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49/51)

홍보 팀 담당자와 미팅을 마치고 되돌아온 윤신이 괜히 비서실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계속 때를 엿보다가 통화를 마친 탁 비서에게 쓱 다가간 그는 파티션 위를 엄숙하게 노크했다.

똑똑.

“저, 탁 비서님.”

“어, 도 변호사님. 홍보 팀장님하고 면담은 잘 끝내셨어요? 뭐라셔요?”

“단속 차원으로 펌 입장을 내보내고 싶으시대요. 인터뷰 한 건 더 추가할 수 없겠냐고 해서요.”

“군불 지피게요? 홍보 팀 물 만났으니까 노 좀 젓겠다고 욕심부리네. 과욕은 금물인데. 지금 잘 일단락돼 가고 있잖아요.”

“그래서 대표님 의견 여쭈고 회신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무실에 안 계시는 거 같네요?”

이 비서실은 세헌이 대표로 취임한 뒤 한 차례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대표 변호사의 비서실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에 인력도 늘었고 하는 일도 많아졌다. 덕분에 윤신까지 덩달아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힐끔힐끔 보기만 할 뿐 전처럼 느닷없이 그의 방에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세헌이 자리를 비웠다. 자신이 홍보 팀장과 미팅을 잡기 전부터 보이지 않았으니 최소한 몇 시간은 부재 상태였다는 소리다.

“어, 연락 안 해 보셨어요? 바쁘셔도 도 변호사님 연락은 신경 쓰실 텐데요.”

“그럴까 봐서요. 중요한 업무 보시는 데 방해될 수도 있잖아요.”

탁 비서는 펌 내부에서 일어나는 강세헌에 관한 모든 일을 총망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 힌트를 구하려고 했던 건데 저를 보는 남자의 얼굴이 어째 수상쩍었다. 의아해하는 시선을 전혀 숨기지 않은 윤신이 몸을 폭이 좁은 인포데스크의 상판 위로 기울였다.

“실장님,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죠.”

마찬가지로 윤신을 향해 상반신을 쑥 기울인 탁 비서는 말을 할 듯 말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간 그러나 싶더니 무슨 생각인지 끝내는 말을 아꼈다. 혹시 이 오픈된 장소가 문제인 걸까. 답답해진 윤신이 위치를 이동했다. 그는 탁 비서의 등 뒤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곧이어 세헌과 가끔 대화하곤 하는 복도 끝의 인적 없는 자리로 남자의 등을 열심히 떠밀었다.

마지못해 딸려 와 주는 걸 보니 말을 전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제 예상대로 장소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마침내 단둘이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먼저 입을 연 건 궁금한 게 많은 윤신이었다.

“뭔데요?”

“하…… 이게 제가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는 사안이란 걸 아는데.”

“하지만 제3자가 끼어들어야 일이 해결될 때도 있는 거 아시죠?”

탁 비서도 그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저, 실은, 아까 ‘산사’에서 사람이 왔어요.”

‘산사’는 이경이 소유한 갤러리 이름이었다.

짚이는 게 많아도 너무 많은 윤신이 아무런 대꾸 못 하는 사이, 남자의 우려가 가득 섞인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알기로 공식적인 루트로 ‘산사’ 측에서 미팅 요청 들어온 게 없어요. 내부 인사라면 일말의 여지가 있지만 그렇게 약속 잡지 않고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외부 손님은 절대로 안 받아 주시거든요. 제가 수년을 모셨지만 그동안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런데…… 순순히 가셨어요.”

탁 비서의 말대로였다. 세헌은 기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상종조차 안 했다. 아무리 몸집이 큰 클라이언트라도 미리 연락하지 않는다면 만나 주는 법이 없었다. 그의 특별 대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들 알았다. 하다못해 도국을 설립한 전 대표이자 송미희 변호사의 아버지마저도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는 반드시 사전에 약속을 잡고 방문했다.

이건 둘 중 하나였다. 세헌과 이경 사이에 교감이 있었거나, 혹은 그가 억지로 그녀의 무례를 용인하고 있거나. 어느 쪽이어도 제게는 불편하게, 아니 불안하게 들렸다.

어쩌면 세헌의 짐작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마음 깊숙한 한편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이경이 둘 사이를 평화롭게 받아들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싹트는 걸 차마 전부 짓밟진 못했다. 하지만 그날, 세헌이 저를 그녀의 집으로 데리러 왔던 그날 밤 이후로 누나가 그 일에 관한 대화를 원천 차단하려 애쓰는 걸 느끼면서 단념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차츰 받아들였다.

‘누나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이 연애는, 그나마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요소들조차 알고 보면 어렵기 짝이 없었다.

