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48/51)

피부가 녹아내릴 정도로 후덥지근한 공기가 대지 위를 뒤덮는 계절이었다. 냉기가 흐르는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잔업을 마무리하던 윤신은 무심코 책상 위 머그잔에 손을 댔다. 내부 기온이 낮아서 일부러 따뜻한 차를 우렸는데 그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자정이 다 됐다.

“하아.”

뻐근해진 목을 마사지하며 몸을 일으킨 그는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모니터도 완전히 껐다. 거울 속 제 얼굴이 꽤나 안 좋았다. 단추를 몇 개 풀어 헤치는 바람에 드러난 목에 며칠 전 세헌이 만든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부분을 손끝으로 눌러 보던 윤신은 애써 달콤했던 기억을 접어 두고 퇴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소지품들을 서류 가방에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그때였다.

똑똑.

외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제 방 문을 두드릴 만한 사람은 손에 꼽았다. 업무상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새벽까지 사옥에 남아 있을 임직원은 많지 않기 때문에 대충 누구일지 예상도 됐다. 대답하지 않자 문이 벌컥 열리는 것으로 미루어 방문자의 신원을 올바르게 짐작한 모양이다.

“도윤신.”

익숙한 음성을 듣고 그제야 시선을 던진 윤신이 살짝 묵례했다. 문간에 선 탄탄한 몸이 매우 눈에 익었다.

“네, 대표님.”

“목소리가 쌀쌀맞네. 아직 삐졌어?”

“이런 상태를 보통 삐졌다고 표현하나요? 전 냉전이라고 배웠는데요.”

“그래. 우리 아직 냉전 중이야? 넌 화 끝이 짧잖아.”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다. 정히 대표의 말을 어긴 거로만 화를 내기가 싫었다면 차라리 스스로를 막 다룬 거로 화를 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얌전히 들었을 터다. 그에게 걱정을 끼쳤으니 그 부분에선 혼나도 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반성할 준비도 돼 있었다. 하지만 끼어들지 말라니. 아무리 그의 앞에서 실실대기 바쁜 저라도 아까 그가 보인 태도는 상처였다.

윤신은 이 일을 도저히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열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 화가 풀렸다고 눙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었다. 외려 저 남자가 자신이 지금 얼마나 화났는지 속속들이 알아봐 주길 원했다. 게다가 세헌에게 거짓말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현명하게 아무 말 하지 않는 걸 택했다.

사고의 흐름이 대강 그려졌는지 그도 캐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새벽까지 야근이야.”

“그래서 이제 퇴근하려고요.”

“잘됐네. 얘기 좀 해. 내 차로 갈까?”

분주하게 움직이던 양손의 움직임을 멈춘 윤신이 가방을 잠그고 세헌을 다시 봤다. 타악. 가볍게 손바닥으로 가방의 손잡이 부분을 치듯이 잡은 건 덤이었다.

“그 차에는 제가 끼어들어도 되나 봐요? 죄송해서 안 되겠어요. 그냥 제 차로 갈게요.”

“그럼 네 차로 같이 가든지.”

“아, 끼어들면 안 되는 건 저한테만 해당되는 거예요? 선밴 나한테 막 끼어들어도 되고?”

아까 그 말이 큰 충격이긴 했던 건지 대놓고 비꼬는 윤신의 어투에 어설픈 날이 섰다.

세헌은 지금 이 타이밍에 귀엽다는 듯이 웃어 버리면 윤신의 반응이 어떨지를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그려 보곤, 이내 무표정한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지금 만지면 화낼 거지.”

“네.”

“귀여워해도…….”

“네.”

“귀여운데.”

“안 돼요.”

“자꾸 안 된다니까 억지로 해 버리고 싶어.”

“뭐……를…….”

저도 모르게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대꾸하던 윤신이 도중에 멈칫했다.

하마터면 그의 공세에 말릴 뻔했다. 뭐가 됐든 역시 아니다 싶어 곧바로 답변을 바꿨다.

“안 돼요.”

“그렇군.”

덤덤하게 답한 그는 진짜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만지면 화낼 거였는데, 안 만지니 더 화가 났다.

그렇다고 진짜 손도 안 대?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다. 더 있으면 싸움만 될 것 같아 가방을 낚아채듯이 든 윤신이 문을 향해 걸었다. 문간에 서 있던 세헌을 냉랭하게 지나치려 하자, 그가 손을 척 뻗어 앞길을 막았다. 이대로 눈앞에서 사라지게 두고 봐 줄 순 없다는 뜻으로 전달됐다.

가방 손잡이를 힘껏 쥔 윤신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멈춰 섰다.

“하실 말씀이란 게 뭔데요.”

“진작 얘기하려고 했는데 타이밍 보느라 못했어. 조만간 사택 반납할 거야. 송 대표한테는 이미 얘기 전해 뒀고.”

“……사택을, 갑자기 왜요? 뭐, 저 몰래 어디 이사 가세요?”

“글쎄. 어디로 가면 좋을까. 너는 어느 동네에서 살고 싶어? 펌이나 사택하고는 좀 떨어져 있는 곳이 좋겠지? 그래야 주말에 외식도 하고, 밤에 공원 산책도 하지.”

세헌의 문장은 지극히 쉬운 단어들로 구성돼 있었으나 그걸 해석하는 윤신은 골이 빠개질 지경이었다. 답 자체는 금세 나왔다. 다만 그게 정답인지 오답인지를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선뜻 그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윤신에게 그가 직접 해답지를 제시했다.

“반응이 왜 그래. 별로 안 기뻐? 너 좀 데려가 달라며.”

윤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기뻐요. 솔직히…… 엄청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 얘길 꺼내는 저의가 뭔지를 모르겠어서요.”

“저의? 다른 뜻 없어. 말 그대로야.”

지금도 서로의 사택이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동선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고는 못 하지만 둘 다 서로의 공간을 출입할 때 꽤 남들 시선에 신경 쓰고 있어서 아직까진 큰 말썽 없이 지냈다. 사택 자체가 나름대로 사생활 보호가 잘되는 곳인 데다, 원체 새벽에 퇴근하는 일이 잦은 두 사람이라 지켜보는 눈이 없을 때 무사히 도착만 잘하면 되었으니까.

