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었다. 조금 전 막 자정을 넘겼으니 장례 이틀 차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세헌은 어제 아침 여러 파트너들과 직원들을 대동하고 장례식장에 다녀갔다. 도국이 보이는 첫 공식적인 반응이었기 때문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엄청 쏠렸다. 종일 이 뉴스를 다루면서 그의 모습이 전파를 탔다. 지금도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장례식장 내 모니터에서 그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대표가 된 뒤로 공식 석상에 몇 번 얼굴을 내밀긴 했지만 이렇게 전국구로 그가 도국의 새 주인이 됐음을 선포하다시피 한 건 처음이었다.
일반적인 죽음과 달리 자살한 사람의 장례식장은 보다 숙연한 게 사실이다. 다녀가는 손님들은 아직도 더러 있었고, 식사하는 문상객들도 있었지만 다들 대체로 조용했다. 사람이 꽤 머물고 있는데도 적막한 공간과, 자식이 죽은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망자의 부모를 두루 둘러본 윤신은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미희였다.
“송 대표님?”
윤신이 먼저 알은체하자, 초췌해진 안색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함께 있는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편안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눈에 확 띄는 수려한 얼굴이라 인상 깊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윤신은 담소가 끝나길 기다렸다. 대강 매조지 된 건지 미희가 더 가까이 오라는 뜻의 눈짓을 보냈다. 착하게 지시에 따르다가 실수로 그녀에게 인사하고 일어선 남자와 살짝 몸이 스쳤다.
“어, 죄…….”
곧바로 사과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근처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던 뒤쪽의 슈트 차림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 사도진인데?’
예의 도진은 편안한 차림의 남자가 걸친 티셔츠를 뒤에서 확, 잡아당겨 데려가 버렸다. 마치 둘 사이를 가로막고 본인 쪽으로 숨기듯이 이끌어 가는 바람에 윤신도 얼떨결에 묵례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두 남자를 지나친 윤신이 미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접근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사도진 총경이네요? 죽은 주니어랑 아는 사인가? 아닌데, 기수가 안 맞는데.”
“어, 그렇구나. 자기랑 사 총경이랑, 둘이 알지?”
“아뇨. 저는 아는데 저쪽이 절 아는지는 잘……. 그런데 같이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대표님이랑 대화하던 사람요.”
“아, 거긴 모르나? 경찰. 중앙청 광수대. 남혜준 팀장이야. 사안이 너무 시끄러워져서 화장 전에 담당 경찰서에서 광수대에 추가 조사를 의뢰했다는 모양이야. 부검 필요할까 봐.”
“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하자 예의 광수대 팀장이 유족에게 몇 가지 당부하고 있는 게 보였다. 표정으로 미루어 아마 유감이라는 말을 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도진 총경은 그 옆에 곧은 자세로 서서 유족을 위로하는 동료의 옆얼굴을 오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미희를 쳐다본 윤신이 입을 뗐다.
“대표님 좀,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지가 않네. 힘들어.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인간인 줄 몰랐어. 애도만 해야 하는데 원망스러운 마음이 함께 드니까 자기혐오감으로 괴롭다. 세헌인 대체 어떻게 이런 거 다 견디고 사나 몰라.”
긍정할 수도, 반대로 부정할 수도 없는 그는 조용히 말을 고를 따름이었다. 유서상의 주 원망 표적은 두 명의 공동 대표였다. 세헌은 예상 그대로 태연하게 대처하고 있으나, 미희는 많이 힘들어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핼쑥한 안색이 그 증거였다. 대표의 직위를 커리어의 일부로 보는 세헌과 운명의 일부로 보는 그녀의 관점 차이라고 봐도 영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적인 원망이 들 테고, 이런 일로 도국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을 윤신도 조금은 이해했다. 자신도 소중한 대상에 상처가 생기는 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위로의 눈빛을 보낸 윤신이 조심스럽게 미소 지어 보이자, 미희가 겨우 입매로 호선을 그리면서 마주 웃어 주었다.
“장례식장 오니까 생각이 많아져. 나 죽으면 추도사는 강 변이 해 주겠지? 안 해 주겠다고 하면 그래야 내 영혼이 성불할 수 있다고 자기가 대신 좀 졸라 줘.”
그들은 동시에 뻣뻣한 태도와 싸늘한 표정으로 추도사를 읊는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성격은 차갑지만 해야 할 일은 하는 강세헌’이라는 공감대가 있는 두 사람은 또 한 번 시선을 교차했다.
웃음을 터트린 윤신은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자신이 여기에서 머무는 바람에 미희에게 다가와 이야기하거나 인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사위에서 서성이는 게 감지됐다. 제게 있는 중요한 용건을 얼른 꺼내는 게 나을 듯했다. 그는 숙고 끝에 포문을 열었다.
“저, 송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중요한 얘기를 할 때의 신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는 것이다. 지극히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 윤신이 몸의 자세마저 앞으로 굽혀 덧붙였다.
“지금 펌 분위기가 나쁘잖아요. 제가 입사하고 이렇게까지 처진 적이 없었던 거 같아서요. 저도 이 상황에 지분이 어느 정도는 있기도 해서……. 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봤는데. 마침 몇몇 선배님들께서…….”