안 그래도 이 문제에 관한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내심 결심하긴 했다.

오늘 해야 할 모양이다.

“탁 비서님, 저 오늘 일찍 퇴근해요. 제 일정 정리 좀 해 주세요.”

“염려 마세요. 외부 미팅으로 해 둘게요.”

“그리고 차도요.”

“아, 오늘 안 갖고 오셨죠? 바로 기사님이랑 같이 배차할게요. 저기, 제가 말씀드렸다는 건 비밀로 해 주실 거죠!”

서둘러 돌아선 윤신이 속력 높여 제 방으로 달려가며 걱정 말라는 듯 손을 짤짤 흔들었다.

“도 변호사님! 아직 다리……! 뛰지……! 마시지…….”

적이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으로 그 위태위태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탁 비서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되돌아와 윤신을 위한 세단을 수배했다.

* * *

얼음이 가득 채워져 있던 아이스커피는 이미 다 녹아 묽어진 지 오래였다.

이경은 꼭 기우제라도 지내는 것처럼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비장한 표정과 완고한 입매는 지금부터 심각한 얘기를 꺼낼 거라고 예고하는 듯했다. 그녀의 정면에 자리한 세헌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퍽 여유 있게 유리컵을 손에 들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녹아 버린 커피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지금 갤러리 ‘산사’ 관장실의 티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14분…….’

자신이 몇 분째 인내하고 있는 건지 계산해 본 그는 차라리 먼저 운을 뗄까 갈등했다.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로 도윤신을 제외한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인내한 적은 처음이었다. 고민 끝에 딱 1분의 시간만 더 줄 셈으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바로 그때, 애써 초연한 척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이경이 분명한 어투로 또박또박 포문을 열었다.

“저도, 윤신이도, 정말 강 대표님껜 고마운 게 많아요. 빚은 두고두고 갚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싱거워진 커피를 또 한 모금 목구멍으로 삼킨 그가 태연자약하게 응수했다.

“보통 빚진 사람에게 배은할 때 그렇게 얘기를 시작하죠. 네, 계속해 보세요.”

멈칫한 이경은 이러다 금세 달변인 그의 페이스에 말릴 것 같았던지 황급히 마저 말했다. 에두르지 않고 직구를 던지는 강력한 어조에서 흐름을 빼앗아 와야 한다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매사에 정직한 태도를 보이는 점은 윤신을 닮았다.

“남자끼리예요. 미래 같은 게 있어요?”

“내가 예언자도 아니고 겪어 보면 알게 되겠죠. 마침 행위 당사자 두 쪽 다 의사가 있으니까요.”

“결말이 너무 뻔해요. 더 늦기 전에 이 만남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별 있는 분이잖아요.”

까랑.

일부러 소리 내어 유리로 된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은 그가 날렵한 시선을 오롯이 그녀에게 고정했다. 세헌은 사소한 손짓 하나, 미미한 기척 하나로도 타인의 주의를 이끌어 가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바로 말렸음을 깨달은 그녀가 어떻게든 타이밍을 사수해 보려 했으나, 그의 담담하지만 힘 있는 음성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게 보다 빨랐다.

“그건 안 되겠는데.”

“제가 반대해도요?”

“그게 나한테 중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물정을 잘 모르는 겁니까, 나를 잘 모르는 겁니까.”

“윤신이를 아는 거예요. 우리 윤신이 누나 말 잘 듣는 동생이에요. 늘 제 의견에 귀 기울여 줬어요. 제가 아들처럼 키웠다는 건 그 애도 부정하지 않을 거고요. 누나가 처음으로 그 애의 선택에 강력하게 반기를 든다면, 잘못된 일이라는 거 깨달을 게 분명해요.”

그녀의 말은 완전한 정답은 못 됐으나 대부분 이치에 맞았다. 세헌은 굳이 그걸 조목조목 반박하려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경이 크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 연애가 얼마나, 정말이지 얼마나 어렵게 시작되었고 또 유지되었는가 하는 두 사람의 역사였다. 그녀도 거기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럼 왜 여태까지 의심하면서 모른 척했어요.”

“그건, 윤신이가…….”

거침없이 대꾸하던 이경이 순간 멈칫했다. 할 말이 입에 가득 남아 있는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뒷말은 그가 수십 초를 더 기다려 주어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많이 참았으니 더 이상은 인내하지 않겠다는 양 스스로 말을 이었다.

“예컨대 도윤신을 사랑한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양보해라. 같이 늪에 빠지지 말고.”

“네, 그거예요. 역시 의식 있는 분이라 말이 통하네요.”

“아뇨. 말 안 통할걸요. 난 도윤신을 늪으로 끌고 들어갈 겁니다.”