한동안 같이 살자고 조르기도 했으나 세헌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도 내심 반 정도는 체념하고 있었다. 동거가 적어도 최근 몇 달간 둘의 관심사였던 것도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뜬금없었다. 아까 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까 제가 한 말 때문이에요? 혼자서도 잘 사시는 분이라고 했던 거? 그래서 그거 아니라는 거 증명하려고 저하고 같이 살아 주시려는 거예요?”

“아냐. 진작 얘기하려고 했던 거야. 적당한 타이밍을 찾고 있었어. 이렇게 멋없게 말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고.”

윤신은 세헌의 잘난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평소처럼 미려한 이목구비에 감탄만 하는 대신, 그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해 내려 애썼다. 수많은 의뢰인들을 만나고, 그들이 거짓말하는 꼴을 수백, 수천 번은 보아 와서 이 일엔 인이 박였으나, 세헌의 것만은 확신을 못 하겠다.

“죄송해요. 거절할게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꾸였던지 세헌이 황당해했다.

“……뭐?”

“누나 얘기로 서운해하는 저 달래려고 마지못해 해 주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요. 제가 원하는 건 억지로 저하고 살아 주는 게 아니에요. 저를 원해서 같이 안 살고는 못 견디는 거죠.”

이쯤 되니 윤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는 거 없이 오직 이 남자를 위해서 인터뷰한 거라고 자위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도우려고 징계도 감수하고 벌이는 짓이라고 스스로를 속였지만 사실 자신은 내심 그의 칭찬이라는 부가 이익을 누리고 싶었던 듯했다. 제가 하는 행위라면 그게 어떤 짓이든 세헌이 다 봐줄 거라고 생각하고 객기를 부린 것이다.

자신은 그에게 특별하니까.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독단 행동을 취해도 언제나처럼 한번 피로해하고, 결국은 웃으며 넘어가 줄 거라고 말이다. 그가 그렇게 해 주지 않으니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제 모습이 그 불편한 진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미희에게 자신만만하게 세헌이 제게만은 약하다고 했던 말들은 그 연장선상이었다. 돌이켜 보니 그날 일이 창피했다.

“도윤신, 내가 너 하나 달래자고 억지로 그럴 사람이야? 날 아직도 그렇게 몰라?”

“저도 이러기 싫어요. 성숙하게 대처하고 싶어요. 그런데 잘 안 돼요. 말이 밉게 나가요. 자꾸 이러다가 선배가 나한테 질릴까 봐 그거도 무섭고.”

“그럴 일 없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계속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하게 될 거 같아서 대화 안 하겠다는 거예요. 솔직히 쪽팔리기도 하고요. 전 진정할 필요가 있어요. 시간을 좀 주세요.”

이제야말로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이번엔 세헌이 보다 완고한 방식으로 붙잡았다. 마주 본 상태로 서로의 왼손을 겹친 그가 중지와 약지를 이용해 윤신의 반지 낀 자리 위를 느긋하게 훑었다. 이러지 말라는 의미의 또렷한 시선을 그에게 보내 봤지만 상대에게 놓아줄 기미는 없었다. 물론 강력하게 뿌리쳐 거부하면 벗어날 수는 있겠으나 윤신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서운했고, 창피했고, 조금은 답답했다. 그런 껄끄러운 감정들을 세헌이 알아주길 원했던 거지 그와의 관계를 뼛속부터 어그러뜨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대화하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거, 내가 다 설명할게. 일단 자리를 옮기자.”

“난 선배가 하자면 해야 돼요? 내 기분이 그럴 기분이 아니라도?”

“응, 해야 돼. 내가 네 상관이니까.”

“하기가 끔찍하게 싫어도?”

“말이라고 해? 당연히 해야 돼.”

“섹스도?”

일순 멈칫한 세헌이 애매 모호하게 응수했다.

“궁금하면 일단 따라 나와.”

“그건 싫다니까요……!”

“강 대표! 마침 나와 있었네. 어, 도 변 이제 퇴근해?”

잡은 손을 밖으로 끌어내려던 세헌이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주시점을 옮겼다. 그 틈을 노려 붙잡힌 팔목을 비튼 윤신이 방에서 먼저 빠져나갔다. 모습을 드러낸 건 둘 사이를 알고 있는 미희였다. 서류철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세헌에게 따로 할 말이 있어 그가 퇴근 전이란 걸 확인하고 이쪽을 방문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녀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지 세헌을 한번 쓱 쳐다보곤 윤신을 향해 눈썹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잠시 그를 빌려달라는 의사 표현처럼 보였다.

이때다 싶었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럼.”

“어? 도 변, 도 변! 내 용건은 잠깐이면 되는데!”

미희가 붙잡기도 전이었다. 사무실의 불을 꺼 버린 윤신은 승강기 방향으로 속도 내 걸었다.

“저게.”

아직 완전히 성치는 않은 다리를 이용해 꾸역꾸역 전진하는 광경을 보곤 기막혀하던 세헌이 잡을까 말까 짧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퇴근길임을 속으로 곱씹고 겨우 참아 냈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윤신은 잡아 주길 기대한다. 그의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뒷모습에 비친 기미는 정확히 반반이었다. 잡으면 화낼 거고, 잡지 않아도 화를 내리라.

내키지는 않지만 윤신이 부탁한 대로 조금 더 시간을 주는 편이 나을 터다.

어디 호텔 방이라도 잡고 거기서 잠들지 않는 이상 사택에 머무를 테고, 세헌은 윤신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자유자재로 들락날락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애써 머릿속에 입력하며 당장 쫓아가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낸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미희를 쳐다봤다.

“뭔데. 급한 일이야?”

“약간? 그런데 쟤 지금 너한테 화내는 거니? 되게 귀엽다.”

“쟤 왜 저러는 거 같아.”

“어? 너 같은 독사가 진짜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닐 거고…….”

세헌의 서늘해진 안색을 요모조모 살피던 그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우, 결국 그거로 싸웠구나. 미안. 난 못 들은 걸로 할게. 아. 기업법 연구소장. 네 의견대로 대법관 출신이 좋을 거 같아서. 리스트 좀 추려 봤어. 나한테 10분만 내 주라.”

가늘게 뜬 눈으로 미희를 직시하던 세헌은 윤신의 방문을 굳게 닫았다.