진중하게 그의 음성을 되새기는 듯하던 미희가 거기까지만 듣고도 알 만하다는 기색을 눈가에 띄웠다. 그녀가 내뱉었을 법한 문장으로 치환하면 ‘이것들이 기어이 사고 쳤네.’ 정도였다.
미희는 세헌에 비하면 유연성이 있는 상관이자 대표였다. 궁극적으로 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넘어가 주는 일이 많았다. 회의 때 자비 없는 세헌이 아닌 그녀가 최전방에서 이 사안을 거부했기에, 다른 파트너들이 의견을 모아 직접 윤신의 의사를 타진한 게 아닐까 했다. 그녀는 무슨 말이 이어질지 잘 알고 있다는 양 바로 말을 끊어 냈다.
“안 돼.”
“대표님.”
“대충 무슨 얘기 할지 감은 오는데. 이거 중역 회의 안건으로 이미 나왔던 거고, 내가 전방에서 대응 사격을 했을 뿐이지 세헌이도 분명하게 반대한 사안이야. 무엇보다, 나도 반대야. 또 수한이랑 엮이고 싶어? 다들 궁금해하는 그거로 눈 돌리려는 거야. 나쁜 건 수한이다. 도국은 피해자다. 그런 일 하라고 자기 총대 메게 하기 싫어.”
“선배는 제가 설득할 수 있어요. 송 변호사님만 제 편 되어 주시면요.”
“글쎄 안 된다니까. 강 대표 자기한테 빚지느니 대표 자리를 던져 버릴걸. 그럼 내가 너무 손해야. 도 변이 포기해. 마음만 받을게. 진심으로 고마워.”
“대표님, 제가 잘 설득할 수 있어요. 선배 제 말이면 잘 들어줘요. 빠른 방법이 있는데 저를 아끼고 숨기느라 선배가 우회하는 게 싫어요. 그렇게 일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윤신의 얼굴에 세헌을 설득할 자신이 넘치다 못해 득의양양해진 표정이 떠올랐다. 그 철석같은 신뢰의 증거를 두 눈으로 직시하며, 미희는 세헌이 곧 사택을 비울 거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확실히 윤신의 이 말들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처럼 보였다. 지금도 적당히 공간을 교류하고 있다는 건 짐작하지만, 타인의 흔적이라곤 지문 하나조차 싫어하는 ‘그’ 강세헌이 정식으로 동거를 고려하고 있을 정도의 대상이니까.
그에게 윤신은 삶의 기로를 정하는 유일한 방정식일 터다.
“도 변, 그래도 난 반대야. 미안해. 나한테는 세헌이 의사가 중요해. 걔하고 척지고 싶지 않아.”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얼굴빛에 이미 미희가 거절할 거라는 걸 예상한 기미가 물씬했다. 씨익 웃는 미소 속에 그런 생각들이 함께 드러났다. 그녀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경청할 모양새를 취했다. 윤신은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는 그녀에게 차근차근 생각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려 섞인 미희의 눈길과 윤신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한 지점에서 교차했다.
* * *
기업법 연구소 설립에 관련한 자료들과 소장 후보 프로필을 읽던 세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 앞의 탁 비서가 능청스러운 태도로 서류 봉투와 서류철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어느 거부터 보여 드릴까요? 하나는 여성이고, 하나는 남성입니다. 둘 중 한쪽은 반드시 취향이실 거라고 자부합니다.”
물끄러미 탁 비서를 응시하던 세헌은 피로한 기미를 여과 없이 내비치며 말문을 열었다.
“보이지. 잡스러운 카드밖에 없어서 나 머리 터지는 거. 사람 데려오려고 할 때마다 다 눈에 안 차서 진절머리가 나. 이 마당에 내가 너의 장난질까지 받아 줘야 하는 이유를 말해 봐. 진짜로 알고 싶어서 그래.”
“그래도 고르시는 게 좋을 텐데요. 둘 다 필히 들으셔야 하는 얘깁니다.”
한쪽은 반드시 취향일 거다.
그럼 그건 도윤신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싫어하는 그는 도윤신 외엔 취향이랄 게 존재하지 않았다.
세헌은 그 반대를 먼저 선택했다.
“하아, 여자.”
“한국대 병원 CCTV 영상요. 며칠 전에 제가 거기서 웬 여자분이 주저앉은 거 발견했다고 보고드렸잖습니까. 각도가 옆모습이랑 뒷모습만 있어서 화질 선명하게 만드는 보정을 맡겼다고요.”
타닥. 타닥.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규칙적인 박자로 두드리던 그는 넌지시 반문했다.
“신원 확인했나?”
“예, 혹시 몰라서 여성분 옆에 주차돼 있던 차량 번호판 추적해 교차 확인까지 완료했습니다.”
“네 표정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인 모양이네.”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탁 비서는 계속 들고 있던 얇은 서류 봉투를 세헌의 앞에 내밀었다. B5 정도 되는 규격의 크기였다. 봉투를 받아 든 세헌은 그 안에서 도톰한 재질의 인화지에 인화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사진 속 피사체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의 눈가가 미묘한 기미로 가라앉았다.
뒤에 있는 사진들까지 전부 다 뒤로 넘겨 본 그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인기척의 주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다.
“도이경 관장이네.”
“예.”