놀란 그녀가 발끈했다.

“지금 그게 윤신이 누나 앞에서 하실 말씀인가요?”

세헌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도이경 씨, 신의로 충고 한 가지 할까요? 나는 도윤신을 언제든지 쓰레기 냄새가 가득한 하수구 구멍으로 처박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남매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다룰 줄도 아신다 이건가요?”

“만약 내가 거기 있으면, 그 녀석은 고민도 하지 않고 제 발로 거기 처박히러 올 거란 얘깁니다. 그러니까 도윤신을 내가 있을 구덩이에 쑤셔 넣기 전에 자꾸 나를 약 오르게 만드는 건 관둬요. 걔가 계속 빛 속에 있는 게 보고 싶다면 이러는 건 좋은 설득 방법이 아닙니다.”

다시 유리컵을 든 그가 다리를 척 꼰 채 앉아 호로록 커피를 마셨다. 그 거만한 모양새는 지금 세헌이 완벽하게 이경을 협박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덕분에 윤신을 볼모로 협박하려던 그녀는 역으로 카운터펀치를 맞은 표정을 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경은 눈앞이 아찔했다. 물론 강세헌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동안의 시간을 통해 나름대로 잘 학습한 바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운데 두고 다른 이도 아닌 그 누나에게 딜을 건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수단과 방법 안 가리는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녀의 상식과는 어긋났다.

이래서 안 되는 거였다. 울컥한 그녀가 끝내 원망스러워하는 감정을 내비쳤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세요? 윤신이 앞에서도 하실 수 있어요?”

역시나. 이런 공격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 어떤 험구들이 나와도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실제로 윤신은 저수위와 고수위를 넘나드는 온갖 말들을 세헌으로부터 듣고 있었다. 특히 침대 위에서 어떤 험악한 말들을 듣는지 그녀가 안다면 입을 다물 수조차 없을 터다.

“요컨대 이건 솔로몬의 재판 같은 거예요. 우린 양쪽에서 도윤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거죠. 나한테서 도윤신을 뺏으려고 하면 누가 진짜로 괴로울까요. 나일까요? 내 생각엔 도윤신이 다칠 거 같은데요. 나는 걔의 팔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안 뺏길 생각이거든요.”

“대체 어울리지도 않게 왜 이렇게 고지식하게 구세요? 그냥 연애잖아요? 언젠간 끝나는.”

“누가 그래요? 그냥 연애한다고. 내가 그 자식이랑 어디까지 가 볼 작정인지 알긴 합니까? 왜 모르는 일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들죠?”

그의 말에 물음표가 찍힌 바로 그 순간.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갤러리 직원이었다. 분위기가 꽤 냉랭해 보였던지 우물쭈물하며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말을 전했다. 이경은 축 처진 음성으로 돌려보내라고 답하더니 사람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세헌을 향해 마저 따졌다.

“남자……. 네, 솔직히 어렵고 불편하긴 해도 윤신이가 좋아하기만 하면 용인할 순 있어요. 돈 없고 못 배운 사람이라도 그 애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겠죠. 그런데 강 대표님은 아니에요.”

“난 돈이 아주 많고, 무척 잘 배웠고, 명예도 있습니다. 납득이 가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전 사랑도, 결혼도 다 실패해 봐서 그게 현실이라는 걸 알아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위기가 오는 줄 아세요? 서로 양보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대표님은 질 줄 모르는 분이잖아요?”

다리를 꼬고 비딱하게 앉아 있던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팔짱까지 척 꼈다. 몹시도 오만해 보였다.

“하아, 지금 내가 너무 많이 이겨서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믿기지가 않는군.”

바로 그때였다.

잠시 사라졌던 작은 인기척이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도 사람의 발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만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거기까지 신경 쓸 수가 없었던 이경이 뒤의 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조바심이 섞인 손끝에는 돌려보내라는 말을 못 들었느냐는 메시지 또한 아로새겨진 채였다. 그녀는 몇 번 수신호를 보내고는 한 박자 뒤늦게 대꾸했다.

“그뿐인 줄 아세요? 평생 외로우셨죠. 주변에 있는 아무도 못 믿잖아요.”

시종일관 여유 만만했던 세헌이 처음으로 틈을 내주었다.

멈칫한 그가 답하지 않는 동안 이경이 거침없이 이어 말했다.