그는 손잡이를 살짝 매만져 연인의 체온이 남아 있지는 않을지 확인해 보다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 싶어져 서둘러 그녀와 함께 제 집무실로 향했다.

* * *

윤신의 집 현관이 고요했다. 시위라도 하는 건지 자잘한 소음 하나 안 들렸다.

지난밤 그들은 세헌의 집에서 잠들고 이튿날 거기에서 출근했다. 여기로 퇴근했다면 며칠 전 봤던 윤신의 집 풍경과 달라진 게 하나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변화가 전혀 없었다. 하다못해 형광등도 켜져 있지 않았다. 현관에 벗어 둔 구두마저 전혀 안 보이는 게 미심쩍었다.

습관이란 건 생각보다 충실하게 제 몫을 하는 법이다. 아무리 평소와 다른 감정 상태로 집에 돌아왔더라도 윤신의 성격상 신발은 이쯤에 정갈하게 놓여 두어야 정상이다.

“윤신아.”

그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머리 위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한데 여전히 사위가 잠잠했다. 혼자 살기에는 많이 여유 넘치는 공간에 적막만이 가득했다. 거실에도, 드레스 룸에도, 침실과 욕실에까지도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그답지 않게 조바심이 일었다. 자신이 돌아왔을 때 도윤신이 집에 없었던 일은 가끔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어색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급격하게 초조함이 차올랐다. 어차피 결국 그렇게 될 거였는데 왜 하루라도 빨리 결정하지 않았을까. 아직 오지도 않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까지 계산하느라 서로를 아쉽게 했던 모든 날들이 불현듯 안타깝게 느껴졌다.

‘여기가 아니면…….’

이곳이 아닌 A동 제 사택으로 갔을 가능성도 남아 있긴 했다. 그는 당장 윤신이 보고 싶었다. 만지고 싶고, 품에 안고 싶었다.

휴대폰을 꺼낸 세헌은 원격으로 제집에 출입한 기록을 확인했다. 그런데 오늘 오전 출근했을 때의 시간 뒤로 딱히 입력된 게 없었다. 혹시나 싶어 가까운 위치에 있는 월패드에서 이 집의 입차 기록 또한 훑어봤으나 오전 중 출차 기록이 있을 뿐 그 뒤로는 공란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윤신에게 전화를 걸면서 동시에 다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1시였다.

“대체 어딜 간 거야.”

몇 번의 신호음이 울렸다. 그런데 한참 기다려도 윤신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는 한 번 더 걸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안 되겠다 싶어서 차 키를 도로 챙기고 집을 나선 그가 세 번째로 전화를 걸었을 때, 천만다행으로 고대하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네, 대표님. 이 시간에 왜 전화를 다 주셨어요? 뭐 시킬 거 있으세요?

“열받기 직전이니까 장난 그만해. 집이 왜 휑해. 너 지금 어디야.”

-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서둘러 승강기를 잡아탄 그는 초조하게 계기판의 숫자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수 초가 수년처럼 느껴졌다. 지잉. 마침내 육중한 기계의 문이 점잖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채 다 벌어지기도 전에 내부에서 막무가내로 빠져나온 세헌은 로비를 지나 주차장으로 달렸다. 운전석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한쪽 다리를 안으로 집어넣던 그가 초조함을 억누르며 답했다.

“재깍 집으로 올 것이지 이 시간에 어디로 샜어. 빨리 말해. 내가 갈게.”

- 아. 저, 오늘 집에 안 들어가요.

반대편 몸까지 완전히 운전석에 욱여넣고 차 문을 닫으려던 세헌이 멈칫했다. 그는 한번 상대의 말을 귀로 들으면 바로 그 물밑의 의도까지 파악하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윤신의 지금 이 말만큼은 쉽게 해석하기 어려웠다.

잠시 시공간이 멈춘 것처럼 침묵으로 답하던 그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너무나도 명료하고 담백한 문장이었는데도 계속 이해가 안 갔다.

“……뭐라고?”

- 안 들어간다고요.

“……뭐?”

- 안, 들어간다고요. 한 번 더 말씀드려요? 안, 들어, 가요.

“지금 뭐라 그러는…… 도윤신. 너 이게 무슨 개소리야. 네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안 들어가요.’는 ‘선배 거 저한테 다 안 들어가요.’ 밖에 없어. 당장 돌아와.”

- 저 선배한테 물러 터져서 오늘 밤 가까이 있으면 선배한테 가고 싶으니까요.

“그럼 오면 되잖아.”

- 그게 싫다는 거예요. 아무튼. 오늘은 누나 집에서 잘래요. 이미 씻었어요. 끊어요.

뚝.

대화를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는데 윤신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실은 이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으나, 세헌이 밤새 저를 찾느라 동분서주할 걸 짐작하고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해 마지못해 음성을 들려준 게 아닐까 짐작됐다. 황당해하던 세헌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더는 안 받으리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일단 시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으려던 그의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너를 돌게 할 수 있냐고 묻던 미희의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가 스쳤다. 신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도윤신은 가출하지 않는다고 확언했던 그때의 자신까지 덩달아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까득, 이를 억세게 문 그가 주행을 시작했다.

운전하는 사람의 기분은 차의 움직임에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심란한 표정의 그가 평소보다 난폭하게 코너를 돌았다.

“이게 감히 가출을 해?”

끼이이익.

출입구를 빠져나가 야밤의 도로를 질주하는 그의 세단이 묵직하게 들썩거렸다.

* * *

이 집에 그가 발을 들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부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리가 없는데도, 세헌은 마치 언젠가 한번 와 본 적 있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안으로 진입했다.

시간은 새벽 2시가 가까워진 오전이었다. 바꿔 말해 타인의 집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기엔 지나치게 실례되는 시각이었다. 그는 그걸 모를 리가 없건만 손톱만큼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보다 목적 달성에 대한 열망이 커 보였다. 아니, 오직 그것만 보이는 사람 같았다. 가해자가 그 부분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아서, 결국 피해자가 운을 떼야만 했다.

“강 대표님, 누구 집에 방문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드세요?”

“듭니다.”

심플하게 답한 세헌은 주저하지 않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종종걸음으로 뒤쫓던 이경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게, 끝인가요?”