이경이 뭔가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꽤 됐다.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니고,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기에 처음에는 ‘설마’ 했던 가정들이 점점 신빙성을 얻어 간다는 걸 깨달았을 터다. 다만 윤신이 아무 말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도 덮어 두려고 한 듯했다. 세헌을 만날 때마다 할 말이 많은 기색이었으나 끝끝내 일절 함구하는 모습을 보며 그도 감 자체는 진작 잡았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군.’
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은 윤신의 상대로 달가운 인물은 못 됐다. 윤신은 그녀가 무조건적으로 둘 사이를 응원해 줄 거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 같지만 그가 짐작하는 현실은 달랐다. 도이경은 도윤신이 아니었다. 오만 일을 겪고도 때 묻지 않은 동생에 비해선 세파를 알았다.
이런 때가 언젠가 도래하리라고 생각은 했다. 의심의 정황은 산적했고, 해결의 키는 도이경이 쥔 상태였다. 오히려 늦은 감도 있었다. 알고자 했다면 정말 단숨에 알아낼 수 있었을 터나 그녀는 그간 그러지 않았다. 아마 줄곧 모른 척한 도이경의 선택은 윤신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동시에 자의도 조금은 섞여 있었으리라.
진실이란 건 알게 될수록 더욱 무섭고 두려운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가능하면 계속 기회가 없길 바랐는데.’
머리가 아파 보이는 세헌을 주의 깊게 살피던 탁 비서가 침묵을 깼다. 그가 몹시 심경이 복잡한 듯해 차라리 다른 화두를 던져 관심을 빼앗기로 결심하고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저, 도 변호사님이 대외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덕분에 도국은 ‘피해자를 방치해 자살로 몰고 간 가해자 집단’에서 ‘소속 변호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줄도 아는 로펌’으로 둔갑 중입니다. 도 변호사님 도움받은 적 있는 사람들이 SNS에서 기사 공유하고 댓글도 남기고 그러는 모양이에요. 펌 입장에선 호재네요.”
이번에는 기사를 인쇄한 종이들이 끼워진 서류철을 사진들 위에 내려놓은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윤신이 인터뷰를 한 건 주요 언론사를 통한 단 세 건이었으나, 금세 온갖 언론사들에서 이 기사를 그대로 가져다 베껴 썼다. 정보의 바다에 널리 퍼진 그것들은 전부 취합할 수도 없는 방대한 양이어서 오류나 왜곡이 있진 않은지 홍보 팀이 아직 다 검토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또한 이미 잘 알고 있던 세헌은 저를 주시하는 탁 비서의 의뭉스러운 모습 너머 진짜 의도를 꿰뚫고 반문했다.
“아는 얘기 굳이 되짚어 주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빙빙 돌리지 말고 얘기해.”
“도 변호사님 징계하시죠.”
으득, 이를 간 그는 한숨 섞인 음성을 토해 냈다.
“탁, 내가 너하고까지 이런 말씨름해야 되나? 펌에서 너 정도는 걔 편들어 줘도 되잖아?”
“전 대표님 비서입니다. 모든 걸 대표님 위주로 사고합니다. 그냥 두시면 말이 나올 거예요.”
그는 제 비서가 상관의 심기를 언짢게 할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조언을 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정해진 창구 외에 함부로 이번 사건을 언급하는 직원은 징계할 거라는 공지가 펌 전체에 대대적으로 내려졌다. 그걸 지시한 게 바로 세헌이었다. 대표의 명령을 어긴 셈인데 윤신만 다른 취급을 하면서 봐주는 게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나 뒷말 듣는 거 하루 이틀이야? 신경 안 써.”
“도 변호사님 때문이기도 합니다. 워낙 질투의 중심에 계셔서요. 특히 매년 연봉 협상 때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계셔서…… 너무 사정을 봐주시면 오해를 사요.”
모두들 도윤신만큼 실적을 쌓으면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연봉 심사는 업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투명하게 처리하는 편이었다. 더불어 도국은 창립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지원이나 출자에 인색했던 적이 없는 로펌이었다.
지금 윤신이 받는 연봉은 성과에 따라 비례해 올려 준 것으로 변호사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준 결과였고, 대표들이 최종 승인하긴 하지만 원천적으로는 인사 팀이 담당하는 업무였다. 다른 사소한 부분들에서 윤신을 조금쯤 달리 대하는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업무적인 영역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에 관해 윤신을 특별 대우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걔가 일 제대로 하는 거까지 내가 책임져야 돼?”
“정말로 공정한 기준으로 대우해 주시고 있는 거니까 이 일도 봐주시면 안 되는 거죠. 외부에서 보기엔 도 변호사님이 대표님 지시를 어긴 거예요. 처분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충심으로 드리는 충언입니다. 저 이런 무례한 말씀 웬만해선 안 드리는 거 아시잖습니까.”
윤신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로 펌 내부 공기가 번잡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혼자서 일을 잘 해내도 세헌이 앞에서 끌어 줘서 그런 거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도저히 낙하산의 성과를 인정하기 싫은 것일 수도, 단순히 윤신이 가진 모든 게 부러운 것일 수도, 이유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도이경과 세헌의 스캔들을 일각에선 믿고 있는 눈치였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세헌의 왼손에서 백금색 반지가 살짝 반짝거렸다. 긴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도로 드러나는 표정에 피로가 물씬했다. 궁리하던 그는 마지못해 타협했다.