“걔는 변호사님하고 달라요. 외롭게 있으면 안 되는 애예요.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강 대표님은 애인까지 고독하게 만들 사람이에요. 최소한 양친, 아니면 한쪽 부모님, 그것도 아니면 형제나 친척, 아니, 속 다 터놓을 친구만이라도 계셨으면 좋았잖아요. 힘들 때 걔가 혼자 당신을 마냥 기다리지 않게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조건이에요?”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힌 유리컵을 고요히 주시하던 세헌이 눈살을 구겼다. 그녀의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해서였다. 한데 지켜보는 이경은 그걸 그의 부정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녀가 보다 더 감정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래요. 필요할 경우 테러들도 여론전으로 활용하는 편이시라더니, 윤신이한테 사고가 날 때까지 예방도 못 해 주셔 놓고, 심지어 방패막이로 쓰시고! 속이 편하시던가요? 전 잠이 안 오던데요. 네, 팔이 잘려도 갖겠다는 분답네요.”

조용히 사념에 빠져 있던 그는 이경이 거친 숨을 뱉는 걸 감지하고 씁쓸하게 픽 웃었다. 다만 계속 침묵했다. 어떤 역공의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답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동시에 혼잡한 정체 상태였던 머릿속은 실타래가 풀리듯 깨끗하게 정리됐다.

반지 낀 왼손을 뻗어 유리컵 위의 물기를 쓱 닦아 낸 그가 정면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 순간, 거침없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영이 시야에 걸렸다.

관장의 나가라는 신호를 무시하고 저벅저벅 접근하는 저 실루엣의 주인은 제 시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나빠진 게 아니라면 윤신이었다.

이경도 완전히 근접해진 인기척을 그제야 의식한 건지 이번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지금 중요한 손님 접대 중인 거 안 보여요? 돌려보내라니……까…….”

어설프게 손을 뻗던 그녀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티 테이블 옆에 우뚝 선 사람의 낯이 눈에 익어서였을 것이다. 무단 침입의 주체가 관장의 친동생이기에 직원이 함부로 그를 돌려보내지도, 강제로 손을 쓰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거로는 내부 인력의 관리 소홀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짓고는 세헌에게 고개를 돌려 그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가 저도 몰랐던 일이라는 답을 하려고 하는데 윤신이 타이밍을 앗아 갔다.

“누나, 그거 내가 하겠다고 한 거야. 대표님은 반대했고, 내가 몰래 저질렀어.”

차분히 해명한 윤신이 그녀를 서운해하는 눈초리로 응시했다.

이 안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는지 상세히 알지는 못했다. 자신이 아는 건 방금 전 문간에서 대충 귀동냥으로 들은 대화들이었다. 그것들은 영영 지울 수 없을 만큼 확실하고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오늘 일은 어떤 의미에선 강세헌의 삶에서 제일 잊을 수 없는 치욕이자 모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뭘 해 보기도 전에 거부당하고 있었으니까.

윤신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평생 안 들어도 될 말을 조용히 듣고 있는 그 때문에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지금 받은 모멸감을 수십, 수백 배로 갚아 주고도 남을 그가 여기선 그러지 않는 걸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눈은 이경을 주시한 상태였지만 윤신은 명확히 세헌을 겨냥해 입을 다시 뗐다.

“왜 진술 반박 안 해요? 선배는 이기는 변호사잖아요.”

상황이 이 지경이 되리라곤 예상을 못 했던 세헌은 골치 아파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해하며 마른세수까지 한 그는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묻듯 천천히 윤신을 올려다봤다. 눈앞에서 분노하고 있는 윤신과 비스듬한 측면에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경, 그리고 여기 앉아 어이없어하는 제 모습을 두루 살피다 보니 떠오르는 오래전 어떤 대화가 있었다.

<그럼 왜 상견례는 안 해 주는데?>

‘결국 기어이 이 짓을.’

기가 찬다는 양 이마를 꾹 눌러 짚은 그가 윤신을 향해 뒤늦게 대꾸했다.

“생각 중이야. 맞는 말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웃기지 마요. 맞긴 뭐가 맞아? 왜 참아요. 선배가 언제부터 이런 소리 듣고 참아 주는 사람이었다고.”

“내가 참는 것처럼 보였어? 좀 더 일찍 들어오지 그랬어. 안 참는 것도 봤을 텐데.”

세헌이 이경의 말에 반박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윤신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냥 일어나요.”

웬일로 순순히 딸려 와 주나 싶던 세헌은 제 손목 위에 얹힌 하얗고 곧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걸 떼어 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윤신이 나타나는 것은 그의 예상도에 없던 일이었으나, 언젠가 남매가 만나 이 일에 관해 대화하리라고는 짐작했으니 방해할 필요까진 느끼지 못하겠다.

