굳이 볼 필요 없었던 현실이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 집에서의 매 순간을 낙관하기에 강세헌은 적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도 관장 일 때문이지? 네 머릿속은 뻔해.”
“그냥 철이 좀 든 거라고 해 둘게요.”
“안 되겠다.”
“뭘?”
“개봉을 해야 환불을 못 하지.”
“뭘?”
어느 시점부터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이해가 안 됐다. 집은 환불하진 못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팔 수는 있었다.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윤신이 영문을 몰라 하자, 세헌이 느닷없이 번쩍 안아 드는 것으로 응답했다. 근사하게 품에 안았다면 모양새는 좀 나았을까. 어깨에 짐짝 걸치는 것처럼 둘러메곤 거침없이 서재를 빠져나가는 바람에 얼떨결에 떠 들린 윤신이 발버둥 쳤다.
“뭐 해요, 지금?”
찰싹.
정신 바짝 차리라는 경고 같았다.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둔부를 가뿐하게 내려친 그가 복도를 걸어 안쪽의 방으로 진입했다. 윤신이 알기로 이 방은 이 집의 가장 평수가 넓은 침실이었다. 이곳에 맞춤으로 제작한 특대형 침대를 두기로 협의했다. 그는 일반 침대의 두 배는 되는 바로 그 침대에 윤신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놀라 바르작거리는 몸 위를 전신으로 내리누르며 완전히 올라탔다.
침실의 문간을 밟는 순간부터 세헌의 의도가 잡혔던 윤신이 그의 바지 버클을 잡으면서 물었다.
“아직 시트 깔지도 않은 침대 위에서 진짜 할 수 있으시겠어요? 매트리스밖에 없는데?”
“온 김에 신고식은 해야지.”
“여기서 제 허리가 배기는 건요?”
“안 벗길게.”
“겨우 그거로 해결되겠어요?”
“살살 할게.”
대부분의 경우 믿음직한 강세헌이 유일하게 못 미더울 때가 바로 침대 위에서였다. 침대 밖에서는 대체로 약속을 지키는 그이지만 침대 위에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약속을 지켰다가, 어느 날은 깡그리 무시했다. 비율은 반반 정도 됐다. 아울러 강세헌은 ‘살살’ 섹스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알아도 아는 체 안 할 사람이었다. 자신이 사고로 입원했을 때 스스로 인정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신했다.
“살살 안 할 거잖아.”
“너무 겁먹지 마. 또 몇 달을 유사 성행위만 할 순 없지.”
“여긴 윤활제로 쓸 것도 없는데…….”
“어젯밤에 우리 많이 해서 아직 헐렁할걸.”
“헐러……. 말 다 했어요? 아니거든요?”
“확인해 보면 알겠지.”
“헉……!”
방심한 윤신의 바지 버클을 풀고 순식간에 하의를 벗겨 허벅지께까지 쑥 내린 그가 속옷을 주시했다. 곧 그는 허리를 깊게 숙여 얇은 천 위로 도드라진 회음 부위를 혀끝으로 길게 핥았다.
하윽. 자신들이 거주하게 될 집인데도 아직 낯선 기분을 느끼고 있던 윤신은 안으로 먹히는 탄성을 토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오늘 자신의 컨디션과 내일의 일정을 떠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저를 이 방으로 데려온 세헌의 배려심 섞인 감정과 제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빠듯한 흥분까지 그 모든 제반 사항들을 충실히 그렸다.
더는 자신도 모르겠다.
“진짜 살살할 거죠……?”
“……부러뜨리진 않을게.”
“잠깐만, 말이 다르잖아?”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는 노련하게 드로어즈까지 벗겨 아래로, 아래로 끌어 내리더니 허공에 반쯤 뜨다시피 한 희멀건 허벅지가 제 상반신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자유로운 두 손을 윤신의 밀부 양쪽에 얹었다. 꾸욱, 엄지로 눌러 구멍의 입구를 크게 벌린 그가 설첨을 뾰족하게 세우곤 그 안에 쑥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아흑. 흣.”
보통은 손가락부터 넣어 보는데, 지금 이 순간엔 그도 꽤나 급한 모양이다. 세헌의 붉은 혀끝이 구멍 속에 거칠게 들락날락했다. 그는 지난밤 성기로 사납게 들쑤셔진 연약한 점막들이 아직 놀라 있진 않을까 우려하는 듯했다. 열기를 잠재우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혀를 넣었다, 빼냈다 반복했다.