“근신하라고 할 생각이야.”
“좀 더 눈에 보이는 징계를 내리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근신.”
“대표님, 그건 징계가 아닙니다. 최소한 벌점이라도.”
“근신. 나 똑같은 얘기 네 번 하게 만드는 직원 다 잘랐어. 너도 예외는 아니야.”
“…….”
윤신의 인터뷰는 제대로 펌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징계하는 게 맞는 거라는 판단이 안 들었다. 아니, 핑계였다. 세헌은 윤신을 소중히 하고 싶을 뿐이라는 걸 속으로 조용히 인정했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짓을 했다면 강경하게 처벌했을 테니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 딱 들어맞게 짐작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가슴 깊은 한구석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세헌은 이 얘기가 공론화되었던 바로 그날, 회의 석상에서 해당 사안에 관해 아무 말도 안 했다.
보통은 무슨 일이 됐든 의견을 내고 바로 그게 펌의 기조나 정책으로 이어지는 편이었다. 왜 이 문제만큼은 침묵했는지, 어째서 본능이 그렇게 했는지 이제는 알 듯했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도윤신의 습성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탁 비서는 그의 무른 처분이 우려가 되는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말 그래도 문제없을까요?”
“있겠지. 도윤신이 나 돕자고 한 짓이니 그건 내가 감수하겠다고. 다른 변호사들한테는 내가 허락한 거라고 말 흘려. 나도 간부 회의에서 그렇게 얘기할 거야. 전략적으로, 도국이, 도윤신의 존재를 요긴하게 써먹은 거라고. 크게 도움 된 건 사실이니까. 알아들었으면 나가 봐.”
“……예, 알겠습니다.”
탁 비서는 징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청원을 했으면서도 이렇게 윤신에게만 유하게 반응하는 세헌이 싫진 않은 듯했다. 희미한 미소가 그 사실을 입증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곤 제 비서를 마주 보던 세헌이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메시지를 담아 오만하게 턱짓했다. 그러다 탁 비서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핑거스냅을 딱, 쳤다.
“아, 도윤신 회의 언제랬지?”
“가사 팀 회의요? 두 시간 뒤입니다. 참관하실 거니까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냐. 놔둬. 기습으로 들어갈 거니까 두 시간 뒤에 내 일정을 비워 놔.”
“예, 그럼.”
딸칵.
문이 닫혔다.
마침내 혼자 남겨진 그는 서류철을 옆으로 걷어 내고 사진 속의 도이경을 눈에 신중하게 담았다. 나란히 놓인 사진과 기사들은 그에게 처리해야 할 두 가지 안건, 더 간단히 표현해 도이경과 도윤신으로 보였다. 실제로 윤신이 인터뷰한 기사 속에 누나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병동 주차장의 인기척이 도이경의 것이란 걸 예감했을 때부터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아마 이 일은 도이경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터다. 도국이, 도윤신의 존재를 아주 요긴하게 써먹는 것으로 말이다. 자타공인 도국은 곧 강세헌이었다. 마치 자신이 윤신에게 빚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건 자명했다. 동생이 이런 가십성으로 화제에 오르는 일을 꺼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간단히 말해 두 일이 벌어진 타이밍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이었다.
“첩첩산중이군. 두 남매가 쌍으로…….”
윤신의 인터뷰 기사는 시기가 적절하고 내용도 좋아서 여론의 판도를 바꿔 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윤신이 워낙 올곧은 성미인 건 그의 누나가 도국에 청탁을 한 것으로 물의를 빚었을 때부터 언론을 통해 심심찮게 등장했다. 메신저에 힘이 있으니 메시지에도 덩달아 힘이 실렸다.
문제는 구체적인 인터뷰 내용이었다. 도국에서의 생활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능력 있는 선배들과 친절한 동기 및 후배들을 통해 많이 배운다는 게 골자였다. 펌 내부의 분위기는 밖에서 보는 것과는 적잖게 다르다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최근 동료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생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유감이며, 요즘 청장년들 사이에서도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우울증이라는 사회 문제와 관련한 메시지도 시의 적절하게 던졌다.
정말이지 훌륭하리만치 변호사답게 처신했다.
너무 노련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몇 년째 따돌림당하면서 말은 잘하지.”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잘할 줄이야.
언론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이 가르친 것 이상이라 선배로서 칭찬해야 할지, 말을 안 들었으니 대표로서 혼을 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는 기분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서랍을 열어 사진과 종이들을 대충 구겨 넣고, 상비해 둔 두통약을 꺼냈다.
* * *
이건 확실히, 좀 이상했다.
‘홍보 팀에서 내 기사를 돌리기 시작했다고?’
논리적으로 성립이 어려운 일이라 비서실발 보고서를 읽는 윤신의 고개가 갸웃했다.
‘내 인터뷰를…… 세헌 선배가 허락한 일이라고 했다는 거지, 지금.’
자신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세헌의 명령을 어긴 셈이고, 또한 미희가 공표했던 주장을 무시한 것이기도 해서 징계도 각오했다. 하지만 상부의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아리송했다.