사실 도이경은 놀라울 정도로 최선을 다해 상식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미 내심으로는 짐작을 하고 있어서 그럴 터다. 오래전 그녀의 소송을 도국이 대리해 주었던 것도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녀야말로 이런 대면을 피하고 싶었을 텐데, 결국 알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방해꾼 역할을 자처하는 게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

손톱을 쥐어뜯는 이경을 내려다본 그는 윤신을 향해 가벼이 턱짓하며 물었다.

“들을 얘긴 다 들은 거 같군요. 동생하고 할 얘기 있어요? 이쪽은 상태 보니 있을 거 같고.”

“있어요. 윤신이랑 얘기 좀 하게 도와주시면 좋겠네요.”

“그렇게 해요.”

세헌은 차분하게 응수하곤 다시 윤신을 쳐다봤다. 혼란이 가득한 저 눈동자를 핥아 대고 싶다는 욕망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최대한 타협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네가 못 본 데서 내가 벌써 매우 재수 없게 굴었어. 괜히 마음에도 없는 상처 주지 말고 적당히 해. 주차장에 있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와. 오랜 못 기다려.”

“선…….”

뭐라 말을 하려던 윤신은 쌩하니 가 버리는 세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문밖으로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고, 남매만이 이 안에 남겨졌을 때 적막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앉으라는 듯 손짓하는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은 윤신이 표정으로, 시선으로, 목소리와 몸짓으로까지 서운함을 표현했다.

“이러기야?”

“그럼 내가 쌍수 들고 찬성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니?”

“나는 뭐 매형, 아니 유 대표 그 개자식 마음에 들기만 했는지 알아?”

“정원 씨는 가족, 일가친척 멀쩡히 다 살아 있어. 의지하는 친구도 꽤 있지. 물론 강 대표처럼 아는 사람 중 반은 그 사람 죽이고 싶어 하긴 하지만 최소한 날 본인 살자고 이용하진 않았어.”

이제야 알겠다.

세헌이 맞고 자신이 틀렸다.

멋대로 인터뷰한 일로 세헌이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설명을 듣고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 한구석에선 수용 못 했다. 지금에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사람은 타인을 이용하는 꺼림칙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사람이고, 자신은 아니기에 누나도 이렇게 오해할 거라는 걸 꿰뚫어 봤던 것이다.

여태 자신은 보고 싶은 것만 봤던 걸까. 줄곧 그녀라면 모두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사려 깊고 현명한 제 누나가 이 사안에서도 예의 통찰력과 배려심을 발휘할 거라고 여겼다. 만에 하나 그러지 않더라도 최소한 반대하는 이유가 아까 말한 것들은 아니리라 믿었다.

그 사람이 성격이 차가워서, 너무 바빠서, 찜찜한 짓을 많이 하는 남자라서, 자신에 비해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라서. 반대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면전에 대고 외로워서 싫다는 핑계를 댄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만나자고 조르지 말 걸 그랬다.

“내가 진짜 바로 눈앞만 보는 바보였네.”

“윤신아.”

“누가 그래, 이용당했다고? 누난 내가 사랑에 미쳐서 이용이나 당하는 등신 같아?”

“이용당한 게 아니어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끔찍한 일인지, 언론에 당하는 나 보면서 느꼈다면서. 그런 네가 강 변 돕겠다고 널 막 쓴 거잖아. 처음부터 잘못된 일은 끝도 나빠. 이래서 차라리 모르고 싶었어. 왜 하필 강세헌이야. 강세헌 몰라?”

“누나, 이제 나도 똑같이 고아야. 대체 뭐가 문제야?”

“네 선택이 널 불행하게 만들까 봐 그게 무서워. 저렇게 차가운 남자하고 사귀다가 사랑이 식으면 그때 가서 어떻게 무를 건데? 내 꼴 못 봤어? 부부는 소송이라도 걸지, 강 대표가 마음먹고 밟기 시작하면 넌 내가 아는 누구보다 비참해질 거야. 평생 사고 한번 안 치더니 이제 와서 이런 대형 사고를 쳐서 누나한테 대못을 박아!”

그가 말했던 대로, 이경은 제게 더 나은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자신의 생각은 다른데, 이거보다 나은 건 절대로 없을 것 같은데. 언제나 침착한 성정의 그녀가 이만큼 흥분한 걸 보니 쉽게 설득이 될 거 같지 않았다.

강세헌은 요령이 좋으니까 분명히 할 수 있었을 터다. 한데 아까 그러지 않은 걸 보고 나니 아직까지도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의 말에 전부 동의하고 있는 기색이어서 심장이 아팠다. 지금 혼자 두면 안 될 거 같은데, 어떻게든 그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도 커서 박차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나, 선배가 사람 못 믿고 곁을 안 주는 건 차가워서가 아니야. 그냥 그런 방식으로 버티는 거지.”