“실례인 걸 알면서 기어이 쳐들어왔다는 건 내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뜻 아닐까요? 그냥 계속 실례할게요. 도윤신 여기 있죠.”

집주인은 앞서가는 손님을 계속 따르면서 답을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 세헌은 여러 개의 방문이 훤히 보이는 거실 한복판에서 발걸음을 끊어 냈다. 그녀를 마주한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까칠했다. 뭔가를 강하게 억누르고 있는 기색이었다. 그게 분노라는 건 지켜보는 사람이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대표님.”

“혹시 도윤신 숨겨 줄 생각이에요? 그거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은데요.”

“아직 고민 중이에요.”

“내가 도윤신 직접 찾으면 상황이 훨씬 꼬입니다. 굳이 안 봐도 될 꼴 서로 보게 될 거라고요. 그래도 계속 고민할 겁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럴 거면 현관문을 열어 주지 말았어야죠.”

그의 이 말은 그녀도 조금 억울했다.

“안 열면 현관 부술 것 같은 표정 짓고 계셨잖아요.”

“안 열면 부쉈을 거니까요. 현명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쭉 현명한 결정을 하세요.”

이경은 퍽 당혹스러워했다. 다만 두 남자를 지켜보는 제 입장이 어떤지는 지금 이 순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어렵게 받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정싸움 중인 둘 사이에 낄 틈이 일절 안 보였다. 부득이 전부 인정한 그녀는 그의 옆을 쓰윽 지나쳤다.

이번엔 집주인인 그녀가 주도권을 잡고 앞서 걸었다. 이쪽으로 따라오라는 양 안내하기에, 세헌도 조용히 뒤좇았다. 복도 왼편 방문 앞에서 멈춰 선 그녀가 여기라는 듯이 손짓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이경 대신 세헌이 방문 앞에 바짝 다가섰다.

똑똑.

“도윤신.”

그는 노크와 함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안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이 복도 전체에 방음 처리를 한 게 아닌 이상 저 너머에서 못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경도 윤신의 대응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 건지 조용히 끼어들었다.

“역시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나한테 할 말 많은 거 압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긴 나중에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그때 하세요. 지금은 이 문 열어요.”

“아까 월패드 보고 윤신이가 안에서 잠갔어요. 대표님 목소리 듣고도 안 열어 주고 있고요. 저 애 의지인데 제가 그걸 함부로 깰 순 없어요.”

세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윤신이 겁도 없이 가출을 시도했다는 걸 인지했던 차 안에서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의 두뇌는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고 기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집중해서가 아니라 열이 바짝 올라서였다. 그는 현재 정서적으로 자극받은 상태였다. 마치 섹스할 때, 몸에 느껴지는 물리적 쾌감을 뺀 극도의 흥분 상태와 아주 유사했다. 이런 식으로 사고의 능률이 오르는 건 드문 일이어서 평상시의 냉철함을 잃었다.

“이러다 도윤신이 문을 열어 줄까 봐 그게 무서운 거겠죠. 이참에 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위선 떨지 마세요. 나는 그런 게 제일 역겹습니다.”

“…….”

순간 한 방 먹은 표정이 된 그녀가 말을 아꼈다. 그리고 이 일련의 반응을 통해 세헌은 도이경이 지금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윤신의 짝으로 세헌을 반대했다. 처음부터 짐작한 일이었다. 그간 세헌이 찜찜해한 건 도이경이 알게 되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한 여파였다. 그녀가 이 관계를 인지하고, 그로 인해 도윤신에게 헤어지라며 상처를 주게 되고, 바로 그게 연인 간의 거리감을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두려웠던 터다.

윤신은 제 거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 지금 두 번째 요청합니다. 꿈 깨고 문이나 여세요. 선의로 한 가지 더 알려 주자면 방문을 부수는 건 현관을 부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합니다.”

그가 두 번째 경고이자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른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는데도 이경은 반응하지 않았다. 안의 윤신도 이쪽의 실랑이가 어렴풋이 들릴 텐데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세헌은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뱀 같은 눈에 순간적으로 광기마저 비쳤다. 그 빛깔을 미처 보지 못한 이경이 물러서는 사이, 그는 거실 한쪽에 있는 티 테이블로 다가갔다. 거기에서 외부가 단단해 보이는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챙겨 들었다. 그걸 뚜껑을 닫아 밀폐된 상태로 만들고는 몇 번 손으로 길들이듯 반복해서 쥐락 펴락 했다.

이윽고 다시 윤신이 있을 방문 앞으로 다가온 그가 이경을 향해 텀블러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펌으로 문 교체 비용 영수증 보내세요. 그거에 열 배로 변상하죠. 이것도 같이.”

그녀가 뭐라 답하기도 전이었다. 세헌은 한 손으로 독특한 문양의 문고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텀블러를 번쩍 추켜들었다.

그가 그대로 힘껏 내려쳐서 문고리를 부서뜨리려던 찰나, 이경이 비명처럼 외쳤다.

“잠, 잠깐만요……!”

가까스로 행동을 중단한 세헌이 이경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어딘가로 뛰어가나 싶더니, 금세 도로 모습을 비쳤다. 떨리는 손에는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표식을 구분해 가며 방 열쇠를 일일이 찾던 그녀가 겨우 발견한 건지 한 개를 따로 빼내 문고리의 작은 홈에 끼웠다.

달그락.

집주인의 취향대로 인테리어한 고풍스러운 문양의 문고리가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세헌은 텀블러를 여전히 손에 쥔 채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문 쪽만 주시하고 있던 윤신이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그를 발견하곤 몸을 더 둥글게 구겼다. 그의 손에 들린 이질적인 텀블러를 향해 힐끗 턱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거로 문 부수려고 했어요?”

손아귀의 물체를 힐끗 본 세헌이 대충 주변에 있는 탁자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왜, 이거론 안 부서질 거 같아?”

“기어이 부술 사람인 거 알아서 물어본 거예요.”

“다행히 머리가 아직 돌아가고는 있네. 가출할 땐 왜 안 돌아갔을까? 그때 돌아갔어야지.”

차갑게 응수한 세헌은 여전히 방문 밖에 서 있는 이경을 돌아보았다.

“자리 좀 비켜 줄래요?”