강세헌이 명령을 번복하는 건 아주, 매우, 굉장히 드문,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했지? 그냥 징계를 하지.’
뭐가 됐든 그 남자가 이런 방법을 쓰기로 했다면 우선은 거기에 맞추는 게 최선이다.
인터뷰를 통해 로펌에서의 일들, 그리고 누나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건 솔직히 마냥 쉽지는 않았다. 10퍼센트의 진실에 90퍼센트의 거짓을 섞어야 했으니까. 일을 저지르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완벽하게 예상대로 따라와 주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고, 그게 역으로 세헌을 곤란하게 만들지도 몰라서였다.
천만다행으로 제 인터뷰는 확실히 로펌의 이미지 실추를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듯했다.
다만 한 가지.
‘누나한테 좀 미안하네.’
방어용 총대가 되어 자신이 이미지 싸움을 하고 있는 와중이라, 그 과정에 이경의 일이 종종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인터뷰 전 그녀의 동의를 미리 구하긴 했으나 마냥 기꺼워서 허락해 준 건 아닐 터다. 다만 그녀 스스로 지금 훌륭하게 자립 중인 데다, 인터뷰 내내 누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기에 기사를 보고 난 뒤의 그녀는 내심 기뻐하리라는 짐작은 들었다.
이만하면 경과로 나쁘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세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관계에선 대부분의 경우 그가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자신도 가끔은 그런 일들을 감당하길 원했다.
표정이 풀어진 윤신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가사 팀 회의 시간이 임박해서였다.
밖으로 나와 습관적으로 세헌의 집무실을 훔쳐보던 그는 얼른 정신을 다잡고 소회의실로 걸어갔다. 마침내 회의실 앞에 당도했을 때, 예상치 못한 커다란 산을 만나 움찔했다.
“오늘 발제 책임자 너지.”
“헉!”
슈트를 걸친 정면의 실루엣이 낯익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예상 그대로 세헌이 우뚝 버틴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색이 싸늘한데 괜한 착각일까. 원래 기본 태도가 쌀쌀맞은 사람이라 선뜻 분별이 안 갔다.
그의 뒤에서 탁 비서가 살짝 눈인사하는 게 보였다. 뭔가 눈짓과 눈빛으로 세헌의 현재 심경과 기분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하는 듯했는데 음성 언어가 아니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윤신은 세헌의 질문에 대답부터 했다.
“예, 제가 발제자입니다. 가사 팀 회의 참관하시게요?”
무신경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그냥 저를 지나칠 듯 보이자, 윤신이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덥석 잡는 것으로 만류했다. 본능이었다. 붙들린 위치를 내려다본 세헌이 다시 정면을 직시했다.
“도윤신 변호사 눈엔 내가 뭐로 보이지?”
“강세헌 대표님이요.”
“손잡이로 보이는 거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원래도 사옥 내부에서 두 사람은 선배와 후배, 대표와 시니어 사이의 적정선을 지켰다. 그러지 못할 때도 많지만 그건 반드시 단둘이 있을 때만 허락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대한의 스킨십은 몰래 서로의 손등을 스치는 정도일까. 그마저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뾰족한 말투가 저를 살살 할퀴는 건 퍽 익숙한 일이었다.
한데 오늘은 확실히 온도가 달랐다. 계속 뜯어보다 보니 세헌의 얼굴이 안 좋았다.
혹시 제 인터뷰 때문인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뭐랄까. 세헌의 지금 얼굴은 단출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봐도 답은 안 나오고, 약간 짜증은 나는데 그렇다고 마냥 싫진 않지만 또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 완벽한 답은 잘 모르겠으면서……. 마치, 두 사람이 마음이 통하기 직전에 저를 보던 거 같은 표정이었다.
“안색이 왜 그러신 거예요?”
“그러는 너는 왜 그러신 건데.”
“……네? 아니. 골치 아파 보이셔서 여쭤본 건데요.”
“그걸 아는 새끼가…….”
“…….”
“뭐 해. 비켜.”
쓰윽.
세헌은 질문에 명쾌히 대답하진 않았다. 그저 윤신의 궁금증을 있는 대로 증폭시키더니, 대화의 흐름을 매정하게 잘라 버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업 인수나 구조조정, 조세 등 도국 내 주요 팀도 아니고, 가사 팀 회의에 대표가 나타나리라곤 꿈에도 예상 못 한 소속 변호사들이 모두 반쯤 넋을 놓았다. 최근 도국이 돌아가는 동향으로 보아 때가 좋지 않았다. 혼란스러워 회의 준비가 더뎌지는 주니어들의 모습을 기민하게 살피던 그가 윤신을 돌아보곤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가사 팀 꽤 잘 돌아가고 있나 보군. 축하해.”
윤신은 차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런 순간 그에게 응수하면 분명 버릇없게 굴게 될 텐데 그런 모습을 동료들 앞에서 보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침묵으로 지켜보며 눈치껏 안으로 진입한 탁 비서가 가장 상석의 의자를 빼 두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세헌이 그 자리에 앉는 사이 정신을 겨우 차린 가사 팀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회의를 준비했다.
문간에 서 있던 윤신은 브리핑을 위해 챙겨 온 작은 포인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밝은 회의실로 입성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주니어들이 저마다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벽에 달려 있는 리모컨을 꺼내 내부의 불을 어스름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차분히 발제를 시작했다.