“남이면 나도 반대 안 해. 그 사람보다 더 잘난 남자를 세상에서 어떻게 찾겠어. 하지만 넌 달라. 내가 너무 다정한 너를 알아서 그래. 운이 따라서 끝장은 보지 않는대도 똑같아. 넌 평생 양보하게 될 거야. 네가 희생하는 연애를 하게 할 순 없어.”

이경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죄다 틀린 소리를 해 댔다.

윤신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이러는 걸 견디기가 어려웠다. 단순히 제 누나라서가 아니다. 자신들 남매가 그에게 빚진 게 많아서였다.

“선배가 왜 도국에 7년이나 발목이 잡혔는지 알아?”

“7년?”

“송 대표님하고 거래했거든. 대표로 취임하는 바람에 남은 기간은 흐지부지됐지만.”

“윤신아, 지금 그런 얘기 할 때니? 강 대표가 능력 있는 변호사라는 거 나 누구보다 잘 알아.”

“정확히 그런 얘기 할 때지. 누나가 지금 누리는 이 괜찮은 삶을 누가 다 걸고 찾아 줬는데.”

“소송? 도국에 제대로 값 쳐서 보상했어. 게다가 그건 너도 많이 노력했잖아!”

윤신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려는 것이다. 모두 그녀의 소송을 맡아 주지 않으려고 했던 때의 기억을 잊었을 리가 없건만 그녀는 잊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 정도 대형 소송을 정말 내가 주도했다고 생각해? 고작 주니어가? 언제부터 그렇게 순진했어? 양보? 희생? 나 어디까지 창피하게 할래.”

차분히 털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제 누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난 그녀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직 궁금한 것도, 해야 할 말도 많은데 당장 동생이 가 버릴 것 같았던지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던 윤신은 도저히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거 같아 그녀의 지척에서 멈췄다.

“나한테 상처 주기 싫다고 그걸 강세헌한테 주면 어떡해.”

이경은 정곡이 찔린 듯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저 반응을 보고 있자니 명확하게 이해됐다. 그녀도 이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아울러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양보하는지 충분히 짐작했으나 오직 동생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기도 하고, 또 둘만 세상에 남겨 두고 먼저 가 버린 부모님이기도 해서 오래도록 탓할 수가 없었다.

슬프게도 그녀의 입장 또한 이해는 됐다. 역할이 바뀌었다면 자신도 저랬을 수 있었다. 그저 본인이 겪어 본 불행을 답습하지 않길 바라는 애정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관점과 방법이 틀렸을 뿐이다.

“내 생각은 안 바뀌니까 누나가 생각을 바꿔. 준비되면 연락 줘. 갈게.”

쓸쓸하게 미소 지은 이경이 윤신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멀리 못 나가니 살펴 가라는 인사였다. 떠나는 동생을 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귀에 또 한 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참아 왔던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내는 그녀의 안색이 꽤 안 좋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혼을 준비하고 있던 당시, 윤신이 찾아와 강세헌에게 어떤 약점이 생겨 제 사건을 수임해 줄 거라고 했던 얘기를 나눴던 날이 떠올랐다. 그 일을 진행하면서 친밀해져 관계가 무르익은 건 줄 알았는데 애초에 둘의 관계 때문에 그 일을 맡아 준 거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꽤 오래 사귀었네.”

처음에는 사람에도 관계에도 집착하는 법이 없던 윤신이 웬일로 연애에 크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좋아 보여 내버려 두었다. 어영부영 시간을 써 버리는 동안 ‘설마’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상대가 누구냐는 물음에 제가 예상하는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하고 또 방치해 두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였다.

사귀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수줍게 뺨을 붉히던 동생의 모습을 하나씩 사탕 꺼내먹듯이 조심스럽게 반추해 보던 이경의 얼굴에 서서히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자수를 놓는 것처럼 생각을 차근히 이어 가던 그녀는 마침내 아까 세헌과 나누었던 대화까지 돌이켰다.

<그럼 왜 여태까지 의심하면서 모른 척했어요.>

<그건, 윤신이가…….>

행복해 보였으니까.

유리잔의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품위 있게 쓸어 본 그녀는 이 자리에 앉은 뒤 처음으로 그것을 손에 쥐었다. 다 녹아 버린 커피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오늘 세헌에겐 이 밍밍한 음료가 얼마나 쓰게 느껴졌을지 가늠해 보는 그녀의 두 눈가가 고민으로 젖어 갔다.

* * *

차 안은 유난히 적막했다. 승차감이 워낙 좋은 차라 주행할수록 누군가 부드럽게 몸을 들어 이동시켜 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모래알들이 물속으로 침잠하듯 기분도 차분해졌다. 덕분에 피가 역류해 솟구치는 것 같던 아까의 심경이 마치 어제 느꼈던 일인 것 같을 정도였다.