말은 뒤의 이경에게 했는데, 대답은 당사자가 아닌 반대편의 윤신으로부터 나왔다.

“여기 누나 집인데 어디로 비키란 거예요?”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계속 말했다.

“모르는 게 나은 얘기할 겁니다. 안 듣는 게 나아서 충고하는 거니까 꼬아 들을 거 없어요.”

그는 신의로 하는 조언이라는 듯 그녀와 눈을 또렷하게 마주치곤 안에서 문을 굳게 잠갔다.

완벽하게 건너편 복도와 방이 차단되자마자 침대 위의 윤신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 그를 보며 마치 저승사자가 다가오는 걸 목도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윤신은 도망치거나, 다른 위치로 피하지는 않고 몸만 더 웅크리면서 숨죽였다. 이리저리 널뛰는 생각들을 한데로 그러모으다가, 문득 조금 전 세헌과 이경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교감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단순히 친한 후배 좀 데리러 오겠다고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그 후배의 가족 집에 약속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지극히 몰상식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 세헌은 물론이고 이경마저도 순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해 의아했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 자신이 입원했을 때의 일도 미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세헌이 해 주었던 배려들은 펌의 복지 정책 일환이라고 어영부영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때도 이경이 완벽하게 해명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던지라 여러 요소들이 더해져 더욱 찜찜했다.

“방금 두 사람 뭐예요? 혹시 저 몰래 연락하고 그래요?”

세헌은 이 물음에 매우 답할 말이 많은 기색이었으나 그것들을 최대한 억눌렀다. 대신 윤신이 등진 헤드 근방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눈높이를 똑바로 맞추곤 반문으로 응답했다.

“너 정말 여기서 잘 작정이었어? 나를 밤새 혼자 두고?”

“네. 선배가 데리러 안 온다면요.”

짧은 대꾸였으나 세헌에게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던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민 기색을 감추지 못한 그의 눈이 매섭게 떠졌다.

“네가 감히 나를 시험해? 올지, 안 올지?”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시험한 건 아니에요. 확인한 거지. 이제 선배 차례예요. 방금 뭐예요?”

여전히 그는 물음에 불친절하게 굴었다. 뜬금없이 곧장 달려들어서 키스를 할 기세이기에, 그런 식으로 화해하고 싶지는 않았던 윤신이 그를 거부했다. 몸을 반쯤 기울인 세헌의 딴딴한 어깨를 잡고 제게 더 고개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듯 코앞에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 마요.”

말로도 세헌을 거절한 바로 그 순간. 윤신은 크게 동요했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런 얼굴은 처음 봤다.

“……선배?”

“나하고 키스하기 싫어?”

“키스로 얼렁뚱땅 화 풀기가 싫은 거예요.”

“나 선택한 거 후회해?”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은 그가 제게 하리라곤 정말로 예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해요?”

“대답부터 해. 나한텐 아주 중요한 거야.”

이는 언젠가 자신이 직접 세공한 반지를 그의 손과 제 손에 나누어 낄 때 나눴던 대화의 일부였다. 저를 후회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각오했던 그가 이제 와 그걸 묻는다는 게 이상했다. 단순히 중간 점검을 하는 차원 같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윤신은 이 순간만큼은 빼거나 에둘러 가선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 적 없어요.”

“한 번도?”

“단 한 순간도요.”

어깨 위에 얹힌 윤신의 두 팔을 뿌리치듯 털어 낸 그가 양손을 뻗어 뽀얀 뺨을 움켜쥐었다. 그는 한 차례 거부당했는데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얼굴을 숙여서 붉은 입술을 제 입에 가득 머금었다. 한입에 삼키는 것처럼 빨아들인 그가 얼떨결에 키스를 받아들이는 윤신의 입술 사이에 혀끝을 난폭하게 쑤셔 넣었다.

“흐으. 읏.”

마치 유랑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내부를 탐험하고는 있지만 안을 헤집어 대는 살덩이에는 확실히 조바심이 실렸다. 질척하게 입 안을 탐색해 가던 그는 윤신이 숨쉬기 버거워한다고 느꼈을 때라야 천천히 맞닿은 서로의 입술을 떼어 냈다. 축축하고 빨간 살덩이가 살짝 떨어진 순간. 젖은 입술에 달라붙은 투명한 실선을 혀끝으로 훔치듯이 쓱, 핥고는 상반신을 곧추세웠다.

얼굴이 벌게진 윤신을 주시하던 그가 긴 한숨을 토했다. 이어서 자세를 고치더니 완전히 돌아앉아 버렸다. 차마 얼굴을 보고 말할 여유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역시나, 금세 왼쪽으로 손을 뻗어 윤신의 곧은 손을 맞잡은 그가 입을 뗐다.

“난 저 여자가 싫어.”

오늘 강세헌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이 타이밍에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윤신은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일단 되는대로 해명했다.

“저 시스터 콤플렉스 없다니까요. 그건 오해라니까.”

“네가 저 여자를 사랑하잖아.”

“사랑하죠! 누나를 안 사랑할 순 없잖아요……. 그게 그렇게 싫어요?”

“그 부분 때문에 싫은 거야. 너한테 남은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니까. 네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무슨 짓을 해도 너하고의 연결고리는 남아 있지. 난 저 여자하고 싸움이 안 돼.”

싸움이 안 된다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긴 한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강세헌은 아무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건 그도 알고, 자신도 알고, 문밖의 누나도 잘 알았다.

이 남자가 누나를 불편해한다는 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로, 또한 상당히 구체적인 강도로 꺼림칙해한다는 것까진 확신 못 했다. 제 누나이기에 어느 정도로는 긍정적인 부분을 봐주고 있을 거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는 상상과는 달랐다.

그런 질투는 할 필요 없다는 걸, 자신이 사랑하는 건 당신이고 그건 더 특별한 형태의 애정이라는 걸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세헌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다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을 듯했다. 윤신은 착하게 기다렸다. 그가 잡은 손에 꽈악, 힘을 주곤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어. 우리 사이.”

“……이거, 아까 저한테 했던 얘기 설명하시는 거예요? 누나한테 보이기 싫다는 거요.”

“사실관계 정정, 아니다, 변명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실수했다고 생각하세요?”

“난 실수 안 해. 다만……. 네가 상처를 받았으니 부주의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들어. 자세히 설명했어야 했어.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까.”