덕분에 그의 상박에 달랑달랑 매달린 윤신의 양 다리가 부들거렸다.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잔열로 인해 앓는 것처럼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괴로워서 몸부림치다 괜히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푹, 혀끝이 안에 깊숙하게 진입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세헌과 몇 년 동안 사귀면서 정말이지 침대 위에서 자행할 수 있는 온갖 음란한 짓은 다 저질러 왔다. 그런데도 이 행위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불편한데, 너무나도 창피한데, 또 싫은 건 아니라 차마 그만두라고는 말 못 하고 계속 끙끙거렸다. 거부하지 않으니 그의 반응이 난잡해졌다. 미묘한 차이지만 확실했다. 제 아래를 빨면서 헤집어 놓는 일만으로도 미친 듯이 흥분되는 모양이다.
“선배, 흐으…….”
“후우, 넣어도 될 거 같다. 아직 부드러워.”
“콘돔 갖고 있어요? 저 없는데.”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가 훅 몸을 일으켰다. 금세 상체를 바짝 겹쳐 온 그가 단둘밖에 없는 이 너른 공간에서 기어이 귓전에 속닥거렸다.
“너랑 내 사이에 아무것도 끼워 주기 싫어.”
부끄러워진 윤신이 뺨을 벌겋게 붉히곤 좋다, 싫다 대답하는 대신 발을 달싹였다. 자신이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 그는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이제 보니 달콤한 희롱에는 도가 텄다. 저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여느 때와 달리 상냥한 어조와 한없이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꼬시는 건 솔직히 반칙 아닌가 싶었다.
괜히 원망스러워져 그를 힐난하려는 목적으로 상체 어디든 때리려고 두 팔을 휘두르자, 세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후속 행동으로 응답했다.
“좋아할 줄 알았어. 허리 들어.”
명령과 동시에 가뿐하게 윤신을 들어 올린 그가 재킷을 벗어 고이 접고는 등허리에 깔아 주었다. 연이어 윤신의 손목을 움켜쥐곤 제 앞섶을 강제로 문질렀다. 양감이 거대한 그의 것 위에 손바닥을 몇 번 비비면서 두 사람 모두 필연적으로 흥분했다. 자극을 가할 때마다 한껏 낮춰 터트리는 숨결에 잔뜩 억눌린 욕망이 섞여 나왔다. 금세 붉어진 방 안의 공기가 낯 뜨거울 정도였다.
몇 번 그가 이끄는 대로 뿌리부터 귀두까지 옷 위로 쓸어내리던 윤신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몸을 어설프게 일으켜 세헌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어느 틈에 흥분해서 최대치로 단단해진 그의 것이 튕기듯이 나오려는 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저 흉기가 제 안을 꿰뚫고 들어오는 상상을 하자 온몸이 떨렸다. 평정을 찾기 위해 가까스로 심호흡하곤 드로어즈를 아래로 조금 내려 숨 쉴 공간을 열어 주었다.
오늘따라 더 거대해 보이는 성기를 꺼내기가 녹록지가 않았다. 낑낑거리면서 빼려고 하니 느릿하고 어설픈 손길에 흥분되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길게 호흡한 세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기다리느라 숨넘어가겠다.”
“괜히, 이 집에선 처음이라 또 첫날밤같이 긴장돼서…… 거의 다 됐어요.”
지그시 윤신을 내려다보던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울리지 않게도 초조한 듯 보였다. 마침내 귀두부터 음낭까지 완전히 꺼낸 윤신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그걸 마주한 순간, 기다렸다는 양 익숙하게 포로의 다리를 벌리고 그 틈새에 자리를 잡는 행동에도 조바심이 가득 실렸다.
“첫날밤이라. 그건 여행 가서 치르는 게 클래식하지?”
하체의 긴장을 애써 풀려 노력하던 윤신이 돌연 뻣뻣하게 굳었다. 아래 누운 자신은 양쪽 허벅지를 추켜올려 그의 어깨 위에 발목을 걸치고, 위의 그는 바지만 미세하게 풀어 헤친 상태로 성기를 꺼내 벌어진 가랑이 사이에 처박고 있는 야릇한 자세로 그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여행?”
“그때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바빠지는 바람에 못 갔잖아. 서운한 티 낼 줄 알았는데 안 내서 내 쪽이 섭섭해지더군. 왜 사려 깊고 그래? 기분 나쁘게.”
“시, 시간 낼 수 있어요? 이번엔 진짜죠?”
“프랑스는 어때.”
“프랑스? 그렇게 멀리 가도 괜찮아요?”
“로트렉 그림을 보러 가자.”
“…….”
“더 놀라도 돼. 신혼여행 가잔 의미 맞으니까. 너나 나나 바쁘니 결혼 전에 미리 가 둬서 나쁠 거 없겠지. 실용적으로.”
이게, 강세헌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정말로 맞는 걸까.
졸라야 간신히 해 주던 얘기를 알아서 줄줄 들려주는 그 때문에 윤신은 어찌할 바 몰랐다. 또 무슨 말을 내뱉을지 가늠도 안 가는 그의 붉은 입술에 완전히 관심을 빼앗긴 바로 그때였다.
“서…… 아윽! 아!”
콰악!