“강 대표님, 가사 팀 회의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발제는 총 세 가지 케이스입니다. 저희 팀이 담당하게 될 소송들이자, 팀장님이 최종 수검하신 건들입니다. 그럼,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차락.
화면을 넘긴 그는 각자의 앞에 놓인 태블릿을 봐 달라고 손짓했다.
“첫 번째 케이스는 유류분 소송입니다. 공동상속인인 부모가 사망하여 조부모의 재산이 손자에게로 대습상속[1]이 된 건인데, 현재 부모의 사망 원인에 오래전 입양한 아들이자 대습상속인이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세간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포인트를 들어 정면의 화면을 가리키던 윤신은 팔짱을 척 끼고 저를 주시하는 세헌과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대체로 회의 시간에 그가 친절하게 구는 일은 없긴 하지만 지금은 여느 때와 명백히 분위기가 상이했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제멋대로 인터뷰한 일을 수습하려는 것인 모양이다.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걸로 말이 맞춰지고 있는 상황이니, 보는 사람이 많은 때에 저와 꾸민 일을 슬슬 마무리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려는 게 아닐까 짐작됐다.
후우, 그를 번거롭게 만들었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윤신은 애써 걱정들을 털어 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 * *
조명 아래 선 윤신이 정면의 세헌을 마주 본 상태로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더 질문 없으시면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세헌의 왼쪽에 있던 가사 팀장이 그의 눈치를 살피자, 팔짱을 척 낀 채로 브리핑을 듣고만 있던 그가 이만 파해도 좋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흠잡을 구석이 없다는 의미였다.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린 변호사들이 그의 후속 명령을 기다렸다. 보통은 회의가 마무리되면 다들 일어나서 정리하고 방을 벗어나는데, 지금은 세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라 누구도 옴짝달싹 못 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대표님?”
윤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세헌도 그제야 모두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어설프게 몸을 움찔거리던 변호사들은 팀장이 움직이자 요량껏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윤신 또한 제자리로 돌아와 서류들을 챙기는데, 세헌이 흐름을 댕강 끊어 냈다.
“도윤신 변호사.”
“예, 대표님.”
“넌 남아.”
일순 회의실 내부에 얼음장 같은 공기가 흘렀다. 기류가 심상찮다는 걸 인지한 내부의 인원들이 썰물처럼 서둘러 회의실을 벗어났다.
소회의실 내부에 적막이 흘렀다. 밝은 색 조명이 어디 숨을 곳이라곤 일절 찾지 못하도록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그 아래 빛을 고스란히 받고 서 있던 윤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회의에 들어오기 전 세헌의 반응을 잘 기억하고 있기에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측하고는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너 나한테 거짓말 안 하는 건 아는데, 그래도 강조하는 건 꼭 솔직하게 대답해야 되는 사안이라서야. 네 대꾸에 따라 내 태도도 달라지니까 있는 그대로 말해.”
“물어보세요.”
“네 인터뷰, 싫다는 걸 파트너들이 억지로 시켰어?”
예감은 적중했다. 최근 둘 사이에 비밀이었던 건 그거 하나뿐이었다. 미리 말하지 않았으니 세헌이 화를 내는 흐름도 당연했다.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을 잡은 뒤로 결전의 날이 올 때까지, 털어놓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조마조마했다. 반대할 게 뻔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인 건 그가 바빠서 일부러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랬을 리가요. 의견은 주셨지만 제가 싫었으면 절대 안 했을 일이에요.”
“송 변은. 아까 회의 때 보니 작전을 같이 짠 눈치던데.”
“계속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하시길래 제가 딜을 걸었습니다. 강 대표님이 저 징계 주시면, 그걸 해제해 달라고요. 제가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한 거니까 받아들인 걸 탓하지는 마세요.”
“그러니까…… 네가 내켜서, 송 변까지 적당히 얼러 가면서, 너 스스로 결정해서 한 짓이다.”
“네.”
“그럼 너는 내 명령을 뻔히 알고도 무시했다는 거네. 대언론 창구 홍보 팀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분명히 공지했잖아. 우습게 들렸어?”
액면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 말이 맞았다. 그래서 윤신은 세헌이 저를 징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 그는 대표로서의 문법을 어기고 자신을 옹호한 듯했다. 정확한 정황까지는 몰라도 현 상황이 그런 추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건 누나의 소송을 도와주는 것이나 자신을 위해 삶의 일정 부분을 내려놓는 배려와는 달랐다. 전자는 변호사로서, 후자는 연인으로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 그가 한 일은 대형 로펌의 수장으로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강세헌이 스스로의 행동에 모순이 있다는 걸 모를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이상한 거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변명하는 윤신에게 그가 날 선 어투로 마저 퍼부었다.
“대표가 둘이니까 한쪽 말만 들으면 되겠다 싶어?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나? 내가 해고할 거라고 분명히 경고했잖아, 그딴 변호사 이 펌에 필요 없다고.”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사과로 해결될 거면 변호사가 왜 존재하지?”
“……선배, 왜 그래. 화 많이 났어?”
“어디서 적당히 뭉개려고 건방 떨어. 내가 너 여기 사랑해서 불렀어?”