느른한 정적이 흘렀다. 곁눈으로 보이는 세헌의 옆태를 주시한 윤신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이 작은 움직임을 기척으로 알아챈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계속 쳐다봐 주진 않았다.

심해처럼 낮고, 또 낮아서 듣는 사람의 마음마저 가라앉게 만드는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너무 바빠서, 별로 좋은 남자 친구는 못 되고. 그건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넌 아무 불평불만도 없이 나를 위해서 중요한 걸 매번 포기하고도 나한테 아무것도 못 해 주는 줄 아는 멍청이고. 나는 당연한 듯이 너의 외로움을 받아들일 거야.”

“…….”

“넌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를 아주 근사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 거야. 너 아니었으면 쭉 불구였을 나하곤 달라. 도 관장도 네가 나한테 과분하다는 사실을 곧 눈치채겠지. 게다가, 안됐지만 나는 너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체념 섞인 고백 같기도, 한편으론 참회하는 고해성사 같기도 한 그의 말을 얌전히 귀담아듣던 윤신이지만, 마지막 문장만큼은 어깃장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네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 그래서 알리기 싫었어. 큰 부담이 됐다고. 내가 못 해 주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된 저 여자가 너를 나한테서 빼앗으려고 할까 봐.”

정말로 어울리지도 않는 나약한 소리를 줄줄 읊어 대던 세헌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윤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빤히 보면서도, 그는 맞닿은 손을 더욱 간절하게 붙잡는 것 이상의 접촉은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온 살결을 맞대고 있을 때만큼 그의 절실함이 전류처럼 전해지는 것 같은 이 특별한 감각의 정체는 무엇일까.

윤신은 지금처럼 이 방어적인 남자의 마음이 속속들이 손에 잡히듯 느껴졌던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난 너 안 뺏겨. 누구한테도. 도윤신 너조차도 나한테서 너 못 빼앗아.”

입으로는 확신에 찬 말을 하면서도 그는 제게 눈으로 동의를 구했다.

가끔씩 세헌은 자신이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 포인트에서 무너질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윤신은 마음이 아프기 이전에 화가 났다.

“선밴 누나가 반대하면 제가 그 말을 듣기라도 할 거 같아요?”

세헌은 별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네 누나 말에 수긍하고 나를 차는 순간, 넌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넌 물론이고 네 누나까지 신세 망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딴 건 꿈도 꾸지 마.”

“저는…….”

“너는?”

“선배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으면 화내려고 했는데…….”

“안 해.”

윤신이 순순히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세헌이 충동을 못 참고 돌연 고개를 기울여 진득하게 키스했다. 서서히 입술이 떨어져 나간 뒤로도 서로의 얼굴은 얼마간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너한테 더 나은 삶이 있을지도 모르니 놔주겠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가끔은 전부 다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그리고 이쯤 들었으면 슬슬 예상하겠지만……. 맞아, 도 관장이 우리 사이를 알아.”

이 담담한 어조에 담긴 의미심장한 말은 마치 거대한 돌덩이 같았다. 턱없이 무거웠고, 두 사람 모두에게 타격을 입혔다. 발목이 매여 한도 끝도 없이 어딘가로 침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크게 심호흡한 윤신이 어리둥절해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런 기색은 비치지 않았기에 의아했다.

“어떻게? 선배가 말했어요?”

“아니. 들켰어. 너 입원했을 때 주차장에 있는 우리 모습을 봤거든.”

“나한테 그런 말 전혀 안 했는데……?”

“차마 못 한 거겠지. 네가 감추고 있으니까.”

“…….”

“너도 짐작하고 있었지? 너희 누나가 우리 사이 의심하고 있다는 거. 도윤신이 몰랐을 리가.”

부정할 수가 없어진 윤신은 침묵하기를 택했다.

세헌과의 스캔들에 대해 언론에 적극적으로 해명할 기회가 몇 번이고 생겼는데도 줄곧 손을 놓고 있는 그녀를 보며 ‘혹시’ 하고 생각하긴 했다. 만약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보호해 주는 거라 믿었고, 그 교착 상태가 편해서 일정 부분 이용했던 건 사실이다.

그녀가 이 관계를 인지했다는 사실을 둘 사이의 갈등 속에 끼워 넣자 순조롭게 모든 등식이 성립됐다. 아울러 들켰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세헌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고스란히 전이됐다. 아까 사옥에서 저를 몰아붙이던 순간의 기분까지도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세헌은 이경이 둘 사이를 반대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생각 자체는 아주 오래된 것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경이 의심을 하는 것 같긴 한데 계속 확인하지 않고 모른 척하기에 늘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이를 들켰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는 차라리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았다가, 곧 마음이 불편해졌을 터다. 마침 타이밍 완벽하게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 가며 도국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려 애쓰고 있었으니까. 그가 보이기 싫었던 건 그런 부분들이었다는 얘기다.

그에게 붙들린 손을 살짝 틀어 조심스럽게 손깍지를 낀 윤신이 속으로 아쉬워했다.

자신이 어제 하루 종일 정말 눈치가 없었던 듯했다. 이제 보니 조금만 세헌에게 시간을 주었더라면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는 간단한 문제였다.

여러 가지 사념이 떠올라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데, 몸을 비스듬히 튼 그가 또렷하게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강조했다.

“내 어깨 위의 짐을 덜어 줘서 고마워. 진심이야. 그런데 윤신아, 다시는 그러지 마.”

그는 윤신에게, 넌 이미 많은 걸 양보하고 있고, 겉보기엔 제가 다 해 주는 것 같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깊은 눈동자로 열심히 주지시켰다.

“너는 좋아하는 일을 해. 그게 나를 진짜로 도와주는 거야. 넌 길가에 널브러진 사람들 구하고 싶은 사람이지, 언론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해 가면서 조직화된 거대 이익 집단을 변호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너로 있어야, 내가 너한테 그 정도 지지대는 돼 줄 수 있어야…… 너희 누나를 이기지. 무슨 얘긴지 이해하지?”