황홀해진 먹잇감이 넋을 반쯤 놓은 사이의 좁은 빈틈을, 그는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세헌은 교활하게도 단박에 민감한 구멍 속으로 음경을 쑤셔 박았다. 광포한 기세로 쳐들어온 발기한 귀두가 그의 말대로 어젯밤 잔뜩 해서 아직 얼마간 벌어져 있는 내벽 사이를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당연히 버거운 양감이라 윤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잠시 동안은 고통에 숨도 못 쉴 정도였다. 그저 제 안에 몽둥이처럼 커다란 성기가 박힌 그 순간의 아릿한 통증을 하나씩 숫자 세듯 감내할 따름이었다.
하악. 하악. 뒤늦게 가까스로 연달아 호흡한 윤신이 비명처럼 내질렀다.
“아파! 강세헌, 나 아파……!”
가뜩이나 그의 것은 커도 너무 커서 좁아터진 밀부로 온전히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고 없이 틀어박히면 아프다 못해 숨이 턱 막혔다.
“한 번에 넣어야 덜 아파. 다 널 위해서야.”
“말은 잘……! 아! 아응, 읏!”
항의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마치 입막음하듯 그의 거침없는 인터코스가 시작됐다. 퍽, 퍼억. 힘주어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윤신의 몸이 몇 번이고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그가 말 대신 몸의 대화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실히 제게로 건너왔다.
두 사람 앞에 놓인 모든 일들은 아직 어렵기 짝이 없지만, 윤신의 우려대로 사택이라는 완충 지대가 사라져 버린 이후로 어쩌면 더 극복하기 어려운 수많은 난관들이 들이닥쳐 올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 이정표 없는 항해를 시도해 보자는 의미였다.
다른 모든 위험 요소들을 차치할 만큼 오랜 시간 함께 있고 싶으니까.
묵직하게 제 안으로 꽂혀 들어오는 그의 것을 느끼며 윤신은 힘겹게 손을 뻗어 눈앞의 딴딴한 팔뚝을 붙들었다. 손에 힘이 빠져 손가락이 떨리는 걸 실감했으나, 놓긴커녕 더욱 간절하게 그를 잡았다. 그의 셔츠를 힘주어 움킨 손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세헌도 이미 다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간절하고 뜨겁게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위태롭게 요동치고 있는 그의 감정들 또한 제게 고스란히 전부 느껴지기에.
세헌이 추삽질할 때마다 뇌가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절정의 쾌감은 그가 세세하게 가르쳐 주어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윤신은 단순한 쾌락뿐만이 아니라 감격으로 가슴이 터질 듯 흥분됐다. 아마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그걸 행복이라고 부를 것이다.
“흣. 아, 뻑뻑해요. 천, 천천히…….”
“흥분돼? 감도가 좋네.”
“으응, 느리게 하는 거…… 너무 좋아. 아…….”
“살살 하려니까 힘들어. 이거 진짜…… 못 할 짓이군.”
“흐으, 흐. 기분 좋아요.”
“이제 덜 불안하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었어.”
생각해 보니 서재에서의 대화가 이 침실에서의 정사로 이어진 거였다.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 자신이 가장 안도하는 걸 잘 알기에 제일 빠르면서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 것이다. 가늘게 뜨고 있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린 윤신이 발그레해진 뺨과 번들번들해진 눈가, 애욕이 가득한 시선, 그를 향해 몇 번이고 달싹거리게 되는 입술 모두를 감추지 않고 모두 드러내 고백했다.
꽤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말해 보는 거 같다. 최근의 세헌은 애정 표현에 전보다 후해졌으니까.
“저도 사랑해요.”
그도 이 타이밍에 예의 그 소리가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일순 멈칫했다. 곧이어 완전히 깔아뭉개는 것처럼 제 하중을 윤신에게 모두 실으며 허탈하게 내뱉었다.
“하아……. 정말 돌겠다, 너 때문에.”
자신이야말로 이 남자 때문에 돌아 버릴 것 같다.
“선배, 잠깐만, 너무 깊게 들어왔어, 아, 아파, 읍.”
평소에 비해 한없이 느긋하게 피스톤질하던 세헌이 더는 참지 못하고 윤신에게 입을 맞췄다. 허벅지가 땅겨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윤신도 온갖 통증을 잠시 잊고 그에게 입술을 내주었다. 뜨거운 숨이 둘의 입에서 토해졌다. 서로에게 완전히 달려든 두 사람이 위의 혀끝과, 아래의 밀부를 모두 연결하곤 아무것도 둘을 가로막지 않는 즉물적인 섹스에 탐닉했다.
터억, 터억.
아직 시트조차 깔지 않은 튼튼한 새 침대의 프레임이 삐걱거렸다.
앞으로 수많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둘만의 아늑한 공간이.
무르익은 사랑을 닮은 공기로 끝없이 달큼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