순간 그의 차가운 대응에 울컥해서 ‘사랑하긴 하잖아요?’라고 되물으려던 윤신은 애써 열기를 참아 냈다.
“걱정돼서 그랬어요. 잘못한 거 알지만 그래도, 걱정돼서!”
“네가 왜 내 걱정을 해!”
계속 저자세던 윤신이 일순 안면 근육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제게 무슨 짓을 저질러도 기저에 깔린 그의 진심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 좋아서 하는 말들이라는 것도 때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방면으로 열려 있는 저로서도 이 말은 납득이 어려웠다. 그를 대하는 말투가 냉담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저 아니면 누가 합니까? 혹시 다른 애인이라도 있으세요? 있으면 데려오세요. 죽여 버리게.”
“나한테 닥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해. 끼어들지 말란 얘기야. 알아들어?”
“끼…….”
순간 윤신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진심으로 의심했다.
조금 전 귀에 꽂힌 음성들을 몇 번이나 곱씹어 보곤 잘못 들은 게 아닌 듯해 마저 말했다.
“끼어들지 말라고?”
“두 번 말해 줘야 알아들어? 그래, 끼어들지 마.”
참다못한 윤신도 결국 폭발했다.
“강세헌, 너 진짜 개새끼다. 내가 익히 알긴 알았는데, 진짜 개자식이네.”
“말버릇이 그게 뭐야? 태도 똑바로 안 해?”
“여기 강세헌 씨보다 말 재수 없게 하는 사람 있어요? 당신이나 잘해요.”
세헌이 웬만해선 하지 않는 일이 있다. 어쩌면 하지 못하는 일에 가까웠다. 당황해서 누군가의 말에 대응할 언어를 잃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드물게 말문이 막혀 버린 세헌이 어이없어했다.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그가 책상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의 동공에 이렇게 차곡차곡 글자들이 쓰였다.
얘가 돈 건가?
끝내 거만하게 앉은 채로 상대를 올려다보던 세헌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윤신은 주눅 들긴커녕 가까이 오지 말라는 양 왼손을 뻗었다. 일부러 그의 시야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보이도록 손바닥을 척 펴서 제 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반지에 닿은 것을 분명하게 느낀 뒤라야 거길 반대편 손으로 가리키곤 팔을 내려 마저 답했다.
“이거 변호사님하고 제 커플링이에요. 까먹으신 거 같아서 알려 드려요.”
“비꼬는 거야, 내 기억력을 의심하는 거야?”
“둘 다예요. 하지 말란 짓 했으니까 걱정해 줘서 고맙단 말은 기대도 안 했어요. 징계 줘도! 이제 막 대표로 자리 잡아 가는데 형평성 없이 굴면 안 되니까 저 그거 기꺼이 받을 각오 했다고요. 하지 말라는 짓 하면서 제 마음은 뭐 꽃밭이었는지 알아요? 나야말로 별로 하기 싫었어!”
“그럼 하지 말았어야지!”
“선배 인생에 도움이 되고 싶었단 말이에요!”
“…….”
“네, 잘못했어요. 그렇다고 그걸 꼭 참견하지 말란 식으로 혼내야 했어요? 명령을 어긴 거에만 화를 내면 좋았잖아요. 제가 받아들일 수 있게요.”
대표로는 눈물 쏙 빠지게 혼내도, 따로 만났을 땐 안아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세헌을 잘못 읽은 걸까. 아니면 그가 저를 잘못 다루고 있는 걸까. 세헌은 지금 윤신이 예상한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표로는 옹호하고, 연인으론 질책했다. 여태까지 수년간 그가 보인 태도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나 위해서 희생할 필요 없단 얘길 하는 거잖아. 네가 그런 걸 왜 해. 좋은 거만 보고 좋은 거만 입고 좋은 거만 해. 걱정돼? 좋아, 거기까지만 해. 나서지 마.”
“살면서 어떻게 좋은 거만 해요? 그럼 당신이 나쁜 거 다 해야 되는데. 그걸 보는 게 더 지옥이에요. 이기심이 배제된 희생 같은 건 없다면서요. 제 만족으로 전 그것도 못 해요?”
“도…….”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대표의 명령을 어겨 놓고 적반하장으로 나서는 부하 직원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아니면 울화를 터트리는 연인에게 기가 막힌 건지, 그것들을 포함한 어떤 감각을 느끼는 건지 정확하게 판별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식의 감정싸움이 인 건 처음이었다. 윤신은 개의치 않았다. 거기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일 때문에 약속을 취소해도, 새벽 다 돼서야 들어와도, 몇 주씩 내버려 둬도 몇 년간 제가 한마디나 한 적 있어요? 저 착한 애인 되고 싶어서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보고 싶어도 매일매일 저는 참고 기다려요. 그런데 이제 와서 선배 인생에 끼어들지도 말라고요?”
“도윤신, 진정해.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왜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이건 완벽하게 그런 얘기예요. 선배 말에 따르면, 전 선배를 위해서 아무것도 못 해요. 지쳐 있는 걸 보면서도 머저리처럼 실실거리는 거나 할 수 있죠. 그런 게 좋으면 그냥 인형을 사귀지 그래요?”