“…….”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네가 조금씩, 더디게라도 세상을 바꾸는 걸 보고 싶어. 나는 못 하는 거. 우리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이런 말을 들었을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고민할 틈도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진지하게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던 윤신이 무릎으로 그에게 다가가 포옥 품에 안겼다. 그러다 이까짓 접촉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걸 여실히 느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런데도 그 안에 무겁게 실린 간절함이 고스란히 제게 전달됐다. 그래서 가슴이 벅찼다.

말로 약속하는 건 쉬웠다. 그럼에도 윤신은 선뜻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선언하지는 못했다. 심정으론 그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지만 어쩌면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은 또 그가 하지 말라는 짓을 저질러 버릴 수도 있었다.

그를 너무 사랑하기에.

아마 그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함구하며 으스러져라 끌어안기만 하는 반응을 통해 그 사실을 짐작한 듯, 세헌이 허탈해하는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나도 사랑해.”

늘 제가 하던 얘길 거꾸로 돌려받아 당황한 윤신이 쑥, 그에게 닿은 상박을 뒤로 젖혀 얼굴을 마주 봤다. 배 속에서부터 치미는 것처럼 차오른 감정들이 심장께에서 난리를 피웠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지 않는 세헌이 가뿐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윤신은 그가 제 감정을 읽었음을 실감하며 절박하게 졸랐다.

“한 번 더 말해 줘요.”

“반복 재생은 안 해.”

담담히 대꾸한 세헌이 윤신을 허벅지에 태우는 것처럼 앉혔다. 그가 얼굴을 기울였다. 윤신은 기꺼이 눈을 감고 기다렸다. 두 사람은 수줍게 첫 키스 하는 어린애들처럼 정성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맞댔다. 혀를 얽는 행위는 없었다. 그저 인체에서 가장 보드라운 살결을 진득하게 문지르다가 천천히 떼어 냈다.

차츰 눈을 뜬 윤신은 가만히 그의 이목구비를 관찰했다. 그러다 한 손을 뻗어 머리카락과 눈썹 따위의 터럭들을 손끝으로 정성껏 쓸어내렸다.

서로를 향한 눈길에는 열정과 애틋함이 가득했다.

만지다 보니 너무나도 간절해져 온갖 음험한 상상력이 머릿속에서 전염병처럼 창궐했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 격한 감정이 순간 울걱한 윤신은 방심한 세헌의 어깨를 확, 밀어 침대 위에 누이고 그의 허리에 올라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거부하지 못하도록 상박을 두 손으로 고정했다. 무슨 생각인지 세헌이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그 호응에 탄력받아 그의 타이를 끌러 내고 단추마저 풀려고 하던 와중이었다.

민첩하게 움직이던 양손을 포함해 윤신의 온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윤신을 올려다보던 그가 기계가 멈추는 것처럼 굳어 버린 모양새를 지켜보다 조용히 물었다.

“왜.”

“아까요. 제가 하기 싫어도 선배가 하자고 하면 해야 된다는 그거. 섹스도 해당이에요? 제대로 대답 안 해 줬어요.”

“음, 궁금하시겠지. 도윤신 변호사는 섹스를 거절해 본 적이 없으시니까.”

“……그럼 막 심하게 다뤄 줬으면 좋겠다는 기분 드는 날엔, 하기 싫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

“…….”

“제가 싫다고 거절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막 다룰 거냐고 묻잖아요.”

보통은 강제로 어떤 행위를 취할 거라는 말을 거북해해야 정상이었다. 한데 어째 윤신은 어딘지 그 일을 고대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통으로 그걸 올려다보며 순간적으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세헌이 이내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꾸준히 제정신이 아니야.”

“왜 말을 얼버무려요. 선배답지 않아요.”

“궁금하면 거절해 보면 될 거 아냐.”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진짜 잘 피해 가네. 하나만 더요. 이건 명확하게 대답해 주셔야 돼요.”

꾸욱. 윤신은 몸을 일으키려는 세헌의 어깻죽지를 지그시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큰 힘이 실리지 않아서 그는 거뜬히 일어날 수도 있었을 터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 모양새가 중요한 화두를 던질 거란 걸 직감한 모습이었다.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축인 윤신은 극히 신중한 어조로, 제법 느린 음성 기호로 질문했다.

“사택…… 이사요. 그거, 진짜 선배 생각이었던 거예요 그럼?”

반짝거리는 별처럼 또렷하게 눈을 빛내는 윤신은 간절히 원하던 장난감을 얻은 어린애 같았다. 이렇게까지 기대에 찬 기미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소원하는 대답이 오직 하나라는 걸 지켜보는 사람마저 선명히 느낄 수 있도록 솔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안색을 관찰하던 세헌은 허리 힘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서로의 눈높이가 다시 엇비슷한 자리에서 맞춰졌다. 그는 명백하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있는 윤신의 입꼬리 양쪽에 번갈아 키스했다. 그러고는 상대가 그랬듯 으스러져라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했다.

서로의 심장 뛰는 소리가 무척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때, 세헌의 코끝에 낯선 향기가 스쳤다. 그는 그게 마음에 영 안 든다는 양 고개를 슬며시 틀고는 제 향취로 덮듯이 입술이 닿는 자리마다 입 맞췄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파자마 옷깃에 감싸인 목덜미, 복받치는 흥분과 감격을 감추지 못한 붉은 귀. 쪽쪽쪽. 부끄러울 만큼 노골적인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해 대곤 서로의 시선을 빤히 마주했다.

“너 다신 내가 모르는 샴푸 쓰지 마. 너한테서 내 냄새 사라진 거 기분 더러워.”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한 그는 얼떨떨해진 윤신이 대꾸를 하기도 전에 다시금 제 품 안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이어지는 나직한 목소리는 연정의 해류가 되어 물결쳐 퍼져 나갔다.

“난 생활 동반자법 생길 때까지 못 기다리겠다. 같이 살자.”

그 순간.

세헌에게 폭 안긴 윤신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긴 한 걸까.

언젠가는 듣게 될 말이라고 짐작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보다 여유를 찾은 어느 날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의 삶에서 이런 격동기를 겪을 때일 거라곤 예측 못 했다. 지금 그는 연애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와중에 꼭 짬을 내서 이 관계를 더 확장하는 문제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다는 의미 같아 그게 무엇보다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정식으로 같이 산다고 해서 지금 생활과 비교해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동거나 결혼 따위에 대한 강세헌의 입장만큼은 이전과 완전하게 달라져 있을 터다. 그가 먼저 손을 뻗었다는 건 숙려를 거듭한 끝에 결심했다는 뜻이었다.