세헌의 차 조수석에 앉아 한참 창밖을 내다보던 윤신은 이 정적 속에 뭔가 말을 해야겠다 싶어져 천천히 입을 뗐다. 여전히 시선은 창 너머 저녁 시간의 푸른빛이 도는 한여름 풍경을 응시한 채였다.

“누나가 한 말 때문에 우리 집 합치는 거 무르거나 그런 건 아니죠?”

핸들을 잡고 있던 세헌이 손가락을 세워 그 위를 툭, 쳤다. 살짝 비웃는 기척도 함께 느껴졌다. 윤신이 그걸 알아채고 확, 고개를 돌리자 운전 중이던 그가 짧게 곁눈으로 시선을 주곤 다시 정면의 도로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 ‘아니.’라는 답변은 없었다.

“비웃지만 말고 대답으로 확실하게 해 주세요. 좀 불안해서요.”

“당연히 아니지. 누구 좋으라고 그걸 물러. 난 남한테만 좋을 짓은 안 해.”

후우. 안도의 한숨을 뱉어 낸 윤신은 한결 편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누나가 극심하게 반대해도 우리 애정 전선엔 이상 없는 거 맞죠?”

“왜. 넌 이상 있어?”

“전 그대로니까 선배만 없으면 돼요. 그리고…… 미안해요. 그런 말 듣게 해서요. 이런 말이 기분 나아지는 덴 도움이 하나도 안 되겠지만, 저 지금 너무 속상해요.”

“그래, 이렇게 될 거 같더라. 네가 속상해지는 게 싫었던 거였는데.”

때마침 그의 차량이 부드럽게 좌회전했다. 윤신은 핑계 김에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세헌의 팔뚝에 관자놀이 부분을 슬며시 문질렀다. 어리광 부리는 게 싫지 않은지 그가 짧게 호흡을 가다듬는 게 닿은 자리를 통해 파동으로 전이됐다.

머뭇거리던 윤신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비스듬한 각도로 올려다봤다.

이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가 주도면밀하게 턱만 미세하게 틀어 머리카락 위에 입 맞춰 주곤 물었다.

“할 말 남았으면 그냥 해. 음침하게 훔쳐보지 말고.”

“별로 훔쳐본 거 아니거든요. 조용히 관찰한 거지.”

“궁금한 거 물어보라고.”

“괜찮은 거죠?”

이번에도 세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옆모습만으로도 생각과 기분이 전달된다. 윤신은 그의 깎아 놓은 듯한 옆얼굴을 지켜보다 보니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추 알 것 같았다. 뭐랄까. 사실 관계를 정정하고 싶은 기색이었다. 혹은 어떤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짚어 두고 싶은 듯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너 누나 속 뒤집어 놓고 왔지.”

“뭐…… 관점에 따라서는?”

“독대의 딱 반만 봐 놓고 그렇게 저지르면 나중에 후회하지. 충고를 듣지 그랬어.”

“으, 그러게요. 선배가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더라고요.”

그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이 말을 가장 믿을 수 없어 했다.

“내가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뇨, 있어요. 저 빈정거리기 잘하더라고요. 선배랑 있어서 티가 안 난 거였어요. 누나한테 말하면서 나도 깜짝 놀랐어. 역시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구나…….”

황당해하던 세헌이 신호가 멈춘 사이 옆을 확 돌아보았다. 그의 어깨에 어설프게 고개를 기대고 있던 윤신이 재빠르게 뺨을 떼어 내고 등을 곧추세워 앉았다. 농담이 어느 정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건 이 차 안의 두 사람 모두 잘 인지하고 있었다. 윤신이 내심 고백하고자 한 건 이경에게 본의 아니게 못된 말로 상처를 주었다는 점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세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주행을 시도했다.

“너 같은 아들 낳을까 봐 무섭다.”

“지금 어딜 후사 타령이에요. 각자 대 끊어 주기로 합의 봤잖아요.”

강세헌이 제 앞에서만 보이는 모습이 있다. 편안하게 웃는 것이다. 예의 얼굴을 해 보이는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윤신이 상반신을 훅 기울여서 그의 뺨에 뽀뽀하곤 다시 처음처럼 창밖을 내다봤다. 세헌은 유리 위에 희미하게 비친 수심 가득한 얼굴을 힐끗 보면서 자신이 자리를 비우고 난 뒤의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오차가 어느 정도 있긴 하겠지만 대충은 상상됐다.

“도 관장은 그냥 네가 걱정되는 거야. 자기처럼 될까 봐.”