윤신의 어조가 전에 없이 시니컬했다. 이런 식으로 신랄하게 말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나 놀라울 정도였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세헌도 도저히 속에 있는 말을 마냥 담아 둘 수가 없었다.
하아. 사막을 닮은 무겁고 깊은숨을 토해 내듯 뱉은 그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이게 너한테만 빚지는 거야? 네 누나 소환된 거 안 보여? 도 관장을 무슨 얼굴로 보란 건데. 이 일이 얼마나 나한테 부담을 주는지 모르겠어? 난 네 누나가 이딴 거 알길 원하지 않아!”
이경의 이름이 이 자리에서 소환되니, 슬슬 감이 왔다. 계속 여느 때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세헌의 의중에 대해 궁리하던 윤신은 이제야 대충 상황이 짐작 간다는 눈치로 제풀에 웃었다. 허탈해하는 웃음소리 속에 서운함과 슬픔이 묻어났다.
“누나가 우리 사이 알까 봐 그게 그렇게 꺼려져요?”
“도윤신.”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같이 만나자고 조를 때마다 진짜로 싫었던 거네요?”
순식간에 차분해진 윤신의 음성 속에는 조금 전 언성을 높일 때보다 더 거센 풍랑이 숨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생긴 섭섭함이 아니었다. 쌓이고, 쌓인 것에 가까웠다. 성격 좋은 도윤신도, 몇 번이고 졸라도 세헌이 해 주지 않는 몇 가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어쩌면 터질 게 터진 것인지도 몰랐다. 덧붙이는 목소리가 턱없이 가라앉았다.
“그냥 절차대로 징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선배의 외로운 인생에 기어이 끼어들어서. 혼자서도 잘 사시는 분인데 제가 눈치가 너무 없었네요.”
마치 어려운 사람들을 앉혀 놓고 앞에서 브리핑을 할 때처럼 허리를 숙여 과도하게 공손한 인사를 한 윤신이 바로 돌아섰다. 세헌은 득달같이 뒤쫓아 문 앞에서 팔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는 낌새가 보이기에 문을 열지 못하도록 반대편 손바닥으로 문의 틈새를 밀고는 윤신을 뒤에서 감싼 자세로 벽을 내려쳤다.
타악!
“내 말도 아직 안 끝났어. 마저 들어. 도윤신. 내 말의 의미는.”
후우, 길게 심호흡한 윤신이 몸을 비틀어 곁눈으로 세헌을 봤다. 어디 해 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를 마주하게 되면 두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키스를 했다. 익숙한 습관을 기억하는 그들은 동시에 짧게 호흡했다.
소통의 오류가 생겼음을 감지한 세헌이 마저 말을 고치려 했다. 끼어들지 말라고 했던 말도, 도이경이 알길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지금 윤신이 오해하고 있는 그런 의미를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한데 어디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사이, 내심 기대하고 있던 윤신은 실망이 더 커진 기색이었다. 침묵이 회피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곤 담담하게 토로했다.
“저 누가 뭐라고 해도 상처 안 받는데 선배한테는 받아요. 지금 제가 엄청 속상하니까 선배는 더 아프겠죠? 아프다고 티 낼 줄도 모르는데.”
“알면 가지 마.”
“아니까 가는 거예요. 괴로워하세요.”
“도…….”
방심한 세헌을 확, 밀어낸 윤신이 힘주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도망가듯이 뛰쳐나가는 윤신을 다시 붙잡으려던 세헌은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는 시선을 던지는 통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는 문을 거칠게 다시 닫았다. 창가 방향으로 돌아서서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끌러 냈다. 숨이 갑갑하다 못해 목구멍에 이물감마저 느껴졌다. 윤신이 남기고 간 모든 말들이 하나하나 되돌아와 비수로 박혔다.
정확히 그 말대로였다. 자신이 일 때문에 약속을 취소해도, 새벽 다 돼서야 들어와도, 몇 주씩 방치하고 내버려 둬도, 도윤신은 잘 설명하면 그거로 됐다고 웃어넘긴다. 다음엔 꼭 데이트하자고, 조금 더 일찍 와 달라고, 못 만진 만큼 안아 달라고 사랑스러운 말들로 넘어가 주지만 그렇다고 약속을 꼭 지키라며 반복해서 조르진 않는다.
역으로 윤신이 저를 외롭게 만들 때도 더러 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이 반드시 몇 배의 시간으로 보상하게 만드는 것과 상반되는 태도였다.
강세헌을 만나지 않았다면 삶에서 아무것도 놓쳐 본 적 없을 도윤신은, 이 연애가 지속될수록 뭔가를 포기하고, 단념하고, 희생하는 거에 익숙해졌다.
그는 그걸 이경에게만큼은 들키기가 싫었다.
빼앗아 갈까 봐.
“젠장.”
하필 타이밍 최악이게도 그녀가 관계를 눈치챈 이때, 윤신을 통해 도국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작금의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 초조해져 더 몰아붙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닌데 말이 매섭고 표현이 서투른 게 이런 식으로 제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도윤신이 이 정도로 반발했던 적이 있었나. 기억력 좋은 그의 뇌리에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처음인 듯했다. 마음이 많이 다친 것이다.
마른세수한 세헌이 책상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가끔은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천하의 도윤신조차 못 알아차리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아주 긴 대화가 필요할 거 같다.