대답에 대해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오래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그 말을 하기만 하면 됐다.

“그럼 선배 저하고 결……. 읍.”

터억.

한데 세헌이 불현듯 모양 좋은 손으로 윤신의 입을 막아 버렸다.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깻죽지를 단단히 붙들기까지 했다. 명백한 제압의 의사였다. 눈을 커다랗게 뜬 윤신이 그에게 눈빛으로 항의했다. 몸부림도 조금 쳤다. 놓아달라는 의미란 걸 모를 리가 없는 그는 완력으로 통제하는 동시에 지그시 시선을 마주해 주면서 정면으로 거부했다.

“안 돼, 이 새끼야. 청혼하지 마.”

“웁! 으읍!”

“이건 성질만 급해 가지고. 넌 왜 내가 그 말을 안 할 거라고 생각해?”

순간 멈칫한 윤신이 버둥거리기를 관두고 그를 가만히 직시했다.

강세헌에게 자신뿐이라는 건 이미 잘 알았다. 어쩌면 그의 애정이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크기일지도 모른다는 비밀 아닌 비밀 또한 말이다. 그렇대도 명확한 단어로 관계를 규정짓는 건 언제나 제 쪽이 먼저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연애라는 여정을 떠나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자 용기를 냈던 건 언제나 자신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찰나들이 세헌에겐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의 연속이었을 테니까. 삶의 방식을 완전히 전복하는 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특히 강세헌 같은 완고한 사람에게는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에 필적하는 이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먼 길을 가던 와중 수심이 깊은 강을 맞닥뜨리면, 그 분수령에서만큼은 늘 그가 먼저 우왕좌왕하는 저를 단단히 품에 안아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대체로 저항적이고, 밤낮으로 냉소적이고, 매사에 신중하지만, 종내엔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오직 제게만.

눈동자를 통해 파문이 일듯 번지는 생각들을 읽은 건지 어깨를 쥔 손에 힘을 푼 세헌이 차분히 덧붙였다.

“내가 손에 안 잡혀서 초조해?”

윤신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본 그가 이어 말했다.

“그럼 기다릴 수도 있겠네. 내 입에서 그 미친 소리 나올 때까지.”

뺨에 홍조를 띤 윤신이 이번엔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특해하며 미소 지은 그가 쐐기를 박았다.

“같이 사는 거부터 시작해 보자.”

법봉이라도 두드려 얼른 이 문제를 매듭짓고 싶었던 윤신이 턱을 비틀어 그의 손을 뿌리치곤 버럭 외쳤다.

“좋아요!”

기뻐서 화색이 돌다 못해 온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가빠진 호흡을 추슬렀다. 버럭 외치고도 좋다고, 그렇게 하자고 몇 번이고 더 말하고 싶어서 입술도 함께 달싹댔다.

세헌은 저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윤신의 생각은 달랐다. 그 말만큼은 동의하지 않았다. 개미 눈물만큼도 말이다. 그와 함께이기에 지금 이만큼 행복할 수 있는 거였다. 여태 윤신의 삶 속에 이런 충만한 행복은 없었다.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같이 살자는 얘길 들었을 때 이만큼 기쁠 리 만무했다. 어떤 의미의 결심인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에 이렇게 들뜨는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그이기에 저는 믿고, 이 감정에 확신을 가지고, 저와의 평생을 그린다는 게 짜릿한 거였다. 한 번도 이 선택을 후회한 적 없다는 자신의 고백은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강세헌만큼 제게 완벽한 사람은 없으리라.

숨 가쁘리만치 가슴이 벅차진 윤신이 세헌의 등을 감싼 드레스 셔츠를 손아귀에서 구겼다.

평정을 찾으려고 최대한 애쓰면서 가까스로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답했다.

“같이 살래요. 좋아요. 우리 그거부터 시작해요.”

“…….”

“난 진짜 선배가 너무 좋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지금도 많이 행복했다. 저를 만나기 전까지 평생 혼자라는 굴레에 갇혀 있었을 그가 자신과 공동으로 삶을 영위하는 데 확신을 갖게 된 것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그런 마음이 맞닿은 옷자락을 통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기를 품에 안은 것처럼 허벅지 위의 윤신을 좌우로 움직이게 그네 태우던 세헌이 오묘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태도도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같은데. 생각할 시간 더 필요한 거 아니야? 더 줄 수 있어.”

저를 놀리는 세헌을 정중하게 흘긴 총명한 두 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디스트.

“그딴 거 필요 없어요.”

예상했던 대꾸를 듣고 피식 웃은 세헌이 눈앞의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내민 손을 덥석 잡고 행위를 저지한 윤신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에요. 당장 집에 가요.”

“호기롭게 가출해 놓고 이제 와서?”

“아, 빨리요.”

먼저 몸을 일으키고, 세헌의 손을 잡아당긴 윤신이 주섬주섬 방 이곳저곳에 둔 짐들을 챙겼다. 그러고는 그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이끌고 방을 벗어났다. 본인이 파자마 차림이라는 것도 잊은 사람 같았다.

고요한 복도로 나온 윤신은 사방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침실로 돌아간 건지 이경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삼자대면을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인사를 하는 대신 문자 메시지를 간단히 남기고는 세헌과 함께 긴 복도를 걸었다. 한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자세가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잡은 손을 놓을 생각 같은 건 안 들었다.

자신이 뭐라고 문자를 보내는 건지, 그녀는 읽긴 한 건지, 읽었다면 왜 나와 보지 않는지. 세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윤신이 하자는 대로 이끌려 얌전히 걷다가, 거실을 지나기 전 굳게 닫힌 침실 문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가 다른 어딘가에 시선을 주는 게 싫었던 윤신이 다급히 그의 손을 흔들어 댔다.

“뭐 해요, 얼른요.”

찬찬히 윤신을 다시 봐 주던 세헌이 약간 난감해했다.

“너 진짜 그러고 갈 거야?”

“새벽이고, 차로 가잖아. 빨리.”

지금 윤신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손아귀에 맞닿는 악력이 점점 세지는 걸 느낀 세헌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윤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곧이어 조용히 이경의 자택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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