“그건 저도 알아요. 사랑이 끝난 걸, 그것도 엄청 더럽게 끝난 걸 경험해 본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선배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또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난 잘 모르고……. 저를 상처 주기는 싫으니까 선배한테 준 거죠. 치사했어요.”

“치사했지. 하지만 난 네가 걱정하는 것만큼 상처받지 않았어. 한 번은 겪었어야 할 일이고, 난 오늘 일부러 당해 주러 간 거야.”

“그것도 알아요. 하지만 누나 말에 동의는 했겠죠. 아픈 델 찔렸고.”

“그게 상처받았다는 뜻은 아니야. 난 지금 허세 부리려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때 안심했어.”

“안심?”

“네 누난 아마…… 한 가지만 납득하면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는 ‘아마’라는 단서를 붙였다. 섣불리 확신하진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트고, 깊은 곳에서 안심했다면 ‘아마’ 그 일은 일어나게 될 터다.

“한 가지요?”

“네가 누나를 답습하지 않으면 돼. 그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이경이 염려하는 건 종국에 사랑이 식어 서로를 상처 입히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가능하면 둘 다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테고, 꼭 누군가 다쳐야만 한다면 그건 반드시 세헌이길 기도할 터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행복하길 소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이 해결해 줄 거란 얘긴, 그가 그 긴 세월 동안 저를 위해 노력할 거라는 뜻이다. 동시에 좋아할 거란 의미였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고, 괴로워도. 그 과정에서 이따금 서로를 외롭게 만드는 한이 있어도.

그래도 그의 삶엔 항상 자신이 자리하고 있을 모양이다.

때로는 소리처럼, 때로는 공기처럼, 때로는 그림자처럼.

그는 함께인 게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도 서로 같은 곳에 있음을 의아해하지 않는 그런 존재로 저를 만들어 줄 작정이다.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고백보다 더 마음을 깊이 울렸다. 강세헌이 얼마나 독립적이고 고독하게 살아온 사람인지를 잘 알기에. 아는 만큼 더더욱.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같이 있으려고 상견례 같은 별 피곤한 짓까지 하는 중이잖아. 이 정도면 책임지는 거 아냐?”

“아, 상견례…….”

이제야 그 엇비슷한 걸 했다는 걸 깨달은 윤신이 수줍게 웃었다. 그러다 본인이 상상했던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며 이마를 창에 툭, 기댔다. 그거로도 모자라 관자놀이 부분을 투명한 창에 툭툭, 쳐 대기까지 했다. 혼자 이랬다저랬다 하는 정신없는 양태를 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구긴 세헌이 운전에 집중했다.

얼마쯤 흘렀을까.

곱씹다 보니 걸리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가 새로운 화두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도윤신 너, 거긴 어떻게 알고 왔어.”

시선은 다른 데 두고 있으나 온 신경만은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윤신이 요란하게 움찔했다.

“……네? 그……건 왜요?”

“탁 비 짓이야?”

“아……니요?”

어투는 지문 같은 것이다. 윤신의 진솔한 성격을 잘 아는 세헌은 이 어설프게 빠져나가려는 대꾸를 통해 일련의 상황을 마치 그림처럼 그려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산사’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비서실 직원 몇 명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세헌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정황상 탁이 아닐 수가 없는데.”

“그게……. 아닌데?”

“난 네가 나 몰래 누구랑 비밀 공유하는 거 못 참아.”

“진짜 아닌데…….”

“탁 비한테 들으면 그땐 너도 같이 책임지게 할 거야. 경제적인 관점으로 생각해.”

윤신은 좋은 친구를 구제해 볼 길이 없는지 짧은 사이 열심히 머리 굴려 연구했다. 뇌세포를 죄다 가동시켜 골똘히 궁리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결국 자진 납세 쪽으로 선회했다.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혼나기 싫으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우리 도와주시려고 애써 주신 거예요.”

“공사 구분을 못 한 거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 편들지 마. 그건 더 못 참아.”

역시나 세헌에게 자비의 기색은 비치지 않았다.

‘죄송해요. 탁 비서님.’

입술을 꾹 다물고 입 안으로 사과의 음절들을 삼킨 윤신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냈다. 몇 자 찍어서 비밀 유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세헌의 반응 따위를 간략하게 정리해 메시지로 보내자, 꼭 휴대폰만 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상대가 다급하게 답장했다.

[탁희원 비서님 : ??????]

[탁희원 비서님 : ??????????]

[탁희원 비서님 : ㅠㅠ]

한참 화면을 보다 손바닥만 한 기계를 도로 쓱 집어넣은 윤신이 멋쩍게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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